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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변종

얼핏 보기엔 좀비는 단순한 존재처럼 보일지 몰랐다

소리가 나는 곳에 모여들고 움직이는 존재는 뭐든지 공격하고 먹으려 한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리에 반응하기는 하지만 바람 소리나 빗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는 무시하고, 발자국 소리나 목소리 같은 사람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움직이는 인간이나 짐승은 물어뜯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이나 자동차 같은 물체에는 이빨도 대지 않는다.

살을 뜯어먹기는 하지만 먹이가 동족으로 변하면 바로 식사를 중지한다.

본능인지, 나름대로 지성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좀비들은 동족과 적, 먹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쿠오오!

어디에선가 들려온 울음소리에 좀비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이상한 존재가 있었다.

눈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몸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떨리고 있었으며, 내딛는 걸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어딘가 고장 난 로봇 같다.

잠시 불청객을 응시하던 좀비들은 그가 동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원래 바라보고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오오오오!

방금 전보다 더 크게 들려오는 소리.

심지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연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좀비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소리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좀비들은 불청객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딱히 어떤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계속 소리를 지르기에 다가간 것뿐이다.

불청객은 걸음을 멈추고 다가오는 좀비를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는 검고 길쭉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탕!

쨍그랑!

귀를 찢는 듯한 폭음과 떨어져 있던 자동차의 창문이 깨졌다.

불청객의 팔이 약간 오른쪽으로 움직였고 다시 한번 불꽃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둔탁한 파육음과 함께 자동차 근처에 있던 좀비가 가슴에서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케에에엑!

쓰러진 좀비는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변에 있는 좀비들도 그에 답하듯 괴성을 질렀다.

동족끼리는 공격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녀석은 자신을 공격했다.

그렇다면 저것은 동족인가?

불청객의 다음 행동은 그들의 의문에 쐐기를 박았다.

탕! 탕! 탕!

연이어 들려오는 폭음.

방금 전처럼 쓰러진 동족은 없었지만 그것이 자신들을 향한 공격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끼에에에엑!

좀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청객을 향해 달려들었고 불청객의 손에 들린 총에서는 연신 폭음이 터져 나왔다.

백발백중의 명사수를 데리고 온다 하더라도 이런 지형에서는 좀비들을 당해 낼 수 없다.

하물며 어설프게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눈 먼 총알에 맞은 몇 마리의 좀비가 쓰러지기는 했지만 남은 좀비들은 무사히 불청객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쿠오! 쿠오오!

불청객은 자신의 몸을 뜯어먹는 동족들을 보며 연신 괴성을 질러 댔다.

그것을 도발의 의미로 받아들인 좀비들은 한층 더 가열차게 불청객을 뜯어먹었다.

만약 좀비가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었더라면 방금 전의 괴성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들은 외침에 분노 같은 단순한 감정밖에 담을 줄 몰랐고 그것이 좀비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말았다.

팅!

불청객은 세 개만 남은 손가락을 움직여 상의 주머니에 있는 동그란 물건을 꺼내 들고는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총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불청객을 뒤덮고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쾅! 콰광! 타다다당!

소란은 이곳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수류탄이 폭발했고 주차장에 있는 차들이 폭발했으며 건물 옥상에서 연신 총성이 터져 나왔다.

그에 호응하듯 도시 곳곳에서 분노에 찬 괴성이 울려 퍼지며 좀비들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비들의 분포가 불균형해진 순간, 근처의 건물에 숨어 있던 유성이 뛰어나와 도심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뭐,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네.'

미지의 존재, 아마도 외신(外神)으로 추측되는 존재가 알려 준 지식은 무극일원공과 비견될 정도로 심오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이라고 봐도 좋았다.

생명체의 뇌에 자극을 가해 신체와 생각, 감정과 의지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기술.

이런 말도 안 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소모하는 마력은 극히 미미했다.

평범한 인간인 최강식의 자연 마력 회복량보다도 낮을 정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강식 때문에, 아니, 덕분에 중간에 미지의 존재와의 링크가 깨져 완전한 정보를 전달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작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신체뿐이고 그마저도 완전하지 않아서 방금 전 좀비들처럼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더 소름 끼치는 건 이것도 그나마 내 수준에 맞춰 열화된 수준이었다는 거야.'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열화되지 않은 완벽한 지식은 굳이 생명체 내부에 가시 덩굴 같은 매개체를 심어서 신호를 보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특수한 파장을 뿜어내기만 해도 그것을 인지한 모든 생명체는 자신도 모르게 파장의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됐을 거야.'

"하아...."

무심코 한숨이 나왔다.

미지의 존재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았다는 안도와 엄청난 기술을 코앞에서 놓쳐 버렸다는 아쉬움이 섞인 한숨이었다.

케에에엑!

탕!

자동차 사이에서 뛰어나온 좀비는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미간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움직이는 목표를 맞히는 건, 그것도 걷는 게 아니라 달리면서 명중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유성은 그것을 해냈다.

수라감각도로 체감 시간을 늦추고 사격술로 최대한 정확하게 조준한 다음, 일반인의 배를 넘는 근력으로 반동을 제어했기 때문이었다.

우연이 아니라 노리고 한 행동.

그 말은 즉, 몇 번이고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탕! 탕! 탕!

기관단총이 불을 뿜을 때마다 달려들던 좀비가 쓰러졌다.

능숙하게 탄창을 교환한 유성은 바로 코앞까지 도달한 좀비의 머리에 총국를 가져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꼭두각시들이 열심히 어그로를 끌고 있기는 하지만 워낙에 도시가 넓다 보니 남은 좀비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가능한 교전을 피했는데도 벌써 두 번째 탄창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였다.

하지만 유성은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더 빠르게 달렸다.

드론보다 많다고는 하지만 총기와 탄약의 숫자에도 한계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다소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두각시들이 버텨 주는 한 가능한 최대한 많은 거리를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첫 번째 지점은 통과해야 해.'

최강식의 아버지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까지 가는 루트에는 총 세 가지 난관이 있었다.

첫 번째는 쇼핑몰과 백화점 같은 상업 시실이 모여 있는 번화가.

두 번째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지역.

마지막은 빌딩들이 모여 있는 오피스 거리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성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이 첫 번째 구역인 번화가였다.

다른 두 곳은 건물 안에 좀비를 피할 곳이 많았지만 번화가는 그럴 만한 장소가 적다.

'아마 이곳에 가장 많은 좀비들이 모여 있겠지.'

유성은 얼마 안 되는 마력을 짜내 섬전보까지 펼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목적지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잠깐, 잠깐, 잠깐! 왜 속도를 안 늦춰?!

'단번에 통과한다.'

-뭐?

거의 어깨가 닿을 정도로 좀비들이 밀집된 거리였다.

이런 곳에 전력을 다해 달려드는 건 최강식이 보기에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케에에엑!

-으아아아아!

좀비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최강식이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유성은 피식 웃으면서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박찼다.

팍!

일반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좀비.

놀랍게도 유성은 그 좀비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최강식의 근력은 31 포인트.

타이런트의 양팔이 내는 근력의 1%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최강식은 지구의 일반인보다 3배는 강한 근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강화 시술 스킬의 효과인 50 포인트를 더하면 총 8배.

'8배의 근력을 가지게 됐다고 8배로 점프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지.'

좀비의 머리를 발판 삼아 다시 한번 위로 몸을 박찬 유성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의 간판 위까지 올라갔다.

닭 쫓는 개 신세가 된 좀비들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 준 유성은 그대로 간판을 발판 삼아 거리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근력이 높으면 상식에서 벗어난 다채로운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유성이 볼 때 지구에 존재하는 무인이나 기사 타입의 계약자.

아니,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능력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지만 적지 않은 수의 신체 계열 능력자들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총탄으로도 뚫지 못하는 몬스터의 가죽을 냉병기로 잘라 내고 특수 합금을 구부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일반인일 때의 상식에 얽매여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여기가 번화가라서 다행이야."

한국의 거리가 떠오를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간판.

미관상 좋지는 않았지만 발판으로서는 더없이 효율적이다.

촤악!

최강식의 점프력으로 닿지 못할 것 같은 거리는 가시 덩굴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건넌다.

이대로만 가면 어렵지 않게 번화가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첫날의 실수를 기억하고 있는 유성은 절대로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유성은 위험을 회피할 수 있었다.

쐐액!

좀비들의 괴성에 섞여 들리는 희미한 파공성.

뭔가가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유성은 반사적으로 속도를 늦췄다.

콰앙!

다음에 밟을 생각이었던 발판이 폭발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날아온 무언가에 맞고 부서졌다.

그어어어어!

돌팔매질을 한 놈을 찾는 건 간단했다.

놈은 다른 좀비들을 압도하는 괴성을 내지르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밝혔다.

몸은 평범하지만 오른팔 하나만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좀비.

과장 좀 보태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팔을 가지고 있는 좀비는 옆에 있는 건물의 벽을 후려쳐 부순 다음, 그 잔해를 들어 올렸다.

"이런 미친?!"

특수한 좀비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물건을 던지는 놈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힘이 강하거나 속도가 빠른 식으로 단순히 스펙이 올라간 좀비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좀비는 매우 골치 아팠다.

좀비의 가장 큰 약점인 접근하지 않으면 공격할 수 없다는 단점을 완전히 극복한 좀비.

콰아아앙!

"큭!"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은 투척이라기보다는 폭격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수라감각도를 발동해 간신히 회피에 성공한 유성은 변종을 향해 기관단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하게 머리를 노린 사격이었지만 그 총알들은 단 하나도 목표에 명중하지 못했다.

'막았다고?'

놀랍게도 변종은 두꺼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총탄을 막는 방어력도 방어력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총을 위험으로 인지하고 급소를 방어했다는 점이었다.

인간일 때의 지식이 남아있는 건지, 아니면 좀비가 되고 나서 총을 본 적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어느 쪽이든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공격하기 전에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해.'

변종을 뒤로하고 다시 몸을 날린 순간, 유성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두 마리?"

조금 떨어진 곳에 첫 번째 놈만큼 크지는 않지만 기형적인 팔을 가진 변종이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며 공을 던지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변종의 모습에, 공중에 몸이 떠 있는 상황이었던 유성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탕!

희미한 총성과 함께 변종의 머리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이거 게임 아님

138화 특별 임무

무사히 다음 간판에 착지한 유성은 원래 가기로 했던 루트와 총성의 근원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대로 계속 가느냐, 아니면 방향을 바꾸느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좀비는 너무 위험하다.'

지구에 있을 때처럼 수십 미터를 뻥뻥 뛰어오르는 정도라면 모를까.

고작해야 건물과 거리 사이를 간신히 뛰어넘는 정도로는 변종의 공격에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정을 내린 유성은 그 즉시 방향을 바꿔 총성의 근원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선택은 옳았다.

건물 안, 골목길, 부서진 자동차 사이사이에서 변종들이 튀어나오며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응 사격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다시 한번 총성이 들려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한 명이 사격하는 게 아니었다.

타다다당!

쉼없이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변종들의 몸에서 핏줄기가 튀었다.

능숙하게 급소를 가리며 다시 사각으로 숨어드는 변종들의 모습에 놈들이 어떻게 총의 대처법을 알았는지, 왜 모습을 감추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있는 좀비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총구 화염이 번쩍이고 있는 대형 쇼핑몰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던 유성은 건물 밀집 구역의 끝에 다다를 무렵 반사적으로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쇼핑몰과 건물 밀집 구역 사이에는 8차선 도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망설이고 있던 찰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뛰어!"

투쾅!

거대한 폭발과 함께 좀비들의 해일에 구멍이 난 것을 확인한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거리를 향해 뛰어내렸다.

한 손으로는 도끼를 휘두르고 한 손으로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전진한다.

폭발로 인해 대열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사방에서 닥쳐오는 좀비의 공격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2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건너면서 몇 번이나 찾아온 위기를 간신히 넘긴 유성은 들고 있던 도끼와 권총을 던져 버리고 건물 외벽에 늘어져 있던 소방 호스를 붙잡았다.

"당겨!"

크아아아아!

좀비들이 분노에 찬 외침을 질렀지만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먹잇감이 아닌 무수히 쏟아지는 구리 탄환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을 잡고 간신히 건물 안으로 들어온 유성은 자신을 반원형으로 포위하고 있는 군인들과 그들의 손에 들린 총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뭐야? 학생 아니야?"

"동양인은 전부 동안이니까 어려 보이는 거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모두 조용히. 그쪽, 혹시 어디 물렸습니까?"

"안 물렸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죠. 옷을 벗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놈들에게 물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변하지 않습니까? 굳이 벗을 필요 없이 그냥 조금만 기다리면...."

철컥!

노리쇠가 후퇴 전진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유성은 곧바로 옷을 벗었다.

기껏 여기까지 와 놓고 순간의 수치심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 목숨을 잃는 것만큼 웃긴 일도 없으리라.

물린 자국이 없는 것을 확인 받고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은 유성의 앞에 날카로운 인상의 금발의 사내가 다가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알렉스 우드라고 합니다.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최강식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 그쪽 소속은 어떻게 됩니까?"

"그야 당연히 주한미군 소속이지요. 이제 당신 소속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특수 부대를 사칭하자니 이 세계의 군대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금방 들킬 것 같았고, 적당한 변명으로 둘러 대자니 무기에 대한 설명이 궁해졌다.

망설이고 있는 유성을 구해 준 것은 뒤에 있던 앳되어 보이는 젊은 군인이었다.

"저, 저희를 구출하러 온 거죠? 본대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본대?"

"총성과 폭발음을 들었습니다.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해 군대가 온 것 아닙니까?"

"아...."

유성은 그제야 이들이 왜 자신을 구해 줬는지, 왜 이렇게 절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꼭두각시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군대가 도착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구출 부대 따위는 없다고 하면 그냥 실망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최소 며칠 이상 좀비의 무리 속에서 지낸 것이 확실한 군인들의 눈동자에는 광기에 가까운 희망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유성은 자신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는 군인들의 시선에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최고 책임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현재 최고 책임자는 접니다."

"잘됐군요.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현재 여기에 몇 명이 있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근처의 상황 등 정보가 필요합니다."

소속이나 목적에 대해서는 하나도 밝히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질문에 알렉스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담당 구역으로 이동해서 경계하도록. 피처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라."

"피처?"

"팔만 비대하게 발달한 놈들을 말하는 겁니다. 딱히 부를 명칭이 없어서 그냥 피처라고 부르고 있죠."

군인들은 알렉스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구출대가 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행동에서 힘과 생기가 느껴졌다.

"알렉스 중사라고 부르면 됩니까?"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미스터 최라고 부르죠. 그래서 미스터 최. 무엇을 알고 싶은 겁니까?"

"일단 저놈들이 등장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전부 듣고 싶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외진 곳이었고 통신까지 끊어진 탓에 현재 상황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음, 저것들이 뭔지는 아시고 계시죠?"

"예. 좀비죠."

말하고 나서야 이 세계에는 아예 좀비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다행히 알렉스는 처음 듣는 단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좀비?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들이 부르는 매드맨보다 짧고 어감도 좋은 게 나쁘지 않군요. 좀비라...."

"흠흠."

"아, 죄송합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저놈들, 그러니까 좀비들은 딱히 어디랄 것도 없이 전국,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습니다. 처음에는 반정부 시위나 폭동인 줄로 알고 경찰이나 비무장 군인을 통제 인력으로 투입했다가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말았죠."

"잠깐, 지금 전 세계라고 했습니까?"

알렉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이 끊기기 전 확인한 다른 나라의 상황은 한국보다 딱히 나을 게 없었다.

부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기에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본토에 있을 가족 걱정에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성은 이마를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잠복기가 긴 바이러스가 시기적절하게 발현한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우연이 맞아떨어질 리 없지. 그럼 바이오테러?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전 세계의 모든 나라, 전국 각지에 동 시간에 테러를 가하고 성공시키는 건 어떤 의미로는 전자보다 더 말이 안 되는데. 그런데 공기 중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면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물리면 좀비로 바뀌는 건 뭐지?'

일단 좀비가 그렇게 빨리 번졌던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소수의 보균자로부터 퍼져 나간 게 아니라 전 세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좀비로 변했으니, 빨리 퍼져 나가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하물며 이 세계는 좀비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으니 그 속도는 더더욱 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간신히 이 사태가 광증, 식인, 공격 본능을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전염병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대처에 들어갔습니다. 저희 부대는 도시에 고립된 민간인들을 구하기 위해 왔다가 여기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군대도 좀비를 당해 내지 못한 겁니까?"

"초기에는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도로가 좀비와 버려진 차로 꽉 차서 탱크나 장갑차를 가져올 수는 없었지만 기관총과 로켓을 아낌없이 갈기고 공중 지원까지 더해지자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었죠. 그렇게 이틀 정도 사람들을 탈출시켰는데 문제가 생겼죠."

옥상으로 올라온 알렉스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심각하게 손상된 건물과 근처에 있는 헬기의 잔해가 보였다.

"피처의 짓입니다. 세상에 오토바이를 던져서 헬기를 격추시키더군요. 급하게 제압하고 추가 지원을 요청했는데, 어디에서 분열이라도 하는 것처럼 피처들이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덕분에 헬기 네 대가 추가로 추락하고 더 이상 지원은 오지 않았죠."

"그때가 언제입니까?"

"사일 전입니다. 위에서는 어떻게든 구조대를 보내 준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 날에 연락이 끊기더군요."

"...."

"...저걸 보셨군요. 이걸로 보시는 게 편할 겁니다."

쌍안경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유성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수만, 수십만, 어쩌면 백만이 넘을지도 모르는 좀비들이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좀비보다는 살점의 해일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저건 대체 뭡니까?"

"하아아, 도시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건물에서 나온 사람들과 인근 지역에서 저희와 한국군이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탈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피처를 비롯한 다른 이상한 놈들이 등장하면서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대부분 좀비가 되어 버렸습니다. 헬기 중 하나가 하필이면 주유소에 떨어져 버려서 생긴 거대한 폭발과 화재 때문에 몰려든 좀비는 덤이죠."

"하, 하하하...."

다소 어려움은 있어도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예측과 달리 두 번째 구역은 무슨 수를 써도 절대로 지나갈 수 없는 마경 그 자체였다.

설령 탱크를 가져오더라도 무한궤도에 좀비들의 살점과 뼈가 끼어 얼마 가지 못해 멈춰 버리고 말 것이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성은 방금 전 알렉스의 말에 자신이 놓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다른 이상한 놈들?"

"예. 일단 저희들이 파악한 건 헤비, 클라이머, 레이더, 새도우 등이 있습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외형과 능력을 짐작할 수 있는 이름이로군요."

물건을 던지는 좀비에게 투수를 뜻하는 피처(pitcher)라는 직관적인 이름을 붙였으니 다른 좀비들도 뻔할 뻔 자였다.

'헤비는 거대하고, 클라이머는 벽을 탈 수 있는 식이겠지.'

이리저리 도심을 훑어보자 변종으로 추측되는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마뱀처럼 납작한 몸과 기형적으로 넓은 손과 발을 가진 변종들이 한 빌딩에 찰싹 달라붙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 빌딩의 위층에는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모여서 물건을 던지거나 기다란 막대기로 미는 식으로 변종들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멀쩡한 총을 막대기처럼 휘두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총알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곳으로는 절대 못 가.'

천수나 엘레멘탈 보우를 꺼내도 마찬가지였다.

좀비들이 전혀 범접할 수 없는 곳에서 안전하게 공격을 가한다 한들 저 만한 숫자의 좀비를 쓰러트리고 길을 만들려면 수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다른 루트를 찾아야 한다.

문제는 이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방금 전의 도주극으로 인해 이 쇼핑몰 인근에 상당한 수의 좀비들이 모여들었다.

이만한 숫자의 좀비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아니,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어.

'뭐?'

-이 쇼핑몰은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어. 지하철을 통한다면 굳이 저곳으로 갈 필요 없이 바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 거야.

지하철.

어두운 환경과 얼마나 되는 좀비가 있을지 몰라 아예 후보에도 올리지 않은 루트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아무렴 지하철이 아무리 위험해 봤자 저기로 가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문제는 안전하다고 해 봤자 결국 상대적인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도심을 가로질러서 통과할 가능성이 0%라면 지하를 통해서 통과할 가능성은 1%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0%와 1%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기는 하지만 목숨을 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다.

'젠장, 나 혼자서는 안 돼. 아공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명이 낼 수 있는 화력에는 한계가....'

"미스터 최?"

"아, 예?"

"이쯤하면 궁금하신 것들은 대충 해결하신 것 같은데 이제 제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구조대는 얼마나 되고 현재 어디까지 왔습니까? 구출 작전은 어떻게 되죠?"

"그게...."

구조대 따위는 없다고 사실을 말해 주려는 순간, 유성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너 아버지 이름 뭐야?'

-참 빨리도 물어본다. 최성훈. 근데 그건 왜 물어봐?

최강식의 타박을 무시한 채 유성은 알렉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구조대는 없습니다. 애초에 저는 구조대도 아니었습니다."

"...예?"

"저는 현재 이 전염병의 백신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닥터 최성훈을 구하기 위한 특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특수 부대원입니다."

알렉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거 게임 아님

139화 희망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알렉스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유성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닥터 최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현 세대 사람들 중 그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 닥터 최현성. 오메가 바이러스를 비롯해 온갖 변종 바이러스를 퇴치한 인류의 구원자. 21세기 최고의 지성. 잘 압니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겁니까?"

"미스터 최. 당신이 보기에는 이 사태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혹은 기생충 같은 것에 의한 팬데믹으로 보입니까?"

이 세계의 사람들은 좀비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상식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클래식하게 걸어 다니거나 좀 더 범위를 넓혀 뛰어다니는 좀비만 나타났더라면 어떻게든 이 사태를 생물학적 재해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넘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도 이 사태가 전염병에 의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위에서 변종 광견병 바이러스니 뭐니 말하길래 그러려니 했죠. 하지만 며칠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놈들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에 어떤 바이러스가 사람을 총탄도 튕겨 내거나 벽을 탈 수 있는 괴물로 만듭니까?"

"...."

"다른 놈들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았는데 살아 있고 기운차게 움직일 수 있다? 이건 절대로 전염병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럼 알렉스 중사님이 생각하는 이 사태의 원인은 뭡니까?"

"글쎄요. 방탕한 인류에 분노한 하느님이 내리는 천벌이라든가, 외계인의 침공이라든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알렉스는 이 사태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의해 일어난 사태라고 결론지었다.

틀린 말이 아니기는 했다.

유성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평범한 바이러스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추측에 동의해 줄 수는 없지.'

지하철에 얼마나 많은 좀비와 변종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료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

하물며 그것이 민간인이 아닌 훈련된 군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속이는 건 좀....

'오히려 잘된 거 아니야? 딱히 내 목표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네 아버지밖에 없어 보이는데,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 뜻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기는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기는 했다.

유성은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이건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 상황이 맞습니다."

"미스터 최. 마음은 이해하지만 현실을 보십시오. 이게 진짜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백신이 있습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몇 개월 전, 닥터 최는 현재 이 사태를 일으킨 원인인 미지의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백신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백신이 있다면 왜 세상이 이 꼴이 된 겁니까?"

"임상 시험 때문입니다. 비밀리에 1차와 2차 시험을 마치고 3차 시험만 남겨 둔 도중 바이러스가 퍼져 버렸죠."

유성은 바지 밑단을 걷어 올리고 양말을 내렸다.

앞서 점검할 때는 떨어진 곳에서 확인한 탓에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자 발목에 희미한 이빨 자국이 있는 것이 보였다.

흠칫 놀란 알렉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유성은 양손을 들어 올리고 말을 이어 갔다.

"열흘 전에 물린 겁니다. 백신 덕분에 좀비가 되지 않을 수 있었죠."

"간판을 밟고 건물을 뛰어오르는 모습을 봤습니다.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되는 대신 초인적인 힘을 얻게 되는 사람들이 있던데 미스터 최도 그런 케이스 아닙니까?"

"제가 좀비가 되지 않은 건 제가 특이 케이스라서가 아니라 백신 덕분이었습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백신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증명?"

"만약에 대비해 가져온 백신 샘플이 있습니다. 좀비가 된 사람에게 사용한다면 백신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오십쇼."

8층으로 이뤄진 쇼핑몰에는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포함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자신을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지나쳐 쇼핑몰 끝에 다다른 유성은 구석진 점포 안에 꽁꽁 묶여 있는 좀비와 마주할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

"경계 임무 중 깜빡 졸다가 클라이머한테 물린 멍청한 놈입니다. 꽤 오래 버티길래 특이 케이스인 줄 알고 놔뒀는데 결국 좀비가 돼 버렸죠. 정말로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은 없다.

상태 회복 물약이 효과를 발휘한 것은 어디까지나 좀비가 되기 전의 일.

좀비로 변하는 도중인 '좀비화'는 상태 이상으로 볼 수 있지만 완전히 변화가 끝난 상태인 '좀비'는 상태 이상으로 간주되지 않아 물약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도 없었다.

[아르콘 수제 제작 최상급 상태 회복 물약(B-)를 꺼내기 위해 300,0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백팩에서 물건을 찾는 척하며 아공간에서 상태 회복 물약을 꺼낸 유성은 좀비의 턱을 붙잡아 강제로 입을 벌렸다.

상쾌한 향과 함께 은색의 액체가 좀비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분간 경과... 어?"

상태 회복 물약은 좀비에게도 효과를 발휘했다.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인간이 좀비가 되는 것처럼, 좀비는 육안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망막은 하얀색으로 변했고 전신에 불거진 푸른 혈관은 심장 박동에 맞춰 서서히 가라앉았다.

'뭐지? 좀비화가 진행되고 있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완전히 좀비가 된 사람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게 훨씬 더 쉽다는 건가?'

열흘이나 사경을 헤맨 유성으로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튼 효과가 빨리 나와서 나쁠 건 없었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그 자리에는 좀비 대신 평온한 표정으로 숨을 쌕쌕거리는 한 명의 군인만이 남아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목격한 알렉스는 떨리는 손으로 군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으으음."

희미한 신음과 함께 눈을 뜬 군인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알렉스와 시선이 마주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 주, 중사님? 제가 자려고 한 게 아니라 너무 피곤해서.... 잠깐, 그런데 저는 분명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아니, 그보다 왜 제가 묶여 있는 겁니까?"

"하, 하하, 하하하...."

몰래 잠을 자다 걸린 것만 같은 반응에 알렉스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탈한 웃음은 이내 층 전체에 들릴 만한 폭소로 변했고 한참을 끅끅대던 알렉스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한 미소와 당당히 펴져 있는 어깨.

방금 전까지의 염세적인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기운찬 모습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 모든 게 바이러스 때문이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닥터 최를 찾으면 세계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도 있겠군요."

"그 부분은 애매합니다. 닥터 최가 무사한지 확실하지 않을 뿐더러 설령 구출한다 하더라도 백신을 양산하고 세계를 정상으로 돌리는 건 매우 힘들 겁니다."

"희망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거 압니까? 저는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총구를 물고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살아서 저런 괴물이 되느니 인간으로 죽는 게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죠."

알렉스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기를 잘했다고 말하며 유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인류를 구원할 영광을 나눠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유성은 도와줄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상태 회복 포션을 두 병 더 소모해야만 했다.

좀비가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알렉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 군인이 면역을 가진 특이 케이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후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좀비를 잡아와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고 나서야 백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됐다.

다만 그 뒤의 일은 유성의 생각처럼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군인들이 가 버리면 저희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가고 싶으면 가! 대신 식량이나 식수는 가져가면 안 돼! 그리고 무기도 놓고 가!"

"...죄송합니다, 중사님. 전 여기서 떠나고 싫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무섭습니다. 지하에 그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민간인은 물론 군인들까지 쇼핑몰에서 떠나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숭고한 목적이라 한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쇼핑몰이라는 요람에서 나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무덤으로 들어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놈들이 도심에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딩이나 아파트에 있는 인간들을 전부 사냥한 놈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이곳도 위험해질 겁니다!"

"도시가 이렇게 넓은데 꼭 이곳으로 온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식량이 바닥날 겁니다. 현재 이 쇼핑몰에 남아 있는 사람의 숫자와 식량을 계산해 본다면 열흘, 무리해도 보름이 한계입니다!"

"그럼 밖으로 나가면 식량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라도 있나? 자네 말을 반대로 하면 여기에 있으면 최소한 보름은 버티면서 구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건데 여길 떠날 이유가 더더욱 없지!"

나가서는 안 된다는 측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나가야 한다는 측의 사람들의 열기는 그들을 압도했다.

한참의 언쟁 끝에 양측은 결국 두 가지 합의점에 도달했다.

명령이 아닌 자의에 의해 결정을 내린 사람만 나갈 것.

무기는 가지고 나갈 수 있되 식량은 가지고 나가면 안 될 것.

결국 최종적으로 유성을 따라가기로 한 사람은 알렉스를 포함해 여섯 명이었다.

"...면목이 없군요. 인류의 명운이 달린 중요한 임무에 자원한 사람이 고작해야 여섯 명이라니."

"아뇨, 괜찮습니다. 혼자 남아서 막막하던 차에 여섯 명이나 되는 동료가 생겼는데 다행으로 생각해야죠."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 봤자 방해만 될 것이다.

'돌아가겠다고 징징거리면서 내분 일으키는 꼴을 보느니 그냥 자원자만 데려가는 게 훨씬 더 낫지.'

숫자는 적었지만 자원자들의 눈에서는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스스로의 목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물이었지만 자신의 목숨이 아닌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해내지 못한 위업을 이뤄 내기도 한다.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 아래 모인 사람들.

이들은 아무리 많은 좀비가 몰려들고 기괴한 변종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울 게 분명했다.

"여기입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는 가구와 침대, 쓰레기 등 수많은 잡동사니로 막혀 있었다.

눈을 반개한 채 통로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유성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그렸다.

무작정 물건을 치웠다가 좀비들이 쇼핑몰 내부로 들어오면 곤란했다.

유성을 비롯한 사람들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무기를 겨눈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감시하에 조심스럽게 물건을 치워 나갔다.

툭.

잡동사니 산의 일각이 무너지며 그 너머의 풍경이 드러났다.

이거 게임 아님

140화 도망

깜빡거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 지하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기다려도 좀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유성이 제일 먼저 구멍으로 몸을 집어넣었고, 그 뒤를 따라 군인들이 차례차례 건너왔다.

마지막 사람이 통로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구멍이 메워졌다.

돌아갈 길은 사라졌다.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뭐, 누구도 돌아갈 생각 따위는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좀비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 군인들은 통로로 나오자마자 곧바로 사방으로 흩어져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그중 유독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앞뒤로는 거대한 등산용 가방을, 양 어깨에는 탄환을 건 채 기관총을 들고 있는 군인.

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전부 탄약과 수류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성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세계 사람들의 신체 능력은 지구의 사람들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저만한 무게의 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이동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짐을 짊어지고 있는 군인은 극히 드문 케이스인 초인적인 힘을 얻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이 군인이 좀비에게 물리고 강해진 게 아니라, 좀비에서 상태 회복 포션을 먹고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좀비 바이러스. 아니, 아직 바이러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좀비 바이러스에 신체 능력을 올려 주는 효과가 있는 건가? 일단 좀비만 보더라도 체력은 엄청나게 늘어나긴 하는데....'

유성은 사람들에게 백신을 증명할 겸 좀비 바이러스를 이용해 정말로 신체 능력을 강화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태 회복 포션을 두 병이나 사용했다.

신체 능력이 올라간 것은 처음의 군인뿐, 다른 두 명은 평범하게 인간으로 돌아왔지만 유성은 실망하지 않았다.

'확률이 높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1% 이하의 확률이라더라도 신체 능력을 상승시킬 수 있다면 지구의 전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릴 수 있어.'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좀비일 때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저도 모르게 쳐다봤습니다."

"아, 흠흠."

군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상관과 동료들로부터 자신이 클라이머에게 물렸다가 백신을 먹고 인간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듣고, 백신이 효과를 발휘하는 모습을 두 번이나 보기는 했지만 자신이 한때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잊고 싶은 기억을 굳이 떠올리게 만든 상대에게 한마디 해 주고 싶은데 하필이면 그 사람이 자신을 인간으로 되돌려 준 사람이라 뭐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가급적이면 쓸데없는 잡담은 자제해 주십시오."

희미하게 들려오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유성은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다른 생각을 할 만큼 안전한 곳에 있는 것도,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다.

'지금은 퀘스트에 집중하자.'

유성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알렉스는 전진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유성은 군인들의 움직임에 맞춰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주변을 훑어봤다.

깨진 유리창과 곳곳에 나뒹구는 물건들, 천장까지 흩뿌려진 피와 코를 찌르는 악취를 풍기는 살점이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물건을 밟지 않도록 신중히 전진하던 유성은 근처에 있는 핏자국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것도 말라 있군.'

대형 쇼핑몰 아래 있는 지하상가, 그것도 지하철과 연결된 곳에 절대로 사람이 적을 리가 없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좀비는 가뭄에 콩 나듯 간간이 보였고 남아 있는 흔적들도 전부 오래된 것들이었다.

"뭔가 이상하군요."

알렉스 역시 이상함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좀비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알렉스는 그냥 의아함을 가지는 정도에서 끝났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 유성은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다른 곳에 모여 있는 건가?'

위로 나가는 길은 전부 막혔으니 아마 전부 지하로 향했을 것이다.

'우리가 가려는 방향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갔으면 다행인데....'

가능한 교전은 회피하고 피해 갈 수 없는 좀비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대검을 이용해 조용하게 처리한다.

한참의 시간을 들여 지하철 승강장에 진입한 알렉스는 좀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휴식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무기밖에 없었기에 유성이 가지고 있던 식량과 식수로 식사를 해결한 일행은 산산이 깨져 있는 스크린 도어를 향해 다가갔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기가 끊기지 않았기에 시야를 확보할 수는 있었지만 지하철 선로는 빛이 비추는 공간보다 그렇지 않은 공간이 훨씬 더 많다.

야간 투시경이라도 있으면 한결 나았겠지만 원래 구출 임무를 위해 파견된 미군은 물론 유성 역시 그런 어둠 속에서의 전투에 상정한 물건들을 준비하지 못했다.

쇼핑몰에서 주워 온 소형 손전등을 총열과 헬멧에 테이프로 고정시켜 간이 야간 장비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어라."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놈들을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방이 막혀 있는 일직선의 터널.

돌아가는 것도, 숨는 것도 불가능하고 소리까지 퍼지는 최악의 지형이다.

"소수고 이쪽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대검으로 처리한다. 하지만 숫자가 많고, 이쪽을 발견했으면 명령이 없어도 바로 방아쇠를 당겨라."

"그래도 됩니까? 소리를 듣고 놈들이 몰려오면...."

"어차피 우리가 총을 쏘지 않아도 놈들이 소리를 지를 거다. 그럴 바에는 먼저 공격해서 리스크를 줄이는 게 낫다."

알렉스가 내린 판단은 유성의 생각과 동일했다.

애초에 좀비에게 들키지 않고 지하철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인다.'

한 명이 낼 수 있는 화력과 일곱 명이 낼 수 있는 화력은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기관총까지 있으니 좀비들의 공격 정도는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 선로로 내려간 유성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앞서 가고 있는 알렉스의 뒤를 따라갔다.

딱딱.

자박자박.

딱딱한 군화 밑창과 선로가 부딪히는 소리와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터널에 울려 퍼졌다.

정숙을 유지하면서 이동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군인들은 한층 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이동하기를 한참.

어디선가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찰팍찰팍.

물장구를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지하에서는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였다.

얼마 가지 않아 소리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긴장감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최고조를 찍었다.

아무 이유 없이 소리가 그칠 리 없다.

소리를 내는 존재는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챘고 어둠 속에 숨어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을 게 뻔했다.

"모두 등을 맞대라.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쏴 버려."

유성은 수라감각도를 발동한 채 알렉스와 등을 맞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뭐지? 설마 도망이라도 간 건가?'

전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전부 라이트를 비춰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좀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어디에서 물이 새고 있던 거 아닙니까?"

누군가가 늘어놓은 추측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 또한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었다.

아니, 풀려 했다.

철퍽.

작은 충격과 함께 차가운 감촉이 볼을 타고 올라왔다.

유성은 볼에 묻은 액체를 닦아 내거나, 고개를 들어 위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멍청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볼에 무언가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바로 앞으로 몸을 날렸고, 채찍이 휘둘러지는 소리와 함께 방금 전 유성이 있었던 자리에 길쭉한 무언가가 내리꽂혔다.

탕!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기형적으로 넓어진 손과 발바닥.

납작한 몸과 길쭉한 혓바닥.

벽을 타는 능력을 가진 있는 변종, 클라이머였다.

'어쩐지 안 보인다 싶더니 천장에 붙어 있었군.'

"...잠깐, 천장?"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유성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빛이 비치는 곳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유성이 확인하려는 것은 다른 곳이었다.

"...."

손전등의 빛이 어둠을 걷어 내자 박쥐처럼 다닥다닥 붙은 채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는 클라이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킥, 키키킥.

이제야 알았냐는 듯한 비웃음 같은 소리.

아니, 미소 비스무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로 미루어 보아 정말로 비웃고 있을 게 확실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응징을 해 주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모두 뛰어!"

유성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은 전력을 다해 앞으로 달려 나갔고 클라이머들이 그 뒤를 따랐다.

타다다당!

벌레처럼 천장과 벽을 타고 기어오는 클라이머들.

그야말로 악몽에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지만 유성을 비롯한 군인들은 당황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며 놀랄 만한 명중률로 클라이머들을 쓰러트려 나갔다.

고작해야 이 정도 광경으로 놀라기에는 유성은 그동안 더 끔찍한 것들을 더 많이 봤고, 군인들은 그동안 수많은 좀비와 변종들을 죽이면서 내성을 길러 왔다.

흥분 상태에 빠져 마구잡이로 총알을 난사하기라도 하면 모르겠지만 이 정도 숫자는 침착함만 유지한다면 아슬아슬하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일행에게는 비장의 무기도 있었다.

투두두두두!

기관총의 막강한 연사력과 위력은 문자 그대로 클라이머를 갈아 버렸다.

압도적인 비주얼에 겁을 먹은 것일까.

끊임없이 달려들던 클라이머들은 썰물 빠지듯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행은 승리를 기뻐하는 대신 재빠르게 가방에서 새로운 탄창을 보급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발자국 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총성이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뻔했다.

우어어어어!

끼에에엑!

거대한 괴성.

수많은 좀비가 내지르는 소리는 터널에 반사되고 메아리쳐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기괴한 울림이 되었다.

아직까지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좀비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지 능히 상상할 수 있었다.

'...왜 소리가 뒤에서만 들리지?'

모두가 사색이 되어 달려가는 가운데 유성만큼은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지상에서처럼 좀비의 어그로를 끌 만한 대형 사건이 일어나서 한곳으로 좀비가 몰려 들었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쪽에 있던 클라이머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유성은 도망치면서도 주변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콰직!

"큭!"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

반사적으로 총을 들어 돌진을 막아 냈지만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충격이 엄습해 왔다.

금이 가 버린 총신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던 유성은 뒤에서 들려오는 알렉스의 목소리를 듣고 적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더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처럼 비쩍 마른 몸을 하고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기괴한 변종,

하지만 우스워 보이는 모습과 달리 순간적인 속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수라감각도까지 발동해서 아슬아슬하게 후속타를 피한 유성은 개머리판으로 레이더의 머리를 후려쳤다.

순식간에 한 놈을 제압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듯이 다수의 레이더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설마 이쪽에는 변종들만 모여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