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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복수는 길고 잔인하게 (2)

지구에 자리를 잡았던 드래곤들.

녀석들은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누군가에 의해 동족들이 하나씩 죽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엔 동족들을 살해하는 존재가 정인우인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은 대검을 쓰고 특성조차도 광전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알아보니 놈은 정인우가 아니었다.

아니, 정인우가 아닌데도 자신들을 상대할 만한 인간이 또 존재했다고?

쉬이 믿기지 않는 드래곤들이었다.

놈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즈음, 지구에 눌러 붙은 드래곤들은 결단이 필요해졌음을 느꼈다.

현대문물이 존재하는 지구라는 차원에서 지속적인 유희를 즐기기 위해선, 그 놈을 찾아 없애야만 했다.

* * *

지천우는 늘 누군가를 모시며 살아왔다.

처음에는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을 이끄는 회장을 모셨었다.

당시에는 그 기업이 최고였다.

지천우의 능력은 충분했고, 그 기업에 휘하로 들어간 채 무력이 필요한 각종 더러운 사건들을 해결 했었다.

하지만 그 기업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한 남자에 의해 괴멸했다.

그것으로 인해 수배령이 떨어진 지천우는 중국으로 도주했다.

그런 뒤 이번에도 누군가에게 붙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바투였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오래도록 안락한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바투는 지상 최강의 생명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바투마저도 무너졌다.

바투를 무너뜨린 존재는 일전에 그 남자였다.

그즈음, 지천우는 자신의 단원들을 이끌고 중국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 그가 모시게 된 존재는 일전에 회장이나 바투 같은 놈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으니까.

그야말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엄청난 존재였다.

그 존재는 바로 마왕이었으며, 마왕은 지천우에게 힘을 주었다.

물론 그냥 준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대상이 악마들과 마족들의 왕인 마왕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후우."

지천우는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붉은 복면을 만지작댔다.

멸살단으로 활동했을 때부터 사용했던 복면이다.

당시에는 대기업 회장의 명을 받들어, 기업의 이윤과 관련된 온갖 악행을 저질러왔다. 때문에, 지천우와 그의 멸살단은 얼굴이 알려져선 안됐었고, 이렇듯 복면을 착용했었다.

하지만 이제 지천우는 대기업에 복속되어 있는 전투병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복면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윽고 지천우는 천천히 복면을 풀었다.

그제야 지천우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모양새였다.

백지처럼 창백한 피부와 푸른색 입술.

마계의 마족들이나 지닐 법한 모습이었다.

이 모습이 바로 마왕이 그에게 준 힘이었다.

지천우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윽고 지천우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와 나의 연은 참 질긴 것 같구나. 정인우."

SG그룹, 블랙오크 바투, 그리고 이제 마왕의 심복.

정인우는 늘 자신의 적이었다.

어쩌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이 날 운명이진 않을까?

지천우는 항상 정인우 생각에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정인우도 그러할까?

아니, 어쩌면 정인우는 지천우를 기억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 * *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다.

고통을 가하는 쪽은 쉽게 잊고, 고통을 당하는 쪽은 쉽게 잊지 못한다.

이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 차이다.

강간범은 쉽게 잊고, 그 피해를 입은 여성은 그 끔찍했던 고통을 평생토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일진과 왕따도 그러하다.

당연한 이야기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쉽게 잊힐 리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에일린은, 근래에 들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쌓여 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에일린은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존재였다.

수천 년이나 살아왔음에도 말이다.

그녀는 늘 가해자였으며, 최상위급 포식자였고, 최강의 갑이었기에, 피해를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밖에.

아무렇지도 않게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면서도 별 생각이 없었던 그녀였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애 엄마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 웃었던 적도 있었다.

그게 왜 웃겼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콧물로 범벅된 얼굴이 그렇게나 우스웠다.

그래서 웃었고,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내 종이 돼라. 도마뱀."

빌어먹을 정인우.

오늘도 이 녀석이 왔다.

어떻게 찾았는진 모르겠는데, 오늘의 에일린은 심지어 짐승의 동굴에 몸을 숨겼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귀신같이 찾아왔다.

그녀는 잘 모를 테지만, 인우는 마스터를 훌쩍 넘은 '위저드 아이'스킬을 보유하고 있질 않나.

이 스킬을 통해 헬리캠처럼 대륙 전역을 살펴볼 수 있는 인우였다.

애초에 인우가 에일린을 놔주었던 순간부터, 그럴 만한 대안이 존재해서 놓아 준 것이었다.

위저드 아이는, 그녀가 어디로 숨어들어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대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 에일린은 정체불명의 짐승 배설물로 가득한 동굴 바닥을 구르며 생각했다.

아, 내가 왜 정인우를 건드렸을까?

라는 생각을.

이 자식은 진정 미친 자식이다.

에일린은 심지어 수천 년 만에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 앞에서도 정인우는 뚱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대답 안 하냐? 말을 안 할 거면 이빨과 혀도 필요 없겠지. 아가리 벌려라."

"자, 잠깐! 말. 말했다!"

저 새끼는 이빨을 뭉텅이로 뽑고 혀를 도려내고도 남을 놈이다.

에일린은 피투성이가 된 채 부들부들 떨다가 황급히 답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인우는 에일린의 금안을 바라보며 다시금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내 종이 돼라고 물었다. 대답해."

"나는 드래곤 로드다, 정인우."

"그래서?"

인우는 짧게 답하며 눈알에 힘을 빡 주고 에일린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 한 번에 에일린의 눈동자가 금세 바닥을 향한다.

도대체, 얼마동안이나 고문을 당했기에 드래곤 로드가 저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인우는 도대체 얼마나 징하게 에일린을 괴롭혔던 것일까?

지금의 에일린은 로드라는 직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웃음을 입에 걸고 있었다.

"그래서라니··· 나는 로드다."

"음."

인우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벌써 한 달째 에일린을 조져 왔는데 아직까지도 굴복하지 않고 있는 그녀다.

이즈음 되면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인우는 잠잠해 보였다.

오히려 이해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을 정도다.

"뭐, 그래. 너는 로드니까."

"그래 정인우··· 나는 로드니까."

"그러니까 훨씬 더 강도를 높여야겠네."

"그래. 응? 뭐? 방금 뭐라고 했지?"

빠악!

순간 에일린은 별을 보았고, 그것을 마지막 기억으로 기절하고야 말았다.

깨어난다면 이번엔 똥통에라도 숨어야 할까?

* * *

민철과 지은을 제외한 모든 인우가(家)의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인우, 알렉산더, 팜이, 용용이, 루시 퀸, 제라.

그리고 인우의 분신들까지.

용용이와 팜이는 그새 부쩍 친해졌고, 전부터 블랙오크라는 변종 괴수가 궁금하다 말했던 알렉산더는 이제야 제라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레이트 홀의 식탁에 앉은 이들은, 서로에 대한 소개를 하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만의 평화일까?

퀸은 인우가 내어준 드래곤 피를 마시며 간만의 평화를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직접 전투를 치렀던 것은 아니지만, 인우는 늘 외줄을 타듯 아찔한 전투를 해 왔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졸였던 퀸이었다.

물론 인우의 입장에서는 아찔한 전투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퀸이 느끼기엔 그랬다.

반면 제라는 원래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녀석이기에 지금도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제라는 그저 식탁에 곱게 차려진 음식들을 입속에 마구잡이로 쑤셔 박으며 간간히 한마디씩 내뱉을 뿐이었다.

"맛있다. 난 이곳이 마음에 든다. 엘리도 그렇고."

"폐하. 제라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제라의 혼잣말에 유일하게 관심을 주는 이는 알렉산더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알렉산더의 시선은 줄곧 제라에게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그로서는 처음 접하는 생명체이기에 보아도보아도 신기하고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알렉산더는 끊임없이 제라를 알아 가려 노력하고 있었다.

"여기가 좋다고 하네. 엘리도 좋고. 음식도 맛있대."

"아아. 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로군요."

그러다가 인우가 무언가 생각난 듯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너, 쟤가 몇 살처럼 보이냐?"

"흐음. 글쎄요. 못해도 마흔은 되어 보입니다."

"내가 재밌는 거 알려 줄까? 제라는 15살이야."

"······."

그 충격적인 진실에 알렉산더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그 모습에 인우는 오랜만에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배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또 그 웃음에, 옆에 있던 퀸도 배시시 웃는다.

프로킨어로 대화를 나눴기에 무슨 말인지도 몰랐을 텐데도 퀸은 웃었다.

그냥 인우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간 퀸이 봐 왔던 인우의 웃음은 크게 두 종류뿐이었으니까.

비웃음이나, 어이없어 하는 웃음.

그게 다였던 것이다.

지금 퀸은, 이 평안과 안락함이 평생도록 유지되었으면 했다.

이제 드래곤들도 인우에게 상대가 되지 않으니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평안을 비집고 자신이 들어설 자리가 생기지도 않을까?

지금과 같은 관계가 아닌, 조금 더 가까운 관계말이다.

이를 테면······.

"커어어어어어어억."

그때, 난데없이 틀려오는 큼지막한 트림소리가 퀸의 행복한 상상을 아작 냈다.

트림을 토해 낸 제라는 통통 올라와 있는 배를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너희 인간들은 나처럼 크게 트림 못한다. 그건 죽었다 깨어나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하하하하."

"참. 좋.겠.네."

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라를 노려보았고, 그 시선에 제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 * *

드넓은 프로킨 대륙의 어느 헬게이트 안.

헬게이트 필드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괴수 시체가 보였다.

그리고 필드 중앙에 솟아 있는 헬탑에서는 연신 기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헬탑의 최상층.

그곳에서 한 쌍의 남녀가 이를 악문 채 디아볼로스와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척이나 수척해 보이는 남자는 급격하게 살이 빠진 것인지 피부의 꼴이 말이 아니었고, 긴 생머리의 여자는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을 벅벅 긁어 대며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둘은 한마디 말조차 내뱉지 않으며 익숙하게 디아볼로스를 공략하고 있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머지않아 디아볼로스는 쓰러졌고, 그제야 수척해진 남자가 하얗게 부르튼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

"누님. 이것으로 5개째인가요?"

"이제 시작이야. 빠르게 움직이자, 민철아."

"네."

민철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톤이 한참이나 낮아진 진중한 목소리도 그러했고, 홀쭉해진 배도 그러했다.

이윽고 둘은 디아볼로스의 전리품을 채취했고, 머지않아 클리어된 헬게이트는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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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소문의 진상 (1)

[수련의 목걸이]

종류 ? 목걸이

기능 ? 스킬 경험치 획득량 +3 증가

발동조건 ? 1레벨 이상

에일린에게 붙은 채로 인우를 향해 헛소리를 내뱉던 루피안.

그 녀석의 사지를 비틀어 버리고 옥에 가둬 버린 지도 꽤나 되었다. 그리고 녀석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과 물품을 빼앗았다.

압수한 물품 중에선 수련의 목걸이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 목걸이 또한 인우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인우에게 크게 필요치 않은 아티팩트다.

하지만 인우는 이것을 잘 챙겨 두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으니까.

인우는 이 아티팩트를 민철이에게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실, 알렉산더에게 줄까 하다가 그보다 한참이나 뒤처진 실력을 가진 민철이에게 주는 것이 낫다 여겼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혼자서도 잘 하는 출중한 능력의 수하이지만, 민철이는 빈틈투성이인 녀석이질 않나.

예전에 지구에서도 수많은 대련을 해 보았고, 녀석이 부족하다는 것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누가 더 좋냐를 떠나서 더 손이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지금 녀석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나아가, 인우의 친동생인 정지은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예상하건대, 둘은 같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애초에 둘이 같이 울트라 게이트에 진입했고, 둘이 같이 이곳 프로킨에 떨어졌을 테니까.

그렇다면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간, 인우라고 녀석들을 찾아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위저드 아이를 이용해 틈틈이 녀석들의 흔적을 쫓았던 것이다.

하지만 녀석들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머리털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녀석들이 프로킨이 아닌 지구에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인우는 여전히 병사를 풀어 대륙 전역으로 보냈으며, 둘의 흔적을 뒤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10왕 중 한 명인 루인에게서 뜻밖의 보고가 들어왔다.

"폐하. 근래에 들려오는 소문을 들으셨는지요?"

"무슨 소문?"

"동쪽의 미개척 대륙인 붉은 안개 사막에 신흥 강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신흥 강자라.

그나저나, 붉은 안개 사막이라면 프로킨 대륙에 존재하는 쓸모없는 지역 중 한 곳이었다.

온통 모레로 이루어진 사막지역인 그곳은 말 그대로 미개척 지역.

또한 그 이름답게 온통 붉은 안개로 뒤덮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을 뒤덮은 기후와 안개는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붉은 안개 때문에 인우의 위저드 아이가 닿지 않는 지역이기도 했다.

또한, 유난히 헬게이트가 많이 밀집되어 있는 지옥과 같은 땅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곳은, 지구로 치자면 사냥터와 비슷하다고 봐도 좋았다.

물론 지구처럼 존(zone)의 개념이 없는, 그야말로 위험지역이다.

나아가, 유명한 유배지이기도 했으며, 온갖 범죄자들이 숨어들어 가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죄를 지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붉은 안개 사막은 법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였으니까.

그리고 붉은 안개 사막에는 헬게이트가 엄청나게 많기에 괴수가 끝도 없이 출몰했다.

아마 그곳에서 떠오른 신흥 강자라 하면 보통 내기가 아닐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루피안 녀석의 왕좌가 공석이다.

놈을 아예 폐인으로 만들었기에 앞으로도 영영 왕이 될 수 없을 테다.

때문에 인우는 왕이 될 수하가 필요하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그림자이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제라는 멍청하며, 루시 퀸은 그런 자리에 흥미가 없었다.

때문에 신흥 강자라 하면 제격이다.

인우는 곧바로 명했다.

"그놈을 데려와."

"예. 폐하. 한데, 2인조입니다. 둘 모두를 데리고 옵니까?"

2인조라.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인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 중 강한 놈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프로킨은 어디까지나 약육강식의 세계이니까.

"둘 모두를 데리고 와."

"예. 폐하. 그러면, 지금 당장 병사들과 기사들을 모집하여 붉은 안개 사막에 보내겠습니다."

* * *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세계다.

더군다나 이곳은 붉은 안개가 가득히 낀 사막 지역.

사실, 이곳에 들어온 경위는 간단했다.

민철과 지은은 화상 자국의 사내에게서 도주했고, 그 자가 자신들을 뒤쫓지 못하길 바랐다.

그런 바람으로 도주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지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민철이는 과거 인우가 그러했듯 이 세계에 철저히 고립된 채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물론 민철이는 과거의 인우와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우선 인우가 프로킨에 떨어졌을 때는 1레벨이었지만, 민철이는 고레벨이었다.

또한 인우는 혼자였지만, 민철이는 지은과 함께였다.

쉽게 말해 민철이는 어느 정도 보정을 받은 채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그랬기에 민철이는 상당히 빠르게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물론 이것 말고도 민철이의 적응을 도와주는 것이 존재했으니.

[헬게이트 파괴자의 기연 팔찌]

종류 ? 팔찌

기능 ? 육체 경험치 획득률 5배 상승

발동조건 ? 김민철

*헬게이트 클리어 시, 0.001%의 확률로 지급됩니다.

*이 팔찌는 귀속으로서 타인에게는 효력이 없습니다.

*헬게이트 파괴자의 기연 세트를 모두 착용하면 세트효과가 발동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기연이었다.

로또를 맞은 격이랄까?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0.001%의 확률로 지급된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민철이는 지은과 함께 첫 번째 헬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이 팔찌를 받았다.

그야말로 운수대통이었다.

헬게이트 파괴자의 기연 팔찌.

이것은 헬탑 보스의 전리품도 아니었으며, 그저 클리어하자 자동으로 생성되어 민철이의 팔목에 감겼다.

물론 착용과 해제는 자유였다.

하지만 설명대로 타인에게는 효력이 없었다.

즉,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민철이만 착용 가능한 아티팩트였던 것이다.

이쯤 되니 지은이가 꽤나 배 아파했다.

물론, 육체적인 능력치를 올려 주는 고급 아티팩트는 포기해야겠지만, 저 경험치 5배는 고급 아티팩트의 능력치를 포기할 정도로 메리트가 있었다.

이 때문인지 첫 번째 클리어 이후로 지은은 0.001%의 확률을 위해 민철이를 데리고 쉼 없이 헬게이트를 박살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민철이는 지은보다 5배 빠르게 성장했고, 그 속도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 5배는 보통 5배가 아닌 것이다.

만일, 지구에서 고블린을 잡고 5의 경험치를 얻었다고 쳐 보자.

이는 프로킨에서는 50의 경험치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5배의 보정을 받는 민철이는 250의 경험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1존 괴수를 잡고 8존 괴수의 경험치를 획득하는 격이랄까?

이러니 민철이의 성장속도는 엄청날 수밖에.

현재 민철의 레벨은 301이었고, 지은이는 402였다.

이 격차는 점차 좁혀지고 있으며, 아마 머지않아 따라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하다못해 민철이는 전투 감각마저도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과거 인우에게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당해 가며 터득한 감각이었다.

당시 민철은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우에게 호되게 당했었다.

인우의 손속에 자비 따윈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민철이 인우와의 대련을 좋아했던 이유가 있었다.

대련은 민철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됐던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죽음에 임박한 순간 생존을 위한 극도의 감각이 피어나고, 그 감각으로 인해 육체는 점차 날이 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날아가는 모기를 좁쌀로 잡는 것이 가능해지는 감각 따위의 것들 말이다.

물론, 육체의 능력치 자체를 올려 주는 레벨이 더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전투 감각 또한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기본이 받쳐 주어야지 능력치를 100%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일례로 인우는 지구에서 육체 레벨이 초기화되었을 때에도, 저레벨임에도 높은 구간의 적들을 상대하곤 했다.

그것은 인우만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감각인 것이다.

그러한 인우가 직접 가르친 민철이니 만큼, 육체 레벨이 받쳐 주자 이제야 비로소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후우. 7번째로군요."

지금, 지은과 민철은 7번째 헬게이트를 클리어한 직후였다.

곧이어 헬게이트가 소멸되었고, 둘은 필드에 복귀했다.

이윽고 둘은 또 다른 헬게이트를 찾아 이동했다.

모래로 인해 푹푹 꺼지는 발 때문인지 맨땅보다 걷는 것보다 더 힘들다.

나아가, 붉은 안개 때문에 시야는 비좁기 그지없었다.

전방 5미터쯤이 간신히 보일 정도랄까?

그럼에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조리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곳 필드에서만큼은 민철마저도 저절로 사나워졌다.

물론, 지은은 원래부터 사나웠고.

그렇게 한참을 걷기도 잠시.

이내 둘은 또 다른 헬게이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진입하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누군가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또 전투인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이곳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부른다면 99% 이상이 전투였다.

이내 민철과 지은은 안개 속 저편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번쩍번쩍한 갑옷과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좀 의외였다.

이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거적때기나 걸치고 있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어느덧 사내들 중 맨 앞에 서 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붉은 안개 사막의 신흥 강자인가?"

"누님. 뒤로 물러서십쇼."

"뭐야. 김민철 니가 뭔데 물러서라 마라야?"

그러거나 말거나 민철은 아무 말 없이 지은의 앞에 떡 하니 섰다.

지은이가 툴툴대는 것을 한두 번 겪어 본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강하게 나가도 잠자코 있는 지은이라는 걸 알게 된 민철이었다.

척.

민철은 지은을 뒤로 무르고 대검을 뽑았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조그마한 지은이는 단숨에 민철이의 등 뒤에 가려졌다.

'······.'

시야가 온통 민철이의 등짝이다.

문득 지은이는 생각했다.

민철이의 등이 원래 이렇게 넓었나?

그런 생각도 잠시.

이윽고 사내들을 향한 민철이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대 맞고 가시겠습니까?"

굉장히 친절한 톤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결코 친절하지 못했다.

물론, 사내들은 민철이의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그저, 대검을 뽑아 든 민철을 향해 배에 힘을 빡 주며 외칠 뿐이었다.

"놈! 칼을 거두어라. 이것은 황명이다. 황제 폐하께오서 너희들을 직접 부르셨······ 으악!"

퍽!

사내의 외침에 되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퍽! 퍽! 퍽!

민철이는 칼등을 이용해 녀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인우에게 배운 싸움의 진리 중 하나는, 선빵은 무조건 취하라는 거였다.

나아가, 상대방이 말을 내뱉고 있을 때 선제공격을 하면 더욱 더 좋다고도 했다.

"여긴 어떻게 된 것이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조리 시비를 거는 겁니까?"

민철은 툴툴대면서 사내들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낌없는 구타를 선사하고 있었다.

* * *

"에라이 한심한 놈들아."

인우는 붉은 안개 사막으로 갔던 병사와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틀도 되지 않아 복귀한 이들은 하나같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모조리 얼굴에 피멍이 든 채였으니까.

이를 통해 유추해 보건대, 아마 붉은 안개 사막의 신흥 강자라는 2인조는 꽤나 성격이 거센 것 같았다.

자그마치 황명을 거부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정도 깡따구는 있어야 휘하에 둘 맛이 들지 않겠는가?

이즈음 되니 더더욱 그 2인조에게 관심이 갔다.

이윽고 인우는 결단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

0172 / 0208 ----------------------------------------------

172화 소문의 진상 (2)

"내가 가 봐야겠네."

"···예?"

인우가 직접 가 보겠다는 한마디에 신하들은 잔뜩 벙찌고야 말았다.

"폐하. 어찌 그리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하시려고 합니까? 차라리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

왕들도 저마다 만류하고 나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우는 알렉산더를 이끌고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신흥 강자라······.'

처음 2인조라 했을 때는 민철과 지은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흥 강자라고 하지 않았나?

인우가 알기로 민철이는 강자에 속할 수 없는 부류였다.

때문에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신흥 강자를 데리러 붉은 안개 사막에 갔던 병사들은 저마다 대검의 칼등에 의해 실컷 두드려 맞고 왔는데, 이게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원래 흉기를 든 상태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죽지 않을 정도로 패는 게 더 어렵다.

그건 조절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 조절을 하기 위해선 적과의 실력 차이가 월등히 높아야 하기도 한다.

이러니 그 대검 전사는 더더욱 민철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우는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이것만 확인하면 진위는 확실해진다.

가장 근본적이고 확실한 그것.

"야, 맞고 온 놈들. 혹시 그 대검을 쓰는 놈이, 뚱뚱하냐?"

"뼈대가 매우 컸지만, 결코 뚱뚱하진 않았습니다. 적당히 살집이 붙어 있는, 보기 좋은 몸이었습니다."

이로서 명백해졌다.

그놈은 절대 민철이가 아니다.

민철이는 비만이었으니까.

이윽고 인우는 궁을 나섰다.

* * *

흔히, 붉은 안개 사막을 두고 위험하다고들 한다.

게다가 이곳은 붉은 안개 때문에 인우의 위저드 아이가 통하지 않는 지역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인우에게 큰 위험거리일 리 없었다.

그래서일까?

인우와 알렉산더는 모래를 헤치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신발에 모래가 가득 차 기분 나쁘게 질질 흐를 즈음이었다.

"너희 두 놈. 멈춰라."

안개 저편에서 살에 파묻힌 육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인우의 시야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보였다.

사내들은 저마다 이빨이 나간 롱스워드를 들고서 인우와 알렉산더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들 중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네놈들이 이번에 새로 왔다던 신흥 강자냐? 잘도 우리 가족들을 패대기쳤겠다?"

사내들은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범죄자들 같았는데, 아마도 인우와 알렉산더를 보고 신흥 강자로 착각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알렉산더는 사내들을 가볍게 무시하며 인우를 향해 물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알렉산더는, 인우가 놈들을 처리하라는 한 마디만 내뱉는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리고 그때, '폐하'라는 단어에 사내들이 반응했다.

"뭐어어어? 폐하? 폐에에에하? 푸하하하하하! 저기 멀뚱하게 서 있는 자식이 뭐 황제라도 되는 거냐? 폐하란다! 푸하하하하!! 미친 나사 빠진 새끼들! 푸하하하하!"

범죄자들의 우두머리는 어찌나 웃겼던지 배를 부여잡고 눈물까지 쏙 뺄 기세로 웃고 있었다.

당연한 태도였다.

무법지대이며 유배지인 붉은 안개 사막에 황제 폐하가 직접 행차하셨단다.

이건 지나가는 개도 웃지 않고 정색할 만한 이야기였다.

어느덧 알렉산더가 불같이 노하며 소리쳤다.

"이놈들! 이분은 프로킨 제국의 황제 폐하이시다! 어디서 감히 그따위 비웃음을 날리는 거지?"

"캬하하하하! 야이 미친 새끼야! 저 새끼가 황제면, 그래 뭐 난 드래곤이다! 하하하하하!"

대륙과 완벽히 격리된 이곳의 미개한 범죄자들이 정인우를 알아볼 리 없었다.

하다못해 시골 마을만 가도 사람들은 인우의 얼굴을 모른다.

황제가 뭐 동네 형도 아니고 흔히 접할 수 있는 얼굴일 리 없지 않은가.

프로킨에 TV 따위의 것들이 있을 리 만무하고 말이다.

모르는 게 당연했고, 범죄자들은 여전히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둣 인우를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폐하, 어찌할까요? 명을 내려주십시오."

"기다려 봐."

그리 말한 인우는 무기조차 뽑지 않은 채 놈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저 걷는 행위일 뿐인데도 인우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 나온다.

그것은 살기도 아니었으며 기세도, 위엄도 아니었다.

그저 몸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인우만의 기운이었다.

이윽고 인우는 놈들의 지척에 섰다.

그와 동시에 말했다.

"내가 많이 착해진 건가."

인우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범죄자들이 뭔 개소리냐는 듯한 얼굴을 할 때 즈음, 다시금 인우가 말을 이었다.

"기분이 나쁘지가 않네."

그랬다.

나쁘다기 보다는······.

"재밌네."

그래 재밌었다.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깝죽거리는 저 모습을 보라.

이 얼마나 재밌는가?

아, 어쩌면 이 맛에 드래곤들이 인간 세상에서 유희를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드래곤들은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채, 그 속에 뒤섞여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재밌을까?

혹여, 손가락질이라도 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우스울까?

인우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윽고 인우는 드물게, 주먹이 아닌 손바닥을 들었다.

손바닥을 든 이유는 간단했다.

주먹으로 치면 이 재밌는 녀석들이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금니 꽉 깨물어라."

물론.

재밌는 건 별개다.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이윽고, 감히 눈을 부라리고 비웃음을 날린 범죄자들의 참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내장 끝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폭! 폭!

이윽고 알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그즈음, 알렉산더마저도 고개를 돌린 채 놈들의 명복을 빌었다.

저 정도면 차라리 그냥 죽이는 게 더 나은 처벌이지 않으려나?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만한 광경이었다.

* * *

인우는 지금 멀찍이서 헬게이트 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저 헬게이트가 엄청난 진동을 머금고 있었으니까.

저처럼 큰 진동이 일어날 때는, 헬게이트가 클리어될 때뿐이다.

헬게이트 클리어. 그것은 다시 말해, 저 안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였고, 그 누군가는 헬게이트를 클리어 할 만한 강력한 무력을 지닌 녀석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곳 붉은 안개 사막에 그만한 무력을 지닌 인간은, 새로이 등장했다던 신흥 강자뿐일 것이다.

후우우우우우웅-!

이윽고 오래지않아, 헬게이트가 소멸되기 시작했다.

이어 그 위로, 한 쌍의 남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누님. 이번엔 반나절 만에 클리어했네요. 기록입니다."

"쳇. 정인우는 과거에 1시간 안쪽으로 끝냈다고 하던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서 익숙한 모습이 드러난다.

인우는 잠시 넋을 놓았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인우의 입술이 열렸다.

"너희였냐?"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반가운 마음이 한 박자 늦게 다가온다.

이런 식으로 녀석들과 재회할 줄은 몰랐다.

* * *

지구에 짱 박힌 수백 마리의 드래곤들.

현대 문물에 맛이 들려 버린 녀석들 중, 한국에 머물고 있던 레드 드래곤 베리는 요즘 사는 게 즐거웠다.

삶이 즐거워진 이유는 스마트폰 덕분이었다.

지루했던 지난 천년의 용생이 이 작은 기계 하나로 뻥 뚫리다니.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문물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는 스마트폰의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팡! 팡! 콤보!

"아오! 콤보! 연속 콤보는 안 되는 거냐!"

애꿎은 액정을 더욱 강하게 터치하며 게임에 빠져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액정만을 바라보았다.

해는 금세 넘어가며 옅은 어둠이 공원을 물들일 즈음.

그녀의 위로 짙은 그림자 하나가 지기 시작했다.

베리는 난데없이 시야를 가득 메운 그림자를 보며 짜증스레 고개를 치켜 올려보았다.

"뭐야 넌?"

그리 물었고,

"스물다섯 마리째인가."

그런 답이 들려왔다.

그제야 베리는 자신의 앞에 선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대검, 붉은 복면, 거대한 덩치······.

놈은 필시······.

판단이 끝날 즈음, 사내의 무차별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베리는 볼 것도 없이 아직 할부가 23개월이나 남은 스마트폰을 내던지며 드래곤으로 폴리모프하기 시작했다.

* * *

-나에게서 받은 힘을 가지고, 드래곤들을 소멸시켜라. 지천우.

이것이 마왕 '몰가스'가 지천우에게 내렸던 첫 번째 명령이었다.

이러한 명령을 내린 이유는 간단하다.

곧 있을 현신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3만 년 전쯤이었나, 그 당시에도 현신을 하려 했었는데 저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드래곤들에 의해서 말이다.

때문에 마왕 몰가스는 드래곤들에게 강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드래곤들이 모조리 뒈져 버려야, 훼방꾼이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대립하던 드래곤들은 세월이 흘러 모두 다 죽었고, 이제는 한참이나 어린 에일린이라는 년이 로드의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년은 마왕 몰가스를 잘 알지도 못한다.

끽 해야 상위의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이나 하고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몰가스는, 에일린이 자신을 알아차리기 전에 지천우를 이용하여 드래곤들의 멱을 하나씩 따고 있는 것이었다.

몰가스로서는 굉장히 절박한 상황이었다.

몇 만 년 전부터 몰가스는 수백의 마왕들 중 하위권으로 서열이 밀려났고, 이 서열은 좀처럼 뒤바뀌지 않았다.

현재 상위권의 마왕들은 전 마계를 지배하는 마황이 되기 위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몰가스는 서열 다툼에서 밀리고 밀려 지구나 프로킨에라도 자리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지구나 프로킨을 식민지화 시켜야만 했다.

그곳은 마계와 달라서, 몰가스의 무력은 적어도 그곳에서 만큼은 압도적인 신의 경지일 것이다.

물론 전 차원 마계를 통틀어 보자면 몰가스는 별 볼 일없는 어중이떠중이 마왕이었다.

그랬기에 몰가스는 절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몰가스는 지구에 있는 지천우를 향해 전언을 날리기 시작했다.

-또 한 마리의 드래곤을 처치했군. 지천우, 그대는 내가 현신하는 날, 나의 오른팔로서 끝없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한마디에 수정구를 통해 보이는 지천우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왕 몰가스는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뒤 자신의 옆에 있던 마족 수하를 향해 물었다.

"야. 나 괜찮았냐?"

마왕은 헤픈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이에 마족 수하는 겉으로 웃는 낯짝을 한 채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왕 중의 왕, 그야말로 마왕다우셨습니다!"

'아··· 아가리 좀 닦고 살아라. 아굴창에서 썩은 내가 난다. 아오, 내가 꼴이 이게 뭐냐. 하필이면 최하위권 마왕의 수하로 발탁 되서. 빨리 사직서를 내던가 해야지. 니미럴.'

그런 생각도 잠시.

어느덧 마왕 몰가스는 표정을 싹 바꾸더니 정색하고는 다시금 수정구를 향해 말했다.

-움직여라 지천우. 얼마 남지 않았도다. 드래곤들을 모조리 처치하여 힘을 얻게 된다면, 그 다음은 정인우라는 인간 놈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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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내 경험치를 건든 새끼가 마왕이라고? (1)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얽히고 설켜있던 모든 오해가 풀렸다.

지은과 트러블이 있었던 알렉산더가 사실은 인우의 충신이었다든지, 지은이 알고 보니 인우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든지, 따위의 것들 말이다.

이즈음 알렉산더는 과거를 상기하며 놀란 가슴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했단 말인가?

폐하의 여동생을 죽이려 했다니!

간담이 서늘해진다.

만일 그때······.

찝찝했던 그 감정을 무시한 채 지은의 목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면?

그랬다면 상황이 어찌되었을까?

그건 정말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랬기에 현재의 상황은 알렉산더에게 있어서 더없이 소중했다.

모든 오해가 풀리고, 끝내 자신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중함은 자연스레 지은을 향한 친절로 이어졌다.

알렉산더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인우의 여동생인 정지은을 받들어 모셨던 것이다.

* * *

이제는 성공적인 다이어트를 끝마친 민철이는, 궁에 들어서자마자 팜이를 찾았다.

"형님. 그런데 팜이가 안 보입니다?"

역시나 그 녀석이 가장 궁금했다.

제 손으로 알껍데기를 직접 먹이며, 울음소리를 본따서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민철이는 팜이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어. 마침 저기 오네."

그때.

인우가 회랑 끝을 가리키며 답하고 있었다.

그러자 민철이는 이상한 눈으로 인우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우가 가리킨 곳에는 난생 처음 보는 꼬맹이 두 명이 보였던 것이다.

한 명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남자 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시선이 확 갈 정도로 예쁜 여자 아이였다.

그 두 명의 아이들 중, 인우는 분명한 손짓으로 남자 아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민철은 인우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철이 아는 팜이는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형님. 장난 그만하시고요. 팜이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 녀석 많이 컸죠? 빨리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즈음, 어느덧 다가온 꼬맹이가 인우 대신 입을 열었다.

"민철이?"

"응···?"

뭐야 저 꼬맹이는?

민철이는 황당한 눈을 했고,

남자 아이, 팜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 뒤로, 인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얘가 팜이야."

"···에?"

* * *

쏜살같다는 말은 이럴 때나 쓰는 말이다.

그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으니까.

지난 한 달간, 꽤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은과 민철이는 기본적인 프로킨어를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 결과로 이제 기본적인 대화는 가능하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황제의 가족인 이들에게 모든 노력을 쏟아 언어를 가르쳤던 것이다.

물론 아직은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라서 완벽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제라의 경우도 이곳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라가 프로킨어를 이렇듯 열심히 배우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엘리가 좋았고, 엘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거였다.

그리고 퀸의 경우, 주인이 내어주는 피를 마시기에 바빴다.

드래곤의 피는 인우의 아공간에 넘쳐흐를 정도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것을 모조리 마시려면 수십 년은 걸릴 거다.

프로킨에 온 뒤로도, 지구에서도 줄곧 마셔 왔는데도 줄지 않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현재 퀸의 레벨은 벌써 160이었다.

이는 놀라울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력이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퀸이 지닌 무력에 더해지는 레벨이니, 현재 퀸의 무력은 분신1과 비슷할 정도였다.

퀸은 오늘도 드래곤의 피로 인해 붉어진 입술을 핥으며 인우를 향해 물었다.

"주인님. 오늘도 가는 거예요?"

"응."

오늘도 제 주인인 인우는 건성으로 답한다.

그리고 퀸은 그러한 건성에도 친절을 담아 다시 말한다.

"항상 조심해요. 그래도 그녀는 드래곤들의 로드라면서요."

'···예쁘기도 하고요······.'

뒷말은 삼켰다.

인우는 지난 한 달간 집요할 정도로 에일린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퀸은 그러한 괴롭힘에서조차도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에일린은 보통 예쁜 게 아니라서, 혹시나 주인이 그 여자를 패다가 정이라도 들면 어쩌나?

그건 정말 퀸에게 있어서 최악의 사태라 볼 수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말이다.

퀸은 그 정도로 인우를 사랑했으니까.

퀸은 다시 한 번 우려를 담아 말했다.

"조심···해요. 항상."

그 걱정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는 인우였다.

* * *

뭐가 더 아플까?

인우는 오늘도 스킬의 목록을 쭉 훑으며 에일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 [내려찍기 Master Lv.90 (2%)] - 양손 무기 장착 시 사용 가능. 거대한 검이나 도끼를 양손으로 틀어쥐고, 장작을 패듯 미친 듯이 내려찍습니다.

.

.

.

47. [암살검 Master Lv.71 (5%)] - 대상이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공격할 시에 발동됩니다.

.

.

50개의 스킬이 있다.

물론 이중에는 공격 스킬이 아닌 것도 존재한다.

어찌되었건, 현재 인우는 히든 스킬을 제외한 모든 기술들을 마스터까지 찍었고, 나아가 2차적으로 레벨이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놀라운 성장력이다.

신규 스킬들은 불과 5일 만에 모조리 마스터를 찍었으며, 벌써 99+71까지 닿았다.

또한 가장 레벨이 높은 내려찍기는 99+90이다.

이를 통해 드러났겠지만, 신규 스킬과 기존 스킬의 레벨 격차가 19밖에 나지 않는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점차 비정상적으로 성장이 더뎌졌기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되는 거였다.

"흠."

어느덧 인우는 한손으로 대검을 뽑고, 다른 한손으로는 힐의 시전을 준비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고문법이었다.

고통을 가하고, 치료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인우는 뚱한 시선으로 에일린을 내려다보았다.

하다못해 이제는 '내 종이 돼라'라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 없는 것은 에일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수천 년을 살아온 고룡답게 인간의 종 따위는 될 수 없다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이상하다.

에일린의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할 말이 있다. 정인우."

"야. 내가 너한테 들을 말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말뿐이고, 그게 아니라면 아가리 곱게 다무는 게 좋을 거다."

"이건 정말 중요한 거야!"

"하나만 묻자. 그 중요한 이야기가, 내 종이 되겠다는 이야기냐?"

"···그건··· 아니지만······."

"그럼 일단 맞고 시작하자."

"이건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야 정인우···욱!"

인우는 말을 내뱉는 에일린의 모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고, 단숨에 그녀의 목을 졸랐다.

숨통이 막히고 피가 통하지 않자, 그녀의 얼굴이 단숨에 사과처럼 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인우는 움켜쥔 손에 강한 힘을 주었다.

"······."

"···끅······."

인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도 결국엔 생명체이고, 폭력에 폭력을 더하다보면 지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그 날이 바로 에일린이 자신의 종이 되는 날이었고.

퍽! 퍽!

인우는 그녀의 목을 조른 채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우의 손속에 자비는 없었고, 에일린은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렸다.

한참 폭행을 가하던 인우는 돌연 그녀의 목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바닥을 향해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인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대검을 뽑고 있었다. 머리통을 내려찍을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졸려있던 목이 풀린 에일린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들어··· 정인우··· 지구에, 상위의 존재가 손을 뻗고 있는 것 같다. 동족들이 사라지고 있어······."

"뭐라는 거야?"

"이건 보통일이 아니야······."

에일린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어서 에일린은 간절한 눈동자를 한 채 인우를 바라보았다.

"정인우 너에게··· 동맹을 요청한다. 내 예상으로, 그 상위의 존재는 아마도······."

거기까지 말을 마친 에일린은 정신을 잃었는지 돌연 고개가 꺾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중도에 끊기자, 인우는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얘기를 들은 거지?

워낙에 황당한 이야기라 뒤늦게 머리가 회전한다.

그래 분명, 울트라 게이트에 죽치고 있을 때에도 드래곤들은 일부만 들어섰고 더 이상 진입해 오지 않았었다.

그러한 과거의 상황과, 지금 내뱉은 에일린의 말이 퍼즐의 조각처럼 인우의 머릿속에 정확히 맞춰지기 시작했다.

지구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껴두었던 드래곤들이 사라지고 있다니?

생각이 기울고, 울화통이 치민다.

"진작 말을 했어야지! 이 빡대가리 새끼야!"

그걸 왜 이제 말하나?

장난하나?

인우는 이미 기절한 그녀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애초에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인우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황급히 아공간을 열고 분신들을 불렀다.

"당장 이년의 치료를 도와!"

외침과 동시에 인우의 손에 새하얀 빛 무리가 응축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힐을 지니고 있는 모든 분신들 또한 인우의 명에 따랐다.

오래지않아 힐로 조금이나마 회복을 한 에일린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인우는 살벌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상위의 존재가 누구냐? 감히 겁도 없이 내 경험치들을 빼앗고 있는, 그 개새끼가 누구냐고."

한마디, 한마디에 살기가 흘러넘치다 못해 쏟아지려하고 있다.

에일린은 인우가 저렇듯 이성을 놓고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는지 겁에 질리고야 말았다.

아니, 경험치를 빼앗기는 것이 그렇게나 열 받을 일인가?

에일린으로서는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다.

어느덧 에일린은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고자질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마계의 존재인 것 같다."

"마계? 뭐하는 새끼인진 모르겠는데, 곱게는 안 죽인다."

으득.

인우는 이를 갈았다.

어디서 감히 내 경험치를 먹어?

빌어먹을 새끼!

그런데 가만······.

마계의 존재라는 녀석들은 경험치가 어떠려나?

* * *

-지천우! 아주 잘 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지천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조아렸다.

이건 지천우에게 있어서 신의 음성이나 마찬가지였고, 절대적인 진리였으며, 살아 나갈 길을 제시하는 길잡이의 음성이었다.

자신이 따르는 마왕은 절대적인 존재다.

지천우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 마왕이 자신에게 내려준 권능은 실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태초부터 레벨 업의 권능을 타고 난 마족이라는 종족으로 각성시켜 주었고, 이를 통해 드래곤들을 잡으며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최근 레벨 업에 부쩍 재미를 붙인 지천우는, 이제는 엄청난 자신감까지 붙었다.

레벨이 502나 되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본래 인간이라는 종족은 일반적인 루트로는 500레벨을 돌파할 수 없다.

하지만 지천우는 마족의 특성을 부여받았기에 500을 넘은 것이다.

이 정도라면······.

그래 이 정도라면, 정인우 녀석도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거다.

지천우는 오늘도 바삐 움직이며 드래곤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지천우는 오래지않아 드래곤을 발견했다.

한데, 이번엔 보통 드래곤이 아니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드래곤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골드 드래곤!?'

이런 행운이 있나?

어느덧 골드 드래곤도 지천우를 발견한 건지, 아니면 본래부터 지천우를 찾으러 다녔던 건지, 이곳을 향해 내려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 지천우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드래곤 위에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아니, 골드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인간이라고?

지천우는 눈을 비비며 그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지천우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저, 정인우?"

이제야 좀 성장하나 싶었는데 정인우라니?

이건 마치 최종 보스가 등장한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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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내 경험치를 건든 새끼가 마왕이라고? (2)

드래곤의 모습을 한 그녀의 등 위에는 정인우가 올라타 있었다.

'하아······.'

인간을 태우고 있는 드래곤이라니.

꼴이 이게 뭐란 말인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에일린은 정인우를 태운 채 하늘을 날며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정인우. 다시 한 번 말할게.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야. 우리 드래곤들과 동맹을 맺지 않으면 제아무리 너라도 힘들 거야."

"동맹의 뜻은 알고서 그따위 헛소리를 내뱉는 거냐?"

인우는 한심하다는 듯 나자빠진 에일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년은 도대체 뭘 믿고 자신에게 동맹 제안을 내뱉는 것일까?

인우는 대답 없는 에일린을 향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함께 행동하자는 게 동맹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냐?"

"충분히 이해하고 인지하고 있어. 정인우."

"이해를 하는 녀석이 뭘 믿고 동맹을 제안하는 거지? 내가 너와 동맹을 맺음으로 얻는 이익이 있을 리가 없잖냐. 안 그러냐?"

"있어. 네가 얻을 이익."

에일린이 자신 있게 말했다.

인우는 들어나 보겠다는 뜻을 담아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에일린이 차분히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정말로 마계의 존재가 움직인 거라면, 이건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정인우 너는 마계에 대한 정보도 없잖아. 안 그래? 너는 고작 100년도 살지 않은 인간이겠지만, 나는 수천 년을 살아왔던 드래곤이다. 나한테는 네가 모르는 정보가 있어. 그 정보를 걸고서 동맹 제안을 하는 거다."

그녀의 말에 인우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저건 말이 좋아 동맹이지, 에일린의 잔머리라고 볼 수 있었다.

말해 보자면, 에일린은 죽어도 종이 될 수 없다고 시위를 하고 있는 거였다.

다시 말해 종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동맹은 맺을 수 있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를 걸고서 말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감히 누구에게 딜을 하는 건가?

인우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대검을 치켜 올렸다.

"거절. 나는 그냥, 네가 그 정보를 내뱉을 때까지 너를 조져 보련다."

그러자 에일린이 황급히 덧붙이기 시작했다.

"자, 잠깐! 정인우! 기다려. 그럼 이건 어때?"

"빨리 말해."

"나, 나를 받아주는 거다. 종으로서가 아닌······."

거기까지 말을 내뱉은 에일린은 차마 끝맺음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인우는 맺혀지지 못한 그녀의 뒷말을 제멋대로 붙이기 시작했다.

"개? 하인? 하녀?"

"하아······."

종이나, 개나, 하인이나, 도긴개긴이다.

인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에일린을 수족으로 부릴 생각인 것 같았고,

에일린은 무슨 수를 써서든 정인우의 종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 빌어먹을 종만 아니라면, 정인우의 동료가 될 의향도 있었던 것이다.

이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드래곤들은 워낙에 독특한 괴짜들이 많은지라, 심지어 슬라임으로 폴리모프한 채 그들과 동료가 되기도 한다.

수천 년을 살아가니, 뭔들 안 해 보겠는가?

이러한 실정이니, 에일린은 자신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정인우는 로드인 자신보다 강할 정도다.

에일린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쌍수를 들고 반겨야 맞는 거다.

현존하는 최강의 생명체가 바로 정인우다.

게다가 정인우를 아빠로 생각하는 용용이까지 존재하는 마당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최선의 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아직 채 버리지 못한 기대를 품고서 인우를 향해 다시금 말했다.

"차라리 나를 너의 동료로 받아달라는 거다. 네가 데리고 있는 그 가족들처럼 말이야."

그리 말한 에일린은 간절한 눈동자로 인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들려온 인우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역겨운 년."

"······."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에일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휴지조각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에일린의 상념은 거기서 멈췄다.

그렇게 됐었다.

참으로 한결같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인우는 드래곤들을 혐오했다.

모든 걸 빼앗아간 녀석들이 바로 드래곤들이었으니까.

제 놈들이 잘못해 놓고도 뻔뻔히 그러한 행위를 일삼는 최악의 족속들이니까.

그러니까 혐오했다.

하지만 에일린으로선 그것이 쉽사리 납득될 리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잠깐의 유희로 마을을 불태우고 인간들을 죽인 거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인우와 사소한 시비가 붙었고, 그것이 커다란 전쟁으로 번졌던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이건 그저 수천 년 용생 동안, 아주 잠깐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인우에게는 다르다. 그에게 이 일은, 백년 안팎의 인생동안 아주 빌어먹을 '개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니 둘은 서로 만족할 만한 조건으로 융합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모습은 조금 의외였다.

-일단 날 태우고 지구로 간다. 그 마계의 존재라는 놈을 찾아주면, 그때 한번 신중히 생각해 주지.

인우는 그리 말했었다.

사실 저건, 진심을 좁쌀만큼도 첨가하지 않은 말이었다.

신중히 생각?

인우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당장 에일린이 종이 될 것 같지 않자, 이에 대한 차선책으로 그녀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계의 존재라는 녀석이 어떠한 힘을 가졌는지, 어떠한 것들을 내뱉는지가 궁금했다.

그랬기에 인우는 당분간 마계의 정보를 지니고 있는 에일린을 사냥개로 쓸 작정이기도 했다.

당장에 아쉬운 '을'의 입장은 에일린인 것이다.

그랬기에 에일린은 좋든 싫든 지금 인우를 태우고 있는 거였다.

동족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마당에 하지 못할 게 뭐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드래곤 로드의 등 위에 올라 탄 인간이라니.

누군가가 이 꼴을 본다면 다신 못 볼 구경거리라며 기념촬영이라도 찍겠지만, 지금 이 꼴을 보고 있는 자는 아쉽게도 지천우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나 볼 수 없는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있는 지천우는, 지금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정인우라는 최종 보스가 등장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 지천우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일린은 비행을 멈추고 말했다.

-정인우. 찾은 것 같다. 저놈에게서 엄청난 마기가 느껴져.

에일린은 분명한 눈동자로 붉은 복면의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인우가 아래를 향해 외쳤다.

"너냐? 겁도 없이 내 밥을 건드린 자식이?"

"······."

사내는 답이 없었고, 그즈음 에일린이 부연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확실해. 풍기는 마기가 장난이 아니야. 저 정도라면 마족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할 거야.

"마족?"

인우가 물었다.

-그래 마족. 마계에 살고 있는 존재들을 뜻하지.

"흥미로운데. 그럼 저 녀석들도 대가리가 있을 거 아니야?"

-그래. 흔히, 마왕이라고들 하지. 정인우 네가 지배하는 프로킨과 같다고 보면 돼. 각자의 세력을 구축한 수많은 마왕들이 존재하고, 이들은 마황, 다시 말해 마신이 되기 위해 마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거지.

이를테면, 마왕과 마신은 인간계로 따지면 왕과 황제 정도의 차이랄까?

어느덧 말을 마친 에일린은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역시나······.

상위의 존재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리고 지금 마족으로 보이는 붉은 복면의 사내를 발견하고 확신했다.

그 상위의 존재는 마족이었던 것이다.

마족이라면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있나?

선대 드래곤들이 마왕의 현신을 막기 위해 싸워 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였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마족을 잡으면 정인우 네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을 거야. 그만큼 무궁무진한 녀석들이니까.

애초에 괴수들을 부리고 창조한 존재들이 마족이다.

녀석들은 그야말로 괴수들의 끝판왕인 것이다.

나아가 마족은 레벨 업이라는 권능을 태초부터 지녔던 존재들이기도 했다.

어찌 됐건, 에일린으로선 정인우의 시야를 드래곤에서 마족으로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그녀의 생각이 끝나갈 무렵.

인우가 천천히 입술을 열기 시작했다.

"뭐, 일단 하나 잡아 보고."

인우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긴. 멸종 위기 종(?)이나 마찬가지인 드래곤들보다야, 무궁무진하다는 마족에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다.

척.

인우는 에일린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했고, 그와 동시에 에일린 또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

두 남녀가 붉은 복면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내는 복면을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후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창백한 얼굴과 푸르스름한 입술.

결코 인간이라 불릴 수 없는 생김새였다.

어느덧 사내, 지천우가 인우를 향해 말했다.

"정인우. 나를··· 기억하나?"

뭘까?

인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생 처음 접하는 마족이라는 생명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기억하냐고 묻고 있다.

인우는 전혀 몰랐기에 고개를 내저으며 묻고 싶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잡소리는 치우고. 니 새끼, 드래곤들을 몇 마리나 잡았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 나를!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너에게 당한 게 몇 번인데!"

"당할 만한 짓을 했겠지. 그리고 나는 마족을 처음 본다고."

"나는 멸살단의 지천우다. 이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나?"

지천우는 집요하게 기억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우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에 인우는 시비가 붙은 집단을 가만두지 않았고, 이에 따라 엄청난 숫자의 인간들을 죽였다. 백두진이나 바투같은 대가리 놈들은 기억이 나도, 지천우를 기억할 순 없는 거다.

게다가 지금 지천우는 마족으로 각성했다.

아예 생김새 자체가 다르니, 인우의 입장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거였다.

그랬기에 인우는 저 새끼가 지금 실성을 했나 싶었다.

"모르겠고, 내 경험치를 건든 것에 대한 뒷감당이나 해라."

말을 마친 인우는 드래곤 본 대검을 빼들었다.

그 모습에 지천우 또한 대검을 뽑기 시작했다.

지천우는 이를 갈며 말했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정인우."

"예전의 니 새끼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그렇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거, 후회하게 될 거다."

인우가 선빵을 위해 한걸음을 뗀다.

그러자 지천우는 숨을 크게 내쉬며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 자신은 예전과 다르다.

마족으로 각성했고, 레벨은 502나 된다.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만, 그때가 되면 적어도 도주할 기회정도는 주어질 거다.

그랬기에 지천우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크아아아아압!"

지천우는 광폭화와 함께 포효했다.

그 또한 인우와 같은 광전사 특성.

그리고 그 모습에 인우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천우의 발끝에 일렁이는 붉은 아지랑이는 아직 채 자라지 못했다.

마스터에 이르지도 못한 광폭화라는 뜻이었다.

반면 인우의 붉은 아지랑이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넘실거릴 지경이었다.

급 자체가 다르다.

공격력을 두 배나 띄워 주는 광폭화는 광전사의 주력 스킬 중 하나이다.

그러한 광폭화조차 마스터가 되어 있지 않다면, 다른 스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조금 위험해 보이는 것은, 지천우의 온몸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였다.

그것은 마족들만의 권능인 마기 방출이었는데, 인우는 잘 알지 못했다.

타다다다닥!

어느덧 지천우가 먼저 내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돌격에는 엄청난 기세와 자신감이 깃들어져 있었다.

인우는 내달려오는 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대검을 야구 배트 쥐듯 그러쥐기 시작했다.

그런 뒤 발을 넓게 벌렸고······.

"으라아아아아아압!!"

달려오는 지천우의 면상을 향해 휘둘렀다.

후웅!

순간 무언가가 번쩍하며 엄청난 파공성이 들려왔다.

대기 중에 머물러 있던 공기들이 찢어질 듯 절규하며, 인우의 대검은 정확히 지천우의 이마를 때렸다.

퍼엉!

순간 99+90레벨의 스윙이 발동됐고,

"커헉!"

지천우는 그 한방에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단 일격이었다.

인우는 눈썹 위에 손바닥을 댄 채, 별똥별처럼 공중을 수놓는 지천우를 보았다.

그 즉시 놈이 날아가는 위치와 속력을 가늠했고, 이와 동시에 대검을 내던져 광폭 어검을 발동시켰다.

쐐애애애애애애액!!

인우의 대검이 공중에 떠오른 지천우를 향해 맹렬히 나아갔다.

푹!

대검은 단번에 지천우의 뱃가죽을 꿰뚫었고, 순간 공중에서 지천우의 피가 비처럼 튀기 시작했다.

철푸덕.

오래지않아 지천우는 추락했다.

녀석도 어이가 없는지 고통보다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7초도 되지 않아 대결이 끝이 난 것이다.

터벅- 터벅-

이윽고 인우는 힘겨운 숨을 토해 내고 있는 지천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뿌드득-

손마디를 꺾으며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말했다.

"궁금하네."

"크훕···! 그게 무슨 말이지···?"

"마족이라는 녀석들의 경험치가 말이야."

0175 / 0208 ----------------------------------------------

175화 내려오기만 해봐

인우는 전투불능이 되어 버린 지천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런 뒤 가까운 헬게이트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인우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헬게이트나 프로킨은 10배였으니까.

이윽고 인우는 에일린과 함께 지천우를 끌고 가까운 헬게이트로 진입했다.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인우의 얼굴.

공교롭게도 그 얼굴은, 적어도 지천우가 보기엔 그렇게나 잔인해 보였다.

어찌 자신의 목숨을 두고 궁금하다며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정인우는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절로 다급해진다.

지천우는 저도 모르게 쏟듯이 말을 토해 냈다.

"난 원래 마족 따위가 아니다. 인간이야!"

그 절규에, 인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지천우는 자신의 말이 통했다 여겼고, 더더욱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왕에게 속은 거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또 다시 끄덕.

"지, 지금이라도 너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비굴한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천우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강자에게 들러붙어 그들의 오른팔이 되어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삶이었기에, 지금도 이렇게 쉽사리 태세 변환이 가능한 거였다.

지금 지천우가 판단하기엔, 자신이 모시는 마왕 몰가스보다 정인우가 더 강하다 여겼던 것이다.

"나, 나를 받아줘라."

그리고 그때.

인우는 끄덕거림을 멈추고 지천우를 불렀다.

"야."

그런 뒤 발을 들어 나자빠진 지천우의 오른 손을 지르밟기 시작했다.

"크으으으으윽···!"

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금니를 갈며 고통을 참는 지천우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럴수록 인우는 더욱 강하게 지천우의 손을 아작 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단검 하나를 뽑아들었다.

깨끗한 유리처럼 벼려진 단검은 섬뜩할 정도의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인우는 그대로 쪼그려 앉아 단검을 쓰다듬으며 지천우를 바라보았다.

"크으으으윽···!"

신음하는 놈의 얼굴을 향해 단검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말했다.

"칼날에 비춰진 네 얼굴을 봐."

"······."

"어떠냐?"

"······."

창백한 얼굴. 푸르스름한 입술. 적어도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지천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결국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인우가 또 다시 말했다.

"지금이라도 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했지? 안타깝지만 늦었어."

"···왜 어째서냐?"

"그러기엔 일을 너무 크게 벌리지 않았냐?"

"크흑··· 빌어먹을······."

맞는 말이다.

이미 너무 멀리 온 걸지도 모른다.

다시금 인우가 말했다.

"지천우라고 했었나? 이번엔 기억해 주지."

"······."

"비굴했던 개새끼정도로."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인우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써걱-

예리한 칼날의 지천우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주인 잃은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나간다.

이와 동시에 경험치가 들어왔다.

[경험치를 900,000,000+900,000,000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엄청난 경험치가 들어왔다.

18억의 경험치.

500레벨 이후 경험치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레벨이 일곱 개나 올랐다.

선뜻 믿기지 않는 양이다.

이는, 만일 헬게이트로 끌고 오지 않고 지구에서 잡았다고 해도 1억 8천이라는 어마무시한 양이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10배의 보정을 받고 잡은 벨자므 녀석이 4억의 경험치를 줬었다.

다시 말해 웬만한 드래곤들보다 높은 경험치를 준 것이다.

인우는 잠시 굳어 있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곤 에일린을 불렀다.

"마계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봐. 에일린."

* * *

마왕 몰가스는 현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지천우는 정말로 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벌써 꽤나 많은 드래곤들을 잡았으니까.

솔직히 지금 당장 현신을 해도 된다.

다만, 아직 지구에는 자신의 힘을 100% 뿜어낼 만한 마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생성된 헬게이트에서 끊임없이 마기가 방출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부족한 것이다.

이 때문에 더더욱 자신을 방해할 요소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드래곤들이 있었으며, 인간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정인우라는 놈이 있었다.

이 요소들이 모조리 제거된다면, 설령 마기가 조금 부족하여 100%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도 현신을 해볼 만했다.

드래곤과 정인우만 제거한다면 손짓 한 번에 정리할 수준의 인간들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이것은 즉, 지구에서만큼은 자신의 무위가 거의 신이라 불릴 정도인 것이다.

마계에는 몰가스 같은 하위 마왕의 자리는 없었기에, 몰가스는 오늘도 지구나 프로킨 같은 하위 행성을 지켜보며 군침이나 삼키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나 수정구를 통해 지천우를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몰가스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정인우가 등장한 것이다.

정인우는 정말로 손쉽게 지천우의 목을 땄다.

"그새 더 강해졌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몰가스는 눈을 부릅뜬 채 수정구만 주시할 뿐이었다.

정인우는 금발의 여인, 로드 에일린과 대화하고 있었다.

-마계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봐. 에일린.

그런 물음을 건네자, 에일린이 마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일린의 설명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게 수만 년 전이라고 알고 있어. 내 예상으로는 지금 이곳 지구를 노리는 마왕은 아마 하위 개체일 거야.

-그놈을 좀 보고 싶은데.

-아마 마법을 통해 이미 이곳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걸? 저 지천우라는 놈을 키워서 우리 드래곤들을 제거하고 있었던 걸로 보이니까 말이야.

에일린은 로드답게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선대 로드가 일찍이 숨을 거두고, 아직 상대적으로 어린년이 벌써부터 로드 자리를 꿰찼다고 생각했건만, 제법 상황을 파악한다.

* * *

마왕 몰가스는 슬슬 똥줄이 탔다.

등줄기에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범죄를 저질렀다가 취조당하는 놈처럼, 몰가스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즈음.

고개를 끄덕이던 정인우가 '그렇단 말이지······.'라고 중얼거리더니, 난데없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야, 대가리! 보고 있냐?

"대가리···? 설마 날 저렇게 부른 건가?"

설마 싶었던 그 마음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까지는 정확히 2초가 더 걸렸다.

다음으로 튀어나온 정인우의 말은 필시 자신을 향해 있었으니까.

-쫄보 새끼마냥 숨어서 지켜보지만 말고, 쳐 나와라 뒈지기 싫으면.

"저놈이 감히!!"

몰가스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린 시절부터 금이야 옥이야 키워졌던 몰가스였다.

몰가스의 부모는 그에게 마계 영약을 끝도 없이 퍼 먹여 주었고, 이를 통해 몰가스는 주제에 맞지도 않는 마왕 자리를 꿰찼다.

다른 마왕들은 몰가스를 향해 낙하산이라며 손가락질 했을 정도였다.

그러한 시절을 보낸 몰가스였기에 지닌 성격이 불안정했다.

커다란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은 시비에도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나아가, 강자에겐 지나치게 약했으며, 약자에겐 지나치게 강했다.

이로 인한 허세 때문인지 지천우에게 온갖 똥폼을 잡았을 정도였다.

"후우··· 진정하자. 나는 마왕이다. 나는 마왕이다. 나는 마···"

지금 몰가스는 간신히 정신을 잡고 있었다.

여전히 수정구 속 정인우가 도발을 해 온다.

-병신 쫄보 새끼. 듣고 있는 거 다 안다. 주둥이라는 게 달렸으면 대답해 보지?

갈수록 욕의 농도가 짙어진다.

이윽고 몰가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수정구를 통해 정인우에게 소통 마법을 시전했다.

그런 뒤 최대한의 위엄을 담아 말했다.

-어리석은 인간 놈. 목숨이 아깝지 않더냐?

이 정도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있지 않은 이상 쫄릴 수밖에 없을 거다.

-오호? 진짜 보고 있네? 반신반의 했는데 말이야.

겁을 먹은 것 같진 않았으나, 확실히 정인우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몰가스는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며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무게를 담아 천천히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놀랐느냐? 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괴수들의 왕이며, 몰가스 일족의 마왕이다! 그것이 바로 나다!

내가 이렇게나 대단한 존재다!

어떠냐! 이제 겁을 집어먹고 고개를 조아릴 테지!

몰가스는 그리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정인우의 대답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시끄럽고, 넌 내려오면 뒈질 줄 알아라.

-···뭐, 뭐라···?

-귓구멍 막혔냐? 뒈질 줄 알라고.

-······.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순간, 몰가스는 어찌나 황당했던지 그 어떤 대답도 내뱉지 못했다.

이윽고 한 박자 늦게 분노가 온 몸을 물들인다.

상위 마왕들에게 망신을 당해 본 적은 꽤나 많다.

하지만 일개 인간 따위에게 이러한 말을 들은 적은 결단코 없었다.

이윽고 몰가스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정인우우우우!!!!!!!!!

* * *

지천우에게서 나온 전리품은 생전 처음 보는 아이템들이었다.

이 아이템들은 모두 엄지만 한 원형 형태를 띄고 있었으며, 마치 과일처럼 생겼다.

수박처럼 줄무늬를 지닌 것도 있었고, 복숭아처럼 분홍빛을 지닌 것도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얼까?

인우는 이것들의 정보를 불러보았다.

[마계 근력 영약]

종류 ? 영약

등급 - +C

기능 ? 근력 스텟 상승

설명 ? 레벨 업만이 강해지는 길은 아니다.

[마계 스킬 경험치 영약]

종류 ? 영약

등급 - +C

기능 ? 스킬 경험치 상승

설명 ? 무작위로 선정된 한 가지 스킬의 경험치를 상승시켜 준다.

[마계 히든 스텟 영약]

종류 ? 영약

등급 - 無

기능 ? 숨겨진 스텟을 각성시켜 준다.

설명 ? 히든 스텟은 한계치가 존재하며, 그 한계점은 100이다.

마계 근력 영약 1개.

마계 스킬 영약 2개.

마계 히든 스텟 영약 1개.

영약들의 정보를 보자면, 그 효과는 명백했다.

이것들은 이를 테면, 굳이 레벨 업을 하지 않더라도 강해질 수 있는, 말 그대로 영약인 것이다.

인우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근력 영약부터 삼켜 보았다.

[근력이 40 증가했습니다.]

[근력 1,308+1550+10+350 => 근력 1,348+1550+10+350]

근력 40증가?

보아하니 일시적인 증가도 아니다.

영구적인 증가인 것 같았다.

근력의 순수 스텟인 맨 첫 번째 1,308이 1,348로 증가되었으니까.

40 스텟이라면, 보통 큰 게 아니다.

일반적인 초인 기준으로는 8개의 레벨 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양이었고, 인우의 기준으로는 4개의 레벨 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양이었으니까.

즉, 인우는 이 영약을 삼킴으로 인해서 4개의 레벨 업을 한 것이었다.

또한 영약의 등급이 알파벳순으로 나뉜 것 같았는데, 더 높은 등급의 영약은 이보다 더 큰 상승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얻은 영약들의 등급은 +C였다.

어느덧 인우는 한껏 고취된 기분을 느끼며, 다음으로 스킬 영약을 삼켜보았다.

그 즉시 인우의 스킬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정되었고, 스킬 경험치가 올랐다.

['아이스 볼' 스킬의 경험치를 4,000 획득하였습니다.]

4천이라.

스킬을 한 번 시전할 때에 '1'의 경험치를 획득하니, 확실히 파격적인 영약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인우의 경우 프로킨에서 숨 쉬고 걷기만 해도 1분도 되지 않아 획득하는 경험치였다.

다시 말해, 인우에게는 전혀 의미 없는 영약이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 바꿔 보면 어떨까?

만일 이 영약을 알렉산더나 민철이에게 준다면?

그리 된다면 녀석들은 4,000번 시전해야 얻을 수 있는 스킬 경험치를 단숨에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녀석들에게 있어서 꿈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마침 스킬 영약이 2개 나와 주어서 1개가 남은 상황이었다.

이 한 개는 민철이에게 줄 생각을 했다.

벌써부터 녀석이 잔뜩 흥분한 채 '형님!!!'하고 외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생각을 마친 인우는 어느덧 마지막으로 남은 히든 스텟 영약을 바라보았다.

0176 / 0208 ----------------------------------------------

176화 마왕들의 내기

히든 스텟 영약을 삼켰다.

[히든 스텟 '괴력'이 생성되었습니다.]

[괴력 ? 괴상할 정도로 뛰어나게 센 힘.]

말 그대로 숨겨져 있던, 생전 처음 보는 스텟이 생성되었다.

설명을 보건대, 아마도 근력의 상급 스텟인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근력 대신 괴력에 스텟을 모조리 투자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든 스텟은 한계점이 100이라고 명시되어 있었기에 무한정 투자할 수 없는 스텟이다. 무엇이 되었건, 이 100은 무조건 챙기는 것이 합당할 터.

인우는 자신의 상태창을 불러보았다.

<정인우>

레벨 : 559

특성 : 광전사

스텟 : [근력 1,348+1,550+10+350] [민첩 1,003+1,240+250] [마력 772+170+250] [체력 967+680+10+150]

*히든 스텟 : [괴력 1]

미분배 포인트 : 70

[EXP 244,800,255 / 259,000,000]

정보를 보니 '히든 스텟'이 새로이 갱신되었고, 괴력의 수치는 1이었다.

현재 인우는 지천우를 잡으며 7개의 레벨 업을 했기에 70개의 보너스 스텟을 가지고 있었다.

볼 것도 없이 이 70개를 모조리 괴력에 투자했다.

이에 따라 괴력 스텟은 71이 되었고, 확실히 근력을 찍었을 때보다 확연히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즈음 되니, 히든 스텟의 한계점이 100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로서 인우가 취할 수 있는 지천우의 전리품은 모조리 다 챙겼다.

이제 남은 것은 지천우의 육체.

다시 말해, 그 육체 안에 담겨 있는 피였다.

이 피 또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상당한 경험치를 지닌 녀석이었기에, 이 피는 퀸에게 커다란 경험치를 안겨 줄 가능성이 높았다.

인우는 지천우의 시체를 아공간에 챙겼다.

그런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인우가 들어선 이곳은 헬게이트다.

지천우를 잡으며 10배의 효과를 받기 위해 입장했었다.

우선 이곳을 빠르게 클리어하고 프로킨으로 복귀할 참이었다.

* * *

마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마왕성.

이중 한곳에 3명의 마왕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몰가스보다 순위가 높은 마왕들이었다.

아니, 그 어떤 마왕이라도 몰가스보다 낮을 수 없었다.

몰가스는 마왕들 중에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몰가스 그놈은 여전히 인간들의 행성에 관심을 갖고 있던데."

"약해 빠졌으니, 그런 곳에서라도 무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거겠지. 이해는 돼."

이들은 몰가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현재 몰가스가 행하고 있는 뻘짓은 마계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우스운 짓거리라서,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본인의 지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숭이 우리로 들어가 그것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과 같았다.

인간이 원숭이들을 지배한다고 해서 그 욕구가 충족될 리 없지 않은가?

동등한 위치에 놓인, 이를 테면 마족은 마족들을, 인간은 인간들을, 그렇게 지배해야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몰가스를 제외한 모든 마왕들은 그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몰가스가 하는 짓이 '뻘짓'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3명의 마왕들은, 보기 드물게 몰가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마왕들이기도 했다.

그들로서는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형편없는 몰가스와, 형편없는 하위 행성의 인간들.

그 둘 중, 누가 승리하게 될 것인가?

이것은 생각보다 박진감 넘치는 유흥거리였다.

어느덧 3명의 마왕 중, 2명의 남자 마왕이 한마디씩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몰가스가 제대로 한 방 먹은 것 같던데 말이야."

"나도 들었어. 드래곤들을 치기 위해 인간 하나를 밀어주고 있었는데, 그곳 땅에 존재하는 최강자라는 황제 놈이 초를 쳤다더군."

"솔직히 듣고 쉽사리 믿기지 않더군. 몰가스가 밀어주던 인간 녀석은, 마족으로 각성까지 끝내고 500레벨을 넘었다던데. 그 정도라면 마계의 마족 중에서도 중급 병사에 속할 정도의 무력이란 말이야. 그런데 거기에 초를 친 인간이 나타나다니. 그놈 이름이 아마······."

그때.

3명의 마왕 중, 유일한 여자 마왕이 처음으로 입술을 열었다.

"정인우. 그 인간 놈 이름은 정인우야."

"오오. 그레모리. 네가 인간의 이름까지 외워 두고. 꽤나 관심이 가나 봐?"

"그럴 리가."

딱 잘라 말하는 그레모리는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잽싸게 화제 전환을 위해 다른 두 남자 마왕들을 보며 말했다.

"단탈리안. 벨리알.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몰가스가 미개한 인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 물음에 단탈리안과 벨리알은 한참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녀석들은 차례로 입을 열었다.

"사실 생각할 것도 없다. 몰가스가 제아무리 별 볼일 없는 녀석이라도, 마왕은 마왕이다. 고작 하위 행성을 지배하지 못할 리 없지."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정인우라는 인간 놈이 까불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래 봐야 인간 세계 기준으로 최강자일 뿐이니까."

두 마왕의 말에 그레모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단탈리안과 벨리알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레모리 네 생각은 어떤데?"

그 물음에 그레모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단탈리안이 보챘다.

"빨리 말해 봐. 나는 네 생각이 궁금한데?"

그제야 그레모리는 미소를 거두고 제법 진중한 얼굴로 무언가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내기 한 판 할래?"

"내기?"

"그래 내기. '몰가스가 인간계를 지배한다.', '지배하지 못하고 정인우에게 저지당한다.' 이 두 가지를 두고 말이야."

"뭐, 내기라면 환영이다. 그럼, 무얼 걸고 하지?"

"마왕성의 최상급 아티펙트를 걸고 하자."

"잠깐! 그건 너무 세지 않아?"

이 여자가 미쳤나?

단탈리안은 질색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본인들의 마왕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티펙트들.

그리고 그 중 최상급 아티펙트는 열 개도 되지 않을 만큼 그 숫자가 현저히 적다.

게다가 이것들은 기존 인간계에 뿌려진 아이템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야말로 오버밸런스의 시초이자 조상인 아이템인 것이다.

그만큼 귀중한 아이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탈리안의 질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레모리가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나는 지배하지 못한다에 걸 거야."

저런 멍청한 여자를 보았나?

순간 단탈리안과 벨리알은 표정관리를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써야만 했다.

지배하지 못한다.

즉, 몰가스가 패배한다에 걸겠다는 거 아닌가?

다른 말로 인간계의 최강자 정인우를 믿어 보겠다는 말인데, 그들로서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없었다.

정인우는 그저 인간계의 최강자일 뿐이다.

마왕과는 애초에 번지수가 다른 것이다.

그 마왕이 제아무리 최하위인 몰가스라 해도 말이다.

어느덧 단탈리안과 벨리알은 피어나는 미소를 간신히 감추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흠! 최상급 아티펙트 하나 가지고 되겠어? 최상급 무구도 하나 더 걸자고! 나는 몰가스에게 건다!"

"나 또한 몰가스에게 건다!"

그렇게, 단탈리안과 벨리알은 몰가스에게 최상급 아티펙트와 무구를 걸었다.

그리고 그레모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정인우에게 최상급 아티펙트와 무구를 걸었다.

이윽고 그레모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빠른 진행을 위해 인간계에 마기를 뿌리는 게 어때?"

현재 몰가스는 현신을 위해 헬게이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헬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무척이나 적은 양이어서, 몰가스는 현신을 미루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레모리와 단탈리안, 벨리알 이 세 명의 마왕이 마기 방출을 돕는다면, 몰가스는 당장에 현신을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금세 결과가 나올 것이다.

* * *

"이놈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몰가스는 영문을 알 수 없는지,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인우의 도발을 참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지구로 현신해 봐야 자신의 힘을 100% 발휘할 수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마기가 부족했으니까!

그랬기에 당장에 놈의 목을 따 버리고 싶었음에도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난데없이 상위의 마왕 세 녀석이 자신을 돕고 있었다.

아주 미친 듯이 날뛰어 보라며 지구와 프로킨에 마기를 듬뿍 뿌려 버린 것이다.

혼자 끙끙 싸맬 때는 그리도 쌓이지 않던 마기이건만······.

상위의 마왕 세 명이 손을 쓰니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마기가 가득 찼다.

"하아··· 이거야 뭐, 실감이 잘 안 나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홀로 끙끙 앓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당장이라도 지구로 현신할 수 있다.

드래곤?

아직 많이 남아 있겠지만, 뭐 상관없다.

다 죽여 버릴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인간 놈. 정인우.

뿌득.

몰가스는 이를 갈았다.

가장 먼저 그 새끼부터 사지를 절단시켜 불구덩이 속에 넣어 버릴 참이었다.

마계에 존재하는 온갖 고문 형벌을 가하며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어 줄 것이다.

벌써부터 놈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자신의 앞에서 질질 짜는 모습이 떠올랐다.

"으아아아아아! 듣거라! 지금 당장 마왕성의 군단을 모집해라! 인간계로 간다!"

몰가스는 제 가슴을 쾅쾅 쳐 대며 성난 외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 * *

프로킨으로 복귀한 인우는 민철이를 따로 불렀다.

"김민철. 이거 받아라."

인우가 민철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척.

민철은 본능적으로 인우가 던져 준 두 개의 아이템을 받아들었다.

"형님. 이건 뭡니까?"

살이 빠진 민철의 목소리는 확실히 전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특유의 톤은 여전하다.

정감 가는 높은 톤이랄까? 도무지 밉지 않은 녀석이다.

인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보를 열어 봐."

그러자 민철은 두 아이템의 정보를 불러보았다.

<수련의 목걸이>, <마계 스킬 경험치 영약>

확인을 끝마친 민철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이건 대체!?"

"목걸이는 지은이랑 알렉산더와 알아서 조율해서 사용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민철은 스킬 경험치를 +3이나 더 주는 수련의 목걸이부터 착용했다.

시험 삼아 허공에 아무 스킬이나 시전 해 보았다.

['대검 막기'의 스킬 경험치를 4 획득하였습니다.]

맙소사.

이런 미친 아티펙트를 보았나?

현재 민철은 그렇지 않아도 헬게이트 파괴자의 기연 팔찌를 통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데, 스킬의 경험치까지 빠르게 올려주는 아티펙트까지 착용하게 된 것이다.

"형님!! 이렇게 엄청난 걸 저한테 주셔도 되는 겁니까!! 하. 정말!"

'가족 중에 네가 가장 약하니 주는 거다.'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인우였다.

만일 알렉산더가 가장 약했다면 그에게 주었을 것이고, 지은이었다면 그녀에게 주었을 것이다.

"영약도 먹어 봐."

그제야 민철은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영약을 바라보았다.

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영약은 무엇일까?

민철은 영약을 삼켜보았다.

그 즉시 민철의 스킬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정되었고, 스킬의 경험치가 올랐다.

['대검 가르기'의 스킬 경험치를 4,000 획득하였습니다.]

['대검 가르기'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대검 가르기'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

.

이건 사기다.

민철은 전율로 인해 부르르 떨리는 몸을 간신히 가눴다.

그리고 전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인우가 내뱉은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마왕을 도발했으니, 조만간 또 다시 영약을 구할 수 있을 거다."

"넵? 방금 뭐라고 하신··· 음? 제가 잘못 들었나요··· 형님?"

오늘도 민철은 인우의 앞에서 멍청한 얼굴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0177 / 0208 ----------------------------------------------

177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케륵! 케륵!

지구의 어느 한 사냥터 1존.

이곳에 있는 고블린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검은 연기와 같은 기운이 그득히 퍼지기 시작한 직후부터였다.

-케륵! 케륵!

고블린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널브러진 짱돌을 주웠다.

양손에 힘을 준다.

까드득!

그러자 돌덩이가 사과 쪼개지듯 두 쪽이 났다.

상당한 괴력.

본래 고블린의 괴력은 이 정도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모든 괴수들에게 적용되었다.

검은 기운이 가득차자 더욱 강한 힘을 머금게 된 것이다.

검은 기운.

그것의 정체는 바로 마기였다.

괴수들에게 있어서 마기란, 지구의 공기와 같았다.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또한 이 마기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괴수들은 더욱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그러한 마기가 세 명의 마왕들로 인해 인간계를 뒤덮은 것이다.

몰가스의 빠른 현신을 위한 안배였는데, 이로 인해 인간계에 존재하는 괴수들까지 보다 더 강한 힘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윽고.

지구를 뒤덮은 마기는 서서히 프로킨까지 마수를 뻗쳐 가고 있었다.

* * *

"형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왕을 도발했다니요?"

민철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약을 받아먹은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지금 인우가 마왕을 도발했으니 이 영약을 또 다시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민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왕.

마왕이라 하면, 신화나 소설 속에서나 접해 보았던 마계의 왕.

괴수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악마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악의 절대자.

그런 존재를 두고 보통 마왕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단어가 인우의 입에서 튀어나올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자세히 좀 알려 주십시오. 형님."

설명을 요구하는 민철.

그즈음, 하늘 위에서 소통 마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일린이 나섰다.

그녀는 소통 마법을 사용하여 민철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 말 그대로다. 정인우는 마왕을 도발했고, 마왕은 크게 노했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든 정인우를 죽이기 위해 현신할 거야.

"뭐, 뭐지. 어디서 목소리가 들렸는데? 도대체 누가!?"

-위를 봐라 인간. 나는 골드 드래곤 에일린이다. 드래곤들을 이끄는 로드지.

"헐······."

그대로 고개를 위로 들어보았던 민철은 벙찌고야 말았다.

프로킨에 드래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드래곤이, 그것도 드래곤들의 왕이 자신의 위에 서 있다니.

황금색으로 빛나는 로드는 그 어떤 드래곤보다 아름답고 위엄이 넘쳤다.

"······."

게다가 상황을 보건대 로드가 인우에게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는 건, 설마 인우가 드래곤 로드를 다스리기라도 했다는 건가?

설마 싶었던 그 마음이 확신으로 굳어지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음 순간 들려온 인우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저년 말대로야."

"저···년···이라니요 형님······. 골드 드래곤 로드님에게··· 그 무슨."

민철은 쩔쩔매기 시작했다.

공중에 날아올라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로드가 당장이라도 브레스를 뿜어 댈 것만 같았으니까.

그 정도로 불안했다.

그간 많이도 강해진 민철이었지만, 이렇듯 인우의 앞에만 서면 늘 바보 같은 말을 내뱉게 된다. 인우는 그 정도로 상식 밖의 모습과 행동을 보였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야. 정신 사납게 파리처럼 날아다니지 말고 내려와."

"혀, 형님!!"

인우의 막말에 민철은 땀을 뻘뻘 흘리며 속삭이듯 외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우가 다시금 외쳤다.

"두 번 말 안 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우우우우웅-

공중에 떠 있던 에일린은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기 시작했다.

금세 조그맣게 변한 그녀가 인우의 옆에 섰다.

그 말 같지도 않은 모습에 민철은 입을 쩍 하고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인우가 로드에게 명령을 한 건가?

어느덧 민철은 제 볼을 꼬집기 시작했다.

좀 전, 스킬 경험치 영약을 먹었을 때도 현실감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아악···!"

꼬집힌 볼은 아팠다.

이와 동시에 민철은 다시 한 번 인우를 바라보았다.

이젠 도저히 인우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

* * *

언제부터였을까?

에일린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무언가가 꿀렁꿀렁대며 대기를 가득 매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기분 나쁜 기운은 심지어 육안으로 확인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 기운은 그녀만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우와 민철이라는 남자는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이게 도대체 무얼까?

고민도 잠시.

에일린은 불현듯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마기···?'

그래 이것은 마기였다.

대기 중에는 본래부터 마기가 존재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 농도부터가 질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결단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마기의 농도가 짙어진다는 건, 그만큼 괴수들이 강해진다는 것을 뜻했으니까.

마기에 영향을 받는 괴수들은 모조리 강해지는 것이다.

그 말은 즉, 마왕이 인간계로 현신을 해도 100%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정인우!"

"뭐야?"

민철과 대화를 나누던 인우가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이 말했다.

"네가 마왕을 도발했던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정말로 마왕이 현신을 준비하고 있어. 이제 어쩔 거지?"

"확실해?"

"그래. 지금 마기의 농도가 엄청나게 짙어졌어. 이 정도의 농도라면, 기존 고블린이 오우거 정도로 강해질 정도일 거야."

인우는 에일린의 말이 끝까지 귀에 꽂히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으니까.

놈이 정말로 오는 것이다.

녀석은 강할까?

강하다면 어느 정도일까?

이제 인우는 인간계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생명체라도 1분 안에 제압할 정도의 무력을 지녔다.

그렇게나 강력한 인우였기에, 갈증이 컸다.

이젠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그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해 본 지가 언제인가.

정말로 까마득하다.

이제, 웬만한 생명체는 냅다 무형검만 꽂아도 원킬이다.

그것은 통쾌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큰 허무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제발, 나를 즐겁게 해 줘라."

인우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다가 인우는 무언가 하나를 깨달았다.

가만, 에일린이 분명 마기가 짙어지면 괴수들이 강해진다고 했다.

"잠깐. 지금 이 마기의 농도로 인해, 괴수들이 얼마나 강해지지?"

"많이. 그것도 엄청 많이."

"오호?"

별안간 녀석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루시 퀸과 제라.

그 둘 또한 분명 괴수였다.

* * *

"아앙!"

난데없이 퀸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응? 왜 그러냐. 퀸."

제라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그럼에도 퀸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간간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 뿐.

갑자기 자신의 몸을 비집고 들어선 기운은 뜨겁게 육체를 달구며 입조차 뗄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

"으흥······."

퀸은 계속 신음과 함께 몸을 꼬며 당황스러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퀸과 제라가 머물고 있던 궁 객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벌어진 문 사이로 인우와 민철, 그리고 에일린이 보였다.

인우의 시선이 단숨에 퀸과 제라쪽으로 꽂혔다.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지금 퀸을 보자면, 풍기는 기운이 기존보다 몇 배 이상 늘어났을 정도였다.

원래부터 드래곤의 피로 엄청난 레벨 업을 했던 그녀다.

그런데 지금 마기로 인해 확연히 더 강해진 것이었다.

"당황하지 마 퀸."

인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퀸을 불렀다.

그런 뒤 단숨에 그녀에게로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럼에도 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인우를 알아보고 본능적으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주···인님!"

"괜찮아. 이건 너에게 더 좋은 거니까."

괜찮아.

그 한마디에 퀸은 요동치던 가슴이 진정됨을 느꼈다.

아니, 인우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정감이 생겼다.

이윽고 차차 정신을 차리던 퀸.

하지만 그 안정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별안간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루비처럼 번뜩이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후우."

퀸은 가빠진 호흡에 괴로운 얼굴이었다.

그렇게, 난데없이 짙어진 마기에 적응하기 위해, 퀸은 한참동안이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하아."

퀸이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인님. 이게 도대체···?"

되먹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우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우는 대답 대신 슬쩍 웃음 짓고는 이번엔 제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에 제라가 반응했다.

"인간. 퀸은 왜 갑자기 저랬던 거냐? 응?"

"넌 뭐 변화 같은 거 없어?"

인우가 물었다.

그러자 제라가 머리를 긁적인다.

"변화? 무슨 변화를 말하는 거냐?"

"짙어진 마기로 인해 강해졌다거나, 하는 그런 것 말이야."

"짙어져? 마기가? 어려운 말 쓰지 마라. 아무튼 나더러 강해졌냐고 묻는 거지? 없다. 그런 거.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제라의 궁금증에 인우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퀸 또한 난데없이 강해진 육체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테니 설명은 꼭 필요했다.

그렇게 인우는 퀸과 제라에게 모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렇게 된 거지. 근데 제라 너는 아무 변화도 없다니. 음."

아무래도 녀석은 오리지널 괴수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놈은 어찌되었건 오크와 인간의 혼종인 블랙오크다.

이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설명을 끝마쳤을 즈음.

제라는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그러다가 녀석은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왜! 왜 나만! 나도 퀸처럼 괴수다! 괴수다고!"

녀석은 어찌나 울화통이 터졌는지 '라고'를 '다고'라고 발음해 놓고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강해지고 싶다고! 으아! 왜! 왜! 왜 나는! 나도 강해지게 해 주라!"

제라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동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났고, 금세 기세가 꺾인 제라가 풀죽은 음성으로 중얼댔다.

"인간··· 그냥 아공간이나 열어 줘라. 난··· 거기가 어울리는 오크인가 보다······."

* * *

몰가스는 본인의 마계 군단을 이끌고 인간계로 현신했다.

그의 발길이 닿아 있는 곳은 바로 프로킨.

정확히 말해 정인우가 머물고 있는 왕성이었다.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몰가스는 거친 콧김을 뿜으며 선두에 선 채로 진격해 나갔다.

이윽고 도착한 왕성 입구.

왕성은 조용했다.

한데, 자세히 보니 왕성 입구에 정인우가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해 정인우와 똑같이 생긴 8명의 분신이 보였다.

녀석들은 몰가스를 발견하자마자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다.

몰가스는 한동안 벙쪄 있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불같은 외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정인우우우우우!! 썩 나와라!! 내 친히 너를 죽이기 위해 현신했도다!!"

그리고 그때.

손을 흔들던 분신들 중, 왼쪽 끝 편에 있던 분신이 입을 열었다.

"네가 마왕이지? 어서 와. 대장이. 기다리고. 있어."

"······."

어라?

뭐가 저렇게 살갑지?

이게 아닌데······.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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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낙장불입 (1)

"드디어 결전인가."

단탈리안이 수정구를 들여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벨리알과 그레모리도 보였다.

이 세 명의 마왕은 내기를 했었고, 빠른 진행을 위해 인간계에 마기까지 뿌렸을 정도였다.

도박이 이렇게나 무섭다.

'후우.'

단탈리안은 속으로 긴 숨을 내쉬며 흥건해진 손바닥을 말리기 위해 손을 쫙 폈다.

이게 몇 백 년 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인지.

자그마치 마왕성의 최상급 아티펙트와 무구가 걸린 내기였다.

쫄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마왕인 몰가스에게 걸었기에 그 쫄림이 조금은 덜했다.

벨리알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그랬기에 더더욱 의문이었다.

'그레모리.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인우에게 건 거지?'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일까?

단탈리안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하게 수정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나 걱정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혹시, 저것은 그저 포커페이스일까?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이러나저러나 그녀는 이번 내기에서 필패할 것이다.

이윽고 단탈리안은 못을 박기 위해 그레모리를 향해 말했다.

"이제 시작이군. 그레모리. 낙장불입인 건 알지?"

그 말에 그레모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이제는 정말 낙장불입이겠지."

단탈리안, 벨리알, 그레모리.

나아가, 몰가스와 정인우에게도.

이제는 모두가 낙장불입이었다.

결과는 반드시 나올 테고, 이로 인한 패자가 반드시 발생할 것이다.

그레모리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 * *

분신들을 세워 놓고 몰가스를 기다리던 인우.

그는 지금 연무장을 빠르게 돌며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지쳐서가 아니다.

인위적으로 숨을 빠르게 내쉬는 거였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1. [내려찍기 Master Lv.98 (99%)] - 양손 무기 장착 시 사용 가능. 거대한 검이나 도끼를 양손으로 틀어쥐고, 장작을 패듯 미친 듯이 내려찍습니다.

.

.

.

내려찍기를 포함한 25개 스킬의 고지가 코앞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벼락치기였다.

마침 절반가량의 스킬 레벨이 99+98이었고, 여기에서 레벨 업을 하게 되면 어찌 될지 꽤나 궁금했던 것이다.

스킬은 기존 1레벨에서 마스터 레벨이 될 때 강력한 변화를 갖게 된다.

파이어 볼의 색깔이 붉은 색에서 고열의 투명한 색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98과 마스터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마스터의 마스터는 어떨까?

도대체 어떠한 변화를 가지고 올까?

그것이 궁금했다.

"하아! 하아! 하아!"

인우는 여전히 달렸다.

빌어먹을 경험치가 1%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꽤나 오래 걸린다.

마치 배고픈 점심시간에 탕수육 배달을 기다리는 것처럼, 시간은 꽤나 더디게 흘렀다.

그럼에도 마지막의 마지막이니 혼신의 힘을 다해 인내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오래지않아 결과물이 나타났다.

['내려찍기'의 레벨이 'Legend Master'에 도달했습니다.]

['대검관통'의 레벨이 'Legend Master'에 도달했습니다.]

.

.

.

['힐'의 레벨이 'Legend Master'에 도달했습니다.]

['헬 파이어'의 레벨이 'Legend Master'에 도달했습니다.]

마침내 도달했다.

내려찍기를 포함한 25개 스킬의 레벨이 차례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숨을 내쉬고 달려 댔으니, 거의 1초당 300~400의 스킬 경험치를 획득했을 거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되먹지 못한 사기적인 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를 통해 드디어 이루었다.

스킬 레벨의 끝을 말이다.

99+99의 경지는 'Legend Master'였다.

현재 인우의 스킬은 도합 50개였고, 3개의 히든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레전드 마스터에 도달할 수 있는 스킬은 47가지.

이 중, 25개의 스킬이 먼저 레전드 마스터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나머지 스킬들도 차츰차츰 레전드 마스터에 닿을 것이다.

"후우."

인우는 천천히 드래곤 본 대검을 움켜쥐기 시작했다.

레전드 마스터의 스킬을 사용해 보기 위해서였다.

어떠한 변화가 있을까?

기대를 품고 있던 그때.

연무장 바깥에서 익숙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마왕이 왔다! 나 빼고 다른 형제들이. 모두. 무릎 꿇었어!"

팔이의 외침이었다.

마왕이 왕궁에 도착하면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전해 두었는데, 마왕은 그러한 분신들을 모조리 요절 낸 것 같았다.

"그놈 자식. 성깔 한번 더럽네."

누가 누구더러 더럽다는 건지.

인우는, 본인에 비하면 마왕 몰가스의 성격이 양반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이윽고 인우는 씨익 웃으며 검을 거뒀다. 그런 뒤 연무장을 나서기 시작했다.

제발 그 녀석이 자신과 피 끓는 혈투를 벌일 정도의 무력을 지녔으면 좋겠다.

바람은 오로지 그거 하나뿐이었다.

* * *

왕궁의 입구.

화원과 분수대가 딸려 있는 거대한 정원.

이곳에 마기를 풀풀 날리는 마족들이 보였다.

이들은 하나 같이 궁의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곳에는 인우와 알렉산더가 보였다.

인우가 마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몰가스가 누구냐?"

"놈! 마왕님 앞에서 격식을 차려라!"

인우의 도발적인 어조에, 마계 병사 한 녀석이 불같은 노호를 터트렸다.

그러자, 인우의 옆에 석상마냥 시립해 있던 알렉산더가 나섰다.

"네놈들이야 말로 프로킨의 황제 폐하 앞에서 격식을 차리도록."

알렉산더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가만 보니, 생김새만큼은 알렉산더가 더 무섭게 생겼다.

마족들이야 그저 창백한 얼굴에 푸른 입술을 지녔기에 이질적인 생김새라고 볼 수 있었으나, 알렉산더는 온몸에 가득한 화상자국으로 인해 무척이나 위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물러서 있어. 알렉산더."

"예. 폐하."

인우가 명을 내리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상대 마족 진영에서도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터벅- 터벅-

다른 마족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이었다.

몸매 자체는 키에 비해 호리호리했는데, 전체적인 육체의 형상이 꼭 여자 배구선수를 보는 것 같았다.

또한 어깨에 비해 매우 큰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굳이 사물에 비유 하자면 망치 같았다.

이 녀석이 바로 몰가스였다.

"정인우. 감히 나를 도발해? 나는 마계의 위대한 존재인 마왕. 각오는 되어 있겠지?"

"어떻게 생겼나 꽤나 궁금했었는데. 거대한 멸치 대가리였네."

"······."

거대한 멸치 대가리.

그 도발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어떤 인간이 감히 마왕에게 저따위 막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건방진···!"

아니나 다를까, 몰가스는 부들부들 떨며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정인우를 수십 갈래로 찢어 버릴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우가 물었다.

이번에는 매우 진중한 어조였다.

"농담은 이쯤 해 두고. 하나만 묻자. 마계에는 마왕이 많다던데······."

거기까지 말한 인우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돌연 익살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들 모두 너처럼 머리통이 크냐?"

"이노옴!!"

마왕은 턱이 날아갈 듯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자 인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검을 창처럼 꼬나 쥐었다.

그런 뒤 레전드 마스터 레벨의 대검관통을 사용했다.

파드드드드득!

인우의 육체가 단숨에 폭발적인 추진력을 머금고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왔다.

그 속력과 파괴력이 기존보다 훨씬 더 강할 정도여서, 인우는 순간 헉 소리를 낼 뻔했다.

하긴.

레전드 마스터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다만 한 가지 불만인 것은, 되먹지 못할 정도의 추진력 때문인지 컨트롤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방향을 한번 정하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였다.

현재 인우의 근력 스텟이 3,200가량이었는데, 이 수치로도 컨트롤이 안 될 정도면 말 다했다.

지금 이 대검관통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선 적어도 근력 스텟이 4,000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파바바바바밧!

주변의 풍경이 쏜살같이 뒤바뀌며 귓가에 태풍이 몰아치는 듯하다.

땅거죽이 종잇장 찢기듯 갈리며 인우는 단숨에 몰가스의 지척에 닿았다.

그야말로 일직선으로 몰아치는 일섬과 같은 공격이었다.

"차앗!"

그러나 몰가스는 날아드는 인우의 대검을 피했다.

어떠한 거짓 없이 올곧게 다가오는 공격인데, 마왕씩이나 되어서 피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쐐애애애애액!

졸지에 인우의 대검은 애꿎은 마계 병사 한 놈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카득!

두 쪽 난 머리통을 비집고 피와 뇌수가 튀었다.

컨트롤만 가능했다면 이 타격에 당한 것은 몰가스였을 것이다.

확실히 레전드 마스터 스킬이 강하긴 했으나,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강해서 문제였다.

인우의 능력으로도 감당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인우는 곧바로 눈을 부릅뜨고 사라진 몰가스를 쫓았다.

몰가스는 인우의 뒤편에서 양손을 모은 채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크라아아아!"

거친 기합과 함께 몰가스의 손바닥에서 직경 5미터 가량의 거대한 구체가 뽑혀져 나왔다.

구체에서 풍기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다.

어느덧 새카맣게 물든 구체는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인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후아아아아앙!

커도 너무 크다.

이 거리에서 피하는 건 무리라 판단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인우는 볼 것도 없이 육체강화를 몸에 둘렀다.

쩌엉!

레전드 마스터의 육체 강화는 인우의 몸을 드래곤 비늘처럼 단단하게 해주었다.

이와 동시에 인우는 대검을 가슴께에 댔다.

쩌어엉!

그러자 대검 막기가 발동되었다.

이어서 인우는 쉴드까지 시전했다.

투웅!

도합 3개의 방어막.

이와 동시에 거대한 구체가 인우의 육체를 덮쳤다.

퍼어어어어엉!

귓가가 멍해질 정도의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시야는 온통 흙빛이다.

그 속에서 인우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양손으로 짚으며 서 있었다.

이윽고······.

"그거 가지고 되겠냐?"

흙먼지 속 인우가 이죽댔다.

울컥.

그러나, 강력한 내상을 입은 것인지 인우의 입가에 굵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력한 3중첩 쉴드가 뚫리며 제대로 한방 먹은 것이다.

마왕 몰가스는 확실히 강했다.

인우는 왼손으로 입가에 피를 닦으며 대검을 고쳐 잡았다.

오랜만에 피가 끓는다.

인우의 눈동자에서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의 투지였다.

* * *

"저, 저게 말이 돼!?"

단탈리안이 눈을 크게 뜬 채 놀라워하고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벨리알 또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 눈만 끔뻑대고 있었다.

정인우가 몰가스의 공격에서도 비교적 무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몰가스가 사용한 스킬은 녀석의 주력기인 마기 태풍.

마기 태풍의 위력은 결코 인간 따위가 맞고서 버틸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설령 드래곤 로드라 해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것은 다시 말해 인간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명체도 버틸 수 없는 공격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정인우는 버텼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마기 태풍은, 마왕의 육체에 들끓는 마기를 응축시켜 발사하는 공격이다.

되먹지 못할 정도의 에너지가 응축된 만큼, 그것은 태풍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쉽게 표현해보자면, 인간계를 덮치는 자연재해가 저 작은 구체안에 응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레모리······!"

이윽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그레모리는 여전히 수정구를 들여다보며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꼴을 보자 그제야 뒤늦게 분노가 몰아친다.

단탈리안이 외쳤다.

"그레모리! 너는 알고 있었지!? 저 인간 녀석이 저렇게 강하다는 것을?"

그래야만 말이 된다.

애초에 내기를 먼저 제안했던 것도 그녀다.

늘 얌전했던 그녀가 어째서 먼저 내기를 제안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나아가, 무슨 자신감으로 정인우가 이긴다는 것에 아티펙트와 무구를 걸었는지도.

그래,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이익! 그레모리! 대답해라! 넌 이미 알고 있었지?"

그제야 그레모리는 수정구에서 시선을 뗐다.

그러더니 공허한 눈동자로 단탈리안과 벨리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낙장불입. 단탈리안 네가 네 입으로 분명 말했잖아."

"······."

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분명 그랬으니까.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나!

그때, 그레모리가 수정구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곧 결과가 나올 것 같네."

말을 마친 그레모리의 눈이 곱게 휘었다.

그녀가 기분이 좋을 때나 짓는 눈웃음이었다.

평소에는 참으로 예쁜 웃음이라고 생각했건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뺨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미소였다.

이윽고 그레모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만약 정인우가 몰가스를 이긴다면, 지난 수십만 년간 굳혀져 왔던 마계의 역사가 뒤바뀌겠는데?"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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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낙장불입 (2)

마계의 율법은 간단하다.

약육강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내리누르고 마왕이 된다.

다시 말해, 마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거다.

그보다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난다면, 마왕의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즉.

마왕을 죽이면 마왕이 된다.

이것은 그간 단 한 순간도 변치 않아 왔던 마계의 법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떨까?

그 마왕을 죽이는 존재가 만약 인간이라면?

그렇다면 인간이 마왕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세세한 관련 법규는 존재치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태껏 마왕의 자리를 꿰찼던 존재들은 모조리 마족들뿐이었으니까.

인간이 마왕과 대등하게 싸울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인우. 네가 지난 수십만 년간 유지되어 왔던 마계 역사에, 칼을 쑤셔 박을 수 있을까?'

몰가스와 정인우의 전투가 극에 달할수록, 그레모리 또한 손바닥이 흥건히 젖기 시작했다.

또한, 벌써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정인우가 몰가스의 목을 따 버린다면, 마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마왕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나아가, 마계 서열 1위이며, 현재 마신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고 있는 '바알'은 정인우를 인정할까?

* * *

두근. 두근.

빠르게 뛰는 맥박이 귓가를 울렸고,

움켜쥔 해머의 손잡이는 흐르는 핏물로 인해 끈적거렸다.

쿠훕.

무언가 비릿한 것이 울컥하고 치밀어 오른다.

몰가스는 간신히 그것을 찍어 누르고 눈알에 힘을 줬다.

"크아아아아압!"

"크윽!"

카아아아앙-!

저 빌어먹을 인간 녀석은 끝도 없이 공격을 가해 오고 있었다.

왜 저 인간 놈은 지치지 않는 거지?

하아. 하아.

숨결이 거칠어진다.

이윽고 생각의 회로가 굳어 가며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카아아앙-!

몰가스는 해머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고서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다.

후웅! 후웅!

그럴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질러 댔다.

체내의 마기를 물 퍼붓듯 사용해 댔으니, 이제는 온전히 육체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거였다.

몰가스의 육체는 마왕답게 레벨과 영약으로 인해 강화되어 있기에 망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해머를 휘두르다 진즉에 근육이 찢어지고 주저앉았을 테지.

"흐아압!"

후우우우우웅!

정인우의 대검은 쉴 틈 없이 몰가스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카드드드득!

한껏 무게가 실린 대검이 뱀처럼 교활하게 몸을 비틀며 빈틈을 헤집었다.

저러다가 한 번씩 보이지 않는 칼을 쏘아 댔는데, 그럴 때마다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정수리 끝까지 차올랐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그리 할 수 없었다.

뒤돌아 버리는 순간.

정인우의 검은 반드시 자신의 목을 쳐 낼 것이었으니까.

이제는 낙장불입인 것이다.

몰가스는 잔뜩 잠겨 버린 성대로 쥐어짜내듯 고함을 내질렀다.

"이노오오오옴!! 보잘 것 없는 인간주제에!"

"······."

대답 대신 날아든 것은 빌어먹을 헬파이어였다.

파바바바밧!

"으아아아아!!!"

도대체 몇 레벨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헬파이어는, 몰가스의 살가죽을 끓는 죽처럼 부글부글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이윽고 몰가스는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로 정인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인간 놈은 괴물이라도 되는 건가?

하다못해 지쳐 있는 티도 나지 않았다.

* * *

상대와의 실력이 비슷할 경우.

이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허세였다.

이를테면, 맞아도 아프지 않은 척.

힘들어도 지치지 않은 척.

아직도 체력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는 척.

여유가 있는 척.

이러한 허세가 가장 중요하다.

이를 통해 상대가 자신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괴물로 느끼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승패가 기운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력 싸움이라 볼 수 있었다.

싸움이란 때론, 전투력만으로 승리를 취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상대가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그 두려움은 차츰차츰 육체를 옥죄어 가며 움직임마저 방해하게 된다.

지금의 몰가스가 그러했다.

확실히 굼떴고, 확실히 겁먹었다.

한심한 노릇이다.

목숨을 건 혈투에서 저런 표정을 짓다니.

몰가스 녀석은 그간 꽁으로 레벨을 올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확실히 몰가스가 강한 것은 인정한다.

인우 자신과 버금갈 정도의 육체능력을 지녔을 정도다.

그런데 그 능력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전투 센스와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인우는 잘 알지 못했지만, 몰가스는 부모를 잘 만난 덕에 어렸을 때부터 영약을 쳐 먹고 컸던 마족이었다.

다시 말해, 육체만 강력한 머저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언밸런스였다.

밸런스가 맞기 위해선,

다시 말해 저러한 강력한 육체를 갖기 위해선, 반드시 그만한 경험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몰가스에게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저리도 겁먹은 표정을 짓는 멍청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거였다.

"으아아아압!"

어느덧 인우는 몸을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광폭난무를 사용했다.

레전드 마스터 레벨의 광폭난무는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파드드드드득!

강력한 회전력을 머금은 대검과 육체가 토네이도를 생성할 정도였다.

후우우우우웅!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 들려왔고, 광폭난무를 시전한 장본인인 인우는 이를 악물었다.

광폭난무 또한 대검관통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직 인우가 지닌 스텟으로는 도저히 컨트롤이 불가능했다.

아마, 이 또한 근력 스텟이 늘어나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휘리리리리리릭!

그래서인지 지금 인우의 신형은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도, 도망쳐!!!"

엄청난 범위의 토네이도로 변한 광폭난무는, 대결을 지켜보던 마족들을 토마토처럼 갈아 마시며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웅!

파드드드드득!

사방팔방으로 마족들의 피와 살점이 튀었다.

그 압도적인 위력에, 몰가스는 수하들이 죽건 말건 혼신의 힘을 다해 거리를 벌렸다.

저기에 휩쓸리면 죽는다.

그건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어쩔 수 없을 거다.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위력의 스킬이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젠장! 젠장! 젠장!"

저도 모르게 주둥이를 비집고 욕설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즈음.

"으라아아아아아!"

인우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를 간신히 확보하며 몰가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와 동시에 광폭난무 시전 중에 대검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태풍과 같은 회전력을 머금은 대검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이 대검은 날아듬과 동시에 암기투척이 덧입혀졌다.

쐐애애애애액!

이건 광폭난무의 회전력과 암기투척의 위력이 공존하는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인우는 날아가는 대검에 광폭 어검까지 시전했고, 한 발 더 나아가 광폭 절대검까지 덧씌웠다.

그러자 강력한 검강까지 입혀진 드래곤 본 대검은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운석보다 강력할 정도였다.

파바바바바바밧!

엄청난 섬광이 일며 대검은 삽시간에 몰가스의 허벅지에 꽂혔다.

까득!

빛처럼 빠른 속도를 머금었던 대검은 몰가스의 살갗을 가볍게 꿰뚫고 근육을 찢어내며 뼈를 동강낸 뒤에 땅에 꽂혔다.

파박!

졸지에 몰가스는 꼬챙이처럼 대검과 함께 땅바닥에 꽂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내장 끝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지독한 비명과 함께 몰가스는 양손으로 땅바닥을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꽝! 꽝! 꽝! 꽝!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몰가스가 언제 이런 고통을 느껴 보았겠는가.

심지어 그는 마계의 서열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은 겁쟁이지 않은가?

지구와 같은 하위 행성만 노리는 한심한 마왕이란 말이다.

그랬기에 그는 육체적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양민을 학살하는 재미에 빠져 있는 최하위권 마왕일 뿐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꽝! 꽝! 꽝! 꽝!

몰가스가 손을 내려 칠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그 내려침이, 그 진동이, 지금 몰가스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대변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광폭난무를 거둔 인우가 천천히 몰가스를 향해 걸어왔다.

저벅- 저벅-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걸어온다.

그 걸음.

그 모습.

그 위압감.

정인우라는 그 존재 하나.

그 하나만으로도 몰가스는 턱을 달달 떨어 대기 시작했다.

순간, 고통마저 달아날 정도였다.

그 고통 대신 온 정신을 가득 메운 것은 두려움이었다.

"오, 오지 마! 오지마아아아악!"

몰가스는 이미 이성을 잃었는지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러거나 말거나 인우는 걸었다.

어느덧 몰가스의 코앞까지 다가온 인우가 쪼그려 앉으며 녀석과 눈을 맞췄다.

인우의 갈색 눈동자와 몰가스의 붉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이와 동시에 몰가스의 동공이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래! 내, 내 마왕성을 주지! 다! 다! 포기한다! 그러니까 목숨만은 살려 줘라!"

아무것도 묻지 않았건만, 알아서 척척 말을 내뱉는 몰가스.

녀석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인우는 피식 하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마왕성엔 뭐가 있지?"

"나, 나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

"그냥 널 죽여도, 그곳은 내 것이 되는 것 아닌가?"

"그, 그건···!"

"대답 못하네. 죽어라."

"자, 잠깐! 그건 아마···으어··· 카악······!"

마계고 마왕성이고 나발이고.

이 빌어먹을 자식은 지구와 프로킨을 노렸던 마왕이다.

인우는 프로킨을 지배하는 황제다.

고로, 프로킨을 노리는 인류 최대의 적인 마왕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인우는 놈의 목젖을 움켜쥐었다.

"카악! 카악!"

으드드득!

그런 뒤 목젖을 그대로 뽑아냈다.

"커륵!"

그러자 놈은 단숨에 동공에 힘이 풀리더니 피를 토해 내며 경련했다.

잠시 뒤.

몰가스의 숨이 끊겼다.

[경험치를 4,500,000,000+4,500,000,000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90억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그린 드래곤 벨자므의 경험치가 4억이었으니, 엄청난 수치라 할 수 있었다.

한 번에 30개의 레벨이 올라갔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인우의 레벨은 589가 되었고, 300개의 보너스 스텟이 생겼다.

지금으로선 이 모든 보너스 스텟을 근력에 투자하는 것이 맞다.

레전드 마스터 스킬을 컨트롤하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근력을 찍기 전, 히든 스텟 괴력부터 맥스 수치인 100까지 올려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괴력은 근력의 상위호환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괴력 스텟을 찍기 전.

먼저 몰가스의 전리품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도 히든 스텟 영약이 나온다면, 그것을 복용하고 어떠한 스텟이 나오는지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보너스 스텟은 그 이후에 모조리 찍는다.

모든 판단을 끝낸 인우는 빠르게 움직였다.

마왕이라고 온갖 똥폼을 다 잡았던 몰가스는, 무엇을 지니고 있을까.

* * *

마계.

이곳에 다소 허황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허황된 소문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마왕이 죽었다.]

물론, 마왕이 죽었다는 것 자체는 그리 허황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마왕 또한 생명체에 속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황된 소문이라 불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왕 몰가스는 죽었다. 그것도 인간의 손에 의해.]

그렇다.

마왕이 인간에게 당했다.

그러한 말 같지도 않은 미친 소문이 빠르게 마계에 돌기 시작했다.

0180 / 0208 ----------------------------------------------

180화 마왕성의 징표 (1)

지천우를 처치했을 때는 혹시나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몰가스를 처치하면서 확실해졌다.

마족들은 힘의 정수를 뱉지 않는다.

생전에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던 생명체들이 내뱉는 아이템인데, 왜 마족들은 뱉지 않을까?

의문이 뒤따르긴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알 수 있을 리 없다.

어찌 되었건, 이것은 다시 말해 지금 인우가 가지고 있는 힘의 정수를 최대한 아껴 써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현재 인우의 아공간에 보관되어 있는 힘의 정수는 190개.

적시적소에 사용한다면, 이것은 190개의 목숨이 추가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힘의 정수가 나오지 않을 뿐이지 꽤나 쓸 만한 전리품들이 가득했다.

일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영약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천우 때와는 다른 점이 존재했다.

그때는 +C등급이었는데, 이번에는 A등급이었다.

[마계 민첩 영약]

[마계 근력 영약]

[마계 마력 영약]

[마계 스킬 경험치 영약]

[마계 스킬 경험치 영약]

[마계 스킬 경험치 영약]

[마계 히든 스텟 영약]

[NO.255 마왕성의 징표]

스킬 경험치 영약은 3개가 나왔다.

때마침 잘된 거라 여겼다.

지은과 알렉산더 그리고 민철이에게 각각 하나씩 줄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인우는 스텟 영약부터 먹기 시작했다.

[민첩이 55 증가했습니다.]

[근력이 55 증가했습니다.]

[마력이 55 증가했습니다.]

지천우를 통해 얻었던 +C등급의 경우 40스텟이 증가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55였다.

A등급이 확실히 더 큰 증가를 보였다.

민첩, 근력, 마력을 각각 55씩.

도합 165스텟.

영약만으로 16.5개의 레벨 업을 한 셈이다.

일전에 느껴 보았듯, 영약은 확실히 사기성이 짙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영약만으로도 1레벨 초인이 500레벨 대의 초인을 이기는 것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스텟, 그리고 스킬 영약까지 존재하지 않나?

영약만 무제한으로 있다면, 무적의 1레벨 초인이 탄생할 수도 있는 거였다.

사실 몰가스 또한 이 영약으로 인해 엄청난 무력을 손에 넣은 거였는데, 인우는 잘 알지 못했다.

'이번엔 히든 스텟 영약을.'

이윽고 인우는 마지막 남은 영약을 삼켰다.

[히든 스텟 '매력'이 생성되었습니다.]

[매력 -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

매력이라.

대중들의 관심을 받아먹고 사는 연예인들이라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얻고 싶은 스텟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우에게는 아니다.

'이딴 것도 히든 스텟에 속하나?'

현재 인우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스텟이었다.

매력을 올려 무엇하겠는가?

여자 마왕들이라도 꼬시라는 건가?

여자건 남자건 노인이건!

깝죽대면 심장에 칼을 박아 넣으면 그만이다.

그게 바로 정인우다.

"몰가스. 감히 나에게 똥을 먹여? 후우."

그렇게 중얼거린 인우는 그제야 보너스 스텟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우선 현재 71에 닿아 있는 괴력을 100까지 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스텟은 모조리 근력에 때려 박았다.

뭐가 됐건 일단 레전드 마스터 레벨의 스킬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만 가능하다면 몰가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왕도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거다.

레벨 : 589

특성 : 광전사

스텟 :

[근력 1,674+1,550+10+350]

[민첩 1,058+1,240+250]

[마력 827+170+250]

[체력 967+680+10+150]

*히든 스텟 : [괴력 100] [매력 1]

미분배 포인트 : 0

[EXP 820,255 / 289,000,000]

분배를 끝마쳤다.

새로이 생성된 매력은 기본 지급 스텟인 1.

그리고 괴력은 100으로 맥스였다.

마지막으로 현재로서 가장 중요한 근력.

근력은 모든 값을 합산하면 도합 3,584.

몰가스와 혈전을 벌일 때에는 대략 3,200 정도였다.

확실히 확연하게 늘어났으니 기존과는 다를 것이다.

인우는 대검을 들고 허공을 향해 대검관통을 쏘아 보았다.

후우우우우웅-!

파바바바바밧-!

"크으으읏!!"

하지만.

3,500이 넘어가는 근력으로도 레전드 마스터 스킬을 제어할 수 없었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근력 스텟이 필요할 듯 보였다.

"후우! 답답하네."

짧은 한숨을 내뱉던 인우는 대검을 등허리에 메고서 마지막으로 남은 전리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조그마한 카드였다.

화투보다는 크고 포커 카드보다는 작은 크기.

손바닥에 너끈히 들어오는 이 카드는 그 어떠한 문양도 없는 그저 새카만 색깔이었다.

[NO.255 마왕성의 징표]

정보 ? 알 수 없음.

정보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인우가 확인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이 아이템의 이름이 마왕성의 징표라는 것과, NO.255라는 넘버가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 * *

"255위 마왕 몰가스 사망. 모두 집사를 통해 소식을 접했을 거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모인 거고."

몰가스가 죽었다.

그것도 인간의 손에 의해.

정처 없이 떠돌던 이 소문은 이제 확실히 굳어졌다.

이로 인해 마계에서는 2천 년 만에 긴급회의가 벌어졌을 정도였다.

평시에는 서로 경쟁하며 서열전을 치르는 마왕들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러한 서열전조차 통용되지 않았다.

사안이 사안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왕들은 현재 마계신전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이곳 마계신전은 그 누구도 마기를 풀어 무력을 발휘할 수 없는 마계 유일의 중립지대였다.

현재 이곳 마계신전에 모인 마왕들은 50여명 정도.

실제로는 250명이 넘어갈 정도지만, 모든 마왕들이 참여하지는 않았다.

마계는 넓고 별의별 녀석들이 다 있는 것이다.

"바알은 역시 오지 않은 건가."

"명색이 마신 후보 1위인데 이깟 회의가 무슨 대수겠어. 나 같아도 안 오겠다."

누군가가 툴툴댔다.

그 툴툴거림을 시작으로 누군가가 운을 뗐다.

"빨리 끝내자고. 이렇게 한데 모여 얼굴을 볼 만큼 우리가 친하진 않잖아?"

"동의. 자 시작하자고. 본론부터 꺼내지. 현재 정인우라는 인간은 몰가스를 죽였고, 마왕성의 징표까지 손에 넣은 상태다."

"······."

"······."

마왕성의 징표.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이 징표는 이를테면, 인간계로 치자면 신분증이라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본인이 마왕임을 증명하는 신분패인 것이다.

기존 마족들 중, 이 징표를 얻게 되면 누구라도 마왕이 될 수 있었다.

이 징표를 얻기 위해 하위 마족들은 마왕에게 도전장을 내밀기도 한다.

저것 하나만 있으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다.

마왕이 되면 길고 긴 마생(魔生)이 편해진다.

하위 마족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술과 마약과 향락에 취해 살수도 있다.

고리타분한 서열전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그저 즐기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왕의 자리는 모든 마족들의 꿈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는 심각했다.

누구라도 마왕을 잡고서 마왕성의 징표를 얻으면 마왕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얻어낸 존재가 하필 인간이라는 거였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마왕이 될 수 있는가?

여태껏 오로지 마족만이 마왕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역사가 송두리째 날아가게 생긴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으리라.

"너희들은 인간이 우리들과 경쟁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

현재 마계신전에 모인 마왕들은 99%이상이 정인우를 인정하지 못했기에 모여 있는 거였다.

이를 테면 이것은 배척이다.

바꿔 말해, 이곳에 오지 않은 마왕들은 정인우가 마왕이 되든 말든 별 상관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인정 못하지. 하지만 궁금하긴 해. 도대체 그 정인우라는 인간이 어느 정도기에? 몰가스가 제아무리 한심한 최하위권 마왕이라도 강하긴 강하다. 게다가 인간계를 기준점으로 둔다면, 몰가스는 거의 대재앙 수준의 무력을 뽐낼 텐데. 어떻게 인간에게 죽을 수가 있지? 정인우라는 인간이 그렇게나 대단한가?"

"내가 듣기론 그쪽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라고 하던데."

"그래 봐야 벌레들의 우두머리라고."

마왕들은 인간을 벌레 정도로 취급했다.

하긴.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짧은 생이다.

게다가 인간은 무척이나 약한 존재다.

이러니 마왕들의 기준에서는 인간이 벌레로 보일 수밖에.

마치, 드래곤들이 인간들을 깔보듯 말이다.

"자 그럼. 모두 정인우를 인정할 수 없다는 거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러니 결론은 쉽게 도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누가 갈래? 정인우라는 인간 놈이 마계에 발을 들이기 전에, 누가 그를 죽일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누군가가 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가지."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였다.

모든 마왕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이내 모두 놀랍다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헤쉬테··· 네가 간다면 확실하겠지."

1~255위까지 존재하는 마왕의 서열.

헤쉬테는 그중 190위에 이름을 올린 마왕이었다.

"흥미로워 미칠 것 같군. 고작 인간의 육체로 마왕을 이기다니. 놈은 반드시 내가 취한다."

헤쉬테는 혀를 날름거리며 눈을 빛냈다.

* * *

그레모리는 벨리알과 단탈리안에게서 최상급 아티펙트와 무구를 받았다.

그리고 녀석들로부터 다시는 보지 말자는 통보 또한 받았다.

도박이 이렇게나 무섭다.

수만 년의 우정이 단숨에 깨어질 정도로 말이다.

조금은 섭섭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그레모리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으음~"

그녀는 지금 침대에 가슴을 대고 누운 채로 베개에 턱을 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는 예의 수정구가 보였다.

수정구 안에는 그가 보인다.

바로 정인우가.

정인우는 마왕성의 징표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푸흣."

그 모습에 그레모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로 그때.

똑- 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모리 전하."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레모리의 집사였다.

"말해."

"예. 지금 방금 마계신전에서 마왕들의 회의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헤쉬테 님이 움직였습니다."

"음. 역시나 정인우를 인정 못하겠다는 건가? 그럼 안 되지. 그는 무조건 마계로 와야만 해."

"어찌하실 참인지요?"

"내가 인간계로 내려가 보지 뭐."

말을 마친 그레모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문밖을 향해 물었다.

"참. 바알은 어때?"

"별 관심이 없다는 걸로 압니다."

"어쩜······."

바알은 광오하다.

마계 서열 1위답게 시답잖은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바알의 기준으로는 지금 벌어진 이 사건이 시답잖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아마 정인우가 바알의 관심을 끌기 위해선 지금으로선 한참이나 멀었다.

현 상황만 보아도 명백할 정도다.

인간이 마왕을 이겼다는데도 관심조차 없었다.

* * *

마왕성의 징표는 아무리 쳐다봐도 뭐하는 물건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인우는 이것을 아공간에 대충 쑤셔 박았다.

그나마도 버리지 않은 건 혹시나 싶어서였다.

그래도 마왕에게서 나온 아이템인데 정보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릴 순 없는 거다.

현재로서 징표는 인우에게 딱 그 정도의 가치였다.

오히려 인우는 징표보다 스킬 경험치 영약을 더 소중히 다뤘다.

이 3개의 영약을 각각 알렉산더와 민철 지은에게 나눠주었다.

영약은 A등급답게 꽤나 많은 스킬 경험치를 올려 주었다.

그 수치는 5,500이였다.

도합 5,500번 스킬을 시전 해야만 습득할 수 있는 경험치를 한 번에 얻은 것이다.

좀처럼 놀라지 않는 알렉산더마저도 눈을 크게 뜰 정도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우는 보관 중이던 지천우와 몰가스의 피를 모조리 채취했다.

이 피는 모두 퀸에게 줄 참이었다.

루시 퀸을, 드래곤보다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기가 가득해져서 한층 더 강해진 퀸이다.

그녀는 강력한 존재의 피만 있다면 무궁무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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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마왕성의 징표 (2)

퀸은 그간 놀고먹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놀고 마셨다.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여도 이것은 무척이나 큰 차이를 보인다.

적어도 퀸에게 만큼은 말이다.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남아 있는 드래곤의 혈액.

정인우는 그러한 피를 끝도 없이 공급해 주었고, 퀸은 하루에 8~10L 정도의 피를 마셔왔다.

이를 경험치로 환산해 보자면, 120만 가량이 나온다.

즉, 퀸은 하루에 120만의 경험치를 꾸준히 올려 왔다는 거다.

퀸은 인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레벨이기에 경험치 총량이 비정상적으로 높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차례의 레벨 업을 거듭해 왔고, 이로 인해 그녀의 레벨은 벌써 211이었다.

그리하여 퀸이 지닌 무력은 지구의 초인 기준으로 최상위권에 속할 정도였다.

고작 211레벨로 그것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넘쳤다.

본래 퀸과 같은 괴수는 레벨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고정 수치인 레벨 0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레벨이 없던 시절에도 미개척지대의 괴수들을 잡아서 피를 빨아먹고 살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때의 0레벨이 지금은 211이 되었다.

이 때문에 퀸의 211레벨은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제 마기까지 가득 차 있다.

그녀의 무력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빠른.

지금 인우의 가족 중 가장 큰 성장 가능성을 지닌 건 다름 아닌 퀸이었다.

인우는 퀸을 확실히 밀어줄 생각이었다.

원래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거다.

아니, 노를 반 토막 내버리고 모터를 달아 줄 참이었다.

그 모터란, 바로 마왕의 피였다.

지금 인우의 손에는 몰가스에게서 뽑아낸 혈액 4리터가 들려있었다.

드래곤 한 마리에서 채취하는 혈액이 3,000리터인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순도에서 확연히 다른 차별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테면 아주 작은 양으로도 대량의 경험치를 확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인우는 기대를 품고 병에 든 혈액을 퀸에게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4리터다. 한 번에 다 마실 수 있겠냐?"

그 말에 퀸은 잠시 침묵했다.

하루에 2번 끊어 마시면 몰라도, 한 번에 저 정도는 무리다.

설마, 주인이 자신을 돼지로 보는 걸까?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절로 간담이 서늘해진다.

퀸은 다급히 답했다.

"나는 배가 작아요. 홀쭉한 것 좀 보라구요."

그리 말한 퀸은 호리병 같은 허리에 손을 얹고 인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인우는 예고도 없이 퀸의 배에 손을 얹었다.

"아, 아!"

기습적인 손길.

퀸은 어찌나 놀랬는지 크게 굳은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우가 말했다.

"확실히 배가 너무 없긴 하네. 살 좀 찌워."

"저, 저기···!"

"응?"

"이, 이거요···!"

"뭐?"

"소, 손 좀······."

퀸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배를 만지작대고 있는 인우의 손을 가리켰다.

인우는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퀸의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살이 없는 배인데, 이건 뭐 거의 꼬집다시피 하고 있는 거였다.

"손 뭐?"

"아니에요···!"

퀸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처음엔 크게 놀랐으나, 인우의 손길이 싫지만은 않은지 금세 태도를 바꾼 것이다.

계속 주무르라는 듯이 얌전히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했다.

이내 인우는 그녀의 배에서 손을 뗐으니까.

그리고 다시금 혈액이 든 병을 내밀며 말했다.

"마셔라 퀸. 쉽게 구할 수 없는 피니까."

"···항상 받기만 하네요."

"그게 마음에 걸리는 거야?"

"네. 난 줄 게 없잖아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재깍 들려오는 퀸의 대답에, 인우는 피식 하고 웃었다.

줄게 없다고 말하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언가를 더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왜 이런 기분이 들까나?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마워요. 주인님. 제가 언젠간 더 큰 것들로 보답할게요."

"그러던가."

어느덧 퀸은 피가 든 병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어 그녀의 목을 타고 마왕의 피가 넘어간다.

[경험치를 10,200,459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를 10,044,150 획득하였습니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몇 모금이나 마셨으려나?

퀸은 어찌나 놀랐는지 크게 눈을 뜬 채 마시던걸 멈췄다. 이 잠깐 사이에 3번의 레벨 업을 했다.

들어온 경험치는 한 모금에 대략 1000만 가량.

아니 잠깐.

이게 말이 되나?

"주, 주인님?"

"왜?"

"이게 도대체 무슨 피죠?"

"마왕의 피."

"···네?"

"마왕의 피라고. 얼마나 오르는데?"

얼마나 오르냐고?

말한다고 이걸 믿어 줄까?

"하, 한 모금을 넘길 때마다 천만씩은 올라요."

"오호······."

인우는 퀸의 예상과 다르게 덤덤했다.

당연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으니까.

그러나 확실히 엄청나긴 하다.

드래곤의 피가 한 모금에 3,500정도의 경험치를 주었다.

그런데 마왕의 피는 한 모금에 10,000,000의 경험치를 준다.

이는 몇 천배의 차이다.

실로 어마무시 할 정도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3000리터의 드래곤 피. 그리고 4리터의 마왕의 피.

드래곤의 피를 모두 마시면 대략 4억 정도의 경험치를 얻게 된다.

이에 입각해 보자면, 마왕의 피를 모두 마시면 4억 이상의 경험치를 얻어야만 말이 된다는 거다.

이 때문에 저렇게 터무니없는 경험치가 들어오는 걸 테지.

퀸은 1리터를 40모금 정도로 마시니, 아마 저 4리터를 모두 마시게 되면 못해도 16억의 경험치는 얻을 것이다.

현재 퀸의 레벨 대에서 16억의 경험치는 말도 안 될 정도의 양이라 볼 수 있었다.

인우 자신에게도 몇 차례의 레벨 업을 선사할 정도의 엄청난 양인 것이다.

생각도 잠시.

꼴깍. 꼴깍.

지속적으로 꼴깍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인우는 다시금 퀸을 바라보았다.

'허. 얘 봐라.'

퀸은 지금 빠른 속도로 4리터의 혈액을 비우고 있었다.

어느새 혈액이 가득 담겨 있던 병은 탈탈 털려 있었다.

가만, 이 여자 지금 4리터를 한 번에 다 마신건가?

"돼지네."

인우는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퀸의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 아니에요!"

다급히 변명하는 퀸이었지만, 입가에 주륵주륵 흐르는 핏물을 숨길 순 없었다.

오늘 퀸은, 마왕의 피를 모조리 마시고 53개의 레벨 업을 했다.

현재 그녀의 레벨은 264였다.

이는 인우가 블랙오크들을 족치고 다녔을 때보다 빠른 성장률이었다.

이래서··· 줄을 잘 타야 하는 거다.

* * *

NO.255 마왕성.

이곳은 과거 몰가스의 마왕성이었다.

하지만 이제 주인이 바뀌었다.

그 주인은 바로 정인우라는 인간.

뒤바뀐 주인 덕에 마왕성의 집사가 바빠졌다.

집사는 마왕성에서 발생하는 모든 업무를 전담한다.

쉽게 말해 마왕의 뒤치다꺼리를 모조리 도맡는 것이다.

NO.255 마왕성의 집사는 에노느라는 여자 마족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마왕성의 집사를 목표로 두고 열심히 꿈을 키워 왔던 그녀.

그리하여 마침내 마왕의 집사로 발탁되었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몰가스는 또라이였던 것이다.

마계는 넓고 또라이는 지천에 깔렸다는 것 따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몰가스는 좀 심각했다.

그러한 몰가스가 죽었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기뻤다.

그리고 동시에 걱정이 됐다.

이번에 새로이 이곳 마왕성에 들어설 마왕은 제발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녀석이었으면 싶었다.

인간이건 오크건 뭐건 상관없다.

그냥 또라이만 아니면 된다.

에노느는 간절한 마음을 품은 채 오늘도 마왕성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 * *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심각한 또라이는 정인우다.

에일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정인우가 말하길,

마왕의 피를 더 뽑아야 한다며 마계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에일린은 눈만 끔뻑대며 잘못 들었나 싶었다.

마계가 무슨 지구나 프로킨 같은 하위 행성인 줄 아는 건가?

그곳은 차원이 다른 생명체들이 머무는 상위 차원이다.

드래곤 로드인 그녀조차도 상위 존재들의 눈치를 볼 정도이지 않은가?

그런데 마계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니!

더욱이 가관인 것은 길을 모르니 안내하라는 거였다.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죽을 거면 혼자 죽지 왜 자신까지 데리고 가는가!

에일린은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되돌아 온 것은 강력한 폭행이었다.

"···하··· 하······."

지금 에일린은 정인우에게 실컷 두드려 맞은 채로 정원 꽃밭에 드러누워 있었다.

딱 그림만 놓고 보자면, 천사와 같은 외모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 꽃밭에 평온히 누워있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니다.

시퍼렇게 멍든 두 눈과 줄줄 흐르는 코피는 그녀가 얼마나 가혹하게 폭행을 당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에일린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둥둥 떠다니는 하얀 구름. 제 눈탱이처럼 퍼렇게 물든 하늘.

그런데 그런 시야에 난데없이 갸름한 얼굴이 불쑥 보였다.

"응?"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맡에 선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시선이 마주쳤다.

강렬한 레드 컬러의 긴 생머리.

푸른 눈동자.

높다란 서구형 콧날과 두툼한 입술.

무척이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기운이 묘하다.

이건 인간도 아니고 드래곤도 아니다.

도대체 뭐지?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뭐야 넌?"

"마왕."

마왕이라고?

그 한마디에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눈을 비비며 다시금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여자가 풍기는 묘한 기운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건 바로 마기였다.

마기도 보통 마기가 아니다.

몰가스 따위는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마기.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살금살금 뒷걸음질 쳤다.

마왕이 프로킨에 온 것이라면 결코 좋은 뜻을 품고 오진 않았을 거다.

몰가스의 복수를 위해 온 건가?

그때 자신을 마왕이라 밝힌 여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직 헤쉬테 녀석은 오지 않은 건가?"

"헤쉬테? 그건 또 누구지?"

"개도 마왕. 정인우를 죽이러 오는 녀석이지."

"······."

에일린은 침묵했다.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 같았다.

이 여자 마왕의 목적이 무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정인우 때문에 마왕이 두 명씩이나 프로킨으로 현신했다는 거였다.

이건 정말로, 역사에 없던 대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 * *

헤쉬테를 제외한 49명의 마왕들은 여전히 마계신전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중앙 탁자에 커다란 수정구 하나를 비치해 두었다.

이 수정구는 헤쉬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고, 나아가 프로킨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도 사실 궁금했던 것이다.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왕을 죽일 정도의 무력을 갖춘 인간에 대해서 말이다.

꼴깍.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수정구에서는, 헤쉬테가 정인우의 왕궁을 날려버리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먼지가 자욱한 왕궁의 잔해 속에서, 마침내 정인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정인우는 인상을 구기며 소리치고 있었다.

-어떤 개새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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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마왕성의 징표 (3)

처음엔 지진이 난 줄 알았다.

왕궁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고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왕궁은 지진 따위에 금이 가고 흔들릴 정도로 허술하지 않다.

온갖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는 강철의 요새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동은 무얼까?

그런 의문이 뒤따를 즈음, 궁이 무너졌다.

그나마도 이 궁은 본래 루피안의 것이었으니 크게 마음이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하다못해 다른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 그만이었다.

아직도 대륙에는 10왕들의 궁이 한 가득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러한 무너짐에 타격을 입을 인우가 아니었으며, 그의 가족 또한 그저 놀랐다 뿐이지 다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쿠구구구구궁!

이러한 개꼴을 당해 놓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건 그와 차원이 다른 문제이지 않나?

감히 자신이 궁에 머물고 있는데 이곳을 무너뜨려?

그렇다.

인우는 궁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머물고 있는데 궁을 무너뜨려서 화가 났다.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한데 이건 인우에게 크게 달랐다.

"으아아아아아!!"

인우는 무너진 잔해에 깔려 있다가 기합을 내지르며 커다란 벽돌들을 내던져 버리고 발로 차 버렸다.

그럴 때마다 잔해의 파편과 먼지들이 얼굴과 옷에 잔뜩 엉겨 붙었다.

누가 이따위 짓을 한 거지?

기분이 더러웠다.

성대를 비집고 절로 짜증이 튀어나온다.

"어떤 개새끼냐?"

"크크크크크."

"너냐?"

인우는 무너진 궁 맞은편 정원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160cm정도의 작은 키를 지녔고 해머처럼 단단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풍기는 기운을 보건대 필시 마족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강력한.

"나는 마계 서열 190위의 헤쉬··· 허업!"

"닥쳐 이 개자식아!"

인우는 볼 것도 없이 놈을 향해 파편을 내던졌다.

프로킨으로 현신한 마왕 헤쉬테.

그는 정인우를 바라보며 자신을 소개하다가 난데없이 날아드는 암기에 헛숨을 들이키고 있었다.

미친.

이건 무슨 암기인데 메테오보다 더 강력해 보이는 거지?

헤쉬테는 정말로 깜짝 놀랐는지 본능적으로 마기 쉴드를 시전하며 암기를 막아냈다.

쿠궁!

쉴드 전체가 흔들리며 진동할 정도의 위력.

헤쉬테는 자신의 쉴드를 타격한 암기가 예사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잠시 뒤 헤쉬테는 쉴드에 떡 하니 박혀 있는 암기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허!'

보니, 그것은 건물의 잔해 파편이었다.

아니 고작 이따위 파편으로 저런 위력을 냈다고?

이건 뭐 볼 것도 없다.

저놈이 바로 정인우다.

"네놈이 바로 정인··· 허업!"

"닥치라고 했지!"

이번에도 헤쉬테는 제 할 말을 끝맺지 못했다.

초고열의 화염덩어리가 쉴 새 없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정인우는 제법 화가 난 것인지 대화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래 저렇게 또라이 기질이 다분한 녀석인가?

아니 이건 세기의 대결인데?

자그마치 서열 190위인 자신이 직접 현신했을 정도로,

나아가 수많은 마왕들이 수정구를 통해 이 대결을 지켜보고 있을 정도로,

그 정도로 모든 관심과 집중이 밀집된 대결인데?

그런데 대화 한 번 없이?

헤쉬테는 어이가 없는지 제 입이 힘없이 벌어져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타닥- 타닥!

그리고 그즈음.

인우의 여덟 분신들이 헤쉬테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포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때.

정인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새끼가 도망치려고 들면 목숨을 걸고서 막아라."

"응! 대장."

"알겠어. 대장!"

정인우의 분신들이 저마다 대검을 꼬나 쥐고 사방팔방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 * *

이 난쟁이 똥자루 같은 녀석이 절대로 도주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인우는 분신들을 꼼꼼하게 배치하고 그제야 헤쉬테가 내뱉는 말을 들어주었다.

유언이 될 테니 들어주는 게 맞다.

이윽고 헤쉬테는 자신을 포위한 분신들을 일일이 노려보다가 인우를 향해 말했다.

"용케도 몰가스에게 승리를 거뒀더군. 하지만 나는 다를 것이다. 나는 마계 서열 190위의 마왕 헤쉬테다."

"마왕?"

"이제야 조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나 보군."

그러면 그렇지.

헤쉬테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후회해도 늦었다는 뜻이 가득 담긴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오래지않아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돌아온 답은 실로 가관이었으니까.

"그럼 하나만 묻자. 대답해 주면 죽은 다음에 피를 뽑을 거고, 대답하지 않으면 산 채로 피를 뽑고 죽일 거다."

뭐가 다르긴 다른 건가?

어쨌든 뭐가 됐건 '죽일 거다.'

딱 그 말이었다.

"······."

감히 인간 따위가 마왕에게 저러한 막말을 내뱉어?

헤쉬테는 모욕감으로 인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욱이 지금 이 모든 광경은 49명의 마왕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또 없다.

졸지에 인간에게 모욕을 당한 한심한 마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나에게 뭐라고 지껄였지?"

"닥치고 내 질문에 답이나 하는 게 좋을 거다. 묻는다. 마왕성의 징표는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이노오오오옴!!"

"대답 안 하네. 그럼 이거라도 답해라. 마계에 침공할 예정인데, 마계는 어떻게 갈 수 있지?"

"죽여 주마!!"

헤쉬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양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새카만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웅-!

예사 기운이 아니었다.

어느덧 그 기운은 단숨에 헤쉬테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어 헤쉬테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안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형체가 기체화된 것일까?

아니, 기체화라니?

저건 듣도 보도 못한 스킬이다.

이윽고 안개가 인우를 덮쳐왔다.

솨아아아아아-!

순간 칼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간담이 서늘하고,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근육이 불끈거렸다.

저 기체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때문에 인우는 우선 회피를 택했다.

타닥!

회피와 동시에 광폭화와 광기 폭발, 육체 강화를 비롯한 모든 버프를 둘렀다.

그런 뒤 분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안개에 대적해 봐!'

정체를 알 수 없을 때는, 먼저 그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이다.

분신을 실험용으로 보낸다면 안개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거였다.

어느덧 분신 칠이가 나섰다.

칠이는 안개를 향해 용맹하게 뛰어들었다.

"크아아아아압!"

거친 기합성과 함께 칠이의 대검이 안개를 후렸다.

후웅!

그러나 형체가 기체여서일까?

칠이의 공격은 허공을 가르듯 안개에 타격을 주지 못했다.

쐐애애액-!

순간 안개가 단숨에 칠이를 덮쳤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안개가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안개는 단숨에 칠이의 목과 가슴, 그리고 복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크으읏! 대장!"

칠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인우는 칠이를 구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지켜보았다.

저 안개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분신이야 24시간 후면 재소환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 안개를 파악하지 못하면 패배할 수도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이성적인 인우였기에 칠이가 내뱉는 고통의 신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버텨. 안개 속에서 발버둥 쳐 봐.'

"크읏! 부, 불가능. 하다!"

칠이는 손가락조차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점차 숨통이 막혀 오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저대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우는 다른 분신들을 향해 명했다.

'지금 칠이를 감싸고 있는 저 안개를 공격해.'

"으아아아압!!"

이번에 나선 것은 허세킹 둘이였다.

둘이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안개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서걱!

한데, 둘이의 대검은 애꿎은 칠이의 팔을 잘라 냈다.

"크으으읏! 뭐. 하는. 거야!"

"공격. 안 먹힌다. 대장."

둘이는 칠이의 신음을 무시한 채 그런 보고를 했다.

"후우. 저건 도대체 뭐냐?"

인우는 골치가 아픈지 엄지로 관자놀이룰 꾹 하고 눌렀다. 이건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쫄리진 않았다.

이보다 더한 극한의 상황에도 몰려 보았다.

오히려 지금 인우는,

몰가스와의 혈전에서 그러했듯, 또 다시 투지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허점이 있을 거다.'

인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안개를 쏘아보았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절대적인 무적은 아닐 것이다.

"으라아아압!"

어느덧 인우는 안개를 향해 광폭 무형검을 날렸다.

쩌엉-!

* * *

궁금했었고, 궁금증은 풀렸다.

"······."

하지만 이 감정은 무얼까.

보통은 궁금증이 풀리면 시원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목이 턱 하고 막힐까나?

마계신전에 모여 있는 49명의 마왕들은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침묵이 감돌기도 잠시.

누군가가 입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가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정인우라는 인간··· 생각 보다 침착한데?"

"몰가스를 죽였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거지."

"오히려 몰가스 보다 훨씬 나을 정도다."

정인우는 헤쉬테를 상대로 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침착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헤쉬테를 상대로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헤쉬테의 능력은 마계에서 제법 유명했다.

저 능력의 비밀은 대부분의 마왕들이 알고 있었다.

알고 나면 일종의 트릭에 불과한 별거 아닌 잔기술이었지만, 모를 때는 그야 말로 공포다.

타격조차 불가능한 적과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처음 헤쉬테가 정인우를 치러 간다고 했을 때 모든 마왕들이 수긍했던 거였다.

고작 190위에 불과한 마왕이었음에도 말이다.

저 능력 자체는, 비밀을 풀지 못하는 이상 굉장한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인우는 단 1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지금의 결과는 굉장히 의외였다.

정인우는 벌써 10분째 헤쉬테와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원을 가야 하나?"

"미친 소리 하지 마."

감히 인간 따위가 마왕성에 들어서는 꼴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끌리지 않은 것은, 고작 인간 하나 잡자고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다.

이들은 마왕이다.

자존심이 있지, 그러한 행위는 결단코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헤쉬테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정인우는 침착했을 뿐이지 여전히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 * *

존재하는 모든 공격 스킬을 때려 박았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검은 안개는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인우는 꽤나 지쳤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차라리 몰가스 녀석처럼 엄청나게 강력한 한방 스킬을 사용하는 적이 낫지, 저건 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마 마왕들은 저마다 고유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헤쉬테라는 녀석의 특성은 저 안개가 분명했다.

기체화라니.

정말이지 울화통 터지는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쉬이이이익-!

여전히 검은 안개가 인우를 덮쳐 오고 있었다.

후웅-!

이에 인우는 블링크를 사용하여 거리를 벌렸다.

전면전은 도저히 무리라 판단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체력도 고갈되었다.

그래서일까?

인우는 히든 스킬은 그림자 은신술을 사용했다.

그림자가 지는 지역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기술.

이를 통해 몸을 숨긴 인우는 아공간을 열고 힘의 정수를 꺼냈다.

으득.

그런 뒤 이빨이 갈릴 정도로 거칠게 씹어 삼켰다.

휘잉-! 휘잉-!

안개는 은신술로 몸을 숨긴 인우를 비웃는 것처럼 꿈틀댔다.

아까부터 느꼈던 건데, 헤쉬테는 절대 말을 내뱉진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은신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말을 내뱉는 순간 위치가 발각된다.

이윽고 인우는 은신을 풀지 않은 채로 안개를 향해 대검을 내던졌다.

그러자 광폭 어검이 발동하며 안개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서걱!

후우우웅-!

하지만 안개는 광폭 어검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스킬인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돌아 버리겠군!'

그런데 그 순간.

안개와 대치하고 있던 어검을 바라보던 인우의 눈이 번뜩였다.

무언가 하나의 가정이 머리를 때렸기 때문이었다.

'설마?'

인우는 지금 은신술을 사용한 채 광폭 어검을 조종하고 있다.

이를 바꿔서 생각해 보자.

만일 인우가 대검을 들어 올린 채 그것으로 변하는 시늉을 하며 은신술을 시전했다면?

상대가 보기엔 졸지에 인우가 대검으로 변한 것처럼 보일 거다.

그런 뒤 광폭 어검을 이용하여 대검을 조종한다면?

상대는 그 기상천외한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다.

검으로 변신하다니, 어찌할 도리가 있겠는가?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인우가 은신 스킬을 사용하며 광폭 어검을 조종하는 것처럼, 놈 또한 본체는 투명화로 몸을 숨기고 저 빌어먹을 안개를 조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말이 된다.

또한, 그러하다면!

놈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은 저곳이 분명하다.

맨 처음 안개 스킬을 사용했던 그 장소.

그곳에서 발걸음 소리조차 줄인 채로 가만히 있을 거다.

나아가 말조차 내뱉지 않을 테지.

그래야 들키지 않을 테니까.

이윽고 인우의 신형이 번뜩였다.

'넌 진짜 곱게 안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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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마왕성의 징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