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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켄과 마젤은 짧게 잠을 잔 뒤, 곧바로 일어났다.

하켄은 피로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지독하게도 쏟아지네요."

여전히 밖은 장마가 한창이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는 빗방울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데일이 마젤에게 물었다.

"흔적이 지워지지는 않았나?"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소. 충분히 따라갈 수 있소."

셋은 다시 추적을 시작했다.

마젤은 이동하다 사냥감이 흔적을 살피고, 다시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하켄은 그런 마젤이 흔적을 살필 때마다 그의 주위에 방패를 들고 빈틈없이 경계했다.

마젤이 조금이라도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반나절을 걸어가자 초목이 우거진 산이 나타났다.

원래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거인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산의 초입에서 마젤이 말했다.

"놈이 여기서 잠시 머뭇거렸소. 산을 넘을까 고민했을 것이오."

"하지만 거인 때문에 결국 포기했고 말이죠?"

"그렇소. 놈이 그래도 제정신이 박혀있다는 증거요.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인간이면 거인의 영역을 지나치지는 않을 테니."

데일과 하켄이 정상이 아니라고 비꼬는 말이기도 했다.

마젤은 둘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는 게 어떻겠소. 거인은 너무 위험하오."

하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사히 통과할 방법도 있고요. 그렇죠 데일 경?"

"그래."

"후우. 그렇다면야."

나직이 한숨을 내쉰 마젤이 말했다.

"시간이 되어도 안 돌아온다면 길드에는 사망했다고 보고하겠소. 괜히 조사대를 꾸려서 애꿎은 이들이 죽게 둘 수는 없으니."

"그래."

"오히려 마젤이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우리 둘이서 마법사 놈을 죽여 버릴 테니."

하켄의 농담 아닌 농담에 마젤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데일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이만 가보겠소."

마젤은 짐을 챙겨 들고 마법사의 흔적을 쫓아 사라졌다. 이런 곳에서 혼자 움직인다면 겁이 들 법도 하건만.

마젤의 등에서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여행자처럼, 홀가분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데일이 말했다.

"우리도 가지."

"예."

둘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빛에 잔뜩 젖은 흙과 나뭇잎은 자칫 잘못 발을 디디면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바닥을 구를 뻔한 하켄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 그래도 억지로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지랄 맞은 날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뭐가."

"거인의 영역을 지난다고 꼭 거인을 마주치는 건 아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인의 산은 넓다. 운이 좋으면 거인을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날씨에는 거인도 자기 동굴에 틀어박혀 있을 거 아니에요? 비 맞는 걸 좋아하는 머저리는 없으니까요."

"그건 일리가 있군."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이지만, 나름 근거는 있는 희망이다.

둘은 그 이후부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거인은 특히 귀가 좋으니, 굳이 소리를 내서 좋을 게 없었다.

산의 중턱으로 올라서자 점점 초목이 뜸해졌다.

그 대신 황토색 바위와 흙으로 이루어진 지대가 나타났는데, 하켄이 남쪽을 가리키며 소곤댔다.

"저기 협곡을 건너서 내려가고, 거기서 좀 더 가면 마을이 멀지 않습니다. 바로 갑시다."

"그래."

하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몸을 가려줄 수목이 없으니, 거인 눈에라도 띌까 두려웠다.

하지만 한참을 걸어도 거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벌벌 떨던 하켄도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신감을 되찾아갔다.

그는 자기 예측이 맞아떨어졌다고 확신했다.

'그래. 누가 이런 날에 밖으로 나오겠어.'

최고의 결과다.

거인을 마주치지 않고 산을 지나갈 수 있다니.

'역시 신은 용기 있는 자의 편이지!'

하켄은 웃으며 모퉁이를 돌았다. 이제 모퉁이에 있는 길을 따라 협곡을 건너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켄은 저도 모르게 속도를 내려 했고.... 데일이 그 뒷덜미를 붙잡았다.

"데일 경?"

데일은 하켄을 뒤로 끌어 모퉁이에서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협곡으로 이어지는 길이 조금이지만 보였다.

무언가 거대한 게 그 길을 막고 있다는 것도.

족히 3미터는 넘는, 흉측한 생김새의 거인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큼직한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비, 기분 좋다. 비 맞으면 씻을 필요 없다. 냄새 안 난다."

있었다. 비 맞는 걸 좋아하는 머저리들이.

하켄은 손으로 입을 텁 가렸다.

입을 조심하라는 데일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켄이 굳어 있자니, 거인 중 하나가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인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인간? 인간이다!"

"인간은 맛있다!"

거인 가족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오랜만의 별식에 잔뜩 흥분했다.

"저놈. 저놈은 살이 많아 보인다."

"오른쪽 검둥이는 껍질에 둘러싸여 있다."

"껍질째 씹어먹으면 된다."

아무래도 검둥이는 데일, 껍질은 갑옷을 의미하는 듯하다.

데일은 거인 가족이 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전에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너희에게 잡아먹히러 온 게 아니다. 이 길을 지나가고 싶다."

아빠 거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 우리 영역이다. 영역을 지나가면 통행세 내야 한다. 하지만 너희한테는 통행세 없다. 그러니 우리한테 먹혀야 한다."

"...거인치고는 제법 논리적인데요?"

데일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희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내기에서 이기면 우리를 그냥 보내줘라."

거인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아무래도 내기를 하는 게 썩 내키지 않는 듯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아는 거인들은 내기라면 환장하는데.'

거인 가족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내기하고 싶지 않다. 또 지는 건 싫다. 고기 먹고 싶다."

"하지만 저 인간. 그 무서운 인간이 아니다."

"그냥 무시하고 먹어치우자."

"으음."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하켄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데, 데일 경. 뭔가 이상한데요? 내기 좋아하는 놈들 아니었어요?"

투구를 긁적이던 데일이 하켄의 어깨를 잡았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도발해."

"예? 아...."

알아들은 하켄이 거인을 향해 크게 외쳤다.

"설마 겁먹었냐 이 새끼들아!? 너희 같은 놈들이 우리같이 작은 인간들한테 겁먹었다니. 이거, 겁쟁이 새끼들이었군! 덩치가 아깝다!"

자존심이 긁힌 아빠 거인이 즉각 고함을 질렀다.

"누가 겁쟁이냐! 우리, 겁쟁이 아니다! 겁쟁이라 말하면 너, 입 찢어버린다!"

"그래. 너희는 겁쟁이는 아니지. 그렇다면 내기도 받아들이겠지?"

"물론이다!"

거인은 가슴을 쿵쿵 두드리고 앞으로 나섰다. 뭔가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다른 가족들도 겁쟁이라는 말에 잔뜩 흥분하고 있었으니까.

이쯤 되면 이제 데일이 계획은 얼추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

하켄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휴, 휴우. 이제 됐네요. 분명 거인들이 즐겨하는 내기는...."

"수수께끼."

"좋네요. 저 멍청한 거인들한테 수수께끼로 질 일은 없으니까요."

사실, 거인들은 수수께끼의 달인들이다.

밥 먹고 하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 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이미 거인들이 내는 대부분의 수수께끼를 경험해보았고, 그 답도 모두 알았다.

즉. 이미 이 승부는 끝난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아빠 거인이 외쳤다.

"내기 종목, 내가 정한다. 그게 규칙이다!"

"그래."

"종목은 바로.... 찰싹찰싹이다!"

하켄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거인 놈들은 멍청해서 수수께끼란 단어도 모르나 보죠?"

"...아니. 쟤들도 그 정도 단어는 안다. 생각보다 똑똑하거든."

잠시 데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머리카락을 벅벅 긁은 하켄이 물었다.

"아니 뭔. 그럼 저 찰싹찰싹이 뭡니까."

데일은 하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모르겠는데."

진짜 모르겠다.

추격

* * *

데일이 아빠 거인에게 물었다.

"내기는 보통 수수께끼로 하지 않나? 그게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는데."

거인은 고개를 휙 돌리며 답했다.

"어떤 무서운 인간. 이곳, 여러 번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우리, 수수께끼로 내기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졌다. 우리, 이제 수수께끼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데일처럼 거인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이곳을 여러 번 지나간 듯하다.

그 사람은 수수께끼의 정답을 연거푸 맞혔고, 화가 난 거인들은 더는 수수께끼를 하지 않게 되었다.

'대체 어떤 놈이야.'

누군지는 몰라도 꽤나 박식하고 대담한 인물인듯하다.

지금 데일에게는 짜증만 날 뿐이지만.

"그래서. 그 찰싹찰싹이라는 내기는 대체 뭐지?"

"설명, 귀찮다. 보여줘라!"

아빠 거인이 외치자, 아들과 딸 거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아들 거인이 팔을 든 뒤, 그대로 누이의 뺨을 올려붙였다.

짜악!

강한 힘에 뺨을 얻어맞은 거인은 그대로 날아가 땅을 뒹굴었다.

아들 거인은 한차례 포효를 내뱉었다. 하지만 딸 거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차례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다가가, 똑같이 형제의 뺨을 후려갈겼다.

쩌엉!

이번에는 좀 더 묵직한 소리가 퍼졌다.

거의 날아가다시피 한 아들 거인은 그대로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다.

쓰러진 거인은 꿈틀거리다가, 이내 바닥에 널브러졌다.

딸 거인이 하늘에 포효했다.

"이겼다아!"

대견하다는 듯, 뿌듯하게 웃은 아빠 거인이 말했다.

"이런 내기다. 이해, 어렵지 않다."

멍하니 보고 있던 하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이 양심 없는 새끼들. 지기 싫으니까 지들 유리한 규칙을 만들어냈잖아."

거인은 자기도 찔리는지, 시선을 살며시 돌리며 말했다.

"험. 험험. 순서. 너희가 먼저다. 그러니 불리하지 않다."

그러더니 도리어 성을 냈다.

"빨리 골라라! 할 거냐 말 거냐! 나 배고프다! 배고픈 거 싫다!"

"허, 참. 이 새끼들은 진짜."

데일은 하켄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입을 다물게 하고, 거인에게 물었다.

"내기에서 우리가 이긴다면,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하고 우리를 보내준다고 약속할 건가?"

"물론이다! 거인, 인간과 다르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하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다. 내기를 거절하면 거인 넷이랑 싸워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낫겠지."

"으음. 그것도 그렇긴 하군요."

데일은 메고 있던 배낭과 무기 따위를 하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빠 거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인이 물었다.

"네가 할 거냐?"

"그래. 갑옷은 안 벗어도 괜찮나?"

"그 정도는 봐준다! 어차피 껍질, 우리한테 소용없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

데일은 팔을 두어 차례 붕붕 휘둘렀다.

거인은 데일이 뺨을 때리기 좋게, 한쪽 무릎을 꿇어 시선을 낮춰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높았지만.

거인과 데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거인은 히죽 미소 지었다.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쪼끄마한 게 때려봤자 얼마나 아프냐는 속마음이 전해졌다.

데일은 마지막으로 팔을 한 바퀴 더 돌린 뒤, 허리를 틀어 뒤쪽으로 힘껏 뻗었다.

거인은 눈조차 감지 않고, 여유롭게 그 손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거인은 시선에서 데일의 팔을 놓쳤다.

순간 흐릿해졌던 데일의 손이 이미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쩌억!

거인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육중한 몸이 기우뚱 옆으로 넘어갔다. 통증은 그 다음이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벙쩌있던 거인이 허겁지겁 다시 일어났다.

거인은 멍한 얼굴로 자기 뺨을 어루만졌다.

두꺼운 거죽에는 건틀릿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입은 터져 피가 흐르고, 치아도 몇 개 부러졌다. 뺨을 부여잡던 거인이 고개를 돌려 가족을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거, 검댕이 인간. 힘세다. 나 아프다. 이 내기 싫다."

누구든 한 대 세게 얻어맞고 나면 정신을 차리는 법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짜증을 냈다.

"엄살 부리지 마라! 인간, 쬐그맣다. 힘 세 봤자다!"

"지, 진짜다. 엄살 아니다."

"어차피 네 차례다! 때려서 이기면 된다!"

"아!"

아빠 거인은 자기가 때릴 차례임을 인지하고 나서야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상대가 강하더라도, 때리기 전에 내기를 끝내면 될 뿐이다.

그리고 거인은 자신 있었다.

지금껏 몇 번 정도 인간과 싸워봤는데, 한 대 얻어맞고 다시 일어난 놈은 없었다.

갑옷을 입었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찰싹 한방이면 나약한 인간은 껍질째로 으스러질 것이다.

"내 차례다!"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거인이 데일에게 다가왔다.

쿵쿵거리며 가까워져 오는 거인은 분명 엄청 위협적이었다.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큼직하고 두꺼운 손 역시도.

하지만 데일은 차분히 서 있었다.

그저 담담히, 어서 빨리 하라는 시선만을 주었다.

다른 도전자처럼 겁먹고 펑펑 울어 주기를 바랐던 거인은 실망했다.

하지만 이내 이 내기를 끝내고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에 표정을 풀었다.

거인이 하늘 높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죽어라아!"

거대한 팔이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두텁고 커다란 손바닥은 그대로 데일을 후려쳤다.

손바닥이 워낙 커 뺨이라기보다는 머리부터 어깨까지 동시에 타격하는 일격이다.

우득!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데일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못해도 3미터는 날아간 데일은 커다란 바위에 틀어박혔다. 바위가 없었다면 더 멀리 날아갔으리라.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거인이 포효를 내질렀다.

"우오오오오!"

"잘했다! 잘했다!"

승리의 기쁨을 잔뜩 담은 포효혔다. 가족들도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빗방울에 먼지가 빠르게 가라 앉자. 거인 가족들은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데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견갑이 찌그러지고, 왼팔이 꺾였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데일은 오른손으로 꺾인 왼팔을 우둑, 반대로 꺾어 다시 방향을 맞춰주었다.

아빠 거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뒤에 있던 다른 거인들이 타박했다.

"왜 살살 때렸냐!"

"실망이다!"

아빠 거인은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나, 제대로 후려쳤다! 검둥이, 엄청 단단하다!"

"거짓말하지 마라!"

거인 가족이 시끄럽게 싸우든 말든. 데일은 거인을 향해 다가갔다.

"다시 내 차례다."

아빠 거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돼, 됐다. 내가 졌다! 그냥 지나가도...."

"무슨 소리냐! 엄살 말고 앞으로 나가라!"

"겁쟁이! 겁쟁이!"

가족들의 타박에 아빠 거인은 울상을 지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가장의 무게란.'

데일이 다시 자세를 잡으려 하자, 하켄이 다가와 물었다.

"괘, 괜찮습니까 데일 경?"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하지만 두 번 맞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번에 끝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암만 봐도 저 덩치가 쉽게 쓰러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해봐야지."

데일은 앞으로 나섰다.

얼굴을 내민 거인은 이제는 아예 눈까지 꾹 감아 버렸다.

데일은 가족 거인들의 위치를 눈여겨본 뒤, 적절한 자리에 서서 팔을 뒤로 뻗었다.

'이번으로 끝낸다.'

분명 거인이라는 종족은 튼튼한 놈들이다.

군대가 몰려와 두들기거나, 마법사의 강력한 화력이 아니면 쓰러트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거인에게도 분명 약점은 있다.

'인간과 신체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

데일은 뒤로 뻗었던 팔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빠르고 힘찬 움직임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아까와 같은 일격이라면, 결과도 같을 뿐이다.

'아아!'

하켄은 속으로 탄성을 삼켰다.

이대로가면 꼼짝없이 실패다. 내기에 져서 거인에게 삼켜지는 미래가 보였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하켄은 보았다. 곧게 펴져 있던 데일의 다섯 손가락이 오므라들어, 주먹을 이루는걸.

주먹은 그대로 곧게 뻗어져 거인의 턱을 스치듯이 절묘하게 타격했다.

"아?"

거인은 얼빠진 소리를 낸 뒤, 좌우로 휘청이다,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거인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맷집 좋은 거인이라도, 뇌가 흔들리면 견뎌내기 힘든 법이니.'

아빠 거인이 쓰러지자, 다른 거인들이 다가와 몸을 마구 흔들었다.

"장난치지 마라! 고기 먹어야 한다!"

"자, 잠들었다."

하켄은 데일에게 다가와 작게 말했다.

"이래도 됩니까?"

"뭐가."

"그.... 마지막에 주먹을 쥐었지 않습니까."

"걱정 마라. 놈들한테 들키지는 않았으니까."

일부러 다른 거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주먹을 쥐었다.

완벽 범죄인 셈이다.

"그리고 애초에 주먹을 쥐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다."

"아니 뭐. 그렇긴 하네요. 이제 내기 이름을 찰싹찰싹이 아니라, 퍽퍽으로 바꿔야 할 것 같지만요."

"재미없다."

"죄송합니다."

다시 배낭을 메고, 허리에 칼을 찬 데일이 다른 거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겼다. 약속대로 이곳을 지나가겠다."

"...."

거인들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딱 봐도 보내주기 싫은 마음이 엿보였다.

머리를 굴리던 엄마 거인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직! 아직 한번 남았다!"

"뭐?"

"내기, 원래 두 번 이겨야 한다! 그게 관습이다!"

3판 2선승이라는 뜻.

화가 난 하켄이 따져 물었다.

"잠깐! 처음에 그런 말은 없었잖아!"

"까, 깜빡하고 설명 안 했다."

"거인은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킨다며!"

"기억 안 난다."

"...양아치 새끼들이네 이거."

하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데일은 팔짱을 낀 채 거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두 번째 내기는 내용이 뭔데."

"으음.... 아! 수수께끼! 수수께끼로 하겠다. 내가 문제 낸다. 너, 맞춰라. 못 맞추면 내가 이긴거다!"

데일은 말싸움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내봐."

거인이 씨익 웃었다.

"비장의 수수께끼 내겠다. 절대 못 맞출 거다."

"빨리하기나 해."

"두 자매, 있다. 언니가 동생을 낳고, 동생이 언니를...."

"낮과 밤."

데일이 툭 말하자, 거인이 말을 멈췄다.

삐질거리는 표정을 보니 어떻게 정답을 맞췄는지 의아해하는 눈치.

눈알만 또르르 굴리던 거인이 급하게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다른 수수께끼 내겠다. 이번엔 진짜 못 맞출 거다."

"빨리 내기나 하라고."

"흐흐.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

"인간."

거인이 버럭 성을 냈다.

"적어도 문제를 끝까지 듣기라도 해라!!"

어쨌거나 정답은 정답이었다.

하켄과 데일은 거인을 지나쳤다. 하켄은 귓속말로 물었다.

"그런데 저 거인 놈, 마지막에 유창하게 말하지 않았어요?"

"화가 나면 없던 능력도 생기는 법이지."

거인들은 그런 둘의 등을 시무룩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말하기도 전에 맞추는 거, 예의 아니다. 검둥이 예의 없다...."

거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데일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계획했던 대로 되었군.'

결과는 처음 예상했던 대로 되었다.

중간 과정은 여러모로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건 하켄에게. 그리고 데일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 * *

홀로 떨어진 마젤은 추적을 계속했다.

다행히 여인은 예상 경로대로 도주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하켄의 고향을 지나칠 것이다.

만약 하켄과 데일이 거인의 영역을 통과해 미리 기다리고 있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힘들겠지.'

괜히 사람들이 거인을 피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포악하고, 변덕스러우면서, 나름 지능까지 있다.

그런 놈들을 무사히 지나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죽었거나 운이 좋다면 도망쳤겠지.'

어느 쪽이든 지금 도움이 될 일은 없다. 마젤은 진즉에 둘을 계획에서 제외했다.

마젤은 계속 흔적을 추적했다.

그리고 한 가지 곤란한 점을 알아냈는데, 그건 바로 여인이 상처를 점점 치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폭이 더 커지고 있어.'

그리고 상처가 나은 여인은 점점 더 대담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마젤은 길가에서 습격당한 상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는 살점 하나 없이 모두 뜯어먹혀 있었다.

주위에 큼직하게 찍힌 발자국은 늑대들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후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마젤은 무심하게 현장을 떠났다.

마법사에게 습격받은 건 안타까운 일이나, 일일이 애도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불운은 누구에게라도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니.

대처법은 두 가지뿐이다.

운 좋게 불운이 찾아오지 않게 기도하거나, 불운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실력을 기르거나.

마젤은 후자를 추구하는 사내였다.

다시 추적을 재개하려던 마젤은 멀찍이 찍힌 늑대 발자국을 하나 발견했다.

같은 무리라고 보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지만, 분명 방향은 일치하는 그런 발자국이었다.

'멀리 떨어져서 주위를 정찰하는 척후인가?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먼데.'

마젤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내 그 상념을 지워버렸다.

흔적을 추적하고, 마법사를 사살해야 한다.

지금 마젤에게 주어진 일은 그것뿐이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쓸 생각도, 쓸 필요도 없었다.

그게 마젤이 지금까지 살아 남아온 방식이다.

추격

* * *

거인의 영역을 지나친 데일과 하켄은 협곡을 따라 이동했다.

깎아지르는 절벽을 옆에 끼고 아슬아슬하게 나 있는 길이었다.

하켄은 슬쩍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장마로 잔뜩 불어난 강물이 거세게 흘렀다. 마치 성난 용 같은 모습이다.

하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거인이라도 저기에 떨어지면 무사하지 못하겠지? 아마 데일 경도....'

하켄은 선뜻 생각을 확정 짓지 못했다.

옆에서 조금 절뚝이며 걷고 있는 흑기사는 무려 거인의 일격을 받고도 무사했다.

갑옷이 좀 찌그러지고, 관절 이곳저곳이 꺾였지만, 이 정도면 무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 비현실적으로 강한 흑기사는 대자연의 분노도 버텨낼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하켄의 시선을 느낀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왜."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치유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나가다가 짐승 몇 마리만 사냥하면 된다."

하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데일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둘은 그 뒤로 길을 따라 계속 이동하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밧줄 다리를 발견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다리는 관리가 되지 않아 허름했다. 하지만 못 써먹을 수준은 아니었다.

"딱 봐도 제국이 망하기 전에 만든 다리네요. 그러면 생각보다 튼튼할 거예요."

둘은 조심히 밧줄 다리를 건넜다.

중간중간 발이 빠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다리가 끊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협곡을 건넌 다음에는 마침내 산에서 내려갈 수 있었다.

하켄은 등 뒤에 우뚝 솟은 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후. 내 다시는 저곳에 들르나 봐라."

"마을은 여기서 가깝나?"

"반나절은 더 가야 합니다."

"그러면 일단 이 근처에서 야영해야겠군."

벌써 밤이다.

원래라면 머리 위로 떠올랐어야 하는 달도, 지금은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사방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데일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하켄은 평범한 인간이다.

이런 어둠 속에서 이동하다가는 세 걸음에 한번은 넘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데일이 하켄을 업고 이동하는 것도 내키지 않고.

'어차피 산을 넘었으니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겠지.'

둘은 지름길을 통해 마법사를 훌쩍 앞지르게 되었다.

남은 건 이제 마법사가 마을에 오는 걸 기다리는 것뿐.

아직 여유가 있었다.

데일과 하켄은 적당히 큰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주위 나뭇가지가 모두 젖어 불을 피우기도 힘들었다.

데일이 말했다.

"자라.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하켄은 모포를 젖은 흙 위에 아무렇게나 깐 뒤. 그 위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하켄은 한참을 뒤척였다. 땅에 머리만 대도 곯아떨어지던 평소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데일이 물었다.

"잠이 안 오나?"

하켄이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게요. 오늘따라 잠이 안 오네요. 비가 와서 그런가...."

"마을 사람들이 걱정되나?"

하켄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되긴요. 악마 하수인도 이긴 데일 경이 있는데, 제까짓 주문 쟁이가 뭘 하겠습니까."

"그러면?"

"글쎄요.... 마을에 돌아오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데일이 물었다.

"전선에서 돌아오고 나서 아직 고향에 안 들렀다고?"

"가끔 사람 통해서 돈이랑 소식은 보냈죠. 근데, 차마 직접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더라고요."

하켄은 씁쓸하게 말했다.

그 얼굴에 죽은 동료이자 친우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떠올랐다.

데일도 한번 마주한 인물.

퀼이라는 용병이다. 하켄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알친구'라는 사람.

고향에서 함께 나고 자란 둘은, 분명 가족만큼이나 더 가까운 사이일 것이다.

하지만 퀼은 죽었다.

이터 무리의 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하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퀼의 가족들을 보겠어요."

그 얼굴에서는 죄책감이 엿보였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데일은 그래도 고향에 찾아가 감정을 풀어야 하지 않겠느니 하며 싸구려 조언을 건네지는 않았다.

자기 일이라면 스스로가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가족에 대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럼 내일 마을에 들르지 않고, 주위에서 야영할 건가?"

고민하던 하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때문에 데일 경한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딱히 상관없다."

"도망쳐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켄치고는 그럴듯한 말이었다.

본인도 자기 말이 제법 폼이 난다 생각했는지,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데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잠이나 자라."

"옙."

머지않아 하켄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일단 결심을 내리니 마음이 편해진 듯하다.

결국. 하켄에게는 등을 떠밀어줄 작은 동기만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밤사이 빗줄기는 점점 약해졌다.

지긋지긋한 장마도 이제 끝날 기미가 보였다.

"하아암. 벌써 아침인가요?"

"그래. 일어나라."

비척비척 일어난 하켄은 다 축축해진 모포를 한차례 쥐어짰다.

그러고는 곱슬머리에 침을 발라 단정하게 치장하기 시작했다.

데일이 핀잔을 주었다.

"어차피 비에 홀딱 젖을 거다."

"그래도 기분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맘대로 해라."

"데일 경. 저 몸에서 냄새 안 나죠?"

데일이 도리어 되물었다.

"안 날 거라고 생각했나?"

"엑? 진짜입니까?"

"평소에 좀 씻어."

"일주일에 한 번은 씻는데...."

더러운 놈이라고 말하려던 데일은 그만두었다.

고향에 돌아가는 날이니만큼, 오늘만큼은 너그러이 봐줄 생각이었다.

준비를 마친 하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데일을 안내했다.

어찌나 신나 보이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둘은 거인산에서 뻗어 나온 강줄기의 작은 지류를 따라 걸었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는 이내 평지에 다다랐고, 그곳에 고여 늪지대의 일부가 되었다.

나무가 빼곡히 자라 있는 밀림. 그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조잡한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에는 행정상의 이름이 따로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늪지 마을이라 불렀다.

늪지 마을은 하켄의 고향이었다.

하켄은 고향 전경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감회가 남달랐다.

"...정말이지. 바뀐 게 하나도 없군요."

"들어가지."

"예."

데일이 성큼성큼 걷자 긴장한 하켄이 그 뒤를 따랐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밭에서 김을 매던 농부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데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흐익!"

"괴, 괴물이다! 아니, 악마인가?"

그 무례한 반응에 하켄이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데일 경. 촌놈들이라 예의가 없어요."

"이해한다."

하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농부들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저 기억 안 납니까?"

"으이? 누구쇼?"

"하켄입니다. 골렌의 아들 하켄."

"어어?"

하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노인과 아낙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켄! 이게 얼마 만이냐!"

"어머 어머!"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둘은 하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놈 이거 몰라보겠구나! 갑옷도 번쩍번쩍한 거 입고 다니고. 용병 다 됐어!"

"제가 먹은 짬밥이 얼만데요. 이 정도 장비는 갖춰야죠."

"으스대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근데. 저쪽은...?"

노인이 데일을 향해 눈짓했다.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켄이 웃으며 말했다.

"데일 경이라고. 제가 신세지고 있는 기사님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아. 그렇구나. 네가 괜찮다면, 뭐. 괜찮은 거겠지."

노인은 그제야 데일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그는 물었다.

"그나저나 퀼은 어디 갔냐? 아랫도리 알 두 짝처럼 매일 붙어 다니던 놈들이 말이야."

하켄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말이죠...."

"아! 일단 퀼 네 가족한테 먼저 말해야지!"

"제가 가서 말할게요."

"자, 잠깐."

하켄은 노인과 아낙을 잡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이미 아낙이 큰소리로 외치며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켄이 왔어요! 하켄이 왔다고요!"

하켄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데일이 물었다.

"설마 퀼이 죽은 걸 아직 얘기 안 했나?"

"예.... 도저히 말 못 하겠더라고요."

"네 입으로 도망쳐서 해결되는 건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면목이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하켄이 데일에게 부탁했다.

"데일 경.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퀼이 죽은 건, 부디 비밀로 해주세요. 나중에 전부 말할 거지만, 그게 오늘은 아닌 것 같아요."

"마음대로 해라."

머지않아 마을에서 주민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데일을 보며 흠칫했지만, 하켄을 보자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주민들은 하켄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잘 지냈냐.

돈은 좀 벌었냐.

다친 곳은 없냐.

결혼은 했냐.

하켄은 일일이 대답해주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다 어느 젊은 여자가 주민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여자의 치마폭에는 자그마한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하켄!"

"어? 어어. 마리. 오랜만이야."

"하켄 삼촌!"

"하하! 이녀석들. 많이 컸구나!"

하켄은 아이들을 안으면서 데일에게 소곤댔다.

"퀴, 퀼의 가족입니다. 그 녀석은 결혼을 일찍 했거든요."

"으음."

퀼의 아내, 마리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전선은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없지?"

"으응."

"신께서 너를 도와주시나 보다. 근데.... 그이는 어딨어?"

하켄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마리와 그 자식들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듯했다.

"어어. 퀼 말이지? 하하. 퀼이 지금 어딨었죠?"

방황하던 하켄의 눈동자가 데일에게 향했다.

데일은 생각했다.

'어디 있긴. 땅속에 묻혀 있겠지.'

하지만 그 생각을 뱉지는 않았다.

하켄은 재빨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

"의뢰! 맞다, 의뢰를 하고 있었어."

"의뢰? 혼자서?"

"우리가 이래 봬도 나름 유명하거든? 의뢰가 너무 쏟아져 들어오니까, 둘이서 같이 다니면 감당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간단한 의뢰를 할 때는 가끔 따로 다니기도 해."

"으음. 너희들이 유명하다고?"

마리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하켄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하켄과 퀼의 소꿉친구였고, 둘의 성격을 잘 알았다.

하켄과 퀼이 유명하다는 건 영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켄은 땀을 삐질 흘리며 데일을 쳐다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데일이 말했다.

"하켄은 그럭저럭 괜찮은 용병이다."

"그, 그렇군요."

그제야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켄의 말보다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기사의 말이 더 무게 있었다.

마리는 하켄을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혹시 그이한테 딴 여자 생긴 건 아니지?"

"아, 아니야. 퀼 그놈이 가벼워 보여도, 마리 너한테 일편단심이라고."

"그으래?"

하켄의 진위를 떠보던 마리는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면 상관없지."

"휴우."

"자! 잡담은 나중에 하고! 오랜만에 하켄이 돌아왔으니 잔치나 열자고!"

"돼지 한 마리 잡자!"

"술은 내가 가져올게. 마침 괜찮은 맥주가 있어."

늪지 마을의 주민들은 이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맥주를 담은 오크통이 착착 쌓였다.

아직 한낮이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경사가 있는 날에는 다 같이 그 기쁨을 나눠야 하는 법이다.

주민들은 하켄과 왁자하게 떠들었다.

하켄은 친우의 죽음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행복해 보이기도 하다.

그럴만하다.

갖은 고생 끝에 몇 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니.

금의환향까지는 아니어도, 하켄 나름대로 용병으로서 성공도 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데일은 하켄이 바보 같이 헤실거리는 걸 보다, 걸음을 옮겼다.

이 마을에는 조잡한 망루가 있었다. 데일은 그 위를 올라 한쪽을 살폈다.

북동쪽. 아마도 마법사가 찾아올 방향.

데일은 그쪽을 하염없이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민들에게 시달리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하켄이 망루의 아래에 다가왔다.

"데일 경. 마을 사람들이 잔치 준비가 다 끝났다는데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라."

"예?"

어벙하게 되묻던 하켄의 표정이 이내 진지해졌다. 그는 방패를 굳게 부여잡았다.

"오는군요."

"그래."

저 멀리서 늑대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늑대

* * *

데일은 망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곤 하켄에게 말했다.

"가자."

"예... 예!"

마을 근처에서 싸우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데일과 하켄은 마법사를 직접 마중 나갔다.

마을로 통하는 큰길을 걷자 저쪽에서도 데일과 하켄을 알아차렸다.

늑대 무리가 우뚝 멈춰섰다. 놈들은 자신들을 통제하는 주인에게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늑대들의 뒤쪽에서 마법사가 걸어 나왔다.

피부에 가득한 상처. 씻지 않아 떡진 머리카락. 다 헤져서 넝마에 가까운 가죽옷. 손에 꼭 붙들고 있는 지팡이.

무엇보다 몸에 진하게 배어 있는 피비린내.

마법사보다는 야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여자였다.

마법사는 찡그린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누구?"

하켄이 퉁명하게 말을 받았다.

"누구긴 누구야. 네년 잡으러 온 용병들이지."

"아. 나를 쫓던 게 네놈들이구나.... 근데 이상하네. 어떻게 나를 앞지를 수 있었던 거지?"

여인은 그리 말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비듬과 머릿니가 후두둑 떨어졌다.

인상을 찌푸린 하켄이 말했다.

"거인의 영역을 지나쳐서 앞질렀지."

"그거. 농담이라면 재미없는데."

하켄은 어깨를 으쓱였다. 믿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태도였다.

하켄은 방패를 꼬나쥐며 말했다.

"순순히 항복해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겠어."

당연히 살려줄 생각 따위는 없다.

마법사가 항복하면 옳다구나 하고 목을 칠 생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밑져야 본전 식으로 말해본 것이었다.

순순히 항복할 놈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테니.

마법사는 하켄의 말은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녀는 옆에 있는 커다란 회색 늑대의 털을 쓰다듬었다.

"저 뒤에 있는 마을은 제법 크네. 사람이 몇 명이나 살까. 100명. 200명? 이전 마을은 너무 작아서 먹을 게 없었는데, 내 친구들이 배불리 식사할 수 있겠어."

"근데 이 새끼가...."

발끈한 하켄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굴었다. 데일은 그 어깨를 붙잡았다.

"진정해라."

"데, 데일 경."

"영리한 놈이야."

마법사가 늑대를 쓰다듬는 사이, 다른 늑대들이 천천히 산개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껏 여유를 부리는 척하면서 충실히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데일도 그리했다.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주위는 대부분 평지였다.

참나무가 군데군데 일어나 있었고, 그 가지 위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

마법사가 풍기는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것이리라.

까마귀는 조류 특유의 섬뜩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살점 몇 개를 주워 먹겠다는 야망이 엿보였다.

하켄이 주위를 둘러싼 늑대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데일 경. 평범한 늑대는 아니겠죠?"

"그렇겠지."

데일과 하켄이 등을 마주 댔다.

늑대 무리가 으르렁거리며 둘을 빙빙 돌았다.

계속 위협을 주어 사냥감을 지치게 만드는 수법이다.

데일은 차분히 서서 늑대의 움직임을 읽었다.

'아마도 마법으로 강화되었을 짐승들.'

이 늑대들은 산만 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도 컸지만, 이곳으로 오며 사람을 뜯어먹고 덩치를 불린 모양이다.

이미 이 짐승들은 몬스터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짐승일 뿐이다.

조금 강한 짐승.

늑대들이 빙빙 돌기만 하고 다가오지 않자, 데일은 짜증이 났다.

홀스터에 꽂혀 있는 단검을 쥐었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 없이 팔을 휘둘렀다.

쐐액!

단검이 일직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늑대들 사이를 그대로 지나친 단검은 곧장 뒤에 있는 마법사를 노렸다.

평범한 마법사는 반응조차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다.

하지만 여인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흥."

마법사는 가소롭다는 듯. 콧김을 뿜고는 지팡이를 내질렀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의 궤적이 그대로 꺾였다.

하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라? 마법사가 저걸...."

"나름 한 가닥 한다 이거군."

어쨌거나 데일의 노림수가 아주 실패한 건 아니다. 적어도 이 지루한 대치는 곧바로 끝이 났다.

주인이 공격당한 늑대 무리는 분노했고, 그대로 데일과 하켄에게 달려들었다.

데일은 곧장 롱소드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검이 한차례 번뜩이자, 커다란 늑대의 머리가 썩둑 잘려나갔다.

하지만 늑대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도리어 폴짝 뛰어서는 데일에게 쇄도했다.

목이 잘리든 말든 무게로 짓뭉개겠다는 전략이었다.

데일은 바닥에 롱소드를 꽂았다. 양손을 날아오는 늑대에게 뻗었다. 그대로 녀석의 몸을 힘껏 붙잡아 버렸다.

"크릉!"

늑대가 아가리를 벌려 데일을 씹어먹으려 했다. 하지만 놈의 송곳니는 갑옷을 뚫을 정도로 단단하지 못하다.

데일은 늑대를 붙잡아 달려오던 다른 녀석에게 그대로 던져버렸다.

"켕!"

부딪힌 늑대 둘이 바닥을 굴렀다. 지켜보던 마법사가 감탄을 흘렸다.

"용력이 제법인데."

뒤쪽에서 방패로 늑대 한 마리를 후려치던 하켄이 말했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데일 경은 저 마법사를 노려주십쇼!"

"혼자서 괜찮겠나?"

"저, 지금까지 운만으로 살아남은 거 아닙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땅을 박찼다. 마법사가 있는 방향이었다.

늑대 두어 마리가 그런 데일을 막아서려 했다.

데일은 롱소드의 손잡이를 내려쳐, 그대로 늑대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머리뼈가 부러지면서 뜨거운 피가 흘렀다.

늑대 따위로는 데일을 막을 수 없다.

마법사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데일을 막아서려는 늑대들을 말렸다.

"물러서 친구들. 아무래도 너희 상대가 아닌 것 같네."

그러자 늑대들이 곧바로 데일에게 길을 터주었다. 마치 잘 훈련된 군대 같은 움직임이다.

데일은 늑대들을 지나쳐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놀랍게도, 마법사는 그런 데일을 제자리에서 그저 쳐다만 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마법사는 으레 거리에 민감하다. 아무리 강력한 주문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도, 급소에 칼에 찔리면 죽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필사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거나, 곁에 믿음직한 호위를 두곤 한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둘 다 하지 않았다.

그저 여유로운 얼굴로 데일을 기다렸다. 데일은 그 여유가 거슬렸다.

'근접 전투에 자신 있다. 이건가?'

데일은 롱소드를 얼굴 앞으로 들어 상단 자세를 취했다. 상대가 자신이 있든 없든, 몸에 칼침을 먹여주면 될 뿐이다.

데일은 땅을 힘껏 밟았다.

발이 조금 패이며 흙이 튀었다. 동시에 데일의 몸이 가속했다.

속도와 무게가 모두 실린 검격이 마법사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마법사는 지팡이의 매끄러운 표면을 한차례 쓰다듬었다. 순간. 그 눈이 붉게 빛났다.

꽝!

쇠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데일이 튕겨나갔다.

공중에 붕 떠오른 데일은 그러나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머리는 냉정히 상황을 분석했다.

'방금 그건?'

무언가 강력한 힘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데일은 마법사를 살폈다.

그녀의 오른손은 마치 곰이 그것처럼 털이 북실북실 나고,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 있었다.

'수인화?'

신체 일부를 짐승처럼 변형시키다니. 흔한 마법은 아니었다.

데일은 여인이 익힌 게 어떤 계열의 마법인지를 고심했다.

하지만 선뜻 정답에 이르지 못했다.

'수인화 마법이랑 짐승을 부리는 마법은 다른 계열인데.'

그런 데일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법사는 히죽 웃었다.

"제법 단단하네."

그녀의 눈이 다시 한번 붉을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변화가 생겼다.

매끈하던 두 다리에 털이 숭숭 돋아났다. 뼈가 자라나 다리가 길쭉해졌고, 근육도 탄탄해졌다.

마법사는 튼튼한 사슴의 다리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당장 써먹어 보기라도 하듯. 곧장 땅을 박찼다.

놀랄 만치 빠른 속도로 다가와, 다시 앞발을 휘둘렀다.

데일은 방어 대신 검을 비스듬히 내뻗었다.

자신은 검을 찌를 테니 후려칠 거면 해보라는 태도였다.

쯧. 하고 혀를 찬 마법사는 발을 되돌려 롱소드를 옆으로 쳐냈다.

그때. 데일은 검에서 미련 없이 손을 뗐다. 검이 저 멀리 튕겨나갔다.

검사가 검을 포기하다니.

마법사는 순간 당황했다. 데일은 그런 마법사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머리는 아직 인간이다.

아직 수인화가 되지 않은 부분이니 충분히 부숴놓을 수 있으리라.

데일을 그리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마법사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녀의 등에서 순간적으로 검은색 날개가 돋아나 급하게 얼굴을 가렸다.

우득!

주먹에 강타당한 두 겹의 날개는 무사하지 못했다. 날개를 이루는 얇은 뼈가 부러졌다.

하지만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끄윽."

신음을 흘리는 마법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데일이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다음 순간.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귀찮게.'

데일은 손을 한차례 휘저어 까마귀들을 모조리 쳐냈다.

검은 깃털이 흩날리며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렸다.

그 잠깐의 틈 덕분에 여인은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두 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잠시 방금의 공방을 복기하던 데일이 말했다.

"너. 마법사가 아니군."

검을 포기하고 순간적으로 내지른 기습은 쉬이 피할만한 일격이 아니었다.

숙련된 전사도 반응하기 힘든 걸 마법사가 대처해냈다?

믿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언뜻 연관된 듯 보여도 중구난방인 마법 계통을 보니 그녀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생각에 무게가 쏠렸다.

'마법사가 아니라면.'

데일은 여인이 손에 든 지팡이에 시선을 주었다.

"힘이 깃든 지팡이군. 유물인가?"

여인이 낮게 으르릉거렸다.

어느새 여인의 입은 조류의 부리처럼 뾰족 튀어나와 있었다.

"끄륵. 내 거야."

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수인화에 대한 대가로 여인은 이성이 흐려진 듯하다.

어깨를 으쓱인 데일은 날아간 롱소드를 다시 주워들었다.

상대가 마법사가 아님을 알았다. 유물 지팡이에서 힘을 끌어쓴다는 것도.

이제 모든 건 간단하다.

'저 지팡이를 부러트리면 되겠군.'

데일이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차례 호되게 당한 여인은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데일에게 응전했다.

곰 발바닥이 데일을 후려치기 위해 다시 휘둘러졌다.

데일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곰 발바닥이 얼굴 바로 앞을 지나가며 풍압을 일으켰다.

데일은 물러났던 걸음을 크게 앞으로 전진시키며 곧바로 반격했다.

목표는 지팡이다. 그는 지팡이를 두 동강 낼 생각이었다.

"끄르륵!"

여인은 가래 끓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마주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녀는 지팡이의 단단함을 믿었다.

드드득.

"끄륵?"

믿음은 곧바로 깨졌다.

유물 지팡이의 단단한 표면에 실금이 생겨났다.

멀쩡히 버텨내기에 데일의 힘은 너무 강했고, 마검 역시 너무 날카로웠다.

그제야 여인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끄륵! 안 돼! 지팡이는 부러지면 안 돼!"

데일은 지팡이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여인은 팔을 움직여 지팡이를 감쌌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곰 발바닥이 잘려나갔다.

"꺄악!"

여인은 비명을 질렀지만, 한편으로 안심했다.

팔은 잘려나갔지만 지팡이는 무사하다.

그녀는 자기 몸보다 지팡이가 소중한 듯. 지팡이를 꼭 감싼 채 뒤로 몸을 날렸다.

"이런."

사슴의 다리는 싸울 때보다 도망칠 때 더 빛을 발했다.

초식 동물에게는 사냥보다 도주가 더 익숙할 테니 말이다.

여인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러면서 등 뒤에 돋아난 두 날개를 연신 파닥거렸다. 하지만 꺾여버린 날개로는 날 수 없다.

데일은 그 뒤를 쫓으며 투척할만한 무기를 찾았다. 거리가 더 벌어지기 전에 마무리해야 한다.

위험한 유물 지팡이를 다루며, 이성을 잃은 괴인이 이 주위를 활보하는 건 막아야 한다.

데일의 손이 홀스터에 걸려있던 손도끼에 닿았다.

하지만, 무기를 던질 필요는 없어졌다.

다음 순간.

수풀 속에서 커다란 회색 늑대 하나가 튀어나와 그대로 여인의 하나 남은 팔을 물어뜯었다.

강력한 치악력은 수인화 되지 않은 여인의 팔을 끊어내기에 충분했다.

"꺄아아악!"

여인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잘린 팔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렀다.

데일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늑대의 눈을 살폈다.

지배당하는 다른 늑대와 달리, 분노에 가득 차 있을지언정 맑은 눈이다.

'그렇군.'

데일은 상황을 얼추 이해했다.

자기 가족들을 여인이 지배했으니, 늑대는 그 복수를 하러 온 것이다.

여인의 주변을 은밀히 배회하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터.

늑대는 끈기 있고 인내심 있는 사냥꾼이었다.

데일과 늑대의 눈이 마주쳤다. 늑대는 눈빛을 빛내며 여인의 팔을 오도독 씹어먹었다.

마치 이건 자기 몫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찌 됐든 데일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여인을 붙잡았으니 그걸로 족하다.

"지팡이. 지팡이...."

양팔이 잘리고, 지팡이를 잃은 여인은 어느새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향해 꿈틀 기어갔다. 지팡이의 마력에 단단히 홀린 듯하다.

이 지팡이를 어디서 구했는지, 말이라도 걸어보려던 데일은 그만두었다.

'말이 통하지도 않을 것 같군.'

데일은 앞서 걸어가 지팡이를 주워들었다.

"아아."

여인은 황망한 얼굴로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여인을 무시한 데일은 지팡이를 스윽 쓰다듬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악마의 힘 같기도 하고, 오래되고 사악한 주문의 힘 같기도 했다.

데일이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의지가 억지로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사용자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지팡이라.'

반대로 말하면 이 지팡이는 그만큼 특별한 물건이라는 뜻도 된다.

사용하기에 따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데일은 머저리가 아니다.

조금 더 강한 힘을 위해, 지팡이의 노예가 될 생각은 없다.

"도, 돌려줘."

여인이 데일에게 간절히 말했다. 데일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여인이 보는 앞에서 지팡이를 양손으로 붙잡은 뒤, 그대로 무릎을 향해 내리쳤다.

지팡이가 똑!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져 버렸다.

친절한 데일은 두 동강 난 지팡이를 여인의 얼굴 바로 앞에 놓아 주었다.

"돌려줬다."

늑대

* * *

지팡이가 부러지자, 여인과 그녀가 부리던 늑대들이 일제히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유물 지팡이의 힘을 받아 강력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 지팡이가 부러지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홀로 늑대와 사투를 벌이던 하켄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처참한 꼴로 죽어 있는 여인을 보며 물었다.

"죽은 겁니까?"

"그래."

"어후."

하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그의 고향 마을이 위협에서 벗어난 것이다.

데일은 널브러져 있는 늑대들을 살폈다.

숫자도 많고, 덩치도 큰 늑대들이다. 그 사이에서 하켄이 용케 혼자 버텼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이 좀 늘었나?"

"하하. 겨우 짐승 따위한테 질 정도로 약하지는 않습니다."

겨우 짐승이라고 부를만한 놈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켄은 방패에 몸을 기대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지킬 게 있으면 강하다 이건가.'

하켄의 성장은 기꺼운 일이다.

앞으로도 하켄을 부려먹을 일이 많을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럼 뒤처리를 하자. 가죽 벗기는 법은 아나?"

"그럭저럭합니다."

하켄은 품에서 뾰족한 단검을 꺼내 늑대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단칼에 깔끔하게 죽은 놈들이 많아, 가죽 상태가 괜찮았다.

그사이, 데일은 죽은 여인에게 다가가 그 품을 뒤졌다.

큰 수확은 없었다.

동전 두어 개. 단검 몇 자루. 냄새나는 육포랑 썩은 치즈.

'원래는 전사나 도적이었군.'

나름 실력이 있었을 것이다. 몸에 밴 단련의 흔적이나 근육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하기에 유물 지팡이도 능숙하게 활용했던 것이다.

'혹시 군인이었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인의 신분을 증명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생기를 흡수하면서 그 기억을 엿보려고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기억은 마치 노이즈 낀 영상처럼 불분명해,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런 지팡이에 정신이 오염되었으니, 기억이 성할 리도 없다.

결국, 남은 의문은 하나였다.

'이 지팡이를 어떻게 얻은 거지?'

활용하기에 따라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물 지팡이다. 탐낼만한 이들도 많고, 값어치도 상당할 터.

이런 누군지도 모를 여인이 들고 있기에는 과분한 물건이었다.

물론, 여인이 운 좋게 유적을 발견해 얻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공교로워.'

전장에서 돌아오는 군인들. 악마 하수인의 출현. 빈민가에 찾아온 전쟁 마법사와 쇠뇌수들. 도시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암약하는 골칫덩이들.

그런 와중에 이 여인이 '우연히' 강력한 지팡이를 얻게 되어, 지하 수로에 악어 떼를 풀어놓을 생각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일을 사주한 배후가 있을 터.

'누군지는 몰라도 골치 아픈 짓을 하는군.'

아직 상대는 가볍게 찔러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적당히 주먹을 몇 번 날리며, 이쪽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엿보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제대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쪽이 만만하다는 계산이 서게 된다면, 다음엔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니.

물론, 대처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건 데일의 일이 아니다.

그건 도시의 통치자들이 할 일.

데일이 지금 해야 하는 건, 강해지는 것뿐이다.

생각을 마친 데일은 하켄을 돕기 위해 다가갔다. 하켄은 요령 있게 늑대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돕겠다."

"괜찮습니다. 제가 다 할게요. 그나저나.... 시선이 영 부담스럽네요."

하켄이 가리킨 곳에는 늑대가 한 마리 서 있었다. 여인의 팔을 물어뜯은 늑대.

목덜미에 상처가 나 있는 늑대는 이쪽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가족들 가죽이 벗겨지는 게 슬픈가 봐요."

"처리하겠다."

"됐어요. 가족들 잃어서 가뜩이나 서글플 텐데."

하켄답지 않은 말이었다.

평상시였다면 가죽 하나 추가라고 신나서 사냥했을 텐데.

어쩌면 동료를 모두 잃고 진짜 '고독한 늑대'가 되어버린 저 생물에게 연민을 느끼는 걸 수도.

아니면 똑같이 친우를 잃었던 자기 처지와 겹쳐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켄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야."

데일은 뽑았던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 뒤, 둘은 가죽 해체에 전념했다. 늑대는 저 멀리서 둘을 애처롭게 쳐다볼 뿐,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적의가 없었기에 데일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작업을 모두 마친 둘은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은 연회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사람들은 하켄과 데일을 보며 말했다.

"하켄! 연회의 주역이 사라지면 어떡하니! 네가 없어서 시작을 못 했잖아.... 근데. 너 괜찮아?"

하켄의 꼴이 엉망이라 한 얘기다.

하켄은 호탕하게 웃어 보인 뒤, 마리에게 가죽을 내밀었다.

"갓 벗겨낸 늑대 가죽이야! 잘 무두질해서 팔아봐!"

"어머. 선물이니?"

"당연히 돈은 줘야지."

"그럼 그렇지...."

마리는 곧바로 가죽값을 지불했다. 하켄은 은화를 받아 데일과 나누었다.

"역시, 데일 경이랑 같이 다니면 주머니 가벼울 일은 없다니까요."

그렇게 말한 하켄은 잠시 머뭇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한참을 주저하던 하켄이 다시 입을 연 그 순간. 마을 주민들이 하켄을 둘러쌌다.

"뭐해. 빨리 와."

"술 먹어야지!"

주민들은 하켄을 억지로 붙잡고 술을 권했다. 하켄은 맥주가 든 통을 그대로 들어 입에 부어 넣었다.

그러자 주민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켄이 속에 들어간 맥주를 곧바로 게워냈을 때, 환호성은 야유가 되었다.

어쨌거나 하켄은 행복해 보였다.

이제야 본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아왔다 해야 할까.

데일은 구석진 자리에서 맥주잔을 드는 시늉만 했다. 몇몇 주민들이 다가와 함께 즐기자 했지만, 데일은 거절했다.

주민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마음속 두려움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아무리 마을을 구했다 하나 이교도 기사는 공포의 대상이다.

굳이 저 안으로 들어가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데일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니까.

연회는 계속돼 밤이 되었다.

어찌나 술을 많이 퍼마셨는지, 다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마리의 아들이 얼굴이 새빨개진 하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툭 말했다.

"아빠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켄은 술이 확 깼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했다. 아이가 말했다.

"삼촌. 다음에는 아빠도 데려와 줘요."

하켄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삼촌이 꼭 데려올게."

"약속이에요?"

"그때까지 엄마 말 잘 듣고 있어라."

그렇게 말한 하켄은 아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린 뒤, 맥주를 꿀꺽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식탁에 머리를 처박았다.

취한 건지. 취한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이와 다른 주민들은 그런 하켄을 옮겨 어딘가로 사라졌다.

"...."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일은 잔을 내려놓았다.

바깥에서 마을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가 오는군.'

은밀한 발걸음이다.

데일은 밖으로 나가 누가 오는지를 확인했다.

키가 유달리 큰 차가운 눈의 사냥꾼. 마젤이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카젤도 데일을 발견했다. 그 차가운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데일 경?"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

데일이 말했다.

"한발 늦었군."

"이게 무슨.... 설마 진짜로 거인의 영역을 지나치는 데 성공한 것이오?"

"거기에다 마법사와의 싸움도 이미 끝마쳤다. 뭐, 진짜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마젤은 왁자지껄한 마을 분위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끄러움이야말로 데일과 하켄이 여인과 싸워 이겼다는 증거다.

졌다면 이 활기 넘치는 마을에도 싸늘한 정적만이 흘렀을 테니.

마젤을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두어 차례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인의 영역을.... 무모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자신이 있었던 것일 줄이야."

한숨을 내쉰 마젤이 말했다.

"혼자서 마법사를 사냥하니 마니 으스댔는데, 꼴이 우습게 되었군. 가란드에게 내 몫의 의뢰금을 받으면 전부 주겠소."

데일은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다. 너는 어디까지나 원칙을 지켰을 뿐이다. 멋대로 행동한 건 우리 쪽이지."

마젤은 고개를 저었다.

"내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했소. 세상에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니 절대 단정 짓지 말라고. 하지만 난 둘이 거인의 영역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계획에서 완전히 배제해버렸소. 그리고 보다시피 늦장을 부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마젤은 얼굴에 새겨진 커다란 흉터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쓰라린 상처가 있어야 교훈이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오. 그러니 이번 의뢰금은 모두 경과 하켄에게 주겠소."

상처가 있어야 교훈이 남는다라.

마젤 나름의 원칙인 듯했다.

솔직히 말해 데일은 마젤이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이 그렇다면야.'

굳이 반복해서 거절할 필요는 없다. 돈을 받고 헤벌쭉해질 하켄의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데일은 마을 쪽을 가리켰다.

"들어와라. 연회가 한창이니,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실 수 있을 거다."

"술은 됐소. 비를 피할 빈집만 있으면 그걸로 족하오."

마젤은 터벅터벅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 밤. 늪지 마을에는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전날 그렇게 술을 퍼마셨건만, 하켄은 해가 뜨자마자 일어났다.

전선에서 복무한 경험이 만들어낸 습관이었다.

하켄은 부스스한 눈으로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라? 마젤은 언제 왔어요?"

"어젯밤에 찾아왔다."

하켄은 능글맞게 웃었다.

"하하. 그러면 우리 둘이서 무시무시한 마법사를 쓰러트린 이야기는 아직 못 들었겠네요? 이거, 마젤씨 몫까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거 몰라."

하켄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리 말했다. 마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인간에게 자기 의뢰금을 준다고 말한 걸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하켄은 괜히 깨갱해서 덧붙였다.

"노, 농담이었어요."

일행이 떠날 채비를 하자 마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켄에게 말했다.

"가는 거야?"

"으응."

"몸조심해. 밥 꼭 챙겨 먹고 다니고. 빨래도 자주 하고. 어서 결혼할 사람도 구해야지."

"알았어."

"그리고 지금 보내는 돈이 너무 많다고.... 그이에게 전해줘. 우린 이것보다 적은 돈으로도 잘 살 수 있어. 그러니 우리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 말고, 덜 벌어도 좋으니까 안전만 신경 써. 알았지?"

"으응. 퀼에게 그렇게 말해놓을게."

머쓱한 얼굴로 답한 하켄이 횡설수설 말했다.

"아, 어젯밤에 너무 많이 마셨나. 출발하기 전에 물 좀 빼러 가야겠네."

그러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걱정스레 쳐다보던 마리가 데일에게 말했다.

"기사님."

"...?"

"하켄 좀 잘 부탁해요. 생각이 좀 짧고, 방정맞은 구석이 있어도 여리고 좋은 사람이에요. 친구가 죽은 것도 숨기고, 혼자서 그 가족들을 책임질 정도로요."

잠시 멈칫한 데일이 물었다.

"알고 있었나?"

마리가 슬프게 미소 지었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마을에 안 올 때, 이미 얼추 짐작하고 있었어요. 이번에 얼굴 보고 확신하게 되었지만요."

하켄은 퀼의 몫까지 고향에 돈을 보내고 있었던 건가.

'요즘 돈이 부족하다고 징징대더니, 그럴만했군.'

마리는 품에서 묵직한 자루를 꺼냈다. 그러고는 자루를 열어 그 안에 반짝이는 은화를 보여주었다.

"전부 하켄이 보내준 거예요.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뒀어요."

"많군."

"예. 언젠가 하켄이 용병 일을 그만둔다면. 그때 하켄이 새 출발 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부디 하켄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기사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데일이 답했다.

"노력은 해보겠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퉁명스러운 대답으로도 만족하는 모양이다.

마리는 자루에서 돈을 꺼내 건네려 했지만 데일은 거절했다.

의뢰비란 의뢰를 성공해야 받는 거지, 미리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사이 하켄이 돌아왔다.

"엉? 둘이 뭔 얘기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출발하죠! 갈 길이 먼데."

짐을 추스른 하켄은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데일과 마젤도 그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걷던 데일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와 그 자식들이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서로를 위해 서로를 속이는 관계라....'

피는 안 섞였지만, 분명 이들은 가족이었다.

데일은 그런 하켄이 부러웠다.

'돌아올 장소.'

하켄의 모험이 끝나는 날, 그는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데일의 모험이 끝나는 날, 과연 그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 앞서가던 하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결심했습니다!"

"뭘."

"이번에 도와만 주신다면 제가 하인이라도 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평생 데일 경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게 설령 불구덩이 속이라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당장 조금 전에 마리에게 부탁받았는데,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딱딱한 대꾸에 바보같이 웃던 하켄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라. 어느새 비가 그쳤네."

우중충한 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빛이 비집고 나와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장마가 끝나고, 계절이 바뀐다.

여름이 다가온다.

하지만 바뀌는 건 계절 만이 아닐 것이다.

"...."

점점 밝아오는 하늘과 참나무에 앉아 한가롭게 깃털을 고르는 까마귀들을 차례로 바라본 데일은 이내 고개를 내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돌아가 이번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일행은 가도를 따라 힘껏 걸었다.

* * *

용병 길드.

가란드의 집무실에 손님이 한 명 찾아왔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경비대장 카달이었다.

카달은 다짜고짜 서류를 하나 건넸다.

"읽어보게."

"하하. 뭐길래 그리 급하십니까."

가란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류를 훑었다.

이내 그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진심이십니까?"

"이대로 가만히만 있으면 안 되지 않나.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속으로 신음을 삼킨 가란드가 중얼거렸다.

"한동안 도시가 또 시끄럽겠군요."

늑대

* * *

늪지 마을에는 적당한 짐 마차가 없었다.

돌아갈 때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걸어서 가야 했다.

비가 그치자마자 쨍한 햇빛이 떠올랐다. 습하고 더운 날씨는 행군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하이고 벌써 이렇게 더우면 올여름은 어떡하나."

하켄은 얼굴에 대고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이런 더위에도 그는 투구나 갑옷을 절대 벗지 않았다.

전장에서 들인 습관으로, 조금 더운 게 화살에 맞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논리였다.

여러모로 불쾌함이 진해지는 날씨지만, 마젤은 집중을 잃지 않았다.

그는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켄이 물었다.

"왜 그래요 마젤."

"이 근방에는 위험한 짐승이 많더군. 올 때도 세 번이나 습격당했소. 덕분에 늦어버렸지."

"아. 원래 이 주위가 좀 위험하긴 하죠."

다만, 마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동하는 내내 일행이 습격당하는 일은 없었다.

무장한 사람 둘에 흉흉한 기운을 흩뿌리는 기사까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음?"

앞서가던 마젤이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짐승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고, 털이나 피 따위가 흩뿌려져 있었다.

"늑대들끼리 싸운 것 같소."

"늑대 무리가 서로 영역 다툼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죠."

"한데 이상하오. 흔적을 봤을 때는 무리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다른 늑대 무리를 상대로 싸운 것 같은...."

마젤은 유달리 크게 찍힌 발자국을 살폈다. 묘하게 눈에 익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이 발자국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냈다.

'마법사가 늑대 무리를 데리고 다닐 때, 유달리 멀리에서 따라가던 놈이 하나 있었지.'

데일에게 듣기로, 여인이 부리던 늑대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늑대는 뭘까?

의문이 들었지만 마젤은 빠르게 상념을 털어내었다.

거대한 덩치의 늑대는 분명 위협적이지만, 지금은 크게 경계할 필요 없다.

어지간한 짐승은 데일이 단칼에 베어버릴 테니 말이다.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 일행은 들판에서 밤을 맞이했다.

하켄은 야영 준비를 하며 마젤에게 말했다.

"마젤. 저녁에는 고기 좀 먹을 수 있을까요? 토끼 같은 거라도 구워 먹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맡겨두시오."

사냥꾼이 용병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데에는 이런 장점 때문도 있었다.

건량이나 육포 대신, 신선한 고기를 사냥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마젤은 군말 없이 일어나, 활과 화살집을 챙겼다.

그의 실력이라면 오래지 않아 토끼 한두 마리는 사냥해 올 것이다.

하지만 마젤은 열 걸음도 걷지 않아 자리에 멈췄다.

"음."

"왜 그래요."

"이것 좀 보시오."

불을 피우려던 하켄과 데일이 마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마젤이 가리킨 곳에는 웬 멧돼지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녀석이었다.

"아니 대체 여기에 웬 멧돼지가...."

마젤은 죽은 멧돼지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송곳니에 물어뜯긴 상처가 나 있었다.

"늑대 짓이오. 숨통을 끊고 나서 이곳에 옮겨 놓았군. 마치 우리 보라고 하듯이 말이오."

셋은 시선을 교환했다. 이쯤 되면 뭐가 이상하긴 했다.

데일은 감각을 집중해 주위를 훑었다. 키 낮은 수풀 속에서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어찌나 은밀하게 숨어 있었는지, 집중하지 못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라."

그러자 수풀 속에서 무언가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덩치의 회색 늑대.

하켄은 늑대를 알아보았다.

"아. 저놈 저거, 우리가 가죽 벗길 때 노려보던.... 허. 여기까지 쫓아왔네. 복수하려고 찾아온 걸까요?"

마젤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소. 우리가 지금껏 오는 동안 짐승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잖소. 그거, 아무래도 저 늑대가 쫓아내서 그런 것 같소."

마치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늑대는 천천히 걸어 나와 멧돼지 사체를 코로 툭 건드렸다.

그러고는 이쪽을 쳐다보며 크릉, 울었다.

"뭐야 저거. 설마 선물이라고 주는 겁니까?"

"동료를 세뇌한 원수에게 대신 복수해줬으니, 그 은혜를 갚는 것 아니겠소?"

"아니, 늑대가 은혜를 갚는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마젤도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오. 어쨌거나 꽤나 영리한 놈인 것 같소. 인내심도 뛰어나고, 상대를 추적하거나 기척을 숨기는 법도 잘 아는 것 같소. 타고난 사냥꾼이라는 말이오."

늑대는 마젤이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리에서 절묘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여느 평범한 늑대와는 다르다는 뜻이었다.

데일은 앞으로 다가갔다.

멧돼지에 손을 올리고, 늑대를 향해 물었다.

"나한테 주는 건가?"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알아듣는 건지, 적당히 눈치로 대답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뜻이 전해진다는 건 알았다.

"고맙다. 은혜는 더 갚을 필요 없으니 그만 가봐라."

늑대는 뒤로 두 걸음 이동한 뒤, 멈춰 서서는 다시 이쪽을 쳐다보았다.

"가라니까?"

그러자 늑대는 아예 배를 깔고 앉아서는, 고개를 훽 돌리며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하켄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가기 싫은가 본데요. 우리랑 함께 가고 싶은 거 아닐까요? 정확히 말하면 데일 경이랑요."

"나보고 늑대를 키우라고?"

"뭐, 안 될 거 있나요?"

마젤도 말을 얹었다.

"손해 볼 건 없을 거요. 보기 드물게 영리한 녀석이니. 나중에 쓸모없어지면 죽여서 가죽과 고기를 팔면 되는 것 아니오?"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이 약한 세상의 주민다운 발언이었다.

척박한 세상에서 가축이라는 건 결국, 쓸모없으면 처분하는 재산일 뿐이니.

데일은 늑대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늑대도 그런 데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받아 달라 온 것치고는 딱히 간절해 보이지도, 애교를 떨지도 않았다.

그 고고함이 마음에 들었다.

데일은 잠시 고민하다, 마젤에게 물었다.

"늑대가 길 안내도 할 수 있을 것 같나?"

마젤은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는 데일이 지독한 길치라는 걸 몰랐다.

"...뭐. 영리한 녀석이니 가능하지 않겠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회색 늑대는 딱히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크릉하고 짖을 뿐이었다.

하켄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런 커다란 늑대를 데리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사람들이 기겁하겠는데요?"

"어차피 나 혼자 다녀도 기겁한다."

"아...."

어색한 표정을 지은 하켄이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두신 이름은 있습니까? 계속 늑대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이름이라.... 하티. 정도면 괜찮겠지."

"음. 왠지 제 이름이랑 비슷해서 기분이 묘한데요. 너는 괜찮냐?"

하켄은 괜히 하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하지만 하티는 꼬리를 한차례 휘저을 뿐, 아무 대답도 안 했다.

맘대로 부르라는 표시 같았다.

"거 도도한 녀석일세."

헛웃음을 지은 하켄은 시선을 돌려 죽은 멧돼지를 보았다.

덩치가 워낙 큰 동물이다.

요리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됐고. 빨리 밥이나 먹읍시다. 손질하는 데만도 한세월이겠네."

고개를 끄덕인 마젤은 칼을 꺼내 멧돼지를 능숙하게 해체했다.

그리고 다리 한 짝을 잘라내 하티에게 던져주었다.

하지만 하티는 멀뚱히 고기를 쳐다보다, 데일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도 된다."

그제야 하티는 다리를 오도독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 충성심 강한 모습에 하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보다 낫구만."

* * *

며칠간 계속 이동한 끝에 일행은 이레네에 다다랐다.

빈민가의 아이들이 이쪽을 기웃거렸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짐마차를 이용하지 않아 식량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했다.

'줄 만한 게 없군.'

하지만 정작 다가오는 아이들도 없었다.

몇몇 아이들이 기웃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부모로 보이는 어른이 와 꾸짖었다.

"얘. 오늘은 나가지 말라고 엄마가 얘기했잖니!"

빈민가의 주민들이 순식간에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지루한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하켄이 말했다.

"뭔가 평소랑 분위기가 다른 것 같은데. 저만 그렇게 느끼나요?"

거리가 휑하다.

길가에 선 허름한 집의 창문에는 경계하는 기색의 눈빛들이 이쪽을 훑고 있었다.

데일과 눈이 마주치자 사람들은 얼른 창문에서 사라졌다.

"그래.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하군."

묘한 기류가 흐른다고 해야 할까.

무슨 일이 벌어지긴 한 모양이다.

일행은 서둘러 도시의 남쪽 성문을 통과해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빈민가와 달리, 성벽 안은 이전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넘치는 활기.

하지만 그 분주함도 일행이 다가서자 뚝 멈췄다.

사람들은 데일을 보며 한번 놀랐고, 그 뒤에 있는 커다란 늑대를 보며 두 번 놀랐다.

"세, 세상에. 이제 저 이교도가 괴수를 데리고 다니잖아."

"얼마 전에 악어를 풀었다는 것도 설마...."

수군거리는 행인들을 향해 하티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겁을 집어먹은 행인들이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데일은 하티의 털을 쓰다듬어주었다.

"잘했다."

하티는 꼬리를 한번 흔들어 데일의 허리를 툭 쳤다.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행인들이 물러나 준 덕에 일행은 용병 길드로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길드 사무소에 도착하니 직원에게서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직원이 위층으로 올라가 달라고 말했다.

"나부터 가면 되나?"

"아뇨. 마젤 님이랑 하켄 님이랑 다 같이 올라와 달라고, 지부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의뢰 보고는 각자 따로 하는 게 원칙이다.

용병들이 혹시라도 무언갈 숨기거나 실적을 부풀리는 걸 막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가란드는 셋이 같이 올라와 달라고 부탁했다.

"알았다."

대답한 데일이 일행과 함께 올라가려 했다. 그때, 직원이 그런 데일을 붙잡았다.

"저, 저기. 혹시 그 늑대도 데려갈 건가요?"

"역시 안 되나?"

"아무리 그래도 좀...."

"그러면 잠시 네가 맡아주겠나?"

데일의 물어보자, 하티가 직원을 향해 흉흉히 눈을 빛냈다.

당황한 직원이 되물었다.

"사, 사납게 보여도 물지는 않죠?"

"글쎄. 일단 사람 맛을 아는 놈이긴 하다."

거짓말은 아니다.

유물 지팡이를 사용하던 여인의 팔을 통째로 씹어 먹었으니까.

직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데일이 다시 한번 물었다.

"맡아주겠나?"

"아, 아, 가, 같이 올라가셔도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계단을 올랐다. 그 뒤를 하티가 따랐고, 하켄도 뒤늦게 다가와 말했다.

"왜 직원들 겁을 주고 그러십니까."

"때로는 백 마디 설득보다 적당한 공포가 나을 때도 있다."

"으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겁주는 걸 즐기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짧게 대꾸한 데일은 가란드의 집무실 문 앞에서 멈췄다. 손을 뻗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일행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가란드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굵은 허리와 억센 팔을 가진 드워프. 외곽구역의 경비대장인 카달이 앉아 있었다.

가란드가 반가운 얼굴로 일행을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데일 경, 마젤, 하켄, 그리고.... 늑대?"

가란드를 본 하티는 몸을 낮게 웅크리고,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비교적 얌전히 지내던 하티가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다.

마젤과 하켄은 하티가 왜 이러는지 의아해했고, 가란드는 당황했다.

"음. 짧은 사이에 사나운 동료가 생겼군요. 혹시 달려들지는 않겠죠?"

"걱정마라."

데일은 하티를 툭툭 두드려 뒤로 물렸다. 하티는 여전히 가란드를 경계했지만, 데일의 명령에 다시 얌전해졌다.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낸 가란드가 말했다.

"일단 의뢰 보고부터 들어야겠죠.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잠자코 있던 마젤이 되물었다.

"그전에 왜 우리를 다 같이 불렀는지 묻고 싶소. 경비대장은 왜 있는지 모르겠고."

"아. 그게 말이죠."

가란드는 카달과 한차례 시선을 교환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용병 길드에서 조만간 대규모 소집 공고를 낼 예정입니다."

마젤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대규모 소집 공고? 대체 무슨...."

용병을 대규모로 긁어모으겠다는 말.

당연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수색

* * *

에스델은 교단의 본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여과된 빛이 에스델의 머리 위로 찬란하게 흩뿌려졌다.

그녀는 교단의 상징인 은 고리를 앞에 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은 고심에 가득 차 있었다.

"고민이 있는 모양이구나 에스델."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스델은 뒤를 돌아보았다.

굳센 인상의 노파가 서 있었다.

"오르단 사제님."

오르단.

교단의 고위 사제로, 성녀를 대신할 유망주로 불리는 에스델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오르단은 늘 에스델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스델은 그런 엄격함 뒤에 자애와 사랑이 있음을 안다.

그녀는 에스델이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오르단이 속내를 물어보니, 에스델은 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마음이 혼란스러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혼란스러운 것이냐."

머뭇거리던 에스델이 답했다.

"교단에 찾아왔던.... 흑기사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그가 왜?"

오르단의 눈에 궁금증이 어렸다.

"얼마 전에 그가 도적 길드를 소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싸움을 엿보았던 빈민가의 주민들이 말하더군요. 전의를 잃고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도 모두 예외 없이 처단했다고. 그야말로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고."

오르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델이 이어 말했다.

"그들은 분명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좀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돕니다. 아뇨. 사실 압니다. 그저 제 치기 어린 이상이라는 것을. 어린아이의 투정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그 이교의 기사에게 실망한 것이냐?"

"실망... 은 아닙니다."

에스델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제가 그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그 기사는 어떤 인물이었느냐."

"...."

에스델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데일은 그 존재만으로 에스델의 믿음과 신앙을 시험하는 이였다.

그간 에스델은 이교도하면 모두 사악하고 잔악무도한 이들이라 여겼다.

아니, 에스델뿐만 아니라 교단의 대부분은 그리 생각한다.

하지만 데일은 아니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먹을 걸 나눠주는 걸 보았다.

그가 죽은 자들에게 보이는 예의를 보았고, 누구보다 앞장서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데일은 어딘가 뒤틀려있을지언정 분명....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존경심이 들 정도로...."

다른 신앙인들에게는 선뜻 고백하기 힘든 말이다. 이교도를 그리 칭한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므로.

하지만 오르단에게라면 말할 수 있다.

"그 생각은 여전하느냐?"

"...네. 단지 제가 멋대로 기대한 모습과 데일 경이 일치하지 않으니, 멋대로 충격받은 것 같습니다. 선뜻 그의 신원을 보증한 게 잘못된 결정이었을까 후회도 되고, 그런 제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지고요."

오르단은 잠시 눈을 감고 에스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교단의 많은 이들은 네가 그 기사와 함께하는 걸 좋게 보지 않는단다. 흰 도화지 같은 네게 검은 물이 들까 걱정하는 거지."

"...."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단다. 온실 속에서 편하게 자란 화초보다, 억센 환경에서 자라난 잡초가 더 질기고 강인하다는 얘기를 알고 있느냐?"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한때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다.

농사에 대한 지식 정도는 있었다.

오르단이 이어 말했다.

"신앙과 믿음도 마찬가지란다. 아무런 고뇌 없는 믿음은 작은 풍파에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란다. 역설적이지만,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의심이란다."

오르다는 에스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려무나. 그 의심에 부딪히고 싸워 이겨냈을 때. 그때 비로소 네 믿음이 굳건히 설 것이란다."

"사제님...."

"그 흑기사가 네 믿음과 마음을 뒤흔든다면, 계속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러다 보면 신께서 네 마음을 밝히어 주시겠지."

오르단이 미소 지었다. 입가에 패인 주름이 인자함을 자아냈다.

그런 오르단을 멍하니 쳐다보던 에스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머리가 환해지는 기분이에요."

"젊은이에게 그럴듯한 조언을 건네는 건, 노인네들의 몇 안 되는 쓸모란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자. 이제 궁상은 그만 떨고 일어나려무나. 다른 형제자매들이 걱정 많이 하고 있단다."

"아...."

"마침 식사시간이니 함께 가자꾸나."

그렇게 말한 오르단은 고개를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따뜻한 뒷모습을 보며 에스델은 미소 지었다. 고민을 털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오르단 사제님이야.'

하지만 에스델이 보지 못한 게 있었다.

고개를 돌린 오르단의 얼굴이 마치 조금 전의 인자한 사제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인 듯.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차갑고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에스델은 모를 것이다.

의심을 이겨낸다면 분명 믿음이 굳건해질 것이나, 언제나 승리할 수만은 없다는 걸.

오르단은 말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의심을 이기지 못해, 잘못된 길에 들어섰는지를.

* * *

대규모 소집 공고.

갑작스러운 선언에 일행이 의아해하자, 가란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압니다. 갑작스러운 얘기죠. 하지만 설명에 앞서, 우선 의뢰에 대해 보고해주시겠습니까? 소집 공고와도 연관이 있으니까요."

"알았소."

데일이 우선 대략적인 내용을 보고했고, 마젤이 중간중간 빠진 부분을 보충했다.

몰살당한 마을. 늑대 무리.

목표의 이동 경로를 읽고 데일과 하켄이 거인의 영역을 지난 일. 마젤이 따로 떨어져 이동한 것.

그리고 여인이 지니고 있던 유물 지팡이까지.

보고가 끝날 때까지 경청한 가란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미리 목표의 경로를 읽고 앞서나가 마을의 피해를 방지하다니. 그것도 거인의 영역을 지나는 위험까지 감수하고.... 중간에 조금 삐걱댄 부분도 있지만, 결국. 의뢰를 성공해냈으니 완벽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카달도 감탄했다.

"확실히 소문대로 깔끔한 일처리군. 그 명성 높은 용병왕도 이런 식으로 일했다 했는데.... 데일 경. 혹시 경비대는 관심 없나? 내 힘으로 좋은 자리에 꽂아줄 수 있는데."

자기 눈앞에서 길드의 용병을 채가려는 카달의 모습에 가란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당당함이야말로 카달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데일이 탐이 났다는 뜻도 되지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괜찮소."

"쩝. 고민하는 시늉이라는 해주지...."

"그보다 보고가 끝났으니,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야 할 것 같소만."

마젤이 중간에 끼어들어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걸 막았다.

카달도 아쉬운 기색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그 년을 쫓는 동안, 수로에 풀어놓은 악어는 대강 다 사냥했다."

하켄이 물었다.

"아니, 대강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그게. 너무 대충 아닙니까?"

카달이 버럭 화를 냈다.

"그년이 악어를 몇 마리나 풀었는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가뜩이나 장마 때문에 물 불어나서 찾기도 힘들었는데. 작정하고 숨어 있는 놈이 한두 마리 있을 수도 있지. 그런 것까지 내가 설명해야 하나?"

"...죄송합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하켄이 깨갱했다.

쓴웃음을 지은 가란드가 말했다.

"다행히 이번 일은 여러분과 경비대가 활약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요근래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가란드는 최근 일어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 서류철을 뒤적이며 말했다.

"당장 데일 경이 이전에 도적 길드를 소탕할 때 만났던 흑마법사도라거나, 이번에 악어를 풀어놓은 여자라거나. 그 외에 크고 작은 위협 행위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그 범인이 잡혔지만, 놓친 경우도 좀 있고요."

카달은 분개하며 외쳤다.

"이 도시는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세우신 도시이며, 인류의 마지막 보루다! 이런 곳을 어떤 개새끼들이 무너트리려 하고 있어!"

"...악마의 소행이오?"

마젤의 물음에 가란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확한 배후는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도시에 행해지는 위협 행위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란드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대로면 도시가 위험합니다. 상위구역은 몰라도, 적어도 외곽구역은 위험하죠. 그래서 평의원 사이에서 많은 의견이 오고 갔는데, 대안으로 나온 게...."

"도시의 검문을 강화하고, 빈민가를 대대적으로 뒤엎을 거다."

카달이 그리 말하자 잠시 정적이 일었다.

일행은 카달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가란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워낙 과격한 얘기니, 놀라시는 게 당연합니다. 빈민가를 뒤엎는다니.... 평의원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카달은 탁상을 쾅 내리쳤다.

"과격해도 꼭 필요한 일이야! 개수작 부리는 놈들을 사로잡아 조사하니, 열이면 열 빈민가에 지내면서 일을 준비했다고! 지금도 그런 놈들이 잔뜩 숨어 있을 텐데, 그걸 그냥 내버려 두라고?"

그야 당연한 일이긴 했다.

빈민가는 성벽 안에 비해 치안도 나쁘고 감시도 느슨하다.

음험한 수작을 부리려는 범죄자들이 숨어 있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문제는 빈민가의 반응이다.

데일이 말했다.

"빈민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빈민가는 크다.

빈민가의 인구가 성안의 모든 인구와 맞먹을 정도다.

그리고 지금도 악마에게 멸망한 국가의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으므로, 앞으로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비록 경제적 상황은 성안 사람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하나, 숫자는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법이다.

'게다가 명분도 문제지.'

지금껏 평의회는 빈민가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데일이 빈민가에서 도적 길드 하나를 박살 낼 때, 경비대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게 그 증거다.

데일이 성안에서 그런 살육을 벌였다면, 상대가 도적들이라 해도 감옥 안에 처박혔을 거다.

그렇게 나 몰라라 하다가 이제 와서 도시가 위험하다고 빈민가를 뒤엎으려 한다?

안 그래도 반골 기질이 강한 빈민가 사람들이다.

만만치 않은 저항이 있을 거다.

가란드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평의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만.... 일단 분위기는 강행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니 소집 공고를 내는 이유를 아시겠죠?"

"뒷골목을 뒤엎고 다닐 때 용병들 힘을 빌리겠다 이 말이군."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입니다. 저희는 최대한 평화적으로 일을 치를 겁니다."

만약의 사태라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게 예상되니, 비싼 돈을 주고 주고서라도 사람을 긁어모으려는 거다.

가란드도 자기가 얘기해 놓고 민망한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건. 세 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워낙 실력 있는 분들이니."

"소집은 강제인가?"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평소보다 의뢰비가 넉넉히 지급되고, 다른 의뢰보다 실적이 크게 책정됩니다. 어때요. 흥미가 있으십니까?"

"오...."

하켄은 관심을 보였다. 확실히,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끔찍한 악마 하수인이나 포악한 외눈 괴물. 유물 지팡이를 사용하는 미친 여자보다는 빈민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더 나았으니까.

그때, 듣고 있던 카달이 소리쳤다.

"당연히 해야지! 이건 고민할 거리도 못 되는 일이다!"

"카, 카달씨."

"우리는 황제 폐하의 신민으로서 그분의 은혜를 입었다! 그 은혜를 갚을 기회가 왔는데, 거절해서는 아니되지!"

얘기를 듣던 데일은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딱히 황제한테 빚진 기억은 없는데.'

어쨌든. 충성심 강한 경비대장은 도시의 모든 주민이 황제의 은총을 받았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켄도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와. 요즘 보기 드문 꼰대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마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젤?"

"나는 됐소. 이런 일은 내 전문이 아니오. 다른 사람 알아보시오."

카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하지만 마젤은 그 시선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데일과 하켄에게 인사했다.

"둘 다 이번에 고생했소."

"아. 고생했어요."

"수고했다."

"다음에 또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소."

그답지 않게 훗날을 기약하는 말을 뱉은 마젤은 미련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그 시원하면서도 단호한 태도에 익숙한 가란드는 쓴웃음을 지었고, 카달의 얼굴은 잘 익은 과일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가란드는 카달이 분노를 터트리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뭐. 마젤은 어쩔 수 없죠. 데일 경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의뢰를 맡으시겠어요?"

데일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수색

* * *

데일은 길드 건물을 나섰다. 하켄이 물었다.

"이제 어디 가십니까?"

"신전."

"아, 그럼 다녀오세요."

하켄의 배웅을 받은 데일은 늑대 하티와 함께 길을 걸었다.

벌써 밤이었다.

하지만 도시는 어둡지 않았다. 각 건물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주위를 밝혔다.

당장 해가 지면 새까만 어둠이 펼쳐져,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야 하는 빈민가와는 영 다른 모습이다.

'어수선하군.'

날이 저물었음에도 사람들은 분주히 돌아다녔다. 단순히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데일은 어수선하다고 느꼈다.

묘한 기류가 흐른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소식 빠른 시민들은 곧 있을 일에 대해 전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했나.'

뒷골목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는 계획은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반대하는 평의원들이 있고, 논의할 것도 많다.

하지만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정식 공문이 발표될 예정이라고. 가란드는 귀띔해주었다.

생각에 몰두하던 사이, 하티가 뭉툭한 코로 데일의 허리를 툭 건드렸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신전의 허름한 입구에 도달했다.

데일은 하티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머지않아 평소와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새까만 어둠. 목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안대로 눈을 가린 사제장 에리얼.

한데, 오늘따라 신전에 사람이 많았다.

신도로 보이는 이들이 에리얼을 둘러싸 웅성거리고 있었고, 에리얼은 곤란한 기색으로 그런 신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흔한 광경은 아니다.

밤의 여신을 섬기는 신도 수는 교단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다.

그마저도 세간의 인식 탓에 신앙을 숨기는 경우가 많기에, 직접 신전을 찾는 이들은 소수.

이렇게 사람이 몰리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몇몇은 양초가 든 램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어둠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일반 신도임을 의미했다.

데일이 하티와 함께 내려서자 실내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신도들은 멍하니 데일을 쳐다보다, 일제히 웅성거렸다.

"저분이 그.... 맞지?"

"세상에. 진짜 데일 경이야."

"참으로 든든하시어라...."

신도들은 데일을 보며 감격에 겨워했다. 몇몇 눈가는 촉촉해지기까지 했다.

길거리를 걸을 때와는 정반대의 반응이다.

데일에게는 달갑지 않은 시선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부담스러운 상황을 해소해준 건 에리얼이었다.

에리얼이 신도들을 해치고 두 걸음 걸어 나왔다.

"오셨군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저쪽에서 무어라 말을 걸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기도실을 사용하고 싶다."

"아무 기도실에나 들어가면 됩니다. 지금은 전부 비어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성큼 걸음을 옮겼다.

신도들이 옆으로 물러나 데일에게 길을 터주었다.

몇몇은 말을 걸고 싶어 했으나, 그 옆에 선 커다란 늑대 탓에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데일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저들이 자신한테 무얼 기대하는지는 몰라도, 데일은 그 기대를 충족해줘야 할 의무가 없었다.

데일은 기도실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하티에게 지시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하티는 알겠다는 듯. 꼬리를 한 차례 흔들었다.

데일은 기도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투구를 벗었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제단 위에 올려진 은촛대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형상을 이루었다.

[데일. 내 아들. 어서 오너라.]

밤의 여신은 여느 때와 같이, 긴 머리카락을 바닥에 드리우며 반가이 맞았다.

창백하고 하얀 발이 데일을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데일은 말했다.

"우선 제물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래. 그리하거라. 어떤 축복을 원하느냐?]

데일의 눈앞에 세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근력 상승"

"갑옷 강화"

"영혼 강화"

신전에 방문하는 건 오랜만이다. 모아 놓은 영혼의 양도 적지 않다.

데일은 신중히 고민했다.

사소한 능력치 차이가 싸움의 승패를 가를 수 있다. 섣불리 결정해서는 안 된다.

'우선 영혼 강화는 제외.... 아니지.'

영혼 강화는 마력과 정신력 능력치를 올려주는 선택지다.

당장 마력을 활용하는 기술이 없는 데일에게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데일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데일이 여신에게 물었다.

"혹시 새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까?"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흑기사라는 직업은 3등급부터 기술을 하나둘 배우기 시작해, 5등급에서부터는 특성화를 시작한다.

흑기사는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특성화를 하냐에 따라 다양한 육성이 가능하다.

지금처럼 무식하게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데일의 질문에 여신이 머쓱한 어조로 말했다.

[으음. 깜짝 놀래켜 주려고 일부러 숨기고 있었는데.... 맞다.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다.]

"그러면 그것부터 배울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여신은 데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강한 힘이 소용돌이치며 데일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데일은 눈을 감았다.

몸속에 흐르는 새로운 힘을 말없이 음미했다.

여신이 설명했다.

[새로운 기술이라는 말은 조금 틀린 표현 같구나. 원래 흑기사로서의 너에게 잠들어 있던 잠재력을 일깨워, 개방하는 것뿐이다. 눈을 떠 몸을 확인하거라.]

눈을 감았던 데일은 다시 눈을 뜬 뒤, 몸을 살폈다.

여인이 물었다.

[변화가 느껴지느냐?]

꼼꼼히 몸을 둘러보던 데일은 금방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공간 속에서 유독 데일 주위가 더 어두웠다.

어둠에도 고저가 있는 것일까?

이성으로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데일 주위의 어둠. 혹은 그림자가 더 짙은 건 단순히 착각이 아니었다.

여신이 설명했다.

[평소에 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한기와 오싹함을 느꼈을 거란다. 그 기운을 실체화한 게 바로 그 어둠이지. 한번 머릿속으로 어둠을 흩뿌린다고 생각해 보아라.]

데일은 그리했다.

자기 주위에 어둠을 흩뿌리는 상상을 했다.

어렵지 않았다.

지금 그가 어떤 기술을 익혔는지는 게임을 통해 이미 경험해보았으니까.

사아아아!

어둠이 데일의 의지에 반응했다.

어둠이 데일의 손에 모여들더니 다음 순간. 온 공간을 뒤덮는 안개가 되었다.

데일은 이 기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검은 안개."

[그래. 그런 이름이란다.]

검은 안개.

일정 범위에 어둠을 흩뿌려 공격하는 광역 기술.

단순히 시야를 가리기만 하는 기술은 아니다.

안개와 접촉한 이들은 공포와 한기를 느끼며, 정신력이 약한 이들은 아예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영 미묘한 기술이었을 것이다.

진짜 중요한 효과는 따로 있다.

'접촉 대상의 생기를 흡수할 수 있지.'

물론. 살아있는 대상에게 생기를 흡수하려면, 데일의 수준이 지금보다 높아야 하며 기술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살아있지 않은 대상에게서는 생기를 흡수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예를 들면 주위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면, 굳이 일일이 건틀릿을 박아 넣지 않아도 된다.

안개를 흩뿌리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흡수할 수 있다.

'전투 중에는 여유가 없을 때가 많으니까. 그럴 때 사용하면 좋겠군.'

여신이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드느냐?]

"예."

[마력을 잡아먹는 기술이니, 무한정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 거란다. 이번 기회에 마력에도 한 번 투자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렇다면...."

잠시 고민한 데일이 대답했다.

"근력에 3분의 2를. 나머지는 갑옷 강화에 투자하겠습니다."

[마력에는 투자하지 않고?]

"예."

[...혹시 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냐?]

여신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유용한 기술이긴 하나, 아직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으음. 아들의 뜻대로 하거라.]

여신은 살짝 서운해했지만, 더 관여하지는 않았다.

밤의 여신이 데일을 한 번 더 부드럽게 쓰다듬자, 몸속에 새로운 힘이 차올랐다.

몸을 이루는 근육이 더 단단해졌고, 갑옷의 광택도 한층 짙어졌다.

데일은 바뀐 몸 상태를 확인했다.

[데일]

등급: 3

직업: 흑기사

근력: 58

내구: 34

마력: 10

체력: ―

정신력: 10

[보유 기술 목록]

생기 흡수

검은 안개

[특성]

반인 반언데드

부정한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악마 하수인 살해자

더 강해진 근력. 그리고 더욱 단단해진 몸과 갑옷.

동일 등급의 다른 직업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능력치.

눈앞의 수치는 데일의 지금까지의 싸움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그가 지금 걷는 길이 옳다는 것도.

이로써 이곳에 들른 목표는 달성했다. 하지만 데일은 질문할 게 있었다.

"물어볼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거라.]

잠시 머뭇거린 데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같은 밤의 신도와 싸운 일이 있었습니다."

데일은 빈민가에서 네크로맨서 처단한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네크로맨서가 어떤 인간이었던지도.

듣던 여신은 씁쓸하게 말했다.

[하킴. 참 가엾은 아이지. 하킴은 성격이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 힘든 인생을 살아왔단다. 그게 그 아이가 행한 악업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데일이 날카롭게 물었다.

"네크로맨서의 행동에 여신님의 뜻이 관여하지는 않았다는 겁니까?"

[오해가 조금 있는 듯하구나.]

여신은 말했다.

[여신이 지상에 할 수 있는 일은 네 생각보다 적단다. 여러 제약에 묶여있으니 말이다. 많은 신도를 거느린 빛이라면 몰라도, 여신이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힘을 내려주고, 목소리를 들려줄 뿐이란다. 아이들이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여신의 말을 따를지는 온전히 그 아이의 몫이란다.]

여신은 이어서 설명했다.

사람은 무수한 변수와 가능성을 가졌으며, 그 속내는 깊고도 복잡해 저 우주와도 비견되니. 설령 신이라도 온전히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몫.'

조금은 무책임하게 들리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밤의 여신이 지닌 한계일 것이다.

여신은 이어 말했다.

[나의 신도들은 오랜 세월을 박해받아 왔단다. 지하로, 깊은 산으로, 황무지로 도망쳐야 했었지. 그곳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며 고난을 버텨야 했단다.]

그리고 박해받는 신앙은 잔인하고 지독해지기 마련이다.

밤의 신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고, 그런 절박함은 대를 이어가며 점점 끔찍한 무언가가 되었다.

데일이 마주쳤던 네크로맨서도 아마 그런 결과물 중 하나이리라.

[여신이 아이들을 지켜줘야 했는데.... 그와 관련해서 데일 네게 부탁이 하나 있다.]

"부탁, 말씀입니까."

여신이 부탁이라니. 드문 일이다.

[기도실을 나가면 에리얼 그 아이가 말을 걸 거란다. 네가 겪은 과거의 일 때문에 엘프를 경계하는 건 이해하나, 부디 대화라도 들어주지 않겠느냐.]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못 들어줄 부탁도 아니었다.

데일은 기도실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음에도 당신의 신도와 싸울 일이 생긴다면, 베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리 해야 한다면 그리하거라. 나는 언제나 아들의 판단을 믿는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밤의 신도를 죽였다가 여신이 노하진 않을까 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데일과 여신은 어디까지나 필요한 걸 주고받는 관계에 불과하지만, 데일에게는 여신이 필요했다.

아직은.

데일은 기도실을 나섰다.

여신은 그런 데일에게 필요할 때만 찾지 말고 얼굴 보러 자주 오라 말한 뒤,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기도실 문을 여니 하티가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데일이 나오자 하티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무심하게 올려다봤다.

일은 다 봤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자."

데일은 복도를 지나쳐 에리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까와 달리 신전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신도들이 다 되돌아간 모양이다.

에리얼은 데일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셨군요."

"그래."

"그러고보니꼭얘기하고싶은일이있는데혹시들어주...."

에리얼은 데일이 평소처럼 쌩하니 사라질 줄 알았나 보다.

그녀는 데일이 떠나기 전에 용건을 전부 말하려는 듯. 말을 마구 쏟아내다가, 멈칫했다.

"엇."

"왜 그러지?"

"아니, 곧바로 떠나버리실 줄 알았는데...."

"천천히 얘기해도 된다."

입가에 실린 에리얼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아. 왠지 데일 경이 저를 경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제 착각이었군요."

사실 착각도 아니고, 여신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데일은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데일 경은 이미 가란드에게 들었겠죠? 조만간 있을 일을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마 용병으로서 빈민가 수색에 동참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거고요."

"그래."

신전의 사제장인 에리얼은 평의원 중 하나였다.

이 정도 정보를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얘기를 왜 꺼낸 이유는 뭘까.

데일이 시선으로 다음 말을 재촉하자, 에리얼은 입꼬리를 내리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는 완전히 반대의 의뢰를 하고 싶습니다."

"반대의 의뢰?"

데일이 묻자, 에리얼이 천천히 힘을 주어 말했다.

"빈민가 수색을 막아주세요."

수색

* * *

빈민가 수색을 막아달라고?

데일은 고민도 없이 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제가 말을 조금 잘못했군요."

에리얼은 정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신도들이 해코지당하는 걸 보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도들이라면 분명, 아까 신전 내부에서 북적거리던 그 사람들을 말할 것이다.

에리얼은 사정을 천천히 설명했다.

"이번 일은 다소 이상한 구석이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 계획부터가 터무니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도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빈민가를 뒤집어엎는다니. 명분은 그렇다 치고, 현실성이 너무 없어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 계획에는 나름 일리가 있었으나, 문제는 빈민가의 규모다.

빈민가 전체를 수색하고, 예상되는 저항을 짓누르려면 그만한 전력이 필요하다.

평의원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그 정도 전력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이 계획에 평의회의 과반이 찬성했습니다. 입안자인 조피스 가주부터 시작해, 경비대장, 상인 길드장, 교단의 주교까지. 미적지근한 가란드를 제외해도, 4명이나 찬성하다니. 반대하는 건 저와 대장장이 길드뿐이죠."

당연한 얘기지만 평의원들은 바보가 아니다. 승산 없는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거나. 특히, 도시의 행정을 책임지는 조피스 가문은 상위 구역의 귀족가와도 연이 있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성격인 그가 이런 계획을 단독으로 입안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에리얼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관여하는 어떤 세력이 있다.

그리고 이번 계획의 목표는 도시 위협을 제거하는 것 외에도 더 있을 수 있다고.

에리얼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때는 제 능력 부족이 뼈아프네요. 확실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 휩쓸리지는 않았을 텐데...."

밤의 교단은 영세하다.

신도가 적으니 자금 여유가 없고, 자금이 없으면 속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된다.

나름 한 종교의 신전이 이렇게 허름한 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장황해지자 데일은 조금 짜증이 났다.

그는 인간이었을 때도, 지금도 복잡한 정치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데일은 이야기를 되돌렸다.

"그래서. 신도들을 보호해달라는 건 무슨 소리지?"

에리얼이 답했다.

"저는 애초에 이 계획이 실패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주도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겠죠. 그럴 때 희생양으로 삼기 좋은 게 우리의 신도들입니다."

밤의 신도들은 수도 적고, 힘도 없다. 게다가 그들에 대한 인식 또한 좋지 않다.

만만한 먹잇감.

'만약 밤의 신도들을 몇 붙잡아, 이놈들이 범인이었다고 한다면....'

시민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노라고.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말하며 만족할 것이다.

일의 실패도 감출 수 있으며, 계획을 주도했던 평의원들의 인기와 명성은 더욱 올라갈 터.

"용병들이 빈민가를 수색하기 시작하면, 제일 위험한 건 신도들입니다. 그러니 데일 경께서 힘을 보태주시지 않겠습니까?"

데일은 현실적으로 말했다.

"나 혼자 경비대와 용병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다."

에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데일 경을 보면 용병들도 섣불리 행동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리고 데일 경이 함께한다면 신도분들도 기뻐하실 겁니다. 다들 데일 경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왜들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군."

에리얼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삶이 고되니까요."

밤의 신도들은 기나긴 패배의 시간을 겪어왔다. 어렵고 고된 삶의 연속.

그런 사람들은 의지하고 자부심으로 삼을 우상이 필요하다.

최초로 교단에 한 방 먹인(적어도 신도들은 그리 생각한다) 흑기사라면, 그 자격을 훌륭히 충족한다.

에리얼이 조심스레 물었다.

"부탁을 들어주시겠나요?"

데일은 고민했다.

'보호 임무라.'

데일이 진짜 밤의 여신을 섬기는 흑기사라면, 고민 없이 승낙해야 한다. 하지만 데일은 그렇지 않다.

데일이 물었다.

"부탁이 아닌 의뢰라면 고민해보겠다. 보수는?"

"물론 확실히 준비할 겁니다. 거래에 철저한 건 저희의 미덕이니까요. 만약 의뢰를 무사히 완수하신다면...."

잠시 뜸을 들인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신전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하급 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

데일은 생각보다 통 큰 보상에 놀랐다.

유물이라니.

아무리 하급 유물이라 해서 절대 뒤떨어지는 물건은 아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데일이 부러뜨렸던 유물 지팡이 역시 굳이 분류한다면 하급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보수치고는 차고 넘친다 볼 수 있다.

데일이 물었다.

"유물을 이렇게 아무에게 막 주어도 되나?"

"사제장인데 그 정도 권한은 있습니다.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그깟 유물이 대수겠습니까. 그리고 아무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데일 경이라서 드리는 겁니다."

에리얼은 일부러 뒷 문장을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데일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정신은 유물에 팔려 있었다.

'유물이라. 이렇게 얻을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쓸만한 유물이라는 건 단순히 돈이 많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데일은 꽤나 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득이 유물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다.

'여기서 여신의 세력이 더 약해지는 건 곤란해.'

도시의 세력 중에 가장 데일에게 호의적인 곳을 꼽으라면, 바로 이곳이다.

나중에 일이 생겼을 때 데일을 지지해줄 곳도 바로 이곳일 거다.

때로는 혼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생기기 마련. 아군이 되어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많은 게 좋다.

데일은 결정을 내렸다.

"알겠다. 소동이 끝날 때까지 신도들을 보호하면 되겠지?"

"네. 데일 경이 맡아주신다면 안심입니다. 저는 저대로, 다른 평의원들이 허튼짓하지 않도록 최대한 견제해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물었다.

"따로 내가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나? 조심해야 할 점이라던지."

"조심해야 할 점. 말인가요?"

"아무래도 신도들이 특이하니,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서."

데일은 일부러 '특이하다' 부분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늘 같은 자리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을 쳐다보았다.

에리얼의 시선도 자연스레 돌아갔다.

"이백만 서른 셋. 이백만 서른 넷."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켈레톤은 오로지 목검 휘두르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에리얼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도분들은 대부분 평범한 분들입니다. 어디서나 볼 법한 그런,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들이죠. 마스터 루드비히는.... 음. 다소 특별한 경우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야.

들어야 할 건 다 들은 데일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하티가 한발 앞서 걸어나갔다.

그런 데일을 에리얼이 잡아 세웠다.

"아. 마지막으로."

"더 할 말이 있나?"

에리얼은 말하기 매우 곤란하다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그, 다른 신도분께서 항의를 하셨거든요. 데일 경이 자꾸 기도 중간에 들어왔다고...."

"...."

"그 점을 좀 조심해주셨으면 해서요...."

데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도망치듯이 신전을 나섰다.

* * *

신전을 나온 데일은 고민했다.

이대로 여관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빈민가를 한번 찾아갈까.

여러모로 애매한 시간이었다.

'일단 한번 가볼까.'

에리얼은 단순히 옆에 서 있어주기만 해도 된다고 했지만, 데일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보상으로 귀한 유물을 준다면 그 가치만큼의 일은 해야 한다.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을 수도 있겠어.'

평의원들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일이다. 허투루 일을 벌이지는 않을 터.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

데일은 도시의 북문을 나섰다.

밤의 신도들은 빈민가의 북동쪽에 살고 있었다.

빈민가에 들어서자, 데일은 이전보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아이들이 돌아다니지 않는다.

여인들도 최대한 외출을 피했고, 돌아다니는 장정들은 다들 무기 하나쯤은 차고 다녔다.

게다가 무리 지어 다니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도시 놈들이 우리의 터전을 빼앗으려 듭니다! 형제들,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우리 몸은 우리가 지켜야 해!"

"옳소!"

이미 빈민가의 주민들은 평의회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에리얼이나 다른 평의원이 일부러 정보를 흘린 듯하다.

주민들이 이번 일로 느끼는 위기감은 작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악마에게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경험을 겪었다.

고향을 잃고 각지를 떠돌다 겨우겨우 정착한 곳이 바로 이레네의 성벽 밖, 빈민가다.

외부 세력이 자기들의 터전을 또다시 들쑤시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주민들은 뭉쳤고, 무장을 시작했으며, 자경단을 만들었다.

수색이 시작되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듯한 분위기였다.

'평의원들이 대체 뭘 믿고 그런 걸 계획했는지 모르겠군.'

아무런 대책 없이 저들을 적으로 돌리는 건, 썩 현명하지 않다고. 데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데일이 빈민가를 걷자 이목이 확 끌렸다.

커다란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검은 갑옷의 기사는 어디서든 눈에 뜨이는 법이니.

옹기종기 모여 있던 장정들은 데일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그...."

"왜 온 거지? 설마 선발대로 온 거 아니야?"

"용병 길드 소속이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데일은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가 보호해야 하는 건 어디까지나 신도들이지, 빈민가의 모든 주민이 아니었으니.

그런 데일이 담벼락 사이에 난 골목길로 들어서려니,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가로막았다.

하나같이 제대로 무장한 게, 자경단으로 보였다.

그중에서 지위가 있어 보이는 사내가 외쳤다.

"멈춰! 주민이 아니면 이곳으로는 지나갈 수 없다!"

"?"

데일은 그들을 의아하게 쳐다보다, 물었다.

"언제부터 이곳을 지나가는 데 자격이 필요해진 거지?"

그 차가운 목소리에 자경단원은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자경단원은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완고하게 말했다.

"너희 도시 사람들은 성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검문을 하잖아. 우리도 똑같이 할 뿐이다."

"음."

그렇게 말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만....

데일은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사제장 에리얼의 부탁을 듣고, 신도들을 도우려고 이곳에 온 거다. 딱히 빈민가를 뒤엎는 선발대나 그런 게 아니다."

"뭣? 그 마녀에게 사주를 받고 왔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보내줄 수 없다!"

역효과였다.

아무래도 에리얼은 밤의 사제장으로서, 그 나름대로 악명을 펼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경단원들은 똘똘 뭉쳐 길을 막았다.

눈빛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절박하고, 비장한 감정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곤란하군.'

데일은 굳이 이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한동안 빈민가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그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켜 좋을 게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당장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데일은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이 길을 지나야 한다. 너희들이 우려할 일은 없을 거다. 약속하겠다."

"뭐라 그래도 길은 비켜줄 수 없다. 정 급하면 다른 길로 가던가!"

물론, 다른 길들 역시 자경단원들이 버티고 서 있을 거다.

너무나 완고한 태도에 데일은 고민했다.

'다른 길이라....'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다, 자경단이 버티고 선 옆에 늘어선 담벼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돌로 만들어진 담벼락이었다.

생김새는 허름하지만, 나름대로 튼튼한 벽.

데일은 자경단원을 슬쩍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자경단원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다시 고개를 돌린 데일은 옆으로 몇 걸음 옮긴 뒤, 주먹을 뒤로 힘껏 젖혔다.

그다음 순간. 데일은 허릿심을 이용해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꽈릉!

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담벼락 중앙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에는 데일의 주먹이 박혀 있었다.

데일은 팔을 거둬들여 주먹을 빼냈다.

그러자 담벼락 일부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데일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자경단원들한테 말했다.

"여기도 길이 있었군."

그러고는 새로 개통한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색

* * *

데일이 길을 만들어버리자 자경단원들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어이없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게다가 데일의 힘을 눈앞에서 보니, 도저히 직접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슨 힘이 이렇게....'

'우리는 한주먹거리밖에 안 되겠는데.'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뒷골목에서 비루하게 먹고 사는 주민들이라도 지키고 싶은 건 있다.

자존심.

여기서 그냥 데일을 보내 줄 수는 없었다.

자경단원이 마지막 용기를 그러모아 외쳤다.

"멈춰! 마지막 경고야! 피 보고 싶지 않으면 말 들어!"

과연 누구의 피를 보게 될까.

쉽게 상상이 가지만, 일단 데일은 멈췄다.

정말이지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귀찮은데.'

기어코 무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걸까. 하티 역시 짜증이 나는지 낮게 울부짖었다.

데일이 어찌할까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뭣들 하고 있는가."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눈동자가 녹색인 중년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데일과 안면이 있는 인물이다.

'토모 상회의 아이렉.'

몰락한 왕국의 귀족이자, 지금은 장물아비로서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다.

아이렉의 뒤로는 일전에 데일과 '사소한' 마찰이 있던 집사와 장정들이 따라왔다.

그들은 데일을 보며 흠칫 놀랐다.

아직도 얻어맞은 자리가 쑤셨다.

"아, 아이렉 님."

자경단원들은 아이렉이 오자 급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아이렉의 영향력이 작지 않음을 보여주는 광경이다.

적당히 손을 내저어 준 아이렉은 데일을 보며 흥미를 빛냈다.

"오랜만이네 데일 경. 감사를 표하기 위해 몇 번 사람을 보냈는데, 계속해서 엇갈리기만 했는데... 이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감사?"

"경이 검은 뱀 형제단을 박살 내주지 않았나. 귀찮게 굴던 골칫덩이들이 사라지니,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

불과 얼마 전.

아이렉은 도적 길드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데일이 혼자서 적을 모두 쓸어주었으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렉이 물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사제장 에리얼의 부탁으로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 왔소."

"아. 무슨 일인지 바로 알겠군."

아이렉은 자경단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경은 그냥 보내 주어도 괜찮네. 우리한테 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그, 그치만."

"내가 보증하겠네."

"그렇다면...."

우물쭈물하던 자경단원들은 두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이 흑기사와 싸우지 않아도 될 명분이 생긴 것에 안도할 따름이었다.

말 잘 듣는 자경단원들의 모습에 데일이 물었다.

"그쪽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오?"

아이렉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들고일어나 뭉쳤을 뿐이네. 물론, 그 과정에 내가 사소한 도움을 줬지만."

사소한 도움.

자경단원들의 무장이 어디서 왔을까 생각하면 간단하다.

'어쩌면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장물아비들이겠군.'

빈민가 사람들에게 무기를 공급해 수익을 거두는 건 물론, 영향력도 키울 수 있다.

어쩌면 이번 일이 지나가면, 도시의 세력 균형이 요동치지 않을까.

그리고 누구보다 셈에 밝은 사내는 어떻게든 이득을 거머쥘 것이다.

자경단원들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아이렉이 말했다.

"요새 이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네. 평의원 놈들이 뭘 믿고 이런 멍청한 계획을 추진하는지, 이제는 도리어 궁금할 지경이야. 대체 무슨 비장의 패를 꼭꼭 숨기고 있는지.... 자네는 혹시 뭐 들은 거 없나?"

"없소. 사제장도 모르겠다는군."

은근히 찔러보는 말에 데일은 즉답했다.

아이렉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 그래. 밤의 사제장은 오히려 나보다 더 도시 사정에 어두우신 분이니.... 이런.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군."

"아니오. 오히려 도움을 받았소."

아이렉 덕분에 무익한 싸움을 피하게 됐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면, 나랑도 함께 일해주게. 요즘 같은 시기에는 경 같은 인재가 절실하니 말이야. 특히 자네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말끝을 흐린 아이렉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길을 걸었다.

아이렉이 보증해주었으니 이제 빈민가에서 귀찮은 일이 벌어질 일도 적을 거다.

데일은 하티와 함께 비교적 큰 골목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향했다.

밤의 신도들이 모여 사는 곳은 빈민가에서도 가장 외곽이었는데, 사람들은 경멸과 비아냥을 담아 그곳을 '암흑가'라고 불렀다.

암흑가에 발을 디디자마자 데일은 생각했다.

'어둡군.'

단순히 볕이 잘 들지 않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분위기 자체가 침침하고 어둡다 해야 할까.

빈민가의 다른 지역에서는 자경단이다 뭐다 시끄러운데, 이곳만 유독 고요했다.

데일은 그 고요에서 체념의 기색을 읽었다.

얼기설기 얽혀 있는 허름한 집들을 지나친 데일은 암흑가의 중앙에 자리한 공터에 다다랐다.

공터에는 아이들 몇이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데일이 다가오자 아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은 데일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데일은 예상치 못한 만남에 바짝 얼어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 데려와라."

"높은 사람이요?"

아이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자, 데일은 좀 더 쉬운 단어를 썼다.

"어른 불러오라고."

"아."

"이해했나?"

"네, 네!"

아이들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골목길로 달려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오래요! 나오래요!"

"기사님이 어른들 전부 나오래요!"

아무래도 데일의 말을 조금 잘못 이해한 듯싶다.

아이들의 외침에 고요하던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더니 주민들이 하나둘 걸어 나왔다.

그들은 데일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엇."

"진짜 기사님이네...."

주민들은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평소 동경하던 이가 직접 이 누추한 곳에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민들은 들뜬 기색으로 웅성거리는 한편, 선뜻 데일에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마치 자경단원이 아이렉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데일을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던 와중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주민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노인은 데일을 향해 다짜고짜 엎드렸다.

"노, 노부가 여신님의 기사를 뵙습니다."

그러자 다른 주민들도 냉큼 엎드렸다. 아이들도 주위 눈치를 살피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해가 안 되는 반응은 아니다.

흑기사는 교단으로 치면 성기사와 같은 느낌이다.

일반 신도에게 성기사나 사제가 가지는 위상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데일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담스럽군.'

애초에 데일은 여신을 섬기는 성기사가 아니다.

심지어 경전 한번 읽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는 품에 경전이 하나 있었지만, 글자를 모르는 데일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있던 때도 아니고.

그래서 대충 땔감으로 태워버렸다.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다.

훗날 그 일을 가지고 여신이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그러니 데일에게는 이들에게 섬김받을 자격이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지긋한 노인에게 절을 받는 건, 유교 사회에서 살아온 데일에게는 굉장히 껄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데일은 노인을 재빨리 일으켰다. 반쯤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일어나시오. 그리고 나는 당신들이 무릎 꿇을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오."

부축받은 노인의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어렸다.

"아아. 참으로 겸손하시어라."

다른 주민들도 더욱 감격해 고개를 조아렸다.

데일은 얼굴을 손으로 짚었다.

종교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여러모로 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데일은 나이가 너무 들어,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앉은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곳의 지도자요?"

"그렇습니다. 일단 편의상, 촌장이라 불리며 주민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촌장.

이런 외곽에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암흑가는 하나의 마을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데일이 말했다.

"촌장. 나는 사제장 에리얼의 부탁을 받고 이곳에 왔소. 곧 있을 빈민가 수색에서 그대들을 지켜달라 하더군."

촌장은 다시 한번 감격했다.

"사제장님께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당신들은 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오. 다른 곳에서는 자경단원이니 뭐니 분주히 움직이는데."

"아...."

촌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울적하게 주위 주민들을 둘러본 뒤, 고개를 조아렸다.

"다들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들입니다. 자경단이라니요. 무장할 돈은커녕, 당장 오늘 일을 못 하면 내일 굶는 처지에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오?"

"저희도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도움을 얻을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녔죠...."

촌장이 다시 뒷말을 흐렸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과가 어땠을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알겠소. 일단 주민들은 지금 전부 모인 것이오?"

"아. 예. 그렇습니다. 아직 일을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제외하면 이게 전부입니다."

데일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번 수색의 목적은 도시에 위협이 될만한 위험인물을 색출하기 위함이오. 최근에 도시를 찾아온 신원이 불분명한 자들이 색출 대상이지. 혹 그런 수상쩍은 이들이 근처에 있거나 하지 않소?"

"으음. 그, 그런 사람은 못 봤습니다. 펴, 평범한 사람들은 이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아서...."

왜인지 촌장이 말을 덜덜 떨었지만, 어쨌거나 다행인 부분이었다.

괜히 수상쩍은 사람 근처에 있다가는 공범으로 몰려 줄줄이 잡혀 나갈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

이곳의 법체계는 야만적인 구석이 많다.

일단 붙잡으면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건 일도 아니다.

재판이라는 제도가 있지만, 정식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귀족이나 힘 있는 자들 뿐이다.

꼬투리를 잡을 만한 부분은 처음부터 없어야 한다.

'일단 수상한 놈이 없는 건 다행인데....'

데일은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고민했다. 촌장과 주민들은 그런 데일의 눈치만 살폈다.

정적.

그 정적을 깬 건 어디선가 들린 고함이었다.

"먹을 거! 먹을 걸 가져와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데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목소리는 분명 근처에서 들리고 있었다.

데일이 촌장에게 물었다.

"주민은 다 모였다고 하지 않았소?"

"아, 주민은 아니고.... 사실 손님이라 해야 할까, 한 분이 더 계십니다."

"손님? 일단 안내하시오."

촌장은 불안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린 뒤, 종종걸음으로 앞서나갔다.

데일이 그 뒤를 걸었다. 뒤이어 주민들이 우르르 뒤따라왔다.

멈춘 곳은 암흑가에서도 그나마 번듯한 집이다.

촌장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당장 보이는 건, 접시의 산이다.

양념이 잔뜩 묻은 접시가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사내가 볼록한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사내는 기름기가 잔뜩 묻은 손가락을 입으러 빨아먹으며, 투정을 부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촌장? 절대 음식이 끊기지 않게 하라고. 난 배고프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야. 그리고 여자도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짜증을 내던 사내는 그제야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듯. 고개를 들었다.

데일과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데일은 고개를 내려 촌장에게 물었다.

"저 인간은 누구요?"

촌장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일단은 저희를 지켜주겠다고 오신 분입니다."

"원래 이곳 주민이오?"

촌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본인 말로는 전선에서 수년간 복무하시다가, 1주일 전쯤에 도시로 오셨다고 합니다. 무려 악마와도 싸워본 적 있는 실력 있는 전사라고...."

"...."

데일은 촌장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1주일 전에 갑자기 도시에 온 뛰어난 실력의 전사.... 뭐야.'

그림에 그린 듯한 수상쩍은 인물이 이곳에 눌러앉아 있었다.

지적하는 것도 귀찮았다.

데일은 일단 검부터 들었다.

수색

* * *

데일이 검을 들며 말했다.

"아무리 상황이 궁해도 그렇지. 저런 의심스러운 자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되잖소."

눈앞의 사내야말로, 지금 평의원들이 빈민가를 뒤엎으려는 원인이었다.

저런 놈을 숨겨두고 있었으니, 만약 데일이 아닌 다른 이에게 발각되었다면....

'꼼짝없이 모두 잡혀갔겠군.'

심지어 이 경우에는 억울함을 토로하지도 못한다. 저 수상쩍은 인간이 주민들의 대접을 받고 있으니.

데일의 꾸짖는 말에 촌장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 제가 부탁한 게 아닙니다. 저 사람이 돌아다니는 저를 다짜고짜 붙잡고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주민들을 지켜줄 테니까 돈과 음식을 요구했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무래도 촌장은 저 사내에게 재수 없게 걸려버린 모양이다.

데일이 물었다.

"왜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소."

촌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혹여나 사람을 불러오면, 주민들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악마랑도 싸운 적이 있는 전사라니, 겁이 나서 그만.... 죄송합니다."

데일의 실력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는 걸까.

사실, 저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악마랑 싸워 살아남았다는 건, 그 자체로도 엄청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이므로.

물론, 어디까지나 그게 사실일 때의 얘기다.

'그 정도로 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데일은 사내를 훑어보았다.

사내는 그때까지도 태연하게 접시에 묻은 양념을 핥아먹고 있었다.

검을 든 데일을 앞에 두고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배짱 하나만큼은 두둑한 놈이었다.

데일의 시선을 눈치챈 사내는 그제야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접시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사람 부르면 죽여버리겠다고 경고했는데도 이 지랄이군. 이 보르단 님이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인 모양이야."

그리 말하고는 촌장에게 살기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기겁한 촌장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데일은 나머지 주민들도 뒤로 물렸다. 그리고는 집 문을 닫았다.

실내에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데일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접시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암흑가의 주민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데일은 검을 굳게 쥐며 자세를 잡았다. 상황이 명확했으므로, 상대에게 더 물을 건 없었다.

그 모습에 보르단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웃음을 흘리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이 몸은 동부전선 3군단 소속 백인대장...이었던! 보르단 님이시다! 무려 그 유명한 용병왕과 함께 악마와 싸워 살아남은 전적이 있지!"

보르단은 묻지도 않은 자기 업적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어때? 대단하지?'라고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데일은 담담하게 자기 심정을 말했다.

"뭐 어쩌라고."

보르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리고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일단 이 보르단 님께서 예의부터 가르쳐줘야겠군."

보르단은 성미가 급한 성격이었다.

그는 외마디 고함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양손에는 어느새 손도끼가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뚱뚱한 모습에 비해 그 움직임이 제법 날렵하다.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다가온 보르단이 양손의 손도끼를 동시에 내리쳤다.

카각!

데일은 롱소드를 쥔 손목을 꺾어 손도끼를 비스듬히 비껴냈다.

그런데도 만만치 않은 충격이 검을 타고 전해졌다.

데일은 뒤로 물러날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실내의 특성상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좁다.

밀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데일은 연이어 휘둘러져 오는 손도끼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견갑과 도끼날이 부딪혀 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튕겨나갔다. 물론. 튕겨 나가는 쪽은 도끼였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보르단이 휘청였다.

그대로 가깝게 파고든 데일은 롱소드를 횡으로 휘둘렀다.

그 궤적은 보르단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보르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절묘하다. 순간적으로 파고들어 균형을 무너뜨린 뒤, 정확히 급소를 노리는 일격.

'제법...!'

보르단은 데일의 검에 담긴 경험의 깊이를 느꼈다.

하지만 경험이라면 보르단 역시 밀리지 않는다.

그는 목을 노리는 롱소드의 궤적에 오른팔을 들이밀었다. 평범한 전사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다.

전사에게 팔이란 목숨보다도 소중한 법이니.

하지만 보르단은 했다.

팔과 검이 맞닿았다.

솨아악!

팔에 긴 상처를 내고 지나간 롱소드가 보르단의 머리카락을 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빠르게 검을 되돌린 데일은 의아해했다.

'얕아.'

분명 팔을 잘라낼 만한 각도였는데, 팔과 부딪힌 검이 마치 쇠와 부딪힌 것처럼 튕겨나갔다.

그 때문에 팔에 길고 얕은 상처를 내는 데에 그쳤다.

보르단은 그런 데일의 의아함을 알아챘는지, 사납게 웃었다.

"흐흐. 이 보르단 님이 제법 튼튼해서 말이야."

오른팔에 난 상처에서 피가 강처럼 흘러내렸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데일은 침착하게 상대를 살폈다. 실력이 뛰어난 놈이다. 우선 그 직업을 유추해야 한다.

하지만 몸을 튼튼하게 만드는 기술은 여러 직업에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

'모르겠군.'

아직 단서가 부족하다. 일단 계속 싸워보는 수밖에.

어쨌거나 오른팔에 난 상처는 유의미한 타격이다. 그 부분을 차근차근 공략하다 보면, 금방 답이 나오리라.

데일이 검 끝을 하늘로 세우고 거리를 재자, 보르단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기분 탓일까?

그 속도가 아까보다 빠르게 느껴진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다.'

보르단은 확실히 빨라졌다. 짓쳐들어오는 도끼의 기세도 더 강하다.

이변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도끼가 데일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쿠웅!

강한 충격에 데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보르단이 파고들었다.

데일은 왼손을 내려 홀스터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대로 보르단의 어깨에 내리찍었다.

단검의 날이 깊숙이 들어갔다. 피가 튀었다. 뜨거운 피다. 하지만 보르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으며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미치광이의 춤사위처럼 난해하고 규칙성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보르단의 힘과 속도가 뒷받침되자, 난해함은 오히려 강점이 되었다.

도무지 그 움직임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데일은 롱소드를 몸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수비에 전념했다. 뒷걸음질해 실내의 모퉁이로 이동했다.

공간이 좁다는 걸 활용하면, 상대의 수를 제한할 수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보르단은 계속해 빨라지고 있었다.

참격이 어지럽게 퍼부어졌다.

하지만 데일은 냉정하다. 그는 승리에 이르는 길을 차분히 찾아 나갔다.

오히려 잔뜩 흥분한 쪽은 보르단이었다.

"흐! 흐하! 흐흐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보르단은 손도끼를 휘두르며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입에서는 침이 뚝뚝 흘렀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데일은 그런 보르단의 눈을 살폈다. 아까와는 달리, 보르단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마치 빨간 물감을 흰자위에 칠해놓은 것 같은 꺼림칙한 모습이다.

그제야 데일은 정답에 이르렀다.

"광전사였군."

광전사. 피를 흘릴수록 더 강해지는 미치광이 전사들.

데일이 정답을 맞히자 보르단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자기 어깨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고여 있던 피가 콸콸 흘러내려 웅덩이가 되었다.

사람 몸에 이 정도로 피가 많은지 감탄이 나올 정도의 광경이었다.

"흐흐. 기사란 것들도. 흐하. 막상 싸워보면 별거 없을 때가 많다니까."

보르단은 승리를 이미 확신하는 듯. 데일을 향해 이죽거렸다.

데일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르단은 처음 전투를 시작할 때와 비교해 족히 두 배는 강해졌다.

나름 자부심을 가질만한 실력이 있는 것도, 경험이 풍부한 것도. 모두 이해했다.

그러니....

"슬슬 끝내야겠군."

"흐?"

처음의 보르단은 경계할만한 적이었다.

그가 어떤 힘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이제 데일은 보르단의 힘을 안다. 그가 어떤 기술을 다루는지도 안다.

그렇기에, 설령 두 배 더 강해졌어도, 보르단은 이제 경계할만한 적이 아니었다.

데일은 검을 앞으로 세웠다. 그리고 어서 오라는 듯, 손을 까딱했다.

보르단은 그 여유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저 시커먼 기사의 사지를 토막 내, 목숨을 구걸하는 게 보고 싶었다.

"우아아아아!!"

그래서 보르단은 달렸다. 괴성을 지르며 달렸다. 둘 간의 거리가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었다.

데일은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미치광이 전사를 무심히 쳐다보다, 왼주먹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보르단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쨌거나 빈틈이다. 보르단은 데일의 투구를 향해 손도끼를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데일이 말아 쥐었던 주먹을 폈다.

화아아악!

손바닥에서 검은 안개가 흩어져 나왔다. 안개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 나가 온 실내를 가득 메웠다.

보르단의 시야도 새까맣게 물들었다.

당황한 보르단은 제자리에서 멈췄다.

싸늘하다. 피부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누군가 귓가에 저주의 말을 속삭이는 기분이 든다.

신경질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려던 보르단은 움직임을 멈췄다.

'환청. 환청이다.'

보르단은 전장에서 오래 구른 전사다. 이런 상황도 몇 번인가 마주했다.

잔뜩 흥분한 상태에서도 한줄기 이성을 붙잡았다.

'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강력하지 않아.'

이 안개에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의 냉기도.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깎여나가는 두려움도 없다.

그저 시야의 제한뿐.

'안개가 흩어질 때까지 버티면서 치명상. 치명상만 피하면 된다.'

죽음에 이르지 못하는 상처는 광전사를 더 강하게 만든다.

목이 베이거나 심장이 꿰뚫리지만 않으면 괜찮다.

그때부터는 보르단의 차례다.

보르단은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공격이 오면,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게 자세를 잡았다.

심장은 쿵쿵 뛰었다. 어둠 속에서는 시간조차 느리게 흘러갔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영원 같은 찰나의 끝을 알린 건, 쇠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온다!'

방향은 가늠이 된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분명 찌르기. 보르단은 예상 지점을 향해 손도끼를 교차했다.

그리고 정확히 그곳을 향해, 롱소드가 안개를 가르며 찔러 들어왔다.

캉!

손도끼와 롱소드가 부딪혔다.

막았다!

보르단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

손도끼에 가로막힌 롱소드가 튕겨나갔다. 롱소드를 붙잡고 있어야 할 데일이 없다.

그제야 보르단은 이게 찌르기가 아닌 투척이었음을 깨달았다.

보르단은 급히 시선을 올렸다.

무기끼리 부딪치는 소리에 맞춰 땅을 박찬 데일이 어느새 앞에 다가와 있었다.

보르단은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롱소드를 버렸는데, 어떻게 치명상을 입히겠는가.

단검으로 목을 끊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심장만 가리면!'

그 마지막 순간의 판단이 승부를 가로 지었다.

보르단은 도끼를 심장을 가렸다. 그리고 데일은.... 양손을 뻗어 보르단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돌렸다.

그제야 데일의 의도를 알아챈 보르단이 급하게 손을 되돌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끄윽!"

데일은 이미 자세를 잡았다. 힘을 주었다.

보르단이 안간힘을 쓰며 막아보려 했지만 한참 부족하다.

머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얼굴 전체가 새빨개진 보르단이 마지막 힘을 담아 외쳤다.

"끄으으윽. 아, 안 돼...!"

우득.

뼈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보르단의 머리가 돌아갔다. 반 바퀴하고 조금 더였다.

데일은 보르단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하고 놓아주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보르단의 얼굴은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마치 데일이 비겁한 수라도 쓴 것처럼.

"그러게 본인 약점을 잘 알았어야지."

광전사의 약점.

목이 꺾이면 죽는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 대부분이 공유하는 약점이기도 하다.

데일은 보르단의 시체에 건틀렛을 박아넣었다.

생기와 잔혼이 흘러들어왔다. 만족스러울 정도의 양이었다.

* * *

암흑가의 주민들은 싸움이 벌어지는 집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기사님이 지면 어떡하지?"

"그, 그러면 그놈이 우리를 전부 죽이려 들 텐데."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대체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암흑가의 주민들은 그저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데일이 이기기를. 저 잔혹한 전사를 처단해, 그들에게 안정을 가져다주기를.

고함과 무기 휘두르는 소리.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오던 실내가 돌연. 고요에 휩싸였다.

"...."

촌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문을 열어 안을 살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그런 갈등에 보답하듯, 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 다 흩어지지 않은 검은 안개가 문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안개 사이에서, 데일이 걸어 나왔다.

검은 안개에 둘러싸여 걸어 나오는 흑기사. 주민들이 섬기는 여신의 사도. 그 신비롭고도 차가운 분위기.

"아아."

촌장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

* * *

데일은 바짝 엎드린 주민들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왜 또 엎드려 있소."

"왜,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던 촌장이 물었다.

"그, 망나니 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데일은 대답 대신 고개짓 했다.

생기가 모두 빨려 미라처럼 바짝 마른 보르단의 시체가 보였다.

"오오!"

"역시...!"

주민들은 감격했다. 주민들을 괴롭히던 전사를 이리 간단히 해치우다니.

촌장이 호들갑을 떨었다.

"악마와 맞붙어 살아남은 전사를 이리 손쉽게 쓰러트리다니.... 이런 기사님을 보내주시다니, 역시 여신님께서는 저희를 저버리지 않았군요!"

지적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우선, 데일을 보낸 건 여신이 아니라 에리얼이다. 그것도 유물을 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받아들인 것뿐.

게다가 보르단에 대한 것도 과장이 심했다.

그가 뛰어난 전사는 맞았다.

하지만 악마랑 맞붙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서열이 가장 낮은 악마도 보르단쯤은 손짓 한 번으로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다른 놈이 악마를 상대할 동안, 옆에서 졸개들을 상대했겠지.'

물론, 그것만으로도 평생 자랑할 만한 업적은 맞다.

하지만 데일의 관심을 끄는 건 직접 악마를 상대한 쪽이다.

'분명, 용병왕인지 뭔지랑 함께 싸웠다 했나.'

데일이 게임을 통해 이 세상을 접하던 시절. 그 당시에 악마란 자연재해와도 같은 존재였다.

한낱 인간이 어찌할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랬다.

하지만 인류에도 그런 악마를 상대할 만한 괴물들은 있었다.

마탑의 마스터나, 황실의 기사단장, 전선을 수호하는 네 명의 장군.

하지만 용병왕이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용병 나부랭이에게 왕이라는 칭호라니. 너무 거창해서 오히려 비꼬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사이에 새로 나타난 영웅인가.'

분명 가란드도 몇 번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조사해볼 마음이 생겼다.

생각을 정리한 데일은 주민들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이제는 일일이 해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오해하든 착각하든 놔두기로 결심했다.

슬금슬금 일어난 주민들은 엉망이 된 실내를 청소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격전이 벌어진 내부는 비교적 깨끗했다.

깨진 접시와 가구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지만,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검은 안개가 주위에 퍼져나가며 보르단이 흘린 피를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덕분에 작업이 수월해진 주민들은 금방 실내를 정리했다. 문제는 보르단의 시체다.

바짝 말라버린 시체를 주민들이 곤란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하티가 성큼 걸어와 데일의 허리를 툭 쳤다.

"뭐."

하티가 코로 보르단을 가리켰다. 그 몸짓을 알아차린 데일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허락이 떨어지자 하티는 아가리를 크게 벌려 보르단을 씹어먹었다.

바짝 말라버린 시체라 그런지, 하티가 씹을 때마다 질겅이는 소리가 났다.

개껌을 씹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이렇게 사람을 먹게 놔둬도 되나?'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신경 껐다.

이미 사람 맛을 아는 늑대기도 하고, 당장 사람을 죽여 생기를 빼앗는 데일이 지적할 부분은 아닌 것 같았다.

뒤처리가 끝나자 어느새 완전히 해가 졌다.

데일은 공터에 다시 모인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주민들은 데일을 단순히 존경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도저히 봐주기 어려운 부담스러운 감정이 눈동자에 가득했다.

'뭐. 말은 잘 듣겠군.'

데일은 주민들에게 생각해두었던 방침을 말했다.

"소란이 끝날 때까지 한동안은 몰려다니시오. 혼자 떨어져 다니지 말고. 해가 지면 외출을 피하고, 웬만하면 모르는 이와 최대한 접촉을 피하시오."

괜히 꼬투리 잡히려는 걸 막기 위해서 하는 최소한의 조치다.

이외의 부분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까.'

여러 사람의 이권이 개입되는 사건이다. 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 가능성도 조금이나마 있었다.

* * *

데일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파리만 날리는 여관에서 카일라가 반갑게 맞았다.

"아! 오셨어요!"

카일라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그 눈부신 모습에 한구석에 앉아 있던 하켄이 투덜거렸다.

"뭐야. 내가 들어왔을 때는 흙 씹은 표정이더니. 왜 이렇게 반응이 달라."

카일라가 새침하게 받아쳤다.

"하켄도 데일 경처럼 잘생기던가요."

"나도 데일 경만큼은 아니어도 꽤 괜찮게 생기지 않았나?"

"...."

"미안."

카일라가 말없이 정색하자 하켄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내렸다.

다시 데일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은 카일라가 이번에는 하티를 발견했다.

"와아! 데일 경이 새로 기르는 강아지인가요? 엄청 귀엽네요!"

하켄이 핀잔을 줬다.

"하다못해 개도 아니고, 저 덩치를 보고 강아지라는 말이 어떻게 나와. 누가 봐도 늑대잖아."

"뭐 강아지나 개나 늑대나 그게 그거죠."

카일라는 하티의 거대한 덩치에도 전혀 겁먹지 않았다. 역시, 배짱이 두둑한 여자였다.

데일이 물었다.

"여관에서 기를 수 있겠나?"

"음. 아무리 그래도 실내는 좀 힘들고. 뒷마당에 기르면 되지 않을까요? 도둑 퇴치도 되고 좋겠네요!"

데일은 하티를 쳐다보며 뒷문을 가리켰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하티가 어슬렁 걸어나갔다.

그 똘똘한 모습에 잠시 감탄한 카일라가 데일에게 물었다.

"식사하실 거예요?"

"그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섭식 행위를 위해 데일은 하켄의 앞에 앉았다. 투구를 벗고 하켄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왜 여깄는데."

"음? 그야 저, 앞으로 데일 경을 따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여관도 옮겨야죠."

데일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 투숙 손님이 한 명 늘었으니, 카일라에게는 좋은 일이다.

정작 카일라는 하켄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지만.

하켄은 맥주잔을 들어 내용물을 꿀꺽 들이켰다. 미묘한 얼굴로 맥주잔을 쳐다본 하켄이 중얼거렸다.

"맥주 맛이 영 이상하단 말이죠. 음식은 그럭저럭 먹어줄 만 한데요."

데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음식 투정이라니.

미각이 없는 그에게는 참으로 사치스러운 모습이었다.

툴툴거린 주제에 맥주를 전부 들이켠 하켄은 데일을 흘끔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왜."

"아니, 그. 전에 가란드가 부탁한 것 말입니다. 데일 경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가란드와 카달과 함께했던 자리에서 일행은 제안을 받았다.

빈민가 수색에 함께해 주지 않겠냐는 의뢰.

마젤은 미련 없이 거절했다.

데일은 고민해보겠다고 답을 미뤘고, 하켄도 데일과 똑같이 답했다.

데일이 되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저야 당연히 데일 경 하는 거 보고 결정할 생각이죠! 애초에 가란드가 저한테 부탁한 것도 제가 탐나서겠습니까? 다 데일 경 때문이죠."

하켄은 스스로에 대해 제법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실 겁니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쪽에서 의뢰를 받았다. 정반대의 의뢰로."

데일은 에리얼에게서 받은 부탁은 대강 설명해주었다. 진지한 얼굴로 경청한 하켄이 대답했다.

"흠. 그러면 저는 그냥 이번에는 쉬어야겠네요."

"딱히 가란드의 의뢰를 받아도 상관없다. 제법 괜찮은 의뢰일 텐데."

"아뇨아뇨. 재수 없게 데일 경이랑 싸우게 되면 어떡합니까. 그리고 이번 일, 뭔가 좀 냄새가 나요."

"냄새?"

"구린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끼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요. 뭐, 그냥 감이지만요."

감.

사선을 드나든 용병들은 자기 예감에 충실히 따르는 편이었다.

데일도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어쩌면 하켄의 예감이 맞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는 무장을 마친 자경단원들과 아이렉이 떠올랐다.

그들은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란드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겠군.'

데일은 카일라가 내온 햄을 포크로 찍어 먹었다. 역시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일라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음식이 가득 찬 접시를 내오려 할 때였다.

"꺄아아악!"

밖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다. 다음 순간. 여관 문이 벌컥 열렸다.

흰 사제복을 여인이 급하게 문을 닫은 뒤,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스델이었다.

"바, 바, 바, 밖에...! 괴물! 괴물입니다!"

안 그래도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에스델이 밖을 가리켰다.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던 하켄이 깨달은 듯, 아! 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밖에 있는 늑대를 말하는 거면 데일 경이 키우는 거니까 걱정 마 사제 양반."

"늘 말하지만 제 이름은 에스델입니다. 아니 그보다, 저런 흉측한 생물을 기르다니요! 누가 봐도 평범한 늑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에스델은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하티를 보고는 어지간히도 놀란 눈치였다.

데일과 하켄은 동시에 카일라를 쳐다보았다.

귀여운 강아지라고 생각한 카일라와는 너무 다른 반응이었다.

'이쪽이 더 정상적인 것 같긴 하지만.'

그 시선을 눈치챈 카일라는 '귀엽기만 하고만'하고 중얼거린 뒤, 에스델에게 다가가 일으켜주었다.

"괜찮으세요 사제님?"

"가, 감사합니다.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식사하시겠어요? 아니면 숙박? 데일 경과 아는 사이 같으니 싸게 해드릴게요."

카일라는 에스델이 당황한 틈을 타 은근슬쩍 매출을 올리려 했다.

아쉽게도 카일라의 시도는 실패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에스델이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은 교단 일이 여러 가지로 바빠서.... 잠시 시간을 내 들른 겁니다."

바쁜 와중에 굳이 시간을 내어 찾아오다니. 데일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에스델이 다가왔다.

그녀는 어쩐지 데일이 어려운 듯,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 데일 경. 신념의 반지는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반지?"

갑작스럽게 반지를 왜 찾는단 말인가.

데일이 되묻자, 에스델이 초조하게 물었다.

"기억 안 나십니까? 마리아 사제님이 데일 경께 드린 반지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설마.... 버, 버린 건 아니죠?"

그제야 데일은 에스델이 무얼 말하는지 기억해냈다.

'예전에 사제 하나를 구하고 반지 같은 걸 받았었지.'

데일은 주머니를 뒤졌다. 반지는 잡다한 물건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은은한 광택을 뿜어내는 반지를 꺼내자 에스델은 눈에 띄게 안심했다.

"후우. 버리지 않았군요."

"그래서. 이 반지가 어떻다는 거지?"

데일의 질문에 에스델은 조금 딴소리를 했다.

"이건 그냥 평범한 반지가 아닙니다. 예전, 어느 한 영웅이 자신의 영혼을 잘라 담았다고 하는 유물이죠. 고결한 영혼과 강한 신념을 지닌 사람에게 단 한 번, 큰 힘을 준다는 물건입니다."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뭐 어쩌라는 건지 싶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델은 어딘가 간절한 어조로 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특별한 반지를 마리아 자매님은 데일 경께 드렸어요. 자매님은 마지막 순간에 데일 경을 믿었던 거겠죠? 아니. 분명 그랬을 거예요."

"글쎄. 뭔가 생각이 있었겠지."

"맞아요. 마리아 자매님은 사람을 허투루 보는 분이 아니니까요."

그제야 에스델은 안도했다.

끙끙 앓고 있던 문제에 대해 답을 얻은 듯한 표정이다.

데일이 더 뭐라 묻기 전에 에스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그러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레 찾아와 멋대로 질문을 던지더니, 혼자 만족해서 사라져버렸다.

하켄은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뭘 잘못 먹었나 본데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꺄아아악!"

또다시 자지러지는 비명이 울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에스델이 또 하티를 보고 놀랐으려니.... 할 뿐.

* * *

아침이 되자마자 데일은 용병 길드로 향했다.

사정을 설명하며 가란드의 의뢰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한데, 오늘따라 용병 길드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외곽구역의 모든 용병이 다 모인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 모두가 게시판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데일은 그들을 헤집고 지나갔다.

용병들이 짜증을 부렸다.

"아이씨 어떤 새끼가 밀치."

용병은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데일도 그런 용병을 내려다보았다.

"지나가시죠."

용병은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데일은 그런 식으로 편하게 용병들을 뚫고 지나갔다.

평소에는 거칠고 사나운 용병이지만, 데일을 보자 절로 예의와 예절이 솟아났다.

그런 식으로 게시판 앞에 도달한 데일은 게시판을 살폈다.

게시판에는 소집 공고가 붙어 있었다.

'기어코 하는군.'

평의회에서 결국, 공식적으로 빈민가 수색을 하겠다고 공표했다.

그에 따라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하겠다는 것도.

여기까지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사실이다. 다른 용병들도 대부분은 알고 있었을 거다.

문제는 공고문에 커다랗게 적힌 문장이다.

데일은 그 문장을 읽고 한숨을 삼켰다.

[본 계획은 마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마법사

* * *

이 세계에서는 강력한 존재에게 대가를 바치고 힘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악마 혹은 신에게 의존하는 이유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스스로 마력을 수련해 인간의 잠재력을 초월한 힘을 쟁취해내는 이들도 소수지만 있었다.

황실을 섬기는 기사들이 그러했고, 일부 마법사들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들이 모여 만든 연구기관이자 교육기관이 바로 마탑이다.

'마탑이 참여하다니.'

마탑은 이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집단 중 하나다.

상위 구역의 오만한 귀족들조차 마법사들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을 정도다.

그렇기에 더욱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상위 구역에서 잘 벗어나지도 않는 놈들이다.

대체 도시의 외곽 구역도 아니고, 빈민가에 무슨 볼일이 있길래 이 계획에 참여한단 말인가.

'귀찮게 됐군.'

데일은 주위 용병들의 반응을 살폈다. 용병들 역시 마탑의 참전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와 마탑이라니...."

"걔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일에 참여하는 거야? 빈민가 전체를 불태우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게 중요하냐? 마탑이 참여했다는 게 뭐야. 이번 의뢰는 그냥 날로 먹을 수 있다는 거잖아. 운 좋게 마법사들 눈에 들어서 마탑 소속 용병이라도 되면 인생 피는 거고. 빨리 신청부터 하자."

이전에는 망설이고 간을 보는 용병이 많았다.

평의원들의 힘만으로 빈민가 일대를 수색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탑이 참전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전쟁 마법사 몇만 파견해도 빈민가 주민들의 저항은 손쉽게 박살 낼 수 있다.

의뢰의 위험도가 현저히 낮아졌다는 뜻.

망설이던 용병들은 너도나도 참여를 결정했다.

간단히 실적을 올리고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거절할 멍청이는 없었다.

길드 직원에게 몰려드는 용병들을 쳐다보던 데일은 혼자서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얘기를 들어봐야겠어.'

가란드라면 알고 있는 게 좀 있을 것이다.

계단을 성큼 올라간 데일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데일 경."

누군지도 말 안 했는데 알아차리다니.

잠시 멈칫한 데일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란드가 서류의 산에 파묻혀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는 데일을 보더니 그 험상궂은 얼굴에 싹싹한 미소를 띠었다.

"혹시 제가 드렸던 부탁에 대한 답을 들려주러 오신 겁니까?"

고개를 한번 끄덕인 데일이 물었다.

"근데 내가 온 건 어떻게 알았소. 이번에는 직원을 통하지도 않았는데."

"하하. 저도 이 자리를 주사위 도박으로 따낸 건 아니라서 말이죠."

가란드 어깨를 으쓱이며 익살을 떨었다.

그 이상을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데일도 더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안은 거절해야겠소."

"아.... 이유를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사제장에게 신도들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소. 이번 수색 동안 억울하게 잡혀가는 걸 막아달라더군."

가란드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확실히. 밤의 신도들은 누명을 뒤집어씌우기 좋은 대상이긴 하죠. 에리얼 사제장님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부디 데일 경도 몸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데일에게 몸조심하라니. 평소에는 이런 말도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마탑이 참여한다는 소식은 당연히 들으셨겠죠?"

"알고 있었소?"

"하하. 민망하지만, 저도 오늘 아침에 들었습니다. 다른 평의원이 왜 이렇게 무리한 계획을 강행하나 했더니, 뒤에 마탑을 끼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극비리에 진행된 계획인 듯하다.

데일이 물었다.

"그들이 왜 참여하는지는 아시오?"

"글쎄요.... 누군가 찾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누굴, 왜 찾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요."

쓰게 웃은 가란드가 말했다.

"어쨌거나 데일 경. 조심하세요. 마법사들은 전부 위험한 자들입니다. 성격이 착하고 나쁘고를 떠나 생각하는 방식이 평범한 이들과는 달라요. 놈들은 자기 마법 발전에 필요한 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릅니다. 수단을 가리지 않죠. 만약 필요하다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빈민가 전체를 불태울 겁니다. 그러니...."

마법사들에게 쌓인 게 많은지. 길게 얘기하던 가란드는 잠시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조심하세요 데일 경."

* * *

북적이는 길드 사무소에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이가 한 명 들어섰다.

그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다, 직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 경쾌한 움직임에 용병들이 흘긋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후드의 양옆이 부풀어 오른 걸 발견하고는 이내 길을 내주었다.

"뭐야. 엘프잖아."

"괜히 시비 걸리지 말고 비켜줘."

그렇게 큰 방해 없이 접수원에게 도착한 엘프가 물었다.

"전에 했던 지명 의뢰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네."

다짜고짜 내뱉는 말에 접수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접수원은 눈앞의 엘프가 어떤 의뢰를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아. 데일 경께 한 지명 의뢰 말이군요. 저희도 전달 드리고 싶지만, 데일 경이 그 후로 길드 사무소에 들르지를 않아서...."

그때. 옆에서 듣던 다른 접수원이 말했다.

"아냐. 몇 번 오긴 했어. 여기를 안 들리고 바로 지부장님 집무실로 올라가서 그렇지."

"아, 그래?"

접수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들으신 대로 데일 경이 접수대를 방문하지 않아서.... 요즘 원체 바쁘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 의뢰가 전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쿵!

엘프가 탁상 위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단단한 원목 탁상에 단검 날이 못해도 절반은 박혔다.

"그럼 뭐 어떻게 하라는 건가! 한시가 급한 일이란 말이네!"

접수원은 생각했다.

오늘 잘못 걸렸다고. 식은땀을 삐질 흘린 접수원이 황급히 말했다.

"그.... 그렇게 급한 일이라면 직접 찾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데일 경을?"

"예, 예. 그렇죠."

"아하! 그것참 훌륭한 생각이군!"

손뼉을 치며 좋아한 엘프는 그대로 나는 듯이 달려, 길드 사무소로 빠져나갔다.

그런 엘프에게 접수원이 애처롭게 말했다.

"저, 저기. 탁상에 박아 넣은 단검을 가져가셔야...."

하지만 신이 난 엘프는 그대로 길드 사무소를 나섰다.

"데일 경을 직접 찾는다.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군!"

하하 웃으며 한참을 달리던 엘프는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어떻게 찾지?"

* * *

길드 사무소를 나선 데일은 시장을 들렀다. 그곳에서 식량을 있는 대로 사 모았다.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데일은 연이은 의뢰 성공으로 상당히 큰돈을 벌었다.

반면에 지출은 턱없이 적은 편이다.

당연했다.

음식도 딱 기분을 낼 정도만. 술도 안 마시고 딱히 여자를 만나거나 도박을 하지도 않는다.

가끔 보조 무기를 사는 것 외에는 돈 나갈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발튼은 어떻게 하고 있지.'

데일의 무기 제작 의뢰를 받은 발튼은 그 이후로 감감무소식이다.

돈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했건만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아직 머리를 싸매고 구상 중이거나, 그냥 도망쳤거나.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데일은 시장을 돌며 부지런히 식량을 사 모았다.

큰 가게보다는 주로 작은 노점들을 이용했는데,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어, 어서오세요."

삶에 지친 얼굴의 여인이 과일을 파는 노점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데일이 오자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며, 자그마한 소년을 치마폭에 감췄다.

아마 아들일 것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데일이 말했다.

"과일을 좀 사고 싶다."

"무, 무얼 드리면 될까요?"

"여기 있는 거 전부."

"예? 저, 전부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여인은 어찌할 줄 몰라했다. 데일은 과일 무더기를 보며 생각했다.

'가져가는 게 문젠데....'

좋은 생각이 났다.

"이 수레도 파나?"

"예?"

"당연히 돈은 내겠다."

"어, 음. 조잡한 물건인데...."

"상관없다."

여인은 조심스럽게 가격을 불렀다. 예상보다 조금 저렴한 걸 보니, 여인이 깎아준 듯하다.

데일은 군말 없이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리고 수레를 끌고 이동했다.

"가, 감사합니다!"

여인과 그 아들이 데일을 향해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다른 노점상을 들러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이 수레까지 통째로 사고 싶다."

"예에?"

"팔 건가?"

"무, 무, 물론이죠!"

원하는 걸 모두 구매한 데일은 수레 몇 대를 줄로 묶어 끌고 사라졌다.

때아닌 횡재에 노점상의 상인들은 기쁜 얼굴로 이 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씀씀이 큰 흑기사가 와서 물건을 싹 쓸어갔다고.

이 기사는 물건값을 흥정하거나 귀찮게 구는 일 없이 물건만 챙겨 사라졌다고.

그야말로 상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손님이었다.

그렇기에 아쉽게 기회를 놓친 상인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짐했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겠다고.

* * *

데일은 여러 대의 수레를 줄줄이 묶어서 끌고 갔다.

식량이 가득 찬 수레는 만만치 않게 무거웠지만, 데일에게는 끄떡도 없었다.

옆에서는 하티가 나른하게 하품하며 터벅터벅 걸었다.

데일이 말했다.

"너도 좀 끌어."

하티는 데일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거 웃기는 놈이네.'

어쨌거나 하티 덕분에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이 똑똑한 늑대는 암흑가로 이어지는 길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 혼자서 여러 개의 수레를 옮기는 묘한 광경에 빈민가의 주민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받을 게 있나 싶어 아이들 몇이 다가왔다.

데일은 사과 몇 개를 던져주었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라."

이 식량의 주인은 따로 있다.

과일을 받은 아이들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걸로도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처음에는 식량만 받고 겁에 질려 줄행랑치던 걸 생각하면, 많이 발전한 셈이다.

"지, 지나가시오."

데일은 당황한 자경단원들을 지나쳐 암흑가로 발을 디뎠다.

줄줄이 묶어놓은 수레를 공터에 세워놓았다.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주민들 틈에서 촌장이 걸어 나왔다.

그는 수레에 산더미처럼 쌓인 식량을 보며 물었다.

"이건...."

"앞으로 한동안은 일을 나가지도 않게 식량을 구해왔다."

데일이 지금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주민들의 통제다.

앞으로 수색이 벌어지는 한동안은 주민들끼리 뭉쳐 있는 게 그나마 안전한 길이었다.

그래야 데일도 효율적으로 이들을 지킬 수 있다.

문제는 주민들이 너무 가난해 일을 나가지 않는다면 굶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데일은 미리 식량을 구해왔다.

이 정도 양이라면 수색이 끝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다.

식량에 더불어 수레까지 사느라 돈은 조금 들었지만....

'유물을 생각하면 푼돈이지.'

데일은 수레에 담긴 식량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 지시했다.

그러고는 빈 수레를 암흑가로 통하는 주요 통로에 세웠다.

"이곳에 모래를 담은 자루나 쓸모없는 가구 같은 걸 함께 쌓아라. 나름 유용할 거다."

수레는 일종의 방어벽 역할을 할 것이다. 여러모로 조잡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작업은 척척 진행되었다.

주민들은 힘을 합쳐 식량을 날랐고, 수레에 모래 자루를 날랐다.

늘 조용하고 어둡던 암흑가에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데일은 작업을 지휘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계속 계획을 세웠다.

'아예 함정도 설치할까? 발튼을 부르면 쓸만한 함정 몇 개는 설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곳을 요새화하면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큰 의미는 없어. 결국 내가 해야 한다.'

주민들은 무장하지 못했고, 싸울 줄도 모른다.

전투가 벌어지면 데일 혼자서 전부 해내야 한다.

함정 한두 개를 설치해봤자 큰 의미는 없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건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것.

하지만 부득이하게 싸움이 벌어진다면....

'힘을 보여줘야 한다. 함부로 못 덤비게.'

공포를 심어 주어 모두 물러나게 하는 것.

그것밖에 수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