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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화 – 토너먼트(2)

톰과 티그리스는 제1식 바람 돌진으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두 물소가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거칠었고, 속도의 우열은 범인

의 눈으론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빨랐다.

티그리스와 톰이 서로 격돌하기 직전 톰의 검이 먼저 변화했다.

어깨가 회전하며 마치 범고래가 물개를 사냥하듯 순식간에 위로 쳐올렸다. 제

1식 바람 돌진에서 이어지는 연속기 제2식 물개 사냥이었다.

티그리스는 똑같이 물개 사냥으로 올려 벴다.

텅!

티그리스와 톰의 검이 같은 경로에서 마주치자 톰의 검이 옆으로 튕겨 나갔

다. 반면 티그리스의 검은 톰의 검이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검로를

이탈하지 않았다.

힘의 차이도 아니고 오러의 양의 차이도 아니었다. 그건 오로지 티그리스의

검술이 더 정교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티그리스의 검이 톰의 허리띠를 베고 지나가자 허리띠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일부러 안 베신 겁니까?"

"네 검술을 다 보지 못했으니까."

톰은 헛웃음을 치며 허리띠를 옆으로 쳐냈다.

"정말로 궁금하네요. 이 검술을 어떻게 익히셨는지."

티그리스는 과거 톰이 키메라를 베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 저돌적인 검술과 톰의 투지가 만나 상승작용이 일어나면서 톰은 키메라들

을 피에 굶주린 혈귀처럼 베어나갔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 같진 않네요."

톰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방금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톰의 투

지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톰의 눈빛은 타올랐다.

티그리스는 톰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돌진.

이번엔 티그리스가 톰의 발목을 노리며 횡으로 검을 그었다. 톰은 잽싸게 위

로 뛰어올라 제5식 물레방아를 시전했다.

몸을 한 바퀴 굴러 상대방의 등을 노리는 검술에 티그리스는 제2식 발목 자르

기에서 제7식 기마 베기로 이어지는 연속기로 막아냈다.

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기마 베기는 뒤를 돌아서 아래서 위로 올려 베

는 것으로, 워낙 고난이도 검식이라 톰은 아직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쩡!

톰의 검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가해지며 톰의 회전력이 크게 죽었다.

"칫!"

톰은 바닥에 나동그라지기 전에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

리고 곧바로 다시 돌진했다.

관중들과 대기하고 있던 선수들의 시선이 티그리스와 톰에게 자연스레 향했다.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며 공격을 하는 모습은 마치 투우사와 소를

보는 것 같았다.

서로 번갈아가며 소가 되기도 하고 투우사가 되기도 하며 서로를 향해 돌진하

고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긴 지금 뭘 하는 거야?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나군!

-저게 사람이 가능한 동작인가? 어떻게 저 자세에서 위로 올려칠 수 있지?

-저 검술은 어디 검술이야? 저런 저돌적인 검술은 처음 보는데?

검술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화려함에 이끌렸고, 검술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톰과 티그리스의 놀라운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심판마저 넋을 잃고 톰과 티그리스의 싸움을 지켜볼 정도로 화려한 결투가 이

어지자, 사진 기자들은 연신 사진기를 들고 찍었다.

-젠장. 너무 빨라서 제대로 찍히질 않잖아.

-제발 한 컷만···. 제발 한 컷만 건지자!

사진 기자들이 사진기의 성능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톰은 아주 죽을 맛이

었다. 하도 티그리스와 검을 부딪혀서 그런지 손이 얼얼하다 못해 뻐근했다.

게다가 옷은 어느새 걸레로도 못 쓸 정도로 넝마가 되었다.

'이건 내가 졌다.'

톰은 첫 격돌 때부터 패배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바람잡이 검술 이해도는 티

그리스가 훨씬 위였다.

검은 더욱 정교했고 자세도 완벽했으며 초식에서 초식으로 이어지는 연결이

마치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톰은 당장이라도 검을 멈추고 티그리스가 어떻게 이 바람잡이 검술을 익혔는

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티그리스의 검을 더 보고 싶다는 욕망이 그보다

앞서 달렸다.

'이건 기회야.'

티그리스의 정석에 가까운 검술을 보면서 톰은 자신의 자세를 고쳐나갔다.

글로 익혀서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던 동작이 티그리스라는 살아있는 교본을

보자 유연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거기에 티그리스는 아주 잠깐의 소강상태

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손목을 좀 더 바깥으로 뒤틀게."

"좀 더 자세를 낮춰도 상관없네."

"방향 전환을 할 때 발목에 오러를 때려 넣기보단 타이밍에 맞게 한순간에 몰

아치게."

"조금 더 나아졌군. 하지만 힘이 모자르군."

톰은 확실히 천재는 아니다. 그러나 범재 정도는 되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하나를 아는 수준이었다.

톰은 티그리스의 소중한 조언을 받아들이며 검술을 차근차근히 고쳐나갔다.

결투장은 어느새 배움의 장으로 탈바꿈되었다. 톰은 성실한 학생이 되어 티그

리스의 검을 배워나갔고 티그리스는 성심성의껏 톰에게 바람잡이 검술을 가르

쳐주었다.

톰과 티그리스의 결투가 30분이 넘어갔다. 전쟁을 겪으며 단련된 육체답게 톰

의 체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검은 그렇지 못했다.

쩡!

톰의 검은 마치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하늘로 비산했다. 톰은 허망하

게 손잡이만 남은 검을 쳐다봤다.

"···허."

톰이 5년 전에 전 재산을 털어 산 검이었다.

철퇴와 직격으로 맞아도 날만 조금 상하는 검이었는데, 아예 산산조각이 나니

어이가 없었다.

그것보다 더 아쉬웠던 것은 티그리스에게 가르침을 더 이상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더 배울 것이 남았는데 검이 깨져버렸으니 너무나 아쉬웠다.

넋놓고 보고 있던 심판이 제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승자.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톰은 제정신을 차리고 티그리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10실버를 잃고 4골드짜리 검을 잃었지만 톰은 그보다 값진 것을 배웠다. 검은

부서지고 돈은 사라지지만 톰의 검술은 톰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남는 것이었

으니까.

티그리스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나도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네."

"나중에 용병이 필요하시다면 붉은 이리 용병단을 찾아주십시오. 제가 그 어

떤 의뢰든 단 한 번은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나리."

"검이 없는데 가능하겠나?"

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간 모아놓은 돈이 있어서 검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리젬블 산 강철로 만든 검보단 못하겠지."

"···뭐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이걸 받게. 노르베르드 산 철로 만든 강철검이네. 자네가 쓰던 검보다 더 나

을 걸세."

티그리스는 자신의 검을 톰에게 넘겼다.

톰은 손사레를 치며 거절했다.

"제가 어떻게 나리가 쓰던 검을 받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예비용으로 하나 더 있네. 그냥 받아도 되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용병일 뿐인데···."

"···용병이라."

티그리스는 오크들의 시체 무더기 위에 누워있던 톰을 떠올렸다. 그의 두 눈

은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눈을 뜨고 있었고, 입에는 부러진 칼이 물려있었다.

그날의 톰은 용병으로 죽지 않았다.

영웅으로 죽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오직 티그리스만 기억하고 있는 과거. 지금의 톰과

그날의 톰이 다르다는 것을 티그리스는 알고 있다.

그러나 미련이 남았다.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그들이 모두 죽은 것이라고. 영

웅으로 영광스럽고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영웅으로 죽어버렸노라고.

그러니 사죄하는 것이다. 오직 티그리스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이기적인 사죄.

오만함을 씻어버린 티그리스의 양심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어쩔 수 없

이 하는 일방적인 사죄였다.

"그저 내 마음이 시키는 것이니. 자넨 그냥 받으면 되네."

톰은 티그리스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귀족의 사례를 연신 거절하는 것도 무례이니 이젠 받게."

톰은 티그리스의 검을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받았다.

"이 검은 제가 대대로 보관하겠습니다. 나리."

"검은 사용하라고 있는 걸세. 아끼지 말고 사용하게."

티그리스는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샤를로트는 티그리스가 젊은 피 토너먼트에 나간다는 소문을 얼마 전에 들었다.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었지만 마침 공강이기도 했고 에이든과 친구들이 하도

같이 구경을 가자고 등을 떠미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관중석 티켓을 구매했다.

샤를로트는 관중석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뭐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고.'

사실 샤를로트는 자신이 진 것은 진 것이지만 완전히 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괜히 쉽게 이겨보겠다고 어깨를 집어넣는 바람에 져 버렸다.

만약 다시 정석적으로 싸운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티그리스와 다시 결투를 할 예정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고 반년? 아니, 내년 이맘쯤에.

티그리스가 제일 중앙에 위치한 경기장에 올라서자 지미가 샤를로트의 어깨를

툭툭쳤다.

"샬롯. 저기 티그리스다."

"알고 있어."

이미 밖에서 나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의 저 뻔뻔한 얼굴은 멀리

서도 아주 잘 보였다.

'좋아. 이번 기회에 녀석의 검술을 봐두는 거야. 그리고 파훼법을 머리 속으

로 생각해두는 거지.'

티그리스가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가 고리 2개에 전쟁터에서 오래 구른 베테랑 용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

지만, 자신을 이겼으니 저런 용병 따위에게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

려 지면 분을 참지 못하고 뺨을 날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둘이 격돌했다.

샬롯은 물론이고 친구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둘의 검술은 상상 이상으로 수

준이 높았다.

단순히 공격 일변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수준 높은 심

리전이 오갔는지 샤를로트의 눈에 보였다.

파훼의 파훼의 파훼.

티그리스는 어떻게 톰이 익히고 있는 정체 모를 검술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같은 검술로 톰의 검술을 파훼했다.

급기야 톰의 검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욱 검이 정교해졌으며 날카로워졌

고 더욱 빨라졌다.

'가르치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샤를로트의 눈엔 다 보였다.

30x30m짜리 작은 경기장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오직 선생과 학생만 있을

뿐이었다.

샤를로트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티그리스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톰의 검이 폭발했다.

쩌엉-!

샤를로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너무 허무하게 끝난 결투였지만 여

운이 남았다.

극한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정직하게 직선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오직 티그

리스의 검은 수십 개의 변화를 일으켰다.

같은 올려 베기라도 방어를 목적으로 하느냐 공격으로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

라 힘이 실린 순간과 타점이 달라졌다.

톰의 검로를 예측하고 검로를 순식간에 수정해 검을 옆으로 쳐내고 옷깃을 베

어내기까지 했다. 티그리스가 옷깃을 노려서 그렇지 만약 목을 노렸다면 톰은

자신이 왜 죽는 것인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었다.

샤를로트가 티그리스의 검을 생각하던 사이 친구들이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

기 시작했다.

"···티그리스가 진짜 천재긴 천재인가보다."

"저 검술 뭔지 알아? 용병들이 개발할 수준의 검술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돌진하는 공격이니까 별거 아닌 검술 아니야? 뒤가 없잖아."

"하긴 한 번만 막거나 회피하면 대처하긴 쉽겠다."

'멍청한 소리. 저건 용병들이 사용할 법한 저급한 검술이 아니야.'

저돌적이고 공격 일변도의 검술이라 부족함이 많은 용병들의 검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수준 높은 검술이었다. 저건 수십 년간 대대로 개발된 귀족의 검술

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가문의 검술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샬롯이라면 저 검술은 쉽게 파훼할 수 있겠다."

"맞아. 안 그래 샬롯?"

"···응?"

샬롯은 친구들의 물음에 잠시 생각했다.

만약 저 공격이 오면 자신은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옆으로 움직이면 발목 베기가 들어오고 위로 점프하면 검이 위로 치솟는다.

찌르기를 막아볼까?

샤를로트는 머릿속으로 모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모든 결과는 하나로 끝이

났다.

샤를로트의 패배.

샤를로트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받아낼 수 없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샤를로트는 아직 저 검식을 파훼할 수 없었다. 저 공격

일변도의 검술이 무슨 검술인지도 모르며 약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었

다. 샤를로트는 저 검술의 약점을 스스로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굉장히 분

했다.

그렇지만 친구들에게 진다고 말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샤를로트는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길 수 있어."

"봐봐 샤를로트는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

샤를로트는 태연한 척 웃으면서 생각했다.

'교관님들께 여쭈어봐야겠어.'

오늘 봐둔 검식을 제국 대학 교관들에게 물어보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리고 그 검식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샤를로트의 머리 속은 오직 오늘 티그리스가 보여준 검식으로 가득찼다.



16. 토너먼트(3)

#016화 - 토너먼트(3)

티그리스는 그 이후 3번의 예선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톰처럼 30분이 넘어가는 결투는 나오지 않았다. 그냥 일격으로 끝을 내거나

상대가 항복해버렸다.

'고든의 검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고든 데이커는 용병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제비꽃 용병단 소

속의 용병이자 13년간 전쟁 용병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다.

고든의 별명은 나이트 킬러.

전쟁 중에 1대 1로 기사와 싸워서 진 적이 없다 하여 생긴 별칭이었다. 그러

다 보니 고든과 마주한 모든 상대는 싸워도 보지 않고 수건을 던졌다.

고리 4개짜리 용병과 싸웠다가 검이 부서지거나 몸을 다치기라도 한다면 엄청

난 손해이기 때문이었다.

고든의 검술 실력은 본선에 가서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쉬움만 남긴 채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티그리스는 기묘한 일을 맞이

했다.

"어이 거기 머리 제대로 안 박아? 어디서 요령을 부리려고!"

제인이 거실 바닥에 도자기와 컵, 그릇, 슬리퍼 등을 내려놓고 소리치고 있었다.

제인이 티그리스를 보며 말했다.

"왔어?"

표정을 보아하니, 마치 검은 늑대 기사단원들을 굴리는 비장한 호른의 것과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 이 빌딩에서 숨어지내고 있던 귀신들을 찾아내서 교육 좀 하고 있었어."

제인은 다시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어디서 눈깔을 돌려. 아주 그냥 내가 만만해?"

제인이 허공에 발차기를 하자 도자기가 덜덜 떨더니 엎어졌다.

"제자리!"

그러자 도자기가 다시 세워졌다. 뭔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저 물건들에 귀신이

빙의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제인은 스산한 눈빛으로 물건들, 아니 귀신들을 내려다봤다.

"아주 여기서 잘 먹고 잘살았나 봐. 얼굴들이 반질반질하네? 지금까지 백화점

사람들이랑 우리 레니 놀래키면서 잘들 지냈지?"

물건들은 격렬히 좌우로 움직였다.

"또 거짓말하네. 인간들을 놀래키면서 영력을 키웠잖아. 누가 먼저 시작했어.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빌?"

도자기가 벌벌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넌가? 레이아나?"

화분의 꽃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허! 티그리스가 왔다고 교태 부리는 것 봐? 넌 아주···"

"그만."

티그리스는 이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더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것보다 레니는 어디에 있지?"

제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게."

제인이 소파를 흘금 봤다. 레니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하라는 눈치를 주자 제인은 뺨을 긁으며 말했다.

"레니가 귀신을 이렇게 무서워할 줄은 몰라서···. 얘네들이 둥둥 떠다니니까

레니가 그대로 기절해버렸어."

레니는 아직 귀신에게 면역이 없었다. 제인은 그래도 몇 주간 봐오기도 했고

선한 인상의 수호령이니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폴터가이스트 현상처럼 갑자기 물건이 움직이는 것은 레니에겐 쥐약이

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 귀신들은 어떻게 할 거지?"

제인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아주 그냥 파묻어버릴까? 들어보니까 레니가 혼자 청소할 때도 몰래 물

건을 움직이거나 거울에 들어가서 장난을 쳤다는데, 레니의 수호령으로서 봐

줄 수 없지."

"빙의된 물건을 부수면 어떻게 되지?"

"뭐, 빙의할 오래된 물건을 찾아 헤매거나 그러겠지? 그런데 이 근처가 다 새

로 지어진 건물에 새 물건들이 가득해서 오래된 물건은 찾기 힘들 거야."

"그럼 부숴버리는 게 좋겠군."

티그리스가 검에 손을 올리고 발을 성큼성큼 옮기자 물건들이 사시나무 떨듯

이 떨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것 같았다.

"자···잠깐."

제인이 다급하게 티그리스를 막았다.

"왜지?"

"이리 와봐."

제인은 녀석들이 들리지 않게 구석진 곳으로 이동해 소곤소곤 말했다.

"그··· 얘네들이 장난은 쳤어도 성질이 글러 먹은 놈들은 아니야. 그냥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거지. 여기는 안개의 숲처럼 영력이

많은 땅이 아니라서 사람의 관심을 받아야 유지할 수 있거든."

"그럼 계속 레니를 기절시킬 건가?"

"···그건 아니지만 내가 잘 관리할 수 있어. 그리고 얘네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

"뭐가 좋지?"

"백화점에 나쁜 마음을 먹고 들어온 사람들이 없나 살펴볼 수 있고, 시설에

문제가 생겼다면 바로 알려줄 수도 있지. 게다가 얘네 잠도 안 자서 24시간

동안 일만 시킬 수 있어."

"흠···."

티그리스는 앞으로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을 죽여나갈 것이다. 당연히 도덕

적인 윤리 따위는 지키지 않는 로타와 아르펨은 티그리스를 죽이기 위해 갖가

지 방법을 동원할 것이고, 레니와 이 건물 사람들은 위험에 많이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티그리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고스트들이 빌딩을 몰래 침입하려는

적들을 미리 발견한다면 위험한 상황을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이튼을 감시할 수도 있고.'

베이튼은 출장 나갈 때를 제외하면 바로 아래층에 있는 '더 노르베르드'에서

일한다.

녀석이 이상한 짓거리를 할 때 바로 제인을 통해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쁘지 않군.'

티그리스는 검 자루 위에 올라가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레니가 다시 기절하지 않게 신경 써서 관리해라."

"그건 맡겨둬! 문제없게 잘 관리할게. 아! 레니를 깨울까?"

"아니. 지금은 되었다."

지금 일어나면 또 알아서 움직이는 물건들 때문에 기절할 테니까.

제인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레니 굉장히 아끼는 것 같다? 하긴 레니가 귀엽긴 해. 몇 년만 더 지나서

성숙한 숙녀가 되면···"

"잡담은 그만하고 이것들부터 치워라."

"넵! 공자님!"

제인은 우스꽝스럽게 경례하더니, 곧바로 일렬종대로 서 있던 귀신들에게 명

령했다.

"자, 다 들었지? 거실 말고 다른 곳에서 우리 찐하게 놀아보자고?"

화분, 도자기, 슬리퍼 등은 공중을 날아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둥- 둥-

그 모습이 뭔가 굉장히 힘이 없어 보였다. 티그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가 당분간 고생을 많이 하겠군.'

* * *

본선 날이 다가왔다.

4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검투장은 시합 시작 2시간 전에 가득

찼다.

토너먼트를 보러 온 것도 있지만 황제 폐하의 용안을 보기 위해 서기도 했다.

관객들 틈 사이를 노닐며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의 손이 바빠지고, 누가 이

기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다가 주먹 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그와 반대로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방이 있었다.

오직 VVIP만을 위해 마련된 호화로운 대기실.

황족이나 공작, 후작만을 위해 마련된 최고급 대기실에 한 여인의 한숨 소리

만 메아리쳤다.

"베르강.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현 블랙 마이스터이자 VVIP 대기실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베르강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가 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은 이유는?"

"황녀님의 아름다운 미모를 돋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황녀는 만년필을 열심히 놀리며 말했다.

"그럼 당장 내일 제출해야 할 과제를 하면서 화장을 받는 이유는?"

"레인로버 황녀님께서 스케줄을 깜빡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기랄!"

급하게 쓰다가 만년필의 잉크가 손가락에 튀었다.

레인로버는 신경질적으로 펜과 종이를 화장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아 베르강을 쳐다봤다.

"그게 아니라 제가 굉장히 바빠서입니다. 베르강. 전 황녀이기도 하지만 소환

마법 동아리의 동아리 장이기도 하고 제국 대학의 학생이기도 하고 소환 마법

사이기도 하다고요. 그리고 매주 망할 과제를 폭탄처럼 던지는 베르트랑 교수

의 수업을 듣는 불쌍한 마법사이기도 하고요."

"굉장히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럼 좀 봐줘야 할 거 아니야! 망할 할아범탱이! 땀 냄새나는 젊은 피 토너

먼트에 꼭 참가하라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난 과제 하기도 바빠 죽겠구먼!"

"황제 폐하를 할아범탱이라고 부르시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생각만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하."

황제는 멀었고 황녀는 가까웠다.

황녀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베르강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황녀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마법사가 일이 틀어지면 저렇게 난폭하게 변한다

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땐 그냥 가만히 닥치고 있는 것이 나았다.

황녀는 시녀가 가져온 손수건으로 직접 잉크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베르강은 누가 이번 토너먼트에서 이길 것 같으세요?"

"승부는 언제나 예측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전하."

"좀 전에 도박권 사러 잠깐 나가는 거 다 봤거든요. 레이첼한테 말하기 전에

어서 말해요."

"큼!"

베르강은 거울에 반사된 황녀의 녹안을 보며 말했다.

"고든 데이커가 이길 것 같습니다."

"역시 뻔한가? 용병이 4개 고리를 가졌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니까."

고리 3개와 4개의 차이는 극명하다. 4개부터 무기에 오러를 담을 수 있다.

무기에 오러를 흘리면 무기의 내구성은 물론이고 절삭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

라간다.

일반 강철 검과 오러를 두른 무기와 부딪히면 그대로 잘려 나간다.

그렇기에 4개의 고리를 완성한 시점부터 전술 병기 취급을 받으며, 기사단의

등급도 4개의 고리 이상을 가진 기사가 총 몇 명이냐에 따라 등급이 달라졌다.

"고든은 왜 아직 기사 시험을 안 봤을까요?"

"평민이기도 하고 첫 기사 서임을 황제 폐하께 받고 싶은 것도 있을 겁니다."

"하긴 그래서 이번 토너먼트에 나왔겠죠."

1등을 하면 소원권을 얻지만, 그 소원권의 사용처는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황제 폐하의 기사가 되는 것.

토너먼트의 암묵적인 룰이기 때문에 고든은 아마 황제 폐하의 기사가 되길 청

할 것이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변이요?"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라고 19살에 3개의 고리를 완성 시킨 천재가 있습니다."

황녀는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 재수 없다던 천재 검사. 티그리스도 이번 토너먼트에 나왔

나요?"

"네. 그렇습니다. 대진표를 보니 결승전에서 고든과 맞붙겠더군요."

"티그리스가 도중에 탈락할 거라 생각하진 않나요?"

베르강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리가 3개라서 그런가?"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작년에 본 티그리스의 검술 실력은 이미 제국 대학의

학생 수준을 넘었습니다."

베르강의 말에 황녀는 살짝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베르강은 검술 실

력 평가에서만큼은 후한 점수를 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르강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궁금해지네요. 그러

면 티그리스가 이기는 것에 걸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경험의 차이가 있습니다. 고든은 16살부터 전쟁 용병으로 참가하여

29살이 될 때까지 쉼 없이 전장을 찾아다녔습니다. 심지어 전쟁이 끊긴 최근

2년 동안은 몬스터 간 전투도 겪어봤죠. 아무리 티그리스가 천재라곤 하지만

13년의 격차는 좁히기 힘들 것입니다."

황녀는 잉크를 모두 닦아내고 손수건을 시녀에게 건넸다.

"흠~ 그래요?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누가 이길지?"

"무슨 내기를 말씀이십니까?"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베르강은 질색했다.

"저번처럼 수인 족의 밀림에 들어가서 자이언트 터틀을 생포해오라고 하실 겁

니까?"

"자이언트 터틀은 이미 제가 길들였어요. 느긋하게 하품할 때 얼마나 귀여운

데요. 지금 꺼내서 보여드릴까요?"

"지금 꺼내면 이곳이 난장판이 될 겁니다. 제발 삼가십시오."

황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다른 건 아니고 고디바 사막에 있는 모래 여우가 그렇게 귀엽다던데. 길

들여보고 싶어요!"

"···모래 여우는 굉장히 잡기 힘듭니다. 굉장히 날 센 데다가 그 조그마한 녀

석이 마법까지 부릴 줄 아는 터라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을 뿐이지 못할 건 없는 거잖아요."

베르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는 다음 주 주말 내내 노아와 놀아주시는 것으로 하겠

습니다."

"주말 내내?! 저 곧 기말고사를 앞둔 학생인데요?"

"최근 노아가 자꾸 칭얼거려서 말이죠. 황녀님을 자꾸 보고 싶다고 밤마다 얘

기합니다."

노아는 베르강의 5살짜리 막내딸이다. 문제는 베르강의 어마어마한 체력을 이

어받아서 그런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아주어도 지치기는커녕 더 놀아달라고

보챌 정도였다.

"최근 노아에게 병정놀이 장난감 세트를 사줬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세상에! 병정놀이 장난감은 선 넘었죠!"

"아주 시간 잘 가실 겁니다. 전 무려 24번이나 마왕이 되었고 10번은 사악한

드래곤이 됐거든요. 아마 황녀님께선 사악한 흑마법사가 되실 겁니다."

"젠장! 이번 내기에서 반드시 이겨야겠어."

황녀는 씩 웃는 베르강을 보며 말했다.

"베르강은 그럼 티그리스에게 거시는 거 맞죠?"

"수작 부리지 마십시오. 황녀님. 제가 먼저 고든에게 걸었습니다."

"나도 고든에게 걸고 싶은데?"

"그럼 먼저 도박권을 사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런 제기랄. 다음 주에 또 폭탄 과제를 주면 베르트랑 교수 연구실을 자이

언트 터틀의 화장실로 만들어버리겠어."

그때 VVIP 실의 문이 열렸다.

"레인로버 황녀님. 곧 토너먼트가 시작됩니다."

"알겠어. 금방 갈게. 황제 폐하께선 아직 안 오셨나?"

"오늘 아침 회의가 길어지셔서 먼저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레인로버는 얼굴을 구겼다.

"망할 할아범탱이. 이럴 줄 알고 나를 부른 거였네."

뭐만 하면 대리로 참가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중에 결승전이 시작될 즈음

에야 얼굴을 보일 것이다.

레인로버는 마음을 차분히 하고 거울을 보며 미소 연습했다.

그래도 황녀는 황녀다.

만민의 우상이자 민초들의 기둥이 되어야 할 황족이다. 왈가닥에 털털한 성격

이 본 모습이긴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행사 자리에선 그에 걸맞은 품위 있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황녀가 누리고 있는 모든 안락함과 사치의 대가니까.

굳은 얼굴 근육이 풀어지자 황녀는 일으켰다.

좀전의 험한 말을 내뱉던 왈가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아한 자

태의 황녀가 서 있었다.

베르강은 따로 여우를 찾을 필요 없이 여기 여우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가죠. 베르강."

베르강은 레인로버 황녀를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전하."

황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티그리스는 검을 들고 경기장으로 나섰다.

상대는 3성 기사이자 28살의 나이에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도리아 경이었다.

티그리스의 기억에 딱히 없는 인물이었다.

둘은 적절한 거리를 벌리고 섰다.

도리아 경이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3성 기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너무 일찍 나오신 것 같습니다. 8

년 후에 나오셔도 되었을 것 같은데요?"

도리아는 자신이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도리아는 전쟁을 많이 겪은 서부 출

신 기사였다.

거기에 도리아는 서부에서 '붉은 하이에나'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상대방의

약점을 잘 물어뜯는 것으로 유명했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도리아는 하이에나처럼 끈질기게 물어뜯을 것이

었다.

"지금까지 운이 꽤 좋으셨던 모양입니다만 여기서 끝입니다."

도리아는 몸을 낮춰 돌진할 준비를 했다. 티그리스는 검을 뽑지도 않고 가만

히 멈춰 서 있었다.

심판은 손을 들었다.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시작하겠습니다. 준비."

티그리스는 여전히 검을 뽑지도 않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발도술을 할 셈인가?'

도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발도술은 빠르긴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검로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검집에 검이 들어가 있는 만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무조건 공격이 들어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만 주의하면 파훼하는 것은 쉬웠다.

'검이 들어오면 막고 검날을 따라서 들어간 뒤 명치에 몸통 박치기. 넘어지거

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순간 이어진 찌르기에 바로 끝.'

시뮬레이션이 그려지자 도리아는 오러 고리를 예열하기 시작했다.

팅-!

심판의 동전이 하늘 위로 치솟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퉁!

묵직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튀었다. 도리아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티그리

스 앞에 섰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설마 이 정도밖에 되지 않은 건가?'

자신의 움직임을 읽지도 못할 정도로 처참한 실력이라니. 고리가 3개라는 것

도 거짓말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낙승이군.'

도리아는 검을 내질렀다.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려 베는 정직한 공격.

목표는 티그리스의 가슴에 달린 붉은 표식이었다. 저것만 타격하면 승리다.

'뭐 살짝 다치실 수도 있지만.'

도리아는 검을 좀 더 깊게 집어넣었다.

그러나 도리아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티그리스의 눈동자는 끝까지 도리아의 검을 따라가고 있었다.

훙!

도리아는 검을 올려 쳤다. 하지만 그 무엇도 베는 감각이 없었다. 티그리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피해냈기 때문이었다.

몸이 완전히 열린 도리아. 티그리스의 오른손이 움직였고 도리아의 가슴에 혈

선이 그려졌다.

"커억!"

도리아는 검을 떨어뜨렸다. 티그리스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검집에 집어

넣었다.

"인과응보일세."

티그리스의 승리였다.

1초도 지나지 않아 끝난 결투 결과에 관객들은 물론이고 심판도 멍을 때렸다.

"스···승자!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17. 토너먼트(4)

#017화 – 토너먼트(4)

단 일격에 끝난 경기에 레인로버는 어리둥절했다.

"베르강. 방금 움직임 봤어요? 순식간에 파밧! 하고 끝나서 잘 모르겠는데."

베르강은 티그리스가 취한 담백한 승리에 혀를 내둘렀다.

"···못 본 사이 정말 괴물이 되어버렸군요."

"괴물이요?"

베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그리스가 검술에 천재인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투에도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하고 전투에 재능이 있는 것하곤 다른가요?"

"검술은 그저 검술일 뿐입니다. 검을 다루는 기술이죠. 하지만 전투는 다릅니

다. 생과 사를 오가는 찰나의 순간에 상대보다 빠른 판단으로 효과적으로 무

력화시키는 것. 그것이 전투입니다."

티그리스는 정확하게 도리아의 검로를 읽고 어느 정도 파고들 것인지 정확하

게 계량하여 한보 뒤로 물러섰다.

검 끝이 종이 한 장차이로 지나가는 것을 티그리스는 끝까지 지켜보고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질렀다.

그 과정에서 오러는 단 1g도 사용하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완벽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완벽한 육체 통

솔, 깔끔한 검로, 거기에 대담함까지. 저것보다 완벽한 승리를 얻기란 힘들

것입니다."

그렇기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티그리스가 사는 노르베르드의 특성상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을 겪어볼 수 있는

환경이 절대로 아니었다.

오우거나 오크와 같은 몬스터들이 갈리아 산맥을 수시로 내려오는 탓에 인간

과의 전쟁이 벌어질 일이 없다.

차라리 티그리스가 몬스터를 사냥할 줄 안다면 이해를 할 것이다. 티그리스는

노르베르드의 피를 이었으니까.

그러나 티그리스는 사람을 벨 일이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사람을 죽이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베오울프가 티그리스에게 직접 지도했나? 아닌데···. 성인이 되지도 않은 아

들에게 사람 피를 묻힐 양반은 아닐 텐데···.'

만약 저것도 재능이라고 한다면 티그리스는 둘 중에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천살성(天殺星)이 되던가 아니면 구국의 영웅이 되던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신의 피보다 남의 피를 많이 볼 운명이었다.

베르강은 티그리스의 무심한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가르쳐볼까?'

베르강은 티그리스의 본성이 어떤 지을 떠나서 한 번쯤은 가르쳐보고 싶은 욕

구가 마구 솟아나는 천재인 것은 확실했다.

자신이 인도한다면 티그리스의 검이 올바른 곳에 쓰이지 않겠느냔 생각이 들

었다.

레인로버는 심각하게 티그리스를 보는 베르강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번 내기는 제가 이길 것 같네요. 베르강."

베르강은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래도 고든이 이길 겁니다. 고든은 고리가 4개나 되니까요. 방심하지 않고

검기를 사용하는 순간 고든의 승리가 될 겁니다."

"베르강 혹시 소설 같은 거 많이 보셨어요?"

"소설이요?"

"네. 지금 베르강처럼 그렇게 확정을 지으면 100%로 틀려요. 그걸 클리셰라고

부르죠."

레인로버는 경기장을 나가는 티그리스를 보며 말했다.

"클리셰대로라면 티그리스가 이길 거예요."

"···이건 소설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말이 그렇다고요. 그런데 종종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나시는 거 아시죠?

제가 봤을 땐 오늘이 딱 그날이에요."

베르강은 레인로버의 손에 든 도박권을 보며 말했다.

"티그리스에게 10실버나 거셔서 그런 게 아니고요?"

"···아니라니까요! 이건 분명히 터져요!"

"황제 폐하께 레인로버 황녀님이 일확천금의 기회를 너무 노리시는 것 같으니

걱정된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내기하자고 하셨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

데···."

레인로버는 눈썹을 찌푸렸다.

"레이첼을 만나면 도박했다고 다 이를 겁니다."

"제발 아내에게 그것만은···."

레인로버와 베르강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고든은 자신 순서가 되자 대기실을 나왔다. 고든은 경기장에 들어섰지만 싸울

상대를 보지 않았다. 관중석에 있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관중석을 훑는 고든의 눈동자가 멈췄다.

시선이 닿은 곳에 티그리스가 있었다.

'티그리스···.'

고든은 좀 전에 보여준 티그리스의 깔끔하고 대담한 움직임을 계속 떠올렸다.

검로는 비단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웠고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는 움

직임은 대담하면서도 노련했다.

'쉽지 않겠어.'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가 천재라는 소문은 파다했다. 하지만 노르베르드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기에 뜬 소문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를 보니 그것이 아예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축소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고든은 어느새 자신이 상대방과 검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비."

심판이 동전을 엄지손가락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고든은 검을 빼 들었다.

상대에 대한 정보는 거의 몰랐다. 그저 제국 대학 예비 졸업생 출신이라는 것

만 알고 있었다.

고리의 개수는 2개에 창술사다.

상대방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돌진을 준비했다. 그 모습에서 어리숙함이 느껴

졌다.

팅-!

하늘 위로 동전이 날아오르다가 땅에 추락했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달려들었다. 상대는 고리 2개짜리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굉장한 속도로 돌진했다.

'속도는 제법 괜찮다만.'

창술사가 먼저 돌진해온다는 것 자체부터 글러 먹었다. 창술의 장점은 거리에

있다.

고든의 무기는 대검도 아니고 일반 롱소드이기 때문에 리치 차이에서 불리함

을 떠안고 가야 한다.

저 창술사는 조급한 마음에 창의 최고의 이점을 스스로 버렸다.

섬전 같은 찌르기.

고든은 몸을 옆으로 가볍게 돌려 피해냈다.

그 이후의 작은 딜레이.

고든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으나 창술사의 눈빛이 묘했다.

'뭔가가 더 있군.'

고든은 검을 내지르는 척을 하자 두 번의 찌르기가 고든의 몸통을 향해 날아

왔다.

고든은 두 번째 찌르기를 검으로 툭 쳐서 막은 뒤 정확히 한 걸음 앞으로 전

진했다.

콧망울에 있는 작은 점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창술사는 당황했는지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만 고든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쿵-!

고든은 발을 굴렀다. 그러자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울렁였다.

기본 오러 운용술 중 하나인 '땅울리기'였다. 뒷걸음질 치려는 상대를 잡아놓

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였다. 상대방은 뒤로 물러서려다가 땅이 움

직인 탓에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상대는 발악을 하려 했다. 하지만 노련한 고든은 변수를 만들지

않았다.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옮겨 잡고 오른팔로 창대를 뱀처럼 휘감았

다. 그리고 넘어진 상대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승자! 고든 데이커!"

심판의 말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든은 검을 치우고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상대는 고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4개 고리를 가졌다고 하더니 정말인 것 같군."

고든은 그게 아니라 당신이 창을 다루는 기본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

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녀석의 곱상한 얼굴과 자연스러운 하대를 보아하니 귀족인 것 같았기 때문이

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 욕만 얻어먹지, 좋을 게 하등 없었다.

고든은 그것보다 녀석의 뒤로 보이는 한 사내를 주목했다.

'티그리스.'

티그리스가 고든의 전투를 지켜봤다.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아마 별 소득이 없겠지.'

고든은 눈앞에 있는 녀석에게 전심을 다 하지 않았다. 고든은 자신의 장기를

두 개 모두 숨겼다.

고든이 이렇게 티그리스에게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있

었다.

'검기를 잘 뽑아내지 못한다는 걸 들키면 안 돼.'

4개 고리를 얻었다고 해서 바로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훈련되어야 하고 지도받아야 한다.

그러나 용병 출신인 고든은 검기를 다루는 법을 누군가에게 배워본 적이 없었

다. 그저 맨땅에 헤딩하듯이 홀로 연습해볼 뿐이었다.

검기를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상황에서 티그리스와 정면으로 충돌하면 고든

의 생각으로 승패는 50대 50이라고 생각했다.

'티그리스를 확실하게 이기려면 내 장기를 숨겨야 해.'

고든은 끊임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티그리스의 맹금 같은 눈을 피해 경기장을

떠났다.

* * *

연전연승.

티그리스와 고든은 상대를 가볍게 제압하며 결승의 무대를 향해 올라갔다.

다른 경기들은 최소 10분에서 30분 정도 걸렸지만, 티그리스와 고든의 경기는

길어봤자 5분 남짓이었다.

티그리스는 10초 이상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티그리스는 그냥 검을 피하거

나 옆으로 툭 쳐내곤 목에 검을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고든도 자신의 검술 실력을 최대한 숨기면서 승리를 가져갔다.

상대방이 발악했지만 고든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3년 용병 생활로 다져진

노하우와 천재성을 막을 자는 오직 티그리스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토너먼트가 예상외로 일찍 끝날 것 같다는 소식이 황궁에 전해지자

황제가 부랴부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올 정도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환관의 외침에 의자에 앉아 있던 모든 관객이 일어났다.

웅장한 관악이 경기장을 울리자 희끗희끗한 금발의 사내가 황금 면류관을 쓴

채 특별석에 등장했다.

황제가 등장하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경기장에 입장한 티그리스와 고든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인로버의 예상대로 황제는 결승전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도착했다.

황제는 입을 열었다.

"루체트 황국의 신민들이여."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담긴 위엄있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절로 더 고

개를 숙였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젊은 영웅의 탄생과 황국의 찬란한 미래를 두 눈으

로 보게 되었다. 우린 영웅들과 한 공간에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의 영원한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황제의 연설이 진행되는 와중 고든은 티그리스를 흘금 봤다.

황제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티그리스와의 결투만을 생각하고 있었

다. 하지만 고든은 티그리스와의 결투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티그리스도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다.'

티그리스는 단 일격에 승리를 쟁취했다. 고든이 검술이 아닌 오로지 전투 센

스 하나만으로 올라온 것처럼 티그리스 또한 그랬다.

아무리 머리로 시뮬레이션을 그려봐도 티그리스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두근- 두근-

고든은 16살에 첫 전쟁을 나섰을 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땐 살고 싶어서 심장이 뛰었지만, 지금은 정말 이기고 싶어서 심장이 뛰었다.

티그리스가 재수 없는 귀족이라서도 아니고 19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검사라

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남자 대 남자로 티그리스를 꺾고 싶었다.

"···룩스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황제의 연설이 끝났다. 티그리스와 고든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경기를 시작하라!"

황제의 말에 티그리스와 고든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티그리스는 결승전에 이

르기까지 단 한 번도 검을 먼저 뽑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스릉-

티그리스가 먼저 검을 뽑았다. 그 광경에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티그리스가 검을 뽑았다!

-이제 드디어 제대로 된 검투를 볼 수 있게 된 거냐?!

고든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티그리스가 검을 뽑은 이유는 자신을

존중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든도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면 나도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지.'

고든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고리 4개 모두가 가동되며 오러가 마력 회로를

타고 거세게 흘렀다.

오러의 움직임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그렇기에 용병다웠다.

"후···."

고든의 입에서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예열이 끝이 났다.

고든은 마치 굶주린 맹수처럼 티그리스를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노려봤다.

팅-!

심판이 동전을 튕기고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동전이 바닥에 추락하자마자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쾅-!

둘 모두가 얼마나 강하게 발을 굴렀는지 경기장 바닥이 부서졌다. 바닥이 부

서진 것과 서로의 검이 부딪힌 것은 거의 동시였다.

쩌어어엉!

소름이 끼치는 강철의 비명에 몇몇 관객들은 귀를 막았다.

뒤이어 연달아 검이 부딪혔다. 그때마다 굉음이 터져나가 몇몇 관객들은 실신

할 정도로 격렬했다.

고든의 검술은 마치 길들지 않은 맹수의 발톱 같았다.

13년 동안 전쟁터를 굴러다니며 고든이 주로 사용한 것은 단순한 종베기 횡베

기 사선베기 찌르기 이 네 종류밖에 없었다.

마치 짐승이 이빨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퀴듯이 본능적인 움직임처럼 빈틈이

보이면 공격하고 위험하면 막거나 피했다.

안 좋게 말하자면 검로가 단순하고 거칠다고 말할 수 있지만, 강인한 육체와

생존본능이 그 모든 것을 커버해주고 있었다.

티그리스가 고든의 종베기를 흘리고 위로 올려 베었다.

두 번의 동작이지만 한 번의 동작처럼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고든은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고든의 갈색 머리칼 몇 올이 허공을 흩날렸

다. 그 이후로 티그리스는 고든을 향해 몇 번이고 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든은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하거나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단순한 본능이라고 하기엔 미묘했다. 티그리스는 한 번 시험해보기로 했다.

티그리스는 종베기를 하다가 검을 당겨 멈추고 찔러넣었다.

페인트 공격이었다.

완벽한 엇박자였기에 평범한 사람의 반응속도라면 이 공격을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든은 몸을 젖혀 피해 냈다.

티그리스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움직임은 생존본능 따위가 아니었다.

"굉장히 좋은 눈을 가졌군."

"···이거 벌써 들킬 줄은 몰랐는데."

고든이 화살과 마법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13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

유는 검술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오러 운용술에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반응속도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반응속도는 0.25초가 한계고 어느 정도 훈련된 기사는 0.1초

내지 0.15초까지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든은 0.01초까지 반응할 수 있었다. 가히 초능력이라 해도 무방한

어마어마한 반응속도였다.

티그리스는 검을 내질렀다. 엇박자에 페인트 공격에 검이 아닌 발로 공격까지

했다. 하지만 고든은 그 모든 것을 피해내고 막아냈다. 심지어 티그리스의 종

베기를 패링하기까지 했다.

몸이 열린 티그리스의 품으로 고든의 검이날아 들어왔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몸을 땅에 거의 붙일 듯이 숙이는 것으로 완벽하게 피해냈다.

"···어떻게."

티그리스의 올려베기가 다시 날아오자 고든은 피해냈다. 멀찍이 떨어져 티그

리스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각도와 속도였는데···."

"자네의 반응속도가 뛰어난 것은 인정하네. 하지만···."

티그리스의 동공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베르세르크라고 반응속도와 동시에 각성효과를 주는 오러 운용술이 있네."

물론 고위 등급의 오러 운용술이라서 사용할 수 있는 이가 황국 전역에 100명

도 채 되지 않는 오러 운용술이었다.

"보아하니 100분의 1초까지 느낄 수 있는 것 같은데 나도 그에 맞춰주지."

"그게 무슨···!"

티그리스가 돌진하여 종으로 검을 베어냈다. 고든은 검을 막아냈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고든의 검신을 따라서 내려갔다.

'젠장!'

훙-!

고든의 가슴을 노리는 검로에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지만 패착이었다. 티그리

스는 중간에 멈추고 찔러넣었다.

고든은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옆으로 피해냈지만 날카로운 검끝이 오른쪽 어

깨를 스쳤다.

티그리스는 다시 횡베기를 했다. 검이 시시각각으로 고든의 목을 노리고 들어

오는 게 보인다.

고든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꺼낼 수밖에 없나.'

정말로 이것만큼은 꺼내기 싫었다. 이걸 꺼내면 다른 귀족들이 고든을 죽이려

고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고든은 이 사내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험하고 싶었다.

자신의 전부가 그에게 얼마나 닿을 수 있을지.

그 마음은 용병이라기보단 기사에 더 가까웠다.

고든은 마치 유령처럼 사라졌다.

소음도 없고 움직임의 예고도 없었다. 말 그대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어디에서 검이 날아올지 바로 파악했다.

'뒤 그리고 우상단'

티그리스는 뒤에서 등을 베어 들어오는 종베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을 들

어 막아냈다.

고든은 어이가 없었다.

"···뒤에도 눈이 달리셨습니까?"

"자네가 숨긴 '유령 걸음'처럼 나도 숨긴 몇 가지 수가 있지."

티그리스는 검을 튕겨내며 고든과 다시 대치했다.

"유령 걸음은 11년 전에 슈바인 백작가가 몰락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

는데 어떻게 자네가 익히고 있지?"

"그런 티그리스 님은 어떻게 제 보법이 유령 걸음이란 걸 알아차리셨습니까?"

"귀족들은 항상 기록하네. 각 가문의 무기술의 특징을 모조리 기록해두지. 눈

을 현혹하는 잔상을 남기고 사라지는 보법은 유령 걸음 하나밖에 없지."

"이거 참···. 단순히 검만 잘 다루시는 공자님이신 줄 만 알았는데 공부도 열

심히 하신 모양입니다."

"귀족의 힘은 검이 아니라 펜에서 나오는 법일세. 모든 가문의 서고에는 각

가문 검술의 약점과 파훼법이 모두 적혀 있지. 물론 유령 보법에 대한 파훼법

도 노르베르드 가문의 기록에 남겨져 있네."

고든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거참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말을 참 잘하십니다. 하지만···"

고든은 검을 역수로 잡았다. 롱소드를 역수로 잡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느

껴졌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기록을 티그리스 님만 보셨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오산입니다. 제가 무너

뜨린 귀족 가문들 만해도 6개나 되니까요."

전쟁 용병들이 무서운 이유가 이것이다. 무너진 가문들의 비급서나 기록물들

을 몰래 탈취해서 본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것이 대다수의 귀족에게 지탄 받을 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든을 포함한 모든 용병은 그렇게 해서라도 강해지고 싶었다.

티그리스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무려 13년이나 전쟁터를 구른 데다가 검술

과 오러 운용술에 재능이 있는 고든이 얼마나 많은 귀족의 기술을 익혔을지

티그리스로선 상상이 가지 않았다.

티그리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럼 시험해보겠나?"



18. 토너먼트(5)

#018화 - 토너먼트(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