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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 유료 시작 화

3팀 사냥 장소에 도착한 이세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전투의 흔적이었다.

"아······."

이세희는 물론 같이 온 이영탄과 운전기사도 탄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이백이 넘는 숫자의 인형이 두 동강 나 죽어 있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죽어 있는 모습은 기괴했으며 동시에 압도적이었다.

검을 다루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인형들, 일격에 모조리 베어 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어떤 인간이 이런 무위를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부상자 수습부터!"

정신을 차린 이세희는 지시를 내린 뒤 운전기사, 이영탄과 함께 부상자들을 수습했다. 그리고 최준호 뒤에 쓰러진 최윤희에게 다가갔다.

"윤희 씨 데려갈게요."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본 이세희는 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전보다 훨씬 짙은 살기. 거슬리면 당장 베어 버릴 것 같았다.

간신히 정신을 챙긴 이세희는 최윤희를 챙겨 차로 돌아왔다.

문제는 부상자로 인해 차에 사람이 가득 찼다.

이세희가 결정을 내렸다.

"먼저 가세요."

"예? 하지만 팀장님도 같이 가셔야······."

"전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겠어요."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이영탄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세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부상자 호송이 더 중요해요. 제 말을 따르세요. 명령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위험하다고요? 전혀요."

이세희는 인형과 대치하고 있는 최준호를 보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에요."

* * *

"······."

차가 떠나는 걸 본 이세희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지만 속내는 이 전투 장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백이 넘는 인형이 쓰러져 있는 걸 본 순간, 그녀는 막연하게 떠돌고 있던 생각이 사실임을 알아차렸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검을 쓰는 검사 중 이런 무위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에 불과하다.

그중 둘은 길드 소속이고 한 명은 쫓기고 있는 빌런이다. 이번에 버서커가 추가될 것이다.

"역시, 맞아."

그녀는 오랫동안 최준호에 대해 조사해 왔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레벨 7 공무원 헌터. 아직 레벨 측정을 받지 않았을 뿐, 레벨 8에 도달한 괴물이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누구도 이뤄 내지 못할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에도 거액의 계약금도, 남들보다 많은 권력도, 바라지 않는 독특한 인물이다.

불체포특권을 바라니 권력을 원하는 걸까? 하지만 그는 남들과 바라보는 방향 자체가 달랐다.

평범한 성장과정을 거쳐 왔음에도 그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최준호는 위험한 인물이다.

지금은 빌런을 잡는 공무원 헌터지만 사소한 계기만 생기면 언제든 최흉의 빌런이 될 가능성이 있다.

불체포특권만 해도 생각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최준호는 본인 기준에 어긋나는 순간, 거대 기득권도 상관하지 않고 부딪칠 것이다.

설사 그게 대통령이나 신성그룹 회장이더라도.

공무원 헌터일 때 손속이 과격한 인물로 헤드 브레이커라 불리지만 검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일까.

이세희는 확신을 입으로 꺼내 놓았다.

"말소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참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최준호의 친구 오종엽은 안산 출신이다.

가난하던 오종엽이 병원비를 마련하게 된 계기는 샤벨 타이거 사체의 판매였다. 꼼꼼하게 분산 처분했지만 신성 길드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샤벨 타이거는 유해 6단계 마물. 최준호가 자신에게 건넨 마물의 심장도 유해 6단계다. 그 말은 최준호가 사냥해서 샤벨 타이거 사체를 오종엽에게 건네줬다는 말이 된다. 오종엽이 판매한 물건 중 심장만 없었다.

즉, 최준호는 오종엽과 만나기 위해 안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샤벨 타이거를 사냥한 뒤 오종엽에게 건넸다. 그날, 말소자에게 소멸된 빅텐도 안산에 본거지가 위치해 있다.

"세상에 우연은 없어."

세상에 갑자기 두 명의 레벨 8 초인이 등장하는 걸 믿는 게 합리적일까. 아니면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둘이 동일인이라 생각하는 게 합리적일까.

이세희는 후자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생각했다.

다른 점이라면 말소자는 검을 다루는 점인데 그것도 최준호가 검을 들고 있는 걸 봄으로써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부하들을 황급히 보낸 것도 행여나 눈치 챌 수 있어서다. 공무원 헌터인 그가 빌런임이 밝혀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최준호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이세희."

눈이 마주치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압도적인 공포가 뇌를 마비 시켰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 걸 자각하고도 멈출 수 없었다.

"네, 네."

"오늘 본 건 잊어라."

검신에 핏빛 포스가 아른거리는 순간.

서걱!

레벨 7로 평가되는 인형 정해솔의 팔 양쪽이 잘려 나갔다.

* * *

오종엽의 슬래쉬는 대표적인 선(線)의 기프트로, 무기의 예기와 포스를 결합하여 절삭력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기뢰가 모든 걸 파괴해 버린다면 슬래쉬는 모든 걸 베어 버린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기프트는 그날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사용했다. 어느 날은 모조리 부숴 버리고 싶고 어느 날은 잘게 썰어 버리고 싶고. 오늘은 후자였다.

녀석은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윤희를 지나치게 굴렸다. 내 동생을 굴리는 건 나만 가능하다. 다른 녀석이 굴린 대가는 죽음이다.

두 팔이 잘린 인형은 비틀거리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는 절단면을 보더니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도 미친놈이군.

"킥킥킥! 놀랍군, 놀라워! 평범한 레벨 7이 아니었다는 건가?"

츠츠츠!

바닥을 뒹굴던 팔이 마치 선에 연결된 것처럼 잘린 부위로 당겨지더니 그대로 붙었다. 봉제인형 꿰매나?

"너, 탐이 나, 탐이 난다고! 잘 단련된 육체! 뛰어난 기프트를 가진 인형이라니! 버서커보다 내가 먼저 취해 주마."

"시끄러워."

입을 찢어 버리면 더 못 지껄이겠지.

"곧 지겹도록 듣게 될 거라고, 친구. 킥킥킥!"

광소를 터뜨린 인형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쇄도한 슬래쉬가 인형의 팔, 다리,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입도 찢어 버렸다.

자기 쓰임이 다했는데 자꾸 지껄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콰직!

나는 바닥을 뒹구는 머리를 지근지근 짓밟았다. 얼굴이 뭉개졌지만 인형의 찢어진 입꼬리는 여전히 말려 올라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인형의 타격은 인형술사한테 가지 않는군.

"키···킥! 그래 봤자 나는 죽···지 않, 아! 내 불···사의 군대가 널······."

"그렇게 외치는 놈들이 자기 목숨을 더 소중하게 여기더라."

난 녀석을 밟던 발을 치우고 머리채를 잡고 들었다.

포스를 밀어 넣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브레인워싱이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백지 상태였다.

즉, 인형은 인형의 본분에 충실하다는 얘기. 그렇다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컨트롤러가 존재할 것이다. 실타래처럼 풀어진 포스가 인형의 머리 모든 부분을 건드렸다.

"찾았다."

인형의 머릿속, 보이지 않는 희미한 파장이 일정하게 일어나며 어디론가 보내지고 있었다.

이게 인형과 녀석의 연결고리다.

"블루투스 같은 건가."

"네놈, 무슨 짓······."

녀석의 파장을 브레인워싱으로 파악하고 직감으로 쫓아 점점 희미해지는 포스 흐름을 추격했다. 한번 기억해 놓은 파장의 형태를 기억해 두자 순식간에 머물고 있는 위치가 파악되었다.

이곳에서 약 5km 떨어진 폐가의 밀폐된 방이었다. 나는 그 안에 있는 남자가 인형술사의 본체임을 알아차렸다.

내 감각이 닿은 영역. 내 포스가 존재하면 거리가 얼마든 내 눈을 피할 수 없다. 천리안을 발동했다.

5km 넘게 떨어진 공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치된 지 수십 년 되어 낡고 부서진 폐가에는 40대 후반에 얼굴 곳곳 검버섯이 핀 보잘것없는 말라깽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난 존재감을 감추지 않았다. 윤희를 노리고 주제도 모르고 날뛰며 제가 불사신인 줄 알고 기고만장하던 녀석에게 가장 확실한 죽음을 내려 줄 것이다.

사냥감과 눈이 마주친 나는 웃었다.

"찾았다, 쥐새끼."

* * *

"미친 새끼! 개자식! 으아아아아!"

인형술사, 조형식은 아끼던 인형을 잃고 분노했다. 무려 이백이 넘는 인형이었다. 중형 길드 하나쯤은 지워 버릴 수 있는 전력이 고작 한 명에게 무너졌다.

가장 뼈아픈 건 레벨 7 붕권 정해솔의 소멸이었다. 정해솔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력 동원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렇다 할 저항조차 못한 채 갈가리 찢겨 나갔다.

이래서는 손해가 극심했다. 리그에 가더라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개자식, 언젠가 반드시 죽여서 인형으로 만들어 주겠다. 내 앞에 무릎을 꿇리고 개처럼 바닥을 핥게 할······."

그 순간, 조형식은 전신을 휘감는 기이한 위화감에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이곳은 자신밖에 없는 방이다. 누구도 접근하지 않을 방치된 폐가였고 개미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밀실화 시킨 곳이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방이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무심코 고개를 든 그는 거대한 눈동자와 마주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히익!"

천장에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은 깊은 늪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대체 저 눈동자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찾았다, 쥐새끼."

"헤, 헤드 브레이커?"

어떻게 녀석이 여길?

상관없다. 자신은 불사신이다. 절대 죽지 않는 불사신.

이백이 넘는 인형을 잃었어도 휘하에 여전히 많은 인형이 존재했다.

그 속에서 자신은 지배자이며 군주였고 불사의 존재였다. 모든 헌터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며 자비를 구걸했다. 제가 잘난 줄 알고 날뛰던 녀석들을 짓밟고 농락하며 최악의 빌런으로 군림했다.

그렇게 두려움을 떨쳐 내려고 했지만.

헤드 브레이커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껍질이 벗겨지면서 볼품없는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녀석은 규격 외다. 절대 대항해서는 안 된다. 도망쳐야 한다. 살아남아서 전보다 더 강하고 더 많은 숫자의 인형을 확보해야 한다.

"으, 으아아아!"

필사적으로 푸른 눈을 뿌리친 조형식은 방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갑자기 강렬한 통증이 가슴에 엄습해 왔다.

저 너머, 자신을 향한 살의가 덮쳐 오고 있었다. 매개는 정해솔과 자신의 연결 부분. 통증은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가슴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잠식해 나갔다.

"끄으으으!"

이를 꽉 물고 연결을 해제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오히려 자신과 인형의 연결을 타고 더 많은 양의 포스가 파고들었다. 

펑! 퍼버벙!

몸속에서 연이어 폭발이 일어나며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걷잡을 수 없는 통증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끅!"

끝까지 살고자 몸부림치던 조형식의 반항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터져 버리면서 끝났다.

절대 대적해서는 안 됐는데.

연신 피를 토하던 그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였다.

* * *

나는 쓰임이 다한 검을 바닥에 던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눈치 보던 이세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감이 좋은 여자다. 아까부터 날 대하는 태도가 유독 조심스러웠다. 윤희 일이라 내가 날이 좀 서 있었나. 평소처럼 부드럽게 기세를 풀었다.

"방금··· 그건 뭔가요?"

"인형술사를 죽였다."

"말도 안 돼."

녀석을 죽인 게 그리 놀랄 일인가? 제법 번지르르하게 불사신을 자처했지만 내가 볼 땐 손이 한 번 더 가는 수준에 불과했다.

"좀 떨어진 곳에 있어. 시체를 확인하러 가지."

하지만 오토바이를 버려두고 전이한 걸 깨닫고는 멈칫했다. 걸어가야 하나? 5km 거리는 걸어가기에는 시간이 꽤 걸린다.

내가 오토바이 날려 버린 걸 떠올렸는지 이세희가 말했다.

"근처에 3팀이 타고 온 차가 있을 거예요. 그걸로 이동해요."

역시 이세희. 내가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속속 들고 온다.

잠시 후, 3팀이 타고 온 차를 픽업해 인형술사의 거처로 이동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폐가 안으로 들어가자 팔다리가 꺾이고 가슴이 터진 채 죽어 있는 조형식이 보였다.

원거리에서 발동한 기뢰라 그런가. 시체 상태가 무척 온전했다. 반면 이세희는 조형식의 시체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람이 인형술사?"

"얼굴을 아나?"

"아니요, 인형술사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준호 씨가 죽였다고 하니 그런 거겠죠. 어떻게 하신 거예요?"

"녀석과 인형이 연결한 파장을 파악해서 그걸 역추적해서 기뢰로 죽였다."

"······."

날 보는 이세희의 표정이 기괴했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설명인데.

의지가 닿은 곳에 포스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왜 그러지?"

"그게 가능한 거예요?"

"해 보니 가능하던데."

"···준호 씨가 뭔들 못하겠어요. 준호 씨가 인형술사를 죽였다는 증인이 필요하면 제가 증인할게요."

"보고 정도는 하겠지만 안 믿어도 상관없어."

기뢰를 실어 발로 툭 건드리자 조형식의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이래야 기뢰에 당한 것답다.

폐가 밖으로 나와 이세희와 함께 차에 탑승하고 서울로 향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버서커를 잡을 생각이다."

"···버서커는 레벨 8에 도달했을지 모르는 빌런이에요."

"레벨 8이 맞아."

김영환은 자기가 공을 독식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버서커가 레벨 8이라는 걸 증명해 주고 죽어 버렸다.

곧 버서커의 레벨이 상향조정 될 것이고 바짝 경계태세를 취할 것이다.

이세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뱀의 죽음으로 정세가 격변할 거예요. 준호 씨의 가치가 더 높아질 기회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버서커를 잡는 건 미루는 게 어떤가요? 지금도 준호 씨가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어요."

그러면서 버서커에 대한 소문을 언급했다.

"버서커는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히 있을 빌런이고요."

이세희는 그동안 들려온 버서커의 목격담에 기반해서 내게 도움이 되는 방향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내가 버서커를 노리는 것은 녀석의 기프트 때문이다. 조급할 이유도 없지만 미뤄야 할 이유도 없다.

"그건 버서커에 대해 몰라서 하는 말이다."

"네? 하지만······."

"버서커는 이미 나한테 흥미를 가졌어. 내가 나서지 않으면 녀석이 나서서 설쳐 대겠지."

내가 숨으려고 할수록 녀석은 더욱 날뛸 것이다.

리그 가입이 변수였지만 제멋대로 구는 녀석이 리그의 지시에 순순히 따를 리 없었다.

미친놈이니까.

"하나 부탁하지."

"뭐죠?"

"버서커가 이 근처에 나타날 거다. 기다렸다가 연락 수단을 건네줄 사람이 필요해."

내 제안을 줄곧 받아 주었던 이세희는 이번만큼은 고민에 빠졌다.

"이건 전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요."

"녀석은 흔쾌히 받아들일 거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미친놈에 대해 잘 아는 건 나니까."

난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마 나만큼 그 녀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녀석이 기프트 소유자라는 것도, 기이하게 뒤틀린 정신 구조도 말이다.

내 말을 납득한 듯 이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미친 사람끼리 통하는 건가······."

27화

버서커는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폐가의 문을 열었다. 집안은 피비린내와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 후각을 괴롭혔지만 일상의 자연스러움이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머리와 팔다리가 갈가리 찢겨 있고 가슴이 터진 시체 앞이었다. 누가 봐도 예술적으로 찢어 놓았다.

"멍청한 녀석에게 어울리는 멍청한 죽음이군."

툭 튀어나온 소감이었다.

그토록 잘난 척을 하더니 이런 어이없는 죽음이라니.

"아니, 헤드 브레이커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말일지도."

불사신으로 알려져 있는 인형술사의 위명은 진짜였으니 찾아내서 죽인 헤드 브레이커가 대단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

방안에 선 버서커는 눈을 감고 방안의 잔여 포스 흐름을 받아들였다. 몇 시간 전 방안의 풍경이 보였다. 인형술사에게서 발산된 신호가 인형을 조종하는 것, 방안을 꿰뚫듯 치뜬 푸른 눈동자, 인형술사가 만들어 낸 신호를 타고 파고든 벼락이 보였다.

그 속에 깃든 건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거대한 살의였다.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은 광기.

세상이 자신더러 버서커라 부르는 게 우스울 정도의 미친놈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큭큭큭!"

자신마저 집어삼키려는 광기를 털어 버린 버서커는 웃었다.

"내가 본 게 어디까지 현실인지 모르겠군."

모든 것들이 혼란함 그 자체였다.

인형술사가 멍청하게 거처를 들켜 죽은 게 아니었다. 방안에 드러난 눈동자는 뭐고 흐름을 타고 파고든 벼락은 무엇이란 말인가.

몇 번이고 읽어 보려 했지만 전부가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폐가를 나선 그가 도착한 곳은 5km가량 떨어진 곳이다.

격렬한 전투 흔적 속에서 버서커는 인형과 헤드 브레이커의 전투 흐름을 감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긋났다. 헤드 브레이커는 손에 닿는 모든 걸 파괴하는 벼락으로 전투를 한다. 근데 이곳에서 그 흔적은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왜 말소자의 향기가 느껴지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헤드 브레이커의 전투 방식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 속을 채운 것은 오직 말소자의 존재감이었다.

"말소자가 헤드 브레이커라는 건가? 대체 무슨 이유로?"

공무원 헌터가 빌런을 가장할 이유가 있었나. 여러 단서를 가지고 퍼즐을 맞춰 봤지만 그림이 들어맞지 않자 포기했다.

대신 상대를 말소자로 가정하고 포스 흐름을 받아들었다.

······!!!

가슴을 둔중하게 때리는 통증과 함께 버서커의 눈이 부릅뜨였다. 아까와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살의와 광기가 내부를 휩쓸었다.

이게 정녕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크기란 말인가.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으로 집어삼키려 드는 최흉의 의지 아래 버서커는 심호흡을 하는 게 전부였다.

"···헤드 브레이커를 봐야 할 이유가 더 늘었군."

대체 어느 녀석인지 한번 보고 싶어졌다.

상념을 접어둔 버서커는 우거진 풀숲을 향해 외쳤다.

"나와라."

"······."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을 생각이지?"

"···평범한 연락책입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평범한 얼굴의 샐러리맨 차림새를 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레벨 5 수준으로 대형 길드 일선에서 활약 수 있는 실력이었다.

평소라면 이런식으로 마주칠 일이 없겠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자 버서커가 웃었다.

"어디서 왔지?"

"신성 길드 총괄 운영팀에서 나왔습니다. 부팀장 이영탄입니다."

"날 감시하라고 했나?"

"정확히 말과 물건을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말해라."

"헤드 브레이커의 전언입니다. 그는 버서커가 이곳에 올 것이며, 마주하면 연락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버서커에게 내밀었다.

"······."

버서커는 스마트폰을 보다 손을 뻗었다. 잠시 후,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통화를 연결하는 방법을 몰라 이영탄이 옆으로 밀라고 얘기를 해서야 연결이 되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서커.

"헤드 브레이커인가? 내게 할 말이 있다고?"

-곧 죽여 줄 테니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뭐?"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 그 정도 장단에 어울려 줄 테니. 마지막으로 오붓하게 식사 한 번 하고 다시 연락해라. 톡을 써도 좋아. 쓸 줄은 알겠지?

그걸로 통화가 끊겼다.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던 버서커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 크하하하하! 미친놈이구나!"

콰직!

그대로 부서진 스마트폰.

"······."

버서커는 가루가 된 스마트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영탄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스마트폰을 하나 더 꺼내 내밀었다. 버서커는 그걸 말없이 바라보다 받아들었다.

또 부서지면 연락할 수단이 없기에 부서지지 않도록 주머니에 넣었다.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다시 웃었다.

"크크크, 재밌겠어."

'미친놈들.'

어차피 안 죽는다고 버서커 아가리로 들이민 놈이나.

자기 죽인다는데 좋다고 웃고 있는 놈이나.

둘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미친놈들 사이에 낀 이영탄만 죽을 맛이었다.

* * *

인형술사를 마무리한 뒤 나는 윤희가 입원한 신성 병원으로 향했다. 최윤희, 1인실. 큰 부상이 아님에도 우선적으로 주어지는 혜택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신성 길드에 들어가려는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니 환자복을 입은 채 멀쩡한 혈색으로 빨빨거리며 돌아가는 녀석이 보였다.

저래서 부모님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건가. 심한 부상은 아니라서 그 말을 들어주긴 했다. 내장이 파열되거나 배가 갈라져서 내용물이 줄줄이 나온 건 아니니까.

간호사한테 들으니 밥을 세 그릇이나 먹었다고 하는데 밥통 크기 하나는 대단했다. 집에서도 밥이나 반찬 해 놓은 게 빨리 떨어지던데. 네가 다 먹었냐고 하면 그 난리를 치더니, 범인이 큰소리치는 건 안 바뀌나 보다. 난 과일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괜찮냐?"

"어? 왜 왔어? 어차피 나 내일 퇴원이야."

"동생이 입원했는데 숨은 쉬나 보러 와야지."

"그게 다친 동생한테 할 말이냐?는 농담이고, 와줘서 땡큐. 오빠 아니면 죽을 뻔했어."

어색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했어. 엄청 잘 버텼다."

"그래도, 내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느껴져서. 더 열심히 했어야 했나? 아니, 방금 말 취소!"

흠칫한 윤희가 주워 담으려 했지만 다 들었다.

"퇴원하면 더 굴려 줄게."

"아냐, 잘못 말한 거야. 지금도 충분해."

"아닌 것 같은데."

"충분하다니까? 내가 말한 건 기프트 얘기야."

"기프트?"

"그냥 투정 부린 거야. 기프트가 있었으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아무나 갖는 것도 아닌데."

헌터 중 기프트를 보유한 비율은 무척 적다. 하지만 상위권 실력을 가진 헌터 대부분이 기프트를 보유했다.

기프트는 헌터에게 특별한 강함을 부여한다.

각성자 등장 초기 몇몇 국가에서는 기프트 개방을 위해 생체실험까지 일삼았지만 결과는 실패. 혈중섭식으로 기프트 종류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난 윤희를 지켜보다 미끼를 던졌다.

"기프트를 가질 방법이 있다면 어떡할래?"

"그런 방법이 있다고? 진짜?"

난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그럼 알려 줘! 나도 기프트 갖고 싶어. 더 강해지고 싶어."

"좀 위험한 방법이야."

"괜찮아."

강함에 대한 열망 때문일까. 저번 생에 내가 혈종이 되기 전 힘을 갈망하던 모습 같아 살짝 마음에 걸렸다.

아니다. 그 갈망도 계속 구르다 보면 잡념도 사라지는 법이다. 힘을 빼놓으면 다른 욕심도 사라지는 법이니까. 기프트 개방을 빌미로 굴려야겠다.

"일단 치료 잘 받고 컨디션 끌어올려. 그 후에 다시 얘기하자."

"알았어. 오빠가 한 말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기억 안 난다고 하지나 마."

"그래."

윤희가 기프트를 가지면 사냥도 더 잘할 테니까.

근데 심장 근처의 피를 뽑아야 되는데 놀라지 않으려나?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아! 그리고. 지켜봤던 거 진짜야?"

"응?"

"내가 인형 상대하는 거 보고 있었냐고."

비몽사몽인 줄 알았더니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니."

"보고 있던 거 같은데."

"······."

가늘어진 눈이 집요하게 날 쫓았다. 앞으로 몇 번 더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벌써 밝힐 이유가 없지.

"아씨, 증거가 없네."

"꿈꿨냐?"

"아니, 현실이었어! 그리고 저거 좀 가져가."

윤희가 탁자 위에 놓인 커다란 냄비를 가리켰다.

"뭔데?"

"열어 봐."

난 뚜껑을 잡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구수한 냄새와 함께 반겨 준 건 올빼미 머리였다. 내 시선에 따라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아울보어 머리를 베이스로 한 된장전골이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지?

"다현 언니가 몸보신하라며 갖고 왔어. 오빠가 추천했지? 미쳤어? 미쳤지? 미쳤냐?"

"이거 보양식 맞아."

"국물에 밥 말아 먹긴 먹었는데 저 눈알 따라다니는 건 못 참겠어. 다현 언니는 눈알이 제일 맛있다고 하던데 저걸 어떻게 먹어. 오빠가 먹어."

"그래."

난 윤희의 강권에 아울보어 머리 된장전골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예상치 않은 큰 수확이었다.

* * *

내가 국가수호국으로 복귀할 무렵, 속보로 김영환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 전체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벨 8의 죽음이다. 비록 노쇠화 되었다고 하나 김영환의 그림자가 짙었던 만큼 파급력도 컸다.

그에 따라 정주호의 책임론이 일었으나 내가 인형술사를 잡은 것이 알려지면서 조용해졌다. 하지만 사기가 떨어진 공무원 조직 내부에서는 주도권이 정부에서 대형 길드로 완전히 넘어갔다며 한탄했다.

버서커를 잡기 위해서는 대형 길드 협조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게 그들의 의견이다. 정부 측에서는 레벨 8 초인 육성을 위해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했지만 눈먼 돈은 다른 놈들의 주머니에 들어갈 뿐이다.

잘 봐 뒀다가 불체포특권을 갖게 되면 조져 놔야겠다.

아무튼 상황이 이세희가 말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협상 테이블이 차려질 때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겠지.

"어서 와라."

잠깐 사이 정주호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표정이 어둡지 않은 건 인형술사를 제거해서 체면치레를 해서다. 시체를 확인하지 못한 게 흠이라나.

지금 가서 들고 올까? 며칠 지나서 상태가 안 좋을 테니 늦었다. 다음엔 머리를 미리 떼어 놔야겠다.

어차피 가져와봤자 인형술사 얼굴 아는 사람도 없다.

"인형술사 제거한 거, 사실이지?"

"예."

"아니, 그러니까. 불사신이라 불리는데 어떻게 제거했어?"

"인형술은 포스의 파장을 이용해서 인형을 조종합니다. 그 파장의 근원지를 찾았습니다. 그곳에 있더군요. 인형술사 본신 무력은 별 볼일 없었습니다."

"시체를 들고 오지 그랬냐."

"머리를 부숴 버렸습니다. 필요하면 이세희가 증언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겠냐. 아쉽지만 납득해야겠지."

머리를 긁적이던 정주호가 말했다.

"그래도 네 덕에 살았다. 김영환 장관 죽고 어찌나 난리던지. 그 영감도 그래. 나이 먹고 기량이 떨어지면 적당히 물러나 있을 것이지 괜히 욕심 부려서는, 쯧쯧!"

"잘 수습돼서 다행입니다."

공식적으로 정주호는 내 뒷배니까. 오래오래 의욕을 갖고 날 도와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네 덕에 산다. 진짜 너 아니었으면 어땠을지."

"분위기가 심각한가 보네요."

"정부 쪽은 죽을라해. 그 양반이 인성은 파탄 났어도 든든했던 건 사실이라. 그렇게 허망하게 갈 거면 자기 후임이라도 확실하게 키워 놓을 것이지. 쯧쯧! 내가 볼 때 다른 곳에서 나오기도 힘들 거야."

"······."

"반대로 네가 지금 레벨 8이 되면 가치가 더 높아질 거다. 너한테는 나쁘지 않은 전개야. 누구의 죽음이 누구한테 이익이 된다는 게 웃긴 일이긴 하지만."

거슬리던 인간이 사라진 건 속 시원하지만 앞으로 대형길드와 주도권 다툼에서 열세를 면치 못할 거라며 쓰게 웃었다.

"국장님."

"어, 왜?"

"제가 레벨 8이 되면 협상에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거절할 확률이 높다. 정주호는 평생 공무원으로 살아왔고 나라에 충성했으니 내 행동이 국가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말을 듣기 무섭게 정주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준호야. 나 솔직히 네가 언제 그 말 하나 기다렸다."

"예?"

"솔직히 나만큼 정부통이 어디 있냐. 평생 공무원 헌터였고 위쪽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 양반들 어디서 커 왔고 어디서 뭘 해 먹었는지 다 안단 말이지."

"그 정보 나중에 공유 부탁드립니다."

벌써 쓸어 버릴 대상을 찾았다.

"···일단 해먹은 거 안다는 건 취소. 머리가 빠지니 기억력도 빠지나?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나한테 도움 요청한 이상 내가 전폭적으로 도와주마. 넌 국가수호국 출신 아니냐. 내가 나서 줘야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그래도 몇 번 자극하면 필요한 정보가 우수수 쏟아질 것 같다.

"국가 이익을 침해한다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침해는 무슨. 어차피 네가 얻어내지 않으면 다른 놈들이 다 해쳐 먹어. 이번에 레벨 8 육성하겠다고 지원금 편성한 거 봤냐? 다 눈먼 돈이야. 엄한 놈들 똥꾸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너 꼬시는데 쓰는 게 훨씬 낫지. 내가 정부 제대로 삥 뜯어 줄게. 나만 믿어라."

"믿습니다."

이 양반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나 보다.

"그래서 말인데."

"응?"

"버서커를 잡으려고 합니다."

"아직도 포기 안했냐?"

싱글벙글 웃던 정주호가 놀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래도 되나?

* * *

버서커와 나의 인연은 저번 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의 구도라는 제정신이 아닌 것을 들고 왔던 녀석은 남들과 다른 기준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던 미치광이였다.

그가 레벨 8이라는 것, 기프트 소유자라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프트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레벨 8인 게 드러났고.

다만 내 기억속에서도 특이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남을 만큼 날 보고 했던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별의 순간이라고 했었지."

버서커는 자신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재능들을 쫓아다녔다.

말소자의 흔적을 쫓았던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 녀석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걸 답보라 말했고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별의 순간을 엿보고자 했다.

녀석이 죽는 순간까지 그걸 봤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힘을 향한 집착만큼은 진짜였다. 내 손에 죽을 당시 나이가 60이었음에도 실력이 퇴보하기는커녕 강해지기 위한 온갖 비기를 숨겨 두었다.

버서커-언제 오지?

버서커-난 벌써 도착했다.

버서커-기다리기 지루하군. 이 또한 즐거움을 위한 조미료겠지. 크크!

버서커-[사진첨부]

버서커-시간이 남으면 일찍 와도 된다.

이 자식은 내가 톡 쓸 줄 모르냐고 물어본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3시간 전부터 나한테 톡을 보내고 있었다.

지가 앉은 셀카는 왜 보내는 건데? 사진 용량은 또 더럽게 컸다.

난 정확히 제 시간에 출발했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첨부한 사진처럼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있는 버서커의 모습이 보였다.

"정시로군. 기다리다 지칠 뻔했다."

"누가 일찍 오래?"

"흥분돼서 참을 수 없더군."

"미친놈."

"크크크!"

욕을 듣고도 좋다고 웃는다. 어쩌면 정주호의 말이 맞을지도. 이놈은 진짜 미친놈이다. 같이 어울리면 나도 물들 거 같다.

"배에 구멍은 좀 채워 넣었냐?"

"충분히. 나도 궁금한 게 있다."

"뭔데?"

"말소자가 넌가?"

28화

말소자, 그놈의 말소자.

오종엽 때문에 한 번 등장시킨 이름이 참 오래도 간다.

나중에 녀석한테 비싸게 청구해야겠다.

아무튼 내가 어떤 대답을 하던 버서커 저 녀석은 이미 확신을 갖고 있었다.

"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 좋을 대로 믿으란 말인가."

"언젠 안 그랬냐?"

"······."

입을 닫고 날 빤히 보던 버서커가 질문을 던졌다.

"말소자와 헤드 브레이커 중 어느 게 더 강하지?"

말인지 똥인지.

녀석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머리통이 부서진 뒤 생각해 보든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네가 빅텐을 지워 버렸던 그 순간을."

버서커의 눈이 번뜩였다.

"오로지 적을 말살하기 위한 살의만 있었다. 죽음을 향한 순수함, 거기에서 나는 별의 순간을 엿봤다."

별의 순간은 미친놈에게만 보이는 환각 같은 게 아닐까.

난 안 보이니 안 미친 거군.

"나중에 보면 사진 보내라."

저승에서 스마트폰 쓸 수 있겠지.

버서커는 본래 검의 구도자로 불렸던 인물로 왜 헌터 시절에도 독특한 행보를 보이던 녀석이다.

왜 빌런이 됐는지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했고.

자신의 검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고 과도한 수련으로 미쳐 버렸는데 그것이 180도가 아닌 90도 정도만 돌았다는 설도 있다. 일각에서는 기프트를 개방하기 위한 수행이 다른 방향으로 비틀렸다는 말이 있다.

마지막 말은 거짓이다. 저번 생에 내가 직접 버서커를 죽이면서 어떤 기프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버서커는 자신이 정의한 '별의 순간'에 대해 말했다.

"별의 순간은 내가 전능해지는 순간이다. 내가 본 모든 것들이 나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 그 조각들이 모여 내가 추구하는 궁극이 완성된다. 내 의지가 닿아 완전무결해지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그냥 미친놈의 개소리였구나.

잠깐이지만 이걸 해석하려고 귀를 기울였다니. 반성했다. 미친놈은 상종하는 게 아닌데.

"나도 하나 묻자. 리그는 왜 가입했냐?"

"말소자가 리그 출신이라고 하더군."

"누가?"

"인형술사."

"그걸 믿냐?"

"아니면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리그가 지 맘대로 드나드는 자동문인 줄 아나.

"더 얘기하면 나만 피곤해지겠네. 이제 끝내자."

내가 검을 들자 광기에 물들었던 눈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미친놈이 본래대로 돌아와 봤자 결국 미친놈이지만.

"와라, 말소자."

* * *

버서커는 내게 말소자와 헤드 브레이커 중 무엇이 더 강하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특별한 생각이 없다.

맨손의 헤드 브레이커도, 검을 든 말소자도 모두 나 최준호다. 그날 기분에 따라 맨손으로 적의 머리를 부숴 버리거나 칼로 베어 버리는 기호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강함에 대한 차이는 없다.

"미쳐 버리면 대가리가 단단해지냐?"

강철처럼 단련된 육체, 성격처럼 질기디질긴 포스가 기뢰의 침입을 허용했다고 해도 위력을 약화시키고 충격을 완화하여 큰 피해를 주기 어려웠다.

지속적으로 피해를 누적시키다 보면 무력화 시킬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녀석과 사흘 내내 싸워야 할지 모른다.

미친놈과 사흘 내내 있으라니. 끔찍한 일이다.

버서커는 내게 몇 번의 공격을 허용했지만 몸을 들썩일 뿐 큰 타격 없이 버텨 냈다. 오히려 기뢰가 녀석을 총명하게 만들었는지 눈빛이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기뢰에 이런 효능이 있었나?

문득 녀석과 프란츠 그 영감하고 붙으면 어떤 결과일지 궁금하긴 해졌다.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사람 아니냐고 했다가 나한테 바로 기뢰를 날리던 할밴데.

"큭!"

수 싸움에서 외통수에 몰리는 건 버서커였다. 녀석은 나를 밀어내기 위해서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고, 저번 생에 진득하게 어울려 봤던 나는 검격을 여유롭게 피해 내며 기뢰를 적중시키는 전개였다.

나는 다시 한번 버서커에게 접근하여 손을 뻗다가 손가락을 모았다. 사람은커녕 풀 한 포기조차 벨 수 없는 예기지만 실낱같은 예기의 존재는 기프트 슬래쉬를 발동 가능하게 만들었다.

"······!"

기뢰에 대비했던 버서커가 처음으로 혼비백산하여 고개를 뒤로 꺾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포스 칼날이 머리칼을 베어 우수수 떨어지게 만들었다.

다시 고개를 든 버서커의 이마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피가 흘러내렸다.

"크크! 고통은 오히려 살아 있는 걸 실감케 해주지. 그나저나 듀얼 기프트라니. 방금 공격이야 말로 나를 별의 순간으로 이끌어 줄 수 있던 것······!"

"미친놈."

그런데 버서커가 처음으로 정색했다.

"대결을 끝내기 전 하나는 바로 잡자. 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쳤어."

"그럼 너도 제정신이 아니란 의미인가?"

"난 제정신인데."

"나도 제정신이다. 말소자, 너는 미치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단지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

"너도 분명 그 순간을 느끼고 있었을 터."

어떻게 내가 공무원 헌터를 하면서 느꼈던 소감이 저 녀석 입에서 나오는 거지?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서로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존재였다. 우리는 이해받지 못했고 그들이 이해하려들지 않았기에 나를 버서커라 칭했을 뿐이다."

"병신 같지만 맞는 말인 거 같아."

솔직히 말하면 말소자나 헤드 브레이커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이명이다.

빌런 같지 않은가. 왜 빌런을 잡았는데 빌런 같은 이명을 지어 준단 말인가. 좀 더 멋진 것도 있을 법한데.

"난 돌아갈 곳이 없고 너는 있지. 우리의 차이는 그것뿐이다."

"그래서 듣고 싶은 말이 나 정상이란 말이냐?"

"그저 내 생각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맞는 말만 하는 걸 보면 개과천선 시켜서 데리고 다니고 싶긴 한데.

기프트를 뺏어야 해서 포기했다.

"유언 다 했지? 이제 끝내자."

* * *

몇 차례 충돌이 벌어지는 순간, 버서커는 자신이 말소자에게 닿지 않는 걸 느꼈다.

그야 말로 절망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강함이었다. 녀석 앞에서 춤추는 꼭두각시 인형이 된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공격을 허용했다.

기뢰라 칭해지는 기프트는 여태까지 접한 공격 중 가장 악랄했고, 슬래쉬는 가장 예리했다.

무엇보다 놀랍게 한 건 전투 중 보여 주는 경험이다.

평생 전투를 치러왔던 것처럼 완벽한 완급조절을 보여줬다.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벽이로군. 높은 곳을 보기 위해 이걸 극복해야 한다는 건가.'

하지만 눈앞의 벽은 극복이 불가능했다.

대체 녀석은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저 녀석이 보는 곳의 경치는 어떤 것일까. 그마저도 가늠하지 못하는 자신의 수준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무의 구도를 추구한다고 했음에도 이 얼마나 부족한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녀석의 여유를 조금도 빼앗지 못했다.

"큿!"

이제껏 해 온 공격과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공격이 이어졌다.

침음을 집어삼키고 무호흡으로 서른 번의 검격을 사방에 뿌렸지만 녀석은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모조리 흘려 냈다. 그리고 검을 잡더니 그대로 뜯어냈다.

반토막 난 검을 휘둘러 밀어내려 했지만 바로 코앞까지 도달한 손이 목을 지나 쇄골을 움켜쥐었다.

콰드득!

"크아아아!"

쇄골이 모래성처럼 부서지는 고통 속에 기합을 지르며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지만 녀석은 유령처럼 옆으로 비켜나 차례대로 오른쪽 어깨를, 팔뚝을, 팔목을 부숴 버렸다.

고작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에 팔 하나가 작살이 났다.

팔 내부에 활개 치는 기뢰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더 강한 독성을 품은 힘은 제멋대로 날뛰면서 산산조각 냈다.

"크흐흐!"

왼손으로 검을 바꿔 쥔 버서커는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 실소를 흘렸다. 세상이 노랗게 물들 정도였지만 말소자가 보여 준 힘은 새로운 세계였다.

저 강함을 조금이라도 더 겪고 싶다. 세상 모든 걸 말살시킬 수 있는 압도적인 힘. 말 그대로 말소자라는 이명이 잘 어울리는 최강 최흉의 헌터였다.

저자가 보는 세계는 어떤 걸까. 자신도 다가갈 수 있을까. 보고 싶다. 녀석의 눈을 뽑을 수 있다면 뽑아서라도 그 세계를 담고 싶었다.

버서커는 전의를 꺾지 않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말소자가 도달했을 저 간격에 닿고자 하는 간절함이 강해졌다.

하지만 왼손 손목마저 비틀리면서 검을 놓치게 되었고, 팔꿈치가 부러져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툭툭 차 버린 발차기에 기뢰가 실려 적중된 다리가 멈추면서 기동력이 상실되었다.

녀석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말소자의 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끄아아아!"

심장이 파열되는 고통과 함께 세상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찰나 간 유지되는 의지 속. 버서커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기프트를 발현했다.

완전회복.

이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기프트이자 비장의 한 수.

부서졌던 심장이 복원되고 온몸의 상처가 완벽하게 나았다.

몸 상태는 최상.

말소자도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녀석을 죽일 틈이다. 비겁하지만 이 또한 운명.

말소자를 죽이고 별의 순간을 취하리라.

하지만 완벽하게 회복한 자신 앞에 있는 것은 무표정한 말소자의 얼굴이었다.

녀석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완전회복이군."

"어떻게······."

이 순간만큼은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경악했다. 그마저도 재차 가슴을 파고든 손으로 인해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이 말은 하고 싶었다. 버서커."

"······."

"네 기프트 쩔더라."

콰드득!

* * *

"질긴 놈."

허물어지는 버서커의 시체를 밀어 버리고 나는 녀석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취한 피를 섭취했다.

혈중섭식(血中攝食)은 버서커의 피에 담긴 완전회복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기프트는 피에 새겨진 지문과도 같은 것. 혈중섭식은 그걸 복사해와 내 피에 옮기는 작업을 한다.

나는 새로운 기프트가 새겨지는 걸 느끼며 기존에 있던 통증완화 기프트를 삭제했다. 통증완화도 전투 중 고통을 경감해 줘 지속적인 전투력 발휘에 도움이 되지만 완전회복에 비교할 건 아니다.

찌잉!

강렬한 두통이 엄습했다. 익숙한 고통이다. 이 고통이 내가 힘을 얻어나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해 줬다.

혈종이 최강이 되었던 건 무수히 많은 기프트 중 최고만 추려내서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미쳐 버렸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중 가장 유력한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많은 기프트를 취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핏속의 기프트가 너무나 많아 서로 충돌하고 폭주하면서 내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했던 것.

미쳐버린 혈종도 어느 순간 필요 없는 기프트를 버려 필요한 것만 남겼고. 난 그것이 생존본능이 발휘된 행동이라 보았다.

상념에 빠진 사이 완전회복 복사가 끝났다. 이제 나는 심장이 부서져도, 설사 목이 잘리더라도 한줌의 의지만 남아 있으면 부활이 가능해진다.

완전회복은 여벌의 목숨이다. 버서커라는 번거로운 녀석을 죽이고서 얻을 이유가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야. 너 왜 살아 있냐?"

"······."

"눈 떠라. 안 그럼 다시 죽인다."

내 경고에 죽은 척 쓰러져 있던 버서커가 눈을 떴다.

29화

녀석이 왜 살아 있는지 미스테리한 일이다. 완전회복은 분명 사용했고 그 후 한 번 더 심장을 부쉈다.

설마 완전회복이 두 번 가능한 거였나? 근데 내가 획득한 완전회복은 한 번이 전부였다.

"어떻게 살아났냐?"

"나도 자세히 모르겠다."

완전회복은 1회용 기프트로, 사용하면 사라진다.

"네 손이 내 심장을 꿰뚫어 죽어 가고 있을 때 내 안에 소멸하던 완전회복에 변화가 일어났다. 기프트 소멸이 멈추고 재구성이 이루어지더니 복원됐다. 그리고 다시 발동되고 사라졌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

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동안 혈중섭식이 기프트를 빼앗는 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빼앗는 건 상대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버서커의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혈중섭식은 강탈이 아닌 복사였다면? 복사를 위해 정보를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상대의 기프트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버서커의 경우 1회용 기프트라 소멸될 때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 강제로 복원을 해서 복사를 한 것 같다.

그래서 두통이 더 심했던 건가? 난 미친 게 아니라 제정신이라서 더 아픈 줄 알았다.

여태까지 날 상대한 적은 죽어 버렸지만 버서커는 완전회복이어서 살아났다.

그랬구나. 다 이해했다. 참 거머리 같은 생명력이다.

그래도 혈중섭식에 대한 의문이 하나 벗겨졌다. 이번에는 고통 없이 보내 줘야겠다.

"그럼 또 죽자."

"잠깐 난 살고 싶다."

"성격이 달라졌어? 원래 목숨 구걸하는 캐릭터 아니잖아."

"두 번 죽어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죽음 자체가 무섭진 않지만 하고 싶은 게 생각나더군. 무엇보다."

버서커가 날 바라봤다.

"네 강함을 겪으면서 길이 보였다. 다시 한번 내 실력을 갈고닦고 싶어졌다."

내가 살려 준다면 말이지.

"저승에서 갈고닦아."

"···어떻게 하면 살려 주겠나."

"글쎄다. 널 살릴 이유가 없어서."

"앞으로 네가 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협력하겠다."

"빌런을 그만둔다고?"

버서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회개하고 돌아간다고 해도 세상이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이 세계는 각성자를 통제하고 대중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각종 제약을 주렁주렁 달아 놨다. 그 속에서 나는 별종이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넌 나보다 강하고 똑똑해서 입지가 좋지만 비슷할 거다. 난 널 이해할 수 있다."

"······."

이 말은 솔직히 좀 와닿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세상이 이상한 게 아닐까? 내가 정상인데 세상이 이상해서 내가 이해를 못 받는 걸지도.

그 점에서 버서커와 나는 바라보는 지점이 비슷했다. 근데 비밀친구 하나 두려고 저 미친놈을 살려 둬야 하나?

"톡하는 것도 재밌더군. 사실 스마트폰도 처음 써 봤다. 살려 준다면 외곽에서 너의 손과 발이 되겠다. 살고 싶다."

무릎을 꿇은 녀석이 머리까지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보니 혈종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어떻게든 한 번의 기회만 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누군가 주변에서 도와줬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딱히 안 바뀌었을지도.

아무튼 삶에 대한 녀석의 의지를 보고 나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어차피 완전회복도 얻었고 내 손발이 되어 주겠다고 하니 말 안 듣고 날뛰면 그때 죽이면 되겠지.

"앞으로 빌런만 족쳐라."

"살려 주는 건가?"

"어, 그리고 리그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면 더 말해 봐."

"강한 빌런들이 모인 단체로 알고 있다."

난 녀석의 말을 기다렸지만 버서커가 오히려 날 의아한 눈으로 봤다.

"끝이다."

"···이게 끝이라고?"

"뭐가 더 있나?"

미친놈한테 물어본 내가 미친놈이다.

"됐다. 그리고 리그 가입한답시고 튀지 마라."

"널 보니 리그에 흥미가 사라졌다. 걱정 마라."

"좋아. 그럼 첫 임무를 주지. 널 맞이하러 온 리그 관련자들, 다 죽여 버려."

"그러지."

"끝나면 톡해라."

난 버서커를 놓아줬다.

* * *

내가 서울로 돌아와 국가수호국으로 복귀했을 무렵, 버서커에게서 연락이 왔다.

버서커-리그 잔존 세력을 궤멸시켰다. 필요하면 목을 보내겠다.

나-사진만 보내.

버서커-알았다.

버서커-[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

미친놈, 현장을 하나하나 다 찍어서 보냈다. 잠시나마 이놈이 정상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니, 이놈은 그냥 미친놈이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정다현과 동료들에게 먼저 인사를 한 뒤 국장실 문을 두드렸다.

업무를 보고 있던 정주호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버서커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녀석이 레벨 8 초인이니 쉽지 않았겠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근데 못 죽인 게 아니라 안 죽여?"

"버서커가 협력 의사를 밝히며 살려 달라더군요."

"버서커가? 그 미친놈이 살려 달라고 했다고?"

"예. 근데 버서커 재활용해도 됩니까?"

정주호 고개가 3배속으로 끄덕여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되지! 되고말고!"

"근데 녀석이 빌런이라······."

"아냐! 버서커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손쓰는 기준은 확실한 놈이었어. 녀석에게 죽은 헌터도 평소 행실이 더러운 놈들이었고. 레벨 8 초인을 동원할 수 있는데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아. 불만이면 버서커한테 가서 따지라지."

내가 처음 들었던 버서커 평가랑 조금 다른 거 같은데.

"그리고 외부에 밝히지 않으면 돼. 그 정도 자율권은 있어. 설마 버서커가 빌런 그만두고 도시로 돌아와서 정상인으로 살고 싶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그럼 됐어. 블링크처럼 특수요원으로 쓰자."

"버서커는 못 죽였지만 대신 작은 성과가 있습니다."

나는 정주호에게 버서커가 한국에 상륙한 리그 세력을 초토화 시킨 사진을 보여 줬다.

"···얘, 내 말은 안 듣겠지?"

"만나 보시겠습니까?"

"아니, 얘 내 말 안 들을 거 같아. 묘하게 너랑 비슷한 냄새가 나거든."

"······."

"너보다 저놈이 더 미쳤다는 거니 기분 나빠하진 말고. 하하!"

왜 자꾸 비교 기준이 버서커인지 모르겠다.

근데 그 말은 나도 미쳤다는 건가?

* * *

나는 레벨 8 측정에 앞서 휴가를 내고 건강하게 퇴원한 윤희와 함께 청주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녀석은 병원에서 특식을 해치워 더 건강해졌는지 옆에서 사사건건 간섭을 해 왔다.

"차가 너무 구리다. 좀 바꾸면 안 돼?"

"나 돈 없어. 불만이면 네가 사던가."

"면허도 없는데 무슨 차야."

"나 운전할 거 사 달란 거였어."

"······."

윤희의 입을 막는데 성공한 나는 운전에 집중했다. 입을 삐죽 내밀며 대놓고 불만 있음을 드러냈지만 어머니표 음식을 먹으면 금방 풀어질 거다.

청주 고향집에 도착하자 문을 박차듯이 나온 윤희가 집앞에 선 부모님에게 돌격했다.

"엄마! 아빠!"

"윤희야! 잘 지냈어?"

"잘 지내는 걸 보니 다행이다."

"응응, 잘 지냈어."

입원한 얘기를 안 한 게 다행인 건가. 그걸 했으면 이래저래 잔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제법 머리를 잘 굴리는군.

"준호도 왔니? 운전하느라 고생했어."

"고생했다."

"예."

나도 부모님과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향했다. 과수원에 걸린 유해마물 퇴치기구를 보니 아직 효과가 남아 있는 듯했다. 언제 효과가 떨어질지 모르니 올라가기 전 멧돼지 하나를 다시 잡아야겠다.

온가족이 모인 시간은 즐거웠다. 부모님은 내가 공무원 헌터가 된데 이어 윤희가 신성 길드에 가입한 걸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윤희는 이 기회에 부모님에게 서울로 올라올 걸 얘기했지만 거절당했다.

"아직 일할 수 있고 자식 덕 보고 살기에는 우리도 젊다. 너희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 생각해 보마."

"얼마 안 걸릴 텐데."

"그럼 괜찮은 남자 데려와서 결혼이라도 하던가!"

"길드에 자리 잡느라 정신없거든? 그리고 최준호 저 인간이 눈 부릅뜨고 있는데 남자 만나는 게 쉽겠어?"

"오빠한테 너가 뭐니? 그리고 준호가 왜? 준호 너 설마 윤희 남자 만나는 거 방해하니?"

"방해한 적 없는데요."

"그게 방해가 아니라고?"

윤희가 기가 찬 표정이 되었다. 답답한 건 오히려 나였다.

나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냥 윤희랑 사귀려면 이 정도면 좋지 않을까 생각만 했을 뿐이다.

"나 말고 오빠한테 먼저 물어봐! 어쩌면 곧 여자 만날 수도 있을 걸?"

윤희의 말에 부모님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준호가 여자를?"

"윤희야,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여자를 불쌍한 처지로······."

"아니라니까! 오빠랑 접점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한데."

나로 화살을 돌리기 위해 윤희가 애썼다.

그러다 대화 주제는 우리 서울 생활로 화제가 옮겨 갔다. 윤희는 신성 길드 적응 과정을 설명하고 이세희랑 나랑 만난 걸 열심히 설명했지만 부모님은 전혀 믿지 않으셨다. 오히려 드라마를 적당히 보라고 충고를 하셨다. 윤희 쟤는 드라마를 좀 끊어야 하긴 한다.

결국 납득시키길 포기한 윤희는 신성 길드에서 주어지는 특혜에 대해 설명했고 부모님이 큰 관심을 보였다. 신성 병원 이용 같은 건 부모님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가질 분야였다.

"준호는 잘 적응하고 있니?"

"예. 주변에서 많이 도와줘서 어렵지 않게 적응했습니다."

"아, 그리고 오빠 사수가 정다현이라고 천재로 유명한 각성잔데······."

자꾸 억지로 엮고 있다. 이성과 만남은 자연스러운 게 최고인데, 얘는 인위적으로 엮어 댄다.

"······."

나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동생과 티격태격,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싫지 않았다. 이 시간이 내가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 앞으로 이 시간을 지켜내는 게 내 목표였다.

그러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많은 권리를 손에 넣어야겠지.

"아, 그리고 일주일 후에 레벨 8 측정을 받을 생각입니다."

"뭐······?"

"레벨 8이요. 말 안 했었나?"

"······."

"그걸 왜 이제 말해!"

내가 윤희한테도 말 안 했었나?

잠시 후, 부모님에게서도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 * *

혜성처럼 등장한 최준호의 존재로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레벨 8 측정 도전자가 등장한 것이다.

레벨 8은 절대 수면 아래에서 등장할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불릴 재능을 모아 체계적인 교육, 차곡차곡 쌓은 경험을 통해 무수히 많은 후보자들이 만들어지고 그중에서 한 명이 레벨 8로 올라선다.

그런데 최준호의 존재는 어느 날 갑자기 땅 위에서 솟아난 이례적인 존재였다.

어린 시절 두각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공무원 헌터가 된 것도 6개월에 불과했다. 특히 그가 9급이라는 말에 청와대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소문이다.

레벨 8의 등장은 정부 입장에서 구세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려스러운 존재기도 했다. 최준호에 대한 검증이 부족했던 것이다. 특히 6개월간 보여준 성과는 대단했지만 성향은 대단히 위험했다.

각성자들을 총괄하는 각성자안보실에서 파견된 비서관이 이 부분을 붙잡고 늘어졌다.

청와대 비서관은 1급 공무원.

자신보다 높은 직급이었지만 비서관을 대하는 정주호의 태도는 뻣뻣했다.

"그래서 지금 제 잘못이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왜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건지 궁금한 겁니다."

"난들 녀석이 레벨 8의 실력자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신입으로 들어와서 실력이 대단하겠거니 생각해서 키워준 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위쪽과 공유는 했어야······."

"공유했으면 옳다구나 하고 믿었을 거고요? 25살이 레벨 8이라고?"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취급은 안 당했을 거 아닙니까."

결국 체면 문제란 이야기였다. 정주호는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위에서 뭐랍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으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어떻게요?"

"공무원 헌터니 당연히 공직에 욕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파고들어서······."

"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비서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레벨 8이 맞는지 확인 후에 구체적인 협상안을 마련할 것 같습니다. 실장님이 직접 준비 중이시고요. 그것과 별개로 20대에 레벨 8이라는 게 쉽게 믿기지 않습니다. 당장 저희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세상도 그렇고요."

"레벨 8 맞을 겁니다."

그것도 아주 완숙한 수준의.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지 않았다.

경직된 정부 조직 놈들은 똥인지 된장인지 기어코 찍어 먹어 봐야 정신을 차릴 테니까.

그나마 이번에 온 각성자안보실장은 수완가지만 그 혼자서 관료 조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최준호가 레벨 8인 게 밝혀지면 비싼 프리미엄이 붙겠지. 잡으려면 그 대가를 고스란히 지불해야 하고. 각성자안보실장도 고생 꽤나 할 것이다.

그래도 같은 식구라서 조언 한 마디 해 줬다.

"최준호 보고서를 보고 대책을 세워야 할 겁니다."

"읽어봤습니다."

그리 말한 비서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그 보고서가 진짜였습니까?"

"표현이 많이 순화된 상태입니다."

"···고생길이 보이는군요."

"마음의 준비 단단히들 하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 붙잡을 수 있을 테니."

"위에 보고는 올리겠습니다. 협상에는 실장님이 직접 나서실 거라 제가 확답드릴 부분은 없습니다. 다행히 실장님이 수완가시니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무운을 빕니다."

결국 비서관은 최준호에 대한 몇 가지 정보만 얻었을 뿐 별다른 소득없이 돌아갔다. 정주호는 정부의 다소 안일한 태도만 재확인했지만 각성자안보실장이 나서면 조금 나아지겠거니 생각했다.

대한민국 각성자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최준호와 직접 얘기할 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피똥 좀 싸겠어."

솔직히 말하면 녀석의 광기가 정부로 향할 때 그걸 접한 인간들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긴 했다.

최준호는 그들에게도 노빠꾸일 테니까.

녀석 때문에 허망하게 스러진 머리털의 복수였다.

"나만 최준호맛을 볼 수 없지. 다 같이 맛보자고."

이 맛, 혼자 보기에는 너무 각별했다.

30화

레벨 측정 당일이 되었다.

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식사를 차려 먹었다. 내 실력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지만 맞은편에 앉은 윤희는 반쯤 혼이 나가 있었다.

"이 웬수가 레벨 8이라니, 맙소사······."

고향 집에서 내 말을 들은 이후 줄곧 저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의외냐?"

"댁이 평온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다른 것도 아니고 레벨 8이라고!"

아침부터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진짜 오빠가 원하기만 하면 돈을 갈퀴로 쓸어 모을 수 있어.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지. 그냥 원하는 거 말만 해도 다 가질 걸? 각성자들의 존경은 덤이고, 관심도······."

그런 것보다 난 불체포특권에 더 관심이 가 있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지.

"내가 레벨 8되면 넌 어떻게 할 거냐."

"난 왜?"

"나한테 관심이 쏟아지면 너도 관심 받을 텐데."

윤희가 관심 받을 이유는 나 외에도 몇 개 있었다.

신성 길드 소속이라는 점, 벌써부터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점 등등.

본인은 초초초미녀라고 하지만 외모도 예뻐서 나중에는 나보다 더 관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나야 즐기면 되지. 어차피 신성 길드 출신인 것만으로도 관심이 상당하거든? 이 기회에 오빠 덕 좀 보지, 뭐. 막 남자 아이돌이 나한테 잘 보이려는 거 아냐?"

꿈도 참 야무졌다. 그 정도일 리가 없는데.

"꿈 깨."

"으흥흥."

내 말이 안 들리는 것 같다.

"레벨 측정 잘 받고. 떨어진다고 해도 항상 응원하니까 위축되지 마. 파이팅!"

"그래."

나는 윤희의 응원을 받으며 서울 종로에 위치해 있는 한국 각성자 중앙 센터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전국 길드 연합 회의가 열리기도 하고, 외국과 각성자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각종 행사가 주최되는 곳이다.

정문에서 정다현과 만났다.

"준호 씨."

"다현 씨."

"······."

정다현이 날 빤히 바라본다. 뭔가 불만이 있는 얼굴. 내가 뭘 실수했나 싶다가 저번에 편하게 대해 달라던 게 떠올랐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씩 노력해 보겠습니다."

"네."

나와 정다현은 안으로 들어갔다.

"레벨 8 측정은 포스의 운용 방식과 동원량을 체크해요. 최소 기준이 있는 거죠."

포스 운용이나 포스 동원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레벨 8 측정이라고 해서 이전 측정과 별다를 게 없어보였다.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그리고 레벨 7 각성자를 상대하게 될 텐데, 제압 과정이 중요해요."

"어떤 부분이 중요합니까?"

"상처를 입히지 않을수록 좋아요."

"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을 의심했다. 내 머릿속에 제압은 곧 죽음이다. 백 번 양보해도 중상이고.

평소대로 팔다리를 부러뜨려 제압하고 회복제를 뿌려야 되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내 놀란 반응에 정다현도 놀랐다.

"죽··· 상처를 입게 되면?"

죽이면 어떡하냐는 말을 간신히 순화했다.

"그건 2차 시험이라서요. 1차 통과한 분 중에 2차에서 탈락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

대체 왜 이런 시험이 있냐고 물어보니 압도적인 강함과 완급조절도 시험의 한 종목이란다.

차라리 레벨 7 각성자 열 명을 죽이는 게 내겐 더 쉽다.

심각한 내 표정에 정다현도 당황했다.

"준호 씨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해 봐야죠."

이 측정, 내 인생에 가장 어려운 난관일지도.

* * *

레벨 8 측정은 정부 측 인사와 당사자의 지인, 초대받은 참관인만 초대되어 진행한다.

보통 초대받는 참관인은 소속 길드 인원, 그리고 인증해줄 외국 인사가 참여한다. 최준호는 길드 소속이 아니었음에도 신성 길드를 지목했다.

외국 인사로는 오랜 우방이자 오랫동안 최준호를 주시해 온 미국이 참관인단을 보내왔다.

신성 길드 측에서는 얼굴 마담이라 할 수 있는 이세희와.

"네가 최준호를 주목해서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레벨 8 측정장에서 보게 되다니, 놀랍구나."

신성 길드 소속이자 레벨 8 초인인 흑룡 백군서가 참여했다.

신성가의 가신 출신인 백군서는 뼛속까지 신성맨이다. 그가 있기에 지금의 신성 길드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평이 주를 이룰 만큼 신성 길드에 해 온 공헌이 컸다.

사적으로 신성 그룹 회장과 의형제 사이이며, 이세희에게 삼촌으로 불린다.

"세희 네가 남자에게 관심 갖는 경우가 없지 않았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오해한다니까요?"

"남자에게 관심을 가질 시기긴 하지."

"어휴, 들을 생각이 없으시네."

미소 짓던 백군서는 측정소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웠다.

"다만 들리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성격도 상당히 강하다고 하고.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는 의미겠지."

"네, 하지만 실력은 진짜에요. 동생도 엄청난 재능이고요."

"최윤희라 했던가. 나도 들었지. 재능 하나는 확실한 남매로군."

"종종 들려서 봐주세요. 탄력만 받으면 무섭게 성장할 거예요."

"그러마."

백군서는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세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다 최준호를 바래다주고 올라오는 정다현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다현아 여기!"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이세희에게 눈인사를 보낸 뒤 백군서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오랜만이구나, 다현아. 그동안 열심히 단련했구나. 많이 성장했어. 그래도 연락 좀 자주하지. 얼굴을 잊어버릴 뻔했다."

"죄송해요."

"아니다. 자기 뜻을 세우려고 하는 건데 내가 방해할 수 없는 일이지. 다만 신성은 네 집이기도 하니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찾아와라."

"···감사합니다."

"그렇게 잔소리하지 말고 삼촌이 먼저 좀 찾아가시지 그랬어요."

"그럼 너무 주책맞아 보이지 않을까?"

백군서의 말에 이세희와 정다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화기애애하던 대화 분위기가 깨진 것은 다른 손님이 등장하면서다.

"저기."

이세희는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외국인 무리를 가리켰다. 오늘 참관하기로 한 미국 측 참관인단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선두에 선 금발 여인에게 고정되었다.

"안나 크리스틴."

러블리한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로 남자 각성자를 전문적으로 홀려 버리는 헤드헌팅 전문가다.

미모뿐만 아니라 빈틈없는 수완까지 가졌다.

이세희와 마주한 안나 크리스틴이 미소 지으며 영어로 인사했다.

"하이, 프린세스 리, 잘 지냈어요?"

"안나도요. 직접 올 줄 몰랐어요."

"당연히 와야죠. 역사적인 순간인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글쎄요? 어떤 생각을 말하는 걸까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안나 크리스틴의 눈을 이세희가 빤히 들여다보았다. 안나 크리스틴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불똥이 튀었다.

치열하게 이어지던 신경전은 측정이 시작된다는 말과 함께 끝났다.

"저희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보려고요. 그럼."

살짝 고개를 숙인 안나 크리스틴이 일행과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이세희가 중얼거렸다.

"은근 기분 나쁘네."

"나도."

"허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안나 크리스틴의 마수는 보통이 아닌데."

백군서가 걱정을 드러냈다.

특히 젊은 남자에게 안나 크리스틴의 미모는 치명적이다. 최준호의 나이가 20대 중반. 한창 피가 끓을 나이다. 자칫하다 새로 등장한 레벨 8 초인이 미국에 넘어갈 수 있었다.

안나 크리스틴의 이명은 서큐버스. 괜히 그리 불리는 게 아니다. 방심하는 순간 홀려 버린다.

하지만 이세희가 보인 반응은 백군서의 예상과 달랐다.

"삼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 중 하나가 뭔지 아세요? 최준호가 여자한테 넘어갈 걸 걱정하는 거예요."

"뭐?"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미모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뚫다가 하루아침에 시궁창으로 처박혔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세희가 쓸쓸히 웃었다.

최준호는 모두에게 공평하다. 자신이 겪었던 걸 안나 크리스틴도 겪으리라.

잠시 후, 레벨 8 측정이 시작되었다.

* * *

레벨 8 측정 중 가장 먼저 시작된 건 포스 운용이었다.

[포스 운용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안내 목소리와 함께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탁구공 크기의 푸른색 돌 5개였다.

상극 마력석.

포스 간직한 돌이지만 포스를 접하면 밀어내는 성질을 가졌다.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 포스끼리 반발력을 발휘한다.

포스 탐지용으로 많이 활용되며, 상극의 반발력을 이용해서 원거리 공격을 하는 헌터의 거리유지용 무구로도 사용된다.

[제한 시간 5분 내에 포스로 상극 마력석을 적중시키면 합격입니다.]

포스 운용을 보겠다고 했지만 그 속에 교묘한 함정이 숨어 있었다. 상극 마력석이 밀려나면 그 경로를 예측, 반발력 계산 등이 이루어지는 것까지 지켜보겠다는 의미였다. 그 변수를 제어하는 것까지 포함되겠지.

포스를 내 몸처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상극 마력석이 움직이는 공간을 통제하에 놓아야 하기에 꽤 여러 가지가 요구된다.

근데 이게 어려운 거라고?

난 쉬운데.

상극 마력석이라는 것도, 포스를 밀어낸다는 것도 결국 필요한 건 반응할 시간.

그마저도 뛰어넘는 압도적인 속도, 최단 경로를 점유하면 세상에서 제일 쉬워진다.

[측정을 시작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기뢰를 발동, 상극 마력석으로 쏘아냈다.

클리어 조건은 간단.

상극 마력석이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면 된다.

퍼벅! 퍽! 퍼벅!

순식간에 다섯 개의 상극 마력석이 기뢰에 적중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타이머는 4:59로 고정되어 있었다.

1초 지난 것이다. 목숨의 위협이 없어서인지 좀 무디게 반응한 거 같다.

[합격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다음 시험은 포스량 측정이 있겠습니다.]

다음 시험은 포스량을 측정하는 것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레벨 8 초인으로서 보유해야 하는 최소한의 포스량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레벨 8 초인으로서 전투가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단, 레벨 8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 다음은 포스 동원량으로, 짧은 순간 얼마나 많은 포스를 운용할 수 있는지 측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출력 테스트라 봐도 무방했다.

최소한의 출력 기준을 충족해야 레벨 8로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항목이다.

내 앞에 놓인 것은 다 쓰고 텅텅 비어 버린 마물의 심장이다.

유해 7단계에 해당하는 크기로, 이걸 다 채우려면 레벨 7의 한계를 돌파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가 출력 기준을 선정하게 되겠지.

[측정을 시작합니다.]

나는 포스를 움직여 마물의 심장으로 일거에 밀어 넣었다.

삐삐삐삐!

순식간에 70%가 넘어서면서 요란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고, 80%, 90%를 돌파하여 100%을 채우는데 성공했다. 나는 포스 운용을 중단했지만 그 사이 더 밀려 들어간 포스가 마물의 심장에 균열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부숴 버렸다.

콰직!

용기가 파괴되어 갈 곳 잃고 날뛰려는 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폭주하려던 포스가 내 통제 안에 들어와 부드럽게 한 바퀴 돌다가 손끝에 스며들며 사라졌다.

[오류 발생! 오류 발생!]

알림 목소리와 함께 웅성거림이 번졌다. 지금 일어난 상황에 대해 논의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내 포스량이 생각보다 더 많고 출력도 강했을 뿐이다. 하도 피를 먹어 사납기도 하고. 마물의 심장이 그걸 견뎌 내지 못할 만큼 연약했던 거지.

[합격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잠시 후, 합격이 알려지면서 나는 두 가지 종목 모두 통과했다.

1차 시험 합격이었다.

* * *

난관이 예상되던 측정 시험.

최준호가 레벨 8로 예상된다고 하나 백군서는 1차 측정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최준호는 쉽게 통과했다.

"믿기지 않는군."

지켜보던 백군서는 예전에 봤던 측정을 떠올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극 마력석을 1초 만에? 대체 얼마나 빠르면······."

자신은 저 5개를 건드리는데 5분을 꽉 채웠다.

더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마물의 심장이 버텨 내지 못하고 부서지자 백군서는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이 많은 양을 손쉽게 움직이는군. 포스량이나 운용 능력만 봐도 이미 레벨 8 수준이야."

양, 속도, 위력 모두 최상급에 해당했다. 저런 인재를 이제야 보게 되다니.

만약 최준호를 상대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괴물의 등장이다.

측정 시작 전 부정적인 인식은 사리진지 오래였다.

곧이어 2차 측정이 시작되었다.

"함익철."

레벨 8 측정에서 2차로 이어지는 전투 대상자 선정은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치게 된다. 이유는 레벨 8과 전투 경험은 더 높은 경지로 향하는데 큰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같은 소속 길드 출신이거나, 정부에서 밀어주는 인물이 선택된다.

함익철은 차기 각성자안보실의 2인자이며 40대 초반의 상대적인 젊은 나이여서 차기 레벨 8에 오를 유력한 인물로 꼽혔다.

마력탄이라 불리는 기프트를 총으로 활용하는 그는 뛰어난 원거리 공격 수단 보유자이면서 격투기 종합 12단으로 근접 거리 약점을 보완했다.

전투는 무려 5분여간 이어졌다.

그걸 지켜보던 백군서가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미쳤군."

* * *

2차 측정은 내 생에 가장 어려운 전투 베스트 5에 꼽혔다.

상대를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라니.

세상에 부상 없는 전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죽이는 걸 가장 잘했던 내게 이건 재앙이요, 시련이었다. 다치지 않게 하는 건 내게 너무나 어려운 요구였다.

한 대라도 치면 죽을 것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 집중했다.

빈틈을 파고들 때마다 손을 쓰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기뢰를 폭발시켰다. 한 번 죽은 것이다.

억겁보다 길었던 5분이 지났다.

나는 5분 동안 함익철을 27번이나 죽일 수 있었음에도 상처 하나 입히지 않는데 성공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녀석은 전의를 상실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내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벗어나는데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산 게 낫지.

잠시 후 알림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합격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끝났군.

사람들이 왜 레벨 8 측정이 어렵다고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역시 죽이는 게 쉽다.

남은 절차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을 때, 참관인단으로 온 외국인 무리가 내게 접근했다.

그중 제일 앞에 선 여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손을 들어보였다.

"하이."

* * *

안나 크리스틴에게 새로운 레벨 8의 등장은 그렇게 새로울 일이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레벨 8을 키우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으며, 매년 여러 명이 탄생한다.

그녀는 직업상 최고의 각성자들을 만나 왔다. 그래서 천재라는 수식어도, 괴물이라는 수식어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온몸을 휘감는 전율에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하!"

탄성을 터뜨린 안나 크리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좀 전의 여운이 가라앉질 않았다.

오늘 탄생한 초인은 특별했다. 불과 20대 중반이라는 나이다. 젊은 나이는 곧 가능성을 의미했다. 가능성은 발전이고 높은 실력이다.

최준호가 짧은 시간 동안 처리해 낸 사건의 숫자가 무지막지했다. 100% 성공률과 함께 사건의 숫자는 곧 전투경험을 뜻했다.

특히 마지막 측정에서 그가 보여 준 전투력은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강력했다.

20대인데 레벨 8에 전투경험까지 풍부하다? 거기다 빌런을 단호하게 제압하는 정의감까지?

할리우드 영화도 이렇게 만들면 개연성 없다고 욕을 먹는다.

'더 말할 것도 없어. 그는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최대어야.'

다만 난관은 최준호가 정부기관 소속이고 레벨 8이 된 이상 우선 협상권은 3년 동안 대한민국에 있다.

그럼에도 놀라운 건 3년이 지나도 최준호의 나이는 28세라는 점이다. 미국 나이로는 27세. 말도 안 되는 역대급 재능이었다. 정부와 계약하지 않고 3년을 허비해도, 최준호의 가치는 여전히 역대 최고인 것이다.

안나 크리스틴은 마음의 도장이라는 단어를 믿었다.

그걸 위해서는 최준호의 마음을 확실히 훔쳐야 한다.

만약 그가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풀어 줄 것이다.

비록 미국의 국토가 넓어 각성자들에게 극악의 사냥 환경이라 불려도 대우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설득이야 말로 그녀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계산을 마친 그녀는 몸을 쭉 뻗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검은색 투피스 사이로 강조된 가슴골과 잘록한 허리, 풍만한 골반라인과 쭉 뻗은 각선미는 그녀의 자부심이며 무수히 많은 남자 각성자들을 홀려온 최고의 무기였다.

"하이."

가까이 다가가자 최준호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레벨 8이 아니면 배우라고 생각할 만큼 곱상한 외모였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고 잘생긴 느낌이 들었다.

"준호! 레벨 8이 된 걸 축하드려요. 당신의 앞날에 축복이 깃들길 기원할게요."

서로 몸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접촉한 채 속삭이듯 말했다.

달콤한 향수와 여성 페로몬의 조화. 여기에 남자들이 동경하는 풍성한 금발과 풍만한 몸매로 섹시함 어필까지.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게 애가 닳도록 만든 뒤 한 걸음 물러나 최준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보통 이쯤 되면 남자는 100이면 99는 넘어온다.

100% 넘어올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미간을 모은 최준호를 보고 이상 기류를 감지했다.

"저기, 준호?"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해야지."

"네?"

"욕하는 건 아닌 거 같으니 봐주지."

가볍게 혀를 찬 최준호가 몸을 돌려 멀어졌다.

"······."

생전 처음 겪는 매몰찬 외면에 안나 크리스틴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세희가 배를 부여잡았다.

31화

31화

"아!"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틀어졌다. 상대가 자국어에 대한 애착이 이토록 강할 줄 몰랐다.

가끔 헤드헌팅 대상 중 자국에 자부심이 큰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도 끌어들이기 위한 매뉴얼도 따로 마련되어 있고.

보고된 자료에 최준호는 그런 생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발생한 참사였다.

이대로 보내기 아쉬웠던 안나 크리스틴이 한국어로 소리쳤다.

"자, 잠칸만요!"

이 또한 의도했던 것.

어설픈 한국어를 더 귀엽게 보는 걸 알고 장착해놓은 비장의 무기였다.

미녀가 자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배우려고 한다? 무조건 호감이 갈 수밖에 없는 포인트다. 그리고 자신은 그 미녀 중에서도 최고의 미녀다.

하지만 돌아온 건 명백한 무시였다. 심지어 돌아보지도 않았다.

완벽한 실패.

"······."

멀어지는 최준호를 보며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딱 봐도 미인계였다.

뒤늦게 뒤에서 한국어가 들려왔지만 그 또한 미숙.

대화해봤자 해석하느라 피곤할 게 뻔해 못 들은 척했다.

레벨 8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된 이상 사방에서 유혹이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이용할 수단에 불과할 뿐, 내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나는 정주호에게 다가갔다.

날 보는 얼굴에 반가움과 착잡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제 진짜 레벨 8이구나. 축하한다. 나보다 신분이 더 높아졌어. 존대할까, 요?"

싫은 기색이 대놓고 느껴졌다. 나 또한 정주호가 편하게 대해주는 게 좋았다.

날 무서워하지 않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가끔씩 머리를 쥐어뜯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동안 국장님이 잘 돌봐주셔서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국장님은 영원한 국장님입니다.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근데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야. 네가 원하는 게 있고 나도 네 편에서 얘기를 하겠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실제로 협상의 지난한 과정에 지친 각성자들이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 나가기에는 제약이 걸려있고 다른 곳과 협상하려면 처음부터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

그러나 난 다르다.

상대가 불리한 걸 알고 있는 한 결국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걸 얻기 위해 천년만년 기다릴 수 있다. 시간은 내 편이니까.

난 정부에게 자기 주제를 각인시켜주고 원하는 걸 얻어내면 된다.

"독자적 지위를 얻어도 국가수호국 소속으로 남으려고 합니다."

"네가 있으면 큰 힘이 되지."

근데 왜 이를 꽉 물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감격해서 혀라도 깨물었나.

아무튼 우린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파트너다. 그 과정에서 정주호가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최선의 선택이다.

정주호는 다가오는 신성 길드 인물들과 정다현을 보고 말했다.

"내가 정부 사람들 만나면서 시간 끌고 있을 테니 인사하고 와. 길어져도 돼. 그럼 저쪽이 더 다급해할 테니까."

"예."

가까이 다가가자 미소 지은 이세희가 성큼 나섰다. 조금 전 안나 크리스틴을 봤더니 저 계산적인 미소도 사실 굉장히 자연스러웠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준호 씨, 축하드려요. 이제 누구나 아는 레벨 8이 되셨네요."

"고마워. 도움을 많이 받았어."

"에이,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이번 기회에 신성 길드와 준호 씨가 긴밀한 관계인 걸 알렸으니 우리가 이득이죠."

미래를 보고 절대 무리하지 않는 이세희의 거래 방식은 내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게 뚝딱 나오는 신성 길드의 연구소 역량도 좋고.

팔다리 부러뜨려도 멀쩡하게 만드는 포션도 있으니 다음에는 다른 걸 주문해봐야겠다.

"내 소개를 해도 되나? 신성의 백군서라고 하네. 측정 과정, 인상 깊게 봤어. 대단하더군."

그때까지 조용히 날 보던 백군서가 나섰다. 신성 길드의 충신이며 견실히 쌓아온 실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저번 생에 나와 부딪친 적은 없지만, 신성그룹의 칼로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해왔다.

신중하고 계산이 빠르며 의리를 지키는 인물. 하지만 이면에는 이익에 따라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이미지마저 던져버릴 과감함까지 겸비했다.

그리고 이세희가 신성 길드를 차지할 때 반대편에 선 걸로 유명했다.

"레벨 8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신성 길드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지. 내 자리가 필요하다 해도 기꺼이 양보할 의향이 있어. 어떤가?"

농담처럼 말하지만 툭 던져 의향을 떠본다. 그리 좋아하지 않는 화법이지만 조마조마하게 보는 이세희를 보고 좋게 넘어갔다.

"제가 원하는 어떤 거라도 말입니까?"

"그리 말하니 무섭군. 내 목만 아니면 의향이 있네. 어떤가?"

"신성 길드는 좋은 곳입니다. 제 동생을 믿고 맡길 만큼."

"다른 대형 길드도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반백년 넘게 대한민국에 뿌리를 내린 신성그룹이야 말로 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지. 동생도 만족할 테고 자네가 와도 만족스러울 거야."

가식인가 진심인가.

이런 인물이 어째서 이세희와 대립했던 걸까.

속내를 끄집어내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다른 속내가 있으면 조용히 제거하면 되겠지.

"오늘의 여기까지 하지. 한 번 생각해보게. 원한다면 회장님에게 부탁드려 세희와 소개팅 자리도 마련해보지."

"당사자 앞에서 그러기에요, 삼촌?"

"이만한 신랑감이 또 어디 있나. 이럴 땐 못 이기는 척 이 삼촌의 주책에 어울려주는 게 좋아."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러네요. 준호 씨, 다음에 봐요."

"그래."

이세희와 백군서가 돌아가고, 정다현만 혼자 남았다. 날 보는 눈에 홀가분함이 서려 있었다.

"축하해요. 측정 과정, 인상 깊게 봤어요."

"어땠어?"

"새로웠어요. 그리고 준호 씨가 얼마나 높은 경지에 도달했는지, 평소 보여주던 게 높은 경지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임이 드러나던 걸 알게 됐어요. 많이 배웠어요. 고마워요."

"앞으로 잘하면 돼. 계속 옆에서 지켜봐. 국가수호국에 있을 거니까."

"다행이네요. 멀리 떠날 줄 알았는데."

"국장님이 잘해주니까. 대신 모발은 좀 위험할지도?"

내 말에 정다현이 웃음을 흘렸다. 편하게 대하기로 해서 그런가, 좀 더 편해진 느낌이다.

"적을 압살하는 게 준호 씨 다운 거 같아요. 상처 없이 제압하는 거 많이 힘들었죠?"

"···여태해온 전투 중 가장 어려운 전투였어."

이런 측정 시스템을 만든 사람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다. 진짜 열어보면 안 되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다.

"이해돼요. 저도 요즘 빌런 상대할 때 그러거든요."

"어떻게?"

"한 번 경고하고 바로 실력행사 들어가요. 그러다 보니 효과도 확실하고."

일선의 공무원 헌터들도 전보다 빌런 체포에 적극성을 띄게 되었단다.

"좋은 현상이야."

"준호 씨 덕분이죠. 진짜 중요한 가치가 뭔지 깨닫게 해주셨으니."

응? 난 그냥 빌런이 나쁘다는 말밖에 한 적 없는데.

그 가치가 뭔지 궁금했지만 정다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다음에 볼 땐 제가 상사가 아니네요."

"그런가?"

"모든 레벨 8 초인은 1급 공무원 대우를 받아요. 직급상 국장님도 상사가 아닌 거죠."

정주호가 나더러 신분이 높아졌다고 말했던 게 그거 때문이군.

매해 호봉이 쌓이고 계약 갱신을 하면 장관급 대우로 높아진단다.

"그래서 말인데요."

"응?"

"다음에 볼 땐 오빠라고 부를게요."

"오빠?"

"네."

전혀 예상치 못한 호칭이다. 윤희와 같은 호칭인데 울림은 달랐다.

"그럼 가볼게요. 협상 응원할게요. 준호 오빠."

고개를 숙인 정다현이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나는 정주호의 부름에 정부 인사와 협상 자리를 가졌다.

*

"각성자안보실장 천명국입니다."

각성자안보실장은 대한민국에서 각성자 관련 직위 중 가장 높은 셋 중 하나다.

천명국은 사신 길드 부마스터 출신으로 젊은 시절 무수히 많은 사냥 실적과 해외 사냥 합작을 해내고 전국 길드 연합 정책실장을 맡다가 3개월 전 각성자안보실장으로 임명되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대명사이며 정부와 길드 사이 이권, 외국과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나가는 실력자다.

나도 아는 이름이고. 하지만 좋은 의미는 아니다.

그 이유가 혈종이 될 당시 정부, 길드, 시민의 대타협을 이뤄내 지긋지긋한 추적이 이루어지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이 양반이었다.

각성자안보실장을 그만두고도 전국 길드 연합 고문으로 빌런 추적 시스템 구축의 혁혁한 공을 세웠지.

그게 다 날 잡으려고 만든 거다.

그래서 저번 생에 내가 가장 죽이고 싶었던 사람 중 첫 손가락 안에 꼽힌다.

물론 저번 생의 원한이다.

내가 아닌 혈종의 원한.

"국가수호국 특수팀 빌런전담반 9급 공무원 헌터 최준호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최준호 초인님의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영광입니다."

"장래에 대한민국을 떠받칠 재목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레벨 8 초인을 두고 과소평가를 하게 되었지만요. 하하!"

적당히 띄워주면서 은근한 눈으로 날 훑었다.

"여기 정 국장님에게 들었지만 최준호 초인님의 의향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정부 소속이 되실 의향이 있습니까?"

"예. 다만 그에 걸맞는 대우를 원합니다."

난 국가수호국 헌터로서 정부와 좋은 관계를 원하지만 여러 방향의 길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래야 내가 유리해진다고 이세희가 코칭해줬다.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정부 측에서는 최대한 성의를 보일 생각입니다. 초인님의 생각이 긍정적이시니 서로 맞춰갈 수 있겠군요. 기대가 큽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내가 수긍하자 정주호가 말했다.

"우선 레벨 8 초인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얘기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야지요. 우선 초인은 첫해 1급 공무원 대우지만 매년 호봉 상승이 이뤄집니다. 실제 국가 서열은 장관에 준하며······."

각종 세금 혜택과 외국 방문시 국빈 대우, 각성자 관련 예산 운영 참여, 정부 산하 무구 우선권 등등이 언급되었다.

대형길드에서 제시하는 천문학적인 연봉과 특유의 몰아주기 등이 없었지만 돈에 큰 미련이 없다면 이것도 나쁜 조건은 아니다.

실제로 이세희는 정부 측이 어떻게 나올지 말해줬고 대부분 일치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듭니다."

"그럼······."

"두 가지 조건만 들어주시면 실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내가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걸까. 천명국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긴, 상대에게 별 거 아닌데 나만 어렵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정주호를 흘긋 본 뒤 오래 전부터 갖고자 했던 걸 거론했다.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을 부여받고 싶습니다."

"자, 잠깐!"

정주호가 놀라서 외쳤지만 처음부터 내가 원하던 건 이거였다.

천명국도 허를 찔렸는지 표정이 굳었다. 저번 생의 원한을 끌고 올 생각이 전혀 없는데 표정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상쾌하군.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답을 주셔도 좋습니다. 오늘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

"아니면 바로 답을 줄 수 있습니까?"

결국 천명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상의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원래부터 원하던 걸 말한 건데 내가 괴롭히는 모양새였다.

진짜 괴롭힐 생각이 없는데?

아무튼 공은 이제 천명국에게 넘어갔다.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주호가 내 뒤를 따라왔다.

"무슨 생각이냐? 불체포특권? 면책특권? 이 나라 멸망시키려고?"

"제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차라리 김영환 영감처럼 이권을 달라고 해. 저쪽도 너에 대해 다 알고 왔는데 그걸 달라고 하면 받아들여지겠냐."

"절 간절히 원하면 받아들이겠죠."

"···생각해보면 지금 급한 처지긴 하지. 그것까지 계산한 거지?"

그냥 처음부터 그걸 갖고 싶었을 뿐이다. 면책특권은 이것도 좋아보여서 즉석으로 포함시켜 찔러 넣었다.

이것이 거래라는 건가. 나 혼자 요구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넌 진짜 악마다. 천명국 실장이 진짜 수완간데 바로 입 다물게 만들어버리고. 지금 머리 터져버릴 거다."

"수완가면 들어주겠죠."

"네가 필요한 입장이니 움직이겠지. 근데 그거 다 받고 무슨 짓하려고?"

"아무 짓 안합니다."

권한이란 건 받아놓고 있으면 언제고 쓸데가 있다.

특권이란 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람이 없는 법이니까.

난 별말 안했는데 정주호가 사색이 되었다.

"준호야, 내가 진짜 간절히 부탁하는데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짓 하면 제발 그 자리에서 말해줘라. 행동으로 옮기지 말고. 아니, 국가수호국이 마음에 안 들면 말만 해. 대외협력관리국이라고 좋은 곳 있는데. 거기 국장은 성격도 좋아. 저번 작전 때 너한테 믿고 맡긴 거 봤지? 사람 확실하게 믿어주고, 부인이 20년째 바가지 긁어도 잘 버틸 만큼 인내심도 있어. 빠지는 모발도 불굴의 근성으로 20년 동안 잡아내고 있고. 네가 결정하면 언제든 가능하니까. 알았지? 응?"

정주호는 가끔 과하게 반응할 때가 있다. 내가 특권을 받고 여러 사건을 해결할 때 가장 깔끔하게 해결해줄 사람은 정주호밖에 없다.

"끝까지 국가수호국에 붙어 있을 테니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난 싫어!"

정주호가 절규하며 기뻐했다.

*

"내 오빠지만 진짜 대단하긴 하다."

윤희는 내가 레벨 8이 된 걸 축하하면서 내가 요구한 걸 듣고 고개를 저었다.

"왜?"

"저거 다 받아주면 완전 무법지대잖아. 오빠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내가 남용할 것 같냐?"

저건 그저 눈에 보이는 빌런들을 때려잡기 위한 용도다. 물론 내가 보는 빌런과 사회에서 정의하는 빌런의 범위가 다소 차이날 수 있을 뿐.

"아무튼 대단하다, 대단해."

"받아들일 거야."

"그럼 좋겠지? 나야 오빠 편이니까."

"귀찮게 구는 사람은 없냐?"

"음, 슬슬 생기는 거 같아."

안 그래도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온단다.

나한테는 안 오던데. 내 스마트폰에는 부모님과 윤희, 정다현과 이세희가 전부다. 아, 최근에 버서커 이놈도 등록했다.

제일 많이 연락 오는 놈도 버서커다.

"그리고 부모님도 귀찮아지실 텐데 서울로 모셔오는 건 어떠냐?"

"나야 완전 좋지. 근데 엄마 아빠가 올까?"

"설득해야지."

내가 레벨 8이 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지방에 계신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오는 거다.

윤희는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했다.

"돈은? 여기서 살 수 없잖아."

"없는데."

"나도 없어. 근데 대출은 잘 나올 걸? 풀로 당겨볼까?"

"······."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돈, 저번 생에서 아무 불편함이 없던 게 새로운 불편함으로 떠올랐다. 마물 하나를 잡아야 하나.

아니면······.

"이세희한테 부탁해볼까."

"거기가 무슨 은행이냐!"

윤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외쳤다.

근데 말하면 빌려줄 거 같은데.

*

사흘 후, 정주호는 국가수호국을 방문한 천명국을 회의실 안내한 뒤 최준호를 불렀다.

천명국은 첫날 그대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많은 갑론을박이 있습니다. 특히 최준호 초인님의 이력을 보면서 우려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점이 말인지?"

"이런 말씀은 실례지만 과잉 진압 건이 많으시더군요."

"예."

정주호는 속으로 동감했다. 정부 측이 제대로 일하고 있군.

소름 돋는 건 최준호 본인은 과잉 진압으로 경고받은 걸 열심히 빌런을 잡고 다닌 훈장으로 여기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런 부분이 우려되는 게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이 주어지면······."

말끝을 흐렸지만 무엇을 우려하는지 너무 잘 알겠다. 정부에서 제대로 봤다. 최준호가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을 가지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특히 자신이 최준호를 통제해야 하는 각성자안보실장이었으면 바로 사퇴했을 것이다.

날카로운 부분으로 찔렀지만 최준호는 태연했다.

"요즘은 괜찮아졌습니다."

"예?"

"조사하셨으면 아시겠지만 과잉 진압 건수는 초기에 많을 뿐, 근래 들어 많이 줄어든 걸 확인하셨을 겁니다."

고작 반년이 넘은 공무원 헌터 생활에서 최근 한 달 괜찮아진 걸 거론하다니. 그 뻔뻔함에 정주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천명국도 고개를 저었다.

"표본이 너무 적습니다. 그걸로 줄어들었다고 표현하기 힘들고요."

"실제로 빌런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왜인지 모르지만 속은 골병이 들었더군요."

최준호 손을 탄 빌런은 두 번 다시 빌런 짓을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서 감옥에 들어갔다.

문제는 겉모습만 멀쩡하다는 점.

그 우려는 백 번 지당했다.

정주호는 최준호가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뭔가가 있는 건가.

뒤이어 나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그동안 힘 조절을 못했습니다."

"힘··· 조절이요?"

"예. 그리고 제가 경고를 많이 받아봐서 아는데 체포된 빌런의 껍데기만 멀쩡하면 크게 문제 삼지 않더군요. 앞으로 겉포장에 신경 쓰겠습니다. 믿어보시죠."

"······."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에 정주호는 입을 쩍 벌렸다.

32화

32화

결국 천명국은 불체포특권을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는 말을 남긴 채 돌아갔다.

힘 조절이 된다는 내 말을 믿기로 했나보다.

정주호가 날 보며 감탄했다.

"넌 날이 갈수록 혀도 날아다니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특히 면책특권, 불체포특권 두 개를 내세운 투트랙 전략은 진짜 놀라웠어. 와! 내가 각성자안보실장이었으면 머리가 터져버렸을지도."

"투트랙이라니요?"

"처음부터 불체포특권 노리고 했던 거 아니었냐?"

아닌데. 난 진지하게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 다 노리고 지른 것이다.

혈종일 때 내게 협상이란 건 필요 없었다. 내가 제시하는 것이 최종 제시안이고 상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가지 중 하나밖에 관철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내심 협상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면책특권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건 솔직히 불가능. 끝까지 얻어내려고 했으면 천 실장도 포기했을 걸?"

"그렇습니까?"

"넌 그리 생각할 것 같지 않지만 면책특권이 갖는 위력이 어마어마하거든."

한해 각성자에 배정되는 예산만 해도 100조가 넘는다.

정주호가 말하길, 레벨 8 초인은 운영 참여 권한을 갖게 되는데 예산안에 간섭을 하면서 면책특권을 갖는다? 그 말은 어마어마한 부정을 저질러도 막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단다.

"그건 몰랐습니다."

"넌 무슨 생각으로 면책특권 얘기했던 건데?"

"빌런 잡는 법 조항을 바꿔보려 했습니다."

가령 도시 밖 빌런을 체포할 때는 선제적 조치를 폭넓게 인정해준다거나 즉결심판 권리를 향상한다거나.

빌런의 과잉 진압이 문제가 되는 건 도시 내에 암약하는 잡범들로 인해 생기는 케이스인데, 도시 밖 빌런은 십이면 십 총기를 들고 다니고 온갖 비겁한 방법으로 습격을 해대니 보이는 즉시 쓸어버리는 게 최선이다.

"···면책특권 안 주어진 게 천만다행이군."

정주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있어. 나도 개정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근데 네가 그 권리 쓸 거 생각하면, 솔직히 끔찍하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다. 오히려 나로 인해 범죄율도 떨어지고 일선 공무원 헌터들도 각성 중인데.

정말 버서커의 말대로 세상이 나를 이해 못하는 건가.

"버서커 이야기 안한 건 잘했어."

"비장의 수라서요."

"근데 나중에 밝혀지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 있어. 적당한 시점에 천 실장한테 밝히는 게 좋아."

"일단 안 들키게 노력하겠습니다."

"버서커가 떠들고 다닐 수도 있지 않냐?"

음. 왠지 버서커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누가 그 미친놈 말을 믿을까요."

"······."

"그리고 버서커가 생각보다 눈치를 잘 봅니다."

"그 미친놈이?"

"예. 생각보다 정상적인 구석이 있더군요."

정주호는 내 말이 전혀 안 믿는 기색이다. 버서커가 미친놈이긴 하지만 말이 통하는 미친놈이다.

직접 대면시켜 대화를 나눠보게 할 수 없고.

깜짝 만남을 주선해야 되나.

국가수호국을 나선 나는 무수히 많이 쌓인 톡을 보고 멈칫했다.

버서커-레벨 8 측정을 받았다고? 크크, 축하한다.

버서커-네놈이 레벨 8이라니. 일부러 그물을 쳐놓은 건가?

버서커-세상은 여전히 네놈을 과소평가하겠군.

버서커-몇놈은 주제 모르고 걸려들겠어.

버서커-난 잘 지내고 있다.

버서커-[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사진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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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놈이 이제는 자기가 뭐 먹었는지 사진 찍어 보내고 있네.

다음에 보면 스마트폰을 부숴버리던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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