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승전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참석할지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아니, 참석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됐다.
궁정 비서실에서도 승전식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심지어 공신 명단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황태자를 비롯해 각 황자, 황녀들은 자신의 후원 세력을 공신 명단에 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평소 황위에 뜻이 없다고 밝힌 막내 오황자 류진철을 제외하고, 황자와 황녀들은 공신 명단 확정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황태자 류진영은,
"이 명단으로 하지. 불만은 없을 거다. 너희들이 원하는 사람들 목록에 다 넣었다."
이황자 류진수가 제동을 걸었다.
"이름이 들어가면 뭐 해요. 제 사람들은 죄다 3급, 4급, 5급 공신에 들어갔는데,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형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1급, 아니면 2급 공신에 이름을 올려놓고선."
사황자 류진웅도 불만이 많았다.
"둘째 형님은 그나마 숫자라도 많지요. 전 이게 뭡니까? 고작 다섯 사람?"
이황녀 류진아도 류진웅을 거들었다.
"맞아. 큰오빠는 우리가 같은 배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차별하는 거야? 여기 없는 진철이 몫으로 몇 사람 더 넣어줘."
삼황자 류진표라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좋습니다. 다 좋은데, 이놈 이름은 뺍시다."
"누굴?"
"태홍 바이오 김태주, 이놈이 한 게 뭐 있나요? 약 팔아 돈만 벌었지, 전투에 참여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같은 어머니 염황후에게서 난 일황녀 류진희와 삼황녀 류진서도,
"그래, 진표 말대로 김태주 이름은 빼."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오빠들."
물론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자신들의 든든한 지지 세력이었던 혼다 카즈오와 혼다 지로가 파주 영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제정원에서 나온 조사 결과.
혼다 부자는 이혼 선언을 통해 자신들과 갈라서려고 했던 김웅방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규슈 영지의 각성자들을 끌고 파주를 침범했는데, 그전에 정보를 미리 알았던 김웅방은 구례의 김태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김태주와 김웅방이 치열한 전투 끝에 혼다 부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게 전부였다.
제정원 측은 적법한 절차에 따른 정당방위라면서 문제 삼지 않았고.
김태주는 체포되지도 않았다.
염황후는 격노했다.
삼황자 류진표, 일황녀 류진희, 삼황녀 류진서도,
감히 일개 기업인 따위가!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
혼다 부자의 사망은 염황후에게 치명타였다.
든든한 무력과 재정 지원이 동시에 끊어진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리고 다른 후원자들에게도 보여줘야 한다.
김태주를 그대로 두면 다른 지지 세력이 동요할 터, 염황후와 삼황자의 리더십이 흔들리게 될 것이 틀림없다.
어차피 황제가 죽으면 김태주는 끈 떨어진 연,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래서 공신 명단에 놈의 이름이 올라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삼황자 류진표의 제안에 황태자도 이황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류진표가 왜 이러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김태주 이름만 빼면 되겠느냐?"
"네, 그럼 공신 명단에 불만을 가지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모두가 찬성했다.
태주의 이름은 즉시 명단에서 지워졌다.
그 후에도 몇 차례 토론이 오고 가고, 양보와 타협이 이루어진 끝에, 드디어 공신 명단이 확정됐다.
※ ※ ※
승전식을 하루 남겨둔 시점.
신문과 방송에서 천리장성 웨이브 전쟁 공신 명단이 발표됐다.
승전식에 참가하려고 준비 중이었던 태주도 공신 명단을 확인했다.
'음? 내 이름이 없어?'
어찌 된 일이지?
승전식에 참여하라고 초대해 놓고선.
'뭐, 잘됐네. 안 가면 되지.'
어차피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가지 않는 게 좋은 일.
'슬슬 여행 계획이나 짜 볼까?'
새로운 독물을 찾아서 해외로 가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걸려온 금수호의 전화로 여행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 설마 공신 명단에 없다고 해서 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지?
"그럴 생각이었는데요?"
- 허허, 승전식에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텐데, 그걸 안 보겠다고?
"나중에 들으면 되죠."
- 실시간으로 봐야 더 흥미진진할 걸세. 올라오게. 서필명 비서관이 마중 나올 거야.
하는 수 없다.
가보긴 해야지.
드디어 승전식 당일.
뉴서울에 상경한 태주는 서필명 비서관과 함께 입궁했다.
황궁 5번 게이트를 지나 행사장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태주에게 쏠렸다.
'김태주? 저자는 왜 왔어?'
'맞아. 공신 명단에 없잖아.'
'구경하러 왔겠지.'
'그런가? 하긴 공신이 아닌 사람도 많이 왔으니까.'
태주는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고 서필명 비서관이 안내하는 맨 앞자리로 가 앉았다.
'맨 앞자리?'
'왜 저기에 앉는 거야?'
'황족들 아니면 1급 공신들 자리 아닌가.'
그러자 염황후를 중심으로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태주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염황후,
태주가 앉은 자리로 와서,
"네가 김태주란 놈이구나. 감히 그런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어?"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짓을 말입니까? 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만."
"하! 듣던 대로 오만한 놈이구나. 네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설마 폐하를 믿는 것이냐?"
염황후는 태주를 비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그래, 기대해라. 승전식이 끝나고 어떻게 되는지 보자꾸나."
삼황자도 왔다.
그러나 염황후와는 다르게,
"네가 살아날 길은 있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없던 걸로 해주지."
이런 제안이 나올 줄 알았다.
"전 황위 다툼에 개입하기 싫습니다."
"이런 시건방진 새끼! 내 지원 세력이 규슈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너와 네 회사, 갈가리 찢어주겠다."
하아, 이런 꼴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닌데.
그래도 지루하지 않게, 재미는 있네.
이윽고 승전식이 시작됐다.
행사장의 모든 문이 닫혔다.
식전 행사가 끝나고, 공신 명단을 발표할 차례.
행사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원래는 황제 폐하께서 승전식을 주재하실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고는,
"하지만 폐하의 옥체가 불편하신 관계로 대신 황태자 전하께서 승전식을···,"
사회자 발표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으로 올라가는 황태자 류진영.
그때였다.
벌컥!
닫혀있던 행사장 문이 활짝 열렸다.
뭐지?
왜 문이 갑자기 열려?
문을 통해 안으로 걸어오는 한 사람.
바로 금수호 비서관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행사장 안에 울려펴졌다.
"위대한 삼한제국의 건국자이시며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십시오!"
뭐?
황제가?
아파서 누워있다는 사람이?
대체 무슨···,
순간!
저벅저벅,
제국군 정복 차림에, 형형한 눈빛으로 힘차게 걸어 들어오는 황제, 그랜드마스터답게 엄청난 위압감 드러내고 있었다.
우우우웅!
행사장 전체에 진득한 마나의 기운이 몰려들었다.
과연 황제였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기세를 뿜어낼까?
경악한 표정의 황후들.
연단에 올라가려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는 황태자.
그리고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입만 딱 벌리는 황자와 황녀들.
하지만 틀림없었다.
건재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충격에 빠진 사람들.
황제 와병설에 베팅한 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저 망했다는 생각뿐.
황제 류태현은 연단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태주의 자리에서 멈춰서서.
"왔는가?"
"네, 폐하!"
"기다리는 동안 심심했겠군. 자네가 키우는 고양이라도 데리고 오지 그랬나? 한심한 놈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나았을 텐데."
태주는 빙긋이 웃었다.
"심심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미있던데요?"
"이제부터 더 재미있어질 거야."
황제도 함께 웃었다.
그들이 나누는 다정한 대화.
염황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삼황자도 마찬가지였다.
※ ※ ※
선계(仙界).
분명 선인들의 영상 촬영 목적은 '인사'였다.
다른 세상, 독선과 같은 영혼의 김태주에게 하는 감사 인사.
그래서 당군악은 막지 않았다.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리고 태주는 신선들의 인사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철장 선인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이미 삼한제국의 언어를 통달한 귀곡 선인이 써준 대본을 더듬더듬 읽으면서.
"어···, 아, 안녕하시오, 김태주 대협! 그대가 준 짝퉁 여의주로 만든 무기들이 다 완성되었소. 곧 독선이 전해줄 거요. 그, 그런데 그 뭐더라? 콜라? 그게 참으로 시원하고 맛나더이다. 그냥 그렇다고."
태백 선인도,
"주선 태백 선인이오. 신선주는 잘 받으셨나 모르겠군. 항상 은혜에 감사하고 있소. 소맥이 오면 더더욱 좋겠고. 드라마 보니까 칵테일이라는 게 나오던데, 하이볼, 블랙 러시안? 그건 어떤 술로 만드는 거요? 진심 궁금해서 하는 말이오, 허허허!"
귀곡 선인도.
"지구라는 세상을 더 알고 싶구려. 그대의 세상을 탐구할만한 서적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되련만. 이를테면 백과사전이라든가, 아! 언어는 걱정하지 마시오. 금방 익히면 되니까."
신선들의 뻔뻔한 말에 당군악은 기가 막혔다.
뭐? 인사?
'이런 거지새끼들이.'
대놓고 물건을 요구하다니.
검선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태주 대협! 열심히 복마검법 시연했소. 그대의 수하들이 잘 익혔으면 좋겠군. 참! 만리비검은 잘 사용하고 있소? 난 탈 것이 없어서 걸어 다니오. 드라마 보니까 바이크? 할리 뭐라던데, 그거 재밌겠더군. 그렇다고 보내 달라는 건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시오. 헌데 다리가 조금 아프군."
신선들 뿐인가?
서왕모와 미호 선자도 정신이 없었다.
신선들 노는 꼴을 보고는 당군악을 졸라 또 다른 태블릿 하나를 손에 넣은 그녀들.
"왕모님, 찍겠나이다."
"그래, 난 준비됐다."
몸을 살짝 비틀면서 한 손은 얼굴에 대고 고혹적인 미소를 띠며 렌즈를 응시하는 서왕모.
찰칵!
"어, 어서 이리 가지고 오거라."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서왕모.
"하아, 얼굴이 너무 어둡게 나왔어. 분이라도 바를까?"
어떻게 알았는지 두 손가락으로 찍은 사진을 확대도 해보고 다시 축소도 해보고,
그러다가,
"응? 갑자기 얼굴이 하얘졌구나. 어째서 이런 거지?"
"왕모님께서 이걸 건드려 그런 것 같사옵니다."
"이걸? 어디···, 오! 훨씬 예뻐졌네. 과연 신기한 물건이로다."
필터마저 찾아냈다.
여기가 선계가 맞나?
인사 영상을 다 찍었는지 귀곡 선인이 히죽 웃으며 태블릿을 들고 당군악에게 왔다.
"자, 인사 다 했소. 이제 보내면 되오."
인사는 무슨!
어림도 없다.
보내기 전에 싹 지워버릴 것이다.
바로 그때!
찌르르르르···,
하필이면 지금 신호가?
'하아,'
어떡하지?
지우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검선의 복마검법 시연 장면이 들어있어 보내지 않기에도 뭐하고.
어쩔 수 있나.
그냥 넣을 수밖에.
< 승전식(1) > 끝
ⓒ 꾸찌꾸찌
=======================================
< 승전식(2) >
강호 무림에서도 절세 고수들의 기도는 제각각.
도가(道家), 불가(佛家)처럼 경지에 오를수록 기세를 안으로 집어넣어 평범함에 가까워지는 고수들이 있는가 하면,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기세를 발산하는 패도(覇道)의 고수들도 있다.
삼한의 황제, 류태현의 경우는 후자.
태연하게 걸어간다거나,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다거나, 지그시 바라본다거나, 이런 일상적인 행동에서도 기세가 줄줄 흘러나왔다.
마나를 끌어올리지도 않았다.
스킬을 발현하지도 않았다.
살기나 피어를 발산하지도 않았다.
그냥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지배해버린다.
카리스마 그 자체.
병실에서 콜록거리던 환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패황, 패도의 황제.
그랜드마스터 류태현.
60년 동안 제국을 통치해온 절대 군주.
태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비슷한 무위의 고수들을 찾는다면 누가 있을까?
천마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그러나 팽가의 가주 팽도중보다는 훨씬 강하다.
구파의 장문인 급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
자신과 비교하면 어떨까?
9성의 혼원무상독령공, 살짝 부족하다.
능히 일전을 치르려면 10성 대성 혼원무상독령공이라야 비빌 수 있을 정도.
황제는 태주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연단 위로 올라갔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황태자를 향해.
"공신 명단 내놓거라."
"여, 여기 이, 있사옵니다."
황제는 명단을 들고 연단 단상 앞에 섰다.
침묵이 흐르는 행사장.
이쪽저쪽에서 사람들의 침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행사장에 모인 장성과 기업인, 그리고 고위 관료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승전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후가 문제였다.
황제가 자신의 건재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이상, 제국은 어떤 식으로든 그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명단을 살펴보던 황제는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그러더니,
쫘아아악!
손에 든 종이를 찢어버렸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야. 제국의 정의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군."
황제는 황태자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진영아."
"···네네, 폐하."
"공신 명단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어. 논공행상의 중요성을 진정 모르고 한 짓이냐? 정작 들어가야 할 사람은 빼버리고, 아니면 4급이나 5급에 처박아놓고."
"죄, 죄송하옵니다."
"멍청한 군주가 얼마나 빠르게 국가를 말아먹는지 새삼 깨달았다. 황제정을 공화정으로 바꾸고 싶은 심정이야."
황태자 류진영도 마스터.
하지만 황제의 기세에 눌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었다.
"이것뿐이 아니다. 네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입만 아프다. 행동은 가볍기 그지없고, 이기심만 가득하며, 자신의 주변만 챙기는 널, 과연 누가 삼한의 황태자라고 생각할까?"
"어···."
"책임을 지거라."
황제가 선고를 내렸다.
"오늘부로 황자 류진영의 삼한제국 황태자 자격을 박탈한다."
깜짝 놀란 최황후가 벌떡 일어났다.
"폐하!!!"
"왜? 불만 있소?"
"당연하지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리고 당신은 책임이 없나요?"
"내 책임을 알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오."
"···."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황태자의 표정.
반면 다른 황후와 황녀들은 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표정 관리만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는 황제.
"다들 참으로 아둔하구나. 너희들이라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느냐? 다른 황자와 황녀들도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황궁에서 나오는 모든 지원을 끊겠다."
순식간에 변하는 표정들.
지원을 끊겠다는 말은···,
"궁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너무 편하게 살았지? 이제부터 너희들은 모두 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쫓겨난다는 의미였다.
"제국의 세금이 아깝다. 스스로 벌어서 살아라. 일자리라도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민간 길드를 들어가든, 군에 입대하든, 너희들 진로는 스스로 개척하라."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 자격 박탈이나 마찬가지.
황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또한 황자, 황녀에게 쥐새끼처럼 빌붙어왔던 소위 후원자들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받았던 특혜를 모두 반납하라."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들은 거의 다 황자 황녀들의 후원 세력들.
"세무조사부터 시작해서 경찰국 조사까지, 잘못이 있다면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 부당하다고? 어디 수작질해 보아라. 진짜 부당한 것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지."
그들은 저항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가 누군데?
대기업이라도 하루아침에 망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실제로 그런 사례도 많았고,
그리고 염황후에게 눈길을 돌리는 황제.
갑자기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염황후는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보게, 염황후."
"폐, 폐하!"
"그대는 삼한의 원칙이 그토록 우스웠던가?"
"···무슨 말씀을?"
"혼다 카즈오, 그놈에게 뭘 약속했나?"
염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오, 오해이시옵니다."
"반역자와 손을 잡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
황제의 입에서 반역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건 일종의 심판이고 낙인이었다.
"그동안 일부 일본계 제국민들을 불쌍한 마음으로 대하여 왔다. 땅을 잃은 슬픔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헌데 이번엔 선을 넘었더군. 짐이 직접 신하에게 하사한 파주 영지를 빼앗으려 들어? 이게 반란이 아니면 뭔가?"
염황후는 부들부들 떨었다.
하루아침에 반란자가 된 셈이니.
"그대를 별궁에 유폐할 것이다. 적어도 10년 동안은 누구와도 만나지 말라."
"···폐, 폐하! 자, 자비를 베푸옵소서."
"이것이 그대에게 베푸는 최선의 자비다."
황제는 염황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삼황자 류진표에게.
"진표야."
"···네, 마, 말씀하소서."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너에게 황자 지위를 빼면 대체 뭐가 남을까?"
"아아아···."
"황가의 족보에 네 이름을 계속 남기고 싶으면 달라져야 할 것이다."
삼황자 류진표는 반쯤 넋이 나갔다.
호적에서 팔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나마 있던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런 말을 들은 황자에게 누가 손을 뻗어올까?
"토,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황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금수호에게 말했다.
"파주 영지 김웅방을 들라 하라."
"네."
금수호가 손짓을 하자 김웅방 준장이 열린 행사장 문을 통해 들어와, 황제가 선 연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고생이 많았다. 그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다 내 불찰이야."
"아닙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파주 영지를 반납하겠다는 소신은 변함이 없는가?"
"이미 결심했습니다."
"그렇군. 그럼 뭘 원하는가?"
"소신을 변방으로 보내주십시오. 지휘관 보직을 맡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제국을 위해 백의종군하고 싶습니다."
"백의종군이라···, 좋다. 그대의 선택을 존중하겠다."
"감사합니다."
태주는 놀라지 않았다.
아버지의 선택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어릴 적부터 봐왔다.
영지를 운영하느라 평생을 다 바쳤던 아버지.
그러나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파주 영지가 족쇄가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겪은 비극의 원인도 영지 때문.
그래서 족쇄를 벗어던지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도 어찌 보면 현명한 결정.
'떠나기 전에 선물이라도 해드려야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황제의 칼춤은 계속됐다.
특히 염황후, 삼황자와 결탁했던 일본계 세력들에 대한 심판은 무자비했다.
이것도 슬슬 지겨워지려던 찰나.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은 연단으로 올라오라."
오라면 가야지.
"이제 승전식다운 행사를 진행해 보겠다."
황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매우 부드러웠다.
"천리장성 웨이브에 그대가 발명한 신약이 없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기업가로서 이익을 취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수많은 제국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그 전에 모기독 해독제와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과의 협력을 통해 지리산 마수 대토벌 작전을 성공시켜 웨이브 위험의 싹을 잘라냈다."
"그뿐인가? 홀로 구례의 3인조 마인을 처단하고, 뉴서울에 출현한 마인을 생포했으며, 제정원과 함께 합빈 교도소 마인도 잡아 제국의 안녕에 기여했다."
듣고 보니 한 일이 엄청 많다.
"그리하여 삼한제국 황제의 권한으로 그대에게 구례 종신 시장직을 수여하도록 하겠노라."
종신 시장.
전에 없었던 새로운 직위.
미리 알고 있던 내용이라 놀라진 않았지만.
"그리고 공석이 된 파주 영주의 직위도 함께 부여한다."
"···네?"
갑자기?
"비록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원래 파주의 적법한 계승자는 김태주 회장, 그대였다. 부디 부친이 못다 한 일을 이어받아 파주 영지를 발전시켜 주기를 희망한다."
이건 아니잖아?
태주는 눈빛으로 황제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런 태주의 눈을 슬쩍 피해버리는 황제.
"···흠흠, 더, 더불어 훈장과 함께 소정의 부상도 수여하겠다. 금수호 비서관!"
"네, 폐하!"
미리 준비했는지 훈장과 상품이 든 상자를 가지고 올라오는 금수호.
황제는 먼저 훈장을 들어 태주의 가슴에 달아줬다.
그러자 얼굴을 황제에게 가까이 가져가 속삭이는 태주.
'폐하? 파주 영지 말은 못 들었습니다만.'
'거참, 좀 넘어가세. 남들은 땅을 못 받아서 환장하는데.'
'부담되니까 하는 소리지 않습니까?'
'전에도 이야기했듯 사람만 잘 쓰면 돼.'
'그게 그렇게 쉽습니까?'
'해보게. 생각보다 쉬워. 힘든 일이 있으면 수호가 도와줄 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금수호 비서관도 목소리를 낮추며 끼어들었다.
'이참에 절 파주 영지 행정관으로 임명해주시지요, 폐하.'
'···응?'
'솔직히 김회장이 두 군데 영지를 한꺼번에 경영하기 벅차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옆에서 도와주면···,'
'흐흐흐, 내가 자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옆에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하아! 왜 제가 잘되는 꼴을 못 보십니까?'
그 콩고물이 뭐겠나?
선도와 신선주지.
그래서 황제는,
'서필명 비서관 어떤가? 일 처리에 있어서는 수호보다 훨씬 나아.'
'흐음,'
'5년 동안 파주로 파견 보내주지.'
생각해보니 괜찮은 것 같다.
'그럼 뭐,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태주의 손에 쥐여준 상자.
무기는 아닌 것 같다.
무척 가볍다.
'이건?'
'아공간 마법 가방이네. 자네가 가지고 싶어 했잖아.'
'오!'
마침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사려고 했던 물건.
무한공간이 있는데 이게 왜 필요하냐고?
사실 아공간 마법 가방과 비교해 신선의 법술 중 하나인 무한공간은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다.
공간의 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수납의 편리함, 넣을 수 있는 물건의 크기,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도.
그러나 당군악에게 물건을 보내기 시작한 이후부터 항상 해온 생각.
공유창고가 너무 작았다.
기다리다 보면 커진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공간이 모자랐다.
그런데 아공간 가방이 있다면?
잡다한 물건을 가득 채운 가방이 공유창고 안에 들어간다면?
그럼 더 많은 물건을 보낼 수 있다.
빨리 실험해봐야지.
제발 가능하길.
그런데 승전식은 언제 끝나?
※ ※ ※
선계(仙界).
신선들이 시청하는 드라마 중에는 지구에서도 300년이 지난 것들이 다수 있었다.
작금의 지구 문명은 과거 찬란했던 문명을 복원하거나 되살리면서 발전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300년 전 드라마와 현재 지구의 문물은 큰 차이가 없다.
TV도 마찬가지.
무려 85인치 크기의 초고화질 대형 TV가 선계에 첫선을 보였다.
대목 선인이 부리나케 받침대 3개를 제작해왔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당군악이 TV를 설치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선인들.
"크고 아름다운 TV구나."
"벽에 걸어야 하는데, 천막이라는 게 아쉬워."
"빨리 건물을 만듭시다."
"맞소. 처음부터 거창하게 지을 필요 없지 않소. 천막보다 좋으면 되지."
"의자도 너무 불편해. 솜이라도 깔아서 푹신하게 만들어야지."
받침대에 TV를 올리고, 전원을 연결하고, 또 태주가 보내온 작은 스마트폰에 케이블도 연결하면서, 외부 입력 방식도 설정하고.
핏!
화면이 커졌다.
"됐다!"
"이제 볼 수 있는 건가?"
"일단 아무거나 틀어봅시다."
스마트폰에는 85인치에 걸맞게 4K UHD를 지원하는 영상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용량이 커서 컨텐츠 숫자는 몇 개 되지 않았고.
당군악은 저장된 영상 중 아무거나 실행했다.
그러자 시작되는 영화.
"오오오오!"
"이렇게나 선명하다니."
"빔프로젝터와는 비교도 안 되는군."
"과연 초고화질이라 불릴 만하오."
"그런데 저 위에 숫자는 뭐요? 18? 제목인가?"
영상이 시작되었다.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나왔다.
"얼굴의 점까지 다 보이네."
"진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 같구나."
"저 안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해도 믿겠소."
오랜만에 보는 영화였다.
장르는 범죄 관련 수사물.
스피커바도 좋은 건지 소리도 웅장했다.
형사들이 마약을 밀매하는 조직을 수사하고 소탕하는 것이 주된 내용.
선인들은 중간중간 탄성도 지르고, 스토리에 대해 열띤 토론도 해가며 영화에 집중했다.
한편 당군악은 TV를 틀어놓고 잠시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보낸 물건은 선도를 비롯해 검선의 복마검법 시연 장면이 담긴 태블릿과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재료로 철장 선인이 종류별로 만든 암기들.
그러다 보니 공유창고를 다 채우지도 못했다.
저쪽에선 항상 꽉꽉 채워서 주는데.
좀 더 많이 주고 싶다.
언제 한번 선계 나들이나 갔다 와야지.
영수가 사는 환수계와 요괴가 사는 요마계도.
갓 등선한 터라 이 넓은 선계를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했다.
'그나저나 철없는 선인들에게 실망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더없이 욕망에 충실한 선인들.
하긴 이곳에서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을 지내 온 그들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얼마나 무료하고 따분한 삶이었을까?
지구에선 흔하디흔한 영화에도 저렇게 열광하는 걸 보면.
그런데?
'···응?'
순간적으로 신선들이 조용해졌다.
숨죽인 채로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장면이 나왔길래.
"헉!"
85인치 4K UHD TV로 보이는 살색의 향연.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 야릇한 신음.
설명하기에도 낯 뜨거운 장면이 화면 가득 펼쳐지고 있었다.
"미친!"
당군악은 서둘러 리모컨을 들었다.
픽!
하고 꺼지는 화면.
"누, 누구야!"
"독선, 당신이오?"
"···왜 꺼?"
당군악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민망하니까 이 장면은 건너뜁시다."
그러자 쏟아지는 불만.
"참나! 이걸 못 봐? 내 나이가 몇인데?"
"저 장면이 스토리 상 얼마나 중요한 흐름인지 알고나 하는 짓이오?"
"감독이 저 장면을 왜 넣었겠소?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
"우리 이래 봬도 신선이야! 저걸 보고 흔들릴 것 같소?"
"쯧쯧, 겉만 보지 말고 전체 맥락을 이해해야지."
"독선! 실망이오. 영화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결국 다시 틀 수밖에 없었다.
< 승전식(2) > 끝
ⓒ 꾸찌꾸찌
=======================================
< 도약을 위한 준비 >
황제가 사정의 칼날만 휘두른 건 아니었다.
태주 이후로도 진짜 공신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이 진행되었다.
황제와 금수호, 그리고 김송겸 합참의장이 따로 작성한 명단에 적힌 공신들.
그리하여 승전식이 끝났다.
황제와 별도의 만남은 없었다.
금수호의 말에 따르면 황가의 기강을 세울 계획이라 매우 바빠질 예정이란다.
태주는 서필명의 안내를 받아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김회장님, 지금 나가시면 매우 귀찮을 겁니다. 조용한 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나가시죠."
아마 황궁 밖을 나가자마자 기자들이 달려들 터, 그들 뿐인가?
제국의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김태주를 만나기 위해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달려들겠지.
그래서 행사장 옆에 딸린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 기회를 빌려 서필명 비서관에게 은근하게 말을 건네는 태주.
"혹시 알고 계세요? 파주로 파견 근무 나갈지도 모른다는 거."
"네, 조금 전에 금비서관님에게 들었습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졸지에 뉴서울에서 떠나게 됐네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가로운 곳에서 몇 년 살아보는 것도 제겐 새로운 경험이라서요."
한가로운 생활이라.
과연 그렇게 될까?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 한가롭지는 않을 겁니다. 조만간 엄청나게 바빠질 거예요."
"네···?"
"파주를 제국 남부 지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만들어볼 작정이거든요."
"아!"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성공하면 몇 배의 이익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서필명 비서관, 아니 행정관님이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대신 연봉은 지금 받는 돈의 2배를 드리죠."
"흠. 그건 안 됩니다."
서필명은 불가능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전 아직 공무원입니다. 파견되어도 똑같을 거고요. 정해진 월급만 받아야 합니다."
"그럼 공직 관두고 넘어오세요. 파주에 정착하시면 연봉 3배 챙겨드릴게요. 연봉 협상은 1년마다 가능합니다."
"네? ···황궁 비서관 연봉이 생각보다 꽤 많습니다. 대기업 부장급인데요?"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3배. 또한 종신고용 보장,"
"···어."
서필명의 눈동자가 마구마구 흔들렸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자.
"그리고 분기별로 보너스도 지급하고, 자녀가 있으면 학비 지원에, 차량 지원, 집도 공짜로 드립니다."
황궁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이 정도는 질러야 영입할 수 있지.
그래도 급하게 강요하진 말고.
"천천히 결정하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참! 부탁이 있는데."
"뭐든 말씀하십시오."
"가방 하나만 구해주실래요? 볼링공 두 개 정도 들어갈 만한 크기에,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걸로."
"바로 구해드리겠습니다."
서필명이 나가고, 잠시 홀로 시간을 보내는 태주.
'파주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곳은 구례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파주다.
먼저 대규모 건설공사를 통해 기반시설부터 다지자.
'약품 공장도 지어야겠어. 어차피 새살쑥쑥과 생기불끈 생산량이 턱없이 모자라니까.'
아직도 사람들은 생기불끈 드링크제를 구매하기 위해 아침부터 약국이나 마트 앞에 줄을 서야 하는 실정.
그래서 수출은 엄두도 못 낸다.
삼한제국 수요량의 절반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판국인데.
'영토도 넓혀야지.'
파주는 서해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 영지.
동쪽은 연천 영지와 맞닿아있고, 북쪽엔 DMZ 마수 밀집지대가 있다.
영토 확장은 마수 밀집지대를 토벌하면 된다.
제국법에 의해 마수를 완전하게 몰아낸 땅은 바로 영지로 귀속할 수 있다.
'DMZ는 일이삼백이만 풀어도···,'
혼자서 토벌이 가능할 것이다.
비욘드 엘리트를 제외하면 일이삼백이보다 강한 마수는 없다.
'그리고 구례에서 열심히 수련 중인 제자들도 있고.'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지만 기분은 좋다.
'파주하고 구례 왔다 갔다 하려면 정신없겠구나.'
순간!
똑똑,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
'벌써 가방을 구해왔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한 사람,
"···응?"
"형님!"
오황자 류진철이었다.
"황자님"
"에이, 진철이라 불러주세요. 저 이제 완전 개털 됐는데."
"어떻게 여길?"
"흐흐, 행사장 나가시는 거 보고 몰래 따라왔습니다."
개털이 맞긴 하지.
황자, 황녀들이 다 황궁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태주가 알기론 오황자 류진철은 황위 계승 투쟁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도 쫓겨나나?
황제가 단단히 마음먹었나 보다.
"아바마마께선 한번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시거든요. 저도 예외 없을 겁니다."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네! 세웠습니다. 그래서 여기 왔고요."
그래서 여기 왔다니?
류진철은 태주 앞에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말했다.
"회장님! 저 취직 좀 시켜주십시오."
"어···,"
"형님이 안 받아주시면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왜 왔나 했더니.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아무 데나 꽂아주세요. 월급? 재워주고 먹여주시면 그걸로 만족할게요."
"···."
어쩔 수 있나?
뉴서울에 진출하면서 도움도 많이 받았다.
스폰도 아니고 취직시켜주는 건데.
"진짜 무슨 일이든 할겁니까?"
"나쁜 짓 빼곤 다 합니다."
"알았어요. 채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호칭은···,"
나름 각성자에다 익스퍼트니까.
"류과장으로 하죠."
"넵!"
순간! 문이 열리고 서필명 비서관도 들어왔다.
"회장님 가방 구해왔습니···, 어? 황자님, 여긴 왜?"
"황자 아닙니다. 앞으로 류과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당분간 류과장은 서필명과 함께 파주에서 일하면 되겠다.
※ ※ ※
뉴서울 중앙역.
김웅방 준장은 떠날 준비를 마쳤다.
목적지는 제국 최전방 시베리아 개척 사단.
금수호 비서관이 중간에서 연결해줬다.
아직 보직은 받지 않았다.
편하게 안주할 생각은 없다.
무조건 최전방에서 마수와 싸울 생각.
황제 폐하껜 이제 전처가 된 혼다 미쯔이와 두 아들을 용서해 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승낙하셨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아들 역시 천륜으로 맺어졌다.
살길은 열어줘야지.
기차 시간이 다 됐다.
김웅방은 가방을 들고 승강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김웅방 준장님?"
"음? 누구?"
"황궁 비서관 서필명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김태주 회장님과 함께 일할 예정이고요."
"아!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거, 김태주 회장님이 보내신 겁니다."
서필명은 김웅방에게 가방 하나를 건넸다.
"누구에게도 주지 말고 반드시 혼자 드시라고···, 그럼 전 이만."
먹는 건가?
도시락이라도 보낸 모양.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받아든 김웅방.
그리고 기차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태주가 보낸 가방을 열어봤는데,
'응? 복숭아?'
볼링공만 한 복숭아가 2개.
또 작은 병도.
'이건 술 같고···,'
그러고 보니 태주와 술 한잔 함께 나누지 못했다.
언젠가 마음이 가벼워졌을 때 꼭 같이 한잔해야지.
가방 안엔 약도 한가득 들어있었다.
한 알에 500만 원이나 하는 태홍 회복제가 무려 30개,
'후우,'
어디 가서 죽지 말라고 챙겨준 모양.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못난 아비였다.
기차가 시베리아로 출발했다.
그래도 마음이 따뜻했다.
※ ※ ※
태주도 뉴서울 역에 있었다.
'잘 전해졌겠지?'
생각 같아선 아버지에게 직접 전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만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고, 또한 서로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서필명과 류진철 황자, 아니 류진철 과장은 곧바로 파주에 내려보냈다.
거기서 영주관 관리들에게 인수인계를 받게 할 예정.
태주는 구례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 향후 계획을 논의하고 나서 파주로 갈 생각이었다.
뭐, 파주야 가까우니까.
당분간 두 군데 왔다 갔다 하면서 기초를 잡아야지.
만리비검 타고 나르면 금방.
혼자서 기차를 타고 구례역 승강장에 내렸다.
그리고 역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뭐야?'
구례 역 안에 가득 찬 사람들.
"오셨다!"
"축하드립니다!"
"김태주 회장님, 아니 시장님 만세!"
곳곳에 플래카드와 팻말도 보였다.
<김태주 회장님의 금의환향을 축하드립니다.>
<구례시 발전에 큰 힘이 되어주십시오.>
<구례 시민들도 파주의 발전을 염원합니다.>
<파주와 함께 나아가는 구례!>
백서연, 백홍표를 비롯해 제자들, 그리고 이정학 길드장을 비롯한 전(前) 상임위원들과 자치위원들까지.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꽃다발도 목에 걸렸다.
'쯧, 쑥스럽게.'
※ ※ ※
태주는 백서연과 함께 태홍 바이오 본사로 먼저 왔다.
"파주에 공장을 지어야겠어요."
"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먼저 건의드리려고 했습니다. 요즘 구례도 땅값이 올랐고 뉴서울도 마찬가지라, 파주가 최고 적격지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백서연.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추가 생산이 너무 급해요. 백두 제약도 전체 라인을 밤낮없이 돌리고 있지만 기존 주문량도 맞추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이유로 현재 추가 주문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의 매출과 순이익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돈을 벌었으니 빨리 재투자해야지.
"해외 수출도 해야 하니까, 될 수 있으면 크게 지읍시다."
"네, 그것까지 감안해서 계획을 세워볼게요."
파주는 너무 낙후되어 있다.
아예 신도시를 건설할 생각으로 달려들자.
그러기 위해선 대규모 공사를 맡아 줄 건설 회사도 선정해야 한다.
태주는 정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두 그룹의 주력은 건설 부문.
- 김회장! 전화 오길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어. 자네 덕분에 살았네. 이황자와 스폰 계약을 했으면 어떡할 뻔했나! 지금 다른 기업들은 난리가 났어.
정욱철 회장 말대로였다.
황제 와병설, 혹은 조기 사망설에 배팅하고 황자와 황녀들에게 붙었던 대기업들이 싸그리 갈려 나가고 있었다.
"하하. 다행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태주는 정욱철에게 파주 개발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 알겠네. 백두 건설에서 수주를 맡겠네. 이익 생각하지 않고 정성을 다할 거야. 곧 실사팀 구성해서 파주로 내려보내지.
"고맙습니다."
- 아이고, 도리어 내가 감사할 일이지. 간만에 초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인데, 참! 나도 파주에 투자하면 안 되겠나? 곧 대도시가 될 파주 아닌가. 아파트도 짓고, 마트, 백화점에 호텔도.
"저야 대환영이죠."
- 흐흐흐, 우리 끝까지 같이 가세. ···그건 그렇고 자넨, 결혼 생각은 없나? 애인은 있는지 모르겠군.
"···너무 바빠서 연애는 신경도 못 쓰고 있습니다만,"
- 그래? 그거 잘됐군.
잘됐다니, 이거 욕 아닌가?
이제 시청에 갈 시간.
시청 공무원들이 새로운 시장 부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주는 회사에서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회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구례 시청으로 가요."
"네!"
그때였다!
찌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배달 완료 신호.
'좋아!'
이때만 기다렸다.
황제에게 받은 아공간 가방.
미리 가득 채워놓았다.
아공간 가방엔 컨테이너 하나 분량의 물건이 들어간다.
즉 기존 공유창고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이것도 크기 제한이 있는지라 비교적 작은 물건들만 들어간다.
1차 실험은 끝냈다.
이 아공간 가방이 무한공간에 수납이 되는지에 대한 실험.
결과는?
성공!
별다른 충돌 없이 무한공간에 잘 들어갔다.
넣다 뺐다 해서 그 안에 물건이 잘 들어있는지 확인까지 마쳤다.
이제 공유창고에 들어가기만 하면 끝난다.
'선계 물건부터 빼고.'
선도도 있고, 편지도 있고, 각종 암기도 들어있었다.
'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암기들.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이용해 만든 무기.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것도 있었다.
'이게 왜···,'
자신이 당군악에게 보내줬던 태블릿.
매번 두세 개씩 보냈었다.
'이 안에 든 건 다 봤나?'
그렇다고 해도 다시 보낼 필요는 없는데.
'이제 넣어보자.'
공유창고에 아공간 가방이 들어가는지.
스슷!
'아싸!'
들어갔다.
태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머지 공간도 각종 상품으로 집어넣고.
그리고 미리 써둔 편지도.
물량 대폭발.
지금 보낸 것이 여태까지 보낸 양보다 더 많다.
왜 더 일찍 실험해볼 생각을 못 했지?
기뻐할 당군악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편지나 읽어볼까?'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몰라도 전에 편지보다 매우 길었다.
첫 문장을 보니 선계에서의 일상이 적혀 있는 듯한데.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순간!
'···뭐?'
태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세상에!
'태, 태블릿이 그거였어?'
미처 상상도 못 했다.
서둘러 태블릿을 꺼내 앨범에 저장된 영상을 확인했다.
거기엔 신선이 있었다.
'와!'
근엄하고 고귀한 검선의 풍모.
보기만 해도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는다.
그리고 당군악의 해설과 함께 시전되는 복마검법의 초식.
실로 아름다웠다.
검의 신선이 보여주는 고매한 검술의 경지.
비록 검술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 이 장면은 태주에게도 커다란 감동이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선계에서 노니는 신선을 태블릿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걸.
그런데 영상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건 또 뭘까?
태주는 동영상을 실행했다.
- 그 뭐더라? 콜라? 그게 참으로 시원하고 맛나더이다. 그냥 그렇다고.
- 드라마 보니까 칵테일이라는 게 나오던데? ···진심 궁금해서 하는 말이오.
- 이를테면 백과사전이라든가.
- 바이크? 할리 뭐라던데, ···그렇다고 보내 달라는 건 아니오, ···헌데 다리가 조금 아프군.
.
.
.
'아아아아!'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신선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다.
선계라는 감옥에 갇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원하는 것들이 고작 콜라, 칵테일에, 백과사전, 오토바이 등이라니.
철저하게 준비해야겠다.
모든 일에 앞서서 최우선으로 처리해야 한다.
솔직히 태주는 선계로 물건 보내려고 돈 버는 거다.
하지만,
'할리 바이크가 문제인데···,'
무한공간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그게 들어가기만 하면 공유창고에도 넣어질 것 같지만.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오늘부터 주식은 최상품 선도 복숭아.
목이 마르면 신선주 들이키고.
할리 오토바이?
반드시 넣고야 만다.
'무한공간 구역 설정도 다시 해두자.'
신호가 오면 재빠르게 넣을 수 있게.
※ ※ ※
한편 선계(仙界)에서도 대규모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 도약을 위한 준비 > 끝
ⓒ 꾸찌꾸찌
=======================================
< 그는 진심이었다. >
공유창고를 통한 지구와 선계의 교류.
원래는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 태주를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잘 되길 바라는 당군악의 마음.
지구의 문물을 받아 선도 혹은 보패로 교환해, 태주에게 보내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선도를 장복하면 무병장수하며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동시에 육체와 정신, 기의 균형이 맞춰진다.
그로 인해 독령(毒靈)을 빨리 깨우치게 하여, 태주와 그가 사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전혀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태주를 도와주려고 벌인 일이 오히려 선계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일명 선계 멀티플렉스 건설 계획.
건물을 만들어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영화를 보자.
현재 당군악은 3개의 대형 TV와 2개의 빔프로젝터, 그리고 3개의 결정체 전기 발전기를 보유하고 있다.
TV 한 대는 게임 용도로 돌린다 치면, 동시에 돌릴 수 있는 상영관이 무려 4개.
멀티플렉스 건설에 약 40여 명의 신선이 투입됐다.
그들 중엔 태상노군 저울추 재판에서 당군악을 배신한 신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건설사업에 열심히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사면장을 받았다.
재료 공급과 가공은 무림 출신의 신선들이 맡았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름드리나무들을 환수계 숲에서 잘라서 옮겨오는 선인들.
가져온 나무들은 열양 계열의 무공으로 순식간에 건조시킨 후, 검을 들고 툭툭 다듬으니 금세 쓸만한 목재들로 변했다.
이미 기초공사는 끝났다.
후토 선인과 대목 선인의 지휘하에 한창 올라가는 선계 멀티플렉스 상영관.
예상 높이는 7층.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오래 걸린다.
또 선계에서 시멘트를 어떻게 구하나?
재료는 나무를 사용하되 대신 귀곡 산인과 갈홍 선인의 술법진으로 보완한다.
화선(畫仙) 승업 선인이 건물의 디자인과 색칠을 전담했다.
도화궁의 선자들이 염료를 조달했다.
태상노군도 독선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천군 신장들을 일꾼으로 보내줬다.
신선들은 쉬지도 않았다.
건물이 다 만들어지기 전까진 영화와 드라마 상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루가 다르게 높이 올라가는 건물.
당군악은 그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았다.
태주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생각할수록 놀랍다.
독립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이기까지 한 선인들이, 멀티플렉스 건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협력하다니.
심지어 노동의 즐거움도 느끼고 있었다.
선계에서 무료하게 게으름이나 피우던 선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쳤구나. 미쳤어.'
두렵기까지 하다.
선계가 어떻게 변할지.
이번에도 저울추가 혼돈이 아닌 조화 쪽으로 기울까?
그 와중에 한 번씩 독선을 찾아와 그를 괴롭히는 검선.
"독선, 혹시 할리 바이크 안 왔소?"
"···아직 신호가 없소. 기다리시오."
"오면 꼭 이야기해 주시오."
"알겠으니 일이나 합시다."
몸이 달았나 보다.
"독선, 할리 바이크 안···,"
"신호가 오지 않았···,."
잊을 만하면 또 찾아와 묻는다.
"할리 바이크는?"
"아직 안."
자꾸만.
"할리?"
"아직."
계속.
"할?"
"안!"
지치지도 않았고.
"하···?"
"아···!"
더 이상 못 참겠다.
"이 양반아! 좀 그만 괴롭혀! 보낸다고 해도 이번 배송은 아니야! 빨라도 다음 배송이라고!"
"흐음, 그런가?"
"우리 태주가 조물주라도 되나?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지."
"그럼 다음다음 배송이겠구려."
"그것도 장담할 수 없소."
과연 올까?
할리 바이크는 크기가 너무 크다.
공유창고의 부피가 할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커지긴 했다.
문제는 태주의 무한공간 안에 집어넣을 수 있냐는 것.
물론 자신은 가능하다.
마음만 먹으면 대형 트럭이나 비행기도 집어넣는다.
'다음 배송 때 무리하지 말라고 일러둬야겠군.'
하지만 검선은 예상보다 훨씬 집요했다.
요 며칠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검선.
그래서 당군악도 검선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태주에게 보낼 선도와 보패들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콰콰콰콰!
드드드득!
슈슈슈슛!
쿵! 쿵! 쿵!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선계의 땅이 은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지?'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신선들이 목재를 구하려다 내는 소린가 보지.
그런데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게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확인차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헉!'
당군악의 눈에 들어온 건 허공에서 휙휙 날아와 떨어져 내리는 돌판.
한 번에 수십 개의 맨들맨들한 돌판이 날아와 땅 위에 착착 깔리고 있었다.
돌판의 크기는 가로세로 1m, 두께도 상당했다.
심지어 단단하기 그지없는 화강암이었다.
그것들이 직선으로 반듯하게 잘려져 있었다.
마치 검으로 자른 것처럼 말이다.
'설마?'
이런 짓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겠다.
"미친!"
휘이이익!
불어오는 바람.
나부끼는 도포 자락.
은빛 찬란한 보검을 든 검선.
어디서 구해왔는지 거대한 바윗돌을 옆에 두고 두부 썰 듯 바위를 자르고 있었다.
우우웅!
부드럽게 일어나는 강기.
서걱! 서걱!
눈 깜짝할 새 돌판 하나를 만들었다.
옆에다 차곡차곡 쌓고.
어느 정도 만들었으면,
탁!
정사각형의 돌판을 발로 걷어차서 연달아 날렸다.
휘릿! 휘리리릿! 쿠쿠쿠쿵!
촘촘하게, 빈틈없이, 그리고 평평하게, 흡사 보도블록처럼 땅 위에 차례대로 깔렸다.
그 모습이 흡사,
'···도로구나.'
맞다.
검선이 만들고 있는 건 도로였다.
그가 도로를 건설하는 방법.
어마어마한 선기와 내공의 힘으로 압력을 만들어 맨땅을 단단하게 다진다.
드드드득!
그리고 흙을 깎거나 쌓아서 일정한 높이로 맞춘다.
그럼 편평한 흙길이 생기는 것이다.
그 위에 화강암 돌판을 덮는 식.
폭은 지구의 2차선 도로.
이미 작업이 꽤 진행된 것 같다.
눈대중으로 잡아도 1km 이상은 되어 보였다.
'고작 바이크 타려고···,'
검선의 바이크 전용 도로였다.
아마 도로는 자신의 거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목적지는 현재 건물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
'이게 사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인가?'
···사람이 아니긴 하지.
한참 화강암 자르기에 열중하던 검선이 당군악을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응? 독선 아니오? 설마 할리 바이크 왔소?"
"···아직, 혹시 이걸 혼자 다 만든 건 아니겠지?"
"뭐, 나 혼자 했소. 기다리기 심심해서, 도와주는 선인도 없고, 처음엔 서툴렀는데 하다 보니 손에 익더군."
"도로는 어디까지 깔 거요?"
"선계 한 바퀴 빙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
으슬으슬 소름이 끼친다.
검선은 진심이었다.
"왜 할리에 집착하시오? 바이크보다 그대가 더 빠를 텐데,"
"멋있으니까."
"대체 뭐가?"
"몸에 쫙 달라붙는 검정색 가죽옷에, 머리엔 헬멧, 등 뒤에 검을 비스듬히 메고, 바이크로 질주하는 신선의 모습을 상상해보시오, 참으로 검선다운 모습 아니겠소?"
"무슨 개소릴 이렇게 진지하게···,"
하지만 검선의 표정은 이미 몽롱하게 변해버렸다.
자신이 묘사한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야단났다.
이러다 할리 바이크가 안 오면 어떡하지?
※ ※ ※
구례 시청.
자치위원회가 해체되고 종신 시장 체제로 전환되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시청 공무원들이야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시민들도 김태주 회장의 시장 취임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였으니까.
태주는 먼저 3명의 상임 위원들을 만났다.
자치위원회가 해체되고 나서 이정학 길드장이 떠날 줄 알았는데,
"절대 안 떠납니다. 구례가 제 고향인데요."
그래도 자경단은 해체되어야 한다.
대신.
"이번에 신설되는 구례 경찰청을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바라고 있었습니다만 현 길드원 숫자로는 치안유지가 어렵습니다."
"경찰들을 더 뽑으세요. 예산은 충분히 지원해드리죠."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정학은 구례 경찰청장으로.
나머지 2명의 상임 위원 지광인 사무관과 민동열 회장, 그동안 그들을 옥죄고 있었던 독의 족쇄도 풀어줬다.
그 둘도 구례 시청의 분과를 맡아 시 행정에 봉사하기로 약속받았다.
태주가 가진 구례 시장의 권한.
크게 두 가지.
인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정책 결정을 통해 시의 예산을 원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다.
인사권은 행사했으니 올해 주요 정책은 무엇으로 할까?
이왕 취임했으니 임팩트 있는 사업을 진행할 생각.
예산은 충분하다.
구례시 재정은 탄탄하다 못해 넘칠 정도.
그동안 체제의 한계 때문에 그랬다.
시의 예산으로 뭔가를 하려면 자치위원회와 상임위원들의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데, 그동안 서로 견제하고 눈치 보느라 제대로 정책이 세워지지도 않았고, 예산 집행도 많지 않았다.
사실 구례시 예산을 빼서 태주 개인 주머니로 슬쩍 옮겨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종신 시장의 권력은 막강하다.
물론 돈을 먹겠다는 건 아니고,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계획이 있었다.
"칠흑동 달동네 재개발합시다."
칠흑동 달동네 슬럼가는 구례시 범죄의 온상.
그곳만 해결하면 구례는 더더욱 살기 좋은 도시가 될 것이다.
"기존 살던 주민들은요? 다 쫓아냅니까?"
"그럼 안 되죠. 토지 매입해서 아파트 짓고, 달동네 거주민들에게 입주권 주세요."
파주의 경우엔 구례보다 더 순조로웠다.
특히 파주 신도시 개발 계획이 발표되자 영지민의 기대감은 하늘을 찔렀다.
영지는 넓었지만 놀고 있는 땅들이 너무나 많았다.
부지 매입이나 토지 보상같은 개발의 걸림돌 따윈 하나도 없다.
그냥 지으면 된다.
일부 영지민들 소유의 주택이나 부동산을 제외하면 남은 땅들은 모두 파주 영주 김태주의 소유니까.
아예 서필명 행정관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류진철 과장도 옆에서 일을 배우며 잘해주고 있었고.
구례와 파주의 행정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태주는 그저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결정하고 방향만 잡아주면 된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지.
그날 저녁 늦게 파주의 영주관으로 커다란 화물 하나가 도착했다.
뉴서울 바이크 매장에서 주문한 할리 바이크.
영주관 지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
과연 들어갈까?
이 순간을 위해 최상품 선도와 신선주 한 단지를 몽땅 먹어 치웠다.
선기가 팍팍 늘어나는 걸 체감할 정도로.
실제로 무한공간의 부피도 눈에 띄게 늘었다.
'넣어보자.'
태주는 손을 뻗어 할리 바이크를 수납했다.
스르륵,
앞바퀴부터 들어갔다.
'···되려나?'
스르르륵!
'오!'
완전하게 들어갔다.
무한공간 구역 안에 얌전하게 들어가 있는 할리 바이크, 수납함에 헬멧과 가죽 수트도 들어있다.
"됐어!"
그러나 선계에서 제대로 할리를 타려면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휘발유.
전기 바이크도 있지만 할리 특유의 으르릉 소리를 들으려면 역시 내연기관 바이크가 최고.
휘발유 또한 말통으로 10개 정도 준비해서 무한공간 구역 안에 정렬해두고.
그밖에 다른 신선들에게도 보낼 물건도 싹 준비했다.
다행히 부피가 작아 넣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사전 예행 연습도 필요하다.
공유창고가 열리면 바로 집어넣을 수 있게끔.
'자, 이제 다음으로···,'
제자들을 만날 시간.
마침 약속 시간이 다 됐다.
태주는 만리비검에 올라타고 구례로 향했다.
※ ※ ※
구례시 태주의 자택 지하엔 개인용 수련실이 있었다.
그곳에 모인 태주의 제자들.
백창훈과 장순철을 비롯해 면접을 통해 새로 뽑힌 6명의 새로운 제자까지, 모두 8명.
그들의 얼굴엔 모두 선명한 각성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스승님이 늦으시네."
"그러게요. 요즘 너무 바쁘셔서 얼굴도 보기 어려워요."
"혹시 우릴 잊으셨나?"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스승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나저나 우리 중 몇몇은 파주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마도 그럴 걸? 거기도 마수 밀집지대가 있으니까."
순간!
수련실 문이 열리며 태주가 들어왔다.
"스승님!"
"기다렸습니다."
"왜 이제 오셨어요?"
.
.
.
태주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들 착한 놈들이다.
요즘 하도 바빠서 신경을 써주지 못해서 불만이라도 가질 줄 알았는데 저렇게 밝은 얼굴들이라니.
"나도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네!!!"
"그래, 바로 시작하자."
태주는 수련실 벽에 걸린 대형 TV에 태블릿을 연결했다.
"오늘부터 새로운 스킬을 연마할 거야."
그러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TV 앞으로 모여든 제자들.
"어떤···?"
"암기술입니까?"
"아니, 검술."
일단 전원은 켜두고.
태주는 주머니에서 공기계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전에 감사 인사부터 올리자."
"네?"
"그냥 한마디면 돼. 검선님, 무공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워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렇게, 그러고 나서 절을 하면 돼."
검선?
누구지?
무협 소설에 나오는 절대 고수를 말하나?
"지금 절하면 됩니까?"
"내가 신호하면!"
스마트폰 공기계를 동영상 촬영 모드로 설정한 후,
"자, 인사하자."
그러자 제자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검선님, 무공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워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
동시에 공손한 절로 마무리.
"일단 눈으로 보는 것부터, 무공 수련은 이곳에서만 할 거야. 스킬이 등록될 때까지 계속."
태주는 검선의 복마검법 영상을 실행했다.
"복마검법 제일초, 격검축마(擊劍警魔), 검을 휘둘러 마귀를 쫓아내다."
TV 화면에 검선의 모습이 나왔다.
"아!"
"···저분이 검선?"
"각성자는 아니신데."
신선이 검을 가지고 노닌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제자들은 영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검선의 몸놀림.
저건 스킬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
먼저 일어선 건 장순철이었다.
무의식중에 검을 들고 검선의 행동을 따라 했다.
백창훈도 일어났다.
뒤를 이어 다른 제자들도 우르르.
오행신공을 익혀서 혈도의 위치는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당군악의 설명대로 마나를 이끌었다.
태주는 흐뭇했다.
기어코 선계의 인연이 제자들에게도 닿았다.
매우 자세하게 동작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일초식 배우는 것도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 계속 영상을 시청하면서 반복하다 보면 언젠간 복마검법 일초식이 스킬로 등록되겠지.
순간!
띠링! 지이이잉!
스마트폰 메시지 알림음.
'뭐야? 방해되게.'
발신자를 보니 제정원 마인파트 문경식 차장.
'응?'
마인이라도 발견했나?
< 그는 진심이었다. > 끝
ⓒ 꾸찌꾸찌
=======================================
< 뉴서울 차이나타운(1) >
투타타타타!
태주는 문경식 차장이 보낸 헬기를 타고 뉴서울 외곽에 위치한 제정원 본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일백이도 함께.
드레스코드는 간편한 트레이닝복.
상의 가슴팍 부분에 일백이가 들어가 콜콜 자고 있었다.
가끔씩 이렇게 바깥 구경시켜줘야지.
얼굴이 수시로 변하는 단점이 있지만 웬만큼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고선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제정원 본부 헬기장에 미리 마중 나와 있는 문경식 차장.
"어서 오십시오. ···호칭을 뭘로 불러드려야 할지,"
"회장이 제일 익숙하긴 합니다."
"네, 김회장님, 사실 고민 많이 했습니다. 출동 요청을 드려야 할지 말지, 전과는 위상이 많이 달라지셔서."
파주 영지 영주, 구례 종신 시장.
제약회사 회장이었을 때와는 비교가 될까?
제정원 원장도 태주 앞에선 절절매야 할 판인데.
"마인 관련 요청은 언제든지 하셔도 됩니다. 눈치 보지 말고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이리로."
태주는 문경식과 함께 제정원 지하에 있는 시신 안치실로 들어갔다.
자택 수련실에서 받은 메시지의 내용
직접 잡아서 제정원에 넘겼던 리더스 클럽 마인 세르게이와 합빈 교도소 마인 다이고가 동시에 의문사해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생포하기 어려운 마인을 둘이나 잡아주셨는데 저희가 제대로 관리를 못 해서···,"
실제로 그랬다.
마인 생포는 거의 불가능했다.
잡아서 죽이기도 어렵다.
과거엔 생포도 몇 번 있었다고 하는데, 최근 10년 동안 단 한 명도 잡히지 않았을 정도로.
시체 안치실 냉동고가 열렸다.
죽어서 마수로 변한 마인들.
그때!
불쑥,
"야앙?"
이백이가 태주의 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캬악!"
마수화된 마인을 보면서 하악질을 하는 이백이.
"넌 잠시 들어가 있어."
"양."
쏙,
태주는 시체를 살피며 문경식에게 물었다.
"언제 죽었습니까?"
"승전식 직후입니다. 그것도 동시에 죽었습니다."
"똑같이?"
"1초 간격으로요, 다이고가 먼저 죽고 세르게이가 두 번째였습니다."
1초면 동시에 죽은 게 맞다.
"마나 구속구는 채워진 채로요?"
"양손과 발, 심장, 머리까지 6곳 채웠습니다. 아마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자살도 불가능했을 텐데.
"사인은? 부검은 하셨을 것 아닙니까?"
"뇌가 터졌다고나 할까요.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문경식.
"체포했을 때부터 MRI로 정밀 검사를 거친 놈들입니다. 머릿속에 금속이나 이물질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외부 충격도 아니고, 약물의 가능성도 없고···,"
그러더니 냉동실에 보관된 시약병 2개를 꺼냈다.
"부검 과정에서 채취한 놈들의 뇌 일부분입니다"
"제가 살펴봐도 되죠?"
"마음껏 하십시오."
태주는 시약병을 열었다.
진짜 액체 상태로 변했는지 꽁꽁 얼어있었다.
살짝 녹여서 코를 가까이 댔다.
'흐음.'
묘한 냄새가 난다.
대부분 부패가 시작된 뇌에서 나는 썩은 냄새지만.
'이거···,'
이상하다.
낯설지 않다.
물론 절대독마 당군악의 경험 속에서.
'설마?'
그럴 리 없다.
여긴 강호가 아니라 지구다.
한 번 더 냄새를 맡아보고.
'맞아. 틀림없어.'
고독(蠱毒)의 흔적.
강호에선 금기로 알려진 독공.
특히 오독문(五毒門)의 고독이 유명하다.
고독은 일종의 작은 벌레.
기생충처럼 인간의 몸에 들어가 활동한다.
종류도 수도 없이 많다.
고독에 당한 자들의 정신을 조종해서 지배한다거나, 미세한 독을 뿜어서 병들게 만든다거나, 내공을 빨아먹는다거나, 아니면 이렇게 머릿속에서 빵! 터뜨려 뇌를 곤죽으로 만든다거나.
'고독(蠱毒)이 확실해.'
동시에 같이 죽은 것도 이해가 간다.
고독을 터지게 만든 시전자가 있었을 테니까.
고독 시술은 독공의 경지가 매우 높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잘 발견할 수도 없다.
지구에 고독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지만···.
'그 고독을 마인에게 먹인 자가 있다고?'
마인에게도 고독이 통할 것이다.
놈들도 반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누굴까.
개인일까, 세력일까.
"문차장님, 이놈들 수사는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수사 상황실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제정원 수사 상황실.
커다란 화면에 마인 세르게이와 마인 다이고의 세부 사항이 동시에 띄워졌다.
놈들에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 명단, 그들이 거쳐온 직장, 카드 혹은 금융거래 목록, 전화 통화 기록···,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문차장님, 전에 천리장성 웨이브 전쟁이 끝나고 제게 전화하셨을 때 마인의 단서를 잡았다고 하신 적 있죠?"
"네, 기억납니다. 보강 수사 후에 정식으로 도움 요청하겠다고 했었습니다."
"어떤 단서였습니까?"
"그게···,"
문경식은 화면에 세르게이와 다이고의 카드 결제 내역서를 함께 띄웠다.
"사실 이 두 놈들은 활동하고 있는 지역도 다르고, 직업이나 취미 생활도 같지 않아서 겹치는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다만 딱 하나가 있긴 했는데."
문경식은 다이고의 카드 결제 명세서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금용각'이라는 식당, 뉴서울 차이나타운에 있는 가게입니다. 다이고가 2322년 10월에 결제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명세서를 짚으며.
"세르게이는 2322년 5월에 뉴서울 차이나타운에 방문해서 '청화춘'에 가서 저녁을 먹었고요."
"음···."
"이것 말고도 둘은 과거에도 자주 차이나타운을 방문했었습니다. 비록 같은 날짜와 장소는 아니더라도."
공통점은 공통점인데, 확실한 단서라고는 볼 수 없다.
"애매하네요."
"네, 그래서 자체 수사만 진행했고, 따로 요청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날짜도 다르고, 식당도 다르다.
같은 부분이 뉴서울 차이나타운이라는 것만.
차이나타운은 뉴서울 관광지 중에 하나.
주말이면 미어터질 정도로 사람이 많다.
"사실 차이나타운 수사는 경찰이나 제정원으로서도 큰 부담입니다. 툭하면 민족차별이다, 혐오에 의한 과잉수사다라는 말이 나와서."
사라진 중국.
그래서 삼한제국으로 피신한 중국계 난민들.
처음엔 잘 섞이지 않았다.
동아시아 3국이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고.
또 당시 제국에 떠도는 유언비어들.
- 유독 중국인들에게 마인이 많다.
- 과거에서부터 인육을 즐겨 먹던 놈들 아닌가.
-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마인이 수두룩할 것이다.
제국 정부로서는 부담이었다.
동아시아가 삼한제국으로 통일된 지금, 자칫하면 민족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유언비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구례 3인조 마인들도 사실 중국계 아닌가.
이 시신들 몸에서 고독(蠱毒)의 흔적이 나온 것도 수상하고.
그동안 무사했다가 승전식이 끝나자마자 죽었다는 것도 미심쩍다.
승전식은 황제의 건재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행사이기도 했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황제는 마인에 의해 몇 년을 고통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건재하다.
당연히 생포된 마인들에게도 관심을 가질 테고.
고독을 찾거나 없애는 방법.
시전자가 직접 거두어들이거나, 혹은···,
'현경급 고수가 고독에 당한 사람의 몸속으로 마나, 내공을 주입하면 찾아낼 수 있어. 그걸 없애는 것도 가능해.'
예를 들어 황제와 같은 그랜드마스터라면?
황제가 친히 마인들을 심문해 고독의 존재를 밝혀냈다면?
물론 혼원무상독령공 9성의 태주도 할 수 있다.
'진작에 살펴볼 걸 그랬나?'
그렇지만 그땐 고독의 존재조차 몰랐다.
"제가 가봐야겠어요."
"네? 어딜···,"
"차이나타운 말입니다."
"혼자서요? 수사단 꾸릴까요?"
"아뇨, ···흐음, 혹시 모르니까 수사관 한 사람만 지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차이나타운으로 가보자.
떠도는 소문이 맞는지 확인도 할 겸.
혹시 알아?
마인 냄새라도 맡을 수 있을지.
※ ※ ※
태주는 뉴서울 차이나타운에 왔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그런데 문경식이 붙여준 사람이 다름 아닌,
"정말 영광입니다. 회장님. 이렇게 함께 작전을 펼치게 되어서···,"
"···네."
백두 그룹의 손녀딸, 정연희였다.
"원래 황도 방위 사령부 소속 아니었습니까?"
"차출되었어요. 원래 제정원 마인파트 수사관은 이런 식으로 채용되거든요."
"그러시구나."
이해가 간다.
재능이 뛰어난 그녀였다.
주머니 속에 든 송곳은 튀어나올 수밖에 없지.
'···다시 봐도 근골이 좋아.'
무공을 익히는 데 최적화된 몸이었다.
또 못 본 척해야 하나?
하지만 이건 무인으로서의 직무유기다.
아아, 이런 재능을 어떻게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나?
태주가 자신의 아래위를 끈적하게 훑어보자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지는 정연희.
조금 무안하다.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
순간!
"니앙?"
삼백이가 또 태주의 턱 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머? 고양이네요? 귀여워라."
"니아아아···,"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삼백이 입에 물려주고.
"아직 나올 때가 아냐. 들어가 있어."
"니아,"
정연희는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선,
"저어, 우리 차이나타운에서 뭘 할까요?"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태주는 먼저 금용각으로 갔다.
들어가자마자,
"여기 짜장면 하나랑 탕수육 하나 주세요."
그러자 정연희가,
"전 주문 안 했는데요?"
"아! 그걸 말씀 안 드렸네요. 제가 다 먹을 겁니다."
"네? 왜···,"
짜장면과 탕수육이 나왔다.
태주는 그릇을 자기 앞으로 놓고 흡입하기 시작했다.
정연희는 황당했다.
아니, 이 사람 뭐야?
진짜 혼자 먹어?
식사를 다 마치고 태주는 청화춘으로 갔다.
거기에선 짬뽕과 볶음밥을 시키곤.
후루룩! 쩝쩝.
'식탐충으로 오해받겠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두 식당은 마인 다이고와 세르게이가 방문했던 곳, 혹시라도 독이 있으면 어떡하나?
마침 배가 고팠기도 하고.
그러고 나서 차이나타운을 돌아다녔다.
입가심으로 탕후루도 하나 사 먹고.
물론 혼자서.
정연희는 살짝 삐친 모양.
그나저나 제국에서 떠도는 중국계 마인에 대한 소문이 꼭 유언비어만은 아니었나 보다.
'뭐, 차이나타운이라 해서 꼭 중국계 제국민들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쪽저쪽에서 냄새가 피어올랐다.
금용각에서도, 청화춘에서도, 심지어 길거리 작은 가게에서도.
'대박인데?'
태주는 정연희를 보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제 말 똑똑히 들어요."
"무슨···?"
"지금 당장 차이나타운을 나가서 입구에서 대기하세요. 있다가 지원 병력이 도착할 겁니다. 그때 같이 합류해서 들어와요."
정연희의 눈동자가 커졌다.
태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저, 저도 함께 하겠···,"
"지시에 따르세요. 어기면 더 이상 제정원에서 근무 못 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따로 한번 만납시다."
"네?"
"데이트 신청 같은 건 절대 아니니까 오해 마시고."
"···으음."
태주는 문경식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전화 받았습니다. 회장님.
"될 수 있으면 동원 가능한 각성자 부대를 모조리 끌고 차이나타운으로 진입하세요. 작전 상황입니다."
- ···네?
"명심하세요. 완전무장하고 최대한 많이 데리고 와야 합니다."
뚝!
태주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냐아앙?"
일백이가 나왔다.
"일백아, 이제 밥값 해야지?"
"냥!"
어디부터 갈까?
제일 냄새가 강한 곳부터 쳐야겠다.
※ ※ ※
선계.
안락한 공간에서 영화와 드라마, 게임을 즐기고 싶다는 신선들의 집념은 대단했다.
어느새 외형이 다 올라간 건물.
지금은 내부 인테리어 작업이 진행됐다.
게다가 저 멀리 선 쿵쿵쿵쿵, 검선이 도로 만드는 소리도 여전히 들려왔고.
독선 당군악은 화려하게 지어진 7층 대형 누각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과 뒤쪽 선물이 함께 나올 수 있게 각도를 조정해서.
찰칵!
"흐음, 잘 나왔군."
이렇게 빨리 짓다니.
심지어 튼튼하기까지 하다.
지구의 무기, 대포를 갈겨도 끄떡없을 정도로.
역시 신선들은 고급 인력.
공짜로 부린 건 아니다.
때마다 새참도 먹였다.
과자나 초콜릿, 사탕, 그리고 쬐끔이지만 위스키도 반 잔씩 돌리고.
하지만 선인들이 너무 많다 보니, 가지고 있던 지구 간식이 거의 동났다.
'올 때가 됐는데.'
지구에서 넘어오는 택배 말이다.
그런데 떠올리기 무섭게,
찌르르르!
"떴다!!!"
당군악의 외침에 현장 공사 작업이 순식간에 중단됐다.
우르르르 몰려오는 선인들.
"뭐?"
"떴다고?"
"어디?"
"허어, 밀지 좀 마!"
재빨리 지구 물건을 빼고 준비한 선계 물건들로 채웠다.
주로 선도, 부적도 넣었다.
호신부는 아직 많이 남았다고 했으니 다른 부적들로.
이제 배송된 물건 확인.
그런데 태백 선인이 그토록 바라던 소주와 맥주가 보이지 않았다.
죄다 간식 같은 먹거리들.
'흐음, 쯧쯧, 주선이 실망하겠군.'
그렇게 소맥, 소맥 노래를 불렀는데.
뭐, 다음에 칵테일 세트 보내오겠지.
그런데 가죽으로 만든 가방 하나가 함께 들어있다.
'이건 뭐지? 명품?'
당군악은 태주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천천히 내려가는 눈동자.
갑자기 흠칫하며 놀랐다.
"헉!"
아공간?
이게 된다고?
'빠, 빨리···.'
서둘러 아공간 가방을 꺼내 열어서 발밑으로 쏟으니.
와르르르르르!
온갖 물건들이 쏟아져 내린다.
태블릿, 공기계 스마트폰, 엄청난 양의 콜라, 와인, 녹색병의 소주와 맥주, 소맥 전용잔, 심지어 아직 김이 따끈따끈 올라오는 수많은 브랜드의 치킨 상자까지.
"우와아아아아!"
"좋구나!!! 소맥이로구나!"
"어? 저, 저건···,"
"치, 치킨? 바삭바삭 치킨?"
"그럼 우리도 치맥 할 수 있는 건가."
"허허, 감개무량이군. 드라마에서만 보던 치맥이라니."
당군악은 싹 비운 아공간 가방을 다시 공유창고 안에 넣었다.
그리고.
"호리병박 보패 가진 선인 여기 있소?"
"나요! 나! 내가 가지고 있소. ···하지만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원래 선도가 가득 들어있었지만 다 압수당해서."
"상관없소! 빨리 주시오."
"전엔 필요 없다더니,"
"필요하오! 값은 나중에 치르리다. 빨리!"
휘익!
사람 한 명의 크기를 기준으로, 뭐든 넣을 수 있는 호리병박이 당군악에게 던져졌다.
재빨리 잡아서 공유창고에.
넣자마자 빛이 픽! 하고 꺼졌다.
아슬아슬했지만 세이프였다.
< 뉴서울 차이나타운(1) > 끝
ⓒ 꾸찌꾸찌
=======================================
< 뉴서울 차이나타운(2) >
뉴서울은 제국 최대의 도시.
인구도 가장 많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다.
누구나 뉴서울에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범죄자들에게 있어 뉴서울은 썩 좋은 선택이 아니다.
제국 황도의 치안이 만만할 리가 있나?
뉴서울엔 제국 총 경찰청, 제국 대검찰청, 황도 방위사령부, 제정원 등 수사 기관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러나 차이나타운이라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겉으로 보면 북적대는 관광지이지만, 실상은 빌런들의 소굴.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초기엔 제국 수사기관의 주요 우범 관리지역이었던 차이나타운.
심심하면 불시 검문과 일제 검거가 시행됐다.
심지어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3분의 1이 수사관이었던 적도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중국계 제국민들이 힘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민족차별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들었다.
왜 우리 중국계만 이렇게 차별받아야 하나?
나라 잃은 것도 서러운데,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수사를 해?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제국의 인권단체들이 들고 일어섰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면서 차별과 혐오 반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물론 그 인권단체들이 제국 내 중국계 정치인들과 기업인에게서 엄청난 자금지원을 받았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지만.
거기에 하나 더.
몇 년 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황제, 그로 인해 황후들을 비롯한 황자와 황녀들이 권력 암투를 벌였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절대 권력이 사라진 공백.
차이나타운 내에 빌런 조직은 급속하게 힘을 키워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바로 혈귀련과 흑림.
고리대금과 도박, 마약, 매춘, 장기밀매로, 흑림과 더불어 차이나타운을 양분하고 있는 거대 빌런 조직들이다.
금용각은 혈귀련의 합법적인 사업체 중에 하나.
주방 뒤쪽에 숨겨진 사무실과 의료시설이 있고, 거기서 주로 장기 적출과 불법 이식 수술이 진행된다.
수술복을 입은 혈귀련 조직원 둘이 사방이 밀폐된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들어온 주문은?"
"적합자 신장 한 세트."
"씨발, 주문자가 일반인 아니었어? 근데 왜 적합자 장기를 원하는 건데? 안 그래도 구하기 어려운 걸,"
"이 양반, 전에도 적합자 간 이식 수술받은 사람이야. 최종 목표가 모든 장기를 적합자 것으로 바꾸는 거란다."
"흐흐흐, 그런다고 일반인이 적합자가 될 줄 아나?"
"꽤 효과가 있다던데?"
대화하면서 수술 장갑도 착용하고, 마스크도 끼고.
"통나무 하나 꺼내오자. 반항은 없겠지?"
"마약에 절어서 제 몸도 못 가누는 놈이 무슨 반항, 바로 배를 갈라서 신장 두 개 꺼내자고,"
"신장만?"
"어, 그것만 꺼내고 투석기 연결해서 숨만 붙여놓으면 돼."
순간!
나풀나풀,
수술실로 두 마리의 나비가 날아들었다.
"뭐야?"
"웬 나비?"
"저거 어디서 들어온 거야?"
"빨리 잡아. 오염될라."
붉은빛을 띠는 나비였다.
혈귀련 조직원이 팔을 휘휘 내저어 나비를 잡으려 했지만.
"···어어? 어어어어어?"
가볍게 피하면서 눈꺼풀 위에 사뿐 내려앉은 나비.
더듬이 하나가 눈알을 그대로 찔렀다.
푸욱!
"아아악!"
털썩!
나머지 한 마리도,
"저, 저리 가!"
피할 수 있나?
혼원무상독령공 9성의 혈접을.
푸욱, 털썩.
놈들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스슷!
태주는 불법 수술실 안으로 일백이와 함께 들어왔다.
"자, 냄새 맡아봐."
킁킁,
"냐아아···,"
"평범하지? 얘들은 그냥 놔둬. 원래는 안 죽이려 했는데 이야기 듣다 보니 기가 차서 죽인 거야."
마인은 아니다.
각성자도 적합자도 아니다.
평범하게 악랄한 일반 빌런.
"따라와."
"냥!"
태주는 수술실을 나와 마기의 악취가 짙게 풍기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악취는 그곳에서 났다.
굳게 잠겨진 철문 손잡이를 뜯어서 강제로 열어젖히고는,
벌컥!
"안녕?"
"냐앙?"
양충은 갑자기 밀고 들어온 젊은 놈과 고양이 한 마리를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장기밀매 및 적출 조직을 관리하고 있던 혈귀련 간부였다.
"누구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하지만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봐! 냄새가 나지? 더럽고 추잡한 냄새."
"···냥!"
"저런 놈들을 마인이라 부르는 거야. 가차 없이 조져버려."
"냐아아?"
"먹으면 안 돼. 지지야, 지지."
"냐아아아앙!"
양충은 기가 막혔다.
동시에 깜짝 놀랐다.
다짜고짜 마인?
'어, 어떻게 알았지?'
경찰인가, 아니면 제정원 소속인가.
일단 잡고 나서 물어보자.
으드드득!
뿌지지직!
순식간에 마수화를 시전해.
"죽여버리겠···, 헉!"
스팟!
어느새 젊은 놈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무, 무슨?'
덥석!
놈의 손에 목이 잡혔다.
"케르륵!"
양충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잡히자마자 힘이 쭉 빠졌다.
분명 마수화를 시전했는데,
그리고 자신의 목을 통해 밀려 들어오는 기운.
"으으으으, 왜, 왜?"
태주는 독기를 움직여 마인의 몸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차이나타운에서 발견한 첫 번째 마인, 과연 이놈 머리에도 고독(蠱毒)이 있을까?
'···있구나.'
달아나는 고독.
독기가 집요하게 벌레를 쫓았다.
태주는 고독을 가만두지 않았다.
이왕 찾은 거 태우는 것까지 해보려고,
"끄아아아아아!"
그러나,
퍼억!
마인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폭음.
"이런!"
힘 조절이 안 됐다.
아무튼 고독이 있는 건 명백하게 확인했다.
이제 남은 의문점.
모든 마인들에게 고독이 있는가?
'알아봐야지.'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선도 3개를 꺼냈다.
"오늘 일당이다."
"니앙!"
일백이, 이백이, 삼백이에게 차례차례 물려 주고는,
"마인 냄새는 기억했지?"
"야오옹!"
"그럼 이제 마음껏 날뛰어 봐."
팟!
순식간에 사라진 일이삼백이.
태주도 걸음을 옮겼다.
※ ※ ※
마인은 보통 마수처럼 자연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인으로 각성하면 적합자와 일반 각성자들을 먹어치우고 힘을 기른다.
하지만 점점 등급이 높을수록 미치광이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다 제어불능 상태에 빠져버려 폭주해 버리고.
그런데 만약 제어 가능한 마인이 있다면?
그만한 도구가 없다.
특히 빌런 조직에선 그 중요도가 매우 높았다.
같은 등급의 각성자보다 훨씬 강해서 조직 간의 전쟁, 암살이나 납치, 구역 접수에 두루두루 쓰인다.
물론 마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않으면.
정작 흑림의 보스 곽구양과 혈귀련의 우두머리 호청반은 마인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익스퍼트급 빌런 각성자.
하지만 제 밑으로 각각 열 명씩의 마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보다 강한 마인들을 수하로 거둘 수 있었을까?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회(會)'라는 곳에서 나온 '핸들러'라는 인물.
그가 혈고(血蠱)라는 고독(蠱毒)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마인을 만들고, 복종하게 만드는 방법을 전수해주었다.
대가는 당연히 돈.
사업으로 벌어들인 금액의 70%를 상납금으로 바쳐야 한다.
그게 어때서?
한때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밑바닥 조직이었던 흑림과 혈귀련이 여기까지 온 건 다 핸들러의 고독 덕분이었다.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자금성 꼭대기 스카이라운지에서 흑림 곽구양과 혈귀련 호청반은 회에서 나온 핸들러를 만나고 있었다.
"···모두 정리하고 철수하란 말입니까?"
"그래요. 상황이 달라졌어요. 우리 회에서도 정체가 밝혀진 마인들을 정리하고 사업에서 손을 떼는 중입니다."
흑림 곽구양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가 건재한 것이 밝혀져 상황이 달라진 건 알겠다.
하지만 정리라니?
차이나타운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잠수를 타라는 말 아닌가?
"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동산도 정리하고 숨겨둔 비자금도 빼내야 하는데···,"
핸들러는 새빨간 입술을 혀로 핥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흑림은 지금 제 지시를 어기겠단 말입니까?"
"아, 아닙니다."
그리고 호청반을 보면서,
"혈귀련은요?"
"···따르겠습니다."
그제야 만족한 표정의 핸들러.
"조금만 참아요. 조용해지면 다시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핸들러가 속한 '회(會)'는 회주의 지시에 따라 200년 가까이 마인을 연구해온 비밀 결사 단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마인은 3종류가 있다.
첫 번째, 시스템 오류로 발생한 마인, 회(會)에서는 놈들을 자연발생 마인이라 부른다.
두 번째, 인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마인.
회(會)에서 만들어 냈다.
시스템 오류와 마인 각성의 상관관계를 연구해 만들어진 인공 마인.
심지어 일반인도 마인으로 만들 수 있다.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그리고 세 번째, 바로 회주의 은혜를 받아 진정한 마인이 된 사람들, 진마(眞魔)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첫 번째 자연발생 마인들만 알고있다.
인공 마인과 진마의 존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인 자체도 알아보기도 어려운 판국에.
그런데 인공 마인의 존재가 밝혀질 뻔했다.
회에서 만든 두 명의 마인, 세르게이와 다이고가 제정원에 잡힌 것이 원인이었다.
각각 리더스 클럽과 빌런 전문 수감시설인 합빈 교도소에 심어둔 놈들.
처음엔 그냥 뒀다.
머릿속에 혈고가 들어있어 중요한 정보는 절대 입을 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저들도 입을 여는 순간 죽는다는 걸 안다.
오히려 제정원에 박아두면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회주의 제자인 부회주님에 의해 목숨이 경각에 달해있었던 황제가 더 강해진 모습으로 승전식 현장에 나타났다.
인공 마인의 존재가 들킬지도 모른다.
그랜드마스터쯤 되면 혈고를 찾아낼 수도 있으니까.
"저어, 그럼 우린 어디로 갑니까?"
혈귀련 호청반이 핸들러에게 물었다.
"열도로 가세요."
"아!"
열도라면 침몰하고 있는 옛 일본 땅.
"제국의 이목을 벗어나기에 가장 좋은 곳이잖아요. 가깝기도 하고."
"네, 당장 수하들을 이끌고···, 헉!"
말을 하다 말고 호청반이 깜짝 놀랐다.
"이, 이게···."
핸들러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마, 마인 양충의 고독이 터졌습니다."
"···뭐?"
혈고(血蠱)는 자고(子蠱)와 모고(母蠱)로 나뉜다.
자고는 마인들이, 모고는 곽구양과 호청반이 각각 지니고 있었다.
모고 하나가 10마리의 자고를 통제한다.
지금 상태가 어떤지도 알 수 있다.
마인이 죽었다고 해도 자고는 터지지 않는다.
그냥 몸에서 빠져나와 땅속으로 숨어든다.
'마인 양충의 자고가 터졌다는 의미는···, 모고가 지시를 내렸거나, 아니면 누가 건드렸다는 말인데,'
자폭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곽구양과 호청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가···?'
순간!
콰콰콰쾅!
차이나타운에서 터지는 굉음.
갑자기 무슨 일이지?
핸들러는 자금성 꼭대기 스카이라운지 전망창으로 달려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광경.
"무, 무슨?"
마수화된 마인이 건물 벽을 뚫고 뛰쳐나왔다,
뭔가에게 쫓기는 듯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호랑이?'
확실하다.
하얀색 호랑이였다.
삼두백호도 아닌 평범한 호랑이에게 마수화된 마인이 쫓기고 있었다.
저게 말이나 되나?
도망치는 마인의 등을 앞발로 찍어 넘어뜨린 후, 목덜미를 물어버리는 백호.
꽈드드득!
"미, 미친!"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죽어버린 마인.
백호는 멈추지 않았다.
훌쩍훌쩍 뛰어가더니 도망가고 있는 한 인간 각성자에게 달려가.
"크르렁!"
휙! 날아서 머리를 물어뜯었다.
콰직! 빠득!
뜯겨지는 머리, 동시에 마수로 변하는 인간.
'···아!'
분명 인간 상태였다.
마수로 변하지도 않았다.
도망가는 다른 인간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알고 마인만 골라서 공격했다.
대체 어떻게?
그렇다면 저 호랑이가 마인을 판별할 수 있다는 말?
"크르르르르르릉!"
호랑이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마수화로 변하는 마인들.
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멀리 가지도 못했다.
호랑이가 훨씬 빨랐으니까.
핸들러는 기가 막혔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어음···,"
그때였다.
털썩, 털썩.
두 명이 쓰러지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렸다.
핸들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곽구양과 호청반,
그리고 기척도 없이 나타난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대박인 줄 몰랐어."
"···."
"엄청 강한 마기의 악취를 쫓아서 여기 왔거든? 그런데 이 두 놈은 마인이 아니란 말이지."
태주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너밖에 없잖아?"
천천히 다가가는 태주.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다만···, 정말 이상하지? 넌 각성 문양도 없는데 어떻게 마인이야?"
스슷!
어느새 손에서 나타난 유엽비도.
"지금부터 그걸 알아보려고."
말이 끝나자마자,
쐐애액!
핸들러가 스카이라운지 전망유리창으로 몸을 던졌다.
와장창!
"쯧, 도망가봐야 소용없을 텐데."
태주도 몸을 날렸다.
※ ※ ※
선계.
도로를 만들던 검선도 떴다 소리에, 건설 현장에 나타났다.
"할?"
"안!"
실망하는 검선의 표정.
"다음 배송?"
"나도 모름!"
당군악이 달래듯 말했다.
"이리 와서 목이나 축이고 가시오."
주선의 소맥 제조가 시작됐다.
대목 선인이 만든 나무 탁자 위에 40여 개의 소맥잔이 놓였다.
드르르르륵!
그 위를 미끄러지듯이 지나가는 녹색 소주병, 각 잔에 똑같은 양의 소주가 깔렸다.
태백 선인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듯이 소맥은 비율이요. 비율에 따라 술맛이 달라지는 법. 여기 이 눈금에 따라야 그야말로 황금 비율이지."
당군악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자기도 처음 해보는 주제에, 무슨 비율?
마침내 태백 선인은 맥주병을 들었다.
상표는 '카오스'
소맥으로 먹어야 빛을 발한다는 맥주.
미리 빙공으로 얼기 직전까지 차갑게 해놓았다.
"검선, 이 뚜껑에다가 구멍 좀 뚫어주시오."
"그냥 따지 않고?"
"쯧쯧, 드라마도 안 보셨나? 소맥 만드는 최신 방법이 있소."
최신 같은 소리하네.
이런 소맥 제조도 지구에선 300년 전 문화.
아무튼 조그만 구멍이 뚫린 맥주병을 손가락으로 막고 세차게 흔들어대는 태백 선인, 그리고 소맥잔 위에서 손가락을 떼니.
치직, 치지직!
새하얀 거품과 함께 채워지는 잔들.
"오오오!"
"나 이거 드라마로 봤소."
"역시 주선이구만."
"···거품이 너무 많은 거 아니오?"
"맥주는 거품 맛으로 먹는 거지!"
"그런가?"
"자, 마셔봅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어 잔을 잡고 한잔 쭉 들이키는 선인들.
"크아!"
"캬!"
"시원하구나!"
"흐아!"
.
.
.
이제 안주.
다른 탁자엔 양념치킨들이 쫙 깔려있었다.
"난 다리,"
"나도,"
"나도,"
"그럼 난 날개나···,"
"배신자들은 퍽퍽살이나 먹어. 모가지 먹던가!"
선계에 열린 첫 치맥 잔치였다.
< 뉴서울 차이나타운(2) > 끝
ⓒ 꾸찌꾸찌
=======================================
< 뉴서울 차이나타운(3) >
즉시 출동할 수 있게끔 준비는 하고 있었다.
김태주 회장이 직접 나갔으니까.
마인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문경식 차장은 태주의 전화를 받자마자 경찰, 황도 방위 사령부, 제정원 등,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전투 부대에게 마인 출현 비상령을 발동했다.
문경식 차장은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대기하던 정연희와 만났다.
"정연희 요원, 회장님은?"
"차이나타운 안에 계십니다. 확실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혼자서 작전 진행한다고."
"···그래? 일단 관광객들부터 피신시키자."
뉴서울이 떠들썩할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끌고 왔다.
사방으로 교통을 통제했다.
언론들도 마찬가지.
신문사나 방송사 차량과 헬기도 취재 금지.
전투부대가 차이나타운 거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든 군인들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도망가는 관광객들.
'김회장님은 어디 계시지?'
문경식은 살짝 마음이 불안했다.
이렇게 많이 끌고 왔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떡하나?
김태주 회장은 병력을 총동원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인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말.
순간!
화가 난 표정의 남자를 필두로 차이나타운 상인들이 우르르 달려와 전투부대 앞을 막아섰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누구?"
"차이나타운 상가 번영회 회장이요."
나타날 줄 알았다.
"이게 무슨 난리요, 장사를 방해해도 정도가 있지."
"범죄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비켜주시죠."
"하! 전쟁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직 우리 중국계 제국민을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는 거요?"
그러자 상인들도,
"중국계 제국민 차별하지 마라!"
"혐오를 멈춰요! 함께 좀 삽시다."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차라리 날 죽이고 가쇼!"
"장사 망한 거 책임질 거야?"
아예 길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문경식은 한숨을 푹 쉬었다.
수사관들이 차이나타운에 올 때마다 이렇다.
"이젠 대답도 안 해? 내가 누군지 알아? 당신 소속이 어디야? 내가 반드시 옷을 벗겨준다. 영업방해 소송까지 할 테니 각오해"
바로 그때!
콰아아아앙!
차이나타운 저 안쪽에 서 들리는 굉음.
사람들의 고개가 획하고 돌아갔다.
건물 벽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괴성을 지르며 나타난 괴인, 아니 마수화된 마인.
"캬아아악!"
드디어 나타났구나.
"마인이다!"
"전투 준비!"
"경찰 특공대, 퇴로를 막는다!"
"제정원 대마인 특작부대 투입!"
하지만 나온 건 마인만이 아니었다.
뻥 뚫린 건물 외벽에서 나타난 네발 달린 생명체.
"크르릉!"
새하얀 털에, 평범한 호랑이 한 마리.
"어?"
"무, 무슨···?"
"호랑이가 왜 저기에?"
동물원에서 탈출했나?
그런데 나타난 마인이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인이 도망을 간다고?
설마 호랑이에게?
급기야,
펄쩍 도약한 백호가 마인을 추적해 넘어뜨리더니 목덜미를 물어 경추를 끊어버렸다.
꽈드드득!
모두가 경악했다.
"···뭐, 뭐야?"
"마, 맙소사!"
"미친!"
마인을 사냥하는 백호라고?
'···마수인가?'
백호는 멈추지 않았다.
"꺄악!"
"사, 사람 살려."
마인과 호랑이가 나타나자 기겁하며 도망치는 사람들.
쐐애액!
백호가 그들 뒤를 쫓았다.
"아, 안돼!!!"
콰직! 빠득.
이번엔 마인이 아닌 일반 사람의 머리를 물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문경식.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더구나 각성자, 완전히 망했다.
"저, 전투조! 뭐 하고 있어? 호랑이, 사살해!"
철커덕!
백호를 조준하는 사격수들.
그런데?
백호에게 습격당한 각성자가 숨이 끊어지자마자 스스스스···, 마수로 변해버렸다.
"···."
문경식의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죽은 자도 마인.
우연일까?
그건 아니다.
노리고 공격한 것이 틀림없다.
대체 저 백호는 뭐지?
혹시 영수?
그러고 보니 눈동자가 익숙하다.
얼굴에 난 회색 무늬도.
어디서 봤더라?
"크르르르르릉!"
마인 두 마리를 처치하고도 멈추지 않는 백호.
성큼성큼 그 옆 가게로 달려 들어가 한참을 휘젓더니,
와장창!
콰콰쾅!
"케엑!"
또 도망치는 마인을 쫓아 나와 물어 죽였다.
꽈득!
"어···,"
콰콰콰콰쾅!
백호가 차이나타운을 휩쓸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일반인들은 건들지도 않았다.
건물로 들어가 들쑤시자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마인들.
그리고 나타나는 족족 한입에 물어 죽이는 백호.
왜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김태주 회장이 품에 안고 다니던 고양이가 생각났다.
아무튼 모두 다 목격했다.
차이나타운에 다수의 마인이 출현한 것을.
'마인이 이렇게 많았어?'
절망한 표정의 차이나타운 상가 번영회 회장.
무슨 말이 필요할까?
문경식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물었다.
"할 말 없어요?"
"···어, 없습니다."
"그쪽이나 각오하세요. 수사 방해로 다 입건하겠습니다."
"죄, 죄송···,"
앞으로 민족 차별, 혐오 같은 단어는 꺼내지도 못할 것이다.
"차장님, 우린 뭘 해야 합니까?"
정연희가 물었다.
사실 문경식 차장도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일단 부대 진입하자."
시체라도 치워야지.
그나저나 김태주 회장은 어디 있을까?
※ ※ ※
태주는 도망가는 놈을 천천히 쫓았다.
가끔씩 유엽비도나 툭툭 날려주면서.
츠핏!
상당히 빠른 놈이었다.
움직임에 일정한 형식이 보였다.
'스킬? 아니면···, 경공?'
스킬일 리가 없다.
서양인 출신인 듯한 놈의 얼굴엔 각성 문양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렇다고 해도 자신에 비하면 매우 느렸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
각성 문양도 없는데 추악한 마기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놈.
얼마나 귀한가?
처음보는 사례였다.
한 번에 죽이면 멍청한 짓이지.
뭐라도 알아내고 나서 죽여야 한다.
당연히 유엽비도엔 독이 발려져 있다.
독의 세기는 아주 약하게.
자신이 중독된 것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천천히 몰아야 한다.
자신이 충분히 도망쳤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츠핏!
또 한 자루의 유엽비도가 날았다.
서걱!
독이 발린 비도가 놈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진마(眞魔) 핸들러는 속도를 높혔다.
'누군가 했더니···,'
김태주 회장, 그놈이 분명했다.
회주께선 말씀하셨다.
각성 문양이 없는데도 각성자보다 더 강한 자를 만나면 조심해라.
맞서 싸울 생각은 접고 가능하면 도망쳐라.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태주.
현재 급부상하는 제국의 신흥 권력자였다.
'퍼킹! 자존심 상하게.'
핸들러는 진마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회주께 직접 사사 받은 자들만 진마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회주님만 계셨다면···,'
제국쯤이야 단번에 멸망시킬 수 있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회(會)가 양지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도망칠 일도 없을 텐데.
하지만 회주님께선 지금 중국 땅에 계신다.
그 무시무시한 비욘드 엘리트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지옥에 말이다.
그래서 현재 회(會)는 부회주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핸들러를 비롯한 진마들이 진심으로 충성하는 분은 오로지 회주.
부회주의 명령을 따르긴 하지만 썩 탐탁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시스템 각성 마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부회주는 마인 각성자 상태에서 회주님에게 거두어진 사람.
삼한제국 황제와 자웅을 겨룰 만큼 강하긴 하지만 한계가 뚜렷한 자였다.
시스템에 귀속된 마인 각성자는 아무리 용을 써도 진마가 되지 못한다.
그에 대해 부회주도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고.
회에는 부회주 말고도 시스템 각성 마인들이 몇몇 더 있어 파벌 비슷한 것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직 10명의 진마들만이 진정한 회주의 제자들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핸들러는 막내, 회주님께 거둬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1년만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김태주 따윈 마기로 녹여버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순간!
츠피릿!
"헉!"
또?
등 뒤에서 날아드는 섬뜩한 기운!
핸들러는 가까스로 몸을 비틀었다.
서걱!
날카로운 투사체가 어깨를 긁으며 지나갔다.
"제기랄!"
벌써 몇 번째인가?
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
독에 대해 조예가 깊다고 알려진 놈이다.
방금 놈이 날린 투사체에도 독이 묻어있을 터.
하지만 걱정 없다.
진마의 마기는 독에 저항력이 매우 강하다.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다.
'다 왔어.'
핸들러의 눈에 들어온 맨홀 뚜껑.
미리 확보해둔 도주로.
차이나타운의 하수도는 미로처럼 꾸불꾸불하다.
이 안으로 들어가 도망치면 놈을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또한 투사체 공격에도 안전하다.
쿵!
맨홀 뚜껑을 부수고 안쪽으로,
타다다다닥!
핸들러는 극성으로 마환보를 시전했다.
파바바바밧!
뉴서울 시내로 이어지는 하수관.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위로 올라가서 도망치면 끝.
핸들러는 정신없이 달렸다.
쿵쿵쿵쿵쿵···,
심장박동이 빠르게 띄었다.
입에서 단내가 피어올랐다.
"헉헉!"
온몸으로 순환되는 마기.
혈류가 증가한다.
펌프질하는 심장에 의해 구석구석으로 흐른다.
핸들러는 집중 상태에 접어들었다.
달리기는 계속, 멈추지도, 멈출 생각도 없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두 다리.
'아아아아아!'
마침내 머릿속에선 피어나는 강렬한 쾌감.
너무나 짜릿해서 미칠 것 같다.
이게 말로만 듣던 무아지경?
회주께서 말씀하셨다.
정진하다 보면 벽을 깨고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마수의 결정체를 빨아먹은 것도 아닌데, 각성자의 마나를 흡수한 것도 아닌데, 도망치는 하수관 안에서 경지가 올라가는 순간을 맞이하다니.
'회주님, 당신의 충실한 제자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나이다.'
전신에서 힘이 솟아오른다.
지금 누구와도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았다.
차오르는 자신감.
회주님께서 기뻐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서 빨리 경지에 오른 자신을 보여드리고 싶다.
현재 핸들러의 머릿속엔 온통 회주님 생각뿐.
순간!
우뚝!
'음?'
핸들러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자신이 달리고 있는 방향에 누군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캄캄한 하수관을 막고 선 사람.
실루엣만 간신히 보인다.
누굴까?
핸들러는 지금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확연히 드러나는 존재감, 강렬한 카리스마.
핸들러는 확신했다.
"회주님···,"
존귀하신 회주님께서 친히 이곳에 나타나셨다.
핸들러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 핸들러, 회주님에게 인사드립니다."
"···그래, 핸들러야, 무사했구나."
"절 구하러 오셨군요."
아닌데?
잡으러 왔는데?
※ ※ ※
태주가 주입한 건 일종의 자백제였다.
모기 독과 마약을 섞었다. 그리고 환각을 일으키는 독버섯도.
지속적으로 독을 투입해서 환영을 보게 만든다.
그러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되고,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의 벽이 무너지고 만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자신이 중독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해야 한다.
일부러 암기를 정확하게 꽂아 넣지 않고 살짝살짝 스치게 조종했다.
어느 정도 약효가 돌았거니 판단하고 그 앞에 나타났는데···,
'나보고 회주?'
어두운 하수관.
놈의 눈은 이미 완전하게 풀려있었다.
자신을 회주라고 여기는 모양.
'이거 생각지도 못한 효과잖아.'
일단 장단을 맞춰 주자.
"핸들러야, 일은 잘 처리했느냐?"
"···아! 제자가 불민하여 그만, 꼬리를 남겼습니다. 주, 죽여주십시오."
"괜찮다.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허나 걱정하지 마옵소서, 꼬리라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입니다."
"거참, 다행이구나."
"김태주, 그놈만 아니었어도···, 언젠간 반드시 놈을 잡아서 회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이 새끼 봐라?
날 잡아 바친다고?
"김태주라, 그놈을 직접 보니 어떻더냐? 나랑 비교한다면?"
"턱없이 모자랍니다. 부회주 수준에도 못 미칠 정도입니다."
술술 나온다.
회주에, 부회주까지.
"그러고 보니 부회주는 잘 있고?"
"황제 놈에게 당한 내상이 깊어서 아직···,"
"쯧쯧, 고작 황제를 당해내지 못해서 그 꼴이라니."
"진마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시스템에 예속된 탓이지요."
"그렇긴 하지. 어디 있느냐? 내가 가서 봐야겠다."
"그야 당연히 고비 초원의 우리 근거지에···, 어어, 그, 그게···, 아!"
고개를 갸웃하는 핸들러.
뚫어져라, 태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켰나?'
환영독의 지속시간이 끝난 모양.
한방 더 놓을 걸 그랬다.
"···너, 넌 회주님이 아니구나."
"어, 아니야."
"이익, 개 같은 새끼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강하게 때려 기절시키고 난 뒤 다시 자백제를 투입하면···.
그런데?
"커헉!"
핸들러는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나, 날 속였···,"
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눈과 코, 귀, 입에서 꿀렁꿀렁 흘러나오는 선혈.
그러더니.
"끅?"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넘어갔다.
"이런!"
태주는 핸들러의 맥문을 짚었다.
맥이 흐르지 않았다.
'죽었군.'
갑자기?
고독은 아니다.
이건 암시에 의한 것이다.
일종의 최면,
비밀을 말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심맥이 끊어지고 단전이 파괴되는 수법.
환각에 들었을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정신을 차리고 나서.
자신이 비밀을 말했다고 깨달은 순간에 암시가 작용한 것이다.
'회주님, 회주님, 하더니만.'
결국 이놈도 쓰다 버리는 도구였다.
'쯧,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어도···,'
그럼에도 알아낸 것들이 꽤 있다.
회주, 부회주, 진마, 고비 초원에 있다는 근거지.
과연 회주의 정체가 뭘까?
물론 심증은 있다.
고독에, 핸들러에게서 느껴지는 진한 마기, 놈이 사용한 경공, 암시를 걸어 입을 다물게 하는 수법도.
'···마교.'
단정 짓기엔 아직 부족하다.
파고 들어가면 또 나오겠지.
그때였다.
찌르르르.
'헐! 벌써?'
선계에서 온 배송 신호.
'어째 배송 간격이 빨라진 것 같은데?'
뭐, 빨라지면 좋지.
태주는 재빨리 무한공간 공유창고를 열었다.
'다시 왔구나.'
당군악이 보내준 선계 물품과 함께 고이 올려져 있는 아공간 가방.
지금 필요한 건 스피드.
먼저 공유창고를 비우고, 할리 바이크부터.
'들어가라! 제발!'
스슷!
들어갔다.
그리고 아공간 가방을 꺼내 무한공간에 든 물건을 안에다 쓸어 담았다.
태블릿과 공기계 스마트폰, 휘발유가 든 말통, 그리고 당군악에게 줄 선물···, 급하다, 급해.
아공간 가방이 하나 더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
미리 준비했다가 넣으면 끝일 텐데.
물건을 다 담고 다시 공유창고로,
그리고 아직 비어있는 공간을 작은 물건들로 꽉 채우고.
핏!
공유창고의 빛이 꺼졌다.
아슬아슬했다.
그제야 당군악이 보낸 물건을 확인하는 태주.
'···이건 뭐지?'
호리병처럼 생긴 물건이 보인다.
나가서 일 마무리하고 자세하게 알아보자.
< 뉴서울 차이나타운(3) > 끝
ⓒ 꾸찌꾸찌
=======================================
< 할? >
태주는 죽은 핸들러의 시체를 무한공간에 넣고 하수관에서 위로 올라왔다.
"크르르르르르···,"
콰콰쾅! 쾅쾅!
여전히 백호가 날뛰는 소리.
'잘하고 있네.'
비싼 선도를 먹였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솔직히 더 굴려도 된다.
태주는 처음 핸들러와 마주쳤던 건물의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다.
아직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는 두 명, 그중 한 놈의 맥문을 잡고 독기를 불어넣었다.
좀 전엔 미처 확인 못 했지만 이놈들 몸에도 고독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우우웅!
흘러 들어가는 독기.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모고구나.'
자고를 통제하는 모고.
첨엔 없애려다 실패한 자고보다 몸집이 크다.
아마도 이 모고를 이용해서 마인들을 조종했겠지.
'녹이자.'
이번엔 힘 조절을 해서, 약하게.
우우우웅!
치치치치치치···,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고독.
'힘 조절이 답이었어.'
사람의 정신을 통제하는 추악한 벌레다.
동시에 독(毒)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딴 걸 독정에 추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나 더.'
치치치치치치···,
모고가 다 사라졌다.
그럼?
자고를 소유한 마인들도 죽는다.
머릿속이 터져서.
이제 끝났다는 의미.
태주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두 놈 옆에다 핸들러의 시체도 꺼내 가지런히 놓았다.
'문경식 차장 불러야겠군.'
마인 찾아내고 죽이는 거야 자신 있지만, 수사는 제정원이 훨씬 잘한다.
그들에게 맡기자.
태주의 연락을 받고 건물 스카이라운지로 달려오는 문경식과 제정원 요원들.
"회장님!!!"
"오셨어요? 이놈들도 끌고 가세요."
"···음?"
문경식은 놈들을 아는 듯 했다.
"흑림 곽구양과 혈귀련의 호청반이군요. 차이나타운 빌런 조직 우두머리들입니다. 그런데 이놈은···?"
"마인입니다."
"네? 그, 그럴 리가."
죽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마수 상태가 아니다.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일단 제정원 본부로 옮기죠. 나중에 제가 따로 설명해드릴게요."
"아, 알겠습니다."
태주는 밑으로 내려갔다.
한적한 거리.
상인들도 관광객들도 모두 피신한 차이나타운엔 각성자 전투부대밖에 없었다.
순간!
"냐아아앙!"
어느새 나타난 일백이가 태주에게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볐다.
"끝났어?"
"냐아,"
"수고했다. 밥값은 했구나."
"냥!"
꿀꺽.
문경식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일백이를 힐끗 살폈다.
이제야 확실해졌다.
백호의 정체가.
태주는 웃으며 문경식을 안심시켰다.
"이쁘게 봐주세요. 착한 앱니다."
"으음, 그, 그렇겠죠?"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인의 머리를 물어뜯던 무시무시한 백호가 저 귀여운 고양이라니.
하지만 마인말고는 인명피해가 하나도 없는 걸 봐선 착한 것도 맞고.
"현재 발견된 마인은 몇 명입니까?"
"시체 15구 확보됐습니다."
"구석구석 수색해서 더 찾아보세요. 아마 몇 명 더 나올 겁니다."
"더요?"
"세르게이와 다이고처럼 뇌가 터진 놈들."
"아!"
그리고 정연희를 불러서.
"연희씨, 우리 한번 보기로 한 거 기억나시죠?"
"···으흠, 기억나요."
"그럼 내일 구례에서, 괜찮으시겠어요?"
"네, 연차 쓸게요."
정연희와 약속을 잡은 후, 태주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오늘 알아낸 사실은 바로바로 공유해야지.
※ ※ ※
태주는 황궁으로 들어갔다.
공식적인 입궁이 아니기 때문에, 황궁 직원들이 출입하는 뒷문을 이용했다.
마중 나온 금수호.
그런데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태주를 흘겨보며 헛기침까지.
"커험! 험험!"
이 사람 왜 이래?
마인을 그렇게 많이 잡아줬는데.
그러자 품속에서 일백이가 고개를 내밀더니,
"캬악!"
금수호를 보며 하악질로 위협했다.
"넌 뭐냐?"
"캭!"
찌릿!
서로 노려보는 일백이와 금수호.
"에잉!"
결국 먼저 눈을 피한 건 금수호였다.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해주세요."
"큼!"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필명이가 사표를 냈네."
"오!"
잘 됐다.
이젠 완전히 파주에 정착할 생각인가.
"원래 약속은 5년간 파견근무였잖아. 그런데 그새를 못 참고 바로 채가나?"
"유능한 사람 같아서요."
"그걸 아는 사람이! 자네 때문에 내 노후 계획이 폭삭 망했네."
노후 계획이라니.
"폐하께서도 건강을 되찾으셨고, 황가의 기강도 슬슬 잡혀가고, 그래서 낙향해서 편하게 살고 싶었단 말이야."
"···그러셨어요?"
"사람을 놓아주질 않아. 지가 무슨 세종대왕인가?"
"···."
금수호는 스스로를 황희 정승이라 생각하는가 보다.
"폐하와 협상을 해서 5년만 참기로 했어. 필명이가 황궁으로 돌아오면 즉시 인수인계를 하려고 했었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서필명 비서관이 금수호의 후계자였다는 의미.
"아니, 황궁에 사람이 그렇게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넘기시고 은퇴하시면 되지."
"필명이 같은 놈이 어디 흔한가? 마스터보다 더 귀한 놈이었어. 얼마나 공들여 키워놓았는지 자넨 모를거야."
"···애초에 대우를 잘 해주셨으면."
"해줬지. 그 나이에 그만한 연봉 받는 공무원이 어디 있다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황제가 순순히 금수호를 풀어줄까?
아마도 은퇴하려면 황제가 죽어야 가능할 지도.
태주 자신도 급하다.
구례 종신 시장에 파주 영지까지 맡게 됐다.
운영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솔직히 부족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아, 5년만 더 참았으면 황궁 탈출각이었는데, 필명이 같은 놈들을 또 어디서 구하나?"
툴툴거리는 금수호를 애써 외면하고는 황궁 후원 별채에서 황제와 만났다.
태주를 보자마자 반색하는 황제.
"어서 오게! 수고 많이 했네."
당연히 수고했지.
물론 일이삼백이가 다 했지만.
"···그놈과 같이 왔는가? 그 고양이 말이야."
"네. 같이 왔습니다."
태주는 품에서 이백이를 내려놓았다.
"야아옹."
방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이백이.
"허허, 보통 놈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지리산에 그 엘리트 삼두백호가 맞겠지?"
"맞습니다."
"역시 마수가 아니라 영수였어. ···어? 이놈, 얼굴이 바뀌었군."
"니아?"
방금 삼백이가 됐다.
"삼두백호니까요. 차례대로 얼굴이 나옵니다."
황제는 신기한 듯 삼백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혹시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도 자네와 백호가 처치했는지?"
어차피 다 알고 물어보는 것 같다.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고.
"제가 한 건 맞지만, ···뭐, 사실 온전한 제 실력이라고는 볼 수 없죠. 아이템 도움도 있었고, 운이 좋았습니다."
부적과 만리비검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꿨을 일이다.
흑악지룡이 느리다는 약점도 한몫했고.
"운도 실력이야. 아이템도 마찬가지고."
금수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차이나타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할 차례.
태주는 핸들러라는 놈에게서 입수한 정보에 대해 황제에게 설명했다.
설명이 진행될수록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두 사람.
"이거 당한 것도 서러운데, 그 새끼가 우두머리가 아니라 밑에 있는 놈이라고?"
가슴을 탕탕치며 분노하는 황제.
"그게 제일 화가 나! 부회주란 놈, 아직 살아있잖아! 난 그 복숭아 없었으면 지금쯤 죽었어. 자존심 상해 미치겠군."
태주도 이해한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나?
"살려둬선 안 돼. 초기 각성 마인임에 틀림없어. 최소 200살은 넘었을 거란 말이지. 그놈에게 희생당한 사람의 숫자가 대체 몇 명이겠나? 내가 직접 찾아서 죽여버릴 거야."
건강도 되찾았겠다, 더구나 부회주 놈도 상태가 완전하지 않다고 하니까.
황제는 제국군 통수권자.
고비 초원 개척 부대 하나 동원해서 근거지를 찾아내고, 막강한 화력을 동원해 쓸어버리면 일망타진할 수 있다.
그러면서 태주를 보더니.
"자넨 한동안 푹 쉬게. 이 건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혼자 끝장을 보겠다는 말이지만,
"근데 찾을 수 있을까요? 고비 초원이 얼마나 넓은데."
한반도 6개 크기의 고비 초원.
그곳도 삼한의 영토지만 일부분일 뿐이다.
마수들도 매우 많아서 10분의 1도 개척하지 못했다.
"···으음."
"게다가 수색을 시작하면 잡아가라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도망칠 것이 뻔하죠."
괜히 들쑤셨다간 놓칠지도 모른다.
"그냥 차이나타운 마인만 소탕한 걸로만 끝내야 합니다. 우리가 그쪽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눈치를 주면 안 됩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부회주만 해도 그렇다.
그놈은 상처를 입고 요양 중인 상태지만 황제는 죽을 뻔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부회주는 황제보다 강하다.
그런데 그 부회주를 부하로 두고 있는 회주라는 놈은 어느 정도 실력일까?
회주라는 존재만 알지, 외모, 나이, 실력, 심지어 성별이 뭔지도 모른다.
"정보 탐색부터 해야죠. 조용하고, 은밀하게."
군대가 나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러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
"흐음, 알겠네. 그렇게 하지."
자신도 나설 생각이었다.
좋은 기회다.
새로운 독을 찾아서 혼원무상독령공 10성 도달하는 것.
구례와는 전혀 환경이 다른 고비 초원.
그곳엔 또 얼마나 많은 종류의 독물들이 있을까?
나들이 삼아서 한번 돌고 오자.
겸사겸사 마인도 수색하고.
※ ※ ※
선계(仙界).
건물 공사가 거의 다 끝났다.
슬슬 장사를 개시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선행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
선계의 화폐는 선도.
하지만 덩어리가 크다 보니 거래에 문제점이 있다.
초콜릿 하나에 선도 하나를 통째로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쪼개서 받을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시, 신용카드?"
"호오! 그렇군. 좋은 생각이야. 그 큰 선도를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고."
당군악의 제안에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는 귀곡 선인과 갈홍 선인.
둘 다 머리도 좋고 술법진엔 일가견이 있는 신선들.
아이디어를 던져주자 자기들끼리 신나서 이야기한다.
"신용카드 대용으로 술법진이 새겨진 금속패를 지급하면 되겠군."
"그렇지. 독선에게 선도를 주고 그만큼의 가치를 코인으로 집어 넣어주는 거요."
"결제 리더기도 술법진으로 대체하면 돼. 물건을 산 만큼 코인이 줄어드는 걸로."
"그럼 선도 하나에 얼마를 책정할까?"
당군악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선도 하나에 100코인으로 합시다. 요 작은 사탕은 1코인으로, 그럼 선도 하나로 사탕을 100개나 살 수 있는 거요."
"···너무 싼 거 아닌가?"
"괜찮소. 내가 손해 보는 셈 치지."
"역시 독선이야!"
선도 하나에 사탕 100개.
전보다는 매우 싸게 파는 거다.
인심 팍팍 써야지.
"그럼 손목시계는?"
"으음, 선도 200개?"
"2만 코인이군. 허허, 좋구나, 좋아!"
싸게 해야 수요가 있을 터.
선계 경제도 원활하게 돌아가고.
선도와 보패를 벌어야 태주에게 보내지.
당군악의 계획이 알려지자 선인들의 반응은 제각각.
마음껏 물건을 살 수 있다고 좋아하는 선인들이 있는가 하면, 선도가 부족해 애를 태우는 선인들도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소!"
"맞아! 뒤엎어버립시다."
"신선을 호구로 아나."
"이건 명백한 갑질이야."
"즉시 항의하러 갑시다."
우르르르,
신선들이 몰려간 곳은 태상노군의 거처.
"한 달에 선도 하나가 웬 말이냐! 각성하라!"
"우리 신선 노조는 한 달에 선도 300개 인상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소."
"투쟁! 총파업이다!!!"
맨날 놀고먹는 신선들이 무슨 파업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날마다 몰려가 태상노군을 괴롭혀댔다.
그 와중에 또 와서 당군악에게 질문을 던지는 검선.
"할?"
실로 집요했다.
이러다 바이크가 안 오면 큰일 날 정도.
"안···."
그때였다.
찌르르르!
순간 머릿속에서 울리는 배송 신호.
'벌써?'
배송 간격이 생각보다 빠르다.
검선의 집념이 만들어 낸 결과인가?
당군악도 긴장했다.
태주가 자비를 베풀었는지.
그리하여 할리 바이크가 들어있을는지.
천천히 공유창고를 확인해보니.
'오!'
기어코 왔다.
번쩍번쩍한 외관을 자랑하는 두 바퀴 탈것.
당군악은 재빨리 물건을 옮겼다.
아공간에 든 물건도 빼내고.
하지만 자신이 보낼 물건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선도 50개 정도.
그동안 장사를 하지 못해서 벌어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패도 마찬가지.
몇몇 선인을 제외하고는 보패를 자식같이 아끼는 자들이 대부분, 그래서 그들에게 보패를 쏙쏙 빼먹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미안하다. 태주야.'
부끄러워 미치겠다.
이 귀한 지구 물건들에 대한 대가로 선도 50개밖에 줄 수 없다니.
"할?"
당군악이 침묵하자 또 다시 물어오는 검선.
"할?"
"왔."
"하알···, 뭐? 다, 다시 말해보시오."
검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들었다.
'안'이 아니라 '왔'이었다.
"맞소. 배송이 왔소."
당군악은 무한공간에서 할리 바이크를 꺼냈다.
"어억!"
검선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
환호가 아니라 비명에 가까웠다.
그토록 소원했던 할리.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
"허허허,"
검선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할리였다.
인간계, 선계, 천계 등을 통틀어 이런 비슷한 물건이 존재하기라도 하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바이크의 몸체를 한참이나 어루만지더니.
"보, 복숭아 몇 개면 되오?"
"그냥 가져가시오. 복마검법에 대한 선물이라고 보면 되겠지."
"···태주 대협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고."
사방에서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허허, 거참, 저걸 실제로 보게 되는군."
"부럽도다."
"난 전동 킥보드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도로도 있으니까."
"그건 안 파나?"
구경꾼 중에는 탁탑 신장도 있었다.
낯선 복색의 누군가와 함께.
"독선, 오랜만이요. 언제부터 영화 상영을 하는지 궁금해서."
"곧 할거요. ···근데 이분은?"
"아! 황천계에 있는 내 친구, 서로 인사 나누시오."
이젠 황천계에서도 왔다.
"하하! 말씀 많이 들었소이다. 강림 차사라고 합니다."
"독선이라 불러주시오."
마침 잘됐다.
"강림 차사,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뭐든,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해드리리다."
"그···, 인간계에서 횡포를 부리던 천마라는 놈 알고 있소?"
"모를 리가! 우리 황천계에서도 벼르던 놈이었는데. 그대가 황천으로 보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놈,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당연히 무간지옥(無間地獄)이지, 영혼이 넘어오자마자 대왕께서 그곳에 처넣으셨소."
꼴 좋다.
당군악은 속이 시원했다.
< 할? > 끝
ⓒ 꾸찌꾸찌
=======================================
< 인재 수집 >
차이나타운 마인 사태.
제정원은 90%의 진실과 10%의 거짓을 섞어 언론에 공개됐다.
<충격! 뉴서울 턱밑 차이나타운에 마인들이 숨어있었다.>
<사살된 마인만 무려 20명, 모두 빌런 조직에 소속된 놈들.>
<심지어 호랑이 형태의 마수까지? 마인과 마수 간의 전투도 벌어져.>
<제정원에 따르면 마인들이 사육하다 길들이기에 실패한 마수로 추정.>
<마인 진압 부대, 마수와 마인까지 성공적으로 소탕했다고 밝혀.>
<흑림과 혈귀련의 보스, 곽구양과 호청반, 현장 체포.>
황제는 즉각 성명을 발표해 공을 세운 자들을 치하했다.
<황제 폐하, 마인 진압 부대의 쾌거에 찬사를 보내.>
<작전에 참여한 모든 인원, 친히 황궁으로 초청, 만찬회를 열 계획.>
그리고 혹시라도 일어날지도 모를 중국계 제국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도 조기에 차단했다.
<중국계 제국민에 대한 비난은 지금 시점에서 맞지 않는다.>
<황제 폐하께서도 마인은 민족, 인종과 상관없다고 단언.>
<근거 없는 유언비어 유포자는 엄벌에 처할 예정.>
차이나타운 관련 기사는 삼한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외신에서도 속보를 편성해 하루종일 떠들어댔다.
고비 초원의 개척 도시 바룬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옛 내몽골 자치구 지역에 속한 사막 도시였지만, 지금은 기후가 변해서 비옥한 초원지대로 변했다.
밀이 잘 자라는 지역이라 넓은 평원 지대에 대규모 기업형 농장들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여기도 마수들이 있다.
제국의 개척부대가 밀집지대를 쓸고 지나갔지만 아직 남은 마수들이 곳곳에 잔존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개척도시 바룬은 몽골계 제국민들과 적합자, 각성자로 구성된 레이드팀, 농장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들로 북적이는 도시.
바룬시 외곽의 중소형 밀 농장.
농가 지하 식료품 창고에서 20여 명의 사람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핸들러와는 아직 연락이 안 되나?"
"차이나타운 사태 이후론···,"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후우, 돈줄 하나가 막혀버렸군. 제정원에 잡혔을까?"
"웃기지 마! 핸들러는 진마다. 절대 쉽게 잡힐 리가 없어."
"뭐야? 지금 네 말은 우리 같은 시스템 각성자들은 쉽게 잡힌단 거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씨발, 은연중에 우릴 깔보고 천대시했으면서."
창고 안, 둘로 나뉜 사람들.
한쪽은 얼굴에 문양이 있는 각성자, 다른 한쪽은 문양이 없는 자.
"그리고 진마나 시스템 각성 마인이나 뭐가 달라? 둘 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모르지."
"···진짜 그렇게 생각해? 출발점부터가 다른데."
"흐흐흐, 출발점이라,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본색은 지랄, 처음부터 자격지심 가지고 있었던 건 너희들 아니야?"
"까고 있네."
그러자 창고 안 밀 포대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
맞은편에 서 있던 남자도.
"부회주님 말씀이 옳다. 우린 회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모인 구성원이란 걸 자각해야 한다."
"저놈들이 먼저 시비를···,"
"한마디만 더 하면 입을 찢어주지."
"···."
부회주라 불리던 남자도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김민석 단장, 핸들러 일은 내가 따로 알아보겠네. 걱정 말게. 별일 없을 거야."
"네, 부회주님, 너무 무리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회주님께서도 안 계신 상황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김민석이 일어나자 앉아있던 8명의 사람도 함께 일어섰다.
그들은 식료품 창고를 완전히 빠져나가자마자.
"단장님, 언제까지 근본도 없는 짝퉁 새끼 눈치를 봐야 합니까?"
"맞습니다. 마수인지 인간인지 구별도 안 되는 주제에,"
"게걸스럽게 인간 내장이나 파먹으면서 마공을 익히는 놈들입니다. 영원히 같이 갈 순 없습···,"
"다들 입 닥쳐!"
싸늘하게 노려보는 김민석.
"멍청한 새끼들! 그딴 식으로 쉽게 속내를 드러내다니."
"죄, 죄송합니다."
"진마답게 행동해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심계도 진마의 덕목이다."
하지만 진마의 수장, 김민석도 수하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부회주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그를 인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한편 식료품 창고에 남아있던 마인 각성자들도,
"참는 것도 한두 번입니다. 엎어버려야 합니다."
"한 놈 본보기 삼아 모가지를 뽑아버리죠."
"맞습니다. 힘의 우위를 보여줘야 합니다."
"툭하면 영약이나 탐하는 허약한 것들이, 김민석 그 새끼도 말끝마다 회주, 회주 하면서···,"
부회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스템 마인이나 진마나 다 같은 처지다.
사실 두 부류 모두 회주의 실험체들.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마기가 어떻게 마공에 작용하는지 알고자 했던 호기심의 산물.
결국 언젠가는 회주에게 먹힐 신세였다.
여긴 또 다른 의미로 농장이었다.
회주의 식량으로 사용될 돼지들이 키워지고 관리되는 곳.
자신도 그렇다.
회주에게 당한 금제만 아니면 회(會)고 뭐고, 당장 탈출했을 텐데.
'병신들, 사육되는지도 모르고.'
진마와 시스템 마인 각성자간의 알력 다툼?
다 부질없는 짓이다.
※ ※ ※
황제를 만나고 난 다음 날 태주는 구례로 돌아왔다.
지하 수련장으로 내려가서.
'뭐가 왔는지 볼까?'
마인도 잡고, 황제도 만나고, 제정원 가서 문경식 차장과 대화도 나누고, 이러느라 당군악이 보낸 물건도 제대로 확인 못 했다.
'오! 부적이구나.'
선도와 함께 묶음으로 들어있는 부적.
'그렇지 않아도 몇 개는 다 떨어져 가는데.'
마음이 통했는지 꼭 필요한 것만 보냈다.
모자란 부적들, 벽마부, 투명부, 추적부, 구속부, 신속부 등 각각 30장씩 왔다.
'근데 이건 뭐야?'
호리병처럼 생긴 물건.
편지를 읽어봐도 어떤 용도인지 적혀있지 않았다.
'급하게 넣은 모양인데···,'
어쨌거나 선계의 물건인 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태주는 독정에서 선기를 뽑아내 호리병에 주입했다.
스우우우우···,
순간!
"어?"
팟!
태주의 머릿속에 호리병 안의 공간이 떠올랐다.
텅 비어있는, 마치 거대한 물탱크를 연상시키는 내부.
'···이거.'
뭔지 알겠다.
'아공간 호리병이구나.'
대박이다.
이제 아공간 아이템이 2개.
'실험해보자.'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잡다한 물건을 꺼내 수련장 바닥에 널어놓았다.
그리고는 호리병을 잡고서,
스우우우우···,
선기를 흘려보내자,
쏘옥! 쏘소소속! 쏘오옥!
호리병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건들.
'좋네.'
황제에게 받은 아공간 가방과 비교하면 호리병이 조금 더 크다.
'어느 정도 크기까지 들어가지?'
지하 수련장에 있는 물건들.
목검이나 방어구, 공기 청정기도 들어가고, 수련용 허수아비도 들어간다.
그러나 대형 TV와 냉장고는 아직 무리.
'이거면 충분하지.'
이제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미리 준비했다가 공유창고 빛이 반짝이면 툭 던져넣으면 그만.
'그나저나 이렇게 물건만 주고받을 게 아니라 얼굴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당군악과의 직접적인 영혼 연결.
지금까진 두 번이었다.
설악산에서 목숨이 위험했을 때 한번, 그리고 혼원무상독령공 7성에 올라 독정 폭발을 경험했을 때 한번,
'10성 대성하면 연결되려나?'
그때 독정 폭발이 일어날 테니, 기대해봄 직하다.
'빨리 10성으로 올라가야겠어.'
장시간 동안 파주와 구례를 떠날 계획.
그전에 채비 단단히 해두고.
바로 그때!
"회장님."
백서연이 수련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연씨, 어서 와요."
"지금 바깥에 정연희씨가 와 있습니다."
"그래요? 일찍 왔네.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안내에 따라 백서연과 함께 들어오는 정연희.
"안녕하세요. 회장님."
"환영합니다. 구례는 처음이죠?"
그녀는 정장을 입고 왔다.
게다가 하이힐까지.
'쯧, 저러면 불편한데.'
그래서 태주는.
"죄송하지만 옷 좀 갈아입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되도록 움직이기 편할 걸로,"
"···네?"
정연희는 태주의 뜬금없는 요구에 황당한 표정.
만나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왔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전에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대련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여긴 수련장이니까.
하지만 대련도 서로 실력이 엇비슷해야 효과가 있지.
고작 주니어 익스퍼트에 불과한 자신.
마스터도 씹어 먹어버리는 김태주 회장과는 실력 차이가 너무 크다.
아무튼 이왕 온 김에 따라보자.
뭔가 배워가는 게 있겠지.
백서연이 정연희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갈아입을 옷은 준비했어요. 저하고 같이 가요."
그래서 백서연을 따라가 간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다시 수련장으로 왔다.
움직이기 편한 운동화.
하체에 쫙 달라붙는 레깅스.
상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크롭탑.
그런 정현희를 빤히 바라보는 태주.
"흐음, 좋네요. 정말 좋아요."
진짜 이 사람 왜 이래?
예전부터 느꼈다.
만날 때마다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는 듯한 눈초리.
평소 몸매에 자신이 있던 터라 김태주 회장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여기에서까지?
'변태인가?'
눈빛을 보면 징그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해 보이기까지 하다.
"뭐가 좋다는 거죠?"
"근골···, 아니 재능요. 혹시 들어본 적 없어요? 재능이 있다고."
"그, 글쎄요."
사실 많이 들어보긴 했다.
사관 학교 동기 중에서도 자신의 실력과 등급이 제일 높기도 하고.
"일단 제가 영상 하나를 보여드릴 겁니다."
"영상요?"
"네! 일단 한편만, 두 편째부터는 협의가 필요해요."
"···무슨 내용의 영상이길래."
"흐음, 일종의 스킬 시연 영상?"
"···."
정연희는 살짝 실망한 표정.
내심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고작 스킬 영상이라니.
시스템 스킬 습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특성 획득, 혹은 등급 상승했을 때, 마수와의 전투 과정에서 우연히 습득하거나, 의도적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수련하거나.
각성자 개개인의 스킬은 개별적이다.
예를 들어 같은 찌르기 스킬이라도 각성자의 특성, 습관, 버릇, 체형 등에 영향을 받아 고유하게 생성된다.
따라서 남의 스킬을 보고 따라 하는 건 비추.
참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그대로 습득되지도 않고, 또한 몸에 맞지 않으면 쓸모도 없다.
차라리 태권도나 합기도, 검도 같은 범용 무술을 수련하는 것이 훨씬 낫지.
게다가 자신의 주무기는 검.
김태주 회장의 특기는 검이 아닌 원거리 투사체 기술.
대체 자신에게 뭘 보여주겠다는 건지.
"오늘 본 영상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먼저 다짐부터 해주세요. 그러겠다고."
아무래도 이상하다.
달랑 스킬 영상물 하나 보여주면서, 왜 호들갑을 떨지?
"···알았어요. 말하지 않을게요."
"좋습니다. 그럼 이제 보여드리죠."
백서연이 태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전 나가 있을까요?"
"아뇨. 그러지 않아도 돼요. 총괄 경영자님이야 우리 식구인데."
정연희는 이 말도 조금 기분이 나쁘다.
자신에겐 그렇게 비밀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하면서···,
태주는 정연희에게 목검 한 자루를 건네며 말했다.
"받아요.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대형 모니터에서 영상이 시작됐다.
화면에 드러난 사람은 뒷짐을 지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초연한 자세로 서 있는 노인, 마치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배우의 모습.
'설마 보여주겠다는 게 영화였어?'
지금 영화 한 편 보자고 이 먼 곳까지 왔나?
그리고 나레이션과 함께 검이 움직였다.
동시에 전혀 기대감 없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영상을 보던 정연희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복마검법 제일초, 격검축마(擊劍警魔).'
부드럽고 유려했다.
동작 하나하나를 남에게 가르치려는 듯 느릿느릿한 동작.
검이 허공에서 노닌다.
걷어버리고, 내치고, 슬쩍 찔렀다가 원을 그리며 다시 돌아오고, 세워 막았다가, 하단을 쓸고, 다시 중단으로 올리며 찌르고.
'음?'
이거 심상치 않다.
영화 액션 따위가 아니다.
"아!"
정연희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에서 노인의 동작이 쾅쾅 못 박히듯 각인됐다.
'세, 세상에!'
몸이 근질거렸다.
자신도 저 동작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새 끝나버린 영상.
"잘 보셨죠? 어때요, 얻을 게 있었나요?"
정연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태주를 바라보다가.
"···하, 한 번만!"
"네?"
"한 번만 더 보여주세요, 제발!"
어려울 건 없다.
겨우 일초식인데.
다시 재생되는 영상.
이번엔 정연희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느릿느릿, 어설프게나마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로 성이 찰까?
"죄,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알았어요."
태주도 눈치껏 영상을 반복시켜줬다.
점점 형이 잡혀 나갔다.
그러더니 영상 속 검선의 검로와 정연희의 동작이 얼추 비슷해진다.
스팟!
그녀의 목검에서 매서운 검풍이 불어온다.
목검에 마나가 제대로 실렸다.
마나목으로 만든 목검이 부르르 떨렸다.
우우우우웅!
정연희의 주위로 밀려드는 마나.
그녀 전신이 새하얀 마나로 빛났다.
등급 상승의 전조 현상.
'···미친 재능이구나.'
태주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재능이 있기로 서니 고작 일초식에 등급 상승?
'깨달음인가.'
그 와중에 정연희의 의식 속에서 울리는 시스템 메시지.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이제 미들 익스퍼트 등급으로 특성이 추가되었습니다.]
[추가된 특성은 소드퀸, 검후입니다.]
[스킬 : 엑소시즘 소드를 습득하셨습니다(10%)]
정연희는 멍하니 서 있었다.
등급 상승과 검후라는 특성 추가, 그리고 스킬 습득.
생각지도 못한 기연이었다.
'대체 회장님은···?'
왜 그를 의심했을까?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이걸로는 부족하다.
영상 속 나레이션 음성에서 복마 검법이라 불렸던 엑소시즘 소드.
기껏해야 10%.
더 있다는 말 아닌가?
"···회장님?"
"네."
"두 번째 영상도 볼 수 있을까요?"
"안 될 건 없지만···."
"더 보고 싶어요. 제가 뭘 하면 되죠?"
"흐음, 어떤 일이든 할겁니까?"
"네,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럼 우리 앞으로 맺을 계약에 관해 논의해볼까요?"
걸려들었다.
넘어올 줄 알았다.
파주 영지는 서필명 하나만으론 부족하다.
오황자 류진철이 있다지만 인재라기보다는 짐 덩어리에 가깝다.
정연희를 태홍 바이오 파주 지점을 맡게 할 생각.
경영 능력도 갖추고 있으니까.
그전에 제정원부터 그만두게 해야지.
그러고 보니 자꾸 공직에서 사람을 빼 오게 되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인재 수집 > 끝
ⓒ 꾸찌꾸찌
=======================================
< 출장 준비 >
백서연이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태주는 계약에 앞서 미리 알아 두어야 할 굵직굵직한 사항들을 정연희에게 설명했다.
"일단 제정원에서 나와 주셔야 합니다. 어려우시겠지만 제가 도와 드리···,"
"바로 사직서 제출하겠습니다."
군에서 제정원으로 차출된 그녀.
들어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나오기가 힘들겠지만, 자신이 요구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3년 동안만 고생해주세요. 태홍 바이오 파주 지점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합니다. 3년이 아니라 10년이라도,"
10년까지야, 3년이면 넉넉하다.
"가끔 DMZ 마수 밀집지대 토벌에도 힘을 보태주시고···,"
"빠지지 않고 나갈게요."
그녀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겠고, 토벌이 성공하면 영지도 넓어지겠고.
"제가 키우고 있는 제자들의 복마검법 진도가 느립니다. 연희씨가 깨달은 복마검법 심득을 조금만 가르쳐주시면···,"
"네, 맡아 보겠습니다."
직접 가르쳐보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검후라는 특성을 획득한 정연희가 자신보다 낫다.
"파주는 매우 낙후된 동네입니다. 초반엔 지내기 어려울 수도···."
"제 특기가 적응이에요. 그런 게 불편했으면 사관학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긍정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고민은 하고 대답하나?
아무래도 복마검법에 제대로 꽂힌 모양.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그렇지.
뭔가 나올 때가 됐다.
"말씀해주세요. 최선을 다해 맞춰볼게요."
"제정원에서 마인 검거 요청이 들어오면 꼭 절 데리고 가주셔야 해요."
"아···."
왜 그런지 알겠다.
정욱철 회장에게서 들은 기억이 난다.
아픈 과거가 있는 손녀라고.
'아버지가 마인에게 습격을 당해 돌아가셨다고 했나?'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꺼내는 정연희.
"보여드릴 게 있어요."
띠링!
신호가 울리더니 태주의 폰으로 메시지가 전송됐다.
확인해보니 첨부된 파일이 있었다.
"···사진이군요. 그것도 마수화된 마인."
"아빠를 죽였다고 의심되는, 아니 확실시되는 마인의 모습이죠."
"이놈을 죽여달라는 겁니까?"
"아뇨, 그 반대입니다. 만나더라도 절대 죽이지 말아주세요."
"네?"
"제가 직접 죽일 거니까."
"아하!"
역시 걸크러시 정연희.
지금은 힘에 부칠지 몰라도 복마검법만 잘 익히면 웬만한 마인들은 상대도 안 될 것이다.
남은 건···.
"성인이시긴 하지만 집에다 이야기 안 해도 상관없을까요?"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제정원 그만두고 파주에 내려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요? 왜?"
"파주 백두 건설 본부장 자리라도 맡으라고."
알 것 같다.
백두 건설도 마음 단단히 먹었다.
아파트에 백화점, 호텔, 공장 등등 대규모 투자가 들어올 계획.
"그런데 정작 백두 건설 본부장이 아니라 태홍 바이오 파주 지점을 맡아 파주로 가게 셈이죠."
"어, 정회장님이 뭐라고 하시면···,"
"아뇨. 오히려 좋아하실걸요?"
좋아하다니?
아무튼 서로 간의 서명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태주는 공기계 스마트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태블릿에서 미리 복사해 둔 것.
"복마검법 나머지 초식입니다. 다 익혔으면 반드시 기계 없애주세요."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익힐게요."
그나저나 아이템도 마련해야 한다.
일반 마수들이야 걱정이 없지만 문제는 엘리트 마수.
그냥 검 가지고는 안 된다.
성능이 뛰어난 무기가 있어야 한다.
마스터 수준에 맞는 무기를.
태주가 예상하기론 제자들 모두 1년 안에 마스터에 오를 것이다.
정연희는 더 빠를지도.
'최소 9자루는 필요한데···.'
제자들 8명과 정연희까지.
뭐, 제작해서 나눠주면 된다.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정연희의 합류로 파주는 걱정이 없어졌다.
이제 마음 놓고 출장 준비해도 되겠다..
생각보다 길어질 전망.
한 석 달 정도를 기본 일정으로 잡고.
목표는 독정에 새로운 독 DNA 추가, 그로 인해 혼원무상독령공 10성 달성, 그리고 고비 초원에 숨어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인 조직 탐색.
하나 더 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백홍표 원장을 만날 계획이다.
※ ※ ※
이런저런 준비로 시간을 보내고.
태홍 바이오 본사.
태주의 집무실.
고비 초원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무턱대고 가진 않는다.
마인이 고비 초원에서 숨어지낸다고 가정해보자.
놈들도 먹고살아야 한다.
기반시설이 충분한 곳, 통신도 터져야 하고.
어느 정도 모양새가 갖춰진 도시로 가야 한다.
그걸 감안해서 목적지를 정했다.
"냐앙···?"
"그래, 너도 갈 거야."
"냥!"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이삼백이와 함께 가니까.
무한공간도 가득 채웠다.
고비 초원에서도 당군악에게 물건을 보내야 하니까.
순간!
똑똑,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백홍표 원장.
"김회장."
"아! 형님, 어서 오세요."
"언제 가려고?"
"오늘 밤에요. 준비는 다 했습니다."
"그래? 전에 자네가 이야기한 거···, 내가 알아봤어."
태주가 백홍표에게 부탁한 건 다른 게 아니다.
"구례시에서도 마나 거부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고."
"그렇겠죠."
마나 거부자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 약 5%.
100명 중 5명이 마나 거부자란 말이다.
당연히 구례에도 있다.
"2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의 증상자들과 접촉해봤네. 다들 승낙하더군. 각서도 다 받았어."
보통 마나 거부자의 수명은 20대 초중반, 즉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태주의 다음 약은 무조건 마나 거부증 치료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효과를 알아보려면 어쩔 수 없이 실험해 볼 마나 거부자들이 있어야 한다.
백홍표는 그들을 만나 임상 대상자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고.
"수고하셨습니다."
"···가능하겠나? 마나 거부증은 질병이나 독이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선천적으로 마나를 거부하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천형, 고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
"반드시 치료법을 찾아낼 겁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마나 거부증에 걸린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겠나."
마나 거부증 치료법 찾기.
다양한 독들을 조합해 약이 아닌 독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신체 자체를 재구성하는 단계까지 간다.
이것이 이번 여정의 또 다른 목표.
그리고 그날 밤.
태주는 만리비검에 올라탔다.
먼저 서쪽으로 가서 중국 땅을 지난 다음 북쪽 고비 초원으로 간다.
태주의 최종 목적지는 고비 초원 개척도시 중 하나인 '나판'이었다.
고비 초원 개척 사단이 마수 밀집 지대를 토벌하고 지나간 후, 한창 개발이 이루어지는 도시.
원래는 조금 큰 도시로 갈까 생각했는데, 나판시 주변에 남아 있는 잔존 마수가 많이 분포해 있었다.
또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고비 초원에서 가장 큰 개척도시 바룬도 있어서 유동 인구도 많다.
마인들이 있다면 나판, 아니면 바룬,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먼저 나판에서 시작해보자.
※ ※ ※
푸다다다다다닥!
할리 바이크 특유의 머플러 소리가 선계에 울려 퍼졌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온다!"
"할리야, 할리구나!"
"어디, 어디···?"
푸르르르르,
검선이 탄 바이크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허, 기가 막히는군."
"어쩜 저렇게 멋질까?"
"난 처음엔 전혀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아니, 검이나 타고 다니던 동빈 선인이 할리 바이크 타고 다닐지 상상이나 했겠소?"
부드럽게 선계 멀티 플렉스 앞에 멈춰 선 바이크.
더거덩! 더거덩, 부륵, 부르륵!
검정색 가죽 수트에, 장갑, 헬멧, 붉은색 수실이 달린 검을 등에 멘 검선이 바이크에서 내렸다.
"후우!"
검선이 오토바이 헬멧을 벗었다.
그러자 짧게 깎인 머리가 드러났다.
오직 헬멧을 쓰기 위해서 과감하게 머리카락을 자른 그였다.
헬멧을 벗느라 드러난 그의 손목에서 은색 시계가 반짝 빛났다.
"오오오오오!"
"미쳤구만."
"선자들이 보면 난리가 나겠어."
검선은 스마트 엔진 버튼을 눌러 끄고, 헬멧과 장갑을 바이크 수납함에 넣고, 건물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구경꾼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주위 신선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선계 멀티 플렉스 1층에는 귀곡 선인이 백과사전을 탐독하며 지구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공부 중이었고, 철장 선인은 연신 콜라를 마셔가며 꺼억, 꺼억, 트림하고 있었다.
장사를 준비 중인 칵테일 바도 있었다.
하얀 셔츠에 검정색 조끼, 그리고 나비넥타이 차림의 주선 태백 선인.
깨끗한 무명천으로 유리잔을 정성 들여 닦고 있는 그에게 검선이 다가갔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작작 좀 하시오. 007 흉내는 그만두고."
"자연스럽지 않았나?"
"검을 찬 제임스 본드 흉내가 자연스럽냐고?"
"흠, 이 검이 문제였군. 허나 이건 내 정체성이라, 아무튼 칵테일은 안 파는 거요?"
주선은 코웃음 쳤다.
"흥! 아직 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칵테일 사 먹을 돈이나 있는지 모르겠군."
하우스 푸어도 아니고, 카 푸어도 아니고, 선계 유일의 바이크 푸어 검선.
한마디로 빈털터리.
"곧 신용카드가 나오잖소. 그걸로 긁으면 되지."
"허허, 이거 큰일 날 신선이로군. 무턱대고 긁다 보면 패가망신이라는 말도 못 들었나?"
"···."
신용카드.
정확히 말하면 신용패였다.
당군악에게 미리 선도를 건네 충전해서 사용하는 거지만, 외상 거래도 가능하다.
물론 그때는 숫자가 마이너스로 찍힌다.
"나중에 그 바이크 다시 빼앗기고 싶은 게로군."
"···왜?"
"선계 은행이 바로 독선이요. 돈을 끌어썼다가 갚지 못하면 바이크라도 팔아야지. 아니면 손목시계라도 팔던가."
그러자 어두워지는 검선의 표정.
바이크와 손목시계, 둘 중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돈을 벌어야 한다.
'어디서 버나?'
태상노군 앞에서 시위라도 해봐?
아니면 몰래 또 도원을 털던가.
'그러다 들키면 뇌옥에서 나오지도 못할 텐데.'
심란한 검선은 다시 건물을 나왔다.
할리 바이크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검선님."
"응?"
세로로 길게 갈라진 치마에, 맨다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몸을 배배 꼬면서 연신 눈웃음치는 여자, 도화궁 소속인 미호 선자였다.
"왜?"
"저 한 번만 태워주시면 안 되나요? 같이 달리고 싶어요. ···검선 오빠?"
이것 봐라?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드라마, 영화가 여럿 버려놨다.
'오빠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물론 태워줄 마음은 있다.
"···선계 한 바퀴에 선도 1개."
"지, 지금은 선도가 없어서, 다음에 가져올게요. 이번엔 외상으로?"
미호 선자가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그녀의 고혹적인 눈매, 가히 치명적인 유혹.
영물 출신으로 등선까지 했지만, 꼬리 아홉 개의 본성이 어딜 가겠나?
"닥쳐라! 요망한 여우 년아! 통하지도 않는 염기는 그만 뿌려!"
"쳇!"
상남자 검선은 미호 선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디 감히 요금도 없이 타려고!
바이크 안장에 앉아 시동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데.
'어?'
그의 눈에 들어온 바이크의 동그란 계기판.
그 중앙에 주황색 불이 하나 들어왔다.
'이게 무슨 표시더라?'
그래서 건물 안에 있던 귀곡 선인을 끌고 나와 물어보니.
"귀곡, 주황색 불이 들어왔는데, 이건 뭐요?"
"쯧쯧, 연료 경고등도 모르오? 기름을 넣지 않으면 더 이상 못 타겠군."
"허어!"
깜빡 잊었다.
'이거 기름으로 가는 거였지?'
낭패였다.
기름이 없으면 어떻게 타나?
'···가만!'
김태주 대협은 공명정대하고 꼼꼼한 사람.
그가 이걸 신경 쓰지 않았을 리 없다.
'분명 기름도 같이 보냈을 거야.'
검선은 바로 당군악을 찾아갔다.
"독선! 물어볼 게 있소."
"응? 뭐요? 지금 바쁘니 별일 아니면 다음에···,"
"바이크 연료가 다 떨어졌소. 혹시 여분이 있는지?"
"아···, 휘발유 말이군."
당군악은 씨익, 웃었다.
바이크는 복마검법의 대가로서 태주가 공짜로 주라고 했지만 휘발유는 아니지.
"휘발유 한 통에 선도 10개, 네고 없소. 싸게 파는 거요."
당군악의 말에 이마를 찌푸리는 검선.
"···싸다는 건 알겠지만 지금 내가 가진 선도가 없어서."
"그럼 어쩔 수 없지. 손으로 끌고 가든가."
"큼큼, 외, 외상 안 되오?"
"될 리가 있겠소? 내가 뭘 믿고?"
당황한 표정의 검선.
한창 바이크 타는 재미가 들렸는데.
"방법이 없겠소? 제발 사정 좀 봐주시오, 독선."
당군악은 고민하는 척하더니.
"선도가 없으면 현물도 가능하지."
"혀, 현물?"
"내가 알기론 검선이 모아왔던 수집품이 있지 않소?"
"···."
검선의 수집품이라면 뭐겠나?
바로 검(劍)이지.
소문 듣기론 검선의 거처에 보관하고 있는 검이 수백 자루란다.
"등선도 했는데, 검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몇 자루만 내게 파시오."
"으음···,"
검선은 고민했다.
오랫동안 모아왔던 수집품이었다.
대부분이 도망친 요괴 잡으러 인간계에 강림할 때마다 가져왔던 것들.
선계에서 만들어 태주 대협에게 넘겨준 만리비검을 제외하고도 많이 있었다.
검선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검은 한 자루만 있으면 돼.'
검의 신선, 나뭇가지 하나만 잡아도 그게 바로 검이다.
그래도 애써 모은 거라 조금 아깝긴 하다.
"괜찮은 보검은 자루당 100개로 쳐주겠소."
검선의 눈이 번뜩였다.
"갑시다."
"응?"
"네 거처로 가서 검을 골라 봅시다. 개당 100개 주는 거 잊지 말고."
"내가 사기꾼으로 보이시오?"
솔직히 사기는 맞지.
검선의 검은 명검이 아닌 것이 없다.
사실 금속 제련을 놓고 봤을 때 지구의 기술이 강호무림보다 훨씬 뛰어나다.
제일 처음 태주에게서 온 물건은 지구에서 만들어진 유엽비도, 그것만 봐도 강호의 숙련된 대장장이가 만든 암기에 비견할 만하지만.
'그 이상으로 가면 이야기가 다르지.'
현철과 운철 등으로 만들어진 보검.
장인의 혼이 실린 무기들.
지구 무기에 꿀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좋을지도.
검선의 거처로 가서 가장 좋은 걸로만 뽑아 태주에게 넘겨줄 생각.
복마검법만 배우면 뭘 하나?
걸맞는 무기도 있어야지.
"뒤에 타시오. 내 허리 잡으시고."
"···그건 사양하겠소."
푸다다다다다!
길게 뻗은 도로 위로 독선을 태운 검선의 바이크가 질주한다.
"참! 검선."
"왜 그러시오?"
"혹시 요마계 가봤소?"
"당연히 가봤지."
"그럼 거기에 독을 가진 요마도 있소?"
"있다 뿐이오? 지긋지긋할 정도요."
"오!"
언제 한번 가봐야지.
독령을 이루고 독선으로 등선한 자신에겐 새로운 독이 무쓸모지만, 태주에겐 그렇지 않다.
또한 호기심도 든다.
요마계 독물들은 과연 어떤 놈들일까?
< 출장 준비 > 끝
ⓒ 꾸찌꾸찌
=======================================
< 개척도시 나판(1) >
모든 개척지가 그렇지만 고비 초원 개척지도 기회의 땅이다.
원래는 마수 밀집 지대여서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었지만, 제국군 개척사단이 토벌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도로를 건설해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고비 초원은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비옥한 흑토지대.
그동안 마수 때문에 이 넓은 땅을 개발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인간이 살만한 땅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먼저 터를 잡고 눌러사는 사람들이 임자.
잔존 마수들이 위험부담이긴 하지만, 땅의 구획을 정하고 씨를 뿌려 밀이나 콩을 생산하면 모두 자기 소유다.
나중에 그 땅을 우선적으로 매입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된다.
땅값이 말도 안 되게 싸다.
그래서 개척이 끝난 곳에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나판이 그런 도시다.
개척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 옆 개척도시 바룬은 10년이 넘은 터라 이미 도시화가 진행되어 선점효과는 지나갔고,
태주는 밤새도록 날아서 나판 외곽에 도착했다.
그리고 걸어서 시내로 들어갔는데.
'와! 진짜···,'
시골도 이런 시골이 없다.
드문드문 3층 이상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이긴 했지만.
'도시가 아니라 읍면 단위구나.'
도시라 불리는 이유는 이곳이 매우 넓다는 것뿐.
주위에 산이라도 있으면 몰라, 넓은 평원 한가운데 조막만 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어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일단 지낼 곳이나 알아볼까?'
호텔 같은 건 없었다.
죄다 여관.
외형이 뉴서울 민박집보다도 못한.
'마음에 안 들어.'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으로 제국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오른 태홍 바이오 회장 김태주가 이런 곳에서 머물러야 하나?
어쩔 수 없다.
여기선 자신의 정체가 밝혀져선 안 된다.
이래저래 얼굴이 많이 팔린 상황.
얼마나 유명해졌으면 차이나타운에서 마주했던 핸들러라는 진마놈도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쳤다.
그래서 역용과 축골로 모습을 바꿨다.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환상 여우 가죽 코트도 무한공간에 고이 접어 넣어뒀다.
현재 옷차림은 체육복에 중요 부위는 철판으로 덧댄 평범한 레이드 팀원 복장.
이곳에서도 각성자와 적합자들이 다수 있다.
마수들을 잡아 부산물을 팔기도 하고, 농장의 의뢰를 받아 퀘스트를 수행하기도 한다.
우리 농장에 마수들이 들어와 농작물을 망치고 있다. 잡아주면 사례를 하겠다. 이런 의뢰들이다.
순간!
태주의 품속에서 머리를 끄집어내는 삼백이.
"니아아···,"
"그래, 다 왔다."
"니앙?"
"밖으로 나오려고? 조금만 참아."
육포 하나를 입에 물려주니 삼백이가 다시 상의 안으로 쏙 들어간다.
태주는 적당한 여관을 골랐다.
이름도 옛 몽골 냄새가 풍기는 게르 여관.
앳된 티가 나는 직원이 태주를 맞이했다.
"방 하나 있습니까? 한 달 정도 여기 머무르려고 하는데."
"아! 외지에서 오셨구나."
"그러니까 여관에 왔죠."
"흐흐흐, 그런 뜻이 아니라 손에 반지가 없어서."
반지?
그건 뭔데?
"아시다시피 여긴 개척도시잖아요. 빌런들이 숨어들기에도 편하고···, 마인도 몇몇 잠입해있다는 소문도 있어요."
"마인?"
"네! 그 마인요. 요즘 뉴서울과 제국 반도가 떠들썩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나판에도 마인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마인이 있으면 오히려 좋지.
그런데 이 얘기가 반지와는 무슨 상관이라고.
"여기서 활동하려면 신분 보증이 필요합니다. 일반인이든, 적합자든, 혹은 각성자든, 허가를 받았다는 의미가 바로 반지거든요."
"···누가 보증하죠?"
"오아시스 길드, 나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시면 무조건 오아시스의 보증을 받아야 해요."
"안 받으면?"
"제가 방을 못 드려요. 심지어 물 한 병도 못 살걸요?"
"그 반지를 받는데, 당연히 돈이 들고?"
"두말하면 잔소리죠."
길드라면 민간단체.
이놈들이 무슨 권한이 있다고.
물론 민간 길드가 도시 치안에 개입하는 경우는 있다.
대표적으로 구례 노고단 길드.
그러나 그곳은 구례가 자유도시였고, 제국의 자치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긴 국가 기관 같은 건 없나? 아무리 개척지라도 그렇지."
"있긴 해요. 고비 초원 개척군단 관할 지역이라 헌병대가 그 역할을 맡고 있죠."
직원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태주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헌병대도 오아시스 길드와 한통속이라는 소문이···,"
아하!
군부와 유착까지.
민간이나 군부나 다들 한탕씩 해보려고 여기저기 손을 뻗치는구나.
"오아시스 길드는 어디?"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쭉 가면 길드 건물이 보일 거예요."
"고마워요."
"반지 받고 꼭 여기로 다시 와주세요. 한 달 숙박이면 할인도 돼요."
태주는 바로 오아시스 길드로 갔다.
알고 보니 나판에서 가장 높은 5층짜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 담당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데스크 앞에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용무를 말씀해주세요. 의뢰? 레이드팀?"
"아뇨. 이곳에서 활동하려면 무슨 반지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신규등록 하러 오셨구나. 여기 서류 작성해주시고 신분증도 주세요."
태주는 제정원에서 제공한 가짜 신분증을 내밀었다.
지금 얼굴도 신분증에 있는 얼굴이고.
사실 가짜라고도 볼 수 없다.
전산상에 실제로 존재하니까.
사용할 가명도 직접 지었다.
"김군악씨? 이름이 특이하네요."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적합자시면 마수 퇴치 의뢰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레이드팀은?"
"그것도요, 따로 활동하는 팀이 있어서."
나름 체계는 잡혀있다.
마치 관공서에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
처리 시간도 신속했다.
컴퓨터에 신상정보를 입력하고, 데스크 밑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는 여직원.
"천만 원 입금하시면 지금 바로 반지를 드릴게요."
"···비싸네요."
"반지 가격보다는 등록비라고 생각해 주세요."
"구경해봐도 될까요?"
"네."
반지는 평범했다.
마나, 혹은 결정체가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냥 구리반지.
굵직한 음각 글씨로 일련번호가 새겨진 걸 빼면.
이딴 걸 천만 원이나 받아?
"이 일련번호가 있어야 물건 구입이나 판매, 의뢰 수행, 레이드팀 참여 같은 활동을 할 수 있거든요."
"흐음."
일종의 통제였다.
적어도 나판에선 뭘 하든, 뭘 사든, 자신의 행적이 고스란히 오아시스 길드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개 길드 따위가···,'
구례 노고단 길드도 이 정돈 아니었다.
순간!
우르르르르!
1층 현관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
짙은 얼굴 문양으로 보아 대다수가 각성자.
"길드장님. 어서 오세요."
"어."
길드장이라는 남자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태주와 무심코 눈이 마주쳤다.
멈칫하더니 다시 계단에서 내려와 여직원을 보며.
"쟤는 누구야?"
"네? 아, 신규 등록자입니다."
"그래? 이름이 뭔데?"
"김군악이라고."
길드장이라 불리는 남자가 천천히 태주에게 다가왔다.
"김군악? 너 어디서 왔냐?"
"뉴서울."
"오! 황도 시민이구나. 그런데 이곳 촌구석까지 왜 기어들어 왔어?"
"돈이나 벌어볼까 하고,"
"돈? 그렇지. 여긴 돈 벌 데가 천지긴 하지. ···그런데 너 아까부터 말이 짧다?"
"오는 말이 짧은데, 가는 말이 길 수는 없잖아."
기가 막힌 듯, 태주를 가만히 노려보다 폭소를 터뜨리는 길드장.
"낄낄낄, 이 새끼, 강단은 있네. 마음에 들어. 근데 너 내가 누군지는 알아?"
"여기 길드장이라며."
그러자 옆에 있던 오아시스 길드원들이.
"씨발 새끼가, 어디서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있어?"
"눈깔 먹물을 쪽 빨아버릴라!"
"뒈지고 싶냐?"
"나판 오아시스 길드가 우스워?"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품속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일이삼백이, 태주는 나오지 못하게 꾹 눌러 놓은 뒤에.
"텃세가 너무 심하네. 이러면 누가 나판에 일하러 오겠어?"
"텃세? 오냐! 좋다. 진짜 텃세가 뭔지 보여주마."
스르릉, 스슷! 철커덕!
길드원들이 검, 칼, 창, 총 등등 무기를 꺼냈다.
"야야! 무기 집어넣어. 사람들 보는 데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말리는 길드장, 그러더니,
"군악아, 군악아, 분위기 파악 좀 해라. 너 이러다 피똥 싼다? 뭐, 돈 벌러 왔다니까 한 번만 봐줄게. 반지 사서 등록하고 열심히 벌어. 응?"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태주를 한 번씩 노려보더니 따라서 올라가는 오아시스 길드원들.
"너 내가 얼굴 기억했다."
"바깥에서 만나면 피해 다녀."
"참나! 각성 문양도 없는 새끼가,"
태주는 가만히 있었다.
참자, 참아.
괜히 문제 생기면 좋은 것도 없다.
또한 놈들에게서 마인의 냄새도 나지 않았고.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여직원.
"등록하실 건가요?"
사실 천만 원이면 껌값이다.
지금도 시간당 몇억이 들어오는 판에.
"아무래도 사야겠죠? 활동하려면···,"
그때였다!
찌르르르!
배송 신호가 떴다.
"여기 화장실은 어딥니까?"
"저쪽으로 돌아가시면···,"
태주는 걸어가면서 공유창고를 확인했다.
'응?'
뭐지?
나중에 확인하고.
공유창고를 비우고, 준비해둔 물건을 집어넣었다.
미리 꽉꽉 채워놓은 아공간 대용 호리병박도.
태주는 전에 보내지 않았던 다양한 물건들을 보냈다.
명색이 멀티플렉스 사업인데 그럴듯한 쇼핑몰 같은 것도 있어야지.
이제 받은 물건들 확인.
공기계 스마트폰 하나랑 텅 비어있는 아공간 가방, 달랑 선도 50개.
'하아···,'
가슴이 아프다.
선계에서 오는 물건이 갈수록 줄고 있다.
물건이 적게 오는 건 아무 상관 없다.
적게 받으면 어때?
태주는 당군악을 잘 안다.
뭐라도 있으면 다 퍼주는 신선이 바로 당군악 아닌가?
하지만 겨우 이 정도 보냈다는 건 그만큼 그의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의미.
'얼마나 쪼들렸으면.'
불쌍한 독선.
자신은 그 덕분에 제국 최고의 부자가 되어 돈을 펑펑 써대고 있는데.
좀 전에도 그깟 천만 원, 하면서 반지 지르려 했다.
당군악에게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어디 화를 풀 데가 없나?
'조지고 시작하자.'
오아시스 길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반지 하나에 천만 원?
또 제깟 것들이 뭐라고 사람을 통제하려고 해?
태주는 다시 데스크로 돌아가 여직원에게 물었다.
"길드장 방이 몇 층입니까?"
"···네? 5층인데, 왜요?"
"아까 이야기하려다 빼먹은 게 있어서."
"자, 잠시만요. 거기 올라가시면 안 돼요!"
그러나 이미 계단을 올라간 후.
여직원은 순간 고민했다.
김군악이란 자가 올라갔다고 길드장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 ※ ※
오아시스 길드장 주철용은 10명의 길드 간부들과 함께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내일 군바리 새끼들 오는 날이지?"
"맞습니다. 오겠다고 전화 왔었습니다."
"상납금은?"
"준비했습니다."
"씨발 새끼들, 평소엔 촌이라고 무시하면서 바룬만 가던 것들이, 상납 날짜는 까먹지도 않아요."
어쩔 수 없다.
개척도시에선 군대가 곧 법이니까.
"근데 길드장님."
"왜?"
"아까 1층에서 만난 김군악이란 놈, 그대로 두실 겁니까? 바락바락 대드는 꼴을 보니 나중엔 머리 위로 기어오를 것 같은데."
"처음 왔잖아. 일단 놔둬 봐. 여기서 지내다 보면 우리가 누군지 알 테고, 그럼 행동이 달라지겠지."
"그래도 안 달라지면요?"
"그땐 니들이 알아서 해."
사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있을 것 같은 눈빛.
일반인은 무조건 아니다.
적합자는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말을 걸어봤다.
적합자라도 귀한 인재.
웬만하면 품어볼까도 생각해봤는데, 저렇게 건방진 놈이라니.
'굴러온 복을 지가 발로 걷어찬 거지.'
혹시 또 모른다.
머리 굽히고 용서를 구하면 받아줄지도.
쓸만해 보였으니까.
바로 그때!
따르릉!
데스크에서 걸려온 전화.
"어, 무슨 일이야? ···뭐?"
주철용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놈이 올라갔다고? 여길? 일단 알았어."
뚝.
벌컥!
전화를 끊자마자 벌컥 열리는 문.
"어?"
"응?"
"뭐야?"
"씨발, 어떤 놈이야?"
고양이를 안고 나타난 남자.
태주는 일백이를 문 앞에 내려놨다.
"여기 이 문 지키고 있어,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해."
"냥!"
그러고 나서.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계속 받아주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여기서 확실하게 정하고 가자. 다들 대가리 박아! 박으면 안 때린다."
"···무슨?"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네."
주철용도 어이가 없었다.
미친놈인가?
"야! 저거 팔 하나만 잘라라."
"네!"
"알겠습니다."
"죽이진 말고."
길드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한꺼번에 달려드는 길드원들.
태주도 앞으로 걸어갔다.
"쓰레기 반지를 천 만원에 팔아먹어? 내가 호구냐?"
쫙!
귀싸대기 한방.
"큭?"
앞으로 쓰러지는 놈을 슬쩍 피하고, 쫙!
"커헉!"
쫙! 쫙! 쫙! 쫙···.
암기도 필요 없고 주먹도 필요 없다.
그냥 싸대기 한 대만 때려도 충분하다.
달려오다가 가볍게 휘두르는 손바닥에 맞아 줄줄이 쓰러졌다.
털썩! 털썩! 털썩···,
'어어···,'
그 모습을 꼼짝도 못 하고 지켜보는 주철용,
쟤들 다 각성자인데, ···저놈은 아니고.
이것들이 서로 짰나?
B급 영화 액션도 이것보다는 현실감 있겠다.
'뭐지?'
쫙쫙쫙!
맞을 때마다 목이 획획 돌아갔다.
빠각!
턱뼈가 부서진 놈도 있다.
조금만 더 셌다면 모가지가 한 바퀴 핑그르 돌았을 것이다.
그제야 주철용은 깨달았다.
강한 놈이다.
그냥 강한 게 아니라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이다.
길드원도 뒤늦게 알았다.
한 7명이 손바닥 한방으로 픽픽, 쓰러질 때쯤 밖으로 튀려는 놈도 있었다.
하지만 문 앞을 막고선 고양이 한 마리.
"냥?"
"훠이, 저, 저리 비켜!"
고양이를 발로 밀치면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지만,
"캬악!"
츠핏!
퍼억!
"아악!"
일백이가 휘두른 앞발에 맞고 휙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휘리릿! 쿵!
"냥."
태주는 아직도 의자에 앉아있는 주철용에게 다가갔다.
"자, 잠깐!"
"뭐?"
"바, 반지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하하···,"
"필요 없어. 새끼야!"
쫘악!
"케엑!"
주철용의 입에서 이빨 두 개가 튀어나왔다.
'에이, 사고 안 치려고 했는데.'
원래는 조용히 지내려고 했다.
방 하나 잡아놓고 혼자서 독 품은 마수를 잡아 독정에 추가하고, 마인 탐색도 하고,
그런데 다 글렀다.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나판 개척도시 접수해놓고 시작하자.
※ ※ ※
검선은 자신의 거처에서 좋은 검만 쏙쏙 고르는 독선을 보고 부아가 치밀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절세 명검들.
"그건 선도 100개 받아 안 되겠는데, 최소 200개는 줘야···,"
"이미 이야기 끝났잖소?"
"끄응."
너무나도 얄밉다.
저런 신선이 어찌 태주 대협과 같은 영혼일까?
"독선."
"왜 그러시오?"
"선명은 그렇다 치고 이름이 군악이잖소."
"그래서?"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서, 날 보시오. 원빈, 현빈, 우빈, 그리고 동빈."
"···."
"쯧쯧, 이름에 '악'자가 들어간 것치고 잘되는 선인 없던데."
으드득!
당군악이 이빨이 깨물어졌다.
와다닥!
골랐던 검들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안 사!!! 거래는 없던 걸로 합시다."
"아니···, 가, 갑자기 왜?"
"앞으로 할리 바이크는 손으로 끌고 다니시고."
"자, 잠깐! 내가 실수했소. 제, 제발 진정하시오."
검선은 독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 개척도시 나판(1) > 끝
ⓒ 꾸찌꾸찌
=======================================
< 개척도시 나판(2) >
제국의 개척군단은 마수와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영토를 넓히는 임무를 맡고 있다.
제국군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보직.
공을 세울 건덕지도 많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외부 간섭도 별로 없다.
권한을 폭넓게 인정받는다.
어느 정도냐고 하면 개척에 성공해 도시가 들어서면 그곳은 군의 관할이 된다.
흡사 영지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해도 반지 하나에 천만 원은 아니지.
자기는 뒤로 빠지고 말 잘 듣는 민간길드를 앞으로 내세워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천만 원은 적합자, 혹은 각성자에게만 한정된 것 같은데···,'
확실하게 알아보자.
그래서 태주는 오아시스 길드원들을 제압한 후, 바로 알만한 사람에게 전화했다.
- 나판 개척도시 반지? 그거···, 나도 알지. 합법적인 거야. 폐하께서도 승인하셨고.
궁정 비서관 금수호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
"아무리 합법이라도 구리반지를 그렇게 비싸게 팔면 안 되죠."
- 쯧쯧, 그깟 반지 하나 가지고 그렇게 쩨쩨하게 구나? 부자들이 더하다더니.
"천만 원이 그깟 이라고요?"
- ···천만 원? 그게 무슨 소린가? 비싸 봐야 10만 원일 텐데.
"천만 원에 팔던데요?"
- 누가?
"나판의 오아시스라는 민간길드가, 군에서 허가를 받았다고 하면서···,"
태주는 오아시스 길드 주철용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 뭐? 그, 그게 정말인가?
"···잘못된 거 맞죠?"
그러자 금수호의 분노가 폭발했다.
- 이런 개 같은 새끼! 좆 같은 새끼,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사지를 잘라서 초원 한가운데 던져둘 테다!
아오! 귀가 다 따갑네.
태주는 전화를 끊었다.
뚝!
그러자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걸려오는 전화.
- 왜 전화를 끊었어?
"시끄러워서요,"
- 미안하네. 자넬 볼 면목이 없어.
"제가 궁금한 건 어느 선까지 관련됐냐는 건데···."
- 시간 내어서 살펴봤네. 군단장은 아니야.
"근거는요?"
- 개척군단 총사령관이 서강진 중장이거든, 그놈 돈이 무지 많아. 처가도 빵빵하고, 대장 달고 합참의장 꿈꾸는 놈이야. 그런 짓거리 하다 들키면 그동안 쌓은 공훈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텐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아하."
- 개척군단 군사 경찰대 권치열이란 놈이 벌인 일일 가능성이 높아.
"오! 간도 크다. 혼자서요?"
- 당연히 뒷배가 있지. 그놈 사촌 형이 제국 의회 의원이거든, 국방위 위원장이기도 하고.
그럴 줄 알았다.
- 그건 그렇고, 자넨 출장 간 곳이 고비 초원이었나? 그 위험한 곳을 왜 혼자 가나? 폐하께서 들으시면 걱정하시겠군.
"몸 사리면서 조용하게 있다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태주는 금수호와 몇 분간 더 통화를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 ※ ※
다음날.
권치열 대령은 방금 걸려온 전화에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뭐?"
- 됐고, 이젠 반지 장사 안 합니다. 그동안 번 돈 사람들에게 돌려줄 예정이니까, 그렇게 아쇼,
이게 무슨 개소리지?
마침 오늘이 수금하는 날이다.
그래서 부하들을 오아시스 길드로 막 보내려고 하던 참.
"하하, 너 지금 돌았냐? 약 처먹었어?"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온다.
지금 부리던 개가 주인을 물어뜯겠다는 말인가?
- 약 안 먹었고, 그동안 모았던 돈, 이젠 없으니까 달라고 하지 마세요.
"주철용, 이 개새끼야! 너 지금 그 돈 가지고 튀려는 거지? 제국군 헌병대 부대장을 물로 봐?"
- 씨발, 나도 몰라! 헌병 대령 따위, 지금 저승사자가 왔는데, 네까짓 게 눈에 들어오겠냐? 내가 지금 당장 죽게 생겼어.
"···무슨?"
- 싹 다 신고해버리고 이 바닥 뜰 테니까, 나 찾지 말라고!
"주, 주철용이? 주철용이? 너 이 새끼,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뚝!
전화가 끊겼다.
권치열 대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놈은 혼자서 이런 일을 할 그릇이 안 된다.
뒤에 누군가 있다.
'저승사자? ···제국군은 아니야.'
고비 초원의 개척도시들은 모두 군부대 통제하에 있다.
그럼 개척도시를 먹어보려는 민간길드?
혹은 마스터급 빌런이거나.
'누구라도 상관없어.'
감히 제국군 헌병대를 건드려?
권치열 대령은 부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 병력 동원해. 지금 나판으로 출발한다."
"모, 모든 병력 말씀이십니까?"
"그래, 장교, 부사관, 일반 사병 할 것 없이 싹! 완전 무장하고 집합시켜!"
헌병 부대는 군단에서 독립된 부대.
개척도시 바룬과 나판의 중간 지점에 주둔하고 있다.
행정 치안 업무만 맡나?
유사시엔 마수도 상대해야 해서 각성자와 적합자를 비롯해 최첨단 중화기 무기도 보유하고 있었다.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병사들을 가득 태운 트럭과 장갑차가 줄지어 나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새끼가···,'
원래 나판 개척도시의 행정 치안은 군대가 맡아왔다.
개척이란 것이 마수만 밀어낸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영토가 되려면 사람들이 와서 터를 잡고 살아야지.
따라서 인구를 흡입할 수 있게 여러 혜택을 만들어야 한다.
먼저 와서 농사도 짓게 하고, 도시가 안정되었을 때 땅을 살 수 있는 우선권도 부여하고.
그런데 주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거처를 잃고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나 난민들.
이들은 신분증이 없다.
하나하나 따져서 신분증을 발급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난민들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
최소한 통제장치 정도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난민들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했다.
간편하게 보여줄 수 있게 반지에 번호를 새겨 나눠준 것.
처음 반지 발급 비용은 단돈 오천 원.
반지값은 받아야 하니까.
도시가 안정화되자 고비 초원 개척군단은 다시 서쪽으로 진출했다.
초원에 남은 잔존 마수들은 민간의 적합자와 각성자에게 맡기고.
그리하여 나판으로 들어오는 적합자들과 각성자들에게도 반지를 팔았다.
이걸 맡은 사람이 바로 권치열 대령.
가격은 10만 원.
이때부터 반지의 수익이 발생했다.
간단하게 서류만 조작하면 아무도 모를 눈먼 돈이.
레이드팀들은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사냥을 할 수 있으니까 비싸게 받아도 된다.
군부에서도 승인한 일이고.
여기까지는 합법적.
하지만 권치열 대령은 만족하지 않았다.
각성자와 적합자들이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가나?
초원에는 돈 되는 마수들이 천지.
독을 품고 있는 전갈류 마수들만 조심하면 사냥도 어려운 편이 아니다.
웬만한 엘리트 마수들은 개척군단이 다 치워버렸으니까.
강아지만 한 크기의 변종 톱니 개미는 플라스틱을 대체할 수 있는 갑각 껍질을 주고, 검은 털수염 염소는 고기 맛이 뛰어나 포자 독 낙타 고라니에 비견될 만큼 인기가 높다.
뭐니 뭐니 해도 고비 초원에서 가장 대박 마수는 바로 공중 비행 마수인 삼목 송골매.
생포하기 힘든 마수지만 일단 포획하기만 하면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특히 암수 한 쌍은 부르는 게 값.
이놈을 길들여 알을 낳게 해 부화에 성공하면 삼목 송골매의 테이밍이 가능하다.
물론 테이밍 스킬이 있는 각성자에 한해서.
대박을 노리고 몰려드는 마수 레이드팀들.
권치열 대령은 오아시스 길드라는 바지를 내세워 반지 장사를 시작했다.
반지 가격을 슬금슬금 올려 나갔다.
레이드 목적으로 나판에 온 적합자, 각성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두 배, 세 배, 다섯 배, 열 배···,
그러다 결국 하나에 천만 원까지 오게 된 것.
권치열 대령은 전역 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촌 형이 제국 의회 의원,
그의 정치자금을 대어주는 대가로 다음 선거의 공천을 약속 받았다.
아울러 자신의 선거자금도 마련하고.
한창 돈이 쑥쑥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터져?
'쌍놈의 새끼들,'
누군지 몰라도 절대 가만 안 둔다.
※ ※ ※
낙후된 나판에서 시내 중심지라고 불리는 곳은 딱 한군데, 바로 오아시스 길드 5층 건물 주변이었다.
그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선 적합자와 각성자들.
건물 벽에 걸린 대형 플래카드 때문이었다.
<과다한 비용으로 구입한 반지, 환불 절차 진행합니다.>
나판에서 활동하는 모든 레이드팀들이 모였다.
그렇지 않아도 반지 가격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돌려준다고 하니 무조건 받아 가야지.
태주는 오아시스 길드 건물 5층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이백이가 어슬렁어슬렁, 태주 옆으로 걸어왔다.
"찾아봤어?"
"야아아아···,"
"냄새가 없다고?"
"야앙!"
차이나타운 마인사태 이후로 일이삼백이도 마인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됐다.
영물이 특성인지, 선도를 먹은 덕택인지, 혹은 둘 다일 수도 있고.
"다른 데도 다 찾아봤지?"
"야옹."
"수고했다."
"야아앙!"
이놈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나?
생각보다 나판은 넓은 곳이다.
마인 탐색하고 다니려면 하루종일 걸릴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일이삼백이가 대신해주니 얼마나 편해?
'빨리 정리하고 필드로 나가봐야지.'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려 제대로 사냥도 못 했다.
초원지대엔 갖가지 종류의 전갈들이 살고 있다.
죄다 고유한 독을 품고 있는 독물들.
몸길이 5m의 거대 전갈도 있고, 반면 몸길이 1cm도 안 되는 초소형 전갈도 있으며, 보호색으로 몸을 숨겨 각성자의 뒤를 노리는 암살 전갈도 있다.
마인 탐색도 탐색이지만 독물을 독정에 추가하는 것도 이곳에 온 중요한 목적.
일정이 빡빡하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파주를 부탁했지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영주로서 자격이 없다.
바로 그때!
부우우우웅!
초원지대 저쪽에서 먼지를 피우며 다가오는 차량들.
'드디어 왔구나.'
주철용이 말한 그놈들.
개척군단의 부패한 군인들.
끼익!
트럭에서 수백 명의 군인이 내렸다.
"모두 해산시켜!!!"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지휘봉으로 지시하는 각성 장교.
환불받기 위해 줄을 서던 민간 각성자와 적합자들이 저항했지만.
"왜 이래?"
"나 돈 받아 가야 한단 말이야!"
"씨발, 군대면 다야!"
"어어? 지금 나 쳤어?"
소용없었다.
아무리 각성자라도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어떻게 이겨?
그리고 군이라고 해서 각성자들이 없나?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곧 있으면 들이닥치겠네.'
태주는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다다다다닥!
계단을 올라오는 군화 발소리.
잠시후,
콰앙!
사무실 문이 부서지듯 열리더니.
철커덕! 철컥! 철컥!
수십 개의 총구가 소파에 앉은 태주를 향했다.
그리고 지휘봉을 빙빙 돌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헌병부대장.
계급은 대령, 명찰은 권치열.
권치열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주철용이는 어디 있어?"
"몰라, 어디 있겠지."
"···응?"
그제서야 태주를 자세히 살펴보는 권치열.
"넌 오아시스 길드원이 아니구나."
"당연히 아니지."
"너냐?"
"뭘?"
"이런 짓을 벌인 놈."
"어, 내가 반지 환불하라고 시킨 건 맞아."
"이런 하룻강아지 새끼가···."
권치열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들이 올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니.
뭔가 있는 놈인가?
처음 보는 얼굴에, 심지어 각성 문양도 없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넌 각성자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네가 그 유명한 김태주 회장도 아니고, 대체 뭘 믿고?"
"그건···, 내가 김태주거든."
"흐흐흐."
권치열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김태주라고 해두자."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태주는 자신의 배 위에서 연신 하품을 하는 삼백이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넌 고작 제국군 대령이잖아."
"그게 어때서?"
"무려 백억 대 단위의 돈은 대령이 삼키기엔 사이즈가 너무 크단 말이지. 대령 계급이 그렇게 대단한가?"
권치열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너 미필이지?"
"아니. 나도 군 생활 해봤어."
"해본 놈이 그걸 모르냐? 멍청한 새끼야. 군대는 계급이 아니라 보직이야. 어떤 보직을 맡았냐에 따라서 다른 거다. 내 앞에선 장군도 벌벌 떨어."
"에이, 설마! 그리고 진짜 장군이 들으면 어쩌려고?"
"니앙!"
삼백이도 태주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다.
사실 이곳에서 권치열 따위와 드잡이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회적 체면도 있는데,
군에서 일어난 일은 군에 맡기자.
"거기, 장군님? 다 들으셨죠? 헌병대 대령이면 장군도 벌벌 떤답니다."
"니아아아아앙!"
순간!
벌컥!
사무실과 연결된 옆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
"네,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떨립니다."
모두 제국군 정복을 입었다.
그중 한 명의 계급장은 별이 3개, 개척군단 총사령관 서강진 중장이었다.
'···어?'
권치열 대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군단장님이 왜 저기서 나와?'
당황스럽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서강진 중장이었다.
어디 서강진 한 명뿐인가?
잡아 먹을듯한 눈초리로 자신들을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는 군단 참모, 사단장, 모두 장군이고 마스터.
갑자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옆방이라면 대화를 다 들었을 텐데.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상황도.
'어떡하지?'
권치열의 뇌가 고속으로 회전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옷 벗는 건 둘째치고 여기서 즉결처분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애써 짜낸 말이.
"주, 중장님, 그, 그게, 으음, 제국 의회 국방 상임위에 제 사촌 형님께서 계시는데,"
싸늘하게 대꾸하는 서강진.
"나도 잘 아네. 권창열 의원."
"아! 아시는구나!"
권치열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제국을 위해 큰일을 하시느라 항상 어렵게 지내고 있는 형님이십니다. 저도 잘못인지는 알지만 제국을 위해···,"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네네, 맞습니다. 이게 다 우국충정의 마음에서 비롯된···,"
서강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태주를 보며.
"회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모든 게 다 제 불찰입니다."
"좋은 사람 밑에 두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긴 하죠."
"저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권창열 의원은 걱정 마세요. 아마 지금쯤 체포되었을 겁니다."
"그딴 새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회장님 마음에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권치열 대령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국방위 소속의 사촌 형님에게 그딴 새끼?
그것도 그렇지만 왜 서강진 중장은 저 젊은 놈에게 90도 인사를 하며 잘못을 빌고 있는 거지?
게다가 회장님? 회장님이면···, 설마?
"지, 진짜 김태주?"
불같이 화를 내는 서강진.
"닥쳐라! 네 썩은 입에서 함부로 불릴 이름이 아니시다!"
"···어어,"
김태주가 맞았다.
천리장성 전쟁의 1급 공훈자, 파주 영지 영주, 구례 종신 시장, 제국의 떠오르는 태양.
'다 끝났구나.'
권치열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개척도시 나판(2) > 끝
ⓒ 꾸찌꾸찌
=======================================
< 무간지옥(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