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얀 추장 (2)
짐승 같은 놈들이라. 난 몸을 살짝 뒤로 빼 거부감을 보여주었다.
"사람을 죽여 달라? 그것도 여럿을? 정계와 엮여있는 일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표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놈들인가에 따라 달라질 일이지만, 일단은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같은 대가라도 어려운 티를 내야 값어치가 높아지는 법이니까.
추장은 의혹을 부인했다.
"그런 거 아니오. 아까 말이 나온 광산 건 때문에 오해를 하신 것 같군."
"광산만이 아닙니다. 당신들에겐 부족의 성지 문제도 남아 있잖습니까? 제 기억이 맞다면 바보퀴바리 산의 정상이었지요?"
"...바보퀴바리가 아니라 「와우 키울릭」이오. 세상의 중심이지. 이방인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일 테지만, 적어도 우리 앞에선 그 땅을 침략자들이 붙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주시오."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거기까진 미처 기억이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해하오."
추장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진다.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고, 또한 일부러 꺼낸 화제였다.
'주요 거래상대의 심리적 약점을 잊을 리가 있나.'
상처가 깊은 상대는 흔들기가 쉽다. 그 상처를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와우 키울릭(Waw Kiwulik)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솟아있는 부족의 영산(靈山)이다. 「사막의 사람들」은 그 산의 북쪽 봉우리에 창조신 「이이토이」, 일명 '미로 속의 사내'가 머무르며 인간과 세상이 조화를 이루도록 이끈다고 믿는다.
허나 그 산은 명목상으로만 부족의 땅이며, 실제로는 미국 정부가 영구적으로 임대해놓은 상태. 그리고 신성한 봉우리 앞, 부족민들이 신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평탄한 자리엔 세계 최대 규모의 태양망원경을 포함하는 대단위 천문관측시설이 들어서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여쭙는 것인데, 그 문제는 어떻게 조금이라도 개선이 되었습니까?"
내가 던진 질문은 추장을 격앙케 만들었다.
"말도 마시오. 놈들은 이제 신성한 봉우리마저 파헤쳐 놓았소!"
"저런."
"부족의 어른들이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거요. 사기꾼들이 내민 계약서의 핵심을 간파하지 못한 채 서명을 해버렸지. 정말 빌리겠다는 뜻인 줄로만 알고...."
과연 그럴까?
난 「사막의 사람들」에게도 이완용과 을사오적이 있었을 것을 믿는다.
비록 임대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철회가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계약이었다. 철회가 불가능한 임대 계약이 영구조차와 다를 게 무엇인가. 그 뒤로 60년여가 흘렀어도 부족은 빌려준 땅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미국이 지불한 계약금은 현재 가치로 환산했을 때 50만 달러쯤 된다. 한화로 6억이다. 그리고 임대료로는 에이커 당 매년 25센트(약 3백 원)를 지급하는 중이었다.
늙은 추장이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녀인 마샤트가 그 떨리는 주먹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무심을 가장한 시선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있다. 딴에는 감추려는 모양이지만 내 눈이 눈인지라.
나는 과거를 언급했다.
"추장님, 당신께서 내게 처음 거래를 제안하던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부족 소유의 카지노가 하나밖에 없었을 적의 일이었죠, 아마."
현재는 카지노가 넷이다. 그때의 추장은 이제 막 사업을 일으키는 아마추어였다. 나이는 많았으되 사업가로서의 관록이 없었고, 배경 역시 지금보다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쉽게 넘어가주지 않으며 간을 보자, 지치고 애가 닳은 추장은 제 밑천을 다 보여주고도 모자라 부족의 아쉬운 처지까지 낱낱이 털어놓으며 연민을 구하려 애썼었다. 내가 지닌 「사막의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추장 개인에 대한 이해는 그때 들은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다.
'이 늙은이가 운이 좋았지.'
난 정의로운 사람은 아닐지언정 제국주의를 혐오한다. 추장의 발버둥은 내게서 최소한의 동정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즉 추장과 나의 첫 거래는, 1할 가량은 내 개인적인 호의가 더해져서 성사된 것이다. 계약도 공평하게 맺었다. 나는 그 점을 은근히 상기시켜준 것이고.
"당신의 사업이 궤도에 올랐어도 부족의 형편은 나아진 게 없군요. 친구로서 유감을 표합니다, 추장."
"친구?"
"아닙니까?"
"...글쎄올시다. 회장이 보여주었던 호의는 지금도 고맙게 여기고 있소. 당신에겐 다른 놈들과 차별화되는 무언가가 있었다오. 그래서 난 지금도 당신을 다른 고객들과는 별격으로 대우해 드리지. 지금 이 대화도 그렇고...."
여기서 추장은 어조를 바꾸었다.
"그러나 우리가 친구인 줄은 미처 몰랐군. 진정한 친구란 어려울 때 조건을 달지 않고 도와주는 관계일 텐데?"
"내가 태어난 나라엔 친구 사이에도 보증은 서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오히려 더 오래 가지 않습니까?"
"하."
침착한 내 대답에 추장이 쓴웃음을 머금는다.
왜 하필 보증을 예로 들었느냐면, 추장의 사업이 초기에 신용을 확보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로 다른 부족들 간의 무제한적 연대보증제도였던 까닭이다. 한 부족의 카지노에서 지급을 보증한 계좌는 다른 부족의 카지노에서도 마찬가지로 지급을 보증하는 방식. 그러나 그 끝은 좋지 않았다. 처음엔 11개 부족이 연대하여 시작했던 사업이 오늘날엔 고작 5개 부족의 협약으로만 남았으니. 그나마도 제한적인 금액에 대한 상호보증으로 축소되어서.
눈앞의 노인이 선방하지 못했다면 5개 부족의 '축소된 우정'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추장은 미소를 지우며 말을 이었다.
"이번 부탁을 들어준다면 나도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하리다. 당신의 의뢰를 친구의 부탁으로 받아들이지."
"그 말씀은?"
"한두 사람 소개시켜주고 마는 게 아니라, 당신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성심성의껏 돕겠다는 뜻이오. 이후에도 우정으로서 거래에 더 많은 편의를 봐드리고."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처음부터 못 박아둔 점은 불쾌하지만, 조건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다.
이때, 갑자기 집안의 전원이 일시에 끊어졌다. 조명이 꺼지고 에어컨과 냉장고의 소음도 지워진다. 내 일행의 즉각적인 경계태세로 실내의 긴장도가 팽팽하게 치솟을 때, 주위를 슥 둘러본 내가 손을 들어 부하들을 가라앉혔다. 바깥에 공격의 전조 따윈 없었으므로.
조용한 가운데 모래 섞인 바람이 불고, 처음 에스코트를 자청한 경찰 둘이 순찰차 안에서 지루하게 대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추장이 애써 수치심을 감추며 말한다.
"다들 너무 놀라지 마시오. 아마 빌어먹을 개미새끼들의 짓일 거요."
"개미?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라즈베리 미친 개미」라고, 심심하면 배전반으로 기어들어가 합선을 일으키는 이상한 것들이 있소. 번식력과 적응력도 미쳐서, 요즘 그것들 때문에 북미 남부가 다 난리라오."
"흠...."
멧돼지나 외래종 칡의 무제한적인 확산으로 미국이 시름한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개미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다.
하기야 땅이 넓은 만큼 환경재해도 많을 것이다. 미국 정부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는 원주민들에겐 더욱 고생스러울 재해였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
나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일단 사냥감에 대한 정보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추장이 끄덕인다.
"표적은 「백색근위대(White Guard)」라는 집단이오."
"이름부터 노골적이군요. 네오나치입니까?"
"맞소. 과거에 존재했던 「침묵을 지키는 형제단」을 계승하겠다며 최근 「미국전선(American Front)」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버러지들이지. 혹시 「미국전선」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소?"
"아, 그놈들은 압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네오나치 스킨헤드 집단이다. 범죄조직으로서는 함량미달이어도 미국 내의 유색인종들에겐 해로울 단체였다. 그놈의 천박한 백인우월주의는 세월이 흘러도 사라질 줄을 모른다.
추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 버러지들이 보호구역 밖에서 삶을 개척하던 우리 부족 청년들의 터전을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있소. 강도를 당한 사업장이 서른하나에 죽은 사람이 아홉, 실종자가 여섯이오."
"그 지경인데도 경찰이 안 움직입니까?"
"흥. 시기와 지역이 제각각이고 관할부서마저 제각각인 사건들이니까,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그자들 입장에선 별일이 아닌 게요. 게다가 압력을 행사하는 자도 있는 것 같소. 「백색근위대」의 간부나 지지자, 혹은 후견인쯤 되는 인물이겠지."
정체는커녕 존재여부조차 확실치 않다는 소리. 이 바닥에서 나름 명성 있는 추장이 그 정도도 파악 못한 것으로 미루어 광산 건에 정말 전력을 쏟고 있나 보다. 돈이든 사람이든.
하기야 구리광산 채굴권이면 좀 커다란 이권인가. 그거 하나로 부족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으니 충분히 이해 가능한 선택과 집중이었다.
"언론은 어땠습니까?"
"기자라는 것들은 흑인이 당하는 차별엔 관심이 많아도 우리가 당하는 차별엔 관심이 없어요, 회장. 그 잘난 인간들에게 우리는 그저 도박장이나 운영하는 쓰레기들인 것을."
사실을 말하자면 도박장이나 운영하는 게 아니라, 도박장 이외엔 가능한 사업이 없는 것이다.
'전형적인 낙인찍기 전략이지.'
도박은 악덕이다. 미국인들이라고 카지노를 좋게 보겠는가.
연방정부가 원주민들에게 선심 쓰듯 던져준-내막을 알고 보면 법정 공방 끝에 정말 마지못해 인정한-카지노 운영권은, 원주민 보호구역의 거의 유일한 밥줄인 동시에, 원주민 부족들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시궁창으로 처넣는 원흉이기도 했다.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뜨린 인식은 원주민에 대한 혜택을 줄일 때 대중적인 지지로 돌아온다.
돈만 있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본인의 말마따나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는 상황.
"즉 그 「백색근위대」를 힘닿는 데까지 척살해주면 되는 겁니까?"
내 물음에 추장이 굳은 얼굴로 긍정한다.
"문자 그대로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라오."
"경고는 전하지 않으시렵니까?"
"마음은 굴뚝같지만, 사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겠소? 광산에 관한 법적 투쟁은 또 어떻고? 우리는 지금 사소한 혐의라도 피해야 할 때요."
"그렇군요."
말하는 걸 보니 사리판단이 흐려지진 않았다.
왜 직접 처리하지 않느냐는 멍청한 질문을 할 필요는 없다. 일단 법정투쟁과 로비에 바빠 여력이 없겠거니와, 부족의 땅 밖에서 원정을 뛴 경험도 드물 테고, 가뜩이나 바닥인 원주민의 이미지에 조직범죄를 덧칠할 위험을 감수하기도 싫겠고.... 나는 습관처럼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시간을 끌다가, 추장이 조바심을 낼 무렵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는 거요?"
"예. 가장 좋은 결과는 경고를 받을 조직이 아예 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
사나운 짐승은 때로 사냥꾼을 죽인다. 더욱이 지금 사냥꾼인 나는 사냥감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모르는 상황. 추장이 신중한 태도로 재확인했다.
"내가 할 소린 아니요만,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 아니오?"
"그렇게 보입니까?"
"...모르겠소. 내가 당신의 모든 능력을 알지는 못하니."
능력이라. 이 늙은이는 내가 지닌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어쨌든 협상은 이쯤이면 됐다. 최선의 결과는 아닐지언정 아예 결렬된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 나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가 서로 합의에 도달한 것 같군요. 바쁜 몸이라 하셨으니, 다른 용건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잠깐. 이렇게 가신다고?"
"예. 한시라도 빠르게 당신의 의뢰를 처리하려는 겁니다."
"...."
"뭔가 또 용건이 있으십니까?"
조금 당황한 기색인 추장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당신은 내 능력을 알게 될 겁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약속한 우정을 준비해두십시오, 친구."
추가 정보 따윈 요구하지 않는다. 카지노의 정보력을 기대할 수 없는 시점이라는 건 벌써 확인했으니까. 마음을 먹는다면 정보를 구할 방법은 얼마든지 많다.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든 사냥감들에 대한 정보든. 이번 기회에 실력을 좀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문가로 배웅을 나온 추장은 손녀와 나란히 서서 내가 탄 차가 떠나는 걸 지켜보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경태가 말했다.
"빈말로라도 누군가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건 처음 들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한마디 더 덧붙인다.
"그러니까, 사전적인 의미로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관용적인 표현으로 그 친구들 운운한 적은 있을지라도.
허나 그래봐야 계산이 많이 들어간 표현이다. 난 차창 밖을 보며 답했다.
"그땐 조금 다른 생각이 들더구나."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잘하면 여기서도 인력을 구할 수 있겠구나 하는."
"영국으로 보낼 인력을요?"
"그래. 한편으로는 카지노의 후계자에게 나의 차별성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고."
"아하."
차창 밖을 스쳐가는 마을은 폐허를 닮아있었다. 드물게 보이는 사람도 폐허의 일부일 뿐 생동감을 더하진 않았다. 그들의 낯짝에 생동감이라곤 눈곱만큼도 묻어있지 않았기 때문. 나른한 눈빛들은 세상의 밑바닥에서 관성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의 특징 같은 것이었다.
"경태야."
"예."
"만약 이곳의 원주민들에게 힘이 주어진다면, 이들과 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관계가 어찌 변할 것 같으냐?"
"어...."
내가 말하는 힘은 당연히 원시마법 내지 초능력을 뜻한다.
궁리하던 경태가 머리를 긁었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요? 미국 애들이 여기 있는 친구들을 좀 더 인간적으로 대우해주거나, 아니면 위협으로 인식해서 지금보다 더 확실하게 밟아놓으려고 들거나."
"가능성이 보다 높은 쪽은?"
"저는 뒤쪽일 것 같은데요."
"왜?"
"인간적으로 대우해주려면 돈이 들잖습니까."
경태다운 간결한 이해였다.
나도 동의한다. 당장 성지만 해도 그렇다. 그 땅을 반환하자면 지금껏 거기에 투자한 자금과 지어놓은 시설들을 매몰비용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미국이 과연 그러려고 할까? 이는 국제 천문학계에서 미국이 보유한 입지까지 위협할 결정이다.
어찌되었든, 미국은 적당히 외면해온 자신들의 원죄와 새롭게 대면하게 될 터다.
'미국만이 아니지.'
사회현상으로서의 능력 각성은 계층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질 확률적인 힘이다. 그렇다면 그 힘의 균형은 숫자가 더 많은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힘이 없어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자들이 온 세상에서 들고 일어나 자신들의 지분을 주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굶주렸던 만큼의 분노와 갈증과 탐욕스러움으로. 사회적 약자들은 억울한 집단이지, 선한 집단이 아니다
요컨대, 불평등한 세상에 도래할 불평등의 대가다.
세상이라는 무대에 새롭게 올라올 자들을 매미로 비유했던 경태의 말이 되살아난다. 곱씹을수록 감칠맛이 배어나는 표현이었다.
"매미들이 울겠구나."
내 독백에 경태가 반응했다.
"예?"
"신경 쓰지 마라. 혼잣말이었다."
"예에...."
갸우뚱하며 다시 앞을 바라보는 경태.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매미들아, 너희의 목청이 터지도록 울어라. 그렇게 시끄러워야, 원탁의 마법사들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내 발소리를 듣지 못할 터이니.
#5. 짐승사냥 (1)
이 바닥에서 세력의 분리는 결코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본격적인 기업화 이전의 스트리트 갱이 특히 더 그러한데, 이런 유형의 동네 양아치들 대부분은 자기네 동네(Street)를 떠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죽으나 사나 그 동네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 것이다.
「백색근위대」와 「미국전선」의 관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허름한 주택과 저렴한 임대료야말로 이 짐승들을 가둬놓는 가장 강력한 우리. 「백색근위대」에게 후원자가 존재한다는 추장의 추측이 사실일지라도, 그 후원자가 양아치들에게 집까지 사줬을 린 없잖은가?
그러므로 최근에야 갈라진 두 꼴통집단은 서로 영역이 겹칠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신흥 조직인 「백색근위대」의 근거지를 찾겠답시고 미적거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다음 행선지를 「미국전선」의 활동영역인 오클랜드로 수정한 이유다. 원래의 일정이 늦춰지는 건 아쉽지만, 의뢰를 받았으면 신속하게 해결하는 편이 좋다.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해 오클랜드로 향하는 비행기 내에서, 옆자리의 경태는 노트북으로 기내 와이파이에 접속하여 나름대로 정보를 찾는 중이었다.
녀석이 한 손을 입가에 대고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미국까지 와서 사냥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애매한 시간대의 국내선 퍼스트 클래스 객실은 탑승객이 없어 적막했다. 나는 시선을 스마트폰 액정에 둔 채 적당히 대꾸해주었다.
"네가 중국에서 하던 것보단 쉬울 거다."
"어휴, 중국에 비하면 어디가 어렵겠습니까? 거기는 감시가 좀 심해야 말이죠."
이렇게 말하며 실실 쪼개는 경태는, 이래봬도 사람을 찾아 고문하고 죽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놈이다. 이 녀석은 조직이 오랫동안 지지부진하게 끌어왔던 아홉 건의 인간사냥을 성공시켰고, 그로부터 거둔 수익은 한화로 약 2조 3천억에 달한다.
내가 이 녀석을 괜히 개 같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사냥개도 이런 사냥개가 없을 것이다.
경태가 자신의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냥을 회상했다.
"쩌어기 지난(?南)에서 한 방에 1조 9천억을 건졌을 때가 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최고인 순간이었지 말입니다. 그 돈 빼돌리는 데에만 반년이나 걸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 자식이 진짜, 손톱을 뽑고 발가락을 써는데도 돈을 안 뱉으려고, 한국에서 가져온 돈은 다 써서 없어졌다고 울면서 사기를 쳐대는데, 와.... 그 직업정신 하나만은 이 김경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놈은 진짜 뼛속까지 사기꾼이구나 하고요."
"그땐 네가 고생이 많았다."
"고생은요! 다 형님을 위해서 한 일인데요."
"...그래."
자주 듣는 무용담이라 지겹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칭찬은 사냥개를 춤추게 한다.
더군다나 이 녀석의 자랑스러움은 사냥을 성공시켰다는 게 아니라, 그럼으로써 다른 어떤 사냥개들보다도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11년에 걸쳐 870억의 예산을 들였던 추적은 허탕으로 끝났을 공산이 농후하다.
경태가 말한 것처럼, 수익사업으로서의 인간사냥은 대개 해외로 도주하는 사기꾼들이 표적이었다. 사기꾼 하나 제대로 잡으면 그놈이 죽어라고 세탁해놓은 자산이 적게는 수십억, 많게는 수천억씩 들어오는 것이다. 경태의 1조 9천 억짜리는 격이 다른 월척이었고.
이런 사냥감들은 범죄자 신분인 만큼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준비를 열심히 해놓는다. 바꿔 말해, 이미 '없는 사람'이기에 정말로 없애버려도 법적인 문제가 따르지 않는다. 최소한 치안당국의 공식적인 수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흔적만 잘 지운다면.
이보다 더 유익한 사냥은 제국주의자 사냥이 유일하지 않을지.
'한 번은 잡음이 좀 있었어도....'
내 조직엔 억울한 꼴을 당했던 놈들이 많은지라, 사냥개 중 하나로부터 일부라도 좋으니 수익금을 피해자 구제에 쓰는 게 어떻겠느냐는 얼빠진 건의를 받기도 했다.
나는 그 건의에 대하여 이렇게 답해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리고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책임을 져야 할 놈들은 따로 있는데, 왜 내가 꼬리를 밟힐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
폰지 사기 같은 대규모 사기행각은, 끊임없이 새로운 희생자를 끌어들여야하는 특성 때문에라도 주변에 수많은 흔적들을 뿌린다. 그리고 사기꾼이 사업을 정리하고 해외로 뜰 때까진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 동안 사기꾼은 최선을 다해 도피할 준비를 한다.
즉 장대한 사기행각이 결실을 거두기 전에 사기꾼을 잡아넣을 시간과 기회가 넘쳐나는 셈이다. 바로 그렇기에 내 사냥개들이 미리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매월 고정 10% 수익 보장 운운 하는 순간 곧바로 사기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소리를 듣고 곧바로 수사당국에 신고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짜증을 내거나 경멸감을 드러내며 멀리할 뿐. 당하는 놈이 등신인 것이다. 이런 방관자들에겐 자신들이 작게나마 사태를 방조했다는 인식조차 없다. 나중에 비웃을 줄이나 알지.
설령 드물게 성실한 사람이 신고를 하더라도, 수사당국이 제대로 대응하는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당사자도 아닌데 왜 그러시냐는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
'혹은 신고를 받자마자 떡고물 욕심부터 내거나.'
예컨대 조희팔 사건 때는 서울고등검찰청 부장검사가 돈을 받고 영장발부를 지연시켜 조희팔 일당이 해외로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었다. 해당 검사가 결국 징역을 살긴 했지만, 그는 스스로의 변명처럼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런 놈들보단 차라리 내가 낫잖은가? 난 그나마 사기꾼들의 멱이라도 따주니까. 수사당국이 사기꾼을 잡아봐야 한국의 형법으론 징역 몇 년이 고작이다. 그것은 형벌이라기보다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면죄부에 가까웠다.
나는 사냥개들에게 정신교육으로 방어논리를 주입하는 한편, 조직이 운영하는 보육원들의 예산을 대폭 인상함으로써 조직 전체의 동기부여를 강화했다.
'멕시코 카르텔 놈들이 괜히 병원과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지.'
그러한 사회공헌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수단인 동시에 조직원들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가장 추악한 범죄자조차 자신이 어떤 면에선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 심리를 꿰뚫지 않고선 거대한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 내 조직은 더더욱 그러하고.
"어라."
경태가 노트북 화면을 나에게로 돌렸다. 화면엔 사내 메신저 대용으로 쓰는 P2P 채팅 프로그램이 떠있었다.
"수연 누님의 연락입니다. 결재를 받을 일이 있다는데요?"
"지금은 비행기 안이니 나중에 대화하자고 해라."
"옙."
경태는 재빠른 타자로 짧은 답신을 보냈다. 수연은 더 이상 어떤 메시지도 입력하지 않았다. 여기는 미국이고, 기내에서 암호화된 패킷을 주고받으면 감시 대상에 오르기 십상이었다.
낡은 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습한 날의 바다 냄새가 터미널 안쪽까지 밀려든다. 우리는 준비된 차를 타고 북쪽 항만으로 이동했다. 홍영식이가 예약한 숙소는 페리 선착장에 인접한 중간 규모의 호텔이었다. 호텔의 푸른 지붕이 우중충한 하늘 아래 물빛으로 번들거린다.
굳이 파도가 가까운 숙소를 얻은 건 스트리트 갱의 생리 때문이다. 놈들은 밀수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다. 이런 놈들의 호구지책은 대개 덩어리로 떼어와 불순물을 섞어 몇 온스씩 소분해서 파는 마약이었다. 보호세 갈취나 절도, 강도 등은 부차적인 수입에 불과하다.
그럼 그 물량을 어디로 들여오는가?
가장 편한 건 역시 뱃길이다. 공항은 검문검색이 훨씬 엄격하고, 도로는 중간에 검거를 당하기 쉽다. 그러나 배는, 너른 해상 어딘가에서 환적(換積)을 한 번만 해줘도 추적이 어려워진다. 이것이 바로 분선밀수다. 내 조직이 다수의 원양어선과 화물선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찰 예산이 바닥을 치는 오클랜드는 분선밀수를 하기에 좋은 도시였다.
내 눈엔 호텔 앞 부두에 매여 조용히 흔들리는 요트들도 밀수 수단으로 보인다. 실제로 몇 척은 선실 어딘가에 민감한 화물이 실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수상해도 영장 없이는 뒤질 수 없고, 뒤져서 발견한들 증거물로 쓸 수 없다. 독수독과(毒樹毒果)의 원칙.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경호팀 애들 일부가 연장을 구하러 나간 사이, 나는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종단간 암호화(End to End Encryption)로 보호되는 통화여서 감청 걱정은 없다. 수연 녀석은 신호가 가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받았다.
「형님.」
"결재가 필요한 사안이 있다고 들었다만."
「예. 광둥 삼합회가 미제 군납용 무기 공급을 대량으로 요청했습니다.」
"미제? 대량이라면 뭘 얼마나 사겠다는 거지?"
「기간을 정했을 뿐 종류나 상한을 명시하진 않더군요. 사실상의 무제한 매입 선언입니다.」
"...."
운이 나쁘군. 무제한으로 비축하려는 시점에서 무제한으로 사들이는 주문이라니.
「죄송합니다, 형님. 거절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당연히 그랬겠지."
삼합회의 의뢰는 대놓고 거절하기도 어렵다.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하면 자기네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중국 놈들의 체면이란.... 그래도 외국물 먹은 분파는 좀 덜한데, 본토에 있는 놈들이 문제다.
게다가 광둥에서 노는 것들은 공산당의 더러운 손발이기까지 하다. 향후 중국 내 활동을 완전히 접을 작정이 아니면 어느 정도는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가격협상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다. 거래를 깨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상대가 받아들이지는 못할 가격을 제시하는 것. 수연은 그 미묘한 선에서 줄타기를 할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연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이번 거래의 마진을 이례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려 놓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진이 몇 프로냐?"
「돌격소총 분류가 순정으로 3천 8백 퍼센트입니다.」
어처구니가 없다.
"녀석들이 그 조건을 받았다고?"
「예. 다른 품목들은 직접 보십시오.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난 통화를 끊지 않은 채로 수연이 보낸 파일을 열어보았다. 마진율은 품목에 따라 최저 3천 8백 퍼센트에서 최대 1만 2천 퍼센트까지 다양했다.
다른 조직과 거래할 때 마진율을 산정하는 기준은 정규 무기시장에서의 평균 거래가다. 그리고 암시장에서의 일반적인 마진율은 최대 1천 퍼센트 안팎이었다. 운송경로와 판매처에 따라 큰 폭으로 달라지고, 물건을 받은 소매상이 가격을 추가로 올리긴 하지만.
예컨대 정가 8백 달러짜리 자동소총이 있다 치면, 암상인이 최종적으로 팔아넘기는 가격은 1천 퍼센트를 더한 8천 8백 달러 가량이 되는 것이다. 보통 북미에서 물건을 떼어 남미에다 파는 놈들이 이 가격을 받는다. 이는 운송비와 리스크 관리 비용을 합산한 가격이기도 하다. 암시장에서 무기 사려는 놈들 치고 떳떳한 놈은 없으니까.
내가 실제로 물건을 받아오는 가격은 정규 거래가보다 한참이나 낮기 때문에, 명목 마진율이 3천 8백 퍼센트면 실질 마진율은 그 두 배를 훌쩍 넘어간다. 소총 한 자루를 팔 때마다 2만 달러 가까운 순이익이 남는 셈.
촉이 온다.
이번 거래의 진짜 상대는 중국 정부다. 평소처럼 삼합회에게 일을 맡겨놓는 수준이 아니라, 당과 정부가 삼합회의 껍데기만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로부터 추궁을 받았을 때 당당하게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나 같은 암상인에게 바가지를 써가며 의뢰를 할 이유가 없다. 자신들이 이미 집중적인 감시와 견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서구권 첩보기관들의 눈 밖에 있는 제3자에게 하청을 주는 것이다.
가끔 한 번씩 일어나는 일.
"어디로 가는 물건이지?"
「1차는 라엠 차방 항(港)입니다. 최종행선지는 아직 밝히지 않았습니다.」
"...라엠 차방이라면, 태국 남쪽에 있는?"
「예.」
"쿠데타라도 지원할 셈인가?"
「육로를 통해 미얀마 북부로 가는 물량일 수도 있습니다.」
수연 또한 상대가 중국 정부라는 걸 기정사실로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얀마 북부엔 연합와주군(UWSA)이라는 반군집단이 웅거하고 있다. 와족(?族) 독립국가 건설의 기치를 내건 이들은, 사실 창설 단계부터 중국 공산당의 배후 조종을 받아 왔다.
중국의 전략은 간단하다. 병 주고 약 주기. 뒤로는 반군을 지원하여 미얀마의 경제적, 정치적 부담을 가중시키면서, 앞에서는 일대일로 사업으로 돈뭉치를 흔들어 보인다. 미얀마에게 있어서 일대일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된다.
한 국가를 장악함으로써 나올 정치경제적 이익에 비하면 암상인에게 던져줄 파격적인 마진쯤은 사소한 지출에 불과할 터.
'아니었으면 파키스탄제 복제품이나 주문했겠지.'
가내수공업으로 쏟아내는 파키스탄제 복제품들은, 내구성과 신뢰성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가격이 대단히 저렴하다. 콜트 권총(M1911)의 현지 조달가가 자루당 4만 원 꼴이니 말 다 했지. 대량으로 구매하면 3만 원 선까지 깎을 수도 있었다. 그들이 비록 요 몇 년간 크게 몰락하긴 했어도 중국의 주문을 못 받아줄 정도는 아니다.
요컨대 중국 놈들이 굳이 비싼 값을 치러가며 정품을 요구한다는 건, 지원을 받는 쪽의 전투수행능력과 사기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아울러 지원대상과의 관계 역시도.
나는 수연의 의견을 물었다.
"네가 보는 가능성은 몇 대 몇이냐."
「미얀마가 90에 태국이 10입니다.」
"미얀마를 더 쥐어짜서 나올 게 있나?"
「그보다는 그간 연합와주군을 지원해온 것에 대한 미얀마 정계와 여론의 거부감을 무마해보려는 의도가 아닐까 합니다. 민주화를 기점으로, 전처럼 시민들의 불만을 총칼로 찍어 누를 수만은 없게 되어버린 나라니까요.」
연합와주군의 장비는, 자체 생산하는 AK 소총 정도를 제외하면 차량에서 대공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온통 중국제로 도배되어있다. 수연의 가설이 맞다면 중국은 이제 와주군에게 미제 장비를 풀어 자기네 이미지를 세탁해보려는 것일 터였다.
비록 필리핀처럼 평화협정을 체결하긴 했어도, 와주군은 미얀마의 가장 중대한 안보위협들 가운데 하나다.
"정권이 친중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건가?"
「제가 판단하기로는, 예. 장기적인 이미지 관리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항구를 비롯해 지켜야 할 이권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적어도 자기네에게 우호적인 인사들에게 약점을 만들어주긴 싫겠죠.」
"흠."
미얀마 기득권층은 중국의 돈을 먹고 개가 된 지 오래다. 그건 민주화 총선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비록 군부가 권력을 내주긴 했어도, 각계각층의 요직엔 여전히 군부 인사들이 포진해 있으므로.
그중 누구누구가 중국의 항문을 핥는 애완견인지는 오직 개가 된 본인과 주인만이 알 것이다.
"이렇게 하자."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서 우리도 세탁을 한 번 하고 가지."
#5. 짐승사냥 (2)
「세탁...입니까?」
"그래. 대가를 돈 대신 무기로 달라고 해라. 아니면 형식적으로나마 돈을 받은 다음 주문을 넣는 식이어도 좋겠고."
「....」
3천 8백 퍼센트의 마진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총 한 자루를 서른아홉 자루와 교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총기의 가격 차이는 감안해야겠지만.
거기다 우리가 보유한 물량을 미제에서 중국제로 세탁하고 나면,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쓰거나 팔기가 편해진다. 중국제를 운용하는 국가와 무장단체들이 죄다 제3세계에 분포하고 있어 추적이 그만큼 까다로워지는 까닭이다.
무기를 주고 무기를 받는 꼴이 우습기는 해도 충분히 성립 가능한 거래였다. 무기비축과 금전적 이익 모두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저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닙니다만, 그들이 과연 응하겠습니까?」
"왜, 자존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정이 어찌됐건, 결국 미제에 비해 중국제를 싸구려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의 열등감이 폭발하겠죠.」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형식이지. 우리의 거래 상대는 어디까지나 삼합회다. 상하는 건 삼합회의 체면일 뿐, 공산당의 체면이 아니야. 바로 네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조건만 맞는다면 협상은 끌어가기 나름인 법.
"놈들이 분개하거든 마진을 조금씩 깎아줘라. 낮아지는 대금을 보면 실무자가 누구든 욕심이 생길 테지."
기존 제안을 받아들인 시점에서 예산은 이미 승인을 받은 상태일 테니까. 추가협상을 보고하지 않으면 이중장부를 쓸 수 있다.
「해 먹을 기회를 만들어주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나는 중국에 대해 한 가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에 부패하지 않은 구석은 없다는 믿음을. 이번 일을 담당하는 게 국가안전부 제3국일지, 아니면 총참모부 직속 행동소조(行?小?)일지는 몰라도, 나랏돈으로 주머니를 채울 기회가 생기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부정축재 분야에선 세계 최고의 전문가 집단이니까.
"가능하겠지?"
「해내겠습니다.」
수연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다른 일은 없고?"
「예.」
"알았다. 나중에 보자."
건조한 통화를 끝낸 나는 객실에 비치된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밖으로 나갔던 애들이 저마다 가벼운 가방을 하나씩 휴대하고 돌아왔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의심을 피하고자 분산해서 움직인 건 물론이다. 가방의 내용물은 절반가량이 무기와 탄약이었다.
유령 총기(Ghost gun). 일련번호가 없어 추적이 불가능한 자동화기들.
미국 법률에 따르면 시민은 면허가 없더라도 판매 이외의 목적으로 총기를 제조하여 보유할 권리를 지닌다. 또한 총기 하부 리시버의 완성도가 80% 미만인 경우, 총열을 비롯한 다른 모든 부분이 완벽하더라도 총기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 두 조항의 존재로 인해, 미국에선 미등록 총기를 구하기가 정말로 쉬운 편이었다. 필요한 건 믿을 수 있는 상인에 대한 정보뿐.
캘리포니아는 주법(州法)으로 고스트 건을 강하게 규제하고 있으나, 규제가 아무리 강력한들 단속이 여의치 않으니 헛일이었다. 모든 시민들이 잠재적인 암거래상인 마당에 무슨 수로 국토 전역을 단속할 것인가?
가장 넓은 내 객실은 한데 모여 장비를 확인하는 녀석들로 잠시 부산스러워졌다.
경태는 내 몫의 권총을 조립해서 두 손으로 건네주었다.
"동네 양아치들 상대로는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겁니다. 형님께서 직접 손을 쓰실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길쭉한 권총(Ruger)엔 소음기와 광학조준기가 붙어있었다. 나는 그립을 쥐고 손목을 까닥거려보았다. 소구경이라 위력은 낮은데 무게는 보통의 권총들보다 오히려 무거운 편. 그 무게가 앞으로 쏠려있기까지 하여, 쥐는 느낌이 좋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이 총의 강점은 강력한 소음제어에 있었다.
경태가 창문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한번 쏴보시죠."
빗방울이 부딪히는 유리 너머엔 어둑한 바다가 물결치고 있었다. 경태는 제가 창문을 열었다. 방울방울 창틀을 넘어온 비가 바닥의 카펫을 점점이 적신다. 나는 선착장 너머에서 너울대는 해면을 조준했다.
탁, 탁, 탁!
자그맣게 튀는 쇳소리. 총성은 이게 전부였다. 반동마저 미미하다 보니 쏴도 쏜다는 실감이 약하다. 희미하게 새는 연기와 바닥을 구르는 탄피들만이 조용한 사격을 증명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난사를 하더라도 소리로는 쫓기 어려울 물건.
총구를 내리자 지켜보던 경태가 말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난 선선히 끄덕였다.
"정품이구나. 탄은 아음속탄이고?"
"예."
아음속, 즉 소리보다 느린 탄은 충격파를 만들지 않기에 초음속보다 정숙하다.
나머지 팀원들의 무장도 대부분은 소구경탄(.22LR)을 쓰는 저소음 화기들이었다. 낮은 위력이 걸림돌이긴 하나 사람을 죽이는 덴 지장이 없다. 쏘는 사람의 실력이 좋다면 더더욱 그러하고.
부하 하나가 탄피를 수거하는 동안, 나는 잠시 내 권총을 바라보았다.
'이것만 해도 총기난사범들의 애호품 아닌가.'
이 총은 학교, 우체국, 잡화점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다. 그런데도 어설프게 아는 놈들은 탄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애들이 쓰는 총이라고 비웃는다.
드르륵, 탁.
창문을 닫은 경태는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간단한 브리핑을 실시했다. 여기엔 밖에서 알아온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짧긴 했으나, 딱 봐도 갱 같다 싶은 놈들을 잡아서 기술적으로 고통을 주면 이 일대의 세력정보를 얻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일단 우리가 족칠 「백색근위대」의 패션 코드인데."
나는 옵저버다. 경태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부하들을 상대로 이야기했다.
"이놈들의 색상은 적, 백, 흑이야. 나치 깃발에서 따온 색이라나 뭐라나. 검은 옷 입고 하얀 모자 쓰고 빨간 신발 신은 놈들은 백이면 백 사냥감이라고 봐도 돼. 대부분 아디다스 짝퉁이니까 알아보기 쉬울 거고...."
미국의 길거리 갱은 집단별로 특성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손짓, 춤, 노래, 구호, 그래피티, 상징적 기호, 문신, 그리고 색상과 복장. 특히 색상과 복장은 피아식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현지인들이 우연의 일치로라도 이 패션을 따라할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멋모르는 외지인이나 관광객이 아닌 이상에야.
브리핑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교차검증까지 마친 정보가 그리 많진 않았던 까닭이다. 길거리 갱이 그리 복잡한 사냥감은 아니기도 하고. 경태가 손뼉을 쳤다.
"일은 내일부터 시작할 거니까, 오늘은 일단 여기서 해산."
연일 장거리를 이동하느라 여독이 쌓인 상황이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사냥개들에겐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지.'
경태 말마따나, 제국주의자들의 첨병과 마주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니.
"아, 참."
인사를 남기고 나가던 경태가 멈칫 돌아선다.
"수연 누님에겐 연락해보셨습니까?"
"그래."
"무슨 일이었답니까?"
"중국 놈들이 무기를 사겠다고 강짜를 부렸다더구나."
설명은 이 한마디로 충분했다. 수연의 재량권은 어지간한 사안이라면 사후승인으로 처리할 수 있는 수준. 고로 내게 결재를 요청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래의 규모와 난해함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경태는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출장에 누님이 합류하긴 글렀네요."
"그렇겠지."
"아쉽습니다. 「대통령」이 있던 숲은 놓쳤어도 나머지는 같이 보고 싶었는데."
입맛을 다신 녀석은 이번에야말로 "쉬십시오." 하고서 제 객실로 돌아갔다.
나는 테이블 위에 남은 브리핑의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형편없군.'
오클랜드의 경찰력에 대한 평가다.
사냥터에 대한 지식은 사냥감에 대한 지식만큼이나 중요하다. 내 사냥개들이 이 도시의 치안행정 데이터를 긁어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도시에선 하루 평균 열 건이 넘는 총격 사건이 보고된다. 그러나 경찰의 출동은 그 절반에도 못 미쳤다. 대응속도도 형편없기는 매한가지. 신고가 접수되었는데도 몇 시간이 지나고서야 현장을 살펴본 사례들이 수두룩했다. 총격전이 일상인 도시인 것이다. 과연 「베이비 이라크」라는 별명을 얻을 만하다.
그래서 경태는 가급적 조용히 일을 진행하되, 유사시 고화력 지원화기 사용까지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경소사(勿輕小事).
우리가 사자 무리라면 사냥감은 쥐새끼들이다. 동네 깡패들 상대로 다소 과한 준비이긴 하나,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큰일을 망치지 않는 지름길이다.
나는 손끝으로 지도 위를 쓸었다.
총격전이 주로 발생하는 장소는 정해져있었다. 이러한 장소- 스트리트와 애버뉴들은 서로 다른 조직들의 경계(境界)를 나타내고, 총격전의 빈도와 강도는 각각의 조직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적대적인가를 보여준다. 경태는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려놓았다.
'가장 뜨거운 곳은 동쪽의 84번가와 헤겐버거 로드, 남쪽의 23번가, 북쪽의 맥아더 교차로, 서쪽의 항만지역....'
항만이 최우선 수색지역이긴 해도, 여기서 성과가 없다면 다른 곳들로 수색을 넓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검거기록과 거주지별 인종 및 소득분포 지도를 대조해보건대 그렇게 귀찮아질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항만을 제외한 나머지는 죄다 흑인과 히스패닉이 치고받는 장소들.
유색인종이 지배적인 이 시궁창에서 피부 하얀 찌끄러기들이 끼어들 수 있는, 그리고 끼어들어야만 하는 장소는 역시 항만이 유일하다.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 스킨헤드 패거리를 말살하기까지 이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면 개인적으로는 제법 수치스러울 터.
눈꺼풀 안쪽이 뜨겁다. 지긋지긋한 피로감이다. 나는 자료를 한데 치운 뒤, 탄을 채운 권총을 베개 아래 쑤셔 넣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잠시 눈을 붙일 요량이었다. 언제나 잠이 모자란 내게 쪽잠은 불가피한 습관이므로.
창가에서 부서지는 빗소리가 단조롭다.
잠의 나락으로 떨어질 듯 말 듯, 멀어지다 가까워지길 반복하던 의식은 가까스로 깊은 곳까지 가라앉았다.
꿈.
내 삶의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
커다란 짐승의 유해와 갑작스레 마주한 나는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며 마력회로를 활성화시켰다. 마법사의 전투태세. 그러나 짐승은 죽어있었고,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살이 다 썩고 없어져 두개골 안쪽엔 공허한 어둠이 고여 있을 뿐인 뼈 무더기. 나는 그 스산한 전모를 재확인하고 내가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면 이것은....
"망할 새끼."
보기만 해도 이가 갈린다. 기억의 미궁을 헤매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쫓다가, 어이없게도 마력 고갈로 뒈져버린 나의 스승.
더불어 몸이 뜻대로 움직인다는 건 이 꿈이 평소와 같은 악몽은 아니라는 의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곧 울릴 알람이 아쉬워졌다. 드물게 꾸는 평범한 꿈. 얕으나마 긴 잠을 잘 수 있는 기회인데.
'아니, 평범하진 않은가.'
이러한 몽중 자각은 스승과의 추격전이 내 정신에 남긴 부작용이다.
여유가 생기니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나무들로 가득한 숲.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마력회로가 뚫린 「대통령」이었다. 평범한 꿈답게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배경으로 깔린 것. 그러나 현실과 다르게, 「대통령」의 마력장은 내 마력장을 위축시키지 않았다. 꿈이기에 가능한 비현실성이겠지.
산책로의 울타리에 기대어 서서, 나는 스승새끼의 유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인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두개골의 까만 눈구멍 한 쌍을.
내가 어둠을 보니 어둠도 나를 본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는지, 어둠이 말을 걸어왔다.
「내…놓아라....」
꿈이 빚어낸 환청인가, 내 무의식에 자리 잡은 두려움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직까지 질기게 남아있는 망령의 한 자락인가.
「내...놔....」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뭐라는 거냐. 골수까지 다 빠진 시체가."
#5. 짐승사냥 (3)
몰락한 어둠이 쇠약하게 일렁인다.
「나의 권능과... 부활을... 돌려다오....」
콰쾅!
투명한 폭발이 뼈 무더기를 박살냈다. 내가 원격으로 격발한 염동(念動) 충격파다. 분노를 닮은 마력이 전신의 회로를 휘돈다. 이 압도적인 힘. 끌어올리는 대로 끓어오르는 마력으로부터 전능감이 느껴진다. 꿈이기에 가능한 일일 테지만, 지금의 나는 회로의 잠재력을 백 퍼센트 발휘하는 마법사였다. 현실에서는 최소 1년은 지나야 가능할 일.
폭발의 중심에서 다른 모든 뼈는 산산이 깨어졌으나, 치솟았던 짐승의 두개골만은 몇 번을 다시 튕겨 오른 끝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뒹굴었다. 부러진 가지와 흩날리는 잎들이 그 위로 쏟아진다. 죽은 짐승은 서글프게 울었다.
「나의 것을... 돌려다오....」
"닥쳐!"
정면을 겨냥했던 손을 거두고, 허공을 움켜쥐며 강하게 내리친다. 그러자 강렬하게 타오르는 열선이 바람을 찢으며 굽이친다. 쐐애애액! 쾅! 이글거리는 채찍은 물리력을 동반한 열의 광란이었다. 스승의 두개골은 반동으로 지면에 처박혔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과거의 스승과 달리, 나는 자유롭게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곳이 나의 정신세계이기 때문이다.
손끝이 감정에 떨린다.
스승의 망령이 흐느꼈다.
「너는... 나의 힘과 지혜를 훔쳤다....」
"누구를 원망하는 거냐."
나는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망령을 비웃었다.
"너를 죽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의 교만이었다. 아닌가?"
선민의식의 결정체인 이 X신 새끼가 나를 어린 황인종이라고 얕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마법사로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힘에 도취되어 마력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초현실적 술래잡기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애초에 이놈이 나를 골랐던 배경엔, 추적자들도 자신이 설마 황인종의 육체에 숨을 거라곤 생각지 못할 거라는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공고한 차별의식이 깔려있으니, 나를 우습게 여길 수밖에.
"...."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갑자기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망령은 무슨 놈의 망령.'
저것을 비웃고, 조롱하고, 저것에게 화를 내며 폭력을 분출하고 싶다.
그러나 저기 있는 스승새끼는 스승새끼가 아니다. 그저 내 안에 남아있는 트라우마의 핵일 뿐. 꿈은 욕망을 반영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난, 어떤 식으로든 두려움의 대상을 비웃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이 자위행위와 다를 바 무엇인가.
사고가 여기에 이르자 조용해진 짐승이 그 증거다. 난 늘어진 채 굉음을 내던 마력의 열선을 휘둘렀다. 쾅! 맹렬한 열압이 깨지지 않는 두개골을 후려쳐 숲 그늘 먼 곳까지 포탄처럼 쏘아 보냈다. 나는 마력을 차단해 불타는 채찍을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숲에 정적이 돌아왔다.
정신적 부하의 경감은 꿈 본연의 기능 중 하나. 이곳에서 나는 거대한 조직의 보스가 아니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얼마든지 추해져도 좋았을 것이다. 허상에 불과한 원수를 모욕하고, 역시 허상에 불과한 힘에 취하여 격노에 몸을 맡기는 것.
하지만 나 자신이 그런 내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드문 꿈을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다. 얕게 든 잠은 아쉽지만, 그렇기에 회로를 운용하는 감각은 현실과 다를 바 없다. 훗날에 대비해 마법사로서 완전한 나의 역량을 시뮬레이션해볼 필요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내가 강해져야 한다.'
내 본신의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줄 최후의 보험이자, 런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마법적 변수에 대응할 만능의 열쇠다. 내가 제국주의자들의 예상을 벗어난 비대칭 전력으로 거듭날 때, 가장 오래된 마법사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할 터였다.
마법적 역량을 강화하고 실전경험을 쌓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할 각오까지 하고 있던 참이다.
이 기이한 수면장애가 자주 찾아오기를 바라며, 나는 알람이 울리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마력의 제어와 다양한 술식 연산을 시험해 보았다.
다음 날 오후. 후각이 예민하고 행동은 기민한 경호실 사냥개들은 「백색근위대」가 임대한 항만 창고를 특정해냈다. 경태는 사냥개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대표로 보고했다.
"단순히 물건을 보관할 용도로만 쓰는 곳이 아닙니다. 집이 없는 놈들은 거기서 단체로 숙식을 해결한다더군요. 경비를 겸해서요."
이 정보를 뱉은 놈은 경호팀의 차량 짐칸에 실려 있다. 때가 되면 바다 아래로 던져버릴 예정. 그 전에 죽여 고통을 덜어줄 이유는 없었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야간에 들이쳐서 1차로 조지고, 연락망으로 허위정보를 유포시켜 그거 받고 오는 것들을 2차로 잡아 조지고, 마약이나 술에 취해 뒤늦게 흐느적대며 오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 그것들을 3차로 잡아 조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변칙적인 전략은 약자의 승부수다. 이쪽의 역량이 압도적이라면 최선은 역시 정공법이었다.
'이것들은 특수부대급 전력이 자기네를 기습할 거라곤 상상도 못하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경호팀이 찍어온 사진 가운데 하나를 응시했다.
"이게 놈들의 사인이라고?"
"예. 개가 영역 표시하듯 여기저기 휘갈기고 다니는 표식입니다."
사진 속엔 벽에 칠해진 그래피티가 있었다.
「????? 14/88」
붉은 바탕에 검은 글씨. 옆에는 하얀 해골이 그려져 있다. 놈들의 상징색 3개가 다 들어가 있는 셈. 알파벳 대신 룬 문자를 쓰는 꼴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룬 문자로 써봤자 그 뜻은 결국 영어이기 때문이다. 낭비에 가깝게 남용된 붉은색이 천박하게 느껴졌다.
"더럽다는 점에서도 개 오줌과 비슷하구나."
내 감상에 경태가 실소한다.
"과연 그렇습니다, 형님."
?????을 영어로 옮기면 ORION. 이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널리 쓰는 표어, 「우리의 민족이 곧 우리의 국가다.(Our Race Is Our Nation)」를 의미하는 두문자(頭文字)였다.
그리고 숫자 14/88 역시 각기 다른 표어의 상징이다. 14는 열네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우리는 우리 인종의 존재와 백인 아이들의 미래를 보호해야 한다.(We must secure the existence of our people and a future for white children.)」를, 88은 「히틀러 만세(Heil Hitler)」를 뜻한다.
수준 떨어지는 말장난들.
타격은 자정에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부하들과 간단하게 도상연습을 마친 경태가, 부하들을 준비하라고 내보내고서 내게 묻는다.
"형님께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라니?"
"굳이 같이 움직이셔야 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저희가 다 제압해놓을 테니 좀 더 쉬시다가 결과만 접수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글쎄."
이럴 때 함께 움직이는 이유는 보통 전력 분산을 피하기 위해서다. 나를 경호하는 업무가 일반적인 경호와 달리 선제적인 위협제거- 즉 광의(廣義)의 선제타격과 전장에서의 근접호위를 원칙으로 삼으며, 이에 따라 경호팀이 이름만 경호팀이지 사실상 최정예 친위대의 역할을 수행한다곤 해도, 결국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나를 지키는 것. 내가 현장에 있으면 근접경호에 할당된 전력을 예비대로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예비대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아니. 역시 나도 가는 편이 낫겠다."
경태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옙.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바다 건너 본사에 있는 현장지원팀은 낡은 창고와 창고 주변의 감시 카메라를 간단하게 해킹했다. 보안성이고 나발이고 없는 싸구려 중국제 IP 카메라들은 좀도둑을 막는 데나 쓸모가 있을 물건이었다. 아껴선 안 될 돈을 아끼는 놈들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사냥개들은 자정을 넘어서까지 현장에 돌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색근위대」 놈들이 변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작전을 하루 미룰까요, 형님?"
경태의 물음에 나는 시계를 보며 답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지."
"알겠습니다."
세 시간 전, 웬 승합차 한 대가 창고에 와서는 육감적인 여자들을 내려놓고 떠나갔다. 야한 복장에 경박한 웃음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노출이 많다. 출장을 다니며 몸을 파는 인생들이었다.
여자들까지 무더기로 실종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일이 많이 지저분해질 테니까. 일단 여자들을 파견한 업소에서 신고가 들어갈 것이고, 경찰은 이 사건을 가볍게 넘기지 않을 터였다. 집단감금, 살해, 인신매매 등. 네오나치 스킨헤드 집단이 여자들과 함께 사라진 시점에선 다른 결말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요컨대 이 도시의 경찰이 아무리 가난하고 의욕 없는 조직일지라도 조용히 넘어갈 수가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재수 없으면 연방 관할로까지 넘어갈 사건이다.
차에 탄 채로 대기하는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순찰차 한 대가 바로 옆을 지나가기도 했으나, 탑승한 두 경찰의 무심한 시선은 이쪽을 스치듯 일별했을 따름이었다.
'대충 노숙자라고 생각했겠지.'
빈부격차와 자동차의 나라인 이곳에선 차를 가진 노숙자들이 널려있다. 그리고 노숙자라고 반드시 무직자인 것도 아니었다. 대학교수와 공무원들조차 자기 차에서 먹고 자고 하는 판국이니, 경찰로선 우리를 눈여겨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무전기가 울었다.
「차가 들어옵니다.」
창고 앞마당으로 들어오는 차는 아까 여자를 실어왔던 바로 그 승합차였다. 미국에서 흔한 포드 트랜짓이긴 해도 번호판을 보면 혼동할 여지가 없었다.
「VAGINA」
질(膣). 참 직관적이지 않은가. 포주가 번호판 구입에 돈 깨나 썼을 것이다.
승합차에서 내린 장년의 여성은 삐딱하게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담배가 다 타들어갈 즈음에야 그녀의 고객들이 그녀의 애들과 함께 창고 문을 열고 나왔다. 이어 장년의 여성과 스킨헤드 놈들 사이에 뭔가 이야기가 오가더니, 장년 여자가 웃음을 터트린다. 화대를 받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기네 애들을 차에 태워 떠나갔다.
한 명만 빼고.
경태가 당황했다.
"뭐야. 쟤는 왜 안 데려가?"
유일하게 남은 여자는 사내 중 하나에게 안기며 전문적인 교태를 부렸다. 그 사내는 여자의 허리를 안고 나머지 무리에게 들어가자는 턱짓을 해보였다. 딱 봐도 창고를 점거한 무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간부 내지 보스쯤 되려나.
"새삼스럽구나. 상급자의 특권 같은 것이겠지."
내 말에 경태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는다.
무언가의 소유나 특정한 행동에 대하여, 누구부터는 해도 되고 누구부터는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서열을 확립하는 건 많은 조직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생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옛 한국 군대의 비뚤어진 사병 간 군기가 그 예시였다.
한편으로 저건 과시를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건달과 탕아들의 세계에서, 남성성의 과시는 다른 수컷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자격의 하나였으므로. 하룻밤에 일곱 번을 했다느니 여덟 번을 했다느니 하는 허세가 일종의 훈장처럼 통하는 것이다.
성능이 지나치게 좋은 눈으로 창고 안쪽을 투시하던 나는,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지. 이대로 진행하도록."
"여자도 같이 묻어버립니까?"
경태의 반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알겠습니다. 1차 제압을 끝내고 보고하겠습니다."
대답한 경태는 복면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마법으로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면 편했을 것을.'
그러나 그런 술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뇌의 기능과 작동원리를 완전히 이해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거니와, 이해를 한다 해도 마력회로의 술식 연산능력이 그 이해를 따라갈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뇌만큼 복잡한 회로가 어디에 있나.
하물며, 만약 회로가 뚫린 마법사나 능력자가 상대라면?
택도 없는 일이다. 마력으로 뇌를 건드리자면 먼저 상대의 마력장부터 걷어내야 한다. 그 말은 즉 회로가 없어지다시피 한 상태여야 한다는 뜻.
나는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왔다. 주위에선 경태가 남겨놓은 애들, 2개 팀 8명이 누구는 벤치에 앉아, 누구는 벽에 기대어 한량인 척 사주를 경계하는 중이었다.
코트 자락이 흔들린다. 골목 사이로 부는 바람엔 외지고 빈곤한 거리 특유의 지린내가 섞여있었다. 항만의 배후지대, 공장과 창고와 주택이 뒤섞인 이런 동네에서 악취가 없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내 눈엔 창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낱낱이 들어왔다.
역시나, 내 사냥개들은 지나친 과잉전력이었다.
#5. 짐승사냥 (4)
비루먹은 들개 무리와 잘 훈련된 사냥개들 사이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있다. 제국사냥을 함께할 나의 군대는 자칭 근위대 운운하는 X신들을 신속하게도 제압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죽은 이가 없는 건 경태의 판단이었다. 카지노 추장의 의뢰를 초과달성하기 위함이다. 용케 한 놈도 안 죽이고 다 생포했구나 싶었다.
내가 창고에 들어서자 의자에 묶인 막장 인생 열아홉의 시선이 집중된다. 재갈을 물려놓은 입들이 조용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었다. 유일하게 묶이지 않은 하나는 이번 일의 골칫거리인 여자. 그녀는 복면을 쓴 무장인원들 사이에 오도카니 서서 바들바들 떠는 중이다.
나 또한 복면을 쓰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사냥감들은, 분위기만으로 내가 사냥개들의 주인임을 깨달은 기색들이었다.
바닥엔 내 부하들이 두껍고 넓은 비닐을 깔아놓았다. 이제부터 여기서 사람을 도축할 텐데, 평범한 도살장처럼 사방팔방 피를 뿌려놓을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발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놈이 하나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여자와 뒹굴던 간부 녀석이다. 나는 놈의 겁에 질린 눈동자와, 그 너머 비정상적으로 확장된 동맥의 혈류를 꿰뚫어보았다.
약을 처먹었나.
꼭 투시가 아니더라도, 뻣뻣함을 유지하는 X과 발그레하게 홍조가 오른 낯짝을 보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차릴 일이었다. 비아그라 같은 걸 본 적도 없을 순수한 인생들이야 당연히 모를 테지만. 사타구니에 텐트를 친 사내새끼와 마주보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잘라버리고 싶군."
내 말에 놈은 불그스름한 얼굴 그대로 사색이 되었다. 영어로 말했으니까.
"자를까요?"
경태의 무심한 추임새. 순서가 엉망이긴 하나, 자르고 지지면 심문에 필요한 시간쯤은 충분히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아가씨부터 먼저 해결해야지."
이번엔 여자가 사색이 되었다.
"사, 살려주세요! 여기서 본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흑, 맹세해요!"
두려움에 둑이 터지고 마는 울음.
"진정하시오."
차분하게 달래보았으나 소용이 없다.
"그치지 않으면 죽이겠소."
울음이 뚝 끊어졌다. 역시 이쪽이 효과가 더 좋다. 대신 딸꾹질이 시작되긴 했어도. 가만히 생각하던 나는 붉어진 눈으로 히끅대는 여자에게 한 가닥 희망을 던져주었다.
"우리의 용무는 여기 묶여있는 잡종들에게 있소. 그쪽은 예상 밖의 변수란 말이지. 무관한 일반인을, 그저 증거인멸을 위해 죽이는 건 우리로서도 달갑잖은 일이오."
"그, 그럼...."
"당신이 협조만 잘 해준다면 놓아주지 못할 것도 없소."
던져진 희망을 꿀떡 받아먹은 여자는 낯빛부터 확 달라졌다.
"할게요! 히끅. 누구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 끅, 게요!"
"그걸로는 부족하오."
눈치를 보던 여자가 묻는다.
"제가, 힉, 뭘 어, 어떻게 해드리면 되나요?"
"잠시 손을 줘보시겠소?"
"...네?"
빤히 바라보자, 여자는 흠칫거리면서도 자신의 한 손을 나에게 내주었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 남는 손으로 코트 안쪽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았다. 금속광에 소스라친 여자가 반사적으로 몸을 뺐으나 내게 잡힌 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손에 권총 그립을 쥐어주었다.
"두 손으로 제대로 잡으시오. 총구는 아래로 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여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립에 느릿느릿 손가락을 감았다. 약간 헐겁긴 하지만, 그래도 떨어지진 않을 정도. 나는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름이 뭐요?"
"캐런.... 캐런 윌리엄, 힉, 윌리엄스요."
눈물로 젖은 얼굴에 애써 아첨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움찔거리는 입꼬리가 필사적이다. 요란한 화장을 제외하더라도 괜찮은 낯짝이었다. 잡티 없이 하얀 피부, 푸른 눈동자, 밝은 색조의 타고난 금발. 묶여있는 네오나치 새끼들이 환장할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더 죽이기가 곤란하지.'
귀한 만큼 포주가 많이 아까워하지 않겠는가. 이 캐런이라는 여자가 사라지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제 연줄을 총동원해서 「백색근위대」를 추적할 테지.
물론 방법은 있다. 우선은 내보내고서, 미행을 붙여두었다가 적당히 떨어진 지점에서 사고나 강도로 위장해 죽이는 것.
그러나.
"윌리엄스 양."
"네, 네!"
"우리, 오늘 하루만 공범이 됩시다."
보다 온건한 수단이 있는데 굳이 죽일 필요까지야.
여자를 거리로 내보내면 추가로 해킹해야 할 CCTV가 생기고, 주차된 차들의 블랙박스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것들이 죄다 중국제 IP 카메라일 리는 없겠지.
그리고 핸드폰. 이건 빼앗아도 문제고 빼앗지 않아도 문제다. 어느 쪽이든 의심스러운 흔적들이 남는다. 포주는 여자가 왜 연락도 없이 혼자 움직였는지 수상해 할 터.
차라리 공범으로 만드는 게 더 안전할 수 있었다.
"...."
캐런 윌리엄스는 눈치가 꽤 빠른 여자였다. 내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묶여있는 네오나치들을 곁눈질하는 걸 보면. 총을 쥔 손의 검지에도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실수로라도 방아쇠울에 넣기 싫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비닐을 까느라 한쪽으로 치워진 테이블로 다가갔다. 언제 마지막으로 닦았는지 모를 테이블엔 손때 탄 포커 패와 마약을 흡입한 자국들, 아직 개봉하지 않은 마약 봉지들, 빨대처럼 말린 달러 지폐들, 비어있는 유리잔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팔로 트레이스 버번 한 병이 놓여있었다. 저급한 깡패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좋은 술. 나는 입술 자국이 적고 깨끗해 보이는 글라스를 골라 3분의 1쯤 술을 채웠다.
제 자리로 돌아온 나는 캐런에게 잔을 내밀었다.
"자, 쭉 들이켜시오."
멈칫거리면서도 순순히 입술을 댄 윌리엄스는, 잔을 기울여주는 대로 꼴깍꼴깍 받아마셨다. 의외로 술을 잘 못하는지, 다 마시고서는 자그맣게 크으- 소리를 내면서 미간을 찌푸린다. 하기야 얼굴이 가산점이라 다른 요구들은 관대했을 것이었다. 팔뚝엔 주사자국도 없다.
나는 비어버린 잔을 부하에게 휙 던져 넘겨주었다.
독한 술의 효과로 윌리엄스는 딸꾹질의 빈도가 줄어들었다.
"저...."
"말씀하시오."
"...저는, 진짜로 살려주시는 거죠?"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아까보다는 떨림이 줄어든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곧 죽일 사람에게 장난치는 취미는 없소."
"...."
"그 총은 아주 조용한 총이오.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기고, 돌아서서 눈을 뜨고 떠나면 끝이지. 당신의 기억엔 총성도, 비명도, 핏자국도 남지 않을 거요."
다만 보험으로서의 사진과 영상은 남겠지.
"이쪽을 보고 웃어 보시오."
흠칫 어깨를 떠는 캐런. 시선은 동영상을 촬영하는 내 부하에게 향한다.
"연습이오. 너무 억지로 하는 것처럼 보여도 곤란하거든."
그녀는 내 지시에 따르려 노력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아까의 아첨하는 미소처럼, 필사적이기에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마시오. 당신이 원래 하던 일 아니오?"
"워, 원래 하던 일이요?"
"그렇소. 나쁜 남자들에게 미소를 파는 것. 내게도 한 번 파셨으면 하는데."
캐런의 표정이 흐트러진다. 울상 섞인 웃음이나마 아까보다는 나았다. 나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하게 평했다.
"화장은 좀 지우는 편이 낫겠군. 너무 번졌어."
"...가방에 클렌징 티슈가 있어요."
"가방은 어디에 있소?"
"저 사무실, 히끅, 안에요."
"가져와라."
내 지시에 부하 하나가 가볍게 뛰어가 창고 사무실에 있던 핸드백을 찾아왔다. 캐런은 자신이 백을 받으려 했으나 내가 손을 펼쳐 멈춰 세웠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이 뭘 들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캐런은 권총에 고정된 내 시선을 보고서야 아! 하며 당황했다. 멋모르고 올린 총구가 나를 향하려던 참이다.
"죄송, 죄송합니다!"
"아니오."
위험했던 건 오히려 이 여자 쪽이었다. 주변의 부하들이 총구를 내린다.
슬슬 시간낭비가 귀찮아지기 시작했지만, 다그치면 도리어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었다. 백을 찾아온 부하는 자그락대는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티슈를 찾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난 한 장을 뽑아 캐런의 얼굴을 손수 닦아주었다.
흠. 생각만큼 잘 안 지워지는데.
"저, 저기...."
"가만히 계시오. 서툴더라도 이해하시고."
이제 와서 권총을 다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도 모양이 빠진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신사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게 중요했다.
총구를 내린 채 순순히 얼굴을 맡기고 있던 캐런이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하는 말.
"...선생님(Sir)께선 그렇게, 음,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신 것 같아요."
그래. 이런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멍청한 반응이지만, 억압적인 상황은 원래 사람의 사고능력을 제한한다. 군대에 간 신병들이 원래부터 X신이라 X신 짓을 하나?
이 여자는 생사여탈권을 쥔 나에게 필사적으로 호의를 얻으려 하고 있었다. 필사적인 아첨은, 적어도 말을 하는 순간만은 한없이 진심에 가깝다.
이럴 때의 정중한 대응은 곧 스톡홀름 신드롬의 성립요건이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대로 일주일쯤 시간을 들인다면 거의 완벽한 세뇌를 노려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까지 공을 들일 가치가 없을 뿐. 캐런의 턱을 잡고 좌우로 돌려본 난 티슈를 한 장 새로 뽑으며 말했다.
"나는 객관적으로는 나쁜 사람이 맞소."
"아...."
"그래도 여기 있는 잡것들보다는 나은 사람이겠지. 이들이 어떤 인간들인지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네, 네! 알아요! 아주 나쁜 인간쓰레기들이죠!"
열심히 끄덕여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캐런. 고객에게 사적인 감정 따윈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다 쓴 티슈를 바닥에 버린 나는, 캐런의 턱을 놓고 가장 가까이에 묶여있던 스킨헤드의 뺨을 후려쳤다. 퍽!
"어디다 대고 눈을 부라리나."
피와 이빨이 튄다. 근력에 마력강화가 더해진 탓.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타격음은 가죽 터지는 소리를 닮았다. 캐런을 노려보았던 놈은 피를 물고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골이 울리는지 머리가 오락가락 흔들거렸다.
티슈의 보습제로 미끈거리는 장갑을 닦아내며, 나는 갑작스러운 폭력에 위축된 캐런에게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이들이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오."
"죄라면 어떤...?"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지. 당신처럼 약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아."
약하고 선량하다는 건 당연히 사탕발림이다. 이 여자가 평소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예컨대 이놈을 보시오."
난 뺨을 쳤던 놈의 머리를 붙잡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눈가의 눈물 문신은 사람을 죽였다는 상징이오. 눈물이 일곱 방울이니 지금까지 일곱 명을 죽였을 거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이 또한 허세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실제로는 그 반쯤 되려나.
그러나 여기서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게 머리를 잡힌 놈은 결백을 주장하듯 웁웁거렸다. 온몸에 힘줄이 도드라지도록 몸을 비틀어대면서. 먼저 죽을 돼지가 제 순서를 예감한 것이다. 내 수신호를 본 부하들이 돼지에게 두건을 씌우고 자백제를 주사했다. 재갈 너머의 우우- 하는 소리가 한층 더 답답하게 줄어든다.
내가 물었다.
"말씀해보시오, 윌리엄스 양. 이런 연쇄살인범들이 멀쩡히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현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맞아요, 선생님께 전적으로 동의해요!"
"나에게 복수를 의뢰한 노인은 가족과 이웃을 잃은 사람들의 대표였소. 난 이 살인자들의 고통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랄 뿐이오."
"진짜로 훌륭하세요."
열성적으로 끄덕이며 공감하는 이 여자는, 지금 심정적으로 나와 같은 편에 서서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둘러댄 명분이 이쪽 동네의 정서에 잘 맞는 탓도 있을 것이다. 자경단에 대한 묘한 동경이 있는 나라이므로. 오죽하면 쫄쫄이 입고 히어로입네 하는 인간들이 실제로도 많을까. 그것도 전직 군인이나 격투기 선수 출신들이, 진지하게.
이쯤이면 된 것 같다. 복면을 벗고 머리를 쓸어 넘긴 나는, 동그래진 캐런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윌리엄스 양. 그 총은 아주 조용한 총이오."
캐런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5. 짐승사냥 (5)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기고, 돌아서서 눈 뜨고 떠나면 끝이지."
말은 같아도 반응은 다르다. 내가 조종하려는 여자는 권총을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래로 늘어뜨린 총구가 덜덜 흔들리고는 있으되, 이는 두려움보다는 갈등과 긴장을 더 많이 내포한 동요였다. 죽인다와 죽이지 않는다의 선택지에 완전히 몰두한 것이다. 입이 마르는지 혀로 입술을 핥는다.
"비밀을 꼭 지키겠다고 약속드리는 건... 역시 부족한 거겠죠?"
이렇게 묻는 캐런의 목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몸을 파는 여자가 간음하지 말라는 종교를 믿는군.'
금기의 첫째가 살인이요 둘째가 간음이다. 그러나 얄팍한 신앙이라도 신앙은 신앙이고, 믿음은 원래 논리와 거리가 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느님께 맹세코, 난 진심으로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소. 그러나 무턱대고 당신을 믿을 수도 없소. 당신으로 인해 내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까."
하느님, 맹세, 진심. 그리고 내 사람들의 목숨.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들.
"내가 도와드리겠소."
장갑 낀 손으로 캐런의 눈꺼풀을 쓸어내린다. 눈썹이 바르르 경련하긴 했으나, 캐런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눈을 감았다. 나는 캐런의 어깨를 붙잡아 표적을 향해 천천히 돌려 세웠다. 힘은 과하게 주지 않는다. 머뭇머뭇 따를 정도면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캐런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손을 포개어 잡고, 권총을 천천히 위로 끌어올린다. 느릿하게 높아진 총구가 표적의 중심을 겨냥했다. 나는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됐소. 준비가 되면 방아쇠를 당기시오."
쏘라는 표현은 피한다. 사소한 단어 선택에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표적이 된 스킨헤드는 두건 속에서 느리게 숨을 쉬었다. 혈관에 도는 자백제는 놈에게서 현실인지능력을 앗아갔다.
사수의 호흡과 신체적 긴장도를 유심히 살피던 나는, 결정적인 순간 차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캐런."
움찔!
권총의 슬라이드가 탁! 하고 후퇴 전진했다. 반사적으로 당겨버린 방아쇠. 캐런은 반동을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장난감 소리를 들을 만큼 반동이 적은 총을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었으니까. 약실에서 튄 탄피가 팅그르르 바닥을 굴렀다. 코끝에 감도는 희미한 초연의 향기. 탄은 명치에 틀어박혔다. 아무런 무늬 없는 검은 옷이 번들거리는 액체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즉사는 아니다. 캐런은 표적이 내는 괴상한 소리에 놀라 총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총을 회수한 나는 캐런의 어깨를 잡아 뒤로 돌려 세웠다.
"그만 눈을 떠도 괜찮소."
캐런이 부서질 듯 떨면서 눈을 떴다. 난 양손으로 그녀의 귀를 막아, 점차 잦아드는 표적의 숨소리를 차단해주었다. 때로는 날카롭게 새고 때로는 핏물이 섞여 부글거리는 숨소리를. 동시에 눈을 마주봄으로써 시선을 내게 고정시킨다.
'심장이 굉장히 빠르게 뛰는군.'
당연하면서 좋은 현상이다. 교감신경이 흥분한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쉽게 착각하니까. 사고가 하얗게 마비된 상태라면 더더욱 그러하고. 이 여자의 기억에 나는 악당이 아니라 이상적인 자경단으로 남아야 한다. 적어도 대략 한 달 가량은.
표적의 목숨이 확실하게 끊어진 뒤에, 나는 비로소 두 손을 거두었다. 여전히 맥박이 빠른 캐런은 입으로 숨을 쉬며 멍한 느낌으로 내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오. 힘든 일을 해줘서 고맙소."
"네에...."
"당신은 당신이 살아가는 거리를 조금 더 안전하게 만든 거요."
"네...."
아까 무기를 쥔 채 내 말에 열성적으로 끄덕이던 장면이 찍혔으니, 악마의 편집을 위한 재료가 추가로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잠시 진정하고 가시는 편이 좋겠군. 저쪽으로 들어갑시다."
나는 캐런을 사무실로 이끌었다. 그 사이에 부하들이 시체를 치울 수 있도록.
2층 높이에서 창고 전체를 내려다보는 사무실은 간부 녀석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벽엔 남부 육군기가 걸려있다. 나는 삐걱대는 창문을 열어 갇혀 있던 공기를 내보냈다. 답답한 정사의 냄새가 빠지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온다. 캐런을 침대 가장자리에 앉힌 난 녹슨 석유난로에 불을 넣고 의자를 끌어다 마주앉았다. 열린 문가엔 호위가 섰다.
조금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캐런의 주의가 그 어색함에 기울 즈음 내가 입을 열었다.
"돌아갈 때 어떤 절차 같은 게 있소?"
"...예?"
"당신이 일하는 업소에 연락을 한다든가. 혼자 돌아다니게 하지는 않을 것 아니오?"
늦은 시간, 이런 도시의 후미진 거리에서 여자 혼자 다니게 하는 건 미친 짓이다. 남자라고 딱히 안전한 것도 아니지만.
"그, 원래는 내일 프레이저가 데려다주기로 했어요. 돈은 선불로 냈거든요."
"프레이저?"
"저기, 바깥에 있는...."
"아아."
이 방에서 함께 뒹굴었던 간부 녀석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단골이면 그렇게 할 법도 하다. 포주 입장에서 한 명 실어오자고 차를 보내기도 번거로울 테니.
"차라리 잘됐군. 내 부하들이 에스코트 해드릴 거요."
"그, 그건...."
"사양하지 마시오."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캐런이 우물우물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삼켰을지는 뻔한 노릇이지만, 나는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그보다, 포주가 벌써 돈을 받아갔다고?"
"아, 네. 팁은 다 제가 갖는 조건이라서요."
"상도덕이 아주 없진 않은 사람인가 보오."
"예, 음, 그렇죠."
이번엔 다소 떨떠름한 대답. 화류계에서 가슴골에 꽂힌 돈을 건드리지 않는 건 최소한의 상도덕이다. 그걸 지킨다고 해도 다른 면에선 얼마든지 X 같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지키지 않는 놈들이 많지만.
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금고로 다가갔다. 잠긴 금고 안엔 마약 덩어리들과 개발새발 적어놓은 장부 비슷한 것 한 권, 고무줄로 묶어놓은 지폐뭉치들, 그리고 강도질로 모은 듯한 귀금속 한 꾸러미가 들어있었다.
'기계식이군.'
기계식 다이얼을 여는 건 손쉬운 일이다. 「황금기의 눈」으로 부품을 보면서 아귀를 맞추면 그만이니까. 가끔 투시로도 구조파악이 까다로운 자물쇠가 있긴 하나, 스트리트 갱 주제에 그렇게 비싼 고급품을 쓸 리가 없었다. 난 눈을 다이얼에 두고 캐런에게 물었다.
"윌리엄스 양. 혹시 마법을 본 적이 있소?"
"마법...이요?"
"그렇소. 마법."
당황하는 캐런. 이 여자는 바로 눈앞에서 마법사가 마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달칵. 모든 톱니가 맞물렸다. 나는 한 발짝 비켜서서 문을 열어보였다.
"당신에게는 이게 마법이겠지."
"...."
금고가 열린 데 놀랐던 캐런은, 곧 금고의 내용물을 보고 그 놀라움을 잊었다.
"여기 있는 금품은 다 가져가도 좋소."
"예?"
잠시 움직임이 없던 캐런이 눈을 크게 뜬다.
"정말로... 그걸 전부...."
나는 끄덕임으로 확신을 주었다.
"맙소사!"
비명 같은 외마디와 함께,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캐런이 주춤주춤 일어서서 금고 가까이로 다가왔다. 상기된 표정과 흔들리는 발걸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번민과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버렸다. 100달러 뭉치 마흔 개엔 그 정도의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금고 앞에 서서 홀린 듯 돈을 응시하던 캐런이 가까스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이걸 다... 제게 주신다고요?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죠?"
말보다는 헐떡임에 가까운 물음. 나는 귀찮은 내색 없이 다시 한 번 끄덕여주었다.
"제대로 들은 거 맞소."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소. 나는 돈이 필요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
"세상에."
나를 보는 캐런의 눈에 경외가 깃들었다. 마법만큼이나 강력한 돈의 마력. 그 마력에 홀려버린 이 여자에게 살인은 벌써 지나간 일일 뿐. 시간이 흘러 다시 떠오르기야 하겠지만, 그때의 충격은 시간이 흐른 만큼 줄어든 상태일 것이었다. 떠오를 기억이라고 해봐야 방아쇠를 당겼던 촉감과 잠깐 들었던 괴상한 소리가 전부인 것을.
비밀유지비용으로 40만 달러면 싼 거지.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적당한 죄책감은 자기합리화의 양분이다. 이제 이 여자는 죄책감이 고개를 들 때마다 스스로를 설득할 터였다. 죽어야 할 놈이 죽었을 따름이라고.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받은 40만 달러도 정당화가 안 되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설득보다 강한 설득이 어디에 있을까.
"감사합니다."
감격한 캐런이 두 손을 모으고 울먹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에 대한 내 호의의 표현이라고 해둡시다."
지폐 뭉치들은 사무실 옷걸이에 걸려있던 낡은 가방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희미하게 하얀 가루가 묻어있는 물건이었다.
이어 나는 캐런이 귀금속 꾸러미에서 원하는 걸 고르도록 해주었다. 그냥 핸드백에 쏟아주는 것보단 이러는 편이 낫다. 반지도 끼어보고 팔찌도 차보고 하던 캐런은 때때로 나에게 조심스러운 눈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아까보다 가깝고 부드러워진 아첨이다.
단순하기도 하지.
난 시간을 확인했다.
47분.
몸 파는 걸 제외하면 평범하게 살아왔을 여자가 사람을 죽이도록 만들고, 죄책감마저 희석시키는데 47분 걸렸다.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줘도 무방할 것이다. 그 유명한 전기고문 복종 실험의 밀그램도 죄책감까지 고려하진 않았다.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평소 풀을 뜯고 사는 동물이라도 기회가 닿으면 고기를 먹는다. 병아리를 산 채로 씹어 삼키는 소처럼. 인간이 아는 소의 순박함은 입안에서 으스러지는 병아리의 비명에 구애받지 않는다.
'앞으로는 그 경계가 더욱 흐려지겠지.'
이 여자는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돌아가기 전에, 당신이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소."
"네? 그게 뭐죠?"
"세금 신고요."
"아."
"그 돈을 함부로 쓰면 국세청에서 반드시 사람이 나올 거요.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는 당신도 보고 들은 바가 있겠지."
캐런이 일하는 업계에선 수시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물며 40만 달러면 국세청이 무장요원을 파견할 만한 금액. 그 요원은 필히 수색영장을 지참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40만 달러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어, 어쩌면 좋죠?"
캐런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당신 주소를 알려주면, 내가 근시일 내에 우편으로 카지노 칩 하나를 보내드리겠소."
"카지노 칩이요?"
"그렇소. 카지노 칩. 그 칩을 가지고 애리조나 주 투손의 다이아몬드 카지노를 찾으시오. 원주민들이 운영하는 곳이지. 창구에 칩을 보여주면 그들이 당신의 용무를 묻거나 별도의 라운지로 안내하거나 할 거요. 그때 세탁할 돈이 있다고 알리시오."
"와...."
"수수료 부담이 크진 않을 거요. 칩 자체에도 가치가 있으니."
칩을 가져간다고 아무나 특별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사기관의 끄나풀일 수 있으므로. 내가 사전연락으로 이런 사람이 찾아갈 거라고 전해두어야 한다. 대구의 미군 벤더에게 주는 코인도 그런 식으로 환전된다.
두근거리는 캐런의 심장이 보인다. 이는 두려움이 아닌, 미지를 경험하는 자의 흥분이었다.
"잊지 마시오. 애리조나 주 투손의 다이아몬드 카지노요."
"네!"
"그래서, 주소는?"
"투손의 다이아몬드 카지노요!"
"당신 주소 말이오."
"앗."
주의가 흐트러져있던 캐런은 자신의 주소를 아무 저항 없이 말해버렸다. 주소가 정확한지는 에스코트할 녀석들이 확인할 것이다. 나는 다이아몬드 카지노를 열심히 되뇌는 여자를 밖으로 이끌었다.
"짐을 챙기시오. 당신을 보내줄 때가 된 것 같소."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철제 계단의 난간 너머 시체가 치워진 자리를 향했다. 거기엔 빈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따름. 죽음의 흔적은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난 부하들에게 가야할 곳을 알려주었다.
부하 둘과 함께 나가던 도중, 캐런은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안타깝게 나를 돌아본다.
"저기...!"
"뭐요?"
"서,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네가 날 다시 봐서 뭐하게?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어보였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또 만나는 일은 없는 편이 좋을 거요."
끝까지 당신을 위해서라고 포장한다.
"역시, 그런가요."
"살펴가시오."
"오늘은,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주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작별인사.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어이없는 상황일 거다. 나는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가볍게 까딱여주었다.
그렇게 조용해진 창고에서, 이제 나는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들을 마주보았다.
"오래 기다렸다, 돼지들아."
#5. 짐승사냥 (6)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유태인들은 통제에 따라 일렬로 걷고 일렬로 죽었다. 그들 대부분은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은커녕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
유태인이 특별히 나약한 민족이라서? 아니다. 다른 모든 학살들도 흡사한 장면들을 품고 있다.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나라면 어차피 죽을 거 발악 한 번 해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역사의 많은 부분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여기 있는 돼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서 동료가 죽을 때조차 숨죽이고 눈알만 굴리지 않았던가. 누구 하나라도 재갈 물고 절규하거나 분노로 몸을 뒤틀었더라면 난 「백색근위대」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했을 거다. 개념은 없을지언정 동료애와 기개는 있는 놈들이라고.
"뭔가 알아낸 게 있나?"
내가 캐런 윌리엄스를 구슬리는 사이에 부하들이 마냥 기다리고만 있진 않았을 거다. 조용히 할 수 있는 일도 얼마든지 많으니까. 내 물음에 경태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것들 핸드폰을 좀 뒤져봤습니다."
"결과는?"
"우선 저놈이-"
경태의 시선이 간부를 가리켰다.
"근위대 운운하는 놈들의 꼭대기입니다."
"그건 운이 좋군."
프레이저라 했던가? 단순 간부가 아니었다니.
'우두머리나 되는 게 겁이 너무 많은데.'
앞서 경태는 이 창고가 활동거점인 동시에 집 없는 졸개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라고 보고한 바 있다. 즉 이 프레이저라는 보스 입장에서, 자신 역시 이 창고에 머문다면 24시간 부하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금고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밖에 다른 건?"
"밖에 있는 인원도 파악했습니다. 의외로 체계적인 놈들이더군요."
"그래?"
"예. 비번으로 집에서 쉬는 인원이 일곱, 운반과 수금을 나간 게 열둘, 주요 사업장 경비 및 구역 순찰이 다시 열둘이었습니다. 지시를 보니 4인 1조가 기본인가 봅니다."
"차례차례 잘라먹기 편한 숫자들이구나."
"왜 아니겠습니까."
"배후는?"
추장은 이들에게 지원자 내지 배후가 있을 거라 추측했었다. 경태가 대답했다.
"메신저 대화 및 통화기록들이 남아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정보가 불충분합니다. 역시 심문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그 윌리엄스라는 여자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했다. 나도 한번 보자."
"핸드폰 말씀이십니까?"
끄덕.
손가락을 까딱이자 경태가 대장 놈의 핸드폰을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보안은 이미 다 해제된 상태였다. 홍채고 지문이고 본인을 붙잡아둔 마당에.
'제이(Jay)라.'
막후의 인물이 텔레그램 비밀대화에서 쓰는 가명. 나는 보자마자 로버트 제이 매튜스를 떠올렸다. 지금은 사라진 네오나치 조직, 「침묵을 지키는 형제단」을 이끌었던 지도자. 하얀 추장은 여기 근위대 운운하는 스킨헤드 돼지들이 바로 그 「침묵을 지키는 형제단」의 계승을 주장한다고 증언했었고, 그래서 조사를 해보다가 접한 이름이다.
70명이 넘는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죽었으니 이 머저리들의 눈엔 얼마나 장렬하고 멋있어 보였겠는가.
'정작 매튜스 본인은 마약상들과 적대관계였는데 말이지.'
매튜스는 확신범이었다. 신념이 있는 범죄자라 이 말이다. 그 신념이라는 게 유태 시온주의자들의 세계정부 음모를 진지하게 믿는 수준이긴 했지만, 어쨌든 코카인 팔아 활동하는 놈들의 배후가 그 미들네임을 빌려 쓰는 꼴은 꽤 우습게 느껴졌다.
뭐....
남아있는 대화를 보면 이 제이라는 놈도 저 나름의 신념이 있는 것 같다. 최근 일주일분 이외엔 다 지워져서 사상의 전모나 정체를 확인하긴 어려워도.
볼 것을 다 본 나는 핸드폰을 경태에게 돌려주었다. 정보는 별로 없으나, 밖에 있는 놈들에게 거짓 지시를 내리자면 필요한 물건이다.
"심문은 내가 하고 있으마. 나머지를 잡아오도록."
"예."
역할분담이 이루어진 뒤, 나는 창고 내부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집회장소로도 쓰던 곳인지 접어놓은 의자가 많다. 사람을 공구리치는 데 썼을 연장과 시멘트 포대들도 보이고. 벽에는 나치와 관련된 장식물들이 난잡하게 걸려있었다. 싸구려 레플리카들이다.
"재갈을 풀어줘라."
내 턱짓에 부하 하나가 칼을 들고 다가와 두목 놈의 재갈을 끊는다. 워낙 꽉 묶어두었으므로, 침에 불은 좌우 입가가 광대 화장처럼 부르튼 상태였다.
"다, 당신 누구야? 대체 뭐 땜에 이러는 건데?"
숨 가쁘게 묻는 말에 나는 뺨을 갈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번에도 가죽 터지는 소리가 날 정도의 힘이다. 난 방수 코트에 튄 핏물을 툭툭 쳐내며 무심히 말했다.
"말이 짧다."
"...."
번민하던 프레이저가 침을 삼키고 이번엔 경칭을 쓴다.
"선생님.... 선생님께선 누구십니까?"
난 다시 뺨을 갈겼다.
"질문은 내가 하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씹...."
퍼억! 또 한 차례 꺾이는 머리통. 이번엔 코피까지 터졌다. 깔린 비닐에 후두둑 뿌려지는 핏방울들. 아파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이었겠지만, 내가 그걸 이해해줘야 하나? 나는 홱 돌아간 머리통을 농구공처럼 붙잡아 원위치로 되돌렸다.
"정신 못 차리지?"
어지간히 아팠는지 답지 않게 눈물을 글썽거리는 두목 녀석. 나는 어김없이 손을 휘둘렀다. 퍽!
"눈물 보이지 마라. 역겹다."
맞은 자리가 선명하게 변색된 프레이저 놈이 나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제발... 그만...."
"지금 나에게 지시를 하는 거냐?"
"아니, 아닙니다!"
치켜들었던 손을 서서히 내리자 두목 녀석은 눈에 띄게 안도한다. 광대뼈에 금이 가서 얼굴이 비정형으로 빠르게 부어오르는 중. 고막도 한쪽이 찢어졌다. 상판 상태만으로는 케이지에서 흠씬 맞고 내려온 격투기 선수처럼 보일 지경. 눈물이 비치는 건 여전하지만 일단은 넘어간다. 애초에 그냥 팰 구실이 필요했을 뿐인지라.
"이름."
"예?"
예? 는 무슨. 나는 두목 놈의 머리를 움켜쥐고, 부어오른 중심, 금이 간 광대뼈를 엄지로 꾸욱 눌러주었다. 퍼렇게 부푼 살에 손가락이 푹 파묻히며 대번에 우드득 소리가 난다.
"끄아아아아악!"
"이름."
이름은 이미 알고 있으나, 심문은 원래 쉬운 질문부터 시작하는 거다. '질문에 대답했다'라는 사실을 만들어놓고 들어가는 것.
"프레이저! 흐윽! 프레이저 듀크! 프레이저 듀끜...."
난 절규처럼 외치는 이름을 듣고서 손을 떼었다. 마력강화가 없어도 강한 악력이라, 피멍 위로 선명한 손자국이 남는다. 골이 파인 피부에선 엷게 피가 배어났다.
"좋아. 프레이저 듀크."
나는 프레이저를 향해 몸을 슬쩍 기울였다. 내 얼굴에 그늘이 지게끔.
"고해성사의 시간이다. 내가 너를 왜 찾아왔을까?"
"예?"
학습능력이 없는 놈이군. 상체를 되돌린 난 워커 뒷굽으로 프레이저의 무릎을 힘껏 찍어 차버렸다. 대각선으로 찍은 발굽 너머로부터 으직 하는 느낌이 전해지고, 넓은 창고엔 비명이 메아리친다. 의자 모서리와 전투화 사이에 낀 무릎은 멀쩡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조금 비껴 차지 않았다면 십자인대는 물론이고 슬개골까지 망가져버렸을 것이다.
'한 번에 망가트려도 곤란하니까 말이지.'
필요한 건 육체와 정신을 자근자근 부수는 다채로운 폭력이었다. 뼈와 인대를 봐가면서 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야가 이런 면에서도 도움을 준다. 공포를 자아내는 무자비한 폭력과, 심문 대상을 살려두어야 하는 입장 사이의 줄타기. 지속 가능한 고통.
"다시 묻지. 내가 너를 왜 찾아왔을까?"
눈치를 보던 프레이저가 아픔 반 두려움 반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 혹시... 14K에서 오셨습니까? 저희가 구역을 침범해서?"
"틀렸어."
콱! 거듭 무릎을 찍힌 프레이저는 고통에 겨워 몸을 비틀었다. 후방 십자인대의 상태가 아슬아슬하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완전한 회복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여길 살아서 나갔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프레이저가 말한 14K는 삼합회의 화교계 분파였다. 정확히는 다수의 분파들로 구성된 느슨한 협력체.
'이것들, 대책도 없이 차이나타운에서 사람을 죽였나?'
이놈은 나와 캐런의 대화를 듣고서부터 제 조직의 행보를 필사적으로 되짚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주어진 단서는 둘. 내 의뢰인이 노인이며, 내가 '가족과 이웃을 잃은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왔다는 것. 추가로 내가 동양계라는 것도 감안했을 터. 그러다 보니 차이나타운에서도 짚이는 게 있었던가 보다.
신생 조직 주제에 무슨 깡으로 거기서 피를 봤을까. 어지간한 조직들도 꽌시(關系)의 그물을 건드릴까 싶어 기피하는 마당에. 나는 심문을 계속했다.
"어서 맞춰보란 말이다. 내가 널 왜 찾아왔을지."
"...."
"틀린 답을 말하거나, 지금처럼 대답이 늦을 경우엔-"
프레이저의 입에서 악 소리가 터진다. 으지직, 뚝. 이번에야말로 놈의 십자인대와 슬개근을 끊고 슬개골마저 손상시킨 나는, 그러고도 워커 굽을 지긋이 비벼주고서야 비로소 발을 떼었다.
"이렇게 되는 거지."
자백제를 먼저 쓰지 않는 건, 자백제로 듣는 진술에 결함이 많은 까닭이다. 서로 다른 사건들이 뒤섞이거나 전후관계가 뒤바뀔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일단은 비합리적인 괴물을 연기하는 편이 나았다. 조금이라도 생각이라는 걸 할 틈을 주지 않으며 몰아붙이는 심문. 자백제는 그 뒤에 검증 용도로 써도 충분하다. 필요하다면 말이지만.
프레이저의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
수시로 두들겨 맞으며, 폭력의 은사(恩賜)를 받은 프레이저는 개신교도가 방언(方言) 터트리듯 저와 제 조직이 저지른 살인행각들을 마구잡이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고통 이상의 공포에 떠밀려서. 제 몸이 영구적으로 망가진다는 공포는 어지간한 고통보다도 강렬한 것일 터였다. 특히나 이놈처럼 심지 약한 유형에게는.
'제이 그놈, 확신범이 맞군. 높은 확률로 「미국전선」의 내부인물이겠고.'
살인의 분포와 구성은 살인자의 성향을 보여준다. 이 경우엔 조직과 배후조종자의 서로 다른 지향이 섞여있었다. 평범한 강도 살인과 조직분쟁, 그리고 이념적이거나 정치적인 인간사냥들.
'인디언 사냥'도 그 일환이었다. 정확하게는 이념적인 교육훈련의 일환이라고 해야겠다. 부하들을 사상적으로 고취시키고 소속감을 배양하는 동시에 조직적인 살인을 경험토록 하는 것. 원주민들은 그런 시시한 이유들로 죽어나갔다.
시시하지 않은 죽음이 흔하겠느냐마는.
무수히 쏟아진 키워드들을 토대로 나는 심문의 범위를 좁혀갔다. 진술을 들어보건대 제이는 대리인을 내세워 「백색근위대」의 창설을 도와주었고, 사상적인 기반과 법적인 비호를 제공해주었고, 그 대가로 상납금을 받거나 특정인의 실종처리를 의뢰하기도 했다.
이 등신들은 그가 내세운 「백인국가」 건설이라는 명분에 푹 빠져있었다. 이것들에게 있어서 「백인국가」는 유토피아의 동의어였다.
여기까지 듣고 한숨 돌린 난, 손수건으로 장갑에 묻은 피를 닦으며 물었다.
"제이에 대해 좀 더 말해봐. 그건 뭐하는 놈이냐? 진짜 이름은 뭐고? 어디에 살지?"
단시간에 피투성이가 된 프레이저는 하도 처맞아 심리적으로 완전히 눌려버린 상태였다. 말이 늦어질 때마다 사전적인 의미로 병신이 되어간다는 걸 학습했기에, 내가 슬쩍 눈을 찌푸리자마자 기겁을 해서 소리친다.
"몰라요! 모릅니다! 진짜로 몰라요! 얼굴도 본 적 없습니다! 만날 땐 항상 똘마니만 내보냈다구요! 연락도 그쪽이 먼저 하고요! 살려주세요! 때리지 마세요!"
"똘마니?"
"예, 예! 똘마니요!"
헉헉대는 호흡에 말이 끊어진다. 갈빗대가 여럿 부러져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난 권총을 뽑아 귓불을 날려버렸다. 외마디 비명 한 번 지르고 꺽꺽대며 우는 프레이저를 보며, 나는 계속 방아쇠를 당겨 놈의 남은 귀를 질금질금 줄여주었다. 고막이 진즉에 찢어져있던 쪽이다.
"울지만 말고 말을 해라, 말을. 그 똘마니는 주로 어디서 만났는지, 한 놈인지 아니면 여러 놈인지, 요구사항은 뭐였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억양은 어떻고 생김새는 또 어떤지, 접선은 어떻게 하는지..."
탁, 탁, 탁! 조용한 총성 속에 연달아 튀는 탄피들과 소음기에서 새는 초연. 한쪽 귀가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경험에 프레이저는 울음 섞인 절규를 내뱉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 정도로 안 죽는다."
멀게는 고흐가 제 귀를 잘랐고 가깝게는 러시아의 반체제 예술가가 제 귀를 잘랐다. 후자, 표트르 파블렌스키는 귓불만 잘라낸 거지만, 어쨌든 경찰이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도 과다출혈 같은 문제는 없었다.
뭐, 이놈은 비아그라를 처먹어놔서 상대적으로 출혈량이 많기는 하다.
바깥이 잠시 시끄럽다 싶더니 새로운 돼지 네 마리가 잡혀 들어왔다. 끌려오는 놈들은 실내에 팽배한 폭력과 공포의 냄새를 맡고 얼어붙었다.
절망이 짙어진 프레이저가 황급히 외친다.
"불러낼 수 있습니다! 제가 불러내보겠습니다!"
"그 똘마니를?"
"예!"
"어떻게?"
"예?"
"어떻게, 무슨 구실로 불러낼 거냐고 물었다."
"그게, 저기...."
"생각도 안 하고 막 내뱉었나? 내가 아직도 만만해 보이나 보지?"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면 생각해라. 생각을 해서 나를 납득시켜봐라. 쓸모없는 대가리에 구멍을 내기 전에."
프레이저는 숨을 거칠게 쉬며 제이의 대리인을 낚을 구실에 골몰했다. 너무 몰아붙여도 곤란하니, 나는 이어질 폭력을 조금 유예해주기로 했다.
#5. 짐승사냥 (7)
맹렬히 고민하던 프레이저가 눈치를 보며 내놓은 답은 돈이었다. 정해진 상납이 아닌, 자발적인 각출과 헌납을 미끼로 상대를 불러내겠다는 것.
'크게 기대도 안 했다만.'
이런 놈들 수준이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먹히기는 먹힐 것이다. 내가 한 조직의 수장이기에 쉬이 보이는 바이지만, 「백색근위대」는 관리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조직이었다.
당장 눈앞에서 질질 짜는 머저리만 봐도 그렇다. 그토록 많은 범죄를 주도했는데도 이 머저리의 거미줄 문신은 고작 세 겹에 불과했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3년밖에 안 된다는 뜻. 적어도 이놈 하나는 철저하게 지켜준 것이다.
이 바닥에서 법적인 보호는 지도자의 권능이다. 조직의 힘이 법을 능가하는 걸 보여주는 것만큼 단시간에 소속감과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일도 드물다.
허나 그 권능을 행사하는 데엔 돈이 든다. 그게 뇌물이든 변호사 수임료든. 뇌물은 그냥 고정비용으로 들어가는 거고, 뇌물을 먹이고도 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경우 기본적으로 수십만 달러가 깨진다고 봐야 한다. 강력범죄에 대한 변호사 수임료는 시간당 3천 달러를 가볍게 넘기곤 하니까. 로펌의 정식 파트너쯤 되면 시간당 1만 달러도 우습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가야 할 감옥을 안 가게 만들어 주거나, 형량을 무의미한 수준으로 줄여줄 수가 없다.
여기에 조직의 운영비용은 또 별개.
그러므로 제이가 그간 이놈들로부터 받아왔던 상납금은 유지비용과 충성맹세 이외의 의미가 크지 않은 것이었다. 돈을 헌납하겠다고 나서면 금액 무관하게 좋다고 받을 첫 번째 이유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공돈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얼마를 바치겠다고 할 셈이냐?"
내 물음에 프레이저가 즉답했다.
"40만 달러!"
한숨이 나온다. 난 얼간이의 뺨을 툭툭 치며 목소리를 낮췄다.
"말이 되는 액수를 이야기해야지, 응?"
제이의 아이큐가 두 자리가 아닌 이상 의심부터 하고 볼 금액이다. 사무실 금고에 40만 달러가 들어있긴 했지만, 같이 있던 장부의 내용을 보건대 그 금액의 절반 이상은 마약 도매상에게 지불할 대금이었다.
게다가 이놈들이 욕심이 좀 많은 놈들이어야지.
나는 거북이처럼 움츠러든 얼간이에게 금액을 정해주었다.
"1만 달러.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백인국가」 건설에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고 싶다고 둘러대."
"너, 너무 작지 않겠습니까?"
"네놈들 수준엔 그것조차 과해."
그래. 과하다. 그러나 믿을 것이다.
'믿고 싶을 테니까.'
제이는 확신범이고, 확신범에게 중요한 건 신념이다. 제 신념이 졸개들을 깊게 감화시켰다는 사실은, 히틀러 주니어에게 있어선 제 행보의 트로피이자 '믿고 싶은 현실'일 수밖에. 얼마나 뿌듯할까. 얼마나 기특하게 느껴질까. 그가 금액 무관하게 좋다고 받을 두 번째 이유였다.
"이건 이 정도면 됐다고 치고...."
제이의 대리인을 불러내자면 우선 날부터 밝아야 한다. 이른 새벽부터 연락을 넣었다간 수상한 낌새를 챌 게 뻔하잖나. 그때까지는 이 우두머리 쓰레기를 살려둘 필요가 있다. 적어도 통화는 멀쩡하게 가능한 상태로.
"이봐, 프레이저."
"옙!"
프레이저의 박박 민 머리는 검은 문신들로 흉하게 뒤덮여있었다. 난 권총 끝으로 그 문신들 가운데 하나를 쿡쿡 찔러댔다.
"너는 네가 진정 아리아인의 혈통이라고 믿나?"
내가 찍은 문신은 위아래로 리본이 감긴 철십자 문양이었다. 리본 안엔 「백인국가와 아리아 인종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같잖은 글귀가 적혀있었고. 권총 총구가 제 머리통에 닿자 프레이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대답 안 하지?"
팔을 든 내가 권총손잡이로 내리치려 들자, 프레이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믿습니, 흐읍, 믿습니다!"
숨이 부족해 중간에 끊어지는 외침이었다.
"믿는다고?"
"예!"
"무슨 근거로?"
"저는 배, 백인이니까요!"
무식이 튀는 근거다. 백인 혈통이 아리아인 하나인 줄 아나?
"그래서, 유전자 검사는 받아봤고?"
"...안 받았습니다!"
"왜? 검사가 유행했던 걸로 아는데. 네놈의 인터넷 친구들 사이에서 말이야."
"그건...."
퍼억! 자꾸 뜸을 들이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리찍었다. 철십자 문신이 찢어지고, 권총 손잡이 아래엔 기어코 피와 기름이 묻게 됐다. 손을 좀 덜 쓰려고 해도 이렇게 학습이 느려서야. 난 소음기 끝으로 이마를 밀어 프레이저가 고개를 들게 했다.
"말해. 그건 뭐?"
눈동자를 위로, 제 이마에 닿은 총구로 모은 백돼지가 또 흐느끼며 답한다.
"유전자 검사는, 그, 유대자본가들의 음모가 있는, 검사를 조작해서 백인의 정체성을, 흑, 정체성을 무너뜨리려는 비열한 음모를, 그거는 믿을 수가 없는, 더러운 유대인들...."
주술호응이 엉망진창인 대답이었지만 내용은 이해가 간다.
X신.
한때 백인 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유전자 검사는, 그들 중 3분의 2가 순수 백인이 아니라는 훌륭한 결과를 보여주었던 걸로 안다. 책으로 이 사실을 접했을 땐 머저리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했었는데, 사람은 역시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동물이었다.
순수 아리아인은 미국이나 유럽보단 차라리 인도에서 찾는 편이 빠를 것이다. 인도는 혈족과 마을 단위로 카스트 구분이 엄격하니까.
'그러고 보면 「마녀」가 인도 출신이었지.'
「마녀」 그레이스.
식민지 시절의 인도에서 태어났으며, 아리아계에 속하는 혈통과 탁월한 미모 때문에 영국의 늙은 마법사에게 납치당해 첩살이를 했던 여자. 그녀는 탐욕스러운 납치범을 계획적으로 유혹했고, 애첩의 아름다움이 영원하길 바랐던 마법사는 원탁의 계율을 어기면서까지 그녀에게 자신의 마법을 공유했다. 오죽 깊이 빠져있었으면 그녀를 제 인생의 은총(그레이스)이라고 불렀을까.
늙은 제국주의자를 다리 사이에 끼고 기회를 엿보던 그레이스는, 마침내 자신을 희롱하던 원탁의 마스터를 살해한 뒤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들을 가로채 잠적했다.
스승새끼를 포함해 원탁의 제국주의자 모두가 끔찍하게 증오하던 여자였다. 그녀는 「빛과 진리의 원탁」 최대의 치욕이자 최악의 손실이었으므로. 스승새끼의 배신이 그 최대와 최악을 동시에 경신해버렸지만.
'내가 그 여자와도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1999년에 다시 자취를 드러냈을 때, 그녀는 악마숭배집단 「O7A」의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갈라진 목소리로 나를 애타게 부르는 프레이저.
"귀에서 피가 멈추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죽을 겁니다.... 제발, 선생님, 아직은 제가 필요하시잖습니까....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제발요...."
이 애송이, 피 흘려본 적 없는 티를 너무 많이 낸다. 어쩌다 이런 놈이 두목이 되었지? 나는 한심한 눈으로 프레이저를 바라보다가, 가까운 부하를 향해 손을 펼쳤다.
"칼."
칼 소리를 듣고 또 코를 벌름거리는 프레이저. 확장된 두 눈이 내 손으로 들어오는 칼에 못 박힌다. 난 불빛에 날을 비춰보며 물었다.
"프레이저. 혹시 마법을 본 적이 있나?"
"예?"
나는 내 영의 회로에 술식 연산을 돌렸다. 회로가동이 불완전한 지금도 무리 없이 쓸 수 있는 단순하고 간결한 술식을. 이에 따라, 칼날의 차갑던 금속광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프레이저는 점차 뜨거워지는 그 광채를 숨도 못 쉬고 응시했다. 두목이 맞는 걸 보고만 있던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치이이이-
"끄아아아아악!"
고기 익는 냄새가 난다. 난 칼을 뒤집어가며 프레이저의 잘린 귀를 지졌다. 꾸욱 눌렀다 떼니 기름 덜 먹은 프라이팬처럼 살점이 조금 뜯어져 나왔다.
"술."
손가락을 까딱이자 부하가 얼른 위스키를 가져다준다. 난 뚜껑을 열고 반쯤 남아있던 내용물을 프레이저의 머리 측면에 부어주었다. 프레이저가 다시금 자지러졌다.
술의 도수가 낮아 소독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깨끗한 물 대용으로는 쓸 만하다. 상처가 건조해져 흉이 더 쉽게 지기야 하겠으나, 그게 지금 문제가 되나? 난 부하에게 빈 병과 칼을 함께 돌려주었다.
칼에 모였던 시선들이 내게로 옮겨온다. 이해를 넘어선 것에 대한 공포가 더해진 시선들.
바깥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시차를 두고 호출한 돼지 네 마리가 추가로 잡혀왔다. 이번엔 저항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는 총구멍이 많아 조만간 죽을 상태였다. 죽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내 부하들은 놈을 비닐로 단단히 말아 포장했다.
퍼덕퍼덕!
포장당한 녀석이 산소부족으로 몸부림친다. 비닐 안쪽의 얼굴엔 청색증이 올라왔다. 산소부족으로 말미암아 눈가와 입술이 파랗게 물드는 것이다. 죽어가는 자와 눈이 마주친 돼지들이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촬영을 담당한 부하가 말없이 이 광경을 녹화했다.
사람이 묶인 의자가 점점 늘어나니 이것도 꽤 신선한 풍경이다. 어지간해서는 이만한 수의 사람을 한꺼번에 묻어버릴 일이 없었으니까.
눈이 풀린 프레이저가 오한에 떨며 묻는다.
"선생님께선 설마 마법사(Wiccan master)이십니까?"
"내가 그런 엉터리로 보이나?"
"...."
이놈이 말한 마법사는 진정한 의미의 마법사가 아니다. 요 몇 년간 북미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중인 종교, 마법숭배교단(Wicca)의 사제지.
빠르게 확산중이라고 해봐야 신도의 절대수는 고작 2백 몇십만 정도지만, 밑바닥 시궁창에서 기는 인생일수록 그런 미신과 거리가 가까운 법이었다. 신도가 아니더라도 주술과 저주는 신경 쓰는 놈들이 태반. 이건 교육 수준의 문제다.
특히 이런 동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중남미나 카리브에서 넘어온 인구로 인해 산타 무에르테니 요루바 이파니 하는 주술 신앙들의 영향이 강하니까.
당장 이 머저리의 몸뚱이에도 관련된 유형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내가 계산적으로 마법을 내비친 이유였다. 상대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의 씨앗을 움틔우기.
아예 마력으로 뇌와 신경 자체를 건드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단순히 술식을 사용하는 것과 그 술식으로 영이 깃든 육을 침식하는 건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었다.
"흑...으흑...."
가뜩이나 염증으로 골통에 열이 차 머리가 둔해진 상태였을 프레이저는, 심리적으론 더 이상 부수고 흔들 여지가 없을 만큼 완전하게 굴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도 음경은 여전히 빳빳하게 서있어 꼴 보기 싫다.
'아니, 더 보고 있을 필요도 없나.'
깡패 주제에 깡이 없어도 너무 없는 쓰레기여서 일을 하다 만 기분이 들긴 하지만, 이쯤 됐으면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맡겨놓고 쉬어도 무방할 터였다. 이제 와서 뭘 꾸미거나 속일 엄두를 낼 수 있으려고.
"선생님...."
"뭐."
"맹세합니다. 시키는 건 뭐든 다 할 테니, 끅,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상납금도 바치겠습니다...."
"하는 거 봐서."
"저, 정말입니까?"
"진정한 마법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프레이저는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본 표정이 되었다. 거짓말을 하면 주술의 힘을 잃어버리느니 어쩌니 하는 소문을 들어봤을 테지.
갱들의 세계에 동화적인 구석이 있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내 부하들에게 협조해라. 아침에 그 결과를 보겠다."
"예! 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난 필사적인 얼간이와 그 외의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사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사무실엔 새벽의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직까지 열려있던 창문을 닫고, 캐런 윌리엄스와 대화를 나누던 의자에 앉는다. 난로의 열기와 기름 냄새가 새삼 피로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기서 눈을 붙이는 건 무리였다.
'의뢰를 완수하면 하루나 이틀은 쉬어야겠군.'
지금은 활자를 볼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간간이 들려오는 비명 속에서, 나는 따뜻한 빛을 쬐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이런 낭비가 불가피한 순간들이 있었다.
#5. 짐승사냥 (8)
어젯밤 나는 호텔 객실에서 권총에 열한 발의 실탄을 채웠다. 탄창에 열 발, 약실에 한 발. 그리고 지금, 날이 바뀐 오후 1시 20분, 내 권총엔 단 한 발의 실탄도 남아있지 않았다.
첫 번째 실탄은 캐런 윌리엄스가 사용했다. 아홉 발은 귀를 쳐내는 고문에 써먹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발은 프레이저에게 베푸는 나의 자비였다.
뚜욱- 뚝-
의자에 묶인 백돼지 두목은 앞으로 기울어진 채 한쪽 눈에서 묽은 피눈물을 쏟고 있었다. 이 금수에게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하기 위하여, 나는 머리통을 붙잡고 세심하게 각도를 조절해 지근거리에서 방아쇠를 격발했다. 눈을 깨고 들어간 소구경 아음속탄은 머리뼈에 갇혀 여러 각으로 튕겨졌다. 탄자의 힘이 강했으면 뒤통수로 뚫고 나왔을 것이다.
나는 이제 제이의 심부름꾼을 향해 돌아서며 탄창을 교환했다.
우우우웁!
여분의 의자에 새롭게 묶인 심부름꾼이 의자를 덜컹거리며 발광한다. 탁, 하는 도축을 목격한 두 눈엔 핏발이 잔뜩 서있었다. 1만 달러의 올가미에 쉽게도 걸려든 사냥감. 마음에 안 드는 건 아침에 연락을 받고 오후가 되어서야 찾아온 느긋함뿐이었다.
나는 두려워하는 놈을 바라보며 권총을 갈무리했다.
"욕심 부리지 마라. 너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그러곤 경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온 것 있나?"
경태가 한 손으로 엄지를 세워 보인다.
"제이라는 작자의 전화번호랑 본명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예. 페이스북 페이지도 같이 말이죠. 포스트마다 열심히 좋아요를 눌러댔더라고요."
제이의 심부름꾼은 두 개의 전화를 휴대하고 있었다. 하나는 선불 폰이고 다른 하나는 정상적으로 계약한 단말기다. 이런 자리에 올 땐 뒤쪽을 두고 오는 게 안전하지만, 이놈은 둘 다 들고 와버렸다. 설마 무슨 일 있겠어? 싶었을 것이다.
"본명이 뭐냐."
"캘빈 케네스 브라임로우입니다."
"주소는?"
"본사에서 원격으로 내비게이션 메모리를 파보고 있습니다만, 다른 단서들과 일일이 대조해보기보다는 자백제를 쓰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써라."
"옙."
사실관계가 복잡한 진술이라면 모를까, 주소처럼 단순한 정보의 확인 정도는 자백제로도 믿을 만한 진술이 나온다. 양 조절을 잘못해서 상대를 재우거나, 죽이거나, 거짓말을 할 여력을 남기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이 투여량 조절은 전문가조차 가끔씩 실수를 할 만큼 까다로운 것이다. 내 부하들은 그나마 사람을 죽여 가며 실습해서 실수를 덜 하는 편.
'어차피 죽일 놈들을 안락사로 처리해준 셈이지.'
부하 하나가 심부름꾼의 정맥에 신중히 스코폴라민 혼합물을 주사했다. 효과는 채 열을 세기도 전에 나타난다. 모든 자백제는 기본적으로 마취제이기 때문. 애당초 미 정부에 자백제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이 산부인과 의사였다. 마취 상태의 산모들이 자신의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더라고. 이거 잘만 쓰면 법정에서 위증을 밝히는 데도 유용하지 않겠느냐고. 당연하게도 미국은 그것을 위증을 밝히는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마취 효과가 나타나자 심부름꾼의 움직임을 억누르고 있던 다른 두 부하가 손을 떼고 물러났다. 약에 취한 놈의 게슴츠레한 눈이 허공을 헤맨다. 경태는 심부름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이, 이봐."
"...응."
"캘빈 브라임로우, 알지?"
"...어."
"그 친구 어디에 살아?"
"...롬바드...스트리트."
"그게 어딘데?"
"러시안 힐...."
경태가 검증 차 여러 번 되물었으나, 심부름꾼은 정확한 번지수까지 외우고 있진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탐색범위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경태는 본사의 현장지원팀에게 문자를 넣어주고, 기왕 자백제를 쓴 김에 다른 질문들을 추가로 던졌다. 평소엔 무슨 일을 하는지, 대인관계와 가족구성은 어떠한지, 생활패턴은 또 어떤지 등.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딩동."
경태가 제 핸드폰을 보며 입으로 내는 소리.
"주소 확인됐습니다. 950 롬바드 스트리트, 샌프란시스코라는데요?"
"공유해라."
"옛 썰."
내 단말기로 전달된 주소와 사진들을 보니 도심 한복판에선 보기 드문 규모의 저택이었다. 집만 팔아도 천만장자일 인간이 뭐가 아쉬워 백인국가 건설처럼 쓸 데 없는 이상에 투신하나 싶을 정도지만, 뭐, 어떤 길이라도 갈 수 있어서 오히려 길을 잃어버리는 놈들도 많으니까.
사진을 보고 있는데 영업용 단말기로 전화가 걸려왔다. 번호를 보니 하얀 추장이었다. 내 부하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현장지원팀이 편집해서 보낸 게 세 시간쯤 전인데, 이제야 확인한 모양이다.
'하던 일 하느라 바빴거나, 드는 생각이 많았거나.'
실행범으로 「백색근위대」를 지목한 시점에서 최소한 프레이저의 낯짝쯤은 파악하고 있었을 테니, 내가 보낸 영상이 가짜가 아니라는 건 보자마자 알았을 것이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돼지들을 등지고 전화를 받은 난, 인사를 생략하고 질문부터 던졌다.
"추장. 영상은 잘 보셨습니까?"
「...결과를 이토록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엄밀하게는 아직 결과가 나온 게 아니지요. 목숨들이 여전히 붙어있고, 막후의 인물은 조금 전 소재를 확인해서 찾아가려던 참이었으니."
「내 말은, 어쨌든, 속도가 놀랍다는 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맞소. 설마 당신께서 직접 나서신 거요?」
"우리 회사는 그렇지요. 정말 중요한 일들은 내가 손수 처리하곤 합니다."
「....」
"추장님 당신에 대한 내 성의로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군요."
「그건... 고맙소. 후견인까진 기대하지 않았건만.」
이 영감이 아무래도 진심으로 놀란 것 같다. 하기야 카지노에서 사람을 담글 기회가 얼마나 자주 있었겠는가. 담가도 개인 단위로 담그고, 전투를 치러도 방어전이 고작이었겠지. 게다가 암흑경제 전반이 다 그렇듯이, 사람을 사냥하는 분야에서도 아마추어와 사기꾼과 도둑놈들이 많은지라.
'그러고 보면 갑을병정을 넘어서까지 하청을 준 등신들도 있었지.'
이는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다른 나라의 청부업계라고 딱히 더 나은 것은 아니다. 암흑경제란 결국 공권력의 감시를 회피하는 완전자유시장이며, 경력을 검증하거나 신용을 보증하는 시스템이 전무하므로. 대형 범죄조직들이 나름대로 시장질서 비슷한 걸 만들어보려 애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뢰가 너무 많다보니 지들도 밟거든.
"방침을 정해주시죠."
「방침이라니?」
"이것들을 전부 다 살려둔 이유가 뭐겠습니까? 이 많은 수를 다 심문할 것도 아닌데."
「....」
"계약이 성립한 이상, 나와 내 회사는 당신이 쥔 칼입니다. 칼을 어떻게 쓸지는 쥔 사람의 마음이지요. 우리는 날이 무딘 칼일 수도, 예리한 칼일 수도 있습니다."
무딘 칼로 자르는 재료는 당연히 엉망진창이 된다.
추장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되도록 고통스럽게 부탁드리겠소.」
"알겠습니다. 결과는 아까처럼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후에 다시 통화합시다.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전화를 끊었다.
높은 창문들로부터 광선 같은 햇살이 들어오는 창고 내부엔 은은한 지린내가 감돌고 있었다. 너무 오래 묶여있어서 바지에 실례를 한 놈들이 원인이다. 무서워서 방광이 오그라든 놈들도 있겠지만. 이래서 도축은 빠를수록 좋은 건데.
경태가 묻는다.
"추장이 뭐랍니까?"
"예상대로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 뻔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묻지 않고 진행할 수는 없었다. 날 쾌락살인마 내지 이중인격 미치광이로 보게 되면 곤란하니까. 끔찍한 결과는 확실하게 추장 스스로가 원한 것이어야 한다. 난 경태와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진행해라."
"예."
되도록 고통스럽게, 라는 주문을 받긴 했으나 시간을 길게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가장 효과적인 건 역시 전기고문이겠지만....'
그건 밀그램이 제 실험에서 거짓으로 연출했던 것처럼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품이 많이 들고 오래 걸리며, 무엇보다 시각적인 만족도가 낮다. 비명 좀 지르고 살 좀 타고 연기 좀 피어오르는 걸로 끝.
마찬가지로 독극물도 시각적인 자극이 약하다. 차라리 전기톱으로 갈아버리는 편이 고객만족도 향상에 유익할 것이었다.
위이이이잉-!
밀폐 보호복과 페이스실드를 착용한 부하들이 원형 전기톱에 시동을 걸었다. 다른 부하들은 테이블을 세팅했다. 재갈에 막힌 돼지들의 아우성이 모터 소리에 다시 파묻힌다. 나는 테이블에 고정된 첫 번째 돼지가 산 채로 해체되는 광경을 큰 감흥 없이 지켜보았다. 겉보기엔 우악스러워도 기술적으로는 섬세한 톱질. 소음은 쇠가 뼈를 가를 때 가장 높아졌다. 대상이 사람이고 살아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일반적인 육가공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난 첫 번째 해체까지만 보고서 창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번을 서는 부하들은 복면을 벗은 채 무기를 감추고 있었다. 아무리 후미진 골목이어도 벌건 대낮에 강도 복장을 하고 있을 순 없는 까닭이다.
도로 건너편에선 우리가 끌고 온 차들이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인근 거주지에서 누구 하나 창문을 열고 항의하는 이가 없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면 일터로 나갔을 시간이거니와, 이 창고를 주거지로 쓰는 놈들의 업보이기도 할 것이었다.
이 동네의 주거환경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치안이 나쁜 도시에서 특히 더 세가 싼 집은 싼 이유가 있는 법.
창고 앞 몇 개의 드럼통엔 불이 지펴져 있었다. 평소엔 갱들이 모여 더러운 이야기들을 나누며 손을 녹였을 불이고, 지금은 태워야 할 것들을 태우고자 경계를 서는 녀석들이 피워놓은 불이다. 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매캐한 연기 속으로 던져 넣었다.
사람을 해체하는 톱질은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조각난 시체들은 트럭 두 대로 실어온 수산화나트륨 탱크에 던져졌고, 핏물은 바닥에 깔았던 비닐을 기울여 배수구로 흘려보냈다.
"다들 수고했다."
난 현장을 정리하고 나온 부하들을 격려해주었다.
"이 일을 마치거든 교대로 하루씩 자유 시간을 주마."
이제 「제이」, 본명 캘빈 브라임로우를 처리하고, 내일 새벽쯤 다시 이 창고로 애들을 보내 수산화나트륨으로 녹인 시체를 하수구에 흘려보내는 일이 남았다. 그러고서 녹지 않은 뼈만 모아 잘게 부순 뒤 바다에 던져버리면 정말로 끝.
과염소산 같은 걸 쓰면 더 빠르겠는데, 수산화나트륨 쪽이 구하기가 쉬운지라.
차에 몸을 싣자 옆자리를 차지한 경태가 물었다.
"캐런 윌리엄스는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 없을까요? 형님의 맨얼굴까지 봤는데 말입니다."
"됐다."
난 경태의 우려를 부정했다.
"설령 그 여자가 갈등 끝에 돈을 외면하기로 한들, 어렵게 결심을 내릴 즈음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까."
"그야 그렇겠지만요."
인간의 기억은 쉽게 오염된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몽타주라 할 수 있는 유나바머의 몽타주조차 실은 전혀 무관한 제3자의 얼굴이었다. 목격자가 유나바머와 마주친 건 사실이나, 그 뒤에 마주친 또 다른 인물의 얼굴이 기억에 덧씌워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여자와 나 사이엔 인종의 장벽이 있지.'
다른 인종을 보면 웬만해선 다 비슷해 보인다고들 하지 않는가. 오늘 이후 캐런은 나와 비슷한 아시아계를 볼 때마다 흠칫거리며 놀랄 것이고, 그렇게 보는 얼굴들은 매번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의 인상에 반영될 터였다. 그러한 왜곡엔 감정상태 및 다른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의 영향이 짙게 들어간다. 연령과 신장 정보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정확한 편.
현대 수사학에서 몽타주의 신뢰도가 '없는 것보단 낫다' 수준인 이유였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한 나는 그래도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아니. 이삼 일쯤은 미행을 붙여둘까."
경태의 안색이 밝아진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카지노 코인을 받고서 어떻게 반응하는지까지 지켜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투손으로 직행한다면 더 볼 것도 없겠지.
#5. 짐승사냥 (9)
엄밀히 말해 제이- 캘빈 브라임로우는 청부 대상이 아니다. 내가 하얀 추장에게 약속한 건 어디까지나 「백색근위대」의 말살이므로. 하지만 의뢰의 본질은 복수였고, 10의 노력을 더 들여 100의 효과를 추가로 거둘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만큼 잠수함이 필요했다. 런던을 불태울 테러리즘의 밀수선단이.
'그러고 보면 「미국전선」도 「영국전선」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거였지.'
악마숭배의 본산도 현재는 영국이고. 하여간 세상 흉악한 건 다 영국 놈들이 일조하고 있다.
운전석의 부하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캘빈의 저택은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를 마주보는 위치에 서있었다. 경사진 지대, 평탄화를 위해 돋워놓은 터가 성곽처럼 시야를 차단한다. 여기에 두꺼운 관상수들까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안쪽을 볼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안에 아무도 없군."
내 말에 경태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렇습니까? 몇 명이라도 지키는 부하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눈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갸우뚱.
"하다못해 고용인 하나 없다는 게 이상하네요. 이 정도나 되는 저택에 말입니다."
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녀석인가 보지."
종종 그런 유형이 있다. 자신의 무방비한 영역을 강박적으로 감추는 녀석들. 이런 녀석들에게 자신의 사적인 공간을 드러내는 건 타인에게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혹은 그냥 사람이 싫은 놈이거나.
"이유야 어쨌든 잘됐다. 우선은 너와 나, 둘만 들어가 보도록 하자. 괜찮은 게 보이는구나."
경태는 군말 없이 끄덕였다.
"옙. 나머지 애들은 적당히 돌고 있으라고 하겠습니다."
이곳은 주택가다. 폐쇄회로도 많고 주차된 차들도 많았다. 떼거리로 차를 대고 떼거리로 움직이기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삑- 철컹-!
한쪽에 작게 난 쪽문의 전자식 자물쇠는 마법으로 간단하게 해제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내 마법에 부족한 건 출력이지 정교함이 아니며, 자물쇠를 여는 데 필요한 전압은 고작 1.5볼트에 불과했으니까. 폐쇄회로를 잠시 정지시키는 것도 난이도는 비슷한 수준이었다.
나는 뒷짐을 지고 앞장섰다. 느리게 걷는 걸음에 포석 틈으로 자란 잡초가 밟힌다.
"이건 무슨 폐가도 아니고."
뒤따르는 경태의 감상.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정원은 겨울이라 누렇게 죽어있기까지 했다. 앙상한 나목(裸木)의 가지들이 메마른 바람에 가늘게 부대꼈다. 퇴락한 정원은 저택을 완전히 둘러싸는 형태였다. 귀가한 캘빈이 잠들기를 기다려, 늦은 시각 불씨만 놓아도 간단히 태워죽일 수 있을 정도로. 마법적인 방화엔 단서도 남지 않을 것이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주문한 추장 역시 만족할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처리해버리면 사건이 미스터리로 남는다는 점에서 위험 부담이 크다.
이만한 정원에 탈출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을 지르려면 그만큼 많은 불씨를 흩뿌려야 하는데, 이는 누가 보더라도 부자연스러울 현상이다. 방화임은 확실하나 증거가 전무한 사건. 이 일대에 즐비하게 주차된 차들의 블랙박스들이 그 부자연스러움을 낱낱이 기록할 것이고....
'머지않아 원시마법에 각성한 능력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이 사건 또한 모종의 초능력에 의한 범죄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받겠지.'
마소의 농도가 아무리 높아졌어도 지금은 각성자가 등장하기에 너무 이른 시기다. 스승새끼를 쫓는 원탁의 마스터들이 이 사건을 접한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 터.
무엇보다, 청부자인 하얀 추장은 강력한 심증을 얻을 것이다. 그는 화재가 나의 소행임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고로 이런 쪽으론 작은 위험이라도 피해서 가고 싶다.
나와 경태는 미닫이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여기서도 경보장치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이 기계적이든 전자적이든, 내 앞에서 대부분의 잠금장치와 방범장치들은 무용지물이었다. 「황금기의 눈」은 전기가 흐르는 배선을 고유의 색채로 인식하니, 의식만 하고 있으면 놓치고 넘어가는 장치가 있을 리도 없다. 시야 내에서 특정 정보를 탐색 및 강조하는 기능이었다.
경태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어? 하고 웃는다.
"밖에서 보셨다던 '괜찮은' 게 아무래도 사제 폭탄이었나 보네요."
"그래."
"하필이면 TATP라니. 이쯤 되면 알리바이를 만들어 바치는 수준인데요?"
"왜. 정석적이지 않나."
"그렇긴 하죠. 초짜들한테는."
TATP. 트리아세톤 트리퍼옥사이드(triacetone triperoxide). 이 폭약은 아세톤, 황산, 과산화수소수만 가지고도 제조가 가능한 테러리스트의 친구다. 여기에 도구도 셋이면 충분하다. 비커, 믹서기, 그리고 여과기. 재료와 도구가 있고 혼합비율만 알면 일반인도 한 시간 내로 폭탄마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별명이 「사탄의 어머니」였다. 만들기가 너무 쉬워 사탄 새끼들을 양산한다고.
경태가 냄새만 맡고도 폭탄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이 폭약이 굉장히 인공적인 과일향을 풍기기 때문이었다. 제조과정에서도 그렇고 완성품도 그렇다.
지하로 가는 문에는 별도의 잠금장치가 걸려있었다. 이번에도 쉽게 풀고 계단을 내려가자 자극적인 향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캘빈의 지하실을 본 경태가 감탄했다.
"이야. 기특하다, 기특해."
지하실 중앙엔 폭탄과 신관을 제조하는 작업대가 놓여있었다. 주변엔 황산을 뽑아내는 데 썼을 자동차 배터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시시한 취미생활이군.'
그렇다. 취미생활이다. 이렇게 돈이 많은 놈이 수제 폭탄 만들겠다고 궁상을 떨 이유가 없었다. 완제품을 사버리면 그만이니까.
따라서 눈앞의 작업대엔 미학과 도취가 녹아있었다. 혁명가의 미학과 투쟁을 꿈꾸는 자의 유아적인 도취가. 굳이 배터리에서 황산을 뽑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심을 피한다는 의미도 있겠다만, 가난을 패션으로 소비하는 부자를 보는 듯하다.
"형님. 혹시 이것도 보셨습니까?"
서가로 다가간 경태가 장갑 낀 손으로 책 한 권을 뽑아보였다. 제목은 「무정부주의자의 요리책」. 다양한 폭탄 제조법을 담고 있어 FBI로부터 출판금지 명령을 받고, 내용을 고쳐 다시 발간해야 했던 불온서적이었다.
그 유명세와 별개로, 이 바닥에선 그냥저냥 나쁘지 않은 입문서쯤 된다. 기실 내용보다는 수집품으로서의 가치가 더 큰 책이다.
"도로 꽂아 놔라. 수사관들이 좋아하겠지."
"아깝네요. 이렇게 깨끗한 초판은 구하기 어려운데."
나는 경태의 괜한 아쉬움을 등지고 캘빈의 작업대에 앉아 납땜기의 전원을 확인했다. 마침 캘빈 놈이 만들다 만 신관이 있어, 마저 완성해서 써먹을 작정이었다. 경태가 볼을 긁는다.
"직접 하십니까?"
"그래."
캘빈의 심부름꾼이 자백제에 취해 토해낸 바에 따르면, 캘빈은 잠시 후에 집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이 신관을 완성하는 건 불과 몇 분으로 끝나는 작업. 이 업계에 오래도록 종사해온 내게, 일부러 '결함이 있는' 신관을 만들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금세 신관을 완성한 난, 완성품을 들고 작업실 한쪽의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캘빈이 그간 열심히 제조했을 폭탄이 반쯤 들어차있었다. 대충 15킬로그램쯤 되지 싶다.
15킬로그램이라, 15킬로그램....
오차를 감안하고 암산해보건대 폭발압력은 5미터 거리에서 30 내지 40psia(제곱인치당 파운드)쯤이고, 밀폐된 환경을 고려하면 더욱 강력해질 것이며, 이 정도면 파편 없이도 작업대가 있는 거리까지 100% 살상지대를 형성할 위력이었다.
난 폭탄에 신관을 세팅하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러곤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허전하군."
"그렇습니까?"
"최소한 이게 누군가의 복수라는 건 알고 죽어야 할 것 아니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지위이고 권력이다. 캘빈 브라임로우는, 그 음침한 내면과는 별개로 지역사회- 정확히는 소외된 백인들의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유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 부촌의 주민들 사이에서 인맥을 넓히려는 시도에도 열심이었고.
이 시대의 '자칭' 혁명가가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건 자연스러운 일.
따라서 추장이 주문한 고통스러운 죽음은, 캘빈에 한해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이 돈 많은 백인우월주의자의 최후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니까.
무엇보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예산이 풍족하다. 바로 옆의 오클랜드와는 다르게.
그러니 추장도 이 불가피한 관대함을 이해해줄 테지.
나는 테이블 위, 캘빈이 레시피를 적는 데 썼을 메모장에 짧은 문장을 휘갈겨 북 찢어냈다. 그러곤 그것을 냉장고에 마그넷으로 붙여놓았다. 다른 마그넷은 다 치워버렸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복수를 원하는 자는 두 개의 무덤을 파야 한다.」
복수에 관한 중국 놈들의 격언. 하나는 원수를 위해,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해.
왜 이렇게 썼느냐면, 이 캘빈이라는 놈의 진짜 동기가 유색인종에 대한 원한이었기 때문이다.
몸을 돌린 난 잠시 작업대 정면을 응시했다. 벽걸이 코르크보드에 압정으로 고정된 신문 스크랩들은 거의가 백인에 대한 제도적 역차별 및 유색인종들의 범죄행각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어느 모녀가 대낮의 거리에서 흑인에게 피살당한 사건이 가장 크게 붙어있다. 두 피해자의 성씨는 브라임로우였다.
모녀를 살해한 범인은 자칭 '급진적인 흑인 인권운동가'로, 법정에 서서는 "기득권층인 백인은 흑인에 대하여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가 될 수 없다." "백인은 죄인과 동의어다." "나의 살인은 범죄가 아닌 의거였다." "백인이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등등의 개소리들을 지껄였다고 쓰여 있다.
하는 소리가 어째 「블랙 게릴라 패밀리」랑 비슷한데. 그 백인우월주의의 피부 검은 데칼코마니들. 선조가 피로써 물려준 명분을 무가치하게 소모하고 있는 집단.
사연 없는 무덤 없고 이유 없는 증오도 없다. 사회현상으로서의 집단적 증오는, 그것이 어느 집단의 증오이든 저마다 각자의 이유들을 가지고 있으나, 대개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내 일에 관련되는 경우만을 제외하고. 두 개의 무덤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증오에 대한 이해는 그저 사업가의 교양일 뿐이다.
브라임로우 가(家)의 비극 또한 이 순간이 지나면 내 관심사가 아니게 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대각선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문의 차고가 열리며 차 한 대가 진입하는 중이었다.
"드디어 집주인이 왔구나."
"가시죠."
"그래야지."
난 들어올 때와 같이 여유롭게 걸어서 저택을 나섰다. 정문으로 들어오는 집주인과 후문으로 나가는 침입자. 서로 반대로 움직이니 집이 넓어 마주칠 일이 없다. 정원 바깥의 경사로로 내려온 나는 차에 올라타 저택 안을 주시했다.
집에 왔다고 해서 곧바로 작업대로 직행할 리는 없으니, 캘빈이 살상범위에 들어갈 때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형님."
"뭐냐."
"달달한 도나쓰가 땡기지 않으십니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여기는 미국이고, 도나쓰의 본고장이며, 차에서 잠복근무를 할 땐 도나쓰를 먹어주는 게 예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
그건 경찰의 스테레오타입 아니었나? 좀 어이가 없어서 경태를 바라보면, 이 녀석은 그냥 배가 고플 뿐이었다. 사냥이 진행되는 내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듦에 따라 허기가 밀려올 법도 했다.
'아니, 이건 나를 신경써주는 거로군.'
열량을 간단히 채우고 호텔로 돌아가 바로 쉬게 해주려는 배려.
수면부족으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기분이다. 나야말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고 풀어진 것일지도.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 시켜 봐라."
"옙!"
경태는 유사시 탈출로 확보를 담당한 녀석들에게 무전을 넣었다. 이 근처에서 옐프(Yelp) 별점이 높은 도넛 가게를 찾아 종류별로 사람 숫자만큼 집어오라는, 참 쓸데없이 구체적인 지시였다.
잠시 후, 나는 글레이즈드 도넛에 단맛이 과한 밀크티를 곁들이며 캘빈의 움직임을 눈에 담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한 녀석은 내가 일부러 열어놓고 나온 지하실의 문을 이제야 발견하고는, 맹수와 마주친 듯 얼어붙었다가, 마른침 한 번 삼키고 벽난로의 비밀 수납장에서 권총을 챙겨 신중한 걸음으로 층계를 내려갔다.
「대통령」처럼 거대한 방해요소가 없는 이곳에서, 내 회로역장은 잠시나마 저택 전체를 삼키고도 남을 반경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그 범위 내에선 원격으로 마법을 구현할 수도 있다. 나는 회로에 술식 연산을 올릴 준비를 했다.
"하나 더 드시겠습니까?"
"음."
경태가 내미는 상자에서 이번엔 초콜릿 아이스드를 고른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한 입 먹고 있으려니 굼벵이처럼 움직이던 캘빈이 마침내 냉장고 앞에 선다. 내가 붙여놓은 쪽지를 읽고 눈이 커지는 놈. 재빠른 판단으로 몸을 피하려 하나-
내 주문이 신관에 스파크를 일으키는 게 먼저였다.
틱.
쿠구구구궁!
강력한 폭음에 지축이 흔들린다. 폭압과 박살난 냉장고 문짝이 캘빈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충격을 받은 천장 일부가 무너져 즉석에서 잿빛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잔해를 분석할 경찰은 결함이 있는 신관이 오작동을 일으켰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경태가 묻는다.
"끝났습니까?"
"잠깐."
회로에 술식 하나를 더 돌린다. 아주 작고 간단한 발화 주문이었다. 표적은 내가 남긴 쪽지의 파편들. 눈에 띄는 큰 조각 몇 개만 제거해줘도 증거인멸로는 충분하다. 필적감정이 불가능해질 테니까.
"됐다. 돌아가자."
내 말에 운전석의 부하가 엑셀을 밟는다. 차는 속도를 높여 소란스러워진 부촌을 빠져나간다. 그러나 퇴근 시간대의 도로에 정체가 빚어지고 있었으므로,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 시원스럽지는 못했다.
나는 그동안 세 개의 도넛을 더 집어먹었다.
#6. 전율하는 거인 (1)
하얀 추장에게 주문제작 스너프 필름을 발송하고서 열흘이 흐른 시점인 1월 20일, 나는 유타 주의 장구한 포플러 숲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자 흐린 안개 속 하얀 가지들이 떨리며 스스스스- 하는 소리들을 낸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던 난, 홀린 듯 바라보다가 탄식을 닮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숨이 넘어가겠군."
모든 뿌리가 하나인 클론 클러스터, 복수가 아닌 단수로서의 숲은 휘황한 마력과 회로의 광채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에 비하면 「대통령」은 갈대밭의 갈대 하나, 백사장의 모래 한 알에 불과하겠다. 이 장관이 내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지경. 평범한 사람의 통상적인 시야엔 하얀 눈밭과 하얀 안개와 하얀 나무들이 보일 따름이리라. 그것만으로도 다소 몽환적인 경관이긴 하겠으나....
이곳으로 향하기 전 먼저 들렀던 워싱턴 주,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유기체로서의 균사가 퍼진 주립공원은 그 규모에 비해 마법적인 실속이 없었으므로, 이곳의 포플러 클러스터는 내게 대단히 각별한 것이었다.
"주변이 어째 소란스럽네요."
경태는 어수선한 주위를 신경 쓰고 있다. 반경 30km 이내에 그럴듯한 도시 하나 없는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오는 길의 도로변에 몇 대의 보안관 순찰차가 정차해있었다. 어디선가는 개 짖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느낌이 안 좋으냐?"
"뭔가 좀 찝찝합니다."
"...그래?"
나는 경태가 말하는 찝찝함을 무시하지 않았다. 위험을 감지하는 이 녀석의 육감은 때때로 마법 이상의 마법처럼 느껴지곤 했으니.
「황금기의 눈」이 제공하는 시야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곳에선 정보량이 너무 많아 실질적인 가시거리가 제한된다. 특히 숲이 있는 쪽, 온갖 광채가 통상적인 인지를 넘어 범람하는 방향으로는 50미터 가량이 고작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줄어들 테지.'
내 회로역장 역시 「대통령」과 대면했을 때와 비슷한 반경으로 축소될 게 뻔하다. 그간 부지런히 회로를 조율해왔는데도 이렇다. 이는 즉 눈앞의 숲이 발휘하는 마소에 대한 장악력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고로 숲 내부를 탐사하는 데 많은 수의 부하들을 동반하기가 어렵다. 정제되지 않은 마력에 피폭당하는 걸 전부 막아줄 수가 없으니까.
사고의 흐름이 여기에 이르자 나 또한 신경이 조금 곤두서는 기분이다. 황홀한 광경에 정신을 빼앗겨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만, 숲으로 들어가려면 나 자신에 대한 보호가 매우 취약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경태도 여기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경호실장으로서는 들어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만.... 「대통령」처럼 그냥 겉으로 보시는 걸로는 부족하겠습니까?"
나는 턱짓으로 숲에 감도는 안개를 가리켰다.
"저기 있는 안개를 봐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처음부터 위화감을 느끼고는 있었습니다. 호수 방향은 깨끗한데 정작 숲에는 안개가 끼다니. 그것도 해가 중천인 시간에...."
"그렇겠지. 저건 저 숲이 구축한 술식의 결과물일 테니까."
"마법이란 말입니까?"
"음."
이쯤이면 이 녀석도 내가 왜 멍하니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것이다. 인간 이외에 원시마법에 각성한 생명체의 등장을 예견했다곤 해도, 그걸 직접 목격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 나는 지금 세기적인 사건, 세계의 비가역적 변화와 대면하고 있다.
...이제 와서 별안간 마소 농도가 떨어지거나 하진 않겠지.
머리를 긁은 경태가 새롭게 제안한다.
"형님께서 정 안쪽을 살펴보고 싶으시다면, 저희가 그 뭐냐, 전에 말씀하셨던 마력피폭인지 마소피폭인지를 감수하고서라도 다 들어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니."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조직의 정예이자 행동대의 핵심이다. 니들을 키우는 데 시간과 예산이 얼마나 들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무가치하게 소모해버릴 순 없어."
마소와 마력이 원인인 암은 통상적인 암과 성질이 다르다. 조기에 발견하더라도 내 능력으로나 통상적인 의학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할 수 있었다.
'내게 있는 건 이론과 가설일 뿐이니.'
「대통령」이 그랬듯이, 이 숲의 각성은 내 예상보다 빠른 것이다. 마소암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는가? 고로 이 녀석들에게 회로가 발현되고 자체적인 역장이 생겨 자력 방호가 가능해질 날까지는 신중을 기하는 게 맞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안 되는 건 안 돼. 애초에 어떤 위험 부담도 없이 강해질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감수할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나 자신이 원탁의 예상을 벗어난 비대칭전력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나는 조직이 보유한 마법적 역량의 전부이며, 잠재력의 전부이기도 하다. 나의 한계치가 곧 조직의 마법적 한계치를 결정할 것이다.
경태는 한숨을 쉬고 대안을 내놓았다.
"그럼 적어도 하루나 이틀 정도는 상황을 지켜보시죠. 기다린다고 해서 저 숲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잖습니까."
"당연히 그럴 거다."
일단은 숙소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야겠다. 왜 이런 오지에 보안관들이 떼로 몰려있는지, 경태가 느끼는 찝찝함은 무엇인지.
숙소로 임대한 산장(Cabin)은 숲과 걸어서 오가도 좋을 거리에 위치했다. 지나는 길목의 캠핑장엔 비수기인 겨울임에도 열 대 남짓한 캠핑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캠핑장 한쪽에서 크레인 저울에 물고기의 무게를 달아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얗게 언 호수에서 얼음낚시를 즐기고 돌아온 이들일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들."
경태가 평소와 달리 유창한 발음으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떠들던 사내들 가운데 회색 캐나다구스를 입은 하나가 경태를 훑어본다.
"무슨 일이신지?"
"저희는 저쪽에 있는 숲을 보러 온 관광객들인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해서 말입니다. 보안관분들도 많이 오신 것 같고.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같은 언어라도 복수의 억양을 구사하는 능력은 유용한 도구였다. 수사와 추적에 혼선을 주거나, 자신에 대한 인상을 바꾸거나. 경태가 구사하는 뉴욕 억양은 동양계 관광객의 인상을 희석시킨다. 질문을 받은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도 어제 왔을 뿐이라 자세히는 모르는데, 그 숲에서 사람이 실종되었다고 들었수. 하나도 아니고 떼거지로."
"저런. 몇 명이나요?"
"자세히는 모른다니까는. 이것도 보안관보가 와서 이거 저거 물어볼 때 얻어들은 거요. 저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구만. 요즘 이상하게 안개가 많이 껴서 위험하다구. 울타리도 쳐놨는데 뭐 하러 굳이 들어갔는지 원...."
사내는 안 그런가? 하고 동료를 돌아본다. 동료가 끄덕끄덕했다.
"그러지 말고 당신들도 우리처럼 낚시나 즐기다 가는 게 어떻겠수? 외지 사람들이야 저놈의 숲이 수만 년을 살았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구경하러 오지만, 정작 들어가 보면 진짜로 별거 없거든. 쓰러진 나무가 많아 다니기 불편하기나 하지. 눈이 쌓여서 발아래가 잘 보이지도 않을 거고."
"하하. 말씀 고맙습니다. 근데 여기, 고기는 잘 잡힙니까?"
"보면 모르겠수?"
"단순히 낚시꾼의 실력이 좋은 것일 수도 있죠."
경태의 아첨에 기분이 좋아진 사내는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나누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송어는 못 줘도 농어는 줄 수 있노라고. 낚시터에서 흔히 보이는 인심 내지 낚시꾼의 자기만족이었다. 경태는 그걸 또 사람 수가 많으니 더 달라고 해서 큼직한 걸 세 마리나 받아낸다. 사람 멱을 아무렇지도 않게 따고 다니는 녀석이 넉살도 참 좋지.
이어지는 대화에서 낚시꾼은 멀찍이 폴리스 라인이 쳐진 캠핑카를 가리켰다.
"실종된 가족 중 하나가 몰고 온 차라고 하더이다. 저거 말고도 주인 잃은 차가 몇 대 더 있고, 산장에서도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고도 하고 그러던걸."
"그렇군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기껏 이런 깡촌까지 오셨는데 헛걸음이 될 것 같아 유감이오."
"여행이라는 게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죠. 좋은 하루 되십시오, 선생님."
"그쪽두. 별건 없지만 잘 놀다 가시구려."
인사를 나누고 낚시꾼을 등진 경태는, 낚싯줄로 꿴 묵직한 농어 꾸러미를 부하에게 넘기고 입가의 웃음기를 지운다. 낚시꾼들과 적당히 멀어진 다음 묻는 말이 이렇다.
"형님. 이거 어째 갈수록 더 찝찝해지는데요?"
"흠...."
"혹시 숲 그 자체가 범인일 순 없겠습니까?"
"글쎄."
사람을 잡아먹는 숲이라. 어쩌면 포플러 클러스터가 일으키는 추가적인 마법적 현상이 원인일 순 있겠다. 또는 안개로 인해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람들이 헤매고 헤매다 탈진해서 쓰러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대기질이 최악인 중국에선 자기 집 앞에서 길을 못 찾아 죽을 뻔한 인간도 있지 않았나. 고작 43헥타르(0.43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숲에서도 얼마든지 조난자가 발생할 수 있다. 난 여기까지 생각하고서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있다고 해두지."
"그런데도 들어가셔야 합니까?"
"시간이 흐르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겠냐."
물론 그때는 나 또한 더욱 완성된 마법사가 되어있겠으나, 그게 반드시 더 나은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런던의 원탁내각도 질서를 확립할 테고, 새롭게 각성한 능력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영향 역시 변수가 되겠지. 세계적인 혼란이 빚어져 국가 간의 이동이 차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으로 걸어야 할 투쟁의 길을 감안하면 지금의 위험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난 그 정도의 가시밭길을 각오하고 있다. 경태가 입맛을 다신다.
"저 캠핑 트레일러 안엔 뭔가 눈에 띄는 게 없습니까?"
폴리스 라인 너머로 시선을 틀고 시야를 조절한 나는,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딱히."
경태는 다시금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난 멀어진 숲을 일별했다.
"숲 그 자체가 문제라면 술식이 현상으로 빚어지기 전에 그 조짐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누가 와있더라도 나 이상의 페널티를 감수해야 할 테니."
"알겠습니다."
평소처럼 4인 1조로 분할된 우리 일행은 연락을 나누며 여러 곳에서 탐문을 진행했다.
나와 경태는 잡화점 및 식당을 겸하는 리조트 본관에서 직원을 상대로 지나가듯 몇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당신은 여기서 언제부터 일을 했는지, 투숙객이 증발했다는 산장은 어디인지, 그들이 가족 손님이었는지 아닌지, 또 언제쯤 들어와 언제쯤 사라졌는지, 그밖에 뭔가 특이한 건 없었는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한 건 경태의 붙임성이었다.
직원은 비수기에 하루 6백 달러짜리 고급 산장을 세 채나 임대한 손님들을 상대로 친절하고 성실한 답변들을 돌려주었다.
"이상한 사람들이요?"
"그렇습니다."
내가 직접 던진 마지막 질문은 뭔가 이상해 보이는 방문자가 없었느냐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런던의 제국주의자들이 하수인을 파견했다면, 종교적인 레벨의 선민의식으로 인해 무언가 특이한 티를 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충성심을 배양하는 수단이 선민의식 그 자체니까.'
원탁의 마스터들은 제 하수인들 앞에서 선지자이자 사도이자 구원자 행세를 해댄다. 사이비 종교인들과 달리 이쪽은 진짜 신비를 다루는 만큼 부하들을 세뇌하기도 쉽다.
사실 부분적으론 내게도 해당되는 사항이고.
그래도 난 나 자신을 종교적으로 포장하지는 않았다. 하찮은 양심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합리성이 마비된 조직은 그만큼 꼬리를 밟히기 쉬운 까닭이었다.
"흠, 이상한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
팔짱을 끼고 검지로 상박을 두드리던 직원은 자신 없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 좀 보헤미안스러운.... 그, 알죠? 잘 웃고 낙천적이고 스타일은 거지같고 머리에 나사 몇 개 풀린 것처럼 흐느적대는 야리야리야라."
"예."
"그런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긴 했는데, 이상하다...라고 할 것까진? 있잖아요, 왜. 여긴 이래봬도 관광지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들렀다 가는 곳이니까요."
"그렇겠지요."
난 친절한 답변에 고맙다고 말하고, 멘톨 담배 한 갑을 산 뒤 팁으로 100달러 지폐를 건네주었다. 직원은 황홀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물론 내가 산 담배는 피우는 용도가 아니다. 생활화된 추적 교란의 습관이지. 흡연은 중독적인 기호여서, 피우는 담배의 종류도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향이 자극적인 멘톨 담배는 유사시 개를 풀어 쫓기에 좋은 냄새였다.
뭐, 나중에라도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을 겪을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어쨌든 몸에 익어서 나쁠 것 없는 습관이다. 언제나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생각하다 보니 새삼스럽게 화가 치민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밖으로 나온 난 가장 먼저 보이는 쓰레기통에 힘주어 구긴 담뱃갑을 던져 넣었다.
#6. 전율하는 거인 (2)
이틀이 지나, 해발 2,700미터의 산장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날.
간밤엔 보안관보 하나가 조사차 이 산장을 다녀갔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는 말도 있으니, 그제 도착한 우리도 용의선상에서 배제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보안관보의 임의수사에 성실하게 협조해주었다. 위조된 면허증이라도 전산망엔 정상적으로 등록되어 있었고, 그로부터 확인되는 동선만으로도 우리의 결백이 증명될 터이므로. 우리의 공식적인 방문 사유는 회사 차원의 단합행사다.
보안관보를 구슬려 가며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카운티 치안당국은 이게 단순 실종인지 아닌지조차 아직 갈피를 못 잡은 상태였다. 인구밀도가 제곱킬로미터당 4명밖에 안 되는 깡촌의 보안관들이 유능해봤자 얼마나 유능하겠는가. 가뜩이나 투표로 뽑는 선출직들인데.
피로해 보이는 보안관보는 조만간 수색을 위해 상위 치안당국의 지원이 올 거라 털어놓았다. 며칠 내로 주 경찰이 오든가 하겠지. 그다음은 연방경찰일 거고.
아침 식사는 밤새 냉장 숙성시킨 농어를 구워 마요네즈 소스를 바른 피시 마요와 샐러드, 커피, 식당에서 미리 사놓은 에그 샌드위치로 해결했다.
농어 구이는 한 사람당 하나가 돌아가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어제 하루를 통으로 탐문에 썼는데, 나갈 때마다 경태가 농어를 한 꾸러미씩 받아 온 덕분이다.
하여간 붙임성은.
"종합해볼까."
식사를 끝내고 모인 자리에서, 난 상석에 앉아 부하들과 시선을 맞췄다.
"확인된 실종자의 숫자는 최소로 잡아도 서른 이상.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숲과 호수가 가장 유력한 행선지다."
얼어붙은 호수의 존재는 안개 짙은 숲과 더불어 수색이 난항을 겪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낚시용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구멍을 뚫어 돌을 매단 시체를 가라앉힌 뒤, 얼음이 다시 얼기를 기다려 텐트를 걷어버리면 완전범죄가 성립하니까.
어제 저물녘, 내가 호수에서 본 텐트만 수십 개에 달한다. 밤을 새우는 낚시꾼들이었다.
게다가 저 포플러 클러스터가 이 일대에서 유일한 숲도 아니다. 안개가 끼어있고 캠핑장 및 숙박시설이 가까워 유력하게 꼽히는 장소일 뿐.
"여기서 모종의 인간사냥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검지를 세워보였다.
"첫째. 현시점에선 희생자들에게 어떤 공통분모도 없다. 이건 원탁의 귀족들에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목숨들이야. 그렇다고 나를 끌어들일 함정이라고 보기도 어렵지. 사냥꾼이 사냥감... 쯧. 사냥감의 경계심을 자극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기분이 더럽지만, 아직까지 난 사냥감인 입장이다.
피해자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이틀 동안의 탐문에 더해 보안관간 무전까지 도청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출신도, 연령도, 성별도, 관계도, 직업도 다 제각각. 난 귀족의 사냥개들이 가족여행을 온 일가를 여섯 살 어린아이까지 물어 죽여야 할 당위성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애당초 「황금기의 눈」을 지닌 날 함정에 빠트리는 것 자체가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한 일. 숲의 상태를 정확하게 예측했다면 모를까, 괜한 가능성에 전력을 낭비하긴 싫었을 터였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펼쳤다.
"둘째. 각 실종사건의 추정 시계열과 탐문 결과를 고려하건대, 정체불명의 살인마 집단이 웅거하고 있다손 쳐도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다. 적게 잡으면 우리의 절반 이하, 많게 잡아도 우리의 두 배 정도겠지."
그렇다면 나와 내 애들에게 위협이 되긴 어렵다. 특히 저 안개 자욱한 숲속에서는.
"셋째. 피해자들의 출신지는 여러 주에 걸쳐있다. 그 말은 즉 이 사건이 결국 연방경찰 관할로 넘어갈 확률이 높다는 뜻. 시간을 끌면 귀찮아진다."
수색이 공식적으로 종료될 때까진 현장보존이니 뭐니 해서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될 것 아닌가. 통제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광활한 삼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테지만.
"넷째. 이미 말했듯이, 저 숲은 내가 새로운 마법술식의 단서와 조각들... 이건 「코드」라고 부르기로 하지. 코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많은 어려움 중 하나일 뿐이다. 코드를 지닌 것들이 그 속살을 순순히 보여주는 경우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나."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하는 이상 내가 그 위험을 피할 방법은 없는 셈.
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짧으면 하루, 길어도 사나흘이면 된다. 나는 저 숲의 마법을 알아야겠다."
그리고 지금 회로의 기초를 봐둬야만, 훗날 숲의 능력이 더욱 강하고 복잡해졌을 때 추가적인 탐색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분석의 기반이 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셈이므로.
6천 6백 톤짜리 단일 유기체의 마법적 잠재력은 다른 평범한 숲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장차 세계 최고이자 최악의 미궁 가운데 하나로 거듭날 테지. 규모 면에선 아마존 같은 곳에 한참 밀리겠지만.'
고로 나는 지금 이 시기에 얻는 지식이 나중으로 갈수록 스노우볼링을 일으키리라 확신한다.
"이견 있나?"
내 질문에 부하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없는 걸로 알지. 출발은 09시다."
나와 동행할 1개조 이외의 나머지 인력은 숲 외곽에 배치하기로 했다. 이들을 함부로 소모하지 않겠다고 했어도, 상황이 위급해지면 지원을 불러들이는 수밖에. 유사시 퇴출로 확보를 고려한 배치이기도 했다.
그리고 09시 30분.
나는 울타리를 넘어 희미하게 눈발이 날리는 숲으로 탐사의 첫발을 들여놓았다. 대열은 내가 가운데 낀 지그재그 형으로 정했다.
"되도록 지금 이 간격을 유지하고, 불가항력으로 떨어지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돌아와라. 이건 너희들을 위해 하는 말이다."
이미 아는 내용이었음에도, 경태를 포함한 넷은 내 당부를 더없이 진지하게 들었다.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해서 죽음을 가볍게 여길 순 없는 노릇. 하물며 그 최후가 최악의 질병 가운데 하나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안개 속으로 들어온 다음엔 무기를 감추지 않아도 되었다. 설산용 위장복 차림의 부하들은 각자의 짐에서 총기를 꺼내 조용하고 신속하게 조립했다. 「비흐리(Вихрь)」라는 러시아제 저소음 소총으로, 짧고 가벼워 휴대와 은닉이 용이했다. 소음기까지 결합한 길이가 한국 K-2와 비슷할 정도. 다만 탄이 좀 귀한 게 흠이었다.
"형님."
"음."
경태가 내미는 총을 받은 난 노리쇠를 당겼다가 느리게 전진시켰다. 마지막엔 확인차 한 번 더 밀어주기를 잊지 않는다. 초탄이 약실에 확실히 들어가게끔.
'바깥보다 따뜻하군.'
포플러 숲이 품은 안개는 온기를 가두는 역할도 하는 모양이다. 한겨울의 물속이 물밖에 비해 따뜻한 것과 같은 이치. 하기야 단순히 수분을 붙잡아둘 목적이었으면 다른 형태의 술식이 발현되었을 것이다. 짙은 안개는 광합성을 방해하니까.
난 방탄복과 방탄모를 착용하는 것으로 탐색 준비를 완료했다.
"이동하지."
기본적인 탐색 경로는 내가 일일이 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숲의 위성지도를 토대로 GPS 좌표를 찍어 미리 기준점들을 정해둔 덕이었다. 그 점들을 연결하면 바깥으로부터 중심부를 향해 나선처럼 들어가는 길이 완성된다. 또한 이 기준점들은 흩어졌을 때의 재집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입을 여는 건 멈출 필요가 있을 때였다. 때때로 멈춰 서서 회로도를 스케치하고, 마력의 흐름을 기억하고, 암기하듯 되새기며 머릿속에서 거대한 회로의 조감도를 그려보는 일.
말이 회로이고 코드이지, 낯선 코드의 습득은 컴퓨터의 복사 붙여넣기처럼 간단할 수 없었다. 곧바로 사용 가능한 형태의 술식이 아닌 이상은. 현재로선 숲의 회로에서 9할 9푼이 군더더기라 어려움이 더 가중되는 면도 있었다.
숨쉬기가 거북할 만큼 농밀한 안개 속에서 내 가시거리는 30미터 안팎까지 축소되었다. 눈의 성능과 무관하게, 내 뇌가 시각적 정보의 홍수를 감당하지 못하는 탓이다.
때때로 방향을 꺾어가며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그 30미터의 가시거리 끄트머리에 매우 불쾌한 상징이 걸려들었다.
"정지."
나지막이 내린 지시에 대열이 정지한다. 난 조금 앞으로 나아가, 그 상징 근처에 위협적인 요소가 존재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이를테면 마법적인 매복이나 함정 같은 것들. 원탁의 최정예에게나 가능할 일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은가.
난 두 번 세 번 안전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따라와."
잠시 경로를 이탈할 동안엔 내가 선두에 서서 나아갔다. 여기서도 사전 합의에 따라 대열이 변경된다. 좌측 후방으로 둘, 우측 후방으로 둘.
경태는 눈밭에 살짝 드러난 사람의 손가락을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
"이건-"
"실종자 가운데 하나겠지."
시체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원형의 상징 주변을 걸으며 발끝으로 단단한 눈을 걷어냈다. 부하들이 시체의 나머지와 숨겨진 상징을 볼 수 있도록.
인체를 길쭉하게 찢어 만든 원 속에 피를 쏟아 그려놓은 별. 별은 위아래가 뒤집힌 형상이고, 원 바깥엔 별처럼 피로 휘갈긴 일흔두 개의 라틴 문자가 있다. 불가해의 영역(Acausal Realm)으로부터 어두운 힘을 끌어내는 악마숭배자들의 표식. 그 믿음 자체는 엉터리지만, 문제는 원 속의 별이 오망성이 아닌 칠망성이라는 점이었다.
'칠망성이라면 영국 놈들의 계보인데.'
전통적인 악마숭배의 상징은 거꾸로 그린 오망성이다. 그 형상이 염소의 머리와 닮아있는 까닭. 그러나 영국에 뿌리를 둔 사탄의 추종자들은 유독 칠망성을 사용한다. 이는 그들에게 진짜배기 마법사인 그레이스가 합류하며 일어난 변화이자, 그레이스가 훔쳐낸 원탁의 지혜였다. 그녀의 추종자들이 '칠각'기사단(O7A)인 이유다.
"허."
사주경계에 임하던 경태가 곁눈질로 더러운 상징을 본다. 기가 막힌 듯한 소리는 잠재적 적대세력에 대해 틈틈이 교육이 이루어졌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섬나라 사탄쟁이들이 여기까지 온 겁니까?"
"아니."
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어설퍼."
"어떤 부분이요?"
"문자열의 순서가 틀렸다."
말로는 감히 형언치 못할 신의 이름을 표현하는 카발라의 72문자(magnum nomen Domini Semenphoras licterarum). 십자가도 뒤집고 별도 뒤집는 악마숭배자들은 이 문자들 역시 당연하다는 듯 역순으로 적는다.
그 마녀 직할의 진짜배기들이 이걸 틀린다고?
그럴 리가 없지.
"본고장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양키 분파의 소행이 아닐까 싶다만."
공권력을 빌린 원탁내각의 집요한 추적과 사냥, 탄압에도 불구하고, 인도계 마녀가 창조한 악마숭배의 새로운 흐름은 전 세계의 악마숭배자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지하교회적인 확산은 필연적으로 교리의 손실과 왜곡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징 자체엔 아무런 마법적 효과도 없다.
경태가 한 번 더 곁눈질을 하고서 눈을 찌푸린다.
"어설픈 것치곤 시체의 상태가 좀 많이... 이상하지 말입니다."
그 말대로다. 시체는 단순히 찢어져있을 뿐만 아니라 식물이 뿌리를 뻗는 형상으로 '펼쳐지는' 중이었다. 핏줄과 모세혈관이 피부를 뚫고 나와 사방으로 자란다면 비슷한 모양이 될 것이다.
내가 말했다.
"시체가 아니야."
"예?"
"식물 입장에선 여기에 웬 양분 덩어리가 있을 뿐이겠지."
"...."
찢어놓은 건 인간의 소행이나 끌어당기는 건 숲의 소행이다. 수분을 당기다보니 다른 성분들도 같이 끌려와, 얼결에 뿌리 끝 근단이 그 맛을 본 것이 아닐지. 아니면 공기 중에 떠도는 냄새를 맡았을 수도 있고.
그 증거로서, 유해가 펼쳐지며 나아가는 방향은 지표와 지중의 뿌리 및 줄기들이 가깝고도 많은 쪽으로 쏠려 있었다.
짧게 생각에 잠겨있던 경태가 말뜻을 깨닫고 히죽 웃는다.
"즉 시신 감식에 대한 걱정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환경이다 이거네요?"
"어느 정도는."
"좋은데요?"
좋다는 건 단순히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닌, 앞으로 치르게 될 숲 속의 전투들을 염두에 둔 만족감일 것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법의학자라도 이런 식으로 훼손된 시체에선 자세한 정보를 얻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나.
"아니, 마냥 좋지만은 않은가."
제 말을 정정하는 경태는 어느새 미소를 지우고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 좋기만 할 리가 있나.
무슨 일을 벌여도 쉽게 알려지지 않을- 혹은 묻어버리기 쉬울 환경,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미궁에 훗날 본격적으로 정치경제적 이권들이 얽히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은 미친놈들이 활개를 칠까? 익명성만 주어져도 사탄이 빙의하는 게 사람이건만.
녹색의 미궁에서 잡것들은 제 밑바닥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낼 것이다. 그 인간 언저리들은 내게 도움보다 방해가 될 공산이 더 컸다.
#6. 전율하는 거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