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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쿵쿵! 쿵! 쿵!

어디선가 울리는 북소리에 이안이 눈을 떴다.

바깥은 어두웠다. 밤이 온 것이다. 방 안을 비추는 것이라고는 우유처럼 빛나는 은하수뿐. 이안이 베릭을 흔들려는 순간, 수가 다시 천막을 걷었다.

"이안? 베릭?"

"으음...."

"어서 나올래? 다들 기다리거든."

아직 꿈에 취한 듯 몽롱하다. 이안과 베릭은 수의 뒤를 따라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주둔지 안쪽에 세워진 흰색 건물. 수가 문을 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하하하!"

"한 번 더! 이봐, 벌써 그러면 쓰나?"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거 있지? 그게 맞았더라고!"

붉은 안료와 황금으로 치장한 천려인들이 춤추며 놀고 있었다. 그들 사이사이에 쌓인 엄청난 양의 고기와 술. 초를 태우는 것인지, 은근한 연기가 가득했다.

무희가 스쳐 지나가며 웃었고, 악단들 역시 곡을 더욱 빠르게 연주했다.

"세상에."

이런 연회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주황빛 등불 아래서 모든 것이 자유로워 보였다. 베릭도 잠이 확 깬 것처럼 두 볼을 비볐다.

"이안. 베릭."

그 상석에 앉아 있는 카칸티르가 둘을 불렀다. 그의 입에는 마른잎이 물려있었다. 횃불 아래 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룻잎.'

저것이 구룻잎이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윈첸의 천막에서 맡았던 향과 상당히 흡사하다. 계피가 아니라 구룻잎이었던 모양이다.

"아. 기분이 왜 이러지?"

"어떤데?"

"…다 존나 패고 싶어."

"입 다물고 있거라."

둘은 속닥거리며 카칸티르 가까이 다가갔다. 그 옆에는 네르사른을 비롯해 부족의 윗계급으로 보이는 자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여독은 좀 풀었는가?"

"족장님의 배려 덕분에요."

"그래. 일단 앉지."

모두가 이안을 주목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향락을 즐기며 웃고 떠들었다. 카칸티르가 이안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혹시 말일세. 자네가 준 지도. 백작을 비롯한 브라츠의 누군가가 지도의 존재를 아는가?"

"아니오. 교사가 제게 은밀히 넘겨주고 간 것입니다. 그는 즉시 브라츠를 떠났으며 위쪽 나라를 통해 블라스터로 향했습니다."

카칸티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굉장히 호의적인 눈짓으로 고기를 들라 권했다. 부하들에게 폭풍에 대하여 보고를 들은 모양이다.

"자네의 모든 것은 브라츠가 천려를 위해 준 것이니, 이 지도 또한 천려를 위해 써도 되겠는가?"

"그리하십시오."

어차피 브라츠로 돌아갈 때는 천려족이 동행할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대사막을 건널 필요가 없으니, 지도를 지니고 있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작은 것을 내어주고 큰 그림을 그리는 편이 나았다.

"데르가 백작이 아들 하나는 잘 키웠군."

"아버지가 들으시면 참으로 기뻐하실 겁니다."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노랫소리가 점점 더 커졌기 때문이다. 잠시 구룻잎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이안은 낯선 시선을 느꼈다.

'음?'

네르사른에게서 두 번째로 떨어진 자리. 한 사내가 이안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입매를 가볍게 말아 올리며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수. 저자는 누구지?"

잠시 주위가 흐트러졌을 때, 이안이 사내를 턱짓하며 물었다. 수가 포도주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부마트? 네르사른 님의 가족이지. 둘째 계모의 사촌 오라버니거든. 식량 관리 총책임자셔."

이해는 잘 가진 않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개념으로는 가족으로 엮이는 것 같다. 상석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위치도 꽤 있고. 근데 왜 자꾸 저를 쳐다보는 것인가?

'찜찜하군.'

이안은 그의 시선을 일부러 털어내며 수에게 물었다. 최대한 천진난만하게. 호기심 외에는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았다는 듯.

"다들 물고 있는 게 구룻잎이라는 건가?"

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안은 혹시 자신도 시향이 가능한지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카칸티르가 술잔을 내밀며 대화를 잘랐다.

"이안. 그대가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내려면 지켜야 할 수칙이 몇 가지 있다."

"말씀하십시오."

"그중 하나가 바로 구룻잎에 관하여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이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아. 생활상 연기까지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이 외에는 전부 불허한다."

그 말은, 연기로 맡는 것과 직접 씹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연회 분위기가 조금 차분해졌다. 카칸티르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날선 경계심을 세운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대답했다. 옆에 있던 베릭은 고기를 주워 먹느라 서로가 서로에게 안중 밖이었다.

"그럼 즐기게나. 우리의 귀환을 위하여."

"네. 카칸티르 족장님."

그래. 이 자리는 귀환식. 이방인을 위한 환영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안은 대충 전반적인 분위기 파악을 끝내고, 자리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족장님!"

일족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와 카칸티르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는 단번에 먹던 것을 내려두고, 네르사른에게 눈짓했다. 유흥을 즐기는 자들은 너무 취한 나머지, 우두머리들이 빠져나가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무슨 일이지?'

수는 가만히 바닥만 보다가 중얼거렸다.

"윈첸 부족장님이 또 발작을 일으켰나 봐. 방금 의원이 뒤따르는 것 같았어."

"그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 보군."

"다들 걱정할까 봐 족장님이 먼저 저렇게 보셔."

"방도는 없나?"

수는 희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의원조차 그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윈첸 님이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랄 뿐.

"베릭. 우리도 이만 가지."

"에? 왜? 나 더 먹어야...."

"어서."

혹여 윈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덜 어색할 것이다. 그때는 수도 자신들을 챙겨줄 수 없을 테니까. 적당히 즐겼으면 적당히 빠질 줄 알아야지. 자리의 주인공은 저들이 아니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타닥타닥!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새벽 아침. 소란스러운 바깥소리에 이안의 눈이 절로 떠졌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분위기다.

"윈첸 님이 아예 의식불명이라고?"

"아아…. 세상에. 이걸 어쩌면 좋아."

"족장님은? 어떻게 하실 거래?"

"사람을 다시 차출할 거라 그랬어. 이제 병세가 너무 뚜렷하니, 어쩔 수 없나 봐."

사람을 차출해? 윈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뭔가 조치를 하려나 보다. 이안은 창문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들락 말락, 정신이 몽롱해졌다.

"실라스크를 찾는 거지?"

"먼저 갔던 사람들도 아직 안 돌아왔는데...."

"만개한 채로 영원히 가는 꽃이 어디 있어? 난 존재부터가 의심스러워."

그때, 이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지금 저들이 뭐라 하는 건가? 만개한 채로 영원히 가는 꽃? 실라스크?

'그때 공원에서 산 화분이군요.'

'희한한 꽃이에요. 만개한 상태로 오래가더군요.'

'저택 사람들도 이게 뭔지 모른답니까?'

'네. 다들 처음 보는 식물이라 합니다. 혹여 독성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안은 저택에서 몰린 경과 떠올렸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상자 안에 잘 포장된 화분을 꺼내, 종이를 뜯었다. 공원에서 받은 이후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붉은 꽃.

"…어?"

설마, 아니겠지?

이안은 조심스럽게 바닥에 화분을 내려놓았다. 곧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이 서자 이안의 몸으로 환생한 것인지.

모든 것은 신의 계획 아래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제30화. 거짓을 보는 눈

이안은 천막 안에서 붉은 꽃만 내려다봤다. 아직도 베릭은 코를 곤 채 곯아떨어져 있고, 바깥은 소란스럽다.

대충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윈첸의 병은 '실라스크'라는 식물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몇 차례 원정대가 떠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거지.

'그런데 이게 그거라고?'

실라스크. 브라츠 저택의 누구도 알지 못했던 화분의 정체. 이안은 꽃잎을 가볍게 쓸며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서자 이안은 생전에 이것을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분명 이안이 직접 키워냈다고 했어. 필리아가 가까이 있었으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혹여 사창가의 사각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명약이 아닐까? 굴라처럼 말이다. 누군가 발견만 한다면 다시금 인류의 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 생각까지 미치자, 이안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으음."

그때, 베릭이 일어났다. 전날 먹은 고기와 술 탓에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이안은 서둘러 채비하라는 뜻으로 수건을 던졌고, 베릭은 반쯤 덜 깬 채로 천막을 나섰다.

"아. 이방인이다."

"쉿. 이방인이야."

"어제 연회에 갔었다며?"

"어이! 좋은 꿈은 꿨나? 자네들 뱃속으로 들어간 건 최고급이었거든!"

수군덕대는 인파를 헤치며, 이안은 그나마 익숙한 거리를 찾았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갔던 윈첸의 천막이었다. 더욱 짙어진 구룻잎의 향. 네르사른이 이안을 발견하고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무슨 일인가?"

"좋은 아침입니다. 소란을 따라오니 이곳이더군요."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카칸티르의 전언이 있기까지 천막에서 머무르거라."

이제 이곳에서 이안은 제 밥값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위치가 있는지라, 아마 고위직들에게 바리엘어와 문화 따위를 전파하는 역할을 맡겠지만.

베릭은 글쎄. 수의 말처럼 노예처럼 굴려질지, 아니면 이안의 보좌 역을 인정받게 될지 모르겠다.

"윈첸 부족장의 상태가 많이 위급하신 것 같습니다."

"이안 브라츠. 자네는 지금 말이 너무 많아."

윈첸 부족장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어이없이 혀를 차는 자도 있었고, 노골적으로 분노의 시선을 보내는 자도 있었다. 이안이 상대하고 있는 게 네르사른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사달이 터졌을지 모른다.

"아침부터 사방에서 시끄러우니, 듣지 않으려 해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한번 피면 지지 않는 꽃, 실라스크라 부르던데. 그것만 있으면 윈첸 부족장님의 건강이 회복되시는 건가요?"

네르사른이 이안을 오래 봐온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분위기를 가리지 못하는 자가 아님은 안다. 이안은 주위를 힐끔거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의논드릴 게 있으니 족장님과 대면하게 해주세요."

보는 눈은 이쯤 하면 되었다. 혹여 자신이 가진 게 실라스크라면, 공로는 바람처럼 이들 사이에 스며드리라. 우호적인 감정을 끌어내야 하는 상황인지라, 약간의 주목도는 필요했다.

차악-

네르사른은 이안을 윈첸의 방이 아니라, 옆의 막사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카칸티르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원정대를 의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자는 이제 막 아들을 낳았소."

"다섯째지요. 위로 장성한 자식이 넷이나 있으니, 남은 가족에게도 문제가 없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유달리 활을 잘 쏘는 자이니...."

"카칸."

네르사른의 부름에 카칸티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에는 여전히 구룻잎이 말려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안 브라츠가 실라스크에 대해 말할 게 있다 합니다."

"정확히는 여쭈려는 것입니다."

"…앉게."

이안은 자욱한 연기 사이에 자리잡았다. 옆으로 쭉 앉은 노인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이안을 지켜봤다.

"실라스크라는 식물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제가 짐작가는 바가 있어서, 그것이 맞는지 확인해보려 합니다."

"짐작 가는 바? 아아. 그대는 실라스크를 모르는가?"

이안은 침묵으로 대신 대답했다.

카칸티르는 연기를 가볍게 내뱉더니, 가에 앉은 의원에게 눈짓했다. 의원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힌 식물도감의 부분인 것 같았다.

"윈첸 부족장처럼 신의 뜻을 직접 받드는 자들이 걸리는 병을 실라스크라고 합니다. 한평생 그 기운을 담아내다가 노쇠하여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는 것이지요."

의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기록으로는 아주 옛날, 남국에서 올라온 상인들을 사막에서 천려가 구해주고 실라스크 씨앗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긴 있습니다만… 요즘은 도통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아주 옛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현재 천려족에서 윈첸의 젊은 시절을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래도록 버티는 와중, 실라스크에 관한 기록이 희미해졌고, 이들도 지금에 와서야 겨우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이안은 적절한 말로 위로했다.

"바리엘에는 신의 뜻을 받드는 자가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집시라고 실언할 뻔했다. 이들에게 윈첸은 중요한 인물이지만, 바리엘 제국에서는 그저 늙은 집시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나마 사기꾼들 천지 중에서도 실력은 있는. 뭐 그 정도.

또한 집시는 평생을 떠돌아 다니기에 그들의 말년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의원이 미간을 좁혔다.

"어느새인가 실라스크는 소실되었고, 뭐. 지금은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실라스크가 혹시… 한번 피면 절대 지지 않는 붉은 꽃, 맞습니까?"

"기록에 문제가 없다면요."

그러자 이번에는 카칸이 미간을 곱게 찌푸렸다.

"자네의 말에서 실라스크의 향이 느껴진다."

이거 완전 개코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브라츠 영지에서 실라스크로 추측되는 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붉은색이었는데, 한번 피고는 지는 법이 없더군요."

하물며 태양도 하루에 한 번은 지는 법이거늘, 한낱 꽃이 지지 않는다라. 분명 특별한 경우다. 이안의 말에 카칸티르가 다그쳤다.

"진실인가?"

"저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실라스크 얘기를 듣자마자 이리 온 것입니다."

자. 어떻게 할까. 시기만 잘 맞아떨어진다면, 이들을 꾀어서 브라츠로 데려가는 방법이 있었다.

황제의 중앙군이 브라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때, 천려의 힘을 등에 업고 가면 생명은 물론이고, 잘만하면 영지까지 얻게 되리라.

하지만....

'윈첸이 오늘내일한다는 게 문제군.'

중앙군이 브라츠로 당도할 때까지 그녀가 버틸 수 있을까? 글쎄다. 연회 도중 족장이 뛰쳐나갈 정도면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상태였다.

"자세히 말해보게."

"그 전에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다른 쪽으로 쓸 수밖에.

이안의 말에 카칸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부족장의 목숨을 두고서 흥정을 하는 태도라.

"부탁이라? 그 전에 윈첸의 숨이 끊어지면, 자네 목도 떨어질 것인데?"

"저를 화친의 대상이 아닌, 바리엘 제국의 손님으로 취급해주십시오."

황제의 명이 없었으니 '사신'이라든지, '대표자'라는 표현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뜻 자체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확실한 생명의 안전과 존대를 원한다는 것이다.

"브라츠는 거대한 바리엘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입니다. 브라츠의 화친을 황궁에서도 알고 있으며, 제가 이곳에 온 것 역시 따지고 보면 황궁의 뜻입니다."

꿀 바른 것처럼 흐르는 이안의 주장에 카칸티르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 봐라? 싶은 시선은 덤이다.

"그래? 그렇다면 내 묻지. 지금 자네의 목이 떨어지면, 황궁에서 이곳까지 군대를 몰고 올까? 자네의 주장대로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맞지 않나?"

"군대를 끌고 올지는 모르겠으나, 문제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저한테는 오래도록 이어진 황궁의 정신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콰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노인이 탁상을 내려쳤다. 그들의 언어인지라, 무어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대충 뱀의 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 같은데....

다른 자들은 침묵했지만, 이안의 말이 허황된 것이라 믿는 눈치다.

"황궁의 정신?"

이안 이자는 지금 저가 황궁의 핏줄을 이었다 말하는 건가? 데르가가 아비라며?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분명히 할 수 있는 건, 육신은 데르가 브라츠에게 물려받았으며 정신은 황궁의 그것입니다. 족장께서 어렵게 들어줄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는데요."

"좋다. 그래, 좋아. 자네 같은 자들 때문에 신께서 윈첸을 내려주었지. 이봐!"

카칸티르의 고함에 전사 둘이서 다가와 이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천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베릭이 깜짝 놀라 달려들려 했지만 이안은 가볍게 손을 들어 막았다.

'됐다.'

이들은 이안을 윈첸에게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이안이 기다리라는 눈빛으로 베릭을 쳐다보고, 이내 다시 부족장의 천막에 들었다.

"윈첸."

"아아...."

숨이 가쁘지만 의식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시종들이 그녀를 천천히 일으켜 주었고, 그녀의 뿌연 눈동자는 계속 하늘을 향해 있었다.

"이자가 말하기를, 실라스크에 대해 아는 게 있다 말하오."

"정확히, 짐작 가는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 하니. 진실인가?"

윈첸의 입가로 침이 주룩 흘렀다. 그녀는 음성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동시에 시종들이 환희 찬 탄성을 내질렀고, 뒤따라 온 네르사른 역시 한 줄기 빛을 찾은 것처럼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또한 이자의 정신이 바리엘 황궁의 것이라 하였소."

이번에도 고칠 말이 있는가?

카칸티르는 이안을 내려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자리에서, 윈첸의 고개가 저어지면 이안의 다리를 잘라버릴 요령이었다. 실라스크에 대해 들어야 하니, 지혈은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

그때, 윈첸이 숨을 훅 들이쉬었다. 몸이 달달 떨리며 눈을 감았다. 거짓을 가리는 와중에는 절대로 눈 감는 일이 없었는데.

"...!"

그리고 이내, 모두가 침묵했다. 윈첸은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두 손을 가슴팍에 올려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허리를 숙여 앞으로 엎드렸다. 누가 봐도, 귀한 자에게 올리는 인사였다.

"윈첸?"

"으으...."

그리고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지는 부족장. 의원이 달려와 맥을 짚었고, 시종들은 따뜻한 물을 길어오기 위해 달려나갔다. 이안은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실라스크는 제 천막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카칸이 놀라서 멈칫거렸다. 족장이 명령을 내리지 않자, 듣고 있던 네르사른이 바깥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이방인의 천막으로 가! 가서 붉은 꽃을 찾아라!"

"어? 어어? 그건 왜?"

"어서! 한시가 급하다!"

"이안! 뭔데? 이거 어떻게 해? 들고 튈까?"

베릭의 외침에 이안이 살며시 웃었다.

"되었다. 내, 바리엘의 손님으로 이들에게 주는 첫 선물이다."

이안은 기품있는 목소리로 베릭에게 알렸다. 구룻잎 향이 가득한 윈첸의 천막. 이안은 처음으로 카칸과 동등하게 서 있었다.

제31화. 우선협상권

의원이 화분을 들여다보는 동안, 일족들은 뒤에서 초조하게 지켜봤다. 어서 저 노인이 그것이 실라스크라고 말해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잎을 뒤적이며 이리저리 살피던 의원이 심사숙고 끝에 선언했다.

"실라스크가 맞습니다."

"젠장!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서, 그걸 달이자고! 응? 윈첸 님 숨 넘어가겠어!"

의원의 말에 터지는 짧은 환호성. 그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가운데 중심을 지키고 있는 건 족장, 카칸티르뿐이었다.

"확실한 것인가?"

"네. 현존하는 기록과 비교하였을 때 실라스크가 확실합니다. 이파리의 수와 굵기, 색, 향, 뿌리의 형태가 모두 예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방인의 증언대로라면 꽃이 핀 이후 지지 않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제일 중요한 특징은 이미 윈첸을 통해 확인받았으니 가타부타 덧붙일 게 없다. 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채근했다.

"그러면 어서 약으로 달여라."

"한데...."

아주 작은 난색. 하지만 천막 안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양이 문제입니다."

"양?"

"기록에는 세 뿌리를 달여야 완치에 효과적이라고 했습니다. 윈첸 님은 이미 기력이 많이 쇠하신 데다, 여기 화분에는 두 뿌리뿐입니다. 아마 당장 급한 불을 끄는 정도에 그치겠지요."

양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긍정적인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급한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서둘러 탕을 올려라. 먼저 한 뿌리만."

"네. 카칸."

"그리고 밖의 이안을...."

명령을 내리던 그가 말을 흐렸다. 다들 무슨 일이실까, 의아하게 쳐다봤다. 카칸티르는 고민하다가 호칭을 정정했다.

"이안 브라츠 경을 모셔라."

어찌 되었든, 그는 부족장을 도와주기 위해 실라스크를 제 발로 가져다주었다. 무슨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족장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천려인으로서 이는 명백한 호의였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차악-

이안이 담담하게 천막으로 들어왔다. 이미 밖에서 안쪽의 소란을 들은 듯하다. 그는 탁상 위에 놓인 화분을 보더니 웃었다.

"저것도 마지막인 것을 아는지, 오늘따라 유독 붉습니다."

"이안 브라츠 경."

그리고 그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인사를 올렸다. 네르사른이 저택에서 보여주었던 그 예법이었다. 카칸이 인사하자, 부하들 역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대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듣자 하니 양은 모자란다고 하던데요."

"그래도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소. 그런 김에, 내 묻고 싶은 것이 좀 있는데. 일단 좀 앉으시겠나?"

확실히 바뀐 태도였다. 천려족의 족장이니 완전한 존대는 아니지만, 존중이 깔려 있는 언사였다.

"말씀하시지요."

"브라츠에서 실라스크를 더 얻을 수 있겠는가?"

윈첸이 죽으면 부족 중 누군가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자 역시 실라스크가 필요하겠지. 길게 봤을 때, 천려족에게는 붉은 꽃 재배가 필수적이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말해주시오."

"화분은 저의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화분의 정확한 출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리아의 존재를 언급해야 했고, 그것은 곧 자신의 신분이 반쪽짜리라는 걸 시사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밝힐 일이지만, 그것이 지금의 타이밍에 적절한가는 다른 문제였다. 이안이 침묵하자, 천막 안의 모두가 숨넘어갈 것처럼 그의 입만 주시했다.

"이안 경?"

"죄송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것인데, 어떤 경위로 제게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에 알 만한 사람이 있긴 있습니다만, 당장은 만나지 못해요. 보름에서 한 달 정도 후에나 연락이 가능할 겁니다."

실라스크를 얻기 위해, 여정이 불투명한 남국보다 며칠 내로 오갈 수 있는 브라츠가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데르가 백작도 실라스크의 존재를 모른다는 뜻인가?"

"브라츠 저택에서 그 꽃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지요."

아니면 정식으로 무역 물품 신청을 할 생각이었건만, 브라츠 내에서도 유통이 안 된다고 하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카칸이 생각에 잠기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연락할 수 있는 시일이 왜 보름에서 한 달이나 걸리는 거지?"

마음만 먹으면 사나흘 내로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실라스크를 아는 자가 다른 곳에 가 있는 건가? 카칸의 짐작이 맞는다는 듯,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좀 있어 브라츠에서 보기 힘들 겁니다."

"자세히 물어도 되겠소?"

"…사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 약조를 더 해주셔야겠는데요."

이번에는 또 무엇일까. 이안 자신을 브라츠로 돌려보내 달라 요청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브라츠 백작보다 저에게 우선협상권을 주십시오."

"우선협상권을?"

이안의 말에 뒤쪽에서 술렁임이 일어났다. 브라츠 가문 하나로 묶인 자들 아닌가? 아비와 아들 사이에서 우선협상권이라니. 그 말은, 안쪽에서 내분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

카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은 아비를 꺾을 생각인가 보군."

"강한 자가 우두머리의 자리에 앉는 것은, 천려족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 사실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천려족이야 말로 강자생존이라는 법칙을 몸소 실천하는 자들이니. 카칸티르는 이 대화가 점점 흥미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안하지만, 우선협상권의 경우는 들어줄 수 없소. 경은 당장 브라츠 병사들을 움직일 수도 없고, 우리에게 넘겨줄 곡식량을 늘릴 수도 없지 않은가?"

쥐뿔도 없는 너를 뭘 믿고 그런 약속을 하겠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부정하는 말과 달리, 카칸티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음을 눈치챘다. 이안이 궁금증을 없애 주리라는 기대가 묻어있었다.

"좋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지요. 대신 이것이 우선협상권을 좌지우지할 만한 내용이라 생각되시면 신에게 맹세하여 저와의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맹세하지."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이었다. 카칸티르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부드러운 양털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곧장 몸이 굳었지만 말이다.

"황궁에서 감찰반과 함께 군대가 내려올 것입니다. 혐의는 탈세로 인한 반역죄. 아마 한 달 안에 브라츠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뭐라고? 반역?"

"지금 저자가, 방금 뭐라 한 것인가?"

"황궁에서 군대가 내려와?"

술렁술렁, 폭탄 발언에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들어댔다. 카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윈첸처럼 집시의 능력이 아니더라도, 그는 이안의 말이 사실임을 알아챘다.

"진실인가?"

"하늘에 맹세하여 진실입니다."

"경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지?"

"화친식을 앞두고 중앙 정부에서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제가 화친 대상으로 적합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죠. 그들에게 들은 것입니다."

"브라츠가 멸문한다면, 자네 역시 무사하지 못할 터인데?"

"그래서 제가 이리 온 것입니다. 브라츠가 멸문한다면, 천려족 역시 곤란하지 않습니까?"

브라츠 가문과 천려족. 이들은 국경을 접하고 서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우호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츠가 사라지고 그곳에 황제의 중앙군이 주둔한다면? 제국의 황제가 과연 데르가처럼 변방의 야만족을 어려워할까? 새로운 백작이 세워진다 한들? 그들과 교류를 할까?

정세가 완전히 바뀌는 엄청난 사건이 되리라.

"데르가 백작은? 알고 있는 건가?"

"모릅니다. 안다고 한들, 쓸데없는 피만 흘리게 될 테니까요. 반역은 황제의 아량과 상관없이 무조건 참수입니다. 저는 최소한으로 영지를 지키기 위해 사막길을 오른 것이고요."

"그게 무슨 뜻이지?"

"아버지가 죽고, 영지가 비면 전사들을 이끌고 저와 브라츠 영지로 들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말도 안 됩니다! 카칸!"

뒤에서 듣던 한 노인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와 달리, 카칸티르와 네르사른의 눈빛은 기민하게 빛났다. 지금 이안이 숨기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카칸이 곰곰이 계산하듯 말했다.

"데르가가 죽으면 영지에는 황제의 중앙군이 있다는 걸 뜻한다. 그들과 맞서면 우리는 곤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들과 마찰을 피하고자 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반역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괜히 변방의 야만족에게, 그것도 전력이 확인되지 않은 적과 맞설 일은 절대 없다.

"어째서?"

"족장께서는 제게 상당히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건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카칸티르가 탁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생각이 복잡해졌다는 걸 뜻했다.

"천려족은 그저 제 뒤에서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한마디 얹어주시면 참 좋겠지요. '브라츠 와 오랜 세월 함께한 동맹의 입장으로, 천려의 가족이 된 이안 브라츠와 뜻을 함께 한다' 같은."

"그럼, 제국이 우리에게 검을 겨눌 수도 있을 텐데?"

"광활한 대사막과 최강의 전사들을 거느린 천려와요? 글쎄요. 오히려 그 반대겠지요."

중앙 입장에선 이안이 영지를 관리해야 천려족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안의 마음먹기 따라서 영지 독립을 위해 전면전까지 갈 수 있다는 것도 암시할 수 있고.

만약 영지가 독립하면 그간 공들여 데르가를 숙청한 게 허사로 돌아간다.

"제국의 전쟁이란 꼭 검을 들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서요. 제국은 쉽고 값싼 방법을 택할 겁니다. 혹시 무력 사태가 일어난다고 한들, 원치 않으시면 그대들은 다시 대사막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이안 경. 자네는 지금 엄청난 말을 하고 있네."

"사막을 건너기 전부터 생각하던 것입니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래서 브라츠를, 정확히는 영지를 지키게 되면 지금껏 천려족이 누리지 못한 '진정한 동맹'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평화로 인해 군사 식량이 줄어들면 영지의 창고가 그득하게 쌓일 게 분명할 테니까. 이로 인해 모두가 배부르게 지낼 수 있다.

"잠깐."

가만히 듣고 있던 네르사른이 손을 들었다. 뭔가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자네, 아니. 경께서는 반역이 멸문에 해당하는 중죄라 하였소. 경의 이름은 이안 브라츠, 반역자의 아들이지. 영지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무리이지 않소? 아무리 우리가 감싼다고 해도 말이오."

"역시 네르사른 님입니다. 맞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이안은 가볍게 박수 치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저는 데르가의 친아들이 맞습니다."

혈육임에는 문제가 없다는 걸 먼저 짚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니에요. 저는 아직 입적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제 이름은 '이안 브라츠'가 아닌, 그저 '이안'입니다."

"뭐라?"

술렁이는 장내. 하지만 이어지는 이안의 말은 모두를 입 다물게 하기 충분했다.

"-따라서 제국은, 법적으로 제게 반역죄를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브라츠의 새로운 영주가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삐끗하면 노예 처지지만 말이다. 굳이 천려족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정보였다.

제32화. 숨긴 것

"입적하지도 않은 자식을 보내다니! 이것은 기만입니다!"

"맞아요! 어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이안은 느긋하게 앉아서 장로들이 분 터트리는 것을 지켜봤다. 화친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리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은 눈치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자식이 맞습니다. 그 부분은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친모는?"

"글쎄요."

카칸티르의 물음에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아서 해석하라는 무언의 대답이었다. 안 그래도 험악해진 상황. 여기서 사창가 출신이라는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고.

"당장이라도 목을 부러트리고 싶군."

"하지만 족장님은 천려족의 지도자십니다. 분명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겠지요."

카칸티르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으르렁거렸다. 이안을 제국의 손님으로 대접하겠노라 선언한 이상, 이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이것은 신념의 문제였다.

'그렇다고 브라츠를 칠 수 있는가? 아니. 중앙에서 군대가 내려오는 것을 안 이상, 이 또한 무모한 짓이다.'

"자네."

카칸티르는 황당한지 구룻잎을 말아 씹었다. 경이라 칭하는 호칭도 입에서 떨어진 지 오래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직까지 이안의 목이 붙어있다는 게 존중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계속 나불대 보지. 더 말할 게 있나?"

"족장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있겠지요."

뒤에서 장로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아. 있으시겠군요.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말입니다."

"흥미로웠으면 좋겠어. 시끄러운 내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해줄 만큼."

카칸티르의 시선이 집요하게 이안의 목덜미를 노렸다. 충동을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천려족의 도움으로 제가 브라츠 영주가 된다면, 저는 브라츠를 바리엘에서 제일가는 영지로 만들 것입니다."

"왜지?"

"그것만이 변방 출신인 저를 받쳐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힘을 충분히 쌓은 다음엔, 중앙으로, 정확히는 황궁으로 갈 겁니다."

카칸티르의 갈색 눈이 번들거렸다. 이 조그만 것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중앙으로 가겠다고? 이는 제국의 아가리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겠다는 뜻이다.

가서 무엇 할지는 둘째 치더라도, 영주가 자리를 비운 영지가 어떤 식으로 몰락하는지 몰라서 그런 것인가? 내부자들의 부패로 곯아 터지던지, 바깥의 침략으로 박살 나는 게 수순이다.

"이 모든 것이 입적도 하지 않은 제가 도망치지 않고 사막을 건넌 이유입니다. 카칸티르. 우리는 이제 달라질 필요가 있어요."

진정한 동맹과 평화.

단순히 서로 무역품을 교류하고, 숫자와 글자로 묶이는 관계가 아니었다. 영주가 등을 내줄 수 있는 상대. 그것은 천려족을 변방의 야만족이 아니라 우방으로 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흥미로운지는 모르겠고. 확실히 잡생각은 사라졌다."

"다행입니다."

카칸티르가 구룻잎을 다시 말아 씹을 때. 네르사른이 손을 들었다.

"이안 경.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중앙군이 도착하면 데르가에게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까? 전언을 보낼 여유 말입니다."

와우. 이안은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칸티르. 자네는 상당히 괜찮은 자를 옆에 두고 있구만. 족장의 책사답게 생각의 깊이가 상당했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니까요. 그 기간이 넉넉잡아 보름입니다. 사실상 중앙에서는 확신하고 내려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군요."

"네르사른. 무엇이?"

카칸티르를 비롯한 다른 장로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벗어날 기회가 없다면, 데르가에게 남은 것은 참수. 그것도 멸문입니다. 군대를 일으켜 대항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려족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겠지요."

그들은 불과 며칠 전에 화친 협약을 맺은 동맹이었으니까 말이다. 카칸티르는 그제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거절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특히나 화친 직후이니 더더욱."

신념 이전에 정치적으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명분 없이 화친을 깨면 천려족 스스로가 야만족이라 선포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제국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카칸은 이런 상황이 불쾌했다. 이러나저러나 제국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 아닌가.

"화친이 문제다. 화친 때문에 우리 입장이 난처해졌으니 이부터 해결해야겠는데. 무를 방법은 없나?"

네르사른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습니다."

"어째서? 놈들은 우릴 속였다. 입적도 하지 않은 자식을 보냈어."

"카칸, 입적이 되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안은 데르가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렇지요. 옳은 주장입니다."

이안은 네르사른의 말에 맞장구쳤다.

"게다가 아버지는 화친 이전에 제가 서자임을 밝혔지요. 또 제가 중앙과 결탁해 입적을 미루었다는 사실도 모를 테니, 이쪽에서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소용없을 겁니다."

"마치 죽여달라 재촉하는 것 같군. 계속 지껄여 보시지."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이안의 선언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카칸티르도 입을 꾹 닫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든 역사는 명분 위에 세워지는 법. 그리고 모든 명분은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는 법이죠.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이지?"

"화친을 파기할 명분이요. 또한 데르가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거절할 명분까지."

그리고 이안은 탁자 끄트머리에 놓인 구룻잎을 집어들었다. 이것이 그 답이라고 말하는 눈빛이 형형했다.

"아버지가 저에게 은밀히 지시했습니다. 내년 생일날 브라츠로 잠시 돌아갈 때, 구룻잎을 밀수해 오라고."

"세상에. 하하!"

척척 나오는 이안의 대답에 카칸티르는 실소를 터트렸다. 사막을 건너기 전부터 결심했다더니, 과연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주가 밀수를 지시한 것입니다. 그것도 절대 금지 품목인 구룻잎을, 평화의 상징인 화친 대상을 통해.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은 뒤통수니. 충분하고도 남는다. 증거는?"

"아쉽게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윈첸 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거라면 입적 건도 얹어서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다. 항의? 아니지. 그저 일방적으로 파기하여도 상대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요."

"그대가 오늘 한 말은 윈첸 님을 넘어서 신께 맹세할 내용일세."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미치겠군. 브라츠는 대체...."

덜떨어진 핏줄 못 속인다고, 데르가에게는 첼처럼 멍청한 것들만 있을 줄 알았다. 이안이 보내온 친필 서신은 그 확신을 더 해주었다.

한데, 지금 분위기를 보라. 금발에 녹안인 외지인이 천려의 지도자들을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인가? 천려족이 그대를 지지한다는 성명."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 것입니다."

이리 재도 저리 재도 딱히 흠잡을 것 없는 거래였다. 따지고 보면 조금 유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이안은 목숨을 잃겠지만 천려족은 그저 사막으로 돌아오면 될 일. 중앙이 침입한다면 하던 대로 사막을 등에 업고 싸우면 된다.

그는 탁자를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는 자네를 위해 피 흘릴 생각이 없다."

"저 또한 원치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전혀요."

호기로운 이안의 태도. 카칸티르는 순전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한참 어린 것이, 기백은 천려족의 전사를 압도했다.

"저는 한번 죽었다 깨어났거든요."

"멋진 각오로군."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지만, 카칸티르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긴, 무슨 수로 알겠나. 이안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으며, 이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뜻임을.

게다가 아직 숨겨놓은 패도 있었다.

바로 그가 마법운용자라는 것이다.

"실라스크의 추적을 포함하여, 천려족이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종이에 남기지."

"시간이 많습니다. 조율하는 즐거움이 있을 겁니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아직 멍하니 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의원을 돌아봤다.

"약, 안 달이십니까?"

"네? 아아! 예에. 갑니다! 가야지요!"

의원이 화들짝 놀라며 화분을 들고 일어섰다. 한 뿌리만 먼저 먹여서 효과를 지켜볼 셈이었다. 남은 것을 어떻게 쓸지는 나중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후대를 위해 재배할 것인지, 아니면 호전 상태를 보고 윈첸에게 바칠 것인지.

"그럼 저도 이만."

이안 역시 천막 입구를 걷었다. 카칸티르는 그를 붙잡으며 반쯤 기대하지 않은 채 물었다. 어느새 거칠던 말투도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이안 경. 중앙으로 가려는 것이, 황제의 정신과 관련이 있는 건가?"

카칸 입장에선 참으로 궁금한 아이다. 아비는 변방의 귀족인데, 정신은 황궁과 연관되어 있다? 분명 어미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쪽에 단서가 있는 것 같다. 이안은 그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그저 웃기만 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일족들이 죄다 모여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나왔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는데, 죽지 않았어."

"오오오. 진짜네."

이안과 베릭이 한 걸음 다가오자, 홍해처럼 인파가 갈라졌다. 그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수였다. 이안은 그녀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수."

"어? 어어."

"시간이 남는다면, 우리를 좀 도와주겠나?"

"어떤...?"

당황스럽게 흔들리는 눈동자. 하지만 이내 이안의 말에 별처럼 빛났다.

"베릭 훈련."

* * *

"멍청이! 굼벵이!"

"안 닥쳐?"

"사막 개미도 너보다는 빠르겠다!"

"와, 저게! 너 잡히면 진짜 코피 터질 줄 알아!"

촤아악-!

이안은 그늘에서 과일을 먹으며 모래바람이 이는 것을 지켜봤다. 베릭의 발길질과 수의 몸짓이 만들어내는 흔적이었다. 땡볕에서 벌써 두 시간째 뛰고 있는데, 둘 다 지치는 기색이 없다.

"베릭! 괜찮아?"

"뭐가?"

"…됐다."

"말 걸지 마! X발!"

촤악!

확실히 습득하고 받아들이는 게 빠르다. 며칠 있었다고 더위에도 적응한 모양. 게다가 환경이 환경인지라, 모래는 훈련 강도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베릭. 너 정말 대박이다."

"발이 자꾸 빠져서 그래!"

"아하? 그래? 난 안 빠지는데? 다리 살이 얼마나 덕지덕지 쪘으면 너만 빠지냐?"

"이거 근육이야! X!"

"네네. 그러시겠죠."

쉬익! 쉭!

둘이 계속 합을 주고받는 동안, 이안은 달콤하고 시원한 과일만 우물거렸다. 천천히 공들여서 천려족을 포섭할 생각이었는데, 실라스크로 인해 아주 쉽고 빠르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브라츠로 돌아가는 그때까지, 이안은 대사막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아! 실로 얼마 만에 마음껏 쉬는 것이란 말인가. 신이 주신 진정한 선물은 이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안 님."

그때, 일족 중 누군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새 포도주와 이안의 화분을 쟁반에 든 채였다.

"윈첸 님께서 드디어 눈을 뜨셨습니다."

"오. 그런가?"

윈첸은 이안에게 인사함과 동시에 혼절했다. 실라스크 달인 물을 조금씩 입으로 흘려보냈더니, 차도는 느리지만, 확실히 나타났다. 심박 수가 안정되고, 발작이 사라졌으며, 혈색이 돋아난 것이다.

"다행이군."

"…감사합니다."

이름 모를 일족이 조심스럽게 감사 인사를 남겼다. 마을 분위기가 눈에 훤했다. 축제 저리 가라겠지. 이안은 그저 잔을 홀짝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 빠른 시일 안에 이안 님을 정식으로 환영하는 연회를 열 것이라 합니다."

"그래? 지금도 연회와 다를 바가 없는데."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가 이안 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별말씀을."

"아차. 그리고 흙까지 통째로 옮기다 발견한 것인데요."

그는 화분을 내려주었다. 빈 화분 안에 들어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목걸이였다. 은빛 줄에 호박색 보석이 달린.

"이안 님 것, 맞으시죠? 숨겨두신 것입니까?"

제33화. 황궁 조사단

목걸이는 햇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안은 그것을 '호박색'이라고 표현하는 것 외, 그 어떤 것도 정의할 수 없었다. 보물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왔던 이안 조차 처음 보는 보석이었기 때문이다.

'이안. 이게 대체 뭘까?'

어찌하여 사창가의 사생아가 실라스크를 키우고 있었으며, 그 안에 이런 것을 보관하고 있었을까? 아니지. 가정을 처음부터 세우자면, 이안은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분도 신분이지만 행동이 맞지 않잖아. 어미 필리아의 고충을 알고 있으니, 귀한 것임을 알았다면 처분하여 가계에 도움이 되게끔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흙 속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 이것은 실라스크를 심은 자가 묻은 게 분명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았던 건가? 이걸 잘 돌보아 달라고.'

지금 당장 그럴 듯한 추측은 그것 뿐이었다. 그리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나? 소중히 대했지만, 브라츠 저택으로 들어올 때 챙길만큼은 아니었다 이거지.

잘그락.

"알 수가 없다. 참으로."

눈 뜨고서 제일 의아한 건 바로 서자 이안의 존재였다. 언제나 그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 건 이 작은 아이뿐이다.

"뭐가 알 수 없어?"

"다 깨졌나?"

"깨지긴 누가! 비등비등했다고!"

"어어. 그래."

이안은 목걸이를 착용하며 대꾸했다. 뭔지 몰라도, 발견한 이상 몸에서 절대 떨어트려 놓을 생각이 없다. 화분을 가져온 천려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휴식 후 부족장님을 뵈러 오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 가지. 다 깨졌으니까."

"안 깨졌다니까? 나 안 깨졌어!"

"입가에 모래나 털고 말하거라. 베릭."

이안은 낄낄대며 천막을 벗어났다. 윈첸이 정신을 차렸으니, 이안의 말에 거짓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려족과 이안 사이의 우선협상권 상세 조율도 해야 하고.

"...?"

"어어!"

천막을 걷던 이안이 멈칫거렸다. 입구에 천려인들이 모여 있었던 탓이다. 따라 나오던 베릭 역시 고개를 내밀며 주위를 살폈다.

어색한 침묵 끝에, 그들은 손에 든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쿠실레 덮개부터 튼튼한 바구니 등등.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물품들이었다.

"이게 다 무엇이오?"

"…사막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들, 챙겼습니다. 윈첸 부족장님을 위해 내준 것에 비하면 하찮지만 천려족 전사들은 은혜와 원수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니까요."

이안을 손님으로 대하라는 명이 있었던 것인지, 처음으로 존칭을 듣게 되었다. 그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유용하게 쓰지."

"그, 그럼...."

그들은 허둥지둥, 쑥스럽다는 듯 흩어졌고 이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그리 재밌냐?"

"귀엽지 않은가? 세상이 야만스럽다 여기는 자들도 자세히 보면 인정이 있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성인군자 납셨네."

"베릭.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물건을 정리해 두어라."

이런 젠장! 이안은 군자라는 말 취소라며, 길길이 날뛰는 베릭을 뒤로하고 윈첸의 천막을 찾았다. 안쪽에는 첫날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상태의 노인이 누워있었다.

차악-!

"이안 경. 어서 오시게."

카칸티르가 그녀 가까이 무릎 꿇고 앉아 뭔가를 속삭이던 차였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노인의 위상이 느껴졌다. 부족을 이끄는 자가 거리낌 없이 무릎 꿇는 존재라.

"윈첸 부족장님. 호전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입구 쪽을 쳐다봤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현자의 미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리 부른 것은 이전의 대화를 매듭짓고자 함이네."

"좋습니다. 제가 카칸티르 족장님에게 고한 것은 모두 사실이며, 하늘을 두고 지킬 것이라 맹세했습니다. 물론, 아직 말씀 안 드린 사실도 몇 있지만, 그것은 천려족과 무관한 일입니다."

이안이 방긋 웃으며 선수 쳤다. 거리낌 없는 태도에 카칸티르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윈첸은 두 손을 모아 다시 이안에게 인사했다.

"신께서...."

힘겹게 쥐어짜는 목소리. 상태가 안 좋아, 다시는 말을 안 할 줄 알았다. 시종들은 노인의 전언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바짝 붙였다.

"…그대의 모든 것을 바꾸라 하셨습니다."

"네?"

"…설령 그것이 존재일지라도."

이안이 놀란 눈으로 카칸티르를 돌아봤다. 지금 윈첸은 신탁을 내리고 있었다. 신전이 아닌 곳에서 신의 말씀을 듣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으나, 카칸티르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국인은 이해 못 하겠지. 그대들은 성전이 있어야만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여기니까."

"사실입니다. 성전을 해독하는 자만이 신의 뜻을 전할 수 있다 여기거든요."

아마 교황청이 알면 사이비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이안은 어쨌거나 신의 말씀을 전해 들어 감사하다는 뜻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전언이 썩 유쾌하지는 않아."

"그럴리가요. 언제나 의미 있는 말입니다."

이안은 단박에 부정했다. 인간이 모른다고 해서 진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카칸티르는 이 금발 외지인이 점점 마음에 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사로서 모든 것을 갖추지 않았던가.

'대범하고 용기 있으며 깊게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다.'

"형제들이 경에게 선물을 가져갔다 들었소."

"고맙게도 잘 받았습니다."

"이제 우선협상권 세부 사항을 조율할 것인데, 그 전에 특별히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보시오."

협상에 들어가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걸 돌려 말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호의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천려족은 전사의 부족 아닙니까?"

"그렇지. 대사막을 지배하는 자들이오."

"제가 데려온 붉은머리에게 전사의 모든 것을 전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서 저가 제일 강하다 여기고 싶어 하는 녀석인데, 아직 모자람이 많아서요."

"베릭이라고 했나?"

부하를 아끼는 것은 지도자의 덕목.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기에 카칸티르는 흔쾌히 대답했다.

"일러두지."

"감사합니다."

"종이를 가져와라."

차악-!

카칸티르의 부름에 밖에서 시종들이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 그들은 윈첸을 두고서, 진실한 계약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쿵! 쿵쿵! 우당탕!

갑작스러운 소음에 데르가의 펜이 궤를 벗어났다. 거의 다 작성했는데, 처음부터 다시 하게 생겼다.

"백작님! 백작님!"

"어디서 호들갑이야!"

파앗!

데르가는 문이 열리자마자 반사적으로 잉크병을 던졌다. 하늘이 두 쪽 난 것도 아닌데 어찌 저러는 건가! 안 그래도 세금 계산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병을 정면으로 맞은 하인이 당황해하며 바지를 닦아냈다.

"죄, 죄송합니다. 한데 당장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중앙에서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입적확인서가 도착할 예정이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하인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데르가는 커튼에 몸을 숨긴 채 창밖을 살폈다.

"...?!"

일반적으로 서류 배달만 목적이라면, 두 명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정문에서 현관까지 마차가 잔뜩이었고, 그 선두에는 낯익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황궁 조사단 아닌가?"

"집사님이 일단 손님을 맞이하고 있긴 합니다만...."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데르가가 책상 위의 서류를 그러모으며 외쳤다.

"너는 당장 여기 있는 서류들을 보좌관 사무실로 옮겨라! 그리고 안쪽에서 문을 잠근 채 기다려. 잉크 통은 왼쪽 수납장에 잔뜩 있다. 상황이 이상하다 싶으면 죄다 쏟아부어라. 알겠느냐?"

"네? 네에. 아, 알겠습니다."

"망할!"

데르가는 단단히 당부하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하인들이 모두 불안한 기색으로 중앙 현관에 모여 있었다.

"주, 주인님. 이것이 대체...."

"비켜!"

그는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집사가 난감한 시선으로 물러섰고, 데르가는 황궁 조사단장과 마주했다.

"데르가 브라츠 백작님 되십니까?"

"그렇소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소."

"황궁에서 파견된 황궁 조사단장, 버티 에리카입니다. 이는 황제께서 직접 인장을 찍으신 허가서입니다. 탈세로 인한 반역죄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성실하고 진실한 과정을 맹세합니다."

탈세로 인한 반역죄.

파견 이유를 듣자마자, 데르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새끼들이 어떻게 안 거지? 대체 어떻게? 하지만 내뱉는 말은 뻔뻔하고 당당했다.

"굉장히 불쾌하군. 나는 바리엘을 위하는 마음으로 변방에서 저 야만족들을 막아내고 있어! 그런데 뭐라? 탈세로 인한 반역? 말도 안 돼!"

일단 발뺌이다. 죄가 확실시될 때까지.데르가는 일단 백작의 신분이었고, 이곳은 그의 영지였다. 마차 십수 대가 오긴 했지만, 전력으로 따지면 우세하다는 의미였다.

에리카는 익숙하다는 듯 다른 품에서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브라츠의 인장이 맞습니까?"

범과 월계수 무늬. 휘어 갈겨쓴 누군가의 문장 위에 확실하게 찍혀있었다.

-브라츠 가문의 탈세를 밀고합니다. 황제이시여, 부디 하나의 의심도 없이 조사해 주십시오.

데르가가 서신을 잡아보려고 하자, 에리카는 단호하게 손을 내쳤다. 밀고장, 그것도 인장이 찍힌 것이라면 당장 이들이 저택을 헤집어도 할 말이 없다.

"저택은 당분간 저희가 관리하겠습니다. 백작님을 비롯한 모든 사용인은 부단장의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보병들이 곧 도착할 것이니, 그들을 위해 정원도 비워주시길 바랍니다."

추가 전력이 속속들이 도착할 것이니, 섣부른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에리카의 눈짓에 부하들이 검을 들고서 저택 안으로 밀려들었다.

쿵쿵! 쿵!

"꺄악!"

"자, 잠깐만요!"

"모두 입 다물고 따라와!"

"주, 주인님! 주인님!"

"거기! 계단 위로 가는 놈!"

"으아아아!"

차마 귀족인 백작을 묶어둘 순 없었기에, 그들의 손과 발인 사용인들을 먼저 제압하는 것이다. 에리카는 구둣발로 카펫을 짓밟으며 들어섰다.

"상당히 저택이 멋집니다."

"자네...."

"첼 도련님과 메리 부인 역시 곧 귀가할 것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으니 그저 지시에 따라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다들 맨 위층부터 쓸어!"

에리카의 외침에 데르가는 머리가 뎅, 하고 울렸다. 이놈들은 집무실이 꼭대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밀고장에는 적혀 있지 않은 정보다. 그렇다면 종이만 올려보낸 게 아니라는 뜻.

'몰린!'

이 찢어 죽일 새끼가 고기 먹여서 대접했건만! 이딴 짓을…! 데르가는 피가 거꾸로 솟은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에리카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지나쳤고, 들리는 것은 하인들의 비명뿐이다.

"백작님!"

위층을 뛰어 올라가던 자는 집사였던 모양이다. 그가 질질 끌려 내려왔지만, 데르가는 생각에 빠져 움직이지 않았다.

'몰린, 그 새끼가 어떻게 인장을 찍었지? 역시 보좌관과 연관된 건가? 하지만 그놈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 여전히 감시하고 있고....'

데르가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브라츠에서 몰린과 가까이 지낸 자를 한 명 꼽으라면....

"이아아안!"

울컥 터지는 괴성에 병사들이 힐끗거렸으나,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거, 일찍 죽는다 한들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제34화. 출정

황궁 조사단장 에리카는 서류 더미로 너저분한 집무실을 돌아봤다. 간이 서랍까지 모두 뒤집어 쏟았으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안쪽 사무실에는 부하들이 모여서 잉크로 젖은 종이를 말리고 있었다.

"복구 가능한가?"

"작성한 잉크 종류가 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절반은 건져서 다행이죠."

"나머지는 문제없습니다!"

"하여간, 그놈. 행동 하나 빠릅니다."

그놈이란, 구석에 목 잘린 채 죽어있는 하인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서류 처분을 지시한 데르가를 말하는 것이다.

아직 죄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백작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눈앞의 여성, 버티 에리카가 바로 이곳의 차기 영주가 될 테니까.

"중앙에 제출된 세금신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필립과 사리엥이 생산량과 영지민 세율을 계산한다. 나머지는 광산 및 거래 내력을 뽑아내. 어림잡아 3년 치만 보면 될 것이다. 일주일 안에 할 수 있겠지?"

상사의 지시에 부하들이 희미하게 웃었다. 에리카의 물음은 물음이 아니라 명령이었으니. 일주일 안에 해내라는 뜻이었다.

"네. 단장님."

"좋아. 델릭스는 별채 관리를 책임진다. 움직여!"

"가자! 제대로 털자!"

"으아아아!"

그들은 기합을 잔뜩 넣으며 탈세의 증거를 찾아내겠노라 소리쳤다. 해내면, 이곳은 그대들의 영지가 된다! 그들의 상사는 귀족이 될 것이며, 모두 중앙에서 한자리 차지하게 될 것이다! 꿈꾸던 출세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 데르가의 집무실이었다.

'이런, 젠장.'

한편, 별채에서 이안이 쓰던 방에 구금된 데르가. 조사단의 편의를 위해 차출된 몇몇 사용인들 외에는 아무도 이곳을 나설 수 없었다. 데르가는 수염을 잡아 뜯을 것처럼 매만지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직, 메리와 첼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백작님. 이제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입 안 닥쳐?"

엄청난 고함에 집사가 몸을 움찔거렸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백작의 처신에 따라 제 목숨줄이 간당간당했으니까. 그는 방안을 서성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황제가 직접 내린 조사단이다. 하지만 분명 이걸 찌른 것은 몰린. 여기서 내 목이 잘려나가면 2황자에게 이득이 돌아간다는 뜻이겠지. 그러면....'

데르가는 책상을 뒤적여 양피지와 펜을 찾아냈다. 그는 생각을 한번 가다듬은 다음, 멈추지 않고 펜을 놀려댔다. 오탈자를 수정할 시간도 없다. 일분일초가 급하다 못해 처절했다.

슥슥.

"집사. 자네가 할 일이 두 가지 있다."

"마, 말씀하십시오."

"서신을 보내. 이건 천려족으로, 그리고 이건 중앙의 1황자 앞으로. 각각 보내고 나면 데오와 접촉해서 병사들을 준비하라 일러. 완전무장으로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게끔."

천려족에게 보내는 것은 전력 지원과 이안의 참수 요청이었다. 중앙지원군이 곧 도착한다 했으니, 그 전에 무력으로라도 저들을 제압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진실로 반역 중의 반역.

이걸 상쇄할 게 바로 1황자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2황자의 계략 중 일부인 걸 알면 분명 조치를 할 것이다. 견제하든, 방해하든. 무엇이 되었든 데르가에게는 기회가 되겠지.

그는 인장을 찍을 수가 없어 반지 하나를 빼서 넣었다.

'그래. 일단은 살아남자. 살아남아서 훗날을 정비하면 돼. 그러면 돼....'

미친 듯이 마음을 다잡는데, 집사가 어이없는 소리를 해댔다.

"여기를 나가라고요? 어떻게요?"

문은 조사단이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데르가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집사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고, 이내 못 하겠다는 듯 도리질 쳤다.

"백작님! 제 나이가 벌써 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자고? 쉰이 그대의 마지막 나이겠구먼."

"그렇게 말씀하시면...."

집사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창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3층 높이다. 재수 없으면 죽을 것이고, 운이 좋다 한들 어딘가 부러질 것 같다.

데르가는 커튼을 주르륵 뜯어내서 집사에게 던졌다.

"밧줄을 만들어."

시발놈. 이것 정도는 좀 같이 만들어주지. 집사는 울컥 차오르는 분을 삼키며 커튼을 꼭꼭 잡아 묶었다. 마치 이것이 제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 * *

새벽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말 한 마리. 모래바람을 뚫고 밤낮으로 내달려서일까. 짐승의 가죽 위로 뜨끈한 김이 서려 있었다.

경계를 서던 천려의 전사가 그 존재를 알아챘다. 그리고 이내, 낯선 자가 흔들고 있는 게 브라츠의 깃발이라는 것도.

"전언…! 브라츠의 전언이 왔습니다!"

"물소뿔을 울려라."

"물소뿔을 울리라 하신다!"

부우우- 부우-

평화롭게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던 일족이 동시에 하늘을 쳐다봤다. 외지인의 방문을 알리는 소리다. 그것은 이안에게도 닿았으며,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일깨우는 신호가 되었다. 브라츠의 기사는 숨을 헐떡이며 외벽을 두드렸다.

"브라츠의 전언을 가져왔소! 급하오!"

히이잉!

그와 동시에 말이 옆으로 쓰러졌다. 얼마나 쉼 없이 달렸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일족은 물을 가져와 말의 몸에 부어주었고, 전사들은 기사를 안으로 안내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차악-

"데르가 백작의 전언이라고?"

천막을 치자, 반라의 카칸티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사는 문득 입구에서 저의 소속을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전언이라고만 했는데, 별다른 물음 없이 들여 보내준 것이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서서 기절한 것인가?"

기사가 멍하니 서 있자, 카칸티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채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브라츠 영지의 기사, 벨입니다. 백작님께서 급히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기사는 급히 정신을 차리며 품에 넣어온 종이를 건넸다. 삐뚤빼뚤, 카칸티르는 천박한 글씨체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진짜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보자, 중앙과의 오해로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다. 우리는 동맹을 맺었으니 서로의 고난을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부디 우방으로서 부탁하니, 천려의 힘을 빌려주어 함께 싸워주길 바란다. 그리고 덧붙여 내 아들 이안 브라츠를...."

-참수해 주길 바란다. 이것이 그들의 명예에 흠이라 생각하면 내가 보낸 기사가 대신할 것이다.

카칸티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의 오해란 무엇이지?"

"백작님이 반역죄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조사받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허위 사실이며, 저항하기 위해 곧 무력 충돌이 있을 예정입니다."

"반역죄가 허위 사실이라는 증거는? 사실인데 가담했다간 우리는 황궁과 척을 지게 되는 것 아닌가."

"그 증거가 바로 이안 브라츠 님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하겠노라 하셨습니다."

"아하하하!"

갑자기 터진 폭소에 기사가 헐떡이던 것을 멈췄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카칸티르는 나른하게 고개를 젖히고 구룻잎을 가볍게 씹어댔다.

참으로 간사하고 영악한 자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 하더니만, 이안을 죽이면서 그걸 또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하지 않나. 데르가가 여기는 이안의 존재가 무엇인지 짐작게 했다.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지.'

"족장님?"

"그게, 내가 잠이 덜 깨서."

"…황궁에도 서신을 보낸 참입니다. 보름, 딱 보름만 황궁에서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동맹을 맺은 우방이 아닙니까? 전사들의 의리란 신의 약속과 같아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카칸티르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연기를 후, 내뱉었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는 듯 손짓했다. 대충 웃옷을 걸친 그가 답신을 써 내려갔다.

"그렇지. 그리고 우리는 전사 중의 전사. 답신을 그대의 주인에게 잘 가져다주게. 우리도 곧 따라가지."

"감사합니다!"

카칸티르는 기사가 훔쳐보지 못하게끔 가죽끈을 친친 감아 묶었다. 품에 챙긴 기사가 넌지시 바깥쪽을 힐끔거렸다.

"하면 이안 브라츠의 처분은...."

카칸티르는 침묵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기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단박에 대답이 떨어질 줄 알았건만, 예상을 빗나가자 긴장감이 올라왔다.

"아. 그거 말일세. 백작의 짐작대로, 화친의 증표이긴 하나 그간 천려에서 함께 지낸 식구일세. 우리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자네가 알아서 해 보시게. 밖에 누구 없나?"

"부르셨습니까. 카칸."

"이안 경에게 이자를 데리고 가지."

기사는 위화감을 느꼈다. 다만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이안과 이안 '경'의 차이는 알아채지 못했다.

카칸티르와 부하들은 앞장서서 이안의 천막 앞에 섰다. 고갯짓하자, 문이 걷혔다.

"이안 경. 일어났나."

"카칸."

여전히 반짝이는 금발과 녹안. 살짝 그을린 피부로 인해 훨씬 건강해 보이는 이안이었다.

기사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자가 자네를 죽이고 싶어 하네."

"역시. 예상대로입니다."

하지만 멈칫. 족장의 말이 또다시 기사의 예상을 빗나갔다. 당장이라도 이안을 끌어내라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기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카칸티르를 돌아봤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안과 그 옆의 베릭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약조하지 않았는가. 전사의 모든 것을 알려주겠노라고. 자네의 그, 붉은머리 부하에게."

"아아. 그렇지요."

"전사란 죽음의 길로 나아가며 살아남는 존재. 우리와 대련하는 건 적의가 없는 이상 한계가 있지."

전투력에는 발화점이 필요했다.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태워야만 했으니까.

그 모든 것에는 생과 사 또한 포함이었다.

"조건이 딱일세. 적의도 있고, 무엇보다 데르가의 기사라 하니 실력만큼은 뭐, 바리엘에서도 인정받는 수준 아닌가."

카칸티르가 보기에는 가소롭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기사 작위가 내려졌다는 건 어느 정도 공인된 자라는 뜻이었다. 크고 작은 마물 전투에서 살아남았으며, 외세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는 뜻이니까.

"족장님. 이게 대체...."

"그대가 이안을 죽이고자 하니, 내 친히 자리를 깔아주지 않나."

기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있음에도, 그들은 저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모멸감에 검 손잡이를 꽉 쥐었고 이안을 노려봤다.

목덜미가 훤하게 드러나 있다. 베기에 좋게끔.

"하. 그렇군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기사는 짧게 헛웃음을 터트린 다음,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데르가가 구금된 상황이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주인을 보좌해야 했다.

채앵!

그때, 베릭이 바로 검을 휘둘러 기사의 검을 쳐냈다. 순간, 환상 같은 불꽃이 튀어 올랐고 베릭은 몸을 낮추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아."

이안은 눈만 꿈뻑꿈뻑. 볼을 긁적인 다음, 기사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베릭 쪽으로 움직이는 시선. 뒤통수만 봐도 얼굴이 눈에 훤했다. 아주 싸우고 싶어 난리인 표정일 터다.

"…나를 죽이려면 베릭 먼저 죽여야 할 것 같은데."

"...?!"

그간 천려족과 모래더미에서 뒹굴며 훈련하긴 했어도, 기사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황궁의 기사들은 베릭과 같이 마검사인 자들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저자도 혹시 모른다. 무슨 능력이 있을지.

"기대되는군. 뭐, 잘 좀 부탁하네."

제35화. 베릭에게 데모샤

기사는 검을 잡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친의 제물에 불과한 이안과 그 똘마니가 천려족에 스며든 것처럼 자연스러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베릭. 잘 할수 있겠어? 오늘 죽는 거 아니야?"

"응, 꺼져. 너나 죽어."

"입 터는 거 보니까 컨디션 좋구먼."

"이봐, 브라츠의 기사 양반! 베릭 혼쭐 좀 내주라고! 정신 번쩍 들게 말이야. 아니면 내가 널 죽일 거야."

"크하하하! 그럼 기사는 이러나저러나 죽는 거 아닌가? 너무 불공평하잖아."

"아아. 그렇지. 맞네."

베릭과 기사를 둥글게 둘러싸고 구경하는 꼴이라니. 마치 투기장의 개가 된 기분이었다. 기사는 카칸티르 옆에 앉아 있는 이안을 보고서,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확신했다. 이런 정세 역시 데르가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퉤!"

베릭은 침을 뱉은 다음 검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아까 기사의 공격을 수월하게 쳐내긴 했다만, 그건 놈이 방심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베릭은 이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이안! 얘 죽으면 답신은 어떻게 보내?"

"튼튼한 쿠실레가 많아. 걱정일랑 말고, 네 목이나 간수 잘하거라.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예예. 그럽죠."

답신 전해주는 것이 문제겠는가?

기사 대신 직접 쿠실레를 타고 달리면 될 일이다. 이안의 말에 베릭은 히죽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카칸티르의 말대로, 살의 없는 전투는 지겨운 참이었으니까.

"살살 봐줘잉. 난 X나 세게 덤빌게."

"말투가 천박하군!"

"그게 내 매력임!"

채앵! 챙!

베릭은 모래를 밟고 단박에 뛰어올랐다. 바람을 가르는 칼날의 궤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기사는 차근차근 베릭의 공격을 막아냈다.

"으아아아악!"

끼이이익!

칼날이 맞물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천려일족들은 흥미롭게 구경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기사! 죽여! 베릭 좀 죽여!"

"으하하핫! 저거 봐라, 저저, 벌써 지쳐 보인다."

"아니거든!"

언뜻 듣기에는 기사를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안과 베릭은 그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카칸티르가 직접 말해주지 않았던가.

"가라! 베릭!"

"어디 한번 굴러봐!"

진정한 전사의 길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베릭이 전사로 거듭나길 바라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드는 미친개 같군."

"칭찬이지?"

퍼억!

"커헉!"

공격을 받아내던 기사가 틈을 노려 베릭의 명치를 팔꿈치로 후려쳤다. 그대로 얼굴을 모래더미로 처박는 베릭. 숨이 쉬어지지 않는지, 꺽꺽대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런. 제대로 맞았나 본데."

"베릭! 마! 일어나!"

"쯧쯧. 까불 때부터 알아봤다."

이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막상 베릭이 저리 쓰러지자, 천려족들의 반응이 험악해진 것이다. 기사는 시간 낭비할 것 없다 여겨, 바로 검을 다잡았다.

고꾸라진 목표물의 목덜미가 훤했다.

쉬이익!

기사의 검이 베릭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베릭은 몸을 틀어 피하면서 기사에게 모래를 뿌렸다. 그리고 바로 갚아 주듯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퍼억!

"뒤지게 아프잖아!"

퍼억! 퍽!

난투로 치닫을 것 같은 흐름에, 기사는 하늘을 힐끔거렸다. 해가 완전히 뜨고 말았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 순간, 그가 베릭과 놀아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성가시게 굴지 마라!"

채앵! 챙!

하지만 문제는 베릭 이놈이 영 만만치 않다는 데 있었다. 됐다 싶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치고 올라오니, 기사는 짜증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으아아악!"

"흐아앗!"

둘의 기합이 동시에 터졌다. 검끼리 맞물리며 서로의 심장을 노린 채 꺾어 들어갔다.

푸욱!

그리고 드디어, 검에 피가 묻었다.

베릭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찌른 기사의 공격. 칼날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기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잡이를 돌렸다.

입가에 슬며시 걸리는 웃음은 덤이다.

"끄아아아악!"

"후우. 실력은 좋으나, 여기까지다."

"으으으! 으아아아악!"

"내가 바빠서."

내장을 후벼 파는 수준이다. 베릭이 맨손으로 칼날을 잡자, 피가 여러 줄기로 뚝뚝 떨어졌다. 이안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천려 일족이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가, 죽이려면 곱게 죽일 것이지."

존중이 없는 전투는 조롱일 뿐이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제일 혐오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베릭은 눈앞이 핑 도는지 머리를 몇 번 털어낸 다음 상처 부위를 내려다봤다.

"…하. X발."

그리고 이를 꽉 깨물며 검을 빼내려고 했다. 그럴수록 기사는 힘을 더욱 깊게 실어낼 뿐. 칼끝이 결국 베릭의 몸을 관통해 뒤로 나오고 말았다.

퍼억!

기사는 그대로 베릭의 몸을 발로 까버렸다. 옆으로 나뒹구는 몸뚱이를 넘어서서는, 이안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카칸티르는 아까와 같이 심드렁한 눈빛으로 턱을 괴고 있을 뿐이다.

"이안 브라츠. 시간이 없다."

그는 허리춤에 찬 단도를 꺼내 들었다. 베릭과 달리, 이안은 이것으로도 충분할 터.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모래바람만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휘몰아칠 뿐이다.

"그대의 죽음으로 데르가 브라츠 백작님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니. 소임을 다하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라."

그가 단도를 위로 쳐들었다. 이안의 시선은 칼끝으로 향했다가, 기사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죽음을 앞둔 자의 반응이 아니었기에, 기사는 저도 모르게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하."

베릭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악마라도 들린 것처럼 고개가 뒤로 꺾여져 있었지만, 두 다리를 제대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꽂힌 검을 한번에 잡아 뺐다.

촤악!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붉지 않은 데가 없다. 베릭은 고개를 천천히 앞으로 내리더니, 힘겹게 중얼거렸다.

"…나, 아직, 안 끝났는데, 개새끼야."

"이제 그만 좀...."

지이잉.

그때였다. 기사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운에 말을 잇지 못했다. 마물 전투에서 기사단장들이 보였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아아악.

살랑이던 베릭의 머리칼이 점점 거칠게 휘날렸다. 바닥에 그어지는 모래 선이 물결처럼 보일 정도다.

"나는 한 방 맞으면 두 방으로 돌려준다."

"젠장! 진짜 더럽게 성가시네!"

"기사, 이걸 쓰시게."

그때, 카칸티르가 웃으며 제 검을 빌려주었다. 베릭의 옆구리에 꽂혔던 기사의 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니까. 기사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고 베릭에게 뛰어들었다.

촤아아악!

"죽어도 혼자 안 죽어!! 나는! XX 새끼야, 너 죽는 거 보고 죽을 거야!"

"닥쳐라!"

베릭이 폭발하듯 힘차게 뛰어올랐다.

이안은 그의 눈이 마력을 불어넣었을 때와 같이 빛나고 있음을 알아챘다. 피떡이 된 얼굴에서, 오직 눈동자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챙! 챙!

"으아아악!"

"이, 뭐 하자는, X발...."

베릭은 엄청난 속도로 밀어붙였다. 겨우겨우 피해가던 기사도 결국을 피를 내고 말았다. 힘이 이전과 달리 비교도 안 되게 묵직한 탓이다.

스쳐 지나가는 칼날을 따라 핏물이 튀었다. 그것이 베릭의 것인지 아니면 기사의 것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죽어어어!"

푸욱!

기사의 어깻죽지를 한번에 관통한 베릭의 공격.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기사가 부들대며 반대쪽 손으로 칼날을 밀어냈지만....

"으아아악!"

기사가 했던 것처럼 베릭 역시 몸으로 무게를 실어 넣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올리며 심장 쪽으로 검을 잡아끌었다. 길고 깊은 자상이 벌어질수록, 기사의 숨결과 함께 피가 쏟아졌다.

"아, 이...."

"하아… 하아...."

베릭은 이를 꽉 깨문 다음 그의 목을 무릎으로 눌렀다. 이내 어깨에서 쭉 빠지는 칼날. 태양을 찌를 것처럼 위로 향했다가, 망설임 없이 기사의 목을 관통했다.

푸욱!

"아, X발, 진짜...."

그리고 모래 위에 벌러덩.

베릭은 아린 옆구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조용하던 주위에서 동시에 환호성과 격려가 터졌다.

"베릭! 잘 했다! 이 싸가지 없는 놈!"

"그래, 끝까지 가 봐야 하는 게 싸움이라고!"

"생각보다 검 잘 쓰네. 베릭, 정신 차릴 수 있겠어?"

"아아. 말 걸지 마. 너무 아파...."

"엄살은! 피 조금 흘리고서는."

"이봐! 얘 좀 옮겨봐. 의원 어디 갔어?"

카칸티르는 그 소란을 지켜보며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그리고 이안에게 고개를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실로 만족스럽게 보였다.

"이안 경이 저자를 데리고 온 이유를 알겠네."

"데려온 것이 아니라 함께한 것입니다."

"하하하. 그래. 역시 전사의 미덕을 그대로 갖췄군. 베릭이라는 자, 실로 예사롭지가 않아."

"성격이 저리 지랄 맞게 독한 자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모래바람이 일렁이고 눈빛이 번득이는 능력을 묻는 것이었으나, 이안은 카칸의 말을 장난스레 넘겼다. 그리고 베릭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베릭. 정신 좀 차려보아라."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딱 튕기자, 베릭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안의 손가락을 깨물려고 했다.

"어허. 어디서."

"…이거 진짜 졸라 아파."

"그래 보인다. 수고했다."

잠재되어 있던 마검사의 능력이 스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안이 마력을 넣어 자극했던 게 점차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베릭은 마지막으로 이안의 손가락을 깨물려고 하다가, 기절해 버렸다.

"좀 옮겨주시오."

"예예. 지혈도 해야겠네."

"얼씨구. 이거 잠든 거야, 기절한 거야?"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 잠이 오겠어? 기절이지."

천려일족이 한마디씩 던지며 베릭을 천막으로 옮겼다. 기사의 시체 위에도 천이 덮였다. 네르사른은 그의 품에서 답신을 꺼낸 다음, 수를 불렀다.

"수. 채비를 하거라."

"아. 제발요."

심부름 시키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수는 손으로 엑스자를 그리며 싫다는 의사를 표했으나, 단호하게 무시당했다. 네르사른이 부하를 불러 지시했다.

"기사의 머리를 잘라서 상자에 넣어라."

"아아악! 그냥 종이만 가져갈게요! 네? 네르사른 님."

"아니, 머리여야 한다."

데르가에게 줄 답신으로는 그만한 게 없었다.

수는 팔짝 뛰며 네르사른에게 매달렸으나, 소용이 없었고 이내 기사의 시체는 토막 났다. 네르사른이 이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때를 보면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화친 파기를 원한다는 걸 알았으니, 데르가는 바로 중앙군과 맞붙을 겁니다. 지원군이 내려오는 중이라 하니 시간 끌어봤자 손해니까요. 조사단 먼저 정리해 놓으려 할 겁니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데르가가 열심히 저항하여 조사단과 중앙군 모두에게 전력 손실을 입히고 척결되는 것이다. 그 상태로 이안이 천려족을 등에 업고 입성하면, 승기의 각도를 더욱 확실하게 가져올 수 있다.

"데모샤!"

기사의 시체를 이고 가던 전사가 이안에게 주먹을 뻗었다. 신의 축복을 빌며, 베릭의 성장을 축하하고, 신의를 다지는 인사였다.

이안은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화답했다.

"데모샤."

피를 쫓는 전사들의 투지가 사막을 더욱 뜨겁게 만들리라. 떠오르는 태양 빛을 잡으려는 것처럼, 이안의 주먹이 굳세었다.

제36화. 발발

밤낮없이 달리고 달려 브라츠 영지에 도착한 수. 그녀는 새벽 동이 트는 시간, 어둠을 틈타 저택에 침입했다. 그리고 나무 위로 올라가 경비들의 동태를 조심스레 살폈다.

'저자들이 황궁 조사단이군. 본채를 숙소로 쓰는 것 같고, 경비가 삼엄한 것이 별채. 이안과 우리가 썼던 건물 아닌가.'

이내 그녀는 창가로 어른거리는 데르가의 모습을 확인했다. 드디어, 등에 지고 있는 찝찝한 시체 머리를 내려놓을 시간이었다. 수는 단박에 나무를 내려가 별채 뒤쪽으로 돌았다.

스윽!

베릭과 한판 떴던 그날처럼.

그녀는 가뿐하게 창문을 타고 데르가가 묵고 있는 층까지 올라갔다. 굳게 잠겨있는 빗장. 안에서 잠근 것이 아니라, 밖에서 때려 박은 것이었다. 수는 단검을 꺼내 나무판자를 박살 냈다.

콰직!

"어머!"

인기척을 듣고 온 메리 부인이 커튼을 치다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이내 달려오는 데르가 백작. 며칠 감금되어 있었다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철컥.

수는 수월하게 창문을 열었다. 데르가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했으나, 그녀는 난간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을 뿐이다.

"자네는 네르사른과 함께 왔던 부하 아닌가?"

"기사는? 기사 벨은 어딜 가고...."

"꼴이 말이 아니시네요. 창문도 못 열게 해요?"

수가 육포를 씹어대며 보따리를 풀었다. 집사가 탈출한 것을 알고, 조사단이 못질을 박은 것이었다. 데르가는 뭔지도 모르고, 수가 건네주는 작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것도 받으세요. 카칸의 답신입니다."

"족장이 뭐라 하던가? 이안은? 이안은 죽였겠지?"

하지만 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석에 숨어서 달달 떨어대는 첼을 힐끔거린 다음, 고개만 까딱이고서 아래로 떨어졌다.

"꺅!"

메리 부인이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으나, 그뿐이다. 추락하는 소리나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처럼 왔던 수는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게 대체...."

"여보, 어서 답신 읽어봐요. 제가 상자를 열게요."

"엄마, 천려족이 우리 도와주는 거죠? 그렇겠죠?"

"쉬이. 첼. 걱정할 것 하나 없단다."

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만, 천려족의 사자가 직접 와주지 않았나. 창문까지 뜯어주고서.

메리는 아들의 머리를 감싸며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데르가가 그릇을 집어 던지지 않았더라면, 계속됐을 기도다.

쨍!

"쳐, 쳐 죽일!"

"여보?"

"아버지, 왜, 왜 그러세요?"

"죽여! 죽여버릴 테다! 내 손으로 목을 분질러 버릴 것이야! 으아아악!"

데르가는 테이블을 거칠게 쓸어버렸다. 허겁지겁 메리의 품으로 숨어든 첼이 두려움에 떨며 울기 시작했다. 백작은 의자를 벽에 내던지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동맹을 파기해? 파기? 더럽고 추악한 야만족 새끼들. 천박한 핏줄 썩은 내가 여기까지 진동하는구나! 받아 처먹을 줄만 아는 것이 개새끼와 진배없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이거지! 이곳만 정리되면 당장 전쟁을-! 단단히 찢어 죽여 짐승 밥으로 던져주마!"

"여보!"

데르가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두서없는 고함에 메리는 그제야 남편을 몸으로 뜯어말렸다. 상처도 상처지만, 더 이상의 큰 소리는 조사단에게 의심을 살 수 있다.

"진정해 봐요. 동맹 파기라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중에 그들의 입지만 곤란해지는 것 아닌가요? 그 정도는 나도 아는 것인데, 어찌하여 족장이 이런 결정을...."

명분이 없지 않나. 명분이.

이런 식의 행태는 저들이 야만족이라고 공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메리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찢어진 답신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가렸다.

"이게 사실이에요? 구룻잎 밀수라니요?"

"젠장! 젠장!"

쾅!

동맹 파기 이유로 거론된 것은 두 가지.

이안의 비(非)입적과 구룻잎 밀반입 시도.

그중 후자가 중대 사안으로 취급되었다. 백작이 직접 화친 대상자인 이안을 사주하여 금수 물품을 빼돌리려 하였으니, 이는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여 동맹을 이어갈 수 없다는 통보였다.

"이안 이 새끼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분명 제 어미 필리아의 사주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들키더라도 꼬리를 자를 수 있게 조치해 둔 것인데, 어찌 뒤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았지?

데르가는 이를 빠득빠득 갈아대며 욕설을 지껄였다.

"저 상자, 열어봐."

"아차, 맞다!"

데르가의 명령에 메리가 재빨리 끈을 풀었다. 희망이 깨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꺄아아악!"

"으아아악!"

하지만 거기 들어있는 것은 처참하게 죽은 기사, 벨의 머리통. 거꾸로 열었던 것인지, 끔찍하게 잘린 목 단면이 위로 향해있었다.

똑똑.

"백작님. 문제 있으십니까?"

그때, 밖에서 조사단원이 문을 두드렸다. 순간 모든 긴장감이 뚝 하고 끊어지는 분위기였다. 전복하기 위해 천려족과 접촉한 것이 알려지면, 즉결처형도 가능했다. 단장의 아량에 호소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벼, 별일 아니다."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조사단원의 말에 메리가 고개를 휙 돌렸다. 뜯긴 창문의 흔적이 여실했다. 그녀는 새된 소리를 지르며 거절했다.

"아, 아, 아니! 나 지금 옷 벗고 있어!"

"…예?"

"나, 나를 모욕 줄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 절대 문을 열지 마시게나!"

"부인. 잠시 시간을 드리지요."

"기다리게! 기다려! 제발!"

메리는 그렇게 외치며 창문을 닫았다. 아래에 흩어진 나무 조각 잔해를 손으로 집어 침대 아래로 던질 뿐만 아니라, 커튼까지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러는 동안, 데르가는 분노에, 첼은 두려움에 휩싸여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흐윽."

그녀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상자 뚜껑을 덮은 다음, 옷장 구석에 밀어 넣었다.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자, 잠깐!"

끼익.

조사단원은 옆구리의 검집에 손을 올리며 문을 열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두 사람 그리고 구석에 웅크리고 훌쩍이는 첼.

"뭐하셨습니까?"

"무엇을?"

단원은 박살 난 의자와 잡동사니를 힐끔거렸다. 분에 못 이겨 난리를 친 모양이다. 천천히 방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소란은 서로 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자중해 주십시오."

"꺼져. 같잖은 게."

"…쉬십시오."

데르가의 노골적인 모욕에도 단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 그래봤자, 데르가는 곧 죽을 목숨이고 그는 주인 따라 출세할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끼익.

"젠장."

데르가는 테이블을 짚으며 현실이 악몽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메리와 첼은 주저앉아 무거운 침묵만 유지했다. 문득, 데르가가 이를 아득아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래, 좋아."

해보자 이거지.

이렇게 나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뿐이었다. 스스로 일어서는 것. 천려족의 도움이고 뭐고, 자신의 영지인 것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사단과 중앙군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바리엘에서 독립하는 것.

어차피 반역 혐의로 찍혔다. 뭐 거리낄 게 있겠나.

오히려 성공하면 중앙으로 개떡 같은 조세 보낼 일도 없으니, 그 얼마나 좋겠나.

"…여보?"

"부인, 당신은 첼과 함께 저택에 남아있어. 비밀창고는 알고 있겠지? 가서 몸을 피한 다음, 내가 찾으러 갈 때까지 절대 나오지 마."

"…여보는요? 가, 같이 가요."

"그래요. 아버지."

"시끄러워!"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났다.

천려족의 도움이 없다면, 그에게 남은 카드란 오직 '시간'. 중앙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조사단을 정리해야 반전의 기회가 있었다.

촤아아악!

데르가는 커튼을 죄다 뜯어 로프로 엮었다. 어리둥절한 메리와 첼은 한 걸음 떨어져 침만 꼴깍 삼켜댔다.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아...."

한데, 막상 나갈 생각을 하니 현실감이 훅 밀려와,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다. 데르가는 대충 묶은 커튼을 창문 아래로 늘어트렸다.

"자. 내려가. 가서 지하창고에 숨어있어."

"여보는...."

"어서!"

데르가의 호령에 메리와 첼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창틀에 올라섰다. 그리고 꾸물꾸물, 어쩔 줄 몰라 하며 천을 잡고 매달렸다. 데르가는 메리와 첼이 나가는 동안, 종이를 그러모아 랜턴 불을 붙였다.

화아악.

조금씩 살아나는 불길. 데르가는 불씨가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부채질까지 해댔다. 연기가 심하게 올라올 때쯤, 그는 창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부인과 첼이 보이지 않았다.

비밀창고로 이동한 게 분명했다.

쿵!

"으윽. 제기랄."

데르가 역시 커튼을 잡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절뚝거리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점점 시커메지는 연기가 식당 연기와 섞여 하늘을 가득 채웠다.

쿵쿵쿵!

"큰일 났습니다!"

본채에서 서류 분류 작업을 하던 에리카가 난데없는 소란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부하의 식겁한 얼굴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백작이 별채에 불을 내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사서 명을 재촉하는군."

"검을 들어라!"

"죽여도 상관없어. 저택 밖을 못 빠져나가게 해."

"필립! 너는 중앙지원군에게 상황을 알려."

"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움직인다."

에리카는 머리를 단단히 묶으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일만 잘 정리되면 저의 저택이 될 곳이었다.

그런데 감히, 불을 내?

"아아악!"

"살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불이야! 불이야!"

"무, 물을 좀 끼얹어! 모래도!"

"데르가를 찾아라! 멀리 못 갔을 것이다!"

촤아악!

별채 아래층은 사용인들의 방이었다. 그들도 데르가처럼 구금되어 있는 상황인지라, 불이 났음에도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

"살려줘! 제발, 제발!"

"아아악! 여기 사람 갇혀있어요! 여기!"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말하라는 거 다 말할게요!"

여기저기서 절규가 들려왔으나, 에리카는 쉽사리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데르가는 사라졌고, 조사단원들은 전력이 흩어졌다. 구조된 사용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수습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단장님."

물과 모래를 끌어 쓰는 부하들 사이로, 화염이 더욱 거세게 솟구쳤다. 에리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을 거듭했다.

"어차피, 데르가가 죽으면 같이 죽을 목숨들."

사실상 누락된 세금을 충당하기 위해 노예시장으로 팔려가겠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똑같지 않겠나.

에리카는 고개를 돌려 정문 쪽을 쳐다봤다.

"화재만 적당히 진압해. 별채다 보니 중요한 자료는 없을 것이다. 구조할 전력이 있으면 데르가를 잡는 게 우선이니까."

"네. 단장님."

"다들 데르가를 쫓아라!"

"소수만 저택에 남고, 나머지는 다 밖으로 가!"

"서둘러라!"

에리카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뒤로 뜨겁고, 끈적하며, 처절한 절규가 불과 함께 타올랐다.

제37화. 대사막의 배신자

"이랴앗!"

데르가는 말 옆구리를 빠르게 차대며 숲으로 내달렸다. 접경한 대사막 쪽과 정반대인, 메렐로프 영지와 인접한 숲이었다. 이전 세대에 그곳을 선점하기 위해 세워둔 임시훈련장이 있다.

데오가 그곳에서 사병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만 해!'

조사단의 압박으로 저택에 있던 병사들은 소집 해제되었으나, 데오를 중심으로 한 사병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데오오오!"

데르가가 말에서 내려 임시훈련장 쪽으로 내달렸다. 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치자, 그는 곧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주위가 조용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이.

"설마, 설마...."

최악 다음에도 최악은 남아있는 걸까?

데르가의 머릿속으로 온갖 끔찍한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도망친 집사가 데오에게 전언을 하긴 했을까? 했다 하더라도, 데오가 도망을....

"백작님!"

그때였다.

훈련장 깃발이 흔들리며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데르가는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들어섰고, 이내 숨어있던 병사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데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천려족은요?"

원래라면 천려족이 당도하여 조사단을 흔들 때, 후방에서 전력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중앙군과의 전면전은 대항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에, 완충작용으로 천려를 중간에 끼우려 한 것이다.

"불발되었다. 녀석들이 배신했어. 서둘러 중앙군이 오기 전에 저택을 탈환하여야 한다. 1황자 마리브 저하의 답장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해."

변경이라는 이유로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또 변경이라는 이유로 할 만했다. 브라츠는 다른 영지보다 병사 수가 두세 배는 많았고, 특이한 지형으로 인해 변수가 많았으니까.

그뿐인가?

천려족의 존재로 인해 언제고 전시에 들어설 수 있는 준비성도 철저했다. 갑작스러운 조사단의 습격에도 병사들을 결집할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증거다.

데르가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제 영지와 병사에 자부심을 느꼈다.

"명 받들겠습니다."

"중앙군과 달리 조사단의 병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아. 가자. 가서 다 죽여버려. 갈기갈기 찢어 짐승 먹이로 만들 테다."

데오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언제나 전쟁을 원하는 자는 존재하기 마련. 그리고 지금은 데오가 그러했다.

'이번 전투에서 이기면, 군 통솔권은 확실히 나에게 오겠군.'

그렇다면 브라츠 영지에서는 데르가 다음으로 권세를 누리게 될 것이다. 첼? 그 덜떨어진 게 후백작이 된다 하여도 이날 데오가 흘린 피와 땀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 역시 밑바닥 출생, 인생의 정점을 눈앞에 둔 사내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가자! 우리의 일상을 되찾으러!"

"우아아아아!"

데오가 소리치자 병사들의 함성이 파도처럼 메아리쳤다. 조용했던 산이 울릴 정도로 거센 기합이다. 산새들이 놀라서 날아올랐고, 그 사이를 거대한 매 한 마리가 유유자적 돌고 있었다.

휘이익.

저 멀리, 길게 이어진 중앙군의 행렬이 매의 눈동자에 담겼다. 수 대째 내려온 브라츠 영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을, 자국끼리의 혈투가 성큼 다가왔다.

그걸 지켜보던 수는 손을 뻗어 매를 받아냈고, 쿠실레의 머리를 대사막 방향으로 고정했다.

* * *

베릭의 몸이 식은땀으로 절어있었다. 노쇠한 의원은 약초를 뭉텅이로 집어서 구멍 뚫린 옆구리에 쑤셔 넣었고, 알 수 없는 검은 물을 계속 입에 흘려 넣었다.

카칸티르는 막사 입구에 기대 그 모습을 보더니만, 넌지시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얼마나 걸리겠나? 한 달?"

"카칸이시여. 천려의 일족이 아닌 자들은 회복력이 낮습니다. 일반인이었다면 아마 즉사했을 터지요. 하나 성깔 까랑까랑한 것으로 보아, 서너 달은 보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너 달이라. 이안 경, 좀 난감하겠군."

데르가와 중앙군의 전투가 일촉즉발이었다.

이안이 천려족을 등에 업고 간다고 하더라도, 그의 개인적인 전력은 베릭뿐.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마저도 없다면....

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베릭의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땀과 모래가 엉켜 엉망이다.

"괜찮습니다."

"생각이 따로 있는 모양이군"

"베릭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못 일어나면 못 일어나는 대로. 방법은 늘 있지 않겠습니까."

카칸티르는 밖에서 부르는 네르사른의 목소리에 자리를 떠났다. 의원 역시 계속해서 피에 절은 약초를 갈아대며 베릭을 치료했다. 시간이 갈수록 베릭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창백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만 보고 계시오. 약을 새로 갈아야겠소."

의원은 이안에게 당부한 다음, 잔해를 잔뜩 이고 밖으로 나갔다. 조용해진 공간. 이안은 숨을 들이쉬며 베릭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잘 될지 모르겠다. 베릭.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전에 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마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 상태가 심하지만 분명 도움은 될 것이다. 베릭은 마검사로서의 능력을 스스로 보이지 않았던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과가 뚜렷하리라 믿고 싶었다.

지이잉. 지잉.

이안은 마력을 발동했다.

조금씩만 밀어주었던 이전과 달리, 계속해서, 계속해서. 덕분에 숨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내쉬는 기분이었다.

"아...."

몇 분 지났을까?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쏟아지고,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베릭은 반응이 없다. 이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손을 떼었다.

차악.

"뭐하시오? 이안 경. 괜찮으시오?"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의원이 멈칫거리며 물었다. 이안은 침대 끄트머리를 지탱하며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괜찮네."

"왜, 왜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그러하오. 신경 쓰지 마시게."

"잠시만 기다리면, 내 약초만 갈고 바로 현기증에 좋은 것을 가져오겠소. 어어? 이놈 봐라?"

헝겊을 갈던 의원이 베릭의 얼굴을 보고 멈칫거렸다. 끙끙 앓으며 기절했던 것이, 꽤나 안정적인 숨을 되찾지 않았나. 그가 축축한 약초를 손으로 매만졌다. 피가 훨씬 덜 묻어 나왔다.

"이놈 대체 뭐요?"

"…베릭?"

"이름 말고. 내가 전투를 직접 보지는 못했소만, 다들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대던데."

의원이 중얼거리며 치료를 이어갔다. 대답을 원하는 듯 힐끗거렸으나, 이안은 힘이 쭉 빠지는 탓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카칸?"

카칸티르가 손에 뭔가를 쥔 채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이안의 상태를 보며 의아하게 웃었다.

"이런. 모자라려나?"

"무엇이 말입니까?"

카칸티르는 말없이 둥근 촛대 위에 구룻잎을 올렸다. 바사삭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막사 안을 가득 채웠다. 족장은 잎을 잘 만 다음 베릭의 코에 대주었고, 이내 이안에게도 건넸다.

"천려가 죽음을 피하는 방법일세."

"베릭에게도 효과가 있을까요?"

"글쎄. 외부인이 피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연회에서 보니까, 반응이 좀 있는 것 같던데."

고통을 잊게 해주며 온몸의 기운을 단번에 끌어올리는 일족의 비기. 그들은 자체로 강하지만, 구룻잎이 주는 효과를 무시할 순 없었다. 하여, 브라츠와의 무역에서도 구룻잎만큼은 금수 물품으로 지정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걸 외지인에게 나누어주다니.

의미가 남다르고, 감회가 새로웠다.

"감사합니다."

이안은 잎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씁쓸한 맛에 이어 시큼하고 톡 쏘는 맛이다. 카칸티르는 그런 이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다음, 말을 이었다.

"수와 함께 보냈던 률이 먼저 돌아왔네. 수는 접경지에서 대기하기로 했어."

"그 거대한 매 말씀이십니까."

"그래. 경의 말대로, 데르가가 궁지에 몰렸더군. 병사를 모은 것 같네만."

브라츠의 전력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저택에서 살면서 보고 들은 게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병 유지에 얼마씩 들이부었는지를 봤기에,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중앙군은요?"

"그건 아직 보고가 없었네."

문제라 함은 중앙군과 조사단의 규모. 그걸 알아야만 대략적인 교전 상황을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이안은 심장이 조금씩 세게 뛰는 걸 알아채고 구룻잎을 뱉었다.

"며칠 간은 시간이 있으니 좀 쉬게."

이안은 카칸티르가 나가자마자 옆으로 쓰러져 몸을 말았다. 의원이 슬쩍 보며 담요를 어깨까지 올려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아아악.

이안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찬 바람에 눈을 떴다. 밤이 어둑했다. 의원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초는 꺼져있다. 희미한 구룻잎 냄새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베릭?"

베릭은 더 이상 식은땀을 흘리지 않았으나,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이안은 침상에 등을 기대고 몽롱한 잠을 깨우려 얼굴을 비볐다.

스윽.

그런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안을 깨운 것이 바람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가만히 입구 쪽을 노려보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베릭이 벗어놓은 혁대에 단검이 달려있었다.

"누구지?"

대답이 없다.

이안은 쏟아지는 달빛을 뒤로하고 천천히 입구로 걸었다. 길게 늘어지는 이안의 그림자. 문 앞에 누군가 있음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젠장. 이해가 안 되는데.'

필시 바깥의 존재는 천려족일게 분명했다. 대사막에서 일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는 그들이 유일했고, 설령 데르가가 첩자를 보냈다 한들 천려의 경계를 뚫고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안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낮만 해도 구룻잎을 내줄 만큼 이안과 베릭에게 호의적이었건만, 어찌하여 바깥의 존재는 살의를 띄고 있단 말인가.

촤악!

문을 걷어 올린 것은 바깥쪽이었다. 이안이 머뭇거리고 있음을 알아채고, 먼저 행동한 것이다.

털가죽으로 만든 가면 그리고 어깨를 감추는 깃털. 사내는 바로 검을 휘둘러 이안에게 덤벼들었다.

챙!

"윽!"

막아냈다기보다 운 좋게 쳐냈다는 게 맞겠다.

이안이 반사적으로 휘두른 단검은 반으로 부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괴한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는 이안의 얼굴을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은 다음, 다른 쪽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쿵!

"으읍!"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아예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이안의 발이 공중에서 버둥거렸다. 숨이 꼴딱 넘어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감히 누가 황제 이안의 목덜미를 잡았겠는가.

"천출이면 천출답게 처박혀 있을 것이지, 어디서 간계를 부려?"

목소리가 영 낯선 건 아니었다.

"지금 네놈이랑 저 빨간 대가리 때문에 일이 얼마나 꼬였는지 알아? 하여간, 이래서 제국 놈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네놈 아비도 그래."

데르가를 언급한다?

이안은 밀어내듯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털가죽 가면이 마력을 무력화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지만....

지이잉. 지잉.

"지금이라도 조용히 죽-!"

솨아아악!

펑!

이안은 폭발시키듯 마력을 쏟아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괴한의 몸이 뒤로 밀리고, 덩달아 이안 역시 공중에 붕 뜨며 떨어졌다.

쿵!

"…젠장."

이안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콜록였다. 잘못 떨어졌는지 팔목이 아릿하다. 동시에 막사 밖에서 불빛이 하나, 둘씩 켜졌다.

잠귀가 밝은 천려족이 소란을 느끼고 깨어난 것이다.

제38화. 새로운 이유

"자네도 들었나?"

"이안 님 막사 쪽 소리였지?"

잠에서 깬 천려족 두세 명이 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왔다. 헛걸 느낀 게 아닌 모양이다. 그들은 서둘러 이안과 베릭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이내 반쯤 걷혀있는 입구를 확인했다.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문제 있어요? 베릭, 죽은 거 아니죠?"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보이는 광경. 웬 정체 모를 자가 바닥에 뻗어있고, 이안은 붉게 오른 목덜미를 부여잡고 기침을 해댔다.

"콜록!"

"이, 이안 님? 뭡니까?"

"그자, 그자 제압… 갑자기 날 죽이려고...."

그제야 바닥에 널브러진 단검 조각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바깥에 상황을 알리고, 사내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잠에서 깨니 날 죽이려고 했다네."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대체 어떻게 쓰러트린 겁니까? 이안 님은 훈련도 안 받으시잖아요."

"…어쩌다 보니."

이안은 대답하기 힘든 척 괜히 목만 매만졌다. 이내 일족의 모든 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카칸 역시 하의만 입은, 가벼운 차림새다.

"무슨 소란이냐? 누가 이안 경을 습격했다고?"

"카칸! 이자입니다. 들어왔을 때부터 이러고 뻗어있습니다."

"등신인가? 뭐 하는 놈이야?"

"그러게...."

"누구지? 얼굴이 안 보이니 원."

악의적인 의도 없이 순수한 물음이었다.

솔직히 전투력으로 봤을 때는 천려의 어린아이도 이안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덩치로 뭘 잘못 얻어터졌기에 기절했단 말인가?

"가면을 벗겨라."

카칸티르는 난생처음 겪는 일에 당황하면서도 이안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앞으로는 출전도 출전이지만, 그들은 이안을 '손님'으로 대접하겠노라 맹세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그것만큼 불명예스러운 것도 없다.

스윽.

"헉!"

부하가 가면을 벗기자, 다들 놀라서 입을 가렸다.

부마트였다. 네르사른의 둘째 계모의 사촌 형제이자, 식량 관리 총책임자인 사내. 이안 역시 단박에 그를 알아봤다. 귀환식에서 저를 뚫어지라 보던 자 아닌가. 영 찜찜하여 기억에 남아있었다.

"…부마트를 옮겨라. 날이 밝는 대로 심문할 것이다."

카칸티르의 명령에 부하 셋이 달려들어 부마트를 끌어내렸다. 함께 나가려던 족장이 이안을 돌아봤다.

다른 자도 아니고 부마트였다. 일족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전사란 말이다. 그런 그와 맞서 상처 하나 없이, 그저 흐트러지기만 하다니.

"이안 경. 자네가 부마트를 제압한 것이 진실인가?"

"어쩌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제국에서는...."

카칸티르의 눈동자가 슬쩍, 베릭으로 향했다. 이제 좀 감이 잡혔다.

"기적을 행하는 자를 마법사라 부르던데."

"대사막에서 거짓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묻지 말라 돌려 말하는 것인가."

"바리엘로 돌아가 적당한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존재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지금은 살아온 시간이 달라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제국 내에서 마력운용자, 즉, 마법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몰라서 저런 반응일 터다. 그 아무리 천한 핏줄일지라도, 황궁의 주축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 그것이 마력의 사회적 힘이었다.

"그러지. 무엇보다 지금은 내부의 일이 더 중요하니. 쉬시게나.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든, 편하게."

"감사합니다."

카칸티르는 기대한다는 듯 가볍게 웃고 막사를 나섰다. 소란이 정리되는 와중에도 베릭은 입을 떡 벌린 채 자고 있었다.

"크어억."

"하아."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찬 것으로 보아, 회복이 되긴 되고 있나 보다. 옆구리에 구멍 뚫린 것 치고는 상당히 상태가 좋아 보였다.

이안은 그제야 탁상 위에 놓인 새 구룻잎을 발견했다. 몇 개는 등불에 태우고, 다시 몇 개는 잘 말려 베릭의 코 아래 대주었다.

* * *

쏴아아!

어둠이 가시자, 카칸티르의 부하들이 부마트의 얼굴에 모래를 끼얹었다. 보통은 물을 뿌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대사막 한가운데. 이안은 괜히 자신의 볼이 따가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신 차릴 때까지 부어라."

"네. 카칸."

모래가 끝없이 쏟아져 부마트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그제서야 겨우 움찔거리며 정신을 차리는 사내. 카칸티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찬찬히 뜯어 살폈다.

"부마트."

"아...."

사지를 결박하여 부목을 세워둔 상태다. 부마트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더니, 이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부마트. 자네가 새벽에 이안 경을 공격한 것이 맞나?"

부마트는 대답을 망설였다. 인간의 혀는 거짓을 고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윈첸이 있었으니까. 카칸티르는 심문을 토대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게 분명했다.

"카칸. 일단 이것 좀 풀고...."

"대답. 허튼 말을 하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망설임이 없는 냉정함이었다. 부마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입술만 깨물다가, 결국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

"침묵을 택하겠다?"

지랄 맞다. 한 손으로도 죽일 수 있는 상대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여지는 남아있다. 동기만 밝혀지지 않는다면, 이안을 공격한 것에 대한 벌만 받고 끝날 것이다.

그것이 곧 부마트 자신의 오른팔일지라도.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

"진심인가?"

"카칸. 나를 아직 가족이라 여겨준다면, 더는 묻지 마시고 내 팔을 가져가십시오. 이안 저자, 기이한 힘을 썼습니다. 누, 눈이 금안으로 변하고 공기가 응축하며 순간적으로 터지는 것이, 분명 미심쩍은 자입니다."

카칸티르는 부마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수군덕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묻지 않은 걸 말하는군. 부마트. 자네 꼴이 지금 얼마나 추한지 알고는 있나?"

일족이 모두 보는 앞에서 모래더미에 묻힌 채 주절주절. 명예와 영광을 우선으로 하는 전사였다면 혀를 깨물고 죽었을 것이다.

부마트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안이 손을 들었다.

"제가 증언해도 되겠습니까."

"말하시게나."

"분명, 데르가를 입에 올렸습니다."

팔 하나 내어주고 비밀을 막을 정도라면, 그 뒤에 더한 게 숨겨져 있다는 의미였다. 이안의 발언에 다들 동요하듯 술렁거렸다.

"제가 카칸에게 제안한 것을 간계라 표현하고, 그를 저지하려는 듯 보였으니 아무래도 데르가와 모종의...."

이안은 뭔가 생각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카칸티르는 참을성 있게 그를 기다려주었고, 부마트는 침을 꼴깍 삼킬 뿐이다.

"혹시 부마트, 데르가에게 서신을 보낸 적 있나?"

이안이 인장을 훔쳐 찍기 위해 집무실로 숨어들었던 날. 서랍 안에서 천려어로 쓰인 서신을 발견하지 않았나.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여 족장 다음으로 올 자가 누구인가?'라 쓴 서신을 데르가의 책상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부마트, 혹시 자네인가?"

모두의 시선이 무릎 꿇고 있는 부마트에게 쏟아졌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안을 한껏 노려보더니, 이내 심호흡 후 혀를 깨물었다.

"막아라!"

데르가의 이름이 나온 직후부터, 전사의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시간은 지났다. 부하들이 단박에 손가락으로 혀를 누르고 천을 쑤셔넣었다.

"읍! 읍읍!"

"부마트! 진실입니까?"

"말 시키지 마! 천이나 더 쑤셔 넣어!"

"젠장, 이게 대체...."

일족들이 충격과 배신감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신을 갖고 추측했다.

황궁에서 비일비재하게 봤던 일들이었다.

"윈첸 부족장님의 건강이 악화된 게, 부마트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자가 식량 담당자라 하지 않았던가요?"

윈첸을 죽이고 부족장 자리를 갈아 치운다라…. 확실히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부마트가 유력한 후보자긴 했다.

"데르가와 어떤 결탁을 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부마트에게는 족장이라는 영광을, 데르가에게는 경제적인 이득이 약속되었을 겁니다."

카칸티르는 침묵한 채 부마트를 응시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이내 일어서서 부마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었다.

"…아무도 들지 마라."

그가 향하는 곳은 윈첸의 막사.

부하들은 긴장한 채 안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이내, 카칸티르가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핏물을 뒤집어 쓴 상태였고 손에는 부마트의 목이 달려있었다.

"사막에 던져버리고 부마트의 가족 역시 끌고 와라."

"…예. 카칸."

장례를 치러주지 않고 짐승 먹이로 던진다는 것은, 그가 반역자임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카칸이 부마트의 머리를 던지자, 일족들이 지나가며 침을 뱉어댔다.

"이안 경. 잠시."

카칸티르의 부름에 이안이 자리를 옮겼다. 그는 네르사른이 건네주는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일정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소."

"어떻게 말씀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대가 브라츠에 무사히 입성하고 입지를 다질 때 힘을 실어주는 것뿐이었지."

중앙군과 직접 대립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천려족도 그들의 싸움에 제대로 끼어들 수 밖에 없다.

"데르가의 숨은 우리가 거둘 것이다."

"아."

감히, 앞에서는 화친을 맺는 척 카칸티르를 기만하고 그들의 가족과 결탁하여 정신적 지주인 윈첸을 죽이려 했다. 구룻잎 밀수 반입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합니다만, 힘들 수도 있을 겁니다."

"어째서지?"

"데르가의 죄명이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그자를 처단하기 위해 보름이나 내달려 황궁 조사단이 내려왔는데, 정작 변방의 외세가 먼저 처리하면 입장이 퍽 우스워지지요."

반역자의 처형식은 보다 화려하고, 잔인하며, 엄숙하게 열렸다.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데르가의 죽음인데, 그걸 변방의 부족에게 넘길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도 우리는, 나는, 직접 데르가를 죽여야겠다."

"…정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카칸티르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보였다.

"원래 목적대로, 제가 브라츠 영지를 차지하면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식적'으로 말입니다. 그리된다면 처형식에 제가 관여할 수 있고, 천려족의 의지를 받들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경을 도와야 한다는 거군."

"말씀이 과하십니다. 제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지요."

카칸티르는 이안의 넉살 좋은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다기보다, 앞으로의 상황이 기대된다는 웃음이었다.

"좋네. 해보자고."

"데모샤."

"데모샤."

이안과 카칸티르가 주먹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의원이 다가와 이안을 불렀다.

"베릭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벌써?"

"정신만, 어찌 차렸습니다."

"…아."

이안은 미묘한 어폐를 알아차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39화. 전투의 시작

"우에에엑."

베릭은 발작하듯 일어나 헛구역을 해댔다. 옆에서 책을 읽던 이안이 물을 챙겨주며 그를 지켜봤다.

막사에 돌아왔을 때는 의원의 말대로 '정신만' 겨우 차린 상태였다. 몸에 구멍 뚫린 것치고는 그것도 대단하다 싶었는데....

"괜찮나?"

"속 울렁거려...."

"대체 왜?"

"몰라. 의원이 약에 술 탄 거 아님?"

시간이 갈수록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는 몸 상태. 여전히 침대 아래로 내려올 수는 없었지만, 말하는 본새나 태도로 보아 목숨은 확실히 건진 것 같다.

"허리는 좀 펼 수 있겠어?"

"아예 힘이 안 들어가는데. 한번 줘볼까?"

"안 돼. 상처가 터질 수 있다."

"윽. 무슨 약초를 이렇게 많이 쑤셔 넣었어?"

베릭은 손끝으로 느껴지는 풀 찌꺼기에 질색하며 꿍얼댔다.

이안은 빈 컵을 든 채 그를 찬찬히 살폈다. 마검사가 일반인보다 전투력이나 회복력이 월등한 건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는데....

'이 정도였나?'

의아하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로 쾌유하는 속도가 엄청났다. 의원도 놀란 눈치였으니, 천려족도 이러진 않을 터.

"베릭. 너 부모의 얼굴을 알고 있느냐?"

"응? 알고 있지. 다 죽었지만, 기억은 해."

날 때부터 천애 고아가 아닌지라, 제 어미와 아비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추억이라 하기에는 더러운 기억도 확실히 간직했고.

베릭의 대답에 이안은 더더욱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면 인외의 피가 섞이지 않았나 의심이라도 할 터인데 말이다.

"…그랬어."

"응?"

이안이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베릭이 중얼거렸다.

"왼쪽 오른쪽 둘 다 쑤실 걸 그랬다고. 시발 새끼, 내 옆구리에 구멍 홀라당 내놓고 지는 편히 눈감았다 이거지. 이름이 뭐더라? 벨?"

베릭은 서로 한방씩 주고받은 게 억울해 보였다. 벨은 죽었고, 저는 살았으면서. 이안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베릭은 더더욱 이를 갈았다.

"기사 새끼들,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구먼. 훈련을 하긴 했나 봐. 그나저나, 브라츠로 언제 돌아가?"

"곧.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어."

"응.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중앙군이 내려오고 있고, 데르가가 병사를 결집했다는 정보까지 들었다. 수가 접경지에서 정보를 보내주고 있지만, 실시간이 아닌 터라 자세히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최대한 빨리 떠날 것이다."

"좋아좋아. 여긴 너무 덥다고."

"베릭. 널 데려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뭐?! 왜?!"

베릭이 고개를 휙, 돌렸다가 반사적으로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일반인이었다면 죽는 게 당연할 정도로 깊은 상처 아니던가.

"걷지도 못하니까."

"이거 내일이면 걸을 수 있을 듯."

"걷는 게 능사가 아니다. 검을 쥐어야 해. 브라츠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이곳에서 치료에 전념하거라."

"싫어!"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리치는 베릭. 하지만 이내 고통스럽다는 듯 발라당 누워 몸을 말았다..

"아오, 씨...."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어어어? 이거, 나 이용하고 버리네. 파렴치한, 배신자, 똥 덩어리."

이안이 희미하게 웃자, 베릭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영락없이 고집 피우는 아이의 모습이다.

"혹시 네가 신세 졌던 주점의 주인이 걱정된다면, 내가 따로 알아보마."

떠나올 때 저택 일을 그만두라 이르긴 했지만, 해나와 사용인들이 그리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전투가 나면 암묵적으로 중립 구역인 은행가 근처로 피신할 터. 이안의 위로에 베릭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러면?"

"중앙군! 백작 사병! 거기에 천려까지 껴서 한판 제대로 붙는데 나 혼자 여기서 손가락이나 빨라니. 거,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전장을 누비며 지르는 기합, 시원하게 썰리는 칼맛, 온몸으로 부딪히며 생사를 오가는 짜릿함. 그 모든 걸 기다리고 기다려왔단 말이다.

"절대 반대. 반박 안 받음. 나 들고서라도 가. 솔직히 따지면 너랑 나, 엉? 사제지간 아니냐? 선생이 어떻게 제자를 버려어!"

"베릭. 상당히 놀랍구나. 선생 대접이 이딴 식이라니. 엄밀히 따지고 보면 주종관계인데…. 뭐 그것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다."

"마력 쓰게 해준다 했잖아! 하루하루가 아깝다고!"

"기억 안 나는 건가?"

"뭐가? 딴소리 하기만 해봐, 콱 씨...."

"벨과 싸울 때, 스스로 마력을 냈다."

"…누가?"

"네가."

이안의 말에 베릭이 눈만 끔뻑거렸다.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아, 필름이 중간중간 나간 게 분명했다.

이안은 웃으며 그의 이불을 정돈해 주었고, 이내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네르사른을 발견했다.

"이안 경."

"네르사른 님."

"잠시 바깥으로."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카칸티르가 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깊게 들이쉬는 숨. 비릿한 피 냄새가 역력했다.

"시기가 완벽하다."

"카칸티르 님?"

"이안 경. 데르가가 사병으로 저택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하오. 조사단에서는 농성하는 중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중앙지원군을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는 것 같네만."

"조사단은 말 그대로 조사를 위해 먼저 내려온 선발대입니다. 전면전으로 대응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중앙군도 지금쯤이면 당도했겠습니다."

"문제는 영지민들의 기류인데."

"영지민들이오?"

이안의 물음에 카칸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영지 중심으로 모여 무기를 잡았다 하네만."

"아아. 그곳에는 은행이 있어 그렇습니다."

"은행?

덩달아 긴장했던 이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그들끼리 내부 분열이라도 일어난다면 정세를 읽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삼파전이 아닌, 사파전으로 가면 그만큼 불확실성도 높아질 터.

"바리엘의 금융 인프라를 담당하는 하이만 뱅크라는 곳입니다. 어느 지역이든 무조건 하나 이상씩 입점해 있습니다. 아마 디온이란 지역일 겁니다."

"우리는 브라츠 뒤쪽의 지역을 잘 모르네."

"디온에서 반란이 일어난 적 있는데, 소란 속에서 은행이 아주 박살 난 적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하이만 뱅크는 디온 반란과 관련 있는 자에게 은행 업무를 거부하였죠."

반란 가담자들은 예치해 두었던 재산들은 물론이고, 모든 경제적 활동을 현물로만 쓸 수밖에 없었다. 동전닢 수백 킬로그램을 지고 옮기거나, 소실되어도 추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바리엘에는 은행업을 하는 가문이 딱 거기뿐이지요. 반란 가담자들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몇 년 안에 반란군의 기세가 기울었고, 바리엘은 반란군 진압에 성공했습니다."

"그 은행이 성역이라 이거군."

"그렇습니다. 신전과 더불어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영지민들이 그곳으로 몰려든 연유가 바로 그것일 겁니다."

그 말은 곧, 브라츠 영지에 물드는 피 냄새가 만만치 않다는 걸 뜻했다. 이안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은행의 가호를 받지 못한 영지민들은 시간이 갈수록 데르가의 편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바리엘의 중심은 황궁이었으나, 브라츠의 중심은 데르가였다. 백작의 사병이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으며, 친구였으니. 터전이 망가질수록 이전의 삶을 찾으려는 욕구가 강해질 것이다.

"바리엘로 들어간다."

"바리엘로 돌아가겠습니다."

카칸티르와 이안이 동시에 말하자, 네르사른을 비롯한 부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다시금 시선을 나누며 같은 말을 내뱉었다.

"바로 내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