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5

***

그 시각, 용사의 탑 29층.

열심히 유일신의 승리를 염원하며 기도를 하던 일호가 번뜩 눈을 떴다.

"근유우욱!"

나는 바다의 왕자 일호다!

그 시각, 용사의 탑 29층.

열심히 유일신의 승리를 염원하며 기도를 하던 일호가 번뜩 눈을 떴다.

"근유우욱!"

일호가 근육이 불끈거리는 양팔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승리하셨도다! 껄껄! 역시 나의 유일신 님이시다!"

과연 짱 세시고 멋지신 유일신 님.

특히 악어 괴물을 산산조각 내고 하늘마저 갈라 버린 유일신 님의 일검은 참으로 강렬했다.

일호가 유일신의 천마군림의 동작을 따라 해 보았다.

"언젠가 나도 그런 일격을 날리고 싶구나! 얍얍!"

그런데 문득 좀 걸리는 게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일호는 축축한 동굴 같은 곳에 있었다.

외벽은 시뻘건 빛을 띠었는데 마치 살아 있는 살덩어리처럼 꿈틀거리고, 곳곳에는 뼈만 남은 생선 대가리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산처럼 거대하고 물컹물컹한 촉수를 가진 괴수와 싸우다가 유일신의 위기에 전투를 멈추고 기도를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삐삐삐!

그때 그가 등에 메고 있는 검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일호는 생각을 멈췄다.

뭐, 사소한 일은 되었다.

"벌써 운동 시간이군."

운동을 거를 수는 없었으니까.

일호가 등에 멘 검을 뽑았다.

마치 역기처럼 생긴 이 검(?)은 일호가 20층 '검의 시련'을 돌파하고 얻은 것이었다.

신의 명장이라고 자처한 대장장이가 만들어 준 검답게 알람 기능 외에도 이것에는 엄청난 기능이 있었으니.

"이제 슬슬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는데. 좋아. 중량 증가!"

번쩍!

그러자 검이 눈부시게 빛나더니, 그 무게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중량 증가! 중량 증가!"

그것을 열 번쯤 반복하자 일호의 무릎이 반쯤 꺾였다.

"껄껄, 좋구나! 역시 이 정도는 돼야 근육에 자극이 오지! 근육! 근육!"

일호가 중량을 늘린 검을 들며 열심히 대흉근을 조졌다.

-'영겁의 구도자'가 흐뭇한 얼굴로 일호를 보며 역시 검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안다고 칭찬합니다.

"왕눈이 형제는 잘 지내고 있을까?"

전층인 28층은 '연못의 시련'이었다.

일호는 그곳에서 만난 개구리 왕눈이와 의형제를 맺고 사악한 연못의 지배자 변종 거대 메기 괴물과 맞서 싸웠다.

왕눈이는 뒷다리 근육이 일품인 뜨거운 사내였다.

일호는 그에게서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서는 칠전팔기의 정신을 배웠다.

메기 괴물을 쓰러뜨리자마자 다음 층으로 전송되었기에 왕눈이와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29층은 '바다의 시련'이라고 했었는데 바다가 뭐지?"

살면서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는 일호였다.

29층의 시련이 시작될 때 커다란 배 위에 있다가 갑자기 괴수에게 습격당했던 터라, 제대로 바다를 볼 경황이 없었다.

꼬르륵!

"후, 배가 고프군."

한참 열심히 근육을 조지던 일호는 허기를 느끼고 버릇대로 성장신의 가호를 마시려 했지만....

"아차!"

없었다.

유일신이 하사해 준 '성장신의 가호' 시리즈들이 담긴 배낭은 배 위에 있었던 것이다.

일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성장신의 가호 중에서도 Ver. 2, 유일신이 일명 '프로틴'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마시지 못한다면 근손실이 오고야 말 것이다.

"큰일이군!"

어떻게 만든 근육인데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일호가 주변에 뒹굴고 있는 뼈만 남은 생선 대가리라도 씹어 먹을까 진지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꾸륵, 꾸륵!

쏴아아아!

동굴이 꿈틀거리더니 시퍼런 액체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치이익!

일호가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생선 대가리가 녹아내렸다.

근손실의 공포에 일호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순식간에 생선 대가리를 녹여 버린 위산은 일호도 덮쳤다.

하지만, 바위와 강철의 축복을 받은 일호의 강인한 육체에 이 정도 소화액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근육을 위한 단백질, 고기가 필요했다.

"잠깐."

일호가 위액을 뿜는 동굴의 시뻘건 벽을 손으로 꾸욱 눌러 보았다.

분명 고기의 감촉이었다.

발상을 바꿔 보니 주변에 넘치는 게 고기였다.

"맛있겠군!"

군침을 주륵 흘리는 일호의 모습에 위장 벽이 본능적으로 파르르 경련했다.

둥실둥실!

얼마 후, 푸른 바다 위에 죽은 거대 오징어의 사체가 둥둥 떠올랐다.

뾱!

오징어의 위장 부분에 구멍이 뚫리더니 온몸에 먹물을 뒤집어쓴 일호가 불쑥 튀어나왔다.

"껄껄껄! 드디어 자유다!"

일호가 짠내가 물씬 밀려드는 바다의 향기를 맡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오호, 이것이 바다로구나!"

일호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며 감탄하더니, 갈증을 느꼈는지 바닷물에 머리를 박았다.

"퉤퉷! 바다는 짜구나!"

물이 이렇게 많은데 마실 수 없다니 몹쓸 바다였다.

둥실둥실.

그때 지평선 너머로 그가 처음 시련에 도전했을 때 전송됐던 배가 보였다.

"흐음, 저기까진 어떻게 가야 한다?"

일호는 헤엄을 칠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왕눈이 형제한테 수영을 좀 배워 둘 걸 그랬다.

쏴아아아!

"응?"

갑자기 들려오는 물소리에 일호가 고개를 돌렸다.

콰콰콰!

물살을 가르며 나타난 세모난 송곳니가 뾰족하게 난 거대한 아가리가 자신을 덮치고 있었다.

일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 그놈 참 커다란 물고기로구나!"

덥석! 꿀꺽!

백상아리가 오징어와 함께 일호를 꿀꺽 집어삼켰다.

***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로, 간신히 고난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고난이 덮칠 때 쓰는 말이다.

내 상황이 딱 그랬다.

간신히 채찍을 휘두르는 근육에 미친 신 놈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더니, 차라리 쇠질 하는 게 나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내 스토커 중 유달리 내게 집착하는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의 영역.

몽환 신전(夢幻神殿).

겉보기에는 참 아름다운 곳이다.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색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천상의 화원 같은 장소.

그것들의 정체가 꿈에 나올까 봐 두려운 식인화라는 것만 빼면 완벽하다.

과거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은 내게 물고 빨고 넣어 주겠다는 수작을 부렸다.

그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우물우물.

쪽쪽쪽.

데굴데굴.

시커먼 혓바닥이 내 몸을 끈적끈적한 타액으로 적시며 사탕처럼 빨고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의 화원에 핀 꽃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식인화의 아가리 안이었다.

이것도 순번제인지 이 안에는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는데.

-주, 죽여... 줘.... 제발....

반쯤 녹아내린 검은 해골이 애타게 내게 손을 뻗으며 울먹였다.

스르륵, 샤라락!

그때 넝쿨이 해골의 몸을 휘감더니 그를 아가리 너머의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으아아아악!

멀어져 가는 해골의 처참한 비명을 들으며, 난 그에게 진한 동정심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저 해골, 어디서 본 기분이 드는데?

"악몽 씨, 언제까지 물고 빨고 할 거예요. 벌써 보름은 된 것 같은데 그만 보내 줘요...."

나는 내 입안으로 기어들어 오려는 꽃의 검은 혓바닥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애절하게 사정해 보았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이게 다 당신을 위한 거라고 합니다. 자신의 타액이 몸에 완전히 스며들면, 세상 그 어떤 독과 저주도 당신을 해하지 못할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입 벌리라며 음흉하게 웃습니다.

위하기는 개뿔!

역시 그냥 사심을 충족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움찔하며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습니다.

그래, 마음대로 하세요.

제발, 풍요 누님 차례까지만 버티자. 그것이 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자 날 능욕하던 식인화의 혀가 덜컥 멈췄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울컥하며 그딴 가슴만 큰 멍청한 년이 뭐가 좋냐고 히스테릭하게 고함을 지릅니다!

"가슴만 큰 게 아니라 너랑 다르게 마음도 크신 누님이다, 이 변태 스토커야!"

스트레스를 받아서 나도 모르게 울컥 소리쳐 버렸다.

감히 풍요 누님을 욕하다니 참을 수 없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이미 그년한테 단단히 홀렸구나 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글썽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 좀 하라고요, 이 변태 스토커님.

일단 나부터 뱉고 이야기합시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그러고 보니 풍요 년 말고도 당신에게 얼쩡거리는 암컷이 너무 많다고 분노합니다. 당신을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먹어 버리겠다고 미친개처럼 으르렁거립니다.

"어?"

그르르릉!

날 입안에 물고 있는 식인화의 아가리 너머에서 성난 짐승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순간 이성이 돌아오며 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 해골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다.

악몽 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휴, 꽃잎도 예쁘셔라. 전 사실 글래머보단 날씬한 슬렌더가 좋답니다, 헤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구라 치지 말라고 꽥 소리칩니다!

슈우욱! 휘리릭!

넝쿨들이 무수히 뻗어 오더니 나를 식인화의 목구멍 안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

"으아악! 꽃 시러어!"

나는 절규하며 눈을 떴다.

"헉?"

내가 깨어난 곳은 식인화의 배 속이 아니라, 가끔 신세를 지곤 했던 헌터 아카데미의 보건실 침대였다.

이곳이 끔찍한 악몽이 아니라 현실임을 증명해 주듯, 맞은편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든 성미나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미리 씨가 보였다.

주르륵.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드디어, 드디어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으드득!"

꿈속에서 시달린 지옥 같은 시간을 떠올리며 나는 이를 갈았다.

죽인다, 그 근육 페티시 신 놈부터 망할 식인 꽃까지 다 죽여 버릴 거야!

그 어느 때보다도 힘에 대한 갈망이 끓어올랐다.

강해지고 싶다!

그래서 제발 밤에 편히 자고 싶다!

"아앗! 선생님! 깨어나셨군요! 아! 잠깐만요! 은비 샘 모셔올게요!"

미리 씨가 내가 깨어난 걸 보더니 황급히 양호 샘을 데리러 갔다.

'아니, 별로 몸이 아픈 데도 없고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까지는 없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벽에 걸린 전자시계의 날짜가 정확히 7일이 더 지나 있는 걸 발견했다.

꿈속에서 한 달은 넘게 있었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일주일이라니.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된다.

사물함에 놓인 내 핸드폰을 보니 담당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50통에, 메시지가 100개가 넘게 와 있었다.

"으아, 난 죽었다...."

그러니까 연재도 일주일이나 펑크 난 거지?

게시판에 남아 있을 독자님들의 독촉과 악플을 생각하니 위장이 아려 왔다.

"...깼어?"

옆 침대에서 자고 있던 성미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몸은 괜찮아?"

성미나가 내게 엉금엉금 다가오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아서 나도 모르게 성미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신연령이 어려진 성미나를 매일 보살피다 보니 뭔가 내게도 부성애가 생긴 것 같다.

그러자 성미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내 눈이 그녀를 감정했다.

[성미나]

분류 : 신도

특이 사항 : 유일신에게 강한 호감을 가진, 초월의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신도이다. 시험 삼아 뽀뽀해 달라고 해 보자. 기뻐하며 해 줄지도 모른다.

성미나가 내 신도가 되었다고?

그것도 놀랍지만, 더 어이없는 것은 특이 사항이다.

뽀뽀라니. 시험 삼아 죽어 보라고 시키라던 검귀 때도 그렇고 이놈의 감정 능력, 뭔가 이상해. 아주.

그때 갓메이커의 메시지가 울렸다.

띠링!

-신실한 신도이자, 당신의 임시 사도인 '일호'가 공물을 바칩니다.

-유일신이시여, 제가 사냥한 이 물고기를 당신께 바치나이다. 부디 맛있게 드시고 기운을 차리소서! 유일신 님, 시바시바!

물고기?

츠츠츠!

콰콰쾅!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갓메이커에서 거대한 뭔가가 소환되며 벽을 박살 내 버렸다.

"헉! 이게 무슨 일인가?"

"검신 님! 무사하십니까?"

"꺅! 언니! 선생님!"

검귀, 강산 형님, 미리 씨에 양호 샘까지.

모두 놀란 얼굴로 양호실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나는 고민했다.

벽을 뚫고 내 앞에 놓여 있는 20m는 될 것 같은, 고전 영화의 <죠스>만 한 백상아리를 보면 누구라도 고민이 될 것이다.

하아, 일호 녀석.

대체 뭐 하고 다니는지 나중에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 봐야겠다.

하지만 일단은 모처럼 받은 거고, 마침 시간도 적당하니까....

"여러분, 점심은 샥스핀 어때요? 콜?"

***

갓메이커의 세계 앤트리니아.

"드디어 황제 폐하와 우리가 모시는 신의 위엄을 저 간악한 악신과 야만인들에게 보여 줄 때가 되었다!"

눈부신 황금 갑주로 전신을 감싼 제국의 신녀이자 십검의 수장 아라크네가 명령했다.

"전군, 출정하라!"

"존명!"

"와아아아! 황제 폐하와 위대한 신들을 위해 싸우자!"

성난 함성과 함께 도열한 제국의 군대가 일제히 움직였다.

쾅!

쾅!

단지 발걸음만으로도 천둥성을 연상케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숫자는 무려 1천억.

제국의 총전력을 모은 압도적인 대군세가 붉은 쓰나미처럼 밀려들며, 앤티가 여황으로 등극한 신생 가야미국으로 진군했다.

유일신은 하급 신에 도전합니다!

사도 구스타프의 습격 이후, 헌터 아카데미는 잠시 휴교에 들어갔다.

사상자와 부상자가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미래의 헌터들을 양성하는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 파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 어떻게 상황이 잘 정리된 모양이다.

혹시 트라우마라도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내가 임시 담임을 맡은 고등부 3-A반의 분위기는....

"전체 차렷! 선생님께 인사!"

다람쥐를 닮은 귀여운 소녀가 그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쩌렁쩌렁 외쳤다.

"안녕하세요, 유일신 선생님!"

몰랐는데 명지가 반장이었다.

인사는 처음 받아 보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아이들의 표정은 생각 외로 밝았다.

뭐, 우리 반 학생들은 큰 피해가 없기도 했고.

학생들 중 몇몇이 수군거렸다.

"저 선생님이 협회의 비밀 병기란 소문이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심지어 S급 성미나도 껌 딱지처럼 붙어 다닌다던데?"

"와, 쩐다."

다 들린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걸 보자니 심히 부담스러웠다.

"흐흐, 이제야 검신 님의 위대함을 아는 표정이군요."

검귀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이러면 좀 부담스러운데.

강산 형님에게 내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무래도 사건이 사건이었던 만큼 완전히 막지는 못한 것 같다.

학생들 앞에서 명지의 소환수를 S급으로 진화시킨 것도 있었고.

"흠흠."

난 멋쩍음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이네요. 간만의 등교이니 오늘은 각자 자습을...."

학생들의 눈빛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자습시켜 놓고 밀린 원고를 작업하려고 노트북까지 가져왔는데 뻘쭘해졌다.

스윽. 나는 슬그머니 노트북을 책상 구석에 내려놓았다.

난 고민했다.

그나마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웹소설 쓰는 법 정도인데.

에이,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예 없진 않지.

"...자습보다는 개별 상담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다시 반짝거렸다.

그렇게 기대하니 부담감에 위장이 쿡쿡 쑤셔 왔다.

***

최은비 양호 샘의 허락을 받고 보건실을 잠깐 빌렸다.

문 앞에는 마치 허준에게 진맥 받는 환자들처럼 3-A반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섰다.

개별 상담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내 고유 권능인 '눈먼 신의 눈'으로 학생들의 상태를 살핀 후 적당히 조언해 주는 정도였다.

예를 들어....

"다음은, 허저 학생?"

쿵!

삼국지의 유명한 무장과 동명이인답게 기골이 장대한 학생이 내 앞에 섰다.

"네, 샘."

덩치와는 다르게 가냘픈 목소리와 함께 허저 학생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허저]

암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19년 되었다.

특이 사항 : 무식하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뭐, 학생이 씩씩하고 건강하면 된 거지.

허저 학생을 감정했지만, 사실 이것만으로는 별로 해 줄 말이 없고.

-'눈먼 신의 눈'의 고유 권능이 다시 발동합니다.

나는 '무식'이라고 써진 글자에 의식을 집중해 보았다.

스륵스륵!

그러자 무식이라고 쓰인 단어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그것이 몇 번의 변형을 거치며 변해 갔다.

-기혈이 뒤틀렸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마치 한의원에서나 볼 것 같은 인체의 혈과 혈맥의 조형도처럼, 허저 학생의 몸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과 등 사이.

대추혈과 신주혈 사이의 혈맥이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혈이름을 아는 건 내가 한때 무협 소설을 써 보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점혈에 대한 로망이 있지 않은가?

뭐, 결국 준비하던 무협 소설은 완전히 망했지만.

"혹시 등이 아프지 않나요?"

"네? 아, 뭔가 간질거리는 기분은 어릴 때부터 종종 있었는데요. 세 살 때 뒷산에서 나무를 타다 떨어졌다는 소리는 얼핏 듣긴 했는데, 헤헤."

보기에도 심하게 혈맥이 뒤틀려 있는데 겨우 간질거린다니, 터프한 여고생이다.

"잠깐만 가만히 서 볼래요?"

"네?"

나는 약지를 허저 학생에게 겨눴다.

"치유하는 신의 약지."

그러자 백광이 허저 학생의 전신을 휘감더니.

띠링!

-1Gcoin이 치유의 대가로 소모됩니다.

으드득!

뒤틀린 그녀의 혈맥이 바로잡혔다.

"와! 선생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뭔가 막힌 게 뻥 뚫린 것처럼 몸이 엄청 개운해요! 이런 기분 처음이야!"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던 허저 학생이 양 주먹을 쥐더니 기세를 개방했다.

츠츠츠!

그러자 그녀의 주먹에 눈부신 백광이 일기 시작했다.

허저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와! 평소보다 기 감도가 2배는 높아요!"

허저 학생은 기공 계열의 각성자였나 보다.

몸 안의 에너지를 무기나 신체에 깃들게 해 강화하는 방식의 각성자인데, 판타지나 무협의 검기를 떠올리게 해서 일부 마니아들에게 인기가 많다.

뭐, 나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검귀도 기공 계열의 각성자였지.

띠링!

-'허저'의 호감도와 믿음이 상승했습니다.

-좀 더 호감도와 믿음을 높이면 '허저'를 신도로 삼을 수 있습니다.

곧이어, 갓메이커의 메시지가 울렸다.

허저 학생 말고도 몇 명이 이런 메시지가 뜨긴 했다.

하지만, 내게 사심은 없다.

이건 그동안 내가 수업을 대충 때우고 잠만 잔 게 미안해서 하는 봉사활동 같은 거니까.

그리고 애들이 벌써 사이비에 빠지면 안 되지, 암.

"그럼 다음 학생?"

"네! 일신 샘!"

해골 목걸이, 새로 내 신도가 된 하데스의 신물을 목에 건 명지 학생이 들어왔다.

적개심 넘치던 처음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호두를 볼에 가득 문 다람쥐처럼 싱글벙글한 표정이다.

하긴 나라도 S급 소환수가 생기면 그럴 만하기도 하겠다.

"명지 학생은...."

그렇게 학생들을 감정해서 조언도 좀 해 주고, 몸이 안 좋으면 치유도 좀 해 주며 얼추 진맥(?)이 끝나 가고 있을 때.

"그럼 다음 분?"

"넵!"

"네!"

씩씩하게 외치며 2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이좋게 같이 들어온 둘을 보았다.

"두 사람은... 왜요?"

"저도 검신 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저두요!"

검귀와 미리 씨였다.

아니, 같이 합숙(?)하면서 개인 트레이닝도 하는 사람들이 뭘 새삼 이런담.

"에휴, 뭐 그냥 하죠. 누구부터 할래요?"

"그럼 저부터 부탁드립니다!"

"아뇨! 저부터죠!"

"어허, 아무리 제자님이라도 그건 아니죠! 제가 먼저 오지 않았습니까?"

"아니, 검귀 아저씨는 우리 학생도 아니면서 왜 그래요!"

"배움에는 나이가 상관없는 법입니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둘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투지 말아요. 그냥 같이 봐줄게요."

나는 권능을 써서 설레는 표정을 하는 내 신도들을 감정하려 했다.

지이이잉!

'어?'

순간, 이명과 함께 '눈먼 신의 눈' 권능을 쓰고 있던 내 시야가 변했다.

나는 '보았다'.

콰콰콰콰!

그것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붉은 바다와도 같았다.

까득! 까드득!

키리리리!

하지만 그 바다를 이루는 것은 액체가 아니라, 세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아득한 숫자의 벌레 떼였다.

벌레들의 바다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파괴했다.

울창한 숲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광활한 산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질리게 한 것은 그들의 후미에서 느긋하게 따라오고 있는 3마리의 괴물이었다.

쿵! 쿵!

7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과 검치 호랑이를 닮은 외양에 등에 박쥐 같은 날개가 달린 기괴한 짐승, 거기에 사람의 머리가 박혀 있는 불꽃을 휘감은 마차.

내 눈이 그들을 감정했다.

['심연 늪의 지배자'의 사도]

양성구유의 뱀이다. 사용한 지 2,000년 되었다.

특이 사항 : 신녀 아라크네가 소환한 사도로 끝없이 재생한다.

['강식과 기만의 야수'의 사도]

수컷 짐승이다. 사용한 지 666년 되었다.

특이 사항 : 신녀 아라크네가 소환한 사도로 '강식과 기만의 야수'가 지배하는 숲에서 제일 포악한 맹수이다.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의 사도]

무성이다. 사용한 지 2,200년 되었다.

특이 사항 : 신녀 아라크네가 소환한 사도로 끔찍한 불꽃을 쓴다.

신의 사도들.

연령을 나타내는 숫자가 나를 질리게 했다.

만약 저 괴물들이 SS랭크였던 그 악어 구스타프와 맞먹는 괴물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갓메이커가 반응했다.

띠링!

제국의 신녀 아라크네가 이끄는 제국군 본대 100,000,000,000과 사도들이 가야미국에 도달하는 시간 : 78시간 12분 5초.

1천억의 벌레 군대에 신의 사도들이 셋.

저건 이미 살충제 같은 것으로 막을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설령 살충제를 트럭으로 들이붓는다 해도 바다에 먹물 한 컵을 붓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놈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앤티들이 있는 가야미국.

내가 저들로부터 앤티들을 지킬 수 있을까?

"검신 님?"

"선생님, 왜 그러세요?"

시바, 아무래도 ×된 것 같다.

***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나는 내 지푸라기를 찾으러 식당에 왔다.

식당 한가운데 테이블에서 식판에 산처럼 고기를 쌓아 놓고 먹고 있는 근육질의 남자가 보였다.

[최강산]

수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58년 되었다.

특이 사항 :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근육이다. 딸을 구해 준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우적우적, 동생. 아까부터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나?"

"강산 형님, 제가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꿀꺽! 부탁? 하하, 뭐든 말만 하게나. 동생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지!"

"별건 아니고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그대로 한 번 따라 해 주실래요?"

내 말을 듣더니 최강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그러지. 자, '유일신 님을 믿습니다.' 됐나? 쩝쩝! 별 이상한 걸 시키는군."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일신 님을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신도가 되는 키워드다. 하지만, 미리 씨 때와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으, 안 되나?'

내가 최강산에게 이런 것을 시킨 이유는 그가 바로 초월의 가능성을 가진 S급 헌터이기 때문이었다.

[퀘스트 : 하급 선신 승급(진행 중)]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신도 : 5(+1)/10

"언니, 나물도 같이 먹어야지. 자, 아~."

"아~."

저기 미리 씨의 도움을 받으며 밥을 먹고 있는 성미나가 2명분의 신도 조건을 만족해서 현재 하급 신 승급까지 남은 S급 신도 수는 이제 겨우 4명이다.

그래서 하급 신이 된다면 혹시라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것이다.

하지만, 신앙 활성화의 호감도와 믿음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 키워드를 말해도 신도는 되지 않는 모양이다.

"강산 형님,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뭔가 해 주면 '와!' 하고 저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생길 일이라든가?"

최강산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무슨 수작이지? 혹시...."

이크, 너무 직접적으로 말했나?

"내가 아무리 널 좋게 보고 있긴 해도 내 딸은 못 준다!"

쿨럭!

이 딸 바보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확실히 양호 샘이 이 근육 노친네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이지적인 미인이긴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전 연상은 별로라...."

그러자 옆에서 미리 씨와 함께 급식을 먹고 있던 성미나가 움찔 어깨를 떨며 날 불안한 눈으로 흘깃 보았다.

쾅!

최강산이 발끈하며 숟가락을 테이블에 박았다.

"이놈! 지금 내 딸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냐!"

이놈의 영감탱이가!

대체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네!

"아!"

그때 최강산이 불현듯 뭔가 떠올랐는지, 날 향해 은근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치유 능력이 있다고 했지? 혹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도 치유할 수 있을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라니?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갓메이커가 반응했다.

띠링!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지성체 최강산의 '신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기적의 미라클

띠링!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지성체 최강산의 '신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신도 퀘스트]

최강산의 친우를 치료해서 그에게 위대한 신의 전지전능함을 보여라.

-대상 : 최강산

-퀘스트 보상 : 최강산의 신앙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갓메이커에 최강산의 신도 퀘스트가 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최강산의 친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치유하는 신의 약지' 권능이 있었다.

"당장 가죠!"

좋아, 일단 S급 신도 1명 확보다.

***

최강산과 내가 도착한 곳은 부활 대학 병원이었다.

낯이 익은 곳이다.

전에 내가 미리 씨와 함께 파괴신의 떨거지인 빡빡이의 테러를 막았던 그 병원이다.

그곳 최상층의 특별 병실.

엘리베이터부터 경계가 삼엄했다.

척 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경호원들이 득시글거렸는데 하나같이 이름이 감정 가능한 네임드들, 즉 최소 B급 각성자들이었다.

경호원들은 최강산의 신분을 확인하더니 깊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출입을 허락했다.

띠링!

경호원 중 하나가 카드키를 특별실 입구에 인식시키자 자동문이 열렸다.

지이잉.

마치 무균실을 방불케 하는 특별 병실 안.

성인 넷은 잘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침대에 잠들어 있는 여인이 보였다.

나는 흘깃 옆에 있는 최강산의 얼굴을 보았다.

"뭘 보나?"

"친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생사를 함께한 전우지!"

최강산이 콧김을 씩씩 뿜으며 외쳤다.

이거 부녀지간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데.

잘해 봐야 내 또래 정도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백발의 여인.

침대에 가득 놓인 꽃과 나뭇잎에 둘러싸인 모습은 환자라기보다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코스프레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겉모습으로 판단하기는 이르다.

이 사람은 청소부란 이명으로 활동했던 최강산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 중 1명이다.

부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게이트와 던전의 발생을 완벽하게 예측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예지 능력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며 미라클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S급 헌터지만 지병을 이유로 드문드문 활동하던 그녀가 공개 석상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5년 전 나락용 사태 이후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가족을 잃고 분노하는 사람들 앞에 깊게 허리를 숙이며 오열하던 소녀의 모습은 어렸던 내게도 지금까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히 기억에 남았다.

혹자는 나락용 사태를 예지했어도 그 피해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15년 만에 다시 본 미라클의 외모는 칠흑 같던 머리카락만 백발로 변했을 뿐, 전혀 변함이 없었다.

스스스.

그때 미라클의 주변에 깔아 둔 꽃과 나뭇잎들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시들어 갔다.

"잠시만요."

병실에 있던 간호사가 익숙하다는 듯 곧 그것을 회수하고 새로운 꽃과 나뭇잎들을 미라클 주위로 다시 깔았다.

"이미 미라클의 수명은 한계에 달했다. 이런 식으로 주변의 에너지를 흡수해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 의사나 치유 계열의 헌터도 그녀를 치료해 보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최강산이 기대와 초조함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어때? 할 수 있겠나?"

"한번 해 볼게요."

그 전에 일단 어떤 상태인지 감정을 해 볼까.

나는 내 권능 '눈먼 신의 눈'을 발동해 보았다.

[이미래]

암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년 되었다.

특이 사항 : 가사 상태로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동결시켰다.

가사 상태로 생명을 동결시켰다라....

어라? 그런데 왜 사용한 년, 나이가 보이지 않지?

마치 숫자만 모자이크로 가린 것같이.

'오류인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혹감을 느끼며 그 부분에 의식을 집중해 보고 있을 때.

-여자의 나이에 집착하는 것은 신사의 행동이 아니랍니다.

마치 옥구슬이 구르는 것 같은 청량한 소녀의 음성과 함께.

스르르르.

내 시야가 변했다.

짹짹짹!

예전 소설에서 흔하게 쓰였던 클리셰처럼 생뚱맞은 참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병실에 있지 않았다.

수풀이 우거진 공원.

"후후, 맛있니?"

짹짹, 짹짹짹!

그곳 벤치에 앉아서 쌀을 뿌리며 참새한테 먹이를 주고 있는 백발의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내가 보고 있었던, 병실 침대에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던 미라클, 이미래였다.

나와 미라클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가 박꽃처럼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이 상황에 당황한 내가 어리둥절하게 서 있자, 미라클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자신의 손에 앉은 통통한 참새를 가리켰다.

"참새가 왜 참새인 줄 아세요?"

"...."

"참 맛있어서 참새래요."

그러자 통통한 참새가 화들짝 놀라며 푸드득 도망가 버렸다.

"아."

그걸 잠시 아쉽게 바라보던 미라클이 다시 내게 말했다.

"바람이 귀엽게 불면 뭔지 알아요?"

그녀가 내게 손을 뻗었다.

깔깔깔.

그러자 아이의 웃음소리와 함께 살랑거리는 미풍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불어왔다.

"분당."

"...."

"이상하다. 분위기 좀 풀어 보려고 했는데, 재미없어요?"

남자 놈이 했으면 죽빵을 날리고 싶은 아재 개그지만, 확실히 미인이 그러니까 분위기가 다르다.

웃지 못하는 내 입을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미라클, 그러니까 이미래 님 맞...죠?"

병실에서 공원으로 갑자기 바뀐 풍경.

이것이 처음이라면 당황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성미나와 싸웠던 경험이 있다.

이건 성미나가 쓰던 심상 공간 같은 게 아닐까.

그러자 내 마음을 읽듯 미라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최근 당신이 거둔 그 가여운 아이와 비슷한 힘이죠, 유일신 님."

"절 아세요?"

"영차, 당연히 잘 알지요. 유일신. 우리의 세계가 선택한 분."

절룩절룩.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그녀에게서는 짙은 아카시아향이 났다.

"직접 보니 인상이 다르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지몽으로 본 당신은 그야말로 악의 화신 그 자체였는데. 역시 사람은 직접 만나 봐야 한다니까요."

미라클이 날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직접 뵈니 생각보다 훨씬 상냥하고 찌질해 보이셔서 조금 안심했어요."

이건 욕인가 칭찬인가 고민이 된다.

화내야 되는 거 맞지?

미라클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약 구제할 수 없는 악이라면, 남은 목숨을 걸고라도 제거하려고 했는데 다행이야."

...역시 참는 게 좋겠다.

연장자이자, 인류의 영웅에 대한 예우를 해 줘야지.

"그런데 왜 절 이곳에...?"

"현실의 육체는 더는 움직이기 힘들어서 이렇게라도 당신을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지나치게 정중한 태도라 낯간지러웠다.

"얼굴을 보셨으면 이만 돌려보내 주실래요? 슬슬 미라클 님을 치료해 드리고 싶은데요."

난 할 일이 많다.

일단 이분을 치료하고 최강산을 신도로 만든 이후에 나와 앤티들을 노리는 1천억 마리의 벌레 군단과 사도들을 상대할 방책을 고민해야 한다.

"절 치료하는 건 아마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저한테 당신의 권능을 써 보시겠어요?"

"네? 이곳에서 써도 되나요?"

미라클이 살포시 웃었다.

"당신은 아직 당신의 권능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자, 어서 해 보세요."

그러더니 내 앞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별 의도는 없다는 것은 알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것이 연상의 매력이란 것인가!

아무튼, 난 약지를 그녀에게 겨누고 권능을 사용해 보았다.

"치유하는 신의 약지."

츠츠츠.

그러자 눈부신 백광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더니.

-치유 대상 '이미래'의 인과율을 계산합니다.

띠링!

-치유에 실패했습니다.

-현재 당신의 신력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 버렸다.

"어?"

S급 헌터 백유현도, 그리고 나도 100만 갓코인이라는 어마 무시한 금액이 들긴 했어도 치유는 됐는데.

왜 안 되지?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때 미라클이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왜 이러세요?"

"아직은 어리고 부족한 신이시지만, 저는 당신께 저와 지구의 운명을 걸어 보기로 했습니다."

"네?"

"저 이미래는 유일신 님을 믿습니다."

미라클이 갑자기 키워드를 말했다.

그러자.

-축하합니다. '이미래'가 지구 지부의 다섯 번째 신도가 되었습니다.

-'이미래'는 S급 2명분의 가치가 있는 강한 신도입니다.

[퀘스트 : 하급 선신 승급(진행 중)]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신도 : 6(+2)/10

-스킬 공유에 신도 '이미래'의 스킬이 추가되었습니다.

New! [이미래 '예지몽']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하고 있을 때, 미라클이 말했다.

"당신이 지금처럼 계속 작은 세계를 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세계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때가 되면 저도 구원해 주시길. 어리고 귀여운 신님, 저는 그날을 기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스르륵.

그러자 물감을 물에 풀 듯 미라클과 그녀가 있는 공원의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아쉽게도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군요. 그리고 어린 신이시여,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고민하는 문제의 해결책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수수께끼 같은 미라클의 말과 함께, 난 현실로 돌아왔다.

"자네, 왜 그래? 괜찮나?"

최강산이 비틀거리는 나를 황급히 부축했다.

"허억! 허억!"

난 미라클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곱씹어 보았다.

해결책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

결국 최강산의 신도 퀘스트는 실패했다.

제한 기간은 없는 퀘스트라 언젠가 미라클을 치료하는 데 성공하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전혀 예상 못 하게 미라클이 신도가 되는 바람에 이제 하급 선신으로 승급하기까지 남은 S급 신도는 이제 겨우 둘.

하지만, 설령 하급 신이 된다 하더라도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거라고는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1천억 마리 벌레 군대에 사도가 셋이라니.

전에 겨우 500만 마리에게 미리 씨와 내가 개죽음당할 뻔한 걸 떠올리면 한숨만 나온다.

내 골방에 털썩 드러누웠다.

미리 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아카데미에 있어서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나 혼자.

"하아, 죽겠네."

위장이 뒤틀리고 신물이 넘어온다.

마치 마감이 지척이지만, 안 써지는 글을 억지로 쥐어짜 낼 때의 기분.

'앤티랑 가야미족 애들은 어쩌고 있으려나?'

지금 나처럼 불안에 떨고 있을까?

핸드폰을 들었다.

-갓메이커에 접속합니다.

곧 화면이 전환되며 갓메이커의 세계 앤트리니아의 풍경이 내 눈에 비쳤다.

그동안 성장신의 가호를 많이 마셔서 동화율이 이제는 40%를 넘긴 영향인지, 왕국 곳곳의 풍경이 4D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히 느껴졌다.

나는 우선 앤티를 찾아보았다.

가야미 왕국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새하얀 성.

신도들이 늘고 앤티가 가야미국을 건국하자 메뉴 창에 건설할 수 있는 건물의 종류가 늘었는데 저 성도 그중 하나였다.

저건 앤티의 즉위 선물로 꽤 거금을 들여서 지어 준 건물이다.

하지만, 그 안에 앤티는 없었다.

'어? 어디 갔지?'

앤티를 찾으려고 왕국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화살표 같은 것이 슥 생겼다.

깜박깜박.

'혹시 저기에 있다는 건가?'

화살표가 있는 곳을 검지와 엄지로 줌인 해 보았다.

그곳은 새로 유입된 유랑민들의 거주지.

눈부신 백색의 드레스에 왕관을 쓴 삼등신의 아름다운 소녀가 보였다.

이야, 우리 앤티. 이제 제법 여왕다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악! 너, 너무 괴로워!"

"잠시만 기다리세요. 치유하는 유일신 님의 약지!"

앤티의 손에서 눈부신 백광이 뿜어져 나오며 유랑민, 내 눈에는 무당벌레로 보이는 것의 상처를 감쌌다.

"이, 이럴 수가! 제국군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어! 여왕님께서 저 같은 하찮은 놈을 위해 기적을 베풀어 주시다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흐흑!"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자애로운 유일신 님의 은총입니다."

"아아, 유일신 님 시바...."

무당벌레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도를 올렸다.

띠링!

-신도가 1 늘었습니다.

앤티는 거주지를 돌면서 부상당한 유랑민들을 치유하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신도가 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갓코인이 생성되었다.

역시 우리 앤티, 착하기도 하지.

다시 한번 흐뭇해하고 있을 때.

"헉헉! 앤티 여왕님!"

멀리서 흰개미 왕국의 장로를 필두로 신하들이 헐레벌떡 앤티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 장로님. 왜 그러셔요?"

장로가 울음을 터트리며 앤티에게 매달렸다.

"아이고, 여왕님!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내가 바로 너희들의 신이다

"제국의 마녀 아라크네가 제국군을 이끌고 가야미국으로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당장 옥체를 피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저번 제국군의 습격도 잘 막지 않았나요?"

흰개미 장로가 갑갑하다는 듯 앞발로 가슴을 콩콩 쳤다.

"그때는 기껏해야 접경 숲에 주둔하고 있던 국경군 10만이 전부였잖습니까! 풍문에 의하면 이번 원정군은 마계의 경계를 지키는 병사들마저 모두 긁어모았다고 합니다! 그 숫자가 무려 천억! 우리 가야미국 백성들의 2천 배가 넘습니다!"

"어머머!"

앤티가 양 볼을 매만지며 놀라자, 장로가 기세를 이어 가며 외쳤다.

"그뿐인가요! 마녀 아라크네의 제물을 받고 오만하고 사악한 백신좌의 신들이 움직였습니다. '심연 늪의 지배자', '강식과 기만의 야수', 거기에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까지! 하나같이 역사에 악명을 새긴 끔찍한 악신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대로 된 신명조차 얻지 못한 변방의 괴신(怪神)이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어머머!"

설득이 먹혀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장로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이곳에 있다가는 개죽음입니다! 가야미 왕국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여왕님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이미 제가 피난 준비를 다 해 두었습니다! 어서 저와 함께 가시죠, 여왕님!"

앤티가 방긋 웃었다.

"싫은데요."

"네, 어서 가십... 네? 싫으시다고요?"

"도망치려면 장로님이나 가세요. 저는 안 가요."

그러더니 앤티가 다른 부상자들을 향해 조르르 달려갔다.

장로가 황급히 앤티를 쫓았다.

"여, 여왕님! 기다리십시오!"

"치유하는 유일신 님의 약지! 휴우, 분명 유일신 님은 제국이 섬기는 잔혹한 악신들에 비하면 약하실지도 모릅니다."

"네!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빨리!"

"하지만, 그분은 절 구해 주셨어요."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앤티의 눈이 장로를 응시했다.

"섬기는 이조차 없고, 이름조차 잊힌 채 버림받은 성지에 방치된 신께서는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는 나약하고 미천한 저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만, 저는 그분께 목숨을 구원받는 순간 결심했습니다. 결코, 다시는 그분을 홀로 남겨 두지 않겠노라고."

고오오.

"그리고 만약 감히 그분을 해치려는 간악한 무리는...."

앤티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며 그녀의 머리칼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제가 모두 태워 버릴 것입니다."

화르륵!

앤티의 손에서 불타오르는 검은 불꽃의 열기에 장로가 움찔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화, 확실히 여왕님의 권능은 대단합니다. 이번 습격도 사실 여왕님의 권능으로 막은 것이나 다름없지만, 이번은 다릅니다! 한 손으로는 열 손을 감당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적은 천억이 넘는 데다 악명 높은 제국의 십검에, 신의 사도들까지 함께...."

"설령 제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앤티가 양손을 꼭 움켜쥐었다.

"적어도 유일신 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지끈!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이 귀엽고 작은 아이가 나를 위해 죽겠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과연 앤티에게 이런 신앙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나같이 평범하고 의지박약인 인간이?

킁킁, 킁킁.

그때 앤티가 갑자기 코를 벌름거리더니....

"앗!"

하늘을 향해 부러질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유일신 님! 거기 계시옵니까?"

...혹시 나한테 이상한 냄새가 나나.

앞으로는 잘 씻고 다녀야겠다.

-아, 으응.

내가 대답하자 곳곳에 난리가 났다.

"으아악! 마른하늘에 처, 천둥이!"

"저분이 유일신 님!"

"어, 엄청나다!"

앤티가 나를 인식해서일까, 아니면 말을 했기 때문일까?

가야미국의 다른 이들도 내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 같다.

특히 근처에 있던 흰개미 장로는 아예 사색이 되어 땅에 넙죽 엎드렸다.

"히이익! 요, 용서를, 괴신이시여...."

쉬이이. 장로의 꽁무니에서 액체가 질질 흘러내렸다.

저거 오줌인가?

내가 이들에게 흉측한 악신으로 보인다는 것은 알지만 좀 과한데.

아, 그러고 보니 장로가 날 보고 제대로 된 신명조차 얻지 못한 변방의 괴신(怪神)이라고 했었구나.

"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소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양이다.

-흠흠, 괜찮다. 흰개미 장로야. 너는 나의 앤티의 소중한 신하니 해치지 않는다.

자비로운 신을 연기하며 다정하게 말해 보았다.

앤티가 몸을 배배 꼬며 히죽였다.

"헤헤, 나의 앤티래."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웃는 것은 앤티뿐.

나머지는 잔뜩 겁에 질린 채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겁먹은 가야미국의 백성들에게 설탕이라도 뿌려 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앤티가 날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마침 잘 오셨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일신 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었사와요!"

-부탁?

앤티가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

살짝 걱정했지만, 앤티의 부탁은 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긴장했는지 더듬이를 바짝 곤두세운 채 훈련장에 도열한 일련의 무리.

내가 악어 사도 구스타프와 싸울 때, 가야미국을 공격했던 제국군의 초병을 막는 데 공을 세운 자들이란다.

새로 유입된 유랑민들 중 대부분이 흰개미들이기 때문인지, 천 마리 정도 모여 있는 곤충들은 대부분 흰개미였다.

-그래, 네 이름은 천호다.

"충!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내가 천호의 이름을 지어 준 흰개미는 다른 개미들보다 덩치가 3배 정도는 커다란 녀석이었다.

목소리도 또 얼마나 쩌렁쩌렁하던지.

옆에 있던 앤티가 흐뭇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원래 흰개미 왕국에서 명성 높은 장군이래요. 혼자서 삼십 마리가 넘는 제국군을 상대하였답니다."

-그거 대단하네.

나는 스퍼트를 올렸다.

-...네 이름은 천사호다.

"흑흑, 과분한 이름에 감사드립니다, 유일무이한 구원의 신이시여...."

누더기로 몸을 가린 곤충이 감격한 듯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게 넙죽 엎드렸다.

탁하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보건대 나이가 있어 보이는데도 활약을 했다니 조금 특이했다.

-휴우, 마지막으로 천백호. 다 끝났다.

츠츠츠츠!

마지막 곤충의 이름을 지어 주자, 변화가 일어났다.

띠링!

-가야미국의 백성들 1,000마리의 진명이 '유일신'에 의해 갱신되었습니다.

-백일호, 백이호, 백삼호.... 천백호.

-종족 진화 조건 : '신께 하사받은 진명과 한계에 달한 경험치'

-종족 진화 조건을 만족합니다!

띠링!

-지금부터 진화를 시작합니다!

파아앗!

눈부신 빛이 내가 새로 이름을 지어 준 곤충들을 감싸며 그들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곤충들이 진화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때는 겨우 백 마리밖에 안 되는 가야미족들을 진화시키다 기절해 버렸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많이 성장한 걸까?

쩌적! 쩌저적!

마치 태어나려는 병아리가 알 껍질을 부수듯, 곤충의 외피가 갈라지며 사람의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륵, 스르륵!

6개의 다리는 2개의 팔과 다리로 합쳐지고, 몸은 직립보행에 적절한 이등신의 형체로 변해 갔다.

그 변화는 순식간에 이뤄졌는데 원래 곤충이었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천호를 위시해서 대부분이 흰개미들이어서인지, 대부분 새하얀 피부에 푸른 눈을 가진 반인반충의 모습.

그래, 마치 앤티처럼 변했다.

'그러고 보니 앤티랑 먼 친척이랬나?'

음, 곤충일 때는 잘 몰랐지만, 아무리 이등신이라 해도 사람 모습인데 이렇게 벌거벗겨 두기 뭐하네.

나는 갓메이커의 메뉴 창을 실행했다.

-새로 진화한 가야미족들에게 '병사' 보직을 내립니다.

-병사 1명당 기본 갑옷의 무장에 1Gcoin이 소모됩니다.

-병사 1명당 기본 무기의 무장에 1Gcoin이 소모됩니다.

-새로 진화한 가야미족 병사들을 모두 무장시키겠습니까? (Yes/No)

그래 봐야 2천 Gcoin이다.

바로 'Yes'를 선택했다.

번쩍!

"이, 이럴 수가! 이렇게 멋진 육체와 갑옷이라니!"

"마치 신화에 나오는 신의 전사 같구나!"

"오오, 유일신 님! 앤티 성황님! 시바시바!"

새로 진화한 가야미족들이 환호했다.

역시 환심을 사는 데에는 공짜 선물이 최고다.

"후훗, 새롭게 유일신 님의 은총을 받은 형제들이여. 축하하오. 오늘같이 기쁜 날, 내 그대들을 위해 노래를 바치리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풀로 엮은 악기를 든 백호가 갑자기 불쑥 나타났다.

"아아, 용맹한 전사들이여~ 위대하고 강하고 멋지신 유일신 님께 이름을 받아 신의 전사의 육체를 얻었구나~. 나, 신의 전령이자 천상의 가수 백호가 그대들을 축복해 주리라~. 백일호가 1갓코인짜리 갑옷을 입고, 1갓코인짜리 칼을 차고 환호를 한다, 요호! 요효! 백이호가 1갓코인짜리 갑옷을 입고, 1갓코인짜리 칼을 차고 환호를 한다~ 요호! 요호!"

큭. 오래간만에 봤지만, 백호의 돼지 멱따는 소리는 여전했다.

"백칠호가 1 갓코인짜리 갑옷을 입고...."

아무래도 천백호까지 저 짓을 할 것 같다.

지금이라도 당장 검지를 들어 백호놈의 입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덩실덩실!

신나서 같이 춤을 추고 있는 가야미족들을 보며 참았다.

아무래도 애들 음악 취향은 좀 이상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앤티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앤티야.

"네? 왜 그러셔요?"

-저기 오해는 하지 말고 들으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 장로 개미 말처럼 어디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게 어떨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없다.

앤티를 지킬 자신이.

"헤헤, 유일신 님."

-응.

앤티가 방긋 웃으며 몸을 힘껏 뒤로 젖히더니....

"싫어요오오옷!"

이크, 작은 애가 목청도 좋다.

얼얼한 귀를 잡고 있을 때, 앤티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저희는 이미 잔악한 제국에게 모든 것을 잃었사옵니다. 이곳은 저희의 마지막 보루. 도망칠 곳도 없거니와 만약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해도 평생 몸을 숨긴 채 언제 그들에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공포에 사로잡혀 비굴하게 살아야겠지요."

앤티가 피가 날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명예롭게 제국 놈들과 맞서 싸우고 싶습니다. 위대하고 자비로운 유일신 님과 함께! 유일신 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사옵니다!"

털썩, 털썩!

앤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야미족들과 왕국의 백성들이 일제히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유일신 님과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제발 허락해 주소서!"

"유일신 님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나를 믿고 따르는 앤티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나는 저들의 신이니까.

-좋다. 모두 나만 믿고 따라라! 내가 바로 너희들의 신이다!

엄지를 치켜들고 믿음직한 건치 미소를 지어 주었다.

"으아악! 신이시여! 용서해 주소서!"

"신께서 우리를 먹으려 하신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신생 가야미 병사들의 모습에 조금 상처 받았다.

***

아무튼,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신 vs 100,000,000,000

"...그럼 늦어도 내일까지는 주문한 물품 배송 부탁드립니다."

달칵!

용무를 마친 나는 전화를 끊었다.

통장 잔고의 먼지까지 털어 내서 구매한 것이니 잘 통해야 할 텐데.

"하압! 합!"

아카데미 수련장 구석에서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두르는 외팔 사내, 검귀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검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거대했다.

검귀의 키보다도 훨씬 거대한 저것은 검보다는 쇠기둥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해 보였다.

[검귀의 수련검 Ver. 2]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이 유일신에게 바가지를 씌워 팔아먹은 천마신검의 수련검 버전 2이다.

수련검 Ver. 1에 비해 내구도와 무게가 크게 개선되었다.

특이 사항 : 졸라 무겁고 단단하다.

바가지라는 말을 보면 혈압이 치솟아 오른다.

아무튼, 특이 사항의 설명답게 전보다 검의 무게가 5배나 늘었다.

즉, 무려 500kg, 반 톤 이상.

수련이라기보다는 학대에 가까운 무게에 처음에는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워했던 검귀였다.

하지만, 강해지고 싶다는 집념과 도핑(?) 덕에 놀랍게도 저렇게 저 무거운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무리 내가 갓코인을 쏟아부어 성장신의 가호를 지원해 줬다는 것을 고려해도 놀라운 성장이었다.

아, 저 수련검 Ver. 2와 더불어 천검이 사은품으로 약속했던 절세의 무공 비급을 받긴 했다.

듣고 놀라지 마시라.

그게 뭐냐면 무려....

[太極慧劍(태극혜검)]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의 비장의 컬렉션으로 등선한 무선 장삼봉이 자신의 정수를 남긴 책이다.

천마에 이어 무협의 또 다른 사골 소재인 무당파의 개파시조 장상품의 비전인 태극혜검이었다!

이 정도라면, 천검에게 준 2,000만 갓코인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며 검귀에게 비급을 주었으나....

"화, 확실히 놀라운 비급입니다. 하지만 검신 님. 극한의 유(柔)와 태극의 묘리로 상대를 제압하는 이 검술은 극한의 강을 추구하는 제 검술과는 맞지 않습니다. 천마신검을 익히기도 재능이 버거운 제가 괜히 어설프게 이것까지 손대다가는 기혈이 뒤틀려 폐인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정중히 사양했다.

결국, '모든 것을 베는 천검' 놈 좋은 일만 시킨 것이다.

"후우."

한참 수련검을 휘두르던 검귀가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올렸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시원하게 뻗은 콧날, 그리고 고독한 늑대 같은 검객의 분위기는 남자가 내가 봐도 제법 멋이 있었다.

"아...."

거참, 침 떨어지겠다.

그런 검귀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으니.

3-A반의 반장이자, 마스코트인 네크로맨서 명지였다.

검귀가 그녀를 향해 검지를 까닥였다.

"그만 구경하고 와라."

명지가 화들짝 볼을 붉히며 벌떡 일어섰다.

"네, 네! 물 드릴까요, 검귀 샘?"

"아니 계집 너 말고, 네 옆의 소환수 말이다."

명지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데스 나이트 하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검귀 공, 나는 기사 하데스요. 그리고 내 소환자는 계집이 아니라 고명지이오."

"흥, 이름 따위 알 바 아니다. 빨리 덤비기나 해라. 땀이 식는다."

"참으로 무례한 사내로다!"

하데스가 버럭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련실의 크기를 생각해서 평소의 절반으로 몸을 줄인 하데스였지만, 여전히 검귀보다 머리 2개는 큰 거인이었다.

고오오!

하데스가 검귀를 내려다보며 투기를 뿜자 짙은 어둠이 그의 전신을 악령처럼 감쌌다.

"검귀 공, 오늘도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흥!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하압!"

검귀와 하데스가 격돌했다.

까가강!

채재재쟁!

천둥성 같은 검명과 함께 격렬한 불꽃이 튀었다.

무기로 같은 검을 써서인지 모르겠지만, 검귀는 하데스에게 경쟁의식을 품고 있는 것 같다.

A급인 검귀에 비해 한 단계 높은 경지인 S급 소환수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하, 검귀 공! 그 정도 공격으로는 내 방패를 뚫지 못하오만?"

하데스는 검귀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했지만, 대련을 하고 있을 때는 즐거운 듯 미소까지 띠며 그를 상대했다.

어쩌면 과거 '산을 씹는 거인'을 모셨던 동료와의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걸지도.

검귀가 울컥 소리쳤다.

"닥쳐! 아직 나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좋소! 그런 투쟁심이야말로 진정한 기사의 소양! 어디 검귀 공의 전력을 내게 쏟아 내 보시오!"

으득!

검귀가 이를 갈며 검을 뒤로 젖혔다.

"어디 이것을 한번 받아 봐라!"

츠츠츠!

검귀의 검에 검은 검기가 아교처럼 진득하게 맺혔다.

"검신 님 비기, 천마군림!"

검귀가 그 검을 마치 내가 검신을 매개로 썼던 천마군림을 따라하듯 길게 반원을 그었다.

"흡!"

하데스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황급히 방패를 들었지만....

서걱! 쿵!

방패가 반 토막 나며 바닥을 굴렀다.

검귀의 검기는 그에 멈추지 않고, 어둠의 기운으로 휩싸인 하데스의 갑옷마저 베어 버렸다.

하데스의 몸에 마치 거대한 짐승이 할퀸 듯한 검상이 깊숙이 새겨졌다.

"커헉!"

"크큭, 어떠냐!"

내장이 보일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하데스의 모습에 검귀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도 잠시.

하데스가 포효했다.

"나는 죽음을 극복한 기사로다!"

콰콰콰콰!

-데스 나이트 하데스가 '불사신의 축복'을 발동합니다.

[불사신의 축복]

언데드의 정점인 데스 나이트의 스킬로, 그 영혼이 파괴되지 않는 한 육체를 다시 수복할 수 있다.

-일 횟수 제한 : 3회.

스르륵! 스륵!

그러자 즉사에 가까운 하데스의 부상이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검귀의 얼굴이 경악으로 휩싸였다.

"뭐, 뭐라고?"

스윽, 쾅!

바닥을 부서질 듯 박차며 하데스가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검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채 검귀가 반응할 틈도 없이 하데스가 손에 쥔 검 손잡이가 그의 명치를 후려 쳤다.

퍼어억!

"커허억!"

검귀가 피를 토하며 10여 미터나 날아가 버렸다.

스르릉, 철컥.

하데스가 검을 검집에 꽂으며 검귀를 내려다보았다.

"방금은 제법 쓸 만한 공격이었소, 검귀 공. 하지만, 아직 나를 쓰러뜨리기에는 부족하군."

"큭, 무식한 몸뚱이 같으니.... 하지만... 기다려라.... 반드시 따라잡...."

털썩!

분한 듯 이를 갈던 검귀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기절했다.

"물론 나 따위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대는 생의 축복을 받고 있으니. 나는 검귀공, 그대가 부럽소."

하데스는 기절한 검귀를 어깨에 둘러업더니 내게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제 주군 유일신 님이시여, 저는 잠시 검귀 공을 의무실에 데려가겠습니다."

들을수록 멋진 저음이다.

마치 중세 기사처럼 예의 바르고 엄숙한 하데스의 모습에, 나도 그의 주군답게 무게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라."

"그럼 잠시."

철컥, 쿵. 철컥, 쿵.

"하데스! 나도 같이 가!"

하데스의 뒤를 명지가 다람쥐처럼 쫓았다.

나는 짐짝처럼 들린 채 멀어져 가는 검귀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처럼 노력한다면 검귀는 언젠가는 지금의 벽을 넘어 S급 소환수인 하데스를 넘어설지도 모른다고.

문제는 역시 시간이겠지만.

"후."

나는 성장신의 가호 Ver. 1, 일명 박카스를 하나 따서 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갓메이커가 반응했다.

띠링!

-갓메이커와의 동화율이 조금 오릅니다.

-45% → 46%.

-유일신의 고유 권능이 동화율이 상승한 만큼 조금 강화되었습니다.

이게 2천 병째인데 겨우 1% 오르다니 정말 너무한 성장 폭이다.

동화율이 40%를 넘긴 후부터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게 된 점은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다른 성장신의 가호 Ver. 2, 일명 프로틴을 따서 입에 물었다.

"잘되어 가요?"

그리고 한참 서로 끙끙거리고 있는 두 자매에게 다가갔다.

바로 미나, 미리 자매였다.

성미나는 미리 씨의 뒤에서 그녀의 머리를 꼬옥 품에 안은 자세로 끌어안고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애정표현 같았지만, 사실 다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츠츠츠!

지금 성미나는 나락용의 제물이 될 것을 우려해 일부러 미리 씨의 능력을 억제했던 봉인을 해방하려 하고 있었다.

"아윽!"

성미나가 갑자기 신음을 토하며 미리 씨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무리했는지 성미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하아, 하아!"

"어, 언니! 괜찮아?"

"응... 괜찮아."

하지만 성미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아직 기억이 회복되지 않아 불완전한 그녀로서는 설령 자신이 했던 봉인이라 해도 해제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해 보세요. 언니분은 할 수 있습니다. 파이팅!"

양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을 해 보았다. 그러자 성미나가 삐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중얼거렸다.

"...미나."

"네?"

"언니 아냐! 미나라고 불러!"

역시 아직은 아이 같은 누님이셨다.

"하하, 미나 씨. 사탕 먹을래요?"

주머니를 뒤적거려 사탕을 한 움큼 쥐여 주고 나서야 미나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에휴.

어서 기억이 돌아오고 능력이 회복돼야 미리 씨의 봉인을 완전히 풀 수 있을 텐데.

[퀘스트 : 하급 선신 승급(진행 중)]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신도 : 6(+2)/10

현재 내가 하급 신으로 승급하기 위해 필요한 S급 신도 수는 이제 겨우 둘.

만약 검귀와 미리 씨가 S급이 되면 그 숫자가 딱 맞는다.

'역시 시간에 맞추기엔 무리인가?'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들뿐 아니라, 갓메이커의 앤티와 가야미족, 용사의 탑을 오르는 일호도 온 힘을 다해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바로 나를 위해.

명색이 신인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나는 몸을 으득으득 풀며 준비한 베개를 꺼낸다.

척, 착!

안대에 수면 양말을 신는다.

그리고 거금을 들여 산 푹신한 오리털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 자리에 누웠다.

쿨.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의 세계가 나를 맞이했다.

***

-끼에에에엑!

-캬아아아아!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돌아온 당신을 노려보며 당신을 가질 수 없다면 먹어 버리겠다고 히스테릭하게 소리 지릅니다!

"하아."

사납게 아가리를 벌리며 울부짖는 식인 꽃들을 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오늘은 저 스토커 집착 악몽이 1번 타자인가.

나는 목숨과 정조의 위협을 느끼며 다급히 허공을 향해 외쳤다.

"천검 씨, 검신 수리는 끝났어요?"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이 아직이라고 합니다. 검신의 검 날이 통째로 박살 나 버렸기에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럼 뭐라도 좀 빌려주시죠?"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이 악몽의 영역인 <몽환 신전>에서 사용할 검 대여에는 100만 Gcoin을 내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울컥했다.

"뭐야! 왜 전보다 2배나 올랐어!"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이 싫으면 말라고 배짱을 부립니다.

하여튼, 이 악덕 상인 같으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100만 갓코인을 결제했다.

저 양반, 설마 일부러 이러려고 검신 수리에 늦장 부리는 건 아니겠지?

쩌적! 쩌저적!

곧 허공이 갈라지며 목검 한 자루가 내 앞에 소환되었다.

"뭐야? 이번에는 목검? 이 양반이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호구로 보나!"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이 보기와는 다르게 좋은 검이니 속는 셈 치고 써 보라고 합니다.

"큭!"

상황이 이러니 일단 써 본다!

휙!

-크르르르!

-키에에엑!

목검을 낚아챈 나는 날 향해 몰려들고 있는 식인 꽃들을 노려보았다.

나는 나의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 내 스토커들과 만날 수 있는 이 꿈이야말로 내가 가장 빨리 강해질 방법.

"검의 극의 발동."

검의 극의는 검의 잠재력을 최고로 끌어내는 고유 권능.

내 눈이 무의식적으로 목검을 감정했다.

[낡고 오래된 목검]

매화나무로 만든 목검이다. 사용한 지 850년 되었다.

특이 사항 : 화산파 시조이자, 전진칠자 학대통이 사용한 수련검이다.

우우웅.

내 손에 쥐인 목검이 슬피 울며 진한 매화향이 사방팔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무협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림태두 무당파와 비견되는 전설의 화산파의 검기가 지금 내 손에서 재현되었다.

***

띠링!

-제국의 신녀 아라크네가 이끄는 제국군 본대 100,000,000,000과 사도들이 가야미국에 도달하는 시간 : 0시간 0분 0초.

그리고 시간이 흘러.

띠링!

-지금부터 '유일신'의 운명을 건 성전(聖戰)이 시작됩니다.

마침내, 결전의 그날이 왔다.

운명의 성전(聖戰), 개막!

-'한없이 베푸는 풍요'가 당신의 놀라운 성장에 감탄하며 햇살 같은 미소를 짓습니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이 금고에 쌓인 당신의 갓코인을 보며 수전노처럼 낄낄거립니다.

-'영겁의 구도자'가 이제야 좀 사람, 아니 신에 어울리는 근육이 조금 붙었다고 흐뭇해합니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다음에는 좀 더 자신을 거칠게 난도질해 달라고 야릇한 신음을 내뱉습니다.

모두가 만족했다.

나만 빼고는.

"시바, 내가 다시는 이곳에 오나 봐라."

저 스토커 놈들과 함께한 지옥 같은 순간을 떠올리면 저절로 치가 떨린다.

이곳의 시간은 현실보다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3개월 이상 수련할 수 있었다.

나는 성장신의 가호 뚜껑을 이빨로 으득 깨물며 그 안의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꿀꺽!

띠링!

-갓메이커의 동화율이 조금 오릅니다.

-49% → 50%.

-유일신의 고유 권능이 동화율이 상승한 만큼 조금 강화되었습니다.

-동화율이 50%에 이르러, 전투 필드가 진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동화율을 50%까지 끌어 올렸다.

자,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났다.

"덤벼, 이 씹어 먹을 벌레 놈들아."

띠링!

-제국의 신녀 아라크네가 이끄는 제국군 본대 100,000,000,000과 사도들이 가야미국에 도달하는 시간 : 0시간 0분 0초.

-지금부터 '유일신'의 운명을 건 성전(聖戰)이 시작됩니다.

***

'내 사랑스러운 독검 나바여, 드디어 네 한을 풀어 줄 시간이 왔구나.'

신녀 아라크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가야미국을 노려보았다.

하나도 아니고 백체나 되는 거대한 성벽이 야자나무 껍질처럼 겹겹이 세워져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 자체였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위대한 제국군만 아니었다면.

까라락!

끄드드득!

천둥 같은 광음이 천지를 뒤흔들 기세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국군이 더듬이를 다듬고 이빨을 곤두세우는 소리에 불과했다.

1천억이라는 압도적인 숫자는 모든 전쟁의 법칙을 무시한다.

철옹성처럼 보이는 가야미국의 성벽조차 물 샐 틈 없이 그곳을 포위하고 있는 제국군의 위용에 비한다면, 그저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종이배처럼 위태로워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그뿐인가?

-크르르!

-키에에에!

-캬캬캬캭!

제국군의 뒤에는 위대한 신들의 화신인 사도들이 계셨다.

신화 속의 칠두룡과 최강의 마수, 그리고 전신에 시뻘건 불꽃을 두른 태양신의 화염 마차.

당연히 아라크네의 머릿속에 '패배'라는 단어는 없었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저 야만인들과 그것들이 섬기는 악신에게 절망과 고통을 안겨 줄 것인가.

오직 복수와 증오만이 가득할 뿐.

바벨탑처럼 높게 세워진 사령탑에서 수의처럼 백의를 입은 아라크네가 천억의 제국군에게 피를 토하듯 외쳤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도다! 자! 누가 저 오만불손한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힘을 보여 주겠는가!"

제국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신녀시여! 우리 블라인 부대가 선봉을 서겠소! 돌마저 박살 내는 우리의 턱과 이빨로 놈들을 토막 내리다!"

"아니! 저희 포름산 부대가! 야만인과 악신 놈을 단숨에 녹여 버리겠습니다!"

"하하하! 땅굴을 파고들어 가면 저런 성벽 따위 무용지물! 저희 어스독 부대에게 전공을 쌓을 기회를!"

하나같이 늠름하고 강인한 제국군의 모습에 아라크네는 흡족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라크네가 마음을 굳혔다.

"오탁공 바알제불! 그대의 오물 파리 부대에게 선봉을 맡기겠습니다!"

"끌끌, 역시 현명하십니다, 신녀님."

제국이 자랑하는 10명의 최강자, 십검 중 제 오(汚)검바알제불.

샤삭, 샤샤샥.

바알제불이 양팔을 쉴 새 없이 비비며 음침하게 겹눈을 빛냈다.

"절대 신녀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부우웅!

윙윙윙!

머리에 왕관을 쓴 바알제불을 선두로 그 휘하의 오물 파리 부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무수히 늘어선 가야미국의 성벽조차, 날개를 가진 오물 파리 부대에는 조금의 방해물도 되지 못했다.

"클클, 하찮구나. 땅이나 기는 하등 생물들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가야미국의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바알제불이 외쳤다.

"오라, 형제들이여."

츠츠츠!

그러자, 바알제불을 중심으로 부대원들이 몰려들며 왕관을 쓴 거대한 파리 형상을 취했다.

위이이이잉!

"꺄아악! 괴물 파리다!"

암운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는 거대 파리의 모습에 가야미국 백성들이 공포에 질렸다.

거대 파리, 바알제불이 앞발을 샤샤샥 비비며 기도했다.

-나 바알제불이 섬기는 추악한 '오물과 전염병의 신'이시여, 땅이나 기는 저 하등 생물들에게 당신의 추악한 저주를 내려 주소서.

콰오오오!

그러자 악신이 기도에 응답하며 바알제불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피어올랐다.

수천 마리의 파리들로 이루어진 그의 눈동자가 음침하게 빛났다.

'오물과 전염병의 신'의 권능으로 살아 있는 시체처럼 썩어 죽을 하등 생물들의 처참한 죽음을 볼 걸 생각하니 벌써 흥분되었다.

-끌끌, 죽어라! 하등 생물들아!

콰콰콰콰!

바알제불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악신의 권능이 담긴 오물을 토하려 할 때.

쩌적! 쩌저적!

하늘에 균열이 일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바알제불이 갑작스러운 기현상에 당황하며 그것을 보았다.

-뭐, 뭐냐?

띠링!

-갓메이커의 동화율이 50%에 이르렀습니다.

-동화율 상승에 따라 '유일신'의 전투 영역이 진화합니다.

-지금부터 갓메이커의 세계 '앤트리니아'에 직접 개입할 수 있습니다.

-동화율 상승으로 가야미국의 수호신 '유일신'이 신성 보정을 받습니다.

드드드드!

균열을 비집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그곳의 모든 이들.

하늘을 날고 있던 바알제불과 천억의 제국군.

심지어 사도들마저 숨을 죽였다.

'그것'이 지상을 향해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쿵!

쿠콰쾅!

그 한 걸음에 지진이라도 난 듯 대지가 요동쳤다.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그것'은 수천 마리가 모인 그 자신보다도 몇 배는 거대했고, 그 어떤 끔찍한 괴물보다도 추악했다.

크르르르!

거칠게 내뱉는 숨결에서는 지옥에서나 볼 것 같은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바알제불은 '그것'을 감히 정면으로 응시할 수조차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얼마나 많은 악업을 둘러야만 저런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

스윽.

'그것', 유일신의 시뻘건 안광이 바알제불에게 향했다.

카드득!

가뜩이나 흉악한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사납게 일그러지더니, 양손에 들고 있던 기다란 금속 통을 자신을 향해 겨눴다.

'F킬라'.

금속 통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어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바알제불은 그것을 본 순간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왠지 모르게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쳐야 할 것 같은 근원적인 두려움!

-어휴, 여기도 파리 새끼들이 있네.

유일신이 투덜거리더니 F킬라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치이이익!

그러자 금속 통에서 분사되는 새하얀 안개가 바알제불을 집어삼켰다.

-케헥! 켁켁! 이, 이럴 수가!

그것은 지독한 맹독이었다.

숨을 틀어막아도 피부를 타고 스며들며 순식간에 퍼져 가는 즉효성의 맹독.

썩은 살점과 병균이 가득한 오물조차 먹어 치우는 바알제불과 그의 부대였지만, 그것은 견디지 못했다.

-아아아아악!

파리 부대로 이루어진 바알제불의 거체가 모래성처럼 부서지며 땅을 뒤덮고 있는 제국군에게 쏟아졌다.

"으아악!"

"히이익!"

부서진 바알제불의 파편에 깃든 오물을 뒤집어쓴 병사들의 몸이 썩어 가며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유일신의 지척에 있던 제국 병사들이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흐아악! 괴, 괴물이 나타났다!"

"맙소사! 저것이 야만인들이 모신다던 그 전설의 악신인가?"

"도망쳐! 잡아먹힌다!"

유일신의 등장에 패닉에 빠진 병사들을 장군들이 통제했다.

"겁먹지 마라! 그래 봐야 놈은 혼자다!"

"뭐 하고 있느냐! 황제 폐하와 제국의 신들을 위해 싸워라!"

드드드드!

유일신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쯧, 진짜 더럽게도 많네. 이 정도면 여의도쯤은 통째로 뒤덮고도 남겠다.

쿵, 쿵!

그가 텅 빈 F킬라를 버리고 검지를 위로 치켜들더니.

-일단 숫자 좀 줄여 볼까.

그것을 아래로 휙 내렸다.

-짓뭉개는 신의 검지!

스스스스.

그러자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처럼, 유일신에게서 뿜어지는 신력이 사방으로 번져 갔다.

푸슉!

푸슈욱!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대지를 시뻘겋게 뒤덮은 제국군 사이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치이이익!

사방에서 새하얀 연기가 엄청난 기세로 뿜어지기 시작했다.

유일신의 '짓뭉개는 신의 검지'는 대상의 On/Off를 조정하는 권능.

그가 전세 보증금은 물론 아카데미 교사 신분으로 대출까지 받아 설치한, 1만 개의 벌레 퇴치 연막탄이 동시에 발동한 것이다.

콰아아아아!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퍼져 가는 죽음의 독무.

"으아악! 도망쳐!"

"안개에 닿으면 죽는다!"

노도처럼 번지는 독무에 닿은 제국군이 발광하듯 온몸을 뒤틀며 죽어 가고 있었다.

사령탑에서 그 끔찍한 광경을 내려다보던 아라크네가 부서질 듯 이빨을 갈았다.

"이 잔악무도한 악신아! 이런 잔재주가 또 통할 것 같으냐!"

독무를 퍼트리는 이 수법은 저번 원정 때 뼈저리게 겪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두었다.

아라크네가 거대한 날개를 가진 흉악한 맹수를 향해 기원했다.

"'강식과 기만의 야수'의 사도시여! 계약에 따라 힘을 빌려주소서!"

-알았다.

맹수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빛을 발함과 동시에 그가 등에 달린 박쥐처럼 생긴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휘이잉!

콰콰콰콰!

그러자 태풍 같은 강풍이 불며 지상을 뒤덮었던 독무를 하늘 저편으로 날려 버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의 사도다운 신화적인 이능!

"우와와! 역시 위대한 제국신의 사도시다!"

"'강식과 기만의 야수'시여! 만세!"

감격한 제국군이 사도의 위업을 찬양하며 환호할 때.

쩌어억!

맹수가 그들을 향해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으아아악!"

콰득! 콰드득!

꿀꺽!

게걸스러운 짐승처럼 맹수가 수십만의 제국군을 산 채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던 아라크네가 피가 날 듯 주먹을 쥐었다.

'어쩔 수 없어! 신의 힘을 빌리려면 이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

대가 없이 움직이는 신은 없다.

신의 힘을 빌리려는 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것이 태고부터 내려오는 신과 피조물의 불문율.

게다가 어차피 병사들은 썩어 문드러질 만큼 있었으니.

-시바, 내 전 재산이 이렇게 허무하게....

한편, 유일신은 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사라진 독무를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라크네가 사악하게 안광을 빛냈다.

"악신이 당황한 지금이 기회다! 잠자리 부대! 블라인 부대! 돌격하라!"

부우우웅!

아라크네의 외침과 함께 하늘로 수천 마리의 잠자리들이 날아올랐다.

다른 곤충들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잠자리의 몸에는 눈을 천으로 가리고 있는 개미 부대들이 올라타 있었다.

"블라인 부대 낙하!"

"낙하!"

블라인 부대, 일명 장님 개미 떼가 폭우처럼 지상으로 쏟아졌다.

퍼벅! 퍼버벅!

부대의 절반이 유일신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지상에 추락해 피떡이 되어 죽었지만,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제국군 중 가장 흉포하기로 명성이 드높은 장님 개미 부대가 유일신의 육체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지구의 장님 개미조차 단단한 게의 갑각을 파고들어 파먹어 버릴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과 턱을 가졌다.

하물며 제국의 장님 부대의 턱은 돌조차 박살 낼 위력이다.

"악신을 죽여라!"

장님 부대들이 일제히 유일신의 살점에 턱을 박았다.

까가강!

하지만 살로 이루어진 육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났다.

-'영겁의 구도자'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역시 쇠질을 하다 보면 몸이 쇠가 되는 법이라고 합니다.

장님 부대들이 당황했다.

돌마저 부수는 그들의 턱과 이빨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지휘관이 서둘러 외쳤다.

"전군! 악신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라! 놈의 내장과 장기는 이렇게 단단하지 않을 것이다!"

장님 부대가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

개미 떼에 파묻힌 유일신이 중지를 불끈 치켜들었다.

-단죄하는 신의 중지!

콰콰콰콰콰!

그러자, 그의 중지에서 지옥의 화염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제국신의 사도들

콰콰콰콰!

화산처럼 치솟는 검은 불꽃에 유일신의 몸을 뒤덮었던 장님 부대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하지만, 재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일신이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중지를 자신의 엄지에 얹더니.

[증식하는 신의 엄지]!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하나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지옥의 흑염이 유일신 주변으로 끝없는 기세로 증식한다.

콰아아아!

무수히 늘어난 흑염에서 뿜어지는 열기에 아지랑이가 폭발하듯 치솟았다.

유일신 주변의 공간이 부서질 듯 뒤틀리는 광경은, 제국군들에게는 마치 지옥 문이 지상에 개방되는 것처럼 보였다.

탕!

유일신이 중지를 튕겼다.

그러자 지옥의 흑염이 공포에 질린 제국군에게 쏟아졌다.

"지, 지옥불이 쏟아진다!"

"으아아악! 살려줘!"

콰아아아!

지옥 불이 화염방사기처럼 사방으로 쏟아지며, 불꽃 하나마다 수만의 제국군을 집어삼켰다.

스스스!

시체 한 점 남기지 못하고 잿더미로 변한 제국군의 유해가 회색 눈처럼 전장에 쏟아졌다.

지글지글!

재와 기름이 들끓고, 죽음이 범람하는 전장의 한 가운데 가야미국의 수호신 유일신이 있었다.

전장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저, 저것이 야만인이 섬기는 악신의 힘인가!"

"제, 제길! 밀지 마! 난 죽기 싫어!"

제국군은 압도적인 유일신의 신위에 전의를 잃고 전진을 멈췄다.

방금 전, 유일신의 지옥불은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대악신이 뿌릴 법한 재앙이었으나.

[허억! 허억! 젠장!]

그러나 정작 유일신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띠링!

<악신 하급신 승급 퀘스트 진행 중>

제물 : 52,023,002 /1,000,000,000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제물 : 2(+4)/10

그렇게 죽였지만 퀘스트에 필요한 제물의 숫자가 겨우 5,000만을 조금 넘겼을 뿐이었다.

내심 제국군의 숫자가 천억이나 되니 퀘스트 승급에 필요한 십억 마리쯤은 금방 달성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지만, 실제는 너무나 달랐다.

'물론 하급신이 된다고 해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핑!

신력을 너무 써서일까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게다가 거슬리는 시선이 있었으니.

'저 마차 새끼는 왜 아까부터 날 저렇게 노려보지?'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의 사도>

-무성이다. 사용한 지 2,200년 되었다.

특이 사항 : 감히 자신의 주인 같은 화염을 사용하는 유일신에게 살의를 품고 있다.

끄드득!

사도 중 하나인 불타는 마차에 박혀있는 머리통이 유일신을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사령탑에 있던 아라크네가 사도들을 향해 외쳤다.

"위대한 신의 사도들이시여! 그대들께서 저 악신을 맡아주십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타는 마차에 박혀 있던 머리의 입이 열렸다.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님의 종, 나 불의 마차가 그 청을 받아들인다! 대신 대가로 1억 마리의 제물을 거두겠다!]

"뜻대로 거두소서!"

아라크네가 기꺼이 답했다.

다소 많은 제물이었지만, 기껏해야 총병력의 1000분의 1일 뿐이다.

"자, 잠깐 신녀시여!"

"우, 우리를 제물로 바칠 셈입니까!"

붉은 바다처럼 펼쳐진 제국군이 풍랑이 치듯 동요했다.

화륵! 화르륵!

제국군 천 마리에 하나꼴로 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산채로 화염에 타들어 가는 제국군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불의 마차가 입을 쩍 벌렸다.

[제물, 거둔다!]

슈우우욱!

그러자 불꽃에 휘감긴 제국군들이 불의 마차의 입안으로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들어갔다.

콰아아아!

그러자 불에 기름을 붓듯, 불의 마차의 덩치와 휘감은 화염이 엄청난 기세로 커졌다.

그 크기는 무려 수십 톤의 덤프트럭과 같을 정도.

유일신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이거 엿된 것 같은데?]

번쩍!

유일신을 노려보는 불의 마차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나더니.

위이이이잉!

마차의 바퀴가 엄청난 기세로 회전했다.

드드드드!

콰아아!

대지에 불의 궤적을 섬뜩하게 새기며 불의 마차가 유일신을 향해 돌진했다.

[크윽! 짓뭉개는 신의 검지]!

발악하듯 유일신이 덤프트럭처럼 자신에게 돌진하는 불의 마차에 검지를 들어 권능을 써봤지만.

띠링!

[권능 발동에 실패했습니다! 신력이 부족합니다!]

콰콰쾅!

[으아아악!]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유일신의 몸이 허공에 튕기며 수백 미터나 나가떨어졌다.

으드득!

쿵!

사령탑에서 그 전투를 지켜보던 아라크네가 희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스윽.

여섯 개의 다리가 씹어 먹은 나바의 독 날개에 중독되어 검은 독꽃이 핀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바 보이느냐? 저 악신의 처참한 최후가! 드디어 네 원수를 갚았다!"

치이익!

새카맣게 타들어 간 처참한 몰골로 땅에 처박힌 유일신은 시체처럼 미동도 없었다.

그때였다.

"안돼에에! 유일신니임!!"

굳건히 잠긴 성문이 열리며 처참히 울부짖는 백발의 소녀가 전쟁터에 뛰쳐나간 것은.

***

···나는 진건가?

아무리 신이라 추앙받는다 해도 원래 나약하고 의지박약한 나로서는 앤티들을 지키는 건 무리였던 걸까?

"으아앙! 안 돼에에! 유일신니이임! 제발 눈을 뜨세요! [치유하는 유일신님의 약지]!"

새하얀 빛이 심연의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내 의식을 잡아끌었다.

스륵.

내 눈꺼풀이 희미하게 열렸다.

'애, 앤티······. 왜 네가 여기에?'

성에 있어야 할 가야미국의 여왕 앤티가 쓰러진 내 얼굴 앞에 있었다.

"[치유하는 유일신님의 약지]! 제발! 제발!"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 뺨에 손을 올린 채 계속 치유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띠링!

[완전한 치유에 실패했습니다!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의 신력이 치료를 방해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 중 하나는 분사(焚死), 불에 타죽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나는 반쯤 타들어 간 숯덩어리 자체였다.

끊임없이 치유를 걸고 있는 앤티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끈질긴 놈! 아직 숨통이 끊어지지 않았나?]

드드드드!

화염이 이글거리는 바퀴로 대지를 박차며, 덤프트럭만 한 크기의 불의 마차가 나와 앤티 앞으로 돌진했다.

마차에 박힌 인간의 머리가 나를 노려보며 입을 쩍 벌렸다.

[더러운 불꽃을 쓰는 변방의 악신아. 각오해라! 너를 태워 내 주인께 바치겠다!]

고오오오!

용광로 같은 화염이 놈의 입에서 치솟았다.

주, 죽는다!

"애, 앤티야······. 도망쳐······."

"유일신님을 두고는 절대 안 가요!"

앤티는 내 앞에서 양팔을 활짝 펼친 채 자신보다 수만 배는 거대한 불의 마차로부터 나를 지키겠다는 듯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죽어라!]

불의 마차가 우리를 향해 화염을 토하려 할 때였다.

펄럭펄럭!

쿵!

하늘에서 내려선 거대한 그림자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불의 마차여! 이 악신은 애초에 삼등분하기로 하지 않았나? 분명 그런 계약이었을 텐데!]

검치호랑이를 닮은 외형에 등에 박쥐 날개를 가진 마수가 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불의 마차가 가소롭다는 듯 이죽거렸다.

[흥, 내가 잡았으니 이 악신의 신력은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님의 것이다!]

[쉬이익~! 그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마치 일곱 명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듯한 기이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캬라라라락!

뭔가를 토해내는 괴음이 들리자, 불의 마차와 마수가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치이이익!

강산의 독액에 그들이 서 있던 땅이 기포를 토하며 녹아내리더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큭!]

[이 더러운 뱀이!]

불타는 마차와 마수가 이를 갈며 이 짓을 한 뱀을 노려보았다.

일곱 개의 뱀 머리를 가진 그 괴물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마수 히드라를 닮았다.

히드라가 일곱 개의 아가리를 동시에 열며 두 사도에게 말했다.

[쉬이익! 위대한 내 주인 '심연 늪의 지배자' 께서 반드시 이 악신을 산채로 삼키고 싶다 하셨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총애하는 자라 그런지 더욱 몸이 달아 계셔. 그러니 내게 양보하는 것은 어떨까?]

[이 더러운 뱀 놈이 감히! 네 놈부터 뱀구이로 만들어줄까?!]

[크르릉! 신의 사도란 것들이 계약하나 지키지 않는 거냐! 오냐! 좋다! '강식과 기만의 야수'님의 이름을 걸고 네 놈들 모두 다 갈가리 찢어주마!]

동료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살의를 뿜는 사도들.

그 모습은 마치 먹음직한 먹잇감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세 마리의 야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앤티에게 힘겹게 말했다.

"앤티야······. 지금이야. 빨리 너라도 도망쳐······."

앤티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내게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리소서! 제가 도움을 청할 분을 소환하겠습니다!"

도움을 청할 분을 소환하겠다고?

대체 누구를?

앤티가 양손을 꼬옥 쥐더니 힘껏 외쳤다.

"용사의 탑을 오르는 강인한 전사여! 성녀 앤티의 부름에 응하여 위기에 빠진 신님과 저를 지켜주소서! 스킬 [강림]!"

그러자 앤티의 주위로 눈부신 백광이 솟구쳤다.

띠링!

스킬 [강림]

-신실한 고위 사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로, 신 혹은 그의 사도를 세상에 강림시킬 수 있다.

-강림 유지 시간 : 60분

쩌적! 쩌저적!

그러자 우리 앞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근유우우욱!!"

우렁찬 외침과 함께 불끈거리는 초콜릿 근육을 온몸에 두른, 삼등신의 강인한 전사가 강림했다.

"일호! 위대하고 자비로운 유일신님과 아름답고 고귀한 성녀님의 부름을 받고 왔나이다!"

그는 바로 용사의 탑을 오르고 있는 일호였다.

"네놈들이냐!"

스르렁!

일호가 등에 메고 있는, 마치 아령처럼 생긴 검을 뽑았다.

"이 덩치만 큰 더러운 괴물들아! 감히 유일신님과 성녀님을 괴롭히다니! 각오해라! 내 검과 근육이 너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고오오오!

일호의 몸에서 엄청난 투기가 솟구치더니, 그 여파로 땅마저 흔들렸다.

엄청나다.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니.

"아아, 용사님."

"일호야······."

앤티와 난 작지만 믿음직한 일호의 등을 보며 감격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약했던 일호가 이렇게 강해져서 우리를 지켜주다니.

일호가 그런 우리를 향해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껄! 두 분은 걱정 마시고 제게 맡겨주소서! 저 일호! 저런 괴물들을 한두 마리 잡아본 게 아······!"

하지만 일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쩌어억!

콰콰쾅!

검치호랑이 마수의 아가리가 일호를 순식간에 덮친 것이다.

꿀꺽!

[크릉? 뭐냐, 이 목청만 큰 놈은? 입만 살았군.]

일호를 삼킨 마수가 붉은 혀를 내밀며 입맛을 다셨다.

"일호야!"

"꺄악! 일호님!"

나와 앤티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저 망할 고양이 놈이 내 일호를 먹었어!

슈슈슉! 슈우욱!

그때 하늘에서 쏟아진 화살비가 사도들에게 쏟아졌다.

"유일신님과 여왕님을 구하라!"

"전군 돌격!"

이호가 가야미 국의 병사들을 이끌고 활과 창을 던지며 돌진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무려 백 만.

대부분 어린애와 노약자로 이루어진 가야미 국이 총력을 기울여 간신히 만든 병력이었다.

까가강!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사도들에게 그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화, 활이 안통해?"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의 어설픈 공격은 오히려 사도들의 분노만을 샀을 뿐이다.

[쉬이익! 이 주제도 모르는 하찮은 벌레들이 감히 신의 사도에게!]

[뱀놈아, 비켜라! 내가 모두 태워주지!]

쩍 벌린 불의 마차의 아가리에서 용광로 같은 불꽃이 피어났다.

안 돼! 이대로면 모두 전멸이다!

그때 내게 구원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께서 맡겨둔 검신의 수리가 드디어 끝났다고 합니다.

그동안 벗겨 먹은 것이 있으니 특별히 배송은 공짜로 해주겠다고 합니다.]

쩌저저적!

우우웅!

그러자, 내 눈앞의 공간이 갈라지며 피처럼 붉고, 톱날 같은 기괴한 검날을 가진 마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듣거라, 본좌 검신의 이름은!

79.

우우웅!

검이 붉은 기운을 뿜으며 낮게 울었다.

악어 사도 구스타프와 싸우던 중 '천마군림'을 사용하고 부서졌던 전과는 모습도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톱날같이 흉흉한 칼날은 1m가 넘었고, 묵빛의 손잡이에 박힌 혈광을 뿜는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무섭다.

정말 이게 원래 식칼이었던 내 검신이 맞는 건가?

[죽어라!]

콰르르!

불의 마차가 가야미 병사들을 향해 용광로 같은 불꽃을 토하려 했다.

제길!

나는 황급히 마검에 손을 뻗었다.

"스킬 공유 [검귀]."

이 상황에서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최강의 공격 수단.

"[천마군림]!"

구스타프를 무찔렀던 그 검을 사도들을 향해 횡으로 그었다.

[크릉! 역시 심상치 않군!]

처음부터 기이한 살기를 뿜던 검신을 경계하던 눈으로 지켜보던 마수가 박쥐 날개를 펼쳐 하늘로 몸을 날렸다.

[크윽?!]

화염을 토하려던 불의 마차도 뒤늦게 살기를 느꼈는지 기겁하며 바퀴를 움직였다.

서걱! 쿵!

하지만, 미처 다 피하지는 못했다.

불의 마차의 후반부, 뒷바퀴를 포함해 3분의 1이 본체에서 썰려 나갔다.

콰콰쾅!

중심을 잃은 불의 마차가 땅을 데굴데굴 구르며 전복됐다.

마차의 머리에 박힌 머리가 찢어질 듯 입을 벌리며 불꽃 섞인 절규를 토했다.

[끄아아악! 주인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내 소중한 몸이!]

그리고 마지막 사도.

피할 생각도 못 했는지 천마군림의 검기를 정통으로 맞은 히드라.

서걱! 서걱!

쿵! 쿵!

일곱 개의 뱀 머리가 일제히 몸에서 분리되며 땅에 쏟아졌다.

푸슈욱!

시퍼런 피를 분수처럼 토하며 놈의 거체가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허억! 허억!"

나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그 광경을 보았다.

다행히 손에 쥔 검신은 '천마군림'을 펼쳤음에도 무사했다.

아무래도 그 갓코인만 밝히는 수전노가 일은 제대로 해준 모양이다.

'남은 건 하나.'

히드라는 죽였고, 불의 마차는 뒷바퀴를 잘라냈으니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하늘을 날고 있는 검치호랑이 마수를 노려보았다.

'좋아, 이제 저놈만 해치우면!'

아직 놈이 일호를 삼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저놈을 쓰러뜨리고 배를 가르면, 일호를 구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조금이지만, 승산은 있었다.

띠링!

[지구 지부 신도 '성미리'의 봉인이 해제됐습니다.

'성미리'가 초월의 가능성을 품습니다!]

<선신 하급신 승급 퀘스트 진행 중······.>

신도 : 50,212,321/1,000,000,000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신도 수 : 7(+2)/ 10

현실에 있는 성미나가 드디어 미리 씨의 봉인을 푸는 것을 성공했는지, S급 신도의 숫자가 하나 늘었다.

게다가 그 영향인지 조금이지만 몸에도 힘이 돌아왔다.

아직 화상의 통증이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간신히 싸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수를 향해 검신을 겨눴다.

'좋아! 한 번 더 천마군림으로!'

쉬이익!

그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놀라서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늘한 비늘로 뒤덮인 뭔가가 사슬처럼 나를 휘감았다.

휘리릭, 콰콰쾅!

"윽!"

꾸득! 꾸드득!

부서뜨릴 기세로 내 몸을 조이고 있는 것은, 바로 방금 머리를 베었던 사도 히드라였다.

이제 겨우 머리가 둘이라 히드라라고 부르기에는 좀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뱀의 머리 중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쉬익! 놀랐느냐? 변방의 하찮은 악신아. 나는 '심연 늪의 지배자'님이 내려주신 불사의 축복을 가졌다. 겨우 '검' 따위로는 날 죽일 수 없다.]

부글부글!

그러던 와중에도 잘려나간 히드라의 다른 상처에서 기포가 일며 뱀의 머리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 머리가 셋이 되었다.

부글부글!

곧이어 다른 상처에서도 기포가 일며 다시 새로운 머리가 튀어나왔다.

새로 난 머리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쉬익! 그래, 우리는 죽일 수 없지!]

'이게 그런 의미였나?'

처음 감정했던 히드라의 특이 사항에 있던, 끝없이 재생한다는 문장.

<'심연 늪의 지배자'의 사도>

-양성구유의 뱀이다. 사용한 지 2,000년 되었다.

특이 사항 : 신녀 아라크네가 소환한 사도로 끝없이 재생한다.

아무래도 히드라를 닮은 것은 겉모습만이 아닌 것 같았다.

[아아악! 내 모오오옴!!]

히드라가 전복된 채 계속 비명을 지르는 불의 마차를 보며 설레설레 머리들을 저었다.

[쉬익! 쉬익! 살아있는 몸도 아닌 주제에 엄살은. 저런 것과 같은 사도라고 불리는 게 창피하구나.]

[크르릉! 뱀이여! 독식은 안 된다! 계약대로 악신의 3분의 1을 내놔라!]

하늘을 날고 있는 마수가 히드라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히드라가 혀를 날름거리며 마수를 비웃었다.

[쉬익! 겨우 하찮은 검기 따위에 놀라 고양이처럼 도망간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 이 악신은 '심연 늪의 지배자'님의 것이다.]

[크르릉! 이 뱀이 정녕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쉬이익! 해볼 테면 해봐라, 짐승아. 허나 이건 기억해둬라. 네 잘난 바람으로 내 몸을 베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닥쳐라! 크아앙!]

마수가 긴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드라를 향해 달려들려 할 때였다.

-하찮은 검기라고?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무미건조한 음성.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나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들었다.

인간도, 괴물인 사도의 것과도 다른 이질적인 목소리.

난 기겁했다.

당연했다.

그 목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내가 움켜쥔 검신이었으니까!

히드라가 검신을 내려다보더니 탐욕스럽게 눈동자를 빛냈다.

[쉬이익! 말을 하다니 생각보다 쓸 만한 마검이로구나! 좋아, 너는 전리품으로 내가 가져야겠······.]

-뱀아, 헛소리 말고 다시 지껄여봐라. 본좌의 검기를 하찮다 하였느냐? 감히?

히드라가 떼쓰는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검신에게 말했다.

[쉬익! 물론. 널 포함해 세상의 그 어떤 빼어난 신검이라도 무한히 재생하는 내 앞에서는 무용지물. 그러니 당연히 하찮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쉬이익! 자아, 이리 오너라, 마검아. 검은 검에 어울리는 효용이 있는 법이니. 마검, 너를 내 토굴 입구를 꾸미는 장식품으로 써야겠다.]

-크큭! 크크큭! 크하하핫!

검신이 갑자기 광소했다.

그것은 마치 내가 검신을 잡고 광기에 함몰돼 짓는 웃음과 비슷했다.

어? 그러고 보니 검신을 잡았는데도 이번에는 왜 이렇게 멀쩡했지?

히드라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쉬이익! 웃어?]

-당연히 웃길 수밖에. 시체가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쉬이익! 이 하찮은 검놈이 개소리를 하는구나! 시체라니? 누가 시체란 말이냐!]

-바로 너 말이다. 대가리가 여러 개인 뱀아.

검신이 뱀을 비웃으며 선언했다.

-넌 이미 죽어 있다!

파스스스······.

[쉬이익?!]

히드라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마치 모래성처럼 그의 전신이 가루가 되며 부서지고 있었다.

[쉬익! 이, 이 마검이 내게 저주를 내렸구나! 쉬이익! 하, 하지만 이쯤이야 내 주인께 받은 재생의 축복을 사용하면!]

부글부글!

히드라의 전신에서 거품을 뿜으며 재생을 시도했다.

파스스스!

하지만, 그것이 소용없을 정도로 히드라의 몸이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마치 천마군림을 맞았던 악어 사도 구스타프의 최후처럼.

[쉬익! 쉬이익! 이, 이건 말도 안 돼! 한낱 검 따위가 나를!]

히드라의 뱀 머리들을 감싸던 녹색 비늘이 공포 탓인지 새하얗게 탈색했다.

-설마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본좌의 천마군림을 정통으로 맞고도 정녕 살려 했더냐?

[쉬이익! 시, 싫어어어! '심연 늪의 지배자'님! 사, 살려······.]

마지막으로 남은 뱀머리가 울부짖으며 자신의 주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파스슥!

채 마지막 말을 내뱉지도 못한 채, 산산조각이 나며 사라졌다.

검신이 조소했다.

-크큭, 하찮은 뱀이구나.

히드라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자 갓메이커의 메시지가 울렸다.

띠링!

['심연 늪의 지배자'의 사도를 학살했습니다.]

[제물을 흡수합니다]

부서진 히드라의 가루가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띠링!

[축하합니다. 신이시여. '심연 늪의 지배자'의 사도는 S급 2명분의 가치가 있는 강한 제물입니다.]

그러자 사도 요한과, S급 5명분의 제물의 가치의 구스타프, 그리고 이번에 S급 2명분의 가치가 있는 히드라를 합쳐.

띠링!

<악신 하급신 승급 퀘스트 진행 중>

제물 : 52,023,002 /1,000,000,000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제물 : 8(3+5)/10

콰아아아!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제물의 숫자가 8로 늘더니 내게 엄청난 힘이 치솟았다.

스륵, 스르륵!

심지어 흡수한 히드라의 재생력 효과인지 화상으로 가득했던 상처가 빠르게 낫기 시작했다.

"우, 우와."

내가 극적인 변화에 놀라고 있을 때, 검신이 버럭 소리쳤다.

-갈(喝)! 이 얼빠진 놈아! 뒤다!

검신의 외침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휘이이잉!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며 온몸에 푸른 바람을 휘감고 있는 검치호랑이 마수의 모습이 보였다.

[크르르! 이제 눈치채봐야 늦었다! 내 삭풍의 권능으로 갈가리 찢어주지!]

마수가 박쥐 날개를 펄럭이자, 내가 서 있는 지상을 향해 서슬 퍼런 바람의 칼날이 쏟아졌다.

"젠장!"

나는 사도들과 싸우는 난장판에 휩쓸려 기절한 앤티를 황급히 주머니에 넣고는 가야미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피해!"

그리고 전력으로 그들의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쾅!

콰콰쾅!

바람의 칼날이 적중한 땅에 거대한 검으로 벤 듯한 상흔이 끔찍하게 새겨졌다.

하늘 꼭대기에서 바람 칼날을 뿌리던 마수가 도망치는 날 비웃었다.

[크르르! 소용없다! 발악해봐야 네 놈은 독 안의 쥐······ 끄에엑!]

오만한 웃음을 띠던 마수의 눈동자가 갑자기 찢어질 듯 커졌다.

[뭐, 뭐냐?]

부륵! 부르륵!

놈의 배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요란하게 꿈틀거리더니.

-[중량 증가!] [중량 증가!] [중량 증가!]

뱃속에서 내가 아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아, 안···! 크아앙!]

그의 배가 바위를 삼킨 듯 아래로 축 늘어지더니, 중력에 빨려 들어가듯 엄청난 기세로 지상을 향해 추락했다.

콰르르 콰콰쾅!

[끄아악! 배, 배가! 찌, 찢어질 거 같아! 크아앙!]

온몸이 피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복부를 움켜쥐며 괴로워하던 마수의 배가.

퍼어엉!

폭발했다.

[끄아아앙!!]

전신을 바르르 떨며 괴로워하던 마수가 머리를 땅에 쾅 박으며 절명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근유우우우욱!"

터진 마수의 뱃속에서 피로 흠뻑 젖은 일호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일호야! 살아 있었구나!"

일호가 몸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껄껄 웃었다.

"당연한 말씀을! 제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껄껄껄! 자기 덩치만 믿는 큰 괴물 놈은 뱃속에서부터 조지면 되는 법입니다!"

"우아아! 일호야! 역시 네가 최고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 일호는 멋있었다.

-크큭, 얼빠진 네놈이 부리기엔 아까운 하인이로구나.

내 손에 쥐어진 검신이 조소했다.

그래, 아까부터 신경 쓰였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대체 누구세요?"

원래 좀 미친 식칼이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낯설다. 아주 많이.

그러자 검신이 호탕하게 외쳤다.

-크큭, 과연 얼빠진 놈답구나! 여태껏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단 말이냐? 귓구멍을 파고 잘 들어라! 본좌는 바로!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바, 바로?"

막장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던 검신이었지만.

-······어라, 본좌가 누구였지?

제정신이 아닌 걸 보면 내 검신이 맞는거 같기도 하고.

천검 씨, 이 상황 설명 좀 해보시죠.

A/S가 좀 이상한데요?

진지하게 환불을 고민하고 있을 때.

[끄아아악! 이 벌레 같은 것들이 감히 신께서 주신 내 몸을 부수다니! 용서 못 해! 절대 용서 못 한다!]

콰아아아!

전장 저편에서 엄청난 기세의 불꽃이 치솟았다.

몸의 3분의 1이 썰려나간 부서진 불의 마차가 제국 사령탑에 있는 거미를 향해 소리쳤다.

[신녀야! 제물을 바쳐라! 저놈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하다!]

나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거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바, 바치겠습니다! 사도시여! 1억! 아, 아니 10억 명의 병사를 거두시고 저 흉악하고 두려운 괴신들을 물리쳐주소서!"

[안 된다!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불의 마차에 박힌 인간의 머리가 악귀처럼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래, 이곳에 있는 너희 모두가 필요하다!!]

"네, 네?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의 사도시여.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바쳐라! 신의 영광을 위해! 네 놈들 목숨 모두 다!]

불의 마차가 내뱉는 섬뜩한 외침과 함께.

화르륵!

콰아아아!

전장에 1,000억 제국군의 몸이 일제히 불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크하하핫! 보아라! 벌레들아! 이것이 바로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 님의 힘이니라!]

절망의 태양이 강림했다.

천마(天魔)는 광소한다.

"으아아아아악!!"

"시, 신녀시여! 살려주십시오!"

"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아! 아아악!"

산채로 불타는 제국군들이 절규했다.

"아, 안 돼! 신의 사도시여! 제발 멈추소서! 이건 계약과 다르지 않습니까! 황제께서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거미 신녀 아라크네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지만, 한번 번진 화마는 멈출 기세가 없었다.

슈우우욱!

슈슈슉!

[크하하! 제물! 제물을 바쳐라!]

불의 마차가 찢어질 듯 아가리를 쩍 벌리며, 화염에 휩싸인 제국군들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반경 수십 킬로를 뒤덮은 약 1,000억 마리의 벌레 떼가 일제히 불타며 불타는 마차에게 먹히는 광경은 두렵기까지 했지만.

'이대로면 저 마차 하나만 부서버리면 되지 않을까?'

1,000억 마리의 벌레 떼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미친!"

불타는 벌레들을 게걸스레 집어삼키고 있는 저 미친 마차의 크기가 무려 300m를 넘어가기 전까지는.

'시발!'

심지어 이 와중에도 멈출 기세 없이 계속 커지고 있었다.

400m, 500m, 600m······.

거기에 불의 마차가 뿜는 불꽃도 비례하듯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콰아아아!

부글부글!

그 열기에 놈 주변의 땅이 녹아내리며 용암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콰콰쾅!

쿠구궁!

"하아압! 근유우우우욱!"

일호가 주변 성벽을 부수더니 집채만 한 크기의 잔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박살나라! 괴물 마차야!"

부우웅!

거대한 바위가 불의 마차의 머리통을 노리고 쏜살같이 쏘아졌다.

치이익! 후드득!

하지만, 그것은 채 불의 마차에게 닿지도 못하고 놈이 두른 불꽃에 녹아버렸다.

나는 그 광경에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얼마나 뜨겁기에 저 바위가 순식간에 녹아버리지?

[크하하핫! 이것이 바로 위대하신 내 주인!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 님의 힘이니라!]

콰아아아!

점점 거세지는 불의 마차의 불꽃은 마치 태양이 지상에 강림한 것 같았다.

치이익!

그 열기는 놈에게서 꽤 거리가 있었던 우리에게까지 번져오며, 땅에서 새하얀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일호가 울상을 지었다.

"유, 유일신님!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하지만, 나로서도 저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우우우웅!

-크큭, 크크큭!

그때 내가 손에 쥐고 있던 검신의 손잡이에 있는 눈동자가 꿈틀거리더니, 나와 일호를 한심하게 노려보았다.

-크큭, 얼빠진 놈들! 어쩌긴 뭘 어쩐단 말이냐!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검신이 광기 어린 음성으로 오만하게 외쳤다.

-크큭, 베어라! 저런 하찮은 불꽃을 쓰는 마차 따위 베면 그만!

하찮은 불꽃이라니? 저게?

이미 제국군 벌레의 3분의 1을 먹어 치운 불의 마차의 크기는 1km를 넘어섰다.

부글부글!

놈의 열기에 녹아내린 땅은 마그마처럼 들끓으며 범람하는 강물처럼 주변을 퍼지고 있었다.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검신을 바라보자, 놈의 눈동자에 시뻘건 안광이 번뜩였다.

-크크큭! 얼빠진 놈아! 본좌를 믿어라! 본좌가 베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 없으니!

"······좋아."

어차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스윽. 나는 검신을 움켜쥔 손을 힘껏 뒤로 젖혔다.

"스킬 공유 '검귀'. 천마신검 제 1초 [천마군림]!

그리고, 악몽처럼 몸짓을 불리고 있는 불의 마차를 향해 검신을 휘둘렀다.

스스슥!

차아아악!

온몸에서 힘이 쫘악 빠지는 탈력감과 함께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기가 쏟아졌다.

[크하하! 제물! 제물을 더 가져······! 커허억!]

요란하게 웃으며 제국군을 빨아들이던 불의 마차가 갑자기 용암 섞인 피를 토했다.

쩌저적!

쩌저저적!

끔찍할 만큼 거대해진 불의 마차의 거체가 인간의 머리를 기준으로 사선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크큭, 벴다!

[아, 안 돼! 내 몸! 주인께서 주신 내 소중한 몸이······ 끄아아악!]

쿠콰쾅!

콰오오오!

콰르르 콰콰쾅!

불의 마차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충격에 지축이 부서질 듯 요동치며, 동시에 불꽃이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검신이 오만하게 외쳤다.

-크크큭! 보았느냐! 이것이 본좌의 힘이다!

뭐 검신을 휘두른 건 나였지만.

"하아, 하아! 죽겠네."

검을 쥔 팔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지만 단 한 번 휘두르고 일주일이나 기절했던 전과 악어 구스타프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

꿈속에서 그 변태 스토커들에게 학대당한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양반은 아닌지 스토커들이 바로 반응했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께서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고 합니다.]

['한없이 베푸는 풍요'께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불타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불타는 하늘?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콰아아아!

하늘이 핏물처럼 시뻘겋게 변한 채 불타고 있었다.

그것의 중심에는 천마군림으로 베어버린 불의 마차에 박혀있던 머리와 똑같이 생긴 거대한 불덩어리가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검신, 혹시 저것도 벨 수 있어?"

검신이 침묵했다.

내 눈이 감정한 놈의 정보가 변해 있었다.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의 형제신 (봉인 해방)>

-본래 '앤트라니아'의 하늘에는 두 명의 태양신이 있었다.

두 태양신은 하늘의 패권을 얻기 위해 싸웠고, 그 여파만으로 대륙의 절반이 불탔다.

칠주야의 결투 끝에 승리자는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의 이름을 얻고 홀로 태양신이 되었다.

패자는 신의 힘을 잃고 소멸했으나,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은 패배한 형제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의 잔해 일부를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마차에 봉인해 자신의 사도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 그 봉인이 깨졌다.

특이 사항 : 사도의 증표인 자신의 몸을 부순 유일신에 대한 증오로 온 세상을 불태우려 한다.

콰아아아!

슈슈슈슉!

"으아악! 살려줘!"

"아악! 이런 개죽음은 싫어어!"

그 와중에도 화염에 휩싸인 제국 벌레들이 놈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사삭!

약 1,000억 마리의 제국 벌레들이 모두 놈에게 먹히고, 먹다 남은 재가 눈처럼 쏟아졌다.

드드드드!

이제 직경 10km는 될 법할 정도로 몸을 불린 불 대가리가 내게 불꽃을 토하며 외쳤다.

[감히 내 주인께서 주신 소중한 몸을 부순 대가는 크다! 너! 이 하찮은 악신 놈아! 네놈과 함께 너희들의 세상을 모두 불태우리라!]

꿀꺽!

"스토커분들, 이거 어쩌죠?"

['모든 것을 베는 천검'께서 찌꺼기만 남긴 했어도 본래 상급신인 놈이었으니 포기하면 편하다고 킬킬거립니다.]

아놔, 이 양반이! 내가 댁한테 바친 갓코인이 얼마인데!

[모두 타 죽어라아아아!]

콰아아아아!

태양 같은 불꽃을 쏟아내는 불의 재앙이 온 세상을 태울 기세로 낙하했다.

"이런 시발!"

항거할 수 없는 절망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저걸 대체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콰아아아!

놈이 다가올수록 점점 강해지는 열기에 가야미국의 백성들이 괴로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유일신님!"

"너무 뜨거워어어! 살려주소서! 유일신님이시여!"

신인 내게 그들의 고통과 절망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제길!"

나는 이를 악물며 지상으로 쏟아지는 불타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고, 내 모든 권능을 쏟아냈다.

[짓뭉개는 신의 검지]!

[단죄하는 신의 중지]!

[증식하는 신의 엄지]!

그러나 그것은 범람하는 산불을 겨우 소화기 하나로 끄려는 무모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끄으으윽!"

내 권능은 재앙의 낙하를 단 1초도 막지 못했다.

[신력이 부족합니다!]

푸슈욱!

갓메이커의 메시지와 함께 내 코와 귀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힘, 힘이 모자라!'

그때 일호가 외쳤다.

"유일신이시여! 당신께 이 짐승을 바칩니다!"

띠링!

[신실한 신도이자, 당신의 임시 사도인 일호가 '강식과 기만의 야수'의 사도를 공물로 바칩니다.]

내가 사냥하지 않았지만, 내 신도인 일호가 죽인 사도를 바치자 갓메이커가 반응했다.

츠츠츠츠!

배가 터져 죽었던 마수의 몸이 모래성처럼 부서지며 내게로 흡수되기 시작하더니.

띠링!

[축하합니다. 신이시여. 일호가 바친 '강식과 기만의 야수'의 사도는 S급 2명분의 가치가 있는 강한 제물입니다.]

<악신 하급신 승급 퀘스트>

제물 : 52,023,002 /1,000,000,000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제물 : 요한, 구스타프, '심연 늪의 지배자의 사도', '강식과 기만의 야수의 사도'.

10(4+6)/10

띠링!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유일신'께서 악신 하급신으로 승급합니다.]

콰아아아!

내 전신에서 패도적인 기운을 가득 머금은 어둠이 폭발할 듯 치솟으며, 텅 비었던 신력이 엄청난 기세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하급신의 신력인가?

평소 내가 가진 신력의 수치가 1이었다면, 못해도 그것의 열배는 증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일신이시여! 제발 힘을 내소서!"

일호가 간절한 눈빛으로 양손을 꼭 움켜쥔 채 나를 향해 기도했다.

"으흐윽, 유일신님! 시바시바!"

"제, 제발 저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소서."

이호를 필두로 가야미 국의 백성들도 공포와 믿음이 뒤섞인 눈으로 날 보며 기도했다.

그래, 나는 너희들의 신이다.

"으아아아! 내 애들한테서 꺼져!"

악다구니 바친 고함을 지르며, 불의 재앙을 향해 온 힘을 쏟아냈다.

***

그 시각, 현실 세계.

쿠르릉! 번쩍!

"선생님! 여기 계세요?"

눈부신 섬광과 광음과 함께 성미리가 훈련실에 나타났다.

성미나의 도움으로 봉인을 해제한 그녀는 드디어 바라마지 않던 S급이 되었다.

S급의 능력은 A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전력을 다하면 작은 산 정도는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미나는 유일신에게 한시라도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참, 집에도 안 계신데 어디 가셨지? 검귀 아저씨, 혹시 우리 선생님 못 보셨어요?"

성미리가 혼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검귀에게 물었다.

"······허억, 허억! 지옥에는 팔열(八熱)의 지옥이 있으니 천마신검의 제 2검초는 그곳에 기인······."

하지만, 흠뻑 땀에 젖은 채 검귀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검귀는 500kg이나 나가는 흑검을 계속 휘두르기만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째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검귀의 모습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졌다.

"에휴, 그러다 쓰러져요. 명지네 하데스한테 라이벌 의식 느끼는 건 알지만 좀 쉬면서 하세요, 아저씨."

쿠르릉! 번쩍!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성미리가 뇌성과 함께 훈련실에서 사라졌다.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더는 검신님의 짐이 되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진짜 검귀가 되어야 한다."

으드득!

부서질 듯 이를 악물며 검귀가 백만 번째 검을 내리쳤다.

부우웅!

화륵!

그때 내려친 검귀의 검에서 아주 찰나, 희미한 불꽃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그것은 실로 미약한 깨달음이었지만.

우우우웅!

유일신을 매개로 검귀와 심령이 연결된, 갓메이커 안에 있는 누군가의 잊힌 기억을 깨웠다.

***

[헛된 발악을 하는구나! 얌전히 세상과 함께 불타라!]

"닥쳐! 불 대가리야! 으아아아아! [단죄하는 신의 중지]!"

콰아아아아!

지상으로 낙하하려는 사도를 내가 쏟아내는 검은 불꽃이 간신히 저지하고 있었다.

치이익!

부글부글!

내가 가야미국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성벽들이 열기에 초콜릿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더, 더는 못버텨······.'

무려 천억 마리나 되는 제물을 처먹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차에 봉인되기 전에 본래 태양신이었다는 이력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건 저것은 하급악신으로 승급한 내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제길,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게는 마지막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바로 '천검의 보고.'

요한과의 일전 때 지구로 강림하려 했던 파괴신 '???'를 떠올릴 때면 지금도 오금이 저렸다.

게다가 그게 겨우 본체의 100분의 1에 불과했다니······.

'그놈과 다시 마주치는 사태를 대비해서 아끼고 싶었지만,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대로면 나도 가야미국 애들도 전멸!

그때 천검의 보고에서 사용했던 '산을 씹는 거신의 검'이라면, 하늘을 불태울 기세로 쏟아지는 직경 10km가 넘는 불의 재앙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크윽, [천검의 보고] 사······."

막 천검의 보고를 소환하려는 순간.

덥석!

주름으로 가득한 거친 손이 내 팔을 으스러질 듯 움켜잡았다.

"크큭, 얼빠진 놈아. 헛수고 마라. 산을 씹는 거신의 검으로는 결코 불을 벨 수 없다."

손의 주인은 얼굴에 수세미 같은 수염이 성성하게 돋은 괴팍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낯이 익지?

"누, 누구세요?"

"크큭, 본좌는 파괴신을 죽이기 위해 힘만을 추구하다 오히려 폭주하여 스스로 세상을 멸망시켜버린 어리석은 우자(愚者)."

노인이 광소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천마(天魔)다."

천마신검 제 2초, 천마대초열(天魔大焦熱)

81.

얼굴은 분명 미친놈처럼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피눈물을 철철 흘리는 광경은 매우 섬뜩했다.

자칭 천마라 하는 이 노인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하늘에서 쏟아지는 저 불의 재앙을 막아야······.

"어?"

노호하며 쏟아지던 불타는 태양도, 내게 간절히 기도하는 일호와 가야미국 백성들.

모든 것이 마치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노인이 쯧 혀를 찼다.

"멈춘 게 아니다, 얼빠진 놈아. 양의심공으로 네 정신을 나누어 대화하고 있을 뿐, 현실의 너는 여전히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

말마다 얼빠진 놈이라고 하니 기분이 나쁘다.

"저기, 대체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본좌는 천마다!"

노인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네, 네. 천마 어르신. 누구신진 잘 알았으니까 그만 돌려 보내주실래요?"

대체 왜 저 노인네가 천검의 보고를 쓰는걸 방해한 지는 몰랐지만, 그의 말대로 현실의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저 노친네,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노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크큭, 크크큭!"

쇠 수세미로 철 솥을 문지르는 것 같은 탁하고 거슬리는 웃음.

"정正 마魔 사邪, 무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본좌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단 한 번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비굴하게 무릎을 꿇었거늘. 네놈은 그런 본좌를 광인 취급 하느냐?"

기분 탓일까?

고오오!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짙은 피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했다.

"크크큭! 복수하게 도와주겠다는 천검 놈의 감언이설에 속아 기억과 무공을 잃고 수천 년 동안이나 놈에게 부림 받았다. 심지어 사마귀 같은 미물에게까지 깃들었을 때는 기억을 잃은 와중에도 치욕스럽기 짝이 없었지. 허나!"

혈광이 번뜩이는 눈동자가 나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지금 네 놈에게 느끼는 감정도 그때와 다르지 않구나!"

드드드!

지축이 요동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철퍽, 철퍽!

처음 끈적거리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내 발치를 적셨다.

그것은 피였다.

"헉!"

기겁하며 나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고대 중국의 복식을 닮았지만 뭔가 미묘하게 다른 복장의 시체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묻겠다. 네까짓 게 정녕 본좌를 소유할 자격이 있다 여기느냐?"

시체 산 위에서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나를 굽어보았다.

"본좌는 세상의 모든 무(武)를 습득하고, 고대의 선술과 수라교의 비술까지 통달한 무의 신이자 마중마, 바로 천마니라!"

천마가 날 가소로운 시선으로 보며 명령했다.

"꿇어라!"

콰아아!

"으윽!"

그러자, 마치 산이 짓누르는 것 같은 위압감이 내 몸을 짓눌렀다.

부들부들!

다리가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이 땅에 닿으려는 순간.

띠링!

['눈먼 신의 눈' 고유 권능이 발동합니다.]

그러자, 나는.

'천마'를 보았다.

***

본좌는 천마다.

물론 이것은 별호.

진짜 이름은 모른다. 날 때부터 고아였으니.

고아가 사는 것은 이 풍진 세상에 녹녹하지 않다마는 본좌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본좌는 천재였으니까.

그것도 만고의 무공 천재.

흔히 무공 좀 쓴다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의 몸짓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빈틈은 또 어찌나 많은지.

암컷에게 구애하는 공작 꼬리처럼 화려하고 요란하기만 했지 도무지 실속이란 게 없었다.

본좌가 생각하는 무공은 세 가지만 알면 되었다.

숨쉬는 법, 때리는 법, 휘두르는 법.

그거면 되었다.

아, 그래도 다섯 살 때까지는 조금 고생하긴 했다.

아무리 본좌라 해도 아해일때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니까.

처음 살인을 한 것은 여덟 살 때였다.

계기는 사소했다.

본좌에게 가끔 먹을 것을 주던 늙은 기생을 흑혈방이라는 사파 놈이 술에 취해서 때려죽여 버린 것이다.

아무리 노류장화의 목숨이 가볍다 하나 너무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래서 본좌도 그놈의 목을 따주었다.

낑낑거리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개새끼의 말 따위 들을 게 뭔가?

그런데 그놈이 제법 흑혈방에서 지위가 있는 놈이었는지, 사파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

아직 어리고 쪽수에서도 밀리니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했다.

그러기를 몇 년.

본좌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흑혈방은 세상에 없었다.

놈들을 한 놈 두 놈 패 죽이다 보니 무공도 세지고, 죽은 놈들이 남긴 돈과 영약 덕분에 먹고 사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아주 좋은 나쁜 놈들이었다.

무림은 영웅 소협이 나왔다고 본좌를 칭송했다.

하지만, 열 다섯 살 때 태산북두라 으스대던 소림사 땡중이랑 무당파 말코 놈들을 멸문시키고 나서는 그 소리가 마두로 바뀌었다.

뭐 이후에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루하니 넘어가고.

아무튼, 본좌가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이 몸을 천하제일고수라 불렀다.

서른 살 때는 고금제일고수.

그리고 불혹이 되어서는 그저 천마.

그때쯤 돼서는 싸울만한 놈도 없고, 사는 게 너무 지루해서 본좌도 제자라는 걸 키워보기로 했다.

그래서 대충 고아 몇 놈을 주워와서 키워봤는데, 자질이 욕 나오게 형편없었다.

이러다가는 내가 울화통이 터져 죽을 것 같아서 몇 년 키우다 내쳤다.

그런데 이 놈들 중 대사형이란 놈이 무공 재능은 없지만, 문파 운영에는 소질이 있었는지 불과 10년 만에 문도가 무려 10만이 넘는 대문파를 세운 게 아닌가?

게다가 스승님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겠다고 낯간지럽게 문파 이름을 천마신교라고 지었다.

정말 개지랄이 아닐 수 없었다.

확 뒤집어엎으려다가 그래도 몇 년 키운 정이 있어 참았다.

본좌는 이게 문제였다.

크으, 본좌는 정이 너무 많다.

본좌에게 처맞은 놈들은 기겁하며 그 말을 부정하려 하겠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

간혹 어떤 놈들은 영웅은 무정해야 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하지만, 그건 약한 놈들이 내뱉는 헛소리다.

본좌 정도 되면 정을 좀 뿌려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크크크.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모두가 잠들었을 야심한 축(丑)시.

은주국의 황실.

대륙을 지배하는 만인지상의 황제가 기거하는 곳.

"오랜만입니다. 사부님."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단아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놈, 아니 년이 그 황제다.

"사부는 개뿔, 겨우 삼초 밖에 못 배운 머저리가."

"그래도 한번 사부님은 영원한 사부님이십니다."

"······크흠, 제법 곤룡포가 어울리게 되었구나."

"다 스승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황제가 달 같은 청초한 미소로 내게 답했다.

무공 재능은 형편없지만, 미모만을 논한다면 천하제일이라 칭할만한 실력을 가졌다.

물론 본좌는 저게 누런 코를 질질 흘리던, 코찔찔이 때부터 알아서 별 감흥이 없지만.

아까도 언급했지만, 본좌는 과거 제자를 키운 적이 있었다.

그날도 쓸 만한 놈이 없나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웬 병사들에게 쫓기고 있는 피투성이인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품에는 한 살 정도 되보이는 아기가 안겨 있었다.

두 번 생각 안 하고 병사들을 쳐 죽였다.

뭐 본좌 정도 되면 생각 안 하고 쳐 죽여도 된다.

하지만 여인은 너무 부상이 심한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뭐 알고 보니 여인은 반란을 피해 도망친 황궁의 시녀였고, 그 아기는 죽은 황제가 남긴 유일한 적통이었다는 별거 아닌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어린 핏덩어리를 죽이겠다고, 새로 황제가 된 놈이 암살자들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이치고.

아까도 말했듯이 본좌는 정이 많은 사내다.

그렇게 몰려오는 놈들을 계속 쳐 죽이다 짜증이 나서 그 대가리인 새 황제 놈도 쳐 죽이다 보니, 어느 날 본좌가 업어 키운 막내 제자가 황제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왜 이리 죽상이냐?"

그나마 키운 제자 중에서는 제일 정이 가는 놈인지라 간만에 얼굴이나 볼까 왔건만, 애 얼굴이 반쪽인게 아닌가?

"왜? 어느 시부럴 잡놈이 또 널 괴롭히더냐? 크큭, 본좌에게 말하라! 다른 나라의 왕이든 요괴든 그놈의 목을 당장 비틀어주마!"

"그, 그게 아니오라."

황제가 주저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불길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늘을 찢고 내려온 거악(巨惡)이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는 악몽······. 그리고, 꿈의 끝에는 언제나 그 섬뜩하고 악의로 가득한 목소리가 제 귓가에 음산하게 속삭입니다.

'황제여, 영광스럽게 여겨라. 위대한 신인 내가 너를 선택했노라.' 하고. 마치 제 영혼이 송두리째 뽑혀가는 그 끔직한 목소리를 떠올리면 저는 너무나, 너무나 두렵습니다."

"개꿈이다. 쯧쯧, 만인지상의 황제란 놈이 이리 나약해 빠져서야. 쪽팔리게 어디 가서 본좌에게 무공을 배웠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황제가 기가 죽은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음, 본좌가 말이 좀 심했나?

"크흠, 만에 하나 그 개꿈이 사실이라도 무엇이 걱정이냐!"

책상에 있는 붓 하나를 집어 든 본좌는 황제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은 마침 수심 어린 황제의 얼굴처럼 한가득 낀 검은 구름이 달과 별을 가리고 있었다.

스윽.

붓을 쥔 본좌의 손이 허허롭게 가벼이 밤하늘을 그었다.

콰콰콰콰콰!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구름을 지우고 밤하늘에 天魔 가 새겨져 있었다.

"본좌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니라. 보아라, 본좌가 네 앞에 있거늘 아직도 그런 개꿈 따위가 두렵더냐?"

천마의 글씨 사이로 쏟아지는 달과 별빛이 황제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아니요. 두렵지 않습니다. 사부··· 아니, 아버님."

"커흐음!"

본좌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그들의 세계에 파괴신이 강림했다.

그리고 황제는.

***

['눈먼 신의 눈' 고유 권능으로 '천마'를 보았습니다.]

스륵.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낯이 익었다.

천마신교라 불렸던 문파의 교주와 10만 신도들의 시체.

그리고 황제가 있었다.

파괴신의 사도이자, 천마가 자신의 손으로 심장을 뽑아버린 그의 사랑스러운 딸이.

"어서 꿇지 못하겠느냐!"

천마가 다시 한번 내게 사자후(獅子吼)를 내질렀다.

"헉! 헉!"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가 있는 시체 산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있는 노인, 천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가 감히 어르신을 소유할 자격은 없습니다. 하지만."

내 눈은 이미 천마의 본질을 보았다.

그는 복수를 위해 무려 수천 년 동안 자신을 써줄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제게 힘을 빌려주세요! 저도 과거의 당신처럼 지키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당신의 눈에는 제가 눈에 차지 않겠지만, 만약 제게 힘을 빌려주신다면 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만은 반드시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언젠가 당신으로 반드시 그 파괴신 개새끼에게 한칼 먹이겠습니다!"

천마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두근!

동시에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산을 씹는 거신'이 내게 전해준 신력이 반응했다.

"거신이여, 그대가 보증한단 말인가? 정녕 이런 애송이를?"

한참 석상처럼 서 있던 천마가 결심한 듯 잿빛 같은 입술을 열었다.

"···알겠다. 그렇다면 나도 너를 믿어 보겠다. 어린 신아."

천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본좌를 뽑아라!"

나는 그의 말대로 그의 손을 움켜잡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츠츠츠츠!

그러자 내 손에서 검신, 아니 천마가 눈부신 혈광을 뿜으며 빛났다.

띠링!

내가 현실로 돌아옴과 동시에 갓메이커가 반응했다.

['천마(天魔)'가 당신을 주인이자 신으로 인정했습니다.]

[천마가 유일신의 신도가 되었습니다.]

[천마는 지금은 영락했지만, 한때 인간으로서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강한 신도입니다.

선신 하급신 승급 퀘스트 조건을 만족합니다!]

<선신 하급신 승급 퀘스트 진행 중······.>

신도 : 50,212,321/1,000,000,000

초월의 가능성이 있는, S급 이상의 지적 생명체 신도 수 : 10(8+2)/ 10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유일신'께서 선신 하급신으로 승급합니다.]

번쩍!

악신 하급신 승급 때의 패도적인 어둠과는 대조적인 성스러운 백광이 내 안에서 솟구쳤다.

선신 하급신 승급은 의외의 수확이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으으윽!"

으득! 으드득!

서로 대조적인 악신과 선신의 신력이 섞이지 않고 몸 안을 날뛰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들끓었다.

[신께서 내려주신 내 몸을 부수다니 절대 용서 못한다! 모두 다 타죽어라! 하찮은 신과 그놈을 섬기는 벌레들아!]

콰아아아아!

그 와중에 나와 가야미국 백성들을 향해 낙하하는 지름이 10km가 넘는, 거대한 태양의 화신.

저것을 대체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절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천마가 말했다.

-본좌는 아직 완전한 기억과 무공을 되찾지는 못했다! 허나 그럼에도 본좌는 천마! 지금 심령이 연결된 너의 신도 중 하나, 검귀의 깨달음이 내 무공의 실마리 하나를 깨웠으니!

천마가 포효했다.

-어린 신아! 아니 본좌가 억겁 동안 기다려온 연자여! 본좌에게 네 신력을 다 쏟아부어 지옥 불을 깃들게 하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 천마의 말대로 했다.

"으아아! [단죄하는 신의 중지]!"

콰아아아!

그러자 천마의 붉은 검신을 타고 여태까지의 내가 쓴 것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흑염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적어도 전과 비교해 백배는 될 것 같다.

-불을 끄는 방법 중 하나는 더 큰불을 일으켜 맞불을 놓는 것이니!

머릿속으로 검을 쥔 천마의 이미지가 전해진다.

나는 그 이미지대로 폭발할 듯 웅웅거리는 흑염의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크크큭! 이것이 팔열지옥 중 가장 끔찍한 대초열지옥을 본따 만든 본좌의 천마신검 제 2초!

나는 쏟아지는 태양의 사도를 향해.

-'천마대초열(天魔大焦熱)' 무간의 화검이니라!

지옥의 화검을 내리쳤다!

번쩍!

사도 구스타프의 유산

82.

크르르르!

내가 내리친 검신 천마에서 쏟아진 검은 불꽃이 하늘을 태우고 있는 사도의 미간을 꿰뚫었다.

하지만, 무려 지름이 10km가 넘는 사도에게 그것은 겨우 강에 떨어진 한 방울의 빗방울과 같은 것.

[크크, 지금 뭐 한거냐? 이것도 공격이라고 한 것인가? 참으로 하찮군!]

거대한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머리, 사도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크크, 아무리 발악해봐야 파멸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물론 이 대륙의 절반 정도는 잿더미로 만들어야 내 분노가 풀리리라!]

쩌어억!

콰콰콰콰!

사도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지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불꽃으로 집어삼키려 할 때.

내가 쥔 천마의 손잡이에 박혀 있는 눈동자가 가소롭다는 듯 호를 그었다.

-크큭, 이미 베었다. 불덩어리.

[뭐?]

-멸하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천마의 조소를 시작으로 사도의 미간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났다.

화르륵!

순간, 불꽃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콰아아아!

화르르륵!

흑염이 사도의 불꽃을 먹이 삼아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번져갔다.

점점 자신을 잠식해가는 정체불명의 불꽃에 불의 사도가 찢어질 듯 입을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히이이익! 이, 이게 뭐냐?!]

-크큭, 그것이야말로 8개의 팔열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의 최심층 대초열지옥, 무려 일만 육천년 동안 악업을 먹이 삼아 불타는 억겁의 불꽃 '천마대초열(天魔大焦熱)'이니라!

츠츠츠츠!

흑염은 이미 불의 사도의 거대한 몸을 3분의 2나 잠식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사도가 나를 향해 외쳤다.

[으아악! 그, 그만! 제발 이 끔찍한 불을 멈춰다오! 날 살려주면 내 형제이자 주인인 '가장 높은 창공에서 빛나는 불'께서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실 것이다!]

"일없어. 새끼야. 그런 말은 우리를 죽이려 하기 전에 했어야지."

나는 비명을 지르는 불의 사도를 향해 중지를 치켜들었다.

[끄아아아악! 시, 싫어어어!]

콰아아아아!

천마대초열의 흑염이 불의 사도가 내지르는 단말마와 함께 그를 일식처럼 완전히 집어삼켰다.

꿀꺽!

스스스!

사도를 삼킨 천마대초열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러자 갓메이커의 세계 '앤트라니아'의 하늘에 눈부신 푸른 하늘이 돌아왔다.

"와아아! 유일신님께서 승리하셨다!"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를 지독한 사악한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셨어!"

"오오, 우리의 위대한 신을 찬양하라!"

"유일신님이야말로 신 중 신이시다!"

사방에서 나를 찬양하는 가야미국 백성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후우."

나는 검신 천마를 땅에 꽃은 채 힘없이 주저앉았다.

개고생하긴 했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천억 마리의 벌레들과 사도들에게서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신력을 많이 소모한 탓일까?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며 눈이 감겨온다. 나뿐 아니라 검신 천마도 무리했는지, 검날에 잔금이 쩍쩍 가있었다.

"역시 유일신님이옵니다! 전 유일신님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나이다!"

나를 올려다보며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일호에게 주머니에 있는 앤티를 조심스레 건넸다.

"일호야, 그럼 뒤를 부탁한다······."

띠링!

[축하합니다! 유일신님. 성전(聖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전 대륙에 유일신의 명성이 널리 퍼집니다!

선신과 악신 [중급신 승급 퀘스트]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갓메이커의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띠링!

[유일신님이 현실로 귀환합니다.]

***

쿠릉! 번쩍! 쿠르릉!

전격을 몸에 두른 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한참을 유일신을 찾아 해매던 성미리는 옥상에서 그를 발견했다.

"앗, 선생님 찾았다!"

쿨, 쿨.

유일신은 곤히 자고 있었다.

햇볕을 쬐다가 그만 잠들어버린 걸까?

"헤헤."

성미리는 잠든 유일신을 내려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왜인지 몰라도 선생님을 보면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어디 뒹굴다 오셨나?'

유일신이 입고 있는 녹색 츄리닝이 땅이라도 구른 듯 엉망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영차, 이런 데서 주무시면 감기 걸려요. 선생님."

성미리가 조심스레 유일신을 품에 안고는 번쩍 들었다.

툭. 데구르.

그때, 유일신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와아아아!]

폰게임이라도 실행 중이었는지 화면에서는 이등신의 캐릭터들이 함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있었다.

성미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질렀다.

"와, 귀엽다."

게임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귀엽고 매력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백발의 삼등신의 소녀와 그 옆에서 포징을 하는 레고처럼 생긴 근육맨이 귀여웠다.

[근유우욱! 유일신님이 역시 최고입니다! 시바시바!]

[꺄아아, 사랑해요! 유일신님, 시바시바!]

성미리가 폰을 집어 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재밌어 보이는 게임을 하시네. 그런데 캐릭터들이 왜 선생님 욕을 하지?"

***

타닥! 타다닥!

나는 골방에서 열심히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유료 연재를 앞둔 와중에 내가 말도 없이 잠적을 하는 바람에 연재 게시판은 난리가 나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단 나와 가야미국 애들이 살고 봐야 했으니까.

사실 지금도 전투의 여파가 남아있어서인지 컨디션이 영 별로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쉬고 싶었지만.

<위대하신 담당놈>

-자까님~?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인 거 아시죠? 자까님 신작이 황금 베스트 1위라고는 해도 아직 겨우 무료라고요. 몇 년 전 1위하던 작가님이 휴재를 밥 먹듯 하는 바람에 연재 엎어지고 선수금 회수 문제로 출판사에서 소송당한 건 아시죠?

하하, 물론 우리 유일신 자까님께서 그럴 일은 없으실 거라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우리 자까님께서 10년 전, 제게 처음 원고를 가져왔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자까님은 정말로 천재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중략>

위대하신 담당 놈에게 받은 회유와 협박이 품격 있게 뒤섞여 있는 장문의 문자를 받아보니 절로 집필 의욕이 솟구쳤다.

뭐 통장 잔고가 바닥이기도 하고.

바닥이기만 하면 다행이지 대출까지 껴있다.

그놈의 제국 벌레 놈들을 상대하느라 들인 출혈이 너무나도 컸다.

게다가 그렇게 날려버린 내 전재산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더 슬펐지만.

"후우, 전송."

달칵!

마우스를 클릭해 완성한 원고를 달피아에 올렸다.

소설은 이제 2권 중반을 향하고 있다.

내가 얼떨결에 세컨문을 만든 이야기부터 일호가 용사의 탑을 오르고 내가 처음 검신을 사용해서 검귀를 제압하는 장면까지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내 현실을 각색한 '갓겜하는 갓작가님'의 소설에서 특히 가야미 애들의 파트가 인기가 좋았다.

하긴 우리 애들이 좀 멋있고 귀엽기는 하지.

주인공인 내 순위는 잘 쳐줘도 10위권 밖인 건 같아서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으아으!"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때.

드륵,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검날에 실금이 쩍쩍 가 있는 천마와 과거 나를 습격했던 사마귀에게서 뺏었던 단검이 놓여 있었다.

내 눈이 단검을 감정했다.

<대장군 카미키리의 신검>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의 신체 중 하나입니다.

특이사항 : 신검에 깃든 영령이 사라졌다.

분명 처음 내가 사마귀 카미키리를 쓰러뜨리고 신검을 손에 넣었을 때는 이 단검의 날에는 섬뜩한 혈광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단검은 그 빛을 잃고 그냥 평범한 단검이 되어 버렸다.

사실 그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제는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단검에 깃든 천마의 영령이 내 식칼에 깃들었으니까.

"천검씨. 언제까지 삐져 있을 거예요? 검신, 아니 천마님 수리 안 해줄 거에요?"

그러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께서 당신을 노려보며 도둑놈이라고 소리칩니다.]

천검은 심기가 좋지 않았다.

그가 '천검의 보고'까지 쓰며 회수하려 했던 천마의 영령이 내 신도가 되어 버렸으니까.

천검은 천마의 영령을 자신의 사도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워낙 꼬장꼬장한 양반이라 말을 듣지 않고 뻗대자 버릇을 고쳐줄 겸 기억을 빼앗아 검에 봉인하고 수천 년 동안 굴린 모양이다.

가끔 자신의 힘을 원하며 제물을 바치는 신도들에게 파견하는 방식으로.

참으로 수전노에 악덕 상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던 중 자신이 만든 천마신검을 접하고 기억 일부를 되찾고, 파괴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내 신도까지 돼 버리자 닭 쫓던 개가 돼 버린 천검 양반은 저렇게 삐져있는 상태다.

거참 애도 아니고.

"우리가 한번 보고 말 사이도 아니고 그만 화 풀고 천마님 수리나 좀 해주시죠? 수리비는 두둑하게 드릴게요."

그러자 천검이 냉큼 반응했다.

그는 과거보다 미래를 생각하는 진취적인 수전노였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께서 자신이 손해가 너무 크니 천마의 수리비는 50,000,000 갓코인은 받아야겠다고 합니다.]

"헐, 이 양반이? 그거 너무 비싸잖아!"

['모든 것을 베는 천검'께서 싫으면 말라고 배짱을 튕깁니다.]

하여간 귀신같은 양반이다.

현재 내게 남은 갓코인이 딱 오천만 갓코인 정도였으니까.

사실 이번에 천억 코인을 벌 기회가 있었지만, 그 망할 불 대가리 놈이 제물로 거의 다 삼켜버리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내가 얻은 갓코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께서 '천마'를 회수합니다.]

츠츠츠!

금이 쩍쩍 간 검신 천마를 새하얀 광채가 휘감았다.

손잡이에 달린 붉은 보석 눈동자가 사라지기 전에 날 노려보며 말했다.

-본좌가 없는 동안에도······ 단련을 잊지 마라. 그 빌어먹을 파괴신 놈에게 본좌로 한칼 먹이겠다는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되느니······.

"네, 천마님도 몸 아니 검조리 잘하세요."

-크큭, 얼빠진 놈 같으니.

스스슥!

천마가 광소를 흘리며 사라졌다.

파괴신 '???'.

천마의 수양딸인 황제를 타락 시켜 사도로 만들고 그의 세계를 멸망시킨 원흉.

그놈은 나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사도 요한과 얼마 전에 습격했던 악어 괴물 구스타프까지 놈의 사도였으니까.

"파괴신 그 새끼는 대체 정체가 뭐죠? 그놈의 목적이 뭐예요?"

산을 씹는 거신과 천마의 세계를 먹어 치운 것도 모자라, 지금은 내가 사는 지구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눈깔 괴물.

['영겁의 구도자'께서 분노한 얼굴로 태초부터 존재했던, 세계를 먹이로 삼는 폭식의 괴물이라고 합니다.]

['한없이 베푸는 풍요'께서 수심 어린 얼굴로 그 짐승에게 과연 목적 따위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힘없이 말합니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께서 당신은 자신이 지켜줄 테니 그딴 놈은 신경 쓰지 말라고 늠름하게 외칩니다.]

"그동안 보아하니 여러분들은 다들 한 끗발 하는 분들 같은데. 그럼 파괴신하고 비교하면 어떤가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갑갑함에 점퍼를 주섬주섬 입고 바람을 쐬러 갔다.

밤바람은 제법 싸늘해서 입김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였지만, 이제 나도 제법 강해진 탓인지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선신과 악신 승급 퀘스트를 모두 달성해 양진영의 하급신이 되었으니.

하지만, 그래도 파괴신을 떠올리면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천마에게서 파괴신은 먼저 자신이 노리는 세계에 자신이 부릴 사도를 만들고, 그 사도를 통해 이계의 게이트를 열어 강림하는 방식을 취한다고 들었다.

'일단은 사도들만 막으면 그 놈의 강림을 막을 수는······.'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노숙자형님]

최강산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집에 불이라도 난 듯 최강산이 급하게 외쳤다.

-너, 어디냐? 지금 당장 헌터 협회로 와라!

"네?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아프리카에서 얼마 전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악어 괴물 놈의 알이 무더기로 발견됐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헌터 협회에 강림한 유일신입니다.

83.

부르릉! 끼이익!

내가 탄 택시가 강남의 빌딩 앞에 멈춰 섰다.

'우와, 크긴 엄청나게 크네.'

대한민국의 가장 금싸라기 땅에 위치한 44층 높이의 이 빌딩 전체가 바로 헌터협회다.

빌딩 꼭대기의 전광판에는 한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S급 헌터들의 광고들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낯이 익었다.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유혹. S급 헌터 성미나도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챙기는 이것! 당신의 피부를 지켜 줄 단 하나의 선택!

에메랄드빛 머리칼의 소녀와 여인의 매력이 신비롭게 공존하는 미인이 눈을 꼭 감은 채, 반짝이는 미스트를 뿌리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는데.

"앗!"

그 화면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여인, 성미나가 날 향해 조르르 달려오더니 나를 덥석 껴안았다.

"헤헤, 왔어?"

누님이지만 나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미인이 날 초롱초롱 올려다보는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아, 안녕하세요. 학부형님."

하지만, 처음의 살기등등하던 본래의 모습을 떠올리면 미래가 조금 두렵다.

걱정이다.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날 죽이려고 하면 어쩌지?

분명 그 성격에 분명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

그래, 내 미래의 안정을 위해서 기억을 회복시키는 걸 조금 미뤄보자.

뒤이어 입구에서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맞았다.

"선생님, 오셨어요?"

"야! 연락한 지가 언젠데 이제 오나!"

"검신님을 뵙습니다!"

최강산 형님과 미리 씨, 그리고 검귀가 내게 다가왔다.

미리 씨는 검은 헬멧과 라텍스로 전신을 감싼 뇌제의 코스튬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저 복장도 오랜만이네.

뇌제에게 내가 빚진 목숨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강남이라 그런지 차가 좀 막혀서요."

"빨리 와! 협회장이 꼭 너를 보고 싶다고 했단 말이다!"

최강산이 억센 손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협회장이 왜 나를?'

아, 이번에 발견된 악어 괴물의 알 때문인가. 내가 놈을 쓰러뜨렸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다.

난 최강산에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뭐냐, 이건?"

"택시요금 영수증이요. 이거 비용처리··· 되겠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요즘 개털이라 한푼이 아쉽단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