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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뜻밖의 조우 (2)

 

 

"저기, 괜찮으시겠어요?"

걱정되는 듯 물어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세라자드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눈높이보다 한 뼘쯤 낮은 곳에 있는 줄리앙의 눈을 쳐다보았다.

"물러서세요."

책상 앞에서 펜대나 굴리는 연약한 녀석.

쓸모없이 뽀송뽀송하기만 한 애송이.

그게 줄리앙을 보며 느끼는 세라자드의 감상이었다.

아까, 처음 말을 걸 때도 그랬다.

'내가 대놓고 수풀에서 움직였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뒤늦게야 깜짝 놀랐어.'

한심한 모습이었다.

만약 이쪽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다면?

스스로를 방어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 뒤로 보인 줄리앙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하자는 대로 질질 끌려오기만 했어.'

깜짝 놀라며 이쪽을 향해 누구냐고 물었던가.

그래서 군더더기 없이 대답해주었더랬다.

이름은 세라자드.

술탄국에서 온 손님.

프론테라 가문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고.

산책이나 할 겸 여기까지 걸어왔다가 우연히 그쪽을 보게 됐다고.

본의 아니게 옆의 수행원과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래서 도움을 줄 생각이라고.

줄리앙이 대답할 틈도 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용건만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줄리앙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물었더랬다.

바위가 어디 있느냐고.

치워주겠다고.

'그랬더니 반응이 더 가관이었지. 맹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바위가 있는 길을 가리켜줬어.'

그 모습마저도 빈틈투성이였다.

곁의 수행원이 부랴부랴 이쪽을 경계하건 말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바위에 막힌 길을 알려주던 모습이란.

'로이드 프론테라, 그 재수 없도록 영악한 자와 형제가 맞긴 해?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세라자드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내심 동생도 로이드 못지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치고 보니 동생이란 자는 생각 외로 헛똑똑이 맹탕, 그 자체였다.

'공부만 잘하는 샌님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줄리앙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짧게 내뱉었다.

"더 멀리."

"아, 네."

줄리앙이 허둥거리며 몇 발짝 더 물러섰다.

그 주위로 늘어선 사내들이 이쪽을 향해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바위를 치우느라 진흙투성이가 된 남자들.

왕도에서부터 줄리앙을 수행해 온 수행원들이었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뛰어난 기사들이기도 했다.

"...."

하지만 관심 없다.

저들이 경계하건 말건.

이쪽은 바위를 치워서 도움을 주면 된다.

그러면 로이드에게 자장가를 얻어내기가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세라자드는 몸을 돌려 바위를 마주했다.

"...."

타원형으로 생긴 바위는 컸다.

짧은 쪽의 지름만 해도 2미터가 넘어 보였다.

긴 쪽은 4미터에 달했다.

덕분에 마차가 지나다닐 길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길 자체가 가파른 비탈길 옆구리를 따라 비좁게 만들어진 까닭이었다.

즉, 바위는 비탈 위쪽인 왼쪽 사면에서 굴러내려 와서 그리 넓지도 못한 길 한가운데에 꽂혀 있었다.

'후우.'

바위를 앞두고서 세라자드는 심호흡을 했다.

그런 그녀의 손은 어느새 시미터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더욱 느슨하게.

동시에 한결 치밀하게.

감각을 끌어올렸다.

바위를 노려보며, 약점을 탐색하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스칵!

 

시미터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커다란 바위 한쪽 면을 그대로 저며냈다.

 

콰석!

 

바위 끄트머리 귀퉁이가 주먹 하나만큼 잘려나갔다.

"...!"

줄리앙과 수행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시작에 불과했다.

 

스카카카카칵!

 

수많은 선율이 허공에 새겨졌다.

세라자드의 모습이 수십 줄기의 검광에 휩싸여 희미해졌다.

동시에 길을 막고 있던 바위가 끄트머리에서부터 조금씩 작아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움큼씩 '깎여나갔다.'

 

커터턱! 콰석! 콰스석!

 

마치 한 땀 한 땀 조각을 하듯.

혹은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다듬듯.

"저건 꼭... 감자 깎는 것 같잖아...."

수행 기사 중의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들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자 깎기.

저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자니 저절로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세라자드의 검술과 위력은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게 가능한 건가?'

모두는 심각한 의문을 느꼈다.

검으로 바위를 일도양단하는 것.

수준이 높은 검사라면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소드 익스퍼트 상급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실력자가 그렇다.

하지만 그런 익스퍼트 최상위권의 검사라 해도 바위를 여러 번 쪼개지는 못한다.

검 자체가 지닌 내구성의 한계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검이라는 건 결국 날을 세운 쇠막대에 불과한 거니까.'

그런 물건으로 바위를 내리치면?

당연히 검날이 크게 상한다.

바위를 잘라내더라도 그렇다.

한낱 가죽이나 고깃덩이만 잘라도 상하는 것이 검날이란 물건인데.

커다란 바위를 내리치고도 검날이 멀쩡하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물체를 베어내는 위력을 발하면서도 검날이 상하지 않는 '오러'가 소드마스터 최강의 기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한데 저 여자는?

'오러를 쓰고 있지는 않아. 소드마스터가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수십 번씩이나 바위를 베어대면서도 검이 멀쩡한 거지?'

모두는 경악과 의문을 담아 세라자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들은 알지 못했다.

세라자드가 이미 소드 익스퍼트 상급과 소드마스터의 경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흐읍!'

시미터를 휘두를수록 세라자드의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동시에 검로가 더욱 정교해졌다.

검기가 더욱 집중되었다.

그녀는 조금의 검기도 낭비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는 동안은 최소한의 마나만 동원해서 검기를 유지했다.

그러다 마침내 시미터의 날이 바위와 맞닿는 순간.

오직 그 짧은 순간에만 마나를 집중시켰다.

검기의 절삭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런 일을 수십 번의 폭풍 같은 검격마다, 찰나의 틈마다 정확하게 수행했다.

예전에는 불가능하던 탈인간적 집중력.

하비엘과의 지옥훈련이 그녀에게 준 성과였다.

물론 그녀는 그런 자신의 수준 상승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눈앞의 바위를 없앤다는 목적만을 위해 집중할 뿐.

'스흐읍!'

 

스츳-!

 

무려 이백 번 넘는 감자 깎기(?) 칼질을 당한 바위.

그리하여 마침내 오십 센티 남짓하게 작아진 바위에 마지막 칼질이 가해졌다.

 

츠팟!

 

남은 바위가 깔끔하게 두 쪽으로 잘렸다.

그리고 세라자드가 시미터를 거두었다.

수없는 마찰로 뜨거워진 검날을 후, 불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시미터를 검집에 넣었다.

모두를 향해 뒤돌아섰다.

"이 정도면 됐죠?"

그녀가 가리키는 뒤편.

커다란 바위가 있던 곳.

그곳에는 무한 깍둑썰기로 만들어진 주먹 크기의 정사각형 바위 잔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줄리앙과 수행 기사들은 누구 하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세라자드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떠올랐다.

"치우세요."

그 말만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세라자드.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수행기사들이 바위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평소와 비슷한 저녁이 깊었다.

하지만 이날, 세라자드의 저녁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낮에 줄리앙을 도왔던 행동.

그 도움 덕분에 프론테라 백작 가족의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은 까닭이었다.

"오늘 세라자드 양이 아니었다면 우리 둘째가 많이 곤란할 뻔했습니다. 참으로 고마워요."

"별말씀을."

백작가문의 것치고는 매우 조촐한 크기의 테이블.

테이블 가득 차려진 소박하지만 정갈한 음식들.

그 음식들 위로 건너오는 프론테라 백작의 감사 인사.

세라자드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산책하던 도중에 우연히 곤경에 처한 모습을 봤을 뿐입니다."

"그 우연이 다른 이에게 갔더라면 다른 일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연을 선행으로 이어준 것은 순전히 세라자드 양의 착한 마음과 호의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

이런 칭찬, 부담스럽다.

세라자드는 포크를 쥐고서 가만히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로이드에게 자장가를 쉽게 얻어내려고 했을 뿐인데.

그래서 줄리앙 일행을 도와줬을 뿐인데.

어째서 다들 이러는 걸까.

'불편해.'

사실 칭찬엔 익숙하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에게 입에 발린 찬사는 들어봤을지언정, 더 높거나 동등한 지위의 사람에게 순수한 칭찬과 감사를 받은 적은 별로 없던 그녀였다.

그래서였다.

이 식사 자리가 불편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 가족의 분위기 또한 너무나 적응이 안 되었다.

생각보다, 너무, 다정하고 훈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니?"

"전혀요. 수행원분들이 너무나 잘 해주셨어요."

"그러니?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로구나."

"네, 어머니. 게다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세라자드 님이 큰 도움을 주기도 했구요."

"그렇구나. 고마워요, 세라자드 양. 오늘, 우리 가문이 세라자드 양에게 큰 은혜를 입었답니다."

"...아, 네."

이쪽을 향해 흐뭇하게 웃는 백작 부인의 인사에 또 어색하게 꾸벅.

세라자드는 샐러드를 쿡쿡 찍어 먹으며 백작 가족의 대화를 귀에 담았다.

"둘째야."

"네, 아버지."

"그동안 낯선 타지에서 혼자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아녀요. 전 부족한 거 하나 없이 지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형 덕분에요."

"말은 그렇게 한다만 이 아비는 다 안단다. 어찌 모르겠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혼자 지내야 하는 서러움을 말이다... 크흡."

감정이 북받친 탓일까.

프론테라 백작이 샴페인 석 잔을 연거푸 마셨다.

줄리앙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하하. 이 아비는 괜찮단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한없이 기쁜 날이라서. 어찌 아니 기쁘겠니?"

"아하하, 마, 맞죠."

"그래서란다."

순식간에 취기가 올라 얼굴이 새빨개진 프론테라 백작.

그가 촉촉한 눈매로 로이드와 줄리앙, 두 아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아비는 행복하다. 너희의 아버지라서."

"아버지...."

"솔직히 밝히자면 이 마음을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너희가 자랑스럽단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럽단다. 너희가 성공을 해서? 첫째가 크게 명성을 떨치고 둘째가 아카데미를 훌륭히 졸업해서? 아니란다."

백작의 말이 울먹울먹 이어졌다.

"이 아비는 말이다. 너희가 성공을 해서 기쁜 게 아니야. 너희가 그저 건강하게, 착하게, 이렇게 자라준 그 자체가 너무나 고맙단다. 아니, 이 못난 아비가 너희의 아비일 수 있어서 한없이 감사하단다. 너희를 아들로 보내준 운명에까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심정이란다."

"우, 으음, 아버지, 많이 취하신 것 같...."

"아니다, 줄리앙. 그리고 로이드야. 이 아비는 지금이라도 당장 너희에게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단다. 만약 저 하늘의 가혹한 운명이 너흴 지키기 위해 평생 굴러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아비는 기꺼이 천 바퀴, 만 바퀴, 억 바퀴, 평생 앞구르기 뒤구르기만 하면서도 웃을 수 있을 거란다. 그렇게 해서 너희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말이다. 알겠니?"

"으으... 아버지...."

줄리앙의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곁에 나란히 앉은 로이드의 십이지장 융털돌기가 알차게 말려들었다.

그 건너편에 앉은 백작부인이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 모습은 마치, '술도 약하신 양반이 하필이면 손님이 와 계신 오늘 이러신담....' 이라며 몹시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라자드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모처럼 취해서.

감정이 차올라서.

시상이 폭발해서.

손발 오그라드는 애정의 표현을 거침없이 해대는 백작의 모습 때문에?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는 부러움 섞인 충격에 휩싸였다.

'원래 가족이란 게... 이런 거야?'

이런 모습의 가족 같은 거, 착하고 순진해 빠진 이야기 속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진짜로 몰랐는데.

'나랑... 너무 다르잖아.'

세라자드는 식탁 밑에서 남몰래 주먹을 꾸욱 쥐었다.

문득, 술탄이 떠올랐다.

자신의 아버지.

아니, 아버지라기보단 비정한 권력자.

그런 술탄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

수십 명의 왕자와 공주들 틈바구니에서 조금이라도 신임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 눈에 띄기 위해 그 얼마나 악착같이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자라와야 했던가.

하루도 검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손에 잡힌 물집이 터지고 또 터져도.

그런 자신을 향해 아버지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언젠가 실력자가 된다면.

혹시라도 소드마스터가 된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비로소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해줄 거라고.

자신을 자랑스러운 딸로, 자식으로 대우해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온 자신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이드에게 자장가를 얻어내려는 것도.

모두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

그런데 이거, 뭔가 불공평하다.

굳이 그렇게 바락바락 애쓰지 않아도.

매일 밤 눈물로 베개를 적시지 않아도.

그런 스스로를 애써 위로하지 않아도.

그러지 않아도.

'원래 인정받는 것 따위, 필요 없는 거였어?'

필요 없는 거였다.

그게 정상인 거였다.

그게 평범한 가족인 거였다.

그냥 네가 내 딸이고 아들이어서 좋고, 행복한 거.

그게 가족이고 부모와 자식인 거였다.

한데 자신은 그런 가족 속에서 자라나지 못했다.

아니, 그런 사실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고 실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 억울하고, 허무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아등바등 애쓴 시간이.

다 뭐였나 싶어졌다.

"...."

난, 뭘까.

식탁 아래로 꼭 쥔 주먹.

그래서 부르르 떨리는 두 손이.

갑자기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늘어뜨려지는 어깨도, 절로 숙여지는 고개도.

전부 볼품없게 느껴졌다.

그 뒤부터였다.

세라자드는 자신이 뭘 먹는지도, 프론테라 백작 가족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멍하니 식사를 마쳤다.

원래의 계획이었던 로이드를 향한 재협상 시도는 떠올리지도 못했다.

귀빈용 숙소로 돌아와서는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밤이 더 짙어지고.

눈치 없는 달과 별이 떠오르고.

뽀얀 달빛이 창가를 간질일 무렵.

세라자드는 홀린 듯 일어섰다.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돌아가자.'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허무했다.

지금까지 애써온 자신의 노력도.

그토록 갈구했던 아버지의 인정도.

그렇게나 염원했던 소드마스터의 경지도.

모두가 덧없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냥, 이젠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저 조금, 쉬고 싶어졌다.

'가자.'

 

삐이걱.

 

방을 빠져나왔다.

어둠에 휩싸인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막막한 광경 앞에 뜻 모를 한숨이 나왔다.

"후우."

이런 한숨, 대체 왜 나오는 건지.

그냥 다 허망하게 느껴져서.

뭔가 견딜 수가 없어져서.

발길을 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힘없이 복도를 걸으며.

눈물도 한 방울, 두 방울.

볼을 따라 턱 끝으로 또르르.

바보처럼 손등으로 눈가 훔치려던 순간.

"...세라자드 님?"

불현듯, 줄리앙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소매를 잡아왔다.

206화. 노동력 착취를 막아낼 비책 (1)

 

 

"세라자드 님?"

줄리앙은 깜짝 놀랐다.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아서.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 왠지 낯설어서.

한편으론 염려되는 일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래서 그냥, 복도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었더랬다.

벤치 맞은 편 창가에서 흘러오는 여름밤 공기가 좋아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간질여서.

그저 그 느낌이 촉촉하니 또 좋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서 앉아만 있었더랬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었다.

아주 작게, 삐이걱, 문이 열리고.

조심스럽게, 살며시, 발을 내딛던.

행여나 누군가를 깨울까.

혹은 누군가에게 들킬까.

어두운 복도로 나와 주위를 살피던 세라자드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려서.

그래서 줄리앙은 토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어, 무슨 일이세요?"

얼결에 물었다.

물어놓고도 멍청한 질문을 한 것 같다고 줄리앙은 생각했다.

이쪽을 돌아보는 세라자드의 무표정한 낯빛 때문이었다.

"...."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한 눈길과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혹시 자신의 멍청한 질문 때문에 화가 난 걸까.

줄리앙은 목을 살짝 움츠리며 빠르게 덧붙였다.

"아, 그게, 미안해요."

"...뭐가요."

"네?"

"뭐가 미안하냐고요."

"아...."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물어오는 세라자드.

그녀의 침묵이 걷힌 것은 좋긴 한데.

저런 질문은 뭔가 한결 난감했다.

진짜로 화가 난 걸까.

왜 화가 난 걸까.

그리고 난 대체 뭐가 미안한 걸까.

줄리앙은 해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학문에는 뛰어난 성취를 보였던 그 영민한 머리가 이 순간만은 어쩐지, 영 원활하게 돌아가질 못했다.

마치 기름칠이 덜 된 바퀴처럼 삐이걱, 삐이걱.

나름 애써서 머리를 굴리던 줄리앙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냥, 그냥요."

"...."

"제가 괜히 여기 앉아 있어서, 으음, 그래서, 그냥, 놀라게 한 것 같아서."

"...."

"혹시 정말로 놀란 거였다면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

세라자드는 고민했다.

놀란 건 맞지만 화난 건 아닌데.

이쪽에게 미안할 것도 전혀 없는데.

저쪽에서 저렇게 나오면 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한편으로 난감함도 느껴졌다.

'여기서 이 사람을 마주칠 줄은 몰랐어.'

진짜로 몰랐다.

조금 전까지 너무나 넋이 나가 있던 터라서.

감정의 소모가 너무 컸던 나머지 진이 빠졌던 중이라서.

소드마스터 증후군에도 불구하고 주의력이 살짝 흩어져 있던 참이라서.

그래서 몰랐다.

"음, 으음, 사실은 잠이 잘 안 와서 말이죠. 그래서 그냥 여기서 밤공기 쐬고 있었어요. 세라자드 양이 이렇게 복도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놀라게 할 줄도 몰랐는데... 으음, 이럴 줄 알았으면 소리라도 좀 내면서 있을걸 그랬어요."

"알고 있었어요. 안 놀랐어요."

"...정말요?"

"네."

어째 거짓말을 연거푸 해 버렸다.

한데 참 묘하고도 이상한 일이다.

눈앞의 토끼 같은 이 남자, 어쩐지 자꾸만 이쪽이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짊어지고 계신 그 가방은...?"

"도시락통."

말해놓고 나서 뒤늦게 화악.

세라자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버렸다.

그냥 대충 둘러대느라 성의 없게 꺼낸 대답인데.

말해 놓고 나서 보니 너무나 이상한 대답이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나, 한밤중에 잠 안 와서 도시락통 싸들고 밖에 나가는 여자로 보이게 된 거야?'

아니길 빌었다.

그런데 눈앞의 토끼 같은 이 남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까지도 그냥 믿어 버린다.

"아, 그러셨구나."

...아니야.

"많이 배고프셨나 봐요."

...아니라고.

"사실은 저도 좀 배고팠는데, 헤헷."

...안 줄 거야. 아니, 그런 거 믿지 말라니깐.

너무나 대책 없이 순진하게 웃어 버리는 줄리앙.

그 모습에 세라자드가 정색했다.

"다른 볼일이 없다면 전 이만."

빠르게 줄리앙의 앞을 지나쳤다.

그러려고 했다.

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저기, 볼일이 없는 건 아닌데...."

"...네?"

뜻밖의 말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저도 모르게 줄리앙을 돌아보았다.

토끼 같은 남자가 이쪽을 향해 배시시.

"혹시 산책하실 생각이시면, 음, 같이 좀 걸을래요?"

"물론 거절...."

"도시락, 안 건드릴게요."

"...."

"사실은 걷고 싶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책만 읽다 보니 밤눈이 조금 어두워서. 그래서 혼자 밤길을 걸으면 종종 돌부리에 발이 걸려요."

"...."

"그러니까 뒤만 졸졸 따라갈게요."

"...."

그냥 따돌리자.

세라자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꾸없이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줄리앙이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관하지 않았다.

먼저 주실을 지나치고,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왔다.

뒤를 따라오는 줄리앙의 걸음이 조금 급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정원을 가로질렀다. 별관에서 멀어졌다. 담벼락 앞에 섰다.

"저기, 잠깐...."

 

파앗!

 

줄리앙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땅을 박찼다.

단숨에 훌쩍, 담장을 넘었다.

"...."

이젠 못 따라오겠지.

홀가분하고 허전한 기분을 느끼며 세라자드는 걸음을 떼었다.

한데 그때였다.

"...우읏!"

 

꾸당!

 

방금 자신이 넘은 담벼락 아래로, 줄리앙이 어설프게 데구르르 쿵 굴러떨어졌다.

"으으, 같이 좀 가요."

"...."

"아파 죽겠네."

"...."

"어디 안 다쳤냐고 물어볼 생각은 없어요?"

"...전혀."

무시하고 가자.

그렇게 몸을 돌리려 했다.

한데 뜻밖의 물음이 가슴을 푹 찔러왔다.

"아직도... 많이 아파요?"

"네?"

세라자드는 멈칫했다.

방금 담벼락을 어설프게 넘다가 굴러떨어진 건 저쪽인데.

그런데 왜 저쪽이 자신에게 아직도 아프냐는 엉뚱한 물음을 건네오는 걸까.

그리고 왜, 저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걸까.

"아까부터 그랬잖아요."

줄리앙의 말이 조곤조곤.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아까, 식사할 때요. 우리 가족이랑."

"...."

"그때부터 엄청, 아픈 표정이었는데."

"...."

"저기, 사실은 그래서... 여기, 이거 가져가요."

절뚝거리며 몸을 일으킨 줄리앙이 주섬주섬.

파자마 위로 걸친 조끼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쪽을 향해 내밀었다.

작은 약병이었다.

"소화제예요. 아무래도 아까 식사 때 기름진 음식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서... 그래서 속이 불편한 듯 보여서.... 으음, 효과는 제법 좋아요. 맛이 엄청 시고 쓰긴 하지만, 어, 음, 그래서 이거도 준비했어요."

다시 조끼 안주머니를 뒤적뒤적.

이번엔 기름종이로 감싼 빨간 사탕 두 알.

"소화제부터 마시고, 재빨리 이거 입안에서 굴리면 될 거예요. 그럼 괜찮아져요."

"...."

세라자드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줄리앙이 내민 소화제도, 사탕도 아닌, 그의 손바닥을.

'피가 나.'

살짝 까져 있었다.

조금 전 담벼락에서 떨어질 때 다친 듯했다.

제법 쓰라릴 텐데.

그런데 저 표정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미안하다는 듯, 걱정된다는 듯한 눈길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

"혹시 딸기맛 사탕은 안 좋아하는 편이세요?"

"...."

"으음, 그게 아니면, 후우, 미안해요. 아까 거짓말해서. 사실은 잠이 안 오는 것도 맞았고, 그래서 서성였던 것도 맞긴 한데, 으음, 사실은 그것보단 세라자드 양이 좀 걱정돼서...."

"...."

"그래서 서성이던 김에 혹시나 하고 별관 복도에 있었어요. 방에서 깨어 있는 기척이 들리면 이거 전해 줄까 싶어서. 으음, 그리고 또...."

"또 다른 거짓말도 했어요?"

"...아, 네."

토끼눈을 흠칫.

줄리앙이 더 동그래진 눈매로 말했다.

"마침 걷고 싶던 참이라던 거, 밤눈이 어둡다고 했던 말도...."

"거짓말이었어요?"

"...네."

"혹시 나한테 이거 주려고요?"

"으음, 네."

"변명을 굉장히 잘하네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나도 거짓말했으니까."

"네?"

또 동그랗게 흠칫.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에 세라자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오늘 저녁 처음으로 웃고 말았다.

"도시락 없어요."

"...아."

"이 가방, 도시락통이 아니라 그냥 여행 가방이에요."

"설마? 떠나려고요?"

"네."

"...."

"이유, 안 물어요?"

"네, 안 물을래요."

이쪽의 물음에 줄리앙이 고개를 도리도리.

한결 깊어진 눈매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괜히 물으면 세라자드 양이 이유를 밝혀야 할 거 같아서. 그러려면 세라자드 양, 괴로운 이유를 마음속에서 들춰야 할 거잖아요."

"...."

"그러기 싫어요. 자, 받아요, 이거."

"...."

소화제 담은 약병.

사탕 품은 기름종이.

얼결에 건네받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닿았다.

"...잠깐만."

기름종이를 풀었다.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나머지 하나는 줄리앙의 입에 쑥 넣어주었다.

그리고 남은 기름종이를 쥐었다. 뭉쳤다.

물건을 건네주고 돌아가던 줄리앙의 손을 잡았다.

뭉친 기름종이로 그 손바닥을 꾸욱 눌렀다.

"...앗, 아야!"

"참아요."

"으, 따가워요."

"엄살? 다친 줄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몰랐던 건 맞는데, 그렇게 누르니까 진짜로 따가운걸요."

"가만히 있어요."

이대로 떠나려니 신경이 쓰여서 안 되겠다.

최소한 이 사람 손바닥에서 피는 멈추게 해줘야겠다.

그래야 조금은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그래야 그나마 미련이 덜 남을 듯하니까.

세라자드는 더욱 야무지게 줄리앙의 손을 기름종이로 눌렀다.

줄리앙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으음, 저기, 세라자드 양?"

"네."

"사탕, 지금 먹어 버리면 어떡해요."

"...."

"그 소화제 진짜로 엄청 시고 쓴데."

"...."

이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게 걱정인 걸까.

어쩌면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라자드는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치미는 의문을 불쑥 입에 담고 말았다.

"왜 날 그렇게 걱정해요?"

"네?"

"아까부터 왜 그렇게 날 유별나도록 걱정하는 거냐구요."

궁금했다.

의아했다.

꼭 묻고 싶었다.

이제 여기서 떠나더라도 그건 알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만큼 줄리앙의 태도가 너무나 유별났으니까.

마치 어미새를 걱정하는 아기새처럼.

시종일관 안절부절 이쪽을 졸졸 따라오며 걱정하고 있으니까.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꼭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였다.

줄리앙의 대답을 들었을 때.

세라자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잠깐 멈추고 말았다.

"그냥요."

"...."

"그냥, 정말로 그냥 걱정이 되어서요."

"...."

"그래서 그냥, 걱정이 되어서 조금 서성였고, 그냥, 소화제랑 이거 가져왔고, 그냥... 이제 떠난다고 하니까 조금...."

"아쉬워요?"

"...네."

"왜요?"

"그것도 그냥요."

"...."

그냥.

정말로 그냥.

이유도 모르게 그냥 울컥.

세라자드는 입술을 깨물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껏 너무나 애쓰며 열심히 살아만 와서.

반드시 이유가 있는 걱정만 가끔 받아봐서.

그냥 걱정한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다가.

그런 게 있다는 자체가 잠깐 의아하다가.

낯설기만 한 그런 말이 어떤 뜻인지.

왜 자신이 그런 말이 낯선 것인지.

그 이유가 마침내 이해되면서.

그냥, 눌러왔던 서러움이 무너져 가면을 녹였다.

정말로 그냥, 흔적도 없이.

"저기, 난...."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마치 홀린 듯이, 세라자드는 말했다.

그냥, 자신이 자라온 이야기를 꺼냈다.

꼭 남의 이야기를 말하듯 덤덤히 내밀었다.

여전히 줄리앙의 손바닥 상처를 꾹 누르고서.

그저 무덤덤하게.

시종일관 건조하게.

사실만을 나열하며 늘어놓았다.

그동안 눈치 없는 눈가만 자꾸 젖어들었다.

그래도 줄리앙은 가끔,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괜찮냐는 말도, 그래서 힘들었겠다는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이쪽의 눈을 바라보아 주며.

조용히 마주 선 채로.

이쪽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렇게 온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을 무렵.

자신이 밤이 새도록 줄리앙을 붙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무렵.

세라자드의 마음속에서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줄리앙의 곁에 있고 싶어졌다.

 

 

'하, 저것들 보소. 차암 좋을 때다.'

따스하다 못해 벌써부터 무더운 여름날 오전.

아니, 무덥다 못해 만년 솔로의 청순한 가슴을 염장으로 팍팍 지지는 듯한 이 가혹한 계절.

로이드는 저택 나무 울타리에 턱을 괸 채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저택 언덕 아래의 가로수길.

그곳을 나란히 거니는 남녀가 보였다.

줄리앙과 세라자드였다.

"흐음."

로이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떠올랐다.

그러니까 한 닷새쯤 전이었던가.

줄리앙이 영지로 돌아온 날 저녁, 가족 식사를 하던 내내 세라자드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웠더랬다.

마치 당장 이곳을 떠날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자?

완전히 달라졌다.

'딴사람이 된 듯한 표정이었어. 게다가 종종 줄리앙과 붙어 다니기 시작했지.'

대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뭔 사건이 벌어졌길래 저 두 사람이 저렇게 하하호호 오순도순 흐뭇한 썸 분위기를 타게 된 걸까.

하지만 로이드는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자신만 여전히 솔로 신세인 게 좀 서럽긴 하지만.

어쨌건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훨씬 중한 것이 있다.

'내 노후 계획이지.'

막연한 노후 계획 따위가 아니었다.

이른바 명백하게 예상이 되는 노후의 위기에 대처할 방안이었다.

'당연하지.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난 평생 꿀 못 빨아. 국왕 누님이 그렇게 안 둘걸. 확실해.'

진심으로 확언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그동안 너무 거창하게 활약을 해 버렸다.

영지에 닥친 금융적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그 뒤엔 물리적 위기와 행정적 위기, 세균 병리학적 위기까지 넘기느라.

매번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초월하는 활약을 선보이고 말았다.

그래서였다.

국왕의 신임을 지나치게 받게 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로이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래선 안 돼. 남은 일생 동안 여기서 편하게 꿀만 빨 수 있을 각이 안 보여.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그냥 아주 세종대왕한테 평생 신나게 노동착취만 당하다가 억울하게 눈 감은 황희 정승 꼴이 나는 거야.'

그건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런 신세는 면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지나치게 열심히 살아온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제는 쉬고 싶었다.

편한 노후를 보장받고 싶었다.

그렇게 평생 꿀만 빨면서 탱자탱자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거고.'

얼마 전부터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한데 그 대책을 마련할 계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고민이었다.

그런데 지금 마침?

하하호호 룰루랄라 썸을 타고 있는 줄리앙과 세라자드를 보니 문득, 자신의 아름다운 탱자탱자 노후를 보장할 절묘한 그림이 떠올랐다.

'가능해. 내 생각대로만 되면? 할 수 있어. 국왕 누님이 마음대로 날 부려먹지 못하게 할 밑그림 정도는 차근차근 마련할 수 있을 거야.'

문득, 음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그러니까 말이다."

로이드는 능글맞게 웃으며 언덕길 아래의 썸남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방금 떠올린 큰 그림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이 형이 이번엔 제대로 큐피드 역할 해줄게. 고맙다, 줄리앙."

207화. 노동력 착취를 막아낼 비책 (2)

 

 

옛날 옛날 제법 오래된 600년쯤 전 옛날.

위대한 세종대왕께서 통치하시는 조선 땅에 황희 정승이란 분이 살았답니다.

명재상 황희 정승은 일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세종대왕의 아낌을 두루 받았어요.

아낌과 함께 매일 많은 일거리를 받았어요.

더 많은 일거리를 받을 때마다 등골이 휘었어요.

등골이 너무 휘어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황희 정승은 세종대왕께 간청했답니다.

저언하, 신이 노쇠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사옵니다.

그러자 인자하신 세종대왕께서 이르시길, '그럼 내 가마를 보낼 테니 앞으로 그걸 타고 출근하시게.'라 하시었답니다.

그 뒤로도 황희 정승은 매일 세종대왕께 간청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쉬게 해 주세요.

밀린 연차 좀 쓰게 해 주세요.

제발 절 좀 은퇴시켜 주세요.

차라리 파직시켜 주세요.

플리즈 파이어 미.

하지만 그때마다 세종대왕께선 상큼하게 'No'를 외치셨답니다.

덕분에 조선의 명재상 황희 정승은 세종대왕이 승하하기 4개월 전까지 신나게 노동력 착취를 당하다가 겨우 은퇴했어요.

그 다음엔요?

여생을 얼마 즐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아아, 헬피엔딩. 헬피엔딩.

 

'...이라는 이야기가 있지. 뭐, 듣기에 따라선 좀 웃긴 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는 건데, 근데 따지고 보면 그게 남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어. 최소한 나한테는.'

로이드는 옛 고사(?)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불현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발 은퇴하게 해달라고 빌었던 명재상 황희 정승.

그런 황희 정승을 죽을 때까지 신나게 굴려먹고 써먹었던 세종대왕.

그저 조금 웃긴 역사의 한 페이지로 치부할 수도 있을 터다.

로이드 또한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남 일이 아닌 걸로 느껴졌다.

세종대왕과 황희 정승.

국왕 알리시아와 자신.

어쩐지 묘하게도, 비슷한 상황과 분위기로 흘러가는 위기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저 기분 탓이 아니야.'

로이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예전부터 간혹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다.

종종 불안감에 휩싸인 적도 은근 많았다.

그래서 자다가 놀라서 깬 적도 있었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영지를 평화롭게 꾸려나가게 된 자신. 그래서 남은 평생 꿀만 빨며 탱자탱자 살아가려는 자신.

그런 자신을 국왕이 부르고.

쉴 틈도 없이 새로운 일을 맡기고.

그 일의 톱니바퀴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신음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는 악몽을 꾸곤 했던 것이었다.

'근데 그 악몽, 방심하다간 실화가 되기 딱 좋아. 진짜 그럴 삘이야.'

로이드는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국왕의 칙명을 받고 특사단에 합류하여 술탄국 아힌샤에 갈 때부터였다.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 한쪽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반군 리더 테르메스의 망명을 허락받으러 왕도 마젠타에 가서 국왕을 만났던 때였다.

그땐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매우 확실하게 평생 국왕의 일꾼, 혹은 SCV가 되어서 일만 하다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쑴펑쑴펑 치솟았더랬다.

'그래서야. 대책이 필요해.'

그동안 너무 능력을 발휘해 버렸다.

영지의 금융적, 물리적, 생물학적 위기를 넘기느라.

필요 이상의 활약을 펼쳐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국왕에게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한데 국왕 알리시아는?

능력 있는 인재를 굴리는 타입이다.

인재들이 고달프게 일할수록 백성이 평안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는 타입의 군주다.

그러니 이대로 대책 없이 있다가는, 자신은 평생 일꾼 신세를 면할 길이 없게 된다.

그토록 염원했던 꿀 빠는 인생과도 작별하게 될 터다.

'그건 안 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는데.

여기서도 위기를 넘기고자 온갖 개고생을 했는데.

남은 인생마저 일만 하다 죽으라는 건 형벌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앞으로 주구장창 펼쳐질 국왕 알리시아의 노동력 착취.

그걸 모면할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엔 그 방법을 마련하려 계속 궁리하던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왕에게 반기를 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국왕 알리시아는 절대의 권력자다.

마젠타노 왕가의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정치력을 발휘하는 권력자이자, 어딜 내놔도 뒤처지지 않는 극강의 소드마스터다.

덕분에 이 나라의 정세는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한데 일 떠맡기는 게 싫다고 반란을 일으켰다간?

거기까지 생각하던 로이드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내가 미쳤냐, 그런 짓을 하게.'

그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새로운 일거리의 지옥문을 스스로 여는 셈이 된다.

운 나쁘면 왕이 되어 버려서 평생 국정에 매달려야 하는 대참사가 생길 수도 있다.

로이드는 그런 상황은 절대 사절하고 싶었다.

'게다가 국왕 알리시아는 날 제대로 신임하고 있지. 잘만 활용하면 평생 제일 든든한 빽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내 입장에선 알리시아가 오래오래 왕위를 지켜줄수록 좋아.'

알리시아의 왕위가 탄탄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 안정적인 우산 아래에서 일은 안 하고 꿀만 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입지를 새롭게 다질 필요가 있다.

권리는 가득하고.

이행할 봉사 의무는 얼마 없는.

그렇게 딱 꿀만 빠는 정치적 포지션을 잡는 방법.

그것이 바로 로이드의 최근 고민거리였다.

'한데 그럴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 방금까지는.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어. 줄리앙, 네 덕분이야.'

씨이익, 로이드의 입꼬리가 휘어져 올라갔다.

그런 그의 눈빛이 닿는 곳.

저택 언덕 아래의 오솔길.

나란히 걷는 줄리앙과 세라자드가 보였다.

뜨거운 여름 햇볕을 피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아직은 어색함이 가득한 두 사람.

그 모습을 보자니 로이드의 두뇌가 핑핑 돌아갔다.

국왕 알리시아에게 당할 노동력 착취를 막아낼 방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좋아, 가능해. 될 것 같아.'

가능성이 느껴졌다.

성공할 각이 보였다.

이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성공한다면?

앞으로 국왕 알리시아가 자신을 대놓고 함부로 굴려먹는 게 전보다 한결 어려워질 것이다.

아니, 최소한 껄끄러워질 분위기 정도는 깔아둘 수 있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을 굴리던 로이드의 입매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야. 줄리앙, 이번엔 이 형이 너한테 신세 좀 져야겠다.'

계획이 떠올랐다면 미루지 않고 실행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날 저녁부터였다.

자신이 그린 새로운 큰 그림을 실현하기 위하여.

로이드는 계획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첫 타깃은 줄리앙이었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온다.

줄리앙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 와중에 자꾸 한숨이 나오는 까닭도.

모처럼 집에서 먹는 음식이 달게 느껴지지 않는 연유도.

'도저히 모르겠어.'

줄리앙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자꾸만 싱숭생숭했다.

식사를 하며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그랬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훈제 오리를 먹는 순간에마저도 그러했다.

그냥 뭔가 자꾸만 기분이 이상했다.

까닭 없이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그런가 하면 숨이 콱 막힐 듯이 답답했다.

그러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 먹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오는지, 코로 들어오는지도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걸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꼭 자신이 미친 것처럼 느껴지지?"

 

움찔!

 

식사를 대강 마치고.

음식을 반 넘게 남기고.

괜찮으냐 걱정하시는 부모님께 아무 일도 아니라며 어색하게 웃으며 복도로 빠져나온 직후였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줄리앙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마침 자신이 미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던 참이라서.

그런 생각을 남에게 고스란히 읽힌 것만 같아서.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형?"

자신의 형, 로이드가 그곳에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미친 것 같다니?"

"난 그런 소리 안 했는데?"

"엉?"

"그렇게 스스로를 생각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물었을 뿐인데?"

"어...."

형의 태연한 반문.

줄리앙은 대답이 궁해졌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줄리앙은 황급히 둘러대듯 말했다.

뭔가 속내를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

"그래?"

"응."

"진짜?"

"어."

"체했나? 그럼 손 따 줄까?"

"어?"

따 주다니? 손을? 어떻게?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형의 미소가 살짝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간단해. 엄지를 실로 꽉 묶은 다음에 손톱 뿌리 근처를 바늘로 콱! 찌르면 돼. 그럼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그때 실 풀어서 등 좀 쓸어주면 직빵이야. 체한 거 그냥 쑥 내려가."

"...."

"해 볼래?"

"아, 아니."

손가락을 바늘로 콱 찌른다니.

시커먼 피를 줄줄 뽑아낸다니.

줄리앙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팍팍 가로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괜찮아. 그런 거 안 할래."

"그래?"

"응."

어째서 형이 따라오는 건지.

그렇잖아도 기분이 싱숭생숭한데 이유도 모르겠어서 혼자 있고 싶은데.

그런데 형은 이쪽의 기분도 아랑곳 않고 태연하게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심지어 뜻 모를 소리까지 해 댔다.

"줄리앙, 형은 알고 있어."

"뭐, 뭘?"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무슨 생각하는데?"

"기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아니거든."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한데 당황스럽게도 형의 걸음 또한 살짝 빨라졌다.

더욱 당황스럽게도 자꾸만 이쪽의 속내를 딱딱 짚어왔다.

"그런데 기분이 왜 이상한지 도통 모르겠지?"

"...."

사실이다.

오늘 저녁 내내 기분이 싱숭생숭 이상한데.

그 원인이 뭔지 진짜 죽도록 고민해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분이 자꾸만 더 이상해지고 갈팡질팡이다.

한데 형이 그런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듯 말해 주고 있다.

결국, 줄리앙은 걸음을 멈추었다.

진지한 눈길로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 나 사실 고민이 있는데."

"응, 말해 봐."

"형 말이 맞아. 기분이 진짜 이상해."

"좋아.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거, 훌륭한 시작이야. 그럼 좀 차분하게 걸을까?"

"어, 응."

역시 형이다.

과거의 망나니 때였던 시절과 달라진 형은 너무나 든든한 사람이 됐다.

저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

이쪽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

그 앞에 줄리앙은 무의식중에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어느새 로이드와 저택 앞 오솔길을 산책하며 자신의 기분을 차근차근 털어놓게 되었다.

"사실은 말이야. 아까 저녁부터 기분이 자꾸 좀 이상해. 그런데 나도 이게 왜 이런 건지 도통 모르겠어."

"모르겠어?"

"응."

"그럼 잠시 짚어 볼까. 아까 오후 늦은 시간으로 기억을 돌려봐. 정확히 언제쯤부터 기분이 이상해졌어?"

"언제부터?"

"응."

"으음...."

줄리앙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음, 그러니까... 오후엔 세라자드 양이랑 산책을 했거든."

"응."

"이야기를 많이 했어."

"어떤 이야기?"

"세라자드 양이 자라온 이야기. 검술 훈련할 때 힘든 점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뭐, 그런 것들. 들으면서 좋았어. 그런데...."

"그런데?"

"...."

줄리앙은 멈칫했다.

불현듯 떠오른 자각.

이젠 알겠다.

"나, 세라자드 양이랑 산책을 마치고 혼자 돌아오면서부터 기분이 이상해진 것 같아."

"그랬어?"

"응."

고개를 끄덕끄덕.

그 행동이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었다.

"맞아. 진짜로 그런 거 같아. 그때부터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막 이상해지고...."

"허전해지고. 맞아?"

"응. 어떻게 알아?"

신기했다.

이런 자신의 기분을 형이 어떻게 딱딱 짚어내는지.

줄리앙은 대답을 갈구하는 심정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형이 씨익 웃었다.

너무나 간단하다는 듯, 말해 주었다.

"그거 첫사랑이네."

"...뭐?"

"첫사랑. 몰라?"

"어, 아는데."

"그럼 됐네. 그거라고."

"내가?"

"응."

"첫사랑?"

"어."

"세라자드 양을?"

"아마도?"

"...."

줄리앙은 입을 다물었다.

형제 덕분에 새삼 깨달은 자신의 기분에 충격을 받아 우두커니.

저 말이 정말로 맞을지 스스로를 돌이켜보며 또 멍하니.

마른침 꿀꺽 삼키느라 숨도 멈추었다.

그 모습에 로이드가 내심 피식 웃었다.

'역시 맞네.'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아까 낮에 산책하던 줄리앙와 세라자드.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전형적인 썸 타기 시작한 남녀의 모습이었다.

'못 알아볼 수가 없지. 내가 그런 거 한두 번 구경한 줄 아나.'

한때 나름 대한민국의 대학생이었던 로이드였다.

물론 여학생을 좀처럼 찾아볼 수도 없을 토목공학과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봄날의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커플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주변의 동기나 친구들을 봐도 그랬다.

'특히 1학년 1학기 새내기 때가 제일 그랬지.'

OT나 학과 MT를 가서건.

혹은 개강총회를 할 때건.

그도 아니면 소개팅을 받아서라도.

수많은 커플이 양산되던 모습과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때론 썸 타다가 깨진 친구놈과 술을 마셔 줘야 하는 날도 있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썸을 탄 적도 있었다.

'젠장, 그때 그 코인 노래방만 아니었어도.'

새삼스럽게 학교 정문 앞 노래방을 원망해 본다.

그때 노래방 가자고 부추기던 동기 놈들에게 무좀이나 걸리라는 소심한 저주도 알차게 새겨 본다.

'쯧.'

로이드는 잠시 새록새록 떠오르는 과거를 재빨리 접었다.

그리고 눈앞의 줄리앙을 쳐다보았다.

'역시 썸 타고 있는 거, 맞아.'

나름 캠퍼스에서 다진 감별안으로 보니 확실했다.

줄리앙과 세라자드, 썸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썸을 타는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심리 상태를 모르는 걸로 보였다.

그럴 법도 했다.

'당연하지. 둘 다 이런 분야엔 숙맥일 테니까.'

줄리앙은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하며 자라난 녀석이다.

세라자드 또한 별반 다를 바 없다.

'그쪽은 검술만 죽어라 익혔겠지.'

각자 자신의 분야에만 매달리며 평범한 연애와는 담장을 쌓고 살아온 남녀였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팔자에도 없던 첫사랑을 덜컥 겪게 되었다.

실수투성이.

어설픈 감정 처리.

그 우여곡절을 겪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썸이 깨지게 둘 수는 없지. 아깝잖아.'

두 남녀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오늘은 자신이 큐피드가 되어 주리라.

풋풋한 첫사랑 남녀를 이어주는 선행을 베푸리라.

그리고 자신은 그 결과로 만들어질 떡고물을 열심히 챙기리라.

다짐하며 로이드는 흐뭇하게 웃었다.

형으로서의 신뢰감 넘치는 표정과 눈빛, 목소리를 알차게 장전했다.

그리고 야심 차게 준비한 멘트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있잖아 너, 그렇게 어설프게 굴다간 세라자드 양 놓친다?"

"...뭐?"

세라자드 양 놓친다.

그 한마디에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지는 줄리앙의 눈매.

미처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배어나는 눈동자.

그걸 보며 로이드는 더욱 흐뭇하게 웃었다.

두 남녀의 결합을 통해 마젠타노 왕가와 술탄국, 양쪽 모두에게 워너비의 존재가 되며 절묘하게 다리를 걸치고 주도권을 틀어쥘 그림이 제대로 만들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 덕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촵촵 적신 그의 혓바닥이 더욱 알찬 계략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208화. 노동력 착취를 막아낼 비책 (3)

 

 

첫사랑.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오는 홍역 같은 감정.

또한, 대부분이 어설프게 놓치고 마는 안타까운 추억.

로이드에게도 그런 첫사랑이 있었다.

예전, 동네에 책 대여점이 있던 시절.

당시 책 대여점에서 알바를 하던 누나만 보면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더랬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

어째서 자꾸만 얼굴이 빨개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제 발로 책 대여점을 찾아가곤 했다.

거기 갈 때마다 가슴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당황스러워서 곤혹스러운데도,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이끌림에 거의 매일 대여점엘 갔었다.

잘 읽지도 않을 책을 왕창 빌려 오곤 했다.

당시엔 스스로도 몰랐던 그 이유.

그건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누나가 알바를 그만두고 나서였다.

'쯧.'

연락처는 물론이고 이름도 몰랐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열네 살 첫사랑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로이드는 당시의 기억을 살포시 접어 두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줄리앙의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그렇게 어설프게 굴다간 세라자드 양 놓친다?"

"...뭐?"

토끼처럼 동그래지는 줄리앙의 눈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농담 아니야. 너, 세라자드 양이 왜 사막 건너 여기까지 와 있는지는 알고 있지?"

"어, 응. 형한테 얻어 갈 게 있다고 들었어. 자장가를 녹음해 갈 거라고...."

"근데 만약 내가 당장 그걸 녹음해 주면?"

"...응?"

"그럼 세라자드 양, 다시 술탄국으로 돌아가겠지?"

"어, 그렇... 겠지?"

"그럼 넌 어떡할 건데?"

"...."

줄리앙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기, 형? 진짜 그렇게 할 거야?"

마치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

로이드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몰라. 사실 그건 내가 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그럼?"

"세라자드 양의 결정에 달렸어."

마치 자신은 모른다는 듯, 별 상관이 없다는 듯, 로이드의 말투가 더욱 태연해졌다.

"실은 네가 오기 며칠 전에 세라자드 양에게 선택권을 줬어. 자장가를 얻는 대신 5년 동안 공병대에 입대해서 여기 머무르든가, 아니면 그냥 돌아가라고."

"그럼...."

"다행히 세라자드 양이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5년쯤 여기서 지내게 되겠지. 아니라면 뭐 어쩔 수 없고."

"어, 그건...."

"싫지?"

 

끄덕.

 

줄리앙이 야물딱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일단 녀석을 부추기는 데엔 성공했다.

로이드의 입가에 남모를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맞아. 막 싫고 아쉬울 거야. 계속 같이 있고 싶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고. 맞지?"

"어, 응."

줄리앙이 다소 간절해진 눈초리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형, 그럼 난 어떡하면 돼?"

"넌?"

"응."

"일단 세라자드 양의 마음부터 살펴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세라자드 양의?"

"어. 너만 좋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잖아."

진짜로 그렇다.

자기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기분도 이쪽의 감정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니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며 서로의 마음을 알아 가야 한다.

'...라고 들었지. 누구한테? 과 동기한테.'

사실은 자신도 모태 솔로다.

막상 실전(?)을 겪어본 적도 없다.

그게 좀 서글프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진 않다.

'내가 안 겪어 본 거라도 상관없어. 지금 중요한 건 줄리앙이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자각하고 행동에 들어가도록 유도하는 거야.'

그렇게 바람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알아서 굴러갈 것이다.

'세라자드 양도 줄리앙과 비슷한 상태일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줄리앙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별로 어려운 거 아니야. 일단 너 스스로의 마음을 알았잖아? 그럼 그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해. 세라자드 양에게 더 잘해 주고, 기회를 봐서 용기를 내보면 어떨까?"

"용기를 내라고?"

"어."

"설마, 고백?"

"당연하지."

 

꿀꺽.

 

줄리앙의 작은 목울대가 출렁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긴장한 걸까.

하지만 그 순간 로이드는 보았다.

줄리앙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희미한 결의의 빛을.

'짜식.'

로이드는 흐뭇한 웃음을 참아 삼켰다.

이쪽은 이 정도면 됐다.

그러니 이제는?

세라자드를 슬쩍 부추기러 갈 차례다.

 

 

"흐흐흐."

"...."

"흐흐흐흣."

"...."

다음 날이 밝았다.

그리고 프론테라 백작가의 기사, 하비엘은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의 정신 상태를 심히 의심하게 되었다.

'뭐지.'

하비엘은 찜찜한 눈초리로 로이드의 알밤 같은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는 시간.

그런데 앞서 걷고 있는 저 인간, 아까부터 어쩐지 자꾸만 음흉한 웃음을 흘려 대고 있었다.

"흐흐흐흐흐."

"...."

결국, 하비엘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으신 겁니까."

자신의 경험상 로이드가 저렇게 웃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분명 뭔가 음흉한 일을 꾸미고 있을 터다.

반쯤 그런 확신을 품고서 물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걸음을 멈추는 로이드.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술에 걸고서 반문해 왔다.

"네가 보기에도 그래 보이냐?"

"예."

"내가 기분 좋아 보여?"

"예."

"잘 봤어. 기분 좋은 거 맞아."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생각하던 일이 아주 잘 진행될 것 같거든."

"생각하던 일이라니요."

"태어난 곳도, 살아온 방식도, 목적도 다르던 두 남녀가 마침내 하나로 맺어지게 될 예정이랄까."

"설마 줄리앙 님과 세라자드 양 말씀이십니까."

"어? 네가 어떻게 알아?"

"알 수밖에 없습니다."

하비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최근 두 분이 서로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더군요. 제가 아주 많이 본 눈빛이었습니다."

"네가? 아주 많이 봤다고? 그런 눈빛을?"

"예."

"어떻게?"

"저한테 고백 편지를 건네주기 직전인 여성분들이 보내곤 하는 눈빛과 무척 흡사했으니까요."

"...."

"제가 그런 눈빛을 받아 본 정확한 횟수를 헤아려 보자면...."

"세지 마."

"팔백육십...."

"하지 말라고."

"...."

존잘러들을 볼 때마다 쑴펑쑴펑 샘솟는 부러움의 감정.

그들이 당연한 듯 누리는 온갖 혜택을 향한 질시의 기분.

로이드는 그렇듯 새록새록 피어나는 음차원의 감정을 서글프게 집어삼켰다.

"쯧. 어쨌건 네가 잘 봤어. 그 두 사람, 조만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것 같아."

"어떻게 말입니까."

"어떻게는 무슨. 내가 부추겼으니까."

"로이드 님이 말입니까?"

"어."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난밤에 자신이 벌였던 일을 떠올렸다.

"줄리앙을 찾아갔지. 혹시나 하고 톡톡 찔러봤어. 역시나 줄리앙 녀석, 자신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더라?"

"그래서 알려 준 겁니까."

"어. 세라자드 양에게도 똑같이 해 줬고."

사실이었다.

줄리앙을 부추기고 난 뒤.

곧바로 세라자드를 찾아갔었다.

처음엔 이쪽과의 대화를 경계하던 세라자드였다.

그럴 법도 했다.

이미 술탄국에서부터 이쪽에게 수없이 농락당한 그녀였다.

사막 건너 여기까지 찾아와서도 생각지 못했던 고용 계약을 강요받았던 그녀였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건 절대로 믿지 않을 기세더라."

"그런데 어떻게...."

"그 여잘 부추겼냐고?"

"예."

로이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별거 없어. 조만간 줄리앙이 왕도로 훌쩍 떠나갈 거라고 말해 줬지."

사실이었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가 초조함을 느낄 계기를 주면 된다.

그 계기를 심어 줄 근거가 명확한 팩트라면, 그 위력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자신이 세라자드 양에게 쓴 수법이 딱 그랬다.

"사실 그대로를 말해 줬어. 줄리앙은 아카데미에서 차석 졸업을 한 재원이고, 조만간 마젠타노 왕실로부터 관직을 받게 될 거라고 했지. 지금은 그저 발령을 기다리기 위해 잠깐 고향에 내려와 지내는 거고 말이야."

모두가 확실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줄리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왕도로 돌아갈 것이다.

왕실의 신하라는 신분으로 수도권 주민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진다.

그럼 세라자드와도?

자연히 떨어지게 되리라.

"그렇게 세라자드 양이 줄리앙을 다시 돌아볼 계기를 심어 줬어. 사람이 그래.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도, 막상 타임어택이 걸리면 초조해지며 집착을 느끼는 법이거든."

진짜로 그렇다.

전에는 별로 소중한 줄 모르던 것도.

시간제한, 타임어택이 걸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자면 일일 한정 세일 품목이 그렇다.

원래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라면 묶음인데.

그걸 하루 한정으로 반값 세일을 하는 걸 보게 된다면?

일단 무의식중에 장바구니에 담고 본다.

원래는 딱히 살 생각이 없던 물건인데도.

오늘 사지 않으면 '아깝다'라는 생각을 어느샌가 하게 된다.

지금 당장은 필요 없지만 나중엔 결국 먹을 거라고.

그러니 이럴 때 미리 사 두는 게 장기적으론 이득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자동차도 그래. 특히 외제차가 가끔 그러더라고. 연말이 되면 재고떨이 할인을 시작하면서 이 모델이 내년에 단종될 거라는 루머를 딜러들을 통해 퍼뜨리지. 그러면 그 차를 지르고 싶은데 참고 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몰려들어. 단종되기 전에 안 놓치려고. 한데 막상 다음 해가 되면? 단종은 개뿔. 멀쩡하게 잘만 계속 팔더라고.'

이른바,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심리를 자극하는 방법이었다.

로이드가 세라자드에게 쓴 수법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조만간 줄리앙이 여길 떠날 거라는 시간제한을 걸어 버렸지. 놓치기 싫다는 생각을 할 거야. 그럼 자기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돌아보겠지."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게 될 거라는 뜻인 겁니까."

"어. 이해가 빨라서 좋네."

"전 그런 로이드 님이 싫습니다."

하비엘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묻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 두 사람을 이어 주려는 건지. 물론 순수한 호의는 아니겠지요?"

"어, 당연히."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순수한 미소는 아니었다.

"국왕한테 안 휘둘리면서 살려고. 그래서 이러는 거야."

"예?"

하비엘의 고개가 갸웃.

대체 저게 무슨 말인지.

줄리앙과 세라자드가 이어지는 것과 국왕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은발의 기사는 심연보다 깊은 알쏭달쏭함을 느꼈다.

로이드의 미소에 쓴웃음이 배어났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국왕이 날 함부로 못 굴려먹게 될 거라서. 아니, 최소한 그럴 분위기를 만들 기틀은 마련될 거라서."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안 될 것까지야. 간단히 말하자면 줄리앙이 세라자드 양과 결혼하게 됨으로써 우리 가문이 마젠타노 왕가와 술탄국, 양쪽에 다리를 걸칠 수 있게 되는 거야."

"그거, 반역 아닙니까?"

"전혀. 줄리앙은 장남이 아니니까."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줄리앙은 둘째지. 가문을 잇지 않아. 그러니 술탄국의 왕녀와 결혼하는 데에 문제가 거의 없어. 아니, 지금 같은 시점에선 오히려 환영받을 일이지."

"어째서 그런 겁니까."

"마젠타노 왕가와 술탄국이 평화적인 협정을 맺은 직후니까."

로이드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술탄국에서 이례적으로 몬스터 도미노 현상의 책임을 모두 인정했어. 거액의 배상금은 물론이고, 재발 방지 협정서에 서명까지 했지. 즉, 대대로 숙적이었던 두 왕가가 모처럼의 평화 무드로 돌입했다는 뜻이야."

"한데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무르익는 와중에, 몬스터 도미노에 피해를 입고서 재건의 중심지가 된 프론테라 백작가의 차남과 가해의 책임을 인정한 술탄국의 왕녀가 혼인으로 맺어진다면...."

"모두의 평화를 약속하고 상징하는 혼인이 되는 거지. 양측 왕가 모두에게, 대외적으로, 두루두루."

즉, 이번 혼인이 평화의 아이콘이 되는 셈이다.

더 나아가 프론테라 가문이 평화와 재건의 상징이 된다.

반역의 의혹이 아닌, 축복과 환영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술탄국에 한쪽 다리를 걸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내겐 유용한 찬사도 있고.'

로이드는 자신이 가장 처음 얻었던 찬사를 떠올렸다.

마젠타노를 업은 자.

그 찬사의 옵션은 바로 국왕 알리시아의 재위 기간 동안에 '절대로 역모 의심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즉, 대놓고 미친 짓을 하는 것만 아니면 반역의 굴레가 씌워지지 않으리란 뜻이다.

"그러니 마젠타노 왕가는 이번 혼인에 내심 서운함을 느낄지언정 겉으로는 불만을 표하지 않을 거야. 아니, 오히려 우리가 술탄국과 더 가까워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더 많은 혜택을 보장할걸."

"...그래서 국왕 전하가 로이드 님을 함부로 못 부려먹게 되리란 겁니까."

"응. 함부로 부려먹으면 술탄한테 가서 붙을 것처럼 굴어 버릴 거니까."

"...."

"그러면 술탄 입장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야. 사실 술탄이 사윗감으로 원하던 건 줄리앙이 아니라 나였잖아."

"...."

"그렇게 두 왕가 사이에서 우리 가문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 거야. 양쪽 모두 우릴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될 거고. 당연히 내 편안한 노후도 보장되겠지?"

"후우. 로이드 님,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정말?"

"고약합니다. 지저분합니다. 저는 로이드 님처럼 치졸한 사기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칭찬 고마워."

자신의 속내를 밝힌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그것이 자신이 그린 큰 그림의 실체였다.

줄리앙과 세라자드의 혼인.

그걸 통해서 마젠타노와 술탄국 양쪽이 이쪽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게 되는 상황.

상황이 그렇게만 만들어지면 된다.

그러면 자신은 누구에게도 아쉬울 것 없이, 국왕에게 수시로 불려 갈 걱정 없이 편하게 꿀만 빨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주도권을 지켜나가려면 또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국왕 알리시아에게서 노동 열외를 보장받는 자치권을 얻어내는 것.

그것이 로이드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할 수 있어.'

계획을 점검하며 로이드는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굳게 닫혀 있는 줄리앙의 방 창문.

커튼마저 쳐져 있는 세라자드의 숙소 창문.

두 창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슬쩍 미소를 흘렸다.

'그래, 고민해라. 번뇌해라. 그리고 이 몸께서 쏜 깨달음의 화살에 반응하는 거야.'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두 목표에 정확히 명중했다.

로이드는 확신했다.

줄리앙과 세라자드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반응해 줄 거라고.

과연 그런 그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그날 밤이 깊은 시각.

정말로 일(?)이 벌어졌다.

209화. 명령과 부탁의 차이 (1)

 

 

'후후후, 일이 이렇게 잘될 줄이야.'

한여름밤이었다.

젊은 드래곤 솔리타스는 식지 않은 열대야 속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드래곤답게 이 정도 더위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에 주먹을 불끈 쥘 뿐.

'해냈다. 해냈어. 드디어 나무 조각을 마스터했어.'

솔리타스는 오늘 낮의 일을 떠올렸다.

평소처럼 끙끙대며.

열심히 나뭇조각을 붙들고 씨름을 했더랬다.

나무를 손톱보다 작은 크기로 자르고 깎고, 다듬었더랬다.

그렇게 한참 집중하고 있던 때였던가.

갑자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만하면 됐군.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세."

자신의 스승인 드워프 장인, 코기두스였다.

스승님은 대체 언제 곁으로 다가온 걸까.

언제부터 이쪽의 조각을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너무나 집중하고 있던 터라 코기두스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던 자신이었다.

스승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더욱 깜짝 놀란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향해 코기두스가 피식 웃었던가.

"이쯤이면 더 나무를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단 뜻일세. 나름 열심히 노력한 게 보여서 더 대견하군."

"그, 그럼...."

"내일부터는 돌을 깎아 보잔 뜻이네."

 

턱, 턱.

 

잘했다는 듯.

자랑스럽다는 듯.

이쪽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떠나던 코기두스의 뒷모습.

그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속으로 환호를 삼켰던지.

'평생 나무 깎기를 못 벗어날 줄 알았는데.'

정말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정말 심각한 똥손이었다.

스승이 아무리 드워프 장인이라도 그 가르침을 1퍼센트도 제대로 흡수하질 못했다.

가르치는 코기두스가 매일 답답해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장가가야 하니까!'

자신에겐 원대한 숙원이 있다.

장가를 가는 것.

오순도순 가정을 이루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험난한 가시밭길도 마다치 않으리라 일찌감치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지. 정말 힘들었어. 크흡.'

오솔길을 걷던 솔리타스는 소매로 눈시울을 훔쳤다.

이곳 영지에 드워프 장인의 도제로 들어온 때부터 노력했던 순간들을 떠올리자니 절로 감정이 북받쳤다.

'게다가 이 보석 세공 수업, 공짜도 아니었지.'

매달 한 번씩은 꼭 대하수로의 분뇨 슬러지를 처리해 줘야 했다.

인간 끙까.

오크 끙까.

제일 냄새 나는 엘프 끙까까지.

매달 수십 톤이 넘는 끙까 덩어리를 향해 브레스를 발사할 때마다 쑴펑쑴펑 피어나던 자괴감이란!

'물론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 그렇게 지내야 하겠지. 그런 일을 더 해야 하겠지. 그래도 괜찮아. 난 발전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

솔리타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돌을 세공하는 단계까지 왔다.

다음엔 금속을, 언젠간 진짜 보석을 세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도 다른 드래곤들처럼 예쁘고 값지게 만든 보석을 산더미처럼 쌓을 수 있는 거야. 할 수 있어.'

딱 10년만.

그만큼만 더 노력하면.

자신도 결혼 시장에 자신 있게 뛰어들 수 있으리라.

솔리타스는 미리 상견례 드레스 코드, 신혼예정지와 가족계획, 산후조리원은 물론이고 실버타운 예약까지 잡아 두는 김칫국 원샷 드링킹의 마인드로 망상을 이어 갔다.

젊은 드래곤의 망상이 자연스럽게 신붓감 후보들에게로 이어졌다.

'후우. 만약 내가 정말로 장가를 가게 되면 누구와 이어지게 될까?'

궁금했다.

그래서 헤아려 보았다.

'지금 시점을 기준으로 결혼 적령기면서 아직 미혼인 내 또래 여자 드래곤이... 어디 보자... 전에 들은 정보에 따르면... 열일곱 명이었나?'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신부 후보감 여자 드래곤들의 명단을 주르륵.

떠올리던 솔리타스는 문득, 또 하나의 존재를 떠올렸다.

'아, 또 하나 있지. 용왕 베르키스의 딸.'

용왕 베르키스가 인간 여성과 혼인하여 얻은 딸이라 했던가.

특이하게도 반인반룡, 하프 드래곤인 존재라 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드래곤과 결혼적령기가 다르다고도 했다.

즉, 용왕의 딸도 신부 후보감 중의 하나일 터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솔리타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참. 내가 무슨 생각을. 아무리 그래도 용왕의 딸이라니. 말도 안 돼.'

아무리 자신이 망상 중이라 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감히 용왕의 딸이라니.

그런 존재와는 이어질 가능성도, 아니, 만나 볼 가능성도 없을 터다.

즉, 애초부터 올려다보지도 못할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쪽은 계산에서 빼고. 후우. 10년 뒤에 보석을 많이 쌓아둘 때까지 나머지 후보들이 잘 지내 주면 좋겠다. 감기 걸리지 말고, 비늘 관리 잘하고, 브레스 너무 세게 뿜다가 역류성 식도염 걸리지도 말고.'

그렇게 솔리타스는 혹시나 자신의 반려가 될지도 모를 신부 후보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언젠간 꼭 장가가겠다는 알찬 계획을 되새기며.

흐뭇한 마음으로 한여름 밤의 오솔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수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음?'

처음으로 솔리타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귀를 쫑긋.

오솔길 저 멀리 앞쪽을 향해 청각을 집중했다.

'누가 오고 있는데?'

대체 자정을 넘긴 이 시간에 누굴까.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솔리타스는 조금 더 감각을 끌어올렸다.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시각으로 어둠을 꿰뚫고 상대의 면면을 살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인간. 두 사람. 하나는 남자. 하나는 여자. 이 한밤중에? 나란히 걷고 있다고? 발그레해진 얼굴로?'

젊은 드래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보자마자 상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커플이다.

가증스러운 것들이다.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 한밤중에까지 나란히 걸어 다니며 죄 없는 드래곤의 쓰라린 가슴에 소금이나 팍팍 뿌려대고 있다.

하지만... 도저히 무어라 타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제, 젠장!'

솔리타스는 어금니를 으드득 깨물었다.

누군 장가 한 번 가 보겠다고 매달마다 수십 톤 끙까를 브레스로 태우고 있는데. 그런 값비싼 노동으로 수업료를 내가며 매일 먼지투성이 공방에 틀어박혀 돌이며 나무나 깎아대고 있는데.

그런데 저 가증스러운 커플이란 것들은 그저 하하호호 사방팔방에서 눈에 띄어 댄다니.

참으로 샘이 났다.

그래서 억울했다.

하지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젠장, 제기랄! 내일부턴 돌멩이, 더 열심히 깎을 거야!'

젊은 레드 드래곤은 비분강개의 심정으로 눈물샘을 부여잡았다.

행여나 그런 자신의 모습이 저 가증스러운 커플에게 보일까 황급히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그 서슬에 커플 중의 여자, 세라자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분명 방금.

저 멀리서 뭔가 기척이 느껴졌는데.

'금방 사라졌어. 누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기척은 아닌 것 같았다.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면 저런 식으로 기척을 순식간에 감추진 못할 테니까.

'토끼인가.'

세라자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토끼 같은 존재라면 자신의 곁에도 하나 있다.

"저기,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이쪽을 향해 걱정되는 듯 물어오는 줄리앙.

그 모습에 세라자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오늘 밤 달이 밝지 않음에 감사했다.

덕분에 빨개진 자신의 얼굴을 줄리앙이 알아채지 못했을 테니까.

'후우, 미치겠어.'

세라자드는 줄리앙 몰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한밤의 이 산책, 절대로 의도한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줄리앙과 함께 걸을 생각도 전혀 없었다.

아니, 그런 기대 자체를 한 적도 없었다.

'그냥 너무 답답해서. 그래서 바람만 잠깐 쐬려고 한 건데.'

종일 숙소의 방을 나서질 못했던 그녀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지난밤 로이드가 해 주었던 말을 되뇌기만 했다.

조만간 줄리앙이 왕도로 떠날 거라고 하던.

그 말을 떠올리며 고민에만 잠겨 하루를 보냈던 터였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로이드의 그 말을 들을 때 어찌나 가슴이 철렁하던지.

어째서 그 말이 뇌리를 떠나질 않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이러다가 줄리앙과 덜컥 마주치게 되면.

그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줄리앙에게 어떤 인사말을 건네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생각만 잔뜩 들었더랬다.

그래서 종일 방에서 나오질 못했다.

행여나 진짜로 줄리앙과 마주쳐 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그게 한편으로는 두렵고도 너무나 어색할 것 같아서.

그런 상황에서 허둥거릴 자신의 모습이 한심할 듯해서.

그만 온종일 좁은 방에서 서성이며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숨만 돌리려고 나온 건데.'

자정을 넘긴 시간이니까.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을 때니까.

비로소 조금이나마 안심하고 숙소를 나섰던 터였다.

그렇기에 이 시간에, 이 오솔길에서 줄리앙과 떡하니 마주쳐 버리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던 세라자드였다.

"후우우."

그걸 몰랐던 건 줄리앙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자신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세라자드 양이 산책을 나와 있을 줄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아니, 이렇게 계속 같이 걸어도 되는 건가.'

줄리앙은 고민하며 걸었다.

이제라도 다른 핑계를 대며 딴 길로 갈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세라자드 양이 더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아.'

어쩌면 서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럼 계속 같이 걸어야 한다는 건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은 거지.'

뭔가 대화를 해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어젯밤 형에게 들은 말들이 떠올라서.

그때 깨달은 자신의 감정이 가슴을 두드려서.

그런데 자기 혼자만 이런 거면 어쩌나 싶어서.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낼 수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야속한 오솔길이 끝나고 말았다.

"...아."

어느새 저택이 눈앞에 있었다.

그걸 깨달은 줄리앙은 황급히 세라자드를 돌아보았다.

"저기."

"네?"

"그, 으음...."

"잘 자요."

"...아, 네."

잘 자라는 인사, 이쪽이 먼저 건네고 싶었는데.

어느새 세라자드는 몸을 휙 돌려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뒤에서 줄리앙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밤이 더 깊었다.

'이상해. 잠이 오질 않아.'

반짝 뜬 눈을 깜빡깜빡.

침실로 돌아온 줄리앙은 멍하니 누워 있었다.

왜 잠이 오질 않는 걸까.

아까 잠시 함께 걸었던 세라자드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마지막 인사, 자신이 먼저 건네지 못한 게 후회가 되어서?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 들었던 형의 말 덕분이었다.

'너, 그러다가 세라자드 양 놓친다.'라고 하던.

"...."

나, 이러다가 정말로 놓치는 걸까.

아까처럼 바보같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세라자드 양을 볼 때마다 멍청하게 어버버.

그렇듯 답답하게만 굴다가 놓쳐 버리는 걸까.

'그건 싫어.'

여러 번 고민해도 결국 답은 하나뿐이다.

줄리앙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냥,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도 좋았다.

그저, 아무 말 나누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까처럼 나란히 걷기만 해도.

그러다 가끔 눈길이 맞닿기만 해도.

설령 이런 마음을 전하지 못한다 해도.

'보고 싶어.'

저도 모르게 벌떡.

줄리앙은 몸을 일으켰다.

어둠에 잠긴 복도로 나섰다.

 

 

'이상해. 자고 싶지가 않아.'

반짝 뜬 눈을 깜빡깜빡.

숙소로 돌아온 세라자드는 멍하니 누워 있었다.

어째서 자고 싶지 않은 걸까.

아까 나란히 걸었던 줄리앙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어색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얼른 먼저 인사하고 저택에 들어와 버렸던 일이 마음에 걸려서?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 들었던 로이드의 말 덕분이었다.

'줄리앙 녀석, 곧 왕도로 떠날 겁니다.'라고 하던.

그 한마디 말이 자꾸만 가슴을 헤집었다.

"...."

줄리앙, 그 토끼 같은 남자.

언제쯤 왕도로 떠나는 걸까.

아까 그걸 물었어야 했던 건데.

이러다가 당장 내일쯤 훌쩍 떠나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아까의 산책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던 건 아닐까.

'그건 싫어.'

여러 번 고민해도 결국 답은 하나뿐이다.

세라자드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이대로 줄리앙을 왕도로 보내기 싫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헤어지는 것도 싫었다.

아무 말을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아까처럼 그냥 말없이 걷기만 해도 괜찮았다.

앞으로도 매일을 그렇게 보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하자.'

저도 모르게 벌떡.

세라자드는 몸을 일으켰다.

어둠에 잠긴 복도로 나섰다.

 

 

줄리앙은 걸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별채로 이어지는 어둠에 잠긴 복도를 지나쳤다.

계단을 내려갔다.

귀빈용 숙소를 향해.

그녀의 문을 두드리리라 다짐했다.

 

 

세라자드도 걸었다.

거침없이, 당당히, 그러나 심호흡 부여잡으며.

본채로 이어지는 어둠에 잠긴 복도를 지나쳤다.

계단을 올라갔다.

닫힌 방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똑똑.

 

복도에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

자신이 만든 그 소리에 줄리앙은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혹시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아니, 이렇게 늦은 밤에 여자의 방문을 두드리다니.

이건 생각할 것도 없이 확실하게 저지르는 실례다.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이렇게 해서라도 세라자드를 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줄리앙은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이내 다시금 똑똑.

두드렸다.

 

 

삐이걱.

 

복도에 울려 퍼지는 경첩 소리.

자신이 만든 그 반응에 세라자드는 어깨에 힘을 넣고 긴장했다.

혹시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아니, 이렇게 늦은 밤에 남의 방문을 두드리다니.

이건 생각할 것도 없이 확실하게 저지르는 실례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줄리앙과 함께 있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세라자드는 열리는 문을 쳐다보았다.

"누구...?"

자다 깬 걸까.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프론테라 백작의 졸린 얼굴.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세라자드는 대차게 양 무릎을 꿇었다.

속으로 수백 번 연습하며 되뇐 말을 꺼냈다.

"백작님, 제게 둘째 아드님을 주십시오. 평생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습니다."

210화. 명령과 부탁의 차이 (2)

 

 

"어흠, 흠! 이처럼 풍요로운 가을이 깊어가는 오늘, 모든 곡식이 알차게 익어 가는 가운데 신랑 줄리앙 군과 신부 세라자드 양 두 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아울러 이 두 사람의 오늘이 있기까지 정성껏 키우고 가르쳐 주신 양가 부모님께도 축하의 말씀을 건네드립니다."

마젠타노 왕가에서 파견한 축하 사절이자 오늘 예식의 주례, 벤투라 백작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문 외교관다운 차분하고도 힘 있는 음성.

그의 성혼선언문 낭독에 정원이 조용해졌다.

모여든 하객들의 이목이 오늘의 주인공인 두 남녀를 향했다.

신랑인 줄리앙.

신부인 세라자드.

손을 꼬옥 잡고서 주례 앞에 선 풋풋한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로이드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후아. 이게 진짜로 실현되네.'

문득, 두 달쯤 전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줄리앙과 세라자드 사이를 오가며 큐피드 코스프레를 시전했던 다음날이었던가.

한밤중의 저택에 난리가 났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백작 부부의 침실을 찾아간 세라자드.

그녀가 백작 앞에 털썩 무릎까지 꿇으며 핵폭탄 발언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둘째 아드님을 제게 주십시오, 라니.'

당시 세라자드가 발사했던 그 발언.

그건 지금 생각해도 엄청났다.

너무 엄청나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썸을 타기 시작했던 사이였는데.

그러고도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하지 못했던 세라자드였는데.

그걸 자신이 직접 찾아가 상담(?)을 해주며 감정을 자각시켰던 건데.

'설마 불과 하루 만에 그런 일을 터뜨릴 줄 누가 알았겠어.'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정신 나간 수준의 행동력이었다.

그 발언의 파괴력 또한 정신 나간 수준이긴 매한가지였다.

백작가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백작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잠옷 차림으로 복도에 털퍼덕 주저앉았더랬다.

백작부인은 입을 틀어막은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실내 불침 순찰을 돌던 경비대원들이 그런 부부의 모습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그들이 다급히 외쳤다.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라고.

그들은 외친 후에야 세라자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세라자드는 무릎을 꿇은 채 결연한 눈빛으로 백작을 보고 있었더랬지.'

만약 결혼을 허락해 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석상이라도 될 기세였다고 했던가.

어쨌건 그 소란에 저택의 하인, 하녀들도 모조리 다 깨어났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깨어나자마자 백작 부부의 호출을 받아야 했다.

미처 눈곱을 떼어내기도 전에 가족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그렇게 건너간 백작의 집무실에서 자신은 두 번째 폭탄 발언을 들어야 했다.

'저도 세라자드 양과 같은 마음입니다.'

...라고 줄리앙이 꺼내던 선언을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의 막무가내 불도저 같던 연타석 폭탄선언.

그 앞에 프론테라 백작이 또 뜻밖의 반응을 보였던가.

더는 당황하지 않았다.

허둥거리지도 않았다.

뭔가 가만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진중한 눈초리로 줄리앙과 세라자드를 향해 차례대로 물었다.

진심인 것이냐고.

'물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지. 그걸로 끝이었어.'

프론테라 백작은 그저 알겠다고 했다.

정말로 다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군더더기 같은 질문을 하는 대신, 말없이 펜을 잡았다.

정성 가득한 서신 두 장을 썼다.

그리고 두 장소로 서신을 보냈다.

하나는 왕도 마젠타의 왕궁.

또 하나는 동쪽 술탄국 수도 아힌샤를 향해서였다.

즉, 두 사람의 진심을 확인한 백작은 곧바로 마젠타노의 왕가와 술탄궁에 두 사람의 혼인할 뜻을 알린 것이었다.

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진심을 보인 두 사람을 믿고 응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양측 왕실의 허락을 구하고 이해관계를 중재하는 무거운 역할까지 기꺼이 자청했다.

그런 백작의 결단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연하지. 마젠타노 왕가도, 술탄도 이 혼인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두 왕가의 반응은 자신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마침 평화적인 협정이 성사된 시점이었다.

양쪽 왕가 모두가 이번 혼인을 반겼다.

아예 이번 혼인을 양국의 화합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띄워 주었다.

몬스터 도미노 사태의 피해자인 프론테라 가문의 차남.

같은 사건의 가해자인 술탄의 딸.

그런 둘이 맺어지는 결혼인 까닭이었다.

'게다가 술탄은 원래부터 날 사위로 삼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당장 날 붙잡지 못한 것은 아쉽겠지만, 줄리앙이 훌륭한 대안이 될 거라는 계산을 했을 거야. 술탄 입장에선 말 그대로 꿩 대신 닭이랄까.'

덕분에 술탄은 프론테라 가문과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렇게 잇게 된 인연을 발판 삼아 나중에라도 이쪽을 사윗감으로 삼으려 들리라.

물론 그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딱히 없지만 말이다.

'어쨌건.'

상념에서 빠져나온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화창한 가을 햇볕 아래.

대부분의 결혼식이 그러하듯, 수없이 복잡했던 준비 과정에 비해 예식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여, 이렇게 두 사람은 많은 하객을 모신 자리에서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할 부부가 되기를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주례는 이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을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퍼펑! 팡!

 

성혼선언문 발표가 끝났다.

곳곳에서 폭죽이 터졌다.

색색의 꽃잎과 종이 가루가 날렸다.

새신부 세라자드가 부케를 던졌다.

부케가 상급 소드 익스퍼트의 힘을 싣고서 맹렬하게 날았다.

그 기세에 하객들이 감히 나서질 못하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허공을 가로지른 부케는 예식장을 벗어나, 수백 미터를 훨훨 날아서, 어느 공방에 다다라서야 힘을 잃고 우연처럼 똑 떨어졌다.

 

툭.

 

"...어?"

공방 구석에서 자갈 세공에 열중하던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창 세공에 집중하던 중이었는데.

별안간 작업대 위로 꽃다발이 톡 떨어져 내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선물한 듯이 말이다.

"뭐야, 이건."

설마 이거, 오늘 결혼식이 거행된다던 곳에서 날아온 물건인가.

그럼 이게 말로만 듣던 부케라는 꽃다발인 건가.

솔리타스의 눈썹이 더욱 크게 꿈틀거렸다.

'전에 들은 적이 있지. 시집가는 신부가 던져 주는 부케를 받으면 곧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던가. 쯧. 하여간 인간들이란. 멍청하게도 쓸데없고 근거 없는 미신에 집착한다니까. 이런 걸 주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나?'

그랬다면 정답.

부케를 작업대 아래로 슬며시 챙긴 솔리타스.

그런 젊은 드래곤의 입가엔 남모를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 결혼식도 성황리에 끝났다.

줄리앙과 세라자드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그 모습에 백작 부부는 기쁨의 눈시울을 적셨다.

직접 찾아오지 못한 술탄도 축하사절이 비춰주는 마법 거울을 통해 멀리서나마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한 감정에 젖었다.

내심 가장 아끼던 딸이 세라자드였다.

하지만 겉으론 냉담하게 대해야 했던 딸이었다.

섣부르게 아끼는 모습을 대외에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그런 부주의 때문에 세라자드가 수십 명 형제자매의 집중적인 견제와 시기를 받을까 염려되었다. 그 질시에 다치게 될까 두려웠다.

실제로 세라자드가 그 알력 다툼에 휘말려 변을 당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였다.

일부러 아비로서의 감정을 숨겼던 술탄이었다.

언젠가 세라자드가 소드마스터가 되면.

그래서 형제자매들의 질시와 음해를 이겨낼 실력을 갖추면. 자신이 더 걱정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켜낼 날이 온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곁에 두고 마음을 드러내리라 다짐했던 지배자였다. 아니, 지배자이기 이전에 아버지이기도 했다.

"...허허허."

이역만리 머나먼 궁정 깊은 곳에서 홀로 흐뭇하게 웃는 술탄.

프론테라 저택 정원을 가득 채우듯 박수를 보내는 하객들.

그렇듯 새내기 부부 줄리앙과 세라자드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알콩달콩 신혼여행을 떠났다.

 

 

"후아."

결혼식이 끝난 후, 로이드는 참아왔던 깊은숨을 터뜨렸다.

'해냈다.'

마침내 줄리앙과 세라자드가 공식적인 부부가 되었다.

마젠타노 왕가와 술탄국, 양쪽 모두의 축하와 인정을 두루 받아냈다.

모두 자신이 바라던 그림대로였다.

'짜식.'

멀어지는 신혼 마차.

새신랑이 되어 거기에 타고 있을 줄리앙.

녀석을 떠올리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배어났다.

자신의 유용한 퍼즐 조각이 되어 주어서?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좋네.'

원래는 진즉 죽어 사라져야 했을 줄리앙이었다.

자신이 읽은 소설 철혈의 기사.

그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자면 진짜로 그랬다.

'프론테라 가문이 망하고, 그래서 학비가 끊기고, 아카데미에서 쫓겨났지.'

그날, 잘 곳을 찾아 왕도의 뒷골목을 전전하던 줄리앙은 이름 없는 강도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것이 철혈의 기사에서 진행되던 원래의 스토리였다.

한데 그게 바뀌었다.

줄리앙이 죽지 않았다.

훌륭하게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제는 자신만의 인연을 찾아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저렇듯 행복한 모습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있다.

원작에서의 비참하고 허무했던 최후.

그것과 너무나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그게 모두 이 형님 덕분이란 말이지, 녀석아.'

세라자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칸다라 지방에 카나트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반란에 휩쓸려 재능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할 예정이었던 세라자드였다.

한데 원작의 그 스토리 또한 바뀌었다.

죽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고, 행복한 신부가 되어 신혼여행을 떠나고 있다.

심지어 어젯밤엔 자신에게서 자장가를 녹음해 가기까지 했다!

'이젠 제수씨가 된 거니까, 흠흠.'

그러니까 줄리앙도, 세라자드도.

돌아오면 나한테 잘해라.

앞으로 이 몸의 훌륭한 장기말이 되어라.

로이드는 훈훈해지는 기분을 만끽하며 멀어지는 신혼 마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깐.

그는 흐뭇함을 가슴속으로 접어두었다.

지금은 감상에만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자신이 만든 새 그림의 기틀이 얼마나 제대로 잡혔는지를 확인할 때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몸을 돌려 걸었다.

정원에서 빠져나오는 하객들의 틈바구니를 지나쳤다.

그리고 오늘 예식의 주례이자 마젠타노 왕가에서 파견한 축하 사절인 벤투라 백작에게 인사했다.

"오늘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백작님."

"오오. 이게 누군가. 프론테라 공자가 아닌가."

"네, 예식 전엔 바빠서 제대로 인사를 드리질 못했지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당연히 잘 지냈지. 자네는?"

"저도 잘 지냈습니다. 백작님 덕분에."

"허허? 이 친구 너스레 하고는."

이쪽을 향한 벤투라 백작의 웃음이 흐뭇했다.

마치 꿀 바른 복덩이를 대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번, 함께 술탄국으로 갔을 때 이쪽 덕분에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백작이니까. 그 후로 국왕에게 큰 상을 받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로이드는 은근한 미소를 띤 채로 벤투라 백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백작님, 혹시 제게 전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무어?"

"아마 있으실 텐데요."

"...허허."

백작의 미소에 헛웃음이 스몄다.

무슨 이런 친구가 다 있느냐는 듯한 눈빛도 보내왔다.

"설마 벌써 눈치를 채고 있었는가?"

"뭐, 대강은 말입니다."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이다.

예상하고 있었다.

이번 혼인에 대해 국왕 알리시아가 보일 진짜 반응.

벤투라 백작이 그 반응을 전해줄 메신저일 터다.

로이드는 더욱 은근해진 눈빛으로 백작에게 권했다.

"그럼 자리를 옮기실까요. 아무래도 여긴 눈과 귀가 많으니 말입니다."

"좋네. 그렇게 함세."

백작과 함께 예식 장소를 빠져나왔다.

일상적인 담소를 나누는 척하며 저택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을 응접실에서 마주앉게 되었다.

"자네가 대강 눈치를 채고 있다니 굳이 빙빙 돌려 말하지 않겠네. 자네의 추측이 맞네. 전하께서 자네에게 특별히 전하라 이르신 전언이 있다네."

벤투라 백작의 엄숙한 말이 이어졌다.

"우선, 전하께서는 이번 혼인에 대해 공식적으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네. 다만 헛웃음과 함께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만 하셨지."

"혹시 뭐라고 중얼거리셨는지...."

"'쯧, 그 땅강아지 같은 자가 참, 시킬 일이 있으니 당장 데려와.'라고 하셨네."

"...제게 시킬 일이 있으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벤투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자네가 나마란 시에서 제압한 흑마법사 칸나바로를 기억하겠지?"

"예."

"실은 진즉 그자에 대한 심문이 끝났고, 그렇게 얻은 자백을 바탕으로 전하께서 토벌 작전을 실행하셨다네. 자네가 카나트를 건설하던 사이에 말일세."

"토벌 작전이요?"

"그래. 성공리에 끝났지."

"...."

로이드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국왕 알리시아다.

심문을 끝낸 것도 모자라 흑마법사들의 잔당마저 싸그리 쓸어버렸다니.

과연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흑마법사 잔당을 토벌한 것과 저를 왕도로 부르시는 것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혹시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하면 저를 왕도로 부르심이 혹여, 전하의 칙령인 겁니까?"

질문을 던진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이제부터가 중요한 대목이다.

국왕이 자신을 왜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태도로 부르는 건지가 중요하다.

앞으로 계속 일꾼처럼 굴려지기 싫으니까.

그래서 줄리앙과 세라자드를 이어지게 했으니까.

그걸 빌미로 술탄국에 한쪽 다리를 걸쳤으니까.

이쪽을 서운하게 대했다간 자칫 술탄에게 뺏길 수도 있겠다고.

국왕이 경각심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위기감을 느낀 그녀에게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판을 짜는 시도를 했으니까.

'이번이 기회야. 이제부터 나올 대답에 따라 국왕이 날 어떻게 대하려는 건지 떠볼 수 있을 거야.'

여전히 일꾼 부리듯 부르는 건지.

아니면 전보다 정중하게 대하려는 건지.

그 태도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칙령? 그건 아닐세."

벤투라 백작이 한결 진중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잖아도 이번 건에 대하여 전하께서 특별히 이르시었다네. 이번에 자네를 왕도로 불러들이는 것은 칙령도, 일방적인 명령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하심은?"

"한 사람의 군주로서 자네에게 건네는 정중하고도 간곡한 '부탁'이라 특별히 이르시더군."

벤투라 백작의 대답을 듣는 순간.

로이드는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공이다.'

예전엔 일방적이던 명령을.

이제는 정중한 부탁으로 바꾸었다.

사소해 보이는, 그러나 중대한 변화의 시작이 느껴졌다.

211화. 보물보다 귀한 사골 (1)

 

 

"부탁이야. 다들 조금만 더 버텨줘."

 

쐐애액-!

 

국왕 알리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검이 춤을 추었다.

허공에 섬광을 새겨넣듯.

혹은 공간을 저며내듯.

일체의 군더더기조차 없는 경로로 쇄도했다.

근위대 기사의 방패를 두드렸다.

 

투콰앙-!

 

단지 목검으로 방패를 타격했을 뿐이었다.

한데 포탄이 부딪치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강철을 다섯 겹이나 덧대어 만든 방패가 주먹 하나 깊이만큼 움푹 우그러졌다.

방패를 들고 있던 근위대 기사도 무사하지 못했다.

"...크욱!"

기사의 두 발이 땅에서 떠올랐다.

우그러진 방해와 함께 퉁겨지듯 8미터나 날아갔다.

"크어억...."

모랫바닥에 처박힌 근위기사가 애벌레처럼 온몸을 꿈틀거렸다.

속이 온통 뒤집히는 감각에 전신의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러나 기사는 서글퍼하지 않았다.

희생자(?)가 자기 혼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투콰앙! 터컹-! 투컥!

 

국왕 알리시아의 목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기사들이 날았다.

핀볼처럼 튕겨 이리저리 하염없이.

물론 근위기사들이라고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밀집과 연계 대형으로!"

중간급 지휘 기사의 외침.

70인 남짓 남은 근위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40인이 밀집대형으로 뭉쳤다.

두꺼운 타워실드를 앞세우고 전진했다.

그러나 그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전원이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자로 구성된 근위대였다.

수십 킬로그램의 갑주 따위에 발이 느려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철컥, 철걱, 철크럭!

 

튼튼하게 밀집된 중장갑의 벽이 삽시간에 알리시아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30인의 근위기사가 국왕을 포위했다.

정교하게 움직이는 톱니바퀴처럼.

순간적으로 방위와 위치를 교대로 바꾸어가며 후방에서 맹렬한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그리고 박살 났다.

 

투확-!

 

"컥!"

국왕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번득인 순간.

그녀에게 검을 휘둘러 가던 기사가 5미터 상공으로 훨훨 떠올랐다.

'무, 무슨....'

기사의 눈에 황당한 빛이 떠올랐다.

분명 국왕의 빈틈을 제대로 잡았다고 확신했는데.

그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허공에 훨훨 떠올라 있었다.

검을 놓친 것은 물론이었다.

전신을 휘감은 충격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기사는 육체의 것보다 한층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야 했다.

 

투확! 터컹! 투콱! 투컹! 퍼컥!

 

"...!"

동료들이 오순도순(?) 봉봉 떠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똑같이 허우적거리며.

검을 놓친 꼴사나운 모습으로.

심지어 높이마저 딱 깔맞춤한 듯한 상공 5미터로.

그렇게 떠올려진 채로 금붕어처럼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서로 경악에 찬 눈길을 교환했다.

'야, 너두?'

'야, 나두.'

이윽고 추락의 순간이 다가왔다.

 

투커커커커컥-!

 

"어욱!"

"헙!"

"크욱!"

사이 좋게 허공으로 떠올려졌던 8인의 기사가 거의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 후에도 국왕 알리시아의 목검은 멈추지 않았다.

"짐이 방금 부탁하였을 터인데.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방패를 앞세운 근위기사들의 밀집대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양 떼 속으로 뛰어든 한 마리 사자처럼.

순식간에 대열을 헤집어 버렸다.

 

터커엉-!

 

후려치고, 또 후려쳤다.

올려베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검에 맞은 근위기사들은 어김없이 위로 '떠올랐다.'

그녀가 몰아치는 곳마다 기사들이 분수처럼 퐁퐁 솟구쳤다.

그녀의 나직한 읊조림도 이어졌다.

"그런데 왜 버티질 못하나. 응?"

 

콰앙-! 투콱!

 

오러를 쓰지도 않았다.

심지어 검기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목검에 평범하게 힘을 실었을 뿐이었다.

오직 가장 적절한 타이밍과 각도, 가장 적당한 힘으로 후려칠 뿐.

그런 그녀의 돌격 앞에 나머지 근위기사들이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 갔다.

마치 훈련을 빙자한 화풀이를 하는 듯한 몸짓.

하지만 그럼에도 알리시아의 눈동자에 서린 거친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로이드 프론테라.'

목검을 휘두르며 떠올리는 이름.

앞으로 귀하게 쓰리라 다짐하던 인재.

한데 지금은?

떠올릴수록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했다.

'짐을 도와 일하는 게 그렇게 싫은가?'

그자의 속내가 너무 훤히 보였다.

능력은 있는데 그걸 쓰기 싫어서.

평생 쉬려고만 바둥거리는 모습이 전부터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치러진 프론테라 가문과 술탄 왕가 사이의 혼인 또한 그러했다.

'분명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가 개입한 일일 터.'

보지 않아도 뻔했다.

혼인을 발판 삼아 술탄 왕가와도 다리를 걸치려는 속셈이리라.

물론 이쪽이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도 아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뭐라고 질책하기엔 또 애매했다.

'혼인의 당사자인 줄리앙 프론테라가 둘째 아들이니까. 가문을 계승할 일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번 혼인은 왕가의 입장에서도 대외적으로 포장하기가 딱 좋았다.

특히 시기가 그러했다.

'때마침 술탄과 성공적인 평화 협상을 치러냈지. 그 직후에 성사된 혼인이야. 왕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프론테라 가문의 차남, 그리고 술탄의 딸. 대외적으로 우리와 술탄국의 우호를 상징하는 혼인으로 포장하기 너무 좋은 그림이지.'

그냥 너무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일부러 이렇게 짰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국왕 알리시아는 더욱 이를 갈았다.

'그것 또한 노린 것이었겠지. 미움받지 않고 술탄에게 한쪽 다리를 걸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이런 약삭빠른 자 같으니.'

 

콰앙-!

 

감정 실린 목검이 파괴적인 춤을 이어갔다.

애꿎은(?) 근위기사들이 인간 샌드백이 되어 쓰러져 갔다.

국왕 알리시아의 생각이 이어졌다.

'아마도 내게 휘둘리는 게 싫어서겠지. 여차하면 술탄과 더 가까워질 수 있노라고, 대우를 소홀히 하면 술탄에게 붙어 버리겠다고 은근히 보이는 시위. 그래서 더 괘씸하고 귀여워.'

 

으드득!

 

이를 갈았다.

로이드 프론테라.

괘씸해서 더 부려먹고 싶었다.

도망치려고 바동댈수록 더 괴롭혀주고 싶었다.

벗어나려고 꼬물거릴수록 더 굴려먹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일거리를 맡겨놓고 그 속에서 애처롭게 허우적대는 모습을 감상해주고 싶어졌다. 제발 좀 쉬게 해달라고 눈물 그렁그렁 채우고서 싹싹 비는 모습도 보고 싶어졌다.

 

투콰앙-!

 

"크억...!"

근위기사가 명치를 부여잡고 5미터나 날아가 나뒹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오만한 시선으로 사방을 쓸어보는 국왕 알리시아.

그런 그녀의 주위에는 멀쩡하게 서 있는 근위기사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쯧."

좀 더 몸을 풀고 싶은데.

아직 땀도 별로 안 났는데.

최근 한 단계 경지를 끌어올린 뒤로는 근위기사들과의 대련도 영 만족스럽지가 못해졌다.

그렇게 알리시아가 불만을 느낄 무렵이었다.

"국왕 전하,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입궁하였사옵니다."

연무장 한쪽에서 궁내부원의 낭랑한 보고가 들려왔다.

국왕 알리시아의 입꼬리가 사납게 말려 올라갔다.

마침 딱 이런 순간이라니.

진짜로 굴려주고 싶어지게.

그녀는 사나운 욕구를 억누르며 명했다.

"기다리라 하라."

그녀는 목검을 거두었다.

냉수 한 잔을 털어 넣듯 비우곤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제법 긴 진입로와 정원을 지나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로이드 프론테라가 국왕 전하를 뵙사옵니다."

"...."

저 뻔뻔하게 숙이고 있는 뒤통수를 보자니 정말로 한 대쯤 찰싹 때려보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그럼 형편없이 나가떨어지며 데굴데굴 구르겠지.

그 모습, 실제로 감상하면 정말 짜릿할 듯한데.

하지만 알리시아는 간신히 그 욕구를 참아냈다.

대신 점잖게 용건만 말했다.

"짐을 따라오도록."

"예, 전하."

몸을 돌렸다.

훈련장이 있는 별궁 밖을 향했다.

본궁으로 향하는 정원을 통과했다.

로이드는 국왕의 뒤를 졸졸졸 따라갔다.

한편으로는 눈치도 야물딱지게 살폈다.

국왕과의 대화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걸어서야 물꼬가 트였다.

"그래. 짐의 부탁을 잘 들어주었군.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성은은 개뿔."

"...."

"쉬고 싶어하는 그대를 여기까지 불러놓고 굳이 미사여구를 꺼내진 않겠도다. 곧바로 본론부터 말하기로 하지. 최근 짐이 흑마법사 무리의 잔당을 모조리 토벌한 사실을 그대도 익히 들었겠지?"

"예, 들었사옵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사흘 전이었던가.

프론테라 영지에서 줄리앙의 결혼식이 끝난 직후.

벤투라 백작을 통해 국왕의 '부탁'을 전달받으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술탄국에서 카나트 공사를 하는 사이에... 국왕 누님이 무지막지한 활약을 펼쳐 버렸다지.'

흑마법사 칸나바로에 대한 심문을 끝냈다고 했다.

나마란에서 잡혀 온 흑마법사.

그에게 갖가지 정신 무력화 마법과 자백제를 서슴없이 쏟아부었다고 했다.

그 결과 영양가 만점짜리 자백을 받아냈다고 했다.

나머지 흑마법사 잔당의 위치와 인원, 계획까지.

거의 모든 고급 정보를 얻어냈다고 했더랬다.

'그리고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고 했어.'

국왕 알리시아는 조금도 미적거리지 않았다.

얻은 정보의 분석이 끝나자마자.

즉시 군사를 움직였다.

토벌군을 편성하고, 직접 지휘했다.

흑마법사 잔당이 대응하기도 전에 그들의 소굴을 벼락처럼 덮쳤다던가.

"미리 들었다니 다행이군. 하면 짐이 그들을 하나 남김없이 도륙하였음도 이미 알고 있겠지?"

"물론이옵니다, 전하."

저 말은 거짓이 아니다.

흑마법사들의 씨를 완전히 말렸다는 저 말은 명백한 실화이며 팩트다.

'그 과정에서 국왕이 전보다 강력해진 검술을 선보였다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지.'

벤투라 백작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토벌전의 마지막이었던가.

국왕이 흑마법사들의 수장을 직접 베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것보다 한층 찬란한 오러를 선보였다고 했다.

덕분에 토벌군의 피해가 최소화되었다고도 했더랬다.

'원작보다 성장한 거야, 국왕도.'

국왕이 얼마나 강해진 건지는 모른다.

다만 원작보다 훨씬 강력해졌을 듯했다.

'소설 속에선 한쪽 팔을 잃은 데다 폭군으로 타락하기까지 했으니까.'

외팔이가 되었다.

타락하며 수련을 등한시했다.

반면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아마 국왕 시해 미수 사건이 큰 자극이 된 게 아닐까.'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 사건 이후로 국왕 알리시아를 알현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수련을 하다가 나온 모습으로 이쪽을 맞이하곤 했다.

즉, 그녀가 극한의 수련을 매일 빼먹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근위기사들, 지못미.'

매일 국왕의 훈련을 받아주고 있을 그 사람들.

어쩌면 이 왕국에서 압도적인 직업만족도 꼴찌 당첨자들이 아닐까.

아마도 확실할 듯하다.

'내가 바꾼 역사로 만들어진 피해자들인 건가. 쩝.'

로이드는 근위기사들에 대한 소소한 미안함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는 사이, 국왕 알리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건, 그 토벌을 성공리에 마친 뒤 짐은 뜻밖의 전리품을 얻었다. 하여 이렇게 그대를 불렀노라."

"그 전리품이 저와 관련이 있는 물건인 것이옵니까?"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겠지. 그걸 활용하는 공사를 그대에게 맡길 생각이니까."

"공사를... 말씀이시옵니까?"

"그러하다. 혹여 내키지 않는 것인가?"

"그건...."

대답하려던 로이드는 흠칫,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

앞서 걷던 국왕의 걸음이 어느새 멈추어져 있었다.

강렬한 눈빛으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말해주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꺼낼 대답을 신중히 고르는 게 좋을 것이라고.

 

꿀꺽.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로이드는 깨달을 수 있었다.

'국왕이 내 의도를 다 알고 있구나.'

전부터 계속 느꼈던 거지만.

역시 국왕 누님은 장난이 아니다.

'수없이 상황을 보면서 각을 쟀던 건데.'

그 끝에 줄리앙과 세라자드를 이어주는 데에 성공했다.

마젠타노 왕가와 술탄 왕가 양쪽 모두에게 원망받지 않으며 다리를 걸치게 되었다.

덕분에 매번 일방적이던 국왕의 '명령'을 '부탁'으로 바꿀 수 있게도 되었다.

한데 지금 보니?

'아직은 좀 이르구나.'

국왕이 시키는 일을 대놓고 거부하기엔.

국왕이 맡기는 일을 하기 싫다고 떳떳하게 밝히기엔.

아직은 너무나 시기상조일 듯했다.

'제아무리 마젠타노를 업은 자라는 찬사를 지니고 있어도 그래.'

찬사는 강력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따라 찬사의 유효 기간이 변동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지금과 같은 순간이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대놓고 국왕의 심기를 거스르면 끝이야.'

그런 촉이 왔다.

이 순간, 눈치도 없이 또 뻣뻣하게 굴었다간?

어떤 상황에서도 역모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마젠타노를 업은 자> 찬사 효과.

그 꿀 같은 옵션의 유효 기간이 쑹텅 잘려나가거나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래서였다.

로이드는 마치 한밤의 주방 싱크대에서 서성이다가 집주인과 맞닥뜨린 바퀴벌레처럼 행동했다.

즉, 촉을 느끼자마자 태도를 싹 바꾸었다.

진심 담은 비굴한 멘트를 혓바닥에 찰싹 올려 진상했다.

"저 로이드 프론테라, 언제나 전하께서 맡기실 일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어떤 일이든 하명만 하여주소서."

"정말로?"

"그러하옵니다, 전하."

"진심으로?"

"물론이옵니다, 전하."

"그대는 거짓말을 참으로 천연덕스럽게 입에 담는구나,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여."

"...."

"세상 누가 일하는 것을 좋아할까."

"저기, 그것은...."

"됐노라. 짐은 이미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다. 무슨 목적으로 동생을 술탄의 딸과 혼인시켰는지,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서슴없이 추진하였는지도. 그렇기에 짐이 특별히 그대에게 당부하겠노라."

"...."

이쪽을 향한 국왕 알리시아.

그녀의 눈빛이 묘한 빛을 띠었다.

"짐은 그대가 좋다. 짐은 그대가 마음에 들어. 하니 앞으로 그대를 함부로, 자주 부려먹지는 않겠노라. 단."

눈빛이 살짝, 사나워졌다.

"짐의 적과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말도록. 하여 짐의 애정을 함부로 시험하지도 말도록. 알겠는가?"

"명심하겠사옵니다."

열심히 끄덕끄덕.

로이드는 2번 3번 경추에 담이 걸리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야 국왕 알리시아의 눈빛이 다소 누그러졌다.

"역시 눈치가 빨라서 편해, 그대라는 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놈의 할 말 없을 때마다 입에 담아대는 편리한 성은 따위."

"...."

"어쨌건, 그대가 짐의 뜻을 알았다니 이제는 짐이 그대에게 맡길 일을 밝힐 차례겠지. 자, 이쪽으로."

국왕 알리시아가 다시 앞장섰다.

로이드는 그 뒤를 뽈뽈뽈 따랐다.

정원을 지나, 본궁으로 들어서고, 수많은 복도와 계단을 통과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왕궁의 갖가지 보물이 보관된 보고였다.

보고 입구 앞에서 이쪽을 돌아보는 국왕 알리시아의 입꼬리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그대는 전리품을 감상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대체 뭘 보여주려는 걸까.

그리고 무슨 일을 맡기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국왕이 손짓했다.

근위대가 움직였다.

보고의 튼튼한 문이 열렸다.

마침내 안쪽에 놓인 '전리품'의 실체가 드러났다.

"짐은 그대가 저것을 활용하여 본 왕실의 국력을 대외에 드높일 대규모 정원을 조성하길 바라노라."

국왕 알리시아가 흐뭇한 미소로 가리키는 전리품.

바로, 몸길이만 200미터에 달하는 드래곤 뼈 무더기였다.

그걸 보는 순간 로이드는 직감했다.

212화. 보물보다 귀한 사골 (2)

 

 

'헐, 미친.'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활짝 열린 보고 안쪽.

그곳에 드래곤 뼈 무더기가 있었다.

엄청난 규모였다.

박물관 공룡 화석?

그런 것 따위완 차원이 달랐다.

정말로 박물관 화석처럼 제대로 조립하면 몸길이가 족히 200미터는 될 듯했다.

일단 두개골 크기만 해도 시내버스 뺨치게 커다랬으니까.

하지만 로이드가 주목한 것은 드래곤 뼈 무더기의 크기나 규모가 아니었다.

'뿔이 세 개야.'

드래곤 두개골의 뿔이 셋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는 넷이었는데 왼쪽 관자놀이에 달린 뿔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그래서 머리 위에 뿔이 두 개, 오른쪽 관자놀이에만 또 하나.

어쩐지 제법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당연하지. 실물이 아닌 문양으로는 지겹도록 봤으니까.'

드래곤의 머리와 날개를 지닌 사신 문양.

프론테라 영지 인근에 언데드 마스토돈과 함께 묻혀 있던 수상쩍던 문양.

나마란에서 칸나바로를 추적하던 때도 숱하게 보았던 문양.

그리고...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폭군이 된 국왕 알리시아의 곁에 붙어 있던 흑막 속 인물이 쓰던 문양.

그 문양 속 드래곤의 머리가 딱 저런 모습이었다.

왼쪽 관자놀이의 뿔 하나가 부러진 모양도.

나머지 뿔 셋이 뻗은 모습도.

그 문양 속 드래곤의 머리와 너무나 똑같았다.

'거의 보고 베끼거나 복붙한 수준인데, 이건.'

확실하다.

똑같다.

그렇게 확신하며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전하, 제게 감히 궁금한 점이 하나 있사옵니다."

"묻도록."

"예, 전하. 혹시 이 드래곤 뼈, 흑마법사들을 토벌한 뒤에 얻은 전리품이라 이르시었사옵니까?"

"그러하다."

국왕 알리시아가 피식 웃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 자부심이 살짝 엿보였다.

"연구실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았더군. 필사적으로 지키려 저항하기도 했고."

"흑마법사 잔당들이 말이옵니까?"

"그러하노라. 마치 가장 중요한 보물을 지키려는 듯한 태도였다. 아마도 그들이 활용하던 각종 시약, 강력한 주술적 도구 등등이 이 드래곤 뼈에서 추출되거나 가공된 것이었겠지. 그대가 나마란에서 캐냈다는 검은 보석처럼 말이야."

"제가 그걸 챙겼음을 알고 계셨사옵니까?"

로이드는 깜짝 놀랐다.

국왕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흑마법사 칸나바로의 자백을 통해 들었다. 아니, 그건 묻지 않았는데도 무려 다섯 번이나 계속 말하더군. 그대에게 보석을 빼앗겼던 일이 굉장히 사무치게 억울했던 모양이야."

"...."

"어쨌건, 그 일당을 일망타진하고 마지막 수괴를 벤 후에야 이걸 짐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노라. 솔직히 당시엔 얼마나 놀랍던지."

드래곤 뼈를 보는 국왕 알리시아의 눈빛에 흐뭇함이 배어났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무려 드래곤 뼈니까.'

드래곤의 뼈는 그 자체로 엄청난 보물이다.

흑마법사들이 활용했던 것처럼 마력을 추출하기에 따라서 강력한 마법적 원천이 되기도 한다. 혹은 뼈 자체를 가공하기만 해도 국보급 무구를 만들 수 있다.

한데 그런 드래곤 뼈를 통째로 한 마리분, 즉, 풀세트(?)로 득템했다.

국왕이 저렇게 대놓고 흐뭇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국왕은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내 추측이 맞다면 국왕의 이번 토벌은 정말 엄청난 성과인 거야.'

단순히 위험한 흑마법사 일당을 뿌리 뽑아서?

혹은 귀한 드래곤 뼈를 무더기로 얻어서?

아니었다.

로이드가 보기엔 이번 토벌에는 훨씬 중요한 성과와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바로,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던 흑막을 제거한 듯하다는 성과였다.

'거의 확실해. 저 드래곤 머리뼈의 뿔. 그리고 사신 문양의 드래곤 머리. 똑같아. 그게 무슨 뜻이겠어.'

흑마법사들이 그 문양을 쓰던 세력이 맞다는 소리다.

프론테라 영지 근처에 언데드 마스토돈을 묻어둔 것도 그놈들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타락한 국왕 알리시아에게 기생하던 의문의 측근 또한 저놈들이었다는 뜻이다.

'근데 후아, 그게 이렇게 한 큐에 해결되네.'

소설 1부가 끝날 때까지 끝끝내 제대로 밝혀진 적 없던 측근이었다. 소설 2부에서 흑막으로 등장하리라 모두가 예상했던 세력이었다.

끝끝내 2부 발간이 중단되며 오리무중에 빠진 놈들이었다.

'그래서 은근 신경 쓰였는데. 소설을 읽은 나도 예상할 수 없던 놈들이라서. 혹시나 나중에 그놈들한테 뜬금포 태클 맞는 거 아닌가 싶어서.'

한데 국왕 알리시아가 놈들을 확 쓸어버렸다.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옆집 누나가 대출을 갚아준 기분이었다.

생각할수록 국왕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 국왕 본인도 자신이 어떤 의미의 위업을 세운 건지 아예 모르고 있겠지만.'

로이드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어쨌건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런 식으로라도 찜찜한 놈들이 정리됐다면 좋은 일이다.

손도 안 대고 코 푼 셈이나 다름없었다.

혹은 에프킬라도 안 뿌렸는데 모기가 알아서 싱크대 설거지물에 퐁당 빠져 죽어 준 거랑 똑같았다.

즉, 제대로 어부지리가 실현됐다.

실로 격하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로이드가 물었다.

"하오면, 전하께서는 이 드래곤의 뼈를 활용하여 대규모의 정원을 조성하고 싶으신 것이시옵니까?"

"그러하다. 드래곤의 뼈대를 땅에 엎드려 조아린 모습으로 조립하고, 그 앞에 석상을 세워볼까 하는데."

"혹시 국왕 전하의 모습을 본뜬 석상을 말씀하는 것이시옵니까?"

"역시. 이래서 그대가 편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매번 짐의 의중을 짚어주니까."

국왕 알리시아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짐이 어찌하여 귀한 드래곤의 뼈를 가지고 고작 조각상과 정원을 꾸미려는 것인지 궁금하겠지. 단순한 허영심? 아니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대외에 마젠타노 왕가의 위상을 드러낼 쇼윈도가 필요한 것이시옵니까?"

"그것까지 짐작하였는가?"

"예, 조금은...."

"그대의 짐작이 맞노라."

국왕 알리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작금에 이르러 이 로라시아 대륙에서 우리 마젠타노 왕가에 정면으로 대항할 이들이 있겠는가? 없다.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모든 분야를 통틀어 감히 우리 왕가를 능가한다고 자부할 이들이 있는가? 그 또한 없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만했고, 그만큼 당당했다.

그 말에 로이드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국왕의 저 말은 냉정하고 깐깐하게 따져도 '거의' 팩트에 가깝다.

그만큼 마젠타노 왕가는 전성기의 강성함을 떨치는 중이다.

21세기의 지구로 치면?

미국이 빠진 세상의 러시아 정도쯤 될까.

말 그대로 이곳 로라시아 대륙을 호령하는 패권국의 위치에 반 발짝 정도는 올라서고 있노라 표현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나마 술탄국이 중국 같은 라이벌 포지션이긴 했지만.'

최근엔 그런 술탄국과 제대로 화친을 맺기까지 했다.

실질적으로 위협이 될 국가가 사라진 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왕실의 권위를 확실하게 드높일 때가 왔다고 판단한 거겠지. 국내의 귀족들을 아우르고. 국제적인 위상도 높이고. 행여나 술탄국이 몬스터 도미노 작전을 시행했듯이 감히 비벼볼까 하는 나라의 기도 미리 눌러 버리고.'

사회적으로도.

국제적 힘의 논리로도.

여러모로 이득이 될 공사이리라.

그러고 보니 지구의 역사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음이 떠올랐다.

어디서? 전성기의 프랑스에서.

누가? 태양왕 루이 14세가.

부르봉(Bourbon) 왕가의 부와 권위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동원했다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확장하고 지은 궁전과 정원.

그곳이 베르사유(Versailles)였다.

한데 지금, 여기 눈앞에서도.

국왕 알리시아가 태양왕처럼 근엄한 눈빛으로 자신의 요구 사항을 밝히고 있었다.

"우선 시공할 정원은 왕성의 본궁 후원을 확장하면 어떨까 한다."

예, 고객님.

"또한, 기존의 후원을 확장하며 확보할 규모는 최소한 800헥타르 이상, 정원 내에 놓일 길의 총 길이는 20킬로미터 이상, 거기에 약 30킬로미터에 달할 수로도 놓였으면 좋겠군."

아이고 예, 고객님.

"그리고 최대한 다채롭고 아름다운 수목이 20만 그루 이상 심어져야 할 것이고, 정원의 메인이 될 공간에는 여기 이 드래곤의 뼈대가 조아린 모습으로 설치되어야 할 것이며, 그 앞에 짐의 조각상이 당당하게 서 있으면 좋겠군."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고객님.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또 있노라."

말씀만 하세요, 고객님.

"방금 언급한 드래곤 뼈대와 짐의 조각상 둘레에 아름다운 수로가 놓였으면 한다. 물론 그 수로엔 최대 50인까지 태울 수 있을 선박이 여유롭게 통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이 선박이 왕도의 마제나 강에서부터 수로를 따라 들어와 짐과 드래곤의 조각상을 감상한 뒤 반대편 수로를 통해 정원을 빠져나갈 수 있으면 좋겠군."

...살려주십쇼, 고객님.

그 뒤로도 국왕의 요구 사항은 끝이 없었다.

심지어 매우 알뜰살뜰 디테일했다.

그랬다.

국왕 알리시아는 매우 꼼꼼하며, 본인의 기호에 대해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지니고 있는 타입의 고객님이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후아.'

속으로 기함하면서도 국왕의 요구를 모조리 다 기억했다.

한편으로는 내심 국왕의 요구를 반기기도 했다.

'차라리 이런 고객님이 편하니까.'

문득, 대한민국의 현장에서 구르던 때가 떠올랐다.

한 번은 개인주택 인테리어 현장에 불려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건축주가 진짜 골때리는 사람이었다.

악독하게 사람을 막 굴려서?

혹은 인부들에게 갑질을 해대서?

아니었다.

'어설프고 우유부단하게 두루뭉술한 호인이었거든.'

자신은 그때 처음 알았다.

일을 주문받을 때 제일 사람 빡치고 난감하게 만드는 고객이 바로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두루뭉술한 호인이라는 걸.

'처음엔 안 믿겼지만, 진짜로 그랬어.'

그 건축주 진짜.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그냥 좋게 만들어주시면 된다고.

그럭저럭 괜찮으면 좋을 듯하다고.

처음 일을 맡길 때는 참말로 사람 좋은 얼굴로 설렁설렁 두루뭉술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일이 진행되면서는?

'서서히 싹 바뀌었지.'

슬슬 요구가 불어났다.

점점 바라는 것이 많아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 일을 맡길 때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였어.'

그래서였다.

그 건축주, 일이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본인의 니즈(?)를 서서히 단계적으로 자각해 갔다.

 

'앗, 막상 보니까 1층 현관 타일은 흰색보단 회색이 더 좋겠는데요?'

'죄송하지만 생각해보니까 중문은 이거 말고 좀 다른 스타일로 해보는 게....'

'지금 보니 욕실 샤워부스는 다시 없애는 게 나을 거 같네요.'

 

...라는 식이었다.

물론 그렇게만 일이 끝났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터다.

일일이 요구하던 변경 사항을 열심히 뚝딱뚝딱 반영해줬으니까.

하지만 그 현장은 그렇게 아름답게(?) 끝나진 못했다.

 

'아, 지금 보니까 그냥 처음 했던 게 제일 좋았던 거 같네요. 다시 그걸로 가죠.'

 

...라는, 건축주의 해맑던 요구 때문이었다.

결국, 그렇게 그 현장은 뒤집어지고 말았더랬다.

'어오. 지금 생각해도 개빡치네.'

뺑이쳐가면서 다 고쳐줬더니만 진짜.

추억(?)에 잠겨 있던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편으로는 국왕 알리시아를 바라보며 새삼 안도했다.

다행이다.

국왕 누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하오면, 그렇게 말씀하신 부분들을 모조리 시공에 적용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그러하다. 짐이 언급한 요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조화롭게. 자금도, 인력도 넉넉히 지원할 터이니 그에 대해 염려할 필요도 없이. 어떠한가,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여."

"매우 훌륭하다고 감히 생각하옵니다."

"그러한가?"

"물론이옵니다."

"좋다. 한데 그대라면 이번 시공의 대가로 짐에게서 얻어낼 조건을 이미 생각해두었겠지?"

"그것 또한 물론이옵니다."

"말하라."

국왕도, 로이드도.

이미 서로를 잘 파악하는 사이였다.

서로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 또한 잘 알았다.

덕분에 복잡한 군말은 필요 없었다.

국왕이 시공 요구 사항을 모두 말하고 나니.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로이드가 요구 사항을 말할 차례가 되었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대는 고향에서 편히 쉴 수 있었음에도 이렇듯 큰 공사를 군말 없이 떠맡아주었지. 하니 이번만은 짐도 조금 과하다 싶은 그대의 요구를 하나쯤은 들어줄 터.'

로이드를 바라보는 국왕 알리시아의 눈길이 깊어졌다.

재주 많고 눈치가 빨라서 써먹기 좋은 인재였다.

한편으로 이제는 너무 막 굴려먹기엔 껄끄러워진 인물이기도 했다.

'쯧. 감히 술탄에게 천연덕스럽게 한쪽 다리를 걸칠 줄은.'

그래서 일 하나를 시킬 때마다 이렇듯 요구사항까지 들어주며 어르고 달래야 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국왕은 조금은 씁쓸해진 입맛을 다셨다.

로이드가 공손히 말했다.

"하오면 감히, 국왕 전하께 청할 사항을 아뢰겠사옵니다."

아직 대놓고 국왕의 일을 거절하긴 시기상조니까.

이렇게 기왕 맡게 된 일이니까.

군말 없이 일을 받는 대신에.

매우 확실한 보수를 받아내리라.

이참에 아주 야물딱지게 한 몫 챙겨보리라.

휘황찬란한 국보급 무구를 풀세트로 십수 벌쯤 번듯하게.

거기에 전설의 포션급 사골 육수 엑기스도 2리터 페트병에 꽉 채울 정도로 알차게.

뽑아내리라 다짐하며 로이드가 말했다.

"저 로이드 프론테라는, 이번 공사를 성공리에 마친다면 향후 10년 동안의 노동 면제권을 얻길 원하옵니다."

"...뭐?"

국왕 알리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식 밖의 요구였다.

놀라움은 곧 언짢음으로 변했다.

짐이 명하는 일을 10년이나 거절하겠다니.

아무리 그대라도 감히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느냐.

그녀가 준엄하게 꾸짖으려는 순간이었다.

로이드의 낭랑하고도 태연 뻔뻔한 말이 재빠르게 이어졌다.

"만일 그러한 청이 마음에 아니 드신다면, 저 로이드 프론테라는 10년의 노동 면제권 대신에 큼직한 드래곤 통뼈 한 덩어리를 하사받길 원하옵니다."

213화. 그의 꿈은 월급루팡 (1)

 

 

노르트 자작.

곧 56세가 될 장년의 조원가.

그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정원 디자이너였다.

소년 시절 정원사의 일개 조수로 시작하여 남다른 재능을 드러냈다.

수많은 정원이 그의 손길을 거쳤다.

황폐하던 정원은 아름다워졌다.

산만하던 정원은 말끔해졌다.

일류 정원사로 발돋움했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았다.

본격적인 토목 시공에 눈길을 돌렸다.

단순히 만들어진 정원을 가꾸는 것이 아닌, 정원 자체의 대지와 구획을 설계하는 분야에까지 눈을 떴다.

그리하여 정원 건설과 관리 분야에서 가히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평민 출신임에도 그 능력 하나로 자작의 명예 작위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고작 몇 년 사이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신출내기 어린 설계자보다는 자신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흐음, 이 친구가 로이드 프론테라인가.'

이야기로 듣던 것보다 훨씬 젊다.

아니, 새파랗게 어리다.

국왕 전하에게 미리 귀띔을 받긴 했는데.

최근 가장 떠오르는 젊은 설계사라고, 이번 대규모 정원 시공에서 함께 일하게 될 자라고는 했는데. 왕도의 저 아름다운 로이-하비 현수교를 지은 자라고도 들었는데.

정말로 이렇게 새파랗게 젊을 줄은 몰랐다.

'이건 거의 내 아들뻘이 아닌가.'

로이드를 보는 노르트 자작의 눈길에 희미한 불만이 떠올랐다.

아직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저 젊은이.

자신이 저 나이 때는 어땠던가.

'정원사로 한창 이름을 떨치다가 처음 설계를 접했었지. 그 뒤로도 10년이나 더 노력하고 공부해야 했어. 그런데 저 친구는 저 나이에 벌써 설계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솔직히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민이었던 자신과 다르구나 싶었다.

저 로이드라는 애송이, 귀족으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공부한 놈이겠거니 싶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 통성명을 하는 자작의 목소리도 살짝 퉁명스러워졌다.

"그래, 자네가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라고?"

"예, 반갑습니다. 노르트 자작님. 저도 국왕 전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전하께 들었다고?"

"예. 충분히 귀감으로 삼을 훌륭한 설계자라고 하셨습니다."

"...어흠, 흠! 무슨 그런 말씀을. 나도 자네 이야기는 좀 들었다네."

"그렇습니까?"

"제법 재주가 있다더군. 나름 성과도 냈고."

"아, 과찬이십니다."

로이드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느꼈다.

'이 사람, 날 별로 안 좋아하네.'

어쩐지 탐탁지 않게 보고 있다.

그런 감정을 제법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아까 국왕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감정도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