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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72.

#마오의 꿈

마오는 꿈을 꾸었다.

사방이 꽉 막힌 곳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문이 활짝 열리며 후광을 달고 철영이와 장득이가 나타났다.

'와아!'

그리고 해가 저물 때까지 신나게 언덕 위를 뛰어놀았다. 어둑해져 집에 돌아가려는 찰나, 늑대 한 마리가 으르렁 이빨을 드러내며 철영이와 장득이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마오가 막아서며 늑대를 걷어차 쓰러트렸는데, 얼굴을 보니 사족보행 마이신이다.

'우하하!'

신나게 두들겨 패주었다. 철영이와 장득이는 고맙다 웃으며 하늘로 사라졌다.

그리고 마오는 눈물 한 방울 흘리며 손 흔들다 잠에서 깨었다.

하... x발.

"개꿈 꾸고 기분 좋아진 건 처음이야."

마오가 축축한 눈가를 닦아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리지만, 참을 만하다.

여기가 어디냐며 놀랄 필요는 없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작지도 크지도 않은 방. 붉은 휘장으로 가려놓은 침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익숙했다. 칠공자가 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처소였으니.

"뭐 달라진 게 없네."

툭툭 휘장을 건드리자 먼지 없이 깨끗하다. 선반에 놓인 화분마저 예전 그대로고.

하지만 애틋함이나 아련함은 일절 없다. 오히려 불쾌지수만 올라갈 뿐.

"처음 여기 왔을 땐 좋다고 뒹굴었지. 호위무사에 하인들까지. 근데 알았나. 죄다 날 죽이려고 풀어놓은 뱀일 줄이야."

겉으로는 도련님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괴롭힘은 실로 교활했다.

'도련님, 죄송한데 이것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응, 알았어.'

처음엔 사람 좋게 웃으며 제 일을 부탁해왔고, 이를 들어주자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하게 요구했다.

'이따 해 지기 전까지 끝내놓으십시오.'

점점 도가 지나쳐져서 이를 따지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곤 문을 걸어 잠가 가뒀다.

'열어줘! 나 배고파!'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쫄쫄 굶어 빈사에 빠질 때쯤이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도련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들어가서 주무셔야죠.'

그러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저들끼리 농지거리하며 사람을 귀신 취급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 부친인 마일성에게 엉엉 울며 달려갔다.

하지만.

'고작 미천한 하인들 하나 처리 못 해 나까지 찾아온 것이더냐? 쓸모없는 놈.'

그때 깨달았다. 이곳이 곧 마교 제일 가문인 마가(魔家)라는 것을.

"가주 영감탱이는 내 목숨 따윈 관심도 없었어. 제 위신밖에 모르는 노친네거든. 사실 나도 어디서 주워 온 걸지도 몰라. 딱 보니까 애가 천재니까 욕심이 난 거지. 왜? 제 아들 마이신은 멍청이니까. 우하하하!"

마오가 영혼 없는 웃음을 터트리곤, 흠. 심드렁하니 코를 후비며 침상에서 내려섰다.

"그나저나 전부 어디 간 거야. 천재 마오 님께서 깨어나셨는데 말이야. 다 빠져 가지고."

이내 붉은 휘장을 휙 걷어냈다. 그러자.

"일어났느냐."

"으악! 깜짝이야!"

가주 영감탱이. 아니, 제 부친 마일성이 휘장 바로 앞에 부리부리한 눈매로 서 있었다. 너무 놀라 마주 노려보다가 이내 다시 휙 휘장을 쳤다.

뭐지? 뭘 본 거지? 멍한 표정으로 털썩 침상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공손히 배 위에 두 손을 얹고 가지런히 누웠다.

"꿈이야."

그리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휙! 다시 휘장이 쳐졌다. 띠용 눈을 뜨고 쳐다보자 제 부친 마일성이 무섭게 노려보며 서 있다.

"x발, 꿈이 아니었어!"

"까부는 걸 보니 살만한가 보구나."

"아니, 저기 그게... 잠깐."

"따라 나오거라."

뭐지. 마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자신이 칠공자가 된 뒤로는 늘 공대를 썼거늘. 이리 하대를 쓰는 걸 본 건 실로 오랜만의 일.

의뭉스레 뒤를 보다가 호다닥 따라나섰다.

그리고 뒷마당에 놓인 한적한 대나무 숲에 들어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솨아아아-

목엽이 바람에 부딪혀 시원하게 뇌까리는 소음이 귓가에 스민다. 그제야 마오는 정신이 확 들고, 침이 꼴깍 삼켜졌다.

"여기는 왜...."

설마 죽이려고?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그리도 끼고 돌던 마이신을 꺾었으니.

그런데.

"제법이었다."

"뭐?"

"뭐는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뭐요?"

고오오오-

마일성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이에 마오는 거북목을 한 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법이라니.

지금 설마 자신을 칭찬한 것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소 절 그렇게 무시하던 아버지가?!

"꽤 열심히 했겠더구나. 욕봤다."

뭐지. 마오는 갑자기 가슴이 먹먹했다. 자신이 천양지체인 걸 알았을 때 이후 처음으로 인정받은 느낌.

천하의 악인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라고,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 종종 본가에 들르거라."

"저, 정말?"

"네 집 아니더냐."

"아니, 그런가. 하하. 내 집...."

"소교주가 되겠다고."

"하하, 예!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

"포기하거라."

"어?"

"그만 내려놓고 대공자에게 가거라. 이 정도 보여줬으면 받아줄 것이니."

이럴 수가. 마일성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뱉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뭘 가요. 싫어요."

"그것만이 네가 살 길이다."

"자객이세요?"

마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따져 묻자 마일성이 슥 고개를 돌린다.

고오오오-!

서릿발보다 차가운 눈동자. 묵중한 살기가 뿜어진다.

"내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리는 것이냐."

"아니, 그건 아닌데...."

"다시 말하겠다. 대공자를 찾아가 말하거라. 시키는 건 뭐든 다 하겠다고. 그래야 너도. 네 식솔도 사는 것이다."

마오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저더러 대공자 밑으로 들어가라니. 그럼 장이서는 뭐가 되는가. 구유는. 칠무위는. 용태와 메기. 그리고 취홍란까지. 절 응원해 주던 그들은 대체 뭐가 되는가.

"싫어요. 전 소교주 한번 해볼 겁니다. 아니, 할 거야."

"쓸모없던 짐승이 이제 겨우 사람 흉내 좀 내는가 싶더니. 버릇없는 건 달라지지 않았구나."

"뭐야?! 컥!"

쿵! 위에서부터 만근이 찍어 누르는 기분. 털썩 무릎이 꿇리고, 두 손은 바닥을 짚는다. 바들바들 떨며 어떻게든 버텨보지만, 어림없다. 철퍼덕! 넘어지며 지렁이처럼 엎어졌다.

"끄으으으!"

일어서려고 아무리 힘을 줘도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겠다.

북명신공의 흡입력을 응용한 초식 태산압란(泰山壓卵)이다. 말 그대로 태산으로 알을 짓누르는 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기고만장하지 말거라. 아비로서 네게 해주는 온정이니."

"온정은 무슨...! 그냥 대공자 새끼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잖아!"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듣거라."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왜 잊고 있었을까.

남들은 자신을 망나니라고 했지만, 저가 볼 때 진짜 망나니는 마일성과 마이신. 그리고 이곳 마가였다.

사람 목숨이든, 인격이든. 파 뿌리처럼 아무렇지 않게 수컹수컹 잘라대는 망나니.

"당신은 양심도 없어? 나도 당신 자식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딴 개소리가 아니라 지금까지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해야지. 그게 맞는 거잖아!"

"힘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 힘을 펼쳐야만 대우받을 수 있는 곳이다. 한데 한낱 하인조차 어찌하지 못하던 너를 살려준 내게... 사과를 바라는 것이냐?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이 미친.... 이런 인간이 정말 제 혈육이 맞긴 한 것인가. 사고방식 자체가 악하다. 너무 악해서 역겨울 만큼.

"당신 제정신 아니야. 진짜 최악이야. 이젠 마이신 그 새끼까지 불쌍해 보여."

"억울한 것이냐?"

"어. 억울해. 당장 내 밑에 무릎 꿇리고 싶은데 힘이 없어서 x나 억울해!"

"평생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것만큼 멍청한 것도 없지. 네가 정말 소교주가 된다면 또 모를까."

마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소교주.... 그래. 나 소교주 할 거야. 해서! 당신부터 무릎 꿇릴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해줄게."

"어디 열심히 해보거라. 그럴 리 없겠지만 그날이 온다면 사과든,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마일성이 피식 비웃곤 손을 휙 휘저었다.

스스스스.

그러자 짓누르던 힘이 사라진다. 그리고 뒤에서 그를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칠공자님."

주춤거리며 일어나 뒤를 돌아보자 그였다.

"장이서...."

먼발치엔 구유와 칠무위가 서 있고, 가까이 와 있는 장이서를 보자 코끝이 또 찡해진다.

아비라는 작자는 어떻게든 절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그는 자신을 구하러 이리 달려오다니.

"그거 알아?"

마오는 차분해진 눈으로 마일성을 노려보며 가차 없이 말했다.

"여기가 내 집이었던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내 집은 저 녀석들이 있는 칠소궁이야. 그러니까 잊지 마. 난 당신 아들 아니고, 소교주가 될 칠공자라는 걸."

마오가 휘릭 몸을 돌리곤 매몰차게 걸어 나간다.

"가자, 장이서."

장이서는 당차게 걸어가는 마오의 뒷모습을 보곤 이내 다시 마일성을 흘겼다.

그러자 그가 기막을 펼치고 입을 열었다.

"번천검객을 만난다더니. 잘 만나고 왔는가."

지금 그게 중한가.

"꼭 이러셔야 했습니까?"

"무얼 말인가."

"절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신 게 장로님 아닙니까. 두 분 대화 들었습니다."

일부러 장이서가 듣게 했다니. 이건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진심이다. 소교주가 된다는 녀석이 고작 말 몇 마디에 흔들릴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달려가 무릎을 꿇는 게 낫다."

마일성은 입가가 길쭉하게 호선을 그렸다.

반면 장이서는 황당함에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가학적인 일을 벌이다니.

누가 마교의 장로 아니랄까 봐 가관이다, 정말.

"마가에 대한 증오만 더 키울 겁니다."

"증오는 상대를 강하게 키우는 방법 중 가장 쉽고 저렴한 수단이지. 후후후."

...어련하겠냐.

"가보겠습니다."

"잊지 말게. 아직 내게 보여준 건 가능성뿐이라는 것을. 더 확실한 성과를 가져오지 않으면 내 기다림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걸세."

"그러죠...."

장이서가 얕게 숨을 뱉고는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빨리 오라며 소리치는 마오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마일성은 미소를 머금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의 행보도. 기대해 보지."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싹 틔운 채 마가와의 대결은 끝을 고했다.

그리고....

*

*

*

"다들... 괜찮은 거지? 나 쓰러져 있는 동안 마가에서 별일 없었지?"

마오는 한자리에 모인 식솔들을 바라보며 잔뜩 걱정 어린 의문을 털었다.

"제일 늦게 일어나 놓고 누구 안부를 묻습니까."

이에 장이서가 코웃음을 치고.

"정확히 사흘 만에 깨어났다."

구유가 고개를 저었으며.

"마이신 눈은 어제 떴다며. 뭐, 산 송장이라곤 하지만."

과평이 귀를 후볐다.

"그럼 진 거... 아닌가...?"

끝으로 아신까지.

"야, 이 씨!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내가 이겼거든?!"

마오가 버럭 성질을 내자 모두가 하하! 크게 웃는다.

그래. 내 가족은 마가가 아니라 이 녀석들이다.

이내 피식 웃고는 힘차게 외쳤다.

"집에 가자아아아아!"

마오오오오! 칠무위의 우렁찬 기합성이 마가에 한참을 울려 퍼졌다.

칠소궁으로 귀환이다.

.

.

.

"아니, 근데 마의는 왜 따라오는 건데?! 아니, 언제부터 있었던 건데!"

"끌끌...."

진짜 귀환이다.

집으로.

173.

#흉신팔주

흐으으으으-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음산한 곡성처럼 울리는 어느 지하 공동.

벽면엔 피 흘리며 고통받는 기괴한 불상들이 가득하고, 곳곳에 놓인 촛불들은 매섭게 일렁인다.

딱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곳.

이는 자리에 모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의를 시작하지."

중앙의 둥그렇고 넓은 단상 위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붉은 악귀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피풍의까지 시뻘건 게 어디서 쉬이 보기 힘든 행색이다.

이는 단상에 선 이들 모두가 똑같았다. 해서 각자 서 있는 자리 밑에 적힌 숫자로 서로를 구별했다.

일(一), 이(二), 삼(三), 사(四), 오(五), 육(六), 칠(七), 팔(八).

이들의 이름은 흉신팔주(凶神八主).

더 정확히 말하면 가면 속에 스스로를 감춘 위군자(僞君子)이자, 세상을 멸하겠다는 뜻을 수행하는 피의 대리인.

혈교(血敎).

바로 혈교의 흉살들이었다.

평소 이면의 모습을 철저히 숨긴 채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이처럼 직접 모이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만나는 경우는 오직 하나. 무언가를 멸할 때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흉악한 입에 오늘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은 바로.

"장이서라고 했나."

칠공자 보좌 장이서.

동명이인 아니고, 진짜 그였다.

장이서가 혈교에 대해 알아가려는 찰나, 그들 역시도 일직선 위를 마주 달려오고 있었던 것.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얼마 전에 칠흉(七凶)이 당했다던데."

칠흉 광의. 흉신팔주 중 하나이자, 지금은 비어 있는 일곱 번째 자리의 주인이다.

장이서가 알고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칠흉이 당했다.

"아직 죽은 건 아니고. 뭐 살아는 있을 거요. 살아도 산 게 아니겠지만."

남 얘기하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자. 삼흉이다. 구룡성에서 추락한 광의를 데려간 자이기도 했다.

"칠흉의 말에 따르면 제대로 싸워서 당한 건 아니랍디다. 내공이 고갈된 상태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그렇게 되었다고."

"자결이라도 하려 했다는 것인가?"

탁한 노년의 음성. 이흉이 황당하다는 듯 말을 던지자 삼흉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소."

"허허, 예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라니."

"어쨌든 우리를 알고 온 건 아닌 모양이었소. 그저 와 보니 맞닥뜨린 것뿐."

"허허, 흉신팔주인 것도 모른 채 우연히 칠흉을 쓰러트렸다?"

"그런 것 같소."

삼흉은 담담하게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하나 돌아오는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럴 리가.

되도 않는 소리!

누구 하나 믿지 않는 눈치.

당연했다.

장이서에게 당한 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 비어 있는 자리는 하나가 더 있었다.

팔흉(八凶).

그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칠흉보다 먼저!

"그놈 때문에 우리 중 둘이 당했소. 한데 그게 전부 우연이다? 그걸 믿으라는 말인가."

오흉이 정기(正氣) 가득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정황만 놓고 보면 당연히 문제가 심각했다. 하나 어쩌겠는가. 삼흉은 그저 제가 보고 느낀 대로만 말할 뿐.

"믿기 싫으면 말든지."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다니!"

그의 퉁명스러운 답에 웅성거림이 커지고, 곳곳에서 거친 언성이 터졌다.

이에 이흉이 타이르듯 중재했다.

"자, 자. 그만들 하시게.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라 처분일세."

맞는 말이다. 우연이든 의도든 이미 장이서는 혈교의 주적으로 급부상한 건 사실.

"뭔 혓바닥들이 이리 길어? 뒈진 새끼는 대체할 놈 찾으면 되는 거고. 뒈질 새끼는 죽이면 되는 거지."

풍채만 봐도 얼마나 거친지 지레짐작이 되는 자, 육흉이 입을 열었다.

실로 간결한 해답.

하지만 이에 반박한 건 놀랍게도 삼흉을 추궁하던 오흉이었다.

"쓸데없이 또 계획에도 없는 일을 벌이겠단 것인가? 그러다 대업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자네는 생각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여튼 정파 새끼들은 죄다 겁보 새끼들만 모였나...."

"지금 뭐라고 했는가?!"

"아, 들렸어? 귓구멍이 꽉 막혀서 들을 줄 몰랐네."

"감히...."

"뭐. 꼬우면 대가리 걸고 붙어보든지."

솨아아아아!

엄청난 기운이 휘몰아친다. 사실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모른다. 하나 딱 보면 알지 않은가. 가면 벗고 겸상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오흉과 육흉은 누가 봐도 정과 사였다.

그렇게 둘 사이에 당장 터질 듯한 기류가 흐르던 그 순간!

"그만!"

쐐애애액!

단호한 일언과 함께 막대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흡!"

"음...."

콰아앙! 그리고 이어진 굉음. 오흉과 육흉은 침을 꼴깍 삼키곤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마치 과녁을 만들 듯 중심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주변엔 원형으로 실금이 잔뜩 새겨졌다.

그리고 반대편엔 한 사내가 검지를 쭉 뻗은 채 서 있었다.

일흉(一凶). 흉신팔주의 수장이다.

그가 나선 효과는 확실했다. 오흉과 육흉은 헛기침을 터트리곤 머쓱히 고개를 돌렸다.

이는 단순히 그의 지위 때문이 아니라 방금 그가 보여준 신위 때문이었다.

이 공동으로 말하자면 가장 강도가 높다는 한철(寒鐵)을 겹겹이 쌓아 만들어 놓은 곳.

한데 그걸 지풍만으로 박살을 내놓은 것이다. 이 정도면 최소로 잡아도 초절정 끝자락.

잠시간의 소강이 이루어지고, 삼흉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잘라내듯 회의를 재개했다.

"장이서가 우리를 뒤쫓고 있는 게 아니라면, 건드려서 좋을 건 없을 거요. 어쨌든 이번 마가 건으로 칠소궁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소. 괜히 벌집을 쑤셨다가 대업을 망칠 수도 있단 얘기지."

"허허,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에겐 무엇보다 대업이 중한 일이니. 하나, 이대로 그냥 넘기기엔 손실이 너무 크지 않은가."

점잖은 이흉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평소 담백하면서도 설득력이 짙은 게 그의 설법.

쉽게 말해 직접 나서긴 모호하나 살려둘 순 없다는 입장이다.

이 정도면 양측의 의견은 모두 나온 셈.

긴 침묵이 흐르고, 일흉이 음산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 일은... 함구한다."

음. 곳곳에서 침음이 뱉어진다. 썩 마음에 드는 얘기가 아니기 때문. 하나 곧 이어진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곧 마교에서 대계가 시작될 것이다."

장내가 웅성거렸다.

"그 말은 마교가 피로 물들 날이 도래했다는 것 아닌가. 허허."

"드디어... 수십 년의 기다림이 난화를 피우는구려!"

이흉과 오흉이 감격을 드러냈다. 도무지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천년 마교를 피로 물들이겠다니.

천마가 우스운가? 아니, 그가 아니더라도 광명사자에 장로회. 오룡당과 칠대공자. 외에도 광명천마대부터 경천동지할 고수들이 수두룩했다.

한데 대체 뭔 수로.

아마 다른 이가 이 말을 했다면 코웃음 치며 비웃었을 거다.

하지만 이들은 혈교.

그 이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마교 놈들은 모를 것이다. 저들의 배 속에 무엇이 태동하고 있는지. 이날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인내하고, 또 인내해 왔는지를."

일흉은 차오른 흥분을 최대한 눌러내며 말했다.

"하나 이제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혈옥(血玉)이 피로 가득 채워지는 날. 천산은 피로 물들 것이고, 천하는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거짓된 평화가 깨지고,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눌 것이며 종국에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때쯤엔 모두가 알게 되리라."

혈교는 사라지지 않으며, 언제나 곁에 함께하고 있음을.

"혈존천하(血尊天下) 파멸일원(破滅一原)!"

장내에 모인 이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대계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보름.

혈교가 준비한 폭약이 마교 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 *

월하촌 초입.

"내가 돌아왔다아아아아-!"

햇살 반짝이는 월광호를 가로지르는 홍예교 앞에서 커다란 고함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기다란 장신에 적발을 가진 미공자.

마오의 귀환이다!

그것도 마가와의 대결에서 대승이라는 쾌거를 이룬 채.

"우하하하하!"

발보다 빠른 게 말이라고, 벌써 소문을 듣고 구경 나온 마을의 신도들은 칠소궁의 행렬에 웅성거렸다.

"칠공자님께서 마가를 꺾으셨다니. 믿을 수가 없어."

"예전의 칠공자님이 아니라니까! 봐봐. 자태부터가 다르잖아. 난 지난번 자객들이 쳐들어왔을 때부터 알아봤다고."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니까."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리 칠공자가 달라졌어요. 딱 이거였다.

망나니였던 과거는 이제 추억 속의 그땐 그랬지가 되어버렸다. 특히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이젠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는 점.

물론 그간 잔치를 열며 노력한 덕분도 있겠지만, 당장 보이는 모습이 너무도 웅장했다.

좌우로 갈라진 신도 사이를 횡단하는 저들을 보라.

칼 한 자루 등에 멘 채, 활짝 웃으며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칠공자 마오.

그의 뒤를 차지한 보좌 장이서와 독산마의 사마균.

그리고 위압적인 기세를 드러내며 이를 뒤따르는 구유, 과평, 아신과 붉은 무복의 칠무위.

누가 감히 이들 앞에서 함부로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아니, 누가 이들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건 필시 미치광이이거나, 그도 아니면....

"아부우우!"

"혜, 혜이야!"

당과의 주인 세 살배기 여아뿐일 것이다.

당과를 들고 뒤뚱거리며 달려 나온 여아가 마오의 앞을 착! 가로막았다.

"뭐냐, 애송이."

마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에 맞춰 뒤의 행렬도 척! 멈춰 섰다.

"애한테 애송이가 뭡니까?"

"장이서. 넌 가만있어. 이건 나하고 저 녀석의 문제니까."

뭔 문제. 네가 당과 뺏어 먹어서 울렸던 애잖아. 장이서가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마오는 자세를 낮춰 아이와 눈을 맞췄다.

설마 또 뺏어 먹으려고?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모두가 두 사람을 주목하고, 침을 꼴깍 넘기는 바로 그때.

"아부우!"

여아가 활짝 웃으며 당과를 척! 한 입 먹으라며 내밀었다.

"오오오!"

"혜이마저 칠공자님이 달라진 걸 알아본 것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주변을 살폈다. 음? 그러다 문득 집요한 시선을 느껴 골똘히 살피려는 찰나.

마오가 우하하하! 크게 웃고는 당과를 한입에 남김없이 해치웠다. 그러곤 배신감에 울먹이는 여아를 제 어깨에 태우고 외쳤다.

"우하하하! 가자!"

무턱대고 다시 시작되는 행렬. 잠깐, 애는 왜 데려가는데! 장이서가 당황해하는 사이, 신도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칠공자님이 달라지셨다!"

"와아아아!"

도대체 뭘 보고! 아니, 그것보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아이 엄마 당신도 지금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하...."

얕게 한숨이 뱉어지고, 이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홍예교를 지나 대나무 숲에 다다르자....

"형니이이이임-!"

"오셨어요."

용태와 식구들. 그리고 취홍란.

그들이 반갑게 웃으며 맞이했다.

드디어 칠소궁으로 돌아왔다.

174.

#모든 게 시작일 뿐

오랜만에 돌아온 칠소궁은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근사한 대문. 일면에 만들어진 연무장. 연꽃이 가득한 연못과 정원. 그리고 그 앞에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협탁까지.

자신들이 한 층 더 성장해 돌아온 것처럼 이곳 또한 발전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특이했던 건 바로 대문부터 시작해 곳곳에 새겨진 문양이었다.

둥그런 원 바깥면에 촘촘히 고리가 박힌 모양. 태양인가?

"크하하하! 형님, 이거 보이십니까? 대공자가 불꽃이라면 우리는 태양! 아주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용태가 신이 난 듯 곳곳의 문양을 가리켰다. 나쁘지는 않다. 소속감을 키워줄 것도 같고.

무엇보다도 마오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오, 용태, 이 자식! 제법인데? 결국 나 천재 마오가 태양이라는 얘기 아니야."

"크하하하! 그렇죠. 여기 루주하고 저희가 고심해서 준비했습니다. 흐흐. 앞으로 딱 뜨면 그냥 어이쿠 눈부셔. 애들 자지러지는 거죠. 옷이고, 무기고. 전부 박아드리겠습니다."

"좋았어. 역시 마음에 들어. 넌 내가 소교주 되면 바로 월하촌의 봉수(縫手)로 임명한다."

"보, 봉수?!"

x발? 그냥 바느질장이잖아.

"우하하하! 들어가자!"

칠소궁으로 들어서자 마오오오오! 칠무위는 대문 앞에서 힘차게 인사를 올린 뒤, 여아를 데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

식솔들은 자연스레 넓어진 정원 협탁에 모여 앉았다.

새로운 식구도 늘었고,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뒤풀이 대화는 필수 덕목.

중심에는 당연히 마오가 앉았고, 그 옆으로는 마의, 구유, 과평, 아신, 홍란, 용태, 메기가 자리했다.

장이서는 마오의 뒤에 시립했는데, 앉으라고 거듭 말했지만 이게 편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칠소궁의 제대로 된 궁회(宮會)가 시작되었다.

"제갈 선생도 없이 이 정도라니. 용태랑 메기. 너희가 고생이 많았구나."

시작은 자연스레 흑룡공방에 대한 칭찬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이들은 그래도 계속 봐 온 게 있겠지만, 장이서는 근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질 못했었으니 더 크게 체감됐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제대로 일 하나 벌이는 중이니 기대해 주십시오. 소개해 드릴 녀석도 있고요. 흐흐."

용태가 잇몸을 드러내며 자신감 넘치게 웃었다. 아직 호언장담할 시기까지는 아닐 텐데. 그래도 뭐든 해보겠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근데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예. 구하운이라고 어리지만 아주 쓸만한 야장입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솔깃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 중 실력 좋은 야장에게 호감 품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까이 있다면 여러모로 좋은 일.

"기대하마."

"예!"

용태가 힘차게 답하자 옆에서 마의가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뭐, 저런 왈패 놈까지 안에 들인 게야. 이러니 칠소궁을 우습게 여기지. 쯧쯧."

"왈패 놈?! 그거 청산한 지가 언젠데!"

"마의이시다."

"왈패하면 용태. 왈용태입니다."

쯧! 마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고, 넙죽 엎드린 용태는 거북목이 된 채 쭈뼛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장이서는 흘깃 눈치를 주곤,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마가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마가칠객을 쓰러트렸고, 칠공자님께선 무혈공을 꺾고 긍지를 되찾으셨습니다. 충분히 기뻐하고, 또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입니다."

마오를 비롯해 모두가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나 장이서는 표정을 굳히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것도 딱 오늘까지. 이젠 전보다 더 많은 이가 우리를 주목할 거고,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접근하려 들 겁니다. 위험한 순간도 많을 겁니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겐 시작과 끝 두 가지만 존재합니다. 칠공자님께서 소교주 자리에 앉기 전까진 모든 게 시작일 뿐입니다."

더없이 현실적이면서도 비장한 말.

맞다.

소교주가 된다는 건 만마의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 그러기 위해선 그 어떤 누구보다도 더 치고 나가야만 한다.

"칠공자님."

"응."

"저희 모두는 칠공자님을 보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마오의 표정이 다소 굳어진다. 과거라면 좋다고 방정맞게 웃었겠지만, 마가에서 칠무위와 장이서의 의지를 보았다.

"나도 알고 있어."

마오가 진중하게 답하자 장이서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들이 곧 칠소궁을 이루는 기둥이며, 앞으로 만마에 칠소궁을 알리는 낯이 될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칠공자님께서 이들을 올바르게 쓰셔야 합니다."

"음?"

"지켜야 한다면 누굴 붙일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고, 베어야 한다면 누구를 보낼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또 앞으로 어떤 일을 맡길 것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모든 걸 심도 깊게 생각하시라는 말입니다."

"뭔 말인지 알 것 같아.... 장수들을 다루듯 제대로 써먹으라는 말이잖아."

대충 그런 말이다.

"좋았어. 그럼 일단 취선루가 진상도 많고 하니까 거기 용태를 보내도록 하자. 또 쟤가 술 좋아하거든. 상성이 잘 맞아."

"누가 누굴 지킨다고 거길 보냅니까. 홍란이 마음만 먹으면 일초지적도 안 되는데."

"하긴. 루주가 좀 평범하진 않지. 그러면 아신으로 간다. 같은 여자들끼리 또 통하는 게 있거든. 우하하하! 역시 난 천재?"

"글쎄요. 미녀가 둘이라면 진상들만 더 늘어나지 않을까요. 진상들은 손대지 않고 치우는 게 제일입니다."

"어, 그래...? 그럼 구유로 하자. 좋았어, 끝!"

"그는 칠공자님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잠깐만. 그러면은... 육장로?!"

"말이 됩니까?"

"과평."

"훌륭하십니다."

x발...? 기분 x나 이상한데.

"취선루엔 앞으로 과평이 머무는 것으로 하고, 월하촌은 칠무위가 5인 1조 3교대로 구역을 정해 순찰을 도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마의께선 식솔이 아닌 빈객의 신분이시므로, 공적으로 도움을 청해선 곤란합니다."

안 그랬다간, 너도나도 외부의 힘을 끌어다 쓰려 할 테고, 종국에는 천마전까지 나서서 시시비비를 가리게 될 거다.

"끌끌. 알겠다. 하나 의생으로서 눈앞의 다친 놈들을 자발적으로 치료해 주는 건 문제 없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마오가 이제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냥 얘 말대로 다 해. 뭐, 언젠 안 했냐. 근데 이거 하나는 양보 못 해."

"뭘 말입니까."

"아신. 네가 장이서 옆에 붙어."

뭐?

"아뇨, 그럴 필요는...."

"시끄러워. 보좌가 돼서 혼자 다니면 되겠어? 수신호위가 붙는 건 당연한 일이지."

첩자에게 붙는 건 수신호위가 아니라 감시자다. 여러모로 거추장스러운 일.

"괜찮습니다."

"괜찮긴 뭘 괜찮아. 아신, 네가 무조건 장이서 지켜. 한 시도 떨어지지 마. 이 자식 걸핏하면 코피 흘리면서 픽픽 쓰러지거든? 그러니까 잠을 자든, 똥을 싸든. 옆에서 무조건 지켜."

"내가 언제 코피를...."

"조용해. 이건 내 항명이다."

명령이겠지. 솔직히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오의 표정이 너무도 단호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하지.」

「따르겠습니다.」

용태와 흑룡공방엔 따로 호위를 붙이려고 했으나, 그가 한사코 거절했다.

"크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용태. 지금껏 눈치로 버틴 놈입니다. 괜히 호위들 붙여봤자 오해만 살 텐데, 일단 제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 같으면 바로 홍란에게 말해라."

"예, 형님!"

이어 자금과 정보는 취선루에서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각자의 역할이 배정되었다.

"좋았어!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한번 가 보자-! 아, 일단 오늘까지는 쉬고."

하하하! 마오의 포부에 화기애애한 웃음이 퍼졌다.

*

그 뒤로 칠소궁은 무탈한 하루하루를 맞이했다. 물론 조금 소란스럽기는 했다.

"아니, 이 꼴들을 하고서 여태 빨빨거리며 싸돌아다녔던 게야?!"

등목이나 하려고 윗옷을 벗은 것뿐이거늘. 무수한 상처에 마의가 경악을 금치 못한 것.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당장 따라오거라!"

"우하하하! 장이서 잘 가."

"칠공자님은 예외인 줄 아십니까?"

"아니, 나도?!"

"너도! 그리고 구유 너 역시 마찬가지다. 전부 별관으로 집합!"

"아니, 아무리 장로라도 나 칠공자야. 말은 조심하자."

"가아아알! 환자에게 문벌 따윈 없는 법!"

"x발?!"

그렇게 며칠 간은 나란히 누운 채 마의의 치료를 받았다.

실력은 확실했다.

"구유, 이놈은 지난번에도 그렇고 매번 송장이 따로 없구만! 그렇게 소원이면 그냥 죽지 그러냐. 그리고 이서 넌 번천검객한텐 베이지도 않았다면서 이 상처들은 다 무엇이냐. 누가 이런 것이야!"

잔소리가 좀 심해서 그렇지.

"근데 장이서. 육장로가 왜 네 형님인데?"

"모르셨습니까. 주름이 많아 그렇지, 보기보다 어립니다, 저 형님."

"그, 그런 거였어?!"

그런 거겠냐. 그렇게 칠소궁은 조금씩 천천히 적응해 나갔다.

그야말로 아늑한 평화.

물론 담장 밖의 상황은 그리 조용하진 못했다.

'칠공자가 무혈공을 쓰러트렸다!'

이 간단하면서도 짤막한 한 줄이 천산을 활화산처럼 달구었기 때문. 이에 가장 많이 나온 첫 번째 반응은 딱 세 글자였다.

'어떻게?'

역대급 불가사의. 저 한 문장을 이해하고자 무수한 부언이 뒤따랐다. 물론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약 때문이겠지.'

'방심한 거야.'

사람들은 대부분 모든 이유를 마이신의 문제로 삼았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진 못했다. 새롭게 등장한 소식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

'무혈공께서 북명신공을 대성하셨다네!'

헉! 경악이 절로 터질 수밖에 없는 일. 북명신공을 대성했다는 건 완전한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마가에 두 번째 마군(魔君)이 탄생한 것.

'그럼 그분을 이긴 칠공자님은 대체....'

천산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믿으라는 얘기인가.

모두가 진실을 궁금해했지만, 칠소궁과 마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탓인지 덩달아 수뇌들도 말을 아꼈다.

덕분에 모든 건 마가의 칭송으로 이어졌다.

'망나니니, 약쟁이니 아무리 떠들어도 호부견자는 없었구나.'

'마가에 두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대공자에겐 악재로 돌아갔다.

"다시 말해보거라. 일장로가 내 제안을 거절했다고?!"

대공자의 그림에 예기치 않은 기다란 곡선이 북 그어졌다. 일장로 마일성이 칠소궁을 치지 않겠다는 거절 의사를 표해온 것.

유령마군은 침을 꼴깍 삼키곤 답했다.

"외람되오나 친선 비무였고, 또 세간에선 두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며 칭송하는데.... 마가가 칠소궁을 치면 자칫 옹졸해 보일 수 있다며...."

콰직!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대공자의 손에 쥐어진 붓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문방사우를 애병처럼 아끼는 그를 생각하면 제대로 화가 났다는 얘기.

"두 개의 태양? 감히 누가 그딴 소리를 지껄인단 말이냐-!"

푸푸푸푹!

그가 던진 붓 파편이 암기처럼 날아가 벽을 뚫고 박힌다.

실로 엄청난 경지.

하나 화가 날 만도 했다. 마가의 치욕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려 하기도 전에 느닷없이 두 개의 태양이라는 낭설이 돌기 시작한 것.

"대체 어떤 놈이 그딴 망언을 떠들고 다닌 것이냐. 당장 가서 잡아내거라!"

대공자의 고함에 유령마군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섰다.

하나... 잡고 싶다고 잡히면 그게 어디 첩자겠는가.

맞다. 그 소문의 근원지가 바로 장이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 휘몰아치는 풍란의 이면엔 발 빠르게 움직이는 홍란이 있었다.

175.

#가만히 있을까?

- 월하촌 취선루.

"분부하신 대로 세간에선 마가를 칭송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취선루 8층. 금남의 영역이라 불리는 루주의 방.

평범한 용모의 사내가 삐딱하게 앉아 세상 편한 얼굴로 술잔을 탁 내려놓는다.

그러자 루주인 홍란이 웃으며 다시 빈 잔을 채워준다.

세상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내는 오직 하나뿐.

"수고했어."

이곳 취선루의 진짜 주인, 장이서였다.

하긴 그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대공자를 분통케 하겠는가.

이번 소문의 배후에는 역시나 그가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취선루가 어디인가. 월하촌의 상징이자 최근 천산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명소였다.

하루에 찾는 이만 셀 수 없을 수준.

거기서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방향만 살짝 틀어 말 흘리는 것쯤이야, 점 찍는 것만큼 쉬운 일.

"대공자 속이 꽤 쓰릴 거야. 대범해 보여도 소심하거든. 충분히 달아올랐으면 덜미 잡히지 않게 슬슬 관심은 다른 데로 돌려. 두세 번 돌려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해."

"예. 최근 들어 본산에 실종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그쪽으로 이미 돌려놓았습니다."

"훌륭해."

역시 홍란이다. 굳이 시키지 않아도 이리 근심을 덜어주니.

장이서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그러자 그녀가 조심스레 숨을 꼴깍 삼킨다. 뭘 말하려는지 이제는 숨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괜찮아, 물어."

"티 났나요?"

많이 났지. 칠소궁에 돌아온 뒤로 아무것도 안 묻고 며칠을 기다렸으니 궁금한 게 많을 수밖에.

"넌 물어도 돼."

별거 아닌 말인데도 홍란은 크게 감동했는지, 코끝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대체 독산각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마의께서 칠소궁에 머물게 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리고 몸은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얼마나 궁금했으면 쉬지도 않고 말하나.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레 일축했다.

"기연을 만났어."

"기연이요?"

홍란의 눈이 새삼 토끼처럼 귀엽게 떠졌다.

"응. 그것도 아주 귀한 인연이지."

장이서는 독산각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취홍란은 들을 때마다 크게 놀라기도 했고, 감탄하기도 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물론 독마의 내공을 삼켜버린 천마귀와 제 사부인 뇌신 한무영에 대해선 일절 함구했다.

홍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아봤자 그녀만 더 위험해질 이야기이기 때문.

"어쩌다 보니 독마께서 날 좋게 보셨고, 덕분에 독공도 전수해 주셨다."

"그게 어쩌다 가능한 일인 건가요?"

당연히 아니지.

"내가 잃은 자식을 닮았다나."

"아! 그런 슬픈 사연이...."

죄송합니다, 사숙. 없는 자식 죽게 해서. 대신 광의가 살아 있다면 꼭 잡아다 드리겠습니다. 혈교 뒤도 차근차근 밟고요.

"정말 믿기지 않네요."

그럴 거다. 사숙은 수십 년 전 기록을 마지막으로 행적이 끊겼고, 지금은 백 세에 달하였으니.

잠시 침묵이 잇따르고, 홍란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잠깐. 그럼 주인님께서 독산각의 주인...!"

"뭐, 그렇게 됐어."

"세상에."

콩닥콩닥. 홍란은 놀란 가슴이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한 번 나갔다 올 때마다 이리 큼지막한 것들을 물고 오다니.

'이러다 정말 마교의 주인까지 되시는 건 아닐까.'

등골이 서늘해지지만, 왠지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주인님은 점점 더 강해지시는구나. 이젠 내가 바라보기도 힘들 만큼.'

옆에서 모셔야 할 자신만 점점 뒤처지는 기분.

애써 우울한 생각을 잊으려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화제를 바꿔 말했다.

"그래서 번천검객을 상대로도 승리할 수 있으셨던 거군요."

"어, 뭐."

사실 그건 아닌데. 근데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장이서는 머쓱하게 웃음만 지었다.

번천검객 단리영.

그를 상대할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제 가슴에 버젓이 자리 잡은 천마귀. 그 녀석에게 잡아 먹힐 뻔했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

'그리고 번천검객도 분명히 보았다.'

마가에서 떠나오던 그날.

장이서는 마일성이 있는 대나무 숲으로 가기 전에 번천검객 단리영을 먼저 찾았었다.

공포에 질렸던 그의 마지막이 떨떠름했기 때문.

그리고 그의 처소에 도착하자....

'몸은 좀 괜찮은 거요?'

'으으으으으으!'

안부 하나 물었을 뿐인데, 실성한 사람처럼 혼비백산했다. 놀란 하인들을 내보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사, 살려주십시오!'

그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애원했다.

도대체 뭘 어쨌길래. 아니 뭘 봤길래.

답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보았구나.'

난감한 일. 천마귀는 천마신공의 상징. 알려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보고도 모를 순 있다. 하지만.

'절대...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가주께서 물으셔도 목숨을 바쳐 함구하겠습니다!'

번천검객은 안타깝게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게 무엇인지를.

본래라면 그를 죽여 입을 막아야 옳다. 백뢰가 달린 우수가 근질근질했다.

하나 이곳은 마가. 게다가 그는 초절정 고수.

기습에 실패하면 더더욱 난처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결국 고심 끝에 침묵을 택했다.

'....'

그저 무심히 그를 노려봤다. 아무런 말 없이 지그시.

그러자 단리영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는 결코 두려움에 의한 거짓이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이 아니었다.

천마귀라는 절대적인 마(魔)의 기운을 마주하고 뼛속까지 굴복해 버린 나약한 마인의 절규였다.

그렇게 그는 한참을 울었고, 나는 그제야 툭 내뱉고선 돌아섰다.

'...잊지 말아라. 천마께선 언제나 우릴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그냥 던진 말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함구하고 또 함구하겠나이다. 천마지존 만마앙복!'

'...본교에 대한 네 충성을 시험할 것이다. 부름엔 즉시 응하여라.'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소천마(小天魔)시여....'

그렇게 번천검객과는 아주 위험천만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나올 땐 지독한 마두처럼 정색한 채 돌아섰으나, 속은 아주 타들어 갔다.

언제고 그의 입이 잘못 열려 교주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죽거라.'

무조건 죽는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 자신이 천마신공의 일부를 이은 것과 후계를 사칭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이니.

굳이 죄목을 따지자면 역모.

게다가 공자들은 가만히 있겠는가. 어떻게든 죽여 없애려고 안달이 날 터.

그러니 번천검객은 어떤 식이든 조만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시급한 건, 이놈이지.'

고개를 떨궈 가슴팍을 살폈다. 심장에 고이 잠들어 있는 이 천마귀에게 언제 잡아 먹힐지 모른다.

'심지어 음양일원도 소용이 없었다. 지난번엔 마의 형님 덕분에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만일 기절하거나 중상에 빠져 또다시 천마귀를 만나게 된다면, 그땐 정말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뒷일이야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절대 경험해 보고 싶지 않은 일.

'결국 천마귀를 이겨내려면 역으로 잡아먹을 만큼 내가 강해지거나, 이를 견뎌낼 만한 불가나 도가의 정공 심법을 찾아 익히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최소 신공에 달하는 무공은 되어야 가능한 일.'

한데 무슨 수로. 어느 쪽도 쉬운 길이 없다.

하지만 길이 막혔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당장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땐 다른 것부터 처리하면 된다.

그럼 분명히 새로운 틈이 보이는 순간이 있을 터.

오늘이 아니면 내일. 그것이 장이서이니까.

"그런데 주인님, 대공자가 가만히 있을까요? 두 번이나 당했으니 주인님에 대한 원망이 엄청날 텐데요."

홍란의 근심 어린 질문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내 술잔을 상 위에 빙그르르 돌리곤 말했다.

"아마도?"

"예...? 가만히 있을 거라고요?"

"응."

아니, 그러기엔 지금까지 대공자한테 하신 일들이.... 홍란이 큼직한 두 눈을 깜빡였다.

"대공자는 성질머리가 더럽지만 신중한 자야. 홧김에 뛰어드는 부나방이 아니라 불을 피우고 조용히 기다리는 녀석이지."

"그럼...."

"분명 나한테 당해 바짝 독이 올라 있을 거야. 하지만 칠소궁의 저력을 제 눈으로 봐버렸다. 더구나 칠무위는 나서지도 않았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있다는 얘기야. 그러니 우선은 우리를 더 자세히 알아내려 할 거다. 목줄을 움켜쥘 패가 생기기 전까진 먼저 나서지 않을 거라는 얘기야."

홍란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듯 똘망똘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칠소궁은 이제 길가의 돌부리처럼 무시하던 과거의 폐궁이 아니야. 소문을 듣고 인사차 찾아오는 이들이 생겨날 거다. 보는 눈이 많아진다는 얘기지. 아마 더더욱 조심하려고 할 거다. 만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역공이라도 당했다간 그의 위치가 크게 흔들릴 테니까."

완벽한 추론. 홍란은 저도 모르게 짝짝 손뼉을 쳤다.

물론 찝찝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느꼈던 기이한 시선. 정확하진 않지만, 일반적인 시선과는 달랐다. 집요했고, 추궁에 가까웠던 눈빛.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순간, 사라져 버렸지.'

보통 기감을 가진 놈이 아니라는 얘기.

"그럼 이대로 그냥 놔둬도 되는 걸까요?"

"아니, 그럴 순 없지. 대공자가 거동하진 않아도 눈에 불을 켜고 우릴 주시할 거다. 그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야.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어."

"그러면...."

"불씨에서 시선을 떼게 하는 방법은 간단해. 더 큰불을 내면 되지."

"부, 불이요?"

"지금까지 인연 맺은 대주들. 전부 삼공녀한테 넘겨."

"...!"

홍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리고 무섭게 웃는 장이서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쳤어.

지금까지 만나온 자 중 공들인 대주만 열둘. 대부분 외곽을 맡아 권세와 돈이 고픈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지속해서 금품과 향응을 제공했고, 이젠 적당히 용돈만 쥐여줘도 웬만한 청은 거절치 못했다.

한데 그들을 전부 넘기라니.

"어차피 삼공녀도 지난번에 나한테 가져간 돈 써먹지도 못하고 있을 거다. 세를 키우고 싶지만 쉽지 않겠지. 나락이나 그 여자나 부러질지언정 수그리지 못하는 자들이니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만.

"그러니 조만간 삼공녀하고 대주들 자리 한번 만들어줘. 대공자는 알아서 눈치챌 테니 신경 쓸 것 없고."

"예."

장이서가 씨익 웃는다. 그러곤 채워진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에 홍란이 따라 일어서며 자세를 공손히 취했다.

"가시려고요."

"불문객잔에 좀 다녀오려고. 최근에 은원(恩怨)이 하나씩 생겼거든. 어느 쪽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은혜부터 갚는 게 더 편해. 그래야 마음 놓고 원수를 잡지."

은혜는 독산각. 그리고 원수는 제게 자객들을 보낸 조양악이다.

지금은 독산각의 주적인 광의부터 찾겠다는 것.

"참, 내가 가 있는 동안 몇 가지 일 좀 처리해 줘. 어렵진 않을 거야."

홍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서는 아니다. 이해는 포기했다. 그저....

"부디 무탈하시기를."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랄 뿐.

176.

#아주 중요한 사실

삼면이 강철보다 단단한 백련정강(百鍊精鋼)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공동.

소년 하나가 왼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오른손엔 목봉을 쥔 채 몸을 비틀어 서 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수련을 한 것인지, 머리는 비에 젖은 듯 땀으로 가득했고 손아귀는 다 찢어져 시커멨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 생각한다면 그건 크나큰 실례였다.

『대파열창술(大破裂槍術) 제3식 일섬(一閃)』

지쳐있던 소년의 눈빛이 타오르듯 바뀌고, 전력을 다해 목봉을 내질렀다.

그러자 거대한 하나의 빛줄기가 백련정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쩌어엉!

귀가 먹먹해질 만큼 크게 울리는 굉음.

투두둑.

들고 있던 봉은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고, 바닥엔 몇 자루째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잔재로 가득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와, 우리 맹휘 대단해. 백련정강을 다 부숴놨네?"

거미줄처럼 둥그런 실금이 수백 개는 중첩되듯 새겨진 파벽(破壁)이었다.

"왔어."

쑥스러운 듯 웃는 소년. 아니, 맹휘가 손을 툭툭 털고 문으로 다가섰다.

오늘도 찾아와 준 이는 폐관 중인 자신을 유일하게 들여다봐 주는 고마운 사촌 누나, 맹원원이었다.

"쉬어가면서 해. 정말 소교주라도 해볼 셈이야?"

"아니...."

맹휘가 머쓱하게 웃으며 그나마 멀쩡한 벽에 등을 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차갑다. 등이 시원해.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맹원원이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자, 아직 녹지 않은 손바닥만 한 얼음이 담겨 있다. 이를 손톱 끝으로 톡 건드리자. 아자작. 먹기 좋게 부스러졌다.

그러곤 이를 수통에 털고는 쉭쉭 흔든 뒤 맹휘에게 건넸다.

"자."

"고마워."

맹휘는 단번에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그러곤 살겠단 표정을 짓곤 배시시 웃었다.

맹원원은 턱에 꽃받침하곤 쪼그려 앉아 이를 지켜보며 물었다.

"말해봐. 백부가 폐관을 명한 건 열흘 전까지였잖아. 근데 왜 이렇게까지 수련하는 거야. 원래 이런 거 싫어하잖아."

"그랬지."

"설마 반항심. 뭐 이런 거야?"

"아니."

"그럼?"

"...도움받기 싫어서."

"응?"

나한테 한 말이니? 맹원원의 동그란 두 눈이 깜빡인다. 이에 맹휘가 당황하며 고갤 저었다.

"아니, 누나 말고. 그러니까...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설마 너."

"응. 마오랑 장이서. 지난번엔 내가 도움만 받았거든."

"의리 뭐 이런 거야? 그냥 정파로 전향하는 게 어때."

기왕이면 장이서랑 같이.

"누나는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

"그럼 누나는 왜 맨날 나 찾아오는 건데. 다 똑같은 거 아니야?"

다르지. 너는 장이서를 도와주고 싶어 그러는 거고, 나는 장이서한테 죽을까 봐 이러는 거고.

'내 신물은 잘 있겠지? 설마 어디 까먹고 이상한 데 놔두진 않았을 거야. 그게 어떤 아이인데.'

천마고 구석에 처박혀 잊힌 지 오래다.

맹원원이 얕게 한숨을 내뱉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생존 확인했으니 간다. 아, 맞다. 들어보니까 이번에 마오가 무혈공을 이긴 모양이더라?"

"뭐, 뭐라고?"

"오랫동안 그렇게 당하더니. 걔도 용 됐어. 아무튼 열심히 하렴."

맹원원이 픽 웃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맹휘는 파르르 떨다가 다시금 벽에 걸쳐진 새 목봉을 손에 쥐었다.

"마오, 네가 무혈공을 이겼단 말이지...? 대단해. 나도 더 강해질 거야. 강해져서 돌아갈게. 기다려 줘, 장 보좌!"

『대파열창술(大破裂槍術) 제3식 일섬(一閃)』

갇혀 지내는 날이 길어질수록 점점 마음도 깊어지는 맹휘였다.

* * *

칠소궁이 마가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지도 어느덧 엿새가 흘렀다.

삼공녀 사해령은 장이서가 예상한 대로였다.

은원보 100개를 손에 넣긴 했으나, 쉽사리 쓰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었다.

본래 통치의 이면은 그런 거였다. 돈과 힘이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고픈 이들을 찾아내고, 모으고, 거르고. 그리고 조금씩 꿀과 독으로 길들여야 하는 것.

비록 마교의 삼공녀였으나 늘 우아하고 고상한 그녀로서는 쥐약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당장 모으는 것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일. 한데 그런 그녀에게 구원의 단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너는... 취홍란?"

"장 보좌님의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장이서의 계획대로 사해령은 취선루에서 대주들과 만남을 가졌다.

"삼공녀님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과정은 순탄했다. 요직이 아닌 터라 어차피 어딜 가든 찬밥 신세. 게다가 그간 홍란이 내어준 금품에 길들어 있던 터라 쉽게 고개를 조아렸다.

사해령도 은원보를 풀 곳이 필요했으니 뜻은 맞았다.

물론.

"목숨은 필요 없다. 나서라 할 때 나서. 그것만 하면 너희가 원하는 걸 얻게 될 테니."

"예!"

"하지만 나서지 않는다면 누구보다도 그대들을 먼저 벨 것이니 명심하도록."

"조, 존명!"

쉽게 보고 들어왔다간, 죽어서 나가는 게 그녀의 품이지만 말이다.

"앞으로 연락은 이쪽을 통하도록."

그리고 의외인 건 그녀가 대행을 내세웠다는 거였다. 그것도 나락이 아닌 방귀룡!

"앞으로 열흘마다 제갈서관에 들르시게. 연판장에 서명들 하시고."

이는 그녀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였다. 자신과 나락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잡기에 능한 방귀룡을 통해 소통하겠다는 것이다.

"장이서에게 빚은 꼭 갚겠다고 전해."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사해령은 월광십귀 외에도 비공식적으로 저변을 넓혔다. 과거라면 지조도 없이 금품에 흔들리는 자들이라며 단칼에 쳐버렸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치고 올라가는 칠소궁을 보며 그녀도 작은 내면의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

물론 그게 칠소궁의 든든한 우군이 될지, 아니면 막강한 적으로 거듭날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공자의 시선을 돌린 장이서. 그는 모두를 따돌리고 불문객잔에 다다라 있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살아났네?"

객잔의 주인 소오가 손을 흔들며 반겼다. 그는 여전히 경쾌했고, 색안경을 선호했다.

"많은 도움을 줬다던데.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

"우리 사이에 또 무슨. 이거 무사한 걸 보니까 너무 반가운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올라가자고."

그래도 한 번 생사고락을 겪었다고 처음 만났을 때보단 훨씬 더 친근함이 느껴진다.

"내가 원래 수컷들은 절대 내 방, 안 보여주는데 특별히 우리 장 형이니까 초대하는 거라고."

실없는 농에 피식 웃고 2층으로 올라서자 비교적 조용한 도박장과 주방이 외길로 이어졌다.

그리고 끝자락에 다다르자 그의 방이 나왔다.

"이거 막상 보여주려니 설레는데. 자, 소개하지. 소오의 방일세."

자기 방을 누가 이런 식으로 소개하나. 코웃음을 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호들갑에 비해 뭐 특별한 건 없었다. 침상에 식탁 하나. 그리고 큰 장 하나.

굳이 특이한 게 있다면.

"창문 하나 없는 방이라니. 어울리지 않게 썩 폐쇄적이군. 바깥이 훤히 보일 줄 알았거늘."

"왜 이래? 나 보기보다 섬세한 녀석이야."

비밀이 많은 거겠지.

"참, 다들 잘 지내지? 소식은 들었어. 마가를 꺾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오는 이곳에 있으면서도 칠소궁의 근황은 계속해서 접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듣는 게 많아 정보에 능했다. 근방 소식은 그보다 나은 자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 물론 그래서 찾아온 것이지만.

"누굴 좀 찾고 싶은데."

"와, 오자마자 일 얘기야? 서운한데. 뭐, 근데 그게 우리 장 보좌 매력이기는 하지. 누굴 찾으러 오신 걸까."

"광의."

담백한 한 마디에 소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리고 찰나였지만 장이서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아는 게 있는가 보군."

"음, 그게...."

소오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척! 이에 식탁에 은원보 하나를 꺼내 올렸다.

"모래폭풍이 흩날리던 날이었지."

이 돈밖에 모르는 새끼. 눈썹을 꿈틀거리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쓰러지고 마의 영감이 약재가 필요하다더라고. 뭐, 가만뒀다간 영영 안 끝나겠다 싶어서 곧장 밖으로 나왔지. 객잔에 연락이라도 취하려고. 알아. 나 괜찮은 놈인 거."

"계속."

"근데 뒤쪽으로 가 보니까 핏자국이 남아 있는 거야. 그것도 길게."

광의구나. 뇌리가 핑! 하고 울렸다.

"붓으로 선을 그은 것처럼 어딘가로 움직인 흔적이었지. 물론 광의가 모래폭풍에 데굴데굴 굴러간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던 낙타가 날아든 돌부리에 엉덩이가 찍혀 힘차게 달려간 것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별로 상상하고 싶진 않군."

"근데 더 이상했던 건 말이야...."

소오가 심각한 얼굴로 기억을 회상하듯 생각에 잠겼다.

...개자식.

척! 다시 은원보 하나를 꺼내 올렸다.

"그게 어느 지점부터 딱 사라져 버렸더라고. 꼭 지워진 것처럼."

"광의를 데리고 간 누군가가... 흔적을 없앴다?"

"강풍에 저 멀리 날아간 게 아니라면 가장 그럴싸한 추론이지."

소오가 웃으며 검지로 가리킨다. 이에 장이서는 생각했다.

'혈교에서 광의를 데리고 갔을 수는 있다. 그도 기다렸을 테니. 하지만 어떻게? 마의 형님은 분명 몰래 따르는 자는 없었다고 했다. 거짓을 말했을 리도 없어. 더구나 은신이 뛰어나도 삼장로와 비룡당주. 그리고 형님의 기감까지 다 속일 수는 없지. 그럼 대체 누가....'

모르겠다. 추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마교 내에 혈교의 잔존 세력이 벌레처럼 숨어 있다는 것. 그리고 바꿔 말하자면 이는 정파와 사파에도 깔려 있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대체 어디까지. 암각은 믿어도 되는 건가.

"광의는 두 팔이 잘린 상태였다. 아마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인근 마을에 수상한 자가 온 적 없는지 알아봐 줄 수 있나?"

"돈만 주면야 어렵지 않지. 발과 귀는 많으니까. 아니, 근데 왜 이렇게까지 찾는 건데. 설마 팔 두 개로는 모자라? 장 형 살귀야?"

"시끄럽고. 알면 놀랄 거다."

"안 놀라. 나 어릴 때 눈앞에 벼락 떨어져 봤잖아. 근데 안 놀랐어. 그러니까 얘기해 봐. 뭔데 그래."

"그건...."

소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장이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와...! 이러기냐?"

척! 결국 받았던 은원보 하나를 다시 토했다. 이에 장이서가 픽 웃고는 말했다.

"광의의 배후에 혈교가 있다."

"뭐야?!"

소오가 놀라다 못해 의자 째 뒤로 넘어간다. 악, 씨.

"안 놀란다며."

"놀란 게 아니야. 당황한 거지. 와, 어질어질한데."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광의를 데려간 건 아마도 본교의 사람일 거다. 혈교가 천산 안까지 숨어들었다는 뜻이겠지."

"미쳤네. 근데 이렇게 다 말해줘도 돼? 난 어떻게 믿고."

"안 믿었어. 뒤로 넘어가기 전까진."

"와... 무섭네, 장 형. 안 넘어졌으면 뭐. 반응 보고 죽이려고?"

"궁금해?"

장이서가 픽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궁금하면 돈.

"돈은 무슨. 됐거든!"

소오가 장이서의 손을 툭 치곤 제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광의 그 미친 늙은이가 혈교 사람인데, 그걸 찾아달라. 이거잖아."

"맞아."

"와, 소름...."

그 순간, 소오가 뭔가 깨달은 게 있는지 입을 가린 채 동공이 흔들렸다. 장이서는 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엔 정말 중요한 게 있어 보였기 때문.

"뭔데 그러지?"

"장 형...."

"왜."

"내가 말이야. 방금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냈거든?"

"그런데?"

소오가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나. 믿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