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황제의 마지막
이안은 소년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성년이 되기 전 목이 베였다.
황제 이안 베로시온의 삶은 저 두 문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격변의 시기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어린 황제를, 그 누가 기억이나 하겠냐마는.
지하 감옥으로 들어선 사내가 이안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피 칠갑으로 엉망이었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형형했다.
"이안 숙부."
사내의 이름은 크로니. 개같이 꼬인 족보 탓에 이안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조카였다. 그가 머리채를 살살 흔들 때마다, 이안의 입에서는 피 섞인 침이 뚝뚝 떨어졌다.
"어쩌다 이리되셨습니까? 그러니 제가 말했지요. 숙부는 황제가 될 덕목이 없으니 자리를 거절하는 게 좋을 거라고. 그때 제 말 들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이안은 대답 없이 크로니만 가만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크로니는 이안의 얼굴을 거세게 후려쳤다.
짜악!
"아무리 생각 없는 철부지 십대라 한들, 누울 자리는 보고 발을 뻗어야지요! 그깟 마법!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 세상에서 신이 남긴 흔적이라 할 정도로 숭고하고 위대한 힘.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안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숙부, 보십시오! 그 잘난 마법이 내 발길질 하나 못 막지 않습니까?"
퍼억! 퍼억!
사실이었다. 이안의 사지를 묶은 마력 봉인석 족쇄 덕분에, 그는 지금 열아홉 살의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봉인석을 푼다 한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터라 끝은 정해져 있었다.
"만 명 중의 한 명이 어쩌고, 최초의 귀족 마법사가 저쩌고!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 칼날 앞에서는."
스윽.
크로니는 결국 검을 빼 들었다. 아무리 반역으로 몰락한 황제의 처지라 한들, 이런 지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다니. 이안은 어이없게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웃어?"
"…그래. 우습다. 크로니. 나도 그렇지만, 그대도 변한 게 없어. 아직도 내가 마법사라는 게 그리 부럽나?"
이안의 말에 크로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희소성이 높을수록 귀하듯,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리엘 제국 전체에서 백 명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소수인 존재.
그렇다 보니, 귀족 집안에서 마법사가 나온 것은 대제국 바리엘의 역사상 처음이었다.
"기억나는군. 마력운용자였던 아이 시절, 아무것도 몰랐던 내게 넌 이렇게 얘기했지. '마법사는 귀하지만 대부분 천민 출신입니다. 들키면 저택에서 쫓겨날 것이니 숨기십시오.'라고."
"…이안.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겁니까."
"웃기지 않나? 당연히 귀족보다 천민의 수가 압도적이니 마법사 역시 천민 출신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데."
"그만 닥치시오!"
"왜, 부끄럽나?"
"닥치라고!"
퍼억!
이안의 시야가 캄캄해졌다. 크로니의 주먹이 눈을 제대로 때린 탓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이안의 뒤통수가 잘근잘근 밟혔다.
"알게 뭐란 말입니까. 나는 지금 이리 서 있고, 그대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으니. 이것이 중요하지요."
크로니는 칼끝을 이안의 목덜미로 겨누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숨통을 끊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크로니 님. 힐론 공작에게 서신이 왔습니다."
"…급한 일인가?"
"네. 송구하옵니다."
크로니는 혀를 쯧, 차며 이안의 뒤통수에서 발을 치웠다. 그리고 죽은 듯 꼼짝하지 않는 이안을 힐끔거린 채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찰칵. 찰그락.
"이안 님...."
낯선 쇳소리와 익숙한 목소리. 이안은 겨우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고개 돌릴 힘도 없었다. 시선만 겨우 옮기니, 마법부 장관인 나움이 울먹이며 족쇄를 풀고 있었다.
"이안 님.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보십시오."
"나움, 여긴… 어쩐 일인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서둘러 몸부터 피하시고, 사셔야 합니다. 이안 님, 제발 힘 좀 어떻게...."
하지만 봉인석 족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작은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나움의 손을 비췄다. 손끝이 녹에 다 까져 엉망이다.
"…그만하게."
"이안 님?"
"…나는 그만하고 싶어."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법부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생생히 떠올랐다.
"고맙네, 마력운용자에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자네들 덕분이었어. 비록 내가 모자라 이리되었지만, 그대들은 계속 살아남아 바리엘 제국을 지켜주게."
"아니요. 안 됩니다. 이안 님 없으면 마법부의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 제 마력 좀 받으십시오. 죽으면, 죽으면 다 끝이라고요...."
죽으면 다 끝이라니. 그것이야말로 이안이 참으로 바라는 것이었다. 너무 힘들고, 지치고, 고단했다. 황제로서 살았던 지난 3년간의 삶이 이안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안 님. 제 말 잘 들으십시오."
하지만 나움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안의 턱을 조심스럽게 쥐며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제2황궁 중앙 본관 옆에 마법부 직속 별채가 있습니다. 아시지요? 이안 님이 처음 황궁에 들어와서 울고 싶을 때마다 찾았던 곳 말입니다."
"…딱 한 번 울었는데."
"그래요. 어쨌거나요."
왜 울었더라?
이안은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연 기억을 더듬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나움이 뭔가를 느낀 듯 감옥 입구 쪽을 살폈다. 볼일을 마친 크로니가 다가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결계를 풀고 서둘러 몸을 숨기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안 님, 그쪽으로 가십시오. 가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안의 말에 나움은 그저 침묵으로 대답했다. 지하감옥의 어둠 때문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으로 그의 얼굴이 짙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안은 몽롱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들며 다시금 나움의 소매를 붙잡았다.
"나움, 내가 물었다."
"마법에 제 피를 섞었습니다."
"…나움!"
"답이 오기를, 그쪽으로 오면 기회를 열어준다고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그곳인지는 모르겠어요. 제 능력 부족인 탓도 있겠지만요. 아무튼, 서두르셔야 합니다."
존재 자체만으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마법의 힘. 조금이라도 힘의 균형이 어긋났다간 심연에 빠지고 말 것이다. 교황청에서는 그것을 지옥이라 부르고,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영속의 저주라 불렀다.
"시공간을 비틀었단 말인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안 님, 그러니...."
"어째서, 어째서!"
끼익.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마법부 새끼들, 다 솎아낸다고 해도 장관이라는 자가 이렇게 나오면 소용없는 일 아니겠어?"
크로니였다. 그의 뒤에는 나움의 뒤를 이어 마법부 차기 장관으로 추대 중인 사내가 서 있었다. 나움이 이를 꽉 깨물며 마법 진을 주문했다. 손끝에서 일렁이는 파장. 어지러운 문양이 흐트러지며 이전과 같이 빛나지 않았다. 이안의 손목을 죄고 있는 봉인석의 기운이 워낙 강한 탓이었다.
"나움! 제발! 안 된다!"
"이안 님. 괜찮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언제나 있어요. 신께서는 답 없는 문제를 내려주지 않습니다."
우우우웅!
나움의 마법진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꽃은 크로니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움의 손을 태워 먹고 있었다.
"으아아악!"
"…안돼! 나움, 잠깐만! 그만!"
이안은 엎드린 채 고개만 쳐들어 소리쳤다.
자신의 목숨에는 미련이 없었으나, 그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황제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왕관의 무게는 이안을 따르는 자들이 보내는 신의의 무게였노라고. 그리고 그걸 버티고 있는 것 또한, 이안이 아니라 그들이었노라고.
화아아악!
"윽!"
크로니 역시 솟구치는 화염을 왼손으로 막아냈다. 뒤에서 마법사가 보호막을 쳐주지 않았더라면, 얼굴을 태워 먹을 뻔했다.
'아. 젠장.'
반면, 이안은 뜨거운 열기에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모든 것이 빛으로 환해지고, 고통마저 아득해지는 순간. 이안은 문득 귓가에 쇳소리가 울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채앵.
크로니의 검이 이안의 목덜미에 닿았다. 3년짜리 황제의 최후가 이런 것이라니. 나름 바리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신의하는 자는 스스로 잡아먹혀 죽어갔고, 이안 역시 목이 베일 처지다.
"이안. 다음 생에는 태어나지 말거라."
크로니의 잔인한 말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죽음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주위. 그리고 이내 보이는 것은....
'포크와 나이프?'
그것도 반대로 잡은 자신의 손이었다.
* * *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지난 며칠 동안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이안."
맞은 편의 낯선 여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드넓은 정원, 잘 가꾸어진 화단 그리고 눈앞의 융숭한 음식들. 정신 차려보니, 둘러앉은 모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지옥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천국인가?
하지만 풍경이 그가 살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황궁과 비교하면 좀 볼품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얘가 왜 이러니. 이안. 손님께 결례란다."
"못 배운 티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가 봅니다."
"첼. 말을 가려서 하거라."
"이안. 정신 차려."
여인 옆에 앉아있는 뚱뚱한 소년이 거친 말을 쏟아냈으나, 이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까부터 위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 때문이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나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미치겠군.'
저도 모르게 나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안은 우아한 손짓으로 식기를 바로 잡고 식사 예법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품격있게,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스테이크를 잘라 먹었다.
"음."
방금까지 포크를 주먹으로 쥐던 자라 생각할 수 없는, 기품있고 격식 있는 몸짓이었다. 훌륭하다는 듯 내뱉는 감탄사 역시 짧고 낮으며 천박하지 않았다.
맞은편의 변경백과 계모인 백작 부인 그리고 배다른 형제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지켜봤다.
제2화. 브라츠 백작가의 사생아
'브라츠 백작가는 귀족치고 천박하다.'
사교계에 떠도는 브라츠 가문의 평가였다. 아마 수많은 변경백 중에서도 야만족과 접경을 맞대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먼 과거만 해도 전쟁 나팔소리가 끊이질 않았지만, 최근 표면적인 화친을 맺고 나서는 이런저런 교류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안 님. 식사 예절이 아주 우수하십니다."
서둘러 고기를 씹던 이안이 노인의 칭찬에 정신을 차렸다. 반어법인가? 굶주려서 저도 모르게 게걸스러웠나? 이안은 저도 모르게 찔려서 목을 가다듬었으나, 노인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자제분이 훌륭한 기품을 갖추셨습니다. 역시 데르가 백작님의 훌륭한 가르침 덕이겠지요."
"별말씀을요. 몰린 경."
브라츠 가문의 수장, 데르가 백작은 단 몇 초 사이에 바뀐 자식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의례적인 표정을 잃지 않았다. 데르가는 이안을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어쨌거나 브라츠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당연하지요. 부디 황제께 말씀 잘 부탁합니다."
"물론입니다. 백작님."
둘의 의미 모를 말에 이안이 우물우물 씹던 것을 멈추었다.
황제? 나 말인가?
아니지. 잠깐만. 방금 브라츠라고 하였나?
'그러고 보니....'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는 제 손이 너무 작고 말랐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야 역시 낮다.
이안은 영문 모를 상황에 음식물을 삼킨 후 포도주잔을 찾았다.
"아."
잔에 든 것은 술이 아니라 음료였다. 게다가 둥근 글라스로 비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웬 낯선 이의 얼굴. 이안은 순간 체통도 잊고 그대로 뿜을 뻔했다.
"콜록!"
기침과 함께 냅킨을 집어 들자, 맞은편 남자아이가 비아냥거렸다.
"쯧쯧. 저것 보십시오. 어찌 잘한다 싶더라."
"첼. 동생이 실수하면 돌보아 주어야지."
첼이라 불린 아이는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비죽거렸다. 백작 부인 메리는 식탁보 아래로 첼의 손을 꽉 붙잡으며 아들을 단속했다.
지금 이 자리는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었기에.
몰린 경은 중앙 황궁에서 내려온 공무원이었으며, 이안이 브라츠 백작가에 입적할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몰린은 첼에게 인자한 웃음을 보이곤 다시 이안에게 집중했다.
"이안 님. 요즘 철학을 배우신다고요."
몰린의 갑작스런 질문에 데르가 백작과 부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제 이름조차 쓸 수 없었으니까. 백작이 저택 밖 평민을 겁탈하여 얻은 자식이었으므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불과 식사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핑거볼 물을 꿀꺽꿀꺽 마시던 아이 아닌가.
"아직 어디서 말 꺼낼 수준이 안 됩니다."
백작이 재빨리 끼어들며 이안을 두둔하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알게 모르게 날카로웠다.
'멍청한 놈. 그렇게 외우라 했건만.'
몰린의 질문에 대비하여 벼락치기식으로 교육한 것이 있었으나, 미천한 게 그새 죄다 까먹은 모양이다. 노인은 물러서지 않고 웃음으로 밀어붙였다.
"학식이란 것이 다 그렇지요. 서로 의견을 부딪치면서 단단해지는 것이랍니다. 이안 님. 최근에는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열여섯이나, 학교는 가지 않으셨다 하니...."
여든이 다 된 노인은 다정하면서도 강건했다. 하루가 멀다고 인재가 갈려 나가는 중앙 행정부에서 평생을 버틴 노인이니 어련할까.
이렇게 된 이상 백작도 두둔할 수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음."
이안은 목을 가다듬으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백작가 사람들의 예상대로 이안은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몰린의 질문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변경 백작저의 뒤뜰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브라츠 백작저에?
처음 보는 소년의 몸으로?
나움의 시공간 마법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시공간 마법은 시점과 시점을 이어주는 통로를 여는 것인지라, 필수적으로 장소 제약이 걸려있었다.
즉,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
하지만 이안의 마지막 기억은 지하 감옥 아니었던가. 게다가 남의 몸을 빌려 이동한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안 님?"
"아. 실례했습니다."
몰린의 재촉에 이안이 반사적으로 기품 있게 답했다. 황궁에서 익힌 습관이었다.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의도를 전하는 웃음. 변경백과 그 가족들은 이안이 저리 웃는 것도 처음 봤다.
"철학이요. 철학...."
이안은 고민하는 듯 몇 번 중얼거렸다.
"제가 대신 대답해도 될까요? 몰린 행정관님."
그사이를 못 참고 이복형제인 첼이 나섰다.
바깥에서 들어온 이안이 귀한 식사 자리의 주인공이라는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천한 핏줄로 백작가에 입적까지 한다니. 부아가 치미는 것도 당연했다.
어른들의 시선을 이안에게서 저로 뺏고 싶은, 어리석다 못해 한심한 치기였다. 메리 부인의 매서운 눈짓에 말끄트머리가 흐려졌지만.
"첼. 몰린 경은 이안에게 물어보셨단다."
그녀는 소리 없이 애원하고 있었다.
아들아. 제발 입 좀 다물어주렴.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란다. 저 천한 소생의 아이를 백작가에 입적해야만 네가 살아.
"저는 퓔른 선생을 좋아합니다."
"퓔른?"
소란 속에서 이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입맛이 뚝 떨어졌는지, 식기는 가지런히 옆으로 치워둔 상태였다.
데르가 백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하든가! 어디서 개뼈다귀 같은 헛소리를...!
"예. 물론 교황청에서는 반기지 않지만, 퓔른 선생이 추구하는 인본주의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진리가 무엇인지 곱씹다 보면 진정한 군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으니까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었다.
이안에겐 철학이니 인문이니 하는 것보다 당장 굶어 죽지 않는 백성의 하루가 중요했다. 어느 정도 형식만 유지한 철학 공부였으니, 소위 '잘나가는' 지식인 중 기억나는 자를 읊은 것이다.
데르가 백작이 눈을 또르르 굴려 몰린의 눈치를 봤다. 노인은 자못 놀란 듯이 멈칫거리더만, 이안에게 상체를 가까이 숙였다.
"퓔른 경을 어찌 아시옵니까?"
"예?"
하지만 대답한 것은 이안이 아닌 데르가 백작이었다. 몰린이 허허 웃으며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아무래도 변경이다 보니 중앙 소식이 늦을 거라, 오만한 생각을 품었나 봅니다. 데르가 백작님과 이안 님께 사과드립니다."
"아니, 아니요."
몰린은 백작이 퓔른을 모른다는 걸 눈치챘다. 알았더라면 저 성정에 저 얼빠진 표정 대신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으리라.
"퓔른 경은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호크먼 자작가의 막내아들이랍니다. 연식이 어리지만, 바리엘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 중의 수재지요. 얼마 전에 황궁에서 열린 학식 토론에서 인본주의를 거론하여 세간을 뒤집어 놓았답니다."
변경이라 소식 늦는 거, 맞다.
수도에서 데르가 변경지까지 마차로 꼬박 보름은 달려야 했으니까. 백작을 비롯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다들 놀라서 이안을 돌아보는 동안, 이안 역시 속으로 기함했다.
'퓔른 선생이 막 성인식을 치렀다니? 그분 연세가 백이 넘었던 것 같은데?'
낯선 몸인 것도 모자라, 시간을 100여 년 가깝게 거슬러 올라온 모양이다. 굉장히, 아주 굉장히 놀라운 상황이지만 겉으로는 어떤 티도 나지 않았다. 황제로서 갈무리된 몸가짐 덕분이었다.
"그래요. 퓔른 경의 철학을 좋아하신다고요. 그런데 방금 교황청에선 반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요. 그게 무슨 뜻인지요?"
"…인본주의라는 것이 인간보다 중요하다는 건 없다는 견해라, 신을 모시는 교황청에서 달가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허허."
완벽한 대답이었다.
몰린은 보름 동안 뭉친 피로가 풀리는 걸 느꼈다.
"여기까지 달려온 보람이 있습니다. 브라츠 백작가의 새 아드님이 이리 총명하신 줄을 몰랐으니. 분명 황제께서도 기꺼워하실 겁니다."
사실 귀족이 서자를 입적하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귀하고 잘나신 귀족들인지라 아랫도리 간수 못 해 사생아 데려오는 게 어디 가십거리라도 되겠는가. 여자고 남자고 따분한 사교계에서 잊을 만하면 떠도는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몰린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리고 천려족 역시 반기겠지요."
'천려족?'
이안은 기억을 더듬어 익숙한 이름을 되새겼다. 천려족은 국경 동쪽의 야만족을 칭한다. 자신의 총명함을 천려족이 반긴다?
…그렇다면.
'볼모인 듯 싶은데.'
국경을 접한 천려족에게 화친 유지의 대가로 보내질 서자.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백작이 사악하게 웃으며 이안의 손등에 제 손을 덮었다. 상황을 알고 나니 인자한 아버지의 탈을 쓴 악마와 같다.
"이안. 나는 네가 평화의 상징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화친은 공식적인 협약이다.
본래는 각 수장의 친자를 보내는 게 관례지만, 변경 밖 야만족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놈들.
실제로 데르가 백작의 둘째 형 역시 어렸을 때 화친을 위해 국경을 넘다가 죽었다. 말로는 사고사라 하지만, 진위를 가릴 수 없다.
이러하니 어떻게 하나뿐인 제 본적, 첼을 보낼 수 있겠는가. 부랴부랴 거들떠도 안 보던 이안을 데리고 와 입적시키려는 거다.
'당연히 황궁에서도 눈치챘겠지.'
다만 아무리 그래도 개나 소나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몰린을 통해 이안의 총명함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보내질 아이가 총명할수록 외교적인 억제력이 생길 것이고 그럼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테니.
물론 변경에서 브라츠 가문의 자치권이 우선이었으므로 반쯤은 형식적인 절차였다. 하지만 또 반쯤은 황궁에서 하는 지방 귀족 견제라 볼 수 있다.
"아아."
이안은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이 죽기 전에도 브라츠 가문은 이렇게 몇 번이고 볼모를 주고받으며 화친을 이어갔었다.
결국, 훗날엔 천려족에게 처참히 멸문당했지만.
중앙에 파발이 닿기까지 보름씩이나 걸린 게 낭패였다. 다른 영주들과 당대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증조 할아버지였나?'
그것이 바로 이안의 증조부 대 일이었다.
황제는 천려족을 몰아내고 함께 전쟁했던 귀족과 기사들에게 영지를 쪼개준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안?"
메리 부인이 이안을 불렀다.
백작의 말에 대답하라는 듯.
본 소임을 스스로 되새기게 하는 재촉이었다.
이안은 방싯 웃으며 다시금 물로 입을 축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하나는 인정하자. 이안은 죽지 않았다. 영문 모를 어떤 아이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네. 아버지."
이안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데르가 백작이 만족한 듯 웃었다. 첼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하호호 웃으며 이안의 존재가 가져올 평화를 축복했다.
"자. 드시지요."
그제야 마음 놓고 식사를 이어가는 데르가.
이안은 잠시 현실감을 느끼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무엇보다, 쿵쿵 울리는 심장 고동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일깨웠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만약 이것이 나움의 마법이라면 확인할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황궁 별채로 가보는 것. 그리하여 나움의 마법 흔적을 찾아 조사해보는 것.
하지만 변경 브라츠에서 중앙까지는 보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고, 곧 대사막으로 팔려가는 아이에게는 영원처럼 닿을 수 없는 세계였다.
그래. 그런 세계'였다.'
제3화. 백작저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데르가 백작이 식기를 옆으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두어 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오찬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중천에 걸려있던 해가 어느덧 산 쪽으로 기운 지 오래였다.
"아주 훌륭했습니다. 황궁에서 먹는 것과 비견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가만히 냅킨 정리를 하던 이안이 멈칫거렸다.
세상의 중심이자 최고 존엄인 황궁과 감히 비교하는 언사였다. 이안의 시대에서는 굉장히 놀랄만한 일인데, 데르가 백작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하니 별 반응이 없다.
'일반적인가?'
그렇다면 황궁의 권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100여 년 전이라. 임기가 짧았던 황제들을 차치하더라도 일곱 명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디저트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백작 부인."
이안이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자리가 완전히 파했다. 메리 부인은 우아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두 아들을 돌아봤다.
"첼. 이안.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둘은 옆방에서 다과라도 들고 있으렴."
분명 이안의 입적을 떠들어대겠지. 당사자인 자신을 빼놓고서.
사실 입적 진행은 거의 기정사실이나, 평소 황궁의 입김이 닿지 않았던 변경이니만큼 견제하듯 까다롭게 물고 늘어질 것이었다.
"네. 어머니."
이안이 똑 부러지게 말하자, 메리 부인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천한 것의 어깨를 쓰다듬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닌가 보다.
그녀는 그저 볼을 톡 치는 것으로 보여주기식 애정을 쏟아냈다. 그럴수록 첼의 눈은 더더욱 찢어졌지만.
"이쪽입니다. 몰린 경."
"오호. 참으로 멋지군요."
그들은 뒤뜰을 뒤로하고 본채로 들어섰다.
저택의 중심부를 차지한 넓은 응접실이 호화스럽다 못해 정신없을 지경이었다. 사방팔방 번쩍이는 금붙이가 햇빛을 받아 방을 밝혀댔다.
끼익.
어른들이 안쪽 응접실로 들어가자, 첼과 이안 만이 남았다. 둘은 마주 앉은 채 서로를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면 첼은 노려본 것이며, 이안은 관찰하는 것이었다.
'고놈 참 데르가 백작이랑 쏙 빼닮았구나. 지나가던 개라도 부자지간임을 알겠다.'
붉고 구불거리는 머릿결과 주근깨투성이인 콧잔등. 혈기 왕성한 나이임에도 볼록한 배는 영락없이 데르가의 핏줄임을 보여줬다.
거울로 보이는 이안은 블론드에 압생트 눈동자였는데, 아마 누군지 모를 어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예쁘장하니, 첼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첼 님. 이안 님. 다과를 들이겠습니다."
하인이 공손하게 다가오며 차와 쿠키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첼의 눈이 샐쭉해지더니만, 손으로 하인의 머리통을 그대로 후려쳤다.
퍼억!
"아!"
하인의 손등으로 뜨거운 찻물이 쏟아졌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손수건을 찾았으나, 천한 서자가 그런 걸 갖고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말해봐."
"네?"
하인은 당황한 기색으로 앞치마에 손등을 문질렀다. 다행히 살짝 부어오르긴 했지만 크게 데이지는 않았다.
"건방지게 어디서 내 이름을 불러?"
"아아. 죄, 죄송합니다. 소백작님."
백작의 유일한 혈통이라는 뜻으로, 데르가의 후계임을 공언하는 지칭이었다.
예법에 정통한 이안 역시 모르지 않았지만, 첼의 날 선 반응은 조금 의아했다.
"찻물을 흘렸으니 책임지거라."
"…다시 내오겠습니다."
"다시 내온다고? 이게 차 귀한 줄도 모르고? 봉급에서 차감할 터이니 흘린 것은 네가 가져가. 평생 맛보지도 못할 것이니 이참에 핥아먹어도 좋겠구나."
"제가 실수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같잖다."
쉽게 볼 수 없는 패악질이었다. 어찌 성정이 저리 잔인하단 말인가? 필시 부모가 잘못 키운 게 분명했다.
"차는 되었으니 나가서 손부터 식히게."
이안의 나지막한 지시에 첼의 표정이 확 찌그러졌다. 하인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 후다닥 쟁반을 들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첼은 금방이라도 이안의 머리채를 잡을 것처럼 날을 세웠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무엇이 말입니까."
"네놈의 형님이 말하고 있었다. 감히 무어라고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하느냔 말이다."
이안은 뭐 그리 빤한 것을 묻느냐는 듯 태평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하인들을 부린다면 조만간 저택 일을 형님이 직접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히 성질부려 문제 만들지 말고 본분을 지키는 게 현명할 텐데요."
담담하고도 논리정연한 대꾸에 첼의 두 눈깔이 툭 불거졌다.
"천한 핏줄의 자식 주제에 감히 어디서 본분이니 뭐니…. 몰린 경이 칭찬 좀 했다고 기고만장한 것이냐? 진짜 귀족이라도 된 것 같아?"
다만 목소리는 소곤소곤하니 조용했는데, 문 하나를 두고 손님이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구나.
이안은 찻잔을 홀짝이며 웃었다.
"내가 귀족이 아니면?"
"…뭐?"
"형님이 천려족으로 팔려가겠지요."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웃겼다.
고작 3년간의 황제였다 한들, 바리엘의 정점이었다. 첼은 이것이 분명한 영광임을 알 필요가 있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아 자신을 비웃는다 여긴 것 같지만.
"이, 이게 미쳤어!"
첼이 이안의 뺨을 내려칠 용으로 손을 들었으나, 허공에서 막혔다. 이안의 손아귀에 꽉 붙들린 것이다.
"첼이라고 했지."
이안은 또래보다 마르고 작은 편이었다. 따라서 첼이 다잡고 누르면 눌릴 터.
하지만 첼은 그러지 못했다. 그가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자, 뒷덜미가 쭈뼛 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얼굴에 환부라도 생기면 몰린 경이 어찌 생각할까? 응? 백작과 그 부인은? 저기서 열심히 나를 팔아먹으려고 하는데, 아들 된 도리로 협조는 못 할망정 초를 치려 하는구나."
황제는 첼의 볼에 손을 올려 툭툭 두드렸다.
정신 좀 제대로 차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다 내가 사라지면 어쩌려고?"
그 말에 겁먹었던 첼의 눈동자가 서서히 영악한 빛을 띠었다.
"흥, 네가?"
건수 잡았다는 듯 반질거리는 미소는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뒷골목에서 한평생 굴러먹은 시정잡배와 똑 닮았으니, 귀족들 사이에서 왜 천박한 가문이라는 말이 떠도는지 알 지경이었다.
"한번 해보렴. 그렇다면 네 어미는 머리가 잘려 시장통에서 공처럼 차일 거란다. 아하하!"
아. 이안은 속으로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황제였던 그는 이토록 천하고 날것인 협박을 들은 적이 없었다. 좀 더 뭐랄까. 품격있는 가시를 받았다는 쪽이 맞을 거다.
아무튼, 이안은 첼의 말로 또 다른 정보를 알아냈다.
'어미가 족쇄였구나.'
이안이 군말 없이 국경을 넘어야 하는 사정이 있었던 거다. 빈민가의 어린아이가 데르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수많은 선택지 중 이 아이의 몸으로 들어온 연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안이 짧게 고민하자, 첼은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먹힌 줄 오인했다.
"납작 엎드리렴. 그래야 네 어미와 함께 하루라도 더 목숨을 연명할 것 아니니? 시장통에 굴러다녀도 워낙에 더러운 몸뚱이라 티도 안 나겠지만."
그 순간이었다.
이안이 첼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압생트 색이었던 그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바뀌며 마력이 솟구쳤다. 피가 거꾸로 차오르듯 저도 모르게 일어나는 반응이었다.
"어리석은 것아."
이안은 온몸으로 마력을 느끼며 일갈했다.
황제의 몸이었을 때와 비교하면 하찮았지만, 첼이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안은 마법 역사에서 제일 빛났던 별이지 않은가.
"아무리 아이라고 한들 말의 무게는 같다. 세 치 혀는 인생을 바꾸기에 그리 짧지 않아. 조심하지 않으면 잘릴 것이다."
한 세기 전, 지금의 바리엘 제국은 이안이 통치했던 때보다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 봐야 했다. 수도 귀족들도 운이 좋아야만 연이 닿을 정도인데, 변경은 당연히 그 흔적조차 없다.
"아······."
그리하여 기현상과 마주해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첼은 머리가 새하얘지며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후두둑.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이안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뒤로 물러섰다. 직사광선을 등지고 선 이안은 마치 천사의 현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첼은 멈출 기미 없이 계속해서 실수했다.
'…미치겠군.'
하인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응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도련님들. 다과는 즐거이...."
몰린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다가 멈칫거렸다. 햇살에 잠긴 이안과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다. 반짝, 하고 짧은 순간 금색 눈이 압생트로 변했다.
'방금?'
빛에 반사되어 그리 보인 것인가?
그러기엔 무언가 이상하다.
몰린은 찰나의 순간을 되새기며 이안의 눈을 들여다봤다. 백작 부인의 호들갑이 집중을 깨기 전까지.
"첼! 이게 무슨!"
메리 부인이 멍하니 서 있는 첼을 발견했다. 아이가 더듬거리며 이안을 바라봤으나,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허튼 말 하면 좋지 않을 거다.'
침묵으로 건넨 경고였으나, 첼에게 잘 닿은 듯하다. 아이는 거의 울먹이며 변명했다.
"…그, 그게, 제가 차를 흘렸습니다."
"어머. 어머. 세상에!"
그제야 첼을 확인한 몰린은 난감하다는 듯 헛기침하며 등을 돌렸고, 데르가는 눈을 꾹 감았다.
망신 중의 망신, 개망신이다! 열일곱, 다 큰 아들이 응접실에서 실례하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정말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으리라.
"밖에 누구 없니? 누구라도 좋으니 어서!"
"무슨 일이셔요? 에그머니나!"
"옷과 수건 그리고 닦을 걸 가져오렴."
백작 부인이 하인을 불러대며 어수선을 떠는 동안, 몰린은 조용히 데르가 백작에게 양해를 구했다. 변경에 내려온 중앙처 직원이 무엇 바쁜 게 있겠느냐만은, 계속 이리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백작님? 제가 급한 용무가 있어서요. 일단은...."
"아아! 그러시지요. 오늘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안 님께 배웅을 요청해도 될는지요?"
데르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생각보다 고갯짓이 먼저 나갔다. 첼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 탓이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안 님, 저택이 너무 넓어서 그러하니 노인에게 도움을 베풀어주세요."
"물론이지요. 몰린 경. 기쁘게 안내하겠습니다."
저택 구조 따위 하나도 모르지만, 여기 계속 있는 것보다 몰린과 나가는 게 훨씬 나을 터다. 안내야 지나가는 하인 하나 잡아서 그의 외투를 들어주라 하면 되지.
"가시죠."
이안은 방긋 웃으며 그를 안내했다.
다시금 마주친 압생트 색 눈동자. 몰린은 세월이 담긴 시선으로 아이를 면면히 뜯어보았다.
제4화. 족쇄
"오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이안 님."
정문에는 몰린이 타고 왔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노인이 모자를 벗으며 인사하자, 하인이 그의 지팡이를 가져왔다. 이안 역시 가슴에 손을 올리며 경의를 표했다.
"결례에도 불구하고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아버지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겁니다."
격식 있고 우아한 몸짓이었다. 황족의 예절을 담당하는 선생처럼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자세. 몰린은 다시금 아이의 눈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짙은 녹안이 유리구슬처럼 맑았다.
"이안 님은 참으로 백작님을 위하시는군요."
진심인가? 아니다.
칭찬을 가장한 질문이었다. 비꼬는 것인지, 한번 찔러보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의도. 몰린은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으나, 이안은 노인네의 욕망을 충족할 생각이 없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애매한 미소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뿐이다.
말의 의도를 모르니 대답도 그에 따르게 던져줄 수밖에. 몰린은 그런 이안의 태도에 더욱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만.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입적 절차는 하루 만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총 네 번. 한 달 정도 몰린과 이런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 후에나 수도로 보고서가 올라갈 것이고, 다시금 보름에 걸쳐 파발이 내려오겠지.
이러나저러나 별일 없다면 두어 달 이상은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이안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유를 확인하고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민한 대처가 몸에 밴 상태다.
"그럼. 안녕히."
끼익.
마부가 몰린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작은 창틈으로 끝까지 이안과 눈을 맞춘 채 사라졌다.
마차가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브라츠 백작저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변경백 치고는 고풍스럽군.'
"이안 님. 방으로 모실까요?"
"아닐세. 응접실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뒤에 서 있던 하인이 조심스레 묻자, 이안은 가로저었다. 첼의 뒷수습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완벽하지 않은 지금, 자신의 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직접 봐야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만 했다.
"먼저 가보시게나."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이안 님!"
하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주뼛거리는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 응접실에서 첼의 패악질을 받아낸 아이였다.
"손은 괜찮나?"
하인은 살짝 부은 손등을 잡으며 꾸벅 인사했다. 제대로 치료한 것은 아니지만, 열기는 가라앉은 듯 보였다.
"…감사합니다."
"됐네."
뭐 그리 대단한 친절이라고.
이안은 하인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마자, 제 손을 내려다봤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군.'
마력은 육체가 아닌 영혼과 감응하는 것이라더니. 낯선 몸뚱이일지언정 힘을 불러낼 수 있나 보다. 이런 경우 아는 바가 없어 당황스럽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본체와 비교할 수는 없으나, 훈련을 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마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마력이 있는 한 그것만은 면하리라.
똑똑.
어느새 응접실에 다다른 이안이 응접실 문을 두드리며 막 들어서려는 순간.
안쪽에서는 백작 가족 대신 낯선 하인들의 잡담만 들려왔다. 분명 엉망인 바닥을 청소하는 모양이다.
"어휴. 참. 대체 이게 무슨 일이니."
"그러게 말이야. 열일곱이나 되어서는."
"쉿. 조용히 해. 마님께서 당부하셨어.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경을 친다고 하셨으니 조심해."
"차라리 이안 님이 실수했다면 믿겠다. 저번에는 소백작님께 머리가 죄 뜯겨서 혼절했잖아. 오줌이라길래, 나는 이번에도 뜯겨서 실수하신 줄 알았다!"
깔깔깔. 하인들의 웃음이 청명하게 울렸다. 이안은 문틈으로 기척을 숨기며 엿들었다. 아주 쥐 잡듯이 잡고 산 듯싶다. 쯧쯧.
"근데 오늘 정원에서 나올 때 보니 진짜 놀랍더라. 몸가짐이 바르신 것이, 마님보다 더 우아해 보였어."
"손님 있으니까 정신 바짝 차려 그런 거지. 아니라면 백작님께서 가만뒀겠어? 피 어디 안 간다. 제 어미처럼 반지르르한 걸 보면 창것 피 확실히 섞였다. 얘."
"근데 어미가 코르티잔 아니라며. 왜 창것이라 해?"
"맞아. 따지고 보면 백작님 잘못이지. 잘사는 여인을 왜 건드냐고."
"잘 살기는. 손가락 빨며 사는 게 잘사는 거니?"
끼익.
이안은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문을 열었다. 난잡한 발언을 일삼던 하인들이 모두 굳어버렸다.
"…어, 저기. 이안 님?"
"부모님과 형님은 어디로 가셨지?"
변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인들 역시 꼬박꼬박 존대하며 예의 차리고 있긴 하지만, 이안의 출신이 천한 것과 곧 천려족에 팔려간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시 물어야 하나?"
"아! 죄송합니다! 마님과 첼 도련님은 방으로 돌아가셨고, 백작님은 집사님과 정문으로 향하셨는데요."
정문엘 갔다면 뒤늦게나마 몰린 경을 배웅하려는 거겠지. 너무 경황이 없었던 거다. 다 큰 아들의 실수에 몰린과 이안, 둘만 보내다니.
능구렁이 같은 노인에게 무슨 책이 잡혔을지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길이 엇갈렸군.'
"알겠네."
이안이 담담하게 문을 닫고 나가자, 하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한 여인을 질책했다.
"어우, 진짜! 벨라! 넌 그놈의 입이 문제야."
"치이. 뭐 어때? 두어 달 있으면 팔려갈 아인데."
"입조심 안 하지? 혼나고 싶어?"
백작이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었다. 화친을 위해 이안의 신분 세탁을 대대적으로 하는 중 아니었던가.
황궁에서는 자국 일이니 별말 않더라도, 천려족에서 알았다간 어떤 꼬투리가 잡힐지 모를 일이다. 저택의 사용인 모두가 이안을 귀하게 모시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거다.
"아, 아버지."
이안은 멀리 복도 끝에서 돌아 나오는 데르가 백작을 발견했다. 그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이안에게 다가왔다.
"몰린 경은 떠나셨는가?"
"예. 타고 온 마차가 나가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함께 가며 무슨 얘기를 했느냐?"
"특별할 것 없는 사담이었습니다. 첼 형님의 실수에 대해 한마디 하셨지만, 그저 우려스러운 걱정이었습니다."
첼의 얘기가 나오자, 데르가는 낭패라는 듯 더더욱 눈썹을 찌푸렸다. 이안은 그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반응으로 봐서, 첼이 금빛 눈에 대해 함구한 것이 분명했다.
"…가서 마차를 준비해."
백작은 스트레스가 치솟는 것을 느끼며 집사에게 지시했다. 그리고서 옥으로 만든 물부리를 입에 물었다. 아이가 앞에 있든 말든, 독한 궐련 연기를 시원하게 내뿜었다.
그러다 대뜸.
"퓔른이라는 자작은 어떻게 알았지?"
오찬을 찬찬히 되짚다 걸린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도 몰랐던 수도의 학자를 천하디천한 사생아가 알고 있었으니까. 이안은 별 고민 없이 대충 둘러댔다.
"집안의 누군가가 하는 말을 주워들었습니다."
"누구의 말을?"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다.
저택 사람들을 일일이 다 알 리가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임기응변이었다. 꽤 그럴듯했는지, 데르가는 알아서 공백을 추측했다.
'첼의 가정교사인가? 그자가 바리엘 대학을 나왔다고는 하더니만.'
뭐.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데르가는 일부러 엄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다음 주에는 실수 없이 하거라. 또 핑거볼 물을 처마셨다간 걸레통에 머리를 박아버리겠다."
황제 이안이 빙의하기 전, 아이가 실수한 부분인가 싶었다. 이안은 별 덧붙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르가는 연기를 입에 머금고는 물끄러미 이안을 내려다봤다.
'흠.'
확실히 어미를 빼닮아서 얼굴이 볼만했다. 처음 데리고 왔을 때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데다가 종일 울어 젖히는 바람에 뜯어 볼 기회가 없었거든. 보고 싶은 마음도 굳이 안 들었고.
"왜 그러십니까?"
본적 정리만 잘 된다면 필시 천려족에서 반길만한 외모다. 게다가 이제 겨우 열여섯. 족장 쪽 가족과 혼인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국경 넘어가는 즉시 생명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잘만 하면 형식적인 화친에 도움이 되겠지.
"오늘 네 형이 실수한 것은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네. 알겠습니다."
저택 아랫것들에게도 민망한데, 천려족이 알게 된다면? 차기 변경백의 위엄이 우스워질 게 빤했다. 그가 담배를 거의 다 태워갈 때쯤. 집사가 외투를 들고서 나타났다.
"백작님. 준비되었습니다."
"가지."
그러곤 매몰차게 돌아서는 백작.
이안은 창문 너머로 그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사용인들이 보고서도 배웅하지 않는 걸 보아, 비밀스러운 외출인 게 분명했다.
"쯧."
별 볼 일 없는 자다. 이안은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생각들을 말끔히 지우곤 돌아섰다. 일단 저택 전체를 머릿속에 그려놓는 게 좋겠다. 아니면 첼을 만나 확실하게 단속을 하거나.
그렇게 거대한 저택을 휘젓고 다니다, 중앙 부엌에 다다르고 말았다. 하인들과 그 식솔들이 삼삼오오 모여 뒤뜰에서 먹고 남긴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안 님?"
"무슨 일이십니까?"
"별거 아닐세. 산책 중이었어."
거참 희한하시다. 평소에는 불이 나도 밖에 안 나올 것처럼 굴지 않았나. 하인들이 우물우물 음식을 주워 먹자, 이안은 희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가축이 아닐 텐데, 어찌 먹다 남긴 것을....'
자신이 있던 바리엘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하 빈민가가 아닌 이상, 대체 누가 먹다 버린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
전반적으로 풍족해진 생활 수준과 별개로, 타액으로 옮기는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로는 빈민가에서조차 금기되는 생활 습관이었다.
하지만 브라츠 백작저에선 익숙한 일인지, 전혀 거리낌이 없다.
"허기지십니까? 좀 드릴까요?"
"이봐! 어찌 작은 도련님에게 그런 막말을!"
"앗,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괜찮네."
천려족의 터전은 들끓는 대사막 한 가운데였다.
그와 제일 가까운 브라츠 영지 역시 그 영향을 받았으니 타지와 비교하면 메마른 땅이라 볼 수 있었다. 농지 자체가 풍족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접경이라는 이유로 군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진 지 오래라, 아랫것들은 언제나 배를 곯는 중이었다.
"그럼 드시게나."
"예에. 들어가십시오."
이안은 그들이 편히 식사할 수 있게끔 자리를 비켜주었다. 근데 계속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괴리감이라고 해야 하나? 황제 이안의 시대와 시간적 간격이 크니 당연하겠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뭔가 빠진 것 같았다.
'뭘까. 뭐가 허한데....'
"저기. 이안 님."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검은 머리칼을 땋은 제 또래 여자아이였다. 아까 식사하던 식솔 중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이지?"
"저기, 한 시각 후에 시장에 가려 하는데요."
…왜 그걸 자신에게 말하는 걸까? 이안은 다정한 미소 아래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뭘까? 설마 이안이 시장 일도 보는 것인가? 저택의 식료품 채우는 일은 어른도 힘든 것인데?
"저기, 어머님께 전하실 말씀은······."
"아."
여자애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하자, 그 의중을 알아챘다. 나갈 때마다 이안의 친모에게 안부를 전해주었나 보다. 글을 읽고 쓸 수 없으니 사람의 입을 통할 수밖에.
'그렇다면 나는 저택을 못 나간다는 뜻이군.'
화친을 위한 귀한 제물이었다. 아마 천려족이 당도할 때까지는 제 발로 백작저를 나갈 수 없으리라. 여자아이는 단 한마디로 이안의 발에 채워져 있는 족쇄를 일깨워주었다.
제5화. 계획
"이안 님?"
아이가 이안의 눈치를 보며 불렀다. 안색이 나쁜 건 아닌데 묘하게 날이 섰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이안이 평소와 다르다고는 말이 떠돌았지만, 실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아. 그래."
이안은 그제야 첼의 태도 또한 이해했다.
애초에 어미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었으니, 그런 악독한 말이 재깍 튀어나온 것이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되었다. 전할 것이 없어."
"예? 하오나...."
처음 있는 일인지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갈 때마다 온갖 자잘한 얘기를 보따리처럼 안겨주던 이안이 아닌가. 하인 역시 글을 쓸 줄 모르는 터라, 그림으로 대충 끄적이며 기억을 단단히 하곤 했다.
"아버지가 외출하셨거든."
"백작님이요?"
오늘은 몰린 경과 함께하는 특별 오찬이 있는 날이었다. 백작의 스케줄 역시 평소와 다르다는 뜻이다. 일정 시간마다 나갔던 하인은 그걸 간과한 것 같았다.
"우연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할 것이다. 게다가 넌 어린 편이지 않느냐. 발걸음 마려무나."
듣자 하니 자꾸 사창가를 언급하던데, 이안의 시대에도 위험한 곳이었다. 한데 100여 년 전이라면 더더욱 심하겠지.
재수 없으면 멀쩡한 사내도 미약 때문에 쓰러져 주머니가 털릴 테다. 그런 곳에 아이를 보낼 수는 없다.
"괜찮으시겠어요?"
"음? 무엇이?"
"매일 밤늦게까지 우시지 않습니까······."
이안이 늦게까지 우는 것을 안다? 함께 방을 쓰는 자가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오밤중 이안의 방 밖에 사람이 있다는 걸 뜻했다.
'감시 역시 붙는 모양이군.'
다행이었다. 실수하기 전에 이런 것을 알아내어. 이안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단다. 이제 울지 않아."
"그, 하면, 심부름 값은...."
"심부름 값?"
오히려 울 것 같은 건 하인이었다. 손끝을 꼬물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이 저도 모르게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든 게 없다.
"오늘 음식을 갖고 가지 못하면 동생들이 굶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 심부름을 시키셔요. 이번에는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씀을 가져올게요."
심부름 값은 돈이 아니었구나. 하긴. 과거에는 빈민으로 나고 자란 아이였고 지금은 저택에 반강제로 감금된 아이였다. 동전 한 닢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을 거다.
"제발요. 이안 님."
그렇다면 이 저택에서 이안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삼시 세끼의 풍족한 식사였다.
'그래. 어쩐지 말라도 너무 말랐더라.'
천려족은 강건하고 굳센 야만족이었다. 한 명이 수십과 대적하여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 덕분에 족(族)이라는 공동체만으로도 바리엘 제국의 골칫덩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안 그래도 건장함의 기준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이안처럼 바짝 마른 아이를 보내면 뒷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덕분에 식사만큼은 백작 가문 사람들과 비교할 것 없이 동등하게 나왔다. 그게 이안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고, 바깥과 통할 수 있는 화폐인 셈이다.
"동생이 총 다섯이여요. 제가 심부름 값을 가져가지 못하면 동생들은 풀죽으로 배를 채워야 합니다."
하인은 손까지 싹싹 빌며 애원했다. 영지 사정이 말랐다는 것은 짐작하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장 스스로 안위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무작정 아이의 사정만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다만 조건이 있다. 이번에는 가불이다. 심부름 값은 먼저 주는 것이고, 나중에 내가 원할 때, 그때 일을 해주면 된다."
"아!"
실로 반가운 제안인지, 아이는 연신 허리만 숙여댔다.
그래도 여기서 이안을 도와주는 자가 있었구나. 비록 거래 관계로 얽혀 있었지만, 그게 어디인가? 어떤 형태로든 조력자는 있는 것이 낫다.
"그리고 너를 좀 편하게 부르고 싶은데."
이참에 아이의 이름을 알아두어야겠다 생각하고 넌지시 찔렀다. 앞으로 네게 부탁할 일이 많아질 것 같구나, 하는 의중이 들어간 말이었다.
뜻을 알아챈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해나라 부르세요! 저택 모두가 저를 그리 부른답니다!"
이전에는 '저기' 혹은 '있잖아' 따위로 부르던 이안이다. 기다렸다는 듯, 해나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소개했다.
* * *
이안의 방은 삼층 복도 끝방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훅 올라오는 곰팡내. 작은 창문은 환기하기에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필시 손님방이 아니라, 사용인 방을 내준 게 분명했다.
끼익.
낡은 의자가 삐걱거렸으나, 이안의 집중력을 방해하진 못했다. 다행히도 구석에는 싸구려 종이와 펜대가 놓여 있었다. 아이가 글씨를 연습한 흔적이 여실하다. 적었다기보다 그렸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필체다만.
'제국력 1,100년이라.'
이안은 해나로부터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있었던 게 1,198년이었으니, 거의 한 세기 가깝게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대충 100년이라 예상했던 게 맞았다. 이안은 고단한 숨을 내쉬며 금빛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거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나움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누군가의 시공간 마법에 걸려든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죽는 순간 보는 자신의 환상이거나.
'지금으로써는 빙의된 자와 내 이름이 같다는 것밖에.'
그렇다고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웠다. 이안이라는 이름 자체가 귀하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니까.
스윽스윽.
이안은 머리를 비울 겸 종이에 굵직한 사건들을 술술 적어 내려갔다. 혹시 이것이 환상이거나, 다른 세계라면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일이 일어날 터다.
"흐음."
이안은 별 무리 없이 앞으로 일어날 바리엘의 역사 연대기를 작성해 나갔다. 중간중간 비는 곳이 있지만, 상관없었다. 기억할만한 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곧 평화로웠다는 뜻이라서.
"그나저나, 공부한다는 아이의 책상에 종이가 이리 없나?"
깨끗했던 종이가 금세 까마득한 글자로 가득 찼다. 남은 종이라곤 서자 이안의 꼬부랑 글씨인지 뭔지 모를 것들로 가득한 것들 뿐.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그게 무엇인지 독해하려 애썼다. 도저히 못 알아보겠지만 말이다.
'글자는 맞지? 패턴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뭔가를 쓰긴 했는데… 바리엘어가 아닌가?'
똑똑.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이안은 슬그머니 종이를 서랍으로 넣으며 뒤돌았다. 누군지 몰라도 글 읽는 자라면 곤란해질 수 있다.
"들어오시게."
"저녁 식사를 두고 가겠습니다. 이안 님."
아. 해나구나.
그는 서랍 속 구겨진 종이를 매만지며 창밖을 쳐다봤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초봄인지라 겨울의 흔적이 짙게 묻어나는 저녁 하늘이다. 천장에 달린 야광돌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해나."
"네?"
야광돌은 초보다 훨씬 값싼 조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형체만 알아볼 정도로 은은하게 빛날 뿐이니까.
"촛대 좀 부탁해도 되겠니?"
"아. 그것이, 이안 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모두 백작 마님 허락이 있어야 해서요."
문 너머로 아이의 난감한 대답이 들려왔다.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방 상태를 보아, 내어줄 리 만무했다. 부군이 밖에서 저지른 '실수' 그 자체인 아이 아닌가. 어느 정도 눈엣가시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굶기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나.'
"…여쭙고 올까요?"
쓰다만 촛농을 받을 확률과 그게 왜 필요하냐며 들들 들이 볶일 확률.
둘 중 무엇이 더 높을까? 그것도 자랑스러운 아들 첼이 응접실에서 실수한 날에.
"아니. 되었다. 그만 가보아라."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해나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다시 펜대를 잡았다. 몇 번이고 펜을 더 놀리려고 했으나, 너무 캄캄해 이제는 잉크 통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문 쪽을 바라봤다.
끼익.
문 앞에는 작은 쟁반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호밀빵 두 덩이와 싸구려 햄 조각 하나 그리고 물.
"얼씨구?"
해나가 심부름 몫으로 떼어가고 최소한으로 남겨준 식사였다. 이런 걸 먹고 지냈으니 힘이 없지. 이안은 혀를 끌끌 차며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성에 차지 않지만, 곯은 배 앞에 장사 있나?
그는 물에 빵을 적셔가며 우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전쟁터의 고아들조차 이리 먹지는 않았다. 그때는 굴라 수프라도....
"아!"
안개로 차올랐던 머릿속에 바람이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선명해지며 가려운 부분을 긁었다.
그래, 주방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했다.
풍족한 오찬이었지만 뭔가 허하다 싶었어.
'굴라가 없었군.'
굴라는 영양소가 풍부하여 식사 대용으로도 먹는 채소였다. 맛은 둘째가라면 서럽고 다양한 요리에 적용 가능하여 바리엘 국민이라면 필수적으로 쟁여두고 먹는 식자재.
굴라의 '발견'은 제국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매해 기아로 죽어 나가던 사망자 수를 85% 가깝게 줄였으니, 경제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 바리엘은 굴라의 발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굴라가 발견되는 건 50여 년 후의 일인데.'
발명이 아닌 발견.
없던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알아내는 것. 동방에서 들어온 굴라는 씨앗 외 모두 독성인 터라 이제껏 식용으로 인식되지 않았고, 그대로 산과 들에 버려지면서 자연스레 토착했다.
'동방의 낯선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던 거지. 무려 50년 동안이나.'
하나 이안은 굴라의 식용법을 안다. 그 말인즉슨, 자신이 굴라를 '발견'만 한다면 바리엘의 대기근을 역사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이안은 문득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으면 싶었다.
마법의 환상이 아닌, 진실로 과거의 바리엘에 온 것이라고. 그리하여 역사를 바꿀 수 있기를.
'이안 님. 괜찮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언제나 있어요. 신께서는 답 없는 문제를 내려주지 않습니다.'
나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떠돌았다.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자.'
그리고 황궁으로, 나움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
이안이 내린 첫 번째 답이었다.
제6화. 산책
"후하! 후하!"
아직 푸른 달이 새벽하늘에 걸린 시간.
이안은 창가에 앉아 바깥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생각할 것이 많아 밤잠을 설쳤는데, 웬 소음 때문에 깨고 만 것이다.
"좌로 정렬!"
"좌로 정렬!"
"앞으로 가!"
브라츠의 사병들이 새벽 훈련을 나가는 소리였다. 이안은 턱을 괴고서 그 모양새를 꼼꼼히 살폈다.
'사병 치곤 꽤 많은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정문 밖으로 뛰어나가는 수가 만만치 않았다.
저택 주둔 사병과 영지 전역에 배치하는 일반적인 병사 비율로 따져봤을 때, 데르가는 과한 병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
'병사 수를 줄이기 애매하긴 하지. 저도 골치 아플 터.'
다른 변경은 화친을 맺으면 병사 수를 줄였다.
실직한 병사는 본업으로 돌아가 농지를 갈고, 물건을 팔아 다시 영주에게 세금을 바칠 수 있지 않나. 화친은 평화와 함께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데르가 백작은 이미 선대부터 화친을 맺고 있었으면서도 병사 수를 줄이지 않았다. 불완전하고 믿음 없는 형식상 화친이라 그럴 것이다.
백작의 둘째 형은 국경을 넘다가 습격당해 죽었고, 이안 역시 죽음을 가정하고 보내는 제물이니까.
'이럴 바엔 차라리 화친을 깨는 것이 나을 텐데.'
영지민의 경제 활동이 받쳐줘야 군대도 유지할 수 있는 법. 지금은 그 수에 비해 병사가 너무 많았다.
그러니 전투가 빈번해야 오히려 균형이 맞을 테다. 전투가 이어진다면 영지민이 감당해야 할 군사 수가 줄어들 것이고, 점령에 성공하면 새로운 노동력과 자본까지 얻겠지.
물론 패전이라는 가정은 또 다른 문제지만, 머리가 점점 부푸는 인간의 말로는 빤하다. 그 전에 해결을 봐야 했다.
'전쟁이라면 전쟁. 평화라면 평화.'
둘 중 하나는 확실히 가져와야 할 터인데, 이도 저도 못 한 어중간한 상황이라면 모두의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해나만 봐도 그러했다. 다른 곳도 아닌 백작저에서 일하는 하인이건만, 이안의 심부름 값 아니면 굶주리는 신세가 아닌가.
끼익.
이안은 옷매무시를 정돈한 후 방문을 나섰다. 복도에서 꾸벅꾸벅 조는 하인이 보였다. 밤새 이안을 감시한 당번일 것이다.
"이보게."
"이, 이안 님?"
"공기가 차네. 들어가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인은 입가를 닦으며 눈을 끔뻑였다. 새벽에 이안이 밖으로 나온 일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진 아침 식사 쟁반을 건네주는 것으로 밤사이 문제없던 것을 확인하곤 했는데....
"어, 어디 가시려고요?"
"산책하려 하네만?"
이 꼭두새벽에? 혹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시종의 눈매가 불경하게 가늘어지자, 이안이 방긋 웃으며 턱짓했다.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다.
"무얼 그리 보고 있나?"
눈 깔고 비키라는 뜻이었다.
시종이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숙였으나, 난감한 기색은 지우지 못했다. 이안을 보내기에는 저택이 너무 한산하여 나쁜 마음을 먹을 것 같았고, 붙잡기에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기에.
"저기, 이안 님...."
"따라와도 좋다."
이안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허락하고 나서 복도를 앞장서 걸었다. 따라오지 말라 한들 듣지도 않을뿐더러, 어차피 저택에는 모르는 것 천지다.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았다.
"저쪽 별채는 잠긴 것인가?"
"손님용인지라 매일 쓸고 닦습니다."
"열렸다는 말을 둘러서 하는군. 그렇다면 저쪽은?"
"무기고는 보안이 생명인지라."
제법 입단속을 하는구나.
하인은 이안의 눈치를 보면서도 시원하게 답하지 않았다. 감시가 끝나는 즉시 어딘가로 달려가 보고할 눈치였다. 그게 눈에 훤히 보였으나, 이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에.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하아."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허리를 곧 세웠다. 나름대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제일 먼저 알아챈 문제점은 바로 아이의 체력이었다.
수련하지 않은 몸. 짐작은 했으나 생각보다 심각했다. 고작 저택을 걷는 게 이리 힘들 줄이야. 분명 천려족을 만나기 전, 국경 언저리에서 지쳐 죽을 지경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점.
'굴라도 없는 것 같고.'
잘 가꾸어진 정원은 물론 인적 드문 뒤뜰까지 확인했으나 굴라가 보이지 않았다.
번식과 생존에 강한 식물이니, 보이는 족족 뽑혀 태웠을 것이다. 깊은 산 등지 외 인가에서는 볼 수 없으리라.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이 또한 문제점이었다.
"이안 님.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식사하시죠."
하인이 하품을 길게 늘이며 권했다. 이제 슬슬 밤 당번을 끝낼 때가 된 것이다. 하인의 행실 치곤 무례했으나 이 몸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따랐다.
"그래. 본채 식당으로 가지."
"네? 본채 식당이요?"
하인의 되물음 의미를 알고 있다.
어제 저녁 식사를 방에서 쟁반으로 받지 않았던가. 이안은 매 끼니를 그리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허기가 잔뜩 지기도 했고, 이안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백작 가문 인간들과 부닥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이안 님? 안녕하세요?"
"여긴 어떤 용무로...."
식당 앞에서 분주하던 하인들이 이안을 보고서 당황해했다. 식기 수로 보아, 안쪽에는 두 명이 들어선 듯싶다.
"식사하러 왔네."
"백작 마님과 첼 도련님이 계시는데요."
"데르가, 아니, 아버지는?"
"어제 외출하셔서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쯧. 일단 혀는 찼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데르가가 없으니 더욱 수월하게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 거다.
"문을 열어라."
이안이 지시하자, 하인은 어쩔 수 없이 손잡이를 당겼다. 곧 화려한 식당 내부가 드러났다.
안에서 본식을 기다리던 두 사람의 눈이 상반되었다. 놀란 듯 크게 떠지는 첼과 불쾌하게 가늘어지는 메리 부인.
"무슨 일이지?"
말씨가 날카롭다.
이안은 능청스레 받아쳤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좋은 아침입니다."
가볍게 인사 후 그들 맞은 편에 앉았다.
첼이 안절부절못하며 제 어미를 돌아봤으나, 메리 부인은 이안을 노려본다고 알아채지 못했다. 어제 정원에서 본 인자한 부인과 동일인이라 생각지 못할 만큼 악독스러운 표정이다.
"식사라면 방에서 받아."
베일 것만 같은 말씨에도 이안은 태연히 식탁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분명 어젯밤엔 그리했습니다. 하나 빵조각을 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옳지 못한 것 같더라고요."
"뭐라?"
"제가 어제 핑거볼을 마시는 바람에 몰린 경이 굉장히 놀라셨지 않습니까? 백작가에 고작 둘 있는 자식들이 죄다 실수를 해댔으니."
그의 말에 첼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메리는 거칠게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입을 앙다물었다. 닥치지 않으면 경을 치겠노라, 경고하는 눈빛이다.
"아버지께서도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배움에 정진하라고요. 혼자 쟁반으로 하는 식사에서는 예절을 배우기 힘드니, 이리 함께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속여 말했다. 데르가가 지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그의 의도인 것처럼.
"어머니?"
"…앉아."
아침부터 속이 끓는다는 표정이었다.
메리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잡고서 프리타타를 썰었다. 첼은 입맛이 뚝 떨어졌는지, 가만 앉아 이안을 힐끔거렸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시선을 나눴다.
"역시 쟁반보다 식탁에서 받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요? 형님?"
"응? 으응...."
양이 훨씬 많았다. 이안은 우아하고 부지런한 손길로 허기를 채웠다. 그러면서도 부인을 자세히 살폈는데, 장신구와 드레스는 물론 몸에 걸친 모든 물건이 황제 이안의 시대에서도 귀하다고 칭송할 만한 것들이었다.
아랫것들은 먹을 게 없어서 서자의 밥그릇까지 넘보고 있건만, 부인된 자는 사치를 부리고 있다.
전반적으로 개판인 가문이다.
"어머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좀 닥치고 먹지 못하겠니?"
"방을 바꿔주세요. 초도 놔주시면 좋겠습니다."
"하!"
부인은 그제야 이안을 쳐다봤다. 기가 찬다는 듯 헛헛한 웃음까지 터트리며.
"분수도 모르는구나. 방을 바꿔? 초는 또 무엇에 필요한데? 아둔하여 글자 하나 깨우치지 못한 게 쓸데없는 낭비를 하려 해. 천하여 허영심만 있는 어미를 똑 닮았지?"
모욕을 넘어 배설 수준이다.
첼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안이 분노하여 금빛 눈을 내보일까 봐, 그리하여 알 수 없는 힘을 쏟아낼까 봐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제 어머니는 백작 부인이신데, 똑 닮은 것은 당연하지요. 부인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하지만 이안은 맑게 웃으며 한 방 먹였다. 네가 말한 천하고 허영심 있는 여자가 바로 너라며.
공손한 말투라 부인은 바로 알아채지 못했으나 곧 괘씸한 내용임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너!"
"몰린 경이 다음 주에 오시면 제 방을 보여달라고 하셨습니다."
부인이 바들바들 떨며 새된 소리를 지르려던 참이다. 이안은 말끔하게 잘라 끼어들었다. 거짓말이었으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쓸모있는 거짓말이다.
"귀한 손님에게 그런 방을 보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일만 바꾼다 한들 기민하신 분이라 어색한 점을 바로 알아채실 겁니다. 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참에 내주시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인데요?"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제가 아둔하여 부족한 면을 보인다면, 오롯이 첼 형님께 부담이 갈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걸 원하시지 않잖아요."
형식적인 절차라고는 하나, 몰린 경은 황궁에서 보낸 중앙 관료였다. 지방 귀족을 견제하는 건 당연지사. 일이 글러졌다간, 정말 첼을 대신 보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머니."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기를 우물거렸다. 그러니 닥치고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우라는 시선.
백작 부인은 당황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고작 하루 만에, 그 산송장 같던 것이 어찌 저리 맹랑해졌단 말인가?
콰앙!
부인은 실로 불쾌하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첼 역시 우물쭈물 눈치만 보다 일어섰다.
"형님?"
"아? 으응...?"
슬그머니 문을 나서던 첼이 뒤를 돌았다.
"어제 일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그러하긴 하지만...."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는 건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랍니다."
겉으로 보면 첼의 실수를 위로하는 말이었으나, 속내는 어제 본 것을 잊으라는 뜻이었다. 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음식이 많이 남겠는데?'
이안은 눈썹을 까딱거리며 눈앞의 풍성한 식탁을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먹을 정도만 던 다음, 나머지는 옆으로 치웠다. 하인들을 위한 것이다.
"음."
이안은 아주 느긋하게 음식을 맛보며 바깥을 구경했다. 널찍한 식당에 홀로 앉아 있으니 참으로 평안했다. 전생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여유다.
그러다 문득, 유리창 위로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작고 왜소하면서도 낯선 얼굴.
'이안.'
황제 이안이 여기 있다면, 서자 이안은 어디로 간 것인가?
이안은 담담한 아이의 얼굴과 마주한 채 턱을 괴었다. 정원의 아름드리나무가 우아하게 흔들렸다.
한편, 그날 늦은 오후.
백작 부인은 분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안의 방을 별채로 옮겼다. 몇 없는 짐을 싸기 위해 하인들이 이안의 방을 뒤적였고, 이내 의아한 종이를 발견했다.
"이게 뭐람?"
이안이 전날 밤 바리엘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었다. 하지만 물컵에 푹 담겨 있어, 잉크는 번질대로 번졌고 종이는 절어서 찢어졌다. 도무지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안 님이 공부라도 하셨나?"
"근데 왜 물에 담그셨지?"
"왜긴? 저가 보기에도 부끄러웠겠지."
하인들은 그 종이가 무엇을 담았는지도 모르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서자 이안은 까막눈이라며, 저택 모두가 의심하지 않았다.
제7화. 까막눈
"이안 님. 집중하셔야지요."
이안은 가정교사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서쪽 별채의 손님방. 이전과 달리 사방으로 트인 창에서 맑은 바람이 들어왔다. 심드렁한 제자의 모습에, 교사는 한숨을 쉬며 펜을 끼적였다.
"자. 다시 해보겠습니다. 영지민 100명이 밀 다섯 자루를 조세로 바쳤다고 합시다. 그중의 절반은 수도로 보내고, 다시 남은 것의 절반은 저택 하인들에게 나눠줬다고 하면 최종적으로 남는 것이 몇 자루입니까?"
이안이 가볍게 하품하며 시선을 돌렸다. 오후에 두어 시간씩 보내는 공부 시간은 정말이지,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다.
"모르겠습니다."
바로 바뀌면 이상하게 볼 것 같아, 맨 처음에는 손가락까지 세워가며 계산하는 척을 했다.
근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하려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이안은 마음을 고쳐먹고 아예 모르겠노라 시치미를 떼었다.
"계산이라도 해보십시오."
"음. 100자루 아닐까요?"
게다가 서자의 아둔함을 이용하면 뜻밖의 소득도 있었다. 이안의 교육 과정을 두고서 가정교사와 집사가 필담을 종종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시답잖은 내용이었지만. 가끔은 가주의 일과 같은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수학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은 문학입니다. 저번 시간에 을 읽었지요?"
가정교사는 열의가 없는 자였다. 이안이 이해하든 말든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만 우직하게 해나가며 봉급을 타 먹었다.
이안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모른다고 하면 깔끔하게 포기하니, 아등바등 공부하는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집사가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하인이 아닌 집사가 직접 가져오는 것은 아이의 학습 태도를 관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을 터.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나요?"
"문학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렇군요. 오늘은 마침이 빠른 것 같네요."
"이안 님이 워낙 잘 따라주시니."
얼씨구. 웃기고 있네.
이안은 간식을 와작거리며 그림이 절반인 책을 내려다봤다. 집사가 가정교사 쪽으로 손바닥을 보이더니 뭔가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이안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네. 집사님."
타악.
가정교사는 몇 없는 글자를 읽어주고, 양피지에 적어주었으며, 이안에게 따라 적기를 시켰다.
그렇게 지루한 오후 공부시간이 마무리되었다. 벽에 걸린 자명종이 울자, 가정교사가 책을 챙기며 일어났다.
"배웅하겠습니다. 선생님."
"아니. 괜찮습니다. 오늘은 바빠서요. 이안 님은 글씨 공부를 마저 하세요."
항상 가정교사를 마중, 배웅하며 걸음걸이와 인사 혹은 사교 예절을 익히곤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거절하는 날은 그가 집안의 누군가를 만나고 간다는 뜻이었다.
"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안은 별다른 말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트를 챙겨 입은 가정교사가 웃으며 방을 나섰다.
'집사를 만나러 가는 것인가?'
간혹 백작이나 백작 부인을 보는 것도 같다만. 별채로 옮겨진 이후 근처를 배회하는 시종이 많아 뒤를 따를 수는 없었다.
미련을 버린 이안은 양피지를 대충 치우고서 몸을 가볍게 풀었다. 방이 넓어져서 다행인 것은, 밖에 안 나가더라도 신체를 단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력이 곧 마력이다.'
마력으로 체력을 기르고, 그 체력으로 다시 마력을 담아내는 것이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현자들이 백발노인이 되어서도 정정한 게 바로 그 이유였다.
"이안 님."
똑똑.
그리고 그날 밤.
저녁 식사까지 마친 이안을 집사가 불렀다.
"백작님이 집무실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 * *
데르가의 집무실은 저택 꼭대기 층에 있었는데, 한 층을 다 쓰다 보니 그쪽 복도를 거닌 적이 없었다. 이안은 의아해하면서도 의연하게 집사를 뒤따랐다.
"백작님. 이안 도련님 오셨습니다."
두꺼운 문손잡이를 몇 번 두드리자,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와라."
끼익.
야광돌 하나만 달렸던 이안의 예전 방과 달리, 집무실은 대낮처럼 훤했다. 빼곡하게 들어선 마력 랜턴이 곳곳에서 빛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중충한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데르가 백작의 존재 탓이겠지.
"부르셨습니까?"
이안이 공손히 물었으나, 데르가는 답이 없었다. 밤낮으로 밭 가는 평민들에 비하면 실로 천하태평인 업무 환경이지만, 백작은 백작 나름대로 바빠서 정신이 없을 것이다.
"···모레 오찬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네. 물론입니다."
데르가는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다른 보좌관들도 대동한다 하는구나."
첫 번째 식사가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시골 변경, 그것도 서자 출신 아이가 푈른의 철학을 논하고 있으니 흥미가 돋은 듯싶다.
"저번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고작 이걸 단속하려고 부른 것인가?
방을 바꿨을 때도 별말 않던 데르가였다. 이안은 참을성 있게 뒷말을 기다렸다. 양피지 위로 그어지는 펜촉 소리가 이어지고, 백작은 무겁게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천려족에서 네 친필 서신을 요구했다."
이쪽에서 화친의 조건으로 데르가의 둘째 아들을 보내겠다 전달했음은, 이안도 아는 사실이었다.
동질의 가족에게만 반응한다는 물약도 함께 동봉했으니 핏줄에 관해서는 가타부타 언급할 것이 없었다.
물론 천민 출신 서자인 것은 모르고 있겠지만. 어쨌거나.
"제 친필을요?"
그들은 나름대로 보안장치를 원하는 듯하다.
혹여 데르가가 아들을 안쓰러워한 나머지 막판에 바꿔치기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가족 간의 유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천려족인지라, 그렇게 생각할 여지는 충분했다.
"야만족답게 귀찮은 일을 사서 만든단 말이지. 쯧쯧. 협약식에서 동질 물약을 또 쓸 터인데."
바리엘 제국과 달리 천려족은 마법사가 따로 없다. 그들은 짐승과 진배없는, 핏줄부터가 자연을 거스르는 존재들이니까.
"뭐. 나로서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친필 서신을 받아 놓고, 나중에 필체 대조를 하려는 것이다. 이안이 데르가의 서자이며 점찍어 두었던 대상이 맞는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서신을 써서 보내도록 하여라. 가정교사에게 일러둘 터이니 너는 받아쓰기만 해. 설마 그것도 못 하는 천치는 아닐 테지."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끼익.
그 순간. 집무실에 딸려있던 작은 방문이 열렸다. 집무관이 바싹 절은 낯빛으로 데르가를 찾았다.
"백작님. 아무리 해도 계산이 맞지 않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쌓인 서류 더미를 한가득 안은 채였다. 조금만 삐끗해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백작이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내가 움직이지."
이안에게는 잠시 기다리라는 눈빛이었다.
업무를 보던 서류들이 책상 위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지만, 백작은 별로 경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안은 까막눈에 가까웠고, 읽는다 해도 음절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쳤으니까.
"기다려라."
데르가는 집무관의 사무실로 들어가며 명령했다. 알겠노라 공손히 웃던 이안의 표정이 단번에 뒤바뀌었다.
'한번 보자. 무엇이 그리 바쁜지.'
지금은 초봄이었다. 성실한 가주들은 땅이 얼었을 때도 영지를 돌보지만, 아무리 봐도 데르가는 그럴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몰린을 만났던 날까지 뒷골목 나들이를 즐기지 않았던가.
차락.
이안은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순서가 섞이지 않게끔 종이 흩트리는 솜씨가 아주 부드러웠다.
'음?'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추측대로 데르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브라츠 변경의 크기라면 많아 봤자 300 안팎이어야 무리 없이 돌아갈 터. 하지만 군량미 지출 숫자로 봤을 때 2,000에서 3,000까지도 가능한 수였다.
'안 망한 게 용하군.'
게다가 영지민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수도 권장비율보다 두 배 이상이었다. 역사에서 천려족이 브라츠를 멸문시킨 건, 어찌 보면 순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가만두어도 자연히 붕괴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 이안은 작은 집무실을 어이없이 노려봤다.
저자는 대체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기에 영지 운영을 이따위로 한단 말인가?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벌써 몇 대째 내려온 가문이면서.
'혹시 다른 돈줄이 있나?'
얼마나 오래 이리 경영했는지는 몰라도, 세금만으로 충당하기에는 상당히 빠듯해 보였다.
'브라츠 쪽은 뭐 없을 텐데.'
짚었다시피, 변경 밖 천려족 땅과 인접한 브라츠 영지였다. 땅이 비옥한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억에 남을 만큼 중요한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면 선대에서 다른 귀족에게 영지를 나눠주지 않았겠지.'
선황은 천려족을 함께 물리친 귀족들에게 영지를 잘라서 하사했다. 중요 자원이 있으면 황궁에서 그랬을 리 없다.
달깍.
그때, 예고 없이 문이 열렸다.
백작 책상에 팔을 기대고 있던 이안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며 마력을 쏟아냈다.
지이잉. 지잉.
"음?"
동시에 방안의 랜턴이 죄다 꺼져버렸다.
집무관 사무실도 마찬가지.
달이 구름 뒤에 가려져 있는 터라, 사방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잠겼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마력 랜턴 바꾼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잠시만요. 초를 키겠습니, 으악!"
쿵!
집무관이 어딘가에 몸을 박았다.
이안은 달이 나오기 전, 슬그머니 기척을 숨기며 방 가운데로 움직였다. 데르가가 앞을 더듬거리며 제 책상을 찾았다.
"이안. 대답해라."
"네. 아버지."
어둠 속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울렸다. 소리로 보아, 소파 근처에 서 있는 것 같다.
"밖에 누구 없어?!"
초를 찾는다던 집무관은 계속에서 넘어졌고, 어둠은 가실 줄을 모르니. 데르가가 짜증을 확 부리며 소리쳤다.
지잉. 지이잉.
그러자 랜턴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숨을 고른 이안이 마력을 거둔 것이다.
데르가는 차분히 서 있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압생트색 눈이 형형했다.
"괜찮으십니까?"
"······."
백작은 책상 짚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서류가 좀 흐트러져 있었으나, 어둠 속에서 자신이 건드린 것이라 치부할 만했다. 그는 의심 없이 서랍을 열었다.
"되었다. 이리 와 받아라."
"무엇입니까?"
손수 수를 놓은 작은 주머니였다. 데르가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가볍게 던졌고, 정확히 이안의 발치에 떨어졌다.
"네 어미가 주는 것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작은 주머니.
이안은 천천히 주워들었다.
"항시 그걸 보며 네 처지를 떠올리고 행동거지를 유념하라."
해나를 통해 듣던 이안의 소식이 뚝 끊어지자, 어미는 자살을 시도했다. 살아서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만나겠다고.
그 돌발 행동에 백작은 어쩔 수 없이 타협점으로 서신과 선물을 전해주겠노라 한 것이다. 그녀가 죽으면 이안의 족쇄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
해나가 마부를 통해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노라 빠짐없이 말해준 사실이었다. 평소 심부름 값을 후하게 쳐주었으니 거짓이 섞여 있진 않을 테다.
"그만 나가."
데르가가 손을 내저었다.
이안은 낡은 주머니를 들고서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복도에 기대어 줄을 풀자, 잡다한 것들이 쏟아졌다.
쨍!
금화 다섯 개. 말린 꽃. 아주 작은 쪽지.
금화 하나는 평민이 한 달에 벌 수 있는 금액과 맞먹었다. 이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편지를 살폈다. 글씨가 정갈한 것이, 분명 누군가에게 대필을 부탁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어미의 진심만 담겨있을까?
'아니. 데르가의 속내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지. 편지를 바꿔치기했다든가....'
이안은 금화를 만지작거렸고, 이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제8화. 의도
"이안. 나의 작은 아이야. 크흠."
가정교사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이안의 눈치를 봤다. 이 편지를 받은 서자는 까막눈이니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대신 읽어달라 부탁했을 것이다.
개중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은 가정교사.
이안은 말간 눈을 반짝이며 턱을 괴었다.
"계속 읽어주세요. 선생님."
"너는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니? 어미는 데르가 백작님 덕분에 편안하단다. 일하지 않아도 되어 나날이 행복해. 너 또한 백작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움에 정진하렴. 첼 도련님은 배다른 형제지만, 네가 모셔야 한다는 걸 잊지 마. 화친의 상징이 되는 걸 영광으로 여겨. 무엇보다 천려족과 공고한 관계를 쌓도록 하여라. 너와 도련님은 세대를 이어갈 희망이란다."
편지를 읊는 교사가 힐끗,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
그래. 그리고 문제의 본론.
"천려족은 궐련 대신 구룻잎이라는 걸 피운다고 하는구나. 어미도 한번 맛보고 싶다. 내년, 네 생일날 들어올 때 씨앗을 몰래 얻어다 줄 수 있겠니?"
구룻잎은 천려족이 쓰는 일종의 각성제였다.
채로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잎을 말아 태우기도 했다. 정확히 어떤 식물인지 그리고 어떻게 만드는지조차 알려진 게 없는 천려족의 비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이 전투에 임할 때 잎 하나씩은 물고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소중히 가꾸었던 화분에서 꽃이 피었다. 국경을 넘어가면 더는 너를 볼 수 없겠지."
"…흐음."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있군요. 이 편지가 닿았다면 어미가 자주 불러줬던 노래 한 소절을 적어주렴. 언제나 사랑해. 나의 아들."
짐작하건대, 주머니에 들어있던 말린 꽃잎이 어미가 보낸 진짜 선물이었다. 또한, 마지막 문단만이 진짜 편지내용이겠지. 그녀가 나름 머리를 쓴 것이다. 암호를 요구하여, 백작이 편지를 전해주고 답신을 보낼 수밖에 없게끔.
'어미가 편지를 보낸 김에 구룻잎을 밀수입해 오라 말을 섞은 것 같은데....'
의아한 것은 데르가의 접근 방식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번잡한 방법으로 이안을 꾀는가?
그저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어미 목숨을 저당 잡아 명령한다면, 이안은 이행할 것이다. 이렇게 빙 돌아갈 이유가 없을 텐데.
"이안 님?"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편지 내용은 꼭 비밀로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분명 데르가의 숨겨진 의도는 더 있을 터. 이안은 그걸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교사는 깨끗한 양피지를 꺼내며 물었다.
"답장은 오늘 쓰시겠습니까?"
"아니요. 할 말이 너무 많아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부탁드릴게요."
"그렇습니까. 모친께서 기다리실 텐데요."
재촉하는군.
하지만 쓰고 싶어도 노랫말을 모르니 곤란했다.
'틀린 노랫말을 쓰면 어미 쪽에서 난리가 나겠지. 내가 어떻게 된 줄 알 거야.'
족쇄는 이안을 묶는 동시에 보호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혹여 오인한 어미가 자결이라도 한다면? 데르가가 이안을 옭아매기 위해 어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최악이라면, 화친식 날까지 감금될 수도.'
아무래도 그녀를 직접 만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다행히 내일이 몰린 경과의 오찬 날.
잘 이용한다면 저택 바깥으로의 외출 기회와 데르가의 의도, 두 가지를 얻어낼 수도 있을 거다.
* * *
"오. 몰린 경."
"일주일만이군요. 데르가 백작님."
미리 일러둔 대로, 몰린은 자신의 수행원들과 함께 저택을 찾았다. 젊고 호쾌해 보이는 사내 둘이었는데, 몰린이 중앙 행정부에서 이끌어 주고 있는 후배임이 분명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님."
"오찬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각각 맥과 드고르라 소개한 남자들이 백작 부인의 손등에 키스했다. 부인 메리는 기품있게 웃으며 제 아들 첼을 앞세웠다.
"부디 즐거운 시간이셨으면 좋겠네요."
"아. 이분이 첼 도련님이신가요? 그렇다면 이쪽이?"
사실 헷갈릴 것도 없다.
전해 들었던 것처럼 이안은 햇빛과 같은 찬란한 금발이었으니까. 그저 예의 차리기 위한 겉치레였다.
"이안입니다."
"반갑습니다. 말씀 듣고 참 보고 싶었습니다."
"맥이라 부르세요. 도련님."
첼은 이안과 같은 호칭으로 불린 게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른들과 이안 앞에서 툴툴댈 수 없는 노릇. 첼은 제 어미 옆에 딱 붙어 정원으로 걸을 뿐이다.
"역시 브라츠 백작저입니다. 정원이 아주 멋있군요."
"수도에서 오신 분께 그런 칭찬을 듣다니. 오늘 운이 좋은 모양입니다."
사소하지만 서로의 품격을 재는 듯한 대화가 오갔다. 나쁜 의도가 들어간 건 아니었다. 귀족들이 으레 그러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습관적인 버릇이었다.
"주인님. 식전 음식을 들이겠습니다."
"그래."
집사의 신호에 하인들이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식전주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날이 맑으니 셰리로 먹겠습니다."
"이안 도련님은요?"
맥의 친절한 물음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같은 것으로 달라 할 뻔했다.
셰리는 백포도 와인. 음주를 하기에는 애매한 나이다. 그는 방긋 웃으며 과일 음료를 요구했다.
"저번 주보다 용모가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몰린은 손을 닦으며 인자하게 웃었다. 화친의 제물로 묶인 몸이긴 하다만, 노인이 보기에 이안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오늘을 기대해서 그런가 봅니다."
"하핫. 그렇습니까?"
"사실 수도에 궁금한 게 많았거든요. 저번에는 제 얘기만 해서 좀 아쉬웠습니다. 그렇죠, 아버지?"
이안의 능청스러운 말에 데르가가 헛기침하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사이 하인들이 식전 음료와 간단한 샐러드 따위를 세팅했다.
"그래. 무엇이 그리 궁금하십니까? 사실 수도라고는 하나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답니다. 오늘 맥과 드고르를 데려오길 잘했습니다. 늙은이라 젊은이들 사정은 잘 몰라요."
이안은 사소한 것으로 운을 뗐다.
수도 학생들은 무엇을 공부하는지, 여가는 어떻게 보내는지, 정말로 마법사를 본 적이 있는지 등등. 마법사 얘기를 할 때 몰린을 비롯한 맥과 드고르의 시선이 반짝였다.
"특히 수도에서는 보통 뭘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수도라고 해서 특별하고 풍족한 게 아닙니다. 영지에서 올라오는 특산품은 모두 황궁으로 들어가지요. 무엇보다 중앙에는 농지가 거의 없어요."
"상인들이 유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수도의 기근은 땅의 마름이 아니라 지갑의 마름에서 온답니다. 적절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것이 황궁의 역할 중 하나지요."
첼이 눈만 굴려대며 아는 척을 해대는 것과 달리, 이안은 여유롭게 맞장구치며 대화를 주도했다. 맥과 드고르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눴다.
'천민 서자치고는 영민하다 하시더니.'
핵심을 찌르는 통찰력과 아이답지 않은 집중력이 예사가 아니었다. 이안은 느긋한 태로 스테이크를 썰며 거들었다.
"식품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 언제나 공급이 많아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먹거리를 발견한다면 참으로 좋겠는데요."
힘주지 않은 말이었다. 날씨 이야기처럼 가벼운 말. 이안의 말에 어른들이 죄다 집중했다. 데르가와 백작 부인은 저것이 오늘따라 왜 저리 말이 많나 싶었고 손님들은 흥미로워 보였다.
특히 몰린 경이.
"새로운 먹거리라. 이안 님의 식견이 궁금하군요."
"식견이랄 것도 없습니다. 먹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 알고 보면 귀한 식재료일지도 모르지요."
"아하하. 그런 꿈 같은 일이 있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굶주린 자는 살고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대니. 그 속을 잘 살펴보면 좋은 발견을 할지도요."
당장은 굴라에 대해 알려줄 생각이 없다. 적절한 기회가 올 때까지는 함구할 예정이었으나, 밑밥 정도는 괜찮지 싶어 흘렸다. 그러자 맥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빈민가에서는 해산물 껍데기로 스튜를 만들어 먹는다고 하더군요. 의외로 맛이 좋다 합니다. 이안 님은 드신 적 있으십니까?"
호의로 가득했던 대화 속에서 처음으로 날 선 질문이었다. 가난해서 사창가에서 살던 이안. 빈민 중의 빈민이라 말할 수 있으니.
'의외로 매섭군.'
이안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중앙과 변경은 서로 견제하는 관계다. 황궁은 첼 대신 이안을 보내는 걸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 천려족으로 넘어간 후, 자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 받는다면? 그로 인해 바리엘에 손해가 발생한다면? 변경을 효과적으로 압박할 빌미를 갖게 되는 거다.
따라서 질문의 의중은 딱 하나였다.
'이안. 너는 빈민가 출신이니?'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세탁한 서자의 출신을, 제 입으로 못 박게 만드는 것. 중앙처 관료 셋이 동시에 들었으니 그것보다 확실한 증언이 없을 터.
"이안? 맥 경께서 묻고 계시잖니."
백작 부인이 웃으며 재촉했다. 말 한마디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오고 가는지 모르는 것 같다. 물론 첼 역시 마찬가지.
"아무래도 그러지 않았을-"
"첼!"
첼이 더듬더듬 입방정을 떨려 하자, 데르가가 재빨리 일갈했다. 쨍그랑. 깜짝 놀란 그가 포크를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데르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들을 단속했다.
"맥 경이 이안에게 질문했지 않느냐. 끼어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조심하거라."
입 닥치라는 뜻이었다.
첼은 울상이 되어 입을 앙다물었고, 메리 부인은 식탁보 밑으로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부군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자못 날카로웠다. 그리 큰 잘못도 아닌데, 어찌 그리 소리치냐는 듯. 안 그래도 저번 주에 실수하여 의기소침해진 아들 아닌가!
"저는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이안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데르가 백작 곁에서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좋았다.
"저택 밖에서 자랐지만, 아버지께서 언제나 따뜻하게 돌봐주셨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자랑스러운 브라츠 가문의 혈통이니까요."
"오호. 분명히 그렇지요."
모두가 거짓말인 것을 알지만, 모른 척 외면하는 웃긴 상황.
몰린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예고 없이 훅 들어간 공격을 어찌 잘 간파했다며.
"그런 연유로 먹어본 적은 없으나 기회가 된다면 접해보고 싶긴 합니다."
데르가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별다른 말을 하진 못했다. 이안의 대답이 똑 부러졌으며, 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십니까?"
"사실 자연에서 오는 것에 귀천이 어디 있답니까. 굶주림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자체만으로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진미라면서요."
순간 몰린은 이안의 대답에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주장이었는데······.
"황자 저하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드고르가 가려운 부분을 긁어줬다.
'황자? 누구지?'
이안 시대를 기준으로 지금의 황제는 수 대 거쳐 올라가야 했다. 거기에 황자는 또 좀 많은가? 보통은 열 명 이상씩 자식을 두었다.
한마디로, 황제였던 이안도 100여 년 전의 황자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다.
"게일 2황자 저하 말씀입니다. 귀족들과 길거리 음식에 관해 얘기하던 중 아주 담담하게 그리 발언하셨죠. 하하."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뒤에서는 꽤 흉봤을 것이다. 일국의 황자 되는 자가 교양 없는 소릴 했다고.
그나저나 게일 2황자라. 어디선가 들은 듯 굉장히 익숙한······.
"두 분이 만나면 잘 통하겠습니다."
"이안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훌륭한 의견이라고 생각해요."
데르가의 체면치레에 드고르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굶어 죽는 자가 한 해에도 수만 명인 시대에 그깟 길거리 음식이면 뭐 어떤가? 사는 게 우선이지.
"체면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아무리 길거리 음식이라도 어쨌거나 가치가 있으니 소비가 되는 것이건만."
"그렇지요. 그런데 현실은 더욱 흉흉하니. 서민들만 하여도 천민이 먹는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맥과 드고르의 한탄에 백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새로운 작물이 발견되어도 보급까지 또 한참 걸리겠지요?"
나쁘지 않은 화두였으나 맥락이 틀렸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어머니. 사실 보급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요? 이안 님, 의견이 있으신가 보군요."
몰린의 시험하는 듯한 말투. 이안은 알 것 다 아는 사람이 왜 그러냐는 듯 웃어 보였다.
제9화. 두 번째 오찬
"소문을 이용하면 됩니다."
"소문을요?"
이안은 몰린을 살짝 쳐다봤다.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지금 해줄 터이니, 잘 들으라는 듯.
"정확하게 말하자면, 욕망을 실현하게 해주는 소문이요. 먹으면 피부가 매끈해지며 머리카락에 윤이 나고 굵어진다든가. 혹은 체중 감량이나 증진에 도움이 된다거나. 그도 아니면 임신에 효과적이라 일러두면 서로 먹겠다고 안달 날 것입니다."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이건 중앙처에서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여론을 형성해 시장 균형을 바로잡는, 아주 기초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
"흥미롭군요. 하나 황궁의 시민들은 기민하면서도 영리하답니다. 뜬소문이라는 게 금방 탄로 나겠지요. 그다음은 어쩌시겠습니까?"
맥이 셰리로 입을 축이며 물었다. 그것 역시 문제 되지 않았다.
"경비를 세워두면 되지요."
이안은 검지와 중지를 테이블에 세워 사람의 다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식기 옆에서 원을 그렸다.
"장황하게 세워두되, 허술한 구멍을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귀한 걸 탐내는 건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설령 지키는 게 개똥일지언정 욕심내서 훔쳐 갈 것입니다. 과연 저게 무엇이라고 지체 높으신 분들이 밤낮으로 지킬까, 하며. 그때가 되면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으니 모두가 자연스레 접할 겁니다. 하나."
"하나?"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대체할 먹거리가 과연 생겨날 것인가, 그것이겠지요."
몰린과 맥, 드고르는 뇌리로 정전기가 이는 기분이었다. 제국의 날고 긴다는 자들이 모두 모이는 중앙처였다. 수많은 사람이 봐왔다는 뜻이다.
학식 좀 쌓았다는 자들에게는 기대할 만한 답변이었으나, 고작 애 티를 벗은 아이가 이리 총명하게 답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사창가를 떠돌던 아이 아닌가.
세 남자는 그제야, 가장 먼저 고려했어야 할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렸다.
'첫째 대신 과연 둘째가 국경을 넘어도 되는가?'
간과했다. 아니 오만했다. 빈민가 출신의 서자이니 당연히 뒤떨어지지 않겠느냐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방긋 웃으며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왔다.
"역시 맛이 좋습니다."
"그, 그렇네요. 날씨가 좋아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시작은 가벼운 오찬이었으나,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안은 모두가 저를 주목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일단 굴라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이제 본격적인 시간이니까. 이안은 데르가가 어찌하여 편지로 수작질을 하였는지, 그리고 저택 바깥으로 나갈 틈이 있는지를 탐색하고자 했다.
"이안 님은 글짓기를 즐기시나요?"
담소가 다시 시작되었다. 맥이 이안에게 질문했으나, 시선은 자연스레 부인과 첼 쪽으로 이동했다. 아무리 이안을 보러 왔어도, 너무 한 명에게 치우치는 대화는 결례였으니.
"부인께서 문학에 일가견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제분들 역시 비범할 것으로 예상합니다만."
"어머. 과찬이세요. 그저 짧은 글짓기랍니다. 그러는 맥 경이야말로, 책을 두 권이나 집필하셨다지요? 그런 분께 칭찬을 듣자니 부끄럽습니다."
그녀의 너스레에 드고르가 끼어들었다.
"부인.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봤을 때 맥 경은 책보다 편지 쓰는 것이 훨씬 능숙하답니다. 누구라도 그의 편지만 받았다 하면 눈물과 함께 사랑을 외쳐대니 말입니다."
"드고르! 농이 심하네."
"아하하! 이안 님. 편지 쓸 때는 맥 경에게 부탁해 보세요. 아주 유용할 것입니다."
장난스럽게 눈까지 찡긋하는 모양새가 심히 익살스러웠다. 부인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깔깔깔 웃어댔지만, 데르가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 대화의 내용이 심히 불편한 것이다.
'천려족이 네 친필 서신을 요구했다.'
타이밍이 참 절묘하지 않은가. 마치 이안에게 서신 쓸 일이 있다는 걸 아는 뉘앙스였다.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담 어떻게 알아낸 걸까.
데르가는 와인으로 입을 축이며 선수 쳤다.
"안 그래도 천려족에게 전언이 왔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주기적으로 이안의 친필 서신을 보내달라 하더군요."
데르가는 다음 말을 신중히 골랐다.
"어차피 동질 확인 물약을 쓸 터인데 무엇이 그리 걱정인지 모르겠습니다. 야만족들은 짐승과 같아서 당최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맥은 방긋 웃으며 데르가를 거들었다.
"원래 짐승이란 언제나 세상을 경계하는 법이지요. 그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오직 힘으로만 질서를 따지는 것들 아닙니까. 봄에 만난 족장이 가을 되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오로지 강함. 모든 위계가 강함으로만 결정되는 공동체였다. 족장은 언제든 결투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죽음만이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그런 성질머리들 아니었으면 바리엘이 더욱 귀찮을 뻔했습니다."
저들끼리 개체 수를 조절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맥의 말에 이안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지금 천려족의 부족장은, 족장의 경쟁자인가요? 아니면 수족인가요?"
천려족은 이안이 즉위하기 전 격멸 당해 위상이 낮았다. 가끔 사막 횡단자들이 실종된다고 하니, 모래폭풍 아니면 천려족의 짓이겠구나 싶은 게 다였다.
그러니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굉장히 단편적이고 기본적인 것들뿐이다.
이안의 질문에 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둘 다 아닙니다. 부족장은 윈첸이라는 노인인데 나이가 미상일 정도로 늙었답니다. 족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지만, 그녀는 벌써 오랜 시간 부족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아. 그렇다는 말은...."
이안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천려족의 정신적 지주이겠군요."
정답이었다. 하나를 말해도 아주 찰떡처럼 알아듣는군! 맥은 기특하다는 시선을 지우지 않았다.
"전해 듣기로는요. 부족 모두가 그녀를 하늘과 닿은 자라고 여긴답니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졌거든요."
"능력이요? 그들은 마력을 천시한다고 들었는데요."
"마력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렵고, 따지자면 집시와 비슷하지요. 장님인데, 목소리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낸다고 합니다."
아. 이안은 부드럽게 눈썹을 구부렸다.
'진리를 보는 장님 부족장이라.'
이제야 데르가의 속내가 이해됐다.
구룻잎은 분명 금수품. 무슨 수를 써도 들여올 수 없는 물건이다. 이안이 제대로만 밀반입한다면 굉장한 이득이 되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천려족이 전투에 임할 때 꼭 챙긴다는 식물 아닌가.
브라츠의 군사력을 높이든지, 아니면 천려족의 전투력을 낮추든지. 무엇이 되었든 승기의 각도를 브라츠 쪽으로 눕힐 기회가 되리라.
하지만 도중에 발각당한다면?
이안은 부족장에게 심문받을 것이다. 그는 순수하게 어미를 위한 마음이었다고 털어놓을 터. 천려족에서 항의하면 브라츠에서는 이안과 모친의 죽음으로 용서를 구하면 끝이다. 백작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니, 적당한 선에서 위로품으로 달래면 된다.
'이를 빌미로 천려족이 전쟁을 선포할 가능성은?'
아직은 희박했다. 아직은.
브라츠가 멸문당하는 건 다음 세대. 분명 그때 일어난 이유가 있을 터. 당장 전면전은 무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백작님께서도 부족장에 대한 이야길 들어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그렇지요? 데르가 백작님?"
"예에. 뭐. 사실 저도 부족장은 본 적이 없는지라."
데르가는 헛기침을 큼큼 해대며 아이를 힐끔거렸다.
'한데 저 녀석은 어찌 아는 것이지?'
가정교사는 이안이 우둔하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노라 보고했지만, 종종 보이는 총기가 미심쩍었다. 저 작은 머리통 안으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당최 짐작할 수가 없다.
"들으면 들을수록 참 신기한 부족입니다."
이안은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더 환히 웃었다. 한 점의 의심 따위 찾아보지 못하게. 이안이 자연스럽게 칼질을 계속하자, 데르가는 곧 미심쩍은 눈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것 어찌하나?
이미 데르가의 의중을 알아버렸으니. 이안이 부족장 앞에 나선다면 꼼짝없이 모두 밝혀질 터인데.
'뭐. 그럴 생각도 없지만.'
그 후론 별 의미 없는 대화들이 오가다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맥과 드고르 그리고 백작 부인을 중심으로 하하호호 웃음이 터졌다.
"해서, 게일 2황자 저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저 시건방진 자식을 당장 돼지우리에 처박아라!'"
"어머나. 세상에! 진정 그러셨다고요?"
"예에. 워낙 호전적인 분이신지라"
"오호호! 정말 끔찍합니다!"
그러다 문득 이안은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다.
몰린과 맥 그리고 드고르는 중앙처에서 파견된 관리였다. 모든 공직자는 황제와 공식 후계자를 따르며 집무를 이행한다. 그런 자들이 이렇게 몇 달씩이나 수도를 떠나 있다는 건 의미가 깊다.
그만큼 중요해서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었다거나.
아니면 요직에서 멀리 물러선 자거나.
사실상 수도 사정에 빠삭하지 않은 데르가가 알 길은 없었으나, 이안은 이상하게 촉이 섰다.
'왜 자꾸 2황자를 언급하는가?'
공식 후계자는 1황자이니 당연히 이들의 주군 역시 1황자여야 한다.
물론 다른 황자들에게도 추종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자들일 터.
하지만 세 남자는 시종일관 게일이라는 2황자 얘기만 늘어놓았다.
"이안 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아니요. 그저 두 분의 얘기가 재미있어서,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잘못 짚었군요. 얼굴이 워낙 근엄하시기에. 허허."
몰린이 슬쩍 이안의 주의를 환기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아이를 찬찬히 뜯어보는 눈매가 매서우면서도 끈덕졌다.
그날, 첫 오찬을 가졌을 때 본 황금 눈이 과연 헛것이었을까? 마력 운용자는 일반인보다 지적능력이 월등하다 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데르가 백작님."
몰린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마치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맥과 드고르가 대화를 멈췄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역시 이안 님의 학식이 굉장하여 저조차 깜짝깜짝 놀랍니다. 백작님과 부인의 훌륭한 교육 방침 덕분이겠지요."
"…과찬이십니다."
"하여 작은 간청을 드리고 싶은데요."
그 말에 데르가가 살짝 불안한 눈치로 와인을 들이켰다.
능글맞은 영감탱이. 간청이라는 말로 곤란하게 만든 것이 몇 번이던가.
데르가가 대답할 말을 고르는 틈에 짧은 정적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안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제 방이라도 구경하시렵니까?"
이안이 장난기를 담아 물었다.
귀족답진 않은 화법이었으나, 예의를 갖춘 아이의 장난. 정색하며 지적하는 것은 우아하지 못한 일이었다. 메리 부인은 입이 근질거리는지 이안의 뒤통수만 노려보았다.
"그것도 좋겠습니다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랍니다."
데르가 백작을 비롯한 가문의 모두가 몰린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맥과 드고르만이 이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의연했다.
제10화. 브로치
"간청이란 게 무엇입니까?"
"벌써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나 되었으나, 저택을 오고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외출을 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데르가는 저도 모르게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모두가 뒤에 따라올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안은 아랫입술을 살포시 깨물며 쾌재를 삼켰다.
"하여, 허락만 하신다면 이안 도련님께 영지 소개를 부탁드리고 싶군요. 백작님과 부인은 바쁘신 일이 많은 줄 알고 있으니, 차마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하."
옆에서 가만히 듣던 맥과 드고르가 거들며 나섰다.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오찬도 함께 하시지요. 학식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 드고르?"
"저기...."
부인이 끼어들까 고심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내 셋을 안내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드고르는 부인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일세. 게다가 이안 님은 얼마 전까지 바깥에서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저희가 모르는 재미있는 것들을 알고 계실 겁니다."
드고르의 '저희'는 이방인인 그들을 포함하여 데르가 백작 가문 사람을 뜻했다. 서민의 골목을 너희가 아는가? 오직 이안 만이 가능한 일이니 끼어들 생각일랑 말라는 의도가 짙었다.
"크흠."
데르가는 심히 당황한 모양새였다. 입안의 와인을 차마 넘기지도 못한 채 눈을 굴려댔다. 어떤 명분으로 거절할지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갓난쟁이도 아니고, 다큰 사내아이를 바깥에 못 보낼 이유가 무엇 있단 말인가? 게다가 학식 토론이라는 아주 건전한 모임 목적까지 덧붙여졌다.
"저택에 자주 찾아오는 것은 손님의 예가 아니지요.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희 거처로 모시겠습니다. 고용한 마부가 아주 친절해요."
몰린이 종지부까지 찍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앞에서 끌어주려 하니, 뒤에서 밀어줄 수밖에.
"몰린 경, 거처가 어디십니까?"
"포트로가 3구역 공원 근처입니다."
"아. 포트로가요?"
"잘 아시는가 보군요."
"아무래도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까요."
이도 저도 아닌, 해석하기 나름인 대답이었다. 실제 서자 이안이 그리했더라도, 황제 이안은 포트로가가 어떤 구역인지 감도 안 왔다. 다만 몰린이 공원이라 콕 짚어주었기 때문에 대충 둘러댈 수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더더욱 잘 되었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며 사색하는 것도 좋겠어요. 요즘 볕이 참 따뜻하지 않습니까? 보아하니 작은 호수에 놀잇배도 뜨는 것 같던데, 노인인지라 차마 타지 못했답니다. 이안 님이 도와주시면 용기 내 보겠습니다."
몰린이 눈썹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이들도 뭔가 속셈이 있구나.'
이안은 백작의 표정을 살폈다. 데르가 역시 어색하게 쓴웃음을 내걸었으나, 표정은 딱딱했다. 안 그래도 거절한 명분이 없는데, 그럴듯한 이유는 자꾸만 생겨났으니.
"백작님?"
"이안. 네 의사가 중요하단다."
결국, 백작은 최후의 카드를 썼다. 결정권을 이안에게 넘긴 것이다. 입은 자비롭게 웃고 있지만, 눈은 냉랭하기 그지없다.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잔뜩 담겨 있었다.
'재밌네.'
변경백인 데르가와 중앙 관리 출신 몰린이 아이 하나를 두고서 기 싸움하는 장면이라. 황궁에서도 심심치 않던 것이나, 위가 아닌 아래에서 보니 색달랐다.
"글쎄요."
이안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에 말을 얹었다. 당연히 바깥으로 나가는 게 이득이지만, 승부가 나기 전에 크게 흔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안내가 서투르면 오히려 방해만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직 어린 터라 경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뜻밖의 대답인지, 몰린 경 일행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데르가는 와인 잔으로 미소를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수도에서 오신 분들의 식견을 엿듣는 자리가 흔한 것은 아니니. 안내가 아니라 학식 겸한 오찬이라면...."
이안이 데르가를 힐끔거렸다. 와인을 음미하듯 씹어대는 턱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러자 드고르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백작님. 혹여 저희가 부족하여 그러신 것이라면, 민망한 말을 꺼냈습니다."
대화 주도권을 가져오는 솜씨가 일품이다. 놀랄 만큼 능숙한 화법이었다. 서로의 처신을 올려주며 긍정적인 대답을 이끄는.
저 물음에 데르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럴 리가요. 당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언제가 좋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이안에게 물으시지요. 이안?"
다시 이안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이번엔 몰린이 기품있게 나섰다.
"백작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이니, 백작님이 날을 잡아주심이 좋겠습니다. 브라츠의 모든 일은 백작님이 행하시는 거니까요."
황제 이안마저 감탄할 만큼 훌륭한 화술. 중앙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아주 기민했다. 변방의 거만한 귀족 데르가는 절대 저들을 말로써 이길 수 없으리라.
'속내가 뭘까.'
처음에는 그저 몰린 경의 사소한 견제인 줄 알았다. 자주 보고 대화할수록 서자의 흠을 잡아내기 수월할 테니까.
근데 셋이서 치고 빠지는 걸 보니,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부수적인 기회를 위한 것치고는 힘을 많이 들이고 있었다. 데르가는 알아챘을까?
'알아챘군.'
수염을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도르륵 굴러가는 눈동자는 또 어떠하고? 어차피 거절할 명분이 없는 이상, 협조하여 그들의 의중을 알아보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 점심 어떠십니까?"
데르가는 몰린을 향해 물었지만, 시선은 이안에게 가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다 마쳤는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굳은 얼굴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오. 감사합니다. 백작님."
"대신 저도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한 뒤, 첼을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이 데르가를 따라 아이에게 집중됐다. 스테이크를 한입에 넣으려던 첼이 멈칫거리며 굳었다.
"이안의 말대로 중앙에서 내려오신 분들이니 분명 훌륭한 선생님이 되시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하니, 첼 역시 함께하여 학식을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귀찮긴 하지만 곤란한 부탁은 아니었다.
맥과 드고르 그리고 몰린이 재빠르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이뤄진 소통이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학교를-"
"좋습니다. 첼 도련님 역시 총명하기 이를 데가 없으니. 오찬 토론이 아주 기대되는군요."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첼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어른들끼리 결론을 내버렸다. 첼은 질색하듯 이안을 힐끔거렸다. 안 그래도 껄끄러운데, 종일 붙어있으라고? 그것도 백작저 밖에서?
"그럼 슬슬 디저트를 내올까요?"
"네. 아주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이안 역시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얻고자 한 걸 모두 얻은 식사 자리. 먹지 않았어도 배가 불렀을 것이다.
"오늘 식사, 영광이었습니다. 데르가 백작님."
"다음 주에 또 뵙도록 하지요."
"이안 님. 내일 점심에 맞춰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이후의 대화는 실로 영양가가 바싹 빠진 잡담이었다. 의례적으로 오고 가던 하하호호 웃음도 없었다. 모두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대화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몰린과 그 일행은 디저트를 반쯤 남기고서 일어섰다.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부인. 다음에 또 뵙지요."
메리에게 작별의 손등 키스를 남긴 세 손님은 마차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식사 자리가 정리되고 이안도 저택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데르가가 두 아들을 불렀다.
"첼. 이안."
"네. 아버지."
"저들이 뒤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내게 전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고 가야 할 것이야."
아주 당연한 단속이었다. 첼과 이안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데르가는 냉랭한 눈빛으로 이안을 주시했다.
"그리고 너는 집무실로 따라와라."
메리와 첼이 의아하다는 듯 돌아봤지만 그뿐이다. 둘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로 사라졌고, 이안은 데르가의 뒷모습을 보며 집무실로 올라갔다.
끼익.
그제 봤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집무실 풍경. 서류가 더 늘어난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데르가는 앉으라는 말도 없이, 서랍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아댔다.
드르륵.
"음."
그가 꺼낸 것은 작은 브로치였다. 범과 월계수 인장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분명 브라츠 가문의 문양이었다.
"내일 갈 때 이걸 차고 가거라."
어미의 주머니를 던진 것과 달리, 데르가는 친히 앞으로 다가와 아이의 가슴팍에 브로치를 달아줬다. 이안은 단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녹음과 위치 추적이 가능한 마력석이구나.'
이안이 살던 시대에서는 빈번하게 쓰였지만, 백여 년 전 변경에서는 쉬이 구하기 어려웠을 터. 분명 가문 대대로 신변의 위협이 있을 때 은밀히 쓰던 물건이겠지.
데르가는 가슴팍을 가볍게 털어주며 경고했다.
"잃어버려서는 절대 아니 된다. 흠 하나 나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야. 네 보잘것없는 몸뚱이보다 수십 배는 귀한 것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두 아이의 전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물며 잔뼈가 굵은 중앙처의 세 남자다. 어벙한 첼 하나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분명히 첼을 따돌리고 이안에게 접근할 것이다.
"사람 또한 붙일 것이니 섣부르게 문제 일으킬 생각 하지 말거라. 다녀오면 바로 집무실로 올라와."
그렇다고 이안이 온전하게 데르가의 편인가? 어미의 목숨줄을 잡고 흔들며, 저를 국경 밖으로 팔아치우려는 작자인데? 어쩔 수 없이 가문의 귀한 마력석 브로치를 꺼낼 수밖에.
"네. 아버지."
하지만 이안은 제 가슴팍에 달린 마력석을 보며 혀를 찼다. 그가 필담은 하지 못할 거라 단언하는 태도였다. 하등 쓸모없는 걸 붙여두고서 안심하는 꼴이라. 웃기지도 않았다.
끼익.
이안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나갔고, 방으로 돌아와 브로치를 자세히 살폈다. 마력을 불어넣자, 금방 막히고 말았다. 담아내는 힘이 적다는 뜻이다.
지잉. 지이잉.
'하급 중의 하급이로다.'
이 정도면 이안이 마음먹고 제어 가능했다.
'위치 추적은 동질의 마력석으로 하는 거니 상관없고.'
아마 데르가는 집무실에서 나침반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자침이 아닌 브로치와 동질의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방향과 빛의 세기 따위로 목표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
'녹음만 어찌하면 되겠어.'
이안이 다시금 집중하며 마력을 흘려보내자, 보석이 더욱 붉게 발하였다. 그의 금빛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차."
그러다 문득, 까먹을 뻔했다. 그가 바깥으로 나가려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생모를 만나기 위해서 아니었는가. 이안은 종을 흔들며 시종을 불렀다.
띠링!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간식을 들여라."
방금 오찬을 마쳐놓고서 간식을?
시종은 고개를 숙이며 놀란 표정을 숨겼다. 하지만 이안은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깥을 쳐다봤다. 그는 간식보다, 그걸 갖고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11화. 술과 물
해나는 쟁반에 말린 과일 따위를 들고 왔다. 그리고 저를 부른 의도가 따로 있다는 걸 직감했는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이안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창밖의 화사한 날씨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실까요?"
"해나. 동생들은 좀 어떠하니?"
식사를 식당에서 한 이후로, 남는 것이 훨씬 풍족해졌다. 해나뿐만 아니라 다른 주방 식솔들까지 주머니를 두둑이 챙길 정도였으니.
"덕분에 아주 잘 지낸답니다. 하루가 멀다고 뛰어다니느라 정신없지만요."
아이는 마음을 다해 웃었다. 배가 부르자 웃음이 가시질 않고, 가족 간의 정이 깊어지는 나날이었다. 모두 이안 덕분이니라. 아랫것들은 이안이 저들을 위해 음식을 덜어 먹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하다면 다행이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지요?"
해나가 이안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조그만 숨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안은 여전히 뒷모습만 보인 채 말을 이었다.
"해나. 어머니에게 전할 말이 있어."
이안은 계속해서 브로치로 마력을 불어 넣고 있었다. 지금 하는 밀담이 데르가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대외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두 아이는 문맹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
"네. 말씀하시어요."
드디어 보답할 일이 생기는구나!
해나는 어서 지시하라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반짝- 하고 창문이 빛났지만, 아이는 그저 햇빛일 거라 치부했다.
"내일 점심 포트로가 3구역 공원 호수 쪽으로 와 달라 전해줘. 변장을 꼭 하고서."
"그것만 전하면 될까요?"
"…주머니를 잘 받았다는 말도 함께."
아마 처음 있는 접선일 것이다. 이안의 어미가 데르가의 꾀임인 줄 알고 안 나오면 곤란했다. 해나는 짤막한 정보를 머릿속에 꼭꼭 새겼다.
"네. 꼭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미안하다. 너를 그런 곳에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급하여 방도가 없어."
당장 내일이었다. 다른 방법을 통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해나는 맡겨 달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서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간식도 가져가렴. 보수다."
"감사합니다! 이안 님!"
해나가 주머니에 말린 과일을 넣을 동안에도, 이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창밖에 무엇이 있기에 저러실까? 아이는 바깥 전경을 떠올리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웃었다. 여기서 보이는 건 본채와 사병 숙소뿐.
"내일 첼 도련님과 나가실 때요. 데오 아저씨가 함께한다고 하셨습니다."
"데오?"
이안의 고개가 살짝 돌았으나, 눈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해나는 두툼해진 주머니를 만족스럽게 매만지며 대답했다.
"네. 하필이면 오늘 야간 훈련이 예정되어 있지 뭡니까? 쉬는 분이 데오 아저씨밖에 없다 합니다. 아직 왼팔이 불편하긴 하나, 두 분 모시는 데는 문제 없다 하시더군요."
"팔이 어쩌다?"
"아. 이안 님은 모르십니까? 보름 전에 술 진탕 취해서는 왼팔이 부러지셨습니다. 아저씨는 지나가던 무뢰한과 싸웠다고 하지만, 사실 그게 주점의 벽이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라요."
해나는 킬킬대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안 역시 살포시 미소를 지었으나, 데오라는 작자가 만만치 않은 자임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추태를 부리고도 잘리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팔이 불편한 상태임에도 두 아들의 호위를 맡겼다?
데르가의 신임을 업은 자이면서도 굉장한 실력자라는 뜻이다. 이안은 창문을 가볍게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두마."
"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또 불러주세요."
달깍.
아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제야 마력을 거두며 뒤를 돌아보는 이안. 금빛 눈동자가 압생트로 돌아오며, 브로치의 빛이 꺼졌다.
'음. 데오라.'
첼은 있으나 마나 한 아이라고 하지만, 잘하면 데오라는 작자가 변수를 일으킬 수도 있겠구나. 이안은 소파에 앉아 어미가 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 * *
일주일 하고도 하루.
이안이 브라츠 저택을 나설 때까지 걸린 시일이었다. 몰린 경이 보내준 마차는 정확히 정오에 도착하여 두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첼 도련님. 이안 님. 이쪽으로."
그리고 데오라는 사내. 얼굴에 빽빽이 난 상처가 그의 성정을 짐작게 했다. 풍채는 또 어찌나 대단한지, 마차에 들어갈 수나 있을지 걱정될 정도다.
그는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미묘하게 둘의 호칭을 달리 불렀다.
"함께 타는가?"
"그렇습니다만?"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것 같은데....
이안은 못마땅한 시선을 한 번 흘긴 다음 차에 올라탔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말이 힘겹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첼과 이안은 서로 반대쪽 창문만 쳐다보며 침묵했다. 차라리 학교 가는 것이 좋겠다며, 아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으나 이안은 감탄하는 중이었다.
'오호.'
변경, 그것도 사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풍경이 색달랐다. 수도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냈고, 참전했던 전쟁은 정반대 쪽 지역이었다. 여타 귀족들처럼 휴양을 떠난 적도 없다.
바리엘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낯선 느낌을 넘어 이국땅을 달리는 것 같았다. 한 세기가 주는 간극도 있겠지만.
"혹여 포트로가에서 갈만한 곳을 아시오?"
그렇게 한참 구경하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이안의 질문에 첼이 돌아봤고, 사내는 눈만 끔뻑거렸다.
"행정관님이 지역 소개를 부탁했으니 체면치레라도 해야 할 것인데, 아시다시피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소."
먹고 살기 급급했던 빈민가의 아이였으니까.
"안 그렇습니까? 형님? 아무리 그래도 저 살던 곳의 골목 소개는 영 아닐 것 같아서요."
"…그, 그렇지."
손님들이 궁금해한다고는 하나, 진짜 그곳을 보여줄 수는 없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창가다. 백작 가문의 영식들이 손님들 데리고 어찌 그쪽으로 간단 말인가? 미친 일이지.
데오는 코를 긁적거리며 난감하게 답했다.
"글쎄요. 술집이야 많지만 중앙처 나으리들이 갈만한 곳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는 곳은 늘 시끄러운 곳인지라."
"…자네는 내가 미성년이라는 걸 까먹었는가?"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이안의 면박에도 데오는 그저 뻔뻔하게 웃었는데, 시커먼 이에서 악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영 꺼림칙한 작자군.'
그저 위생 때문이 아니다. 끊임없이 단도 끝을 만지작거리는 습관도 그렇고, 음흉한 눈빛이 영 사람 같지가 않았다.
"되었네. 어쩔 수 없이 공원이나 돌아야겠어."
이것이 바로 이안의 목적이었다. 바로 밑밥을 깔아두는 것. 혹여나 데오가 백작에게 보고할 때를 염두에 두었다. 공원에서 어미를 보기로 했으니, 모든 게 자연스러우면서도 확실해야 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내리시지요."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마부가 문을 열어줬다.
포트로가는 확실히 상층민의 거주지가 분명했다. 잘 닦아놓은 돌길과 가로수를 차치하더라도, 대로변 떡하니 세워져 있는 '하이만 뱅크'가 그 증거였다.
바리엘 전역의 금융 인프라를 담당하는, 제3의 성역이라 불리는 곳. 각 영지에 하나 이상씩 지점이 나 있었는데, 저들이 없다면 막대한 세금을 마차에 실어서 보내야 할 것이다.
쿵!
데오가 마지막으로 내리자,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맥이 반갑게 다가왔다.
"오! 이안 도련님!"
"맥 경. 마중을 나와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바깥에서 보니 더욱 반갑습니다. 아. 첼 도련님도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맥은 이안과 첼을 반겨주면서도 뒤쪽의 경비를 힐끔거렸다. 웃음 뒤에 경계하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데오는 귀만 후비적거리며 반응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그들은 건물을 통째로 쓰는 것 같았다. 데르가 저택처럼 크진 않지만, 고급스러운 자재들로 마감된 실내 장식이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이곳은 관사인가요?"
"네. 수도에서 공무원이 파견될 때 쓰는 곳이랍니다. 깔끔하고 편안하여 제집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안쪽은 준비가 끝나있었다.
쟁반 가득 쌓인 음식에 포도주까지 완벽했다. 브라츠 백작저 오찬과 그다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호위병께서도 함께 들려고 하는 건가?"
"아니 됩니까?"
맥이 응접실 문을 앞에서 두고 묻자, 데오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상당히 무례한 처사였지만, 맥은 팔짱만 꼈다. 이자를 어떻게 떨굴지 고민하는 것이다.
"식사하시고 학식 토론도 즐거이 하십시오. 저는 그저 구석에 있기만 하면 되니."
사내의 말에 이안은 몸을 빙글 돌려 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서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까딱거리며 신호했다.
"같이 저택에서 나왔는데, 식사를 구경만 하게 할 수는 없지요. 혹시 식기와 와인 잔을 하나 더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이안은 일부러 '와인'에 힘을 주어 말했다. 몸으로 먹고사는 자가 몇 번이고 술에 취하여 팔이 부러졌다 한다. 분명 술 없이는 죽고 못 사는 성격일 터.
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와인은 올리지 않았는데."
두 명의 초대 손님이 모두 아이였다. 데르가와 메리 부인도 없는 오찬에서, 술을 준비할 리가 없지 않나. 이안이 그걸 모를 정도는 아닌 것 같고....
"혹시 술을 즐기나?"
"예? 뭐. 아니라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지하로 가게나. 거기에 와인 창고가 있는데 가서 원하는 걸 골라보도록 하지. 예상치 못했지만, 식기를 놓으면 어쨌거나 자네도 손님이니까."
…이게 맞나? 맥은 이안을 힐끔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주 완벽한 소통이었다. 아이가 희미하게 웃자, 맥은 감을 잡고 데오를 부추겼다.
"종류가 꽤 많아."
"바로 아래입니까?"
"건물 지하."
데오는 코를 킁, 하고 훌쩍이더니 첼과 이안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건물 안이라 위험은 없다. 첼과 이안이 붙어 있는 한 잠깐은 괜찮을 터.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관사의 와인 창고라! 평소에는 보지도 못한 술이 즐비할 것이다.
"그럼. 뭐.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기다리게. 드고르!"
맥은 응접실 문을 열고 드고르를 불렀다. 그리고 뭐라 속삭이더니, 데오에게 따라오라며 지시했다.
"도련님들. 어서 오시지요."
드고르는 맥의 역할을 이어받아 손님들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몰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시선이다.
"앉으세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장소만 데르가 저의 뒤뜰에서 이쪽으로 옮겨진 것 같은 기시감. 그들은 어제와 다름없는 인사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오호. 첼 도련님이 다니시는 학교가 근처라고요?"
"네. 마차를 타면 10분 정도 걸립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질문의 대상일 것이다.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첼에게 관심을 쏟아부었다. 이안은 그것이 어쭙잖은 눈속임이라는 걸 알지만, 어쩌면 첼에게 통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그들은 이안에게 별로 말도 안 붙이던데요? 다른 의도는 딱히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눈 대화는....'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가져오라 했으니, 아이는 머릿속으로 저들의 말을 기억하느라 애쓰고 있을 터. 이안은 첼의 아둔한 모습이 상상되어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데르가는 브로치를 확인할 것인데.
'자. 언제쯤 시작하려나.'
이안은 조용히 다물고 고기만 우물거렸다. 사실 데르가 만큼이나 그도 궁금했다. 대체 무슨 저의가 있어서 그를 밖으로 빼낸 것일까. 짐작 가는 바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아!"
촤악!
그때, 드고르가 물병을 쏟았다. 아주 정확하게, 첼의 바지로. 고전적이지만 어쩌면 확실한 방법. 이안은 그것이 신호임을 알았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아. 네...."
첼은 반사적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소변을 지린 것처럼 허벅다리가 죄 젖어버린 것이다. 이안은 미동 없이 평온하게 고기를 한입에 넣으며 드고르의 대사를 점쳤다.
'옷 갈아입으시겠어요?'
"갈아입으셔야겠는데요."
"괘, 괜찮습니다."
"잠시만요. 하인에게 서둘러 적당한 옷을 사 오라 하겠습니다. 마침 바로 옆 건물에 괜찮은 의상실이 있어요."
우물우물.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식사를 이었다.
"그러지 말고 직접 다녀오십시오. 형님. 평소 가던 의상실이 아니라 사이즈를 제대로 모르지 않습니까?"
분명 하인에게 이르면, 그는 다시 올라와서 첼이 직접 가야 할 것 같다고 전언할 것이다. 안 봐도 훤하다. 몰린은 물로 입을 축이며 이안을 쳐다봤다.
"그렇지 않습니까? 몰린 경?"
그러니 시간 낭비 따위 그만하고, 우리 진짜 얘기를 나눠보자고. 아이는 눈빛으로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제12화. 제안
첼이 의상실에 간 사이, 응접실엔 이안과 몰린만 남게 되었다.
"국경을 넘어가면-"
조용한 응접실.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몰린의 평이한 말투에 이안 역시 고개를 들었다.
"이곳이 많이 그리우시겠습니다."
"고향은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너무 아이답지 않은 대답이었나? 그는 잠시 고민하였으나, 몰린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수도에 관심이 많아 보이시던데."
"아무래도요. 바리엘 국민이라면 누구나 수도 땅을 한 번쯤은 밟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황궁과 교황청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다. 애국의 시발역이자 성지순례의 종착역과 같았으니.
이런 거창한 이유를 제하더라도, 수도는 매달 자잘한 축제와 행사를 진행했다. 아이에게, 그것도 빈민의 서자에게는 꿈같이 화려한 곳일 터.
"안타깝습니다. 두어 달 뒤에 국경을 넘으면 기회가 영 없을 텐데요. 그럼, 첼 도련님은 수도에 올라가신 적이 있나요?"
이안은 방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 없겠지? 이곳은 수도에서 제일 먼 변방이었으니까.
바리엘 귀족 자제들의 사교계 데뷔는 황제의 소관이었다. 매해 벼가 제일 아름답게 익는 가을의 어느 날, 성인식을 앞둔 풋내기 귀족들을 모아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는 것.
"글쎄요. 시일이 더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두 해 정도 지나면 첼과 이안도 사교계에 데뷔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당장 내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년을 기약할 순 없었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백작님께 부탁하여 수도 여행을 해보시지요. 첼 도련님은 기회가 많겠지만 이안 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뉘앙스가 첼을 묘하게 강조했다. 마치 그와 저의 처지를 비교하며 자극하려는 듯이.
하지만 이안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마음 같아서는 뜸 그만 들이고 본론만 말하라 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은 순서가 있는 법.
"아직 부족하여 배울 것이 많아서요. 엄두도 못 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몰린은 반신반의했다. 총명한 것이 고작 글자 하나 못 떼어 끙끙댈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이안이 방싯 웃으며 물었다.
"수도로 가면 황궁을 구경할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데르가 백작 가문의 도련님들은 제가 특별히 게일 저하께 청하여 초대장을 발부하도록 하지요. 저번에 보니 마법사를 궁금해하셨죠?"
몰린의 눈이 빛났다. 이안의 금빛 눈이 허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가늠하기 위해. 하지만 이안은 게일이라는 이름을 되씹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익숙하단 말이지.'
"게일 저하 휘하에는 훌륭한 마력 운용자가 많답니다. 분명 좋은 만남이 될 것입니다."
"아."
이안은 냅킨으로 입가를 가리며 어이없이 웃었다. '게일'과 '마력운용자'라는 연관 단어 덕분이었다. 빛바랜 기억 아래 적혀있던 그의 이름이 기억났다.
"그렇군요. 정말 좋은 만남이 되겠어요."
황제로서 각인해야 할 대상은 딱 두 종류.
공을 혁혁히 세웠거나 혹은 반역과 관련이 있거나.
특히 후자는 후환 처리가 중요했기에, 시간이 지나도 소홀해서는 아니 됐다. 100년이 지나도 주기적으로 조사하여 혈계가 확실히 끊어졌는지 추적했으니.
'2황자, 게일. 반역자였군. 실패한.'
유달리 귀에 익었던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게일의 정체가 그것이라면....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몰린을 쳐다봤다.
혹시, 그날 응접실에서 마력의 흔적을 본 것일까?
'게일의 반역 주축 중 하나가 바로 마법부였지.'
그것이 이안에게까지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안 그래도 귀한 마법사들이 대거 숙청되는 사건, 황제 이안이 그 부담을 그대로 짊어진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오백여 명에 가까운 마법사들이 이안 세대에서는 고작 백 명에 남짓했다.
'맞아. 그래서 한번은 보고서를 갈가리 찢은 적도 있었지. 어찌하여 마법사를 끌어들여 그 사달을 내었냐고.'
이제 좀 명확해졌다.
몰린이 이안에게 접근하는 이유 말이다.
이렇게 나오는 거 보니, 응접실 때 무언가 눈치챈 게 분명했다. 마력 운용자라, 마법사가 되기 전 인재를 사전에 회유하는 것이다.
"어디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아닙니다. 그저...."
이안은 몰린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몰린이 마력을 확신했든 아니든, 현재 이안의 상황에서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잘만 이용한다면 충분히 반길 만한 일이다.
이안은 천천히 제 가슴의 브로치를 보란 듯이 만지작거렸다.
"눈이 좀 따가워서요."
그리고 이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브로치로 대화가 녹음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그들은 소리 없이 의중을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래요? 잠시만요."
몰린은 잠시 놀라더니, 이내 일어서서 탁상으로 걸었다. 그리고 작은 메모지와 펜을 들어 보였다.
"이걸 써보시겠습니까?"
"안약이군요. 감사합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메모지를 건네며 이안 가까이 앉았다. 펜을 갈기는 손길이 시원시원했다.
-마력석입니까?
끄덕. 이안은 고개로 긍정했다. 몰린은 관자놀이를 잠깐 짚은 다음, 인상을 찌푸렸다. 수도에서도 귀하다는 물건인데, 변방의 백작이 어떻게 이런 걸 가졌는지 원.
스윽.
하지만 필담하는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거듭 생각했던 것이 적혔다.
-국경을 넘고 싶으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프 볼을 싹싹 긁는 소리가 함께 잡혔다.
-적자인 첼이 있거늘, 불합리하지요. 이안 님은 생모도 따로 있지 않습니까? 바리엘을 떠나면 백작 부인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그가 예상했던 서문과 일치했다.
아이의 유일한 약점인 생모를 언급하며 마음 깊은 곳의 반발심을 찔러댔다. 이들은, 첼 대신 이안이 이곳에 남았으면 하는 거다.
'내가 마력을 쓰는 걸 봤다면, 예상대로 게일 쪽으로 끌어들여 세력에 힘을 보태려는 것이고, 아니라면....'
반역자들이니까 딱 하나지.
이안을 허수아비로 세워 브라츠 가문의 영지를 먹겠다는 뜻이다. 경영이 엉망이었지만 그로 인해 병사 수는 다른 곳보다 몇 배나 많았다.
무엇보다 반란의 성공은 속전속결이 핵심. 변방의 다른 귀족들이 지원군을 보내기 전, 여기를 주둔지로 둔다면 효과적인 저지를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군. 데르가는 어찌하고?'
이러나저러나 백작의 협조를 받는 것이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다.
'현 실세는 1황자 쪽이니 데르가와는 당장 견제하는 사이. 2황자 세력의 접근이 나쁘지는 않았을 터인데? 당장 반역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은근한 세력 형성 정도로 찔렀을 터. 하지만 이안을 꾀는 것으로 보아 불발된 게 자연스러운 가정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안은 데르가를 알고 있었다.
그처럼 탐욕스럽고 처세에 예민한 자가 2황자의 접근을 거절하다니? 차라리 보류하여 줄타기하고 있다면 설득력이 있겠다만…. 몰린의 태도로 보아 아예 거절한 것 같다.
이안은 담담한 눈길로 몰린을 쳐다봤다.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원하신다면요.
어째서?
어째서 데르가는 중앙의 세력 다툼에 관심이 없나?
순간, 이안은 집무실에서 봤던 서류가 떠올랐다.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높은 군사 비율. 과세가 폭탄 수준이었지만, 그걸로 감당이 될까 싶었다. 오죽했으면 영지에 특수자원이 따로 있나 생각해 볼 정도였으니.
'이놈 이거 혹시....'
황궁으로 바치는 세금을 떼먹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모든 정황이 들어맞았다. 최대한 중앙과 얽히지 않으려는 태도와 비정상적인 경제 구조, 비농기의 바쁜 업무까지.
톡톡.
몰린은 이안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마지막으로 적힌 말에 답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이안은 작은 손으로 답장을 써 내렸다.
-제게 뭘 원하시나요?
말이 잘 통하는군. 몰린은 숨김없이 그날의 금빛 눈을 언급했다.
-혹시 이안 님. 마력운용자 아니십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안은 딱 잡아뗐다. 아직 마력운용자라는 게 밝혀지면 득보다 실이 많았다. 게다가 상대는 마법부를 등에 업고 반란을 꾀하려는 자. 신변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숨기는 게 현명했다.
몰린은 말없이 메모지를 톡톡 두드렸다. 거짓을 잡아내려는 노인의 눈이 날카로웠다.
-그거 아쉽습니다.
-혹시 그 때문에 말을 물리실 건가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이안 님이 필요해요. 잘만 도와주신다면 수도로 올라가 이안 님의 입적을 반대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국경을 넘어갈 이유도 없지요.
"옷은 좀 편하십니까?"
그때, 밖에서 드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안으로 들어갈 터이니 대화를 마무리하라는 신호였다.
몰린은 당황한 기색 없이 메모지를 재떨이 통에 그러모았다. 거기에 작은 불씨를 넣고, 뚜껑으로 봉했다.
끼익.
"어?"
옷을 새로 맞춘 첼이 문을 열다가 멈칫거렸다. 분위기가 묘하게 딱딱해서 그런 것이다. 몰린은 인자하게 웃으며 첼을 반겼다.
"이런. 역시 그쪽 의상실 마담 실력이 좋아요."
"드고르 경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감사합니다."
"제가 물을 엎지른 탓인데요. 어서 식사를 마저 하시죠. 그나저나 맥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것인지."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다시 열렸다. 경비는 어디 가고 맥 혼자였다.
"술통에 빠지면 익사가 아니라 술독으로 죽을 자더군요. 시음해 보라 하니 홀짝이다가 맛 갔습니다."
맥의 유쾌한 말에 오찬 분위기가 단번에 살아났다. 이안은 미소로 화답하며 남은 고기를 썰어 먹었고, 몰린은 두 부하에게 눈짓했다.
'어떻습니까?'
'예상대로 영민하다.'
첫 오찬에서 몰린은 백작에게 게일의 의중을 전했으나, 데르가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난감해하며 문을 여는 순간, 이안의 금빛 눈과 마주한 것이다. 잘만 하면 가치가 있다. 특히 마력 운용자라면 신이 내려준 기회라 여길 참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예의 주시해.'
몰린은 왼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맥과 드고르에게 지시했다.
한편, 이안은 왼손의 포크와 오른손의 나이프를 내려다봤는데, 꼭 제 손에 황궁과 천려족 모두가 들린 것 같았다.
스윽.
그렇다면 가운데 놓인 스테이크는 브라츠가 될 것이다. 둘을 동시에 이용한다면, 아주 깔끔하게 잘라 먹을 수 있으리라.
"고기 맛이 역시나 훌륭합니다."
이안은 한마디 보태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호위병이 곯아떨어졌으니 오늘은 멀리 못 갈 듯합니다. 식사 후 소화할 겸 공원 산책이라도 할까요? 몰린 경이 말씀하신 호수를 보고 싶어요."
제13화. 화분
"아직 멀었습니까?"
첼이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선선한 날씨에 그리 오래 걸은 것도 아니건만, 아이는 힘에 부치는 듯 자꾸 뒤처졌다.
반면 이안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바깥바람에 마음이 가볍다. 낯선 거리 풍경 보는 맛도 꽤 좋고.
"거의 다 왔습니다."
"힘드시면 첼 도련님은 돌아가실까요?"
맥의 친절한 말에 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오가 있었으면 몰라. 지금 혼자 돌아간다면 아버지의 지시를 따를 수 없게 되지 않나. 저들이 이안과 나누는 얘기를 최대한 기억하여 가져가야 했다.
"오. 여기군요."
"포트로가 수준에 맞게 조경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호수도 아주 맑고요. 날씨가 좋으면 저 산이 수면 위에 그대로 비친답니다."
몰린의 칭찬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황궁의 화려한 정원을 봐왔던 이안에게도 썩 훌륭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안은 곤란한 기색을 숨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이가 얼마나 합니까?"
"글쎄요. 저도 다 돌아본 것은 아닌지라."
"천천히 걸으면 삼십 분 정도 걸릴 것입니다."
생각보다 공원이 컸다.
정확한 위치를 지정한 것이 아닌지라, 아이의 어미를 만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몰린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이안은 행인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
그때. 저 멀리 천을 뒤집어쓴 부랑자가 좌판 연 것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아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널린 물건 중 익숙한 것 하나.
'같은 것이다.'
어미가 전해준 말린 꽃과 같은 종의 화분이 놓여있었다. 이안은 걸음을 멈추고 첼을 돌아봤다. 아주 고맙게도, 땀을 뻘뻘 흘리느라 머리칼이 엉망이었다.
"첼 형님이 너무 힘들어하시니,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면 좋겠습니다."
"그럴까요?"
"괜찮으시다면 마실 것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잠시만요. 리!"
맥은 뒤에 걷던 하인을 불러 마실 것을 가져오라 했고, 일행은 가까운 테이블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이안은 좌판이 있는 곳을 계속 힐끔거리며 틈을 노렸다.
"하인이 오는 동안 잠시 저쪽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형님. 같이 가실래요?"
"…아니. 나는 괜찮아."
손까지 내저으며 헉헉대는 첼. 이안이 세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침묵으로 동의를 구했다. 앉은 곳에서 먼 것도 아닌지라, 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뭐 볼 게 있겠습니까만."
"고맙습니다."
좌판 앞으로 간 이안은 쪼그려 앉아 물건을 살폈다. 거의 엎드려 있다시피 한 부랑자는 반응이 없다. 설마 쓰러진 건 아니겠지? 이안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하여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의 압생트색 눈이 금빛으로 변하고, 브로치는 붉은빛을 내며 작동을 멈추었다.
"어머니."
그의 목소리에 움찔. 부랑자가 고개를 든다. 검은 천 아래 사막 모래 같은 금빛 머리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이와 같은 녹안. 이안의 어미다.
"…이안."
"크게 반응하지 마시고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이안의 어미, 필리아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어찌하여 데르가에게 걸렸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필리아는 고개를 들려다가 이안의 말에 멈칫했다. 천으로 가려진 시야로는 아이의 가슴께밖에 볼 수가 없다.
"이안. 이안...."
"어머니.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편지도 잘 받았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후두둑. 어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이안은 묵묵히 지켜봤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다. 뒤쪽 사내들이 이 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터.
"이전처럼 해나를 통해 안부 물을 수 없음을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이안은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냈다.
"혹시 어머니가 넣어주셨나요?"
"무엇을? 금화를?"
필리아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백작이 어미를 물질적으로 돌보고 있다는 걸 은근히 강조하려던 장치.
이안은 방긋 웃으며 여인의 손에 금화를 쥐여줬다.
"돈으로 몸 숨길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 제가 해나를 통해 시기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재 이안의 걸림돌은 필리아다. 데르가를 썰어 먹기 위해서는 예상 가능한 변수를 모두 정리해 두는 것이 좋다.
여인은 동전을 가만히 쥐고 고개를 들었다. 당최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이안. 너 눈이...."
"맹세해 주세요. 저를 위해 그리하시겠다고."
사자처럼 빛나는 금빛 눈. 놀란 필리아가 눈을 깜빡이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이안.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도 좋아."
"어머니. 죄송하지만...."
"이안 님!"
하인이 마실 것과 간식거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맥이 이안을 불렀으나, 아이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저자들에게 금안을 보일 수는 없으니.
"너를 그리 보낸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미안해. 그러니 원한다면 망설일 것 없이 도망치렴."
맥이 서서히 다가왔다. 가까이 올수록 의아한 표정이 짙어졌다. 여인은 자신의 각오를 전하고자 이안을 만나러 온 듯 보였다. 차마 아이의 손을 잡지는 못하고, 소매만 꽈악 붙잡았다.
"저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이안은 나지막이 결심하듯 덧붙였다.
"여유가 될 때마다 굴라 씨앗을 모아두세요. 필시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불러주셨던 노래는 잊으시고, 제가 편지로 부칠 가사가 앞으로 암호입니다."
맥이 바로 뒤에 섰다. 이안은 마력을 풀며 방싯 웃어 보였다. 금빛 눈도, 붉은 브로치도,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화분으로 하겠소. 값은 이만하면 되었을 터."
"이안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미안합니다. 맥 경. 살까 말까 고민한다고 오래 걸렸어요."
이안은 화분을 집어 들며 웃었다. 맥이 아이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으나, 담담함 외에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부랑자를 힐끔거리며 아이를 안내했다.
"첼 도련님이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약하십니다."
이어서 소곤소곤. 첼의 흉을 보며 낄낄댔다. 이안 역시 웃으며 살짝 뒤를 돌아봤다. 필리아는 천을 뒤집어쓴 채 아예 엎드려 있었다. 소리 없이 우는 법을 아는 여인이다.
"화분을 사셨군요. 이안 님."
"무슨 식물입니까?"
드고르의 질문에 이안은 웃기만 했다. 알게 뭐란 말인가. 식물에 견식이 깊은 것도 아니요, 편지 내용으로 봤을 때 아이가 기르던 화분인 것만 확실했다.
"글쎄요. 꽃이 너무 예뻐서 샀는데요."
"처음 보는데…. 맥! 자네는 알지?"
"내가 어찌?"
"꽃다발 바치는 건 자네 전문 아닌가?"
"드고르! 정말!"
하지만 놀랍게도, 자리에 모인 모두가 화분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수채화를 머금은 듯한 붉은 꽃잎이 화려하여 한 번 보면 잊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화분을 끌어안으며 뒤를 돌아봤다. 여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