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008

008

"어떻게 알았어요?"

오후 11시가 훌쩍 넘은 시각.

오늘 마지막 던전을 청소하고 막 밖으로 나가려던 차에 반갑지 않은 얼굴이 다짜고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야?"

뭐지.

대체 뭔가 이 상황은.

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거봐. 저 새끼 저거, 전 여친 맞다니깐?"

"아, 아무튼 우린 피해 주는 게 좋겠지?"

"...그래요."

박 팀장은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팀원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동시에 어째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시선이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어떻게 알았냐니까요."

"...뭘 말이야."

"뭐겠어요. 이제 와서 모른 척이에요?"

칫,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새 검사를 받아 본 모양이다.

아니, 받았으면 그만이지 찾아오긴 왜 찾아오는 건가.

"그냥 찍어 본 거야. 알고 한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찍어봤다고요?"

"어. 그냥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거로 헌터한테 아는 척 한번 해보고 싶었어."

김민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알아들으셨으면...."

"검을 쥘 때 왼손이 받쳐줘야 한다, 고 하셨죠?"

"...그런데."

"전 그때 검을 들고 있지도 않았고 검을 쓴다고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데, 그건 어떻게 알았죠? 그것도 찍어 본 건가요?"

"...."

빌어먹을.

실책이다. 역시 그냥 닥치고 있어야 했다.

어떡하지. 계속 찍었다고 잡아뗄까.

아냐. 저 자식 성격상 그걸 인정할 리가 없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올 것이다.

여기서 어정쩡하게 대답하면 더 귀찮아지려나.

"말 안 해주시면 내일 또 올 거...."

"저번 사당에 출현했던 블루 등급 던전을 청소할 때."

김민주의 말을 싹둑 자르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몬스터 시체를 운반하면서 칼자국을 봤어."

"...칼자국이요?"

"칼자국 방향이 꽤나 변칙적이었거든. 그건 어느 특정 기술에만 고정된 게 아닌, 상황에 따라 다양한 기술들을 즉석에서 연계한다는 말이겠지. 이건 전투 경험이 매우 풍부해야만 가능한 방식인데, 뭐... 나이에 비해 실력이 상당하다는 얘기고."

아무렴, 다른 건 몰라도 저 녀석의 포텐셜만큼은 S급, 혹은 그 이상인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수많은 칼자국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게 있었어.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이어지는 종 베기. 오른손잡이가 주로 쓰는 기술이지만, 보통은 그 직후에 우측 횡 베기, 혹은 우측 올려 베기로 연계하지. 그런데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는 종 베기는 꽤나 칼자국이 깊었지만 이어 연계한 나머지 베기는 그 깊이가 눈에 띄게 얕더라. 그래서 왼손에 힘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어."

"...."

"문제는 그다음. '베가'는 매우 빠른 속도의 공격이 특징이야. 하지만 그거 외에는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으니, 빠른 속도를 역이용해서 카운터를 치는 게 공략이라면 공략이었겠지. 그런데도 카운터를 시도한 흔적이 단 하나도 없더군. 너 정도의 실력자가 그걸 몰랐을 리도 없는데 말이지."

김민주는 퍽 당황한 눈치였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 마치 비밀을 들킨 얼굴이다.

"그럼 생각해볼 수 있는 건 하나. 베가의 속도에 반응해서 카운터를 치기에는 몸이 따라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순간적으로 어깨에 부담이 오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상생활에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증상이었을 거야. 하지만 순간적으로 반응해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티가 날 수밖에 없지. 특히나 검사라면 더더욱."

검사.

클래스가 공식적으로 나뉘어 있는 건 아니지만, 헌터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스킬과 특성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

즉, 검술에 대해선 사실 김민주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검사 클래스가 아닌 내가 그녀에게 조언해줄 수 있는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내가 세계 최초의 올 클래스, SSS랭크의 헌터였으니까.

"검을 쓰는 헌터들은 대부분 무기에 특수한 힘을 부여하거나, 시전자의 능력을 대폭 끌어올리는 버프 스킬들이 많지? 그건 곧 스킬 자체에 크게 의존하는 다른 헌터들과 다르게 검술 실력이 우선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러니 이참에 며칠 쉬면서 다시 기본부터 잡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그 상태로 계속 토벌에 참여해 봤자 제대로 못 움직일 거고."

"...."

김민주는 대답이 없었다.

내 말은 안 듣고 딴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그래 뭐, 이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청소부 말을 듣기나 하겠어.

"이 정도면 대답이 된 것 같은데, 슬슬 가도 될까. 내일도 출근해야 해서."

"역시 당신...."

그때, 김민주가 번뜩 입을 열었다. 뭔가를 확신한 듯한 표정을 짓고.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간 채로 나에게 다가왔다.

또 자길 무시한다고 욕이나 한바탕 쏟아부을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생뚱맞았다.

"당신, 프리랜서 헌터죠?"

"...뭐?"

"서울에도 몇 명 있다고 들었어요. A급 프리랜서 헌터. 국내에서 최상위권을 다투는 랭커들이지만, 초고위험도 던전 토벌 외엔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프리랜서가 아니면 민간 길드 헌터거나. 그렇죠?"

"뭔 소리야. 나 헌터 아닌데."

"...네? 그, 그럼 뭔데요?"

"보면 모르시나? 청소부인 거."

나는 귓구멍을 후비며 대답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이다.

내가 잘 나가는 프리랜서나 민간 길드 소속이면, 좀 따라다니면서 콩고물이나 받아먹을 생각이었겠지.

미안하지만 어림도 없다.

난 이제 널 다시 볼 생각이 일절 없으니까.

"알아들었으면 이제 좀 비켜주지. 막차 끊기기 전에 가야...."

"...아무튼, 고마워요."

"...?"

저 녀석... 지금 뭐라 그런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설마 지금.... 나한테 고맙다고 한 거야?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입을 다무는 것도 깜빡한 채였다.

"저, 그리고... 실례라곤 생각하지만, 혹시 괜찮으시면...."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김민주가 손을 꼬물거리며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

"휴가? 갑자기?"

서울 본부, 작전 1팀 사무실.

책상에 앉은 남자는 김민주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지원팀에서도 쉬는 게 좋겠다고 해서요."

"설마 그 저번에 검사받은 그거 때문에?"

"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어깨 좀 아프다고 휴가는 시벌. 나 때는 상상도 못 했는데."

"뭐, 그냥...."

김민주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

현 작전 1팀장, 이수용.

이놈은 저번 달에 낙하산으로 꽂힌 놈이 아니던가.

'나 땐 말이야'를 시전하기엔 본인과 나이 차가 불과 5살이었다.

"겸사겸사 자기 계발도 좀 하려고요."

"자기 계발은 무슨. 어디 남자친구랑 여행이라도 가려고?"

"아닌데요."

"그럼 뭔데."

김민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가 이렇게 말이 많은가 싶었다.

있는 휴가 쓰겠다는데도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검술 좀 배워보려고요."

"...뭐? 어디 학원이라도 다니려고?"

"아뇨. 그냥 개인 교습."

"개인 교습? 누구한테? 요즘에도 뭐 무림 고수 그런 게 있나? 아님 뭐, 남자친구?"

하아, 김민주는 티가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청소부요."

"...뭐?"

"던전 청소팀 소속 청소부 말이에요."

"청소팀...?"

"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 배울 사람이 없어서 청소부한테 검술을 배운다고? 그것도 현직 헌터가? 차라리 검도 학원을 끊던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 아, 설마 그 어깨 검사받아보라고 했다던, 그 청소부냐?"

김민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남자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아… 설마 지원팀에서....'

그제야 김민주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며칠 전, 약을 조금 더 타기 위해 다시 지원팀에 들렀을 때, 친분이 있는 간호사에게 그 일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담소 수준으로 나눈 이야기가 설마하니 자신의 상관한테까지 흘러 들어갈 줄이야.

김민주는 묘한 배신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참 나, 그 새끼도 그 새끼다. 청소부 주제에 헌터한테 훈수 두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하다 하다 분수도 모르고 헌터를 가르치겠다고...."

"가르치겠다고는 안 했어요."

"뭐?"

"아직 가르쳐준다곤 안 하셨다고요. 저번에 한 번 부탁 했는데 거절하셨거든요."

"...이건 또 뭐라는 거야. 너 나랑 장난치냐? 가르치겠다고도 안 했는데 뭘 배워, 배우긴!"

"또 찾아가야죠. 들어줄 때까지."

이수용 팀장이 등받이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그리곤 콧잔등을 꾹꾹 눌러댔다.

김민주는 드디어 이 무의미한 대화가 끝이 났다는 걸 직감했다.

"...됐다. 니 알아서 해."

"감사합니다."

말을 꺼낸 지 무려 30분 만에 떨어진 허가.

그 사이 김민주의 머릿속에선 '이럴 바엔 그냥 안 쓰고 말지'라는 생각이 백 번은 더 오갔다.

분명 저 남자도 그걸 노렸으리라.

"아, 몇 주 뒤에 대규모 토벌 하나 잡혀 있거든? 좀 큰 건이라서 인원이 많이 필요하니까 그전엔 복귀해."

"...알겠습니다."

"가봐."

이수용 팀장은 마치 벌레를 치우듯 손등을 휘저었다.

김민주는 말없이 목례를 하곤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

사무실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쯧... 조직이 거꾸로 돌아가네. 거꾸로 돌아가."

이수용 팀장은 김민주가 나가자마자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닌 게 아니라, 헌터가 청소부한테 뭔가를 배운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헌터를 뭐라 생각하겠는가. 아니, 우리 팀을 뭐라 생각하겠는가.

특히 작전 2팀장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어후 시발,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이수용 팀장은 치를 떨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직에는 위계라는 게 존재한다.

지위, 계층, 등급.

낮은 등급과 높은 등급. 하위 계층과 상위 계층.

위계는 곧 조직의 품위이고, 위계가 깨지면 조직은 품위를 잃는다.

그리고 최정예라 불리는 작전 1팀의 팀장으로서, 조직이 품위를 잃는 걸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는 일이었다.

"청소팀이라...."

깊은 한숨을 토해내던 그때, 이수용 팀장의 눈이 번뜩였다.

동시에 손이 곧바로 앞에 놓인 전화기로 향했다.

몇 번의 발신음.

이윽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이수용 팀장의 목소리가 상기됐다.

"어, 작전 1팀 이수용 팀장이다. 지금 본부장님 계시냐?"

「아, 네. 계십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당장 바꿔봐.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

[해금 조건 달성]

"...어?"

던전 바닥에 눌어붙은 피가 도저히 닦이지 않아 약품을 쏟아붓고 있던 그때였다.

머릿속에 뜬금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협회 내 던전 청소팀 관심도 상승]

[습득 스킬 : 원 카운터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뭐야? 왜 갑자기?'

꽤나 갑작스런 조건 달성에 가만히 서서 눈을 끔뻑거렸다.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저게 해금이 되는 거지? 시스템 오류인가?

'아, 아니 뭐. 어쨌든....'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중요한 건 어쨌든 해금이 됐다는 거 아닌가.

"뭐야, 왜 실실 쪼개? 기분 나쁘게."

"...아무것도."

"그럼 약품이나 좀 더 뿌려봐! 이 새끼 툭 하면 멍 때리네?"

뜻밖의 횡재에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한상혁이 미친놈 보듯 바라봤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009

009

"그래서 말인데, 준우야."

던전에 들어온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통로 청소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박 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네가 저 헌터 분이랑 무슨 관계인지 내가 신경 쓸 건 아니긴 한데 말이다...."

"그런데요."

"저분이 대체 왜 여기 계시는 거냐?"

"...."

나와 박 팀장의 고개가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그곳엔 걸레를 들고 통로에 묻은 피와 씨름 중인 김민주가 있었다.

"제가 데려왔습니다."

"그, 그거야 그렇겠지! 내가 데려온 건 아니니까!"

"뭐, 희장 씨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그래도 한 명 더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일반적으로. 근데 저분은...."

박 팀장은 또다시 김민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팍 죽이며 말했다.

"헌터시잖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청소팀은 협회 내 최하위 직군. 그리고 작전팀... 그러니까 헌터는 협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력이다.

따지자면 청소팀은 천민 혹은 노예.

그리고 헌터는 귀족.

박 팀장의 말은 결국, 저런 귀한 분이 왜 이런 누추한 곳에서 청소하고 있냐는 뜻이겠지.

그런데 뭐... 나라고 좋아서 저 녀석을 데리고 왔겠는가.

'하여간 고집은 진짜....'

나도 모르게 거친 콧바람이 새어 나왔다.

고집에 못 이겨 조언해준 그 날.

김민주가 난데없이 내게 검술을 배우고 싶다는 개소리를 내뱉었다.

뭐, 당연히 칼같이 거절했지만....

하지만 그날 이후, 김민주는 매일 나를 찾아왔다. 정말 매일 매일 찾아왔다.

우리 스케줄은 통제팀에서 알아 온 건지, 마지막 던전의 청소가 끝나면 어김없이 저 녀석이 던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일주일을 꼬박!

참다못한 나는 어젯밤, 김민주에게 우리 일을 도와주면 생각해보겠다고 흘려 말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당연히 '아, 청소는 조금....' 하며 포기하고 돌아갈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대체 어느 헌터가 이런 허드렛일을 하려 하겠는가.

아니, 그렇게까지 가지 않아도 어느 누가 휴가까지 받았는데 굳이 청소 일을 하겠는가.

...라고 생각했으나, 그건 그녀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녀는 정말 청소팀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청소 일을 하고 있다.

현직 B급 헌터가, 청소팀에서, 던전 청소를 하고 있다고.

솔직히 겉으론 담담한 척했다만....

'뭐야, 진짜 오면 어떡하자는 거야. 아니 무슨 B급 헌터나 되는 녀석이 청소나 하고 있어. 쪽팔리지도 않나? 아니 그것보다, 이러다 진짜 매일 출근하는 거 아니야? 그럼 어떡하지? 젠장, 쟤 보기 껄끄럽다고. 하 어쩌다 이 지경이....'

속은 그 누구보다 동요 중이다.

"선생님. 이거 안 지워지는데요."

"어... 어?"

그때, 김민주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그녀가 멋대로 붙였다.

아무래도 나를 쪽팔려 죽이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약품을 뿌려야지. 그걸 멍청하게 힘으로 닦고 있냐."

"아...."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던 걸레를 뺏어 들었다.

"봐봐. 이건 사람 피고, 이건 몬스터 피야. 이렇게 두 개가 묻어 있는 건 같이 지우려고 하면 안 돼. 하나는 걸레로 닦고 하나는 불로 녹여서 지우는 거다.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이 눌어붙은 건 몬스터 살점인데, 이걸 약품으로 떼려고 하면 양이 너무 많이 드니까 단검으로 살살 긁어내. 떼어낸 부산물은 한곳에 잘 모으고. 아, 단검은 사용했으면 그때그때 닦아놔. 몬스터 피 때문에 부식될 수도 있으니까."

"...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하기 싫어? 하긴, 헌터가 이런 일 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이쯤하고 그냥 돌아가는 게...."

"아뇨. 그냥... 청소도 꽤 심오하구나 해서요."

"...."

김민주가 턱을 쓰다듬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 팀장이 만족스러운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준우도 이제 청소부 다 됐어! 하하하!"

"뭐, 감...."

나는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가.

설마,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거야?

어엿한 청소부가 된 게 감사하다고...?

세계 최초 SSS랭크 헌터였던 이 천하의 김준우가?

'시발, 울고 싶다....'

갑자기 솟구친 자괴감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터덜터덜 내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다는 듯 곧바로 따가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소연이 굉장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슨 문제라도?"

"아무것도요."

문소연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선생님, 여긴 끝났어요. 이제 뭐 하면...."

"아! 그럼 저랑 같이 저쪽으로 가요. 괜찮죠, 팀장님?"

김민주가 입을 열기 무섭게 그녀를 낚아채는 문소연.

김민주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묻어나왔다.

"어? 어어.... 그런데 저쪽엔 사체가 많을 텐데. 둘이서 힘들지 않겠어?"

"이럴 때 아니면 헌터님이랑 언제 일해 보겠어요. 헌터님도 괜찮죠?"

"...뭐, 네."

김민주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문소연은 김민주를 데리고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야, 야."

이내 멀어지는 둘을 바라보던 한상혁이 나를 툭툭 건드렸다.

"난 헌터님이 이긴다에 건다. 너는?"

"...."

나도.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통로.

문소연은 자신의 돌발행동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일단 김민주를 데려오긴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니까, 왜 안 하던 짓을 한 거야. 바보같이....'

문소연이 스스로를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던 그때.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김민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네, 그럼요. 끄떡없어요."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하."

김민주는 그녀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너무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사실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아뇨. 딱히 무슨 일이라기보단...."

문소연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캐물어서까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김민주 또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제 이야기 말고 헌터님 이야기해주세요. 저 사실 헌터랑 이렇게 대화하는 거 처음이거든요."

"딱히 할 만한 얘기가... 그냥 아버지 따라 헌터가 됐다는 것 정도밖엔...."

"헐. 아버님도 헌터셨어요? 그럼 부녀가 같이 일하고 있는 거예요?"

"아뇨. 해고되셨어요. 어깨 부상으로."

김민주는 하마터면 미래의 자신 또한 겪을 뻔한 그 이야기를 담담히 내뱉었다.

"상관한테 말했더니 꾀병 부리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같은 팀원들도 쉴 생각 하지 말라고 눈치 주고. 괜히 폐 끼치기 싫어서 참았던 게 병을 키운 거죠."

"네?! 그, 그건 말도 안 돼요! 같이 일하는 동료잖아요! 어떻게 그런...."

"아뇨."

단호한 목소리.

덩달아 김민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협회에 동료라는 건 없어요. 자기보다 낮은 계급과 높은 계급만 존재하죠. 저희 아버지는... B급에서 올라가지 못했어요. 잘리는 그 순간까지."

"그, 그런...."

"솔직히 그래요. 만년 B급인 헌터를 누가 걱정해주겠어요. 사람으로만 봐줘도 다행이죠. 뭐 결국 아버지는 쓰다 버리는 도구 꼴이었지만...."

이가 빠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문소연은 내심 뭐라도 하나 부러진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아무튼, 협회 자체가 그래요. 위계가 전부인 곳. 약자에겐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약하죠. 하물며 같이 일하는 헌터들끼리도 그러는데...."

청소팀에겐 오죽하겠어요, 김민주는 그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비하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당사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문소연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김민주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큼큼, 결국 김민주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소연 씨는 선생님한테 관심이 있는 거죠?"

"...그래 보여요?"

"뭐, 누가 봐도."

김민주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순수한 건지, 곧바로 낚아채는 그녀가 퍽 귀여웠다.

"그냥 뭐... 책임감이 강하기도 하시고. 아, 첫날엔 아무것도 안 하고, 둘째 날엔 지각까지 하셨거든요? 그것도 한 시간씩이나! 그래서 조만간 관두겠구나 했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더라구요."

"그렇군요."

문소연은 묻지도 않은 걸 재잘재잘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민주는 싫은 내색 없이 귀를 기울였다.

"또 던전이랑 몬스터에 대해서 엄청 빠삭하세요. 진짜 모르는 게 없다니까요? 통제팀에서 준 자료보다 더 정확하고... 심지어 자료에도 없는 정보까지 알고 계세요.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역시...."

"역시?"

"...아니에요."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 남자, 단순한 청소부가 아니다.

김민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눈썰미가 좋다고 한들, 시체에 난 칼자국 몇 개로 한 사람의 상태를 낱낱이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엄청난 실력과 경험을 가진 헌터가 아닌 이상.

게다가 던전과 몬스터에 대해 통제팀보다 빠삭하기까지 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놓칠 수 없지.'

김민주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무튼, 걱정 마요. 전 딱히 선생님한테 호감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 그래요? 그럼 준우 씨를 왜 그렇게 매일 같이 찾아온 거예요?"

"...아까 제가 말했죠? 여기 모두가 약자에겐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약하다고."

"네... 그러셨죠."

"소연 씨, 저는요. 그게 정말 개 같아서 참을 수가 없어요."

김민주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하지만 문소연의 눈에는 전혀 미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강자가 돼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선생님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요. 뭐... 그뿐이에요."

말을 마치는 순간 김민주는 아차 싶었다.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된 애한테 이런 말까지 하다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따윈 관심도 없을 텐데.

괜히 분위기만 무겁게 만든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미안해졌지만.

"어... 그러니까 헌터님 말씀은...."

"...?"

"어쨌든 전 여친은 아니라는 거네요?"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

각자 구역의 청소가 끝난 후, 보스 방으로 가기 위해 슬슬 합류하던 참이다.

"왜 꼭 그런 상사 있잖아요. 어떻게든 수작 한 번 부려보겠다고 질척대는 새끼들."

"진짜로요! 저도 예전에...."

저 멀리서 담소를 나누며 다가오는 문소연과 김민주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과 다르게 부쩍 친해진 느낌이다.

고작 30분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자, 다들 아까 설명했다시피 여기 보스는 맹독 몬스터야. 알아서들 잘하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각별히 더 조심해. 그래도 뭐, 피부에 닿지만 않으면 괜찮으니까 너무 겁먹진 말고."

이윽고 모든 팀원이 모이자 박 팀장은 마지막으로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예."

"...아, 네!"

우리보다 한 박자 늦은 대답.

범인은 문소연이었다.

"왜 그래 소연아. 뭐 문제 있어?"

"아, 아뇨. 오늘따라 방호복이 좀 불편해서요."

"이런, 오래돼서 그런가? 어디가 불편해?"

"팔이 잘 안 올라가긴 하는데... 뭐, 작업하는 데 지장은 없을 것 같아요."

문소연이 팔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한상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방호복 슬슬 새것으로 바꿀 때 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저번에 하나 찢어먹어서 이젠 여분도 없잖아요. 협회 가서 예산 좀 올려 달라고 해봐요.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나라고 안 해 봤겠냐. 돈이 없다는데 뭐 어쩌겠어."

"하여간... 일은 죽도록 시키면서 아끼기는 오지게 아껴요."

정말 흔치 않게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내가 입고 있는 방호복이 그나마 새것이었음에도 군데군데 오염된 부분이 눈에 띄었으니까.

"일단은 있는 거로 버텨보자고. 자, 준비됐으면 들어가자."

박 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보스 방으로 들어섰다.

010

010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가장 일반적인 차원형 던전.

지구상의 공간이 아닌 어딘지 모를 이질적인 곳이지만, 함정도 없고 길도 복잡하지 않아 사상자가 가장 적은 던전.

보스 방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소연아? 왜 그래, 소연아!"

박 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스 몬스터, 맥시멈 슬라임을 해체하던 도중 갑자기 문소연이 쓰러졌다.

처음엔 과로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도 꽤나 피곤해했던 기억이 있으니까.

하지만 상태를 확인하자,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뻣뻣해지는 팔다리, 파랗게 변색된 입술. 호흡곤란.

이건 분명히....

"...슬라임을 만졌어. 중독됐다."

"뭐?! 방호복도 제대로 입고 있는데 그럴 리가!"

한상혁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문소연을 똑바로 눕히자, 방호복 옆구리 쪽이 찢어져 있는 걸 바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이, 일단 당장 밖으로 데리고 나가! 나가서 지원팀 호출하고! 준우야! 헌터님이랑 같이 소연이 좀 옮겨줘! 빨리!"

"야, 김준우! 뭐 하고 있어 새끼야! 움직여!!"

한상혁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생님?"

미안하지만 지금 바로 데리고 나간다 한들 늦는다.

맥시멈 슬라임의 독은 치명적이다. 그것도 직접 피부에 닿은 거라면 골든타임은 고작 5분 내외.

물론 지원팀에 해독제가 있긴 하지만 지원팀이 5분 만에 오는 것도, 그렇다고 우리가 5분 만에 지원팀까지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순간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릴 수 있는 확률은....

방법이 없다, 그렇게 고개를 가로젓던 순간이었다.

문소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머릿속에는.

'...최후의 수단.'

왜인지 내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도마뱀 이야기가 떠올랐다.

꼬리 자르기.

자신의 몸을 해하는,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손해가 막심한 수단.

하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수단.

...쯧, 답지 않게.

"김민주."

"네, 네?"

"검 꺼내."

김민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벤토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물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렵지 않아. 그냥 한 번 슥 베는 거야. 할 수 있지?"

"...서, 설마 소연 씨를?"

"아니. 나를."

김민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

그녀는 검을 거두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 뭘 하시려고요!"

"저 새끼 뭐라는 거야!!"

"준우야! 너 대체 왜 그래!"

동시에 여기저기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답답한 놈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들 하시고. 시간 없으니까 빨리."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알았어요."

이내 김민주는 잡다한 생각을 그만둔 듯, 자세를 잡았다.

올곧은 눈빛으로 검을 꾹 움켜쥐길 잠시.

"발무."

[습득 스킬 : 발무]

[스킬 발동]

잠깐, 스킬까지 쓰라곤 안 했....

촤악―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이 배에 새겨졌다.

폭포수처럼 솟구쳐 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시전자를 향한 공격 감지]

[현 시간부로 전투태세에 돌입합니다]

[스킬 발동]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전신이 불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투 중에만 발동할 수 있는 이동 스킬.

청소 일 하면서는 절대 쓸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연 씨를 데리고 지원팀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서 뵙죠."

"무, 무슨 소리야? 여기서 거기까지 택시 타고 가도 30분은 족히...!"

파앙―

박 팀장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만이 귓속을 때려 박기 시작했다.

***

"빨리 오셔서 살았어요."

협회 지원팀 부설, 의료 센터 응급실.

치료를 마친 의료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의식도 바로 찾으셨고... 경과 좀 보다가 돌아가셔도 될 것 같네요.

"가, 감사합니다!"

박 팀장이 아들뻘 되는 의료진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아, 그리고 저쪽 분은...."

"김준우입니다."

"네. 김준우 씨는 가실 때 원무과에서 들리세요. 봉합 비용."

의사가 붕대 범벅인 내 배를 슥 가리켰다.

참 나, 이걸 돈을 받네. 그거 몇 바늘 꿰매는 데 얼마나 든다고....

이내 의사가 자리를 뜨자,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침대로 다가갔다.

죽다 살아난 문소연이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야, 너 진짜 사람 걱정하게 할래?!"

"이놈아! 다친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괜찮아요, 소연 씨?"

"그럼요. 끄떡없어요."

문소연은 히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는 관계없이, 한상혁은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하아, 시발. 팔 좀 몇 번 뒤척였다고 어떻게 방호복이 찢어지냐."

"어허, 병원에서 욕하는 거 아니야."

"욕 안 나오게 생겼습니까? 아니, 솔직히 반년이 넘게 방호복 하나 안 바꿔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요! 참 나, 헌터 새끼들은 뭐 말만 하면 장비 싹 다 새거로 바꿔준다는데! 우린 이게 대체 뭡니까?"

"야, 야 이놈아...."

"아, 제가 뭐 틀린 말...!"

박 팀장의 신호에 한상혁은 그제야 입을 닫았다. 그리곤 뒤늦게 김민주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아니 뭐... 그렇다고 헌터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

"괜찮아요."

김민주는 한상혁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뭐, 다들 현역 헌터의 신경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표정을 보아하니 저 녀석, 지금 그냥 딴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푹 좀 쉬어. 산재 처리는 내가 올려놓을 테니까."

"...해줄까요? 산재."

"당연하지! 엄연히 일하다 다친 건데! 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어, 준우 씨? 어디 가요?"

문소연이 박 팀장의 말을 자르고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바람 쐬러요."

대충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

오가는 의료진으로 꽤나 분주한 복도.

그곳을 가로지르는 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데?'

이내 참았던 미소를 터트렸다.

이건 기회다.

해금을 위한 절호의 기회.

[업화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팀 예산 확대]

예산 부족에 의한 장비 노후.

청소팀의 안전은 언젠간 깨져도 깨졌을 금 간 접시였다.

결국, 팀원이 다친 이상 예산 확대를 건의하기에는 딱 좋은 타이밍이다.

이번 사고를 걸고넘어지면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지원이 들어올 수밖에 없겠지.

'클클클....'

이걸로 벌써 스킬 두 개.

이대로라면 청소팀과 작별할 날도 머지않았다.

***

"뭐야 저 새끼...."

한상혁은 쿵, 소리를 내며 닫힌 문짝을 고깝게 쳐다봤다.

"표정이 엄청 굳어 있으시던데,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당연히 화가 많이 났겠지."

"아, 역시 제가 너무 민폐를 끼쳐서...."

"그게 아니야. 자네가 다쳤잖나."

문소연의 자책에 박 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녀석, 보기엔 나쁜 놈 같아도 동료를 끔찍하게 아끼는 녀석이거든. 암, 딱 보면 알지."

확신에 찬 박 팀장의 표정.

김민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동료를 끔찍하게 아낀다라....'

역시, 저 사람이라면 분명....

김민주는 그렇게 되뇌며 굳게 닫힌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저 새끼, 진짜 보면 볼수록 미스터리 하지 않습니까? 대단한 놈이라고 해야 할지, 미친놈이라고 해야 할지."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문소연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아, 넌 기억이 안 나지. 저 새끼가 너 구했어. 그것도 스킬을 써서!"

"주, 준우 씨가요?"

"그래! 참 나, 내가 청소일 오래 한 건 아니지만 스킬을 쓰는 청소부는 처음...."

"준우 씨가 절 구한 거예요?! 어떡해, 그것도 모르고… 고맙다는 말도 안 했는데...."

한상혁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스킬 어쩌고부터는 아예 머릿속에 입력이 안 된 모양이었다.

"저, 그래서 말인데... 김민주 헌터님."

그러던 와중, 박 팀장이 슬쩍 김민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준우 녀석,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좋은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얼굴은 제 취향이...."

"아, 아뇨. 그게 아니고. 헌터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말입니다."

"...아."

김민주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하지만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헌터라...."

"저 녀석, 솔직히 여기 있기 아까운 녀석입니다. 헌터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던전이나 몬스터 정보는 물론이고 공략법도 웬만한 헌터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작전팀으로 옮겨줄 수 있냐, 그 말씀이신가요."

"네. 힘들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김민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팀장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모습만 봐도, 김준우의 팀 변경은 가능성이 있는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확실히 웬만한 헌터들보다 경험이나 실력 면에서 뛰어나요. 그건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 문제가 있습니까?"

"네. 선생님이 청소팀에 있다는 게 문젭니다."

김민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상혁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 헌터님, 거 말씀이 되게 거슬리시네? 뭐 청소팀에 있으면 올라가지도 못한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죠."

"...뭐요?"

"선생님의 본 실력은 저로서도 가늠이 안 돼요. B급 나부랭이인 저보다 훨씬 낫겠죠. 아마 선생님의 힘은, 선생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작전팀이 아닌 청소팀을 선택하셨어요. 그게 무슨 소리 같나요."

"본인이 이 일을 원해서… 하고 있는 거다?"

"네. 그것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김민주는 팀원들을 한 명씩 둘러보았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사실에, 모두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대체 그 누가 청소 일을 원해서 하겠는가.

까놓고 말해 지나가는 백수한테 물어봐도 거절할 일이다.

하물며 김준우는 당장이라도 헌터가 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놈이 아닌가.

그런 놈이 원해서 청소팀에 남아 있는 거라니.

팀원들은 충격과 감동,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어중간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선생님은 엄청난 실력이 있지만, 협회나 헌터들의 위계에 끼어들기 싫은 거예요. 아니면 동료애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곳보다는 청소팀이 더 마음에 든 걸 수도 있고요."

"그런 거라면… 섣불리 추천할 수가 없겠군요."

"네. 작전팀에 오면 분명히 상위권 헌터가 되겠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상, 강요할 순 없겠죠. 어쩌면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도 있고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이 얘기는 준우한테 비밀로 해야겠습니다."

"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숙연해진 분위기.

그 속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한상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 문득 든 생각인데 말입니다. 준우 그 새끼가 동료를 끔찍이 생각하는 놈이라면.... 지금 설마 협회에 따지러 간 건 아니겠…죠...?"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011

011

널찍한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남자는 상당히 고까운 표정이었다.

딱 봐도 내 방문이 꽤나 불쾌한 듯했지만..., 나 또한 선택지가 없었다.

경영부 직원들한테는 백날 얘기해봤자 위에서 결재가 안 떨어진다는 말이나 할 거고, 그렇다고 청소부 신분으로 깽판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뭐, 다른 걸 다 떠나서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고.'

희끄무레한 머리의 남자를 슬쩍 흘겼다.

그리곤 이내 책상 위에 놓인 명패로 시선을 옮겼다.

명패에 적힌 그 남자의 이름은 서민철.

직책은 무려, 이능차원관리 협회 서울 본부장.

한 마디로 내가 소속된 서울 본부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인간.

'흐음, 서민철이라....'

내 기억으로는 이맘때쯤 새로 부임한 놈이다.

저놈이 본부장 자리를 꿰차자마자 저쪽 라인 놈들이 줄줄이 낙하산을 탔었지 아마.

그만큼 '서민철 라인'이 협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당연히 지금 내 신분으로는 쳐다도 못 볼 위치지만....

승부를 볼 거면 머리부터 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침묵을 지키던 서민철 본부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청소팀의 예산을 늘려 달라?"

"예."

"그런 이야기라면 경영부를 찾아가셨어야지."

대꾸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투였다.

"어느 헌터가 토벌에서 잡몹들을 일일이 상대하겠습니까. 보스만 잡으면 끝인데."

"...아, 너 헌터였어?"

"아뇨. 청소부인데요."

"...."

서민철 본부장의 눈빛이 짧은 순간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면 지금, 청소부가 예산 올려달라고 본부장을 직접 찾아온 거네?"

"정확하십니다."

"팀장도 아닌 일반 사원이?"

"예."

"...그래 뭐, 멋모르고 덤빌 나이긴 하지. 이해해."

본부장은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이지만, 젊어 보인다는 말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청소팀이 돈 쓸데가 어디 있다고? 지출이 많은 것도 아니잖아."

"그 얼마 없는 지출보다 예산이 적으니까 올려 달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 하하! 이런 당돌한 새끼를 봤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이게 지금 어디서...."

"사고가 났습니다."

나는 최대한 무거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물론 진지한 표정도 잊지 않았다.

"방호복이 꽤나 오래됐는데도 새로 살 예산이 없더군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일을 하다가 방호복이 찢어졌고, 결국 팀원 중 한 명이 몬스터 독에 노출됐습니다."

"...난 그런 보고 못 받았는데?"

"뭐, 방금 일어난 일이니까요."

서민철 본부장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주춤했다.

당연히 믿는 눈치는 아니지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일이다.

"청소팀에 돈 아끼고 싶은 거, 솔직히 이해는 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사고는 안 나게 해야죠. 방호복 살 돈도 안 준다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유감스러운 일이긴 한데, 본부도 돈이 없어. 우리라고 안 주고 싶겠냐? 그래도 그거 최대한 골고루 편성한 거야. 청소팀이라고 덜 준 게 아니라."

"돈이 없다고요?"

"그래, 인마. ...하긴, 네가 협회 사정에 대해 뭘 알겠냐. 보니까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돈이 없다, 그 말에 딴죽을 걸 수 있는 직원은 없다.

협회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게 진짜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까.

"아닐 텐데요."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뭐?"

"이번 연도 예산, 어마어마하게 땅기셨잖습니까. 올해 이능운용부에 떨어진 예산만 해도 몇백억이고, 그중 70%가 작전팀에 편성됐을 텐데요."

갑자기 서민철 본부장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본부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거 다 못 쓴다는 거. 무엇보다 올해 '레드 등급' 던전은 한 개도 없었고 말이죠. 뭐, 연말에 기념 토벌이니, 연합 레이드니 하면서 남은 예산 어떻게든 없애려고 할 거 뻔히 아는데... 그럴 바엔 정말 필요한 곳에 조금 더 얹어달라는 겁니다."

"...!"

"어떻습니까.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닌 것 같은데."

경직된 표정.

서민철 본부장은 나를 매섭게 노려보던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말씀드렸잖습니까. 청소부라고."

그와 반대로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건 청소팀만의 일도 아닙니다. 본부장님 입지도 생각하셔야죠. 부임하신 지, 3개월...?"

"...2개월이다."

"네, 2개월. 어렵게 올라간 자리인데 오래오래 하셔야죠. 가뜩이나 대우 안 좋기로 소문난 팀인데, 방호복 살 예산도 없어서 사고가 났다는 걸 시민들이 알면 본부도 꽤나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너 지금 나 협박하냐?"

"그럴 리가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나를 어떻게든 꿰뚫어 보려는 눈빛.

본부장의 얼굴은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서민철 본부장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먹혔다.

"그래서, 얼마를 올려 줬으면 좋겠는데."

"내키시는 대로."

10원이 됐든, 100원이 됐든 올라가기만 하면 나야 그만이니까.

"그럼 대충 얘기 끝난 것 같으니, 전 이만...."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서민철 본부장이 손을 들어 나를 멈춰 세웠다.

"혹시 너, 김민주 헌터랑 아는 사이냐?"

"...그건 왜 물어보시죠."

"안다는 뜻이네."

서민철 본부장은 이내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이번 일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예산 확대는 검토해보고 내일 중으로 연락 주겠다. 그만 가봐."

"...예."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

청소부?

지랄하고 있네.

서민철 본부장은 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사내 회선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 본부장님.」

이윽고 전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수용아. 방금 청소부 한 명이 사무실에 왔다 갔는데... 저번에 네가 말한 그 새끼인 것 같다. 김민주가 검술 배운다던 그 새끼."

「예?! 이런 미친! 어디 청소부 주제에 본부장님을 찾아....」

"아니야. 그 새끼 청소부 아니야."

「...예? 그럼 뭡니까?」

"몰라. 그런데 절대 그냥 청소부는 아니야. 우리 쪽 정보도 다 알고 있는 걸 보면 협회랑 관련 있는 놈인 것 같기도 하고. 방금 나한테 청소팀 예산 확대를 건의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게 진짜 목적은 아닌 것 같아."

짧은 정적.

「...어쨌든 지금은 청소팀 소속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그게 왜?"

「마침 잘 됐습니다. 안 그래도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이대로 계속 기어오르게 둘 순 없으니....」

"본보기?"

「윗사람에게 고개 숙이는 법을 알려줘야죠.」

***

이른 아침.

출근하자마자 박 팀장이 위에서 내려온 공문을 우리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다 함께 공문을 살펴보던 팀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 징계...?"

"시발, 배상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징계라고?!"

문소연이 징계를 받은 것이다.

"헌터님! 이게 말이 됩니까?! 솔직히 이건 아니잖아요!"

"...저도 당황스럽네요."

한상혁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김민주 또한 납득이 가지 않긴 매한가지인 듯했다.

징계 사유는 다름 아닌, 겸업 금지 조항 위반.

'겸업에 의한 피로감 누적이 사고의 원인'이라며 산재 신청도, 배상도 모두 기각.

그렇다.

문소연은 협회 몰래 야간 아르바이트를 해온 것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박 팀장과 한상혁은 알고 있었던 것 같고.

그렇게 피곤해하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뭐, 그건 둘째 치고라도...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공고 가장 밑줄에 딸려온 몇 줄.

'해당 사고는 개인 부주의로 인한 것.'

즉, 장비가 노후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예산 확대 또한 기각.

"하, 시발 진짜...."

공문을 당장이라도 찢어 삼킬 듯한 기세로 종이를 움켜쥐었다.

간만에 진심으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덕분에 문소연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저… 준우 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진짜 괜찮아요!"

"...예?"

"징계라고 해봤자 경고일 뿐이고... 사실 산재는 기대도 안 했거든요."

"...."

얘는 또 뭐라는 건가.

"야 그래도 다시 봤다, 새끼야. 설마 우리 때문에 총대 메고 본부장까지 만날 줄이야. 미친놈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진짜 또라이였네."

"그래 준우야. 이렇게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결과는 이래도 너무 마음에 담지 마라."

"선생님...."

갑자기 나를 위로하는 팀원들.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싶었다.

상당히 어리둥절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뭐, 그건 그렇고....'

이건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다.

큰돈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배상 소송을 한 것도 아닌데 굳이 겸업까지 걸고넘어지면서 기각시킬 이유가 없다.

어차피 남을 돈, 조금 얹어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온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의도적이야.'

하지만 왜?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올 만큼 우리를 고깝게 볼 이유가 있나?

"설마 저 때문은 아니겠죠...?"

그때, 김민주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왜."

"사실 저번에 휴가 쓸 때, 팀장님한테 청소팀 이야기를 했거든요. 워낙 위계를 중시하는 새끼라 당연히 안 좋게 볼 거 같긴 했는데… 혹시 그거 때문에 괜히 본보기로...."

"잠깐, 너희 팀장 이름이 뭐야."

"작전 1팀에 이수용 팀장이에요. 혹시 아는 사람이세요?"

"...하, 하하."

그래, 어쩐지 시발.

어떻게 된 건지 이제 알겠네.

이수용.

서민철 본부장 라인의 대표적인 인물.

낙하산으로 팀장을 달았지. 그것도 최정예인 작전 1팀장을.

내가 그놈을 잊을 리가 없지. 당시의 나도 그 새끼 팀이었으니까.

실력도 없는 주제에 완장질이나 하던 놈.

'그래서 김민주를 아냐고 물어봤던 거구만.'

확실하다. 그 새끼가 서민철 본부장과 작당한 거다. 괜히 기어오르는 것 같으니까 본보기를 보여준다는 생각이겠지.

'이런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덩달아 손에 있던 서류가 완전히 구겨졌다.

그래... 이게 대답이라 이거지?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

이 방법만큼은 쓰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지.

'...…포기해야지, 뭐.'

별수 없잖아.

012

012

출근한 지 10분도 채 안 된 시각.

아직 작업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팀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다들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분위기만 더 측은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미 본부에서 내려진 결정을 바꿀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쯧, 나도 마음 같아선 예산만이라도 좀 올려달라고 따지고 싶긴 한데....'

매우 유감스럽지만 지금 내 신분으로는 서민철 라인을 건드려봤자 좋을 게 전혀 없다.

앞으로의 해금을 위해선 본부장과의 관계가 핵심인데, 괜히 적으로 돌려봐야 나만 손해고. 대놓고 본보기가 들어온 이상 다시 협상하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

그래. 앞일을 생각하면 괜히 안 좋게 엮일 바엔 아예 엮이지 않는 게 낫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해금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예산 협상은 물 건너갔다고 해도, 뭐... 사비로 지원금이나 넣어봐야지. 협회는 외부 지원금도 예산으로 편성해주긴 하니까.

문제는 아직 월급날이 한참 남았다는 건데.

지금 잔고는 생활비 하기에도 빠듯하고, 투잡을 뛰기엔 이번처럼 괜히 꼬리를 잡힐 것 같다.

들키지 않고 돈을 벌 수단이라면....

'역시 그거밖에 없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팀장님."

"어, 왜?"

"저 오늘 연차 쓰겠습니다."

"응? 갑자기?"

"뭐, 뭐 하시려고요? 설마 다시 찾아가려는 건 아니죠?"

뭘 예상했는지 김민주가 당황하며 나를 가로막았다.

일일이 설명해 주긴 너무 귀찮았고, 또 마땅한 핑곗거리도 없었다.

"...."

"...선생님? 선생님!!"

때문에 그녀를 가뿐히 무시한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

서초구 삼성역 근처.

여러 회사 건물들이 밀집된 그곳은, 때마침 점심시간을 맞아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앞으로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슬슬 이때쯤일 텐데....'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오후 1시 22분 하고도 57초를 가리켰다.

동시에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초침이 3칸을 더 이동하던 그 순간.

지이잉―

차원이 요동치는 소리와 함께 던전이 출몰했다.

"뭐, 뭐야!"

"더, 던전이다!"

"빨리 협회에 신고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거리.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이 되어 대피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두가 던전에서 멀어졌다.

한편 난 이 흐름에 역행했다.

인터셉트.

신고를 받은 헌터가 출동하기 전, 제3 자가 토벌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던전을 토벌하는 행위.

대개 한 곳에 죽치고 있던 프리랜서 헌터들이 주로 시도하는 비매너 토벌.

원칙상 모든 헌터들은 던전 토벌을 하기 위해선 협회에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간혹 돈이 목적인 놈들이 인터셉트를 시도하곤 한다.

뭐,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급하게 토벌을 해야 하니 목숨을 잃는 놈들도 한둘이 아니지만....

나한테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다.

'토벌은 진짜 간만이네.'

여태까지 천 개가 넘는 던전을 토벌했음에도 긴장하고 만다.

작전팀이 도착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5분. 그 안에 토벌을 완료해야 한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앞서 다시 한번 기억을 되짚었다.

여긴 퍼플 등급의 동굴형 던전이자, 과거 내가 작전 기획을 했던 던전. 보스는 '기간틱 골렘'.

E급 헌터들이라면 1시간쯤 걸릴 던전이다.

그렇다면 대충....

'10분 안에 끊어볼까.'

타이머를 맞추고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퍼플 등급이라고 해도 하급 방어 스킬 하나 없는 지금 상태로는 몬스터한테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가겠지만....

다행히 던전 루트부터 몬스터의 공격 패턴, 약점은 이미 훤히 꿰고 있다.

전투 중 발동되는 하이퍼 부스트로 최대한 공격을 피하는 것에 집중하다가, 틈이 보이는 순간.

[습득 스킬 : 원 카운터]

[약점 공격 시, 대미지 3,000% 증가]

최근 해금한 '원 카운터' 스킬로 한 방을 노린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나는 그렇게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며, 방금 마트에서 산 곡괭이와 삽을 들고 던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시작된 10여 분간의 쾌속 토벌.

"이야, 이거 생각보다 빡세네."

이마에 맺힌 땀을 슥 닦아냈다.

솔로 토벌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지 않았다.

확실히 스킬이 없는 게 컸다.

고유스킬... 아니, 하다못해 메인 스킬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초 단위로 토벌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어이구, 벌써들 오셨네.'

이윽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 이후, 나는 쉴 틈도 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바쁘게 이동하며 인터셉트 한 던전은....

퍼플 등급의 '메탈릭 보어' 던전.

네이비 등급의 '주니어 서큐버스' 던전.

네이비 등급의 '혼망귀' 던전.

그린 등급의 '차원 개미' 던전까지 총 4개 던전이었다.

작전팀 소속의 헌터 한 명이 일주일 동안 토벌하는 던전도 평균 3~4개인 걸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가로채기가 아닐 수 없다.

뭐, 그래봤자 하급 던전이라 수익은 얼마 나오지도 않겠지만.

해가 저물 때쯤엔 인근 구역에 협회 차량이 쫙 깔렸다. 보아하니 본부는 때아닌 비상이 걸린 모양이었다.

하긴, 누군지도 모를 놈한테 던전을 무려 4개나 빼앗겼으니 나 같아도 노발대발할 일이다.

무엇보다 걸리면 감봉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소 해고. 재수가 없으면 손해 배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터셉트 한 인간이 사실 청소부일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이상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내일도 이어서 한다면 어느 정도는 벌 수 있을 테니,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 보자, 내일 출몰할 던전은....'

기억을 더듬으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이틀간의 연차가 끝나고, 다시 청소팀으로 출근한 오늘.

출근지에는 여전히 나를 빼고 모두가 먼저 모여 있었고.

'뭐, 뭐야?'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손님과 마주했다.

"크흠."

나를 보자마자 헛기침부터 내뱉는 남자.

다름 아닌 작전 1팀의 이수용 팀장이었다.

작전 팀장이 청소팀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저놈이 여기를 왜....'

젠장, 설마 눈치챈 건가?

나는 곁눈으로 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그건 박 팀장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 어쩐 일이신가요?"

"견학입니다."

이수용 팀장이 점잖은 말투로 대답했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견학이요…?"

"가끔은 이렇게 다른 팀과도 교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서로를 더 이해하고 동료애도 돈독해지죠."

"아, 예...."

지랄.

박 팀장을 제외한 세 명의 입이 동시에 움직였다.

다행히 이수용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난 없다고 생각하고 평소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귀찮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쯧, 귀찮게 됐네....

이 타이밍에 작전 팀장이 직접 행차했다는 건, 그 의도가 너무 명백했다.

요 이틀간의 인터셉트.

그 범인으로 날 의심하고 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수용 팀장의 시선은 대놓고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꼬리가 잡힐 만한 건 없었을 텐데... 그냥 정황상 찔러 보는 건가?'

아무래도 본보기가 들어오자마자 인터셉트가 일어났으니....

덕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물론 티를 낼 순 없었다. 괜히 의심에 힘만 실어줄 테니.

"자, 자… 그럼 다들 작업 시작할까?"

박 팀장의 지시에 이윽고 모두가 던전으로 들어섰다.

불편한 손님이 낀 덕에 던전 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수용 팀장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정도랄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우리 뒤를 따라올 뿐이었다.

그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평소처럼 작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일반 몬스터가 너무 많네. 이거 다 해체하려면 좀 걸리겠는데? 상혁아, 리미트 얼마나 남았냐?"

"한 시간이요. 서두르면 넉넉합니다."

"김민주. 약품 남은 거 좀 있냐? 내 거 다 떨어졌어."

"네. 좀 남았어요. 농도는 어떻게 할까요?"

"60%로 맞춰줘. 살점이 완전히 굳어서 좀 세게 가야 할 것 같아. 아, 걸레도 하나 새거로 갖다줘."

"소연아, 가스 수치는?"

"제곱미터당 150마이크로그램이요. 부패가 상당히 빠르네요."

"방독면, 정화통 한 번씩 갈자. 그… 이 팀장님 거도 누가 좀 갈아주고."

"한상혁. 거기 작업 다 됐으면 가서 소연 씨 해체하는 것 좀 도와줘."

"지금은 안 돼. 통로에 피가 너무 많이 튀어서 한 번 더 닦아야 할 것 같다."

"소연 씨는 제가 도와줄게요. 선생님은 상혁 씨랑 마무리해주세요."

던전 안에서는 정돈된 대화만이 오고 갔다.

그 와중에도 이수용 팀장은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로.

"아, 민주야."

그때, 이수용 팀장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

"요 이틀 동안 인터셉트 난 거 아냐?"

동시에 어깨가 움찔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민주는 지금 날 헌터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연차를 낸 기간 동안 인터셉트가 났다고 해버리면....

아니, 김민주뿐만이 아니라 팀원 모두가 눈치챌 게 분명하다.

'젠장... 대놓고 떠보겠다, 이건가.'

이거 일 났네....

"그런가요. 그거 헌터들 반발이 장난이 아니겠네요."

하지만 예상외로 김민주는 무관심한 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렇지 뭐. 본부장님도 상당히 화가 나셨고. 눈에 불을 켜고 찾고는 있는데… 이게 쉽지가 않네."

"네."

"그래서 본부장님이 이번에 인터셉트 잡아 오는 사람한테 보상을 크게 한다시지 뭐냐. 역시 통이 크시다니까."

"...보상이요?"

"어. 헌터가 잡으면 랭크 심사에서 가산점. 그리고 다른 팀에서 잡으면 인사이동.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청소팀 중 누군가가 인터셉트 한 놈을 잡으면 다른 팀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거지."

순간, 일동 움직임이 멈췄다.

"뭐, 민주 말고도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 있으면 얘기해주십쇼. 가령, 주변에 갑자기 이틀을 쉰 놈이 있다거나… 뭐 그런 거."

"...."

끝이다.

여기서 인사이동을 걸고 팀원들을 이용할 줄이야. 저렇게까지 나오면 선착순 싸움이다.

먼저 찌른 놈이 이기는 싸움.

쯧, 낙하산이긴 해도 머리는 좋은 새끼네....

"아 맞다! 준우야, 너 어제 다친 데는 괜찮냐?"

"...?"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박 팀장이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게, 이놈아. 내가 몬스터 해체할 땐 조심하랬잖아. 요즘에 칭찬 좀 들었다고 방심하긴!"

"...맞아 새끼야. 너 해체하면서 노래 부를 때부터 알아봤다!"

"그, 그러니까요, 준우 씨. 그래도 어제 다쳤으니까 다행이지, 오늘 높으신 분도 와있는데 다쳤어 봐요. 청소팀 망신이라니까?"

...?

뭐야.

다들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그나저나 이 팀장님이 참 좋은 제안 해주셨는데... 정말 아쉽게도 제 주변엔 딱히 짚이는 놈이 없군요. 이야, 이것 참 아깝게 됐습니다. 우리 팀이었으면 바로 꼰지르고 다른 팀 가는 건데. 하하하!"

"그, 그러게 말이에요."

"혹시 주변에 의심 가는 놈 있으면 제가 바로 갖다 바치겠습니다! 저 한상혁, 의리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입니다!"

나는 열심히 눈을 굴리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해보려 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

그런 와중에 김민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013

013

이수용 팀장이 청소팀 견학을 마치고 밤늦게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청소부 놈이 출근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오늘.

마침 인터셉트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정황상 그놈이 확실했음에도 증거가 없던 탓에 요 며칠간 이가 바득바득 갈렸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감히 청소부 주제에 작전팀을 상대로 이빨을 세우다니.

대가를 톡톡히 치러줄 생각으로 이수용 팀장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본부장님! 확실합니다. 그 새끼예요. 그 새끼가 출근하니까 인터셉트가 안 일어난...."

「수용아.」

"예!"

서민철 본부장이 말을 끊었음에도 힘차게 대답했다.

「청소팀, 예산 주자.」

"...예?"

그리고 날아든 예상치 못한 답변.

이수용 팀장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확실한 정황도 있겠다, 그 새끼 잡아서 징계 때려야죠! 설마 눈감아주실 생각이십니까?!"

「방금 말이다. 익명으로 이능운용부에 지원금이 입금됐다. 그것도 청소팀 앞으로.」

"...지원금요?"

「2,000만 원. 큰 금액은 아닌데… 이번 인터셉트 당한 던전의 추산 이익도 그쯤 된다더라.」

"그, 그럼 더 확실한 거 아닙니까? 인터셉트가 일어나자마자 청소팀 앞으로 같은 금액이 입금된 거잖습니까. 이건 누가 봐도 범인이 정해져 있잖아요!"

이수용 팀장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됐다.

청소팀에 대한 예산 확대 기각.

그 직후에 발생한 인터셉트. 그리고 같은 금액이 청소팀 앞으로 입금.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는 명백한 상황이지 않은가.

「범인이 확실해져서 더 문제야. 던전을 인터셉트 하는 청소부… 넌 이게 말이 된다고 보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대로 생각해봐. 너 같으면 던전을 인터셉트 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청소팀에 남아 있겠냐고.」

"...."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이수용 팀장은 쉽사리 대답을 뱉지 못했다.

「나 같으면 절대 안 남아 있어. 당연하잖아? 올라갈 힘이 있으면서, 누가 그런 더러운 일을 하려고 하겠냐.」

"화, 확실히 그렇기는 한데...."

「능력뿐만이 아니야.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어. 중간 직급 다 쌩까고 본부장부터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청소부 신분으로 협회 사정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대놓고 자기가 범인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듯한 이 행동.... 확실하다 수용아.」

서민철 본부장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지금 청소팀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있는 거야.」

"그, 그럼 대체 그 청소부 놈은…?"

「전에도 말했듯이 협회 내부 사람이겠지. 다만… 상당히 거물 라인인 것 같다.」

그 말에 이수용 팀장의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협회장님 라인은 아니겠죠?"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내가 본부장 달 때도 달갑게 보진 않으셨으니까. 그때 협회장님이 꼬투리 하나라도 걸리면 바로 모가지라고 경고까지 했잖냐.」

'어쩐지....'

이수용 팀장은 그제야 오늘 있었던 일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같은 팀원들도 그놈이 범인인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대놓고 감싸주지 않았던가. 심지어 인사이동까지 내걸었는데 말이지.

'이미 그놈이 협회장 라인인 걸 알고 있었다는 건가....'

젠장,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렇게까지 대놓고 나오면 의심해봤어야 했는데.

이수용 팀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이거 아무래도 경고하는 게 아닐까 싶다. 지켜보고 있으니까 목 잘리고 싶지 않으면 일 똑바로 하라고. 너도 알겠지만, 내 모가지 떨어지면 너도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한다.」

잠자코 듣기만 하는 중이었지만, 이미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수용 팀장은 고개를 떨어트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수용아, 이거... 우리 아무래도 잘못 건든 것 같다.」

***

다행히 인터셉트 건에 대해선 흐지부지 넘어간 모양이었다.

벌써 이틀이 더 지났는데도 별다른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뭐, 나야 다행이다만....'

남은 건 입금한 지원금이 언제쯤 편성이 되냐는 것뿐이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게 내심 불안했지만, 설마하니 대놓고 꿀꺽하진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의 마지막 작업을 끝내고 막 던전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저건 또 뭐야...."

던전 앞에 놓인 엄청난 양의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던전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없던 것들이다.

"팀장님, 여기로 뭐 배달시키셨어요?"

"…아니?"

모두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다.

또 뭔가 본보기가 들어온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뭐, 뭐야. 이거 방호복인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한상혁이 상자를 바로 뜯어본 것이다.

"약품도 있어요. 1년은 넘게 쓰겠는데요?"

"정화통에 장갑… 뭐가 엄청 많네. 본부에서 지원해준 건가?"

"에이, 설마요."

각자 하나씩 상자를 뜯어보던 와중에, 나는 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협회에서 내려온 공문이다.

보아하니 드디어 지원금이 편성된 모양이었다.

내용은 뭐, 안 봐도 뻔했다.

익명의 지원자가 보낸 물건이다, 대충 그렇게 쓰여 있겠지.

그나저나 2,000만 원어치치곤 꽤 물건이 많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충 공문을 훑어보던 순간.

'...뭐야.'

내가 0을 잘못 셌나 싶어, 손가락을 들고 천천히 숫자를 짚어갔다.

'일, 십, 백, 천, 만... 이런 미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추가 예산 편성액.

200,000,000원.

내가 입금한 지원금에서 무려 10배나 뛴 금액.

"대, 대체 왜...?"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이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돈이란 말인가.

"혼자 뭐라는 거야 줘봐, 나도 보게."

그 순간, 한상혁이 들고 있던 공문을 낚아챘다. 동시에 공문에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소리 내어 읽었다.

"협회 내부에서 다시 한번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예산 부족에 의한 장비 노후가 이번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능차원 협회 서울 본부는 약소하게나마 예산을 추가 지급하기로 결정하였고...."

"뭐?!"

"추가 예산이요…?"

박 팀장과 문소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아직 밑에 몇 줄이 더 남아 있는지, 한상혁은 계속해서 그것을 읽어나갔다.

"또한, 문소연 님의 사고에 큰 유감과 사과를 표하며, 소정의 위로금을 전하려 합니다. 물론 이것으로 귀하가 겪은 상처를 위로할 순 없겠지만...."

그러다 마지막 문장에 다다라선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 산재 배상 지급액...."

100,000,000원.

여기도 1억이었다.

그 액수에 문소연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 이내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그 눈은 곧 나에게로 향했다.

"이, 이거 설마 준우 씨가…?"

"...아닌데요."

내가 대답하자 한상혁의 시선 또한 나에게로 쏠렸다.

"야, 너 대체 무슨 짓을...."

"나 아니라니까."

어리둥절한 건 나 또한 매한가지였기에, 억울한 마음으로 분을 토하던 그때.

"이야, 협회가 입장을 바꾸다니, 오래 일하고 볼 일이구먼!"

박 팀장이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티, 팀장님! 팀장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본부에서 내려진 결정이 바뀔 리가 없잖아요! 그것도 이런 금액…!"

"뭘 바뀔 리가 없어, 이놈아. 공문에도 쓰여 있잖냐. 다시 판단했다고."

박 팀장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니까 우린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되는 거야. 누가 뭔 짓을 했느니… 우린 그런 거 모르는 거다."

박 팀장은 말없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한상혁은 아직도 묻고 싶은 게 많이 남아 있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닫았다.

"그나저나 이거 다 사무실로 옮겨야 하는데.... 에잇, 놈들도 참. 이왕 주는 거 사무실에다가 갖다 놓지!"

"우리도 사무실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쓸 일이 없어서 문제지만."

박 팀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김민주가 입을 열었다.

"위치가 어디예요?"

"예, 예?"

"선생님이랑 제가 가져다 놓을게요. 다른 분들은 퇴근하세요."

"에이, 그래도 둘이서만 옮기는 건 아니죠. 저희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뇨. 저희 둘이 할게요. 괜찮죠, 선생님?"

"...안 괜찮다고 하면 안 해도 되냐?"

김민주가 대답 대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나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때.

[해금 조건 달성]

[던전 청소팀 예산 확대]

[습득 스킬 : 업화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선생님이죠?"

마지막 상자를 들고 어둑한 거리를 걸어가던 중.

문소연이 뜬금없는 말을 꺼내 들었다.

"뭐가?"

"요 이틀간 일어났던 인터셉트요. 선생님이 한 거잖아요."

미간이 꿈틀거렸다.

앞서가던 걸음을 멈춘 채 뒤로 돌아 김민주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하면, 뭐 어쩌려고?"

"무서운 표정 짓지 마세요. 제가 설마 가산점 받으려고 선생님을 찌르겠어요?"

"그럼 굳이 말을 꺼낸 이유가 뭔데."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날카로워졌다.

"이번 배상금이랑 예산, 선생님이 인터셉트로 번 돈을 지원한 거죠?"

"...알고 있었냐?"

"저뿐만 아니라 팀원들도 다 알고 있을 거예요. 선생님이 곤란해지실까 봐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뭐, 모를 수가 없죠."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미 다 들켰다니. 나름 철두철미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엄청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렇겠지. 갑자기 2억 원이 생겼는데 누가 안 고마워하겠냐."

"아뇨. 돈을 떠나서요."

김민주가 싱긋거렸다.

"그래도 이번엔 운이 좋았어요."

"그래, 운이 좋았지. 다들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안 들켰으니."

"낭중지추라는 말, 혹시 아세요?"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뜻이야 알고 있다만, 웬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선생님의 능력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수준이에요. 이번에는 어떻게 넘어갔다고 해도 다음에는 분명히 협회 눈에 띌 거예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청소팀에 남아 있는 건 힘들겠죠."

"...그래?"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혹시 위에 잘 얘기해서 작전팀으로 보내주겠다는 뜻인가?

그런 거면 빨리 말하지!

"하지만 선생님은 청소팀에 계속 있고 싶으시잖아요. 절대 작전팀으론 가고 싶지 않잖아요."

"...어?"

"저도 도와드리고 싶어요. 선생님이 천년만년 청소팀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얘, 얘가 지금 뭐라는 건가.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저주를 쏟아붓는 이 녀석의 말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물론 저 같은 B급 나부랭이가 도움이 될 리는 없겠지만 제가 A랭크가 되면… 아니, 더 강해지게 되면 그땐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

"지금은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거....

나 엿 먹이는 거 맞지?

014

014

아무래도 작전팀의 예산을 빼갔다는 사실이 헌터들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전에는 그냥 있는 둥 없는 둥 무시했다면 지금은....

"아 씨, 걸리적거리게."

"아, 묻었어! 개 더럽네 진짜."

대놓고 청소팀을 씹어대기 바빴다.

오늘 일정의 첫 번째 던전.

내 출근과 동시에 토벌이 끝난 건지, 마침 헌터들이 던전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두 명의 젊은 헌터가 불쾌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야, 쳐다본다."

"지들이 쳐다보면 뭐 어쩔 거야. 참 나, 꼴에 또 존심은 있다고...."

"그러게 왜 남의 돈을 건드려, 건드리긴. 찬물 더운물 구분도 못 하면서 무슨 회사를 다니겠다고. 쯧."

면전에 쏟아지는 비난.

문소연과 한상혁은 벙찐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조롱을 당하는 건 두 사람도 처음인 모양이다.

아무튼, 두 헌터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부러 걸음걸이까지 늦추며 연신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려댔다.

다행히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게 맞는 대처였고, 나 역시 무시할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저러니까 못 배운 티 난다는 거 아니야."

"솔직히 청소일 하는 거 안 쪽팔리나? 나 같으면 차라리 알바를 하겠다."

"팔자야 팔자. 천년만년 청소나 할 팔자."

"이, 이런, 개 씨...."

개인적으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이 들려오기 전까진.

참다못한 내가 그들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너희들 어디 소속이야."

두 헌터 뒤에서 김민주가 등장했다.

"묻잖아. 어디 소속이냐니까?"

"넌 뭐야?"

김민주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우습게 보인 모양이다.

"어디 소속이냐고? 네가 말하면 알아?"

"...야, 야!"

"아, 놔봐! 너 근데 왜 반말이냐?"

"벼, 병신아! 선배님이잖아!"

"...뭐?"

"우리 팀 김민주 선배!"

다행히 눈치가 빠른 한 명이 나머지 한 명을 다급하게 말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두 명.

김민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팀이었구나."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두 헌터의 허리가 90도로 접혔다. 하지만 김민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뭐가 죄송한데?"

"제가 선배님인지도 몰라뵙고...."

"그게 왜 죄송해? 나도 너희가 우리 팀인지 몰랐는데."

"...예?"

"순서가 틀렸잖아. 너희는 날 못 알아본 걸 사과하기 전에...."

다정다감했던 목소리가 어느새 시퍼렇게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김민주의 눈빛이 그들을 관통했다.

"인간이 덜된 걸 사과했어야지."

두 헌터는 침묵했다.

그렇게 김민주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던 끝에 슬슬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미안해요."

김민주가 우리에게 사과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놈들일 거예요. 저도 모르는 얼굴들이니."

"신입이라… 그럼 화날 만도 하겠네."

기분이 좋진 않아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남을 예산, B급 이상 헌터들이야 아무 상관 없다지만 신입들에겐 얘기가 달랐으니까.

2억 원이라는 거금이 빠졌으니 무언가를 줄이긴 해야 했는데, 그렇다고 고 랭크 헌터들의 수당을 깎을 수는 없었겠지.

그러니 피해는 자연스레 D, E급 헌터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냥 사람이 덜된 거죠. 손해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도 않을 텐데. 이렇게 보면 신입 중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놈들이 꼭 한 명씩 있더라고요. 실상은 E랭크도 겨우 받은 주제에.... 아무튼 정말 미안해요. 제가 후배 교육을 못 한 탓이에요."

"아, 아니에요. 저흰 괜찮아요. 딱히 신경 안 써요."

문소연이 애써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김민주는 그 이상의 말을 아꼈다.

이미 들은 말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최소한 괜찮은 척은 할 수 있을 테니까.

"어이고, 언제 다들 모였대?"

그때, 다른 곳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있던 박 팀장이 뒤늦게 합류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는 박 팀장은 여전히 호쾌한 목소리였다.

"헌터님은 오늘도 와주셨구만! 그럼 바로 작업 시작할까요?"

박 팀장의 말에 김민주가 쓰게 웃었다.

김민주가 출근한 지도 일주일이나 되었다.

배움이 빠른 건지, 이젠 거드는 수준이 아니라 어엿하게 한 명분의 일을 소화했다.

이젠 그냥 청소팀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아뇨. 오늘은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음?"

그녀는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팀원들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이다.

무려 일주일 동안 헌터가 청소팀을 도와 청소일을 했다.

그게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인사를 하는 김민주에게 왜 가냐는 둥, 미련이 남는 물음을 던질 필요는 없었다.

"이제부턴 저한테 시간을 좀 써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요.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아녜요. 덕분에 좋은 팀을 만날 수 있었으니 제가 더 감사하죠."

"뭐 누구 죽어? 갈 사람 가는 건데 분위기가 왜 이래."

"인마! 그만큼 정들었다는 거 아니냐."

"언니...."

문소연의 아련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언니라니, 언제 또 그렇게 친해졌대.

"나중에 꼭 얼굴 보러 와요."

"그럼요."

김민주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소소히 작별 인사를 건넸지만, 아쉽게도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녀 또한 나에게 인사를 받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김민주가 청소팀을 떠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나 때문이었으니까.

-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마.

어젯밤, 나는 김민주에게 그 말을 전했다.

김민주는 그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금세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나오지 말라는 말은 곧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김민주는 직접적인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솔직히 내가 가르칠 게 없었다.

그보다는 가지고 있는 걸 더 갈고 닦을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팀으로 복귀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토벌 스케줄을 정해줬다.

국내 최초로 S랭크를 달성했던 나의 스케줄 그대로. 내가 가진 모든 정보, 모든 경험을 토대로 한 일정이다.

심지어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 목록까지 전부 알려줬으니, 잘 소화만 한다면 A랭크 정도는 반년 안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쯧, 내가 미쳤지. 이걸 꽁으로 알려주다니. 민간 길드에 팔았으면 최소 몇억은 받았을 텐데....'

뭐, 말은 그렇게 해도 당연히 그럴 마음은 없었다.

지금의 나는 국내 최초 S랭크, 세계 최초 SSS랭크 같은 커리어를 쌓을 수가 없다.

당연히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그것들을 달성하겠지.

어차피 딴 놈한테 내어주느니, 차라리 김민주에게 넘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놈들한테 넘기는 것보다야 뭐.

물론 자길 도와주면 천년만년 청소팀에 남아 있게 해주겠다, 그런 개소리 때문은 아니고.

김민주의 랭크가 올라가면 그만큼 영향력도 올라간다는 뜻이고, 이후에 그 영향력을 이용한다면 해금 조건을 달성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한 마디로 나는 김민주를 최고의 헌터로 키워서, 협회와의 협상을 위한 장기 말로 써먹을 생각이다.

'전생에선 쓰다 버리는 도구라고 했었지....'

미안하지만 이번 생에도 넌 도구일 뿐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탓하려면 평생 나한테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네 운명을....

"선생님."

"…어? 어, 왜."

"고마워요. 진심으로."

"...."

머쓱한 기분에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알았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 조금 이따가 토벌 있잖아."

"...네."

김민주는 아쉬운 듯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에 또 올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민주는 등을 돌렸다.

***

김민주가 청소팀을 떠난 지 고작 하루.

고작 하루 만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거...."

가장 먼저 본 한상혁이 말끝을 흐렸다.

나름 경험이 많은 그 또한 이런 상황은 처음인 듯했다.

"대체 뭔 지랄이 난 거냐?"

청소 작업을 위해 방금 막 들어온 던전.

그런데 던전 상태가 완전히 엉망이었다.

몬스터 시체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고, 통로 전체가 피와 점액으로 뒤범벅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병신… 이라 쓴 거 맞지, 이거?"

몬스터 피로 쓴 듯한 온갖 욕설들까지.

이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 새끼들 짓이네."

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김민주의 후배들.

그 새끼들이 김민주에게 깨진 후 괜히 우리에게 분풀이한 게 분명했다.

"이건 너무하잖아요...."

"허, 참...."

문소연과 박 팀장은 푹 잠긴 목소리로 분을 토했다.

'쯧, 정성이다 이것도.'

토벌하고 복귀하기 바빴을 텐데 짬 내서 손수 이런 짓까지 하다니.

"민주 언니한테 연락해볼까요?"

"바쁠 겁니다, 그 녀석."

"야, 김준우! 따지러 가자! 이건 시발, 매너가 아니잖아!"

한상혁이 소리쳤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매너는 얼어 죽을.'

언제부터 청소팀한테 그런 걸 지켰다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따지러 가도 놈들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야. 오히려 가서 욕이나 더 먹지 않으면 다행이지. 상황도 상황이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자."

"뭐?! 넌 이 꼴을 보고도 넘어가자는 말이 나오냐? 화도 안 나?!"

"안 넘어가면 네가 뭘 어쩌게. 이런 건 반응 안 하면 알아서들 관둬."

나는 일부러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흥분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한상혁은 여전히 씩씩거렸지만 딱 그뿐이었다.

작전팀과 청소팀이 대결 구도가 되는 건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다.

작전팀은 청소팀과 가장 연관이 깊은 팀이고, 또 청소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팀이니까.

괜히 눈 밖에 났다가는 앞으로의 해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뭐, 그놈들은 우리가 선빵을 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애들 장난쯤, 한 번 눈 감아 주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래… 대선배님이 참아줘야지.'

…라고 생각한 지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흘째에도 그 새끼들은 그만두지 않았다.

"진짜...."

문소연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던전이 워낙 난장판이라 항상 리미트에 간당간당하게 작업해야 했고, 그건 육체적으로 꽤나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문소연은 그런 것보다, 입에 담기도 힘든 낙서와 그림들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들어했다.

"팀장님, 이건 진짜 아닙니다! 작전팀 가서 지랄을 해서라도 잡아 올 겁니다!"

"...아서라."

"아, 팀장님!!"

"이미 내가 한 번 갔다 왔어. 그쪽 팀장하고 이야기를 좀 해볼 생각이었는데, 며칠 출장을 갔다더군. 놈들은 준우 말대로 자기들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고."

박 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한상혁도 이번엔 물러설 수 없는 듯했다.

"그, 그럼 민주 헌터님한테라도 이야기를...."

"됐어."

한상혁이 핸드폰을 꺼내 드는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뭐?"

"됐다고. 연락하지 마."

"참 나. 뭐, 또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자고? 우리가 일하러 왔지 욕 처먹으러 온...."

분통을 터트리던 한상혁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하던 말을 끊고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마. 내가 갈 거니까."

"...."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던전을 벗어나고 있음에도 말리는 이는 없었다.

"아, 그리고...."

문득 한 가지 깜빡한 게 떠올랐다.

"여기 청소하지 마세요."

그 말을 모두에게 남기고 던전을 나와 큰길로 들어섰다.

정말이지, 열정과 끈기로 뭉친 대단한 놈들이다.

3일 내내 이 지랄을 하는 정성도 대단하고, 헌터씩이나 돼서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도 대단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대단한 건.

[습득 패시브 : 결벽증]

[패시브 발동]

나를 진심으로 빡치게 했다는 것이다.

개 같은 새끼들....

'안 그래도 힘들어 뒤지겠는데, 하루에 15시간을 일하게 만들어?'

덕분에 그동안 막차 다 놓쳤다 빌어먹을 새끼들아.

015

015

협회 서울 본부.

이능운용부 작전 1팀 사무실.

회귀한 내겐 너무나 익숙한 곳의 문을 열었다.

"야, 야 저기 또 왔다."

"뭐야. 오늘은 다른 놈인데? 저번엔 뭐시기 팀장이었잖아."

곧바로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얌전히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다. 찾으러 다닐 수고는 덜었으니까.

"어… 어떻게 오셨어요?"

그때, 한 젊은 남자가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 일과는 관련 없는 놈인 듯했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사무실 안을 살폈다. 그리곤 이내, 저 구석에서 익숙한 얼굴 두 개가 보였다.

"저기… 실례지만 어떻게 오신 건지...?"

"이수용 팀장 어디 계십니까?"

"...출장 가셨는데요."

"언제 오시죠?"

"글쎄요, 그것까진 잘...."

"그래요… 그거 다행이네."

고개를 끄덕이곤 철컥, 사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두 새끼들을 똑바로 노려보며 사무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와 눈이 마주친 두 놈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야, 야. 이쪽으로 오는데?"

"올~ 거의 뭐, 한 대 칠 기세...."

퍽. 쾅!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파열음이 한 차례.

무언가가 벽을 들이박는 충격이 한 차례.

그리고 이어서.

후두둑―

벽에 금이 가며 잔해가 부스러졌다.

"...뭐, 뭐야!"

옆에 있던 놈은 뒤늦게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그의 친구는 부서진 벽에 몸을 기댄 채 정신을 잃은 뒤였다. 목이 반쯤 돌아간 상태로.

"너,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짝―

뺨을 후려갈기자 억,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몸이 크게 휘청였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네, 네크로맨서!"

[고유 스킬 : 네크로맨서]

[스킬 발...]

짝―

"지랄하고 있네."

누구 앞에서 겁도 없이 스킬을 쓰고 있어.

이번엔 버티기가 조금 힘들었던 건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는 그 앞으로 몸을 낮췄다.

"헌터 교육 안 받았냐? 어디 던전 밖에서 스킬을 써. 그것도 일반인을 상대로."

남자는 짐짓 놀란 얼굴이었다.

청소부가 헌터 규정을 알고 있는 게 당황스러운 거겠지.

"누, 누가 할 소리! 감히 헌터한테 폭력을 써?! 너 이러고도 그냥 넘어갈... 히익!"

다시 한번 손을 들자, 곧바로 몸을 웅크렸다.

에휴, 고작 싸대기 몇 대에 겁먹는 새끼가 무슨 헌터라고....

"야."

"...."

"좋냐? 재밌디? 중학생들도 안 할 병신 짓을 해놓고 뒤에서 낄낄거리는 게 재밌어?"

남자는 침묵했다.

주어는 없었지만 뭐, 본인이 한 일이니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내가 청소팀 무시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해. 하지만 최소한 날 무시하면 안 됐지. 어디서 헌터증에 잉크도 안 마른...."

"차, 참 나! 그래 봤자 청소부 주제에…!"

"이런 시발 E급 나부랭이 새끼가 지금 누구 말을 끊는 거냐?"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남자의 태도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노려봤다.

여태까지 살면서 내 말을 끊을 수 있는 놈은 청소팀 외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어디서 감히.

"센 척은 니보다 약한 사람한테 하는 거야. 예전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쳤을 새끼가 어디서."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한다 한들, 들을 생각도 없었지만.

"잘 들어."

툭툭, 남자의 뺨을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우린 오늘부로 너희들이 토벌하는 던전은 청소하지 않을 거야."

"...!"

"니들이 했던 짓은 모조리 인터넷에 올릴 거고. 아는 기자들한테도 제보할 거야. 어때, 앞으로 헌터 생활 재밌어질 것 같지 않냐?"

"혀, 협회가 그걸 가만히 둘 거 같아? 협회는 무조건 헌터 편을 들어주는...."

"야, 너 뭔가 크게 착각하는 것 같은데.... 협회가 E급 나부랭이한테까지 커버 쳐줄 것 같아?"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 진심으로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일 크게 만들기 싫으면 청소 3팀으로 찾아와서 사과해. 한 명씩 무릎 꿇고."

"그, 그건...."

"왜? 싫어? 이것도 저것도 싫으면 계급장 떼고 던전에서 한 판 붙던지. 그냥 확 죽여 버리게."

물론 농담이었다.

나같이 여린 사람이 싸움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않은가.

그러나 남자에겐 허세가 통한 모양이었다. 꿀꺽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온 걸 보면.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대충 알아들었겠지.

다시 사무실 문으로 걸어가며, 조금 전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를 돌아봤다.

"오늘 제가 온 거 비밀로 해주세요."

"네, 네...."

"너도 마찬가지야. 나 다시 오게 만들지 마."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쏘아붙인 후 잠가두었던 문고리를 여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이수용 팀장이 등장했다.

"사무실 꼴이 이게 무슨... 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사무실을 훑어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젠장.... 일 났네.'

빼도 박도 못하게 들켜버렸다.

입단속만 잘 시키면 새어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수용이 직접 봐버린 이상, 이건 피해갈 수가 없다.

헌터를 상대로 폭력을 휘둘렀으니… 최소 모가지겠지.

쯧,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새끼도 그냥 몇 대 치고 제 발로 나가는 것도 썩....

"어, 그… 여, 여기까진 어쩐 일로...."

"...?"

이수용의 허리가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덕분에 내 허리도 따라 내려갔다.

뭐지. 누구야 이놈은.

이전에 봤을 때랑은 그 눈빛부터가 다르다.

"혹시 일전에 예산이 부족했던 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수용 팀장의 갑작스런 태세 변환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남자를 슬쩍 흘겼다.

"저분들이 토벌하면서 장난을 좀 쳐놔서요."

"…장난 말입니까?"

"예. 뭐… 몬스터 피로 던전에다가 낙서를 해놨더군요. 시체도 일부러 사방팔방 뿌려놓고. 청소팀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건지 얘기 좀 하러 왔습니다."

"지, 지랄! 팀장님! 저 새끼가 다짜고짜 와선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저 빌어먹을 청소부가..."

남자는 이때다 싶어 다물고 있던 입을 놀렸고.

"이, 이런 미친!!"

이수용의 눈이 뒤집혔다.

헐레벌떡 구석으로 달려가서는 곧바로 남자의 뺨을 후려갈겼다.

"지금 누구한테 새끼라는 거야! 미쳤어?! 헌터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눈에 뵈는 게 없지?!"

"티, 팀장님...."

"주둥아리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E급 주제에 감히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당장 사과드려! 지금 당장!!"

뭘까.

왜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전개에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자니, 이수용 팀장이 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면 사과를 안 받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크흠. 그래요. 다음부턴 좀 주의해주세요."

"예! 물론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수용 팀장은 쉬지 않고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볼일은 다 봤으니 가보겠습니다."

"예, 살펴 가십쇼!"

나는 이내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사무실을 나서려던 찰나.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다시 한번 두 남자를 가리켰다.

"저놈들, 앞으론 내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는데."

"무, 물론입니다!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하는 이수용 팀장.

그 모습에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

"사과했어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한상혁과 문소연은 서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과라기보단...."

"거의 절규였죠?"

"바짓가랑이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던데? 죽을죄를 지었다고, 제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한상혁은 몸동작까지 따라 하며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뭘 어떻게 해. 꺼지랬지."

"잘했어."

흔치 않게 한상혁을 칭찬했다.

뒤늦게 용서를 구할 거였으면 저지르질 말았어야지. 멍청한 놈들.

"근데… 대체 가서 무슨 얘기를 했길래 애들이 그렇게 죽을상으로 찾아오냐?"

"별말 안 했는데."

말보다 효율적인 게 있었으니까.

뭐, 사실 나보단 이수용 팀장이 뭐라 그랬는지 궁금하다.

눈에 안 띄게 해 달랬으니 당분간 토벌에는 배정이 안 될 거고… 조금 더 나가서 아예 전근까지 보내버리면 좋겠는데.

"뭐… 그건 그렇고."

이내 내 시선이 문소연에게로 향했다.

"소연 씨는 며칠 쉬는 게 어떻습니까."

"...네?"

갑작스런 제안에 어리둥절한 표정.

하지만 동시에 반가운 기색 또한 섞여 있다.

"그렇다고 우리끼리 정할 순 없고, 팀장님이 허락해주신다면 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뜻입니다."

"일단 나는 찬성. 너 요즘에 투잡 뛴다고 거의 쉬지도 못했잖아. 어린 애가 왜 그렇게 돈 욕심이래?"

"안 그래도 오늘 이야기하려 했다. 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

"...."

문소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녀 성격상 거절할 생각이었으면 손사래부터 쳤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침묵한다는 건, 본인 또한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거겠지.

다만, 인원이 적은 와중에 자기까지 쉬면 우리에게 민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서, 당연히 세 명보단 네 명이 낫다.

하지만 저 상태로는 일 인분은 고사하고 방해만 될 게 뻔했다.

"많은 사람이, 힘든 걸 참고 일하는 것을 열정이라고 하더군요."

때문에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연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네, 네? 그야 당연히...."

"틀렸어요. 참고 일하다가 망가지면 써먹질 못하잖습니까. 그건 열정이 아니라 멍청한 겁니다."

문득 전생에서 김민주와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은 쓴소리.

하지만 지금만큼은 단호해야 했다.

"소연 씨, 누가 봐도 많이 지쳤어요."

"...."

문소연의 커다란 눈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우는 건데....

혹시 뭔가 오해할 법한 이야기라도 한 걸까.

"아, 아니 그러니까 소연 씨가 도구라는 건 아니고...."

"고마워요."

문소연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

해프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갑자기 바뀐 이수용 팀장의 태도.

예산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넌 아냐?"

"글쎄요. 짚이는 건 없네요."

김민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저도 일주일이나 쉬었잖아요. 그 인간한테 뭔 일이 있었는지 저야 모르죠."

김민주는 벤치에 앉은 채로 들고 있던 캔 커피를 홀짝였다.

늦은 밤.

나는 시간을 내서 김민주와 집 앞 공원에서 만났다.

물론 이번 일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니다.

그저 다음 토벌 스케줄을 알려주기 위해 부른 것뿐이다.

하지만 스케줄을 짜기도 전에, 오늘 있었던 이야기로 벌써 30분째 수다만 떠는 중이었다.

"아무튼, 진짜 개새끼들이네요. 쪽팔리게 헌터라는 놈들이 그딴 짓이나 하고. …하긴, 덤빌 상대도 못 알아보니 E급이겠지만요."

"그래도 뭐. 제대로 사과했고, 따끔하게 혼난 것 같으니 다신 그러지 못하겠지."

"이젠 하고 싶어도 못 하죠."

"응?"

"잘렸거든요. 그 두 명."

김민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 잘렸다고?"

"네. 심지어 강제 파면이라 퇴직금도 몰수당했어요."

말도 안 된다.

아무리 눈에 띄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지만, 그냥 이렇게 잘라버린다고?

심지어 다짜고짜 찾아가 주먹을 날린 청소부는 내버려두고?

"그 천하의 이수용 팀장이 청소부 편을 들었다라...."

대체 왜?

점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016

016

작전 1팀에 때아닌 피바람이 몰아친 지도 3일이 지났다.

현역 헌터 두 명을 당일 해고한 건 나에게도 꽤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게다가 그 천하의 이수용이 말이지....'

물론 이수용 팀장이 직접 해고를 지시한 건 아닐 것이다.

팀장에게 인사 권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아마 토벌 후 던전에다가 장난질한 걸 본부장에게 보고했겠지.

아무튼, 며칠간은 혹시나 우리에게 불똥이 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문소연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복귀했고, 우린 평소와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작업을 이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다만, 한 가지 이전과 바뀐 게 있다면....

"고생하십니다!"

"수고하세요."

"수고하십쇼!"

"마무리, 잘 부탁드립니다!"

작전 1팀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어, 예… 작전팀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젊은 헌터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나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저들의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어쩌다 한 번이 아닌, 매 토벌 직후 반복됐다.

만약 토벌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면 우리를 기다리면서까지 인사를 하고 갔다.

심지어 인사뿐만이 아니다.

토벌 후에 아예 몬스터를 한곳에 모아주거나, 대충이나마 보스 방을 정리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어째… 익숙해지지 않네요."

멀어지는 작전팀을 보며 문소연이 운을 뗐다. 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 천하의 작전팀이 우리 눈치를 보게 될 줄이야. 나도 청소일 10년 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이러다 작전팀 우리가 먹어버리는 거 아닙니까? 분위기 보면 썩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데."

"건방 떨지 마, 이놈아. 그리고 우리는 무슨 우리야! 우리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 준우가 애써서 그런 건데!"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닙니까, 말이. 당연히 고맙긴 하죠. 하여간 엄청 아낀다니까."

한상혁이 장난스레 불만을 토했다.

하지만 문소연은 그들의 농담이 오히려 불안한 듯했다.

"저도 준우 씨가 우리 편 들어주는 거, 정말 너무 고마운데....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 편들어준 적 없는데.

"괜히 우리 도와주다가 준우 씨한테 불똥 튀는 거 아닐까 해서...."

"저한테요?"

"네. 벌써 본부에 소문 쫙 퍼졌잖아요. 말 한마디로 헌터 두 명의 모가지를 그 자리에서 잘라버린 청소부가 있다고."

"...뭐, 그런 말이 도는 것 같긴 하더군요."

앞뒤를 다 잘라먹어서 문제지만.

사실 작전 1팀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도 결국 다 그 소문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수용 팀장이 청소팀 편을 든 건 사실이니까.

자칫 청소팀한테 밉보였다가는 본인들 모가지도 날아갈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지금이야 우리 눈치를 보고 있다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나쁜 마음먹은 헌터가 벼르고 있을지도...."

"뭐, 벼르는 놈이 있다고 해도 직접 건들지는 않을 겁니다. 어지간히 정신 나간 놈이 아니고서야."

"그렇겠죠? 하긴, 준우 씨가 잘못한 것도 아니니까."

문소연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그때,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상혁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본부장한테 따져서 예산을 늘리질 않나, 헌터를 말 한마디로 잘라버리질 않나. 이젠 하다 하다 작전 1팀이 청소팀 눈치를 보게 만들고.... 이제 좀 말해줄 때가 되지 않았냐?"

"뭘 말이야?"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

한상혁의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애초에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나도 모르겠거든.

왜 상황이 저따구로 흘러가는 건지.

"너 혹시… 뭐 그런 건 아니지?"

마땅히 해줄 말이 없어 침묵을 지키고 있자, 한상혁이 답답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또."

"막, 윗사람들도 꼼짝 못 하는 거물 라인이라거나...."

"...참 나."

자동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뭔 개소리인가 저건 또.

***

협회 서울 본부.

작전 1팀 사무실.

모두가 퇴근한 시각이었지만 이수용 팀장은 여전히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한숨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그때였다.

"이야, 일 열심히 하네~ 잘 지냈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이수용 팀장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뭡니까?"

"야야, 오랜만에 보는 선배한테 반응이 그게 뭐냐."

"평소엔 얼굴도 안 보이시던 분이 대뜸 찾아오니까 놀랄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인마, 너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와주는 선배가 또 어디 있다고."

"퍽이나...."

이수용 팀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작전 2팀의 임동빈 팀장.

이수용 팀장의 한 기수 선배였지만, 항상 문제가 생길 때만 찾아와 조언이랍시고 시비를 걸어대는 놈이었다.

지금 그런 놈이 찾아왔다는 건....

"야, 근데 너네 팀… 요즘 청소팀 눈치 보고 다닌다면서?"

"하아...."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수용이도 많이 죽었네~ 작전 1팀장이라는 녀석이 청소부들 눈치나 보고. 조직이 거꾸로 돌아간다니까. 그치?"

"참 나… 모르면 가만히 계십쇼. 지금 청소팀에 계신 분이 누군 줄 알고."

"모를 리가. 거물 라인이라매? 벌써 소문 다 났지."

임동빈 팀장이 이수용 팀장의 책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래서 낙하산이 안 된다는 거야. 나처럼 당당하게 올라왔어 봐. 거물 라인이고 자시고 애초에 눈치 볼 일을 안 만들면 이럴 일 없잖아."

"...안 그래도 기분 더러우니까, 시비 걸 거면 돌아가시죠?"

"새끼, 성깔은. 뭐… 본론은 그게 아니고."

괜히 주변을 살피길 한 차례.

임동빈 팀장이 은근히 말을 이었다.

"내가 대신 해결해줄게."

"...뭘 말입니까?"

"청소팀 말이야. 라인 하나 믿고 언제까지 기어오르게 둘 순 없잖아. 내가 도와준다고. 이럴 때 선배 노릇 한 번 해줘야지."

도와주겠다, 그 말에 이수용 팀장이 헛웃음을 뱉었다.

"뭘 어떻게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충고하는데, 괜히 어쭙잖게 건드렸다간 선배님도 내 꼴 나요."

"에이… 날 뭐로 보고."

임동빈 팀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표정엔 묘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뭐, 별로 거창할 건 없고. 그냥 원칙대로 할 거야. 아무리 협회장 라인이라고 해도 팀원들이 실수한 것까지 커버 쳐줄 이유는 없잖아?"

"그건 또 무슨… 청소팀이 뭐 실수한 게 있습니까?"

"아니, 아직은. 뭐… 앞으로 하게 만들어야지."

임동빈 팀장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저 미친놈.

이수용 팀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시선만큼은 임동빈을 향한 채였다.

후배가 혹한 낌새를 보이자 임동빈 팀장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 처신 잘해야 해. 이러다 평생 청소팀 눈치 보면서 살아야 한다? 나름 정예라 불리는 작전 1팀장인데 그건 아니잖아."

"...됐고, 조건이나 말하십쇼."

"역시 눈치 하난 빨라."

이수용 팀장은 쓰게 웃었다.

저 새끼가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주고 싶어서 말을 꺼냈겠는가.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놈이라는 것쯤은 진즉 알고 있던 사실이다.

"어려운 건 아니야. 지금 너희 팀, 다음 주에 대규모 토벌 하나 잡혀 있지? 영등포 쪽에 다중 구역 던전."

"...그런데요."

다중 구역 던전.

한 구역의 보스를 처리해야만 다음 구역이 열리는 특수 던전이다.

일반적으론 '보통' 등급의 그린 등급이지만, 도중에 던전을 나올 수 없는 구조 때문에 모든 구역의 보스를 토벌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논스톱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곳이다.

준비 기간만 한 달.

작전 기획에 또 한 달.

상당한 인원과 시간이 투입된 이번 토벌은, 현재 작전 1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그거 우리한테 넘겨."

이건 상도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양아치 새끼를 봤나.'

이수용 팀장이 이를 바득 갈았다.

"뭐, 싫으면 관두던가. 참고로 본부장님은 허락했어. 우리끼리 잘 얘기해보래."

이수용 팀장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임동빈 팀장이 그동안 토벌한 던전만 100여 개. 그중 대다수가 저런 식으로 실적을 가로챈 것들이었다.

'하여간 저 기회주의자 새끼. 선배만 아니었으면 진짜....'

당연히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지만, 그로서도 언제까지 청소팀 눈치를 볼 순 없었다.

그렇다고 협회장 라인을 직접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누군가 대신 처리해준다면 그만큼 반가운 제안도 없었다.

'그래, 시발… 대규모 토벌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윽고 이수용 팀장은 결심을 굳혔다.

"…알겠습니다."

"하하하! 역시 통이 큰 친구라니까."

"그 대신 똑바로 처리하십쇼. 괜히 나한테 불똥 안 튀게."

"당연하지."

임동빈 팀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가 사무실을 나서던 그때.

"아, 그리고 너희 팀에 요즘 물오른 친구 있다면서? 이름이… 김민주였나?"

"...그 친구는 또 왜요."

"걔도 좀 빌려줘."

빌어먹을 새끼. 그 얘기는 또 어디서 처듣고 와서....

이때다 싶어 간이고 쓸개고 다 뺏어가네.

"에휴… 알아서 하십쇼."

이수용 팀장은 반쯤 포기한 듯 손을 휘저었다.

***

퇴근 버스 안.

뒷자리 구석에 앉아 해금 조건들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흐음, 이 정도면 꽤....'

몇 개의 목록을 살피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도 몰랐던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물론 메인 스킬들은 여전히 버거운 조건들이었지만, 이제 그중에서 몇 개 정도는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급 소환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팀, 신규 입사자 1명]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운 조건이다.

듣자 하니 몇 달째 지원이 아예 없다던데... 뭐, 일반인은 청소팀이 뭐 하는 팀인지도 모를 테니 기각.

[과몰입 - 해금 조건 : 타 부서와 공동 프로젝트 체결]

예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겠지만… 요즘 작전팀 분위기 보면 썩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네.

이건 일단 보류.

[시간 초과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팀 임금 인상]

이건 아직 힘들어 보이니까 패스.

[폴리모프 - 해금 조건 : 일반 시민의 던전 청소팀에 대한 관심도 상승]

원 카운터 스킬, 그러니까 협회 내 관심도 상승 조건의 상위버전.

'이게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할 만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김민주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요즘 통 바쁜 건지, 연락도 뜸하던 녀석이 이 시간엔 웬일이래.

"어, 왜."

"서, 선생님...."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

직감적으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저, 저희가 이번에 대규모 토벌이 잡혔어요. 팀 전체가 참가하는 다중 구역 던전인데… 이번 토벌대 리더로 제가 선발됐거든요."

"다중 구역 던전?"

그게 벌써 이맘때였나?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그런 대규모 토벌에 리더 선발이라니, 확실히 주가가 오르고 있긴 한가 보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숨을 고르는 소리.

이내 김민주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청소팀도 토벌에 참여해 달래요."

"...뭐?"

017

017

작전 세미나실.

이번 토벌 브리핑을 듣기 위해 참석한 헌터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사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내 말이. 청소팀이 무슨 토벌을 하겠다고 여길 와. 해도 해도 너무하네, 진짜."

"쯧, 예산도 뺏겨, 직장도 뺏겨. 이젠 일까지 뺏기게 생겼네."

"어쩌겠냐. 라인 못 탄 게 죄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청소팀이나 갈걸. 에휴, 운 좋은 새끼들."

"야, 야. 듣겠다. 조용히 말해."

어중간하게 끼어있는 던전 청소팀.

항상 기세등등하던 한상혁도 지금만큼은 기가 팍 죽어 있다.

문소연은 반쯤 넋이 나갔고, 박 팀장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다리 좀 그만 떠세요."

"아... 그, 그래. 미안타."

다들 초긴장 상태.

하긴, 호랑이 소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겠지. 아무리 요즘 청소팀의 위세가 좋아졌다고는 해도, 작전팀은 작전팀이니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청소부 신분으로는 말 한마디 섞을 수조차 없었던 그들과 한자리에 있으니, 눈치가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뭐, 그래봤자 C, B급 놈들투성이구먼....'

세미나실을 슥 훑어보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곤 김민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애들, 작전 1팀이 아닌데? 다중 구역 던전이면 1팀 배정이잖아."

10년 전, 이 토벌에 참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참여했다기보단… 애초에 내가 토벌대 리더였지.

당시에 내가 작전 1팀이었으니, 당연히 이번에도 작전 1팀이 맡을 줄 알았는데.

"맞아요. 원래는 우리 팀 작전이긴 했는데, 듣자 하니 이수용 팀장님이 2팀에 통째로 프로젝트를 넘겼다나 봐요."

"...프로젝트를 넘겨? 대체 왜? 최소 두 달은 준비했을 텐데."

"글쎄요. 팀장들끼리 무슨 말이 오간 것 같긴 한데…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살다 살다 별.... 쯧, 1팀 애들만 불쌍하게 됐네."

"안 그래도 반발이 꽤나 심했는데, 위에서 결정 난 사항이니 별수 없죠. 운이 좋게도 저는 끼워 팔기로 참가하게 됐고요."

"운...?"

참 나, 쓸데없는 겸손 떨긴.

이런 대규모 토벌에 리더를 맡게 됐다는 건 운의 문제가 아니다.

토벌대 리더라는 건, 팀장급들을 제외하고 현장에서 토벌대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

현재 팀원 중 가장 뛰어난 헌터라는 방증이다.

'뭐… 잘하고 있나 보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튼, 죄송해요. 선생님을 작전팀이랑 엮이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팀장님이 하도 닦달을 해서."

"...됐어. 우리 데리고 뭐 하려는 건지나 들어보려고 온 거니까."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과몰입 - 해금 조건 : 타 부서와 공동 프로젝트 체결]

이렇게 단번에 기회가 올 줄이야.

클클클.

"어, 언니. 그래서 저희는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설마 진짜로 토벌에 참여하는 건 아니죠?"

"저도 모르겠어요. 팀장님이 일단 데려오라고만 하셔서. 아마 브리핑 때 설명해주시겠죠. 아, 저기 오시네요."

김민주의 시선이 세미나실 앞에 놓인 단상으로 옮겨갔다.

때마침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류를 들고 등장했다.

"아아."

중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손가락으로 마이크를 건드리길 두어 차례.

"안녕하십니까. 이번 영등포 다중 구역 던전 토벌의 작전 기획을 맡은 작전 2팀장, 임동빈입니다."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눈에 핏줄이 섰다.

'저, 저 새끼는....'

꽈악 쥐어지는 주먹. 몸이 부들거릴 정도였다.

"준우 씨…?"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팀원들의 주의를 끈 것 같아 애써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분노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는 놈이다.

아는 걸 넘어서, 잊을 수가 없다.

신입 시절, 내 실적을 몇 개나 가로챈 놈을 어떻게 잊겠는가.

나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준비해놓은 프로젝트에 숟가락만 올리는 짓도 수없이 봤다.

'쯧, 왜 프로젝트가 2팀한테 넘어간 건지도 대충 이해가 가네.'

요즘 1팀 분위기도 뒤숭숭하겠다, 틈을 노려서 뺏어온 게 분명하다.

"김민주, 너 혹시 저 팀장이랑 아는 사이냐?"

"아뇨. 가끔 마주치면 인사는 해도, 대화를 나눠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애초에 다른 팀과 교류가 많은 것도 아니고요."

"혹시라도 친해지려고 하지 마. 저놈이랑은 엮여서 좋을 거 없으니까."

"...네?"

영문을 몰라 김민주가 되물었지만, 굳이 사정을 설명하진 않았다.

그냥 저 새끼를 피하면 충분하다. 괜히 엮였다간 성장에 방해만 될 테니까.

"이번 작전의 토벌 예상 시간은 24시간. 다들 아시다시피, 던전에 한 번 들어가면 모든 구역이 토벌될 때까지 나올 수 없으니 이점 염두에 두시고요. 혹시 작전 참가를 원치 않으시면 오늘 안까지 말씀해주십시오."

임동빈 팀장의 브리핑이 시작되자 헌터들의 눈이 사뭇 진지해졌다.

"아무래도 토벌 시간이 24시간이나 되다 보니 그사이에 이미 토벌한 몬스터는 부패가 시작될 겁니다. 가스가 방출되기 시작하면 토벌에도 지장이 생기겠죠. 그 부분은 여기 계신 청소 3팀 분들이 맡아주실 겁니다."

그리고 공개된 청소팀의 임무.

당연히 헌터들과 함께 직접 토벌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비웃을 만한 작전이다.

토벌과 청소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건 그냥 2팀의 헌터들이 무능해서 빠른 시간 안에 토벌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나 때는 6시간이면 떡을 쳤는데.'

당연히 청소팀과 공동 작전 같은 건 생각조차 안 해봤고, 실제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떠신가요. 청소팀 분들, 할 수 있으시겠죠?"

"아, 뭐...."

박 팀장이 대답 전에 우리 눈치부터 살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청소팀에겐 작전팀과 교류를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토벌 이후에 한꺼번에 작업하는 것보다 실시간으로 작업하는 게 효율도 좋다.

그리고 나에게도 절호의 해금 기회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른 팀과 연합으로 작전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청소팀이.

"죄송합니다.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 양아치 새끼 목구멍에 실적 꽂아주느니 안 하고 말지.

***

브리핑이 끝난 후.

모두가 돌아가고 텅 비어 버린 세미나실.

김준우 또한 먼저 자리를 떴지만, 청소팀은 아직 그곳에 남아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왜 거절한 걸까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데...."

문소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성과급도 준대서 덥석 물려고 했더만. 설마 쫄았나?"

"에이… 준우 씨가 던전을 무서워한다고요?"

"아냐, 아냐. 그 새끼 내가 확실히 봤는데 손을 계속 덜덜 떨더라고. 쫄아서 그런 게 아니면 뭐겠냐."

한상혁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 말을 귀담아듣는 이는 없었다.

한편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김민주가 박 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래도 우리가 걱정되는 모양입니다."

"저도 동감이에요."

김민주와 박 팀장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핑 때는 간략하게만 설명해서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사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전이에요. 24시간 동안 논스톱으로 진행되는 토벌에 합류하는 거니까요. 저도 솔직히 말리고 싶었어요."

"그래요.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녀석은 알고 있었겠죠. 준우 성격에 그걸 모른 척할 리도 없고…. 아무래도 우리가 멋모르고 수락해 버릴까 봐 자기 선에서 선을 그은 것 같군요."

박 팀장이 진지한 얼굴로 거들었다.

문소연과 한상혁은 괜히 머쓱해진 기분이었다.

어디까지 사람 좋은 녀석인 건가.

"...참 나,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해주던가. 꼭 사람 오해하게 만든다니까."

"그래도 준우 씨답네요."

문소연이 싱긋 웃었다.

"그래도… 꼭 참가하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제가 팀장님한테 말해볼게요."

"됐어요, 됐어. 그 새끼가 기껏 우리 생각해서 총대 매줬는데 막무가내로 나갈 순 없지."

"그렇죠? 뭐, 꼭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구요."

"하하하! 그래, 준우 마음 모르는 거 아니니까. 아쉽기는 해도 어쩔 수 없지. 우리 팀은 이번 작전 불참이다!"

박 팀장이 결론을 지었다.

당연하겠다만, 이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니라도 파이팅이에요."

문소연이 김민주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하지만 김민주는 대답을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이내.

"저도 빠질까 봐요."

자신도 작전에서 빠진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네?! 그건 안 되죠! 이런 큰 작전의 리더시잖아요!"

"그, 그러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빠져서 그러는 거라면 다시 생각을...."

"아뇨. 딱히 휩쓸리는 건 아니에요. 사실 저도 좀 탐탁지 않았어요. 잘할 자신도 없고, 아직 때도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그놈이랑은 엮여서 좋을 거 없다고 하셨거든요."

과분하리만큼 큰 기회인 건 틀림없었다.

아무렴, 이런 대규모 토벌대의 리더 자리가 아닌가.

하지만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김준우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다.

김민주 입장에선 당연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럴 때일수록 선생님 말을 들어야지 누구 말을 듣겠어요."

***

작전 2팀 사무실. 모두가 퇴근한 시각.

임동빈 팀장은 혼자 남아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선배님!"

때마침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다름 아닌, 이수용 팀장이었다.

"좆 되셨다면서요?"

이수용 팀장은 매우 들떠 있는 표정이었다.

덕분에 임동빈 팀장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시비 걸 거면 꺼져라."

"내가 뭐랬습니까. 어쭙잖게 건드릴 상대가 아니랬잖아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벌써 다 눈치 깐 겁니다."

임동빈 팀장의 한숨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이런 중대 프로젝트에 청소팀을 끌어들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수용 팀장에게 내건 조건.

청소팀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선 반드시 이번 토벌에 참여시켜야 했다.

그런데....

"성과급까지 걸었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진짜 눈치챈 건가?"

"심지어 김민주까지 빠졌다면서요. 그럼 뭐 말 다 한 거지. 작전 2팀, 김민주 없이 이번 작전 가능합니까?"

"...우리를 뭐로 보고."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뺏어온 프로젝트다. 공치게 되면 그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뒤집어써야 한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했다.

하지만 현재 작전 2팀의 수준으로는....

"...민간 길드에 협력 요청하면 돼."

"걔네 스카우트할 돈은 있습니까?"

"이번 분기 예산 좀 남았잖아."

"모자랄걸요? 내가 최근에 2억 원이나 써버렸거든."

"아니, 시발...."

임동빈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근에 청소팀한테 작전팀의 예산이 빠져나갔다는 건 이미 보고 받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그 정도는 딱히 영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임 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얼마나 치밀한 놈인 건가.

괜히 거물 라인이라고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작전 경험도 없는 애송이 새끼가...."

임 팀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수용 팀장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운이 좋은 걸 수도 있습니다."

"뭐?"

"넘어진 김에 쉬어가랬다고, 괜히 무리해서 끌어들였다가 된통 당하지 마시고 다른 방법을 알아보시는 게.... 됐다, 선배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지. 어쨌든 이제 난 모르는 일입니다~."

"야!"

임 팀장이 사무실을 나가려던 이수용 팀장을 불러 세웠다.

"왜요. 설마 이제 와서 도로 가져가라는 건 아니죠?"

"나도 본부장 라인 한 번 빌리자."

임동빈 팀장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018

018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각.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퇴근하던 중이었다.

"할 걸 그랬나...."

시간이 좀 지나고 흥분이 가라앉으니 스멀스멀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단 말이지.'

생각해보면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전생의 원수라지만… 딱히 지금 나한테 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별 상관도 없는 놈 아닌가.

하나라도 더 많은 스킬을 해금해야 하는 상황에 괜한 자존심을 세웠다.

그래, 그까짓 원수가 이제 와서 무슨 대수라고.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그만인데.

'지금이라도 가서 다시 끼워달라고 하면....'

...안 해주겠지.

나 같아도 안 해준다.

뭐가 아쉽다고 주제넘게 거절한 청소부를 다시 끼워주겠어.

'모르겠다. 이미 지난 일, 더 생각해봤자 뭐....'

[해금 조건 달성]

[타 부서와 공동 프로젝트 체결]

[습득 스킬 : 과몰입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

"뭐, 뭐야."

뜬금없이 머릿속에 울린 음성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혹시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싶어 다급하게 시스템 창을 확인했지만....

[습득 스킬 : 과몰입]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분명하게 해금이 됐다.

'이, 이게 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도 못 잡고 있던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김민주에게서 온 전화였다.

김민주 또한 작전 참가를 거절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솔직히 나로선 이해가 안 가긴 했다만 뭐, 개인적인 사정이 있겠거니 했는데....

"서, 선생님… 죄송해요."

축 처진 목소리.

다짜고짜 사과부터 뱉는 걸 보니 확실히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긴 모양이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나는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담하게 물었다.

"본부에서 청소 3팀에 필수 참가 명단이 내려왔어요."

"필수 참가 명단?"

"네. 물론 저도 포함됐고요. 아무래도… 이번 작전 참가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래서...."

작게 탄식했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

작전 필수 참가 명단.

토벌에 있어 꼭 필요한 인원이 있을 경우, 본부장 권한으로 내려오는 강제 작전 수행 명령.

그거 때문에 강제로 공동 프로젝트가 체결된 거구만.

"정말 죄송해요. 팀원분들 생각해서 총대 메고 거절하신 건데, 이렇게까지 나오면 저도 어쩔 수가...."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잘됐지 뭐.

마침 후회하던 참이었거든.

그런데 팀원을 생각해서 거절했다는 건 뭔 소리지.

"아무튼, 날짜는?"

"네?"

"토벌 날짜 말이야."

"차, 참가하시게요?"

"필참 명단 내려왔다면서. 상부의 명령인데 따라야지 별수 있어?"

김민주의 대답이 늦어졌다.

핸드폰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숨소리가 조금 떨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미안해하는 듯했다.

"...5일 뒤 토요일이에요."

"좀 빡세네.... 일단 알았어. 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고."

"네. 알았어요."

통화를 종료하고 좌석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가만히 버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그나저나....'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필참 명단을 청소팀한테까지 내리는 경우도 있었나?'

그것도 굳이 청소 3팀이라고 콕 집어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우리를 참가시킬 이유가 없는데. 청소팀이라면 꼭 우리 팀이 아니어도 충분할 테고.

턱을 쓰다듬으며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지길 잠시.

'...하암.'

하품과 함께 머리 밖으로 날려버렸다.

모르겠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

작전 준비 때문에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5일이 지나고.

토벌 당일. 영등포 어딘가.

"무,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우리가 막 던전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소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닌 게 아니라, 던전 앞은 대규모 토벌 소식을 듣고 취재를 나온 기자들과 구경을 나온 일반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토벌이면 온갖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니까요. 협회가 그걸 원하기도 하고요. 일종의 마케팅이죠. 시민들의 관심이 올라가면 그만큼 후원이나 지원금도 여기저기서 들어올 거고요."

"그럼 우리도 막 인터뷰하고 그러냐? 사진도 찍히고 기사도 나고?"

"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스킨이라도 좀 바르고 올 걸 그랬다."

"...머리 감을걸."

문소연을 포함한 팀원들은 주변의 시선을 크게 의식했다.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 자꾸만 들이대는 마이크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관심. 이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조금은 위축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건 김민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명색이 리더라는 녀석이, 얼굴이 사색이 돼선… 왜, 긴장돼?"

"...당연하죠. 처음인걸요. 이런 거."

"그래도 대범하게 행동해. 헌터가 긴장하면 시민들은 불안해한다."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어째 김민주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선생님은 익숙하신가 봐요."

"그런 셈이지. 그래도 오늘은 좀 많긴 하네."

주변을 슥 둘러보며 대답했다.

본부에서 어지간히도 떠들고 다녔나 보다.

하긴, 대규모 토벌이 흔한 일도 아니고.

청소팀과의 공동 프로젝트라고 하면 모양새도 좋으니 이참에 지원금 좀 끌어모을 생각이겠지.

"어깨 좀 펴. 고작 사람들 몇 명 모였다고 이렇게 긴장하면 토벌 때는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요. 전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서요."

"그래, 어련하시겠어. 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던전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토벌에만 집중해. 우리한테는 신경 끄고."

내 당부에 김민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무전기는 켜주세요."

"왜. 설마 도와달라고 할 건 아니지?"

"...."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어째 웃질 못한다.

기억 속의 김민주와 너무 상반된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지어졌다.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론 다 죽겠다 싶으면 그때 얘기해.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

당연히 해본 소리였다.

이런 대규모 작전에서 청소부의 도움을 받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물론 김민주 또한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래도 긴장은 조금 풀렸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모든 참가 인원들이 던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림잡아도 60명은 족히 되는 인원이 작전에 앞서 분주하게 최종 점검을 하는 중이었다.

"자! 우리도 점검 한 번씩 하자. 약품이랑 장비 다 제대로 있지?"

작전팀에 질 수 없다는 듯, 박 팀장이 입을 열었다.

"과산화수소, 묽은 염산, 식염수. 각각 10L씩 다 있어요."

"진공 압축기랑 EVA 필름 압축팩. 레벨 C 방호복 인당 세 벌씩. 고글도 있고, 정화통도 확인했습니다."

"식량이랑 물도 잘 있습니다!"

한상혁이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좋아! 힘든 작업이겠지만 다들 평소처럼만 하면 문제없을 거야. 기합 빡세게 넣고 가자고."

박 팀장의 우렁찬 목소리에 주의가 끌린 듯, 헌터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개중에는 일부러 들리도록 비웃는 이들도 있었다.

뭐… 청소팀 주제에 꼴값을 떤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이고, 드디어 오셨네. 오늘 잘 부탁한다. 김민주 리더님."

"...잘 부탁드려요."

그때, 임동빈 팀장이 토벌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스레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인사를 받은 김민주 또한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저분도 참가하는 거였어요? 민주 언니가 리더라고 해서 참가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문소연은 어리둥절한 건지, 목소리를 낮춰 나에게 속삭였다.

"뭐,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팀장이 직접 참가하는 토벌이라면 보통은 팀장이 리더를 겸임하니까요. 그런데 무조건 그런 것만은 아니고, 자질이 충분한 헌터가 있을 경우 다른 이를 리더로 선임하기도 하죠."

"그게 민주 언니라는 거죠?"

"...그렇게 되겠죠."

물론 김민주가 리더 자질이 있다는 건 인정한다만… 사실 임동빈 팀장이 리더를 맡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저 새끼, 현장 지휘를 할 줄 모르거든.

작전 기획만 하던 놈이라, 리더 경험이 없는 탓에 토벌에선 항상 얹혀가는 놈이었으니까.

뭐, 팀장 딱지 달고서는 항상 토벌 완료 직전에 리더를 위임받아서 실적만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했지.

쯧, 하여튼 개양아치 새끼라니까.

"첫 리더 자리라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나도 있잖아! 조금이라도 문제 생기면 나한테 다 맡기면 돼.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대답.

김민주의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임동빈 팀장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는 작게 혀를 찬 뒤, 이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청소팀 분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

"미리 말씀드리지만, 청소가 지체되면 안 됩니다. 가스가 방출되기 시작하면 토벌에 영향을 미치게...."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임동빈 팀장의 표정이 결국 싸늘해졌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주변 시선을 의식한 건지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자자, 다들 모인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정리 한 번 하자고. 김민주 리더님?"

임동빈 팀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김민주를 떠밀었다.

김민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숙지하셨겠지만,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짝 힘이 들어간 목소리.

"토벌은 A, B, C 세 팀으로 나눠 진행합니다. A팀이 첫 번째 구역을 토벌하면 다음 구역은 B팀이 토벌을 진행하고, 그다음엔 C팀. 이 사이클을 토벌이 모두 완료될 때까지 반복해주시면 됩니다."

"넵!"

조금 놀랐다.

방금까지 바짝 긴장해있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꽤나 당당한 기세였다.

"아시다시피 이번 작전은 청소팀과 공동으로 진행합니다. 워낙 베테랑들이시니 저희가 신경 쓸 부분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만약에, 정말 만약에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청소팀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

쟤 지금 뭐라 그런 거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 올랐다.

혼란에 빠진 분위기.

보다 못한 임동빈 팀장이 급하게 수습을 위해 나섰다.

"하, 하하! 김민주 리더님이 긴장하셨네. 작전팀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한 거지?"

"...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임동빈 팀장은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고, 그냥 바로 진행이나 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냈다.

"아무튼, 다들 마지막으로 작전 내용 한 번씩 검토해보시고...."

김민주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던전 입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검은색의 날카로운 검을 꺼내 들었다.

전생에서도 그녀와 단짝이었던 흑랑지도(黑浪之刀).

"준비되셨으면, 작전 시작합니다."

검을 쥔 그녀가 작전 개시를 선언했다.

019

019

다중 구역 던전.

기본적으로는 그린 등급의 동굴형 던전으로 분류되는 곳이다.

던전 자체는 그리 위험도가 높지 않다.

다만 다중 구역이라는 특수한 구조와 토벌이 완료될 때까지 나갈 수 없는 조건 때문에 높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솔직히 들어오기 전까지는 조금 겁났는데...."

첫 번째 구역의 보스, '펜타그램 발록'을 처리하던 중, 문소연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어째 생각보다 평화롭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벌이 시작된 지도 2시간이 흘렀다.

처음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다들 바짝 긴장한 상태였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하니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듯했다.

"아무리 대규모 작전이라고 해봤자 저흰 청소 역할이니까요. 아마 끝날 때까지 토벌대랑 만날 일도 없을 겁니다."

"에휴, 토벌하는 거 구경 좀 해보고 싶었는데. 이래선 공동 프로젝트를 하는 의미가 없잖아."

"이놈아, 네가 헌터냐? 우리야, 우리 일만 잘하면 되는 거야."

박 팀장이 한상혁을 다그쳤다.

그의 말이 맞았다.

물론 지금쯤 최전선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겠다만…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

청소팀이 청소만 잘하면 그만이지.

"자! 해체 끝났으면 이제 약품 처리하자."

박 팀장은 이내 조각조각이 난 몬스터 앞에서 몸을 쭉 일으켜 세웠다.

"토벌이 끝날 때까지 몬스터 한 마리도 부패하면 안 된다. 약품 처리한 다음에는 잊지 말고 비닐 씌워서 진공포장 꼭 해두고!"

"귀에 딱지 앉겠습니다~."

"이번엔 좀 참아라. 우리만 일하는 거 아니잖냐. 우리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진짜 큰일 날 수도 있어. 그러니까 하나하나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박 팀장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이곳에선 해체한 몬스터를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다.

그러니 사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몬스터를 해체 후 약품에 담갔다가 비닐 팩에 씌워 진공포장을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덕분에 작업이 훨씬 더 번거로워지긴 했다만.... 번거롭다 뿐이지, 그 이상 어려울 건 없었다.

"근데 밥은 언제 먹나?"

"이놈아, 들어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밥 타령이냐?"

"간식이라도 먹고 할까요?"

"어? 간식이 있어?"

"혹시나 해서 집에서 초코바 몇 개 가져왔어요. 자, 준우 씨도 하나 먹어요."

"아, 전 딸기 맛으로."

슬슬 긴장도 풀린 건지 분위기도 한층 가벼워지던 참이었다.

잡담이 계속해서 오갔지만, 그런 와중에도 작업에 실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다.

그냥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고, 나 또한 이견이 없었다.

그렇게 작전이 시작된 지 5시간째.

다들 조금 지친 기색이지만 아직까진 괜찮았다.

8시간째.

문소연이 슬슬 피로감을 느끼는 듯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10시간째.

해체 작업 도중, 한상혁이 졸다가 손을 다쳤다. 아쉽게도 큰 상처는 아니었다.

15시간째.

이전에 작업한 구역에서 작은 이슈가 발생했다. 몬스터를 진공 포장해놓은 비닐이 터진 것이다.

그걸 재처리하느라 작업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고, 토벌 진행 현황과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전 18시간째.

「아아, 청소팀, 청소팀. 지금 던전 내 가스 수치가 올라가고 있으니 확인 바랍니다.」

결국, 문제가 터져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현재 구역이 많이 밀려 있어서요."

「밀렸다고요? 지금 몇 번 구역입니까?」

헌터의 물음에 박 팀장은 손가락으로 빠르게 숫자를 셌다.

"지금이… 5번 구역입니다."

「5번? 우린 지금 10번 구역을 토벌했는데? 다섯 구역이나 밀렸다고요?」

"죄송합니다. 한 시간만 쉬고 최대한 빨리 진행해보겠습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립니까. 한 시간이나 쉬면 지금 밀린 몬스터는 어떻게 할 겁니까? 지금도 계속 수치가 올라가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두시겠다고?」

헌터의 목소리가 주제도 모르고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쪽 작업 진행이 밀리면 그쪽에서 조절하면 될 거 아닌가.

나는 보다 못해 무전기를 뺏어 입을 열었다.

"다들 지금 너무 지쳐있습니다. 더 이상 진행하는 건 무리니까, 김민주 리더한테 토벌 일시 중단 요청해주십시오."

나 또한 도를 넘은 피곤함에 굉장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빨리 끝내지 못할 거면,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됩니다. 예정 시간에 늦어집니다.」

얼탱이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지금 이대로 진행하겠다는 겁니까? 이쪽은 더는 계속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그건 청소팀의 문제 아닙니까? 어떻게든 알아서 하셔야죠.」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그래, 지금은 작전 중이다.

작전 중에 화를 내는 건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다.

그렇게 다독이며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최소한 지금 로테이션이 아닌 헌터들이라도 보내주십쇼. 지금 저희 상태로는 계속 밀리기만 할 겁니다."

「...안 됩니다.」

"야 이 개새끼야. 당장 팀장 바꿔."

프로는 개뿔 시발.

신경을 건드리다 못해 터트려버리네?

「....」

하지만 무전기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무전은 없었다.

덕분에 머리에 점점 피가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작전에 투입되는 인원과 팀을 편성하는 것은 작전기획자인 팀장의 역할이다.

작전팀은 60명 편성에 세 팀으로 나눈 로테이션 배치. 하지만 총원이 고작 4명뿐인 우리는 무려 단일팀으로 편성됐다.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가 쌓이고 작업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토벌 중단도 안 하고, 도와주지도 않겠다?

이거 시발.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러는 거지?

'피곤해 뒤지겠는데 움직이게 만드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안쪽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방금 토벌이 끝난 10번 구역.

비번인 B와 C팀이 그곳에 모여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자, 임동빈 팀장이 나를 발견하곤 곧바로 튀어나왔다.

"거참, 뭐 하자는 겁니까! 알아서 잘한다면서? 지금 가스 차는 거 안 보여요?!"

화가 잔뜩 난 목소리.

다짜고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길 찾아올 시간 있으면 작업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거 엄연히 농땡이 피우는 겁니다. 근무 태만이라고요!"

"…김민주 리더 어디 있습니까?"

아쉽게도 그에겐 볼 일이 없었다.

가볍게 무시하며 물었지만, 임동빈 또한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건 알아서 뭐 하시게. 참 나… 지금 청소팀 이러는 거 적반하장이라고 생각 안 해요? 내가 토벌에 영향 안 끼치게 해달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곤란하지!"

"쉬지도 못하고 18시간을 일했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우리가 기계입니까? 더 이상은 우리도 한계니까...."

"그럼 뭐, 더 이상은 못 하겠다, 그 소리야?"

순간 임동빈 팀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시발, 진짜 큰일 났네. 청소팀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작전 다 망치게 생겼잖아."

그리곤 주위 헌터들이 듣길 바라는 건지, 임동빈 팀장은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헌터들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다.

"참 나,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근무 태만, 지시 불이행, 토벌 중 작전 포기."

"...?"

"당신들, 토벌해본 적이 없어서 감이 잘 안 잡히나 본데… 이거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야. 지금 청소팀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내가 반드시 엄중하게 물을 거야. 설마 이걸 부당하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눈을 부라리며 다짜고짜 경고를 던지는 임동빈 팀장.

나는 결국 참다못해 실소를 뱉었다.

"...웃어?"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왜 굳이 필참 명단까지 써가면서 우리를 참가시키려는 건가 했더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데려온 거구만.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징계를 먹인다라… 하여간 이런 쪽으론 비상한 새끼라니까.'

하긴, 작전팀이 언제까지 청소팀 눈치 보고 다닐 수는 없을 노릇이고. 이런 식으로 징계라도 좀 먹여서 기세를 꺾고 싶었던 거 같은데....

팀장이 할 만한 짓은 아니지, 아무리 봐도.

"...이봐. 당신 지금 믿는 구석 있다고 막 나가려는 것 같은데. 작전 포기야, 작전 포기. 이건 협회장님이 와도 커버 못 친다고. 알아들어?"

"알았어요. 그래, 뭐… 우리 팀이 작전 포기했다고 치고.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 가스 차고 있는데 계속 토벌 진행할 겁니까?"

임동빈이 들고 있던 무전기의 채널을 조정했다.

아아, 발신을 확인하길 한 차례.

"임동빈 팀장이다. 지금 바쁘냐?"

「팀장님? 지금 좀… 야! 고개 숙여! …바쁘긴 한데요!」

수신자는 다름 아닌 김민주였다.

"문제가 생겼어. 청소팀이 작전 포기했다."

「...네?」

"처리 못 한 시체만 5구야. 이대로는 토벌하기 전에 모조리 질식사할 거다. 이제부턴 내가 직접 지휘할 테니까, 리더 자리 나한테 넘겨."

「그, 그게 무슨…?」

"리더 자리 넘기라고! 햇병아리 새끼가 어떻게 할 상황 아니니까!"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상에, 누가 누구더러 햇병아리라는 건가.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도 어떻게든 실적은 뺏어 먹으려고 하는군.

이걸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양아치 새끼.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

"뭐? 너 지금 뭐라고...?"

"야, 김민주."

「선생님? 팀장님 말 진짜예요? 청소팀이 작전 포기했다는 거?!」

전투 중이라 그런 건지 꽤나 격양된 목소리였다.

"너 혹시… 지금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론 다 죽겠다 싶지 않아?"

「...네?」

잠깐 대답이 끊겼다.

그사이, 기다리다 못한 임동빈 팀장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 답답하게 하네, 머저리 같은 년이. 빨리 지휘권 넘긴다고 말하라고. 뭐 이리 시간을 끌어! 이년은 리더 한 번 시켜줬다고 진짜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네?"

「...알았어요. 넘길게요.」

그제야 임동빈 팀장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김준우 청소부님한테요.」

"진작 그럴 것이... 잠깐, 뭐?!"

「현 토벌대 리더, 김민주는 지금 시간부로 청소 3팀 김준우 청소부에게 지휘권을 인계합니다.」

콰직.

반대쪽 무전기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야! 야, 김민주...!"

임동빈 팀장은 무전기에 얼굴을 박고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물론 대답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뭐… 다들 들었지?"

나는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 역시 임동빈 팀장과 똑같은 표정이다.

지금 무슨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하지만 이제부턴 알아서 눈치껏 행동해야 할 거다.

"지금부터 이 작전, 내가 지휘한다."

간만에 현역 때 기분 좀 낼 거거든.

020

020

비번인 인원들이 대기 중인 10번 구역.

리더 변동이 일어났음에도 헌터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움직이는 놈이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감도 못 잡고 얼빠진 얼굴들이다.

시작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김민주 그 녀석... 이 얼간이들을 데리고 용케 여기까지 왔군.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다.

"어이가 없네. 이봐, 당신."

그때, 임동빈 팀장이 기가 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여기 팀장은 나야. 뭐 리더 자리 하나 인계받았다고 대장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어디 작전 경험도 없는 어린놈이...."

"경험은 내가 그쪽보다 배는 많을 텐데."

"...뭐?"

"그리고, 설마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어디 던전에서 직급을 들이밀어요. 니가 팀장인 게 여기서 무슨 상관이라고."

눈을 똑바로 뜬 채 임동빈 팀장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드러났다.

여긴 던전, 심지어 작전 중인 던전이다.

작전 중에는 현장 최고 결정권자인 '리더'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통제한다.

그 리더님께서 나한테 지휘권을 넘긴 거다.

팀장 딱지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임동빈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당신… 헌터였어?"

"흠, 왜 날 만나는 놈마다 헌터냐고 물어볼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헌터도 아닌 청소부가 현장 지휘를 맡겠다고? 우릴 다 죽일 생각이야? 이건 징계 수준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나 같이 경험도 없는 애송이가 아니라 당신 같은 베테랑 헌터가 직접 지휘를 해야 한다는 소린가?"

"다, 당연한 거 아니야! 알겠으면 나한테 지휘권 다시 넘겨. 지금이라도 넘기면 청소팀 징계는 없던 일로 해줄 테니까."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구미가 하나도 안 당기는 조건을 내밀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뭐, 청소팀이 징계를 받건 말건 내 알 바 아니고.... 지금 널 보니까 자꾸 옛날 생각이 나서 기분이 참 좆 같아."

임동빈 팀장을 향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좋았지? 그동안 날로 실적 두둑이 챙겨 먹어서."

"그, 그게 무슨 말...."

"넌 지금 부로 작전에서 열외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가져갈 생각 마."

"...!"

작전 열외.

토벌 참여권은 물론, 이 토벌을 통한 수당과 실적을 모두 박탈하는 작전 중 최고 수위 징계.

"입 닫아, 새끼야. 벌레 들어가겠다. 징계 처음 받아봐?"

표정에서 완전히 넋이 나갔다.

뭐, 팀장이 본인 작전에서 그런 징계를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나는 그가 가지고 있던 무전기를 뺏어 들었다.

"아아, 청소 3팀에 김준우 청소부입니다. 전 토벌대원들에게 알립니다. 현 시간부로 임동빈 팀장은 작전 열외입니다. 그런고로 남은 대원들끼리 힘내봅시다."

무전기가 시끄러웠다.

"그리고 들었다시피 김민주 헌터가 저한테 지휘권을 인계했으니 지금부터는 제 지시를 따르세요."

「....」

"대답!"

「...네, 네.」

「아, 알겠습니다.」

꽤나 떨떠름한 목소리였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대기 중인 헌터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일단… 지금 놀고 있는 B, C팀은 청소팀 도와주러 가세요."

"...."

"음… 알았어. B, C팀은 지시 불이행으로 모두 이번 작전 열외입니다."

10구역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가볍게 무시하며 다시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A팀~ A팀. 응답 바랍니다."

「네, 네! A팀 수신했습니다!」

"김민주 헌터 바꿔."

잠깐의 침묵.

「네, 선생님!」

힘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응답했다.

"지금 인원이 많이 빠져서 어쩔 수 없이 너희가 좀 더 고생해줘야겠다. 지금 11구역 토벌 중이냐?"

「맞아요. 그런데 이 몬스터....」

"그 곰탱이 새끼, 공격받으면 10분간 공격 면역이야. '가디언' 클래스 앞으로 배치해. '힐러' 클래스는 광역 버프 스킬 말고 단일 버프로 가디언들한테 집중하고."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면역 시간이 끝나면 가장 앞에 있는 놈한테 달려들 거야. 가장 근력 스텟 높은 놈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있다가 달려들면 그냥 맞아. 별로 안 아프니까. 그럼 네가 바로 카운터 넣고. 너… 왼손 악력 키웠지?"

「그럼요.」

"좋아. 그대로 한 번 해봐."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전투 중인 대원들의 음성이 간헐적으로 무전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11구역 클리어했어요!」

거친 숨소리가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오케이. 12구역은 고스트 타입 몬스터다. 물리 공격은 투과시키니까 검사 클래스는 뒤로 빠져 있어. 마법사 클래스는 어쭙잖은 스킬 연계하지 말고, 제일 센 거 하나만 연사해."

「넵!」

그렇게 50분 만에 12구역 클리어.

"다음! 환각계 몬스터니까 체력 스텟 높은 놈들로 배치하고. 힐러 클래스는 정화 스킬 다 때려 부어! 무리하게 거리 좁히려 안 해도 되니까 치고 빠지기만 잘하면 돼."

「리더! 포션으로 환각 풀립니까?」

"어. 최상급 포션으로는 풀려."

「...없으면요?」

"그럼 대가리 한 대 쳐서 기절시켜놔."

정확히 40분.

13구역 클리어.

"마지막이 제일 별거 없어. 그냥 힘으로 때려잡아. 스킬 빨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잡으니까."

「넵!!」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들.

더 이상의 무전은 필요 없었기에, 나는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다시 주변을 살폈다.

임동빈 팀장을 포함해 B, C팀 헌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 채였다.

현역 시절, 나를 바라보던 팀원들과 똑같은 표정으로.

'뭐, 어쨌든 이걸로 끝....'

「부, 불가능합니다!」

그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무전을 탔다.

"뭐? 대체 뭐가 불가능한데?"

「선생님! 다들 너무 지쳐서 스킬 화력이 제대로 안 나와요!」

「체력 스테이터스가 너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대로는....」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참 나, 무슨 헌터라는 놈들이 그거 하나 못 잡아서....

"다 뒤로 빠져서 대기하고 있어."

「...예?」

나는 마지막 구역으로 향했다.

14구역에 도착하자마자 A팀 헌터들의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

물론 김민주도 마찬가지였다.

"서, 선생님...."

초조한 목소리.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검."

"...네?"

"검 빌려 달라고."

김민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게 검을 건넸고, 나는 몬스터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물론 최근에 해금했던 스킬들을 발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몰입."

[습득 스킬 : 과몰입]

[스킬 발동]

[전투 중 시전자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업화."

[습득 스킬 : 업화]

[스킬 발동]

이윽고 김민주의 검에서 검은 화염이 피어올랐다.

크르르르―

몬스터 또한 위협을 느꼈는지 거대한 이빨을 드러냈다. 내 몸통만 한 앞발을 들고 가공할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섭네....'

저 앞발에 한 대라도 맞았다간 내 머리는 청소팀이 진공포장을 해줘야 할 것이다.

뭐,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콰앙―!!

[시전자를 향한 공격 감지]

[현 시간부로 전투태세에 돌입합니다]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스킬 발동]

[전투 중 시전자의 이동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여유롭게 공격을 피한 직후, 몬스터가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기도 전이었다.

검을 움켜쥐며 몬스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푸욱―

[습득 스킬 : 원 카운터]

[약점 공격 시 대미지 3,000% 증가]

[과몰입 스킬 효과로 대미지 3,000% 추가 증가]

정확히 심장에 검을 꽂아 넣자, 육중한 몸뚱이가 크게 휘청이길 잠시.

쿠웅,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

동시에 몰아치는 정적.

나는 눈을 슥슥 비비며 입을 열었다.

"나가자. 먼지 때문에 눈 가렵다."

그렇게 등을 돌려 먼저 그곳을 벗어났다.

***

모든 구역의 토벌이 완료됐다.

하지만 A팀의 헌터들은 여전히 14구역에서 얼어붙은 채였다.

"뭐, 뭡니까…?"

"지금 대체 무슨...?"

모두가 자신이 뭘 본 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김민주 또한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체 얼마나 더 놀라게 하시려는 건지....'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김민주를 제외하고 방금 일어난 일을 납득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호, 혹시 그 사람입니까? 김민주 헌터님께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저 사람, 대체 정체가 뭡니까?!"

"뭐겠어."

헌터들의 호들갑에, 김민주는 도리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소부지."

"...."

"...."

이제부턴 내 차례네.

김민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다들 방금 여기서 일어난 일은 비밀로 해줬으면 해."

"...네?!"

"왜, 왜요? 비밀로 할 게 아니라 당장 스카우트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협회에 알려야죠! 청소부에 저런 분이 계신다는 거! 청소팀에 있을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김민주가 고개를 저었다.

"저분한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거든."

"그게 무슨 말씀...?"

"돈, 명예, 권력. 헌터로 치자면 스킬, 스텟, 무기... 그런 거에는 관심 없는 분이야. 그냥 원하는 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전부인 분이거든."

"...."

"그러니까 너희들도 그냥 저런 사람이 있다고만 알아둬.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고.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A팀의 헌터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충격.

경외감.

그리고 굳은 각오가 느껴지는 눈빛들이었다.

***

협회 서울 본부, 본부장실.

"돌았냐?"

서민철 본부장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쳤어? 미쳤냐고! 팀장이나 된다는 새끼가 이런 중요한 작전에서 열외를 당해?!"

"...죄송합니다."

임동빈 팀장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청소팀의 실수를 퍼트리기 위해 무리하면서까지 불러 모은 기자들이 오히려 독이 됐다.

던전 토벌 직후, 임동빈 팀장의 작전 열외 사실이 기자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지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중이었다.

물론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작전팀의 팀장이 본인의 작전에서 징계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가히 충격적인 사건임은 분명했다.

"아무래도 김민주 헌터랑 그 청소부 놈이 짜고...."

"이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이빨을 까! 청소팀 엿 먹이고 김민주 실적 꿀꺽하려다가 이 사달 난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임동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걸 본부장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A팀의 팀원들이 본부장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다는 사실을, 그가 알 방도는 없었다.

"그니까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고 건드려! 네 빽은 하느님이냐? 어디 주제도 모르고!"

"...이제 와서 저한테 죄다 덮어씌우시겠다고요?"

분명 자신이 잘못한 건 맞았지만, 이렇게 몰아가는 건 임동빈 팀장으로서도 억울한 일이었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청소팀 놈들 눌러주겠다고 했을 때, 좋다고 필참 명단 써준 건 본부장님...."

"야!"

서민철 본부장의 눈빛에 살기가 드리웠다.

"너, 내가 니 친구로 보이냐? 수용이 선배라고 좀 봐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

임동빈 팀장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 이미 인터넷에 퍼진 이상 이번 일 그냥은 못 넘어가.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해 볼 테니까, 돌아가서 경위서부터 쓰고 있어."

"...."

"뭐해. 안 꺼져?"

서민철 본부장의 호령에 임동빈 팀장은 고개를 떨군 채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서민철의 화는 도저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게 아니라, 임동빈의 말대로 자신도 이번 일에 연루되어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떡합니까. 임 선배가 본부장님도 도왔다는 걸 그 청소부한테 말해버리면...."

"시발...."

이수용 팀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본부장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라인을 걱정하는 것뿐이었지만.

'저 새끼가 자신만만하게 나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서민철 본부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잘못 걸리면 이번에야말로 모가지였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임동빈과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야, 수용아."

"...네."

"김민주 헌터 말이야...."

서민철 본부장은 말 꺼내기를 망설였다.

하지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힘겹게 입을 열었다.

"팀장 달아주는 게 어떠냐?"

021

021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공동 프로젝트가 끝난 지 불과 5일 만에 작전 2팀에서 대규모 인사 발령이 진행된 것이다.

토벌 당시 작전 열외를 당했던 B, C팀 대부분이 경기 지부로 발령 났고, 개중에는 울릉도 지부로 떨어진 놈도 있었다.

말이 인사 발령이지, 실질적으론 2팀을 통째로 물갈이 한 수준이다.

나조차도 고작 징계 한 번에 너무 과도한 조치가 아닌가 싶었지만....

'뭐, 윗분들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놈들이 어떻게 되든 나랑은 딱히 상관도 없고.

사실 그런 것보다 진짜 충격적인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작전 2팀, 임동빈 팀장에게 다음과 같은 징계를 처분한다.」

「랭크 등록 해제」

임동빈 또한 작전팀 출신의 랭크를 보유한 헌터.

헌터 랭크를 삭제한다는 건, 헌터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물론 팀장이라는 직급을 건든 건 아니다.

토벌 자격만 없어졌을 뿐, 팀장으로서 팀을 운영하고 작전을 기획하는 일엔 문제가 없다. 형식적으로는 계속 팀장 자리에 남아 있을 수는 있다.

'근데 뭐… 말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이제 헌터도 아닌 자를 그 누가 팀장으로 대우해주겠는가.

그보다 임동빈 본인이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남아 있으려 하겠는가.

임동빈 팀장의 사퇴는 사실상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리고 공석이 된 작전 2팀장 자리에....

"언니! 축하해요!"

"이야~ 우리 헌터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누님, 저 주변에 자랑 좀 해도 됩니까? 작전 팀장이랑 아는 사이라고?"

김민주가 올라섰다.

"최연소 팀장이라. 때깔 좋네. 축하해."

"다들... 고마워요."

작전 2팀 사무실.

소소하게 준비한 꽃다발을 전해주자 김민주는 흔치 않게 감동한 표정이었다.

"언니 울어요?!"

"아, 아니에요. 꽃가루 때문에...."

미안하지만 그거 조화다.

딱 보니까 축하해준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제가 먼저 찾아봬야 했는데 저도 정신이 없어서... 죄송해요."

"아냐, 아냐! 우리야 사무실 구경도 하고 좋지."

"그럼, 이제 언니가 여기 대장인 거죠?"

"당연한 거 아니냐? 작전 팀장이잖아. 저기 저… 이수용 팀장이랑 동급인 거라니까!"

"그건 아니에요. 같은 직급이라도 엄연히 연차가 다르니까."

김민주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곤 사무실 안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일단 여기에 좀 앉으세요. 차라도 내올게요."

김민주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았다.

청소팀에게 직접 차를 대접하는 작전 팀장이라....

한 달 전만 해도 꿈도 못 꿀 일인데.

"사무실이 좀 휑하죠? 아직 정리가 안 돼서 조금 어수선해요."

팀원들이 사무실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자 김민주가 면목 없다는 듯 말했다.

"뭐, 그 정도 인원이 한 번에 빠졌으니 어쩔 수 없지. 몇 명이나 남았댔지?"

"17명이요. 사실상 내놓은 팀이죠. 그렇다고 터트릴 순 없으니까 저한테 떠넘긴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겸손도 도를 넘으면 기만이야. 아무리 하꼬 팀이라고 해도 팀장직을 아무나 다는 줄 아냐. 네가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거니까 조금은 뻐겨도 돼."

"...고마워요."

김민주가 얼굴을 붉혔다.

공중분해 될 뻔한 팀을 운 나쁘게 넘겨받았다고 해도 팀장은 팀장이다.

팀에 소속된 헌터들을 손가락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

물론 다른 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인원.

하지만 바꿔 말하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일개 헌터였던 그녀에게 17명의 전력이 생긴 셈이다.

'나도 팀장은 서른 돼서야 달았는데....'

어째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솔직히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 선생님 덕이죠. 뭐, 제가 팀장이라고는 해도… 결국 선생님 팀이나 마찬가지예요."

"야야… 너는 그렇다 쳐도, 팀원들한테는 그런 얘기 하지 마."

"왜요?"

김민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심으로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본인 팀이 청소부 팀이나 마찬가지라는데 어떤 헌터가 좋아하겠냐? 안 그래도 나 때문에 팀이 통째로 날아갈 뻔했는데...."

"좋아하던데요."

"...뭐?"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대답인가 싶던 그 순간.

"복귀했습니다!"

"교대 쪽 토벌은 좀 늦는대서 우리 먼저 왔습니다."

"아, 배고파. 팀장님, 오늘 점심은 배달 어떻습니까?"

때마침 문이 벌컥 열리며 몇 명의 헌터들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얼굴들을 보아하니 토벌 때 마주쳤던 A팀 놈들이다.

"수고했어. 토벌 보고서는 내일까지 제출해줘."

"넵!"

"아, 그리고 청소팀 와 계시니까 다들 인사드리고."

"청소팀이요…?"

"청소팀이 오셨습니까?!"

이윽고 팀원들의 시선이 뒤늦게 우리에게 꽂혔다.

"안녕하십니까! 작전 2팀, 이진호입니다!"

"저번 작전 땐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전 2팀, 최종훈입니다!"

"홍지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의 허리가 일제히 접혔다.

"아, 안녕하세요.... 문소연이라고 합니다...."

"한상혁입니다. 저희도 뭐… 자,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작전팀의 기세와 다르게, 문소연과 한상혁은 데면데면했다. 작전팀의 인사를 받는 게 아직까지 꽤나 어색한 모양이다.

"에이, 같은 팀이라 생각하시고 편하게 대해주십쇼."

"아, 그리고 혹시 저희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고요!"

"그… 다른 팀 녀석들이 무례하게 굴거나, 저번처럼 던전에 장난질 쳐 놓으면 저희가 가서 그냥…!"

손날로 목을 긋고 동시에 혓바닥을 내미는 제스처에 문소연이 쿡, 웃음을 흘렸다.

그걸 계기로 두 팀 사이에서 이런저런 대화가 조금씩 오고 갔다.

진심으로 생글생글한 얼굴들.

나는 목소리를 낮춰 김민주를 향해 슬쩍 입을 열었다.

"너… 애들 때렸냐?"

"아뇨."

"근데 상태가 왜들 저래."

"든든하죠?"

"...."

팀장 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생길이 훤하군.

팀원이라는 놈들이 어째 죄다 맛이 갔잖아.

"아무튼, 이제 본부도 청소팀을 쉽게 못 건드릴 거예요. 당분간 마음 놓고 청소에만 전념하셔도 돼요. 방해꾼들은 제가 처리해드릴 테니까."

"그거참, 고맙…다고 해야 하냐?"

청소에만 전념하라.

그 무시무시한 말에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뭐....

'내 팀이나 마찬가지라....'

청소팀을 고깝게 보던 놈들은 죄다 날아가고, 청소팀에 호의적인 놈들만 남았다는 건 우리로서도 좋은 일이다. 게다가 팀장이 김민주 아닌가.

여기 있는 놈들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해금이 훨씬 수월해지겠지.

'뭐, 앞으론 조금 더 대범하게 나가도 되겠네.'

김민주, 이 자식....

드디어 도구로 써먹을 수 있는 정도까진 됐구나.

"그나저나 슬슬 오실 시간인데...."

그때, 김민주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또 누가 와?"

"오늘 지원팀에서 보좌관이 온다고 했거든요. 나름 팀장이라고 붙여준다네요."

"아, 그러겠네. 이젠 어엿한 팀장이니까."

작전 팀장에게만 붙여주는 전속 보좌관.

이 녀석이 정말 팀장이 됐다는 게 실감 나는 대목이었다.

'보좌관이라… 뭐, 나도 팀장일 때 도움 많이 받았지.'

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머릿속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현역 시절, 내 전속 보좌관이었던 이아영 실장.

내가 죽던 그 날, 유일하게 나와 함께였던 직원이자, 단언컨대 협회에서 가장 오래 붙어 있던 동료.

'그러고 보니 이맘때면 이 실장도 협회에 있을 때인데....'

지원팀 헌터관리실 소속이었나?

그런데 뭐, 우리 팀은 그쪽이랑 아예 교류가 없으니… 우연이라도 마주치긴 힘들겠네.

아니면 혹시....

"...야, 혹시 오늘 온다는 보좌관. 이름이 뭐냐?"

"아직 저도 몰라요. 딱히 신상을 알려주진 않아서."

"그래… 알았어."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물어봐서 뭐 하겠는가.

만난다고 해도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실장이 날 알아볼 리도 없는데.

"이런, 손님이 온다니 그 전에 가봐야겠구먼! 다들 일어나자."

박 팀장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덩달아 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아니에요. 굳이 자리 피하시지 않아도...."

"팀장님 업무를 방해할 수는 없지. 우리도 슬슬 다음 작업하러 가야 하니…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가십쇼!"

"또 놀러 오세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다음엔 저희가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작전 팀원들의 여전히 기세 좋은 인사를 받으며 등을 돌렸다.

그렇게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아...!"

앳된 얼굴의 여성과 마주쳤다.

꽤나 화들짝 놀라는 표정.

보아하니 곧 온다던 김민주의 보좌관인 듯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아,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김민주 팀장님을 보좌하게 된 지원팀 소속, 송혜연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

...역시 아니었다.

"아, 오셨네. 반가워요. 그런데 김민주는 그분이 아니라 전데...."

"아, 어?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보좌관, 송혜연의 볼이 확 붉어졌다.

물론 더 이상은 신경 쓸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무관심하게 그녀를 지나쳤다.

"...그럼 우린 이만 간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김민주에게 가볍게 인사를 던지며 사무실을 나왔다.

아쉬운 기색을 애써 숨긴 채였다.

***

헌터지원팀, 헌터관리실.

협회 내 모든 헌터들의 정보를 관리하고 현황과 필요 지원을 분석하는 곳.

"하아...."

첫 출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송혜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협회에 들어온 지 겨우 두 달 만에 작전 팀장 보좌관이라니. 과분해도 너무 과분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모든 게 긴장의 연속이었으니, 한꺼번에 피곤이 몰려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 그래, 혜연 씨. 상사가 생각보다 별로였어?"

"아, 부실장님."

그때 단발의 여성이 송혜연에게 다가왔다.

지원팀 헌터관리실, 이아영 부실장.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까지 단숨에 올라온 대단한 실력자.

게다가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답고 고혹적인 외모.

신입인 송혜연에게 있어 가히 롤모델이라고 불릴 만한 존재였다.

"그, 그런 건 아녜요. 생각보다 더 좋으신 분이긴 한데… 제가 긴장을 너무 많이 했나 봐요."

"그래? 그건 다행이네. 김민주 팀장이랬나. 그 공중분해 될 뻔한 팀을 맡게 됐다지? 운 나쁘게도."

"네 맞아요. 뭐… 확실히 본부장님 눈 밖에 나긴 했나 봐요. 저 같은 생 신입을 보좌관으로 붙일 정도면."

이아영 부실장이 싱긋 웃었다.

"아직 잘 모르는구나. 협회에서 서민철의 눈 밖에 났다는 건, 일을 잘하고 있다는 소리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정말이라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될 표정이었다.

송혜연 보좌관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무튼, 앞으로 계속 잘 해봐. 듣자 하니 그 팀장이 협회장 라인인 청소부랑 엄청 친하다던데? 이름이… 김준우였나."

"아…. 안 그래도 오늘 한 번 마주쳤어요."

송혜연 보좌관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초면에 사람 얼굴을 뚫어지라 노려보는 게, 신입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혹시 알아? 혜연 씨도 잘 보이면 김준우 라인에 붙을지."

"에이, 전 그런 거 싫어요. 높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기 생각만 하잖아요. 아랫것들은 사람으로도 안 보고… 재수 없게."

"흐음, 그런 것치곤 청소팀에서 꽤 열심인 것 같던데? 저번엔 예산도 받아내고, 청소팀 무시하는 놈들 혼내주고."

"다 이미지 관리에요, 그거."

"...그래?"

"그럼요! 지금이야 이미지 생각해서 위해주는 척하는 거지, 조금이라도 문제 생기면 바로 나 몰라라 내뺄걸요? 내기해도 좋아요."

송혜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이아영 부실장은 왠지 모르게 그 청소부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