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왕의 가장 강력한 패(1)
탁. 창백할 정도로 하얀 손이 기세 좋게 책상을 짚었다.
그 밑에 깔린 것은 다름 아닌 흰 종이.
짧은 공백을 두고 잠시 멈췄던 손이 종이만 남긴 채 천천히 물러난다.
멀어지는 손을 보던 남자가 시선을 내려 책상 위 종이를 눈에 담았다. 대수롭지 않게 종이를 향한 눈이 그 위에 적힌 '사직서'라는 글자를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가 급히 고개를 치켜들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지켜보던 흰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사내는 당황이 고스란히 드러난 역안을 똑바로 마주하며 딱딱한 표정만큼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 그만두겠습니다."
***
제국에 '영웅'들이 있다면 마왕군에는 '군단장'들이 있다.
제국이 유능한 장수들을 내세운다면 마왕은 역시 '군단장'들을 내세울 것이다.
그만큼 군단장은 마왕의 검이자 방패이며 힘의 상징이다.
공식적으로 마왕의 군단장은 제1군단장부터 제12군단장까지 총 열둘이지만, 사실 공공연하게 숨겨진, 비밀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한 그런 군단이 하나 더 있다.
마왕성의 모든 이들로도 모자라 심지어 적인 제국군까지 알고 있지만 엄연한 비밀인 제0군단.
무려 '마지막 용사'를 죽인 자가 군단장을 맡고 있는, 사실상 마왕의 가장 강력한 패.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패가, 갑자기 그만두겠단다.
"안 돼! 저어어얼대 안 돼!!"
너 같은 인재를 이렇게 놓칠 순 없다! 그런 의지로 마왕 카베르는 제 수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평소에 말수가 없는 데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아서, 직접 이곳까지 왔을 땐 웬일인가 싶기는 했다. 심지어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기껏 하는 말이 이거라니.
아마 진심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냥 한번 해보는 말이겠지. 반드시 그래야 한다.
여전히 바짓가랑이를 꾹 붙잡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고, 침묵이 흘렀다.
아마 그라면 눈빛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설마 정말 그만둔다고 하진 않겠지?'
의도가 제대로 먹혔는지 줄곧 굳어 있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얼핏 보아서는 티도 나지 않았으나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마왕은 이를 기민하게 잡아챌 수 있었다.
흔들린다. 그렇다면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겠지.
줄곧 잡고 있던 다리를 놓고 벌떡 일어섰다. 대신 이번에 잡은 부위는 양어깨.
"도대체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부하들이 막 대해? 인간이라고 차별이라도 하는 거야? 어떤 새끼야?! 내가 당장 요절을…!"
다소 격한 음성과 달리 속내는 그들이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인간임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무위.
아니, '인정'이 다 무어냐. 마족들에게 있어 그의 무위는 호승심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이다. 호승심은커녕 모두가 경외하며 존경하고 있는데, 어느 간 큰 놈이 감히 그를 건드리겠는가.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데온 하르트. 마왕성에서는 '데몬 아루트'라 불리는, 사실상 마왕 다음가는 지위의 '인간'.
마왕성의 유일한 인간이라 다른 인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평소의 그는 확실히 다른 마족들과는 달리 누군가의 피를 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든 반응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막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손목이 덜컥 잡혔다.
돌아보니 피를 연상케 하는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왕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제야 대화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군.'
뿌리치려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나 상대는 가장 아끼는 수하, 그것도 방금 막 사직서를 낸 수하인 데다 애초에 이것을 의도한 것이기에, 그는 뿌리치는 대신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한 번 묻지. 이유가 뭐야?"
"...죽이실 겁니까?"
그저 진심이 궁금했을 뿐이건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죽일 거냐니.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눈이 마주쳤다. 섬뜩해 보이는 붉은 눈이 조금의 깜빡임도 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더 몰아붙였다간 정말 목이라도 뜯기겠군.'
용사를 제외하고는 상대할 자가 없는 마왕이라지만 그에게도 눈앞의 사내는 위협적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목을 노린다면 이쪽 역시 나름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테니까. 아마 상당히 귀찮아지리라.
상대를 진정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내가 널 죽일 리가 없잖아. 그래서 이유가 뭐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건."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왈칵.
'…왈칵?'
"피! 피가!!"
"아."
피가 쏟아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서류가 가득한 책상 위로.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피를 받았다. 그 외의 행동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독인가? 아니, 피를 본 순간부터 독 감지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다.
후유증.
공식적으로, 데온 하르트는 용사를 죽였다.
무려 '용사'다. 당연히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그 탓에 그는 원래도 그리 좋지 않던 몸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지금처럼 종종 피를 토할 때도 있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어쨌든 후유증이 맞기도 하고, 결과도 같으니.'
각혈은 이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 같지만, 그 빈도가 확연히 늘어버린 것이 선명히 보인다.
으득. 소중한 인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이가 갈렸다.
그때, 뒤늦게 상황을 자각한 건지 데온이 입을 막고 책상으로부터 두어 걸음 물러섰다. 누가 봐도 피를 억누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힘겹게 기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서류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주치의! 0군단장의 주치의를 불러와라!! 지금 담당 환자가 아픈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거야아아아아!!"
마왕성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포효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
저 멀리서 담당 주치의 벤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마왕의 방 카펫에 지저분한 붉은 얼룩을 만들고 있던 나의 감상은 아주 단순했다.
'시발, 망했다.'
난 그저 사직서나 내고 일을 그만두려 했던 건데. 하필 그때 피가 올라와 가지고 서류도 더럽히고, 카펫도 더럽히고, 담당 주치의까지 번거롭게 만들고… 이거 누가 봐도 처맞기에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처맞기만 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상대는 마족. 인간이었다면 단순히 화를 내고 넘어갈 일도, '네 목숨으로 사죄해라!'라며 검을 휘두를 놈들이다.
때문에 나는 하얗게 질린 채 뻣뻣하게 굳어서는 필사적으로 벤의 진찰에 응했다.
"데몬 님, 제 말 들리십니까? 이게 몇 개로 보이시죠?"
"세 개입니다."
착실한 대답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을 대신하며 조금 전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내 이름은 데온 하르트. 약간의 오해가 있어 마왕성에서는 '데몬 아루트'라 알려져 있다.
아니, 아니지. '약간'이 아니지. 내가 사직서를 낸 이유가 바로 이 '오해'에 있는데.
무슨 오해냐 하면, 마왕을 비롯한 마왕성의 모든 이들이 내가 무지막지하게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 웃기는 소리. 아마 이 성의 요리사가 나보다 더 강할 것이다. 적어도 그 요리사는 '마족'이지 않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계속되는 과한 평가는 내게 공포심마저 선사했고, 더 늦기 전에 발을 빼야 함을 경고하는 듯 했다.
후한 평가가 좋지 않냐고? 그것도 적당해야 좋지.
지나친 고평가는 후환을 두렵게 만든다. 특히 내가 있는 곳은 마왕성. 심지어 마왕마저도 나를 과하게 평가하고 그에 맞춰 대우하고 있는데, 진실이 밝혀진다고 생각해 봐라.
아마 그날이 내가 죽는 날이 되겠지. 죽더라도 곱게 죽지는 못하리라.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이대로 말없이 도망치면 분명 마왕이 '너 같은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라며 군대를 끌고 쫓아올 것이다. 자칫하면 잡히는 거로도 모자라 감금되거나, 최악의 경우엔 죽을지도 모른다.
인간들 중에서도 '갖지 못한다면 부숴버리겠어!' 하는 녀석이 있는데, 마족이라고 없을 리가.
적끼리 닮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하필 인재를 아끼는 것만큼은 제국의 황제를 닮아가지고.
사실대로 말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믿는다 해도 '지금까지 날 속여?!'라면서 내 목을 날려버릴지도 모르니….
그래서 직접 마주하고 매듭을 지으려 했다. 여차하면 분위기를 살펴 사직서와 함께 그만두겠다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질 생각도 있었다.
설마 마왕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줄은 몰랐지만.
"안 돼! 저어어얼대 안 돼!!"
어느 정도 말릴 거라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이건 내 계획에 없었다고!'
바짓가랑이라니, 마왕이라는 작자가 자존심도 없냐?!
속으로 절규를 내지르면서도 나는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그야, 무서웠으니까.
'내 다리에 마왕이! 시발, 마왕이이이이이!!'
상대는 무려 마왕. 매번 용사들과 맞부딪히면서도 큰 피해 없이 마왕성을 지킨 역대 최강의 마왕이다. 그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내 목숨은 그대로 끽- 날아가 버린다.
그러니 잘못 움직였다가 자칫 그를 차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굳이 시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가 먼저 손을 뗄 때까지 동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마왕이 조금만 늦게 손을 뗐더라면 분명 몸에 쥐가 났을 것이라 장담한다.
어쨌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뗀 마왕이 벌떡 일어섰다. 바지를 놓은 것은 좋지만, 이번에 잡은 것은 내 어깨!
어떻게든 나를 붙잡겠다는 나름의 어필인지 양어깨에 손을 얹은 그가 눈을 마주하며 줄줄이 말을 뱉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왕님.
"도대체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애초에 제가 사직서를 낸 이유는,
"부하들이 막 대해? 인간이라고 차별이라도 하는 거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잘 해줘서 그런 겁니다.
댁들은 '실력에 걸맞은 대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난 아니라고. 진짜 아무 능력도 없단 말이야!
오히려 신체 능력은 일반인보다도 떨어지는 허약한 인간일 뿐인데.
'처음 영입을 시도했을 때, 그때 의심했어야 했어.'
나 같은 인간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그런 건지 의심했어야 했다.
거절했다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것 같은 분위기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어? 그러네. 생각하고 보니 처음부터 선택지 따윈 없었네.
'...인생.'
목구멍까지 치민 한숨을 눌러 삼켰다. 지금이라도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최종 보스인 마왕이 생각보다 내게 잘 해주고 있으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어느 새끼야?! 내가 당장 요절을…."
아니! 아니 아니!!
성큼성큼 집무실 문을 향하는 그를 기겁하며 붙잡았다.
누구 잡을 일 있나. 그쪽이 부하들을 요절내면 누가 욕을 먹겠어? 당연히 원인인 내가 표적이 될 거 아냐!
거봐라, 잘 해줘도 너무 잘 해주지 않는가. 아 제길,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다행히 진정한 모양인지 마왕이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다시 한 번 묻지. 이유가 뭐야?"
어째,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이 얼핏 살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죽이실 겁니까?"
아, 이게 아닌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이 직설적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역시나, 마왕의 상징인 역안이 이채를 띠고 이쪽을 향한다.
저 눈빛은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알았지?' 정도의 눈빛일까, '이걸 죽여, 살려?' 하고 고민하는 눈빛일까.
어쩌면 '이래서 눈치 빠른 부하는 귀찮다니까'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지,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나…? 아니 그 전에, 사과한다고 해서 살려주기는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암울한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강렬한 눈빛을 차마 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안절부절못하며 입술만 달싹이는데, 속내를 파헤치기라도 할 듯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던 마왕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죽일 리가 없잖아. 그래서 이유가 뭐야? 일단 들어나 보자."
잠시 머뭇거리긴 했으나, 그건 잠시였다.
어차피 담판을 지으려 했으니 이건 꼭 필요한 절차다. 도망칠 수 없으며, 도망쳐서도 안 된다.
때문에 막 입을 여는데.
"...그건."
왈칵.
익숙하디익숙한, 비릿한 혈향이 입안부터 코끝까지 화악 퍼져나갔다.
"피!! 피가!"
"아."
2. 마왕의 가장 강력한 패(2)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하필이면 각혈을 해도 여기서! 젠장!
피로 어질러진 서류가 보인다. 더해서 손으로 내 피를 받고 있는 마왕이… 세상에.
'더러운 생이었다.'
속으로 짧은 유언을 남기며 급히 입을 막고 책상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래 봤자 이미 더럽혀진 서류요, 피로 물들어버린 마왕의 손이다. 역시나 화가 난 건지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을 찌르는 살기에 절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나는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서류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주치의! 제0군단장의 주치의를 불러와라!! 지금 환자가 아픈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아아아아!!"
...응?
예상 밖의 상황에 머리가 굳어버렸다.
잠시 뒤, 내 머리는 간신히 다른 가정을 내세울 수 있었다.
아, 주치의에게 화가 난 거구나.
요컨대 이런 거다. 내가 이런 사고를 친 것은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치의가 일을 제대로 안 했다는 뜻이고, 그 말인즉 내가 사고를 친 이유는 주치의 때문이라는 것.
그러니 나를 족치는 대신 주치의를 족치겠다, 이거겠지.
그렇다면 난데없이 불벼락을 맞은 주치의의 원망은 어디로 향할까.
이곳은 마왕성이다. 주치의 역시 마족이라는 것을 되새긴 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발, 망했다.
***
"지금 환자가 아픈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아아아아!!"
압도적인 마기가 성 전체를 휩쓸었다.
이 진득하고 묵직한 마기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하다. 주치의 벤은 오늘 죽을 각오를 하고 급히 왕진 가방부터 챙겨 들었다.
마왕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는 부하는 당연히 그의 담당 환자, 자랑스러운 제0군단장이신 데몬 님밖에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마왕님의 집무실에 도착하니 입을 가린 채 맨바닥에 앉아 계시는 데몬 님이 눈에 들어왔다. 손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피.
그 탓에 집무실 카펫이 너저분해졌으나, 마왕님께서 그런 것을 신경 쓰실 리 없기에 개의치 않고 그분께 다가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인지 일어날 생각을 않으시는 그분을 급히 부축해 소파에 앉히며 속으로 자책했다.
환자가 아픈데 재깍재깍 나타나지 못하다니, 주치의 실격이다. 만약 데몬 님께서 분노하셔서 이 목을 꺾어버린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 전에, 회복부터 시켜야겠지만.
일단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우선 의식 확인부터.
"데몬 님, 제 말 들리십니까? 이게 몇 개로 보이시죠?"
"세 개입니다."
의식 정상, 시야도 정상.
데몬 님이 왜 이러시는지는 마왕성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똑똑히 봤으니까.
한낱 인간의 몸으로 자폭하려는 용사를 제지하는 그분의 모습을.
그것도 모자라 가벼운 손짓 하나로 용사의 목숨을 거두신 그 장면을.
용사의 자폭을 온전히 혼자 받아내었으니 몸이 망가진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얕보고 있느냐고?
'그럴 리가.'
몸이 약해진 것과 전투 능력은 별개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라면 모를까, 이분은 다르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으리라. 그럼 나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죽었음을 알겠지.
당장 피를 토하면서도 생생히 살아 있는 눈빛만 봐도 그랬다.
갓 흘러나온 핏물이 동그랗게 고이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붉은 눈. 새하얀 머리 탓에 더 돋보이는 그 눈은 엄연한 '죽음'을 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여봤고, 수없이 많은 죽음을 봐왔기에 할 수 있는 눈이다. 어찌 감히 얕볼 수 있을까.
애써 밀려오는 두려움과 경외심을 억누르고 벤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예상하셨겠지만, 후유증입니다."
예상했다는 듯 마왕님의 얼굴에 체념이 스친다. 그 역시 씁쓸함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데몬 님만큼은 달랐다.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표정. 아니, 저건 분명 질린다는 표정이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미 질리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별말을 다 한다는 듯, 그분은 마왕님께 받은 손수건을 입가에 대며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체념, 혹은 해탈에 가까운 태도에 벤은 물론이고 마왕조차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리도 의연할 수가.'
다른 군단장들이었다면 분명 난리가 났어도 한참 전에 났으리라.
검을 빼 들든, 주먹을 휘두르든, 조용히 앉아 협박을 하든. 살기를 띤 눈을 형형히 빛내며 어떻게든 고치라고 했을 것이다.
그게 네가 할 일이 아니냐고.
그게 바로 네 존재의 이유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답답함이나 분노가 아닌 안도에 가까운 한숨.
무의식중에 벤은 0군단장의 주치의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곧바로 상념을 털어내고, 감정마저 갈무리한 뒤 빠르게 왕진 가방을 뒤졌다.
"언제나처럼 내상에 도움이 되는 약입니다. 이런 것밖에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데몬 님이 약병을 받고, 먹는 것까지 확인한 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할 일도 끝냈겠다, 이젠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왔다.
막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너, 나 좀 보자'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계시던 마왕님. 무시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왕을 마주했다.
딱히 불만은 없다. 억울하지도 않다. 환자의 이상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니까.
아마 데몬 님 역시 분노, 아니 분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계시리라.
그렇기에 일단 마왕님의 분노를 받고, 이후 살아 있다면 데몬 님의 분노까지 감내할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가장 크게 화를 내야 할 데몬 님께서 나섰다.
...어째서?
***
마왕이 주치의를 족치려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벤의 손목을 잡았다.
깜짝 놀랐는지 벤이 커진 눈으로 나를 본다. 마찬가지로 의외였던지 마왕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놀랐냐? 나도 놀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이대로 주치의를 족치면 그 원망이 모두 나를 향할 것 아닌가. 제아무리 평소 온건한 성격의 벤이라 하더라도, 제 잘못도 아닌 것으로 갈굼을 받으면 당연히 열 받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늦는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막아야 한다!
그런 각오로 나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는 마왕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물론 제 주치의도 함께요. 아쉽지만 사직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야겠군요."
"어, 응? 사, 사직…? 아니, 일단 알았어. 얼른 가서 쉬어."
사직서 이야기만큼은 하기 싫은 건지, 역시나 얼렁뚱땅 넘어간다.
다음번엔 꼭 이야기하리라! 일단 오늘은 타이밍이 안 좋으니 속으로 다짐하며 성큼성큼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걸음을 멈췄을 때, 우리는 제법 긴 복도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복도가 한두 개인 것도 아니니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슬쩍 창밖을 내다봤다.
해가 없는 마계답게 복도 창밖으로 밤의 베일이 내려앉은 정원이 보인다. 해가 없는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세 개의 달이 정원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풍경이 제법 멋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저길 보라. 무슨 꽃이 이빨을 가지고 있는지. 식인 식물이랬나? 심지어 그 옆의 식물은 눈알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깜빡거려!
징그러움에 몸서리치는데, 옆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데몬 님…."
"음? ...아."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손목을 잡고 있었네. 정신이 없어서 자각도 못 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손을 놓고 슬쩍 벤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기분이 상한 건 아니겠지?
다행히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눈에 들어온 것은 나만큼이나 희게 질린 안색.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 아프기라도 합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의 얼굴에 체념이란 감정이 떠오른다.
정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듬뿍 담아 바라보니 그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벤은 창백한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뭔가 각오한 듯 입술을 한 번 꽉 깨물고는 허리를 푹 숙였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시길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어?"
순간 표정 관리조차 잊고 말았다. 아마 지금쯤 내 얼굴에는 황당함이라는 감정이 노골적으로 떠올랐을 테지. 얼빠진 목소리는 덤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다. 미동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내 목소리 역시 듣지 못한 것 같고.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차마 대놓고 그게 무슨 개소리냐 물을 수는 없으니 조금 말을 바꿔서….
"그게 무슨 뜻이죠?"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껏 친절하게 물었더니만 오히려 기겁한다.
얘 진짜 어디 아픈가? 사람이 자기 머리는 못 깎는다더니, 주치의란 놈이 아프면 어쩌자는 거야?
심지어 그 주치의가 내 주치의다.
자칫 환자에게 내 몸을 맡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함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죽입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안 죽인다. 아니, 못 죽인다.
마족을 죽일 정도의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군단장 역할을 내팽개치고 탈출했겠지, 내가 왜 이곳에서 가슴 졸이며 살겠어?
새삼 깨닫게 되는 처량한 신세에 한숨만 나온다.
나는 울적한 마음을 안고 얼빠진 벤을 뒤로한 채 터덜터덜 내 방으로 향했다.
***
보기와는 다르게 모든 군단장을 통틀어 데몬 님이 가장 너그럽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설마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도 못한 이까지 감싸실 줄이야.
아니, 저분은 애초에 내가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인간 출신이어서 그런가, 마족들과는 생각부터가 달라 통 그분의 기준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대뜸 고통 없이 죽여달라 했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우셨을까. 오죽하면 평소 존댓말을 쓰시는 분께서 '뭐?' 하고 반말을 내뱉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런 착각을 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른 군단장들. 그분들이었더라면 나를 구했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분이 풀려서'였을 테니까.
아무튼 거기서 눈치 빠르게 말을 멈췄더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난 눈치 없이 내 말에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줄로만 알고 용서를 빌기까지 했다. 그분께 부담을 씌운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쳐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데몬 님은 손을 올리는 대신 희미한 한숨과 함께 말씀하셨다.
[안 죽입니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이건 너그러워도 너무 너그러운 것 아닌가.
평소에도 저분의 주치의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지만, 오늘만큼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 한 병 들고 공식 군단장 전용 주치의, 세터를 찾아가야겠다.
평소 성질 나쁜 군단장들을 상대해야 하는 그가 부러움에 뒷목 잡는 장면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만.
'두 번 다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피를 뚝뚝 흘리고 있던 제 담당 환자, 데몬 아루트의 안타까운 모습을 떠올리며 벤이 눈을 미세하게 빛냈다.
3. 0군단장 데온 하르트(1)
"서류 작업은 싫습니다!"
처음 마왕에게 영입 제안을 들었을 당시 내뱉은 말이었다. 덕분에 비공식적인 지위인 제0군단장을 맡음으로써 나는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딱히 불만은 없다. 다른 군단장들이 서류 더미에 파묻혀 끙끙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그런 말을 했던 나 자신이 기특할 지경이니까.
다만 치명적인 단점을 하나 꼽자면….
"심심해!"
너무 심심하다는 것이다! 할 일도 없고, 나가 봤자 마계는 언제나 밤인 데다 정원에는 끔찍한 식물들만 살고 있으니.
그렇다고 마왕을 찾아가는 것은 미친 짓이고, 다른 군단장들을 찾아가는 것 역시 내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셈이며, 내 밑에 있는 놈들은 인간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지 언제나 날 피하는 데다 나 역시 놈들을 통 믿을 수 없으니…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큐브라던가, 퍼즐 같은 아주 건전한….
"때려쳐어어어어!!"
촤르르르.
수천 개의 퍼즐 조각들이 하늘을 날았다. 나는 씩씩거리며 방 안을 둘러봤다. 깔끔하게 맞춰진 대형 퍼즐들이 액자에 끼워져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심심풀이로 50개, 60개짜리를 맞추기 시작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6000개짜리를 맞추고 있었다.
빌어먹을, 팔아도 되겠네. 나란 새끼, 쓸데없이 집중력만 높아서는.
문득 밀려오는 허탈함에 헛웃음만 흘리다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눈에 띄게 움찔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움직임을 모른 척하며 나는 말했다.
"술 가져오세요."
"예?!"
"술이요. 어떤 종류든 상관없습니다. 술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 하지만…."
뭐든 시키면 할 것 같던 필사적인 태도와 달리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머뭇거리며 연신 망설였다.
왜 이런 반응인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보나 마나 벤이 막았겠지.
나는 타고나길 몸이 약하게 태어났다. 이 비정상적인 흰 머리와 붉은 눈,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가 그 증거. 틈만 나면 피를 토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이곳에선 그 원인을 '용사와의 전투 후유증'으로 둘러댈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만,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은 좀 슬프다. 정확히 말하자면 벤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정말 유감이다.
어릴 때인가, 날 진찰했던 의원이 한 말이 있다.
[몸 전체에 고루 퍼져 있어야 할 모든 건강이 간에만 몰리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어지간해서는 쉽게 취하지 않았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몸에 좋지 않은 약을 먹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거고… 아무튼.
그러니 난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뜻이다. 안 죽는다고.
그러니까 술을 내놔. 지금이 딱 술이 필요할 때란 말이야.
0군단장씩이나 되어 가지고 할 일 없이 방 안에서 퍼즐이나 맞추고 있는 내 꼴을 자각하니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못 버티겠다.
빨리 가져오라는 뜻을 담아 빤히 쳐다보니 시종이 흠칫 어깨를 떨고는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나갔다.
...잠깐, 대답은?!
"설마 안 가져오는 건 아니겠지."
그래, 도망갔다던가 어디 다른 곳으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러 간 건 아닐 거야.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어째서인지 밀려오는 불길함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길한 느낌은 적중했다. 대답도 없이 도망치듯 사라진 시종이 돌아온 것이다.
─무려 마왕을 데리고.
이 배신자 새끼.
"술이 먹고 싶다고?"
원망을 가득 담아 시종을 노려보다가 들려오는 마왕의 목소리에 재빨리 눈을 깔았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제 잔소리가 날아오겠지.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반쯤 체념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그렇게 몸이 근질거렸어?"
"…네?"
"요즘 전투가 없어서 네가 심심할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내가 널 너무 무르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사과하지."
아, 아아아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난 그냥 술이 마시고 싶었을 뿐인데, 의식의 흐름이 왜 그런 방향으로…?
"정 원한다면 작은 전투나마 참여시켜줄 수도 있는데. 요즘 전방에 나가 있는 9군단장이 지루하다고 난리더군. 네가 간다면 전황이 바뀔 것 같은데, 어때? 거기라도 가는 것은?"
9군단장이 나가 있는 곳이라면….
'최전방이잖아.'
제국과 맞닿아 있는 만큼 크고 작은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 그런 곳에 날 보내겠다고?
아, 알겠다. 어차피 술을 마셔도 죽을 만큼 약한 몸뚱이, 조금이라도 쓸모 있게 전쟁터에서 고기 방패로나마 쓰이다 죽으라는 건가.
나 참. 더럽고 치사해서. 아, 안 먹으면 되잖아.
"괜찮습니다."
절대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더러워서 이러는 거다.
"뭐, 좋은 판단이야. 가봤자 네가 만족할 만큼의 피는 보지 못할 테니."
이젠 말도 안 나온다. 아, 정정한다. 무서워서 얼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술 좀 마시려 했다고 이렇게까지 협박하는 것은 너무하잖아.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이런 내 감정이 들통나기라도 할까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마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튼 술은 안 돼. 마왕성을 뒤엎을 일 있어? 정 심심하다면 네 군단을 돌아보든가, 정원이라도 돌아보도록 해. 히엔이 이번에 새로운 꽃을 들였다고 좋아하던데 말이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 미친놈이?
마족인 것은 당연하니 생략하고, 히엔은 정원사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그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뭐에 미쳤냐고?
징그럽고 위험한 식인 식물에!
처음에는 마왕성에 정원사가 있다는 것이 영 어울리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었는데, 놈과 함께 정원을 돌아보고 나서 아주 처절하게 납득했다.
[이런 놈이니까 마왕성에서 일하지!! 평화로운 직업이라 나름 믿었는데! 내가! 다시는! 마족 따위 믿나 봐라!!]
몸으로 겪고 뼈에 새긴 값진 경험이다. 함부로 무시할 수 없기에 난 진지한 표정으로 마왕을 쳐다봤다.
"군단을 돌아보겠습니다."
군단원들도 위험하긴 하다만, 그 미친 정원사보다는 확실히 나을 테니까.
...라고 생각해 제0군단의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던 게 불과 5분 전이었건만.
"어, 데몬 님!"
"...히엔."
파리해진 안색을 감추기 위해 급히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유려한 인상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까, 깜짝이야!
"피곤하세요?"
"뭐, 조금…."
"그럴 땐 꽃향기를 맡는 게 제격이죠. 제가 이번에 새 꽃을 들였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특별히 데몬 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는 거랍니다."
악마다. 악마가 눈가를 사르르 접은 채 웃고 있었다.
보통은 넋을 놓고 볼 외모이건만, 나는 그저 도망칠 방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데 열중했다. 그의 외모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 저 외모에 넘어가지 않냐고? 그야 남자잖아.
서큐버스라면 몰라도, 인큐버스인데 넘어갈 리가 있나. 내가 요즘 이곳에서 미쳐가고 있다지만 성 정체성마저 흔들릴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은근 고단수인데? 인큐버스라 그런가, 선택지를 한 가지로 줄여버리는 데 재능이 있다.
피곤하세요?
A 루트: 피곤하다 > 그럴 땐 꽃향기가 최고!
B 루트: 피곤하지 않다 > 그렇다면 이번에 제가 들인 꽃을 한번 보고 가시는 게….
평소였다면 그의 말에 얼렁뚱땅 넘어가 그 끔찍한 정원을 돌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훌륭한 핑계가 있다.
"지금 막 제 군단원들을 살펴보러 가던 중이라 곤란합니다."
"아… 혹시 미룰 수는…없겠죠?"
"...."
끈질겨라.
미루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0군단원들도 딱히 날 찾지도 않고, 찾아가 봤자 가까이 오거나 말을 붙이는 대신 두 눈에 불을 켜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만 있으니.
사실상 그곳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는 구석에 처박혀서 적당히 검이나 만지다가 자리를 피해 주는 것밖에 없다.
아, 여기서 검을 만진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만지기만 하는 거다. 괜히 똥폼 잡고 검 한 번 휘둘렀다가 내 실력이 뽀록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아무튼 그래서 미루는 건 가능하지만, 그래도 싫다. 애초에 0군단 전용 연무장으로 향하려던 이유가 바로 이놈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
"...."
문득 나는 적막이 생각보다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이 너무 길어진 나머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다.
길어진 침묵에 심기가 상한 건 아닐지 슬쩍 눈동자를 굴려 히엔을 쳐다봤다. 때마침 그도 이쪽을 살피고 있었는지 하필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히엔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평소의 은은한 미소도 지워버린 채 허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이쯤 되면 마족이라는 종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이참에 한번 제대로 논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자, 오늘의 논제.
갑자기 사과하는 것은 마족들 특성인가?
'얜 또 왜 이래?'
***
히엔은 인큐버스다. 천박하다고 무시당하는 바로 그 인큐버스.
마왕성의 정원사로 들어간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 온갖 위험하다는 식물을 수집하고 키우는 것이 취미인데, 마침 희귀한 식인 식물을 구해 들고 길거리를 가로질러 오다가 마실 나온 마왕님의 눈에 띄어 정원사로 영입되었으니까.
그런 자신을 군단장씩이나 되는 높으신 분들께서 제대로 대우해 줄 리가 없었다.
당장 시종들부터가 눈이 마주치면 침을 뱉고 욕을 읊조리는 정도인데, 감히 군단장의 눈에 찰 리가. 괴롭히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지. 실제로 발로 걷어차는 둥, 괴롭히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그분들을 상대로 일개 인큐버스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참는 수밖에.
그날도 폭언과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던 날이었다.
"인큐버스 따위가…."
공들여 가꾸어놓았던 정원을 온몸으로 깔아뭉개며 나뒹군 히엔이 곧바로 일어나는 대신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소중한 식물들이 망가진 것은 뼈아프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상황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불쾌한 기색의 10군단장.
자신이 가는 길 앞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히엔을 날려버린 그가 잔뜩 인상을 쓴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심란해 미치겠는데, 별게 다…."
히엔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10군단장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자다. 1군단장이나 3군단장을 상대할 때처럼 벌떡 일어나면 도리어 그것을 도발로 받아들일 것이다.
때문에 아파서 못 일어나는 척, 바들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아…."
"음?"
낯설디낯선, 마왕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작은 목소리가 앓듯이 들려왔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종이 우연히 이 장면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니까.
문제는 10군단장의 반응이었다.
"헉…!"
반사적으로 히엔의 고개가 올라갔다.
잘못 들었나? 잘못 들었다고 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도 노골적이다.
경악에 가까운 표정. 얼핏 두려움과 경외심마저 내비치는 듯한 표정에 히엔은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한 '인간'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약해 보이는 마른 체형. 이질적인 흰 머리와 붉은 눈동자. 더해서 창백한 피부까지. 아마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력이 아니었다면 인간인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폭풍과도 같은 소문이 마왕성을 휘돌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였더라, 아마 용사와의 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마왕님이 아닌 다른 분이 용사를 죽였다더라.]
[그 자리에서 마왕님이 바로 영입을 시도하셨다더라.]
[심지어 인간이라더라.]
'그 사람이다.'
헛소문일 거라 믿고 있던 그 소문의 주인공. 그게 바로 저 사람이라고,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그에 쐐기를 박는 것은 10군단장의 말과 행동이었다.
"여기엔… 어쩐 일로…."
"정원사가 있다길래 좀 만나보러 왔습니다만…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춘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무려 군단장씩이나 되는 이가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렇다는 것은 저 인간이 그보다 더 강하거나,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그가 0군단장의 자리를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손사래를 치던 10군단장이 편히 대화 나누시라며 급히 물러가고, 그가 멈췄던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지. 무슨 목적인지 궁금하긴 하다만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야, 난 인큐버스니까.'
심지어 상대는 무려 0군단장이다. 그가 내게 잘 대해 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분명 그리 생각했었다.
4. 0군단장 데온 하르트(2)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원사라고 들었습니다. 마왕성의 거의 모든 식물들을 가꾸고 있다면서요?"
호의 가득한, 친절한 목소리. 히엔은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감히 고개를 들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 말도 안 되는 확률이 실제로 일어났다.
0군단장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친절함을 보였고,
"마왕성이 상당히 넓던데, 대단합니다."
히엔은 그런 그에게 무언가 동해 버렸다.
마왕님께 인정받아 무려 0군단장이라는 지위를 받은 존재다. 그만큼 오만해도 뭐라 할 자가 없을 터.
그럼에도 그는 경어를 사용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강자의 여유… 같은 건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을수록 제 실력을 부풀리고 목소리를 높여 어떻게든 상대를 깔아뭉개려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0군단장은 최소한 저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 있었다.
그것들이 그의 존재감을 드높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왕성의 식물은 어떨지 궁금한데,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한낱 인큐버스를 인정하는 것도 모자라, 명령하면 될 일을 안내를 부탁하기까지 한다.
거기서 히엔은 멍하니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웃었다.
[그분의 이름이 뭐라고?]
[뭐랬더라, 어렴풋이 들어서 희미했는데….]
"데몬. 데몬 아루트."
마족보다도 더 마족 같은 이름.
그날, 히엔은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 후로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감히 친해지길 바란 건 아니다. 그저 방 안에만 계시는 그분의 건강이 염려되어 정원이라도 산책하길 바라며 열심히 말을 걸었을 뿐.
역시 데몬 님께서는 다른 군단장들과 달리 내 말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폭력이나 폭언도 없었다.
그분께서는 딱딱한 무표정으로나마 꾸준히 대답하며 자주 정원을 거닐곤 하셨다.
그것도 모자라 쫓아내거나 최소한 혼자 있고 싶다며 밀어내도 되는 나를 굳이 배려해 산책할 때면 언제나 옆에서 같이 거닐게 하셨으니.
그래서 기고만장해진 모양이다.
감히 인큐버스 따위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오늘,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
난 아직도 그 날의 일을 후회한다.
처음엔 그저 우연히 마왕성에 들어가기 전, 멀리서 정원을 보았고, 그에 대해 마왕과 대화를 하다가 정원사의 존재를 알게 된 것뿐이었다.
거기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몰랐던 난 기뻐했다. 정원사라니. 그런 건전한 직업이 마왕성에도 있을 줄이야.
피에 미친 마족들만 득실득실한 이곳에 오아시스 같은 정상적인 이가 있다니. 나는 모든 필요한 절차를 마치기 무섭게 그부터 찾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유려한 인상의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원사라고 들었습니다. 마왕성의 거의 모든 식물들을 가꾸고 있다면서요?"
이곳은 마족들의 소굴. 아무리 하찮아 보일지라도 나보다는 강할 테니 존댓말은 기본이다.
괜히 신경을 거슬렀다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하면 난 그날로 골로 간다. 그런 식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마왕성이 상당히 넓던데, 대단합니다."
그래도 극존칭은 곤란하다. 얕보이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길 테니까. 어느 정도 존중해 주고 있다는 티만 내면 되겠지. 물론 기분이 상할까 봐 적당히 아부성 칭찬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큼, 그건 그렇고 반가운 마음에 자꾸만 말이 빨라지려고 한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춘 뒤, 태연한 척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마왕성의 식물은 어떨지 궁금한데,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잠시 멍한 표정이던 그의 얼굴에 꽃이 피어나듯 화사한 미소가 퍼져나간다.
그는 기꺼이 그리하겠다 했고,
─그리고 지옥을 보았다.
마족은 그래 봤자 마족이다!
내 인생 철학에 새겨진 뼈아픈 명언이다.
그날 이후, 히엔은 마주칠 때마다 내게 정원 산책을 권유해 왔다. 거절했다간 그 무시무시한 식물로 어떤 해코지를 해올지 모르니 차마 거절하지도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정원을 거닐었던 것 같다.
물론 산책을 권유한 당사자인 히엔은 반드시 옆에 뒀다.
이 녀석이 없는 사이에 저 끔찍한 식물들이 날 먹으려 들면 어떡하라고. 나 혼자서만 죽을 수는 없지! 죽더라도 같이 죽자! 뭐, 대충 이런 심보였는데.
...어째서인지 날이 갈수록 녀석이 점점 더 친근하게 구는 것 같다.
***
나는 연신 사과하는 히엔을 곤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얘는 또 왜 사과를 하는지.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전의 상황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사과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아무 일도.
'정말 아무 일도 없었지.'
나도 침묵했고, 이 녀석도 침묵했다. 그 침묵이 조금 길어진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고, 대뜸 사과를….
'...설마.'
내가 이렇게 허리 숙여 사과할 테니 다소 시간을 소모하더라도 같이 정원을 걷자는 뜻인가!
이러면 거절하기 곤란하잖아?
이 자식. 은근 고단수다 했더니만, 이제 보니 대놓고 고단수였네.
뭐, 좋다. 매번 잘도 살아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별문제만 없다면 충분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 터.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시선을 내려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히엔을 봤다.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고개 드시죠."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여전히 굳어 있는 표정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갈게, 간다고. 갈 테니까 표정 좀 풀어.
"그래서, 이번에 새로 들인 꽃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
대답이 모자랐나.
보란 듯이 정원을 향해 발을 뗐다. 얼떨결에 뒤따르는 그에게, 난 확신을 주듯 또박또박 말했다.
"꽃 보고 가라면서요. 안내 안 할 겁니까?"
"아, 아아! 하겠습니다!"
히엔이 허둥지둥 횃불을 찾는다.
밤에 익숙한 마족과 달리 인간인 나는 식물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 횃불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해서 굳이 자세히 관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만, 저 악마 새끼는 언제나 내게 자세히 관찰해 볼 것을 요구했다.
직접 그리 말했냐고? 물론 아니! 하지만 '무언의 압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식물에 대해 신나게 설명하고 난 후, 저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날 빤히 쳐다보는데, 어찌 살펴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이제 저를 따라오세요!"
그새 기운을 회복한 건지 횃불을 든 히엔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활짝 웃는다.
회복이 빠르네, 그래서 아까 왜 사과했던 걸까 따위의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며 무심결에 그를 따라 발을 옮기려던 나는 잠시 멈칫하고 아무것도 없는 빈 두 손을 내려다봤다.
히엔에게서 횃불을 넘겨받아 단단히 쥐고 그의 안내에 따라 서쪽 정원에 발을 들였다.
역시 언제 봐도 비정상적이고, 징그럽고, 무섭다.
복도에서 내려다봤던 눈알 달린 식물이 날 쳐다볼 때의 그 소름이란….
시야에서 빨리 벗어나려 걸음을 빨리했더니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가며 나를 응시하기도 했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하마터면 횃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저, 데몬 님."
"네?"
"횃불은 제게…."
"괜찮습니다."
어허, 어디서 내 무기를 갈취하려고. 슬그머니 횃불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식인 식물이네 뭐네 하지만 결국 이놈들은 전부 '식물'이다. 사람을 잡아먹든 말든 일단 불로 지져버리면 쪽을 못 쓴다는 것.
그러니까 이곳에선 이게 바로 내 무기이며 생명줄인 셈이다. 그걸 함부로 내맡길 수는 없지.
"그보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슬슬 내 정신도 한계다.
침착한 척하는 데에도 다 정신력이 소모된다. 이러다 정말 선 채로 기절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던 때, 다행스럽게도 히엔이 기대에 부응하듯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거의 다 왔습니다. 바로 저겁니다."
시선이 그의 손끝이 가리킨 곳을 향했다.
"...오…."
입이 벌어지고,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사실 이건 감탄사 따위가 아니다. 억눌린 비명이었다. 거대한 충격에 새하얗게 질려버린 머리가 마지막으로 명령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비명.
'시발 저게 뭐야! 저게 식물이라고?'
미친! 어딜 봐서 저게 식물이야?
틀렸어. 여긴 정상이 아니야. 당장 여기에서 벗어나야….
"데몬 님?"
"...아."
주춤 물러서려던 걸음을 간신히 멈췄다.
원래 얼굴이 창백해서 더 희게 질려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 혈색이 정상이었다면 분명 새하얗게 질린 것이 도드라졌을 테니까.
이런 내 반응은 당연했다.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이었어도 나와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저건 식물이 아니다! 동물(動物)이지!
마치 발이 땅에 박혀버린 사람이 빠져나오기 위해 악을 쓴다면 저런 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식물은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키에에에!"
...정정한다. 발광하고 있었다.
"무슨 식물이 소리를 질러?!"
아차, 나도 모르게 반말이!
분노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히엔은 말투보다는 내용에 신경을 기울였다.
"식인 식물이라 그래요. 너무 하찮아서 데몬 님께서는 잘 느끼지 못하신 모양이지만, 저래 보여도 저 괴성에는 약한 피어가 담겨 있답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은 듣자마자 얼어붙어서 도망치지도 못할 거예요."
"...."
"그나마 '식인' 식물이라는 게 다행이랄까요. 마족은 먹지 않으니 마왕성의 시종들은 잡아먹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아마 반대일걸. 저 녀석이 하찮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하찮아서 피어를 느끼지 못한 거다.
그리고 잊은 모양인데….
'나 인간이야 이 미친놈아….'
내가 마족이 아니라는 것을 좀 기억해 주겠니? 아니, 그보다 지금 저 녀석, 꽃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저거 침이지? 그런 거지?!
뭐가 그리도 화났는지 뼈도 없는 저 괴물, 아니 식물이 줄기를 마구 흔든다. 낭창낭창 잘도 휘어지는 것이 잘하면 여기까지 닿을 수도 있을 것….
콰앙!
'히익!'
간신히 피했다!
"무슨 사정거리가!"
"하하, 데몬 님께서도 놀라신 모양이네요. 확실히 사정거리가 길긴 하죠? 아마 반경 10m는 커버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열심히 번식시키고 있으니 조만간 마왕성을 완벽하게 커버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럼 난 어떻게 다니라고! 날 죽일 셈이냐?
역시 피를 토하든 말든 그때 사직서를 냈어야 했어.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내야겠다. 이 미친 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든가 해야지. 여긴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저 괴물의 피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뜻밖의 방향으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몇 번이고 망설이며 각오를 다졌을 사안을 지금의 난 거침없이 행하려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가자. 마왕은 지금 어디에 있지?'
몸이라도 튼튼했다면 그걸 믿고 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몸은 일반인 이하. 살기 위해서는 유독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는 내게 마왕성은 그야말로 최악의 환경이다.
때문에 당장 사직서를 제출하러 가려는데, 어째 한쪽 발이 땅에 박힌 듯 안 움직인다.
"데몬 님!"
"...응?"
후웅!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시야가 휙휙 바뀌는가 싶더니 멈췄을 때는 세상이 뒤집혀 있었다.
아, 나 거꾸로 매달린 거구나. 근데 왜?
"...미친!"
눈앞에서 사람 크기만 한 꽃봉오리가 쩌억 벌어지며 징그러운 이빨을 드러낸다. 줄기는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을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그래. 식인 식물의 뱃속을 탐험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강제적으로.
5. 0군단장 데온 하르트(3)
기특하게도 내 손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생명줄을 꼭 쥐고 있었다.
내 손에 꼭 쥐어진 채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횃불. 그 존재를 자각하기가 무섭게,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나는 그것을 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줄기를 향해 휘둘렀다.
"키에에에에엑!"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과 함께 발목에서 줄기가 떨어져 나간다.
좋아! 역시 횃불을 직접 들고 있길 잘했어! 설마하니 정말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왜 등 뒤가 시원하지?'
저 징그러운 꽃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아니, 멀어지는 건 좋은데, 뭔가….
'잠깐만! 떨어지잖아!!'
여기 높이가 얼마였더라. 반경 10m는 커버하는 놈이니 역시 10m 가까이 되지 않을까.
"...하하, 시발."
사람 살려어어어어!!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경악하고 있는 와중에도, 전쟁터에서 구를 대로 구른 몸은 착실히 낙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질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 목이 부러지는 것보단 나을 테지.
마음속으로 단단히 각오하고 타이밍에 맞춰 낙법을 시도하려는데, 누군가 내 몸을 낚아챘다.
"데, 데데데데몬 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다치신 곳은 없픅, 없으시고요?"
놀라야 할 사람은 난데, 네가 왜 말을 더듬니. 얼씨구, 심지어 혀까지 씹으셨어요?
당장이라도 모든 일의 원흉인 이 자식을 저 식인 식물의 주둥아리에 밀어 넣고 싶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상대가 나보다 강해서가 아니다. 나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팔의 감촉에 고개를 들어 히엔을 봤다.
'...잡아줬으니 이번만 봐준다.'
그 높은 데에서 떨어졌는데 무리 없이 받아내다니. 내가 아무리 가벼운 편이라 해도 결국 일반적인 성인 몸무게 범위 내인데, 역시 마족은 마족이구나.
"데몬 님?"
"...괜찮…습니다."
슬그머니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생존본능에 의거한 거부를 내려오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히엔이 조심스럽게 나를 바닥에 내려준다.
바닥에 내려서자 세상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흔들리는 골이 제자리를 잡도록 잠시 눈을 감고 서 있던 나는 이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히엔을 돌아봤다. 그리고….
"...."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히엔의 등 뒤로, 달빛의 은색과 밤의 검은색이 어우러졌어야 할 배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달군다.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더워서가 아니라….
'이거… 나 때문이지?'
떨어질 때 놓쳐버린 내 생명줄, 횃불 때문에 정원이 불타고 있었으니까.
***
난 오늘 죽을 것이다.
'아니, 분명 죽는다.'
피부에 와닿는 뜨거운 열기에 히엔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가꾸던 식물이 데몬 님을 잡아먹으려 했다. 물론 데몬 님께서 고작 식물 따위에 당할 리는 없으니, 저 식물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보잘것없는 공격에 부러 당해 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저 식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아니, 이 정원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불태울 명분을 찾고 계셨던 것이다.
어쩌면 히엔 그 자체가 마음에 안 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식물의 잘못은 곧 정원사의 잘못.
데몬 님의 속셈이야 어쨌건 결국 먼저 공격한 쪽은 저가 가꾸던 식물이고, 데몬 님은 공격을 당해 반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그로써 자신은 정원이 불탄 것에 대해 그를 탓할 수 없게 되었을뿐더러, 되레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 놓였다.
애당초 데몬 님께 불타버린 정원의 책임을 물을 생각 따위, 선택지에 올리지도 않았지만.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건 내 잘못이겠지.'
평소엔 상당히 너그러우신 분이다. 그분의 담당 주치의인 벤이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닌 것만 들어도 그랬다.
그러니 화가 났다면 필시 이쪽에서 뭔가 심기를 거스른 것이리라.
각오를 했다지만 그래도 죽음은 두렵다. 하얗게 질렸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매만지고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데몬 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뒷모습이어서일까, 표정을 알 수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평소의 데몬 님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른 것 같다.
'아니, 아니지. 지금은 분위기를 살필 때가 아니야.'
납작 엎드려야 할 때다.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정원을 집어삼키는 불길만 바라보는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뒤꿈치를 보이던 그의 발이 서서히 돌아선다.
히엔은 자신을 향한 상대의 신발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이야, 활활 잘도 탄다.
영주의 과도한 세금을 피해 도망친 화전민들이 산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불을 지른다던 게 이런 모습일까.
문제는 여긴 산이 아니라 마왕성이고, 농사를 지을 일도 없다는 것이지만.
'어떡하지…?'
잘 타도 너무 잘 탄다.
날 공격했던 괘씸한 식인 식물은 이미 불길에 완전히 잡아먹혀 더 이상 그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지 않았고, 주위에 있던 다른 징그러운 식물들도 소리 소문 없이 불 속으로 사라졌다.
벌써 이곳, 서쪽 정원의 반을 집어삼키고도 불은 아직 모자란다는 듯 남은 식물을 잡아먹을 기세로 탐욕스럽게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필시 히엔의 시선일 터.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부러 반쯤 넋을 놓고 붉게 물든 정원만 바라봤다.
아, 그래. 부정할 생각 없다. 이건 현실 도피다.
여긴 마왕성의 정원이고 정원사는 당연히 마족이다. 마족이란 말이다.
'누가 이 불 좀 꺼봐. 아무나 좋으니까 제발.'
하다못해 비라도 오길 바라며 속으로나마 기우제를 지내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분명 이 상황은 내가 사과해야 할 상황인데, 왜 저놈이 사과하는지.
귀는 제대로 들었다고 주장하고, 머리는 잘못 들었을 거라 주장하고 있어 잔뜩 망설이면서도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천천히 돌아섰다.
다행스럽게도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분노한 표정의 히엔이 아닌, 허리를 숙이고 있는 히엔.
반쯤 안도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침묵하고 있자니, 그가 알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저 식물이, 아니, 이 정원이 마음에 안 드신 줄은 몰랐습니다."
"...."
"아니면 혹시, 제게 화가 나신 건지…."
"아니, 그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양심 없는 사람으로 보이나? 슬쩍 얼굴을 매만지고는 다시 히엔을 쳐다봤다.
아무튼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내가 저 식인 식물이나 이 정원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불을 지른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그런데도 화를 내긴커녕 사과를 한 거고.
"미친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이제 보니 이 새끼 호구였네.
어찌 됐든 상황을 보니 그가 이걸로 내게 화를 낼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로서도 멍청하게 실수로 횃불을 놓친 것보단 이쪽이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고.
그렇다면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정원이 썩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싫다. 완전 싫어. 징그러워!
하지만 마왕성의 정원사에게 장미나 백합 같은 인간계의 평범한 꽃을 키우라고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나. 내가 참아야지.
"그럼…."
"그, 조금 전 보여준 그 식물을 키우는 것만 좀 자제해 줬으면 합니다만."
"아, 네! 알겠습니다. 종자는 싹 다 갖다 버리겠습니다."
버릴 것까지야. 네 집에서 네 마음대로 키우는 것까진 관여할 생각 없는데.
아무튼 어찌어찌 잘 해결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데, 결연한 표정을 한 히엔의 등 뒤로 웬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가 봐도 사람, 아니 마족의 형체. 누구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쳐다보는 순간, 그림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이게 웬 불이야?"
히엔의 몸이 바짝 굳었다. 티는 나지 않았지만, 나도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목소리는 분명….
"누가 낸 거지? 일부러 낸 건가?"
역대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마계의 유일무이한 왕, 통칭 마왕의 것이었으니까.
"마, 마왕님께서 여기엔 어쩐 일로…."
"그럼, 내 성에 불이 났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히엔의 의문을 단번에 잘라버린 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스르륵 굴러간 그의 역안이 불길을 한 번 보더니 유독 섬뜩한 빛을 내며 히엔과 나를 시야에 담는다.
히엔을 보았을 때만 해도 무기질적이었던 그의 눈이 나를 보기가 무섭게 이채를 띠었다.
"왜 불이 났는데도 아무도 안 끄나 했더니…."
그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명백히, 나를 향해.
아, 이거 그거죠?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다, 같은.
역시나 예상대로 마왕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주위에 다른 이들이 있어서인지 본명이 아닌 마계에 알려진 이름으로.
"네가 있었구나, 데몬."
동시에 손을 휘젓자 주위에 자욱했던 연기가 후욱 밀려 저 멀리 사라진다. 그제야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주위에 잔뜩 깔려 있는 마족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곤란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진작 왔으면 빨리 불이나 끌 것이지 왜 저기 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덕분에 마왕까지 와버렸잖아.
"그래서, 뭐가 마음에 안 든거지?"
"...?"
"저 정원사한테 화가 난 건가, 아니면 정원이 마음에 안 든 건가? 원한다면 저놈을 죽여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줄까?"
아니 잠시만요. 저 정원사, 댁이 직접 데려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무슨 죽인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눈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 당황해 히엔을 돌아봤으나, 애원이든 뭐든 열심히 자기변호를 해야 할 그마저도 어떤 결정이든 받아들이겠다는 듯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마왕이 히엔을 죽일 것만 같아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정원사에게 화가 난 것도, 정원이 싫은 것도 아닙니다."
"그럼 왜? ...아니 그 전에. 그럼 저 불, 꺼도 되는 거야?"
"네? 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마법을 시전한다.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 거대한 물방울들이 생성되어 일제히 쏟아진다. 한두 명이었으면 모를까, 저 많은 이들이 이러고 있으니 불이 꺼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뭐야, 빠릿하게 잘할 수 있었으면서 왜….
"그럼 왜 정원에 불을 지른 거야?"
여기서 난 잠시 멈칫했다.
일단 히엔의 오해를 내 입으로 말해 괜한 이들의 눈 밖에 나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고작 식물 하나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식물 하나에 쩔쩔맬 정도로 약하다니, 지금까지 날 속였다 이거지? 죽어라!'라고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겨우 그것 때문에 내 정원을 태워?' 하면서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왕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데,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도 히엔이 불쑥 끼어들어 대신 설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이번에 들인 식물이 데몬 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신 데몬 님이 불을 지르셨고요."
"...."
이야. 이 새끼 스파이였네. 누가 보냈냐? 혁명군? 아님 제국의 귀족파가 보냈든?
이걸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데, 아직 말이 끝난 것이 아니었는지 잠깐의 틈을 두고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잘못입니다.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습니다."
식물에게 교육이란 단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하긴, 조금 전 그 모습을 생각하면 그건 식물보다는 동물에 가까웠으니.
"컥."
순간 짧은 신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퍼뜩 고개를 들자 시야에 비친 것은 한 손으로 히엔의 목을 움켜쥔 채 들어 올리고 있는 마왕과… 단절된 호흡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히엔이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유야무야 잘 끝낼 수 있었는데 왜….'
공기부터가 다르다. 무겁고 심각하다 못해 사람 하나 충분히 눌러 터뜨리고도 남을 지경이다.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리는 사이, 히엔의 목을 쥔 마왕이 고개만 돌려 이쪽을 본다. 분명 히엔을 볼 때까지만 해도 험악했던 얼굴이 이쪽을 향하자 유하게 풀어졌다. 아니 분명, 웃고 있었다.
"어떡할까?"
"...네?"
"죽일까?"
6. 0군단장 데온 하르트(4)
점심 메뉴를 묻는 듯 가벼운 어조. 너무도 평이하고 가벼워서 무심코 답할 뻔한 나는 급히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이 이상한지 마왕이 눈썹을 까닥였으나,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내 말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목숨이 달렸다. 마왕성에 들어와서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입을 연 적이 없다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정말이지….
"환장하겠네."
"응?"
"이미 다 끝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린 마왕이 이내 뒷말에 주목했다.
"그럼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그 식물은 키우지 않는 것으로."
"너무 약해."
"네?"
마왕의 얼굴에 불만이 서렸다.
"널 공격했다. 그건 단순히 거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야. 넌 중요한 인재고, 그런 만큼 누구에게도 우습게 보여서는 안 되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네가 방심해서 다쳤으면? 그럼 그동안 평가되던 네 수준이 훅 떨어지는 거야. 절대 이기지 못할 상대에서 잘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상대로. 그런데 그렇게 쉽게 넘어가? 아무리 널 존중한다지만 이건 안 돼. 최소한 사지 정도는 잘라놓아야지."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원사인 히엔의 사지를 잘라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나를 존중한다는 것도 그렇고.
너무 허무맹랑한 말을 들은 나머지 혈압마저 오르는 기분이다.
...코피가 터진 것을 보니 기분 탓이 아니었던 것 같네.
"데몬?!"
당황한 마왕이 히엔을 내던지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졸지에 바닥에 나뒹군 히엔은….
"데몬 님!"
넌 왜. 그냥 누워 있지.
기어코 내게 다가오겠다는 듯, 몸을 한 바퀴 구르는 재주까지 펼치며 벌떡 일어나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땅이 울렁이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빌어먹을 식물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거꾸로 매달리기를 했었지. 머리에 피가 몰릴 만도 했다.
엉망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 하관을 손으로 가리고 비틀, 무너지려는 중심을 잡았다.
약하디약한 피부는 화끈거리고, 불을 직면했던 눈은 시큰거린다. 시야는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식물 줄기에 잡혔던 발목이 뒤늦게 쓰라려 왔다.
와, 이 몸뚱이는 진짜.
"정… 차려!"
"데몬… 제 목소… 들… 세요?"
다른 의미의 신기록 갱신이로군. 제기랄.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가운데에서, 나는 유약한 몸을 원망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핏 눈을 감기 전, 벤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진위 여부를 파악할 시간도 없이 암전이 찾아왔다.
뭐, 착각이었겠지. 그가 지내는 방은 여기서 한참은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알고 왔겠어. 설사 누군가 통신으로 호출했다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할 테고.
***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아주 익숙한 천장이었다. 조금 더 눈을 굴려 벽들을 살펴보자 잘 맞춰진 거대한 퍼즐들이 액자에 끼워져 걸려 있…는 것을 보니 백 퍼센트 내 방이다. 음.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일으키려다 전신에서 밀려오는 은은한 통증에 짧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방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분간 생활하는 데 꽤 불편하실 겁니다."
"...벤?"
"네, 데몬 님."
방 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약을 제조하던 벤이 의자를 드륵 밀고 일어났다.
그는 내게 다가와 눈을 확인하더니,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보란 듯이 내 팔을 잡고 들어 올렸다. 팔에는 하얀 붕대가 손끝까지 꼼꼼히 감겨 있었다.
"보이십니까. 약하지만 전신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
"눈도 불을 오래 봐서인지 조금 상했습니다. 다행히 자가 회복이 가능한 부분이라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영구적으로 손상될 뻔했습니다."
"...어, 음."
"햇빛에 20분 정도만 노출되어도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시는 분께서 왜 불을 지르셨답니까? 화가 나셨으면 그 당사자를 죽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얘가 원래 이렇게 과격했었나…? 좀, 뭐랄까. 온순한 편 아니었어?
그러나 뭐라 말하기에는 분위기가 영 적합하지 않다. 저 눈을 보라. 정원에서 봤던 불길보다 더 이글거리고 있다. 심지어 거기에 담긴 감정은… 분노?!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서둘러 이 화제에서 벗어나는 편이 좋겠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찝찝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그때, 얼핏 들었던 것 같은 벤의 목소리.
"벤. 그때, 제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을 때, 정원에 왔었습니까?"
"예? 새삼스럽게 왜 묻고 그러십니까. 저와 대화까지 나누셨으면서."
"...예?"
***
벤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정신이 나갔던 것이다.
난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마왕을 상대했고, 그 결과 히엔은 사지 멀쩡히 살아남았다.
벤의 말로는, 내가 마왕의 앞에서 당당히 말했단다.
나를 존중한다면, 이번 한 번만 더 존중해 주면 안 되겠냐고.
"정확하겐 '저를 존중한다 하셨습니까'라고 하셨고, 마왕님께서 긍정하시자 '그렇다면 한 번만 더 존중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왕이 '무엇을?'이라고 물었고, 나는 '무엇이겠습니까'라는 건방진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히엔을 가리켰다고 한다.
아, 여기서 건방지다는 표현은 내가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다. 벤이 그런 삿된 말을 했을 리가 없잖은가.
어쨌건 내가 감히 마왕에게 그런 말과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차마 대놓고 좌절하지도 못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살피는 벤을 향해 나는 안면 근육을 푸들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감사합니다. 사실 그때 그 장소에 있던 이들 중에서 그 장면을 잊는 자는 없을 겁니다.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요."
그만큼 강렬했다는 뜻이군. 아, 혼자 있고 싶다. 다 꺼졌으면.
나는 조용히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다니. 확실히 할 수만 있다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마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잊고 싶어 했을 터. 그러니 기억이 끊긴 것도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아, 더는 생각하기 싫다. 그냥 이에 대한 일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싫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왕성에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의 수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더는 누구도 이번 일에 관련한 말을 해오지 않으리라.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으음."
나는 침대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은 채 미간을 있는 힘껏 좁혔다.
이 모습을 보고도 내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눈치라는 것 자체가 없는 놈일 것이다.
지금 난 심기가 아주 불편하다. 누가 말을 건다면 마족이고 뭐고 사력을 다해 째려볼 정도로.
내가 왜 기분이 이렇냐 하면, 전에 말했던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 지극히 한정적인 수의 그들이 하나같이 정원에서의 일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전부!
[네 말대로 널 존중해 살려두기로 했다.]
병문안을 왔던 눈치 없는 마왕도.
[데몬 님, 그때의 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원래부터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었던 정원사 히엔 녀석도.
심지어는 매일같이 들러서 상처를 봐주는 주치의 벤까지 틈만 나면 정원에서의 일을 언급했다.
[아마 많은 이들이 감명받았을 겁니다. 고작 정원사 하나 살리겠다고 마왕님을 막아서셨으니.]
너네 짰냐?!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눈치 없을 수가 있어? 마족 특성인가?
"으으음."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도 옆에서는 벤이 붕대를 갈아주고 있었다.
뭐, 여기까지만 생각하도록 할까. 그래도 요즘은 덜한 것 같고.
내가 미간을 좁힐 때마다 벤이 손끝을 움찔거리는데, 정원에서의 일 이후 막 깨어났을 때 나를 혼내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간 건지 정말 의문이다.
그나저나 말로만 전신화상이라는 줄 알았는데 정말 전신에 약한 화상을 입었다. 불 속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고작 그 열기에 잠시 노출된 것뿐인데 화상이라니, 수치스럽다.
이 기억도 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니, 상처 때문에 잊는 것은 무리이니 차라리 기억 왜곡이 돼서 불에 직접 닿은 걸로 기억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차라리 덜 수치스러울 텐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수치스러움을 몰아내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도중, 문득 이전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벤."
"네."
"벤이 머무는 방 하고 서쪽 정원은 거리가 상당하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내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던 겁니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마왕에게 사직서를 냈던 그 날 이후, 내 몸 상태가 이상하거나 상처가 났다 싶으면 벤은 귀신같이 알고 금세 찾아왔다.
당시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이번에 정원에 나타났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착각은 아닌 것 같고.
노골적인 의심을 담아 벤을 쳐다봤다. 그런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벤이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벗어 내밀었다.
"이것 덕분입니다."
기묘한 빛을 내뿜는 동전 크기의 돌멩이가 꿰인 목걸이였다.
얼핏 보면 단순히 투박한 목걸이의 장식 같지만 그저 보석이라 치부하기엔 묘하게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분명 기억에 있는 모습인데.
…아.
"마력석?"
"네, 여기에 데몬 님의 피 몇 방울과 마왕님의 마법이 담겨 있습니다. 데몬 님의 몸에 흐르는 피의 질이나 속도, 흐름이 이상하다 싶으면 곧바로 신호가 옵니다. 두 번 다시 지난번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요."
저번과 같은 일이라면 마왕 앞에서 피를 토했을 때인가. 딱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심지어 위치까지 알려준단다. 안 그런 척하지만 뿌듯해하는 모습이 눈에 보여 차마 뭐라 하지도 못하고 나는 속으로만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이 미친 새끼. 내 피는 언제 가져간 거야?'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자연히 방 안에 침묵이 맴돈다. 자칫 어색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는 이내 벤이 화제를 돌리며 부드럽게 변했다.
"오늘도 방에서 식사하실 생각이십니까?"
"뭐… 늘 그랬으니…."
"저는 데몬 님께 침대에만 누워 있으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 벌써 사흘째, 나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 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원래 마왕성에서 지내는 일상 대부분이 그랬지만, 벤은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그는 부지런히 붕대의 끝을 마무리하며 짐짓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군단장 전용 식당의 식단을 확인해 봤는데, 나쁘지 않더군요."
"난 환자…."
"애초에 미미한 화상이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마왕님께 직접 부탁해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든 약을 사용했으니 거의 다 나았을 테고요. 눈 역시 회복되었을 테고, 줄기에 쓸렸던 발목은 이젠 뛰어도 고통이 없을 겁니다."
"...."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니 할 말이 없다.
그제야 난 벤의 스위치를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온건하던 그가 거침없이 입을 열고 독설을 내뱉게 만드는 그 스위치.
건강.
참으로 투철한 직업 정신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무엇도 아닌 건강이 상하는 것에 분노하다니.
물론 내가 좋다거나 걱정된 게 아니라 마왕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겠지만, 그래도 나름 감동이다.
그것과 별개로 귀찮은 것은 귀찮은 거지만.
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 갈아입을 거니까 나가주시죠."
"제 주제넘은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확실히 예의를 갖춘 그가 물러간다.
저러면 미워할 수도 없잖아. 그걸 알고 저러는 게 분명해. 나는 속으로 잔뜩 툴툴대며 옷장을 열었다.
옷걸이에 걸린 채 주르륵 늘어져 있는 옷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부 마왕과 2군단장이 채워준 것들이다.
마왕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2군단장은 왜 그렇게 내게 뭘 입히려 드는지.
확실히 센스 있게 잘 어울리는 옷들만 들고 온다만, 순순히 입어줄 생각은 없다. 한번 입어줬다간 또 새 옷을 골라주겠다고 한참을 붙잡을 게 뻔하거든.
치를 떨며 2군단장이 사 준 옷을 촤악 밀어버리고 마왕이 준 옷을 꺼내 들었다.
7. 0군단장 데온 하르트(5)
깔끔한 검은 옷을 차려입은 나는 거침없이 군단장 전용 식당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날 발견한 병사들이 흠칫하더니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는 괴물을 본 것처럼 허리를 푹 숙인다.
처음엔 부담스럽고 무서웠지만 이젠 고마울 정도다. 네놈들이 참 무섭게 생겼거든. 전에 우연히 정면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정말 돌이 되는 줄 알았다. 물론 너희 말고 내가.
쏟아지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어느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문을 지키던 이들이 움찔 몸을 떨더니 정자세로 각을 잡는다.
"시,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그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그 흔한 '끼익' 소리 하나 없이 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안에 들어서자, 나름 복작거리던 식당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일제히 나를 향한 시선들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이래서 내가 식당에 안 오려는 거였는데!
저 시선들의 주인이 죄다 '군단장'이다. 혼자만의 무력 하나로도 충분히 전장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바로 그 군단장!
"...."
"...."
어, 어떡하지?
침착해, 침착하고, 이이이이일단 음식부터 받는 거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집요한 시선들이 따라붙었으나 모르는 척 요리사들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어째 요리사들의 움직임이 더 빨라진 것 같다.
'그래, 될 수 있으면 서둘러주라.'
지금 내겐 이렇게 군단장들의 주목을 받으며 서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나 다름없거든.
"요, 요리 나왔습니다. 마마마싯, 아니 맛있게 드십시오."
달그락달그락.
나는 요란하게 떨리고 있는 쟁반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요리사를 쳐다봤다.
너도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구나. 하긴… 무려 군단장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데, 누가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어.
반가움과 안쓰러움에 힘내라는 뜻을 담아 웃어주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더 요란해진다.
이러다가 쏟을 것 같아 빨리 받으려고 손을 올리는데… 아뿔싸.
촤악!
...너무 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앞에 있는 요리사보단 덜할 거라 생각했는데, 나 역시 그 못지않게 긴장한 모양이다.
너무 빨리, 너무 높게 들어 올린 손은 보기 좋게 쟁반을 쳐올렸고, 내 손에 의해 하늘을 날게 된 쟁반은 공중에서 몸부림치며 음식을 흩뿌리더니 바닥에 요란히 나뒹굴었다.
"...."
"...."
아까보다 더욱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속으로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렸다.
제기랄, 망했다.
***
사악하다. 역시 사악해.
지금 이 순간, 이 식당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동시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데몬 아루트.
마지막 용사를 죽인 자이자 마왕이 직접 데려온, 마왕도 함부로 못 건드릴 만큼 강한 무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마왕군의 제0군단장.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군단장들이 장담하건대, 그는 무서운 작자다.
평소의 온건한 모습? 그것만 믿고 안심했다간 큰일 난다. 그는 그저, 분노하는 시점이 남들과는 다를 뿐이니까.
지금도 봐라. 얼마 전 식물을 제대로 가꾸지 못해 자신을 공격하게 만든 식인 식물의 담당자를 살려둔 것과 대비되게, 이번엔 고작 '떨었다'는 이유 하나로 요리사가 내민 쟁반을 내쳐버렸지 않았나.
'그래도 이건 평소에 비해 정도가 지나친데….'
1군단장 제이카르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지켜보며 조용히 나이프를 까닥였다.
...그러고 보니 정원에 불을 질렀다지. 불을 질렀을 정도면 상당히 화가 났다는 것일 테고.
여러 가지 가정을 세우던 머리가 가장 적합한 가정을 찾은 듯 어느 순간 뚝 멈췄다.
'그때, 용서를 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저 마왕성의 인력을 줄이는 것이 껄끄러워 정원에 불만 지르는 정도로 참은 것이라면?
그래서 그때의 분노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면?
'요리사만 불쌍하게 되었군.'
그는 운 나쁘게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이다.
뒤늦게 데몬의 검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아마 '오늘 기분이 별로이니 건들지 마라'라는 무언의 경고였을 테지.
제이카르는 눈은 저들에게 고정한 채 느릿하게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요리사에겐 미안하지만 불쌍한 것과는 별개로 감싸줄 생각은 없다. 고작 요리사 하나 구하자고 목숨 걸고 0군단장과 대치하는 것은 크나큰 손해이니까.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도 아닌, 같은 편의 손에 죽는 허무한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기에 제이카르는 그저 침묵했다.
그건 아마 다른 군단장들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다들 침묵하고 있는 것이겠지.
데몬의 얼굴은 진작부터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침잠하게 가라앉은 채 요리사를 향한다.
저건 분명 화가 난 거다. 당장 엎드려서 빌지 않으면….
"죄, 죄죄죄송합니다!!"
역시 군단장들을 상대해 온 요리사다 이건가. 눈치는 빠르군.
제이카르는 포크로 샐러드를 찍으며 슬쩍 데몬의 표정을 살폈다. 가라앉았던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고민하는 모양이군."
근처에 앉아 있던 3군단장 아실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이카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며 묵묵히 상황을 지켜봤다.
어떻게 하려나.
죽이진 않겠지. 평소의 그는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극도로 꺼리니까.
또 불을 지르려나, 아니면 간단하게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리려나.
데몬은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제이카르의 눈빛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
데온 하르트, 이번 생은 망하다. 머릿속에서 그 짧은 문장만 둥둥 떠다닌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린 나는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요리사를 멍하니 바라봤다.
요리사의 안색은 나보다도 더 창백했다.
그래, 정성 들여 한 요리가 바닥의 토핑이 되었으니 속상하고 화가 났겠지. 그런데 상대는 군단장이라 화도 못 내겠고…. 어떻게든 분을 삭이려는 모양인데, 역시 사과해야겠다. 안 그러면 언제, 어디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니.
때문에 사과를 하려는데, 요리사가 갑자기 넙죽 엎드렸다.
"죄, 죄죄죄송합니다!!"
"!?"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순간 동요해 버렸다. 아마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으리라.
나는 빠르게 동요를 수습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요리사를 내려다봤다.
"...일단 일어나시죠."
"죄송합니다! 부디 자비를!"
아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내가 잘못한 거잖아. 도대체 왜 그러는데?
"자비랄 것도 없습니다. 일어나세요."
"히익!"
기껏 네 잘못이 아니라고 부드럽게 말했는데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납작 엎드리는데…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역시 데몬…."
"이름값을…."
심지어 다들 뭔가 속닥거린다.
인간 주제에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걸까.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돌아보자 다들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한다. 역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게 분명해.
지금 내 이미지는 완전히 바닥이겠지.
그래, 어차피 망한 이미지다. 거기서 더 망쳐도 회복되어도 거기서 거기 아니겠나.
그리 생각하자 마음이 한층 편해진다.
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여전히 엎드려 있는 요리사를 바라봤다.
"이럴 시간에 요리부터 다시 해오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괜찮지만 다른 군단장들이 화를 내지 않을까. 군단장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꼬인 구석이 있다고 들었는데.
특히 아랫것들에게는 자비가 없다고….
"네, 네네! 당장 다시 해오겠습니다!"
언제 엎드렸냐는 듯, 벌떡 일어난 요리사가 주방을 향해 후다닥 달려간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다시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왜 눈을 감았냐고? 안 그러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아, 인생….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심지어 내미는 것도 빨랐다.
빠르고 신속하게 요리를 전달한 요리사는 직각으로 허리를 푹 숙여 보이고는 후다닥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빠르던지, 내 손에 들려있는 음식이 아니었다면 아마 바람이 왔다 간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겨우 음식을 받아들고 걸음을 뗐다.
고작 열셋의 군단장의 식사를 제공한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식당은 넓고도 자리가 많았다.
스무 명은 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의 테이블이 무려 열세 개!
하지만 조금만 상황을 생각해보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군단장들은 각각의 개성이 강하다. 그만큼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마왕에게 들은 것이지만 식당에 저 20인분 테이블을 한 개만 갖다 놓았을 때, 서로 싸웠던 두 군단장이 저놈과는 같은 테이블에 앉고 싶지 않다며 식당을 뒤엎었단다.
그 이후로 설사 모든 군단장들이 싸우더라도 별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20인분짜리 테이블을 군단장의 수대로 준비해두었다고….
'그러니까 내 곁에는 아무도 안 오겠지.'
자리도 넉넉한데, 왜 굳이 내 곁에 오겠어.
그런 장담을 할 수 있었기에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니었으면 아무리 등을 떠밀었어도 차라리 죽이라며 바닥에 드러누웠겠지.
아무튼 나는 가장 끄트머리의 테이블에 슬그머니 앉았다. 내게 볼일이 있지 않고서야 굳이 시선이 닿지도, 발걸음이 향하지도 않을 자리.
이제부터 마음 편히 식사하려 막 포크를 드는 순간….
"여기 앉아도 되겠나?"
"...?!"
한 마족이 다가왔다.
어두운 피부색과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듯 길고 뾰족한 귀. 모두가 내게 경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능숙하게 반말을 해오는 태도까지.
이 모든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입을 꾹 다물어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모든 군단장들의 실세.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나와 달리 공식적으로 마왕의 대행을 맡을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자.
1군단장 제이카르가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든 채 내게 옆자리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먹던 중 왔는지 슬쩍 확인한 그릇에는 음식이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냥 앉은 자리에서 다 먹으면 될 것을, 왜 굳이.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지만 딱히 이렇다 할 명분이 없어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입꼬리를 힘겹게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 없는 자리입니다.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답은 뭐, 이 정도면 무난할 테고.
"그도 그렇군."
피식 웃은 그가 쟁반을 내려놓고 드륵- 의자를 빼더니 자리에 앉는다.
설마 설마 했더니, 정말 앉을 줄이야. 도대체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원래부터 희미하던 입맛이 싹 사라졌다. 자꾸만 나오려는 한숨을 꾹꾹 눌러 삼켜가며 샐러드만 뒤적이는데, 느닷없이 낯설고도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저도 앉아도 되겠습니까."
하마터면 포크를 놓칠 뻔했다. 등 뒤에서 말하다니, 매너는 어디에 팔아먹은 건지.
화들짝 놀랐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분노로 변화하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던 나는, 상대를 확인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관자놀이에 뿔이 달려 있는, 인간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비상식적인 수준의 근육을 가진 마족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3군단장 아실드. 제이카르와 마찬가지로 먹다가 이동한 듯 음식이 반쯤 남은 쟁반을 든 그가 답을 재촉하듯 나와 눈을 마주한다.
이 상황에서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당연한 것을."
1군단장에게 앉든 말든 자유라 말해놓고 3군단장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자리는 이미 제이카르가 차지하고 있기에 아실드는 자연히 내 옆에 앉았다.
졸지에 앞과 옆이 봉쇄된 나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떨리는 눈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음식에만 집중했다. 물론 통 넘어가지는 않아 포크로 뒤적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3군단장 아실드라면, 아마 마왕의 친위대였지.'
생존을 위해 이곳에 오고 외워두었던 정보를 머리 한구석에서 끄집어냈다.
군단장을 비롯한 모든 군단원이 대검을 사용하며, 압도적인 힘으로 적들을 섬멸하는 군단이 바로 3군단이다. 그만큼 강력한 군대가 필요할 때 마왕이 주로 사용하는 군단 역시 3군단이고.
1군단을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1군단은 움직이는 것 그 자체로 큰 의미를 부여하기에 1군단이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괜히 제이카르가 마왕의 대행을 맡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
"...."
아, 이런. 다른 생각을 너무 오래 했나.
문득 어색한 침묵이 피부에 와닿아 살짝 고개를 들었다.
불쾌하다거나 화가 난 것은 아닌지 표정을 살피려는 의도였으나, 안타깝게도 이쪽을 보고 있던 제이카르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차마 눈을 피하지 못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 역시 어색했는지 잠시 접시에 시선을 두더니 이내 고개를 수직으로 들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8. 0군단장 데온 하르트(6)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나?"
"딱히 없습니다."
있어도 없어야 할 판이다.
군단장들은 다들 어딘가 엇나가 있다고 했던 마왕의 말을 상기하며 군더더기 없이 답하자, 제이카르가 미묘하게 굳은 얼굴로 내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딱히, 라고 한다면… 있긴 있다는 건가."
"네?"
"아무래도 그대는 인간이니 불편한 점이 없을 수가 없겠지. 그러니 참지 말고 말하도록. 할 수 있는 한 편의를 봐주겠다."
뭐지 이건. 배려…인가? 난 마왕이 직접 데려온 인력이니 직접 신경 써주는, 뭐 그런 거?
그럴 리가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품던 찰나, 제이카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눈치를 보듯, 한층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괜히 성을 뒤엎는다거나 그러지 말고…."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으아아아아, 죽고 싶다.
저건 분명 정원에서의 일을 돌려서 까고 있는 거다. 왜 쓸데없이 정원에 불을 질렀냐고 질책하고 있는 게 분명해.
동시에 이건 경고다. 한 번만 더 그런 쓸데없는 짓을 벌였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두려움에 막혀버린 목구멍을 꾸역꾸역 뚫어내고 억지로나마 대답을 뱉어내니, 그제야 그가 다시 음식에 집중한다.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아실드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어머, 데몬 님. 오랜만에 뵙네요?"
갑자기 끼어든 4군단장만 아니었다면.
아실드의 미간에 골이 팼다. 내 미간에도 골이 팰 뻔했으나 다행히 직전에 표정 관리를 할 수 있었다.
'역시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1군단장부터 시작해서 3군단장과 4군단장까지. 예상치도 못했던 이들이 자꾸 꼬이니 그렇지 않아도 간당간당했던 내 정신이 아예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다.
벤이 무슨 말을 하든 버텼어야 했다며 진득하게 후회하고 있는데, 옆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느릿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델리아, 알면서 그런 거지?"
척 듣기에도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
그 대상이 내가 아님을 아는데도 절로 흠칫하게 만들 정도였으나, 4군단장 이델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요요하게 웃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내가 뭘?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데?"
"헛소리."
아실드가 으르렁거린다.
맞다, 저 둘은 원래 사이가 안 좋았지. 나는 이미 구멍투성이가 되어버린 샐러드를 또다시 포크로 쿡쿡 찌르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애써 외면했다.
물론 속은 말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음식을 패대기치고 싶을 정도로… 아, 이미 한 번 그랬지.
먹은 게 없는데도 체할 것 같다.
이러다 정말 얹힐 것 같아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자, 상황을 지켜보던 제이카르가 고개를 돌려 조용히 둘을 불렀다.
"둘 다 그만. 지금 누가 앞에 있는지 잊은 것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짜기라도 한 듯 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당혹스러움에 서둘러 고개를 저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하니, 이델리아가 남은 내 옆자리에 앉아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정원을 불태우셨다면서요?"
"이델리아."
"아,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데몬 님을 그렇게까지 분노하게 한 원인이 뭔지 궁금해서…."
제이카르가 아니었다면 정말 먹은 것도 없이 사레들릴 뻔했다.
제발 정원 이야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본인이 연관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관심을 갖는지.
...그러고 보니 4군단이 정보를 다룬다고 했던가.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을 만하네.'
맡은 일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이델리아를 포함한 4군단은 정보 처리 담당이다. 물론 주로 정보를 모으는 건 2군단이고 그걸 가공해 거를 건 걸러내고 엑기스만 쫙 뽑아내는 것이 4군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정보를 모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있어서는 이들 중 가장 위험한 군단장이란 말이지.'
의식의 흐름대로 나온 뜬금없는 결론이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마왕성의 유일한 인간이다. 당연히 날 싫어하는 이들이 태반일 터.
이델리아가 언제, 어디서 나에 대한 약점을 알아내 팔아버릴지 모른다.
새삼 와닿는 현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흐트러진 정신을 빠르게 수습하고, 단단히 각오한 뒤 눈을 마주했다.
계속해서 이쪽을 보고 있었던 듯, 곧바로 눈이 마주친 이델리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정원사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
"그를 살려두신 이유가 직접 손을 쓰는 것이 꺼려지기 때문이셨다면 제가 기꺼이 대신 제거해 드릴 의향도 있답니다."
"...됐습니다."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무슨 문제가 터졌다 하면 대뜸 그 원인을 죽이는 것부터 생각한다. 도대체 이들에게 자비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 말인즉, 반대로 생각하면 나에게도 자비가 없을 거라는 뜻 아닌가?
'안 돼, 위험해.'
미래의 내가 위험하다.
그렇지 않아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중인데, 이 사실까지 알게 되니 새삼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포크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찌나 세게 힘을 주었던지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옆에서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훗날의 나를 위해서라도 이곳 마왕성의 이들에게 '자비'라는 것을 심어줘야 한다.
그런 다짐과 함께 잠시 내려갔던 고개를 들어 이델리아를 쳐다봤다. 조금 전과는 달리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그녀의 눈이 심히 떨리고 있었다.
혀라도 잘못 씹었나? 잘 보니 손도 떨고 있는 것 같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미래의 나를 위해 할 말은 해야겠다.
"애초에 별거 아닌 일이었습니다. 죽일 정도는 아니에요."
"네, 네…."
"아시겠습니까? 죽일 정도는 아닙니다."
"네, 죄송해요."
"이델리아, 당신이 뭐가 죄송합니까. 그냥, 죽인다는 말을 하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해 보세요. 정말 상대가 죽을 정도의 잘못을 했는지."
아, 제일 중요한 말을 잊을 뻔했다.
"그리고 가끔은 자비를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네, 꼭 기억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왜 자꾸 죄송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이대로 서서히 물들이다 보면 언젠가 내가 실수를 한다 해도 한 번쯤은 봐주겠지.
문제는 이델리아가 입을 다물고 난 후 정적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시무룩해진 표정 하며, 딱딱하게 굳은 다른 군단장들의 표정을 보니 마치 내가 그녀를 혼낸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고 보니 잘못한 것도 없는 이델리아가 연신 사과를 하기까지 했지.
그제야 내가 천하의 쓰레기가 된 이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침묵이 길어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압박을 이기지 못한 내 표정은 점차 제어를 벗어나 멋대로 굳어져만 갔다.
덩달아 군단장들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게 변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인간이 감히 저들 앞에서 표정을 굳히고 있는데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이 침묵이 불편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군단장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무언가 필사적으로 고민하던 이델리아가 나를 한 번 보고 슬며시 입을 열었다.
"...데몬 님."
어, 그래!
어색했던 공기가 풀어진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뭐든 다 들어주겠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델리아를 마주했다.
좋아, 뭐든 말해 봐. 내가 이번만큼은 뭘 말해도 다 들어줄….
"군단을 살피러 가신다면서요."
들어줄….
"아, 저도 그것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젠장.
여차하면 도망, 아니 자리를 피할 생각으로 조용히 의자를 뒤로 밀었다.
확실히 군단을 살피겠다고 한 적은 있다.
그게 언제였냐면… 아마 술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가 마왕이 찾아왔던 때, 그때였을 것이다.
[아무튼 술은 안 돼. 마왕성을 뒤엎을 일 있어? 정 심심하다면 네 군단을 돌아보든가, 정원이라도 돌아보도록 해. 히엔이 이번에 새로운 꽃을 들였다고 좋아하던데 말이지.]
[군단을 돌아보겠습니다.]
그 끔찍한 정원사를 상대하기보단 차라리 군단원들을 상대하는 것을 택했었지.
억울하다. 정원사를 상대하기 싫어서 군단을 선택했던 건데, 히엔은 히엔대로 만나고 군단은 군단대로 살펴야 한다니.
심지어 마왕 앞에서 한 말이라 이제 와서 무르지도 못 한다.
"데몬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표정이 이상했나. 다행히도 의자를 뒤로 민 건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이대로 타이밍만 잘 보고 도망치면….
'...안되겠네.'
생각하고 보니 완벽하게 포위된 상황이다.
왼쪽엔 이델리아가, 오른쪽엔 아실드가. 정면에는 제이카르까지. 심지어 하나같이 전부 군단장이다. 도망치려는 순간 곧바로 뒷덜미를 낚아챌 터.
체념은 빨랐다.
티 나지 않게 긴장시켰던 몸에 힘을 풀자, 내가 조금 전까지 도망치려 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아실드가 내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군단원들을 살피실 때 검을 드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들긴 들었지.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게다가 진검도 아닌 목검이다.
목검 그거, 너무 무거워서 팔이 후들거리더라. 부끄럽지만 솔직히 내 근력으로는 일반 철검은 꿈도 못 꾸고 목검 정도만 간신히 든다.
그런데 그게 왜?
"군단원들을 전부 지도하고 난 뒤, 그때 대련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
귀로 가려는 손을 간신히 멈췄다.
아무래도 내가 요즘 기가 많이 허한 모양이다. 별 헛소리가 다 들리는 것을 보면.
그렇게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던 내 노력은 제이카르가 툭 내뱉은 말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좋은 생각이군. 난 참관을 해도 되겠나?"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하라더니, 살려달라는 내 표정은 보이지 않는가 보지.
애당초 이건 말도 안 되는 대련이다. 당장 그와 나의 체급부터가 말도 안 되게 차이가 나는데 대련은 무슨 대련. 아실드의 손만 봐도 그렇다. 검이 아니라 저 손에 한 대 맞기만 해도 분명 내 목은 뽀각- 하고 부러지리라.
"...그…."
대답을 마냥 미룰 수는 없어 일단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집중되는 시선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시선 가운데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찾아내려 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결국 실패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여기서 이렇게 끝인가. 타당한 이유가 없으니 저들은 이대로 밀어붙이겠지. 그럼 내 실력은 들통날 테고 저들을 속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아니, 들통난 이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가 한 방에 죽는 기염을 토함으로써 실력이 만천하에 드러날 테니까.
얼마 먹지도 못한 채 차게 식어버린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기 전에 따뜻한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어둘걸.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대답을 기다리는데, 생각 외로 아실드의 반응이 침착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렇겠습니다."
"...?"
"데몬 님께서는 대련보다는 실전 방향으로 두각을 드러내시는 편이니. 자칫하면 대련 중 저를 죽여버리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곤란하셨을 테지요."
"?"
"죄송합니다. 경솔했습니다."
"아뇨, 뭐…."
잘… 풀린 건가?
영문 모를 불길한 말들을 들은 것 같지만 어쨌거나 대련은 피했으니 잘된 거라고 치자.
"나중에, 제가 쉽게 죽지 않을 만큼 실력을 쌓았을 때, 그때 다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전혀 잘 풀린 것 같지 않다.
큰일 났다.
"그리 오래 기다리시게 하진 않겠습니다."
"...."
"그래도 오늘은 구경 정도는 하러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3군단장에게 선전포고를 듣고 말았다.
9. 0군단장 데온 하르트(7)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겠다니,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오래 기다리게 해도 돼. 기왕이면 내가 죽을 때까지 쭉.
하지만 아실드는 제가 한 말은 꼭 지키는 타입이다. 이 약속을 잊는 일은 절대 없겠지. 다시 말해 언제가 됐든 내가 저 무시무시한 녀석과 검을 맞대는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된다는 뜻이다.
"데몬 님?"
"아."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뭐라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래, 구경하러 가도 되냐고 물었었다.
무심코 나오려는 한숨을 꾹꾹 눌러 삼켰다.
이건 거절할 명분도 없다.
그래도 대련보단 나으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얻어야 하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의 딱딱한 얼굴 위로 희미한 웃음기가 스몄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진…."
전장에서는 미친 듯이 인간을 썰어대는 녀석이 이리도 정중하게 나오니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차라리 반말을 해줬으면.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뻔뻔하게 나왔으면 마음이 좀 편할 텐데.
"어, 그럼 저도 가도 될까요? 0군단의 훈련 방식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아실드랑 사이도 안 좋으면서 이델리아는 왜 오려는 걸까. 아, 혹시 그건가, 염탐?
뭐 쓸 만한 정보 없나, 하고 염탐하려는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오는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기대하고 있는 이델리아에겐 미안하지만 내 훈련 방식은 '방치'다.
말 그대로 방치해 두고 가끔씩 들러서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게 전부인데… 아무래도 실망하지 않을까.
그래도 양심상 차마 방치 중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나는 조용히 식기를 정리했다.
여전히 음식이 가득한 그릇들을 죄다 쟁반 위에 올린 뒤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진작부터 다 먹고 앉아있던 제이카르와 아실드가 덩달아 빈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애초에 그릇까지 다 정리한 뒤 이쪽으로 왔던 이델리아가 내 접시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다 드신 거예요?"
"네."
"혹시, 속이 안 좋으시다거나…."
"네, 조금."
네놈들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자 제이카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럼 주치의부터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아무리 벤이 착하다지만, 계속 별것도 아닌 일로 귀찮게 굴었다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결국은 그도 '마족'이지 않은가.
얼굴 일부가 뱀 비늘에 덮여 있어 외형부터 스스로 마족이라 주장하는 것 같았던 그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쟁반을 사용인에게 넘겼다.
밖으로 나오자 나머지 군단장들이 우르르 내 뒤를 따라 나온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더해, 여기서 누군가의 모습이 겹치는 듯해, 나는 흠칫-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이러니까 마치….
'내가 마왕 같잖아?'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끊이질 않던 시선이 한층 더 강렬해진 느낌이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식사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분위기상 이대로 바로 군단으로 향해야 할 것 같아 어정쩡하게 멈춰 서서 눈치를 살피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제이카르 님!"
저건 또 뭐야. 당한 게 있다 보니 일단 경계심부터 생긴다.
적인지, 아군인지에 대한 판단은 금방 섰다.
"제이카르 님, 서류 작업이 밀렸으니 속히 와달라고 제이카르 님의 부관님이…."
아군이구나.
"...그러고 보니 책상에 서류가 쌓여 있던데, 설마 그게 전부?"
"예, 아마… 그럴 겁니다."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짜증과 답답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제이카르가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내 쪽을 돌아봤다.
"들었겠지만 오늘은 못 갈 것 같군."
"네, 아쉽네요."
전혀 아쉽지 않다.
희소식을 전해 준 마족에게 속으로 찬사를 보내며 새삼 처음부터 서류 작업에 선을 그어두었던 과거를 돌아보았다.
당시에는 말하면서도 목이 날아갈까 달달 떨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잘한 것 같다. 덕분에 부관에게 시달릴 일도 없고.
참고로 내 덕분에 덩달아 할 일이 없어진 부관은 지금 인간계에 나가 있다. 내가 너무 심심해했더니 새로운 퍼즐이나 큐브를 구하겠다고 나가버렸거든. 역시 마족이라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나름 벤 못지않게 착하고 고마운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저도 아슬아슬하군요."
옆에 서 있던 아실드가 한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말을 뱉어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탈탈 털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무래도 구경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부탁한 주제에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니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괜찮다는 뜻을 내보이며 좋은 소식을 전해 준 마족에게 애정을 듬뿍 담은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녀석이 경비대를 마주한 좀도둑처럼 몸을 움찔한다.
딱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애초에 군단장들을 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 이상한 거니까. 게다가 그들에게 서류 작업이 밀렸으니 어서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인데, 무서울 만도 하지.
"그…그리고 이델리아 님은...응? 이델리아 님?! 이델리아 님 어디 가셨습니까?"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이델리아를 찾던 시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델리아? 이델리아라면 바로 여기...응? 얘 어디 갔어?'
뭐야, 사라진 거 나만 몰랐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아실드도, 제이카르도 미묘하게 감탄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어딜 간 거래. 설마 서류 작업하기 싫다고 도망친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군단장인데.
"또 도망친 모양이군."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느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잊고 있었다. 군단장들은 정상이 아니랬지.
시종 역시 도망쳤다는 것을 파악했는지 잔뜩 울상을 지으며, 아니 울상이라기보다는 거의 울먹이는 수준으로 상대가 누구인지도 잊은 듯 한탄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델리아 님 부관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거의 송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뿐이면 안쓰럽다고 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데, 문제는 지금 부관이 사직서를 내겠다고 난리를 치는 중이라…."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이델리아 님을 발견하신다면…."
"꼭 잡아서 부관 앞에 던져주지."
"예,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찾아보려는 듯, 시종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갔다.
그리고 그 모습이 시야에서 흐려질 때쯤, 제이카르와 아실드가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그럼 다음에 보지."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예에, 서류 작업 힘내시길…."
앗, 이게 아니었나 보다.
나름 응원이라고 한 말에 둘이 짜기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쉰다.
설마 화를 내려나 싶어 긴장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둘은 별말 없이 돌아서더니 내키지 않는 걸음을 느릿느릿 옮겼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군단을 찾아가… 봐야겠지.
딱히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미룰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서류 작업을 끝낸 군단장들이 들러붙을지도 모른다.
모두 바쁘게 사라져버린 지금이 바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최적의 타이밍.
때문에 나는 자꾸만 방으로 향하려는 걸음을 억지로 붙잡아 0군단 전용 연무장을 향해 틀었다.
아, 가기 싫다.
***
막 점심시간이 끝났을 때라 그런지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하긴, 누가 식사하고 곧바로 뛰겠어. 옆구리만 아프지.
이대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지만, 군단원 얼굴 하나 마주하지 않고 돌아가면 그건 군단을 살핀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때문에 난 기다릴 생각으로 거치대에서 목검을 하나 뽑아 들고 연무장 한쪽 구석에 터벅터벅 걸어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손잡이 부분이 변색된 목검을 만지작거리며 새삼 느낀다.
마계의 것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냥 내가 약한 것인지, 역시 무겁다. 휘두르려 한다면 휘두를 수는 있겠지만 그건 내가 목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목검이 나를 휘두르는 게 되어버릴 것이다.
철검은커녕, 목검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근력.
그것 때문에 처음 전쟁터에 끌려나갔을 때 이렇다 할 무기를 쥐지 못한 채 피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서야 내가 선택한 무기는 작고 가벼운 단검이었고.
"헉."
문득 들려온 작은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연무장 입구에 군단원으로 보이는 녀석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0군단 전용 연무장이니 아마 우리 쪽 군단원이겠지. 훈련하러 온 건가? 부지런하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녀석이 연무장 밖으로 후다닥 달려나갔다.
"...."
뭐야. 돌아갈 거면 왜 왔던 거야?
아니면 설마, 내가 싫어서? 내가 싫어서 돌아갈 때까지 아무도 오지 말자고 공모하려는 건가?
"하아."
그래, 한낱 인간이 어딜 감히 군단장 노릇을 하겠다고.
돌아가자. 난 할 만큼 했어.
사실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 양심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외치고 있으니 됐겠지.
목검을 돌려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 걸음을 떼는데, 땅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려니 했으나….
두두두두두두두.
저 멀리, 먼지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미친, 저거 뭐야. 마물인가? 마왕성에 마물도 있었나?'
아, 먼지구름 사이로 사람과 닮은 형상이 드러난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저놈들, 군단원들이구나. 그것도 우리 쪽.
"...."
도망가자.
뭔진 모르겠지만 느낌이 안 좋아. 군단을 살피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지. 아니, 이 정도면 반드시 미뤄야 한다고 하늘이 계시를 주는 수준이다.
내가 주춤주춤 물러서는 사이, 그새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섰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각이 잡힌 행동이었다.
"...."
"...."
드넓은 연무장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용한 공간과 달리 내 머릿속은 한창 복잡해져 있었다.
이건 뭐지. 군단장 대우를 해줬으니 빨리 꺼지라는 뜻인가. 언제 돌아가지? 지금 돌아가야 하나? 저 눈빛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지금 가야 할 것 같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보인 뒤 막 돌아서려는데, 저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 데몬 님."
"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건지…."
왜 내게는 저 말이 '할 일도 없으면서 왜 왔냐'는 말로 들리는 걸까.
하지만 내 해석이 맞다 해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 뭐라 할 수도 없다.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손이 멋대로 움직이려 한다. 옷깃을 움켜쥐려 하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목검을 만지는 게 보기에 훨씬 낫겠지.
나는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궁금해서요."
우리 군단원들의 실력이.
올 때마다 거의 늘 훈련만 하고 있었으니 평균 이상은 할 거라 믿고 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한 번쯤은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뭐, 저 태도를 보아하니 무슨 사건이 있지 않은 한 직접 보는 일은 요원하겠지만.
빨리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목검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목검 거치대로 향했다.
최대한 떠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려 했는데, 너무 긴장한 모양이다.
발과 발이 꼬여버렸다!
오늘도 부실한 하체가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구나!
'너, 넘어진다!'
이대로 넘어지면 개쪽이다. 단순히 개쪽에서만 끝나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아도 인간이랍시고 날 보는 시선이 좋지 않은데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는 소문이 들려봐라.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넘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기 위해 한 발을 크게 내디뎠다.
이어서 상체를 낮추며 안정된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머리 위로 무언가 지나갔다!
"데몬 님!!"
뭔가 싶어 살짝 고개를 들자 눈앞에 무언가 살랑살랑 떨어진다.
마치 하얀 털 같은… 이건 내 머리카락이잖아?
기겁하며 상체를 세우는 동시에 몸을 뒤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팔꿈치에 무언가 둔탁한 것이 부딪혔다.
그리고 이어진 신음.
"커헉!"
"...?"
뒤늦게 시야가 완전히 확보되었을 때, 상대는 이미 명치를 부여잡고 허리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친숙한 외모에 내 눈이 커졌다.
"인간?"
꼬리도 없고, 뿔도 없고, 비늘도 없다. 어느 한구석은 인간과 다른 부분이 있는 마족들과 달리 이 녀석은 아무리 봐도 인간처럼 생겼다.
인간이 어떻게 마왕성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잠시, 그가 들고 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침입자구나. 설마 내 팔꿈치에 부딪혔던 게 이 녀석 명치인 건가?
운이 좋았다. 자칫했으면 역으로 내가 당했으리라.
놀란 가슴을 다독인 뒤, 두 손으로 목검을 쥐고 들어 올렸다.
인간이든 뭐든 그가 침입자이고 나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내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오히려 이대로 두었다간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체중까지 실어 있는 힘껏 목검을 내리쳤다.
빠악!
10. 영웅, 회의, 그리고…(1)
기절한 채 질질 끌려가는 침입자를 암울한 눈으로 지켜보며 군단원들은 속으로 '난 오늘 죽었다'를 미친 듯이 복창하고 있었다.
식사 후 잠시 쉬고 있을 때, 밖에서 들어온 한 놈이 빨리 집합하라고 외칠 때까지만 해도 장난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군단장님이 오셨다니. 그분은 가끔, 아주 가아끔씩만 들르신단 말이다.
그러나 블루베리처럼 파랗게 질려버린 녀석의 얼굴엔 한 치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 말이 사실임을 안 순간 우린 기겁하며 미친 듯이 연무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우리의 군단장님을 마주할 수 있었다.
"궁금해서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용기 내어 던진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의미심장했다.
무엇이 궁금하단 말인가.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데몬 님이 어디론가 느긋하게 걸어간다.
그러더니 한순간,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허리를 숙이며 목을 노린 검을 피하고는 그대로 상체를 돌려 팔꿈치로 적의 명치를 가격했다. 하나같이 재빠르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제야 우린 알 수 있었다. '궁금하다'는 말의 의미를.
'궁금해서요.'
─정말 몰랐는지.
무려 연무장까지 침입자를 허용해놓고, 정말로 몰랐던 건지.
그런 주제에 이리도 느긋하게 쉬고 있었던 건지.
충격에 얼어버린 우리에겐 시선도 던지지 않고, 데몬 님은 상대를 기절시키려는 듯 느긋하게 목검을 들어 올리셨다.
그리고 이어서, 경쾌한 소리가 연무장 가득 울려 퍼졌다.
빠악!
***
자꾸만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리며 자학하는 군단원들을 간신히 뜯어말리고, 난 다시 내 방에 틀어박혔다.
할 일은 전부 끝냈다.
정원 산책도 했고, 군단도 살폈다. 벤이 요구했던 식당에서의 식사도 했으니 한동안은 밖에 안 나가도 되리라.
모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일상에 행복한 기분으로 침대 위를 뒹굴거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몬 님, 에드입니다."
에드라면 내 부관이잖아? 심심해 죽으려 하는 나를 위해 색다른 퍼즐이나 큐브를 찾겠다며 인간계까지 나갔다더니만, 드디어 돌아왔구나.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보는 에드의 표정은 어쩐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당했던 건가? 아니, 근데 0군단장의 부관 자리는 그에 걸맞은 인재가 차지해야 한다며 마왕이 무려 군단장 후보로 거론되던 녀석을 뽑아준 건데? 그러니까 에드 실력이면 웬만한 녀석들은 찜쪄먹고도 남을….
"새로운 큐브를 가져왔습니다. 미러 큐브라고, 조금 독특한 큐브입니다."
"오."
"그리고…."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가 힐긋 시선을 옆으로 옮긴다.
문만 열어놓고 아직 복도에 서 있는 상태였기에 나는 그가 뭘 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마른침을 삼킨 에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왕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오."
...오?
"바쁘지 않다면 잠시 시간 괜찮을까?"
저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누군가 방 안에 들어섰다.
방 안을 한 번 훑어본 역안이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하더니 이내 싱긋, 반달처럼 휘어진다.
잠깐의 침묵 끝에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섰다.
마, 마왕이 왜 여기에? 나 이번엔 사고 안 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긴 한데.
"설마 그 침입자에 관한 겁니까?"
"맞아."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듯 흐뭇한 웃음을 지은 그가 문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있어. 괜찮다면 잠시 같이 죄수를 보러 가지."
그 말인즉, 지하 감옥에 같이 가자는 뜻 아닌가?
무슨 일이지? 설마 그 침입자 놈이 나에 대해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같은 인간이라 나름 신빙성이 있었을 테고.
뭔진 몰라도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는 건 사양이다. 살려달라는 의미를 담아 슬쩍 에드를 돌아봤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내 눈을 피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망할 놈.
지하 감옥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축축하기까지 했다.
그래, 결국 끌려와 버렸다.
"열어."
마왕의 한 마디에 튼튼해 보이던 철창이 단숨에 열렸다.
문을 열어준 병사가 물러가라는 말에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보던 마왕이 시선을 돌려 감옥 안의 '인간'을 쳐다봤다.
그새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침입자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마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들어가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데온."
주위를 물렸기에 나온 본명.
동시에 침입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눈빛이 할 수만 있다면 나를 씹어 먹고 싶다는 눈빛이다. 마왕을 볼 때보다 나를 볼 때의 눈빛이 더 살기가 넘쳐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마왕은 거칠게 침입자의 머리채를 잡아 올리더니 고개만 돌려 나를 봤다.
"이 녀석, 잘 봐봐. 어딘가 익숙하지 않아?"
인간이라는 것 빼고는 자, 잘 모르겠는데요….
침묵으로 답을 하자, 마왕이 힌트를 주려는 듯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임에도 어지간한 마족은 혼자 쓰러트리는 무력, '마왕'인 나를 상대로 유독 강해지는 힘."
녀석의 몸 상태가 엉망이다 했더니, 그새 가지고 놀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왕의 설명을 들은 난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설마…."
"그래."
던지듯 머리채를 놓은 마왕이 피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웃었다.
"용사의 찌꺼기. 제국에서는 용사의 파편이라 부르며 찬양하는─"
"...영웅."
"우습지도 않지."
***
용사는 죽을 때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중 하나만 우선하여 말해보자면, 죽음과 동시에 바스러져 사라질 '용사의 힘'을 대륙 전체에 뿌려 미약하게나마 마왕을 상대할 이를 만들어내는 것 정도가 되겠지.
힘 자체를 온전히 한 사람에게 넘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생전엔 양도가 불가능한 데다 죽음과 동시에 용사의 힘은 바스러지기 시작하기에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죽을 목숨을 대가로 그 파편을 뿌려 용사의 힘을 일부나마 지닌 자들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제국은 그런 파편을 가진 자들을 '영웅'이라 부르며 모으려 했다.
물론 '영웅' 칭호를 아무에게나 주지는 않았다. 비공식적으로는 '용사의 파편'을 지닌 이들을 전부 영웅이라 부르지만, 공식적으로는 그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훌륭한 공을 세운 이들에게만 '영웅'이란 칭호를 내리며 차원이 다른 영광을 부여했다.
눈앞의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인간은 안타깝게도 '전자'였다.
'공식적인 영웅이 되지 못한 용사의 파편.'
그래도, '영웅'이라 불리진 못했을지라도 '영웅 후보'라 불리던 몸이다. 함부로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패일 터.
그런 녀석이 마왕성에 침입한 것이다.
'도대체 왜?'
새빨간 눈동자가 소름 끼치는 빛을 담고 번들거린다.
그 속에서 얼핏 비친 감정은 다름 아닌 혼란과 의문.
왜, 혹은 어떻게 여기까지 쳐들어왔는가- 따위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곳에 영웅 후보가 올 이유는 없다. 그는 어떠한 메시지도 담지 않았고, 마왕을 포함한 마족들을 제거하는 것 이외의 어떤 특별한 목적도 없는 듯 보였으며, 결정적으로 데온 자신을 공격했다.
'나를 공격한 이유는 뭐지? 여기에 무슨 이유가 담겨 있나?'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가.
"…그런고로 오늘 오후에 군단장 회의가 있을 예정이야. 직접 마중을 나갈 테니 이따 보도록 하지."
"...."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자리에서 일어난 마왕이 데온을 돌아봤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모습.
아무래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평소에도 딱딱하던 표정이 더더욱 굳어진 채 멈춰 있었다.
'아무래도 같이 올라갈 생각은 없는 것 같군.'
속으로 고개를 내저은 그가 일단 확인은 해보려는 심산으로 넌지시 말을 꺼냈다.
"좀 더 있을 생각인가?"
"예."
"그래, 그럼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철창을 나온 마왕이 느릿느릿 사라졌다.
...고민은 끝났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로 거리를 파악하던 데온이, 시선을 내려 침입자를 바라봤다.
속을 알 수 없는 건조한 눈빛. 피를 머금은 듯 번들거리는 붉은 눈이 침입자를 향한다.
그러나 침입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데온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명백한 증오와 분노가, 배신감이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윽고 피딱지가 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데온 하르트."
오랜만에 듣는 풀 네임.
데온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침입자는 이를 악물고 부글부글 끓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서늘한 원한을 담아 씹어뱉듯 말을 내뱉었다.
"배신자 새끼."
"...."
아하.
이것으로 답이 나왔다.
가늘어진 채 잔뜩 힘이 들어갔던 눈이 김이 샜다는 듯 풀어진다. 마찬가지로 한결 풀린, 긴장감이 사라진 목소리가 흘리듯 말을 뱉었다.
"너는 버린 패로군."
"뭐?"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녀석이었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어.
얼빠진 되물음에 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데온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질문을 던졌다.
"너는 무슨 죄를 지었지?"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야! 버린 패? 죄라니!"
"무슨 짓을 했길래 황제의 눈 밖에 났냐는 말이다."
"헛소리! 폐하께서는 내게 중대한 임무를 내리셨다! 내가 눈 밖에 났다면 임무를 부여하지도 않으셨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찔리는 것이 있는 듯, 놈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빛이라고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밖에 없는 공간에서 그 떨림을 기민하게 잡아챈 데온이 철창을 넘어 감옥 안으로 들어간다.
마왕처럼 침입자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그는, 마왕과 달리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고,
──말한다.
"아니, 네가 나를 '배신자'라 칭한 것이 그 증거다. 넌 황제의 눈 밖에 났고, 지금 이렇게 버려졌지."
"그럴 리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가르치듯 현실을 짚어준 데온이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 판단하고 일어섰다.
결론이 내려졌다.
이 녀석을 굳이 살려야 할 필요는 없다. 아니, 확실히 죽이는 편이 오히려 좋겠지.
하지만 이를 결정할 권한이 본인에게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데온은 그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어서 누군가에게 들리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
놈의 눈이 커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데온은 더 볼 것 없이 돌아섰다.
등 뒤로 지독한 발악이 이어졌다.
"이 황제 새끼가아아아!!"
참으로 얄팍한 충성심이 아닐 수 없다.
입가에 비웃음을 띤 채 걸음을 옮기던 데온은 지하 감옥 입구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마왕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뜯어보던 마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었어."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너무하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녀석을 죽일 수밖에 없잖아. 그래도 잘만 하면 어딘가에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부러 그런 거지?"
"...."
"됐다, 됐어. 안에서도 말했지만 못 들은 것 같았으니 다시 한 번 말할게. 오늘 오후에 군단장 회의가 있을 예정이야. 직접 데리러 갈 생각이니 방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해."
11. 영웅, 회의, 그리고…(2)
그냥 제국에서 버린 패 암살자로서 훈련받은 녀석들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무려 영웅 후보라니.
솔직히 충격이었다.
'그래, 충격이었는데….'
이 정도까지 정신이 팔렸을 줄이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어느새 방에 도착해 있었다.
넋을 놓은 상태여서 그런지 기억에 안개가 낀 듯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얼마 없다. 그나마 가장 선명한 기억이 뭐였더라.
그 녀석이 죽으리라는 확신?
'....'
그냥 그쪽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 녀석이 죽든 말든, 내가 녀석을 동정하든 말든,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에드가 가져다준 큐브를 들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큐브를 마구 섞으며 하나둘 잡생각을 지워나가던 도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야."
"...마왕님?!"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복장을 점검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매만진 뒤 문을 열었다.
"마왕님께서 여긴 또 왜…?"
"말했잖아. 데리러 오겠다고."
"네?"
언제?
의문 가득한 내 표정을 읽은 건지 마왕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는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서더니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군단장 회의. 이래도 기억 안 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쩐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기억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였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넘어간 마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럼 가자."
"예."
더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그 탓에 나는 큐브를 내려놓을 타이밍은커녕,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방을 나와버렸다.
***
용사와의 전투 당시, 7군단장은 오우거였다.
굳이 마왕군의 핵심 전력 중 하나라는 이유를 제치더라도 확실히 기억한다. 그는 데온 하르트의 훌륭한 들러리가 되어주었으니까.
다시 말해, 데온 하르트가 처음 등장할 때, 7군단장을 죽이며 등장했다는 뜻이다.
마왕은 그날을 회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용사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그냥 둬도 곧 끊어질 용사의 목숨을 직접 거두기 위해 검을 들었을 때,
──용사는 자폭을 택했다.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용사의 몸을 보며 어찌나 당황했던지.
"...이번 용사는 꽤 호전적인 모양이야."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용사는 죽을 때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는 힘의 파편을 대륙에 뿌려 조금이나마 마왕에게 대항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마왕이 근처에 있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일명 자폭이다.
용사의 힘을 모아 터트리는 것.
보통 용사들은 후일을 위해 힘의 파편을 뿌리는 것을 택하는데.
'어차피 난 죽지 않겠지만.'
괜히 역사상 최강의 마왕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마력을 아낌없이 사용한다면 저 폭발의 여파에서 큰 피해 없이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주위에 포진된 다른 마족들이다.
종족의 명운을 건 전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역사적인 전투를 보기 위해 나온 마왕성의 모든 마족들.
용사의 힘은 마왕을 제거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고, 마족은 마왕으로부터 탄생한 종족이다.
결국 용사의 힘은 간접적으로나마 마족에게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분명 여기서 용사의 힘이 터져나간다면….
'어림잡아 절반.'
이 많은 군단의 절반 정도가 순식간에 증발하리라.
마왕성의 규모가 제국의 소도시급이라는 것과, 그곳의 모든 마족들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피해 수준이다.
"모두 물러…!"
때문에 서둘러 명령을 내리는 순간.
콰아앙!!
...하늘에서 한 인간이 떨어졌다.
그것도 7군단장과 함께.
7군단장을 깔아뭉개며 등장한 그는 마왕에겐 시선 하나 던지지 않았다.
그저 제 밑에 깔려 있는 7군단장이 죽었는지 재차 확인하려는 듯 단검으로 그의 목을 찌르고는, 그걸 지지대 삼아 천천히 일어났다. 어이없을 정도로 느긋한 태도였다.
하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핏빛 눈동자가 마왕과 용사를 오가더니, 이내 용사에게 고정된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마족들이 둥그렇게 에워싼 그 전장 가운데를,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너무도 무방비한 태도였다.
그러나 당당한 태도 탓일까, 흔들림 없는 표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백이 느껴져 병사들은 그를 제지하기는커녕 바짝 얼어붙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심한 놈들.'
그럼에도 차마 대놓고 한심하다 욕할 수 없어 마왕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한순간이지만 그 역시 압도당했으니까.
애초에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그는 금세 용사의 앞까지 도착했다.
마왕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용사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가 녀석의 어깨 위,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용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무리가 저 인간을 향해 쏟아져 내린 것이다.
"...미쳤군."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용사와 마왕, 그리고 용사를 보내는 제국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 상황에 대한 추측은 빠르게 이어졌다.
저 흰 머리칼의 인간은 아마 이 싸움의 결말을 직접 보고 제국에 알리기 위해 따라왔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주 임무.
그리고 부수적인 임무로는 용사가 죽더라도 마왕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본인이 죽일 수 있으리라 판단되면 죽이고 오는 것이 되겠지.
그래서 용사가 자폭을 택했을 때, 확률을 계산했을 것이다.
[용사의 자폭으로 마왕에게 피해를 입힐 확률과, 이것으로 마왕이 입을 피해의 규모.]
[자폭으로 줄일 수 있는 주위 마족들의 수.]
[그 줄어든 마족들을 뚫고 부상당한 마왕을 죽일 확률.]
[최종적으로 이를 수행하며 주 임무인 '생환'을 달성할 가능성.]
자폭은 비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나왔으리라.
그래서 용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렸을 것이다. 적진 한복판에 뛰어내렸다는 것은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살아 도망치는 것에 자신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똑똑하고 임무에 대한 충성심도 높고, 전투 능력도….'
유쾌함을 가득 담고 눈꼬리가 휘어졌다.
이런 녀석을 이 위험한 곳까지 내돌린 제국에 유감을 표한다. 나였다면 쓸 땐 쓰더라도 이렇게 존중 없이 죽을 자리에까지 보내진 않았을 텐데.
어쨌건 용사는 그의 뜻을 읽었고, 급히 방향을 틀어 양도의 목적으로 그에게 쏟아부었다. 물론 힘이 용사의 의도대로 상대의 몸 안에 머문다든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지.'
용사의 힘은 세계가 목적을 가지고 직접 부여한 것. 본래 용사가 죽으면 산산이 흩어져 다시 세계에 귀속되어야 할 힘이다.
그것을 파편으로나마 이 땅에 남기는 것만으로도 용사 본인의 목숨을 대가로 해야 하는데 의도적인 양도가 가능할 리가.
용사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금방의 행동으로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야 했겠지.
그럼에도 의미 없는 몸부림을 치다가 죽어 축 늘어진 용사를 본 마왕은 시선을 조금 올려 그의 시신을 받쳐 안고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세계의 뜻을 어긴 말도 안 되는 시도의 직접적인 관계자다. 그 역시 멀쩡할 리 없을 터.
아니나 다를까,
"쿨럭."
약점 하나 내비치지 않는 의연한 표정으로, 그가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가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데도 표정은 여전하다. 그 기이한 위화감에 마왕의 눈에 희열이 스쳤다.
들뜨는 기분을 꾸역꾸역 억누른 마왕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이름이?"
"...데온 하르트."
데온 하르트. 그 이름을 입안에서 연거푸 굴렸다.
사실 곱씹을 필요도 없었다. 마왕은 그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 보면 그는 용사의 자폭을 제지했고, 그 대가로 각혈을 했다.
이 정도면 다른 마족들도 인정할 터.
상황까지 그의 편인데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다. 마왕은 거칠 것 없이 그의 욕망을 드러냈다.
"마왕군이 될 생각은 없나?"
상대가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마왕은 이 똑똑하고 충성스러운 존재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눈앞의 인간은 권태에 찌들어 있던 자신에게서 흥미를 끌어냈다.
마왕성에 끌어들일 이유는 충분했다.
***
"야, 비켜봐. 안 보이잖아!"
"그래서 저 인간은 적이야, 아군이야?"
"용사의 자폭을 제지했잖아! 적어도 적은 아니겠지."
"하지만 7군단장님을 죽였는데?"
"어어? 마왕님께서 이름을 물으신다!"
"시끄러워! 하나도 안 들리잖아!!"
"네놈이 더 시끄럽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거리도 거리이거니와, 주위가 시끄러운 데다 저 인간의 목소리도 작았기에, 마족 병사는 귀를 기울이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입 모양에 집중했다.
"데…몬, 아…루, 트?"
"데몬 아루트?"
"그런 것 같은데?"
"데몬 아루트라...."
마족보다 더 마족 같은 이름이네.
그렇게 데온 하르트의 이름은, 데몬 아루트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마족 군영에 퍼져나갔다.
***
용사의 자폭을 제지하여 큰 피해를 막은 인간의 업적은 다른 군단장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큰 공로다.
심지어 용사와의 전투 이후 승리연을 겸한 새 인재의 환영회에서 '데몬 아루트'가 술을 거하게 마시고 마왕성을 한바탕 뒤집어놓은 이후로는 실력에 대한 뒷말 역시 나오지 않았다. 그 사건의 희생자가 또 다른 군단장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갑자기 들어와 대뜸 0군단장의 자리를 차지한 인간에 대하여 마왕성의 모든 마족들은 어지간해서는 나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어지간해서는'이다.
"늦는군."
6군단장 벨리탄이 회의실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미간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듯 잔뜩 좁아져 있었다.
그때 당시 그가 세운 공훈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의 강한 무위도 인정한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0군단장 데몬 아루트.
그는 회의가 있을 때마다 매번 늦었다.
지금도 그렇다. 일 때문에 나가 있는 군단장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회의실에 모여 있는데, 또 그 인간만 불참하다니.
결국 벨리탄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이건 정말 한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시끄럽다."
"제이카르! 언제까지 그 오만방자한 행동을 봐줄 생각이냐! 그는…."
"벨리탄."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 있던 제이카르가 느릿하게 눈을 뜨고 벨리탄을 쳐다본다.
저를 직시하는 차가운 시선에 그가 움찔 말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4군단장 이델리아가 툭 끼어들었다.
"오만방자한 건 너 같은데, 벨리탄. 지금 감히 누구를 향해 그따위 무례한 언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해?"
"...뭐?"
"한낱 사용인을 향해서도 말을 높이시는 분한테 오만하다니,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었어."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오만하지 않은 건 아니잖은가! 그렇다면 회의에 늦는 것은 뭐라 설명할 생각이지?"
"뭔가 사정이 있으시겠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발언이었다.
심지어 그녀와 사이가 안 좋은 아실드까지 고개를 끄덕이니 순간이지만 '정말 그런가?' 싶을 정도였다.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제정신을 찾은 벨리탄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 거냐?"
그에 막 이델리아가 대답하려 할 때, 테이블 한쪽에서 쾅! 하고 충돌음이 들렸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모든 군단장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 곳으로 돌아갔다.
상대를 파악하기가 무섭게 몇몇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고,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부는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을 띠기도 했다.
벨리탄은 그중 세 번째 부류에 속했다.
테이블 끄트머리 자리. 그곳엔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벌떡 일어서 있었다.
"모독은 그쯤 하시죠, 벨리탄! 불경이에요!"
"...리리넬?"
"불경이에요!"
"리…."
"불경!"
11군단장 리리넬.
평소 얌전하고 순둥하기만 한 그녀는 단 한 가지 일만 엮이면 미친 듯이 폭주하는데, 벨리탄에게는 불행하게도 그게 바로 데몬 아루트에 관한 일이었다.
그래, 그녀는 데몬 아루트의 광팬이다.
마왕성에 머무는 이들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마물 사냥 때문에 마왕성을 비우는 경우가 잦았던 벨리탄이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향해 마구 삿대질을 해대는 꼬마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과하세요! 못생긴 게!"
"헉."
"리, 리리넬…?"
보기엔 연약하고 앙증맞아 보이지만, 이래 보여도 군단장이다.
벨리탄은 큼직한 도끼를 휘둘러대는 전형적인 무장이고, 리리넬은 군단장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마력량을 지닌 마족으로 뛰어난 마녀다.
둘이 싸움이라도 벌이는 날엔 이 회의장이 날아가 버릴 것은 안 봐도 뻔한 수순.
그렇지 않아도 곧 있으면 마왕님이나 0군단장이 들어올 텐데, 회의장을 날려버린다?
그날로 마왕성이 뒤집히리라.
어쩌면 대규모 군단장 교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다른 군단장들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순간, 회의장 문밖에서 시종이 마왕의 등장을 고했다.
"마왕님과 0군단장님께서 드십니다."
...0군단장의 소식까지 함께.
12. 영웅, 회의, 그리고…(3)
혼란은 잠시였다. 빠르게 가슴을 다독인 군단장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이내 문이 열리고, 마왕과 0군단장 데몬이 들어섰다.
이델리아는 슬쩍 벨리탄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썩어 있는 표정. 솔직히 고소했다. 그러게 누가 감히 데몬을 건들랬나. 그는 마왕성에서 마왕 다음으로 존경받는 존재인데.
가장 상석, 호화로운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다리를 꼰 마왕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다들 앉아."
또다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일었다.
마왕은 자리에 착석한 이들을 쭉 둘러보고는 가장 가까이에 앉은 데온을 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고 있겠지만 침입자가 있었다. 여기에 있는 0군단장이 훌륭하게 잡아냈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데온을 향했다.
여기 있는 이들 전부가 한 가닥 하는 만큼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했으나, 그는 그저 눈을 내리깐 채 큐브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큐브?
군단장들 사이에 눈빛이 바쁘게 오가기 시작했다.
'야, 저거….'
'그래, 아무래도 이번 일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대신 그만큼 확실한 결과가 나올 테지만….'
'자칫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어.'
전쟁 중에 회의가 있을 때 그는 언제나 큐브를 돌리며 자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의견을 들었다.
의견이 마음에 들 경우 큐브는 부드럽게 돌아가 맞춰졌으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짤깍거리는 소리가 막사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칠게 돌아갔다.
거칠게 돌아가든 부드럽게 돌아가든, 최선의 결론은 언제나 큐브의 완성과 함께 나왔다. 문제는 거칠게 돌아갈 경우 꼭 무슨 일이 터져도 단단히 터졌다는 것이지만.
미묘한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마왕의 말이 이어졌다.
"조사 결과,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었다. 물론 마왕성, 그것도 내성까지 들어왔을 정도이니 단순할 리가 없겠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그중에서도 유독 특별하다."
약간의 적의가 서린 눈빛이 자리에 앉은 이들을 훑는다.
그의 눈은 군단장들을 보고 있음에도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 너머로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 마왕은 희미한 살기까지 담아 말했다.
"용사의 찌꺼기였으니까."
"...영웅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리 많지도 않아 제국이 눈에 불을 켜고 모으던 이들 중 하나를, 이곳에 희생양으로 보냈다."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군단장들은 굳이 소음의 원인을 찾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누구의 짓일지는 안 봐도 뻔했으니까.
꽉 쥔 주먹을 그대로 손잡이 위에 얹어둔 채, 마왕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묵직한 압박이 회의장 전체에 쏟아졌다.
"뭐가 목적일까?"
"...."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심지어 최근, 전방에 나가 있던 9군단장과도 연락이 끊겼다. 필시 무슨 문제가 있을 테지."
마왕은 강하다.
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했기에, 그의 선택은 언제나 단순하면서도 하나하나가 묵직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1군단장."
"예."
"네가 가라."
그는 전면전을 치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이카르는 마왕의 대행자다. 그가 직접 나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멍청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잠시 멈칫한 제이카르가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 살짝 올려 마왕을 쳐다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이렇다 할 반문도 없이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담담히 답했다.
"예."
회의실 전체에 미미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당장 전쟁이 터지는 것도 아니건만,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에 마왕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침묵이 깨지고, 한결 가벼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 그럼 이건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 같고, 다음 문제를 논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
"...?"
"용사의 찌꺼기를 무려 혼자서 잡아낸 0군단장에게 어떤 포상을 주어야 할까?"
쉴 새 없이 큐브를 돌리던 손이 멈췄다.
회의 내내 단 한 순간도 책상 위로 올라가지 않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가 그를 마주한다.
저를 향한 붉은 눈을 마주 보며, 마왕은 싱긋 웃었다.
"당사자가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나는 군단장 회의가 싫다. 끔찍하게도 싫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무서우니까!
군단장 전용 식당은 그나마 식사를 하지 않는 이들도 있어 견딜 만한데, 회의장은 어지간해서는 전부 참여하는 자리다. 그러니 얼마나 무섭겠는가.
'가기 싫다….'
매번 회의에 늦은 것도 가기 싫다며 미적대다 늦은 것이다. 아마 데리러 온 마왕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늦었겠지.
아, 이미 늦었나?
나는 잔뜩 땀이 난 손을 옷자락에 문지…르려다가 멈칫했다. 이건 뭐야?
'큐브?'
큐브라니. 물론 내가 회의를 할 때 큐브를 챙기고 다니긴 하지만, 그건 '내가 중심인 회의'일 때 한해서였다.
어차피 날 빼도 잘만 돌아가는 회의, 괜히 눈 마주쳤다가 누가 의견을 묻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시선도 피하고 시간도 때울 겸, 큐브나 만지작거리는 건데….
지금 내가 참석하러 가는 회의는 마왕이 중심인 회의란 말이다!
마왕은 왜 이걸 지적 안 한 거야?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제자리에 두고 오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마왕님과 0군단장님께서 드십니다."
제법 크고 근엄한 목소리와 함께 회의장 문이 열렸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쭈뼛쭈뼛 회의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큐브에 대한 내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들고 와서 다행이다.'
안 들고 왔으면 뻘쭘할 뻔했어.
분위기도 무섭고, 누구도 날 쳐다보지 않으니 그야말로 큐브 돌리기에 최적인 환경이다.
그렇게 새 큐브를 섞었다가 반쯤 맞추고, 다시 섞길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왕이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자, 그럼 이건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 같고, 다음 문제를 논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용사의 찌꺼기를 무려 혼자서 잡아낸 0군단장에게 어떤 포상을 주어야 할까?"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은 것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명백히 마왕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못을 박듯 덧붙였다.
"당사자가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쉬이 입을 열지 않자 덩달아 입을 다문 군단장들이 나와 마왕의 눈치를 살핀다. 마왕은 빨리 말하라는 듯 턱까지 괴며 날 쳐다봤다.
침묵 속에서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을 말하라 이거지?'
원하는 것이라면 얼마 되지 않는다. 마왕의 입장에서 봐도 손쉽게 들어 줄 수 있을 만한 것들 밖에 없….
"사직…."
"안 돼."
"그럼 술…."
"진심이야?"
"...."
"...."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단호하게 끊어내면서 표정 하나는 한결같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채 마왕이 다음 말을 기다린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날 쫓아다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빨리 아무거나 말하고 끝내려 했지만….
그거 외에는 딱히 바라는 게 없는데요…?
"...지금은 없으니 다음으로 미뤄도 되겠습니까?"
"무슨 요구를 하려고. 벌써부터 무서운데?"
픽 웃은 그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치우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군단장들을 쭉 훑은 눈이 스륵 굴러가 벨리탄을 담는다.
본능적으로 그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리라는 것을 눈치챈 군단장들이 몸을 뻣뻣이 세우고, 다시 팽팽해지는 공기에 난 차마 시선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한 채 책상 아래에서 감각에 의존해 열심히 큐브만 돌렸다.
무슨 안건이든 나와는 상관없을 테니까.
"6군단장, 마물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예, 지원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흐음…."
보고서를 뒤적인 마왕이 서류 한 장을 빼 들었다. 초반에는 무덤덤하던 표정이 서류를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일그러진다.
마침내, 마지막 줄까지 읽은 그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확실히 사안이 심각하군. 너와 12군단장만으로는 부족한가?"
"12군단은 현재 마물 사냥을 나설 여력이 없습니다."
순간 마왕의 행동이 멈췄다. 서류를 향해 있던 눈동자가 수직으로 올라가 벨리탄을 향한다.
흔들림 없는, 아니 얼어 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미동도 없는 역안을 보며 난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겠지.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나도 놀랐거든.
저 말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마물 사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군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 원인은 분명 마물일 테고.
"그럼 12군단장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듣기로는 부상 때문에 요양 중이라 하더군."
"고작 마물 따위에?"
"말조심해라. 한낱 미물도 뭉치면 위협적인 적이 되기 마련이다."
군단장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가 바삐 오간다.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12군단이 고작 마물 따위에 당했다니.
'고작' 마물이다. 제국에서는 이른바 '몬스터'라 불리는 실패작들.
마왕의 힘은 마왕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수많은 마족들을 탄생시킨다. 마왕이 위협적인 것은 이 때문이며, 그것은 제국이─ 더 나아가 모든 인간들이 기를 쓰고 그를 제거하려 하는 것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리 녹록지는 않은 법.
태어난 마족들 중 이성을 가진, 진정한 '마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고작 40%에 불과했다. 나머지 60%는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마족'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미물뿐.
제어는커녕 마족마저 먹으려 드는 완연한 실패작이기에, 마왕은 그것들을 '마물(魔物)'이라 칭하며 마족들의 안전을 위해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곤 했다.
'아주 그냥 술술 떠오르네.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나?'
햇빛을 보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더라.
새삼 밀려오는 서러움에 괜히 애꿎은 책상을 노려봤다.
그 사이, 잠시 멈췄던 마왕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조금은 동요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괜히 마왕이 아닌지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침착하고 차분했다.
"서류로는 한계가 있다. 직접 설명해 봐."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마물들의 수가 크게 불어났습니다. 뒤늦게 알고 대처하려 했을 때는 이미 작은 마을들의 반이 짓밟힌 뒤였습니다."
"'반'이라… 그렇다면 남은 반은 어쨌지?"
"성벽이 있는 큰 도시로 피난을 시켰습니다."
벨리탄 무식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판단력이 좋네…?
미안하다, 내가 널 너무 무시한 모양이야. 속으로 영영 닿지 않을 사과를 하며 조용히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문제는 마물들의 수가 너무 많아 성벽을 넘으려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이 흡사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모양새입니다."
"...앞으로는 큰 도시에도 군단장을 배치해야겠군."
"어째서 갑자기 그렇게 수가 는 건지…."
마왕의 혼잣말에 이은 뒷말은 한탄에 가까웠다.
그에 마왕이 반쯤 손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얹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용사가 죽어서 그래. 균형이 깨졌으니까."
그리 말하며 마왕은 나를 한 번 쳐다봤다.
아니, 왜 날 쳐다봐? 내 잘못 아닌데? 애초에 용사를 죽음까지 몰고 간 사람은 댁이잖아?
그럼에도 그의 역안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언제 눈을 돌린 건지 마왕이 정체 모를 서류를 뒤적이며 흘리듯 말했다.
"큰 도시는 네 개이니… 게다가 12군단이 전투 불능이라면 확실히 방비하기 힘들겠군."
"예, 지원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어디… 남는 인력이…."
불길한 느낌이 등골을 훑고 내려간다. 떨리는 동공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책상 아래에서는 큐브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도 내 손이 이렇게까지 신들린 듯 움직일 수 있을 줄은 처음 알았다.
짤깍짤깍짤깍-.
왜 이렇게 불안해하냐고?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잉여 인력 하면 누가 떠오르지? 바로 나다. 모든 군단장들이 도맡아 하고 있는 서류 작업조차 하지 않는 잉여 중의 잉여! 하는 짓이라고는 정원을 불태우고 식판을 엎어버리는 것밖에 없는….
"데몬, 네가 가는 게 좋겠다."
...짤깍.
손이 멈췄다. 내 숨도 멈췄다.
'허억, 안 되지! 숨은 쉬어야지!'
얼핏 누군가 강 너머에서 손짓하는 것을 본 것 같다.
급히 폐에 산소를 공급하자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빠릿한 머리가 원망스러워졌다.
나는 어느새 완성된 큐브를 두 손으로 꾹 쥐고, 속으로 절규했다.
이럴 줄 알았어, 제기라아아아알!!
13. 수하들이 너무 유능해서 미칠 것 같다(1)
큐브가 완성되었다.
그게 최선의 결론이라는 의미.
다만….
마왕을 포함한 회의실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거칠게 돌아갔어.'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마왕은 조심스레 데온의 표정을 살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표정. 그래서 더 신경 쓰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으니.
그렇지만 기분이 좋지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아, 그는 쫓기듯 입을 열었다.
"물론 네가 어느 종류의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어."
"...."
"하지만 마물도 감정이 있어. 오히려 지성을 가진 이들보다 더 감정에 충실하지. 그러니 분명 네 전투 스타일은 잘 먹힐 거야."
"...."
여전히 대답이 없다.
이에 불안해진 마왕이 데온의 눈치를 살피며 느릿느릿 덧붙였다.
"게다가 너, 이전에 술을 찾기도 했잖아?"
움찔.
큐브를 쥔 손끝이 작게 미동했다.
동시에 데온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약간의 당혹감과 부정의 뜻을 내비치는듯한 표정.
이와 대비되게, 그 표정을 확인한 마왕의 얼굴은 제대로 짚었다는 확신을 담고 한결 밝아졌다.
"그거 많이 쌓였다는 뜻 아니야? 이번 기회에 풀어두는 게 좋지 않겠어?"
"...."
너무 노골적이었나.
서늘한 침묵이 칼날처럼 바짝 선 채 사방을 겨눈다.
근원지는 당연하게도 데온.
분위기를 보아하니 뭐라도 더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이미 할 말은 다 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마왕은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평생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데온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렸다.
***
침착하게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통 이해 안 되는 말만 하는 마왕의 발언을 해석하기 위함이었으나 다각도에서 해석해 봤음에도 결론은 하나로 좁혀졌다.
'그러니까, 내가 술을 찾아서 그렇다는 거지?'
이마를 짚으려는 손을 간신히 멈췄다.
핑계 한 번 어설프다. 속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마왕도 이런 것을 이유로 들이밀 만큼 어리석진 않으니 아마 일부러 허술한 핑계를 댔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내가 거절을 해봤자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보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리라.
'하… 진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회한에 잠겼으나, 그마저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내가 긍정을 표하기가 무섭게 테이블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으니까.
"그럼 저도 지원할게요!"
"...리리넬?"
없는 줄 알았던 자리에서 손이 불쑥 올라와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어서 드러난 친숙한 외모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11군단장 리리넬. 가장 안심되는 외양을 가지고 있어 만날 때마다 반가움에 이것저것 챙겨줬었지.
물론 저 녀석이 마왕 다음으로 마력량이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전장에서 소악마라 불리는 것 역시 잘 알고 있고.
그렇지만 인간은 언제나 편협한 사고방식에 붙잡혀 있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나 역시 그런 인간들 중 하나였다.
저렇게 자그마한 꼬맹이가 뭐가 위험하다고. 뭐, 그런 심리로 편하게 대했는데… 지원한다고? 저 아이가?
"큰 도시는 네 개예요. 밀려오는 마물의 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늘고 있다 들었어요."
벨리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긍정에 힘을 얻은 건지 리리넬이 작은 두 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네 개의 도시를 가장 효율적으로 지킬 수 있는 군단장이죠."
"그게 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네! 벨리탄은 도끼를 휘두르는 전형적인 무식한, 아니 무투가예요. 데몬 님은 단검을 쓰시구요."
방금 무식하다고….
나만 들은 거 아니지?
힐긋 벨리탄의 얼굴을 보니 그 역시 들었는지 황당함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다.
뭐야, 둘 사이에 뭔가 있었나? 어째 리리넬이 벨리탄에게 날을 세우는 것 같은데….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는 스타일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자신이 머무르는 성 한 채를 지키는 것이 전부죠."
"그러니 마법을 쓰는 네가 나서겠다고?"
"네!"
"사심은 없고?"
"당연히 있, 네!"
"...."
"...."
군단장들 사이에서 크흠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크흠'이 아니라 '크흡'에 가까웠던 것 같다.
리리넬은 안절부절못하더니 나를 슬쩍 보고는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 어깨를 활짝 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도시는 네 개예요. 그러니 벨리탄과 데몬 님이 한 개씩 맡으시고, 제가 두 개를 맡으면 데몬 님의 수고를… 아니, 이게 아니라."
"리리넬."
"네?"
마왕이 자세를 바꿨다.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턱을 괸 채, 리리넬을 향해 부드럽게 눈가를 접는다. 누구라도 혹할 정도로 화사한 미소였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건 거절을 하기 전, 상대를 희망 고문하기 위해 짓는 성격 나쁜 미소.
곧 있으면 울상을 지을 리리넬을 향해 속으로 미리 위로의 말을 심심찮게 전하던 순간.
마왕이 그 화사한 미소를 유지한 채 한 마디 내뱉었다. 귀를 의심할 정도로 짧은 말을.
"해."
"네?"
"하라고. 허락할 테니까."
***
마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리리넬을 향해 자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특하게도 자처해서 돕겠다 나서는데 어찌 그 얼굴에 대고 뭐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녀는 데온을 좋아하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상을 향한 숭배.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하고, 또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지원한 것이기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같은 도시를 지키겠다고 우긴 것도 아니고, 그저 데온의 수고를 덜어주겠답시고 혼자서 도시 두 개를 맡겠다 한 것이니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만약 그녀가 감정에 휩쓸려 같은 성을 지키겠다는 비합리적인 제안을 내놓았더라면 절대 허락했을 리 없었다.
오히려 화를 냈겠지.
"데몬의 수고를 덜어주고 싶다 이거지? 마음대로 해."
애초에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데온을 보내는 것인데, 괜히 여러 도시를 한꺼번에 신경 쓰다가 되레 스트레스를 받으면 곤란하다.
스트레스받은 데온보다 위험한 것은 적어도 이 마왕성에선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리리넬의 적극적인 태도는 실로 환영할 만했다.
그렇기에 마왕은 본래 마왕성의 결계를 책임져야 할 11군단장의 출정을 흔쾌히 허락했다.
외부의 공격은 마음 편히 상대할 수나 있지, 내부에서 날뛰어대는 아군만큼 상대하기 곤란한 존재는 없을 테니까.
"대신 떠나기 전에 마왕성의 결계를 손보고 가도록 해."
"네! 100년은 거뜬히 버티도록 해놓을게요!"
...100년이나 거기에 있으려고?
마왕은 그저 웃었다.
***
회의가 끝나고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데몬 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정말로 다 준비한 거 맞습니까?"
"예, 완벽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잘 생각해 보세요. 잊은 것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 기억력이라는 게 마냥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혹시 몰라 점검을 겸해 데몬 님과 연이 있는 분들한테 데몬 님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추가로 말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빠진 것은 없었습니다."
완벽해. 너무 완벽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결국 내 입에서는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과찬이십니다. 모처럼 데몬 님께서 오랜만에 밖에 나가시는 건데, 최대한 빨리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
내 부관은 왜 이렇게 유능하단 말인가…!
6군단이나 11군단은 아직 준비가 한창이건만, 우리 군단만 벌써 준비를 마치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단다.
이로써 죽을 날이 한층 더 가까워졌군.
침대에 엎드려 좌절하고 있자니, 에드가 어디선가 검은 로브를 들고 다가왔다.
"가는 곳은 같은 마계이니 붕대까지 하실 필요는 없겠지요."
뭐, 그렇겠지. 해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나는 해가 있는 곳, 그러니까 인간계에 나갈 때는 맨살이 드러나는 모든 곳에 붕대를 칭칭 감고 그 위에 로브를 걸친다.
하다못해 얼굴까지 붕대나 복면을 하고 로브의 후드를 눌러쓰니 어느 정도로 꼼꼼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내 몸이 허약한 것을 어쩌겠어.
눈이나 피부나, 햇빛에 조금만 오래 노출되어도 문제가 생기니 불편해도 가릴 수밖에 없다.
로브만 걸쳐도 충분하지 않으냐 물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자칫 로브가 펄럭이며 손이나 팔, 얼굴 같은 곳의 맨살을 노출할 수도 있기에, 미리 붕대를 감고 그 위에 로브를 걸치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사실 마계에선 로브도 딱히 필요 없지만, 이건 일종의 상징이니까.'
전장에서 '0군단장'은 언제나 검은 로브를 입고 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오죽하면 '사신'이라는 별칭까지 붙었겠는가.
사실 그 앞에 '미친'이라는 수식어가 있었다만, 그건 자의적으로 제거하도록 하겠다. 다른 것도 다른 것이지만 특히 그건 분명 단단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테니.
"데몬 님?"
"아."
침대 시트에 뺨을 댄 채 눈만 깜빡이다 로브를 받기 위해 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로브가 한 걸음 멀어진다.
"...?"
귀찮음을 무릅쓰고 힘겹게 머리를 들었다. 여전히 로브를 들고 있는 에드가 보인다.
재차 팔을 쭉 뻗고 손바닥을 펼쳐 내놓으라는 의사를 보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한참을 기다려도 로브는 내 손에 얹어지지 않았다.
짜증이 치밀었으나 군단장 후보였던 에드를 상대로 짜증 낼 정도의 담력은 없기에, 결국 나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아 웅얼대듯 말을 뱉었다.
"...이리 주시죠."
"입혀드리겠습니다."
"에드, 매번 말하는 거지만 그럴 필요까진…."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
내가 부담스럽다고. 좀 가라, 응?
에드는 다른 모든 부관들을 통틀어 가장 유능한 부관이다.
애당초 군단장 후보였던 녀석이니, 그 가치는 굳이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그 정도로 유능한 인재를 밑에 두어야 하는 내 심정은 어떻겠는가.
유능해서 좋고, 성격도 친절해서 좋은데, 어째 하루하루가 피 마르는 기분이다. 특히 무언가를 시킬 때는 더더욱.
대충 이런 거다.
'너무 많이 일을 시킨다고 날 죽이려 들면 어쩌지?'
혹은 먼 훗날,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들켰을 때.
'고작 그런 놈 주제에 자길 부려먹었냐며 죽이려 들지도 몰라.'
그래서 웬만해서는 일을 안 시키려 하는데… 이 새끼가 일을 안 하면 가시가 돋는 병이라도 걸렸나, 하루가 멀다 하고 일거리만 찾는다.
고작 새로운 퍼즐이나 큐브를 사겠답시고 인간계에 간 일부터, 하다못해 이런 겉옷 시중 같은 소소한 것까지.
'제발 좀 쉬라고 이 자식아!'
이 유능한 인재가 고작 겉옷 시중이나 들겠다니, 양심과 생존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댄다.
하지만 내가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보다, 에드의 설득이 더 빨랐다.
"다른 군단장님들의 부관을 보면 전부 하나같이 반쯤 시체가 되어서 서류를 들고 돌아다닙니다. 심지어 식사를 할 때조차 서류를 손에서 놓질 못하지요. 그런데 저는 그 모든 것을 다크서클 하나 없는 말끔한 얼굴로, 서류 한 장 들지 않은 손으로 식기를 쥔 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 제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
행복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가 바라는 답은 이게 아니겠지.
조용히 입을 다물자, 에드가 희미한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는 입기 좋게 들고 있던 로브를 한 번 가볍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제 존재 이유가 없어질 것 같아 부탁드리는 겁니다. 제가 입혀드리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마음대로."
말이 허락이지,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한숨을 삼키며 에드의 시중을 순순히 받…으려는 순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몸을 빼며 문을 향해 고갯짓했다.
"누가 온 모양인데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로브를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은 에드가 문 쪽으로 향한다.
그 사이, 나는 잽싸게 로브를 주워 들고 후다닥 입었다. 스스로도 뿌듯할 만큼 빠르고 완벽한 솜씨였다.
그런데 에드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데몬 님, 12군단장이 방문했… 스스로 입으신 겁니까?"
"네."
"엉망이잖습니까."
이런, 너무 급하게 입었나.
다시 보니 로브 여기저기가 흐트러져 있다. 그래도 완전히 못 봐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한숨?! 한숨을 내쉴 정도였어?
들릴 듯 말 듯하게 한숨을 내쉰 에드가 다시 내게 다가오더니 이리저리 구겨지고 흐트러진 로브 자락을 정리한다.
헐렁한 로브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끈을 매듭지으며, 그는 조금 전 하려던 말을 다시 꺼냈다.
"12군단장이 방문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12군단장…?"
14. 수하들이 너무 유능해서 미칠 것 같다(2)
아, 생각났다.
6군단장 벨리탄과 함께 마물 사냥을 맡던 군단장. 이름이 아마 '마이어스'였을 것이다.
부상으로 요양 중이라 들었는데…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그 전에, 난 왜 찾아온 거지?
'아, 설마….'
자기 일거리 빼앗았다고 화내려는 건가?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다.
서류 작업 같은 일거리라면 질색할지도 모르겠지만 전투와 관련된 일거리는 군단장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좋다.
그렇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이라는 판단이 든 순간, 나는 재빨리 답했다.
"아니요."
"예? 거절…하시는 겁니까?"
"네."
자고로 안전제일이라 하였다.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잠시 의아한 듯 나를 보던 에드가 이내 거절의 뜻을 밝히려는 듯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살짝 열더니,
"마이어스 님, 죄송하지만…?"
멈칫.
"네가 왜 여기에…."
"데몬 님을…."
"...."
"...."
뭐야, 또 누가 온 건가?
방이 넓은 데다 나를 배려한답시고 작게 속닥거리니 통 들리지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화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는 것이다.
"...알았다."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 살짝 문을 닫아 소리와 시야를 차단한 에드가 나를 돌아본다.
그의 얼굴에는 감추려고 했던 것 같은, 그러나 미처 감추지 못한 탐탁지 않은 감정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데몬 님."
"네."
"정원사 히엔이 찾아왔…."
"12군단장 아직 안 갔죠?"
"예? 예."
"12군단장을 만나겠습니다."
즉답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에드가 이내 얼굴 가득 미소를 피워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째서인지 통쾌한 표정이었으나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 나는 구태여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나? 왜 자꾸 찾아와?
'...무슨 날이긴 하지. 내가 죽으러 가는 날.'
히엔이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아, 히엔의 의도가 사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순수한 의도로 나를 대했다.
다만… 그 녀석과 함께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왔다 하더라도 수명이 대폭 짧아진 느낌이었으니.
그러니 그 미친 정원사보다야, 12군단장이 훨 낫지 않겠나.
게다가 부상까지 입었다 했으니 내게 해를 끼치려 한다 해도 최소한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난 피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내가 상념에 잠긴 사이,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선 마이어스가 어딘가 경직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데몬 님."
무려 경직된 얼굴이다. 종말을 고하는 듯한 표정에 덩달아 나 역시 얼굴이 굳어졌다.
'이거… 위험한 거 맞지?'
12군단장 마이어스. 주 무기는 창. 특징은 너무 과묵하다는 것.
물론 필요할 때는 할 말을 꼭꼭 하긴 한다만, 평소에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을 닫고 있어 시종들 사이에서는 그가 과거에 모종의 사건으로 혀가 잘렸다는 등의 소문이 떠돌고 있다.
물론 나야 회의 중에 그 귀한 목소리를 몇 번 들어보긴 했는데….
'지금이 바로 말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왜 말을 안 해?'
우리 사이에 겨우 인사나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인사를 했으면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침묵이 길어진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아 나라도 말을 하려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리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웃어? 아니지, 웃었다간 약 올리냐면서 주먹을 날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표정? 기껏 인사했는데 무슨 표정이 그따위냐고 할지도.
"...."
"...."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이어스의 표정이 더 굳어진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내가 쓸데없이 유능한 부관을 향해 구원 요청의 눈빛을 보냈으나, 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하는 건지 에드는 되레 한 걸음 물러섰다.
정말 유능하지만 쓸데없는 부관이었다.
차라리 피라도 났으면 싶지만, 평소에는 열린 수도꼭지처럼 줄줄 잘만 나오던 피가 이때만큼은 꽉 잠긴 건지 조금도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속으로 작게 후회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히엔이 나았을지도….'
그동안의 경험을 잊은 듯, 아니 그러한 과거의 경험조차 미화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새삼 깨닫고 있는데,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에드?"
"흠, 크흠, 12군단장님. 오셨으면 말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줘서 고맙긴 한데, 이것 때문에 더 불쾌하게 여기면 어떡하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마이어스와 눈을 맞췄다. 눈이 마주치니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확실히 화가 난 모양인데, 사과해야 하나…?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것은 딱히 없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화내고 싶은 쪽은 오히려 이쪽이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물론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에 낼 정도로 간이 크지 않아 할 말을 고르는데, 대뜸 마이어스가 허리를 푹 숙였다. 절도 있고 각이 살아 있는 행동이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네?"
"이 말을 꼭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정수리를 쳐다봤다.
그다음은 각도 탓에 옷 사이로 훤히 보이는 그의 어깨. 어깨부터 시작되어 상체까지 감싸고 내려가는 하얀 붕대는 그가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 그럼 저 자세는 상처에 그다지 좋지 않을 텐데.
"허리 펴세요."
"예!"
난 그냥 부상이 걱정되어서 허리를 펴라고 한 건데, 무슨 억지로 휘어져 있던 레이피어처럼 튕기듯 허리를 세운다.
오죽하면 '뚜둑' 하는 환청이 들린 것 같았을까.
저러면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 것도 잠시, 역시나 상처에 문제가 생긴 건지 마이어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린다.
나는 고통을 표하는 미간과 재차 붉게 물들어가는 흰 붕대를 애써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화가 난 건 아니라 이거지?'
오히려 내게 사과하고 있으니 뭔진 몰라도 맞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는 건 이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테지.
한 시름 놓았으니 이제 설명을 들어야 할 때다.
그에게 방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고 나 역시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앞뒤 설명 없이 대뜸 사과하시면 어떡합니까."
"어떡… 어… 사과를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방법을 물은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아니… 일단 허리는 펴시고…."
"예."
뚜둑.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에드를 쳐다봤다.
나 얘 감당 못 하겠다. 어떻게 대신해 줄 수 없냐?
'...너까지 경악을 하면 어떡해?'
말끔하던 얼굴에 경악이 서려 있다. 아마 나 역시 그렇겠지. 과묵하기로 유명한 12군단장이 이런 성격일 줄은 누가 알았겠어?
'넌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길 잘한 것 같다.'
그 콘셉트 아주 좋네. 그냥 이대로 밀고 가라.
함부로 입을 열고 다녔다간 나중에 한 번 크게 사고 치겠어.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그의 언행에 휘말리기 전의 대화 목적을 떠올렸다.
"왜 사과한 건지에 대해 물은 겁니다."
"아…."
판도 깔아줬으니 이제 설명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 자식, 왜 이렇게 떨어대?
다리를 얼마나 떨어대는지 테이블이 마구 들썩인다. 이 위에 찻잔이라도 있었으면 아마 차가 넘치고 쏟아져서 난리도 아니었겠지.
기다리다 못한 내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미처 입을 다 떼기도 전에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 부관을 좀…!"
"...?"
휘익.
강한 바람이 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마이어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어디 숨은 건 아닐까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에드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나갔습니다."
"...응?!"
"아무래도 부관을 부르러 간 것 같습니다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먼저 내려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향했다.
뭐 때문에 사과한 건지 궁금하긴 하다만 내 목숨이 달린 것도 아니고, 설명 따윈 듣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기다리고 싶지가 않다. 또 마주하기 불편해.
아무 생각 없이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이내 문이 열렸고,
"...."
쾅.
닫혔다.
"데, 데몬 님! 떠나시기 전에 드릴 식물이…!"
"데몬?! 기껏 마중 나왔는데, 마왕을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냐?"
"저, 저는 12군단장 마이어스 님의 부관입니다! 마이어스 님의 실례에 관해…."
똑똑거리는 노크 소리가 통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쾅쾅거리는 소리로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시끄러워 귀를 틀어막았다.
아,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또 하나의 목소리가 얹어졌다.
"저 마이어스입니다…."
"더 크게 하세요! 더 크게! 데몬 님 화나시면 저 진짜 부관 그만둘 겁니다?"
"저 마이어스입니다!"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문은 열렸다. 애초에 마왕이 문밖에 서 있는데 언제까지고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이 열렸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그렇다. 나는 지금 이 끔찍한 마족들에게 포위되었다.
가장 먼저 나선 이는 마이어스의 부관이라는 작자였다.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이들을 제치고 마이어스의 손을 잡아끌고 나선 그는 물 흐르듯 부드럽게 예를 갖추고는 행동만큼이나 단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데몬 님. 저는 제12군단장 마이어스 님의 부관, 다하르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상당히 불쾌하셨을 텐데 이리 너그러이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깊숙히 허리를 숙인 다하르가 손가락으로 마이어스의 허리를 꾹꾹 찌른다.
그러자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마이어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 예…."
뭐지, 이건.
"무례를 무릅쓰고 제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된 데에는 사정이 있는데요, 다름이 아니오라 제 상관 마이어스 님의 부상으로 데몬 님께서 그 역할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죠."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고.
나는 조용히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들을 죽 훑었다.
이름 모를 식물의 종자를 들고 있는 히엔부터 시작해서, 자신에게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이 불만인 듯 뚱한 표정의 마왕. 그리고 눈앞의 12군단장 마이어스와 그의 부관 다하르까지.
"예상치 못한 일을 떠맡으셨으니 불쾌하고도 귀찮지 않으셨겠습니까. 그에 대한 사과를 하고자 마이어스 님을 쫓아냈… 아니, 마이어스 님이 방문을 했습니다만…."
다하르가 마이어스를 슬쩍 째려봤다.
"…크나큰, 실례를, 저지르셨다고…."
오, 말이 뚝뚝 끊겨 나온다.
이를 악문 듯 낮게 깔려 나오는 목소리가 제법 섬뜩하다. 나는 조용히 침묵했고, 마이어스는 말이 끊겨 나올 때마다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따라 궁금하지도 않은 12군단장의 새로운 면목을 많이 보는 것 같다.
미묘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이러다 정말 12군단장이 내 앞에서 부관에게 갈굼당하는 꼴을 보게 될 것 같아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내 앞에서 그 난리를 치면 곤란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하찮… 과묵한 12군단장의 명예는 지켜주는 편이 좋을 것 같으니까.
"실례라면… 그의 엉뚱한 발언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정말 별거 아니었…."
"예?!"
어, 잘못 짚었나 보다.
괜스레 미안해져 마이어스의 눈치를 살피는데, 다하르가 퍼뜩 고개를 들고 경악하듯 말했다.
"맙소사, 다짜고짜 도망친 것도 모자라 또 얼토당토않은 말까지 내뱉었다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답니까?"
...또?
15. 수하들이 너무 유능해서 미칠 것 같다(3)
역시 12군단장은 입만 열면 사고를 치는 쪽이구만.
누군가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자리에 따라서는 심각해질 수도 있는 문제다.
이를테면 제국의 황제를 알현했을 때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해보자.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특히 이번 황제는 폭군이니 만약 마이어스가 그쪽에 있었다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목이 잘렸으리라 장담한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이 마왕성의 마족들은 나를 그 폭군 황제와 비슷한 성향의 인간으로 보고 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냐고? 나를 보는 놈들의 시선이, 황제를 보는 신하들의 시선과 너무도 닮아 있었으니까.
그러니 부관이 저리도 경악하는 것이리라.
"음… 그게."
긍정하기엔 마이어스가 너무 불쌍해 대답을 미뤘다. 안 그래도 갈굼당하는 것 같던데, 지금이라도 부정해야 하나….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망설이자 다하르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그는 마이어스를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내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데몬 님. 잠시 마이어스 님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다하르가 성큼성큼 문밖으로 나간다.
어물쩡거리던 마이어스는 '마이어스 님, 안 나오실 겁니까?' 하는 상냥을 가장한 분노 어린 목소리에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후다닥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닫힌 문 너머로 '내가 못 살아, 진짜…'라는 한탄부터 시작해서 다하르의 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가 웬만하면 입을 다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이어스 님은 입만 열면 두들겨 맞을 타입이시란 말입니다! 그냥 사과만 하고 나오면 될 것을 왜 데몬 님 앞에서 입을 여셨답니까! 그렇게 죽고 싶으셨습니까? 차라리 그냥 마왕님께 죽여달라 하시죠? 마왕님이라면 데몬 님보다는 곱게 보내주실 텐데요."
과묵한 콘셉트는 부관이 정해준 것이구나. 솔직히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쪽 부관도 이쪽 못지않게 유능한 모양이야.
그래도 에드와 비교하자면 에드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에드는 나를 향해 저런 뼈아픈 언어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으니까.
'...응? 가만, 그러고 보니 이 방, 방음 처리되어 있는데? 그것도 절대 뚫릴 일 없는 마왕의 방음 마법으로….'
방음 문제에 대한 의혹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단 지금 밖에서 들려오는 저 대화에 집중하는 것이 더 재밌었으니까.
그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지, 어느새 방 안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다하르는 입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말을 멈추지 않았고, 마이어스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애잔할 정도였다.
아, 간혹 마이어스도 반발을 하긴 했으나….
"하, 하지만 데몬 님께서 물어보시는데…."
"적어도 대답하기 전에 그게 정상적인 답변인지 생각을 좀… 아, 그렇군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걸 구분하지 못하니 이런 사고를 치는 것인데. 그냥 입을 다무세요. 몸짓으로 답을 하시라고요. 제가 괜히 행동을 교정해 준 것이 아니잖습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굉장한 부관이다.
그 절도 있고 각이 살아 있는 묵직한 행동이 다 그가 교정해 준 것이었다니.
또다시 쪼그라든 건지 마이어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쯧쯧, 불쌍한 자식.
그때, 나와 마찬가지로 저쪽에 귀를 기울이던 마왕이 흥미가 사라진 듯 자세를 바꾸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외부의 소리가 차단됐다.
"잠깐만 풀어둔다는 게 잊고 있었네."
"...?"
"네가 문을 안 열어줘서 잠시 방음 마법을 해지했지."
"네…?"
원래 마왕의 방과 군단장의 방을 포함한 여러 중요한 장소에는 전부 방음 마법이 걸려 있다.
통과시키는 소리는 오직 노크 소리와 그 후 몇 초간의 시간―그러니까 딱 용건과 허락이 오갈 정도의 시간―뿐.
"그걸 독단적으로 제거하시면…."
"응?"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는 마왕이다.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마왕을 쳐다봤다. 옆에서 히엔이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나 저 손에 들린 이름 모를 식물의 종자가 너무 불길해 보여 슬쩍 외면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긴. 모처럼 네가 밖에 나가는데 배웅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아… 그럴 필요까진…."
"그러게 말이야.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말이지. 설마 문전박대를 당할 줄이야."
마왕이 원래 이렇게 뒤끝이 있었나?
뭐라 답해 봤자 제 무덤을 파는 수준이라 차마 답하지 못하고 어설픈 표정으로 눈만 굴렸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없다.
기껏 해봐야 운에 맡기는 것 정도가 전부.
다시 한 번 피가 간절해졌다. 설마 아픈 사람을 상대로 뒤끝을 보이진 않겠지.
어떻게 하면 피가 나왔더라. 혈압만 좀 올라도 나왔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렇게 속에서 끓어오르는 느낌으로….
"데몬 님…."
"으, 네?"
아, 아차. 정신을 놓은 나머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고 말았다.
목소리의 주인을 뒤늦게 파악한 내 얼굴이 희게 질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망했다는 생각에 잠시 얼어붙었다가 천천히 눈을 굴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확인했다.
역시나, 그곳에는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가 닿았다는 사실이 기쁜 듯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히엔이 있었다.
그는 웃는 낯으로 손에 들고 있던 '전혀 유쾌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데몬 님께서 밖으로 나가신다 하여 호신용으로 쓸 만한 식물의 종자를 가져왔습니다."
"...혹시 이거, 식인 식물입니까?"
"네, 그뿐만 아니라 마족도 잡아먹는 아주 강력한…."
오오, 오른다. 혈압이 오르고 있어.
몸속 저 아래서부터 비릿한 향이 느껴진다. 이것이 피를 토하기 전의 증상이라는 것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가를 가렸다.
아니나 다를까,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이내 입술이 벌어지고, 그것을 뱉어내려는 순간.
"우…."
콰앙!
"데몬 님!"
"…웩?!"
왕진 가방을 든 벤이 등장했다.
뭐야, 뭐가 저렇게 빨리 와?!
아, 맞다. 내 주치의, 무슨 마법 장치 같은 거 가지고 있댔지. 마력석이랬나.
어쩜 저리도 유능할까.
'이 상황을 벗어나기도 전에 오면 어떡하냐….'
너무 유능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
유능한 주치의 덕분에 사태는 제대로 터지기도 전에 수습됐다.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핑계로 히엔을 몰아내고, 문밖에서 한바탕하고 있던 12군단장 마이어스와 그 부관까지 돌려보낼 수 있었으니 딱히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걸 핑계 삼아 이번 임무를 취소하려 했으나….
"저, 이번 임무…."
"응? 아… 이 지경이 되어서도 임무에 집착을…."
집착이라니, 지금 무슨 개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