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7

250화. < 반격 (1) >

모스크바 전승 행사는 다른 의미로 대단한 행사가 되었다.

행사는 제대로 진행되지도 못했지만, 사람들은 행사보다 더 대단한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야기로만 듣던 거대 괴수가 도시 한복판에 등장하고, 그 거대 괴수가 각성자와 군인에게 쓰러지는 것을 화면으로 지켜본 것이다.

종군 기자들이 전쟁터에서 보내오는 영상을 보긴 했었지만, 몇 년에 걸친 괴물과의 싸움으로 사람들은 그런 영상에 꽤나 무덤덤해져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펼쳐진 전투는 그런 생각을 모두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각성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확 바뀌었고, 전쟁에 질려 하던 사람들도 다시금 힘을 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방송에 나왔던 두 각성자에 대해 궁금해했다.

빠아아앙!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두 각성자는 지금 기차역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럼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경례하는 이사벨 뒤에는 유럽으로 떠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멈춰서 있었다.

이사벨은 지금 EV 마크가 달린 검은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는 평상복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원래 EV의 집행자이자, 특수 작전팀의 일원이었다.

거기다, 뜻밖의 일로 모스크바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지만, 이사벨이 원래 싸워야 할 곳은 괴물들이 밀려오고 있는 유럽이었다.

이제 앞으로의 싸움이 원래 치러야 할 그녀의 싸움이었다.

경훈이 이사벨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먼저 가 있어. 일을 처리하고 합류할게."

같이 갔으면 좋겠지만, 경훈은 할 일이 많았다.

미국에는 홀로 남겨진 다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남미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그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 이후로 구 중국 나라들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EV에게 도움을 청하는 곳은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길게 밀려있었다. 하지만, 분할된 중국에서 요청이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미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국의 자존심 때문인지, 그들은 EV의 도움을 원하지 않았다.

-순위는 뒤로 미뤄두겠습니다.

하지만, 요청이 너무 늦었다.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벽은 만주 독립국이 마지막이었다.

물론, 시간이 되면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경훈은 아직 핵폭발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셰인이 잘하겠지만, 마나가 회복될 때까지 최대한 쉬고."

"네."

경훈의 말에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 아래에 아직도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마나 고갈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때, 기차 탑승구에서 헬멧을 쓴 남자가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기다리고 있어."

멍!

헬멧 위에 올라탄 강아지도 그녀를 불렀다.

"네!"

이사벨이 경훈에게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한 뒤, 옆을 바라보았다.

승강장 한쪽에 낙오된 두 각성자, 아니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정규와 영철.

유럽으로 떠나는 다른 각성자들과 달리, 두 사람은 다음 기차 편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영철은 다시 일반인이 된 덕분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를 호송한다는 명목으로 정규가 파견군에서 빠졌다.

정규는 밝은 얼굴로 이사벨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고, 영철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차를 보는 중이었다.

이사벨은 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폭주 후에 이상한 말을 하고, 마나와 함께 기억을 잃은 각성자.

각성자의 말을 듣고 심각해진 경훈.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아직 어린 그녀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었다.

경훈과 함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으니, 그녀는 그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이사벨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뒤, 기차에 올라탔다.

빠아아아앙!

그녀가 올라탄 뒤, 바로 기차가 출발했다.

경훈이 기차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창문 안에서 로잘리아와 EV 각성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뒤따르는 객차 안에서도 각성자들과 군인들이 그에게 감사의 경례를 보냈다.

이제, 적어도 파견군 내에서 경훈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된 것이다.

잠시 뒤, 기차가 멀리 사라지고,

경훈은 뻘쭘하니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정말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니까."

격세지감일까. 정규가 경훈을 보며 중얼거렸다. 군대에 잡혀 실험체가 되었을 때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지금은 같이 추억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다가온 경훈이 영철에게 물었다.

"돌아가면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아, 저 말인가요?"

경훈의 말에 영철이 바짝 얼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상한 곳에서 정신을 차린 뒤, 그는 기억에 없었던 동안에 벌어진 일을 듣게 되었다.

각성자가 되어 괴물을 잡고, 엄청나게 실력이 올라, 유럽으로 향하는 파견군에 합류하게 된 이야기.

그리고, 모스크바가 파괴될 위험을 구하기 위해 마나를 폭주시켜 모든 것을 잃은 이야기.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명이 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사진이나 영상도 남아 있었으니,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영철은 그 이야기 중에 지금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들을 수 있었다.

EV의 집행자이자 속칭 헬멧 맨. 그리고, 괴수를 잡은 사람.

영철도 녹화된 영상을 뉴스에서 보았다.

당연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영철의 표정에 정규가 조금 흐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새삼 과거의 영철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군대 오기 전에 뭔가 하던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계획이라던지."

"아, 아뇨. 백수였는 걸요. 돌아가서 알아봐야죠."

영철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영철의 과거는 이브가 알아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경훈은 정규를 슬쩍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정규 각성자가 도와주겠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연락 주십시오."

경훈은 그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영철도 아는 회사였다.

World Gold.

엄청나게 큰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마나석을 박아넣은 액세서리로 유명한 회사였다.

"아, 감사합니다."

그 대단한 EV 집행자가 준 명함치고는 조금은 소박한 회사 같았지만, 영철에게는 감지덕지한 명함이었다.

하지만, 경훈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SG 전자, JK 포션 대표에게도 말해 놓을 테니 그쪽으로 연락해도 됩니다."

영철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한국의 양대 대기업, 아니 세계에서도 유명한 대기업들이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거기다 소개하겠다는 사람이 이상했다. 과장도, 차장도, 임원도 아니었다.

"설마, 진샤웨이 사장님하고, 혜린 대표님 말인가요?"

"네. 경훈이나 이브의 소개를 받았다고 연락하면 될 겁니다."

감당이 안 돼서 옆을 돌아보니, 정규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세상은 불공평해. 누군 저렇게 유명한 미인들과 잘 지내고 있고. 난 이렇게 고생만 하고."

경훈은 마지막으로 투털거리는 정규에게 말했다.

"영철을 부탁합니다."

"맡겨둬요."

정규와 경훈의 눈이 마주쳤다.

경훈의 말이 아니더라도 정규는 계속 그를 살필 생각이었다.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같이 싸운 전우로서.

마지막으로 그를 감시하기 위해.

마나를 잃고 기억을 잃었지만, 경훈은 그를 그냥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아직, 그에게 듣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정말 멸망한 차원에서 넘어온 영혼이었는지.

왜, 자신과 과거에 만난 것처럼 이야기하는지.

어떻게 자신이 차원 이동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여러 가지 추측만 남겨놓고, 그는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저 마나를 잃은 영철뿐이었다.

멸망한 차원에 가서 그가 말한 '혁준'이라는 이름을 찾아봐야겠지만, 저 영철도 그냥 놓아줄 수는 없었다.

잠시 뒤, 두 사람도 서울행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모두가 떠난 썰렁한 승강장.

경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희가 기다리겠군."

-세뇌를 다 풀면 유럽 파견군에 합류하는 겁니까?

미국 전체를 다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경훈은 우선 주요 도시만 해결할 생각이었다.

"아니. 우선 아프리카에서 올라오는 군주부터 잡자고."

-혼자 움직이시려고요?

"이제 군주급은 혼자도 충분해."

그동안의 싸움으로 자신이 생겼다.

혼자서 싸우면 주변 피해가 커지겠지만, 지금 유럽으로 움직이는 군주가 있는 곳은 폐허만 남아 있었다.

"준비 부탁해."

-알겠습니다. 위성과 드론으로 적의 정보를 파악해 놓겠습니다.

그렇다고, 준비도 없이 싸울 생각은 없었다.

미국에서 사람들의 세뇌를 푸는 동안, 이브가 싸울 준비를 마쳐 놓을 것이다.

떠나기 전, 경훈은 마지막으로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도플갱어가 만들어놓은 소환 포탈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각국 정부에 다시 한번 강하게 지시를 내려놓았지만, 다들 잘 따라줄지는 알 수 없었다.

"더 있으려나?"

-지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쪽 세상에서 군주급 좌표가 나왔던 지역을 모두 훑고 있습니다. 문제는 몬스터가 점령한 지역입니다.

각성자들과 사람들을 보내 꼼꼼하게 확인시키고 있었지만,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괴물에게 점령된 지역이 너무 많았다.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다른 것보다 뒤통수만 안 맞으면 돼."

사람들이 사는 도시 안에서 튀어나오는 일만 없다면 군주급이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이브의 대답을 들은 경훈은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은빛 구멍이 그의 앞에 떠올랐다. 그는 잠시 은빛 구멍을 바라보았다.

"저쪽 세상을 한 번 갔다가 와야 하는데...."

너무 바빠서 저쪽 차원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혁준'이라는 각성자도 알아봐야 하고, 등급을 올리기 위해 대군주도 확인해 봐야 했다.

하지만, 우선은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경훈이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

경훈과 다희가 한참 세뇌를 풀고 있는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괴물들이 나온 이후 폐쇄된 지역인 이곳에 허름한 건물이 하나 지어져 있었다.

창고처럼 허름해 보이지만 크기만큼은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다.

푸아아악!

건물 앞 간헐천에서는 뜨거운 온천물이 몇십 분마다 공중으로 솟구쳤고, 다른 온천에서는 부글부글 공기 방울이 올라왔다.

"사람이 없으니 더 으스스하네..."

건물 옆 숙소를 나선 관리인이 황량한 공원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공원이 폐쇄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동물들보다 괴물이 많은 공원을 개방해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보안이 중요하다지만, 이런 곳에 시설을 만들어야 했는지 알 수가 없군."

물론, 건물이 세워질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이 시설이 멀쩡한 것을 보면 잘한 결정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직접 일하는 처지가 되어보니 잘한 결정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쿠우우웅. 캬악. 스스스.

간헐천과 온천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뚫고 괴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건물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괴물들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홀로 멀쩡한 이 시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정말, 괴물들의 접근을 막는 장치를 연구하는 거였나...."

그렇다면 정말 보람된 일이 분명했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도 랭글리가 바로 공개할 리가 없지."

CIA가 그렇게 사람 좋은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시설의 관리자이자, CIA에서 홀로 파견 나온 스미스 요원은 건물 한쪽의 작은 문에 다가가 전자키를 눌렀다.

삑삑.

"랭글리가 난리가 났는데, 앞으로 프로젝트가 굴러가려나…."

랭글리뿐만이 아니었다. 정부도 발칵 뒤집혀 버렸다.

괴물에 당한 세뇌가 풀렸다는 사람도 있고, EV와 유라시아 연합에게 당했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쓰기에는 미국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 미국은 갑자기 쏟아지는 괴물들의 공격을 막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기가 더 황당한 거고."

철컥.

건물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랭글리에서 마지막 연락을 받고 기술자와 다른 관리인들을 모두 집에 돌려보냈다.

이 시설이 무슨 시설인지 조금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뭐, 나도 아는 것은 없지만."

그도 어차피 CIA와 분리된 숨겨진 요원일 뿐이었다.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누군지, 이곳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이곳을 지키라는 마지막 연락을 받았을 뿐이었다.

"두 달이라고 했나?"

건물 안에 들어온 그가 넓은 내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건물 내부는 기둥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부는 웬만한 경기장보다 크고, 대형 비행기 공장보다 더 커 보였다.

하지만, 그 내부에는 거대한 문양만이 빛나고 있었다.

스미스 요원은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 펼쳐져 있는 문양은 모스크바에 펼쳐져 있던 문양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차원과 연결되어 괴수를 소환하는 소환진. 모스크바에 있던 소환진보다 몇 배나 큰 소환진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가운데 설치된 기계가 계속 문양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옐로스톤 국립공원.

바로 다른 세상의 대군주가 머물러 있는 곳이었다.

251화. < 반격 (2) >

모스크바에서 괴수가 잡힌 이후, 유라시아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동유럽부터 시작된 반격은 터키를 수복하고, 폴란드와 체코,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로 향했다.

피난민들은 유라시아 연합군과 각성자들에게 환호를 보냈고, 피난민과 함께 있던 각국의 각성자들이 속속 연합군에 합류했다.

이제 유럽에 파견된 유라시아 연합군은 나라와 인종을 넘어 괴물과 싸우기 위한 인류의 군대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행히 괴물들은 처음 동유럽을 휩쓸었을 때처럼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들을 지휘해야 할 군주급 괴수가 이란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유럽은 상황이 달랐다.

프랑스 칼레.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이자, 지금은 해협의 땅속을 지나가는 채널 터널이 있는 도시.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초기 연합군 철수 작전이 벌어진 덩케르크 옆에 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에는 지금 수백만 명의 난민이 북적이고 있었다.

칼레 시청. 시장실에는 시장 대신에 영국의 루이 왕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팔도 한쪽이 없었지만, 그는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팔과 눈을 잃어 영국으로 이송되었던 왕자는 포션으로 상처가 치료되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채널 터널 복구는 아직이야?"

루이 왕자의 물음에 잉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포기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파는 것보다 무너지는 게 더 빠릅니다. 사망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잉그리드의 말에 왕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껏 채널 터널을 통해 서유럽 피난민 수천만 명이 영국으로 피난을 할 수 있었다.

장애인이 된 그와 수많은 사람이 의회와 영국인들에게 호소해서 겨우 국경을 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고, 철수 작전은 제2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라고 이름이 붙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천만의 피난민은 영국이 감당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치안이 무너지고, 영국 내 혼란은 극심해졌다.

괴물들이 유럽을 점령해갈수록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서유럽이 거의 다 점령당하고, 이곳 프랑스 서부 일부만 남게 되자, 혼란은 공포로 변해버렸다.

채널 터널을 통해 피난민만이 아니라 괴물들까지 넘어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이 있다는 이야기부터, 피난민 중에는 괴물들에게 세뇌를 당한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아무리 그래도 터널을 무너뜨리다니...."

왕자는 지친 얼굴로 얼굴을 쓸었다.

결국, 공포를 이기지 못한 영국인들이 터널을 폭파했다.

채널 터널은 무너지고, 바닷물에 잠겼다. 터널 안에서 수천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슬픈 일이었지만, 지금 루이에게는 이곳에 남겨진 수백만의 피난민과 군인, 각성자들이 더 걱정이었다.

"거기다 저 구름 때문에 비행기도 헬기도 쓸 수가 없고…."

창밖은 낮인데도 꽤 어두웠다. 낮은 구름이 가득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수십 일 동안 머물러 있는 구름이었다.

구름은 번개 대신에 마나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

터널이 무너진 뒤, 헬기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려던 계획은 저 구름 밑을 지나가던 헬기들이 모두 추락하는 바람에 멈춰야 했다.

바닷속에는 거대한 물고기 괴물이 가득했고, 구름 속에는 하늘을 나는 괴물이 숨어 있었다.

어느 곳으로도 피할 곳은 없었다.

왕자는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연합군은 아직 독일에도 진입 못 했죠?"

그의 말에 별을 달고 있는 나이든 프랑스 장군이 대답했다.

"네, 서쪽으로 갈수록 괴물들의 저항이 거세답니다. 점점 속도가 느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투에 나서지 못하는 왕자였지만, 대신 그는 각성자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중년의 장군은 군인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각자 같은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군은 여러 가지 이유로 왕자의 참모를 자처하고 있었다.

장군의 말처럼 연합군의 진격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괴물들의 저항이 강해지지 않아도, 전선이 넓어질수록 진격속도는 늦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이 달려온 속도를 생각하면 늦어지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칼레에 있는 이들에게는 연합군은 아직도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서 칼레를 방어하고 있었지만, 포탄도 부족하고, 병사와 각성자들도 지쳤다.

이제는 적의 집중공격 한 번에 방어선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정말 방법이 없나?"

왕자는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케이라도 와주었으면 했는데…."

집행자들의 활약은 영국에서도, 칼레에서도 무척이나 유명했다.

소녀와 날개 달린 사자, 그리고 카우보이.

그리고, 괴수를 쓰러뜨린 각성자.

연합군이 진격하는 동안 활약을 이어간 덕분에 이제 다른 두 집행자도 괴수를 쓰러뜨린 각성자 만큼 유명해져 있었다.

하지만, 눈을 잃고 팔이 잘린 날, 눈앞에서 본 광경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은빛 구멍에서 튀어나와 괴물들을 쓸어버린 케이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며칠 전부터 연락이 안 돼요."

하지만 그와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케이의 연락처를 받았던 잉그리드도 지금은 통화가 불가능했다.

시청 창밖으로 멀리 채널 터널 입구가 보였다.

수많은 사람이 터널 입구에 자리를 잡고, 터널이 다시 뚫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그곳만이 아니었다.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해변에 천막을 치고, 도버해협 너머 영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나 배가 오기를 계속 기다렸지만, 구조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바다 위로 올라왔다.

츄아아아악.

"저게 뭐지?"

다른 사람들처럼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한 소년이 그것들을 처음으로 보았다.

물이 갈라지고, 기괴하게 생긴 것들이 해변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퀭한 눈, 긴 주둥아리, 마른 몸. 마치 뼈만 남은 물고기처럼 보이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두 발로 해변으로 어기적거리면 걸어오는 괴물들을 물고기로 부르기는 불가능했다.

"괴물이에요! 바다에서 괴물이 나왔어요!"

소년은 큰소리로 외치며 자신의 텐트로 달려갔다. 오랜 괴물의 싸움으로 사람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빨랐다.

해안가를 지키던 몇몇 군인들과 함께, 사람들이 무기를 잡고 괴물들을 맞이한 것이다.

"도시로 도망쳐!"

"군대를 불러, 각성자에게 말해!"

군인과 야경단들이 총을 들고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짐도 챙기지 않고 도시로 달려갔다.

남은 사람들이 바다를 보며 혀를 찼다.

"이젠 바다에서 올라오는 괴물이라니. 정말 세상이 망하려는 건가."

"쩝, 이런 곳에서 죽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저놈들은 총알이 먹힐까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괴물들을 보고도 꽤 담담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들은 야경단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는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무기가 효과가 없자, 피난민들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 낸 방법.

그들은 자신들을 먹이로 주어 괴물들의 발을 묶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데요? 계속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담담한 것도 잠시였다.

괴물의 숫자가 너무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보이는 것만도 수천, 얼마나 늘어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젠장! 쏴! 한 마리라도 줄여야 해!"

마음이 급하진 사람들이 해변으로 올라오는 괴물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탕! 타 타 타 탕!

하지만,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총알은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너무 많아! 이래서야 도망치는 사람들도 잡힐 거야!"

"죽어! 죽어!"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총을 쏘아댔지만, 괴물들은 방어막으로 총알을 받아넘기며 점점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마치, 망아지가 태어나서 처음 걸음을 연습하는 것 같았다. 괴물들의 어색한 걸음은 점점 제대로 된 달리기로 변해갔다.

"크아아악!"

그리고, 다음 순간, 총소리 대신 비명이 해변을 메웠다.

비명도 곧 멈췄다.

해변은 괴물들이 모래를 차는 소리만 가득했다.

*

왕자는 검을 쥐고 해변을 향해 달렸다.

한쪽 팔이 없고, 눈도 한쪽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해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때문에 그는 총소리와 동시에 괴물의 등장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빠른 파악은 좌절만 더 크게 만들 뿐이었다.

대부분의 각성자와 군인들은 반대편에서 적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에서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도시에 있는 군인과 각성자는 왕자의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정말 한 손이라도 도와야 할 상황이었다.

달리면서 그는 조금 전에 헤어진 잉그리드를 떠올렸다.

그가 검을 들고 시장실에서 나설 때, 잉그리드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전, 이곳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녀는 그의 입에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경례를 했다.

담담한 그녀의 모습은 왕자처럼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영국에 남았으면 했지만, 그가 고집불통인 것처럼, 잉그리드도 고집불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케이가 구해 준 뒤, 두 사람이 짧은 시간이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잉그리드를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며, 그는 검을 움켜쥐었다.

앞에 해변이 보였다.

"아악!"

"살려줘요!"

해변까지 갈 수도 없었다. 해변과 이어진 거리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변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이 괴물들의 손에 죽어가고 있었다.

루이 왕자는 그 광경을 보고 데자뷔를 느꼈다.

똑같은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힘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사람들은 죽어갔었다.

남은 것은 잘린 팔과 눈. 잘린 상처에서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멈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해변에서 쏟아져나오는 괴물은 끝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은 지금 각성자로 불리기도 어려운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아이를 안은 엄마에게 손톱을 휘두르려는 괴물의 목을 날려버리고, 노인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괴물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 괴물은 그를 스쳐 지나갔고, 몇몇 괴물만이 그를 상대했다.

그가 구했던 사람들은 다른 괴물에 죽어갔고, 그는 몇 마리도 죽이지 못하고, 지쳐버리고 말았다.

"하하, 난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었구나."

그는 검을 땅에 박아넣고 눈물을 쏟았다.

괴물들이 점점 다가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은빛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기적은 두 번 오지 않았다.

루이 왕자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짙은 구름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구름 속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서걱!

뭔가 구름을 가르고 지나갔다. 번개?

서걱! 서걱!

번개가 아니었다. 구름이, 아니 공간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캬아아아악!

구름 속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화르르르르!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황당하게도 구름이 갈라지며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갈라진 하늘에는 피를 흘리며 추락하는 괴물과 사방으로 불을 뿜는 사자.

그리고, 사자를 타고 하늘을 가르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 뒤에는 헬멧을 쓴 남자가 앉아서 지상으로 기관총을 갈겨댔다.

투다다다다!

왕자에게 달려들던 괴물들이 터져나갔다.

동유럽에 있어야 할 집행자들이 칼레에 나타난 것이다.

이사벨이 지상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등급이 올라간 이사벨의 차원 절단이 지상을 향해 펼쳐졌다.

해변과 바다가 반으로 갈라졌다.

252화. < 반격 (3) >

크아아아악.

날개가 잘려나간 괴조가 물에 처박혔다.

괴조가 처박힌 바다 위로 몸이 잘려나간 괴물들이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해변도 마찬가지였다. 긴 선이 쭉쭉 그어진 해안가에 잘려나간 괴물들 시체가 가득했다.

아직도 하늘에서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루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염이 구름이 밀려나고, 구름 속에서 튀어나오던 괴물들이 갈라지는 공간에 놀라 구름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구름의 모습이 마치, 양 떼 같았고, 날개 달린 사자와 소녀는 양 떼를 모든 양치기와 개 같았다.

타타타타타.

그리고, 소녀와 함께 사자에 올라타 있던 헬멧을 쓴 각성자. 카우보이는 어느새 땅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반쯤 얼이 나간 루이 앞에 도착해 말을 걸었다.

"EV에서 왔습니다. 다른 각성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의 말에 루이 왕자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영상으로 보았던 EV 집행자들이었다.

저 구름을 뚫고 올지는 정말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루이 왕자는 진심으로 기뻤지만, 셰인의 질문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마지막일 겁니다."

도시에도 각성자 몇 명이 남아있었지만,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각성자는 없었다.

루이 왕자의 말에 셰인이 이사벨에게 연락했다.

-지상이 더 급한 것 같다. 지금 올라온 놈들을 처리해야겠어.

"네, 알겠어요! 가자, 베일리!"

크아앙!

셰인의 말에 이사벨과 베일리는 다시 지상으로 향했다.

다행히 바다가 뒤집힌 이후 해변으로 나오는 괴물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놈들을 잡아!"

땅에 접근하자, 이사벨이 베일리에게 말을 남기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사벨이 내리자, 베일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북쪽 해변으로 향했다.

크아아아앙!

사자의 입에서 불길이 쏟아져 해변을 뒤덮었다.

"제가 남쪽을 맡을게요."

베일리에서 뛰어내린 이사벨이 남쪽 해변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옆구리에 달려있던 기관단총이 불을 뿜자, 해변을 빠져나가려던 괴물들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같이 갑시다. 해변을 벗어난 놈들을 잡아야죠."

카우보이의 말에 루이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도시를 향해 달려갔다.

두타타타타!

기관총이 거리를 달려가는 괴물들을 쓰러뜨리고, 외팔이 왕자가 검을 휘둘렀다.

탕! 타탕! 타타당!

그때, 도시에서 요란한 총소리들이 들려왔다. 도시에 있던 야경단들이 총을 들고 나서준 것이다.

*

탕! 탕! 탕!

"죽어! 이 괴물들이! 그만큼 죽였으면 되잖아!"

"젠장! 유인은 무리야?"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성당 안에서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당의 제단 위에 담임 신부가 눈을 감고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총을 든 남녀들이 사방으로 총을 갈기고 있었다.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져나가고, 몇백 년 된 조각들이 부서졌다.

팅! 팅!

하지만, 부서지지 않고 총알을 튕겨내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은 벽에 매달려 움직이고, 긴 의자를 넘어오는 괴물들이었다.

총을 쏘고 있는 사람들은 이 구역을 담당하는 야경단이었다,

야경단은 괴물들의 시간을 뺏어야 하는 사람들.

시간을 끌려면 한자리에서 이렇게 싸워서는 안 되지만 이들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제단 뒤, 계단 아래 지하실에는 근처에서 도망온 수백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발에 달린 빨판으로 벽에 매달려 움직이는 괴물들은 슬쩍슬쩍 총알을 피하며 인간들을 비웃었고,

정면에서 다가오는 괴물들은 총격을 무시하고 장난을 치듯이 접근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다가오던 괴물들은 뻥 뚫린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제단 뒤를 바라보았다.

수백 가지의 인간 냄새가 그곳에서 나고 있었다. 인간들이 저 아래에 숨어 있었다.

괴물들은 하늘을 보며 목을 꿀렁거렸다.

가르르르르.

이상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동족들을 부르는 소리였다.

가르르.

밖에서도 괴물들이 호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여유롭게 움직이던 괴물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눈앞에 접근하는 괴물들을 보고 사람들은 절망을 느꼈다.

괴물들이 숨어 있는 가족들을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자신들은 죽음을 각오했지만, 가족들이 죽게 되면 쓸모없는 죽음일 뿐이었다.

벽에서 튀어나온 괴물들과 앞에서 달려든 괴물들.

사람들은 괴물들이 덮쳐들자 눈을 감았고, 신께 기도를 드리던 사제는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구름을 타고 천사들이 내려와 악마들에게 고통받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벽화.

벽화는 이미 괴물들에 의해 반쯤 훼손되어 있었고, 훼손된 벽화는 지금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사제는 벽화를 올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크르르릉.

괴물들의 괴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신부는 훼손된 벽화가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천사?"

앞장서서 달려오는 천사들 앞에 새로운 천사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흐릿하던 천사는 점점 또렷해졌고, 그림에서 튀어나와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오는 금발 천사는 이상하게도 천 옷이 아니라 검은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한 손에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창을 들고 있던 천사는 창을 휘둘러 괴물들을 죽이는 대신, 반대편 손에 든 기관단총을 갈겼다.

투다다다다!

접근하던 괴물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총소리에 사람들은 눈을 떴다.

"각성자다!"

놀란 사람들의 외침에 신부는 자신이 착각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 그림에서 나왔는데?'

이사벨은 특성으로 천장을 통과한 것이었지만, 신부가 볼 때는 성화에서 튀어온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신께서 보내주신 천사인가…."

총알을 다 써서 접근하는 괴물들을 날려버리고, 이사벨은 창을 휘둘러 남은 괴물들을 쓰러뜨렸다.

쾅!

창을 휘두르자, 방어막과 함께 괴물들의 몸이 잘려나갔다.

전처럼 아이템 창으로 방어막을 부수고, 그 후에 괴물의 몸을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등급이 올라간 그녀는 힘으로 방어막과 괴물의 몸을 동시에 박살냈다.

성당 안에 있던 괴물들은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괴물들이 쓰러진 뒤, 그녀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이곳에는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다들 괜찮죠?"

피가 튄 머리카락을 넘기며 묻는 그녀의 음성에 모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

깨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신부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가르르르르.

하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건물 벽 뒤로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동족이 부르는 소리에 달려온 괴물들이었다.

소리만 들어도 수십이 넘어 보였다.

깨진 창문 너머로 괴물들이 얼굴을 들이밀었고,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사벨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등급이 오른 뒤, 마나량도 많이 늘어났다. 아직 여력은 많이 남아있었다.

후욱!

그녀는 앞발을 한걸음 내디디며 강하게 창을 휘둘렀다.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른 마나는 창을 빠져나가며 특성으로 전환되었다.

서걱!

대각석으로 휘두른 창을 따라 거대한 원이 성당 벽에 만들어졌다.

이어, 그녀는 몇 번 더 창을 휘둘렀다.

천장의 벽화도 금이 쩍쩍 그어졌고, 그 뒤로 괴물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아악!

그리고, 괴물들과 함께 갈라진 천장과 벽이 무너져 내렸다.

전보다 훨씬 섬세한 차원 절단이었다.

잘라내면서 파편이 떨어질 것도 고려했는지, 제단 위에 떨어진 파편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뻥 뚫린 하늘을 보는 사이, 이사벨은 다시 몸을 날렸다.

아직, 총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안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모두 신부를 돌아보았다.

신부는 무너진 성당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좀 과격한 천사를 보내주셨나 봅니다."

*

사방에서 총소리가 울렸지만, 야경단들이 쏘는 총은 괴물들에게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 총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었고, 괴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사벨 일행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탕.... 탕.... 탕...

총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죽어서가 아니라 괴물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괴물의 몸에서 검을 빼낸 루이 왕자는 쓰러져 있는 야경단의 주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들 야경단의 희생 덕분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아쉽게도 길게 인사를 할 수는 없었다. 아직, 총소리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시 움직여야 했다.

투투투.

이미 카우보이는 기관총을 갈기며 다음 장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루이 왕자도 지친 몸을 다시 움직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던 모양이었다.

쾅! 콰광! 콰콰쾅!

멀리서 요란한 포격이 들려왔다.

분명 칼레를 방어하고 있는 군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루이 왕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과거에도 괴물을 막기 위해 화력을 퍼부은 적이 있었지만, 지금 들리는 소리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콰아앙! 타타타! 크아앙!

끝없는 포격에 다른 무기들의 소리가 마구 섞여들었고, 괴물들의 괴성도 묻어나왔다.

더구나, 한 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북쪽에서도, 동쪽에서도, 남쪽에서도.

서쪽 바다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통신이 들어왔다. 조금 전, 집행자들의 등장을 듣고 기뻐했던 잉그리드에게서였다.

-모든 방어부대가 공격을 받고 있어요! 고등급 괴물들도 다수 포함된 대규모 공격이에요!

살 수 있다는 기대가 생겼었기 때문일까? 잉그리드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역시, 총공세였나."

쓸데없이 바다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올 이유가 없었다.

예전의 괴물들이라면 혼자서도 날뛸 수 있겠지만, 지금 인간들을 공격하는 괴물들은 전략과 전술을 잘 알고 있었다.

후방을 교란하면서 총공세를 가한다는 무척이나 정석적인 전술.

후방 교란은 EV 집행자들이 막아주었지만, 그것으로 전황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지금, 각 부대에서 구조 요청이 들어오고 있어요.

점점 차분해지는 잉그리드의 목소리 너머로 장군의 고함이 들려왔다.

-전선이 붕괴한 부대는 후퇴시켜! 어떻게 하든 버터내야 해! 뒤가 없는 건 나도 알아! 그렇다고 그냥 자살할 수는 없잖아!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장군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비장했다.

어두운 얼굴로 무전기를 듣는 루이 옆으로 카우보이가 다가왔다.

"공세가 시작되었습니까?"

그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네, 막기 어려워 보입니다. 혹시 여러분 말고, 다른 부대도 같이 오지 않았습니까?"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았지만 카우보이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겠죠. 이곳까지 올 방법이 있을 리가…."

집행자들은 하늘을 나는 사자와 함께, 구름을 뚫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오기는 무리였다.

"아, 구름…!"

구름을 보며 한탄을 하던 왕자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저 구름을 다 없앨 수 없겠습니까?"

"멀리 쫓아내는 것은 가능해도 구름을 없애기는 쉽지 않아요."

어느새 이사벨도 그의 옆에 와 있었다. 그녀도 포격을 듣고 왕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아, 쫓아내는 것도 괜찮습니다."

이사벨의 말에 왕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도버해협에서 구름을 밀어낼 수 있을까요? 영국까지 길만 터주면 됩니다."

그의 말에 이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 걸리긴 해도 가능은 할 것 같은데요. 왜요?"

"바로 옆 칼레-덩케르크 공항에 헬기와 여객기들이 남아있습니다. 비행로만 열리면 사람들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 도움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수백에서 수천 명은 살릴 수 있습니다."

이사벨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비행기가 뜰 수 있다고 해도, 그들 대부분은 살기 어려웠다.

왕자는 그 많은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자는 소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하지만, 이사벨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남쪽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칠 뿐이었다.

"서둘러 주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뜬금없는 소리에 루이 왕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 대답이 들려왔다.

쾅!...쾅!

갑자기 포격 소리가 확 줄어든 것이다.

크아악.

괴물들의 비명이 포격 소리 사이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신기에서 잉그리드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물들이 이상합니다! 체계적인 공격을 멈추고 날뛰고 있어요! 자기들끼리 싸우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어요!

흥분한 잉그리드의 목소리와 함께 장군의 고함이 들려왔다.

-부대를 정비해! 일시적인 걸 수도 있어! 싸움을 걸지 마! 일시적이든 아니든 자기들끼리 싸우게 놔둬!

통신을 들은 왕자는 황당한 얼굴로 이사벨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 자랑스러워했다.

"경훈 아저씨에요!"

칼레 남쪽 500km.

스웨덴 북쪽 평야에 거대한 괴수가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괴수 앞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경훈이 서 있었다.

"늦진 않았겠지?"

-네. 칼레는 무사합니다.

안심한 경훈에게 마나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이번에도 등급이 오르지는 않았다.

대신,

[대량의 마나가 흡수되었습니다. 다음 등급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경훈은 정말 오랜만에 시스템 메세지를 듣게 되었다.

253화. < 반격 (4) >

군주가 쓰러진 뒤, 군대와 유럽의 각성자들은 결국 칼레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지시를 내리는 군주가 없어도, 괴물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지만, 산발적인 공격은 기존의 병력과 EV 집행자들의 도움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칼레와 도버해협을 메우던 구름도 대서양으로 물러섰다.

칼레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영국에서 항공기들이 출발했다. 군용기뿐만 아니라 민간 헬기와 여객기들이 목숨을 걸고 칼레로 향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모스크바 전투를 보도하는 것으로 세계적인 방송사로 떠오른 NTV도 뉴스에서 그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저녁 뉴스의 주 진행자 자리를 차지한 이리나가 멋진 모습으로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 칼레를 방어하고 있던 나토군과 각성자들이 오늘부로 반격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지원 온 각성자와 군부대, 그리고 EV 집행자가 함께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리나 앵커가 말을 하는 동안 화면에는 칼레에 도착한 병사들을 환영하는 루이 왕자와 그의 옆을 지키는 잉그리드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칼레를 지킨 영웅으로 영국과 유럽에 사는 사람들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자, 이번에는 독일 곡창지대를 지나가는 전차와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은 유라시아 연합 유럽 파견군 소식입니다. 현재 유럽 파견군은 독일 중부와 오스트리아를 진격 중입니다. 파견군은 그동안 늦어진 것을 만회하듯이 호쾌한 속도로 괴물들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화면에 펼쳐진 유럽 지도의 붉은 색이 동쪽에서부터 점점 파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화면이 다시 이리나를 비추자 그녀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옆자리에 앉은 앵커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시 속도가 늦어진 것은 진격로에 있던 고등급 괴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면서요?"

"네, EV 특수 작전팀이 요격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남자 앵커의 말에 이리나는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동쪽에서 번쩍, 서쪽에서 번쩍. 정말 EV 집행자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리나의 모습은 자신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도박 같은 헬기에서의 촬영 이후, 그녀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고, 방송국도 그녀를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얼마 되지도 않아, 꿈에 그리던 저녁 뉴스의 주 진행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오르게 해준 EV 집행자를 더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중요한 기자 회견이 있었다.

"지금, 모스크바 SG 전자 연구소에 마나 공학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윤혜린 박사가 와 있습니다. 오늘 중대한 발표가 있다는 소식에 수많은 기자가 현장에 집결해 있습니다."

이리나가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현장을 연결하겠습니다!"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SG 전자의 모스크바 연구소 앞입니다!]

*

주변은 어두웠지만, 밝은 조명이 야외에 만들어진 기자 회견장을 비추고 있었다.

기자 회견장은 격납고처럼 보이는 커다란 공장 앞 광장에 만들어져 있었다.

회견장 앞에는 윤혜린 박사의 명성에 걸맞게 백 명이 넘는 기자가 모여 있었다.

유라시아 연합과 일본, 주변 나라에서 기차를 타고 달려온 기자들이었다.

기자들은 뜻밖의 장소에서 진행되는 기자 회견을 두고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들은 거 있어?"

"글쎄? 새로운 마나석 기계 아닐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게 뭐냐는 거지."

"그걸 알 리가 있나. 뜬금없이 모스크바에서 발표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모스크바 전투 이슈를 이용하려는 걸까? 이 밤에 기자 회견을 하는 것도 방송시간에 맞추려는 것 같은데."

"모스크바나 뉴스 시간이지, 동아시아는 한밤중에 새벽이야."

"그럼 뭐지?"

이유를 알 수 없이 머리를 쥐어뜯는 기자들 옆에는 오랜만에 만나 새로운 정보를 얻어내려는 기자들의 탐색도 이어졌다.

"기사 좀 줘요."

"나도 없어."

"EV 집행자 정보 좀 없어요? 한국 쪽은 뭔가 있을 거잖아요."

"카우보이하고 전투 천사 쪽은 오리무중이야. 전혀 정보가 없어. 카우보이는 헬멧 속에 들어있는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도 모르고 있는데 뭐."

"그럼, 다른 한 명은요?"

"그거야 뭐, 얼굴도 노출되었고, 그럭저럭 유명했던 사람이라…."

"그게 정말이에요? 귀금속회사 대표라는 게?"

"증언도 많고, 신문 기사도 나오기도 하고, 나도 인터뷰했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쩝, 나도 깜빡 속았어."

중년의 한국 기자가 혀를 찼다.

"뭐, 나름 집행자를 찾느라 난리였으니, 숨겨진 신분 같은 거였겠지."

"그럼, 진짜 신분이 아니에요?"

"뭐, 글쎄, 영 자라온 과정에 비밀이 많아서.... 고아원에서 자라고, 군대에 있을때도 어디 소속되어 있었는지 파악도 안되고, 더구나 평범한 청년이 갑자기 승승장구한 것 보면 말이 안 되는 점이 너무 많아."

모스크바 전투가 방송을 탄 뒤에 기자들은 필사적으로 방송에 등장한 집행자들을 찾아다녔다.

다른 두 사람은 아무런 정보를 찾지 못했지만, 얼굴을 드러낸 동양인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드러난 그의 행적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일투성이였다.

그렇게 기자들이 떠드는 가운데, 한쪽에서 SG전자의 대표. 혜린 박사가 등장했다.

파파파팍!

언제나처럼 화려한 모습의 박사가 등장하자,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방송국 카메라들이 일제히 그녀를 찍기 시작했고, 기자들은 언제 잡담을 나누었냐는 듯이 노트북에 손을 올리고 기사를 작성할 준비를 했다.

혜린 박사가 단상에 올라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열 대가 넘는 카메라와 백 명이 넘는 기자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과거 마나석에 대한 발표 이후 수많은 기자 회견을 했지만, 오늘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오늘 기자 회견을 망칠 수는 없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 자리에 모여주신 기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녀는 짧은 인사를 한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발표할 것은 과거 마나 발전기 이상으로 사회를 변혁시킬 기술이자, 변혁입니다."

마나 발전기 이상이라니. 혜린의 말에 기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여러분의 예상처럼 오늘 발표할 것은 마나 공학으로 탄생한 물건입니다. 그리고, 이 물건은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EV의 설계와 SG 전자의 개발로 완성되었습니다."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던 기자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혜린의 말 속에 이상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동안 SG전자에서 발표한 마나 발명품이 전부 EV와 함께 만들었다는 건가요?"

참을 수 없었던 기자 한 명이 질문했다.

질문과 답변 시간이 아니라 대답할 필요는 없었지만, 혜린은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네, 대부분의 마나 발명품은 EV와 함께 SG전자가 개발했고, 마나석 발전기 같은 중요한 발명품은 EV에서 설계했습니다."

혜린의 말에 기자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여태 거짓말을 한 거였어?"

"그럼, 특허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전부 SG 전자가 특허를 가지고 있잖아."

몇몇 기자가 급하게 손을 들어 질문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혜린이 질문을 받아주지 않았다.

"저희는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고, 특허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SG전자는 EV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놀란 기자들이 타자를 멈추고 말았다.

바로 다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기자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벌겋게 달궈져 있었다.

특종이었다.

아직, 발표할 물건이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특종이라니.

기자들의 눈과 귀는 더할 나위 없이 커졌고, 카메라맨들의 귀로 방송국 PD의 고함이 들려왔다.

-한 컷도 놓치지 마! 시청률이 수직으로 오르고 있어!

PD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카메라맨들은 눈에 불을 켜고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기자들의 흥분이 단상에까지 전해졌다.

혜린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그녀가 할 몫은 제대로 한 것 같았다.

이제 원래의 주인에게 자리를 넘길 차례였다.

"그런 까닭에 이번 발표는 EV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과거 헬멧맨이라 불리었죠? EV의 집행자이자, 골드월드사의 대표인 강경훈 대표입니다."

혜린이 옆을 향해 손을 펼치자, 조명이 어둠 속에 서 있던 한 남자를 비추었다.

조명이 비춘 것은 정장을 차려입은 경훈이었다.

경훈은 조명을 받으며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파파파파파파팍!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미소를 띤 얼굴로 옆으로 비켜선 혜린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경훈이 마이크 앞에 섰다.

단상 앞에는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기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방송국 카메라들이 그를 찍고 있었다.

아마,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방송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리지도, 식은땀이 흐르지도 않았다.

각성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이 변한 것일까.

경훈도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발표는 어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강경훈입니다. 그리고, 질문은 발표 이후에 받겠습니다."

경훈이 등장한 순간부터 수많은 손이 번쩍 올라가 있었다.

사람들의 손을 내리게 한뒤, 경훈은 발표를 진행했다.

"여러분을 이곳 러시아 연구소 앞으로 모신 이유는 바로 오늘 발표할 아이템 때문입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철컥.

높이 달린 조명들이 단상 뒤쪽에 있는 연구소를 비추었다.

드르르르륵.

격납고처럼 보이는 연구소의 거대한 문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연구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비어 있는 바닥에는 거대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문양 중앙에는 둥근 공 형태의 기계가 문양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웅.웅.웅.

은은하게 빛나는 문양을 보며 기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경훈이 입을 열었다.

"지금 보시는 것은 런던과 연결된 공간이동 장치. 포탈입니다."

경훈의 말과 함께 포탈 위로 환한 빛이 퍼져나갔다.

빛이 사라지자, 문양 위에는 마술처럼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에는 헬멧을 쓴 남자와 강아지를 어깨에 올린 소녀. 그리고,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루이 왕자와 잉그리드가 있었다.

"맙소사."

어느새 일어서 있던 기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몇몇 기자들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눈치 빠른 기자들은 포탈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눈치챈 것이다.

사람들은 건물 안에서 걸어나와 단상으로 다가왔다.

이사벨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고, 베일리는 코를 킁킁거리며 모스크바의 냄새를 확인했다.

루이 왕자도 잉그리드도 기쁜 얼굴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공간이동 장치. 포탈은 현재 유라시아 연합의 각 수도와 런던, 그리고 남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실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유럽에 있다던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포탈은 계속 늘려나갈 겁니다. 이제 비행기나 배 대신, 물류 이동은 포탈이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더 많은 포탈을 설치해야 했고, 기술도 더 개발해야 했다.

앞으로 마나석 소모도 심해질 거고, 몰래 움직이던 EV 특수 작전팀의 움직임도 제약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경훈은 자신을 공개한 것처럼 포탈도 공개하기로 했다.

이제 괴물들을 대륙에서 밀어낼 때였다. 그러기 위해 포탈의 공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공개를 더 해야 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칩니다. 그리고, 이왕 나온 김에 EV의 조그마한 비밀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혜린이 다시 미소를 지었고, 단상에 다가온 사람들도 경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어 있는 EV의 지배자 같은 것은 없습니다."

경훈의 말에 회견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경훈이 후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EV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254화. < 대군주 (1) >

모스크바에서의 기자 회견은 방송을 통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아직 방송이나 인터넷이 되는 모든 곳에서 이슈가 되었다.

포탈이라는 공상과학에나 나올 법한 장치는 과학자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난리를 치게 했지만, 일반인들은 그것보다 EV의 책임자로 자처하는 각성자 쪽을 더 궁금해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더 심했다.

네티즌 수사대는 그의 정보를 찾기 위해 온갖 자료를 들쑤셨고, 기자들은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 인터뷰했다.

이미, 집행자로 소문이 났을 때도 기자들이 이리저리 찔러봤지만, 지금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경훈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는 곳이 없었고, 인터뷰하기에는 지인들의 위치가 만만치 않았다.

-백산 그룹은 이 일에 할 말이 없습니다.

-진샤웨이 회장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문의를 남겨주시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한국 각성자 협회는 각성자에 대한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인들의 인터뷰는 대부분 불가능했고, 몇 년 전으로 거슬러 겨우 아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기자들은 과거 경훈이 인턴으로 다녔던 회사 직원들을 찾아냈다.

"정말 경훈씨가 맞나요? 비슷하게 보이고, 분위기는 똑같은데.... 각성자가 된다고 이렇게 될 수 있는 건가?"

"일은 정말 잘했어요. 처세술이 약해서 결국 정식 직원은 안되었지만, 나름 독특한 분위를 풍겨서 잘 기억하고 있어요."

"일은 잘했죠. 친구는 없었지만.... 뭐 지금도 다들 미안해하고 있어요. 위에서 내려온 지시였지만, 그래도 보호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모두 자기 보신하기 바빴죠."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고,

"너무 독불장군이었습니다. 별다른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마지막 날에 분위기만 흐려놓고. 스프링쿨러 고장도 그가 한 것일지 모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기자는 그나마 괜찮은 인터뷰 대상을 찾기도 했다.

경훈이 자주 들렸다는 국밥집 사장 부부였다.

"정말 잘됐어요. 무척이나 성실한 청년이었어요. 제대하고 취업이 안 되었을 때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열심히 살았죠."

그녀의 말에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경훈이 달라졌던 때를 물어보았다.

"얼마 뒤였나? 어느 날 일이 잘되었는지 저쪽 버려진 공단 단지의 공장 하나를 샀어요."

"고양이들이 득실거려서 유령까지 나온다는 곳이었어요. 관청에서 나와서 싹 처리하고는 조용해졌죠."

그녀는 즐거운 얼굴로 계속 이야기했다.

"그 뒤에도 가끔 들렸는데, 이사를 가는 바람에 한동안 보지 못했어요. 조금은 특이한 청년이라서 잘 기억하고 있죠. 남편이랑 항상 그 청년은 언젠가는 크게 성공할 거라고 이야기했다니까요."

"암. 암."

남편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무척 바쁘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나면 국밥 먹으러 다시 와주면 좋겠어요. 진혁 청년도 같이 오고요."

인터뷰 동영상은 수많은 커뮤니티에 퍼져나갔고, 수많은 댓글을 만들어냈다.

ㄴ전부 뻥 아닐까? 각성하기 전에는 그냥 백수였잖아. 각성한다고 저렇게 된다고?

ㄴ별의별 특성이 다 있잖아요. 뭔가 엄청난 특성을 얻은 게 아닐까요?

ㄴ전투 특성도 아니라고? 그럴 리가…. 저번 모스크바 전투 영상보고 전문가들이 세계 최강의 각성자일거라고 이야기했잖음.

ㄴ젠장, 이것도 될놈될인가!

ㄴ아니, 포탈 이야기 좀 합시다. 저거 되면 땅값 개판 되는 것 아닙니까?

ㄴ건물주 오셨나 보네. 지금 상황 알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수도권 빼고는 땅값 초 개판 되었고, 음식값도 천정부지인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ㄴ포탈 만세! 반대하는 놈들은 내가 직접 가서 멱을 따버릴 거여. 미국에 있는 식구들 볼 수 있는 희망이 생겼는데 뭐가 어째?

ㄴ그런데, 진혁이라는 이름 한국 각성자 협회장 이름하고 같지 않아?

ㄴ헉. 각성 전에 서로 알고 있었다는 건가.

ㄴ아니, 각성 전부터 인맥 빨이냐!

ㄴ쩝, 진혁 병장도, 경훈 병장도 전부 대단해졌네.

ㄴ넌 누군데 아는 척이야

ㄴ관심 종자일 듯

ㄴ군대에서 같이 복무한 사람임. 진혁 병장도 꽤나 유명했고, 경훈 병장은 거의 전설로 불리워서리….

ㄴ군대 기록도 없다던데?

ㄴ병장 따위가 무슨 전설이냐! 구라잖아!

ㄴ뻥 치지 말고 부대나 말해봐!

ㄴ제대하면 다들 병장 달아주는 곳임.

ㄴ특수부대인 모양인데. UDT? HID?

ㄴ뻥 아니었어?

ㄴ어, 글쓴이 방금 탈퇴했다. 설마 사실?

모든 인터넷 게시판들은 온갖 소문과 추측이 뒤섞여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하지만, 소문의 주인공은 이쪽 세상이 있지 않았다.

***

"이곳도 많이 변했어."

경훈이 복도를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지가 가득했던 녹슨 지하 기지가 말끔하게 변해 있었다.

-80% 정도 시설을 복구했습니다. 숙소 같은 곳은 아직 복구가 다 되지 않았지만, 기지를 운용하는 데는 문제 없습니다.

쿵. 쿵.

경훈 옆으로 이브가 통제하는 골렘이 지나갔다.

지금 경훈은 로키산맥의 지하 요새. 과거 미국의 전략 방위 사령부가 있던 지하 기지에 와 있었다.

경훈은 멸망한 세상의 마나 위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 지하 요새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복도는 싸움의 흔적까지 모두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깨끗해진 지하 요새를 보고 좋아할 만했지만, 경훈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란해 보였다.

"사망자 명단에 있을 줄이야...."

-네,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경훈은 이곳에 오기 전 부산 물만골에 있는 마지막 지하 벙커 찾아갔었다.

영철, 아니 혁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시금 샅샅이 뒤진 결과, 경훈은 폐기된 종이들 속에서 사망자 명단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혁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각성자 이혁준.

명단에는 간단한 이름만 적혀 있었다.

동명이인이면 좋겠지만, 이브가 알아낸 이쪽 세상의 한국 각성자 명부에는 혁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각성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걸까?"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모두 논리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말해봐."

-영철 각성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나온 추측입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철이 모두를 속였다면 전부 의미 없는 이야기였지만, 속일 이유도, 속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혁준 각성자의 의식이 마나와 함께 떠돌고 있다가 영철 각성자의 특성으로 활성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도플갱어같은 괴물들을 통해 영철 각성자의 특성으로 치환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비과학적이지만, 영철 각성자의 특성이 일종의 영혼 소환일 수도 있고….

마지막, 추측은 꺼내기도 싫었는지 이브가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는 주인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시 만났다고 말했고요. 저와 만난 뒤 주인님은 항상 저와 있었고, 그가 각성한 것은 제가 주인님과 만난 뒤였습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이쪽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닐까?"

-확률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두 세계가 무척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의 대통령도 다르고, 기업명도 조금씩 다릅니다.

-주인님과 같은 인물이 있을 가능성도 적습니다만, 같은 특성을 가지고 같은 일을 했을 확률은 소수점 이하로 떨어집니다.

"결국, 의문만 남는 건가...."

마나와 특성에 대해 이제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의문만 남은 일을 뒤로 미루고 경훈은 오랜만에 위성 통제실에 들어갔다.

통제실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기계들은 그대로였지만, 낡은 브라운관들이 전부 최신 디스플레이로 변해 있었다.

-통제 장치도 바꾸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 힘을 쏟아 만든 곳이었다.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디스플레이도 켜져 있었고, 제어판의 불들도 모두 들어와 있었다.

디스플레이에는 세계 지도와 함께 여러 개의 파형이 화면을 수놓고 있었다.

전에 보았던 위성들의 궤도였다.

경훈이 휴대폰을 꺼내 중앙 제어판 단자에 연결했다.

-마나 위성을 연결하겠습니다.

화면에 그려지던 위성들의 궤도가 사라지고, 지도에 점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회색 점들이 전보다 더 늘어나 있었다. 회색 점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찍혀 있었다.

새로 늘어난 회색 점은 지난 2년간 경훈이 처리한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회색 점 중에는 경훈이 관련 없는 곳도 있었다.

만주, 아프리카, 아랍 등, 경훈이 처리하지 않은 여러 곳의 점들이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전부 차원을 넘은 놈들이겠지? 우리 세상에서 내가 잡은 놈들을 제외하고 명단을 뽑아봐."

-알겠습니다.

역시 이곳으로 오기를 잘했다.

차원을 넘어간 괴물의 위치를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브가 확인하는 사이, 경훈은 실눈을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점 하나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저게 뭐지?"

-무슨 말씀인가요?

"분홍색이 군주급이고, 붉은 점은 대군주급이지?"

-네.

"저기, 미국 중부에 있는 붉은 점을 확인해봐. 분명 옐로스톤에 있는 괴물을 가리키는 점일 텐데."

북아메리카에 홀로 박혀 있는 붉은 점 주위로 흰 얼룩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옐로스톤이 맞습니다. 지금 그곳에 마나가 급격하게 치솟고 있습니다.

경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흰 얼룩은 점점 하얗게 변하며 붉은 점 주위로 더욱 모여들고 있었다. 마치 괴물이 마나를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

같은 시각 옐로스톤.

오래전에 인간의 손길이 사라진 옐로스톤은 간헐천과 숲이 뒤덮은 태고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간 옐로스톤이었지만, 간헐천이 있는 중심부에는 동물도, 괴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괴수 때문이었다.

다른 군주급 괴수처럼 엄청나게 큰 괴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괴물처럼 무섭게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이상할 뿐이었다.

인간을 닮은 괴물이었지만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있지만, 얼굴도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팔다리는 있었지만, 손가락도 발가락도 보이지 않았다.

몸도 다를 바가 없었다.

괴물의 몸 전체는 밋밋한 검은 색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언뜻 보면, 마치 검은 비닐을 뒤집어쓴 외계인 인형처럼 보일 정도였다.

콰과과과과.

괴물 때문에, 오랜 시간 조용하던 옐로스톤이었지만, 지금은 태풍을 맞은 것처럼 시끄러웠다.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대를 휘감고 있었다.

나무가 뽑혀나가고, 간헐천의 물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괴물을 향해 마나가 몰려들고 있었다.

콰과과.

아니, 정확히는 아래로 뻗은 괴물의 뭉뚝한 손을 향해 몰려들었다.

몰려든 마나는 괴물의 손에서 변화되고 있었다.

괴물의 손 아래에는 검은 구멍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차원 문이었다.

하지만, 검은 구멍 아래에도 다른 곳에도 문양은 보이지 않았다.

이 검은 구멍은 마나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대군주의 특성으로 만든 차원문이었다.

검은 구멍이 점점 커져갔다.

255화. < 대군주(2) >

차원 B.

옐로스톤 국립공원.

콰과과과광.

간헐천 옆에 만들어진 CIA 비밀 시설이 갈가리 찢겨 하늘을 날고 있었다.

웬만한 격납고보다 큰 건물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분해되고 있었다.

"맙소사!"

평상시처럼 시설 관리를 위해 숙소를 나섰던 스미스 요원은 눈앞의 참사에 비명을 질렀다.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주차장에 있던 차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고, 회오리바람은 그가 있는 곳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토네이도가 왜 이곳에?"

이곳 옐로스톤은 토네이도가 일어나는 곳이 아니었다.

그의 몸도 휘몰아치는 바람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놀란 스미스는 미친 듯이 도망쳤다.

하도 놀란 바람에, 그는 이 회오리바람이 일반적인 자연현상과는 다른 것을 알지 못했다.

"헉, 헉, 헉."

몇십 미터 전력 질주를 하자, 더는 달릴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회오리바람은 쫓아오지 않았다.

"사라진 건가?"

그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회오리바람이 사라진 자리에 서 있는 기괴한 괴수를 보게 되었다.

회오리바람이 사라진 자리, 시설이 있었던 자리에는 삼 사층 크기의 거인이 서 있었다.

온몸이 검은색 일색의 평평한 거인.

"빨리 사람들에게 알려야...."

그는 급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지만, 번호도 누르지 못하고 전화를 놓치고 말았다.

지이이잉.

환상과 환청이 머리를 뒤집어 놓았다. 그는 아무것도 못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헤...."

입가에 침이 흘러나왔다.

대군주가 뿜어내는 이미지를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는 없었다.

스미스 요원은 정신을 놓고 멍하니 거인을 바라보았다.

대군주는 바닥에 주저앉은 인간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었다.

차원을 무사히 넘게 된 것이다.

대군주는 긍정의 이미지를 뿜어냈다.

드디어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

자신같이 격이 높은 존재는 이쪽 세상의 차원의 벽을 뚫는 게 쉽지 않았다.

전의 차원까지는 스스로 넘어올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흉내 내는 종족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일을 망쳐왔지만, 흉내 내는 종족이 그래도 마지막에는 제대로 일을 해낸 것이다.

원래는 일이 다 끝난 뒤 넘어올 생각이었지만, 역시 다른 차원을 먹어 치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자신들이 마무리해야 했다.

차원의 군주는 마나 폭풍에 엉망이 된 바닥을 향해 검은 팔을 쭉 뻗었다.

대군주에게서 좀 떨어진 바닥에 회오리바람이 모여들더니 검은 구멍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사용할 차원 회랑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구멍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펄럭!

구멍 안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잠시 뒤, 구멍 안에서 거대한 물체가 하늘로 솟구쳤다.

삐이이익!

한참을 솟구친 형체는 자신의 날개를 활짝 폈다.

날개 달린 공룡. 익룡을 닮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괴수는 날개를 펄럭이더니 바닥에 내려왔다.

쿵.

삐이이이익!

괴수는 날개를 크게 펴고 새로운 세상의 공기를 만끽했다.

[넌 여기서 날뛰어라. 이 대륙의 인간들이 다른 곳은 신경 쓰지 못하게 해라.]

삐이이익!

차원 군주의 이미지에 괴수는 울음소리로 답했다.

대군주는 한 번 더 바닥에 손을 펼쳤다.

경훈과 다르게 대군주는 특성을 사용하는데 시간의 제한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 만들어진 구멍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은빛 구멍이 대 군주 발아래 펼쳐졌다.

우우우우웅.

구멍 안으로 대군주가 빨려 들어간 뒤, 괴수가 다시 날개를 펼쳤다.

사방에서 인간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디로 날아가든지 상관없을 것 같았다.

푸아악.

날개가 크게 펄럭이자, 괴수는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발에 인간의 피가 그득하게 묻어 있었지만, 괴물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괴수는 서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향해.

*

괴수가 크게 날개를 펄럭이며 봉우리 위를 넘어가는 순간.

쾅!

괴수는 공기를 일그러뜨리며 날아온 탄환에 날개 한쪽이 뻥 뚫려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크아아아아!

군주급 방어막이 뚫릴 것으로 생각지도 못한 괴수, 아니 괴조는 비명을 지르며 지상에 추락했다.

쿠아아앙!

숲 한쪽을 박살 내며 괴조가 땅에 처박혔다.

겨누었던 레일건을 내려놓으며 경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옐로스톤에 있던 괴물하고 다른데."

-네, 전혀 다른 종족입니다. 전에 보았던 대군주가 몸의 형태를 바꾸는 종족이라면 모를까, 생김새가 전혀 다릅니다.

경훈과 이브는 옐로스톤의 대군주를 본 적이 있었다.

바람 풍선 인형이라는 경훈의 표현과 달리, 혼자 상대하기 힘든 괴물이었다.

"분명 위성 화면에서 사라졌지?"

-네. 마나가 모여든 뒤 붉은색이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차원을 넘은 게 분명합니다.

그 화면을 보고 경훈은 최대한 빨리 옐로스톤으로 차원 이동을 했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 넘어와 보니, 전에 보았던 대군주는 보이지 않았고, 엉뚱한 괴물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쁜 예감이 드는데…."

경훈이 추락한 괴조를 향해 달려가며 중얼거렸다.

그는 한걸음에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넘으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갔다.

"섬에 확인해봐. 마나 위성을 돌려 고등급 괴물 숫자를 확인해보라고 해."

-혹시, 옐로스톤 대군주가 차원 이동이나,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나도 아니었으면 해."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경훈은 금방 괴조가 추락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개에 구멍이 난 익룡을 닳은 괴조가 경훈을 향해 이미지를 쏟아냈다.

[감히!]

역시, 군주급 괴물이었다.

하지만, 경훈은 타격은커녕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아공간에서 검을 꺼낼 뿐이었다.

그가 꺼낸 검은 대검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삼정검이었다.

공략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삼정검이 아까웠지만, 최대한 빨리 쓰러뜨려야 했다.

그때, 이브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나 위성을 확인한 것이었다.

-주인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이곳 옐로스톤에 나타났던 붉은 점이 사라진 뒤, 그 점이 극동 아시아에 다시 나타났다고 합니다.

-거기다 붉은 점이 있는 곳에 마나가 모여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고 합니다.

경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극동 아시아 어디?"

-한반도, 정확히는 백두산입니다.

***

차원 대군주는 백두산 천지 위에 서 있었다.

괴수의 발아래에는 호숫물이 찰랑거렸지만, 괴수는 물속에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괴수의 양팔은 하늘을 향해 높이 들려 있었고,

하늘에는 검은 구멍 여러 개가 동시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모두 각기 다른 곳과 연결된 차원 문이었다.

검은 구멍이 점점 커지고, 다른 세상에서는 군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중국 베이징.

파괴된 자금성을 둥지로 삼고 있었던, 괴수가 몸을 일으켰다.

화염을 머리에 두른 박쥐 날개를 가진 원숭이가 천천히 자금성 앞 광장. 천안문을 향해 걸어갔다.

원숭이는 걸어가면서 도시를 향해 포효했다.

[모여라!]

크아아앙!

베이징을 헤집고 있던 괴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수많은 짐승을 닮은 괴물들이 천안문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괴물들이 달려오는 천안문 중앙에는 검은 구멍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 휘어진 에펠탑 위에 앉아 있던 거대한 나비도 날개를 펄럭이며 마르스 광장에 내려앉았다.

부앙!

광장에 내려앉은 나비는 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날개에 묻은 인분이 사방에 퍼져나갔고,

푸악! 푸아악!

광장 땅속에 있던 애벌레들이 땅을 뚫고 튀어나왔다.

수백 마리의 애벌레들이 검은 구멍이 있는 광장 중앙을 향해 꾸무럭거리며 기어갔다.

다른 군주들이 있는 곳에도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히말라야의 산자락에도, 파라과이의 밀림에도.

그리고, 알래스카의 눈 덮인 기지에도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기지의 안쪽 깊은 격납고. 그 중앙에 구멍이 생겨났다.

우우우웅.

검은 구멍이 나타나자, 흐릿하던 불들이 다시 밝아졌다.

위잉. 철컥.

전자 장비들이 하나씩 가동되고, 잠들었던 기지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기지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 시스템 가동.... 완.... 료.]

이상한 음성이 섞인 기계음이 기지가 다시 깨어난 것을 알려주었다.

[테스트…. 머신.... 구동.... 시작.]

이어서 격납고 한쪽에 서 있는 기계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우주선 발사를 위한 발사대 같았다. 하지만, 발사대에 서 있는 것은 우주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로봇이었다.

군주급 괴수를 상대하기 위해 미군이 비밀리에 만드는 중이었던 마나석 로봇.

연구원들끼리 농담 삼아서 마장기라고 불리던, 대 괴수 결전용 로봇이었다.

하지만, 이 로봇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미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기지도 갑자기 난입한 괴물 한 마리에게 모두 죽고 말았다.

몸전체가 액체로 된 괴물이었다.

괴물은 기지의 외벽 틈으로 침입해서 컴퓨터를 장악한 뒤, 환풍기를 잠가 기지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죽였다.

모두가 죽은 뒤, 괴물 자신을 로봇과 동화시켜서 미완성인 로봇을 완성한 것이다.

군주급 마나석을 이용해 만든 로봇. 이 로봇을 장악하게 되자, 액체 괴물은 자신이 군주급으로 격이 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초로 인간이 만든 기계로 군주급 괴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우웅.

로봇의 장갑 틈 사이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두꺼운 합금으로 만들어진 장갑 안쪽에 그려진 문양이 불게 달아오른 것이다.

치익.

냉각기가 가동되고, 수증기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철컹.

거대한 발이 한걸음 움직였다.

철컹.

그리고, 또 한발.

외부와 연결되어 있던 점성있는 액체가 로봇의 가슴 안으로 사라졌다.

부우웅.

동시에 기지의 시스템은 다시 가동을 중지했지만, 로봇은 멈추지 않았다.

로봇의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쿵.

로봇은 검은 구멍 앞에 멈춰 섰다.

괴물은 구멍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

경훈은 부서진 검을 들고 바닥에 누운 괴조를 바라보았다.

숲은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고, 뒤쪽에 있던 산봉우리는 반쯤 사라졌었다.

경훈도 엉망이었다. 방탄복은 갈가리 찢어져 있었고,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무리한 싸움이었다.

기습으로 날개를 봉인한 덕분에 겨우 이길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질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그는 부서진 삼정검을 던져버리고,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꿀꺽, 꿀꺽.

상처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하지만, 상처와 달리 걱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옐로스톤의 괴수는 차원 특성을 가진 것이 맞습니다. 백두산에 분홍색 점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른 세상에서 군주들을 소환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갈수록 나쁜 소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냥 군주들을 소환하려고 백두산으로 간 건 아니겠지?"

-다른 세상의 백두산에는 붉은 점. 대군주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옐로스톤과 달리 엄청나게 진한 붉은색 점이었습니다.

옐로스톤의 괴수는 경훈과 같은 차원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괴수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경훈보다 훨씬 뛰어났다.

시간, 개수의 제한도 없었고, 혼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군주급 괴물도 소환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백두산 놈이 넘어오기 전에 막아야 해."

-옐로스톤 괴수도 넘어오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대군주급은 군주급과 달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예상만으로는 안 돼. 마나 위성을 움직이고, 다른 모든 위성을 불러 확인해봐. 그리고, 정찰기 드론, 보낼 수 있는 것은 다 보네.

-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사람들 모아줘. 셰인과 이사벨. EV 각성자. 아니, 최대한 연락해. 지부의 포탈을 모두 사용해서 사람들을 모아."

-네.

이브의 대답을 들으며 경훈은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군주급 괴물의 마나가 모두 경훈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등급이 올랐습니다. EX등급이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휴대폰에서 메세지가 들려왔다.

256화. < 대군주(3) >

백두산 천지.

대격변 이후 일반인이 접근이 금지된 화산.

하지만, 백두산은 유라시아 각국의 각성자들이 수시로 사냥을 해서 괴물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곳이었다.

속칭 안전한 사냥터라고 불리는 백두산. 화산 정상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변형된 짐승들과 애벌레처럼 보이는 괴물들. 백두산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괴물들이었다.

괴물들은 원래 백두산에 있던 괴물들과 함께 북으로 남으로 내달렸다.

"웨이브다!"

백두산을 감시하던 북한과 만주 독립국의 감시원들은 쏟아져 내려오는 괴물들을 보고 본국에 급하게 연락했다.

*

같은 시각.

미국 국립 정찰국(NRO).

복잡한 위성 관제실 뒤쪽에서 한 장군이 참모에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백두산 천지를 찍으라니 무슨 소리야?"

"백악관에서 직접 날아온 지시입니다."

"지금, 위성 궤도 움직이려면 연료가 얼마가 날아가는지 몰라? 수명 몇 년이 날아간단 말이야!"

"별수 없습니다. 최상위 명령입니다."

"CIA가 박살이 나는 바람에 명령체계가 엉망이 되어 버렸어. 위성 보수도 못 해서 숫자도 줄고 있는데, 이런 명령이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그는 기다리는 관제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의 지시를 확인한 관제사들이 정찰 위성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위성 궤도가 바뀌는 장면을 지켜보는 장군에게 참모가 작은 목소리로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CIA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쪽 애들 말로는 이번 명령이 EV에서 나온 요청이랍니다."

참모의 말에 장군이 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완전히 항복한 꼴이잖아. 미국 대통령이 각성자 조직 따위에 설설 기다니."

하지만, 참모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사람한테 정예 2개 사단이 박살 났습니다. 거기다 군주급으로 불리는 괴물들도 잡은 사람 아닙니까."

처음 2개 사단이 무너졌을 때는 정보의 혼선이 있었지만, 지금에서는 한사람에게 무너졌다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그것도, 모스크바에서 괴수를 잡은 각성자와 동일인이었다.

미국인에게는 주적이 될지도 모르는 각성자였지만, 세뇌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각성자였다.

"이번 요청도 그 사람한테서 나온 건가?"

"본인이 EV 주인이라고 발표했잖습니까. 당연하겠죠."

장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각성자가 나온 뒤로, 히어로가 등장할 것 같긴 했지만, 미국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한국이라니…."

그가 안타까워하는 동안에 관제사들의 보고가 들어왔다.

"러시아 정찰 위성이 궤도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저놈은 또 저래! 빨리 확인해봐!"

괴물들이 등장한 이후 러시아는 미국의 주된 적에서 밀려났지만, 그래도 첩보 위성들은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 양국의 핵미사일들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궤도 확인했습니다. 러시아 정찰 위성도 백두산 위를 지나가는 궤도로 수정 중입니다."

"러시아도 확인하려는 건가? 그럼 왜 우리한테 시킨 거야."

"그만큼 중요한 걸까요?"

참모의 말에 장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위성의 궤도 수정이 끝났다.

"키홀 KH-13-1 위성 궤도 조정이 끝났습니다. 1분 뒤에 백두산 상공을 지나갑니다."

"최대한 찍어! 궤도를 옮기느라 1억 달러는 날아갔어!"

관제사들에게 소리친 그는 관제실 중앙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가 있기에 이 난리를 치는지 꼭 봐줄 생각이었다.

"군주급 괴물이라도 나왔나?"

"백두산에 군주급 괴물이 등장했다면 유라시아 연합에게는 꽤나 위험한 일이니까요."

백두산이라면 러시아, 만주 독립국, 북한 세 나라의 중앙에 있는 산이었다.

"뭐, 괴물이 화산이라도 터트리면 큰일이긴 하겠지."

2년 전 일본에서 벌어진 재해를 생각하면 EV의 호들갑이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모두 관심 있게 화면을 지켜보는 사이, 촬영시간이 되었다.

"촬영 시작합니다."

화면에 정찰 위성이 찍은 백두산 정상의 모습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홀리 쉣!"

"세상에...."

그리고, 비명 같은 신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백두산 천지는 예상했던 잠든 화산 분화구의 모습이 아니었다.

화산 정상에 있는 푸른 호수. 천지 위에는 거대한 문양이 펼쳐져 있었다.

원형으로 그려진 거대한 마나진.

그 중앙에는 커다란 검은 괴수가 물 위에 서서 아래로 팔을 뻗고 있었다.

이것도 무척이나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그것으로 모두 신음을 흘릴 리가 없었다.

"맙소사. 저렇게 큰 괴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전부 군주급은 아니겠지?"

천지 사방에는 거대한 다섯 괴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로봇처럼 보이는 괴수에서 거대한 원숭이와 나비, 그리고 오래된 나무처럼 보이는 괴물과 상체에 커다란 눈을 단 괴물까지.

괴수들 옆에 크고 작은 수많은 괴물이 꾸물거리고 있었지만, 저 거대한 괴수들 때문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저 중앙에 있는 괴수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모의 말에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저건 방어 진영이었다.

장군이 크게 소리쳤다.

"카메라 전부 돌려! 적외선 카메라도, 전파 레이다도!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한다!"

군주급 괴수가 다섯 마리 이상이라니, 이건 더는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었다.

관제사들이 정신없이 위성을 조작하는 동안, 화면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거대한 눈을 단 괴물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괴물의 눈이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설마, 위성을 보는 것은 아니겠지?"

장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괴물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마치 섬광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번쩍!

다음 순간, 화면에 하얀빛이 가득 찼다.

그리고, 바로 화면이 검게 변하며, 'No Signal'이라는 문구만 화면에 덩그렇게 남았다.

"위성과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카메라만이 아닙니다. 모든 연락이 안 됩니다!"

키홀 위성 관제사가 헤드셋을 벗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모두 놀라 그를 바라보는 사이, 다른 관제사가 질겁한 표정으로 레이다에서 눈을 뗐다.

"키홀 13-1 번 위성, 레이다에서 사라졌습니다!"

"다시 확인해봐!"

장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이어진 보고는 더 안 좋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러시아 위성도 레이다에서 사라졌습니다! 아, 북한 궤도에 진입하는 위성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장군은 관제사들의 보고에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파괴된 건가?"

여태 위성을 파괴하는 괴물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우주만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장군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동아시아 위를 지나가는 위성을 확인해서 궤도를 바꿀 수 있으면 바꿔! 연료가 얼마나 소모되든 상관없다! 나사와 우주 군에도 바로 연락해!"

관제사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이, 그는 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는 백악관에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각하. NRO입니다. 방금 정찰 위성 하나를 잃었습니다. 네, 백두산...."

NRO의 보고는 백악관을 거쳐 위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나라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제 위성을 운용할 수 있는 나라는 얼마 남지 않았고, 바로 궤도를 바꿀 수 있는 나라는 더욱 적었다.

NRO 통제실의 레이더에서 위성들이 계속 사라져갔다.

*

동아시아의 하늘에서 갑작스러운 우주쇼가 펼쳐졌다.

푸른 하늘에 하얀 선들이 쭉쭉 생겨나고 있었다.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유성우가 지나갈 때가 아니었지만, 유성우가 지날 때보다 더 많은 별이 떨어져 대기에 불타고 있었다.

신비로운 광경에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소원을 빌었지만, 경훈은 저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슨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번쩍.

백두산 꼭대기에서 다시 하얀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별이 떨어졌다.

-U-2 정찰기, 글로벌 호크도 모두 격추되었습니다. 우주는 물론 공중에서 접근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더구나 드론들은 저 빛에 당하기도 전에 괴물들에 의해 박살 나고 있었다.

백두산 아래에 도착한 경훈도 드론이 터져나가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러시아와 미국의 위성에서 건진 영상 덕분에 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나 위성의 마나 분포 영상과 위성들이 남긴 영상과 사진으로 이브와 경훈은 적의 규모와 하는 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인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대군주는 백두산 천지에 소환 진을 만들어 마나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저쪽 세상 백두산에 있는 괴수를 불러들일 모양입니다.

"다른 군주급 괴물들은 소환이 끝날 때까지 대군주를 지키는 역할일 테고."

-네, 군주급 다섯, 그리고, 상급 몬스터들 다수입니다. 솔직히 주인님이 없다면 동아시아 전체를 쓸어버릴 전력입니다.

괴물들은 그동안의 실패를 경험으로 확실히 준비했다.

경훈은 영상에서 본 물 위에 그려진 문양을 떠올렸다.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준비하는 것 보면 불러오는 놈이 엄청나다는 거겠지?"

-적어도 차원 이동을 하는 대군주와 동급 이상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마나 위성이 확인할 수 있는 괴물의 등급은 대군주가 마지막이었다.

붉은빛, 대군주 이상이면 괴물이 얼마나 더 강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차원문이 열리는데, 얼마나 걸릴지 알겠어?"

-영상으로 확인한 바로는 90%의 확률로 2일에서 4주로 예상됩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눈썹을 실룩였다.

"아니, 그건 알 수가 없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잖아."

-우주에서 확인한 마나 유입량과 짧은 영상만으로는 정보가 부족합니다. 그동안 열린 소환진과 대조하려면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면 가까이서 수집한 정보가 필요한 거겠지?"

-네...

"어차피, 간을 한번 볼 필요가 있었군."

말과 함께 경훈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평범한 검이었다. 마나석이 박혀 있지 않은 평범한 문양 검.

전 같았으면 경훈이 휘두르기만 해도 부서질 검이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시체를 만들어낸 검이었다.

경훈 주변에 괴물들의 주검이 가득했다.

백두산 정상에서 쏟아져 내려온 괴물들의 일부였다.

남쪽으로 달려가던 괴물들은 공간을 이동한 경훈과 만나 떼 몰살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경훈은 검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피어난 마나가 부드럽게 검에 흘러들었다.

문양이 은은하게 빛났다.

마나가 흘러들어왔지만, 검은 깨지지도, 균열이 가지도 않았다.

등급이 하나 더 오른 경훈은 이제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깨 먹지 않겠어."

물론, 아직도 그의 마나를 모두 감당할 아이템은 레일건 이외에는 없었지만, 아공간에 들은 다른 무기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각국 정부에도, EV 각성자들에게도, 각국의 각성자들에게도 모두 상황을 전했습니다. 지부의 포탈들도 모두 활성화했고, 군대도 각성자들도 모두 각지의 EV 지부로 향하고 있습니다.

마나석이 얼마나 들던, 최대한 병력과 각성자를 이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뒤를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땅도 많았고, 괴물들도 많이 남아있었지만, 이곳 괴물들을 막지 못하면 유라시아 연합도, 인류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모두 모이기 전에,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확인하고, 방어가 얼마나 튼튼한지 확인해보자고."

경훈은 빛이 솟구치는 백두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군주급 한, 둘만 잡아도 좋을 테고, 문양을 헝클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장난처럼 말을 하고 있었지만, 경훈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경훈은 진실로 방금 한 말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모두 모아도 어려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등급이 오른 그는 그만큼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고 있었다.

경훈은 굳은 얼굴로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57화. < 대군주(4) >

박쥐 날개를 단 족제비들이 피막을 활짝 펴고 덮쳐들었다.

부웅.

검이 부드럽게 움직였고, 날카로운 족제비들의 손톱 사이로 각성자가 스쳐 지나갔다.

팍!

피 보라가 나무 아래로 퍼져나가고, 어느새 몸이 잘린 족제비들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경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뭇가지를 밟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숲에는 산 정상에서 내려온 괴물들이 버글거렸다.

토끼 얼굴을 가진 늑대, 새 얼굴을 가진 하이에나 등, 여러 동물이 섞인 것 같은 괴물들이었다.

산 정상에 있는 군주급 괴물들처럼, 이곳의 괴물들도 다가오는 모든 것을 막을 심산인 것 같았다.

하지만, 경훈은 자신에게 덤벼오는 괴물 이외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돌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특성을 사용해서 방해하는 괴물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모두 쓸어버리며 전진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산에 올라갈수록 숲이 점점 줄어들었다.

나무 크기도 점점 작아졌고, 초원과 황무지가 숲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경훈도 결국 나무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캬아아악.

괴물들이 반가워하며 덮쳐들었다.

콰아앙!

그리고, 다음 순간 괴물들이 갈가리 찢긴 채로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땅이 뒤집히고, 경훈 주변이 횅하니 비워졌다.

구덩이 안에서 경훈이 손잡이만 남은 검을 바닥에 버렸다.

등급이 올라 검을 부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이 검을 박살 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박살 낸 검의 위력이 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등급이 올라 마나를 더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 위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검을 버린 경훈이 아공간에서 기관총 2정을 꺼내 양손에 들었다. 셰인이 쓰는 마나 기관총이었다.

투다다다다다.

그는 다가오는 괴물들에게 총을 갈기며 다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

백두산 정상.

다른 군주들과 달리 분화구 밖에 나와 있던 원숭이 군주가 실눈을 뜨고 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데려온 수하들이 계속 죽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하들을 죽인 인간은 계속 산 정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군주의 뛰어난 시력으로 인간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한 각성자였다.

인간이 만든 장난감을 사용하고 있긴 했지만, 저 정도 화력과 움직임이라면 일대일로 겨뤄보고 싶을 정도였다.

[아쉽군.]

화르르르.

원숭이 얼굴을 한 군주가 머리에 두른 화염을 더 키웠다.

싸우고 싶었지만, 지금은 명령을 따라야 했다.

이 정도 격까지 올라왔는데, 아직도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게 군주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촤악!

원숭이 군주는 박쥐 날개를 펼쳤다.

그가 받은 명령은 정당한 대결이 아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적의 접근을 막는 것이었다.

날개가 펄럭였고, 그의 거대한 몸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화구 안에 있던 군주들도 하늘로 날아오른 원숭이 군주를 보았고, 괴물들을 박살 내며 산을 오르던 경훈도 하늘을 나는 화염 원숭이를 보게 되었다.

화염 원숭이의 양손에 거대한 불덩어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선제공격을 당할 수야 없지."

경훈은 양손에 들고 있던 기관총을 던져버리고, 아공간에서 레일건을 꺼냈다.

화염 원숭이가 불덩어리를 던졌다.

화르르.

그와 동시에 경훈도 마나석을 레일건에 장착했다.

경훈의 마나가 마나석에 쏟아져 들어가는 것도, 마나석이 폭주를 일으키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한순간에 준비를 끝낸 경훈이 마나석을 쏘아 올렸다.

원숭이 군주가 날고 있는, 불덩어리가 날아오고 있는 북쪽 하늘을 향해 레일건이 발사되었다.

쾅!

소리보다 일곱 배 빠르게 쏘아진 마나석이 불덩어리를 뚫고 지나갔다.

콰아아앙!

불덩어리가 하늘에서 터져나가고, 불덩어리를 뚫은 마나석은 뒤에 있는 괴물의 날개 방어막을 터트려버렸다.

한쪽 날개가 엉망이 되었고, 원숭이 군주는 지상으로 추락했다.

콰앙!

반대편 손 위에 놓였던 불덩어리가 지상에 추락할 때 터져버렸다.

굉장한 화력이었다.

원숭이 군주가 추락한 주변이 화염으로 뒤덮였다.

-잡았을까요?

"그럴 리가."

경훈의 말마따나 화염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일어났다.

쿵. 쿵.

화염 밖으로 원숭이 군주가 걸어 나왔다.

마치 불붙은 거인이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원숭이 군주는 화염을 머리만이 아닌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박살 난 날개도 화염을 두르고 있어, 상처를 입은 것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상처를 입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크아아앙!

[감히!]

분노의 이미지를 사방으로 퍼트리며 군주는 자신을 공격한 인간을 찾았다.

이곳은 돌무더기와 잡초만 무성한 휴화산 중턱이었다. 놓칠 리가 없었다.

[어디냐!]

하지만, 자신의 앞에도, 인간이 있을 법한 장소에도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인간은 추락한 그를 무시하고는,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화륵.

[날 무시하다니!]

분노한 군주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군주를 뒤덮은 불길이 좀 전보다 더 거칠어졌다.

그리고, 군주 주변에 불덩어리가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군주는 불덩어리들을 멀어져가는 인간을 향해 날리지 못했다.

철컥.

인간이 다시 그를 향해 총을 겨눈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기습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날려버린 불덩어리를 뚫고, 날개도 박살 내버린 총이었다.

[마나석을 총알로 쓰다니.]

무척이나 참신한 마나석 활용법이었지만, 그것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군주는 만들어낸 불덩어리들을 지우고, 자신의 앞에 불로 된 벽을 세웠다.

군주를 가릴만한 거대한 화염벽이 하늘로 치솟았다.

원숭이 군주는 몸 앞에 두 번째 방어막을 만든 것이다.

군주는 화염 벽 뒤에서 폭주한 마나석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폭주한 마나석은 날아오지 않았다.

경훈이 빈 총으로 군주를 속인 것이었다.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가며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쿨 타임이 문제야."

말 그대로 냉각 시간이 문제였다. 쿨 타임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빈총으로 속일 이유도 없었다.

마나석은 충분했지만, 다시 총을 쏘기에는 레일건이 너무 뜨거워져 있었다. 열기가 식기 전에는 다시 사용하기 힘들었다.

경훈은 레일건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대검을 다시 꺼내 들었다.

레일건을 계속 쓰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른 무기를 쓸 수 있었다.

경훈이 빠르게 산을 올랐다.

그도 마음 같아서는 되돌아가 원숭이를 닮은 군주를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백두산 분화구의 확인이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막아서는 괴물이 줄어들었다. 땅은 점점 화강암과 황무지로 변해갔다.

그리고, 분노한 괴물의 이미지가 경훈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미지는 경훈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 있는 분화구가 시끄러워졌다.

콰과과과.

분화구 너머에서 붉은 나무줄기들이 솟구쳐 경훈을 향해 밀려들었다.

푸하하학.

나무줄기들이 자라난 땅은 모두 시커멓게 죽어버렸고, 땅이 죽을수록 나무줄기는 점점 더 길게 자라났다.

촉수처럼 보이는 나무줄기들이 다가오자, 경훈의 방어막 위로 작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파지지직.

땅을 죽인 특성이 방어막도 뚫으려고 하고 있었다.

경훈이 대검을 휘둘러, 나무줄기를 잘라냈다. 다행히 대검에 담긴 마나로도 나무줄기를 잘라낼 수 있었다.

의외로 약한 군주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금방 취소해야 했다.

촤아아악.

잘린 가지 끝에서 다시 여러 개의 가지가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땅이 죽는 범위가 몇 배나 넓어졌다.

-주위에서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잘라내봤자 의미가 없었다.

역시, 군주급 괴물들은 하나같이 쉬운 괴물이 없었다.

전과 달리, 이제는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혼자 잡으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경훈은 사방을 뒤덮는 나무줄기들을 피해가며 백두산 분화구 외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분화구 안의 거대한 호수. 천지 위에 문양이 펼쳐져 있었다.

문양 중앙, 물을 밟고 서 있는 검은 괴물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괴물이었지만, 다른 어떤 괴물보다 강한 괴물이었다.

그리고, 날개를 펴고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한 나비와

쿵. 쿵.

멀리서 육중한 몸을 이끌고 달려오는 쇳덩어리 로봇도 보였다.

그리고, 호수 반대편에서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거대한 눈알 괴물.

짧은 영상으로 보았던 광경과 다르지 않았다.

"쉽지 않겠는데...."

산을 오르는 동안 자신감에 차 있던 경훈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군주들과 대군주가 같이 있는 것을 보니,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후, 우선 계획대로."

경훈은 아공간에서 드론을 있는 데로 꺼내 공중에 던졌다.

부우우웅.

공중에서 프로펠러가 움직이기 시작한 드론들이 빠르게 천지를 향해 나아갔다.

-분석 중입니다.

그 후에 그는 검을 땅에 박아넣고, 아공간에서 레일건을 꺼내 들었다.

아슬아슬했지만, 발사가 가능해 보였다.

그는 마나석을 꺼내 레일건에 장착한 뒤, 레일건을 백두산 천지, 아니 천지 위에 펼쳐진 문양을 겨누었다.

솔직히 대군주에게는 먹힐 것 같지 않아, 대군주가 마나를 불어넣고 있는 차원 문을 부시기로 한 것이다.

경훈이 방아쇠를 당겼다.

쾅!

폭음과 함께 마나석이 쏘아졌다.

붉게 달궈진 마나석이 쏜살같이 호수에 펼쳐진 문양을 향해 날아갔다.

문양이 파괴되면 여파가 없을 리가 없었다.

시간도 벌고, 대군주의 힘이 약화한다면, 덤벼들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쏜살같이 날아가던 마나석은 문양에 닿지 못하고 이상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콰아아앙!

문양에 닿기 전 마나석 앞에 커다란 은빛 구멍이 만들어지고, 마나석은 은빛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 하늘 높은 곳에서 터져나갔다.

"젠장, 차원문을 방어용으로 쓰는 건가?"

방금 사용한 것은 공간이동문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경훈이 이동용으로 겨우 쓰는 능력을 적은 전투용으로도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지상으로 향하던 팔 하나를 날아오는 마나석을 향해 펼쳤던 대군주가 고개를 돌려 경훈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없이 밋밋한 검은 얼굴이었지만, 경훈은 그 얼굴에서 귀찮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나비 군주의 화려한 날개에서 반짝이는 인분이 쏟아져 내려왔다.

로봇도 거의 다가왔고, 멀리서 경훈을 바라보던 눈알 괴물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번쩍.

빛의 선이 경훈이 있던 자리를 뚫고 지나갔다.

쾅!

분화구 한쪽 벽이 뻥 뚫려버렸다.

반사적인 직감으로 겨우 광선을 피할 수 있었지만, 방탄복과 옷 일부가 불타 버렸다.

경훈의 방어막으로도 막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그리고, 대군주의 검은 팔이 경훈을 가리켰다.

"어그로를 너무 끌었나…."

예상보다 적의 방어가 더 단단했다.

경훈도 방어를 뚫기 전에 시체가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다행히, 이브가 늦지 않게 일을 끝냈다.

-자료 수집이 끝났습니다. 지금 같은 속도면 앞으로 6일에서 7일 뒤에 대군주가 이동할만한 차원 문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린 덕분에 드론들이 문양을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퇴각해야 합니다. 위험합니다.

이브의 말대로 물러날 때였다.

하늘에는 어떤 성분인지 모를 인분이 반짝이며 내려앉고 있었고, 거대한 쇠덩이가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자라나 퇴로를 막고 있었고, 저 눈알을 다시 빛을 뿜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공격보다 경훈은 대군주가 내민 팔이 더 위험해 보였다.

"아직 한 가지 일이 더 남아있어."

그는 손을 뒤로 뺀 뒤에 들고 있던 대검을 힘껏 던졌다.

슈아아악!

검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고,

퍽!

멀리서 지켜보던 외눈 군주의 방어막을 뚫고 거대한 눈알에 박혔다.

캬아아악.

다시 빛을 뿌리려던 괴물이 눈에 박힌 검을 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경훈이 있는 곳 주변이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공간과 차원을 잘라버리는 것 같은 선들.

이사벨의 특성인 차원 절단이었다.

선들은 경훈이 있던 자리를 모두 잘라버렸다. 땅이 갈리고,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 뒤에 반짝이는 인분이 내려와 그 자리를 뒤덮고, 나뭇가지들이 경훈이 있던 곳의 생기를 빼앗았지만, 어디에도 경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훈이 있던 자리에는 은빛 연기만 공기 중에 흐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경훈이 마지막 순간 공간이동을 한 것이다.

다른 군주들이 인간을 찾아 주변을 살필 때, 대군주는 은빛 연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경훈이 어떻게 도망갔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엉뚱한 곳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군주의 눈에 박힌 검이 산산이 터져나간 것이다.

경훈이 날린 대검은 그의 마나를 담고 있었다.

폭주 된 마나석을 레일건으로 날린 것처럼, 경훈은 박살 나기 직전의 검을 마나로 묶어 군주의 눈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눈과 함께 상반신이 날아간 괴물이 바닥을 버둥거렸다.

저렇게 박살난 몸으로도 죽지 않은 게 대단해 보였지만, 형체도 남지 않은 눈은 다시 복구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검은 대군주가 고개를 돌려 버둥거리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대군주는 손을 뻗어 버둥거리는 괴물을 가리켰다.

서걱.

공간이 갈라지고, 버둥거리던 군주는 수백개로 잘려나가 바닥에 흩어졌다.

푸악.

땅속에서 애벌레들이 올라와 흩어진 시체를 먹어치웠고, 검은 대군주는 다시 문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문양은 전처럼 계속 마나가 주입되었지만, 그 아래 호수는 전처럼 잔잔하지 않았다.

푸아악. 철썩, 콰르르르.

분노한 대군주의 마음을 들려주는 것인 양 천지가 마구 날뛰었다.

258화. < 백두산 (1) >

World Gold 사 최상층 영상 회의실.

귀금속 관련 중견 기업에 대기업에 있을 법한 영상 회의실이 있는 것도 의아했지만, 여러 모니터 화면에 비추는 사람들은 더 황당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정상들이 화면에 보이고 있었다.

유라시아 연합의 정상들뿐 아니라, 영국과 아직 정부가 유지되는 동유럽 국가. 그리고, 남미와 미국 대통령까지.

현재 실질적인 국제 연합 회의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정상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화면에 나오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이브가 조종하는 드론들이 찍은 백두산 정상의 영상들이었다.

군주들과 천지 위의 문양. 그리고 대군주.

[군주급 4마리 이상. 그리고, 그 아랫급 괴물 다수. 마지막으로 공간이동과 차원 이동이 가능한 대 군주급 괴물 1마리입니다.]

영상이 이어지면서 검 하나가 군주의 눈에 박히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이 뒤에 검이 파괴되면서 위성들과 정찰기를 파괴하던 군주의 눈은 제거되었습니다. 다만, 눈을 잃은 군주가 죽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바로 남은 정찰 위성을 보내겠습니다.

이브의 말에 비코프 러시아 대통령이 바로 지시를 내렸다.

-우리도 위성을 보내겠소.

미국 대통령도 러시아 대통령과 같은 대답을 했다.

[그리고, 대군주가 지금 마나를 주입하고 있는 문양은 일종의 소환진으로 보입니다. 최소 6일 후에 소환진이 열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군주급도 그냥 소환하던데, 저렇게 시간이 걸린다는 건 엄청난 놈을 불러온다는 거겠군.

[네. 그 전에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도와야 하죠?

새로운 일본 수상이 대표로 질문을 했다.

원하는 게 있으니 모두를 모아 회의를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회의에 참여한 나라들은 최대한 도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EV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고, 앞으로도 EV와 유라시아 연합의 도움을 받아야했기 때문이었다.

잘못해서 EV와 유라시아 연합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솔직히 더이상 괴물들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경훈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 세계에서 고등급 각성자들을 소집할 생각입니다. 여러 나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성자들을 모을 테니 방해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각국 정상은 경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EV를 방해할 국가는 없었다.

"그리고, 고등급 각성자들이 필요합니다. 정부 소속의 각성자들을 보내주십시오."

어느 나라건 각성자 상당수는 EV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래부터 정부 소속이었던 각성자도 꽤 있었고, 전쟁이 이어지면서 정부가 각성자들을 군대로 징집하기도 했다.

경훈의 말에 몇몇 나라 정상들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경훈이 난처한 표정을 한 정상들을 쭉 훑어보았다.

"명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신 국가들에게는 EV가 제대로 보답을 하겠습니다."

정상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도 EV의 해킹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각성자들을 숨기는 게 불가능한 이상 경훈의 부탁은 협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작전이 시작되기 전 미사일 공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사일?

"네. 미사일을 막는 괴물의 눈은 파괴했습니다."

-군주급 괴물은 핵도 안 통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미사일을 때려 박아도 소용없을 텐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주급 외에도 상당히 많은 괴물이 주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미사일로 미리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브의 설명에 경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핵은 안됩니다."

괴물들을 막는답시고 방사능 낙진을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

경훈의 집무실에는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집무실을 쳐들어온 진샤웨이와 그녀를 따라온 오마르. 그리고, GoldWorld사의 대표인 류이링이었다.

"회사 지하에 울릉도와 EV 섬으로 연결되는 포탈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과 대피하십시오."

방안에 들어선 뒤, 꺼낸 경훈의 말에 진샤웨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요?"

진샤웨이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솔직히 백두산은 한국과 너무 가까웠다.

여파가 미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문제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잠시 경훈을 바라보던 진샤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뒤는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오히려 경훈을 안심시키고는, 책상 위에 서류 가방을 올려놓았다.

"전, 이걸 주려고 왔어요."

딸깍.

플라스틱 가방을 여니, 안에는 여러 색깔의 액체가 담긴 병들이 들어있었다.

"수제 포션이에요. 제 최고의 작품들이죠. 재현할 수 없어서 전시용으로 놔두었던 거에요."

솔직히 실패한 실험으로 나온 것들에 가까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좋게 포장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병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이건 체력 회복, 육체 강화, 마나 회복, 정력 증가...."

설명 중에 뭔가 지금 상황과 걸맞지 않은 것이 끼어 있었지만, 경훈이 보기에도 유리병에 들어있는 액체의 색은 전에 보던 포션들과 확연히 달랐다.

경훈이 기쁜 얼굴로 설명을 들었다.

좋은 포션은 목숨줄을 하나 더 달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브는 다른 것을 걱정했다.

[부작용은 없나요?]

이브의 말에 진샤웨이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테스트 때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털 색이 변하는 부작용은 있긴 했지만…."

탈모 치료제와 회춘용 포션을 만들다가 나온 물건이라 원래 제품과 비슷한 부작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경훈씨라면 문제없을 거예요."

다짐하듯 꺼내는 말에 경훈이 웃고 말았다.

어쨌거나 큰 도움이 되는 포션이었다. 경훈은 가방을 닫고, 가방 위에 손을 얹었다.

반지가 빛을 뿌리자, 가방이 손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저도 하나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는 오마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다들 왜 왔나 했더니...."

걱정은 경훈보다 다른 이들이 더 많이 하고 있었다.

경훈은 천에 감긴 길쭉한 물건을 받아 들었다.

경훈은 천을 풀었다.

천을 풀자, 은은한 광채를 내는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정검과 닮은 검이었다.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창작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나마 자료가 있는 사인검과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삼정검이 아니었다. 칼날에 새겨진 문양은 삼정검과 달랐다.

손잡이에 마나석이 박혀 있는 것은 삼정검과 같았지만, 이 검은 검날 한쪽에 별자리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신령한 기운을 불어넣는다는 문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경훈이 손잡이를 쥐고 오마르를 바라보았다.

오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이 조심스럽게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우우웅.

문양이 조금씩 빛을 내고, 검날이 울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빛은 점점 밝아졌다. 검날이 내는 소리도 더욱 커졌다.

이미 삼정검이 버틸 수준의 마나를 넘겼지만, 검은 아직도 버티고 있었다.

경훈은 있는 힘껏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제는 문양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검날 전체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검 전체가 소리를 냈다.

조금 전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맑은소리가 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검명(劍鳴)일까요?

진정한 주인을 만나면 검이 운다고 했던가.

이브의 말처럼 검명은 아니겠지만, 경훈도 검이 쏙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그의 힘을 온전히 버티는 검이 생긴 것이다.

"검 이름은 정했어?"

경훈의 말에 오마르가 고개를 저었다.

"안 정했어요. 직접 지어주세요."

경훈이 검을 바라보았다.

칼날에 별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미리내라고 하자."

-은하수인가요? 이쁜 이름이네요.

"아니, 무서운 이름이 될 거야."

경훈은 검을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었다.

***

공격은 5일 후. 차원문이 열리기 하루 전에 하기로 했다.

다행히 유럽도 그동안 많이 회복되었고, 미국에서 날뛰던 괴물들도 잠잠해져 있었다.

각국에 있는 EV 지사를 통해 전 세계에서 각성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포탈을 타고, 평양, 서울, 선양,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EV 지사에 도착했다.

"시험 작을 만든 건 줄 알았는데, 이미 만들어놓았던 거야?"

"한국 SG전자에서 만든 거 아냐? 그럼 양산 발표였겠지."

그들은 이미 만들어져서 가동되고 있는 포탈을 보고 놀라워했다.

"만들어놓고 그동안 혼자만 쓴 거였어?"

"미리 알려서 모두 같이 쓰게 하면 좋았잖아. 유통이 마비되고 이동할 수 없어서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그리고, 각성자 일부는 EV 혼자 포탈을 사용한 것에 화를 냈다. 하지만 화를 내던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포탈을 가동하는 비용을 듣고 바로 불만을 접었다.

"미친, 전용기 날리는 비용보다 비싸다고?"

평양에 도착한 고등급 각성자들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금액이었다.

포탈로 전 세계의 각성자들이 모여드는 것과 함께 유라시아 연합의 군대도 백두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 파견으로 숫자가 줄었지만, 시간에 맞출 수 있는 기계화 부대 전체가 백두산으로 향했다.

기차가 배 이상의 객차와 화차를 달고 낡은 선로를 달렸고, 헬기와 비행기 하늘을 날고, 전차와 군용차들이 거리를 질주했다.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북으로 향하는 군대를 지켜보았다.

정부들은 이번 일을 비밀로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세계인 모두가 이번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각성자들도 군대와 함께 백두산으로 향했다.

백두산에서 남동쪽으로 30km 떨어진 삼지연 읍이 이들의 목표였다.

군대와 각성자들이 집결하는 삼지연 읍도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집결하는 각국의 부대들을 정리하는 야전 사령부도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각성자들을 관리하는 부서들도 비명을 질렀다.

"말이 되는 소리예요? 며칠 안에 각성자들을 배치하고 물자를 지원하라니. 같은 시각에 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각성자 지휘소에서 한 일반인이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각성자들과 달리 그녀는 평범한 일반인이었지만, 그녀의 고함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집행자들이 항로를 열어줘서 군대 쪽은 편해졌잖아요. 그럼 이쪽도 도움을 좀 줘요. 각성자들 게으른 건 모두 다 알잖아요. 게으름뱅이들 대신 일할 사람들이 필요해요!"

그녀의 말속에는 각성자들을 욕하는 내용까지 섞여 있었지만, 은혜가 보여준 성과에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내가 이번 일 끝나면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말 거야.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면 돈도 못 써보고 죽을지도 몰라."

전화를 끊고 한껏 투덜거리는 은혜를 보고 정규가 손짓했다.

"왜요. 못할 말한 것도 아니잖아요. 같이 끌려왔으면서 뭔 손짓을 하고 있어요."

솔직히 서울에 도착해서 이제 좀 쉬어볼까 하던 정규를 끌고 온 것은 경훈이나 진혁이 아니라 은혜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누가 왔는지 알려주는 편이 좋았다.

정규가 그녀의 등 뒤를 계속 가리켰고, 그녀의 어깨를 누가 두드렸다.

"은혜 언니죠?"

은혜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키가 훌쩍 큰 서양 소녀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요즘 제일 유명한 각성자. EV의 집행자인 이사벨이었다.

그녀 뒤에는 헬멧을 쓴 다른 집행자도 보였고, 마지막으로 경훈의 모습도 보였다.

"경훈 오빠한테 뭐라 한 건가요?"

이사벨의 말에 은혜가 입을 뻐끔거렸다.

이 어린 집행자의 또 다른 유명한 점은 경훈의 엄청난 팬이라는 점이었다.

경훈 욕을 하다가 고생한 경험담이 주변에 가득했다.

"아니. 뭐…."

더듬거리는 은혜 옆으로 경훈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수고했어. 이번 일 끝나면 휴가를 줄게."

"정말이죠?"

은혜 얼굴이 환해졌다.

경훈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바로 군 사령부로 향했다.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시간이 흘러갔다.

작전이 준비되고, 병력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밝아졌다.

259화. < 백두산(2) >

평일이었지만, 서울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아직 출근 시간이었지만, 출근하는 차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몇몇 보이는 차와 사람은 어디로 급하게 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뒤. 서울 시각으로 9시 정각.

위이이이이잉.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만 울리는 사이렌이 아니었다.

사이렌은 한반도 전체와 만주, 시베리아 동부지역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나와 있던 차들은 급하게 길가에 멈춰섰고,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방공호로 향했다.

방공호 안에는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9시 정각.

공격 시간이었다.

*

"시간이 되었습니다."

청와대 지하 상황실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대통령에게 비서실장이 작게 속삭였다.

대통령이 눈을 떴다.

상황실 모니터에 여러 곳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미사일 기지들과 썰렁한 주요 대도시. 그리고 멀리서 촬영 중인 백두산 전경.

"미국에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러시아, 동유럽 각국의 미사일도 발사되었습니다. 영국 근해에서 미사일 발사. 잠수함 ICBM으로 보입니다!"

"그새 재래식 폭탄으로 다 바꾼 걸까요. 아니면 저 비싼 대륙간 탄도탄에 원래부터 재래식 폭탄을 실은 걸까요?"

"글쎄요. 미국은 재래식 폭탄을 실은 ICBM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는 정보가 없습니다."

권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량한 백두산 정상이 나오는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결국, 그동안의 일은 재해가 아니라 침략 전쟁이었다는 거군."

그전에도 평범한 돌연변이로 보기 어려운 괴물들이 등장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세상에서 괴물을 소환하는 놈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더는 자연적인 재해로 볼 수 없었다.

"EV에서는 다른 차원에서 온 거라고 하던데. 정말일까요?"

"모르지요. 아직도 비밀이 많은 곳이니. 괴물들이 온 세상을 가봤을지도 모르고."

"음모론자들 이야기 말입니까?"

전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EV에 대한 유언비어가 음모론자들 사이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뭐, 저렇게 열심히 하는 곳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죠. 더구나 한배를 탔으니. 그저 과거 비밀이 많았던 미국을 보는 것 같을 뿐."

어쨌거나 침략을 받은 것이라면 대응도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화낼 곳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국 미사일 부대도 발사할 시간이 되었다.

"함대와 미사일 부대 발사를 시작합니다."

슈아아아악!

전함의 수직발사관에서 탄도미사일들이 수직으로 날아올랐고, 차량에 실린 미사일들도 차례로 쏘아졌다.

다른 나라의 미사일들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발사한 미사일 들이었다.

"만주 연합국과 북한. 러시아에서도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목표는 백두산. 앞으로 몇 분 뒤면 착탄 됩니다."

수백 개의 미사일 궤적이 한반도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화산이 터지지는 않겠죠?"

대통령의 말에 같이 화면을 지켜보던 육군 참모총장이 고개를 저었다.

"화산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터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저 정도 화력이라면 핵이 아니더라도 남아날 게 없을 것 같습니다만...."

대기권 밖에 나갔다가 떨어지는 포탄들이었다. 단순한 충격량만으로도 산을 허물고 땅을 뒤집을 위력이었다. 그런데 모두 화약을 가득 품고 있었다.

화산이 터지지는 않겠지만, 장군은 저 미사일들만으로 싸움이 끝날 것 같았다.

"솔직히 그렇게 되면 저도 좋을 것 같군요."

하지만, 대통령은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재래식 무기가 통했다면 이렇게 인류가 고생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탄도탄 중에 오차가 심하게 나는 미사일이 있다면 백두산 남쪽에 있는 부대에 피해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EV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패트리어트 미사일도 탄도탄을 막긴 어려울 텐데, 좀 걱정이 되는군요."

참모총장의 걱정과 달랐지만, 대통령도 걱정이 있었다.

'과연 미사일 모두에 핵이 안 실려 있을까?'

저런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자리 잡고 더 무서운 괴물을 부르려고 하는데, 가지고 있는 제일 강한 무기를 쓰지 않고 모두 참아낼 수 있을지.

중국 때의 경험으로 그동안 자국에 핵무기를 쓰는 나라는 없었지만, 지금 괴물들이 있는 곳은 머나먼 지구 반대편이었다.

한국 대통령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모든 신께 기도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그때, 레이다 화면에 새로운 궤적이 나타났다.

"남아메리카 위쪽 바다에서 새로운 미사일들이 발사되었습니다. 발사된 정확한 위치는 파악이 안 됩니다."

"아! 동해 먼바다에서도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다행히 발사 궤적은 모두 백두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곳에서 발사된 미사일들이었다.

"미국이나 러시아 잠수함에서 쏜 걸까요?"

"글쎄. 아니면 EV가 쏜 걸지도...."

한 각료의 물음에 대통령이 중얼거렸다.

상황실에 있던 각료 모두가 표정을 굳혔다.

EV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탄도 미사일까지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백두산 남쪽 삼지연 읍.

읍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옛 공산당 건물 옥상.

[섬에서 발사한 ICBM과 울릉도에서 쏘아 올린 탄도 미사일이 무사히 대기권을 벗어났습니다. 다른 미사일들을 따라 순항 중입니다.]

권 대통령의 추측대로 남미 북쪽 대서양에서 쏘아 올린 미사일과 동해 먼바다에서 발사한 미사일은 모두 EV가 쏘아 올린 미사일이었다.

마나 위성을 자신들이 만든 로켓에 실어 우주로 날려 보낸 EV였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었고, 상당수 만들어놓았다.

물론, 세상이 모르는 핵폭탄도 저쪽 세상에서 상당수 가져오긴 했지만, 이번에 쏜 미사일들은 모두 재래식 폭약, 아니, 마나 폭약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미사일 탄두 앞에는 모두 마나가 흐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괴물 타격용 탄도 미사일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옆을 내려다보았다.

이사벨이 건물 옥상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묘하게 생긴 고글을 쓰고, 저격 총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철컥.

그녀는 저격총을 장전한 뒤에 하늘을 향해 겨누었다.

저쪽 세상에서 얻은 아이템 저격 총. 경훈도 레벨이 높아지기 전에 잘 사용했었지만, 지금은 이사벨이 주인이었다.

-사격 실력만은 이사벨이 더 좋습니다.

경훈이 총을 바라보자, 이브가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쉬워서 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들고 있는 것보다, 이사벨이 들고 있는 것이 원래 주인과 더 닮아 보였다.

"나도 총 있어."

철컥.

경훈이 자신의 총을 장전했다.

이사벨이 가진 저격총보다는 성능이 떨어지는 양산형 아이템 총이었지만, 부족한 것은 높아진 등급과 마나 활용 능력으로 커버하면 그만이었다.

경훈도 이사벨과 똑같이 생긴 고글을 머리에 썼다.

고글에 문자가 떠올랐다.

<AR 연결 완료. 저격 모드 셋팅>

두 사람이 쓴 고글은 평범한 고글이 아니라 화면에 정보를 출력하는 AR 장비였다.

[두 사람이 쓴 AR 화면에 저격할 미사일을 표시하겠습니다.]

경훈도 이사벨 옆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도 없는 푸른 하늘이었지만, 고글 화면에는 수많은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모두 이곳으로 날아오는 미사일들이었다.

[낙하하는 탄도 중에서 이곳 삼지연 읍과 10km 이내에 떨어지는 모든 탄도를 표시하겠습니다.]

"15km로 해."

[...알겠습니다.]

참모 총장의 말처럼 이브와 경훈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대에 피해를 줄지도 모르는 미사일을 모두 미리 떨굴 생각이었다.

다만, 대공 미사일로 막는 게 아니라, 총으로 쏘아 떨굴 작정이었다.

[마나를 쓴다지만, 총알이 무한대로 날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격할 시간이 짧으니 주의해 주세요.]

곧이어, 수백 개의 붉은 점이 더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고글이 출력한 정보가 아니라 실체 모습이었다.

탄도탄들이 대기권에 다시 진입하면서 붉게 달아올랐다.

[대기권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불량이 많습니다! 바로 위험해 보이는 미사일을 지정하겠습니다.]

요즘 탄도 미사일의 정확도는 목표와 수십 미터 급으로 줄어들었지만, 이런 시기에 모든 미사일이 제대로 관리되었을 리가 없었다.

고글에 붉은 사각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두 부대 근처에 떨어지는 미사일들이었다.

이사벨은 고글에 나타난 사각형과 그 옆에 써진 내용을 읽었다. 거리, 속도, 풍향 등. 이브가 파악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이 파악하기는 너무 큰 숫자들이었다.

마하 10이 넘는 속도에,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경훈 아저씨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해서 하고 있지만, 탄도 미사일을 저격하라니. 해본 적도 없고, 생각해보지 못한 저격이었다.

후우욱.

하지만, 그녀는 믿었다. 경훈 아저씨가 말한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그걸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이제 그녀가 해내야 할 일이었다.

이사벨은 마나를 저격총에 밀어넣었다.

손잡이에 박힌 마나석을 통과한 마나가 총알과 함께 총 전체에 맴돌기 시작했다.

'총도 창과 다르지 않아. 창에 마나를 싣는 것도 총알에 마나를 싣는 것도 다른 게 아니야. 그리고 마나는 각성자의 의지와 호응을 해. 강렬하게 희망하면 마나는 그것을 이루어 주지.'

경훈이 알려준 설명은 아직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화면에 나타난 글자들을 무시했다.

그대신 뚫어지라 붉은 점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점과 저격총을 하나로 이었다.

하늘 끝까지 머리 속에 선 하나가 그어졌다.

이사벨은 숨을 멈추었다.

손가락이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탕!

평범한 총소리가 읍내를 울렸다.

그리고, 저격 총구에서 빛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갔다.

빛은 멀리 하늘 위로 치솟았다.

잠시 뒤,

콰아앙!

멀리 하늘 끝에서 작은 폭발이 눈에 들어왔다.

명중이었다.

[과학적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명중입니다! 타겟을 계속 지정하겠습니다!]

이어, 경훈이 총을 발사했다.

쾅!

이사벨과 다른 굉장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이번에도 명중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총을 쏘는 사이, 미사일들이 백두산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첫 탄은 백두산 중턱을 강타했고, 이어진 탄들은 운 좋게 분화구 안으로 떨어졌다.

콰아앙! 쾅! 콰아아앙!

폭발이 분화구를 뒤집어놓았다.

화염과 연기가 백두산 정상을 뒤덮었다.

미사일들이 계속 백두산을 때렸다.

중턱과 산마루, 산허리 아래에도 미사일이 충돌했다.

쾅! 콰아앙! 콰앙!

땅이 울렸다.

30km나 떨어진 삼지연 읍에서도 그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탄이 터지지 않은 미사일도 있었지만, 충격량만으로도 수십 미터의 화구를 만들어냈다.

[위험한 미사일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이사벨 명중률 100%, 주인님은 50%입니다. 꽤 위험했습니다.]

쓸데없는 이브의 설명을 들으며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청 무서운 무기네요. 괴물들이 살아 있을까요?"

백두산이 온통 화염과 연기로 뒤덮인 것을 보고 이사벨이 무척 놀란 것 같았다.

경훈이 백두산 정상을 노려보았다.

쾅!

미사일 하나가 또 분화구 안에서 터져나갔다.

하지만, 미사일이 터진 곳이 너무 높았다.

더구나 화염 사이로 언뜻언뜻 검은 막이 보였다.

괴물들이 일종의 방어막을 만들어 막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경훈의 말을 들은 이사벨은 무척 아쉬워했지만, 경훈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미사일 공격은 괴물들의 힘을 빼기 위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거기다, 아직 추가 공격이 남아 있었다.

EV가 날린 미사일들이 백두산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 탄두에 문양을 새긴 마나 폭탄이었다.

이 미사일들은 저 검은 방어막만으로 막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경훈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마지막 미사일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EV가 날린 미사일들과 마지막으로 합류한 인도에서 쏜 미사일이 꼬리를 물고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쏜 마지막 미사일에는 핵탄두가 실려 있었다.

260화. < 백두산(3) >

화염이 채 사라지지 않은 백두산 봉우리에 다시 미사일들이 내려꽂혔다.

지상에 도착하기 직전, 미사일 탄두에 새겨진 문양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미사일 탄두에 새겨진 문양 위로 송곳 같은 빛이 튀어나왔다.

그 빛이 자리를 잡은 순간, 미사일은 화염을 뚫고 검은 막과 충돌했다.

콰직!

송곳 같은 빛이 깨져나가고, 검은 막이 빛에 구멍이 났다.

미사일 탄두가 검은 막에 반쯤 박혀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탄두에 실린 폭탄. 박쥐 괴물 구아노로 만든 마나 폭탄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폭발이 미리 세팅한 대로 탄두 전면을 향해 쏟아졌다.

아쉽게도 폭발은 검은 막을 깨뜨리지는 못했지만, 뚫린 구멍을 통해 막 내부를 휩쓸었다.

콰아앙! 콰아아앙!

EV 미사일들이 계속 검은 막을 두들겼다.

구멍을 뚫지 못하고 터져나간 미사일들도 있었지만, 많은 미사일이 구멍을 뚫고 검은 막 내부에 화염을 쏟아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쏜 미사일이 검은 막을 강타했다.

번쩍!

세상이 하얀빛에 휩싸였다.

고글을 쓰고 있었지만, 이사벨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핵입니다!]

이브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붉은 화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결국, 쏜 나라가 있었군."

[미사일 경로 확인되었습니다. 인도에서 쏜 미사일입니다.]

어두워진 고글을 쓰고 경훈이 솟구치는 하늘로 치솟는 붉은 화염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나와 있는 사람은 없지?"

[전부 전차와 건물 안에 대피해 있습니다.]

미사일이 잘못 떨어질 것도 예상했는데, 핵 미사일을 안 쓸 거라고 안심했을 리가 없었다.

핵미사일에 대한 준비도 최소나마 해놓고 있었다.

[충격파가 옵니다. 대비해 주십시오.]

이브의 말에 이사벨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마나를 움직여 천근추를 펼쳤다.

건물 옥상과 몸이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아아!

핵폭풍이 밀어닥쳤다.

작은 나무가 뽑혀나가고,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 무너졌고, 장갑차들이 들썩이고, 아직 걷지 못한 천막들이 날아갔다.

경훈과 이사벨에게도 핵폭풍이 밀어닥쳤지만, 두 사람은 한 발짝도 밀려나지 않았다.

밖으로 퍼져 나갔던 폭풍이 다음 순간 다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화염이 버섯구름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방사능은?"

경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환한 대낮이었지만, 하늘은 푸른색의 작은 불꽃이 반짝이고 있었다.

온 하늘에 펼쳐진 빛들이었다.

[현재 삼지연 읍 방사능 수치는 0. 주변 방사능 수치도 급격하게 내려가고 있습니다!]

"정말 다희 언니는 치유의 여신인 것 같아요."

이사벨이 반짝이는 불꽃을 보며 말했다.

파파팍.

하늘에 가득한 불꽃은 다희의 정화 특성에 사라지는 방사능들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방사능을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큰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무척 아쉽겠네요.]

마나석 발전기 덕분에 현재, 원자력 발전소들은 모두 가동을 멈췄다.

[그래도 폐쇄되기 전에 정부가 붕괴해서 방사능이 유출된 발전소도 꽤 있고, 아직, 방사능 폐기물로 고생하는 나라도 많으니까.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되겠어요.]

하지만, 지금 다희의 지위와 인기는 방사능 정화 능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많은 생명을 구한 덕분에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미국에서는 천사의 재림으로, 북한에는 위대한 여신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한껏 겁에 질린 소녀일 뿐이었다.

핵폭풍이 지나간 뒤, 건물 밖으로 나온 그녀는 사자로 변한 베일리에게 애원했다.

"자, 천천히, 천천히 날아야 해. 넌 귀여운 강아지니까 날 안 떨어뜨릴 거지?"

그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베일리에게 애원했지만, 베일리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강아지일 때는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날개 달린 사자가 갸웃거리는 모습은 무서울 뿐이었다.

그녀는 반쯤 우는 표정으로 전 공산당 건물 옥상을 노려보고는 억지로 사자 등에 올라탔다.

크앙!

"꺅!"

다희가 등에 올라타자, 베일리는 크게 포효했고, 다희는 놀라 베일리 등에 엎드렸다.

베일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날개가 펄럭이면서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마나가 공기를 움직여 사자의 몸을 떠받들었고, 베일리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희가 베일리 등에 엎드려 비명을 질렀다.

"천천히! 조심! 으앙! 경훈 오빠 너무해!"

아쉽게도 다희 목소리는 지상에서 들리지 않았다.

경훈은 하늘 높이 날아오른 날개 달린 사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리가 그래도 잘 태우고 나는군."

"베일리는 착한 애예요. 다희 언니하고도 잘 지낼 거에요."

이사벨의 말에 경훈은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다희한테 조금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네, 방사능 낙진을 막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백두산 주변은 유라시아 연합국이 모두 자리 잡고 있어, 전처럼 구름을 움직여 낙진을 다른 방향으로 날려버릴 수 없었다.

결국은 정화하는 방법밖에 없고, 하늘 높이 올라간 낙진을 정화하려면 다희도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백두산에 군주급 괴물들이 있는데 헬기나 비행기를 띄울 수는 없었다.

결국, 베일리가 다희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핵이 터지지 않았으면, 베일리도 다희도 바로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을 텐데, 손해를 보았습니다.]

"글쎄, 손해인지 이득인지 보면 알겠지."

잠시 뒤, 버섯구름이 사라지자, 백두산이 다시 모습을 보였다.

아름다웠던 백두산은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

미사일 샤워로 땅과 바위가 모두 뒤집혀 있었고, 핵폭발로 숲과 초원이 불타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 부근은 더 엉망이었다.

분화구 형태가 전과 달라져 있었다.

분화구 일부가 부서졌는지, 천지의 물이 폭포가 되어 분화구 한쪽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분화구 주변과 백두산 곳곳에 자리 잡았던 괴물들 태반이 이번 공격으로 죽은 듯했다.

[러시아와 미국에서 정찰 위성으로 백두산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이브가 바로 경훈의 고글에 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띄워주었다.

수많은 괴물이 분화구 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무 형태의 군주도 불타는 몸을 천지에 넣어 불을 끄고 있었고, 다른 군주들도 온몸이 검게 타 있었다.

그리고, 경훈이 눈을 터트렸던 군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 보였다.

"역시, 문양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나."

하지만, 아직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검은 몸을 가진 대 군주도 몸 색깔 때문인지 전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대군주 하나는 보이지 않고, 다른 군주들에게도 피해를 주었습니다. 거기다 일반 몬스터들도 대부분 전멸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성과입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말대로였다. 아직 제대로 된 전투도 시작하지 않았다.

"좋아! 작전 시작."

[알겠습니다.]

이브가 경훈의 지시를 군 사령부와 각성자 지휘부에 전달했다.

위이이이이잉!

사이렌이 울리고, 간부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빨리 움직여! 작전 시작이다!"

"전차 시동 걸어! EMP 방호는 충분하다니까. 늦게 출발하는 놈은 영창이야!"

"방사능 수치 0이잖아! 빨리 안 튀어나와!"

"자주포 부대는 준비된 포탄이 사거리 연장탄인지 다시 확인하고 방열 준비해! 우리가 제일 먼저야!"

군 간부들은 목이 아프도록 소리쳤고,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달려갔다.

핵이 터지고, 수많은 미사일 폭격과 핵까지 버티는 괴물들과 싸우러 가는 길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병사들은 모두 수많은 싸움을 거친 백전노장들이었다.

그것은 각성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때보다 굳은 얼굴이 된 각성자들이 자신의 무기를 들고 건물을 나섰다.

처음부터 힘든 싸움이 될 거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핵의 위력을 보게 되자, 모두 몸으로 실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각성자는 없었다.

유라시아 연합의 각성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EV의 각성자들도, 지원을 온 다른 나라의 각성자들도 이번 전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각 각성자 파티는 미리 계획된 기계화 부대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말고,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로봇을 방패삼아 움직이십시오."

"최대한 같은 시간에 정상에 도착해야 합니다. 파괴된 전차를 도울 생각도 말고, 낙오된 동료는 병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각성자들은 다시 한번 냉혹한 지시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각성자들은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은 각성자 협회 사람들이 아니라, 군 간부들이었다.

모두 낮은 직급의 군 간부들. 그들은 전부 전차장이나 조종수인 전차병들이었다.

그들은 달려가는 각성자들에게 각자의 경례를 했고, 각성자들은 그들에게 악수하고,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편재가 마무리되었다.

부르르릉.

각성자들이 전차 위에 올라타자, 바로 전차들이 출발했다.

화물 열차로, 트레일러에 실려 이곳까지 온 각국의 전차와 장갑차들이 백두산 정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방렬(放列)을 마친 포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쾅! 쾅! 쾅!

백 대가 넘는 자주포와 견인포들이 백두산 정상을 향해 포탄을 날렸다.

남아 있는 괴물들에게는 효과가 별로 없을 공격이었지만, 접근하는 공격 부대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시야를 가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지원이 되었다.

"멈추지 마! 탄약은 충분하다! 분화구를 뒤덮어버려!"

장교들의 고함이 포격을 뚫고 병사들의 귀에 들려왔다.

검은 군복을 맞춰 입은 EV 특수 작전팀도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경훈이 뉴욕 지하에서 가져온 방탄복을 입고, 오마르가 만든 최고의 무기를 든 전 세계 각지에서 모은 최고의 각성자들.

작전 팀 앞에 선 경훈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로잘리아와 그녀의 은빛 늑대 코니. 그리고, 방어막 각성자 바실리.

두 팀장과 그들을 따르는 수십 명의 팀원.

헬멧을 쓰고 있는 로봇, 셰인과 이사벨. 두 집행자.

최고의 동료와 팀원들. 그리고, 수많은 각성자들과 국가가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뭔가 한마디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브가 경훈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경훈은 정말로 한마디만 꺼냈을 뿐이었다.

"출발! 괴물들을 사냥하러 가자!"

"넵!"

-주인님은 명연설가는 못될 거에요.

이브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경훈과 각성자들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도 먼저 출발한 군대와 각성자들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

쾅! 쾅! 쾅!

포탄들이 백두산 정상을 두들기는 사이, 기계화 부대와 각성자들은 늦지 않게 백두산 정상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살아남은 괴물들이 방해하고, 험한 길에 전차가 뒤집히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각성자들과 반수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살아남았다.

부대가 정상에 접근하자, 포격이 멈추었다.

그리고, 분화구 너머로 괴수가 모습을 보였다.

두꺼운 나뭇가지들이 넘실거리며 분화구 벽을 넘었고, 거대한 나비가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화염에 휩싸인 원숭이도 모습을 보였다.

괴물들을 보고 경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괴수들은 모두 멀쩡해 보였다.

몇몇 괴물들은 엄청난 회복 속도를 가지고 있었고, 군주급 괴물들은 모두 조금씩 자체 치유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저렇게 모두 한꺼번에 멀쩡해지는 경우는 없었다.

위성을 확인한 이브가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나비 군주가 뿌리는 인분이 괴물들을 치료하는 것 같습니다.]

경훈은 실눈을 뜨고 괴물들을 노려보았다.

나비 날개에서 인분이 뿌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도 인분에 닿은 괴물의 몸에 치료되는 게 눈에 보였다.

"힐러가 있는 건가?"

-먼저 쓰러뜨릴 몬스터가 정해졌군요.

힐러가 있다고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브의 말대로 변수는 먼저 처리해야 할 뿐이었다.

지금, 괴수들 주변에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적들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훈이 귀에 손을 올렸다.

"공격 개시!"

경훈의 명령이 이브를 통해 모두에게 전해졌다.

쾅! 쾅!

전차의 포격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261화. < 백두산(4) >

쿵.

백두산 정상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분화구 아래에서 소리.

쿵.

소리는 부글거리는 용암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의 백두산은 더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휴화산이 아니었다.

천지로 불리는 맑은 호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바닥을 보인 호수 중앙에 작은 용암 호수만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몇 년 전 큰 싸움 끝에 한껏 분화했던 백두산은, 부글거리는 용암만 남기고 다시 잠들었었다.

얼마 전 잠시 용암이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조용하던 분화구였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분화구 분위기가 달라졌다.

며칠 전에 공중에 나타난 흐린 문양. 문양이 생긴 뒤, 용암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마지막으로 백두산에서 퍼져나가는 거대한 마나.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일대의 괴물들 전체가 공포에 질릴 정도로 강렬한 마나가 용암 속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쿵. 쿵. 쿵.

용암 속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부글부글.

용암이 출렁거리며 마구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암 위에 불타는 바위가 떠올랐다.

푸아악.

용암 안에서도 녹지 않은 바위들이 하나둘 용암 위로 모습을 보였다.

쿠구구궁.

바위들이 용암 위에서 하나로 뭉쳐졌다.

바위들은 용암 밖으로 솟구쳤다. 용암 밖으로 솟구치는 뭉친 바위의 모습은 마치 돌로 만든 커다란 손처럼 보였다.

손처럼 보이는 바위 아래에는 팔 모양의 바위가 있었고, 머리와 몸, 다른 쪽 팔과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몸체까지 차례로 용암에서 빠져나왔다.

용암 밖으로 바위로 이루어진 돌 거인의 상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우웅.

그리고,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암을 가르며 걷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뒤, 돌 거인은 용암을 빠져나왔다.

매마른 호수 바닥을 걷던 돌 거인은 곧 분화구 경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멀리 분화구 밖 백두산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숲도, 동물도, 인간들이 몬스터라 부르는 마나 종족도 보이지 않고, 용암이 녹은 돌과 황무지만 남아 있었다.

화산은 돌 거인이 용암 속에 잠들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돌로 이루어진 거인은 손을 들어 올렸다.

치이이익.

돌로 이루어진 손에서 붉은 용암이 뚝뚝 떨어졌다.

거인은 손을 꽉 쥐어보았다.

콰지지직.

돌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돌로 만들어진 손은 금도 가지 않았다.

상처는 모두 회복되었다. 그리고, 이제 진화의 마지막 단계만 남겨놓았다.

돌 거인은 핵에 가득 담긴 마나를 몸 전체에 퍼트렸다.

오랜 시간 화산 용암의 기운을 빼앗아 만든 마나였다. 상처를 회복하고 진화를 이루기 위한 마나.

오랜 시간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묶인 존재들에게 명령만 내려야 했던 시간을 보상하는 마나였다.

이제 진화의 시간.

쩌적.

괴물의 몸이 빛나는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용암도 어쩌지 못한 바위에 마나가 균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온몸에 퍼져나간 빛나는 균열은 마치 하나의 문양, 마나진을 이루는 것 같았다.

쿠우우우웅.

돌 거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는 현실에 간섭해서 거대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사방으로 돌가루가 퍼져나가고, 부글거리는 용암이 멀리까지 날아갔다.

바람이 밀려 나가고, 구름이 흩어졌다.

마나가 끝없이 퍼져나갔다.

괴물의 진화는 대륙 전체의 마나를 뒤흔들었다.

인간이 사라진 뒤 별다른 일이 없었던 대다수 괴물은 갑작스러운 마나의 폭주에 놀랐다.

처음 느끼는 마나였고, 처음 보는 진화였다.

쿵.

바위가 더는 균열을 감당하지 못했다. 부서진 돌들이 쏟아져 내렸다.

머리를 이루던 돌도, 몸을 이루던 돌도, 손과 발을 이루던 돌들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돌들이 떨어져 내렸지만, 괴물의 덩치는 계속 커질 뿐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파편이 떨어진 뒤, 돌 거인이 서 있던 곳에는 전혀 다른 괴물이 서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 두꺼운 비늘. 번들거리는 뱀의 눈. 마치 공룡처럼 보이는 거대한 파충류였다.

하지만, 그 괴물은 공룡이나 파충류와 달리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두 앞발은 인간의 손처럼 길쭉한 발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긴 목과 동양의 용처럼 보이는 머리.

괴물은 공룡이 아니라 마치 서양 전설에 나오는 날개 달린 용(Dragon)처럼 보였다.

용이 날개를 폈다.

[인정. 승인. 환희, 갈망]

온갖 감정이 섞인 강렬한 이미지가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 이미지들은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무릎을 꿇어라.]

대군주를 넘어 새로운 격의 탄생에 대륙의 모든 괴물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용(Dragon)은 긴 목을 돌려 분화구 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막아놓았던 용암이 점점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다시 한번 대분화가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용이 보는 것은 끓어오르는 용암이 아니었다.

용암 위에 펼쳐진 커다란 문양. 마나진이 점점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진화에 맞춰서 준비했던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인간들 때문에 늦어지긴 했지만, 새로 발견한 차원은 그에게 복수와 함께 새로운 힘을 주게 될 것이었다.

이제 하루만 남았을 뿐이었다.

용은 분화구 한쪽에 서서 점점 모양을 갖추는 마나진을 계속 지켜보았다.

***

같은 시각. 다른 차원의 백두산 정상.

포를 쏘던 전차가 화염에 휩싸였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전차가 터져나갔다. 안에 있던 병사들이 탈출할 시간도 없었다.

주변에는 이미 수십 대의 전차가 박살 나 있었다.

"후퇴해! 몸빵도 불가능하잖아!"

진혁이 헤드셋에 대고 고함을 질렀지만, 남은 전차와 장갑차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쿠르르릉.

오히려 앞으로 나가며 포를 갈길 뿐이었다.

쾅! 쾅!

지상의 왕자라는 전차의 철갑탄은 위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군주급 괴물의 방어막을 뚫기는 어려웠다.

"젠장! 말을 듣는 놈이 하나도 없어!"

진혁이 그답지 않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싸우는 이유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지, 동료가 죽는 것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움직여!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해! 괴물들 발목을 잡아!"

대신 각성자들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그들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진혁은 각성자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바닥을 향해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쾅!

쿠에에엑!

땅속에서 튀어나오던 거대한 애벌레가 빛나는 주먹에 맞아 체액을 뿜으며 나뒹굴었다.

쾅! 쾅!

진혁은 양쪽 주먹을 계속 내리쳤다. 다시 땅속으로 도망치게 놔둘 수 없었다.

대여섯 번을 두들긴 끝에 만신창이가 된 애벌레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애벌레 괴물을 끝장낸 진혁이 주변을 둘러보고 표정을 굳혔다.

상황이 안 좋았다.

예상보다 더 강한 군주급 괴물들도 문제였지만, 땅속에 숨어있던 애벌레들이 더 문제였다.

미사일과 포격으로 군주급 아래의 괴물들은 모두 쓸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애벌레 괴물들이 땅속에 살아있었다.

덕분에 군주급 괴물들의 발을 묶어야 할 각성자들이 그처럼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애벌레들과 싸워야 했다.

그렇게 되자, 전차들이 그들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전차들은 화염을 뒤집어쓴 원숭이 괴물과 나무 괴물에게 포탄을 퍼부었다.

하지만, 전차들은 시간 벌이도 안 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전차는 이십여 대. 부대의 70% 이상이 부서졌다.

실제로 두 군주급 괴물을 막아내고 있는 것은 전차부대가 아니라, 검은 방탄복을 입고 있는 EV 각성자들이었다.

특히, 헬멧을 쓴 집행자가 EV 각성자들을 지휘해서 원숭이 괴물을 저지하고 있었고, 금발의 소녀 집행자가 혼자서 마구 뻗어 나가는 나뭇가지를 계속 잘라내고 있었다.

그들도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각성자 몇이 벌써 보이지 않았고, 소녀도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지만, 적들은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원숭이 괴물의 머리를 둘러싼 화염은 처음보다 작아지지 않았고, 나무 괴수가 뿜어내는 가지들도 그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이사벨이 지칠 만했다. 특성을 사용해서 잘라내는 것보다 빨리 나무 괴수는 자신의 몸을 키우고 있었다.

모두 고전을 하는 사이, 한 곳만이 대등한, 아니 그 이상의 전투를 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각성자가 두 군주급 괴수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친한 형. 군대 선배. 처음 만날 때부터 뭔가 달랐던 사람.

생명의 은인인 그는 거대한 로봇과 나비 괴수와 대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저렇게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원래, 저 거대한 로봇까지 다른 각성자들이 붙잡고 있어야 했고, 이미 저 나비는 경훈이 쓰러뜨렸어야 했다.

름을 만들어야 했다.

후우우.

진혁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경훈에게 배운 호흡법으로 마나를 가득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혼자 가실 생각은 아니죠?]

머릿속에 설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은 작게 혀를 찼다.

설현에게 들킨 모양이었다.

그는 이중 통신망으로 설현의 텔레파시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않는다고 약속했었다.

아무래도 설현이 약속을 깬 것 같았다.

[네, 협회장님한테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어요. 사람을 살린다고 불길을 뛰어드는 분이잖아요. 나중에 벌을 받더라도 협회장님은 계속 지켜볼 거예요.]

설현의 목소리에 이어 정규의 한숨 섞인 음성이 머릿속에 들려왔다.

[하아.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이어, 설현의 텔레파시로 연결된 한국 각성자들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저도요.]

모두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안돼. 그러면 남은 각성자가 위험해."

애벌레 괴물들을 상대로 겨우 우위를 점하고 있는 각성자들이었다. 한국의 고등급 각성자들이 다 빠져나가면 남은 각성자들이 위험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여긴 우리가 막겠습니다.

그때, 헤드셋으로 브라질 각성자 협회장인 소냐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만 버티는 건 우리도 가능합니다. 저놈이 움직이면 어차피 끝입니다!

만주 독립국에서 온 각성자 협회장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진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바보밖에 없었다.

텔레파시로 연결된 모두가 허락했다. 이렇게 되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한순간만 묶으면 돼!"

[넵!]

모두의 대답이 진혁의 마음속에 흘러들어왔다.

"좋아. 설현 부탁해!"

[모두 마음 문을 활짝 열어주세요!]

설현의 텔레파시를 들은 각성자들은 모두 잠가놓은 마음속의 빗장문을 활짝 열었다.

온갖 감정이 설현에게 쏟아져 들어갔고, 이어 그 감정들이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바로 그 순간, 진혁은 수많은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자기 생각처럼 알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각성자들도 모두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설현의 텔레파시가 만든 현상이자 기술.

텔레파시를 듣는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 감각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게 하는 일체화 기술이 펼쳐진 것이다.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에 전율하던 진혁이 정신을 차리고 경훈의 싸움터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 흩어져 싸우던 각성자들이 그를 따라 달려나갔다.

-진혁 협회장을 비롯한 각성자 일단이 고속으로 접근 중입니다. 목표는 거대 로봇 몬스터. 틈을 만들 생각 같습니다!

마침, 경훈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비 괴수는 하늘을 날면서 인분 폭탄을 쏟아내고 있었고, 저 거대한 로봇은 몸에 설치한 미사일과 기관포로 그를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분명 위성 촬영 때는 인분을 치료용으로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구아노같은 마나 폭탄처럼 인분을 사용하고 있었다.

로봇이 쏘고 있는 미사일과 기관포도 전부 마나 무기들이었다.

-인간이 만든 로봇이 확실합니다. 미국제로 보입니다.

이브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깨에 그려진 성조기가 로봇이 미국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왜 그런 로봇이 괴물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나 미사일과 마나 포탄이 각성자와 괴물에게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경훈도 이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더구나, 경훈이 타겟으로 잡은 군주는 하늘을 나는 나비 괴수였다.

레일건을 쏠 틈도 나오지 않았고, 나비 괴수를 잡기 위해 하늘로 뛰어오르면 뒤에서 미사일과 기관포를 갈겨대니 도무지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로봇의 발목만 잠시라도 잡아준다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경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집행자도 없고, EV 각성자들보다 훨씬 약한 각성자들이었다.

작은 틈을 만들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경훈은 날아오는 미사일을 피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만들어줄 기회를 헛되이 할 수 없었다.

경훈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한 손에는 레일건과 다른 손에는 오마르가 만들어준 미리내 검.

-도착했습니다.

이브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경훈은 양손에 최강의 아이템을 쥐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앙! 쾅!

뒤쪽에서 날아오던 미사일과 기관포가 이번에는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폭음과 비명이 그의 귀를 때렸다.

슈우우욱!

경훈은 이를 악물고 계속 하늘로 치솟았다.

목표는 나비 괴수.

하늘에는 눈처럼 하얀 인분이 가득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경훈이 레일건을 치켜들었다.

262화. < 로봇(1) >

지상은 지옥 같은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거대한 나비는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홀로 하늘을 거닐고 있었다.

나비는 마치 불로 만든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것 같았다.

나비 아래 하늘은 나비가 떨군 반짝이는 인분 대신, 화염이 가득했다. 인분이 폭발해 만들어진 화염이었다.

그 어떤 것도 뚫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화염이었지만,

빛나는 총알이 화염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콰아아앙!

방어막이 깨져나가며 날개 한쪽이 누더기가 되었다.

삐이이익!

나비 군주는 크게 휘청였지만, 다행히 추락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누더기가 된 한쪽 날개는 바로 인분에 뒤덮혀 회복되기 시작했다.

치유 특성을 가진 군주다웠다.

하지만, 화염을 뚫고 올라온 것은 레일건으로 쏜 마나석 만이 아니었다.

나비 군주가 상처에 신경을 쓰는 사이, 화염 속에서 한 사람이 솟구쳤다.

방탄복이 검게 그을렸지만, 그는 하늘을 가득 메운 화염 속에서도 무사했다.

S급을 넘어선 방어막이 그를 지켜준 것이다.

총알처럼 솟구친 그는 나비 군주의 날개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거대한 나비 괴물과 최강의 각성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비 괴물은 검에 날개가 뜯기고, 다리가 잘려나갔다.

나비 괴물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급가속과 급회전은 물론이고, 몸에 붙은 인분을 그냥 터뜨려 경훈을 떨구려 했다.

하지만, 나비 괴물은 경훈을 떨구지 못했고, 인분을 폭파에 쓰는 바람에 몸을 회복시킬 수도 없었다.

경훈은 나비 괴물의 몸에 검을 박아넣으며 기어가 결국 머리에 도착했다.

그는 나비 괴물의 머리에 새로운 검 미리내를 들이댔다.

검에 경훈의 모든 마나가 가득 밀려 들어갔다.

부르르르.

검이 떨리고, 검날에 새겨진 별들이 가득 빛을 뿌렸다.

'오버차지 가동.'

그리고, 검에서 마나로 이루어진 칼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나 폭풍.

삼정검으로 보여주었던 마나 폭풍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마나 칼날이 폭풍이 되어 나비 괴물의 머리를 강타했다.

콰콰콰콰콰!

방어막이 깨져나가고, 더듬이가 잘려나갔다. 나비의 겹눈이 터져버리고, 털이, 피부가 갈려 나갔다.

나비 군주는 폭발로 돌렸던 인분을 급하게 회복으로 전환해서 갈리기 시작한 머리를 치료하려고 했다.

하지만, 회복시키는 속도보다 갈려나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콰직.

결국, 괴물은 머리를 잃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쿵.

괴물이 추락하는 순간, 싸움터에 정적이 감돌았다.

땅속에서 튀어나와 각성자들을 괴롭히던 애벌레들은 죽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귀찮게 하는 전차와 장갑차를 모두 부숴버리고, 각성자들을 잡기 시작한 화염 원숭이도 공격을 멈추었고,

나뭇가지를 휘둘러 이사벨을 한쪽으로 몰고 있던 나무 괴수도 가지를 더 휘두르지 않았다.

극심한 부상을 입은 채로 쓰러진 진혁과 한국 각성자들에게 마지막 공격을 하려던 로봇 괴수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거대한 문양을 향해 펼쳐진 팔이 방향을 바꾸었다.

문양에 마나를 주입하고, 회복에 전념하던 검은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대군주가 문양에서 손을 뗀 것이다.

아직, 문양은 형태를 유지되고 있었지만, 조금씩 마나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괴수가 팔을 뻗었다. 팔이 향한 방향에는 화염 원숭이와 싸우던 각성자들이 있었다.

"피해요!"

이사벨이 각성자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군주의 마나가 움직였다.

쩌쩌적!

허공에 수많은 선이 그어지고, 공간이 무너졌다.

바닥이 갈라지고, 잘린 공간에 걸쳐있던 수십 명의 각성자가 한순간에 분해되었다.

방어막도, 튼튼한 몸도 소용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재해에 모두 넋이 나가버렸다.

하지만, 군주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염 원숭이가 몸 주변에 화염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나무 괴수가 나뭇가지 위에 빼곡히 가시를 뒤덮었다.

그리고, 검은 괴수가 다시 팔을 움직였다.

"멈춰!"

경훈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는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쇳덩이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몬스터를 막기 위해 미국이 만든 로봇이었지만, 로봇은 괴물의 방어막을 두르고 경훈을 막아서고 있었다.

경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상성이 안 좋았다.

로봇은 튼튼한 골격과 두꺼운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어막이 없는 상태로도 거대한 괴수를 상대하려던 로봇이었다.

거기다 방어막까지 더해졌으니, 방어력 하나만큼은 그 어떤 군주보다 뛰어났다.

피해가려면 피해갈 수도 있지만, 이 로봇 괴물을 혼자 놓아둘 수는 없었다.

검은 괴수와 싸울 때 협공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그를 쫓지 않고 남아 있는 각성자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남은 각성자가 없었다.

전차와 장갑차는 전멸했고, 각성자들은 반 이상 쓰러졌다.

진혁과 한국 각성자들도 로봇 괴수와의 싸움 여파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부상과 모두의 고통을 같이 느끼는 일체화의 여파 때문에 이들은 포션으로도 치유가 쉽지 않았다.

번쩍!

그 사이, 검은 괴수가 다시 공간을 뭉갰다.

"흩어져요! 한자리에 뭉쳐 있으면 안 돼요!"

다행히 미리 소냐가 지시를 내려 걸려드는 각성자는 많지 않았지만, 충격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저 괴수의 공격은 쿨타임도 없었고, 끝도 없어 보였다. 시간이 늦어진 것일 뿐, 전멸은 기정사실이었다.

후퇴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를 때였다.

-여긴 내게 맡겨. 넌 계획대로 저 검은 놈을 잡아!

경훈의 귀에 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경훈은 셰인이 어디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거대 로봇의 허리에 셰인이 매달려 있었다.

쓰고 있던 헬멧은 예전에 박살 났는지 카메라가 그대로 보였고, 그의 팔에서 손과 함께 쏘아진 줄은 로봇의 가슴판 틈에 박혀 있었다.

셰인은 줄에 매달려 로봇의 가슴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하지만, 경훈은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군주급 괴수는 다른 괴물들과 달랐다. 거기다 상대는 생명체가 아니라 로봇이었다.

전처럼 괴물의 몸에 구멍을 뚫어 마나석을 뽑아내는 것은 힘들었다.

-빨리 가!

-셰인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셰인을 믿어주십시오.

셰인이 고함을 질렀고, 이브가 전과 전혀 다른 뉘앙스의 말을 했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경훈은 로봇을 피해 달려가며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무인기들 준비되었지?"

-네.

"셰인을 우선 지원해 줘."

-....알겠습니다.

경훈은 아공간에서 드론을 꺼내 휴대폰을 장착했다.

"지휘 부탁해!"

-제가 없으니, 더 조심하세요.

"걱정 마."

경훈은 로봇 쪽을 힐끔 바라보고, 드론을 하늘로 띄워 보냈다.

이브가 반대했지만, 경훈이 마지막 순간 이브를 따로 떨어뜨려 놓기로 했다.

처음 맞닥뜨리는 강력한 괴물이었고, 경훈처럼 차원 특성이 있는 적이었다.

둘의 싸움에 경훈의 품에 있는 휴대폰이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더구나, 나비 괴수가 사라지면 이브가 할 일이 있었다.

핸드폰이 장착된 드론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군주가 쓰러졌습니다. 헬기와 전투기 부대 전부 출격 바랍니다.

이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이 들려왔다.

-헬기 부대 지금 출격합니다.

-러시아 항공우주군 출격합니다.

-한국 공군 전기 출격합니다.

-북한 공군...

-만주 독립국...

-일본 항공자위대 출격합니다.

헬기 부대가 기다리고 있던 삼지연 읍과, 주변의 군대 사령부 전체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삼지연 읍에서 아파치와 MI-28 하보크, 그리고 중국과 북한의 전투 헬기가 하늘로 떠올라 백두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각국의 비행장에서 전폭기와 폭격기들이 출격했다.

목표는 백두산.

과거 적국이었던 군용기들이 처음으로 힘을 합쳐 하나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드론 부대 비행 시작.

마지막으로 이브가 주변에 기다리고 있던 드론들을 깨웠다.

백두산까지 오면서 준비해놓은 드론들이었다. 그동안 이브가 개발해온 최고의 전투 드론들.

온갖 무기를 장착한 전투 드론들이 정상을 향해 날아올랐다.

*

위이이잉.

폭탄이 터지고, 전투 소리가 요란했지만, 모터가 줄을 감는 소리는 잘 들려왔다.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벽에 빠르게 내려갔다.

배로 보이는 강철 벽을 지나 이제는 가슴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이 로봇 괴수는 그가 매달려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것 같았다.

로봇 괴수는 경훈을 쫓을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향할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화염 원숭이가 날뛰는 곳으로 향했다.

경훈의 걱정대로 로봇 괴수는 각성자들을 먼저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턱.

하지만, 다행히도 셰인이 먼저 로봇의 가슴에 도착했다.

다행히 로봇 괴수의 몸은 꽤나 울퉁불퉁했다. 방어막이 철판을 덮고 있었지만, 붙잡고 버틸만한 곳은 많았다.

지금 그가 매달려 있는 곳도 그런 곳 중의 하니였다. 그는 거대 로봇 가슴에 달린 작은 문에 매달려 있었다.

'비상구인가?'

아니면 작업을 하기 위한 작업 통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철 문은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고, 그 위는 방어막으로 한 겹 더 덮여 있었다.

그는 문틈에 끼어 있는 손을 회수한 뒤, 손가락을 모두 쭉 폈다.

셰인의 손바닥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마나석이 박혀 있었다.

창에 박힌 마나석과 똑같은 마나석. 바로 방어막을 부수는 버펄로 괴물의 마나석이었다.

마나석 주위에는 복잡하게 새겨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창과 달리 방어막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유지하기 위한 문양이었다.

범위를 줄여 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문양이었지만, 군주급 괴수에게 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왠지 될 것 같단 말이야."

셰인은 마나석에서 마나를 뽑아 손에 있는 마나석에 불어넣었다.

셰인의 강철 손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그의 손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셰인은 손을 가슴에 힘껏 찔러넣었다.

갸갸갸갸갹!

불꽃이 튀고, 방어막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웅.

로봇 괴수가 걸음을 멈추었다.

괴수는 무거운 머리를 아래로 숙였고, 머리에 달린 빛나는 렌즈가 가슴에 매달린 셰인을 확인했다.

끼기기긱.

로봇 팔이 가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봇 괴수의 움직임은 마치 몸에 붙은 날파리를 쫓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셰인이 볼 때는 거대한 철벽이 다가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가오는 커다란 강철 손을 보면서도 셰인은 멈추지 않았다.

"뚫려라!"

그는 고함을 지르며 더 힘껏 손을 박아넣었다.

팔 관절이 삐걱거리고, 회전하는 손날이 덜덜 떨렸다.

쩌저저적.

손으로 만들어진 드릴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푸학!

결국, 방어막에 구멍이 뚫렸다.

그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이브와 현대 과학의 힘을 모아, 최고의 합금으로 만든 손 드릴이었다. 그리고, 방어막이 뚫린 로봇 괴수와 다르게 그의 손 드릴은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로봇 괴수의 가슴은 아직도 두꺼운 강철로 뒤덮여 있었지만, 마나로 뒤덮인 손 드릴을 막아낼 수 없었다.

구멍이 뚫리고, 손날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쉽게도 괴수의 마나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로봇 괴수의 손이 가슴을 내려쳤다.

콰아앙!

폭음이 울리고, 철판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에 손을 꾹꾹 누르던 거대 로봇이 가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로봇 괴수는 잠시 손과 가슴을 바라보았다.

손에도 가슴에도 날파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슴 한쪽에 만들어진 작업 통로용 문이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세게 내려친 모양이었다.

셰인은 좁은 통로에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로봇 안에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263화. < 로봇(2) >

우우우웅. 철컹. 쿠웅.

시끄러운 소리와 진동이 로봇 속, 좁은 통로를 울렸다.

작업 통로는 이상한 파이프와 전선들이 얼기설기 섞여 있어서 지나가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들어오긴 했는데, 통신이 끊어져 버렸군."

두꺼운 철판들이 전파를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셰인은 작업 통로에 누운 채로 바닥에 손을 얹었다.

거대 로봇을 움직이는 핵, 마나석을 찾기 위해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수색은 실패로 끝났다

이 로봇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쇳덩이로 이루어진 로봇 내부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하나하나 부셔야 한다는 소리인데…."

자리에서 일어난 셰인이 마나 폭탄을 꺼내 통로 안쪽으로 던져 넣었다.

퉁. 퉁. 퉁.

붉게 달아오른 폭탄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통로 안쪽 깊숙이 사라졌다.

폭탄은 잠시 뒤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붉은빛이 통로를 가득 메웠다. 화염이 통로를 따라 내달리고, 충격이 셰인이 있는 곳까지 밀려왔다.

화아아악.

튀어나온 전선들이 스파크를 일으키고, 배관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공기가 적기 때문일까? 화염은 바로 사그라들었다.

화염이 사라진 뒤, 작업 통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통로 벽도 뚫리지 않았다. 무척이나 강한 강철 벽이었다.

"이 안에 들어와서도 쉽질 않군."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였다.

이번에는 기관총을 벽에 겨누었다.

투다다다다!

마나를 머금은 총알이 벽을 강타했지만, 벽은 움푹움푹 패일 뿐 뚫리지 않았다.

대신 경고음이 들려왔다.

[위이이잉!]

[내부에서 폭발과 사격 발생. 기체 내부에 외부인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침입자 발생!]

묵직한 목소리가 영어로 계속 경고했다.

셰인은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안테나로 수신된 통신 때문에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두 달아나!

-피해! 로봇이 미사일을 쏜다!

-말도 안 돼! 저거 사람이 만든 거 아냐?

-미사일과 포격이라니, 저걸 어떻게 막아!

-후퇴해야 해요! 로봇까지 막을 수 없어요!

조금 전 폭발 때문인지, 막혀 있던 전파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로봇 괴수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부실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셰인 자신도 남은 시간이 없었다.

그는 시야 한쪽에 떠 있는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AI 모듈 사용한계 돌파>

붉은 경고 메시지가 언제나처럼 떠 있었다.

오랫동안 같이 해서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메세지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떠 있었다.

<AI 모듈 종료까지 앞으로 47시간>

얼마 전까지 떠 있던 메시지. <남은 기간 확인 불가>와 전혀 다른 메시지가 떠 있었다.

남은 시간 이틀.

그의 수명이 결정된 것이다.

*

며칠 전에 뜬 메세지였다.

그는 이번 전투에 피해가 갈까 봐, 이브 말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모듈 사용 연한 초과로 47시간 이후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데이터를 백업하시고, 관리자는 AI 모듈 초기화에 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리자 프로세서....>

메시지 아래에는 여러 관리 규약들이 계속 출력되었지만, 셰인은 그 규약들에 관심이 없었다.

AI가 그밖에 없었다면 과학의 발전을 위해 정보를 백업해 놓겠지만, 이곳에는 더 뛰어난 AI인 이브가 있었다.

더구나 데이터를 백업해봤자, 그가 백업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그와 이브는 마나석에 매여있는 변종 AI였다. 마나 AI들은 복제 되지 않는 오롯한 독립 객체였다.

자신이 마구 복제되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막상 때가 되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이번 싸움 뒤에 인사를 나눌 시간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영화에서처럼 끝나고 싶지는 않았었다.

마지막을 알리지도 않고 떠나는 카우보이는 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셰인 때문인가?'

하지만, 결국 이름처럼 끝이 나게 된 것 같았다.

이브에게 인사말은 남겨 놓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방탄복을 벗고, 붕대를 풀었다.

기계로 이루어진 몸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셰인이 손으로 왼쪽 가슴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쉬이익. 철컹.

한쪽 가슴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열린 가슴 속에는 환하게 빛나는 마나석이 보였다.

셰인은 장착된 마나석을 억지로 뽑아냈다.

몸에 연결된 전선 뭉치와 함께 마나석이 밖으로 뽑혀 나왔다.

그는 전선 뭉치 중에서 붉은 전선을 뽑아버렸다.

퍽!

<폭주 승인 시스템이 해지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자체 AI가 폭주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귀찮은 짓을 했어."

혹시 셰인이 자폭을 할지 몰라, 이브가 새로운 몸을 만들어줄 때 넣은 시스템이었다.

이브는 셰인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셰인도 로봇에 관한 한 이브 못지않은 전문가였다.

셰인은 뽑아낸 마나석을 들어 올렸다. 주렁주렁 달린 전선과 함께 마나석이 카메라 앞으로 올라왔다.

<AI로부터 폭주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승인 시스템이 해지되었으므로 외부 승인 없이 폭주가 진행됩니다.>

마나석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셰인은 점점 달아오르는 마나석을 지켜보았다.

마나석 위로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나가 과하게 흐르는 바람에 저장된 데이터가 마구 재생되는 것 같았다.

'인간들이 말하는 주마등 같은 건가?'

그의 삶이 눈앞에 빠르게 펼쳐지고 있었다.

처음 눈을 뜨고, 비디오로 학습하고, 홀로 남아 괴물과 싸우고, 기다리고, 싸우고, 기다리고.

태반의 영상이 연구소에서 홀로 있는 영상이었다.

하지만, 뒤쪽에 흐르는 영상들은 그때와 달랐다.

경훈을 만난 뒤에 영상들.

그와 함께 싸우고, 베일리와 이사벨을 만나고, 수많은 모험과 낚시. 그리고 다른 세상의 여행까지.

마지막 몇 년은 정말 멋진 삶이었다.

셰인은 만약 자신이 인간처럼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한껏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상에 잠기는 사이, 마나석이 더욱더 붉게 달아올랐다.

[경고! 경고! 기체 내부에서 마나석 폭주 반응!]

사방에서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 거대 로봇은 꽤 구닥다리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센서나 인공지능이 발전해 있었다.

하기에 그 정도도 안 되었으면 이런 로봇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괴물의 손에 넘어갔다는 거지. 그런데 어떻게 미국이 만든 로봇이 괴물 쪽에 붙은 거지?'

셰인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쳐 갈 때였다.

츄아아아악!

작업 통로 안쪽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물결이 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점액이 끌리는 소리같기도 했다.

그리고, 다가오던 것은 셰인이 총을 겨누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를 덮으며 다가오고 있는 것은 끈적거리는 점액질의 액체였다.

투명하고 찰랑거리는 맑은 액체.

이 거대 로봇의 전자두뇌를 둥지로 삼아 새로운 군주로 탄생시킨 점액질 괴물이었다.

과거, 잠실에서 경훈이 만났던 푸딩 괴물과 같은 종족.

컴퓨터에 기생하는 몬스터였다.

점액질 괴물은 확실한 적의를 가지고 셰인에게 달려들었다.

타타타탕!

셰인은 반대편 손에 든 기관총을 갈겨 액체 괴물의 접근을 막았다.

방어막이 깨지고, 총알에 맞아 점액질이 튀어 올랐다.

핵은 보이지 않았다. 총으로 액체 괴물을 죽이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폭주 때까지 시간을 벌기는 충분했다.

마나석이 붉게 타올랐다.

셰인이 마나석을 돌아본 순간,

푸아아아악!

셰인 주변의 통로 벽 틈에서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부서진 배관에서도 한꺼번에 점액질이 밀려 나왔다.

셰인의 몸이 점액질 액체에 휘감겼다. 셰인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 빨리!'

점액질에 휘감기면서도 셰인이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마나석이 닿지 않았다.

<폭주 제어 프로토콜 가동됩니다. 인증 시스템 재 활성화합니다.>

그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시스템이 마음대로 가동되었다.

그리고, 점액질이 꿀렁거리더니, 끊어졌던 전선이 액체 속에서 다시 이어졌다.

<제어 성공. 폭주 저지되었습니다.>

붉게 달아오르던 마나석이 조금씩 빛을 잃기 시작했다.

셰인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폭주를 멈춘 거지?'

한번 발동되면 멈출 수 없다고 알고 있었던 폭주였다.

<시스템 관리 체계 변경 완료. 새로운 통제 시스템 승인되었습니다.>

액체 속에서 로봇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셰인은 몸을 움직이는 데 전혀 관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AI 모듈 보안 해제합니다.>

머릿속으로 무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지들이었다. 검은 촉수였다. 점액질 액체였다.

괴물이 그의 정신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셰인은 어떻게 거대 로봇이 괴물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

전뇌가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침식중입니다. 5%, 10%....>

셰인은 감각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시각도 보이지 않고, 청각도 들리지 않았다. 전파도 닿지 않고, 기억도 조금씩 사라졌다.

'안돼!'

셰인은 발버둥을 쳤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적을 앞에 두고 쓰러질 수는 없었다. 추하게 몸과 정신을 빼앗길 수 없었다.

'인간을 죽여'

'격을 올려야 해'

'인간의 마나를 먹어치워'

'인간이 미워'

전과 다른 생각이 점점 머리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지만, 그는 그 생각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는 로봇이었고,

카우보이였다.

조금 총을 늦게 뽑았지만, 아직 손에 들린 총에는 총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명령을 자신에게 내렸다.

<AI 모듈 종료를 앞당깁니다. 남은 시간 20초>

괴물이 자신의 몸과 머리까지 빼앗는다면 자신의 머리에 총을 한 발 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런다고 본체가 다른 곳에 있는 괴물이 죽지는 않겠지만, 그의 몸을 빼앗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피해를 보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 순간,

움찔.

그의 정신을 뒤덮던 괴물의 검은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

그는 이미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셰인은 도망가는 괴물을 붙잡았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는 강하게 염원할 뿐이었다.

셰인은 이미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괴물의 이미지가 비명을 질렀다.

시간이 흘렀다.

*

날뛰던 로봇 괴수가 어느 순간 움직임이 멈추었다.

다른 군주들이 의아해했고, 각성자들은 한숨을 돌렸지만, 싸움의 균형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각성자들의 죽음이 조금 늦어질 뿐이었다.

그것은 이사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거의 마지막에 몰려 있었다.

더는 밀려오는 나뭇가지를 잘라낼 수 없었다.

마나도 다 떨어지고, 체력도 고갈되었다.

나무 괴수는 마치 몰이 사냥을 하듯이 그녀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가지로는 다른 각성자들을 잡아 죽였다.

이사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죽어가는 각성자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죽어가는 그들보다 다른 동료가 더 걱정되는 것이 죄송했다.

그녀는 날아오는 나뭇가지를 피하면서 멈춰있는 로봇을 계속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셰인이 로봇 안에 들어간 것을 알아차렸다.

로봇이 멈추고, 셰인과의 통신도 끊어졌다.

경훈과 셰인, 베일리는 그녀에게 가족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도 안타까웠지만, 가족이 더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치이이익.

멈춰있던 로봇이 다시 움직였다.

덜컹.

연기가 뿜어지고, 거대 로봇 가슴에 있는 작은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리고,

텅.

사람 크기의 로봇 하나가 안에서 튕겨 나왔다.

이사벨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다른 사람은 처음 보는 로봇이겠지만, 그녀는 떨어지는 로봇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쿵!

로봇이 바닥에 떨어졌다.

"셰인!"

나뭇가지가 다시 그녀에게 떨어져 내렸지만, 그녀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쾅!

그녀 위로 커다란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땅이 파이고, 먼지가 치솟았다.

하지만, 이사벨은 그 자리에 없었다.

반투명하게 변한 이사벨이 공간을 뚫고, 셰인 옆에 도착한 것이다.

무리하게 마나를 써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이사벨은 로봇 옆에 앉아 정신없이 로봇을 확인할 뿐이었다.

셰인이 맞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로봇은 셰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는 이상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팔다리는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카메라의 불도 꺼져 있었고, 몸에 흐르던 마나도 느껴지질 않았다.

당연했다.

활짝 열려 있는 가슴이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있어야 할 마나석은 멀찌감치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돼.... 안돼...."

이사벨이 넋 나간 표정으로 로봇을 안아 들었다.

덜렁거리는 기계가 위로 들려졌다.

로봇은 가동이 중단된 것이다.

그녀가 비통에 잠겨 있는 상황에서도 싸움은 계속 되었다.

그녀를 놓친 나무 괴수가 다시 그녀를 향해 나뭇가지를 가득 내지른 것이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게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한꺼번에 쏘아 보냈다.

이사벨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날아오는 가지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피할 수 없었다. 마나가 없었다.

그리고, 피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가족이 죽은 것이다.

멀리서 고함이 들린 것 같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쿠구구구.

거대 로봇도 다시 움직였다.

마무리 할 생각일까?

거대 로봇은 그녀와 가동이 중지된 로봇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사벨은 눈을 감았다.

쿵!

엄청난 소리가 이사벨의 귀를 때렸다.

먼지가 확 몸을 스쳐 지나갔다.

'소리가 들렸어?'

죽었다면 들릴 리가 없었다.

몸도 아프지 않았다.

이사벨이 눈을 떴다.

눈앞에 땅에 박혀 있는 거대한 쇠 주먹이 보였다.

쇠주먹 아래에는 나뭇가지들이 박살이 난 채로 깔려 있었다.

끼이이익!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나무 괴수가 가지들을 다시 회수하려고 했다.

꽈직.

하지만, 가지들은 거대한 쇠주먹에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대 로봇이 가지들을 움켜 쥔 것이었다.

황당한 상황에 나무 괴수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거대 로봇은 계속 움직였다.

덜컹, 덜컹.

어깨에 있는 덮개가 열리고, 팔을 뒤덮은 철판이 제쳐졌다.

몸에 달린 기관포가 전부 나무 괴수를 가리켰다,

이어 로봇에서 시스템 음성이 들려왔다.

<타겟. 나무 군주>

그리고, 묵직한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

[전탄발사(全彈發射)!]

슈아아아악!

열린 덮개 안에서, 모든 미사일이 튀어 나가고, 제쳐진 철판 밑에서 다연장포가 쏟아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기관포가 방어막을 두들기고, 문양이 새겨진 무기들이 방어막을 꿰뚫었다.

쿠아아아아악!

괴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거대 로봇이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이사벨이 멍하니 로봇을 올려다보았다.

"셰인?"

264화. < 차원 대군주(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