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른 상회〉본부 앞.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바쁘게 드나들어야 할 짐마차 대신 감찰 기사단의 휘장이 걸린 마차들이 길을 막고 있다.
그뿐 아니라.
마쿠스, 실베아, 그 외 상회 간부 들이 줄줄이 연행되어 나오고 있었다.
"...이걸 보고도?"
공중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는 두 사람.
이번에도 시에라는 대답하지 못한 다.
겨우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입을 뗐다.
"제니츠가 약이 많이 오르긴 했나 보}. 그래도 그렇지… 설마 너, 진짜 악마 불러내려고 했던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말한 건 아 니지?"
"아니야? 아님 말고."
"난 결백해. 그리고 내가 뭐하러 그딴 짓을 하겠어?"
"음… 대륙엔 마음 맞는 사람이 없 으니까? 너라면 악마하고 친구 먹어 도 이상하지 않거든?"
선 넘지 말라는 듯 바라보자 시에 라가 농담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그럼 내가 제니츠를 잘못 봤던 거겠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에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악마 소환이 모든 걸 빨아들이는 명분이긴 해도 증거 없이 이렇게까 지 할 수는 없지. 최초 증언자가 살 아 있을 거다.'
그 최초 증언자란….
"어딘가에 안드레드를 숨겨 뒀을 거야. 그 새끼 잡아 족치러 간다. 시에라, 7서클 마법 가능하지?"
"어, 어떻게 알았어?"
시에라의 자색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
그녀가 모자를 매만졌다.
"그, 그렇게 티 나...?"
[143 화]
"그럼 티 나지. 그 언밸런스한 조 합은 뭔데?"
평범한 사람들은 나이에 맞춰 옷 을 입는다.
그런데 시에라는 옷에 나이를 맞 춰 입는 유일한 케이스.
에른이 아는 한은 그렇다.
그녀가 포기 못 하는 것은 본인 의 체형을 그대로 드러내는 스타 일인데.
왜인진 몰라도 어둡고 칙칙한 색 만 골라 입는다.
그건 아무래도 하얀 살결을 돋보 이기 위한 게 아닐까?
오늘도 옷감을 극도로 절약하는 복장이라서.
어깨의 곡선과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가 두드러진다.
"언밸런스라니?"
"모자가 너무 안 어울려."
무게 중심을 앞으로 기울이자 에른의 몸이 시에라에게로 향했다.
까마득한 허공, 숨결이 닿을 정도 로 가까워진 거리.
에른이 손을 뻗어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만 졌다.
"아...
순간 시에라의 얼굴에 다양한 감 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도, 부끄러움, 혹시나 하는 걱 정, 다시 의심.
"이, 이걸 어떻게 본 거야?"
"기사를 너무 무시하네. 머리카락
한 올보다 좁은 틈을 보는 게 특 급 기사라고."
물론 모든 특급이 다 그 수준인 건 아니지만.
"그럼 이건 필요 없었던 거네?"
시에라가 모자를 벗어 던지자 폭 포수 같은 머리카락이 얼굴 아래 로 쏟아져 내렸다.
폭포수.
정말 그 표현이 맞았다.
포말 같은 머리카락.
눈처럼 새하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정말 흑단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물 빠진 것 처럼 백단으로 변해 있다.
"...결국 성공한 건가?"
시에라가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 였다.
"성공이긴 하지. 절반의 성공도 성공으로 쳐 준다면."
"절반의 성공?"
"머리색은 되돌릴 수 없었거든. 호, 혹시 다른 데서도 나이가 느껴 지는 건...r
"흠."
에른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은데. 백발인 거 보고 짐 작한 거뿐이거든. 눈가나 피부나… 변신 마법 쓴 것처럼 감쪽같아."
이건 또 이거대로 놀라운 사실이 기는 했다.
그녀가 역노화 마법을 완성시켰 다니.
젊음에 대한 집념은 시에라를 움 직이게 하는 동인이자 그녀를 이 해하는 코드이기도 하다.
시에라 펠가스는 왜 남부의 광녀 가 되었나.
원래 성격이 좀, 아니 많이 모난 편이긴 하다만 진짜 미친년 소리 듣게 한 굵직한 사건들은 다 그것 과 관련이 있다.
"미식안 덕분이지…. 겨우 2년 만 에 성과를 볼 줄은."
감쪽같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의기양양 해 하는 시에라.
"그리고 이 몸이 식음을 전폐하면 서까지 연구에 매진한 결고}! 천재 가 노력까지 하면 이 정도는 기본 아니겠어?"
"음… 진짜 금단의 업적은 악마 소환 따위가 아니라 이거 같은데. 마법으로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 고 한다면 사회적인 파장이...
"걱정 마. 겉모습만 젊어지는 거 지 불로불사가 되는 게 아니라서. 그리고 좋은 건 나만 알고 있어야 지 왜 동네방네 소문내니?"
"바람직한 마인드군."
에른은 조금 안도했다.
완벽한 젊음이 아니어서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는 거겠지만, 지금 보여준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세월은 누 구에게나 평등하다.
...라는 상식.
그런데 왕족과 귀족, 재력가들이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걸 보게 되면 백성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상상만으로도 불만이 싹트겠구나
싶다.
미래를 아는 에른으로선 과도한 변화의 바람은 사양이었다.
이게 도의적으로도 옳은 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너한테는 알려 주는 게 맞겠지. 필요하면 말해."
"알았어."
물론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면 사 양할 생각은 없다.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 긴 해서.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이 상태 로 고위 마법을 쓰는 건 좀 그렇 잖아?"
"안으로? 어디?"
"사리야."
"뀨엥!"
에른이 사리를 위로 던지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마차가 생 성되었다.
사리의 변신체 중 하나.
전에 상회 뒷마당에서 한 대를 통째로 다 먹었던 그 마차다.
이게 추락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슈아아앗-
마차 바닥에서 불길 네 개가 분 사되고 있었다.
에른은 사리에게 했던 약속을 지 켰다.
간식으로나 아주 조금 맛볼 수 있었던 브란티움은 이젠 매끼, 양 껏 먹는 주식으로.
거기에 이럴 때를 대비해 레그 파츠까지 몇 개 먹였더니 비행 마 차라는 희한한 혼종이 탄생했다.
'이거 의외로 안정적이네. 대체 변신이 어디까지 가능한 거야?'
마차에 탄 시에라가 신기한 눈으 로 내부를 둘러봤다.
거대 이무기로, 액세서리나 기계 장치로까지 변신하는 걸보긴 했 다만.
하늘을 나는 대형 마차라….
대마법사들도 이런 걸 타고 다니 진 못한다.
'아무리 신물의 사용자라곤 해도 그렇지.... 아직도 널 모르겠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시에 라에게, 에른은.
"핸디캡 없는 온전한 7서클로 돌 아왔으니까. 안드레드 찾는 거쯤이 야 쉽지?"
"[이계의 악의]와 접촉하면 지울 수 없는 악취 같은 흔적이 남아. 그 지랄까지 하면서 의식을 준비 했으면 푹 고아 낸 스튜처럼 진하 게 배었다고 봐야지. 그래서 추적 하려면 못할 건 없는데...
" 없는데?"
"이게 뭐가 쉬워? 수도 전체를 스
캔하는 게 장난인 줄 알아?"
"대마법사잖아."
"대마법사도 사람이야, 사람! 신 이 아니라고."
"일단 고도를 약간 높여야겠다. 사리야?"
-응, 주인님!
마차가 하늘 높이 올라가자 수도 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도 전체를 대상으로 할 필요는 없어. 왕궁하고 마탑, 아카데미에 는 절대 없을 테니까."
"...반경을 약간 좁힐 수는 있겠네."
"저어기 고급 저택가도 지워도 될 거 같고. 빈민가도 그래. 안드레드 를 잡은 곳에 놈을 숨겨둘 리 없 으니."
"그래도 여전히 넓은데."
시에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완전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 기 아닌가.
그녀가 투덜거리며 [라이트 펜 슬]로 마법진을 그렸다.
"다른 일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안
해줬어. 악마 소환 건이라 돕는 거 니까."
"잠깐, 거기."
«..2"
에른이 밀착해 와서 마법진에 수 식을 써넣었다.
"이, 이건?"
"이거 추가하는 게 더 효율적일 걸? 마나 소모도 적고."
'...뭐야, 이 기발한 발상은?'
시에라가 입을 벌렸다.
분명 눈에 익은 수식이긴 하다.
그런데 몇 군데 손 본 것으로 모 든 게 바뀌었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훌륭한 셰프 가 흔한 재료를 사용해 흔한 요리 를 만든 것 같달까?
얼치기가 고급 식재료 때려 박아 서 만든 결과물보다 훨씬 맛있고, 무엇보다 최고의 장점은 무지막지 한 가성비!
문외한이 보기엔 다 똑같은 꼬부 랑 글씨일진 몰라도.
"아.…"
곱씹을수록 깨달음의 감탄사가 나 오고 전율까지 흐르는.
좋은 수식이었다.
"...이, 이걸 네가 생각했다고?"
"그렇지 뭐."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찔리지만.
2계에서 거래를 계속하다 보니 인벤토리에 마법 지식들이 쌓여 갔다.
악성 재고로 남은 것들.
헐값으로 거래소에 넘기느니 배 우는 게 남는 거다 싶어서 흡수했 더니 이제는 잔기술에선 대마법사 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할 순 없으니까.
"...이건 미식안하곤 상관없는 거잖아. 너, 설마'?"
"아, 아냐. 요즘은 마법 수련 안 해."
"정말이지?"
"정말이지 그럼. 너 때문에 일부 러 5서클에서 멈췄는데."
마음만 먹으면 6서클까지도 갈 수 있었다.
그 정도 지를 코인은 돼서.
다만, 고리 여섯 개부터는 시에라 가 준 팔찌로도 서클을 숨길 수 없다고 하길래 일단은 흡수를 보 류하고 있다.
"이봐, 천재 소년."
"천재는 무슨."
"겸손 떨지 마. 내 마법사로 반백 년 넘게 살면서 괜찮은 자질들을 수도 없이 봤지만, 천재라는 수식
어가 어울리는 건 너뿐이야."
"샤펠은? 샤펠 정도면 천재 아닌가?"
시에라가 고개를 저었다.
"걔는 범재 중에서 뛰어난 편. 쭉 쭉 성장한다면 마탑주까진 가능할 지도? 근데 넌...
"넌 뭐'?"
그녀가 뒷말을 삼켰다.
'내 안목으로도 예측이 안 되는 재능…. 얘가 스틸가드가 아니었다 면 얼마나 좋았을까. 샤펠 클라우 스도 꽤나 역설적인 재능이지만
이쪽하곤 비교도 안 돼.'
시에라는 묵묵부답인 채로 마법 을 완성시켰다.
회전하는 일곱 개의 서클.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기류가 되 어 마차 안을 휘감았다.
그렇게 몇십 분이 지났을까?
번쩍!
시에라의 분석안이 더욱 짙은 보 랏빛을 발했다.
"찾았어…. 테아로스에 깃든 [악의]. 잠깐, 근데 왜 하나가 아니지?"
"...하나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
착, 하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지붕 위.
에른은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 았다.
수도 외곽, 감찰기사단 단원들이 엄중히 지키고 있는 안전가옥.
그런데 너무도 쉽게 잠입했다.
사리를 타고 바로 위까지 비행해 와서, 최대한 조용히 착지.
그리고 지붕에 달린 덧창을 열고 소리 없이 들어오는 것으로 침입 완료.
'이런 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건 몰랐겠지.'
이 부분은 이해해 줘야 한다.
마법사는 비행과 투명 마법을 사 용할 수 있지만, 기척을 완벽히 숨 긴다는 게 어렵고.
기사는 은밀히 움직인다 해도 기 동성과 위장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도 마법 스크롤의 힘을 빌린 다는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니라서.
"엇? 침입…?"
"어디? 안 보여."
나름 신경 써서 다락방에도 단원 들을 배치해 둔 거 같은데.
"투명 마법이 좋긴 흐fl. 무공은 이 런 거 없나?"
에른은 씩 웃어주곤 그들을 지나 쳐 갔다.
"허억.…"
a 으 w
이미 반응하기 전에 지풍이 기사 들의 혼혈을 찌르고, 안으로 파고 들어 간 참이다.
털썩, 털썩!
차례로 기절하는 단원들.
내버려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 귓가에서 시에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 옆에 두 놈.
" 알아.
둘 다 3급 수준인 것 같다.
혼잣말에도 반응하지 않는 걸 보 면.
에른은 몰래 다가가 그들의 혼혈 도 짚었다.
-악마 소환자는 방 안에 있어.
삼엄한 외부 경비에 비해 내부는 좀 허술한 편이었다.
"네가 안드레드냐?"
에른이 [인비저빌리티]를 해제하 자 의자에 묶여 있는 안드레드가 고개를 들었다.
"아, 대답 안 해도 도H. 딱 보니까 알겠네."
"누구냐… 넌."
힘겨운 목소리.
거기에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어찌나 얻어맞았는지 한쪽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나로 말하자면 그쪽이 혀를 내키 는 대로 놀려서 곤경에 빠진? 뭐 그런 입장이지?"
"...블랙 스네이크에서 왔나?"
"마법사잖아. 잘난 머리 뒀다 뭐 해? 더 굴려 봐."
"필, 필라프 상회?"
"더."
"에른 상회… 아, 아니?!"
안드레드가 한쪽만 멀쩡한 눈을 크게 떴다.
"호, 혹시 총회주 에른 스틸가드?"
"나 같은 미소년이 상회에 또 있 겠어? 당연히 나지."
"머리 나빠도 마법사 가능한 건 가…? 하긴 그러니까 악마 소환이 나 하고 앉았지."
기묘한 적대감.
안드레드는 의문 섞인 눈으로 에른을 바라봤다.
"총회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여, 여 긴 어쩐 일로? 나한테 원하는 게 뭐 지요...?"
"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퍼억
놈의 아구창을 한 대 갈겨 주자 갑자기 안드레드가 말을 쏟아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나, 난 당신한테 악감정 없어! 그, 그 새끼가 나한테 [데스 스콜피온] 을 먹였다고! 시키는 대로 증언하면 해약을 주겠다길래 어쩔 수 없 이...
"악마 소환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를 바라나? 진짜 머리 나쁘네."
"어차피 살 생각은 버렸어! 그래 도 편히 죽고 싶어서…. [데스 스 콜피온]을 먹고 죽는 건, 그건 최 악이라고!"
"흠. 그 새끼라면, 제니츠?"
"아니, 나요."
돌아보자 무표정한 얼굴의 기사 가 문 옆에 서 있었다.
"저, 저 자식 맞아!"
안드레드가 게거품을 물었다.
거의 발작에 가까운 반응.
"...이거 참."
놀랍다고 해야 할지, 새삼스럽지 도 않다고 해야 할지.
"다들 바깥 경비에만 신경이 팔려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지?"
"내가 바본가."
그가 호출기를 흔들었다.
"누가 이 방에 들어오면 나한테 연락이 오게 돼 있지."
"...그 원한은 대체 뭔지 모르겠 네. 헛다리짚은 것도 모자라서 이번 에는 증언까지 조작하는 건가?"
"뭔지... 모르... 겠다고? 헛… 다리?"
기사, 아니 디르카의 눈에서 불꽃 이 튀었다.
그동안 응축된 원독이 폭발하는 듯한.
"주군을 참살한 자에게 복수하는 것은 기사의 도리! 내 추리는 틀 리지 않았다! 증언 조작? 그래 내 가 했다. 근데 그거 알아?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디르카는 후련함을 느꼈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
던가.
지금을 위해 2년이란 시간 동안 칼을 갈았다.
그런데.
씨익.
에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기 시 작한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정반대의 반응에 디르카의 표정이 굳었다.
"뭐, 뭐냐?"
"고마워. 듣고 싶은 말 잘 들었어."
에른이 고개를 치켜들자 디르카 또한 그 시선을 따라 눈을 높였다.
천장에 뭔가가 둥둥 떠 있다.
방 안의 광경을 그대로 담는 중 인 수정구 하나.
"설, 설마...?"
"그 설마가 맞을걸? 전부 녹화했 어."
[144 화]
"...알브레트에서 조용히 지내는 가 보다 했더니만."
디르카가 감찰 기사단에 입단한 줄 은 에른도 모르고 있었다.
하는 짓을 보면 말단 신입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는 건, 암중에서 이쪽 등에 칼 꽂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던 건 가?
일그러진 디르카의 얼굴.
그가 겨우 말을 뱉었다.
"주군의 혈육이자, 훗날 주군이 되 실 분을 지켜내지 못했다. 무슨 낯 으로 영지민, 기사들 얼굴… 주군의 존안을 뵐 수 있겠냐고!"
"지키긴 뭘 지킨다는...? 쿤츠는 실종된 거 아니었나?"
"그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지."
"흐음."
에른이 비죽 웃으며 공중에 뜬 수 정구를 가리켰다.
"과연 누가 거짓말쟁이로 보일지
디르카의 미간이 우그러졌다.
솔직히 말하면 저 안에서 돌아가는 영상을 보는 순간 다 틀렸다는 생각 이 들었다.
좀 더 침착했어야 했는데....
평상시의 냉철함을 유지했어야 했 는데....
당황한 복수 대상의 얼굴을 보고 나니 제어가 되지 않았다.
자제할 겨를도 없이 쏟아낸 말, 그 결과는.
'감찰이 수사 대상을 모함, 그것도 스틸가드를. 거기다가 금지된 독인 I데스 스콜피온]까지 썼다는 게 알 려진다면….'
안드레드와 손잡고 사이좋게 사형 대에 올라야 하지 않을까?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욕지거리뿐.
어린 시절, 그는 동네에서 천재라 고 불렸다.
비단 검에 대한 자질뿐 아니라 판 단력이랄지 통찰력이랄지… 어지간 한 문제는 뇌에 입력하면 금방 답이 도출되곤 해서.
그리고 그 답은 대개 정답이었다.
오러 유저로, 후작가의 부기사단장 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출중한 두 뇌가 큰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하지만 지금은....
수렁 속에 빠져드는 느낌.
그 어떤 답도 나오지 않는다.
고민 끝에.
파앗!
디르카의 허리춤에서 번뜩이는 빗 살이 튀어나왔다.
오러를 머금은 깔끔한 발검!
그러나.
휘익〜
수정구는 놀리기라도 하듯 뒤로 물 러나면서 검의 궤적에서 벗어났다.
척
"...복수에 눈이 멀면 원래 이렇
게 뻔해지나? 난 다행이었군."
에른의 손바닥 위로 수정구가 떨어 졌다.
소중한 듯이 품에 넣으니 디르카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에른 스틸가드… 쿤츠 도련님을 죽이려면 1급은 되어야 한다. 마나 측정법이 통하지 않았으니 실력 면 에서 나보다 위일 테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수정구를 박살 내야 살길이 열리는 데.
촤악!
디르카의 검이 다시금 호선을 그린 다.
빠가각!
안드레드가 묶여 있는 구속 의자.
팔걸이가 부서져 나가면서 그의 양 팔이 자유로워졌다.
"...디르카. 이건 좀 아니지 않 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 정은 알겠지만… 본인의 존엄을 시
궁창에 처넣고 있잖아."
에른의 비아냥에도.
'우선 살고 봐야지!'
디르카가 제안했다.
"해약을 얻고 싶나? 그럼 날 도와
라."
안드레드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 올랐다.
[데스 스콜피온]이 금지 약물인 이
그냥 독약이 아니라 온몸을 분해하 는 것만 같은 고통을 겪게 하는 끝 에 복용자를 죽게 하니까.
죽어가는 과정이 너무 잔인하고 끔 찍해서 암흑가에서도 인도적인(?) 이유로 잘 쓰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해 약을 얻는 건 물론이고 살아날 구멍 도 보이는 것 같다.
어차피 포기한 목숨.
1%라도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 다면.
"어, 어떻게 도우면...?"
그때.
"...무슨 일이라도 났습니까?"
기사 한 명이 달려왔다.
방안을 살피러 간 디르카가 한동안 소식이 없어 그런 듯.
"뭐, 뭡니까?"
박살 난 의자, 갑자기 등장해 있는 금발 미소년.
절로 어리둥절해지는 광경인데.
저놈!"
디르카가 에른을 손가락질했다.
"에른 상회 총회주, 에른 스틸가드 다."
"헉! 잠, 잠깐만요…. 올해의 [카르 숨], 그 애요?"
"이야… 실력도 외모도 1등이라더 니 듣던 대로 진짜 잘생겼네."
단원은 연신 감탄사를 발하며 에른 을 훑어봤다.
"역시 [카르 숨]은 뭐가 달라도 다 르다니까. 아주 수석의 아우라가 줄
줄 "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선배님이 시겠군요. 반갑습니다."
"61기 가이안이라고 합니다. 반가 워요, 후배님."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려 하자.
디르카가 어이없어했다.
"이봐, 수사 대상한테 뭐 하는 건 가?"
"그, 그래도 최연소 [카르 숨]을 직 접 볼 기회가...
"아마추어 같으니라고! 증거 인멸
하러 온 거잖아! 중죄인을 앞에 두 고 뭐 하는 건가?"
"어, 음… 그, 그러네요?"
가이안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 였다.
[카르 숨]이란 칭호가 가진 마력.
매년 배출되는 자리라지만 아카데 미 출신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의미 로 다가온다.
동기들은 그 빛나는 재능에 시기와 질투를 보내다가도… 결국에는 납득 하고 인정해 버리고 만다.
"걔를 뭐 어떡하겠냐. 팔다리를 부 술 것도 아니고. 노력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을 갖고 태어 난 걸 어쩌겠어? 그냥 다 해 먹으 라고 해."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카르 숨]은 하늘이 내린 재능.
역대 수석 졸업자들만 봐도 다들 까마득한 자리에 올라 있지 않나.
체념 다음으론 경외와 존경심이 그 자리를 채운다.
좀 황당하긴 해도 감찰 기사의 반
응이 아주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 었다.
"그, 근데 증거 인멸이라요?"
"안드레드를 입막음하러 온 거다. 보면 몰라?"
"에이, 설마요. [카르 숨]이 그런 짓을 할 리가."
"그게 [카르 숨]하고 뭔 상관이 냐!"
"1등의 긍지라는 게 있잖아요."
'어째 태도가… 증언 조작은 부하 들 몰래 저지른 건가?'
그렇다면 감찰 기사들을 적대할 필 요는 없었다.
에른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 [카르 숨]입니다. [카 르 숨]이 뭐하러 타락한 마법사와 손을 잡습니까?"
가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럴 수 있죠. 악마한테 영 혼을 팔아서라도 인간을 초월한 힘 을 얻겠다…! 이런 얘기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기준을 알 수가 없다.
"디르카는 나한테 원한을 품고 있 어요. 저 사람이 안드레드한테 [데 스 스콜피온]을 먹인 건 알고 있나 요?"
"헉,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일 리가 있나."
디르카가 웃으며 다가가서 가이안 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게."
"아뇨, 좀 이상하긴 한데요? 작년 부터 에른 후배님 뒤 캐고 다니셨
고... 안드레드를 잡아 오신 것도. 억!"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디르카의 단 검 끝이 가이안의 앞가슴을 뚫고 나 왔다.
예상을 벗어난 행동에 에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복수귀가 되더니 인성까지 마모된 건가?"
안드레드와 손잡은 거야 절박해서 그랬다고 쳐도, 몇 년을 같이 지낸 동료를 죽일 정도로 망가졌을 줄은.
다다다다.
그와 함께 복도에서 한 무리의 발 소리가 들려 왔다.
"타이밍 죽이는군."
디르카는 단검을 뽑아 내던지고 절 명한 가이안을 붙들고 흐느끼기 시 작했다.
"가, 가이안… 정신 차려! 처자식 을 남겨두고 이렇게 먼저 가 버리면 안 되지!"
"무, 무슨 일입까?"
우르르 몰려온 감찰 기사들이 두
사람을 감쌌다.
"죽지 마, 명령이다. 씨발… 죽지 말라고! 명령 불복종은 사형인 거 모르나!"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
가이안의 눈을 감겨 준 디르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번득.
머리를 쳐든 그의 눈에서 광기가 엿보였다.
"침입자가 가이안을 살해했다. 부 단주의 권한으로 하명하겠다."
"말씀하십시오."
"...놈을 척살한다."
"명을 받듭니다!"
척, 척!
동료의 죽음에 분개한 기사들이 일 제히 검을 꺼내 들었다.
"뭔 연기까지. 독하다, 독해.... 저기, 단원분들? 일단 이쪽 말부터 들어 보고."
"그 입 닥쳐라! 가이안은 우리의 소중한 동료였어!"
"네 놈의 목을 가이안의 영전에 바
치겠다!"
다들 흥분해서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다.
에른이 질린 듯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씨익.
이번에는 디르카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살아남으려면 에른은 죽어야 한다.
물론 수정구만 빼앗아도 되긴 하겠 지만... 놈이 알아낸 게 너무 많아서 그냥 죽어 주는 게 깔끔한데.
가이안의 죽음은, 이보다 좋은 명 분이 있을까?
'전투력 상승은 보너스고 말이지.'
대장격인 자신은 1급.
기사들 중에는 오러 유저도 몇 있 다.
이 정도 전력 차이면 한두 수 위 라고 해도 뭐....
그런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디르카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지 는 데에는.
".…"미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지막까지 맞 서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시체처럼 포개져 있는 감찰 단원 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저들이 시체 가 아니라는 것.
손가락을 뻗을 때마다 픽픽 쓰러지 는 게 무슨 짜고 치는 연극처럼 느 껴졌다.
"마, 말도 안 돼… 왜 이렇게 강한 거야?"
디르카의 혼잣말에 에른이 친절히 대답해 줬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지? 그쪽이 계속 주장해 왔던 거 아닌가?"
"역, 역시 네가 범인이었어! 난 틀 리지 않았다!"
기쁨의 빛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생각만큼만 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상을 넘어서 버려서.
겨우 몇 합 나눴을 뿐인데도 극복 할 수 없는 실력 차가 느껴진다.
디르카의 팔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완전 갖고 놀고 있잖아…. 설마?'
그의 뇌리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 랐다.
모두가 무리수 던지고 다니지 말라 고 조언하곤 했다.
에른 스틸가드는 1급이라고.
그가 쿤츠를 죽였다고.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돌아오는 반 응은 싸늘하기만 할 뿐.
그런데 그런 그조차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각, 각성급...?"
"흠."
에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이대로는 곧이다. 뭔가가 있어야 돼. 변수가 될 만한 뭔가 가...
디르카의 바람대로.
그 뭔가가 일어나기는 했다.
전투가 벌어진 와중, 슬슬 눈치 보 면서 발목의 결박까지 풀어낸 안드 레드.
"미개한 인간계 새끼들! 결국 승자 는 이 몸이라 이거야!"
그가 가이안의 시체로 달려가서 가 슴에 난 구멍으로 손을 넣었다.
바스러진 갈비뼈에서 훼손된 심장 이 뽑혀 나오고.
"외우주를 누비는 위대한 존재이시 여…! 비천한 자가 마련한 제물을 받으시 옵소서!"
"이건 또 뭔...?"
가까이에 있던 디르카가 달려가서
제지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순간 넓은 내부가 칠흑처럼 어두워 지더니 코를 찌를 듯한 악취가 방 안 전체를 감돌았다.
펄떡.
안전가옥, 가이안의 심장.
그리고 빈민가에 널린 장기들이 동 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차원 밖에서 유영하던 정신체 하나 가 흡족함을 느끼며 안드레드의 안 으로 들어왔다.
-그 정성, 고맙게 받도록 하겠다. 연출 좋던데? 너 소질 있더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느껴진 다.
"이... 이것이 악마."
디르카의 눈빛이 흐리멍텅해졌다.
몸을 일으킨 안드레드를 보는 순 간, 모든 전의가 사라져 버렸다.
평범한 인간이 숲에서 오우거와 마
주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존재 자체로 압도당하는 기분.
발버둥 쳐 봐야 죽음을 조금 늦추 는 것에 불과한, 결국 놈이 짓누르 면 짓눌려질 뿐인 하찮은 존재.
...그게 바로 나.
콰작!
디르카의 무릎이 역방향으로 꺾였다.
-너한테는 관심 없어. 꺼져라.
악마가 깃든 안드레드의 얼굴은 심 히 기괴했다.
원래도 심하게 맞아서 꿈에 나올까 두려웠는데, 이제는 그 자체로 악몽 같았다.
-그쪽은 미천한 하계놈 치고는 먹 음직스럽군. 그 안에 있는 선홍색 젤리들을 가지고 놀고 싶구나.
이계에서 온 [악의]에, 디르카는 바로 굴복해 버리고 말았지만.
에른은 오히려 전의를 불태운다.
특히나 거슬리는 단어가 있어서.
"...미천한 하계놈?"
0계 출신 교류자가 가장 듣기 싫 어하는 말이다.
-미천한 것을 미천하다, 하계를 하 계라 하는 것이 싫은가.
"하여간 이계 놈들은 왜들이런 지.... 꼭 손이 가게 만들어요. 하나 같이 재수가 없다니까."
에른이 뇌정검을 들어 올렸다.
푸른 검기가 검신을 뒤덮기 시작했 다.
"...남의 몸에 들어와 있으면 고 통도 공유하려나? 제발 그래야 하는 데."
-날 왜 그렇게 싫어하지? 난 그쪽 이 마음에 들어.
"너 때문에… 네 추종자가 저지른 짓…! 아무리 나라도 용서 못하겠
어. 그 더러운 몸에 들어온 걸 환영 한다. 이 변태 새끼야."
화아아앗!
'아니...?'
쓰러진 채, 멍한 눈을 뜨고 있던 디르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에른의 검에서 오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의 빛이 생성되고 있었다.
너울대는 푸른 광휘.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오러 블레이드?! 각성급이 아 니었어. 영, 영웅...
차마 문장을 완성할 수가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지.
그런데 오러 블레이드에 정신이 팔 려서 미처 보지 못했다.
에른의 왼쪽 눈에서 회색빛이 흐르 는 것을.
'접속 중이면 좋을 텐데… 8서클 흑마법사라고 했던가?'
[145 화]
-청안흑마 : 사령술은 관심 없다 고 안 하셨나?
-에른 : 관심 생길 만한 일이 생 겨서....
-청안흑마 : 뭐, 주변에 고위 사 령이라도 출몰했는지?
—에른 : ....
'너무 정곡이라 대답하기 싫은데.'
이 청안흑마라는 교류자.
벌써 십수 번의 거래를 지속해 왔지만 대화하고 있으면 종종 불 편해진다.
절대 진상은 아니고 흥정도 상식 선에서 하는, 굳이 따지자면 젠틀 한 타입인데.
해서 거래로 감정 상하는 건 아 니고 이런 날카로움이 가끔 소름 을 돋게 한다.
어떨 때는 맥스급 [마음의 소리] 특전으로 이쪽을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건 아니겠지.'
[섭리의 눈]으로 본 그의 프로필은.
[닉네임 : 청안흑마.
종족 : 인간.
접속 장소 : 2계, 암흑 마도국 테페르,
거래 등급 : level 3
혼의 위상 : 어둠과 하나 된 자 보유 코인 : 453245
거래소 리포트 - 본명은 라크드리알. 마법대륙의 여러 금지(禁地) 중에서
도 가장 위험한 곳으로 꼽히는 사령 의 성지, 고대 유적〈카베클리〉.
한번 발 들인 자는 원혼이 되어서 도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곳이다.
그곳의 관리인을 자처하는 8서클 흑마법사로, 카베클리의 유일한 생 존자로, 〈흑마도 8존〉의 일좌를 맡은 〈사령의 지배자〉란 칭호로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령 술사다.
따로 세력이 없음에도 가장 무시 할 수 없는 8존 중 하나인 이유는
그가 거느린 사령 군단 때문.
특히 카베클리 안에서라면 일국의 군대가 동원된다 해도 그를 어찌할 수 없다.
본인의 성취, 카베클리의 사령들을 복속시킨 전무후무한 업적, 대륙에 서 차지하는 위상... 등으로 스스 로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사령술이 백안시되는 현실을 안타 깝게 여겨 사령술 전도사를 자처하 고 있지만… 잘 안 되고 있다.
그런 데다, [어둠과 하나 된 자] 위 상을 갖고 있어 흑마법 관련 거래에
서 상당한 보너스를 받는 터라 꽤나 합리적인 가격을 책정하는 편.
흑마법 물품을 구할 일이 있다면 채널에서 청안흑마를 찾도록 하자.]
8서클!
기사로 치면 거의 신화급.
거기에 [어둠과 하나 된 자] 위상 은 흑마법에 있어서만큼은 정점을 찍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신화경에 이른 무인이었던 태양 신군 이후로 에른이 만난 가장 강
력한 교류자.
자이온 대륙에서는 7서클인 시에 라가 위대한 대마법사라고 불리고 있으니.
그는 흑대마법사나 대흑마법사라 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에른은 왼쪽 눈을 지그시 감고 감을 휘둘렀다.
촤악! 촤아악!
푸른 검기를 두른 뇌정검이 안드 레드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
—캬아아아악!
오러 유러가 대접받는 이유.
유형화된 마나를 검신에 두르면 싸구려 철검도 신검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일반 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삭 력과 파괴력을 가졌기에, 맞부딪친 다면 무조건 오러 있는 쪽의 승리.
그렇기에 오러는 이렇게 불린다.
'검 위의 검.'
꾸물꾸물.
세인들이 '악마'라고 부르며 두려워 하는 괴물의 정체는 [이계의 악의].
인간이나 다른 생명의 몸에 깃든 채로 활동하지만, 그 본질은 정신 체라.
안드레드는 이미 죽은 뒤지만… 안 드레드라고 '불렸던' 살과 뼈로 이 루어진 유기체가 사악한 힘에 의해 끊임없이 재조립되었다.
척!
-미, 미천한 인간 주제에...!
"상체하고 하체를 거꾸로 붙였는 데?"
발가락이 엉덩이 쪽을 향하고 있다.
무릎도 뒤를 보고 있고.
"...하여간 취향 참."
푸른빛이 다시 번득였다.
물론 오러라고 해서 다 같은 오 러가 아니다.
1급, 검에서 빠져나와도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오러 방출의 경지.
무림계에선 일류라고 불리며.
쏴앗!
쏘아져 나간 푸른빛이 안드레드의 양팔을 깔끔하게 절단했다.
-죽, 죽인다…! 네 놈!
다음 경지는 각성급.
검화(劍花)와 검운(劍雲) 등, 오러 컨트롤이 극도로 정교해져 다양한 오러 활용이 가능해지는 경지.
푸른빛이 아지랑이처럼 흘어지면서 안드레드를 감쌌다.
'이것이 초일류.'
이윽고.
푸왓!
화려한 폭발과 함께.
육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원래도 인간의 형체가 아니었지 만, 이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드네.'
그러나 언행 불일치를 보이는 에른.
그가 감고 있던 왼쪽 눈을 떴다.
-청안흑마 : 원래 이런 건 상담 료 받아야 하는 건데…. 우리가 그 렇게까지 삭막한 사이는 아니지 않소? 무료로 해 드리지.
-에른 : 고맙습니다.
-청안흑마 : 뭐, 사령 퇴치법이 라도 알려 드릴까?
-에른 : 아뇨, 그럴 것까진. 별로 대단한 놈은 아닌 거 같은데.
-에른 : ...근데 계속 살아나네 요? 이계에서 온 놈이라 그런가?
-청안흑마 : 빙의라도 했나 보
군. 그런 놈들에게, 빼앗은 육체라 는 건 껍데기에 불과하오.
-청안흑마 : 그 세계에 투사한 영혼력을 전부 소모하기 전까진 계속해서 살아나겠지.
-청안흑마 : 퇴치법은 간단하지. 죽을 때까지 죽이면 되는 거요.
'정말 도움이 되는군...
-청안흑마 : 대답이 없는 걸 보 니 뻔한 소리나 하고 있다고 생각
하나 봅니다.
-에른 : ....
-청안흑마 : 요는, 정신체는 부 활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거요. 한도가 존재한다는 거지.
-청안흑마 : 껍데기를 산산조각 낼수록 부활에 드는 에너지가 많 아지니까.
-청안흑마 : 난 그런 타입은 분 쇄기에 넣고 갈아버리는 걸 선호 하지. 몇 번 다짐육으로 만들어 주 면 제풀에 지쳐서 살던 곳으로 돌 아가더군.
카베클리의 유일한 생존자 라크드 리알.
그의 대 사령전(戰) 실전 꿀팁.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은 듯 이 하고 있지만, 분명 도움 되는 조언이기는 했다.
꾸물꾸물.
반 토막만 났을 때보다는 확실히 부활 속도가 느리다.
'단순히 역소환 시키는 정도로는 분이 안 풀려.'
지금도 선연히 떠오른다.
빈민가의 참혹한 광경.
솔직히 그들의 삶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갖진 않았다.
빈민들이 못 먹고 못 입고 살건 말건 에른이 알 바가 아니어서.
그건 테아로스의 주인인 왕과 왕 실에서 구제해야 할 일이지 자기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이계 정신체의 여홍을 위 해서, 흑마법사의 욕망을 위해서.
그들이 그런 꼴로 죽어야 했었나.
뿌드득.
안드레드의 몸이 다시 조립되는 걸 보며, 에른이 이를 갈았다.
-에른 : 퇴치법을 알고 싶은 게 아닙니다. 놈을 노예로 삼고 싶습니다.
-에른 : 방법을 아실 거 같은데 요.〈사령의 지배자〉라면.
-청안흑마 : ...그건 어떻게 알 았지? >의혹
-에른 :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
고. 자기가 누구랑 거래하는 줄도 모르면 안 되죠. 교류자라면.
-청안흑마 : (은근 날카로운 데 가 있군. 매번 느끼는 거지만, 0계 인이 제법이야.)
-청안흑마 : 결국은 사령술에 손 대겠다는 건가? 그러게 진작 추천 해줄 때 하지.
라크드리알의 말투가 바뀌었다.
애매한 존대에서 평대로.
뭐, 2계에서 8서클 마법사면 아
무한테나 욕하고 다녀도 다들 뭐 라고 못할 것이다.
이 정도 오만함은 겸손에 가까운 편.
-청안흑마 : 다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어둠의 존재를 다루기에 흑 마법이라 불리는 거지, 결국은 마나 에서 근원한 똑같은 마법일 뿐.
-청안흑마 : 미혹에 빠져 타락하 는 놈들이 문제인 거고.
-청안흑마 : (그 비율이 다른 마 법에 비해 높긴 하지만….)
-에른 : 위험한 물건도 잘만 통 제한다면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 긴 하죠. 뭐든.
-청안흑마 : 내 말이 그 말일세! 편 견을 걷어내고 보면 흑마법도, 사령 술도 유용한 도구일 수 있다니까?
-청안흑마 : 내 특별히 자네한테는 싸게 넘기지. 그쪽 단골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인드가 마음에 들어.
그가 물품 하나와 지식 하나를 대화창에 올렸다.
-당신은 사령을 부려도 된다(지식)
"흡혼의 거울(보유 혼령 없음)
-청안흑마 : 2천 코인으로 하지.
-에른 : 그러죠.
확실히 청안흑마는 사령술 전도사 라 할만했다.
[흐름 파악]으로 보니 거래가보 다 확연히 아래.
[1800코인을 지불했습니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캐시백- 270코인을 받습니다.]
-청안흑마 : 이렇게 거래까지 할 여유가 있는 거 보면, 고위 사령은 아니겠지. 그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대처가 될 거야.
-청안흑마 : [흡수]에 걸리는 시간 은... 알아서 잘 끌어 보도록 하고.
'굳이 시간 끌 것까지 있나.'
[흡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맥스급 [내 머릿속의 스펀지] 특 전의 효고E
약간의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안드레드의 몸이 조함되기도 전, 에른은 사령에 대한 전문가 수준 의 지식을 갖게 되었다.
-너! 심장을 씹어먹어 주마!
안드레드의 몸에 깃든 [악으]]가 광분하자 디르카의 전의를 상실하 게 만든 소름 끼치는 존재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에른은 별달리 영향 받지 않는다.
8성에 오른 현천태을신공의 경지.
악의에 잠식당하기에는 단전에 잠재한 기운이 너무 현묘하고도 정갈하다.
파악
에른이 안드레드의 주둥이를 후
려갈기자 입에서 하얀 가루가 후 두둑 떨어졌다.
"어떡하냐.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지만… 잇몸으로 심장을 씹을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인간 주제에… 하계 놈 주제 에… 넌 내가 제대로 강림했으면 한주먹 거리도 안 돼!
"...그래? 그럼 제대로 강림해 보시지? 궁금하네. 이렇게 약한데,
뭔 자신감으로 하계 놈, 하계 놈
하는 건지."
-정, 정말? 본체가 내려오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한데.
"그 시간, 줄 수 있지. 얼마든지."
에른이 공격을 멈추고 뇌정검을 내리자 [악의]가 염두를 굴렸다.
'뭐야, 이놈... 진심으로 하는 말 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드레드였던 것.
'멍청한 건가… 멍청한 척하는 건가.'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영혼력이 다해 가서 더 이상 이 육신을 조종하기 어려운 상태.
이대로 물러나기엔 자존심이 허 락하지 않는다.
또 놈의 내장을 너무 보고 싶기 도 해서.
하늘을 찌를 듯이 건방지지만, 그 런 만큼 탐나는 놈이었다.
'뭐 별일 없겠지. 뭐 얼마나 대단
한 차원이라고.'
[악의]는 입을 벌리고 이계에서 유 영하는 자신의 본체를 불러들였다.
안드레드의 몸이 변형을 시작했다.
함죽이가 된 입에서 송곳니가 튀 어나오고.
연약한 마법사의 신체가 압도적 인 근육질로 변해 갔다.
얼굴 또한 전형적인 악마의 얼굴로.
변신을 끝내기 전.
' 지금이군.'
에른의 신형이 문득 사라졌다.
파앗!
패왕군림보가 펼쳐진 순간이다.
그리고 뇌정검을 뒤덮는 푸른 검강.
디르카가 오러 블레이드라고 착
각했던.
'오러 위의 오러.'
아니, 검기 위의 검기.
에른이 절정의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장면이었다.
—얘, 얘기가 틀리잖아! 변신 중에!
[악의]가 다급히 배리어를 만들었다. 하지만 급조한 방어막 따위야.
'쇄혼경천검, 제삼초...
극도의 쾌검, 일초식 섬뢰.
극강의 중검, 이초식 쇄혼.
전이초(前三招)도 어디 가서 무
시 받을 만한 건 아니지만.
쇄혼경천검의 정수는 강기공.
그 첫 발걸음을 떼는 삼초식.
와장창창!
배리어가 산산조각 났다.
파지지 직!
검강과 결합한 뇌정검의 뇌전이
악마의 몸을 찢어발겼다.
-비, 비겁하다!
".…"지폭."
깔끔하게 삼초식을 펼친 에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겁 좋아하네. 남의 몸 빼앗고 다니는 놈이 뭔."
확실한 절정지경.
초식의 출수가 날이 갈수록 신속, 정확해지고 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에른은 흡혼의 거울을 꺼내 [악 으|]를 비추었다.
-뭐, 뭘 하는 거냐! 끼아아악!
만신창이가 된 악마의 몸에서 검 은 연기 같은 게 흘러나오며, 거울 안으로 흡수되어 왔다.
굳이 놈을 강림하게 한 이유다.
〈당신은 사령을 부려도 된다〉의 가르침.
'...…이계의 정신체의 경우엔 과정 이 조금 복잡해진다. 본체가 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
'완전히 홉혼하기 위해선 정신체가 영혼력을 전부 투사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잘 꼬드기는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은 없고, 행운을
빈다.'
-마,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하계 놈이 흡혼술을 사용할 수 가....
[악의]의 절규.
반면 에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 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큰코다친다니까. 어 째 결말이 다 똑같냐."
'하계인 에른'을 무시한 대가.
이번에는 채널의 교류자들이 아 닌, 이계의 [악의]가 톡톡히 치를 차례였다.
[146 화]
—돌았냐! 이거 열지 못해?
쿵, 쿵, 쿵!
거울 안쪽.
검은 연기의 형상을 한 [악의]가 경면에 몸을 부딪쳐 댔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일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야 당연한 것.
사령, 악령, 혼령… 정신체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감옥과도 같은 곳이니까.
-너 이 새끼… 가만 안 둬! 가죽 안 쪽에 있는 거 죄다 꺼내서 가족, 친구, 애인 앞에 전시하고 말 테다! 기필코!
"어디서 개가 짖나. 흠흠."
에른은 흡혼의 거울에 얼굴을 비추 며 흰 치아를 드러내 보였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외모.
오늘만 해도 장소를 몇 번이나 바꿔 가며 전투를 이어 왔는데, 머 리카락만 좀 흐트러졌을 뿐이었다.
"인벤토리!"
물품을 꺼낼 때는 [인벤토리] 카 테고리에서 지정하는 것으로 간단 히 손에 쥘 수 있지만.
저장할 물품을 집어넣을 때는 약 간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벤토리를 부르자 거의 천장까 지 닿는 커다란 문이 생성되었다.
[인벤토리 Lv. 8]
-저장 용량 (9269/500000)
-인테리어: 강철 재질의 슬라이 딩 도어(크기 조절 가능), 적재대를 갖춘 소형 물류 창고, 온도 조절 기 능, 냉동 창고 보유.
2년 전에 쓰던 인벤토리는 Lv. 6 이었는데 코인도 꽤나 모였고, 슬 슬 저장 용량이 부족해지기도 해 서 업그레이드를 했다.
큰맘 먹고 두 단계나.
'용량 50만…. 그냥 Lv. 7에서 멈 출 걸 그랬나?'
재고로 꽉꽉 채우고도 남은 용량 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
끼리 리릭.
개방하자 문이 한쪽으로 밀리면 서 열리기 시작했다.
100평 넓이, 500톤까지 보관 가 능한 창고.
게다가 언제 어디서건, 눈 하나 까딱하는 걸로 불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마법사들이 자랑하는 아공간 저장소? 여기에 비하면….'
쿠웅.
맥스급 [인벤토리 확장] 특전으 로 1000% 확장된 내부 구조가 펼 쳐진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철제 선반과 진열대가 늘어서 있다.
다양한 물품을 보관할 수 있도록 폭이 제각각이고, 가장 안쪽에서는 은은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끽해야 방 하나 크기잖아? 그냥
구멍가게지. 음, 어디 두면 좋을 까...
에른이 허공섭물을 사용하자 흡 혼의 거울이 인벤토리 안으로 날 아들어 왔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화려한 반신 거울.
자이온 대륙의 기준으로는 아직 최신 유행이다.
혹시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 로 선반 1층에 가로로 눕혀 놨다.
그렇게 보관해 두고 나오니.
새로운 물품이 인벤토리에 추가 되었다.
-흡혼의 거울(보유 혼령 있음) : 사령 술사라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물품.
숙련된 사령술사는 심상 공간에 혼령 을 속박해둘 수 있지만. 그 공간이 무 한한 것은 아니라서, 여분의 보관 장치 를 마련하게 된다.
보관보다는 흡수력과 제어 기능에 특 화된 편. 초보 사령술사에게는 필수품 이라 할 만하다.
(보유 혼령 - 안달루시아의 파편 17)
(저장 용량 - 1400/3000)
'안달루시아의 파편? 17?'
눈에 힘을 주고 [섭리의 눈을 사용해 봤지만 안달루시아는 뭐고 파편은 또 뭔지.
제일 이상한 저 두 자리 숫자는 뭘 의미하는 것인지.
숨겨진 정보조차 나오지 않았다.
라크드리알에게 물어보니.
-청안흑마 : 안, 안달루시아? 17 번이 거기 있었어?
-에른 : 왜요, 이거 대단한 겁니 까? 영혼력 1400밖에 안 되는데.
-청안흑마 : 파편들은 별거 아니 지만, 쪼개지기 전 안달루시아는 거물 정신체….
-청안흑마 : 자네 그거 나한테 팔 생각 없나…? 값은 얼마든지 쳐 주지
뭐해?!"
허공에서 시에라가 툭 떨어져 내렸다.
텔레포트로 이동해 온 것이라 기 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에른은 황급히 차원거래를 종료 하고 시에라를 마주 봤다.
"어떻게 됐어? 다들 안전하지?"
"내가 누군데. 멀리 떨어진 곳에 쌓아 놨어."
에른이 안달루시아의 파편을 상 대하는 동안, 시에라는 감찰 기사 단 단원들을 안전가옥 밖으로 옮
겼다.
전투의 여파로 단원들이 죽거나 다칠 수도 있어서.
"급해 보여서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시에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나가서 싸우면 되는 걸 왜 나만 번거롭게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한 거지?"
"여기가 좀 외진 곳이긴 하지만… 누가 볼 수도 있으니까. 그닥 고위
악의는 아니었어도 2급 수준으론 감 당 안 되는 놈이었어. 목격자 입 막 기보단 시에라가 좀 움직이는 편이."
"그건 그러네."
잠깐씩 본 거긴 했어도.
오러가 비산하고 오러 블레이드 까지 꺼내 들었다.
에른이 벌써 영웅급이라....
시에라는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열일곱에 영웅급 기사라니. 늙은 이들이 알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싫은 일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성장 속도를 보 여주고 있긴 해도 7서클이 일곱, 자길 빼도 여섯인 [세븐 아이즈] 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기쁨과 대견함보다는 걱정이 앞 서는 그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해!'
에른이 그녀의 얼굴에 깃든 근심 을 눈치챘다.
"왜 그래?"
"아, 아니...
"참, 디르카는?"
"...죽었어."
"겨우 다리 부러진 거 때문에…? 설마?"
시에라가 시선을 피했다.
"널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놈이야."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감찰 기사를 죽이다니, 제정신이 야? 증언 조작이야 기사단에서 처
리할 일이지."
"네가 영웅급인 걸 알고 있었어.
살려둘 수 없잖아."
사실 에른도 알고 있었다.
디르카를 죽이는 게 맞는다는 거.
물론 고독도 있고 시에라한테 부 탁하면 정신계 마법으로 조종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해도 아무런 실익이 없는데.
무익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는 게 말이 안 되는 판단이다.
엄격히 금지된 약물, [데스 스콜 피온]을 사용하거나, 동료의 등에 칼을 꽂는 짓까지 하는 극단적인 복수귀가 되었다.
디르카는.
그런 정도니 통제한다 해도 된다 는 보장도 없었다.
'안드레드로 날 무너뜨리려고 했 던 건 괘씸하지만…. 애초에 나만 아니었어도 알브레트의 부기사단 장으로 쭉 잘 살았을 텐데.'
쿤츠를 죽인 일?
석현과 샤일로크에게 한 복수.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전 생에서 겪은 고통과 괴로움 을 고스란히 돌려주기 위해 과거 로 돌아온 거니까.
하지만 디르카의 경우는… 전생에 그 가 자신에게 잘못한 건 없지 않은가.
절로 번민이 생겨난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는 게 이런 건가.'
뒷맛이 씁쓸했다.
"미안해. 시에라 말이 맞아. 디르
카는 죽어야만 했어."
시에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어린 게 의아할 정도로 독하더니만. 뒷수습 때문에?"
"뭐, 그런 것도 있고."
"그건 걱정할 거 없어. 모든 건 이계의 [악의]가 저지른 걸로 하 면 되니까."
시에라는 미라처럼 변해 버린 안 드레드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수분이 싹 빠진 것처럼 쪼그라들어
있지만, 생긴 건 여전한 악마의 형상.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고도 악마가 소환됐다는 걸 인정 못 하는 사람은 없겠지."
"곧 마탑에서 조사 들어갈 건데… 내가 마탑주잖아?"
여기에 대해선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디르카가 사실을 털어놓은 수정구 영상까지 있으니, 에른 상회에 대한 부당한 수사도 곧 종료될 것이고.
"근데 시에라."
" 음?"
그녀의 분석안, 동공에서 보랏빛 이 물결치는 걸 보고 에른이 시에 라의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
"느껴지긴… 뭐가?"
'[악의]의 기운이 안 느껴지나 보군.'
흡혼의 거울이 고성능인 건지, 인 벤토리에 격리되어 있어 그런 건지.
'아무래도 후자겠지.'
분석안으로도 악의의 흔적을 읽 어내지 못하는 걸 보면 사령술에
손댄 것을 후회할 일은 없을 듯.
"영문 모를 소리를 자꾸 하네. 얼굴 펴. 이번 일로 더 유명해질 텐데."
«..2"
"오늘 일은 전부 네가 해결한 걸 로 하자. 난 여기 없었던 거고…. 실제로 악의를 퇴치한 거도, 네가 한 게 맞긴 하잖아."
"왜?"
'그거야… 난 네 감시자지 조력자 가 아니니까! 자꾸 엮이면 늙은이 들이 수상하게 여길지 몰라.'
이런 속내.
시에라는 애써 감추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너, 별명 하나 더 생 기겠다? 부럽다, 야."
"어떤?"
"조금 오그라드는 거긴 한데…."
*
시에라가 말한 새로운 별명이란.
"최연소 [카르 숨]으로도 모자라서
[데몬 슬레이에까지? 그 친구는 무 슨 칭호 수집하는 게 취민가?"
삼삼오오 모인 기사들이 한 마디 씩 던졌다.
입방아에 오른 인물은 단연 화제 의 인물, 에른 스틸가드.
"거기에 집안 좋아, 어린 나이에 상 회까지 운영해…. 도대체 못 가진 게 뭐냐?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 는 거야?"
"...그나마 막내라는 거? 아무리 능력 있어도 스틸가드를 물려받는 건 첫째 키르안일 테지."
"글쎄, 그건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암튼… 그리고 말이 데몬 슬레이어 지, 완전 얻어 걸린 거 아니냐. 디르 카 경의 희생으로 빈사 상태가 된 악 마 놈의 숨통을 끊은 거뿐이라며. 그 냥 막타만 친 건데 데몬 슬레이어가 되다니. 운도 좋지."
"글쎄, 그것도 사실과는...
"넌 왜 아까부터 글쎄, 글쎄만 하고 있냐? 참…. 너도 거기 있었구나?"
감찰 기사들의 시선이 한 명에게 로 쏠렸다.
그날, 안전가옥으로 파견되었던 감 찰 기사.
"사실과는? 알려진 게 사실하곤 다 르다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 아냐. 말이 헛나왔어."
"헛나오긴. 너, 뭔가를 본 거냐?"
다들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다.
현장의 정보는.
일반 기사도 아닌 감찰 단원이라 더더욱 공개되지 않은 정보의 중 요성을 알고 있는 그들.
'아 씨, 이놈의 입방정.'
주목받은 기사가 급히 머리를 굴렸다.
디르카는 숭고한 희생을 한 것으로 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동료를 살 해하고, 에른에게 누명을 씌우기까지 하려다 실패했다는 사실.
'...에른 스틸가드는 알려진 것보다 더 강해. 막타만 쳤다고 폄하할 게 아 니다. [데몬 슬레이에라고 불릴 자격 이 있어.'
"말해, 우리한테까지 숨기는 거냐?"
절대 말할 수 없다.
자신뿐 아니라 거기에 있었던 전 부, 영원한 함구 명령을 받았으니까.
"어…? 저기 에른 스틸가드다!"
"야, 어디서 개수작을."
"안 속아."
기사들이 코웃음 치는데, 정말 그 들 앞으로 에른이 지나갔다.
"진, 진짜네?"
"와씨, 어린 거 보게…. 저대로 10 년을 흘려보내도 나보다 급수 높은 거 믿어지냐."
감찰 기사들도 나름 엘리트 축에
속한다.
첩보와 감찰이 주 업무라 검술 실력 외의 요소를 많이 보지만, 그 래도 최소 상급반 졸업자들.
그런 그들도 박탈감을 느낄 만한 스펙이었다.
17세 오러 유저라는 건.
'예전엔 내가 저들을 부러워할 때 도 있었는데.'
감찰 기사들의 눈길을 느낀 에른 이 미소를 지었다.
감찰 기사단 복도.
요 며칠 여러 번 드나들었더니 건물 구조가 익숙했다.
똑똑.
단장실을 찾아 노크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네."
에른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니츠 가 상자에 소지품을 담고 있었다.
-감찰기사단 단장 제니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이 명패 하나뿐.
그가 뭘 하는 건지 모를 수가 없 는 상황이었다.
"에른 총회주 아닙니까? 여긴 무 슨 일로?"
"...얘기 듣고 달려왔습니다. 정 말 사임하려는 겁니까?"
"그렇소. 이런 식으로 봉합하는 건 내 가 납득이 안 도바서."
"납득이 안 될 건 뭔데요? 기왕 넘 어가기로 한 거, 그냥 넘어가시죠."
"감찰 인생 20년. 미친개라 불리며 사람 가리지 않고 물어뜯어 왔지 만…. 여태껏 물려도 싼 놈만 물어 왔소. 그런데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다니. 자격이 없어진 이상 그만둬 야지, 어떡하겠소."
제니츠가 무거운 얼굴로 명패를 집어 들었다.
턱
데구르르.
명패가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에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가 이-닌 디르카.
'아니… 이렇게 나오면 너무 미안 해지잖아?'
그것도 그렇고.
자기한테 이빨을 드러낼 때나 미친 개지, 앞장서서 적을 물어뜯어 준다 면 그보다 든든한 아군이 또 없다.
'제니츠가 사임하면 안 되지. 누 구 좋으라고!'
그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한다.
[147 화]
'...어쨌거나 제니츠가 옷 벗는 건 좀 그래. 이해득실을 떠나서.'
왠지 약간, 아니 많이 찔린다.
죄책감으로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처음 블랙 스네이크에 대한 수사 가 시작되고, 상회 직원들이 끌려 가는 걸 보면서 그에 대한 적개심 이 하늘을 찔렀다.
에른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이렇
게 평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기나 할까?"
"테인이 얼음덩어리면, 에른은 빙산?"
"차가운 건 기본이고 흔들어도 꿈 쩍도 안 해. 수면 아래에 뭔가를 숨 겨둔 거 같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심장까지 얼음으로 되어 있는 놈 같지."
그러나 얼음 심장은 그에 속한 사람에게만큼은 36.5도의 정상 온 도를 되찾는다.
그 속했다는 기준이 남들에 비해
높아도 너무 높아서 문제지만.
그래도 마쿠스와 실비아, 그리고 상회 직원들은 에른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감찰에 끌려가 고초 를 겪었다.
강도 높은 조사와 심문이 이어졌 고….
얼마 안 가 풀려나긴 했지만, 다 들 얼굴이 반쪽이 되어 나왔다.
'증언 조작에 제니츠가 관여했다 면… 그랬다면 더 심한 꼴로 만들
어 준다.'
시에라가 말하길, 디르카는 제니 츠는 관련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고 했다.
감찰 기사단의 내부 보고서도 비 슷하게 나왔고.
여기까지는 팔이 안으로 굽은 거 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에른의 자체 조사 결과도 마찬가 지의 결론을 가리킬 뿐이었고.
무엇보다.
"죄송합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고…. 또 사람을 잘못 보았군 요. 디르카도, 총회주님도."
털썩!
무릎 꿇고 사죄하는 제니츠에게 서 느껴졌던 것은 송구함과 죄스 러움이 뒤섞인 감정.
"뭐에… 대체 뭐에 홀린 건지 모 르겠습니다. 설마 디르카가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를 줄은. 단 장으로서, 수사 책임자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자부심과 스스 로에 대한 크나큰 실망.
'이게 연기라면 기사단이 아니라 극단 단장을 해도 되겠군...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단장직을 내던지 겠다고 하니.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었 던 것 같다.
제니츠는 사람을 잘못 봤다고 했 지만.
'디르카는 그렇지. 근데 나에 대 한 건 제대로 본 게 맞아서.'
자기가 쿤츠를 죽인 것은 사실이 니까.
따지고 보면 제니츠는 단련된 촉 을 믿고 성실히 수사했을 뿐이다.
그 대가가 단장직에서 물러나는 거라면, 가혹하기는 하다.
"...됐습니다."
제니츠가 상자를 들었다.
굳은 에른의 얼굴.
"그만두면 뭐 하시려구요?"
"저 오러 유저입니다. 1급이고.
어디 가서 굶기야 하겠습니까."
"잠깐."
불러세운 말에, 에른을 지나쳐 가 던 제니츠가 몸을 돌렸다.
"...더 하실 말이라도?"
"지금 하는 행동이, 올곧음이며 책 임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렇다면 단단히 착각하는 건데."
"그냥 비겁해 보이는데요."
"말씀이 지나치군요...
제니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비겁?
누군가 이 두 글자를 귓가에 들이밀었다면 바로 주둥이를 찢어 주었을 터이다.
나 제니츠, 평생을 그렇게 살지 않았노라고.
어디서 그따위 망발이냐고.
하지만, 에른 앞이라 버럭하는 대 신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디르카는 기사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습니다. 그 결과 가 이안 선배는 순직했고, 악마까지
소환되었죠. 누명 쓴 걸 밝혀내지 못했다면 무고한 피해자가 더 생 겼을 테고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감찰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걸 막아 주신 것에는 감사한 마음 뿐이고...
제니츠가 쩔쩔매는 이유였다.
에른이 수정구 영상을 공개했다면?
단장의 권한으로 영입해온 인재가, 중범죄를 세트로 저질렀다는 게 알 려진다면 기사단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에른이 입을 다물어 준 것에는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덕분에.
디르카는 명예로운 죽음이나마 건 졌고, 기사단도 명성에 먹칠하는 일 은 피하게 됐으니.
"공치사를 듣자는 게 아니에요. 사임 말이에요. 단장님 마음 편하 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단장님의 실수로 무고한 사람이 희생됐어요. 악마까지 소환됐구요.
책임지셔야죠. 이렇게 도피할 게 아니라."
"...도피?"
제니츠가 상자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직해진 그의 음성.
"나도 책임을 지려는 겁니다. 블 랙 스네이크에서부터 시작해 상회 를 엮고 최종적으론 총회주님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했죠."
에른이 예상했던 대로다.
비록 상회 선에서 차단되어 버렸
지만.
"처음부터 무리한 수사였습니다. 그런데도 강행했던 건. 총회주님을 칠 방법이 그거 말곤 없어서. 그런 데 알고 보니.... 무리한 정도가 아니라 조작으로 얼룩진 복수극에 불과했을 줄은."
"그래도 단장님은 몰랐으니까. 디 르카의 단독 행동이잖아요."
"난 비겁한 놈이 아닙니다. 칼을 뽑아 들었다는 건, 나도 남의 칼에 맞을 수 있겠다고 각오한 것이죠. 총회주님께서 날 디르카의 배후로
지목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량을 베풀어 주실 줄은...
제니츠가 말을 이었다.
"벼룩도 낯짝이 있죠. 저 나름의 방 식으로라도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실망이네요."
그가 의아한 듯 에른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면 엄지를 추켜올려 주고 싶지만.
남들에게 들이대는 잣대 그대로
자신한테도 적용하는 사람이 세상 에 얼마나 될까.
'의외로… 멋있는 면이 있단 말이지.'
평생 외길만 걸어 온 사람은 달 라도 뭐가 다른가.
하지만 결심을 존중해 줄 수는 없는 노릇.
이럴 때는 역시.
'...궤변으로 간다.'
에른은 속내를 숨기고 제니츠에 게 차가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내가 아는 제니츠 단장님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이번 생에서는 전해들은 것과는 너 무 달라서 실망할 뻔했지만.
"수틀리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달 려드는 호전성. 그래서 미친개라고 불리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근거 없이 물고 늘어지는 일은 없어요."
방금 전, 제니츠 그 자신이 말했 던 그대로.
그래서 반박할 수 없다.
"예, 뭐...
"내가 쿤츠를 살해했다는 근거는요?"
"음, 그게 말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제니츠는 주저하면서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일단은 증언. 아카디오에서 철혈가 와 열혈가가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이 정황을 뒷받침해 주었고… 디르카의 진심도. 창창한 앞날을 내던지고 주 군의 복수를 하겠다는 그가 신뢰가 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줄 알았더라면 돌려보냈겠지만...
"흐음, 그래요?"
"무엇보다 가장 큰 건 총회주님 때문이죠."
"왜 나 때문…. 이래서 어린 나이에 오러 유저가 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니까."
"검술도 검술이지만. 그 이유에서 만은 아닙니다."
제니츠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총회주님은 인생을 처 음 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뭐야, 감찰만 20년쯤 하다
보면 거기까지 보이는 건가?'
놀랐지만.
에른은 태연히 되물었다.
"제가 뭘요?"
"그냥 전부 다 말입니다. 그 21클럽 을 문 닫게 하고, [카르 숨]으로 조기 졸업? 여기까진 그렇다 치죠.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교내의 업적일 뿐이 니까. 하지만 상회를 시작해 겨우 2 년 사이에 일가를 이루고… 까놓고 말하죠. 블랙 스네이크를 복속시킨 것도 총회주님의 역량 아닙니까?"
"...그 인간들하곤 비즈니스 관계일 뿐인데."
"아무튼, 총회주님은 어린 나이부터 대운이 트인 스틸가드의 막내 정도가 아닙니다. 남들은 그렇게 볼지 몰라도."
어느새 제니츠의 눈빛이 진지하 게 변해 있었다.
죄지은 기사들이 가장 마주 하고 싶지 않은 그 눈.
"적어도 저한테는 아니죠. 에른 스틸가드가 쿤츠 알브레트를 살해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그 가 쿤츠를 죽일 마음을 애초부터 품
고 있었다면?"
제니츠의 시선이 얼음송곳처럼 날카 롭다.
에른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있었다면?"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고 죽여 없앴을 테지. 실종된 것처럼, 가출 해 버린 것처럼."
싸악하고 소름이 쫙 올라온다.
'촉이 좋긴 해.'
그러니까 단장까지 하고 있겠지.
에른은 이번에도 속마음과는 정반 대로 말했다.
"...진짜 터무니없네."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날 물고 늘어진 것도 다 이유 있는 행동이란 거잖아요? 디르카하고는 다른, 감찰로서 마땅 히 가져야 할 의심."
"그건 그렇지만."
"그럼 책임지고 계속하세요."
"뭐, 뭘 말입니까?"
"나에 대한 수사. 여태껏 잘못 문
적 없다면서요. 디르카의 잘못된 행 동 때문에 포기하겠다니… 납득이 돼 요? 난 안 되는데."
제니츠의 진지한 눈이 벙찐 눈으 로 변해 버렸다.
"난 미친개가 목줄 차고 입마개 쓴 채로 개집에 틀어박히는 걸 원하지 않아요. 물려도 싼 놈은 물어 뜯겨 야 제맛이지."
"어...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렇게
떠나는 건 도피에요. 수사관은 수사로 책임지는 겁니다. 사임하지 마세요. 다시는 가이안 선배 같은 케이스가 생 기지 않도록, 상회 직원들처럼 무고한 이들이 고초를 겪는 일 없도록."
'뭐지, 이 사람은?'
제니츠는 얼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에른이 자길 봐줬을까.
그가 옷 벗긴 기사들은 하나 같 이 이를 갈며 복수를 맹세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멘트는.
'미친개… 너 언젠간 꼭 가죽 벗기 고 살점 송송 썰어서 콩 소스에 듬뿍 찍어 먹고 만다! 각오해, 제니츠!'
무슨 부모의 원수였다면 이해라도 가 지.
그저 비리를 저질러 해임시켰을 뿐 인데.
그만큼 당한 것을 잊지 않는, 아 니 몇 배나 부풀려서 받아들이는 게 기사고 귀족이란 인간들이다.
'거기다 백작가면 더하지. 근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 어간다고? 또, 쿤츠 수사를 계속하
라고 하는 건
열일곱, 에른 스틸가드.
도대체 어떤 그릇이란 말인가.
감찰 인생 20년, 이런 사람은 처 음 겪어 보는 제니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