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아리엘은 에른이 차원거래자임을 아 는 대륙의 몇 안 되는 인물.
물론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실.
차원거래는 각 차원의 생산물이 오 갈 뿐인 단순한 교환의 장이 아니라 는 것.
물론 이것만 해도, 그런 시스템이 에른의 눈에 깃들어 있다는 것만 해도.
부러워하고 축복으로 여길 만한 능
력이기는 하다.
하지만 차원거래의 최고 강점은 여 기에 있는 게 아니라서.
재능, 성추], 오랜 기간 습득한 지식과.
건강, 수명, 긍정적인 습관 같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고 알려 진 무형의 가치들까지도.
거래소가 지원하는 [추출] 기능을 이용하면 판매하고, 또 구입할 수도 있다.
계좌에 든 [코인]이 넉넉하기만 하 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전대의 차 원 교류자, 라제칸 스틸가드.
변방의 평범한 기사였던 그가 구국 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차원거래 덕분.
스틸가드 가문의 비사다.
레바단은 여기까지 알고 있고, 시에 라와 베모스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라제칸과 에른이 차원거래를 통해 '신물'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쯤은 안다.
반면 아리엘은.
'음식이랑 집 짓는 재료가 허공에서 뚝딱하고 나오다니… 엄청 편리하겠 다! 우리 일족에 저게 있으면 곧이 인간들하고 교역 안 해도 되겠네?'
사실상 사리급 이해도라고 봐야 하 는데.
차원거래로 정령도 살 수 있다는 말에도 놀라워하는 그녀라, 절대 알 수 없었다.
에른이 왜 격동하는지.
왜 어깨가 위아래로 물결치고 두 눈
가득 기대감과 흥분이 들어차 있는지.
평소의 눈빛이 아닌, 전에 본 적 없 는 새로운 빛으로 바뀐 것은 상승과 더불어 진입을 의미한다.
전생에도 가본 적 없는 새로운 차 원으로, 미답의 세계로.
파직!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에서 그보다는 다소 밝은 톤의 황광이 새어 나온다.
이러니까 정말 눈에 순금이 박혀 있 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에른은 어리둥절해 하는 아리엘을
내버려 두고, 시야를 덮는 차원거래 화면과 메시지에 주목했다.
『도와줘요 비서에몽' 특전이 개방되 었습니다』
[공지 사항이 전달되었습니다. 필독
해 주십시오.]
'공지 사항이라.'
지금까진 상위 차원에 진입하면 거 래소에서 축하 메시지와 함께 쿠폰을 쏴 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딱딱하고 엄한 느 낌의 메시지.
봉투 모양 아이콘을 누르자 편지가 열렸다.
[안녕하세요, 에른 교류자님. 3계 채널에 도달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현 채널은 파이오니어 협정의 광범 위한 적용을 받고 있습니다.
교류 금지 물품을 하위 차원에서 판매할 경우, 혹은 개념과 아이디어, 기술의 유출이 일어날 경우 계정 정
지 처분이 내려집니다.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이 점 유의 하여 거래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3계에 도달한 것을 축하드리며 거래소가 준비한 소정의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보내드릴 물품은 총 5매이며 인벤 토리에 지급됩니다.
감사합니다.
차원거래소 드림.]
'石' ' 百'.
가장 에른의 시선을 끄는 것은 파 이오니어 협정이라는 단어다.
최초로 인지한 것은 아르엘도의 마 도기갑에서 나온 마나 리액터에 대한 거래소의 설명을 보고.
...파이오니어 협정에 의해 교류 금지된 물품이므로 해당 채널에서의 거래를 엄금함.
이 문구로.
마나 리액터가 이미 개발되었지만, 2계 이하에서는 아직 풀리지 않은 기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3계에 와서야 비로소 공식 적으로 언급되는 용어.
청안흑마, 라크드리알이 왜 3계 얘 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는지 이것으 로 알게 되었다.
카베클리의 지배자인 그도, 아니 오 히려 고대 유적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기에 차원거래가 꼭 필요한 터이다.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흑마법 사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아니, 이것들 미친놈들인가...?'
에른이 '파이오니어 협정'이란 단어
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데,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는다.
'협정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할 거면, 최소한의 정보는 알려줘야지. 하여간 거래소 일관성은.'
에른은 [섭리의 눈]을 발동해 보았다.
그제야 추가 설명이 떠올랐다.
-파이오니어 협정 : 다차원 차원거 래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가 각계각 층에 받아들여지고, 모든 계획이 수 립된 뒤 거래소가 영업을 시작했다.
하르모니아의 선지자들이 주장한 대 로, 차원거래는 교류자들 각자의 편 익을 극대화시켰다.
필요하지 않은 걸 내놓고, 필요한 것은 뭐든 구할 수 있고.
거래소는 여기에서 창출되는 이윤의 일부분으로 시스템을 정베, 발전 시 켜 현재에 이르렀다.
'일부분이 아니라 대부분이지. 코인 제일 많이 벌어 가는 건 지들이면서.'
좀 어이없지만 거래소에서 작성한 거니까 편향적인 서술은 어쩔 수 없 지 싶다.
-...허나 부정적인 작용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르모니아의 선지자들이 우려한 것은 채널 간 고 유성의 상실. 한번 상위 차원의 기술 이 흘러 들어가면 하위 채널은 그 존 재 의의를 잃어버리게 된다. 상위 기 술을 선점한 교류자들이 거주 차원의 독재자가 되곤 하는 도덕적 문제 또 한 야기되었고…. 이러한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 각 차원의 지배자들이 하르모니아에 모여 체결한 협정이다.
대강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차원의 주도 세력은 각 계의 고 유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노력의 범위와 구체적 방 침은 세부 사항으로 정한다.
2. 차원 생태계를 망가뜨릴 수 있는 물품을 [교류 금지 물품]으로 정하고 이를 어겼을 경우, 차원거래에서 배 제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3계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여기부터 갑자기 허들이 높아지는 건지.
라제칸이 1계의 무공으로 대륙 최 강의 기사가 되었던 사례나.
2계의 마도공학 기술로 에른이 [세 븐 아이즈]를 무너뜨린 일만 해도 충 분히 생태계 파괴라고 볼만도 한데, 거래소는 이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런 무관심한 놈들이 제재할 정도면.
에른은 공지 사항을 끄고 3계 채널
을살폈다.
한가운데에 'C'라고 쓰여진, 코인을 형상화한 듯한 금색 동전들이 귀퉁이 를 장식한 황색 레이아웃.
좌우로 구매자와 판매자 게시판이 보였다.
-테러리스트가 싫어요 : 대전차무 기, 유탄발사기, 돌격소총 등 각종 무기 무한 매입 중. 법률적 문제 전 혀 없습니다.
-김첨지 : 중소규모 자동화 공장
구매하려고 합니다. 월 순수익 100코 인은 뽑았으면 하구요…. 가격은 논 의 후 결정하십시다.
-더킹포스 : 각종 전투기 판매 중 입니다. 폭격기와 요격기, 스텔스 기 능을 갖춘 정찰기…. 108개월 할부 가능! 당신도 전투기 오너가 될 수 있다!
-마하리시 : 마음을 다스릴 수 있 는 명상법, 의지력을 높일 수 있는 수행법을 공유합니다.
-정글짐 : 모두에게 안전한 4놀이 터4 지금 가입하면 0.5코인 무료 지
급! .효바로 입장.
'전쟁 무기, 자동 공장, 명상?'
뭔가 하나로 엮이지 않는다.
놀이터라는 건 또 뭔 소린지 모르 겠고.
에른은 최상단 게시글을 눌러 보았다.
꼬리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교류자 들의 반응.
-별빛달빛 : 뭐냐, 이 어설픈 위장
술은? 테러리즘 아웃! 제발 개념 있 는 교류자라면 이딴 인간 같지도 않 은 놈한테 물건 팔지 맙시다.
-울애기 : 님이 뭔데 남한테 팔라 마라세요? 꼬우면… 아시죠?
-스테이크냠냠 : 나왔다, 꼬무새 등 장! 으으 꼬랑내 나. 테러리즘은 방 관하면 안 되는 게 맞지.
-울애기 : 네 다음 선비님들.
-별빛달빛 : 하여간 뭐만 하면 선 비 타령. 상식 결여된 게 자랑이냐? 일상생활 가능?
-울애긔 : -선비-
-별빛달빛 : "히키-
-울애긔 : -흉노-
'뭐라는 거야, 이놈들은?'
에른은 이해를 포기하고 채널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처음 도달한 채널이니만큼.
이곳 교류자들의 습속과 3계에 속 한 세계의 특성을 파악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음, 우선.'
엘루나는 까망이와 노느라 정신이 없고, 아리엘은 계속 자기 눈을 들여 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다.
빠져들 것만 같은 은색 눈동자가 코앞에 다가와 있으니, 의식하지 않 을 수 없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말도 없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에른은 차원거래를 종료하고 왼손 검지에 암흑군주의 반지를 끼웠다.
청안흑마 라크드리알이 눈물을 머금 고 구매 의사를 물어본 물품.
"천풍제약이 떡락하지만 않았어 도…. 내가 자금이 급해서 그런데, 자네 10만 코인 이상 값어치 하는 '유일'한 물품이 필요하잖은가?"
사실 이것도 사기적인 매직 아이템이 지만, 아까워하지 않고 사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에 에른은 다른 물품 과 양쪽에 놓고 저울질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까망이가 말을 안 들으니까.
-암흑군주의 지배 반지 : 암흑 마 도국 테페르가 세워지기도 전, 암흑 문명을 이끈 고대 군주, 요나츠의 혼 백이 깃든 지배자의 반지. 착용자는 사령과 어둠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며 자연스레 암흑군주의 위엄이 깃든다.
스스
-이번엔 젊은 놈이군. 근본 없는 새 끼한테 왔구만. 나도 갈 때까지 갔나.
검은 반지를 끼워 넣자 머릿속에서 극한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한서불침인 에른조차도 순간 한기를 느낄 정도의 소름 끼치는 음성.
하지만 조금도 티 내지 않는다.
'놈한테는 처음부터 세게 나가야 한 다고 했었지? 괜히 말려들었다간 주 도권을 뺏길 수 있다고.'
-호오? 좀 버티는 척하는데? 이봐 어린 인간?
대답하지 않고 요나츠의 기운만을 이용했다.
화아아앗!
새까만 기류가 에른을 휘감는다.
호박색 눈에도 어두운 기운이 가득 들어찼고.
"까망아, 내 앞으로 와라. 계약해야지?"
반지를 낀 뒤로, 어둠의 정령의 태 도가 180도 바뀌었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낫을 똑 바로 세우고 에른 앞으로 날아가는 모습에.
아리엘이 어이없어했다.
"뭐, 뭐야… 지금 친화력을 차원거 래로 산 거야? 이런 게 어딨어?"
"여기 있지."
"이, 이건 불공평해!"
"음? 뭐가? 날 때부터 물고 태어난 친화력 수저로만 갈리는 것보단 차라 리 피땀 흘려 번 코인으로 살 수 있 는 게 더 공평하지 않나?"
"무슨 그런 궤변이!"
에른이 씩 웃는다.
서브 능력으로 정령술을 선택한 이 유가 이거다.
아리엘은 엘프 중에서도 달의 일족 으로 태어났고, 그 특출난 아름다움
으로 엘루나의 선택을 받았다.
그래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어 도 영웅급〜전설급에 속하는 전투 능 력을 갖게 됐는데.
물론 이 얘기를 한다면 아리엘은 나름 자기도 노력 많이 했다면서 억 울해할 것이다.
정령과의 계약은 계약이고, 계약한 뒤로도 정령과 손발을 맞추고 기운을 다루는 등의 훈련은 끊임없이 해야 하니까.
'그래도 기사와 마법사들이 피땀 흘 리고 머리에 쥐나는 것에 비할까?
정령술은 그냥 재능이 9할이야.'
에른은 까망이의 까만 후드 안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나랑 계약할래?"
암흑군주의 기운에 압도된 까망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아린 머리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다.
"좋아, 그럼 계약 성립."
"이, 이게 무슨 계약이야? 복종시킨 거지!"
"더 좋은 거 아니야? 말 잘 들을 테니까."
"정, 정령술은 이런 게 아니야!"
어처구니없어하는 건 아리엘뿐만이 아니다.
요나츠 또한.
-3400살 먹은 어르신이 얘기하면 공손히 대답해야지. 개무시하면 쓰 나? 이봐, 어린 친구! 신사답게 행 동....
뚝
에른은 개무시하고 반지를 빼내 인 벤토리에 넣었다.
까망이에게도 모습을 감추도록 명령
하니 아리엘이 의아해한다.
"왜 그래?"
"굳이 동네방네 소문낼 일도 아니잖 아. 엘루나 표정 봐라."
"끄흑... 으흐흑극...
에른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좋 아하던 엘루나가 눈물이 그렁그렁해 진 채, 무서워하고 있다.
"엘루나 엄청 챙기네. 이럴 때는 참 스윗한데."
"꼭 그래서라기보단."
에른이 문가를 보았다.
기척 하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렌이군. 또 잔소리하려나.'
그녀는 자작들과의 합의서를 받아온 이후, 에른을 아주 들들 볶아 댔다.
어떻게 할 거냐고.
키르안이 계속 영주직을 수행하게 내버려 둘 거냐고.
덜컥.
문이 열리고, 다렌이 소리쳤다.
"에른!"
"왜, 또?"
"에른, 너 정말…!"
"글쎄 기다려 보라니까. 율라프 상 회에 손해 끼칠 일 없어."
"그, 그런 거 아니야. 믿을 수가 없네."
황당해하는 다렌에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어이없는 듯, 그러면서도 기쁜 듯한.
"지금 자작들이 항의하러 왔어.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음, 무슨 일?"
에른은 알면서도 괜히 고개를 갸웃 거렸다.
"자세히 말해 봐. 하나도 모르겠으 니까."
"철광산이 전부 고갈됐다고! 채굴권 을 가져갔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권리였어!"
다렌의 눈이 의혹으로 반짝이기 시 작한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 혹시 알고 있었던 건 아니지? 이렇게 될 줄?"
[201 화]
"이 자리도 오늘로 마지막이군."
칼로이가 아련한 눈으로 책상 위를 쓰다듬었다.
단단한 원목 책상.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백 성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물건이다.
특히나 여기에 앉아 광활한 백작령의 사무를 총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할 일.
특히나 일자무식, 까막눈이 가문의
전통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똑같이 못 배운 채로 자라났다면.
소년 칼로이는 가난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또한 자식에게 물려 주고 싶지도 않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대물림의 고리를.
끊어 내고 싶었다.
검을 배우려면 장비와 연공법을 구매 하고 스승도 찾아야 했기에 가장 돈 안 드는 길을 택했다.
글자를 깨우치고 학문에 몰두하기로.
칼로이는 깃털이 잉크를 빨아들이듯 지식을 습득해 갔다.
한 자 한 자 읽고 깨달을 때마다 성 취감과 자신감으로 뿌듯함을, 나중에 는 전율을 느꼈다.
'난 재능이 있다! 희대의 천재는 아니 지만... 수저 색을 바꿀 만큼은 된다!'
하지만 부풀어 오른 기대감은 곧 바 람 빠진 풍선처럼 되고 말았다.
재능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는 세 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돈이 없으면 더 나아갈 수 없다.
아니, 애초에 발걸음조차 뗄 수 없다.
웃기는 일이었다.
돈이 없어 가난한 건데 가난을 탈출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니.
도시의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필 요한 비용을 알아본 칼로이는 꿈을 접 었다.
그렇게 소작농으로의 운명을 받아들 려던 참.
억센 손… 농사꾼? 아니, 호미에 긁 힌 상처 같은 게 아니다.
검합을 교환하며 얻은 영광의 상처, 강인한 손…. 기사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 손이 뙤약볕 에 새까맣게 탄 얼굴 앞으로 내밀어졌 을 때.
칼로이는 한탄으로만 점철될 줄 알았 던 인생에 새로운 무언가가 찾아왔음 을 느꼈다.
"칼로이라고 했나? 마을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하던데?"
"레, 레바단 도련님...?"
"아카데미 입학을 생각하고 있다며?"
"예.... 아니, 이제는 아닙니다."
"왜지?"
"혹시 학문에 정진하는 게 지겨워진 건가? 물론 경작도 신성한 일이지만,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재능이 있어. 그 재능은 썩히기 아까운데."
"왜겠습니까". 저, 저도 공부가 하 고 싶어요!"
"다행히 비용 때문이군.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어떤가, 수도 아카데미 에 입학해 보는 건? 단,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전환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손길 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칼로이는 영주직 을 물려받은 레바단을 보좌했고, 스틸가드의 행정을 총괄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세월.
이제는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지.'
수도의 여러 가문과 관료들의 러브콜 을 전부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 은 레바단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함
이었다.
키르안에게 밉보여 이렇게 쫓겨나는 것도 레바단에 대한 충성심 때문.
자리를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했다면 맡은 바 임무만 다하면서 권력에 찰싹 붙어 있었으면 되었을 일이나.
레바단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스틸가드다.
그러니 자신도.
무엇이 가장 영지를 위한 결정인지를 생각한다.
'이번에 에른 도련님이 큰 실수를 했
지만….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결과적으로 안타깝게 되었으나 칼로
이는 후회하지 않았다.
"남은 인생, 뭘 하고 사는 게 좋으려 나...
막 물건을 챙겨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허겁지겁 집무실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총, 총관님!"
사무보조인 알렌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게 한참 멀리서
부터 전력 질주해 온 모양.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
"지, 지금 난리 났어요! 자작들이 항 의하러 저택 앞까지 왔는데요! 지금 기사단하고 대치 중이에요!"
"음…? 자작들이 왜? 가져갈 거 다 가져가 놓고."
불만을 품을 게 뭐가 있다고?
갸웃거리는 칼로이에게 알렌이 목소 리를 높였다.
"저, 저도 모르겠어요. 뭐 사기를 당 했는데,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철광 산이 고갈됐다나 뭐라나…? 그게 말이 되는 말이에요?"
"철광... 산이 고갈? 자세히 얘기해 봐라."
알렌의 설명을 들은 칼로이의 입꼬리 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말대로라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전환점인가?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있을 수가?'
칼로이에게 있어 가장 큰 행운은 레 바단과의 만남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고….
하지만 그건 살다 보면 충분히 일어 날 수도 있는 일.
근데 이건, 운의 수준이 무슨 초자연 적인 스케일이 아닌가?
확실히 에른 도련님에게는 뭔가가 있다.
칼로이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번 졌다.
"얼른 가 보자!"
*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시면 어 떡합니까? 기사들까지 이끌고."
스틸가드의 기사단과 3자작의 기사 들이 저택 정문 앞에서 신경전을 벌이 고 있었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세 명의 자 작과 하파엘 기사단장.
게이츠가 한껏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 며 대답했다.
"쳐들어오다니. 말 함부로 하지 말게. 진짜 쳐들어올 거였으면 스쿼드 죄다 이끌고 왔겠지."
"...이것만 해도 충분히 많은 숫자 입니다만."
"그럼 뭐, 빈손으로 왔다가 또 뒤통 수 맞고 가란 얘긴가? 우리도 최소한 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안전장치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주군이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엄두 조차 내지 못 할 짓을 당당히 저지르 고 있는데.
냉소를 지으며 하파엘의 옆에 선 칼 로이가 자작들에게 말했다.
"지톤 경, 로데인 경, 메드시안 경.
지금 밟고 계신 땅이 어디인지 잊으신 듯한데. 여긴 스틸가드입니다."
그 사실을 주지 시켜 주니, 자작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화를 냈다.
"저, 저… 평민 출신 주제에 건방지긴!"
"지금 우릴 가르치기라도 하겠단 거야, 뭐야?"
"스틸가드들은 다 어디 가고 기사단장, 총관 따위가! 스틸가드 나오라고 해!"
주군의 부재를 이럴 때 느낀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이렇게 막말하지 못했을 간덩이 작은 위인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소식을 듣고 온 키르안이 황당해 하 면서 자작들에게 물었다.
"정말, 정말 광산이 고갈됐습니까?"
"그럼 우리가 장난으로 이러겠소, 임 시 영주님?"
"아니, 말이 안 되잖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아인스가 자기 가슴을 퍽퍽 쳤다.
"...누구 염장 지를 일 있나. 이거 다 짜고 한 짓 아니오? 수명 끝난 광 산 넘기고, 것도 모르는 우리는 귀한
땅만 빼앗긴 거고."
"아니, 난 조금도...
키르안이 손을 내저었다.
그 또한 자작들만큼, 아니 그 이상으 로 당혹스러운 참.
"조금도 뭐요? 막내… 아니 에른 공 자가 합의를 주도했다지만 영주의 직 인을 가지고 온 바. 전부 계획된 거라 고 봐야겠지."
"형제 사기단이야!"
"왕실에 정식으로 제소하겠어!"
자작들이 아인스를 거들었다.
"오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카렌과 제이슨이 달려왔다.
키르안으로선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 다.
이 말 밖에는.
"에른이야. 대체 뭔 짓을 한 거지?
막내 어디 있어? 얼른 불러와!"
"저, 저기 오십니다!"
지목받은 기사가 정원 쪽을 가리켰다.
다렌과 함께 정문 쪽으로 걸어오는 소년.
자작령과 백작령의 기사들, 칼로이, 자작들과 형제들의 눈길이 에른을 향 한다.
'생각보다 빨리 발견했네. 하여간 사 리 먹성도 참.'
너무 공교로운 것도 좀 그러니까 적 당한 시기에 드러나도록 채굴 중인 구 역은 남겨 달라고 당부하긴 했었다.
그에 대한 사리의 반응은.
"뀨에엥…?"
뭐, 며칠 채굴할 양을 남겨둔 것만 해도 잘 참아준 거라고 보긴 한다.
에른은 이쪽을 향하는 눈빛들을 하나 하나 훑었다.
놀라워하면서도 기쁜 빛이 떠올라 있 는 키르안을 제외한 형제들.
그리고 칼로이.
또 몇몇 기사들과 가신들.
모두의 면면을 뇌리 한곳에 담아 둔다.
'쭉 같이 가도 좋을 사람들…. 그래 도 좀 되는군.'
에른은 그들을 지나쳐 적대적인 시선 을 보내는 자작들과 마주했다.
"저 찾으러 오셨다고 해서 나와 봤는 데. 기사들까지 우르르 몰고 와선 무 슨 일로?"
헤론이 소리쳤다.
"이,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하려고 왔다."
"우리의 교환 조건은 멀쩡히 채굴되 는 광산과 농지이지 텅텅 빈 쓸모없는 산하고 경작 가능한 땅이 아니란 말이 지! 그러니까 합의했던 건 무효야!"
"흐음...?"
에른의 얼굴에 떠오른 물음표가 점점 커져만 갔다.
그가 품에서 합의서를 꺼냈다.
내용을 확인하고 모두가 경악했던.
"여기 보시면 광산의 채굴권과 경작지 를 교환한다고 되어 있을 뿐이지, 채굴되 는 광산이란 말은 어디에도 없는데요?"
해론의 말문이 막히자 게이츠가 나섰다.
"그 말이 그 말이지! 어떤 미친 인간 이 텅 빈 광산하고 매년 수확되는 경 작지를 바꾸겠어?"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에른의 표정이 싹 변했다.
지금까지 웃음 띤 얼굴만 보여주고, 또 그것만 자작들의 기억에 남긴 까닭 은 이 순간을 위한 것.
가식을 벗어던지고,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어떤 미친 인간이 매년 수만 골드 벌 게 해 주는 돈줄을 겨우 몇천 티르 땅 과 베꾸려고 할까.
참 낯짝도 두껍지? 이득이 될 때는 이상한 걸 못 느끼다가 정작 손해를 보니까 이치에 안 맞는다 고 바락바락 우기는 태도 말이야."
"여, 역시 네놈 짓이었어! 네놈이 철 광석을 고갈시킨 게 틀림없다!"
"추하군, 게이츠 자작."
"뭐... 뭣!"
"내가 좀 대단하긴 해. 그건 인정인 데… 내가 신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무,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다. 그 렇지 않고선…."
"그러니까 그 수가 뭐냐고. 증거는? 증인은? 대답해 보지?"
찌릿.
에른이 쏘아보자 자작들의 흥분이 눈 에 띄게 가라앉아 갔다.
'뭐, 뭐라고 말 좀 해봐, 헤론!'
'아, 아니 난 좀...
'다 보는 앞에서 개쪽 당하는 걸로 끝낼 거야?'
'그렇게 자신 있으면 형님이 하시죠?'
자작들이 의기소침해졌다.
왜일까.
돌변한 막내 놈의 눈빛을 쳐다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위축되고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특히나 헤론은.
'내, 내가 왜 이러지?'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보는 눈만 없다면 털썩 주저앉고 말 았을 것.
'효과가 있군.'
에른이 미소를 지었다.
자작들은 알지 못하리라.
왜 자신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죽음과 마주한 듯한 극한의 공포를 왜 어린 소년에게서 느끼는 것인지.
지워진 기억을 복원하지 않는 이상에 는, 앞으로도 영원히.
"또 합의문을 보면 이런 말이 있지. 이 함의는 영구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종류다."
"그, 그건...
자작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에른이 딴말하지 못하도록 삽입한 문 구가 역으로 자신들의 족쇄가 되어 버 렸다.
"거기다가 피스리드 백작의 공증까지 받았는데. 스틸가드와 한 약속, 백작
의 공증도 아무것도 아니다...?"
에른이 노성을 질렀다.
"어디서 자작들 따위가! 감히!"
"이, 이보게 에른 공자. 마, 말이 심 하잖아?"
"심한 건 너희들이지. 자신 있어서 그래? 강철의 심장을 적으로 돌려도 안전할 거란 자신이?"
그러면서 브란웰을 암시하는 말을 쓱 홀렸다.
"...든든한 뒷배라도 있는가 보지?"
자작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왜인지 말까지 더듬는다.
"아, 아니…. 무, 무슨 그런!"
"어, 어떻게 스틸가드를 무시할 수 있겠나. 그건 오해일세."
"음.. 피스리드 백작님 체면도 있고. 합의는 지키는 게 맞긴 하지. 우, 우리가 화가 나서 잠깐 어떻게 된 모양이야"
자작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이만 빠지자는 눈짓을 해 보였다.
에른이 비죽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더 할 말은 없고?"
"없, 없다네...
"그럼, 데리고 온 놈들 다 데리고… 썩 꺼져!"
순간 지축을 울리는 우렁찬 사자후.
내공이 실린 목소리에 자작들과 기사 들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 크아악!"
"뭐, 뭐냐!"
주르륵.
기사들의 양쪽 귓구멍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연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이후, 정 말 간만에 펼쳐 보이는 소요탄금결이다.
자작들이 기겁하며 기사들을 이끌었다.
"어, 어서 가자!"
에른은 떠나는 그들의 등에 대고 경 고했다.
"이따위 무도한 짓을 봐주는 것도 이 번이 마지막인 줄 알아. 다시 기사들이끌고 스틸가드 땅을 밟았다간…. 귀 뿐 아니라 온갖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 를 흘리게 될 거니까!"
그렇게 자작령에서 온 인간들이 전부 사라져 버리자.
기사단과 저택의 사람들만이 남았다.
"에, 에른..…
놀란 누이들.
그리고 말을 잇지 못하는 키르안.
형제들의 반응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막상 닥쳐 보니 재미있달까?
"이, 이러면 결국 잘 한 합의였던 거 네? 맞지?"
제이슨의 물음에 다렌이 고개를 끄덕 였다.
"채굴 안 되는 광산의 채굴권을 내주 고 거의 2000티르 가까운 땅을 받아 낸 거니까."
카렌이 덧붙인다.
"기사단의 도움을 받은 것도 이니고, 영 지가 입은 피해는 굳이 따지자면 약간의 소란 정도? 이건 피해라고 할 수 없어."
"그러게 진작에 말했잖아."
에른은 꼭 하고 싶었던 그 말을 꺼냈다.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라고."
"나, 난 인정 못 해!"
키르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상 못한 결과에 따른 반응은 예상 대로의 고집, 그리고 우기기.
"자, 자작들하고 짠 거 아니야? 광산 이 고갈됐다는 말을 어떻게 믿어?"
"그거야 직접 가서 보면 아는 거 아 니Op 난 확인해 봐도 상관없어."
"이, 이 내기는 누가 영주직에 더 적합 한지를 확인하자는 취지였어. 정말 광산 이 텅 비었다고 해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데… 그럼 성립이 안 되는 거지!"
"...내 이럴 줄 알았어. 형은 너무 의외성이 없다니까."
에른이 품을 뒤졌다.
"승복 안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이 걸 꺼내는 수밖에."
"그, 그건...?"
파란 무언가.
에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본 하파엘 의 안색이 변했다.
이게 나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통성이 첫째 도련님한테 있는 게 아니었어...?'
얼른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는 그.
"...주군을 뵙습니다!"
그가 단원들에게도 눈짓했다.
"뭣들 하는 거냐? 주군께 예를 갖추 어라!"
철컥! 철컥! 철컥!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주, 주군을 뵙습니다!"
[202화]
척.
등에 닿는 감촉이 새롭다.
폭신한 안락의자의 그 느낌은 아니다.
솜털 같은 부드러움보다는 차라리 딱딱하다고 해야겠는데.
그런데도 알 수 없는 편안함,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안락감.
척추의 굴곡에 딱 맞는 등판이 허리 를 착감싸 온다.
'인체공학적이라는 말이 이런 뜻인가?'
에른은 의자에 달린 각종 기능을 사 용해 봤다.
팔걸이를 조정해 보기도 하고, 좌판의 높이를 높였다 낮췄다 해 보기도 하고.
어찌나 기능이 많은지 같이 딸려온 〈트리오백 H9000ulda 완벽 사용 설 명서(지식)〉을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한참 헤맸을지 모른다.
끼리리릭.
체중을 뒤로 실으니 등판이 확 젖혀 졌다.
여기서 고정레버를 사용하면 원하는 각도로 맞출 수 있다.
"집중할 때는 최대한 세우고, 잠깐 쉬고 싶을 때는 뒤로 젖히면 반쯤 누 울 수 있고. 기발하네. 역시 3계 물품 이라는 건가."
기발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신통방통 한물건.
한낱 의자 따위에도 섬세한 손길, 몇 수를 앞선 기술력이 깃들어 있으니.
'이질감이 심하진 않으려나?'
에른은 문가로 가서 책상과 의자와
의 조화를 살폈다.
이 인체공학 의자는 Level 3으로의 등급 상승을 축하한다며 거래소가 보 내온 선물 다섯 개 중 하나다.
가격은 5코인으로, 의자치고는 비싸 긴 하다만 실은 가격 보고 '에계….' 라고 생각했었다.
1계 진출로 받은 선물만 해도 각각 이 수백 코인 단위였으니까.
아무리 특별 제작했다고 해도 솔직 히 급이 안 맞는다.
앉아 본 지금은 거래소의 의도를 알
것 같아졌지만.
3계는 0, 1, 2계와는 결이 다른 세 계라는 것.
이런 평범하고 흔한 물건에도 차원 의 철학과 특성이 담겨 있다는 것.
3계의 기술력은 차원 제일!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고른 선물 이 아닌가 싶다.
" 흐음...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다발.
어지러이 널린 꼴을 보면 키르안이 꽤나 골머리를 앓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의자가 가죽 재질이라 그런가. 아주 이상하진 않네. 아니, 은근 잘 어울려."
트리오백 H9000ulda와 기묘한 조화 를 이루는 고풍스러운 책상.
은은한 붉은빛이 도는 이 원목 책상은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그리고 아버지 가 십수 년을 사용한 물건이었다.
백작령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이 이 루어지는 영주의 자리.
'잠깐 큰형이 앉아 있었지만, 이제는 나에게로 왔다...
어제의 일로 키르안을 제외한 모두
가 수긍했다.
그럴 수밖에.
키르안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지 세력 없이는 고집부려 봐야 공 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
하는 수 없어진 그는 에른에게 모든 권한을 내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결국 다시 돌아왔다. 이 자리로 결국."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입 밖으로 끄 집어내 본다.
조심스레.
" 영주."
전생의 마지막 3년.
그동안 내내 들었던 말이지만 어쩐 지 생경하게 느껴진다.
스스로 말하고도 쑥스러우니 왜 이 러나 싶다.
시간으로 치면 고작 2년 남짓 지났 을 뿐인데.
에른은 책상으로 돌아가 다시 인체 공학 의자에 읹았다.
"당분간은 내가 스틸가드의 영주….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이번에는 망치지 않는다."
굳게 다짐한 두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오른다.
"...절대로!"
왠지 모르게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을 느꼈다.
다시 짊어지게 되었으니까.
영주라는 직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책임의 무게.
멍청하게도, 아니 무책임하게도… 전 생에는 갖지 못했던 마음가짐.
그래서일까?
기분 좋은 중압감이었다.
아버지는 부재중이고 자작들은 호시 탐탐 기어오를 기회만 노릴 뿐.
거기에 거물급 귀족, 브란웰 후작이 스틸가드를 집어삼키고자 한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
그 외에도 스틸가드를 노리는 무수 한 하이에나들….
하지만 막중한 책임감만 있을 뿐이 지, 부담감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자신은 전생의 한심한 그놈이 아니니까.
무의미한 세월만 흘려보내다가… 어
쩌다 차례가 돌아온 것에 얼씨구나 영 주직에 앉은, 30세 에른 스틸가드가 아니니까.
'사실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잘 됐지. 한 영웅급 정도 오를 거라고 봤었고, 마 법이나 다른 능력은 생각도 안 했는데.'
무엇보다.
파앗!
에른의 왼쪽 눈을 뒤덮는 황색 안광.
이 색깔을 2년 안에 얻을 줄은 몰랐다.
애초에 3계의 상징색이 노란색이었 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차원 간 거래를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접속한 3계의 화면이 시 야를 가득 채운다.
그와 함께.
['에몽'이 돌아온 당신을 환영합니다.]
['에몽'이 1342호 지구 시간으로 15 분 만의 귀환임을 알립니다.]
"좀 과할 정도로 친절한데?"
몇 분 만에 접속했는지 알 게 뭐냐.
에른의 마음을 읽은 것인 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에몽'이 TMI가 거슬린다면 '특전' 항목에서 설정을 변경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TMI? 그건 또 뭔 말이지?"
['에몽'이 TMI란 굳이 알고 싶지 않
은 너무 많은 정보의 약자임을 알려 줍니다.]
['에몽'이 비슷한 용어로 누물보, 안 물안궁, 설명충 등이 있다고 예를 들 어 보입니다.]
"아, 설명충."
그거라면 에른도 아는 용어다.
"이런 말들이 다 어디서 나왔나 했 더니. 상위 세계에서 쓰이던 게 점차 아래로 내려오는 거였군."
['에몽'이 그 말들은 모두 3계에서 유래했다고 정정해 줍니다.]
['에몽'이 꿀팁을 알려 줍니다.]
[TIP - 차원거래에서 통용되는 각종 유행어와 밈, 속어들은 거의 대부분이 3계에서 나왔다!]
'진짜 TMI군…. 빨리 설정을 바꿔야 겠어.'
에른은 거래소 메뉴의 [VIP샵] 항목 으로 들어가 가장 아래의 특전을 확
인했다.
3계로 올라오면서 얻은 새로운 VIP
특전, 그 13번째는.
[도와줘요 비서에몽(Lv. Max)]
-최고의 차원거래 도우미, AI 어시 스턴트 '에몽'이 당신을 보조합니다.
-'에몽'의 성능과 권한, 보유 데이터 는 특전 레벨에 비례합니다.
-'에몽'이 보내는 메시지의 빈도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항상]-[자주]-[흔히]-[가끔]-[요청시]
-'에몽'에게 위임할 각종 권한을 지 정할 수 있습니다.
에른은 메시지 빈도를 [요청人|]로 바 꾸고 아래 항목에 달린 세부 사항을 읽었다.
"교섭이나 정보 수집뿐 아니라 아예 거래까지도 맡길 수 있다고…. 거래소 이것들, 은근 통 크네."
물론 거래소는 확실히 선을 긋고 있다.
['에몽'의 거래로 손실이 발생했을
경우, 모든 책임은 권한을 위임한 교 류자에게 있습니다.]
그래도 대신 차원거래를 해줄 무언 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중증의 차원거래 중독자라고 할지라 도 최소한 먹고 싸기는 해야 하니까.
그러면서도 채널에서 눈을 못 떼는 정신 나간 놈들이 없는 건 이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건전한 차원거래자 들은.
'나 같은!'
항상 차원거래 화면만 보고 있을 수 는 없다.
특히나 막 스틸가드의 임시 영주로 부임한 참.
당연히 영지에 신경 쓰는 만큼 차원 거래에는 덜 신경 쓰게 될 터이니.
"거래소가 농간을 부리지만 않는다 면야. 괜찮은 특전인 거 같다. 어떻게 생각하지, 에몽?"
['에몽'이 '거래소가 농간을 부린'다 는 말뜻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걸 물어봐야 알아? 혹시 맥스급 성 능이 아닌가? 척하면 딱이지. 거래소가 시세나 거래량 조절에 AI를 이용한다면, 그보다 쉬운 방법이 없을 거 같은데. 숫 자 속여서 뒷돈 챙길 수도 있고… 이건 아무리 거래소라도 심한가?"
['에몽'이 자신은 거래소로부터 독립 된 인공지능이며, 담당 교류자의 이득 만을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었기 에 그런 '농간'은 일어날 수 없음을 확실히 합니다.]
"글쎄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겠
지. 근데 거래소는 거래소야."
['에몽'이 거래소는 VIP급 교류자들 을 우대하며 그들로부터 책잡힐 일은 하지 않는다고 알려 줍니다.]
['에몽'이 이는 거래소가 딱히 정직해 서나 직업정신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농간'이 발각되었을 경우 입을 손실이 크기에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 니다.]
['에몽'이 또한 판단하기에 당신은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만큼,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내 놓습니다』
"그래? 뭐, 믿을지 말지는 하는 거 봐서."
흔쾌히 대답하는 에른의 얼굴이 살 짝 굳어 있었다.
조금 진지해진 모습.
'괜히 맥스급 특전이 아닌 건가?'
약간 놀리듯이 혹시 맥스급 아니냐고 했던 말은 바로 취소해야 할 것 같다.
방금 에몽이 말한 정보는 여러모로
중요했다.
'거래소가 눈치 보는 대단한 교류자 들이 존재 한다…. 나는 최고의 우대 를 받고 있다…?'
문득, 파이오니어 협정에 대한 설명 을 [섭리의 눈]으로 살핀 일이 떠올 랐다.
'하르모니아의 선지자들, 차원의 주 도 세력…. 그쯤 되면 거래소도 눈치 를 봐야 하려나?'
에른이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뭐, 지금은 답 안 나오는 문제고 굳
이 답을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는 [섭리의 눈을 부릅뜨고 다 녔어도 절대 알 수 없었던 고급 정보들.
3계에 올라오니 비로소 조금씩 풀리 고 있으니까.
'계속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진실 을 알 수 있겠지. 뭐에 대한 진실일지 는 모르겠지만.'
에른은 나머지 선물들도 확인해 보 았다.
거래소가 보내온 물품은 이러했다.
-트리오백 H9000ulda(한정판)
KK7( 자동소총)
-엑소더스 Q90(세단)
-Hel375(단일 로터식)
-디 럭스룸(46형)
처음 두 개는 너무 싸서 살짝 기분 상해버릴 뻔했지만, 나머지는 다들 바 로 채널에 내놓아도 목돈 건질 정도 로 비싼 것들이었다.
'5코인, 7코인, 300코인, 1000코인, 8500코인...
설명을 보면 순서대로 의자, 총기, 승용차, 헬기, 아공간 방이다.
도합 1만 코인 가까이 되는 선물이 니까.
거래소는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고 봐야 하리라.
에른은 각 물품과 같이 딸려온 매뉴 얼을 [흡수]로 습득되도록 해 두었다.
설명을 읽어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 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히지만.
진행도가 100%에 이르면 다 알게
될 것이다.
'음?'
문득 창밖을 내다 본 에른의 표정이 변했다.
멀어지는 뒷모습.
"아니, 또 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에른이 얼른 저택 밖으로 향했다.
*
'씁쓸하군.'
축 처진 넓은 어깨, 우울한 눈빛은 바닥을 향한다.
단장실에 사직서를 남기고 나온 하 파엘이었다.
밤새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
'도련님을 뵐 면목이 없군.'
아니지, 솔직해지자.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불 만 표시였다.
' 헛?'
뭔가가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에 하 파엘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내줘서 는 안 되는 거리를 내줬다.
'스틸가드에서 이럴 수 있는 사람
단한명.
"도련… 아니, 영주님!"
하파엘이 뒤를 돌아봤다.
"간 떨어질 뻔했잖습니까!"
"무슨 죄라도 지었어요?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싱긋 웃어 보이는 에른.
그 환한 황금빛 미소를 보니 순간 솟구친 화가 가라앉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죄라됴,전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음, 그건 그렇다 치죠. 근데 주군이 아니라 영주님이네요? 마음을 굳혔나 봐요?"
"...보셨습니까, 사직서?"
"안 봤지만. 그 차림이면 보고도 모 르는 게 이상한 거죠."
하파엘은 누가 봐도 멀리 떠나는 사
람 같았다.
"왜 떠나려고 하세요? 단장님은 스틸가드에 꼭 필요한 분이에요."
하파엘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말은 하지 않지만, 엿볼 수 있다.
그 안에 가득 찬 불만을.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뭐 때문에 이러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참고 있는 겁니다. 그간 스틸가드에, 주군께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
키르안에게 남은 마지막 명분, 맏이
라는 정통성마저 앗아간 것은.
"...비고 열쇠. 그걸 이제 와서야 꺼내셨죠. 저도 눈치 있는 놈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쯤은 알아요."
에른이 혀를 찼다.
둔한 곰 같이 우직하기만 한 하파엘 에게 이런 면모가?
그런데 곰이 여우짓을 해 봐야 여우 같은 곰에 불과할 뿐이다.
"설마, 제가 단장님 내쫓으려고 그때 까지 기다린 줄로 안 거에요?"
"그럼…! 아닙니까?"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신데요. 정말 눈치 있으신 거 맞아요? 내가 보기엔 아닌 거 같은데."
[203화]
하파엘의 뇌리에.
지금도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선연히 떠오른다.
손에 들린 푸른 열쇠.
보통 열쇠가 아니다.
스틸가드의 저력을 상징하는 비밀스 런 공간, 전대의 부가 보관된 장소.
바로 [비고]의 문을 여는 장치다.
북부의 영웅은 제대로 보답 받지 못했다.
그가 나바로에 기여한 만큼의 보상을 받았더라면?
스틸가드는 보다 비옥하고 따뜻한 중 남부의 땅을 다스렸을 것이고.
또한 백작령이 아닌 공작령이라고 불 렸을 터이다.
그래도 나바로 왕실이 아주 양심불량 은 아닌지라 전대의 주군은 많은 양의 금과 보물을 하사받았다.
그리고는….
'땅과 작위는 대를 이어 지속하는 오 래 가는 것. 반면 재물은 영원히 존재
할 것 같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야 만다.'
이렇게 말한 뒤, 비고를 만들어 후손 들이 보물을 함부로 낭비하지 못하도 록 조치를 해 두었다.
그 [비고]의 열쇠.
에른이 영주를 상징하는 푸른 열쇠를 꺼내들었을 때, 하파엘은 깨닫고 말았다.
'주군께서는, 이미 막내 도련님을 차 기로 점찍어 두셨던 거구나.'
아무에게나 넘기는 물건이 아니다.
스틸가드의 혈족이라고 해도 그 자신
이 가주가 되기 전에는 비고 안쪽에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는데.
'유일한 예외가 에른 도련님이었 지...
그때는 에른의 당돌함과 기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고만 생각했다.
하늘 같은 주군에게 마나에 맹세하도 록 부탁하고, 비고에 들어가게 해 달 라고 한 일.
이제 와 되짚어 보면 그 또한 무언 가의 암시, 주군의 포석이었던 걸까?
아무튼.
하파엘은 극도로 내려앉는 기분을 어 떻게든 끌어올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다 압니다. 꼭 제 입으로 말해야겠 습니까?"
" 뭘요?"
"탈곡의 변, 스틸가드 버전의. 아닙 니까?"
'와... 진짜 여우 같은 곰이었네.'
에른이 혀를 내둘렀다.
오늘 하파엘의 새로운 면모를 계속 발견하게 된다.
[탈곡의 변]이란.
기사 아카데미의 창립자, 전전대의 나바로 왕 알베스 3세가 일으킨 피의 숙청을 일컫는 말이다.
알베스 3세는 각종 개혁 정책을 성 공 시켜 지금에 와서는 성군 대접을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귀족들의 반대가 극렬했다.
어찌나 심했냐면, 암살 시도를 당하 기까지.
암살자의 칼에 맞은 알베스 3세는 중태에 빠져 국정을 돌보는 것조차 어 려워졌다.
급기야는 몸도 가누지 못하며 오늘내 일하는 중이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이에 왕실과 귀족들은 후사를 준비하 며 두 파로 나뉘었다.
알베스 3세의 뜻을 계승하는 1왕자 파와, 개혁 정책을 원점으로 돌리려는 2왕자 파.
왕으로 옹립된 왕자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양측의 대립이 극한에 이르러 사상자 까지 발생할 때쯤.
"욍성이 망측한 반역자들로 득실거리
는구나!"
알베스 3세가 병석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태 파악이 안 된 2왕자 파를 급습.
무자비한 숙청을 지시하며 왕이 남긴 명언은.
"무엇이 쭉정이고, 무엇이 낱알인지 구분하였으니… 이제는 쭉정이들을 모 조리 불태울 차례다!"
그리하여 탈곡의 변.
이때부터 나바로인들은 일부러 약점 을 노출해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드
러난 적을 소탕하는 계책을 이에 빗대 었다.
'흠…. 충분히 비슷하게 보일 수 있군.'
섬을 떠날 띠I, 아버지에게 받은 비고 열쇠.
마지막까지 꺼내지 않은 것은 그 이 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파엘이 한숨을 내쉰다.
"결국 영주님께 전, 낱알이 아니었던 셈이죠. 쭉정이가 기사단을 이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더러운 꼴 보기 전 에 그만두는 게 낫습니다. 그게 영주
님을 돕는 일이기도 하고."
"하여간 진짜 눈치 없으시다니까."
"이번 일로 누가 낱알인지 확인하긴 했죠. 특히 칼로이 총관이 그렇고."
"...그 친구는 머리가 좋고 실용적 인 사고를 하니까. 무엇이 영지를 위 한 선택인지 바로 알았겠지요."
"그렇지만 난, 쭉정이는 찾아내지 못했 어요 영지에 법도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죠;
하파엘의 얼굴에 연이어 물음표가 떠 오른다.
에른은 그 물음표를 지우고 빈자리에 느낌표를 찍어 주었다.
"저한테는 단장님 같은 분도 필요해요/
"생각해 봐요. 쭉정이들을 죄다 불태 우고 싶었으면 왜 각성급인 걸 먼저 드러냈을까. 또 뭐하러 큰형한테 내기 를 제안했을까요?"
하긴 그렇다.
레바단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표인 비
고 열쇠가 있는데, 뭐 때문에 위험 부 담을 감수한단 말인가?
'도련님은…. 모두를 설득하고 싶었 던 거군. 주군의 그림자가 아닌, 본인 스스로의 능력으로.'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미친다.
"그, 그렇다면… 광산 고갈도 다 계 획된?"
"그건 노코멘트."
"아...
"아무튼, 안 떠나시는 거죠? 쭉정이 아닌 걸로 결론 났으니까."
하파엘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
그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하, 하지만 전 큰 도련님의 편에 섰 던 몸입니다. 거기에 영주님 뜻도 모 르고 자리까지 박차고 나왔고…. 앞으 로 절 신뢰할 수 있으실지."
"뭘 그런 걸 다 걱정하고...
에른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때는 단장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 죠. 저한테는 너무 엄한 스승이셨으니
까.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역시 충심에서 나온 엄격함이었음을. 그래 서 단장님을 신뢰해요."
하파엘의 눈이 커졌다.
겨우 그런 이유로?
...라는 듯한 얼굴.
에른의 미소가 짙어졌다.
'실은 전생에, 10년 넘게 본 바가 있
으니까.'
하파엘은 스틸가드 최후의 충신이다.
칼로이마저 영지를 떠났을 때도, 하 파엘은 형제들과 자신 곁에 남아 스틸가드를 지켰다.
결국 못 지켜내긴 했지만.
칼로이가 아버지와의 의리로 충성하 는 스타일이라면, 하파엘은 스틸가드 그 자체에 충성한다.
어떻게 보면 하파엘의 맹목적인 충성 심이 더 값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단장님을 믿는 것보다 더."
"예, 옛?"
"이건 진심이에요. 단장님은 절대 스틸가드를 저버릴 분이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해요."
보수적인 성향 탓에 키르안을 지지하 긴 했지만, 비고 열쇠까지 꺼내든 지금.
하파엘 만큼 믿음직한 가신이 없다는 건 에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하파엘.
그가 겨우 말을 이었다.
물기 젖은 목소리로.
" 영주님...
털썩 무릎까지 꿇는다.
"아니… 주군!"
"이걸 굳이 또 하실 것까진. 일어나 세요."
"아닙니다. 저도 이번에는 진심이니까 요. 진정으로 주군을 모시고 싶습니다."
역시 하파엘은 어쩔 수 없는 곰이랄까.
우직한 기사의 눈에 두 열기가 일렁 인다.
기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것이 기사도.
하파엘 같은 정통파에게는 그야말로 지고의 가치였으니.
"너무 감동할 거 없어요. 믿을 만한 분이라서 믿는 거니까."
"...말씀 낮추십시오, 주군."
"이제야 주군 소리가 술술 나오는군요"
"지금 이 순간부터, 제 평생 주군은 단두분뿐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두 사람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에른이 손을 내미니 하파엘이 검을 뽑 아 들고 공손히 손잡이 부분을 건넨다.
척
날 부분을 비스듬히 눕혀 하파엘의 내려온 어깨 위에 올려놓으며.
공명이 일었다.
마나를 담은 음성.
"그대, 하파엘은 나 에른 스틸가드를
주군으로 섬길 준비가 되었는가?"
우웅!
"되었습니다."
"그대, 나의 기사 하파엘은 나와 함 께 고난과 역경의 길을 헤쳐나갈 준비 가 되었는가?"
"되었습니다."
"마나와, 아스파이어의 존귀한 이름 에 대고?"
"마나와, 아스파이어의 존귀한 이름 에 대고."
약식으로 진행했지만, 큰 의미가 있 는 맹세였다.
기사들이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이 정
도의 충성 서약을 하지 않는다.
보통은 조직과 가문에 매여 있기에 일대일로 맹세하는 일은 잘 없는데.
이건 게다가 가장 강력한 서약 아닌가.
"이제 일어나지 단장."
"예."
"다행히 본 사람은 없군. 오글거려서 혼났네. 주종 서약은 왜 이런 거밖에 없지?"
"...예?"
"아니, 기사단장이 떠나려고 했다는 게 알려지면 모양새가 나빠지니까. 얼
른 가서 사직서도 회수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 그러네요? 명을 받듭니다!"
하파엘은 얼른 짐 꾸러미를 벗어 던 지고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신의 두 번째 주군이 내린 첫 번 째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
"...덕분에 숨통이 트였습니다."
에른의 집무실.
책상 앞에 공손히 선 칼로이가 별로 반갑지 않은 서류들을 들이밀었다.
"어음, 어음, 어음". 죄다 어음들이군."
"그것이… 영지의 사업 때문에."
"설명 안 해도 알아. 잊은 건 아니겠 지? 내가 수도에서 뭘 했는지."
"아, 물론이죠."
필라프, 아니 에른 상회의 총회주인 그다.
상회건 영지건 자잘하게 돈 쓸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흔한 사건.
허나 큰돈이 들어오는 건 보기 드문 경사스러운 이벤트다.
거래처에서 대금이 들어오거나, 영지 라면 매년 돌아오는 수확철이거나.
그런 이유도 있고.
또 매번 대금 결제를 해야 하면 비 효율적이기도 하니까.
몇 개월 단위로 어음을 끊어 한꺼번 에 처리하곤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에른은 어음들을 하나씩 뒤적거려 보 았다.
"크라이트 상회, 1500골드. 크라이트
상회 1700골드, 다미안 상회 300골드 크라이트, 크라이트, 다미안, 크라이 트… 뭐 이렇게 크라이트 위주지? 원래 다미안하고 주로 거래하지 않았나?"
"다미안 상회와도 여전히 거래를 자 주 합니다. 다만, 다미안과는 저택에 서 사용하는 소모품 거래가 주라서요. 크라이트는 최근 영지에서 벌인 사업 에 참여하면서 부쩍 가까워졌습니다."
크라이트로부터 구매한 물품 목록을 보니, 대부분이 생산재였다.
대량으로 구매한 농기구와 관개 및 배수 공사에 들어간 인력과 장비.
스틸가드에는 농지만 있는 게 아니다.
라발 산에 들어간 물품과 공사 대금 또한 상당한 금액.
모두 합해 보니.
"...8만 골드? 1년 세수의 1/3 가 까이 되네. 아버지께선, 왜 이렇게 큰 일을 벌이셨지?"
에른이 눈살을 찌푸리자 칼로이가 해 명했다.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이 워낙 좋아 서요. 영지의 숙원 사업이었던 만큼, 언젠가는 하긴 했어야 하는데. 크라이
트가 손해 볼 각오로 제안해 와서요."
"왜 그랬을까. 상회가 지향하는 가치 는 첫째도 이윤, 둘째도 이윤인데."
에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레히테를 본거지로 하는 상회 중에서 스틸가드와 친밀해지고 싶지 않은 곳은 없을 겁니다. 길게 보면 그 게 상회에도 이득이니까요."
'과연…?'
에른은 어음의 만기 날짜를 확인했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났군."
"올해 작황이 그리 좋지 못해서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크라이 트 쪽에서도 최대한 사정을 봐주겠다 고 했고. 이젠 비고를 열 수 있으니까 요. 금세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글쎄, 총관.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 예'?"
"둘 다 그러지 않을 게 분명하지. 나 도, 크라이트도."
벙찐 칼로이.
그는 에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선, 난 비고를 열지 않을 거야.
그리고 크라이트는, 말은 그렇게 했어 도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을걸."
"...어째서 입니까?"
"왜냐고?"
에른은 이어지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뒤셸 크라이트는 상회를 대표하는 얼굴일 뿐. 크라이트 상회의 실질적인 주인은 브란웰 후작이니까!'
[204화]
무력과 돈.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살면 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양쪽 다 없으면 안 타갑게도 처지가 고달파진다는 얘기 도 된다.
두 가지를 다 갖췄으면?
당연히 더할 나위가 없다.
애초에 문제 생길 일 자체가 없을
뿐더러, 더 좋은 건.
'남들에게 문제를 안겨줄 수 있는 위치가 되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 표현을 단 두 글자로 줄일 수 도 있다.
바로 '거물'이라고.
*
그 기준대로라면 브란웰 후작은 충 분한 거물이었다.
브란웰 가문은 같은 후작가인 알브 레트에 비하면 다소 손색이 있지만, 전설급을 보유한 루페브르 후작가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는 중북부 에서 가장 번성한 가문이었다.
그런 명문가의 수장인 페론타 브란 웰.
그가 왜 스틸가드를 먹으려고 하는 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페론타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알 것 같았다.
'방법론은 굉장히 정석적인데. 매 번 대리인을 내세우는 걸 보면 ..?'
후작이 가장 먼저 노린 것은 스틸가드가 취약한 무력 부분이었다.
데킨스와 3자작의 합작.
자칫 성공할 뻔했던 이 계획은 에른의 귀환으로 바닥부터 무너져 내 리고 말았다.
데킨스와 호위들은 지하 감옥에 구 금되어 식은 죽이나 퍼먹고 있고.
자작들은 1750티르나 되는 땅을
눈 뜨고 코 베인 격으로 내주곤, 텅 빈 광산이나 끌어안고 있으니.
완벽한 실패.
하지만 연이은 계책을 준비해 둔 페론타 후작이다.
"저기, 영주님? 어째서인지 말씀을 안 해주셨...
"총관!"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는 칼로이에 게 에른이 목소리를 높였다.
"모르겠어? 무력 다음은?"
"예?"
"당연히 경제적인 압박이지! 스틸가드의 취약점을 노리고 있는 거야. 크라이트 상회도."
"정말입니까? 그걸 어떻게?"
그야 공포에 질린 헤론 자작이 후 작이 꾸미는 음모에 대해 아는 대로 실토했으니까.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너무나 뻔 한 수순이었다.
'3자작 다음은 크라이트 상회냐. 냄새가 나는데, 이 인간...?'
무슨 냄새냐면, 쫄보의 냄새.
그것도 엄청난 개쫄보의 향취다.
페론타 후작이 이 말을 들었다면 영웅 가문을 집어삼키는 게 쉬운 일 로 보이냐면서 역성을 냈겠지만.
'이렇게 사려댈 거면 애초에 마음 을 먹지도 말았어야지. 이 정도 쫄 보면 전생에 10년이나 기다렸던 것 도 이해가 간다.'
이번 생은 무엇 때문에 빠릿하게 움직이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본인 성향은 어떻게 숨기 질 못하는 것 같다.
칼로이의 고개가 좌우로 갸우뚱 기 울어진다.
"스틸가드를 노리는 의문의 세력이 있다는 영주님의 주장에는 저도 동 의를 합니다. 당장 데킨스가 몰고 온 패거리만 해도 석연치 않은 부분 이 있고. 그렇지만 크라이트가 미치 지 않고서야 백작가를 엿먹이겠습니 까."
"...내기 할까?"
"예?"
"아니…. 총관하고는 그런 거 하면 안 되지. 이건 어때, 확인하러 가
보는 건…?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 지."
" 원하신다면야."
"그 전에, 잠깐만."
에른이 검지를 위로 세웠다.
"취약점을 언제까지고 취약한 채로 둘 수 없지. 이거부터 해결하고. 하 파엘 단장 들어오시라고 해."
*
신임 영주가 과연 제정신인가?
칼로이는 지금껏 한 적 없는 질문 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냉철 함이 기본 바탕이고, 합의서 사건은 어린 나이의 치기일 뿐인 줄 알았는 데…. 무모함이 바탕이고 냉정한 모 습이 요행이었던 건가? 광산 건도 그렇고 단지 운이 좋았을 뿐...?'
저택 밖으로 나온 두 사람.
칼로이의 한숨이 끝이 없다.
그의 심사를 아는 에른이다.
피식 웃으면서.
"땅 꺼지겠네. 걱정 안 해도 된다 니까?"
"걱정 안 하게 생겼습니까. 당장 막아야 하는 어음만 해도 크라이트 에 8만, 다미안에 5천인데…."
"총관도 알잖아. 스틸가드는 그동 안 할아버님이 세운 위업, 그리고 아버지의 개인 기량에만 너무 의존 해 왔어. 그 결과가 작금의 종잇장 스쿼드지."
"그거야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만. 정도라는 게 있는데요. 단장님께
1만을 추가로 끊어준 건...
"오러 유저하고, 쓸만한 3, 4급 위 주로 채우려면 그 정도는 써야 흐L 사실 1만 골드도 부족한 느낌이지."
"영주님, 이건 실수하는 겁니다. 신 규 기사 영입은 최소 io년은 유지 할 수 있을 때나 시도해야 합니다. 당장 함부로 늘렸다가는 몇 년 뒤에 후회하는 수가…."
"흐음…. 총관은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그것도 생각 못 했을까 봐'?"
"최소한 비고라도 여셨어야죠. 왜
고집부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도 전에, 불 길로 달려 들어가는 격입니다."
"...비고는."
에른의 눈이 가라앉았다.
"할아버님께서 후손들을 위해 마련 해 둔 안배야. 가문이 위기에 빠졌 을 때에만 사용해야 하고. 또 거기 에만 의존해서도 안 되지."
지금이 위기가 아니라면 대체 언제 가 위기란 말인가.
당장 10만 골드에 육박하는 빚더 미를 막아야 하는 상황인데.
하지만 이 신임 영주는 영지의 재 정이 파탄 나려 하는데도 근심의 빛 이라곤 조금도 비추지 않는다.
'부디 근거 있는 자신감이어야 할 텐데...
"안 되겠다. 난 총관을 믿지만 총 관은 날 못 믿는군."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아냐. 믿음을 못 준 나한테 문제 가 있는 거지."
"아닙니다, 음...
"줘."
"예?"
"어음들. 크라이트, 다미안, 그리고 하파엘 단장한테 내준 예산 1만 골 드까지. 전부 해결해 보이지."
"그렇게만 된다면야…."
칼로이가 얼른 어음 다발을 넘겼 다.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이게 위 기였는지, 아니었는지."
에른이 손짓하자 칼로이가 의아한
고갯짓을 보였다.
"아, 마차를 준비해 뒀습니다."
"웬 마차? 우리 그거 안 타."
"...마차를 안 타면, 레히테까지 어떻게 가시려고?"
"더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거 든. 아마 총관도 좋아할걸?"
씨익?
에른이 불길한 웃음을 지어 보였 다.
*
부아아아앙-!
가도에서 울려 퍼지는 우렁찬 엔진 소리.
엑소더스 Q90의 검은 차체가 북부 의 차가운 공기를 반으로 갈랐다.
'2000kg 에 육박하는 중량에, 말 400마리의 힘을 내는 괴물…. 이런 게 3계에선 일상적인 이동 수단이라 니.'
익숙한 발놀림.
힘껏 엑셀을 밟으니 쭉 뻗어 나가 는 느낌과 함께 속도계가 치솟는다.
그와 함께.
"으아아아아악! 속, 속도 좀 줄이 십시오!"
조수석에 앉은 칼로이가 비명을 내 질렀다.
평소의 얼음장 같은, 또한 저택에 서 보인 엄한 얼굴은 이미 산산조각 나고 없다.
시속 200km를 넘나드는 난폭 운
전
평지를 달리는 마차보다 20배는 더 빠르니 그로서는 처음 겪어 보는 속도감에 눈이 핑핑 돌고 속이 거북 해질 수밖에.
게다가 양쪽 창문까지 열어 놔서, 칼바람이 온몸을 오들오들 떨게 만 든다.
반면 에른은.
"왜, 재밌기만 한데!"
이미 몇 번 운전도 해 봤고, 마도 기갑에도 익숙한 그라 아무렇지 않
게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상태다.
부아아앙!
속도를 더 올려 본다.
[흡수]한 운전 매뉴얼에서는 제한 속도를 준수하고, 신호 지키고, 보행 자가 지나가지는 않는지 항상 주의 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지만.
'0계에 그딴 게 어디 있어! 인적도 없고 뭐.'
포장도로가 아니라서 덜컹거리는 게 아쉬운 부분이지만.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이 무한정
내달릴 수 있다는 것은 3계인들도 부러워할 부분인 것 같다.
'이런 물건이 고작 300코인이라. 거기다가 이보다 더 좋은 차량이 얼 마든지 있다고...
막 구매 의욕이 샘솟기 시작한다.
역시 거래소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공짜로 보내주는 선물에도 다 의미 가 있는 것이고.
3계의 기술맛을 한번 보면 빠져들 고 만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끼이이 익.
멀리 레히테의 전경이 들어오자 에른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무래도 Q90을 끌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라.
차를 세우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칼로이를 위해 조수석 문 을 열어 주니.
"우웨에에엑!"
뛰쳐 나간 칼로이가 구역질을 해 댔다.
에른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총관. 은근 멀미가 심한 체질인 가? 수련도 꽤나 한 걸로 알고 있 는데."
"대, 대체 이건 무슨 물건…? 마탑 에서 만든 신형 이동 수단입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죄, 죄송합니다. 생각해 보니… 우 욱! 제가 주제넘었던 거 같군요."
눈치 빠른 칼로이였다.
에른은 시치미를 뚝 떼며.
"음?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내
가 설마 가신이 날 못 미더워한다고 해서 이런 걸로 보복하는 놈일까. 에이... 그럴 리 없잖아?"
"난 그냥 시간 절약하려고. 빨리 와서 좋았지?"
"전, 전혀요."
에른이 웃음 지었다.
칼로이가 원래 직언하는 스타일이 라는 건 잘 알고 있고, 그의 우려가 상식선에서는 충분히 할 만하다는 것도 알지만.
자신은 상식선에서 움직이는 스타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이렇게 사사건건 태클이라면 앞으 로도 계속 귀찮아질 게 뻔하니.
이번 기회에 칼로이의 인식을 바꿔 놓을 생각이었다.
"한번 타 봐서 적응됐을 테니까. 돌아갈 땐 더 빠르게?"
"아, 아뇨!"
칼로이가 창백한 낯빛으로 대답했 다.
"저, 전…. 돌아갈 땐 마차를 빌리
도록 하지요."
"뭐, 그건 총관 마음대로 하고. 크 라이트 상회는 어디 쪽이지?"
"제가 압니다. 따라오시죠."
크라이트 상회의 '대외적' 주인인 뒤셸 크라이트는 정말 인상이 좋았다.
푸근한 상인의 얼굴.
'귀족 출신답게 의전에서도 관록이 엿보이고… 페론타가 대리인으로 내 세울 만하군.'
응접실로 두 사람을 인도한 뒤셸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에른을 칭찬해 댔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열일곱에 카 르 숨! 나바로, 아니 대륙을 통틀어 도 최연소 아닙니까?"
"그거야 카르 숨은 나바로에서만 쓰이는 용어니까."
"거기다가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대신해 영주직까지 수행 중이시고… 장성한 제 아들놈은 아직도 제대로 구실을 못 한답니다. 언제쯤 정신 차릴는지."
아들까지 팔아 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띄워 주고 있다.
그런데.
"만기가 지난 어음을 상환하러 오 셨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나 버렸 네요?"
사업 애기로 들어가자 뒤셸의 표정 이 싹 변해 버렸다.
"...이건 안 되겠는데요."
비굴할 정도로 아부하던 태도는 온 데간데 없고.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함.
"영주님께서 직접 오셔도, 이건 처 리해 드릴 수 없습니다."
"흠."
그럼 그렇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놀란 기색 없는 에른과 달리 칼로 이는 황당해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건 얘기가 다르잖소? 기한은 상 관없이 금액을 상환하기만 하면 된 다고, 분명."
"그때는 그렇게 해 드릴 수 있었지 만… 지금은 안 됩니다."
"갑자기 왜? 뭐 때문이오?"
"상황이란 시시각각 바뀌기 마련이 지요. 그때는 되던 것이 이제는 되 지 않게 바뀐 걸 어쩌겠습니까."
"그런 말이 어딨소!"
"총관."
에른이 칼로이를 제지했다.
교차하는 눈빛.
'봐, 맞지?'
'정말이군요.'
에른은 칼로이에게 가만히 있으라 는 눈짓을 해 보이고 뒤셸에게 물었다.
"상환 금액 8만 골드. 그 두 배인 16만으로 해서 돌려주지. 그러면 어 음을 처리해 주겠나?"
"안 되겠는데요."
"세 배는?"
"네 배, 다섯 배라고 해도 제 마음
은 변함없습니다. 제대로 절차를 밟 을 작정이거든요."
에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야 계약서에 쓰여진 대로."
"끝까지 가 보자 이건가?"
"상인은 계약으로 말하고 골드로 답하는 족속들이죠. 전 상인답게 행 동할 뿐입니다."
"하나 묻지. 방금 말한 변화라는 건, 아버지의 실종을 의미하는 건 가?"
"무슨 그런 말씀을!"
뒤셸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젓는다.
"최근 상회 사정이 안 좋아져서요. 새 영주님께는 죄송한 일이고 저 역 시도 내키지 않지만… 이해해 주셨 으면 합니다."
"이해는 무슨. 가지, 총관."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셸이 다시 웃 는 낯으로 돌아와서는 두 사람을 배 웅했다.
크라이트 상회 정문.
뒤셸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원하는 대답을 드리지 못해서 송 구함니다. 영주님."
"송구스러울 건 없고. 회주는 응접 실부터 여기까지 오는 길, 기억에 잘 담아 뒀나?"
"무슨 말씀이신지?"
"내 제안을 거절한 걸 두고두고 후 회하게 될 텐데, 기왕이면 제대로 떠올리는 게 좋잖아. 이 순간을."
에른이 보인 매서운 눈빛에도 뒤셸 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럴 일이 있을까요? 전 잘...
*
"...크라이트한테 뒤통수를 맞다 니.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 씀이 없습니다."
칼로이가 고개를 숙인다.
에른은 별로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다.
"뭘 그래. 아버지하고 상의해서 결 정한 일이잖아. 크라이트가 우릴 엿 먹이고 싶어서 안달 났을 줄, 또 비
고를 못 열어서 대금 지급을 못하게 될 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그래도… 뭔가 꾸미는 게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명백한 제 실 책입니다."
"계약대로라면 크라이트는 뭘 받아 가지?"
"통상적인 어음 계약서입니다. 대 금의 세 배에 달하는 가압류 권한을 행사 가능…."
"그러면, 24만 골드 치 물건이나 땅을 가져가겠군."
"감정사가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 라 달라지겠지만. 보통 압류품은 저 평가되는 경향이 있어서, 더 큰 타 격이 될 겁니다."
에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브란웰 후작의 영향력이면 시청 쪽에도 자기 사람이 있겠지. 네 배, 다섯 배로 돌려받아도 싫다니?'
그렇다면 8만 골드의 최소 여섯 배 이상의 타격을 입힐 심산일 터.
"총관. 현재 영지 재정에 50만 골 드 이상 손실이면 어느 정도 피해 지?"
"1년 세수를 훌쩍 넘는 금액이죠. 50만 골드면 스틸가드는 파산입니 다. 영주님, 이제는 정말 비고를 열 어야 합니다."
"아니, 뭘 이런 일로."
"이런데도 아직 위기가 아니라는 겁니까?"
"물론."
담담하기만 한 에른.
그걸 본 칼로이는 아까 한 생각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가 과연 제정신인가?'
"...그렇게 보지 마, 총관. 내가 분명 해결해 보이겠다고 했지. 아직 안 끝났어."
"여기서 달리 방법이 있습니까?"
"우리에겐 우리의 약점이 있듯이, 뒤셸 크라이트에게도 그만의 약점이 있으니까."
" 예?"
"자기 입으로 말하더군. 아까 언급 한 장성한 아들 말이야."
그 아부 퍼레이드 덕분에 문득 떠 올릴 수 있었다.
레히테에서 가장 유명했던 난봉꾼 이자 망나니의 이름.
"론도 크라이트가 뒤셸의 취약점이 지."
[205화]
"...처음 뵙겠습니다. 다미안 상회 회주, 다미안이라고 합니다. 저희 쪽 에서 먼저 인사드리러 갔어야 하는 건데…. 아무튼, 이렇게 만나 뵙게 되 어 큰 영광입니다."
영주직을 수행하면서 좋아진 게 이 거다.
어딜 가나 확 달라진 대우.
'사실 처음은 아니지만.'
다미안과는 2년 전, 마나석 거래를
하면서 안면을 튼 적이 있다.
평민 출신으로 레히테에서 둘째가라 면 서러울 규모의 상회를 만들어 낸 능력자.
하지만, 그런 그라고 해도 율라프가 인피면구를 쓴 에른 스틸가드였을 줄 은 꿈에도 모르는 것 같다.
"드, 드, 드십시오…. 입에 맞으실진 모르겠지만."
상회 직원인 일리엔이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차를 내왔다.
이 역시 울라프였을 때와는 너무 다
른 대접이다.
2년 전에는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다 미안마저 그 험상궂은 얼굴을 보곤 표정 관리가 안 되었고.
일리엔은 '이 인간, 뭐 이따위로 생 겼지?'하는 티를 팍팍 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존경합니다. 도련… 아니 영주 님…!"
다미안이 설명한다.
"하하, 일리엔이 한때는 기사를 지
망했던 적이 있는지라…. 이 친구한 테는 영주님이 우상일 수밖에요. 꿈 을 접었던 게 거의 영주님 나이였 지?"
"예...."
일리엔이 두 손을 모았다.
"접은 꿈을 다시 펴고 싶은 지망생 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어떤?"
"어떻게 2년 사이에 오러 유저가 될 수 있으셨는지...
'이건 말 해줘도 도움 안 될 텐데.'
오러 유저가 되고 싶은 상인이라.
소원의 책갈피 들고 다시 태어나란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노력해서. 이만하면 하얗게 불 태웠다 싶을 때도, 그냥 계속 불 질 러서."
"아앗…."
진짜 하등 도움 안 되는 소리다.
꿈틀거리는 일리엔의 목울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겨우 참는 중…?
일리엔의 눈이 커졌다.
"개, 개안했습니다! 역시 뭐든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군요!"
"음?"
"저도 남들보다는 노력해 왔다고 나 름 자부해 왔습니다만, 그게 자만이 었군요. 영주님 같은 분도 계시는데."
에른은 깨달았다.
개소리를 해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 는 분위기는.
단지 스틸가드의 신임 영주이기 때 문만이 아니다.
'하긴.... 모자란 막내가 카르 숨, 그 리고 상회의 주인이 되어 돌아왔으니. 영 이상한 반응은 아니군.'
에른은 애써 겸양의 태도를 보였다.
"나 같은 분이라니,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다미안이 눈을 빛냈다.
"아니긴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 신 분 아닙니까. 검과 저울로 수도를 평정한."
"...평정까지야."
"라이한 상회가 쪼개진 두], 그 공백
을 에른 상회가 채웠으니. 평정이 아 니면 무어라 할까요."
"그거야 뭐,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회주와 직원들이 잘해준 덕분…."
"글쎄요, 알려진 것과는 다르지 않 습니까? 저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만."
' 음'?'
날카로워진 다미안의 눈빛.
역시 나바로 북부를 장악하게 될 상 인은 달라도 뭐가 다르긴 한 건가?
나바로의 호사가들은 에른을 저평가
했다.
그의 진정한 면모를 아는 사람은 최 측근 몇 명뿐이고 이건 형제들도 파 악하지 못한 바이니, 크게 억울할 것 은 없다.
하지만 에른이 보란 듯이 일구어 내 보인 것까지 저평가 받는 것은….
이 또한 시기나 질투 때문이라기보 다는 이루어 낸 실적이 너무도 현실 적이지 않은 탓이다.
차라리 최연소 [카르 숨]은 이해라 도 가지, 그건 스틸가드의 핏줄이고 천재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겨우 2 년 만에 상회를 그렇게 키운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
"그럼그럼. 돈이 얼마나 독기가 센 데. 산전수전 다 겪고 온갖 더러운 맛, 쓴맛, 똥 맛 다 보고 들어온 놈들 도 손사래를 치고 물러나는 게 상회 사업이지. "
"스틸가드는 수도에 인맥도 없잖아. 뭐 돈이야 넉넉하게 있겠지만… 그걸 막내 아들한테 퍼줄 것 같지도 않고. 맨손으로? 열몇 살짜리가? 절대 불가 능해!"
"총회주 에른 스털가드는 대외용 얼 굴인 거고. 진짜 실세는 마쿠스 회주 가 맞을 거야. 총회주가 실종됐어도 상회는 잘만 돌아갔잖아. 라이한 상 회 파이까지 잡아먹었고. 그게 다 마 쿠스의 리더십인 거지. "
이런 추측들.
전부 완전히 빗나갔지만… 다미안은 눈치채고 있는 것 같다.
'실종 기간에도 상회 일을 손 놓고 있진 않았지. 지시한 대로 마쿠스회 주가 잘 해준 덕분에 테아로스에서도, 다른 도시들에서도 수월하게 진행되
고 있는 건 맞지만.'
아무튼.
다미안은 호사가들이나 브란웰 후 작, 뒤셸 크라이트와는 다르다.
에른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봐준다면, 얘기가 잘 통하겠군.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바쁘실 텐데 저희가 귀한 시 간만 뺏고 있었군요. 말씀하시죠."
에른이 품에서 다미안 상회에 지급 해야 할 어음 다발을 꺼냈다.
"전부 해서 5000골드. 만기가 지난
것들이 좀 있는데…. 혹시 3배로 차 압하기를 원하나?"
"예? 무슨 그런 농담을 다...
다미안이 양손을 내젓는다.
"저희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한두 해 거래한 사이도 아니고…. 더 구나 스틸가드에."
"다행이군. 요즘 영지 사정이 부쩍 나빠져서."
다미안이 얼굴에 물음표를 떠올린 다.
그러나 곧, 원래의 표정을 회복하고는.
"아, 그러시면. 지급일을 연장해 드 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이건 어떤지. 그냥 받은 셈 치는 건?"
"...5000골드가 아주 큰 돈은 아 니지만. 저희도 상회입니다. 물건을 제공했다면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합 니다."
다미안의 낯빛이 썩어들어갔다.
'이거 신임 영주가 양아치였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하는 순간.
에른이 입을 떼었고.
"그거야 당연하지. 나도 장사꾼. 대 가 없이 부탁할 리가."
"크라이트 상회의 간판을 내려 주 지. 상회의 골칫거리 아닌가?"
놀라운 제안이 들어왔다.
황급히 묻는 다미안.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한 그대로. 최근 크라이트가 사 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면서 가장 손 해 본 게 다미안 아닌가? 겨우 5000 골드에 경쟁자 제거할 수 있으면 할
만하다고 보는데?"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지만… 저 희를 떠보기 위함입니까? 크라이트가 가장 많이 빼앗아 간 게 스틸가드의 사업인데요? 가장 친한 사이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일리엔이 거들었다.
"정신 나간 놈들이죠! 고객 뺏겠다고 마진도 안 남기는 수준으로 단가를 후 려쳐?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거 아냐!"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크라 이트와 스틸가드의 관계는 보이는 것 과는 다르지."
에른은 조금 전, 크라이트 상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허...!"
다미안과 일리엔이 동시에 탄성을 뱉었다.
"정말입니까? 아무리 귀족가 상회라 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스틸가드에."
"일리엔, 자네 말이 맞았군. 정신 나 간 게 아니고서야. 음, 크라이트 회주 가 그럴 성격이 아닐 텐데, 대체 왜?"
"궁금한가?"
에른이 손짓하자 다미안이 몸을 숙
이고 귀를 가까이 댔다.
"헛!"
다미안이 눈을 부릅떴다.
"...이만하면 5000골드가 아깝지 않겠지?"
"정, 정보료라고 해도 차고 넘치는군 요 그럼 그렇지…. 그렇게 급속도로 성 장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하지. 그런데 그분이 대체 왜?"
"그건 차차 알아보도록 해야지."
"좋습니다. 5000골드는 받은 걸로 하 지요 단 이 일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 원한다면."
다미안이 어음을 처리해 주면서 물 었다.
"하나 이해 안 가는 게 있는데 말입 니다."
"뭐지?"
"영주님, 아니 총회주님께서는 아주 부자이신 걸로 압니다. 파란약과 미인 크림 판매량만 해도…. 그냥 사재를 털 어서 해결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스틸가드는 스틸가드, 내 상회는 내 상회니까."
에른이 비죽 웃었다.
그리고 차원거래는 차원거래고 말이다.
서로 돕되, 각 부문이 뒤섞이게는 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까지 지켜 온 에른의 원칙 이다.
"그리고, 걸려 온 싸움은 받아 주는 게 예의잖아?"
상회에서 나오자 정문 근처에서 서 성이는 칼로이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 영주님. 어음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야 물론."
에른은 칼로이에게 회주의 인장이 찍힌 어음을 건넸다.
"정말… 말씀하신 대로 됐네요? 어 떻게 하신 겁니까?"
"어떻게가 중요한가? 영지의 빚 5000골드가 사라졌다는 게 중요하지."
"그, 그건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들놈은?"
"...말씀하신 대로, 여간 방탕한 놈이 아니더군요. 아까는 유곽에 들 어가서 한참을 나오지 않더니, 지금
은 도박장에서 패 돌리고 있습니다."
"대낮부터? 잘됐네."
뒤셸 크라이트의 아들 론도 크라이 트는 파락호들이 선호하는 취미를 모 조리 즐기는 인물이었다.
술, 매춘, 도박, 약물, 폭력… 5관왕 을 석권한 올라운더 망나니인데.
약점이 너무 많아서 찌를 데도 많다.
'도박이면 저 다섯 개 중에서도 최 고지.'
에른은 칼로이를 앞장서게 하고 인 벤토리를 확인했다.
'언젠간 써먹을 날이 올 것 같았다 니까?'
[보유 물품]의 [지식&정보], 그리고 [기술]항목에 든 물품 두 개는.
-생초짜에서 타짜가 되기까지(카드 편)
-눈보다 빠른 손놀림, 신들린 손길 (기술)
♦ *
"에라이, 오늘 완전 재수 옴 붙은 날이네. 퉤!"
론도는 투덜거리며 도박장 바닥에 침을 뱉었다.
걸쭉한 가래침이 눌러붙은 음식물 위를 덮는다.
몸에서 불운을 끄집어내기 위한 일 종의 의식 같은 거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잃은 운을 되찾 을 수는 없었는지.
"투 페어!"
"트리플."
"어떠냐, 트리플이다!"
"스트레이트."
이번 판은 땄다고 확신할 때마다 계 속해서 한 급 차로 족보가 밀린다.
그것도 구석탱이에 앉은 웬 이상한 놈한테만!
열 번을 연달아 진 론도가 양 주먹 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씨발! 뭔데, 이거?"
그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를 노려 봤다.
지금까지 100골드 넘게 빨아 간 억
수로 재수 좋은 놈!
론도는 로브한테로 가서 눈을 부라 렸다.
"이거 사기꾼 아냐? 옷차림부터가 딱 사기꾼이네. 이봐, 피어스. 수질 관리 제대로 안 하냐?"
론도 앞으로 온 도박장 관리인, 피 어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론도 도련님. 제가 아까부터 유 심히 지켜봤는데요. 딱히 장난질하는 거 같지는 않아서...
"원 페어 뜨면 투 페어고 투 페어
뜨면 트리플인데 어떻게 매번 그래? 이게 사기지 아니야?"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도 박이죠. 그래서 재밌는 거고."
"얼씨구? 시 쓰고 앉았네."
론도는 피어스를 옆으로 밀치고 남 자의 후드를 잡아채려 했다.
"얼굴이나 보자!"
척
그런데 막 후드에 닿으려는 찰나, 남자의 손이 론도의 팔목을 붙잡았다.
"크, 크악…! 이거 놔, 새끼야!"
뜻밖의 상황에, 테이블에 고개를 처 박은 노름꾼들이 다 이쪽을 쳐다봤다.
론도의 패악질은 유명하지만, 아무 도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허나 남자는.
"남의 얼굴에 관심 갖지 말고 본인 패나 제대로 확인해. 아까 내가 트리 플이었을 띠I, 그쪽은 투 페어가 아니 고 원 페어였어."
손목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 그리고 서늘한 목소리.
순간 위축된 론도가 남자를 뿌리치
고 멀찍이 떨어졌다.
"너... 너. 잠깐만 기다려."
피어스에게 다시 간 론도가 손을 벌
렸다.
"저 새끼 때문에 개털 됐다. 돈 좀
꿔 줘. 한 200골드만."
"도련님.... 이젠 안 됩니다"
피어스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
었다.
"왜 안 되는데?"
"보스의 명령입니다. 이젠 도련님한
테 한 푼이라도 빌려 드리지 말라고."
"허, 어이가 없네. 나 누군지 몰라? 우 리 아버지가 레히테에서 가장 돈 많이 버는 사람이야! 그리고 너네 조직도…!"
"...그 회주님의 부탁이라서요. 죄 송합니다."
하는 수 없이 테이블을 뒤로하니, 로브를 입은 남자가 팔을 벌리고 양 손바닥을 내보인다.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라는 듯한 몸짓.
론도는 씩씩거리며 도박장에서 나왔다.
"아, 가오 상해. 아버지는 왜 그따위
쓸데없는 말을 해선!"
퍽! 퍽!
애꿎은 땅바닥을 걷어차며 화풀이를 하고 있는 그때.
처음 보는 남자가 그에게로 접근해 왔다.
"...저기, 론도 크라이트 님이시 죠?"
"그런데?"
"아까 게임 잘 봤습니다."
"뭐냐, 놀리는 거냐?"
"아, 아뇨."
남자가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손을 저었다.
"관리인은 사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저 역시 론도 님과 생각이 같거든요. 놈은 사기 도박꾼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론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여간 사기꾼 놈들 때문에 페어플 레이가 안 된다니까. 내 이놈을 그 냥...
"듣자 하니 복수하고 싶으신 것 같
은데… 어떤가요? 제가 필요한 만큼 빌려 드리는 건?"
"빌려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음, 근 데 관리인도 못 잡는 사기 도박꾼을 내가 무슨 수로 이겨?"
그 말에 남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놈은 손장난을 하는 모양이니까…. 도박장 직원을 딜러로 시키면 그만이 지요. 몸수색도 해서 바꿔치기 못 하 게 하고."
"아, 그러면 되겠네."
"실력대로만 하면 론도 님께서 지실 리는 없잖습니까? 이젠 운도 트이실 때가 되었고."
"그... 그거야 당연하지! 불운이 몰려 갔으니까 이젠 행운이 들어올 차례라 고! 근데 얼마나 빌려줄 수 있는데?"
"얼마든지요. 단, 계약서를 쓰시죠."
남자가 품에서 빈 종이와 깃펜을 꺼 냈다.
그가 작성한 양식을 본 론도.
"...다 좋은데 여기 마지막 부분. 갚지 못할 경우 각종 장기를 비롯한
신체 전부에 대한 권리를 양도한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어차피 따실 텐데. 그리고 못 따도 갚으면 되지요. 못 갚을 일이 있겠습 니까."
"하긴 그렇지. 우리 아버지가 누군 데."
론도는 별다른 고민 없이 쓱쓱 사인 하고 지장까지 찍었다.
'진짜 멍청한 놈.이네. 영주님 말씀대 로야. 정말 호부 밑에서 견자가 나왔 구나.'
이놈에 비한다면 데킨스도 나름 번 듯하게 자란 축에 속하지 않을까?
의문의 남자, 아니 칼로이가 속으로 혀를 찼다.
[206화]
자존심을 건 '결투'로 인해 숱한 기 사들이 불구가 되었다.
하지만 돈이 걸린 '듀얼' 때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생겨났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듀얼'은 악 명이 높았다.
룰은 매우 간단.
1부터 10까지의 숫자가 적힌 네 가 지 색깔의 카드.
총 40장의 패로 족보를 만들어 가 장 높은 족보를 가진 사람이 판돈을 쓸어 가는 도박인데.
단순하지만 쪼는 맛과 한방의 쾌감 때문에 수많은 노름꾼들을 탄생시켰다.
'와라… 와라… 와라..
론도는 물론, 구경꾼들의 시선이 카 드를 섞는 딜러의 손끝으로 모였다.
정말 불운이 가고 행운이 오는지 웬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돈을 빌린 다음부턴 연전연승이었다.
옆에 수북이 쌓인 금화들이 지금까
지의 기세를 보여준다.
거기에 이번 판은 로브 남자가 잔 뜩 약이 오른 모양인지 기본 판돈이 500골드에, 이전 베팅액의 2배까지 레이즈할 수 있는 정신 나간 게임.
'이게 웬 간만의 빅게임이냐.'
'잘하면 판돈 만 골드도 볼 수 있겠 는걸?'
구경꾼들은 물론, 관리인인 피어스 의 눈에도 흥분이 떠올랐다.
딜러가 패를 돌렸다.
론도에게 세 장, 로브 남자에게 세 장.
'검정 4, 5, 6? 이거 오고 있는 건가?'
페어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더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최고의 족보가.
론도는 검정 5와 4를 뒤집어 놓고,
6을 앞면으로 두었다.
로브가 공개한 카드는 노랑 7.
딜러가 가장 높은 숫자를 공개한
로브를 보았다.
"베팅하시지요."
"500골드."
철컥.
로브가 금화 자루를 던졌다.
'이것 봐라…?'
우선은 탐색전.
"500 받고 500 더."
1000골드를 던지자 판돈이 순식간 에 1500골드가 되었다.
딜러가 카드를 돌린다.
론도에게 온 것은 검정 8, 로브는 파랑 7.
이것으로 로브에게 페어가 만들어 졌지만, 론도는 풋 웃으며 놈의 베팅 을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