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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찾아뵈었을 때 서울행에 부정적이던 부모님은 내가 레벨 8이 되었다는 말에 서울행을 흔쾌히 수락하셨다.

지방에 있다가 자식의 발목을 잡는 것보다 자식 덕을 보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나로서도 마음이 놓이는 말이었다.

"따로 살겠다고 하시던데. 좀 보태드려야 할 거 같아."

"보태야지."

마물의 창궐과 영역을 넓혀가는 빌런들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가 된 서울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태였다. 부모님이 재산을 다 처분하고 올라오시더라도 제대로 된 자가 하나 구하기 힘들 것이다.

나와 윤희는 어떻게 돈을 보탤지 의견을 나눴다. 윤희가 대출을 받겠다고 말했지만 조만간 마물을 하나 사냥할 거라 말렸다.

"오빠가 그리 말하면 감사히 가만히 있을게. 나도 잘난 오빠 덕 좀 보네."

돈을 아껴서인지 싱글벙글 웃는다. 아낄 이유가 있나? 혹시 남자라도 생겼나?

"근데 기프트 알아보는데 다른 준비 필요 없는 거 맞지?"

"없어."

"그래?"

"지문 같은 거니까. 원래 새겨져 있는 거야."

"이거 알려지면 대박이겠지?"

"그런가."

"아니, 이런 대박 소스를 갖고 반응이 왜 그래? 세희 언니한테 알리면 초대박이라니까! 상용화해서 오빠도 돈방석에 앉을 수 있어."

윤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지만 내 기프트와 관련된 능력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능력은 몇몇 믿을 수 있는 사람 외에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세희는 신용이 가지만 본질이 재벌이기에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윤희는 순순히 체념했다.

오늘은 윤희의 기프트를 알아보기로 한 날이다. 그리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정다현이 도와주기로 했다.

사실 이 정도로 준비할 필요가 없지만 첫 시도라서 신중을 기했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와 함께 정다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브리즈 셔츠원피스를 입은 정다현은 평소와 달리 여성스러운 매력이 가득했다.

"어서 와요, 언니!"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강아지 마냥 정다현에게 달라붙은 윤희가 예쁘다고 난리였다.

"윤희야 안녕. 준호 오빠, 안녕하세요."

"어, 오빠?"

"응. 이제 부사수가 아니고 나보다 높은 분이 될 예정이니까. 오빠라 부르기로 했어. 초인님은 좀 어색해서."

"흐흥, 그러셔?"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세희 언니도 분발해야겠다."

"최윤희, 준비해."

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는 윤희를 부른 뒤 정다현에게 말했다.

"오늘 해줘야 하는 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회복제를 사용해줬으면 해서."

"네."

난 정다현에게 회복제 두 개를 건네줬다. 그리고 윤희에게 기프트를 알아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줬다.

내 고유 기프트 혈중섭식은 피를 섭취함으로서 상대의 기프트를 빼앗아온다. 정확히는 복사다. 기프트의 복사는 심장의 피가 가장 효과적이며 심장에서 멀어질수록 기프트를 읽어낼 가능성이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기프트 개방을 하지 못한 헌터도 피에 새겨진 정보를 읽어내면 기프트를 개방할 수 있지 않을까?

기프트 개방은 선천적인 개방과 후천적인 개방이 있는데, 후천적 개방은 자신에게 가능성 있는 방향을 알아내면 그 방향으로 노력을 할 때 개방이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 나는 윤희의 피에 새겨진 기프트 정보를 읽어낼 생각이었다.

"시작한다."

"응."

푹!

"······!"

내 손가락이 윤희의 심장 옆부분을 콕 찍자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피부 안으로 파고들었다.

두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진 윤희가 비틀거렸지만 정다현이 부축하며 재빨리 회복제를 뿌렸다.

나는 붉게 물든 손가락을 들어 피를 섭취했다. 그 속에서 윤희가 가질 수 있는 기프트 종류를 파악하고자 했다.

심장의 피가 아니라서 완벽하지 않지만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들로 윤희가 개방 가능한 기프트를 식별, 분류에 들어갔다.

역시, 여러 종류의 기프트가 존재했다.

좌우 10m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가로 스텝, 이물질을 씻어내는 클리닝, 에너지 저장량을 소량 늘려주는 폭식.

모두 쓸모없는 기프트다. 그러다 마지막에 감지된 기프트를 보고 나는 눈을 반짝였다.

"최윤희."

"어우, 살다살다 가슴에 구멍까지 뚫려보네. 엄청 아프다. 뭐가 좀 있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불안감이 서린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 있다. 그중 쓸모 있는 것도 찾았고."

"뭔데?"

"불굴(不屈)."

"불굴? 못 들어봤는데."

나도 딱 한 번 본 기프트였다. 그 위력은 실로 강력했다.

"유니크 기프트다. 지치고 포스가 소모되어도 완전히 고갈되기 전까지 만전 상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각성자도 사람이라 결국 체력과 포스에 의해 공격력이 결정된다. 100% 상태일 때와 10% 상태일 때 차이는 극명하며, 상대의 체력이 고갈되길 유도하는 방식은 흔하디 흔했다.

하지만 불굴은 10% 상태에서도 100%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상대하는 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력이 떨어지지 않는 공격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거 엄청 좋은 거 아냐?"

"처음부터 만전의 위력을 발휘하는 건 불가능해. 혹독한 수련에 뒤따라야하지."

그 땀방울이 쌓이고 쌓여 강이 되어야 비로소 100%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내 눈과 마주한 윤희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잠깐, 잠깐! 스톱! 생각 멈춰!"

"왜?"

"지금 표정 장난 아니거든? 나 엄청 굴릴 생각했잖아!"

"그래야 불굴을 쓸 수 있으니까."

나도 더 이상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사적인 감정은 없다. 윤희가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웃기지 마! 사적인 감정이 없긴 뭐가 없어. 나 굴릴 생각에 신났잖아."

"내가 언제?"

"지금 입 꼬리 말려 올라갔거든."

나도 평화에 찌들었군. 이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다니. 아니, 동생 앞이라 실수한 건가. 내가 손으로 입 꼬리를 만지자 윤희가 소리쳤다.

"거봐! 지금 신났잖아! 입 꼬리 처음부터 안 올라갔거든?"

"다현아. 도와줄래?"

"네, 오빠. 불굴이라니, 저도 들어보기만 했는데 귀한 기프트네요. 윤희야, 빨리 수련장 가자.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기프트 개방하지."

"···다현 언니는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수, 부사수가 한통속일 줄은. 이래서 국가수호국 소속 아닌 사람 서러워서 사나! 나도 국가수호국으로 갈래!"

"그 말 들으면 세희가 섭섭해 할 걸. 다 윤희 널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는 거야."

"그 노력 적당히 해주면 안 될까요?"

"최선을 다해 굴려줄게."

나와 정다현은 윤희를 데리고 수련장으로 갔다.

곧이어 윤희의 기쁜 비명과 함께 수련이 시작되었다.

*

천명국과 협상을 마치고, 마침내 정부 측에서 최준호의 요구안이 통과되었다.

불체포특권이 주어지고 정부 소속 초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최연소 레벨 8 초인의 탄생!>

<새로운 초인은 인형술사를 사살한 인물!>

<대한민국 정부! 최연소 초인과 레귤러 계약!>

<레벨 8 초인은 국가수호국 출신!>

<대한민국 각성자 선진 교육 시스템! 세계를 놀라게 하다!>

<미국이 극찬하고 중국이 놀라워하며 일본이 두려워하는 K-각성자 교육 시스템!>

"···한시름 놨군."

빠른 속도로 기사가 쏟아지는 걸 보며 천명국은 안도했다.

짧은 기간 이어진 협상이지만 피가 말리던 순간의 연속이었다.

정부 측에서는 불체포특권에 대해 난색을 표했지만 시간은 최준호의 편이었다.

그는 최연소 나이에 레벨 8에 오른 천재다. 참관인단을 파견했던 미국에서 최준호를 데려오기 위해 예산안 편성부터 각종 지원책을 마련한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인접국은 물론 조건 제시가 가능한 모든 국가들이 최준호를 주시하며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대형 길드들은 더했다. 그들은 그동안 나온 적 없던 최대 단위 계약금 준비는 물론, 상장될 알짜 계열사의 스톡옵션까지 준비한다는 말이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최준호의 몸값이 상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더 시간을 끌면 특권 두 개를 모두 주고도 놓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천명국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선언하며 불체포특권 부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이렇게 성과가 나왔다.

"잘 잡았어."

최준호가 갖는 상징성은 실로 대단했다. 20대 최연소 레벨 8이라는 점, 실력은 이미 완숙한 수준에 도달한 점, 풍부한 실전 경험과 성과가 존재한다는 점이 특별했다.

천명국이 주목한 점은 최준호가 젊은 천재 각성자 특유의 허영심이나 쓸데없는 명예욕, 물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젊은 각성자가 전용기를 요구한다던지, 국가 보물급 장비를 요구한다던지 선을 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준호는 그런 욕심도 없었다. 이는 달리 말해 정부에 추가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걱정되는 부분이라면 손속이 독한 점인데 그의 말마따나 최근 들어 과잉 진압 건이 눈에 띄게 줄었으니 믿어보기로 했다.

"힘 조절이 실패했던 거겠지."

누구나 혈기가 넘쳐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천명국은 최준호의 선의를 믿기로 했다.

"근데 기자들 정보는 왜 달라고 했던 거지?"

오늘 참석하는 기자들의 정보 요구에 의아했지만 순순히 건네줬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는가.

새로운 레벨 8 초인의 등장은 국회 본청 기자회견실에서 이루어졌다. 천명국은 먼저 기자들에게 최준호의 영입을 선언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등장한 최준호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빌런을 잡겠습니다."

"······."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은 과민 반응일 거라 생각했다.

장내의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최준호에게 쏟아졌다.

레벨 8 초인으로 처음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배우를 연상케 했다.

귀공자를 연상케 하는 잘생긴 외모에 잘빠진 비율, 탄탄한 몸매까지. 차콜그레이 색상 정장에 올오버 블랙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니 마치 영화 시사회에 등장한 듯했다.

보통 이렇게 시선이 모이면 당황할 법도 하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자기소개를 했다.

"국가수호국 최준호입니다. 앞으로 국가수호국 소속으로 발맞춰 움직일 예정입니다."

간단한 소개 후에 이어진 것은 질문 시간이었다.

"문송일보의 김재덕입니다. 앞으로 포부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을 빌런청정국으로 만드는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한누리 신문의 김송화 기자입니다. 인형술사를 사살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과정이 궁금······."

"인형술사는 포스 파장을 활용하여 인형을 조종했고······."

"리바이벌 컨텐츠의······."

여러 언론의 질문이 쏟아졌고 그때마다 모나지 않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특히 인형술사를 제거하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걱정 없겠어.'

최준호의 뾰족함을 우려했던 천명국도 한결 편해졌다.

어쩌면 자신이 했던 모든 걱정이 불필요한 거였을지 모른다.

그러다 기자회견 마지막즈음 발언권을 얻은 사람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불독 닮은 인상의 40대 후반 남자였다.

"스피드포스의 오창문 기자입니다. 최준호 초인에 대해 조사해보니 공무원 헌터 시절 과잉 진압이 많아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평생 장애를 얻거나 불구가 된 빌런들도 많고요. 그들에게 죄송한 마음은 없는 겁니까?"

"······."

기자회견실이 침묵에 빠졌다.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지만 오창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최준호가 마이크를 들었다.

"스피드포스의 오창문 기자님"

"예."

아닌 척 했지만 기자들은 최준호가 어떻게 대답할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젊을수록 이런 도발에 잘 걸려들기 때문이다. 하물며 혈기 넘치는 20대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레벨 8 초인이면 그 경향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하지만 최준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기자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살펴보니 제가 빌런을 체포할 때부터 비판 기사를 쓰셨더군요. 과잉 진압이다, 권한을 침범했다, 빌런보다 손속이 더 잔인하다 등등."

"사실을 보도했을 뿐입니다."

"그런 기자님은."

최준호의 무감정한 눈이 오창문을 향했다.

"서대문구의 빌런 조직에게서 향응 접대를 받고 마약 유통을 옹호하셨던데."

"······."

오창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5년 전 TV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인생 최악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다시 일선에 복귀하기까지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천명국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준호가 대놓고 그걸 짚고 넘어갈 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거지? 기자한테 대놓고 지른 건가?

설마 기자의 정보를 달라고 했던 것도······.

"지금 시민을 수호해야 할 초인이 주제와 맞지 않는 이야기로 기자를 겁박······!"

성질대로 소리를 지르려던 오창문의 행동은 끝을 맺지 못했다. 어느새 최준호가 눈앞에 서 있던 것이다.

"빌런이 제공한 향응을 받고 빌런의 편을 든다. 그럼 기자가 아니라 빌런이지."

콰드득!

"끄아아악!"

오창문의 양 팔이 순식간에 정반대 방향으로 부러졌다. 그리고 정강이를 툭 건드리자 양 다리도 부러졌다.

순식간에 사지가 부러진 오창문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난 오창문이 기자가 아니라 빌런이라고 생각하는데."

최준호가 주변을 둘러봤다.

"불만있는 사람?"

"······."

33화

33화

"끄아악!"

나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고 있는 오창문을 봤다.

녀석을 잡은 건 즉흥적인 결정이다.

오늘은 내가 레벨 8이 되고 처음 공식선상에 나서는 날이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 헌터가 됐던 때가 떠오른다.

내 의도는 순수했다.

부모님에게 걱정 끼치지 않는 아들, 여동생에게 자랑스러운 오빠가 되고 싶었다. 가끔 주변에 보이는 빌런을 잡으면서 공무원 헌터 역할로 충실한 나날을 보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나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특히 이런 기레기는 평화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나도 빌런으로 만들 놈이었다.

"끄으으!"

그동안 정주호가 보호하여 내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과잉 진압 건으로 몇 번 기사가 났다.

기본적으로 나는 내 행동으로 기사가 나는 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기사를 보던 윤희가 노발대발 할 때가 있었는데, 하나는 낚시에 가까운 제목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기자의 사견이 교묘한 방향으로 몰아가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낼 때였다.

나도 제목 낚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부분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한다.

내가 혈종일 때 기자들의 농간으로 하지도 않은 수많은 악행이 추가됐으니까. 아마 기사대로면 내가 죽인 숫자가 만 명이 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니다. 수천은 될지 몰라도 만은 과했다.

왜 내가 저지르지 않은 악행도 모조리 뒤집어썼어야 했을까.

당시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어떤 기자도 처벌받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책임지지 않으면 책임지게 만들면 된다. 난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내게는 이제 불체포특권도 따라다닌다.

"크흐흑!"

그렇다고 현미경을 들이대서 모두를 벌할 생각은 없다.

정도가 크게 어긋난 놈만 처리하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중요하니까.

단지 자유에 대한 책임만 지우면 될 뿐.

"······."

역시 배운 사람들이라 내 말에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도 오창문 같은 부류를 좋아하지 않나보다.

나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이름은 익숙한 기자의 이름을 불렀다.

"고예진 기자님."

"히끅! 네, 네!"

150cm 조금 넘는 키에 작은 체구를 가져 얼핏 보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기자가 딸꾹질을 하며 대답했다.

"기사 잘 읽었습니다."

"사, 살려주세요! 기사 다 내릴게요! 제발 용서를······."

"괜찮습니다. 제목이 자극적이지만 내용이 잘못된 건 아니니까요. 앞으로 활발한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네, 넵!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끄아아아!"

나는 아직도 괴성을 지르는 오창문을 발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입에 게거품을 멀고 정신을 잃었다.

기자회견실 미관과 어울리지 않아 회복제 하나를 꺼내 녀석에게 부었다.

기괴하게 뒤틀려있던 팔다리가 되돌아오자 모두의 눈에 경악이 서린다. 원상복구의 마술이다.

난 제자리로 돌아와 회복제병 상표가 잘 보이게 들어보이며 말했다.

"궁금하실까봐 말씀드립니다. 제가 사용한 회복제는 신성제약에서 나온 회복제입니다. 문의는 신성제약에 해주십시오."

나한테 물어볼까봐 바통을 신성그룹으로 넘겼다.

"그럼 기자회견을 계속하겠습니다."

*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천명국은 자신의 손을 완전히 떠났음을 깨달았다.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말이 옳을까.

어린 시절 8시간 넘게 바닷가에서 만든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을 때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최준호는 기자 하나를 완전히 뭉개버렸다. 빌런도 저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망가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손을 쓴 최준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 일의 파장은 누가 감당할까. 일을 벌인 건 최준호지만 그는 아니다. 불체포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책임을 질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최준호에게 불체포특권 부여를 밀어붙인 게 자신이었으니까. 모든 회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마지막에 책임지겠다고 말한 것도 있다.

순간 사퇴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이다.

'힘 조절을 못했다고?'

저렇게 사람을 종이접기 하듯 접어놓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겠다.

그제야 최준호 옆에 붙어있던 정주호의 모호했던 표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백미는 오창문에게 회복제를 들이붓자 부러졌던 사지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였다.

사기의 화룡점정이다.

과잉진압건이 줄어들기는 미친.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저 비싼 회복제를 들이부었던 것이다. 누가 저런 빌런에다 3천만 원짜리 회복제를 들이붓는 미친 발상을 할 수 있겠는가.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30분 동안 자신을 둘러싼 상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남은 건 수습, 수습, 또 수습이다.

근데 이게 수습이 가능할까.

천명국은 기자들에게 질문 받는 최준호를 보다 탄식을 터뜨렸다.

"아······."

레벨 8 초인을 영입했다고 자랑하기 위해, 이 모든 광경은 생방송으로 중계 중이었다.

*

최연소 레벨 8 초인, 인형술사를 사살한 영웅. 미국이 극찬하고 중국이 놀라워하며 일본이 두려워하는 초인의 등장.

최준호의 첫 등장은 대중들의 큰 관심을 샀다.

그러다 보니 공식선상에 등장하는 기자회견 채널에는 평소보다 무척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극동의 작은 반도국가임에도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각성자 강대국.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은근한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최연소 타이틀마저 빼앗아온 것이다.

-근데 너무 어리지 않냐? 레벨 8이 되는 평균 나이가 42세인데. 점점 어려지고 있는 추세라지만······.

-인형술사 잡은 것도 과장하는 거 아냐? 걔가 불사신이라고 해도 어차피 전투력은 별로잖아.

-나이가 어리면 아무래도 포스량이 부족하고 운용 노하우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 그래도 측정 시험이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으니 최소 요건을 채웠다고 봐야할 걸?

-우선 나이가 깡패임. 나이가 어리다는 건 발전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거. 그리고 육체가 전성기일수록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크기가 커진다.

-이번 일은 정부를 칭찬할 만함.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되는 대어였음.

-새로운 각성자안보실장이 일 잘한다고 하더니 제대로 해낸 듯.

-이제 나온다.

잠시 후, 최준호가 등장하자 채팅이 올라가는 속도가 수십 배 빨라지기 시작했다.

-와! 존나 잘생겼다. 왜 여기 배우가 있냐?

-외모 실화냐? 외모 수준이 레벨 8이라는 거였어?

-수트핏 죽이네. 얼굴도 얼굴인데 몸 상태 뭐냐? 키도 그렇게 크지 않은데 비율이 완전······.

-오빠! 절 가져요ㅠㅠㅠㅠ 너무 잘생기셨어요ㅠㅠㅠ

-얼굴 보고 뽑았냐? 선전용이냐?

외모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지만 우려하는 채팅도 늘어났다.

-근데 별로 강해보이지 않는데? 진짜 레벨 8이라고?

-저래서 빌런이나 마물 잡겠어? 빌런이 총질하면 사색이 돼서 도망칠 거 같은데.

-주저앉아 지리는 거 아니냐? ㅋㅋㅋ

-마물이 울부짖어따, 최준호눈 주저앉아 지려버려따!

-근데 분위기가 장난 아닌데? 강렬한 아우라가 느껴짐!

-이거, 측정 시험에 미비함이 드러나면 정부가 역대급 호구딜을 한 거일 듯.

-크크, 최준호의 존재만으로 빌런들은 두려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우려들도 최준호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다 오창문의 사지를 꺾어버리자 씻은 듯 사라졌다.

-···방금 최준호 움직임 본 사람?

-모니터에 눈을 뗀 적이 없는데 언제 이동한 거야? 팔다리는 어떻게 부러뜨린 거고?

-미쳤다. 120프레임인데도 했는데 움직임이 안 잡혀. 이게 레벨 8의 움직임이라는 거냐?

-걱정했던 말 다 취소. 와! 손 하나 까닥하는데 사람이 병신이 되네. 이게 레벨 8 초인의 힘이구나 ㄷㄷㄷ

-초인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읍읍!

-최준호 앞에서 무조건 굴종하라. 그래도 녀석의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목이 날아가겠지. 크크크...!

단 한 수로 실력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그 자리를 대신 한 건 즉결심판에 대한 내용이었다.

-근데 자기 힘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거 아님?

-ㄴㄴ 저 오창문에 대해 검색해보셈. 몇 년 전에 빌런한테 돈 먹고 그 조직 옹호해준 기사를 쓴 놈임. 죽어도 싼 놈 맞음.

-미친, 저런 놈이 국회까지 들어간다고? 딴 맘 먹으면 어떡할 건데? 저런 과격한 사상을 가진 놈이 초인이라고? 이게 나라냐!

-최준호가 아주 탄산을 한계치까지 들이붓네.

-걱정된다고 뭘 할 수 없음. 최준호가 계약하면서 받은 게 불체포특권임.

-눈앞에서 조져도 처벌할 수 없네. 이게 큰 그림이라는 건가 ㄷㄷㄷ 근데 어차피 레벨 8 초인은 체포 못하지 않나?

-지금 쏟아지는 기사 보셈. 다들 어조가 정중햌ㅋㅋㅋ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건가 ㄷㄷㄷ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없기 때문에 불체포특권 가진 초인한테 대놓고 대립각 세울 용자는 많지 않을 듯. 머리 진짜 잘 썼다.

-정부는 최선의 판단을 했다. 최준호에게 불체포특권을 준 걸 후회하지 않을 것...!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기자회견이 끝났지만 시청자들의 채팅은 끝없이 이어졌다.

*

치이익!

불판위에 익어가는 고기를 열심히 굽던 오종엽은 맞은편에 있는 나를 힐끔거리다 물었다.

"근데 승진한 건 넌데 내가 고기를 사고 있냐?"

"내가 사?"

"아니, 그건 아니고. 당연히 나도 대접할 생각은 있긴 한데 갑자기 시간 내라고 하니 이해가 안 돼서······."

"생각해보니 너한테 얻어먹어야 하는데 깜빡한 거 같아서."

"그런 건 깜빡해도 되는데."

"안 잊어먹어. 그러고 보니. 이제 내 직위가 더 높군."

녀석이 첫 출근 때 했던 말을 잊어버리지 않고 되돌려줬다. 오종엽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눈이 마주칠까봐 불판에 시선을 옮긴 녀석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 음. 그럼 존대할까요?"

"그냥 해본 말이야. 공적인 자리에서나 잘 지켜라."

"그치? 그런 거지? 후! 난 또 진심인 줄 알았네."

"종수는 어때?"

"통원치료 해도 될 만큼 나았어. 종수가 퇴원하고 놀래켜 주자고 했는데 들켰네. 진짜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정말 고마워."

어떻게 되긴, 빌런이 됐겠지. 오종엽 때문에 말소자가 등장했고 버서커라는 미친놈이 들러붙었다. 놈은 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종수는 앞으로 계획은 있고?"

"난 괜찮다는데 자꾸 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라. 돈은 크게 문제가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러네."

"일할 수 있는 상탠가?"

"할 순 있는데 체력은 안 좋아. 그래서 몸 쓰는 일은 무리. 체력이 좋아지면 하자고 설득 중이야."

"그럼 국가수호국으로 출근시켜보는 건 어때."

"응?"

"내 휘하에 공무원 몇 명 뽑을 수 있으니까. 종수가 괜찮으면 출근시켜봐. 간단한 서류 정리랑 심부름 정도만 하면 돼."

"어, 괜찮을까?"

"괜찮으니까 하는 소리다."

오종수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내가 레벨 8이 되었다고 하자마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연락 때문이다.

그중에서 내 직권으로 구성할 수 있는 자체 팀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았는데, 엄한 사람 들여놓으면 내 행적이 줄줄 새어나갈 게 뻔해서 아는 사람으로 채워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대상 중 하나가 오종수였다.

저번에 보니 똘똘하고 분위기 파악도 잘해서 오종엽이 깐족대는 걸 효과적으로 틀어막을 것 같다.

"기회를 주면 감사하지. 종수도 하겠다고 할 거고."

"같은 국가수호국 내라 지켜보기도 쉬울 거다."

"고맙다. 진짜 고마워."

"그럼 고기나 더 사던가."

"그, 그럴까? 얼마든지 시켜!"

친구의 호의를 배신할 수 없지.

나는 녀석의 바람대로 메뉴판에 부위 중 제일 비싼 걸 주문했다.

"여기 살치살 2인분이랑 업진살 2인분, 차돌된장찌개 추가요."

"······."

오종엽의 얼굴이 새까맣게 죽었다.

*

"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보고 있어요."

안으로 들어온 직원에게 이세희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은 조금 전 끝났지만 실시간 채팅창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건 기회죠."

"예?"

기자회견에서 난데없이 터진 폭력사건. 그 과정에서 신성제약 회복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비상사태였지만 이세희의 명령은 달랐다.

"회복제 재료 가공량을 늘리도록 해요. 계열사에 생산 원료 발주량을 늘리고요."

"아, 알겠습니다."

"빨리 움직이도록 해요. 곧 회복제 주문량이 폭주할 테니."

보고하러 올라왔던 직원은 일거리를 잔뜩 떠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이세희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몸을 묻었다. 조금 전 본 장면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레벨 8이 되었어도 최준호는 최준호다웠고 신성제약은 큰 기회를 잡게 되었다.

"다 알고 도와준 거겠지."

대놓고 기레기를 빌런으로 지목하고 조질 줄 몰랐지만 거기서 회복제를 사용할 줄 몰랐다.

그것도 상표를 대놓고 드러내고.

역대급 PPL(간접광고)이었다.

팔다리가 부러진 기레기의 부상이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걸 봤으니 효과가 확실하다는 인상을 주었으리라.

이건 곧 회복제 광고 효과를 불러 일으키고, 주문량 폭증으로 이어질 것이다.

최준호가 역대급 화제성을 얻게 되었다면 이익은 신성그룹의 것이 되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팀장님. 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오늘 미팅은 없는데요."

약속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만남은 이세희가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손님의 정체를 듣자 이세희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게 손님이 최준호 초인님입니다."

"지금 어디 계시죠?"

"프런트에 계십니다."

"10분! 10분을 지연시키세요."

"아, 알겠습니다."

직원이 나가고 혼자 남은 이세희가 빛의 속도로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과하지 않게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러운 것. 각성자의 신체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다 고 쳤다. 풀어놓았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를 착용하고 남은 시간 동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정확히 10분이 되자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최준호만이 아닌 최윤희도 함께였다. 최준호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온 최윤희가 사과를 건넸다.

"언니,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이 웬수가 아주 큰 사고를 쳐서 사과하러 왔어요."

"아니, 괜찮아. 준호 씨가 회복제를 광고해 주셨는걸."

"봐라."

"아니, 기자 조져놓고 우리 회사 물건 써놓고 뭐가 그리 당당한 건데?"

"기자가 아니라 빌런이지."

"어이구 그러셔요? 기자 모인 자리에서 기자 조져서 전부 적으로 돌려놓고서?"

최윤희가 기가 찬 듯 말했지만 이세희가 끼어들어 정정해줬다. 최준호의 행동에는 고도의 노림수가 있다, 여태까지 최준호를 봐온 이세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기자들이 준호 씨를 적대하기 쉽지 않을 거야."

"왜요?"

"준호 씨가 평범한 각성자가 아닌 초인이니까."

초인이 가진 권한은 상당하다. 그럼에도 이를 신경 쓰지 않고 공격하는 기자들이 있는데, 초인의 무력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최준호는 첫 만남부터 그 틀을 깨버렸다.

무력 앞에 초연할 수 있는 기자는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최준호에게는 불체포특권이 있다.

"특히 죄 없는 기자를 공격한 게 아니야. 실제 혐의가 드러난 기자를 공격했어. 선량한 기자와 분리시킨 거지. 제목으로 장난질하던 기자는 공격하지 않았고."

"고예진 기자가 제일 악질인데······."

"그리고 하나 더, 준호 씨는 일부러 강하게 나가서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도 있어."

"진짜요?"

"국가수호국 시절 과잉 진압 건이 많았던 건 사실이니까. 기자들에게 얕보였으면 이걸 시작으로 계속 물어 뜯겼을 거야. 하지만 처음부터 기레기 하나를 처리하면서 과격한 모습을 보여주고 '선 넘으면 너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이미지를 준 거지. 초인이 날 공격하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고 낚시성 기사를 남발할 수 있지만 그 초인이 날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

결과적으로 경고가 되어 최준호에 대해 기사를 쓰려면 한 번 필터링을 거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게 고도의 노림수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최준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세희는 그가 판을 짰다고 확신했다.

강력한 무력만큼 교활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최윤희는 가족이라 오히려 그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최윤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첫 이미지를 과격하게 가져감으로써 준호 씨는 앞으로 활동 반경이 위축되지 않도록 유도한 거야. 맞죠?"

"그래."

"그리고 하나 더. 준호 씨는 기레기를 부상 입혔지만 그 자리에서 치료하는 걸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것도 보여줬어. 이건 윗사람들을 향한 메시지가 돼. 간섭하려고 들면 필요 이상으로 과격해질 수 있지만 간섭하지 않으면 자기가 알아서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는 뜻이지."

"호오."

최준호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최윤희가 눈에 불을 켰다.

"오빠는 별 생각 없이 지른 거 같은데 언니가 의미부여하는 거 같아요."

"아니야, 윤희 넌 준호 씨의 노림수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 준호 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보고 움직이셔. 상황을 조성하고 유리한 판을 만드는 거지. 안 그런가요?"

"···모두 네 말대로다."

3초 정도 멈췄다가 대답한 최준호가 미소를 지었다.

"모두 내 의도대로다."

34화

34화

날 의심섞인 눈으로 보던 윤희가 밖으로 나가고 나와 이세희만 남게 되었다.

"회복제 성능이 좋더라."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분이 말씀해주시니 가장 확실한 후기네요. 칭찬 고마워요."

"당연한 평가다."

"······."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거죠?"

역시, 이세희는 눈치가 빨라서 같이 일할 때 편했다. 지나치게 똑똑해서 뭐든 의미부여를 하는 것 같지만.

나도 내 행동에 그런 계산이 숨어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의뢰를 하나 하고 싶어서."

"어떤 건가요."

"신성제약은 국내 최고로 알고 있다. 경쟁력은 세계에서도 우수하다고 알고 있고."

"맞아요, 준호 씨가 쓰는 회복제도 결과물 중 하나에요. 미국이 굳건한데 가격이 워낙 비싸죠 우리 건 가격 경쟁력이 좋거든요. 준호 씨가 의뢰하고 싶은 건 회복제 쪽인가요?"

"맞아."

"어떤 걸 원하세요?"

"신체가 잘린 걸 붙이는 회복제 개발을 의뢰하고 싶다."

"······."

"어렵나?"

이세희 표정이 관리가 안 되는 게 보였다.

한 번씩 해볼 법한 생각 아닌가.

"지금 준호 씨가 무슨 생각하는 건지 잠시 생각해봤어요. 어, 음. 전투를 하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벌어졌을 때 수습하려는 의도겠죠?"

"그런 셈이지."

"할 수는 있지만 실효성은 모르겠네요. 외과 수술로도 가능하고 붙이더라도 바로 전투를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균형이 무너지는 걸 바로잡을 수 있지. 반대 손으로 검을 잡으면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손실은 최소화 할 수 있다."

"그건 그렇지만······."

망설이는 이세희에게 내가 미끼를 던졌다.

"공짜로 해달라는 게 아니다. 연구 자금을 지원하겠다."

"연구자금을?"

"그리고 절단된 걸 붙이는데 효과 좋은 걸 알고 있지."

"그럼 연구를 엄청 단축할 수 있어요."

"하겠나?"

"준호 씨가 주는 힌트가 확실하다면요."

이렇게 이세희의 협력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세희는 내가 팔다리 자른 걸 붙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생각이었다.

피치 못할 때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기뢰로 머리를 부숴버리면 빼도박도 못하지만 잘라버린 뒤 붙여놓으면 책임을 최소화 할 수 있다.

겉포장은 중요한 법이니까.

근데 다시 붙였을 때 잘린 자국은 지워지나?

*

늦은 밤, 천명국과 정주호가 만남을 가졌다. 둘은 허름한 노포 술집에서 홍합탕에 생선구이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실장님이 부르시면 와야지요. 그, 오늘 사건 거하게 터지기도 했고.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하."

"···괜찮으신 겁니까?"

정주호는 마른 웃음을 터뜨리는 천명국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야지요."

만약 자신이 천명국이었으면 어땠을까. 정주호는 자신이 일개 국장에 불과한 걸 신에게 감사했다.

"제가 최준호 초인의 계약을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저도 옆에 있었으니 잘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레귤러 계약은 7년입니다. 최준호 초인님이나 우리 정부 측은 7년 동안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지요."

"······."

"그런데 첫날부터 사건이 터졌습니다. 최준호 초인님과 계약 하루만에요. 크흐흐! 앞으로 남은 계약기간이 6년 364일입니다. 날짜로 2554일이고 지금이 10시니 시간으로 치면 10만 7270시간이 남았군요."

10만 시간 동안 최준호를 케어해야 한다고? 듣는 것만으로 어질어질했다. 차라리 죽여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하자 천명국이 왜 술을 들이키는지 이해가 되었다.

"정 국장님, 최준호 초인님이 이런 사람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몰랐다고 하면 실장님을 기만하는 꼴이 되겠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최준호가 원래 그런 녀석입니다. 근데 오늘 저렇게 사고 칠 거라 생각했다면 아닙니다. 녀석은 늘 상상을 뛰어넘더군요."

말없이 잔을 드는 천명국을 보며 정주호가 잔을 부딪쳤다.

이 순간만큼은 둘의 마음이 일치했다.

"그동안 정 국장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눈에 훤합니다."

"저야 고작 반년이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저는 6년 364일. 10만 시간을··· 후!"

자기 잔을 가득 채운 천명국이 술을 들이켰다.

"생각해보니 제가 그때까지 자리를 지킬지 의문입니다. 근데 제가 그만두면 최준호 초인님은 누가 제어하게 될까요. 아니, 애초에 제어가 되는 거 맞습니까? 만약 최소한의 제어라도 할 수 있는 고삐를 놓치게 될 때, 전 그 상황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왜 벌써 그런 생각부터 하시는 겁니까."

"저지른 게 있으니까요. 국장님, 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가르침을 얻고 싶어 만남을 청했습니다."

"······."

정주호는 대답하지 않고 잔을 매만졌다. 천명국은 다시 한 번 술을 따라 단번에 들이켰다.

"더러운 이야기지만 사건이 터지고 혈변을 봤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더군요.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깨끗했는데. 평생 건강했던 제가 하루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헌터 생활을 하면서 마물에게 패퇴하더라도, 외국에서 홀로 표류하면서도 절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피똥 싸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후우!"

천명국 손에 들린 병을 빼앗은 정주호가 그의 잔을 채워줬다. 그리고 잔을 들어 건배 제스처를 취하자 둘의 잔이 부딪쳤다.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정주호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실장님. 저는 그 녀석 때문에 머리가 빠진지 꽤 됩니다."

"그런 참혹한 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미 레벨 8로 공인받고 불체포특권까지 얻었습니다. 놈은 제어하려고 할수록 튀어나갑니다. 다행이라면 녀석은 자기만의 정의가 확실해서 모든 사안에 노빠꾸로 들이받지 않습니다."

"그걸 파악해야 되는군요."

"그래도 예상할 수 있는 재앙이 덜 스트레스지 않겠습니까?"

"···파악만 할 뿐 막을 수 없다는 의미였군요."

"예."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된 것 같다.

대비가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다니.

천명국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녀석과 친해지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있습니다. 가끔 가뭄에 콩이 나듯 의견도 들어주고요. 그때까지 버티시길 추천드립니다."

"국장님은 대체··· 그동안 어떤 싸움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녀석이 빌런되지 않도록 한 게 제 인생 최대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정주호 국장님을 위하여."

"천명국 실장님을 위하여."

피똥과 탈모의 아픔을 공유하게 된 둘은 노포 술집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

오종엽과 얘기를 나눈 대로, 오종수가 출근했다.

"형, 안녕하세요. 형 덕분에 건진 목숨, 폐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해서 갚을게요."

"어서 와. 아직 어수선한데 정리 좀 하고 컴퓨터 프로그램 설치할래?"

"네!"

잠시 외부에 다녀온 사이 오종수는 책상 정리를 마치고 컴퓨터까지 설치해놓았다. 그리고 내게 도착한 서류까지 가져다놓았다.

"이제 뭘 할까요?"

"내가 서류를 분류하면 그걸 정리해놓으면 돼. 당일 처리할 것, 이번 주 내로 처리할 것, 이번 달 내로 처리할 것이 있고 반려할 것. 이렇게 나뉠 거다."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해볼게요."

"그리고 주된 일은 내게 오는 연락을 분류하는 거다."

직접 오는 연락부터 시작해서 메일, 메신저 등이다. 내가 직접 거르지 않으면 국가수호국으로 업무가 몰려들어서 내 선에서 해결하기 위해 오종수를 들였다.

기대에 못 미치면 어쩔 수 없고 잘 해내면 또 다른 기회가 되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 벌써 초대가 상당한데요. 각성자 아카데미 특별 초청, 공무원 헌터 연수 초청, 대형 길드 특강, 간담회도 있고······."

"네가 사안의 중요도를 정해봐."

"제가요?"

"참고만 할 거야. 네 결정이 그대로 반영되지 않을 거니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고 해봐."

"네!"

그렇게 오종수가 업무에 들어갈 무렵, 숙취 가득한 얼굴로 늦게 출근한 정주호가 날 불렀다.

"그래서 그 기자는 어떻게 된 거야?"

"법의 심판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처벌받을까?"

"받지 못하더라도 예전처럼 나대진 못하겠죠."

"하긴, 네가 빌런으로 규정했으니 또 눈에 띄면··· 그냥 자살을 추천하고 싶다. 아무튼 그걸로 끝이구나."

"맛보기였으니까요. 끝까지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법의 처벌은 그다지 기대 안한다. 차라리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 게 더 확실하겠지.

일각에서 사적 제재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레벨 8 초인에게는 즉결심판권이 존재한다. 나는 이걸 조금 폭 넓게 사용할 뿐, 문제는 없다.

"···난 가끔 네가 말하는 끝이 어느 건지 생각하다가 모골이 송연해져. 제발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오자. 너 때문에 몇 명이 수명 줄어드는지 아냐?"

모발이 줄어든다고 툴툴 대더니 어느새 수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근데 이렇게 푸념하는 건 정주호밖에 없던데. 요즘은 앓는 소리를 해도 상황을 즐기는 것 같고.

난 그가 엄살 부리는 걸로 이해하기로 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계획은 뭔데?"

"레벨을 인정받았으니 초인인 걸 각인시킬 성과를 거둘 생각입니다. 우선 제게 들어온 여러 초청 스케줄과 공식 스케줄 중에서 참가할 걸 분류한 뒤 인천의 빌런 항쟁에 연류된 조직을 토벌 하려고 합니다."

"오오! 네가 그걸?"

"리그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요."

"위에서 좋아하겠다. 그래, 그런 거 맡아주면 얼마나 좋냐고. 하하하! 우리 국가수호국에서 뒤를 받쳐줄 테니 마음껏 날뛰어봐."

국가수호국이면 확실히 뒷정리를 맡길 수 있다.

"감사합니다. 근데 어제 술을 많이 드셨나봅니다."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 잘 들어가더라고. 난 괜찮지만 그 사람은 승승장구하다 브레이크가 걸려서인지 힘들어하더라. 그 사람도 참 안 됐어. 쯧쯧!"

"잘 치유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불가능할 거야. 스트레스 원인이 미쳐 날뛰는 중이거든."

"참 안 됐군요."

"안 됐지. 나중엔 불쌍하더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주호가 날 빤히 보며 말했다. 세상에 자기가 극복하기 불가능한 것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스트레스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히 먹는 게 최선이다.

조만간 인천으로 가게 되면 자세한 계획을 수립하기로 한 뒤 밖으로 나왔다.

내 사무실로 돌아가다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 정다현이 보였다. 난 정다현을 데리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요."

"말해."

"최근 정체된 느낌이 들어요. 윤희가 실력 느는 걸 보면서 저도 잘하고 싶은데 갈피를 잡기 쉽지 않더라고요. 오빠한테 조언을 구하고 싶어요."

"일상에서 직감은 활용하고 있지?"

"네. 24시간 내내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직감이 더 발전하려면 그걸 확신 수준으로 발전시켜야겠지. 그러려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고.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건 실전 경험이다."

나는 실전만큼 많은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수련을 본 적 없다.

부상입지 않게 조심조심하는 것도 사실 소꿉장난이라 생각한다. 피와 살이 튀며 목숨이 오가는 대결이야 말로 진짜 깨달음의 장이다.

주로 내 피보다 상대의 피와 살이 튀었지만.

"실전, 경험."

"그러려면 빌런을 잡는 게 최고겠지. 수준 낮은 빌런은 안 돼. 비슷한 수준에, 긴장감을 줄 수 있는 빌런이 좋겠지. 레벨 6이 적당해."

"제가 찾아다녀야겠네요."

"직감은 본능적으로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적과 아닌 적을 구분할 수 있어. 이걸 더 세분화하면 상황에 따라 이기거나 질 수 있는 빌런도 구분되겠지. 거기까지 발전시키면 다음으로 향하는 길을 열 준비가 된 거야. 할 수 있겠어?"

정다현은 주로 시내의 빌런을 체포하는 일을 맡아왔다.

시내 빌런 체포는 모두가 원하는 꿀보직으로 빌런 수준이 높지 않으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정다현은 국가수호국의 꽃이자 아이콘으로 착실한 꽃길을 걷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근면성실하게 수련하여 미래에 레벨 7에 오르고.

나는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정다현이 발전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본인은 그걸 만족하지 않는다.

이번 일은 도시 외부의 빌런을 상대하는 일이다. 혼자 다니는 고레벨 빌런도 있고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빌런도 있으며 숫자로 밀어붙이는 빌런들도 있다.

어디에서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에서 성과를 쌓아나가야 하는 일인 것이다.

"마침 나도 마물을 잡아야 해서, 같이 도시 밖으로 나가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어."

"해볼게요."

"좋아."

난 전의를 다지는 정다현을 응원했다. 외곽을 돌다 보면 몇 명 걸려들겠지.

*

근래 들어 정다현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주변 모두가 성장하고 있다.

친구인 이세희는 각성자로서 자신에게 크게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신성 길드 요직에서 맹활약했고, 최준호의 동생인 최윤희는 빛나는 재능이란 게 뭔지 보여주며 급성장을 이뤄내고 있다.

그리고 최준호.

25세의 나이에 레벨 8로 공식 인정을 받은 천재.

한때 부사수였던 이 남자는 자신이 쫓을 수 없는 곳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다현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실감했다. 자신이 좀 더 부지런하고 좀 더 치열했다면 지금보다 높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뒤처지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래서 최준호에게 조언을 구해 앞서 나가고자 했다.

"옆에 서려면 빌런을 잡아야 돼."

그래서 정다현은 최준호와 도시를 나와 빌런을 찾아다녔다.

*

"죽는 줄 알았네."

대외협력관리국 블랙요원 한상민은 얼마 전 부상을 털고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부상으로 힘든 나날이었다. 염기철 국장의 명령으로 빌런을 행세를 하면서 빌런들의 정보를 수집했지만 그날의 경험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순간이었다.

"그 미친놈이 레벨 8이라니, 살아남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힘들었던 재활 순간을 떠올리며 한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는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며 저주를 퍼부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복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놈이 튀어나온 건지.

공무원 헌터와 빌런 생활 둘을 두루두루 해보면서도 처음 보는 타입이었다.

부상으로 이탈해 있다 보니 기존 본거지로 향할 수 없게 되었다. 한상민은 먼저 암시장에 들려 필요한 물건들을 산 뒤, 빌런 조직들과 접촉해서 블링크 나경욱이 건재하다는 걸 알릴 생각이었다.

암시장을 들렸다가 나온 그는 인적이 드문 길을 걷다가 위화감에 휩싸였다. 저번에도 이러다 최준호에게 습격을 당해서 지독한 꼴을 당했다.

"데자뷰? 에이, 아니겠지."

레벨 8 초인의 귀하신 몸이 암시장에 나타나겠는가. 과민 반응이라 생각하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사색이 되어 경계태세를 취했다.

"찾았다. 레벨 6."

"넌 정다현?"

천재적인 재능보다 미모로 더 유명한 공무원 헌터의 꽃, 정다현이었다.

다소 딱딱한 성격이지만 공명정대하고 정의감이 넘쳐 공무원 헌터들 사이에서 빛이라고 불리는 그녀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시내에 암약하는 빌런들을 주로 체포하는 걸로 아는데?

지금 그녀는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섬뜩한 기세를 발산하고 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레벨 6 빌런, 블링크 나경욱."

"어어? 자, 잠깐!"

한상민은 검을 들고 다가오는 정다현을 보며 사색이 되었다.

*

정주호는 전날 천명국과 만남으로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최준호맛을 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홀로 그 엿같은 맛을 그동안 감당했던 걸 생각하면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혈변이라니, 꼭 나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하지만 최준호맛은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밀려들 최준호맛 폭풍 웨이브에서 천명국이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그 여파에 한 발 비켜서 있다는 것이 이토록 고마울 줄이야.

이제 녀석이 사고 쳐도 책임지는 건 자신이 아니다. 옆에서 적당히 제동 거는 척하면서 작전에 힘을 보태주고 과실을 챙기면 된다.

그래도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혈변에 좋은 보약이라도 한첩 지어줘야겠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을 때,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친구이자 앙숙, 대외협력관리국 국장 염기철의 연락이었다.

"어, 무슨 일이냐?"

-야이, 미친 새끼야!

"갑자기 왜 이래. 어제 부부싸움 했냐?"

-이이, 익! 이 미친 새끼가, 한상민이 복귀하자마자 중상을 입히냐! 오늘 임무 받고 출동했다고 이 미친놈아!

"무슨 소리냐니까."

-부하 관리도 안 되는 거냐, 이제? 어? 네놈 부하가 상민이 중상 입혔다고! 복귀하는데 1년이 걸린단다!

귀기마저 띄기 시작한 염기철의 목소리에 정주호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정주호는 결백했다. 사고칠 가능성이 99.99%인 최준호는 한상민의 얼굴을 안다. 그가 빌런이지만 작전을 위해 잠입한 걸 안 이상 건드릴 리 없다.

무엇보다 최준호는 이제 자기 부하가 아니다.

"잘못 안 거 아냐? 최준호가 또 건드릴 리 없잖아. 그리고 너 뭐 착각하나 본데, 최준호는 국가수호국과 협력 관계를 구축한 거지 내 부하가 아니야."

-최준호가 아니다.

"그럼?"

-정다현.

"누구?"

-네 조카 정다현이 상민이를 반병신으로 만들었다고! 미친 새끼야!

"에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진짜 아니라고 확신하는 거냐? 진짜로?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정다현, 자신의 조카.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유명했고 올곧은 신념과 정의로운 성격으로 훌륭히 일을 처리해왔다.

정주호는 그녀가 대한민국을 빛날 헌터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준호에게 영향을 받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깨는 자양분으로 삼을 거라 믿었다.

아니다. 정다현이 그럴 리 없다. 그런데 왜 자신은 염기철에게 단호히 아니라고 말을 못하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한 정주호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안 돼!"

35화

35화

첫날부터 정다현은 꽤 훌륭한 경험치 상대를 만났다. 레벨 6이 길을 가다 발에 채일 만큼 많지 않다.

문제라면 그 상대가 빌런을 가장한 공무원 헌터라는 점이지만.

빌런 블링크 나경욱으로 알려진 대외협력관리국 한상민은 정다현에게 된통 걸려 1년 이상 치료를 요하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나와 다른 점이라면 정다현은 한상민이 언급한 신분을 끝까지 믿지 않고 몰아붙였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모습, 훌륭했다. 내가 정다현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다.

다음 날, 출근한 정다현은 그대로 국장실로 끌려갔다. 정주호의 얼굴은 폭발할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한참 있다 나온 그녀를 보고 다가갔다.

"몸은 어때?"

"멀쩡해요. 한상민 요원한테 미안할 정도로."

"운이 나빴지. 국장님은 뭐라셔?"

"다음부터 주의하라고 하셨어요."

역시 정주호가 상황을 볼 줄 안다.

"네가 잘못한 건 없어. 블랙요원이 빌런으로 위장한 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의미겠지."

물론 나 다음 정다현한테 걸린 건 재수 없긴 했다.

"앞으로 그런 정보는 서로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알았으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텐데. 대외협력관리국장님한테 죄송하네요. 한상민 요원한테도 그렇고."

"이해해줄 거야. 피치 못할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주시겠죠?"

"내가 볼 땐."

"한상민 요원한테는 병문안 가서 사과해야겠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과연 병문안이 수월할까?

꽤 지독하게 당했던데.

정다현과 대화를 마친 뒤 국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얼굴이 잔뜩 구겨진 정주호가 맞아주었다.

"그래, 정다현 부추기신 우리 초인님이 무슨 일로 오셨나?"

"불운한 사고였습니다."

"아하, 그래서 잘못이 없으시다?"

"빌런 위장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게 됐을 테니 이 기회에 한상민 씨는 공무원 헌터로 복귀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건 염기철이가 결정할 일이고."

다시 생각해봐도 블링크 기프트는 진짜 탐이 나는 기프트였다.

마음 같아서는 뺏고 싶을 정도로.

"아무튼 다현이 좀 그만 부추겨."

"다현이는 제 사수였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친구입니다. 제가 지도하는 걸 너무 감사히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한 적 없어!"

"아니었나요?"

아닌 척 하기는.

절규하는 정주호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지만 국가수호국 조직을 이끄는 장으로서 공평하게 대하려는 정주호의 태도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 나한테 고마움을 느끼고 있겠지.

나는 조직을 이끌어본 적이 없지만 정주호를 보면 올바른 리더는 그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국장님 마음 다 알고 있습니다."

"와, 사람 미치게 하네."

*

난 사적으로 천명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얼굴만 보면 저번 생의 경험이 떠올라서다.

천명국은 혈종을 잡기 위해 이뤄낸 이른바 '대타협'은 무수히 많은 희생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혈종 나를 위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이어지던 추격이 아니었으면 저번 생의 나는 끝까지 대한민국에 눌러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한국을 뜨게 만든 인간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을 제외하고 보면 천명국은 훌륭한 사람이다.

아래 사람에게도 정중하고 예의발랐다. 그래서 나도 개인감정을 섞지 않고 협조하는 중이다.

"관용차 말입니까?"

"예."

"별 말씀이 없으셔서 준비된 세단이 배정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레벨 8 초인은 품위유지를 위해 관용차도 제공된다. 자원도 희귀해진 대마물시대에 주유비가 무려 무제한 무료였다.

하지만 내가 그걸 타봤자 얼마나 타겠나. 난 허례허식이나 의전, 이런 건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천명국은 내가 할 말이 있는 걸 눈치 챘다.

"관용차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으신지?"

"제가 사람 만나러 다닐 일도 많지도 않은데 굳이 관용차가 필요한가 싶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대신 도시 밖에 작전을 나갈 때 시간을 다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시겠지만 KTX나 SRT가 제 마음대로 이용이 안 되는 걸로 압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발상을 바꿨다.

"제가 도시 밖으로 작전을 위해 움직일 때 타고 다닐 스포츠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운전기사는 F1 출신이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윤희를 구하러 갈 때 오토바이로 이동하면서다.

스포츠카에 F1 출신 운전기사면 시속 300km도 가능하지 않을까?

오토바이로 200km를 밟았으니 300km면 1.5배 빨리 갈 수 있다.

처음엔 황당한 표정을 짓던 천명국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최준호 초인님의 발상은 다른 사람들과 궤가 다른 것 같습니다. 감탄했습니다."

"가능할지?"

"초인님이 작전 지역에 최대한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인데 그게 어렵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성사시킨 뒤 날짜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인천 지역 빌런 소탕 건이었다. 대화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시원하게 들어주니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음엔 전용기를 얘기해봐야겠다.

*

오종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을 잘했다.

특히 방대한 분량을 요약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레벨 8이 된 이후, 내게 들어오는 제안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있었는데 이걸 오종수가 커버해주고 있었다.

나는 오종수가 추려내고,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것들을 일정에 포함시켜 소화하기 시작했다.

내가 국가 소속 초인이 된 이상 빌런만 잡는다고 제 역할을 다한 게 아니게 된다. 적당히 사람도 만나고 행사도 참석해서 정부의 지지율을 견인해야 한다. 이래야 주변 우군이 생겨 내 활동반경이 넓어진다.

···라는 이세희의 해석을 듣고 난 뒤 그대로 움직였다.

듣다보니 나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불체포특권을 만능으로 써먹으려면 중요하지."

초인에게는 단독 작전안 수립과 실행 권한이 있고, 현장에서 판단을 존중받는다.

내가 받은 불체포특권도 결국 얼마나 정당하게 보이느냐가 중요했다. 여론을 내 편으로 만들고 정당성을 확보하면 절차의 문제가 있어도 날 건드릴 수 없다.

그리고 난 자신 있었다.

어차피 죽일 놈 조지는 건데.

내가 참가한 행사들도 주로 나라에서 여는 행사들이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하고 악수 좀 하다가 병풍처럼 서 있다가 오면 돼서 난이도도 높지 않았다.

물론 빌런이나 마물을 잡아 죽이는 게 훨씬 더 쉬웠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가만히 서 있어! 오빠는 허우대를 이용할 필요가 있어! 입 다물고 있으니 얼마나 보기 좋은 줄 알아? 오빠 실체 모르는 애들은 벌써 팬이 되고 난리라고!"

슬슬 질린다 싶으면 귀신같이 끼어드는 윤희의 역할도 컸다.

내가 부지런할수록 아군이 많아진다면서 여기저기 다 참석할 것을 추천했다. 여기에 왜 연예계 행사가 있고 기업행사도 있는 건데?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은 건지 기자들도 곧잘 좋게 써주고 있었다.

내 진심을 이해해준 것 같아 다행이다.

오늘 방문할 곳은 압구정동에 위치한 아카데미다.

우리나라 최고의 각성자 육성 기관으로, 이곳 졸업생 중 레벨 8 초인이 세 명을 배출하면서 각성자를 꿈꾸는 지망생이면 반드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저번 생에 나도 그렇고 윤희도 이곳에 입학하길 간절히 원했었지.

하지만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을 탁월한 재능이 아니면 학비가 너무 비싸 쳐다보기 힘든 곳이다.

정다현과 이세희도 이곳 아카데미 출신이고.

아카데미 학장부터 시작해서 교수, 조교 모두 현업에서 검증된 헌터 출신이다.

내가 본 것은 아카데미 학장이었다.

"고명학입니다."

"최준호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카데미 학장 고명학은 70이 넘은 고령으로, 10년 전 은퇴한 레벨 8 초인 출신이다.

더 이상 레벨 8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면서 후진 양성에 집중하겠다고 의사를 밝히며 쿨하게 은퇴했다. 버서커한테 어이없이 죽은 김영환과 대비되는 행보였다.

"그 말씀은 제가 드려야지요. 국회 기자회견은 인상 깊게 봤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입니다. 속이 시원하더군요."

그 말에 난 호의를 베풀었다.

"아카데미에 대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기사를 쓰는 기자가 많더군요. 자료를 보내주시면 교차검증을 해보겠습니다."

"허허,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고명학은 내가 저번 생 마지막 그 순간까지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다. 은퇴할 때 했던 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고령임에도 청수(淸秀)한 외모는 사선을 넘나든 헌터라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껍데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버서커도 겉모습만 보기에는 점잖게 잘생긴 미중년이었으니까. 하지만 행동은 미친놈 그 자체였다.

"학장님이 보셨을 때 기자회견은 어떠셨는지?"

"아마 현직에 있었을 땐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혈기가 넘쳐 날뛴다고요. 하지만 최준호 초인님에게 남들이 모르는 기준이 존재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속이 시원하다는 말도 진심이었고요."

"······."

"예상 외였는지? 저도 현직에 있을 때 기자들에게 적잖이 시달렸고 은퇴 후 아카데미에서도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감정이 없다면 거짓이겠지요. 하지만 제 이미지를 챙기느라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초인님의 행동을 보고 배포와 용기, 젊음이 부러워졌습니다."

"이렇게 좋게 봐주실지 몰랐습니다."

앞으로 그 배포와 용기, 젊음을 발휘해달라는 말로 들렸다.

"요즘 길드 가입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길드 입장도 이해가 되고 정부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그 사이에 낀 학생들은 죄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많은 자리가 필요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네요."

"오랫동안 유지해온 룰이긴 하지요."

각성자 세계도 취업난이 심했다.

정부에서는 특정 길드가 필요 이상의 무력을 보유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나온 게 길드 인원 제한이다. 사업장이 5인, 10인, 100인, 300인 적용 기준이 다르듯이 길드 또한 인원이 많아질수록 지켜야 할 규칙과 납부해야 할 세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대형 길드에서는 일정 인원 이하를 유지했고, 아카데미를 막 졸업하는 학생들은 최상위 길드에 자리가 없어 취업난을 겪었다.

이를 완전히 극복할 실력이 있다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러다 고명학은 내게 고명학은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부탁했다.

"제가 말입니까?"

"초인님 같은 분이 잘 가르치시더군요."

내가 학생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내게 배울 게 있을까?

그러자 생각이 다른 곳에 미쳤다. 아카데미도 사람 사는 곳이고 삐뚤어진 놈들이 있을 테니 미래에 빌런이 되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그 녀석들을 사람 만들어놓으면 신세를 입히게 되겠지.

"아카데미의 문제아들에게 관심이 가네요."

"문제아 말입니까?"

"심성이 삐뚤어졌어도 바로잡을 수 있으면 유용한 자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허! 안 그래도 사춘기에 엇나간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이렇게 신경을 써주실 줄은."

"그 아이들을 위한 특강을 준비해보겠습니다."

"허허,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명학은 안경을 매만지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해왔다.

별 거 없다. 아카데미에서 골치 아파하는 애들을 내가 하루 데리고 굴려줄 생각인 게 전부였다.

"다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삐뚤어진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려면 그만한 충격은 필요한 법. 인원 구성이나 일정 등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저희가 준비하는 동안 초인님이 강의 방향을 알려주시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초인님 덕분에 제가 자랑할 게 하나 늘어났군요. 초인님의 특강으로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결국 죽음 앞에서 모든 게 공평해지는 법.

죽음의 위기 앞에서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지 지켜보면 될 일이다.

그런데 빌런의 싹이 보이면 차라리 제거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도 사람 만들겠다고 했으니 몇 명은 살려와야겠지.

난 고명학과 몇 마디 더 대화를 주고받은 뒤 아카데미를 벗어났다. 이날 일정은 꽤 유익했다.

*

정다현의 표정은 우울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한상민의 병문안을 갔는데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켜서 사과도 못하고 병실을 나와야 했단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야."

"제가 그분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어요."

"빌런을 상대로 하나하나 다 귀 기울였다가 언제 죽을지 몰라. 넌 최선을 다했어. 상대는 재수가 없었고."

"······."

정다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일이 모두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정다현과 한상민 모두 운이 없었다.

"이번 빌런 소탕 작전은 오빠가 추진했다고 들었어요."

"레벨 8이 되고 실적을 거둬야 해서."

"잘하셨어요. 안 그래도 리그의 진입 소식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거든요. 그 틈을 타서 여러 조직이 항쟁을 벌이고 있고요."

리그 세력은 버서커로 인해 소멸되었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조직이 날뛰고 있는 상황이었다.

군소 조직이지만 그 숫자가 상당해서 출몰하는 빌런 숫자만 무려 오백이 넘었다. 그로 인해 인천 지역 빌런대응팀이 연일 비상경계 태세를 취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빌런 잡는 건 어때?"

"생각보다 성과는 크지 않아요. 몇 명 잡아넣긴 했는데 실력도 모자라고 저레벨 빌런들은 피해 다녀서······."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건가."

"네. 그리고 이명도 안 좋은 걸로 붙고."

"이명? 뭔데?"

정다현에게도 드디어 이명이 붙었나? 늘 천재, 신성의 꽃, 국가수호국의 빛 등등 화려한 수식어로 불렸던 정다현의 첫 이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게, 나찰녀라고······."

음, 공무원 헌터보다 빌런에게 더 잘 어울릴 법한 이명이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표정이 밝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나도 헤드 브레이커다. 한 번 정체를 감췄다가 말소자가 되었고.

아무래도 나나 정다현이나 멋진 이명과 인연이 없나보다.

하지만 실망이 커 보여 영혼없는 위로를 해줬다.

"멋진데."

"그, 그래요? 이상하지 않아요?"

"널 두려워해서 나온 이명이잖아. 당연히 무시무시한 걸로 붙어야지. 헤드 브레이커랑 나찰녀, 아주 찰떡이네."

"네, 찰떡, 찰떡이네요."

위로가 되었는지 정다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정다현의 수련이었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치열한 전투를 통해 의식했던 걸 무의식으로 넘겨야 하는 단계다.

힘의 수발이 자잘한 정체 과정을 매끄러운 한 단계로 압축시킬 수 있어야 했다.

이건 극한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면 얻기 힘든 깨달음이다.

죽일 각오로 몰아붙여야 하는데 내가 하면 진짜 죽일 거 같아서 문제다.

정다현을 잘 가르쳐놔야 아카데미 문제아들도 깔끔하게 갱생시킬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다 실력도 괜찮고 팔자도 좋은 녀석이 떠올랐다.

"아! 그게 있네."

"좋은 방법이라도?"

그 녀석이 주둥이만 닫으면 정상인으로 보이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이래저래 동원할 때 마주칠 테니 안면을 터놓는 게 필요해보이고.

"한 번 알아보고 알려줄게. 그 녀석도 스케줄이라는 게 있어서."

스케줄 없을 거다. 나한테 매일 톡 보내는 거 보면 검의 구도자는 개뿔, 그냥 미식여행 떠난 자연인이다.

우선 빌런 토벌 이후 연락을 해봐야겠다.

36화

36화

"국가수호국 특수팀장 노국철입니다."

"최준호입니다."

노국철은 내가 왕주열을 찍어내고 다음으로 팀장이 된 남자다.

왕주열이 앞에서 나대길 좋아하고 부하에게 이것저것 간섭하길 좋아했다면 노국철은 간섭을 싫어하고 조용히 자기 일을 처리하는 걸 선호했다. 대신 무척 깐깐하고 원칙대로 처리하려고 했다.

내 과거 상관이기도 했는데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지 않을 정도로 날 가만 놔뒀다.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팀장이다.

"저야 말로 잘 부탁합니다."

"작전 개요는 보셨는지?"

"주요 포인트마다 반 단위로 나눠 배치하겠습니다. 최대한 많은 빌런을 체포하겠지만 초인님의 명령대로 피해를 최소 하는데 집중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번 빌런 조직 소탕 작전의 진행은 간단했다. 군소 조직이 협상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지점을 내가 습격한다. 체포는 하되 생사는 중요하지 않다.

이놈들은 리그로 인해 엉망이 된 인천일대 치안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기에 보이는 즉시 즉결처형이고 운이 좋아 살아남으면 체포한다.

주요 지점을 국가수호국으로 틀어막고, 그 외 범위는 인천 각 지역의 빌런대응팀이 맡을 것이다.

이걸로 주변 일대를 휩쓸던 오백이 넘는 빌런을 다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내가 난입한 방식은 간단했다. 회합이 이루어지는 폐건물 뒤의 산에서 포스로 계단을 만들어 옥상에 착지했다. 무지막지한 양의 포스가 드는 방법이지만 상관없었다.

옥상에서 경계를 서던 빌런들을 쓸어버린 뒤 문을 열고 내려가 그대로 우두머리들이 모인 곳을 습격했다.

누군지 볼 것도 없이 여덟 조직 보스와 호위하던 빌런의 목을 모조리 비틀어버렸다.

"헤드 브레이커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절대 대적하지 마! 도망치라고!"

폐건물에서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포스를 얇게 펼쳐 모조리 튕겨내면서 나는 손에 닿는 빌런을 하나씩 죽였다.

난 살릴 생각 없이 손에 닿는 것 족족 갈가리 뜯어버렸다.

죽이는 빌런보다 도망치는 빌런이 많았지만 주변 도망칠 길은 국가수호국 헌터들이 점거한 상태였다.

나는 저항하는 빌런들을 죽이면서 폐건물 밖으로 나왔다. 자기들이 몰고 온 차에 타거나 짐을 챙기는 등,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죽어!"

미처 도망치지 못한 빌런이 총을 쏘기도 하고 자포자기 한 표정으로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놈들도 다 죽였다. 더 이상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주변을 둘러보니 건물 안을 포함해서 백 명 가까이 죽였다. 사지가 갈가리 찢긴 시체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을 적시는 걸 보다 나무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피가 조금씩 말라붙을 무렵, 폐건물 주위로 국가수호국 헌터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난 선두에 선 노국철에게 물었다.

"얼마나 잡았습니까?"

"백 명 넘게 현장에서 사살하고 백 명 정도 체포했습니다.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 죽이진 못했지만 빌런들에게 시달려 잔뜩 독이 오른 빌런대응팀의 손은 매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면?"

"죽은 빌런 중에 외국인이 있습니다."

빌런을 죽이는데 내국인 외국인 구분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빌런일 뿐인데.

"무슨 문제가 됩니까?"

"가끔 자국의 각성자를 죽였다며 딴죽을 걸 때가 있습니다."

"빌런 짓을 해서 죽인 걸로도?"

"예."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문제가 된다면 문제가 안 생기게 하면 되겠지.

난 간단명료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은 건 전부 한국인입니다."

"예?"

노국철은 물론 주변 헌터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외국인이 죽으면 문제라고 했으니 죽은 사람을 전부 한국인으로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수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체포된 외국인들이 증언 할 수도 있고."

"제가 전투 중에 한국말을 들었으니 한국인입니다. 만약 이게 납득되지 않으면 체포한 빌런을 전부 죽이면 됩니다. 그럼 주장할 수 없겠죠. 데려 오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

난 노국철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먼저 굽힌 건 그였다.

"···초인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좋습니다. 오늘 우리가 죽이고 체포한 빌런은 모두 한국인입니다. 그럼 뒷정리는 팀장님에게 맡기고 가보겠습니다."

"예."

특수팀에 현장을 맡겨두고 나는 현장을 벗어났다.

*

빌런 소탕 작전을 마친 그날 밤, 나는 멧돼지구이, 멧돼지김치찌개, 멧돼지수육 사진을 보낸 버서커에게 통화가 가능하냐고 톡을 보냈다. 그러자 녀석이 3초도 되지 않아 전화를 걸어왔다.

난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시킬 일 하나 있다."

-뭐지? 누굴 죽이면 되나? 날 흥분시킬 수 있는 상대면 좋겠군. 눈에 거슬리는 빌런 조직이어도 좋다. 네가 흡족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도록 하지.

"그런 건 아니고. 그 전에, 너 힘 조절은 잘하냐?"

-그건 왜 묻는 거지?

"힘 조절 되냐고."

-어설프게 힘 쓰면 추격이 붙는다. 숙련된 빌런이라면 힘 조절은 당연히 해야 한다. 그래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움직일 수 있지. 애초에 힘 조절도 못하면 수준미달 애송이 아닌가?

수준미달 애송이라 미안하군.

난 버서커의 업보를 고이 쌓아두며 용건을 밝혔다.

"지도 대련 좀 해라."

-내가 지도를?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네가 적임자 같거든."

-네가 시키는 일은 뭐든 하기로 했으니 받아들이겠다. 네가 가르치라고 했으니 보통 놈이 아니겠지. 마침 무료하던 참이니 재밌겠어.

무료한 것치고 제대로 자연인의 삶을 살고 있는 거 같던데. 가끔 녀석이 보내는 사진을 보면 최고급 캠핑용품이 풀세트로 갖춰져 있었다.

오종엽이 말하길 캠핑 중독의 끝은 캠핑카라며 곧 그 단계로 넘어갈 거라던데 버서커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시간과 장소는 톡으로 보내지."

난 통화를 끝낸 뒤 버서커에게 시간과 장소를 통보했다.

*

지도 대련 당일이 되었다.

"누군지 기대돼요."

정다현은 밝은 표정으로 내 뒤를 쫄쫄 따라왔다.

움직이기 편한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은 그녀는 지도해줄 사람을 향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

버서커 그놈은 진짜 미친놈인데. 혹시 실망하는 건 아닐까?

기껏 지도해줄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됐다.

"일단 타."

나는 정다현과 함께 경차를 타고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꽤 멀리 가네요? 수련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여기가 더 편한 인간이라. 저기 있군."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릴렉스체어에 앉아있는 버서커가 보였다. 그 뒤에는 캠핑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미 있었군.

차에서 내린 나와 정다현이 버서커에게 다가갔다.

"······."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정다현의 표정이 굳어갔다.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반대로 정다현을 본 버서커의 표정은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내가 지도해줄 대상인가? 이런 어린양일 줄 몰랐는데. 꽤 재밌겠어."

"오빠, 이 상황은······."

"호오, 오빠라고?"

버서커 이 자식이 나를 본다. 보는 눈빛이 재수 없어서 눈알을 빼내고 싶었다.

"한창 때로군. 풋풋해서 보기 좋아."

"······."

정다현은 대답 대신 의문 섞인 시선으로 날 봤다.

"버서커는 마음을 고쳐먹고 날 돕기로 했다. 국장님도 알고 계신 사실이고."

"난 최준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 난 녀석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내 몸과 영혼을 다 바쳐 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

저 미친놈은 괜히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이고 있었다.

"버서커는 미친놈이지만 실전경험이 풍부한 실력자다. 네게 도움이 될 거야."

레벨 8 측정 대련 때도 그랬지만 내겐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고 대련해주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윤희처럼 저레벨이면 가능하지만 정다현의 레벨은 6이라서 적당히가 어려웠다.

혈종일 땐 그냥 다 죽이면 됐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라서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노력이 있기에 내가 정신을 붙잡고 있는 거겠지.

갈등하는 정다현에게 말했다.

"빌런에게 배우는 게 내키지 않으면 안해도 돼."

"아니요."

어느새 감정을 수습한 정다현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버서커가 악행을 저지른 빌런과 다른 종류 빌런인 건 알고 있어요. 아직 이해하기 어렵지만 레벨 8인 초인과 대련해볼 기회를 놓칠 수 없죠. 해볼게요."

"좋아."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버서커에게 다가갔다.

"나는 대련만 해주면 되는 건가."

"그래."

"대가는 없나? 공짜로 부려먹기만 하는 건가?"

"뭐 받고 싶나?"

"아무거나 상관없다."

"······."

"참고로 난 네 제안을 받고 땅끝마을에서 올라왔다."

왜 거기까지 가 있었냐.

뭐라도 줘야 된다는 생각에 난 잠시 고민하다가 녀석의 완전회복이 소멸된 게 떠올랐다.

"줄 거 생각났다."

"기대되는군."

"네가 얻을 수 있는 기프트를 알려주마."

"······!"

녀석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감정 표현 풍부하기는.

"알지 내 능력?"

"갑자기 의욕이 생기는군. 밑바닥에서 하나하나 찾아봐야 할 줄 알았는데. 대련은 어느 정도로 하면 되나?"

"죽음이 생각날 정도로."

"정신적 트라우마가 남을 수 있다."

"트라우마에 잡아먹히면 거기까지겠지. 자비없이 몰아붙여. 죽이지만 않으면 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준이군. 알겠다."

버서커의 광기 어린 미소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를 성장의 발판으로 사용하느냐는 정다현의 몫이었다.

*

대련은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버서커는 정말 정다현을 죽일 것처럼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버서커의 대검이 대기를 찢어버릴 때마다 여파에 휘말린 정다현의 머리칼이 허공에 우수수 날아가곤 했다.

포니테일로 묶었던 머리끈이 잘려 산발이 되었지만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릴 틈도 없이 버서커의 검에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쓸모 있어."

버서커는 내 주문에 충실히 임했다. 정다현을 향한 공격에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걸 마주한 정다현은 전력을 다해 반응해야 했다.

안 그러면 죽을 테니까.

모든 걸 쥐어짜낸 순간이야 말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제법인데? 과연 내 모든 걸 바칠 상대가 신경 쓰는 여자로구나!"

"저 입을 찢어놓을까······."

제멋대로 날뛰는 버서커의 주둥이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정다현의 손발이 점점 더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한계에 봉착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부터 한계 그 이상의 여력을 쥐어짜내지 못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직감의 활용, 그 이상의 건너편을 봐야 한다.

그래야 그동안 쌓아온 노력의 토대 위에 재능을 꽃피울 수 있다.

"됐군."

완전히 잡념이 배제된 정다현은 기프트를 발동한 채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감이 개화를 하여 통찰로 넘어가는 단계다. 정확히 말해 직감의 두 번째 단계다. 정다현은 버서커의 기세, 미세한 움직임만 보고 예지에 가까운 미래를 그려 간신히 피해냈다.

"오! 오오오! 좋다!"

버서커가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다현의 분전은 거기까지였다. 버서커가 완급조절을 통해 변초와 허초를 섞자 감각이 교란된 정다현은 다섯 번도 버텨내지 못한 채 튕겨나갔다.

"이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더 할까?"

"딱 좋아. 수고했다."

"나야 주인님의 명대로 따랐을 뿐."

난 못 들은 척하고 정다현에게 다가가 회복제를 내밀었다.

잠시 후, 정다현의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방금 그 감각을 기억해둬. 네가 레벨 7에 도달하려면 그걸 자유자재로 활용해야 하니까."

"네, 고마워요."

"쉬고 있어. 난 버서커랑 얘기 좀 할 테니까."

정다현을 쉬도록 둔 나는 버서커에게 다가갔다.

"그럼 정산을 할까."

"좋다."

"너도 저번에 겪어서 알겠지만 나는 피에 새겨진 기프트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내 완전회복이 뺏겼지."

"이걸 응용해서 피에 새겨진 기프트 정보도 알 수 있어. 저번엔 네 기프트를 복사하느라 못 봐서 다시 피를 봐야 돼."

"난 좋다. 시작해라."

버서커가 가슴을 쭉 폈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이 미친놈은 대체 내 어딜 보고 믿는 거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도 상대의 믿음을 시험할 정도로 못된 놈은 아니었다.

내 손가락이 녀석의 심장 옆을 파고들었다. 두 번이나 부쉈다보니 위치도 정확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자 피가 흘러내렸다. 난 회복제를 뿌린 뒤 녀석의 피를 섭취했다.

피에 새겨진 정보를 읽던 나는 인상을 구겼다.

"야이, 미친놈아."

"왜 그러나."

"대체 마물의 피랑 고기를 얼마나 처먹은 거냐."

"그런 것도 나오나? 마물의 신선한 피로 만든 선지는 훌륭한 식재료지."

"거시기는 왜 먹어!"

"정력에 좋다고 들어서."

미친 새끼. 쓸 곳은 있으시고?

녀석은 마물을 먹으면서 독기도 빼내지 않았나보다.

얼마나 독을 처먹었으면 마물의 특성과 독성에 대한 기프트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중 정점의 기프트가 만독불침이었다. 모든 독과 상태 이상에 버텨낼 수 있는 최강의 패시브 기프트다.

그리고 버서커의 피에 만독불침이 새겨져 있었다.

이 전설의 기프트를 내가 보게 될 줄이야.

"······."

갖고 싶다. 탐났다.

버서커를 향한 내 눈이 욕심으로 타올랐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녀석의 눈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어깨를 움츠렸다.

왜 저래?

"···살려다오."

"뭐가?"

"어떻게 하면 살려줄 수 있나?"

"누가 잡아먹는데? 너 안 죽여. 안 뺏어."

그래도 좀 아쉬웠다.

내가 입맛을 다시자 버서커가 어깨를 움찔 떨더니 조용히 정다현 뒤에 섰다.

갑작스러운 버서커의 행동에 정다현이 몸을 움찔 떨며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버서커도 옆으로 이동해서 정다현 뒤에 섰다.

"너 뭐하냐?"

37화

만독불침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자 버서커 녀석이 신났다.

"만독불침라니, 이것만 있으면 너와 좀 더 뜨거운 대결을······."

광기에 물든 얼굴로 웃던 녀석이 날 보고 있었다. 어느새 두 눈은 호승심 가득해져 있었다.

지금 해 보자는 건가.

덤비면 얼마든지 어울려 주겠다고 말하려 했다. 만독불침, 탐이 났다.

하지만 내 대답보다 녀석이 정신 차리는 게 더 빨랐다.

"···아니군, 지금 자살할 이유가 없지."

···귀신같은 자식.

아무튼 정산이 끝나고, 버서커 녀석은 짐을 챙기며 작별을 고했다.

"필요하면 다시 연락다오. 저 어린양의 재능이 상당하던데 별의 순간을 볼 수 있도록 기꺼이 협력하지. 그리고, 누구와 달리 난 가르치는 재능도 꽤 있는 것 같으니까. 크크크!"

오늘 만남에서 제일 이득 본 녀석이 버서커라고 생각되면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상념을 털어 내고 멀어지는 버서커의 캠핑카를 멍하니 바라보는 정다현에게 말했다.

"가자."

"네."

우리 둘은 서울로 향했다.

"······."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정다현은 생각할 것이 많아 보였다.

나 같은 경우는 만독불침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뺏고 싶다는 말은 사실 농담이고, 그동안 녀석이 해 온 기행이 피에 새겨져 그만한 기프트 개방 가능성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도 그만한 가능성을 새겼다면 좋았을 텐데.

정작 내 피에 새겨진 기프트는 읽어 낼 수 없었다. 왜 그런 걸까.

그러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열 개나 되는 기프트를 보유하고도 욕심을 내고 있다니.

서울로 진입할 무렵, 상념에서 빠져나온 정다현이 입을 열었다.

"버서커는 생각보다 더 재밌던 사람이었어요."

"그래?"

내가 보기에는 그냥 미친놈인데.

"빌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거든요. 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면 그냥 유쾌한 분이던데요."

"빌런이란 게 악하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주위 환경 때문에, 사람에게 휩쓸려서, 가정환경 때문에, 한순간의 실수 등등 빌런이 되는 경위는 다양했다.

하지만 처음에 악하지 않을지라도 빌런이 된 순간 결국 악에 물든다.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한 나도, 혈종도, 버서커도 모두 악이다.

나는 악이 되기 전 시기로 되돌아왔지만 한 번 악에 발을 들여놓으면 발을 빼는 건 쉽지 않다.

"어느 순간 제 안의 정의가 모호해지는 기분이에요. 뭐가 정의고 뭐가 악인지 구분이 어려워지면서 이게 맞나 의구심이 들어요."

"보이고 느끼는 걸 믿어. 네 기준은 흔들리지 않고 있으니까."

"네. 그리고······."

정다현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뭔데?"

"듀얼 기프트는 어떻게 가능한 거죠?"

듀얼 기프트는 말 그대로 두 개의 기프트를 가진 각성자를 말한다. 이는 매우 희박한 확률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힘들어. 각성자는 기본적으로 기프트에 특화되니까. 다른 기프트를 각성하면 효율이 떨어지게 돼."

그래서 듀얼 기프트를 가진 각성자 중 높은 수준에 도달한 자는 거의 없다.

"그럼 오빠는··· 아니, 괜한 걸 물었네요. 죄송해요."

"난 경우가 다르니까."

나는 열 개의 기프트를 가졌지만 모두 '누군가가' 특화시켜 놓은 기프트를 가져왔다.

좋게 말하면 복사, 나쁘게 말하면 강탈이다.

"지금은 레벨 7의 감각을 네 것으로 만드는데 집중해. 느낌만 잡으면 바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

"네, 감사해요."

결연하게 눈을 빛낸 정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윤희를 보고 느끼는 부분이지만 On/Off 스위치가 확실하다 싶었다.

신성 길드에 출근할 땐 매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집에서는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늘러 붙어 있었다.

정작 나는 윤희와 많이 다른 것 같다. 언제나 스위치가 켜진 채로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레벨 8로 인정받으면서 주변 대우도 바뀌다 보니 그 점이 더 커진 것 같다.

현재 내 상황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다만 지금 시점은 허니문 기간으로 초인으로서 직위를 누리고 있는 단계다. 이제 슬슬 내가 해야 할 의무들이 닥쳐올 것이다.

국가는 내 힘을 써먹기 위해 그만한 투자를 하고 나도 동의한 거니까.

나 또한 거래에서 밀고 당기기가 있을지언정 상대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저걸 어떻게 굴리지.

소파에 붙은 녀석을 떼어 놓을 고민을 할 때 귀신같이 눈치 채고 소리쳤다.

"그만 스탑! 지금 나한테 잔소리 하려고 했지?"

"귀신이냐."

기프트로 불굴이 아니고 독심술을 개방했나.

"애초에 나보다 열심히 수련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놈의 불굴! 불굴! 아예 기프트 이름을 백절불굴이라 하지 그랬어?"

어디서 삼강오륜 주워 보고 아는 척 하고 싶었군.

그런 것치고 윤희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력했다.

지금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데, 터진 모습이 궁금했지만 두 눈에 살기가 줄줄 흐르는 걸 보고 생각을 접었다.

"괜찮은 집은 좀 알아봤어?"

"어, 사무처에 말하니 몇 가지 조건 기입하더니 바로 추천해 주던데? 돈만 준비되면 돼."

"금방 준비될 거야."

"누구는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서 간신히 사냥하는데 누구는 산책 나가듯 가서 잡아오고, 세상 참 불공평해."

"나처럼 되고 싶으면 열심히 하면 돼."

대신 꽤 다이내믹한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근데 장난기를 지운 윤희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마물은 오빠가 혼자 잡은 거야?"

"어, 왜?"

"아니, 그냥. 주변에서 아무 말도 없나 싶어서."

"별말 없던데."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리 말하면서 윤희는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몸을 들썩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윤희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내게 꼭 알려 주고 싶지만 입으로 꺼내기 부담스럽다는 의미였다.

마물에 관련된 것 같은데 나중에 분위기를 만들어서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나 간다."

"응."

의문을 접어 둔 나는 시간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이세희와 약속이 있었다.

오늘 신성그룹의 행사가 있어 미리 꾸민 이세희는 평소보다 더 화려한 모습을 맞아 줬다.

일로 만난 터라 곧장 일 얘기로 들어갔다.

"준호 씨가 건네준 마물의 심장 가치는 동급 레벨에서 효율면으로 월등해요. 저번에는 3배였지만 프리미엄을 붙이면 5배까지 오를 수 있겠어요."

"그건 좋은 현상인데."

"네. 그런 의미에서 저희랑 같이 사업을 해 보는 건 어떠세요? 이 세공 방식을 잠깐이라도 독점하면 떼돈을 벌 수 있어요."

이세희가 말하길, 내가 배운 세공은 앞서 나간 기술이긴 하지만 기술 독점을 오랫동안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앞서 나간 시간 동안 브랜드를 공고히 하여 마물의 심장 세공 분야 업계 1위에 올라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없어."

"네, 하지만 저희 그룹 세공사분들 모두 일류에요."

그리 말하지만 이건 천부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감각이 없어 무지막지한 양의 포스로 활성화 시킨 면이 있고.

역시 원조가 있어야 된다.

"일단 나보다 이 기술을 잘 소화할 수 있는 녀석을 소개시켜 줄게."

"그런 분이 있다고요? 저는 왜 여태까지 몰랐죠?"

"음지에 있으니까."

"아, 음지, 암시장······."

난 이세희에게 조만간 저번 생의 하트워커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내게 기술을 전수해 줬으니 이번 생에 결자해지로 풀어야겠지. 돈독 오른 녀석이긴 하지만 이세희가 말하는 규모를 들어 보면 충분히 그 욕심도 채워 줄 수 있을 듯했다.

사업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하자는 말에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물 사냥할 때 어떠세요?"

"어떠냐니?"

"어려움은 없나 싶어서요."

"없는데?"

"그럼 다행이고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분야라서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요, 없어요. 문제가 없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갈까요?"

이세희가 서두르는 척하며 날 외면했다. 아까 윤희도 그렇고 이세희 행동도 그렇고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신성그룹은 각성자들을 위한 신성 백화점 프리미엄 갤러리를 개관한다.

이 행사에 나도 초대를 받아서 이세희를 에스코트하기로 했다.

"근데······."

"무슨 문제라도?"

"내 차에 태워 달라고? 흠, 상관은 없지만."

보석 하나에 수억 하는 걸 걸치고 경차를 타고 가도 되려나.

치렁치렁한 드레스 끝자락이 걸릴지도.

이세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제 차로 가야죠."

* * *

신성 백화점의 각성자 갤러리는 이세희의 주도로 이루어진 곳으로, 각성자에게 필요한 모든 용품들이 구비되어 있는 곳이다.

마물을 상대할 때 필요한 방어구부터 시작하여 각종 무기 종류와 포스를 활용한 회복제, 해독제 같은 상태 이상 회복제는 물론 각종 일회용 용품과 생존 용품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에 마물의 심장과 부산물을 매입하는 매장까지 들여놓아 각성자가 필요한 물건을 한 곳에서 구입할 수 있게 해놓았다.

그중 백미는 전세계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들과 콜라보한 방어구였다.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잡아 여성 각성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았다.

이제 패션쇼를 방어구 걸치고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최근 건강 문제로 일선에 나서는 걸 자제하는 이영문 회장을 대신해서 나타난 이세희는 행사의 중심이었다.

난 옆에 서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제 것처럼 즐기는 이세희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각성자 애인을 둔 사람은 다 이리로 오겠는데?"

"정답. 그걸 노렸어요. 이제 성능은 상향평준화가 이뤄졌거든요. 그렇다면 경쟁력은 얼마나 예쁜가에 달렸죠."

적어도 여성 각성자들한테는 이게 확실히 먹힌단다.

그리고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은 것처럼 남성 각성자들도 조금 더 비싸더라도 멋진 걸 선호했다.

헌터 지망생 천만 명인 시대였다. 정부에서는 대중이 초월적인 힘을 지닌 각성자를 적보다 영웅시하길 원했다.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헌터가 되어야 국가의 힘이 강해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실력이 뛰어난 미남미녀 헌터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어 나날이 장비의 디자인이 중요해지고 있었다.

나라면 눈에 띄어서 별로··· 아니다. 이건 도망다니던 빌런의 마인드였다. 레벨 8 초인으로 주목을 받는 이상 나도 화려한 걸 좋아해야 한다.

다시 보니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이세희는 인터뷰도 능수능란했고 신성길드의 행보와 신성그룹이 지향하는 바를 재치 있게 풀어서 얘기했다.

"응?"

그때 한쪽에서 웅성거리더니 말쑥하게 차려입은 훤칠한 외모의 청년이 다가왔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남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있지만 음험함이 느껴졌다.

"오랜만이다, 세희야. 잘 지냈냐."

"···오빠가 여기 어쩐 일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이세희의 오빠이자 신성그룹의 장남 이세찬이었다. 그리고 신성그룹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동생이 이렇게 멋진 성과를 이뤄 냈는데 와야지."

"와 줘서 고마워."

남매끼리 대화였지만 어색함이 느껴졌다. 이세희를 일별한 이세찬이 날 보며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세희 오빠 이세찬입니다."

"최준호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장안의 화제이신 최연소 초인님."

어딘가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이세찬이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녀석의 손에 핏줄이 불거지면서 힘을 주는 게 보였다. 효자손으로 살살 긁는 정도의 강도였다. 무슨 생각인가 싶어 얼굴을 봤더니 표정이 기괴했다.

"우리 세희가 남자 경험이 없어서 사람 보는 눈이 약합니다. 주변에 잘 보이려고 하는 남자들이 천지거든요. 다 별 알맹이도 없는 녀석들이고. 세희가 그걸 구분할 능력이 모자랍니다. 오빠 말을 잘 들으면 좀 나아질 텐데 말이죠."

이거 지금 날 멕이는 거로군.

사실 난 눈치가 빠르다.

"이 팀장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수완이 좋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시야가 좁은 사람은 큰 뜻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확실한 역량 차이죠."

이세찬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입니까?"

"듣는 사람이 판단하면 될 일입니다."

"이 반쪽짜리가······."

반쪽?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설마 새로운 이명인가. 안 그래도 헤드 브레이커니, 말소자도 마음에 안 드는데. 반쪽은 뭘까. 반으로 접어 버려서 그런 건가.

난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난 힘을 과하게 줘서 부들부들 떨리는 녀석의 손을 보다 가볍게 힘을 줬다.

"끄으읍!"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이 착각하게 있는데 자신은 아무런 위해를 입지 않을 거라 생각하더군요. 제가 지병이 있어서 그런 머저리를 볼 때마다 자기주제를 파악하게 짓밟아 주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여기서 좀 더 힘을 주면 이세찬의 손이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손을 걸 보며 나도 힘 조절이 좋아졌음을 느꼈다.

"한 번 보고 싶으신지?"

"흐읍! 흡!"

이세찬은 가까스로 고개를 한 번 저어 보였다. 내가 손에 힘을 풀자 휘청거리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전무님!"

"도, 돌아가자."

이세찬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혼비백산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둘러싸고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나저나 반쪽짜리라.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걸 눈치 챈 이세희가 다가왔다.

"준호 씨, 무슨 일 있었어요?"

"별거 아냐."

왜 사람은 꼭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는 건지 모르겠다. 마물은 죽어서 심장과 부산물이라도 남기지만 사람은 그것도 없는데.

난 이세희에게 카메라 셔터를 눈짓했다.

"저기 기자가 찍는다. 오늘 주인공이 더 빛나 줘야지."

"네."

이세희가 내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 * *

행사를 마친 뒤 나는 빌런 소탕 건 보고를 위해 천명국과 만났다.

첫날 핼쑥해졌던 그는 건강 이상이 있나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하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빌런 소탕 작전부터 시작해서 각종 행사까지.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다만 외국인 빌런들은······."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며 난 의아함을 느꼈다.

"해결된 게 아니었습니까?"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죽일 타이밍을 놓쳤다면 시민증을 발급하고 주민등록을 해 놓는 건 어떻습니까?"

"시민증과 주민등록을?"

"그럼 우리 국민이니까요."

"···매우 끌리는 방법입니다."

천명국이 감탄 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고민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초인으로서 며칠 어떠셨습니까."

"만족스럽습니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날 땐 헬리콥터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작전 지역으로 출동하기 수월하겠네요."

"초인님이 필요한 걸 맞춰 드리기 위해 노력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초인님께서도 대한민국 소속 초인으로서 역할을 해 주셔야하지요."

말을 멈춘 천명국이 조용히 날 바라봤다. 내 대답을 바라는 얼굴이다.

"당연히 제게 주어진 역할을 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거래니까요."

"그런데······."

곤란한 듯 머뭇거리는 천명국에게 내가 말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실은 최준호 초인님에 대해 최근 일각의 우려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우려? 설마 말소자의 행적이 드러난 건가?

정체를 짐작할 사람은 이세희와 버서커밖에 없는데.

버서커 이 녀석이 내가 입맛 좀 다셨다고 떠들고 다녔나.

"국가 소속 초인은 외부, 내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 권력을 수호하고 빌런의 위협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지막. 국가 소속 초인은 마물의 위협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 합니다."

"······."

천명국은 날 보며 말했는데 난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마물을 잡는 건 당연한 일이다.

"빌런 조직 소탕도 좋고, 국가 권력 수호도 좋습니다. 하지만 국가 소속 초인이 진정으로 빛을 발할 때는 마물을 사냥할 때입니다."

그는 대형 길드가 국가 권력마저 넘볼 수 있을 정도로 커진 이유를 마물 사냥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돈이다. 마물의 부산물은 돈이 되니까.

그 돈으로 투자를 하고 부산물로 장비를 제작하니 세력이 커지는 것이다.

근데 이 말을 왜 나한테 하는 거지.

"일각에서 최준호 초인님의 마물 사냥 능력을 놓고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입니까?"

"마물 사냥을 못하는 반쪽짜리 초인이라고······."

그래서 이세찬이 아까 나더러 반쪽짜리라고 한 건가.

다행이군. 헤드 브레이커, 말소자처럼 이상한 이명 하나가 는 줄 알았다.

그래서 윤희가 내게 그런 태도를 보였던 거였나.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시죠."

"···그저 뒤에서 떠도는 소문일 뿐입니다. 신경 안 쓰셨으면 합니다."

"예."

이어진 말은 말 그대로 황당한 날조였다.

내가 레벨 8 초인이 되었지만 경험이라고는 하위 레벨 빌런을 잡은 게 전부이며, 최대 실적이 인형술사 제거지만 인형술사는 불사신으로 유명했을 뿐 전투력은 하위에 불과하단다.

특히 내가 마물 사냥에 나서지 않는 건 '마물 공포증'을 겪고 있어서고, 정부에서는 마물 사냥도 못하는 초인을 붙잡기 위해 호구 계약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 증거가 마물 사냥에 나서지 않는 거란다.

공식적으로 난 마물 사냥을 단 한 차례도 나서지 않긴 했다.

천명국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혹시 마물 사냥을 못하는 비밀이 있다면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 양반도 내가 숨기고 있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황당한 마음뿐이다.

내가 혈종일 땐 세계를 멸망시킬 거라며 과장하더니 이제는 마물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반쪽짜리 취급을 한다.

실소만 나왔다.

"곧 증명을 해 보이겠습니다."

저번 생을 살아 본 나는 기억하고 있다.

한 달 후, 제8호 괴수인 '누리'가 서울에 나타난다. 그때 모든 게 밝혀질 것이다.

내 말에 천명국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리고 실장님."

"예."

"그거 떠든 사람들 리스트 작성을 지금부터 해서, 제가 마물을 잡으면 저한테 주실 수 있습니까?"

"······."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궁금해서. 보기만 할게요."

"······."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다.

이러면 왠지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거 같잖아?

"제발 좀······."

천명국의 안색이 흙빛이 되며 배를 부여잡았다.

38화

한 달 후 등장하는 누리가 제8호라고 불리는 것은 여덟 번째로 나타난 유해 8단계 마물이라서 그렇다.

유해 8단계 마물.

한 국가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전력이다.

레벨 8 초인이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으며, 이를 보조할 수 있는 레벨 6 이상 헌터가 최소 백 명은 있어야 사냥이 가능하다.

···솔직히 내가 볼 때 이렇게 전력이 많을 필요가 있나 싶다.

"최소한의 피해로 사냥할 수 있는 기준이긴 하지만."

물론 레벨 8이 없어도 사냥은 가능하다.

도시가 1/3정도에서 절반이 파괴돼서 문제지.

당시 기억이 떠오른다.

이때 누리로 인해 최정예 헌터 수백 명이 죽고 서울이 큰 피해를 입는다.

어떻게든 대형길드 가입을 노렸던 나는 이후 전후복구 시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실패.

무수히 많은 자리가 비어 있었음에도 길드에 내 자리는 없었다.

그때부터 삐뚤어졌던 것 같다. 결국 내 능력이 부족했던 거지만 세상을 탓했으니까.

인생이 가장 엇나가 가장 멍청한 선택을 했던 시기라서 기억이 선명했다.

난 최명국과 함께 청와대 안으로 이동했다.

* * *

"저는 대통령님과 언제 인사를 나누는 겁니까?"

최준호 한 마디에 성사된 만남.

최명국은 대통령과 최준호의 만남이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우려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둘은 잘 맞을 가능성이 있어서다.

한 사람은 일국의 대통령이고 한 사람은 초인이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 대통령의 권력은 실로 강대했다. 그리고 최연소 초인인 최준호의 가치도 비교할 대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둘이 의기투합하면 어느 정도 파괴력이 발휘될지 두려움이 들었다.

최명국은 먼저 한발 뺐다.

"대통령님은 스케줄이 무척 바빠 늦은 시기에 만남이 성사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최준호의 직진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

결국 최명국은 최준호의 요청대로 대통령께 보고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일 만남이 성사되고 말았다.

* * *

운이 좋았다.

나는 최명국이 보고를 올린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대통령을 만나볼 수 있었다.

현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름은 전한철, 서울 3선 국회의원에 장관, 당대표를 거쳐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늘 웃는 얼굴이라 부처라 불리며 무난하면서 모나지 않은 국정 운영으로 탄탄한 지지를 얻고 있는 중이다.

60대 중반이 된 대통령은 그간의 스트레스를 증명하듯 새하얀 머리와 한결 깊어진 주름과 인자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보통 다른 꿍꿍이를 갖고 있던데.

"전한철이라고 합니다."

"최준호입니다. 편하게 대해 주시지요, 대통령님."

"천천히 말을 놓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쯤 만나고 싶었습니다. 화면에서 보던 대로 훤칠하십니다."

"대통령님도 훨씬 인상이 좋으십니다."

"안 그래도 실물이 낫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합니다."

"······."

음, 일단 자기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일단 인상은 좋으니까. 외모부심 추가.

그것과 별개로 나와 대통령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최명국 저 양반은 왜 저렇게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고 있는 건지 눈에 거슬릴 지경이다.

설마 나더러 반쪽짜리라고 한 사람 중 대통령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한다. 블랙리스트 아니, 내 뒷담 리스트를 빨리 받아 봐야겠다.

어차피 보기만 하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전한철 대통령.

이 사람은 날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대통령이 먼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최준호 초인의 행보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기자회견을 보고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보통 자중하라 그러지 않습니까?"

"저도 그 소리 듣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대통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몇 번이고 최준호 초인을 만나고 싶었지만 바쁜 몸이라고 최 실장이 말리더군요. 그래서 꽤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

역시 최명국 저 양반이 막고 있었구만.

설마 블랙리스트 아니, 뒷담 리스트 첫줄에 최명국이 있는 거 아닌가.

대화를 나눠 보니 알겠다. 대통령 이 사람, 주변에서 커버해 주지 않으면 구설수로 이것저것 논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표현이 상당히 직설적이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좋게 봐야지요. 여러 곳의 끈질긴 구애를 뿌리치고 국가를 선택해 주지 않았습니까? 행정부 수반으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던 대통령의 눈이 살짝 반개했다.

"성과에 대한 압박은 있으실 겁니다."

"반쪽짜리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최준호 초인은 국가를 대표하는 초인이기에 여러 방향으로 다양한 압박감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다시 인자한 웃음을 짓는다.

입에 발린 말로 칭찬하지만 딱 봐도 할 말은 하면서 자기 걸 챙겨 드는 여우였다.

음, 여우보단 너구리같다.

"딱히 압박감을 느끼는 체질은 아닙니다."

"역시 비범하군요. 그 배포 마음에 듭니다."

"조만간 실력을 보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에 휘둘려서 행동에 나서는 게 소문에 민감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다.

"멋집니다. 저도 최준호 초인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대통령과 나의 거리감은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그동안 내가 관계를 맺은 사람의 분류는 딱 두 가지였다.

상종하면서 모든 걸 수용하거나, 아니면 기뻐하면서 절규하거나.

그 점에서 대통령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유들유들한 태도로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각성자도 아닌데 무게감이 상당했고.

대통령 하려면 저런 처세는 필수인 듯했다.

"곧 해가 지나면 외국의 귀빈들이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때 초인들도 방문하곤 하는데 적잖은 신경전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오! 제가 원하는 대로 가능한 겁니까? 상대 기를 꺾어 달라고 해도?"

"대신 상대가 많이 다칠 수 있습니다."

내 말에 대통령이 좋다고 웃었다.

"그거 좋습니다. 전에 계시던 분은 좋게 가자는 말만 하셨지요. 우리도 각성자 강국이고 뒤처질 게 없는데 왜 매번 눈치를 보자고 하는 건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외교는 결국 힘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부딪치면 더 센 쪽의 말에 무게가 실리는 법이지요. 나는 최준호 초인만 믿고 지르겠습니다."

"예."

"대통령님."

"몰라, 난 초인의 말만 믿기로 했어."

"······."

최명국의 주름이 깊어지는 것도 재미 포인트였다. 표정이 안 좋다 싶더니만 대통령 때문에 저랬던 거로군.

늘 나더러 자제하라고 하던 사람만 보다가 이렇게 등을 떠미는 사람을 보니 새로웠다.

그럴수록 뒤에 서 있던 최명국의 안색이 흙빛으로 바뀌어 갔다.

누가 보면 내가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뒤집어 놓으려는 줄 알겠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어느덧 오후 6시가 지났다.

"자자, 다음 이야기는 식사를 들면서 하지요."

이동하면서도 주로 얘기하는 건 대통령이었다.

그는 외국의 초인들과 정세에 대해 설명해 줬는데 요약하면 세계 각국은 리그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며, 대한민국처럼 정부와 길드가 균형을 잡고 안정된 체계를 유지하는 곳이 없다고 했다.

"균형과 안정은 무척 중요합니다. 정부의 힘이 지나치게 크면 탄압의 형태를 띠게 되고 대형 길드가 너무 커지면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쪽으로 치우치더라도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리그가 진입하려던 시기가 분수령이었다고 말했다.

과격한 사상은 쉽게 주변을 물들게 한다. 리그의 비전은 얼핏 보기에는 매력적이지만 결국 끝없는 투쟁으로 인해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이게 다 선제적으로 대응해 준 최준호 초인 덕분입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최명국을 보다 내게 슬쩍 몸을 기울인다.

"버서커를 움직여 리그 잔존 세력을 궤멸시킨 것도 최준호 초인님인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역시 대통령쯤 되니 정보력이 좋다. 어쩌면 최명국이 보고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찔러보는 단계이거나.

굳이 숨길 일도 아니어서 난 순순히 수긍했다.

"조만간 자세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거 선거운동 때문에 편의점 가서 1+1 물건을 사 보긴 했어도 초인이 1+1인 건 처음 봅니다."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근데 왜 하필 버서커 그 미친놈과 1+1인지. 기분이 묘했다. 녀석은 미친놈이고 난 정상인인데. 바로 잡고 싶었지만 조용히 넘어갔다.

저녁 식사는 한식 한상차림이다.

정갈하면서도 은은하게 느껴지는 깊은 맛이 딱 내 취향이다.

그중 백미는 된장찌개였다. 좋겠다. 대통령은 이거 매일 먹겠지?

게 눈 감추듯 한 공기를 해치우고 두 번째 공기를 먹고 있는데 놀란 대통령의 눈과 마주쳤다.

"왜 그러십니까?"

"워낙 맛있게 먹어서 놀랐습니다. 최준호 초인을 보면 스테이크를 잘 썰 것 같은데."

"제일 좋아하는 게 된장찌개입니다."

"그거, 제 부인이 한 겁니다."

자랑하듯 말하니 나는 경악했다. 청와대 있는 내내가 아니라 결혼 생활 내내 먹었던 거라고?

"그럼 결혼하시고 계속 이걸 드셨단 말입니까?"

"그, 그렇지요?"

"부럽습니다."

"뭐? 하하하하! 그 말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그 정도였습니까?"

"···어머니라고 부를 뻔했습니다."

"하하하하!"

파안대소 하는 대통령이었다. 진짜 대통령이 부럽다고 느낄 줄이야.

만약 영부인이 아울보어 된장전골을 끓이면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호오, 아울보어라. 다음엔 그걸로 대접하겠습니다."

"대통령님은 정말 복 받으신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거, 우리 부인이 들어야겠어."

대통령은 그 길로 영부인을 불러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된장찌개에 대한 극찬을 하자 영부인은 눈을 반짝이면서 나와 요리 대화를 나눴다.

요리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는데, 특히 마물들의 재료로 맛을 내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또 그쪽 생존요리 전문가 아니던가. 영부인과 나는 생각보다 나와 죽이 잘 맞았다.

날 보고 어떻게 초인이냐면서 피도 못 볼 것 같이 생겼다고 해서 흡족했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고 착하게 살려고 하는 걸 귀신같이 눈치챈 것이다. 이게 연륜이란 거로군.

다만 옆에 있는 최명국의 눈은 불손했다.

"다음에 꼭 와요. 아울보어 된장전골이라는 거 맛있게 해 줄 테니."

"꼭 오겠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청와를 나갈 무렵에는 아예 막내아들로 삼고 싶다고 해서 편하게 대해 달라고 했다.

아울보어 된장전골하면 정다현도 빼놓을 수 없지. 다음에는 정다현도 데리고 와야겠다.

* * *

유익한 하루였다.

배웅을 나온 최명국의 안색은 핼쑥하게 질려 있었다.

"오늘 대통령님이 하신 말씀은··· 적당한 수준에서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간절한 눈으로 보더니 그게 전부인가 보다.

"다만, 대통령님과 실장님의 말씀이 상당히 다른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정제하는 것도 있고 각 부서의 입장을 고려한 것도 있습니다. 좋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유능한 사람이니 잘 판단해서 행동하겠지.

다만 대통령과 대화를 나눠 보니 심정적으로 날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초인으로서 제 몫을 할 때에.

그 말은 제8호 괴수인 누리를 잡고 반쪽짜리가 아닌 걸 증명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명단,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최명국의 웃음이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윤희는 여전히 소파와 혼연일체 상태였다.

"왔어? 오늘 행사 엄청나더라."

"기사 봤냐."

"어, 세희 언니는 날이 갈수록 더 예뻐지네."

"너도 그만 굴러다니고 좀 꾸며."

"난 셀럽이 아니라 헌터랍니다."

자기 유리한 건 기가 막히게 써먹는다.

녀석은 무심하게 대답하는 척 하지만 눈을 흘긋거리면서 내 안색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녀석도 반쪽짜리에 대해 아나 보다.

"마물 사냥 건 때문에 걱정했던 거냐."

윤희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최 실장한테 들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걸 면전에서 얘기해? 사람에 따라 얼마나 민감한 얘긴데!"

"난 안 민감해."

"그래도!"

분기탱천한 윤희가 소리를 질렀다. 최명국은 충분히 조심스럽게 얘기한 것 같은데. 말해 봤자 화내는 윤희가 어색해질 테니 욕받이로 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윤희가 날 이렇게 걱정해 줄 줄이야. 살짝 감동이었다.

"상처 받은 거 아니지?"

"내가 그런 걸로 받겠냐."

"다행이다."

안도한 윤희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마냥 어린애 같던 동생이 다 커서 내 욕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주다니. 회귀하고 잘못 살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욕해도 내가 욕해야지, 딴 놈들이 욕하면 얼마나 열 받는 줄 알아?"

아, 그런 거였냐.

* * *

오늘도 국가수호국은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다는 건 어김없이 사건이 터졌다는 의미.

갑자기 회의가 열리고 소속 헌터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회의가 끝난 뒤 정주호의 부름에 국장실로 들어갔다.

"사형집행인이 움직였다."

"아, 레벨 7 빌런."

리그에 합류하려던 빌런, 기억났다. 이후 별 존재감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고.

저번 생에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내가 리그 한국지부 괴멸시킬 때 있었었나?

"문제될 게 있습니까?"

"혼자 다니던 녀석이 세를 이루기 시작했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정주호가 말하길 사형집행인은 원래 홀로 다니던 빌런이라고 한다.

사형집행인은 버서커와 쌍벽을 이루던 광인으로,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살인마다.

버서커가 민간인보다 빌런과 헌터들을 죽였다면, 사형집행인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다니는 녀석이다.

"리그에 가입하지 못했다고 깽판 치는 거지. 하필 녀석이 활동하는 지역이 지방이라 전력투사가 쉽지 않아."

사형집행인은 충청도와 전라북도에서 주로 활동했다.

녀석은 지역 빌런 조직과 연계해서 분란을 조장하고 있었는데,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군의 빌런대응팀이 괴멸되고 초토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현재 북상 중이라고 하는데 내부 정보에 의하면 목표가 천안이라고 한다. 내일쯤 공격하겠지."

"천안."

하필이면 청주 근처다. 거기 부모님이 사시는데. 아직 올라오지 않으셨다.

국가수호국에서 움직인다고 해도 레벨 7 빌런을 직접 상대하려면 핵심 팀 몇 개를 보내야 한다. 그 결정 과정이 신속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처리해야겠군.

아마 정주호도 내 부모님이 청주에 계신 걸 알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끼를 던졌을 것이다. 역시 능구렁이다.

"내일 결정을 내리고 팀을 파견하더라도 사형집행인의 공격이 먼저 이뤄질 가능성이 높겠네요."

"그렇지. 그래서 일부 전력을 먼저 보내는 것도 고려중이다."

하지만 이건 각개격파의 우려가 있다며 부정적인 기색을 보였다.

방법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천안에 주변 전력을 끌어모으는 것인데 이건 공격 경로를 틀면 빈집이 털릴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시적으로 거점을 비우고 전력을 한데 모아 탈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수비의 이점을 포기하는 거라 피해가 커질 것이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공주로 캠핑을 떠난 자연인을 떠올렸다.

"사형집행인의 북상을 막아 보겠습니다."

"직접 간다고?"

"저는 내일 움직일 생각이고, 대신 움직일 놈이 있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버서커에게 톡을 보냈다.

나-뭐하냐

버서커-ㅇㅇ?

버서커-네가 선톡이라니 시킬 일이 있나보군.

버서커-난 지금

버서커-[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

버서커-혼합독을 먹는 중이다. 짜릿하군. 크크...!

버서커-곧 만독불침은 내 것이 되겠지. 그때가 되면.

버서커-잠시 미친 소릴 할 뻔했군. 취소다.

버서커-근데 시킬 일이 뭐지?

버서커-대답해라.

나-사형집행인이 북상하고 있다더라. 사형집행인이 못 올라오게 막아봐. 내가 내일 갈 테니.

버서커-ㅇㅇ 알았다. 곧 연락하지.

39화

사방이 비명으로 가득 찬 인세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형집행인 우주완은 참수도 바닥에 꽂아 넣은 채 자신이 만든 살풍경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아로새겨진 흉터가 꿈틀거릴 때마다 주변에 선 빌런들이 몸을 떨었다.

그런 우주완에게 빌런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보스.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

"오늘은 이곳에서 쉰다. 일단 필요한 걸 다 챙겨라. 내일 천안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표정이 환하게 바뀐 빌런이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들이 불타오르는 걸 보면서 사형집행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리그가 떠났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리그가 한국에 상륙했을 때부터 사형집행인은 합류를 희망했다. 각성자를 옭아매다 못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가차 없이 빌런의 낙인을 찍는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실력에 따라 대우받는 리그의 세계에서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고자 했다.

그는 세상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는 힘, 눈에 거슬리는 놈을 마음대로 죽여 버릴 수 있는 힘을 갈구했다.

사형집행인은 오른쪽 이마부터 왼쪽 뺨까지 아로새겨진 흉터를 만지며 살기를 발산했다.

"버서커."

이 흉터는 버서커로 인해 생겼다.

놈을 죽이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었다. 녀석이 리그에 합류한다고 했을 때 결판내길 고대했지만, 녀석은 도리어 리그 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합류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이제 리그에 합류하려면 외국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졌다. 한국 리그 지부에 합류해서 힘을 얻으려던 계획은 이미 산산조각 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버서커는 도움이 되는 게 없었다.

빌런 조직 녀석들을 움직인 건 화풀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피날레는 불바다가 된 천안일 것이다. 그 후, 조용히 중국으로 빠져나가 리그에 합류할 계획이다.

그 사이 약탈을 마친 빌런들이 희희낙락하며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죽을 하루살이들이다.

"쉬었다가 이동한다."

그때였다.

"얄팍한 머리를 또 굴리는군, 망나니."

"······."

대검을 들고 다가오는 중년 남자가 있었다.

얼핏 보면 멀쩡하게 생긴 외모.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광기를 엿본 적 있는 사형집행인의 표정이 굳었다.

버서커였다.

"누구냐."

"쏴 버려."

빌런대응팀을 괴멸시키고 약탈까지 마친 빌런들이 기고만장해져서 총구를 겨눴다.

그보다 먼저 버서커가 움직였다.

쾅!

손에 든 대검을 집어던지자 무시무시한 포스 폭풍이 일어나면서 빌런들을 휩쓸었다.

폭풍 범위 안에 있던 빌런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 한 수에 모여 있던 빌런들이 사색이 되었다.

"히, 히익!"

"괴물이다!"

"누, 누구야?"

이어진 사형집행인의 말이 불을 지폈다.

"버서커."

"잘 지냈나, 망나니?"

"여긴 왜 왔지?"

"내 주인이 네 목에 볼일이 있어서."

"주인? 언제 리그에 가입했지?"

주인이라는 말에 사형집행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제멋대로 날뛰는 저 미친놈에게 주인이 있다고?

자기가 던진 대검을 주워 든 버서커가 웃었다.

"리그 따위가 내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보는 건가?"

"미친 건 여전하군. 오늘 네 목을 잘라 버리고 리그로 가겠다."

"간에 기별이라도 가면 좋겠어. 크크크!"

* * *

버서커와 사형집행인은 3년 전 한 차례 맞붙은 적이 있다.

사형집행인이 사냥팀을 습격하던 도중 버서커의 쉼터를 침범했던 것. 사형집행인이 헌터들을 죽이고 버서커마저 죽이려 들자 대결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버서커의 승리로 끝났다. 사형집행인은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간신히 도망쳤다. 당시 지쳐 있던 버서커도 뒤쫓지 못했다.

처참했던 패배는 지옥과도 같았다. 그 후, 사형집행인은 3년 동안 복수의 날을 기다리며 모든 삶의 초점을 강해지는데 맞췄다.

버서커가 김영환을 죽였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늙어 버려 제 무위도 발휘하지 못하는 초인 따위는 자신도 죽일 자신 있었다.

다시 보면 버서커를 갈가리 찢어 버릴 거라 다짐했지만, 검을 맞대는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약하군."

"네, 네놈."

수준이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대체 언제 이렇게 벌어졌단 말인가. 사형집행인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지만 밀어내는 것조차 역부족이었다.

카가가각!

검에서 전해지는 거력을 감당하지 못한 사형집행인의 참수도가 튕겨 나가며 뒤로 밀려났다.

"버서커를 죽여!"

사형집행인의 외침에 빌런들이 주춤거렸다. 이익을 안겨다 줄 때 간도 쓸개도 빼 줄 것처럼 굴었지만 버서커에게 밀리면서 위상이 수직하락 했다.

하지만 사형집행인이 죽으면 자신들도 무사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빌런들도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저마다 총을 들어 엄호사격을 가했다.

두두두두!

"지압 마사지 수준이구나!"

버서커의 대검이 대기를 가르는 순간, 거대한 포스가 반달 형태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앞을 가로막는 빌런들을 모조리 두 동강 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있던 건물의 벽마저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한 수에 무려 열 명이 넘는 빌런이 죽었다. 버서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총기를 난사하는 빌런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크하하하!"

"도, 도망쳐!"

무차별한 살육이 벌어졌다. 총이 통하지 않았다. 버서커의 범위 안에 든 빌런들이 대검의 포스에 휘말려 갈가리 찢겨 나갔다.

쾅!

어떤 빌런이 수류탄을 던졌지만 비산하는 잔해도 두터운 포스를 뚫지 못했다.

폭발 속에서 유유히 앞으로 나온 버서커에게 총알 세례가 쏟아졌지만 모조리 튕겨 나갔고, 손에 닿은 빌런은 모조리 죽어 버렸다.

삐이이익!

어떤 미친 빌런이 RPG탄까지 쐈지만 눈에 보인 건 갈가리 찢긴 잔해가 아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번 건 꽤 짜릿했어."

돌아온 건 죽음이었다.

어떤 무기를 써도 통하지 않는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빌런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으으! 으아아아!"

"도, 도망쳐! 괴물이야!"

"살려줘! 살··· 끄악!"

오십이 넘던 빌런 중에서 도망치는데 성공한 건 채 열도 되지 않았다.

자욱한 연기와 시체 토막 사이에서 버서커와 사형집행인이 마주섰다.

"이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어. 체력 좀 회복했나? 도망치지 않은 건 높게 평가해 주지."

"···누가 널 보낸 거냐."

버서커에 대한 소문은 과장된 게 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김영환이어서 축소된 감이 있었다. 녀석은 레벨 8에 도달한 초인이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사형집행인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내 주인님은 내 모든 걸 바친 대상이지."

"대체 네 주인이 누구냔 말이다!"

"크크, 안알랴줌."

버서커를 향한 사형집행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크아아아! 이제 날 농락하는 거냐!"

"약자는 원래 농락당하는 거다. 그리고 약자는 너다. 나도 내 주인에게 매번 당하고 있지."

"난 널 죽이기 위해 단련해 왔다. 근데 왜 이런 차이가 벌어진 거란 말이냐!"

"재능 없는 놈의 흔한 레퍼토리로군. 이젠 재미도 없다."

"널 죽이기 위해 모든 시간을 바쳤는데!"

울부짖는 사형집행인이 달려들었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녀석을 보며 버서커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넌 진짜 최선이 뭔지 몰라. 죽음 또한. 하늘 위에 하늘을 보며 혼신의 몸부림을 치고도 모조리 부정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영혼을 다했다는 말을 할 수 있지."

"크아아!"

"울부짖는 것도 계집애 같군. 이젠 질려."

사형집행인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버서커의 뒤로 푸른 포스 칼날이 형성되었다.

대기 중에 흩뿌려 놓은 포스를 긁어모아 펼쳐낸 기프트 '길로틴'이었다.

세상은 그가 목을 자르는 걸 즐긴다 하여 사형집행인이라 불렀지만 그 이유는 빈틈을 파고드는 길로틴이란 기프트가 있어서였다.

저번 대결에서도 펼치지 않고 숨겨 둔 비장의 무기였다.

은밀하게 접근한 칼날이 뒷목을 베려던 순간, 버서커의 뒷목에 푸른막이 생겨났다.

"꽤 간지럽군."

"너, 너! 어떻게······."

"두 번 정도 죽어 보면 된다."

이어지는 버서커의 맹공 앞에 사형집행인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검이 부러지고 왼손이 잘린 다음 오른팔이 통째로 날아갔다. 힘이 풀려 주저앉은 녀석을 지켜보던 버서커는 일말의 망실임 없이 목을 날려 버렸다.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대를 자기 영역처럼 활보하던 대형 빌런의 최후였다.

"준비운동 수준이군. 기름값이 아까울 지경이야."

습관적으로 머리통을 짓밟으려던 버서커가 멈칫했다. 이걸 최준호에게 가져가야 부여받은 임무가 완수된다.

잠깐이지만 큰 실수를 할 뻔했다. 가뜩이나 만독불침을 호시탐탐 노리던 녀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빌미를 제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했다.

어느새 두 눈 가득 채워져 있던 광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까먹을 뻔했군. 죽을 뻔했어."

버서커는 한참이 지나서야 온몸에 돋은 소름을 떨쳐 냈다. 식은땀이 축축해졌지만 그 서늘함이 목숨을 구했다며 거듭 안도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든 스마트폰을 꺼내 건물 안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 * *

버서커에게 사형집행인의 막으라고 한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무섭게 버서커에게서 톡이 쇄도했다.

버서커-다 끝났다.

버서커-사형집행인도 잡았고 빌런들도 잡았다.

버서커-[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

버서커-사형집행인의 머리는 방부처리 해놓겠다.

버서커-필요하면 말해라.

"벌써 다 처리했어?"

사형집행인을 막으라고 했더니 그냥 다 죽여 버렸다.

설마 연락받자마자 전력으로 달려간 건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고, 예상보다 큰 성과였다.

내가 움직일 필요도 없이 상황이 끝날 줄이야.

난 일단 소식을 들고 국장실로 갔다.

"국장님."

"굿모닝,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 천안은 11시에 출발하기로 했잖아?

"버서커가 사형집행인을 잡았답니다."

"응? 엉? 뭐?"

내 말에 정주호가 잠시 버퍼링이 걸렸다.

사형집행인에 대한 정보가 전달된 게 전날 저녁이다. 대책 회의를 하고 버서커에게 전달한 게 깊은 밤. 그리고 아침인 지금 상황이 종료됐다.

"그, 버서커가 사형집행인을 잡았다는 게 죽였다는 건가?"

"머리를 잘라 방부처리를 하겠다더군요."

"이게 원래 이렇게 빨리 처리되는 일이던가?"

버서커 녀석이 빠르게 움직이긴 했다. 나조차도 황당할 정도였으니.

"일단 잘 해결된 건 확실합니다."

"그렇긴 한데······."

"왜 그러시는지?"

"이미 위에 보고가 돼서. 사형집행인이 죽었으면 어떻게 처리된 건지 경위도 설명해야 할 거 같은데."

정주호의 얼굴에 난감함이 서렸다. 사형집행인 건은 다른 빌런 조직도 연관되어서 상부에 보고하고 전력 증원을 요청할 생각이었단다.

"버서커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겠네요."

"100% 드러난다고 봐야지. 정부 조직이 움직인 게 없는데 사형집행인이라는 거물이 죽었으니까."

순간 대통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만 사실로 드러날 때 어떻게 바뀔지 잘 모르겠다.

일단 정주호의 반응을 볼 때 나쁜 반응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일단 버서커를 한번 만나 보시죠."

"내가? 왜?"

"버서커가 드러나면 제가 관리해야 하는데 보조를 맞춰야 한다면 국장님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대외협력관리국이나 대마물방위전선국에 넘겨도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럼 만나러 가시죠."

"으응."

내 말이 정주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버서커를 만나기 위해 정주호는 최준호와 국가수호국 헌터 셋을 데리고 광명 외곽의 국가수호국 안가로 이동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버서커가 나라를 위해 도움을 주다니.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런 비현실적인 현상도 안가 안으로 들어오는 버서커를 보자 현실이 되었다.

"국가수호국장 정주호입니다. 반갑습니다."

"버서커 이광진이다. 국가수호국장을 만나게 되다니 영광이군."

우선 첫 인상은 정상인이었다. 안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나 의미심장하게 걸린 미소가 보였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사형집행인을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음."

작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별 말이 없다. 악감정이 있었다면 뭐라도 쏟아 냈을 텐데 그런 것도 없다. 정말 미친 게 맞나?

버서커는 들어올 때 손에 쥔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내가 방부처리 해 온 사형집행인의 머리다."

살짝 열어보니 사형집행인 우주완의 얼굴이 보였다.

"···확인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부탁받은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시종일관 반말로 일관했지만 오히려 그게 편했다. 만약 버서커가 존대를 한다? 그럼 더 의심했을 것이다.

녀석은 미친놈이다.

그래서 미친놈을 생각하고 왔는데 미친놈이 아니라서 헷갈렸다.

이 정상적인 남자가 왜 버서커로 불린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이번 건으로 인해 버서커님이 국가와 협력하고 있는 게 일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행동하다 벌어진 일이니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

뭐지, 이런 정상적인 반응은. 보통 납득 못 하겠다면서 난리를 부려야 되는 거 아닌가?

정주호는 혼란에 휩싸였다.

자신이 아는 버서커는 미친놈 중에서 가장 미친놈이었다.

근데 왜 버서커가 정상인처럼 느껴지는 거지?

자신이 미쳐 버린 건가? 그래서 미친놈이 정상으로 보이는 병에 걸린 건가.

혼란스러워하던 정주호가 답을 얻은 건 가까운 곳에서였다.

"대신 국가수호국을 포함한 삼국에서 더 이상 널 귀찮게 굴지 않을 거다."

"그거 기쁜 소식이군."

"좀 더 기뻐해야 되는 거 아니냐?"

"크하하! 좋군. 됐나?"

그래, 최준호 저 녀석이다.

자신의 모발을 얇아지게 만들고 최명국 실장이 피똥 싸게 만든 1등 공신.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저 녀석을 보다 보니 버서커를 보니까 순한맛으로 느껴지던 것이다.

매일매일 캡사이신을 들이붓다 하니 평범한 매운맛은 순하게 느껴질 수밖에.

'괜히 미안하네.'

정주호는 자신이 아는 빌런 중 가장 미친놈을 버서커로 지목했던 것을 속으로 사과했다.

* * *

대한민국 국가 소속 헌터는 대부분 치안유지 목적으로 고용된다.

그들 중 대부분이 빌런 체포를 비롯한 마물의 습격에 대비한 방어적 성격을 띠지만 사냥을 위한 팀도 존재한다.

하지만 대우 면에서 길드들을 쫓아가지 못해 그 숫자가 많지 않고 수준 또한 높지 못했다.

정부에서는 실력 좋은 사냥팀을 보유하고자 여러 혜택을 내세웠지만 모든 면에서 대우가 뒤처졌다. 그러다 보니 믿음직한 성과를 올리는 사냥팀이 극히 적었다.

유일한 장점은 사냥터 확보에 최우선권이 부여된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마물은 많고 사냥터도 많았다.

"유해 7단계 블랙와이번 등장! 다시 한번 말합니다. 유해 7단계 블랙와이번이 등장했습니다."

갑자기 터진 변수에 사냥팀에 혼란에 빠졌다.

이곳은 유해 5단계 마물이 등장하는 곳인데 한참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 유해 7단계 마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블랙와이번이 왜 여기에 나타나!"

"팀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변에 사냥팀도 몇 개 없습니다."

"최근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군."

급박한 상황 속에서 팀장은 신중하게 판단했다.

주변 길드 사냥팀을 불러 모아 대응하다간 오히려 전멸할 수 있었다.

"주변 사냥팀에게 후퇴를 권고하고 우리도 물러난다. 그리고 초인을 부른다."

"예? 하지만 현 초인은 사냥에 검증된 게 없습니다."

같은 팀 젊은 헌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최연소 초인이지만 아직 사냥팀조차 구성하지 않은, 반쪽짜리 초인이었다.

제대로 검증조차 되지 않은 그에게 자기들 목숨을 맡기자고 하다니.

하지만 팀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나이에 레벨 8이 되었다는 건 재능이 있다는 의미다. 설사 사냥 경험이 없다고 해도 유해 7단계는 상대할 수 있을 거다."

"그래도 하, 알겠습니다."

한 번 더 반박하려던 젊은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당장 연락하고 우리는 세 갈래로 나눠 시선을 교란한다. 어서 움직여!"

곧이어 보내진 초인콜은 청와대로 전달되었다.

40화

버서커가 사형집행인을 제거했다는 소식은 각성자안보실을 거쳐 청와대까지 전달되었다.

미친놈을 끌어들여서 안 좋은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버서커는 나라에 큰 힘이 되어 줄 각성자입니다. 그를 끌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렇게 밝은 표정의 천명국은 처음 봤다. 그만큼 버서커의 힘이 크긴 한가보다. 미친놈의 손을 빌릴 정도인가.

하긴, 저번 생에서도 끝끝내 15년 동안 살아남은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보여 줬으니 정부 입장에서 꽤나 귀찮긴 했을 것이다.

"버서커 정도 되는 빌런이 변수로 작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안정감이 부여됩니다. 미친 사람은 언제 어느 순간 날뛸지 모르니까요. 단, 이게 외부에 밝히기 쉽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버서커의 현재 위치는 정부의 이름으로 고용된 빌런 정도가 옳겠다. 보수로 돈이나 장비 등이 거론되었는데, 뭐가 필요한지 물어봐야겠군.

정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악행은 상대적으로 덜 저지르고 사회에 적응을 못한 빌런들을 예의주시해 왔다고 밝혔다.

그들을 전력화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는데, 문제는 빌런의 포악함을 다스릴 사람이 없어 무기한 연기되고 있었던 상황이라 말했다.

그러던 중 내가 버서커와 연을 맺으면서 한 걸음 내딛게 되었다단다.

난 저번 생 내내 쫓겨 다녔는데.

버서커 이 녀석은 나한테 고마워 해야 한다. 만독불침 얻을 수 있는 것도 알려 줬고. 만독불침, 탐이 나는데 버서커를 안 죽이고 얻을 방법이 있나 연구해 봐야겠다.

"빌런을 쫓는 추격대 구성만으로 많은 부담이 되는데, 이걸 줄인 건 고무적입니다."

그러는 양반이 저번 생에 날 죽이려고 대타협을 이뤄 내냐?

그때 내가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이러니까 살짝 심통 나려고 하는데?

"초인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행입니다. 제가 심기를 거스른다 싶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시정하겠습니다."

"다만 버서커는 제멋대로인 녀석이라, 협조적인 태도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 좋습니다."

그의 셈법은 간단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협이 되던 버서커, 인형술사, 사형집행인, 검은 사신 중 둘은 죽고 하나는 아군이 되면서 빌런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리그가 손을 뗐고, 마물 사냥은 순조롭다.

여전히 국토의 절반 이상이 마물 소굴이지만 70~80%, 심하게는 90% 넘게 점령당한 다른 국가에 비하면 양호한 상황이다.

"검은 사신은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빌런이니 독보하는 빌런 중 위험한 빌런이 사라진 셈입니다."

마지막 남은 암살자인 검은 사신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빌런이다.

나도 저번 생에서도 본 적 없었는데 악명은 대단했다.

소문으로는 도시 내에 암약하는 빌런 조직 출신이라는 말도 있고 한 명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천명국이 나를 보며 화제를 바꿨다.

"슬슬 사냥팀을 구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냥팀? 그게 왜 필요합니까?"

"초인은 자신의 힘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사냥팀을 구성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사냥에 별 뜻이 없어서 흘려들었던 거 같다. 이게 초인으로서 평가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되었지.

근데 사냥팀이 필요한가?

나는 저번 생 내내 혼자 마물을 잡고 다녔다.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고위 단계 녀석들은 주제파악 못 하고 달려들어서 어그로를 끌 필요도 없었다.

사냥 후 해체하는 것 때문에 그런가? 근데 그마저도 슬래쉬 기프트를 보유한 나만큼 완벽하게 해체하는 사람이 또 없다.

"모르기보다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허."

천명국의 얼굴이 내가 자주 보던 표정으로 바뀌었다.

진짜 날 반쪽짜리로 생각하나?

일단 내 머릿속 예비 리스트에 천명국도 넣어 둬야겠다. 물론 결백하면 언제든지 빠질 수 있다.

진짜로.

"사냥팀을 구성하지 않으셔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겁니다."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사냥팀 구성이 필요하단 의미군요."

내가 사냥에 나서지 않는 걸로 소문을 내는 줄 알았더니 사냥팀 구성되지 않는 걸 보고 짐작하고 있었나 보다.

내 입을 여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사냥팀원의 입을 여는 건 쉬울 테니까.

근데 난 소문을 불식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내 욕 할 사람들은 내 욕하고 있을 테니 이번 기회에 다 끌어내면 서로 이득이지 않은가.

저쪽은 내 욕해서 스트레스 풀고, 난 누가 내 욕 하는지 알아 둬서 좋고.

이게 윈윈이라는 건가? 아름다운 말이로군.

"초인님,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언제 사냥팀을 구성할지 지켜보고 있는 눈이 많습니다."

"그 부분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 사냥팀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허! 초인에게 사냥팀은 매우매우 중요합니다."

"전 안 중요합니다."

"초인님, 제발······."

천명국이 내게 매달리다시피 할 때였다. 요란한 알림과 함께 연락이 왔다.

"초인님, 초인콜입니다."

초인콜은 외부에서 초인의 힘이 필요할 때 요청하는 걸 말한다. 사안을 놓고 각성자안보실과 초인의 판단하에 출동여부가 결정된다.

대부분 각성자안보실 선에서 커트가 되기 마련인데, 내게 말한다는 건 상의가 필요한 사안이란 의미였다.

"유해 7단계 블랙 와이번이 영역 밖으로 나와 사냥팀이 위험에 처했다고 합니다."

"다 죽겠네요."

"출동하지 않으면 사냥팀은 전멸할 것입니다."

문제는 사냥팀이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자칫 도시까지 습격당할 수 있었다.

천명국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곤란함과 간절함이 섞여 있었는데 그도 확신이 없어 보였다.

"가 보죠."

"헬기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나와 천명국은 청와대 헬기장으로 향했다. 그 사이 블랙 와이번에 대한 간략한 정보와 대응요령을 내게 알려 줬다.

10km 밖에서 사냥감을 식별할 수 있으며, 먹잇감이 아니더라도 보이는 사냥감을 모조리 죽인단다.

내가 아는 정보보다 빈약한 거 같다.

블랙와이번은 여기에 더해 주제파악이 잘 안 된다.

한 마디로 죽을 자리인지 모르고 뻗대다가 처맞는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건 사냥팀의 생존입니다. 그들이 초인님을 보조할 것입니다."

내가 사냥팀을 구성하지 않았으니 현장에서 사냥팀으로 써먹으란 이야기였다.

그 속에서 내가 제대로 사냥하길 바라는 마음, 정부 소속 사냥팀이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현재 블랙 와이번이 위치한 곳은 안성시와 진천군 경계였다.

헬기 탑승 전, 난 천명국에게 물었다.

"현장에서 제 지시가 최우선, 맞죠?"

"예, 맞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천명국을 보며 정답이라고 속으로 말해 줬다.

* * *

-지원 출발했다. 40분 이내로 도착할 예정이다.

"40분."

정부 소속 헬하운드 사냥팀 리더 이창수는 40분이라는 단어를 거듭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닐 거라 생각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무척 피 말리는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다.

"초인콜에 응답했다.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도주한다. 40분. 40분이면 초인이 블랙 와이번을 상대할 거다."

"초인이 오면 우리가 살 수 있는 겁니까, 팀장님?"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이창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헬하운드 팀 3년차, 한중석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 수 있다."

"전 회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최준호는 아직 사냥으로 검증된 적 없습니다."

올해 28세로 젊은 헌터인 한중석은 이창수가 아끼는 재능이다. 상황판단 능력이 날카롭고 과감함을 무릅쓰고 동료들을 보호할 정도로 팀에 대한 애정도 크다.

이창수를 보좌하여 헬하운드의 사냥 역량이 높아지도록 다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언제고 헬하운드 사냥팀이 대형 길드를 뛰어넘어 최고가 되는 것이 한중석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는 최준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했다.

"최준호 등장은 오히려 팀장님의 지휘권을 회수해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오지 않는 게 생존확률이 더 높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를 구하러 오는 초인을 무시하자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릴 비롯해 다른 사냥팀이 노려지고 있다."

가장 가깝던 사냥팀이 블랙와이번에게 당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사냥팀이 습격당해 하나둘씩 연락두절이 되고 있다.

언제 어느 순간 노려질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후퇴하고 있었다.

한중석이 한숨을 내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사냥 경력이 없는 최준호를 못 믿겠습니다."

반년 전에 등장해서 빌런들만 잡은 초인. 가장 굵직한 경력은 인형술사를 잡은 게 전부다.

빌런 수백 명을 잡은 건 좋다 이거다. 하지만 마물 사냥 이력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강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각성자가 마물 사냥 초기에 겪는 다양한 부작용들을 생각할 때 우려가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각성자 중 마물을 사냥하다 트라우마를 얻어 평생 사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마물의 살기에 얼어 버려 허무하게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괜히 첫 마물 사냥에서 가장 많은 희생이 발생하고, 대형 길드에서 신입 헌터가 사냥에 익숙해지기 위해 베테랑 헌터를 붙이는 게 아니다.

최준호는 실력에 비해 알려진 게 너무나 적다.

"그 생각도 맞다. 하지만 나는 정부가 어설프게 판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나이에 초인이 됐다는 건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는 의미지. 천재는 달라. 우리가 겪은 모든 시행착오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언론에서 수많은 천재들을 다루지만 그들 중 20대에 레벨 8에 도달한 사람은 없다.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최준호였다.

이창수는 최준호를 모른다. 하지만 최준호가 가진 천재성은 믿었다.

"최준호가 올 때까지 버티면 난 모두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어라. 우리에게 그 방법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확고한 믿음이 담긴 음성에 한중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방법은 이것밖에 없긴 했다.

* * *

청와대에서 탑승한 헬리콥터는 순식간에 서울을 지나 경기도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그 사이 통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희생자는 얼마나 발생했는지, 블랙와이번이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았다.

헬기가 있으니 웬만한 공간 계열 기프트가 부럽지 않군.

"곧 경계선에 진입합니다."

조종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헬기는 빠른 속도로 블랙와이번이 있는 근처까지 도착했다.

"근처에 착륙할까요?"

"이대로 갑시다."

"예? 하지만 이대로 가면 블랙와이번이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

조종사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마물 있는 곳으로 가는 건데 왜 저리 놀라나.

"블랙와이번에게 다가가야 잡을 거 아닙니까."

"······."

블랙와이번은 10km 밖 사냥감을 식별할 수 있다.

이것은 지상에 있는 사냥감이 있을 때 가정이다. 아무 장애물도 없는 하늘에서는 그 시야가 더 넓을 것이 분명했다. 녀석의 시야에 닿으면 어차피 다가올 것이다.

"갑시다."

"···알겠습니다."

현장지휘권을 발동하지 않아도 초인의 권위가 먹혔다. 갈등하던 조종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블랙와이번이 있는 곳으로 조종했다.

"블랙와이번이 있습니다. 10km 이내."

이미 블랙와이번의 시야에 들어왔을 것이다. 조종사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헬기가 떨리는 게 아니었군.

나는 덜덜 떠는 조종사에게 말했다.

"계속 갑시다."

"예에, 예!"

헬기는 빠른 속도로 블랙와이번과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조종사의 떨림이 커졌다.

"블랙와이번과 거리 5km!"

블랙와이번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마뱀 같이 생긴 몸길이가 20m에 달했고, 날개는 박쥐와 흡사했다. 날개가 그리 크지 않은데 어떻게 날아다니는 건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참고로 블랙와이번 고기는 별로 맛이 없다.

"블랙와이번과 거리 3km!"

"계속 가세요."

"블랙와이번과 거리 2km! 이쪽을 봤습니다! 날아오기 시작합니다!"

비명 섞인 보고였다. 나도 보고 있다.

블랙와이번의 비행 속도는 빠르다. 서로 가까이 다가가니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블랙와이번과 거리 1km! 초인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잡을 겁니다."

"예?"

"내가 나가면 회피기동을 하면 됩니다."

난 헬기 문을 열었다.

어마어마하게 강렬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나는 저 앞에 날아드는 블랙와이번을 바라봤다. 자기가 사냥감인 줄 모르고 이쪽을 먹이라 착각하고 달려드는 게 딱 도마뱀 수준 지능이다.

생각해 보면 유해단계가 높은 마물일수록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날뛰곤 했다. 오히려 낮은 단계 마물들이 생존본능에 특화되어 있어 알아서 잘 피해 다녔다.

이러니 사냥팀이 필요가 없지. 알아서 자기 죽을 자리로 뛰어드는 걸 잡기만 하면 되는데 왜 사냥팀을 꾸려야 하나. 사람이 늘수록 귀찮은 일만 느는 법이다.

나는 바닥을 박차며 허공에 몸을 던졌다.

두웅!

포스가 쭉 빠져나가며 발바닥에 포스 발판이 생겨났다. 난 발판을 밟으며 블랙와이번에게 달려들었다.

비행 기프트가 없기에 무지막지한 양의 포스를 때려 부으며 몸을 유지했다. 어차피 바다에서 대야로 퍼 가는 수준이다.

블랙와이번이 다가오는 날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브레스를 쏘려 하는 것이다.

날 자신이 잡았던 사냥감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녀석이 새대가리인 거겠지.

캬아아아아!

화염 브레스가 쏘아졌다. 나는 포스 발판을 힘차게 박차 높게 점프해서 브레스를 피했다. 주변 공기가 달아오르며 화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이놈 때문에 산불 나면 귀찮아지는데.

내가 위로 회피하자 블랙와이번의 눈알에 위로 움직여 날 쫓았다.

비행 마물이 까다로운 이유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녀 주도권을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점, 지금 쏜 브레스처럼 하늘에서 공격을 할 때 반격 수단이 마땅하지 않은 점에 있다.

하지만 나 또한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되면서 녀석의 이점은 모두 사라졌다. 도리어 브레스를 쏠 때 움직임이 멈추게 되니 커다란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새대가리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실수지."

퍽!

블랙와이번의 머리가 움푹 파였다. 단단한 가죽을 뚫지 못했지만 가죽 안에 있던 뇌는 기뢰에 휩쓸려 곤죽이 되었다.

아무리 생명력이 질긴 생명체라 해도 뇌가 파괴되고 살아남을 수 없는 법이다.

캬아아!

단말마 비명을 터뜨린 블랙와이번이 눈을 까뒤집더니 그대로 죽어 버렸다.

혈종일 때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새대가리들을 사냥했다. 새대가리들은 자기가 포식자라 생각해서 이렇게 접근해서 뇌에다 기뢰를 심어 주면 무조건 한 방이다.

유해 8단계 마물 누리도 비행 마물인데 먹힐지 모르겠다. 곧 해 볼 기회가 생기겠지.

"시끄럽게 꽥꽥거리긴."

나는 허공에 멈춰 서서 추락하는 블랙와이번을 내려다보다가 돌아오는 헬기를 향해 이동했다.

헬리콥터 타고 오는 게 더 고역이었던 사냥이었다.

41화

최준호가 처음에 헬기를 블랙와이번이 있는 곳으로 가도록 지시했다는 말에 천명국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늘 경로를 이용한 접근은 비행 마물을 상대함에 있어 절대 금기시 되는 지시였기 때문이다.

마물의 등장 이후, 하늘은 더 이상 인류의 터전이 아니게 되었다. 비행 마물의 속도, 공격력과 방어력은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어서 출몰하지 않는 검증된 비행항로가 아니고서는 다니지도 못했다.

유해 7단계 마물이면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투기다.

공격력은 부족할 수 있어도 내구도, 생명력, 지구력이 압도적이다.

만약 헬기가 공격당해 추락하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설사 레벨 8 초인이라 해도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왜 멀리 떨어진 곳에 착륙하지 않고 무리를······."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최준호가 죽기라도 하면? 후폭풍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최준호가 블랙와이번을 사냥했다는 내용이다.

"······."

사냥과정이 담긴 영상을 본 천명국은 할 말을 잃었다.

최준호는 블랙와이번을 그냥 사냥한 게 아니었다. 일격에 머리를 함몰시켰다. 그 후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산책을 나온 듯했다.

지금 자신이 보는 게 현실 맞나? 영화가 아니고?

그제야 최준호가 보인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내 행동이 비웃음 살 수밖에 없었어. 그런 거였구나."

행여나 사냥에 큰 차질을 빚을까봐,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던 모든 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문득 정주호가 술을 마시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부질없는 걱정이 최준호의 걱정이라는 것.

그 자체가 사치라며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정주호가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는 자신은 스트레스 받아 탈모가 가속화 됐으면서.

"하긴, 피똥 싼 내가 할 말은 아니지."

괜히 머리를 만지면서 다음에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나왔다.

최준호는 사냥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란 게 밝혀졌다.

문제는 반쪽짜리라고 욕한 사람들의 명단 요구였다.

직업상 누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 두긴 했지만··· 문제는 이게 최준호 손에 넘어갔을 때 여파였다.

그냥 보기만 할 거라고?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일이다.

"실력을 증명했으니 대통령님도 지지하실 테고, 결국 피할 수 없는 태풍인가."

속이 쓰려 오는 기분이다. 약을 먹으면 좀 나아질까? 약의 힘을 좀 더 빌리기로 결심하면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이건 좀 더 심한 건이다.

"유해 7단계 마물이 터전을 벗어났다. 이건 절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야."

마물이 자기 터전을 벗어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기 영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을 때. 둘째는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였다.

첫 번째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기존 블랙와이번의 터전은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유인데. 유해 7단계보다 상위 포식자면 하나뿐이다.

"유해 8단계."

이건 나라가 멸망할 수 있는 재앙이다.

만약의 가능성이지만 대비해야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