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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목을 비틀어 목뼈를 부쉈다.

죄책감이나 망설임 따윈 없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전장에서 망설임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사방팔방에서 창칼이 날아왔다.

전쟁의 최종국면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허무하게 죽는 난

전 상황이었다.

"티그리스!"

한 사내가 티그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난전 상황 중임에도 살기가 없었기에

티그리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그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금발에 벽안, 그리고 은빛 플레이트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였다.

"티그리스! 부탁이 있네! 난 이곳을 벗어나 아드네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네!"

사내는 티그리스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티그리스를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티그리스는 이게 성좌의 시련에 들어가면 일어나는 '등장인물화'라는 것을 알

았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사내의 목에 걸린 붉은 루비 목걸이를 봤다.

이 사내가 이 성좌의 시련의 주인공 중 하나인 페르셴이었다.

"이 전쟁통 속에서 염치가 없는 건 알겠네만 난 아드네를 이렇게 잃을 수···"

"가지."

티그리스는 담백한 말과 함께 샐러맨더의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검을 횡으로 그었다.

그러자 유려한 은빛의 곡선이 전방으로 날아가며 정면이 있던 적 병사들의 허

리를 모조리 양단 냈다.

그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검술에 페르셴은 당황했는지 말을 잃었다.

이 성좌의 시련을 깨는 법은 간단했다.

페르셴을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아드네에게 안전하게 데려가는 것.

티그리스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적을 다 죽이며 나아가면 되니까.

42. 연인 자리

#042화 – 연인 자리

페르셴과 아드네 이야기.

군인 귀족 가문 출신이자 대장군인 아드네와 아드네를 지키는 평민 출신 호위

기사 페르셴은 전쟁을 겪으며 서로에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결국 사랑에 빠졌

다는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그러나 유명한 사랑 이야기에는 장애물이 존재하는 법.

마지막 토드리고 대평원 전투에서 아드네와 페르셴의 사랑을 시기한 악독한

마법사는 죽기 직전 공간이동 마법을 펼쳐 아드네를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뜨

려 버린다.

결국에 페르셴과 절친한 친우 하나가 역경을 뚫고 아드네를 찾아냈지만 아드

네는 적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아드네, 한날한시에 죽자고 하지 않았소? 난 그 약속을 지킬 거요.

페르셴은 아드네가 죽자 자결하여 약속을 지켰고, 그 사랑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났다.

성좌의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다.

정해진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

즉,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아드네의 앞에 안전하게 페르셴을 데려가면 되는

일이었다.

티그리스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적을 도륙 냈다.

검이 한 번 번뜩일 때면 시야에 닿는 적병의 목이 모조리 날아갔다.

"···세상에."

페르셴은 티그리스의 유려한 검술과 넓은 전쟁 시야에 감탄했다.

눈먼 화살이 페르셴에게 날아왔을 때도 티그리스는 가볍게 쳐냈으며 적들이

창칼을 뻗어와도 창칼을 잘라내며 적진 한가운데를 종횡무진했다.

티그리스는 페르셴에게 말했다.

"내 기준 반경 2.3m 밖으로 떨어지지 말고 내 뒤를 바짝 따라와라. 그러면 위

험하지 않을 것이다."

"아···알겠네."

그때, 쌍창을 든 검은 수염의 사내가 티그리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난 위대한 세르미고의 천인장 하야고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티그리스! 네게 일기토를··· 크아아악!"

티그리스의 검은 세르미고의 천인장의 창대를 가르고 놈의 목을 잘랐다.

티그리스의 뒤를 따르던 아군은 경악했다.

"피를 삼키는 하야고가 죽었다!"

"하야고가 죽었다! 모두 투항해라!"

하야고가 누구인지 티그리스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실력으로 봐선 5성 기사

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던 자로 보였다.

하지만 티그리스의 적수는 되지 않았다.

뒤이어 검과 방패를 든 사내가 나타났다. 티그리스의 키도 큰 편이긴 하지만

사내는 티그리스보다 머리통은 하나 더 컸다.

"하하하! 하야고를 죽이다니 대단··· 크아아악!"

티그리스의 검은 놈의 튼튼한 두 다리를 한 번에 갈랐다. 그리고 놈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오른팔과 함께 목을 쳐냈다.

"아이를 잡아먹는 피야테가 죽었다!"

"세상에 저 기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뒤이어 세 차례나 뛰어난 기사를 만났지만, 티그리스의 검에 공평하게 썰려

나갔다.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적군은 티그리스의 눈만 마주쳐도 오줌을 지리

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티그리스는 마치 두더지가 땅속에 길을 내듯 티그리스는 적진에 붉은 길을 만

들어 냈다.

"블러디 로드 티그리스를 따라라!"

"적의 진형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 빈틈을 노려라!"

블러디 로드란 이명은 티그리스가 지나친 길엔 적군의 피로 만들어진 붉은 길

이 만들어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명이었다.

전장은 쉽게 이명이 붙여졌고 쉽게 영웅이 되었다.

티그리스는 역사에 없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세르미고의 대장군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증명된 전술과 전략을 파괴하는 압

도적인 무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고서 대규모 폭발 마법을 떨어뜨려도 놈은 기이한 방법

으로 마법을 소멸시킨 뒤 마법 병단을 도륙 냈다.

철벽 방패 부대를 보내 티그리스를 포위해도 마치 오우거의 몽둥이에 맞은 듯

방패병들은 하늘을 날았다.

티그리스의 전진을 늦추기는커녕 오히려 제 전력을 깎아 먹는 행동을 하고 있

었다.

세르미고의 대장군은 회귀 전 로타와 아르펨이 겪었던 실패를 똑같이 따르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전술과 전략으로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함정을 파고 포

위하고 대마법을 떨어뜨려도 티그리스의 전진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

었다.

티그리스를 대항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대응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회귀 전, 황녀가 티그리스를 제일 미워하면서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티그리스를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 4명이 티그리스에게 달려들어도 티그리스는 로타의 입

레비스의 목을 자르고 도주했다.

아렌 요새 공방전에서 티그리스는 식탐을 깎아내는 자 템페가 보이자 요새 성

문을 열고 홀로 적진에 들어가 템페를 죽이고 유유히 돌아왔다.

황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드라코레퀴엠 산 안에 봉인된 드래곤을 깨웠지만, 티

그리스는 홀로 드래곤을 상대하여 철혈 마법 병단이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시간을 끌어주었다.

로타와 아르펨은 티그리스의 압도적인 무력에 공포를 느꼈고, 동시에 티그리

스의 오만함과 교만함에 안도를 느꼈다.

그러나 이제 티그리스는 달라졌다.

오만을 버리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였다.

하나는 베는 것.

다른 하나는 가르치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자 티그리스는 몸이 더 가벼워지고 날카

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티그리스의 시야에 무언가가 걸렸다. 저 멀리 적진 한복판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반드시 잡아라!

-절대 죽이면 안 된다! 서서히 조여들어!

'찾았다.'

티그리스가 밟지 않은 적진에 아군이 있을 리 없었으니 저곳에 있는 건 아드

네일 가능성이 컸다.

티그리스는 아드네가 있는 곳으로 동선 낭비 없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크아아아악!"

"어떻게···!"

전열에 큼직한 구멍이 생기고 티그리스의 눈앞에 이마에 피를 흘리는 백금발

의 여인이 보였다.

그녀의 목에 걸린 붉은 루비 목걸이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티그리스와 페르셴이 찾던 아드네였다.

티그리스의 다리가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튕겨 나갔다.

아드네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적병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 압도적인 무력에

적병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드네!"

"페르셴!"

페르셴은 아드네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눈먼 화살 하나가 아드네를 향해 날

아갔다.

역사대로라면 저 화살을 맞고 아드네는 죽을 것이다.

성좌의 시련을 깨는 방법은 역사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만일 티그리스가 저 상황에 난입해서 화살을 자른다면 이 성좌의 시련을 깨지

못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티그리스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돼!"

그러나 티그리스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페르셴과 아드네는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일찍 만났다.

화살이 아드네에게 닿기 전 페르셴이 아드네에게 먼저 도착했고, 페르셴은 아

드네를 껴안아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티그리스의 눈이 커졌다. 이건 역사와 다르다. 이대로 가다간 아드네가 아닌

페르셴이 먼저 죽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티그리스의 검이 순간 번뜩였다.

화살이 페르셴의 몸에 닿기 일보 직전 은빛의 호선이 화살을 갈랐다.

역사가 달라졌다.

아드네는 죽지 않았고, 페르셴 또한 절망에 빠져 자살하지 않았다.

둘 모두에게 해피엔딩이지만 티그리스는 달랐다.

역사가 달라졌으니 성좌의 시련을 극복했는지 아닌지는 오로지 성좌가 판단을

내릴 것이다.

어차피 실패해도 크게 상관이 없다.

시련의 극복 여부를 성좌가 판단하여 실패했다고 판단을 내린다면, 처음 페르

셴이 티그리스에게 말을 걸었던 시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면 되었다.

또 실패해도 상관이 없었다.

성좌는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볼 때까지 끝없이 기회를 주니까.

라칸은 3주 동안 이 시련을 수백 번이고 반복했지만 결국 극복할 수 없었고,

황국 제일가는 모험가이자 성물 사냥꾼 '트리샤'가 나서고 난 후에야 성좌의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성좌의 시련은 당시 라칸이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똑같다.

이 성물을 얻기 위해 시간 낭비할 바엔 다른 퀘스트를 깨고 포인트를 얻는 게

나을 것이다.

티그리스는 사방을 훑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이 조용해지고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피가 멈추었으며 아

드네와 페르셴은 서로 안은 채 가만히 있었다.

티그리스를 제외하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티그리스도 성좌의 시련을 극복해본 적이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윽고 하늘이 컴컴해지기 시작하더니 14개의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4월 밤하늘의 상징 연인 자리였다.

연인 자리는 이 상황을 잠시 지켜보는 듯 말없이 반짝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저 반짝이던 연인 자리가 빛을 잃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멈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오직 페르셴과 아드네만 움직였다.

페르셴과 아드네는 티그리스에게 다가왔다.

"정말 고맙네. 티그리스."

"우리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행복하게 끝날 수 있다는 걸 알려줘서 정말 고

마워요."

티그리스는 성좌의 시련을 극복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이런 종류의 대답을 들

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소설 속 주인공인 것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

"저희를 잘 사용해주세요. 부디 그대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그러자 주변이 점점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연극의 종막이 끝나고 검은

커튼이 무대를 가리는 것처럼 눈앞이 컴컴해졌다.

이윽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별들의 운행에 티그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

았다.

그때, 수많은 별 중에서 14개의 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리고 그 별들은 서로를 빛으로 엮기 시작하더니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

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좀 전에 하늘에서 빛났던 연인 자리였다.

[정말 고마워.]

연인 자리의 목소리는 깨끗한 빗방울이 잔잔한 호수에 부딪히며 나는 맑고 청

아한 소리 같았다.

[페르셴과 아드네가 이런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서. 너무나 감동

적이었어.]

티그리스는 지금까지 성좌의 시련을 깨고 난 후에 성좌와 직접 만났다는 이야

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느낌··· 굉장히 익숙하다.'

이 연인 자리에서 풍기는 기운을 어디선가 딱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건 회귀 전 오염과 침식의 여왕 '우노'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봐. 고마운 사람.]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왠지 연인 자리는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 성좌의 시련을 극복한 것입니까?"

[아, 미안해. 조금 당황했겠구나. 단 한 번도 페르셴과 아드네의 이야기가 해

피엔딩으로 끝난 적이 없어서 나도 살짝 당황했어. 정확히 말하자면 너는 내

가 바랐던 전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줬어.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도

잠시 그 시간을 멈추고 말았지.]

"아드네와 페르셴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맞아. 내 시련을 받은 사람 중에 이 이야기를 비극으로 끝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어. 비극이기에 아름답고 처절하지만 이런 식의 해피엔딩도 있을 줄은 전

혀 생각을 못 했거든. 넌 이 이야기에 새롭고 더 나은 결말이 있다는 걸 증명

해줬어. 정말 고마워.]

티그리스는 가장 잘하는 것을 했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성좌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나타난 이유는 너랑 조금이라도 대화를 해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야. 괜한 일을 벌인 건 아니지?]

"아닙니다. 저도 성좌와 대화해 본 적은 처음이라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습니

다."

[궁금한 게 있어? 무엇이든 물어봐. 대답해줄 수 있는 건 다 대답해줄게.]

티그리스는 연인 자리에게서 풍기는 기묘한 기운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우노와 당신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연인 자리의 별빛들이 더 밝게 반짝였다. 감정 변화가 일어나면 빛의 세기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우노···. 그 오염된 옥좌 자리의 진명(眞名)을 들은 건 정말 오랜만이네. 그

런데 그 오염된 옥좌 자리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했다. 이 성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지.

'털어놓자.'

연인 자리 성좌는 우노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고, 잘하면 우노를 죽일 방법

을 알 수 있을지 몰랐다.

"전 우노가 대륙을 멸망시키기 직전 기이한 힘에 의해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티그리스는 최후의 전쟁에 있었던 일들을 조금 털어놓았고, 연인 자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과거···. 그래. 그래서 네게 시간의 힘이 미약하게 느껴지던 것이었어. 그럼

네 말도 안 되는 힘도 설명이 되는구나.]

연인 자리 성좌는 다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우노가 네게 혹시 '하나가 되자'라고 하지 않았어? 우노라면 네 힘을

분명히 탐낼 텐데?]

"맞습니다. 혹시 우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우노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줄 수 있지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알려줄 수 없

어. 그 이유를 차근히 설명해줄게.]

연인 자리 성좌는 우주에서 피처럼 붉은 별들을 확대했다.

붉은 별들은 중구난방으로 퍼져있었는데, 별들을 아무리 이어봐도 무슨 형상

을 나타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선 우리 같은 성좌는 보통 너희 같은 지성체에 의해 이어지고 태어나고 이

름 붙여지고 죽어. 탄생과 죽음. 너희들이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

도 마찬가지야. 차이점이 있다면 너희는 나이를 먹으면 죽고 우리는 잊히면

죽는 거지.]

연인 자리 성좌는 붉은 별들을 보는 각도를 틀었다. 그러자 붉은 별들이 커다

란 옥좌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노는 달라. 우노는 잊히고 싶지 않은 거야. 죽고 싶지 않은 거지.

마치 인간들이 영생을 꿈꾸는 것처럼 죽는 걸 원치 않아. 그래서 우노는 필멸

의 굴레에 벗어나 영생에 이르는 방법으로 지성체들이 사는 행성을 자신의 피

와 살점으로 뒤덮는 일을 하고 있어.]

"우노의 피와 살점으로 행성을 뒤덮는 것과 영생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처음에 말했지? 우리는 지성체에게 잊히지만 않으면 살 수 있다고. 그래서

우노는 영원한 삶을 위해 행성마다 자신의 살점과 피를 이어받은 지배자를 하

나씩 심어놓는 거야. 그리고 그 지배자는 오로지 우노 만을 생각하게 만들어

두는 것이고.]

그러고 보니 우노가 필멸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말을 티그리스에게 했었던

것 같았다.

그 말뜻이 이런 의미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 피와 살점은 오직 그 행성의 지배자의 숨을 붙여 놓는 데만 사용돼. 그렇

게 하면 수백 만년이 지나도 그 지성체는 살아남을 수 있지.]

"그런데 그 지성체는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노는 결국

잊히는 게 아닙니까?"

[그래. 모순이지. 우노는 그래서 자신의 살점과 피를 이어받을 행성을 계속

찾아 나서는 거야. 우주가 존재하는 한 지성체가 있는 행성은 계속 탄생할 것

이고 우노는 그 행성을 찾아가 자신의 피와 살점으로 뒤덮는 거지. 그러면 우

노는 평생 살 수 있게 되는 거야.]

우노는 결국 죽음을 계속 뒤로 미루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로타와 아르펨은 무엇입니까?"

[그 둘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노가 집어삼킨 행성들에서 거둔 지성

체일 거야.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거나 재능을 가진 지성체겠지. 아마도 너

처럼.]

티그리스는 이제야 우노의 말을 이해했다.

불멸의 존재가 되자고 했던 말이 티그리스를 로타나 아르펨처럼 거둔다는 의

미였을 것이다.

당연히 티그리스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도 우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우리도 죽고 싶지 않아. 더 살

아서 너희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지. 그래서 우리는 성물을 만들었어.]

"그럼 잊히지 않기 위해 성물을 만드신 겁니까?"

[맞아. 우노가 계속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기 위해 행성을 침략하듯이, 우리는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성물을 내려 우리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도록 하

는 거야. 성좌의 시련을 만든 건 우리를 탄생시킨 이야기를 한 번 더 보고 싶

다는 욕망도 있지만,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도전하면서 사

람들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길 바라는 마음도 커.]

연인 자리 성좌는 티그리스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네게 우노를 죽이는 법을 알려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우노를 죽이는 방법은 아예 없으니까. 다른 행성에 있는 지성체

가 우노를 기억하는 한 우노는 영원히 살아남을 거야.]

티그리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노를 죽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 말은 우노가 평생을 걸쳐서 이 대륙을 노린다면, 언젠간 이 대륙은 우노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이니까.

[너무 절망하지 마. 티그리스. 조언을 하나 해주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

든 매듭은 풀리게 되어있어.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방법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거지. 나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연인 자리 성좌의 몸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검은 우주를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가 네게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게. 넌 내 무료

한 삶에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으니까. 그리고 우노로 부터 사람들을 지킬 뛰

어난 존재니까.]

티그리스의 눈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네 앞길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빌게.]

작가의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는

유료화 됩니다.

25화까지만 하더라도 선호작 수가 51명 뿐이었는데 벌써 2만명이 넘을 줄

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투베 1등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고요.

이 모든 건 독자님들의 사랑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각설하고 제가 매주 7일 연재를 해왔지만 유료화 되고 난 시점부터는 7일

연재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비축분이 많이 사라져서 불안하기도 하고 매

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당일 올라올 글을 점검하는 게 힘이 많이 부치더라

고요.

그래서 다음 주 월요일부턴 매일 8시 연재가 아닌 월화수목금 오전 11시

연재로 바꾸겠습니다.

유료화 날 연참은... 해야겠죠. 그러려면 정말 열심히 써야할 것 같아서

손이 벌써부터 덜덜 떨리네요.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벌써 한 주의 절반이 지나갔네요.

이틀 만 지나면 불금이니 화이팅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3. 1등 보고

#043화 – 1등 보고

티그리스는 눈을 떴다.

티그리스의 눈앞에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샤를로트와 아이린이 있

었다.

"어? 티그리스 교관님! 몸은 괜찮으세요?"

티그리스는 말없이 일단 주변부터 확인했다. 기절했던 놀들은 아이린과 샤를

로트가 한쪽 구석에 몰아 두었고, 별달리 느껴지는 위협은 없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사람을 부를까 했어요. 성좌의 시련은 극복하신 거죠?"

"그래. 그것보다 성물은?"

연인 자리 성물은 쌍둥이 형 성물이다.

페르셴과 아드네.

티그리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페르셴이고 다른 하나가 또 존재해야 했다.

"그게 티그리스 교관님께서 눈을 뜨기 직전에 갑자기 다른 쪽 성물이 빛무리

로 변하더니 그 목걸이로 들어갔어요. 모양도 좀 바뀌고요."

티그리스는 의아한 눈으로 자기 손에 들린 성물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성물의 모습이 이상했다. 페르셴과 아드네는 평범한 금줄에 붉은

루비가 박혀 있는 목걸이였는데 모양새가 달라졌다.

네모난 루비가 조금 더 커지고 둥그런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그 안에 14개의

하얀 점들이 수 놓아 있었다.

연인 자리였다.

'도움을 준다는 게 이런 걸 의미하는 거였나?'

페르셴과 아드네의 목걸이가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보아, 티그리스가 알던 능

력이 아닌 다른 능력으로 변한 모양이었다.

페르셴과 아드네의 목걸이의 능력은 순간이동과 위험 감지다.

페르셴을 차고 있는 사람은 아드네를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

면 위험을 감지하고 그쪽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반대로 아드네도 페르셴을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 위험에 처하면 위험을 감지

하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목걸이가 하나로 바뀌었으니 뭔가 새로운 능력으로 바뀌거나 새 능력

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황성에 들러야겠군.'

이 성물의 능력을 감별할 수 있는 건, 황궁의 보고를 지키는 보고지기 마테오

뿐이었다.

어차피 1등 보고에서 성물을 고르기도 해야 했으니 겸사겸사 들르기로 했다.

"별일 없으면 바로 돌아가는 걸로 하지."

"네."

* * *

4일 차 수련의 숲 정비도 끝이 나고 5일 차도 별 탈 없이 지나갔다.

티그리스와 함께 수련의 숲 내부 몬스터 수색 임무를 맡았던 두 교관은 티그

리스가 성물을 얻었다는 말에 이를 갈았지만 그뿐이었다.

두 사람은 수련의 숲 정비 첫날에 티그리스에게 단단히 혼이 났음에도 불구하

고, 자신이 맡은 임무를 제대로 다 하지 않은 것이었다.

만약 둘이 꼼꼼하게 수련의 숲 수색을 했다면 티그리스보다 먼저 성물을 발견

했을지 몰랐다.

물론 성좌의 시련을 극복했을 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맞이한 월요일 아침.

티그리스는 계획했던 대로 연인 자리 성물을 들고 황궁의 보고(寶庫)로 향했다.

"흠···.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저도 당황스럽긴 하군요."

보고지기는 마테오는 티그리스가 건넨 연인 자리의 성물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했다.

본래 연인 자리의 성물은 각각 페르셴과 아드네로 불렸지만, 하나로 합쳐진

이상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능력을 검사하나?"

"성물의 능력을 알아내는 '모험가의 돋보기'란 성물이 따로 있습니다. 진짜

성물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사용합니다."

마테오는 티그리스가 가져온 연인 자리 성물을 다시 돌려주었다.

"1등 보고에 들어가시기 전에 우선 이 성물이 무엇인지 확인부터 해봐야겠습

니다. 만일 다른 성물에 영향을 주는 성물이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마테오는 앞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금방 모험가의 돋보기를 가져오겠습니다."

"알겠네."

마테오가 안으로 들어가자 티그리스는 벤치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인 자리 성물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둘째치고, 1등 보고에서 무

슨 성물을 고를지 고민이 되었다.

티그리스는 회귀 전, 1등 보고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 후, 제국력 344년 3월에 일어난 빅토리에 대 침공 사건을

막는 데 크게 기여하여 금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때 똑같이 1등 보고에서 성물 하나를 받을 기회를 얻었지만, 베오울프가 죽

고 노르베르드 가문이 갖고 있던 모든 광산이 키메라들과 몬스터들에게 부서

진 탓에 가세가 심하게 기울었다.

그래서 1등 보고 출입권 대신 황국으로부터 금화 50만 개와 20년간 세금 면제

권을 받았다.

당시 티그리스에겐 노르베르드 가문의 보검인 드윈의 검이 있기도 했고, 1등

보고에 있는 성물보다 노르베르드 가문의 존속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리 결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 로타와 아르펨은 황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걸어왔다.

노르베르드는 제1순위 공격 대상이었다.

놈들은 티그리스를 죽이기 위해 식탐을 깎아내는 자 템페, 분노를 깎아내는

자 페이라, 로타의 입 레비스, 로타의 뿔 슈비츠 네 명을 보냈다.

그때 티그리스는 살아서 황도 빅토리에로 도망쳤지만, 노르베르드는 놈들에게

빼앗기고 말았고 노르베르드 가문의 기사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리고 아르펨의 꾐에 넘어가 리니아가 슬픔을 깎아내는 자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1등 보고에서 좋은 성물을 하나 가져오는 편이

나았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그때 로타의 입 레비스 뿐만이 아니라 분노를 깎아내는 자 페이라까

지 죽이고 도망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때,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레인로버 황녀였다.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에게 예를 표했다.

"위대하신 황금의 일족을 뵙습니다."

"예를 푸세요. 티그리스."

평소라면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구냐고 한 소리 했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키메라 실험실 사태 이후로 티그리스와 레인로버 황녀 사이에 알 수 없는 벽

이 세워진 기분이었다.

티그리스는 일어났다.

황녀는 티그리스의 손에 들린 연인 자리 성물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게 그 수련의 숲에서 발견된 성물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연인 자리의 성물입니다."

"연인 자리 성물은 원래 쌍둥이형 성물이라서 두 개라고 알고 있었는데 왜 한

개죠?"

티그리스는 수련의 숲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물론 우노와 관련된 얘기는 하지 않았고 성좌를 만났다는 것과 페르셴과 아드

네의 이야기를 바꿨다는 내용만 말했다.

"그 페르셴과 아드네의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도 있군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성좌를 만났다는 것보다, 둘의 사랑 이야기가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건 티그리스 교관이라서 가능한 거였겠죠?"

"프리하르덴 백작님 정도라면 제가 본 이야기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음···."

황녀는 '그럼 티그리스와 프리하르덴 백작과 실력이 비슷하다는 것인가?'라는

짓궂은 질문이 순간 떠올랐지만 질문하지 않았다.

이런 장난스럽고 가벼운 대화가 오가기엔, 티그리스의 사회적 지위가 너무 높

아졌다.

티그리스는 악독한 키메라들로부터 황도 빅토리에를 구한 영웅이 되었고, 대

륙에 티그리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황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티그리스에게 이런 영웅 이미지를 심은 것은 황국

의 국방력과 안보력이 허술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시선 돌리기였다.

하지만 황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티그리스의 유명세는 황국을 위협할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현재 수많은 방랑 기사들이 명예를 얻고자 노르베르드 가문으로 몰리고 있었

고, 제국 대학의 예비 졸업생들도 학과를 따지지 않고 황국이 아닌 노르베르

드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노르베르드는 그 뛰어난 인재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막대한 재력까지 갖추

고 있었기에, 내부에서 노르베르드를 견제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제 티그리스와 황녀는 가벼운 농담을 나눌 수 있는 가벼운 관계

가 아닌, 세상을 움직이는 대화를 나눠야 하는 딱딱한 관계가 된 것이다.

그게 조금 슬펐다.

레인로버 황녀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제가 티그리스에게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미안한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거예요."

"어떤 부탁이십니까?"

"케일 자작을 찾아주세요."

케일 자작은 현재 황국에서 제일 유명한 현상 수배범이었다.

빅토리에 경찰국장, 수도국장, 환관 등 황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뇌물을 먹이

고 키메라 실험실을 건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찰국장과 수도국장을 심문해봤지만 왜 케일 자작이 황도에 키메라 실험실을

설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 모두 키메라 실험실을 모른 척해준 끄나풀일 뿐이었다.

이번 사태가 일어난 원인을 심층적으로 파고들기 위해선 케일 자작을 찾아내

심문해야만 했다.

"현재 인퀴지터는 과부하 상태예요. 경찰들이 상상 이상으로 부패했다 보니

그들을 믿을 수 없는 노릇이고··· 믿을 사람이 티그리스밖에 없어요. 혹시 케

일 자작을 잡아주실 수 있나요?"

티그리스는 즉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외부에서 사람 한 명을 기용하고 싶습니다."

"외부 사람이라면 누구죠? 아, 설마···."

"라칸입니다."

티그리스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티그리스가 키메라 실험실을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키메라 실험실의 위치

가 하수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케일 자작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몰랐다. 케일 자작을 찾으

려면 라칸의 도움이 필요했다.

레인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 직권으로 허가할게요. 라칸이라면 믿을 수 있죠."

라칸이 굉장히 이상한 녀석은 맞긴 했지만, 그간 대화를 나눠본 결과 꽤 괜찮

은 사람이란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람만 서글서글하고 좋은 게 아니라 능력도 있었다.

라칸이 황궁에서 잠시 지내면서 키메라 실험실과 내통하는 환관을 잡아내기도

했고, 현장에서는 키메라 실험실에 물자를 대는 공장 세 곳을 잡아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인퀴지터는 라칸의 성향과 과거 조사가 끝나는 대로 등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라칸을 거두실 생각인가요?"

"라칸을 가신으로 삼겠냐는 질문이십니까?"

"네. 맞아요."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했다.

라칸이 자신의 밑에서 지내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라칸은 인퀴지터에 가는 것이 맞다.'

라칸이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펼치려면 인퀴지터에 들어가는 것이 나았다.

그곳에서 수사기법을 배우고 갖가지 퀘스트를 깨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

이다.

"아닙니다. 라칸은 제 밑에 있는 것보다 다른 곳에서 성장하는 것이 훨씬 나

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인퀴지터에서 라칸을 등용할지를 두고 내부 회의 중이거든

요."

"라칸이라면 인퀴지터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회귀 전에도 크게 활약했으니 라칸은 인퀴지터에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티그리스 교관은 은근히 라칸을 챙기는군요?"

"재능이 있는 사람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황국에 충성할 사람은 구하기 힘듭

니다."

그때, 라칸은 분명히 자신이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티그리

스에게 줬다.

티그리스는 아직도 라칸이 무슨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 기회를 주었는지 감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과 황국의 운명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보통 용기로 불가능하기 때

문이다.

"라칸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국을 위해 헌신할 인재입니다. 그러니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목소리와 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의 편린이 느껴졌다.

레인로버가 감히 공유할 수 없는 깊고 쓰라린 종류의 감정이라 말문이 막혔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하문하십시오. 전하."

"티그리스 경은 왜 황국을 왜 그리 사랑하시는 거죠?"

"애국에 이유를 물으면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이성이 아닌 감정의 영

역이기 때문입니다."

티그리스의 답변에 문득 레인로버는 며칠 전 황제 폐하께서 하신 말이 머릿속

을 스쳐 지나갔다.

-티그리스와 결혼을 해야 한다면 할 수 있겠느냐?

그때, 레인로버는 '황국을 위해서라면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티그리스가 좋아서 아니라 황국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것이었다.

레인로버는 황녀로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티그리스와 결혼을 한다면, 황국이 내게 해준 것이 있으니 그 보

답을 해야 한다는 상인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그리스의 대답을 들으니 눈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애국을 이성이 아닌 사랑과 기쁨과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하자 왜 황녀가 티그

리스와의 결혼을 받아들였는지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황녀는 황국을 사랑했다.

황국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와 결혼을 해야 한다면 할 수 있겠느냐?

황제 폐하, 아니 아버지가 만약 그 질문을 다시 하신다면 황녀는 이렇게 대답

할 것 같았다.

티그리스가 준비되었다면 언제든지.

레인로버는 황국을 사랑하는 것을 떠나 오늘 티그리스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녀가 황국을 사랑하듯이 그 또한 황국과 백성들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던질

각오가 된 영웅의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인로버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부채질하며 말했다.

"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그렇습니까?"

"아, 네. 원래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요. 그러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

세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하지만 황녀 전하가 바쁘

시다는 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기회 되면 여유롭게 차나 한잔해요. 그럼···"

"황녀님."

황녀는 급하게 떠나려다가 발을 멈췄다.

"네?"

"전에 약속하신 연극은 언제 보시겠습니까?"

황녀의 얼굴이 더욱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티그리스가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

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6월 11일이 제 생일이에요. 그날 보러 가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뵈어요."

황녀는 잰걸음으로 떠났다.

황녀가 떠나자 때마침 마테오가 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녀가 갈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마테오는 황족을 모시는 그람 가문 출신답게 황녀와 티그리스가 나눈 이야기

를 엿듣지 않았다. 그저 황녀가 가길 가만히 기다린 것이었다.

이 정도 센스가 있어야 황궁의 보고를 지키는 보고지기가 될 수 있는 모양이

었다.

마테오는 평범한 돋보기 같은 것을 하나 들고 왔다.

"성물을 지금 검사해도 되겠습니까?"

티그리스는 연인 자리의 성물을 마테오에게 건넸다.

마테오는 돋보기로 연인 자리의 성물을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곧바로 끄덕였다.

"검사가 끝났습니다. 다행히 보고 안에 있는 성물이나 아티팩트에 영향을 끼

칠 성물은 아니군요."

"그렇게 빨리 끝나나?"

"그게 이 성물의 능력입니다. 티그리스 공자님도 살펴보십시오. 그냥 돋보기

로 성물을 들여다보시면 됩니다."

티그리스는 마테오에게 돋보기와 연인 자리의 성물을 받곤 들여다봤다.

그러자 이 연인 자리의 성물의 능력이 무엇인지 곧바로 이해했다.

"이 성물은 굉장히 특이하군."

연인 자리의 성물이 아니라 이 모험가의 돋보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제국 공통어와 같은 언어체계로 성물의 능력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것이 아

니라 그냥 직관적으로 이해시켜주었다.

"이 성물의 정확한 능력이 뭐지?"

"이 모험가의 돋보기는 유일하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는 성물입니다."

"···우문이었군."

성물의 능력 무엇인지 알려면 이 모험가의 돋보기가 필요하지만, 이 모험가의

돋보기론 이 모험가의 돋보기 자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성물을 확인하는 도구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 모험가의 돋보기 덕분에 이 연인 자리의 성물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기존 연인 자리의 성물인 페르셴과 아드네의 능력의 큰 차이는 없었다.

상대방이 위험에 처하면 위험을 감지할 수 있고 그 상대방이 있는 근처로 순

간이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여기에 세 번째 능력이 추가되었는데, 그건 바로 복제 능력이었다.

이 연인 자리 성물 자체를 총 5개까지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복제품의 위험 감지와 순간이동 능력의 발현은 오직 진품을 들고 있는 사람에

게만 발동된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리니아와 샤를로트 그리고 라칸에게 복제품을 건네주면 총 두 개가 남

는군.'

나머지 2개의 여유분은 상황에 맞춰서 사용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럼 바로 1등 보고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이 성물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이제 1등 보고에서 성물을 하나 받는 일

만 남았다.

"그러지."

티그리스는 보고로 들어갔다.

전과 똑같이 어두컴컴하고 구불구불한 내부를 지나가니 어느새 3층에 위치한

1등 보고에 도착했다.

1등 보고 내부는 2등 보고와 많이 달랐다.

우선 2등 보고는 각종 성물과 아티팩트가 마치 도서관의 책들처럼 꽉꽉 차 있

는 느낌이었다면, 1등 보고는 미술관에 걸려있는 예술품 같았다.

한 10분 정도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세어볼 수 있을 정도로 적었지만, 그만큼

각각의 성물들과 아티팩트들에게선 영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테오는 티그리스에게 모험가의 돋보기를 건넸다.

"1등 보고에 있는 성물들의 능력은 제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 돋보기로

확인해보시는 편이 훨씬 나으실 겁니다. 아티팩트나 영약을 찾으시는 거라면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영약이나 아티팩트는 볼 필요도 없었다.

쓸만한 영약의 위치는 티그리스가 알고 있었고, 아티팩트는 수준 높은 마법사

들이 많은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에게 무용지물이었다.

티그리스가 고를 것은 성물밖에 없었다.

티그리스는 성물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안에 있는 성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나라와 민족을 구한 서사가 담겨 있는

성물이기에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십 개의 성물 중에 티그리스의 시선을 끄는 성물이 하나 있었다.

수려한 은빛을 토해내고 있는 폭이 좁은 롱소드였다.

'현자의 검이 여기에 있었군.'

라칸이 회귀 전에 사용했던 주 무장이자 '현자의 눈' 자리를 상징하는 성물이

었다.

44. 케일 자작(1)

#044화 – 케일 자작(1)

티그리스는 현자의 검에 돋보기를 가져다 댔다.

현자의 검은 총 다섯 가지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법 저장, 마법 증폭, 쾌속 캐스팅, 거짓을 판별하는 눈썰미, 마법과 검의

조화.

마법 저장은 총 7개까지 마법을 미리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었고

마법 증폭은 말 그대로 마법을 증폭시켜주는 것이었고

쾌속 캐스팅은 마력으로 마법진을 그릴 때 빠르게 그릴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능력이었다.

그 외에 거짓을 판별하는 눈썰미는 검을 들고 있으면 상대방이 거짓을 말하는

지 알 수 있었으며, 환각이나 환청과 같은 감각을 어지럽히는 사술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마지막 마법과 검의 조화는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캐스팅을 할 수 있게 보

조해주는 능력이었다.

굉장히 길게 설명했지만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마검사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검

을 찾을 수 없었다.

티그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이 검을 라칸에게 줄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주지 않는다.

라칸은 검은 포기하고 오로지 마법의 길만 걷게 될 것이었다. 이 검을 줘봤자

의미는 없었다.

그리고 라칸에게 1등 보고에 있는 성물을 주는 것은 그레이 타운 한복판에 어

린아이에게 금화 주머니를 들려주는 행동이나 다름없다.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수많은 갱단과 강도들이 라칸을

죽이고 성물을 빼앗기 위해 암살 공작을 펼칠 것이 분명했다.

티그리스는 돋보기로 성물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검이든 창이든 반지든 망토든 상관할 것 없이 일단 모두 확인했다.

뒤에서 찌르면 거인도 죽이는 독을 품은 단검, 던지면 반드시 심장을 꿰뚫는

창, 벼락을 일으키는 도끼 등 굉장히 다양한 성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능력이 마음이 들면 생김새가 이상했고, 장신구처럼 휴대하기 쉬운 형

태의 물건이면 능력이 하나씩 살짝 애매했다.

물론 2등 보고에 있는 성물들보단 훨씬 좋았지만, 기왕 1등 보고에 들어왔는

데 아쉬운 성물을 고르고 싶진 않았다.

'대적자의 검이 있었다면 대적자의 검을 골랐을 텐데···.'

티그리스가 마지막 최후의 전쟁에서 사용한 루체트 황가의 보검인 대적자의

검은 두말할 필요 없이 굉장히 강력한 검이었다.

거인이 대륙을 점령했던 거인의 시대에 거인의 왕을 베어낸 대적자 '아함브

라'가 사용한 검으로, 공격력 하나만큼은 황국 3대 보검 중에서 최고를 달리

는 검이었다.

대적자의 검은 황국 루체트를 상징하는 보검이기 때문에 황제에게 계승되는

검이었다.

회귀 전에도 루체트 황국이 멸망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티그리스는 대적자의

검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티그리스는 모든 성물을 다 확인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 성물 중에 티그리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성물은 네 개가 있었다.

절대로 부러지거나 녹슬지 않으며 무디어지지 않는 검.

강제로 상대를 일정 범위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속박시킬 수 있는 사슬.

눈먼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한 번쯤은 지켜줄 수 있는 절대 방어의 능력을 갖

고 있는 반지.

현재 위치 파악, 아공간, 짧은 비행, 짧은 순간이동, 은신, 자동 세탁, 온도

조절, 습기 조절 등 사용하기 좋은 보조 능력들을 다 갖춘 망토.

이 중에 제일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검이었다.

최후의 전쟁 때 티그리스가 사용하던 보검 세 자루 모두 부러져서 홍역을 치

른 경험이 있었다.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검이라면 최후의 전쟁까지도 꽤 쓸만하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검은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현재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검의 하위호환 격인 샐러맨더의 검이 있었고, 결

국에 티그리스는 드윈의 검이나 대적자의 검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러지지 않는다는 장점 하나만으로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을 모두 처리하기

엔 부족함이 있었다.

부러지긴 하더라도 티그리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보조 능력이 많은 드윈의

검과 대적자의 검을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최종 후보는 이제 세 개가 남았다.

도주하려는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을 붙잡아두고 죽일 수 있는 성물이냐

눈먼 공격으로부터 몸을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성물이냐

앞으로의 모든 여정을 윤택하게 해주고 전투 시 쏠쏠한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성물이냐

고민은 길었지만 결국 결정을 내렸다.

"이 천공의 사슬로 하지."

티그리스는 회귀 전, 번번이 권속들을 놓친 이유가 바로 작심하고 도주하는

상대를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놈들 중에선 수준 높은 마법사들이 많았고 상황이 불리해지면 번번이 공간계

마법이나 텔레포트 스크롤로 도망을 쳤다.

특히 레비스는 영혼술사답게 자신의 영혼을 육체에서 꺼내 도주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 천공의 사슬을 사용한다면 레비스가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천공의 사슬을 가져갔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나?"

마테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만 고하겠습니다."

"고맙네."

티그리스는 천공의 사슬을 들었다.

그리고 항시 가지고 다니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인퀴지터의 상징 은사(銀蛇)가 회중시계 형태로 변한 것이었다.

"사슬을 없애라."

그러자 회중시계에 달려있던 사슬이 사라졌다. 그리고 티그리스는 두꺼운 천

공의 사슬을 회중시계의 머리 부분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금빛으로 빛나던 천공의 사슬이 얇아지고 짧아지더니 회중시계의 금줄

로 변했다.

은사도 천공의 사슬의 구멍에 맞춰 자신의 머리를 변형시켰고 은사와 천공의

사슬이 달라붙었다.

티그리스는 천공의 사슬을 단추에 걸고 회중시계를 품에 넣었다.

티그리스의 고급스러운 외모와 너무나 잘 어울렸기에 그 누구도 저 금줄이 성

물일 거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티그리스는 착실히 레비스를 포함한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가는 것 같아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 * *

다음 날, 티그리스는 수업을 끝마치고 라칸을 찾아갔다.

라칸은 일일 퀘스트를 깨고 있는 듯 연병장을 돌고 있었다.

라칸은 티그리스를 발견하자마자 해맑게 웃으며 곧바로 달려왔다.

"교관님!"

티그리스는 라칸의 몸을 확인했다. 녀석의 몸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근육의 양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몸의 균형이 맞아있었다.

매일같이 달리고 팔굽혀 펴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많이 달라질 수 있었다.

"잠시 얘기하지. 시간이 되나?"

"아, 네. 마침 일일··· 그 할당량을 다 끝냈거든요."

티그리스는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티그리스가 연병장에 나타났을 때부터 사람들

이 모여든 것이었다.

예전에도 티그리스가 나타나면 학생들이 몰려들곤 했는데, 키메라 실험실 사

건 이후로 더욱 유명해져서 숫자가 더 늘어났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티그리스와 라칸은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티그리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게 맡길 일이 있다."

라칸은 씨익 웃었다.

"이거 퀘스트 냄새가 풀풀 나는데요? 어떤 거죠?"

"케일 자작을 찾아야 한다. 케일 자작이 어떤 사람인지 아나?"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 키메라 실험실을 만든 나쁜 놈 아니에요."

라칸은 케일 자작에 대해 의외로 많이 알고 있었다.

케일 자작과 함께 사라진 집사장 그리고 슬하에 자식 2명 있다는 것, 그리고

키메라 실험실 사건이 터졌을 때 황도에 있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따로 조사했었나?"

"네. 최근에 퀘스트가 떴거든요. 그래서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었죠."

라칸이 벌서 수사에 들어갔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퀘스트는 제한 시간이 있어요."

"제한 시간?"

"네. 다다음 주 수요일까지 찾지 못하면 끝나요."

"원래 퀘스트에 제한 시간이란 조건이 자주 붙었나?"

"아뇨. 그리 흔한 건 아니죠. 아, 교관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아

요."

라칸은 가방에서 종이 뭉텅이를 꺼냈다.

"어디 보자···. 아, 여깄다."

라칸은 오늘 자 신문을 꺼내 티그리스 앞에 두었다.

"왜 퀘스트가 다다음 주 수요일까지 해결하라고 했는지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그날에 황국에 특별한 이벤트가 열리더라고요."

라칸은 신문의 헤드라인을 가리켰다.

<4월 29일 수요일 각 영주들이 황궁에 방문 예정.>

<토드 황제 폐하께서 지시한 내부 점검 결과 보고를 드릴 예정.>

"지금은 계엄령이 떨어져서 그 누구도 황국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딱 다다음

주 수요일은 외부에서 주요 인사들이 다 들어와요."

"유일하게 성문이 열리는 날이지."

"네. 맞아요. 아마 이날에 어떤 방식으로든 케일 자작과 가족들은 도망칠 거

예요."

라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티그리스는 살짝 감탄했다.

"그리고 키메라 실험실을 찾으라고 했을 때는 15,000포인트였는 데, 케일 자

작을 찾으라는 퀘스트는 겨우 3,000포인트밖에 되지 않아요. 그 말은 키메라

실험실의 위치를 찾는 것보다 케일 자작의 위치를 찾는 게 더 난이도가 낮다

는 말이겠죠."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칸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그 말은 적어도 케일 자작은 아직 제가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있다

는 말일 테고, 아마 100% 황도 안에 있을 거예요. 현재 계엄령이 떨어진 상태

라 29일까지 제가 밖을 나가지 못하니까요. 시스템은 제게 불가능한 임무를

주지 않아요."

라칸은 물증을 뛰어넘어 시스템의 원리까지 파악하여 추측했다.

티그리스는 라칸의 추측을 멍하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라칸은 이어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케일 자작이 있을 만한 곳을 제가 추려봤는데, 총 두 곳이에요."

지도엔 빨간색 동그라미가 총 두 군데에 그려져 있었다.

하나는 그레이 타운의 서남쪽이고 다른 하나는 트레져 타운의 '블랙 스네이

크' 용병 사무실이었다.

"케일 자작이 이 황도에서 숨을 곳은 거의 없어요. 얼굴이 쫙 뿌려져 있는 데

다가 걸려있는 현상금도 많아서 현재 용병들이고 모험가들이고 일확천금을 벌

어보겠다고 난리를 벌이고 있거든요."

"그런데 왜 하필 두 곳이지?"

"우선 블랙 스네이크 용병단은 케일 자작 가문이 만든 사설 용병단이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닌 곳이에요. 케일 자작 가문이 갖고 있는 모든 빌딩에 보안 요

원으로 들어가 있고, 각종 더러운 일도 도맡아서 처리해준다는 소문이 자자해

요. 그래서 블랙 스네이크가 케일 자작을 숨겨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

가 많이 나오고 있죠."

하지만 그건 인퀴지터와 경찰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인퀴지터도 현재 케일 자작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케일 자작의 손

길이 닿은 용병단을 의심할 게 뻔했다.

그러나 인퀴지터는 케일 자작을 찾지 못했다. 그 말은 블랙 스네이크 용병단

이 보유한 건물에 없다는 게 확실했다.

"그럼 그레이 타운의 서남쪽 부근은 왜 의심하는 거지?"

"이곳에 케일 자작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곳에서 케일 자작의 흔적 같

은 흔적? 아니지, 케일 자작의 것으로 의심되는 증거물들을 찾아냈어요."

라칸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라칸은 파파라치들이 사용하는 소형 카메라로 몰래 찍었기에 날것 그대로의

현장을 담을 수 있었다.

사진에는 거지들이 한곳에 모여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여기는 그레이 타운이예요. 그런데 이 거지들이 먹고 있는 음식이 보이세요?

밀빵이랑 고기에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그레이 타운의 거지들이 이런 것을 먹지 않았나?"

저번에 티그리스가 갔을 때도 거지들은 쓰레기를 뒤지며 이런 음식물 찌꺼기

들을 먹고 있었다.

"그레이 타운 서남쪽에 있는 쓰레기 처리장에 들어오는 음식물 쓰레기들은 대

부분 퍼플 타운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먹고 남은 음식이 와요."

쓰레기 처리장이 강 이남 지역엔 그레이 타운에 있고 강 이북 지역엔 아카데

미 타운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디테일까진 몰랐다.

"최근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로 배급되는 빵은 호밀빵이거든요? 3월에서 5월은

호밀을 추수하는 계절이라서 호밀이 싸고 보리는 그보다 조금 더 비싸고 그

다음으로 밀빵이 제일 비싸요."

티그리스는 라칸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거지들은 밀빵을 먹고 있군."

"게다가 최근 보기 드문 고기까지 먹고 있죠. 아무리 공장 노동자들이 일을

잘한다고 해도 점심 저녁에 고기를 주는 공장은 없거든요. 결정적으로 거지들

에게 물어봤는데, 최근에 밀빵과 고기들이 버려졌다고 했어요. 그것도 아주

적은 양만요."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

"제 순수한 감이긴 한데요. 이 음식물 쓰레기의 발생지를 추적해 가면 케일

자작이 숨은 은신처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라칸은 사소하거나 버려진 것들로부터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전에 라칸이 키메라 실험실에 각종 물자를 대는 공장 3곳을 단번에 잡아낸 것

도 비슷한 원리였다.

공장 세 곳에서 나오는 폐기물에서 특이하게 하수구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라칸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이 되는군."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게 왜 케일 자작은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하

지 않았을까요? 제가 만약 케일 자작이라면 키메라 사건이 터지자마자 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했을 텐데."

"텔레포트 스크롤이 향하는 목적지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네? 왜요?"

"전에도 말했지만 인퀴지터의 히드라는 7서클의 대마법사다. 만약 텔레포트

스크롤이 발동하면 곧바로 추격하여 텔레포트 스크롤의 목적지를 찾아낼 수

있다."

"아하~ 만약 케일 자작에게 도움을 주었던 다른 귀족 가문의 저택이나 비밀

키메라 실험실로 이동하면 바로 추격할 수 있는 거군요."

정리하자면 황국의 입장에선 케일 자작이 텔레포트 스크롤을 오히려 써주길

바라고 있었다.

케일 자작을 잡는 것은 둘째치고 케일 자작에게 협조한 귀족 가문이나 비밀

실험실을 또 찾을 수 있으니까.

"그럼 텔레포트로 도망칠 생각은 못 하겠네요."

"그렇지. 그럼 넌 이번 주말에 그레이 타운에 가볼 생각인가?"

"네. 이번 주말에 이 근처 쓰레기 처리장에 잠복해 있다가 밀빵을 버리는 사

람이 나타나면 바로 뒤를 쫓아가 보려고요."

"꼭 네가 해야 하나? 인퀴지터를 불러서 해도 될 것 같은데?"

라칸은 고개를 저었다.

"퀘스트 내용에 제가 직접 케일 자작의 위치를 찾아내라고 적혀 있어요. 인퀴

지터가 찾으면 아마 이 퀘스트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거예요."

"흠···."

라칸이 직접 퀘스트를 깨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한데 너무 위험하다.

만약 라칸이 실수를 해서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비명횡사할 수 있었다.

티그리스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엔 연인 자리의 성물이

들어 있었다.

티그리스는 이 목걸이의 이름을 그냥 '페르셴과 아드네'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그게 뭔가요?"

"페르셴과 아드네라는 이름의 성물이다."

"성물이요?"

티그리스는 페르셴과 아드네의 복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주문을 외웠다.

"그대 앞길에 축복만이 가득하길."

그러자 목걸이가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툭! 하며 새로운 목걸이가 튀어나왔다.

마치 슬라임이 분열되는 것 같았다.

티그리스는 라칸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받아라. 그리고 목에 걸거나 품속에 항시 넣고 다녀라."

"이 성물에 무슨 능력이 있나요?"

"위험 감지와 순간이동이다. 네가 위험에 빠지면 내 목걸이가 반응하여 네 근

처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추격하다가

만일 문제가 생기면 네게 바로 이동하겠다."

"오···. 뭔가 보너스 목숨이 하나 늘어난 느낌인데요?"

라칸은 곧바로 목걸이를 착용했다. 붉은 루비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옷

안으로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포인트가 얼마나 쌓여 있지?"

"35,000포인트 정도요. 아, <하급 탐색> 능력만으론 조금 부족한 감이 있어서

최근에 10,000포인트를 투자해서 <상급 탐색>을 구매했어요. 왠지 제 길이 이

쪽인 것 같아서요."

라칸도 자신의 재능이 수사 쪽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마 회귀 전의 라칸도 그 기술을 포인트로 구매했을 것이다.

"아, 이제 일어나야겠네요. 이제 다른 퀘스트를 깨야 하거든요."

"···무슨 퀘스트지?"

"도서관에서 마법 공부하기요."

"마법?"

"아, 네. 저 마법 학부로 전과해야 하잖아요? 그것과 관련된 연계 퀘스트예

요. 하루에 4시간씩 앉아서 마법 공부하면 50포인트를 줘요."

티그리스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로 정상적인 퀘스트도 주는군."

"아, 물론 웃통을 벗고 공부하면 50포인트 더 줘요."

"······."

웃통을 벗을 거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45. 케일 자작(2)

#045화 – 케일 자작(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