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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61

150화 못난 왕의 신념 (4)

기사의 왕국, 바스테리온.

유수한 검술 명가가 많고 이를 바탕으로 강한 기사들이 넘쳐 났던 고대의 왕국.

그만큼이나 다양하고 실전적으로 유명한 검술이 많았지만, 가장 완벽한 검술이라 평가받는 것은 역시 바스테리온 왕가의 검술이었다.

그러니 바스테리온의 역대 모든 왕은 그들 스스로부터가 강인한 기사왕인 셈.

허나 열네 번째 왕만큼은 달랐다.

레오란트 리안 드 바스테리온.

멸망한 고대 왕국 바스테리온의 마지막 왕.

11대 왕의 마지막 자손으로서 그의 형제들과 달리 유난히 유약한 신체를 타고났던 작은 왕자.

그런 탓인지 어려서부터 검술이나 기사도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으며 좋아하는 것은 오직 독서.

그중에서도 마법서를 유독 좋아했기에 왕의 요청으로 당시 한창 유명세를 올리고 있던 마법사, 아벨라르 파블렌코가 직접 왕성을 방문해 레오란트의 마법 재능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물론 체구가 작고 마법서를 좋아한다고 해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아직 어린 왕자 레오란트에게는 마법의 재능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레오란트는 실망했으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사실 크게 상관없기도 했다.

계승 서열은 확실했고 형제들 간의 사이는 돈독했으니.

왕은 자식들을 사랑했으며 유약하고 검에 관심을 갖지 않는 그를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문제될 건 없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당대의 기사왕은 어질고 강했으며 그의 형제들 역시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랐다.

잘하는 것 하나 없었지만, 부족한 것 역시 없었으니.

모두가 레오란트를 사랑했고 레오란트 역시 모두를 사랑했다.

부모, 형제, 왕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착한 왕자.

그래서였다.

그래서 여태 홀로 살아남은 것이다.

부모도, 형제도,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홀로 살아남아 버린 것이었다.

시작은 부고였다.

항상 가장 앞에 나섰던, 용맹스러운 기사왕의 부고.

11대 왕, 레오란트의 부친이 괴이를 조사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가 전사했다는 끔찍한 소식.

아직 괴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시기였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12대 왕의 즉위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참여한 전원이 갑주를 걸치고 허리에는 검을 매단 채로, 그 흔한 환호성 한 번 없이 살기 가득한 침묵 속에서 말이다.

"전원."

그것의 이유라고 한다면.

"검을 뽑아라."

이는 즉위식임과 동시에 이루어진 출정식.

"왕관은 쓰지 않겠다."

수여받은 왕관을 머리에 얹지도 않고 내려놓은 채 등을 돌리는 바스테리온의 새로운 왕.

12번째 왕.

"선왕의 복수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이 자리에 앉을 터이니."

물론 그의 말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선왕의 복수를, 아버지의 한을 달래기 위해 출정한 그는 영혼까지 심연에 물들어 버렸으니.

그를 알아보지 못한 한 이름 모를 기사에 의해 목이 잘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감히!"

13대 왕은 분노했다.

남은 형제들 역시 함께 분노했다.

왕국의 모든 백성 또한 분노했다.

그들은 모두 자랑스러운 기사왕의 왕국민.

목숨보다 명예를 중시하며 약자를 보호하는 기사들이 사는 나라.

그러니 즉위식 따위 거칠 새도 없이 바로 전장을 향한다.

"괴이를 모조리 섬멸하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

13대 왕이자 레오란트의 둘째 형은 왕의 묘비 앞에서 그리 다짐했다.

분노한 형제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단 한 명. 언제나 유약했던 레오란트만 제외하고 말이다.

"레오란트."

그랬으니 새로운 왕은, 레오란트의 형제는 떠나기 전 강직한 눈으로 레오란트와 시선을 맞추고 말을 전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까.

어떤 말을 했으면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을까.

"네가 왕이다."

그럴 리 없다고.

"이런 무거운 짐을 떠넘겨서 미안하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형과 강인한 기사들이 이번에도 패배할 리가 없다고 답해야 했을까.

아니면 믿고 다녀오라 그리 응원했어야 했을까.

무슨 말을 하든 믿음직스럽지 못할 거란 생각에, 모자란 자신감에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고.

잠깐의 망설임 동안 열세 번째 왕은 떠나 버렸다.

언제나 듬직했던 뒷모습 그대로 일말의 망설임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그렇게 바스테리온에는 열네 번째 왕, 가장 못난 왕이 탄생한 것이다.

* * *

그러니 레오란트는 말한다.

"테트라디아로 데려가 주시오."

괴이와의 전쟁이 한창인 기사의 왕국, 바스테리온의 새로운 왕.

왕의 패기도, 카리스마도, 리더쉽도 없는 왜소한 왕.

통칭 못난 왕.

"나는 검을 모르오. 나는 기사도를 모르오."

열네 번째 왕은 기사왕이 아니었다.

검이라고는 몇 번 잡아 본 적도 없고 기사도는 책으로 읽어 본 것이 전부다.

"아버지처럼 한마디 말로 만 명의 기사를 부리는 법도 모르고 첫째 형처럼 백만 백성의 마음을 얻는 법도 모르오."

모르는 것투성이었다.

"둘째 형처럼 강하지도 않고 강직하지도 않소. 나는 기사가 아니란 말이오."

전장을 지휘하는 법도, 그들의 가장 앞에 서는 법도 모른다.

늘 강인한 그 뒷모습만 보았지 그들의 앞에 서 본 적은 없는 까닭이었다.

허나.

"나는 왕이오."

그럼에도 그는 왕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못날지언정, 왕이었다.

"세상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해도, 역사상 가장 못난 왕으로 기록되어도 상관없소."

머리에 얹은 왕관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 가끔은, 아니 사실은 매일같이 짓눌리며 살지만.

"나는 명예도 모르고 신하를 다스릴 줄도 모르며 통치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왕이지만."

아버지의 피, 형제들의 원한, 백성들의 목숨이 담긴 그것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워 매일을 헛구역질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지만.

"내게도 신념이 있단 말이오."

그런 못난 왕에게도 신념은 있다.

그런 그도 아는 것은 있었다.

"죽으면 아무 소용 없지 않소."

죽음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명예도 기사도도 그들의 기개도 모르기에 외려 아는 것이다.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남겨진 자들이 받을 고통은 죽음보다 더한 것임을.

"긍지 높은 기사들은 명예를, 신념을 잃는 것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자들. 허나 나는 그게 아니란 말이오."

죽음은 두렵다.

자신의 죽음도 두렵고 가까운 이의 죽음은 더욱 두렵다.

"나는 알고 있소. 물론 그대도 알고 있겠지. 마법사가 부족한 우리 바스테리온은 결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죽을 것이다.

모든 기사가 초개처럼 목숨을 버린다고 하여도,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도와준다고 하여도 결국 몇 번을 버티지 못하고 저주받은 저것들에게 잠식당하고야 말 것이다.

그의 아비처럼.

그의 형제들처럼.

"그러니 제발...."

그것을 알기에 절박을 담아 부탁하는 것이었다.

"우리를 테트라디아에 데려가 주시오. 마탑주!"

왕은 무릎을 꿇었다.

명예도 수치도 모르는 못난 왕이기에 가능한 일.

이까짓 무릎보다, 명예보다, 수치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마음속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왕으로서, 기사도를 모르는 기사들의 왕으로서 반드시 그들을 살려야 하오."

그라고 어찌 부끄러움을 모르겠는가.

어찌 수치를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꿇는 무릎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말로서 내뱉는 의지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간절했다.

그가 사랑하는 왕국의 모든 이가 죽지 않게 하는 것.

못난 왕의 유일한 신념이었다.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니 파블렌코 공. 제발...."

히오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허나 간절한 눈빛과 함께 흐르던 비절한 눈물은 이미 잔상으로 남아 새겨졌으니 눈을 감는다 한들 소용이 없었다.

테트라디아로 데려가 달라는 왕의 부탁.

과연 아벨라르 파블렌코는, 마탑의 주인은 무어라 답했을까.

"이주해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소?"

어떤 결론을 내렸을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남겠소. 세상에서 가장 못난 왕이 남을 테니."

이제는 안다.

자신의 대답은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의 기사들은, 나의 백성들은 부디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시오."

자신은 관망자.

아벨라르의 기억을 되짚어 볼 뿐인 답습자.

그럼에도 그 간절하고도 절박한 표정과 마주하고 있기가 어려워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모습으로 자신이 아닌 백성의 목숨을 구걸하는 그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마탑주...."

변화를 느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왕의 절절한 외침이 점차 멀어지고 눈을 감고 있음에도 시야가 흐릿해진다.

장면이 넘어가는 것이다.

아벨라르 파블렌코는.

당대 최고의 마법사이자 테트라디아의 위대한 마탑주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인가.

못난 왕을 위해, 바스테리온의 수많은 백성을 위해 기꺼이 테트라디아로 이주를 도왔을 것인가.

그것을 확인하고자 서서히 눈을 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왕의 모습.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갑주를 걸치고 어울리지도 않는 검을 찬 채 어설프게 말의 등에 올라탄 상태였다.

푸른 하늘 아래,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왕의 눈은 공허했고 그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바스테리온이여."

그의 텅 빈 눈을 따라 시선을 옮겼기에 히오 역시 그와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짓쳐들어오는 어둠. 심연.

푸른 하늘을 잠식하며 몰려오는 재앙.

그 아래로 바글한 것은 뒤틀린 자들.

그것을 맞이하는 왕.

"나를 따르라."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외침.

결말을 아는 자의 공허한 울림.

그것은 분명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모습이었으니.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아벨라르 파블렌코는 못난 왕과 백성들의 이주를 끝끝내 허락치 않은 것이다.

* * *

"막아라! 버텨라! 조금도 밀려나서는 안 된다!"

무한의 공간.

밀려드는 어비스 몬스터를 상대로 기사들은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었다.

"시르베르트!"

물론 그것은 빙의자들 또한 마찬가지.

기사들처럼 몬스터와 몸을 맞대며 직접 상대하는 게 아닐뿐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진형 안에서 막대한 화력을 지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진형은 무너지고 여기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터였다.

"뭐가 이렇게 질겨!"

허나 그것도 슬슬 한계에 봉착해 가고 있지 않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조금씩, 한 걸음씩 밀려나고 있었으니 넓었던 원은 어느새 눈에 띄게 작아진 상태였다.

"화력을 올린다! 스킬 강도를 높혀라!"

빙의자들 또한 작전의 결대로 마력을 최대한 아껴 가며 조절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쌓일대로 쌓인 몬스터의 숫자가 감당 가능한 범주를 넘어서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화력을 올리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어차피 이대로면 밀려!"

조금은 늦은 감이 있는 결단이었다.

허나 다프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안티푸스와 히오 파블렌코가 대체 언제 각고의 공간을 깨고 나오는지.

무력도, 어비스에 대한 정보도 출중한 두 사람인만큼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으니.

"화력을 올려라!"

내려진 결단에 모든 각성자가 스킬의 화력을 높히기 시작한다.

콰아아앙-!

다프네를 상징하는 푸른 활, 라플리시아의 푸른빛이 더욱 짙어진다.

한 번의 번뜩임에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지는 어비스 몬스터.

적들의 돌진을 늦추고 움직임에 제약을 가했을 뿐인 시르베르트의 염동은 이제 확실하게 적을 찍어 누르기 시작한다.

곳곳에서 불길이 피어나고 얼음이 쏟아졌으며 폭발이 일어난다.

꽈아앙-!

효과는 확실했다.

끈덕지게 달려들던 공세가 느슨해졌으며 틈이 많이 생겨났으니.

"지금이다! 다시 밀어붙여라!"

물론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빈공간에 다시금 몬스터가 밀려 들어와 가득 찼지만, 그 짧은 틈을 놓칠 정도로 허술한 자는 이 공간에 없었으니.

밀려났던 진형이 다시 복구되며 안정감을 되찾아 가는 것이다.

"버텨!"

그리하여 다시 버티기 작전에 들어갔지만, 이전보다 버티는 시간이 짧아질 것임은 모두가 알고 있을 터였다.

이는 생각보다 대가가 큰 회복.

아끼고 아끼던 마력을 쏟아부음으로서 얻어 낸 잠시간의 안정감.

그러니 다시 몇 시간이 더 지나 버렸을 때 어느새 원은 좁아질대로 좁아진 것이다.

밀려나고 밀려나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바짝 붙을 정도로 밀려나 버린 것이었다.

"...남은 마력을 전부 쏟아부어!"

이젠 정말로 뒤가 없다.

무한하게 계속 나타나는 어비스 몬스터. 이미 혼까지 모조리 물들어 버린 주제에 앞뒤 가리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드는 지독한 놈들.

마력을 아낀다고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여기서 더 밀려난다면 기사들과 스킬 사용자들 간에 손발이 꼬여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었다.

버틴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수준까지 와 버린 것이다.

그러니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공간을 확보하고 길을 뚫어 내야만 했다.

"길을 뚫어야 한다! 더 빨리 움직여!"

허나 길은 뚫리지 않았다.

비탈리아누스가 있는 방향만큼은 공간이 꽤 넓었지만, 그 혼자서 무한한 몬스터를 전부 막아 낼 수도 없었고 삼백에 가까운 인원을 전부 보호할 수도 없었으니.

그쯤에서는 빙의자들은 물론이고 강인한 기사들마저도 무한이 주는 압박에 짓눌려 가는 것이다.

정말로 끝도 없이 밀어닥치는 그것에, 어쩌면 이대로 영영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 시작하면 얕게 퍼진 어비스의 기운이 그 작은 틈을 파고 들어온다.

제아무리 강인한 이들일지라도 계속 이어지는 전투에 몸도 마음도 지쳐 갈 때쯤 슬며시 스며드는 심연의 기운은 저항키가 어려웠으니.

그때였다.

마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몸 또한 무거워져 더이상 검을 들어올리는 것도 힘겨워졌을 때.

이상하게 정신이 어지럽고 결국 무한에 잠식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

가득한 어둠 자체가 뒤흔들린다.

자세히 보면 거대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양쪽으로 높게 서 있던 거대한 게이트.

그것은 각고의 공간 중 하나.

"저건...!"

좌측 각고의 공간이 부서지고 있었다.

151화 못난 왕의 신념 (5)

이곳은 각고의 공간.

아벨라르 파블렌코의 기억 속.

몰려드는 심연은 어둠과 함께 들이닥친다.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광경이었다.

심연과 인간이 맞부딪치는 전쟁.

밝은 오러와 칠흑의 어둠이 충돌하는 현장.

물론 압도하는 것은 어둠이었다.

"끄아아악!"

어둠이 빛을 삼킨다.

심연이 인간을 끌어당기고 그것에 뒤덮인 기사는 삽시간에 심연에 물들어 버린다.

"끄어어...."

단말마는 검게 물든 울음으로 바뀌고 몸은 뒤틀렸으며 눈자위는 온통 검게 변한 채 전진하는 방향은 반대.

"하, 할리안! 정신 차려! 나라고!"

어둠을 향하던 기사의 검은, 동료를 겨누고 친구를 향한다.

아직 심연에 물들지 않은 기사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몇 번이나 토해 내다가 결국 거멓게 뒤틀리는 그것을 베어 버린다.

눈은 벌겋게 충혈된 채 짓씹은 입술에서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 조금 전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동료를, 친구를 제 손으로 베어 버리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악!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들아!"

분노에 휩싸여 휘둘러지는 오러의 향연은 얼마 가지 않는다.

격화된 감정은 심연의 탐스러운 먹이일 뿐이었으니.

그렇게 벌어진 틈에 심연이 닿는 순간, 그 역시 심연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어둠은, 심연은 그렇게 제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다.

물론 그것에 맞서는 빛 또한 있었다.

「스킬 - '사신(死神) 소환'이 발동 중입니다.」

「모든 스킬이 봉인됩니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빛.

어둠을 불태우는 희망의 빛.

"플레어."

콰아아앙-!

불의 기둥이 치솟는다.

서리의 광선이 밀려들던 어둠에 깊은 상처를 새기고 거센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며 어둠에 빈틈을 만든다.

그러한 틈은 뒤따르던 심연에 금방 다시 채워지긴 했으나, 이는 희망.

"위대한 마법사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괴이를 막아 내어라! 결코 물러서지 말아라!"

마음의 어둠을 걷어 내는 희망이었다.

* * *

본디 살아 있는 생명체였으나 이제는 심연이 되어 버린 존재들에게는 생전의 마력 같은 에너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오히려 심연에 물들어 그것이 더 강해졌으니.

사신은 그러한 것들을 거두어들여 히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낑낑아."

히오의 부름에 등 뒤에선 사신이 재차 낫을 휘두른다.

그 끝에 걸려드는 막대한 에너지.

그것이 곧 마력이 되어 히오에게 쏟아졌고, 마법을 쉼없이 만들어 내고 있음에도 마력이 넘쳐흘러서 몸 주위로 옅은 아지랑이까지 피워 낸다.

- 시전 속도가 엄청나게 늘었구먼.

마법을 만들어 내느라 정신없는 히오의 머릿속에서 낮게 울리는 푸르넬의 목소리.

- 조절하지 않고 마력이 계속 공급되니 가능한 것이기는 해도 경이로운 속도야.

그의 말처럼 히오의 마법은 각고의 공간에 들어오기 전과 비교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세상 어느 마법사가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마법을 쏟아 보았겠는가.

무아지경으로 펼치는 4서클과 5서클의 마법은 단순한 숙련, 완숙을 넘어선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 평범한 마법사의 수준은 진작에 넘어섰지만... 이건 뭐라 불러야 할지.

5서클의 마법이란 적어도 백 개가 넘는 문양을 다루는 일.

그것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력을 분배해 정확한 힘을 끌어내고 그 모든 것을 버무려 완성되는 하나의 작품.

히오는 그것을 초단위로 찍어 내고 있는 것이다.

- 괴물이 만들어지고 있구먼.

전장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다는 5서클의 마법을 끊이지 않고 계속.

몇 시간이나 계속해서 쏟아 내었으니.

- 부작용은 없을런지....

마력은 무한하다.

원한다면 체력 또한 무한하다.

최상위 스킬, 사신(死神) 소환은 모든 스킬이 봉인될 정도로 막대한 패널티를 지닌 스킬.

상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무한한 에너지를 얻게 되는 사기적인 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외적인 요소일 뿐이다.

제아무리 무한한 힘을 얻는다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정신은 무한하지 않다.

수십 년을 단련한 강인한 기사도, 수십 년을 수학한 마법사도 정신력의 한계는 있다.

한데 히오 파블렌코를 보라.

무한한 마력에 맞춰 무한한 마법을 쏘아 내고 있지 않은가.

마치 자신의 정신력 또한 무한한 것처럼.

분명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 생각해 보면 히든 특성이라는 것도 이상하지.

인내력은 올리기가 어렵다.

웬만한 방법은 다 시도해 봤지만, 작정하고 인내력 작업을 해도 효율은 극악이었다.

그런 인내력이 한순간에 백 단위로 오르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그런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델피르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이 죽었을 때가 그러했고 첫 번째 스승 베르가 파블렌코가 죽었을 때가 그러했다.

황녀의 기사 테오르도가 홀로 군단에 맞서다 난도질당했을 때가 그러했고 천 년간 용을 지키던 기사의 사명을 무너트려야 했을 때도 그러했다.

끔찍한 고통을 수 시간 인내해도 고작 1~2 정도 오를 뿐인 인내력이 그런 상황에서는 백 단위로 오른다는 말이다.

그러니 푸르넬은 잠시간 망설이다 묻는다.

- 자네... 정말 괜찮은가?

히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크게 내비친 적이 없었으니.

언제나 인내력 수치로 그것을 확인했을 뿐, 늘 무던하게 그냥 넘어갔을 뿐, 결코 눈물을 흘리거나 울분을 토해 낸 적 또한 없다는 말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베르가의 무덤 앞에서도, 용을 죽여야만 했을 때도.

아카데미 학생들의 처참한 시신 앞에서도,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던 악당의 죽음 앞에서도.

언제나 참고 참고 인내했을 뿐이지 않나.

그렇게 닳고 닳아 버린 정신은 지금 어느 정도인가.

참아야지만 강해지는 특성이라니.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특성이란 말인가.

그렇게 인내하던 정신은 정말로... 괜찮은 것이 맞는지.

그것을 물었으나.

"...."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무아지경에 빠진 탓이었다.

마법을 쏟아 내는 것만이 할 일이라는 듯, 심연을 향해 미친 듯이 마법만 쏘아 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전쟁마저도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가 죽고, 많은 이가 심연에 물들어 버렸지만, 결국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이곳은 각고의 공간.

이미 지나가 버린 어느 위대한 마법사의 기억 속.

그러니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존재이고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이 아니다.

"이, 이겼어...!"

"어둠이... 괴이가 물러간다!"

"와아아아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진다.

"해, 해냈어!"

"또다시 막아 냈다!"

또다시 몇 시간의 전투 끝에 물러나는 심연.

이전처럼 모든 심연을 소멸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물러났으니.

그것을 본 기사들과 병사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히오 또한 미소지으며 함께 기뻐하는 것이었다.

어둠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다시 푸른 하늘이 장식한다.

"고생 많았소. 파블렌코 공."

비록 잠깐의 승리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승리는 승리.

레오란트 왕 또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히오의 곁에 다가왔다.

단 한 번의 패배는 곧 멸망으로 이어지겠지만, 그럼에도 기쁜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번 승리 역시 그대의 공이 몹시도 크구려."

웃으며 히오를 치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히오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시련을 극복하였습니다.」

「각고의 공간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메시지가 뜬 것 때문이 아니었다.

못난 왕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끝끝내 알 수 없는 까닭도 아니었다.

외려 그 반대의 이유였다.

"파블렌코 공. 전날의 무리한 부탁은 내 사과하겠소. 그대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 미안하오. 못난 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런 것밖에...."

이 못난 왕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어둠이 재차 몰려오고 있는 까닭이었다.

말을 건네는 못난 왕의 뒤로, 기뻐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위로, 어쩌면 히오 자신의 등 뒤로도.

심연이 다가오고 있다.

심연은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기다린 것이다.

정면이 아닌 사방에서 들이닥치기 위해.

저 먼 곳에서 날개짓하며 날아오고 있는 것은 분명 용이다.

심연에 물든 일곱 마리의 용.

그것을 선두로 사방에서 몰려드는 것은 분명 심연의 기운.

막대한 심연의 덩어리 그 자체.

설상가상으로 바로 위, 하늘에는 짙은 그림자까지 끼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거대한 눈이었다.

언젠가 본 적 있었던 감시자의 눈.

심연에 존재하는 괴이하고 거대한 눈동자.

"저, 저게 무슨...!"

그제서야 레오란트 왕도, 기뻐하던 기사들도, 전장에서 살아남은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시련 - '못난 왕의 신념'이 종료됩니다.」

「각고의 공간이 붕괴됩니다.」

세상은 어둠에 잠긴다.

각고의 시련이 끝난 것이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811 / 1000)]

* * *

무한의 공간.

말 그대로 무한하게 몬스터가 쏟아지는 곳.

그러니 기사들과 빙의자들이 버티고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이 온통 검은 어비스 몬스터로 뒤덮였다.

왕국 하나와 홀로 싸우면 이런 기분일까.

그만큼이나 적의 숫자는 많았고 감당키가 어려웠다.

"지긋지긋한 놈들!"

더군다나 끈덕지기는 어찌나 끈덕진지.

마치 저들이 숭고한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온몸을 내던지며 달려드는데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상황은 최악에 가깝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투.

그렇게 몸도 마음도, 마력도 고갈되어가는 와중.

쿠구구궁-

좌측 게이트가 흔들린다.

미친 듯이 싸우는 와중에도 굳건하게 서 있던 게이트가 격하게 흔들린다.

그에 무한의 공간 또한 함께 진동했으니.

"저건...!"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흔들리고 흔들리다 못해 부서져 내리는 검은색의 거대한 게이트.

각고의 공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

"각고의 공간 하나가 끝났다!"

두 개 중 하나의 공간이 공략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좌측 각고의 공간은 수호 기사, 히오 파블렌코가 들어간 곳이었지 않은가.

"정신 차려라!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른다!"

허나 그저 기뻐하고 있을수만은 없었다.

아직 우측 각고의 공간이 남았으니.

곧 현 황제의 수호 기사라는 고급 전력이 합류하겠지만.

그로 인해 숨통이 조금 트이기는 하겠지만, 그 혼자 힘으로 지금 전황을 단박에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기에.

결코 방심하여서는 안 될 것이었다.

쿠구궁-

하지만 각고의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에 오롯이 떠 있는 한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면, 집중을 외치던 기사마저도 결국 시선을 빼앗기고야 만다.

"...."

흩날리는 게이트의 잔해 속에서 더 깊게 내려앉는 어둠.

어비스 공간임에도 그보다 한층 더 어둑해지는 시야.

무너진 게이트.

그 자리에 언제부턴가 보이는 것은 빛나는 붉은 안광.

흐릿하게 보이는 거대한 사신. 죽음의 형상.

그리고.

콰아아앙-!

동시에 치솟는 일곱 개의 불기둥.

그것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솟구치는 열 개의 불기둥.

콰아아앙-!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땅이 흔들리며 푸른 광선이 쏘아진다.

"이게 무슨...?"

각고의 공간이 무너짐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방에 빼곡히 들어차 있던 어비스 몬스터가 비산하고 찢겨지며 죽어 나간 것은 당연한 일.

콰앙-!

콰아아앙-!

거대하고도 흐릿한 사신이 번뜩이는 낫을 휘두른다.

그것에 대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인외의 사신이 선사하는 거대한 존재감.

사신이 낫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휘몰아치는 막대한 마력의 흐름.

그리고 그 막대한 흐름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한 명의 인간.

그것을 비탈리아누스가 모를 리 없었다.

"돌아왔군. 마법사."

그러니 옅게 웃으며 검을 힘껏 들어 올린다.

힘이 담긴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리며 무한의 층을 뒤덮는다.

이것은 희망을 알리는 외침.

인내하던 반격의 서막.

"위대한 수호 기사, 히오 파블렌코가 돌아왔다!"

마력을 아낀다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그저 버티기만 했던 기사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기에 모두의 마음 속에 불안감이 피어나고 있었을 터였다.

"모두! 전진하라!"

허나 고작 한 명의 등장만으로 모든 작전이 변경되는 것이다.

"버틸 필요 없다! 가진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라!"

"와아아아!"

한없이 밀려나기만 하던 기사들이 마지막까지 아껴놨던 모든 힘을 동시에 쏟아붓는다.

콰아아앙-!

불의 기둥이, 전조조차 없는 강한 폭발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덕분이었다.

땅이 부서지고 뼈의 창이 쏘아졌으며 용암을 흩뿌리는 거대 지렁이가 난동을 피우는 것까지 전부 한 사람이 만들어낸 힘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격! 진격해라! 수호 기사께서 돌아오셨다!"

"마법사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콰아앙-!

한 번의 폭발에 못해도 수십 마리의 어비스 몬스터가 쓸려 나간다.

나름 중반부의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가 지난번 정복의 층 언데드보다 강하지만, 일거에 치솟는 불의 기둥 앞에서, 전조도 없는 넓은 폭발 안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몇 초만에 몇번의 마법이 뿜어지고 백 단위로 쓸려 나가는 어비스 몬스터.

"모조리 쓸어버려라!"

한없이 밀려나고 좁아지던 공간에 여유가 생기고 기사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데다가 더욱 좋은 소식마저 들려왔으니.

"우측... 우측 게이트가!"

안티푸스가 들어갔던 각고의 공간.

그 게이트도 격하게 흔들리며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와아아아!"

희망은 순식간에 덩치를 불린다.

"다 죽여! 이 끈질긴 놈들!"

"저주 받은 쓰레기들아!"

체력이, 마력이 분명 얼마 남지 않았으나 급격하게 차오르는 희망은 기적처럼 다시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준다.

몸을 움직이게 하고 적을 쓸어버릴 힘을 안겨다 준다.

넓디넓은 무한의 공간.

그곳에 빼곡했던 어비스 몬스터가 쓸려 나가는 것에는 생각보다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는 말이다.

초단위로 떨어지는 강대한 마법이 무한하게 이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티푸스!"

몬스터의 숫자가 줄고 빈공간이 많이 생겨났기에 각고의 공간에서 막 나타난 안티푸스의 모습도 바로 드러났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온몸이 땀에 푹 절은 제법 힘겨운 모습.

세상에 두려울 것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그가 반쪽이 된 모습에 대부분의 빙의자들이 놀랐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멍청이는 없었다.

"끝나간다!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힘을 내라!"

각고의 공간은 모두 클리어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무한의 공간에 몬스터는 더 생겨나지 않을 터.

이제 남은 어비스 몬스터를 모조리 죽이기만 하면 짧았으나 한없이 길었던 53층의 공략도 성공으로서 끝이 난다는 말이다.

콰아아앙-!

그리고 이런 순간마저도 히오의 마법은 온사방에서 작열하고 있었으니.

콰아앙-!

끝이 보인다.

무한의 공간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더이상 무한하지 않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히오 파블렌코의 힘은 그야말로 무한하지 않은가.

어찌 일개 개인의 힘으로 수천 수만 마리의 몬스터를 모조리 도륙해 버리는 것인가.

"위대한 수호 기사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

"와아아아아! 전부 쓸어버려!"

"베르덴의 영광을 위하여!"

더이상 무한하지 않은 무한의 공간.

홀로 수천 수만을 학살하는 마법사와 빙의자 측 최강이라 불리는 안티푸스의 합류.

그러니 남은 어비스 몬스터를 정리하는 것은 그로부터 고작 십여 분이면 충분한 것이다.

"...끝났다...."

"지, 진짜로 끝이야...?"

"이겼다! 역겨운 몬스터 놈들! 드디어 전부 죽었네!"

빙의자들은 물론이고 고상한 기사들까지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그만큼이나 힘들었던 전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가 말이 아니었으니.

"수호 기사님의 무력은 비탈리아누스 님도 인정할 정도라고 말은 들었지만...."

"이건 진짜 상상 이상이잖아."

나지막이 들려오는 감탄과 대놓고 히오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고 연호하는 기사들.

"고생했네. 마법사."

비탈리아누스마저도 기쁨의 미소와 함께 히오의 어깨를 두드린다.

"...."

하지만 히오는 미소짓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등장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표정으로 한곳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을 뿐.

"자네 왜 그러나."

그에 비탈리아누스 또한 히오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어비스 몬스터가 한 마리 보이는 것이다.

"아, 몬스터가 한 마리 남아 있었군."

너무 초라해서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어비스 몬스터 한 마리.

마지막에 나타난 건지, 계속 있었는데 그냥 운 좋게 마지막에 남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외형은 무한의 층에 나왔던 여타 어비스 몬스터들과 비슷했다.

말과 뒤틀린 괴물이 합쳐진 듯한 모습.

온몸은 시커멓게 검은색으로 물들었고 등에는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깃발 같은 것이 꼽혀 있다.

다른 점도 있었다.

"쯧, 너무 약해서 기척에도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야."

덩치가 볼품없을 정도로 왜소하다는 점.

그리고 머리에 쓰고 있는 관.

마치 왕관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 그 뒤틀린 머리 위에 얹혀져 있다는 점이었다.

"피곤할 테니 가만 있게. 마지막인 만큼 내 직접 마무리 짓지."

온통 검게 물든 채 뒤틀린 외형.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별다른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약골.

볼품없고 뒤틀린 것마저도 어설픈 저런 몬스터가 어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가.

"...아니."

다른 몬스터들은 왜 저런 못난 놈만 남기고 미친 듯이 몸을 던졌는가.

마치 지키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내가 가야 해."

그러니 나서려는 비탈리아누스를 제치고 한 발짝 앞서 나간다.

어색하고 초라하며 볼품없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했기에 지팡이를 꽉 꼬나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마력이 요동치고 움직인 끝에 곧바로 완성되는 5서클의 마법은 윈드 블레이드.

무형의 칼날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며 히오와 움직임을 같이한다.

- 크아아아!

못난 몬스터는 힘찬 비명과 함께 달려든다.

등에 꽂힌 채 길게 삐져나온 깃발이 펄럭이고 머리에 쓴 왕관이 흔들린다.

이제는 알아보는 이 하나 없는 깃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왕관.

어쩐지 울부짖는 것만 같은 비명.

"바스테리온의 마지막 왕, 레오란트."

히오는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추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못난 왕."

결말이야 뭐, 당연한 것이다.

바람의 칼날은 그런 왜소한 몬스터의 목 따위 너무도 가볍게 가르고 지나가버렸으니.

"볼품없이 꿇던 무릎,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

순식간에 떨어지는 목.

나뒹굴며 몇 바퀴나 구르는 머리.

「어비스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외형과 꼭 닮은 허망한 결말.

못난 왕의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절대 잊지 않겠다."

비굴하게 꿇던 무릎.

망설임 없이 숙여 오던 머리.

뚝뚝 못나게도 떨어지던 눈물.

그 모든 것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

"세상에서 가장 못난 왕의 숭고한 신념."

그것은 반드시 살리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

가장 못난 왕으로 남을지언정 사랑하는 이들이 죽게 만들지 않겠다는 숭고한 마음.

그 신념 만큼은 천 년의 세월을 지나 히오에게 닿은 것이었으니.

"내가 이어갈 테니."

그 자리에 선 채 나뒹구는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한없이 뒹굴며 날아가다가 힘을 잃고 땅에 처박히는 초라한 머리.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그렇게나 볼품없이 나뒹굴었음에도.

「-53층이 더없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습니다.」

「층이 붕괴됩니다.」

머리에 쓰여진 왕관만큼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946 / 1000)]

152화 성장 (1)

「시련 - '혹한의 공포'가 종료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꽁꽁 얼어붙었던 안티푸스의 온몸이 순식간에 풀린다.

꿈이라도 꾼 것처럼 원래의 상태로 멀쩡하게 돌아온 육체.

"허어억...."

참았던 숨이 크게 토해지자 다시 황급히 들이마신다.

안티푸스 프라만.

바깥 세상에서 부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

그런 자신에게 두려움 따위, 더는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빌어먹을...."

한데 그게 아니었다.

원초적인 두려움이란 안티푸스 역시 겪어 본 적 없는 것이었으니.

온몸이 얼어붙고 온몸이 불에 지져지는 와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스킬로 대항하고 오러를 몸에 두르며 검을 휘둘러 봐도 대낮의 허깨비를 가르는 듯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

자신이 노력한 그 어떠한 힘도, 능력도 통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무기력함.

종합하자면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이겨 내야만 한다.

스스로가 택한 길은 그런 것이다.

「혹한의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였습니다.」

「특성 - '지배자'의 발동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랭킹 2위의 특전으로 얻은 특성 '지배자'.

벤타이얼 세계관 속 알려진 수만 가지의 특성 중에서 정점이라 불리는 최강의 특성.

지존 천마의 1위 특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특성만큼은 자신보다 하위 특성일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배자'란 오로지 가장 꼭대기를 목표로 하는 특성이었으니.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강해질 수 있는 완벽한 특성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은 이것을 운 좋게 가진다고 해도 취할 수는 없었으리라.

지배자는 두려움을 모르는 자.

두려움을 느껴서도 안 되는 자.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잡아먹히는 순간, 이루었던 모든 힘을 잃고 한순간에 몰락해 버리는 위험천만한 능력.

오직 안티푸스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성 - '지배자'가 '혹한의 공포'를 지배합니다.」

「특성 - '떨리지 않는 육신'을 획득하였습니다.」

「모든 스킬의 정확도가 상승합니다.」

「특성 - '빙(氷) 속성부여'를 획득하였습니다.」

「이제 오러와 마력에 빙(氷) 속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빙(氷) 속성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스킬 - '냉기 방출(하위)'를 획득하였습니다.」

「혹한의 공포를 극복하여 스킬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스킬 - '냉기 방출(하위)'가 스킬 - '서리의 파동(중위)'로 변경됩니다.」

이것이 모든 특성의 정점에 있는 지배자의 힘이었다.

능력을 지배하여 제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괴랄한 힘.

게임 속 지존 천마의 '화염의 지배자'나 다프네의 '빙하의 지배자'처럼 한 속성을 극한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고 그것의 우위에 서는 그런 특성이었다.

그러니 이곳 각고의 공간이 주는 시련은 안티푸스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수련 장소인 셈이다.

평소에는 결코 겪을 수 없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선사하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시련이었으니까.

꼭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그것을 키워주려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그것은 과한 생각.

"흐흐흐... 혹한의 공포도 극복해 냈다."

화염의 공포를 극복했고 혹한의 공포마저 극복해 내었다.

희귀하면서도 원초적인, 강한 두려움이었던 만큼 얻은 특성과 능력이 제법 대단하다는 의미.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시련 - '심해의 공포'가 시작됩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시련이 즐거운 것도 아니다.

「심해의 두려움을 인내하고 극복하십시오.」

끔찍하게도 힘들다.

그렇기에 이것은 각고의 시련.

"끄으윽...."

화염의 공포를 시작으로 혹한의 공포, 심해의 공포까지 이겨 냈을 때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몸은 멀쩡한데 정신이 난도질당한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하는데 사실 어떻게 한 것인지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오직 하나.

강하디강한 승부욕,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마음.

원초적인 공포마저도 억누르는, 극복해내고야 마는 강대한 승부욕이었다.

그것만을 생각하며 버티다 보면 어느새 네 번째 시련, 사막의 공포마저도 끝나고야 마는 것이다.

「시련 - '사막의 공포'가 종료됩니다.」

메시지를 확인할 새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네 번째 시련, 사막의 공포.

그래도 그나마 나았다.

앞선 화염, 혹한, 심해의 공포에 비한다면 온몸에 수분이 빠져나가고 모래와 벌레가 기어다니는 고통쯤이야 버틸만 했다.

물론 생각과는 별개로 정신은 아찔하고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각고의 공간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네 번째, 사막의 공포 시련을 극복함과 동시에 드디어 공략 성공의 메시지가 떠올랐으니.

"드, 드디어...."

안티푸스는 그답지 않은 말이나 내뱉으며 기뻐한다.

"끝났다… 이건 무조건, 무조건 이겼어."

지배자 특성을 지닌 자신도 이 정도의 공포와 고통이었지 않나.

그 두려움을 뛰어넘을 정도의 승부욕을 지녔기에 망정이지, 다른 이가 들어왔으면 분명 자신보다 몇 배, 혹은 시련을 실패해 버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니 안티푸스는 확신하고 기뻐하며 무너져 내리는 각고의 공간을 바라본다.

"지존 천마. 제아무리 너라고 해도 공포가 없을 수는 없을 터."

두려움과 그것의 극복에 관한 시련.

어찌보면 안티푸스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였으나, 그것을 누구에게 따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운이 없었다 변명은 하지 말아라."

공간이 부서지고 시야가 어둠에 잠긴다.

「각고의 공간이 붕괴됩니다.」

아마 무한의 공간에서도 꽤 애를 먹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합류하면 크게 활약하며 도움을 줄 수 있을 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아직 어둠에 잠긴 시각보다 먼저 청각이 회복되며 소리가 들려온다.

예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듯 격렬한 전투의 소음.

그리고.

"전진! 전진하라!"

힘이 가득 담긴 기사들의 외침.

콰아앙-!

사방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오는 폭발음.

무언가... 예상과는 조금 다른 상황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 시야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방에서 치솟고 있는 불의 기둥. 신나게 몬스터를 도륙해 나아가는 기사들의 모습.

그리고.

"...."

중앙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정체불명의 사신.

그 아래에 서 있는 화려한 복장의 사내.

"지존 천마...!"

그는 자신보다 먼저 각고의 공간을 클리어하고 나와, 무한의 공간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릎이나 꿇은 채 비틀거리는 자신과 달리 너무도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으니.

패배.

이번에도 졌다.

지존 천마가 이기고 자신이 진다.

이것이 당연시되어서는 안 된다.

반복되다 보면은 스스로조차도 질 거라는 마음부터 든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렇기에 마음의 분노를 담아 검을 들어 올려 보지만, 사실 남은 몬스터조차 그다지 없는 것이다.

"히오 파블렌코!"

"베르덴의 위대한 수호 기사!"

마지막 몬스터의 목을 히오 파블렌코가 직접 갈라 버리며 그렇게 어비스 53층의 공략은 마무리된다.

「-53층이 더없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습니다.」

각고의 공간에서 먼저 나온 것도 히오 파블렌코.

그리하여 가장 주목 받은 것 역시 히오 파블렌코.

모두가 외치고 있는 이름 또한 히오 파블렌코.

한데 정작 히오 파블렌코의 표정에는 조금의 기쁨도 서려 있지 않다.

안티푸스는 그것에 더욱 화가 나는 것이다.

「층이 붕괴됩니다.」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환호하는 와중에도 바닥에 널브러진 몬스터의 사체 따위나 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비스에서 나온 뒤에도 비탈리아누스와 몇 마디 나누더니 그대로 날아가 버린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두가 히오 파블렌코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명성 포인트를 위해 개선식에 참여해야만 했고 히오 파블렌코는 이런 것 따위 참여도 하지 않고 고상한 척 구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히오 파블렌코의 이름이 들려오는 것이 지독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안티푸스는 온통 히오의 이름만이 들려오는 개선식의 한가운데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

다음은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겠다고.

이번 각고의 공간에서 얻은 것도 많으니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지존 천마를 넘어 보이겠다고.

그것이 안티푸스가 아는 지배자의 길이었다.

* * *

"어때. 대륙 최정예 원정대와 함께해 본 소감은."

맬리사의 물음에 클레어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았어요."

공략이 끝나고 이제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당시의 일이 마치 아득히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그만큼이나 다른 별세계 존재들의 전투였던 것이다.

거기서 클레어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그저 보호받았을 뿐이다.

"당연히 아직 버거울 수밖에. 아카데미 졸업한 지 일 년밖에 안 됐다고 했지 않아?"

"아, 졸업은 아직 못 했어요."

"응?"

"졸업이 아니라 입학한 지가 일 년이라고...."

"...그래. 아무튼, 잘하고 있으니 너무 기죽을 필요 없어."

맬리사가 그리 위로했지만, 그렇다고 클레어가 딱히 기죽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다시 한번 느꼈을 뿐이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곳까지는 도달했지만, 그 곁에 서기까지는 아득히 높고 몹시도 멀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네 목표를 직접 가까이서 본 소감은 어때."

"...네?"

"모른 척할 필요없어. 너 수호 기사님 보려고 로열 나이츠 들어온 거잖아."

"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나 티를 내는데 모를 리가. 어쨌든 소감은 어때? 엄청나지?"

맬리사의 물음에 클레어의 머릿속이 며칠 전의 광경을 떠올린다.

각고의 공간에서 나옴과 동시에 몬스터를 쓸어버리던 그 압도적인 모습을.

사신을 지휘하며 너무도 쉽게 모든 것을 정리하던 강한 힘.

"네, 엄청났어요."

제국에서,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만 모인 원정대.

그 속에서도 압도적인 힘.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 목표였다.

"설마 포기하지는 않았겠지?"

맬리사의 물음에 번쩍 치켜드는 고개.

"그럴 리가요."

이전보다 더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맬리사가 흔치 않게 미소를 짓는다.

클레어를 보고 있으면 자신 역시도 그 뜨거운 열정에 전염되어 버릴 것만 같았으니.

"이래서 비탈리아누스 님이 너를 데려온 것이구나."

아마 이렇게나 노력하는 소녀를 보고 좀 배우라고, 그런 의미로 비탈리아누스가 클레어를 덥썩 데려와 버린 건 아닐까.

맬리사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으면 우물쭈물하던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 그보다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

"히오... 아니, 수호 기사님은 대체 어디 계시는 거죠? 공략 이후에 바로 떠나시고는 황궁에 돌아오시지를 않으니까...."

"보고 싶니?"

"네? 아니!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요!"

맬리사의 희미한 웃음이 조금 더 짙어진다.

하나 같이 나사가 빠졌거나 무뚝뚝한 기사단 내에서 이런 신선한 반응이라니.

"안타깝지만, 수호 기사님의 위치는 아무도 몰라. 항상 어디선가 바쁘시거든."

"아...."

"글쎄, 황제 폐하나 비탈리아누스 님 정도면 아실지도 모르는데, 직접 한번 물어볼래?"

"아, 아니욥! 괜찮습니닷! 그럼 저는 이만 훈련하러 가 보겠습니다!"

더이상 놀림받기 전에 후다닥 자리를 떠나는 클레어.

맬리사의 푸른 눈은 그런 클레어의 뒷모습을 쫓는다.

"...클레어라."

희미하게나마 걸쳐져 있던 미소는 다시 평소처럼 싸늘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에 맞춰 푸른 두 눈동자 또한 깊게 가라앉아 있는 채였다.

그녀가 클레어를 유심히 살피는 이유는 하나.

"괴물이네."

어비스 게이트. 마경이라 부르기 시작한 그곳에서 클레어의 괴물 같은 재능을 보아 버린 까닭이다.

지나가듯이 해 주었던 가벼운 조언에 클레어가 무슨 일을 해내었던가.

스킬에 마음을 담으라고.

불에 네 감정을 실어 보라고 말했으나,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직후 클레어가 해낸 것은 분명....

"이거."

의념.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

의념의 기초 단계.

맬리사 본인조차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능력, 의념.

육체를 완벽히 다루고 마음을 온전히 다스릴 줄 알아야 하며 나아가 스스로의 혼을 들여다봄으로서 완성된다는 최강자의 기술.

물론 아직은 하잘것없는 것이지만, 중요한 건 클레어의 가공할 만한 성장 속도이지 않나.

이대로 쭉 성장한다면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맬리사 또한 클레어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이것은 어쩌면.

"클레어, 같이 가자."

"네, 넵?"

비탈리아누스가 바랐던 변화의 불씨.

그것의 시작.

153화 성장 (2)

지금껏 익힌 5서클의 마법은 블링크를 포함해서 총 6개.

그리하여 최초에 푸르넬이 추천해 준 것 중 아직 익히지 않은 마법서는 이제 4개만이 남았다.

[아이스 캐논]

[배리어]

[안티 매직 필드]

[거스트 오브 윈드]

사실 '파이어 월'이나 '프로즌 포그' 같은 속성 마법이 더 남아 있었지만, 문양을 더 새겨 넣는 것에 비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크지 않다 판단하여 걸러 낸 것이다.

그것 외에도 여신에게 직접 받은 고대 마법서 [용(龍) 소환술의 서]도 익혀야 하고, 새로운 신성 마법사의 집을 찾아 다른 종류의 신성 또한 연구해 봐야 한다.

할 게 많다는 말이다.

그러니 공략이 끝난 직후 가 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곧장 마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포탈에 손을 얹고 마법사의 탑 각각의 층별로 나뉘어진 목록을 훑어본다.

「목록」

「마법사의 탑 1층 - 시작의 로비」

「마법사의 탑 2층 - 견습 마법사 생활구역」

「마법사의 탑 3층 - 견습 마법사 생활구역(2)」

...

「마법사의 탑 89층 - 골렘 연구자 렐렌디스 아르페의 방」

「마법사의 탑 90층 - 정령 권위자 마서린 미센의 방」

...

「마법사의 탑 150층 - 마탑주 아벨라르 파블렌코의 방」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은, 여전히 의문 투성이인 마법사의 탑.

목록을 쭉 훑던 히오의 시선은 마지막 층의 이름에서 멈춘 채 고정된다.

「마법사의 탑 150층 - 마탑주 아벨라르 파블렌코의 방」

천 년 전, 마법을 상실하고 그 대가로 심연을 막아 내었던 그 시대의 마탑주. 당대에 가장 위대했던 마법사.

그는 바스테리온의 멸망 앞에서 도망친 것일까, 맞서 싸웠던 것일까.

전쟁은 도왔으나 왜 이주는 돕지 않았는가.

각고의 공간은 어찌 자신에게 아벨라르 파블렌코의 기억을 시련으로서 보여 준 것일까.

알 수 없는 것뿐이었으나, 이제 그것을 물어볼 수 있는 유일한 신마저도 잠들어 버렸다.

천 년 전, 혹은 그 이상의 인물이라고 해 봐야 용의 기사 레가르다와 심연 어딘가에 있을 크뢰츠발트 정도뿐.

그러니 결국 스스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포탈을 향해 5서클의 마력을 불어넣으면 길게 떠올랐던 목록이 사라지고는 새로운 창이 나타난다.

「확인된 마력은 5서클입니다.」

「갈 수 있는 지역은 총 25곳입니다.」

「마법사의 탑 101층 - 입문 마법사용 훈련장(임시)」

「마법사의 탑 102층 - 견습 마법사용 훈련장(임시)」

「마법사의 탑 103층 - 정식 마법사용 훈련장(임시)」

...

「베르덴 남부 지역 독립 거점(3) - 마법사의 집」

「베르덴 남부 지역 네크로맨서 지부(2) - 마법사의 집」

「이메니아 마법 대학(1) - 마법사의 집」

「히베루니아 수도(5) - 신성 마법사의 집」

「마법사의 탑 110층 - 네크로맨시 교육 실습의 방」

「마법사의 탑 111층 - 원소 마법사(화염) 교육 실습의 방」

「마법사의 탑 112층 - 원소 마법사(대지) 교육 실습의 방」

「마법사의 탑 113층 - 원소 마법사(바람) 교육 실습의 방」

...

「마법사의 탑 126층 - 크로노맨시 교육 실습의 방」

막 손을 움직여 이동하려는 히오에게 날아드는 희끄무레한 스펙터 한 마리.

푸르넬이었다.

- 바로 마법을 익히겠다고?

정신없이 히오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눈알을 키웠다 늘렸다 좌우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푸르넬.

- 인간의 정신에는 한계가 있네. 자네는 좀 쉬어야 해. 사신에게 무한한 마력을 받아 몇 시간이고 계속 마법을 사용했지 않은가.

히오는 손을 들어 그런 푸르넬을 살짝 밀어낸다.

"바빠."

- 어허.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결국 한계가 찾아올 게야. 몸은 멀쩡한데 정신이 막 피로하고 쉬고 싶지 않은가?

"전혀."

- ...젊은 게 좋구먼?

또 이상한 소리나 할 게 뻔했기에 대충 무시하고 선택하는 하나의 층.

그것은 특수학파의 마법이 있는 층.

「마법사의 탑 126층 - '크로노맨시 교육 실습의 방'으로 이동합니다.」

크로노맨시.

시간을 연구한 마법사들의 방이었다.

- 자네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응? 이게 다 자네 잘되라고 하는 피와 땀이 서린 조언....

아직 기본 마법 4개가 남았음에도 히오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라고 한다면 역시 목표치에 거의 도달한 인내력 때문.

특수 학파의 마법, 그러니까 시간을 다루는 크로노맨시나, 흑마법의 일종이라 평가 받는 혈마법. 혹은 이 아래에 있을 공간술사의 마법 등은 익히기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하다.

그런 주제에 다른 정통마법에 비해 위력이 뛰어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으니.

5서클에 오르고서야 조금 쓸만한 마법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주력으로 삼기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른 것이다.

하지만 히오에게는 한줌 불꽃도 푸른 태양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기적인 특성이 있지 않은가.

여태 인내력을 모아 진화한 최상위 스킬은 총 네 개.

뇌제(雷帝).

청염(靑炎).

천상(天上).

사신(死神).

밸런스는 썩 나쁘지 않은 편이다.

뇌제는 순간 벼락같은 힘을 낼 수 있게 하고 벼락 그 자체가 되어 그와 같은 속도로 이동하게 만들어 주는 힘.

청염은 히오의 의지를 읽고 움직이는 지극히 파괴적인 불.

천상은 물리적인 모든 공격을 막아 내고 어비스의 기운마저도 소멸시킬 수 있는 신성한 결계.

사신은 다수의 적을 상대로 무한한 힘을 안겨다 주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이 네 가지 최상위 스킬만 잘 활용해도 웬만한 상황에서 곤란을 겪을 리는 없을 테다.

하지만 앞으로 갈 길이 어디 웬만한 상황일까.

어떤 상황이, 어떤 강적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가능한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하필 또 특수 학파 마법인가? 이렇게 정신이 혹사당했을 때는 차라리 익숙한 원소 마법을 익히러 가세! 그러고 좀 쉬었다가 다시 와서 익히든지....

"그러기에는 다음 공략까지 시간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어."

- 그렇다면 다다음 공략 때까지 익히면 되지?

"그러다가 변수가 생기면?"

히오의 제법 퀭한 눈이 푸르넬을 향한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야."

자신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미래를 내다보고 조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움직이는 법 따위는 모른다.

그렇기에 실수했다.

실패했다.

레가르다의 바람대로 에리얼을 정화시키지도 못했고 51층의 공략 실패를 예상하지도 못했다.

피해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로 인한 참상을 목격했을 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혼자 얼마나 자책했던가.

"이제 실수하지도, 실패하지도 않을 거야."

못난 왕의 신념을 이어받겠다 다짐하지 않았던가.

세상에서 가장 못난 왕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왕에 어울렸던 자.

그 초라한 시체 앞에서 그의 신념을 이어 가겠다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보다도 주변인을 더 사랑했기에, 그들의 죽음에 진심으로 통탄했기에 다져진 신념. 자신이 죽을지언정 그들을 지키고자 했던 굳센 마음.

레오란트 왕이 그것에 실패한 이유는 단순한 것이다.

힘이 없었으니까.

어떤 변수에도 대항할 수 있는 힘.

멸망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그것들을 모조리 물리칠 수 있는 힘.

그것이 없었기에 결국 신념은 관철되지 못하고 그대로 심연에 침식당해 버린 것이었다.

- 너무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게. 자네도 말했지 않은가. 인간이라고. 인간인 이상 실수도 실패도 당연한 게야.

그러니 힘이 필요하다.

마지막 마법사의 꿈이

희망의 여신의 희망이.

못난 왕의 신념이.

그 무거운 것들이 전부 자신과 함께한다.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밀며 나아갈 길을 재촉한다.

"그럼 신이라도 되어야지."

더이상은 실수도, 실패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더 철저하고 혹독하게 채찍질하여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이 세계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망가져도 좋으니.

한없이 비굴한 모습으로 타인의 목숨을 구걸하던 못난 왕처럼.

"그러니까 푸르넬."

하지만 당장은 부족하다.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도와줘."

마법을 배운 것이라고 해 봐야 고작 일 년.

그사이에 5서클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는 했지만, 부족하고 부실하다.

지식에 공백이 많은 것이다.

- 허어.

히오의 진지한 말에 푸르넬은 유령체인 제 몸을 짐짓 부풀리더니.

- ...어쩔 수 없지. 제자가 부탁하는데.

바람 빠진 풍선마냥 흔들거리며 결국 히오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 내가 아니면 누가 자네를 이해하겠나.

푸르넬이 아니면 누가 히오를 이해하겠는가.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의 생각을 공유하며 그와 감정을 함께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헛소리 말고 빨리 가자. 할 게 많아."

- ...자네 혹시 내 입을 막으려고 분위기 잡은...?

휴식을 계속 권해 봐야 히오는 결국 듣지 않을 것임을.

* * *

무작정 모든 특수 학파의 마법을 익힐 수는 없다.

문양도, 시간도 많이 들어가는 작업인 만큼 신중하게 골라야만 한다.

특히나 인내력이 목표치에 거의 다다랐으니 이번에 익힐 마법의 이펙트가 곧 최상위 스킬로 진화하게 될 터.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보로 둔 것은 네 가지.

시간을 다루는 크로노맨시.

공간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공간술사의 마법.

그림자와 동화되어 위장과 암살에 특화된 그림자 마법.

피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루는 혈마법까지.

모두가 탐나는 마법이기는 하지만, 모두를 익힐 수는 없다.

시간적 여유는 둘째치더라도 문양의 공간이 부족했으니.

"혈마법은 버리자."

제법 매력적이었으나, 크게 필요치 않을 혈마법부터 제외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세 가지.

"이제부터가 문젠데...."

이 세 가지는 모두 각각의 매력이 있는 마법이다.

마법적 효과로 뒤따를 이펙트를 예상해 봤을 때도 분명 막대한 능력을 안겨다 줄 만한 것이다.

그렇기에 고르기가 더 어렵다.

히오가 원하는 것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전투시에는 '뇌제'를 이용해 벼락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애초에 그것을 위한 스킬이 아닌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공간, 그림자, 시간 이 세 가지 마법은 훌륭한 보조 수단이 되어줄 터였다.

그러니 고민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 셋 모두 마법만 놓고 봤을 때 그리 훌륭하다 말할 수는 없지만, 자네의 특성과 연계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전부 다 엄청난 건 틀림없네. 그러니 현실적으로 생각하자고.

"...현실적으로."

- 그렇네. 사실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지금 익히기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 말이야.

푸르넬의 말에 다시금 포탈 목록으로 향하는 시선.

이동할 수 있는 층 중 가장 높은 층인 크로노맨시의 층부터 시작해 아래로 내려오며 모든 특수 학파의 마법을 확인해 보았다.

그랬으니 푸르넬의 말처럼 히오도 정답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 현실적으로 보면 이게 맞아."

과감하게 선택하는 하나의 층.

그것은 공간을 자유로이 다루는 공간술사의 방.

「마법사의 탑 125층 - '공간술사 교육 실습의 방'으로 이동합니다.」

- 잘 생각했네. 나머지는 서클을 더 올리고 배우는 것이 맞을 게야.

현실적인 이유였다.

사실 보조 수단으로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시간을 다루는 크로노맨시였으나, 그것은 문양을 처음부터 다시 새기는 수준으로 새로운 문양이 많이 필요했다.

게다가 그쪽 관련해서는 푸르넬도 별다른 조언을 해 주지 못할 정도로 다른 세상의 학문.

반면에 공간술은 겹치는 문양이 꽤 많은 데다가 블링크를 익히며 어느 정도의 공부가 되어 있기에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익힐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히오가 마탑의 125층 공간술사의 방을 가로질러 간다.

탑의 내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넓은 층.

그곳에 놓인 수십 권의 마법서.

5서클에 오르기 전에는 차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고등급의 마법이다.

공간을 다룬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5서클이 고작 시작일 뿐인 그런 마법.

- 자네, 이거 하나만 약속하게.

마법서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데 푸르넬이 제법 진중한 표정으로 히오의 앞을 가로막았다.

- 공간 마법 다음은 무조건 네크로맨시여야 하네.

"왜?"

- 왜라니. 내 누차 말했지 않은가. 인간의 정신에는 한계가 있다고. 이번 공략처럼 자네 혼자 마법을 그리 사용했다가는 정신이 버티지 못할 게야.

"네크로맨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고?"

- 5서클부터는 그렇다네. 뭐, 보면 알게야. 그러니까 다음은 무조건 네크로맨시라네.

"알겠어."

그리 약속을 하고 다시 마법서로 시선을 돌린다.

앞에 놓여진 수십 권의 마법서 중에는 지금 배울 수 있는 것도, 엄두도 나지 않는 것도 있었으니.

[공간 이동 - 아공간 전송]

[공간 이동 - 포탈제작]

[공간 절단 - 소멸]

[공간 왜곡 - 분리]

[공간 압축]

[공간 팽창]

[공간 조작 - 거리]

[공간 조작 - 경로]

[공간 조작 - 크기]

[공간 조작 - 회전]

...

[공간 창조]

이 중 하나를 다섯 번째 최상위 스킬로 진화시켜야 할 것이었다.

154화 성장 (3)

[공간 이동 - 아공간 전송]

[공간 이동 - 포탈 제작]

[공간 절단 - 소멸]

[공간 왜곡 - 분리]

[공간 압축]

[공간 팽창]

[공간 조작 - 거리]

[공간 조작 - 경로]

[공간 조작 - 크기]

[공간 조작 - 회전]

...

[공간 창조]

기본이 되는 것은 예상외로 '공간 창조'였다.

모든 공간술의 시작은 공간 창조를 시작으로 이루어지는 것.

- 물론 하나의 세상을 창조한다는 대마도사의 공간 창조 같은 게 아니네. 기초 중의 기초. 사실 창조라기 보다는 아공간을 탐색하고 그것을 불러들이는 거라 할 수 있지.

푸르넬의 설명에 히오는 허리춤에 찬 작은 주머니를 들어올리며 묻는다.

"아공간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주머니 같은 거?"

베르가에게 받은 유품과도 같은 아티팩트.

포인트 상점에서도 상당히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야 하는 고급 아공간 주머니였지만, 푸르넬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아공간 주머니가 아닐세. 그러니 아공간도 아니지.

"아공간이 아니었어?"

- 공간의 확장과 경량화 등 갖가지 마법이 합쳐진 것일 뿐. 아공간 자체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란 말일세.

기존의 공간을 확장한 것뿐이지, 다른 공간을 활용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아공간 주머니가 사실 아공간이 아니었다니.

이건 소비자를 기만하는 과장 광고....

- 헛생각 말고, 준비나 하세. 자네도 짐작했다시피 공간술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야.

"...알지. 마도사에 올라야 간신히 시도할 수 있다는 아공간 제작이 시작일 뿐이라니 말 다했지 뭐."

- 특히 공간 조작 계열은 아직 시도할 수 없을 게야. 공간 창조 중에서도 상위 부분은 건들 수 없겠지. 나머지에 집중하게.

그 나머지만 하더라도 충분히 대단한 것들이다.

공간 압축, 팽창, 이동, 왜곡, 분리 등 그야말로 공간을 다루는 일이었으니.

"해보자고."

그렇게 히오가 의욕을 불태우려는 순간.

- 그런데... 자네.

푸르넬이 눈앞으로 불쑥 날아들었다.

- 뭔가 잊은 거 없나?

"잊은 거?"

푸르넬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히오가 이내 곧 손뼉을 치며 푸르넬을 바라본다.

어쩐지 뭔가 찝찝하더라니 잊고 있던 게 바로 떠오른 것이다.

"아이라이츠?"

- 그렇다네. 돌아오면 마법을 가르쳐 준다 해 놓고서는... 자네도 참 무심하구먼.

아이라이츠에게 마법 가르치기.

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 * *

호롱불 하나가 은은하게 빛나는 방 안.

"으흠흠."

아이라이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내 원래 특성이랑 스킬은 이 정도인데...."

더 성장하겠다 선언했지 않은가.

한다고 정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해낸다.

그게 아이라이츠였다.

"새로운 특성이랑 스킬을 유추하는 게 어렵단 말이야."

아이라이츠의 본래 특성과 스킬은 고스란이 지금의 육체에 전해졌다.

아무리 크뢰츠발트식 강령술이라고 한들 모든 능력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아이라이츠에게는 빙의자의 시스템이 있었으니.

그덕에 기존의 모든 특성과 스킬이 현재의 육체에 넘어올 수 있는 것이다.

문제라고 한다면 지금 육체에 있는 능력은 시스템 창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그렇기에 실제 이곳 주민들처럼 자신이 직접 알아내고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했다.

"아릴레이야에 있다는 그 엘프를 만나보면 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한데...."

히오에게 전해 듣기로 자신의 몸은 엘프. 그것도 이전 세대의 가장 고귀했던 엘프라고 한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릴레이야에는 현 시대의 가장 고귀한 엘프가 있다고 하니.

그를 만나 보면 대충 감이 잡힐 법도 하건만.

"너무 멀단 말이야."

멀어도 너무 멀다.

아이라이츠의 능력 중에는 이동과 관련된 것이 없기에 그저 뛰어서,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다.

뭐, 애초에 히오와 동행하지 않는 이상 서쪽 바다의 지배자가 항로를 열어 줄 리도 없고 말이지.

"그러니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마법."

히오에게 배우기로 한 마법.

그것만 있으면 그와 같이 마법사의 탑이라는 곳으로 이동해 대륙 곳곳을 누빌 수 있으리라.

지금처럼 떨어져 있을 필요도 없고 이제는 정말 매일을 함께하는 것이다.

"헤헤헤."

아이라이츠의 머릿속에서는 행복한 미래가 밝게 그려진다.

대륙을 누비며 맛있는 것도 먹고 그 지역의 맛집도 방문하며 이게 맛있니 저게 맛있니 토론도 벌이다가 밤이 되면 함께 잠드는 그런 완벽한 일상.

마법을 깊이 있게 배울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딱 고리 하나. 기초만 만들어 놓아도 마법사의 탑에 히오와 함께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니.

"재밌겠다."

마법을 배우는 과정도 분명 재밌으리라.

히오와 함께하는 것이지 않은가.

모르는 걸 물어보며 바짝 다가갔다가 급작스러운 마력 이상 현상으로 극심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비틀거리는 자신을 히오가 받아 주며 자연스레 함께 방으로 이동하는 그런....

"헷!"

붉게 상기된 뺨을 감싸고 고개를 가로저은 아이라이츠가 결국 펜을 내려놓고 책상 위로 턱을 괸다.

"언제 오려나, 히오."

이번에야 말로 꽤 긴 시간을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거의 혼자 지내고 있지 않나.

히오는 마법사의 탑에서만 생활하고 이따금씩 밥 같이 먹는 게 전부이니 마법 배우는 것을 기회로 다음 공략 때까지는 쭉 붙어 있을 수 있으리라.

아이라이츠가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쿵쿵-

저 아래쪽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려온다.

이 시간에 갑자기 지하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이라면 하나뿐.

"히오!"

히오가 돌아온 것이다.

아이라이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방을 나선다.

고작 해봐야 지상으로 2층, 지하로 4층 정도인 좁은 집.

히오와 마주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 아이라이츠 안 자고 있었네. 잘됐다."

"자, 잘됐다니. 그럼 히오도 역시...?"

"이거 받을래?"

인사보다도 먼저 불쑥 건네주는 물건을 얼떨결에 받은 아이라이츠.

"이건...?"

손에 들린 것은 책이었다.

정확하게는 [너도 할 수 있다! 마법의 첫 걸음!]이라는 책.

"이게 제목은 좀 이상해도 테트라디아 공식 기초 교육 마법서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우선 그거 읽어 보면서 차근차근 연습해 봐."

"응? 아니 그래도 히오가 직접 알려 주면...."

"그러고 싶은데 할 게 너무 많아서. 그럼 다시 가 볼게!"

뭐가 그리 급한지 그런 말만 남기고 바로 돌아서는 히오.

"아니 그...."

아이라이츠가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딱히 붙잡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히오가 할 일은 많고 자신이 하는 짓은 히오의 일을 방해하는 것일 뿐이지 않나.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이야 있다.

당장에 불쌍한 척, 외로운 척 붙잡으면 그는 마지못해 집에 남을 테니까.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자신을 위해 줄 것이 분명했으니까.

허나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음? 왜? 뭐가 잘 안 될 것 같아?"

그러니 아이라이츠는 뻗었던 손을 내리고 밝게 미소 짓는다.

"아니. 괜찮아. 혼자할 수 있어."

"정말 괜찮지?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거야."

"응. 진짜 모르겠으면 그때 물어볼게. 신경 쓰지 마."

자신이 그의 앞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아이라이츠 자신의 행복보다 우선해서 놓이는 바램.

요약하자면 사랑이었으니.

"알겠어. 그럼 진짜 가 볼게."

"응. 몸 조심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

그래서 그냥 그렇게 보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바라는 것이 한가득 있었음에도 그는 자신보다 우선할 게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뭐, 늘 있는 일상이긴 했지만.

"마법만 익히면 꼭 함께하자."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조금 아렸다.

* * *

53층, 무한의 층을 공략한 이후로 한 달이 지나간다.

그렇지 않은 적이 없지만, 특히나 이번 한 달은 성장이 두드러진 한 달이었다.

클레어는 클레어대로, 아이라이츠는 또 그녀 대로.

로열 나이츠와 안티푸스, 시르베르트와 다프네 등 모두가 각자 어비스의 공간에서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히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한 왕국의 멸망을 보았다.

마지막 왕의 처절한 발악을 보았다.

그리하여 느낀 것이라고는 역시나 강해져야겠다는 것.

그런 생각으로 온전히 쏟아부은 한 달이었으니.

성과 또한 제법 대단한 것이다.

「공간 마법 - '창조 - 생성'의 발현에 성공하였습니다.」

「공간 마법 - '왜곡 - 분리'의 발현에 성공하였습니다.」

「공간 마법 - '절단 - 소멸'의 발현에 성공하였습니다.」

「공간 마법 - '이동 - 전송'의 발현에 성공하였습니다.」

공간술은 기존의 마법과는 그 체계가 사뭇 달랐다.

특수 학파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공간 마법 - '압축'의 발현에 성공하였습니다.」

「공간 마법 - '팽창'의 발현에 성공하였습니다.」

한 달 사이에 공간 마법을 무려 여섯 개나 성공한 것이다.

공간술의 시작이라 불리는 '창조'를 시작으로 창조한 공간을 왜곡시키는 분리.

절단과 소멸, 이동과 전송, 압축과 팽창까지.

말 그대로 하나의 공간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마법을 익힌 것이다.

어찌 짧은 시간에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던 공간술을 여섯 가지나 익혔느냐 하면은.

- 신기하군. 이건 마치 스킬의 방식과 유사하지 않나.

공간술의 체계. 그것이 스킬의 진화 방식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마법이라 함은 1서클이 다르고 2서클이 다르다. 3서클, 4서클 올라갈수록 같은 속성이라 하여도 펼치는 마법은 완전히 별개의 마법이라 할 수 있다.

허나 공간술은 그게 아니었다.

1서클이든, 2서클이든 '공간 창조 - 생성'에 성공했다면 같은 공간, 같은 마법인 것이다.

그것은 5서클로 펼친 공간 창조라 하여도 같은 공간.

단지 크기와 범위, 그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영향력 정도가 다를 뿐이다.

마치 하위 스킬을 중위, 상위로 진화시키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으니.

생각보다 시작은 크게 복잡하지 않았고 거기서 영향력을 넓히며 힘을 키우는 과정이 어려웠지, 시작 자체는 제법 쉬웠다.

그렇기에 한 달 사이에 공간술을 여섯 가지나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네."

여섯 가지의 공간술을 익혔지만, 스킬로서 비교해보자면 이건 기초 중의 기초 스킬.

"이걸 어디다 써먹으라고...."

히오가 공간 마법으로서 만들어 낸 아공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뭐랄까... 무척이나 작고 소중한? 그런 아공간.

대충 비교해 보자면 히오의 주먹만 한... 아니 그것보다도 조금 더 작아 보인다.

저 공간만큼은 히오가 지배하는 절대적인 공간.

그곳을 압축하고 팽창하며 절단, 소멸, 왜곡, 분리, 이동, 전송 등등 갖가지 짓거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작고 귀여운 공간 속을 말이다.

이것이 고작 한 달 사이에 여섯 가지의 공간술을 익힐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기습도 안 돼. 물체가 있는 곳을 아공간으로 뒤덮을 수도 없어... 대체 옛날 공간술사라는 놈들은 어떻게 살았던 거지?"

아공간을 적의 머리통에 생성에 적을 무찌른다... 와 같은 헛소리는 아공간이 생성되는 속도를 보면 쏙 들어갈 것이다.

한마디로 이 작은 공간은 그저 관상용.

예쁘고 신기한 쓰레기? 뭐 그런 것이다.

- 어허. 모르는 소리 말게. 테트라디아의 포탈, 대륙 전역에 설치되어 있는 포탈 전부가 공간술사의 손을 거친 것이니. 나의 대에는 없었지만, 대마도사에 오른 공간술사는 대책이 세워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었다네.

생각해보면 그럴 것 같긴 하다.

이 작은 공간이 일대를 장악할 정도로 커진다면?

그 공간을 직접 다스리는 마법사를 대체 어찌 상대할 것인가.

공간을 베어 버리는 게 아닌 이상에야 무적이나 다름없는 것이 공간술의 대마도사였다.

"...아주 먼 이야기네."

물론 히오의 눈앞에는 작게 꼬물거리는 귀여운 아공간 하나가 있을 뿐이지만.

- 그래도 덕분에 공부는 확실히 되었지 않나. 좋게 생각하게.

"그건 확실히 나쁘지 않아."

공간 마법에 대한 공부.

그것 만큼은 지독하리만치 했으니.

덕분에 큰 수확이 있었다.

"리퓨에 신에게 받은 용 소환술의 서. 감을 잡았단 말이야."

마탑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대의 마법서 용 소환술의 서.

날 잡고 제대로 연구해 보려 했는데 뜻하지 않게 공간술을 익히다가 겹치는 다수의 문양을 발견했다.

소환술과 공간술은 제법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진짜 중요한 건 이제 시작이다.

- 공간술의 위력이 아쉽긴 해도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애초에 우리의 목표는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야.

"그것도 맞아. 중요한 건 결국 이펙트. 이게 어떻게 나오느냐가 제일 중요한 거지."

공간술을 익히기로 한 것은 히든 특성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스킬의 이펙트.

여섯 가지 공간술을 익혔다.

그러면 이제 모든 스킬의 이펙트를 확인해 볼 차례였다.

"그럼 어디 한번...."

생성된 아공간을 취소하고, 다시금 발동하는 것은 스킬.

스킬창에 등록된 새로운 스킬을 발동하자.

「스킬 - '공간 창조 - 생성'이 발동됩니다.」

히오는 물론, 푸르넬의 입까지 떡 벌어지고야 말았다.

155화 성장 (4)

아릴레이야 섬 서쪽 외곽.

오직 한 존재를 위해 넓게 만들어진 공터.

그곳에는 용 하나와 기사 한 명이 열띤 수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타올라라.』

물론 수련하는 것은 용, 프레이야였고 이를 지켜보는 것은 용의 기사 레가르다 오비에르.

프레이야는 본체의 모습으로 용언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타, 타올라라아아아...?』

화륵-

용으로서 내뱉는 언어는 그 자체로도 마력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어 체내의 마력이 자연스레 반응하고 그 의지대로 마법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용언의 위대함.

허나.

"좀 더. 말에 실린 힘이 약하다. 프레이야."

프레이야의 의지대로 불꽃이 되어 나오기는 했으나, 약하다.

아직까지 의념이 성장하지 않은 탓이었다.

본래라면 동족의 용언을 보고, 막대한 마력의 흐름과 그 결과물을 보고 자연스레 익히는 것인데 프레이야가 본 것이라고는 조잡한 스킬로 인한 불꽃 정도.

그러니 프레이야의 용언도 그 정도밖에 펼쳐지지 않는 것이다.

『으으... 어려워요.』

본격적으로 용언을 익히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용의 육체에 적응하고 마력다루는 법을 배우기 바빴으니.

말하자면 이제 막 적응 기간이 끝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레가르다의 눈에는 안타까움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차라리 자신이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였다면.

이럴 때에는 자신이 익힌 창술 따위 하등 쓸모가 없었으니... 차라리 마법사였다면 프레이야에게 좀 더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알려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히베루니아의 수도에서 있었던 전투를 떠올려 보거라."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것뿐이다.

일부러 떠올리지 않고 있던 그날.

에리얼을 보내야만 했던 그날의 기억을 읊어 주는 것 정도.

"멀리 있어서 잘 보지 못했겠지만, 그럼에도 푸르게 떠오르던 불꽃을 떠올리거라. 그것은 충분히 용의 불꽃과도 비견될 만한 것이었으니."

마법사가 보여 주었던, 하늘을 뒤덮는 푸른 불꽃.

물론 진정한 용이 내뿜는 불에 비한다면 부족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푸른 불꽃의 바다에 마법사의 의지는 담겼으나, 의념은 실리지 않았기에.

그것마저 실려 있다면 모를까, 겉만 뜨겁게 타올라서는 결코 용에 닿을 수 없음이라.

반대로 말하면 의념만 실린다면 세상 무엇보다 무서운 힘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마법사님의 불꽃이라면....』

프레이야 역시 그날 보았던 하늘 위의 전투를 떠올린다.

비록 아이라이츠의 등에 업힌 채 저 멀리서 지켜본 게 전부였지만.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천상의 빛과 함께 에리얼이 추락하고 있었지만, 멀리서 보았기에 외려 그 불꽃의 거대한 힘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

『해볼게요!』

비로소 심상이 잡혀가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는 하늘을 뒤덮고 사방에서 용을 향해 내리꽃히던 그날의 불꽃이 그려지고 프레이야의 의지는 곧 그것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언어로 내뱉어지는 힘.

『뒤덮어라.』

마력이 맹렬히 요동치고 용의 의지에 따라 형상을 이루어 간다.

『...와아!』

이는 곧 그날의 푸른 태양이 되어 하늘을 가득 뒤덮는 것이다.

그만한 일을 고작 몇 번의 시도만에 해냈으면서 하는 말이라고는 조그마한 감탄사가 전부.

『예쁘다!』

그것이 용이었다.

반신이라 불리우는 지고한 생명체.

몸에 품은 무한에 가까운 마력. 세상 무엇보다 단단한 비늘. 현묘한 지능과 마법을 숨쉬듯 발현할 수 있는 정신력.

거기다 프레이야는 바람을 관장하는 녹색 용이지 않나.

화염은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이 정도라는 말이었다.

"잘했다."

그러니 무뚝뚝한 레가르다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해 주었다.

『헤헤. 그럼 이제 용언도 익힌 건가요?』

"멀어도 한참은 멀었다. 마법사의 집에 있는 모든 용언을 익히고 에리얼 고유의 용언 마법도 익혀야 하니까."

『네에....』

바람 용이면서도 아직 바람을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고 있지 않나.

갈 길이 아직 한참 먼 것이다.

수련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보통의 상식 선에서 생각할 수 없는 시간 개념을 가진 레가르다와 프레이야였기에 가능한 일.

그렇게 이어지는 훈련과 가르침 속에서 프레이야는 종종 레가르다에게 묻곤 했다.

『괴이와의 전쟁은 어땠어요?』

기억하는 이 하나 없는 천 년 전의 전쟁.

비록 아릴레이야에는 관련 역사가 남아 있지만, 그조차도 정확하지는 않다.

순전히 레가르다의 기억을 토대로 작성된 것인 까닭이다.

나머지 기록은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심연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레가르다는 프레이야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 주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늘 최선을 다해 프레이야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용들은 원래 어땠어요?』

『옛날의 마법사들은 어땠어요?』

허나 아직 어린 용, 프레이야는 궁금한 것이 넘쳐흐른다.

다른 용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던 습성을 지녔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마법이 융성하던 삶은 어떠했고 어떤 종류의 마법사가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먼 과거의 이야기까지 나오곤 하는 것이다.

"옛 마법사 중에는 용을 몹시도 사랑한 마법사도 있었다고 하지."

레가르다 역시 에리얼을 통해 전해 들은 것이 전부인 아득히 먼 옛날의 이야기.

『우와! 멋있어요!』

"...그래. 아무튼, 용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와 평생 함께하기 위한 마법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마법이요?』

"혼과 혼이 이어지는 계약과도 비슷하다고 하지. 원한다면 언제든지 용을 부를 수 있고 그 전능한 힘을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만드는 마법."

고대에는 그런 마법이 있었다고 한다.

용이 확실히 존재하고 마법이 고도로 발달했던 시기였으니 크게 이상할 것도 없으리라.

"하지만 결국 그 마법은 용이 직접 나서서 완전히 소멸시켰다."

『에에?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좋은 마법이잖아요?』

"용과 인간이 함께할 수 있으리라 보느냐. 인간은 욕망을 원천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언제든 부릴 수 있는 막대한 용의 힘. 그것을 하찮은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인간. 말 그대로 재앙이었지."

『힉! 너무해!』

지엄한 용의 얼굴로 울상이나 짓고 있는 프레이야.

그 모습에 레가르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니 프레이야. 누가 계약하자거나 따라오라고 해서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

『음... 아는 사람이라도요?』

"그래. 네 힘이 지닌 막대한 영향력을 항상 생각해라."

『네엡!』

"용을 부리는 그 재앙과도 같은 마법은 모든 용이 나서서 완전히 소멸시켰다고 하니 볼 일은 없겠지만, 조심하라는 말이다."

『그 마법의 이름이 뭐였는데요?』

프레이야의 질문에 레가르다가 잠시 오랜 기억을 더듬는다.

반신의 용을 마음대로 부르고 또 부릴 수 있는, 어쩌면 가장 끔찍한 마법 중에 하나.

그 이름은 분명....

"용 소환술의 서."

그런 이름이었다.

* * *

공간술의 모든 스킬 이펙트를 확인한 다음, 125층 공간술사의 방을 곧장 빠져나왔다.

가능하면 공간술도 깊이 있게 익히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효율이 좋지 않다.

이것은 다섯 번째 최상위 스킬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효과를 줄 것임은 이펙트로 확인했으니 이제 다른 일을 해야 할 차례이다.

그리고 다른 일이라고 한다면 역시.

- 네크로맨시! 바로 가세나!

명색이 네크로맨서의 제자가 아닌가.

지금의 히오는 어느 학파의 마법사라고 콕 집어 말하기가 상당히 애매하다.

기초부터 모든 문양을 새기며 익힌 마법은 네크로맨시가 유일한데 정작 그것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 자네의 그 낑낑인지 끙끙인지 그것과 가장 잘 들어맞는 건 역시 네크로맨시라네. 진작 이것부터 가르쳤으면 그렇게 정신이 혹사당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뭐야, 그 애매한 말은?"

- ...가 보면 알 게야.

곧장 포탈을 타고 네크로맨시 교육의 층으로 이동했다.

다른 층과는 달리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음산한 층.

- 4서클까지의 네크로맨시는 소환 위주였지.

그런 음산한 교육장의 복도를 거닐며 푸르넬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 서먼 라바, 서먼 팬텀 스티드, 서먼 고스트 등 본 스피어 같은 공격 마법을 제외하면 대개 유령을 소환해 싸우는 게 4서클까지의 네크로맨서란 말일세. 또 자네는 모르겠지만, 시체와 죽음의 기운을 수집해 언데드를 직접 만드는 방법도 있었지.

"그럼 5서클부터는 다르다는 말이야?"

- 그렇다네. 이제부터 비로소 일인 군단, 전장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법사, 네크로맨서라 불릴 만한 것이지.

"오호...."

확실히 이전까지의 네크로맨시를 잘 쓰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속성 마법에 비해 파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소환하는 유령이나 라바 같은 것들이 크게 유능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팬텀 스티드는 히오에게 영체라는 특성이 있어서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

나머지는 여러가지 면에서 하자가 있었다.

- 게다가 자네는 크뢰츠발트의 삼신기까지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랜턴과 망토. 거기에 낑낑인지 끙끙인지 그것까지 합쳐진다면....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도는지 입맛을 쩝 다시는 푸르넬.

- 그야말로 크뢰츠발트의 재림이겠어.

"지금 크뢰츠발트의 아티팩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네 말대로라면 이제 이것도 확실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말이겠네."

망토, 지팡이, 랜턴까지 해서 푸르넬이 부르기를 크뢰츠발트의 삼신기.

히오는 지금 이 훌륭한 아티팩트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이것들의 능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크뢰츠발트의 존엄한 망토 (에픽)」

「아홉 밤을 거쳐 홀로 왕국을 무너트린 위대한 네크로맨서 크뢰츠발트를 위해 제작된 망토. 죽음과 관련된 힘에 특화되어 있다.」

「착용 시 언데드 제작에 필요한 사기의 총량이 대폭 감소합니다.」

「데스 오라 : 소환된 모든 언데드의 스탯 강화 +30%」

「병사의 품격 : 소환된 모든 언데드는 방어막을 지닌 채 소환됩니다. 방어막의 강도는 소환자가 사용한 마력량에 비례해 강력해집니다.」

「영혼 수확자의 랜턴 (에픽)」

「인외의 물건」

「영혼 흡수 : 영혼을 흡수하여 능력치를 영구히 올릴 수 있습니다. 혼의 격에 따라 상승폭이 달라집니다.」

「영혼 보관 : 손상없이 혼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랜턴에 오랜시간 보관되어 있던 영혼은 사용자가 조종할 수 있습니다.」

「영혼 회복 : 보관된 영혼을 소모하여 영력을 회복하거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영혼 추출 : 혼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을 추출하여 어둠 속성 마력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흑마법의 근원인 기운입니다.」

보다시피 언데드를 소환하거나 영혼을 흡수하거나 하는 능력이기 때문.

- 따지고 보면 어비스의 몬스터들 또한 전부 영혼이 있는 상태이지. 자네는 무한의 층에서 랜턴을 활용했어야 했어.

"...그렇네. 심연에 물들었을 뿐, 영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어비스의 몬스터들은 사실 본래 이 세상 어딘가에 있었을 생명체.

당연히 혼이 있고 그것은 심연에 침잠했다 뿐이지 영혼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으니... 영혼 수확자의 랜턴을 통해 영혼 흡수를 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한데도 그러지 못한 이유라면 마법을 계속 쏟아 내느라 정신이 없었기도 했고 또 아예 영혼 흡수라는 것을 배제하고 있었던 탓이다.

"영혼을 흡수하면... 그 본래의 영혼은 어찌되는 걸까."

이곳에서 어비스 몬스터 취급을 받지만, 저주 받은 것들이라 욕먹으며 손가락질 받지만, 저들에게 아무런 죄가 없었음을 히오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태에서 영혼마저 흡수해 버린다면 가엾은 혼은 어찌되는 것일까.

그에 대한 푸르넬의 대답은 제법 냉혹했다.

- 뻔하지 않나. 소멸되겠지. 그러니 마음 독하게 먹게. 자네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해.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야.

사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옳은 말이었다.

이미 심연에 물든 영혼을 구제할 방법따위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가엾다고 한들, 불쌍한 혼이라고 한들 그것을 다시 돌려놓을 방법은 없다.

있었다면 진작에 모두 돌려놓았을 터.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터였으니까.

- 그 어떤 변수도 힘으로 뚫고 나갈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알고 있지 않나. 다음에는 망설이지 말고 혼을 전부 흡수하게.

"...알겠어."

랜턴의 효과로 영혼 흡수를 하면 영구적인 능력치가 상승한다.

그 상승폭이 얼마나 되는지는 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분명 유의미할 정도로 오를 테니.

"랜턴은 그렇다치고 망토는? 망토의 효과는 기본적으로 언데드를 소환해야 발동되는 거잖아."

망토의 효과는 언데드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사기를 낮추고 그것들을 강화하는 능력.

그러기 위해서는 전장의 죽음을 즉석에서 다시 되돌리는 그런 힘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 물음에 푸르넬은 씨익 미소 지으며 답한다.

- 그걸 이제부터 해야지. 자네는 이제 네크로맨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제대로 배우게 될 걸세.

* * *

네크로맨서의 생활 방식은 독특하다.

아니, 독특함을 넘어서 반쯤 미쳐 있다고 보면 된다.

어딜가든 두 눈 벌겋게 뜨고 시체, 시체 어디 있나만 살피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다툼이 넘쳐 나는 시대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시대에 네크로맨서는 불길함의 상징.

네크로맨서가 등장하는 곳이라면 당연하게도 시체가 뒤따르는 곳이니 그리 여기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테다.

- 하지만 자네는 아주 곱게 자란 네크로맨서지. 시체라고는 첫 입문 때나 깔짝 다루어 본 게 전부이지 않나.

"아니 뭐,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

- 말대꾸! 말대꾸!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딜 감히!

"...그래. 계속해 봐."

오랜만의 주도권에 신난 푸르넬이 있지도 않은 턱을 쓰다듬으며 근엄하게 말을 이어간다.

- 아무튼, 아무리 자네라 해도 언제까지 뼈의 창이나 날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본격적인 언데드 제작에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스켈레톤 같은 거?"

- 에헤잇! 어딜 그런 저급 언데드를. 자네 수준이면 듀라한이나 데스 나이트까지 노려볼 만하지. 문제는 시체란 말이야. 그만한 시체를 어디서 구하느냐하면 딱 떠오르는 게 없는가?

고위 언데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육신.

그런 시체를 얻을 수 있는 장소.

"설마... 어비스 몬스터?"

히오의 대답에 푸르넬은 몸을 크게 부풀리며 기뻐한다.

- 정답일세!

"그게 가능해?"

- 가능하지 못할 건 무에 있는가? 그것도 결국 죽음이란 게 있고 죽으면 아무리 심연에 물들었다 해도 혼은 빠져나가지. 그럼 그 혼은 영혼 흡수로 자네의 능력치를 올리고 덩그러니 남겨진 육신은 잘 가져다가 고위 언데드로 만드는 걸세. 한마디로 버릴 것 하나 없는 아주 귀중한 자원이다 이말이야.

"...미쳤군."

미쳤다.

아무리 그래도 생전에 무고한 존재였을진데 혼을 흡수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육신까지 이용해 먹겠다니.

물론 마음 단단히 먹겠다 다짐하긴 했지만, 푸르넬은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뼛속까지 진성 네크로맨서인 것이다.

복잡미묘한 히오의 표정을 읽었는지 푸르넬이 눈앞으로 날아든다.

- 왜, 못 하겠나?

큰 눈알을 바짝 들이밀며 묻는 푸르넬의 질문에 잠시 눈을 감는 히오.

그리고 그 눈이 다시금 뜨였을 때는 더이상 망설임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지겠다 다짐했으니."

그에 푸르넬은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웃기 시작한다.

-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입꼬리를 머리끝까지 말아올리면서 말이다.

156화 성장 (5)

데스 나이트와 같은 고위 언데드는 마법으로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죽은 육체에 각종 마법진을 새기고 죽음의 기운을 때려 부어 만들어 내는 것.

그렇기에 지식이 있고 죽음의 기운을 다룰 줄 안다면 낮은 서클의 마법사도 이론상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 낼 수 있긴 하다.

그것을 일으키고 다루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 그러니 만들어 내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게야. 무엇보다 스승인 나, 푸르넬 펜체프가 있지 않은가. 복많은 자네는 아무런 걱정없이 맛있는... 아니 훌륭한 시체만 구해다 주면 된다네.

네크로맨시 교육이 시작되니 신날 대로 신난 푸르넬.

하지만 푸르넬의 말만 듣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정말 어비스 몬스터의 육체로 언데드 제작이 가능할까? 뒤틀릴 대로 뒤틀렸는데?"

- 오히려 좋지! 그만큼 기존의 언데드 보다 더 강한 언데드가 탄생할 게 아닌가!

"...그래?"

역시 푸르넬의 사고방식은 지독히 네크로맨서적이다.

"그럼 그건 그렇다치고, 혼은? 고위 언데드를 만드려면 그에 걸맞은 영혼도 구해야 할 거 아니야."

- 아 그거 말인데....

여태 신 나서 떠벌리더니 영혼에 관한 문제점을 이야기하자 급격하게 차분해지는 푸르넬.

- 제국 측 기사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겠나? 그럼 그 혼을 잘 수습해다가....

역시 그러면 그렇지.

"미친 네크로맨서 같으니라고."

아무리 강해짐에 뜻을 두었다 한들 이건 아니지 않나.

"안 해."

- 아니, 내 말을 잘 들어보게나. 억지로 취한다는 게 아닐세. 그건 더 어려울 뿐더러 오히려 미련 남은 영혼을 잘 설득해서 한을 풀 수 있게 하는 그런 긍정적인....

* * *

일단은 푸르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뭐, 억지로 영혼을 잡아넣는다는 게 아니라 지난번 테오르도처럼 강한 미련이 남았을 때만 하면 되지 않겠냐는 말에 설득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찝찝한 것은 사실이다.

제국의 기사들.

히오의 이름을 외치며 기뻐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런 영혼을 죽은 육체에, 그것도 심연의 기운으로 뒤틀린 육체에 집어넣어 언데드로 만든다니.

언제나 히오를 위하는 푸르넬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듣지도 않았을 그런 말이었다.

- 아직 자네가 언데드 군단을 가져 보지 않아서 그런 걸세. 본능적인 거부감이 남아 있는 게지. 사실 황제의 데스 나이트, 테오르도만 봐도 알지 않나. 언데드라는 것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게 아니야. 본인이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게 자네가 주인으로서 잘하면 되는 일일세.

"그래. 그건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넘어가고, 그래서 나는 뭘 배우면 돼?"

- 으흐흐흐. 좋은 질문이야.

음산하게 히죽 웃는 푸르넬.

5서클의 네크로맨시.

푸르넬의 말을 빌리자면 본격적인 일인 군단, 전장의 재앙으로서 자리할 수 있는 단계라고 한다.

그러니 고위 네크로맨서로서 배우게 될 첫 번째 네크로맨시는.

- 보관 마법이라네.

"...응?"

- 뭐, 언데드는 조상님이 들어 주시나?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보관 마법이었다.

제작한 언데드를 보관할 수 있는 그런 마법.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뭐랄까. 좀 짜치네."

무게란 무게는 다 잡아 놓고 보관마법이라니.

김이 샐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푸르넬은 그게 아니라는 듯 머리를 좌우로 까딱인다.

손가락을 멋있게 까딱이고 싶은 모양인데 손가락이 없어서 머리를 흔드는 것이다.

- 모르는 소리. '언데드 창고'야말로 고위 네크로맨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라네. 지배하에 있는 언데드를 한순간에 넣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는 그런 마법.

"아공간이랑 비슷한 원리야?"

- 그거랑은 다르네. 아공간은 공간술로서 공간 창조의 영역에 해당했지 않나. 이건 말 그대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언데드 창고를 빌려오는 개념이라네.

"빌려 온다면... 어디서? 지옥?"

- 말해 뭐하겠나. 네크로폴리스지.

듣고 보니 꽤 활용도가 높은 마법일 듯 했다.

혼자 다니다가도 불쑥 대규모 군단을 꺼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지배할 수 있는 언데드가 군단급으로 많다면 혼자 적진에 침입해 한순간에 대규모 전쟁터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으리라.

- 그것 외에도 전장에서 즉시 언데드를 양산해 내는 데스 필드 같은 마법도 있긴 하네만, 이건 지금 자네 수준에서는 크게 쓸모 있지는 않을 테니 서클을 더 올리고 다른 마법을 익히는 게 나을 게야.

"그럼 지금 배울 건 언데드 창고랑 고위 언데드 제작법 정도라는 거네."

- 그렇지. 다음 공략에서 쓸 만한 시체를 마구마구 가져와 보세나. 흐흐흐. 분명 엄청난 언데드 군단을 만들 수 있을 게야.

"...그래. 뭐, 해보자."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공간술은 생각보다 빠르게 익혔고 비록 공간술사로서 위력은 보잘 것 없겠으나, 중요한 것은 스킬의 이펙트.

그것을 얻었으니 이제 5서클의 네크로맨시를 익히고 남은 마법들도 모두 익힌 다음 '용 소환술의 서'라든지 다른 신성 마법을 찾아본다든지 하면 될 테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다보면 분명 올 것이다.

- 우선 문양부터 새기지.

그 어떤 변수에도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날이.

* * *

어비스 53층을 공략한 지도 두 달이 가까워져 가는 어느 날.

또다시 전대륙에 검은색의 게이트가 나타났다.

다시 찾아온 공략의 때.

이제는 대륙 주민들도 제법 익숙해진 그것.

마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어비스 게이트의 54층이 열린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선발대가 투입되었고 게이트 부근은 발 빠르게 움직인 병력들로 완전히 통제되었다.

그 소식은 당연히 제국 수도에도 퍼졌지만, 기사들의 동요는 미미했다.

지독하리만치 힘들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마경 내에서의 전투.

허나 연이어 승전보를 울렸지 않은가.

그 결과로 본인들의 실력 또한 진일보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감도 제법 붙은 것이다.

오만, 방심과는 거리가 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은 로열나이츠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열기가 다른 기사단에 비해 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 제국 최강의 기사단으로 이름 높은 로열 나이츠지만, 강해지고자 하는 열정은 더욱 뜨거웠다.

여러가지 이유가 맞물린 탓이리라.

그중 하나라고 한다면 역시.

"후욱...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리고 있는 클레어.

그리고 그런 클레어의 옆으로 여유롭게 다가서는 맬리사.

"힘들어? 그만하고 싶어?"

"아닙니다!"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훈련에 쏟아붓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자극받은 것이 이유일 테다.

"괜찮아. 힘들면 쉬어도 돼. 편하게 뒤에서 화염이나 펑펑 쏴 대면 되는데 뭐하러 힘들게 체력을 길러? 그렇지 않아?"

"...아, 아닙니다!"

맬리사는 유독 클레어를 잘 챙겨 주었다.

거친 남정네들 사이에서 맬리사 다음으로 들어온 여성 단원이지 않나.

가뜩이나 인원도 얼마 없는데 워낙 무뚝뚝하고 조용한 녀석들만 모인 기사단이 아니던가.

말이 많아도 너무 많은 데이먼조차 안티푸스에게 처참히 패배한 이후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클레어와 맬리사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닐 텐데? 힘들지? 목 마르지? 쉬고 싶지? 그대로 멈추고 드러누우면 편하단다?"

"아닙... 허억... 아닙니다...!"

물론 맬리사가 잘 챙겨 준다는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르긴 했으나, 뭐 어찌됐건 가깝게 지내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더 할 수 있습니다앗!"

두 사람은 그렇게 계속 단련을 이어 간다.

"결국 모든 것의 기초는 체력이야. 아무리 마력이 높고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이 약하면 소용이 없으니까."

"넵!"

원거리 스킬 사용자라고 해서 먼 옛날의 마법사와 같은 취급을 받는 건 아니다.

그들이 마법사처럼 방에 틀어박혀 연구와 공부만 일삼는 것도 아니고 마법사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스킬 사용자들 또한 기사와 같은 강도의 훈련을 받고 단련을 이어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 너의 화염은 특히 실전에서 성장하는 경향이 강해. 그러니 지금은 다른 생각말고 체력 늘리는 데 집중하란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닷!"

그냥 달리는 것도 아니다.

온몸에 모래 주머니 따위를 매달고 맬리사의 속도에 맞춰 벌써 몇 시간째 달리기만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스킬 사용자라 함은 본능적으로 마력을 다루고 그것을 활용하는 자이니 육체가 일반인에 비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기사처럼 오러를 다루는 것도 아니었으니 클레어에게는 말도 못 할 정도로 힘든 훈련임은 분명했다.

"후욱...."

그럼에도 클레어는 불만 한 번 내비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너무도 아득하긴 하지만, 목표가 분명하게 존재하기에.

그것을 위해 높다랗게 타오르는 불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려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서야.

"좋아. 여기까지."

맬리사의 말과 동시에 클레어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린다.

온몸이 땀으로 푹 절은 채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행위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의 상태.

체력을 극한까지 쥐어짜 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클레어와 함께 뛰었던 맬리사는 땀에 절었긴 했으나, 클레어와는 달리 제법 여유로운 모습이었으니 경력에서 오는 체력 차이가 이렇게나 나는 것이다.

"마경에 들어간 선발대가 복귀하고 나면 우리도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니 내일은 쉬어. 훈련도 가능하면 체력 쓰지 않는 걸로 하고."

"후우... 네."

조금의 휴식 후에 클레어는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힘들었는지 바닥에 자신이 드러누웠던 모습 그대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땀으로 이루어진 자국이었다.

"엑...."

클레어는 얼굴을 붉히며 신발 밑창을 이용해 그것을 문질렀지만, 그런다고 사라질 자국이 아니었다.

민망하긴 해도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같은 여자인 맬리사였고 이곳은 황성 내에서도 로열 나이츠만 드나들 수 있는 전용 훈련장.

땀 자국 정도야 조금의 시간만 지나면 빠르게 마르며 사라질 테니 다행이었다.

어차피 단련 후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않나. 다른 이가 봐도 크게 상관은 없겠다만, 그래도 아직 소녀 티가 남아 있는 여인에게 대자로 뻗은 땀자국이라니.

좀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조금의 민망함을 감추며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데.

"음?"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으니.

"클레어?"

그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클레어의 고개가 그 무엇보다도 빠르게 돌아간다.

"엥? 진짜 클레어네?"

언젠가 마주칠 수도 있다 생각은 했지만, 그게 설마 지금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사람.

히오였다.

언제나처럼 큰 지팡이를 짚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히오.

단언컨대 지금 모습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1위인 인물이다.

그런 클레어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히오는 세상 반가운 표정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뭐야? 그 옷은 로열 나이츠 훈련복인데? 클레어 너 로열 나이츠에 들어온 거야?"

히오가 한 걸음 다가오면 클레어는 한 걸음 물러선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금 모습을 되짚어 보는 클레어.

땀에 푹 절어서 붉은 머리칼은 얼굴에 지저분하게 달라붙어 있을 테고 훈련복 또한 비슷한 상태일 테다.

그리고 무엇보다....

'냄새! 땀 냄새가 날 거야!'

그러니 절대.

절대 절대로 가까이서 마주하면 안 된다.

"언제부터? 아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아, 내가 궁에 없었구나?"

하지만 히오의 걸음은 빨랐다.

훈련장의 입구에서부터 환하게 웃으며 정말로 반갑다는 듯이 다가오는데, 그런 히오를 대체 무슨 수로 말린단 말인가.

"아무튼, 여기서 보니까 엄청 반갑네. 클레어."

설상가상으로 이제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등뒤가 벽이라든가 그런 문제는 아니었고 여기서 더 물러난다면 대자로 바닥에 새겨진 땀 자국이 고스란히 히오에게 드러날 테니.

그것만큼은 진짜로 정말로 절대 안 된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자국을 히오에게 보인다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불가능한 일.

앞으로 나아가면 땀 냄새.

뒤로 물러나면 땀 자국.

그런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클레어를 구해 준 것은.

"에휴...."

작은 한숨과 함께 나선 맬리사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호 기사님."

히오의 앞을 가로막으며 절묘하게 클레어를 가리는 맬리사의 위치 선정.

"응. 맬리사도 오랜만이네. 두 달 만인가?"

"예. 지난번 공략 직후에 바로 떠나 버리셨으니까요. 그보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실비아랑 상의할 게 있어서 잠시 왔다가 이제 다시 마경이 열릴 때도 됐고 하니 비탈리아누를 만날 겸해서...."

이야기하면서도 클레어를 보기 위해 맬리사 뒤쪽을 힐끗거렸으나, 그때마다 맬리사의 푸른 머리칼이 살랑이며 클레어의 모습을 절묘하게 가린다.

"비탈리아누스 님은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아, 그래? 고마워."

히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맬리사를 지나쳐 클레어에게 가려는데.

휘잉-

"...응?"

문득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게 아닌가.

아직 늦가을에, 그것도 실내에 몰아치는 눈보라라니.

그 주인이 누군지는 뻔했기에 히오의 시선이 재차 맬리사를 향한다.

"맬리사...?"

그에 맬리사는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전혀 그녀답지 않은 생그러운 미소와 함께 말이다.

"비탈리아누스 님은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그, 그래?"

"네. 혹시 모르니 지금 바로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런가?"

그쯤이면 제아무리 히오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뒷걸음치던 클레어.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맬리사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고 실내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아, 그럼 얼른 가 봐야겠구나. 음. 그래."

대충 상황을 짐작한 히오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곧장 등을 돌려 버린다.

"다음에 보자고. 하하하."

그렇게 빠르게 훈련장을 나가는 히오의 머릿속으로 푸르넬의 혀 차는 소리가 깊게 울려 퍼졌다.

- 쯧쯧... 자네는 숙녀에 대한 배려가 그렇게나 없나?

'그러게. 내가 생각이 짧았어.'

웬일로 순순히 인정하는 히오.

아무리 이런 쪽으로 자신이 눈치가 없다지만, 이번에는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까지 티를 내는데 반가움이 앞서 눈치채는 것이 늦었지 않은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접근을 막는 둘의 모습.

이유야 뻔한 것이다.

'클레어가 훈련 중에 실례라도 했나 본데?'

히오에게 클레어의 이미지가 대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말릴 이유는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으니.

그 말을 들은 푸르넬의 한숨이 히오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 얼씨구!

맬리사의 한숨은 눈보라가 그친 훈련장에 울려 퍼진다.

"...갈 길이 멀겠구나. 클레어."

157화 돌파의 층 (1)

"돌파의 층. 54층의 유형입니다."

선발대는 층의 유형을 빠르게 파악해서 원정대에 전달해 주었다.

층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그만큼 특색이 있었기에 후반부에 나올 유형이 아니고서야 웬만한 랭커라면 다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돌파의 층이라... 변수가 생길 수도 있겠어."

이번 54층은 돌파의 층.

변수가 가장 많기로 유명한 유형.

이전의 층에서도 변수는 충분히 발생했지만, 로그아웃이 잠시 막혔었던 51층을 제외한다면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단 유형을 알고 있고 제국의 정예 기사단과 랭커 출신의 빙의자들이 함께 움직였지 않은가.

그 정도의 힘이라면 작은 변수 정도는 무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을만 한 힘이다.

하지만 돌파의 층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돌파의 층이란 한없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인스턴스 던전을 돌파해 나아가야 하는 층입니다. 돌파해야 하는 던전의 평균 개수는 알려지기로 대략 스무 개 가량이지만, 이 역시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쉽지 않겠소. 이전 무한의 층보다는 훨씬 수월해 보이는구려."

"난이도만 생각해 본다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닐 수도 있다?"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만 들으면 어려울 게 없어 보인다.

제국 최정예 병력과 랭커 출신 빙의자들이 뭉친다면 고작 스무 개 정도의 인던쯤이야. 돌파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돌파의 층은 가장 변수가 많기로 유명한 유형.

그 이유라고 한다면.

"돌파의 층은 되돌아 나오는 게이트가 없습니다."

명색이 돌파의 층이 아닌가.

돌파의 층에 후퇴란 없고 다른 층과 달리 진입하면 다시 되돌아 나갈 수 없다.

빙의자들의 로그아웃은 가능했으나, 제국의 기사들은 다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어차피 공략 전까지 나올 생각은 없었으니 그건 상관없소."

"그뿐만이 아닙니다."

고작 그것뿐이었다면 변수라고 칭하지도 않았을 테다.

"층에 진입한 전원, 각기 다른 장소로 흩어지게 됩니다."

"...흩어진다?"

"네. 누구와 어떻게 뭉칠지 모르는 상태에서 스무 개에 가까운 인던을 돌파해야 하는 것이죠."

진입하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병력의 구성을 계획할 수도 없고 그에 따른 변수에 대비할 수도 없다.

들어감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공간에서 돌파를 시작해야 하는데 무엇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겠는가.

"그건... 진짜 변수가 많겠구려."

"맞습니다. 제국과 함께한 52층, 53층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번 돌파의 층은 다릅니다. 병력들에게 알리고 충분히 주의를 주어야 할 테지요."

이전까지는 어찌 됐건 함께 있었고 미리 계획했기에 부상을 당할지언정 죽음에 내몰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돌파의 층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

상성이 좋지 않은 스킬 사용자끼리 뭉치게 되거나 이끄는 이 하나 없이 약한 기사들끼리만 뭉친다면 어찌되겠는가.

물론 원정대에서 가장 약한 기사라고 해봐야 다른 곳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정예 기사였기에 믿음직스럽기는 한다만, 그들이 가는 곳은 어비스의 공간. 정예 기사들에게도 결코 만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돌파해야 하는 던전은 각 무리당 평균 스무 개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망자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음은 물론, 그 피해가 어느 정도나 될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병력을 더 보충해서 가는 것도 방법이겠군."

"그나마 유일한 대안이 그것입니다만,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을 만한, 마경에 정신이 잡아먹히지 않을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건 당연하네."

뿔뿔이 흩어져 어떤 조합으로 돌파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최적의 대비책은 인원을 늘리는 것이리라.

다만 아무나 늘릴 수는 없다.

일반 병사로 늘려 봐야 어비스 공간이 주는 기묘한 정신적 압박감에 사로잡힐 것이고, 기사라 할지라도 무위가 약하면 방해만 될 테니까.

"공략 성공 조건은 무엇이오?"

제국 또한 층의 공략에 두 번이나 성공한 경력자들답게 제법 능숙한 질문이었고 그에 설명을 이어 가던 빙의자가 답했다.

"우선 제각기 구성된 인원으로 주어진 던전을 모두 돌파합니다. 그럼 돌파에 성공한 인원끼리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층의 대장격 몬스터를 함께 쓰러트리면 공략은 성공. 제한 시간 내에 돌파에 성공한 인원이 아무도 없거나, 대장격 몬스터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실패입니다."

단순하고 간단한 룰이다.

끝까지 돌파에 성공한다면 성공.

실패한다면 실패.

"층의 대장격 몬스터는 언제 나타나는 것이오? 돌파에 성공하고 바로 맞닥트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성공한 모두가 모일 때까지 층은 기다려 줄 겁니다. 돌파에 실패한 입구는 닫히고 아직 진행 중인 입구는 계속 열려 있을 것이며 성공한 입구는 부서질 것입니다. 모든 입구가 닫히거나 부서진 이후에 보스 몬스터... 그러니까 대장격 몬스터가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모든 입구가 부서지거나 닫힐 때까지라... 제법 잔인하군."

입구가 닫힌 곳은 돌파에 실패했다는 의미.

돌파에 실패했다는 의미는 곧 해당 던전의 구성원이 전멸했다는 말이었으니.

"일단 알겠네. 그렇게 알고 준비하지."

어비스 54층의 원정대, 일명 마경 원정대는 이전보다 조금 더 많은 병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완성된 원정대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게이트를 향해 진격하는 것이다.

* * *

반드시 이긴다.

반드시 이겨 내고 지존 천마마저도 발아래에 두고야 말 것이다.

이는 단순 승부욕이라는 말로 치부될 문제가 아니었다.

안티푸스의 특성은 지배자.

지배하거나, 몰락하거나. 극단적인 특성인 만큼 효과 또한 확실한 특성.

그것은 이제 자신의 정체성과도 다름없게 되었으니.

'사소한 승리마저 거두지 못한다면 점점 더 지배와는 멀어진다.'

지배자의 위로는 그 누구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안티푸스는 자신이 있었다.

위대한 검성 비탈리아누스도, 정체불명의 서쪽 바다의 지배자도 결국 자신이 뛰어넘을 것이라는 자신.

하지만 그보다 먼저 벽에 가로막혔지 않나.

게임 속부터 지독히도 넘어지지 않던 굳건한 벽.

이름조차도 광오하기 그지없는 지존 천마.

처음에는 이름의 뜻을 몰랐다.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어차피 머지않아 자신의 발밑에 놓이게 될 것이고 늘 그랬듯이 잊혀질 거라 여겼으니.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 삼 년이 지남에도 지존 천마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 위에 있었다.

그쯤에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알아먹지 못할 저 이름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그렇게 지존 천마의 뜻을 처음 알게됐던 날, 제법 전율했던 기억이 있다.

스스로를 '하늘의 악마'라 칭한다니.

마치 너희들과는 이미 다르다는 듯, 다른 세상에 산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한 광오한 자신감이 아닌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실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남들의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몰라도 안티푸스의 눈에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악마.

저 높다란 하늘에 기거하는 악마와도 같은 자였으니까.

그렇기에 안티푸스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늘에 닿고자. 그곳에 올라 하늘의 악마마저도 지배하고자.

'...반드시.'

그러니 이번 돌파의 층에서도 그보다 먼저 돌파에 성공해 보이겠다 다짐하는 것이다.

스스로도 점차 줄어드는 자신감이 느껴졌기에.

지배자에게는 결코 허락되는 감정이 아니었기에 지존 천마를 상대로 자그마한 승리라도 취해 자신감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진입한다!"

그런 굳은 다짐과 함께 진입한 어비스의 54층.

「어비스 - 54층에 진입하였습니다.」

돌파의 층.

「지정된 구역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운적인 요소가 중요한 층이었다.

누구와 어떻게 팀을 이루느냐.

자신이 있는 곳에 누구와 함께 하게 될 것이냐에 따라 전략도, 속도도 확연히 차이날 것이 뻔했으니.

어둑해진 시야가 차츰 회복되고 바로 눈을 번쩍 뜬 안티푸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총 일곱 명의 사람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빠르게 확인한 안티푸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운이 좋군.'

인정해야겠다. 운이 좋았다.

갑주를 걸친 기사가 둘.

나머지 다섯은 전부 빙의자 출신.

게다가 그중 한 명은.

"시르베르트."

"...안티푸스?"

빙의자 중에서도 최고위급 전력. 염동의 대가 시르베르트였다.

기사 두 명의 수준도 꽤 괜찮고 과반수 이상이 빙의자였으니 안티푸스의 뜻대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터.

다른 파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안티푸스와 시르베르트 두 사람이 뭉친 것만으로도 무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안티푸스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진다.

'이번에야말로....'

느낌이 좋다.

시작부터 운이 따라 주지 않은가.

이번에야말로 지존 천마를 이길 수 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총 여덟 명에 기사가 두 명, 각성자 여섯. 그중에 나랑 안티푸스 너까지 같이 있다라... 일단 공통 공간까지 돌파에 성공하는 건 확정이나 다름없겠어."

"맞는 말이다만, 방심은 하지 마라."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는 시르베르트와 다른 빙의자들은 물론 두 명의 기사 또한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기사들 역시 무한의 층에서 안티푸스와 시르베르트의 실력을 확인했기에.

자신이 속한 파티에 그런 강자 두 명이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나.

살아남을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최전방은 내가 맡지."

가진 능력을 공유하고 포지션을 얼추 정한 뒤 곧장 던전의 게이트 앞에 선 안티푸스의 파티.

검게 일렁이는 게이트의 모양은 각고의 공간 게이트와 똑같았지만, 그 크기는 사람의 키만 할 정도로 훨씬 작았다.

"던전의 돌파는 당연한 것이고 내 목표는 따로 있다."

그런 게이트의 앞에서 안티푸스는 시르베르트를 비롯한 파티원을 돌아보며 말한다.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돌파하는 것. 그것만이 목표다."

그와 동시에 등을 돌리며 게이트로 진입하기 시작했으니.

"알아서 잘 따라오도록."

돌파의 층을 가장 먼저 시작한 파티였다.

* * *

「어비스 - 54층에 진입하였습니다.」

익숙한 느낌에 눈을 감는다.

두 달만에 다시 들어서는 어비스의 공간.

이번 공략에도 아이라이츠는 참여하지 않았다.

1서클을 완성한 이후에 포탈을 이용하여 같이 공략에 나서겠다는 의지가 강력했다.

아이라이츠에게 건네 준 것은 테트라디아 기초 마법 교육서.

그 책을 꼼꼼하게 살펴봤는데 설명도 잘되어 있으니 어지간히 알아서 잘할 것이다.

나 때는 그런 책도 없어서 무식하게 심장에 서클이나 때려 박고 그랬었는데 말이지.

「지정된 구역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어쨌든 이제 집중해야 할 때다.

돌파의 층은 변수가 많은 층.

그 막대한 변수의 시작은 바로 지금, 무작위로 만들어지는 파티와 그 구성원으로 인한 변수였으니.

손에 잡혀 오는 지팡이의 감촉을 느끼며 히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온통 검은색인 방.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자신의 키만 한 게이트. 빙의자들이 말하는 인스턴스 던전.

저런 게이트를 대략 스무 개 정도 돌파해야만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공통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것까지 확인한 히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누가 자신과 함께 이곳으로 왔을 것인가.

그게 가장 중요했다.

어차피 전부 랜덤이겠지만, 굳이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비탈리아누스나 안티푸스 같은 강자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이유라고 한다면 자신감이었다.

어비스 몬스터에게는 히오의 최대 단점인 '폭력은 안 돼!' 패널티가 적용되지 않았으니까.

적이 많으면 낑낑이와 함께 마법으로 상대할 수 있다.

적이 소수의 강자라면 뇌제와 청염, 정 안 되겠으면 천상까지 불러들여 상대할 수 있다.

그러니 비탈리아누스 같은 강자들은 고루 퍼져서 다른 이들을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었고 그것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진심이긴 했는데....

"...진짜 없어?"

히오의 바람대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아무도 없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진짜로?"

돌파의 층을 진짜 혼자 돌파하라는 건가?

분명 리퓨에를 마지막으로 신은 전부 잠들었을 텐데 갑자기 왜 기도가 통하고 난리인지.

- 자네의 바람대로 된 게 아닌가? 왜 화를 내고 그러나? 으흐흫.

"...외롭잖아. 그래도 한 명 쯤은 와서 말상대 해 줘도 되는데."

- 내가 해 줄 테니 걱정 말게.

"그게 싫다고!"

- ...응?

어쩔 수 있나.

매일 같이 지겹게 듣는 푸르넬의 목소리지만, 그거라도 듣고 있어야지 뭐.

이쪽에 인원이 모자란만큼 다른 파티에 전력이 더 보강되었을 테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에휴...."

그렇게 히오가 터덜터덜 돌아서 게이트에 들어가려는 순간.

파아악-

환하게 치솟는 빛무리.

확 솟구치던 빛이 차츰 줄어들며 나타나는 모양은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었으니.

"오...!"

뒤늦게 진입한 누군가가 히오의 파티로 지정된 것이었다.

"역시! 아무리 그래도 한 명은 너무했지?"

아무리 무작위로 배정된다고 해도 혼자서 스무 개의 던전을 돌파하라니. 히오가 아니었다면 그냥 죽으라는 소리가 아닌가.

자신을 포함해서 두 명 정도면 그래. 소소하게 이야기하기도 좋고 딱 적당하다.

빛무리가 점차 사라지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되어 간다.

키는 히오보다 확연히 작고 체형 역시 호리호리했으며.

드러나는 머리칼의 색은 붉다.

한마디로 그냥.

"클레어?"

클레어였다.

동시에 눈을 번쩍 뜨는 클레어.

그 붉은 눈동자가 히오를 향하고 당황한 듯 주춤거린다.

히오는 아랑곳 않고 클레어에게 다가가 두 손을 덥썩 잡았다.

반가움이 컸던 까닭이다.

누가 뭐라 해도 클레어는 이 세계에서 처음 마주한 인연이자 정을 붙이게 해 준 소중한 사람.

2년의 시간을 한 지붕 아래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과도 인연.

그러니 히오는 클레어를 환한 미소와 함께 맞이해 준다.

"오줌싸개다!"

"...엑?"

히오와 눈이 마주치고 괜스레 어색해하던 클레어가 히오의 다음 한마디에 곧장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휘둘러 왔으니.

"너 며칠 전 훈련장에서 실례했지?"

"아! 뭐라는 거야! 멍청한 히오 같으니라고!"

확실히 예전보다 훨씬 매워진 주먹이었다.

158화 돌파의 층 (2)

"우리 둘뿐이야? 다른 사람은...?"

한차례 투닥거림 이후 정신차린 클레어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본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검은색인 방. 그럼에도 이상하게 밝은 방에는 오직 히오와 클레어 둘뿐이었다.

"이 정도 기다렸는데 안 오는 거면 진짜 우리 둘뿐이라는 거야. 왜? 무서워?"

"무, 무섭기는! 나 로열 나이츠야. 그것도 최연소 로열 나이츠!"

전혀 무섭지 않다는 듯 가슴을 쭉 펴보이는 클레어.

왼쪽에 새겨진 황금 사자의 문양이 유달리 더 빛나 보인다.

"그런데 로열 나이츠에는 진짜 어떻게 들어간 거야?"

처음부터 묻고 싶은 거였다.

제국에서 최고로 강한 이들만 모였다는 로열 나이츠.

물론 소문은 조금 과장되기 마련. 실제로는 가장 강한 이들이 모였다기보다 많은 경험과 막대한 잠재력을 지닌 인물을 비탈리아누스가 손수 뽑아 창단한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는 게 문제지.

아무튼, 그런 히오의 질문에 클레어는 또다시 쭈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건...."

어떻게 들어갔냐니.

자신도 잘 모른다.

그냥 운 좋게 만난 비탈리아누스 앞에서 로열 나이츠에 들어가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했을 뿐인데 덜컥 로열 나이츠가 되어 버렸지 않은가.

스스로의 부족한 경험과 실력은 최근 몇 달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쌓았던 무수한 기대와 칭찬 따위는 진작 무너져 내린 후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걸 히오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않겠나.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고. 남들은 저 밑바닥부터 아득바득 시작할 때 자신은 운으로 높게 올라왔다고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하긴. 비탈리아누스는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좋지."

히오가 먼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네 재능은 나는 물론이고 시르베르트도 극찬할 정도였으니까."

싱긋 웃으며 당연하게 건네 오는 칭찬이 무척이나 오랜만이어서였을까.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해 오던 와중에 들은 말인 탓일까.

아니면 그저 히오가 말해 주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했겠다. 대단해."

정말이지 별것도 아닌 말에 얼굴은 왜이리 빨개지고 가슴은 눈치 없이 콩닥이는 걸까.

아카데미 시절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었던 익숙한 칭찬.

온갖 미사여구를 잔뜩 집어넣은 화려한 칭찬에도, 수줍게 혹은 당당하게 전해오는 사랑 고백에도 늘 별생각 없던 자신이었건만.

히오의 무던한 칭찬 한 번에 날아갈 듯한 이 기분은 대체 무엇인지.

"아니 뭐... 이 정도는 뭐... 당연히 해야지. 히오가 아카데미도 보내 주고 그랬으니까."

괜스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가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찍기도 했다가 히오를 힐끗 쳐다봤더니 아직도 자신을 보면서 미소 짓고 있지 않나.

"그, 그러니까! 나는 무섭지 않으니까!"

왠지 모르게 그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어려워 괜히 목소리를 높히며 히오를 지나쳐 게이트를 향해 간다.

혹시 빨개진 얼굴을 들켰을까.

콩닥이는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는 않을까.

"빠, 빨리 들어가자!"

걸음을 재촉하며 검은 게이트를 향해 갔고.

"그렇게 서두르면 안 돼."

히오는 그렇게 지나치는 클레어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멈춰 세운다.

"내가 먼저 갈 테니까 천천히 따라 들어와. 긴장 늦추지 말고."

그 손에 부드럽게 이끌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 클레어의 눈앞에 가득 차는 것은 히오의 뒷모습.

히오의 키가 이렇게나 컸었는지.

그의 등 뒤가 이렇게까지 아늑하고 듬직했었는지 이전에는 왜 전혀 몰랐을까.

그러니 클레어는 앞서가는 히오의 뒤를 따라 천천히 이동한다.

"들어간다. 잘 따라올 수 있지?"

다정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는데.

"응...."

그 대답 뒤에는 델피르 마을의 왈가닥 클레어가 아닌, 이제는 제법 성숙해진 소녀가 있었다.

* * *

「개척자 - '히오 파블렌코'의 진입을 확인했습니다.」

「던전이 형성됩니다.」

평균적으로 스무 개 정도 있을 돌파의 층 던전.

히오는 그중 첫 번째 던전에 진입하고 낯선 공기가 피부에 느껴짐과 동시에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 '뇌제(雷帝)'가 발동됩니다.」

돌파의 층은 대개 던전에 진입함과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돌파'라는 컨셉에 충실한 던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도 즉시 대응하기 좋은 뇌제를 발동했으나.

「스킬을 발동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스킬을 발동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스킬 - '뇌제(雷帝)'가 취소됩니다.」

난생처음 보는 메시지에 혼란이 찾아왔다.

스킬을 발동할 수 없는 공간과 상태?

그런 곳이 있단 말인가.

갑작스레 끌려간 심연에서도 스킬은 발동이 가능했었다.

한데 인스턴스 던전에서 스킬 발동이 안 된다는 말은....

'...일단 지금은.'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 다음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때.

스킬이 없어도 히오에게는 마법이 있다.

그러니 재빨리 마력을 끌어올리고 서클에 힘을 가한다.

스킬을 발동할 수 없는 공간이라 했으니 사신 소환도 불가능할 터.

그렇다면 마법 또한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5서클의 마법은 마력을 상당히 잡아먹으니 말이다.

그렇게 서클을 돌리고 정신을 집중하며 대비하는 사이 시야가 차츰 확보되어 갔고.

문득 몰아치는 밝은 빛에 눈을 번쩍뜸과 동시에.

"이건...."

왜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인지.

왜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인지 곧바로 이해해 버렸다.

- 으아아아아아!

- 들어가! 들어가!

사방에 빼곡하게 들어찬 것 전부 다 사람이었다.

어디까지인지도 모를 정도로 끝없는 인간의 행렬.

그것이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 모든 사람이 히오를 무시한 채 밀려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히오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밀어닥치는 사람들은 히오를 뚫고 지나가 버린다.

히오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정말로 히오가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뚫고 지나가 버리는 사람들.

물리적인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 느낌은 제법 익숙한 것이다.

"영체화?"

히오의 특성 중 하나인 영체.

그것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

허나 확연히 다르다.

유령의 몸으로 변한다고 해서 아예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영체를 발동하고 팬텀 스티드에 올라타 이동해도 사람들은 히오의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유령의 몸을 잠시 빌린 것일 뿐, 완전한 유령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주변에 가득한 이들은 전혀 히오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유령이라도 된 듯한 느낌.

"꺅! 까, 깜짝이야...."

한발 늦게 진입한 클레어 또한 몸을 뚫고 달려가는 사람들에 질겁하며 자신의 몸을 살핀다.

"이건 무슨...."

이미 영체 특성이 있는 히오조차도 낯선 감각일진데 클레어는 오죽하겠는가.

유령이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고 지나가는 사람을 건드렸다가, 손이 그대로 쑥 지나치는 걸 보며 신기해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 들어가! 밀고 들어가!

- 반드시 들어가야 돼!

온사방에 빽빽히 들어찬 사람들.

그 모두가 한곳을 향해 무작정 밀고 들어가는 중이었으니.

- 으아앙!

- 으아아악!

- 미, 밀지 마! 막혔다고!

아이의 울음소리.

넘어진 사람의 비명. 간곡한 외침 등이 뒤섞여 흡사 전장을 방불케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마경에 진입하기 전, 설명은 충분히 들었다.

던전에 들어서면 몬스터가 무지막지하게 덤벼들어 올 것이라 했지 않았나.

한데 지금 이 현상은 클레어로서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히오?"

그렇기에 히오는 무언가 알고 있을까 싶어 그를 보며 물었으나, 히오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연스레 클레어의 시선도 히오를 따라간다.

그리하면 보이는 것은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탑.

저 멀리 아득하게 멀리 있음에도 어찌나 거대한지 선명하게 보이는 탑 하나.

마치 개미 떼처럼 몰려든 사람들.

사람들을 막고 있는 기묘한 반투명의 장막.

그리고 그 안쪽으로 보이는 도시.

도시의 중앙에서 구름마저도 뚫고 높게 솟아 있는 탑.

"저게 무슨...."

그 웅장한 자태에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자니 귓가에 나지막이 들려오는 히오의 목소리.

"...테트라디아."

이곳은 고대 마법의 도시.

테트라디아의 앞이었다.

* * *

"일단 들어가 보자."

"응."

드높은 장막이 쳐진 테트라디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령의 몸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허공을 자유로이 거닐 수 있었기에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 테트라디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 문 열어! 이거 열라고!

- 제발... 제발 열어 줘!

반투명한 장막은 몰려든 사람들의 침입을 철저하게 막고 그 너머에 선 마법사들은 사람들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하늘을 응시하거나 땅을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저 사람들... 히오랑 옷차람이 비슷한데?"

"마법사들이야."

"응? 마법사?"

"그래. 이제는 사라진 고대의 마법사들."

"그럼... 지금 우리가 과거로 왔다는 말이야?"

클레어의 물음에 히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건 아닐 거야.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아마 단순한 기억 속."

어쩌면 이전 각고의 공간과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스테리온의 이주를 돕지 않고 못난 왕과 왕국의 멸망을 지켜보았던 아벨라르 파블렌코.

그의 뒷이야기.

다만 그때와 다름 점이 있다면, 직접 움직일 수도 무언가를 바꿀 수도 없는 철저한 방관자로서 지켜봐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좋았다.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천 년 전의 진실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클레어. 잘 봐 둬."

어느 누구도 기억하는 이 없고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천 년 전의 비사.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고 기록조차 소멸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두 사람은 그렇게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 반투명한 장막과 그 앞에 늘어선 마법사들을 지나 테트라디아로 진입했다.

테트라디아의 거리는 익숙한 듯 낯설었다.

히오는 항상 마탑의 백여 층에서 거리를 내다봤을 뿐 직접 그곳을 거닌 적은 없었으니까.

어비스 기운과 중후반부의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현재의 테트라디아가 아닌, 깨끗하고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과거의 도시 테트라디아.

"그러니까... 마법이 사라진 이유가 퇴보가 아니라 상실 때문이라는 말이야?"

"여기는 천 년 전 고대 마법의 도시이고?"

"와... 도시가 진짜 신기해."

히오는 그런 거리를 걸으며 클레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최대한 간략하게.

핵심적인 것만 전해 준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마법 도시 테트라디아.

밝은 빛을 발하는 포탈이 곳곳에서 모습을 보이고 일정 간격마다 설치된 가로등과 전기줄처럼 이어진 마력통로.

하늘에는 몇몇 비행선이 느릿하게 부유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는 마법사의 탑은 웅장하기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런 도시를 실제로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런 마법적인 광경을 눈으로 보고 귀로는 믿기 힘든 과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클레어는 절로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마법사의 탑은 원래 저렇게 커?"

"그럼 히오가 마지막 마법사라는 말이야?"

"마법은 왜 상실했는데?"

"그 심연이란 것들이 그렇게 강해? 히오도 힘들 정도로?"

그러니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쏟아진다.

히오 역시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도시 테트라디아.

어쩌면 이번 기회로 과거의 비밀을 조금이나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도착한 곳은 마법사의 탑 입구.

현시대의 마탑에서는 여지껏 히오에게 허락되지 않은 1층. 시작의 로비.

과연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들어가 보자."

"...응."

테트라디아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마탑의 안으로 들어섰고.

동시에 시야가 암전된다.

시야는 물론이고 모든 감각이 차단되는 느낌.

각고의 공간에서 장면이 바뀔 때와 같은 느낌이었고 그것이 서서히 풀리며 시야를 비롯한 모든 감각이 다시 돌아왔을 때.

- 이보시오.

히오와 클레어의 눈앞에는 노년의 마법사 한 명과 중년의 마법사 한 명이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백발이 무성한 노인 마법사는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 맞은편의 중년 마법사의 정체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으니.

다름아닌 그의 목에 걸린 녹빛의 목걸이가 무척이나 익숙한 까닭이었다.

- 마탑주...!

그는 아벨라르 파블렌코.

당대 최고의 마법사이자 위대한 파블렌코 가문의 가주임과 동시에.

- 정녕 그게 최선이란 말이오!

못난 왕과 그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방치한 자였다.

159화 돌파의 층 (3)

늙은 마법사 한 명과 중년의 마법사, 아벨라르 파블렌코.

호호백발의 마법사는 흰바탕에 연녹색의 수실이 놓인 마법복과 모자를 쓴 채 아벨라르와 마주앉아 있었다.

- 마탑주.

- 말씀하시지요.

- 테트라디아에는 아직 여력이 있소.

-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 그렇다고 이대로 놔둘 것이오?

- 어쩔 수 없는 일이죠.

- 이보시오! 마탑주!

점차 높아지는 언성.

늙은 마법사는 탁자를 쾅 내려치고는 손을 뻗어 바깥을 가리켰다.

- 저토록 많은 사람이 몰렸소! 이대로 놔두면 저들 모두가 개죽음 당한다는 것을 탑주께서 모를 리가 없지 않소이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도시 바깥의 사람들.

히오와 클레어가 처음 보았던, 테트라디아에 들어가기 위해 구름처럼 몰린 수많은 인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늙은 마법사가 열변을 토했지만, 아벨라르는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 저들을 들인다면 테트라디아마저도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흔들리면 미래가 없음을 알지 않습니까.

- 어찌 그리 장담하시오. 해보지 않았잖소! 기적을 일으키는 학파의 대마도사가 몇 명인데 이런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겠냐는 말이오!

아무래도 바깥에 몰린 수많은 사람 전부가 난민인 모양.

연녹빛 마법복을 입은 늙은 마법사는 그런 난민을 받아 주자는 의견이었고 아벨라르는 받아 줄 수 없다는 의견인 듯했다.

자세한 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히오가 보기에도 저토록 많은 사람을 받아 주는 것은 무리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테트라디아 내에도 사람이 꽉 차 있었으니까.

저 많은 인원을 받아들여서 발생할 혼란과 식량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을 어찌 감당할 생각인가.

그런 것들을 걱정했기에 아벨라르는 바스테리온의 이주도 끝내 허락치 않은 것일 터였다.

그러니 아벨라르 파블렌코.

테트라디아 마법사의 탑 주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 상급 마도사 이상은 전원 그 작전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테트라디아에도 여력이 없어요.

- 그 터무니 없는 작전 말이오?

- 그렇습니다.

- 허!

그 작전이라 함은.

- 도시 테트라디아 자체를 이동한다는 그 터무니없는 계획이 정말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는 게요?

테트라디아 전체를 다른 공간으로 격리한다는 작전.

거기까지 들은 히오의 눈이 순간 이채를 띈다.

그렇지 않아도 테트라디아의 소재지에 관하여 의문이 있지 않았던가.

현재의 대륙 어디에서도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마법사의 탑을 볼 수가 없었으니.

적어도 같은 대륙 내에는 마법 도시 테트라디아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는 말은....

"테트라디아의 공간 격리에 성공했다?"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벨라르는 여전히 변화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 그 실낱같은 가능성 때문에 대체 몇 명의 대마도사가 묶여 있는지 알고 있소?

-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들이 전장에 나섰다면 대륙의 절반은 아직 안전했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소?

- 결국 패퇴하여 지금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 그럼 테트라디아를 분리하고 그 마법을 완성하면 괴이를 물리칠 수 있다 자신하는 것이오?

- 당연히 확신은 없습니다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 아니! 그게 아니오 마탑주!

다시 한번 탁자를 쾅 내려치고는 아벨라르를 쏘아보는 늙은 마법사.

주름이 자글한 눈과 백발로 성성한 그 몸에서 어찌 저런 기운이 나오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 당신은 지금 겁에 잔뜩 질려 있구려!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아벨라르를 바라보며 격노하는 노인.

- 무엇이 그리 두렵소! 지킬 게 많아지니, 잃을 것이 넘쳐나니 무서운 것이오?

- 그런 게 아닙니다.

- 아니기는! 내 탑주를 아주 오랜 시간 지켜봐 왔소. 그대는 지금 수십만 단위는 우습게 죽어 나가는 상황에!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짓눌려 핑곗거리를 만들고 있을 뿐이오!

잠시간 이어진 정적.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던 아벨라르는 눈을 슬며시 감는다.

그리고 곧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표정은 제법 서글픈 것이었으니.

- 드루이드 렌 행크. 아니....

아벨라르는 꽤나 힘겨운 표정으로 늙은 마법사를 부르는 것이다.

- ...스승님.

늙은 마법사의 이름은 렌 행크.

마탑의 몇 남지 않은 드루이드임과 동시에 아벨라르를 어린 시절부터 지도한 스승.

- 대륙과 테트라디아를 분리시켜야만 해요. 괴이... 아니, 심연에 맞서 나약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란 말입니다.

-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 그게 몇푼이나 더 높소? 그 하찮은 숫자놀음이 수백 수천만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 가치가 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는 게요! 마탑주!

- ...그렇습니다.

- 허....

렌 행크는 허탈하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댄다.

- 아벨라르, 너는 지금 머리로만 생각하고 오직 머리로만 움직이고 있구나.

시선은 더이상 아벨라르에게 가 있지 않은 채였다.

- 그래서는 아니된다. 그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내 몇 번이고 가르쳤지 않느냐.

-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장 초인급 마법사들을 모두 풀면 스승님의 말씀대로 많은 이를 구할 수 있겠으나, 그래서는 마법의 완성이....

- 시도해 보기는 했느냐.

어느새 차분해진 늙은 마법사, 렌 행크의 조용한 목소리 속에는 질책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시도해 보지 않았겠지. 가능성이 낮은 일이니까. 얼마나 많은 이가 죽든 간에 그 역시 낮은 확률에 포함된 숫자일 뿐이니 말이다.

다시 아벨라르를 향하는 주름이 자글한 눈. 어쩐지 서글피 우는 듯한 눈으로 아벨라르의 모습을 가득 담는다.

- 결국 잊었구나, 아벨라르. 네가 어찌 그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너 역시 끔찍하리만치 낮은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더냐.

- ...스승님. 이건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렌 행크는 의자를 드륵 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 괜찮소 마탑주. 다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에게까지 변명은 하지 않아도 되오.

- ...스승님!

- 탑주께 너무 내 생각을 강요한 것 같구려. 그러니 탑주의 생각대로 하시게나. 단, 하기로 한 만큼 철저하게 이뤄 내야 할 것이외다.

- 그건 당연히....

- 이 늙은이가 죽더라도 절대 멈추지 마시오.

그말을 끝으로 곧장 등을 돌려 방을 벗어나는 렌 행크.

- 탑주께서 그 위대한 마법을 완성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겠소.

나이를 섣불리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노인이었지만, 허리는 꼿꼿했고 걸음에는 힘이 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고 목표가 있는 자의 모습.

- 나는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다 갈 테니.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렌 행크는 그렇게 방을 빠져나갔다.

- 부디 뜻을 이루시구려.

홀로 남은 아벨라르.

히오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는 아벨라르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클레어에게 뜻을 전했다.

"저 노인을 따라가자."

아무래도 당장에 행동을 취할 것은 아벨라르보다는 렌 행크일 것 같았으니.

그를 따라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고.

"응. 따라가 보자."

두 사람이 렌 행크의 뒤를 쫓아 방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전처럼 장면이 바뀌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첫 번째 던전을 돌파하였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과거의 기억을 따라 움직였을 뿐인데.

곧 암흑이 찾아오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전의 공간과 비슷한 공간.

사방이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방이었다.

"뭐, 뭐야? 끝난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얼핏 보면 가장 처음 들어왔던 방과 똑같은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일렁이는 검은색 게이트의 크기도 조금 다르고 위치도 달랐다.

그러니 이것은 두 번째 던전의 앞.

"바로 들어가 보자."

이런 던전이 앞으로 스무 개 가까이 남았다.

그말인즉.

"과거의 기억을 엿보러."

기록되지 않은, 상실된 진실에 크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란 말이었다.

* * *

「스킬 - '열대야'가 발동됩니다.」

「스킬 - '사막화'가 발동됩니다.」

「스킬 - '개미 지옥'이 발동됩니다.」

검을 앞으로 쭉 뻗자 일대가 말라비틀어진다.

안티푸스 프라만.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바람한 점 불지 않는 밤이 되었고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이 되었으니.

- 케헤헤헥!

달려드는 몬스터는 모래밭을 뒹굴고 검게 물든 그 육신은 급격하게 말라 가기 시작한다.

「스킬 - '모래 바람의 축복'이 발동됩니다.」

「속성 - '대지'가 오러에 부여됩니다.」

움직일수록 몸이 가라앉는 모래 지옥.

그 위를 자유로이 누비는 안티푸스의 두 발.

불필요한 동작을 최소화한 채 휘둘러지는 검에 어비스 몬스터들은 비명을 내지를 새도 없이 썰려 나간다.

주변 환경을 바꾸는 스킬은 같은 등급일지라도 취급을 달리한다.

바뀐 환경은 스킬 시전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니.

다루기가 까다로울 뿐더러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략적 가치가 천차만별로 나뉘었기에 당연한 것이다.

한데 안티푸스는 그러한 종류의 스킬을 대체 몇 가지나 보유하고 있는 것인가.

환경을 자유로이 조성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바뀐 환경을 지배라도 하듯이 더 빠르고 강해진 채로 검을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상대에게는 불리한 환경을, 자신에게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안티푸스의 스킬.

던전을 돌파하는 사이에 선보인 스킬의 종류만 대략 십여 개는 가뿐하게 넘는다.

그러면서도 본신의 무력 또한 강력하고 때때로 색이 바뀌는 오러는 폭발하기도, 그 무엇보다 단단해지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하였으니.

안티푸스 프라만.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 인간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드는 것이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강자 중의 강자.

수십 가지의 스킬을 능숙하게 다룸과 동시에 기사단장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검의 경지.

그렇기에 벌써 열 개의 던전을 돌파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속도.

시르베르트조차도 놀랄 만한 압도적인 속도였다.

이번 열 번째 던전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돌파에 성공하고 말았으니.

「열 번째 던전을 돌파하였습니다.」

주변의 풍경이 이그러지고 시야가 어두워진다.

그리하여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예의 그 사각형의 방.

열한 번째 던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진입한다."

숨돌릴 새도 없이 곧바로 진입 명령을 내리는 안티푸스.

"좀 쉬었다 가지?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안티푸스를 시르베르트가 제동해 보지만, 이미 아득히 먼 하늘에 목표를 둔 그에게 닿을 턱이 있나.

"힘든가?"

"...그건 아니지."

"그럼 뭐가 문제지? 바로 진입한다."

반박할 말도 없었다.

실제로 던전 몬스터의 6할 이상을 안티푸스가 처리했으니.

"...그래."

총 몇 개의 던전을 끝내야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공통 공간이 나오는지는 모른다.

허나 평균값이 20개임을 감안하면 벌써 절반은 넘은 셈.

이번만큼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리라.

압도적으로 1등일 것이 너무도 뻔했다.

"들어가자."

그렇게 안티푸스의 파티는 열한 번째 던전에 쉬지도 않고 진입한다.

히오와 클레어가 이제 막 두 번째 던전에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160화 돌파의 층 (4)

「개척자 - '히오 파블렌코'의 진입을 확인했습니다.」

「두 번째 던전에 진입합니다.」

두 번째 게이트에 진입하자마자 보인 광경은 난민들의 앞에 선 렌 행크의 모습이었다.

- 질서를 지키고 기다리시오!

새하얗게 센 수염과 머리로 커다란 스태프를 짚으며 선 렌 행크.

그가 음성 증폭 마법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난민들에게 외쳤다.

- 내 테트라디아와 계속 이야기 중이니 머지않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것이오!

척보기에도 거짓이었다.

직전까지 아벨라르와 의견 대립으로 언쟁을 벌이던 모습을 보았지 않은가.

마법사의 탑 주인은 명백히 아벨라르 파블렌코이다.

렌 행크가 그의 스승이라고 한들 아벨라르가 확고한 이상에야 난민을 테트라디아에 들일 방법은 없을 터였다.

- 그러니 조금만 더 참으시오!

하지만 렌 행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거짓을 외친다.

조금만 기다리면 테트라디아에서 그들을 받아 줄 것이라고.

그러니 희망을 놓지말고 질서를 지키며 기다리라고 말이다.

그에 난민들은 각자 목소리를 높이며 열광했다.

아니, 자세히 들어보니 열광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 장난하나! 여기서 더 어떻게 지내라고!

- 마법사들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나!

- 아이라도! 아이라도 들여보내 주세요!

렌 행크는 혼자서 오롯이 그 모든 분노를 감내했다.

- ...미안하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쏟아지는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기꺼이 받아 내었다.

-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이 정도의 식량으로는 우리 가족 다 굶어 죽습니다!

- 마법사님! 제발 테트라디아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 고향이! 우리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테트라디아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 이 겁쟁이 놈들아!

- 너희들만 제때 나서 줬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잖아!

- 우리를 전부 죽일 셈이냐! 빨리 문 열라고!

왕국의 멸망이 테트라디아 소속 마법사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럼에도 갈 곳 잃은 분노는 테트라디아를 향했고 렌 행크는 홀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일면식이라고는 없는 이들일 테고 아벨라르의 말대로 난민 전부를 받는다는 것은 자멸을 앞당길 뿐일 텐데.

- 미안하오... 미안하오.

대체 무엇이 그리 통탄하여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하는 것일까.

-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그때였다.

콰아아앙-!

익스플로전 수십 발이 동시에 터진 듯한 굉음이 테트라디아 중심에서부터 들려왔다.

폭발은 아니었다.

치솟는 것 또한 없었다.

다만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하게 느껴지는 것은 있었으니.

그것은 마력.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막대한 마력의 방출.

렌 행크는 물론이고 일반 난민들까지 마력 방출로 인한 기운을 느끼고 몸을 떨 정도였으니.

- 아벨라르... 기어이!

저것이 무슨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렌 행크는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지긋이 감았는데.

이는 찰나였을 뿐.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전처럼 걱정할 것 없다는 자신감이 얼굴에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 걱정하지 마시오!

거짓으로 점칠된 자신감이.

- 내가 있으니 괜찮소. 나만 믿고 같이 기다립시다!

* * *

- 준비는 끝났습니다.

아벨라르와 십여 명의 마법사가 모인 곳은 몇 층인지 모를 마탑의 내부.

- 결단만 내리시면 하루 안에 이동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한 학파의 장 혹은 마탑의 원로들.

전쟁 당시 대륙 최고의 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굉음과 함께 내뿜어진 막대한 마력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공간술이 준비를 마쳤다는 의미.

- ...잠시만 기다려 주시게.

그럼에도 아벨라르는 망설였다.

- 드루이드 렌 행크 때문에 그러십니까.

- ....

- 탑주답지 않으십니다. 그가 탑주께 각별한 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는 늙었고 마법 경지는 기껏해야 마도사 수준. 대의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알고 있으니 그만하시게나.

렌 행크의 마법은 기껏해야 5서클 마도사 수준.

그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기는 하나, 테트라디아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그의 나이도, 경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예.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십시오. 탑주께서 그 자리에 오르기 훨씬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일입니다.

아벨라르와 함께하고 있는 십여 명의 마법사.

마탑의 늙은 원로와 각 학파의 장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벨라르 또한 표정 변화가 적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들 사이에 있으니 외려 그가 표정이 풍부해 보일 정도.

누군가 말했듯 피도 눈물도 없는, 감정이 사라진 인간 같아 보인다.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은 모두 저렇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일까.

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일까.

-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에 테트라디아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이면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죠. 몇몇 왕국의 희생이야 있었지만, 어차피 이것이 아니었다면 대륙이 멸망했을 겁니다.

- 마치 저쪽처럼요.

- 그러니 렌 행크, 그자가 저리 행동하는 것도 탑주께서 이해하시지요.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닙니까.

- 제아무리 렌 행크가 어린 탑주를 구하고 가르친 은인이라 하여도 이번에는 도가 지나칩니다.

한마디씩 입을 여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아벨라르는 고뇌한다.

딱딱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언행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표정.

그것은 렌 행크의 가르침 탓일까. 아니면 본래의 성품 탓일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오겠네.

-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 걱정 말게. 권유는 딱 한 번만 할 생각이야.

-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그때는 바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 그럴 생각이네.

아벨라르 파블렌코는 마법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당대에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위대한 마법사.

가장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 더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아벨라르의 몸이 하얀 빛에 휩싸인다.

* * *

- 스승님.

급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도 렌 행크의 시선은 정면만을 향해 있다.

- 이제 테트라디아로 들어가시지요.

렌 행크 대신에 사방에 가득한 난민들이 아벨라르를 보고 놀라거나 그를 가리키거나 기뻐한다.

- 마, 마탑주다!

- 파블렌코께서 직접...!

- 됐어! 우린 살았어!

- 어서 들여보내 주세요! 마탑주님!

그렇게 재차 몰려드는 난민들을 쳐다도 보지 않고 지팡이를 내젓는 아벨라르.

그에 마력의 장막이 쳐지고 난민들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아우성치는 난민들과 그쪽으로 시선조차 두지 않는 아벨라르.

- 곧 이동이 시작될 겁니다.

-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 우리는 저쪽으로 넘어가 마법을 완성할 것입니다.

- 저 수많은 사람을 보거라. 어둠에 쫓겨 희망을 쫓아 여기까지 온 자들이다.

- 마법을 완성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 한데 간신히 도착한 이곳마저도 절망뿐이라면 얼마나 비참하겠느냐.

- 스승님께서 잘 모르셔서 그런 겁니다. 가능성은 낮지 않습니다. 이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왔던 일이고 준비하고 있던 일입니다.

- 하여 나는 저들의 희망이 되고자 한다.

대화가 서로를 마주하지 않는다.

오직 한 방향으로 각자의 이야기만 전하며 유연하게 휘지 않는 것이다.

- 전쟁을 끝내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남은 이들이라도 살리기 위한 희생이란 말입니다. 스승님.

그 말이 있고서야 렌 행크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인다.

주름이 뒤덮은 눈가.

아벨라르를 바라보는 세월의 깊이가 새겨진 눈.

- 언제 이리 자랐더냐. 아벨라르.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이 아벨라르의 어깨를 짚고서는 약하게 토닥인다.

- ...스승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심연이 몰려오고 있어요.

- 내 다리에 매달려 빽빽 울던 녀석이 어느새 이렇게나 자랐구나.

- 함께 저쪽으로 갑시다. 대륙 끝, 그 너머로 함께 이동하자는 말입니다.

- 하루가 너무 무심해 네가 자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었어. 그것이 후회로구나.

- 저쪽으로 건너가 마법을 완성하고 전쟁을 끝내고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 어서 같이 갑시다.

서로를 마주보고 있음에도 마주하고 있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벨라르는 미래를.

렌 행크는 과거를 보고 있었으니.

- 아벨라르 파블렌코.

그런 대화를 마무리 짓는 것은 어느새 굳게 변한 렌 행크의 표정.

그것과 비슷한 단호한 어투.

-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네 경지가 아무리 높아도, 네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너는 인간임을.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몸을 돌린다.

아벨라르를 더이상 바라보지 않는다.

- 마음을 잃지 말아라. 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아벨라르 역시 그런 렌 행크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등을 돌린다.

몹시도 단호한 그의 의지를 읽은 탓이었다.

-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벨라르는 곧 밝은 빛무리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고.

- 탑주와는 이야기가 잘됐으니 안심하시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이오!

렌 행크는 거짓된 희망을 재차 불어넣는다.

자신들의 미래를 뻔히 알면서도 당장 이 순간만큼은 안심하길 바라며. 기뻐하길 바라며.

희망에 젖어들기를 바라며 계속 외치는 것이다.

그것이 정녕 옳은 것인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허나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빛의 기둥이 테트라디아 중심부에서 환하게 솟아올랐을 때에도.

그것과 함께 멀쩡하던 도시 자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 괜찮소! 내가 여기 남아 있지 않소이까! 걱정하지 마시오!

렌 행크는 홀로 남아 그리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렌 행크의 시야에 비춰지는 것은

- ...괜찮소. 나만 믿으시오.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어둠.

그들을 향해 심연이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두 번째 던전의 돌파에 성공하였습니다.」

* * *

두 번째 던전에서 얻은 키워드는 많았다.

아벨라르가 계속 이야기했던 저쪽 공간.

세상 끝, 그 너머로 함께 가자고 이야기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테트라디아는 아벨라르가 말한 그곳에 있는 것인가.

그곳은 어디이고 왜 굳이 공간술을 이용해 그곳으로 향했어야만 했는가.

다시 돌아갈 것이라 했으면서 무슨 연유로 실패하고 마탑의 바깥쪽에는 어비스 몬스터가 득실거리게 되었는가.

의문점은 많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다.

곧 알 수 있을 테니까.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

이제 고작 두 번째 던전을 끝냈을 뿐이다.

앞으로 남은 던전은 많을 테고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정보 또한 많을 터.

물론 끝까지 알아낼 수 없는 것은 있을 것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수백 수천만 명의 죽음을 외면했던 아벨라르.

수백 수천만 명의 목숨을 외면하지 말고, 숫자놀음에 휘둘리지 말고 맞서 싸우라 했던 렌 행크.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한 아벨라르.

현재가 있기에 미래가 이어질 수 있다 믿었던 렌 행크.

누구의 말이 더 정답에 가까웠을까.

자신이 저런 상황이었다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바로 들어가자."

그것만큼은 모든 던전을 다 돌아도 끝내 알 수 없을 터였다.

161화 돌파의 층 (5)

안티푸스의 파티는 한 자루의 창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던전을 돌파해 나간다.

「열네 번째 던전에 진입합니다.」

그리하여 어느덧 열네 번째 던전.

"진짜 미쳤는데?"

"괜히 안티푸스가 아니구나...."

"이 정도면 역대급 기록이 나오겠어."

저들끼리 중얼거리는 빙의자들.

그들이 이렇게 잡답이나 나누며 대강 상대해도 될 정도로 여유로웠다.

거칠 것 없이 뿜어지는 안티푸스의 오러와 함께 쏟아지는 스킬만 몇 개인가.

"들은 것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일단... 일등으로 도착하는 건 확정인 것 같지?"

"장담하는데 그건 무조건이야."

"그래도 그 지존 천마가 있잖아."

"에이 그래도 설마...."

그 말에 몇 달 전 무한의 층에서 보았던 지존 천마의 모습을 떠올리는 빙의자들.

끝없이 쌓여 있던 어비스 몬스터의 한가운데서 잿빛의 사신과 함께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던 이름 모를 스킬들.

순식간에 정리되어 버린 현장. 그 압도적인 폭력.

"음...."

"쓰읍...."

그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정면의 안티푸스를 바라본다.

콰아앙-!

이번엔 서리의 영역에서 대다수의 몬스터의 몸을 얼어붙게 하고 그 위로 휘두르는 것은 화염의 검. 붉은 오러.

한 번의 휘두름에 네다섯씩 썰려 나가는 어비스 몬스터의 몸뚱어리.

잠깐 사이에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가 버린 안티푸스의 뒷모습.

저런 괴물 같은 자가 뒤쳐진다는 것은 잘 상상이 가지 않으나, 그것이 지존 천마와의 경쟁이라 한다면 섣불리 장담할 수가 없다.

"지존 천마가 마음먹으면... 글쎄다."

"솔직히 장담은 못하겠는데...."

「열네 번째 던전을 돌파하였습니다.」

"에이 그래도 설마 이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겠지."

"그렇... 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 말도 안 되는 속도를 보라.

오로지 돌파만을 일삼는 안티푸스.

그 귀신이라도 들린 것 같은 행위에는… 설령 지존 천마라 할지라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을 터다.

아무리 그라도 이토록 최선을 다해 돌파하지는 않을 터였으니.

「열다섯 번째 던전에 진입합니다.」

이번 만큼은 안티푸스가 지존 천마의 앞에 놓일 것이 분명했다.

* * *

「개척자 - '히오 파블렌코'의 진입을 확인했습니다.」

「세 번째 던전에 진입합니다.」

세 번째 던전에 들어서고 보이는 것은 역시 직전의 장면과 이어지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상태.

빛을 삼킨 심연이 지척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 으, 으아아악! 도망쳐!

- 괴이다! 괴이다! 괴이다!

- 사, 살려 줘!

- 마, 마법사들은! 테트라디아는!

빼곡히 들어찬 난민들이 혼비백산했지만, 도망칠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지켜줘야 할 마법사는, 테트라디아는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그런 혼란 속에서 홀로 남은 마법사는 기다란 스태프를 들어올리고는 땅을 쿵 찍는다.

그에 맞춰 퍼져 나가는 연녹빛 파동.

- 걱정 마시오! 내가 남아 있지 않소!

드루이드 학파의 5서클 마도사 렌 행크.

그의 마법이 일대를 장악하며 퍼져 나간다.

- 내가 남아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소! 테트라디아 마법사들은 곧 돌아올 게요! 그러니 너무 두려워 마시오!

연녹빛의 파동은 마법이 되어 사람들이 모인 모든 구역을 감싸안았다.

- 마, 마법사님...!

- 마법사님이 계신 곳으로 모여!

- 살려... 살려 주세요!

드넓은 지역 그 바깥에서부터 빠르게 자라기 시작하는 것은 초록의 덩쿨.

두텁고 크게 자라나는 덩쿨이 서로 얽히고설켜 빠르게 넓은 공간을 감싼다.

모인 모든 사람을 보호하듯이 반구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초록의 방어막.

- 안심하시오! 이 안쪽은 안전하니 이대로 버티고 있으면 마법사들이 올 것이오!

그 안쪽에 있으면 이제 보이지 않게 된다.

몰려오는 심연이, 지척까지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가 식물에 가려져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안심한다.

믿고 싶지 않아도 절로 믿게 된다.

- 그, 그래. 테트라디아가 사라졌다니 말도 안 되지.

- 마법사님 말씀대로 기다리면 다른 마법사들이 해결해 줄 거야!

정말 이 초록의 보호막이 괴이를 막아 주고 그렇게 버티고 있다 보면 테트라디아의 마법사들이 저것들을 물리쳐 줄 것이라고.

- 가, 감사합니다.

부질없는 짓이다.

히오 역시 5서클 마도사의 경지에 올라 있으니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이 정도의 보호막으로는 몰려드는 심연을 상대로 몇 초도 버틸 수 없을 것임을.

가진 바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더라도 순식간에 뚫릴 것이고 그 안에 뭉쳐 있었던 만큼 모조리 심연에 물들어 버릴 것임을.

- 감사는... 살아남은 이후에 받겠소이다.

혼자서 밀어닥치는 심연을 막아 내기란 불가능하다.

공간술을 이용해 도시 자체가 사라져 버린 테트라디아가 당장 돌아올 가능성도 없다.

다만 확실한 점은, 절망이 짧을 것이라는 점.

고통은 찰나고 그 전까지는 헛된 희망을, 거짓된 꿈을 꿀 수 있다는 점.

그러니 렌 행크는 목이 갈라질 때까지 외치며 사람들을 다독이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계속해서 불어넣는 것이었다.

- 테트라디아에 들어가면 거주지가 주어질 텐데 그리 넓지는 않을 것이오! 가족이라도 자칫하면 흩어질 수 있으니 꼭 붙어 있으시게!

모두가 곧 죽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행하는 그 행동에는 정녕 의미가 있는 것인가.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허나 이것의 결말은 알 수 있다.

짙고 깊은 심연이 곧 녹색의 보호막에 닿을 테고 신성력도 없는, 그저 마력으로 자라난 식물의 보호막은 너무도 허망하게 꿰뚫릴 것이다.

그 안에 갇혀 있다시피 한 모두는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렇게 심연에 물들어 버리겠지.

믿고 있던 마법사들에게 버림받은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직전까지 품던 희망이 산산히 부서지기도 전에 그렇게 전혀 다른 생명체가 되어 버릴 테다.

그러니 더욱 궁금했다.

"...아벨라르 파블렌코."

그를 포함한 당대 최고의 마법사들이 계획한 것은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많은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팽개쳐 버리고 떠난 것인가.

렌 행크의 말대로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이 맞았을까.

- 테트라디아에는 까다로운 규칙이 제법 많소이다. 그러니 들어가기 전, 잘 숙지하고 최대한 이를 어기는 일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어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식물로 이루어진 결계에 그것이 닿는다.

그때까지도 내부의 사람들은 불안해할지언정 렌 행크의 말을 귀담아듣고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의 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각고의 공간 때처럼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지만, 그럼에도 자그마한 발악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허나 히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으니.

그저 이 끔찍한 장면이 빨리 지나고 이후 아벨라르의 기억을, 테트라디아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히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서 끔직한 장면이 끝나고 마법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그들의 결정에서 어떤 당위성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이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안심하고 기다리시오! 조금... 만 더 버... 티면 되... 니...!

렌 행크의 목소리가 치직거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 그래... 설... 마 테트라디아가 이 많... 은 사람... 들을 버릴 리가....

- 손 꼭 잡고 있... 어야 한... 다....

주위의 모든 소음이 갈라지고 찢어진다.

마치 버퍼링에 걸린 영상처럼 멈췄다가 움직였다가를 반복하더니 기어이.

[□□□□-!]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

공간이 이그러진다.

크게 외치는 렌 행크의 모습도, 간신히 진정하는 난민들의 모습도 일그러지고 갈라진다.

초록의 보호막 또한, 그것에 짓쳐들고 있는 어둠 역시도 그대로 멈춘 채 사라진다.

마치 그림책을 누군가 갈기갈기 찢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잡하게 찢어지는 공간.

히오와 클레어가 있는 세 번째 던전.

그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것이었다.

그 찢겨진 틈새로 보이는 것은 어둠.

혹은 심연.

[찾았다.]

괴이한 소리는 곧 인간의 언어로 변해 히오와 클레어의 귀에 꽂혔으니.

조각조각 흩어지는 공간.

푸른 하늘이 떨어져 내리고 그 사이를 차지하는 심연.

[리퓨에의 희망.]

어느새 그곳에는 거대한 눈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채였다.

* * *

[하찮다.]

던전이 깨져 나간다.

공간이 조각나고 부서져 내리는 와중에 울리는 목소리.

퍼져 가는 심연.

머리 위에 자리한 감시자의 눈.

[너희의 술수가 하찮고... 치는 발버둥 역시 하찮다.]

난민들의 모습도, 렌 행크의 굳은 얼굴도.

푸른 하늘과 그것을 잡아먹으며 들이닥치던 어둠마저도 깨져 나간다.

이 공간이 보여 주고, 간직하고 있던 기억을 깨부수며 심연이 들이닥친 것이다.

[지존 천마.]

털썩.

바로 등 뒤에서 힘이 풀린 누군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볼 것도 없이 클레어이리라.

[히오 파블렌코.]

보는 것만으로도 심연에 잠식당하게 만드는 감시자의 눈.

그 옆으로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대하고 끔찍한 무엇인가가 꿈틀거린다.

지난번 미궁에서 마주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감시자의 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외에 다른 심연의 무엇인가가 함께 있는 것이다.

[리퓨에의 마지막 희망.]

던전의 공간이 깨지며 히오의 몸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온 상황.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공간도 아니고 그런 상태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것은 방어.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높게 들어 올리고 즉시 발동하는 스킬.

「스킬 - '천상(天上)'이 발동됩니다.」

깨져 가는 공간과 짓쳐 들어오는 심연.

그 사이의 틈이 열리고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금빛 광휘가 쏟아져 내려온다.

희미하게 비치는 여신의 형상과 그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여신의 손길.

이 모든 것이 찰나라 불러도 좋을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간이 깨지고 감시자의 눈이 하늘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것을 마주한 클레어가 주저앉음과 동시에 발동된 스킬, 천상.

그럼에도 이전과는 달랐다.

미궁에서 마주한 것은 오직 감시자의 눈 하나뿐.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 또한 감시자의 눈이지만, 그 뒤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저것이 심연에 존재하는 본연의 존재라는 것.

심연에 물들어 오염되고 뒤틀린 채 탄생한 존재가 아니라 본래부터 심연과 함께했던 존재라는 것.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점.

그렇기에 그것이 내뱉는 말 한마디에 머리가 울리고 공간이 진동하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빛이다.]

그렇기에 그 한마디에 금빛 광휘마저도 위축되어 버린다.

최상위 방어 스킬 천상.

신성으로 범벅된 여신의 손길마저도 점차 줄어들며 그 영역을 어둠에게 내어주고야 만다.

심연에 밀리는 천상이라니.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며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경악만 하고 있을 수야 있겠는가.

「스킬 - '뇌제(雷帝)'가 발동됩니다.」

히오의 몸이 백색 광휘에 둘러싸인다.

두 눈 가득 쉴새없이 벼락이 휘몰아친다.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푸른 불꽃은 작은 태양이 되어 하늘을 탐낸다.

히오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감시자의 눈과 그 너머의 어떤 존재를 향해 뜨거운 불길을 뿜어 댄다.

그럼에도 자그마한 빛줄기 하나가 감시자의 눈 너머에까지 닿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심연.

그 자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기억을 전수하면 무언가 바뀌리라 믿었더냐.]

천상의 공간이 빠르게 줄어든다.

부서져 내리는 공간의 조각 사이로 진득한 심연이 짓쳐 들어온다.

빛을 집어삼키며 마치 손을 뻗어오듯이, 히오를 그대로 쥐어 버릴 듯이 빠르게 다가오는 심연.

그에 히오 또한 벼락과 청염을 합치며 대응하려는 순간.

「이상징후를 감지했습니다.」

「던전이 강제로 종료됩니다.」

히오의 눈에만 보일 메시지가 빠르게 떠오른다.

「세 번째 던전을 돌파했습니다.」

「네 번째 던전을 돌파했습니다.」

「다섯 번째 던전을 돌파했습니다.」

「여섯 번째 던전을 돌파했습니다.」

...

「열일곱 번째 던전을 돌파했습니다.」

동시에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무엇인가가 혼을 잡아채 저 멀리 던져 버리는 듯한 느낌.

부서져 내리는 던전의 공간, 감시자의 눈과 그 너머의 어떤 존재까지 까마득히 멀어지는 와중에도.

[우리의 땅을 되찾을 날이 머지 않았다.]

공간을 울리는 괴이한 목소리만큼은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듯 선명하게 들렸으니.

[빛은 가라앉고 어둠은 떠오를 것이니.]

「모든 던전의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공통 공간에 진입합니다.」

[그때는 너희가 심연이리라.]

그 마지막 말에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