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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을 가득 메우는 시스템 메시지.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해냈다.'

제물.

이 튜토리얼은 보통 한 사람을 제단에 바치는 것으로 공략한다.

도주는 불가능하다.

설사 데몬의 토벌에 성공해도 명왕의 말처럼 다른 개체가 끝없이 소환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우선 데몬을 토벌해 추가 보상을 획득한 뒤, 이름 없는 이를 제물로 바쳐 클리어했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리했었다.

그러나 이 공략법은 후에 문제를 일으킨다.

'신의 성향.'

이 세계엔 여러 성향을 지닌 신격이 있고, 그중에는 윤리를 중시하는 선한 신들이 있다.

즉, 범죄자도 아니요 아무런 죄도 없는 이를 희생시킬 경우 훗날 그러한 신들에게 외면 받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또 다른 방법을 고안해 냈다.

"클리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상념이 흩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반신반의하며 메시지를 살피는 사람들이 보였다.

"끝난, 건가?"

"비프로스트는 뭐야?"

"GP?"

곳곳에서 의문이 쏟아졌지만, 궁금증은 해결되지 못했다.

더 큰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클리어를 확인했습니다.]

[메시지를 수신했습니다.]

"어?"

메시지가 떠오른 직후, 중앙의 제단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데몬이 삼켜졌던 것처럼 환한 빛은 아니었다.

일곱 빛깔의 빛이 은은히 빛나면서 형상을 허공에 투사했다.

형상은 호를 그려내는 무지개가 그려진 문양이었다.

<반갑습니다, 인류여. 나는 이리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 신들의 전달자입니다.>

'왔군.'

<여러분이 경험한 것은 꿈도 아니며 환상도 아닌 현실입니다. 현재 이 세계는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전부 이 메시지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 카페 내부의 사람들도 침을 꿀꺽 삼키면서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앞으로 사람도 동물도 아닌 것들과 그들을 부르는 종말의 신이 문을 넘어와 이 땅의 생명을 멸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대들에겐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희망이라.

<시공간에 균열이 새겨지고, 그 사이로 문이 열린 것은 재앙이나 동시에 기회입니다. 괴물들이 넘어올 수 있게 된 것처럼, 이 행성에 다른 변화도 생겼습니다.>

그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

<여태껏 그래왔듯 인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발전하여 이능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균열로 인해 신과 인간 사이에 단절되었던 고리가 다시 이어지게 되면서 저희 신들 역시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게 됐습니다.>

비프로스트. 노르드 신화에서 중간계 미드가르드와 신계 아스가르드를 연결하는 무지개의 다리.

신과 인간 사이를 잇는 연결 고리.

<인류여. 또 다시 신과 인간이 함께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는 기존의 다섯 시대가 아닌, 새롭게 연 여섯 번째 시대입니다. 황금과 은, 청동과 영웅. 그리고 신들과 단절된 철을 넘어 우주로 나간 시대. 그래요, 별의 시대입니다.>

여신이 인류의 여섯 번째 시대를 고한다.

<여러분께서는 앞으로 멸망을 비롯하여 여러 시련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그대들은 시련을 겪은 만큼 강해질 것입니다.>

시련.

퀘스트라 불릴 시스템.

<행운을 빕니다.>

그 말을 끝으로, 빛과 함께 제단이 모습을 감췄다.

이후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침묵이었다.

충격에 빠졌다기보다는 다들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당연했다. 악마 다음에는 여신이라니.

믿는 건 둘째 치고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머리가 미처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나 역시 기다종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저길 봐요!"

누군가가 창밖을 가리켰다.

"괴물이 없어진다!"

그 말에 모두의 안색이 환해졌다.

시선을 돌려 확인해 보니 정말로 창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괴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와아!"

"살았어!"

"흑흑!"

사람들에게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카페만이 아니었다.

열린 문 밖—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도시 곳곳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확신했다.

'틀림없어.'

사람들 앞에 돌연 나타난 메시지, 신이 내린 시련, 그리고 무지개의 여신이 전한 인류의 여섯 번째 시대.

'내가, 아니.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건 전부— 틀림없는 게임, 기어 다니는 종말이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게임이 현실로써 재현되고 있어.'

게임이 현실이 됐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현 상황이 그리 증명하고 있었다.

'좋지 않아.'

게임 기다종의 시나리오는 애석하게도 그리 밝지 않다.

이름만 봐도 그 흉흉함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있을 시련을 버텨내지 못하거나, 혹은 위기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예고대로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선 큰 불행이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내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점이야.'

끝을 봤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가능성을 겪었다.

8년이란 세월을 쏟은 만큼 수많은 것을 클리어 했다.

설사 신들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더 잘 아는 자는 없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을 정도다.

'할 수 있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게임이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과 섞인 게임이 '기다종'이란 걸 안 이상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미래와 지식, 그리고 경험.

이 세 가지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세계를 구하겠다, 라는 거창한 게 아니야. 살아남는다. 그리고 나는― 이 기회를 통해 달라져 보이겠어.'

반드시.

* * *

"와아아아!"

괴물이 사라진 뒤에도 환호성은 한동안 계속됐다.

카페 내의 사람들은 서로 얼싸 안고 기뻐했다.

몇몇은 자리에 주저앉아 기쁨의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가족이나 친구의 안부를 확인하는 모습이나 도망치듯이 카페를 벗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엔 그 안에서 명왕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혼자 어딘가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려는 거겠지.

나는 바로 나가지 않고 숨을 돌리기 위해 구석진 곳에 앉았다.

"지쳤다...."

"당연히 지치지. 죽을 뻔했는데."

목소리에 머리를 드니 내 편집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괜찮은 연출 아니었어?"

"뭐?"

"화려한 퍼포먼스. 네가 스트리머는 그런 게 중요하다고 했잖아."

"하!"

미라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더니.

"좋네. 화려한 퍼포먼스. 그래. 나도 방금 좋은 생각났어. 다음 컨텐츠는 '막 끓인 커피를 얼굴에 부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주제야. 어때. 화려할 것 같지?"

"...."

"기획이 마음에 들었으면 구독과 좋아요 버튼 눌러주세요."

"싫어요...."

"정말이지. 너 때문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미라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저기...."

편집자의 쓴 소리가 이어지려던 찰나였다. 아이를 둔 부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무슨 일이지? 게임에서 이런 전개가 있었나.

"형!"

부모 손을 쥔 아이가 나를 보고 외쳤다.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순간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고가 잠깐 멈췄다.

"아까 전에 괴물과 싸우는 모습, 진짜 멋졌어요!"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 인사에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저희도 인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부모로 보이는 두 남녀도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감사 인사를 받을 날이 오다니.

"그러면, 저희는 이만...."

아이는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부모는 더 이상 이 장소에서 머물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부모와 아이의 인사를 몇 차례씩이나 받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애송이."

또 누군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의 주인은 아까 그 노인이었다.

"빚을 졌다."

노인은 검정색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곤란한 일 있다면 얼마든지 연락해. 도와주마."

"아, 네. 언더... 라이온? 씨."

이름이 뭐 이래.

혹시 회사 이름을 잘못 봤나 싶어 명함 뒤를 살펴봤는데, 양면 다 똑같았다.

어떻게 봐도 실명이 아닌데.

방송용 이름? 동업자인가?

"불 있나?"

노인이 담뱃갑을 꺼내며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그전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실내는 금연이에요!"

나왔다.

질서 선(Lawful Good)의 여자.

발키리였다.

잘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지적을 하는구나.

그녀답다면 그녀다웠다.

"쯧."

노인, 언더라이온은 발키리가 다가오자 귀찮은 것을 봤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그는 입에 담배를 문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발키리.'

기다종의 인기 캐릭터.

아까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별다른 생각이 들었지만, 여유가 생기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현실에서 나타나다니.

기쁘기도 하고 이상했다.

심정을 어찌 표현할까 고민하던 중 나는 문제의 장본인과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치게 됐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발키리가 먼저 말을 걸어오더니, 그녀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리를 숙이며 깍듯이 인사했다.

"여러모로 큰 도움을 받았네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걸요."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발키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했다.

"괴물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모습, 똑똑히 봤는걸요. 저라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에요."

"아니요. 제가 아니더라도 그쪽이라면 충분히 했을 겁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녀는 발키리니까.

확실히 아무나 할 수 없지만, 그녀라면 가능하다.

"아니요. 과찬이에요. 결국 저도 사람들이 뭐라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이 굳어 버렸는걸요."

발키리의 입가에 아주 잠시 쓴웃음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게다가 그 혼란 속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그 튜토리얼? 이란 걸 해결하셨잖아요. 다들 누군가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칭찬은 고맙긴 한데 낯이 조금 뜨거워질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에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솔직히 나도 이런 공략을 생각해낸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

"그쪽이 아니라면 설사 살아남았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못했을 거예요. 정말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발키리가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저, 혹시 괜찮다면... 연락처 좀, 여쭤 봐도 될까요?"

"네?"

당황한 나머지 반문이 절로 나왔다.

발키리는 누가 봐도 미인이다.

그런 사람에게 연락처를 줄 수 없냐는 물음을 받다니.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아!"

그녀도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앗, 아뇨, 저기, 그, 그, 그런 뜻이 아니라요!"

새하얀 피부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사, 사례예요! 사례! 그쪽에 딱히 흥미가 있다는 게 아니라, 도움을 받았는데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아서 그래요! 뭐라 할까. 나중에 꿈에 나올 것 같다고 할까. 아, 물론 꿈에서 볼 만큼 그쪽이 매력적인 게 아니라... 앗,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충분히 알 것 같으니 더 이상 말 안 해도 괜찮아요."

폭주기관차처럼 증기가 뿜어져 나오자, 보다 못한 미라가 대신 말했다.

그에 비해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다.

그만 둬. 내 HP는 이미 0이야.

아프다. 말로 때리는 사람이 내 편집자 말고도 또 있었을 줄이야.

사실 폭행은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과연, 북유럽의 전사. 폭력적이구나.

나는 눈물을 삼키면서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내, 그 위에다 번호를 적어 그녀에게 넘겼다.

"연락처는... 여기 있습니다."

"아, 네. 다음에 꼭 사례할게요!"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주먹을 꽉 쥐는 발키리. 귀엽다.

"...정말 게임에서 나오는 그대로네."

미라가 떠나가는 발키리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래. 이젠 게임이 아니게 됐지만."

"역시, 그랬구나."

미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곁에서 내 영상을 줄곧 봐온 편집자라면, 앞으로 찾아올 미래가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리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 일단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집으로 돌아가서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제7화

7

텔레비전, 인터넷, 신문. 어느 매체를 보건 하는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멸망.

그래. 인류의 끝에 대해서였다.

<지구 곳곳에서 치솟는 불길... 유례없는 대충격>

<괴물發 전 세계 증시 대폭락>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는 누구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말하는 인간의 다섯 시대>

<비프로스트. 북유럽 신화? 노르드 신화?>

<사람들 앞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홀로그램>

<레벨, 스킬... 게임처럼 변한 세상>

<[LIVE] 뉴스특보 – 대통령 대국민 담화>

<뉴욕서 유엔 총회 열려>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 이상 걸맞은 표현이 없었다.

<신이 내린 시련? 지난 튜토리얼로 인한 사망자 집계 각국 최소 10만 명 추정... 경악>

<인류에게 내려진 재앙>

"튜토리얼로부터 일주일... 여전하네."

방 하나에 작은 거실이 있는 자취방.

나와 미라는 소파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로 뉴스를 시청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세계적으로 일어난 재앙이니까."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괴물.

신의 지침서라 불리는 튜토리얼.

이 두 가지만으로 세계는 쑥대밭이 됐다.

전자는 물론이고 그 카페에서 겪었던 일들은 다른 나라 할 것 없이 전 지구적으로 발생했다.

두 사건은 인류— 아니, 지구 역사상 유례없는 일을 일으켰다.

군사 면에선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전쟁 영화에서 단골로 이름을 올리는 국가들이 먼저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전시 체제가 인류 간이 아닌 문을 열고 넘어온 침공자, 괴물을 향해서였다는 점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내가 알고 있는 대로, 각성자가 등장하여 다방면으로 활약하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괴물을 사냥하는 자.

헌터라 불렸다.

이후에도 여러 협력 덕분에 인류는 괴물들의 침공은 무사히 정리할 수 있었고,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외의 사회는 두말할 것도 없이 망했다.

증시는 매 순간마다 폭락하며 기록을 남겼다.

경제에는 보이지 않는 검은 미래가 도래했다.

세계가 불안해지자, 치안 역시 엉망이 됐다.

사람들은 멸망이 도래했다는 언론의 기사에 거리로 뛰쳐나와 혼란을 빚었다.

생필품을 구비하기 위해 마트로 나갔다가 경쟁을 넘어 약탈로 번지기까지 했다.

사회는 마비, 아니. 폭발했다.

너무 엉망이라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리고 이러한 대혼란 속에서—나는 소꿉친구와 함께 앞으로 있을 일에 철저히 대비했다.

"오늘도 찾아봤지만, 역시 없었어."

미라가 노트북을 열어 보여주었다.

검색어는 '기다종', '기어 다니는 종말.'

결과는 '0건'이었다.

튜토리얼을 클리어 한 직후 나는 곧장 귀가하여 모든 일의 근원인 기다종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다종에 관련된 것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게임, 공식 홈페이지, 커뮤니티 사이트. 심지어 내가 업로드한 동영상까지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아이튜브와 트위스치는 물론이고 미라가 작업 도중인 동영상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이 지난 오늘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다방면으로 조사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

"확신치는 못하겠지만...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아무래도 기다종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녹아든 것 같아."

그동안 정세를 관망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최초에는 명왕이나 발키리 등 게임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현실에 있는 것을 보고, 나와 미라가 게임 속 세상에 전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후 공식 석상에 나타난 대통령의 이름이나 연예인들의 소식을 보고 그 가능성은 부정됐다.

그들은 게임 속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던 세계에 실존하던 사람들이 분명했다.

그걸 보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현실과 게임이 뒤섞였어.'였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현 상황을 보면 그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네."

미라가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믿고 싶지 않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여태껏 겪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심사숙고한 결과 우리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면 우리가 원작의 플레이어이자 '주인공'이 된 거야?"

"그렇기는 한데...."

"뭐가 있구나."

"기다종의 주인공은 엑스트라나 다름없거든."

게임의 유저가 더 몰입하기 좋게 만들었다고 했던가.

대사도 선택지로 대신하거나, 또는 두루뭉술하게 생략하고 주변 인물의 입을 통해 묘사된다.

성격도 행동에 따라 정해진다.

또한 플레이어의 분신인 주인공은 배경도 불명확했다.

그 흔하디흔한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환생이라거나 또는 어떠한 숨겨진 힘 역시 없었다.

이러니 워낙 평범하고 쉽게 죽어 보는 이들이 분통 터졌다.

차라리 웹소설이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악역이나 주인공의 주변 인물로 빙의해 상황을 이용한다던가.

"언제는 한 번 유저들 몇몇이 불만 삼아 명색이 주인공인데 뭔가 특별한 힘 없냐며 장문의 메일을 보낸 적 있었어. 과금해서 부활을 유도하려는 것의 변명 아니냐면서. 그다음 답변이 장관이었지."

"뭐랬는데?"

"자기 인생의 주인공인 여러분들처럼 스스로 개척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더라."

"빈말로 들리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은 말 같은데...."

"다음 날에 한정 픽업 뽑기만 개최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

주인공 보정을 원하시나요?

지갑을 여시면 나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정리해 볼게."

"괜찮겠어?"

"뭐가?"

"그... 천기누설이라고 해야 하나."

미라는 눈치를 보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살폈다.

"신들? 괜찮아."

내 말에 미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거리낌 없이 말하는 걸 보니, 적어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는 모양이네."

"아니, 아마 지금쯤 저 위에서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을걸."

"잠깐, 그거 위험하지 않아?"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신이라 하면 보통 경외심을 갖고 우러러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다.

기다종의 신들은 인간을 구원해 주며,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램프 같은 편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지구의 각종 신화, 전설, 설화, 구전 등을 밑바탕으로 한 신들.

문제는 이 신화 속에서 인류가 신에 의해 멸망을 맞이한 경우가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괜찮아. 설사 신이라 한들, 미래— 특히나 별의 운명이 관련된 일이나 대화는 그리 쉽게 알 수 없어."

앞을 내다보는 이는 신격자 중에서도 소수.

"아마 지금쯤 그들에겐 필터링해서 들릴 거야. 우리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추측도 할 수 없을 걸?"

[신격들이 미래와 관련된 말을 알지 못해 답답해합니다.]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뒤,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신들의 시선을 받았다'라는 등 이런 식의 메시지가 추가됐다.

[당신을 지켜보는 신들이 무슨 말을 하냐며 짜증을 냅니다.]

"봤지?"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어찌 됐든 '기다종'이 현실화됐다는 건, 세계관이나 설정 같은 것도 그대로 반영된다는 의미다.

같은 이유로 미래만이 아니라 운명이 관여된 것을 넘어 그 자체인 기다종에 대해서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물론,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신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해. 아직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그저 한낱 인간 중 하나에 불과한 우리를 위해 그러진 않을 거야."

"그러면, 그는...."

미라도 '성외의 예언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기다종'에서도 꽤 예외적인 신이었으니까.

"그래. 대가를 지불했어. 당분간 도움을 받지 못 해."

"용케 불렀네."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하니까."

앞으로 어찌 되는가.

"1년."

검지를 펼쳤다.

"이 세계가 멸망을 맞이하기까지의 시간이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지구상에 생명체는 거의 남지 않게 되며, 사람들이 쌓아 올린 문명 역시 허무하게 붕괴한다.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건 매년 한 번씩 발생하는 퀘스트. 일명 '아포칼립스 퀘스트'라 불리는 시련이지."

Apocalypse Quest.

"그리고 퀘스트의 결과에 따라서...."

"기다종의 본편이 어찌될지 정해진다."

미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보통의 게임이라면, 가이드가 되는 튜토리얼이 프롤로그다.

그러나 기다종은 게임에선 1년.

현실의 플레이 시간으로도 무려 네다섯 시간이 프롤로그였다.

"잘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래. 기다종의 본격적인 무대가 될 1년 후의 세계는 프롤로그에 큰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본편의 배경이 결정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다종에선 튜토리얼을 비롯한 도입부가 몹시 중요시됐다.

"클리어 유무는 두말할 것도 없고, 성과가 시원치 않다면 본편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채 시작 돼."

사람들은 괴물을 피해 겁먹은 채 숨어 다닌다.

또한 생존물자가 부족해 생존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일도 번번히 벌어졌다.

"하지만 정말로 문제는 그 뒤. 인류― 아니, 세계의 끝을 원하는 종말신(終末神)에 대항해야 한다는 거야."

종말신.

튜토리얼에서 이리스가 경고한 절대악.

"그러니 우리는 사람은 물론이고, 문명사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이 1년을 무사히 보내야만 해."

"...할 수 있겠어?"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프롤로그는 초심자가 적응할 수 있도록 난이도가 낮다.

하지만 기다종은 달랐다.

이 게임이 망겜이라 평가받는 것 중 하나가 욕을 절로 나오게 만드는 난이도였기 때문이었다.

"...어려워. 그래서 보통은 희생을 어느 정도 감수하고, 레벨을 올려 개인의 능력치를 성장시키는데 집중해서 보다 안정적인 플레이를 노리는 게 정석이지."

전 세계를 구하는 건 어렵다.

어차피 희생될 거 차라리 능력을 우선하겠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사람이 적으면 보상을 독차지할 수 있어서, 중반부터는 죽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해지니까."

잠시 입을 멈추고,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 혼자만 살아남는 건, 어떠한 의미도 없어."

그래.

혼자 살아남는 삶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

사람이 없는 세상 따위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세계를 구해 영웅이 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암울한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죽지 않고 앞으로 있을 위협에 대항하려면 나 혼자만의 힘으론 부족하니까."

게임에선 죽어도 부활하여 재도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는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부활이 가능한지도 모를 상황에서 보다 안전하게 플레이하기 위해서라도 동료와 세력의 힘이 필요했다.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해내지 않으면 안 돼."

그래.

확률 따위 중요치 않다.

계산기를 구하고, 수학 공식을 외우며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해내야 한다.

나는 이를 머릿속에 몇 번이나 각인시키고, 맹세하듯 말했다.

"그리고 걱정 마. 어렵다곤 했지만 불가능하다곤 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할 수 있어."

턱 끝을 들고,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조금 건방지게 웃어 보였다.

"그야—나는 기다종의 명실 공히 탑 플레이어인 '트리머'니까."

그저 안심시키기 위해서만 한 말이 아니었다.

8년이란 시간 동안 쌓아온 경험에서부터 우러나왔다.

"...후후."

내 호언장담에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망겜이라서 하는 사람이 없으니 탑 플레이어인 건 아니고?"

"너무하네."

평소와 같은 사실적시.

다행이다. 언제나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편집자야.

"어찌 됐건,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숨겨진 요소까지 공략해 나갈 거야."

"얼마 전의 파티처럼?"

"그래."

나는 시스템 로그를 재확인했다.

[최초로 파티를 결성했습니다.]

['제3의 길'에 의해 1,000GP를 획득했습니다.]

[숨겨진 보상으로 수호성수(守護聖水)를 획득했습니다.]

기다종에는 일반적으로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요소란 게 존재한다.

이 요소를 찾아내거나 공략할 경우, 최초에 한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최초의 파티].

조건은 간단하다. 게임 최초로 그룹을 결성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미라에게 파티를 초대하여 팀을 결성했고, 보상도 성공적으로 받아냈다.

[수호성수(守護聖水)]

등급: ☆☆☆☆

분류: 소모품

미계약자에 한하여 신을 부를 수 있는 의식을 가능케 해준다. 물이 고여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자, 말 나온 김에...."

나는 주방에서 아무 컵을 가져와 거실 정중앙에 뒀다.

"미라 너는 수호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질문과 함께 사전에 준비해둔 유리병을 꺼냈다.

가볍게 흔들자 안에 있는 금색의 액체가 찰랑인다.

"그러니까...수호성인(守護聖人)처럼, 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켜보고 보호하며 때에 따라 그 사람에게 가호를 선사하는 걸 말하는 거지?"

"맞아. 간단하게 수호신이라 생각하면 돼."

그러나 이 가호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신은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대신, 인간은 신의 부탁을 어느 정도 들어줘야 해. 그게 '수호성 계약'이야."

나는 유리병의 입구를 닫은 마개를 뺐다.

병을 비스듬하게 내리자, 금빛의 액체가 컵 안으로 떨어졌다.

"다만 이 부탁이란 게 쉽지 않은 데다가, 힘을 내주는 데에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해야 해서 신들 역시 수호성 계약에 관해선 신중하고 몹시 까다로워."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내자, 유리병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은 저 위에서 지상을 살펴보며, 퀘스트에서 두각을 보이거나 다른 이유로 마음에 든 인간을 찾아가. 즉, 신에게 매력적이지 않으면 계약은커녕 시선도 받을 수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그 예외가 유리병 안의 금빛의 액체다.

"이 수호성수가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져. 원하는 신은 아니지만... 신들을 불러낼 뿐만 아니라, 수호성 계약을 할 수 있게 해 주거든."

수호성수는 '기다종'에서도 플레이어가 게임을 시작한 뒤 필수로 입수해야 할 아이템 중 하나였다.

조건도 그리 어렵지 않은데다가, 본인이 사용하거나 혹은 동료에게 수호성을 붙여줄 수 있었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다.

"미라야, 이 컵 안에 피 한 방울 떨어뜨려 볼래?"

나는 미리 준비한 바늘을 소꿉친구에게 건넸다.

미라는 건네받은 바늘을 보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피 한 방울 내는 거야 어렵지 않다.

다만 지금부터 신들을 불러내서, 계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됐다.

미라는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서 바늘만 살펴보다 이내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으며 검지를 찔렀다.

뚝.

[수호성사(守護聖事)가 거행됩니다.]

[성수에 깃든 거룩한 힘이 신들을 불러냅니다.]

[성사 중에 신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안심하세요.]

제8화

8

상처는 깊지 않았다. 벌려진 피부에서 핏방울이 느릿하게 흘러나와 컵 안으로 떨어졌다.

황금으로 빛나던 액체에 붉은 빛깔이 번진 순간, 순간적으로 눈부실 만큼의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자아, 누구부터냐?'

수호성수로 소환되는 신들은 무작위.

나도 어떤 신이 소환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당신을 지켜보는 신들이 흥미로운 시선을 보냅니다.]

모두가 긴장된 순간.

"어?"

미라가 무언가를 본 듯 눈을 껌뻑였다.

수호성사에 관련된 메시지는 계약자만 나타나기 때문에, 나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메시지를 나에게 말해 줄래?"

"응. 일단 첫 번째는... '묠니르의 계승자'라는데?"

묠니르의 계승자.

본명은 아니었다. 인터넷의 닉네임처럼 별칭이다.

이명(異名)을 내세우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전승에서 알려진 약점 같은 것이 밝혀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첫 번째였다.

"묠니르라면...."

"토... 북유럽 신화의 뇌신의 망치야. 계승자는 그의 자식들일 거고."

"그 신이라면 나도 알고 있어."

"워낙 유명하니까. 아, 그리고 신의 이름은 가급적 부르지 않는 게 좋아. 그는 인간에게 자비로운 편이라서 상관없겠지만, 신 중에서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불쾌하게 여기는 자도 있거든."

다른 하나의 이유는 단순하다.

하등하다 생각하는 인간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 자체가 싫어서였다.

설사 본인이 아니더라도, 신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자체를 모독이라면서 분노하는 부류가 몇몇 있었다.

"어쨌거나, 시작부터 나쁘지는 않네."

이름은 모디와 마그니.

그 뇌신의 아들답게 무력 보정도 적지 않게 받고 시작한다.

특히 그 '묠니르'를 들고 시작할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원주인이라면 모를까, 모디와 마그니로 이 망겜을 헤쳐 나가는 데는 다소 부족했다.

"다음을 알려줘."

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스템 메시지를 읊었다.

[지혜의 수호자가 나타났습니다.]

'거물이다!'

낯익은 이름에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신격으로나 명성으로나 흠잡을 곳 없는 신으로서 모디와 마그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그녀는 그 '올림포스'의 열두 신 중 일원이니까.

'하지만....'

흥분도 잠시. 곧 내 머리와 심장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기대감은 온데간데없고 아쉬움만이 남았다.

"올림포스는 안 돼."

그래.

다른 출신 신들은 괜찮다. 아니, 백번 양보해도 그리스 로마 출신의 다른 신들이라면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림포스산의 신들과는 어울릴 수 없었다.

"왜? 뇌가 하반신에 달려 있어서?"

"...."

신에게도 거침없구나.

수호성사 중 대화가 신들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쉬워도 별수 없지. 아직 남았잖아.'

수호성수가 부를 수 있는 신은 다섯.

이제 세 번째 신을 볼 차례다.

[군중의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군중의 주인?"

"힌두교에서 상업과 학문의 신으로서, 주신의 아들로서 혈통으로나 명성으로나 신격이 높은 신이지만...."

"그 뜻은, 전투력이 낮으니 몸을 지키는 데는 맞지 않는다는 거구나."

"그래. 정치인이나, 언론인... 상인에 걸맞은 신이지. 참고로 학부모들이 환장하는 신 중 하나야."

그래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선 초반에서 중반까진 몹시 유용해서, 일단은 보류로 두기로 했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무작위라니... 무슨 게임이 이래? 말만 게임이고 도박 아니야?"

"...."

사실 적시를 그만둬 주세요.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도 성가셔. 한꺼번에 보자."

"좋아."

[마법의 지존자가 나타났습니다.]

[기계장치의 신이 나타났습니다.]

"허어."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설마하니 이 둘이 동시에 나올 줄은.

"각각 마법과 과학의 신이 나타나다니. 이거 아이튜브였으면 분명 하이라이트였다."

'그렇지?'라고 묻듯이 소꿉친구를 바라봤지만, 무슨 일인지 낯빛이 좋지 않았다. 표정도 어두웠다.

마치 회사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걸 다음 날 아침에서야 깨닫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부장을 본 것 같았다.

"왜 그래?"

"...설마, 이 중에 추천할 수호성이 있는 건 아니지?"

"어? 어떻게 알았어?"

놀라서 반문하자, 미라의 표정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세상의 종말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앞에 셋은 알겠어. 이 둘은 누군데?"

"전자는 이집트의 신. 신왕의 왕비이자, 신들의 어머니. 신격만 보면 주신(主神)급이야. 마법부터 시작해 치료, 지혜... 그리고 사령술도 사용할 수 있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나도 깜짝 놀랐다. 신격만 보면 '지혜의 수호자'보다 위다.

일단 받을 수 있는 능력과 범위만 해도 무궁무진했다.

게임의 처음은 물론이고 끝까지 유용한, 그야말로 흠잡을 것 없는 수호성이었다.

"역시 비프로스트와 연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 계약하지 않은 높은 신들을 제법 불러낼 수 있었어. 이 정도라면 성공이야."

말했다시피 수호성 계약은 신이건 인간이건 신중하게 이뤄진다.

대신 계약이 늦어지면, 퀘스트의 보상이나 혜택을 놓치니 계약자의 성장도 느려지기는 하다.

그래도 대가를 함부로 소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아무리 늦어도 몇 달 내지 1, 2년이 지나면 주신이나 상위 신들은 대부분 계약을 끝낸 상태라, 그때 가면 기대하기 힘들다.

"하...."

미라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몇 십 년 남은 대출 통장을 앞에 둔 회사원 같았다.

"있잖아. 내 기억으론... 계약자는 게임에서 누구의 계약자란 걸 칭하거나, 그런 일 있었지?"

"신의 성향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기다종의 신들은 특히 명예와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고."

이에 관련된 속사정이 있긴 하지만, 굳이 지금 말할 필요가 없어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명왕과 발키리처럼 수호성의 이명을 건네받아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신의 힘을 사용할 때마다 그 이름을 주문 삼아 외우는 경우도 있어. 특히나 마법의 신들은...."

"됐어. 그만. 알겠어. 그 정도면 충분해."

미라가 질색하며 말을 막았다.

"괜찮아? 미라야. 너 지금 눈이 죽은 생선 같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다종에서 최고인 네가 추천하는 신이니 군말하지 않고 받아들일게."

"응? 뭘?"

"뭐라니... 이제부터 '나를 수호하고 있는 건 마법의 지존자다!'라고 말해야 하는 걸 말이야."

아. 과연.

이제야 미라의 이상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옛날 사람이라면 모를까 요즘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입에 담기에는 민망하지.

툭 까놓고 유치하다.

나는 눈앞의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수호성의 이름을 외는 걸 상상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마법의 지존자의 계약자예요.'

'그래요. 저를 수호하고 있는 건 마법의 지존자입니다.'

'나에게 마법으로 대항하겠다고? 이 마법의 지존자의 계약자를?'

'제 이름은 알 필요 없어요. 명왕이나 발키리처럼 부르면 됩니다. 그래요... 마법의 지존자!'

'마법의 지존자시여. 저에게 힘을!'

"푸흡."

"지금 웃었니?"

"아, 아니... 푸흐읍."

"좋아. 네 목을 조르고 세계를 멸망시키겠어."

미라가 치욕으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주먹 쥔 손은 파르르 떨렸다.

빛 한 줌 없는 시선을 본 나는 미라가 진심이란 걸 깨닫고, 급히 사과하면서 오해를 풀기 위해 설명했다.

"자, 잠깐만! 미라야, 너 착각하고 있어!"

"착각이라니? 혹시 마법의 지...존...자라는 이름을 대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네가 계약할 신은 마지막으로 나온 '기계장치의 신'이야."

"뭐?"

나는 변화무쌍한 소꿉친구의 얼굴을 은근슬쩍 머리 한구석에 넣어두고, 설명을 이었다.

"마법의 지존자는 신격으로나 전승으로나 완전무결하지만, 과학의 신도 만만치 않게 좋거든."

"기계장치의 신... 혹시, 데우스...."

미라가 이름을 말하려다 충고를 떠올리고 그만뒀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뭐? 하지만, '그것'은 신이 아니라...."

"개념이지."

기계장치로부터 온 신, 또는 기계장치의 신.

그러나 이름만 신일 뿐, 그 기원은 신화도 구전도 전설도 뭣도 아니다.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믿고 선택해 봐. 아, 그리고 메시지 잊지 말고 알려줘."

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재촉했다.

미라는 여전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수호성사를 마무리했다.

[기계장치의 신을 수호성으로 선택했습니다.]

[가호 '기계 혁명'을 습득했습니다.]

[수호성사가 체결됐습니다. 성수에 불린 신들이 돌아갑니다.]

[기계장치의 신이 당신을 수호합니다.]

미라는 신에게 수호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듯, 제 손을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돌려봤다.

"좋아. 수호성도 정해졌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다음 단계라면... 퀘스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포칼립스 퀘스트는 한 번이 아니라 네 번에 걸쳐서 일어나. 시간적으로는 분기별로 한 번. 첫 번째 시련이었던 튜토리얼에서 일주일이 지났으니, 두 달하고도 삼주일 정도 남았어."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튜토리얼. 멸망의 시작에 걸 맞는 시련이었다.

"두 번째 시련은... 그거였지? 던전."

던전(Dungeon).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소굴.

게임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써, 괴물을 쓰러뜨리며 성장을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안쪽의 여러 난관을 통과하면 보상이 주어진다.

"맞아. 아마 지금쯤 방송에선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거나 발견되는 던전으로 또 난리 났을 거야."

헌터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던전은 기본적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안전해. 몬스터가 내부에서 외부로 나올 일은 없어. 하지만 두 번째 시련― '백귀야행(百鬼夜行)' 때는 그렇지 않아."

첫 번째 시련, 튜토리얼의 희생자도 적지는 않으나 두 번째 시련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두 번째 시련에선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무리를 짓고 세상 밖으로 나와. 문제는 이 던전이... 사람이 사는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름도 모를 오지에서 발견되면 비교적 다행이다.

미리 알고 있다면 대피라거나 어찌어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도시 한 가운데라면?

인명 피해야 두말할 것도 없고, 발전소 등의 주요 시설이 무너지면서 인프라도 순식간에 박살날 것이다.

"아직 사회는 별의 시대라거나, 헌터라거나 괴물에 적응하지 못했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수천만— 아니, 억 단위다.

인류는 백귀야행에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항했을 땐 이미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가만히 지켜만 봐야 한다는 건 아니지?"

"물론."

게임에선 시간 단축을 위해 백귀야행까지 단숨에 넘어간 적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루해하는 시청자를 위해서였다. 방송이 아니니 그럴 이유가 없다.

"던전은 클리어하면 그 안의 괴물들은 물론이고 장소도 사라져."

"클리어 조건은 던전 안의 코어의 파괴 및 회수지?"

역시 내 편집자.

"응. 하지만 문제가 있어. 수가 너무 많아."

수도인 서울만 해도 스무 곳.

범위를 나라 전체로 해도 팔십여 곳이다.

"...80? 그것도 1년... 아니, 3개월 안에?"

숫자를 들은 편집자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던전은 한꺼번에 등장하진 않으니 걱정 마. 그래도 적지 않는 건 사실이지. 우리만으론 불가능 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힘이.

"개인, 단체, 국가, 그 외의 세력이 깨닫도록 메시지를 보낼 거야.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고."

"믿을까?"

"보통은 믿지 않지. 하지만, 믿게 만들 거야."

어떻게?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 화면에 보이는 건, 구독자 '0명'을 표기하고 있는 내 계정이었다.

"늘 하던 대로."

"과연. 이해했어. 영상 메시지부터 만들어야겠네."

"응. 몇 가지 준비를 하고, 내일부터 바로 움직일 거야."

향후 성장을 위해 필히 손에 넣어야 할 것이 있었다.

"'포식자'를 습득해야 하거든."

제9화

9

<다음 소식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가운데, 또다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시. 뉴욕입니다. 어젯밤, 이곳 뉴욕 한가운데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의 구멍이 불현듯 나타났습니다. 현재 보이는 영상은 절대 영화의 한 장면도, 조작된 영상도 아닙니다.>

<뉴욕만이 아닙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와 같은 정체불명의 장소가 출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 보도의 내용이 바뀌고 있다.

방송국에 앉아 있는 아나운서도,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들도 다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눈 밑에선 검은 기미가 가득하고 눈꺼풀도 반쯤 감겨 있다. 아마 지금 가장 바쁜 직업군이 아닐까.

"준비는 됐어?"

"아무래도 조금 긴장되네."

번화가 부근 공원.

그 난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평소라면 사람들로 북적일 장소인데 거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기계장치의 신과의 계약으로부터 하루. 나는 미라와 함께 특정 장소를 방문했다.

"흡!"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잡아당기는 시늉을 한다. 흉내만 낸 게 아니다. 정신과 이어진 쇠사슬을 움직였다.

쿠웅!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입구가 열렸다.

지옥문이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맨홀 뚜껑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수도관과 연결되어, 사다리가 있어야 할 풍경이 보이지 않고 검푸른빛이 수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던전, 쥐의 소굴을 발견했습니다.]

"찾았다. 역시 게임대로네. 정확히 '쥐의 소굴'이야."

이제부터 공략해야 할 첫 번째 던전.

"여기를 클리어하면, 스킬 '포식자'를 입수할 수 있는 거야?"

"응."

두 번째 시련에 앞서— 나는 앞으로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한 힘부터 준비해 두기로 했다.

미라를 수호성사로 기계장치의 신과 계약시켰으며, 그리고 다음 단계가 바로 이 특수한 스킬이었다.

스킬, 포식자.

사용자는 입으로 먹어 치운 것은 무엇이든지 소화해서 흡수할 수 있다.

다만 무조건적이지 않다.

운빨 망겜답게 스킬 레벨에 따른 소화율이란 것이 있어 일부 제한적이었다.

내 방송의 몇몇 시청자는 이를 보고 이리 말했다.

[이거 완전 먹방용 스킬이네?]

처음 발견됐을 때는 나는 물론이고 대부분은 이 스킬을 보자마자 혀를 차며 쓰레기라 평했다.

당연하지.

향후 게임의 환경이 어찌 될지 판단하는 시기에 이런 쓰레기를 얻자고 시간을 버리다니.

상식적으로 보다 좋은 보상을 위해 다른 던전을 공략하는 게 옳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기다종의 온갖 컨텐츠를 즐겨보기로 한 나에 의해서 이 스킬은 재평가 되었다.

"기다종 중에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라는 격언이 있어. 예를 들어 보상으로 능력을 몇 단계나 올려준다는 '용의 심장'이 나온다 한들, 인간의 신체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용과 관련된 수호성과 계약한다면 흡수가 가능하다.

그래서 보통 이러한 성장용 아이템은 수호성이나 지니고 있는 스킬에 따라서 캐릭터에 맞게 복용했다.

"나름대로 밸런스나 성장을 조절한 것 같았는데... 하다 만 느낌이네. 망한 이유를 알 것 같아."

신랄하다.

그러나 부정할 수가 없었다.

스킬 '포식자'가 그 증거였으니까.

성장의 범위는 폭넓고 속도 또한 빨랐다. 심지어 이 스킬엔 페널티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화에 실패한다 한들 흡수를 시도한 것이 소멸할 뿐, 죽는 건 물론이요 다치는 경우도 없었다.

능력치의 성장을 우선으로 하는 플레이에서 필히 해야 할 공략 중 꼽힐 정도다.

그만큼 반칙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도록 해. 나도 할 일이 남았거든."

그동안 미뤄두었던 걸 처리할 때가 됐다.

"잔여 포인트 확인."

[GP: 3,000]

이 게임에선 무엇이든지 가능케 하는 화폐가 있다.

God Point. 이른바 GP다.

"딱 알맞게 모였군."

이 GP는 현금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스킬의 개방, 강화 등 정말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신이 가호를 내리는 등의 행동을 위해서 필요한 대가 역시 이 GP를 뜻했다.

"가호 개방. 성외산력."

[가호 '성외산력'을 개방하는 데 3,000GP가 소모됩니다. 지불하시겠습니까?]

[3,000GP를 지불했습니다.]

[가호 '성외산력'을 개방했습니다.]

[스킬 '인체 강화'가 개방됐습니다.]

[능력치가 생성됐습니다.]

<성외산력>

성외자가 남기고 간 힘. 특정 조건 하에 따라 개방된다.

1. 도구 생성(C)

2. 인체 강화(F)

3. ?

[인체 강화]

랭크: F

인간의 신체 능력을 강화한다. 현 단계에선 신체의 토대를 다지는 정도다. 10레벨에 도달할 시 랭크를 상승시킬 수 있다.

[트리머]

레벨: 1

근력: F

민첩: F

내구: F

마력: F

행운: F

능력치를 수치화한 시스템. 상태창은 헌터로 각성했거나, 수호성의 계약자 등만 확인할 수 있었다.

미각성자의 경우엔 나처럼 편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상태창이 개방되지 않는다.

"오, 이런 감각인가...."

소설처럼 세포 하나하나가 느껴진다, 라는 건 없었다.

조금 힘이 넘치거나 몸이 가벼운 정도였다.

"응?"

스킬의 확인 도중,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상의를 슬쩍 올려 복부를 확인했다.

"허, 괜히 헌터, 헌터 하는 게 아니었구나."

복근이 여섯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다.

근육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었다. 흔히들 말하는 식스 팩이었다.

모델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훌륭했다.

오랫동안 앉아 있어 생긴 요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앞으로 나가있던 목도 제 위치를 찾았다.

'각성자, 헌터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서 능력만이 아니라 외관도 저절로 변하게 된다던 설정이더니 정말이었어.'

신체 능력 강화 계열이 특히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운동이라곤 헬스장 사흘 나간 게 끝이라서 평생 연이라고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좋네.'

거울을 보며 몸이 어찌 변했는지 좀 자세하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서 참기로 했다.

"어?"

"왜 그래?"

"아니, 이름이 방송용으로 되어 있어서. 별거 아니야."

워낙 교우 관계도 없다시피 해서, 본명보다 시청자들에게 불린 '트리머'란 이름이 더 익숙했다.

"차라리 잘 됐어. 좀 더 게임... 아니, 현실에 집중할 수 있을 거야."

사람이 죽고, 괴물과 혈투를 벌였다. 그런데도 패닉은커녕 당황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이는 내가 현실을 게임으로 인식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트리머란 이름은 이와 같은 자기 암시에 도움이 될 터.

"자, 가자."

[쥐의 소굴에 입장했습니다.]

[쥐의 소굴]

난이도: E

도시 지하의 수로. 도시 전설에 의하면 괴물이 산다고 한다.

* * *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쥐의 소굴]

분류: 메인

난이도: E

내용: 이름 모를 도시의 하수도에 도착했습니다. 던전의 안쪽, 핵을 파괴하고 클리어 하십시오. 그러나 편히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방류(放流)가 시작되기 전에 던전 끝에 도달하세요.

방류까지: 59분 56초

보상: 3,000GP

던전의 입구를 통과한 우리를 반긴 것은 코를 찌르는 끔찍한 악취였다.

만반의 준비로 마스크를 준비했는데도 보통이 아니었다.

미라는 물론 나 역시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세계치곤 지구랑 비슷하네. 던전이 다른 세계란 걸 듣지 않았다면, 하수도가 이렇게 생긴 줄 알았을걸."

미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게이트 너머, 쥐의 소굴은 오래된 서양 공포 영화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장소였다.

뚜껑을 덮은 듯 반구형의 천장은 족히 5미터는 되어 보였고, 그 아래는 수로를 가운데로 낀 잘 매장된 콘크리트길의 폭 역시 좁지 않고 넓었다.

특히 벽에는 일정한 구간마다 전등이 설치되어 있어 그리 어둡지 않았다.

일반적인 도시 하수도라기보다는 어딘가의 공사 중인 지하도 혹은 잘 정리된 하수도 처리장 같은 느낌이다.

"영상은?"

"입구에서부터 촬영 중."

카메라까지 겸하는 나의 편집자.

유능해. 멋져.

"...."

"편집할 거니까 목소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리는 두 번째 시련, 백귀야행 및 던전의 위험성을 전파할 목적으로 동영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실시간 중계는 당분간 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신분이 노출됐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였다.

적어도 신변을 보호할 힘이나 세력 등을 갖추기 전까지는 얼굴도, 이름도 감추는 편이 좋다.

어차피 정부나 언론에 던전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니 던전의 출입 및 클리어만 보여주면 충분했다.

찍! 찌익!

아니나 다를까 던전의 위험이 곧장 반응했다.

하수도의 끝자락에서부터 이형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빨리도 오네."

시뻘겋게 물든 눈. 둥글게 난 귀.

잿빛으로 물든 뭉툭하고 못생긴 코와 수염.

그 모습은 영락없는 쥐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체구는 손바닥에 쥘 만한 크기가 아니라, 어린아이 정도만 했으며 또한 이족보행을 했다.

쥐의 소굴의 괴물.

래트맨(RatMan).

"미라야. 준비해. 그리고 절대 수로에 빠지지 마."

"...응."

미라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나에게는 두 번째 전투. 아니,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의 경험이었으나 그녀는 다르다. 첫 번째 전투였다.

미라는 백 팩에서 미리 준비해 둔 물건들을 꺼냈다.

톱니바퀴와 나사 등의 기계 부품과 녹이 슨 낡은 철판.

그리고 청색과 적색으로 엉킨 전선과 장갑이었다.

미라는 장갑을 착용하고, 기계 부품과 전선을 올린 철판을 잡았다.

"기계 혁명."

[기계 혁명을 사용했습니다.]

[다섯 개의 부품을 감지했습니다.]

<기계 혁명(S)>

문명의 발달을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는 기계를 제조한다. 단,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미라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투사됐다.

태양이 아닌, 가정집 전등의 낯익은 주광색 문명의 빛이었다.

그리고— 이름 그대로의 혁명이 일어났다.

청과 적으로 나뉜 전선은 실처럼 철판과 톱니바퀴, 나사. 그리고 장갑을 엮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강화 외골격을 제조했습니다.]

색이 바랜 회색의 철판이 팔을 덮었다.

단순히 덮인 것이 아니다. 피부에 달라붙듯이 하나가 됐다.

전선은 인조 섬유가 되어 근육이 됐고, 톱니바퀴와 나사 역시 팔을 움직이는 동력 중 하나로 탈바꿈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계 팔.

로망의 결정체를 버려진 부품 몇 개로 만들어 내다니.

"과연, 기계장치의 신.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구나."

아서 클라크의 과학 3법칙.

"...이건 그냥 마법 아니야?"

아니다. 아무튼 과학이다.

"끼이익!"

잡담은 끝났다. 래트맨이 어둠을 가르며 접근했다.

눈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다섯 마리.

수적으로 불리하긴 했지만 크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심장의 두근거림은 없었다.

긴장감도 없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미간이 좁혀질 뿐이다.

마스크가 흘러내려 가지 않도록 치켜올려 고정하고,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어 나 역시 스킬을 사용했다.

'결박의 쇠사슬!'

촤르륵!

손바닥에서부터 쇠사슬이 로켓처럼 쏘아진다.

찰랑, 찰랑하고 쇳소리를 내던 사슬이 적의 목을 후려쳤다.

"키헥!"

전방의 래트맨이 꺾이듯이 뒤로 넘어졌다.

래트맨.

이름 모를 하수구에 사는 이 괴물은 최약체 몬스터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도 몹시 약했다.

다만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기세도 몹시 사나워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면 쉽게 당하고 만다.

촤륵!

쇠사슬이 다시 출렁였다. 되돌아오기 위해서 길이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여의봉 못지않은 조절이다.

그사이 남은 네 마리가 바로 지척까지 거리를 좁혀왔다.

"어딜!"

사슬을 꽉 쥔 채 팔을 휘두른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동안 신체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가벼워졌다.'

쇠사슬을 창조하고, 길이를 조절한다 한들 무게까지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1미터 정도 쇠로 된 줄을 휘두르는 데는 힘이 벅차다.

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나에겐 불가능한 게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휘둘러진 사슬은 매섭게 공기를 찢는 소리를 토해 내며, 래트맨 무리를 덮친다.

찰랑, 퍼억!

쇳소리가 난 직후에, 부딪치는 소리가 터졌다.

래트맨이 사슬에 맞고 날아가 벽에 처박히면서 낸 소리였다.

당한 건 한 마리만이 아니었다.

다른 한 마리는 가운데 수로로 빠져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면치 못했다.

두 마리는 피했다. 이제는 정말 바로 앞까지 왔다.

사슬을 되돌리기에는 늦어 대신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하아압!"

복부에 바람을 넣으면서 몸을 움직였다.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공구 망치가 래트맨의 두개골을 후려쳤다.

퍼억!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개골에 금이 생기기에는 충분했다.

[망치의 해결사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왔구나.'

제10화

10

비프로스트와 연결된 이후, 신은 인간에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보내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신은 이 메시지로 수호성의 계약자를 테스트하거나, 또는 단순히 반응을 보며 유희를 즐겼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거나.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머리를 박살 내자.]

분류: 미션

의뢰인: 망치의 해결사

난이도: F

내용: 망치로 머리를 박살내 래트맨 10마리를 토벌하라.

보상: 1,000GP

나왔구나. 머리 성애자!

"No!"

[퀘스트를 거절했습니다.]

[망치의 해결사가 입맛을 다십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아직 남은 한 마리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뒤로 물러났다.

자세가 무너져 바로 싸우기는 무리였다.

풍덩!

물이 위로 솟구쳤다.

무언가 빠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수로에 빠졌던 래트맨이 올라오며 내는 물장구 소리였다.

래트맨이 눈을 벌겋게 뜨며 나를 덮친다. 그 움직임이 잽싸다.

정면과 측면.

어딜 막고 피해야 할까.

부웅.

고민하던 찰나 바람이 불었다.

무거운 바람이다.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놀란 내 눈에 들어온 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래트맨에게 꽂아 넣는 편집자였다.

퍼억!

기계로 된 주먹이 래트맨의 턱을 후려쳤다.

그 위력은 막강했다. 턱뼈가 아스러지고, 앞니가 혀를 씹었다.

살점이 튀고 피를 흩뿌리며 몸이 튕겨 나갔다.

입술 사이로 감탄이 절로 흘러나온다.

나는 멍하니 쳐다보지 않고 손에 쥔 망치를 최후의 한 놈에게 던졌다.

"잘했어!"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아오던 래트맨이 잠시 주춤거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쇠사슬을 회수했다.

촤르륵!

길이가 줄어들면서 그 사이에 있는 래트맨의 발목을 감는 등의 재주를 부리지는 못했다.

신체 능력이 좋아졌긴 하지만 나는 전투 전문가도 도구 전문가도 아니다.

그 대신, 래트맨이 재차 공격에 나서려는 순간을 맞춰 쇠사슬을 힘껏 던져서 비교적 부피가 큰 몸을 묶었다.

"흡!"

"케헥!"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래트맨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리부터 부딪쳤는지 일어서지 못한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까 집어 던졌던 망치를 주워 마무리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200GP를 습득했습니다.]

경험치 분배 방식은 파티 시스템으로 기여도가 아닌 공통으로 설정했으니, 미라도 레벨이 올랐겠지.

"미라야. 아까 전에는 정말 잘했어."

빈말이 아니었다. 데몬 이후로 두 번째 보는 몬스터라고는 해도 실전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당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나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아이템을 쥐여 준 것도 아닌데 가호에 따른 조합 하나 알려줬다고 이렇게나 잘하다니!'

미래가 기대되는 뉴비의 재능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웨에...."

하지만 후폭풍은 컸다.

괴물을 해치우긴 했지만, 주먹질에 살이 뚫리고 뼈가 박살 났다.

그 잔해가 주먹에 묻었다.

기계로 덧씌웠다고 해도 그 감각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을 터.

만취한 다음 날 기상한 대학생처럼 벽에 기대 헛구역질했다.

"괜찮아?"

"...전혀."

미라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낯빛도 그리 좋지 않다.

"미안. 괜찮지 않아도 움직여야 해."

마음 같아선 조금이라고 쉬고 가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방류 때문에 그렇지?"

미라가 왼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 시선은 나를 넘어 더 뒤로 향했다.

뒤는 앞과 달리 전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무저갱처럼 끝도 없는 암흑이었다.

"응."

전날 밤.

쥐의 소굴을 공략하기로 한 나는 미라에게 '기계장치의 신'의 사용법과 던전에 대해서 설명했다.

특히 몇 번이나 되새기며 설명했던 건 퀘스트에도 주의하라는 '방류'였다.

여기가 어디 지하에 있는 곳인지는 모르지만, 그 역할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수도와 같다.

"앞으로 오십여 분 정도면 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배수 작업이 시작될 거고, 우릴 덮치겠지."

나아가야만 한다. 상황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죽고 싶지 않으면 가야만 해."

목소리에 힘을 주고 소꿉친구를 쳐다보자, 이에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에는 자기 의견 하나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애가... '기다종'과 관련되기만 하면 변한다니까. 하여간, 방구석 여포야. 방구석 여포."

미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마스크를 고쳐 썼다.

"화장실에서 내려온 물을 뒤집어쓰며 죽느니, 차라리 괴물과 싸우는 게 낫지. 가자."

"...."

"왜 그래?"

"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얼른 가자."

* * *

[괴물이 사는 하수구에 가는 스트리머가 있다?!]

제목을 짓자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면.

[조회 수가 뭐라고... 사고 당한 스트리머 TOP10]

다른 사람의 영상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겠다.

"미라야, 옆!"

쉬는 시간은 없었다.

목적지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훼방꾼이 문제였다.

얼마 가지도 못하고 래트맨 무리가 몇 마리씩 꾸준하게 우리를 덮쳐왔다.

래트맨이란 개체는 하나하나만 두고 보면 위협적이진 않았다.

일반인이어도 겁만 먹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

최소 대여섯 마리씩 몰려다니고, 쓰러뜨려도 금세 나타났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몹시 성가셨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300GP를 습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400GP를 습득했습니다.]

대신 그만큼 경험치의 수급 속도도 상당했다.

레벨이 금세 두 단계나 올랐다.

그러나 목을 조금씩 압박해 오는 시간 탓에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나와 미라는 조금도 쉬지 않고 꾸준히 움직였다.

힘이 떨어지지 않도록 백팩에 넣어둔 에너지 바를 섭취했다.

[방류까지: 4분 27초]

그러나 파죽지세도 잠시. 그 기세도 한풀 꺾였다.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도중에 멈춰서야 했다.

"맙소사. 도대체 몇 마리야...."

미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

전등의 미약한 빛 사이로 서로 엉켜 꾸물거리는 래트맨의 그림자가 보인다.

찍. 찌익. 키익.

울음소리도 들렸다. 다만 그 수가 문제였다.

족히 오십여 마리는 넘는 듯싶었다.

"이런 게 있다곤 못 들었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예상 못 한 일이니?"

"그럴 리가. 괴물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잖아. 부담될 것 같아 일부러 말 안 했어."

"...배려해 줘서 고맙긴 하다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초조한 듯 동동 구르는 발.

"설마 여길 뚫고 지나가는 게 공략은 아니길 빌게."

"걱정 마. 그건 첫 번째."

"그런 걸 염두에 두지 말아줬으면 해."

한숨을 크게 내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두 번째는?"

"GP는 얼마 남았어?"

"특수 보정 렌즈 500GP, 강화 외골격에 1,000GP... 레벨 업 포인트까지 합해서 1,200GP."

가호 '기계혁명'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조에는 재료만이 아니라 적잖은 포인트도 요구되는지라 마음껏 대량 제조할 수는 없었다.

현재 제조된 것은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카메라를 대신 할 특수 보정 렌즈와 강화 외골격 오른팔이었다.

"좋아. 계산대로다."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이번에는 내 백팩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다.

직사각형의 철판과 유리였다.

유리의 경우 깨지지 않도록 뽁뽁이로 감쌌다. 크기는 미라 것보다 컸다.

"이것들과 1,000GP로 전술 방패를 제조해 줘."

"방패...라니, 설마 방패를 앞에 두고 돌진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두 번째인 건 아니겠지?"

"걱정 마. 보고만 있어."

결박의 쇠사슬을 꺼냈다. 평소와 달리 이번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꺼내서, 중앙의 수로 아래로 흘려보냈다.

"자, 와라."

퐁.

쇠사슬이 밑으로 떨어지자 수면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까 전 수로로 떨어뜨렸던 래트맨으로 잠에서 깨어났을 터. 이제 여기로 부르는 일만 남았다.

촤르륵!

결박의 쇠사슬의 움직임이 보다 격해진다.

마치 춤을 추듯 격렬하게 흔들리고, 그에 따라 수면도 첨벙였다.

물장구가 커지자 소음도 커졌다. 자연스레 괴물들의 주의를 끌었다.

"키엑!"

"찍! 찌직!"

하수도의 괴물 쥐가 동시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 피어오르는 붉은 안광은 수십여 개의 촛불을 보는듯했다.

미라가 놀란 듯 숨을 멈췄다.

괴물 쥐가 내는 울음소리는 영혼 깊숙한 곳까지 섬뜩해진다.

투두두.

수면이 떨렸다. 지면이 흔들렸다.

지진은 아니다.

수십 마리의 래트맨이 움직이면서 내는 발걸음이었다.

"트리머!"

편집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주의를 끈 이상 더 이상 목소리를 줄일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쇄골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직사각형 방패를 앞에 내세운 모습이 보였다.

전술 방패.

좋아.

준비는 끝냈다.

"얼른!"

검은 구름. 래트맨 무리가 다가온다. 콘크리트 바닥은 물론이고 벽까지 타며 꽉꽉 채워 발을 딛을 틈도 없었다.

언젠가 흑사병을 소재로 한 중세 배경의 영화에서 쥐가 몰려다니며 시체를 갉아 먹는 걸 본 적이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영화에서 본 것과 동일했다.

그리고 굶주린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긴박한 순간—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왔다!"

촤르륵!

결박의 쇠사슬이 줄어들며 빠르게 후퇴한다.

그러자 그 끝을 노리고 있던 그림자도 재빨리 쫓아와 물었다.

"대어다아앗!"

쿠와아앙!

물기둥이 솟구쳤다.

수면이 크게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미끼를 문 대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아아아!"

이름 모를 하수도의 또 다른 괴물이 출현했다.

머리는 크고 넓다. 위에 달린 눈은 동공이 세로로 갈라진 파충류의 것이었다.

주둥이는 길고 넓적했다. 결박의 쇠사슬을 문 입 사이론 무수히 난 이빨이 보였다.

몸의 길이만 해도 4미터를 가뿐히 넘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비늘로 뒤덮여있다.

"아, 악어?"

정식 이름은 '하수구의 악어.' 도시 전설이자 이 하수구의 또 다른 주민의 크기는 허벅지까지 왔다.

사람을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덩치.

나는 이 괴물을 정면의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라아아아!"

하수구의 악어가 포효하며 움직였다.

그 목표는 정면에서부터 겁먹을 것 없이 덤벼오는 래트맨이었다.

"키에에엑!"

"끼익!"

"찍!"

하수구의 주민들이 격돌했다.

악어는 입을 쩍 벌려 래트맨을 몇 마리씩 입에 넣고, 수 톤에 이르는 턱 힘으로 짓뭉갰다.

때로는 옆이나 뒤쪽으로 덤벼들면 꼬리를 움직여 그 작은 몸들을 쓸어버렸고,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거나 먹어 치웠다.

일 대 다수인데다가, 수로도 아니고 육지에서 벌이는 전투임에도 하수구의 악어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혹시, 수로로 빠지지 말라고 했던 건...."

"이게 두 번째야."

나와 미라는 하수도의 악어를 방패삼아 래트맨이 접근해 오는 걸 막았다.

저 괴물들은 우리에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서로 눈앞에 있는 적수를 죽이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쥐의 소굴의 공략법은 크게 둘.'

하나는 수로를 무시하고 육로로 래트맨 무리를 남김없이 쓸어버리거나, 혹은 밀쳐내며 출구까지 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보기와 같이 괴물들끼리 싸움을 붙여 어부지리를 노리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자칫 잘못하면 낚시에 실패해 악어 밥이 되지만, 결박의 쇠사슬이 있어서 편했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2분도 안 남았어!"

미라가 언성을 높이며 나를 노려봤다.

"뒤로 돌아서, 방패를 사선으로 세워."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런 걸까. 미라는 군말 없이 내 지시에 따랐다.

그사이 나는 결박의 쇠사슬을 재소환.

이번에는 목표가 아래가 아닌 위. 전등 사이에 이어진 파이프였다.

촤르르르!

손에서 화살처럼 쏘아진 쇠사슬은 그대로 파이프를 몇 바퀴 감았고, 빠져나가지 않도록 적당히 고정했다.

"크흠. 잠깐만 실례할게."

양해를 구하고, 소꿉친구의 얇은 허리를 팔로 휘감아 뒤에서부터 껴안는다.

괴물과 싸우는 것보다 긴장됐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인지 알 수가 없다.

화만 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어부지리를 노리는 게 두 번째 방법 아니었어?"

"그렇지. 그런데 난 두 번째는 안 가. 우리는 세 번째로 간다."

"너, 설마...."

[수문(水門)이 개방됐습니다. 방류가 시작됩니다.]

띠링.

시스템 창이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무슨 일인지 하수도는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하수도의 악어'의 포효도, 래트맨의 비명도 사라졌다.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 세계를 다시 움직이게 한 건— 귀가 멀 정도로의 크나큰 폭파 음이었다.

콰아아아!

파도가 쳤다. 또다시 예전에 본 영화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낡은 호텔, 정적 속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피가 파도치며 쏟아져 나오는 장면.

스티븐 킹의 '샤이닝'.

슬로우모션 속 오수(汚水)가 지면과 벽면을 훑는다.

잡배수가 벽면을 타고 올라 전등을 먹어 치웠다.

빛이 꺼지며 오랫동안 달려왔던 길들이 보이지 않게 됐다.

이제 보이는 건 먹을 먹은 듯 검은 파도였다.

"아까, 그 말... 복선이었어?"

"응."

나는 이를 악문 듯한 물음에 답하면서, 그대로 미라를 안은 채 사선으로 세운 방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와 동시 파도는 세차게 하수도를 아래에서부터 후려쳤고, 우리는 방패를 서핑보드삼아 파도 위를 탔다.

"꽉 잡아! 휩쓸려 가면 안 돼!"

하수도는 순식간에 수 톤에 이르는 물로 가득 찼다.

키에엑!

괴물 쥐들이 물에 휩쓸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숨을 못 쉬는 건 둘째 치고 물의 압력에 뼈가 부서지거나 혹은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악어가 문제였다.

파스스!

수면이 조금씩 위로 올라간다.

그 기세는 멈추지 않았고, 이윽고 천장까지 닿기 직전까지 왔다.

미약한 빛을 내고 있던 전등도 대부분 물에 잠겨 수면 아래 역시 어둠으로 잠겨야 했다.

그러나.

'찾았다.'

빛이다. 수면 아래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확히 말해선 물에 잠겨 있는 벽이 빛나고 있었다.

"설마, 저긴 아니지?"

"맞아. 저기가 세 번째야."

[하수도의 숨겨진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제11화

11

쥐의 소굴은 제한된 시간 내에 코어 룸에 도착하지 못하면, 수억 톤의 파도를 정통으로 후려 맞고 사망한다. 또한 설사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 최후는 좋지 못했다.

수중에서 기다리고 있을 '하수구의 악어' 탓이었다.

어찌어찌 살아남으면 방류수(放流水)도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한다.

문제는 그 시간 동안 육지에서도 래트맨을 학살하던 하수구의 악어에게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알려진 정공법은 단 두 가지.

정면으로 뚫고 가거나, 하수구의 악어를 미끼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이 쥐의 소굴의 '숨겨진 요소'를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물에 잠기면 드러나는 비밀의 문을.

[하수도의 허수구역에 입장했습니다.]

['제3의 길'에 의해 1,000GP를 획득했습니다.]

[제3의 길]

어느 한쪽도 택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숨겨진 요소를 발견 혹은 공략하면 위업에 따라 보상이 발생한다.

제3의 길. 튜토리얼 클리어 후 손에 넣은 위업이다.

나처럼 게임을 몇십, 몇백 번 이상 다회차로 플레이한 사람에게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효과를 가졌다.

"미라야. 일단 진정하자. 그걸로 맞으면 나 죽어."

그러나 지금은 감상할 때가 아니다.

미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문제는 강화 외골격으로 감싼 오른팔이다.

추정 근력 랭크 E. 맞으면 아픈 걸로 안 끝난다.

물에 젖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귀신같았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네. 그것도 화장실 물."

"화, 화장실 물이라니! 아니야. 보통 오수나 잡배수는 건물의 정화 시설을 거쳐서 배출해! 그리 더럽지 않아!"

"...정말?"

"정말!"

"...좋아. 이번에만 용서해 주겠어."

휴우.

'이세계의 던전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입 다물도록 하자.'

어딘지도 모를 허수구역(虛水區域)에 발을 들인 우리는 미리 가져온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았다.

마스크도 교체했다. 백팩이 방수라서 안의 물건들은 멀쩡했다.

"그나저나, 여기는...."

미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장소 파악에 나섰다.

허수구역은 벽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방이었다. 그 크기는 사람 오십여 명을 수용하는 정도.

햇빛은 들어오진 않았으나 밝다. 5미터 높이 천장에 박힌 전등 덕분이었다.

출입구는 하수구와 연결된 비밀통로가 끝이었다.

그 외에 눈에 띄는 건 하나뿐이었다.

허수구역 중앙의 인공물. 열두 계단 위에 세워진 단(壇)이었다.

있다.

[식탐의 제단을 발견했습니다.]

[식탐의 제단]

과거, 이름 모를 도시에서 성행했던 종교의 흔적. 탐하라. 기도하라. 힘을 얻을지어니.

"또 제단?"

"저번 것과는 달라."

튜토리얼의 경우 이름만 제단이지 술식만 새겨진 양산품에 불과했다. 눈앞의 것은 구성부터가 다르다.

그 증거로 신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남쪽의 32군단장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명계의 하급관료가 식은땀을 흘립니다.]

[위험과 자비의 건설 장인이 위험을 권해 봅니다.]

[지혜의 수호자가 불쾌하게 여깁니다.]

'나를 주시하고 있는 신들은 이 정도인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시스템의 표시만 보면 네 위(位).

망치의 해결사까지 포함하면 다섯 위다.

'아니, 그보다 지혜의 수호자가 붙었잖아?'

지혜의 수호자. 올림포스의 열두 신 중 하나.

신화에서도 유명하기로 손꼽히는 신.

얼마 전의 수호성사에서 잠깐 불렸었는데, 설마 그걸 계기로 내 곁에서 머무르고 있던 건가?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제단을 파괴하시오.]

분류: 미션

의뢰인: 명계의 하급 관료

난이도: F

내용: 식탐의 제단을 파괴하라.

보상: 3,000GP

"3,000GP?"

미라가 보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도 조금 놀랐다.

"명계의 하급 관료... 난이도에 비해 보상이 후한데, 이 정도 포인트를 내줄 정도로 높은 신격이야?"

수호성의 계약자에게 가호를 내리는 데만 해도 GP가 소모된다.

그래서 포인트를 절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포인트를 다른 경우에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쉽게도 나도 모르는 신이네. 하지만 하급 관료란 이름을 보면 그건 아닐 거야."

긍지를 중요시하는 신들은 스스로를 낮추지 않는다.

"저 정도를 내걸 만큼 저 제단의 파괴가 중요한 거겠지."

수호성 계약을 생각지 않고, 후원이나 원하는 것을 보기 위해 얼마 없는 포인트를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다.

"네가 '기다종'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있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한두 줄 잠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나, 혹은 설정만 있는 것 까지는 알지 못 해."

특히 후자의 경우를 예를 들자면, '기다종'의 설정에서는 지구상의 신들이 인류와 다시 함께한다고 한다.

그러나 게임에 이 신들을 전부 등장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의미가 없기도 하고.

"현실과 게임이 뒤섞이면서, 불확정 요소가 늘었구나. 이 부분은 확실히 주의해야겠네."

[당신을 지켜보는 신들이 언어의 검열에 답답해합니다.]

"제단은 어떻게 부술까?"

"안 부숴."

"...?"

[명계의 하급 관료가 의아해합니다.]

쥐의 소굴을 첫 번째로 공략하기로 한 최대 이유는 '포식자' 때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던전을 공략하며 입수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는 신들과 불안해하는 미라를 뒤로하고, 주변에 둘러 다니는 돌조각을 주웠다.

그리곤 곧장 중앙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올라, 제단 위에 서서 손바닥을 쫙 펼쳤다.

[위험과 자비의 건설 장인이 흥미로워합니다.]

푸슛!

돌조각이 손바닥을 긋는다. 피부가 갈라지고, 그 사이로 핏방울이 제단 위로 떨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지면 위에 새겨지는 검붉은 점.

"이렇게 할 거야."

[식탐의 제단이 활성화됩니다.]

[퀘스트를 거절했습니다.]

[명계의 하급 관료가 분노합니다.]

[남쪽의 32군단장이 눈을 부라립니다.]

[지혜의 수호자가 싫어합니다.]

[위험과 자비의 건설 장인이 500GP를 후원했습니다.]

핏방울에서부터 빛이 흘러나왔다. 어둠을 밝히는 환한 빛이 아닌, 거무튀튀하고 기분 나쁜 빛이었다.

이내 어두운 빛에서 제단 위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생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함, 그리고 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살점이 없어 피부 가죽밖에 없다.

손은 습기로 축축하게 젖은 제단의 바닥을 짚었다가, 힘을 주며 아래에 박혀 있는 몸을 끌어올렸다.

[허수의 아귀(餓鬼)가 깨어났습니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전투 준비!"

히든 보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밖으로 나오며 내지르는 괴성은 포효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깝다.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토해 내는 고통에 가득 찬 목소리도 외관도 섬뜩했다.

머리카락 하나 없는 민머리는 앞부분이 반쯤 함몰됐고, 눈꺼풀은 어딘가에 맞아 부은 것처럼 두껍다.

팔다리는 얇은데, 복부는 과할 정도로 나와 있어 병자를 연상시켰다.

또한 쩍 벌린 입 사이에 언뜻 보이는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좁은 것이 인상적이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허수의 아귀 토벌]

분류: 히든

난이도: E

내용: 허수의 아귀를 토벌하시오.

보상: 1,000GP

[망치의 해결사가 다시 망치를 쥘 때가 왔다고 발언합니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놈의 머리를 박살 내자!]

분류: 미션

의뢰인: 망치의 해결사

난이도: E

내용: 망치로 허수의 아귀의 머리를 박살 내라.

보상: 1,100GP

[퀘스트를 거절했습니다.]

[망치의 해결사가 입맛을 다십니다.]

"허수의 아귀."

"끄아악!"

아귀란, 불교에서 죄를 지어 아귀도(餓鬼道)로 환생한 죄인이자 귀신을 뜻한다.

먹어도, 먹어도 굶주림이 해소되지 않은 형벌을 받은 괴물.

그리고 이 허수의 아귀는 이러한 죄인들을 가둬 두는 아귀도에서 탈출해 허수구역에 숨은 개체였다.

신들의 반응이 괜히 격해진 게 아니다.

고작 하급귀가 형벌 도중 도주했으니 기분 나빠하리라.

"끄아아아아아아!"

허수의 아귀가 먹잇감을 보고 팔을 휘두른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이나, 족히 삼 미터는 되다 보니 팔을 비롯한 몸집도 컸다.

나는 핏방울을 떨어뜨리자마자 뒤로 물러났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팔 다리는 얇은데, 몸통만 큰 게 꼭 이쑤시개를 박아 둔 감자 같네."

"풋!"

미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을 즐겁게 하는 방송인으로서 뿌듯했다.

"코멘트 괜찮았어?"

"...어흠. 급박한 때에 개그 욕심 내지 마."

"전술 방패 좀 빌려줄래?"

접두에 전술이란 이름이 붙어 있긴 하지만, 별 거 아니다.

몸을 가릴 만한 크기에 유리를 달아 앞을 볼 수 있는 것뿐. 요컨대 특수부대에서 가끔 사용하는 그것이다.

"끄아아악!"

허수의 아귀가 사납게 울며 달려든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자 풍만한 복부가 바닥에 끌렸다.

우스꽝스러우나 웃을 수는 없었다. 칼날처럼 매서운 손톱이 대기를 다섯으로 찢으며 덮쳐왔다.

채애앵!

손톱이 전술 방패를 긁었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몸이 절로 뒤로 밀리며 신발 바닥이 쓸렸다.

"후읍!"

대퇴부가 작게 부풀어 오른다. 발목에 힘이 들어갔다.

방패 안쪽 손잡이를 잡은 손에도 압력이 느껴졌다.

아직 조금 부족하다. F랭크의 능력치로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역시 괴물과 정면으로 힘 대결은 아직 무린가.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한 사람이 아닌 둘.

미라가 뒤에서부터 오른팔로 등을 밀어주며 버텼다.

'결박의 쇠사슬!'

방패의 유리로 앞을 주시한 채 쇠사슬을 투사한다.

이번에는 새처럼 높이 날진 않고 아래를 비행했다.

허수의 아귀는 사슬을 미처 보지 못했다. 태산처럼 부풀어 오른 복부 탓에 시야가 한정적이었다.

쇠사슬은 아귀의 발목을 빙글빙글 돌아 결박했다.

"지금이야, 당겨!"

등을 짚은 기계손의 차가운 촉감이 사라졌다. 대신 쥐고 있던 사슬이 미라에게로 옮겨갔다.

괴성을 내지르는 요란함은 없었다. 마치 정말로 기계처럼 제 할 일을 하듯, 그녀는 있는 힘껏 사슬을 당겼다.

촤르르르르.

쇠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요란함을 대신했다.

"끄아아아아아!"

쿠웅!

정면에서도 난리다.

발목을 묶인 아귀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경추와 머리를 차례대로 바닥에 박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방비. 이때다.

숨을 들이 쉬고 지면을 박찬다. 땅을 밀어내듯 달렸다. 손에는 쇠사슬 대신 전술 방패를 들었다.

방패를 방어용으로만 다루는 건 잘못된 사용방법이다. 통째로 철이 된 이 방패는 훌륭한 무기다.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밟는다. 그리고 그 위의 태산처럼 부푼 복부를 올라탔다.

보통은 치명상도 입히고 맞추기 쉬운 복부를 노리겠지만, 이는 초보자가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다.

영원토록 굶게 된 귀신의 배는 지방이 아닌, 먹을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돌이 들어 있다.

나 역시 게임 초반에 멋모르고 복부만 실컷 패다가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잡아먹혔었지.

"우오오옷!"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방패를 위로 들었다. 안쪽에 손잡이가 있어 잡는 데는 편했다.

동산과 같은 복부 위에 올랐다가, 언덕의 아래로 떨어졌다.

가슴을 지나니 못생긴 얼굴이 바로 나왔다.

먹잇감이 오자 좋다구나 하며 입을 벌리는 아귀.

이에 나는 있는 힘껏, 전술 방패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아래턱을 향하여.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방패의 끝이 턱을 후려쳤다.

입안의 얼마 없는 이가 부서지고, 아래턱뼈는 모래처럼 흩어졌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굶주리도록 윤회하는 아귀는 먹을 것을 삼킬 수 없도록 목구멍이 좁고, 씹지 못하도록 턱 구조가 약합니다."

모니터 너머 시청자들에게 설명해 주듯, 중얼거린다.

"약점을 모르면 이게 무슨 E랭크냐면서 화를 내시겠지만, 알기만 하면 그리 어려운 적은 아닙니다. 비각성자조차 충분히 손쉽게 공략할 수 있죠."

[지혜의 수호자가 당신의 지식에 미소 짓습니다.]

"끝."

콰직!

[허수의 아귀를 토벌했습니다.]

[퀘스트 '허수의 아귀 토벌'을 클리어 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1,000GP를 획득했습니다.]

['제3의 길'에 의해 500GP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500GP를 습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600GP를 습득했습니다.]

제12화

12

허수의 아귀가 소멸한다.

생명을 잃은 살과 피부는 검게 그을려지고, 타서 없어진 재처럼 바스러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방해꾼도 사라졌고, 경험치도 얻었다.

이제 쥐의 소굴에 온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할 차례였다.

[식탐의 제단을 파괴했습니다.]

[명계의 하급 관료가 좋아합니다.]

[남쪽의 32군단장이 좋아합니....]

메시지 창이 연달아 나타났다.

나는 손을 내저어 창을 내쫓고, 제단의 잔해 더미를 뒤져 한 물건을 찾았다.

"찾았다!"

[갈마석(羯磨石)을 습득했습니다.]

[갈마석]

등급: ☆☆☆☆☆

분류: 소모품

업(業:Karma)이란 결과를 부르는 원인이자 시작이다. 신업(神業)의 대가가 되는 GP의 습득률이 20% 증가한다. 단, 후원으로 인한 포인트는 제외한다.

만약 '고속 성장'에 빠질 수 없는 것을 꼽으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갈마석'이라 대답할 것이다.

'제3의 길 역시 좋긴 하나 숨겨진 요소를 공략해야 하는 전제조건이 붙지. 하지만, 이 갈마석은 제한이 없어.'

GP는 신이나 인간에게나 중요하다.

물물교환의 화폐가 되거나 능력의 강화 등 여러 가지가 사용할 수 있다.

그러한 포인트를 무조건적으로 20% 상승시켜 준다니.

남들보다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케 할 수 있다.

암시장에 내놓는다면 부르는 게 값. 사회가 별의 시대를 받아들이면 국가가 이를 두고 싸울지도 모른다.

그만큼 갈마석의 습득은 '포식자'만큼이나 중요했다.

다만.

"미라야, 할 말이 있어."

"뭔데?"

정작 먼저 말은 건 것은 나인데, 입이 잘 열리지 않는다. 결국 몇 번의 뜸들임과 함께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이 갈마석... 혹시, 내가 사용해도 될까?"

갈마석의 소유는 한 번 택하면 영구적으로 귀속된다.

도중 양도가 불가능했다.

나 혼자서 얻은 것도 아니고, 미라의 협력을 받아 입수한 아이템이다.

당연히 그녀에게도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상의도 없이 결정할 수는 없었다.

미라 역시 앞으로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훗날 도움이 될 주요 아이템을 원할 터.

무엇보다 '기계장치의 신'은 능력의 발현에 포인트가 지속적으로 소모되니, 그 필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다.

"좋아. 그렇게 해."

"응?"

그러나 내 이런 깊은 고민과 달리— 내 소꿉친구는 너무나도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래. 어차피 네가 아니었으면 이 허수구역이란 곳에 오지도 못했을걸. 상관없어."

"하지만...."

"됐어."

미라는 내 말을 일축했다.

"나도 생각 없이 너에게 떠넘기듯 결정한 건 아니야."

소꿉친구가 편집자로서 공사를 분리한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이 쌓일 것만 같은 긴 속눈썹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팔짱을 꼈다.

"잘 들어. 만약 이 세계가 네가 질리도록 한 게임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어떤 게 보다 효율적이고 정답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있도록 의논을 나눴을 거야."

나는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연하지. 별다른 매력도 없이 운 좋게 약간 인기 있었던 걸 믿고 분석 하나 없이 서투르게 방송에 뛰어든 널 어떻게 믿겠니?"

의사 선생님.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한 시간 전, 출입구가 바로 앞인데도 주저하지 않고 등을 돌려 방패를 내세운 건 상황이 급박하고 생각을 포기해서가 아니야."

김미라.

"이 게임을 수백 번 이상 반복하며, 연구하고, 경험한 네 판단을 믿은 거지."

나의 소꿉친구이자 편집자.

그래. 그녀는 늘 그랬다.

어린 시절에 다소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모습은, 여타 아이들보다 생각이 많고 성숙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았다.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침착하게 논리적으로 사고한다.

나에게 그런 그녀는 둘도 없는 파트너였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건 나는 너를 믿을 거야. 설사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해도."

코끝이 찡하다. 설마 이렇게까지 신뢰받는지는 몰랐다. 말도 못할 만큼 감격스러웠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서 있자, 미라는 나에게 다가와 이마에 오른손 검지를 올렸다.

"다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독단도 적당히. 의논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줘."

그러곤 조금 쑥스러운 듯, 얼굴을 돌리는 미라.

"특히 전처럼 화장실 물을 뒤집어쓰는 건 사양이야."

"미라야...."

"...됐어. 더 이상 말 안 해도 돼."

"나, 죽을 것 같아...."

"응? 아, 강화 외골... 꺄아악! 이마! 이마가!"

오른 손가락에 머리에 바람구멍이 날 뻔했다.

인체 강화가 없었다면 죽었다. 정말로.

* * *

[갈마석에 깃든 힘이 몸에 스며듭니다.]

[GP의 습득률이 20% 증가합니다.]

갈마석의 효과적용은 어렵지 않았다. 돌을 손에 쥐고 소유하겠냐는 메시지에 답하는 걸로 진행됐다.

Yes, 라고 답하자 돌에서 검고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와 몸 안을 감싸 안았다.

따스하거나 차갑거나 하는 감각은 없었다.

약간의 허기가 느껴지는 걸로 끝.

그 후로 손에 쥐고 있던 효과를 흡수당한 갈마석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평범한 돌로 변했다.

굳이 들고 다닐 이유는 없어 부서진 제단 위에 두고 왔다.

"아까 그 난리가 거짓말 같네."

허수구역을 빠져나와, 하수도로 돌아왔다.

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던 수면 역시 원래 있을 곳에 위치했다.

파도가 한 차례 휩쓸고 가서 그런지, 아까 전 꽃잎처럼 흩뿌려진 살점이나 핏자국도 깨끗이 청소됐다.

등도 한결 가볍다. 백팩에서 철판이나 유리 등의 소지품이 빠진 덕이다.

마음 같아선 벗어 던지고 가고 싶었지만, 아직 몇 가지 물품이 남아 있어 그럴 수 없다.

[방류까지: 00:34:56]

한 편, 남은 시간은 초기화됐다.

이 하수도의 방류는 몇 번이나 반복된다. 이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파도가 훑고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코어 룸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이상 제한 시간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다만, 아직 래트맨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긴장은 풀지 마. 천장에 작은 구멍이 있어. 방류 때 저 위까지는 차오르지 않으니 저리로 도망쳐 살아남은 무리가 있을 거야."

"하수구의 악어도 마찬가지고."

미라는 전과 달리 수로를 경계하듯 살펴봤다.

"응. 하지만 거의 도착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장마처럼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하수도의 끝.

얼마 없는 전등 아래— 그림자 속에 숨은 무언가가 보였다.

"그런 말 하면 꼭 걱정할 일이 벌어지더라."

미라가 나를 흘겨보곤, 싸울 태세를 준비했다.

"응?"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그림자 속에 무언가는 우리를 앞에 두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어 겁먹은 듯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래트맨이 아니야."

래트맨은 약할지는 몰라도 어떤 상황에도 겁을 먹지 않는다.

그 하수구의 악어에게도 덤벼들지 않았는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쥐의 소굴에 대한 정보가 나열되고, 변수가 될 만한 것을 골랐다.

예상치 못한 상황.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잡는다.

"자, 잠시만요!"

일촉즉발의 순간.

여성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고, 공격하지 마세요. 저는 적이 아니에요!"

"사람?"

미라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누구지?

"앞으로 천천히 나오세요."

경계를 풀지 않고 정면을 주시한다.

뒤편에 선 미라에게 손바닥을 보여 조심하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네, 네. 그럴게요."

그림자 속에 숨은 여성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또각, 또각.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곧이어 머리 위의 전등이 여성의 얼굴을 비췄다.

나는 그 외모를 잠시 살펴보다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여자는...!'

전등의 빛을 받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동화 속 요정을 연상케 했다.

쇄골을 살짝 가릴 정도로 내려앉은 머리카락은 파도를 치듯 펌을 넣었고, 이마는 가리지 않고 드러냈다.

그 아래는 얇고 고운 눈썹과 사랑스러움이 돋보이는 눈매에 두려움을 비추는 푸른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놀란 건 외국인인지 모를 외모적 특징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파도의 마녀잖아!'

모를 리 없다.

은발에 푸른 눈에 저 얼굴. 게임 일러스트로 본 적 있다.

확실하다. 기다종의 조연— '파도의 마녀'가 틀림없었다.

파도의 마녀.

명왕과 발키리와 마찬가지로 게임 속 등장인물.

훗날 주요 퀘스트에서 도움이 될 협력자이자 조연.

어딘가 모르게 신비가 묻어나는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정말로 유명한 것은 그녀와 계약한 수호성이었다.

'마나난 막 리르.'

Manannán mac Lir.

켈트 신화의 바다의 신이자, 동시에 요정의 왕이며 또한 위대한 힘을 지닌 마술사.

전승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여타 신들 중에서도 상위의 신격을 지녔다.

그런 신과 계약을 맺은 파도의 마녀 역시 준수한 능력의 소유자로서 후에 여러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본편에 들어간 뒤, 중반에 가서야 얼굴을 보이는 파도의 마녀가 왜 지금 여기에 나타난 거지?'

파도의 등장 시기는 훗날.

본편이 시작하고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다.

등장하려면 아직 한참 먼 인물이 프롤로그에서 툭 튀어나오니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저기...."

"아, 죄송합니다. 잠깐 뭣 좀 생각하느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경계를 풀었다.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기회다.'

게임의 중반부터 등장하는 인물답게 이 종말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정신력도 가지고 있다.

또한 수호성이나 이명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마법적 능력도 준수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평가 받는 건 그녀의 성향이었다.

'완전한 중립.'

기다종에서 '성향'이란 레벨 다음으로 중요하다.

예를 들어 수호성 계약을 맺은 신이 선의 신이라면, 악행을 용서치 않는다.

애초에 계약을 맺을 때 성향이 맞은 이를 찾긴 하나, 만약 도중에 여러 사건으로 변심이 와 변할 경우에는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 외에도 곧 그 사람의 신념과 행동을 알려줘서, 자칫 잘못하면 동료로 맞이해도 여러 마찰을 일으켰다.

전의 두 사람과 합류하지 않은 이유도 위와 같았다.

'명왕처럼 군림하려 하지도 않고, 발키리처럼 악행을 용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경우에 따라 판단하지.'

순수한 전투력은 앞의 두 사람보다는 당연히 떨어지지만, 협조성만큼은 S랭크.

'동료로 합류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파도의 마녀가 왜 쥐의 소굴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볼 문제는 아니었다.

정말로 천운이 닿았다 할 정도로—동료로 맞이하기에 안성맞춤인 존재였다.

생각을 끝낸 나는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방금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사람이 아니라 괴물로 착각했거든요."

"아, 아니에요. 저도 설마 저 외에 사람들이 있을 줄은 몰라서 놀랐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트리머라고 합니다."

"트리머...?"

"실명은 아니고, 닉네임입니다. 제가 개인 방송으로 하고 있어서요."

"아, 그렇군요. 저는 나루예요. 인나루."

"김미라라고 해요."

미라도 넌지시 인사를 건넸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네요."

시간을 가리키듯 손목을 보여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적어도 방류에 휘말리는 것은 피하고 싶어서 그런데, 앞으로 이동해서 대화해도 괜찮을까요?"

파도의 마녀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면식 하나 없는 사람이 동행을 요청을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언제 나타날지 모를 래트맨과 하수구의 악어, 그리고 방류를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알겠어요. 대신, 조금 거리를 두고 걸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인나루.

이 당시의 나는 '기다종'의 이름이 알려진 인물을 동료로 포섭한다는 생각에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파도의 마녀이었으나, 본편이 시작하기 전인 내가 모르는 '과거의 인나루'였다는 것을.

제13화

13

우리는 던전의 최심부를 향해 나아갔다—라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십여 분. 아니, 오 분 정도를 걷자 하수구의 끝자락이 보였다.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이 우리를 반겼다.

문 주변의 표면은 폭포가 깎아내린 절벽처럼 울퉁불퉁하고 거칠었다.

다만 한 군데만은 멀쩡했는데, 그 위로는 반쯤 훼손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어 눈에 띄었다.

확인 차 가까이 다가가 손바닥을 올리니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

미라와 인나루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경계했지만, 나는 미리 알고 있어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진입하겠습니다."

내부는 일직선으로 펼쳐진 길이었다. 다만 구조는 달랐다.

안으로 향하는 길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대리석으로 포장됐고, 벽에는 전등 대신 횃불이 달렸다.

쿠르릉!

인나루가 마지막으로 들어오자 뒷문이 닫혔다.

"힉."

파도의 마녀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도망칠 곳이 막혀서 그런지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모르는 사람과 어딘지도 모를 세계에 갇혔으니 불안하겠지.

조금 덜어주자.

"너무 그리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이 주변은 아마 안전할 거예요. 그리고 저희도 사람을 잡아먹진 않거든요."

불안해하지 않도록 살며시 웃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자 인나루의 입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이제 좀 살겠네요."

한결 가벼워지는 분위기.

"아, 진짜. 죽을 뻔했어요!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하더니만 사람만 한 괴물 쥐가 나타나지, 방류다 뭐다 시간은 압박해 오고... 인도자는 이래라저래라...."

으응?

"인도자?"

"아, '젊은 나라의 인도자.' 제 수호성이에요. 꼰대 기질이 좀 다분한 신님이시거든요."

마나난 막 리르의 이명이다. 아니, 그보다....

'파도의 마녀가 이런 성격이었나?'

얼굴은 같다. 파도의 마녀가 틀림없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밝아진 건 좋은데 좀 과하다.

"두 분도 저처럼 신님의 인도로 오신 건가요?"

"인도로 와요?"

"네. 한 시간 전쯤이었나, 길을 가던 도중에 신님께서 공원 쪽으로 가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해서 왔거든요. 뭔가 속은 기분이지만요."

'신 고유의 특성인가.'

신은 각자 남들과 다른 권세나 능력을 지녔다.

예를 들어 '성외의 예언자'는 '예언'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힘으로 나를 찾았다.

그리고 '젊은 나라의 인도자'는 이름 그대로 남을 이끄는 힘을 지닌 신.

"켈트 신화에서 밀레시안에게 패배한 신들을 젊은 나라의 인도자가 서쪽의 낙원으로 인도했었지."

무심코 중얼거렸다. 방송 때문에 이젠 습관이 들었군.

[젊은 나라의 인도자가 놀라워합니다.]

"응? 신님을 아세요?"

"아, 뭐... 신학을 조금 공부했거든요. 취미 삼아."

"그래도 이름을 듣자마자 떠올리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아, 혹시 방송도 그런 건가 봐요? 신화를 소개해 주는 아이튜버. 저 학교에서 가끔 그런 거 보긴 했는데."

"그건 아닌데... 잠깐, 학교?"

설마.

"네, 고등학생이거든요. 1학년이에요."

맙소사.

아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파도의 마녀의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이십대. 그것도 본편 시점이니 과거인 프롤로그에서는....'

학생이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머리가 열을 내며 회전한다. 의문과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해답을 도출하기 위해 온갖 지식이 서로 엉켰다.

'실수다.'

지금 이 시기의 그녀는 종말을 종횡무진하며, 어딘가 모르게 신비에 가득 찬 지혜로운 마녀가 아니었다.

아직 그리되기 전의—이제 막 수호성과 계약을 맺은 고등학생에 불과하다.

'골치 아파졌군.'

보스가 기다리고 있을 방과 이어진 긴 복도를 거닐며 우리들은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학교 수업 도중 튜토리얼에 휘말린 인나루는 헌터로 각성하고, 시련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 한다.

그리고 얼마 뒤 '젊은 나라의 인도자'의 눈에 들어와 수호성 계약.

그 뒤는 말한 대로 수호성의 인도로 쥐의 소굴을 찾았다.

참고로 앞서 가 있긴 했으나, 정황상 첫 번째 방류가 지나간 뒤에 들어온 듯했다.

우리와의 거리 차이는 허수구역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면서 생긴 모양이다.

인나루는 생각보다 더 수다스러운 성격이었다.

특히나 수호성 계약자라는 말을 듣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와, 저 외에 계약자를 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쪽 신님... '기계장치의 신'의 성격은 어떠세요?"

"으음. 과묵하다고 해야 할까... 계약한 뒤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네? 그쪽 신님은 한마디도 안 하세요?"

"네."

"와, 부럽다. 저희 신님은 뭐만 하면 중얼중얼 잔소리만 하거든요. 굉장히 성가셔... 아, 알았어요. 지금도 뭐라 하시네요. 하여간 진짜 꼰대 그 자체라니까."

인나루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저도 모르는 힘을 깨우치고 신과 계약을 맺었을 때는 약간의 기대를 했거든요. '신들이 나를 두고 싸워서 곤란하다.'라거나 '치트를 가지고 악역 영애로 환생했다.' 같은 삶이요."

"네?"

"어라, 모르세요? 요즘 유행하는 건데... 알기 쉽게 이야기한다면, 인생을 날로 먹고 싶다는 뜻이에요."

검지를 피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인나루.

"요즘 같은 세상에서 누가 고생하는 걸 좋아해요? 노력하나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사랑해 주고, 알아서 먹여 살려주는 그런 날로 먹는 삶!"

"...."

두 손 모아 눈을 반짝이는 인나루.

그에 비해 미라는 '뭐라는 거야?' 라는 얼굴이었다.

나 역시 점점 더 멀어지는 그녀의 이미지에 혼란스러웠다.

"아, 도착한 것 같네요."

언제 끝날지 모를 복도도 끝이 보였다.

비각성자인 미라는 슬슬 지칠 무렵이었는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앞에 있을 위험에 대비해 심호흡을 하고, 발자국을 내민다.

그리고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무심코 감탄했다.

코어 룸은 넓었다. 아니, 거대했다. 중고등학교 운동장 정도의 넓이에 천장도 족히 십여 미터는 넘었다.

내부는 직사각형이었는데, 벽에는 복도에서 본 것보다 배는 큰 횃불이 달려 있어 낮처럼 환했다.

정면에는 허수구역에서 목격했던 제단 비슷한 것이 보였다.

그 뒤로는 어딘가에 걸어 둔지도 모를 족자가 있었는데, 무려 3미터에 이르렀다.

제법 거리가 되는데도 압도된다. 다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족자에 그려진 그림은 쥐였다.

래트맨처럼 이족 보행이었는데, 머리와 손을 제외한 부위를 갑옷으로 감쌌다.

오른손에는 병기를 쥐었다.

긴 자루에 세 갈래로 나누어진 날을 달았다.

좌우 갈래의 날이 옆으로 길게 펼쳐진 것을 보면 삼지창은 아니다. 극(戟)이었다.

"설마, 저 그림에서 보스가 나오는 건 아니지?"

"맞아."

"...."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는 미라.

"걱정 마. 바로는 안 싸워."

사각.

사각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쥐새끼가 머리 위를 기어 다니는 소리다.

집 천장이었다면 대걸레로 홧김에 쳐 보기라도 했겠지만, 천장이 워낙 높아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곧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점차 커져 오는 소리의 근원지는 위가 아닌 바닥에서. 제단 뒤편의 구멍에서부터였다.

"...이건, 악몽이야."

미라가 반쯤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나루는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나 역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말이 안 나왔다.

검은 구름. 아니, 정확히는 무리를 진 래트맨이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수를 세는 건 의미가 없다.

대충 세어 봐도 수십 마리. 기억상 40이었나.

"만화처럼 알지도 못한 힘을 각성하고, 인생 좀 날로 먹을 수 있나 싶었는데...."

인나루가 불평을 입에 담았다.

'겁을 먹진 않았네. 좋아. 싸울 수는 있겠어.'

별의 시대 초기에는 각성을 해도 겁을 먹고 어이없이 죽는 이들이 숱하다.

적어도 그런 경우는 아니었다.

"전에 말한 대로 후위를 맡기겠습니다! 미라야! 잘 보호해 줘!"

쿠웅

미라가 준비됐다는 듯 전술 방패를 꺼냈다.

드륵! 드르륵!

전술 방패가 가로로 늘어났다.

정확히 말해선 반으로 접혀있던 부분을 펼쳤다.

괜히 '전술' 방패가 아니었다.

코어 룸에 도착하기 전, 복도에서 우리는 간단한 통성명과 함께 각자의 특기를 알려 주고 전술을 짰다.

"트리스켈리온(Triskelion)!"

인나루가 스킬 명을 외치듯 무구를 소환한다.

오른손을 위로 뻗자, 그 손에 지팡이가 쥐어졌다.

크기는 허리까지 올라오고, 하얗게 칠한 나무였다. 끝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회전대칭의 문양이었다.

문양은 훗날 '파도의 마녀'라 불리게 되는 이미지에 걸맞게 파도를 닮았다.

"하앗!"

인나루는 지팡이를 들었다가 지면을 두드린다.

주문을 외울 필요는 없다.

바다의 신이자 마술사로도 이름이 알려진 마나난 막 리르에게 받은 힘이다.

쿠—웅!

몸을 지탱하려 땅을 짚은 게 아니다. 트리스켈리온의 마력이 어딘지도 모를 세계의 지맥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행위는 기적으로 이어졌다.

콰드드!

땅에 균열이 갔다.

그리고 곧 혹이 나듯 땅이 위로 솟구치며, 바위를 뱉어냈다.

몇백 kg에 이르는 바위는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래트맨 무리를 후려쳤다.

"키에엑!"

"키익!"

괴물이 된 쥐 떼가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약한 몸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파도의 마녀다.'

기억과 너무 달라 의심했던 게 바보 같았다.

원소의 힘을 다룬다는 드루이드의 지팡이와 켈트의 마법.

그 힘을 두 눈으로 보니 안심이 갔다.

'결박의 쇠사슬!'

나 역시 멀뚱히 서서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결박의 쇠사슬을 불러 작은 목을 후려치거나, 또는 후위의 두 사람에게 다가가는 무리를 밀어 넘어뜨렸다.

수가 많다 보니 걸리지 않고 근접해오는 놈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허리춤에 단 망치로 후려쳐 죽였다.

[망치의 해결사가 좋아합니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안 해!"

[퀘스트를 거절했습니다.]

[망치의 해결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립니다.]

안 봐도 뻔하지.

"쯧!"

방금 전 일격으로 망치의 머리가 날아갔다.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해뒀는데, 역시 한계였나.

'이 다음에는 바로 근접용 무기부터 갖추자.'

쇠사슬로는 한계가 있다.

도구 생성 중에서도 근접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아아압!"

전력의 중심지는 후위였다.

적이 접근해 오면 미라가 전술 방패로 막고, 또는 강화 외골격의 오른손으로 말 그대로 박살을 냈다.

"죽어!"

인나루는 바위 외에도 대기 중의 수분을 끌어모아 물대포를 쏘아내거나, 바람의 칼날로 래트맨을 조각냈다.

적이 후위에 몰리지 않도록 나는 주의를 끌었다.

가끔 너무 과하게 집중되면 켈트의 마법이 보조를 맞췄다.

"하아, 하아...."

차가 거의 식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폐는 찌르듯이 아파 오고 손과 다리에 조금씩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친 만큼 성과는 있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700(+140)GP를 습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800(+160)GP를 습득했습니다.]

피가 바다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그 잔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가 되어 경험치로 흡수됐다.

경험치의 양은 상당했다. 순식간에 레벨이 두 단계나 상승했다.

남아 있는 수는 열 마리 남짓.

놀랍게도 겁을 모르던 그 래트맨들도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지쳤다아...."

대군과의 혈투에서 가장 활약하고, 고생한 건 인나루였다.

마력의 소비가 큰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라 역시 지친 기색이었다.

오른손은 래트맨의 피로 새빨갛게 변색됐고, 얼굴에도 핏자국이 남았다.

"하아, 하아... 끝난 거라고 말해 줘."

미라가 애원하듯 나를 바라봤다.

"미안."

2페이즈야.

[???가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쿠구구구!

발밑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방류 때와 견줄 정도의 큰 흔들림이었다.

근원지는 정면의 끝—제단 위. 족자였다.

빠직!

족자 안의 그림에 균열이 갔다.

시작은 이마였다.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금은 전염되듯 몸 곳곳으로 퍼졌다.

쿠르르!

돌로 된 조각이 떨어졌다. 제단의 일부였다.

그 영향으로 걸려 있던 족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윽고, 족자 너머의 그림이 움직이더니 쥐의 모습을 한 괴물이 튀어나왔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

[보스가 출현했습니다.]

'십이지요(十二支妖), 하수도의 왕.'

쥐의 소굴의 수호자이자 보스 몬스터였다.

'2페이즈가 예상보다 빠르다. 파도의 마녀 덕분이야.'

쥐의 소굴의 보스 전(戰)의 1페이즈는, 약하기는 해도 성가시기 그지없는 대군의 래트맨이다.

원래라면 시간이 걸리긴 해도 전술 방패를 내세워 적절하게 공방을 바꿔가며 지구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군에도 특화된 파도의 마녀가 합류한 덕분에 예상보다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보스 전에 돌입하기 직전 그녀와 합류한 건 우리에게 있어선 큰 행운이었다.

하수도의 왕은 삼 미터에 이르는 거체를 움직였다.

마치 왕좌에서 내려오듯, 쥐의 왕이 계단 아래로 향했다.

래트맨은 신하가 왕을 알현하듯 움직이지 않았다.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쿠웅!

그러나 최후는 좋지 못했다.

그 몸짓은 살려달라는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하수도의 왕은 래트맨을 살려두지 않았다.

발로 짓밟고, 얼어붙어 있는 몇 마리를 손으로 쥐어 입안에 삼켰다.

그러곤 마치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내려다봤다.

"...."

등 뒤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농담도, 경악하는 중얼거림도 없었다.

여태껏 봐온 것들과는 달랐다.

갑옷으로 몸을 무장하고 병기를 다룰 줄 아는 삼 미터의 괴물이었다.

기분 나쁠 정도의 고요함.

그 침묵을 깬 건, 나의 목소리였다.

"스킬 강화. 도구 생성."

[스킬 '도구 생성'을 강화하는 데 5,000GP가 소모됩니다. 지불하시겠습니까?]

[5,000GP를 지불했습니다.]

[스킬 '도구 생성'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도구 생성]

랭크: B

인류의 발전은 도구에 의해 시작됐다. 성장형 스킬. 랭크별로 생성할 수 있는 도구 범위가 늘어난다.

-C랭크: 결박의 사슬–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쇠사슬

-B랭크: 더블 배럴 샷건- 중절식 쌍열 산탄총 12게이지.

"용사가 기도 올리기를. 신이시여. 제게 악마를 물리칠 힘을 주소서. 그러자 신께서 속삭였다. 용사여, 샷건을 들거라. 그리고 악마의 대가리에 납 탄을 박거라."

좌우가 뫼비우스의 띠 모양으로 연결된 수평 쌍대.

"언젠가 봤던 책에서 이런 문구가 있었지."

어깨를 누르는 개머리판. 왼손에 착 감기는 총대.

"지구를 얕보지 마라, 판타지."

스읍.

총열이 상하로 흔들리지 않도록 숨을 참는다.

반동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개머리판을 단단히 밀었다.

샷건은 단 한 번도 쥔 적이 없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마치 원래부터 안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

스킬.

관련된 지식이 없어도, 컴퓨터 게임처럼 자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신의 능력.

마음속으로 이 시스템에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을 당겼다.

쿠와앙!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굉음.

고막이 흔들렸다.

뇌가 울린다.

그러나 내 육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총열에서 불꽃을 토해낸다.

12게이지의 산탄이 불꽃을 꿰뚫고, 대기에 찢어발기며 악마의 몸통을 꿰뚫었다.

"이게, '지구'야."

제14화

14

산탄(散彈). 격발과 동시 여러 개의 구슬이 든 탄이 화약의 폭발과 함께 확산되어 적의 몸을 뒤덮었다.

"그아아악!"

십이지요, 하수도의 왕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몸을 갑옷으로 둘러 그런지 아쉽게도 살까진 뚫지 못했다.

그러나 타격을 입히지 못한 건 아니다.

갑옷에는 균열이 갔고, 그 충격량은 고스란히 털과 피부를 넘어 갈비뼈까지 전달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그 증거다.

"둘."

콰아앙!

총열에서 재차 불꽃이 토해진다.

빛이 번쩍였다.

더블 배럴 샷건이 내지른 굉음에 귀가 조금 찡했다.

신체 능력이 향상한 만큼 청각도 예민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고막의 내구력도 향상했다. 멀쩡히 버텨냈다.

"그아아악!"

영화처럼 하수도의 왕이 몇 미터 날아가지는 않았다.

몸집도 상당하다 보니 잠깐 주춤했던 정도.

그렇다고 무사한 건 아니었다.

동일한 부위를 맞자, 탄환이 살에 구멍을 냈다.

"후웁!"

참았던 숨을 내뱉고,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동시에 왼손으로 총대를 쥐고, 오른손으로 중절 레버를 당겼다.

퐁.

붉게 칠해진 탄피가 배출됐다.

쌍열로 나란히 서 있는 12게이지 탄피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밑으로 코를 갈고리로 긁는 듯한 화약 냄새와 함께 연기를 토해냈다.

'리로드.'

샷건을 아래를 향해 사선으로 세우고, 오른손에 탄약을 부른다.

탄약을 어디서 구하냐, 라는 걱정은 할 필요는 없다.

기적을 부르는 스킬이 있다.

몸에 들어간 힘이 풀리며 마력의 소비와 함께 탄약이 잡혔다.

손바닥에 쥔 탄피의 밑바닥을 오른손 엄지로 밀어내고, 두 탄을 공급. 장전에 완료하고 다시 조준했다.

신경을 곤두세워 정조준을 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위력의 극대화를 위해 접근하는 편이 좋았다.

겁먹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

되돌아간 만큼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고, 개머리판을 어깨로 밀어 넣는다.

좋아. 다음 일격으로 치명상이다.

그러나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산탄총이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하수도의 왕이 반격해 왔다.

'당황하지 마.'

확실히 지금껏 봐온 놈들 중에선 가장 위협적이다.

그러나 그건 '현실'에서다.

나는 게임에서 이보다 더 불합리한 적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아니, 동요할 이유도 없다.

아무렇지 않게 몸을 오른편으로 날려 바닥을 굴렀다.

"구오오옷!"

부—웅.

하수도의 왕이 제 몸만 한 창을 휘둘렀다.

바람이 무겁게 불었다.

크기가 크기다 보니 창이 아니라 둔기에 가까웠다.

조금만 스쳐도 죽음을 면치 못할 파괴력.

그러나 질량에 걸맞은 움직임을 지녀 그리 빠르진 못했다.

리치가 워낙 길어 후퇴하는 건 의미가 없다. 게임에서도 그랬다.

안으로 파고드는 편이 더 피하기 쉬웠다.

제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지면을 밀듯이 박차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쏠려 전력으로 뛰었다.

카가가강!

등 뒤에서 창날이 지면을 긁는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환해지며 열기도 느껴졌다.

마찰열로 불꽃을 만들어낸 것일까.

그러면 나도 불꽃으로 대답해 주마.

'리로드!'

총신을 꺾자 와인 따개를 따듯 퐁, 하고 시원한 소리가 났다.

그 사이 손가락 사이로 탄약을 불러내 잡는다.

"셋!"

장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전진하며 끝냈다. 이번에는 머리 위가 아니라 아래를 조준했다.

타앙!

불꽃의 갑주를 휘감은 쇠구슬이 발에 분사됐다.

잿빛의 털이 뭉개지고, 가죽이 나선형으로 찢어졌다.

그 안의 근육과 살을 지우고 발가락뼈에 구멍을 냈다.

"캬아아아아!"

개성 없는 비명. 나에겐 희소식이다.

기억 속에 그 울음의 톤이 치명상이라는 정보가 떠올랐다.

괴로워하는 사이 다리 옆으로 선회하며 뒤로 돌았다.

"넷. 한 번 무너지고."

예언자의 힘을 받은 사람답게 미래를 예측해 본다.

사격(四擊)째가 등을 후려쳤다.

아직 부서지지 않은 갑옷이 있어 직접적은 피해는 없었다.

아쉬워할 건 없다. 노린 건 반대편인 몸통에서부터 차곡히 쌓아 올린 충격량. 몸의 안쪽이다.

"...!"

쿵. 하수도의 왕이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무너졌다.

[지혜의 수호자가 감탄합니다.]

[젊은 나라의 인도자가 경악합니다.]

[망치의 해결사가 불만족스러워합니다.]

망치 안 사용했다고 불만스러워하는 거야?

하여간.

"두 사람! 온 힘을 쥐어짜 낼 준비 해!"

산탄총이 재차 몸을 꺾고, 탄피를 배출했다.

이번엔 곧장 장전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들어 옆으로 치웠다.

"결박의 쇠사슬!"

왼손바닥을 개화(開花)하듯 활짝 펼치고, 마력을 운용해 쇠사슬을 불러들였다.

화려하진 않다. 공사장 구석에서 볼 법한, 빛이 바랜 사슬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든든했다.

"그르륵!"

쥐의 왕이 일어나려 했다.

목소리엔 분노로 가득 찼다.

굵은 목 위의 머리에서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페이즈 3. 광전사화가 시작된다.

래트맨처럼 앞도 안 보고 달려들 예정.

이 순간을 노렸다.

촤르르륵!

화살처럼 쏘아진 사슬이 하수구의 왕의 발밑을 선회했다.

피해 가기 위함이 아니라, 발목을 빙글 돌아 감쌌다.

'이때다! 결박!'

왼손을 무언가 쥐듯 손가락을 오므렸다.

마력이 빠져나가면서 사슬의 길이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발목을 결박한 사슬은 죄인을 묶는 구속구로 변했다.

그 사이 하수구의 왕은 분노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발목이 결박당한 것도 잊은 채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어리석은 행동은 고스란히 피해로 되돌아왔다.

몸을 내 쪽으로 다시 돌린 순간, 사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아아악!"

거체가 앞으로 쏠린다. 발이 묶인 상황에서 힘차게 일어나니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 균열 천지의 상체 갑옷 또한 기어코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지금이야!"

결박의 쇠사슬의 장점은 마력의 소비가 조절 외에는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제는 산탄총이었다.

파괴력만큼 마력의 소비도 컸다.

탄약을 재장전할 때마다 기운이 밑 빠진 독처럼 빠져나갔다.

혼자만으로는 무리다.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 외침에 응답하듯, 미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그리 빠르진 않다.

하지만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서 금세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측면에서부터 접근해 온 미라는 하수구의 왕의 팔을 발판 삼아 도약하고, 오른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하압!"

이팩트가 화려하게 빛나거나 하진 않았다.

판타지의 이렇다 할 로망 없이, 투박하기 그지없는 공격이다.

살아 있듯 숨 쉬는 자연처럼 알록달록한 색이 아닌, 빌딩이 빽빽하게 늘어진 도시처럼 숨 막히는 잿빛.

부웅.

전선 사이로 언뜻 보이는 나사와 톱니바퀴가 움직인다.

어디에 연결된 건지 모를 전선이 에너지를 공급했다.

그리고 곧 주먹은 철퇴로, 철퇴는 곧 공성추가 되어 하수구의 왕이 다신 일어나지 못하도록 척추 위로 떨어졌다.

콰아앙!

털가죽이 눌리며 움푹 들어갔다.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근육을 찢어 보호되어 있는 척추를 박살 냈다.

"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쥐의 왕의 입에서 괴성이 길게 늘어졌다.

불을 담은 것처럼 붉게 타오르던 안광은 피눈물을 삼킨 것처럼 격렬하게 빛났고, 입에서도 피가 뿜어졌다.

보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온몸을 비틀었다.

척추의 고통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목숨을 잃을 것이란 걸 깨달았는지,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결박의 쇠사슬을 부술 정도였다.

"트리스...켈리온!"

어린 시절의 마녀도 마력을 쥐어짜 내듯, 없던 힘을 끌어모아 최후의 일격을 퍼부었다.

구르르르!

땅이 다시 한 번 솟아올랐다. 이번엔 기둥이 아니었다.

파도를 일으키듯, 부채꼴로 된 자갈과 모래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하수구의 왕의 양팔을 덮었다.

이를 끝으로 인나루는 마력을 소진한 듯 손에 쥔 지팡이가 사라졌다.

"수고했어."

팔다리는 고정되고 척추는 부서져 일어나지 못한다.

쥐의 왕은 실험실의 쥐처럼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다.

걸음을 내딛는다. 무언가를 다짐한 것처럼, 용기를 실은 걸음이 아니다. 집 앞을 산책하듯 걸었다.

"끼르르에엑!"

다가오지 말라는 듯 괴성을 내지르는 괴물 쥐.

"어림없어."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목표점은 왕의 머리였다.

탄환이 부채꼴처럼 퍼지면서 머리를 후려쳤다.

"끼...."

쿠앙!

고막이 거슬린다. 더 이상 괴성도 듣고 싶지 않고, 혹여나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총신을 꺾어 탄피를 빼내고, 손에 꼬옥 쥔 두 발의 탄환을 안경처럼 비어 있는 둥근 공간에 넣어 장전했다.

"다섯 발, 여섯 발... 일곱 발 째, 여덟 발 째."

총성이 연속으로 두 번 울렸다.

하수구의 왕의 머리가 흔들렸다. 강철처럼 단단했던 두개골에도 한계가 왔다.

"앞으로 두 발."

부릅뜬 눈에서 빛이 사라진다. 장전되어 있는 아홉 발 째를 선사해 주었다.

이제는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이제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피처럼 붉게 찬 동공에 산탄총을 겨누는 내가 비쳤다.

"열 발 째."

타앙!

[하수구의 왕을 토벌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900(+180)GP를 습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1,000(+200)GP를 습득했습니다.]

[레벨 10에 도달했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스킬 '인체 강화'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 * *

게임이 현실화되며 불편한 것이 하나 있다.

몬스터에게서의 소재 채집.

게임에선 마우스를 두드리거나, 혹은 손가락으로 터치 몇 번을 하면 알아서들 진행했다.

그러나 게임이 아닌 현실 속에선 이 모든 것을 직접 행해야 했다.

"후우, 다 뽑았다."

준비해 온 빈 주사기로 하수구의 왕에게서 채혈하고, 플라스크 병을 가져와 집어넣고 안전하게 보관했다.

그 다음은 휴식을 취해 마력을 회복한 인나루에게 도움을 받아 심장을 뽑았다.

바람의 칼날로 가슴 한복판을 둘로 갈라 열고, 손을 집어넣어 언뜻 보이는 심장을 잡아 꺼냈다.

"앗...."

생명의 근원을 빼앗기자,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던 거구의 몸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심장이 꼭 보석같이 생겼네."

미라가 신기한 듯 말했다.

[하수구의 왕의 심장]

십이지요, 하수구의 왕의 심장. 지하 깊숙한 곳, 지맥의 정기를 흡수하여 특수한 무엇인가로 변했다. 사용 시 스킬을 습득한다.

찾았다.

이것으로 스킬 '포식자'를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인나루.'

젊은 나라의 인도자의 계약자.

파도의 마녀.

'예상치 못한 협력자가 도와준 덕에 생각보다 더 안전하고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게 됐어. 하지만, 그 탓에 그녀 역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됐다.'

보통 헌터의 사회에서 던전을 공략하는 데 도움을 받으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는 것이 상식이자 법이다.

아이템의 소유권을 주거나, 혹은 금전 등의 다른 형태로 지불한다.

물론, 아직 사회에 헌터라는 체제가 잡히지 않아 그럴 필요는 없었다.

눈 딱 감고 모른 척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중이다.

향후 이 일을 기억한 파도의 마녀가 나에게 앙심을 품을지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할 거야?"

미라도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고 속삭이듯 물었다.

어찌해야 할까.

"그 심장, 필요하신 건가요?"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심중을 헤아린 듯의 물음에 눈이 절로 떠졌다.

"원하신다면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정말로요?"

"네. 그 대신, 제 요구를 한 가지 들어주시겠어요?"

제15화

15

던전의 핵— 코어는 제단 뒤의 구멍 안에 있었다.

페이즈 1의 래트맨의 출현 장소였는지라, 혹시 숨어 있을지 모를 잔당을 경계했다.

낮은 확률로 가끔씩 무작위로 몇 마리 숨어 있다가 습격해 오는 일이 있어 더더욱 주의 필요했다.

다행히도 걱정할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떠한 전투도 없이 코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리를 겨우 펼 정도의 구멍 안은 밝았다. 그 끝에 있는 석순 위에 떠 있는 어린아이 머리만 한 구슬이 그 원인이었다.

던전의 근원. 코어가 환영하듯 우리를 반겼다.

또한 코어의 주변은 래트맨의 둥지로 사용된 듯,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살을 먹고 남긴 짐승의 뼈를 비롯한 것들과 하수도로 흘러나온 물품 등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아, 있다."

인나루가 무엇인가 발견한 듯 앞장서서 걸었다.

멈춰 선 곳은 코어의 앞. 정확히는 그 아래, 석순들 사이에 고인 푸른빛을 내는 물웅덩이였다.

[공청석유]

등급: ☆☆☆☆

분류: 소모품

오랜 세월 동안 마력이 한데 모이면서 농축된 액체. 마력이 B랭크 이하일 경우 랭크가 한 단계 상승한다. 일반인이 복용할 경우 만병을 치유하며 무병장수한다.

"그럼, 회수할게요."

공청석유. 갈마석 만큼은 아니나 기다종에서도 우수한 효과로 소문난 성장 아이템.

약간의 제한이 있기는 하나 그래도 게임 초반이나 마력이 낮은 이에겐 많은 도움을 선사한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있었지.'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그리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확실히 우수한 아이템이다.

그러나 하수구의 왕의 심장과 갈마석. 이 두 개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공청석유는 시간이 흐른 뒤, 좀 더 나중에도 입수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효과가 비슷한 아이템도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앞서 두 아이템에 비해 중요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인식을 뒷전에 둬서 그런지 잊고 있었다.

"공청석유가 있을 거라고 알고 계셨던 건가요?"

"저도 이름까진 몰랐어요. 다만, 꼰대... 신님께서 원하는 것이 여기 있을 거라고 인도해 주셨거든요. 그래서 던전을 클리어한 보상 중에 있을 거라 생각한 것뿐이에요."

인나루는 제 손을 움직여, 웅덩이의 얼마 없는 물을 움직여 조심스런 손길로 병 안에 채웠다.

'아무리 권능이라지만, 아이템을 찾아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안내해 주는 건 대가가 꽤나 상당했을 텐데.'

권능이라고 절대적인 건 아니다. 몇 번이나 말 했다시피 그만한 대가가 든다.

다만, 젊은 나라의 인도자가 다른 신에 비해 유리하기는 했다.

바다의 신 겸 지혜의 신이기도 한지라 바다와 연결된 하수도 내부의 아이템을 찾는 게 수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대가가 적은 건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신들에 비해 부담이 조금 덜할 뿐.

특히나 이번처럼 운명이나 세계에 영향을 끼칠 직접적인 개입은 특히나 소모가 적지 않다.

공청석유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 대가를 지불할 정도의 아이템은 아니다.

지혜의 신이기도 한 젊은 나라의 인도자가 당장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의문을 참지 못한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이유를 물었다.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청석유를 원하셨던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응? 아... 그게, 사실은 저희 엄마가 많이 편찮으시거든요. 췌장암."

말문이 막혔다.

"너무 미안한 표정 짓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인나루는 공청석유가 담긴 병을 품 안에 갈무리하고, 살며시 미소 지었다.

먼 훗날, 언젠가 봤던 신비에 가득 찬 그 웃음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기여서 보는 제가 더 힘들긴 했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이걸 손에 넣었는걸요."

"아!"

췌장암 말기의 어머니.

원하는 것.

젊은 나라의 인도자.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공청석유는 각성도 하지 않고 수호성과의 계약도 하지 않은 일반인이 복용할 경우, 만병의 치유와 동시 무병장수가 가능케 해 주는 효과가 있다.'

과연. 그렇구나.

'말기라면...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리 좋다곤 할 수는 없지. 그녀에게도 시간이 없었을 터. 젊은 나라의 인도자가 무리한 것도 이해가 가.'

하지만 여기에서 궁금증이 한 가지 더 생기게 됐다.

'파도의 마녀에게 이런 설정이 있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

확실하다. 기억 속에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파도의 마녀 정도 되는 인물의 설정을 내가 모를 리 없다.

'애초에, 게임의 중반부에 출현하는 파도의 마녀가 쥐의 소굴에 나타난 적이 없었어. 그런 기록도 없다.'

쥐의 소굴을 한두 번 공략한 것도 아니다.

포식자와 갈마석이 중요한 만큼 초반부에 여러 번 공략했었다.

그 수많은 공략 중에서 파도의 마녀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다.

'게임의 운영진만 알고 있는 설정이라거나, 혹은 게임이 현실로 되며 인과를 맞추기 위해서 정해져 있지 않은 부분이 만들어졌다. 예상할 수 있는 건 이 두 가지.'

초반부의 행적이 없는 등장인물이라면 후에 설정 구멍이 생긴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게 필요했다.

'전자의 경우는 문제없어. 하지만 후자라면? 누가 채워 넣는 거지? 세계?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

복잡하군.

"...읏!"

추리의 영역에 들어서려 하는 순간이었다.

근처에서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미라였다.

설마. 쥐의 소굴의 위험은 다 끝난 것일 텐데.

내가 모르는 또 무언가가 있는 건가?

"너... 정말, 장하구나."

으, 응?

"네, 네?"

"아까는 인생을 날로 먹고 싶다, 환생하고 싶다... 그런 말을 하더니 사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응, 장하다. 장해. 어린데도 굉장해."

소꿉친구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파도의 마녀라 불릴 여고생의 머리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자애로 가득해 보는 내가 따스해졌다.

[젊은 나라의 인도자가 흐뭇해합니다.]

그에 반면 곤란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파도의 마녀.

게임에서 본 적 없었던, 신비와는 거리가 먼 여고생과 소꿉친구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동시에 나는 그녀와의 만남 이후, 쭉 가슴 한구석에 품은 의문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

"저기, 혹시 괜찮다면 저희 쪽 파티에 들어오시지 않을래요?"

"파티요? 아, 뉴스에서 알려진 그거요?"

어느 정도의 기초 상식도 알려지기 시작했구나.

"네. 방금 전의 연계도 상당히 좋았고, 포지션도 후위시니 전위가 필요하시지 않겠어요?"

"흐음...."

파도의 마녀가 아닌 고등학생 인나루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를 동료로 맞이해도 될지 주저했다.

특히나 인생을 날로 먹고 싶다던가, 미래의 그녀를 떠올리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에 걱정까지 했다.

그러나 그 걱정과 고민은 보스전을 거쳐, 지금에 와선 말끔하게 사라졌다.

인나루. 그녀는 틀림없는 파도의 마녀가 맞다.

훗날 그 힘은 큰 도움이 되리라.

"아무래도 당장 대답하기에는 힘드네요. 일단 저는 한시라도 빨리 엄마에게 가야 해서...."

"대답은 나중에라도 괜찮습니다. 연락처를 드릴 테니 굳이 파티원이 되지 않아도, 힘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연락해 주세요."

"그 정도라면...."

인나루에게 메신저를 전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해 줘."

미라가 상냥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왠지 여동생을 돌보려는 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슬슬 던전을 클리어하도록 하겠습니다."

코어의 파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몇몇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히면 끝이었다.

[던전의 코어를 파괴했습니다.]

[던전 '쥐의 소굴'이 24시간 내에 소멸합니다. 주의하세요.]

[퀘스트 '쥐의 소굴'을 클리어 했습니다.]

[보상으로 3,000(+600)GP를 획득했습니다.]

* * *

세계는 격변을 맞이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변화였다.

신과 인간, 그리고 다른 세계로 추정되는 곳에서 넘어온 괴물이 어울려진 세계.

별의 시대였다.

인류는 이 별의 시대라는 미증유의 사태에 즉각 대응에 나섰다.

최초에는 첫 번째 시련, 튜토리얼로 인한 피해를 수습하느라고 타국을 신경 쓸 틈도 없이 바빴다.

군대가 나서 괴물을 사냥하고, 국민을 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급한 불을 끄고 한숨 돌릴 순간이 돼서야, 세계 각국은 의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적대국의 음모다, 외계인이다'하는 각종 의견도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전조도 없이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사태가 벌어졌다. 믿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동시 발생한 이상 현상을 보고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힘들었다.

인류의 일부가 이능을 각성해 헌터라 불리고, 컴퓨터 시스템 같은 것이 보이며 신화 속 괴물도 등장했다.

그보다 더한 충격은 역시 신의 등장이었다.

여하튼 세계 각국은 이 유례없는 대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담으로 한 다국적 기관을 결성한다.

국제(International)

대책(Countermeasure)

연합(Nations)

이른바 I. C. N이었다.

"이거, 진짠가?"

팔 대 이로 정리한 반백의 머리카락, 군살 하나 없는 각진 얼굴.

야수를 보는듯한 사나운 눈매 아래에는 며칠 밤을 새우기라도 한지 검은 기미가 꼈다.

오십대 중반의 아일랜드 남성 피어스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예. 국적이 다른 전문가 스물을 초빙해 확인해 봤습니다. 합성은 아닙니다. 신원불명의 인물이 보낸 던전을 클리어하는 이 동영상—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ICN의 사무총장, 피어스는 비서의 대답에 재차 동영상을 돌려봤다.

동영상의 시작은 맨홀 아래에 차오른 검푸른 수면이었다.

처음에는 하수도가 역류한 것인가 싶었으나, 그 아래로 잠수하듯이 들어서자 또 다른 장소가 나왔다.

이내 퀘스트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별의 시대 이후 등장한 '시스템 메시지'다.

그러곤 편집을 했는지 화면이 갑자기 바뀌면서 이족보행을 하는 쥐 괴물이 등장했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다음은 또다시 편집.

어린아이 머리만 한 크기의 구슬이 부서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던전에 관련된 몇 가지 메시지가 나오며 영상이 끝났다.

"동영상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나?"

"던전이라는 위험에 대한 설명과 대처 방안입니다. 영상의 코어라는 것을 파괴하거나 회수하면 된다고 합니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두면 후에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습니다."

"신원 파악은?"

"불가능합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해커들을 데려와서 해독해 봤지만, 실마리 하나 캐내지 못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스킬'이라는 신비의 영향인 것 같더군요."

"스킬, 스킬... 참나. 어이가 없군."

거짓이 아닌 사실이란 걸 알고 있기는 하지만, 워낙 허황된 이야기다보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실은 판명됐나?"

"뉴욕 시내에 등장한 빛의 구멍이 던전으로 판명, 특수부대를 어제 새벽에 투입하여 여섯 시간 만에 클리어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각국에서도 속속히 던전에 대한 소식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놀랍군, 놀라워. 이 논제에 대해 회의를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알아서들 움직이다니. 국제 대책 연합이 왜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군. 정말 최고야!"

피어스가 인자하게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자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와 같이 일은 남들에게 맡기고 골프나 치면서 세금이나 축내는 건 어떤가?"

피어스가 개소리를 했다.

"내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이후 언제 잤는지 기억도 안 나. 좀 쉬엄쉬엄하는 게 좋겠어."

"안 됩니다. 앞으로 한 시간 뒤에 이 안건으로 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우선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X발."

제16화

16

[디바이스]

등급: ☆☆☆

분류: 장신구

스마트폰을 고성능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충전할 필요가 없으며, 보안이 강화되어 본인 외는 화면조차 볼 수 없다. 보관소는 기계장치의 신과 연결되어 있어 사실상 무한에 이른다. 그 밖에도 여러 기능이 업그레이드됐다.

가호 '기계혁명'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강화 외골격이나 전술 방패 등 전투용부터 시작해 특수 보정 렌즈처럼 보조를 받아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었다.

후자의 경우 스마트폰을 베이스로 한 디바이스가 유용했는데, 특히 도움이 되는 건 '추적 차단'이었다.

"강한 힘을 가진 채 기다종에서 활약해 이름이 알려지거나 하면, 신들 외에도 인류에서도 접촉해와."

"국제대책본부...였지?"

"그래. ICN."

국제대책본부.

유엔에 소속된 아일랜드인 정치인, 피어스가 총장인 범국가적 연합체.

종종 세계정부라 불리기도 했다.

"ICN은 여러 정치적인 요인이 얽혀 있는 단체이긴 하지만, 그 목적은 일단 인류 수호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위협적이진 않아. 반대로 여러 도움이 될 일을 해줘."

인류사회가 혼란에 빠져 문명을 잃지 않도록, 규범을 정하고 사회를 새롭게 조정하며 여러 방도로 수호했다.

던전에 군대를 내보내거나, 일반인이 휘말리지 않도록 치안 등부터 시작해 헌터와의 조율도 도맡았다.

후에 여러 기초가 될 사회 체계를 잡은 것도 이들이다.

"대체적이란 건, 그러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거네."

"협조적이지 않으면 특히나."

나는 모니터에 띄운 인터넷 기사를 보여주었다.

<ICN, 헌터를 향한 과잉 진압 논란>

"헌터를 괴물에 대항할 조력자이자,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장을 한 예비 범죄자로 보고 있겠지. 당연해. 길거리에서 소총을 들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미라가 분석하듯 의견을 꺼냈다.

"설사 협조적이라고 해도, 그 힘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감시하며 통제하려들 것이다. 이게 현황이란 거지?"

"완벽해."

기다종에 관련된 약간의 지식도 있고, 원래부터 똑똑하다 보니 조금만 설명해도 알아서 알아들었다.

"요약하자면, 프롤로그 및 게임 초반부에 ICN이 접촉해 오면 협조하건 협조하지 않건 귀찮게 굴 거야."

"아, 이거... 전에 편집하던 방송에서 본 적 있었는데, 뭔가 있지 않았어?"

"ICN루트. 프롤로그부터 국가에 소속되어 활동해."

일명 '공무원'.

"국가 소속이라 지원이라거나 여러 가지 좋긴 한데... 행동이 많이 제약되어 있어 흠이야. 특히 도중에 정치 요소 포함되어 있어서, 누구에게 줄을 서느냐에 따라 행동이나 결과가 정해져 있거든."

"그런 것까지 구현되어 있어?"

"굉장하지? 이 게임이 다른 건 몰라도, 자유도나 그 외의 설정이라거나 여러 가지 세세하거든!"

기다종은 확실히 망겜이다.

단점을 세라면 하루 종일 말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얼마 없는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와 그에 따른 방대한 이야기.

"그런데도 망한 거면, 게임이 정말 재미없었나 봐."

"...."

아프다.

편집자의 말이 차가운 비수가 되어 꽂혔다.

사실 게임성 외 스토리의 평가도 그리 훌륭하진 않다.

이야기가 방대한 건 맞는데, 그중에 재미없는 것도 여럿 섞여 있어서 기다종의 망겜의 요소 중 하나가 됐다. 괜히 쓸데없이 길게 늘어뜨렸다고 비판받았었지.

"크흐흠. 어쨌거나, 너무 눈에 띄지 말아야 하니, 동영상은 편집해서 보내자.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을 거야."

"알겠어."

던전의 입장과 클리어 순간 등 주요 장면만 편집할 부분이었는지라, 편집 그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귀환한 바로 다음 날 국제대책본부—ICN의 홈페이지를 확인하고 별다른 말없이 이메일을 전송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시작할게."

방송을 위해서 아이튜브를 참조해 시공한 방음실 내부. 방 중앙의 탁자 위에 하수도의 왕의 심장이 놓여있다.

[하수도의 왕의 심장을 사용하겠습니까?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십이지의 정기가 몸에 스며듭니다.]

[스킬 '포식자'를 습득했습니다.]

[둘로 나누어 흡수하여 랭크가 한 단계 하락합니다.]

[포식자]

랭크: D

외부와 단절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던 십이지의 쥐가 터득한 스킬.

무엇을 먹건 소화하여 그 힘을 40% 확률로 흡수할 수 있게 됐다. 소화에 실패할 시 별다른 효과 없이 소멸한다.

검푸르게 은은히 빛나던 보석이 힘을 잃었다.

"습득했어."

"좋아."

하수구의 왕의 심장의 또 다른 장점은, 갈마석과 달리 랭크 하락을 조건으로 타인과 습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한 번뿐인 기회이긴 하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랭크의 하락 정도는 나중에 어찌 복구할 수도 있고.

"다음은...."

십여 분 전 냉장고에 보관 중이던 비닐 팩을 꺼냈다.

병원, 특히나 응급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혈액 팩.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건 사람도, 동물의 피도 아닌 괴물의 피.

하수구의 왕에게 채혈해 온 그것이다.

"정말로 마셔야 해?"

미라의 안색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잠들기 직전 방 안에서 바퀴벌레를 목격한 것 같은 표정이다.

"내 판단을 믿는다고 하지 않았어?"

"...괴물 쥐의 피를 마셔야 한다니. 최악이야."

땅이 꺼지도록 숨을 내쉬는 내 편집자.

"눈 딱 감고 토마토 주스라고 생각하고 마셔. 자, 빨대. 아, 그렇다고 단숨에 마시지는 말고. 한 모금씩."

[십이지요의 혈액을 섭취했습니다.]

[스킬 '포식자'가 실패했습니다. 소화되어 사라집니다.]

"난 실패했어. 너는?"

"...실패했어."

"바로 다음 가자."

스킬 '포식자'의 효과는 소화.

힘의 흡수에 성공하지 않는 이상 섭취마다 발동한다.

즉, 소화에 실패해도 성공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재도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일종의 꼼수다.

물론, 무작정 전부 통용되는 건 아니었다.

하수구의 왕의 경우엔 힘의 원천인 심장과 그곳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혈액에 담겨 있어 가능했다.

그러나 용의 심장처럼 조각나지 않고 전부를 삼켜야 발동하는 경우에는 이처럼 재도전은 불가능했다.

[스킬 '포식자'가 발동했습니다.]

[십이지의 힘이 능력치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아, 됐다."

여섯 번째 모금째에 성공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쉽게도 표시되는 능력치의 랭크가 상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약간이나마 기운이 나는 기분이 든 정도.

그러나 실망할 건 없다.

이를 몇 번 반복하면 랭크가 상승하니까.

투자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이건, 고문이야."

미라도 아홉 번째 모금에서 성공했다.

"남은 건 어떻게 해?"

"물이나 음료에 섞은 뒤 끓여서 버리면 돼. 절대로 그대로 버리지 마. 내성계 스킬이 없는 사람이 실수라도 마신다면 하급귀로 변하니까 처분은 확실히 해야 해."

전에 멋모르고 아무렇게나 버렸다가, 도시가 좀비 아포칼립스처럼 감염병이 유행해서 고생한 적 있었다.

백귀야행의 난이도를 급상승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그리고... 아, 스테이터스."

[트리머]

레벨: 10

근력: F

민첩: F

내구: F

마력: F

행운: F

위업: 제3의 길

GP: 7,680

입가가 절로 씰룩인다.

능력치야 둘째 치고 쌓여있는 포인트를 보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했다.

'성외산력 이후 레벨 6까지 레벨 업 포인트 2,000GP.'

레벨 업 포인트는 레벨이 오를 때마다 100포인트씩 상승한다. 레벨 2는 200, 레벨 10은 1,000.

'허수구역 발견으로 1,000, 후원으로 500, 허수아귀에서 1,000, 제3의 길 500까지 합해 레벨 6까지의 총 획득 포인트는 4,000GP.'

여기까지는 그럭저럭이다.

진짜는 갈마석이 손에 들어온 이후부터였다.

'레벨 7부터 갈마석 보너스를 포함해 레벨 10까지 포인트가 무려 4,080GP. 게다가 쥐의 소굴 3,600. 앞의 것까지 합하면 무려....'

획득 수치만 12,680GP.

"예상은 했다만 직접 보니 터무니없네."

제3의 길.

퀘스트 보상.

갈마석.

이 3가지를 합하니 포인트 수급 속도나 양이 보통이 아니었다.

"도구 생성의 강화에 사용했는데도 이 정도 남다니."

프롤로그에서 각성자 및 계약자의 경우, 10레벨까지 획득할 수 있는 포인트의 수급 수단은 레벨이 전부다.

수치로는 5,400GP.

신의 주목을 받아 후원을 받거나 혹은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추가 수급도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게임 초반이다 보니 수치는 그리 많지 않아, 많이 잡아 봤자 2,000GP가 한계였다.

[명계의 하급 관료가 부러워합니다.]

신들도 부러워하는 수준.

항상 포인트가 부족한 신격이 낮은 신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스킬."

[인체 강화]

랭크: E

인간의 신체 능력을 강화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30레벨에 도달할 시 랭크를 상승시킬 수 있다.

[스킬 '인체 강화'의 영향으로 능력치를 하나 선택하여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10레벨 이전의 능력치가 기준입니다.]

[근력을 선택했습니다. 정말로 강화하겠습니까?]

[근력의 랭크가 한 단계 영구적으로 상승했습니다.]

E랭크.

F랭크가 단련을 거듭하여 무도에 능한 사람이라면, E랭크부터는 인간의 신체한계를 넘어서는 시점.

큰 바위나 나무를 번쩍 들거나 혹은 100미터를 7초, 6초 내의 주파 정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점검을 끝낸 나는 미라의 능력치를 물어봤다.

"잔여 포인트와 능력치 좀 알려줄래?"

"얼마 전 디바이스 개조에 3,000GP를 빼면 5,700GP. 능력치에는 그대로."

나쁘지 않다.

내가 비정상적으로 포인트가 많은 것뿐이지, 일반적인 기준에선 미라의 보유량도 상당했다.

"좋아. 점검도 끝났으니 다음 행선지를 정해 볼까."

"개인적으로 당분간 물가에는 가고 싶지 않아."

하루에 세 번씩 샤워했다며 한숨을 내쉬는 소꿉친구.

"걱정 마. 그쪽은 아니야."

"말투를 보아하니, 이미 정한 모양이네?"

"마리오네트 시나고그. 일명, 인형의 사원."

"뭐 하는 곳인데?"

"우리는 이 던전에서 반드시 두 가지 아이템을 얻어야 해. '랍비의 포션'과 '골렘 제조의 양피지'야."

나는 말을 끊고 다시 이었다.

"우선, 랍비의 포션은 복용 시 '특성'을 개화해 줘."

"특성?"

"각성자의 방향성이나 성질에 의해 발현되는, 이름 그대로 특수한 능력을 말해."

비각성자인 나나 미라에게는 없다. 물론, 각성자인데도 없을 경우도 있다. 특성의 개화는 사람마다 다르다.

"랍비의 포션은 신과 계약을 맺어주는 수호성수처럼, 각성자가 아니여도 이 '특성'을 개화시켜 줘."

이 특성은 초반에 개화하면 굉장히 유용하다.

"반드시 얻어야겠구나."

"다만, 안타깝게도 이 아이템은 하나뿐이라서...."

"괜찮아. 전에도 말했듯이 네 판단에 맡길게."

미라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겼다.

"그러면, 내가 가져갈 건 '골렘 제조의 양피지'구나?"

"맞아. 사실, 스킬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아."

등급도 C랭크.

최대로 랭크 업해도 A랭크가 한계다.

이름에도 알 수 있다시피, 흙과 돌로 빚은 인형을 사용자가 제조하여 조력자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러나 이 스킬이 '기계장치의 신'의 계약자의 손에 들어가면, 그 가치는 전혀 달라지지."

골렘의 제조는 흙과 돌로 시작하나, 랭크를 올리면 진흙이나 철 등 여러 가지를 재료로 삼아 차츰 강화된다.

특히 그중 A랭크—'아이언 골렘'을 제조할 수 있게 되면, 그 진가를 발휘했다.

"아이언 골렘의 금속을 모을 때, 그중 기계부품이 섞어 들어가면 '기계혁명'의 대상이 돼."

"...과연. 확실히 그건 터무니없겠네."

골렘이 기계혁명에 적용된 이후, 이 스킬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했다. 등급도 상향 조정되어 재평가 받았다.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누가 알려준 거야?"

"아니. 아마 4년 전쯤이었나... 기계혁명이 어느 것까지 통하나 알아보던 도중에 우연찮게 알게 됐어."

그리운 기억이 떠올랐다.

다만, 그 양은 다른 수호성들에 비해 많지 않았다.

기계장치의 신은 수호성사에서만 출현하기도 하고, 소환될 확률도 낮아 나도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문득 궁금해졌는데, 대체 얼마나 많은 수호성들과 계약해 본 거야?"

"일단 게임에 등장하는 계약 가능한 수호성은 전부."

"전부라고?"

입을 살짝 벌리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미라.

"대체 얼마나 시간을 쏟아 부은... 아니야. 됐어. 그래. 그 영상 기록을 보면 수긍이 안 가는 것도 아니지."

8년이란 시간은 결코 적지 않다. 정말 여러 가지를 했다.

수호성 전원과 계약해 본 건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 하지만, 전부 제대로 된 엔딩을 본 건 아니야. 그중에선 나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하거든."

수호성이라고 무조건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스킬이 별로거나, 혹은 힘을 제대로 빌려주지 않는다거나.

또는 계약자가 그저 종말이란 무대 위에서 춤추다 죽는 걸 원하는 쓰레기 같은 설정의 신도 존재했다.

게임 초반부에 멋모르고 계약했다가 '뭐 이런 거랑 계약 가능하게 만들었어?'라고 욕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어쨌거나, 우리는 골렘 제조를 위해 이 인형의 사원을 방문할 거야."

"이번에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야겠네."

"그래. 우선, 마음의 준비부터 하는 게 좋을 거야."

"아깐 걱정하지 말라더니, 설마 또 하수도 같은 곳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다른 의미론 그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외의 헌터들과 마찰을 빚을 마음의 준비."

제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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