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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워어어어어어어어-!!!
버니언 산맥 전체를 떨어 울리는 굉음.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는 일행의 모두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할아버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한 니나가 자신의 옆에 선 데론의 옷 소매를 잡는다.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굉음에 저절로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진 탓이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드리겠습니다."
무릎을 굽혀 니나와 눈높이를 맞춘 데론이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네, 할아버지. 믿을게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확인한 니나가 조금은 안심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렇게 니나를 다독인 후 일어서는 데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으니...
"놈이, 바로 근처까지 따라붙은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껏 긴장한 겔베르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왕국 내에 서른 남짓한 금빛 용병패의 소유자인 그조차도 함부로 이름을 언급하지 못할 만큼 두렵고, 불길하며, 무시무시한 존재.
'산중제왕(山中帝王)' 오우거.
지난 며칠간 멀찍이서 울려 퍼지던 놈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후우우..."
스승인 데론의 뒤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제자 아드리안의 한숨에 옅은 떨림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빼어난 실력과 재능을 보유한 그였지만, 오우거란 이름엔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공포가 서려 있다.
"하, 시발... 운 좋게 그놈 안 마주치고 버니언 산맥 지나가나 했더니만."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진 엔리케.
문득 자신의 등 뒤에 매여진 화살통을 힐끗 확인한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한다.
"... 근데, 고블린 놈들한테 뺏은 이 화살로는 아무 도움이 못 될 것 같은데? 이거 뭐 오우거 입장에선 모기한테 물리는 것보다도 못하지 않겠어?"
인간보다 훨씬 작은 체구를 지닌 고블린.
당연히 놈들이 쓰는 활과 화살은 인간들이 쓰는 것보다 작았다.
활과 화살의 크기가 작으니, 그만큼 화살에 실리는 힘도 부족할 수밖에.
엔리케의 말은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었고, 다른 일행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니요,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선두에 서서 일행을 이끌던 데미언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엥? 이 부실한 화살로 오우거 잡는데 도움이 된다고?"
"예. 다른 사람이 그 화살을 날리는 거면 몰라도, 조장은 확실히도움이 돼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쏘면 뭐, 고블린 화살이 날아가는 동안 발리스타로 변해서 오우거 배때지에 박히기라도 하냐? 나 마법사 아니야, 인마."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조장한테는, 원하는 곳으로 화살을 날릴 수 있는 훌륭한 활 솜씨가 있잖아요."
"... 아!"
그제야 데미언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엔리케가 눈을 크게 뜬다.
"오우거가 나타나면, 놈의 눈을 노리고 계속 활을 날려주세요. 못 맞혀도 상관없어요. 오우거가 눈으로 날아오는 화살에 조금이라도 신경이 분산되어서 싸움에 집중력을 잃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하! 알겠어. 이 엔리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한이 있어도 화살 날리는 걸 멈추지 않겠다! 자, 그럼 내가 화살로 짤짤이 치는 동안 너는 대장, 베르켈 경이랑 같이 오우거 잡는 거고?"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오우거 사냥 계획을 읊으며 콧김을 내뿜는 엔리케.
하지만, 데미언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아니요. 엔리케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오우거가 나타나는 즉시 아가씨를 모시고 전투 장소를 피해 주십시오."
"뭐? 아니, 그게 무슨..."
데미언의 말에 기겁한 모두가 입을 열어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
"오우거는 제가 상대합니다, 바로... 지금!"
우지지지직!!! 콰아앙!!!
족히 수령이 2, 30년은 될 듯한, 눈앞의 참나무 대여섯 그루를 한꺼번에 쓰러뜨리며,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오우거가 나타났다.
***
쿵! 쿵! 쿵! 쿵!
그야말로 지축을 뒤흔드는 가공할 충격이 고요했던 숲속을 깨웠다.
체고만 해도 무려 5미터.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재앙(災殃)'이라 불러 마땅할 대형종 몬스터 오우거가 등장했다.
놈이 내딛는 걸음마다 놓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깨어져 내린다.
우직! 우지끈!
다 큰 어른이 양팔을 한껏 뻗으면 겨우 껴안을 수 있을 정도의 둘레를 지닌 두꺼운 나무들이 가녀린 갈대 줄기 마냥 힘없이 부러졌다.
콰앙! 슈우우웅-!
놈의 발끝에 걷어차인 큼지막한 바윗돌들이 포탄처럼 사방으로 쏘아진다.
놈이 날려 보낸 바위 하나하나에 족히 사람의 머리통을 깨뜨리고 몸통을 터트릴 힘이 담겨있었고, 주변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전쟁터가 따로 없네, 이거.
"으아아아아아! 저 미친 괴물 새끼가 진짜!!!"
다른 일행들은 오우거의 등장과 동시에 몸을 피했지만, 나와 함께 싸우기 위해 자리에 남아있던 엔리케.
콰쾅! 쾅! 우지직!
하지만 그는 화살을 쏘기는커녕, 큼지막한 바윗돌 뒤에 숨어 미친 듯이 사방으로 날리는 흙과 돌멩이 세례를 피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미친 파괴력! 오우거 이 새끼, 확실히 클래스가 다르구나!'
엄청나게 힘든 싸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5미터 넘는 키를 지닌 몬스터가 지랄 발광을 하며 숲을 초토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싸움이고 뭐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이건 뭐 게임으로 구현한 것보다 현실이 더하네.'
이대로 두었다가 저 새끼가 니나의 뒤를 쫓아가겠다 싶어서 나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 근육 덩어리 괴물 새끼야! 지랄 그만하고 나한테 덤벼라!!!"
사방이 워낙 시끄러워서 내 목소리가 놈한테 들릴까 싶었는데,
"쿠와악? 크롸아아아아악!!!"
... 들렸나 보네.
흉악한 살기로 번들거리는 특유의 검은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오우거.
자신보다 약한 생명체에게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는 '오우거 피어(Ogre Fear)'의 위력이 시선에도 녹아 있는 것인지, 가슴 한구석이 찌릿찌릿한 느낌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세 번째 히든 피스, '붉은 송곳니의 도끼날 조각'을 얻고 오우거를 단독으로 사냥할 수 있다는 상급 기사의 상징, 레벨 60의 고지를 돌파한 나였다.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오우거 피어 '따위'에 발목을 잡힐 정도로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눈깔 참 마음에 안 드네, 이 괴물 새끼. 만난 김에 서열 정리 좀 해보자, 흐아아아아!"
그렇게 냅다 함성을 내지른 후, 나는 등 뒤의 어딘가에서 엄폐하고 있을 엔리케에게 소리쳤다.
"조장! 상황 봐서 엄호 사격 부탁합니다!"
그리고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나는 검을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크롸악! 크아아아아아아!"
쿵! 쿵! 쿵! 쿵! 쿵!
나의 위치를 확인한 오우거 역시 집채만 한 몸을 흔들며 마주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놈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공기의 흐름 자체가 울렁거리는 듯한 충격파가 퍼졌다.
하긴, 저 괴물 놈의 몸무게가 어지간한 중장비 수준으로 많이 나갈 테니 그럴만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크롸아아악!!!"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놈이 기다렸다는 듯 머리 위로 치켜들었던 곤봉을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말이 곤봉이지, 그냥 어디 목조건물의 기둥이나 대들보를 통째로 뽑아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한 무식한 크기였다.
후와아아아아앙- 콰아아앙!!!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오우거가 휘두른 곤봉이 떨어졌다.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은 둘째치고, 마치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흙먼지와 돌멩이의 양이 엄청났다.
스치기만 해도 피떡이 될 듯한 무지막지한 일격.
하지만,
'안 맞으면 그만이야, 이 새끼야!'
머릿속으로 그렇게 외친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 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목표는 오우거의 왼쪽 발목!
콰지직!!!
오우거의 가죽에 틀어박힌 검에서 무슨 나무판자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치밀어오르는 손목의 통증을 느끼며 나는 생각한다.
'이런 미친! 가죽을 칼로 베는데 이딴 소리가 난다고?!'
소리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검사가 있는 힘껏 휘두른 검에 베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죽만 베였을 뿐 살과 뼈는 멀쩡했다.
가죽의 단단함도 단단함이거니와, 그 두께 자체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오우거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 왜 그렇게 비싼 건지 이해가 되네!'
거의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깊이로 베어냈는데,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미친, 대체 가죽이 얼마나 두꺼운 거냐?
"크롸악! 크아아악! 크롸아아아아아!!!"
나에게 발목을 살짝 긁히고(?) 화가 난 오우거가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두르며 포악을 떨기 시작한다.
쾅! 콰앙! 우지직! 콰아아아앙!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놈의 굼뜬 몸짓으로는 결코 내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으니까.
'아니, 저 새끼가 굼뜬 게 아니라 내가 빠른 거지만...'
상급 기사가 오우거를 혼자 잡아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바로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속도 덕분이었다.
오우거의 공격은 어설프게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 안 맞으면 그만이다.
"흐으으읍!!!"
콰지직! 콰악!
나는 압도적인 속도의 우위를 이용해 오우거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고, 착실하게 놈의 두 다리를 공격해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옛말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다.
물론 오우거는 그 어떤 나무보다도 더한 놈이었기에 열 번은 턱도 없었고, 서른 번, 마흔 번의 칼질이 필요했다.
냉철한 인내심으로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썰어대자, 마침내 두꺼웠던 가죽 밑의 살과 뼈가 드러나며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기 시작한다.
"크와아아아악!!!"
고통을 느낀 오우거가 울부짖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괴로움의 감정이 녹아 있는 울음이었다.
더불어, 쉴 틈 없이 날아들기 시작한 엔리케의 화살이 두꺼운 가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놈의 얼굴 부분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퍽! 퍼퍽! 퍽!!!
"아가리 더 크게 벌려라! 화살 들어간다아아아아!!!"
"크와아아악!!! 컥! 카학!!! 칵!"
개중에 몇 발의 화살은 괴성을 지르느라 열린 오우거의 입안에 보기 좋게 틀어박혔는데, 그 후로 놈의 울음소리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생선 먹다가 입천장에 가시가 틀어박히는 기분 같은 거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
쿠우웅!
수십 번의 칼질로 양 발목이 너덜너덜해진 놈이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크롸악!!! 칵!! 카아아악!!!"
곤봉을 놓치고 뒤로 자빠진 놈이 허우적거리며 괴성을 토해낸다.
하지만 다 의미 없는 발악이다.
땅에 발 딛고 사는 생명체가 다리를 잃고 쓰러졌는데, 뭔 힘을 쓸 수 있으랴?
"그만 닥치고, 뒤져 이 새끼야!!!"
휘우우우우웅-!!!
함부로 휘두르는 놈의 주먹을 가볍게 피해낸 내가 머리 위로 치켜들었던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콰지직!!!
벼락처럼 떨어진 검이 놈의 코를 짓뭉개고, 광대뼈를 부수며 얼굴에 틀어박혔다.
굳이 공들여 두 번 세 번 확인할 필요도 없는 완전한 죽음.
마침내, 최강의 육상 몬스터라 불리는 오우거를 잡아내는 순간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어후, 개 빡세네, 진짜."
털썩-
오우거의 얼굴에 박아넣은 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탈력감.
삼십 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싸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뭐, 이러고 조금만 있으면 구원의 성배 빨로 금세 회복되긴 하겠지만.
"... 하, 그래도 다친 데는 없네. 어이고!"
싸우는 내내 뛰고 구르며 얻은 이곳저곳의 생채기와 타박상 정도를 제외하면 심각하게 다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럴만하지.
저 무식한 괴물 놈한테 맞았으면 그냥 상처 생기고 마는 수준이 아니었을 테니까.
오우거를 상대로 싸운 이에겐 한 대도 안 맞거나, 혹은 죽거나 병신이 되는 극단적인 결과만 있는 거다.
"아무튼, 안 다치고 끝나서 다행... 윽!"
"우와아아아아!!! 이 미친 새끼! 진짜 오우거를 잡았네? 막내 너, 정체가 뭐냐 진짜!"
"어흑! 윽! 살살해요, 살살!"
뒤쪽에서 달려온 엔리케가 나를 껴안고 미친 듯이 흔드는 통에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뭐, 기분 좋으니 상관은 없었다.
"상급 기사랑 맞먹는 수준의 용병이라니! 와아, 막내 네가 진짜 전설을 쓰는구나! 전설을 써! 미쳤다, 미쳤어!!!"
엔리케의 흥분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용병의 신분으로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이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있었을 수도 있지만... 기록엔 안 남아있으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상급 기사가 될만한 엄청난 재능을 지닌 용병이라면, 진작에 귀족들의 눈에 띄어 그 밑에서 한자리를 해 먹고 있을 테니까.
업계의 사정이 이러하니, 겔베르트 수준의 실력과 경험을 지닌 금패 이상의 용병이 이 바닥에 드물 수밖에 없는 거다.
"아니, 근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로 갔길래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죠?"
"그러게... 꽤 멀리까지 피했던 건가? 그래도 조용해진 거 느꼈으면 슬슬 돌아왔을 텐데?"
싸움이 끝난 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일행들.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솟는 불길한 예감에 안색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
나의 감각에, 무수히 많은 움직임이 잡힌다.
"누가, 옵니다."
"뭐? 아니... 누가 오긴 누가 온다고 그... 헉?!"
바로 그때, 오우거와의 전투로 난장판이 된 이곳으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들은 모두 흉험한 창칼을 손에 쥐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이런, 세상에... 주 아르닌이시여...!"
그 무리의 선두에 선 낯선 사내가 엉망이 된 숲속의 정경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다.
크고 당당한 체구와 빈틈없이 갖춰 입은 방어구, 허리춤에 걸린 검집까지.
멀리서 보았음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니나와 일행들이 몸을 피한 방향에서 한 떼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그 사내의 정체는,
바로, 기사(騎士)였다.
다시, 텔마르크 (4)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기사와 한 떼의 병사들.
'혹시... 바덴하임 놈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순간적으로 머리는 스치는 생각에 저절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두려움?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다만, 그들이 나타난 방향 쪽으로 몸을 피했던 니나와 일행들이 다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과 분노가 끓어올랐을 뿐이다.
"후우..."
으직- 으드득!
오우거의 얼굴에 틀어박혀 있던 검을 다시 뽑아냈다.
며칠 전 쓸어버린 오크 부락에서 우연히 얻은 고급 등급의 펄션이었는데, 오우거의 단단한 가죽과 뼈를 수십 번이나 후려친 탓에 검의 상태는 영 좋지 못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자루와의 결합 부분도 덜컹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 무기는, 상관없다.'
저 정도 병력쯤은 이 나간 검이 아니라 목검 한 자루만 있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차 한잔 마실 시간 정도면 죄다 두들겨 맞아서 바닥을 굴러다닐 것이다.
지금의 내가 다다른 경지는, 그런 걸 가능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뭐 어지간히 레벨 노가다를 뛰었어야지...'
지난 보름간 나와 일행들은 버니언 산맥의 깊고 깊은 숲을 지나며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크고 작은 몬스터들을 썰어 넘겼다.
거기에 방금 오우거를 잡아내며 얻은 막대한 경험치까지 더해졌다.
그 결과,
팟-!
『 데미언 / Lv. 70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
나는 드디어, 레벨 70의 고지에 도달했다.
오우거와 싸우기 직전 레벨이 67이었는데, 놈을 쓰러뜨린 후 단번에 세 단계가 더 뛰었다.
'레벨 70이라니... 찌질했던 옛날을 생각하니 진짜 감개무량하다.'
극적인 성장을 이룬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막내야, 저 새끼들... 혹시 바덴하임 놈들 아니겠지?"
내 옆에서 천천히 목을 풀며 활을 들어 올리는 사내, 엔리케.
그 역시 지난 보름간 수없이 많은 몬스터를 활로 쏴 죽이며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다.
팟-!
『 엔리케 / Lv. 37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호크 아이(Hawk Eye) 』
걸어 다니는 '전투병기'라 불리는 기사들의 능력치가 보통 레벨 35 정도에서 시작한다.
즉, 엔리케는 이 시대 전장의 비주류 취급을 받는 궁수의 몸으로 무려 기사급의 능력치를 달성했다는 얘기였다.
나와 처음 만났을 당시 그의 레벨이 20대 중반에 머물러 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은 현재의 모습이었다.
"저놈들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러네요. 스무 명도 안 되는 것 같은... 엇?"
오우거의 얼굴을 쪼갰던 이 나간 펄션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내 눈에, 허겁지겁 손을 흔들며 뛰어나오는 사람이 보였다.
특유의 붉은 빛 도는 갈색 머리를 찰랑거리는 잘생긴 얼굴의 소년.
"엔리케 조장님! 데미언 형님! 쏘지 마세요! 이분들, 우리 편이에요!!!"
바로, 아드리안이었다.
***
"조장님! 형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고요?"
오우거와 벌인 싸움으로 엉망진창이 된 숲 한복판을 날 듯이 달려 내게 다가온 아드리안.
녀석은 다급함이 담긴 눈빛으로 나와 엔리케의 몸 상태부터 물었다.
"괜찮아. 그냥 몇 군데 긁히고 타박상 입은 정도다."
"어, 나도 멀쩡해. 고생이야 뭐 괴물이랑 드잡이질 한 데미언이 했지. 나야 바위 뒤에 숨어서 활만 쐈는데, 다칠 일이 있나."
"정말 다행입니다, 형님!"
아드리안은 얼마 전부터 '형님'이란 호칭을 붙이며 내게 깍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로 신분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살 차이긴 하지만 내가 나이도 더 많아서 형님, 아우 관계가 되는 것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더구나 아드리안은 원작에서도 꽤 비중 있는 캐릭터로 성장하는 인물.
그런 아드리안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는 건 내 쪽에서도 두 손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호형호제'를 허락해주었다.
"그나저나, 니나 아가씨는?"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말씀대로 오우거가 등장하자마자 몸을 피하신 덕에 다친 곳 하나 없으십니다."
"다행이구나. 다른 분들도?"
"예. 스승님과 겔베르트 대장님도 괜찮으십니다."
"후우, 잘됐네. 그나저나... 저놈들은 뭐야?"
나의 시선이 아드리안과 함께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향했고, 이내 아드리안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텔마르크의 병사들입니다."
"... 텔마르크?"
"예, 형님. 근방 숲속에서 오우거가 나타났다는 약초꾼의 제보가 들어와 파견된 병력이라고 합니다."
아드리안의 대답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음, 이곳과 텔마르크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근데, 저 정도 병력으로 오우거를 잡겠다고 나서? 말이 되나?'
뒤에 따라오는 후발대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건 기사 하나에 스무 명 남짓한 병사가 전부였다.
'... 오우거를 잡기는커녕 오우거 손목 한쪽 떼어가기도 벅찰 것 같은데?'
그런 내 속마음을 읽은 것일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텔마르크의 병력을 바라보며 아드리안이 추가적인 설명을 늘어놓는다.
"저기 다가오는 텔마르크의 병력, 정찰대랍니다."
"정찰대?"
"예. 오우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급하게 파견됐다고 하더군요. 실제 오우거 사냥에 투입될 병력은 따로 있다네요."
그래, 어쩐지 오우거 잡겠다고 나서는 병력치고 너무 적다 싶었다.
그제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짓는데, 아드리안이 존경의 감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형님이 잡으신 저 오우거, 이쪽 텔마르크 영지에선 엄청 유명한 놈이었답니다."
"유명한 놈이었다? 네임드 몬스터라는 얘기야?"
"예, 거의 오십 년 전부터 이곳 치페른 산에 둥지를 틀고 활동했다던데요? 그래서 따로 부르는 별칭도 있답니다. '치페른의 폭군'이라고... 혹시 두 분은 아십니까?"
"엥? 치페른의 폭군? 우리가 잡은 게 그놈이라고?!"
아드리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엔리케가 펄쩍 뛰며 말했다.
치페른의 폭군(暴君).
나 역시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텔마르크 쪽에서 몬스터 토벌 의뢰를 나가면 꼭 한 번쯤은 언급되는 이름이었으니까.
'... 짬을 처먹을 대로 처먹은, 평범한 오우거의 서너 배에 해당하는 힘과 체력을 지닌 돌연변이 같은 놈이라고 했었지.'
엔리케의 놀란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잡은 오우거의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보통 오우거의 수명은 길어야 삼십 년이었다.
근데 치페른의 폭군이라 불린 이놈은 장장 오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살아남아 활동하며 텔마르크 영지 남부의 주민들을 불안에 떨도록 만들었다.
한 마디로, 보통 놈이 아니었던 거다.
'무협지로 치면 영물 같은 거네... 이 새끼 이거, 내단 같은 건 없나?'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엔 엔리케가 자기가 알고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치페른의 폭군, 그 이름 들으니까 이제 생각이 나네. 이놈이 텔마르크 남부에 입힌 피해가 너무 막심해서, 3년 전쯤에 영주인 라이만 남작이 주군인 그뢰네마이어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했었거든."
"도움이라... 오우거를 죽일 수 있을 만한 기사를 빌려달라고 한 건가요?"
"그래. 데미언 너도 알겠지만, 텔마르크엔 상급 기사가 한 명도 없잖아?"
"예, 그렇죠."
"자신을 따르는 봉신의 제안이었던지라, 백작도 흔쾌히 자기 휘하의 상급 기사 한 명을 파견해준 거지. 그를 중심으로 텔마르크 군은 오우거 토벌대를 조직했고, 결국 추격에 성공하긴 했는데... "
"죽이진 못했군요?"
그때 죽었다면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났을 리가 없을 테니, 타당한 추론이었다.
"어, 맞아. 당시 파견되었던 바이펠베르크의 상급 기사가 놈한테 큰 상처를 입히긴 했는데, 완전히 죽이진 못했다고 들었어. 도망을 엄청 빨리 갔다나? 그리곤 버니언 산맥 깊숙한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는데... 이놈이 그놈이었다니. 허!"
"... 어쩐지, 칼이 더럽게 안 들어가더라고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평범한 오우거들을 압도하는 힘과 체력을 지닌 네임드 몬스터, 치페른의 폭군.
보통의 상급 기사들보다 월등한 기량을 지닌 나의 검을 수십 번이나 맞고도 버텨내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긴, 오우거 한 마리 잡았다고 바로 레벨 70 넘어가는 게 이상하긴 했지..."
"예, 형님? 지금 뭐라고 하셨..."
"아니, 혼잣말이다. 그보다... 인사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저벅, 저벅-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한 사람.
"축복받은 땅 텔마르크의 온당하신 주인, 티노 라이만 남작님을 모시고 있는 기사 다니엘 랭턴입니다. 홀로 오우거를 격살한 젊은 영웅을 이렇게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젊은 기사 하나가 격한 인사말을 늘어놓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
'한 서른 초반 정도 되려나...?'
그렇다고 해도 이제 고작 열일곱인 나에 비해선 훨씬 많은 나이였다.
더구나 상대는 준 귀족으로서 대우받는 기사의 신분.
그런 양반이 이토록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먼저 건네는 걸 보고 있자니, 새삼 오우거를 잡아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느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랭턴 경. 푸른 방패의 용병, 데미언입니다."
나는 다니엘의 손을 공손히 맞잡으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먼저 저 자세로 나왔다고 해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며 건방 떨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나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었기 때문이다.
힘 좀 생겼다고 바로 싸가지 없이 행동한다?
'... 그럼, 나와 우리 일행의 평판이 떨어질 거다.'
용병 출신이라 그런지 천박하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이런 말이 나올 테지.
더불어 나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녀, 니나 역시 실망할 것이고.
'원래 애들 앞에선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법이지... 크흠!'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 나의 공손한 인사를 받은 다니엘이 감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 이토록 대단한 위업을 이루신 분께서 이리도 겸손하시다니... 오늘 이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런 분이 우리 텔마르크의 깃발 아래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만으로도 든든합니다."
내 얼굴에 쉬지 않고 금칠을 해주는 다니엘.
저렇게 행동하는 게 이해는 간다.
성년도 되기 전에 오우거를 때려잡은 미친 기량의 용병이 나타났다.
당연히, 나를 텔마르크 측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설령 영입을 못 하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옳은 선택일 테니, 계속 저렇게 아부성 발언을 던지고 있는 거다.
하지만...
'미안하다, 나는 이미 갈 데가 있단다.'
괜한 헛물을 켜는 다니엘이 안쓰러워서, 나는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십니다. 저는 아직 실력도, 경험도 부족한 일개 용병일 뿐입니다. 감히 랭턴 경 같은 훌륭한 기사의 곁에 머물기엔 격이 맞지 않습니다."
한껏 겸손을 차린 나의 발언.
하지만 다니엘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우거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데미언 님께서 상급 기사의 격(格)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실력과 경험에 대한 검증은 끝이 난 셈이지요."
"..."
직설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그의 반박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뭐... 기사한테 존댓말 받는 게 좀 낯간지럽긴 하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자주 생길 테니까.
'그래도, 좀 민망하긴 하네.'
몰려드는 어색함에 괜히 코끝만 문지르고 있는데, 한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랭턴 경, 임시 지휘 막사 설치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본대를 향해 이곳 위치를 알리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음, 그래? 알겠다."
보고를 마친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니엘이 나와 일행들에게 말했다.
"지휘 막사가 설치되었다고 하니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귀한 분들을 모시기에 한없이 부족하고 누추한 곳이지만, 이곳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곳에서 쉬고 계시다가 저희 군의 본대가 도착하면 함께 텔마르크로 가시지요."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일행은 다니엘의 안내를 받아 임시로 설치된 지휘 막사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왕국의 위엄을 상징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의 고향, 바이펠베르크의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입니다."
나는 오우거를 잡기 위해 바이펠베르크 영지에서 파견되었다던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를 만났다.
다시, 텔마르크 (5)
외르크 라인홀트(Jörg Reinhold).
올해 나이 마흔여섯이 된 그는 백작령 바이펠베르크의 강대한 무력을 상징하는 세 명의 상급 기사 중 하나였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외르크는 영지 동북부 숲 지대에 나타난 오우거를 쓰러뜨린 후 영광스러운 상급 기사의 이름을 얻었다.
그 이후 바이펠베르크의 깃발 아래 여러 전투에 참전해 활약하던 중 백작의 봉신 중 하나인 텔마르크의 영주, 티노 라이만 남작의 요청을 받아 버니언 산맥으로 향했다.
이른바 '치페른의 폭군'이라 불리는 오우거를 토벌하기 위해서였다.
'...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말해,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다.
홀로 영지 동북부 숲 지대의 오우거를 쓰러뜨리고 상급 기사의 명성을 얻은 게 2년 전이었다.
그때도 가능했던 일이 지금 안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크롸아아아아아아악!!!"
며칠 동안 이어진 지루한 추적 끝에 마주한 오우거 '치페른의 폭군'은, 외르크의 빈곤했던 상상력을 완벽하게 깨부수는 존재였다.
2년 전 그가 상대했던 녀석과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의 막강한 힘과 체력을 지닌 돌연변이 오우거였던 것!
콰앙! 콰아아아앙-!!!
건물 기둥을 뽑아 휘두르는 듯한 놈의 곤봉 공격엔 땅을 꺼뜨리고 산을 무너뜨리는 힘이 실려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머리통이 깨지고 몸뚱이가 부서져 나갈 어마어마한 위력!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의 공격을 정신없이 피해가며 죽어라 검을 휘둘렀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외르크의 검은 수십 번의 반복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놈의 두꺼운 가죽을 뚫어내지 못했다.
'2년 전 그놈은 대여섯 번만 검을 맞아도 가죽이 쩍쩍 갈라졌는데...!'
반면 이 돌연변이 오우거 놈의 가죽은 어찌나 질기고 튼튼한지, 흡사 방패를 두드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혼자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
오우거 사냥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온 텔마르크의 정병 오십에 더해 몬스터 토벌에 잔뼈가 굵은 용병들이 무려 백오십.
도합 이백의 병력이 외르크의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외르크가 검을 휘두르고 오우거의 사각으로 빠져나가면, 그 즉시 병사들이 창을 찌르고 화살을 날려 후속 공격을 가했다.
그렇게, 목숨 걸고 싸우길 한 시간여.
콰지직!!!
"크롸아아아악!!!"
마침내, 놈의 몸통에 길이만 6미터에 이르는 대(對) 오우거 용 장창이 틀어박혔다.
"크흐윽!!! 뒤져라, 이 괴물 새끼!!!"
싸우던 도중 놈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갈비뼈가 다섯 대나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한 외르크.
하지만 그는 상급 기사다운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통증을 참아냈고, 자신의 검으로 간신히 찢어낸 오우거의 뱃가죽 틈에 병사들에게 건네받은 창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크와악! 크롸아아아아아!!!"
오십 년 가까이 텔마르크 남부 지역의 공포로 군림해온 전설적인 괴수는, 질기게 이어온 자신의 생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콰직! 퍼어억!!!
분노한 놈이 휘두른 곤봉에 수십에 달하는 병사들이 피떡이 되었다.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 공격을 피해 다급히 땅바닥을 구른 외르크.
"커흑!"
그의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뚫고, 살가죽을 찢었다.
실로 눈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이었다.
"크롸아아아!!!"
우지직!!!
주변의 적들을 떨쳐낸 돌연변이 오우거, '치페른의 폭군'이 제 배를 뚫고 틀어박힌 장창을 주먹으로 후려쳐 단숨에 부러뜨린다.
그리곤 몬스터 특유의 흉험한 기운이 담긴 눈빛으로 외르크와 텔마르크의 병사들을 잠시 쏘아보더니만, 별안간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 돼... 지금, 죽여야... 쿠웨엑!!!"
멀어지는 놈의 뒷모습을 향해 덜덜 떨리는 손을 뻗던 외르크가 왈칵 피를 토했다.
놈이 큰 부상을 입은 지금 추격해서 반드시 죽여야 했다.
만약 놈이 저대로 도망쳐 살아난다면, 그래서 죽음의 위기를 딛고 더욱 강해진다면 그다음엔 얼마나 끔찍한 재앙으로 변모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크허윽..."
가물거리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니, 넋이 나간 텔마르크의 병사들이 손발을 덜덜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오우거는 사라졌지만, 놈이 전장에 흩뿌린 공포(恐怖)의 잔재가 여전히 자리에 남아 병사들의 목줄을 죄고 있었다.
"크흑... 컥! 바, 반드시... 반드시 내 손으로... 널 죽여주겠다... 크흐윽!!!"
바로 그것이, 피투성이가 된 바이펠베르크의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
"... 그래서, 놈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예정된 모든 일정과 업무를 제쳐놓고 말을 달려 텔마르크로 내려왔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죽여 그 날의 치욕을 갚으려 했는데..."
허탈함이 배인 눈빛으로, 외르크가 쓰러져 있는 오우거의 시체를 바라본다.
"... 이제, 그럴 수 없게 됐군요."
그의 허망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지난 3년 내내 이놈 죽일 생각만 하면서 칼을 갈았을 텐데, 본의 아니게 내가 그 복수의 기회를 뺏어버렸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저 텔마르크를 향해 가고 있었을 뿐이고, 그 와중에 '치페른의 폭군'이 등장했으며, 살기 위해 놈을 죽였을 뿐이다.
하지만...
'... 아이고, 이 아저씨 완전히 넋이 나간 거 같은데?'
외르크의 텅 빈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내가 아주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아, 이거 괜히 높은 양반이랑 척지게 된 거 아냐?'
나의 걱정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외르크 라인홀트는 그 개인만 봤을 때도 상급 기사라는 드높은 경지에 오른 대단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바이펠베르크라는 강력한 힘을 지닌 영지 내에서 손꼽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바이펠베르크는 앞으로 다가올 왕국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반드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할 중요 세력 중의 하나.
얽혀있는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외르크와의 관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저를 대신해, 3년 전 이 포악한 괴물 놈에게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그대의 검을 빌어 꿈꾸었던 복수를 이루었습니다. 바이펠베르크의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는 오늘 그대에게 받은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외르크는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반응에, 나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와, 이 아저씨... 내 생각보다 훨씬 멋있는 사람이었잖아?!'
딱히 우리 측이 잘못한 건 없으니 대놓고 뭐라고 하진 못하더라도 불편한 뉘앙스 정도는 풍길 줄 알았다.
하지만, 외르크는 내 예상과 달리 깔끔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감사의 인사까지 전했다.
외르크를 비롯해 그가 몸담은 바이펠베르크에 대한 모두의 인상이 좋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
"여기, 이쪽에 계신 어린 숙녀께선 거친 용병 일을 하시는 분 같지 않아 보이는군요."
외르크가 툭 지나가듯 던지는 말에 훈훈했던 지휘 막사 안의 분위기가 차게 식어버렸다.
외르크가 언급한 '어린 숙녀'란 당연히 니나였고, 그의 말을 들은 텔마르크의 기사 다니엘 역시 궁금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 아무래도 용병분들과 함께하고 계시니, 호위 임무를 부탁한 의뢰주 분들 아니시겠습니까? 제 생각은 그런데, 그게 맞는지는 잘... 하하하!"
안 그래도 니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였으나,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노 기사 데론의 존재감에 짓눌려 입을 열지 못했던 다니엘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외르크가 있으니 거침없이 참았던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다.
"어, 음..."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당황하여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니나.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옆자리의 데론이 입을 열어 뭐라 얘기를 하려던 그때...
"... 저는, 왕국 서남부 국경 지대에 자리한 남작령 리트베르크의 영주 바일 아르펜 남작의 유일한 후계자, 니나 아르펜입니다."
"아, 아가씨!"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선 니나의 행동에 깜짝 놀란 데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런 데론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외르크를 바라보며 말한다.
"백작령 바덴하임의 무도한 침략으로 인해 우리는 소중한 영지를 빼앗겼고, 아버지께선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저는 리트베르크의 온당한 지배자인 아르펜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가주의 신분으로써 이번 전쟁의 불의(不義)함을 모든 왕국민들에게 알리고, 바덴하임의 더러운 모략으로 실추된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푸른 방패 용병대의 도움을 받는 것이고요."
길었던 발언을 쉬지도 않고 단숨에 쏟아낸 니나였다.
어린 소녀가 보여준 그 강단 있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막사 안에 모인 모두가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경우엔, 그저 압도당하는 것을 넘어 뿌듯함과 대견함을 함께 느끼는 중이다.
'크으, 뉘집 딸인지 정말 야무지다, 야무져! 말을 어쩜 저렇게 똑부러지게 하고... 하하하! 잘했다, 우리 니나!'
전쟁에서 패하고 용병들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도망치고 있다는 말을 저렇게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바꿔서 말할 수 있다니!
확실히 귀족의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그것보단... 주인공의 위엄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로소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의 정체를 알게 된 외르크와 다니엘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그래, 놀랄 만도 하겠지.
'자...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지금부터 저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몸담은 영지의 입장을 어느 정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외르크의 반응이 중요하지.'
나는 혹시 모를 돌발상황에 대비해 전신의 감각을 한껏 끌어올리며,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외르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감았던 눈을 뜬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외르크.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니나의 양쪽에 있던 데론과 아드리안이 움찔했지만, 다행히 검을 뽑아 들거나 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저벅, 저벅-
그 사이 니나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간 외르크.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니나의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만,
턱-
그 자리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아 고개를 숙인다.
"... 왕국의 위엄을 상징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의 고향, 바이펠베르크의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가 리트베르크의 온당한 지배자인 아르펜 가문의 가주 니나 아르펜님을 뵙습니다."
***
이틀 후_
"저곳이 바로 텔마르크의 주도, 크라벤입니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성벽을 가리키며 뿌듯한 미소를 보이는 기사 다니엘.
그의 설명을 들으며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는 소녀 니나의 얼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오른다.
"드디어... 도착했네요."
떨림을 숨기지 못하는 니나의 목소리.
지난 몇 주간의 고됐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가씨."
늘 그렇듯 니나의 곁에 선 데론의 목소리에서도 격정이 묻어난다.
목숨을 위협하는 침략자들의 눈을 피해 각종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험지(險地) 버니언 산맥으로 숨어들었고, 수없이 많은 위험을 이겨내며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이곳이... 푸른 방패의 고향이라고요?"
"예, 아가씨.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크라벤의 정경에 감격한 눈빛을 한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믿었던 크라벤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이씨... 크윽! 크라벤아! 내가... 내가 돌아왔다아! 크흐윽!"
... 엔리케는 이미 울고 있었고.
눈물도 모자라 콧물까지 질질 흘리며 못 볼 꼴을 보여주는 엔리케의 모습을 일별한 겔베르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일행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 녀석.'
그리고 그곳엔, 바이펠베르크의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푸른 방패의 막내가 있었다.
'데미언, 네가 우리 모두를 살렸구나.'
처음 용병대에 들어왔을 땐 빼빼 마른 몸에 모든 것이 어설프기만 했던 녀석.
그러나 지금은 홀로 오우거를 격살하고, 파도처럼 몰려오는 고블린과 오크 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힘을 지닌 사내가 되었다.
'상급 기사라...'
어렸을 적 겔베르트 자신도 꾸었던 꿈.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이 바랐던 그 꿈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해 버렸다.
'영원히 닿지 못할 곳에 있는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자신보다 훨씬 부족했던 녀석이 그곳에 닿아 그 꿈을 이뤄내는 것을 보았다.
'... 나도 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자신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지금보다는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 뭐... 해보자, 까짓거. 안 되면 막내가 어떻게든 도와주겠지."
끝 모를 피곤으로 굽어졌던 어깨를 당당히 펴고 크라벤의 성문을 향해 걸어가는 겔베르트.
깨어질 운명을 딛고 더욱 단단하게 돌아온 푸른 방패의 머리 위로, 새하얀 겨울의 눈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푸른 방패의 귀환 (1)
사방이 어둑해질 시간이 되어서야 크라벤의 성문에 도착한 우리 일행.
해가 짧은 겨울철이기에, 이미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폐문(閉門)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이고, 병사님! 저희까지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예?"
"정말 멀리서 왔습니다! 내리 열흘을 밖에서 노숙했는데...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일몰 후엔 성문을 지날 수 없다. 지엄하신 영주님의 명을 어길 셈이냐?"
"그, 그것이 아니라...!"
"예외는 없다. 출입 시간이 지났으니 내일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라."
"병사님! 병사니임! 제발 부탁드립니다! 들여보내 주십쇼!!!"
"저희 아이가 아픕니다! 이 겨울 날씨에 밖에서 노숙하면 얼어 죽을 텐데...!"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자, 다들 물러서라! 물러서지 않으면 텔마르크 영지군에게 위협을 행사하는 적도로 간주하여 처벌하겠다. 거기 너, 뒤로 물러서라고!!!"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성안에 들여보내 달라 애걸하는 사람들을 거칠게 밀어낸다.
너무 무정하고 야멸차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지 텔마르크는 펠리노어 왕국의 적국(敵國)인 브리카니아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땅.
한 마디로, 최전방이라는 얘기다.
그런 중요한 지역의 주도인 만큼, 성문의 개폐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고 사람들의 출입 역시 엄격하게 관리하는 게 당연했다.
'... 이러니 도둑 길드 놈들이 성벽 밑에 몰래 땅굴 파서 통행료 장사하고 그러는 거지.'
한번 닫힌 성문은,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다시 열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도시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성문 근처에 천막을 쳐두고 노숙을 하게 되는 거다.
'아마 우리끼리만 왔다면 저 사람들처럼 천막 친다고 부산을 떨고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각, 다각-
"텔마르크의 기사 다니엘 랭턴이다. 설마 내 얼굴을 모르진 않겠지?"
말머리를 몰아 일행의 선두로 나선 텔마르크의 기사 다니엘 랭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허업! 텔마르크 영지군 성문 경비대 소속, 십인장 조슈아! 래, 랭턴 경을 뵙습니다!"
"랭턴 경을 뵙습니다아!!!"
텔마르크 영지군의 고위급 인사라 할 수 있는 다니엘의 등장에 놀란 병사들이 허겁지겁 군례를 올린다.
"그래, 수고가 많다. 영주님의 명을 받아 치페른 산의 오우거 토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문을 열어라."
"어흡, 예옛! 알겠습니다, 바로 문을 열겠습니다! 야! 문 열어, 빨리 문 열라고!"
혹시라도 시간을 지체했다간 다니엘에게 한 소리를 들을까 싶어 다급하게 성문 안쪽으로 소리치는 병사.
잠시 후,
쿠웅- 철커덩!
문의 개폐 장치가 조작되는 소리가 들리고,
쿠구궁! 그그그그그-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성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열리는 문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크라벤의 풍경.
성문 근처, 환하게 등을 밝히고 밤 장사에 돌입하는 번화가 상점들과 여관, 술집의 모습이 보였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랭턴 경, 이제 들어가시죠."
"음, 그래."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에 대며 군례를 올리는 병사에게 고개를 까닥인 다니엘이 우리 일행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인다.
"자, 들어가시죠. 축복받은 땅 텔마르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외르크 경은 저와 함께 영주성으로 가시면 되고..."
텔마르크 영주성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선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며 넌지시 니나를 바라보았다.
함께 영주성으로 가겠냐는 물음을 담은 눈빛이었다.
다니엘의 의도를 파악한 니나가 차분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푸른 방패 용병대와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휴식을 취한 이후 내일 아침 일찍 영주성으로 가 남작님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지요."
"으음, 괜찮으시겠습니까? 용병들이 머무는 여관은 아무래도 가주님께서 계시기엔 여러모로 불편할 것인데..."
다니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니나는 그 예쁜 얼굴에 방긋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버니언 산맥 한복판에서도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잘 먹고, 잘 잤습니다. 여관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잠자리가 되어줄 테죠."
"... 허!"
니나의 당돌한 대답에 다니엘의 옆에 있던 외르크가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러운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아르펜 가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랭턴 경."
다니엘의 입에서 나온 '아르펜 가주'라는 표현에 순간적으로 니나의 얼굴에 슬픈 빛이 떠오른다.
아직 니나는 왕실로부터 남작령 리트베르크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
지금으로선 '아르펜 가주'라는 호칭 외에는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슬픔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런 니나의 생각을 알아챈 다니엘이 급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여관 근처에 병사들을 몇 명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감시가 아니라 귀한 분을 보호하기 위한 텔마르크의 배려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시라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텔마르크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니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니엘이 이번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데미언님, '치페른의 폭군'을 토벌해주신 것에 대해 텔마르크 영지민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와 관련해 영주님께서 따로 포상을 내려주실 겁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관련 일정은 따로 사람을 보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머무실 장소가 혹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곁에서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겔베르트가 대신해주었다.
"저희는 크라벤 시장 근처 있는 여관 '친절한 당나귀'에 묵을 생각입니다. 오래전부터 저희 용병대가 머물던 곳입니다."
"아, 친절한 당나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리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해주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길."
그렇게 다니엘과 외르크를 떠나보낸 후, 우리 일행은 여관 친절한 당나귀로 향했다.
이동하는 도중, 이제는 우리 용병대 식구들과 부쩍 친해진 아드리안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왔다.
"저기, 겔베르트 대장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음? 뭔데?"
"데미언 형님이랑 조장님이 잡은 그 오우거 말입니다, 그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듣기로는 오우거 사체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엄청 돈이 된다고 들었는데..."
아드리안의 질문에 그의 옆에서 걷던 니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말은 안 했지만, 니나도 그게 제법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 그 오우거? 그거야 뭐... 야, 데미언! 네가 직접 설명해줘라."
"하하, 그럴까요?"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있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음, 일단 오우거를 잡은 게 나와 엔리케 조장이니 그 부산물에 대한 소유권은 우리 푸른 방패 용병대에게 있는 것이 맞아. 문제는... 당장 우리에겐 그 오우거 사체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는 거지."
"능력이라면..."
"체구가 작은 몬스터들의 경우엔 수레에 실어서 작업장이 있는 곳으로 옮기면 되는데, 오우거 같은 대형종 몬스터의 사체는 그게 불가능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오우거 덩치가 집채만 하니까 통째로 옮길 수가 없거든."
"네, 그렇죠."
"그래서 오우거의 사체를 처리할 땐 관련 전문가들이 오우거의 사체가 있는 장소로 가서 임시 작업장을 설치하고, 거기서 일을 하지. 오우거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수거하고, 뼈를 바르고... 그렇게 대강 사체를 처리한 다음에 나온 부산물을 차곡차곡 수레로 옮기는 거야."
"아..."
거기까지 말하고 니나를 살피는데,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엄청 흥미롭게 내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 귀가 쫑긋거리는 게 보이네. 귀여운 녀석!'
절로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나는 설명이 이어나갔다.
"텔마르크 측 사람들이야 애초부터 오우거를 잡을 작정으로 온 거였으니까, 오우거 사체를 담당하는 전문가들도 당연히 데리고 왔을 것이고..."
"아하, 그래서 랭턴 경이랑 대장님, 형님이 그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신 거군요?"
"그렇지. 텔마르크 측에서 알아서 오우거 사체를 처리하고, 부산물 판매까지 맡아주는 대신 수익금의 일부를 떼어주기로 했다."
"얼마나 떼어주는 건데요?"
이번엔 옆에서 지켜보던 겔베르트가 대답을 해준다.
"보통은 수익금의 절반 정도를 떼어주거든. 그게 업계 표준이다. 우리도 텔마르크 측에 그 정도 주기로 했어."
"아니, 그렇게나 많이 준다고요? 오우거 잡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업적인데, 텔마르크 쪽에서 너무 많이 가져가는 거 아닌가요?"
"어쩔 수 없어. 오우거 사체를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몬스터 사체 처리 전문가들은 죄다 영지 소속 공방에 묶여 있거든. 텔마르크 쪽 도움 못 받으면, 어차피 그 오우거 사체 갖다 팔지도 못하고 버려야 해."
"... 그렇구나."
자신이 몰랐던 분야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해한다.
열심히 세상 공부에 매진 중인 제자의 모습이 기꺼웠던 것일까?
아드리안의 스승인 데론이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야 좀 편하게 웃으시네.'
지난 몇 주간 니나를 지키느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노 기사 데론이었다.
늘 긴장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오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기분이다.
"아, 저 질문 한 가지만 더요!"
"음? 뭐가 또 궁금한데?"
"몬스터 부산물이요, 그거 다 팔면 얼마 정도 나오나요? 엄청 희귀한 재료이니까... 적어도 오백 골드 정도는 되겠죠?"
오백 골드면 오만 실버.
지난 생의 화폐 가치로 설명한다면, 약 오억 원쯤 되는 돈이다.
분명 거액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이나, 오우거의 가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에이, 아드리안. 너 나이도 어린 녀석이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해서 되겠냐? 이거, 이거, 실망이야!"
아드리안의 대답을 들은 엔리케가 낄낄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용병 경력이 풍부한 만큼 이런 쪽 지식에도 빠삭한 그였다.
"자, 아드리안. 생각해봐. 오우거 사체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뭘 만드냐?"
"어... 갑옷이나 무기?"
"그렇지. 오우거 가죽으로 만든 갑옷, 오우거 힘줄로 만드는 활, 오우거 뼈로 만든 방패... 이런 거,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거든. 물론 잡은 오우거의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에 따라서 값이 다르긴 하지. 가죽이 많이 상했으면 팔아먹기가 좀 그럴 거 아니냐, 안 그래?"
"그렇죠."
"하지만 아무리 후려쳐도 삼천 골드는 받을 수 있어. 잘 받으면 오천까지는 그냥 간다?"
"오... 오천 골드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오천 골드? 허어..."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아드리안이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워한다.
관심 없는 척하던 니나 역시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는지, 아예 몸까지 돌려서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그래, 오천 골드! 근데... 이번에 데미언이 잡은 놈은 '치페른의 폭군'이라고 따로 별칭까지 붙은 대단한 놈이었잖아?"
"어, 예. 그랬죠."
"지난 오십 년 동안 텔마르크 남부를 공포에 떨게 만든, 무시무시한 괴수! 3년 전 저 유명한 바이펠베르크의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 경의 공격마저 버텨낸 전설의 오우거!!!"
"아, 맞네요! 그럼 더 가격이 비싸지겠네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연신 감탄을 터트리는 아드리안과 니나의 모습에 신이 난 것인지, 엔리케가 흡사 음유 시인이라도 된 듯 손짓 발짓을 해가며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맞아, 더 비쌀 테지. 경매가 붙으면, 적어도 두 배 이상은 가격이 뛸 거야. 어쩌면 세 배가 될지도 모르지."
"오천 골드의 세 배면... 만오천 골드?! 큽! 딸꾹!"
너무 놀란 아드리안이 딸꾹질을 하고, 니나의 경우엔 그 큰 눈을 깜박이며 지금 자기가 들은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어휴, 저 새끼 신났네, 신났어. 야, 저 자식은 네가 잡은 오우거 가지고 왜 지가 저렇게 신났냐?"
엔리케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겔베르크가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하하,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제가 혼자 잡은 거 아닌데요? 같이 잡은 거지."
"지랄하네, 엔리케 저 새끼가 도움이 되어봤자 오우거 상대로 얼마나 도움이 됐겠냐? 그냥 응원단 역할 정도나 했겠지. 으휴..."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기던 우리 일행의 눈앞에, 마침내 목적지인 여관 '친절한 당나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드디어 도착했군."
간판에 쓰인 여관의 이름을 확인한 데론이 반갑게 입을 열었다.
드디어 식사다운 식사, 잠자리다운 잠자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반갑게 여관으로 들어가려는데...
퍼억-!
"흣!"
하필 그때 안쪽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손님과 몸을 부딪친 데론이 짧은 신음을 흘린다.
데론도 데론이었지만, 밖으로 나오던 이도 꽤 건장한 체구를 지닌 사내였기에 충격이 작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
여관에서 나온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데론에게 사과를 건네다 무언가를 목격하고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동시에, 여관으로 들어서던 나와 겔베르트, 엔리케의 몸도 굳어버렸다.
무뚝뚝한 인상을 지닌, 검은 피부의 사내.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던 머리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짧게 자른 머리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믿음직한 얼굴과 목소리만은 잊을 수가 없다.
덜덜 떨리는 눈빛과 입술로,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겔베르트.
"... 메이슨?"
그러자, 상대 역시 목이 메인 음성으로 대답한다.
"... 돌아오셨군요, 대장."
푸른 방패의 부대장 메이슨.
그가, 이곳 크라벤에 살아 돌아와 있었다.
푸른 방패의 귀환 (2)
"메이슨...! 너 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콰악!
메이슨에게 다가간 겔베르트가 몸이 부서질 기세로 그를 껴안는다.
본래 무뚝뚝한 성격을 지닌 메이슨이었지만, 그 역시도 끓어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했는지 입술을 바르르 떨며 겔베르트를 마주 껴안는 게 보였다.
"이런 씨이... 죽은 줄 알았잖아! 어흐흐윽!!!"
이미 눈물을 쏟기 시작한 엔리케가 서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에게 달려든다.
산산이 깨어졌던 푸른 방패의 조각들이 다시 하나가 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후우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울컥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
눈물을 참아보려고 해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메이슨도... 살아 있었어!'
원작 속 리트렌 전투에선 '바덴하임의 사자'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만나 몰살을 당했던 푸른 방패 용병대.
하지만, 현실이 된 이곳에선 목숨 걸고 에리히의 발목을 잡은 나의 노력으로 인해 용병대의 주요 멤버들인 겔베르트와 메이슨, 엔리케까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고개를 떨군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
누군가의 손이, 덜덜 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는 게 느껴졌다.
작지만,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그 손의 주인은...
"... 데미언 오빠, 괜찮아요?"
바로, 니나였다.
"음? 어... 괜찮, 괜찮아."
괜찮다고는 말을 했지만 눈물을 질질 짜고 있는 내 얼굴이 영 설득력이 없었던 것인지, 니나는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좋아서 우는 거죠? 동료를 다시 만났잖아요."
"어, 그렇... 그... 그렇지."
"잘 됐다, 정말 잘 됐어요!"
목이 메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밝은 미소로 위로해주는 니나.
그러다 문득, 나를 위로해주고 있는 눈앞의 이 어린 소녀가 얼마 전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포함해 자신의 인생을 이루던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얘는 그런 힘든 일을 겪고도 어떻게 이렇게 의연할 수가 있지?'
심지어 열두 살 난 어린 애가 말이지.
내 의문에 대한 답은, 니나의 상태창에 담겨 있었다.
팟-!
『 니나 아르펜 / Lv. 2
소속: 없음
클래스: 군주
고유 특성:
- 꺾이지 않는 운명 』
처음 봤을 땐 대체 이게 뭔 뜻인가 싶었던 니나의 고유 특성.
근데, 지금 이런 상황이 되어 생각해 보니 대강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꺾이지 않는 운명이라...'
그야말로 주인공이 지닌 '불굴(不屈)의 의지'를 뜻하는 고유 특성이었던 거다.
'그야말로 강철 멘탈이네... 하긴, 그러니까 주인공 하는 건가?'
한편, 메이슨과 한바탕 눈물을 쏟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눈 겔베르트와 엔리케에겐 더욱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대장, 들어가 보십쇼. 애들이 깜짝 놀랄 겁니다."
"애들... 애들이라고?"
"뭐야, 다른 놈들도 다 살아 돌아왔어요?"
메이슨이 꺼낸 말에 깜짝 놀란 겔베르트와 엔리케가 되묻는다.
그리고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뻐끔거리는 두 사람을 제치고 여관 1층 식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은...
"헐, 뭐야? 데미언?"
"막내? 막내 맞지?"
"이런 씨... 데미언? 너 진짜 데미언이야?"
"야아!!! 다들 내려와 봐! 막내가 돌아왔다고!!!"
"뭐? 누가 왔다고? 막내?"
우당탕탕!!!
계단을 통해 2층 객실에서 뛰쳐 내려오는 사람들.
나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온 겔베르트와 엔리케 역시 눈앞의 광경을 보고 말을 잃었다.
"대장?! 뭐야, 엔리케 조장까지?"
"이런 젠장! 대장,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죽은 줄 알았잖아! 어흐윽!!!"
"거봐, 내가 대장은 절대 안 죽었을 거라고 했지?"
"이야아, 역시 대장! 믿고 있었다고요!!!"
"너 이 자식들...!"
쏟아지는 부하들의 환호성에 또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는 겔베르트.
원작 소설에선 눈물 따윈 모르던 강철 같은 사나이 겔베르트였는데, 오늘만큼은 고장 난 수도꼭지가 따로 없었다.
"데미언!!!"
반가운 재회의 방점을 찍은 것은, 다름 아닌 여관 '친절한 당나귀'의 주인장 후고 아저씨였다.
"데미언, 무사히 돌아왔구나! 잘 됐어, 너무 잘 됐다!!!"
동료들이 외치는 내 이름을 듣고 부엌에서 뛰쳐나온 후고 아저씨가 나를 와락 안아주었다.
돈 없는 나에게 든든한 식사를 챙겨주던, 그때의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후고 아저씨, 잘 계셨어요?"
"이 녀석아, 내가 어떻게 잘 있었겠니? 네 걱정하느라 힘들었지!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어!"
왜 이리 늦었냐며 원망하듯 이야기하는 후고 아저씨의 목소리에서 나에 대한 진심이 느껴졌다.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그동안 먹고 싶었던 거 있으면 다 말해! 오늘 제대로 내가 대접하마."
"아, 그럼 저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잔뜩 흥분한 엔리케가 목이 찢어져서 소리쳤다.
"여기, 맥주! 다른 거 제쳐두고 맥주부터 깔아주세요! 와하하하!!!"
***
정신없었던 재회의 첫 순간이 지나가고, 조금은 차분한 분위기가 되었다.
니나와 데론, 아드리안은 우리들의 재회를 위해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고, 식당엔 푸른 방패의 식구들만 자리한 상황.
테이블에 앉아 부하들의 얼굴을 돌아보던 겔베르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잭과 요나스, 마르빈, 자비어. 이렇게 넷이 맞나?"
그의 질문에 담긴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모두의 표정이 침울해지고, 모두를 대표해 메이슨이 그 말에 대답을 건넨다.
"예, 맞습니다. 잭과 요나스, 자비어는 전투 중 사망했고... 마르빈은 중상을 입어 치료 중에... 먼저 떠났습니다."
죽었다는 말 대신 '먼저 떠났다'는 표현으로 동료들의 마지막을 전하는 메이슨.
"..."
그 대답을 듣고 말없이 한참을 서 있던 겔베르트가 다음 질문을 이어나간다.
"... 다친 녀석들은 얼마나 되나?"
"앞으로 무기를 들 수 없게 된 녀석들이 다섯, 회복 가능한 수준의 부상을 입은 녀석은 저를 포함해 여섯입니다. 나머지는 멀쩡합니다."
"크게 다친 놈이 다섯..."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가 침통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본 메이슨이 위로하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래도, 그 아수라장에서 안 죽고 살아나온 사람 숫자가 열 명이 넘습니다. 대장과 엔리케, 막내를 포함해서요. 이 정도면 천운이라 할만합니다. 전쟁신 카이테르님께서 우릴 도와주신 거지요."
"천운이라..."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테이블 어딘가를 응시하는 겔베르트.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리트렌 빈민가의 어느 창고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을 때, 겔베르트는 '칼밥 먹고 사는 놈들 팔자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고 대답했었지.
'... 나랑 엔리케가 심적으로 동요할까 봐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던 거겠지.'
하지만, 지금의 겔베르트는 애써 태연한 척하던 그 날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타깝고, 괴롭고, 슬픈 얼굴.
부하들의 죽음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씨, 대장! 고개 들어요. 대장이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으면 먼저 떠난 놈들이 뭐가 됩니까?"
"맞슴돠! 먼저 간 놈들도, 그리고 저희도 푸른 방패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대장, 고개 떨구지 마십쇼!"
"맞습니다! 그리고 이 바닥 일 하면서 어디 안 죽을 생각하고 사는 놈 있답니까?"
"얼굴 펴요! 대장이 그러면 죽은 놈들이 더 쪽 팔려 할 겁니다!"
눈에 띄게 어두워진 겔베르트의 얼굴을 본 푸른 방패의 동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을 건네며 그를 위로했다.
평소 말 없기로 유명한 메이슨 역시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대장이 그렇게 힘들어하시면 먼저 간 놈들이 더 슬퍼할 겁니다.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고, 남자답게 떠난 놈들입니다. 우리도 멋지게 보내줘야죠."
'멋지게 보내 준다'는 표현이 겔베르트의 가슴을 울린 것일까?
오랜 침묵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난 겔베르트가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잭! 요나스! 마르빈! 자비어! 네 녀석 모두 누구보다 잘 싸우고, 용감했고, 의리 있는 멋진 놈들이었다. 누가 말 더럽게 안 듣는 놈들 아니랄까 봐 대장한테 보고도 없이 먼저 떠났지만, 우리도 곧 따라갈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자!"
"어이씨, 나는 그 새끼들 따라가기 싫은데? 오래오래 살 거예요!"
"맞아, 저 세상 갈 거면 대장이 제일 먼저 따라가요! 그럼 그때가서 나도 생각해 볼 테니까."
"야, 어차피 대장이 우리 중에서 제일 늙은이잖아. 자연스럽게 먼저 가게 되어 있어!"
"아,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네, 푸하하!"
언제 우울했었냐는 듯 다시 왁자지껄해진 식당의 분위기.
그 중심에 선 겔베르트가 맥주잔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자, 치사하게 먼저 도망친 놈들을 위해 한잔하자! 푸른 방패!!!"
겔베르트의 선창에 모든 푸른 방패의 식구들이 잔을 들어 올리며 외친다.
"영원하라-!!!"
***
우리가 크라벤에 도착한 지도 벌써 열흘이 훌쩍 넘었다.
니나와 데론, 아드리안은 뭐 그리 할 이야기가 많은 지 하루가 멀다 하고 텔마르크 영주성을 찾아가 남작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 생각엔 아마도 바덴하임 측이 주장한 리트베르크 침공 전쟁의 명분이 조작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텔마르크 영주인 티노 라이만 남작, 그리고 그가 모시는 주군인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모두 왕국 내에서 바덴하임 백작의 영향력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니, 바덴하임 백작을 압박할 정치적 카드로 써먹기 위해 니나의 주장을 신경 써서 들어주는 것이겠지.
한편, 우리가 텔마르크 측에 위임했던 오우거 사체의 처리 및 판매가 모두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으와, 대장! 이, 이게...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 맞아요? 어? 으아, 미친...!"
우리와 안면 있는 기사 다니엘이 직접 여관까지 찾아와 전달해준 문서의 내용을 들여다보던 엔리케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 대단하군."
문서를 손에 쥔 겔베르트도 그 내용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총 판매 대금 16,000골드 중 오우거 사체의 처리와 판매과정 모두를 담당한 텔마르크 영지 측이 그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수수료로 취한다. 수수료를 제한 대금 잔액 8,000골드를 푸른 방패 용병대의 몫으로 지급하며, 오우거 토벌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500골드를 포상금의 명목으로 추가 지급한다.
- 텔마르크 영주, 남작 티노 라이만 ]
그렇게, 도합 8500골드의 거액이 우리 용병대의 이름으로 주어졌다.
지난 생의 화폐 가치로 따진다면, 무려 85억 원 상당의 어마어마한 금액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 고맙다, 치페른의 폭군. 네 덕에 부자 됐다!'
싸울 때는 더럽게 힘들었는데, 문서에 적힌 금액을 보니 그 모든 기억이 아름답게 변하는 기분이다.
"금화나 금괴로 지급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기에, 부득이하게 전표로 준비했습니다. 여기..."
다니엘의 품에서 왕국 내 가장 높은 신용을 자랑하는 '왕립 펠리노어 은행'의 빳빳한 새 전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
하지만, 겔베르트는 다니엘이 내민 전표를 받지 않았다.
마치, 그 전표가 자신과 상관없는 물건이라는 듯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의아한 눈빛을 한 다니엘의 물음에, 그제야 겔베르트가 이유를 말했다.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니니까요."
"예? 아니 그게 무슨 말씀..."
"막내야, 뭐하냐? 랭턴 경께서 기다리신다. 빨리 받아라."
"...!"
겔베르트의 말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 아저씨, 이걸 지금 나한테 받으라는 건...
'... 이 돈, 나한테 다 주는 거야?'
엔리케의 도움을 조금 받긴 했지만, 사실상 나 혼자서 오우거 '치페른의 폭군'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큰돈을 다 나한테 준다고?
"어, 예!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다니엘에게 전표를 건네받았다.
8500골드.
손에 쥐고도 참 현실감이 없는 액수의 돈이었다.
번쩍이는 금화가 아니라 종이 쪼가리를 들고 있어서 더 와닿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영주님의 승인 문서와 전표, 모두 차질없이 잘 전달해드렸습니다. 그럼, 전 이만..."
"아, 예! 살펴 가십시오, 랭턴 경."
정신없이 다니엘을 떠나보낸 후, 나는 멍한 얼굴로 겔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바로 돌아오는 겔베르트의 목소리.
"인마, 뭘 그렇게 멍청하게 쳐다봐? 그거 네 돈 맞잖아?"
"아니, 그렇지만..."
"그렇지만은 무슨... 야, 나 올라가서 좀 더 잔다. 이따 밥 먹을 때 깨워라."
진한 상남자의 향기를 풍기며 2층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겔베르트.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 돈을 가장 먼저 써야 할 곳을 결정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1)
"이 돈을... 정말 우리한테 나눠준다고? 이렇게 많이?"
"에이,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푸른 방패 출신이라고 목이 힘 좀 줄 거 아닙니까? 받으세요. 선배들은 충분히 이 돈 받으실 자격 있어요."
"크흐윽...!"
"정말... 정말 고맙다, 막내야! 덕분에 굶어 죽지 않아도 되겠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했는데..."
"데미언,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게! 정말 고맙다, 정말로!"
"참나, 당연한 거 가지고 자꾸 고맙다 하시면... 돈 벌었으면 식구부터 챙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하!"
나는 리트렌 전투에서 입은 큰 부상으로 더는 용병 일을 할 수 없게 된 동료들에게 삼백 골드씩을 은퇴 자금 명목으로 건네주었다.
그 정도 돈이면 왕국 어디서든 자리를 잡고 정착하기에 충분한 돈이리라.
그렇게 용병 일을 은퇴하게 된 다섯 명의 동료에게 삼백 골드씩, 총 천오백 골드를 썼고, 이제 내 수중에 남은 돈은 7천 골드.
마음 같아선 리트렌 전투에서 사망한 동료들의 가족을 찾아 돈을 나눠주고 싶었지만, 용병들이 대개 그렇듯 죽은 동료들 역시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 지 오래였던 터라 가족들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했다.
'...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네.'
그렇게, 은퇴하는 동료들에게 돈을 나눠준 그 날.
"대장."
나는 늦은 밤 홀로 겔베르트의 방을 찾았다.
"어? 네가 뭔 일이냐, 이 늦은 밤에? 둘이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퍽 반가워하면서도 겔베르트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 그러던 놈이 갑자기 그렇게 분위기 잡고 말하니까 무섭다, 이 새끼야."
농담처럼 대꾸했지만,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을 한 내 모습에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겔베르트.
침대 위에 비스듬하게 누워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그래, 할 말이 뭔데?"
"저, 그게..."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려니 엄청나게 부담이 된다.
'대장이 내 말 듣고 어떻게 반응하려나...'
하지만, 내가 꿈꾸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
"... 대장."
"음?"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겔베르트에게 말했다.
"저, 푸른 방패 용병대에서 떠나겠습니다."
***
"..."
용병대 푸른 방패에서 떠나겠다는 나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이 혼란스러울 거다.
아마 배신감도 느끼고 있겠지.
어쩌면 오우거를 잡아 큰돈을 벌고 나니, 내가 '딴 살림' 차릴 생각을 하는 거라 오해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딴 살림이라... 하긴,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푸른 방패를 떠나려는 이유.
그것은 바로, 며칠 뒤 크라벤을 떠나 왕국 북서부에 자리한 다닐렌츠 영지로 출발하는 니나 일행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대장도 같이 갈 수 있으면 진짜 좋을텐데...'
겔베르트뿐만이 아니다.
메이슨과 엔리케를 포함한 나머지 푸른 방패의 식구들도 함께 데려갈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내 계획에 분명히 큰 힘이 될 거다.
'문제는, 내가 니나를 따라 다닐렌츠로 가려는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다는 거지.'
내가 니나와 함께 하려는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내가 알고 있는 <로스트 킹덤> 속 미래 지식의 대부분이 니나의 곁에 있을 때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 원작에서 묘사되는 미래의 사건들은, 당연히 주인공인 니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즉, 니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히든 피스'라고 할 수 있었다.
'... 다닐렌츠 영주가 니나의 아버지인 바일 아르펜 남작과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낸 절친한 친구 사이라 했던가?'
왕국 북서부 변경에 자리한 영지, 다닐렌츠의 영주인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을 찾아온 옛 친구의 딸 니나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더 나아가 그녀를 자신의 양녀(養女)로 삼는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엔 남작은 지병으로 죽게 되지.'
남작은 미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작위와 다닐렌츠 영지는 양녀였던 니나에게로 승계된다.
그리고, 새로운 영주 니나의 치세 아래 다닐렌츠 영지는 어마어마한 부흥을 맞는다.
다닐렌츠의 그 같은 성세엔 군주(君主)로서 서서히 눈 뜨기 시작한 니나의 재능이 크게 한몫을 했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에게 능력 있는 인재들과 여러 행운을 몰아준 작가의 의도가 큰 역할을 했다.
알아서 특급 인재들이 몰려들고, 쓸모없는 땅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귀한 광물이 쏟아져나오는, 그런 판타지적 전개가 이어지는 거다.
'그 결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왕국 변방의 가난한 땅 다닐렌츠는 불과 몇 년 만에 왕국 모두의 주목을 받는 강대한 영지로 떠오른다.'
이처럼 빛나는 성공이 예정된 니나의 미래를 알고 있기에, 나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리트베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니나와 그 일행들의 리트렌 탈출을 도왔고, 함께 험난한 버니언 산맥을 주파하여 단단한 인연의 끈을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의도했던 계획대로였다.
'... 모름지기 인간은 가장 힘들었을 때 곁을 지켜준 사람을 잊지 않는 법이지.'
어렸을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데론과 아드리안 정도를 제외한다면, 지금 이 시점에 니나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이대로 니나를 따라가기만 하면, 훗날 그녀가 다닐렌츠의 주인이 되었을 때 나는 영지 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이다.
'... 근데, 이런 미래를 나만 알고 있다는 게 문제지.'
그래, 그게 문제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눈에 니나 아르펜이란 사람은 생전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옛 친구에게 몸을 의탁하러 떠나는 몰락 귀족 가문의 고아 소녀일 뿐이었다.
내 눈엔 황금 동아줄이지만, 다른 이들의 눈엔 다 썩어 문드러진 새끼줄 정도로 보인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내가 미래를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하, 진짜. 답답하네.'
한편, 내가 머릿속으로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겔베르트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방안을 채우는 지독한 침묵.
먼저 뭐라 말을 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기에, 나는 그저 겔베르트의 앞에 서서 그의 말이 나오기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겔베르트의 입이 열렸다.
"... 그래, 알았다."
그게 끝이었다.
겔베르트는 내게 용병대를 떠나려는 이유도, 목적도 묻지 않았다.
그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럽다 못해 섭섭한 기분마저 들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니... 저한테 왜 용병대를 나가는지 이유 안 물어보세요?"
내 질문을 들은 겔베르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유를 알면, 결과가 달라지냐?"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오래 함께했던 사람이 나간다는데 한번 잡지도 않고 보내주니까 그렇죠."
"섭섭하냐?"
"어... 조금은요?"
섭섭하다는 내 말에 겔베르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허이구, 지랄한다. 야, 섭섭하기로 치면 내가 더 섭섭하지. 사람 구실도 못하던 거렁뱅이 꼬마 놈 길바닥에서 주워다가 이 만큼 키워놨더니..."
"와, 거렁뱅이요? 말이 너무 심하시네!"
"인마, 내가 틀린 말 했냐? 아무튼, 너 그러는 거 아니다. 그렇게 정성껏 키워놨더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꼬맹이 뒤를 따라가려고 해? 어휴, 뒤통수가 다 얼얼하네."
순간, 겔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꼬맹이 뒤를 따라간다'는 표현이 내 귀에 화살처럼 박혀 들었다.
이 양반, 대충 눈치채고 있었구만?
"... 알고 계셨어요?"
"그거 말고 네가 갑자기 용병대를 떠날 이유가 또 있겠냐? 이 자식이 날 무슨 바보로 아나..."
쯧, 혀를 찬 겔베르트가 다시 침대에 등을 대고 눕는다.
그리고는 툭, 던지듯 꺼낸 말이...
"... 잘 생각했다."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겔베르트가 꺼낸 뜻밖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겔베르트는 누운 자세에서 방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막내 너도 잘 알겠지만... 이 바닥에 진짜 용병일 하고 싶어서 들어온 놈은 거의 없어. 대부분이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어서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뛰어든 쪽이지."
"그건... 그렇죠."
"근데 또 용병이 돈을 잘 버냐? 아니지, 돈 벌어봤자 결국 부상 치료하고 무기 바꾸고 괜찮은 갑옷 사는데 돈을 다 써버리거든. 결국 다시 빈털터리가 되지."
"..."
"초짜가 휘두른 눈먼 칼이나 화살에 맞아서 개죽음당하거나 재수 없게 기사 만나서 말발굽에 밟혀 죽는 거, 그게 바로 용병들의 팔자야. 이 일 시작한 놈 백 명 중에 구십구 명은 그렇게 인생 종 치는 거라고."
"음..."
"오래 살아남아 한몫 챙긴 다음 멀쩡한 몸으로 은퇴한다? 푸훗! 용병 중에 그거 해내는 놈 정말 찾기 힘들어. 거의 개천에서 드래곤 나오는 것 같은 소리거든 그게."
그야말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겔베르트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아주 드문 확률로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한몫 단단히 챙기는 놈들이 있어. 그게 누군지 아냐?"
"누군데요?"
"귀족들이 벌인 전쟁에서 눈에 띄어 작위를 받거나 기사로 서임 되는 놈들."
"아..."
"그런 놈들이야말로 용병 바닥에서 모두가 바라는 꿈을 이룬 놈들이지. 지렁이로 태어나 드래곤까지는 아니어도 와이번이나 드레이크 정도까진 올라간 인생이랄까?"
근데 말을 듣다 보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참지 않고 물어보았다.
"근데... 대장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귀족들에게 기사로 서임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으셨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나? 나야 뭐..."
내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는 겔베르트.
뭔가 쓸쓸한 눈빛을 한 채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보는데, 문득 겔베르트의 고향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대장이 다닐렌츠 근방에 위치한 안할트 영지 출신이라고 했던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기사 서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대장이 보여준 쓸쓸한 눈빛의 원인이 고향인 안할트와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에이, 쓸데없는 얘기는 됐고!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아무튼 데미언 네가 그 꼬맹... 어, 아니지. 니나 아가씨 따라가기로 한 건 정말 잘 생각한 거다.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테지만 그 아가씨, 나이는 어려도 진짜 보통이 아니더라."
"그쵸, 확실히 보통 아니죠."
"그 옆에 계신 베르켈 경도 대단해. 실력도 실력인데, 경험 자체가 무시무시한 양반이라... 솔직히 말해서 리트베르크처럼 작은 영지의 군무관으로 머물러 계시기엔 아까울 정도의 인재야.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나 역시 겔베르트의 말에 완벽하게 공감하는 바였다.
안 그래도 데론이 장차 크게 발전할 다닐렌츠의 군무관 자리를 맡아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으니까.
"보자,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춘 영주의 후계자와 백작령 급 대영지의 병력을 맡겨도 충분히 감당할 능력을 갖춘 군무관. 거기에..."
"...?"
"홀로 네임드 급 오우거를 때려잡는 상급 기사의 검까지 더해진다면, 리트베르크의 부활도 꿈은 아니겠네."
"아니, 대장..."
"됐고! 아무튼, 데미언 너는 어디서든 잘할 거다. 예전부터 우리랑 같이 용병 바닥에서 구르긴 아까운 놈이라고 생각했었어. 진심이다."
마지막 말을 하며 뿌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겔베르트.
한참 그 눈빛을 마주하던 나는 참았던 속마음을 털어놓고야 만다.
"저기, 대장."
"음?"
"함께... 가시겠습니까?"
"어딜, 다닐렌츠로?"
"예."
조심스럽게 꺼낸 나의 제안을 들은 겔베르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겔베르트라는 용병 개인의 입장에선 확실히 끌리는 제안이네. 하지만, 푸른 방패의 리더 입장에선 불가(不可)."
"왜입니까?"
"그걸 몰라서 묻냐? 너랑 나, 엔리케의 경우엔 니나 아가씨와 그 일행이 지닌 가능성을 봤지. 하지만, 다른 놈들 눈엔? 그냥 망해버린 귀족 가문의 꼬맹이로 보일 뿐이야."
"그럼, 대장이 나서서 다른 대원들을 설득해주시면..."
"아니, 이제는 그러기 싫다."
"... 이제는, 이요?"
의아한 눈빛으로 묻는 내게 겔베르트가 회한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다.
"우리, 지난번 리트베르크에서 말이다. 평소라면 절대 껴들지 않을 싸움에 명예니 뭐니 같잖은 명분 내세워서 끼어들었었잖아. 그랬다가 결과가 어떻게 됐냐?"
"..."
"애들한테 내 의견을 따라달라고 같잖은 소리 늘어놓으면서 어른 행세하는 그런 짓, 이제 안 하련다. 용병 새끼들이 명분은 뭔 시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용병은 돈 따라 움직이는 게 맞지. 안 그러냐?"
나름의 확실한 이유를 내세우며 나의 제안을 거절한 겔베르트.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마지막 말 때문에 나는 겔베르트와 식구들을 설득할 명분을 얻었다.
"대장, 그럼... 저 용병대 나가는 건 허락해 주시는 거죠?"
"음? 어... 뭐, 허락이고 뭐고가 어디 있겠냐 이 바닥에. 애초에 가입 신청서 쓰고 용병대 들어온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해라, 새끼야."
"흐음, 그렇군요. 그럼..."
터억,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겔베르트가 누워있는 침대 한쪽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 뭐야, 인마. 남자끼리 한 침대에서 잠이라도 자자고?"
"아니요, 뭔 그런 끔찍한 소릴... 이제 용병대장과 소속 대원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좀 더 수평적이고 편한 관계에서 대화를 나누고자 앉은 거예요. 예를 들면..."
"...?"
"실력 좋은 용병대에게 중요한 의뢰를 맡기기 위해 찾아온 고객과 용병대장의 관계 같은?"
"고객과 용병대장? 갑자기 그게 뭔 개소리야?"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겔베르트에게, 나는 한층 여유로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자, 푸른 방패 용병대에게 정식으로 제안합니다. 나를 포함한 니나 아르펜 일행을 왕국 북서부의 다닐렌츠까지 호위해주세요. 의뢰 완수 금액은... 뭐, 달라는 대로 드릴게요. 저 돈 많은 거 아시잖아요."
"너 이자식..."
"어때요, 이 제안, 받으실 거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들은 푸른 방패의 용병대장 겔베르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흡족하게 미소 짓는 나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2)
"정말요? 정말 저희랑 다닐렌츠까지 같이 가는 거예요? 데미언 오빠도 같이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와아, 정말 잘 됐다!!!"
나를 포함한 푸른 방패 전 인원이 자신들과 함께 다닐렌츠로 향한다는 말을 들은 니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녀석, 이럴 때 보면 또 되게 어린애 같단 말이지.
아, 참고로 나는 푸른 방패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했다.
애초에 용병대를 떠나겠다고 말을 꺼낸 거 자체가 겔베르트와 동료들을 돈으로 사서(?) 다닐렌츠로 데려가기 위한 일종의 블러핑이었다.
얘기가 다 잘 된 지금에 와선 굳이 용병대를 나갈 필요가 없게 된 거지.
"흐음, 우리 입장에서야 정말 좋은 일인데... 거 참 희한하구만. 텔마르크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용병대가 갑자기 다닐렌츠로 가게 된 이유가 뭔가?"
우리가 함께 간다는 말을 듣고 마냥 좋아하는 니나와 달리 데론은 갑작스럽게 결정된 푸른 방패의 동행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과연 산전수전 다 겪어본 베테랑다운 침착함.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비해 다 준비된 변명 거리가 있었다.
"아, 베르켈 경. 예전에 한 번 말씀을 드렸었는데... 제가 사실, 왕국 북부 출신입니다."
"아, 그랬지. 겔베르트 자네가... 그, 안할트 영지 출신이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기억하시는군요."
겔베르트의 입에서 갑자기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데론이 뭔가 눈치를 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야 알겠군. 혹시, 자네 용병대의 주요 활동지를 고향 근처로 옮기려는 건가?"
우리가 바랐던 그대로의 말을 꺼내주는 데론의 모습에, 겔베르트가 반색하며 대답한다.
"하하하! 역시 연륜은 못 속이겠군요. 맞습니다. 이번에 부하 녀석들과 함께 북부로 이동해서 자리를 잡아볼까 합니다. 오우거 잡고 받은 돈이 꽤 많은지라, 정착 자금도 충분합니다."
"으흠, 그런 사연이라면... 이해가 가는구만."
"예, 그렇게 된 거고... 그,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혹시 저희가 다닐렌츠 쪽에 자리를 잡는다고 하면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무래도 높으신 분의 도움이 있으면 그쪽 용병 길드와도 사업 얘기하기가 편해져서요."
"다닐렌츠는 나 역시 초행일세. 하지만... 그곳 영주님께서 내가 모셨던 바일 남작님과 아주 절친했던 사이라고 하시니, 말 꺼낼 기회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내 노력해봄세."
"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라니, 당연한 것을. 이 베르켈, 비록 늙고 볼품없으나 생명의 은인을 위해 노력할 양심 정도는 가진 사람이라네. 허허허!"
겔베르트가 줄줄 쏟아내는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간 데론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의 제자인 아드리안 역시 실력이 검증된 든든한 '형님들'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냥 기쁜 눈치다.
그리고, 여기 누구보다 기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 야, 막내야."
"예, 조장."
"우리 다닐렌츠 도착하면 그날 바로 백 골드씩 나눠주는 거 맞지? 확실한 거지?"
"아이, 똑같은 소릴 몇 번을 하게 만들어요? 속고만 살았나..."
"흐흐,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다 인마. 백 골드라니, 내 인생에 그런 거금을 한꺼번 받을 일이 또 있을까!"
"절대 안 까먹을 테니까, 다른 대원들한테도 니나 아가씨 앞에서 괜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하세요. 우리는 지금 의뢰 수행 차 다닐렌츠에 가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는 방향이 겹쳐서' 함께 가는 겁니다."
"알았어, 인마.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대장 겔베르트를 포함한 푸른 방패 용병대 12명 전원이 왕국 북서부 다닐렌츠로 향하는 니나의 여정에 합류했다.
***
백작령 바덴하임의 주도(主都),
그라이츠(Greiz)_
"... 리트베르크 남작의 딸이 살아있다고?"
부하의 보고를 들은 바덴하임 백작 헤르만 바이츠제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꼬마 년이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을 노릇인데, 목격된 장소가 텔마르크다? 그게 말이 되느냐?"
"그게... 저희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일단은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은 텔마르크의 주도 크라벤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
퍼억!
"커흑!"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금속 장식을 부하의 얼굴에 집어 던진 백작이 고성을 토해낸다.
"이런 개 버러지 같은 놈이! 내가 지금 그걸 물었느냐? 그 꼬마 년이 어떻게 리트렌을 탈출해서 그 먼 텔마르크까지 갔는지, 그것을 물은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부족했습니다!"
백작이 던진 물건에 맞아 이마가 쭉 찢어진 부하가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거듭 고개를 숙인다.
평소 아랫사람 대하기를 물건 다루듯 하는 백작의 가혹한 성품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각하, 노기를 거두시지요. 귀하신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입니다."
씩씩거리는 백작을 만류하는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
언제나 그렇듯 조금 긴듯한 금갈색의 머리를 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단장한 묘한 눈빛의 사내.
바로, 백작의 오른팔이자 바덴하임 영지의 명실상부한 2인자로 불리는 알프레트 아이케였다.
그는 눈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내의 모습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어쩌면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한 광경을 하도 자주 봐서 무감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리석은 대답으로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다니... 너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만 나가보아라."
"예, 예! 알겠습니다.!"
자신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이마를 싸쥐고 물러나는 부하의 뒷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알프레트.
철컥-
그가 빠져나가고, 백작의 집무실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알프레트가 간사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연다.
"각하가 아끼시는 바덴하임의 사자가 이번엔 실수를 좀 한 모양입니다. 분명 저희에겐 남작의 딸이 죽었을 거라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신의 정적(政敵)을 흠집 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게, 이제 사자도 늙은 것인가? 이런 실수를 할 녀석이 아닌데... 쯧!"
알프레트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차는 백작이었다.
"문제는, 각하를 시기하는 왕국 내 세력들이 그 꼬마 계집을 데려다 체스판의 말처럼 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당장 텔마르크 남작이 이번 일을 바이펠베르크 백작에게 보고한다면..."
"바이펠베르크 백작? 허, 디트리히는 그런 일에 크게 관심을 둘 인물이 아니야. 밤이나 낮이나 그저 검에만 미쳐있는 작자 아닌가? 다만... 그 아들놈은 좀 문제가 되겠군."
"아, 로이스 자작 말씀이시군요."
알프레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백작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로이스인가 하는 그놈. 칼질만 잘하지 정치 쪽엔 영 관심 없는 제 애비랑은 달라. 아직 나이도 어린놈이 눈동자에 욕심이 드글드글해. 제법이야."
"제법이라고는 하나 그 또한 아비의 후광에 깃댄 잔재주 아니겠습니까?"
"아비의 후광, 가문의 저력... 그런 게 있어도 제대로 못 써먹는 놈들이 태반이야. 손에 쥐고 태어난 것을 잘 쓰는 것도 능력이지."
그 말을 하는 백작의 눈빛에 스치는 씁쓸한 기색.
그 눈빛이 영 자신의 기대에 차지 않는 백작의 자식들 때문임을 눈치챈 알프레트가 재빨리 대화의 방향을 바꾼다.
"크흠, 아무튼 빨리 수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퍼져 각하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더 커지면, 리트베르트 병탄 작업이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클클, 괜한 말이 퍼져서 이 늙은이의 면을 깎기 전에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흐음... 그럼 어찌할까? 이 늙은이는 머리가 굳어서 그런지 영 생각이 나질 않는데... 자네에게 좋은 방법이 있는가?"
툭, 툭-
집무실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알프레트를 바라보는 바덴하임 백작.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상대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의뭉스러움.
백작을 모시는 가신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하지만 알프레트 아이케는 수많은 정적을 물리치고 명실공히 백작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자리에 오른 사내.
탐욕과 잔혹함이 흐르는 주군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알프레트는 그가 듣고 싶은 말을 꺼낸다.
"그 꼬마 계집이 더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알아서 처리한다라... 어떻게?"
집요하게 확실한 대답을 원하는 백작에게 알프레트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겠지요. 본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
크라벤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아흐레 만에 바이펠베르크 영지의 주도 쾨니히슈타인(Königstein)에 도착했다.
"와아아! 성벽이 진짜 높아요!"
리트렌이나 크라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쾨니히슈타인의 드높은 성벽을 본 니나가 한껏 올라간 목소리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놀란 것은 니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푸른 방패의 몇몇 동료들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성벽의 위용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씨, 단체로 이러면 너무 촌뜨기 티 나는 거 아닌가?
"으와아! 진짜 개쩐다! 뭔 놈의 성벽이 이렇게 높냐? 거의 크라벤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은데?"
"에이, 조장! 두 배는 좀 너무 갔다! 한 1.5배 정도?"
"그게 그거지 새끼야! 아무튼 규모 작살난다는 얘기야!"
"아까 지나올 때 성문 두께 봤어요? 와, 나는 진짜... 충차로 계속 때려 박아도 끄떡도 안 하겠던데?"
"아우, 둘 다 좀! 조용히 좀 해요! 창피해 죽겠네, 진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계속 티 낼 거예요?"
나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엔리케와 다른 동료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한편, 일행 중엔 이미 쾨니히슈타인에 와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었으니...
바로 니나 일행의 정신적 지주, 데론 베르켈과 푸른 방패의 리더 겔베르트였다.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 두 사람의 눈엔 다른 사람들에게선 볼 수 없는 여유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쾨니히슈타인의 성벽은 언제봐도 어마어마하구만. 허허, 참으로 장관이야."
"베르켈 경께선 쾨니히슈타인에 자주 와 보셨습니까?"
"자주까지는 아니지만, 젊었을 적 몇 번 와 보았다네. 나이 먹어서는 서너 번 정도?"
"어휴, 역시 베르켈 경의 경험은... 저는 평생 두 번 와본 게 끝입니다."
"허허,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자네도 알겠지만, 쾨니히슈타인이 크기만 으리으리하지 딱히 볼 것은 없어. 도시의 태생 자체가 군사 요새로 지어진 곳이다 보니 찾아갈 명소 같은 게 별로 없다네. 보게나, 얼마나 분위기가 칙칙한가?"
"하긴, 저도 처음 쾨니히슈타인에 왔을 땐 열심히 무기상들만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대신 여기서 파는 무기와 갑옷들의 품질은 왕국 전체에서도 손꼽힌다네. 왕국 북부에 있는 바페슈타트 정도를 제외하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을 찾기가 힘들 거야."
데론의 말 그대로였다.
쾨니히슈타인은 군사적 목적으로 세워진 요새가 오랜 세월 발전해 도시가 된 곳.
당연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군인이거나 군인의 가족이었고, 혹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곳이니, 당연히 도시 내에서 팔리는 무기나 갑옷의 품질도 훌륭할 수밖에.
그리고 나는, 우리 일행의 전력을 강화해줄 이런 훌륭한 기회를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자,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십시오!"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도시 광장의 한 가운데, 나는 큰 소리로 일행들을 불러모았다.
"뭐야, 뭔데 그래?"
"데미언, 무슨 일 있어?"
"왜? 맛있는 거라도 사주려고?"
"으하하하! 그거 좋네!"
왁자지껄 떠드는 동료들의 목소리에,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다는 말, 다들 아시죠? 좋은 무기와 갑옷으로 이름 높은 쾨니히슈타인에 왔는데, 명색이 칼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빈손으로 떠나겠습니까? 안 그래요?"
"어? 데미언 너 혹시..."
내가 무슨 의도를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 얼추 감을 잡은 동료들의 눈에 기대감이 차오르는 게 보인다.
그리고 내 입에선, 그 기대감에 걸맞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한도는 1인당 100골드, 제한시간은 1시간. 그 안에서 뭐가 되었건 다 제가 쏩니다. 자! 뭐하십니까? 빨리들 움직이세요!"
바이센 평야의 혈투 (1)
1457골드.
단 한 시간 만에 내가 쾨니히슈타인 무기상 거리에서 쓴 돈의 액수였다.
'진짜 돈을 물 쓰듯 한다는 게 이런 건가...?'
이 정도 금액이면 아마 내가 자란 크라벤 빈민가를 기준으로 거리 전체를 몇 년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깝지 않은 투자였어.'
지닌 바 실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플 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푸른 방패의 동료들.
개개인의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몇 년 동안 함께 싸우며 길러온 끈끈한 조직력까지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평소엔 감히 살 생각도 할 수 없던 수준의 고가 장비들을 맞춰주었다.
당연히, 동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야! 이거 봐봐! 크으, 때깔 죽이지 않냐?"
"어우, 그놈의 도끼 사랑은 진짜... 넌 용병이 아니라 나무꾼이냐? 전장에 나선 사나이라면 당연히 검을 써야지. 나처럼!"
"근데 비싼 거라 그런가? 느낌이 확실히 다르네... 검이 무게 중심이 잘 잡혀서 그런지 무게가 별로 안 느껴져."
"갑옷도 그래. 몸에 아주 쫙 달라붙는 느낌이... 크으!"
"야 이 새끼들아, 새로 산 장비 자랑할 시간에 막내한테 고맙다는 말부터 해라!"
"어어, 맞네. 인사부터 해야지. 데미언, 진짜 고맙다!"
"내가 용병 일 시작한 후로 이렇게 좋은 갑옷은 처음 입어본다. 고맙다, 막내야!"
"데미언 만세! 네가 짱이다!!!"
동료들의 격한 환호와 감사의 인사가 쏟아졌다.
좋은 무기는 적은 힘만으로도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게 하고, 좋은 갑옷은 전장에 나선 용병들에게 여벌의 목숨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제 푸른 방패 전원이 그런 좋은 무기와 좋은 장비를 갖추게 되었으니, 용병대의 전력이 급상승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리라.
"대원들의 처우를 위해 이렇게 개인 사비를 털다니... 악덕 용병대장인 누구와는 다르다! 데미언을 푸른 방패의 대장으로 추대하자!!!"
"데미언을 대장으로! 대장으로오!!!"
"악덕 용병대장은 물러가라! 물러가라아!"
"물러가라아!"
"아잇, 엔리케!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요!"
늘상 그렇듯 엔리케는 이번에도 선 넘는 소리를 하며 동료들을 선동하다 나한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문제는...
"돈 잘 쓰는 데미언을 푸른 방패의 대장으로! 대장으로오!!!"
... 나를 대장으로 추대하자는 사람들 틈에 겔베르트도 끼어 있었다는 거다.
"뭐야?! 대장은 왜 그 말에 같이 찬성하고 있는 건데요?"
"... 크흠, 봤어?"
싸움터가 아닌 곳에서 보면 그냥 얼간이들 집합소 같은 푸른 방패의 식구들이었다.
"야, 근데... 우리야 좋은 장비 사줘서 좋긴 한데, 데미언 너 괜찮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막내한테 좀 미안하긴 하다. 야, 이거 나중에 우리가 돈 벌어서 갚자. 이게 한두 푼도 아니고... 그래야 하지 않겠냐?"
갑작스러운 큰 지출에 놀란 동료들이 나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했지만, 그 정도 돈은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뭐... 돈이야 또 벌면 되니까.'
이미 내 머릿속엔 다닐렌츠 영지에서 돈을 벌 방법이 열 가지도 넘게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쓴 돈은 그 방법들도 벌어들일 돈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
'... 라기엔 좀 많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내 수중에 있는 돈과 앞으로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큰 부담이 아니라는 얘기다.
동료들의 무기와 갑옷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면서 겸사겸사 니나에게도 갑옷을 하나 사주었다.
소매가 없는 조끼 형태의 가죽 갑옷이었는데, 재질이 남달랐다.
바로, '대형종 몬스터 등급의 문지기'라 불리는 트롤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이었던 것!
몬스터 가죽 중 최고의 내구성을 자랑하는 오우거 가죽만큼은 아니었지만, 트롤의 가죽도 상당히 질기고 튼튼했다.
'기본적으로 오크나 고블린 같은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놈이 트롤이니까...'
트롤의 가죽 역시 어지간한 창칼이나 화살 공격 정도는 뚫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평범한 병사들은 어림도 없고, 적어도 기사급 실력자 정도는 되어야 검으로 가죽을 베어낼 수 있을 거다.
'그래서인지, 가격도 엄청 사악했지...'
그 조그마한 조끼의 가격이 무려 40골드나 했다.
오늘 산 물건 중에 제일 비쌌지 아마?
"오빠,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는데..."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고마워하는 니나의 모습을 보니 좋은 선물을 해준 것 같아 뿌듯했다.
그래 니나야, 오빠가 널 이렇게나 생각한단다.
한편, 나는 데론에게도 좋은 검 한 자루를 선물했다.
데론은 우리 일행의 최연장자이자 정신적 지주였고, 니나에겐 친할아버지 같은 분.
더불어 레벨 50이 넘는 막강한 실력을 지닌 기사였기에, 투자가 아깝지 않았다.
데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검도 나쁘지 않은 검이었다.
애초에 한 영지의 군무관씩이나 되는 양반이 싸구려 칼을 차고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버니언 산맥에서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썰어내느라 데론의 검은 날이 많이 상해있었고, 이참에 아예 새 검을 마련해주기로 했다.
"허! 이런 귀한 선물을... 정말 고맙네, 데미언! 잘 쓰겠네."
나에게 검을 선물 받은 데론은 진심을 감격한 듯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에게 선물한 검의 가격은 25골드로, 등급은 고급(Advanced)이었다.
하지만 검을 살펴본 데론은 거의 희귀(Rare) 등급에 준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검이라고 했다.
아마 희귀 등급 검을 만들려다가 잘 안 된 실패작 정도가 아닐까?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받은 게 대체 얼마만 인지... 묘한 기분이 드는군."
"하하하,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선물을 해드려야겠네요."
"아니지, 다음엔 내가 자네에게 선물을 줘야 어른으로서 면이 서지 않겠나? 이 늙은이에게도 멋 부릴 기회를 좀 주시게나, 허허허!"
나이로 치면 거의 손주 뻘인 나였지만, 데론은 늘 나에게 존댓말을 썼다.
특히, 내가 오우거를 때려잡은 후에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나를 무인(武人)의 한 사람으로 존중하겠다는 의도일 터.
대우받는 것 같아서 좋긴 한데, 나이도 훨씬 많은 어르신이 내게 존대를 하니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니나의 경우처럼 조손지간으로 지내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그래, 아직은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천천히 하자. 천천히!'
한편, 겔베르트는 새로 무기를 사는 대신 원래 쓰던 바스타드 소드를 수리해서 계속 쓰기로 했다.
써오던 검에 너무 익숙해져서 다른 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다나 뭐라나?
그 덕분에 나는 원작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게임 <로스트 킹덤>만의 오리지널 설정 하나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
짧은 겨울 해가 슬슬 산 너머로 향하는 시간.
다른 일행들은 모두 도시 광장 근처에 잡은 숙소에서 쉬고 있었고, 나와 겔베르트만 따로 길을 나선 상황이었다.
깡! 깡! 까앙!
가게 안팎으로 벌겋게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코끝에 진하게 느껴지는 쇳가루 냄새와 한겨울의 추위를 잊게 만드는 화로의 열기가 가득한 곳.
우리는 쾨니히슈타인 무기상 거리에 자리한 어느 대장간에 와 있다.
"오호... 이게 바로 대장이 말한 '그거' 군요?"
"어, 맞아. 처음 보냐?"
"예, 처음 보네요. 텔마르크 쪽 대장간에선 이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럴만하지. 기본적으로 이걸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최소 달인(達人)급 대장장이는 되어야 이걸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걸?"
"아하?"
"근데 그 달인급 대장장이가 그렇게 흔하지가 않아. 이 넓은 왕국 다 뒤져봐야 한 이백 명 될까?"
"왕국 전체에 이백 명이라... 적긴 하네요."
"그나마 여기 쾨니히슈타인쯤 되니까 달인급 대장장이가 운영하는 대장간을 쉽게 찾는 거지, 다른 도시엔 거의 없어."
"그렇구나..."
겔베르트의 설명을 들으며 신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나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물건 자체가 내가 만들어낸 게임 <로스트 킹덤>의 고유한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손에 들려 있는 둥글둥글한 생김새의 검은 돌.
이것이 바로, 게임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무기를 강화하는데 쓰이는 물질인 '강화석(强化石)'이었다.
"이거 크기에 비해서 무게가 꽤 나가네요. 이름만 돌이지, 그냥 금속 덩어리 같아요."
"그렇지 뭐. 그러니까 쇳덩이랑 섞였을 때 더 튼튼해지는 거 아니겠냐?"
바로 그때, 대장간 안쪽에서 열심히 망치질 중이던 중년 사내 하나가 우릴 보고 말을 걸어왔다.
"허헛, 강화석을 만지작거리시는 걸 보니 쓰는 무기에 밥 주러 오신 모양이오?"
"맞습니다. 여기 주인장 되십니까?"
"그렇소만?"
"검 수리를 좀 맡기러 왔습니다. 수리를 맡기는 김에, 밥도 좀 주고..."
대장간 주인과 겔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밥 준다'는 말은 무기를 강화할 때 쓰는 업계의 은어였다.
무기에 강화석을 '먹인다'는 의미에서 나온 표현이었다.
"그럼... 미안한데, 조금만 기다려주쇼. 하던 작업이 좀 남았거든. 이게 쇠가 식으면 안 되는 거라... 너무 오래는 안 걸릴 거요."
"예,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십쇼."
"고맙소. 그럼, 잠시만."
깡-! 깡-! 까앙-!
그렇게 대장간 주인이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는 사이, 나는 대장간 매대에 전시된 무기와 갑옷들을 이것저것 구경했다.
달인급 대장장이가 운영하는 대장간답게, 일반적인 무기상에선 보기 힘든 고급 등급의 장비들이 많이 구비 되어 있는 게 보였다.
"여기 주인장, 감각이 좋으시네요. 만드는 무기의 성능 자체는 경험으로 끌어올릴 수 있어도 디자인 쪽은 타고 나야하는데..."
"오, 그래? 여관 주인이 추천한 곳이라 반신반의하면서 왔는데 다행이다."
"추천 성공이네요. 그나저나..."
눈앞의 검 한 자루를 들어 살펴보는 척하며 나는 겔베르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있는 대장간 맞은편, 검은색 옷 입고 있는 남자 보여요? 후드 걸친 놈이요."
"음? 어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겔베르트를 다급하게 말렸다.
"정지! 쳐다보지 마세요, 눈치채니까."
"어? 어어..."
"저 새끼 아까 우리가 여관에서 나올 때부터 따라온 놈이에요. 처음엔 그냥 가는 방향이 비슷한가 싶었는데... 아니에요. 우리가 대장간에 들어온 후엔 더 안 움직이고 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중이거든."
내 설명을 들은 겔베르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꼬리가 붙은 건가? 바덴하임?"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그렇겠죠?"
"젠장,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근데 예상했잖아요? 니나 아가씨가 텔마르크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바덴하임 측에 들어갔을 테니, 그놈들도 뭔가 움직임을 보일 테죠."
"젠장, 그래도 너무 빠른데... 그럼, 저놈은 소속이 어디지? 당장 바덴하임 쪽 사람들이 여기까지 투입된 건 아닐테고..."
이를 악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겔베르트.
그런 그에게, 내가 간단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모르면, 잡아서 물어보면 되죠."
"뭐?"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자, 잠깐 데미언! 작전을 짜서 나랑 같이 움직이..."
하지만 겔베르트가 손을 뻗었을 때,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터억-
"허억?"
대장간 밖, 무기상 거리 한쪽에서 서성이며 나와 겔베르트를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사내.
그는 앗, 하는 사이 자신의 눈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코앞에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미행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가 품에서 무기를 꺼내려던 찰나,
터억-
그보다 앞서 움직인 내 왼손이 사내의 오른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었고,
콰악!
"커흡!!!"
사냥에 나선 독수리의 발톱처럼 쏘아진 내 오른손이 놈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뒤, 나는 사내를 밀어젖히며 근처의 골목으로 향했다.
"... 지금부터 아무 소리도 내지 마. 넌 내가 허락할 때만 말하는 거야. 안 그러면..."
꽈아악-
"꺼흐윽...!"
나직한 목소리의 협박과 함께 점점 강해지는 오른손의 악력.
숨이 막히다 못해 단숨에 목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압력이 사내의 목에 가해졌다.
"... 이대로, 목을 부러뜨리겠다. 내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겠지?"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를 바삐 굴리며 나에게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만하면 됐겠다 싶어, 놈의 목을 잡았던 오른손을 풀어주었다.
"쿨럭! 쿨럭! 커흐으으읍!"
살았다 싶어 숨을 크게 들이쉬는 사내.
바로 그 순간,
퍼억!!!
"끄허억...!"
놈의 배에 내 오른손이 틀어박혔다.
"꾸웨에에엑...!"
아무리 살살 쳤다고 해도 상급 기사에 경지에 다다른 이의 주먹질이 일반 사람과 같을 리 없다.
주먹질이 아니라 발로 걷어차인 것 이상의 고통을 느끼고 있을 테지.
"끄어어어... 커헙!"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며 바닥으로 엎어지려는 사내의 머리칼을 잡아 강제로 다시 일으켰다.
"꺼흐윽! 컥! 사... 살려 주십시오!"
"... 지금부터 묻는 말에 솔직하고, 성실하게 대답해라.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에겐 언제나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였을 나의 녹안(綠眼).
"... 네놈 머리통을 잡아 뜯어서 대장간 화로에 넣어버릴 거다. 내 말, 알아들었냐?"
하지만, 눈앞의 사내에겐 꿈에서 다시 볼까 무서울 사신(死神)의 눈동자로 기억될 것이다.
바이센 평야의 혈투 (2)
"끄르륵..."
털썩!
머릿속 정보를 다 토해낸 녀석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진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나에게서 뿜어진 강렬한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정신을 잃은 것이다.
뭐, 그전에 기절할 만큼 충분히 많이 맞기도 했지.
"젠장..."
놈에게서 얻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게 붙잡힌 이 녀석은 자신을 쾨니히슈타인 도둑 길드에 소속된 조직원이라고 고백했다.
며칠 전, 우리 일행의 인상착의 정보를 지닌 익명의 사내가 도둑 길드를 찾아와 미행을 의뢰했단다.
그 익명의 사내가 어디서 온 놈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황금백의 부하일 테지.'
백작의 추적이 따라붙는 상황은 니나가 텔마르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다.
하지만, 그 추격의 속도가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하긴, 황금백 정도면 이곳저곳에 깔아놓은 정보망의 수준이 대단하겠지.'
왕국 전체까지는 아닐지라도 '왕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포나우 강 이남 지역, 즉 바덴하임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왕국 남부 지역 정도는 백작의 정보망 아래 있을 것이다.
무릇 구축된 정보망의 수준이란 얼마나 많은 예산을 투입하느냐에 달린 것.
왕국 제일의 부호(富豪)라 불리는 바덴하임 백작이 만든 정보망이라면 얼마나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쾨니히슈타인에서 하루 이틀 정도는 정비를 하고 움직이려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바로 도시에서 빠져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때,
'...!'
넓게 펼쳐진 나의 감각에 걸려든 누군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맞은편 골목 끝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나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빼는 것이 보였다.
"어딜!"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턱, 턱!
단 두 번의 도약으로 골목길 담벼락 위로 올라선 나는 내 몸에 잠재된 검성(劍聖)의 감각이 일러주는 대로 도망치는 적을 추격했다.
'확실히, 상급 기사의 경지에 이른 뒤 감각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어!'
범위만 넓어진 것이 아니다.
감각 자체가 더욱 예민해지고, 또한 정밀하게 변했다.
즉, 지금 발바닥에 땀 나도록 도망치는 저놈은 나의 추적을 절대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휘이이잉- 턱!
일부러 놈이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기다리다 모습을 드러냈다.
"흐어억!"
철퍼덕!
갑자기 눈앞에 뚝 떨어진 내 모습에 기겁한 놈이 뒷걸음질을 치다 못해 발이 엉키며 바닥에 나자빠졌다.
제 깐에는 나를 따돌렸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네깟놈이 도망쳐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이 자식아."
"에...?"
내 입에서 나온 알 수 없는 소리에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짓는 상대.
그런 녀석에게, 나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
***
"데미언, 어떻게 됐..."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내 모습을 보자마자 질문을 던진 겔베르트가, 내 손에 묻은 붉은 혈흔을 보며 말끝을 흐린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한 내가 빙긋 웃으며 손에 묻은 피를 옷에 문질렀다.
"아, 이거... 미행 붙었던 놈이랑 대화 좀 하느라고요."
"... 대화가 많이 격했나 보네."
"그러게요, 너무 반가워서 감정이 격해졌나 봐요. 두 놈이나 따라왔던데."
"농담은 이쯤하고. 그래, 뭐 하는 새끼야? 백작이 붙인 놈들이 맞아?"
"아니요, 백작이 붙인 놈은 아닌데... 따지고 보면 백작 때문에 우리랑 엮인 건 맞아요. 쾨니히슈타인 도둑 길드 조직원이랍니다."
"도둑 길드?"
내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 백작 쪽에서 길드에 의뢰를 넣었군. 그래서 꼬리가 붙은 거고?"
"맞습니다. 근데, 정확히 우리가 누군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저한테 붙은 놈, 둘 다 너무 실력이 보잘것없는 놈들이었어요. 저나 대장의 수준을 알았으면 이딴 놈들 못 붙이죠."
"그럼 백작 쪽에서 의뢰 넣은 도둑 길드에 자기들이 아는 정보를 다 풀지는 않았다는 얘긴데... 하긴, 백작 쪽에서도 조심스럽겠지. 너무 정보를 많이 풀었다가 자기들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할 테니."
"예, 그렇겠죠."
겔베르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펠리노어 왕국을 대표하는 대귀족 중 하나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근거지인 쾨니히슈타인.
이곳에서 바덴하임의 첩자들이 도둑 길드를 사주해 음험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황금의 힘이 대단하다곤 하나, '왕국제일검'의 분노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겠지."
"예, 그렇죠."
왕국제일검(王國第一劍).
한 시대를 기준으로, 펠리노어 왕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검사 중 단 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영광스러운 호칭.
당대의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는 이가 바로 이곳 백작령 바이펠베르크의 주인인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Dietrich Grönemeyer)였다.
금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그 외모적 특성에 기인한 '벽안무적(碧眼無敵)'이란 별칭으로도 유명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맞설 자 없는 어마어마한 검술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 대단한 실력을 인정받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왕족들의 경호를 담당하는 왕실 근위대의 수장으로 부임했고, 그 후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도 전혀 무뎌지지 않은 그의 검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왕실의 위엄을 상징한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 왕국제일검의 분노도 무섭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국왕 폐하의 최측근이라는 게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맞아. 안 그래도 리트베르크 전쟁 때문에 바덴하임 백작을 곱게 보지 않는 귀족 사회의 시선이 많을 텐데, 여기서 국왕의 최측근까지 건드려버리면 불 난데 기름 붓는 꼴이 될 테니..."
거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 대장간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흠, 큼! 거, 중요한 대화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데... 나 이제 하던 일 끝났는데?"
"아, 주인장.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뭐, 그쪽도 기다렸으니까... 그래, 밥 먹일 녀석 얼굴 좀 봅시다."
"한 번 봐주시죠. 이놈입니다."
겔베르트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검집째로 끌러 주인장에게 내어주었다.
스르릉-
겔베르트의 검을 검집에서 뽑아내 상태를 살피는 주인장.
잠시 후,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아니, 이거... 보아하니 고급 등급도 아니고, 그냥 일반 등급의 검인데 이걸 굳이 수리해서 강화할 필요까지 있나? 그냥 여기 있는 고급 등급 검을 하나 새로 사는 게 더 간단할 듯 한데?"
"그게... 좀 사연이 있는 녀석이라 그렇습니다."
겔베르트의 대답을 들은 주인장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사연이 있는 검이라... 그러면 뭐, 어쩔 수 없구만."
"수리에 강화까지, 작업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지금 이래저래 작업이 밀린 게 있어서,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걸릴 거요. 그나마도 장담 못 하지."
"사흘... 하, 너무 늦는데."
바덴하임 백작의 추격이 따라붙었다는 걸 확인한 상황이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겔베르트였다.
"어떻게, 웃돈을 좀 드릴 테니 더 빠르게 안 되겠습니까?"
"웃돈? 허, 얼마나 주시려고 그런 소릴... 일단 수리비에 강화 작업 추가하는 것까지 해서 30실버요. 거기에 웃돈으로 한 5실버 정도만 얹어주면, 이틀까진 어떻게 당겨보겠..."
턱-
"...?!"
주인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싯누런 금화 한 개를 올려주며 말했다.
"저희가 좀 바빠서, 일단 선금으로 1골드. 내일 아침 일찍까지 작업 마쳐주시면 1골드를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아, 대신 날림으로 하시면 안 되고, 꼼꼼하게. 가능하시겠습니까?"
"..."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진 금화를 잠시 바라보던 주인장이 한껏 공손해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일 아침 7시까지 준비해놓겠습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
"그럼, 일단 나는 숙소로 돌아가 있으마. 가서 일행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라고 전할 게."
"예, 대장. 저는 도둑 길드를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위치는 아까 그놈들에게 물어 알아뒀습니다."
내가 도둑 길드를 찾아간다고 하자 바로 걱정스러운 눈빛이 된 겔베르트다.
"혼자 괜찮겠냐? 내가 숙소 가서 몇 놈 추려서 나올까?"
"걱정마세요. 그깟 도둑놈들 소굴이 위험해봤자 '치페른의 폭군'만 하겠어요?"
내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하! 맞네. 순간적으로 네가 어떤 놈인지 잊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고, 숙소에 가셔서 기다려주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알았다. 그래도... 조심해라."
"예. 대장."
겔베르트와 헤어진 뒤, 나는 앞서 잡아 족친 조직원 두 놈에게서 알아낸 도둑 길드 본부의 위치를 향해 이동했다.
서로 다른 두 놈에게서 나온 대답이 같았으니, 아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누가 도둑놈들 소굴 아닐까 봐 길드 본부의 위치는 도시 빈민가 쪽이었는데, 내가 살던 크라벤 빈민가와 비슷한 냄새와 분위기가 느껴졌다.
'역시, 어딜 가든 없이 사는 동네 풍경은 비슷하구나.'
여기 오는 길에 시장에서 3실버를 주고 구매한 허름한 로브의 모자를 손끝으로 당겨 써 얼굴을 가렸다.
혹시라도 내 얼굴을 알아본 도둑 길드 조직원이 있을까 우려한 탓이다.
'뭐, 알아본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귀찮아서 그런다, 귀찮아서.
"하... 한 푼만 줍쇼. 한 푼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구걸하는 거지를 지나쳐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맴도는 거리를 걸었다.
이토록 추운 날씨에 집도 없이 길가에 나앉은 잿빛 얼굴의 사람들.
그들의 주변엔 먹을 것 없고, 가진 것이 없어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사람들 특유의 음습한 기운이 가득했다.
익숙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빈민가 특유의 분위기였다.
'분위기 참... 개떡 같네.'
머릿속에 감도는 씁쓸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도둑 길드 본부로 추정되는 건물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 저기군.'
빈민가 한가운데 자리한 2층짜리 석조 건물.
그 건물을 중심으로 건장한 체력을 지닌 대여섯 명의 사내가 사각(死角)이 없도록 배치되어 주변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보았던 빈민가 주민들과 다르게 어지간히 잘 먹고 지내는 듯 때깔이 좋았다.
"어이, 너 뭐야?"
수상한 놈이 나타나 지네 건물로 다가오자 경계하는 녀석들.
그중 민머리에 험악한 얼굴을 한 녀석 하나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 새끼. 얼굴만 봐도 아주 적성을 잘 찾은 것 같다.
'그래도 밥값은 한다 이거지?'
피식, 속으로 웃음을 터트린 나는 표정을 굳히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길드에 의뢰를 하러 왔소."
"의뢰? 너 누구 소개로 왔어?"
생각보다 성실한(?) 문지기의 태도에 작게 감탄하면서, 나는 지금 무기상 거리 골목길 어딘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녀석의 이름을 댔다.
"자말에게 소개받았소. 이리 가면 된다고 들었는데..."
짤랑-
내 주머니에서 나온 은화 몇 개가 나를 가로막은 사내의 손으로 전해진다.
그 모습을 본 주변의 다른 사내들이 '아' 하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저거 내가 먹었어야 하는데!'
뭐, 대강 이딴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한편,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표정이 밝게 바뀐 민머리가 슬쩍 길을 터주며 말한다.
"커흠, 흠! 손님이셨군. 들어가시오. 문 열자마자 정면에 테이블이 하나 보일 텐데, 그놈이랑 대화하면 될 거요."
"고맙소."
민머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철컥, 끼이익-
낡은 나무문 특유의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나는 도둑놈들의 소굴에 들어섰다.
바이센 평야의 혈투 (3)
나를 건물 안쪽으로 안내해준 민머리 사내의 설명 그대로,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테이블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건물 밖에 버티고 서 있는 험상궂은 조직원들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
아무래도 접수 일을 보는 직원인 만큼 조금 똘똘한(?) 놈을 자리에 앉혀 놓은 것 같았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확실히 말투도 공손한 편이다.
하긴,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가드들을 지나 이 건물 안에 들어왔다는 건 길드를 찾아온 손님이라는 뜻일 테니 태도를 깍듯이 해야겠지.
"길드장을 보러 왔다."
"...!"
앞뒤 뚝 잘라먹은 내 말투에 접수 담당 직원의 인상이 굳는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유지한 채로 다시 한번 내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왔다."
"허..."
헛웃음을 터트리는 접수 담당 직원.
영 비협조적인 내 대답에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이런 미친 새끼가... 여기가 어디 시장 바닥 여관인 줄 아나, 처맞기 싫으면 얌전히 돌아가..."
툭-
직원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내가 테이블 위에 던진 무언가.
그것은 왕립 펠리노어 은행의 문장이 선명하게 찍힌, 100골드짜리 전표 뭉치였다.
"30장쯤 될 거다. 당연히 진짜지만, 의심스럽다면 확인해도 좋다. 그 정도는 기다려주지."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너무 놀라 시퍼렇게 안색까지 변해버린 접수 담당 직원이 내가 내놓은 전표 뭉치를 들고 뒤쪽에 있는 문 안쪽으로 달려 들어간다.
금화 동전 한두 개를 찔끔찔끔 내놓은 것도 아니고, 아예 전표 뭉치를 가지고 다니는 대박 손님이 등장했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흐음, 저 방 안쪽에 전문가가 있나 보군.'
이런 도둑 길드뿐만 아니라 내가 있던 용병 길드에도 보통 위조 전표, 위조 동전을 감별해내는 전문가를 하나쯤은 두고 있었다.
가짜 돈 들고 와서 사기 치는 놈이 왕왕 있다 보니, 아예 감별사를 상주시켜 놓는 것이다.
"소, 손님!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보여주신 전표, 진품인 걸 확인했습니다."
안쪽 방에 들어갔다 나온 직원 녀석이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인다.
아마 길드장도 이만한 각도의 인사는 못 받지 않을까?
'역시, 돈이 좋긴 좋네.'
그런 생각을 하며 직원이 돌려준 전표 뭉치를 받아 다시 품에 넣었다.
"지금 제가 바로 위로 올라가서 길드장님께 손님 오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그러지."
잠시 후, 2층에서 접수 담당 직원과 함께 내려온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길드장님께서 손님을 모시고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아, 가기 전에 가지고 계신 검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 그러지."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끌러 덩치 큰 사내에게 건네주며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래 쳐다본 건 아니고, 한 1, 2초 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목적을 달성하기엔 충분했다.
팟-!
『 파르멜 / Lv. 34
소속: 쾨니히슈타인 도둑 길드
클래스: 용병 』
'... 새끼, 도둑놈 따까리질 하는 주제에 좀 하네.'
길드장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녀석답게 레벨이 꽤 높았다.
물론, 그래 봤자 나한테는 한 주먹 거리에 불과한 놈이긴 했다.
"이제 올라가면 되나?"
"예, 이쪽입니다."
나를 모시러 내려온 덩치 큰 사내, 파르멜의 안내를 받으며 나는 길드장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
"3... 3천 골드라고? 확실한 거냐?"
"예, 방금 왕립 펠리노어 은행에서 발행한 진품 전표인 걸 확인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쾨니히슈타인 도둑 길드의 수장, 보르닌은 부하가 전한 말을 듣고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3천 골드짜리 전표 뭉치를 들고 다니는 손님이라니?!
'... 놓치면 안 돼. 이건 무조건 대박이다!'
안 그래도 고질적인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 길드였다.
그런 와중에 거액을 지닌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릴 들으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 반가울 수밖에.
'뭔 일을 시키려는지는 모르지만... 어지간히 미친 짓이 아니라면 무조건 승낙하고 봐야지.'
얼마나 흥분했는지 흥흥, 거리며 콧바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문득, 돈 많은 손님이 왔다는 소리에 호들갑을 떠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 시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른 도시로 튈걸. 왜 이런 거지 같은 동네에 흘러들어와서 이 고생을... 후우...!'
농사일이 지겨워 고향을 떠나 이곳 쾨니히슈타인에 정착한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두운 뒷골목 세계에 몸담아 온 보르닌이었다.
그가 평생 해온 일이라곤 도둑질, 문서 위조, 협박, 사채, 납치 같은 더러운 일들뿐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보르닌은 이쪽 방면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 남다른 재능이 그에게 뒷골목 세계의 명성을 가져다주었고, 그렇게 모인 명성은 마침내 그를 도둑 길드의 수장 자리로 이끌었다.
문제는, 그의 길드가 자리 잡은 곳이 다름 아닌 쾨니히슈타인이었다는 것.
쾨니히슈타인은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는 위대한 검사,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백작의 영지인 바이펠베르크의 주도(主都)이자 왕국 남부 최대의 군사 도시였다.
백작의 명을 따르는 잘 훈련된 군인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의 치안 수준은 당연히 다른 도시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높았다.
그런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떳떳하지 못한 일로 먹고사는 도둑 길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살림에 제일 도움 되는 도박장 수익도 영주랑 나눠 먹고 있으니... 시발!'
뿐인가, 도박장과 함께 도둑 길드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로 꼽히는 사채 사업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영주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채 사업을 벌이다 발각된 전대 도둑 길드장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보르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영주가 보낸 기사들이 들이닥쳐서 길드장 모가지를 날려버렸지.'
무려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친위대인 '백검기사단(白劍騎士團)'의 기사들이 몰려와 순식간에 길드장과 부하들을 도륙하던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쾨니히슈타인의 도둑 길드는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똑똑똑-
그때, 보르닌의 상념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들어와."
곧 문이 열리고, 1층으로 내려보냈던 그의 경호원 파르멜과 허름한 로브 차림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하, 저를 보고자 하셨다고요? 반갑습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
보르닌의 말을 들은 사내가 말없이 그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뭐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얼굴도 안 보여주고.'
상대는 로브에 달린 펑퍼짐한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밖으로 보이는 부분은 코끝과 입가 정도.
영 마음에 안 드는 상대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보르닌은 참았다.
그가 지녔다는 3천 골드의 전표 뭉치 때문이었다.
"자아... 하하! 손님께서 쓸데없는 대화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성미 같으시니, 바로 일 얘기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어떤 일을 맡기러 오셨습니까? 저희가 성심성의껏,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여기에 어떤 여자아이와 용병대에 대한 미행을 의뢰하러 온 놈이 있었을 거다."
말이 짧았다.
'하, 이 시발 새끼가 진짜...'
하지만 이번에도 보르닌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냈다.
3천 골드의 위력이란 없던 인내심도 생기게 할 만큼 대단했다.
"흐음, 그런데요?"
"그 미행을 의뢰하러 온 놈의 정보를 팔러왔다."
"... 허!"
상대의 말을 들은 보르닌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오른다.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끓어오르자 자연스럽게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한테 의뢰를 맡기려고 온 게 아니라 정보를 팔기 위해 왔다? 내가 맞게 이해한 건가? 우리한테 돈을 내는 게 아니라, 돈을 벌어가겠다고?"
"아주 잘 이해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아주 멍청이는 아니군."
"허, 허허... 허헛! 하하하!!!"
그렇게 한참을 이어지던 보르닌의 웃음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시발, 하다하다 이제 별 미친놈이 다 길드에 기어들어 오네... 뭐? 정보를 팔러 와? 그것도 우리한테 의뢰 맡긴 다른 고객의 정보를 팔겠다고? 아이고, 지랄도 가지가지한다, 정말!"
"..."
"후우! 이 보르닌 성질 많이 죽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턱주가리 돌려서 건물 앞 시궁창에 처박았을 텐데... 너, 요즘 내가 나이 먹고 성질을 많이 유해져서 참는 거야. 그거 알고 가라, 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한 보르닌이 손님의 뒤쪽에 서 있던 경호원 파르멜을 향해 소리쳤다.
"뭐해, 새끼야? 손님 나가신단다! 먼 길 찾아오셨으니 보답으로 여기저기 마사지 좀 해서 보내 드려!"
"예, 알겠습니다."
뚜벅, 뚜벅-
보르닌의 명령을 받은 파르멜이 움직일 생각 없는 손님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데...
휘웅, 콰직!!!
"커흑! 끄르륵..."
털썩-!
뭔가 번쩍거리는 듯한 움직임과 함께, 무언가에 얻어맞아 코뼈가 완전히 주저앉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파르멜이 눈을 까뒤집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 무, 무슨...?!"
돈 받고 경호 일을 하는 파르멜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르닌 역시 한 도시 뒷골목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이답게 일신의 무력이 상당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방금 파르멜의 얼굴을 박살 낸 공격(아니, 애초에 공격인지 뭔지도 알 수가 없었다)을 눈으로 따라가지 못했다.
뭔가 휭, 소리가 들리고 퍽! 하며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경호원이 눈깔이 뒤집으며 쓰러졌다.
정황상 앞에 있는 손님이란 녀석이 한 짓 같은 데, 움직이는 모습을 보질 못했다.
"하, 이 새끼... 결국 생긴대로 멍청하게 구는구나. 결국 주먹 쓰게 만드네... 쯧!"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난 손님이 바닥에 쓰러진 파르멜의 몸을 뒤졌다.
길드장의 방에 들어오기 전 그에게 맡긴 자신의 검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상대가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을 보면서도 보르닌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으... 이게 무슨...?!'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기운이 보르닌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보르닌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자, 하려던 얘기를 다시 하겠다. 지금부터 내 얘기 듣고, 대답하라고 한 말에만 대답하도록. 그 외에 쓸데없는 말 지껄이면 주둥아리 찢어버린다. 알았냐?"
"예, 허흡!... 으음!"
반사적으로 '예'라고 대답했다가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아까 말했던 새끼들, 용병대랑 어린 여자아이 하나 미행하라고 한 새끼들 있었지?"
"예, 예!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답을 알려주마. 그 새끼들, 바덴하임 백작의 부하들이다."
"... 예?"
"황금백, 바덴하임 백작 말이다. 몰라?"
"아, 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일행과 그 돈에 미친 늙은이가 악연이 좀 있다. 그래서 그 부하들이 우리를 계속 따라오고 있는 건데... 그래, 뭐. 그거야 우리 사정이니까 우리가 알아서 감내할 일이지. 근데 말이야..."
"...?"
"그 늙은이가 보낸 첩자 새끼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 쾨니히슈타인에서 개수작을 벌이고 있는데, 그걸 도시 내에서 돈 받고 도와준 새끼들이 있다는 걸 이 동네 영주님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 둘이 사이 되게 안 좋은 거, 너도 알지?"
"...?!!!"
상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보르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모, 몰랐습니다! 저희는 그 새끼들이 바덴하임 백작의 부하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 하..."
"알았건 몰랐건, 그건 윗분들에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너희 길드가 감히 '왕국제일검'의 영지 한복판에서 그 미친 늙은이의 첩자들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촤앙- 슁- 카아앙!!!
앉은 자세에서 가볍게 휘두른 검에 보르닌의 방 한쪽 장식장 위에 세워져 있던 은촛대와 청동 조각상들이 깨끗하게 베어져 반 토막이 난다.
"?!"
그 모습을 바라본 보르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진다.
기를 쓰고 휘두른 것도 아니고, 앉은 자세에서 날파리 쫓아내듯 대강 휘두른 검에 저런 위력이 실린다?
'이... 이 새끼?! 어마어마한 실력자구나!'
놀라 기겁한 보르닌의 표정을 살피며, 정체불명의 손님이 말을 이었다.
"... 봐서 알겠지만, 내가 좀 실력이 된다. 이따위 작은 길드 정도야 밥 한끼 먹을 시간이면 지울 수 있다."
드르륵- 철퍼덕!
"저, 저희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냅다 돌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보르닌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뭐든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해가 뜨자마자 도시를 떠날 것이다. 그 후, 우릴 미행하라고 시킨 그놈들이 찾아오면 우리가 여관에 계속 머물고 있다고 역정보를 흘려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옙, 알겠습니다!"
"이틀이건, 삼일이건 시간을 끌 수 있는 한 최대한 끌어봐라. 만약 너희에게 속은 걸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기껏해야 욕이나 몇 마디 지껄이겠지."
"그들이, 황금백의 부하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그 사실이 밝혀지면, 놈들은 이 도시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귀한 정보를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번, 보르닌이 돌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며칠 전, 오랜만에 들어온 큰 건수에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도시 내에 들어온 용병대를 미행해달라는,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을 맡기며 큰돈을 주길래 냉큼 알겠다며 수락했었지.
'근데, 그게 황금백이 보낸 첩자들이었다니...'
하마터면 그 악몽 같은 백검기사단의 방문을 또 한차례 경험하게 될 뻔했다는 생각에 보르닌의 뒤통수에 식은땀이 맺혔다.
"혹시, 설명이 더 필요한가?"
"아닙니다!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전해줄 말은 끝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로브 차림의 사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바닥에 엎드린 보르닌에게 말한다.
"이제, 돈 내놔."
"... 예?"
"돈 내놓으라고, 정보료. 너네 뒤질 뻔한 거 구해준 거잖아."
"어, 으... 아니, 그게..."
"싫어? 그럼 나 이대로 영주성으로 간다? 아니면, 뭐 그냥 여기서 네 목을 직접 따줄까?"
"아, 아닙니다! 드리겠습니다! 드려야지요, 예!"
거듭 돌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대답하는 보르닌.
'시발... 그냥 고향 내려가서 농사나 지을 걸... 흐으윽!'
농부의 자식이었던 그의 가슴속에 수년간 이어져 온 진한 후회의 감정이 몰아치고 있었다.
바이센 평야의 혈투 (4)
쾨니히슈타인의 여러 시장 골목 중 과일과 각종 곡식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따뜻한 대륙 남서부 에이다르 왕국에서 넘어온 사과! 너무 달아서 설탕 같아요! 5개의 1실버! 어서 담아가세요!"
"배 드세요! 겨울 배가 아주 달고 맛있습니다!"
"에이, 너무 비싸다! 좀만 깎아 줘요!"
"사는 김에 보리 한 됫박 들여가세요. 요걸로 보리빵 만들어 먹으면 그게 아주 또 별미야!"
가진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과 손님들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펼쳐진다.
고막이 얼얼할 정도로 소란스러운 그 흥정의 한 가운데 자리한 작은 청과상.
그리고, 그 가게로 들어서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 하나.
손님의 방문을 확인한 순박한 얼굴의 가게 주인이 밝게 미소 짓는다.
"어서 오세요. 좋은 물건 많습니다!"
"예, 안녕하세요."
여기까진 평범한 대화지만, 그다음 이어진 대화는 어딘가 좀 이상하다.
"연어가 좀 들어왔나요?"
가게에 다른 손님이 없다는 걸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이 찾는 것을 말하는 손님.
과일 파는 청과상에서 연어를 찾다니?
하지만, 손님의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들은 가게 주인은 밝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 물론이죠. 여기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계산대 밑에 있던 종이봉투 하나를 주섬주섬 꺼내주는 가게 주인.
손님이 봉투를 건네받으며 슬쩍 그 안을 살펴보는데,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몇 개 들어있다.
연어가 있냐고 물어봤는데, 주인이 내어준 물건은 엉뚱하게도 사과였다.
하지만 손님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가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받았고, 동전 몇 푼으로 값을 치른 뒤 미련 없이 뒤를 돌아서 가게를 나왔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순박하게 웃는 가게 주인의 작별 인사를 들으면서.
***
끼이익-
녹슬고 낡은 경첩의 비명을 들으며, 문을 열어젖힌 사내.
"으, 더럽게 춥네."
턱,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탁자 위에 내던진 사내가 방 한쪽에 마련된 작은 화로에 불을 붙인다.
"... 이제 좀 낫네."
화로의 불꽃에 얼었던 몸을 적당히 녹인 사내가 탁자 위에 던져두었던 종이봉투를 거꾸로 뒤집는다.
와르르, 봉투 안에서 쏟아져나오는 빨간 사과들.
그리고,
툭-
탁자 위에 놓인 사과 위로, 봉투 바닥에 깔려있던 자그마한 쪽지 하나가 떨어진다.
평범한 인상의 사내, 바덴하임의 첩자 벤피셔가 돌돌 말려 있는 그 쪽지를 펴들고 내용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여전히 여관에 머물며 장기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 중이라..."
지난 며칠간 보고 받은 정보에서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쪽지 속의 내용에, 벤피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새끼들,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영 의심스러운 정보의 내용에 벤피셔의 마음속에 불길한 느낌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 안 되겠어."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니나 아르펜과 푸른 방패 용병대의 상황을 확인하러 가보기로 마음먹은 벤피셔.
하지만,
콰쾅-!!!
그 순간, 벤피셔가 숨어 있던 안가(安家)의 낡은 나무문이 박살 나며 정체 모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누, 누구냐?!"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방문에 놀란 벤피셔가 소리를 지르며 다급히 방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던 검을 꺼내들었는데...
"어이, 너 그거 휘두르면 손모가지째로 날아간다. 그러니까, 우리 괜히 피 보지 말고 얌전히 가자. 응?"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불청객들의 선두에 선 사내가 여유로움이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벤피셔에게 말했다.
"아, 손님이니 내 소개부터 해야지. 나는 바덴하임의 쥐새끼를 잡으러 온 백검기사단 2조장, 루츠 비어만이다."
"...!"
"손에 든 거, 얌전히 내려놓고 투항해라, 그럼 '일단은'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
"하... 시발."
탱그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대의 말을 들으며, 벤피셔의 손에서 천천히 검이 떨어져 내렸다.
"옳지, 옳지. 잘 생각했어."
무기를 버리는 벤피셔의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웃는 백검기사단 2조장, 루츠 비어만.
하지만 그는 몰랐다.
벤피셔가 벽에 세워져 있던 검을 집어든 순간,
후두둑-!!!
건물 옥상에 설치되어 있던 새장의 문이 열리며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는 사실을.
***
"... 곧 해가 지겠군."
슬슬 붉게 물들기 시작한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 겔베르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뒤쪽에서 따라오던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베르켈 경, 슬슬 야영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겔베르트의 뒤쪽에 말을 타고 따라오던 노 기사, 데론 베르켈이 대답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 푸른 방패, 정지."
"푸른 방패에! 정지이이이!!!"
나직한 목소리로 겔베르트가 명령을 내리면 부대장 메이슨이 우렁찬 목소리로 해당 명령을 복창한다.
그와 동시에 한 몸처럼 제자리에 멈추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
평소엔 시장바닥 건달패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전에 들어갔을 땐 그 어떤 정예병보다도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이었다.
"일몰이 가까워졌다. 현 위치에서 이동을 멈추고 전원 야영 준비에 들어간다. 각자 위치로."
"야영 준비! 각자 위치로오오오오오!!!"
다시 한번 겔베르트의 명령과 메이슨을 포함한 푸른 방패 대원들의 복명복창이 이어진다.
"자, 일단 저는 물 뜨러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데미언! 수고해라."
"보니까 물 구하려면 좀 멀리까지 나가야 할 것 같던데... 고생해라, 막내."
"옙,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자자, 보자... 일단 수레에 있는 짐부터 내려야지. 여기! 이쪽으로 끌고 와!"
"바람이... 크흠, 동쪽에서 부네. 이쪽이 동쪽 맞지?"
"아니지, 병신아! 해가 이쪽으로 지고 있는데! 그럼 여기가 서쪽이잖아!"
"아, 맞네. 시발, 잠깐 헷갈린 거 가지고 지랄은... 크흠, 천막은 이쪽에다 세우자. 야, 말뚝 가져와!"
"대장, 그럼 저희는 주변 순찰 시작하겠습니다! 야, 너랑 너! 빨리 따라와!"
야영지 형성을 위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
야영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들의 움직임엔 경험에서 비롯된 여유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모습.
이 같은 야영 준비의 풍경은 푸른 방패가 얼마나 체계가 잘 잡힌 용병대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 중의 하나였다.
한편, 야영 준비로 한창 정신없는 푸른 방패 대원들과 달리 데론과 아드리안은 한쪽에 비켜서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의 최중요 보호 대상인 니나의 경호를 위해 야영 준비 작업에서 열외 되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
"예, 스승님."
"야영을 준비하는 저들의 움직임을 잘 보고, 머릿속에 새겨라. 저게 바로 제대로 체계가 서 있는 정예군의 모습이다."
"알겠습니다."
"흐음, 그나저나 참 신기하구나. 용병들의 야영 준비 모습이 어찌 군에서 가르치는 야전의 기본 교리와 이리도 꼭 닮아 있는 것인지... 허참!"
데론의 시선 끝, 부하들과 함께 밤이슬을 막아줄 천막을 설치하는 겔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저 친구... 단순히 용병 바닥에서만 구른 인물이 아니야.'
그렇게, 데론에 겔베르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한 단계 더 올리던 차...
"저기... 스승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음? 무슨 일이냐."
공손한 눈빛을 한 제자 아드리안이 스승에게 질문을 던진다.
"저도 가서 야영 준비를 돕는 게 어떨지... 계속 작업에서 열외 되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듭니다."
"음, 그래. 그렇게 해라. 어차피 니나 아가씨 곁엔 내가 있으니 문제 없을 것이다."
"예, 스승님. 그럼..."
말을 마친 아드리안이 잽싸게 달려가 겔베르트와 부하들이 세우던 천막의 한쪽 끝을 잡는다.
"저도 돕겠습니다!"
"오, 진짜 막내! '찐막내' 등장!"
"엥? 그게 뭔 소리야? 아드리안이 데미언보다 더 어려?"
"어, 데미언이 아드리안보다 한 살 더 많다더라."
"그래? 그건 몰랐네... 야, 아드리안, 너는 우리 용병대 들어올 생각 없냐? 응?"
"예? 아니, 저는..."
"야, 앞길 창창한 어린 애한테 뭔 개소릴..."
"그래 인마, 베르켈 경이 저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계신 데 뭔 소릴 하는 거냐? 저 양반 제자를 네가 뺏겠다고?"
"어흑, 내가 지금 뭔 소릴... 야, 아드리안! 방금 내가 한 얘긴 못 들은 거로 해줘라!"
"시끄러워 이 새끼들아! 해 떨어지기 전에 천막이나 빨리 치라고! 아드리안, 그 끝에 더 평평하게 당겨! 천막 울지 않게."
"아, 옙!!!"
왁자지껄, 아드리안이 합류한 후 좀 더 화기애애하게 변한 분위기.
한참 형님뻘인 용병들과 어울려 열심히 천막을 설치하는 어린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데론이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스승인 자신이 미처 가르쳐주지 못한 세상의 많은 부분을, 저기 보이는 뜨거운 사내들 채워줄 것이다.
"우웅..."
바로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아는 데론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어웅... 할아버지, 여기 어디예요?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졸린 눈을 비비며 데론 곁에 세워진 작은 수레 위에서 몸을 일으킨 니나였다.
"이제 바이센 평야에 들어섰습니다. 음... 대략 하루 반나절 정도면 라이프링겐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하루 반나절이요? 아직도 많이 남았네요? 휴우..."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이틀이 더 남았다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니나.
그 작디작은 소녀의 얼굴에 가득 차 있는 피로를 발견한 데론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얼마나 힘드실까...'
바덴하임 측의 추격을 피하려 바이펠베르크의 주도, 쾨니히슈타인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것이 지금으로부터 5일 전이었다.
그 5일 동안, 일행은 어떠한 도시나 마을에도 들리지 않은 채 길바닥에서 먹고 자며 빠르게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야영 생활에 이골이 난 푸른 방패의 대원들과 기사인 데론, 종자 아드리안도 피로를 느낄 정도의 강행군.
그런 혹독한 일정에, 아직 어린 소녀인 니나가 느끼는 육체적 고단함은 얼마나 클 것인가?
하지만 니나는 초췌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할아버지, 저 괜찮아요. 이 멀리까지 계속 걸어오신 분들도 있는데, 저는 수레를 타고 편하게 왔잖아요. 제가 힘들다고 하면 안 되죠!"
"... 아가씨."
니나가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수레를 바라보며 데론이 착잡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 수레는 쾨니히슈타인에서 마련한 것으로, 다른 짐은 일절 싣지 않고 오로지 니나를 위해서만 준비된 이동 수단이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아예 마차를 사서 이동했을 테지만, 워낙 쫓기듯 다급하게 도시를 빠져나온 터라 급하게 구한 짐수레로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짐칸에 지푸라기를 두껍게 채우고, 다시 그 위에 모포를 여러 장 깔아 푹신하게 만든 짐수레.
하지만, 그래 봤자 처음부터 승용(乘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차의 쾌적함과는 비교할 바가 아닐 터였다.
"다들 저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 거 알아요. 그러니, 저도 끝까지 힘 내볼게요."
"... 참으로 어른스러우십니다."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칭찬뿐이어서, 데론은 치밀어 오르는 걱정을 누른 채 그렇게 말하며 니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스승님, 아가씨가 머무실 천막 설치가 끝났습니다. 일단 두 분 모두 모닥불에 몸부터 녹이시지요."
어느새 일을 마치고 수레 옆으로 돌아온 아드리안의 말.
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데론이 수레에서 내리는 니나의 손을 잡아주려던 그때...
"남동쪽에서 정체불명의 병력 접근 중! 전원 경계 태세에에에에!!!"
야영지 근처 언덕 위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엔리케의 다급한 외침.
일행 모두가 하던 일을 내려두고 서둘러 엔리케가 가리킨 쪽을 바라본다.
"... 젠장."
이윽고 겔베르트의 입에서 짓씹듯 튀어나온 한 마디.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
왕국 최대의 곡창지대로 불리는 광활한 바이센 평야 저편에서 넘실대는 악의(惡意)로 무장한 한 떼의 인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바이센 평야의 혈투 (5)
니나 일행이 바이센 평야에 들어서기 사흘 전_
바이펠베르크의 주도, 쾨니히슈타인 근방에 자리한 작은 도시 로하임(Roheim).
푸드득-
"... 음?"
그 로하임 시내에 마련된 한 건물에 머물고 있던 바덴하임의 첩자 우드릭은 갑자기 창문으로 날아온 전서구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서둘러 전서구의 발목에 묶여 있던 쪽지를 끌러 펼쳐보자, 낯익은 동료의 필체가 보였다.
[첫 번째 까마귀 둥지가 깨어짐, 참새는 날아갔다.]
"... 하!"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우드릭이 탄식을 토했다.
쪽지 속 '까마귀 둥지'란 바이펠베르크에 숨어든 바덴하임의 첩자들이 자신들이 머무는 안가(安家)를 달리 이르는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까마귀 둥지'란 바이펠베르크의 주도인 쾨니히슈타인에 설치된 안가를 뜻하는 용어였고, 쪽지의 말미에 적힌 '참새'는 얼마 전 하달된 임무의 목표인 리트베르크의 후계자 니나 아르펜을 이르는 단어였다.
그 간단한 문장의 내용만으로도 쾨니히슈타인 쪽의 일이 잘못됐음을 직감한 우드릭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젠장!"
꾸깃-
손에 쥔 쪽지를 신경질적으로 구긴 우드릭.
창가에서 돌아선 그가 손에 있던 쪽지를 불이 붙은 화로에 집어 던진다.
화르륵!
불이 붙은 쪽지가 완전히 타서 잿더미가 되는 것을 확인한 우드릭은 방 한쪽에 놓인 옷장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옷장의 안의 모습이 드러난다.
화려한 색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칙칙하고 허름한 모양새의 옷들만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우드릭의 옷장.
하지만 굳은 표정이 된 우드릭이 옷장 안에 걸린 옷 사이를 거칠게 헤집자, 안쪽에 숨겨져 있던 검은색의 작은 금고가 얼굴을 내민다.
철컹, 끼리릭-
자신의 목걸이에 걸려 있던 열쇠로 금고의 문을 열자 번쩍이는 금화와 금괴, 수북한 전표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 일단 다 가져가 보자."
금고 안에 들어 있던 재물을 있는 대로 챙긴 우드릭이 묵직해진 가죽 가방을 챙겨 들고 다급하게 문밖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로하임 시내 외곽에 자리한 길드 사무소였다.
***
'꾀 많은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는 말이 있다.
어떤 계획을 세움에 있어, 영리한 사람은 그 계획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여러 대안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황금백' 바덴하임 백작의 지낭(智囊)으로 불리는 알프레트 아이케 역시 그런 '꾀 많은 토끼' 같은 인물이었다.
알프레트의 지휘 아래 구축된 바덴하임의 첩보망은 상대 영지의 각 도시에 근거지를 두고, 서로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도시에 전서구를 통해 연락이 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결과...
"목표, 니나 아르펜과 그 일행들은 현재 바이펠베르크 북부에 위치한 라이프링겐으로 이동 중입니다."
"금패 용병 겔베르트와 그가 이끄는 푸른 방패 용병대 11명, 사자 기사단 출신의 기사 데론 베르켈이 적의 주 전력입니다."
"이들이 라이프링겐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착수금은 1인당 40실버입니다. 그리고 목표인 니나 아르펜의 목을 가져오는 용병대에겐, 즉시 800골드의 의뢰 성공비를 지급하겠습니다."
쾨니히슈타인 인근, 5개 도시의 용병 길드에 동시에 등록된 거액의 의뢰.
1인당 40실버라는 넉넉한 착수금도 대단했지만, 의뢰 완수 시 지급되는 800골드의 성공 사례비는 해당 소식을 접한 모든 용병의 눈이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야, 이 새끼들아! 지금 걸을 새가 어딨어? 해 떠 있는 동안은 뛰어! 뛰라고!"
"그놈들이 라이프링겐에 들어가면 더 기회가 없어! 도시 안에서 사고 쳤다간 바이펠베르크 백작에게 칼 맞아 죽을 거야!"
"시팔, 횃불 용병대 새끼들이 어제 출발했다는 얘기 못 들었어? 더 빨리 달려 이 새끼들아!"
누구보다 먼저 의뢰에 성공해 800골드를 손에 넣겠다는 일념으로, 각기 다른 다섯 개 도시에서 출발한 수백의 용병들이 무서운 속도로 북쪽을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저기다! 저기에 목표가 있다! 바로 들이쳐!!!"
"크하하핫!!! 800골드는 우리 꺼다아아아!!!"
"싹 다 죽여버려! 가자아아아!!!"
"우리는 어린 꼬마 년의 머리부터 노린다! 다른 새끼들은 신경 쓰지 마!"
탐욕으로 물든 용병들의 시퍼런 칼끝이, 마침내 바이센 평야에 도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