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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글 박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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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회

#001화 - 기회

부러진 창칼 사이로 창백한 머리가 구른다.

붉은 피로 점철된 땅의 입장에선 붉은 빛을 더할 뿐인 메마른 목일 뿐이었지

만, 티그리스에겐 대전쟁을 끝낸 마침표였다. 하늘로 솟구쳐 추락하는 붉은

피를 맞으며, 티그리스는 잘려 나간 머리를 향해 돌아섰다.

조각난 시체와 창칼들 사이에 안착한 새하얀 머리를 향해 부러진 '대적자의

검'을 치켜세운다. 목이 잘렸지만 죽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르펨은 이 세

상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 우주 너머의 존재기 때문이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되었다. 난 죽는다."

잘려 나간 머리에서 나온 건조한 목소리는 티그리스의 긴장감을 한층 더 끌어

올렸다.

"대단하군. 인간의 몸으로 나 아르펨을 죽이다니."

갑옷이 무겁다.

티그리스는 넝마가 된 갑주를 벗었다.

철컹!

황금빛이 퇴색되어 빛바랜 놋쇠의 색을 토해내고 있는 갑주가 허물 벗듯이 벗

겨졌다. 드워프들이 드래곤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만들었다는 '우로스'라는

전설의 갑주였다. 그러나 지금은 티그리스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족쇄 그 이상

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여왕 '우노'와 함께 했던 천년의 세월 동안 너처럼 강한 자는 보지 못

했다."

티그리스는 묵묵히 걸었다.

발에 노르베르드 변경백의 보물 '드윈의 검'의 조각이 밟혀도, 프리하르덴 백

작가의 보물 '프리하르덴의 여름'이 발에 차여도 피로 점철된 구덩이를 향해

걸었다.

"과연 오만한 티그리스라 불려도 충분한 검술이었다."

오만이란 단어에 티그리스는 발이 멈추었다.

오만.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의 꼬리표였다.

티그리스는 검술의 천재였다. 한 번 본 검술은 그대로 따라할 수 있었고, 두

번을 보면 검술을 창시한 이의 의도를 알 수 있었으며, 세 번을 보면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들어 상승의 검술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티

그리스보다 강한 검사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훌륭한 기사가 되지 못했다. 자신보다 못한 검사를 버러지

취급했으며 마법 따윈 쓸모없는 학문으로 폄훼했다. 결정적으로 티그리스는

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마냥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살아 움직이는 이가 없다.

인류의 존망을 건 최후의 전쟁에서 황국의 황금 기사단도, 철혈 마법 병단도,

인퀴지터도, 밀림의 수호자들도 용병들도 모두 흐르는 핏물의 강이 되었다.

오로지 세상에 자신만이 잘난 줄로 알았던 오만한 티그리스만이 남았다.

티그리스는 다시 발을 움직였다. 모든 일에는 끝이 필요하다. 죽은 이들의 넋

을 기리기 위한 한 송이의 꽃을 건네기 전에, 이 지옥 같은 대전쟁의 종막을

선언하는 붉은 마침표가 우선이 되어야 했다.

"그 고고하고 아름다운 눈···. 곧 오염과 침식의 여왕님의 것이···"

콰직!

티그리스는 부러진 대적자의 칼로 아르펨의 머리를 찍었다. 아르펨의 목 없는

육체에서도 부서진 머리에서도 생기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다.

마침표 끝에 공백이 남듯 피 냄새가 섞이는 대전쟁의 막이 끝나고 티그리스만

이 덩그러니 남았다.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티그리스는 극심한 고독감에 후회

의 눈물이 흘렀다.

'벌을 받는 것이다.'

그래. 벌이었다.

하늘에서 내린 천벌.

하늘에서 내려준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베풀지 않았기에 하늘이 노

한 것이었다.

붉은 피로 가득한 전장에 은빛이 더하지만 피 냄새 가득한 붉은색이 희석되지

않았다.

-죽어어어어어!

그때, 티그리스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 죽은 것이 아니었던가?

티그리스는 부러진 대적자의 검을 짚고 일어났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지만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발 누군가 살아있길.

지금 들리는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길.

-죽어어! 죽어어!!!

환청이 아니다.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다. 티그리스는 시체의 언덕을 기어서

넘었다. 한 사내가 애처롭게 흩날리는 푸른 불꽃의 검을 들고 한 시체를 향해

검을 내리찍고 있었다.

그러나 시체는 실시간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척추를 따라 갈비뼈가 생겨나고

쇄골이 자랐으며 그 위로 살이 덮기 시작했다. 이윽고 머리가 생기더니 입이

생기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죽어! 죽어! 이 끈질긴 벌레 새끼야!!!"

비명은 점점 웃음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넌 나를 죽일 수 없다! 라칸! 내 심장은 네 싸

구려 불꽃으론 태울 수 없단 말이다!!!"

티그리스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쉼 없이 구르는 수레바퀴' 로타.

'마음으로 조각하는 예술가' 아르펨과 같은 외계의 존재다.

라칸이 뛰어난 마검사이긴 하나 라칸의 검과 마법으론 로타를 온전히 죽일 수

없었다. 마검사들은 대개 그렇듯 마법도 검도 끝을 보지 못한다.

황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검사라 불린 라칸은 결국 자신의 심상을 검에 담

을 수 있는 소드 마스터도 세상의 작은 이치를 깨달은 대마법사도 되지 못하

였다.

극에 달하지 못한 이가 로타를 벨 수 있을 리 없다.

이윽고 로타의 오른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죽어라! 라칸!!!"

로타의 오른팔이 섬전같이 라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 은빛 실선이 로타의 오른팔을 잘라냈다.

털썩!

잘려 나간 로타의 오른손이 핏물에 추락했다.

"끄아아아아아!"

로타의 끔찍한 비명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로타는 오른손을 다시 재생하려 했

지만 잘려 나간 상완골 아래로 전혀 재생이 되지 않았다. 로타의 재생을 방해

할 수 있는 수준의 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뿐이었다.

"티그리스···!"

로타는 필사적으로 왼팔을 재생시켰다. 빨리 라칸의 남은 오른팔을 잘라내어

붙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시 티그리스의 검이 움직였다.

부러진 대적자의 검이 로타의 단단한 갈비뼈를 자르고 심장을 갈라냈다.

울컥!

라칸이 수십 번을 찔러도 뛰던 심장이 티그리스의 칼질 한 번에 두 조각이 났

다. 로타의 심장이 멈췄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티그리스가 자신의 심상을 검에 담을 수 있는 소드

마스터의 단계에 올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라칸은 로타의 죽음이 확실해지자 누웠다. 전부 끝났다는 안도감에 뒤늦게 고

통이 몰려왔다. 라칸은 고통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르펨 그 개새끼는 죽었냐?"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

"씨발새끼. 잘 뒈졌다."

티그리스는 주변을 훑었다. 혹시나 산 사람이 있나 봤지만 이곳도 생존자가

없었다. 오직 라칸 뿐이었다.

라칸은 잘린 왼팔에서 몰려오는 화끈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말했다.

"포인트 상점."

라칸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을 하곤 했다. 티그리스는 그런 라칸을 평

생 무시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엘릭서는 재고가 소진됐고···. 젠장 이것밖에 없네. 최상급 치유 포션 2개

구매."

라칸의 오른손에서 황금빛 찬란한 회복 포션이 두 병 생겨났다. 라칸이 아공

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던가? 티그리스가 알기론 라칸은 7서클이 아니라 6

서클 마검사였다. 아공간 마법은 7서클 대마법사 수준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

는 마법이었다.

"야. 받아라."

라칸은 한 병을 티그리스에게 던졌다. 제구력은 엉망이었지만 티그리스는 재

주 좋게 받았다. 라칸이 잘린 왼팔에 절반을 뿌리고 나머지는 삼켰다.

티그리스는 구멍이 뚫린 왼쪽 배에 뿌리고 나머지는 입에 집어넣었다. 최상급

포션답게 바닥난 마력이 차오르고 신체 컨디션도 빠르게 돌아왔다.

"언제부터 아공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지?"

"아공간 마법은 지랄. 포인트 상점이다."

"포인트 상점?"

라칸은 빈 병을 내던지며 일어났다.

"너 아렌 요새 공방전 때 없었냐?"

"있었다. 그때 식탐을 깎아내는 자 템페를 내가 베었잖나?"

"아니 공방전 직전 작전 회의 때 말이야. 그때 내가 무슨 능력을 갖고 있는지

모두 설명했을 텐데?"

"작전 회의 땐 참석하지 않았다."

라칸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맞다. 이 새끼 그래서 혼자 닥돌했었지. 아렌 요새를 붕괴시켜서 적 병력들

을 한 번에 묻어버리자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잖아."

"그 덕에 아렌 요새는 지킬 수 있었지 않았나?"

"지랄. 그때 아렌 요새 사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 알아?! 아렌 요새를 지킬

병사가 없어서 결국 로타에게 넘어갔잖아."

라칸은 티그리스를 쏘아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너랑 무슨 얘길 하겠냐."

"그래서 네 능력이 뭐지?"

"똥이나 쳐 먹어라. 다 끝난 마당에 뭐하러 얘길 해주냐."

라칸은 피바다뿐인 전장을 훑었다. 그 눈빛에서 티그리스와 같은 고독과 슬픔

이 만져졌다.

"시발···. 결국 다 죽었네. 레인로버 황녀님도 프리하르덴 백작님도 전부···."

라칸은 울지 못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더 강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지금 100만 포인트를 갖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야."

티그리스가 자신의 오만함에 후회를 하듯 라칸은 자신의 검술과 마법 실력에

후회했다.

좀 더 검을 수련할걸.

좀 더 마법 공부를 할걸.

포인트에 의존하지 않고 나 자신을 성장시킬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라칸은 땅에 널브러진 '현자의 검'을

옆구리에 차고 해가 지는 방향으로 걸었다.

"난 이제 간다. 넌 알아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어디로 갈 셈이지?"

"네가 알아서 뭐하게. 지 잘난 맛에만 사는 녀석이 이제야 남 생각도 할 줄

아나 보지?"

"무너진 황국을 다시 세우자.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루체트 황가의 핏줄을

찾아···"

"지랄하지마!"

라칸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네가 다른 사람 말만 잘 들었으면 이 모양 이 꼴은 안 났어! 멍청한 내 말은

듣지 않아도 레인로버 황녀님이나 프리하르덴 백작님이나 망할 땅딸보 드워프

아저씨 말을 듣고 같이 싸웠다면 이 지경까지 안 왔다고!"

라칸의 날카로운 말에 티그리스의 심장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라칸은

티그리스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자 웃었다.

"하하하! 평소 같으면 평민 새끼가 감히 위대하신 변경백에게 무슨 망말을 지

껄이냐면서 그 우아하고 고상한 말투로 지랄했을 텐데 가만히 있네? 너도 양

심이 있나 보지?"

"···넌 인류를 구원한 영웅이다.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영웅? 영웅이라고? 이제야 영웅취급을 해주는 거야? 우와 시발 존나게 고맙

다.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각하 나리!"

티그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하다."

"···뭐라고?"

"내가 교만했다. 네 말대로 이 모든 참상은 내 탓이 크다."

라칸은 어안이 벙벙했다. 티그리스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녀석 때문에 병사 10만명이 죽었을 때도, 수인족들이 괴멸을 당했

을 때도, 아렌 요새를 결국 빼앗겼을 때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라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슬픔, 좌절, 허탈을 지나 결국 결국 분

노로 모였다.

"좀 더 빨리···! 좀 더 빨리 미안하다고 했다면! 좀 더 빨리 네 잘못을 알았

다면!!!"

라칸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네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었다면···. 이 지경까지 안 왔을 텐데···."

"미안하다. 이 말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티그리스가 고개를 숙이자, 라칸은 비명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이 개 시발 새끼가아아아아아!"

라칸은 검을 뽑아 티그리스의 목에 가져다 댔다. 선혈이 검을 타고 흘렀다.라

칸은 지금이라도 당장 티그리스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벨 수 없었다.

라칸, 아니 김유신의 머리 속을 휘젓고 지나가는 새로운 계획 때문이었다. 이

참상을 모두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라칸은 심호흡을 하

고 입을 열었다.

"너 만약에 과···"

찌이이이이이잉!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저 멀리 거대한 보랏빛 빛줄기가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빛줄기에 시선을 빼앗길 시간은 없었다. 라칸과 티그리스는 동시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땅을 뚫고 검고 붉은 촉수가 둘을 향해 날아왔다. 티그리스는 반사적으로 검

을 휘둘렀다.

서걱!

촉수가 잘려나갔지만 대적자의 검이 손잡이만 남고 부서졌다.

아슬아슬했던 내구도가 다한 것이었다.

텅!

라칸도 똑같이 남은 오른팔로 촉수를 올려쳤지만 촉수에 작은 생채기만 남을

뿐 잘라내지 못했다. 심상 개화를 한 소드 마스터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극명

한 차이였다. 둘이 바닥을 밟자 사방에서 수백 개의 검붉은 촉수들이 둘을 향

해 덮쳐왔다.

"티그리스!"

라칸은 티그리스에게 검을 던졌다. 티그리스는 손잡이만 남은 대적자의 검을

버리고 '현자의 검'을 받았다. 마검사에게 특화된 성물이지만 티그리스에겐

중요치 않았다.

검이란 것이 중요했다.

티그리스는 오러를 끌어올렸다. 라칸은 티그리스의 준비 자세를 보고 무엇을

할지 예상이 갔는지 바로 허리를 숙였다.

티그리스의 검에서 방출된 검기가 촉수들을 가르고 지나갔다. 라칸이 겨우 생

채기만 냈었던 촉수 수백 개가 동시에 두 동강이 났다. 다른 촉수들보다 유난

히 굵었던 것들도 상관이 없었다. 모두 티그리스의 검 앞에 평등하게 잘려 나

갔다.

하늘 높이 솟구쳤던 촉수들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지진을 일으켰다.

라칸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이것들은 뭐지? 로타랑 아르펨이 남겨놓은 비장의 수라도 되는 건가?"

"아니. 이건 로타와 아르펨과 다르다."

베어냈기에 알 수 있다.

이것은 로타와 아르펨이 절대로 만들 수 없는 유기물이다. 분명 유기물이건만

같은 무게 강철보다 무겁고 단단했으며 질겼다.

즉, 이 세상의 규칙과 어긋나는 존재였다.

"이건··· 어떤 존재다."

"존재?"

그때 잘려 나간 거대한 촉수 하나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말끔한 절단면으로

하얀 무언가가 꿈틀대며 나오기 시작했다.

검붉은 촉수에서 나온 것과 다르게 눈처럼 창백했으며 얼굴과 머리카락은 없

었지만 몸은 여성의 실루엣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창백한 여인은 촉수의 끝

에서 분리되어 두 발을 딛고 티그리스를 봤다. 눈은 없었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확실히···. 나와 하나가 될 가치가 있군.]

창백한 존재는 소리가 아닌 정신파로 말을 했다. 인간의 격을 넘어선 무언가

라는 것을 라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여인은 손을

뻗어 티그리스를 향했다.

[티그리스. 나와 하나가 되어라. 나는 우노. 오염과 침식의 여왕이자 우주와

차원을 유영하여 신이 될 위대한 자다. 너는 나와 함께 신이 되기에 충분하다.]

"넌··· 아르펨과 로타와 무슨 관계지?"

[아르펨과 로타는 나와 하나가 되기로 했던 자들 중 하나. 비록 죽었지만 둘

의 혼이 내게 돌아옴에 따라 옥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라칸은 허공에 뜬 메시지를 멍하니 쳐다봤다.

"최종 퀘스트? 여왕 우노? 시발 아르펨과 로타가 끝 아니었어···?"

우노는 라칸의 중얼거림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우노에게 있어서 바닥에 널브

러진 시체들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가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넌 나와 함께할 자격이 충분하다. 나와 하나가 되어 이 행성의 지배자가 되

거라. 필멸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티그리스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력감에 혼란스러웠다. 우노를 베어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노의 본체는 저 창백한 여인이 아니다.

티그리스는 발밑에서 느껴지는 작은 진동을 감지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

지만, 티그리스가 감지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이 끔찍한 촉수들이 기어 다니

고 있었다.

돋보기를 든 인간 앞에 선 개미가 이런 감정일까? 티그리스가 아무리 발버둥

을 쳐봤자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민하지 말지어다. 어차피 너는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니.]

티그리스가 감지한 촉수들이 땅을 천천히 뚫고 올라왔다. 수십 만개의 촉수들

이 전장을 모두 매웠다. 땅이 사라지고 촉수가 땅이 된 것 같았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검을 놓칠 정도로 충격적이었지만 라칸은 포기하지 않았

다. 비장의 수가 하나 남았기에.

"포인트 상점."

라칸의 눈앞에 수없이 많은 상품목록들이 떴다. 개중엔 품절된 것들도 있었지

만 아직 남은 것이 두 개 있었다.

<지구 귀환권>

남은 개수: 1EA

가격: 1,000,000 포인트

<회귀의 회중시계>

남은 개수: 1EA

가격: 1,000,000 포인트

라칸은 주저없이 <회귀의 회중시계>를 선택했다.

찬란한 은색의 회중시계가 라칸의 손에서 튀어나오자, 단 한 번을 쳐다보지

않았던 우노가 라칸을 봤다.

[그건 무엇이냐? 그것에서 시간의 힘이 느껴진다.]

라칸은 주저 없이 <회귀의 회중시계>의 용두를 눌렀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라칸은 티그리스를 보며 말했다.

"야. 내가 과거로 돌아가도 널 설득할 자신이 없거든. 그리고 돌아가더라도

널 이겨 먹을 자신도 없고. 난 재능이 없으니까."

째깍- 째깍-

라칸은 티그리스에게 <회귀의 회중시계>를 던졌다. 티그리스는 반사적으로 받

았다.

"그러니까 네가 돌아가라."

째깍- 째깍-

"지금 이게 무···"

째깍- 째깍-

"10년 전의 나는 존나게 단순해서 김유신, 상태창, 시스템 이 세 개만 말하면

내 능력이 뭔지 다 말해줄 거야. 그리고···"

째깍- 째깍-

회중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12시에 향한다.

"좀 잘해. 마지막 기회니까 새끼야."

"라···!"

시계에서 하얀빛이 터지며 티그리스는 기절했다.



2. 회귀

#002화 - 회귀

라칸이 준 성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티그리스는 과거로 돌아왔다.

티그리스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증거들을 살폈다.

손에는 검을 연습하다 생긴 굳은살이 박혀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날카로움을

겪어보지 못한 듯 손등이 흉터 없이 매끈했다.

거기에 이런 폭신한 이불과 침대라니. 외계의 존재 아르펨과 로타가 황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감행한 이후로 티그리스는 이런 고급 침대와 이불에서 잠을

잔 기억이 없었다. 기껏해야 장교용 야전 침대가 끝이었다.

그것 외에도 가구 배치와 티그리스가 자주 사용하는 라벤더 방향제 냄새까지.

모든 것이 오랜만이지만 익숙했다.

이곳은 티그리스의 방이었다.

티그리스는 달빛이 비치는 창가를 봤다. 아침 해도 뜨지 않은 야심한 밤이었

다. 시계를 보니 5시 10분 전이다.

티그리스는 왜 이 시간에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이 시간은 개인 훈련을 하

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사용인이 티그리스를 깨워주기로 되어 있지

만 단 한 번도 사용인에게 깨워진 적이 없었다. 남에게도 엄격하지만 자신에

게는 더 엄격한 강박증과 같은 성격 때문에 4시 50분이 되면 바로 일어났다.

똑- 똑-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거라."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티그리스는 침착했다. 라칸이 과거

로 돌아올 것이라 얘기해준 것도 있었지만, 티그리스는 귀족 중에 귀족이다.

호들갑을 떨거나 품위를 훼손하는 언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사용인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용인은 카트를 밀면서 세숫물과 크리스

탈 병에 담겨져 있는 시원한 물을 갖고 왔다.

사용인은 나이가 10대 중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잔뜩 긴장했는지 티그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티그리스 님."

티그리스는 저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보다 3살이 적은 그녀

는 분명 '레니'라는 이름의 평민이었다. 티그리스가 레니를 기억하는 것은 레

니는 무너져가던 노르베르드 변경백의 가문을 끝까지 지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아침이다. 레니."

레니는 순간 어깨를 떨었다. 레니는 지금까지 티그리스에게 제대로 인사를 받

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용인이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매번

실수하기 바빠서 티그리스는 레니를 벌레 보듯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세숫물을 가져와라."

"아···!"

레니는 단단히 혼이 날 것이라 생각했다. 순간 머리가 멍해져서 세숫물을 드

리는 게 늦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시원한 물로 세수를 했다. 레니

의 침이 꼴깍 꼴깍 넘어갔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었다.

"수건을 다오."

"아."

또 늦었다.

이번은 정말로 혼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티그리스는 혼을 내지 않았다. 티그리

스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뒤 레니에게 건넸다. 레니는 이번엔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크리스탈 병에 담긴 물을 건넸다.

"여기 물 있습니다."

"컵을 다오."

"컵···히끅!"

컵이 없다.

레니는 크리스탈 병에 담긴 생수를 담아올 생각만 했지, 컵을 준비하는 것을

깜빡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잊은 물건이 없는지 꼼꼼히 검사했건만 컵을 놓

치고 말았다.

레니는 넙죽 엎드렸다.

"죄···죄송합니다! 제가 컵을···!"

"컵을 안 가져온 모양이군. 되었으니 물병만 주거라."

"···네?"

레니는 의아했다. 이틀 전에 뵈었을 때도 제대로 인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

냐면서 꾸중을 들었는데 오늘따라 굉장히 인자했다.

티그리스는 물을 물병째로 한 모금을 마시곤 카트 위에 올려두었다.

귀족답지 않은 품위 없는 행동이었지만 수년간 전쟁을 치러온 티그리스로선

이런 크리스탈 병에 담긴 생수조차도 사치라고 느껴졌다.

"그만 가서 쉬거라."

"아···. 그 오늘 아침 훈련 시중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넌 모자란 잠을 채우거라.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레니는 지금 대하고 있는 사람이 티그리스가 맞는지 의심이 갔다. 이렇게 포

근한 솜이불처럼 따뜻한 말을 할 사람이 절대로 아닌데···.

"그리고 내일부턴 수건을 줄 땐 받기 편하도록 최대한 넓혀서 주거라. 그리고

카트는 침대 옆까지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침대를 나설 때 방해가 된다. 마

지막으로 너무 긴장하여 말을 떠는구나. 말을 떠는 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

금 듣기 거북하게 할 수 있으니 주의하도록 해라."

"···죄송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질책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역시 티그리스는 티그리스였다. 세세한 것을 하나하나 봐두었다가 한 번에 지

적했다.

"내게 보인 실수를 다른 손님이나 가족들에게 보이면 꾸중을 받을 수 있으니

다음부턴 실수하지 않도록 하거라. 그것 외엔 잘했다."

레니는 움찔했다.

잘했다.

저 말 한 마디가 왜 이렇게 사람을 들뜨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말

투는 또 왜 저렇게 자상한 걸까? 혼을 내는 게 맞긴 한 걸까?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친절한 선생님이 학생에게 조곤조곤 가르쳐 주는 듯한 느낌이다.

아무튼 어제 저녁과 오늘 새벽에 제대로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세숫물을 늦

게 드리고, 수건을 잘못 드리고, 카트를 침대 가까이 대고, 컵을 안 가져오

고, 말을 떠는 실수밖에 하지 않았다.

'처음인데 이 정도면 잘한 거 아닐까?'

레니는 자신을 칭찬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티그리스 님."

레니의 목소리에 작은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그럼 가보거라."

레니는 끝까지 기억한 대로 예법을 지켜 카트를 끌고 나갔다. 티그리스는 그

런 레니를 보며 생각했다.

'옷의 주름도 지적할 걸 그랬나?'

레니는 티그리스에게 있어서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었다. 노르베르드 가문이

사용인들에게 제대로 된 봉급을 주지 못할 때도 끝까지 남아 지켜주었다.

그렇기에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최대한 신경 써서

알려주었다. 레니는 어렸을 적에 유난히 덜렁거리는 성격 탓에 티그리스뿐만

이 아니라 집사장 세바스찬에게 엄청 혼이 났었다.

만에 하나 레니가 다른 귀족들에게 지적을 받아 혼이 난다면 티그리스는 화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레니가 아니라 그 귀족에게.

그건 되었고.

티그리스는 침대 옆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역시 일기가 있었다. 티그리스는

언제나 자기 전에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평범한 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적는 것이 아니

라, 자신의 검술을 어떻게 하면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한 오답 노트에

가까웠다.

티그리스는 일기를 펼쳤다.

<제국력 337년 10월 2일>

날씨가 화창하다.

연무장에서 검을 수련하기 좋은 날이다.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노르베르드 류 검술 훈련을 했다.

노르베르드 류 5번 초식에서 7번으로 넘어갈 때 오른 발목에서 불편함이 느껴

졌다.

제국 공통 오러 운용술 '뿌리내리기'로 발목을 강하게 고정시켰더니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7번에서 1번으로 마무리를 지을 때, 0.08초 정도 지연되었다.

체술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 오러 고리가 하나 더 필요하거나, '뿌리내리

기'를 캔슬함과 동시에 어깨로 오러를 이동시키는 오러 운용술 개발이 필요할

것 같다.

···

제국력 337년 10월이면 티그리스의 나이는 19살이다. 마지막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기 정확하기 10년 전이었다.

티그리스는 일기를 뒤로 계속 넘겼다.

검술. 검술. 검술. 또 검술.

검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면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미쳤

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검술에 집착했다.

왜 그랬는지는 티그리스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티그리스가 검술을

연마하는 것은 논리가 아닌 감정의 영역이었다. 티그리스는 그저 검을 단련하

여 강해지는 것이 좋았다. 거기에 티그리스는 검술의 천재였기에 하루가 다르

게 발전하는 것이 체감이 되니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군.'

일기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티그리스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며 오만

한 사람이었다. 검술 천재인데다가 잠자기 전까지 검술 훈련을 하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나만이 아르펨과 로타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론 둘 모두를 티그리스가 죽인 것이 맞지만 아르펨과 로타는 개인이

아니다. '로타의 신체'와 '깎아내는 자'라는 집단의 수장이었다. 개인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한 손으론 열 손을 막지 못하는 법이다. 티그리스는 그

이치를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티그리스는 일기를 닫았다.

'나만 강해져선 안 된다.'

로타와 아르펨은 간악하게도 뛰어난 인재들이 꽃을 피우기 전에 죽였다. 차도

살인지계는 물론이고 권속들을 부려 암살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살

아 있다면 티그리스가 봤던 고독하고 붉은 전장의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티그리스는 질문을 던졌다.

그들을 모두 살리려면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금방 나왔다.

'우선 내가 강해져야 한다.'

티그리스는 옷을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검을 쥐었다.

불편하다.

8개 오러 고리를 완성한 소드 마스터의 강인한 육체가 아닌 겨우 고리가 2개

뿐인 유약한 몸이다. 열아홉의 나이에 오러 고리가 2개인 것은 가히 천재라고

불릴 만하다. 하지만 체감상 30분 전까지만해도 티그리스는 소드 마스터의 영

역에 오른 강인한 육체로 검을 휘둘렀다.

만약 소드 마스터에 오를 때 얻었던 심득을 바탕으로 무작정 검을 휘두르면,

온몸의 근육이 끊어지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티그리스는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고 중단세를 취했다. 그리고 검을 머리 위로

든 뒤 내리그었다.

마치 달팽이가 기어가는 속도였다. 검술이 아니라 천천히 검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무리하지 않고 세세한 근육들의 움직임과 소리에 집중했다.

뚜둑-! 툭-!

굉장히 느릿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두 개

의 오러 고리는 순식간에 과부하 되었고,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 땀이 차가

운 새벽 공기와 만나 순식간에 기화되었다.

그렇게 티그리스는 장장 15분에 걸쳐 내려치기를 한 번 할 수 있었다.

"후···."

티그리스의 폐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마치 열차가 수증기를 뿜는 듯

했다.

'약하다.'

티그리스의 심득은 저 멀리 있는데 육체의 수준은 밑바닥이다. 단 한 번도 경

험해보지 못한 괴리감에 티그리스는 당혹스러웠다. 심득을 얻는 것이 육체를

단련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었다. 이젠 반대가 되니 육체가 티그리스의 검로

를 받아들이질 못했다.

티그리스는 다시 중단세를 취했다. 그 자세 그대로 명상에 잠겼다. 근육과 뼈

는 단숨에 질기고 단단하게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훈련과 오

러 연공법을 통해 단련 해야할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오러 고리를 하나 더 만든다.'

현재 티그리스의 심장 부근에 위치한 오러 고리는 총 두 개. 티그리스의 육체

를 점검해 봤을 때, 오러 고리 세 개를 만들어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강

도를 갖고 있었다. 티그리스가 그간 열심히 훈련한 덕분이었다.

이미 올랐던 경지인 만큼 쉽게 오를 수 있다. 티그리스는 두 개의 오러 고리

를 달궜다. 온몸에 퍼진 마력 회로를 따라 질주하는 오러들을 심장 부근으로

모으기 시작한다.

탁! 타닥! 탁!

오러가 강하고 거칠게 마력 회로를 따라 흐르자 티그리스의 몸 전체에서 폭죽

이 터지기 시작했다. 막힌 세맥들이 뚫리면서 나는 소리였다. 특히 심장 부근

에선 아예 망치질 소리가 났다.

쿵! 쿵! 쿵! 쿵!

오러들이 오러 고리를 타고 정해진 길을 따라 거세게 질주했다. 마치 철길을

따라 달리는 기차와 같았다. 그러다가 몇몇 오러들이 정해진 길을 벗어나 탈

선하기 시작했다. 티그리스는 거친 야생마처럼 튀어나오는 오러를 잡아내 능

숙하게 유도하여 하나의 고리로 만들기 시작했다.

강제로 오러 고리를 만드는 만큼 심장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라면 지레 겁을 잡아먹고 멈췄겠지만 티그리스는 오히려 더 강하게 오러를 몰

아붙였다. 이 정도론 심장이 멈출 리도, 마력 회로가 훼손될 리도 없다는 확

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가 울기 시작하고 아침 해가 티그리스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할 무렵 티그리

스는 심장에 오러 고리 세 개를 만들 수 있었다.

"후···."

티그리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티그리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쓸만해졌군.'

고리 두 개와 세 개의 차이는 극명했다. 육체의 괴리감이 많이 해소되었고,

오러들은 더욱 힘차게 마력 회로를 질주했다. 티그리스가 고리 세 개를 만든

때가 스물하나의 일이었으니 2년을 앞당긴 셈이었다.

티그리스는 검을 다시 휘둘렀다.

--!

검로가 안정되어 공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썩 만족스럽진 않다.

하지만 타협은 가능한 수준이었다.

티그리스는 검을 집어넣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 * *

연무장을 벗어나 방으로 돌아가는 길, 땀도 식힐 겸 산책로를 걷다가 그리운

얼굴을 만났다.

비단처럼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을 뒤로 질끈 묶은 채 공터에서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이름은···

리니아 디 노르베르드.

티그리스의 유일한 여동생이었다.

리니아는 티그리스를 보자 검을 휘두르는 것을 황급히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오···오라버니. 좋은 아침입니다."

리니아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급하게 인사하느라 예법에 맞지않게 행동했고 말도 떨었다. 티그리스가 제일

싫어하는 것의 귀족의 품위를 지키지 않는 것이었다. 혼이 날까 두려웠다. 그

리고 그 무엇보다 겁이 나는 것은···

'혹시 내 검을 보셨나?'

리니아의 검술은 티그리스의 검술에 비하면 굉장히 모자랐다. 그래서 항상 티

그리스는 리니아를 질책하곤 했는데, 그것이 무서워 연무장이 아닌 산책로 공

터에서 따로 훈련하고 있었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시지?'

리니아는 티그리스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검술이 너무나 하찮아서. 티그리

스의 여동생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쓰레기 같은 검술을 구사하고 있어서 화

가 난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티그리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 반대였다. 이렇게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고 기뻐서···

슬펐다.

리니아는 언제나 티그리스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홀로 검을 수련했다.

그녀가 제국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도, 티그리스 여동생답지 않게

검술이 모자라다는 말이 나올까봐 입학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숨어서 홀로 검술을 연마하던 리니아는 아버지가 저주에 걸려 돌아가

시고 극심한 죄책감에 빠졌다. 자신이 약해서 아버지를 잃었다고 생각한 것이

었다. 그녀의 짙은 슬픔을 알아챈 아르펨은 슬픔을 잊게 해주겠다고 유혹하여

그녀를 권속으로 삼았다.

결국 리니아는 '슬픔을 깎아내는 자'가 되어 노르베르드 가문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티그리스와 대적했고, 티그리스는 그녀를 직접 베고 말았다.

-아···. 왜 난 당신이 이렇게 두려운 거죠?

리니아는 죽어가면서까지 티그리스를 무서워하며 죽었다. 당시의 티그리스는

아르펨에게 넘어간 리니아를 증오했지만, 오만함을 벗은 지금은 그녀에게 너

무나도 미안했다.

무너지는 리니아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다면, 티그리스가 리니아

를 베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후회의 가시덩굴이 심장을 아프게 조여왔다.

티그리스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다."

티그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리니아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더 볼 자신이 없

었다.

적어도 지금은.

리니아는 티그리스의 뒤로 떨어진 은빛 물방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땀이겠지?"

그것보다 리니아는 티그리스가 아침 인사를 받아준 것이 기뻤다.

"집중해야지."

리니아는 다시 검을 들고 숨을 내쉬었다. 지쳤던 몸이 다시 활기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3. 베오울프

#003화 - 베오울프

"변경백 님께서 조찬을 갖자고 하셨습니다."

레니는 새벽에 티그리스에게 칭찬받은 일 때문인지 자신감이 늘어 말을 떨지

않았다. 칭찬 한 번해주면 금방 회복되는 야생초 같은 녀석이었다.

"좋다."

"그럼 혼자 드시는 줄··· 네?"

레니는 당황했다. 평소에 티그리스는 가족들과 식사를 잘 하지 않았다. 가족

들과 식사를 하느라 검술 훈련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조찬을 갖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아, 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잠시 후 레니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엔 잔뜩 긴장

한 리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니아는 옷에 주름이 없는지 화장이 잘 되었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갑자기

오라버니가 식사를 같이 한다는 말에 부랴부랴 준비했던 것이었다.

티그리스는 리니아의 맞은 편에 앉았다. 티그리스는 리니아의 얼굴을 뚫어져

라 쳐다봤다.

리니아는 당황했다. 혹시 어디 잘못된 구석이 있는 걸까? 거울을 너무나도 보

고 싶었다.

리니아가 반짝이는 나이프로라도 얼굴을 확인해야 하나 깊게 고민하고 있을

때, 티그리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리니아는 예뻤군.'

예쁘다는 말보단 소중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티그리스는 지금

까지 리니아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리니아를 제대로 눈에 담으려

고 했을 땐, 이미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으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귀하게 여겨졌다.

"음···나이프가 예쁘네···?"

리니아가 티그리스의 눈치를 보면서 나이프를 들어 올리기 직전 아버지와 어

머니가 오셨다.

티그리스는 아버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베오울프 드 노르베르드 변경백.

티그리스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였다. 고리 6개인 6성 기사이

자 노르베르드 가문의 황금기를 연 훌륭한 변경백이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시

작한 현재의 노르베르드 방벽을 완성시키고, 광산 사업을 부흥시켜 지금의 위

세 높은 노르베르드 가문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아버지의 호화로운 이력보다 건강한 현재의 모습이 너무나

도 감격스러웠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기사로서 명예롭게 전장에서 돌아가

신 것이 아닌, 저주에 걸려 고통받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구나 티그리스."

"네. 아버지. 어머니.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 그렇겠군. 거의 보름 동안

보지 못했으니."

본가에 있어도 티그리스는 오로지 검술 훈련에만 집중한 터라 가족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매일같이 노력하는 아들이 아버지로서 대견하면서도 조금 섭섭

했다.

"그나저나···. 티그리스 뭔가 많이 달라진 듯하구나."

티그리스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오러의 기운이 조금 달랐다. 보름 전

에 봤을 때보다 더욱 정제되어 있었다.

"고리를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정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 그리고 리니아도 크게 놀랐다. 티그리스가 고리 두

개를 만든 것은 18살 무렵이었다. 그런데 불과 1년만에 고리를 하나 더 만들

다니. 고리 세 개는 웬만한 기사들이 평생을 갈고 닦아야 오를 수 있는 경지

였으니, 가히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이거 가문에 경사가 났군. 저녁에 거하게 만찬이라도 열어야겠어. 세바스찬

준비할 수 있겠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바스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초를 먹고 자란 벨프 산 소가 있으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티그리스가 소고기를 곧잘 먹었지. 그럼 그걸로 준비하게."

티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무슨 소리냐. 오늘은 네 경사이기도 하지만 가문의 경사이기도 하다. 그러니

너는 오늘 만찬에 반드시 참석하도록 해라."

"만찬에 불참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고기가 아닌 오늘은 멧돼지 고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뭐? 멧돼지?"

원래 티그리스는 야만적으로 자란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 손을 거치지

않은 동물은 아무것이나 주워 먹고 살았을 것이기에 별로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란 미신 때문이었다. 물론 멍청한 소리였다.

로타가 곡식을 병들게 만들어, 대전쟁 내내 지독한 흉년에 빠졌었다. 그때 티

그리스는 먹을 것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먹었다. 기초 대사량이 워낙 많아 제

대로 먹지 못하면 일반 병사들보다 빠르게 아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땐 똥을 퍼먹은 돼지든 사람 시체를 먹은 늑대든 가릴 것 없이 모두 먹었다.

"갈리아 산 멧돼지를 통으로 구워 먹으면 맛있을 것입니다. 사용인들과 가신

들도 다같이 즐길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 네가 멧돼지 고기를? 고리 세 개가 되면서 뭔가 깨달음을 얻은 모양

이구나. 확실히 고리가 세 개가 된 이후부터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긴 하지."

티그리스가 갈리아 산 멧돼지를 굳이 고른 이유는 아버지 베오울프 때문이었

다. 베오울프가 걸렸던 포만의 저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저주였다. 음식을

억지로 먹으려 하면 위에 가득 찬 검은 젤 때문에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외과적인 수술도 해봤지만 검은 젤은 저주로 인한 현상이었기에 계속 불어났

고 결국 2년 동안 저주와 싸우시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베오울프는 메마른 입술을 열며 말했었다.

-막 영주가 되었을 때, 기사들과 오크들을 몰아내고 먹었던 멧돼지 고기가 생

각이 나는구나. 하산하기엔 너무 늦은 밤이라 어쩔 수 없이 야영을 해야만 했

었지. 그런데 모닥불 화력이 약해서 익는데 하루 종일 걸려 새벽이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호른 그 녀석이 고기를 제대로 돌리지 않아서 어느

부분은 타고 어느 부분은 생고기나 다름이 없었지. ···그런데 맛은 기가 막혔

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날 먹었던 멧돼지 고기가 그립구나.

아버지의 이야기는 티그리스의 평생의 한이 되었다. 그렇기에 티그리스는 아

버지에게 꼭 멧돼지를 대접해드리고 싶었다.

"흠···. 그런데 멧돼지 고기가 지금 있으려나 모르겠구나. 사냥을 해야할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에 제가 갈리아 산을 올라 멧돼지를 잡아 오겠습니다."

"네가 직접? 그렇게 멧돼지가 먹고 싶더냐?"

티그리스는 끓어오르려는 감정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 아침 일정은 미뤄두고 오랜만에 아들과 사냥을 나가야겠군. 일정

에 문제는 없겠지?"

세바스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로써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생겨서 기분이 좋구나. 오늘 내

가 멧돼지를 사냥하는 법을 알려주마."

너무 잘난 아들을 두는 것에 단점이 있다면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가르쳐줄 것

이 적다는 것이었다. 베오울프는 오늘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멧돼지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게 되어 굉장히 기뻤다.

티그리스는 부러운 눈치로 티그리스와 베오울프를 엿보는 리니아를 보며 말했다.

"리니아. 너도 따라오겠느냐?"

"네?! 저도 말씀이십니까?"

베오울프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리니아 너도 배워두는 편이 좋겠구나. 오전에 시간이 남느냐?"

"그것이···."

리니아는 티그리스를 흘금 보며 말했다.

"티그리스 오라버니가 고리를 세 개나 만드셨으니, 저는 검술에 정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니아는 현재 나이는 16살로 이제야 고리를 하나 만들었다. 15살에 고리 하

나를 만들고 18의 나이에 고리 두 개를 만든 티그리스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

지만, 리니아도 천재에 속했다. 보통 고리를 하나 만드는 시점은 18살에서 20

살로 재능 없는 이는 25살에서 27살에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리니아는 스스로 티그리스와 비교했기 때문에 천재라고 전혀 생각하

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오후에 검을 봐주겠다."

"네?! 제 검을요?"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말에 리니아는 몸을 떨었다.

저번에 티그리스가 검을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어려운 말을 쭉 늘어놓고 리니

아를 몰아붙였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 때문에 악몽을

꾸곤 했다.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오전 내내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내가 한 번 봐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같이 하자꾸나."

가만히 있던 어머니도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같이 가렴 리니아. 이런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으."

리니아는 오늘 아침에 멧돼지를 잡는 것보다 오후에 티그리스에게 검술을 배

운다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오전에라도 검을 단련해놔야 오라버니께 좋은 모

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티그리스는 리니아가 곤란해하자 입을 열었다.

"리니아. 네가 부담스럽다면 안 와도 좋다. 사냥은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테

니까."

리니아는 눈을 꽉 감고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지금은 어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검술 훈련을 하고 싶었다. 또 부족하다는 소

리를 들으면 오늘 밤 악몽을 꿀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럼 어서 식사를 하지. 음식이 식겠구나."

세바스찬이 손짓을 하자 사용인들이 음식을 내어놓았다.

리니아는 음식 대부분을 남기고 말았다.

* * *

갈리아 산에서 멧돼지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 갈리아 산에 자

리 잡은 오크와 오우거는 잡식성이라 멧돼지를 곧잘 사냥해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오울프가 오크와 오우거를 몰아내고 갈리아 산 깊숙한 곳에 전초기

지를 세운 이후로 갈리아 산은 굉장히 안전해졌다. 그 때문인지 멧돼지와 노

루 등 산짐승들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간혹 민가에 내려와 난동을 부리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그 덕에 티그리스와 베오울프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멧돼지 두 마리를 금방

잡을 수 있었다.

"검술에 조예가 깊다고 생각했지만 궁술에도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티그리스가 잡은 멧돼지의 옆구리엔 화살이 깊숙하게 박혀있었다. 멧돼지는

티그리스의 화살을 급소에 맞고 세 걸음을 걷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아버지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허허. 아비인 내가 너보다 못하면 되겠느냐?"

베오울프의 화살은 멧돼지의 오른쪽 눈을 정확하게 꿰뚫고 뇌를 헤집었다. 그

리고 티그리스는 멧돼지를 20m 근방에서 쏘아 맞췄지만 베오울프는 무려 100m

가 넘는 거리에서 오른쪽 눈을 맞췄다.

'아버지가 활을 잘 다루신다는 걸 이제야 알다니···. 불효자가 따로 없구나.'

활뿐만이 아니라 멧돼지 똥과 노루 똥을 구분할 줄 알고 멧돼지가 어디로 이

동했었는지 추적하는 실력 또한 일품이었다. 변경백이 아니라 노련한 사냥꾼

이라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사실을 과거를 돌아온 후에야 알게 되

니 기쁘면서도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멧돼지를 들고 갈리아 산맥을 내려오자 거대한 장벽이 보였다. 장벽의 높이는

무려 15m이고 길이는 20km에 달했다. 장벽의 정문으론 철도 레일들이 깔려있

었는데, 철도 레일 위로 광부들이 캔 구리를 비롯한 각종 광물들이 실린 광차

들이 영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 광물들이 현재의 노르베르드의 황금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옛날에는 흉악한 몬스터의 위협을 받으며 갈리아 산맥에 있는 갱도에 들

어가 광물을 캤어야 했다. 하지만 베오울프의 전초기지와 장벽 덕분에 안전하

게 광물을 캘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광물 수급이 가능해지자 상권이 급속도

로 발달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앗! 변경백 님!"

"고생이 많군."

기사나 병사할 것 없이 사람들은 베오울프와 티그리스가 지나가자 고개를 숙

여 인사했다. 모두 베오울프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다. 곡식 하나 자

라기 힘든 추운 노르베르드에서 저들이 따뜻한 감자 수프를 먹을 수 있는 것

은 베오울프의 훌륭한 치세 덕분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베오울프가 오자 수레를 끌고 왔다.

성인 남자 네 명은 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수레 위로 튼실한 멧돼지 두 마

리가 올라가자 가득 찼다.

"끙차!"

사용인들은 힘겹게 수레를 밀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 이 토실토실한 녀석을

먹을 생각에 입이 귀까지 걸려있었다.

사용인들의 열심히 수레를 미는 사이, 베오울프의 곁으로 검은 늑대 기사단장

호른이 다가왔다.

"변경백님. 순찰 도실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티그리스. 나는 기사단과 점심을 함께할 테니 세

바스찬에게 점심은 따로 할 필요가 없다고 전해주겠느냐?"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늘 아침은 네 덕분에 꽤 즐거웠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함께 하자꾸나."

베오울프는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장벽 위로 향했다.

베오울프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장벽 순찰을 했는데, 포만의 저주가 걸린 후

에도 무려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장벽 순찰을 하셨다.

자신의 몸보다 영주민과 병사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참된 군주이기 때문

이었다.

티그리스는 오직 자신만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를 떠올렸다.

-···장벽을 확실히 높게 짓긴 했군. 오크들이 넘보지 못하겠어.

베오울프가 더 이상 장벽을 오르지 못할 정도로 병약해졌을 때, 장벽 위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베오울프는 계단을 마치 산책하듯이 가볍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시리 콧잔등이 매워졌다.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은 편이 결코 아

니었지만 아무리 티그리스라도 기쁨의 눈물을 참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

이었다.

그리고 기쁨이 차오를수록 살의는 더더욱 증폭되었다.

'로타의 입을 빨리 죽여야겠군.'

베오울프의 몸에 '포만의 저주'를 건 자는 로타의 권속 중 하나인 '로타의

입' 레비스라는 놈이었다. 레비스는 베오울프를 죽일 수 없자 저주를 걸고 도

주했다. 대다수의 저주가 그렇듯 저주를 건 저주술사가 죽거나 직접 풀어야만

저주가 풀린다. 그러나 레비스는 베오울프가 죽을 때까지 작정하고 숨어다녔

기에 티그리스는 끝내 저주를 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버지는 건강하고 레비스를 어떻게 하면 찾아낼 수 있는지 안다. 티그리스는

다른 놈들보다 놈을 먼저 쳐죽이기로 결심했다.

티그리스는 아버지가 장벽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보다가 본가로 돌아

갔다.

* * *

오후가 되자 티그리스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훙! 훙!

연무장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리니아가 검술을 훈련하고

있는 것이었다.

멀리서 리니아의 검술을 보고 있던 티그리스의 눈이 좁아졌다.

'힘이 부족하군. 아니 힘이 빠진 건가?'

리니아는 땀으로 푹 젖었다. 티그리스가 검을 봐주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점심

도 거르고 검만 계속 휘두른 탓이었다.

"아!"

리니아는 손아귀의 힘도 풀리고 땀 때문에 손이 미끌려 검을 놓치고 말았다.

리니아는 입술을 씹으며 검을 주우러 갔다. 그때 티그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헙···."

리니아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본 걸까? 설

마 검을 놓친 걸 본 걸까? 머리가 멍해졌다.

리니아가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몸이 얼어붙자 티그리스가 다가왔다. 리

니아는 검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티그리스의 무서운 눈빛만 쳐다봤다.

티그리스는 리니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아귀엔 굳은살이 가득했지만 방금

전에 검을 놓치면서 쓸린 탓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

리니아는 재빨리 손을 뺐다.

"아···. 그것이··· 손에 땀이···"

"다시 손을 주거라."

리니아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지금 화가 난 상태였다. 저번에

리니아의 검술을 보고 '쓰레기'라고 말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도망

가고 싶었다.

하지만 리니아는 티그리스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결국 손을 내밀었다.

티그리스는 상처 난 손을 보더니 옆에서 검술 시중을 들고 있던 사용인에게

말했다.

"카렌. 뭐 하느냐. 붕대를 가져오거라."

카렌은 구급상자에서 붕대와 연고를 재빨리 들고 왔다. 카렌이 직접 리니아의

손에 연고를 발라주려고 하자 티그리스가 연고를 빼앗듯 가져왔다. 그리고 직

접 연고를 리니아의 손에 발라주었다. 차가운 연고가 상처에 스며들었다.

리니아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가 멍해졌다.

"검사에게 있어서 손은 생명이나 다름이 없다. 전쟁터가 아닌 이상 손을 다치

면 바로 치료부터 해야 한다."

"···아. 아, 네.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붕대를 꼼꼼하게 감아주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동여매

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느슨하지도 않았다.

"오늘 말고 내일 아침에 검을 봐주겠다. 지금 당장 검을 놓고 푹 쉬어라. 그

리고 연고에 포션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이니 저녁엔 붕대를 갈아주거라. 붕대

천이 살에 엉겨 붙을 수 있으니까."

저번에는 쏘아붙이는 말투에 머리가 멍해졌는데, 지금은 모닥불처럼 따뜻한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실 나 혼나고 있는 게 아닐까?'

티그리스가 말을 돌려서 혼을 내는 것이고 리니아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리니아가 알고 있던 티그리스와 지금의 티

그리스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다. 푹 쉬도록."

저 담백한 말투는 티그리스의 것이 맞는데, 걱정과 따뜻함이 담긴 눈빛은 티

그리스의 것이 아니었다.

리니아는 티그리스의 갑작스런 변화가 좋으면서도 공포심이 몰려왔다.

"···카렌."

"···네. 리니아 님."

"티그리스 오라버니가 맞겠지?"

카렌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맞으실 겁니다."

카렌도 확신할 수 없었다.



4. 자질(1)

#004화 – 자질(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