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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그날 밤.

대공자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칠소궁의 식솔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장이서와 마오를 시작으로 홍란과 독마, 소오. 이어서 구유, 과평, 아신까지.

솔직히 이긴 것 치고는 표정들이 썩 좋지는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건 상 위에 올려진 가면 때문.

안쪽에 사(四)자가 적혀 있는 붉은 악귀의 가면.

바로 흉신팔주 사흉(四凶)의 가면이었다.

"산왕가주의 방에서 찾았다."

구유가 씁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과만 얘기하자면 팔이 잘린 채 도주한 산왕가주 파군성을 쫓았으나 끝내 그를 잡진 못했다.

그들의 본진까지 추격하는 데엔 성공했으나 막상 쳐들어가 보니 눈도 못 감고 목이 잘린 채 죽어 있었던 것.

누군가에게 꼬리가 잘린 거다.

남은 것이라곤 꼭꼭 숨겨져 있던 바로 이 가면 하나.

"산왕가주가 사흉이었다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답답함에 마오가 상위를 탕! 내려쳤다.

"...처음부터 혈교 놈들에게 놀아났던 거다."

이에 구유는 짙은 분노를 씹어 삼키며 말했다.

마교도 마교이지만, 과거 자신들을 파멸로 몰아간 산왕가주 파군성과 광의 공손절.

두 원흉이 모두 흉신팔주로 밝혀졌으니 어찌 분기탱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집하촌에서 산왕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탓에 칠무위의 피해도 컸다.

"젠장. 이미 죽어버렸으니 더 알아낼 방법도 없잖아. 혈교 새끼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소오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었다. 모두가 같은 심경이다.

이에 장이서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었으면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혈교의 수뇌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뜬다. 대체 그게 누구인가.

"혈존."

이어 장이서의 입에서 3년 전 겪었던 일들이 흘러나왔다.

붉은 면류관을 썼던 혈존과의 만남.

그리고 그때 겪었던 충격.

이야기는 짧았으나 여운은 길었다.

"그럼 3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이유가...."

마오가 묻는다. 그래. 그들을 상대하기 위함이다.

"혈교 새끼들이 그렇게 강하다고?"

믿기 힘든 건 안다.

하지만.

"이서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독마의 말 한마디에 논란은 금세 종식되었다.

비록 과거의 힘을 모두 되찾은 건 아니지만, 엄연히 입신지경에 다다른 절대자.

한데 그런 그마저 위험할 뻔했다.

"젠장! 이거 천무기 자식 치웠다고 전부가 아닌 거잖아!"

마오의 말대로다. 천무기는 그저 그들에게 이용당한 꼭두각시일 뿐.

진짜는 그 뒤에 숨어 있는 혈교다.

"미안하다. 산왕가주라도 잡아 왔어야 했는데."

구유가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넨다. 이에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산왕가주도 고작 하수인에 불과해. 혈존이 어디 있는진 알지 못했을 거다."

순식간에 공기에 돌을 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굳어진다.

듣고도 믿기가 힘든 이야기이기 때문.

산왕가주 파군성과 대공자 천무기가 누구인가. 지난 3년간 천산을 뒤흔들었던 자들이다.

한데 그런 자들이 고작 혈교의 하수인이었다니.

하지만 장이서는 이제 확신했다.

흉신팔주는 그저 배신한 첩자들에 불과할 뿐이며, 진짜 수뇌는 따로 있다는 것을.

"혈교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평화가 유지됐던 것 또한 사형인 천마의 탓도 있겠지만, 40년 전 사부인 뇌신이 혈교를 찾아간 이유도 컸을 거다.

잘은 몰라도 그때 놈들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 숨을 죽인 채 힘을 길러온 것.

그리고 작금에 와서야 기나긴 동면을 마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단언컨대 놈들은 세상 모두가 멸렬할 때까진 절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미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서역의 소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을.

기나긴 침묵 끝에 마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남들이 어찌 되든 내 알 바는 아니야. 그 정도로 위험한 놈들이면 우리가 먼저 섣불리 움직여야 할 이유도 없고. 어쨌든 이제 천산은 문제없는 거니까."

실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말.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어쨌든 이곳은 마교.

의와 협을 내세울 수도 없을뿐더러, 무의미한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진 않았다.

혈교는 예정대로 저 혼자 쫓으면 되는 일이니.

"그런데."

마음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마오가 씨익 웃으며 말을 잇는다.

"장이서 넌 그 새끼들 어떻게든 잡겠다는 거잖아."

뭐?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내 식구가 엮이면 그때부턴 내 일이거든."

"칠공자님...."

다소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자 마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같이 하자. 그 새끼들 잡는 거."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기 있는 거냐. 뭉클한 기분에 눈매를 찌푸리자 옆에 있던 구유도 일어선 채 말했다.

"광의도 파군성도 모두 흉노족의 원수다. 그들이 혈교라면 이건 내 일이기도 하지."

맞습니다, 형님! 구유에 이어 과평과 아신도 주먹을 불끈 쥐며 따라 일어선다.

너희들....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긴 좀 그렇지만, 나도 원한은 많다고. 집하촌에서 장사도 못 하고 3년간 그 새끼들이 얼마나 괴롭혔는지. 이대로는 진짜 못 참지."

소오. 너까지....

"내게 그리 건방지게 승부를 걸어온 놈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에 교(敎)를 위해 일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사숙."

독마도 손끝에 음산한 독기를 뿜어내며 이를 갈았다.

"무엇이든 함께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홍란이 수줍게 웃으며 일어나 말한다.

다들....

잔잔한 감동이 가슴에 맺힌다.

"우하하하! 좋았어. 다들 손 모아!"

마오가 먼저 손을 얹고, 소오, 구유, 과평, 아신. 그리고. 독마 사숙과 홍란.

모두가 손을 얹고는 절 바라본다.

아무래도 또 생각을 잘못했던 모양이다.

혼자가 아니다.

이들과 함께다.

척! 그들의 모인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마오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묻는다.

"그래서. 이제 뭐부터 하면 되는데?"

"우선."

모두를 둘러보곤 답했다.

"천산부터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혈교든, 중원이든.

이젠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도록.

이제는 내 방식대로 싸워주마.

기다려라.

혈존.

* * *

- 몇 시진 전.

만년설봉에서 서패왕과 독마의 대결이 이루어질 무렵.

모두가 눈치채지 못했지만, 드높은 구름 위에는 장이서보다 앞서 나타난 존재가 한 명 더 있었다.

세상 다 찢어발길 듯 격노한 눈으로 천하를 내려다보는 백발의 미공자.

그렇다. 천마 진우광이다!

"...."

그리고 지금 그의 눈엔 다른 건 일절 보이지 않았다.

오직 피를 흘리는 독마 양대헌의 모습만이 눈에 담겼다.

평소 그의 안위를 신경 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뇌기에 기혈이 뒤틀려 죽어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죽든지 말든지 일절 상관없는 존재였다.

천마에게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감히...."

남의 손에 죽어가는 꼴을 보자 심기가 아주 제대로 뒤틀렸다.

죽는 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해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어야 했다.

왜? 자신이 지금 그렇게 정했으니까.

제 과거를 기억할 수 있게 허락한 몇 안 되는 존재이기에.

"한낱 버러지 따위가 주제를 넘는구나."

그가 실로 무심하고도 섬찟한 눈매로 서패왕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예전에 장이서가 물은 적이 있다. 신의 경지에 올라 필멸의 저주를 비껴간 자들을 죽이는 방법이 무엇인지.

같잖아서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사실 방법은 간단했다.

더 강한 힘으로 그냥 짓눌러 버리면 되는 거다.

저 같잖은 봉우리와 함께 가루가 되어 완전히 소멸해 버릴 때까지.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거다.

이내 마음을 먹은 그 순간.

"사숙...!"

아래편에서 익숙한 그 녀석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숙?"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 어느 때보다도 울분에 찬 장이서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

그리고 이를 본 첫 느낌은 꽤 큰 충격이었다.

마치 자식이 다친 부모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아련하고도 걱정 가득한 눈빛.

사형인 자신에겐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모습.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운다.

이내 천마는 삐뚤어진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다 다시금 서패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뻗었던 손을 거두어 뒷짐을 지곤, 어딘가로 사라지며 말했다.

"죽이든지, 말든지. 네놈들 알아서 하거라."

생에 처음 질투라는 걸 느껴보는 천마였다.

316.

#왕이 돌아왔다

칠소궁이 결연한 의지를 다지던 그 시각.

유령마군 환사는 일소궁 흑화원에서 도저히 믿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대, 대공자님."

목내이처럼 폭삭 상한 몰골에 헛것을 보듯 풀려버린 초점.

"어으...."

옹알이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까지.

단 하루 만에 자신의 주군이 미쳐서 돌아와 버렸다.

이유는 뻔했다.

"장이서...."

그에게 당한 것이다. 조심해야 한다고 어떻게든 전했어야 했거늘.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갔어야 했거늘.

자신의 망설임이 이리 만든 것이다.

빠득.

이빨이 갈리고 두 눈에선 시퍼런 안광과 참회의 눈물이 뿜어져 나왔다.

"크흑...."

옆에 있던 수하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파묻은 채 보고를 올렸다.

"칠소궁의 연통을 받고 갔을 땐, 이미 대패한 상태였고 산왕가주도 사라진 뒤였습니다."

"사라져? 감히 대공자님을 버려두고 도망쳤다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크아아아아아!

유령마군의 처절한 포효가 울려 퍼진다.

"파군서어어어엉-!"

이 분노를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주군을 놔두고 저만 살겠다고 빠져나갔다니.

"한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령마군이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하거라!"

"산왕가주가 혈교의 사람이었고, 대공자님께선 이를 알고도 손을 잡으셨다는...."

"감히 누가 그딴 헛소리를 지껄인단 말이더냐!"

솨아아아!

유령마군의 몸에서 압도적인 살기가 뿜어지자 수하는 숨이 턱 막힌 채 바짝 엎드렸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이미 월하촌에 대공자께서 혈교의 마공을 펼치는 걸 목격한 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닥치거라!"

콰아아앙! 결국 유령마군의 손에서 거침없는 장력이 뿜어졌다.

부복한 수하의 옆자리가 움푹 파인다. 맞았다면 즉사했을 수준.

하지만 차마 수하를 없애진 못했다.

마음이 여려져서가 아니다.

언행과 달리 그의 뇌리에는 지금껏 이해되지 않았던 수많은 대공자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

무공을 수련할 땐 반드시 제게만 호위를 서게 했던 그가 한 발짝도 다가오지 못하게 한 것.

주변을 교인이 아닌 새외의 인물로 등용한 것.

일소궁에서 3년 동안 신도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것.

만일 이 모든 것이 혈교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대공자님께서 절대 그럴 리 없다. 찢어 죽일 놈들이 모함하는 것이다. 대공자님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명예마저 실추시키려는 것이다!'

유령마군은 수없이 떠오르던 의심을 지워냈다. 그러곤 이를 꽉 깨문 채 물었다.

"장이서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오늘 천마전으로 향한다고 들었습니다."

"흑폭위(黑爆衛)를 불러라."

"...!"

수하는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렸다. 흑폭위라면 유령마군이 비밀리에 과거 흑화위의 명예를 대신하기 위해 키우고 있던 자들.

기존과 다른 게 있다면 단 하나.

금기시될 만큼 위험한 마공인 폭사공(爆死功)을 익혔다는 것.

이름 그대로 스스로를 폭발시켜 상대와 공멸하는 마공이었다.

그들을 부르라는 이유는 단 하나.

"죽일 것이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놈을 죽일 것이다. 죽일 수 없다면 그 주변 것들이라도 없애버릴 것이다."

유령마군의 살벌한 거사가 시작되었다.

* * *

- 월하촌 칠소궁.

일소궁에서 위험천만한 암계가 꾸려지는 사이. 장이서는 천마전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간다고?"

방까지 쳐들어온 마오가 의자에 앉아 창룡도를 괴고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예."

"아무것도 안 하고?"

"예."

"하!"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마오는 답답함에 한숨을 크게 뱉었다.

"천산을 바로 잡겠다며."

그랬지.

"근데 그냥 이대로 휙 가버리면 어떡해. 천무기 밑에 있던 놈들이 딴짓 못 하게 일망타진하든가 해야지. 그놈들이 얼마나 영악한 놈들인데."

얘 봐라. 눈매를 좁힌 채 마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뭐."

"많이 컸어."

"야, 장이서!"

픽 웃고는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본교가 괜히 본교겠습니까. 억지로 돌려세우려고 하면 말 더 안 듣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가면 어떡해. 가는 길에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건 그거대로 좋고.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씨익 웃은 뒤 밖으로 나섰다.

"야, 장이서!"

이내 대문으로 향하자 식솔들이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다녀오겠습니다."

가볍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곤 길을 나섰다.

"같이 가!"

결국 마오와 칠무위는 호위를 자처하며 함께 했다.

"이제라도 돌아가자."

"진짜 그냥 가?"

"갈 거야?"

"너 똥 밟았어."

어떻게든 멈춰 세우려고 되는 대로 질문을 던져보지만, 장이서는 요지부동.

'이래 갖고 도대체 뭘 어떻게 바로 잡겠다는 거야.'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마교. 야욕으로 가득한 마인들 천지다.

이렇게 허술하게 움직였다간 누가 또 무슨 짓을 해올지 모른다.

한데 천마전에 간다고 동네방네 소문은 다 내놓고 만사태평하게 세월아 네월아 기어가다니.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

하지만 불신도 잠시.

첫 번째 관문을 지나면서부터 마오는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허허허, 오셨습니까. 부교주님."

금룡당주 황금 거북이 만금수.

그가 품격 있는 예복을 갖춰 입은 채 수하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것.

심지어 장이서를 위한 멋들어진 피풍의와 커다란 흑마까지 준비하고서 말이다.

"고맙게 받겠소."

심지어 장이서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 피풍의를 어깨에 걸친 채 말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떠나는 여정.

놀라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오호호! 참 늦게도 오십니다."

두 번째 관문에서는 묘채경과 비룡당이 합류하였다.

"우리, 왔다."

세 번째 관문부터는 방첩대부터 군소 세력들이 따라붙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마오는 비로소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인지했다.

장이서가 천마전으로 향한 것뿐이었다.

한데 습격은커녕 수많은 이가 마중을 나와 장이서를 보필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산채에 도착했을 땐.

와아아아아아-!

온점처럼 가득 채워진 신도들의 함성이 자신들을 맞이했다.

'이거였구나.'

그제야 마오는 깨달았다.

장이서가 괜찮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애초에 그는 알고 있었던 거다.

천무기가 무너진 순간 자신에게 대항할 존재는 더 이상 이곳 천산에 없다는 것을.

3년 전 모두에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고, 또한 3년 후엔 천무기를 하루 만에 몰락시켰다.

입지전적인 행보.

그런 그에게 누가 감히 칼을 들 수 있겠는가.

이곳은 미치광이 마인들이 서식하는 마의 소굴임과 동시에 힘 앞에 진심으로 충복하는 강자지존의 마교였으니.

그러니까 이건 왕의 귀환이었다.

뇌마 장이서라는 천산의 왕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공식 행보였던 것.

해서 천마전으로 향한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 거였다.

그럼 알아서 기어 나와 그의 앞에 복종을 맹세할 것이니.

'대단해...!'

그리고 마오는 그런 장이서의 위풍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커다란 전율을 느꼈다.

아버지에게서, 형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본받아야 할 어른의 향취를 느껴버린 것.

이는 새로운 감정이었다.

동경이라는 찬란하고도 떨리는 감정.

물론 이런 장이서의 모습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은 건 마오뿐만이 아니었다.

"어, 어째서...?!"

흑폭위를 이끌고 기습을 준비하던 유령마군 환사.

그도 이 안에 있었다.

신도들 사이에 숨어 기습을 노리던 그는 멍해진 시선으로 장이서의 위엄을 지켜봐야 했다.

"어찌할까요."

뒤늦게 다급함을 느낀 수하의 재촉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명령을 내리려 하였으나....

"오래 기다렸습니다, 부교주님."

천산채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던 일곱 명의 절대자에 결국 입을 다물어야 했다.

칠장로 이두쌍마 양요와 양유.

육장로 독산마의 사마균.

오장로 팔마객 광교.

사장로 백귀신마 몽유.

삼장로 신창마귀 맹철용.

이장로 마선 천오산.

일장로 북명마군 마일성.

"늦었습니다."

그들이었다. 3년간 숨죽이고 있던 칠대장로. 그들이 봉문을 깨고 나온 것이다.

그것도 천마를 알현할 때 입는 피풍의까지 갖춰 입은 채.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보좌님!"

수하가 떠나가는 장이서를 보며 다급히 외쳤다.

하나 그는 진심으로 깨달아버렸다.

대공자를 믿었었다. 본산의 태양은 오직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장이서는 그런 대공자를 밀어내려는 간악한 무리일 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대공자가 당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며.

장이서가 대공자를 모함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자신들은 저무는 달이었고, 장이서는 월동을 마치고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그게 다였다.

이젠 자신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모르겠다. 3년 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눈이 멀어 보지 못하였을 뿐.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대공자님께 돌아간다."

유령마군이 몸을 돌렸다.

이어서 결심했다. 죽는 순간까지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기로.

일평생 대공자만을 보필하며 은둔한 채 살아가기로 말이다.

'장이서. 이젠 너의 시대로구나.'

그렇게 유령마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천무기의 시대가 끝이 났음을 스스로 증명한 채.

그리고.

"장이서! 장이서!"

신도들의 연호와 함께.

부교주 장이서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

장이서가 천마전에 입궁했다.

신도들은 오늘을 역사적인 날로 기억했다.

칠대장로와 당주들. 이 밖에도 수뇌들이 모두 모여 고개를 조아리던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 그 자체.

어디 그뿐인가.

호룡당 앞에서 구유와 칠무위가 멈춰 서고, 마중 나온 천마대주가 이를 이어받듯 호위하던 건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단 한 번의 행보로 천산은 이제 부교주의 차지가 되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하게도.

"교주님께서 내리신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셨군요."

천마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방증.

"받으시지요. 마땅히 지닐 자격 있으십니다."

장이서는 우사가 건네는 흑옥함(黑玉函)을 열어 그 안에 든 반지와 장신구. 그리고 칠흑빛 완갑을 착용했다.

천마전의 어디든 출입과 이용이 가능한 천마환과 직속 산하 부대를 다루는 천마령.

그리고 가장 기대가 컸던.

'흑뢰.'

사형이 사부를 기리며 만들었다는 흑뢰다.

확실히 투박하고 단출했던 백뢰와 달리 새겨진 문양부터 섬세함과 화려함이 느껴지는 게 천마의 성정이 묻어 있었다.

"후후, 마음에 드십니까."

옆에 선 좌사의 물음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다마다.

당장 뇌전법을 일으켜 어디든 쏘아보고 싶을 정도다.

외관도 마음에 들었다.

첩자로 살아갈 때를 생각하면 튀지 않는 백뢰가 더 나았겠지만, 가면을 벗고 나니 이게 더 낫다.

"집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럽시다."

한껏 좋아진 기분으로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317.

#부교주의 기적

우사를 따라 도착한 곳은 드넓은 공동.

바닥의 석판엔 천마귀를 형상화한 문양이 크게 새겨져 있고, 벽에 걸린 화로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인다.

그리고 끝의 낮은 계단 위에 놓인 태사의에는 손잡이에 마귀 머리가 인각 되어 웅장함과 기괴함을 자랑했다.

"앞으로 용무는 이곳에서 보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좌사와 우사는 얼른 가서 앉아보라는 듯 태사의를 가리켰다.

이에 떨떠름히 걸어가 태사의 대신 계단 위에 앉았다.

아무래도 익숙하지가 않았기 때문.

한데.

훅! 그 즉시 좌사와 우사가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파묻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천마환과 천마령. 그리고 천마신패를 지니신 이상 부교주님께선 본교의 지존과도 같으시지요."

"그래서요?"

"한데 그리 낮은 곳에 앉으시니 저희가 몸을 낮추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다소 놀랐다. 광명사자는 누구보다 교리에 엄격한 자들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아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도.

실수를 인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태사의에 올랐다.

"됐습니까?"

그러자 두 사람이 일어나 가지런히 손을 모으곤 씨익 웃는다.

"훌륭하십니다."

헛웃음이 뱉어졌다. 마치 삼공(태자의 스승들)을 마주한 태자가 된 기분.

"앞으로는 존체를 다루심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부교주님께서 몸을 낮추면 상대는 더 낮추어야 하는 것이 본교의 질서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스스로를 낮추지 마십시오."

정파의 기조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잔소리지만, 그들의 말을 허투루 듣진 않았다.

피로 가득한 마인들의 길을 답습할 생각은 없지만, 부교주라는 삶에 가벼이 임할 마음도 없기에.

"그러지."

하여 조금은 더 딱딱하고 차가운 어투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에 좌사와 우사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지난 3년간 대공자가 행했던 것들입니다. 정세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좌사가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올렸다. 이를 받아 살피자 지난 3년간의 일지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걸 전부 직접 기록한 거요?"

"천산을 둘러보는 것도 저희의 역할이니까요."

확실히 대단하긴 한 자들이다.

이 커다란 천마전을 단둘이 모두 관리하면서도 천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니.

심지어 둘의 무공 실력이 신의 경지에 다다른 것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만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자들.

살아있는 전설인 1세대 인물들다운 면모다.

스륵.

어쨌든 감탄은 여기까지.

좌사가 올린 천무기의 행적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천무기는 태어났을 때부터 제왕의 길을 걸어온 자.

잠시 미쳐 혈교와 손을 잡았지만, 그래도 몇몇 가지는 곧잘 관리를 해 왔다.

수뇌들도 잘 챙겼고, 새외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오히려 금고는 더 불어났다.

장로회의 도움이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능력은 나쁘지 않았던 것.

다만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이거였다.

정작 신도들을 굶주리게 했다는 것.

제 살 깎아 먹듯 이것만으로도 그의 행적은 역대 최악으로 기록될 수준.

'교의 자산은 늘었는데 신도들은 더욱 궁핍해졌다.'

바꿔 말하자면 일부러 그랬다는 얘기.

대체 무얼 위해서.

'대부분의 비용은 광물과 무기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대곡고에 누적된 식량은 이미 두 해 분을 넘겼고, 마사(馬舍)의 말도 급증했어.'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전쟁(戰爭).'

천무기는 어이가 없게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신도들을 굶주리게 한 이유도 뻔했다.

부족한 삶에 찌들어 갈수록 독기로 가득 채워질 터.

중원의 비옥한 토지를 빼앗겠다는 명분이면, 모두가 앞장서서 달려들 게 뻔했다.

그럼 이렇게까지 하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혈교. 놈들이 계획한 거다.'

아마 이를 대가로 천무기와 밀약을 한 것일 터.

그에겐 힘을 빌려주고, 반대로 세상을 전란에 빠트린다.

그리되면 천무기도 사형 몰래 벌여놓은 짓들을 자연스레 묻을 수도 있고.

이래저래 둘의 성정을 가늠해 보면 이보다 찰떡궁합도 없었을 거다.

'만일 내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

더 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거다.

툭. 서책을 덮고는 이를 다시 좌사에게 건넸다. 그러자 좌사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다 보신 겁니까?"

너무 대충 본 게 아니냐는 반어적 물음. 이에 거두절미하고 답했다.

"두 사람도 알고 있었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대공자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자 오므렸던 좌사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 찰나에 거기까지 알아냈다는 것에 경악해 버린 것.

감탄을 터트리며 이실직고했다.

"맞습니다. 대공자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도 가만히 놔둔 거요?"

"부교주님께서 오시길 기다렸지요."

하, 그게 말인가.

"내가 더 늦었으면 어쩌려고."

"그럼 부교주님께서 할 일이 더 많아지셨겠지요."

미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두 사람이 걱정 없는 미소를 짓는다.

깜빡했다. 이들이 누구인지.

천마가 마의 신이라면 이들은 그 신을 보필하는 최강의 마룡(魔龍).

아마 마교에서 사형 다음가는 미치광이들이 바로 이들일 거다.

"이제부터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리시면 됩니다."

그럴 생각이다. 아니, 그래야만 하겠다.

"물론 쉽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지난 3년간 대공자가 지나온 발자취가 작지만은 않을 테니."

좌사와 우사의 입가에 얄궂은 미소가 서렸다. 어찌 해결해 나가는지 어디 한번 지켜보겠다는 표정.

그래. 분명 쉽지는 않을 거다.

"어디 가십니까."

태사의에서 내려오자 좌사가 묻는다.

이에 스쳐 지나며 툭 뱉었다.

"되돌리러."

하지만 그 쉽지 않은 걸 해내는 게 장이서다.

부교주로서의 활약은 이제부터였다.

*

천마전에 돌아온 이후의 나날은 정신없이 바빴다.

"오늘부터 신도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십시오. 누구도 부족함이 없도록."

가장 먼저 금룡당주에게 대곡고의 문을 열도록 하였다.

수뇌들이 성탑이라면 신도들은 대지.

그들의 굶주림은 결국 근간을 흔들고 모든 걸 무너뜨릴 것이다.

"앞으로 교내의 소사는 본래 하던 대로 일장로께서 관리해 주십시오."

이어서 행한 일은 흐트러진 관리 체계를 돌려세운 것.

그리고 지금 가장 중한 것은 빠른 안정과 단합.

잡음이 들리지 않도록 과거 본교의 실세들을 모두 복직시키는 쪽을 택했다.

"후계들에게도 이젠 모두 복귀해도 된다고 알려주시고요."

"예. 그리하지요."

물론 전부 너그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쳐라!"

천무기가 들여와 신도들을 핍박하던 마인들과 양심까지 팔아넘겼던 수뇌들에겐 자비 없이 도륙을 명했다.

일말의 아량도 없었다.

죄가 많거나 큰 자들은 도리어 보란 듯이 효수하였다.

"끄아아아악!"

매일 같이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부교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반면 찬양도 끊이지 않았다.

경외(敬畏).

장이서는 자신의 기조를 그렇게 잡았다.

평화의 이면에 공포를 새겨 누구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덕분에 마교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야말로 부교주의 기적이었다.

*

이른 새벽.

장이서는 천마전 정상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정신없는 정사(政事)를 마치고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

이곳은 천마가 가장 애용하던 장소라고 했다. 이유는 단번에 깨달았다.

천산에서 가장 흉험한 마기(魔氣)가 넘쳐흐르는 명소였으니.

후.

가볍게 숨만 들이켜도 폐부에 묵직한 돌덩이가 들어설 만큼 고강했다.

정공 수련을 한 이들이라면 바로 메스꺼움에 헛구역질을 뱉고, 휘청거렸겠지만.

'좋구나.'

안타깝게도 장이서는 마공을 익힌 자.

그것도 독(毒), 살(殺), 마(魔).

하나만 알아도 섬찟하기 그지없는 심법들을 고루 익혔다.

성정은 둘째치고 익힌 것만 보면 희대의 대마귀가 따로 없는 일.

지금도 그저 수련을 하는 듯 보였으나 모습은 범상치 않았다.

고오오오오!

지독한 살기가 마른하늘에 먹구름을 일으키고.

솨아아아아!

어깨 위로 떠오른 시퍼런 독무는 서서히 바닥에 낮게 드리워진다.

퀴아아아아!

품 안에 잠들어 있던 혈마귀는 포식하듯 몸 밖으로 빠져나와 머리 위에 우뚝 자리한다.

콰과과광!

하늘이 격노하여 번개까지 내리치니 그야말로 마중의 마.

소천마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지경.

심지어 여기서 끝도 아니었다.

본디 남천능가경의 성장은 항마(降魔)에서 비롯되는 법.

마기가 강해질수록 덩달아 자연스레 정공의 기운도 거세졌다.

우우웅!

하여 황금빛 기운이 몸을 감싸니 그야말로 황홀한 전경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각기 다른 네 개의 진기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는 얘기.

여기에 내면의 근골을 이루는 역근경까지 생각하면 무려 다섯 개의 절대 기운이다.

오죽하면 호위를 서던 좌사와 우사도 감탄을 터트렸다.

'3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저 마귀의 형체는 성역이 분명한데. 정작 본인이 극마에 오르신 것 같지는 않으니.'

그들 정도의 연륜과 실력이라면 대충 보기만 해도 상대의 수준이 가늠이 된다.

자신의 발끝인지. 아니면 마주 볼 만한 상대인지.

하지만 지금의 장이서는 모든 게 미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안개 속에 사는 사람처럼.

분명 자체만 놓고 보면 초절정 경지에 머무른 듯 보이지만.

하늘 위에 서린 마귀의 성역이나, 뿜어져 나오는 경천동지할 살기.

그리고 은은히 퍼지는 이 정대한 기운은 두 사람마저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하여 지금 그와 겨룬다면 그 무엇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강하다!'

광명사자도 이제는 함부로 내려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얘기.

그것도 고작 3년 만에 말이다.

더구나 반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던 본교의 안정도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후...."

장이서가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지그시 눈을 떴다.

그러자 주변에 펼쳐졌던 신묘한 현상들도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자 좌사와 우사가 본능적으로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그런 본인들의 태도에 놀라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지존 외에 우리가 이리 긴장한 적이 있었나?'

'없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

천마의 명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장이서를 천산의 작은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말이다.

지나가는 그의 어깨에 피풍의를 둘러주고, 빼놓았던 천마환과 천마령을 끼워주었다.

공손해진 모습이 볼만하다.

장이서도 이젠 일말의 어색함 없이 덤덤히 서서 이를 받았다.

우사는 그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물었다.

"부교주님 덕분에 본교는 금세 안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혈교 놈들은 도리어 꼭꼭 숨어 버렸으니....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말대로다. 천산이 견고해질수록 혈교는 습성처럼 음지로 숨어버렸다.

이대로면 또다시 기약 없는 숨바꼭질이 이어질 터.

하나 장이서는 걸어 나가며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아직 하나 남았소."

"뭐가 말입니까?"

"혈교를 잡아낼 마지막 꼬리."

"...!"

이제 잡으러 갈 시간이다.

318.

#최선을 다했을 뿐

사실 천산을 바로 잡는 것만큼 장이서가 주력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세작들을 찾아내는 것.

산왕가주 파군성은 놓쳤지만, 분명 연관된 자들이 아직 남아 있을 것이라 여긴 탓이었다.

'오호호! 싹 다 잡아들이거라!'

그때부터 비룡당과 방첩대. 그리고 백오문이 총동원됐다.

암각 최고의 요원이었던 장이서가 수장이 되었으니, 숨어 있다면 잡히지 않는 게 어불성설.

당연하게도 빠짐없이 두더지들을 잡아냈으며.

'반갑네. 형 선생일세.'

고문가(拷問家) 형 선생의 도움으로 그들의 신원까지도 전부 알아냈다.

하지만 그래봤자 잔챙이들뿐. 의미 있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덜미가 잡힌 건 정말 아주 의외인 곳에서였다.

"이곳입니다."

비룡당주 묘채경이 안내한 곳은 지하 깊숙한 곳의 철문 앞.

도라옥이 무너진 후 특별 죄인들을 가둬두는 뇌옥이었다.

끼이이익!

그리고 철문이 열리자 산발 머리에 좌선하듯 뒤돌아 앉아 있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딱 봐도 하루 이틀 갇혀 있던 게 아니었다. 최소 수년. 대체 이자가 누구기에.

한데 바로 그때 장이서의 입에서 믿기 어려운 말이 튀어나왔다.

"오랜만입니다, 대주."

대주라니! 산발의 사내가 인기척에 서서히 몸을 돌린다.

잘려 나간 한쪽 팔.

그리고 음산하게 웃는 곱슬머리.

"오랜만이구나. 103호."

그다.

"아니, 이제 부교주라고 해야 하나."

방첩대주 겸사익.

아니, 암각 요원 12호!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신수가 더 훤해졌구나."

"바깥소식까지 듣는 걸 보면 나름 잘 지내고 계셨나 보오."

"크큭. 고작 3년 아니냐. 우리 같은 자들에게 기다림은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 일이지. 앉거라."

그의 제안에 묘채경이 수하에게 눈짓한다. 의자를 가져오라는 얘기.

이에 장이서는 손을 들어 말렸다.

"대주와 둘이 이야기하지."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얘기.

"알겠습니다."

쿵! 잠시 후 묘채경과 수하들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겸사익은 악의 없는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확실히 거물이 됐구나. 당주를 저리 부리다니.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다면 나도 너한테 투자라도 좀 해놓는 건데."

하여튼 그 입은 아직도 죽질 않았군. 하긴 장이서가 입씨름을 누구에게 배웠겠는가.

스승이 그다.

픽 웃으며 바닥에 마주 앉았다.

"가진 돈도 없는 양반이 투자는 무슨."

"끌끌, 내가 누군지 벌써 잊은 것이냐? 나 황금 귀신 겸사익이다."

"그런 인간이 부하들한테 밥 한 번을 안 사줬나. 기억나? 한 턱 크게 쏜다며 데려간 곳이 살혼대주 부친 장례였던 거. 그날 우리 전부 장례 치를 뻔했어."

"크큭, 그랬지."

"예전부터 이해가 안 됐지. 돈이란 돈은 싹 다 긁어모으던 양반이 쓰는 꼴은 보질 못했으니. 심지어 내가 바꿔주기 전까지 이 나간 칼도 안 바꿨잖아."

겸사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 금세 다시 끌끌 웃으며 답했다.

"너도 내 나이 되어보거라. 돈 나갈 일이 한둘이 아니니."

"그렇겠지. 요원들을 위해 써야 했을 테니까."

겸사익의 올라간 입꼬리가 슥 내려간다.

요원. 그래, 맞다. 그가 악착같이 모은 돈은 전부 천산에 잠입한 요원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피차 다 알면서 왜 묻는가.

"지금 그거 따지러 온 것이냐? 같은 요원인 너한텐 밥 한 번 제대로 안 사줬다고?"

"왜 그랬어."

"미친놈. 뒤끝이 긴 놈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다만, 고작 그거 하나 가지고...."

"왜 날 첩자로 밀고한 거지?"

"뭐...?"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겸사익의 표정이 멍하니 굳어진다.

"한 번은 이해가 가. 내가 부교주로 당선이 되었을 때는 제갈상과 틀어진 뒤였고. 일부러 그러도록 유도한 것이니까."

그건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그전이었다.

곤륜산맥에서 남천능가경을 익히고 돌아오던 날.

천무기가 사공자와 비룡당주를 앞세워 절 첩자로 붙잡았던 바로 그때 말이다.

"그때도 이해가 되지 않던 게 하나 있었지."

사공자 한이 아무리 제 뒤를 캐고 다녔다고 해도, 천산 밖으로 나간 것까진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자신이 돌아오는 날 나타났다.

그것도 비룡당주와 함께.

"다른 건 다 그럴 수 있다고 쳐. 하지만 흑거가 조사 대상에 오른 건 도통 납득이 되질 않더군. 그건 내부에서 밀고한 게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는 거거든."

그때도 생각했었다.

'대공자는 아니다. 그보다 날 더 잘 아는 자가 뒤에서 제보하고 있는 거다. 대체 누가.'

제보자가 있다고. 자신이 아닌 흑거를 겨냥해 정보를 흘린 결정적인 제보자가.

"그런데 얼마 전 이장로가 지나가듯 말해주더군. 당신이 날 첩자로 내몬 게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다고."

"...!"

분명히 그랬다.

'자네가 지난번에 뇌마를 첩자로 몰아간 자였나?'

'뭐 몰아갔다기보다는 의심 가는 구석이 있어서 제보를 한 거지요. 하하!'

심지어 그때는 암각과 틀어졌을 때도 아니었다.

오히려 제갈상은 제 사상을 검증하기 위해 밖으로 불러냈던 상태.

그러니까 그 말은 곧.

"당신이 날 밀고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는 거야. 암각의 12호라면 더더욱."

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장이서를 밀고했다. 첩자로 몰아 죽이려고 했었다.

대체 왜.

암각의 요원인 그가 무슨 이유로.

오기 전 이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봤다.

"처음엔 제갈상이 천무기한테 붙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

암각 입장에선 훗날 교주가 될지도 모르는 천무기와 가까워져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자신을 희생시켜 관계를 깊이 다질 수 있다면 그것도 있을 순 있는 일.

하나 아무리 조사해도 둘 사이의 연고점은 더 이상 없었다.

더구나 바로 직후 청해에서 만난 제갈소미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고.

그렇다면 무엇일까.

생각을 바꾸어 보았다.

"애초에 제갈상이 한 일이 아니었다면."

"뭐?"

"당신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인 거라면 말이 되더군."

"그게 무슨 말이냐. 크큭. 내가 굳이 왜...."

"이중첩자(二重諜者)."

"...!"

"암각 말고도 당신한테 명령을 내리는 곳이 또 있었던 거야."

겸사익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든다.

"천무기 말고도 그토록 날 죽이고 싶어 하던 자들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니 딱 하나가 더 나오더군."

장이서가 눈매를 굳히곤 일언했다.

"혈교."

"...!"

사도철부터 광의. 그리고 뇌옥왕까지.

번번이 그들을 무너뜨리던 시기다.

천무기의 뒤에 숨어 자신을 사지로 밀어 넣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일.

"농담이 지나치군...."

겸사익이 힘겹게 웃으며 애써 부정한다. 하나 무의미한 일이다.

그의 앞에 툭 붉은 가면을 던졌다.

안쪽에 삼(三)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붉은 악귀의 가면.

"당신의 안가를 샅샅이 뒤져 찾아냈지. 삼흉이라고 불러줘야 하나."

실로 충격적인 일!

암각 요원 12호가 혈교의 삼흉이었다니!

겸사익은 파르르 떨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 인정해 버린 것과도 같은 일.

장이서는 쓰린 침을 삼키곤 말을 이었다.

"광의가 구룡성에 갇혀 미혼산까지 풀며 기다리던 것도 당신이었어."

분명히 그랬다.

'날 구하러 온 게 아니라면... 사마균 그 늙은이가 보낸 놈이더냐?'

광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추락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삼흉. 겸사익이 데려간 것이다.

"방첩대주였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겠고."

그래서 마의도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거다. 방첩대가 이탈자를 쫓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이것이 바로 사건의 전말.

"...그만해라."

"아니, 이제 시작이야. 끝까지 들어."

진짜 의문은 여기서부터였다.

"궁금했어. 대주가 왜 혈교와 손을 잡았는지."

대체 왜.

그가 뭐가 아쉬워서.

암각의 명이라서?

천만에.

제갈상은 장이서가 거론하기 전까진 혈교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그럼 그가 진짜 처음부터 혈교의 사람이었을까?

아니, 그것도 아닐 거다.

그랬다면 그런 엉성한 증거를 들이밀진 않았을 거다.

'이달 그믐. 청해호(靑海湖). 12호 접선 요청.'

오히려 그의 태도는 양쪽 모두에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려는 듯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듯이.

대체 뭣 때문에.

"생각해 보니 간단하더군. 당신은 암각도, 혈교도 아니었던 거야."

겸사익의 얼굴이 절망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장이서는 잔혹하게도 그가 감추고 싶었던 진실을 꺼내버렸다.

"당신이 진짜로 따르고 있던 사람은 따로 있었던 거지."

"그만!"

"천마. 바로 마교의 교주였던 거다."

그랬다.

겸사익은 암각의 12호이자, 혈교의 삼흉이었으며, 천마의 하수인이었던 거다.

그래서 처리한 요원들의 신상이 담긴 기록을 건넸을 때도 천마는 놀라지 않았던 거다.

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천하의 사형이 자신의 직속 부대인 방첩대가 첩자들 소굴이라는 걸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장이서가 말을 끝내자 겸사익은 기나긴 침묵 끝에 허탈한 음색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어디에도... 내 행동에 거짓은 없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실로 얼토당토않은 궤변에 기함이 터졌다.

"당신 대체 뭐야."

"난 그저 최선을 다한 것뿐이었다."

"뭐?"

"처음엔 살아야 했고, 그 후엔 버텨야 했으니까."

겸사익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다.

요녕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타고난 자질로 그의 나이 일곱이 되기 전에 정무방이라는 문파로 팔려 갔다.

'금방 올게!'

굶주린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써 웃으며 떠났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은 평범한 문파가 아니었다.

속내는 살수를 양성하던 자객 단체.

그들은 아이들 사이에 칼 하나를 던져주었고, 겸사익은 그날 첫 번째 살인을 했다.

살기 위해.

'버텨라. 그럼 네 가족들은 부족함 없이 살게 될 테니.'

그 뒤부터는 버티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옥 같은 훈련.

지옥 같은 살인.

하지만 괜찮았다. 자신이 버티면 제 가족들은 행복할 테니.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기를 삼 년째.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인생을 뒤바꿀 사건이 벌어졌다.

'크아아아악!'

정무방에 그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정도무림맹(正道武林盟).

그들은 가차 없이 살수들을 소탕했고,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는.

'나와 함께 가겠느냐.'

그의 손에 거두어졌다.

암각의 각주 제갈상.

그리고 다시 3년.

'널 천산으로 보내야 하는 날 용서해 다오. 네 가족들은 부족함 없이 살게 될 것이다.'

바뀐 건 없었다.

단지 살수에서 첩자가 되어 이곳 마교로 오게 된 것뿐.

여전히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야 가족들이 평안히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천마지존 만마앙복!'

방첩대는 교주 직속 특무대.

천마를 마주한 순간 모든 것이 비틀어졌다.

'재밌는 아이구나.'

철저히 신분을 감춘 그도 모든 걸 꿰뚫는 천마의 신안(神眼)을 피해 갈 수 없었던 것.

'혈교에 들어가거라.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이니.'

그때부터 겸사익의 인생은 생각지 못한 풍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천마의 명으로 혈교에 잠입하였고.

암각의 명으로 방첩대주가 되었으며.

혈교의 명으로 장이서를 첩자로 내몰았다.

삼중첩자(三重諜者)의 삶이었다.

319.

#냄새가 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 난 그냥 최선을 다해 버틴 것뿐이다."

그의 길었던 이야기가 끝나고 장이서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던 대주의 모습이 송두리째 깨져버린 기분.

이보다 더 첩자다운 삶이 있을까.

"날 그리 보지 말거라. 그저 난 너처럼 반하지 못한 것뿐이니."

얕게 뱉어지는 한숨.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에 이해하기엔 너무 멀리 갈라섰다.

"하나만 묻지. 그럼 암각의 명을 따른 것도 천마의 뜻이었나?"

"크큭, 넌 아직도 천마를 그리 모르느냐?"

"무슨 뜻이지?"

"그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든. 무얼 하든. 관심이 없는 자다. 그저 자신이 시킨 일만 해내면 그뿐인 거지."

하긴. 뇌옥왕이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 걸 알면서도 버젓이 살려둔 자가 바로 천마였다.

그가 사소한 모략까지 가담했을 리 없는 일.

"천마가 내게 내린 명은 단 하나. 혈교에 잠입해 한 사람을 찾아내라는 것뿐이었다."

"누구를."

"한무영."

"...!"

"그것이 그가 내 정체를 눈감아주는 조건이었다."

어째서....

"더는 묻지 말거라. 그 이상은 나도 모르니."

머릿속이 살짝 혼란스러워진다. 그럼 사형은 계속해서 사부를 찾고 있었던 것인가.

언제부터.

아니, 그것보다도.

"그래서 찾았어?"

"크크, 그랬다면 내가 이곳에 갇혀 있겠느냐? 듣지도 못했다. 뭐,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침음이 뱉어진다. 그리고 겸사익과 지그시 눈을 마주했다.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자 현실이 보인다.

너무도 차분한 눈빛.

입을 다물려면 얼마든 다물 수 있었을 거다. 아무 이유 없이 인정했을 리는 없을 터.

표정을 갈음하고 물었다.

"바라는 게 뭐야."

"크크, 역시 미친개답구나. 찰떡같이 알아듣는 걸 보니."

"헛소리 말고 말해."

"날 여기서 내보내다오."

절로 인상이 확 찌푸려지는 소리.

"조용히 천산을 떠나겠다. 지금의 너라면 가능한 일 아니더냐."

공교롭다. 그의 정체를 추궁해 알아냈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를 인정하고 목적을 밝힌다.

문득 처음 들어왔을 때 겸사익이 한 말이 떠올랐다.

'크큭. 고작 3년 아니냐. 우리 같은 자들에게 기다림은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 일이지. 앉거라.'

설마.

"3년간 기다렸다는 게 나였나?"

"너라면 냄새를 맡고 날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미친개 아니더냐."

"이제 보니 안가에 가면을 놔둔 것도 일부러였군."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

"근데 왜 놀랐던 건데."

어이가 없어서 묻자 겸사익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한편으론 몰라주길 바랐으니까."

빌어먹을. 그래도 일면은 대주이고 싶었다는 건가. 욕심이 지나치다.

"널 속였던 건 미안하다. 하지만 너와 함께할 때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

"그렇겠지...."

겸사익의 얼굴에 씁쓸함이 가득하다. 하나 부질없다.

"아는 걸 말해. 풀어줄지 말지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 얘기니까."

"크큭, 차가운 녀석 같으니."

"잊었나? 우리는 인연이나 낭만에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는 거. 죽으면 경조사는 챙겨주지."

겸사익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칼자루를 쥔 건 장이서. 어쩌겠는가. 따라야지.

"혈교에 오랜 시간 몸담았지만 나도 그들의 실체는 본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이지. 애초에 내가 속한 흉신팔주도 원래부터 혈교가 아니니까."

알고 있는 얘기.

"그런 우리끼리 만날 때도 가면을 쓰니 서로의 신분을 알지 못한다. 물론 대화를 하다 보면 유추할 수는 있지. 해서 오흉이 무림맹인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군사인 것까진 알지 못했다."

"거래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

"성급하긴. 하나 물으마. 산왕가주가 흉신팔주였나?"

눈매가 좁혀졌다. 아무것도 모른다더니. 그건 또 어디서 들었는가.

"맞아."

"역시 그랬군. 참석이 가장 뜸했던 걸 생각하면 그가 사흉이겠군."

정확하다. 의문스럽게 바라보자 겸사익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일흉이라면 내가 사라진 순간 바로 그 자리를 채워놓았을 테니까."

"일흉?"

"흉신팔주의 수장인 자다. 누구보다 음흉하고 위험한 자이지. 흑혈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강자이기도 하고."

흑혈. 적아린이 속했던 곳이다. 문제가 있는 자들을 청소하는 자객 단체.

"만일 산왕가주가 이 안에서 무언가를 획책했다면 그건 모두 일흉의 뜻일 거다."

전쟁을 준비한 게 그라는 얘기.

"그가 누구지?"

"모른다."

무의미한 대화. 인상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지."

마지막 기회다.

"정도에 숨어든 첩자는 군사 하나가 아니라는 것."

"뭐...?"

"일흉은 정도의 사람이다. 그것도 스스로 무림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는 아주 큰 거물."

"...!"

"맹주를 살펴라. 분명 그의 신변에 네가 찾는 답이 있을 테니."

뒤를 돌아보자 겸사익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씨익 웃는다.

"...풀어주는 건 사실부터 확인한 다음."

"후후, 기다림은 늘 익숙한 법이지. 다녀오시지요, 부교주님."

빌어먹을 양반.

*

장이서는 뇌옥에서 나와 곧장 묘채경에게 조사부터 명했다.

3년 내 정도 맹주 주변에 특이점이 없는지. 새로운 세력이 나타난 건 없는지.

그리고 해가 저물기도 전에 그녀는 식솔들과 대화 중이던 칠소궁으로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부교주님 말씀대로 이상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빌어먹을. 아니길 바랐거늘.

"아무래도 맹주에게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

장이서를 비롯해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에 묘채경은 서신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보시지요."

서신을 받아 펼치자 생소한 소식이 시야에 담긴다.

[무림맹주 현청 귀주로 낙향. 조만간 퇴임을 준비 중인 것으로 확인.]

퇴임이라니. 너무 놀라 헛숨이 뱉어졌다.

"당주 외에는 볼 수가 없는 특급 정보라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만, 이미 전부터 얘기가 나오고 있던 모양입니다."

대체 왜. 아니,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는 이미 구순을 바라보는 혼란의 1세대 인물.

천마인 사형과 사도련주가 전란의 2세대임을 감안하면 분명 한참 전에 세대가 바뀌었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련주와 사형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줄 알았거늘.'

솔직히 완성된 그림의 삼분지 일이 텅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이건 이미 수십 년 넘게 균형을 이루며 평화 협정을 마친 세 절대자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리라.

한데 그런 그가 퇴임을 한다니.

이건 평화롭던 무림에 대격변을 예고한 것과도 마찬가지.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묘채경이 말끝을 흐린다.

"3년 전부터 맹주는 두문불출한 채 일선에서 물러서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1세대인 신주오절들도 마찬가지고요. 아마 그때부터 준비했던 게 아닐는지요."

3년 전이라면.... 군사의 죽음 이후를 말하는 것인가.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오륜회라는 자들이 나타나 지금은 중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오륜회(五輪會).

본래 명가에서 시작한 가벼운 친목 모임이었으나, 단기간에 거침없이 세를 키운 이들이었다.

비공식적인 모임인 터라 실체가 불분명하나, 그들의 허가 없이는 작은 문파조차도 운영하기 힘들다는 것이 작금의 통례.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소오가 그건 아닐 거라며 고개를 내젓자 묘채경이 얕게 숨을 뱉곤 답했다.

"보거라. 3년 새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몰락해 가는 문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오륜회에 들지 못했다는 것이지."

묘채경이 내려놓은 서류에는 수많은 문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수만 무려 서른여 곳.

장이서는 침음하며 나직이 물었다.

"구파일방에서 이를 가만히 놔뒀단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구파일방은 세속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하나 오륜회는 다릅니다. 상단부터 시작해 황실의 관료들까지. 모든 영역에 전반적으로 걸쳐 있지요."

이것이 바로 오륜회가 정도 무림을 단기간에 집어삼킬 수 있던 이유였다.

아무리 도를 닦고, 불경을 읊는 자들이라도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도움이 필요한 바.

오륜회는 바로 이점을 파고들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통제해 버리니 버틸 재간이 없는 것.

더구나 같은 정도의 친목 무리이니 거세게 견제할 수도 없는 노릇.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난다. 그것도 아주 독하게.

만일 일흉이 정도의 거물이라면, 그가 곧 오륜회의 수뇌부일 확률이 높다.

맹주가 지친 틈에 교묘히 장악에 들어간 것.

"어찌할 것이냐."

잠자코 듣던 독마 사숙이 묻는다.

장이서는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겼다.

만일 무림맹주가 퇴임을 선언한다면 그 후는 어찌 되겠는가.

일흉이 무림맹을 장악하기라도 하는 날엔 중원은 끝이다.

절대 그리 놔두어선 안 될 일. 맹주의 퇴임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마침내 장이서의 결단이 내려졌다.

"제가 직접 맹주를 만나봐야겠습니다."

"뭐어?!"

부교주에 올라선 지 어느덧 한 달 남짓.

3년 만에 강호 출두다.

* * *

- 중원 귀주(貴州) 화림현(花林?).

사시사철 따뜻하여 푸른 산과 수풀이 가득한 아담한 마을.

이곳의 오랜 세월 비어 있던 거대한 장원에 주인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무림맹주 현청.

낙향한 그가 제 처소를 처음으로 찾아온 귀한 벗을 맞이했다.

겉보기엔 그냥 무단 침입한 거지가 따로 없지만, 허리춤 열 개의 붉은 매듭을 보면 결코 그리 막대할 수 없다.

"맹주 직에서 내려오겠다는 게 사실인가? 제정신인 게야?!"

수년 만에 나타나 냅다 맹주한테 성질부터 내는 거지. 아니, 유일하게 성질부릴 수 있는 거지.

신주오절의 일인.

개방의 태상방주인 북개 취걸륜이었다.

"우선 좀 앉게. 만나자마자 뭐 그리 급한가."

현청은 그런 벗의 성질마저 반가운지 허허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반면 취걸륜은 우유부단해 보이는 모습에 더더욱 속이 근질거렸다.

늘그막에 예까지 무슨 기분으로 달려왔겠는가. 아주 복창 터지는 줄 알았다.

또르르.

한데 그런 속도 모르고 뜨신 차를 따라주고 앉았으니.

"들게나."

"됐네!"

화만 더 나지. 북개가 고개를 휙 돌린다. 단단히 토라졌다는 얘기. 현청은 이에 픽 입꼬리를 올렸다.

예부터 신주오절 내에서도 취걸륜과 제갈상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서검 여중악은 제일검(第一劍)을 두고 후기지수 시절부터 경쟁이 치열했기에 서먹함이 있었고.

신승은 모두에게 공대를 하고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니 가까워지긴 어려웠다.

반면 세 사람은 서로 술을 좋아한 데다, 의협심이 강해 일찍이 의기투합한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토록 화가 잔뜩 난 채 찾아왔다는 건....

'그새 찾아가 또 사정했나 보군.'

뻔했다. 자신이 퇴임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자 수뇌들이 애꿎은 북개를 찾아가 호소한 것.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한 게야?! 거 변명이라도 해보게."

현청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뱉어졌다.

여태 이 질문만 수백 번은 들었다.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답한 적은 없다.

다른 이였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내보냈을 터.

하지만.

"하나만 물음세. 날 말리러 온 겐가, 얘기를 들으러 온 겐가."

"에잉! 이런 촌구석까지 온 자네가 어디 말린다고 들을 사람인가?"

이유만 알면 된다는 얘기. 현청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먼 산 보듯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젠 지친 것 같네."

북개는 침음을 삼켰다.

자신이나 제갈상이면 몰라도 맹주나, 서검. 그리고 신승은 노화라는 필멸의 저주를 비껴간 자들.

굳이 따지자면 언제고 선계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처지다.

그러니 육신이 지쳤다는 건 결코 아닐 터.

"혹 그날의 일 때문인가?"

망설임 없는 발언에 현청의 눈매가 흠칫했다.

320.

#다녀오겠습니다

"맞나 보구먼."

북개의 입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이 뱉어졌다.

그날.

3년 전 군사였던 화평자 구자기가 혈교의 손에 목숨을 잃었던 사건.

지금도 많은 이가 그를 추모할 만큼 충격이 컸다.

맹주 입장에서도 최측근을 잃었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는가.

하지만.

"대체 나만 빼고 무슨 작당들을 벌인 게야?"

북개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내막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검 여중악은 그날 이후로 화산을 떠나버렸고.

신승은 절연하듯 면벽 수련에 들어섰으며.

제갈상은 소리 소문 없이 잠적해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현청마저 맹주 직을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아무 말도 듣지 못했지만, 북개는 그게 군사의 죽음과 연관이 있음을 확신했다.

한데 중원 최고의 정보통인 그로서도 이 이상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아는 신주오절 네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솔직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

"그냥...."

현청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네. 이젠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맡기고 물러나야 할 때가 아닐까. 뭐 그런 생각 말일세. 이제 오래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잘 버티다가 갑자기 왜!

북개가 답답하다는 듯 속을 끙 앓는다.

하지만 현청의 공허한 두 눈을 보곤 애써 속내를 삼킨 채 괜스레 투덜거렸다.

"답지 않게 웬 청승이야?"

"후후, 이 사람아. 이제 우리도 백수(白壽-99세)를 향해가고 있네. 이쯤 됐으면 물러설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난 게지. 후학을 위해서라도 물러나야 할 때일세."

"그럼 정리라도 잘하고 가든가. 요즘 오륜회가 날뛰고 있는 거 모르는가? 이러다 무림맹까지 놈들 손에 넘어갈 기세야!"

"그들도 모두 똑같은 정도의 연맹일세. 누가 되든 잘만 이끌어 주면 될 일이지. 무엇이 그리 중한가."

"하는 짓이 심상치가 않으니 그렇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 그리 허술하게 끝내진 않을 테니."

허! 북개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놈이 아예 작정을 했구나.

"기어코 그리 물러나야 직성이 풀리겠단 말인가?"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후후, 문제가 있다면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고. 나도 그 정도 책임감은 있네."

"고집하고는! 에잉, 쯧!"

결국 북개는 고개를 저어야 했다.

이 정도까지 마음을 먹었다면 머리끄덩이 잡고 말려도 소용없는 일.

아까 따라준 차를 후르륵 마셨다.

다 식은 것이 이젠 화도 없다.

"쓸데없이 나나 찾아오지 말라고 해. 독한 놈들이 가래도 안 가고. 아주 거지보다 더해."

맹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할 텐데도 절 이해해 주는 벗이 너무나 고마울 뿐.

어쨌든 답답한 사연은 여기까지.

"한데 누구한테 뒤를 맡길지는 정한 건가? 자넨 아직 제자도 없지 않은가."

북개가 모두가 궁금해할 질문을 툭 던졌다.

2세대 중에서 꼽으라면 단연 무림오성(武林五聖)이 독보적이다.

신주오절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상 정사마전이 한창이던 전란의 2세대에서 톡톡히 활약한 자들.

실력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그들만 한 자들도 없다.

이에 맹주는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글쎄. 맡긴다면 누구보다 공명하고 정대한 이에게 맡겨야겠지."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검성은 지금 앓아누운 지 좀 되었고.... 아니면 설마 무당의 그 꼬맹이? 예전에 자네가 아끼던 아이 하나 있지 않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문이라고 특별 대우 해줄 생각은 없네."

"미친 겐가? 남들은 다 그렇게 해!"

이 말까지 들으면 더 미쳤다고 하겠군.

"누구든 후임이 생긴다면 내 성명절기를 전수해 줄 걸세. 아무 조건 없이."

"이런 미친놈!"

하하하! 맹주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나 북개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미친놈.

맹주가 누구인가.

서검 여중악과 함께 검으로는 중원 제일로 꼽히는 자다.

분란을 피하겠다며 여태 제자 하나 안 구하고 스스로 무공까지 창안한 절세 고수!

한데 후임에게 이를 다 전수해 주겠다니.

그것도 아무 조건도 없이?!

돌아도 한참 돌아버린 거다.

북개가 장고 끝에 물었다.

"그럼 나는 어떤가."

"뭐?"

"나 좀 제자로 받아주게. 사부 잘못 만나 일평생 거지로 산 팔자 좀 바꿔보게."

"하하하! 이 친구가 정말. 아서게.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인가."

"내가 뭐 어때서!"

"꿈도 꾸지 말고 가끔 놀러 와 술이나 마시고 가게."

"친구 놈 덕에 팔자 좀 고쳐보나 했더니. 에잉!"

현청이 잔잔한 웃음을 짓는다.

"한데 떠난다면서 뭣 하러 그리 다 퍼줘."

이유가 뭐 있겠는가.

어차피 퇴장하는 길. 새로운 영웅의 앞길에 발판이라도 되어주고자 할 뿐.

적어도 천마와 련주에 대응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바른 곳에 힘을 써줄 걸세."

"얼씨구. 벌써 이름도 모를 제자 놈한테 빠졌구먼, 빠졌어. 늘그막에 이 뭔 팔불출이야?"

"하하하하!"

현청의 입에서 오랜만에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고 꼭 만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한편 맹주가 낙향한 채 퇴임을 준비할 무렵.

이에 맞춰 음험한 흉계를 꾸미는 자들도 있었다.

온통 새카만 흑지로 가득 채워진 어두운 방. 피눈물 흘리는 불상이 즐비한 이곳의 주인.

"사흉은 조용히 정리하였습니다."

엎드린 백발의 사내에게 보고를 받는 그의 이름은 모용소.

흉신팔주의 수장이자 일흉으로 통하는 자다!

"대업을 목전에 두고 실패하다니. 이런 멍청한 것들."

분노가 얼마나 큰지 이빨이 빠득 갈린다.

그럴 만도 했다.

대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대공자 천무기와 산왕가주 파군성.

그들의 이야기다.

"애초에 마교 놈들에게 기대를 한 내 잘못이다."

그나마 대업을 위해 제 노비를 보내놓았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쨌든 꼬리는 잘라낼 수 있었으니.

"어찌 된 것이냐."

"확실하진 않지만 부교주와의 정쟁에서 패한 듯하옵니다."

"부교주라면.... 3년 전에 사라진 뇌마가 아니더냐. 그놈이 다시 돌아온 것이냐?!"

일흉의 입에서 거친 음색이 터졌다.

뇌마 장이서.

어찌 그를 모르겠는가.

3년 전 자신들의 대업을 깡그리 망쳐놓고 사라진 바로 그 원적이 아닌가!

솨아아아아!

일흉의 몸에서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뿜어진다. 이에 노비는 벌벌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나 그도 잠시.

"흥, 차라리 잘 되었다. 어차피 마교 놈들은 내 업적을 위한 제물에 불과한 일. 무림맹만 내 손에 들어오면 직접 놈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주인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중원은 내 발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그 아이에게 가서 전하거라. 반드시 맹주의 측근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예!"

일흉의 음산한 미소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 *

장이서가 중원행을 결정한 지도 어느덧 며칠.

그의 성격대로라면 말 나온 날 바로 길을 떠나고도 남았겠지만.

이제는 그냥 평범한 교인이 아닌 부교주. 이것저것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하여 묘채경과 소오에게 은밀히 지령을 내려 먼저 떠나보냈고.

"당분간 천산 좀 부탁합시다. 내가 사라진 건 비밀로 좀 하고."

장이서는 회당에 모여 앉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쳐다보는 일곱 명의 절대자들.

일장로 마일성을 비롯한 칠대장로에게 선전포고를 던졌다.

물론.

"고작 두 달도 안 돼 또 자리를 비우시겠다는 겁니까?!"

"부교주님께선 이제 홀몸이 아니심을 어찌 모르십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솨아아아아!

좋은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교라서 좋은 점도 있었다.

"서로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고. 그냥 쉽게 갑시다. 어차피 본교에 답은 하나 아니오."

씨익. 장이서가 웃자 장로들도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자지존(强者至尊)."

콰과과과광!

그리고 그날 회당이 무너져 내렸다.

"후, 그럼 믿고 갑니다."

장이서는 입가에 피를 닦아내곤 비틀거리며 먼저 자리를 떴다.

"도대체... 우리가 뭘 본 것인가?"

반면 멀쩡한 장로들은 믿기지 않는 듯 멍한 눈으로 그의 뒤를 살폈다.

급소 부위마다 전부 한 군데씩은 옷이 베어진 채로.

그렇게 천산의 뒤를 맡긴 뒤 장이서는 곧바로 칠소궁으로 향해 마오와 대면했다.

"당분간 자리를 비울 생각입니다."

"설마 맹주 만나러 혼자 가겠다는 건 아니지? 너 인마, 부교주야."

마오가 인상을 찌푸리곤 팔짱을 낀다.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 거란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일을 크게 키우면 그만큼 변수도 커진다.

조용히 찾아가 그에게 사실을 알리고 뜻을 전하는 게 낫다.

마음을 다잡고 마오를 설득하려는 찰나.

"자신은 있는 거지?"

"...!"

녀석에게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말린다고 들은 녀석도 아니고. 또 못 해낼 것도 아니잖아."

3년이 길긴 길었구나.

"천산은 걱정하지 마. 아무도 못 설치게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이젠 진짜 너 소교주 해도 되겠다.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공자님만 믿겠습니다."

"쳇. 말은. 전쟁 나기 싫으면 잘해. 조금이라도 너한테 문제 생기면 그날로 쳐들어갈 거니까."

협박도 참 너답게 한다. 하지만 참으로 마음이 든든해지는 협박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마오와 인사를 마치고, 다음으로 홍란과 사숙을 찾았다.

두 사람은 취선루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냄새만 맡아도 혼미한 독차(毒茶).

놀라는 두 사람 앞에 다가가 담담히 말했다.

"사숙. 홍란을 데리고 요녕에 좀 다녀와 주십시오."

요녕. 이곳 천산이 서쪽 끝이라면 거의 동쪽 끝에 자리한 머나먼 땅.

그리고.

"주, 주인님...."

그녀의 집인 모용세가가 자리한 곳이었다.

독마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인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들이켰다.

"이제야 약속을 지키게 됐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홍란은 금세 떨어트릴 듯 눈물을 글썽였다.

"아, 그리고 이거."

그녀에게 황금 포장지에 쌓인 환단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천마전의 3대 보고인 영생고에서 가져온 영단이었다.

양기가 강하고 회복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준다는 마신단(魔神丹).

소림의 대환단과 필적한다고 하여 영생고에도 딱 2개밖에 없는 귀한 물건이다.

"별거 아니야. 부친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감사합니다...."

홍란은 결국 눈물을 떨구며 두 손에 꼭 마신단을 쥐었다.

이렇게까지 절 챙겨주니 이 고마운 마음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중원 정세가 좋지 않습니다. 모용세가도 혹 오륜회와 개입되어 있을지 모르니 사숙께서 꼭 함께 가주십시오."

"흐음, 오랜만에 중원 나들이를 다녀오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역시. 일말의 고민도 없는 승낙이다.

"그럼 잘 다녀와."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천산을 떠났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장이서도 떠날 시간이 찾아왔다.

천마전 정상에 오른 채 천산을 내려 살폈다.

거친 바람이 몰아치고, 마른하늘에선 천둥이 울린다.

아마 자신이 다시 돌아올 때는 혈교가 이 땅에서 사라진 이후일 거다.

그러니까.

"다녀오겠습니다."

휘이이이잉!

천마전 정상에 서늘한 바람만이 남겨졌다.

첩자의 중원생활.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한편 장이서가 떠나고 난 후.

홀로 남겨진 천산의 신.

천마 진우광은 모처럼 오랜만에 천마전을 찾았다.

요즘 들어 하늘이 얼마나 날뛰는지.

걸핏하면 멀쩡한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고, 고요하다가도 태풍이 몰아치며 암석이 날아들었다.

해가 지날수록 멈추지 않고 강해지는 천마에게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

물론.

"패배자의 아우성일 뿐이다. 후후."

누가 감히 유아독존 천마의 길을 막아설 수 있겠는가.

"피곤하군."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평소보다 피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럴 때마다 그도 즐겨 찾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직접 영초들과 내단을 공수해 만들어 둔 절세의 영약.

영생고(永生庫)에 특별히 2개만 비축해 둔 마신단이다!

한데.

"다 어디로 간 것이냐."

휘이이잉.

도둑이 왔다 간 것인가.

"장이서...."

빠득. 사제 때문에 심히 심기가 불편해지는 천마의 하루였다.

321.

#청해의 백서

- 중원 귀주(貴州) 화림현(花林?).

눈꽃이 몰아치는 천산과 달리 따스한 벚꽃의 봄기운이 완연한 마을.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흑립을 눌러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손엔 검은 반지. 허리춤엔 옥구슬의 장신구. 그리고 널찍한 소매 속엔 검은 완갑이 도드라진다.

그의 이름은 장이서.

"이곳인가."

낙향한 맹주를 만나러 온 천마신교의 부교주였다.

목적은 퇴임식이 열리기 전, 맹주를 비밀리에 만나 혈교의 만행을 전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함.

물론 공식적인 만남을 청할 수도 있겠으나, 혈교가 어디까지 퍼져 있을지 모르기에 최대한 은밀히. 아주 조용히 만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웅성웅성.

사시사철 한적해야 할 촌구석에 대체 뭐 이리 사람이 많단 말인가.

그것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무림인들투성이다.

순간 아차 싶었다.

'소문이 퍼졌구나.'

특급 정보라는 말에 너무 안일하게 판단했다.

다른 이도 아닌 맹주 현청. 무려 반백 년 동안 백도의 정점이었던 인물이다.

아무리 감추려 한들 태산이 움직이는데 어찌 잡음이 없으랴.

그의 거취에 이 정도 부산물이 뒤따르는 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나기가 쉽지만은 않겠구나.'

그렇다고 이 정도 변수에 흔들리는 건 장이서답지 않은 일.

금세 마음을 다잡고 마을로 들어섰다.

무림인들이 종종 보여서 그렇지, 그래도 나름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마을 주변은 작은 산들이 둘러싸 정취가 있고, 따스한 햇살에 비해 나무가 많아 시원하고 산뜻하다.

그야말로 은퇴 후 여생을 보내기에 나쁘지 않은 곳.

왜 굳이 연고도 없는 이곳을 골랐는지 조금은 알겠다.

"어서 오십시오."

낡은 객잔에 들어서자 점소이가 힘없이 맞이한다.

손님이 많아져 웃음꽃이 핀 객주와 달리 죽상이 따로 없다.

"아무 데나 앉으세요."

그러려고 온 건 아니고. 북적이는 장내를 가볍게 살피곤 품에서 엽전을 꺼내 건넸다. 그러자 점소이의 눈이 띠용 커진다.

"방 하나를 얻었으면 하는데. 기왕이면 해가 안 들고 조용한 곳으로."

"마침 딱 좋은 방이 하나 있습죠!"

다행이네.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점소이가 신나게 위층으로 안내한다.

"타고 오신 말은 제가 마방(馬房)에 맡겨두겠습니다. 이쪽입니다."

끼이익.

이내 구석진 곳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정말 혼자 오셨군요."

빛 없는 낡은 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반겼다.

"오호호! 부교주님께서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장난스레 활짝 웃으며 인사를 올리는 여인. 분명 다른 얼굴이지만 그녀였다.

이제는 그저 반갑기만 한 비룡당주 묘채경!

그녀가 미리 와서 동태를 살피고 있던 것.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픽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어느새 화려했던 깃털 옷도 버리고, 인피면구를 쓴 참한 아낙으로 변신해 있다.

"숨어 지내는데 별수 있겠습니까. 잘 아시면서."

알지. 협탁에 앉자 그녀가 문밖을 다시 한번 살피곤 돌아와 마주 앉는다.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지낼 만은 했습니까?"

"이 집 저 집 반찬도 만들고, 바느질도 해주고. 곧잘 지냈습니다."

찬모와 침모(針母) 노릇이라니.

'옷이 찢어졌다고요? 오호호, 그 입 구멍부터 메꿔주마.'

상상은 잘 안 가지만, 비룡당주인 그녀는 이 분야의 전문가.

마음만 먹으면 수백 번이고 신분 바꾸는 건 일도 아니다. 그만큼 얻은 정보도 많을 거라는 얘기고.

"이미 보셨겠지만 상황이 조금 안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설명을 이어갔다.

"소문이 어찌나 빨리 퍼진 건지. 며칠 새 몰린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맹주 측에서도 이 때문에 난처해하는 듯하고요."

그랬겠지. 요란을 떨 거였다면 뭣 하러 이런 외진 곳까지 왔겠는가.

분명 퇴임식까지 생각 정리라도 할 겸 조용히 칩거하고자 찾은 것일 터.

단기간에 퍼진 것이면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냈을 확률이 높다.

단지.

"범인을 특정하기는 어렵겠군."

"예. 워낙 은원관계가 복잡하기도 하고, 자리를 비우는 순간부터 수많은 이가 의문을 품었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나마 가장 의심스러운 건 무림맹과 대척 중인 오륜회인데...."

오륜회.

명가(名家)를 중심으로 3년 새 무림맹을 위협할 만큼 급부상한 조직.

일흉이 개입되어 있을 공산이 유력한 자들이다.

"하지만 동기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굳이 이런 사달을 일으켜 얻을 게 무엇인가 싶고요."

묘채경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맞는 말이긴 했다.

알아서 퇴임해 주겠다고 낙향한 맹주를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무엇인가.

상식적인 선에선 타초경사다.

"오륜회 쪽은 차도가 있습니까."

말이 나온 김에 물었다.

그들의 실체에 접근했냐는 의미.

"아직입니다. 그래도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요."

묘채경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말은 길게 안 했지만, 아마 소오가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을 거였다.

서역에서 온 부호 행세하며 오륜회에 들어가려고 용을 쓰고 있을 테니.

뭐, 그건 그거고.

"어쨌든 의심되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겁니다."

그녀가 품에서 고이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올렸다.

그러곤 이를 펼쳐보라 눈짓을 보낸다.

이에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활짝 펼치자, 그 안엔 생각지도 못한 글귀가 담겨 있었다.

[호위무사 모집. 정원 50명. - 맹호원(盟護院)]

이건...!

"예. 맹주 쪽에서 붙인 공고입니다. 누가 누구를 호위한다는 건지, 원. 어쨌든 너무 많은 이가 마을에 몰리니 저들도 둘이선 별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둘이요?"

"예. 맹주와 총관. 귀주에 단둘이 왔답니다."

"그게 무슨...."

"어이가 없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근데 사실입니다. 장원은 큰데 안은 텅 비어 있는 셈이지요."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 아직 퇴임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뭐, 어쨌든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맹주 주변에 사람을 심어둘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 말이지요."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는다.

좋은 기회.

맞는 말이다.

맹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그게 혈교든.

아니면, 나든.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끼이익!

창문을 열어젖히자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밝은 햇살이 안으로 스민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먼발치를 살폈다.

언덕 위에 산을 등지고 웅장하게 자리한 장원 하나.

맹호원(盟護院).

맹을 지키겠다는 포부가 담긴 이름. 무림맹주 현청이 머무는 곳이다.

과거 속했던 조직의 수장이자, 실로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기억 속의 그는 매우 멀었고, 또 이상한 어른이었으니까.

말마따나 암각에서 한창 수련 중이던 어린애 앞에서 이기어검술 같은 초상승 무공을 펼쳐 보이다니.

내기도 못 다루는 애가 본다고 뭘 알겠는가.

심지어 자신이 구규지체인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넌 선천적으로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몸이다. 알고 있느냐.'

사람 놀리려고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듣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어서 해준 가르침들도 괴상했다.

'음양은 천지 만물을 이루는 근간이오, 흐름이니라. 때로는 대립하나, 때로는 공존하며, 어느덧 조화와 평형이 유지되니 그것이 곧 우주이리라.'

선문답도 이런 선문답이 없다.

물론 그 덕에 시간이 흘러 구규지체의 첫 번째 구멍을 막았고, 음양일원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으니 욕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은인인 것 같기도 하고.'

피식 웃음을 삼켰다.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두자. 설마 다른 의미가 있어서 알려주었겠는가.

그냥 늙은 도사의 유희였을 거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네게 천운이 닿으면 언제고 깨달을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아니면 말고.

뭐 그런 될 대로 되라 식의 아량 말이다.

당연히 잠시 만난 저를 기억할 리도 없고, 저 역시도 무림맹에 미련을 닫았다.

그저 하루빨리 맹주에게 혈교의 심각성을 알려 이런 애들 소꿉놀이는 집어치우라고 말해주고 싶을 뿐.

"부교주님, 준비 다 됐습니다."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묘채경이 들어와 서 있다.

고이 접은 옷가지와 새로운 신패를 손에 들고서.

"시작합시다."

천마신교 부교주 장이서.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날 시간이다.

*

"갑니다, 가요!"

객잔의 점소이는 정신이 없었다.

늘 파리만 날리던 곳에 요즘은 낮이고 밤이고 손님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

입꼬리가 찢어진 객주를 보면 배가 아파 때려치울까도 했지만, 종종 따로 몫을 챙겨주는 손님들 탓에 힘겹게 버티는 중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일을 마치고 숨을 돌리려는 찰나.

저벅, 저벅.

객실이 있는 2층에서 백의를 입은 손님 하나가 내려섰다.

앞머리가 눈 아래까지 덮어 답답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올려 묶은 머리가 또 나름 분위기가 있다.

갸름한 하관과 제법 높은 코가 호남형인 것 같기도 한데....

"저런 손님이 계셨나?"

웬만하면 손님 얼굴은 다 기억하는 편인데, 요즘 도통 바빠서 그런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여기 청주 한 병!"

하긴 뭔 상관이랴.

제 객잔도 아닌 것을.

"예, 가요!"

점소이가 픽 웃고는 달려 나갔다.

그사이 사내는 객잔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물론 머물렀던 건 맞긴 하다.

단지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전혀 다른 모습이라서 그렇지.

그의 이름은 백서.

나이는 서른넷.

청해에 있는 백가장(白家莊)의 소장주로서 평소 무림맹주를 동경하여 무작정 예까지 달려온 자다.

물론.

'곧 찾아뵙도록 하죠.'

목적을 다하면 사라질 신분이지만 말이다.

* * *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장원.

미간의 천(川)자 주름만 봐도 상당히 예민해 보이는 중년인이 대문 앞에 섰다.

그의 이름은 등태보.

무림맹 총관으로 오랜 세월 맹주를 보필해 온 최측근이다.

지금은 맹주보다 먼저 사직서를 내고, 맹호원 총관으로 재직 중.

그리고 장원 앞에 몰려든 이들 탓에 가장 골머릴 썩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했다.

"총관님이시다!"

"등 총관님이 나오셨다!"

"와아아아!"

도대체 이게 뭔 소란인지.

그야말로 골머리가 지끈거린다.

자신은 수저 하나를 놓아도 가지런히 놔야 밥이 넘어가는 사람이거늘.

이건 뭐 무질서하게 몰려 있는 꼴이 도떼기시장에 몰려든 잡상인이 따로 없다.

정말 오늘 밥 먹기는 글렀다.

게다가.

'정녕 이자들을 안에 들여야 하는 것인가.'

저들 중 호위무사를 뽑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하나 별다른 수도 없긴 했다.

이미 조용하던 마을은 바람 잘 날 없었고, 무수히 몰려드는 이들을 진정시키려면 뭐라도 하긴 해야 했으니.

그저.

"지원하러 온 자들은 한 줄. 아니 열 줄로 서시오!"

이 중에 진정으로 함께할 만한 자들이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겠소!"

와아아아아!

낙향한 맹주의 거처 맹호원.

함께 상주할 호위무사 모집을 위한 시험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322.

#호위무사 시험

와아아아아!

힘껏 울려 퍼지는 함성에 장이서. 아니, 이제 백가장의 소장주가 된 백서는 내심 크게 놀랐다.

'이게 다 시험을 치러 온 자들이라고?'

무사들이 많이 온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어림잡아 수백. 아니 모인 이들만 일천에 육박하는 듯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일평생 무예를 수련하는 무림인의 길은 갈수록 개미굴처럼 좁아지는 고난일로(苦難一路).

어쩔 땐 신의 경지에 다다른 맹주의 말 한마디가 수십 년의 수련보다도 더 값질 수 있다.

그런 기연을 앞에 두고 몰려들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

그렇기에 더더욱.

'첩자를 심어두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겠지.'

이 많은 자들 중 분명 다른 의도를 갖고 잠입한 이들도 숨어 있을 거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고 말이다.

어쨌든 총 오십 명을 뽑는다고 하였으니 확률로 치자면 스무 명 중 하나.

'설마 긴장해야 되는 건가.'

픽 웃음이 서렸다.

맹주의 호위무사 시험에 참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형의 격노가 심히 우려되지만, 거기서 떨어졌다는 걸 알게 되는 날엔....

'그냥 죽거라.'

날이 춥다. 서늘해. 당혹스러운 웃음을 갈음하곤, 다시 전방을 살폈다.

줄이 길다.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터. 하여 길어질 시간에 미리 무던해지려는 찰나였다.

"함양의 조진평일세. 미혼이지."

옆에 있던 사내가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텁석부리에 딱 사람 좋게 생겼다는 말이 제격이다.

말수가 많아 보이는 게 여간 심심했던 모양.

"청해에서 온 백서요."

"오, 청해에서 왔는가? 요즘 거기 아주 소문이 자자하던데. 상전벽해를 이루었다고. 다들 가고 싶어 안달이라지?"

그랬나. 경황이 없어 청해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했다. 하지만 훤히 짐작은 갔다.

'지부장. 그대가 결국엔 해냈구려.'

청해지부장 만세극.

그가 3년 전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하하, 이거, 이거. 표정을 보니 아주 자부심이 넘치는군. 보기 좋구먼."

저도 모르게 너무 깊게 웃은 모양. 이내 표정을 갈음하곤 답했다.

"한데 무슨 일로."

"일은 무슨. 그냥 기다리기 적적하니 말동무나 하자는 거지."

뭐, 나쁠 건 없다. 첩자가 의심을 피하는 방법 중 하나가 주변에 날 가려줄 우산들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말동무라도 있으면 타인의 시선도 옅어지기 마련.

"백 소협은 올해로 춘추가 어찌 되시는지."

"서른넷이오."

"오, 이런 우연이! 나도 서른넷인데."

어딜 봐서. 누가 봐도 오십을 바라볼 나이 같은데.

"못 믿는 눈치군. 친구끼리 너무 그리 보지 말게. 누군들 이리 나고 싶어 났겠는가? 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에 주변에서 눈길이 쏠린다.

생각을 정정해야겠다. 말동무는 좋지만 이렇게 목청 큰 자는 사절. 그리고 미안한데 친구 아니야. 실제는 서른하나거든.

"그럼 무운을 빌겠소."

가볍게 포권을 취한 뒤 휙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미꾸라지처럼 슥 앞으로 들어와서는 검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 이번 시험이 왜 대단한지 아는가?"

피곤한 녀석이다.

"알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만 가주는 게 어때? 혼자 있고 싶은데."

"백 공, 자네 욕심도 참. 지금 여기 사람이 천 명인데 어떻게 혼자 있겠다는 건가. 그건 과욕이야!"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원래 이렇게 시끄럽나?"

"그러지 말고 들어봐.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사이좋게 함께 합격하면 좋지 않은가. 봐봐. 주변에서도 귀 쫑긋 세우고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니까?"

뭐 이런 녀석이.... 주변을 흘깃 살피니 그의 말대로 다들 아닌 척해도 관심은 이쪽이다.

"뭔데."

퉁명스레 묻자 조진평이 속삭이는 척 크게 말했다.

"내가 아까 객잔에서 들었는데, 이번 시험에 아주 대단한 자들이 참가한다더군!"

미안한데 관심 없어. 몸을 돌리려 하자 그가 다시 훅 튀어나와 말을 이었다.

"놀라지 말게.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창궁룡(蒼穹龍) 남궁신 소협과 무당파의 진룡(眞龍) 진자량 소협일세!"

"헉!"

내가 낸 소리 아니다. 무덤덤한 그와 달리 곳곳에서 엿듣던 이들의 탄성이 대신 터졌다.

물론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소림의 불공룡(佛功龍)과 더불어 후기십룡 중에서도 최상위 3인으로 꼽히는 둘이었기 때문.

심지어 둘 다 검술을 익혀 오랜 세월 수없이 논쟁에 오른 자들이었다.

누가 더 강한가를 놓고서.

한데 그런 두 사람이 맹주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나타났으니.

조진평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대단한 사건.

"근데 자넨 안 놀라는가?"

"놀랐어. 눈 커졌잖아."

"머리카락 때문에 안 보이는데."

"아쉽네."

솔직히 크게 감흥은 없었다. 후기지수들이 누가 왔건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맹주에게 용건만 말하고 돌아가면 끝이다.

어깨를 으쓱이자 조진평이 입맛을 다시곤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번 호위무사 시험이 그만큼 치열할 거란 얘기지. 그러니 다들 긴장 좀 해야 할 걸세! 모두 건투를 비네! 하하하!"

그의 외침에 모인 이들의 어깨가 바짝 굳어진다.

시험에 임하는 태도가 보다 더 진중해진 것.

장이서는 관심을 거두곤 생각 없이 시선을 돌렸다.

'음?'

그리고 이번엔 진짜로 눈이 번쩍 커졌다. 앞쪽에 죽립을 쓴 사내의 뒷모습이 너무도 낯이 익었기 때문.

"어? 백 공 어디 가는가?!"

장이서는 넋 나간 사람처럼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팔을 붙잡아 돌려세운 순간.

'아....'

머리칼 너머 숨겨진 눈빛이 진한 아쉬움으로 변했다.

분명 너무도 그립고 낯이 익어서.

그래서 자신이 아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아니었구나.'

죽립 아래 드러난 용모는 생전 처음 보는 이의 모습.

아무래도 많이 그립긴 했는가 보다.

제 동생 장이윤.

선유를 다른 사람과 헷갈리다니.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

중원까지 와 놓고도 찾지 않는 참 못난 형이다.

"미안하오."

장이서는 정중히 사과를 건네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렇지. 새치기라니?! 맹주님께서 얼마나 도의를 중시하시는데."

옆에서 조진평이 호들갑을 떨자 잠시 공허해졌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다. 보다 보니 괜찮은 녀석 같기도 하다.

"앞에 봐."

"그러지!"

맹주의 호위무사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

시험은 생각보다도 훨씬 느리게 진행됐다.

처음엔 해가 동천이었는데, 어느새 뚝뚝 떨어지더니 이제는 서천에 노을이 생겼다.

장장 다섯 시진(10시간).

차례가 막바지이기도 했고, 워낙 많은 인파가 몰렸으니 이해는 갔다.

물론 그사이 조금 더 가까워진 조진평은 더 이상 참기 힘든지 절규를 토했다.

"백 공, 나 좀 살려주시게.... 집에서 토끼 같은 두 자식이 기다리고 있단 말일세!"

"미혼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머니!"

점점 미쳐가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주변 대부분이 비슷비슷한 반응이긴 했다.

물 한 모금 없이 부지하세월 기다리려니 지칠 수밖에.

"한데 백 공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어찌 이리 앓는 소리 하나 없이 태연할 수가 있는 거지?"

"나도 힘들어. 눈 찌푸렸잖아."

"안 보인다고!"

그렇겠지. 하지만 가리지 않았어도 보진 못했을 거다. 기다림은 첩자의 기본 소양이니까.

암각에서 받던 훈련 중 관 속에 들어가 대롱 하나만 입에 문 채, 사흘을 견디는 과정이 있었다.

잠시만 정신이 동요해도 공포에 빠져 질식하는 게 다반사.

그때 익힌 것이 바로 시간의 분리였다. 바깥과 내면에서의 시간을 달리 바라보는 것. 거기에 익숙해지면.

"백 공, 드디어 우리 차례일세! 오늘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하하하!"

어느새 원하는 때에 도달하게 된다.

뒷산 앞 공터까지 올라서자, 시험장의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그리고 모두가 놀라며 웅성거리는 소음이 빗발쳤다.

흡사 바둑판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총 오십 개의 거대한 화강암!

그 웅장함에 지친 것도 잊은 채 압도되어 버린 것.

다소 당황한 채 시선을 흘깃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협탁 앞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미간에 천(川)자 주름이 가득한 까칠한 용모.

총관 등태보!

그가 홀로 시험 감독을 하고 있던 것.

이제 보니 오래 걸린 게 아니라 경이적으로 빨리 끝낸 거였다.

혼자서 일천 명에 달하는 이들을 평가하고 있었다니. 십수 년간 무림맹의 안살림을 책임졌던 자다운 면모다.

한데.

"뭐야, 이거 멀쩡한 게 없잖아!"

조진평의 외침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자 바위들은 대부분 금이 가 있었고, 심지어 두 동강 난 녀석과 완전히 산산이 조각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서지 말라는 듯 묘비처럼 말뚝이 박혔다.

멀쩡한 건 고작해야 두 개뿐.

"설마 합격자 자리가 겨우 두 명만 남은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조진평을 비롯한 이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니, 이건 늦을수록 너무 불리한 거 아니오!"

"맞아!"

그중 일부는 불평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다소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게 저들에게 해당할 문제 같지는 않았다.

측면에 진열된 수많은 검.

짐작건대 이 시험은...!

"기회는 단 한 번. 좌측에 진열된 검으로 바위를 베든, 부수든, 찌르든. 상흔을 내면 통과일세."

역시. 등 총관의 입에서 고저 없는 무차별 통보가 떨어졌다.

"말도 안 돼!"

이에 참가자들의 입에선 이구동성으로 경악이 터졌다.

그럴 만도 했다.

화강암은 웬만한 날붙이로는 실금조차 만들 수 없는 고강도의 바위.

그걸 딱 봐도 삼류 무사들이나 쓸 법한 싸구려 검(劍)으로 베어내라니.

"이게 가당키나 하단 말이오?!"

어느 무사 하나가 용기 내어 소리쳤다. 하지만 실로 무지몽매한 질문이다.

등 총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저 정면을 턱짓했다.

이에 모두가 뒤를 돌아보곤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가능하다는 증거가 마흔여덟 개나 버젓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남은 자리는 두 개뿐이니 검 하나씩 챙겨 들고 말뚝이 없는 곳에 순서대로 서시게."

등 총관의 서늘한 지령에 다들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내, 내가 먼저 가겠네!"

순식간에 진열대로 앞다투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중에서 나은 무기를 고르겠다는 것.

"이건 내가 먼저 고른 걸세!"

"비키시게!"

장이서와 조진평은 멍하니 서서 그들의 치열한 다툼을 지켜보았다.

"이거 원, 심히 당황스럽군. 근데 백 공. 자네는 왜 이렇게 태연한 건가?"

"나도 놀랐어. 눈썹 모였잖아."

"전혀 안 보인다고!"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어느 검을 잡느냐가 아니다.

왜냐하면 저기 있는 그 어떤 검으로도 화강암을 가를 순 없을 테니까.

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방법은.

"초장부터 공력 시험이라니."

그래, 맞다.

이건 단순히 검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검기(劍氣).

최소한의 경지를 시험하는 자리였던 거다!

323.

#극로

"총관님, 검에 이가 나갔습니다. 바꿔 주십시오!"

"제가 쓰던 검과는 검파의 길이가 다릅니다!"

곳곳에서 응시자들의 호소가 이어졌다.

하나 총관은 묵묵부답.

당연했다. 신검이 아니고서야 미약하게라도 검기를 두르지 못하면, 어차피 성공할 수 없을 테니.

모래알 틈에 섞인 옥석을 가려내기엔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봐, 백 공. 저기 보이나."

조진평이 두 개의 바위를 턱짓했다.

완전히 양분된 바위 하나와 수백 조각으로 박살이 나버린 바위 하나.

"역시 그들 둘이 한 거겠지?"

진룡 진자량과 창궁룡 남궁신을 말함이다.

후기십룡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라더니. 흔적만 봐도 확실히 허명이 아니란 건 잘 알겠다.

"소문만큼 정말 대단하군. 이런 검으로 어떻게...."

어느새 한산해진 진열대에 다다르자 조진평이 통탄의 한숨을 길게 뱉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검의 상태가 더 심했기 때문.

이를 보며 별다른 생각 없이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왜 검뿐이지?"

"칵!"

그러자 조진평이 기함했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등 총관이 슬쩍 고개를 들곤 찌릿 노려본다.

"이보게 백 공. 오직 일검일로(一劍一路)만을 걸어오신 맹주님 아니신가. 그분의 곁에 머물려면 당연히 검술이 기본이어야지."

그런가. 호위무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 거기까진 생각 못 했다.

"자네 설마 검술을 배우지 않은 것인가?! 그러고 보니 허리춤에 패용한 검도 없고."

조진평의 경악에 장이서는 진열대에서 검 하나를 꺼내 쥐곤 답했다.

"여기 있네."

벙찐 조진평을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정식으로 검을 배운 적은 없다. 들개 생활 하며 닥치는 대로 싸우면서 익힌 게 전부.

그마저도 백뢰를 얻으면서 내려두었지만.

"다 골랐으면 이만 줄 서시게!"

등 총관의 재촉에 조진평이 다가와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백 공, 우리 꼭 합격해서 만나세!"

그러곤 제 두 손을 꽉 한 번 쥐고는 우측 끝으로 후다닥 달려 나간다.

사람 참 싱겁긴.

픽 웃고는 장이서는 마지막 자리에 섰다.

그러자.

캉!

장내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먼저 줄을 선 이들이 시험을 치르기 시작한 것.

"3번, 12번 탈락. 나가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는 것도 정도인의 자세인 걸 모르는 겐가? 나가시게."

등 총관은 어느새 다가와 가차 없이 판결했다.

자칫 냉혹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자는 백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어느새 장이서의 차례가 되자 등 총관이 옆을 스치며 다 들으란 듯 조언했다.

"맹주님께서 자네들을 생각하여 직접 준비하신 자리일세. 그러니 신중히들 임하시게. 기회는 한 번뿐이니."

이 화강암들이 다 맹주가 직접 준비한 거라고?

듣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평소 정도후학회를 열 만큼 후배들을 아낀단 소리는 들었었다.

하지만 암각의 요원이었던 장이서에겐 그리 와닿는 말은 아니었다.

만인에겐 어떤 맹주였을지 모르지만, 그에겐 사지로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몰래 육성한 비정한 맹주였으니.

캉!

다시금 쇳소리가 귓가에 박힌다.

정신이 일깨워지고 장이서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채 화강암 앞에 마주 섰다.

맹주가 직접 준비한 것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문득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기는 의념을 도와주는 매개체일 뿐. 정신의 깊이가 경지에 다다르고, 뜻이 통하였다면 설령 내기가 없더라도 그 무엇이 동하지 않으리.'

분명 공력을 담아 베어낸다면 검술의 깊이가 얕은 저라도 이 시험은 우습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가벼운 일장에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맹주의 배려에 심기가 살짝 언짢아졌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맹주가 한 말이 불현듯 떠올라 무심코 본능이 따랐기 때문인지.

장이서는 청개구리처럼 일말의 공력도 주입하지 않고, 서늘한 표정으로 자세를 취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인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제 자신은 암각의 요원이 아닌 마교의 부교주가 됐음을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핑!

안광이 번뜩이며 눈앞에 수많은 결이 그려진다.

떠다니는 먼지, 바람의 흐름. 대기를 형성하는 입자.

그중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만의 검로(劍路)를 찾았다.

그리고.

수아아악!

횡으로 검을 그었다.

아무런 내공도 없이, 그저 베겠다는 일념만으로!

그 결과는....

콱!

"음...?!"

기괴한 소음에 시선을 돌린 등 총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장이서는 홀렸던 정신을 바로잡았다.

천마안이 서서히 옅어지고, 이내 검파에서 손을 뗀 채 한 걸음을 뒤로 물렀다.

검은 정확히 화강암 정중앙에 박혀 버렸다.

등 총관은 기이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벤 건가? 찌른 것인가."

미처 보지 못한 그로서는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빠지지도 않고 박혀 버리다니."

등 총관이 검파를 쥐고 빼 보려 해도 검은 바위 안에 갇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릇 베었든, 찔렀든 지나온 길은 있기 마련이거늘.

아무리 봐도 그 흔적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내기를 다루긴 한 것인가.'

직접 보질 못했으니 알 수가 없는 일.

무림맹의 안살림을 맡아온 등 총관으로서도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으음...."

하지만 규칙은 규칙.

"합격일세."

등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맹(盟)이라는 글귀가 적힌 나무 신패를 건넸다.

"사흘 뒤에 맹호원으로 나오시게."

장이서는 묵묵히 이를 바라보다 짧게 묵례를 취한 뒤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하, 하하하하! 돼, 됐다-!"

우측 끝에선 커다란 외침이 터졌다.

조진평이다.

그가 전력을 다해 펼친 일격으로 바위에 금이 서린 것.

방방 뛰며 환호하는 모습에 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느덧 해가 저문 저녁.

드디어 시험이 끝이 났다.

* * *

어느덧 밤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르고, 인파로 가득 찼던 시험장도 한적해진 시각.

암벽 앞 공터에는 웬 백의의 노부가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현청.

퇴임을 앞둔 무림맹주이자 이번 시험을 준비한 장본인이다.

이 야심한 시각에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하나.

"흐음.... 날보다 상흔이 넓다는 것은 공력을 담아내긴 하였으나 날카롭게 세우지는 못한 것이겠지."

가지런히 놓인 오십 개의 화강암.

이 안에 새겨진 흔적으로 시험에 참가한 이들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미 합격한 이들을 두고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고질적인 취미였다. 후학들의 수를 살펴보고 이를 유추하는 것.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의 경지쯤 되면 어떻게 검을 대해왔는지, 또 어떤 마음으로 수를 펼쳤는지가 훤히 보였다.

이는 단순히 그가 화경에 오른 고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검을 수련한 최고의 검객이자, 수많은 후학을 봐왔던 맹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보람을 느껴 종종 가르침을 내려주기도 했다.

"아직 물도 다 차지 않았거늘, 배부터 띄우려 하니 제대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대부분이 선문답에 가까운 터라 못 알아듣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험의 흔적을 살피는 건 맹주의 지친 일상에 단비와도 같은 일.

"흐음, 이미 베어낼 실력은 충분하거늘. 검을 믿지 못하였구나. 부서질까 두려워 여기서 힘을 거둔 것이야."

그들의 이름도, 출신도 알지 못했지만, 저와 함께 할 자들의 특징을 꼼꼼히 기억했다.

맹주가 먼저 쌓는 내적 친밀감.

이것이 바로 수많은 이가 그를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리라.

그리고.

"그새 더 진일보하였구나. 훌륭하다."

말끔히 두 동강 난 바위 앞에 서서 처음으로 호평을 터트렸다.

굳이 묻지 않아도 잘 아는 자였다.

자신과 같은 사문의 아이.

무당의 진룡 진자량.

반듯하게 잘려 나간 일면이며, 삼 척의 날로 오 척의 바위를 잘라낸 깊이며.

무엇 하나 거스를 게 없는 실력이다.

굳이 하나를 따지자면 검로가 너무 고착화되어 있다는 것.

나쁜 건 아니었다.

그저 재능이 너무 뛰어난 게 문제라면 문제.

진자량은 한 번만 봐도 상대를 베는 데 최적의 검로가 보이는 검안(劍眼)의 소유자.

이게 어느 정도로 대단한 일인가 하면.

고작 스물다섯 살 나이에 배분을 무시한 채 무당 제자들 중 제일검이 되었다.

물론 내공을 다루지 않은 순수 검 실력만 논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검객으로서는 미친 자질이라는 얘기.

하지만.

"최상의 검로는 최적의 길이 아니다."

그 역시도 말년에 오르고서야 깨달은 부분.

말로 형용하기는 어려우나 맹주는 최상의 검로가 신조차도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길이라고 정의했다.

이른바 극로(極路).

쉽게 말해 그 검로로 베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얘기다.

뜬구름 같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언제고 진자량도 이를 깨닫게 될 터.

이를 지켜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리라.

물론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남궁가의 기교가 갈수록 현묘해지는구나."

다음으로 맹주가 감탄한 곳은 역시나 창궁룡 남궁신.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자리였다.

일검에 시원하게 잘라버린 진룡과는 달리 그의 검은 굉장히 능숙했고, 현란했다.

검 안에 수많은 내기를 응축했다가 베어내면서 폭발시킨 것.

진룡이 오직 검 하나의 외길 인생이라면, 남궁신은 공력이 만든 탑에 검을 올리는 형국.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용호상박이다.

이외에도 감탄한 흔적들이 여럿 더 있었으나, 진자량과 남궁신에 비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예상했던 바.

흥겨웠던 기분도 어느새 차분해지고 마침내 마지막 화강암 앞에 다다랐다.

한데.

"이게 무슨...!"

처졌던 맹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어떤 흔적을 보았을 때보다도 크게 놀랐다.

화강암 가운데에 박혀 있는 칼 하나.

등 총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보였다.

이 칼이 지나온 흔적이!

그리고 그것은....

"이건 극로(極路)가 아닌가!"

믿을 수 없지만 자신이 지고한 경지에 올라서야 찾아낸 경지인 극로였다.

현청은 떨리는 손으로 검파를 쥐었다.

하나 어느 쪽으로도 빠지지 않는다.

당연했다.

검의 극로란....

그 순간에 펼쳐진 바람의 흐름과 떠다니는 입자. 그리고 검이 이끌리는 방향.

이 모든 것이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단 하나의 길이기 때문.

극로를 통해 벤 검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공력이 없어도 전부 잘라낼 수 있다.

그야말로 신이 정한 질서를 무시하는 길.

하여 상황이 바뀐 이 순간엔 다시는 그 검로를 되찾을 수 없으며 되돌아갈 수도 없다.

만일 자신이 그 길을 답습해 이 박힌 칼을 빼내려 한다면 부러지고 말 거다.

그것이 질서를 무너뜨리며 탄생한 극로의 형벌이므로.

자신도 말년에야 깨달은 극로를 대체 누가....

"우연히 펼친 것인가."

검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박혀 있는 걸 봐선 확실했다. 무의식중에 펼치다 뒤늦게 의식을 차리고 길이 막힌 것.

게다가 투박하고 서투르다.

검을 제대로 잡아본 자도 아니라는 얘기.

한데.

'우연일지라도 극로를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절대 아니다!

천하의 맹주 현청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굳어져 버렸다.

도대체 이자는 누구인가.

머릿속에 온통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허. 허허허허...."

그러곤 허탈한 웃음이 가득 뱉어졌다.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이번 낙향은 확실히 잃는 것보단 얻는 게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겠네."

맹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어느 날의 밤이었다.

324.

#오륜회 망나니들

한편 맹주의 마음을 뒤흔든 정체불명의 장본인.

장이서 역시 머릿속이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했던 거지?'

아까 오롯이 감각만으로 화강암을 베었던 자신만의 검로(劍路).

바로 맹주가 극찬을 토했던 극로에 대한 생각이었다.

분명히 아무런 내기도 싣지 않았었다.

한데 화강암을 베었다.

그것도 생전 보지도 못한 궤도를 그리면서.

등 총관이 칼을 빼내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일직선으로 그어진 게 아니었으니까.

장이서의 검로는 그보다 훨씬 더 난해하고 복잡했다.

정작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하지만 그 어느 길보다도 빨랐고, 아름다웠으며 경쾌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흔히 남들은 백날, 십 년 수련해도 얻기 힘들다는 깨달음의 단계가 장이서는 아주 빠르게 찾아오는 편이었다.

보통은 이런 경우를 미친 재능이라고 평하는데, 사실 뚫린 단전만 아니었다면 스스로가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 홀린 듯 베었던 검로가 대표적인 일례.

그 오묘한 이치를 파헤친다면 분명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영역을 깨우칠 수 있으리라.

하여 어떻게든 빨리 이를 재현해 보고 싶은 마음뿐이거늘.

"백 공. 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딱 감이 오더라니까. 평생을 함께 갈 지기지우가 이 사람이구나. 이런 감 말일세!"

합격 기념으로 반드시 한잔해야 한다며 들러붙은 조진평과 주루에 마주 앉게 되었다.

"자네, 많이 취한 거 같은데."

"우리 방금 앉았네!"

그랬나. 얕게 한숨을 삼켰다. 하긴 깨달음은 잡으려 하면 멀어지고, 놓으면 다가오는 꽃잎 같은 것.

챙!

결국 조진평과 술잔을 부딪쳤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겠네. 나 함양의 조진평일세."

픽 웃고는 또르르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청해의 백서다. 잘 부탁하지."

"크, 난 아직도 꿈 같네. 내가 설마 맹호원에 들어가게 될 줄이야."

"그게 그리 좋은가?"

"좋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세. 검 밥 먹고 사는 놈 중에 맹주님 옆에 있기 싫은 놈 나와 보라고 하게. 그분은 검의 신일세. 검신(劍神)!"

검신이라. 뭐, 고개는 끄덕여졌다.

예전에 사형한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사형께서 생각하는 중원 제일 고수는 누구입니까.'

사형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다.'

너무 진심이 느껴져서 더 어이가 없었지만, 뭐 사실은 사실.

'사형 말고요.'

'그딴 가정을 읊조리는 것 자체가 죽어 마땅한 일이지만, 그게 네 죽기 전 소원이라면... 답은 맹주다.'

맹주 현청.

분명 사형은 그가 자신의 다음이라고 말했었다.

이에 뻔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입니까?'

중원에는 신승도 있고, 서검도 있으며 하다못해 사도련주와 팔대방주도 있지 않는가.

이에 사형은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이렇게 답했다.

'련주나 서검이 실력에서는 조금 더 앞설지도 모르지. 하지만 맹주에겐 놈들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다.'

대체 그게 무엇이기에.

하지만 아쉽게도 뒤는 더 듣지 못했다. 눈을 부릅뜨며 뭐냐고 되묻는 순간. 악! 비명을 지르며 사형의 일장에 날아가 처박혀 버렸으니까.

'내가 맹주의 일거일동까지 네놈한테 알려줘야 하느냐?'

뭐 그렇게 성질까지 들으면서 말이다.

어쨌든 사형조차 그를 자신의 바로 다음으로 보고 있으니 검신이라 불릴 만한 절대 고수인 건 틀림없는 사실.

"어쨌든 앞으로 잘 지내보세. 뭐, 진짜는 이제부터겠지만."

조진평이 쓴웃음을 짓고는 주변을 살폈다.

고오오오오!

분명 음주에 흐트러져야 할 주루 안이거늘.

경쟁심과 기세가 공기를 매섭게 달구고 있다.

당연했다.

이곳 화림현에 규모 있는 주루는 이곳 하나뿐.

바꿔 말하자면.

지금 이 안에 모여 있는 손님들 대다수가 시험을 통과한 합격자들이라는 얘기.

"이보게 백 공, 자네보다 밥 한 끼라도 더 먹은 내가 충고하나 할까."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 얼굴을 보게. 더 쪘지 않은가."

"그래서. 충고할 게 뭔데."

"오늘 같은 날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네."

"왜지?"

"왜긴. 한 우리에 갇힌 짐승들. 긴장감이 오르겠지.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고, 피는 뜨겁게 끓는 거야. 보글보글. 그럼 어찌 되겠는가?"

"죽겠지."

"아니지! 이럴 땐... 반드시 사달이 나는 걸세."

알겠으니까 눈 크게 뜨지 마. 조진평이 휙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와당탕! 나자빠지는 사내 하나가 보인다.

"시작됐군."

조진평은 한숨을 길게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장이서는 지그시 상황을 살폈다.

"눈을 얻다 뜨고 다니는 거야?! 엉?"

딱 봐도 비좁은 길에 일부러 어깨를 쳐서 넘어트린 상황.

무슨 일인지 눈짓으로 묻자 조진평이 찰떡처럼 알아듣고 답했다.

"저 시비 거는 말상이 위지세가의 셋째 위지경. 성질머리가 드세기로 유명한 자이지."

위지세가. 들어본 적 있다.

하북의 알아주는 삼대 명가 중 하나.

한데 저자가 왜.

"뻔하지 않은가. 서열 싸움. 누가 위고, 아래인지 보여주겠다는 걸세. 주변에 앉은 자들 보이는가?"

보인다. 하나 같이 값비싸 보이는 옷들.

"맨 앞에 쥐 머리는 황보병. 그 옆의 들창코는 단목살. 이외에도 모두 쟁쟁한 가문들이지. 저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겠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륜회로군."

위지세가, 황보세가, 단목세가. 오대세가에 들진 못했으나 모두 이름 있는 명가.

지금은 오륜회 산하에 속해 있는 곳들이었다.

만일 혈교에서 심어둔 이들이 있다면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자들.

조진평은 씨익 웃고는 답했다.

"과거엔 구파일방 눈치 본다고 조용했는데, 이젠 저들 세상이라 이거지. 무엇보다도."

조진평이 코밑을 긁는 척 한 사람을 가리켰다.

"믿는 구석이 있거든."

가장 안쪽에 고고히 술잔을 든 채 앉아 있는 사내.

"창궁룡 남궁신."

강직한 용모와 더불어 우월한 체격.

"내가 아까 소피 누러 갔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시험장에서부터 먹잇감을 점찍었다더군."

먹잇감이라. 표현이 거칠긴 하지만 일리는 있다. 만만해 보이는 자 하나 골라다가 본보기로 밟아주겠다는 것.

이어진 상황도 예상되는 그대로였다.

똑같이 합격했다 해도 엄연히 실력엔 차등이 있는 법.

위지경의 엄포에 상대는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이에 술잔을 빙그르르 돌리자, 툭! 조진평이 손목을 붙잡곤 고개를 저었다.

"백 공, 참으시게. 참아야 하네."

이에 멀뚱히 그를 바라보곤 답했다.

"누가 나선대. 그럴 생각 전혀 없어. 손 치워."

"아, 그래? 미안. 왠지 꼭 나설 것 같아서. 하하."

얕게 헛웃음을 뱉었다. 보기엔 딱하지만 나서줘 봤자 잠시뿐.

"칼 밥 먹고 사는 무림인이라면 제 가치는 스스로 증명해야지."

조진평이 놀란 듯 눈썹을 곤두세웠다. 생각보다 비정한 말이었기 때문.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난 여기서 이렇게 당할 놈이 아니라고.

이 정도에 겁먹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라고.

이 정도는 스스로 보여줘야 험난한 강호에서 버틸 수 있는 거다.

그게 안 되면 비굴하게 빌붙어 살아남든가. 아니면 제 발로 떠나든가.

둘 중 하나뿐.

"귓구멍 열고 잘 들어라! 같은 신분이 됐다고 맞먹을 생각하지 마. 주제에 맞게 처신하라는 얘기다. 못 볼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어느새 상황을 마친 위지경이 다 들으란 듯 떠든다.

분위기가 침중해졌다.

모두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 말이 누구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경고였다.

눈치껏 기어다니라는 오륜회의 졸렬한 선전포고.

물론 장이서한테는 하등 영양가 없는 일이었다.

뭐, 저들이 혈교라면 조금 달라지겠지만.

* * *

한편 맹주 현청은 장원으로 돌아왔다.

"벌써 다 보고 오신 겁니까."

등 총관은 기다렸다는 듯 달여놓은 차를 내왔다.

떫고 진한 차향이 방 안에 가득 퍼진다.

또르르.

그리고 이를 따라주며 조심스레 맹주의 안색을 살폈다.

그를 보필한 지도 어느덧 수십 년.

이제는 숨소리만으로도 맹주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고, 나아가 기분마저 통찰하는 경지에 올랐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맹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해하고 있다는 것을.

3년 내 본 맹주의 모습 중 가장 눈매가 곱게 휘어 있다.

물론 예상은 갔다.

"진룡과 창궁룡의 실력이 확실히 대단하더군요."

진자량과 남궁신. 평화의 3세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인재들.

그들의 수준을 확인하고 온 것일 터. 자연스레 넌지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한데.

"그런 것 같더군."

뭔가 이상하다. 맹주의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오히려 조금 가라앉은 것.

'왜지?'

의문이 가득 차 있던 순간, 맹주가 차를 톡 내려놓곤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맹에서 가장 예민하다는 등 총관의 눈에도 띄지 않은 자였나 보군."

"예...?"

"이러니 더 궁금해지네. 겉으로 보기엔 특별할 것 하나 없었다는 말일 테니."

그게 무슨....

하지만 더 물을 수는 없었다.

맹주의 눈을 보고 그가 사색에 잠겼음을 깨달았기 때문.

이럴 땐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수하의 자세.

'대체 누굴 보신 것인가.'

또르르.

차 따르는 소리만이 고요히 흐르는 밤이었다.

* * *

사흘이 지났다.

명상에서 눈을 뜨자 창 틈새로 비추는 여명에 서서히 어둠이 걷힌다.

잠이 든 건 아니다.

지금의 장이서는 사나흘에 한 시진(2시간) 정도면 잘 잤다 말할 정도는 됐다. 두 시진이면(4시간) 날아다닐 정도고.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가능하다.

이는 장이서가 탈인(脫人)의 경지. 곧 입신지경에 가까워졌기 때문.

남들은 입신(入神)의 경지를 두고 다양한 추측을 내놓지만, 장이서의 지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단전에서 파생한 절대적 기운이 체(體) 내외를 감싸 물리적 충격을 넘어 시간마저 비껴가게 하는 것.

이른바 육신이 시간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을 입신지경으로 정의했다.

하여 더는 노화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며, 먹어야 할 이유도, 자야 할 이유도 사라지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거다.

불멸의 시작점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이서는 정확히 그 지점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이미 머리는 단계를 넘어섰으나 막혀버린 구규지체가 따라주지 않은 것.

천마에게 배운 귀천살마공으로 다섯 번째 구멍은 막아냈으나, 그다음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만큼 소원했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 그 자체.

그래서일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사흘간 숱한 궤적을 그어 보았지만, 시험장에서 펼쳤던 그 검로는 찾아내지 못했다.

3년 전 무아지경에 펼쳤던 소림의 무공을 다시 펼치지 못하듯,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은 있는데, 다시 그 길이 재현되지는 않았다.

길게 숨을 뱉어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되는 걸 억지로 쫓는 건 무의미한 일.

오늘이 안 되면 내일이 있다.

마음을 비우고 옆의 탁상을 흘겼다. 서류가 가득하다. 인사 기록이었다.

이번 맹호원 호위무사 시험에 합격한 오십 명.

그들에 대한 정보를 묘채경이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해 온 것이다.

'시간이 없어 많이는 못 찾았습니다. 따로 알아볼 게 있어 놓고 갑니다.'

그것도 잠시 밥 먹으러 자릴 비운 사이, 서신과 함께 놓고 나갔다.

그녀 말로는 적다고 했지만, 이 짧은 기간에 믿기 힘들 정보량.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만일 이 중에 혈교에서 보내진 자가 숨어 있다면, 그게 누구든 결코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연한 눈빛으로 텅!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지금부터 제1기 맹호단(盟護團)의 입단식을 시작하겠다!"

강렬한 태양 빛 아래.

각자 봇짐을 싸 들고 모인 오십 명의 무사들.

맹호단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325.

#맹호단

"이보게, 백 공! 잘 지냈는가?"

약속된 연무장에 도착하자 익숙한 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누가 봐도 오십 대 같지만, 자칭 노안 조진평이다.

"이거 첫날부터 분위기가 영 별로일세."

그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주변을 눈짓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눈에 날이 선 것이 건드리면 안 될 분위기다.

"왜 저러는 건데?"

"무시당했다 이거지."

"누구한테."

"누구겠는가. 입단식에 얼굴 한번 안 비춰주신 맹주님이지."

눈매를 좁히고 귀를 기울이자 주변에서 수군대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맹주님은 오늘도 안 나오신 건가?"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사실 이곳에 모인 오십 명은 제법 특별한 자들이었다.

경쟁률만 수십 대 일.

쉽게 말해 어디 가서 칼 좀 쥐어봤다는 자들.

모르긴 몰라도 시험의 수준을 가늠해 보건대, 아마 제 고향에선 날고 기는 영재 소리 들으며 자란 자들일 거다.

한데 그런 그들이 이런 촌구석 낡은 장원까지 모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맹주 현청.

오직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거였다. 한데 입단식에도 나타나지 않으니 불만이 속출할 수밖에.

"솔직히 총관님이 연설에 나서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오랫동안 칼 놓고 안살림만 하던 분인데. 이거 뭐 첫날부터 힘 빠지는구먼."

조진평도 볼멘소리를 토했다.

물론 등 총관도 어디 가서 무시당할 군번은 절대 아니다.

아니, 과거를 생각하면 받들어 모셔야 할 수준.

하지만 맹주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다. 비교가 되니 누구든 마뜩잖을 수밖에.

"이제라도 맹주님이 나오셔야 해. 이대로면 괜히 총관님만 체면이 많이 상할 걸세. 뭔 말을 하든 반응들이 좋게 나오겠는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미 총관은 우리 앞에 섰고, 물러서자니 그건 그거대로 체면이 안 선다.

더구나 앞으로 호위무사들이 가장 많이 마주칠 자가 누구겠는가.

맹주? 아니다. 등 총관이다.

대부분 그가 명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누가 위인지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맹주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그는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흥미로운 눈으로 잠시 상황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등 총관이 담담히 연설의 포문을 열었다.

"그대들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기로.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발언에 술렁임이 잦아들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주목됐다.

"어제까지는 무릎이 꿇려도 다시 일어서면 되었고, 하루 나태하게 보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뒷짐을 진 채 사이를 거닐며 말을 이어간다.

"이유를 아는가?"

내부가 술렁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무엇을 위한 존재가 될 것인가. 과연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하루가 될 것인가. 지금까지는 그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등 총관은 차분했고, 담백했다. 그게 묘하게 거슬리면서도 가슴의 떨림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는 그대들 모두 그 답 앞에 서 있다."

답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있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포부 있게 나온 정도인들에게 통용될 단 하나의 이름.

"맹(盟)."

모두의 눈이 부릅떠지고, 가슴에 돌덩이가 쿵! 떨어졌다.

무림을 수호하고, 정의를 관철하며,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온 바로 그 한 글자.

"오늘부터 그대들은 맹을 수호하는 벽. 무릎을 꿇으면 적들의 화살이 머리 위로 날아들 것이고, 한눈을 파는 순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다. 한 번의 실수가, 한 번의 좌절이, 한 번의 포기가! 우리에게서 맹을 앗아갈 것이다."

모두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격앙되는 숨. 뜨거워지는 공기. 하나가 되는 기운.

"어제까지의 자신은 잊어라. 오직 맹을 위해 버텨라. 싸워라. 그리고 죽어라."

"...!"

"기다리는 가족이 걱정되는가? 헛된 죽음으로 느껴지는가?"

결의가 단단해진다.

"맹이 기억할 것이다. 맹이 그대들을 바라볼 것이다. 맹이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다."

신의가 확고해진다.

"영광의 벽이 되어라. 가슴에 긍지를 품어라."

그 위에 충의가 쌓인다.

"그대들이 맹호단이다."

와아아아아아!

거친 열기와 함께 미친 듯한 함성이 터졌다.

누가 등 총관을 한낱 안살림이나 맡는 자라 하였는가.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안살림까지 맡을 수 있었던 거다.

비록 칼을 놓은 지는 꽤 되었지만, 전란의 2세대에선 결코 빠질 수 없던 인물.

이것이 무림오성 중 일좌인 철혈성(鐵血聖) 등태보의 진면모였다.

'아직 안 죽었네.'

장이서도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세대 신주오절의 그늘이 너무 컸을 뿐, 2세대를 대표하는 무림오성도 저력이 있는 자들.

이제 누구도 등태보를 앞에 두고 맹주를 찾는 녀석은 없을 거다.

아마 맹주도 그걸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것일 테고.

"백 공, 나 오늘부터 총관파에 합류하겠네."

"정신 차리고 앞에 봐."

"그러지."

피식 웃고는 등 총관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맹주님과의 면담을 시작할 것이니, 호명하는 대로 따라오도록."

"...!"

맹주와의 면담! 생각지도 못한 선물 같은 희소식에 모두의 얼굴이 벙쪄버렸다.

이런 줄도 모르고 불만부터 품었다니.

"왜 대답이 없나?"

이에 등 총관이 슥 노려보자.

"예-!"

"예-!"

세상 떠나갈 듯 우렁찬 외침이 흩날렸다. 등태보. 진짜 사람 다루는 재주는 알아줘야겠다.

그야말로 뛰는 무사들 위에 나는 총관.

기강이 제대로 잡히는 순간이었다.

기대감이 잔뜩 서리는 순간이었고.

*

맹주와의 면담은 단독이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다섯 명씩 한 조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첫날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

따로 은밀히 접선하기 전에 미리 봐둔다면 어떤 식으로든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둘 호명에 따라 안채가 놓인 담으로 향했다. 숙련된 자들답게 묵묵히 긴 시간을 기다렸다.

한데 절반 정도가 넘어서자 연무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기 때문.

"설마 성적 역순인가?"

아무리 강호가 넓다지만, 윗물은 좁게 고이는 법.

칼 좀 쓰는 자들 사이에서도 제법 잘 알려진 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것이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묘한 신경전이 펼쳐진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마지막 최종 다섯 명이 남겨졌다.

기적처럼 생존한 조진평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다가와 쑥덕거렸다.

"백 공, 보이는가? 진룡과 창궁룡일세! 지금 저 둘과 우리가 한 공간에 있단 말일세!"

나도 알아. 쪽팔리니까 그만해. 그리고 아까부터 같이 있었어.

어찌나 목청이 큰지, 이 정도면 모른 체 해주는 두 사람이 고마울 지경.

그래도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긴 했다.

정파 3세대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 두 사람이었으니.

진자량은 무심한 눈빛이 썩 잘 어울리는 미공자였고, 남궁신은 주루에서 봤던 대로 위압적인 체격의 호남이었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니 제법 그럴싸했다.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한데 정말 이게 성적순은 아니겠지? 에이, 내가 그 정도는 아닌데. 하하하!"

조진평이 쑥스럽다는 듯 호탕하게 웃는다. 글쎄. 근데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누가 그런 걸 신경... 쓰는구나.

고오오오!

남궁신과 진자량의 몸에서 엄청난 열기가 불타올랐다.

말은 안 했지만 그냥 느껴졌다. 서로를 향한 승부욕이.

그리고 때마침 다시 돌아온 등 총관.

그의 입이 열렸다.

"조진평, 송옥."

"예!"

무미건조하게 불리는 이름. 조진평이 손을 번쩍 들며 앞으로 나간다.

송옥은 종남파 출신으로 진자량과 가장 가까운 벗이다. 옆이 너무 잘나서 그렇지 그 역시 쾌룡(快龍)으로 통하는 후기십룡 중 하나.

드디어 다음 차례.

남궁신과 진자량의 울대가 꿀렁인다.

과연 누구의 이름이 먼저 불릴 것인가.

"남궁신, 진자량."

"...!"

남궁신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반면 진자량의 얼굴은 희미하게 평안해진다.

하나 그도 잠시.

'아직 넷이다!'

'하나가 더 있어?!'

두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리고 등 총관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백서. 이상 안채로 이동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휙 돌아갔다.

앞머리로 눈매를 가린 또래의 사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남궁신은 1등도, 2등도 아닌 3등이라는 사실에 두 눈 부릅뜬 채로 멎어버렸고. 진자량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장이서를 흘겼다.

성적이 아니었나? 그냥 우연이었던 건가?

물론 등 총관이 성적 역순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저 남아 있던 이들이 지레짐작한 것뿐.

하지만 어찌 이리 찝찝한 것인가.

"맹주님을 기다리시게 할 셈인가?!"

등 총관의 호통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백서....'

그의 이름을 뇌리에 깊이 박은 채.

*

맹주가 머무는 거처는 사찰과 비슷했다.

수양을 위한 널따란 공간이 있었고, 안쪽 구석엔 그의 방으로 향하는 장지문이 놓였다.

안에선 미묘하게 떫은 향이 가득했는데, 그가 즐겨 마시는 차인 듯했다.

'어째 향이 낯이 익은데.'

여러 향이 배합되어 확실하진 않지만 분명 익숙한 느낌이 섞여 있다.

"여기서 기다리게."

하나 등 총관의 말에 금세 잡념을 떨쳤다.

다섯 개의 방석이 놓여 있고, 총관은 맹주의 방으로 사라졌다.

자리에 앉자 조진평이 감격한 듯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내 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감개무량일세!"

"그리 좋아?"

"좋다마다! 나 같은 얼치기가 언제 맹주님과 또 인사를 나누겠는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지. 저들 둘이면 또 모를까."

하긴.

"한데 백 공, 자네는 맹주님을 만나 뵌 적이 있는가?"

"그거야 당연히... 없지."

있어도 말할 수 없지만, 어차피 그는 절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 없는 것과 진배없다.

근데 그건 왜.

조진평은 흘깃 주변 눈치를 살피곤 슬그머니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내 자네니까 말해주는데 이번에 맹주님께 반드시 잘 보여야 하네."

"왜."

"사람 참 순진하긴. 몰라서 묻나? 같은 호위무사라고 다가 아니네. 자그마치 오십 명 아닌가. 잘 보이면 꽃마차 드는 거고, 밉보이면 대문이나 여는 거지."

"그냥 둘 다 노비 같은데."

"어허! 주인님 옆에 붙어야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거 아닌가. 여기 왜 왔는가. 하나라도 가르침을 받으러 온 거 아닌가? 괜히 불침번으로 야외 순찰만 뺑뺑이 돌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명심하게."

아니, 별로 명심하고 싶진 않은데.

드르륵!

때마침 장지문이 열리고 조진평은 잽싸게 방석을 끌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많이 기다렸는가."

그가 나타났다.

단정한 차림에 인자함이 물씬 느껴지는 중년의 사내.

과거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

"반갑네."

무림맹주 현청.

그와 다시 만났다.

약 20년에 달하는 시간이 흘러 바로 이곳 귀주에서.

326.

#면담

오랜만에 다시 만난 맹주는 여전히 늙지 않은 용모였지만, 기억 속 모습과는 분위기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

"조진평입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하, 목숨이라니. 그런 말 말게. 자네들이 없으면 누가 이곳을 지키겠는가. 어서 일어나게."

"추웅!"

눈가에 주름 가득한 사람 좋은 웃음. 적당한 선의 농담과 칭찬.

분명 기억 속엔 차가운 절벽처럼 무뚝뚝한 모습이었거늘, 이렇게 사람이 다를 수가 있나.

이것이 진짜 후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인가.

아무리 요원이 음지에서 이름 없이 죽어 나갈 비운의 운명이라지만, 극명한 온도 차에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

불쑥 심기가 뒤틀린다. 물론 이를 드러내진 않았다. 그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백서입니다.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속내를 갈음하곤 마지막 제 차례에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자네였군."

맹주에게서 속이 뜨끔할 말이 흘러나왔다.

설마 103호인 걸 눈치챈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반박귀진에 오른 이상 화경의 고수라도 내력을 가늠할 수 없고, 십수 년 만에 변장한 제 모습을 알아볼 리도 없다.

그렇다면 역시.

"인상 깊은 검이었네."

자신도 모르게 화강암에 그어낸 검로.

그걸 눈여겨본 것이다.

"감사합니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라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몰랐다면 실망했을 거다.

아무런 증명도 없이 그가 순순히 제 말을 들어주겠는가.

하여 뜻을 담아 보낸 것이다.

내가 왔노라고.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되려 놀란 건 함께 온 이들이었다.

특히 진자량과 남궁신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들 차례에선 일절 검에 대한 언질이 없었기 때문.

단 한 마디뿐이었지만, 그 충격은 엄청났다. 특히 내심 기대했던 터라 더했다.

맹주가 다른 건 몰라도 검에 대한 칭찬이 얼마나 인색한지 잘 알기 때문.

대체 저자가 뭘 어쨌길래.

'정말 1등이라도 된단 말이냐.'

'백서라고 하였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그의 이름이 뇌리에 박히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둘보다도 더 놀란 이가 있었다.

'으음....'

차분한 표정 안에 들뜬 가슴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절세 고수.

바로 맹주 현청이었다.

'이자가 정말 극로를 펼쳤다는 말인가?! 그러기엔 너무도 평이하지 않은가.'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장이서는 그저 잘 쳐봐야 일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걸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극로는 무예의 극의. 우연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심득의 깊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일류는 너무도 부족한 수준.

물론 이는 장이서가 화경의 고수도 꿰뚫을 수 없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마 거기까진 생각이 도달하지 못했다.

삼십 대에 반박귀진에 오른다는 게 도저히 말이 안 되기 때문.

어느 순간 맹주의 눈에 불신이 가득 서렸다.

'혹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가 온 것일 수도 있다.'

점점 생각이 부정적인 견해로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장이서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믿지 못하시겠다. 그럼 좀 더 놀라게 해줄 수밖에.'

솨아아아!

장이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실낱같은 기운이 서서히 맹주를 향해 쏘아지기 시작한다.

그것도 아주 도발적으로!

"무슨...!"

이에 맹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등 총관은 이런 상황도 모른 채 맹주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흘깃 살피니 모두가 마찬가지다.

능청맞게 앉아 있는 장이서의 기운을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다.

이에 맹주는 더더욱 깊은 침음을 삼켜야 했다.

'등 총관도 느끼지 못할 정도라니....'

등 총관이 누구인가. 무림오성의 일좌인 철혈성이다.

전란의 2세대에서도 최상위에 꼽히는 고수라는 얘기. 따지자면 마교의 칠대장로와 동급이라는 말이다.

한데 고작해야 이립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자의 기운을 간파하지 못했다.

이는 어지간한 기교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정말 이자가 극로를 펼쳤다는 말인가?'

어찌 이런 기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

맹주는 불신의 늪에 빠졌다.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는 숨을 삼켰다.

수수수수수!

그러자 스산한 소음과 함께 주변 곳곳에 첨예한 백광(白光)의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장내를 비롯해 밖까지 서린 각기 다른 일만 개의 검.

맹주의 성역인 만검(萬劍)이다!

이에 등 총관은 심상치 않은 기감에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고, 나머지는 그저 멀뚱히 앉아 있었다.

심안의 차이였다.

심안은 초절정 경지에 올라도 익히지 못하는 자가 태반.

그만큼 깨우치기 어려운 심득이었다.

등 총관도 보는 게 아니라 그저 느끼는 정도.

그러니 고작해야 삼십 대 나이에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에 장이서는 내심 크게 당황했다.

'미치기라도 한 건가?! 여기서 성역을 불러내다니!'

남들은 모르겠지만, 그의 눈엔 첨예한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잘못 건드리면 손이고 머리고 다 잘려 나갈 판.

[퀴아아아아!]

오죽하면 내면의 마귀까지 노호를 터트렸다. 기분이 실로 불쾌하다는 뜻.

'제정신이 아니군.'

물론 어이가 없는 장이서와 달리 맹주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심안까지 깨우친 것인가...?!'

분명히 보였기 때문. 장이서가 만검을 조심스레 살피는 모습이.

정신이 아찔했다.

신주오절로 불리는 무림의 전설 현청이었다.

그가 구십 년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기사를 겪었겠는가.

하나 이건 자신의 상식을 송두리째 깨트리는 일이었다.

'혹 반로환동한 고수인가?'

그럴지도. 하지만 의미는 없다. 반로환동을 하게 되더라도 최초로 신의 영역에 접근했던 나이를 넘어서진 못한다.

한마디로 시간의 굴레를 처음으로 벗어나기 시작한 나이가 최저점이라는 얘기.

그게 자신은 반백에 가까운 나이였고, 신승과 서검은 그보다 훨씬 뒤에야 들어섰다.

같은 경지임에도 자신이 서검과 신승보다 젊어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

바꿔 말해 반로환동을 했다 하더라도 삼십 대 나이에 신의 경지에 근접했다는 뜻이다.

그건 그거대로 이미 경악을 넘어설 수밖에 없는 일.

물론 이십 대에 올라선 괴물도 있긴 했다.

천마 진우광.

하지만 그건 고금을 통틀어 비교 자체가 불가한 자이기 때문 아닌가.

'설마 이자의 자질이 천마에 버금간다는 말인가?!'

헛숨이 뱉어지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맹주님?"

침묵이 길어지자 등 총관이 정신을 깨운다. 후학들을 앞에 두고 못난 꼴을 보였다. 이내 표정을 갈음하곤 인사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이에 등 총관도 담담히 지시를 내렸다.

"밖에 나가 기다리게."

모두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장이서도 이를 따라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기회는 지금만 있는 게 아니니까.

'곧 찾아뵙죠.'

*

"괜찮으십니까."

모두가 나간 뒤, 등 총관이 진한 향의 차를 다시 달여오며 걱정스레 물었다.

숨소리만 들어도 안다. 지금 그의 심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다는 것을.

"음...."

맹주 역시 숨김 없이 침음을 뱉었다.

"백서라는 자 때문입니까."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기이한 자더군."

빠른 수긍. 한데 참으로 중의적인 표현이다. 기이하다. 보통 이리 모호한 평을 남기는 경우가 거의 없거늘.

"제가 보기엔 그리 특별한 게 없어 보였습니다만."

등 총관이 넌지시 소회를 밝혔다. 솔직한 평이었다. 그의 눈엔 그저 평범한 젊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하나.

"그래서 더 이상한 걸세."

"예?"

맹주가 허탈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여태 본 자들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난 자일지도 모르네. 말인즉슨. 내가 찾던 인재에 가장 가깝다는 얘기일세."

"...!"

등태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본래 맹주는 후학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자.

특히나 후기지수를 볼 때 얼마나 큰 잠재력을 지녔는가를 무엇보다도 중시했다.

이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 하면, 신진고수가 나타났다고 하면 무조건 자질부터 확인하려고 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곧 정도의 미래이니까.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맹주께선 자신이 일평생 꺾지 못한 그를 뛰어넘어 줄 인재가 나타나 주길 바라셨다.'

그랬다. 맹주는 늘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비롯해 중원의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었던 천재 위의 천재.

천마 진우광.

그를 뛰어넘어 줄 인재를 말이다.

등태보는 이 사실을 아는 극소수의 측근 중 하나.

하여 맹주가 찾던 인재라는 말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삼천룡(三天龍)보다도 더 말입니까."

믿기지 않아 물었다. 삼천룡. 진룡 진자량과 불공룡 정연. 그리고 창궁룡 남궁신을 말함이다.

3세대 최고의 기재들이며 그들을 처음 봤을 때 맹주의 기쁨을 선명히 기억하기 때문.

하나 현실은 처참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세."

"...!"

평소 잘 놀라지 않기로 유명한 등 총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나 맹주는 솔직했다.

분명 삼천룡은 자신이 본 수많은 기재 중에서도 손꼽히는 자들.

하나 그 정도 천재는 그 전 세대에도 있었다.

무림오성.

당장 눈앞의 철혈성 등태보만 하더라도 그중 하나.

하지만 자신이 본 게 맞다면 그 누구도 저 나이에 성역을 느끼고, 극로(極路)를 펼친 자는 없었다.

물론 이만큼 설레게 했던 아이가 하나 더 있긴 했다.

'최악의 몸을 갖고 태어났으나 최고의 자질을 가졌던 아이.'

하지만 맹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어쨌든 등 총관도 못 알아챌 만큼 기척을 감추는 데 능한 아이.

한데 그런 아이가 제게 노골적으로 기세를 드러냈다.

대체 왜.

이유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곳에 온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

"어찌할까요."

맹주의 두 눈에 깊은 고민이 서렸다.

* * *

한편 밖으로 나온 장이서 역시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확실히 대단하구나.'

장내를 가득 수놓았던 일만 개의 검.

백광을 뿜어내던 그 모습은 실로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명관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가만히 있어 줄 때의 얘기.

만일 그 검들이 자신을 향해 쏘아졌다면 어땠을까.

이를 막아낼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손에는 땀이 쥐어졌다.

사형의 말에 따르면 성역이란 그 사람이 일평생 이루어 온 의념의 결정체라고 하였다.

하여 성역은 발현하는 자들마다 모두 형태가 다르며, 무엇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부 모양새가 달랐던 맹주의 만검은 아마 그가 일평생 휘둘러 온 검이 아닐까 생각했다.

단 한 번을 써도 깊은 애정이 가득했던 검들이 그의 의념으로 형상화한 것.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실제 그가 휘두르는 검은 어떠할까. 어릴 때 신선처럼 느껴졌던 그의 검을 마주하면 어떤 기분일까. 이길 수 있을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아귀가 뜨거워졌다.

첩자로 살아갈 때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무사로서의 호승심이었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보게, 백 공! 대체 자네 시험 때 뭘 어찌한 것인가?!"

조진평의 호들갑이 감상을 깨웠다.

327.

#정호위

정신을 차리자 남궁신과 진자량도 답이 궁금했는지,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의심과 시기. 그리고 호승심. 맹주를 보는 제 눈빛이 저랬을까. 참 한창나이다. 너희나 나나. 어쨌든 얽혀봤자 피곤한 일.

"뭘 어째. 그냥 남들 하듯이 했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인상 깊은 검이었네. 내 앞으로 자네만 눈여겨보지. 자네가 정도의 희망일세. 분명 이리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렇게까진 안 했고.

"그냥 하신 말이야."

장이서가 픽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뭔가 자네 볼 때 눈빛이 우리 볼 때랑 달랐는데?"

"쓸데없는 소리. 나만 이상한 사람 만들지 말라고. 내가 볼 땐 저 두 사람을 더 눈여겨 보시는 거 같던데."

장이서가 힐끔 남궁신과 진자량을 턱짓했다.

"그랬나? 하긴... 뭐 좀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억측은 그만하지."

동조하듯 답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관심은 사그라든다.

내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때마침 등 총관이 밖으로 나왔다.

"가지."

그를 따라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저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데.

불쑥 등 총관이 가던 걸음을 멈추곤 말했다.

"오늘부터 백서 자네가 정호위(正護衛)이니 그리 알도록."

"커헉!"

이에 조진평은 사레가 들리고, 진자량과 남궁신은 입이 벌려진 채 얼어버렸다.

당연했다.

정호위는 가장 측근에서 주인을 보필하는 호위무사. 상식선에선 가장 믿고, 강한 자에게 부여되는 직책이다.

'이것 봐. 뭐 있다니까!'

조진평이 눈으로 제 뜻을 피력했다. 남궁신과 진자량의 눈에 기껏 꺼진 불이 다시 거세게 붙었다.

그냥, 너희들 알아서 해라.

결국 어깨를 으쓱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맹호단에 백서라는 장작이 또 한 번 던져지는 순간이었다.

*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일과는 특별히 한 것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복식을 맞추기 위해 찾아온 재단 장인들과 차례대로 시간을 보내야 했고, 가벼운 식사 후엔 마련된 숙사(宿舍)에 방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찾아온 자유 시간.

온종일 함께 다닌 탓인지 어느새 하나둘 서먹함이 걷히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단연 가장 큰 화제는 그였다.

"들었는가? 정호위가 벌써 정해졌다더군."

"누가 되었는가? 창궁룡? 진룡?"

"둘 다 아닐세. 이름이... 백사랬나?"

백사 아니고 백서.

바로 장이서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처음 듣는 자인데 총관께서 그를 정호위로 임명하셨다더군."

"에이, 그게 말이 되나. 시험장에서 못 봤는가? 창궁룡과 진룡이 화강암을 어찌 만들어 놨는지."

왜 못 봤겠는가. 다 봤지.

하나는 두 동강에 다른 하나는 박살이 나버렸지 않은가.

"뭔가 착오가 있는 걸세."

"혹시 아는가. 이곳 맹호원에 신룡(新龍)이 나타난 걸지도."

"설마."

곳곳에서 기대와 불신이 가득 서렸다.

그럴 만도 했다.

무명인 자가 천하의 창궁룡과 진룡을 젖히고 정호위에 올라섰으니.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맹주의 장원에서 말이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는 일.

그리고 이러한 수군거림은 이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복도를 지나는 오륜회의 무리.

창궁룡 남궁신 패거리였다.

"하, 저 병신들이. 신아. 내가 가서 밟아버릴까?"

위지세가의 망나니 위지경이 이빨을 드러낸다. 이에 단목살과 황보병도 거들었다.

"백사고 뭐고 가문도 별 볼 일 없는 거 같던데. 더 나대지 못하게 손봐줘야지."

"맞아. 우리 오륜회의 체면이 안 살잖아. 안 그러냐, 신아?"

세 사람의 기세가 매섭게 쏘아진다.

당장 남궁신의 명만 떨어지면 박살을 낼 기세.

하나.

"위지경."

"어."

"가서 자라."

"나 안 졸린데?"

"자라고."

서슬 퍼런 눈초리. 그제야 상황을 직감한 무리가 깨갱 고개를 숙였다.

"너희도 쉬어라."

"어, 알았다. 신아."

"그럴게."

살벌한 기세에 남은 이들도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를 보며 남궁신은 중얼거렸다.

"한심한 것들."

의외였다. 남들이 보기엔 그가 악의 축 같지만 천만에.

그는 남궁가의 대공자이자 정도 제일 후기지수.

저들의 유치한 장단에 놀아줄 마음 따윈 없었다.

그냥 집안 어르신들의 서로 잘 지내라는 당부가 있어 어울려 준 것뿐.

'백서....'

지금 그의 머릿속엔 오직 백서라는 이름뿐이었다.

분명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거늘. 온종일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남궁세가의 대공자인 자신이 언제 이처럼 의문의 굴욕을 맛본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네가 정말 그럴 만한 실력이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그의 마음에 짙은 투기가 서리는 순간이었다.

* * *

한편 맹호단이 그의 이름에 들썩이고 있을 무렵.

정작 당사자인 장이서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그건 바로 어느 한적한 담벼락.

빛 한 점 없는 이곳에서 지나는 이의 금품이나 갈취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여기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정호위라니요. 첫날부터 그게 가능한 겁니까?"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 바로 묘채경과의 접선이었다.

"오호호, 이제 보니 무림맹에 계셨어도 잘나가셨겠습니다."

잘나가긴. 죽다 살았지.

"어쨌든 금방 일이 끝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계속 계시는 것도 영 모습이 이상했는데."

그렇긴 하지.

"그보다 서신에 알아볼 게 있다고 적어놨던데."

"아, 맹호단을 조사하던 중에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요."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곤 말을 이었다.

"화림현 인근에서 누가 칼 좀 쓰는 낭인들을 모으고 있답니다. 그것도 돈만 되면 뭐든 다 하는 자들로."

칼 쓰는 낭인이라. 이런 경우는 뻔했다.

전쟁을 준비할 때.

이른바 부족한 머릿수를 채워 줄 칼받이가 필요할 때 흔히 낭인들을 모으곤 했다.

"한데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했다. 그것도 많이.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 촌구석엔 전쟁 벌일 만한 곳이 없는데 말이지요."

그녀의 말대로. 화림현은 워낙 외져 칼을 든 자조차 보기 어려운 곳이다.

한데 전쟁이라니.

"맹호원을 노리는 거라고 보는 겁니까?"

"그걸 알아보려고 간 겁니다. 근데 그건 그거대로 이상하니 답답할 노릇이지요."

하긴. 어떤 미친 자가 맹주와 전쟁을 벌이려고 하겠는가. 그것도 낭인으로. 황실의 십만 대군을 끌고 오는 거라면 모를까.

"그래서 알아냈습니까?"

"아직입니다."

그녀에게 지금껏 뒤를 밟히지 않을 정도라면, 절대 보통 녀석들은 아닐 거다.

무엇이든 혈교가 도사리고 있는 이상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들이 누구인지 찾아내세요."

"존명."

벽 너머의 인기척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침, 모두가 다시 연무장에 모였다.

통일된 복식은 아직이라 여전히 옷차림은 각양각색이고, 서로 얕보이지 않겠다고 눈빛은 부리부리하다.

맹호단 출범 이래 하루가 지났지만, 여전히 한 식구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전부 모였나."

"예!"

등 총관만큼은 모두가 인정했다는 것.

그의 등장에 흐트러진 자세가 바로 서고, 눈빛도 선명해진다.

본래 인정만 하면 마음의 만리장성도 허물어지는 게 사내 아닌가.

모인 용건은 간단했다.

"지금부터 임무를 배정하겠다."

임무 배정!

맹호단에 뽑힌 인원은 총 오십 명.

힘들게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지만, 역할이 다 같은 건 아니었다.

조진평의 말대로 누군가는 맹주를 지키고, 누군가는 대문을 지켜야 한다는 것.

서열이 갈린다는 얘기다. 당연히 모두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

"맹주님을 보필할 정호위부터 호명하겠다."

흡! 서두부터 제일 호위무사?! 모두가 숨이 얹힌 듯 바짝 경직됐다.

하나 등 총관은 그딴 사정 알 바 아니라는 듯 거침없이 뱉었다.

"백서. 앞으로 나오도록."

웅성웅성! 소란이 크게 인다. 소문이 다 사실이었단 말인가.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뒤에 선 장이서에게 시선을 꽂았다.

"정말 저자가 제일 무사라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백서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어."

대체로 좋은 평은 아니었다. 눈빛엔 불신이 가득했고, 분노한 자들도 여럿 보였다.

본래 강한 사내들일수록 인정할 수 없는 자가 위에 서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

물론 장이서는 덤덤했다. 귀찮게. 딱 그런 표정이었다. 마교 부교주인 그에게 제일 무사 따위가 뭐 별거겠는가.

하나 이들에겐 의미가 컸던 모양이다.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가려는 찰나, 묵직한 음색이 흐름을 끊었다.

장신에 딱 벌어진 체격. 섬찟한 눈매를 가진 창궁룡 남궁신이다.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저자가 정호위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고오오오!

등 총관의 눈빛에서 압살할 듯한 철혈의 기세가 뿜어진다.

아무리 그라도 상관의 뜻에 불복하는 건 용서되지 않는 일.

꿀꺽. 그때 모두 깨달았다. 입관식 때 본 총관의 모습은 조족지혈이었다는 것을.

그야말로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명검 그 자체.

하나 그가 2세대의 주역이었다면 남궁신은 떠오르는 3세대의 핵심. 뚝심 있게 말했다.

"이곳에 모인 저희는 오직 맹주님을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그럼 제 말은 듣지 않겠다는 건가. 등 총관의 눈매가 꿈틀거린다.

"그래서?"

"당연히 가장 가까이에서 맹주님을 모시길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겁니다."

"용건만 말하게."

"저자가 정말 정호위에 어울리는 자인지. 모두가 납득하고 따를 수 있게. 확인할 기회를 주십시오."

웅성웅성! 또다시 소란이 빗발쳤다.

이번엔 부정이 아닌 긍정이다. 그것도 과한 초긍정!

"맞습니다! 확인시켜 주십시오!"

"실력도 없는 자를 위에 둘 수는 없습니다!"

군중이 남궁신의 발언에 힘을 싣는다. 총관의 미간이 더 찌푸려지지만 아랑곳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등 총관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맹주님께서 관심을 기울일 만한 아이가 아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평범 그 자체.

더구나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흡사 사마외도를 보듯 어딘가 묘하게 사이함이 느껴졌기 때문.

지금도 보라. 팔짱 툭 끼고 시건방진 자세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지 않은가. 마치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보통 이런 상황이면 조바심이 일어야 정상이거늘.

'마음 같아선 나 역시 백 번이고 확인해 보고 싶다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원칙에 상명하복은 기본. 어쨌든 맹주가 직접 내린 명이다. 번복은 있을 수 없다.

단호히 안 된다고 잘라내려는 찰나.

"모두가 이토록 바라는데 그리해 주게."

뒤편에서 중후한 음색이 흘러들었다.

그러자 일시에 소음이 멎고, 모두가 정중히 예를 갖춘다.

등 총관 역시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섰다.

맹주 현청.

그의 등장이었다.

328.

#칼 좀 빌리지

모두가 감격에 빠졌다. 저들 요구를 들어줘서가 아니었다. 그와 한 공간에 지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맹주의 등장에 표정이 굳어진 건 장이서였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어제 충분히 제 뜻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정호위 임명 역시 그에 대한 응답이라고 여겼고.

한데 이들 앞에서 실력을 다시 증명해 보이라니.

설마 늙어서 어제 일이 깜빡깜빡하는 건 아닐 테고.

맹주를 노려보자 그는 아랑곳없이 말했다.

"자네들의 의심을 거두는 데 초식필사 정도면 되겠는가."

초식필사(招式筆寫)!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는 분위기.

이에 장이서가 미간을 찌푸리곤 옆에 있던 조진평에게 물었다.

"뭔데 다들 놀라는 거지?"

"자네 맹주님의 초식필사도 모르는가?"

알면 물었겠냐.

"이거 참, 청해가 아무리 멀다지만.... 잘 듣게. 초식필사란!"

"초식을 흉내 내는 것이군."

"어? 어. 그렇지."

말 그대로. 초식을 베껴 쓴다는 뜻이다. 물론 붓으로 쓴다는 건 그냥 비유일 테고, 실제는 시범을 따라 하는 거였다.

이른바 흉내 내기.

한데 반응들이 너무 열띠다. 기대에 가득 찬 표정.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후후, 놀라지 말고 듣게. 아무거나 따라 하는 거면 다들 이리 기뻐 날뛸 이유가 없지. 초식필사는...!"

"맹주께서 자신의 초식을 선보이는 거겠군. 당연히 모두에겐 배울 기회가 되는 거고."

"알면서 왜 묻는 거야?!"

그냥 말하다 보니 알게 된 거다. 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거든.

어쨌든 상황 파악했다.

검의 정수가 담긴 한 수를 보여주면, 그 이치를 파헤쳐 최대한 근접하게 펼쳐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맹주의 초식필사였다.

"듣자 하니 진룡과 창궁룡 저 둘도 과거 초식필사를 터득하고 큰 진전이 있었다더군."

그 때문인지 처음 이의를 제기한 창궁룡도 입술을 꾹 다문 채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더는 불만 없다는 얘기.

맹주가 절 보며 물었다.

"백서 자네는 어떠한가. 이들의 뜻에 따라도 괜찮겠는가."

웃는 게 꼭 음흉한 구렁이처럼 보인다. 뭔가 의도가 있는 건 분명한데.

다 보는데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리하시죠."

끝내 담담히 답하자 맹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

잠시 후, 모두가 5열로 자리에 앉았다.

맹주의 초식을 견학하기 위함.

등 총관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공손히 올리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고개를 두리번 살피더니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떨어진 가지 하나를 주웠다.

"수취명검(手取名劍)...!"

그러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수취명검. 손에 쥐면 그것이 곧 명검이라는 맹주의 대표적인 수식어 중 하나.

일평생 검술을 수련해 온 이들에겐 꿈의 경지였다.

'과연 무슨 초식을 보여주실까.'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눈도 깜빡여선 안 돼!'

모두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선 맹주를 주목했다.

그건 등 총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최측근이기 이전에 검객이기 때문.

그리고 마침내 맹주의 몸이 운율을 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데 금세 모두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느릿하게 검을 돌리고, 들썩이는 것이 흡사 검무를 추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놓치지 않는다!'

하나 무엇이든 어떠하랴. 펼치는 자가 맹주인데.

모두가 작정하고 이를 꽉 깨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쩌저저적!

갑자기 다섯 걸음 떨어져 있던 느티나무 기둥에서 기이한 소음이 흘렀다.

이에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맹주의 움직임도 끝이 났다.

나무에는 검흔(劍痕)이 새겨졌다.

그것도 나무뿌리처럼 수백 갈래로 번진 얇고 기이한 검흔.

앉아 있던 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분명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었거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검무만 추는 것 같더니 대체 언제 저리 만든 것인가.

반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아, 아니...."

"방금 뭐가 어떻게 된...."

첫 번째는 아무것도 파악을 못 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부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했다.

그들에겐 맹주의 움직임 너머의 진기가 보이지 않았던 것.

그러니 봐도 본 게 아니다.

두 번째는 경악에 빠진 부류.

'이것이 전에 말씀하신 무공인가.'

'나뭇가지가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기가 난류(亂流)하는 듯했다.'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경지.'

이들은 그래도 나았다.

맹주의 움직임 너머 은은히 흘러나오는 기의 파동을 느꼈기 때문.

등 총관과 진자량. 그리고 남궁신과 같은 고수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하지만 보았다고 다 깨우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수만 갈래로 번지는 진기의 정체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역시나 봐도 본 게 아니었다.

결국 두 부류 모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천치 신세인 건 똑같다는 얘기.

그리고 이건 맹주도 예상했던 바였다.

심득을 얻기가 어디 쉽겠는가.

당연히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일.

하지만 이번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쪽에 속했다.

아니, 비교 불가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번 초식필사는 말이 안 되는 짓이었으니까.

당연했다. 자신의 것도 아닐뿐더러 완전히 깨우치지 못한 미완의 무공이었으니.

어찌 그걸 처음 본 후학들이 따라 할 수 있겠는가.

맹세컨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데도 불구하고 이런 기괴한 짓을 벌인 이유는 단 하나.

'어떠한가.'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내.

바로 장이서 때문이었다.

이번 초식필사는 그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던 것.

"시범은 여기까지일세. 그럼 바로 필사를 시작하도록 하지."

바로?! 최소한 이를 이해하고 깨닫도록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 맹주는 어차피 시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자네의 대답을 들려주게.'

장이서뿐이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