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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이린은 어렸을 적부터 칼이 무서웠다.

날카롭고 뾰족하며 생명을 앗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날붙이는 정이 들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빠는 굳이 검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린은 검을 다루기엔

너무 유약하고 선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외교관이 되길 꿈꿨다. 무시무시한 칼날이 아버지와 오빠를 다치

게 하기 전 부드러운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아이린은 아직 세상을 몰랐다.

세상엔 대화로 풀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는 마치 메뚜기 떼가 곡식

을 모조리 갉아 먹는 것처럼 아이린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붉은 혈귀의 핏빛 대검은 무자비했다. 악룡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만

들어진 성벽은 무참히 파괴되었고, 벨프 가문의 창천 기사단은 모조리 살해당

했다.

아이린에게 몸을 피하라고 말했던 가신들은 건물의 잔해에 깔려 죽었고 벨프

가문의 가호 아래에 살아가던 백성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핏덩이로 변했다.

그리고··· 혈귀는 아빠의 목을 날리고 오빠의 허리를 양단했다.

핏빛 대검에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가주도 죽고 후계자도 잃었으며 봉토를 이끌어나갈 능력도 지킬 힘도 없었기

에 벨프 가문의 봉토는 주변 영주들이 피자 조각 잘라먹듯 나눠 가졌다.

혈귀 사태 이후에 아이린에게 남은 것은 오직 셋뿐이었다.

엄마 그리고 오빠가 사용하던 흑룡아(黑龍牙), 마지막으로 벨프 가문의 대검

술 '용 가르기'.

그래서 아이린은 대검을 들었다.

아이린은 날붙이의 공포를 분노로 뭉개버리고, 선량한 성질을 들끓어 오르는

복수심의 장작으로 삼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아이린은 복수심과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막았다.

표출되면 복수심과 분노가 소모되기에.

아이린은 이 복수심과 분노를 복수의 날까지 참고 견디며 속으로 썩혀 지독한

독(毒)으로 만들 것이었다.

* * *

아이린의 독니가 샤를로트의 옆구리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어린 독사

는 살기를 조절하는 법을 몰랐다.

샤를로트는 지독한 살기가 담긴 대검을 맞받아쳤다.

쩡-!

대검에 실린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샤를로트의 검이 흑철과 함께 3대 강철로

불리는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이 아니었다면 부러졌을 것이다.

샤를로트는 대검의 검신을 타고 앞으로 전진했다. 대검과 일반 롱소드는 명백

한 리치 차이가 있다. 자신의 검이 닿는 거리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끼기기기긱-!

쇠와 쇠가 긁히는 소리가 연무장을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아침에 벼려두었던

샤를로트의 검날이 무뎌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결국 대검의 가드와 롱소드의 가드가 맞부딪쳤다.

샤를로트와 아이린은 서로 코 닿을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봤다.

"살기 좀 죽이지? 이거 대련이라고."

"죄송하지만 살기 죽이는 법은 잘 모릅니다."

빠드득-

땅이 깊게 파여 발목까지 흙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넌 내게 질 수밖에 없는 거야."

샤를로트는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대검을 위로 밀어냈다. 팔꿈치로 아이린의

코를 향해 내리찍었다.

아이린은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피해냈다. 그러나 샤를로트는 그것까지 계산한

상태였다.

샤를로트는 오른발로 아이린의 발목을 걸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제국 공통 오

러 운용술 '뿌리 내리기'로 발을 단단하게 고정했다.

훙-!

아이린의 반격이 이어지자 샤를로트는 검을 위로 쳐냈다. 살기는 여전히 지독

했지만 좀 전처럼 강력한 힘이 실리지 않아 쉽게 튕겨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린이 아무리 오러 연공술로 몸을 단련해도 저 무식한 대검을 작대기처럼

휘두를 정도로 근력을 단련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린은 저 대검을 휘두르는 것일까?

바로 오러로 몸 전체를 강화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아이린은 상시 오러 고리 하나를 사용하고 있었고, 검술을 펼칠 땐

남은 오러 고리를 하나를 이용해서 필요한 부위에 오러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샤를로트의 발목 공격을 막기 위해 '뿌리 내리기'를 사용한 상

황이기에 남은 오러 고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샤를로트는 아이린의 몸이 열리자 어깨로 아이린의 명치를 가격했다.

"컥!"

아이린은 숨이 순간 턱 막히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검을 멈출 수는 없었

다. 샤를로트의 검이 다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오러 고리를 사용하여 샤를로트의 검을 막아냈다. 이번엔 힘이 제대로

실려 샤를로트의 검이 위로 튕겨져 나갔다.

"넌 지금 굳이 지지 않아도 될 리스크를 지고 있는 셈이야. 전에도 티그리스

교관님이 언질을 줬을 텐데?"

"···대련에나 신경 쓰시죠!"

아이린은 샤를로트를 향해 대검을 내질렀다.

이성을 잃은 아이린의 대검의 검로는 단순했고, 샤를로트는 그 대검을 굳이

맞받아 쳐주지 않았다.

샤를로트는 오러 고리를 모두 사용해 사선으로 돌진했다. 대검이 샤를로트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샤를로트는 폼멜로 아이린의 옆구리를 노렸다. 아이린은 피할 수 없었기에 대

검을 강제로 끌어와 검 면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똑같이 오러 고리 두 개를

모두 사용했던 상황이라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몸의 균형이 다시 무너졌다.

샤를로트는 또다시 발목을 걸었다. 뿌리 내리기로 막아내면 또 똑같은 패턴으

로 당할 것이 분명했기에 아이린은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건 악수(惡手)였다.

"회피 동작이 너무 커."

샤를로트는 그날 티그리스가 자신을 제압했던 방식대로 검을 역수로 잡고 아

이린의 품으로 들어갔다.

'아차!'

아이린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샤를로트는 아이린을 잡고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쩡-!

아이린의 브로치에서 배리어가 발동되며 충격을 흡수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컥!"

샤를로트의 검이 아이린의 목에 닿아 있었고 왼손은 단단하게 대검을 속박했

다. 완벽한 샤를로트의 승리였다.

샤를로트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린은 눈을 가린 채 누워있었다. 입술을 씹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눈물을 참

고 있는 듯했다.

샤를로트는 이 광경이 굉장히 익숙했다.

몇 개월 전 티그리스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이겼고, 똑같은 위치와 각도

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를로트는 입을 달싹였다.

할 말이 분명히 있었다.

대검은 아이린의 가벼운 육체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몸에 맞는 검

을 들어라.

샤를로트는 이 대련을 이기고 선배로서 그걸 지적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울음을 참는 아이린의 모습에서 그날의 샤를로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돛 꺾인 배처럼 말이 길을 잃었다.

샤를로트는 반사적으로 티그리스를 봤다.

티그리스는 특유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묵묵하게 샤를로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학생들도 먼발치에서 둘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멍하니 샤를로트와 아

이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과 너무 똑같았다.

"···젠장."

샤를로트는 입술을 씹었다.

기억하기 싫은 일이 기억나 심장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제일 싫은 것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티그리스에게서 무엇을 해야 하

는 지 찾고 말았다.

샤를로트는 눈물을 훔치고 있는 아이린에게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날의 티그리스처럼.

"아이린. 좋은 승부였다."

그날 왜 티그리스가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넸는지 이해가 갔다.

그땐 티그리스가 귀족적으로 화해의 제스쳐를 취한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

었다.

샤를로트가 패배의 눈물을 흘렸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

해서였다. 샤를로트가 패배해도 당당하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멋진 기사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그날의 샤를로트처럼 이를 빠득 갈며 일어났다.

아이린은 샤를로트의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

"됐습니다. 괜히 동정하지 마세요."

아이린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이린은 자꾸 흐르려는 눈물을 빠르게

닦아냈다.

샤를로트는 패배감에 잠식되어 터뜨렸던 분노의 말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꺼져 이 개새끼야!

-꼴에 선생 짓을 하겠다고 가르치려고 들어? 네가 벌써부터 검술 교관이라도

된 것 같아?!

샤를로트는 손에 들린 손수건을 꽉 잡았다.

"아이린."

아이린은 샤를로트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샤를로트가 아이린의 손목을 반사적으로 잡았다.

"아이린."

"왜 그러시죠? 저는 대검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하지만

저는 대검을 포기···"

"그게 아니야."

아이린의 손목을 잡은 손이 작게 떨렸다.

"그게 아니야···."

손에서 시작한 떨림이 어깨를 타고 입술로 전염되었다. 아이린은 그 떨림에

살짝 당황했다.

"아이린···. 눈물을 남들에게 함부로 보이지 마."

샤를로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다. 왜 눈물이 나는 것인지 샤를

로트도 알지 못했다.

그냥 눈물이 났다.

"넌···넌 대단한 사람이니까. 고작 나한테 한 번 졌다고 해서 눈물을 보여서

는 안 될 녀석이니까."

아이린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샤를로트 자신에게도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넌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아이린은 몰락한 가문의 귀족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아이린이 무슨 마음으로 검을 휘둘러왔

는지 모든 사람들이 알았다.

아이린은 무너진 가문을 다시 세우고 가문을 무너뜨린 붉은 혈귀에게 복수하

기 위해 검을 단련한 것이다.

그러니 아이린은 눈물은 어울려선 안 되는 사람이다. 그녀는 귀족으로서 당당

함과 고고함을 연기해야만 했다.

봉토도 작위도 없는 허울 뿐인 귀족이지만, 언젠간 복수를 끝내고 모든 것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업을 짊어진 기사이니까.

그녀는 패배에 초연하고 언제든지 다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깊은 슬픔

을 감춰야만 했다.

"내가 몸을 가려줄게. 어서."

아이린은 샤를로트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샤를로트의 눈물이

불타오르던 아이린의 복수심과 분노를 식혀주었다.

머리가 이성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자신들을 쳐다보

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이린은 샤를로트가 쥐여준 손수건을 받았다.

아이린은 말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샤를로트는 아이린의 몸과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도 털어내 주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패배감에 짓눌린 패배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오늘은 졌지만, 다음번에는 제가 이길 겁니다. 선배."

아이린은 도전자의 눈빛으로 샤를로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샤를로트가 티그리스를 쳐다봤던 것처럼 멋지고 당당했다.

"그래. 언제든지 도전을 받아줄게."

* * *

그날 수업이 끝나고 티그리스는 뒷정리를 했다.

티그리스가 칠판을 들어서 창고로 옮기려 하자 한 손이 도왔다.

샤를로트였다.

"거참 학생들한테 시키면 될 것을 왜 혼자하고 있어요."

티그리스는 샤를로트를 말없이 잠깐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학생들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규정 위반이다."

"이게 사적 심부름이예요? 그냥 칠판 좀 들어주는 게?"

"본래라면 교관 보조에게 시켜야 할 일이겠지. 하지만 아직 구하지 못했다."

샤를로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잔말 말고 이거 어디에다가 둬야해요?"

"단상 아래 창고에 두면 된다."

샤를로트와 티그리스는 큰 칠판을 들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단상 아래에

있는 문을 열고 칠판을 집어넣었다.

"으~ 퀴퀴한 냄새. 난 이런 먼지 냄새 싫더라."

샤를로트는 손을 탁탁 털며 티그리스를 흘금 봤다.

티그리스는 특유의 무감정한 눈빛으로 샤를로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뭐···뭐가요. 제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래요?"

"할 말이 없나?"

샤를로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뭐 할 말이라기보단 궁금한 게 있긴 하죠."

샤를로트는 밖을 흘금 쳐다봤다. 밖엔 아무도 없었다.

"아이린 말이에요. 혹시 그 대검···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샤를로트는 아이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었다. 그러나 왠지 아이린의 삶

에 너무 깊게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 말을 잘랐다.

"아이린의 대검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한 건가?"

"···알고 있어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그리스는 창고 문을 닫은 뒤 입을 열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대검의 이름은 '흑룡아(黑龍牙)'라는 검이다. 대대로 벨프

가문의 후계자에게 내려지는 두 개의 검 중 하나지."

"잠시만 그 말은···."

"벨프 가문의 가주가 쓰던 성물 '용혈검(龍血劍)'은 부러져 사라졌고, 아이린

에게 남은 것은 흑룡아 하나뿐이다. 게다가 벨프 가문의 검술 비급 또한 대검

술 '용 가르기' 밖에 남지 않은 상태지."

샤를로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무거운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한테 저보고 대검을 놓게 만들라고 한 거예요? 제가

어떻게 아이린에게 대검을 놓으라고 말해요!"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난 단 한 번도 아이린에게 대검을 놓게 만들라고 한

적이 없다."

"분명 나한테 '믿겠다.'라고 말했잖아요. 그건 뭐예요?"

"넌 내 신뢰에 제대로 응답해주었다. 넌 아이린을 꺾었고 아이린이 자신의 문

제를 다시 한번 직시했으니까. 넌 잘해주었다."

아이린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자신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다. 반드시 벨프 류

의 대검술로 혈귀를 찢어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옳지 않다.

결국 그녀는 대검으로 혈귀에게 맞섰다가 죽고 말았으니까.

아이린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샤를로트는 눈썹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참나. 사람 오해하게 만드는 건 진짜 잘하네. 그렇게 제대로 말해줬으면 아

이린한테 주제넘는 얘긴 안 했잖아요."

"그래도 아이린은 대검을 놓아야 한다. 아이린은 대검과 전혀 맞지 않으니까."

"어떻게 아이린한테 대검을 놓으라고 말해요. 유일하게 남은 벨프 가문의 유

산이고 검술인데. 그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티그리스는 밖을 나서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몫이다. 교관은 학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줘야 하니까."

"참나. 그렇게 말하면 멋있는 줄 아나 봐. 어떻게 대검을 놓게 할 건데요?"

티그리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라진 용혈검을 찾아주고 벨프 가문의 검술인 '용살(龍殺)'을 되찾아주면

된다."

"···그게 가능해요?"

티그리스는 담담히 말했다.

"가능하다."

샤를로트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이미 부서진 가문의 보검과 실전

되어 버린 가문의 검술을 어떻게 되찾아준다는 얘긴가?

그러나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담백한 말투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티그리스라면 정말로 아이린에게 가문의 보검과 검술을 되찾아줄 것 같았기에.



34. 샤를로트와 아이린

#034화 – 샤를로트와 아이린

샤를로트는 수업을 마치고 저녁 훈련을 위해 훈련장에 들어서기 전, 수풀에

숨어 훈련장을 살폈다.

상하좌우 어디를 봐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없지···?'

샤를로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훈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선배."

움찔!

샤를로트는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샤를로트는 뒤를 돌아봤다.

아이린이 대검을 들고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샤를로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안녕. 아이린."

"네. 안녕하세요."

샤를로트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린의 입을 쳐다봤다. 설마 또 그 말을 할까 봐.

'제발 오늘은 제발···.'

아이린의 작은 입이 움직였다.

"대련해주세요."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에 샤를로트는 속으로 절규했다.

"···오늘 아침에도 해줬잖아!"

"저녁은 다르니까요."

아이린은 샤를로트에게 진 이후로 매일 같이 샤를로트에게 찾아와 대련을 신

청했다.

그것도 매일 한 번씩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대련해달라고 졸랐다.

"아니 내가 분명 언제든지 도전을 받아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매일같이

해달라고 하면··· 젠장."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에게 아이린의 처지를 들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하기가 힘

들었다.

샤를로트는 은근히 마음이 약해서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이틀 연속은 심하잖아!'

아이린은 덩치도 작은 주제에 체력은 오우거 수준이라 거의 2~3시간 동안 끝

이 나지 않았다.

때문에 대련을 하고 나면 몸이 완전 녹초가 되어 다음 날 컨디션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니···. 이렇게 대련만 한다고 해서 실력이 늘 것 같아?"

"실력이 느는 것도 중요하지만 샤를로트 선배를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어요."

"내가 말했잖아 넌 나한테 절대로 안 된다니까?!"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그건 네 대··· 으아아악!"

그놈의 대검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샤를로트는 답답함에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럼 넌 왜 티그리스 교관님한테는 대련해달라고 왜 안 해? 너 그때 티그리

스 교관님한테도 졌잖아."

"티그리스 교관님은 샤를로트 선배 다음이에요."

빠직!

샤를로트의 이마에 혈관이 돋았다.

"그러니까 내가 티그리스보다 못하다?"

"···맞지 않나요?"

"오호~ 그래?"

아이린은 본래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샤를로트를 아주 불타오르게 했다.

결국 그날 저녁 대련을 했고, 잔뜩 지쳐버린 샤를로트는 훈련장 한가운데에

누워버렸다.

아이린은 샤를로트에게 얻어맞아 그 옆에 기절해 있었다.

오늘 또 이 녀석 때문에 개인 훈련 시간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말았다.

"···젠장 이대론 안 돼."

샤를로트가 아이린의 대련을 거부한다 → 아이린이 티그리스를 들먹인다 → 화

가 나 대련을 받아준다 → 하루를 날려 먹는다.

이 패턴이 반복될 것이 눈에 선했다.

'이걸 어떻게 하면···.'

그때, 샤를로트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아이린을 티그리스한테 보내면 되잖아!"

샤를로트는 당장 내일 티그리스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 * *

다음 날.

샤를로트와 아이린은 수업이 끝나자 티그리스가 사는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몰랐는데 티그리스는 수업하는 날을 제외하곤 출근을 하지 않았다.

티그리스가 사감이나 시설 관리 등 별다른 직무를 갖고 있지 않고, 오로지 교

관 업무만 하다 보니 굳이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 말은 일주일에 하루를 제외하곤 모든 날을 온전히 개인 훈련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한테 껌딱지를 붙어서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자기는 해피 훈련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그거지?"

덕분에 샤를로트의 분노 게이지는 폭발 직전이었다.

아이린은 그러거나 말거나 지도를 보며, 티그리스가 사는 빌딩을 찾았다.

"여기 맞죠? 샤를로트 선배?"

"···맞는 것 같은데?"

노르베르드 타워

19층짜리 거대한 빌딩은 보기만 해도 굉장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 건물의 주인이 티그리스라는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노르베르드 가문의 것이지만, 결국 가주의 자리를 티그리스

가 잇게 될 것이니 결국 티그리스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샤를로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빠보고 부동산에 좀 투자하라고 할걸···."

현재 황도의 땅값은 하늘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귀족들이 모여 사는 업타

운은 말할 것도 없었다.

노른자 땅 중 노른자 땅에 떡하니 놓여있는 이 거대한 빌딩의 가치가 얼마나

할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재수 없게 돈도 많다니···. 아주 짜증 나 죽겠어."

샤를로트의 눈엔 모든 것이 다 미워 보였다.

둘이 노르베르드 타워 앞에 서자 한 사내가 둘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전 노르베르드 가문을 섬기고 있는 집사 베이

튼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베이튼. 지금 티그리스 교관님은 어디에 있죠?"

"티그리스 공자님께선 펜트하우스에 계십니다. 지금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베이튼은 둘을 펜트하우스와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오···."

이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 샤를로트와 아이린은 감탄

을 내뱉었다.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올라갈 때 스크린에 비친 사람들이 좁쌀만 하게 변하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깔끔한 펜트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 티그리스 집이네.'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깔끔한 인테리어는 티그리스의 평소의 차가운 이미지와

비슷했다.

샤를로트와 아이린은 거실로 향했다.

거실 밖으로 드넓은 테라스가 한눈에 보였다. 테라스 한 가운데에서 티그리스

와 리니아가 같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테라스도 있네···.'

테라스는 굉장히 넓어서 검술 훈련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하늘 위에서 훈련을 한다니···.'

꽤 낭만도 있고 훈련할 맛도 날 것 같았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와 리니아가 훈련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티그리스

는 리니아의 검술을 가르쳐주고 있었는데, 굉장히 우애가 좋아 보였다.

보통 귀족 가문이라면 후계자 다툼 때문에 서로 죽이려 안달이 났는데, 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때, 벽을 뚫고 제인이 나타났다.

"네가 샤를로트야?"

"으악! 귀신!"

샤를로트는 엄청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아이린도 덩달아 놀랐는지 얼굴이 사

색이 되었다.

제인은 클클 웃으면서 말했다.

"놀라는 모습이 꽤 재밌네."

샤를로트는 급하게 양손으로 십자가를 만들었다.

"귀신아, 썩 물러가라! 물러가라!"

아이린도 샤를로트가 갑자기 손으로 십자가를 만들자 자기도 모르게 따라 했다.

제인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쳤다.

"그게 뭐야. 설마 그게 퇴마술이라고 하진 않겠지?"

"어···? 이렇게 하면 귀신이 사라진다고 했었는데?"

"참나. 그런 식으론 네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토미나 파리스도 못 쫒아내."

"내 어깨에···? 으아아아악!"

샤를로트가 어깨를 털기 시작하자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제인은 배를 잡으며

웃었다.

"티그리스랑 달리 너희는 꽤 반응이 재밌네. 티그리스는 그런 농담을 하면 베

어버리겠다고 검을 꺼내 들거든."

"그···그래서 넌 누구야?"

"난 제인이야. 뭐, 이야기하자면 기니까 그냥 이 빌딩을 지키는 수호령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티그리스를 섬기는 레니의 수호령

이지만 그게 그거니까."

그때, 테라스 문이 열리며 티그리스와 리니아가 들어왔다.

레니와 카렌은 리니아와 티그리스에게 생수를 건넸다. 티그리스는 생수는 거

부하고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오늘 수업이 일찍 끝나서요."

티그리스가 땀에 젖은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깔끔한 이미지와 전혀 달랐지만, 이렇게 살짝 흐트러진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리니아는 샤를로트에게 굉장히 반갑게 인사했다.

"언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덕분에 연극 재밌게 봤어요!"

"반가워 리니아. 그럼 또 볼래? 용돈 줄게."

'티그리스 시간을 좀 뺏게!'

"아뇨. 아뇨. 이번엔 제가 보여드려야죠. 시간이 되시면 같이 연극보러 가요."

"어···. 그게···."

"다음 주 어떠세요? 다음 주 주말에 저 시간 괜찮은데?"

부담스럽도록 반짝거리는 눈빛에 샤를로트는 결국 약속을 잡고 말았다.

"어···. 괜찮을 것 같아."

"아싸!"

샤를로트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가뜩이나 훈련할 시간이 없는데 또 약속을 잡아버렸으니 머리가 아팠다. 역시

샤를로트는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상대에겐 약했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를 흘금 봤다.

"대신 티그리스 교관님도 같이 가는 걸로 하자. 우리 둘이 가는 것도 좋지만

티그리스 교관님도 같이 가면 좋잖아?"

이렇게 된 이상 물귀신 작전이다.

샤를로트가 훈련을 못 한다면 티그리스도 훈련을 못해야 한다.

"난 특별 수사관의 임무 때문에 곤란할 것 같군. 나 대신 아이린을 데리고 가

도록 해라."

샤를로트는 이를 빠득 갈았다. 티그리스가 황제 폐하로부터 특별 수사관직을

받았다는 것은 유명했다.

'임무 핑계로 또 훈련하려고···!'

티그리스가 그레이 타운에서 수사를 진행했다는 소문은 파다했지만, 역시나

소득이 없었는지 최근 제국 대학과 집만 오가기만 했다.

샤를로트는 특별 수사관 직무를 받은 이유가 개인 훈련 시간을 늘리기 위한

핑계라 확신했다.

"그럼 잠시 기다려라. 씻고 올 테니. 레니, 카렌. 두 사람에게 차를 내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레니는 최근 아카데미에서 배운 버터 쿠키를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일 생각에

즐거웠다.

레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구워둔 버터 쿠키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냥 드셔도 되고 홍차에 살짝 찍어서 드셔도 괜찮습니다."

"잘 먹을게요."

아이린과 샤를로트는 버터 쿠키를 맛봤다.

"······!"

레니의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달거나 짜지도 않은 삼삼한 맛이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버터 특유의 풍부한 감칠맛이 입안에서 폭발했다.

게다가 카렌이 끓여온 홍차와도 정말 잘 어울렸기에 자꾸 손이 갔다.

덕분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샤를로트의 분노 게이지가 바닥으로 추락하며,

표정이 헤실헤실해졌다.

20분 뒤, 티그리스는 거실로 나왔다.

티그리스는 평소에 보기 힘든 편한 가디건에 면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비율이 좋아서 마치 잡지 모델 같았다.

티그리스는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쿠키가 마음에 든 모양이군."

"어···."

샤를로트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바구니 안에 담겨있던 쿠키가 모두 동이 났

다. 이 쿠키 대부분은 샤를로트가 다 먹었다.

"큼! 그럭저럭 맛이 좋아서요. 솜씨가 좋은 것 같네요?"

레니는 샤를로트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입이 귓가에 걸렸다.

"레니. 남은 게 있다면 둘이 갈 때 한 봉지씩 싸주어라."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연유로 나를 찾아온 거지?"

"아 맞다."

샤를로트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토해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잠잠했던 분노가 차 주전자처럼 서서히 끓어올랐다.

장장 10분에 걸친 샤를로트의 분노와 투정이 담긴 서사였지만, 한마디로 축약

하자면 이렇다.

"그러니까! 아이린이 저를 이길 수 있도록 검술 훈련을 해달라는 얘기죠."

샤를로트를 이길 수 있도록 성장시켜 달라는 발상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천재

적이었다.

아이린을 가르치는 동안 티그리스는 개인 훈련을 하지 못할 것이고, 그 말은

티그리스가 개인 훈련 시간이 줄어든다.

그 사이 샤를로트가 열심히 훈련을 하면 10년 내로 티그리스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이 제안을 안 받을 수 없겠지. 티그리스 당신이 교관이라면 말이야.'

티그리스는 교관이기 전에 귀족이었다. 남을 가르치고 돕는 것을 미덕으로 삼

는 귀족이 이런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저는 아직 부족해서요. 전 아이린에게 대련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거든요.

하지만 유능하신 티그리스 교관님이라면 더 빠른 시일 내에 아이린이 저를 이

길 수 있도록 올바른 길을 인도해주시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제 딴에는 티그리스를 도발하기 위해 말을 강하게 했지만, 티그리스에겐 전혀

타격이 없었다.

'이거 복이 넝쿨째 굴러왔군.'

티그리스도 아이린을 따로 가르칠 구실을 찾고 있던 상황이었다.

샤를로트라면 모를까 아이린은 티그리스가 직접 지도를 해줘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

샤를로트는 오랫동안 말이 없자 왠지 마음이 급해져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제발 받아들여라···. 제발 받아들여라···. 제발 받아들여라···.'

티그리스는 입을 열었다.

"좋다."

"나이스!"

샤를로트는 손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아이린 너는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없었군. 넌 내게 수업을 받고 싶

은 게 맞나?"

'아차!'

그러고 보니 아이린에게 이 문제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만약 아이린이 거절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저는···."

아이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샤를로트 선배도 같이 받는다면 받겠습니다."

순간 샤를로트는 머리가 텅 비었다.

"···뭐? 나도 같이 수업을 받는다고? 왜? 왜 나도 받아야 하는데?"

"그건 불공평하니까요."

"뭐가 불공평한데?"

"제가 티그리스 교관님의 도움을 받고 샤를로트 선배를 이겨버리면 그건 정정

당당하게 이긴 게 아니니까요."

"그게 왜 정정당당하지 않은 건데?"

"전 교관님의 수업을 들었고 선배는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건 불공평해요."

"너 나를 이기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럼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

그러나 아이린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기더라도 이런 식으로 이기고 싶진 않아요. 만약 샤를로트 선배도 티그리

스 교관님의 수업을 받지 않는다면 저도 받지 않을 거예요."

"으아아악!"

샤를로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샤를로트의 단정한 머리칼이 사자 갈기처럼 변하기 시작할 때, 갑자기 샤를로

트의 손이 멈췄다.

"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티그리스가 샤를로트를 가르친다면 샤를로트는 성장한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그 시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한다.

시간적으로 계산으로 해봤을 때 이건 확실한 이득이었다.

티그리스 밑에서 배운다는 것이 굴욕적이긴 했지만, 어차피 자신은 티그리스

의 강의를 듣는 입장이다.

'티그리스의 밑에서 배우면 티그리스의 약점을 빨리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시간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약점도 찾아낸다. 전술적으로도 전략적

으로 완벽한 판단이었다.

'그래 이미 버려진 몸이야···! 굴욕적이지만 티그리스 밑에서 배운다면 더 빨

리 티그리스를 꺾을 수 있겠지!'

샤를로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나도 티그리스 교관님의 수업을 받을게. 그럼 된 거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게 된 샤를로트는 아저씨처럼 흘흘흘 웃었다.

"그럼 이제 내 조건을 말하도록 하지."

"···뭐야. 티그리스 교관님도 조건이 있어요?"

"내 개인적인 조건이 아닌 학교 방침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건이다. 본래 교

관은 특정 학생을 대상으로 따로 수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교육 평등에

대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

"아···."

제국 대학은 평민이든 귀족이든 동등한 조건에서 교육을 받을 '교육 평등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정규강의 시간도 아닌데 티그리스가 샤를로트와 아이린을 따로 가르

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그러나 너희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오! 그게 뭔데요?"

"하나는 검술 동아리를 창설하는 것이다. 내가 동아리 담당 교관이 된다면 너

희를 따로 교육할 수 있게 되니 불법이 아니다."

"아···. 그럼 그건 불가능하겠네요."

이미 제국 대학 내에는 검술 동아리가 존재한다. 중복되는 목적의 동아리 개

설은 불가능하니 이미 개설된 검술 동아리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검술 동아리는 베드리안 교관이 담당 교관으로 되어있다.

샤를로트와 아이린을 가르치겠다고 담당 교관을 바꾸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

야기였으니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뭔데요?"

"너희가 내 직속 제자 겸 교관 보조가 되는 것이다."

샤를로트의 표정이 깨졌다.

"···제자?"

티그리스의 제자?

그것도 직속?!

샤를로트의 머리속은 카오스로 변해버렸다.



35. 제자

#035화 - 제자

직속 제자와 스승.

예시는 멀리 찾을 필요 없이 베르강과 고든과의 관계를 떠올리면 되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과 함께 제자를 보호할 의무가 생긴다. 반대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성실히 받을 의무 외에 별다른 의무를 짊어지지 않는다.

대신 제자는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의 가문과 함께 스승의 이름을 소개해야

한다.

샤를로트가 황제 폐하의 앞에서 훈장을 받거나 상을 받을 때도 티그리스의 이

름을 대어야 하고, 가주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선포할 때도 티그리스의

이름이 함께 불린다.

샤를로트가 유명해지고 훌륭한 기사가 되면 티그리스의 명예도 같이 높아지는

것이고, 샤를로트가 전 국민에게 칭송을 받는다면 티그리스도 함께 칭송을 받

는 것이다.

샤를로트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마음속에서 싹텄다.

샤를로트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티그리스의 제자가 되는 걸 불편해하는 걸까?'

티그리스는 샤를로트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는 걸까?

자격조건으로만 보자면 차고도 넘친다.

젊은 피 토너먼트 우승, 제국 대학 최연소 교관, 최연소 4성 기사에 차기 블

랙 마이스터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교관으로서 실력이 부족한 걸까?

그것도 아니었다. 티그리스의 첫 강의를 들은 모든 학생은 네 종류의 내려치

기를 그날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성이 문제일까?

티그리스는 귀족과 평민들 사이에서 모두 인품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젊은 피 토너먼트에서 톰이란 용병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검을 준 모습에서 귀

족의 품위를 보였고, 오만하다 소문이 났지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샤를

로트에게 고개를 숙여 자신의 과오를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자격, 실력, 인품 모두 완벽한 티그리스의 직속 제자가 된다는 건 모두가 꿈

꾸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샤를로트는 내키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샤를로트가 꺾어야 하는 목표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슈베어트에서 자신을 모욕한 것에 대한 앙금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걸까?

전자가 이유라면,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는 일은 많았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

았고.

후자가 이유라면, 그건 티그리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샤를로트에게

있었다.

샤를로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냥 나 티그리스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였구나.'

아무 이유가 없다.

그냥 티그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슈베어트에서 티그리스에게 진 그날부터 그냥 샤를로트는 티그리스를 미워하

기로 한 것이었다.

'나 엄청 나쁜 년이었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눈을 봤다.

감정을 알 수 없는 고요한 눈빛이었다.

"티그리스 교관님. 왜 저희를 직속 제자로 삼아서까지 가르치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티그리스의 표정과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샤를로트는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티그리스의 잔잔한 마음에 돌멩이를 던진 것은 확실해 보였다.

잠시 후 티그리스의 입이 열렸다.

"세공사가 왜 보석을 다듬는다고 생각하나?"

"···더 아름다워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도 그렇다."

티그리스의 말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 울림을 샤를로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샤를로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충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티그리스 교관님의 직속 제자가 되는 게 진짜 부끄러워

요. 나이도 제가 2살이나 더 많고 슈베어트에서 그렇게 모욕적인 말을 들어놓

고 교관님 밑에서 배운다는 것 자체가 정말 굴욕적이에요."

샤를로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저랑 한 판 붙어요. 이 부끄러운 감정을 완전히 지워낼 수 있도록 철

저하게 저를 짓밟아주세요. 제가 어떤 점이 부족한지 하나하나 다 꼬집어주세

요."

샤를로트의 표정은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던 돌덩이를 내던진 사람처럼

굉장히 후련해 보였다.

"그래야 제가 교관님의 직속 제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티그리스는 일어났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

* * *

샤를로트는 검을 뽑았다.

오늘따라 검날이 소름이 끼치도록 바짝 서 있는 것 같았다.

티그리스는 샐러맨더의 검을 뽑아 중단세를 취했다.

빈틈이 없었다.

둘은 서로를 잠시 응시했다. 차가운 바람이 샤를로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따로 신호는 없었다.

잠깐의 눈빛 교환 후 둘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쩡-!

검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샤를로트는 전에 자신이 왜 졌는지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를 쉽게 이기려 들

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론 티그리스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유효타를 입혀 이긴다는 생각으로 티그리스를 대해야 하는 게 아니라, 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이길 수 있었다.

쩡-! 쩡-!

"큭!"

이제 막 시작했는데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티그리스가 힘을 딱히 많이

주는 것도 아니었고, 오러 고리를 3개 이상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힘의 배분이 완벽한 것뿐이었다.

"정직한 검을 정직하게 받아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직선은 곡선으로 받

아내야 한다."

티그리스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검을 흘려내며 받았다. 힘이 덜 들고 더 차분하게 막

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흘려내 받아내는 탓에 반격할 기회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건 곡선으로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검로를 끝까지 읽고 내 몸을 열어라."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말을 곧장 이해했다. 샤를로트의 눈동자가 티그리스의

횡베기를 끝까지 추격했다.

샤를로트의 검이 부드럽게 티그리스의 검에 달라붙었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말 대로 곡선

으로 티그리스의 검을 비껴냈다.

티그리스의 검이 샤를로트의 머리칼을 스쳤다. 그리고 티그리스의 몸이 열렸

다. 그 빈틈을 향해 샤를로트는 검을 집어넣었다.

티그리스의 검이 도달하려면 멀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샤를로트의 검을 피했다.

티그리스의 검이 다시 번뜩였다.

쩡!

샤를로트는 다시 티그리스의 검을 받아냈지만 제대로 막지 못해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시선과 검의 방향을 동일하게 두는 버릇을 고쳐라. 빈틈을 포착해 찔러넣어

도 시선과 검의 방향이 똑같다면 상대방은 쉽게 피해낼 수 있다."

다시 티그리스의 검이 정직하게 날아갔다. 샤를로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딱히 기술이 들어간 검도 아니고 정직한 검일 뿐인데 제대로 막지 못했다.

티그리스의 검이 갑자기 변화했다. 사선으로 내려 그어지던 검이 갑자기 중간

에 멈추고 샤를로트의 어깨를 향해 날아갔다.

샤를로트는 깜짝 놀라 검을 위로 쳐냈지만,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티그리스의 발차기가 옆구리에 직격했다.

"억!"

갈비뼈가 부서진 것 같은 충격에 눈앞이 어지러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또다

시 티그리스의 정직한 검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정직한 검의 장점은 변수 창출에 있다. 상대방이 언제 또다시 변칙적인 검이

날아올지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반격도 못 하기 때문이다."

샤를로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티그리스의 검을 읽고 비껴냈다. 그리고 시선과 검을 따로 하며 검을 내질렀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샤를로트의 천재성에 티그리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티그리스는 큰 동작으로 검을 피했다.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샤를로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샤를로트는 프리하르덴의 검술 '칼바람'을 사용했다.

지독한 겨울철,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뒤섞인 칼바람과 같은 난격이 펼쳐졌다.

1초에 무려 7번을 내지르는 난격은 쾌속 그 자체였다. 그러나 칼바람은 티그

리스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갈 뿐 유효타를 주지 못했다.

티그리스가 검을 미세하게 조정해 샤를로트의 난격을 모조리 비껴낸 것이었다.

'말도 안 돼···!'

뒤이어 티그리스의 정직한 검이 날아왔다. 피할 수 없었다.

샤를로트는 최대한 힘을 끌어모아 티그리스의 검을 막아냈다.

쩡-!

샤를로트의 검이 공중을 날았다.

악력이 떨어져 검을 놓친 것이었다.

"너는 네 검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르는 것 같군. 난격의 장점은 속도가 아

니라 적이 막기 힘든 각도로 공격을 연달아 집어넣는 것이다."

샤를로트는 자신의 손아귀를 봤다. 굳은살이 벗겨지고 손바닥이 터져 피가 흐

르고 있었다.

카렌이 눈치 좋게 붕대와 연고를 바로 가져왔다.

티그리스는 직접 샤를로트의 손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샤를로트는 지금 티그리스가 자신에게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철저하게 져 버린 탓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렇게 질 것이라 예상했고 지고 나면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다 훌훌 털어버

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미련이 자꾸 남았다.

샤를로트는 진짜 열심히 노력했다.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밤낮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티그리스의 발끝도 따라가

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분했다.

"샤를로트."

"···네."

티그리스의 붕대가 포근하게 샤를로트의 손을 감쌌다.

"지금 네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여서, 나중에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보장

은 없다."

"···네?"

"넌 내 모든 것을 배울 것이고 난 네게 내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리

고 넌 나를 꺾기 위해 나를 배울 것이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눈동자를 봤다. 그 눈동자에 비친 샤를로트는 지금의

샤를로트가 아닌 다른 샤를로트가 비쳤다.

"네가 내게 도전할 기회가 백만 번이 있다면 난 네게 기회가 없다. 제자에게

도전하는 스승이란 없으니까."

"제가 티그리스 교관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알지 못한다.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으니까."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이 달콤한 말이 진심인지 궁금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그러나 그건 샤를로트가 티그리스가 아니고서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믿기로 했다.

저 말이 티그리스의 진심이라고.

"티그리스 교관님 제 스승이 되어주십시오."

그날 스승과 제자가 탄생했다.

* * *

평화로운 일요일.

티그리스는 황실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To: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From: 레인로버 데 루체트

시간 되면 차 한잔하러 와요. 그 맛있다던 쿠키 맛을 보고 싶네요!>

단순히 차 한잔하자고 황녀가 황궁으로 부를 일은 없었다.

'때가 된 모양이군.'

소탕 작전 계획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티그리스는 곧바로 옷을 갖춰 입고 황도로 향했다.

기사들에게 이미 말을 전달해두었는지 티그리스에게 곧바로 1급 패찰을 지급

했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티그리스 경.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젊은 피 토너먼트에서 자웅을 겨루었던 고든이었다. 고든은 황금 기사단의 정

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기운을 숨길 줄도 몰라서 중구난방으로 기운을 흩뿌리고

다녔는데, 지금은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많이 성장했군."

"하하. 티그리스 경에 비하면 한참 모자랍니다."

고든은 베르강에게 올바른 훈련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각종 검술은 물론

이고 오러 운용술도 배웠다.

그 중 '기감'을 읽는 법도 배웠는데, 고든의 실력으론 티그리스의 수준을 가

늠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같은 4성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고든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티그리스

의 경지가 높다는 것이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티그리스 경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 같습

니다."

"앞으로 더 정진하게. 자네는 옥석이니 다듬어지면 누구보다 훌륭한 기사가

될 것이니."

"감사합니다."

고든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기사의 예를 표했다. 이제 용병티가 아예 사라지

고 제법 기사다워졌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고든은 황녀가 있는 '봄의 궁전'으로 안내했다. 봄의 궁전은 경비가 삼엄했는

데, 고든과 티그리스를 보자 기사들은 곧바로 문을 열고 들여보내 주었다.

궁전 안 작은 정원으로 향하니 익숙한 얼굴 셋이 보였다.

하나는 황녀였고 또 다른 하나는 베르강이었다.

"어! 티그리스 교관님!"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손을 트럭 와이퍼처럼 크게 흔드는 라칸이 있었다.

라칸의 턱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 턱이 부서졌다고 하던데 아직 완

쾌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티그리스는 황녀에게 곧바로 예를 표했다.

"위대하신 황금의 일족을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티그리스 경. 저 그런 거 싫어한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예와 법도가 안 세워지면···"

"아아! 늙은 환관들이 하는 소리를 또 듣고 싶진 않아요!"

레인로버는 아예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자리에 앉죠. 쿠키 맛이나 좀 보게."

티그리스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레니가 어젯밤 열심히 구운 버터 쿠키와 마들렌을 꺼냈다.

"호오~ 이게 샤를로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던 쿠키인가요?"

"샤를로트를 언제 만나셨습니까?"

"토요일 점심에 잠깐 만났죠. 티그리스 교관이 샤를로트랑 아이린을 불렀다길

래 궁금해서요."

단순히 샤를로트와 아이린이 왜 티그리스를 찾아간 것인지 궁금해서가 아니

라, 이번 소탕 작전에 변수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찾아간 것이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를 믿긴 하지만 '만약'이라는 마법의 주문은 사람을 자꾸

의심하게 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이번 소탕 작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를 이제 정말 완전히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보니까 샤를로트랑 아이린을 직속 제자로 삼기로 하셨다면서요? 처음에

들었을 땐, 진짜 깜짝 놀랐어요. 왜 둘을 제자로 삼으신 거예요?"

"제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황국을 지킬 훌

륭한 검이 될 것입니다."

"진짜 그 이유 때문이에요?"

레인로버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혹시 샤를로트나 아이린에게 마음이 있으신 건 아니고요? 아니면 둘 다거나~?"

"저는 제 제자를 제자로만 바라볼 것입니다."

"에이~ 그런 경우는 나이 차가 꽤 나는 사람이나 그런거고. 아이린이랑 샤를

로트하곤 나이 차가 얼마 안 나잖아요. 스승님~이러다가 여보~이러는 건 한

순간일지 몰라요."

레인로버의 아저씨 같은 말투에 베르강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 제발 체통을 좀 지키십시오."

"참나, 베르강이 그런 말하니까 이상하네요. 레이첼이 베르강의 제자였다는

건 대부분이 알 텐데?"

"아니···. 그게···."

"나이 차가 분명 10살이나 나던가? 이거 거의 삼촌뻘 아니야?!"

"···죄송합니다."

베르강은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침몰해버렸다. 레인로버는 흘흘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기숙사도 정리하고 펜트하우스로 옮기라고 하셨다면서요."

"제가 매일같이 제국 대학에 밤늦게까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

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둘은 그냥 제 제자일 뿐입니다."

"프리하르덴 백작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내가 생각해봐도 엄청나게 오해

할 것 같은데?"

"프리하르덴 백작은 이해심이 높은 인물이니 충분히 받아들일 겁니다."

"아직 프리하르덴 백작을 만나보신 적 없죠? 다른 건 몰라도 외동딸에게 얼마

나 극성인데요? 불시에 집에 쳐들어갈지 몰라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티그리스가 알고 있던 프리하르덴 백작은 로타와 아르펨의 목을 치기 위해 목

숨까지 내놓았던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심지어 블랙 마이스터인 베르강이 죽은 시점에서 유일하게 7성 기사가 될 수

있는 인물인 티그리스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프리하르덴의 상징이

자 성물인 '프리하르덴의 여름'을 줄 정도로.

그런 인물이 딸바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군.'

프리하르덴 백작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던 시점은 샤를로트가 죽은 이후였다.

그리고 항상 전투에 나서기 전 '딸 아이의 복수를 해주겠다.'라는 말을 한 뒤

전투에 임했었다.

"뭐,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겠··· 아악! 내 쿠키!"

티그리스가 가져온 쿠키는 어느새 라칸과 베르강의 입에 거의 다 들어가 있었다.

레인로버가 베르강과 라칸을 쏘아봤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둘 다? 쿠키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난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베르강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음 생각보다 맛있군요. 자꾸 손이 가는 맛이랄까?"

"···맞습니다. 새우 과자같은 느낌이에요."

"새우 과자? 이건 버터 쿠키인데?"

"아 그게···"

"둘 다 조용히 해요!"

레인로버는 쿠키 상자를 자신 앞으로 당겼다.

"둘은 손댈 생각도 하지 마요. 이건 다 내 거니까."

티그리스는 한심하게 라칸을 쳐다보며 말했다.

"라칸이 황녀님께 폐를 끼치진 않았습니까?"

"누구와 달리 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오히려 편했어요. 당신

도 라칸의 반만 닮는 건 어때요? 그 정도가 제일 적당할 것 같은데?"

연무장을 알몸으로 달리는 라칸의 반을 닮으라는 소리에 티그리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티그리스가 정말 싫어하는 표정을 짓자 황녀는 깔깔 웃었다.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군요?"

레인로버는 쿠키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전에 말했다시피 라칸 덕분에 작전 계획을 세우는 데 수월해졌어요. 디테일

한 부분은 손을 봐야겠지만 작전 진행일도 나왔고요."

"언제입니까?"

"다음 주 일요일에 국정 업무로 황제 폐하께서 강 이남 지역을 직접 순찰하시

기로 계획되어 있어요. 목적은 실종사건 현장 순찰이죠."

티그리스는 황녀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그러면 토요일까지 보안 조치가 이뤄져야겠군요."

"예. 맞아요. 다음 주 토요일까지 인퀴지터들과 철혈 마법 병단이 나서서 강

이남 지역 맨홀 뚜껑이 절대로 열리지 않도록 특별 제작된 고정 마법으로 막

아버릴 거예요."

"그리고 한 곳만 열어두겠죠."

"루체트 강 하류에 있는 출구 쪽만 열어둘 거예요. 거기엔 황금 기사단과 철

혈 마법 병단이 들어갈 거고요."

"연구실 쪽에서 텔레포트로 연금술사와 마법사들이 도주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인퀴지터의 '히드라'가 안티 스크롤 마법과 방해 마법을 펼칠 거예요."

현 인퀴지터의 히드라가 7서클의 대마법사다.

그가 작정하고 방해 마법과 안티 스크롤 마법을 사용한다면 쥐새끼 하나 도망

치지 못할 것이다.

레인로버는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작전 실행일은 토요일 오후 6시예요. 티그리스도 거드시겠어요?"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예. 하겠습니다."



36. 로건

#036화 - 로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