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귀환 (5) >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각하?"
"괜찮다니까."
주교의 말에 요한은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거절했다. 그 뜻이 확실한 것 같자 다른 이들은 혹여 마음이라도 바뀔까봐 급히 말했다.
"백작님께서는 이미 충분한 공을 세우셨습니다. 부하들도 지쳐 있을 테니 휴식할 시간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맙군. 그대가 선봉에 서겠나?"
요한의 말에 귀족은 깜짝 놀랐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감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가문의 깃발과 함께 공을 세우겠습니다."
'아니.'
상대가 숨도 쉬지 않고 허겁지겁 말하자 이번에는 요한이 좀 당황했다.
농담 삼아서 한 말을 저렇게 진지하게 받을 줄이야?
다행히 요한을 도와준 건 다른 귀족들이었다. 그들도 상당히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백작께서 공을 세운 건 알지만 선봉을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지 않소."
"맞는 말입니다. 주교 예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무슨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다급한 모습들에, 요한은 여기 있는 귀족들이 꽤나 기대가 크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긴... 기껏 자기 군대들을 이끌고 왔으니 당연한 일인가.'
이 시대에 전쟁은 사업이었다. 수십 명을 끌고 온 기사, 수백 명을 끌고 온 귀족, 수천 명을 끌고 온 대영주 모두 똑같았다.
자기가 끌고 온 군세를 먹이고, 용병이 있다면 봉급을 지불하고, 전리품과 명성을 손에 넣어서 돌아가야 했다.
군세의 총지휘관이 어느 정도 대가를 지불해준다지만 사실 그것도 미뤄지고 빚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요한처럼 넉넉하게 휘하 영주들에게 금화를 뿌리는 경우는 오히려 드문 경우였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일단 금화 주머니를 쥔 이들에게 돈을 빌리고, 그 다음에는 이권을 팔든 쥐어짜든 해서 처리하는 게 보편적인 귀족의 방식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인근 자유시에서 온 도시귀족 출신 지휘관과, 교단의 영역에 있는 영주들. 전리품도 전리품이지만 더 탐이 나는 건 교단이 보장해주는 권리였다.
저 멀리 떨어진 신성 제국에서도 교단의 힘은 막강했다. 이 반도에서는 더더욱 강했다. 명분과 실리를 양 손에 쥐고 있는 교단은 이론상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금을 더 걷든 원하는 봉신의 영지를 뺏든 상인들에게 빌린 돈을 안 갚든 마음에 안 드는 자기 가족을 죽이든...
이런 모든 일들을 하고도 반발 없이 넘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교단의 힘이었다.
얻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힘이니 그 힘을 탐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공을 세워야 했다.
요한이 여러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남부의 황제파 귀족들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교단의 찬사를 받았듯이 말이다.
주교는 살짝 생각에 잠겼다가 겸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지휘의 경험이 많지 않으니, 백작 각하의 조언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
명목상의 총지휘관은 교단에서 나온 주교였다. 주교라고 해서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이들도 제법 됐다. 주교 또한 몇 번의 종군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믿음직한 오른팔이 있는데 굳이 자기가 지휘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주교는 요한의 조언을 아낌없이 들으려 했다.
'신뢰 받아서 나쁠 건 없는데 부담스럽군.'
총지휘관이 자기 말 안 들어주면 그게 문제였지, 말 잘 들어줘서 나쁠 것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좀 달랐다.
저 눈빛들을 보라!
무슨 전장에서 만나면 요한도 움찔하게 만들 정도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보는 눈만 없었다면 달려들어서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저런 간절한 눈빛들을 보고서도 그냥 선봉을 고를 수는 없는 법.
"...음. 그렇게 말한다면 다시 한 번 고민을 해봐야겠군."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태세를 재정비했다. 이번에는 요한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다.
* * *
카스틸로네 주교는 교단에서 기적파에 속하는 주교였다. 그는 젊었을 적 역병에 걸린 마을 사람들을 완쾌시킨 기적을 보여줬었다.
기적파 주교들이 대부분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긴 했다. 하지만 카스틸로네 주교는 특히 더 마음에 들어했다. 요한이 다치고 병든 용병들을 낫게 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건 기적과는 거리가 멀긴 한데.'
위생 신경 쓰고 용병들 관리한 걸로 기적이란 말을 들으면 아무리 요한이라도 좀 민망했다.
"백작 각하. 정말 나서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호위는 충분하니 움직이셔도 됩니다."
"나 한 명 없다고 해서 그리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주교는 체스판 위의 말을 옮기며 말했다.
선봉의 자리에 누가 서느냐의 치열한 싸움은 근처 자유시에서 온 지휘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요한이 도시귀족의 지휘력을 높게 사서...는 아니었고, 그저 그 자유시 쪽에서 요한의 직할령으로 오가는 교역량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쪽에서 배려해주면 저쪽에서도 나중에 은혜를 갚지 않겠는가. 이렇게 챙길 수 있을 때 챙겨 놓는 게 좋았다.
"백작 각하가 아니었다면 저 들은 벌써 이 앞까지 달려왔을 겁니다."
원래라면 바로 득달같이 달려와야 할 적들은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했는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마을들을 약탈하며 물자와 전리품을 채워 넣으려 들었다.
그걸 이쪽에서 가만히 두고 볼 리는 없으니 여럿이 출전하고...
그런 식으로 소규모 접전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수십에서 수백 정도의 규모였지만 절대 얕볼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만 싸우다가 점점 불리해진 쪽이 후퇴해서 끝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몇 천끼리 부딪히는 대규모 회전은 흔치 않았다.
'이대로 끝나도 나야 손해 볼 거 없지.'
애초에 요한의 목적은 현상 유지였다. 교황만 뺏기지 않으면 됐다. 적들이 후퇴할 때 뒤를 공격해서 전리품을 챙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덤인 것이다.
"보고를 들어보니 제국에서 온 기사들도 여럿이라고 합니다. 백작 각하. 제가 비록 성직(聖職)에 발을 디딘 몸이지만 기사의 명예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백작 각하께서도 겨루고 싶어 피가 끓어오르시겠지요."
"??"
요한은 들고 있던 말을 놓칠 뻔했다. 피가 끓기는커녕 아주 차가운 상태인데...
'어디서부터 시작된 오해야?'
하긴 미친놈처럼 이곳저곳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날뛰었으니 저런 오해를 받아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런 혈기를 참고 자리를 지켜주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분명 축복이 있을 겁니다."
"그렇군."
요한은 말을 마저 옮긴 뒤 수비를 탄탄하게 굳혔다. 그러던 도중 하인이 안으로 들어와 말을 전했다. 이젤리아가 부른다는 보고였다.
"이젤리아가? 기다리라고 전해라."
"예."
카스틸로네 주교의 표정이 가볍게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하인이 방해해서가 아니라, 이젤리아의 이름 때문이었다.
교단은 이젤리아를 그리 썩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실하기 그지없는 백작이 이젤리아와 관련해서는 고집을 피웠으니, 교단 입장에서는 이젤리아가 홀린 게 분명하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악한 마녀 같으니라고.'
"마저 둘 차례인데."
"아. 지금 두겠습니다."
* * *
정찰을 위해 돌아다니는 켄타우로스들을 제외하면 요한은 용병들을 밖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만이 쌓였나?'
이젤리아 성격에 다른 귀족 놈들은 다 말 타고 나가서 싸우는데 계속 안에만 박혀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을 법도 했다. 요한이 밤에 달래주고 있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으리라.
"아. 왔는가?"
이젤리아는 요한이 오자 반색하며 말했다. 딱히 불만 가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뭐야. 출전하게 해달라고 부른 게 아니었어?"
"...그대여.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이젤리아는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물론 그녀가 말 타고 달려 나가서 적장의 가슴팍을 창으로 꿰뚫는 것을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눈치 없이 출전하게 해달라고 징징댈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네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
"..."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로 불렀는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갖고 온 자가 있어서 전해주려고 불렀다."
이젤리아는 말을 전하면서 살짝 투덜거렸다. 요한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꽤나 기분 나빴던 모양이었다. 요한은 달래듯이 이젤리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말해봐라. 무슨 이야기를 갖고 온 거냐?"
"저는 백작 각하께 제 주인님의 명예로운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
네 주인이 누군데 왜 이런 식으로...?
"기사로서 명예로운 대우를 해주신다면, 검을 거꾸로 쥐고 각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싶다고..."
"..."
순간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요한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미사여구를 붙이긴 했지만 한마디로 항복하고 싶다는 것 아닌가!
'빠르군. 아니, 영리한 건가?'
계획이 꼬였다는 건 적들도 슬슬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도적떼들이 뒤에서 난리를 치고 있다면 이렇게 영주들이 굳건히 버틸 리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일이 꼬였을 때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목숨을 갈랐다. 저런 식으로 배신하는 기사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받아줄 생각인가?"
"안 받아줄 이유는 없지."
상대의 항복은 언제나 이쪽에 도움이 됐다. 게다가 기사 출신이라면 아는 것도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여. 좀 수상하지 않나? 기사라는 자가 저렇게 쉽게 항복한다니."
"제국 출신 기사들은 원래 좀 이리저리 붙고 그러긴 하는데..."
"..."
'하긴 이젤리아의 말도 일리가 있긴 해.'
바로 배신을 하는 것도 말이 됐고, 그게 아니어도 말이 됐다. 알아보기 위해서는 역시 결국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네 주인에게 전해라. 무장을 갖추고 진영 앞으로 홀로 온다면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아드비코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황제 측 사절에게 말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할 수 없다, 못 하겠다 같은 대답을 들으려고 내가 말을 꺼낸 거 같나? 어떻게든 해야 할 것 아닌가!"
사절들은 진땀을 흘렸다. 상황이 꼬이자 아드비코는 황제에게 더 많은 지원을 요청했다. 금화를 낼 테니 기사들을 더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제안이었고, 아드비코는 기사들 중 가장 뛰어나기로 이름 높은 카라마프가 여기에 와주기를 원했다.
본인의 초월적인 무력도 무력이지만, 카라마프쯤 되어야 여기 있는 기사들을 휘어잡고 지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황제 쪽 사절들은 '힘들 것 같다', '곤란하다' 같은 핑계만 대고서 말끝을 흐리고 있었으니...
"상황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군대를 물리면 당신들의 폐하도 곤란해지는 건 마찬가지야! 일을 이렇게 벌이고서 실패하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거라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라마프 경께서는 정말로..."
"무슨 빌어먹을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됐다! 꺼져라!"
아드비코는 잔을 집어 던졌다. 사절들은 기겁해서 천막 밖으로 도망쳤다.
아드비코는 씩씩대며 지도를 훑어보았다. 원래라면 더 빠르게 치고 가야 하는데 지금은 거의 발이 묶인 상태였다.
아직은 서로 별 영향이 없었지만 오래 끈다면 이쪽이 확실히 불리했다.
좀 더 확실하게 유리한 상태에서 싸우고 싶었는데, 이 상태로라도 한바탕 전면전을 벌여야 할까?
"아드비코님."
"뭐냐?"
"적진에 찾아간 하인 놈이 긍정적인 대답을 갖고 왔다고 합니다."
"그거 잘 됐구나!"
아드비코는 반색했다. 거짓 항복으로 상대방 쪽의 정보를 캐내려는 건 그의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교황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캐내야 했던 것이다. 그것만 할 수 있다면 복잡한 싸움은 필요 없었다.
원래라면 정말 제국에서 온 기사들이 맡아주면 좋겠지만, 제국 기사들이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해줄 리 없었다. 용병대장 중 한 명이 기사로 위장하고서 대신 나섰다.
"놈이 의심하기 전에 보내는 게 좋겠다. 가서 신뢰를 얻은 다음 정보를 보내도록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 흉내는 몇 번이고 해봤으니 말입니다."
용병은 씩 웃으며 말했다. 영지가 없거나 명성이 없는 한미한 가문이 수도 없이 많은 이상 들킬 걱정은 없었던 것이다.
< 197 귀환 (5) > 끝
< 198 귀환 (6) >
게다가 최근 제국에는 영지를 잃은 가문들도 많았다. 그런 이들을 핑계로 대면 위장은 더욱 수월해졌다.
"내 모습이 어떠냐?"
"아주 그럴듯하십니다."
기사 역할을 맡은 용병, 풀리에시는 직위는 고작 백인대장 정도였지만 남들에게는 없는 재주가 있었다. 변장과 위장에 재주가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영지 있는 남작을 사칭하거나, 마을에서 유명한 기사를 사칭하는 등 그 전적은 화려했다. 자칫하면 목이 매달릴 뻔한 경험을 몇 번이나 겪은 풀리에시는 이런 일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다른 백인대장 놈들은 이런 임무를 맡지 못하지. 하물며 배에 군살이 찐 기사 놈들은 더더욱. 아드비코 님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임무를 어떻게 맡을 수 있었겠느냐?"
"맞는 말씀이십니다!"
풀리에시의 말에 노예들이 맞장구를 쳤다. 휘하의 부하 용병들도 동의했다.
물론 아드비코 입장에서 풀리에시는 대체 가능한 한낱 말일 뿐이었다. 일단 정말 아끼는 부하라면 저런 위험한 자리로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용병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기회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려 도시의 권력자가 내민 줄 아닌가. 길을 떠돌며 노숙을 하고 은화 한 닢 때문에 서로 찌르고 죽이는 용병 입장에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근데, 예이츠 백작이 그리 대단한 기사라고 하던데..."
용병 중 한 명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요한의 명성은 산맥 너머 신성 제국에까지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용병들만큼 소문에 예민한 이들도 드물었고, 이번에 참전하는 이들은 대충 다 소문을 확인한 상태였다. 여러 소문이 부풀려지고 섞인 탓에 더더욱 꺼림칙했다.
"걱정할 거 없다. 그래봤자 애송이 아니냐. 내가 귀족 나으리를 몇 번 상대한 줄 알면서?"
풀리에시는 자신만만하게 출발했다. 그가 자신감에 찬 것도 당연했다.
요한이 가진 기사로서의 업적이 대단하긴 했지만, 풀리에시는 지금 요한과 검을 겨루러 가는 게 아닌 것이다.
적당히 꼬드겨서 신뢰를 얻은 다음 정보를 보내려고 하는 것이니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풀리에시는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공을 세웠으면 사람이 오만해져 있을 터. 귀족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 이들은 다루기 쉬웠다.
* * *
"..."
요한과 마주한 풀리에시는 본능적으로 얼어붙었다. 요한 옆에 앉아 있는 거대한 늑대가 그르렁거리며 풀리에시를 노려 본 것이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경."
"아... 아닙니다. 백작 각하. 항복을 받아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절차를 마치고 요한의 천막 앞으로 온 풀리에시는 무너지는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압박이 심했던 것이다.
예이츠 백작의 진영은 다른 귀족들의 진영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켄타우로스나 드워프들부터 시작해서 왠지 모를 이질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분위기의 정점은 요한 옆에 있는 늑대가 완성시켰다. 백작의 명 없이는 저 짐승이 덤벼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겁이 났다.
"앉도록. 술을 한 잔 따라주지."
"예... 감사합니다."
쟈니나는 장막 뒤에서 힐끗 쳐다보았다. 요한이 아는 얼굴일 경우 말하라고 대기시켜 놓은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얼굴이었다.
옆에 있던 수에틀그가 물었다.
"어떤가?"
"잘... 모르겠는데요."
"괜찮네.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
자리에 앉은 풀리에시는 조심스럽게 잔을 받았다. 평소에는 마실 수 없는 깊은 향을 가진 포도주가 안에서 찰랑거렸다.
원래라면 만나자마자 혓바닥을 놀리며 상대를 현혹시킬 생각이었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앞의 백작이 내뿜는 특유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늑대 때문인 줄 알았는데, 적응하고 나니 누가 그런 존재감을 내뿜는지 구분할 수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다행히 술이 들어가니 몸에 긴장이 좀 풀렸다. 풀리에시는 아드비코와 다른 귀족들을 욕하고, 원정대의 병사들을 욕하고, 제국에서 온 기사들을 욕했다.
요한은 틈틈이 원정대의 구성이나 이름 있는 기사들에 대해 물었다. 풀리에시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숨길만한 정보도 아니었을 뿐더러, 정말 중요한 정보는 애초에 일개 기사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됐다.
"경도 제국 출신인가?"
"예. 그렇습니다. 남부 토벌 때 휘말려서 제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만..."
요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풀리에시를 쳐다보았다. 풀리에시는 설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국에서 있었던 남부 반란 때 떠난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리라고는.
"저런. 운이 없었군. 누굴 섬기고 있었지?"
"지넨 남작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풀리에시는 막힘없이 말했다. 이런 부분은 이미 준비가 끝난 뒤였다. 남작은 실제로 제국 남서부에 있는 꽤나 유력한 귀족이었다. 편력기사들도 여럿 고용해 거느리고 있었으니 그들 중 한 명이라고 하기 좋았다.
"지넨 남작..."
"아시는 분입니까?"
"아니. 이름만 들어봤지."
사실 잘 알았다.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영주였으니까. 작은 마을 하나 갖고 있는 기사인 게센 경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그 정도 귀족은 가만히 있어도 이야기가 들려오기 마련이었다. 에이츠 가문의 아이들은 남작의 자식과 혼인해서 출세할 수 없을까 하는 헛된 꿈을 꾸곤 했다.
"남작의 숲이 사냥하기 그렇게 좋다던데."
"물론입니다. 저도 몇 번 들어갔었는데, 짐승들이 손을 덜 타서 그런지 도망도 잘 치지 않았습니다."
"그거 즐거웠겠군. 마을은 괜찮았나?"
"맥주 빚는 솜씨가 괜찮은 수도원이 하나 있어 즐거웠습니다."
풀리에시의 답변은 그럴듯하고 생생했다. 의심하고 있던 요한도 살짝 헷갈릴 정도로.
'내 직감이 틀렸나?'
풀리에시와 대화하면서 무언가 수상쩍은 감을 느낀 요한이었다. 확인하기 위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는데 상대는 잘도 대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잘못도 없는 기사를 심문하겠다고 고문할 수는 없고...
'좀 더 기다려보자.'
요한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사람인 이상 계속 말을 하다보면 한군데쯤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풀리에시는 젊은 백작이라고 요한을 무시했었지만, 정작 휘말리고 있는 건 그였다. 눈치 채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계속 풀리에시만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계획이었던 요한을 구슬리는 건 시작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남작이 창을 잘 다룬다던데 정말인가?"
"아. 그건 사실입니다. 백작님. 다른 부하들의 도움 없이 집채만한 놈을 사냥하신 적도 있지요."
"소문이 정말이었나보군."
"물론 백작님보다는 못하지만..."
"남작의 첫째는 활을 잘 다룬다던데, 그건 어떻지?"
남작의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풀리에시는 당황했다. 자식들의 특기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당황할 거 없었다. 요한의 질문에서 활로를 찾은 뒤 듣고 싶은 대답을 들려주면 됐다.
"밖에 날아가는 새 두 마리를 하나로 잡으시는 분입니다. 대단한 솜씨죠."
"그렇군."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게르돌프를 불렀다. 상황 파악이 덜 된 풀리에시는 영문을 몰라 의아해했다.
"여기는 게르돌프 경. 내 충직한 기사 중 한 명이네."
게르돌프는 뿌듯하다는 감정을 눈빛에 담았다. 풀리에시는 잘 되었다는 듯이 게르돌프에게 인사했다. 벌써부터 꽤나 친해진 기분이었다.
"반갑습니다. 게르돌프 경."
"게르돌프. 데리고 나가서 털어놓게 해라."
"...????"
풀리에시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요한은 냉정하게 말했다.
"남작의 첫째는 한쪽 손이 없다. 활솜씨는 무슨."
"...!!!!"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취기가 확 깼다. 풀리에시는 공포감보다도 백작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남작을 알고 있었다고??
그러면 아까 그렇게 던진 질문들은 설마...
"남작을 모른다고 하셨...?"
"거짓말을 너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
게르돌프는 풀리에시의 어깨를 붙잡고 느릿하게 말했다.
"따라와."
풀리에시는 무심코 몸부림쳤다. 습관적인 저항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게르돌프였다.
빡!
게르돌프는 무자비하게 풀리에시를 후려치고 두들겨 밟았다. 풀리에시는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게르돌프. 죽이지 마라. 협조하게 만들어야 할 테니까."
끌려 나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풀리에시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협조하겠다고 맹세했다.
* * *
"남작은 좌측을. 경은 우측을 맡도록."
요한이 지시를 내리자 귀족들은 기대감과 초조함, 그리고 경쟁심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들은 매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풀리에시가 첩자인 게 알려진 이상 그걸 역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한은 풀리에시를 통해 정보를 흘렸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 하나에 교단의 주교가 통행 중 잠시 머무를 거라고.
주교 한 명 잡는다고 전략적으로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지는 않았지만, 주교에게는 몸값이 있었다. 적들 중에 황금에 눈이 먼 이들이 제법 나올 것이다.
이런 일은 속도가 생명이니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고, 매복해서 타격을 입히기 좋았다.
'기사나 귀족들을 잡으면 그대로 몸값이지.'
본진에 머물고 있다지만 요한도 돈 욕심은 있었다. 몸값은 받을수록 좋았다. 게다가 적처럼 상황이 꼬인 상대는 이런 패배로도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운이 좋으면 예상 외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다른 이들도 만만찮게 눈이 돌아가 있다는 것이었다.
요한이 선봉을 양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운 이가 없었다. 그만저만한 전투를 그럭저럭 치렀을 뿐.
그런 상황에서 이런 매복은 탐나는 기회였다. 여기서 확실하게 전공을 세우고 전리품을 얻어야 했다.
"마을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놈들이 들어서면 한 번에 들이닥친다. 먼저 돌격하거나 늦게 돌격하는 일이 없도록. 알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작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작께서 말한 대로 하겠소.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이놈들 눈빛이 말 들을 눈빛이 아닌데?'
요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일개 기사로서 병사들을 데리고 다니던 때와는 달랐다. 이런 식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귀족들을 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한마디로 거칠게 말하자면...
더럽게 말 안 듣는 자들!
왕의 소집에도 제멋대로 돌격하고 덤비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하물며 자기 주군도 아닌 백작의 말이라면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완벽할 필요도 없고.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도 일단 들어선 순간 도망치지 못할 테니 말이야."
수에틀그는 귀족들의 저런 행동에 요한보다 훨씬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거야 그렇지만 짜증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 곳에서 온 군세를 지휘한다는 게 언제나 그런 법 아니겠나. 너무 마음 쓰지 말게."
수에틀그는 요한을 위로했다.
"성가시더라도 저들에게 기회를 준 건 잘한 짓이네. 지금이야 눈이 벌개져서 앞뒤 못 가리고 있지만, 전공을 세우고 나면 감사할 정신머리가 돌아올 터. 은혜에 감사할 걸세."
사람은 원래 배가 좀 불러야 감사를 표하기 마련이었다. 지금이야 자기네들 욕심에 눈이 벌게져 있었지만, 전공을 좀 세우고 나면 요한이 베풀어 준 기회에 새삼스레 감사할 정신이 생길 것이다. 본인들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판단에 동의했기 때문에 저놈들을 부르지 않았던가.
"중앙으로 이동한다. 출발해라!"
* * *
매복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수백은 되는 적들의 무리가 어둠을 틈타 마을에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숨어 있는 아군이 기쁨에 들썩이는 것 같았다.
-돌격하라! 돌격하라!
-적들을 놓치지 마라!!
'이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다음도 역시 예상대로였다. 적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자마자 요한의 명령 없이 돌격이 개시된 것이다. 좌측이 먼저 쏟아져 나오자 우측도 놓칠까봐 돌격을 시작했다.
질서정연한 포위 대신 난잡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병사들을 이끌고 접근한 요한은 혀를 찼다.
'괜히 들어가봤자 혼란스럽기만 하겠군.'
괜히 섞여서 아군끼리 싸우는 것보다는 상황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혼란스럽다지만 적보다는 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기습도 기습이지만 일단은 포위하고 있는 셈 아닌가.
이대로 적들이 무너져 내리면 추격이나...
"백작 각하! 백작 각하!"
"추격 허가를 받기 위해서 왔나?"
우측에서 전령이 급히 달려오자 요한은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보아하니 벌써 도망치는 이들이 꽤 보였던 것이다.
"도와주십시오!"
"...뭐?"
요한은 깜짝 놀라 다시 확인했다. 놀랍게도 도망치는 놈들은 아군이었다.
< 198 귀환 (6) > 끝
< 199 귀환 (7) >
'무슨 병신들도 아니고...?'
요한은 순간 황당함으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상황이 무슨 대낮에 서로 들판에 늘어서서 치고받는 전면전도 아니었다. 마을 밖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한 상황인 것이다.
당연히 상대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터.
그런데 그걸 못 이기고 도망치는 놈들이 나오다니?
"우익 쪽 기사들이 훈련이 덜 되었거나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다."
"한심하기 그지없군."
이젤리아와 수에틀그는 혀를 차긴 했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요한의 기준이 특이한 편이었다. 요한은 기본적으로 부하들에게 높은 수준의 훈련도와 잘 잡힌 규율을 원했다.
물론 병사들이 잘 훈련되어서 나쁠 건 없지만, 그런 건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보통 소집에 참가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용병들이거나 징집병이었다. 평소에 손발을 맞춰가며 훈련을 해야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돈 많은 대영주들이야 용병단들을 오래 거느리며 마치 사병처럼 훈련시킬 수 있었지만 여기 있는 영주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필요하지도 않은데 뭐하러 그런 낭비를 하겠는가.
서로에게 질서정연하게 싸우는 능력이 없다면 결국 싸움은 개개인의 무력, 즉 기사 같은 이들의 실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적들 중에 잘 싸우는 기사 몇 명만 있어도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적이 잘 싸우는 모양이군."
"더 내버려뒀다가는 아예 무너져 내리겠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요한은 도우러 나갈 준비를 했다. 우측이 뚫리면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상황. 공포는 전염되기 쉬웠다.
"켄타우로스들, 싸울 시간이다. 나를 따르라!"
요한의 부름에 기쁨 섞인 함성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 드디어 싸움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 * *
"물러서지 마라! 반도 놈들은 무기를 휘두르는 법도 모르는 겁쟁이 놈들이다! 맞아봤자 상처도 나지 않을 거다!"
"필릭스 경! 이쪽을 좀 지원해주시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소!"
"지금 가겠습니다! 버티고 있으십시오!"
신성 제국에서 온, 황제 휘하의 기사들은 마을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아드비코의 호언장담에 기꺼운 마음으로 마을에 들이닥쳤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갑작스러운 매복이었다.
노련한 기사들답게 그런 기습에도 잘 싸우고 있었지만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적들은 커다란 압박이었다. 어둠 속에 숨은 적들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가장 먼저 도망치기 시작한 놈들은 경험 적은 신참 용병들이었다.
"흩어지지 마라! 울타리를 끼고 진형 유지해! 도망치는 놈은 목을 베겠다!"
용병 중 몇 놈이 도망치려고 하자 기사가 나서서 단칼에 베어버렸다. 그제야 다른 놈들이 눈치를 보며 시선을 돌렸다.
"아드비코 이 멍청한 잡종놈이!"
"지원 요청은 보냈나!"
"보냈지만 한세월 걸릴 거요! 버텨야 합니다!"
"애비가 반푼이와 흘레붙어서 낳은 자식 같으니...!"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들켰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아드비코의 멱살을 잡겠다고 다짐하며, 기사들은 무기를 들어올렸다.
"형제들이여! 오늘 같은 위기가 처음도 아닐 뿐더러 마지막도 아닐 것이오. 검을 들고 영광을 쟁취합시다!"
포위당한 제국 기사들은 짐승처럼 날뛰었다. 그 기세에 매복하고 있던 이들이 밀릴 정도였다. 용병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병사들이 급히 달려가 보고했다.
"저기 제국 기사 놈들이 있습니다!"
"놈들이 심하게 날뛰는군! 자네가 가서 실력을 보여주게!"
"예!"
남작 쪽에서도 기사가 나섰지만 제국 기사들의 협공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남작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
그러자 제국 쪽 기세가 더욱 치솟았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상대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자, 매복하고 있던 용병들 중 몇몇이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회다! 놈들이 흔들린다! 덤벼들어!"
"이, 이런 병신 같은 놈들이...! 돌아오게 해라!"
"저기 적 지휘관이다! 적 지휘관을 쓰러뜨려!"
용병들의 수준은 비슷했지만 제국 기사들은 매복하고 있던 기사들보다 훨씬 더 노련했다. 황제를 따라 돌아다니며 전장에서 싸운 경험이 많았던 것이다.
누가 누군지 파악도 안 되는 이런 상황에서 지휘관을 노리는 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저 놈을 잡으면 길이 열린다! 잡아라! 저 귀족을 잡는 용병에게는 몸값의 절반을 포상으로 내리겠다!"
"남작님을 지켜라! 물러서지 마라!"
서로 덤벼들었지만 기세는 제국 기사들에게 있었다. 남작은 당황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주변에 병사들이 많은데다가 어둡기까지 해서 빠져나가기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너도 명예를 아는 귀족이라면 당당하게 승부하자!"
제국 기사가 그렇게 외쳤지만 남작은 귓등으로 흘렸다. 저쪽 좋은 일을 뭐하러 해준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도망칠 만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아까 말에서 내린 다음 병사들 사이에 끼어서 도망쳤으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정말 항복해야 하나 싶어서 앞이 캄캄할 때, 뒤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
다시 한 번 들리는 나팔소리. 동시에 땅을 울리는 말발굽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뚫고, 요한이 이끄는 기병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컥!"
"큭!"
싸우던 용병들 중 몇몇이 갑자기 목과 얼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날아오는 화살이 짧고 빨라서 보지도 못하고 당한 것이다.
"적들이 더 몰려왔다!"
"겁먹을 거 없다! 어차피 이런 지형에서는 숫자가 많아도 동시에 들이닥치지 못해! 진형을 유지해라!"
그러나 제국 기사들의 호언장담과 달리, 요한의 군세는 날카로운 창끝처럼 진형을 무너뜨리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자 제국 기사들은 상황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적 기사 놈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 놈을 상대해야 해!"
"아네앗 경, 따라오시오! 같이 놈을 쓰러뜨립시다!"
제국 기사들은 남작을 노리던 걸 멈추고 요한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받고 번쩍이는 요한을 보며 외쳤다.
"명예로운 기사라면 가문을 밝혀라!"
"예이츠 가문의 요한."
말과 함께 요한은 검을 휘둘렀다. 아네앗 경이라고 불린 기사는 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투구 위로 공격이 스쳐지나갔다.
"!??"
아네앗 경은 눈앞이 흔들리고 균형을 잡을 수가 없어 그대로 쓰러졌다.
옆에서 보고 있던 기사들에게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저 공격으로 어째서 쓰러진단 말인가?
요한은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들이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관들인 모양이었다.
"항복해라. 항복한다면 관습에 따른 명예로운 대우를 약속하겠다."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는 포위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항복을 고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용병대장이었다면 당연히 항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좀 달랐다. 겁이 없어서거나, 혹은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 그도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몸값과 관습 때문에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창칼에 맞고 낙마한 다음 붙잡히기 전에는 쉽게 항복하지 않는 것이다.
"항복을 원한다면 직접 가져가봐라!"
"그러시겠지."
요한도 예상했는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에랑스의 엘프들이 특히 심한 거였지 제국 기사들도 그리 교양 있는 상식인은 아니었다.
"이젤리아. 오른쪽 놈을 맡아줘."
"알겠다."
이젤리아는 창을 꼬나 쥐고 옆으로 말을 몰았다. 엘프 기사들의 강력함은 제국에서도 유명했지만, 여기 있는 기사들은 이젤리아가 아닌 요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놈에게 무엇인가 있다!
"쉔코티 경. 조심하십시오. 아네앗 경이 쓰러진 걸 보니 특이한 마법을 부리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네. 조심하도록 하지."
기사라고 언제나 정정당당한 수법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었다. 검에 독을 바르기도 하고, 사악한 마법에 자신의 긍지를 팔기도 했다. 제국 기사들은 요한의 검에 사악한 마법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내가 먼저 가도록 하지!"
쉔코티 경의 검술은 제국 내에서도 견실하고 빈틈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찌나 단단했는지 그를 상대하는 기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초조해져서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그런 쉔코티 경이라면 적이 마법검을 갖고 있더라도 어느 정도 버티면서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바버하 가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한이 번개처럼 들이닥쳤다. 생각치도 못하는 속도로 덤벼오는 요한의 공격에 쉔코티 경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오랜 전투로 단련된 몸은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쉔코티 경은 허리를 뒤로 젖혀 첫 번째 공격을 피해냈다.
'으윽!'
위로 들리는 소리가 실로 살벌해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쉔코티 경은 급히 검을 들어 요한을 견제하려 했다.
고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명검은 아니었지만 쉔코티 경의 검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괜찮은 명검이었다. 강철 안에 깃든 마법의 기운 덕분인지 검은 튼튼하고 질겼다.
하지만 아무리 검이 좋아봤자 쓰는 사람이 견디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견제하기 위해 휘둘러서 맞댄 검이 갑자기 통제를 벗어나자 쉔코티 경은 기겁해서 손을 놓았다.
'감이 좋군.'
만약 검을 잡고 있었다면 그대로 자기 검에 찍혀 죽었을 것이다. 빈손이 된 쉔코티 경은 옆으로 굴렀다. 보고 있던 기사들은 당황했다.
쉔코티 경마저 버티지 못하다니?
"백작 각하! 도와드리겠습니다!"
요한이 와서 주변을 밀어버린 덕분에 정신이 좀 돌아왔는지 남작이 외쳤다. 호위들도 다시 주변에 부르고, 기사들도 좀 데리고 와서 다시 싸울 채비를 갖춘 것이다.
"백작? ...예이츠 백작! 예이츠 백작이었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젤리아가 기사를 쓰러뜨렸다. 상대를 두고 한눈을 판 대가였다.
요한도 지지 않고 한 명을 더 노렸다. 필릭스 경이라고 불린 기사는 요한의 소문을 들어본 적 있는지 최대한 검을 맞대는 걸 피하고 주변을 빙빙 돌려고 했다.
요한은 워해머를 꺼내 집어 던졌다. 필릭스 경은 얼떨결에 막으려 했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항복하겠소. 백작! 백작과 겨뤄서 이길 자신이 없소."
주변에 있던 제국 기사들은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하고 칼을 내렸다. 실제로 맞서보니 숨이 막힐 정도로 강했다. 벌써 기사 셋이 쓰러져서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기사들이 항복하자 주변에서 싸우고 있던 용병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무기를 내렸다.
사실 상황을 보면 더 싸울 수 있긴 했다. 남은 병사들도 제법 됐고, 기사들도 여럿 남았으니 요한이야 잘 피하면서 포위망을 뚫고 나가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 기사들은 대결에서 패배한 이상 명예롭게 항복하기로 했다. 얼핏 어리석어보일지 몰라도 기사들에게 이런 관습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기사님! 지원이 오고 있습니다! 아드비코 님께서 지원을 보내셨으니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멀리서 전령이 달려와 외쳤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었다. 주변이 시끄럽고 계속 싸우는 이들이 많아, 기사들이 아직도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국 기사들은 황당함과 난감함이 섞인 표정으로 전령을 쳐다보았다.
지원을 올 거면 좀 빨리 와야지 다 항복한 다음에 이러면 어쩌란 말인가?
"설마 항복을 번복하지는 않겠지?"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소."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은 아쉬웠는지, 기사들은 말을 더듬었다.
* * *
지원 요청을 들은 아드비코는 깜짝 놀라서 병사들을 재촉했다. 혹시 몰라서 병사들을 준비시켜 놓은 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원정 나간 이들이 잡히면 몇 백 전멸하는 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 쪽 기사들이 대거 잡히는 것이다. 황제 쪽에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은 아드비코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용병들을 깨워서 움직이게 해라! 남은 기사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해라. 가능한 최대한 빨리 움직여라!"
어수선하고 정신없긴 해도 아드비코는 빠르게 병사들을 준비하는 데에 성공했다. 어둠 속에서 전군에 가까운 병력들이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아드비코를 포함해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서로 크게 부딪히게 될 줄은!
< 199 귀환 (7) > 끝
< 200 귀환 (8) >
다행히 요한에게는 대비할 시간이 있었다. 적의 전령이 와서 지원이 오고 있다고 말한 덕분이었다.
본대에 소식을 전할 사람을 보낸 뒤, 요한은 마을에 남은 적들을 몰아붙였다. 기사들까지 잡힌 이상 남은 이들은 별로 버티지 못했다. 빠르게 무너지고 도주가 시작되었다.
"실로 훌륭하십니다, 백작님! 오늘 이 승리는 오로지 백작님의 검으로 이뤄낸 겁니다."
몰려온 귀족들은 진심 어린 감사를 보냈다.
전투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눈이 벌게져 있었지만 전투가 얼추 마무리되자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병장기를 맞부딪혀가며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요한이 이끌고 들이닥친 건 알 수 있었다. 잘 버티던 적들을 그대로 무너뜨리고 들어왔는데, 그걸 모르려면 눈이 없어야 했다.
전공을 세우지 못한 건 아쉽지만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 상황. 그들은 요한이 적절한 지원을 끌고 온 것에 감사해했다.
물론 요한은 심드렁할 뿐이었다.
'너희들이 지랄만 안 했어도 훨씬 더 쉽게 이겼을 거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
하지만 요한은 참았다. 언제나 뒤통수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놈들을 참고 잘 대해주는 것이 요한의 재능이었다.
"경 같은 기사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혼자 이길 수 있었겠나? 경들의 공이 크다."
솔직히 말해서 매복하고 있던 기사들과 소영주들이 좀 더 제대로 했다면 포위망도 깔끔하게 굴러갔을 것이다.
차분하게 포위망을 갖춘 다음 화공을 가하고 흩어져 나오는 이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은 다음 기사들은 요한이 직접 나서서 요격하면 그냥 도망치는 놈들도 없이 다 잡았을 텐데...
수에틀그가 헛기침을 했다. 표정을 보니 요한이 분노해서 욕설이라도 퍼부을까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냉정합니다."
"그런가? 다행이네. 아무리 화나도 모욕은 하지 말게. 해서 좋을 거 없으니까."
아직 자리 잡은 지 오래되지 않아 조금 불안정한 감은 없잖아 있지만, 요한은 남부의 맹주나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항구도시들을 직할령으로 삼고, 영지 대부분의 봉신들이 충성하고 있는데다가, 최근 전투들로 인해 금고마저 풍족했다.
거기에 교단이나 공화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중부나 북부의 영주들이나 자유시 귀족들은 요한이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요한 본인이야 반도를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겠다는 야심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야 요한의 진심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요한은 스물 남짓한 나이에 검 하나로 남부 영지를 손에 넣은 야심가 그 자체였다.
그런 상황이니 괜히 귀족들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적대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요한도 그걸 잘 알았기에 저들이 저렇게 주는 것도 못 받아먹고 일을 망쳐도 계속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었고.
'그냥 시비나 붙었으면 좋겠군.'
포위 하나 제대로 못 한 귀족들 중에 건방 떠는 놈이 있으면 본보기 삼아서 밟아버리려고 했는데, 그런 멍청한 놈은 나오지 않았다.
답답하다!
그러는 사이 이젤리아가 잔당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이젤리아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뭔가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요한은 직감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젤리아. 고생했어. 자. 이리 와."
"어? 그대여. 저들에게 말할 게 있..."
"그래그래. 고생했다고 말하려고 한 거겠지. 경들. 여기 블루아 가문의 이젤리아가 경들의 공을 치하하고 싶다고 하는군."
"아니, 그러려고 한 게 아닌...?"
요한은 이젤리아의 말을 끊어버리고 입을 막았다. 기사들은 감사하다는 듯이 인사했다. 그들은 이젤리아가 칭찬해주자 꽤나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보통 엘프 기사들은 거만하고 오만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반도 쪽 기사들을 칭찬하는 일이 드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는 기사들을 절대 칭찬하지 않았다.
"경들은 말 위에서 싸울 때도, 말에서 내려서 싸울 때도 용맹하고 적보다 더 작은 방패와 짧은 칼을 들었을 때도 물러서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는군."
"읍?"
"하하... 그런 말을 듣다니 부끄럽습니다."
"블루아 가문의 이젤리아 공께서는 관대하고 너그러우시군요."
예상치 못한 칭찬을 받으면 누구나 기뻐하기 마련. 기사들은 이젤리아의 칭찬에 감동했다.
요한 같은 기사가 왜 저렇게 키가 크고 풍만한 엘프와 결혼을 했나 의아했었는데, 아무래도 저런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 때문이 분명했다.
엘프 기사들에게는 볼 수 없는 덕목이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물러나고 나자 이젤리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왜 막은 것인가?"
"이미 짐작이 가긴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음. 일단 경들은 그냥 검이 아닌 막대기를 들고 다니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래. 잘 막았군. 이젤리아. 앞으로 귀족들한테 말하기 전에는 나한테 한 번 물어보고 입을 열어줬으면 좋겠어."
"??? 알겠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한은 이젤리아가 새삼 엘프라는 걸 느꼈다.
"이젤리아도 엘프긴 하군요. 매번 살을 섞어서 잊고 있었는데..."
"적의 수급을 잘라서 선물로 주는데 그걸 잊고 있었나?"
수에틀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수에틀그가 보기에 이젤리아만큼 엘프다운 엘프도 드문 편이었다.
* * *
적 대군은 멀리서도 보였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는 탓에 불빛과 소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적들도 아마 기습을 가할 생각은 포기한 게 분명했다.
"후퇴할 준비를 해라. 굳이 마을을 두고 싸울 필요가 없으니."
요한은 물러설 생각이었다. 수비하는 입장에서 굳이 싸워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벽 끼고 버티면 괴로운 건 상대였지 요한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쪽에서 진형을 갖추고 전투에 나서는 아군 쪽 지원군들을 보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아니...?"
적들의 지원이 오고 있다고 보고를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고였지 지원 요청이 아니었다. 왜 저렇게 많이 몰려온단 말인가.
"저 자들이 왜 온단 말이냐?"
요한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그 살벌한 기운에 옆에 있던 기사는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방금까지 관대한 젊은 백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공... 공을 세우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적들이 오고 있으니 당연히..."
"..."
요한은 옆에 있는 기사에게 욕을 하려다 말았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 저러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 아마 저 기사는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적 대군이 저렇게 나온 이상 이쪽도 맞서 싸우기 위해 나서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다.
그렇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확실히 지금 사기나 전황을 보면 아군이 유리했으니까.
하지만 그냥 성벽을 끼고 버티면 더 유리하지 않을까??
'환장할 놈들 같으니.'
이미 들판에 나와서 진형을 갖추고 있는 이들을 후퇴시킬 수는 없었다. 요한은 한숨을 쉬고 전투 준비를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전투에 참가해 이길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우익인가.'
마을 쪽 병력이 우익. 중앙은 교단 쪽 병력. 좌익은 남아 있던 자유시 병력들이 주축이었다.
"백작. 백작."
"?"
항복한 제국 기사 중 한 명이 입을 열고 요한을 불렀다.
"백작이 보여준 명예에 대한 보답으로 한 가지 알려주겠소. 만약 싸우게 되면 크루거 경을 조심하시오."
"그 기사가 누구길래?"
"우리도 친분은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오. 하지만 폐하 밑에서 종군할 때부터 소문을 들었소."
요한이 사악한 마법과 계약한 게 아닌가 의심했던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보다 더 소문이 짙은 기사가 있었다. 그게 바로 크루거 경이었다.
"입에서 불이라도 뿜나?"
"그런 건 아니오."
"손에 닿은 걸 썩고 부스러지게 만드나?"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럼 뭐가 마법이라는 거냐?'
요한은 이번 전투가 끝나면 다른 귀족들과 연합해서 군대를 이끄는 일은 가능한 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름 인내심 강한 성격이라고 자부했는데 자꾸 성격이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붙잡힌 제국 기사들은 열심히 설명했다. 기묘한 검술을 쓰는데다가 그와 싸우게 된 기사들은 이상한 불운을 겪었다고 말이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요한은 한심하다는 듯이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말해줘서 고맙다. 상대하게 되면 조심하도록 하지."
"고마워 할 것 없소. 백작 같은 기사가 그런 불명예스러운 수단에 지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 말이오."
'나도 마법은 쓸 줄 알지만.'
사실 제국 기사들의 말만 들어보면 크루거 경보다는 황제 휘하의 마법사들이 더 신경 쓰였다. 아주 보잘것없는 마법이라도 쓰기에 따라 전황을 바꿀 수 있다는 건 이미 직접 겪지 않았던가.
"걱정하지 말게. 나도 있고, 또 자네도 마법에 조예가 있지 않나. 게다가 마법사가 이런 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없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수에틀그의 말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잠깐. 쟈니나는 계산에 안 넣으시나?'
* * *
전투는 양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딱히 전술적 이유 때문은 아니었고, 양익이 먼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진형 갖추고 전진을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각자 알아서 싸우는 식에 가까웠다. 복잡한 전술이고 뭐고 그런 거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아드비코 공. 아군의 숫자가 더 많으니 말이오."
"..."
황제가 보낸 마법사들의 말에도 아드비코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아군의 숫자가 좀 더 많다고 하더라도 이런 수천 명이 부딪히는 전장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한 번의 실수로 사기가 무너지고 도망치면 얼마든지 전투의 결과가 뒤집힐 수 있다는 걸, 아드비코는 잘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정예인 제국 기사 여럿이 밤에 매복을 당해 대패했다는 게 거슬렸다. 못마땅하긴 해도 여러모로 든든한 전력이었는데...
덕분에 아드비코는 숨겨 놨던 전력을 전부 동원했다. 그 중에는 황제가 보낸 마법사들이 갖고 온 몬스터들도 있었다.
"아직도 걱정이 되시오?"
"전투에 몬스터를 동원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내 명성이 더럽혀질 거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들킬 정도로 허술하지 않으니까."
마법사는 자신감이 넘쳤다.
사실 아드비코는 몰랐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마법사라고 불리기 부끄러울 정도로 실력이 떨어지긴 했다. 정말 뛰어난 마법사였다면 황제가 이리 많이 보내줄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몬스터를 부리는 데에는 상관이 없었다. 정해진 방법에 따라 먹이와 비약만 사용하면 됐으니까.
이들 중에 유일하게 마법사라고 불릴 만한 실력을 갖고 있는 우테르만이 입을 열었다.
"좌익은 우리 쪽 마법사들이 맡는다지만 우익은 공께서 잘 해주셔야 하오."
"공이 아닌 각하요."
"아. 미안하게 됐소. 각하."
우테르만은 말을 바꿨지만 아드비코 귀에는 영 거슬렸다. 비꼬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내가 부리는 정예들이 우익에 배치시켰소. 적들을 밀어붙이고 포위할 것이오."
"각하만 믿소."
우익에 무게를 두고 상대를 밀어버린 뒤 그 기세를 몰아 중앙과 왼쪽을 무너뜨린다.
평범한 전술이었지만 이것보다 더 복잡한 전술은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원래 전술은 이기면 그만이지 쓸데없는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파 마법사들의 계획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거리가 있는 그들은 몰랐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들의 좌익은 처참하게 박살나고 있는 중이었다.
* * *
말 탄 이들이 먼저 부딪히고 그 다음에 말에서 내린 이들이 부딪히는 건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말 탄 이들의 승부가 일방적으로 나면 그 뒤는 일방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을 근처에서 일어난 싸움이 바로 그랬다.
진형을 갖추고 접근한 메레느 시 군대는 요한이 이끄는 기병의 돌격에 맞섰다가 그대로 박살이 났다.
기사들이 먼저 무너지고 중장병들이 그 뒤로 무너졌다. 주변 병사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요한은 분노를 풀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사납게 파고들었다. 뒤에서 기회를 보고 있던 마법사들이 당황해서 손이 멈출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들을 호위하고 있던 용병대장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뭐라도 해보십시오, 마법사 님!"
"기, 기다려라. 지금... 지금 하고 있으니까. 지금..."
"빨리 하라고!! 이러다가 다 죽게 생겼어!"
그렇게 고분고분하던 용병들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만큼 앞에서 달려오는 기사가 무서웠던 것이다.
< 200 귀환 (8) > 끝
< 201 귀환 (9) >
"어... 아니..."
요한이 미친놈처럼 전열을 날려버리고 있긴 했지만 아직 거리는 제법 됐다. 냉정하게 본다면 아직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공포에 눈이 먼 이들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와 닿지 않았다. 게다가 겁을 먹은 건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용병 중 한 명이 칼을 겨눴다. 악에 받친 눈에는 핏발이 서있었다.
수에틀그나 카에네르나, 혹은 쟈니나 정도만 되었어도 기지를 발휘해서 뭔가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마법사들은 마법사라고 하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 우테르만이 가르쳐 준 것만 따라할 줄 아는, 제자나 하인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뭐라도 해달라고 난리를 쳐봤자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원래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오면 뭐라도 하게 되어 있었다. 그 결과 마법사들은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알, 알겠다! 비켜서라. 몬스터를 풀 테니까!"
호위하고 있던 용병들은 어디까지나 짐작하고만 있을 뿐, 마법사들이 뒤에서 뭘 다루고 있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몬스터를 다루는 것도 모자라서 그걸 전투에 투입하는 건 보통 역겨운 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뭐? 몬스터를 갖고 왔어?"
"이런 미친 마법사 새끼들..."
"지금 그게 중요하냐? 비켜서!"
용병들은 경악하면서도 일단 비켜섰다. 몬스터보다 더 무서운 건 지금 저 앞에서 오고 있는 기사들이었으니까.
철커덩, 철커덩-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천이 젖혀지고 철제 우리의 자물쇠가 풀렸다. 원래라면 전투의 혼란을 틈타 옆의 숲으로 이동해서 풀어줘야 할 놈들이었다.
뭐하러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해야 하나 싶겠지만, 결과는 같아도 과정이 달랐다.
용병 놈들은 잃을 게 없다지만 여기 낀 귀족들은 잃을 게 많은 것이다. 몬스터들을 부렸다는 소문에 엮여 들어가면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진 마법사들은 일단 우리를 열고 봤다. 안에서 트롤 한 마리와 늪지 드레이크 세 마리가 그르렁대며 걸어 나왔다.
기껏해야 고블린이나 포악한 괴물 멧돼지 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용병들은 기겁해서 뒷걸음질쳤다.
"이, 이런 시발... 뭐, 뭘 데리고 다니는 거야? 풀려나면 어쩌려고 이딴 지랄 같은 몬스터를 데리고 다녀??!"
앞에 있는 기사만 무서워하던 용병들도 제정신이 돌아올 정도였다.
다른 위험한 몬스터들과 달리 트롤은 용병들이 접할 일이 많은 위험한 몬스터였다. 소란을 일으킨 몬스터나 도적떼를 토벌하러 갔다가 갑작스레 만나게 되는 트롤은 악몽 그 자체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 반응은 격렬했다.
"너희들이 하라고 하지 않았냐!"
"내가 언제 트롤을 풀라고 했어! 미친 마법사 놈아!"
그들이 다투는 사이 요한은 옆에 있는 용병 셋을 박살내고 백인대장을 쓰러뜨려 그 깃발을 꺾었다.
'상황이...'
전장에 한 번이라도 뛰어든 사람이라면, 전장에서 지휘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온갖 곳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병사들은 소속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서 싸운다. 곳곳에서 깃발이 쓰러지고 북과 함성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무엇보다 본인에게도 창칼과 화살이 날아드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정신없이 싸우다보면 전체 상황은 어느새 까마득하게 멀리 잊혀져 있었다. 싸우던 부대가 명령을 잊고 멋대로 돌격하거나 추격에 돌입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기에 요한은 매 순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어찌 보면 싸우는 것보다 이게 더 힘들었지만, 요한에게는 축복을 받은 육체가 있었다.
"저 놈들 뭐하는 겁니까?!"
덕분에 가장 먼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요한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 뒤에서 웬 미친놈들이 몬스터를 풀고 있었다. 너무 당당해서 기가 막힐 정도였다.
'미쳤나?'
"일단 뒤로 물러서는 게 어떻겠나!"
수에틀그는 목에 힘을 주고 외쳤다. 상대가 뭔 생각을 하고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걸 상대해서 좋을 게 없었다.
일단 물러서야 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를 부리는 게 오래 가지는 못할 테니까.
설사 오래 가더라도 시간을 주면 약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 이 주변은 요한과 기병들의 돌격으로 적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한 차례 뒤로 물러서도 괜찮을 분위기였다.
그러나 요한은 망설였다.
"왜 그러나?!"
"이쪽을 최대한 빨리 무너뜨리고 다른 쪽으로 지원을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른 영주들과 연합해서 군대를 이끌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요한이었지만, 이제 감을 잡은 상태였다.
이런 전쟁은 능력 있는 놈이 손해 보는 구조였다. 아니, 그만큼 많이 보상을 얻으니 손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능력 있는 놈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는 건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영주들이 이끌고 온 군대는 생각보다 무질서하고 약했다.
그 결과 요한의 직감은 외치고 있었다. 남이 이겨주길 바라지 말고 요한이 직접 이겨야 한다고.
"물러선다고 무너지지는 않을 걸세!"
사기도 훈련도도 낮은 징집병들은 후퇴 명령 내렸다고 갑자기 와해되어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요한의 부하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들이 다시 재정비할 기회를 주게 됩니다."
"그건 그렇지만..."
상대하는 적들 입장에서 보면 요한이 무슨 악마와 계약한 두려움 없는 기사처럼 보이겠지만, 요한 본인은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요한도 잘못 날아온 창이나 화살 하나에 크게 다칠 수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어떻게 상대하느냐지.'
수백 명이 같이 죽자고 둘러싸고 일제히 달려들면 요한도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나하나 평범하게 쓰러뜨리면 안 됐다. 발악하는 용병들 여럿이 같이 죽자고 무기를 휘둘러대면 손발이 묶였다.
일단 먼저 진형을 무너뜨리고 겁에 질리게 만들어야 했다. 방패 든 용병도 가차 없이 때려눕히면 공포가 파도치듯이 전염되었다.
이런 싸움에서 창칼보다 중요한 게 공포였던 것이다.
그런데 재정비할 시간을 주면 이런 공포심이 사라졌다. 저들 사이에서도 대비할 방법이 나올 것이다.
가능하면 지금 몰아쳐서 무너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적들도 있는데 저 몬스터들까지 같이 상대하는 건 아무리 자네라도..."
"제가 나설 때 같군요."
쟈니나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과 수에틀그는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으로 쟈니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생각치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그 태도가 쟈니나를 더 어이없게 만들었다.
정말 진심으로 잊고 있었단 말인가??
"트롤을 길들여서 가두는 비술은 제가 황제에게 바친 거거든요??"
"아... 그랬었지."
"부... 부탁하네."
요한과 수에틀그는 매우 어색하게 말했다. 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 * *
"우익은 계획대로 잘 밀어붙이고 있답니다!"
"잘 됐군. 중앙의 병사들에도 전진 명령을 내립시다!"
우테르만이 재촉하자 아드비코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 재촉하지 마시오. 전진 명령을 내려라!"
병사들이 위압적인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적들이 긴장하는 게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우익 쪽에서 이기고 있다는 보고는 아드비코를 안심시켰다.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중앙을 같이 밀어붙이고 무너뜨리면...
"아드비코님!"
좌익 쪽에서 전령이 달려오자 아드비코는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 전령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좌익이 벌써 무너진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일이지?
"용병대장이 죽기라도 했느냐?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달려오느냐?"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
아드비코는 깜짝 놀랐다. 좌익 쪽이 우익에 비해 약하다지만 노련한 용병대장이 지휘를 맡고 있고 기사 여럿이 배치되어 있었다.
불운하게 화살이라도 급소에 맞은 것인가?
"알리게로가 쓰러졌다면 부관이 대신 지휘하고 있겠지?"
"부, 부관도 쓰러졌습니다."
"마법사 놈들은!? 마법사 놈들은!"
"몇, 몇몇은 붙잡힌 거 같고... 남은 자들은 도망쳤습니다."
아드비코와 우테르만의 입이 동시에 쩍 벌어졌다. 무슨 지휘를 술에 취해 한 게 아니라면 저렇게 빠르게 지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믿지 못해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그들도 알 수 있게 징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기사들, 무기를 던지고 숲 쪽으로 도망치는 용병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적 기병들!
"후퇴 명령! 후퇴 명령을 내리시오!"
"후퇴 명령을 내려라!"
자기가 뭐라도 된 것마냥 구는 우테르만에게 짜증을 낼 여유도 없었다. 아드비코는 허겁지겁 명령을 전달했다.
상황을 모르는 중앙 쪽 용병들은 적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최대한 빨리 후퇴하란 명령이 내려오자 당황스러워했다.
"지금 뒤로 물러서라고?"
"미친 거 아닌가?"
"십인장님. 정말 후퇴해야 합니까?"
적을 바로 앞에 두고 물러서는 건 아무리 용감한 용병이라도 쉽지 않았다. 몇몇 용병대는 물러서고, 몇몇 용병대는 명령을 무시했으며, 몇몇 용병대는 미적거렸다.
그렇게 중앙에 배치된 병사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적들을 뚫고 나온 요한은 절호의 먹이를 발견했다.
"잠깐, 저 놈 지휘관 아닌가?"
"맞는 것 같습니다!"
커다란 천막과 휘날리는 깃발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잘 차려 입은 작자들. 요한의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똑똑히 보였다.
요한이야 직접 검을 들고 기사들처럼 전장의 한가운데를 누비는 걸 선호했지만, 지휘관은 원래 저런 식으로 전열 뒤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명령을 내리기도 좋고, 상황을 파악하기도 좋고, 죽거나 다칠 위험도 훨씬 줄어들고...
이렇게 장점이 많았지만 한 가지 단점도 있었다.
바로 이렇게 적이 몰려올 때 주변에 병사들이 없다는 것!
"잡아라! 반드시 잡아라!!"
요한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 있는 용병들과 전사들은 눈을 부릅뜨고 아드비코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대어(大魚)라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얼핏 봐도 수백이 넘는 기병들이 살벌하게 달려들기 시작하자 아드비코는 상황이 꼬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드비코 공! 후퇴해야 하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무조건 붙잡혔다. 수십 정도 되는 호위들로 버티는 건 무리였다. 전진하던 용병들이 돌아오기 전에 전멸할 것이다.
아드비코는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탔다. 주변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말을 잡아탔다. 그들은 호위들에게 길을 막도록 명령한 뒤 미친듯이 말을 몰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전진하고 있던 용병들 중, 가장 후미에 있던 용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인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대장님. 어... 미친 소리 같습니다만, 지휘관께서 도망치시는 거 아닙니까?"
"무슨 미친 개소리를 하는 거냐? 대가리를 반쪽만 달고 태어난 놈도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진 않을..."
무심코 뒤를 돌아본 백인대장은 경악했다. 웬 못 보던 적들이 뒤를 폭풍처럼 휩쓸고 있었다.
* * *
"후퇴합시다!"
"너무 불명예스럽지 않소! 하더라도 조금 더 기다렸다가 해야 하오!"
한편 교단 군세의 좌익에서는 요한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을 만한 대화가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전투는 반대편에 비하면 매우 상식적이었다.
서로 말 탄 기사 수십이 나와서 얽히고 쓰러지고, 다시 진영으로 들어갔다가 말 갈아타고 나와서 얽히고 쓰러지고, 그러는 사이 말 안 탄 병사들은 점점 거리를 좁히면서 부딪치고...
누구처럼 돌격 한 번에 기사들을 무너뜨리고 전열을 갈아버리는 기사 같은 건 없는, 상식적인 전투였다.
이런 전투는 비교적 느리고 여유가 있었다. 귀족들이 상황을 봐가며 항복할지 안할지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나간 기사들도 쓰러지고, 용병들도 이쪽이 밀리는 거 같자 전투에 나선 귀족들의 용기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후퇴해서 몸값이라도 안 내려고 나서기 시작했다.
요한 휘하에서 복무하던 기사들은 분노해서 따졌다.
"백작 각하께서 여러분들의 비겁함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불리할 때는 물러서는 것도 용기요, 경."
"아직 팽팽하지 않습니까! 물러서면 안 됩니다!"
"팽팽하다니! 전장에서 수많은 이교도들을 상대해 본 내가 봤을 때, 지금 후퇴하지 않으면 위험하단 말이오! 갑자기 저들이 모래처럼 흩어지지도 않을 텐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팔소리가 불더니, 적들이 급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 201 귀환 (9) > 끝
< 202 도주하는 이들 (1) >
"..."
"..."
순간 귀족들이 모여 있는 천막에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까지 퇴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교도 전문가 귀족이 민망한 듯이 시선을 피했다.
종군 경험이 없는, 지휘에 대해 잘 모르는 귀족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유인하려는 것 아닌가?"
"어지간히 얼간이가 아닌 이상에서야 저렇게 유인하지는 않을 거요."
어느 귀족이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 말이 맞았다. 조금 기다리자 상대방은 발 빠르게 후퇴하고 있었다. 유인을 하려면 어느 정도 속도를 맞춰야 하는데, 상대는 챙겼던 전리품이나 물자도 버리고 내달렸다.
귀족들은 이 상황에 기뻐해야 할지, 민망해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 * *
아드비코와 제국에서 온 여러 놈들을 붙잡았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놈들은 한 발 먼저 도망쳤다.
요한은 아쉬웠지만 아드비코를 쫓아서 달려가진 않았다.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놈들의 뒤를 쳐라!"
중앙도, 왼쪽도 걱정이었다. 아드비코를 쫓아서 내달리다가 아군 진영이 무너지면 그것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었다.
전사들은 아쉬웠는지 연달아 고개를 돌려 아드비코가 도망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다른 놈들이 병신도 아닌데 설마 각하께서 없다고 바로 무너지겠습니까?"
"아니. 병신들이라고 가정해라."
"..."
요한의 말에 말을 몰고 있던 전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분노 섞인 진심이 느껴졌던 것이다.
요한의 통솔력이 약했다면 명령을 거절하고 달려 나가는 이들이 나왔겠지만, 그러기에는 요한이 내뿜는 존재감이 너무 대단했다.
전사들은 당황해서 흩어지기 시작한 적들의 중앙을 강타했다. 뒤에서 지휘관들이 도망간 걸 깨달은 적들은 힘없이 허물어지며 도망쳤다. 이런 혼란에서는 몇 배나 숫자가 더 많은 것 정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도망치는 놈들은 굳이 쫓지 마라! 전열을 유지해라! 남아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라!"
적의 중앙이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렸을 때쯤, 요한은 적들의 우익이 도망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행이군.'
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쪽에서 아군이 다 도망쳤다는 걸 깨달은 적들이 포위될까봐 서둘러 도망친 게 분명했다.
요한 입장에서는 차라리 나았다. 안 그래도 지금 몇 차례 격렬한 전투를 쉬지 않고 수행한 뒤였다. 이 상태에서 아직 쌩쌩한 적들과 맞붙고 싶지는 않았다.
이쪽이 포위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솔직히 아군 포위망이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것도 아니었고...
'구멍 숭숭 뚫린 그물 수준이지.'
"저 놈들이 도망을 치다니!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돌아와라 이 비겁한 겁쟁이들아!"
"..."
옆에서 지치지도 않고 분해하는 전사들을 본 요한은 어이가 없었다. 나름 정예인 고참 용병들도 지금 지쳐서 말 위에서 늘어져 있는데...
실제로 용병들은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전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긴 했군.'
요한은 묘한 통쾌감이 섞인 기분으로 전장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적들이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뒷모습은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물론 이번 연합은 '다시는 연합해서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요한의 속을 긁어 놓은 연합이었지만...
"고생했네. 이걸로 한동안은 잠잠하겠군. 뒷일이야 지금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남은 적들을 추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감히 교단에 칼을 들이댄 메레느 시에게 어떻게 보상을 요청할 것인가.
이건 요한이 지금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요한이 빨리 나서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중앙과 왼쪽이 무너졌으면 아무리 정예인 요한의 군세라도 후퇴부터 해야 했다.
"그래. 정말 운이 좋았지. 특히 쟈니나는..."
수에틀그의 말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쟈니나의 활약은 요한도, 수에틀그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쟈니나는 갑작스레 나타난 트롤과 늪지 드레이크를 광란 상태에 빠뜨렸다. 놈들은 이쪽으로 오기도 전에 적들 사이에서 날뛰기 시작했고, 그 효과는 대단했다.
요한은 반성했다. 쟈니나를 너무 무시해왔던 것이다. 어떤 재주든 간에 쓸 곳이 있기 마련인데...
"대단한 마법사였다. 앞으로는 좀 더 예의를 갖춰 대해야겠다."
이젤리아는 '음, 음'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쟈니나의 활약이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이젤리아."
둘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젤리아는 엘프다운 면모가 있어서 잘못 넘어가면 골치가 아파질 수 있었다.
"그럴 필요 없이 마땅한 포상을 내려주면 그녀도 만족할 걸세."
"그럴 생각입니다. 그런데..."
"?"
"상대를 보니 제국에서 온 마법사들 같던데, 그렇게 나서서 활약을 해도 됐던 겁니까?"
마법사들이 쟈니나를 못 알아봤으면 다행이었지만, 그 상황에서 못 알아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돌아가면 분명 쟈니나의 인상착의를 보고하리라.
"...뭐, 그녀는 이미 황제파에게서 원한을 사지 않았나. 거기에 조금 더해진다고 해봤자..."
"조금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자작 관련된 일을 망친 덕분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쟈니나였지만, 오늘 저지른 일은 그 차원이 달랐다.
쟈니나의 존재를 잊고 있던 귀족들도 오늘 일을 들으면 분노해서 암살자를 보낼 수준의 일 아닌가.
쟈니나는 아마 이런 상황을 모를 가능성이 컸다. 정치적인 시야나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아무래도 이 일은 말해줘야겠습니다."
"자네는 참 관대한 사람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대여."
'쟈니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지 않은데.'
* * *
군세를 거느리고 귀환한 요한을 맞이하기 위해, 카스틸로네 주교는 직접 호위들을 이끌고 요한의 막사로 찾아갔다.
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앙 쪽 진영에서는 요한의 돌격을 목격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요한이 가장 앞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하면 적들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분명 요한과 어깨를 맞대고 같이 싸우는 이들이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젊은 백작밖에 없을 정도였다.
젊은 백작의 무력을 과소평가하던 이들은 전투를 직접 목격하고 그 입을 다물었다.
중무장한 기사든, 헐벗은 징집병이든 요한의 검 앞에서는 평등했다.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적들은 쓰러져 내렸고 나중에 가면 아예 상대도 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주교는 준비해 온 성물로 손수 요한을 축복하며 그 전공을 치하했다.
"백작 각하. 백작 각하께서 교단을 위해 해주신 이 업적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은 공손하게 그 치하를 받아들였다. 주교를 따라 같이 온 귀족들은 조심스럽게 그 칭찬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찔리는 부분이 많았기에 훨씬 더 과장되게 칭찬에 참여했다.
병사들을 끌고 온 귀족들 각자에게 상당한 권리가 주어지는 만큼, 그 책임도 상당했다. 추태를 보인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정도로 귀족들은 관대하지 않았다.
당장 본인은 열심히 싸웠는데 다른 쪽을 맡은 귀족이 도망치면 분노가 치솟지 않겠는가.
이겨서 망정이었지, 졌다면 요한이 아무나 붙잡고 결투를 신청해도 주교는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딜 뻔뻔하게 끼어드는 건가! 내 다 들었다. 비겁하게 도망치려고 했다면서?"
"오, 오해요. 그건.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잠시 뒤로 물러나서 재정비를 하려고 했을 뿐..."
"겁쟁이나 하는 변명이다 그건!"
정작 화내야 하는 요한은 가만히 있었지만, 요한과 우측에서 함께했던 귀족들이 분노해서 비난을 터뜨렸다.
요한이야 잃을 게 많고 다독여야 하는 입장이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도 참았지만, 함께한 귀족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백작이 칼과 창과 망치로 적들을 베고 부수는 동안 당신들은 뭐하고 있었소! 나는 백작과 함께 가장 앞에서 싸웠소. 화살이 내 살갗을 뚫고 검이 얼굴을 스쳐지나가도 멈추지 않았단 말이오!"
그들은 감히 도망치려고 했던 좌측 쪽 귀족들을 맹비난했다. 그들은 당당했고, 명분 있는 자신감으로 넘쳤다. 상대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이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저런 뻔뻔한 놈들 같으니.'
매복도 제대로 못해서 추태를 보인 자들이 남들보고 못 싸웠다고 뭐라고 하니 요한 입장에서는 황당했다. 물론 그 뒤에는 병사들을 이끌고 열심히 싸우긴 했다지만...
솔직히 없었어도 별 차이가 없었을 것 같았다.
"말려야 하지 않나?"
요한은 슬쩍 주교에게 물었다. 아직 싸움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서로 저렇게 물고 뜯어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왜 말려야 합니까?"
"...!"
카스틸로네 주교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요한을 쳐다보았다.
주교라고 무작정 평화를 사랑하고 화해를 시키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물렁한 사람이라면 주교 자리에 오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싸움이 끝나지 않았으니 다툼을 말리는 것도 일리가 있는 판단이었지만, 주교는 그보다는 별 도움 안 된 비겁자들을 응징하는 게 더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주교가 나서는 게 아니라 다른 귀족들이 나서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요한은 이 자리에서 싸움을 말릴 수 있는 게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들 그만두게. 저들도 비겁한 마음으로 그러지는 않았을 테니. 함께 한 기사들에게 들어보니 이들도 꽤나 용감하게 싸웠다고 하더군."
"???"
요한 휘하의 기사들은 의아하다는 듯이 요한을 쳐다보았다.
분명 전투가 끝나자마자 쪼르르 찾아가서 '저 비겁한 작자들이! 각하께서는 싸우시는데!'하며 있었던 일을 다 말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용감하게 싸웠다니?
"각하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화를 내던 영주들도 요한이 말을 꺼내자 더 화를 내기 뭐했는지 머뭇거렸다. 가장 화를 내야 할 사람이 저러는데 그들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난 받던 귀족들은 진심 어린 감사의 눈빛을 요한에게 보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백 마디 인사나 금화로 가득 찬 선물보다, 이럴 때 베풀어 준 은혜가 깊게 남는 법이었다. 그들은 요한에게 속으로 깊게 감사했다.
'예이츠 백작. 고맙소! 이번 일은 잊지 않겠소.'
* * *
싸움이 얼추 마무리되자,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방금까지 싸웠던 이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오늘 있었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과 인질들도 상당했지만, 도망친 이들도 많았다. 아드비코나 그의 부관, 그리고 제국에서 온 기사들과 마법사 등등.
이들을 붙잡으면 막대한 몸값을 얻어낼 수 있었다.
원래라면 상당히 많은 병사들을 데리고 있어 도망치더라도 쉽게 쫓아가지 못했을 테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완전히 와해된 상태에서 몸만 빼서 도망친 수준인 것이다.
이 일대를 빠져나가기 전에 붙잡기만 하면 된다!
"맞는 말이오. 어서 추격대를 조직합시다!"
"백작 각하.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니."
요한은 단칼에 거절했다. 혼자 가서 잡으면 잡았지 이 사람 복장 뒤집어지게 만드는 귀족 놈들과 같이 가서 잡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각하께서는 남작을 걱정해주는 것 아니겠소. 각하의 말과 보조를 맞추려면 남작께서는 쓰러질 수도 있으니 말이오."
"이 작자들이..."
다른 귀족들이 고소하다는 듯이 말을 얹자 남작은 분노해서 노려보았다.
"좋소. 내가 반드시 그 도시 놈들을 잡아와서 당신 앞에 보여주겠소!"
"나도 가고 싶군. 주교 예하. 추격을 허락해주시겠지요?"
원래도 모래알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추격할 때도 비슷했다.
귀족들은 방금 있었던 앙금까지 섞여 경쟁심에 타올랐다. 말에 탈 수 있는 부하들을 데리고 있는 귀족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각자 추격에 나섰다.
"...백작 각하. 저희 가문에 혈통 좋은 말이 하나 있는데,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방금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걸 봤는데도 몇몇 영주들은 슬쩍 요한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적을 붙잡고 싶어서보다는, 요한과 보다 깊은 친분을 쌓고 싶어서였다.
< 202 도주하는 이들 (1) > 끝
< 203 도주하는 이들 (2) >
물론 요한은 거절했다.
"성주의 제안은 고마우나 나는 내 부하들과 함께 추격에 나서고 싶군."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상대는 아쉬웠지만 순순히 물러섰다. 요한의 이유에 납득한 것이다.
원래 이런 추격은 많은 숫자로 할 필요가 없었다. 추격대가 일정 숫자를 넘어가면 오히려 더 불리할 때가 많았다. 속도가 느려지는데다가 적이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도 도망치는 이상 잘게 쪼개져서 이동할 테니, 필요한 건 찾아내는 능력이었지 싸우는 능력이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예상 외로 숫자가 많으면 그냥 싸우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서 본대를 부르면 됐다.
보아하니 젊은 백작은 휘하의 기사들만 데리고 빠르게 추격에 나설 모양이었다. 동행을 강요하기는 힘들어보였다.
'추격을 상당히 진지하게 하시려는 모양이군. 전투도 그렇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승리를 거두고 찬양을 받았으면 사람이 느슨해지거나 할 법도 했는데,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나서려는 모습에 성주는 솔직히 감탄했다.
요한은 준비를 마치고 나서려는 이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 안 봐도 되니 다행이군.'
추격할 때마저도 같이 했다면 정말 누구 한 명을 활로 쏴버렸을 지도 몰랐다.
* * *
"여기 기사들이 사냥을 알고 추적을 알겠습니까?"
아클라다의 말에 다른 이들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 밑에서 복무하고 있는 고참 용병들이나 동부 전사들은 전부 다른 곳 출신이었고, 그에 걸맞게 자부심 또한 강했다.
이번 추격은 그들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용병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감히 입을 열 수 없는 지위였지만, 요한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십인장이든 남작이든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됐다.
"놈들은 지금 한시라도 급히 돌아가려고 하고 있을 겁니다. 사람을 풀어 가도를 막읍시다."
고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가도(街道)는 가장 잘 만들어진 길 중 하나였다.
도망치는 입장에서는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상당히 유혹처럼 느껴질 터.
이젤리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요한과 수에틀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는군."
"백작 각하의 말씀이 맞네. 적이 그 정도 생각은 할 걸세. 누구나 가장 먼저 가도로 쫓아올 텐데, 막을 병력도 없이 그런 짓을 하지는 않겠지."
아드비코가 몇몇 호위만 데리고 전장에서 이탈한 뒤, 나름 전장에서 무사히 이탈한 적 우익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미 상황이 글러먹었다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뭉쳐서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도주하는 기사들, 재산을 챙기고 도망치는 용병들... 자기 목숨 하나 챙기기도 바쁜 이런 상황에서는 아드비코의 명령이고 지휘고 통하지 않았다.
아드비코 본인도 당연히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리라.
"하루 이틀 거리면 가도를 따라 말을 전력으로 달려서 도망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메레느 시는 그렇게 가깝지 않고, 아드비코는 교단의 영역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네. 도움을 받기도 여의치 않을 거야."
말을 전력으로 몰아서 달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 주변에 말을 교환 받을 마을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주변은 교단의 영지거나 교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귀족의 영지. 설사 아드비코의 편을 들어줬다 하더라도 거지꼴로 나타난 아드비코를 보면 배신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건 모두 내 추측이네. 아드비코도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으니 가도를 따라 당당하게 돌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지."
"어차피 그런 경우라면 다른 자들이 먼저 잡지 않았겠습니까? 아닌 가능성에 걸어 봅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갔을 것 같습니까?"
요한의 말에 수에틀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른 귀족이었다면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지위가 아무리 높아져도 처음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나 같으면 용병이나 행상인으로 위장했을 거 같군."
"너무 나가신 거 아닙니까, 마법사님?"
"물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가장 좋은 방법 아닌가."
지금 도망치는 병사들이나, 종군하고 있던 행상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 중 하나인 척 하면 그리 의심 받지 않으리라.
이젤리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같으면 다른 귀족인 척을 할 것 같은데?'
엘프 기사는 어지간해서는 저런 책략을 쓰지 않았다. 종족 특유의 자존심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드비코는 엘프가 아니었고 그와 동행한 제국 인물들도 엘프가 아니었다. 위장해서 도망친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그럴듯했다.
"좋습니다. 위장했다고 치고... 그렇다면 이 자들을 어떻게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도망치는 쪽이 유리하지. 저렇게 숨어서 도망치면 소문도 기대하기 힘들고. 길을 앞질러서 들릴 만한 곳에 먼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자리에 있는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레느 시로 돌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였지만, 그 길들이 엇갈리는 곳에 위치한 마을들이 몇 개 있었다.
물론 그런 마을에 먼저 앞질러 가있는다 하더라도 운이 없으면 엇갈려서 놓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그 정도 불운은 얼마든지 감수할 생각이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무작정 상대의 흔적을 쫓아 내달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모든 일이 다 마음대로 될 수는 없는 법이니... 어느 정도는 마음을 비우고 쫓아야겠지.'
이미 전투에서 이긴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요한은 마음을 비우고 쫓기로 결정했다.
* * *
아드비코와 제국인들의 분위기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패배 때문이었다.
전투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병가지상사라지만, 보통 지더라도 이렇게 크게 지는 일은 흔치 않았다.
소규모 접전이 여러 번 오가고 불리해진 쪽이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는 게 일반적이지, 이런 식으로 군대 전체가 와해되어서 도망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도시로 돌아가서 상황을 수습하셔야 할 것 같소."
"..."
우테르만의 말에 아드비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도 없었다. 게다가 미우나 고우나 지금 일단 같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 아닌가.
하지만 도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딱히 방법이 나올지는 의문이었다.
끌고 나간 군대를 대부분 잃어버린 이상, 도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아드비코와 그의 가문을 쫓아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교단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우테르만 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
갑옷 위에 거친 천을 두르고, 말의 털을 일부러 더럽히고, 볼품없는 수레를 끌게 하며 걷는 모습에 기사들 사이에서 불평이 나왔다.
지금 그들은 행상인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들이 쫓아올 것을 대비해야지."
"놈들이 날개 달린 새도 아닌데 우리가 도망친 곳을 어떻게 쫓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 하지만 앞으로 들릴 마을에서 자네가 먹을 음식에 독을 타는 놈이 나올 수는 있겠지?"
"..."
우테르만의 말에 기사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성질이 괄괄한 기사 한 명이 납득하지 않고 따지고 들었다.
"농노 놈들이 미쳤다고 그러고 들겠습니까? 놈들이 덤비면 바로 베어버리겠습니다."
"메츠거 경. 그만하게."
"못하겠습니다. 전투에 패배한 것도 분통이 터지는 일인데 우테르만 님께서 자꾸 기사의 명예를 모욕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일행은 아드비코와 제국인들,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들이었다. 여기서 제국인들은 우테르만과 노예를 제외하면 전부 기사와 종자들.
이번 패배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 눈에는 좌측을 맡은 마법사들 탓이 컸던 것이다.
뭘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 빨리 무너지고 돌파 당한단 말인가. 가만히 서있기만 했어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다퉈서 좋을 게 없지 않나."
다른 기사들이 말렸지만 메츠거는 계속 떠들어댔다. 다른 기사가 우테르만의 눈치를 보며 대신 사과할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우테르만 님."
"이해하네. 기사인 이상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우테르만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메츠거를 불렀다.
"메츠거 경. 이리 오시오."
"...?"
메츠거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우테르만 앞에 섰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검어지더니 피를 토하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커헉, 커헉...!"
"!!"
우테르만은 웃음기 하나 없는, 조그맣고 검은 눈동자로 메츠거를 내려다보았다. 메츠거는 버둥거리다가 숨통이 끊어졌다.
"메츠거 경께서 지병이 있으신 모양이군. 이봐. 네 주인의 시체를 챙겨야지."
"...예, 예!"
자신의 주인이 눈앞에서 죽었는데도, 종자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메츠거의 시신을 챙겼다.
방금까지 불만을 표하던 기사들은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우테르만의 눈치를 봤다. 그제야 우테르만의 소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저주의 달인, 우테르만!
황제의 명에 따라 여러 귀족을 죽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오늘 모습을 보니 그 소문이 헛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앞으로 언행에 조심해라. 또 지병에 걸린 자가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
우테르만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아드비코에게 시선을 돌렸다.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소."
"알, 알겠소."
아드비코는 소름이 돋았다. 우테르만의 본색을 엿본 기분이었다.
황제가 보낸 조력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음험한 작자였다.
'이 자는 원하는 게 있다면 내 목숨도 가져갈 수 있는 작자다!'
* * *
용병들은 웃음을 꽉 참으며 요한을 쳐다보았다. 백작 각하께서 깃발을 내리고, 특유의 서코트도 벗은 채 용병처럼 차려입은 것이다.
요한은 소탈한 주인이었지만 이렇게 위장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다른 귀족이었다면 제안한 용병의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용병 같나?"
"이제 막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 같으십니다."
"그럴듯하게 잘 됐나보군."
기왕 쫓는 거 요한은 용병으로 위장하기로 했다. 가문의 깃발을 들고 돌아다니면 상대가 주워들을 수도 있었으니까.
설마 아무리 용의주도한 자라도 추격자들이 변장하고 쫓아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리라.
"각하께서는 가만히만 계셔도 됩니다. 가만히 계시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용병을 볼 때 가장 먼저 평가받는 부분은 장비와 더불어 얼굴이었다. 거칠고 흉터 많고 삭은 얼굴일수록 노련함의 상징이 됐다.
그런 면에서 아직 젊은 티가 나는 요한의 얼굴은 '나 새로 온 신참입니다'라고 자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사 님께서는 저희를 고용한 주인이시라고 하면 될 겁니다."
"아주 잘 어울리는 역할이군."
수에틀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쟈니나는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젤리아의 하녀 역할을 맡은 것이다.
"내가 잘 대해주겠다. 걱정할 거 없다."
이젤리아가 머리를 툭툭 쓰다듬으며 말하자 쟈니나는 속으로 욕을 했다.
피모이아는 사는 사람이 천 명은 가볍게 넘는 제법 커다란 마을이었다. 제국 가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몇 갈래 굵직한 길들을 끼고 있었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도 여럿 갖고 있었다.
"이것저곳 물어보니, 놈들은 아직 안 온 것 같습니다."
정찰 나갔던 용병들은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말을 그렇게 미친 듯이 몰아 달린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기대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군. 꼭 용병이나 행상인이 아닌 다른 걸로도 위장할 수 있으니 주의를 놓치지 말게. 의심 받으면 안 되니 평범하게 행동하고."
* * *
켓타나 상회 소속 상인, 루케체는 못 보던 용병들이 왔다는 말에 관심을 가졌다.
이 마을은 요즘 계속해서 커지고 있고 그에 따라 사람들도 몰려오고 있었다. 당연히 수상쩍은 놈들도 그에 맞춰 증가했다.
호위 두 명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루케체였지만 슬슬 손을 늘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적놈들도 대비하고, 몬스터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번에 온 용병 놈들은 영 못 써먹을 놈들이었는데. 그렇게 괜찮아 보였나?"
"예. 숫자도 제법이고 규율도 괜찮아 보였고 무엇보다 장비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루케체는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손바닥을 비비며 발걸음을 옮겼다.
< 203 도주하는 이들 (2) > 끝
< 204 도주하는 이들 (3) >
용병들이 마을에 왔다면 지금쯤 맥주를 마시며 질펀하게 늘어져 있으리라.
노련하든 그렇지 않든, 가진 돈이 많든 적든 그건 똑같았다. 먼 거리를 돌아다닌 이들의 생각은 다 똑같은 법 아니겠는가.
"기분 좋게 취해 있다면 더 이야기하기 편하겠군. '취한 거인' 여관에 있다고 했나?"
"예."
"거기 주인장이 내놓는 음식은 제법 괜찮지. 덕분에 이야기하기 좋겠는걸. 따라오게. 용병대장을 만나보고 싶으니."
* * *
"너,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나중에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더라도 지금은 지금이지. 나중에 어디 가서 백작님에게 심부름 시킨 적 있다고 언제 말해보겠냐?"
"이런 미친 놈 같으니."
고참 용병들은 안쪽에, 신참 용병들은 바깥쪽에.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관습이었다. '취한 거인' 여관의 일층은 새로 온 용병들로 북적거렸다. 다 앉지 못해 몇몇은 밖의 공터에서 앉아서 술을 마셨다.
원래라면 새로 굴러들어온 이방인들에게 시비를 걸었을 토박이 용병들도 감히 덤비지 못하고 주눅 든 얼굴로 빠져나갔다. 한둘이면 모를까 숫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과연. 괜찮아 보이는군."
뛰어난 용병을 알아보기 위해서 꼭 본인이 뛰어난 용병일 필요는 없었다. 잔뼈가 굵은 상인도 뛰어난 용병을 잘 알아보았다.
행동거지나 분위기, 갖고 있는 장비나 무기...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한눈에 판단할 수 있었다.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사람 참. 아직도 일에 서투르군."
상회에서 일하는 젊은 직원의 말에, 루케체는 쯧쯧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다짜고짜 들어가서 용병대장을 찾은 뒤 말을 걸어도 되겠지만, 뛰어난 상인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지. 서두르지 말게. 내가 하는 걸 보고 잘 배우게나."
"예. 알겠습니다."
루케체는 공터에 앉아 있는 용병들을 두리번거렸다. 용병대에서 가장 경험이 적고 신참인 이들은 주머니 사정이 궁한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호감을 사기도 쉬웠다. 닳고 닳은 놈들이 아니라 조그만 호의에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기뻐하는 것이다.
"이봐. 여기 은화가 있으니, 이 자리에 있는 용병들이 다 마실 수 있을 만큼 술을 갖고 와."
"알겠습니다. 루케체 씨."
루케체의 얼굴을 알아 본 하인이 술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가고, 루케체는 슬쩍 용병들에게 접근했다.
'덩치가 크기도 하군.'
루케체는 등을 돌리고서 앉아 있는 용병을 주목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용병들도 눈치를 보는 걸 보니 이 중에서는 이 자가 대장격인 모양이었다.
하긴 덩치가 저렇게 좋으니 그럴 법도 했다.
"크흠. 이보게."
"?"
나무 그릇에 담긴 스튜를 퍼먹고 있던 요한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웬 상인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나름 마을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 분명했다. 게다가 저 문양은...?
'켓타나 상회 소속이잖아?'
요한은 상황 파악이 아직 되지 않아 당황했다. 그러나 루케체만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아무리 봐도 앞에 있는 사람이...
'예이츠 백작 아닌가??'
예전에 쿨리아 백작령에 갔다가 먼 거리에서 요한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도 있었고, 백작의 인상착의에 대해서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켓타나 상회는 요한과 꽤나 밀접한 관계를 맺은 곳이었다. 요한은 백작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상회에게 꽤나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둘의 인연을 생각한 배려였다.
상회 입장에서는 황금이 그냥 손에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횡재를 한 셈 아닌가.
때문에 루케체도 예이츠 백작을 존경하는 편이었다. 기사로서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일단 상인은 자기 주머니를 챙겨주는 사람은 좋아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여기 계시냐???'
루케체는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서 침만 삼켰다. 아무리 봐도 예이츠 백작 같은데, 예이츠 백작이 여기서 용병들하고 같이 앉아서 스튜 퍼먹고 있을 신분은 아니고, 그런데 진짜 아무리 봐도 예이츠 백작 같고...
혼란에 빠진 루케체를 구해준 건 요한이었다. 상대가 얼굴을 알아본 것 같자 요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앉게.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테니."
"...아, 아니. 누추하신 분께서 이런 귀한 곳에는 왜...?"
혀가 꼬인 루케체의 말에 용병들이 수군거렸다. 상인 놈이 미친 것 같았다.
"사정이 좀 있지."
요한은 간단하게 상황을 말해줬다. 그 말을 들은 루케체는 깜짝 놀랐다.
도망친 적 지휘관들을 쫓아가는 건 이해가 갔다. 기사나 귀족이라면 당연히 할 일이었으니까. 사냥보다 더 좋은 오락거리였다.
하지만 상대를 놓치더라도 어디까지나 품위 있게 쫓아가지, 이렇게 목숨 걸고 쫓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놓치면 죽는 것도 아닌데 용병으로 위장해서 추격에 나선단 말인가.
게다가 백작이 손수 나서서 이렇게 용병들하고 같이 움직이다니...
루케체는 솔직히 감동했다. 소탈한 인물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 정도로 거침없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다른 영주들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마을에 외부인들이 많이 들어와서 수고롭겠지만,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말해주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마을에서 꽤 오래 지낸 터라 발이 제법 넓습니다."
* * *
"가서 알아보고 오도록."
"..."
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하자 우테르만은 바로 명령을 내렸다. 위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테르만은 철저했다. 먼저 사람을 보내 마을에 기사들이나 귀족들이 와있는지 확인부터 했다.
상대적으로 느리게 움직였으니 먼저 온 이들이 있어도 이상할 거 없는 것이다.
'이미 확인을 했는데도 또 확인을 하다니.'
하지만 확인하는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솔직히 마을에 귀족이나 기사가 이끄는 추격대가 먼저 도착했다면 벌써 티가 났을 것이다.
당장 마을을 오가는 여행자나 행상인들이 시끄럽게 떠들 것 아닌가.
하지만 주변 양치기부터 시작해서 아무도 그런 자들은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또 들어가서 확인을 하라니.
"없답니다."
"그래. 들어가도록 하지."
일행은 짐을 꾸린 후 다시 움직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도주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아직까지 추격대를 만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참 얄궂은 것이, 이렇게 되니 우테르만의 말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애꿎은 말들을 풀어버리지 말고 그냥 가도를 따라 달렸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룻밤 쉬고 필요한 물건을 챙긴 다음 산을 넘어가도록 하지. 산을 넘어가기만 하면 이제 추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굳이 산까지...?"
"계속 이렇게 마음 졸이면서 길을 달리는 게 좋다면 상관없겠지. 그러고 싶나?"
"알겠소."
돌아가는 다른 길들과 달리, 산길을 따라 넘어가면 이제 메레느 시에 우호적인 영지들만 나왔다. 그러면 추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잘 다져지지도 않은 산길을 따라 걷는 건 누구나 싫어하는 일이긴 했지만...
우테르만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밑의 놈들이 하는 불평보다는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흠집이 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추격하는 놈들이 얼마나 있든 간에 지금쯤 아예 다른 곳을 찾아 헤매고 있으리라.
* * *
"왜 수상하다고?"
"그게, 요즘 보통 산길을 넘어서 가는 자는 별로 없습니다. 정말 급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보아하니 가벼운 짐도 아닌 것 같던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병장기 같이 무거운 짐을 옮기는 행상인이 굳이 산으로 가는 것이 이상했다. 루케체는 의심이 들자 바로 달려와 보고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확인에 나섰다. 용병들이 바로 여관을 둘러쌌다.
"...?"
바깥 공기도 쐴 겸 별 생각 없이 맨몸으로 걸어 나온 기사는 못 보던 이들이 있는 것에 경악했다. 요한이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척 했겠지만 기사는 그런 연기에 서툴렀다.
"뭐하는 놈들이냐!?"
"기사 맞군. 잡아라!"
귀족 가문의 기사는 억양부터 티가 났다. 요한은 바로 명령을 내린 다음 검을 뽑았다.
"추격자다! 용병 놈들이 쫓아왔다!"
요한은 앞의 기사를 후려갈긴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기사가 황급히 검을 뽑아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요한을 용병으로 생각하고 얕잡아 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바로 저렇게 검을 맞대러 올 리 없었으니까.
검이 맞붙었다. 기사는 기술을 사용해 요한의 균형을 무너뜨린 다음 칼날로 상처를 입히려 했다.
"??!"
기사는 화들짝 놀랐다. 상대가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못 박은 것마냥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바위를 상대로 기술을 거는 느낌이었다.
우드득!
요한은 그대로 힘을 써 기사를 짓눌러버렸다. 기사의 뼈가 부러지고 비명을 질렀다. 그걸 본 다른 기사가 고함을 질렀다.
"예이츠 백작이다!!! 예이츠 백작이 여기 왔다!!"
"아니. 어떻게 안 거지?!"
"그렇게 무식하게 잡으시면 눈깔이 하나 있어도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던 용병이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다. 기사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요한을 노려보았다.
"백작이나 되시는 분이 그런 꼴로 쫓아오다니, 이게 뭐하는 짓이오?!"
"그러는 그쪽은 그런 꼴로 도망치는 게 부끄럽진 않나?"
요한의 말이 정곡을 찔렸는지 기사는 얼굴을 붉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항복이나 하게. 관습에 따른 명예로운 대우를 약속할 테니."
"...알겠소."
기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무기를 던졌다. 추격을 따돌렸으면 모를까, 추격을 맞닥뜨린 이상 고집을 피울 이유가 없었다.
"놈들이 도망간다!"
"!"
뒤편에서 들리는 소리에 요한은 시선을 돌렸다. 요한은 기사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나?"
"아드비코 공과 마법사는 다른 곳에 머물고 계시오. 소란을 듣고 도망친 모양이로군."
우테르만이 있었다면 중요한 정보를 그냥 말하는 기사의 목을 손수 졸랐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는 정당하게 승리한 요한을 기사의 명예를 가지고 존중했다.
"젠장. 쓸데없이 귀찮게 구는군."
"추격하시겠습니까?"
"일단 기사들부터 잡은 다음 쫓아가도록 하자. 급히 쫓으면 괜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요한은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종자들을 마저 붙잡았다. 그들은 용병 차림으로 나타난 요한을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뭐 이런 지독한 백작이 있단 말인가?
* * *
"추격이 붙은 것 같은데 항복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허튼 소리 하지 말게. 기껏해야 용병 놈들이나 쫓아왔겠지. 마을 안에서는 기습을 당했지만 이런 밖에서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지 않나?"
우테르만의 말에 기사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적긴 했지만 용병 나부랭이들에게 질 정도로 약한 기사는 없었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 나눠 머무른 게 천운이었다. 덕분에 소란이 일어났을 때 바로 짐을 챙겨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기는 최악이었다. 우테르만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자 기사들은 아드비코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아드비코 님. 항복을 하고 몸값을 내는 게 어떻습니까?"
"으음..."
전투에 뛰어든 귀족들 중에서 한 번도 잡혀보지 않은 이들이 드물 정도로, 항복과 몸값 지불은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특별한 상황인 아닌 이상 죽을 때까지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명예롭게 항복을 하고 몸값을 내면 됐다.
원래라면 아드비코도 이렇게 추하게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도망치다가 잡히면 그냥 항복을 하고 몸값을 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바로 도시로 돌아가서 상황 수습을 해도 위험한 판국에, 백작에게 잡혀서 인질 생활을 하면 가문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추격이 턱 아래까지 붙자 아드비코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항복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너는 추격이 없나 확인하고 와라. 너는 앞으로 가서 혹시 모를 매복을 확인하고."
"또 말입니까??"
우테르만은 크루거 경한테 눈짓했다. 기사들 중에서 가장 강하게 충성하는 기사였고, 사실상 우테르만의 호위에 가까웠다. 크루거 경이 걸어오자 종자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종자들은 성질 괴팍한 마법사를 욕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좁은 산길 주변에는 딱히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없지?"
"없어. 없어. 근데 이건 뭐지?"
종자들은 웬 큼지막한 바윗덩이들이 길을 막고 있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 도적놈들이 놨나 싶었지만 도적놈들은 이렇게 무식하게 길을 막지 않았다.
"치워. 보면 지랄할라."
"산사태라도 났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멀쩡한데...?"
< 204 도주하는 이들 (3) > 끝
< 205 도주하는 이들 (4) >
산의 윗부분이 무너지고 부서져서 길이 막히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 경우는 없었다.
혹시 몰라서 도적놈들이 숨어있나 다시 확인해봤는데 보이지 않았다.
"으윽!"
"끅..."
종자들은 끙끙대며 바윗덩이를 옮겼다. 기사로서 훈련 받는 종자라면 어지간한 용병보다 잘 단련되어있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윗덩이는 옮기기 힘들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대체 이건 왜 여기 있는 걸까?
* * *
크루거 경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투구 안에서 껄끄러운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너무 과하신 거 아니십니까? 불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같잖은 놈들이 품어봤자지. 산적 놈들과 드잡이질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나. 지금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가?"
"아닙니다."
크루거 경은 즉답했다. 우테르만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테르만에게 크게 빚진 입장에서는 강하게 말하기 힘들었다.
"산을 넘은 다음에는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나도 고민하고 있다."
우테르만은 내뱉듯이 말했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건 아드비코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 자를 도와서 도시를 안정화시키고 동맹을 유지해야 하는데..."
"가능할 것 같습니까?"
"가능하냐 불가능하나갸 아니다. 해내야 하는 거다."
우테르만은 목소리에 진득한 살기를 담아서 말했다. 듣는 사람을 몸서리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도시로 가는 즉시 황제파 인물들을 소집해라. 아직 소문이 확실히 퍼지지 않았을 테니 긴가민가하고 있을 거다. 반대파 놈들을 제압해버리면 가능성이 있다."
우테르만은 도시가 들고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제압할 생각이었다. 불리한 이상 거칠게 피를 뿌려서라도 먼저 제압하겠다는, 우테르만다운 계략이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전투에서 그렇게 진 이상 다른 방법도 별로 없었다. 크루거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백작 놈이 생각 외로 괴물이었어."
"강한 기사였습니다."
"그래. 괴력의 기사, 용력의 기사로 불리는 이유를 알겠더군."
우테르만은 솔직히 요한을 얕봤었다. 아무리 소문이 남쪽에서 올라온다 하더라도 요한은 너무 어렸고, 쌓은 명성은 갑작스러웠던 것이다.
남부의 맹주라지만 그 짧은 사이에 얻은 봉신들과 직할령들을 쉽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잘해봤자 교단의 사냥개였고 못하면 금세 쫓겨날 용병대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 직접 겪게 되자 그 생각이 달라졌다. 멀리서도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박력이 있는 기사였다.
"젊은 카르디리안이 생각났어."
"..."
"물론 카르디리안과는 정 반대지만 말이야. 그렇게 신앙심이 깊다던데 아쉽게 됐군. 교황만 손에 넣었으면 요긴하게 부려먹었을 텐데."
떠드는 사이 종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우테르만은 쯧쯧 혀를 차며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산적 놈들하고 구르기라도 했나?"
"바위가 있어서 치웠습니다."
"산사태라도 났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종자의 말에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입을 열었다.
"어찌되었든 빨리 움직입시다. 여기서 밤을 새고 싶지는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봐라."
우테르만은 무언가 이상해서 멈추게 했다.
"바위가 어떻게 생겼지?"
"바위가 어떻게 생겼냐뇨... 큼지막하고, 이 정도 크기에..."
"위가 반듯하고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나??"
"글자요? 어, 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습니다만..."
우테르만의 주름 잡힌 얼굴이 분노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런 미친놈들 같으니! 거인의 돌을 건드리면 어떡하자는 거냐!"
"거, 거인의 돌이요?"
"모두 움직일 준비를 해라! 돌을 건드렸으니 거인 놈이 쫓아올 거다! 놈이 쫓아오면..."
말하던 우테르만은 숨이 턱 막혀서 멈췄다. 사람 두 명은 되는 거 같은 커다란 덩치를 가진 거인 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지독하다고 불평하긴 했어도 기사들은 의외로 협조를 잘 해줬다.
"우리야 도망치느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용병으로 변장하는 건 명예롭지 않..."
"그래서 남은 이들이 누구라고?"
"우테르만 공. 폐하의 총애를 받는 궁정마법사 중 하나이자 제국의전관의 직위를 가지신 분이시오."
"그렇군."
"어쨌든 백작 각하. 아무리 그래도 용병으로 변장하는 건..."
"남은 기사는 몇 명이지?"
"기사는 여섯 정도 될 거요. 아드비코 공을 모시는 노예들이 따로 있고. 백작 각하. 용병들로 변장하실 필요까진 꼭..."
"그렇군."
기사 숫자를 들으면 종자나 나머지 하인이나 노예들까지 해서 대충 인원 짐작이 됐다. 요한은 바로 추격 준비에 나섰다.
"백작 각하. 그런 일은 부하들에게 맡기고 이야기나 좀 더 하시지..."
붙잡힌 기사들은 요한과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은 눈치였다. 요한은 끝나면 떠들자고 달랜 다음 바로 출발했다.
"놈들이 정체를 눈치 채진 못했겠지?"
"아마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급히 도망쳤으니 기껏해야 용병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다면 싸우려고 할 수도 있겠군."
먼저 간 쪽이 대비하기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요한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워낙 이쪽의 숫자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요한을 따르고 있는 카라마프와 카르디리안은 야성이 날카로운 몬스터들이었다. 기습을 하고 싶다면 한 번 해보라고 하고 싶었다.
"...????"
"뭐야?"
앞서 정찰 나간 용병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앞에 핏자국과 함께 무기들이 떨어져 있다고 보고했다.
"싸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 도적놈들이 있었나?"
요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루케체의 말에 따르면 딱히 도적떼는 없다고 들었던 것이다. 산이 가파르고 험한데다가 통행이 적어 도적떼가 머무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새로 흘러 온 놈들 아닙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붙잡힌 기사가 자못 냉정한 어투로 끼어들며 대답하자 유클리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기사를 쳐다보았다.
포로로 붙잡힌 새끼가 왜 혓바닥을 나불거리지??
그러나 요한은 연합군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참는 법을 몇 번이고 배운 뒤였다. 요한은 너그럽게 웃으면서 기사에게 말했다.
"고견을 듣고 싶군."
"숫자가 적긴 해도 남은 기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 제국에서도 뛰어난 솜씨로 유명한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도적떼에게 질 리 없잖습니까?"
"..."
유클리아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눈빛으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보나마나 해서 좋을 게 없는 말일 것이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잘 훈련 받은 기사는 인간흉기나 마찬가지였다. 도적 여럿이 붙어도 쉬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확인부터 하지."
요한은 카라마프를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 보고한 대로 주변이 어지럽혀 있었다. 핏자국에 부러진 무기까지. 꽤나 격하게 싸운 것 같았다.
'설마 위장한 건 아니겠지? 이런 복잡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드비코를 잡아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요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르릉!
카라마프가 길옆으로 넘어가더니 뭔가를 보고 울음소리를 냈다. 요한은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
인간이 낼 수 없는 커다란 발자국이 거기에 있었다.
"거인이라고요?!"
쟈니나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설마 여기에 거인이 흘러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니!
"앞에 바위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건드리지 마!"
그녀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건 거인의 돌이야!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해!"
"거인의 돌이 뭐지?"
"거인이 자기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놓는 돌이에요."
쟈니나는 자기가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거인은 원래 저런 식으로 길을 막고 통행료를 거두는 걸 좋아하는 종족이었다. 바위로 막힌 길을 보면 멈춰서 기다린 다음 통행료를 내야지, 바위를 멋대로 건드렸다가는 거인의 분노를 살 수 있었다.
수에틀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급하다고 건드렸다가 거인의 공격을 받았나보군."
"죽었을까요?"
"글쎄... 나도 거인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라..."
요한과 수에틀그가 쟈니나를 쳐다보자, 쟈니나의 어깨에는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오만함이 섞인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거인과 사이클롭스는 뭐가 다른 거지?"
이젤리아가 듣고 있다가 쉽다는 듯이 말했다.
"눈의 개수 차이 아닌가?"
"..."
쟈니나는 경멸과 경악이 섞인 눈빛으로 이젤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요한에게 들킬까봐 바로 시선을 아래로 내려 깔았다.
"사이클롭스가 좀 더 난폭하고 잔인하지. 거인은 상황에 따라 말이 통하는 상대고."
"맞는 말씀이에요. 이런 경우에 거인은 통행료만 받으면 싸울 일이 거의 없거든요."
"잡혀간 놈을 돌려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 그건..."
거인에게 잡혀간 사람을 돌려받는 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쟈니나는 말문이 막혔다.
다행히 대답하기도 전에 거인이 나타났다. 요한보다 절반 정도는 더 큰 것 같은 거인은 옆에 숨겨진 비탈길에서 걸어 나오더니 돌들을 세심하게 살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것 같자 거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행료 받는다. 너희들은 낸다."
아클라다가 납득하기 힘들다는 듯이 거인에게 외쳤다.
"내가 이 길을 지나겠다는데 왜 너한테 돈을 바쳐야 한다는 거냐?"
"길 닦았다. 땅 고르고 나무 치웠다."
"..."
아클라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클리아는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거인에게 말싸움으로 지면 어쩐단 말인가.
"쏠까요?"
"아니. 일단 좀 물어보고."
요한은 거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통행료는 은화인가?"
"필요 없다. 반짝이는 거 따위. 원한다. 살아 있는 거."
거인은 먹고 싶다는 듯이 카르디리안을 간절히 쳐다보았다. 카르디리안은 불쾌하다는 듯이 발굽을 앞으로 두드렸다.
"하나면 된다. 저 말일 경우. 아니면 다섯 마리다."
거인은 뭉툭한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카르디리안을 바치거나 말 다섯 마리를 내란 소리였다. 카르디리안이 정말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못 내고 돌아가겠다면?"
"그, 그러지 마라. 저거 하나면 된다."
-푸흐흥!
거인은 요한 일행이 돌아갈까 봐 초조한 모양이었다. 상대와 말하면서 적당히 감을 잡은 요한은 슬슬 본론을 꺼냈다.
"여기 먼저 온 사람들은 없었나?"
"있었다. 잡아뒀다. 통행료를 못 내서."
"이렇게 생긴 자도 있었나?"
요한은 아드비코의 인상착의를 말했다. 거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거슬러주겠다."
"?"
"그 놈을 말이다. 저 말을 주면."
"..."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요한은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쟈니나에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거인은 딱히 좋아하는 게 없나?"
"금은이나 보석에 별 관심이 없을 거예요. 먹는 것 말고는..."
"짐말이라도 몇 마리 사서 갖고 올 거 그랬군."
요한은 공격 명령을 내릴까 살짝 고민했지만 포기했다. 길도 좁았기에 싸움이 벌어지면 몇 명이 다칠지 몰랐다. 가능하다면 대화로 끝내고 싶었다.
게다가 상대를 어디에 숨겼는지 찾아내는 것도 일이고...
"내기도 좋다. 저 말을 건다면. 난 그 놈을 걸겠다."
요한이 수군거리기만 하자 거인의 초조함은 더 심해진 모양이었다. 먼저 내기를 하자고 말을 꺼냈다.
"내기?"
"활쏘기 같은 건 어떠냐?"
아클라다의 말에 거인은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인에게 경멸의 시선을 받은 아클라다는 울컥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거인은 서로 공정하게 하나씩 고른 다음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마지막 하나를 더 골라서 승부를 내자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골라봐라."
"창던지기다."
거인의 말에 뒤에 있던 용병들은 일제히 야유를 토해냈다. 거인 놈이 생각보다 너무 양심이 없었던 것이다. 거인은 왜 그러냐는 듯이 뻔뻔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요한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물었다.
"뭘 맞추면 되는 거지?"
"건너편 절벽을 향해 던져라. 멀리 던지면 이긴다."
거인은 자신만만했다. 자신은 절벽에 닿을 정도로 던져본 적이 있었지만, 저 작은 인간 놈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푹!
"...????"
거인은 눈을 깜박였다. 방금 분명 인간 놈이 창 하나를 뽑아서 가볍게 던지긴 했는데...
어느새 창이 저기 절벽에 박혀 있었다.
< 205 도주하는 이들 (4) > 끝
< 206 도주하는 이들 (5) >
"뭐하나? 던지지 않고."
요한의 말에 거인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우물쭈물하더니 마지못해 창을 들었다.
인간 놈이 속임수를 썼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속임수를 쓴 건지 짐작가지 않았다.
거인이 든 창은 힘차게 날았다. 제법 기세가 있었지만,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뒤에 있던 용병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퍼부었다. 거인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그만. 명예롭게 행동해라."
요한의 말에 용병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입을 다물었다. 거인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기꺼워하는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마음이 약한 것 같았다.
"내 승리겠지?"
"...네 승리다. 다음 종목을 정해라."
거인은 뭐든 간에 반드시 이기겠다는 눈빛으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으음. 의외로 어렵군.'
요한은 고민에 빠졌다. 가능하면 여기서 끝내고 싶었는데 의외로 떠오르는 게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자신 있는 건 바둑 정도인데 거인 놈이 두자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았고...
"수수께끼를 제안해보게."
"수수께끼 말입니까?"
"그래. 거인들은 수수께끼를 좋아하니 덥석 받을 거야."
"허. 그렇습니까?"
몰랐던 사실에 요한은 신기해했다. 쟈니나도 동의한다는 듯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길 자신은 있으시고요?"
"사람 참. 여기 있는 마법사가 몇 명인가. 거인 한 명 못 이기겠는가?"
수에틀그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요한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수께끼로 승부하자고 하자 거인은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에틀그는 쟈니나와 수군거리더니 이야기를 맞추고 헛기침을 했다.
"자. 들어보게. 커다란 덩치를 가진 옛 종족이여. 이 괴물은 포악하기 그지없고 삼키지 못하는 것이 없네. 어떤 영웅도 이 괴물을 이겨내지 못했고, 어떤 성벽, 어떤 왕국도 이 괴물을 막아낼 수 없었네. 이 괴물은..."
"정답! 시간!"
거인은 쉽다는 듯이 외쳤다. 수에틀그는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쟈니나도 마찬가지로 경악했다.
"...두 분?"
"아, 아니. 우리도 맞추면 되지 않나."
수에틀그가 실수하는 건 오랜만에 본 요한이었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 놈이 밥 먹고 수수께끼 놀이만 했나?'
거인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았다. 거인은 승부를 떠나서 지금 이렇게 노는 게 매우 행복한 것처럼 굴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사람 말하는 거냐?"
"..."
거인은 슬픈 눈동자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어찌나 구슬픈 눈동자였는지, 문제를 다 듣지도 않고 맞춘 요한이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다시 네 차례다."
차례가 너무 빨리 돌아온 탓에 수에틀그와 쟈니나는 문제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둘은 속닥거리며 바로 내지 못했다. 거인은 빨리 하라는 듯이 바닥을 탁탁 쳤다.
"안 내십니까?"
"이번에만 자네가 내보게. 잠깐 책을 좀 뒤져봐야 할 것 같네."
'이러실 거면 왜 수수께끼를 고르신 거지?'
생각보다 높은 거인의 수준에 두 마법사가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요한은 혀를 찼다.
원래 알고 있던 수수께끼들 중에서 쓸만한 게 없나 생각해봤다. 그나마 떠오르는 게...
"이건 불꽃같지만 불꽃은 아니다. 네가 나태해지면 이것은 식어버리고, 네가 승리하면 이것은 타오른다. 이것은 무엇인가?"
거인은 끙끙대며 대답하지 못했다.
'뭐야. 설마 대답 못하나?'
요한은 의외의 반응에 놀라워했다. 거인이 당연히 맞출 거라고 생각하고 시간 끌기 위해 낸 문제였는데...
뒤에서 듣고 있던 수에틀그가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답이 뭔가?"
"...혹시 엿들을 수도 있으니 끝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 * *
"모르겠다! 네 승리다. 정답을 알려다오."
"명예롭게 인정해줘서 고맙군. 정답은 피다."
거인은 탄성을 내뱉었다. 수에틀그도 탄성을 내뱉었다. 쟈니나도 탄성을 내뱉었다. 요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뒤를 쳐다보았다. 민망해진 두 마법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거인은 영 아쉬웠는지 슬쩍 말했다.
"혹시 다른 내기를 할 생각은 없나? 너는 이번에 딴 그 놈을 걸어라."
"너는 뭘 걸 생각이냐?"
"다른 놈들을 모두 걸겠다."
내기가 재밌었는지 거인은 남은 인질들을 전부 걸려고 했다.
'남은 인질들이면 황제 쪽 기사들인가? 몸값이 나오긴 하겠군.'
요한은 빠르게 계산을 끝냈다. 옆에서 수에틀그가 말했다.
"기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궁정마법사가 있는 게 틀림없네. 그 자를 확보해야 해."
일개 기사는 붙잡아봤자 몸값 이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궁정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황제의 궁정 안에서 이뤄지는 은밀한 일들과 계획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좋다. 받아들이겠다."
"이번에는 한 판 승부다."
"마음대로 해라. 종목은 뭐지?"
"..."
거인은 우물쭈물했다. 말하려다가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
"서로 붙잡고... 힘을 써서 넘어뜨리는 쪽이 승리다."
쉽게 말해서 씨름이나 격투 레슬링 비슷한 걸 하자는 거였다. 창과 달리 이건 덩치가 있는 거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저런 뻔뻔한 놈이!"
"명예는 네놈 동굴에 처박아두고 왔냐!"
거인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용병들의 욕설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할 만할 거 같은데?'
아까 창 던지는 거 보니 덩치 차이가 있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요한이 무기를 내려놓고 앞으로 나서자 용병들은 깜짝 놀라 말리려고 했다.
"각, 각하. 저런 개수작을 받아주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시끄럽다! 한다고 하지 않나!"
거인은 요한이 마음을 바꿀까봐 허겁지겁 붙잡았다. 체면을 구긴 이상 승리라도 얻어야 했다.
거인은 요한의 손을 마주 붙잡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끙끙대는 소리와 함께 굵은 땀방울이 비처럼 떨어졌다. 그러나 오히려 몸이 점점 꺾이는 건 거인 쪽이었다.
"!"
보고 있던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백작의 힘이 신에게 받은 힘이라는 건 겪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거인과 정면에서 힘씨름을 해서 밀리지 않을 줄이야!
용병들이야 놀라는 정도였지만, 일행 뒤를 따라온 제국 기사들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충격이 커도 너무 컸던 것이다.
저게 인간의 힘인가?
쿵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인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거인은 울상이 되어 패배를 인정했다.
* * *
거인이 바위를 끙끙거리며 치우자 절벽 밑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길이 나왔다. 거인이 잠을 자고 포로를 보관하는 동굴이 나타났다.
"가지고 가라."
"오냐."
안에 갇혀 있던 포로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일행에 깜짝 놀랐다. 아드비코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예이츠 백작 각하십니다. 아드비코 님."
먼저 붙잡힌 제국 기사가 대신 설명에 나섰다. 붙잡힌 놈이 체면도 없이 뭐가 좋다고 앞에 나서는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아드비코는 따질 힘도 없었다.
도망치던 와중에 거인에게 지불할 통행료가 없어 습격 받아 붙잡히는 경험은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영혼이 반쯤 빠진 기분이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건가?"
"백작 각하께서 거인과의 내기에서 이기셨습니다."
"??????"
멍하니 있던 아드비코나 다른 포로들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뭐... 뭐?"
"일단 나가기나 하지. 여기서 떠들고 싶진 않으니."
요한은 그렇게 말하고 동굴 안을 확인했다. 아드비코도 아드비코지만 제국에서 온 마법사가 신경 쓰였던 것이다.
어디 있지?
"마법사는 어디 있나?"
"...죽었소만?"
"!?"
노예가 마법사의 옷과 지팡이, 장신구를 챙겨서 밖으로 갖고 나왔다.
거인이 나타났을 때 우테르만은 거인에게 저주를 걸려고 했다. 그러나 거인은 고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던 오래된 격언을 잘 기억하고 있는 거인이었다.
마법사부터 먼저 죽여라.
거인의 몽둥이가 휘둘러지자 그 대단한 우테르만도 고깃덩이로 변해버렸다. 어찌나 살벌했는지 다른 자들도 겁에 질려 무기를 던지고 항복을 외칠 정도로.
"죽었다고???"
"통... 통행료를 내지 않은 놈이었다. 놈의 잘못이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거인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했다. 요한은 허탈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죽은 마법사를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 여기 있는 자들만이라도 손에 넣은 걸 감사히 여겨야 했다.
"인간 영웅. 다음에 오면 통행료 없이 넘어가도 좋다."
"고맙군. 하지만 여기 오래 있는 건 별로 좋은 선택 같지 않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거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걸 추천하지."
요한은 거인에게 인사를 한 다음 일행을 끌고 하산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아드비코는 손에 넣었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아드비코 공. 괜찮나?"
"..."
요한은 쾌활하게 말을 걸었지만 아드비코는 혼이 반쯤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람을 보내는 걸 허락해 줄 테니, 도시로 사람을 보내 몸값과 배상금을 준비해줬으면 좋겠는데."
"나... 나는..."
"충격이 큰 모양이군. 다른 이들과 같이 쉬게 해줄 테니 정신이 돌아오면 사람을 보내게."
상대가 나름 귀족인데다가 다 붙잡은 이상 굳이 거칠게 나설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너그러운 아량을 보여줄 때였다.
아드비코 입장에서는 요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리라.
포로들이 떨어지자 수에틀그가 와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걱정이 있네."
"?"
"도시 사람들이 저 자를 쫓아낼지도 모른다는 말일세."
"아무리 졌다지만 도시의 주인 아닙니까?"
영주가 패배했다고 해서 그 영지에서 쫓겨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도시의 경우는 달랐다.
여러 도시귀족 가문들과 용병대장들이 서로 권력을 탐하며 얽혀 있는 것이다.
별 것 아닌 실수로 자리에서 쫓겨나는 귀족들을 흔히 볼 수 있는 게 도시였다.
"...설마 일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더라도 몸값은 지불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좀 더 오래 걸리겠지. 이런 일은 시간을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는 법이야. 최대한 빨리 받아내게 하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모양이니, 쉽게 협조할 겁니다."
* * *
용병으로 떠났지만 다시 돌아올 때는 백작의 깃발을 걸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백작의 방문에 깜짝 놀라 마을을 정비했다.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커다란 건물이 제공되었고, 요한은 그 안에 포로들을 가뒀다. 동시에 지금도 헤매고 있을 귀족들을 그만 헤매게 하기 위해 전령을 보냈다.
마을 근처 수도원에서 갖고 온 독한 포도주를 급하게, 그것도 희석시키지도 않은 채 석 잔을 들이키고 나서야, 아드비코는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입을 열었다.
"백작이 용병으로 변장하고 매복하고 있었다고?"
"예."
"아..."
아드비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인의 내기부터 시작해서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일들 투성이었다.
제국 쪽 기사들은 아드비코처럼 절망하지 않았다. 물론 잡힌 건 아쉽고 분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미래가 멀쩡했다. 제국 쪽에 있는 가문에 연락을 해서 몸값을 받아오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기사들은 잡혀 있는 와중에서도 젊은 백작의 용맹과 무용에 대해 떠들었다. 거인과 직접 내기를 하는 배짱과 힘은 솔직히 떠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아드비코를 모시는 노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사람을 보내서 몸값을 받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몸값을 받아 온다고 쳐도, 내가 돌아가기 전에 도시가 뒤집어 질 가능성이 크단 말이다."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됩니까?"
"그쪽은 지금 병사 한 명이 귀한 상황이다."
"그러면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됩니까?"
노예의 단순한 질문에 아드비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백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말하던 아드비코는 멈칫했다. 미친 생각 같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도시 안에 있는 제국파 귀족들 여럿 바치고, 제국에서 온 사절들도 바쳐야 할지 몰랐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드비코가 권력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죽느니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 206 도주하는 이들 (5) > 끝
< 207 산맥과 도시 (1) >
"어디 가시오, 아드비코 공?"
아드비코가 요한에게 접견을 신청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기사들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혹시나 아드비코가 탈주할까봐 의심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도망치는 게 뭐 중요한가 싶을 수도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요한에게 항복한 이상, 아드비코가 도망치는데 눈감아준 건 불명예스러운 짓인 것이다.
"백작을 만나러 간다."
"아. 난 또..."
"..."
마치 남 일처럼 다시 술잔을 들며 지껄이는 제국 기사들의 모습에 아드비코는 침을 뱉었다. 믿을 놈 없는 세상이라지만 동맹으로서 정말 가치가 없는 놈들이었다.
* * *
"어... 방금 뭐라고 했나?"
요한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아드비코를 쳐다보았다. 접견을 요청하길래 몸값 지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러 왔나 싶었는데, 상대가 전혀 의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백작 각하!"
"일어나게. 과분한 제안이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드니."
요한은 아드비코가 왜 이러나 싶었다.
설마 몸값을 덜 지불하려고 이러나?
교단의 편에 서서 격렬하게 싸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단을 돕고 요한에게 우호적인 교단의 영향력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요한은 메레느 시를 손에 넣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얻고 싶어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영지는 커질수록 원래 주인인 영주의 손을 벗어나려고 했다. 마을 규모일 때는 잠잠하다가도, 점점 규모가 커져서 도시 수준이 되면 안의 참사회원들과 유력 가문들이 나서서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방법이야 다양했다. 영주를 돈으로 매수할 수도 있었고, 용병을 고용해서 독립을 선언할 수도 있었고, 다른 귀족의 힘을 빌릴 수도 있었고...
이런 만큼, 이미 자유를 얻은 도시를 복속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의 사람들이 그만큼 격렬하게 반발할 테니까.
당장 요한도 직할령 안에 있던 도시는 굳이 건드리지 않고 세금만 받고 있었다. 황제처럼 곳곳에서 반란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충성을 바치겠다니. 좀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아드비코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탄 셈 아닌가.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백작 각하의 도움이 없다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드비코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도시의 여러 경쟁자들을 생각했을 때 돌아가면 일 년 안에 암살당하거나 쫓겨날 것이니, 요한이 다른 귀족들과 함께 군대를 끌고 와서 머물러달라고.
"내가 알기로 자네는 황제와 손을 잡지 않았나? 나와 손을 잡는다는 건 교단과 손을 잡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뒷감당을 할 수 있겠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몇 배는 나을 겁니다! 돌아가기만 한다면 제국 쪽 귀족들을 각하께 넘겨드리겠습니다. 제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을 충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와. 장난 아니군.'
요한은 막나가는 도시귀족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자기가 주도한 전쟁에서 진 상태에서, 적 귀족들의 군대를 빌려 도시에 돌아온 다음, 불만을 가진 정적들을 제압하고, 동맹 맺었던 이들을 팔아 넘긴다라...
요한은 뒤통수가 서늘해서라도 절대 하지 못할 짓이었다. 궁지에 몰려 있다면 차라리 재산을 챙기고 도주하면 모를까.
'저게 귀족인가?'
갖고 있던 걸 놓고 도망칠 바에는 나중에 일이 꼬여 죽더라도 끝까지 붙어 있는 집요함. 요한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교단의 주교가 공증을 서는 앞에서 방금 했던 대화를 각서로 남길 수도 있고?"
어느새 요한의 말투는 변해 있었다. 부하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아드비코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래만 주신다면 제가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좋다! 한 번 이야기는 꺼내 보겠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 또한 동의해야 한다."
요한은 혼자서 군대를 이끌고 메레느 시로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무리 아드비코가 있다 하더라도 도시민의 원망을 혼자 받아쓰게 될 테니까.
군대를 이끌고 간다면 다른 영주들과 교단 인물을 데리고 같이 가야 했다.
예이츠 백작의 군대와 교단의 군대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백작 각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 * *
"이야기가 그렇게 됐나?"
"예상하고 있으셨습니까?"
"내가 아무리 예언자라는 별명이 있어도 그런 것까지 알진 못하네. 그냥 도시의 지도자란 이들이 여럿 죽어나가는 꼴을 본 적이 있어서 한 말이지. 말이 좋아서 도시의 주인이지, 어떨 때는 파리 목숨보다 못한 것 같네."
치열한 정쟁 끝에 뽑힌 도시의 대표는 어지간한 소영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권력을 휘두르지만, 그만큼 쉽게 죽곤 했다. 한 번 실패에 기다리고 있던 정적들이 등 뒤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가 충성할 것 같나?"
"충성심을 믿진 않고, 놈의 이기심을 믿고 있습니다."
"좋은 자세군."
수에틀그는 빙긋 웃었다. 아드비코 같은 작자는 신뢰하면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요한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놈은 배신할 곳도 없었다.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려 있으니 줄만 던져주면 붙잡고 매달리리라.
"그리고 많은 걸 바라지도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몸값과 배상금. 거기에 도시에서 황제파 세력 제거. 요한이 바라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제국에 가까운 도시가 황제와 손을 잡고 있으면 좋을 일이 없는 것이다.
요한은 제국 너머로 쳐들어가서 적극적으로 복수할 생각은 없었다. 원한이야 있었지만 그런 원한으로 불확실한 도박을 하기에는 요한이 너무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아닐 것이다. 당장 요한이 가진 영토들이 황제나 황제파 영주들의 영토였으니, 제국 상황만 안정되면 당장 군대를 내려 보내리라.
'아드비코 놈이 버티든, 버티지 않든. 도시에서 황제 쪽 세력만 어떻게든 없애면 되겠지.'
"도시가 충성을 바치면 여러모로 좋지 않겠나?"
"물론 바친다면 좋지만 세상 일이 그리 쉽게 돌아가겠습니까? 들어보니 메레느 자유시는 만 명도 넘는..."
"만 명이 뭔가. 2만, 아니 3만 명도 넘을 걸."
"예. 어쨌든 그런 도시 아닙니까. 게다가 자유를 얻은 지 몇 대가 지난 도시. 외부인이 군대 끌고 가서 환영 받을 곳이 아닙니다."
"...설마 그래서 지금 다른 귀족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였나?!"
수에틀그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도시에 병사들이 그리 많지도 않을 뿐더러 아드비코도 있으니, 당장 출발해도 될 것 같은데 왜 기다리나 했더니...
"예. 혼자 갔다가 괜히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지요."
"허..."
수에틀그는 이 젊은 백작의 인내심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제국에서 온 기사들이야 요한의 무력에만 시선이 팔렸지만, 이 백작의 진면목은 그 내면에 있었다.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서 몇 번이고 실수를 저지르는 귀족들과 비교했을 때 그 인내심은 더더욱 빛이 났다.
"그대여. 제국 기사가 한 수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데 혹시 결투를 해도 되겠는가?"
"..."
"..."
요한과 수에틀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젤리아를 쳐다보았다.
기사들 사이에서야 저런 결투가 관습적으로 흔한 일이었지만, 마법사인 수에틀그나 겉모습만 기사인 요한에게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몸값 받아내야 하는 상대가 죽거나, 혹은 이젤리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안 돼."
"앗. 알겠다..."
이젤리아는 시무룩해져서 돌아섰다. 수에틀그는 요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가서 달래주게나."
"...결투를 걸라는 겁니까?"
"아니! 사람 참 무슨... 달래주는 게 그것만 있나? 좋아하는 다른 게 있지 않나."
"이젤리아는 엘프인데요. 수에틀그 님."
"...검이라도 선물로 줘보게."
* * *
"도시로 말이오? 찬성이오!"
전령의 연락을 받고 찾아 온 귀족들은 요한의 말에 반색했다.
젊은 백작이 포로들을 잡아버렸다는 말에 실망하기도 전에 귀가 솔깃한 말을 들은 것이다.
도시 놈들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본때를 보여준다니. 배상금도 배상금이고 건방진 자유도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준다는 쾌감이 컸다. 전투의 승자로서 정당한 명예를 누리고 대접을 받을 기회인 것이다.
"함께하겠소. 백작 각하."
"놈들이 만약 성문을 닫고 저항한다면 가장 앞서서 성벽을 넘겠습니다!"
"아니. 그런 자리가 아닌데."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귀족들의 모습에 요한은 제동을 걸었다. 약탈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배상금 받을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됐다.
"걱정 마십시오. 백작 각하. 도시의 탐욕스러운 돼지들이 약속만 지킨다면 저희들도 명예를 지켜 행동할 겁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이렇게 설득력 없는 경우도 드물었다. 요한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포기했다.
'그래. 이런 놈들이라도 같이 가야지.'
그래도 귀족들이 생각보다 순순히 응해줘서 다행이었다. 이들은 기대라도 한 것처럼 즉각 대답했던 것이다.
"조금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것이 명예이기 때문이다."
이젤리아는 선물로 받은 숏소드를 허리춤에 하나 더 차고 있었다. 균형적으로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이젤리아가 좋다니 굳이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뭔 명예?"
"단순히 적을 이기고 끝나는 게 아니라, 적의 본거지에 가문의 깃발을 올리는 일 아닌가. 둘은 명백히 다르다."
"그, 그렇군."
요한은 '그거나 저거나 이긴 건 이긴 거지 뭐 그런 허례허식에 집착을 하지'라고 말하려다가 이젤리아의 눈빛을 보고 그만두었다.
말해봤자 설득 가능한 눈빛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젤리아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그대 가문의 깃발을 올릴 준비를 해야겠다."
"내 깃발을? 꼭 그래야 하나?"
"그대의 깃발이 아니라면 어느 겁쟁이의 깃발을 올린단 말인가!"
이젤리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쳤다. 성벽 위에 가장 먼저 깃발을 거는 것도 중요한 권리였다. 이 군세의 주인이 누군지, 성의 점령에 공을 가장 세운 게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도시를 직접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전투에서의 공을 봤을 때 마땅히 요한의 명예였다.
'깃발 꽂으면 도시의 원한이란 원한은 다 살 것 같은데.'
굳이 원한 혼자 받기 싫어서 귀족들 여럿 데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젤리아. 신께서는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가르치시지."
"아니다. 그대여. 몇몇 이들은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 같은 사람은 겸손할 필요가 없다."
"..."
엘프 귀족들은 종교 교육을 따로 받나?
"교만하지 말라는 말 안 배웠어?"
"배웠지만... 그건 당연한 권리지 교만이 아니지 않은가?"
요한은 다른 식으로 설명해주기로 했다.
"이젤리아. 여기 화살 한 개가 있지."
"보고 있다. 그대여."
"이렇게 한 개가 있으면 부러뜨리기 쉽겠지. 하지만 세 개를 뭉쳐 놓으면?"
"그대라면 여전히 쉽게 부러뜨릴 수 있지 않나?"
"...내가 괜한 비유를 했다. 잘못했어. 그냥 여기 귀족들을 배려해주고 싶어서 그래. 전투에서도 공을 세우지 못한데다가 도망치는 포로들을 잡지도 못했으니, 불만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잖아?"
"아하. 이해했다. 그대여. 나와 같이 훈련을 받던 기사들 중에서도 가끔 능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불만만 많은 자들이 있었다. 저들도 그렇다는 것인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이젤리아는 엘프였을 뿐이지 멍청하진 않았다. 요한이 귀족들과 교단을 배려해주겠다고 말하자 아쉬워할 뿐 금세 알아들었다.
'괜히 귀족 놈들한테 넘겨줘봤자 싸우기나 할 테니 그냥 교단의 깃발을 거는 게 낫겠군.'
-도시의 성문을 넘으면 교단의 깃발을 성벽 위에 걸어도 되겠습니까?
-각하... 각하의 신앙심은 정말로 저를 감동시킬 뿐입니다!
* * *
거대한 도시는 숲과 강과 산맥을 끼고 있었다. 아직 개척이 덜 된 자연 사이에 위치한 문명의 모습은 이질적인 위용을 뽐냈다.
"드워프 산맥도 오랜만에 보는군."
수에틀그는 새삼스럽게 중얼거렸다. 신성 제국과 반도를 구분 짓는 기다란 드워프 산맥. 몇 번이고 멀리서 그 모습을 봐왔지만 이번에는 정 반대 방향에서 보는 셈이었다.
"산 쪽으로 무슨 용병들이 이렇게 많이 갑니까?"
"눈도 좋군. 아마 산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고용한 거겠지."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병들을 고용해서 들어갈 정도로, 산은 보물들을 품고 있었다.
< 207 산맥과 도시 (1) > 끝
< 208 산맥과 도시 (2) >
메레느 시가 여러 자유시 중에서 손꼽히는 재력을 갖추고 제국과 교단의 정쟁에 끼어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산맥이었던 것이다.
산에서 나오는 희귀한 약초들과 모피, 귀중한 금속 광산들까지.
'하긴 단순히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정도 규모의 도시로 성장하기는 힘들었겠지.'
"약초꾼에 광부에... 행상인들도 산에 올라갑니까?"
"산 곳곳에 작은 개척촌들이 있을 테니, 거기에 물건을 대러 가는 것 아니겠나. 돈을 가릴 때가 아니니 비싸게 살 거야."
"몬스터들이야 좀 나오더라도 저런 산이 있다니 부럽습니다."
"저런. 너무 부러워하진 말게나. 자네의 영지도 잠재력이 있으니까. 십 년 안에 주변에서 손꼽히는 도시가 될 걸세."
단순히 요한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수에틀그가 보기에 요한의 직할령이 가진 잠재력도 대단했던 것이다.
요한의 직할령은 주변 해로(海路)를 끼고서 활발하게 펼쳐지는 무역의 중심에 있었다. 벌써 여러 곳에서 온 상인들이 지어진 회관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백작 각하께서 거느리신 영지에 비하면 별 거 아닌 조그만 곳입니다."
아드비코는 요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도시로 군대를 끌고 이동하면서도 끊임없이 아부를 시도했다.
"글쎄. 작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도시 안의 분위기는 어떤가?"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행히 아드비코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전투에서 졌다는 소식이 도시에 도착했지만, 아드비코의 정적들이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소문을 의심하고 자기들끼리 다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떠드느라 시간을 낭비한 덕분에 그들은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했다.
덕분에 아드비코의 직위와 세력들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아드비코는 그걸 이용해 손쉽게 도시의 성문을 열었다.
'다행이군. 공성전은 사양이었는데.'
싸우면 싸울수록 늘어나는 건 싸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특히 성벽을 공략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싸움은 더더욱.
"원하신다면 가장 앞에서 깃발을 걸고 들어가셔도 됩니다."
"아니. 교단의 깃발을 걸고 들어갈 거다."
"예? 아니... 뜻, 뜻에 맡기겠습니다."
아드비코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요한은 아드비코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저런 영광을 양보하다니 미련하다고 생각하고 있나보군.'
신앙심이 부족한 귀족은 별로 드문 존재도 아니었다. 실용주의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도시귀족 출신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아드비코 입장에서는 뭐하러 공을 세워서 교단에 명예를 양보하나 싶을 것이다. 자신이라면 당당하게 앞에 서서 뽐을 낼 텐데.
하지만 교단을 방패로 쓰고 있는 요한 입장에서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조금의 신실한 태도로 이런 방패를 얻을 수 있는데 왜 남들은 그러지 않는 것일까?
"성문 개방!"
"성문 개방!"
아드비코의 말대로 성문은 쉽게 열렸다. 교단에서 나온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경계심이 보통이 아니군.'
성벽 위부터 시작해서 성문 주변까지, 도시에 관련된 사람들은 전부 두려움과 경계심이 섞인 눈빛으로 귀족들의 군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외부에서 온 군대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이들이 약탈자가 되어서 도시를 불태워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최대한 조심해야겠는데.'
다행히 요한은 몇 번의 경험으로 이런 부분에서도 요령이 생긴 상태였다. 잔뜩 움츠러든 도시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게 만드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이다.
"깃발을 더 높게 들어라!"
"예!"
"..."
물론 다른 귀족들은 기세등등하게 깃발을 높게 들어 올렸다. 성벽에서 보고 있는 도시 사람들에게 경고하듯이 가슴에 힘을 주고 검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 요한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켄타우로스 놈들이 지랄을 해도 이놈들보단 덜 미움 받겠군.'
* * *
도시 곳곳에 귀족들이 데리고 온 병사들이 배치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아드비코의 일이 시작되었다.
마음 같아서야 병사들을 등에 업고 정적들을 불러낸 다음 칼을 몸에 박아 넣고 싶었지만 일을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대번에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도시귀족들도 머리가 있고 칼이 있는 것이다.
천천히, 꾸준히, 음모와 혐의를 만들어서 몰아붙이고 포섭 가능한 놈은 포섭하고...
물론 이 과정에서 패배한 주제에 공포정치를 펼치는 아드비코에 대한 원한은 강처럼 쌓이겠지만 지금 그것까지 신경써줄 수는 없었다.
"저기 제국 놈이다! 저기 제국 놈이다!"
"놓치지 마라!"
켄타우로스들은 밧줄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설마 교단 쪽 연합군이 도시를 점령할 줄 몰랐던 제국 쪽 사절들이 기겁해서 도시를 탈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위 낮은 상인 같은 이들은 어차피 붙잡을 가치도 없어서 가만히 있어도 됐지만, 지위가 좀 있는 사절들은 아니었다.
"내가 여기로 온다고 했지? 내기에 건 목걸이 내놔라."
"아... 이 자식은 왜 이쪽으로 온 거야?"
도시에 숨어 있다가 몰래 도망치려고 시도하는 이들 덕분에 켄타우로스들만 신이 났다. 거의 사냥만큼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 야만족 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
"백작님께 바치면 금화가 될 놈 아니냐? 자꾸 시끄럽게 떠들면 어디 한 군데 잘려서 끌려갈 수 있으니까 입 닥치고 있어."
호전적인 켄타우로스들의 성질은 제국에서도 유명했다. 붙잡힌 사절은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
"잠깐. 저거 기사들 아니냐? 왜 용병들을 데리고 저러고 있냐?"
"???"
* * *
호화로운 저택에서 쉬고 있던 요한은 찾아온 귀족들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무슨 일인가?"
"백작 각하. 저희가 들어보니 이 도시에는 참으로 적들이 많더군요."
도적들부터 시작해서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몬스터들까지. 도시에 용병들이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보다 우리가 그 중 하나인 건 모르나?'
요한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요한의 긍정에 기분이 좋아진 두이노 성주는 웃으며 말했다.
"깃발을 꽂은 귀족의 마땅한 책임으로, 용병들을 고용해 몬스터들을 소탕하고자 합니다."
"오. 그 고용은 자네들의 은화로 하는 건가?"
"아닙니다. 각하. 당연히 아드비코 공께서 내주셔야죠."
"..."
요한은 처음으로 아드비코를 동정했다. 배상금과 몸값 마련으로 지금 금고를 쥐어짜고 있을 텐데, 몰려 온 연합군 귀족들이 용병 고용하게 돈 내놓으라고 협박까지 하다니.
하지만 귀족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를 위한 일에 왜 그들이 돈을 낸단 말인가.
"각하께서도 함께하시겠습니까?"
"나는 병사들을 좀 쉬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요한은 같이 온 사람들 중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비자니 주교백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른 영주들과 달리 뿌리부터 교단 쪽 영주였기에 말이 통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을 고용해서 몬스터 토벌에 나선다니. 굳이 그럴 것까지 있나?"
"아닙니다. 각하. 악한 몬스터를 물리치고 어린 양들을 구하는 건 신자로서 당연한 의무 아니겠습니까?"
다른 귀족들은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불타고 있었다면 주교백은 신앙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교단의 성격을 잊고 있었군.'
"...그렇군. 성공적으로 진행되길 빌지."
요한이야 굳이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참가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런 토벌은 해서 나쁠 거 없긴 했다.
영주들이 농노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행사 중 하나가 몬스터 토벌이었다. 전사들이 몬스터를 사냥하고 돌아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강한 상징력을 갖고 있었다.
도시라고 다를 거 없었다. 성공적으로 토벌이 끝난다면 도시 사람들이 가진 불안감이나 경계심은 확 줄어들 것이다.
물론 용병들을 고용하는 돈은 아드비코의 주머니에서 나가겠지만...
* * *
"천한 용병 놈이 도시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호화로운 저택에 모인 도시귀족들은 살기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서 말하는 천한 용병 놈은 아드비코였다. 그의 선조가 용병대장이었던 걸 꼬집고 있는 것이다.
독단적으로 황제와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킨 것까지는 봐주더라도, 실패했는데 뻔뻔하게 칼을 휘두르는 그 모습에 도시귀족들의 분노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죽입시다!"
"어제 모피공 길드의 대표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했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쫓아내겠단 거지! 내버려두면 우리가 그 꼴이 날 것이오."
"하지만 그 놈 뒤에는 교단의 군대가 있지 않나?"
도시귀족 중 한 명이 두렵다는 듯이 말했다. 도시 안 곳곳에 교단 쪽 군대가 있는데 아드비코를 죽인다면, 분노한 군대가 도시를 불태워버릴지도 몰랐다.
"걱정할 거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했으니! 아드비코 그 놈은 교단과 그리 밀접한 관계도 아닙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애초에 군대를 일으켜서 교황을 납치하려고 한 자가 어떻게 사이가 좋겠습니까. 아마 배상금과 몸값을 낼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감언이설로 놈들을 꼬드긴 게 분명합니다."
도시귀족의 추측은 꽤나 정확한 편이었다. 교단의 군대가 아드비코 뒤에 있긴 했지만, 이들은 딱히 아드비코가 부릴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아드비코가 죽는다고 딱히 교단 점령군이 날뛰진 않을 겁니다. 아드비코와 놈의 가문 사람들을 죽인 다음 배상금과 몸값을 지불하도록 협상하면 됩니다."
그 말에 분위기는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떻게 아드비코를 죽일지 수군거렸다. 다행히 도시에는 솜씨 좋은 용병들이 많았다.
"잠깐. 내가 할 말이 있소이다."
"뭐요?"
"교단의 귀족들 중에 예이츠 백작이 있는데, 좀 주의해야 하지 않겠소? 소문을 들어봤는데 보통 기사가 아니라고 하더군."
"아."
몇몇 도시귀족들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전투가 있었는데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호기심 섞인 눈빛을 던졌다. 이 자리에는 도시에 들어온 요한을 만나 본 몇몇 이들이 있었다.
"당신이 만나본 적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땠나?"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거친 맹수 같은 기사를 상상했다. 상처투성이에 숨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며 살기를 내뿜는 백전노장의 기사.
그 정도는 되어야 소문에 걸맞은 모습일 것 같았다.
"나름 친절하고 신실하던데?"
"..."
"...뭐?"
동료의 말에 다른 도시귀족들은 어이없어했다. 지금 저걸 말이라고 한단 말인가.
"설마 뭐라도 받은 건가?"
"무... 무슨 말을. 당장 취소하게!"
"자. 자. 말이 심하긴 했네. 하지만 자네도 제대로 말해줘야지."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란 건가! 나보고 거짓말이라도 하란 건가!"
도시귀족은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선물을 들고 찾아갔던 그였다.
요한은 선물을 받는 대신 근처 신전에 기부해달라고 말하고, 오히려 그에게 귀한 선물을 내주었다. 도시귀족 입장에서는 홀딱 반할 수밖에 없는 친절함이었다.
"예이츠 백작이 대단한 기사라는 건 나도 들었소. 하지만 우린 아드비코를 죽이려는 거지 백작을 죽이려는 게 아니잖소."
"동의합니다. 막말로 뛰어난 활잡이나 쇠뇌잡이 한 명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솜씨 좋은 용병을 구해보겠소. 자. 모두 신 앞에 비밀을 맹세합시다."
도시귀족들은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열 명을 고용해서 한 번만 성공해도 아드비코는 저 세상으로 가리라!
* * *
귀족들이 용병들을 고용하고 도시귀족들도 용병들을 고용하는 동안, 요한은 도시에서 제국 쪽 포로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요한은 붙잡힌 이들이 머무르는 저택에 매일 찾아가서 말을 걸었다. 원래라면 시종을 시켜서 부르거나 소식만 전해도 될 일이지만 요한은 그러지 않았다.
이런 기회만큼 생색내기 좋은 기회가 또 없는 것이다.
"백, 백작 각하. 또 오신 겁니까? 사람을 보내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
"그럴 수야 없지. 내가 비록 운이 좋아서 경을 포로로 잡았지만, 경 같은 기사에게 멋대로 명령을 내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상대 이름은 제국에 있을 때도 들어본 적 없었지만 요한은 많이 들어본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줬다. 상대는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요한은 인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로 말을 이었다.
"카르디리안의 권세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건 경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곧 무너질 걸세. 어떤 선제후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하, 하지만..."
"난 경 같은 기사가 그런 불명예스러운 폭군 밑에서 싸운다는 사실이 참으로 분하네!"
< 208 산맥과 도시 (2) > 끝
< 209 산맥과 도시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