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오스몬드는 문을 열고 들어온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불편한 곳은 없느냐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이곳에 가두기로 한 것은 로드웰 경의 판단이었지. 제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잠자코 입 다물어 줬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열어 둔 방문을 닫고서 남아 있던 빈자리에 앉았다.
"저로서는 로드웰을 돕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겠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협박할 생각이냐?"
"아닙니다. 저는 제안을 하러 온 겁니다."
"제안이라고 한다면?"
"감옥에서 빼내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로 돌아갈 때 양손 두둑이 챙겨 드리겠습니다."
오스몬드는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다.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다.
그리고 머리를 굴렸다.
그를 과거의 문제아라고 생각하며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로드웰이 소년의 말을 신뢰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별빛 기사단의 참모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너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 거냐?"
"회의실에서 충분히 보여 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원하는 게 뭐냐? 공짜로 이런 일을 해 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없습니다."
"없다고?"
조슈아는 가볍게 웃었다.
자신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건드려야 할 상대와 피해야 할 상대가 있었다.
오스몬드는 후자에 가깝다.
그를 처형해서 타워 정문에 효수하더라도 쿤델은 방관할 테지만.
방관한다는 의미가 잊는다는 뜻은 아니다.
사절단을 없애면 쿤델은 두고두고 이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건 죽음의 시나리오였다.
"흠, 내가 자네를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살려 준다고 말하니까 태도부터 바뀐다.
표정을 감추어도 내심 두려웠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양손 두둑이 챙겨 준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지?"
"로드웰 경이 아닌 다른 사람이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루실 경입니다."
오스몬드는 헛기침을 하였다.
기사단 안에서의 서열은 낮더라도 가문의 격으론 루실이 높았다.
명성을 추종하는 인간이라면 누굴 더 원할지 분명하다.
"루실 경과 따로 얘기하신 걸로 압니다."
"무, 무슨!"
"아닙니까? 저에게까지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로드웰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기회를 여러 차례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스몬드는 망설였다.
실토한다면 소년에게 칼날을 쥐여 주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면 이 좁은 방에서 손을 내밀어 줄 인간이 있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깐이었지만 얘기를 나눴다. 그녀에게 도시로 가는 게 어떻냐고 말했어."
"뭐라고 하던가요?"
"대답은 못 들었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어."
"그렇군요."
"부탁이다! 이 얘기를 절대로 로드웰 경에게 알려서는 안 돼. 만약 그리되면 이번에야말로 목이 떨어질 거야!"
오스몬드는 살 수만 있다면 신발도 핥을 기세였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공포.
자신에게도 [냉정함]이나 [강심장]이 없었다면.
언제든 저런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진정하세요. 말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것보다 루실 경을 보내 드린다면 스탈리아로 돌아갔을 때의 성과로는 충분하겠죠?"
"충분한 게 아니라 아주 넘치지! 레인우드 가문이라면 왕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이니까!"
"진급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잘되면 저한테 한 턱 쏴야 할 겁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로드웰 경도 허락하신 일인가?"
"제가 설득할 겁니다."
오스몬드는 이제 소년이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얘기만 듣는다면.
이 타워의 실세는 소년처럼 느껴졌다.
"제가 설득에 성공한다면 오스몬드는 제게 빚을 진 겁니다. 이 빚은 당장 갚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받아 낼 겁니다."
받아 낸다는 끝말에는 힘이 실린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열여덟이다.
인생을 살아온 시간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반밖에 안 되는 핏덩이였다.
한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알았다. 명심하마."
"서류 하나를 작성하시죠."
"말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냐?"
"세상이 변한 만큼 이런 일은 신중하게 마무리해야죠. 안심하세요. 자필이면 충분합니다. 마법을 걸어서 강제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는 않겠습니다."
오스몬드는 소년이 딴마음을 품을까 서둘러 계약서를 완성하였다.
"이제 제가 로드웰 경과 얘기가 잘되도록 빌어 주세요."
"믿고 있으마! 부디 나쁜 뜻은 없었다고 내 뜻을 잘 전해 주길 바란다."
"걱정하지 마시죠. 아주 잘 해결하겠습니다."
오스몬드가 무릎까지 꿇어 가면서 사정하였다.
조슈아는 돌아서서 감옥을 나왔다.
이걸로 자신이 구해 줬다는 뉘앙스는 각인시켰다.
훗날 도시로 향하였을 때.
뜬금없는 개죽음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히든 퀘스트 – 사절단 맞이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코인 20개를 획득합니다.]
[보유 코인: 90]
히든 퀘스트.
퀘스트 내용을 사전에 공개하지 않는 비밀 퀘스트였다.
이 게임에서 코인을 주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플레이어가 죽음을 극복하는 경우다.
주변에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아직 비틀어야 할 시나리오는 하나가 더 남았다.
* * *
"풀어 줘."
로드웰을 만났을 때.
그도 이미 나와 같은 결론을 내놓았다.
사절단을 억류해 봐야 이쪽만 손해를 본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네."
"로드웰과 저는 서로 통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흠, 조슈아.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는데, 네가 내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것 같다."
[냉정함]이 표정이 흐트러지는 걸 막았다.
과연, 통찰력 하나는 기가 막힌 양반이다.
내가 그도 모르는 사이에 일을 정리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하다.
"저에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그럴까? 나는 내 직감을 상당히 신뢰한다. 이 직감이 말하기를 네가 날 조종한다고 말하고 있어."
어떻게 되어 먹은 직감인지 모르겠다.
성격적 특성처럼 직접적으로 조언을 하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의 고유 권한이다.
[영리함]도 그건 아니라며 부정한다.
"아무튼 너와 뜻이 같다면 그걸로 됐어. 그 문제는 제쳐 두고, 말했던 건 가지고 온 거냐?"
"무 씨앗입니다."
"...정말로 가져올 줄은 몰랐다."
"제가 빈말하는 걸 본 적 있습니까?"
"없었지."
"소작농들에게 맡긴다면 알아서 잘 키울 겁니다. 한 달이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자라겠죠."
로드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다. 이걸로 더는 내쫓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겠어."
그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진심으로 안도한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긴장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설마, 우는 겁니까?"
"피곤한 것뿐이야. 뭘 보고 있어! 냉큼 고개 돌리지 않고."
"저만 보기 아까운 장면이네요. 홀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을까요? 단장이 자신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안다면 감격할 겁니다."
"날 놀림감으로 만들 생각이냐!"
로드웰이 감정을 정리하고는 얼굴을 들었다.
"너는 내 부하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가 뭐냐? 기사단 창고 해방,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은데."
나는 웃었다.
이 게임의 엔딩을 보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해 보았다.
하지만 실패했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배운 깨달은 팁과 노하우.
살아남으려면 내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겨울이라 잠잠합니다. 하나 계절이 바뀐다면 좀비들은 예전보다 더 사납고, 더 강하게, 더 많이 덤벼들 겁니다. 그때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준비에 내가 필요하다는 뜻이겠다?"
"예, 로드웰이 필요합니다."
"네가 약한 소리를 하다니 별일이구나. 너 혼자서는 안되는 거냐?"
"안 되더라고요.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마치 이런 삶을 되풀이해 본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셀 수 없이 해 봤죠."
로드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법이냐? 회귀나, 전생을 기억하는 뭐 그런 건가?"
"비슷합니다."
"크하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데우스(1등급)의 마법사도 그런 건 못 해."
"그렇죠."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누구에게 고백하더라도 저런 반응일 것이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나와 같이 이 게임에 빙의한 인간이 아니라면 내 심정을 모른다.
그렇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말씀하시죠."
"너는 어째서 미치지 않는 거냐? 내가 너였다면 진작에 정신이 붕괴되고, 감정이 마모되어 산 송장이 되었을 것 같은데."
[냉정함]은 자신이 일등 공신이라며 주장한다.
[영리함]도 뒤질세라 자신에게 어필한다.
얌전한 [인내심]도 자신을 잊지 말라며 조심스레 신호를 보낸다.
늘 묵묵히 일만 하던 [강심장]도 이때만은 예외였다.
"일을 잘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좀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성격적 특성들이 불만을 토로한다.
요즘 좀 잠잠하더니 아쉬운 소리를 할 때면 늘 이 꼴이다.
아, 머리가 아프다.
"하하하!"
로드웰의 폭소와 함께 머리의 두통이 약해졌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뭘 말입니까?"
"이 세상 모두가 무너져도 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칭찬인 거죠?"
"칭찬을 넘어서서 존경한다는 의미다. 너보다 강한 사람도 있겠지, 너보다 가진 게 많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렇지만 너보다 단단한 사람은 없을 거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내뱉은 본인도 낯간지러운 모양인지 뺨을 긁적거렸다.
"너,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냐?"
"그 얘기는 벌써 세 번은 듣는 것 같네요."
"아쉬워서 그렇지. 싹수가 보이는 놈을 놓치기 싫은 기분 말이다."
"제 대답은 변함없습니다."
"그러냐?
로드웰은 기쁘게 웃었다.
내 대답은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너를 단순한 학생이나, 소년으로 보지 않겠다.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너를 한 그룹의 리더로서 존중하며, 경이라고 부를 거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는 지금처럼 편하게 대하고."
"알겠습니다."
"기쁘지 않은 거냐? 다름 아닌 기사단장인 나의 인정이다. 조금 더 좋아해도 괜찮아."
"기쁩니다. 단지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거죠."
로드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앗이란 희망을 얻었으니 기사들과 생존자를 설득하려면 바쁘게 뛰어다녀야 한다.
"로드웰, 한 가지 더 상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뭐지?"
"루실 경에 대한 겁니다."
"...뭐, 어떤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간다."
* * *
그로부터 3일이 흘렀다.
나는 농장으로 돌아가서 로드웰이 사건을 매듭지을 시간을 주었다.
[히든 퀘스트 – 기사단 반란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코인 30개를 획득합니다.]
[보유 코인: 120]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정면에 떠오르고, 사라진다.
사절단이 찾아옴으로써 생길 수 있었던 죽음의 변수들.
문득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 불똥이 어디로 향했을지 뻔했다.
"피곤하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느닷없이 내뱉은 한탄에 레오널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전에 건네준 달걀을 부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지금은 그것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말을 건네는 와중에도 병아리를 제 품에서 놓치지 않았다.
"우리 그룹을 위하여 이 한 몸 희생했다는 얘기다."
"최근에 힘든 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모르는 게 약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아무도 알아줄 수 없다는 사실은 조금 씁쓸하다.
[냉정함]이 위로한다.
역시 나를 알아주는 녀석들은 이놈들밖에 없다.
"난 마실 나간다. 집 잘 지키고 있어."
타워 근처에 도착하자 정문에는 기사들이 보였다.
이곳을 떠나는 파벌이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오스몬드가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오, 조슈아."
그가 내 얼굴을 보고는 기쁜 듯이 뛰어왔다.
"로드웰 경께서 나를 풀어 주었다. 그뿐이냐! 루실 경도 우리와 함께 성 스탈리아로 돌아가는 걸로 결정되었다."
"그렇군요."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거냐?"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크크크, 아무튼 고맙다. 네 덕분에 한자리 꿰찰지도 모르겠다. 그리만 되면 언제든 성 스탈리아로 와라. 쿤델 경에게 말해서 대접받을 수 있도록 힘써 볼 테니까."
"감사합니다, 오스몬드."
"감사는 무슨, 나야말로 눈앞의 은인에게 감사해야지!"
오스몬드가 경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와 친해지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괜찮은 동맹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바쁘신 것 같으니까, 인사는 여기까지 하죠. 돌아가시는 길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
그가 멀어지자 자연스레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루실 레인우드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의 얼굴은 기숙사에서 처음 봤을 때 이상으로 피곤해 보였다.
스트레스가 많았던 모양이다.
또다시 부하가 도주하였다고 한다.
책임감이 강한 그녀 입장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뭐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안 하는 거야?"
그녀가 장난스럽게 주먹으로 가슴을 후려쳤다.
"오랜만이에요, 루실 경."
"너, 팔자 핀 얼굴이다? 요새 들리는 소문이 엄청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겸손함 것도 그대로네. 어우, 재수없어."
"그러는 루실 경도 까칠한 건 여전하네요."
"뭐야! 컸다 이거지."
루실이 가까이 다가와 목에 팔을 휘감더니 조르는 시늉을 하였다.
좋은 냄새가 흘러나왔다.
입고 있던 갬비슨 너머로 그녀의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도시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 그렇게 됐어."
"성 스탈리아의 주인인 쿤델 글로버는 권위적인 인간이니까, 레인우드 가문인 루실 경을 못살게 굴지는 않을 겁니다."
"걱정해 주는 거야?"
"예."
루실이 귀엽다는 듯이 뺨을 잡아당긴다.
알맹이가 서른인 나에게는 조금 거북스러웠다.
"난 떠날 사람이니까, 만약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다면 타니아, 그 아이한테 신경 좀 써 줘."
"그녀는 함께 가지 않는 겁니까?"
"어떻게 홀려 놓았는지 말을 안 들어. 자기는 여기에 남겠다고 끝까지 고집 피우더라. 내 말에는 무조건 따르던 아이였는데."
루실이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 밖의 전개였다.
나는 단 한 번도 루실과 타니아가 이런 식으로 헤어지는 루트를 경험하지 못했다.
내 노력이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 것이다.
"너 때문이니까, 네가 책임져. 만약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널 평생 저주할 거야."
"노력하겠습니다. 저에게도 그 아이는 소중하니까요."
"설마, 흑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니지? 미안하지만, 타니아는 더 좋은 가문에 시집 보낼 거야."
"동료로서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루실은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미묘한 표정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였다.
[영리함]이 감정을 읽어 보려 시도하지만.
녀석도 정보가 부족하다며 금새 포기하였다.
"우리 귀염둥이 상처 좀 받겠네."
"예?"
"숙녀의 혼잣말이거든! 알 필요 없어."
루실이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이쪽을 곁눈질한다.
부러움에 가득한 시선이다.
몇몇은 야유까지 퍼부으며 얼른 떨어지라고 손짓한다.
루실은 미인이니까.
기사단 내에서 홍일점인 만큼 아이돌 같은 위상을 지닌 거겠지.
[영리함]은 그들을 약 올릴 생각으로 더 오래 끌어안고 있으라 조언한다.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했던 것 같아서."
"어울리지 않게 왜 이러세요."
"요새 쭉 힘들었는데, 내 투정을 받아 줄 사람이 없더라."
"로드웰 경이 있잖아요."
"그 녀석도 위태로워 보였거든. 하지만 너는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루실이 천천히 떨어졌다.
상념을 떨쳐 낸 그녀의 얼굴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여유가 된다면 편지 쓸게. 지원 물자도 보낼 수 있다면 노력할 거야. 그리고 너희들이 나중에 왔을 때를 대비해서 성 안의 파벌도 장악해 놓을 테니까... 건강히 잘 지내."
"루실 경도 조심하세요."
62화
"루실을 포함하여 다섯 명의 기사가 도시로 가는 걸 선택했다. 남은 건 일곱 명이야."
로드웰이 여느 때처럼 창가 바깥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창가 너머로 조금 전 출발한 오스몬와 루실 일행이 보였다.
"생존자는 데리고 가지 않았다. 방해만 될 게 뻔하다고 하더군."
조슈아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루실이 떠난 자리를 자신이 대신한다는 느낌이었다.
"따라가지 못한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잠잠하더라. 네가 준 무 씨앗이 희망을 준 거겠지."
"다행이네요."
타워에 낀 먹구름이 잦아들었음을 느꼈다.
희망 없이 버티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면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게 인간이었다.
"무를 키울 장소와 사람은 알아보셨습니까?"
"이미 손을 써 놨다. 키울 작물만 구하면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짜 놓은 상태였거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준비성 하나는 빈틈이 없는 사내가 로드웰이었다.
"잘됐네요. 그럼 무에 대한 권리를 얘기해 볼까 싶은데...."
"언제 그 소리가 나오나 했다."
로드웰은 전전긍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무를 수확했을 때 나눌 비율.
지나치게 요구해서는 안된다.
타워 안의 사람들은 아직까지 예민한 편이었다.
"전체 수확량의 20%를 요구하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하냐?"
로드웰이 놀란 얼굴로 되묻는다.
보상에 관한 문제로 하도 괴롭힌 탓인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2할도 차고 넘친다.
그룹의 인원이라고 해 봐야 다섯 명이 전부였다.
배불리 배를 채우고도 많이 남을 게 분명하다.
남는 양은 비축한다.
식량은 얼마나 있더라도 모자라다.
"더 주신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만."
"아니다. 네가 양보해 준다면 나로서는 고맙게 받아들이마."
로드웰이 일을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이제 끝인가? 그럼 넌 어디 있는지 모를 네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데."
그가 상큼한 표정을 지으며 뒤쪽에 있던 문을 향하여 손짓한다.
얼른 사라지길 바라는 눈치였다.
초조해하는 이유는 알고있다.
우리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모른 척하시려는 겁니까? 생각나게 해 드려요?"
"...난 모르겠는데."
"문제를 해결해 드리면 기사단 창고를 열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로드웰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만은 자신 역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
"알았다."
"그럼 제 밑에 있는 친구들을 부르겠습니다."
로드웰이 식은땀을 흘리며 난색을 표하였다.
"뭐 하려고 애들까지 불러! 설마, 싹 쓸어갈 생각이라면 너라도 용서 안 한다!"
"제가 창고 안에서 원하는 물건은 딱 일곱 개입니다."
"그 구체적인 숫자는 뭔데? 너, 우리 창고는 본 적도 없을 텐데."
"일곱 번 들어가 봤습니다."
로드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실을 털어놓더라도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만하자. 머리가 아프니까. 어쨌든 일곱 개라는 말이지? 그 정도라면 괜찮다."
창고 안의 보물을 전부 합하면 30개가 넘는다.
그중에 일곱 개를 요구하였다.
이만하면 로드웰로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숫자였다.
'물론, 그 일곱 개는 가장 으뜸인 녀석들만 골라 가져갈 생각이지만.'
[영리함]의 사악한 웃음이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
로드웰이 앞장서며 아래로 내려갔다.
머물고 있던 집무실이 꼭대기라면.
기사단의 보물을 옮겨 놓은 장소는 정반대인 지하였다.
엊그제만 하더라도 이곳에는 오스몬드를 포함한 사절단이 갇혔던 장소였다.
"로드웰 경, 인사 드립니다."
홀에서는 레오널드 일행이 자신들과 합류하였다.
탈레온과 가비누.
거기에 더하여 타니아까지 합류하여 전원이 모였다.
"레오널드, 못 본 사이에 살이 좀 찐 것 같다?"
"아, 아닙니다."
"다음에 너희들 근거지가 어디인지 소개시켜 줄 생각은 없나? 궁금한데."
"그건 저와 상의할 이야기가 아닌 줄로 압니다."
로드웰이 당황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너희가 함께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걸로 아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네."
레오가 조금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틀립니다. 로드웰 경."
"응?"
"저는 지금 조슈아가 올바른 리더인지 평가하는 중입니다. 그는 시험대에 올랐을 뿐. 제게 합격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 사람'이란 표현은 조금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리더로서 존중은 하고 있잖아."
"그것과 이것은 별개입니다."
"...너, 귀찮은 성격이네."
"무, 무슨 말씀입니까."
로드웰이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슈아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피곤함이 몰려왔다.
"조슈아 경, 네가 이 녀석을 데려간 것은 좋은 판단이었던 것 같다. 내 밑에 있었다면 죽일 듯이 굴렸을 거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다.
그의 성격이 피곤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기, 로드웰 경. 제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조금 전 선배를 부를 때 경이라고 부르셨던 것 같은데."
타니아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탈레온이나 가비누가 그를 경이라 부른 것은 존경의 의미였다.
이름값은 중요하다.
이런 세계이지만 귀족과 평민이란 두 계층은 여전히 존재했다.
불리는 호칭에 따라 영향력이 깃드는 것이다.
로드웰에게 불린다면 그 영향력이란 게 생길 수도 있었다.
"이상하게 들렸냐?"
"그게 아니라 신기해서 여쭤봤어요."
타니아는 기뻤다.
여기 있는 모두가 비슷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리더가 대접을 받는다면 그룹 전체의 체면이 선다.
"조슈아와는 협력 관계다. 지킬 건 지켜야지."
"감사합니다!"
"너는 그래도 사람이 됐구만. 당사자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하던데."
로드웰이 조슈아를 곁눈질하였다.
조슈아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린 지하 감옥에 도착하였다.
로드웰이 자신의 반응을 살피며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놀라지 않는 거냐?"
"어떤 부분에서 놀라야 하나요?"
"보물을 숨겨 둔 장소가 감옥이라는 점 말이다."
"글쎄요, 저는 오히려 뻔하다고 생각하는데."
"뭐?"
"로드웰, 숨바꼭질 잘 못하시죠?"
"너, 그거 어디서 들은 거냐? 그 얘기는 부모님과 형제들밖에 모를 텐데."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로드웰은 본인 애기를 잘 하지 않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아주 친해지면 요구하지 않더라도 추억담을 먼저 들려준다.
좋은 징조였다.
호감도가 표시된다면 한없이 '신뢰'에 가깝겠지.
"따라와라."
그는 감옥 중 한곳으로 들어서더니 벽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홈을 찾는 중이다.
한데 장소를 잊었는지 찾는 게 굼뜨다.
감옥은 관리가 되지 않아서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인 상태였다.
별수 없이 로드웰의 근처로 다가가서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열한 시 방향. 로드웰 경의 어깨 높이에 있습니다."
로드웰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소년은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눈치챘다.
이 장소는 부관이었던 루실에게도 비밀로 하였었다.
한데 어찌 알고 있을까?
'일단은 여는 게 먼저다.'
지켜보는 시선이 많았다.
아직 어린 소년 소녀들에게 허둥거리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홈을 찾아내고는 주머니에 있던 훈장을 박아 넣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문처럼 돌아갔다.
"함부로 물건을 건드리지 마라. 뛰어다니지도 말고."
로드웰이 경고했다.
뒤에 있던 소년 소녀들은 긴장하였다.
말로만 듣던 기사단의 창고.
이곳에는 선대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희귀한 물건들의 집합된 장소였다.
가치를 따지자면 웬만한 귀족들의 창고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장인이 만든 검과 갑옷.
마수들을 상대하며 얻은 희귀한 재료.
마법사들로부터 강탈한 책과 연구일지.
다른 귀족으로부터 하사받은 보물들.
그것이 한데 모인 장소가 여기였다.
"전 절대 오늘을 잊지 못할 거에요."
탈레온은 신성한 장소에 발을 들인 것처럼 행동했다.
사뿐히 걸었고, 숨소리를 죽였다.
아카데미를 졸업하여 기사가 되고.
기사로서 무운을 쌓아 기사단에 가입하고.
거기서 단장에게 인정받아야 구경할 수 있는 장소였다.
자신은 이 세 단계를 넘어설 자신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할 뿐이었다.
그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소망이 타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이루어졌다.
'...조슈아 경.'
소리 없이 그를 불렀다.
그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의 등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쫓아야 한다.
나란히 걷지는 못하더라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대장이나 타니아 같은 재능은 없다.'
재능이 없다면 배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한다.
그걸로도 메꿔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내심 불안해하고 있던 와중에 가비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겁먹었냐?"
"무, 무슨 소리야?"
"지금처럼만 하자는 얘기다. 방해되지 말고, 보통에서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게 우리 역할이야."
탈레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고민은 같은 처지가 아니라면 이해하지 못한다.
가비누이기에 해 줄 수 있는 말들이었다.
"조슈아 경, 혹시나 해서 묻는데, 저희가 직접 고르는 겁니까?"
"아니, 내가 골라 준다. 로드웰 경에게서 딱 일곱 개만 가져간다고 말해 두었으니까."
"우리가 고르지 못하는 거였나?"
물건을 품평하던 레오가 아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도 기사 견습생이다.
기사단 창고는 그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큰 장소였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생각하여 처음으로 물건을 골라 줬다.
"받아라."
선반에 걸린 원형 방패 하나를 던져 주었다.
[클라만드의 라운드 실드].
클라만드는 방패를 만든 장인의 이름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여러 방패를 사용해 보았지만.
이 시기에서 구할 수 있는 방패로는 저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갑옷은 거추장스럽다. 방패가 가장 좋아.'
일반적인 좀비라도 한 번만 공격 당하면 치명상이다.
움직임이 둔해지는 갑옷보다는.
방패로 방어하는 것이 그들을 상대로 유리했다.
"레, 레오널드."
로드웰이 가까이 다가와 소년을 붙잡았다.
"방패라면 여기에도 네 개가 더 있다. 이, 이게 더 멋지지 않니?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
로드웰은 초조한 안색이었다.
그로서는 똥줄이 탈 것이다.
여러 방패들 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높은 방패를 던져 주었다.
어떻게든 다른 것으로 바꾸어 손해를 줄이고 싶겠지만.
"추천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조슈아가 처음으로 골라 준 것이니 받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레오널드가 넘어갈 리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존중으로 단호히 거절한다.
녀석에게 클라만드라는 이름만 알려 주면 태도가 확 바뀌겠지.
"하하, 그, 그것도 그렇지."
참으로 어색하게 웃으시네.
딱한 심정이 들지만 이쪽도 생존을 위해서는 가차 없이 고를 생각이다.
"다음은 검 세 자루를 집겠습니다."
[슐켄], [블러드너], [키드만].
검만 스무 자루가 넘는 공간에서 자신이 골라 낸 세 자루였다.
"조, 조슈아."
로드웰이 자신의 손목을 낚아챘다.
우는 소리를 내며 불안한듯이 떠는 게 보였다.
"검이라면 전문가인 나에게 맡겨라. 네가 고른 것들은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도 최하급이다."
"저는 제 안목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곳에 있는 검의 이름을 아는 것만이 아니다.
실전에서 전부 휘둘러 봤다.
장인이 만들었더라도 실제 성능은 다를 가능성이 있으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비싼 게 장땡이다.
입소문이 퍼진 물건은 성능도 그만큼 남달랐다.
"...미치겠네."
로드웰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소년은 창고 안에서도 으뜸인 물건들만 골라내었다.
고민하는 시간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서 행동하는 사람 같았다.
"이걸로 4개."
조슈아가 검을 레오에게 맡겼다.
그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린다.
당장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말해 두는데 휘두르면 안된다."
"아, 알고 있다고!"
모르는 것 같은데.
걱정하는 그를 뒤로하고서 창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사단의 창고라고 하길래. 기사들이 사용하는 물건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타니아가 옆에 다가와 물었다.
"기사나 마법사가 충돌하는 일은 곧잘 있었으니까. 승리한 쪽이 전리품이랍시고 강탈한 거겠지."
그녀에게도 줄 선물을 골라야 한다.
무기는 필요 없다.
기숙사에서 구한 지팡이로도 충분하다.
기사와는 달리 마법사의 아이템은 타고난 성질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치가 높은 것이 꼭 정답은 아니란 뜻이다.
"이걸 쓰고 다녀."
그녀에게 건네준 것은 망토였다.
과거 연구소에서 사용했던 방패와 망토처럼 인챈트가 된 물건이다.
[붉은 마녀의 망토]
평상시에는 눈에 띄지 않는 갈색이다.
타니아가 마력을 발휘하는 순간.
이 갈색은 붉게 물들며 보온 효과와 함께 마력 회복 속도를 증가시킨다.
"예뻐요! 망토 뒤에 새겨 넣은 자수. 이거 태양이죠?"
"그래."
"한번 입어 볼게요."
타니아가 제자리에서 망토를 걸쳤다.
그러고는 한 바퀴 돌았다.
아카데미 교복의 치마와 망토가 나란히 회전한다.
그 나이대의 여학생답게 옷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어때요?"
"나쁘지 않아."
"그게 전부예요?"
"불편한 곳은 없나? 크다 싶으면 그 부분만 기장을 줄여라."
"흥, 됐어요."
[영리함]이 한심스럽다며 자신을 꾸짖었다.
녀석이 채찍질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안다.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말 같은 거겠지.
그녀의 소망은 들어줄 생각이 없다.
그건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불필요한 일이었다.
"나머지 두 개는 내 몫이다."
두 개를 챙긴다고 말했을 때는 누구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물러섰다.
로드웰만이 창백한 낯빛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싱긋 웃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첫번째로 집어 든 것은 둥그런 형태의 보주였다.
"...정말로 그거냐?"
로드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때까지 그의 손길은 최상의 가치를 지닌 물건만을 콕 집어 냈다.
한데 이번에는 빗겨 나갔다.
그건 생존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처럼 보였다.
본래 보물이란 의미에는 가장 적합할지도 모르는 장식품.
"예,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겁니다."
다음으로 집어 든 것도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책이었다.
라인 타워는 도서관이다.
읽을거리라면 넘쳐 나는 이곳에서 책을 원한다는 것은 기묘했다.
그건 어느 신과 관련된, 종교적인 내용이 담긴 경전이었다.
63화
홀로 올라오자 로드웰은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창고 안에 모셔 놓았던 검 세 자루와 방패를 잃었다.
자신조차 써 보지도 못하고 감상만 하던 물건이었다.
"선대 단장들을 뵐 면목이 없군."
"비상 상황이잖아요. 그들도 용서할 겁니다."
조슈아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차라리 창고 안의 물건을 전부 해방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절대로 안돼."
로드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기사단을 배신하여 이탈한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하던 무구들 중에는 기사단의 소유물인 것도 있었다.
창고 안의 보물과 비교할 레벨은 아니더라도 상등품이었다.
"내 부하들이지만 신뢰하기 어려운 놈들이야. 실제로 루실을 따라서 몇 명인가 가 버렸고."
"도시로 가고 싶었던 게 이유 아닙니까?"
"루실이 향했으니까 더더욱 가고 싶었다, 라는 거다."
푸념 섞인 듯한 대답에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음 번에 타워로 올 때는 무가 성공적으로 재배되어 있길 바랄게요."
"그러면 한 달 뒤에나 타워에 올 거라는 소리냐?"
"예."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조금 더 자주 놀러 와서 내 말벗이나 해 주면 안 되냐?"
"생각해 보고요."
로드웰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예전이라면 루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겠지만.
그녀도 이제는 없다.
소년에게 동정을 기대해 보았지만, 그는 남 일이란 듯 얼버무렸다.
"내가 놀러 가면 안 될까?"
"아직은 공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내게 보여 주면 안 되는 것이라도 있나 보지?"
"추측도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을 시켜서 미행도 하지 마시고요."
"무서워라."
무기질적인 조슈아의 목소리에 손을 휘적거렸다.
소년이 고집을 꺾을 리는 없었다.
이리 되면 포기하는 게 좋다는 걸.
로드웰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약속은 지켰다. 의논할 것이 생긴다면 언제든 집무실로 와라."
"그럴게요."
로드웰이 계단으로 사라졌다.
조슈아는 몸을 돌리며 그룹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이다.
"검은 여기서 꺼내지 마라. 기사들이 눈독이라도 들이면 곤란하니까."
"그,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레오널드는 검에 향해 있던 시선을 재빨리 거두었다.
다른 두 소년들도 따라 행동했다.
기사 견습생인 만큼 검에 흥미를 지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단지 경계심을 지니길 바랬다.
좋은 물건일수록 그걸 손에 넣으려는 악랄한 인간들이 많다.
타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친숙한 점을 이용하여 가로채려는 놈들도 있겠지.
"저도 함께 가나요?"
타니아가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골라 준 망토를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넌 여기에 남아 있어라."
"아직도 말인가요?"
그녀가 볼멘소리를 내며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이곳의 생활이 농장보다 편할 거다. 거긴 춥고, 벌레들도 많아."
"상관없어요!"
"루이젤라와 수업은 어떡할 생각이냐? 농장과 타워를 오가다 보면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 그건."
"당분간 타워 안의 분위기를 봐 줄 사람도 필요해. 루실 경이 사라졌다. 생존자들에게는 할 일이 생겼고, 이것이 어떤 변화로 이어질지 알아보고 싶다."
"알겠어요. 하면 되잖아요!"
냉담한 기운을 뿜어내던 타니아였지만 곧 고개를 떨구었다.
어리광을 부리면서까지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다.
감정을 앞세워 매력을 떨어뜨리면 안된다.
천천히.
조급하면 도리어 멀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몇 번씩은 들를 생각이니까. 너도 농장으로 몇 번씩 찾아오면 되고."
조슈아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녀가 기쁜 듯이 웃었다.
타워 안의 상황은 이걸로 끝이었다.
소년들의 표정을 살피건대.
저대로 두면 실수할 것이 분명하기에 서둘러서 농장으로 돌아갈 길에 올랐다.
"감사합니다."
* * *
정문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이쪽을 향하여 감사 인사를 하였다.
검버섯이 얼굴에 드문드문 생긴 노인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자신과 소년들 뿐이었다.
"당신이 씨앗을 가져다준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생존자들을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기사단에게 버림받지 않고, 저희 스스로가 일을 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노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며 파종에 열심이었다.
무를 심어 둔 밭으로 점 찍어 둔 자리인 모양이다.
기분 좋게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무만으론 살아남을 수 없다.
언젠가 영양 불균형으로 병에 걸리거나, 쓰러지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때가 되면 저들도 변할 것이다.
은인으로 바라보는 눈빛은 차가워지며 자신을 외면하겠지.
인간의 감정이란 그만큼 연약했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는 게 어때?"
레오가 화답해 주라고 대답했다.
소년의 표정에서 스스로가 영웅이라도 된 듯한 향상심을 엿보았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그룹이 목표로 해야 할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레오, 착각하지 않는 게 좋아."
분위기를 경직시킬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레오널드는 제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도와주는 게 아니다. 이용하는 거다. 이 차이를 분명히 기억해라."
선의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상대로부터 어떤 반응이 돌아오든, 그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훗날.
위선이라고 평가받더라도 말이다.
그걸 견딜 만한 인내심이 소년에게는 없었다.
하여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알았다."
레오널드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멈춰 있던 발걸음이 다시금 움직이고, 시선은 노인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였는지는 모르나.
느끼는 바가 있었던 건 분명하다.
어울리지 않는 감상을 끝내고 황혼으로 물들어 가는 길목을 향해 걸었다.
차분해진 머릿속은 다시금 생존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쫓기 시작했다.
'[성장]을 걸어 놓는다면 수확하는 시기를 앞당길 수 있겠지. 다음에 한번 와 봐야겠어.'
* * *
그날 밤이었다.
레오널드와 다른 소년들은 모두 잠에 든 시간이었다.
농장 근처에 있는 빈 폐가에 홀로 들어왔다.
툭!
뭉툭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창고에서 가져온 보주였다.
로드웰은 이것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사역마.
이 안에는 마법사와 계약을 맺는 생명체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별빛 기사단 초대 단장인 가레스가 목숨을 잃을 위기를 이겨 내면서 찾아낸 보물.
사용자의 마력에 영향을 받아 태어나는 종류가 달라지는 알이었다.
"이게 창고 안에 있던 물건 중에서는 가장 비싼 거지."
로드웰이 이 보주의 정체를 알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물건이었다.
이 알을 암시장에 판매하는 것으로, 소년들에게 주었던 것 같은 검 열 자루를 사고도 남을 정도니까.
그만큼 이 세계에서 마법사를 따르는 사역마라는 건 귀한 생물이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알에서 태어날 생명체는 아마도 용이겠지."
타니아로 부화시켰을 때는 불사조가 태어났다.
아델라로 부화시켰을 때는 늑대가 태어났다.
이는 그들의 선조들이 계약한 첫 사역마와 관련이 깊었다.
팔라리온 가문의 초대 가주에게도 사역마가 있었다.
용.
이 게임을 하며 용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접해 왔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용의 흔적은 게임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제 두 눈으로 직접 볼 차례다."
단검을 꺼내어서 손가락에 가져다 대었다.
가볍게 그어 피를 보주 위로 떨어뜨렸다.
피는 사역마를 불러낼 매개체였다.
파직!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무언가가 꿈틀거리면서 껍질을 깨트려 나간다.
작게 생긴 균열은 좌우로 뻗어 나가며 이윽고 완전히 갈라졌다.
조슈아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예상대로의 생물이 태어났다.
밤하늘을 흡수한 것처럼 새까만 비늘과 갈고리처럼 생긴 발톱.
깃털이 아닌 뼈대로 이루어진 날개.
고양이처럼 길쭉한 동공은 황금이 깃든 것처럼 노랗게 타올랐다.
화려하고 기품이 넘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크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하는 행동들도 미덥지 못했다.
네 발로 걸어 다니면서 고양이처럼 제 몸을 핥아 대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인데."
용에게 지팡이를 겨누며 [분석]을 사용했다.
[다크 드래곤 – 해츨링]
잠재 능력 – S
고유 스킬 – 거대화. 브레스. 성은. 영혼 공명. 폴리모프.
잠재 능력 S라면 게임 안의 최고 등급이었다.
더불어 성은 또한 패시브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고유 스킬이다.
성은을 지닌 생명체는 좀비의 공격에 감염되지 않는다.
몸의 흐르는 피가 다른 무엇과도 섞이기를 거부하는 권능.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왜 까만 거냐?"
성스럽다는 단어라면 하얀색이 먼저 떠올랐다.
검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내 생각이 편협하다고 [영리함]이 지적해 왔다.
용의 피라면 어떤 특별함을 지녀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용은 부모를 알아본 듯 천천히 다가와 몸을 비비적거렸다.
"불은 쏠 수 있니?"
용이 가슴을 부풀리더니 몇 번인가 숨결을 토해 냈다.
무언가 시험하는 듯한 자세로 보였다.
쿠악! 쿠악!
녀석은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인지 으르렁거렸다.
"연습하면 되겠지. [분석]에는 확실히 브레스가 있으니까."
용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시늉을 하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녀석은 내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내 밑에서 열심히 일한다면 배불리 먹여 줄 거고, 기대 이하라면 버릴지도 모른다."
이제 갓 태어난 생명에게는 너무 가혹한 말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경고했다.
불리한 상황일 때 태도를 바꾸는 치사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검둥이는 기쁜 듯이 뛰어올랐다.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으름장에도 도리어 해맑게 웃어 댄다.
"정을 붙여서 살아남을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어."
어쩐지 힘이 빠진다.
녀석을 상대하면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마음을 모르는 기계였다면 차라리 속 편했을 텐데."
녀석에게 지팡이를 겨누며 [성장]을 걸었다.
변화는 없었다.
용은 천 년을 산다고 알려진 생물이었다.
보름이란 시간을 빨리 감더라도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네가 만약 하늘을 날고, 불로 좀비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면 많은 게 편했을 텐데."
내 쌀쌀맞은 말에도 녀석은 변함없이 웃었다.
물끄러미 녀석을 관찰한다.
시골 강아지처럼 사람의 손길을 원하는 순진무구한 얼굴.
트집을 잡는 자신이 죄책감에 파묻힐 것 같은 모습이다.
"폴리모프로 변신 한번 해 볼래?"
용은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생물이었다.
녀석의 몸이 번뜩거린다.
여섯, 일곱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여자 아이가 나타났다.
성별로 따지면 암컷이었던 건가?
"다르게 변신할 수는 없어? 예를 들자면 다 큰 성인이라던가."
용은 강하게 부정하였다.
한계가 많은 변신술이라고 생각했다.
"알았다. 불필요한 관심을 받지 않게 평소에는 이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
용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부분은 나중에 차근차근 알아보도록 하고, 다른 장소에서 놀고 있어."
용이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묵묵히 다음 할 일을 이어 나갔다.
창고에서 가져온 다음 물건.
어느 종교 단체의 경전이었다.
다른 캐릭터라면 불쏘시개밖에 되지 않는 종이 뭉치였지만.
조슈아 팔라리온이라면 명검이나, 갑옷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독창성의 레벨 업.
[속독]을 이용하여 책을 넘기기 시작하였다.
리듬감이 넘치게 넘어 가던 페이지는 30분도 되지 않아서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내용은 빠짐없이 머리에 집어 넣었다.
[영리함]과 [속독]의 조합이다.
독서라는 능력에 한정하면 자신을 이길 인간은 없었다.
[독창성이 LV3로 상승했습니다.]
[주문 자비송을 얻었습니다.]
[주문 성수 제조를 얻었습니다.]
[주문 성역를 얻었습니다.]
[신성력이 3,000으로 증가합니다.]
[신과의 연결이 강력해집니다.]
트라이덴 마을에서 얻은 경전에 적힌 신은 화합을 주장했다.
모두가 힘을 합해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이번에 읽은 경전에서는 연민이었다.
타인을 가엾게 여기며,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며 함께 살아가라.
인류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겠지."
이상적인 문장으로만 가득 채워진 고서였다.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에게는 혐오감마저 느껴졌다.
추악한 인간들을 보았다.
당하고, 바라보고, 때로는 나 자신이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않은가?
[인내심]이 위로한다.
[인내심]은 자신이 미치지 않는 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흠."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세 번째 경전을 읽음으로써 자신은 서로 다른 세 명의 신과 연관이 생겼다.
천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몇 분간 상황을 주시하였다.
폐가는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고요하고, 공허했다.
"괜한 걱정이었던 건가."
별일 없다면 그걸로 되었다.
[이름 : 조슈아 팔라리온]
[5학년(18) – 노비스]
[잠재 능력 – 격세 유전(신성). 습득의 대가. 속독.]
[성격적 특성 – (강심장) (냉정함) (영리함) (인내심) (외톨이) (야행성)]
[후천적 특성 – 리더십(중) 언변술(중) 카리스마(중) 화염 저항(하)]
[보유 코인 – 120]
[인벤토리 – 2칸 개방]
[독창성 LV3 – 신성 마법]
[보유 마법 – 방패. 정화. 자비송. 섬광. 평정. 성장. 축복(근력 강화). 성수 제조. 성역]
[체 력: 70]
[근 력: 50]
[민 첩: 35]
[마 력: 450]
[신성력: (3,000)]
능력의 변화도 확인하였다.
각각 어떤 마법인지 확인해 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나는 구석에서 놀고 있던 용에게 눈짓하였다.
녀석이 한달음에 달려 왔다.
눈치가 빠르다.
"이름이 필요하겠네."
성격적 특성들이 여러 이름을 거론하였다.
전부 무시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자신이 직접 정해 주고 싶었다.
나는 답지 않게 생존과 관련도 없는 일에 성실히 머리를 굴렸다.
오늘 밤은 달이 아름다웠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빈틈없이 꽉 채워진 보름달.
폐가와 황무지가 가득한 삭막한 공간에서 오직 그것만이 영롱하게 빛났다.
"네 이름은 루나다."
루나는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64화
"달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레오는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아직 꿈속에 있는게 아닌가 생각했다.
새벽이라는 잠깐 사이에 리더의 옆에 본 적 없던 아이가 나타났다.
"별일 없었어."
조슈아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황무지를 방황하고 있길래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설명에도 레오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조슈아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아는 사실이 있었다.
그는 이득이나 대가없이 사람을 구할 위인이 아니다.
설령 그 대상이 어린아이라고 할 지라도.
"이 아이에게 무언가 특별한 힘이라도 있는 거야?"
레오는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불안해하는 얼굴로 조슈아의 다리 뒤로 몸을 숨겼다.
"그래."
생각했던 것보다도 싱겁게 원하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레오는 한숨을 토해 냈다.
조슈아는 분명 대단하다.
그래서일까?
생각이나 행동들이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정확히 어떤 건지 물어봐도 될까?"
"비밀이다."
"비밀이라, 네가 그렇다면 더는 묻지 않겠지만 말이지."
새로운 동료가 늘었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어린 아이는 동료라는 인식보다는 지켜야 할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네가 지금 이 아이와 싸워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재미없는 농담이네."
"나는 농담을 좋아하지 않아."
성질을 긁어 대는 듯한 대답이 오고 갔다.
레오는 다시 한번 아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압박감은 없었다.
두려운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힘이 느껴졌다.
그 힘이 자신을 압도할 정도로 커다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오빠!"
레오는 놀란 토끼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등골에 차가운 기색이 달려 나간다.
뒤로 돌아보자 타니아가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뭐 하는 짓이야!"
타니아가 레오를 지나치며 어린 소녀 앞에서 허리를 낮추었다.
눈높이를 맞추고는 가볍게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안녕, 내 이름은 타니아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소녀는 대답하지 못하고서 붙잡고 있던 조슈아의 바지를 더 힘껏 움켜쥐었다.
"루나라고 하는 것 같더라. 부끄러움이 많아서인지 낯가림이 심한 편이야."
"선배는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래."
타니아는 물끄러미 루나를 관찰하였다.
아직 어리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였다.
흘러내리는 흑발은 눈이 부실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럽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다. 네가 조금만 더 컸다면 위기 의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
타니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소녀에게 질투해 버릴 뻔한 자신에게 유치함을 느꼈다.
"그런데 너, 어딘가 선배랑 닮은 것 같아."
저 조각 같은 외모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머리 색만 분리한다면 그녀는 자식이라 해도 믿을 만큼 조슈아를 닮았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레오는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18살이고, 저만한 크기의 아이가 있다는 건 아무래도 말이 안 되지."
성년 이전에 결혼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에서도.
둘의 관계를 부녀로 받아들이기엔 힘들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거든!"
타니아가 툴툴거렸다.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대화에 루나는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방금 웃었지? 웃는 게 훨씬 귀여워. 마치 인형 같아."
타니아가 꺄악! 거리면서 어쩔 줄 모르며 흥분하였다.
그 과장된 몸짓에 루나의 닫혀 있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조슈아를 벗어나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타니아 앞에 멈춰 섰다.
서로의 거리가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귀여워! 루나, 언니가 한번 안아 봐도 돼?"
루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타니아는 천천히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파묻으며 들어올렸다.
몸집과 달리 생각했던 것보다도 묵직하다.
팔과 어깨의 근육이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갔다.
"윽, 높이높이는 못 해 줄 것 같아."
타니아가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았다.
"이래서 마법사들은 형편없다니까. 비켜 봐라. 내가 해 줄 테니까."
레오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다가오자.
루나는 아까 전처럼 조슈아의 뒤로 숨어 버렸다.
"헤헤. 오빠, 루나한테 미움받는 것 같은데."
"크윽."
"그러니까 왜 그리 쌀쌀맞게 굴었어. 애들은 첫인상이 중요한 것 몰라?"
"나쁜 뜻은 없었어."
"변명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레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소년도 아이를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 * *
루나가 부화하고 다시금 한 달이 흘렀다.
로드웰에게 나눠 주었던 무 씨앗은 소작농들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다.
완성된 그것을 몇 개 건네받아 맛보았다.
나쁘지 않은 맛이다.
별다른 양념 없이도 단맛이 넘쳐서 끼니를 해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훈련에 매진하던 동료들도 조금씩 성과를 보여 나갔다.
출발이 늦은 만큼.
본래 있어야 할 경지에 다다르기 위하여 노력했다.
레오와 타니아가 지닌 찬란한 재능이 그들의 성장에 탄력을 더하였다.
탈레온과 가비누도 레오널드의 밑에서 잘 녹아들었다.
'이걸로 끝이라면 좋겠지만.'
든든한 동료가 있다.
의식주가 해결되었다.
아포칼립스에서 이 두 개를 갖췄다면 기반은 갖춘 셈이었다.
이제 버티기만 하면 끝인가?
남은 생활은 안전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었다.
기반은 어디까지나 생존에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그것만으론 게임의 엔딩에 다다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이곳도 다른 생존자들의 표적이 될 테고, 그게 아니라면 좀비 떼가 들러붙겠지.'
좀비 아포칼립스 게임이었다.
좀비가 남아 있다면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정말이지 질 나쁜 게임에 들어왔다고, 탄식 섞인 숨을 토해 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얼마나 좋을까?"
로드웰이 자신을 불렀다.
좋은 소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장난이나 칠 생각으로 불렀다면 집무실이 아닌 다른 곳이어야 한다.
집무실은 로드웰이 그룹의 일들을 결정하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로드웰은 가벼워 보여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인물이 된다.
"오랜만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로드웰이 의자에 앉은 채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로드웰. 잘 지내신 것 같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나는 비어 있던 의자 하나에 앉았다.
"무는 먹어 봤냐?"
"예, 나쁘지 않았어요."
"나도 무가 이렇게 맛있는 야채라는 걸 처음 알았다."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더 맛있어질 겁니다."
"그래, 이미 수확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려는 모양이다. 소금이나, 설탕을 뿌리거나, 불에 굽는 방법이라든가."
로드웰은 잡담은 이쯤 하자는 듯 표정을 바꾸었다.
"전서구가 왔었다, 달빛 기사단에게서."
그가 책상 서랍을 열면서 봉투 하나를 꺼내 보였다.
"원군을 요청하는 내용이더군."
"그렇군요."
로드웰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여기서는 무엇으로부터 도와 달라는 건지 묻는 게 먼저 아니냐?"
"좀비겠죠."
"다른 생존자 그룹일 수도 있잖아.
"둘 중 하나니까 때려 맞췄다고 생각하면 그뿐인 일입니다."
로드웰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여느 때처럼 추궁하기를 포기하였다.
"원군에 대해서는 거부하려고 생각 중이다."
"이유는요?"
"아무래도 찜찜해서 말이야. 함정이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이 편지의 필체는 데릭이 쓴 게 아니다. 그리고 편지에는 기사단장을 상징하는 봉인도 없었다. 이건 데릭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낸 거야."
"제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로드웰은 편지를 이쪽으로 내밀었다.
[영리함]이 글씨체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몇 초간을 정적 속에서 보냈다.
어느 순간.
아델라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글씨에서부터 우아함이 느껴지는 인간은 몇 없었고.
달빛 기사단 내에서 한정한다면 그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것 같아?"
"데릭이 쓴 게 아니라는 로드웰의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300마리가 넘는 좀비가 근거지를 포위하였다.
탈출할 방법이 없다.
안에는 환자들이 생겼고, 그들도 변하지 않을까 두렵다.
데릭과 기사들 몇몇이 행방불명인 상황
부디 이 편지를 받는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원군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저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로드웰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대답했다.
그가 되묻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의 결정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원군을 보내지 않을 생각이셨죠? 함정이라고 믿고 싶었던 이유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라도 주고 싶었던 건가요?"
"너 말이다, 설마 나와 불편한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친하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거죠."
정곡을 찔린 로드웰은 위장이 꼬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불쾌감이 겉으로 드러난 듯한.
여기서는 더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원군을 보내지 않는 건, 내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다. 루실이 떠나면서 데려간 기사들 때문에 인력이 부족해. 내가 나선다면 남아 있는 이들은 불안에 떨 거다. 그렇다고 기사들만 보낼 수도 없다. 데릭이 해결하지 못했다면, 기사 몇 명으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힘들다는 뜻일 테니까."
나는 눈썹을 살짝 오므렸다.
반론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태도로 비추어 볼 때.
지금의 결정을 꺾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로드웰의 생각이 옳습니다. 제가 그 의자에 앉아 있었어도 같은 결정을 내렸겠죠."
로드웰은 뜻밖이란 듯이 눈을 키웠다.
그 눈동자에 조그마한 실망감이 깃든 것을 알아채고서 입을 열었다.
"제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아니, 너라면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어차피 고집을 꺾을 생각도 없었잖아요."
"그래서 생각해 둔 전략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냐? 내 말은 나를 설득하라는 얘기다."
"이번에는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타워의 안정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로드웰이 자리를 비우면 이번에야말로 개판 5분 전의 상황이 되겠죠.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대화의 흐름이 여기까지 도달하자.
로드웰은 내 의중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광산에 갈 생각이냐?"
"예."
"엄청 위험할 거다. 그리고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얻을 만한 것이 광산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의 말처럼 광산으로 향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타워에서 출발하여 광산까지 도달하는 데 닷새가 걸렸다.
그만한 시간이면 아지트는 좀비들로 쑥대밭이 될 것이다.
도움을 주기도 전에 파멸한다.
빈손으로 돌아올지도 몰랐다.
운이 좋게 버틴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구해 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가야 할 이유가 두가지 있습니다."
"뭔데?"
"첫 번째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제게 쓸모가 있는 이들을 말하는 겁니다."
"나처럼?"
"예, 제겐 로드웰도 그런 사람입니다."
"기분이 나쁘지 않네."
"두 번째는 제가 아직 해 보지 못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해 보지 못한 방법이라? 뭐냐, 그 아리송한 대답은."
"물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뭍에는 그 광경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데 그 사람은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해서 방관했습니다. 둘이 같이 빠져 죽을 바에는 자신이라도 살아남는 게 좋다고 생각했죠."
로드웰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감정을 이입하였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같은 얼굴이다.
순식간에 결론을 짓고, 그것을 입 밖으로 토해 냈다.
"그게 나쁜 건가?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은데."
"나쁜 게 쟁점은 아니에요. 단지 이 화자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을 부를 생각도, 부표를 던져 줄 생각조차 안했습니다."
"구조할 방법이 있는데도 시도해 보지 않고 외면했다는 거냐?"
"예."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한다는 설정이냐?"
"그건 아니에요. 그때는 분명 그게 최선이었을 겁니다."
"그럼 마음이 바뀐 계기가 뭔데?"
"이건 빠뜨린 부분입니다만. 뭍에서 바라보던 사람도 다른 이유로 죽어 버려요."
로드웰은 만족스럽지 않은 결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잘 나가다가 확 꺾어 버리네. 왠지 맥이 빠졌어. 이제 돌려 말하지 말고 대답해라. 뭍에서 바라보던 인간은 너지? 네가 살아남으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인간을 살릴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고."
"그렇네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와줘도 괜찮겠지. 인간상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고."
"사람의 가치를 논하는 시점에서 실격 아닙니까?"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인간이 물에 들어가는 거잖아. 그 정도는 따지는 게 보통이다. 얼굴은 예쁜지, 몸매는 괜찮은지, 돈은 많은지, 그 정도 따질 권리는 줘야지. 이걸 이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어."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참고로 그 물에 빠진 인간에는 나도 포함되냐?"
로드웰의 매서운 통찰력이 발휘되었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물에 빠진 사람이 여럿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어떻게 아신 거에요?"
"뻔하지. 그 정도도 간파하지 못할 줄 알았냐? 그래서 대답은."
"로드웰도 포함되지만, 로드웰의 경우는 조금 달라요."
"어떤 식으로?"
내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로드웰은 몇 달간은 살아남는다.
그런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 운명이 그를 보호해 주는 시간도 곧 끝이 난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왜 여기서 끊어 버리는 건데? 내 입장에서는 그게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고!"
"제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흥이다, 이놈아."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좀비의 군집이 나타났다.
[영리함]이 다음에 이어질 시나리오를 분석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
딱 하나가 머릿속에 남았다.
"로드웰, 제가 떠난 뒤에 동쪽을 집중적으로 감시해 주세요."
"그건 왜?"
"또 다른 군집이 이곳을 덮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원을 하러 간 사이 집을 잃는 것.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가장 싫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네가 하는 말이라면 흘려들을 수 없는데."
로드웰이 골치 아픈 모양인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지금 있는 사람들로 타워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냐?"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버리는 수밖에 없겠군."
로드웰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이득이 되는 방향을 고를 줄 아는 것.
그게 로드웰의 장점이었다.
"만약 타워를 버린다면 어디로 가면 좋을까?"
"성 스탈리아로 가세요."
"설마, 내가 걷어찬 놈들한테 달려가서 살려 달라고 빌라는 말은 아니겠지?"
"그 근처에서 자리를 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로드웰은 고민하였으나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로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광산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저도 그쪽으로 갈 겁니다."
"넌 이미 그 일이 일어날 것처럼 말하는 구나."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요. 만약 그리된다면 광산으로 전서구를 날려주세요."
"하, 알았다."
이걸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로서는 이 계획이 쓰이지 않는 게 최고였다.
하지만 가능성은 높았다.
이 세계(아카데미)는 나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하니까.
65화
조슈아가 농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밤이 되어 싸늘해진 공기가 몸에 배어 들어온다.
길목은 어두컴컴했다.
갑작스레 좀비가 나타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으슥한 분위기였다.
[냉정함]에게 주위를 맡기고는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아름다웠다.
아지트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늦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에 보이는 풍경을 영원히 담아 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뭐든지 생각처럼 술술 풀리지 않는 법이네.'
조슈아는 사색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의 이미지로 제일 처음 떠오른 것은 두 소녀였다.
아델라 그레이스와 세레나.
회담장에 헤어지기 직전.
자신은 틀림없이 경고하였다.
좀비의 군집이 쳐들어올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그룹을 버리라고 말했다.
정답을 알려 주었음에도 실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다.
[냉정함]도 실망이 크다며 한 손 거들었다.
[냉정함]은 아델라를 특히나 높이 평가했었다.
숲에서 우르곤을 상대했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맞서 다른 계획을 내놓았고, 굽히지 않고 움직였다.
그 결과 학생 한 명이 죽었지만.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으로 움직였다는 것에 감탄했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살아남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생존은 사람의 본능이다.
그걸 뛰어넘는 무언가를 찾아낸 게 아니라면.
사람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되었다.
아델라 그레이스라는 캐릭터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사명감을 부여하는 타입이었다.
그건 타인의 애정을 원해서가 아닌.
야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녀의 야망은 가문의 인형이 되기를 거부했다.
어쩌면 지금 광산에서 겪고 있는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있는 사람이 세레나인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세레나는 고향을 잃었다.
고향을 제 손으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지녔다.
그녀가 동료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저주에 가까웠다.
아델라가 남는다면 그녀도 남는다.
둘을 따로 구할 수고는 덜었다.
'다시 지옥으로 향할 시간이군.'
* * *
조슈아는 레오널드에게 광산으로 향할 예정이라고 알려 주었다.
간부로 인정한 이상.
그와는 계획을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내 의견은 씨알도 안 먹힐 테지만, 일단은 간부 된 입장으로서 한마디만 하자. 나는 반대한다."
레오는 눈앞의 리더에게 똑바로 전해지도록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의견을 내놓았으면 뒤따라 근거를 원한다.
그것이 자신과 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우리는 이제 자급자족이 가능해. 달걀과 무를 생산할 수 있어. 거주 공간도 나와 내 부하들이 주변 폐가를 보수한다면 그럭저럭 쓸 만한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의식주를 해결한 거야. 물론 이외에도 필요한 것들은 많겠지만, 그런 걸 찾아낼 목적이라면 광산이 아닌 곳도 많다는 얘기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의견 또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이 몇 번이나 했던 선택이기도 하였다.
"맞는 말이야."
"무섭게 왜 그래? 순순히 인정하지 말라고."
"아니, 정말로 괜찮은 의견이야. 나 또한 예전에 시험해 봤었고."
"너 말이야. 한 번씩 인생을 여러 번 산 인간처럼 말하는데, 그게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지 알고 있어?"
조슈아는 무신경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레오널드."
"왜?"
"네 말대로 이곳의 기반은 사는 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달빛 기사단이 무너지면, 좀비 군집은 새로운 먹이를 찾아 움직일 거다."
"배불리 먹었으면 그대로 흩어지는 거 아니야?"
"놈들에게 포만감이란 개념은 없어. 먹어도 먹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게, 녀석들의 식욕이지."
"그 미친놈들이 우리한테 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들만이 아니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군집이 나타날 수도 있어."
레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좀비 수백 마리가 모여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에서 역겨움이 끓어올랐다.
"가능성은 충분해."
"그런 끔찍한 애기를 잘도 서슴없이 말하는 구나, 넌."
그의 표정에 드러난 불쾌함을 무시하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놈들이 우리에게 오지 않더라도, 다른 그룹을 먹어 가면서 힘을 키울 거다."
"위험 요소를 미리 제거하자는 말이냐?"
"그것도 있지만, 첫 번째는 사람을 구하는 데 있다."
다른 그룹의 사람을 빼내려면 척을 질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하나 비상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사람을 구한다는 명분.
그 강력한 명분이 다른 누구와의 갈등 없이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너도 아는 사람이다."
"달빛 기사단에 내가 아는 지인이라면, 아델라를 말하는 거냐?"
"그래."
"능력이라면 확실히 대단하지만 말이지. 넌 그 녀석이 쓰고 있는 가면 뒤의 모습을 보지 못해서 그래. 능글맞고, 여유가 넘치는 듯한 모습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일 뿐이야."
"일만 잘해 준다면 성격은 아무래도 좋아."
조슈아는 그리 대답하면서 눈앞의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레오가 당황한 얼굴로 반응했다.
"내 성격이 어디가 어때서!"
"너의 그 커다란 자존심도 나로서는 다루기 까다롭다. 그러니까 아델라가 피곤한 성격이더라도 별로 상관없다는 얘기다."
레오는 멍한 눈빛을 보였다.
광산에 관한 이야기를 의논할 때도 보여 준 적 없던 표정이다.
아델라와 비교한 것이 그에게는 훨씬 더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설득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너보다도 경험이 풍부하거든."
* * *
2월 중순.
겨울이 끝나 가는 시기였다.
추위는 줄어들고, 잿빛 날씨는 쾌청하게 변했다.
첫 월동은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했다.
동료들이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행운이었다.
[성] 속성 마법이 있더라도 병은 치명적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감기에만 걸리더라도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게임을 플레이하던 시절에 몇 번인가 그렇게 죽은 적도 있었다.
'농장을 두고 오는 게 걱정되지만, 술식에 문제가 없다면 괜찮겠지.'
닭을 데리고 다니며 움직일 수는 없었다.
현재 인벤토리는 2칸.
트라이덴에서 데리고 온 이후로 닭은 대가족을 이루었다.
30마리가 조금 넘는 숫자.
이들을 옮기려면 인벤토리보다 더 크고 넓은 아공간이 필요했다.
'광산에서의 일이 잘만 풀린다면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계획의 단추를 맞추고 있던 도중.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레오였다.
"탈레온, 뭔가 이상하지 않냐?"
레오가 뒤따르던 탈레온에게 물었다.
"어떤 게 말씀입니까?"
"농장을 벗어나고서 이틀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껏 상대한 좀비가 열 마리도 안돼."
레오는 경악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태양 기사단에 머물 때.
기사들을 따라 원정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가는 길목마다 좀비들이 들이닥쳤고, 쉬던 도중에도 늘 주변을 경계했다.
나흘쯤 지났을 때는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가슴은 방망이질 치듯 아팠다.
그게 자신이 기억하던 원정이란 것이다.
"아~ 그거에 놀랐던 거에요?"
탈레온의 목소리는 산뜻했다.
이런 일이 놀랍지 않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사람 같았다.
"조슈아 경은 길눈이 밝은 모양이에요."
"아니, 길눈이 밝은 정도라는 수준을 넘어선 것 같지 않아?"
"음, 그렇네요. 조슈아 경은 지도를 보지 않고도 목적지에 곧잘 도착하시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다. 녀석은 많은 길목 중에서도 안전한 장소만을 찾아내고 있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탈레온의 싱거운 대답에 레오는 힘이 빠졌다.
이 소년의 머리에는 좋으면 좋은 거지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대장, 그게 왜 궁금한 겁니까?"
가비누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레오는 시선을 바꾸어 다른 소년을 바라봤다.
어딘가 물렁한 탈레온과 달리 가비누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보고 배우고 싶거든."
"그런 거라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지 않나요?"
"미쳤냐? 조슈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한데."
가비누는 조금은 짜증이 섞인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배우고 싶은 이유가 뭔가요?"
"녀석에게 이기고 싶거든."
"이기고 싶다?"
"이런 애기는 창피하지만 말이다. 회담장에서 저 녀석과 승부해서 패배했거든. 그때부터 '타도 조슈아'라는 목적이 내게 생긴 거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 들어 봤지? 녀석에 관한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알아 두고 싶거든."
가비누는 질색했다.
그의 말을 해석한다면 그때 당한 굴욕을 되갚아 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같은 그룹 사람에게.
그것도 리더에게 복수의 칼날을 간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승부욕이라는 거지."
가비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에게도 탈레온에게 라이벌 의식 정도는 있었다.
그보다는 더 강해지고 싶고, 그보다도 더 칭찬 받고 싶다.
그렇지만 이 기분이 목표가 된 적은 없었다.
"대장의 마음이 그룹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좋겠네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정정당당하게 도전장을 건넬 테니까. 기습은 하지 않는다."
"그것 참 안심되네요."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다. 조슈아가 지리에 밝은 이유 말이다."
가비누는 견디기 어려운 얘기였지만, 성실히 머리를 짜냈다.
과거의 자신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리더의 무시무시한 판단력이 어디에서 근거하는지.
언젠가 그는 말했다.
몇 번이고 경험했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조리 시험해 보았다고.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 말뜻은 여전히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뭔가 알 것 같은 얼굴이더니 실망인데."
"어차피 알더라도 우린 따라 하지도 못할 방법이겠죠. 그러니까 그건 포기하세요."
레오는 혀를 찼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대화가 끝나 버렸다.
그는 앞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조슈아는 두 사람을 시작으로 부대를 만들라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움직일 때도 세 명씩 나뉘어 행동했다.
그것이 저 무뚝뚝한 리더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나, 힘들지 않아?"
타니아가 나란히 걷던 루나를 신경 썼다.
조슈아가 자리를 비울 때면 자신이 그녀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덕분에 루나는 자신에게만은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괜찮아요."
부드럽고 고운 음색.
루나의 목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성악가의 멜로디 같았다.
노래를 가르친다면 훗날 대성할 게 틀림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처음에 입을 떼지 못했을 때.
타니아는 루나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게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는 단지 언어적인 부분이 약했을 뿐이었다.
글자와 말을 알려 주자 루나는 놀라운 속도로 그것을 흡수하였다.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만큼 재미난 일도 없었다.
"힘들면 언제든 말해. 언니가 엎고 갈 테니까."
"전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저, 많이 무거우니까, 언니에게도 짐이 될 거에요."
"아하하, 아니야. 그건 언니가 남들보다 힘이 부족해서 그래."
타니아는 뜨끔한 얼굴로 몸을 움찔거렸다.
루나의 몸집은 꼬마였지만.
어째선지 조그마한 덩치에 비하여 과할 정도로 무거웠다.
말은 자신만만하게 했어도, 속으론 불안했다.
그녀를 업고서 광산까지 도착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선배, 제 말 잊지 않았죠? 루나를 봐 가면서 움직여야 한다고요."
타니아는 조슈아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라. 루나는 강해."
"선배는 그리 말하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아직 어린 아이예요. 어떤 힘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좀비를 상대하는 일에 불러서는 안 됐어요. 큰 트라우마로 남을 거예요."
조슈아는 그녀의 진심 어린 충고에 침묵할 뿐이었다.
사역마의 수준은 마법사의 마력에 영향을 받았다.
루나는 어려 보여도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힘을 지닌 것이다.
오히려 전투적인 부분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성] 속성은 보호와 치료의 마법이다.
파괴력은 거의 전무하다.
반면에 용의 발톱과 이빨, 그리고 꼬리에는 강한 물리력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과는 별개로.
루나가 싸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용의 지성은 대단히 뛰어나다.
한 달 만에 사람의 말을 익히고, 유창하게 떠들 정도였다.
괴물을 사냥하기 위한 사냥개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루나는 자신에게 어떤 표정을 보일까?
조금 두려웠다.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오른쪽 손에 무언가가 감쌌다.
따뜻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루나가 손을 내밀어 잡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오빠라고 불렀다.
주인님이란 표현이 맞겠지만.
다른 동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쪽으로 결정했다.
"오빠가 무얼 바라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그걸 이루기 위해서 깨어났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그 일로 상처받을 일은 없어요."
루나의 눈빛에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고유 스킬에는 영혼 공명이란 게 있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더라도, 내 감정과 생각의 일부가 그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
루나가 웃었다.
그 미소에 거짓은 없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한 번도 응석을 부린 적이 없었다.
주변 분위기에 스스로를 녹이고 자신을 지워 버렸다.
다른 동료들이 거부감 없이 루나를 받아들인 이유였다.
어른스럽다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좋아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어째선지 씁쓸함을 느꼈다.
"루나."
"네?"
"힘들면 말해라. 이건 명령이다."
한순간이지만.
루나의 눈동자가 젖어 있다고 생각했다.
푹! 그녀가 내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슈아는 그것을 동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66화
조슈아는 걸음을 늦추었다.
달빛 기사단의 아지트인 광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정면에 정비된 도로를 포기하고서, 옆에 있던 산길을 택하였다.
개척되지 않은 산길을 오르는 것은 피로감이 심하였다.
한데 따르던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길을 따라 광산에 도착했더라면, 그 앞에 무엇이 있었을지.
시궁창에 빠진 듯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좀비들이 입을 모아 내뱉는 비명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산 중턱에 오르자 목적지였던 광산의 입구가 보였다.
"저기로 들어갈 셈이냐?"
레오는 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광산의 입구를 두드리고 있는 수백 마리의 좀비가 보였다.
죽음이란 단어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광경.
그것은 검은 파도였다.
자신의 몸이 부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족들을 허물어뜨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생명을 증오하는 듯한 몸부림이었다.
"우웨에엑."
타니아가 토하였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 나가 눈앞의 광경을 본 것을 후회하였다.
좀비를 바라본 건 처음이 아니다.
부패한 살점과 지저분한 몰골을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좀비의 군대 앞에서 위를 보호해 주지는 못하였다.
속이 쓰렸다.
아침을 적게 먹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몇 번 게워 낸 것으로 입 안에서의 역류가 멈췄다.
"마셔라."
조슈아가 물병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을 망설이는 기색으로 받아 들었다.
"귀중한 물이에요. 이런 데 쓰면 안 돼요."
타워에서 광산까지 오는 데 닷새가 걸렸다.
그사이에 처음 가져왔던 물병은 반으로 줄었다.
만약 광산 안의 생존자들에게 보급품이 제한된 상황이라면.
이 물의 가치는 몇 배로 상승했다.
"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두 번은 제안하지 않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받아라."
타니아는 물병을 받고 목을 축였다.
속은 여전히 쓰라리지만.
몸을 지배하던 떨림은 잦아들었다.
"조슈아?"
레오는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두려움을 이겨 내려 필사적일 때.
그는 눈앞의 광경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잠시 생각 중이다."
조슈아는 광산의 상태와 좀비들이 몰린 장소를 번갈아 보았다.
입구가 건물의 잔해와 돌덩어리로 막혔다.
폭파시켜서 봉쇄한 것이다.
정문으로의 출입은 불가능하다.
잔해들의 강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앞으로 며칠간은 안전하다.
그러나 그건 변종의 존재를 제외하고서의 이야기다.
'저만한 무리라면 몇 마리가 변종으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다.'
좀비는 사냥을 하면서 점점 더 강해진다.
썩은 아귀에 얼마나 많은 생명을 집어넣는지가 힘의 차이를 결정한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좀비에 대한 적합성이 좋거나.
'뚫리는 건 시간문제야.'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아래에 있는 무리 중에 몇 마리가 변종으로 변할지 알 수 없었다.
우르곤 같은 마수가 한 마리만 태어나도 상황은 바뀌었다.
좀비들의 절규가 귀를 거슬리게 한다.
[영리함]이 잠들어 있던 기억들을 일깨웠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만을 분리하여 긁어모았다.
"이쪽으로 와라."
조슈아는 동료들을 풍경이 보이지 않는 뒤쪽까지 후퇴시켰다.
모두 표정이 창백했다.
좀비와 마주하는 것이 익숙해지는 일 따윈 없다.
단지 싫더라도 참아 낸다.
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채찍질한다.
손을 뻗으며 그들에게 [평정]을 걸었다.
빛의 고리가 지팡이에서 뻗어 나오며 네 사람에게 흩뿌려졌다.
술렁이던 이들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마음을 안심시키는 주문이다."
"가, 감사합니다."
탈레온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전까지 미치도록 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신의 기적!
종교인들이 신을 숭배하는 마음이 이런 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꺼이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일시적이지만 이걸로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냐?"
레오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정문을 지날 생각은 없었다. 저 광경을 직접 보니까 더 확신이 섰다."
"그럼 들어가지 못하는 거냐?"
"광산에는 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하여 몇 개인가 샛길을 만들어 두었어. 그걸 이용할 거다."
"지도는 있는 거냐?"
조슈아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레오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정문만큼은 아니겠지만, 샛길에도 좀비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해. 전투는 맡기고 싶은데."
레오는 한차례 깊게 심호흡하고는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양 뺨이 열이 오른 사람처럼 붉어졌다.
그룹에 합류하고 첫 전투였다.
전투의 규모와 상관없이 첫 전투는 언제나 중요한 법이었다.
"알았다."
"방심하지 마라. 한 대라도 맞으면, 다친 상처를 도려내야 할 테니까."
"격려라기에는 많이 섬뜩한데. 조금 더 제대로 된 말은 없어?"
"믿는다."
레오는 당황스런 얼굴로 몸을 빼었다.
"으아, 닭살 돋아. 어울리지 않는 일을 부탁해 버렸어."
레오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는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탈레온과 가비누였다.
처음에는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실력과 상관없이 출신과 명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건 실수였다.
"싸우기 전에 말이다. 너희 두 사람에게 해 둘 말이 있는데, 미안하다."
느닷없는 사과에 가비누가 의아한 눈치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처음 만났을 때 너희에게 냉담하게 굴었던 것 말이다."
"자아 성찰을 하시기에는 너무 뜬금없지 않나 싶은데요."
"말해 두는 게 좋겠다 싶었거든."
"찜찜하네요. 지휘관이 그런 말을 출전 전에 하다니."
"긴장 풀라고 얘기한 거다."
"긴장이라면 조슈아 경의 주문으로 거의 해소됐습니다만."
"제기랄, 귀염성 없는 놈들 같으니."
레오는 혀를 차며 시선을 딴 곳으로 옮겼다.
첫 전투에 들떠 있던 탓일까?
자신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해 버렸다.
주변에서 빤히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장."
탈레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해 보죠."
소년이 기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에는 자신을 향한 신뢰가 느껴졌다.
"그래, 그래야지."
레오는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 * *
조슈아는 광산의 구조를 떠올렸다.
개미굴 같은 땅굴이 뿌리처럼 퍼진 장소로서, 주요 광물로는 은이 채집되었다.
지하 3층으로 이루어진 시설.
인부들은 광산이 무너질 것을 대비하여 다른 출입구를 만들어 두었다.
"찾았다."
그중 하나가 산 중턱에 있었다.
동굴의 입구처럼 보이는 앞에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문이 버티고 있다.
"크아악."
좀비가 보였다.
무리에서 떨어진 놈들이 문틈 사이에 흘러나오는 희미한 체취를 맡고서 몰려왔다.
숫자는 아홉 마리.
정문과 비교한다면 위험 부담은 한없이 적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좀비는 성장한다.
변종이 되지 않더라도 몸뚱이가 단단해지고, 근력이 상승하는 것이다.
4달 전쯤에 기숙사에서 처음 싸웠던 좀비보다도 명백히 더 강했다.
"타니아는 지원이다."
"네."
"마력을 남용하면 안 된다. 너 혼자서 전부 해결할 생각은 버려. 동료에 의지해."
타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마력이 떨어지면 맨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투는 이번이 전부가 아니다.
광산에 들어가고 나서 생존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몰랐다.
아낄 수 있다면 아끼는 게 좋았다.
"네, 그렇게 할게요."
타니아가 지팡이를 움켜쥐고서 마력을 순환시켰다.
타워에서 루이젤라로부터 수련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불을 피워 내고.
그것을 강화하며.
빠르게 쏘아 낸다.
술식을 꺼트리지 않고 연속해서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조슈아에게 [평정] 주문을 받았는데도 긴장감으로 이마에 땀이 흘렀다.
달라붙은 머리칼이 거추장스럽다.
그러나 그걸 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에 집중하였다.
"오빠,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조슈아의 곁에 있던 루나가 물었다.
소녀는 그가 신호만 한다면 폴리모프를 풀고서 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주저함은 없었다.
주인인 조슈아의 감정이 흘러 들어와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루나는 학습이다. 괴물이 어떤 식으로 덤벼드는지 파악해."
"제가 나설 차례가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그래, 지금은 아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을 배려하여 전투에서 제외한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광산에 있는 동안에 자신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의미였다.
"주변에 다른 좀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순찰을 나갔던 가비누가 돌아왔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오에게 눈짓하였다.
레오의 시선은 다시금 탈레온에게 향하였고,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을 꺼냈다.
쏴아악!
세 개의 화살이 한 좀비의 머리와 몸뚱이에 박혔다.
좀비가 경련하듯이 무릎이 무너졌다.
다음은 타니아였다.
난전 중에는 오발의 위험성이 크지만, 좀비만 있는 지금이라면 상관없었다.
차분하게 불덩이의 술식을 떠올렸다.
머리 위에 떠오른 두 개의 화염구를 내던졌다.
화염구는 지면과 충돌하며 폭발하며 좀비의 살점을 분쇄했다.
남은 건 여섯 마리.
레오와 두 소년이 뛰어 나갔다.
검을 뽑고는 흩어져 있던 좀비들을 하나씩 상대한다.
먼저 다리를 베었다.
기동력을 빼앗으면 좀비는 쓰러진 상태로 양팔만 허우적거린다.
그 지저분한 손길에 주의하며 머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아아악!"
좀비의 단말마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앞서 나간 세 기사 견습생들은 속으로 같은 마음을 품었다.
첫 좀비를 가장 먼저 쓰러뜨린 것은 레오널드였다.
그는 재빨리 사냥감을 바꿨다.
두 부하들의 짐을 덜어 줄 생각이었는지.
본보기가 되고 싶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양쪽 모두였는지 모르겠으나.
소년의 검은 예리함을 품고서 남아있던 두 좀비를 제거하였다.
"끝난 건가?"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시간으론 3분 남짓이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던 소년들은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크아아악!"
가비누가 눈을 부릅떴다.
근처에 쓰러졌던 좀비가 최후의 발악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금 전 탈레온이 화살을 쐈던 개체였다.
화살이 머리를 관통하지 못한 모양인지.
희미하게 의식이 남았다.
그 티끌만 한 의식을 끌어 모아서 덤벼든다.
콰악!
조슈아가 지팡이의 끝 부분으로 후려쳤다.
"가비누, 다친 곳은?"
소년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서 쓰러지고 말았다.
조슈아의 걱정이 귀에 닿지 않는다.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슈아 경."
조슈아가 내민 손을 붙잡고는 일어났다.
아찔했다.
생사의 경계에서 싸우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잊고 있었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단숨에 바뀐다.
방심하면 죽는 것이다.
목의 땀을 훔쳐 내자 끼고 있던 장갑이 검게 번졌다.
"미안하다. 내가 제대로 마무리를 못 하는 바람에."
탈레온이 급히 달려와 사과한다.
가비누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사래를 쳤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도 제대로 확인을 못 했어."
"정말로 괜찮은 거냐?"
뒤이어 레오가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대장."
"아니, 내 탓이다. 다른 녀석들을 상대하기 이전에 마무리해야 했어."
레오는 한숨을 토해 냈다.
부상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첫 전투는 실패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혼자서 싸울 때와는 달랐다.
부하들이 주는 편리함과 불리함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지휘관으로서의 유능함을 결정지었다.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것과는 많이 달랐어. 단체로 싸우는 모의 대련도 충분히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레오가 조슈아 앞에서 스스로를 탓하듯이 대답했다.
그라면 따끔하게 질책해 주리라 생각했다.
"모의 대련에는 교관들이 감독으로 있으니까. 문제가 생기더라도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지만, 실전에서는 네가 책임져야 한다."
"그렇네."
"풀이 죽은 거냐?"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첫 전투부터 꼬이고 시작했으니까."
"처음에는 당연히 어렵다."
"넌 처음부터 잘했다고 하던데."
레오가 뒤에서 쉬고 있던 소년에게 눈짓했다.
그들에게서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해 들었다.
"운이 좋았어."
"천재가 겸양을 떠는 것 같네."
"네가 제대로만 한다면 나보다도 강해질 수 있다."
"못 믿겠는데, 실제로 너한테 크게 깨졌고."
"네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카리우스 밑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그걸 폄하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조슈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분명 매일같이 노력했을 것이다.
레오널드를 몇 번이나 플레이해 본 자신이기에 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는 위기라는 것이 결여되었다.
위기를 모르는 인간은 필요 이상의 힘이란 것을 발휘하는 데 서툴렀다.
"어쨌든 덕분에 가비누가 살았다. 고마워."
레오는 쑥스럽다는 듯이 뺨을 긁적거렸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문을 여는 데 집중했다.
걸쇠로 안쪽을 틀어막았다.
발을 들어 올려서는 금속 문을 내려찍었다.
쾅! 쾅!
문은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안쪽의 걸쇠는 녹이 슬어 헐거워졌다는 걸 알고 있다.
몇 번 충격을 주자 문이 열렸다.
"들어가자."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산 중앙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장소이기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타니아가 불을 밝혔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통로를 따라 쭉 걸어 들어간다.
함정은 없다.
모퉁이를 지켜야 할 보초도 없었다.
[냉정함]이 부글부글 끓는 듯이 화를 냈다.
넓은 장소를 아지트로 삼을 것이라면 그에 대한 준비는 필수적이었다.
"조슈아."
앞장 서서 걷고 있던 레오가 발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수군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래."
바로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67화
조슈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근처까지 다다라도 그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봤다.
시선을 따라가자 거기에는 개미가 있었다.
손가락을 쭉 뻗어 개미를 짓누르고는 입으로 가져다 댄다.
"그만두세요!"
타니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인은 그제서야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달아날 힘이 없었던 모양인지 제자리에서 머뭇거릴 뿐이다.
"먹을 게 필요하다면 이걸 드세요."
타니아가 자신의 배낭에서 손질된 무를 꺼냈다.
여인은 망설임 없이 소녀의 손에서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게걸스레 먹었다.
모두 말없이 그걸 지켜봤다.
"식량을 나눠 줄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레오가 쌀쌀맞게 대꾸하였다.
타니아는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오빠는 그럼 조금 전에 그걸 보고만 있을 생각이었어?"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말이지. 조슈아, 넌 어떻게 생각해?"
조슈아는 여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식량이 없다면 벌레를 잡아먹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먹어야 할 벌레와, 아닌 벌레를 구분할 능력은 있어야 하겠지만."
"너, 많이 먹어 본 것처럼 말한다."
"내 입으로 들어간 벌레만 50종은 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타니아와 레오는 모르겠지만.
이 두 사람으로 플레이할 시절에도 벌레로 영양을 공급한 적은 많았다.
맛은 모른다.
게임은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원하지 않더라도 실행한다.
벌레를 먹으면 포만감이 올랐다.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흔들려서 디버프에 빠지기도 한다.
그건 양날의 검이었다.
하여 되도록이면 실행하지 않지만, 불가피할 경우에는 좋은 선택지였다.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주변이 정적으로 뒤덮였다.
모두 이상하다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봤다.
"조슈아 경이 말하면 농담처럼 들리지 않으니까요."
탈레온이 침묵을 깨며 대답했다.
"농담은 아니야."
"이 애기는 그만하죠! 지금은 벌레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탈레온이 서둘러 화제를 넘겼다.
이제 소년 소녀들은 다시금 여인에게로 시선을 보낸다.
그녀의 탁한 눈동자가 조금이지만 생기를 되찾았다.
"당신들은? 이곳 생존자가 아니죠?"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온 거죠? 설마, 정문이 뚫린 건가요!"
"샛길을 발견했습니다. 우린 그곳으로 들어온 거고요."
설명을 해 주어도 여인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니다.
난데없이 등장한 침입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그렇지만 이쪽도 여유가 없었다.
"광산의 상황에 대하여 잘 알 만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를 그쪽으로 안내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알겠어요."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호기심에 입이 근질거렸지만 그건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그녀가 식량을 건네준 타니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뒤에 있던 소녀의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식량이 넉넉한 상황이 아님에도 은혜를 베푼 것이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타니아가 밝게 웃었다.
부담감을 덜어 내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여인은 그 위로에 힘입어 조슈아 일행을 수뇌부가 있는 장소까지 이끌었다.
광산의 지하 2층이었다.
천장에 달린 어슴푸레한 랜턴에 의지하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조슈아는 그들 사이에서 무장된 이들을 가려냈다.
남아 있는 기사는 다섯.
단장인 데릭은 보이지 않았다.
순찰을 떠났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전력은 심각하게 떨어졌다.
"누구냐!"
한 기사가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휴식을 취하던 이들이 고개를 쳐들며 시선이 집중된다.
"아, 안심하세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저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에요."
여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서는 조슈아 일행을 변호하였다.
"도와주러 왔다고? 우린 지원을 요청한 기억이 없는데."
조슈아는 기사의 표정을 살폈다.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는 말은 전서구를 사용한 것은 아델라의 독단이었다는 거다.
"소속을 밝혀라."
"별의 기사단 동맹, 이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사단이면 기사단이지, 동맹은 뭐야?"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그가 얼굴을 살펴볼 심산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퉁, 퉁.
입고 있는 갑옷에서 안쪽이 비어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눈에 보이는 체격보다도 허약해진 게 틀림없었다.
"별의 기사단이라면 타워에서 온 거냐? 그렇다면 너희들의 리더는 로드웰 경인 거냐?"
"로드웰 경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네 녀석이 리더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기사는 예민하고 초조한 눈초리였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스트레스를 억누르고 있었다.
조슈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햇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한 지하.
다듬어지지 않은 바위 벽은 폐소 공포증을 느낄 만큼 협소했다.
공기도 탁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먼지를 집어 먹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런 장소라면 디버프가 걸리는 데 하루면 충분했다.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정신력을 칭찬해 주어야 할 일이겠지만.'
차분하게 다독일 시간은 없었다.
좀비는 지금도 바위 벽을 부수는 데 온 힘을 쏟아 낼 것이다.
"너, 어디선가 본 기억이."
기사가 표정을 흐트러뜨렸다.
그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서 생긴 반응이었다.
"레오널드! 너 이 새끼, 살아 있었던 거냐?"
기사가 손가락질까지 하며 가리킨 인물은 레오였다.
소년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살아 있었으면 왜 회담장에서 모습을 감췄지? 네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카리우스 경으로부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그는 데릭과 함께 회담장을 지켰던 인물로 보였다.
레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양 기사단을 빠져 나오는 과정이 올바른 방법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 결과 달빛 기사단이 고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변명거리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달려드는 기사를 향하여 억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참았다.
지금 분위기에서 말다툼이 벌어지면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여기는 회담장이 아닙니다. 태양 기사단도 지금은 이 자리에 없고요. 저는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만."
조슈아가 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정]을 사용할까 싶었지만.
눈앞의 기사가 마법의 술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공격으로 오해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생산적인 이야기? 학생인 너희들과 무슨 애기를 할 수 있지?"
"살아남기 위한 전략."
"하하하, 어이가 없네. 외부인과 그런 걸 논의할까 보냐!"
"어차피 이대로는 전멸입니다."
"뭐라고!"
"정문 앞에 있던 좀비의 대군을 보았습니다. 입구를 부순 것으로 시간을 벌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죠."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 준다.
기사는 받아들이기 힘든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씩 기억이 떠올랐다.
회담장에서 유망하다는 학생들을 제치고서 당당히 일등을 차지한 신인.
그 신인은 낙제생이라고 손가락질받던, 몰락한 가문의 자제였다.
"...조슈아 팔라리온."
"팔라리온은 떼셔도 됩니다. 전 이제 귀족이 아니니까요."
"나는 봤었다, 네가 쓰러뜨린 변종의 시체를. 거대한 곰이었지."
"그런 일도 있었죠."
조슈아는 덤덤하게 말하였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뭐냐?"
기사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그의 다른 동료들도 근처로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처럼 파리한 몰골이다.
"아델라와 세레나는 어디 있습니까?"
"그녀들이라면 탈출구를 찾으러 수색을 떠났다."
"얼마나 지났습니까?"
"며칠은 되었다.
"찾으러 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광산은 넓다. 그리고 이 안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어."
조슈아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샛길로 들어온 금속 문.
사용한 흔적이 너무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즉, 달빛 기사단 본인들조차 이 광산을 완전히 파악해 두지는 못한 셈이었다.
꼼꼼히 확인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거나.
딱히 놀랄 만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 단장인 데릭은 계산적인 인간이지만, 실수도 많은 인간이었다.
"그녀들은 왜 찾으려는 거지? 그 두 사람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던 거냐? 아니면 연인이었다든가."
기사가 농담을 던졌다.
그 물음을 던진 기사 이상으로 타니아가 관심을 보였다.
"아닙니다."
"아니냐? 목숨을 내걸 이유로는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도 데릭 경은 어디 있습니까?"
"행방불명이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사람들을 구하겠다며 일층으로 향했을 때였다."
조슈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데릭은 누군가를 구하려 자신을 희생할 성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먼저 도망치는 것이 그에게는 자연스러웠다.
"못 본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일주일이 넘은 것 같군."
"그럼 포기하는 게 좋겠군요."
기사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정황을 전해 듣자마자 칼날처럼 결단을 내렸다.
심장을 움켜쥔 듯한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가로질렀다.
"아직 포기하는 건 이르지 않을까?"
데릭은 달빛 기사단의 구심점이다.
구심점을 잃어버린 그룹은 존속되기 어려웠다.
"살아 있다고 믿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그런대로 계획을 짜면 그뿐. 하지만 저는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소년에게서 담합하려는 마음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이곳에 있는 다른 누군가와 엮이길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지시를 받지 않겠다는 거냐?"
"지시?"
조슈아가 진지하게 되물었다.
"우리는 기사다. 너희들보다 실력이든, 경험이든 앞서는 존재라는 말이다. 너희가 우리에게 의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달빛 기사단은 사람을 평가할 때.
혈통을 우선 순위로 두는 집단이었다.
스스로가 고귀하다고 믿는 집단들이 으레 그렇듯이.
서열이 자신보다 아래인 이들에게는 반감이 강하였다.
"제가 여러분들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습니다."
조슈아가 단언했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월권을 일삼을 조짐이 보인다면 가차 없이 배제한다.
계획에 방해였다.
방해물을 등에 업고 싸우면 양쪽 모두 망했다.
[냉정함]이 머리를 차갑게 식히는 게 느껴졌다.
이들을 버리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진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 너희를 침입자로 받아들이고 없애거나, 사로잡을 수도 있다."
"해 보시겠습니까?"
"뭐, 뭐라고?"
"지칠 대로 지친 당신들보다는 우리가 더 강할 겁니다. 피해는 있겠지만, 변수를 줄이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 있습니다."
기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소년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기백이 어깨를 짓눌렀다.
카리스마였다.
그는 수라장을 건너온 인간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 말에 복종하라는 거냐?"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저로서는 지금 당신들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습니다."
"뭐라고!"
"신분으로 저희를 마음대로 할 생각은 버리세요. 협력하고 싶다면 우선 자세를 낮추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겁니다."
대단히 모욕적인 언사에 기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사태가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낙제생이니, 몰락한 귀족이니.
좋지 않은 소문으로 유명한 소년이었다.
실력이 조금 좋아진 정도로 자신들을 평가할 권리가 그에게 있을까?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등 뒤의 다른 동료들의 칼집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뽑을 듯한 기세였다.
이야기를 주도하던 기사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만둬!"
동료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살의로 가득했던 표정이 물을 뒤집어쓴 듯 빠르게 식어 간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이 녀석들과 싸워 봐야 좋은 꼴은 못 봐. 도움을 구하는 편이 맞겠지."
기사는 포기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허리가 뻣뻣하면 될 일도 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의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을 이루도록 돕는 것만이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우리로서는 거래에 쓸 만한 게 없다. 가진 것도 모자라서 아등바등 버티는 중이야."
"이번에만 특별히 바겐세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바, 바겐세일?"
"가진 정보, 광산이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 주시면 충분합니다."
조슈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가져가면 될 뿐이다.
데릭이 없다는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훼방만 놓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도 해를 끼칠 이유가 없다.
"...도움을 구하는 쪽에서 묻기는 좀 그렇긴 하다만, 우린 살 수 있는 거냐?"
"장담은 못 합니다."
"그, 그렇겠지."
기사가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떨구자.
타니아가 그들 근처로 다가가서 작게 속삭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선배가 마음먹었다면 분명, 좋은 쪽으로 해결될 거예요."
소녀의 위로에도 기사들은 뒤숭숭한 심정을 떨칠 수 없었다.
68화
아델라는 눈을 떴다.
머리가 몽롱하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의식을 잃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잠결에서 벗어나려고 옆에 있던 물통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고서 입가에 갖다 대자 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그제서야 물이 바닥났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
광산에 갇힌 지 일주일이 흘렀다.
입구를 봉쇄한 건 기사들의 결단이었다.
좀비들의 출입을 막아 낸 것까지는 성공이었지만.
탈출할 방법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광산의 지도는 데릭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데릭은 사태가 터진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다.
그가 사라짐으로써 그룹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빠르게 무너졌다.
'결국 아무도 오지 않는구나.'
마지막 희망을 담아서 전서구를 날렸다.
꼭대기에 있던 틈새로 비둘기가 날아가던 모습을 보았다.
기사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서 홀로 결정한 행동이었다.
규칙을 위반하였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전서구는 그대로 날아서 두 기사단으로 향하였다.
날려 보내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회담장에서 각 기사단은 서로 반목했다.
본래 좋지 않던 사이가 보다 더 나빠진 셈이었다.
돕지 않겠지.
편지의 내용을 거짓으로 작성했다면 좋았을까?
좀비의 수를 줄이거나, 보상을 준다는 식으로 유혹했으면 어땠을까?
만약을 생각한다.
그것이 당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세레나?"
아델라는 뒤늦게 곁에 있던 친구를 떠올렸다.
함묵증에 걸린 그녀는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에 언제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따스한 감촉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
얕은 숨결을 토해 내고는 얼마 없는 힘을 다리에 끌어모았다.
찾고자 했던 인물은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
모퉁이를 지나자 금발의 소녀가 무릎을 굽히며 누군가를 간호하였다.
알리사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전에 회담장에 스스로를 꾸며 미인계를 펼쳤던 귀족의 영애였다.
본래부터 창부는 아니었다.
세상이 이 꼴만 아니었다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인물이다.
물론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을 걸었을 테지만.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 내가 내 삶을 선택할 수 없다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높은 자리를 원했다.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하지 않기를 바랬다.
운이 좋게도 자신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와 마법사로서 성공한다.
다른 귀족들을 만나 인맥을 쌓는다.
귀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달빛 기사단은 안성맞춤인 그룹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데릭이 행방불명됐을 때.
속으론 음흉한 생각도 했었다.
이 위기를 자신의 손으로 극복한다면.
데릭을 향한 충성심을 자신이 거머쥘 수 있다고 믿었다.
오만했다.
그 오만함이 불러온 결과가 현재의 상황이었다.
"그녀는 어때?"
세레나가 노트와 펜을 집어 들었다.
[좋지 않아. 호흡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알리사는 포기하자."
[무슨 소리야?]
"치료약이 없어. 구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살아 있는 사람을 포기할 수는 없어.]
아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향을 잃어버린 세레나였다.
부모도, 형제도, 친인척도,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인연을 잘라 내자는 말은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넌 여기서 죽을 거야?"
[죽겠다는 말이 아니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얘기지.]
"그게 그거라고! 네가 옆에 있는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다면, 다른 사람도 죽지 않았겠지."
아델라는 말하고도 곧장 후회하였다.
친구의 표정에서 슬픔이 떠올랐다.
죄악감이 몰려온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추악하게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진심은 아니었어."
[응, 알고 있어.]
세레나는 평온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그녀를 설득하여 데리고 가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해야 한다면 혼자서 해야 한다.
친구를 버리고서 어두컴컴한 통로를 걸어 나간다.
그뿐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둠이 무섭다.
혼자라는 게 무서웠다.
살길을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가슴에서 꺼져 간다.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나갔다.
"조슈아의 말대로 할 걸 그랬어."
세라나가 이쪽을 바라본다.
그 소년의 이름은 자신도, 그녀에게도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좀비의 대군이 온다고 말했잖아. 준비를 하라고, 여의치 않다면 도망치라고 했었어. 결국 나는 어느 쪽도 하지 못했어."
[네 탓이 아니야. 기사단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잖아.]
"그랬었지. 하지만 나도 조슈아를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야. 좀비의 대군? 몇 달 뒤에 온다? 하하,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델라는 자조가 섞인 목소리로 한탄하였다.
"만약 정말로 믿었다면, 훨씬 더 열심히 노력했을 거야."
세레나는 펜대를 굴리지 않았다.
그녀도 불안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하, 죽는다면 조금 더 근사한 장소에서 죽고 싶었는데. 이런 광산에서 생을 마감할 줄이야."
[어디서 죽고 싶었는데?]
"음, 마탑의 납골당? 마법사로 대성한 인물들이 묻히는 곳이니까. 역사에 남지 않았을까?"
[답답할 것 같은데.]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델라는 히죽거렸다.
미친 게 아닌가 싶지만 충분히 정상이었다.
무거운 분위기만큼 정신력을 쇠약하게 만드는 건 없었다.
"누군가 오는 것 같은데?"
예민해진 감각이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감지하였다.
기사들이라고 생각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늦어졌기에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여기 있어요."
그들이 찾기 쉽도록 목소리를 내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드러난 얼굴은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아델라의 입가가 벌어지며 경악으로 휩싸였다.
아직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눈가를 비비적거리자 소년은 조금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부상을 당한 거냐?"
조슈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뒤로 타니아와 레오널드.
그리고 이름 모를 두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가 함께였다.
"응, 레오라고?"
레오는 난처한 얼굴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너, 너 살아 있었던 거야!"
"그래, 살아 있어서 불만이냐?"
"어떻게?"
"말하자면 복잡하다고.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잖아."
아델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적 같은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좀처럼 상황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시선을 바꾸어 가장 앞서 있던 소년에게 향하였다.
회담장에서 느꼈던 그 신기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푸르스름한 머리칼을 다급히 손질한다.
뺨에 열기가 전해졌다.
"다친 곳은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전서구를 날렸잖아."
아델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알았어? 편지에는 나라고 적어 놓지 않았는데."
"필체를 보고 알았다."
"그게 가능해?"
"머리에 조금 똑똑한 친구가 있어서 말이지."
"기억력이 좋다는 말이지?"
"다르지만, 비슷한 거지."
아델라는 손을 뻗어 뒷목을 쓰다듬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습을 보여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그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창피한 마음이 다른 감정을 잡아먹으며 커져 간다.
"비웃으러 온 거야?"
"비웃으러 왔다?"
"정보를 알려 줬잖아. 좀비 무리가 올 거라고. 그거에 대한 방법도 가르쳐 줬지만, 실패하고 말았어. 회담장에 이어서 두 번째야. 모두 네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고."
조롱을 받더라도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그에게 꾸짖음을 받는다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웃을 생각은 없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어. 내가 옳은 선택을 내렸다면 살릴 수 있는 사람도 있었어! 그런데 이걸 봐. 모두 죽어 가고 있다고."
부아가 치밀었다.
그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다.
그가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성공을 원하지만 타인을 희생하면서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이루고자 했던 꿈.
그 꿈은 순수하고, 올발랐다.
"누구나 실패는 해."
"넌 아니잖아."
"나도 수없이 실패했다. 그리고 아직 성공한 적도 없어."
"놀릴 생각이라면 그만둬. 받아 줄 기분이 아니니까."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지만."
아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질책받고 싶다던 기대감도 배신당했다.
정말이지 뜻대로 되지 않는 남자였다.
"여긴 왜 온 거야?"
"편지에 도와 달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지원군이다."
"바보 같네. 지금 광산은 편지의 내용보다도 사정이 나쁜데, 보고서 후회했지?"
"사정이 나쁜 건 동의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어."
아델라는 조슈아와 시선을 교차하였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종잡을 수 없다.
이 기묘한 분위기가 그에게 어울린다고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여기에 얻을 만한 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데... 설마, 나 때문에 온 거야?"
"그래."
"어?"
아델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소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의미야?"
"말 그대로의 의미지. 네가 죽으면 나에게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세레나 너도 포함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세레나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에서 관망하던 기사 견습생들이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가비누와 탈레온이 처음 만난 두 여성에게 눈길을 던졌다.
아델라, 그리고 세레나.
기사 견습생이었지만,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빼어난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엘리트.
그리고 그 이상으로 아리따운 미모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직접 보니까 실감이 갔다.
먼지로 뒤덮여도 감출 수 없는 오라 같은 게 느껴졌다.
"나였다면 분명 한마디도 못했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부럽다. 조슈아 경은 저 사람들과 나란히 서도 어색하지 않으니까."
"엣헴."
타니아가 이쪽을 봐 달라는 듯이 기침을 하였다.
"눈이 즐거운 여학생이라면 여기에도 있잖아."
두 소년 모두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적지근한 반응에 타니아가 발끈했다.
"뭐야! 그 반응은."
"아, 네가 예쁘지 않다는 건 아닌데. 저 두 사람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크게 뒤지는 부분이 있어서."
"확 불태워 버리기 전에 어디 한번 말해 봐. 내가 부족한 게 뭔지?"
"색기가 없잖아."
타니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이 자동적으로 빈약한 가슴을 향하였다.
으르렁거리는 거친 숨결을 내뱉는다.
신체적으로 가장 성장이 빠를 타이밍에 4년이나 격차가 났다.
이 부분만은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테니까."
"뭐, 루실 경도 몸매가 좋으시니까, 유전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지. 힘내라."
쾅!
수다스러워지는 분위기에 조슈아가 지팡이로 찬물을 끼얹었다.
"잡담은 광산을 탈출하고 나서라도 늦지 않아."
"죄, 죄송합니다!"
조슈아는 시선을 돌려서 세라나가 돌보고 있던 여성에게 다가갔다.
"좀비에게 물린 거냐?"
[그건 아니야. 며칠 전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았는데, 최근 급격히 안 좋아졌어.]
조슈아는 그녀의 맥을 짚었다.
맥이 약하다.
병에 걸린 것이라면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하다 못해 증상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물병을 꺼냈다.
머릿속에 새롭게 얻어 낸 주문의 술식을 그려 나간다.
성수 제조.
신의 은총으로 물을 성수로 바꾸는 마법이었다.
따뜻한 기운이 주변을 뒤덮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엄청 아름답네. 성 속성 마법이란 건."
아델라가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황금색을 바라보며 감탄하였다.
"이걸 마시게 해 줘. 조금은 나아질 거다."
물병을 건네받은 세레나가 알리사를 일으켜 세우고는 먹이기 시작한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호흡조차 어려워하던 알리사의 숨결이 한결 편안해졌다.
[괜찮아진 것 같은데?]
"그래."
[알리사는 살 수 있는 거야?]
"그녀의 체력에 달렸겠지. 어쨌든 이곳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아델라를 바라봤다.
"탈출구는 찾은 거냐?"
"아니, 찾지 못했어."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아델라 그레이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세였다.
'그녀가 출구를 찾아내는 것이 나로서는 좋았는데.'
회담장에서부터 이어진 연이은 실패.
디버프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아델라는 자신이 기억하는 인물로 성장해 주어야만 한다.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여기에 있어 봐야 달라질 건 없으니까."
"...알았어."
69화
"용케도 그녀들을 찾아냈구나."
기사가 놀란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봤다.
광산에서 지내던 사람들도 이곳에선 곧잘 미아가 되어 버리고는 했었다.
한데 소년은 그토록 복잡한 장소에서 단번에 사람을 찾아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
기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소년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묻지 않기로 하였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저희가 들어왔던 통로로 가 볼 생각입니다."
"알았다. 바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마."
조슈아는 떠나가는 기사를 바라봤다.
잠시 뒤 무리를 지은 그들과 함께 들어왔던 샛길로 되돌아간다.
대열이 길어진 탓인지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모두 합하면 스무 명이 넘는다.
더군다나 그들 대다수가 오랜 동굴 생활에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무기와 방어구도 갖추지 못했다.
갈림길이 나타날 때면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좀비가 나타나면 막기 어렵다.
[방패]를 사용할까 고민했지만, [영리함]이 반대했다.
마력의 소모가 크다.
자신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까지 써 버려서는 곤란했다.
'저 상황은 이용할 수 있겠어.'
데릭이라는 리더가 사라지며 달빛 기사단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기사들은 방관했다.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기만 할 뿐이었다.
누군가가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역할에 걸맞은 사람이 떠올랐다.
'아델라가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얼음 마녀라 불리던 네임드로 각성할 수 있으니까.'
뒤에서 따라오던 아델라를 바라봤다.
[디버프 – 트라우마(중)]
여러 차례의 실패로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녀가 성장하려면 저걸 없애야만 한다.
"레오."
나는 앞서 걷고 있던 레오에게 눈짓하였다.
한번 지나왔던 통로였다.
소년의 길눈이라면 선두를 맡겨도 문제 없었다.
"뒤로 갈 생각이지?"
"그래."
"방법은 있는 거냐? 산 송장 같은 사람들을 다독거려 봐야 없던 의지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하지 말라고는 안하네."
레오가 시선을 피했다.
이윽고 한숨을 토해 내며 말을 이어 간다.
"저들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그게 당연한 거겠지."
"너는 아무렇지 않은 거냐?"
"그래."
무뚝뚝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이 죄책감이 드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미안하다."
"뭐가?"
"우릴 위해 꾹 참고 있는 것 아니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내 성격이 차가워진 것은 [냉정함]의 영향이 컸다.
이를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스트레스도 없었다.
오히려 감사했다.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아무것도 참고 있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라. 내심 괴로워하고 있잖아.
"괴로워?"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넌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
이야기를 흘려듣던 탈레온도 측은한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본다.
나는 말을 아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고는 시선을 가비누에게 돌렸다.
소년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가비누, 미안하지만 한 가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뭔가요?"
"길목 중간중간에 보이는 물건을 모아 뒀으면 한다."
"어떤 걸 말씀하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워야 할 물건을 찾아낸다.
바닥에 뒹굴고 있던 공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이런 거다. 군데군데 있을 테니까, 탈레온과 함께 최대한 많이 모아둬라."
"어디에 쓰는 건가요?"
"폭탄이다."
"폭탄?!"
"광석을 캐거나 단단한 암반을 뚫을 때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온 채광 폭탄이다."
"함부로 만지면 터진다든가, 그런 위험은 없나요?"
"심지에 불을 붙이거나, 충격받아서 터지는 형태는 아니야."
시범 삼아서 폭탄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툭!
가비누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입을 벌렸다.
"술식으로 터지는 마력 폭탄이다. 그러니 안심해라."
"안심시키려고 보여 주신 건 고맙지만, 다음부터는 설명으로도 충분해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혹시 어디에다 쓰실 생각인가요?"
"당연히 좀비를 상대하는 데 써야겠지."
가비누는 폭탄은 건네받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눈에 보이는 대로 모아 두겠습니다."
"부탁한다."
소년이 멀어진다.
그가 자신의 친구인 탈레온에게 다가갔다.
자신은 몸을 틀어서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아델라였다.
보이지 않게 손을 감추고는 술식을 그리며 [분석]을 사용하였다.
[아델라 그레이스]
LV 57(견습 마법사)
7등급 미티오스.
잠재 능력 A++
고유 스킬 – 고속 술식. 마력 분석. 암기. 푸른 마안.
보조 스킬 – 리더십(하) 중재와 격려(하)
레벨은 그럭저럭 준수하다.
고유 스킬도 알던 그대로였다.
인상적인 것은 보조 스킬, 후천적 능력을 얻었다는 점이다.
리더십과 언변술.
그녀의 향상심에 어울리는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나름대로 이 지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
아델라는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똑똑하다.
그녀의 지식은 아카데미 필기시험 전교 1등을 차지할 정도였다.
스스로가 떳떳하고 고귀해지기를 원하는 강인한 여성.
하지만 지금은 실패의 수렁에 빠졌다.
이대로 도전을 멈춘다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그녀를 손에 넣지 못한다.
"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반응했다.
"대열이 어수선해. 이대로 좀비가 나타나면 사고가 날 거다."
아델라가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린다.
"어쩔 수 없잖아. 사람들이 누굴 의지하고 있는지는 뻔하니까. 만약 충고해 줄 생각이라면 내가 아니라 기사들에게 해."
"네가 사람들을 이끌어."
"뭐라고?"
아델라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말문이 닫히며 머뭇거리는 사이.
뒤편에 있던 기사가 다가온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냐?"
기사는 나와 그녀 사이에 하던 얘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열을 정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걸 왜 아델라에게 말하는 거지? 그런 문제라면 나와 상의하면 될 텐데."
"그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투구 속에 비친 기사의 눈이 일그러졌다.
"이유를 묻고 싶다만."
"타워에 편지를 보낸 게 그녀니까요."
"뭐야! 그러면 멋대로 전서구를 날려 보낸 사람이 아델라 너였다고?"
기사가 언성을 높인다.
그들은 규칙을 어기는 것을 싫어했다.
"진정하세요. 그게 타워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제가 여기 올 일도 없었으니까."
"결과론적으로 말하지 마라! 규칙은 중요하다. 특히나 이런 비상시에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데릭 경이 없다는 이유로?"
기사가 말문을 삼켰다.
그는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식은땀을 흘렸다.
"사고를 유연하게 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광산을 벗어나고도 늘 위험이 붙어 다니실 겁니다."
"내가 실수를 했다고 아델라를 리더로 세우겠다는 말이냐?"
"20분."
"응?"
"당신이 대열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군요."
"크윽."
"한번 맡겨 보시죠. 의외로 잘할지도 모릅니다."
기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흥분된 감정은 그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 가라앉는다.
처음 느꼈을 때의 한기.
그것이 착각이 아니란 걸 가르쳐 주려는 것처럼.
"제길, 실패한다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거다."
기사가 돌아서고 다시 아델라와 둘만 남았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야? 이러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너는 아직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으니까."
"무, 무슨."
그녀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너, 짜증나."
"그래."
"왜 아카데미에서 친구 한 명 못 사귀고, 외톨이로 지냈는지 알겠어!"
"관계를 쌓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생존에 필수적인 건 아니지."
"정말이지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입버릇처럼 그리 말하더라."
아델라가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려 하는 이유가 뭐야?"
"말했잖아. 앞으로의 생존에 네 힘이 필요하다고."
"그것뿐?"
"그런데?"
"아니다, 괜한 걸 물어봤네."
그녀가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저기, 하나만 물어볼게."
"그래."
"리더가 되면 첫인사말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아?"
* * *
아델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뜬 마음과 불안감이 한데 섞인 듯한 기분이었다.
"줄을 맞춰 주세요. 혹시나 이변이 생긴다면 바로 알려 주시고요."
생존자들은 자신의 말을 잘 따라 주었다.
기사들이 군말 없이 따라 주는 게 도움이 되었다.
조슈아에게 밉보이기 싫은 것이리라.
"언니."
앞쪽에서 타니아가 찾아왔다.
"아무래도 우리가 들어왔던 샛길이 막힌 모양이에요."
"그래?"
아델라는 놀라지 않으려 애를 썼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진동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다른 샛길이 있다고 얘기했어요. 다만 그쪽으로 가려면 아래로 내려 가야 하는데, 아래쪽에는 좀비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하니까 주의하라고 말했어요."
"알았어. 알려 주러 와 줘서 고마워."
타니아가 싱긋 웃고는 앞쪽으로 걸어간다.
한차례 심호흡하고는 몸을 틀며 사람들에게 사정을 전하였다.
다들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신까지 불안해해서는 안 되었다.
"괜찮아요. 우린 분명 나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힘내요."
목소리를 짜내며 격려했다.
그들도 아직 희망을 끊어 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몇 번의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크르르."
목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의 불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잠시 뒤에 그것들은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덮쳐 왔다.
좀비였다.
뒤쪽에서도 나타났는지 소란스럽다.
"그쪽은 여러분들에게 맡길게요!"
후방에 기사 셋은 배치해 놓았다.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
자신은 앞의 상황에만 집중하였다.
마력으로 고드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좀비의 머리를 노렸다.
고드름은 머리를 관통하고 그대로 뒤쪽에 있던 지면에 박혔다.
녹색의 피가 바닥에 흩뿌려진다.
"하앗!"
곁에 있던 기사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재빨리 뛰쳐나가 좀비를 베었다.
목이 잘린 놈이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꺄아아악!"
한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갈림길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좀비 한 마리.
이름 모를 청년이 녀석을 밀쳐 낸다.
좀비는 바닥을 한 바퀴 뒹굴고는 재빨리 일어났다.
도와야 한다.
손을 뻗으며 재빨리 고드름을 날렸다.
좀비가 고드름이 날아오는 방향을 보고서 몸을 비틀었다.
"...말도 안 돼."
좀비는 아둔하다.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른다.
반사 신경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맹목적으로 살육을 즐기는 존재.
예외가 있다면 그건 변종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좀비는 자신이 알던 변종과는 달랐다.
평범한 좀비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누군가 저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아델라는 소리쳤다.
술식을 구현하는 속도라면 자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늦는다.
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모두들 저마다 상대가 있었다.
다른 생존자들은 두려움에 몸이 굳었다.
이대로라면 청년과 여인이 위험했다.
'또다시 실패하는 걸까?'
과거에 자신이 주도하여 어그러진 일들이 떠올랐다.
숨이 막혔다.
이 절망감이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만 같았다.
쾅!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섬광이 스쳐 지나간다.
빛이 수그러든 자리에는 조금 전까지 날뛰던 좀비가 곤죽이 되어 있었다.
방패 모양의 빛 무리가 사라진다.
그 마법의 주인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온다.
"좀비는 계속해서 강해진다. 피하는 것 정도로 너무 당황하지 마라."
아델라는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얄밉게도 자신의 실책을 지적해 왔다.
하려던 말을 집어삼키고.
부끄러움이 차오른 듯한 목소리로 반항한다.
"내가 해결할 수 있었어!"
"그런 것치고는 동작이 굼뜬 것처럼 보였는데."
"네가 잘못 본 거야."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태연한 행동을 보자니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저, 정말이라고!"
"알았다. 피해 상황은?"
아델라가 고개를 돌렸다.
발 빠른 기사들이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달려와 보고한다.
부상자만 있을 뿐, 사망자는 없다고 말했다.
"문제없는 모양이야."
"샛길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 생길 수 있으니까, 긴장 늦추지 마라."
조언을 끝낸 그가 돌아서려고 발걸음을 옮긴다.
"자, 잠깐만."
아델라는 저도 모르게 그를 멈춰 세웠다.
그가 다시금 이쪽을 바라본다.
"아직 할말이 남은 거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고맙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고마우면 나중에 날 좀 도와주든가."
"어떻게?"
그녀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묻는다.
"광산을 무사히 탈출하려면 쓰러뜨려야 할 적이 있어. 그때 네 마법이 필요하다."
"좀비야?"
"좀비이지."
"넌 그 좀비가 누구인지까지 아는 것처럼 말하네."
조슈아는 말문을 삼켰다.
싸워야 할 적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다.
하나 그것은 이 자리에선 밝히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70화
"여기 부탁하신 물건이에요."
대열로 돌아오자 가비누가 모아 둔 폭탄을 건네줬다.
"부족하다면 말씀해 주세요. 다른 길목에 가서라도 구해 오겠습니다."
"아니, 충분해."
쿠궁! 그때 다시 한번 진동이 느껴졌다.
"조슈아 경, 여기 무너지는 것 아닐까요?"
가비누가 불안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은 안 무너진다."
"그 말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네요?"
"그래."
가비누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슈아의 말은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레오, 탈레온, 가비누 이 벽을 밀어 줬으면 한다."
그가 눈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레오가 가장 먼저 바위로 다가갔다.
"벽을 밀어 보라고?"
"그래."
"어떤 장치라도 되어 있는 거냐?"
"밀어 보면 안다."
"뭐, 네가 시키는 일이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너희들 이리 와서 도와라."
세 기사가 기합을 내뿜으며 벽을 힘껏 밀었다.
기계 장치 따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숨겨진 방이 드러났다.
조슈아가 안으로 반딧불이를 던졌다.
내부가 밝아지자 도르래가 나타났다.
"광산의 인부들이 광석을 옮기기 위해서 쓰던 도르래다. 이걸 이용하여 지상으로 탈출한다."
"사용을 안 한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안전한 것 맞아?"
"이걸 이용하여 세 번 정도 탈출해 봤다. 무게만 지키면 안전해."
레오가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또 알아듣지도 못할 황당한 소리를."
"저는 이제 내성이 생겼습니다. 조슈아 경과 어딜 가면 꼭 이런 일이 생기니까."
탈레온이 가슴을 펴며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레오는 질색하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럴 때는 말이다, 무서워하는 게 정상 아니냐? 이 녀석은 너무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다고."
"하하, 좋게 생각하자는 이야기죠."
조슈아가 수다스런 분위기를 끊어 내려는 듯 아델라에게로 향하였다.
그녀와 가까워지자 반사적으로 몸을 튕겼다.
아까 전의 응어리가 남았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뭔데?"
"도르래로 탈출한다. 생존자를 먼저 올리기보다는 기사들을 먼저 올려서 상황을 확인했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나한테 묻는 거야?"
"일단은 리더이니까."
"...그렇구나."
아델라가 어색한 손길로 머리를 빗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써 보지만 쉽지 않았다.
조금 전 도와줬던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조, 좋은 생각이야. 나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그랬냐?"
"그래!"
"그럼 생존자들에게 사실을 전하고, 순서를 정해. 우리는 조금 늦더라도 상관없어."
"알았어."
아델라가 상황을 정리할 동안 이쪽도 사정을 설명할 차례였다.
"야! 당연히 우리가 먼저 올라 가야지. 순서를 뒤로 미뤘다고?"
레오가 길길이 날뛰었다.
구출하기 위하여 찾아온 지원군이 우선권을 얻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됐다."
"저들이 올라가다가 줄이라도 끊어 먹으려면 어쩌려고 그래?"
"샛길이라면 몇 개 더 알고 있으니까 상관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네 생각은 알고 있어. 구하러 온 우리가 반대의 입장이 되어서는 안되겠지."
레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조슈아는 조슈아였다.
"안심해라. 너희들은 내가 책임진다."
소년 소녀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
그만큼 믿음직스러운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들 빠짐없이 위로 올려 보내 드릴 테니까, 서두르지 말고 차례를 지켜 주세요!"
아델라가 사람들을 이끌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도르래에 처음 올라탄 사람은 기사 둘과 어린아이 셋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기계 장치가 돌아간다.
올라탄 사람들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일단 첫 번째는 성공이군."
도르래는 무사히 천장까지 다다랐다.
위에서의 상황을 기다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이쪽은 괜찮다. 계획대로 해라!"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서야 생존자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한다.
구멍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빛 한 줄기.
그곳 너머에 다다르기 위하여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모여 있던 생존자들이 차츰차츰 줄어들고.
광산에서의 계획이 순조롭게 풀려 간다고 믿고 있을 때였다.
"...아."
아델라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얼굴에 번진 당혹감.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오 듯이 흘러내렸다.
누군가를 절실히 찾는 시선은 사람들을 지나치며 왔던 통로로 되돌아간다.
"언니, 왜 그러세요?"
보다 못한 타니아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아델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망설임으로 가득한 입술은 도통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그녀는 결심을 내린 듯이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레나가 보이지 않아."
얘기를 전해 들은 모두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놓쳐 버린 건가?"
"그건 아니야! 분명 조금 전까지는 곁에 있던 걸 똑똑히 봤다고."
레오의 물음에 아델라는 곧바로 반박한다.
"좀비가 납치 같은 짓을 했을 리도 없고, 생존자들 사이에 소란이 생겼다면 우리가 몰랐을 리도 없어."
"그녀 스스로의 의지로 돌아간 거겠지."
레오가 추리를 이어 나가던 도중.
조슈아는 모두가 알면서도 쉬쉬했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가능성은 처음부터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구할 필요는 없겠네."
레오는 딱 잘라 말하였다.
그의 결단에 서 있던 모두가 적잖이 동요했다.
"설명도 없이 혼자 떠났어. 이유야 어쨌든 이건 무단 행동이다.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찾으러 갈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아델라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맞는 말이야. 이건 우리 문제이니까. 우리가 해결해야 해."
"결정됐네."
레오가 매정하게 몸을 틀었다.
그를 따르던 두 견습 기사도 도르래에 올랐다.
타니아는 이들 사이에서 어느 쪽의 편도 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가 간다."
조슈아의 대답에 모두가 신기한 듯 바라봤다.
"진심이냐?"
"그래."
"이유가 뭔데?"
"살아남기 위해서지."
"무슨 소리야! 누가 보더라도 넌 지금 사지로 뛰어드는 거라고."
레오가 혼란스러운 듯 이쪽을 바라봤다.
그는 모른다.
자신이 아직 시험해 보지 않은 방법이 무엇인지.
사람을 버리고, 모른 척하며, 이기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런 방식만으론 부족했던 것이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노력이.
"죽기 싫으니까, 죽을 정도로 발버둥 치는 거다."
"이해가 안 돼."
"버리는 게 가장 어려운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틀렸어. 버리는 게 가장 쉽다."
레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조슈아의 말은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안심해라. 세레나가 사라질 거라는 건 예상했고, 구할 방법도 있다."
"정말이냐?"
"그래, 너는 먼저 올라가라.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한다."
조슈아는 아델라에게 곁눈질하며 다가왔다.
"너는 어쩔 생각이지?"
"나도 데려가 줘! 세레나를 놓친 것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어.
"알았다."
그녀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통로로 다가갔다.
"루나, 뭐 하는 거야? 빨리 이쪽으로 와."
탈레온이 루나를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
"상관하지 말고 먼저 올라가세요."
"너 혼자 남으면 위험하다고! 도르래가 무너지는 게 겁나는 거라면, 차라리 내가 기다릴게."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여기서 오빠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렇죠?"
루나가 조슈아에게 동의를 구하듯이 물었다.
바위 같던 사내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거렸다.
"루나도 나와 함께 간다."
* * *
그녀는 거칠게 호흡을 토해 냈다.
가슴의 고동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소리를 떨쳐 내려는 듯이 고개를 크게 흔들어 보았다.
그럴수록 펼치고 있던 마법이 위태롭게 반응한다.
탐지 마법.
[토] 속성인 자신의 특기이자 자랑.
무언가를 찾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하나 오늘만큼은 조금 원망스럽다고 생각했다.
출구를 코앞에 두고.
그때까지 반응 한 번 없던 마법에 움직임이 잡혔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에 가깝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찾아낸 무언가는 강하게 몸부림쳤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그 무언가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봤다.
생존자들 모두가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벅차올랐다.
아델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미소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리를 벗어나 혼자서 통로를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뿌리치고서 앞으로 전진했다.
후회는 없었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후회가 가득했다.
또, 놓치고 싶지 않아.
가슴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폐허가 된 고향의 풍경.
부모는 괴물로 변하였고, 하나뿐인 동생은 무너진 잔해 밑에서 발견되었다.
끔찍한 기억이었다.
지금도 매일 밤마다 악몽처럼 그날의 꿈을 꾼다.
그날을 기점으로 말문이 막혔고, 사람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 되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뒤꿈치가 쓸리며 피가 흘러내렸다.
고통스러웠지만, 상처의 통증을 비웃듯이 멈추지 않았다.
"흑흑."
바위 모퉁이에 있던 작은 틈새.
그 사이에서 어린 소년이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꼈다.
늦지 않았다.
눈물이 터지려던 것을 겨우 참고서 노트를 꺼내며 대화를 시도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리한 아이였다.
소리가 나면 괴물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여긴 위험하니까.]
아이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내민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죽은 동생이 떠올랐다.
그 아이도 자기 말이라면 곧잘 따랐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마력은 거진 바닥났지만, 돌아갈 때까지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붙잡고 있던 아이의 손길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우리가 걷는 방향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무언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좀비가 없어야 할 텐데....
전투는 무리였다.
정상적인 컨디션으로도 그것은 약점이라 불릴 만큼 쥐약이었다.
한데 지금은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만약 괴물과 마주친다면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아, 안 돼요!"
아이가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무슨 소리야?]
"이쪽으로 가면 안 돼요!"
아이는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듯한 목걸이가 그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괴물이 있어요. 갑옷을 입은 괴물이."
[알았어. 다른 방향으로 갈 테니까 안심해.]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사정을 전해 들을 여유가 없었기에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반대로 걸어가던 도중.
뒤쪽에서 강한 한기를 느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소년의 말처럼 갑옷을 입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중앙에 박힌 달빛 무늬.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은으로 도금된 것을 쓰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데릭이었다.
"크아아아!"
좀비가 된 데릭이 날아들었다.
검을 끌어 올리고서 크게 휘두른다.
간신히 고개를 숙여 피하는 데 성공했다.
검의 궤적이 지나간 장소는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생전에 익혀 둔 기술을 죽은 이후에도 발휘하는 능력.
변종이었다.
세레나는 아이를 붙잡고서 뛰기 시작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크윽!"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리에 걸렸던 부하가 한꺼번에 닥친 느낌이었다.
[도망쳐!]
아이는 달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쓰러진 자신에게 다가와 부축하려고 한다.
안 된다.
이대로라면 함께 죽는다.
힘을 짜내어 아이를 밀어내 보아도 자꾸만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크르르."
데릭이 다가왔다.
투구 속에 비친 그의 시선은 무기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한다.
어린 소년은 여전히 자신의 곁을 지켰다.
끝이었다.
죽음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날, 가족을 모두 잃었을 때.
자신도 그들을 따라가고 싶다고 몇 번이나 고민했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아니었다.
이 아이만은 어떻게든 조슈아와 아델라가 있는 장소로 보내야만 했다.
"도, 도...."
목소리를 쥐어짜 내려고 했다.
하지만 목이 막혔다.
몇 번인가 혼자 연습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애당초 말을 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기적처럼 누군가가 자신들을 구해 줄 가능성은 낮았다.
그럼에도 노력했다.
"도와주세요!"
목소리가 나왔다.
무척이나 그리운 느낌이 드는 자신의 목소리.
그토록 해내고 싶었던 일이 죽음을 앞에 두고서 성공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목소리에 반응하듯이 무언가가 나타났다.
사람이 아니었다.
네 발로 움직이는 짐승이었다.
녀석은 자신을 지나치며 데릭에게로 달려들었다.
"세레나!"
아델라가 다가와 자신을 끌어안았다.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세레나가 서툴게 말하였다.
실어증에 걸렸던 영향이 남아있었다.
"널 두고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너 목소리가?"
"여, 여긴 위험해 어서 도망치지 않으면... 그, 그가 있어."
"무슨 말이야?"
"...데릭 경이 조, 좀비로... 변했어."
아델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도 괴물로 변한 기사단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아델라가 당황한다.
"걱정하지 마. 이쪽도 나름의 준비는 하고 왔으니까, 그렇지?"
아델라의 시선이 통로로 향하였다.
그녀를 따라 통로를 바라보자 누군가가 걸어왔다.
조슈아였다.
"...너도 온 거야?"
"그래."
"어째서? 이건... 내, 내 잘못인데."
"회담장에서 약속했잖아. 도와주겠다고."
소년이 잊고 있었던 약속을 언급했다.
"...나는 기, 기억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상관없어. 그것 때문에만 온 건 아니니까."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은 덤덤했다.
화도 내지 않는다.
마치 이 일을 예상했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다음부터 그룹에서 빠져나올 때는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라."
"응?"
"무단 이탈을 넘어가 주는 건, 이번 만이다."
"아, 알겠어."
"알았으면 됐다."
71화
조슈아는 데릭을 바라봤다.
한때 기사단장이었던 인물은 좀비로 변해 있었다.
"크르르."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한기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강심장]이 두려움을 떨쳐 낸다.
[퀘스트 – 망자가 된 기사단장]
클리어 목표 – 기사단장으로부터 도망쳐라.
난이도 – A
보상 - 70코인
또다시 A랭크의 퀘스트.
매번 강해질 때마다 자신을 비웃듯이 어려운 과제를 던져 준다.
이 세계는 이런 곳이었다.
플레이어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없다.
예상 범위 안이었다.
"당신이 나타나도 상관없다. 우린 탈출한다. 그리고 살아남겠지."
"크르르."
5등급의 템플러.
그중에서도 상위권의 강자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팔 한쪽을 잃어버린 외팔이였다.
"움직일 수 있겠어?"
세레나를 향하여 묻는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선을 따라서 도착한 곳에는 상처로 엉망이 된 다리가 보였다.
"나는... 괜찮으니까, 이 아이라도... 데리고 나가 줘."
조슈아가 떨고 있던 아이를 바라봤다.
세레나가 목숨을 버릴 각오로 구하려고 했던 생명이었다.
지켜야 한다.
이 아이를 잃는다면 그녀의 정신은 완전히 망가질 테니까.
"그래, 하지만 너도 데리고 나갈 거다."
"... 이 꼴로는, 짐만 될 뿐이야."
조슈아는 허리를 숙이고는 [치료]를 사용하였다.
빛이 상처 속으로 스며들면서 피를 멈추고, 찢어진 피부를 고쳐 놓는다.
"이걸로 괜찮아졌지?"
세레나가 발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졌던 끔찍한 고통이 잦아들었다.
일어서는 데도 불편함이 없었다.
휘둥그레진 눈길로 소년을 바라봤다.
"치료 마법이야...?"
"그래, 말하고 다니지 마라."
그가 고개를 돌리고는 상대를 바라봤다.
좀비가 된 데릭은 눈앞에 나타난 용을 관찰하였다.
곧장 덤벼들지 않았다.
마치 피식자의 힘을 관찰하려는 듯한 태도.
보통의 좀비와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 데릭 경이... 변종이 되었다면 우리 힘으론... 감당하지 못할 거야.
"걱정하지 마라, 계획이 있으니까. 그것보다도 움직여."
세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아 있던 마력을 지하로 향하면서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저 용, 루나지? 그 아이의 정체가 용이었던 거야?"
"그래."
아델라가 물었다.
검은빛의 용이 데릭과 싸우고 있었다.
"용이라면 신수 중에서도 으뜸인 생명체잖아. 어째서 우릴 도와주는 거지?"
"내 사역마다."
"용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아델라는 말문을 삼켰다.
사역마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용은 최고 등급의 사역마였다.
"길들인 게 아니야, 내가 부화시킨 거니까."
"뭐?"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싸움에 집중해."
"뭘 하면 되는데?"
"네 얼음 마법으로 다리를 묶어 줬으면 한다."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릿속으로 술식을 떠올리며 데릭이 밟고 있던 지면에 집중했다.
바닥이 천천히 얼어붙었다.
그러자 데릭이 재빨리 뒤로 거리를 벌렸다.
"좀비 주제에 왜 피하는 거야!"
"변종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방금 전 그게 내 최대 속도였다고."
"그렇다면 틈을 노려라, 루나가 만들어 줄 테니까."
데릭이 검을 고쳐 잡았다.
구부정하게 몸을 숙이고는 다리에 박차를 가한다.
루나와 거리가 좁혀진다.
그가 검을 위로 치켜들고서 곡선을 그리며 휘둘렀다.
쾅! 검은 용에게 닿지 않았다.
그 사이를 가로막듯이 커다란 [방패]가 나타났다.
보통의 좀비라면 이것만으로도 공격을 봉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좀비는 달랐다.
데릭의 검에 휘감기는 검푸른 에너지.
오라라고 불리는 기사들의 마력이었다.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패]를 부수며 돌진해 왔다.
"크윽!"
루나는 가까스로 데릭의 공격을 피하였다.
숲에서 좀비의 싸움을 본 것이 도움이 되었다.
주인인 조슈아는 여기까지 내다본 것이라며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가 앞으로 뛰쳐나와 손을 펼쳤다.
강한 빛이 전방에 쏟아지며 통로를 가득 채웠다.
[섬광]
그러나 데릭은 눈을 감는다는 간단한 방법으로 이것을 피해 냈다.
"반응이 좋아. 기습이나 연계가 아니라면 안 먹히겠어."
조슈아는 차분했다.
데릭이 어떤 행동을 해 오든,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깨부수든.
그걸로 놀라거나 흥분할 일은 없었다.
[냉정함]이 머리를 차갑게 했다.
[인내심]이 여유를 가지게 해 주었다.
"루나, 움직임을 막아야 한다."
루나는 겁 없이 상대에게 돌진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이건 주인인 조슈아의 마음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패가 무너져도.
마법이 공략당해도.
그의 자신감은 싸우기 이전과 무엇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크르르!"
데릭이 다시금 덮쳐 왔다.
손에 든 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연속된 찌르기.
첫 일격은 방패로 막아 내고.
두 번째 일격은 루나가 발을 휘두르며 튕겨 냈다.
"크아악!"
데릭이 포효를 내질렀다.
기사로서의 판단력이 남아 있던 모양인지.
기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승리를 확신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쏴악!
데릭이 휘두른 검과 루나의 발톱이 부딪쳤다.
둔탁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양쪽 모두 밀리지 않고서 힘겨루기로 이어졌다.
"루나, 엄청나게 강하잖아! 저 데릭 경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아."
"잠시뿐이다. 오래 버티지는 못해."
데릭의 검기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좀비가 된 몸에 빠르게 적응했다.
"나도 할 때는 하는 성격이라고!"
아델라가 다시 한번 마법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데릭이 피하지 못했다.
그의 발이 얼어붙으며 지면과 함께 묶였다.
"저 사람은 이제 죽은 거지?"
"그래."
"그럼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는 뜻이겠다!"
아델라가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야, 데릭! 네가 제대로만 했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일도 없었어. 맨날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중요할 때마다 깡통이나 차고! 당신이 그 꼴로 변한 걸 보니까 속이 아주 시원하다!"
그에게 쌓여 있던 불만을 모조리 토해 냈다.
발밑에 달라붙은 얼음이 감정에 반응하듯이 치솟았다.
"그리고 회담장에서 미인계 하라고 시켰던 것도 사과해! 그거 정말로 하기 싫었거든. 나는 그런 짓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이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라고!"
"크르르!"
"내 이름은 아델라 그레이스! 언젠가 마법사로 이름을 날릴 거야!"
점점 더 커진 얼음이 데릭의 하반신을 집어삼켰다.
"잘했다."
조슈아는 적에게 달려가서 움직이지 못하는 데릭에게 지팡이를 겨누었다.
움직임이 봉쇄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있었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를 가엾게 여기소서. 눈앞의 불쌍한 영혼을 당신께 인도하니."
[자비송]
기사단의 보물 창고에서 얻은 경전을 통해 새롭게 터득한 주문이었다.
데릭의 어깨와 무릎이 아래로 처졌다.
부정한 생명의 몸을 속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좀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크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가진 마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 위한 대가.
상대가 강할수록 반동도 커졌다.
[인내심]은 해야 할 일이 생겼다며 좋아한다.
녀석이 돕더라도 고통은 오롯이 이쪽이 감당해야 한다.
"크아아악!"
"생각했던 것보다도 쉽지 않지만."
데릭이 발버둥 쳤다.
[인내심]이 없었다면 주문을 유지하는 이쪽이 휘청거렸을 것이다.
과연, 기사단장.
저 위치까지 오르는 건 실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10초는 벌 수 있다."
[자비송]을 유지하면 손발이 묶였다.
자신은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 자신을 도와서 적을 두들겨 팰 친구가 있었다.
"루나!"
루나가 앞으로 달려 나간다.
10초 동안은 그야말로 맞기만 하는 샌드백.
앞발을 치켜들면서 연속으로 공격한다.
그녀의 발톱이 멈춰 있던 데릭의 복부를 꿰뚫었다.
연이어 머리를 내려찍었다.
용은 온몸이 무기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파괴력을 지녔다.
자비송이 끝났을 때.
데릭의 몸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조, 조, 조슈!"
"뭐라는 거야."
루나가 쓰러진 데릭을 깔아뭉갰다.
쾅! 쾅!
지면에 처박힐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패고는 자리로 돌아온다.
데릭은 쓰러지고도 시선만은 이쪽을 향하였다.
언뜻 눈동자에서 사람의 감정이 느껴진 것 같았다.
"벌써 의식이 생길 정도인 건가?"
등급이 높은 인물이 좀비가 되어 변종으로 각성하면 진화도 빨라졌다.
조금 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 하였다.
"위험한 건가요?"
루나가 물었다.
"이대로 두었다면 그는 좀비들을 이끄는 좀비가 되었을지도 몰라."
"설마?"
"그런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쾅! 쾅! 쾅!
위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땅이 울렸다.
루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건?"
"정문이 부서진 거야."
"그러면 좀비들이 쳐들어온 거잖아요?"
"그래."
"순식간에 이곳으로 들이닥칠 거예요."
조슈아는 뒤쪽을 바라봤다.
도르래가 있던 입구 근처로 세레나와 아이가 보였다.
두 사람은 자신과 루나를 기다렸다.
"루나, 변신해서 아이로 돌아와. 그 모습으론 도르래에 오르지 못한다."
루나가 흑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이 꼴이 될 때까지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참아 준 것이다.
쿠궁!
다시금 천장에서 모래와 돌이 떨어졌다.
좀비의 발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떠나기 직전 데릭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거 압니까, 데릭 경? 나는 이 광산이 정말 싫었습니다."
달빛 기사단으로 시작하여 망한 경험은 3번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에 두 번을 같은 이유로 죽었다.
"시설이 낙후되어 군데군데 보수 작업이 필요한 곳으로 넘쳐 났죠.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로 사람이 죽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고요."
"크르르."
"그 일로 매번 엉뚱한 사람만 죽어 갔지만, 이번에는 당신 차례입니다."
광산에 들어오고서 내부를 꼼꼼히 확인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게임을 플레이하던 시절 그대로였다.
이 장소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무너질 수 있었다.
가비누에게 부탁했던 폭탄을 집어 던졌다.
모두 술식을 해제해 둔 상태였다.
쾅! 쾅!
천장이 무너졌다.
자신과 그 사이를 잔해들이 가로막았다.
"서둘러 도르래에 올라타라."
조슈아가 근처에 있던 두 사람과 함께 도르래에 올라탔다.
"위로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 이 정도로 안 무너져."
세레나는 아이를 감싸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밑에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괴성.
광산이 무너지며 들려오는 굉음.
그 모든 것들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들은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빛이야!"
아델라가 환호성을 질렀다.
위쪽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을 기다렸다.
"모두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타니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왔다.
세레나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어 보았지만 다시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찰나의 기적.
기적은 제 역할이 끝났다는 듯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금 노트와 펜을 집어 들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시면 안 돼요!"
[미안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말하자면 길어.]
세레나가 조슈아를 바라봤다.
[분명한 건, 조슈아와 아델라가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 거야]
"그렇구나."
세레나가 고개를 돌리자 다른 생존자들이 근처에 모두 모여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는 쉬지 않고 움직일 모양이었다.
"너희도 따라와라. 광산이 무너지면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서 생존자들을 이끌고 이동했다.
"레오, 주변 정찰은 했나?"
레오가 당당히 어깨를 펴며 말하였다.
"물론이지! 몇 마리 발견된 놈들도 확실하게 처리해 놨어."
"잘했어."
"안쪽은 전부 해결한 거냐?"
"그래, 게다가 좋은 소식도 있고 말이야."
"좋은 소식이라고 그게 뭔데?"
"너한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야."
레오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대답해 줘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광산에서 얻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화폐였다.
코인.
최고 소득이었다.
많은 좀비가 있었고, 그 많은 좀비를 한 번에 묻는 데 성공했으니까.
[망자가 된 기사단장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코인 70개를 획득합니다.]
[좀비 100마리를 한 번에 처리하였습니다. 업적을 완료하였습니다.]
[코인 30개를 획득합니다.]
[좀비 200마리를 한 번에 처리하였습니다. 업적을 완료하였습니다.]
[코인 50개를 획득합니다.]
[좀비 300마리를 한 번에 처리하였습니다. 업적을 완료하였습니다.]
[총 코인 70개를 획득합니다.]
[현재 보유 코인: 340]
첫 번째 목표는 아델라와 세라나 두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코인.
다음에 벌어질 시나리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코인 300개가 필요했다.
"레오, 혹시 이 근처로 전서구가 나는 걸 보지 못했어?"
"넌 귀신이냐? 어떻게 아직 보고도 안 한 걸 미리 알고 있는 거야."
"그 말은...."
"있었어. 탈레온이 곧 찾아서 돌아올 거다."
조슈아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현재 달빛 기사단으로 전서구를 날릴 집단은 단 한 곳뿐이었다.
타워.
전서구는 로드웰이 보낸 것이다.
72화
탈레온이 전서구를 가지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 있어요."
조슈아는 전서구를 건네받고서 곧장 쪽지를 확인했다.
타워에도 군집이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군집은 한번 발생하면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발생하는 이벤트였다.
타워에서 나오기 전.
미리 로드웰과 상의하여 손을 써 두고 나왔다.
'타워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었다.'
생존 게임에서 아지트를 옮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농장은 맡은 역할을 다했다.
로드웰과 관계를 쌓았고 기사단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이제 그곳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로 옮길 타이밍이었다.
장소는 정해 놓았다.
가기 전에 해야 할 준비도 착실히 진행 중이다.
"어떤 내용인가요?"
"타워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심각한 건가요?"
"글쎄, 가 봐야 알겠지."
탈레온이 불안한 낯빛으로 바라봤다.
"곧장 돌아가야 하는 거냐?"
레오가 물었다.
"그래."
"구한 생존자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타워로는 못 데려가. 그 점을 설명해 주고 올 생각이다."
동료들을 두고서 빠져나온 생존자 무리로 향하였다.
그들 곁에 있던 기사가 자신을 맞이하였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다친 사람들이 있지만 괜찮다. 모두 무사해."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기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계획은 없다. 우리는 이곳에서 더 오래 버틸 생각이었거든."
"의탁할 곳이 없다면 성 스탈리아로 한번 가 보시죠. 그곳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데릭 경 없이 말이냐?"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죽였습니다."
"무슨 뜻이냐?"
"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레나가 위험했던 상황이라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기사가 몸을 휘청거렸다.
그토록 찾고자 했던 리더가 죽었다는 소식으로 되돌아왔다.
"네가 말이냐? 평범한 좀비였던 모양이지?"
"아뇨, 변종이었습니다만."
"뭐라고!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 덕분에 이겼습니다."
기사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다가 이내 거두었다.
학생에겐 불가능한 영역.
그런 식으로 넘어가기엔 눈앞의 소년은 많은 것을 증명해 왔다.
"알려 줘서 고맙다. 네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쏟을 뻔했어."
"그리고 아델라와 세레나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가 곧바로 대답을 잇지 못하고서 머뭇거렸다.
두 사람은 양보하기에 아까운 인재였다.
한 명은 탐지 마법의 전문가이며, 다른 한 명은 수 속성을 다루었다.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를 갖춘 셈이다.
"알았다. 어차피 네가 아니었더라면 모두 죽을 목숨이었으니까. 네가 무엇을 원하든 우리로서는 막을 이유가 없다."
"감사합니다."
조슈아가 기사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생존자들이 한데 모여서는 떨고 있었다.
"저들은 어쩔 생각인가요?"
기사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물음 속에 어떠한 의도가 느껴졌다.
"우리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식량과 물이 한정되어 있는데, 먹어야 할 입은 많으니까요."
"미안하지만 장담은 못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조슈아는 떨고 있던 생존자들 중에서 누군가를 찾아냈다.
세레나가 구하려고 했던 소년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살아남았지만, 이후로도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었다.
"노력은 해 볼 거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를 건네받고는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아델라와 세레나.
두 사람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밝아졌다.
안에서 있었던 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그 데릭을 상대로 말이야, 내가 다리를 얼리고, 루나가 팍! 하고, 조슈아가 마무리를 했다니까!"
"호들갑 떨지 마라."
아델라가 무용담을 늘어놓자 레오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변종을 사냥한 경험은 나한테도 있어."
"어떤 녀석인데?"
"회담장 숲에서 만났던 그 곰, 이름이 우르곤이었던가?"
"그 곰보다도 데릭이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그 녀석을 가까이서 지켜봤다면 그런 말은 못 했을 거다."
"그럼 어느 쪽이 강한지 물어보면 되겠네."
아델라와 레오의 시선이 동시에 조슈아에게 향하였다.
그가 한숨을 토해 냈다.
두 사람 모두 승부욕이 강한 캐릭터였다.
"데릭이 더 강하다."
"거봐!"
"그렇지만 둘 중 적을 쓰러뜨리는 데 누구의 공이 더 컸냐고 묻는다면 레오일 거다."
레오가 승리를 거머쥔 사람처럼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델라는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이 두 사람의 경쟁심을 자극해 주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 중 하나였다.
"내 마법이 레오널드의 검술보다도 못하다는 뜻이야?"
"그런 의미는 아니야."
"그러면!"
"맡은 역할의 차이지. 레오는 그 전투에서 선봉장이었으니까, 후방 보조보다는 점수를 높게 줘야 한다."
아델라가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탈출 후의 기쁨을 만끽하는 건 여기까지였다.
'타워가 공격받았다면 플랜 A는 이제 무리다.'
플랜 A는 타워에 계속 머무르며 세력을 키우는 전략이었다.
농장이란 거점을 통하여 물자를 수확.
수확한 물건들을 상인회와 교류하며 물물 교환을 할 생각이었다.
이제는 불가능하다.
로드웰은 떠났고, 농장이 부서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영리함]이 플랜 B를 주장했다.
'플랜 B인가.'
빌른.
길드가 운영하는 마을이었다.
그쪽에서 휴식을 취하며 경험을 쌓는 방법이었다.
[냉정함]과 [영리함] 그리고 나 자신이 의논을 펼쳤다.
결론은 금세 정해졌다.
"...우선 너희에게 현재 사정을 설명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