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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20

110화 개판 (1)

"...이거였어."

밤하늘을 밝히는 금빛의 손.

어찌나 거대한지 섬 전체를 감싸고, 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것.

이는 다프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때... 그 모습은 역시...."

심연에서 의식을 잃기 직전에 보았던 모습은 역시나 제대로 본 것이었다.

당시에 느꼈던 따스함. 정신이 치유받는 듯 노곤해지던 마음. 가슴을 가득 채우던 충족감.

물론 지금은 저 속에 들어가 있지 않았기에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해서 그때는 몰랐던 압도적인 힘이 느껴진다.

어비스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섬.

들어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51층의 원정대가 들어갔던 것은 분명 저 섬 안이었으리란 것을.

한데 마냥 따스한 줄로만 알았던 여신의 손은 그 섬 자체를 부숴 버리는 게 아닌가.

저건 대체 무슨 힘인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기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차이가 이만큼이나 나는 것이다.

나서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조금 과하지 않나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한데 과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모자란 것이었다.

같이 원정대를 구성하자니.

얼마나 같잖은 말이었나.

그가 듣기에는 얼마나 우스웠겠나.

그러니 나서지 말라고 한 것은 그 딴에는 최대의 배려였던 것이다.

섬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으니.

섬을 부숴 버리면 그만인 일이었으니.

자신과는 힘의 크기도,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과 사고하는 방식까지 다른 사람이었다.

"대체... 무엇을 내다보고 있는 걸까."

지존 천마.

할 수만 있다면 그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와 보고 싶은 심정이다.

섬 하나를 가볍게 부수는 힘으로 그는 어디까지 계획하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도."

자신은 과연 저곳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주먹을 꽉 쥔 다프네의 눈동자에 추락하는 섬의 잔해와 그것을 바라보는 히오의 모습이 가득 담긴다.

* * *

다프네의 옆에는 윤슬아가 함께였다.

어쩌다보니 이현승을 사이에 두고 동행했고, 어쩌다 보니 하늘섬이 무너지는 경이로운 광경을 함께 보고 있는 것이다.

"하."

자신도 모르게 짧은 숨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최초의 각성자?"

어렴풋이 추측하기로 이현승은 최초의 각성자를 이끄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최초의 각성자에 대해 윤슬아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드러나지 않은 남태민의 진짜 힘까지 직접 본 사람이 윤슬아였다.

그리고 다프네와 남태민, 두 사람 다 최초의 각성자들을 아우르는 최상위권 인물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

한데... 지금 저 꼴을 보라.

바로 옆의 다프네마저도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먹을 꽉 쥐고 있지 않은가.

저 힘은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정말 이게 인간이 가능한 일이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빛의 손은 자애롭고 성스럽다.

그러면서도 거대한 섬과 그 속에 가득한 몬스터를 단번에 부숴 버릴 정도로 강하기도 한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겠나.

신의 힘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신의 힘을 다루는 사람.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가정.

설마 이현승은....

"신인가?"

최초의 각성자를 만든, 뭐 그런 존재인가?

"하하...."

스스로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이라니.

정말로 몇 시간 전이었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윤슬아답지 않은 논리라고는 일절 없는 것.

허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그런 생각이 마냥 허황되지는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현승이란 존재를 아무리 알아보려 했건만, 나오는 것이 전혀 없었지 않았나.

그에 대한 기록도, 그를 아는 사람도.

신분을 증명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 역시도 그가 신이라면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하... 진짜...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시 신은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일 테다.

분명 그럴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윤슬아의 눈동자는, 스스로에 대한 불확신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 *

불꺼진 방.

모니터의 불빛만이 남자의 얼굴을 포함한 상반신을 비추고 있다.

벌써 몇 시간째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영상이나 찾아보고 있었다.

무서웠기에 도망쳤다.

- 실력에 비해 과한 명성을 얻은 머저리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마무리되었고.

- 부끄러움을 알아라.

부끄러웠기에 틀어박힌 것이다.

- 지켜보마.

그 말이 너무도 두려워 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모니터 뒤에 숨어 봤던 것을 보고 또 보는 중이었다.

남자의 화면에 재생되고 있는 것은 그날의 영상.

보고 있음에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기적.

그날의 영상 중에서도 편집이 가장 잘된, 벌써 조회수만 수십억 회를 돌파한 영상이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어둑한 바다. 해가 진 하늘.

그 사이를 부유하는 섬은 유독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런 밤하늘을 가르는 새하얀 한 줄기 빛이 보인다.

그것이 조금씩 확대되면 그제서야 모습이 자세히 드러난다.

하늘을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새하얀 말과 그 위에 올라탄 한 사내의 모습.

그쯤에서 배경음악은 점점 빨라지고 계속해서 확대되어 가던 사내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 찼을 때.

어느새 사내는 섬 앞에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둡고 거대한 섬에 맞서는 새하얀 말과 사내의 모습은 몹시도 작아, 언뜻 보기에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싸움처럼 느껴진다.

허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가볍게 들어올리는 지팡이.

둥- 강렬해진 음악은 심장을 울리고 동시에 카메라의 시점이 위로 확 올라간다.

그 순간.

둥- 화면에 가득 차는 것은 거대한 마법사의 형상.

어둠에 잠긴 섬과 그 위에서 섬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늙은 마법사의 모습.

자애로운 얼굴로, 단호한 눈빛으로 섬을 내려다보던 마법사가 지팡이로 점을 찍듯 허공의 어느 지점을 톡 건드렸고.

파바바박- 소리와 함께 생겨나는 수천 개의 눈동자가 섬의 주위를 모조리 감싼다.

섬의 하나부터 열까지 분석해 내겠다는 듯 압박해 들어가는 수천의 눈.

화면은 그런 섬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 번 비추고 사내의 모습을 비춘다.

두 모습을 번갈아 가며 비추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그에 맞춰 고조되는 음악.

그 속도가 극에 이르렀을 때.

모든 소리가 뚝 멈추고.

보이는 것은 미소 짓는 사내의 얼굴.

- 천상이라.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며 하늘 위로 쭉 뻗는 지팡이.

그 뒤로 일어난 일은 기적이었다.

영상으로 보고 있음에도 그저 기적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황홀한 광경.

하늘에서부터 금빛 광휘가 내려와 어둠을 씻어 내려간다.

그래, 씻겨 내려간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리라.

섬에 불결한 어둠이 물러가고 섬이 육중한 울음을 토해 내며 균열하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그 거대한 것이 무너지며 추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제야 드러나는 섬 내부의 모습.

그 안에 빼곡하게 존재하고 있던 기괴한 형태의 괴물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몬스터들이 마치 혼이라도 빠진 것처럼 모조리 쓰러져 있는 것이다.

추락하는 섬과 함께 그대로 수장되는 것이었다.

영상은 추락하는 섬과 하얀 말에 탄 채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사내의 뒷모습을 함께 담으며 그렇게 마무리된다.

"...지존 천마...."

남자는 영상 속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야 최초의 각성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내였고 남자는 최초의 각성자 중 한 명이었으니.

"나, 나는... 진짜 어쩔 수 없었어."

항상 가벼운 마음이었다.

벤타이얼 속 세계로 진입할 때마다 말이다.

로그아웃 이용권 역시 처음에야 부담됐었지, 명성을 어느 정도 쌓고 나니 크게 부담되는 것도 아니었다.

로그아웃 한 번 할 때마다 포인트를 무지하게 벌었으니까.

온세상이 자신을 찬양하고 떠받들어 주었으니까.

그러니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자신과 비슷하거나 훨씬 더 강한,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런 대단한 각성자들이 맥도 못추고 쓰러져 가는 상황을.

그러다 못해 기어이 머리가 터져 나가며 죽는 모습까지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나 로그아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자신이 거기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혹, 공략의 시작처럼 로그아웃이 안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로그아웃을 했고 다행히 로그아웃 이용권은 잘 작동되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안도감.

그리고 공략은 실패했다.

책임은 통감하고 있었다.

실패 이후에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숨어만 있을 생각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어비스 게이트가 나타날 거고 각성자들이 다시 모일 테니 자신도 그때 다시 힘을 내면 되지 않겠는가.

저쪽 세상이야 모르겠고 현실 세계인 이곳만큼은 지켜 내야 했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나서려 했단 말이다.

그런데 나서기도 전에 일이 끝나 버렸지 않나.

지존 천마, 랭커들의 랭커.

그가 나서서 순식간에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하지만 뒤늦게 밝혀진 그의 마지막 말에.

- 부끄러움을 알아라.

곧장 숨어 버린 것이었다.

왜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부끄러움을 알아 버린 것인지.

모르겠다만... 문득 그냥 두려웠다.

- 실력에 비해 과한 명성을 얻은 머저리들.

이것 이상으로는 더 해낼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이 앞은 이제 지존 천마 정도나 되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세상의 멸망을 막는다니.

너무도 무거워서 느껴지지도 않았던 그 무게감이 이제서야 가늠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자는 불 꺼진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모니터 화면 속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곳에서 빛나는 지존 천마를.

너무도 여유로운 그 모습을 눈에 새기고 가슴에 새긴다.

그 아래에 달린 댓글만 수백만 개.

각 국가의 언어로 온통 그를 찬양한다.

그 힘에 전율한다.

그럼에도 한 톨 질투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경지임을 알기에.

질투대신 이는 것은 오직 동경.

남자는 화면을 들여다보던 눈을 서서히 감는다.

자신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앞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지존 천마와 같은 괴물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일 터.

더 나아가야 하는가.

여기서 멈춰야 하는가.

마음속에 파도가 치는 것만 같다.

그런 현상은 최초의 각성자 혹은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 대부분에게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 * *

어비스의 약점은 신성력이다.

생각해 보면 힌트는 이전부터 꾸준했다.

게임 속에서도 신성력은 유효했고 오염된 땅이나 사람을 정화하기까지 했었지 않나.

다만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사제가 지극히 적었을 뿐.

그리고 벤타이얼 세계관에서 어비스의 침공에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는 신성국 히베루니아였으니 이 역시 꽤나 직관적인 증거인 셈이다.

성녀의 부재, 전통성이 부족한 교황, 추기경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 여러 이유가 있긴 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어비스 몬스터가 가장 먼저 성국을 침공했다는 것이다.

그저 우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생각해 본다면 과연 그것이 우연일까.

본능적으로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것을 먼저 제거하려 든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어비스에 잠식당한 그린 드래곤, 에리얼을 만나고서 더욱 확실해졌다.

이미 영혼 대부분이 어비스 기운과 동화되어 버린 상태.

그런 상태에서 고위 신성 마법과도 같다는 '천상'을 쓰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이미 히오에게 새겨진 스킬이었기에 굳이 실험해 보지 않아도 곧장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비스와 관련된 것의 완전한 소멸.

정화가 아닌 소멸이다.

그렇기에 용에게 천상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고 퓨리피케이션으로 천천히 정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설명이 길었는데 요약하자면 어비스의 약점은 신성력.

그리고 히오가 얻은 방어계열 최상위 스킬 '천상'은 신성력을 요하는 스킬.

마침 마력 스탯도 명성 포인트 상점으로 올릴 수 있는 500에 거의 도달했다.

이제 얻을 명성 포인트로 마력을 모두 올리고 나면, 신성력을 올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모든 어비스 게이트가 소멸되었습니다.」

「귀환합니다.」

아무튼,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아릴레이야.

분명 어비스에 의해 침략받았을 아릴레이야와 제국이 멀쩡하기를.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히오는 눈을 떴고.

눈을 뜸과 동시에 보인 풍경은.

"이... 뭔 씹."

개판이었다.

111화 개판 (2)

개판.

이보다 더 잘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히오가 마지막으로 있던 장소는 잠든 용의 바로 앞.

거대한 신목(神木) 아래, 용은 잠들어 있었고 레가르다는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그런 고요함이 썩 잘어울리는 곳이었다.

한데 다시 눈을 뜬 곳은.

꽈아앙-!

전장의 한복판.

콰앙-!

마력을 머금은 화살이 날아다니고 여기저기서 폭발이 인다.

느껴지는 것은 진득한 죽음의 기운.

「특성 - '유령의 눈'이 발동됩니다.」

보이는 것은 육을 떠나가는 영혼들.

머리 위로는 거대한 나무의 가지가 후웅- 살벌한 바람을 일으키며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에 걸린 새카만 덩어리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간다.

아릴레이야 특유의 나무와 건물이 어우러진 도시 사이사이로 불길이 치솟는 것도 보였으니.

「특성 - '영체(靈體)'가 발동됩니다.」

「스킬 - '서먼 팬텀 스티드'가 발동됩니다.」

즉시 팬텀 스티드에 올라타 하늘 높이 솟구친다.

온갖 기운들이 섬의 전역에서 뒤엉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각종 마력 반응. 분출하는 오러.

죽음의 기운과 어비스의 불길한 기운까지.

레가르다가 있음에도 어찌 이 정도까지 피해를 입는가... 라는 의문은 잠시 접어 두고, 우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테다.

"진짜 개판이네."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섬의 풍경이 더욱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온다.

나무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며 활시위를 당기는 엘프들의 모습.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새카만 몸체로 허공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몬스터였다.

히오도 처음보는 종류의 몬스터.

얼핏 보기에는 유령의 몸이 새카맣게 물든 것처럼 보였는데 괴상한 기운을 쏟아 내거나 죽기 직전에는 몸이 터지는 둥,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 음... 뭔가....

"왜?"

- 아닐세... 일단은 좀 더 보자고.

푸르넬이 흔치않게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것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히오는 마법을 준비한다.

'천상'을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조금 전에 신성력을 전부 쏟아 낸 참이 아니던가.

그러니 다른 스킬로 녀석들을 직접 상대해야 할 터였다.

어비스 몬스터.

녀석들을 죽여도 아무 문제 없음은 확인했다.

바깥 세상에서 섬 하나를 가라앉혔지 않은가.

그럼에도 히든 특성의 패널티는 적용되지 않았다.

- 천상으로 어비스 기운만 빼내고 육체에 타격은 없었으니 패널티도 받지 않은 것이 아닌가?

"날카로운 지적이긴 한데."

육체적 피해를 입힌 게 아니라 '천상'으로 어비스 기운을 소멸시킨 것이니 괜찮았던 게 아니냐는 의미.

"이게 그렇게까지 사정을 봐주는 특성은 아니란 말이지."

히든 특성을 얻고 이것저것 많이 실험해 본 결과, 인과라는 것이 있다.

히오가 직접 몬스터에게 육체적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히오로 인해 섬에서 추락했고 육체에 손상을 입었을 터이니 이건 패널티를 받아야 마땅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결국 패널티는 없었다.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생명체가 아니거나, 지성이 없거나."

상황으로 봤을 때는 후자로 판단되기는 한다.

녀석들에게는 오직 본능만이 있을 뿐, 지적인 사고 같은 것은 없어 보였으니까.

"여하튼, 중요한 건 패널티 없이 상대할 수 있다는 것."

인내력이 그리 많이 쌓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올리기 힘든 것이었으니.

아릴레이야의 전역이 보일 정도로 높게 올라온 히오가 지팡이를 앞으로 뻗는다.

"청염."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주변에 화악- 퍼져 나가는 푸른 불꽃.

하늘을 뒤덮어 가는 청염에게 의지를 전달한다.

"다 태워."

동시에 하강하기 시작하는 푸른색의 향연.

지상에 있는 존재는 마치 하늘이 덮쳐들어오는 듯한 착각을 받았으리라.

물론 어비스 몬스터에게는 지성이 없었고, 지상의 엘프들은 청염 뒤에 떠 있는 히오를 발견했으니.

"마법사님이 왔다!"

푸른 화염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가며 몬스터를 잿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 가기 시작한다.

이전처럼 스스로의 몸을 폭사할 새도 없이, 닿는 즉시 바스라지는 시커먼 형체.

다른 몬스터처럼 흔한 울부짖음 한 번 없이 그저 그렇게 사라져간다.

"남은 마력이... 아슬아슬하겠는데."

마력 스탯이 거의 5서클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릴레이야 섬은 넓다.

게다가 대충 청염을 펼쳐 놓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 중반부 몬스터이지 않은가.

제법 마력과 집중을 쏟아서 하나하나 해나가야 하는 전투인 것이다.

"밀어붙여라!"

"마법사가 함께한다!"

그래도 혼자 다 잡아야 하는 게 아니었기에 부담이 덜했다.

가장 든든한 것은 역시 섬의 중앙에 위치한 나무.

신의 나무라 불리는 그것이 거대한 나뭇가지를 활용해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있었다.

"저기서 마력을 느꼈을 때부터 혹시나 하긴 했는데...."

나무 하나에 테트라디아와 비견될 정도의 마력량이 느껴졌을 때부터 심상치 않긴 했는데... 저게 움직이는 거였다니.

"그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데 움직이는 것 정도야 당연한 건가."

고작 움직이는 게 끝일까?

아마 더 있지 싶은 생각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혼자 이 정도로 중얼거렸으면 푸르넬이 무게 잡으면서 아는 척 답해 줘야 하는데 너무 조용하다.

히오의 혼잣말이 점점 늘고 있는 이유가 이 말 많은 유령 때문인데... 아무런 호응이 없으니 허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 푸르넬은.

- 아... 알겠군.

깊게 탄식하며 말한다.

- 저것들의 정체를 말이야.

"저것들?"

히오가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것은 펑펑 터져 가는 검은색의 형체.

마치 유령과도 비슷하게 날아다니는 검은색의 덩어리.

정체라고 한다면 저것 외에는 말할 게 없지 않은가.

"어비스 몬스터 말하는 거야?"

- 맞네... 그래, 그런 거였구먼.

말을 이어가는 푸르넬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 저건 정령이라네.

"...정령?"

아래를 바라보면 여전히 건재한 청염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에 힘껏 저항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검은 덩어리들 또한 보인다.

"저게 정령이라고?"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파괴만 일삼을 뿐인 덩어리.

- 심연의 기운에 대부분이 가려졌지만, 아주 희미하게 정령의 흔적이 남아 있어. 형태도 정령의 형상과 비슷해. 종은 모르겠다만... 중급 정도의 정령인 것 같군.

"정령이... 어비스에 물들었다고."

푸르넬의 말은 저 어비스 몬스터가 본래는 정령이라는 말이었다.

공략에 실패하고 게이트를 통해 넘어왔을 게 분명한 저 몬스터가, 원래는 정령이었다고.

"이렇게 되면 이전에 잠시 생각했던 가설에 힘이 더 실리네."

어비스 몬스터가 과거에 멀쩡했던 존재라는 것.

혼까지 심연에 물들어 버려서 저리 되어 버렸다는 가설.

그렇다면 이전에 죽여 왔던 모든 어비스 몬스터가 사실은 혼이 타락해 지성을 상실한 존재.

어쩌면 과거에는 멀쩡한 인간이었을 수도 있었을... 그런 존재들이었단 말인가.

"되돌릴 수는... 없겠지."

-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미 저주 받은 저 기운과 일체가 되어 버렸어. 용과는 경우가 다르단 말일세. 그건 미리 마법으로 기운을 약화시키고 스스로를 봉인한 데다가 혼의 격까지도 아득히 높았기에 가능한 것이지. 저건... 그냥 몬스터라고 생각하게나. 그게 마음 편해.

발밑을 보면 여전히 엘프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검은 덩어리들이 보인다.

청염에 하나둘씩 사라지는 모습이 보인다.

저것들이 정령....

아니, 잠시만 그 전에.

"그러고보니 용이 없네?"

- 음? 그렇네?

오자마자 개판된 섬의 풍경에 우선 이걸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몰랐는데 용이 없어졌지 않나.

용과 함께 있어야 할 레가르다 역시 없다는 말이었고, 그 말은.

"...망했네."

어비스에 물든 용이 깨어났다는 말이었다.

저 아래 새카맣게 물든 정령처럼 타락해 버린 용이.

* * *

어비스 몬스터, 타락한 정령은 결국 완전히 아릴레이야에서 소멸되었다.

도시 곳곳이 파괴되기는 했지만, 아릴레이야는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질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애초에 다른 이유로 진영이 붕괴된 것이 문제였지, 크게 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히오의 합류 덕에 피해가 크게 줄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릴레이야를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마법사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이시도르가 감사인사를 건네 왔다.

그럼에도 특유의 고귀함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제법 무리를 한 것인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신목을 움직인 것이 다름 아닌 이시도르의 능력이라고 하니.

레가르다마저도 빠져나간 이 시점에서 한계까지 무리하며 능력을 사용한 것이다.

"제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막아 냈을 텐데요 뭘."

"흘려도 되지 않을 피를 흘리지 않게 해 주셨으니까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기에 외려 더 빛나는 고귀함.

그렇기에 그녀는 가장 고귀한 엘프였다.

"...예."

이시도르는 히오가 갑작스레 왜 사라진 것인지.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자칫하면 따지는 모양새가 되는 까닭이었다.

히오가 아릴레이야를 지켜 줄 이유가 하등 없음에도 왜 갑자기 사라졌냐고 묻는 것은 너무도 무례하지 않은가.

물론 히오 입장에서는 차라리 물어봐 주는 게 나았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자신은 위험할 때 도망갔다가 전투가 거의 다 끝날 때 슬금슬금 나타난 놈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가만히 있어봤자 이시도르는 평생 묻지 않을 기세였기에 그냥 히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병이 있어서요."

"...네?"

"저 어비스 게이트가 터지면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이동되는 그런 병... 아니, 저주? 마법? 뭐 그런 것 때문에 간 거지 무서워서 도망쳤거나 그런 건 아니거든요."

"아... 네.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요."

"아하."

실수한 것 같다.

괜히 분위기만 더 어색해졌지 않나.

"그건 그렇고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런 분위기를 깨고자 히오가 이시도르에게 물었고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답해 주었다.

"저 불길한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나오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빠르게 대응한 덕택에 포위망도 잘 갖추어져 있었고 레가르다와 이시도르의 능력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용이 갑작스레 눈을 뜨고...."

정화되지 못한 용이 눈을 뜨고 순식간에 와해되어 버린 진형.

용은 강하다.

지성을 거의 상실해 마법을 쓸 수 없음에도 이 세계 최강의 생명체인 것이다.

"용이 날뛰고 레가르다 님이 그것을 막기 위해 뛰어드셨죠."

신목과 도시가 파괴된 이유가 그 때문이었고 그 틈에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밀려들어 오기까지 했으니.

"...개판이었겠네요. 그래서 용은 어디로?"

고개를 가로젓는 이시도르.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섬 밖으로 날아갔고, 레가르다 님은 그 뒤를 쫓아가셨고 저희는 남아서 밀려드는 몬스터를 막느라...."

"골치 아프게 됐네요."

걸어다니는... 아니, 날아다니는 핵폭탄이 대륙으로 향했다.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위해 갑자기 대륙으로 향했는지 모르기에 더욱 위험한 것.

레가르다가 그 뒤를 쫓았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 혼자서 용을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그의 강함은 충분히 알지만, 그 상대가 용이라면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디로 향했는지 그걸 우선 알아야 하는데...."

피곤한 얼굴로 그리 중얼거리는 히오.

그리고 그 순간.

『제가 알아요! ( `-´ )』

그의 눈앞에 번쩍번쩍 솟구치는 화려한 메시지.

『저는 느껴져요!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깨끗한 혼이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

프레이야였다.

"그걸... 알 수 있어?"

『넹! (๑'ᵕ'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프레이야.

그러고보니 프레이야는 용의 조각이 아닌가.

용의 위치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움직이려다 말고 멈칫하는 두 다리.

당장 움직이기에는 최상위 스킬을 너무 오래동안, 많이 사용했다.

이 세계로 넘어오기 직전에 사용한 '천상'으로 신성력을 모두 소모했고 여기서 마력을 절반 이상 소모했으니.

어쩌면 다시 크게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 상태로는 상당히 불안한 것이었다.

"...쉬었다 갈까."

마력과 신성력이 회복되는 속도는 무척이나 더디다.

말로는 조금 쉰다고 하지만, 전부 회복하려면 며칠 이상을 쉬어야 할 테고 그 정도의 시간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고야 말 터.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완전한 회복은 무리고 조금이라도 신성력과 마력이 돌아오면 곧장 이동하는 수밖에.

조금 불편한 히오의 표정을 읽었음인가.

『네! 천천히 가요! 레가르다 아저씨가 바로 따라갔으니 괜찮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도 밝게 웃으며 힘찬 메시지를 띄우는 프레이야.

『레가르다 아저씨는 세상 누구보다 용을 아끼는 사람이니까! 괜찮아요!』

"...그래."

히오는 씁쓸하게 웃으며 프레이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그게 문제였지만.

그래서 더욱 불안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구태여 프레이야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조금이라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히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마나 호흡법이라도 하고 있으면 신성력은 몰라도 마력은 평소보다 빠르게 회복되었으니.

"몇 시간은 걸릴 거야. 어느 정도 회복되면 내가 찾아갈 테니 너희도 좀 쉬고 있어."

프레이야에게 그리 말하며 히오는 바닥에 앉은 채 눈을 감았고.

그 순간.

띠링-

「'하늘섬을 부숴 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하늘섬을 부숴 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신의 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신의 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진정한 각성자'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각성자'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대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대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위대한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명성 증가로 0.5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0.5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0.5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명성 증가로 0.75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0.75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0.75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명성 증가로 0.4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0.4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0.4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눈을 감자마자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의 행렬.

감당 안 될 정도로 치솟는 포인트의 숫자.

그 끝을 모를 엄청난 메시지의 양에 히오는 그대로 눈을 번쩍 떠 버린다.

"회복 끝!"

회복이 별건가.

그냥 포인트로 스탯 올리면 그게 회복이지.

"빨리 가자! 뭐 해?"

그렇게 다시 벌떡 일어나며 프레이야에게 말했고.

『...?』

프레이야의 머릿속에는 생에 처음으로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 112화 개판 (3)

「스탯 '마력'을 80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마력'이 +80 상승합니다.」

「스탯 '신성력'을 1,01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신성력'이 +101 상승합니다.」

왜 빙의자들이 이곳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기는커녕, 허구한 날 로그아웃만 주구장창 해대는지 온몸으로 체감하는 중이었다.

단기간에 명성 포인트가 엄청나게 오른다고는 들었지만... 원래 이 정도로 폭이 가파른 것인지.

대폭 스탯을 구매했음에도 오르는 속도가 줄지않고 포인트가 계속 쌓이는 것이다.

"드디어... 스탯 하나를 다 찍었네."

[이름 : zl존☆천마★]

[근력 : 50]

[민첩 : 50]

[체력 : 50]

[마력 : 545 (+45)]

[영력 : 45]

[신성력 : 121]

[주 특성 : 마력 감응의 천재]

[부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보조 특성 : 모든 게 두 배!]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0 / 1000)]

[특성 : 유령의 눈]

[특성 : 영체화]

[스킬 : 뇌제(雷帝)]

[스킬 : 청염(靑炎)]

[스킬 : 사신(死神) 소환]

[스킬 : 천상(天上)]

...

['악당을 물리친 수호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이메니아를 지켜낸 수호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벼락을 다루는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하늘섬을 부숴 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신의 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각성자'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대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이곳에서 퍼지는 명성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오르고 있었고 바깥 세상에서 얻은 명성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한꺼번에 막대한 명성 포인트를 올리고 있었다.

덕분에 마력 스탯을 한계까지 찍은 것을 넘어, 신성력까지 많이 올릴 수 있게 된 것.

그말인즉, 곧장 출발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어떻게 가지?"

본디 계획은 팬텀 스티드를 타고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만큼 훌륭한 이동 수단이 없으니 말이다.

허나 용이 어디로 향했는지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지금, 프레이야의 존재는 필수였고... 당연한 말이지만, 프레이야는 팬텀 스티드에 올라탈 수 없었으니.

『우와! 이거 손을 막 통과하네요?』

소환된 팬텀 스티드를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손을 뻗는 프레이야.

하지만 그 손은 당연하게도 팬텀 스티드를 뚫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영계의 말인 팬텀 스티드에 살아 있는 생명체가 올라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생각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손을 휙휙휙 움직이다 못해 몸까지 들락날락거리는 프레이야를 보며 히오가 가만히 중얼거린다.

"실질적인 마법을 구사하기는 힘들어도 일단 서클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니까."

- 반쪽짜리 서클이어도 모양은 확실히 잡혀 있으니 말이야. 테트라디아로 이동할 생각이지?

"맞아."

테트라디아로 이동해 포탈을 타고 제국의 남부나 수도로 향한다.

이왕이면 수도로 향해 대략적인 상황을 듣고 가능하면 이오스의 힘까지 빌려 단번에 이동할 수 있으면 최선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 모든 건 프레이야가 테트라디아의 포탈을 이용할 수 없다면, 폐기해야 할 계획이다.

"그만하고 이제 가자. 프레이야."

팬텀 스티드 속에 들어가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프레이야는 히오가 팬텀 스티드를 돌려 보내자 입맛을 다시며 히오의 다리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렇게 곧장 마법사의 집으로 향하는 히오와 프레이야. 옆의 이시도르까지.

지하 4층으로 향하는 일행의 주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히오는 히오 나름대로.

프레이야와 이시도르 역시 그들 나름대로 많은 걱정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용을 지켜야 하는 자신들의 천 년 사명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지키기는커녕 세상에 재앙을 풀어 버렸으니 마음이 무거운 것이었다.

"또다시... 부탁 드려도 될는지요."

그렇기에 이시도르는 잘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다시금 히오에게 부탁한다.

"용을 막아 주세요."

불행히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힘은 너무도 미약하기에 무례한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이에 대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든 걸 다 바쳐도 과연 보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용을 막아 내야 했으니.

그말에 프레이야 역시 미안함을 담아 히오를 올려다본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별다른 능력도 없는 용의 지극히 작은 조각.

그럼에도 자신의 일이지 않나.

하지만 계속해서 히오에게만 의지하고 있지 않나.

히오는 그런 시선을 받으며 대충 뒷머리를 긁적인다.

"뭐... 용을 소환한 건 일단 저이기도 하니까 제가 해결해야죠."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대답인 줄 알면서도 히오는 그리 대답했다.

어지러워질 미래에는 자신이 아릴레이야의 힘을 빌릴 날도 분명 올 것이기에.

"다음에 제가 부탁할 일이 분명 있을 겁니다."

"마법사님의 부탁이라... 무슨 부탁이든 온힘을 다해 행해야겠군요."

"하하하. 그 말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어떤 부탁을 할 줄 알고."

"못해도 용을 부활시켜 달라, 용을 막아 달라는 것보다는 상식적인 부탁이겠죠."

"...그건 인정합니다."

짧은 담소 끝에 지하 3층에 도착했고, 파블렌코 목걸이의 힘으로 지하 4층의 문을 열자 이번에는 프레이야가 불안한 눈빛으로 히오를 바라본다.

그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생겨 나는 문자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저 포탈이 저를... 마법사로 인정해 줄까요?』

히오에게 설명은 들었다.

저 포탈은 고대 도시로 이어진 포탈이며 오직 마법사만 이용할 수 있다고.

그러니 이 작은 용은 무서운 것이다.

혹, 저것이 자신을 마법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나름 드래곤의 조각인데 그것마저도 부정당하면 그때는 어찌해야 할까.

그런 마음이 이는 것이었다.

"안 해 주면 저게 엉터리인 거지.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정말요?』

"그럼. 저게 좀 낡았잖아. 고장 날 때가 되기도 했고 또 옛날 마법사들이 좀 고리타분한 면이 있어.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휴... 다행이다!』

히오의 말을 진정으로 믿는 것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는 프레이야.

히오는 피식 웃고는 지하 4층으로 내려간다.

포탈 앞에서 손을 올리고 불어 넣는 마력.

「확인된 마력은 4서클입니다.」

「포탈과 연결된 지역은 고대 도시 테트라디아 - '마법사의 탑'입니다.」

「포탈에 진입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차오르는 새하얀 빛.

프레이야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당부한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서클의 마력을 움직여 봐."

그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프레이야.

그런 모습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이시도르의 얼굴까지 보인다.

그녀에게 걱정 말라는 듯 작게 웃어 주고 다시 프레이야에게로 향하는 시선.

작은 몸에 작은 마력이 열심히 꿈틀대는 것이 느껴진다.

맞잡은 손을 통해 마력을 조금씩 흘려 넣어 주자.

"네 서클은 생각보다 완전한 서클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 나조차도 처음에는 깜빡 속았을 정도였으니 자신감을 가지고 마력에 온 신경을 집중해."

프레이야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다.

모쪼록 마법에 관한 히오의 말이라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도착해 있을 거야."

점점 더 밝아지는 빛.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집중하는 프레이야의 표정과 그 뒤에 다소곳이 서 있는 이시도르.

그 고귀한 눈과 마주침을 마지막으로 히오 또한 슬며시 눈을 감는다.

"이제는 잊혀진 위대한 마법사의 상징. 오직 마법사만이 출입할 수 있는 신비의 땅."

따스한 빛을 느끼며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나지막이 말하는 것이다.

"그 땅에 세워진 건물은 오만할 정도로 높았고 그 위세는 신과 눈높이를 같이할 정도였다고 하니."

완전히 몰입하고 있는 프레이야. 즐거운 듯 옅은 미소를 띤 히오.

그 둘을 감싸는 새하얀 빛.

아득해지는 정신.

눈을 감았음에도 환하게 밝아져 오는 시야.

"옛사람들은 그중 가장 높은 건물을 보며 동경하고 경외했으며 또 두려워했다더라."

조금 낯설은 느낌에 프레이야가 감았던 눈을 서히 뜬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하 4층의 공간이 아닌, 새하얀 타일이 깔린 높고 넓은 새로운 공간.

벽을 대신하는 건 전부 마법으로 강화된 유리였으며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흉측하고 거대한 어비스 몬스터.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히오의 목소리.

"그리하여 모두가 부르기를."

칙칙한 하늘은 손닿을 듯 가까웠으며 그와 대비되는 내부는 새하얗고 깔끔하다.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마법 련 서적이 널려 있었으니.

"과연 마법사의 탑이로다."

테트라디아, 마법사의 탑에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와악! ヾ(。ꏿ﹏ꏿ)ノ゙』

* * *

마탑에 온 김에 5서클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비스 게이트가 터진 대륙이 어떤 위기를 겪고 있을지.

풀려난 용이 어떤 재앙을 선사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5서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우와아! ᑦ(⁎◕ ˕ ◕)ᐣ』

머리 위에 감탄사를 잔뜩 띄워 놓고서는 오도도도 뛰어다니며 곳곳을 구경하는 프레이야.

"프레이야. 이리 와 봐."

『네에! ⸜(*'꒳'* )⸝』

히오는 그런 프레이야를 부른 뒤,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여 이전에 쓰던 장비를 꺼내 들었다.

"내가 예전에 쓰던 건데."

꺼내 든 것은 히오가 쓰고 있는 모자와 비슷한 생김새의 커다란 고깔모자.

지금의 정식 마법사용 장비 세트를 얻기 전에 쓰던, 입문 마법사용 모자였다.

"테트라디아에 왔다는 건 한 명의 마법사로 인정받았다는 거니까 이제 네게도 자격이 있어."

물론 크게 의미는 없을 터였다.

프레이야는 결국 일반적인 마법은 사용하지 못할 테고 그런 존재를 마법사라고 칭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이 세상 남은 마지막 마법사가 그리 인정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머리보다도 훨씬 큰 모자를 덮어쓴 프레이야가.

모자를 쓰면 얼굴까지 푹 뒤집어써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된 프레이야가, 이토록 좋아하고 있지 않나.

『제가... 제가 정말 마법사로 인정받은 건가요??』

모자를 들추고 빼꼼 올려다보는 눈망울에는 눈물마저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으니, 고작 이 한 마디가 무엇이 그리 어렵겠는가.

"그래."

혼에서 떨어져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아직 어리고 성숙치 못한 영혼에 부담감이 얼마나 막중했을지.

그 작은 어깨에 아릴레이야 모두의 사명이.

천 년의 임무가 달려 있는데, 모두가 이 작은 아이만을 보고 희망을 품고 있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런 노력 끝에 받은 한마디 인정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o˂ू) ૮˃ ֊ ˂ ა (。˃ ᵕ ˂ ) ╰( ^o^)╮』

그러니 프레이야는 말하는 것도 잊고 감정 표현만 잔뜩하며 신나게 뛰어다닌다.

모자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넘어지기도 했는데, 그것을 벗을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웃으며 다시 일어난다.

모자를 고쳐 쓰고 널린 마법 서적을 뒤적이며 근엄한 마법사인 척도 한번 했다가, 유리벽을 향해 뛰어가 밖을 내다보며 감탄도 했다가.

그러다 문득.

『어?』

우뚝 멈춰선 채 이상하다는 듯 갸웃거리는 고개.

『갑자기 용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요!』

몸을 홱 돌려 히오에게 보이는 메시지에는 다급함마저 느껴지는 것이었으니.

"멀어서 그런 거 아닐까? 테트라디아는 제국에서도 잊혀진 북쪽에 있거든."

서쪽 바다의 아릴레이야 섬에서 머나먼 북쪽까지 한순간에 이동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허나 프레이야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같은 세상에 있다면 어디에 있든지 그 방향이라도 유추할 수 있어요. 같은 혼이니까. 그런데 그것마저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그제서야 히오의 표정도 심각해진다.

세상 어디에 있든 본체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프레이야.

한데 갑자기 그게 느껴지지 않을 이유는 생각해 보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다지 가정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용이 죽어 버렸다거나....

아니면.

"용과 같은 세상에 있는 게 아니라거나."

같은 세상에 있다면 무조건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프레이야가 장담했지 않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할 수 있는 가정은 단 둘뿐.

용이 죽었거나, 이곳이 다른 세상이거나.

"일단... 이동하자."

생각이야 복잡해졌지만, 당장에 해야 할 건 행동이다.

뭐가 됐든 프레이야와 함께 이동해 보면 알 수 있을 터.

이메니아로 이동했을 때 용의 존재가 다시 느껴지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선은 이메니아로."

일단은 이동해 용의 흔적이 느껴지는지 확인하고 실비아나 시르베르트를 만나 대륙의 전반적인 상황을 들어봐야 할 것이었다.

더해서 가능하면 이오스의 도움을 받아 용이 있을 만한 곳으로 곧장 이동하면 더 좋을 테고.

『...네!』

다시 포탈에 손을 올리고 불어넣는 마력.

반대손은 프레이야와 꼭 잡은 채였다.

「확인된 마력은 4서클입니다.」

「갈 수 있는 지역은 총 22곳입니다.」

「이메니아 마법 대학(1) - '마법사의 집'을 선택하였습니다.」

「포탈이 가동됩니다.」

환한 빛과 함께 재차 이동하는 히오와 프레이야.

다시 눈을 뜬 곳은 어두컴컴한 아카데미의 지하 4층이었고 그 즉시 히오의 시선이 옆의 프레이야를 향한다.

"프레이야. 용은?"

눈을 감은 채 집중하던 프레이야가 눈을 번쩍 뜨며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킨다.

『느껴져요! 저쪽!』

저쪽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용이 죽은 건 아니라는 말이네."

용이 죽어 버린 건 아니다.

그 반신과도 같은 존재를 죽일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테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터.

그렇다는 말은 히오의 가정 중 두 번째 가정이 맞다는 말이었는데....

이전부터 의아하긴 했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제국의 최북단.

그곳에 위치해 있다는 금지(禁地) 테트라디아.

하면 왜 게임이던 시절에는 맵조차 열려 있지 않았던 것일까.

바알 숲이나 그란디나 산맥 같은 다른 금지는 전부 존재했는데, 유독 테트라디아만 없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단순 제국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라면 걸어서도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하늘 끝까지 닿은 이 높은 탑과 다른 건축물 또한 멀리서 보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한데 전혀 그런 것이 없지 않았나.

어쩌면 마탑은.

고대 도시 테트라디아 자체가 희생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은 아닌가.

깊고 깊은 심연을 끌어안은 채로, 이 세상과 단절된 어떤 곳에 도시 자체를 봉인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히오 아저씨...?』

조심스레 옷깃을 잡는 느낌에 상념은 깨어졌다.

"아, 그래. 어서 가야지."

뭐가 되었든 움직이면서 생각해도 충분하리라.

우선은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올라가자."

빠르게 올라가기 위해 프레이야를 들쳐안고 계단을 뛰어 올랐다.

지하 4층을 벗어나 3층.

그리고 2층을 향하면서 문득 든 느낌인데.

"이거... 왠지 좀 익숙하지 않아?"

- 나만 느낀 게 아니었나보군.

『저도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어요!』

상당히 낯익으면서도 굉장히 짜증나는 그런 느낌.

그래, 마치 바깥 세상에서 아릴레이야로 귀환했을 그 당시의 불쾌한 느낌이 똑같이 전해졌고.

기어이 지하 1층을 지나 지상으로 올랐을 때 본 광경은.

"...에휴."

- 그럼 그렇지.

또다시 개판이었다.

113화 개판 (4)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한국 이름으로는 남태민.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순했다.

어비스 공략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공략이 실패했을 경우 피해를 최소화할 것.

물론 그에게만 주어진 임무는 아니었다.

이곳 세상에서 명성과 지위가 확고한 자.

그렇기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는 자.

그런 자들이 맡고 있는 임무였다.

사실 그래 봤자 공식적으로는 두 사람뿐이었지만.

아카데미 정교수로 있는 시르베르트와 수도에 있을 랭킹 2위.

그 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고 당연하게도 강제성은 없었다.

일만 명의 빙의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 꼭대기에 위치한 랭킹 2위와 5위에게 누가 감히 강제로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제아무리 탄탄한 기반과 지지를 받고 있는 다프네라 할지라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때문에 임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수행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도 시르베르트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오른 아카데미 교수라는 자리와 이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어비스 - 51층 공략에 실패하였습니다.」

「두 개의 차원이 연결됩니다.」

「'심연'이 출현합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떴을 때 놀라긴 했지만, 발빠르게 대처했다는 말이다.

이메니아 아카데미는 넓었고 그 안에도 게이트가 하나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최대한 멀리 대피시키고 가용 병력을 모두 활용해 게이트를 포위해야 합니다!"

아카데미에는 빙의자가 거의 없다.

평소에도 그런 사정인데 하물며 공략에 실패한 지금에야 모조리 본래의 세상을 지키러 로그아웃해 버렸으니.

"어서요!"

허나 이조차 시르베르트는 대비한 것이기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여제가 아직 황녀이던 시절부터 그쪽에 줄을 댔고.

위기 때 황성에서 탈출하게 도왔으며 그녀와 히오를 연결해 준 것이 시르베르트가 아니었던가.

그에 대한 보답을 실비아는 확실하게 해 주었고 덕분에 아카데미에서의 입지가 이전에도 높았지만, 더욱 높아진 것이었다.

"졸업반 학생들만 유사시 예비 전력으로 광장에서 대기하고 나머지는 전부 물러나!"

그리 준비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의아함만이 가득했다.

이전의 50층이야 갑작스레 난이도가 뛰었고, 미궁이라는 특수한 유형에 대비하지 못했으니 위기였던 것이지.

전해 듣기로 51층은 평범한 레이드의 형태로 추측된다고 보고를 받았지 않나.

거기에 참여한 멤버 또한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했을진대.

"...변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마라!"

아무래도 어떤 변수가 작용한 듯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다시 걱정이 되는 것이다.

바깥 세상은 어떠할까.

지금이라도 로그아웃해서 바깥 세상을 막아야 하는 게 아닌가.

지켜야 할 것은 사실 이곳보다 그곳에 더 많았으니 말이다.

"...집중하자."

고개를 흔들어 잡다한 생각을 떨쳐 버린다.

이미 한 번 겪었지 않나.

아타올프라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려고 했었는지.

두려움에 떨며 비명 지르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로그아웃 이용권을 손에 쥐었던 그날 이후, 얼마나 자괴감에 시달렸던가.

그런 일은 한 번이면 족하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보이겠다.

그리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검게 물든 어비스 게이트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준비...!"

시르베르트는 긴장했지만, 동시에 자신에 차 있었다.

흑아의 아카데미 습격 이후로 병력이 보강되기도 했고 스스로의 성장 또한 있었으니.

게다가 입구는 하나고 그것을 막는 입장이지 않은가.

시르베르트의 염동은 다수를 상대로 할 때 막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인 것이다.

"온다!"

그 예상대로 시작은 순탄했다.

검게 물든 채 몸 이곳저곳이 비틀린 흉측한 괴물들.

어비스 몬스터라 불리는 것들은 게이트를 넘어오는 즉시 시르베르트의 염동에 몸이 찌부러져야 했고 그것을 운 좋게 피한다 하더라도 수많은 검과 창날에 꿰뚫렸으니 말이다.

끝없이 쏟아지는 막대한 숫자는 어비스 게이트의 악명처럼 대단했지만, 그뿐이었다.

게이트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병력 또한 충분했으니.

시르베르트가 마력을 아껴 가며 싸울 수 있는 환경.

준비된 환경에서 싸우는 시르베르트를 뚫어 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과연 중반부의 어비스 게이트.

1층의 실패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몬스터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일방적인 학살이 몇 시간이나 이어지면 시르베르트의 마력도 조금씩 줄어들고 병력들의 체력 또한 깎여 나가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텨!"

자신만 이토록 힘든 게 아닐 테다.

대륙 곳곳에 게이트가 있고 수도만 하더라도 아카데미를 포함해 몇 곳이나 존재했으니 검성이나 랭킹 2위의 그녀석이나 모두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터.

그러니 시르베르트는 끝까지 집중력을 놓지 않았다 자신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정말이지 말 같지도 않은 변수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해치웠나?"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 조용해진 게이트의 앞.

하지만 시르베르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직이다!"

끝났다면 모든 어비스 기운을 쏟아 낸 게이트가 부서지는 것이 정상이다.

허나 아직도 건재하지 않은가.

건재하다 못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 더욱 세게 그 기운이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시르베르트의 예상대로 어비스 게이트의 출렁임이 점점 격해지고 그것이 절정에 달했을 때.

어떤 존재가 게이트를 넘어 걸어 나왔다.

그 심상치 않은 존재감에 등장과 동시에 시르베르트는 염동을 집중했고 다른 이들에게도 비슷한 것을 명했으니.

"일제히 공격! 스킬을 아끼지 말고 쏟아부어!"

콰아앙-!

각종 스킬의 집약으로 그렇지 않아도 황폐화된 게이트 주변에 거센 폭발이 연달아 일어난다.

콰아앙-! 꽈앙!

그것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누가 따로 명하지 않았음에도 공격은 서서히 멎어 갔고.

"...해치웠나?"

다시 중얼거리는 누군가의 말과 함께 먼지구름이 걷혀 간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모습은.

"사람...?"

어비스 몬스터라고는 보기 힘든 사람의 모습.

늘씬하게 뻗은 팔과 다리.

정석처럼 자리잡은 이목구비와 긴생머리칼.

얼핏 보다면 화려한 외모의 여인을 향해 공격을 퍼부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는데.

특이한 점은 눈자위가 온통 검은색이라는 것과 귀가 뽀족하게 길다는 것.

그 주위를 새카만 식물 따위가 자라나 모든 공격을 막아 내었다는 것.

그리고.

「강한 정신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강한 정신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강한 정신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강한 정신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미친 듯이 울리는 메시지.

시르베르트가 그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린 것은 본능이었다.

그랬으니 볼 수 있었다.

"여, 여신이다. 여신...."

"와...."

"어억...."

삽시간에 돌처럼 굳어 버린 이들을.

아니, 정말로 석상이 되어 버린 것들을 말이다.

어비스 게이트에서 걸어나온 여인과 눈을 마주한 모든 이가 돌로 변해 그대로 굳어 버렸으니.

"이, 이게 무슨...."

시르베르트는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리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

돌아오는 대답 역시 전혀 없었다.

분명 게이트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병력이 있었건만, 어느샌가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그저.

- 키에에엑!

- 끼아아아아-!

여인의 뒤로 쏟아지듯 나오는 무수한 어비스 몬스터의 비명 소리뿐.

"...망했네. 진짜로...."

주먹을 꽉 쥔 시르베르트의 손등 위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른다.

물론, 숙인 고개는 전혀 들지 않은 채였다.

* * *

"교수님! ...아니, 태민이 형! 이제 어떡하냐고!"

아카데미 건물 사이를 뛰어가며 외치는 누군가의 말에 마주 외치는 시르베르트.

"나도 몰라 이 새끼야!"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끼고 싶은지 바로 등 뒤에서 다른 대답이 들려온다.

- 끼에에엑!

검은 몸체에 뒤틀린 머리. 두 팔은 꺾여 다리가 되었고 다리 역시 기이하게 뒤틀려 네 발로 걷는 모양새인 어비스 몬스터.

그게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두 사람을 덮쳐오지만.

「스킬 - '상급 염동'이 발동됩니다.」

그대로 땅으로 빠르게 꽂히며 찌부러진다.

"일단... 저 미친 괴물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야 돼!"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유로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 흑발의 여인.

아니, 괴물.

짐작컨데 이곳 게이트의 보스 격인 어비스 몬스터.

하필 수많은 게이트 중 여기에 보스급 몬스터가 나타날 게 무엇인가.

검성이나 그녀석이 있는 곳에 나타날 것이지.

"형! 염동을 최대로 해도 안 돼요?"

"안 돼! 봤잖아 아까!"

등장과 동시에 불길함을 느낀 시르베르트. 그를 비롯한 스킬 사용자 대다수가 가진 능력을 한 번에 쏟아 냈지만, 저녀석의 주위를 따라 계속 움직이는 새카만 식물 덩어리에 모조리 막혀 버렸다.

저것을 뚫으려면 적어도 최상위 스킬.

그 중에서도 자신의 염동보다도 더 파괴력에 특화된 그런 스킬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 같은데....

"빌어먹을. 다프네가 여기 왔어야 됐어."

다프네가 가진 전설급 무구, 라플리시아라면 타격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저 녀석, 우리만 계속 따라오고 있어."

보스급 몬스터가 이미 석상처럼 굳어 버린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들만 똑바로 쫓아 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저렇게 사람처럼 생긴 보스 몬스터가 있었어요? 저는 처음 보는데!"

시르베르트의 옆에서 열심히 도망치며 외치는 이는 그의 길드원 중 한 명.

함께 길드를 일으켰던 창립 멤버 중 이인자라 할 수 있는 권우빈. 여기 이름으로는 케멘.

이곳 세상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깥 세상에서는 최초의 각성자로서 남태민 못지않게 유명한 이.

그만큼 무력도 강한 축에 속했지만... 저 상정 외 괴물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너, 그거 써 봐. 감정 스킬."

"예? 미쳤어요 형? 눈 마주치면 저도 죽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눈 안 마주치게 잘 쓰면 되잖아! 이렇게 도망만 다닐 거야? 뭐라도 알아내야 해결을 하지!"

"아니... 아오... 진짜 개무서운데...!"

두려움을 떨치려는 듯 고함을 크게 한번 지르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 케멘.

"으아아! 감정!"

제대로 보기나 한 건지 그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허어어억! 존x 무서워!"

"...제대로 본 거 맞아?"

숨을 크게 들이마신 케멘이 내뱉는 한숨과 함께 답한다.

"제대로 본 건 맞는데... 진짜 난생 처음 보는 이름인데요? 저런 보스 몬스터가 있었나?"

"뭐라 적혀 있는데?"

이어진 그의 대답에.

"가장 고귀했던 엘프... 라는데요?"

시르베르트의 의문은 더욱이 깊어져만 간다.

* * *

아카데미의 예비 전력이라 불리는 졸업반.

그것은 단순히 연차가 쌓인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로지 실력.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것은 곧 제국의 요직에 배치된다는 의미였고 어엿한 제국의 공직자로, 기사로서 살아간다는 의미였으니.

그만한 준비가 된 학생이 졸업반에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클레어와 롤랑이 이곳에 있는 것이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졸업반이라고 해서 당장 내년에 졸업하는 것은 아니다.

졸업반에 못지않은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함께 있는 것이었다.

"별일 없겠지...?"

그런 이들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크게 감돌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웃고 장난칠 학생들 사이에서도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알기에.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친구를, 동료를 잃은 슬픔을 불과 몇 달 전에 겪었기에 그런 것이다.

다만 이전과는 달랐다.

한번 겪어 봤으니. 그 좌절과 슬픔, 무기력함을 겪어 봤으니... 긴장할지언정 도망가지 않는 것이다.

두려울지언정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앞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도망친다면 옆의 친구가 죽을 테니.

두려워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지난번 습격에서 뼈저리게 느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을 어여삐 여긴 것일까.

"포위망이 뚫렸다! 모두 전투 준비해!"

그들의 다짐을 시험이라도 해 보겠다는 듯 위기는 곧바로 찾아왔으니.

- 끼에에에엑!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께름칙한 비명소리.

대충 듣기에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울음.

침묵은 더욱더 깊게 가라앉고 공기에 배인 짙은 긴장은 전염되듯 학생들에게 번져 나간다.

"...멍청한 클레어. 겁나면 먼저 도망가지 그러니?"

"한심한 롤랑. 겁은 네가 먹은 것 같은데?"

"아니? 전혀?"

"나도 전혀?"

그런 와중에 무던히 나서는 것은 클레어와 롤랑.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클레어의 목표는 고작 이런 곳에 있지 않았으니.

히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 수없이 다짐한 주제에 이 정도로 몸이 굳어 있을 수는 없었기에 태연하게 걸어 나갔고.

롤랑은 그런 클레어에게 지지 않고자 함께 걸어 나간다.

클레어는 히오를.

롤랑은 시르베르트를.

한 사람을 동경하고 그를 따라가기 위한다는 점에서 두 소녀는 똑 닮은 것이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아카데미 자체 기사단과 교수들은 강하니까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고 자리를 지키면서 싸워!"

지도 교수의 외침과 동시에 보이기 시작하는 몬스터.

시커먼 색깔에 팔다리와 목이 기이하게 뒤틀린 외형.

심지어 그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으니.

"무, 뭉쳐서 싸워! 교수님들께서 전부 해결해 주실 거다!"

그런 지도 교수의 외침 속에는 이미 불확실함이 강하게 서려 있는 것이었고.

...그로부터 벌써 몇 시간째.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은 그저 최악을 향해서 달려간다.

* * *

- 끼아아아악!

불길에 휩싸인 채 소름끼치는 비명과 함께 소멸하는 몬스터 한 마리.

"허억... 후우우...."

가쁜 숨을 몰아쉬는 클레어와 롤랑.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지휘체계는 엉망이 되어 통제되지 않았고 난전에 가까운 형태가 된 것이다.

처음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상상 이상의 속도로 달려드는 몬스터의 공격에 학생들은 삽시간에 흩어져 버렸다.

이들을 통솔할 교수 또한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를 상대하기 쉽지 않아 보였으니.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건지.

책에도 나오지 않는 기괴한 몬스터는 어찌 이리도 강한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클레어는 불평 한 번 없이 화염을 불러들인다.

"롤랑, 준비해."

"후우... 싸가지 없는 클레어."

롤랑 또한 굽혔던 몸을 재차 일으킨다.

바람 스킬 사용자인 롤랑은 클레어와 썩 잘 어울리는 조합.

- 끼에에에엑!

"온다."

클레어의 머리 위에 피어나는 화염구는 점점 크기를 불려 간다.

그것은 마치 언젠가 보았던 푸른 화염처럼.

그를 닮길 바라는 제 주인의 의지처럼 덩치를 키워 가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그것에 비한다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이 세상의 상식 선에서 본다면 충분히 대단한 위력의 화염구.

- 께에엑! 께에에엑!

롤랑의 바람이 더해져 배가된 위력.

그것에 직격당한 몬스터는 소름끼치는 고음의 비명을 내지르며 소멸해 간다.

그렇게 내리 잡은 몬스터의 숫자만 벌써 수십.

허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알 수 없는 위화감은 갈수록 커져 갔으니.

이 비틀린 몬스터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시르베르트 교수와 아카데미의 기사단이 뚫릴 리가 없었으니까.

거기에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은.

"...저기, 또 있어."

골목 곳곳에서, 넓은 정원이나 대로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석상.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몹시도 생생한 표정과 몸짓.

무언가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린, 공포에 질린 표정.

혹은 황홀감에 휩싸인 표정.

그것을 만들어 낸 존재는 대체 무엇이기에.

어떤 끔찍한 재앙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고 시르베르트는 무엇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인가.

그런 석상을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불안한 감정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이다.

마력이 얼마남지 않았음이 느껴졌으니.

체력 또한 다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모자라다.

핑계를 대자면 시간이 부족했다 할 수 있겠다.

흑아의 아카데미 습격으로부터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이지 않나.

이만한 발전도 아카데미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대단한 것인데 여기서 더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

"...더 할 수 있어."

욕심은 무슨, 멀어도 한참은 멀었다.

"...무식한 클레어. 적당히 하고 우리도 도망쳐야 해. 너도 나도 마력이 얼마 없잖니?"

"나는 아직 멀었어."

그렇게 말하지만, 꼴이 정상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격하게 움직이며 몇 시간이 넘도록 싸워 왔으니.

마력도 체력도 한계에 가까워져 오는 것이다.

"욕심만 많은 클레어야. 이러다가 저 돌덩이로 만드는 괴물과 마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니? 시르베르트 교수님조차 고전하는 상대를 네가 어쩌겠다고? 주제를 좀 파악해."

"...."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실습동의 앞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들어왔나.

최초에 졸업반의 예비 병력은 게이트와 제법 멀리 떨어진 광장에 모여 있었다. 위험하면 망설임없이 도망가라는 교수진의 배려였다.

허나 클레어와 롤랑은 외려 안으로 진입한 것이었으니.

실습동의 앞이라 한다면 아카데미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진입한 이유는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본인의 실력 향상을 위해.

남들의 뒤를 따라, 안전하게 숨어 있어서야 자신의 목표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터였으니 더욱더 앞으로, 안으로 나아간 것이다.

허나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지 않나.

- 끼에에엑!

사방에서 들려오는 건,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울음소리.

- 끄아아악!

그 속에서 간혹 인간의 것으로 짐작되는 비명 또한 섞여 있다.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끔찍한 석상이 나타나는 빈도 또한 잦아진다.

그러니 이제는 무리였다.

"...나가자."

클레어는 결국 그리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절뚝이는 롤랑을 부축하고 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개판이야. 개판."

들리는 것은 너무도 낯익은 목소리.

어찌나 바라 왔던지 꿈에서도 간혹 들려왔던 그 목소리.

"세상은 이다지도 개판이어라."

믿을 수 없는 목소리에 클레어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이제는 눈에 익은 화려한 차림새에 커다란 지팡이를 짚은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실습동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목표이자 우상이며 동시에....

아무튼, 뭐 그런 사내.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것은 그와 똑닮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손을 휘휘 내젓는 웬 꼬마 아이.

작은 덩치에 비해 모자가 어찌나 큰지 제 몸통의 절반만 했고 머리 위에는 웬 글자가 번쩍이며 화려하게 떠 있었다.

『개판! 개판! ╭( •̀ •́ )╮』

그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웠으니 잔혹하고 치열한 이 현장과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괴리감에 점정을 찍는 것은 평온하게 열리는 히오의 입.

"잘 보렴 프레이야."

그에 모자를 삐죽 올리고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드러내 보이는 꼬마 아이.

"저것들의 약점을 알려 주마."

곧,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울리는 히오 파블렌코의 목소리와 함께.

"천상."

지팡이가 움직인다.

114화 가장 고귀했었을

상급 염동을 최상급 염동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염동과 관련된 스킬 다섯 가지를 모두 상급으로 올려야 한다.

염동 - 압(壓)

염동 - 출(黜)

염동 - 파(波)

염동 - 중(重)

염동 - 강(强)

이 다섯 가지를 전부 상급으로 올려놓는다면 그제서야 최상위 스킬, 최상급 염동으로의 진화 조건이 충족된다.

염동은 최상위 스킬 중에서도 진화 조건이 까다로운 편인만큼 단점이 없는 스킬로 유명했다.

긴 사거리, 넓은 범위, 그나마 단점으로 꼽히던 파괴력 또한 진화와 동시에 대폭 상승하고 공격과 방어의 전환은 최상위 스킬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으니.

최상위까지 올릴 수만 있으면 그야말로 만능 스킬이 되는 것이다.

시르베르트는 이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우선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염동 스킬을 상급 염동까지 진화시켰고.

상급 염동 - 압(壓), 상급 염동 - 출(黜), 상급 염동 - 파(波), 상급 염동 - 중(重).

나머지 다섯가지 중에서 네 개를 상급에 올려놓았으니 말이다.

남은 것은 하나.

'염동 - 강(强)'뿐이었고,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을 합쳐 최상급 염동으로 진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무력은 라플리시아를 지닌 다프네와도 엇비슷할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리 희망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토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그러게 형. 내가 염동에 집착 좀 버리고 다른 거 올리자고 했잖아. 그랬으면 진작 최상위 스킬 하나는 가졌을 텐데."

"헛소리할 시간에 스킬 한 번이라도 더 써라."

"...그냥 로그아웃하자 형."

케멘과 시르베르트의 시선이 동시에 정면을 향한다.

"우리랑 상성이 너무 안 좋아."

긴 흑발에 가녀린 체구.

차마 시선이 얼굴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빼어난 외모를 지닌 보스 몬스터.

저것은 여태 봤던 어비스 몬스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저거... 생각을 하잖아."

그저 본능에 따라 울부짖고 달려드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한 걸음 한 걸음이 여유롭다.

알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에게 대적할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일대에서 가장 강한 것이 눈앞의 두 사람임을 알고 그들만 쫓아오는 것이다.

저런 몬스터가 있었던가.

몬스터주제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하고.

얼핏 보이는 걸음에는 품위와 여유가 느껴지는 게 정녕 몬스터가 맞는 것인가.

아니, 애초에 저런 외형을 가진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로그아웃하자."

케멘은 이것이 아직 게임이던 시절부터 함께해 온 시르베르트를 향해 달래듯이 말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단호한 대답.

"네가 로그아웃해서 다프네든 누구든 불러 봐. 저 빌어먹을 식물만 뚫어 내면 될 것 같으니까."

"저 괴물이랑 계속 싸우겠다고?"

그제서야 시르베르트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그럼 언제까지 로그아웃만 하라고? 그래서야 뭐가 될 것 같냐? 정신 차려라 우빈아. 변수는 계속 생길 거고 저녀석보다 더 강한 괴물도 튀어나올 거다."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

"어떻게든 찾아야지."

권력 놀음이나 하는, 도를 넘어선 명성에 취해 버린 바깥 세상의 각성자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모를 테니까.

자신의 옆에 오래 있었던 권우빈조차도 벤타이얼의 중반부에 그만둔 녀석이었으니까.

머리로는 알아도 진정으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허나 1위부터 5위까지, 속칭 최상위 랭커들은 달랐다.

그들은 게임이 기어이 끝장나던 그 순간까지 발악하던 자들이었으니.

멸망이 얼마나 끔찍한지, 상대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기에, 그것이 현실이 되어 들이닥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오는 것이었으니.

"나아가지 못하면 뒤쳐질 뿐이야. 뒤쳐짐 끝에 있는 게 무엇인지는 뻔할 테고."

아마 시르베르트 위로 모두가 같은 생각일 테다.

그러니 그들이 이토록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르베르트 자신도 다프네도.

아이라이츠는... 죽어 버렸지만, 그 위의 두 녀석도 결국에는 끔찍한 미래를 알기에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니까 네가 로그아웃해서 지원을 요청해라. 저 괴물은 어떻게든 여기서 잡는다."

말과 동시에 발동하는 스킬.

「스킬 - '상급 염동 - 중(重)'이 발동됩니다.」

꾸우웅-!

어비스 보스 몬스터, 가장 고귀했던 엘프의 머리 위를 찍어누르는 염동.

그것은 마치 중력과도 같아서 스킬 범위 내의 모든 것이 무거워지고 내구성이 약한 것들은 그대로 바스라진다.

하지만 공기마저 짓눌리는 염동의 영역임에도 보스 몬스터, 가장 고귀했던 엘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그것에 서린 품위 또한 여전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어나는 식물의 모습까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

"아오...!"

그에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트리며 케멘이 나섰다.

"지금 가서 어느 세월에 누구를 불러오라고!"

"로그아웃은?"

"안 해! 안 한다고!"

그렇게 외치며 쭉 뻗는 두 손.

「스킬 - '칼날비'가 발동됩니다.」

그 방향으로 생겨나는 십여 개의 칼날.

그저그런 평범한 칼날이 아니었다.

스킬로서 만들어진 단단한 칼날.

기사의 오러와도 맞부딪칠 수 있는 그런 칼날 십여 개가 걸음을 옮기는 몬스터를 향해 쏟아진다.

카아앙-!

결과는 역시나였다.

"제기랄... 진짜 안 된다니까."

"일단 하는 데까지는 해봐!"

「스킬 - '상급 염동 - 중(重)'이 발동됩니다.」

「스킬 - '상급 염동 - 압(壓)'이 발동됩니다.」

공기가 짓눌리고 땅이 움푹 패인다.

물론 그 어떤 공격도 통하는 것이 없었다.

* * *

"하아... 형 하나 잘못 만나가지고."

한숨과 한탄을 동시에 내뱉는 케멘.

그의 손과 발을 포함한 몸 전체가 거대한 덩쿨에 빈틈없이 감싸진 채였다.

"인생 X발. 여기서 죽을 줄이야."

덩쿨에 감싸지지 않았더라도 모양새는 비슷했을 테다.

손끝이며 발끝이며 이미 돌이 되어 감각이 없어진 까닭이었다.

눈을 마주치면 순식간에 석상이 되어 버린다 생각했다.

정보가 없기에 벌인 오판이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 미친 듯이 경고 메시지가 울렸지 않나.

'정신 공격이 감지되었다'고 말이다.

시작과 동시에 눈을 쳐다봐 버린 이상, 돌이 되고 말고는 시간문제였다.

이는 정신 공격의 일종이었으니.

그런 주제에 육체를 굳게 만드는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니.

역시나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내가 진작 로그아웃하자 했잖아. 이게 뭐야."

케멘의 옆에는 시르베르트가 비슷한 꼴을 한 채 식물에 뒤덮여 있었다.

둘 다 얼굴만 간신히 드러난 모양새.

"...미안하다."

시르베르트라고 이리 될 줄 알았을까.

그라고 목숨이 아깝지 않았을까.

그도 해볼 때까지는 해보고 정말 안 된다면 도망치려고 했었다.

다만 힘닿는 데까지 시도조차 하지 않고 도망치기가 싫었을 뿐. 그렇게 해서는 발전하지 못할 것을 알았을 뿐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손과 발이 돌처럼 굳어 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나.

로그아웃을 위해서는 손을 움직여야 한다.

손이 없으면 발이라도, 발이 없으면 얼굴을 이용해서라도 로그아웃하겠다는 알림창을 눌러야 발동된다는 말이었다.

허나 손과 발이 굳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걸렸을 때였고, 그 짧은 멈칫거림은 상대에게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으니.

꽈아악-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몸이 덩쿨범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덩쿨, 몸을 옥죄어 오는 동시에 체내의 마력까지 쪽쪽 빨아들인다.

급격하게 내려가는 마력수치와 덩달아 빠져나가는 힘.

한순간에 결판이 난 것이었다.

로그아웃이라는 수단마저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은 이젠 정말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으니.

"형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결국 제가 안 간 건데...."

"...고집이었나 보다. 내가 위기의 순간에 성장이라도 할 줄 알았지."

"하.... 그러게 평소에 소설 좀 작작 읽으라니까. 우리는 그냥 게임하다가 운 좋게 능력을 얻은 거지 특별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게나 말이다."

체념해 버린 것은 이제 목 아래부터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터였다.

시르베르트의 시야에는 케멘의 목을 타고 그 피부가 돌로 변해 가는 것이 보인 까닭이었다.

"아, 엄마 기다릴 텐데. 위험한 일은 그만하자고 할 때 말 들을걸...."

케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간다.

이마를 덮고 눈까지 회색의 돌로 변해 간다.

"죽기 싫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한 석상이 되어 버린 케멘의 모습.

시르베르트는 쓰게 웃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조용히 다가오는 괴물의 모습이 보임에도.

여전히 그 눈을 쳐다볼 수 없는 것이 치욕스러우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역시 목 아래로 돌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저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뿐.

지난날을 회상하며 조금씩 굳어 가는 몸을 느끼....

"응? 뭐야 저거."

허허롭게 하늘을 바라보던 시르베르트의 시선에 작은 금빛이 스쳐 지나간다.

미약했던 그것은 눈깜짝할 새 하늘을 가득 채우며 거대해져 갔고.

"...."

어느새 주변에 가득 들어차는 것이다.

어쩐지 따스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빛이.

그에 놀랄 법도 하건만, 시르베르트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작부터 눈을 하늘에 두고 있었기에 보아 버렸으니.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여신의 형상을.

그곳에서 시작된 금빛의 손길을 말이다.

여신의 기적인가.

그리고 금빛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끊임없이 들려오던 소음 또한 뚝 멎어 버린다.

먼 곳에서 혹은 제법 가까운 곳에서 쉬지 않고 들려오던 어비스 몬스터의 울음.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여신의 금빛 손길에 녹아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의문을 품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여유 가득하던 보스 몬스터가.

이른바 가장 고귀했던 엘프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고 있었으니.

여유와 품위는 온데간데없고 거대한 힘 앞에 죽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시에 진행되던 석화 또한 멈춘 것이다.

턱끝까지 피부가 돌처럼 변했으나 이것 이상으로는 올라오지 않았다.

곧장 든 생각은 석상이 되어 버린 자들.

그들도 혹시 기적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눈동자를 굴려 옆을 쳐다봤지만.

'....'

이미 돌로 변한 자들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이... 몬스터는? 전부 죽었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이토록 답답할 줄이야.

할 수 있는 것은 추측뿐이었다.

화려함과 성스러움의 극치인 금빛.

이것이 어비스 몬스터들에게 효과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다른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일순간에 사라졌고 그토록 괴물 같던 보스 몬스터가 눈앞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그것 외에 다른 효과도 있는 것 같다.

죽음 앞에서 요동치고 번잡하던 자신의 마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안해졌지 않나.

허면 누가 이런 기적 같은 일을 행했단 말인가.

생각 나는 사람이 없었다.

성국의 교황? 능력이 없을뿐더러 이곳에 있을 리가.

새로 탄생한 성녀? 추기경 헤럴드? 아니면 자신이 파악 못 한 다른 빙의자?

편안해진 마음 덕에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느것도 합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끔찍한 풍경이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에는 여유와 자신감이 느껴진다.

"하필 여기에 보스급이 나타난 건가."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시르베르트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깨달은 것이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납득 가는 것이 곧 부조화였다.

저벅- 걷는 소리는 더욱 가까워져 온다.

그것이 시르베르트의 바로 옆까지 왔을 때, 그는 기어이 헛웃음을 지어 버렸다.

화려한 차림새의 익숙한 뒷모습이 그의 앞에 섰으니.

히오 파블렌코.

랭킹 1위의 지존 천마.

이 신성한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

"천상에 저항하는구나. 처음 있는 일이야."

온통 금빛으로 내려 앉은 세상 속에 태연하게 도달한 그 모습이 썩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는 명백히 방심하고 있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던 몬스터가 돌연 홱 들어올리며 히오를 바라봤으니.

시르베르트는 다급히 외친다.

"녀석의 눈을 보지 마!"

그리고 그런 황급한 경고에 대한 히오의 반응은.

"음?"

무덤덤했다.

검게 물든 눈과 매혹적인 여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태연한 것이다.

그걸 넘어서.

"시르베르트. 살아 있었나? 아니, 죽은 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별것도 아닌 걸로 자신이 호들갑 떤 모양새가 됐지 않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석상들이 아니었다면 순간적으로 마음을 놓을 뻔했다.

"...죽기 직전이지. 그보다 좀 더 경각심을 가져라. 보스급 몬스터다."

"몬스터... 그래, 몬스터지."

"처음 보는 유형이야. 이름은 가장 고귀했던 엘프. 내 옆의 이 녀석이 목숨 걸고 알아낸 정보지."

눈동자를 굴려 허망한 표정 그대로 석상이 된 케멘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식물을 다루고 눈을 한 번이라도 마주치면 석화가 진행되는데 정신 공격 판정이야. 그리고 이런 덩쿨에 한 번이라도 붙잡히면 마력이 흡수되고 기본 스탯 역시 한계 이상으로 높은 것 같은데...."

자신이 아는 바를 최대한 전달하고자 했지만, 히오는 이미 그 뒷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가 집중한 것은 이름.

"가장 고귀했던 엘프라...."

다시 시선을 돌리는 히오.

그 앞에는 여전히 괴로워하는 몬스터가 있다.

"그랬구나."

시르베르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막막할 정도로 강한 어비스의 몬스터이지 않았나.

분명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의 몬스터였지 않나.

한데.

"네 역할은 이시도르가 이어서 잘하고 있으니...."

히오는 무엇이 그리 안타까워 몬스터에게 그런 말을 건네는 것인가.

그런다고 몬스터가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금빛 신성에 저항하며 몸부림칠 뿐.

"괜찮다."

괴로워 하는 몬스터의 앞에 선 히오.

가장 고귀했던 엘프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는다.

그에 드넓게 펼쳐진 금색의 영역이 좁아진다.

그만큼 농밀해진 신성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고생 많았어."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괴로워하던 몸부림이 뚝 그치고 고개를 드는 몬스터 아니, 언젠가 가장 고귀했었을 엘프.

어비스에 물들어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눈이 찰나간 히오를 응시하고.

"...."

그대로 하릴없이 허물어진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말이다.

그렇게 허물어진 몬스터를 말없이 바라보는 히오.

한참을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다.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아는 것이 없었기에 시르베르트는 그런 히오를 내버려두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3분이....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닌가?

보스 몬스터가 죽었음에도 굳어 버린 시르베르트의 몸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그로서도 조급한 마음이 일었고.

결국 참지 못한 시르베르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나 잊어버린 거 아니지?"

그에 히오의 시선이 시르베르트를 향하고 그 입이 짧은 감탄사를 토해 낸다.

"아, 맞다."

115화 크뢰츠발트식 강령술

- 가장 고귀했던 엘프라니. 이시도르의 선조라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까. 혼의 격 또한 높았겠지. 육체가 조금도 비틀리지 않았으니까.'

- 그런 존재도 결국 잠식되어 이런 꼴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군. 하긴 용도 버티지 못했는데 가장 고귀한 엘프라고 해서 별수 있었겠나.

적막에 휩싸인 작은 광장.

주위는 온통 회색 석상에 둘러싸여 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살아 있었을 그것들은 이제 돌이 되어 버린 채 그저 굳어 있을 뿐.

히오는 그런 광장의 중심에서 혼이 빠져나간 엘프의 육체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모든 어비스 기운이 소멸하여 껍데기만 남은 그것은 머리색 정도만 빼면 이시도르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외형이었다.

'이시도르보다도 훨씬 강했어. 어비스에 물든 영향일까 아니면 본래 능력이 이 정도였던 걸까.'

- 본래의 능력이 바탕이 되었겠지. 그 기운에 강화되기도 했을 테고. 다만 그만큼 지성은 상실했으니 오히려 더 약해졌다 볼 수 있지 않겠나.

가장 고귀했던 엘프는 강했다.

주변에 널린 석상과 경비를 단단히 한 아카데미가 뚫렸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토록 강하고 고귀했던 엘프마저도 타락시킨 심연은 대체 무엇인가.

그런 생각으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저기... 나 잊은 거 아니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시르베르트가 아직 있었지?

고개를 돌려보면 죽어 가는 식물에 둘러싸인 채 표정을 구기고 있는 시르베르트가 있었다.

설마 진짜 잊어 버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한껏 구겨진 얼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에휴, 됐다. 그보다 이거 풀 수 있을 것 같냐?"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덩쿨 사이로 드러나는 회색의 딱딱한 돌.

다름아닌 시르베르트의 몸이었다.

"정신 공격의 일종이라...."

그래서 히오에게는 통하지 않은 것이다.

정신 공격에 관해서는 높은 방벽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잠시만 있어 봐."

얼굴만 나온 채 굳어 있는 시르베르트를 내버려두고 히오는 몸을 돌렸다.

상식적으로 몸이 돌로 변했는데 사람이 살아 있을 수가 있는가?

그리 생각했으나 시르베르트는 살아 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다.

그러니 히오는 광장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석상을 둘러보며 특성을 발동시켰다.

「특성 - '유령의 눈'이 발동됩니다.」

그렇게 유령의 눈으로 본 석상들은.

"아직... 살아 있네."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과 다를 게 없었으니.

허나 원래의 상태로 다시 되돌릴 수 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방법이 없다.

가진 마법을 쭉 생각해 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고 스킬 역시 마찬가지.

최고위 신성 마법과도 같은 '천상'이 통하지 않았는데 다른 스킬이 먹히겠는가.

- 청염으로 돌로 변한 부분만 녹여 보는 건 어떻겠나?

'...되겠냐?'

- 안 되겠지?

가능성이 낮을 뿐더러 너무 위험부담이 큰 방법이다.

자칫했다가 그대로 녹아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남은 마법 중에 보자....'

그나마 생각나는 것은 최근에 배운 마법.

4서클의 퓨리피케이션.

정신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물론 작은 가능성이었다.

정신 공격으로부터 비롯된 석화긴 하지만, 결국 돌이 되어 버렸지 않나.

시전자인 어비스에 물든 엘프가 영혼 채로 소멸해 죽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단순 정화 마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었다.

그럼 남은 마법이....

'음?'

번뜩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가지 마법.

'크뢰츠발트식 강령술...?'

- 강령? 그걸 하겠다는 말인가?

히오의 시선이 다시 바닥에 허물어져 있는 가장 고귀했던 엘프를 향한다.

혼이 빠져 껍데기만 남은 육신.

여기에 크뢰츠발트식 강령술이 가능하다면....

혼자 아카데미를 괴멸하다시피한 저 육체, 저 능력에 다른 혼의 능력까지 더해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이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마법인지....

왜 그토록 찾기 어려운 곳에 숨겨져 있었는지 바로 이해되는 것이다.

- 흐음...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이야.

푸르넬의 걱정처럼 그저 번뜩 생각난 것일 뿐,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 자네가 보관하고 있는 그 영혼과 저 고귀했던 육체가 호환이 잘 되겠는가?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호환성.

다른 건 모두 준비가 가능하다.

크뢰츠발트식 강령술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어둠 속성 마력이라든가, 그것을 추출하기 위한 죽은 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호환성.

기껏 다른 것들을 마련해도 육체와 준비된 영혼이 호환되지 않으면 전부 허사였으니.

'애초에 호환성이라는 게 뭔데? 혼과 육체가 잘 맞는지 어떻게 알아낸다는 거야?'

'크뢰츠발트식 강령술의 서'에도 호환과 관련된 설명은 없었다.

단지 실패했을 경우, 사용한 영혼은 소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만 서술되어 있었지.

그리고 그런 히오의 질문에 대한 푸르넬의 대답은.

- 내가 어떻게 아나? 그걸 알았으면 내가 크뢰츠발트였겠지.

역시나 예상대로.

사실 별로 기대도 안 했다.

'호환... 호환성이라....'

한번 생각해 보자.

강령할 영혼이라 해 봐야 하나뿐이다.

크뢰츠발트의 삼신기 중 하나인 영혼 수확자의 랜턴.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혼은 하나뿐.

악당으로서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였고, 스스로 가둬 두었던 기억을 깨우쳐 냈음에도 어째선지 이승을 떠나지 않고 있던 영혼.

불행한 혼.

아이라이츠.

'아이라이츠의 혼과 저 고귀한 엘프의 육체가 잘 맞을지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 개인적인 의견으로 외형은 합격이라 생각한다네.

외형은 합격.

호환성에 외모가 중요한지는 모르겠다만, 키나 체형 등은 엇비슷할 것 같다.

거기다 외모 또한 두 사람 모두 빼어난 미모를 지녔었으니.

물론 화려한 아이라이츠의 얼굴과 단아한 엘프의 얼굴에서 차이가 있긴 했지만....

'뭐, 외모로 호환성이 결정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키와 같은 체형이 비슷하다는 점은 꽤 유효한 것일 테다.

그렇다면 남은 건 능력.

아이라이츠의 능력은 매혹.

상대와 눈을 마주하면 스킬을 걸 수 있으며 매혹에 걸린 대상을 통해서도 매혹을 걸 수 있다.

전염처럼 퍼트릴 수 있다는 말이었고 매혹에 걸린 대상은 아이라이츠의 명령만을 따른다.

가장 고귀했던 엘프의 대표적인 능력은 두 가지.

마력을 흡수하는 식물을 다루는 것.

그리고 석화.

시르베르트가 말하기를 눈을 마주보는 것이 발동 조건이며 정신 공격의 일종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그말인즉.

'할 만할 것 같은데?'

꽤나 비슷한 점이 많지 않나.

비슷한 체형. 비슷한 능력.

뭐, 굳이 더 집어넣자면 같은 성별.

또... 예쁜 미모?

...솔직히 모르겠다.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봤어야 알지.

'겉모습, 그리고 가진 능력. 또 호환성에 뭐가 관련 있을까.'

혹시 인성 이런 것도 비슷해야 하려나?

그럼 완전 나가린데.

- 신중하게 생각하게. 자네가 그 영혼을 가엾이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어.

'...가엾기는 무슨.'

- 그럼 왜 굳이 그 혼만 따로 랜턴에 보관했는가? 귀신을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네.

'귀신이랑 너랑 뭐가 다른데?'

- ....

벙쪄 버린 푸르넬을 내버려두고 주머니에서 랜턴을 꺼내 들었다.

짙은 녹빛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랜턴.

귀기가 느껴지는 영혼 수확자의 랜턴.

그것을 눈높이까지 들고 안쪽을 들여다본다면 보이는 것이다.

잔뜩 웅크린 채 잠든 하나의 영혼이.

'아무튼, 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데이터가 없다.

그러니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 조심하게. 실패하면 그 소녀의 혼이 소멸될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거야 그렇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보관만 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언젠가는 시도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지금이라 판단했을 뿐이다.

'해보자.'

랜턴에 내재되어 있는 스킬을 사용한다.

「영혼 수확자의 랜턴 - '영혼 추출'을 사용합니다.」

이승을 떠나 승천하고 있는 죽은 혼에게 사용하는 영혼 추출.

혼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만을 골라 뽑아내었고 그것이 곧 어둠 속성 마력으로 변환되었다.

일반 마력보다도 훨씬 진득하고 농밀한.

끈적이는 듯한 느낌의 마력.

- ...어둠 속성 마력이라. 이런 것이었구먼.

혼에서 직접 추출해 낸 어둠 속성 마력이란, 얼마나 순수한 것인지.

이것을 활용한다면 네크로맨시나 흑마법의 다양성이 얼마나 발전할지.

다만, 추출 방법이 저 랜턴을 이용하는 방법뿐이기에 아쉬운 것이다.

'이걸 마력 다루듯이 똑같이 하란 말이지.'

죽은 혼에서부터 추출되어 몸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어둠 속성 마력.

물론 그만큼 특수한 마력이기에 다시 재생이 되지 않는 일회성 마력이지만, 어찌됐건 결국 마력이 아닌가.

마력의 한 종류라면 히오가 다루지 못할 이유가 없다.

- 허어어... 효율이 엄청나. 보통 마력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될까.

그렇게 돌아가는 어둠 속성 마력은,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식을 만들어갔고 그것이 곧 크뢰츠발트식 강령술의 기초식.

기초 마법식이 완성됐다.

"그럼 이제...."

랜턴 속에 잠든 영혼을 꺼내야 할 때.

「영혼 수확자의 랜턴 - '영혼 보관'을 사용합니다.」

「꺼낼 영혼을 선택하십시오.」

녹빛이 조금 더 진해지고 한층 어두워진다.

그런 녹색을 통해 조금씩 빠져나오는 것은 영혼.

지난 바알 숲의 전투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던 아이라이츠의 영혼.

그것을 강령술의 식에 따라 어둠 마력과 함께 인도한다.

혼이 빠져나간 엘프의 육체를 향해.

이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랜턴을 빠져나온 아이라이츠의 혼이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본디 의지가 있는 혼을 다루기란 지극히 까다로운 것인데 아이라이츠의 영혼은 히오가 이끄는 대로, 무엇을 향해, 어떤 연유로 가는 것인지 모를 텐데도 그저 순응하며 따른다.

허나 전체적인 강령술이 쉬운 건 아니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꽤 긴 작업이었고 인내를 요하는 것이었다.

어둠 마력을 처음 다뤄보기도 했거니와 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혼을 인도한다는 게 생각보다 까다로웠으니.

하지만 결국.

"...됐다."

시간 문제이기도 했다.

기어이 가장 고귀했던 엘프의 육체에 아이라이츠의 혼이 씌워진 것이다.

-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

아이라이츠의 혼을 보좌하듯이 함께 들어간 어둠 마력이 엘프의 육신에 퍼져 활개치기 시작한다.

팔을 통해, 다리를 통해 뻗어나가는 그것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동시에 꿈틀- 움직이는 육체.

천천히 일으키는 몸.

슬며시 떠지는 눈은 이전처럼 검게 물들지 않았으며 움직이는 자신의 몸을 신기하게 둘러본다.

- ...성공한 겐가?

"그런 것 같은데."

가장 고귀했던 엘프의 몸에 자리잡은 아이라이츠의 영혼.

그 눈이 이내 곧 히오를 향하고 어김없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휜다.

"히오 파블렌코."

동시에 퍼져 나가는 것은 선홍색의 빛.

그렇게 다시 육체를 얻은 아이라이츠의 첫마디는 지극히 그녀다운 것이었다.

"사랑해."

몸을 일으키며 잠깐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히오의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라이츠.

그러니 이제는 확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성공했구먼.

"확실하네."

누가봐도 아이라이츠지 않나.

외형은 엘프의 단아한 얼굴이었으나 몸짓, 행동, 말투가 전부 아이라이츠였다.

"아이라이츠."

"사랑해!"

"몸이 불편하거나 뜻대로 안 움직이는 느낌은 없어?"

"사랑해!"

"부작용이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하니까...."

"사랑해!"

"...머리에 문제가 생겼나?"

꽉 끌어안은 채 고개를 흔드는 걸 보면 말을 알아 듣는 모양인데....

그냥 간만에 말문이 트여서 기분 좋은 건가 보다.

"진짜... 이거 현실 맞지? 꿈 아니지?"

고개를 들고 히오의 뺨을 만지고 얼굴을 더듬는 아이라이츠.

눈에는 눈물마저도 살짝 맺혀 있었다.

"그래. 꿈 아니야."

"...다행이다."

다시 고개를 숙여 품으로 파고들며 중얼거린다.

"나 계속 꿈을 꿨어. 죽는 순간의 꿈. 생각보다 엄청 아프고 그랬는데 가끔씩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면 신기하게 아프지 않더라. 그리고 그럴 때면 항상 다른 꿈을 꿨어. 어릴 때의 꿈이라든가. 히오 너와 함께하던 때의 꿈이라든가."

아이라이츠를 가만히 품에 안은 채 그녀의 독백에 가까운 말을 듣고 있는다.

그러다보면 신기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사실 아이라이츠와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었으니.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가 어찌 이토록 크게 각인된 것일까.

"돌이켜 곰곰이 떠올려 보면 어릴 때 기억도 마냥 나쁘지는 않더라고. 시간이 지나서 그런가?"

그러니 지금 이 약간의 시간 정도는 투정과도 같은 아이라이츠의 말을 받아 주기로 했다.

어찌보면 죽었다 다시 태어난 순간이 아닌가.

그것은 어떤 심정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으니.

"그래서 말이야...."

하지만 너무 이 상황에만 몰입했었기에 또다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문득, 들려오는 어쩐지 이를 꽉 깨문 듯한 목소리.

"나... 잊어버린 거 아니지?"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면 여전히 돌처럼 굳은 몸으로 빳빳하게 선 채 이곳을 보는 시르베르트가 보인다.

그에 히오가 뭐라 대답하려 했으나.

"아, 맞...."

그보다 한발 빠른 것이 있었으니.

안긴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시르베르트를 바라보는 아이라이츠.

그 표정은 히오를 볼 때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렇게 내뱉는 말에.

"뭐야, 저 못생긴 건."

기어이 시르베르트의 이마에 힘줄이 빡 돋아난다.

116화 용을 찾아라 (1)

"으음...."

비틀거리며 걷는 아이라이츠.

아직 새로운 몸에 완전히 적응 못 한 건지, 걷는 걸음이 불안하다.

히오는 그런 아이라이츠를 옆에서 부축해 주고 있었는데.

"히오가 좀 더 가까이서 잡아 주면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그냥 잡고 있던 팔을 놓아 버렸다.

"쳇."

아니나 다를까 멀쩡하게 잘 걷는 아이라이츠.

"장난치지 말고 능력 사용에 집중해 봐. 쓸 수 있겠어?"

"으음... 어렵단 말이야. 그래도 조금만 감 잡으면 가능할 것 같긴 해."

"얼른 감 잡아 봐. 시르베르트 울겠다."

히오와 아이라이츠 앞에는 시르베르트가 멀뚱히 서 있었다.

제 의지는 아니었고 아직도 돌로 변한 몸을 풀지 못했기 때문.

그리고 그 표정은 몹시도 복잡 미묘했는데.

"저게 진짜... 아이라이츠라고?"

죽었던 아이라이츠가 살아서 돌아왔다는데 저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면서도, 죽었던 몬스터 시체가 일어나서 대화까지 하니 맞는 것 같긴 한데, 이걸 당연히 믿는 게 진짜 맞는 건가... 싶은 그런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아이라이츠 맞잖아."

그런 히오의 말에 가로로 살짝 기우는 아이라이츠의 고개.

유혹하듯 치는 눈웃음.

고운 손으로 살며시 가리는 입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전형적인 아이라이츠가 아닌가.

"그래... 난 이제 모르겠다. 네가 죽은 사람까지 살린다는데."

시르베르트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으리라.

히오 파블렌코. 지존 천마.

이놈은 정말 신이라도 되려는 건지.

죽은 사람까지 살리고 신성 스킬을, 그것도 최고위 스킬로 짐작되는 것을 다루지 않나.

그에 대해서는 더이상 상식이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죽은 사람 살리는 것쯤이야. 히오한테는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아이라이츠 맞네. 지독한 지존 천마 스토커."

"히오. 우리 그냥 시르베르트 놔두고 갈까? 지금 상태도 괜찮아 보이는데."

"미안. 살려 줘."

사이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로 히오가 끼어든다.

"빨리 연습해 봐. 시간 없어."

"시간 없어? 왜?"

"용 찾으러 가야하거든."

"용? 재밌겠다."

"...그게 뭔 줄 알고."

"몰라도 같이 갈 거니까. 재밌겠지."

"음... 그래."

다행히 아이라이츠가 능력을 감을 잡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본래 가장 고귀했던 엘프의 능력.

식물을 다루고 마주 보는 이를 그대로 굳어 버리게 만드는 능력.

그것은 이제 아이라이츠의 능력이 되었으니 아직은 미숙하더라도 다뤄 내야만 할 터였다.

"자, 나 봐 봐."

아이라이츠의 눈을 마주하자.

「미약한 정신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선홍빛 대신 잿빛이 새어나온다.

엘프의 석화 능력이 미약하게나마 발현된 것이다.

"오, 이제 된 것 같은...."

생각보다 빨리 익힌 것에 대해 칭찬을 해 주려는 찰나.

「강한 정신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회색빛 뒤에 몰래 숨어 있던 선홍빛이 강하게 짓쳐 들어온다.

이건 아이라이츠의 본래 능력, 매혹이 발동될 때 퍼져 나가는 빛.

"...뭐해?"

"헤헤. 안 통하넹."

다른 능력을 실험해 보는 척하면서 히오에게 몰래 매혹을 걸려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러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는 아이라이츠.

"아무튼, 능력을 사용해서 돌로 변한 저것들을 다시 돌려 놓으면 된다는 말이지?"

뻔뻔한 모습이지만, 그렇기에 참으로 아이라이츠답다고 할 수 있는 모습.

그러니 히오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겠어?"

"응. 될 것 같아."

주위에 가득한 석상.

이 모두가 조금 전까지는 살아 있었던 사람.

아이라이츠가 능력을 발현해 그것을 회수하기만 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테다.

"이런 식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아이라이츠의 눈이 잿빛으로 번뜩이고.

그 시선이 닿는 곳에 위치한 석상은 다시금 본인의 색을 띄기 시작했으니.

시선이 닿는 족족 회색이 녹아내리고 다시 색이 입혀지는 그 과정도 나름 기적이라면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회색 돌이 녹아내리고 다시금 숨쉬기 시작하는 사람들.

"허억...!"

"여, 여신이... 있었는데?"

"저기, 저기 있다! 악독한 마녀!"

"몬스터...? 아니, 사람이잖아?"

"근데 귀가 왜 저리...."

수많은 사람이 석상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소란스러워진 광장.

아이라이츠에게 집중되는 시선.

그에 불편한 듯 살짝 미간을 좁힌 아이라이츠의 몸에서 진한 선홍빛이 뿜어져 나온다.

"시끄럽기는."

석화가 풀린 모두를 자신의 매혹으로 다시 장악하려는 선홍빛의 향연에.

「강한 정신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히오의 지팡이가 아이라이츠의 머리를 툭 친다.

딱콩-

"습관성 매혹 이제부터는 금지야."

"…응...."

함께하기 위해서는 손버릇. 아니, 매혹 버릇부터 차근차근 고쳐 나가야 할 터였다.

* * *

아카데미 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석화된 사람들을 모두 돌려놓았다.

대부분의 교수진이나 경비 병력은 게이트가 있던 장소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다시 되돌릴 수 있었다.

오히려 게이트 부근에 대부분의 병력이 집결되어 있었기에 더욱 쉽게 뚫린 것이리라.

최대한 효율적으로 방어하려던 계획이 외려 악수가 된 것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이라고 할까.

병력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고 그들이 돌이 된 사이 학생들의 피해 또한 생각보다 막심하지 않았다. 지난번 흑아의 습격이 의도치 않게 도움된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라이츠의 능력 사용도 꽤 자연스러워졌고, 더불어서.

"오랜만이네. 클레어 꼬맹이."

클레어와 아이라이츠가 만났다.

매혹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게... 아이라이츠라고? 그때 그 또라이?"

"또라이라니. 히오가 들어면 오해하잖니? 돌로 만들어 줄까?"

"흥. 할 수 있으면 해 봐."

『싸우지 마세요! ⸜( ⌓̈ )⸝』

"이봐, 아이라이츠. 나 아직 손등 쪽에 돌가루가 좀 남아 있는데 마무리 좀 확실하게 하지? 어깨도 영 뻐근한 게 아직 석화 덜 풀린 거 아니야?"

"교, 교수님. 좋은 아침... 아니, 좋은 저녁? 어쨌든 저 롤랑을 걱정하고 계셨을 텐데, 보다시피 저는 이 정도 위기는 여유롭게 헤쳐 나가고 있었...."

두 사람뿐만 아니라 얕은 인연으로 조금씩 이어지고 있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히오 파블렌코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둥근 인연의 고리.

바깥 세상에서는 모조리 사라졌었던 그런 인연.

"자자, 일단 아카데미는 얼추 정리된 것 같으니까 시르베르트, 네가 잘 처리할 거라고 믿고."

히오가 지켜야 할 것들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젠 진짜 가야 해."

그렇기에 서둘러 가야 한다.

아이라이츠의 부활과 전력 강화라는 큰 소득을 얻긴 했으나 여전히 용은 건재하고 어떤 재앙을 일으키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므로.

레가르다가 어떤 심정으로 그에 맞서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 이제는 정말 서둘러야 한다.

"또... 무슨 일이 있나 보네."

그런 히오를 향해 말을 건네는 붉은 머리칼의 클레어.

오랜만에 본 클레어는 눈에 띄게 강해져 있었다.

한층 더 예민해진 마력 감응에 클레어의 강해진 힘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빙의자가 아님을 감안한다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성장세.

"조금만 기다려. 삼 년... 아니, 이 년 뒤면 나는 네 옆에 있을 테니까."

히오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리 말하는 클레어의 눈에는 불꽃이 일렁인다.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진심이었다.

클레어의 성장 속도라면 다른 랭커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으니.

자신의 스킬인 화염을 다루고 진화하는 것에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라는 시르베르트의 평가를 들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무럭무럭 자라나 정말로 히오에게 큰 힘이 될 날이 오지 않겠는가.

히오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표가 되어 주고, 클레어는 함께할 미래를 그리며 굳게 다짐한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분위기 속에 끼어드는 이가 있었으니.

"어머. 나는 벌써 히오 옆에 있는데?"

역시나 아이라이츠였다.

히오의 팔에 찰싹 달라붙으며 클레어를 향해 얄밉게 웃어 보인다.

"어쩌나? 클레어는 아직 꼬맹이라서 같이 가기는 좀 힘들지?"

"...넌 빠져."

"후음. 빠지려면 히오랑 같이 빠져야 하는데? 우린 같이 가거든."

"네가 왜 히오랑 같이 가는데?"

"그야 우리는 서로 막 손도 잡고 심심하면 껴안기도 하는 데다가...."

"뭐?"

"그리고 히오와는 내 은밀한 곳(영혼 깊숙이 감춰져 있던 과거 기억)까지 공유한 사이니까?"

아이라이츠의 클레어 갈구기 실력은 가히 대단했다.

이전보다 한껏 어른스러워졌던 클레어가.

"이... 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다혈질이 다분하던 옛날처럼 소리를 빽 질렀으니.

"미친 변태 같으니라고! 나도 같이 갈 거야!"

왜 대화가 그렇게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라이츠 옆을 비집고 들어오는 클레어를 떼어 놓고.

잘 타이른 뒤에 히오는 곧장 황궁으로 출발했다.

옆에는 아이라이츠, 프레이야가 함께였다.

* * *

황궁의 접견실.

피곤에 절은 얼굴로 실비아가 히오를 맞이해 주었다.

"이런 시기에 황제가 되어서 고생이네 너도 참."

"아니야... 이런 시국이니 내가 더 잘해야지. 그래도 덕분에 아카데미 쪽은 한시름 덜었네. 고마워, 히오."

"다른 쪽은 크게 이상 없어?"

"응. 로열 나이츠가 잘 막아 낸 모양이야. 마헬 경이 의욕을 되찾은 것 같아서 다행이지."

이 근방에서 보스급이 나타난 것은 아카데미뿐이었던 모양.

그나마 다행이었다.

히오가 있는 곳에 나타났기에 큰 피해없이 막아 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아이라이츠와 호환이 잘되는 육체를 찾고 강령에 성공하여, 고귀했던 엘프의 능력과 본래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큰 전력을 얻었으니까.

"게이트 발생했던 부근에 어비스 기운이 퍼졌을 테니까 정화 작업에 들어가야 할 거야. 가능하면 신성력 사용 가능한 사제가 오면 좋겠지만...."

"인력 부족이지."

신성력을 사용할 정도의 고위 사제는 신성이 거의 사라진 현 시대에 무척이나 드문 것이다.

"우선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멀리 떨어지게 하고... 다녀와서 내가 최대한 정화해 볼게."

"다녀와? 또 어디 가야 되는 거야?"

실비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략적으로나마 설명을 시작한다.

"전에 아릴레이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렇게 실비아와 히오,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접견실의 한쪽 구석에는 또 다른 두 사람이 있었다.

"네가 용의 영혼이라고?"

『네! 아주아주 작은 일부예요!』

아이라이츠와 프레이야였다.

프레이야가 신기한지, 주로 질문하는 쪽은 아이라이츠, 답하는 쪽은 프레이야.

"생각과 감정이 문자가 되어 나타난다니, 신기한 아티펙트네?"

『네! 제 고향에 오래 전부터 있던 보물이라고 했어요! ( ≧ᗜ≦)』

"그럼 말은 못 하니?"

『네... 제가 너무 약한 영혼이라 그런가봐요. т ̫ т』

"저런... 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널 동정할 것 같니?"

『...네?』

"새로운 수법이구나. 동정심으로 히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다니."

『넴...?』

"그래도 내게는 통하지 않지. 요망한 것."

『(。・ω・。)?』

"겨우 말 못 하는 것쯤이야. 나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말 안 할 수 있어. 나도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란 의미야. 이해했니?"

『( º﹃º )』

"역시 정곡을 찔리니 말을 잇지 못하는구나. 아, 말은 원래 못 했지?"

『( ᐪ ᐪ )』

그런 괴상한 대화가 끝난 것은 히오와 실비아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였다.

"어쨌든, 동정심으로 공략하는 짓은 내가 있는 한 불가능하니까 포기하란 말이야. 알겠니?"

『( ˘﹃˘ )』

옆에서 보기에는 꼭 아이라이츠가 프레이야를 괴롭히는 모양새지 않나.

그렇기에 실비아와 대화를 마무리지은 히오가 프레이야를 들쳐 안으며 아이라이츠에게 말했다.

"뭐 하냐?"

"응? 별거 아니야. 조기교육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건 미리미리 주입시켜 놓아야 나중에 커서도 다른 마음을 안 먹거든."

"...그냥 헛소리하고 있었나 보네."

어찌됐건 수도의 대략적인 상황을 들었고 문제없음을 파악했다.

거기에 이오스의 협조까지 받아 내었으니.

"가자 프레이야."

『네...!』

이제 용을 찾아내야 한다.

"어디 있는지 느껴져?"

『네! 멀긴 한데 확실하게 느껴져요!』

누구보다 프레이야 본인이 가장 걱정되리라.

자신은 누가 뭐라해도 용의 혼, 그 일부였으니.

『이쪽 방향으로 쭉 가면 있을 거예요!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까 여기서 제법 먼 지역이에요.』

손을 쭉 뻗어 한쪽 방향을 가리키는 프레이야.

책상에 지도를 펼치고 실비아와 함께 그 방향이 어디인지 유추해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으니.

"여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더욱 강하게 피어오르는 것이다.

"신성 왕국이잖아."

117화 용을 찾아라 (2)

신성 왕국 히베루니아.

서쪽으로 그란디나 산맥을 끼고 제국과 맞닿아 있는 종교의 왕국.

여러 신을 받들던 시대에도 리퓨에 여신을 섬겼으며 다른 신의 신성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리퓨에 신을 모시는 국가.

유일하게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교단이었으나 그것도 점차 힘을 잃어 가고 그에 따라 왕국의 힘도 함께 하락하는 중이었다.

이런 시대에 탄생한 성녀는 많은 이의 머릿속에 '리퓨에'라는 이름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금 리퓨에 교단이 대륙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그런 성스러운 소녀가 미래를 보았다.

히베루니아의 수도가 무너지고 불타오르는 미래를.

옛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전설 속의 용이 나타나 히베루니아를 침공하리라는 것을.

그러니 대비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뭘, 어떻게?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도를 불태우고 교단을 무너트린단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대체 왜?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막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신탁마저 거의 사라진 현시대에 성녀가 보고 느낀 것은 명백한 이상 현상.

즉, 신의 계시가 분명했으니.

굳건한 믿음 아래, 히베루니아는 하나되어 움직였다.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들을 전부 불러들여야 합니다."

오래 걸리거나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침 분기별로 있는 대기도회가 진행 중이었고 주교 이상급 사제들이 수도에 모여 있었으니 말이다.

"신성 가호를 언제든 쓸 수 있도록 훈련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신성 가호란 히베루니아를 지키는 가장 단단한 보호막.

아주 오래전부터 왕국을 지켜온 기적과도 같은 신성.

물론 이를 사용한 적은 역사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지금에서는 방법만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습하고 훈련하자는 말이었고.

"모두의 신성력을 합쳐야 할 거예요."

모두가 힘을 합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위기에 대응하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성과는 곧장 나타났다.

"게이트에서 사악한 것들이!"

어비스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히베루니아도 게이트의 위험성은 인지하고 있었기에 대처는 재빨랐다.

허나 문제는 넓은 땅덩이에 비해 이름난 강자가 많지 않다는 것.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게이트의 숫자는 열을 넘어갔고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는 법.

몇몇의 강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게이트 발생지에서 조금씩 밀려나며 피해가 커져 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위기에서 빛을 발한 것은 수도에 모인 사제들.

성녀의 예견에 따라 히베루니아 고유의 신성 가호를 연습하고 있던 이들이 위기를 인지하고 신성 가호를 발동했으니.

주교 이상의 고위 사제와 추기경 성녀 등.

모든 이의 신성이 합쳐져 왕국 전체를 감싸는 막대한 방어진을 발현하게 되었다.

히베루니아가 왜 제국 못지않은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 주는 광경.

수없이 많은 교단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세월 속에서도, 유일한 신성국으로서 어찌 버틸 수 있었는가를 증명하는 기적.

본래 지금의 약해진 신성력으로는 왕국 전체를 신성 가호로 뒤덮는다는 것은 불가능이었겠지만, 성녀는 가히 성녀였다.

이리나가 가진 모든 신성을 쏟아붓자 비정상적으로 많은 신성력이 발휘된 것이다.

리퓨에가 일으킨 기적의 빛. 신성.

그것이 히베루니아 전역을 뒤덮은 시간은 짧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기도 했다.

어비스의 약점은 명백히 신성력이었으니까.

짧디 짧은 시간 탓에 신성 가호를 버텨 낸 몇몇 몬스터가 있긴 했다.

물론 버티는 데 힘을 다 쓴 탓에 사기가 오를대로 오른 왕국의 기사단에게 곧 온몸이 꿰뚫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러한 우연인지 리퓨에의 계시인지 모를 것 덕택에 히베루니아는 가장 빠르게 위기를 극복한 왕국이 되었고.

신민들은 다시 한번 성녀를 찬양한다.

"역시 성녀님."

"악에 물든 놈들이 침공할 것을 예견하시다니."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잘 막아 냈지 않나."

수많은 고위 사제들과 추기경 헤럴드, 성녀 이리나까지 모든 신성을 쏟아부어서 기진맥진해 있지만, 그것으로 큰 위기를 넘긴 것이었으니.

이리나가 본 것은 이걸 예견한 것이라고.

그녀의 말대로 모든 사제들이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정말 왕국이 불타고 교단이 무너졌을 수도 있었겠다고.

성녀님이 계신 한, 우리는 안전하다고.

이제 끝났다고.

그리 생각하며 위기를 잘 극복했다 안심하는 것이다.

얼마나 찝찝하고도 불안정한 안심인가.

이리나도, 헤럴드도, 고위 사제들도 바닥까지 쏟아부은 신성력을 얼마 회복하지 못했지 않나.

그런 불완전한 안심을 줄여 표현하자면 곧 방심이었으니.

불길한 예언을 극복했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을 때.

- 크르르르르....

재앙은 시작되었다.

* * *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아 내고.

모든 사제가 힘을 합쳐 신성 가호라는 기적을 행했던 날.

히베루니아의 모든 신민이 리퓨에의 기적을 목도한 날.

모두가 기뻐하는 한편으로 무거운 피로감에 짓눌린다.

대낮을 푸르게 감싸던 하늘도 지쳐 붉게 물들어 갔으니.

하루 종일 목숨 바쳐 싸웠던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전장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얼른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잠에 들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은 마무리해야 했기에.

피곤하긴 해도 새하얀 신성을 온몸으로 느꼈지 않은가.

역사적인 날이며 자신은 그런 사건의 최전선에서 싸운 용사인 것이다.

그런 병사들 중 하나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굽혔던 허리를 편다.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그리고 그 미소 띤 입가가 벌어지는 데는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으니.

"저게... 뭐야?"

붉게 노을진 저녁 하늘.

마치 태양과 맞서듯, 석양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가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

그 형태는 보자마자 오직 한 단어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용?"

어린 시절 동화 속에서나 종종 등장하던 생명체.

그런 얼빠진 병사의 넋두리를 순식간에 지나쳐 하염없이 날아가는 그것은 분명 용이었다.

게이트 주변의 전장을 지나, 평범한 도시 위를 빠르게 날아가는 거대한 형체.

"우와! 용이야 용!"

"바보야. 용이 세상에 어디있어?"

"저기! 하늘에 날아가잖아!"

"어어...?"

구름도 많지 않은 노을진 하늘.

그 사이를 빠르게 날아가는 용의 모습은 너무도 눈에 띄는 것이었으니.

너도나도, 경로상에 있는 왕국민 대부분이 목격하고야 만다.

어느 한곳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용의 모습을.

그들에게 있어서 용이란 환상의 생명체.

그러니 더더욱 기뻐한다.

신의 가호가 펼쳐진 날에 나타난 전설의 존재.

이 또한 신의 은총일 것이라고.

리퓨에의 손길이 다시금 이땅에 내려앉으리라 여기고 기뻐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길조라 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육중하고도 장엄한 비행이 수도 인근에서 목격되었을 때는.

"...요, 용이다!"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예언의 용이 나타났다!"

붉게 물든 하늘.

정말로 나타난 용.

예언의 그 모습 그대로였으니.

흉조였다.

비상사태에 종이 긴박하게 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려던 모든 병력이 다시금 왕궁으로 집결한다.

보고를 받은 교단의 최고위 사제들 또한 급하게 모인 상태였다.

"위치는요?"

"마지막 보고가 라단이었습니다."

"라단이면 그래도 꽤 거리가...."

"새, 새로운 보고입니다! 용이 라단을 벗어나 수도에 거의 근접했다는...."

상식을 벗어난 속도.

인간의 기준으로 파악해선 안 될 그것.

"용이라니.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사라졌다 전해지는 생물이 아닙니까? 그게 정말...."

"그런 말이나 할 게 아니에요!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대책을!"

"그런데 왜 하필 성국일까요. 무슨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혹시 저희에게 우호적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이야기에 따르면 용에게는 인간 못지않은 지성이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대화를...."

"어허! 성녀님의 예언을 듣고서도 그런 망발을 하십니까!"

짙은 피로감과 혼란.

장내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그리 말할 수 있겠다.

이리나의 예언은 왕국 수뇌부 모두가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지극히 신실한 자들뿐이었다.

붉은 하늘 아래에 나타난 용이 교단과 수도를 파괴하고 무너트린다니.

쉬이 믿기 힘들 뿐더러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예언이라 생각한 것이다.

붉은 하늘과 용은 곧 불길함이오, 그것에 맞서는 자는 이리나.

즉, 불길한 일이 있을 테니 대비해라. 신성으로 위기를 극복하여라.

압축하자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어비스 몬스터를 훌륭하게 막아 냈지 않은가.

예언의 내용은 이제 끝났을 터인데 갑자기 진짜 용이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신 차리세요. 용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헛된 희망을 품지 말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해요."

용 목격담에 대한 보고가 동시다발적으로 계속해서 올라오는 중이다.

그러니 대화를 시도해 보자는 멍청한 소리를 할 시간에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대비해야 할 터였다.

"이리나 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모두의 시선이 새하얀 성복을 차려입은 성녀, 이리나에게로 향한다.

신의 선택을 받은 가장 성스러운 여인이자 예언의 당사자.

그런 이리나가.

"다시 한번 신성을 모아야 해요."

신성 가호를 또다시 펼치자고 말한다.

"하지만 신성력이 그리 금방 회복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돼요. 저건... 분명 제가 보았던 재앙이 틀림없어요."

신성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황임에도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리나가 보았던 미래의 모습은 용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모습이었으니.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신성 가호를 펼치기 위해 모든 사제가 집결한다.

용이 수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비늘은, 붉은 석양 탓에 새빨갛게 비친다.

- 크르르르....

왕성 전체가 떠오른 듯 거대한 육체.

번들거리는 파충류의 눈은 포악했고 연유를 알 수 없는 적개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은 교단 본부의 중심에서도 한눈에 보일만큼 살벌한 모습.

"지, 진짜 나타났어...."

"저게 전설로만 전해지던 용...."

사제들이 동요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될 때였다.

"집중하세요. 시작합니다."

교단의 중심부.

예로부터 성역이라 불리던 이곳은 사실 신성 가호를 시전하기 위한 장소.

모든 고위 사제가 중심을 둥글게 감싼 채 얼마 남지 않은 신성력을 쏟아붓는다.

"확장이 아니에요. 집약과 방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추기경 헤럴드의 주도하에 다시금 펼쳐지는 신성 가호.

신성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방어막이 수도를 진하게 감싼다.

물론 이 모든 건 마지막 남은 신성력까지 쥐어짜 낸 고위 사제, 그리고 이리나의 희생 덕분.

왕국 전역을 감싸지도, 다른 의도를 섞지도 못하고 그저 방어에만 몰두했기에 간신히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꽈아아앙-!

용이 그 거대한 몸체를 부딪쳐 오자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듯 위태로이 흔들렸으니.

"크흑."

모인 고위 사제들 가운데서도 신성이 약한 사제들은 그 한 번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

"화살을 쏴라! 투석기를 쏴라!"

바깥에서도 용을 향해 갖은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소용이 없다.

왕성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덩치인 탓에 빗나갈 일이 없음에도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강대했다는 고대의 생명체의 비늘 하나 뚫어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콰아앙-!

몇 번의 부딪침이 이어지고 그 사이에 온전히 서 있는 사제는 몇 없었다.

추기경 헤럴드와 이리나를 포함해서 겨우 다섯.

단 다섯 명이서 신성 가호를 유지하며 용을 막아 내고 있었으나.

콰아아앙-!

그것도 이제 한계인 것 같지 않나.

고작 다섯이다.

콰아앙-!

아니, 이제 넷.

콰앙-!

셋.

꽈아아앙-!

"리퓨에시여...!"

둘.

몇 번의 충돌 이후 남은 건 오직 둘 뿐.

헤럴드와 이리나.

헤럴드의 입가에는 이미 진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곧게 뻗은 늙은 두 팔은 하염없이 떨리는 중이었다.

"어찌... 어찌해야 합니까."

하필 오늘.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삿된 것들을 신성으로 물리친 오늘 나타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무슨 시련이란 말인가.

"리퓨에시여!"

헤럴드 구겐베르거.

평생 교단을 위해 헌신했던 늙은 종은, 각혈하며 쓰러지는 순간까지 신을 향해 울부짖는다.

"부디...."

여신 리퓨에.

인류의 기록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존재했던 태초의 신.

그녀의 또다른 이명은.

"무지한 저희에게 한 줄기 희망을...."

희망.

"리퓨에시여."

헤럴드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찾는다. 희망을 갈구하며 그것이 부디 답을 내려주기를.

그의 몸에 존재하는 모든 신성력을 쏟아 내며 그렇게 쓰러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이는 고작 한 명이었다.

이리나.

리퓨에가 사랑하는 아이.

가장 성스러운 소녀.

"헤, 헤럴드 할아버지...."

그런 이리나의 두 눈은 사정없이 떨려오고 있었다.

의지하던 헤럴드마저 쓰러지고.

그 옆으로는 그와 비슷한 처지인 수십의 사제가 보인다.

하늘에는 거대한 용이 절대자의 눈을 번들거리며 지상을 오시한다.

"이건...."

얼마 전 문득 보았던 광경과 결국 같은 광경이 아닌가.

쓰러진 사제들.

하늘 위에는 용.

이리나의 끝을 모를 신성 또한 이제는 정말 바닥을 드러냈고 그에 따라 새하얀 가호 역시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으니.

"어, 어떻게 해야...."

두 손은 당황한 듯 허공을 휘저으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여기까지 의연하게 잘 왔으나 결국 헤럴드마저 쓰러지고야 말았기에.

가장 성스러운 소녀라 존경받고, 막중한 책임감에 의젓해졌으나 속은 아직 여린 이리나였기에.

덜덜 몸을 떨면서도 다시 몸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해, 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허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오늘만 두 번째 신성 가호를 펼치는 것이었으니 제아무리 성녀라 한들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주저앉은 이리나의 머리칼이 거세게 휘날리기 시작했으니.

바람이 부는 것이다.

"용이 뭐, 뭔가 한다!"

"화살을 쏴! 더 빨리!"

"으아아악!"

본디 녹빛이었던 비늘이 더욱 그 색을 진하게 밝히고 쩍 벌어지는 입.

그 사이로 광풍이 몰아친다.

바람이 모여든다.

거센 바람이 부는 것이다.

그와 함께 모여드는 엄청난 양의 마력은, 마법을 모르는 이리나와 다른 병사들 역시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으니.

"아, 안 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쏘아지는 순간, 닿는 순간 모든 것이 바스라질 것임을.

예언 속의 그 풍경처럼 교단은 무너지고 왕성은 불에 탈 것이며 시체로 땅을 이루게 될 것임을 말이다.

그러니 하찮은 발버둥을 쳐 보지만, 될 턱이 있나.

이미 신성력을 끌어올릴 수도,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상태이지 않은가.

공기가 휩쓸리듯 용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그에 따라 그것의 존재감은 더욱이 커져만 간다.

"마, 막아!"

"안 돼! 쏴! 빨리 더 쏘란 말이다!"

"아아, 리퓨에시여!"

집결해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저것이 터져 나오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임을.

누군가는 절망을.

누군가는 마지막 발악을.

누군가는 뒤돌아 도망치기를 행하는 어지러운 순간에.

콰아아아아-

바람과 마력이 뒤섞인 그것은 마치 용의 숨결처럼 쏟아져 나온다.

닿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절망적인 브레스.

"아아...."

이리나는 그것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탄식한다.

재앙 그 자체의 폭력 앞에서 무엇을 떠올려야 할까.

신실한 사제처럼 신을 부르며 기도를 올려야 할까.

아니면 평범한 사람처럼 절망에 허우적대야 할까.

틀렸다.

이리나가 떠올린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은 한 사람의 등.

왜 갑자기 그 사람이 떠오른 것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마치 그때와 같았기 때문인가.

모두가 자신을 무시하고 친구들을 몰아세울 때 지켜 주었던 유일한 사람.

그가 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아-

번뜩이는 샛노란 색의 빛.

그것이 히베루니아의 하늘을 노랗게 뒤덮는다.

창을 수만 번, 수십만 번, 무한히 휘두르면 그런 모양새일까.

순식간에 샛노랗게 물들인 빛이 포효하는 용의 숨결을 오롯이 막아 낸다.

그에 뒤돌아 도망치던 이도.

절망하며 땅에 머리를 처박던 이도.

리퓨에를 찾으며 눈물 흘리던 이도, 모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 …에리얼.

이리나의 눈동자에도 노란 빛이 담기고 그녀 또한 곧 볼 수 있었다.

용의 눈앞에 문득 나타난 한 사내의 모습을.

- 나를 기억해 내어라.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나타난 사람을.

118화 용을 죽여라 (1)

"이것 이상으로는 못 나갑니다."

이오스의 말이었다.

"국경 너머로는 직접 이동이 안 돼서요."

"되는데 안 하는 것이겠지."

"뭐, 아시는 대로."

프레이야가 가리킨 방향이 신성 왕국인 것을 확인하고 곧장 이오스를 불러 그 국경 지대에 도착한 것이다.

하나, 신성 왕국 히베루니아 내부로 바로 이동하는 것은 국가 간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이동이 불가하다는 게 이오스의 설명.

게다가 이오스의 공간 이동 스킬은 생각보다 조건이 까다로운 모양인지 제국을 넘어선 거리에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낮은 가능성이지만,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몸이 찢기거나 이상한 공간에 처박히는 등 위험하기 그지없는 게 공간 이동의 특징이었으니.

"그래. 안전하게 가야지. 고맙네, 이오스."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오스는 제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돌아가 버렸다.

아무런 미련도, 망설임도 없이 돌아가 버린 그 모습이 가히 이오스답다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남은 사람은 세 사람. 히오와 아이라이츠, 프레이야.

"흐음… 이렇게 같이 나오니까 여행 온 기분이고 좋아.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 거였구나?"

『여행이 아니라 저희는 엄청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걸 줄여서 여행이라고 한단다? 꼬마야."

『우우. 아닌 거 알거든요. ( `-´ )』

언제 저리 친해졌는지 종알종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히오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쨌든 히오랑 알콩달콩 여행 다닐 테니까 꼬맹이 너는...."

그제서야 아이라이츠도 무언가를 느낀 듯 히오와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이전의 아이라이츠라면 느끼지 못했을 기운.

하나, 새로 얻은 엘프의 육체, 그 예민한 감각이 먼 곳에 있는 거대한 마력을 잡아낸 것이다.

"저건...."

너무도 노골적인 기운.

거리가 멀어서 희미하게 느껴지나, 그렇기에 얼마나 강대한 기운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쐐기를 박는 프레이야의 손짓.

『저쪽! 아까에 비하면 가까워요!』

그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히오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으니.

"뭔가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진 모양이야, 히오."

아이라이츠는 옅은 눈웃음과 함께 살랑이며 히오의 곁으로 향한다.

"우리가 얼른 가서 해결해야겠는걸? 아무래도 이 몸은 이전보다 더 민첩한 것 같으니 너와 내가 빠르게 이동하면...."

"아이라이츠, 혹시 그 몸은 유령으로 변할 수도 있나?"

"응? 유령?"

"될 리가 없겠지?"

"…아니? 할 수 있을걸? 뭔지는 모르겠지만, 해 볼게."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도 모르면서 유령이 되어 보겠다고 끙끙거리는 아이라이츠.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고 히오는 팬텀 스티드를 소환한다.

「스킬 - '서먼 팬텀 스티드'가 발동됩니다.」

「특성 - '영체화(靈體化)'가 발동됩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긴박한 듯했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찌 느껴지는지 모르겠으나 히오는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휘몰아치는 마력이 얼마나 강대한지.

응집된 그것이 어찌나 거대한지 말이다.

"끄응… 유령으로 변하라니… 취향이 좀 독특.... 아니면 천천히 같이 이동하면서 해 볼까?"

"먼저 갈 테니까 프레이야 데리고 뛰어와."

"…응?"

"미안, 상황이 심각한 거 같아서. 프레이야 괴롭히지 말고 프레이야도 이 누나랑 같이 잘 따라와야 된다?"

『네!! 걱정 말고 얼른 가 보세요! 잘… 부탁드려요!』

"그래."

히오가 올라타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달리기 시작하는 팬텀 스티드.

"아니… 잠깐?"

아이라이츠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사이에 히오는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중이었으니.

"둘이 사이좋게 손 꼭 잡고 와!"

"...."

어느새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

히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리는 아이라이츠.

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아이라이츠의 입장에서는 퍽 허탈한 것이다.

그러나 겨우 이 정도로 상처받을 그녀가 아니기도 했으니.

"유령 되는 법이라도 익혀야겠네."

외려 승부욕을 불태운다.

"그럼 오늘처럼 도망치지도 못하겠지?"

승부욕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불태운다.

그리고 그런 아이라이츠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작은 형체.

다가온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라이츠의 손을 슬며시 잡는다.

"…뭐니?"

『가시죠! =͟͟͞͞(๑•̀ㅁ•́ฅ✧.』

"내가 너랑? 왜? 혼자가 훨씬 빠를 텐데?"

『그야 히오 아저씨가 손 꼭 잡고 오라고 했는걸요?』

"…귀찮기는."

히오가 없으니 대놓고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도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는 아이라이츠.

"업히렴. 너처럼 다리 짧은 애랑 손 잡고 어느 세월에 가겠니?"

『네! 언니! ٩(˙ ˆ ˙ )۶』

"…흥, 언니는 무슨."

그렇게 아이라이츠와 프레이야 두 사람.

아니, 강령술로 되살아난 언데드 한 명과 작은 용의 조각 하나는 히오의 뒤를 쫓아 부지런히 이동하기 시작한다.

붉은 하늘마저도 서서히 잠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 * *

- 레가르다.

눈을 감으면, 역시나 생생하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온화한 목소리.

그에게 세상을 보는 법과 대하는 법을 알려 준 그런 목소리.

에리얼은 레가르다의 부모였다.

- 레가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음에도 목소리는 여전하다.

온화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

모든 질문에 틀림이 없었던 대답.

그렇기에 그녀는 레가르다의 훌륭한 스승이었다.

- 레가르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사명을 이어 가야 했다.

바람과 자연을 관장하는 절대자. 녹색 용 에리얼.

자신은 용을 모시는 일족이었으니.

그런 일족 안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자로 선택받았으니 말이다.

하나, 다 자란 순간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에리얼을 지킨다니.

그녀를 가장 잘 안다 자부할 수 있기에 더욱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으로부터 지킨다는 말인가. 이미 완성된, 지고한 생명체일진대.

그러니 에리얼은 레가르다의 하나뿐인 친우였다.

배울 것이 많은 친구.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이.

용과 용의 기사란 그런 것이다.

부모이자 스승이었으며 유일한 친우.

하나, 주어진 사명을 너무도 쉽게 생각했음인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할 틈도 없었다.

정말이지 단 한순간에 용은 멸족했다. 하루아침에.

그나마 에리얼이 훗날을 기약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레가르다가 옆에 있었던 덕택.

홀로 생활하는 용의 습성상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

그렇게 레가르다는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명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자신을 끝없이 탓하며.

마지막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 다짐하면 기나긴 세월을 인내하며 버텨 온 것이었다.

약속의 내용은 별게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웃으며 넘겼을 약속.

정말이지 너무도 사소했을 약속.

그런 약속이.

- 다시 눈을 뜨면 내가 웃으며 반겨 주지, 에리얼.

- 그대,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 아니, 반드시 만날 거야. 약속하지.

이렇게나 지키기 어려웠을 줄이야.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렇게 어그러질 줄이야.

그러니 에리얼.

"나를 기억해라."

예전처럼 현묘한 눈빛으로, 온화한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고, 나를 불러 다오."

그런 레가르다의 바람은.

꽈아아앙-!

에리얼이 쏘아 낸 바람 앞에서 다시금 무너진다.

- 크아아아!

현묘하지도, 온화하지도 않은 목소리.

목소리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포효.

오직 파괴만을 위한 포식자의 눈.

콰아앙-!

그런 포악한 몸짓을 레가르다는 창 한 자루로 막아 낸다.

샛노란 강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며 용의 꼬리질, 몸짓, 날갯짓을 모조리 봉쇄했으니.

"전부 네게 배운 것 아니더냐."

지고한 생명체라고 한들 지성이 없는 이상에야.

본능만 남은 채 무작정 밀어붙이는 몸짓은 레가르다에게 통하지 않는 것이다.

콰아아앙-!

무한에 가까운 마력과 그것을 마법으로서 다스리는 마법의 종주, 용.

하나 지성이 사라진 지금 남은 것은 거대한 육체, 단단한 비늘, 그리고 이따금씩 내뱉는 마력 덩어리 브레스가 전부였다.

눈앞의 레가르다가 거슬린다는 듯 포효하며 살 떨리는 공격을 끝없이 퍼붓는 녹색의 용.

그런 공격을 받아치는 노란빛의 강기.

콰앙-!

콰아앙-!

콰아아앙-!

용의 거체와 작은 창이 맞부딪치는 충격에 땅이 울리고 건물이 흔들린다.

단단한 비늘과 재빠른 꼬리는 압축된 강기, 혹은 이 육체에 남아 있던 다른 스킬로.

파아아- 내뿜어지는 바람의 브레스는 하늘을 뒤덮는 자신의 의념기로 모조리 상쇄한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마찰이 일어난다.

우레와 같은 굉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와중, 레가르다는 직감하는 것이다.

본능만 남은 용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고.

의념을 실은 그의 창이라면 저토록 단단하고 아름다운 비늘을 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것을 느꼈기에 레가르다는 더욱더 간절하게 부르는 것이었다.

"…에리얼, 나를 기억해 다오."

그는 용을 지키는 기사였기에.

그것은 그의 사명이자 용은 그의 부모였으며 스승이었고 또 유일한 친우였으니.

다시 만날 에리얼 앞에 웃으며 서 있겠다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약속.

그렇기에.

"제발...."

그는, 결코 용을 죽이지 못한다.

* * *

콰아아앙-!

정녕 인간의 무위로 가능한 것이었나.

저토록 커다란, 성과 비견될 만큼 거대한 용.

화살도, 창도, 투석기도 통하지 않는 비늘과 파괴적인 숨결까지.

그것을 상대하는 이는 그저 한 자루의 창을 꼬나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한 치의 밀림이 없다.

하늘을 뒤덮는 노란빛의 향연으로 용의 숨결을 막고.

파괴적이고 거대한 공세는 재빠른 움직임과 곧은 창으로 맞선다.

주저앉은 채 그것을 올려다보는 이리나의 표정에는 당혹과 의혹이 짙게 번져 가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던 까닭이었다.

용은 왜 저토록 교단을 파괴하고 싶어하는 것인가.

그에 맞서는 저 사내는 누구이며 어찌 저토록 강한지.

그리고… 무엇에 그토록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용과 저 사내 둘 모두가 말이다.

콰아앙-!

물론 근거없는 직감이었다.

그저 이리나의 눈에만 그리 보일 뿐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시, 신의 사도께서 강림하셨다!"

"여신께서 사도를 내려 주셨어!"

"아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리퓨에시여… 감사합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안도의 목소리.

주저앉은 채, 무릎을 꿇은 채 저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용의 기사야… 용의 기사가 나타난 거야."

"사악한 용에 맞서는 기사라!"

"그게 딱 맞네! 용의 기사!"

"용의 기사!"

"용의 기사가 어서 저 사악한 용을 물리쳐 주기를...."

그런 외침을 들으며 이리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용의 기사라 불리기 시작한 사람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의문을 품는다.

기쁨과 희망에 가득찬 이들의 말과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일그러진 사내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간절해 보였기에.

그와 맞대는 용의 몸짓은 어쩐지 괴로워 보였으니.

콰아아아앙-!

둘의 부딪침이 구슬피 울려 퍼진다.

"용의 기사! 용의 기사!"

용의 기사는 사실 용을 지키는 자.

그것을 알고 있는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 * *

- 쯧쯧. 자네도 참 냉정하구먼.

푸르넬의 말에 히오는 눈앞에 실드 마법을 펼치며 가볍게 대꾸한다.

"어쩔 수 없잖아. 팬텀 스티드에는 유령체만 탈 수 있으니까."

- 그래도 자네 좋다는 여인에게 말 좀 따스하게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거, 속으로 생각하는 것의 절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중해야 해."

팬텀 스티드를 타고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빠르게 향해 가는 중이었다.

아직 거리가 꽤 남았음에도 점점 선명해지는 막대한 충격.

강한 마력과 다른 강한 기운이 부딪치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 과연 용이야. 하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군.

"완전히 이지를 상실한 거겠지."

- 그럼 용에 맞서고 있는 건 레가르다인가?

"아마도...."

- …쯧. 어렵게 됐구먼.

"그래. 마음 단단히 먹자고."

이미 어둑해진 하늘.

홀로 유일하게 빛나는 팬텀 스티드를 타고 그것을 가로지르며 낮게 중얼거린다.

"여차하면 용을 죽여야 할 테니."

119화 용을 죽여라 (2)

신성 왕국 히베루니아의 수도.

성역이 있는 성국의 수도답게 새하얗고 깔끔하며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도시.

물론, 지금은 그저 전쟁터일 뿐이었다.

용과 사람이 다투는 전장.

도시의 밤하늘에서 펼쳐지는 막대한 충돌의 연속.

콰아앙-!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녹빛과 노란빛의 충돌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선사한다.

용의 거체에 비한다면 사내는 몹시도 작아 성립되지 않는 싸움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정반대.

오히려 여유를 가진 쪽은 사내였다.

용은 끝없는 마력을 보유함과 동시에 마법의 종주이기도 한 최강의 생명체.

허나 지금은 그저 크고 단단하기만 할 뿐이었으니.

파괴적인 몸짓과 마력이 집결된 브레스를 막아내면서도 여유로운 것이다.

"리퓨에시여!"

"오오, 용의 기사가...!"

하지만 여유가 있어 보임에도 용에게 직접 타격을 주지는 못하고 있지 않나.

신의 사도가 분명할 저 사내도 단단한 용의 비늘을 뚫기는 힘든 것인가.

모두가 그리 생각하며 손에 땀을 쥐고 하늘 위의 전투를 바라본다.

이리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단단한 용의 비늘을 뚫지 못한다기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사내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기에도 버거울 만큼 빨랐으니.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나 실제 전투는 무척 긴박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했고.

사실은 정말 여유로웠음을.

긴박한 전투란 어떤 것인지,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 * *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에리얼은, 레가르다의 입장에서는 덩치 큰 아이와도 같다.

거대한 육체와 단단한 비늘, 재빠른 움직임을 더한 물리적인 공격은 건물 하나를 일격에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허나 레가르다에게는 이를 가볍게 흘려 넘길 만한 기술과 경험이 충분했다.

용의 기사가 아니던가.

그 존엄한 생명체를 상대하는 법은, 다름 아닌 눈앞의 이 에리얼에게 직접 배운 것이 아니었던가.

실제로 에리얼이 마력을 다룰 수 있다면, 육탄 공격에 마력을 싣는 것만으로도 레가르다는 수세에 몰릴 터였다.

그리하면 이제 단순한 아이의 몸놀림이 아닌 진정 용의 공격이라 할 만한 것이다.

물론 본능만 남아 있는 에리얼이 당장에 마력을 다룰 수는 없을 테니 레가르다는 이토록 여유로운 것이었다.

단순한 공격도 이제 눈에 익었고 움직임은 훤히 보였으니.

- 나는 그대를 다시 되돌릴 마법 같은 건 부릴 수 없어. 잘 알지 않나, 에리얼.

여유 사이로 끊임 없이 말을 거는 것이다.

- 그러니 이제 그만 정신을 차려.

미약한 소리로나마 자신의 말이 용의 영혼에 닿기를.

그리하여 예전과 같은 눈으로 다시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라며.

- 더 기다릴 수 있다. 천 년이고, 이천 년이고 기다릴 수 있으니 차라리 다시 잠에 들자.

계속해서 말을 걸어 보지만.

- 잠에 들고 다시 깨어나도 나는 여전히 있을 것이야.

변한 건 없었다.

콰아앙-!

에리얼은 그저 점점 새카매져 가는 눈동자로 폭력을 일삼을 뿐.

레가르다는 그것을 계속해서 막아 낼 뿐.

콰아아앙-!

그러한 현상에 좌절할 법도 하건만, 레가르다는 포기하지 않는다.

천 년을 기다린 약속과 천 년을 지켜온 사명에 시련 한 번이 없었겠는가.

이 역시 강한 시련 중 하나이며 언제나처럼 극복해 내고야 말겠다.

그리하여 반드시 너를 되돌리고야 말겠다 무던히 다짐하는 것이다.

하지만.

- 크르르르르....

그쯤에서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했으니.

- …에리얼.

본디 영롱했을 녹빛 눈동자가 완전히 검게 물들어 버린 것이다.

현묘함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고 바람을 담고 있던 푸름 또한 검정에 뒤덮여 버린 것이었다.

- …괜찮다. 괜찮을 게야. 분명 다시 되돌릴 수 있다.

그리 중얼거렸으나 변한 건 비단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반짝이던 비늘 또한 빛을 잃고 까맣게 물들어 간다.

그 주위로 퍼지기 시작하는 것은 저주 받은 기운.

심연이라 불리우는 그것의 기운.

- 감히.

그 빌어먹을 기운이 감히 용의 신체를 탐하려 드는 것이다.

- 감히!

레가르다의 오러가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참고 참았던 분노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무엇을 향해 분노해야 하는가.

답은 금방 나타나는 것이다.

- 크르르륵!

짐승과도 같은 낮은 울음에 떨려오는 밤하늘.

그 속에 담긴 것은 마력이 아닌, 심연.

콰아앙-!

심연으로서 움직이기 시작한 용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또 강력했으니.

콰아아앙-!

온힘을 다해 맞서는 레가르다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조금씩 더 강해져 가는 것이다.

마치 새로운 육체에, 새로운 힘에 적응하듯이.

- 감히 무엇을 탐하려 드는가!

분노가 가득 실린 레가르다의 외침.

심연에 완전히 물든 용의 울음.

더욱 강해진 둘의 격돌음이 한데 뒤섞여 히베루니아의 하늘을 뒤덮었고.

콰아아앙-!

그만한 충돌은 지상의 존재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대지가 진동하고 크게 흔들리는 건물에서는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져 내린다.

불어닥치는 바람에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버거워졌으니.

"서,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그제서야 정신 차린 경비대가 움직이는 것이다.

"괜찮아요. 저보다 여기 사제님들을...."

"예! 빨리 와서 사제님들을 모셔라!"

힘이 다한, 신성을 한계까지 쏟아부으며 용의 공격을 막아 낸 사제들.

그렇게 쓰러진 사제들과 추기경을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대피하기 시작한다.

콰아앙-!

더욱이 격해지는 충돌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 듯, 용의 주변에서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나온다.

그에 맞춰 레가르다 역시 힘을 키웠고 전투는 격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튕겨나온 강기 조각 따위가 초 단위로 지상에 내려꽂히기까지 했으니.

"성녀님! 가셔야 합니다!"

교단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위 대장은 이리나에게 대피할 것을 권했지만.

이리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요."

몹시도 불길한 용의 기운.

게다가 검게 변해 버린 용은 노골적으로 교단을 파괴하려 들고 있지 않은가.

교단을 지켜야 한다.

신성력이라면 저 기운에도 대항이 가능하리라.

그러니 신성을 회복할 시간만 조금 벌 수 있다면 교단을 감싸는 가호를 펼칠 수도 있을 테다.

콰아아앙-!

물론 불가능한 바람에 가까웠다.

"서, 성녀님! 어서, 어서 가셔야...."

호위 대장은 이리나를 지키기 위해 그 곁으로 향했다.

"조금만 있으면 교단 정도는 지킬 수 있을 신성력이...."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겁니다. 너무 위험해요!"

이제는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 정도의 굉음.

강한 바람과 흔들리는 대지.

"하지만...."

그렇다고 성역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버리고 가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이리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녀로 지내 온 시간은 짧았으나 그 짧은 시간 받은 무수한 존경, 높은 위치.

사제들이 자신을 보며 느낀 희망.

그런 것의 뒤에는 막중한 책임감이 함께하고 있음을 이제는 알기에.

"성녀님!"

허나 고집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경험이 일천해서 결단에 확신을 내리지 못하겠다.

"어서요. 정말로 위험합니다."

자신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희망을 고이 간직하느냐.

아니면 목숨 걸고 교단을 지켜 내 뿌리를 간직하느냐.

"...알겠습니다."

확신을 할 수 없었기에 결국 호위 대장의 말을 따라 움직인다.

경호를 받으며 교단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검게 변한 용은 왜 교단 자체를 향해 저토록 강한 적개심을 보이는지.

용에 맞서는 사람은 누구이고 무슨 연유로 저리 슬퍼하는지.

이번 선택으로 그것들은 영영 알 수가 없어질 테다.

그런 직감이었다.

목숨 걸고 이곳에 남아 교단을 지켜야 한다고, 직감은 그리 말하고 있었으나.

신성을 회복할 때까지 저 두 존재의 바로 아래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그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될 것인지 여전히 확신할 수가 없기에 이리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인다.

그렇게 걸음을 떼며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콰아아앙-!

여전히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격돌.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그 사이에서.

"…저건...?"

몹시도 새하얀 빛이 하늘에서 내려꽂힌 것은 그때였다.

콰앙-!

마치 유성우처럼 이리나의 앞에 내려꽂힌 새하얀 무엇인가.

"성녀님! 제 뒤로...."

솟아오른 먼지구름에 다급히 호위 대장이 검을 뽑아들었으나 이리나는 그런 호위 대장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떨어지는 하얀 빛 속에서 무언가를 본 까닭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화려한 무엇인가를.

그리고.

"오랜만이네."

먼지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는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이리나."

히오 파블렌코.

제국의 수호 기사이자 자신의 운명을 바꿔 준 마법사.

"…마법사님!"

히오의 옆에 서 있는 것은 새하얀 빛의 정체였다.

날개 달린 흰색의 말.

은은한 빛을 내는 그 말은 가히 성서에 나오는 신수(神獸)의 모습과도 같았으니.

"엉망진창이구나."

히오는 그런 신성한 짐승을 돌려보내고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왼손에는 키보다 더 큰 지팡이를 짚은 채였다.

그런 히오를 향해 검을 겨누는 호위 대장.

맡은 바 본분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누구냐!"

"괜찮아요. 제 은인이세요."

"…성녀님의 은인이라면… 설마 베르덴의 수호 기사 말씀이십니까?"

성녀의 시작은 곧 히오 파블렌코가 이름을 알리게 된 시작과 같았기에 신성국의 대부분은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에 히오는 들었던 고개를 내려 주변을 둘러본다.

잿빛으로 번뜩이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이리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리나. 지금 바로 도시 전체에 대피령을 내릴 수 있겠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해우를 반길 시간 따위는 없었다.

히오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젓는 이리나.

"힘들어요. 도시 전체에 명령을 내리고 이를 수행한다 해도 거기까지 몇 시간이나 걸릴지...."

실제로 인근에도 여전히 대피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점점 더 격렬해지는 전투 상황에도 정확한 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뇌부도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남은 이들은 리퓨에가 자신들을 지켜 주리라 믿으며 기도나 올리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대답을 들은 히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살짝 들어 올린다.

"조금 격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니."

그런 말과 동시에 손에서 빙글 회전하는 지팡이.

「스킬 - '샤우트'가 발동됩니다.」

지팡이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색의 빛.

어찌나 강렬한지 용이 날고 있는 저 하늘 위까지 닿은 금빛이 뭉쳐 어떤 형체를 이루어 가기 시작한다.

곧 완성된 그것은 금빛으로 만들어진 거인.

신의 뜻을 전파하는 대리자.

히오의 입이 열리고 거인의 입이 함께 열린다.

그 입 모양은 히오의 입 모양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 멀리 물러나라.

모든 소음을 밀어내는 압도적인 울림.

- 관망하지도, 기도하지도 말아라. 그저 도망쳐라.

그것은 신의 대리자가 전하는 말.

용이 날뛰고 용의 기사가 그에 맞서는 가운데 펼쳐진 신의 뜻.

감히 누가 이것을 거역하리.

- 무의미하게 죽지 말아라.

동시에 다시 한번 히오의 지팡이가 들어 올려진다.

거인의 손 또한 들어 올려진다.

「스킬 - '어스 브레이크'가 발동됩니다.」

콰아아아앙-!

땅이 폭발하고 대지가 뒤집힌다.

거인의 발밑에서 시작된 폭발은 흔들거리며 모든 대지를 뒤엎어 버릴 듯하였으니.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지개벽의 때가 이러했을까.

하늘에서는 용이.

지상에는 거인이.

하늘을 뒤흔들고 땅을 뒤집어 버린다.

"으, 으아아악!"

"빨리 도망쳐!"

"신의 뜻이다! 모두 물러나라!"

"최대한 멀리 물러나!"

그것을 목도한 이상에야 어찌 버티고 있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이 환상에 불과함에도 그 속에 분명 진실 또한 있었기에.

정신없는 전장의 상황과 맞물려 사실로 믿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리나와 호위 대장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교단을 지킬게요!"

거인이 몸을 일으키고, 대지가 폭발하며 뒤집히는 광경의 중심에서도 다른 희망을 찾았다는 점이리라.

"할 수 있어요! 신성이 조금만 더 돌아오면 본단의 건물 정도는 어떻게든 제가 지켜 내 볼게요!"

"서, 성녀님. 하, 하, 하지만...!"

압도당한 호위 대장이 말을 더듬으면서도 성녀를 말려 보지만, 이리나의 곧은 눈은 오직 히오를 향할 뿐이다.

히오 또한 그런 이리나의 눈을 잠시간 마주하고 곧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믿는다. 이리나."

그에 환하게 밝아지는 이리나의 표정.

"…네!"

지상의 문제는 얼추 해결되었다.

무엇이 그리 문제였냐고 한다면 역시 전투의 여파.

그로 인해 휩쓸릴 사람들.

히오가 참전할 이번 전투의 여파는 상식을 아득히 벗어날 터였으니.

다시금 잿빛으로 변한 히오의 눈이 하늘을 향한다.

이제는 저 문제를 해결해야 할 차례.

그런 히오의 귓가로 이리나와 호위 대장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베르덴의 수호 기사가 어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성녀님?"

"괜찮아요. 제국의 새로운 영웅, 대륙의 영웅이라 불리시는 분이니까요."

"하아… 제가 그럼 마지막까지 곁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문득 그런 대화를 들어 버렸으니 히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고야 만다.

영웅이라니.

물론 저들에게 자신이 그리 비춰질 수도 있겠지.

못해도 수십만의 사람이 대피했을 테니 말이다.

수십만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영웅이라...."

콰아아아앙-!

때마침 에리얼과 레가르다가 크게 맞부딪쳤고, 서로의 몸이 길게 밀려나며 거리가 벌어졌다.

잠시간의 소강 상태.

레가르다의 시선이 아래를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였다.

"영웅이니 악당이니. 그 화려한 이명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사실 무척이나 초라하지."

의념을 싣느라 샛노랗게 물든 레가르다의 눈과 영혼을 보는 히오의 잿빛 눈동자.

"늦어서 미안하다. 레가르다."

- …마법사.

마주하는 두 눈.

- 늦지 않았다.

"아니, 늦어 버렸어. 안타깝게도."

히오의 잿빛 눈에는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완벽하게 침잠해 버린 용의 검은 혼이.

레가르다가 과연 이를 느끼지 못했을까.

- 되돌릴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방법이 없어. 설령 있다해도 수천, 수만 명이 희생되겠지."

- 내가 막으마.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순 없어. 지금도 꽤 힘들어 하고 있지 않나."

- 천 년을 이보다 더한 심정으로 버텨왔다.

"…아니, 그것과는 상황이 너무 달라."

레가르다의 몸 주위로 막대한 기운이 유형화되어 일렁인다.

천 년을 관철해 온 의념이 눈에 보일 정도로 형상화 되는 것이다.

그의 음성은 차분했지만, 속에 담긴 것은 숨길 수 없는 격노.

- 그대. 정녕 그리 선택한 것인가.

히오는 마주하던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 속에는 더이상 흔들림 따위가 없었으니.

"그래. 저건 이제 재앙덩어리가 됐을 뿐이야. 그러니...."

검성의 뒤를 잇는, 제국의 새로운 영웅.

악으로부터 대륙을 구해 낸 대륙의 영웅.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에게 영웅으로 불리고 있지만.

"용을 죽인다."

적어도 눈앞의 한 사람에게만큼은 최악의 악당일 터였다.

- 불가.

영웅과 악당이란, 어쩌면 그런 관계가 아닐까.

120화 용을 죽여라, 용을 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