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 *

옥타르의 행운은 아틸라가 결투에 사용할 무기로 용아귀와 범아귀를 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옥타르와 아틸라가 맞붙는다니!"

"막강한 차기 족장 후보 옥타르!"

"떠오르는 신흥 강자 아틸라!"

연무장 중앙에 마주 선 두 전사에게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문주크가 우렁찬 목소리로 시합 개시를 알렸다.

먼저 몸을 날린 건 옥타르였다.

'무조건 선제공격이다. 제아무리 괴물 같은 힘이라 해도 날렵한 기술을 가미한 무기 공격이라면!'

별다른 형식 없이 도끼를 휘두르던 아틸라를 보고 떠올린 옥타르 나름의 해법이었다.

"하아아압!"

옥타르의 양손도끼가 무서운 기세로 쇄도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손쉽게 막아 냈다.

'오. 이게 되네?'

아틸라 역시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문주크에게 검은늑대의 비전들을 배워 왔다.

하지만 입력만 되었을 뿐 출력 가능한 신체 능력이 전무했던 아틸라.

그런데 지금, 권능으로 재구성된 그의 육체가 이전에 받아들였던 기술을 완벽하게 펼쳐 냈다.

"아틸라가 막아 냈다!"

"정말로 엄청난 일격이었는데!"

"대단하잖아! 아틸라!"

조금 전 아틸라는 문주크에게 너무 힘에만 의존하는 전투법을 구사한다며 지적받았었다.

아틸라도 할 말은 있었다.

'기술을 떠올릴 틈도 안 주고 미친 듯이 공격해 올 땐 언제고.'

제아무리 아틸라라지만 문주크 정도 되는 전사와의 대련에서 여유를 가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옥타르를 상대로는 아니었다.

아틸라는 개화한 스킬을 활용해 옥타르의 공격을 연이어 막아 냈다.

"아틸라가 모조리 막아 내고 있어!"

"옥타르의 공격이 단 한 방도 통하지 않다니...!"

"이, 이러다 정말 옥타르가 지는 거 아냐?"

누구보다 놀란 건 당사자인 옥타르였다.

'히, 힘만 센 게 아니었다고? 그렇다면...!'

옥타르는 공격에 더욱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아틸라 역시 마주 속도를 올리며 맹공을 막아 냈다.

"우와아아아!"

"저, 저 속도 좀 봐!"

"제대로 눈에 보이지도 않아!"

이쯤 되자 옥타르는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힘, 기술, 속도, 모든 게 나보다 위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아틸라의 입가가 스르르 올라갔다.

곰이나 문주크를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 전신을 휩쓸고 있었다.

'상대의 공격에 맞춰 저절로 몸이 움직인다. 이대로 좀 더 스킬을 개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 순간 옥타르의 손에서 강한 일격이 내질러졌다.

위력은 다르지만 문주크가 선보였던 섬광 같은 일격과 유사한 종류의 것.

"전사의 일격!"

"옥타르가 승부수를 던졌다!"

"저건 못 막을 것 같은데!"

그러나 아틸라는 보란 듯이 그것을 쳐 냈고, 위력이 강했던 만큼 옥타르의 도끼는 더욱 높이 튕겨 났다.

때마침 떠오르는 상태창.

[ 스킬, 반격이 활성화됩니다. ]

메시지가 떠오른 것과 아틸라의 도끼가 쏘아진 건 거의 동시였다.

문주크가 외쳤다.

"거기까지!"

목소리에 반응한 아틸라의 어깨가 움찔하며 멈췄다.

정적이 찾아왔다.

"후우우...."

턱밑에 멈춰 선 도끼를 확인하며 옥타르는 긴 숨을 내뱉었다.

쿵, 그의 무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졌다. 아틸라."

거대한 함성이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 * *

이튿날 오후, 문주크와 아틸라는 북쪽 숲을 걷고 있었다.

"어젠 잘했다. 아틸라."

옥타르의 체면을 살려 준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틸라가 하려고만 했다면 그 끔찍한 용력으로 초반부터 찍어 누를 수도 있었을 것이리라.

"옥타르는 강하고 충직한 전사입니다. 굳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힐 필요는 없지요."

스킬을 개화하는 것이 목적이긴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아틸라는 옥타르의 면을 세워 주고 싶었다.

'원작에서 옥타르는 마지막까지 부족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니까.'

한참을 걸은 두 사람은 수풀로 우거진 거대한 동굴을 발견했다.

"여기가 대무신왕의 무구 중 하나인 '무휼(無恤)'이 보관된 곳이다."

아틸라는 말없이 동굴을 바라봤다.

"들어갈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무휼의 수호자는 대무신왕의 환생이 아닌 이는 가차 없이 공격할 테니까."

"제가 대무신왕의 환생이 아닐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으신 겁니까."

문주크는 그저 웃었다.

"범아귀 좀 빌려주십시오."

"음? 네겐 이미 용아귀가 있지 않느냐."

"녀석이 덤빌지도 모르잖습니까. 무기 하나보단 두 개가 낫지요."

문주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두 자루 도끼의 묵직함에 만족한 아틸라가 성큼성큼 굴 안으로 들어갔다.

'여차하면 걍 모가지를 따주마.'

내벽 곳곳엔 은은한 빛을 내는 돌이 박혀 있어 시야 확보에 어려움은 없었다.

걷다 보니 바닥에 수상한 게 보였다.

'화살?'

화살을 들어 모양을 확인했다.

'이건 검은늑대 부족의 화살인데. 그리고 저건.'

핏물도끼 부족의 것.

머릿속에 어떤 가설이 세워졌다.

아틸라는 몸을 돌려 출구로 달렸다.

이 세상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 불가해한 존재의 포효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주크의 외침이 귀를 울렸다.

005. 전설의 무기 (3)

부족에 심어 둔 첩자의 밀서를 확인한 블레다는 자신의 예상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역시 아틸라에게 무휼을 넘길 생각이로군.'

블레다는 서둘러 계획을 실행했다.

자신의 부하들과 군디카에게 빌린 활잡이들을 이끌고 그리즐리의 동굴로 향한 것.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됐다.

'천운이 따르는구나!'

그리즐리는 만삭의 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걸음이 굼떠질 수밖에 없지. 뱃속의 새끼를 보호하려면.'

덕분에 블레다는 아무런 손실 없이 그리즐리를 굴 밖 멀리 유인할 수 있었고.

아틸라가 동굴로 들어간 뒤 혼자가 된 문주크 앞에 수십 발의 화살을 맞고 광분한 그리즐리를 대령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문주크는 용아귀도, 범아귀도 들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이런 일이...!"

문주크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지금의 수호자는 완전히 눈이 뒤집힌 상태.

이대로 굴 안으로 들어간다면 대무신왕의 환생조차 알아보지 못할지 모른다.

아틸라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고정하시오! 숲의 수호자여!"

문주크는 허리춤의 손도끼를 뽑아들었다.

그 순간 사방의 나무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 * *

개인 훈련에 열중이던 옥타르는 부락 방향에서 달려오는 얼간이 하나를 발견하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 대한 분노는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아틸라와의 결투 이후 수많은 깨달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으니까.

"오, 옥타르 님!"

그러나 코앞까지 달려온 얼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옥타르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부락으로 달렸다.

점점 선명해지는 비명과 병장기 부딪는 소음.

부락이 불타고 있었다.

* * *

"사흘 만에 다시 뵙는구려. 형님."

블레다의 손에 쥐어진 도끼는 문주크의 등 깊숙이 박혀 있었다.

"브, 블레다...! 네놈이...!"

"그러게 진즉 내게 족장 자리를 넘기고 물러나지 그랬소. 그랬다면 우애 좋은 형제끼리 이렇게 피를 볼 일도 없었을 거 아니오."

문주크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광분한 그리즐리와 사방에서 내리치는 화살비에 맞서 문주크는 분전했다.

아틸라를 지켜야 했다.

미쳐버린 수호자를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의 행동반경엔 치명적인 제약이 생겼다.

"이렇게 쉽게 등을 내주다니. 전사왕(戰士王)이라 불리던 형님답지 않구려."

블레다가 손을 들자 활잡이들이 일제히 그리즐리의 배를 겨눴다.

"그럼 잘 견뎌 보시오."

이어 십여 발의 화살이 녀석의 뱃속을 파고들었고, 그 모습을 확인한 그리즐리는 숲이 떠나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새끼 잃은 어미의 분노를 말이오."

절규하는 재앙의 품을 향해 블레다는 힘껏 문주크의 등을 걷어찼다.

* * *

몸 안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며 달리던 아틸라는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포효가 동굴 밖을 울리는 것을 들었다.

'이건...?'

때마침 동굴이 끝을 보이며 빛이 들이쳤고, 굴 밖으로 뛰쳐나온 아틸라를 맞이한 건 새까맣게 날아드는 화살의 군체였다.

그 사이로 보였다.

등과 입에서 피를 토하는 문주크가 성난 회색곰에게 떠밀리는 모습이.

"아버지!"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곰에게 강타당한 문주크가 바닥에 꽂혔다.

녀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널브러진 문주크의 가슴을 향해 재차 발톱을 휘둘렀다.

"멈춰!"

아틸라의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등 뒤의 용아귀와 범아귀를 뽑아든 아틸라는 거대한 두 도끼날로 쇄도하는 화살비를 모조리 막아 내며 곰에게 질주했다.

"미, 미친!"

"저게 뭐야!"

거대한 쇠방패를 양손에 쥐고 달리는 듯한 무지막지한 모습에 활잡이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아틸라의 발이 아무리 빨라도 이미 휘둘러진 곰의 앞발을 막긴 역부족.

'그렇다면!'

아틸라의 왼팔이 흩뿌려졌다.

파앙! 하는 파육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주인의 손을 떠난 범아귀는 그리즐리의 어깨 위에 박혀 있었다.

우어어어어!

너덜대는 팔을 부여잡으며 그리즐리가 상체를 뒤집었다.

아틸라는 멈추지 않고 뛰어올라 놈의 어깨에 박힌 범아귀의 칼등을 용아귀로 내리쳤고, 뼈와 근육이 절단되는 사실적인 감각과 함께 녀석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광경은 활잡이들뿐만 아니라 블레다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쏴, 쏴라! 놈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려!"

지면에 박힌 범아귀를 뽑아 용아귀와 함께 추켜든 아틸라는 쏟아지는 화살비를 막으며 문주크를 보호했다.

그 와중에 몇 발의 화살이 그리즐리의 몸에 꽂혔고, 아틸라의 가공할 무력에 두려움을 느낀 녀석은 그제야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최초의 원인 제공자들이 누구였는지 깨달았다.

아울러 뱃속의 새끼를 공격한 이들 역시도.

"아버지!"

아틸라는 문주크를 들어 동굴 안으로 옮겼다.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왈칵왈칵 쏟아지는 핏물을 보며 아틸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젠장...!"

문주크의 숨이 아직 붙어 있다는 걸 확인한 아틸라는 상의를 벗어 그의 상처를 동여맨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살 공격은 멈춰 있었다.

재설정된 목표를 향해 달려간 그리즐리가 활잡이들의 머리통을 차례차례 박살 냈기 때문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주하는 인간들과 그 뒤를 추격하는 곰, 그리고 그들 모두를 노려보던 아틸라가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 * *

박처럼 터져 나가는 부하들의 머리통을 보며 블레다는 다급한 와중에도 의구심을 느꼈다.

'왜 갑자기 이쪽을 공격하는 거지? 설마 이성을 되찾은 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블레다의 눈이 또 다른 활잡이의 머리를 폭파시키는 그리즐리의 몸을 탐색했다.

녀석의 척추 한가운데.

그곳엔 어둡고 요사스러운 기운을 발하는 핏빛 화살이 박혀 있었다.

'바토리의 화살은 제대로 꽂혀 있는데. 제길, 뭐가 뭔지 모르겠군. 한쪽 팔이 작살나더니 진짜로 미쳐 버린 건가!'

바토리의 화살.

블레다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손에 넣은 저주의 화살로, 남부 대륙의 악명 높은 마녀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손수 제작한 귀물(鬼物)이었다.

'놈의 눈은 아직 핏빛이다. 그렇다는 건 여전히 바토리의 힘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

블레다의 생각대로 그리즐리의 몸엔 저주가 지속되고 있었다.

다만 아틸라에 대한 지독한 공포심이 그것을 눌러 버렸다는 사실을 블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뿐.

'빌어먹을.'

의구심을 해결하지 못한 채 도주를 계속하던 블레다의 눈이 불현듯 커졌다.

그리즐리의 등 뒤에서 솟아오른 무언가가 놈의 어깨를 짓밟으며 더욱 높이 뛰어올랐기 때문이었다.

블레다가 소리쳤다.

"아틸라!"

새처럼 날아오른 아틸라의 시선이 도주자들을 훑었다.

아틸라의 어깨가 돌연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수풀로 숨어들던 활잡이 하나의 허리가 절단됐다.

그와 거의 동시에 블레다의 지척을 달리던 부하의 몸이 쩌억, 하며 세로로 쪼개졌다.

'저, 저런 미친!'

블레다는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두 단련된 전사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린 것은 아틸라의 손에서 던져진 용아귀와 범아귀.

'웬만한 전사는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양손도끼를 무슨 투척도끼 던지듯 한단 말인가!'

뒤이어 날아온 건 두 자루의 한손도끼였다.

그것은 눈물 콧물을 흩뿌리며 달리던 두 활잡이의 뒤통수에 꽂혔고,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네 명의 전사가 내장과 뇌수를 터뜨리며 죽었다.

바닥에 착지한 아틸라는 지면을 박차며 도끼들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공포에 질린 도망자들을 차례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으히이익! 사, 살려...!"

"끄아아아아악!"

핏물과 살점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더 이상 그리즐리는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틸라에 대한 공포감이 다른 모든 감정을 지워버렸다.

"괴물이야! 저건 진짜 괴... 크허억!"

"큐르르릅...!"

대열을 이탈해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한 사람도 남김없이 아틸라의 도끼에 쪼개졌다.

메아리처럼 이어지던 비명이 점차 잦아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살아남은 건 블레다 뿐이었다.

'제기랄. 쓸모없는 놈들.'

블레다의 눈이 신중하게 주위를 살폈다.

아틸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성난 그리즐리의 발톱이 블레다에게 쏘아졌다.

"얕보지 마라!"

블레다의 몸이 빙글 회전하며 발톱을 회피했다.

능숙하게 양손도끼를 뽑아든 블레다가 발목과 허리에 힘을 실었다.

한쪽만 남은 그리즐리의 팔을 힘껏 내리쳤다.

'이 무슨...!'

그러나 도끼는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성긴 살가죽 속에 감춰진 놈의 근육은 돌처럼 단단했고, 블레다의 완력으로 그것을 부수긴 역부족이었다.

'이, 이런 걸 절단해 버렸단 말인가. 아틸라는...!'

우어어어어!

격노한 그리즐리의 팔이 다시금 블레다에게 휘둘러졌다.

하지만 블레다는 위대한 검은늑대 부족에서 문주크 다음가는 전사.

"찢어죽여주마!"

블레다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공중으로 솟았다.

양 허리의 손도끼를 뽑아든 그는 표범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그리즐리의 어깨에 올라 도끼를 난사했다.

살갗을 찢는 소음이 폭죽처럼 터졌다.

"제아무리 단단한 근육을 가지고 있어도 목은 어쩔 수 없을 거다!"

문주크가 압도적인 물리력의 전사라면 블레다는 날카롭고 정밀한 기술자였다.

둘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최고의 파트너였고, 실제로 수많은 부족 간의 전투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젠 모두 부질없는 것이 돼 버렸지만.

"이걸로 끝이다!"

블레다의 도끼가 피로 얼룩진 그리즐리의 목젖으로 쇄도했다.

그는 정말로 승리를 확신했다.

'자, 잡았다! 내가 단독으로 숲의 재앙을 사냥한...!'

녀석의 앞발이 그의 등허리를 움켜쥐기 전까지는.

"크허어억...!"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충격과 함께 블레다의 입에서 핏물이 뿜어졌다.

강한 완력으로 바닥에 패대기쳐진 블레다는 꺽꺽대는 숨을 몰아쉬며 사지를 버르적댔다.

"크흑.... 크허억...!"

심장을 흔드는 공명이 가까워졌다.

거대한 앞발이 들어 올려지며 블레다의 시야가 검게 뒤덮였다.

"큭큭큭큭.... 이거 내가 먼저 가게 생겼수다 형님."

블레다는 실성한 사람처럼 킬킬대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우두둑, 하는 파열음과 함께 그리즐리의 팔꿈치가 기묘한 방향으로 꺾여 버린 것은.

이어 완전히 떨어져 나간 아래팔이 수 미터 떨어진 나무 기둥에 꽂혔고, 양팔을 잃고 절규하는 그리즐리의 턱밑이 몇 차례 번뜩이는가 싶더니 놈의 잘린 머리는 아틸라의 손아귀에 들려 있었다.

쿵.

목 없는 곰이 무릎을 꿇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 칠갑을 한 채 블레다를 내려 보던 차가운 시선이 늘어진 곰의 몸뚱이를 향했다.

그의 팔이 절단된 그리즐리의 목 안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꺼내진 손안엔 핏물 속에서도 찬연한 빛을 내는 검 하나가 쥐여 있었다.

'저것이... 대무신왕의...!'

아틸라가 포효했다.

한 손엔 무휼, 다른 손엔 그것을 지키던 수호자의 머리통을 추켜들고 울부짖던 아틸라의 얼굴이 지독한 살기가 되어 블레다를 습격했다.

006. 새로운 세계로

붉게 타는 검은늑대의 부락을 바라보며 군디카는 만족의 웃음을 머금었다.

블레다가 문주크를 사냥하러 떠난 사이, 그는 약속을 깨고 검은늑대를 습격했다.

'쳐라! 모든 것을 불태워라!'

핏물도끼 부족과 3개 부족이 연합한 대군.

그들은 문주크 없는 검은늑대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군디카는 자신의 야망을 이룰 날이 지척까지 다가왔음을 감각했다.

"네 이놈 군디카아아!"

머릿속을 흐르는 만족감과는 별개로, 작금의 상황에도 투지를 잃지 않은 검은늑대의 한 전사를 보며 군디카는 윗입술을 핥았다.

군디카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만 포기하는 것이 어떤가 옥타르. 지금이라도 내게 온다면 중히 써 줄 것을 약속하지."

"닥쳐라 군디카! 위대한 검은늑대의 전사는 죽어서도 부족을 배반하지 않는다!"

"아쉽지만 별수 없군."

군디카가 도끼를 움켜쥐었다.

"뜻대로 해 주겠다."

군디카의 도끼가 옥타르에게 쏘아졌다.

그의 실력은 옥타르보다 몇 수는 위.

게다가 수많은 핏물도끼 부족의 전사들을 상대하며 기력을 소진한 옥타르는 온전한 몸 상태도 아니었다.

"크하하하! 뭐 하는 것이냐! 네가 말하던 검은늑대의 전사는 혓바닥만 위대한 것이었더냐!"

옥타르는 분전했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군디카의 파상공격을 버티지 못한 옥타르의 양손도끼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옥타르의 뇌리에 떠오른 이는.

'아틸라가 있었다면...!'

문주크가 아닌 아틸라였다.

그 사실에 놀라워하며 옥타르는 웃었다.

허리춤의 손도끼를 뽑아들었다.

"와라! 군디카!"

군디카의 일격이 쇄도했다.

양손도끼로도 불가능했던 일을 손도끼가 해낼 리 없었건만 옥타르는 후회 없이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질풍처럼 날아든 거대한 날붙이가 군디카의 도끼에 부닥친 것은.

"크허억...!"

날붙이가 노린 건 군디카의 목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가공할 살기를 감지한 군디카는 휘두르던 도끼의 방향을 틀어 그것을 막았다.

아니, 막은 줄 알았다.

"끄어어어억...!"

군디카의 머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았다.

그의 도끼는 정체불명의 날붙이와 부딪치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충격을 흡수하지는 못했고, 우악스럽게 밀쳐 들어온 그것은 군디카의 이마를 가른 뒤 지면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건 군디카에게도 낯익은 무기였다.

'요, 용아귀! 문주크가 살아왔는가!'

조금 전까지의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군디카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용아귀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핏물에 잠긴 시야 속으로 보이는 건 문주크를 등에 업은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자신을 향해 또 다른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이, 이 녀석이 바로...!'

군디카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그것을 막았다.

그러나 전신을 뒤흔드는 무지막지한 공격은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네 번째 공격에 이르렀을 때 군디카의 도끼는 주인의 손을 떠났다.

군디카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이런 시...!"

시뻘건 내장을 와르르 쏟아 내며 군디카의 몸이 반으로 갈렸다.

* * *

군디카의 죽음과 아틸라의 맹활약으로 전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3개 부족 족장들은 차례로 항복 의사를 전했다.

저항을 계속하던 핏물도끼 부족도 머지않아 무기를 내던졌다.

'무조건 항복하겠소.'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문주크는 3개 부족 족장들에게 책임을 물었고, 아틸라의 난데없는 주장에 힘입어 전쟁에 참여했던 5개 부족의 대족장 자리에 올랐다.

'문주크 대족장 만세!'

'위대한 검은늑대 부족이여, 영원하라!'

모든 것이 마무리된 후 아틸라는 부족을 떠났다.

5개 부족의 힘을 갖게 된 지금의 검은늑대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 * *

"후우...."

숲길을 걷던 아틸라는 저만치 앞에 서있는 그림자를 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그냥 돌아갈 순 없는 거요?"

"그럴 수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니."

"난 잘 모르겠소."

아틸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그리즐리를 유인한다는 숙부의 계획은 나와 아버지가 그곳을 향한다는 사실과 도착시각을 알지 못한다면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니까."

일레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활잡이들을 죽이고, 그리즐리의 목을 따고, 마지막으로 숙부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으면서도 그 생각뿐이었소.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숙부의 시신을 보며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약간의 틈을 두고 아틸라가 말했다.

"누님이 숙부와 한배를 탔다는 것을."

"...처음부터는 아니야."

"알고 있소. 내가 되살아나 곰 세 마리를 맨손으로 찢어 죽인 뒤겠지."

일레크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긍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틸라는 모르지 않았다.

"족장이 되고 싶었소?"

일레크는 족장을 꿈꿨고, 실제로 차기 족장 후보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은띠 전사였지만 몇 년 내로 금띠를 달 자신이 있었고 옥타르보다, 그리고 블레다 숙부보다 강해질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난,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했어."

"난 족장이 될 생각이 없었소."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틸라는 변명으로 들릴 거라는 걸 알았다.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족장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니, 검은늑대의 전사로서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생각이니까.

내가 반쪽짜리라서 그렇소. 누님.

"아버지께서 슬퍼하실 거요."

"아버지는 네가 부족을 떠난 것에 더욱 슬퍼하실걸."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의 아틸라, 아니 김도현에겐 아버지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문주크가 아틸라와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했듯.

그 역시 문주크와, 그리고 토끼 사냥을 나섰다가 사고로 죽은 어머니 대신이었던 일레크와의 삶에 행복했다.

"게다가 난 이미 아버지를 죽이려는 자를 도왔어. 그게 내 의지와 무관한 것이었다 해도."

"검은늑대를 떠나는 방법도 있소."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일레크가 도끼를 뽑았다.

"난 영원한 검은늑대의 전사야."

아틸라도 용아귀를 손에 쥐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일레크가 섬광처럼 손도끼를 휘둘렀다.

속도도, 힘도, 곰 사냥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모습.

그 순간 아틸라는 그녀의 실력이 비로소 금띠 전사에 도달했음을 감각했다.

그리고 용아귀가 휘둘러졌다.

멈춰 선 아틸라의 어깨를 스치듯 일레크의 몸이 무너졌고, 한발 늦게 그녀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있는 거 알고 있소."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저벅저벅 아틸라 앞으로 다가와 일레크의 시신을 내려 봤다.

"복수하실 거요?"

옥타르는 대답 대신 일레크의 몸과 머리를 안고 일어섰다.

부릅뜬 눈을 감기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 뒤에도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내려 보던 그는 뒤돌아 부락을 향해 걸어갔다.

아틸라도 말없이 발걸음을 이었다.

* * *

며칠 걸으니 슬슬 숲의 영역도 끝이 보였다.

그리고 숲을 벗어난다는 건 십여 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대륙 남서부 야만족의 땅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였다.

머리 위로 차오른 달을 확인하며 아틸라는 야만 숲에서의 마지막 야영 준비를 마쳤다.

"언제까지 따라올 거냐."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토끼 두 마리를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난 내일 이곳을 벗어날 거다. 너도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아."

하긴, 돌아갈 곳을 없애 버린 게 나였지.

"며칠 동안 제대로 못 먹었을 텐데 이거라도 먹고 가라."

아틸라는 잘 익은 토끼 한 마리를 등 뒤로 던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없었다.

대신 으적으적 그것을 씹는 소리가 앙증맞게 들려왔다.

"잘도 처먹네."

아틸라도 토끼를 들어 으적으적 씹었다.

김치찌개, 삼겹살, 햄버거 등의 음식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원주인의 기억 덕분인지 아틸라는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뼈째로 토끼 한 마리를 순삭한 아틸라가 투덜거렸다.

"젠장. 괜히 줬네."

평소 두세 마리씩 먹던 토끼를 하나만 먹으니 배가 차지 않는 건 당연지사.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틸라의 발밑에 반쯤 먹다 남긴 토끼가 슬그머니 놓였다.

그 위에서 조그만 새끼곰이 동그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아틸라를 올려 보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그러거나 말거나 새끼곰은 아틸라를 보며 헥헥 혀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토끼 반쪽을 아틸라에게 툭툭 밀어내더니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두껍고 짤막한 검, 무휼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래. 여기서 엄마 냄새가 나겠지."

아틸라는 새끼곰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자신의 손으로 숙부를 처단하기 위해 그리즐리의 팔을 찢고 모가질 따 버렸을 때.

녀석의 잘린 목이 말했었다.

- 저주를 풀어준 것에 감사한다.

또 자신의 몸뚱이를 뒤져 무휼을 가져가라 했다.

화살의 저주가 완전히 퍼지기 전에 삼켜두었노라고.

아틸라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찾아낸 건 무휼만이 아니었다.

끼엥...! 끼아옹...!

블레다를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새끼곰은 그리즐리의 동굴 안에 넣었다.

문주크를 업고 부락으로 달리는 내내 새끼곰의 울음소리가 등 뒤를 울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먹이를 들고 동굴을 찾았다.

녀석은 냠냠거리며 잘도 먹었고, 며칠 만에 다람쥐 같은 자그만 동물을 사냥할 정도로 건강해졌다.

이후 아틸라는 동굴을 찾지 않았다.

"그렇게 좋냐. 엄마 냄새가."

새끼곰은 무휼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아틸라는 야영의 흔적을 지우고 발을 움직였다.

새끼곰이 헥헥대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말했다.

"안 오면 두고 간다."

새끼곰이 방방대며 달려왔다.

발치까지 다가온 녀석을 들어 어깨에 올린 아틸라는 숲의 경계에 서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가 어쩌면 나의 현실일지 모른다고.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순간 상태창이 떠올랐다.

[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

[ 그동안의 경험치를 일괄 정산합니다. ]

[ 레벨이 올랐습니다. ]

[ 레벨이... ]

이 세상이 현실일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들 무렵 반박하듯 떠오른 메시지에 아틸라는 크게 웃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헤아릴 수 없는 디지털 신호와 픽셀이 현실로 화해 세상 속에 녹아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마침내 아틸라는 달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어깨 위에서 새끼곰이 빼액빼액 포효했다.

* * *

어두운 방.

그들의 모습을 수정구를 통해 들여다보는 이가 있었다.

"흐응. 저주의 화살을 무시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야만전사라. 이런 멋쟁이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붉은 로브에 후드를 눌러쓴 새하얀 피부의 여자.

수정구에 손을 얹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던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라? 전사신 아레스조차 그의 정체를 모른다 했다고?"

어둠 아래 드러난 핏빛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재밌어지겠는걸."

007. 도적기사용병단 (1)

[ 대륙 공용어 패치가 완료되었습니다. ]

"방 하나 주시오. 식사와 술도."

야만 숲을 벗어나 수 일 만에 처음 도착한 마을.

아틸라는 여관 주인을 향해 유창한 공용어를 구사했다.

"엥? 서쪽의 야만족인 거 같은데 공용어를 할 줄 아는 거유?"

주인장의 물음에 아틸라는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곧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으니.

"그러니까 지금,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거유?"

"...그렇소."

"그럼 꺼지쇼."

여관 주인은 퉁명스럽게 말한 뒤 제 할 일로 돌아갔다.

'이런 젠장.'

간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조리된 음식에 술 한잔한 뒤, 시트 깔린 침대에서 늘어지게 자고 싶었건만.

'오늘도 빌어먹을 야영인가.'

투덜대며 여관을 나서려 할 때였다.

험상궂은 사내들이 들어오다 아틸라와 부딪쳤다.

"똑바로 안 보고 다녀!"

"엥? 야만족? 말도 안 통하는 짐승새끼가 뭐 한다고 여까지 기어 나오고 지랄이야!"

"이 개새끼는 또 뭐야."

사내 하나가 새끼곰에게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상대는 숲의 재앙이라고까지 불렸던 그리즐리의 핏줄.

공격을 회피한 새끼곰이 덥석 사내의 발목을 물었다.

"으아아아! 이 개새끼가!"

아틸라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새끼곰도 만족한 듯 혀를 헥헥대며 돌아왔다.

여관문을 벗어나려는데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 이 야만족 새끼야."

아틸라의 발이 멈췄다.

굶주린 야생짐승을 연상케 하는 눈빛이 뒤를 향하자 사내는 흠칫하며 단검을 뽑았다.

"뭐, 뭘 꼬나봐 이 짐승새끼야. 넌 오늘 팔 하나는 내놓고 가야 할 거다. 아울러 저 개새끼의 모가지까지."

대답은 없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사내가 피식거렸다.

"하긴 야만족 새끼가 공용어를 알아먹을 리도 없...."

"뒈지고 싶지 않으면 무기 넣어라."

짧은 정적이 일었다.

"...엥? 뭐야. 공용어를 할 줄 알잖아?"

"이거 놀랍군. 부락에서 글공부 좀 하셨나 봐? 으하하하하!"

"망토 위로 튀어나온 건 도낏자루인 모양이지? 어디서 나무라도 베다 오셨나?"

사내들의 비아냥에 아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딱 손봐주고 나가려는데 아무래도 곰탱이가 더 화가 났나 보다.

사내의 가슴팍으로 뛰어오른 새끼곰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으악! 이 개새끼가 진짜!"

머리끝까지 화가 난 사내는 새끼곰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지만 아틸라가 두고 볼 리 없었다.

부드득, 하는 소음에 이어 찢어지는 비명이 여관을 울렸다.

"손...! 내 손이...!"

사내의 손은 아틸라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기묘하게 뒤틀린 손가락을 보고 울부짖던 사내가 뒤를 보며 소리쳤다.

"뭐, 뭐해! 모두 공격해!"

그제서야 뒤에 있던 세 남자가 허둥지둥 검을 뽑았지만 질풍처럼 달려든 아틸라의 주먹에 차례로 바닥에 꽂혔다.

쯧쯧, 혀를 차며 아틸라가 말했다.

"그러게 무기 넣으라니까."

* * *

그날 밤.

아틸라는 여관 주인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뭐 더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요, 전사님. 헤헤."

빈 그릇과 술병들이 쌓여 갔다.

포식한 새끼곰은 볼록한 배를 드러내며 탁자 위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놈들이 도적단의 일원이란 말씀이오?"

"예예. 수시로 마을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는 아주 악질적인 놈들입죠."

"그 실력으로 말이오?"

"아이고 전사님. 좀 전의 놈팡이들 정도야 마을 자경단으로도 충분히 혼내줄 수 있습죠. 아니 자경단까지 갈 것도 없이 제가 삼 년만 젊었어도 확 그냥."

물끄러미 여관 주인을 바라보던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럼 뭐가 문제요."

"그게..., 두려운 건 도적단 두목과 그 부하들입니다요."

내용인즉슨 놈들의 우두머리는 어느 자그만 영지를 다스리던 기사 출신이고, 지금은 부하들과 함께 도적단을 꾸려 근방 마을을 약탈하며 살고 있다는 것.

영지를 잃은 기사가 도적으로 돌변해 양민을 습격하는 일은 패영전 세계관에서 흔한 일이었다.

지금의 대륙은 혼돈,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녀석이 나타나지.'

패영전의 주인공이자 훗날 남부의 패왕으로 불리게 될 인물.

'샤를 아인하르트.'

애정을 듬뿍 담아 창조했던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틸라가 기분 좋은 상념에 잠겨 있을 무렵 노인 한 명이 여관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촌장이라 소개한 그가 아틸라 앞에 마주 앉았다.

"주인장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무력을 지닌 전사님이라고...."

"본론만 말씀하시오."

물론 무슨 말을 할지는 짐작이 갔다.

"부탁드립니다. 도적단을 괴멸시켜 주십시오."

"그게 야만족 전사 하나로 가당키나 한 일이라 생각하는 거요?"

물음과 달리 아틸라는 자신이 있었다.

아틸라는 핏물도끼 부족과의 전쟁에서 무려 오십 명이 넘는 적군을 도살했다.

그리즐리의 동굴 근처에서 죽였던 활잡이들을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이 나이 먹도록 사람 보는 눈 하난 제대로라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제 눈이 전사님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대전사라 말하고 있군요."

노인네 혓바닥 참 기네.

"그게 다요?"

"아, 그것만은 아니고...."

촌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사님이 오늘 그 놈팡이들을 흠씬 두들겨 패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녀석들은 두목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할 테고, 내일이면 이 마을은 쑥대밭이 될 겁니다."

아. 그런 건가.

그제야 촌장의 표정 한구석에 담긴 불유쾌함을 엿본 아틸라는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데?

"위에선 뭘 하고 있는 거요. 도적들이 이렇게 날뛰는 동안."

"영주님은 지난번 도적단과의 전투에 앞장서다 큰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럼 대영주는?"

이곳은 남부의 패자라 불리는 대영주, '가스코뉴 공작'의 직영지 중 하나다.

가스코뉴는 군디카를 꼬드겨 서쪽의 야만 부족을 통합해 자신의 군대로 만들려는 개수작을 부렸던 자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원작에선 부족 통합에 성공한 군디카가 그와 봉신의 계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샤를 아인하르트한테 처발리지.'

"그러지 않아도 관리인께서 보고를 드리러 가신 참입니다. 며칠 안으로 토벌 부대가 당도하겠지요."

그렇군. 녀석들이 내려오기 직전의 상황인 건가.

고개를 끄덕이던 아틸라가 물었다.

"대가로는 뭘 지불하시겠소?"

"그게 무슨...."

"놈들을 괴멸시키면 내게 무얼 줄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거요."

멍하니 아틸라를 쳐다보던 촌장은 탁자에 가죽 주머니를 올렸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은화와 동화가 섞여 있지만 합치면 금화 한 닢은 될 겁니다."

금화 한 닢.

목욕을 포함한 하루 숙박과 두 끼 식사 비용이 은화 세 닢이었으니 나쁘지 않은 금액이다.

그래도 목숨 값으론 좀 싼데?

"도적단의 규모를 알고 있소?"

대답은 여관 주인이 했다.

"제대로 된 장비로 무장한 이가 대략 열 명. 아까의 풋내기들까지 포함한다면 아마도...."

"두당 반 닢으로 계산해서 금화 다섯 닢. 풋내기들은 무료로 치워 주겠소."

다섯 배로 껑충 뛰어오른 의뢰비에 촌장은 해쓱한 얼굴이 되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아틸라는 느긋하게 술병을 비웠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건 계약금. 나머진 의뢰를 완수한 뒤에 받겠소."

주머니를 끌어당긴 아틸라는 동전 한 줌을 꺼내 탁자에 뿌려 놓고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술병을 들이켰다.

잽싸게 그것을 챙긴 주인장이 환히 웃는 얼굴로 술상을 대령했다.

* * *

이튿날.

마을 어귀에 선 아틸라는 십여 마리의 말이 부연 먼지 속을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몸을 풀었다.

'저 말 잡아다 팔면 돈 좀 되겠는데.'

어젯밤 맛있는 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운 아틸라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요정왕국으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그런 게 있다면 참 좋으련만.

요정왕국의 존재는 지금 시점에선 인간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다.

결론만 말하자면 정확한 위치는 아틸라도 몰랐다.

'바보같이 정확한 위치를 설정하지 않았거든.'

- 요정들의 성역. 그 아름다운 공중섬은 크리엘도라 대륙 북해의 하늘 위에 고고한 자태로 떠 있었다.

원작에 쓰인 문장이다.

설령 정확한 위치를 특정했다 해도 마땅한 비행 기술이 없는 이 세계에서 물리적인 방법으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

'그것뿐이면 다행이지.'

북쪽 바다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거인과 설인의 땅을 지나야 한다.

그곳 너머의 불길한 존재들 또한 그 이상의 거대한 장벽이었고.

'그렇게 어찌어찌 북해에 도달한다 해도.'

심지어 공중섬은 하늘 위를 움직이기까지 했고, 그곳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마력의 영향으로 섬 근해엔 미로 같은 결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 빌어먹을 곳에 있었다 요정들의 성역은.

왜 그런 곳에 있냐고?

그래야 신비로워 보이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썼지!'

하지만.

'그러니까 가 볼 가치가 있는 거다.'

말 그대로 공중에 떠 있고 움직이기까지 하는 섬이다.

살아 있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이 존재한다면 그곳 말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가는 방법인데.

'녀석을 만나는 수밖에 없나.'

샤를 아인하르트.

녀석은 어릴 적부터 요정왕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결국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 도달하는 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아틸라는 가능하면 샤를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놈은 진짜 무지막지하게 강하거든.'

패영전 세계관 최강의 검사.

문주크의 강함을 100이라 표현한다면, 샤를은 300을 거뜬히 넘을 거다.

영웅 문주크보다 세 배 이상 강한 게 말이 되느냐고?

달리 주인공이겠는가.

'물론 지금이야 그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껄끄러운 이유는 또 있었다.

샤를의 행보는 패영전 스토리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공연히 녀석을 만나 역사를 뒤틀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말고 당분간은 몸 사리자."

군디카의 야망이 무너진 탓에 대륙의 역사는 벌써 바뀌기 시작했다.

녀석이 이끄는 야만전사들은 가스코뉴 공작이 벌인 전쟁에서 상당한 수완을 발휘할 예정이었으니까.

'귀찮지만 그것에 대해선 사후 처리를 해 놔야겠지.'

그때 새끼곰이 아틸라의 발을 톡톡 건드렸다.

새끼곰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 보던 아틸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젠가부터 녀석의 표정이 읽히는 것 같다.

"뭐? 몸 사려 봐야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고?"

새끼곰은 맞는다는 듯 헥헥 혀를 내밀었고.

이제는 얼굴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진 도적단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아틸라가 말했다.

"재수 없는 소리 마."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기다란 창을 든 무장 도적이 앞장서 쇄도했다.

"네놈이냐! 공용어를 쓴다던 건방."

정면으로 몸을 날린 아틸라가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고.

"진 야만...!"

폭풍처럼 휘둘린 용아귀가 말과 함께 그의 몸을 반으로 쪼갰다.

008. 도적기사용병단 (2)

오동나무 용병단(이라 쓰고 도적단이라 읽는다)의 우두머리이자 한때는 촉망받는 기사였던 오토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촌장 놈은 분명....'

덩치 큰 야만전사 하나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은 틀린 게 없었는데.

'조, 존나게 힘센 놈이란 말이 빠졌잖아!'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오토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저 손에 들고만 있기도 벅차 보이는 거대한 도끼를 장난감처럼 휘두르며 사람과 말을 일거에 두 쪽 내는 괴력이라니.

'젠장 그렇다면.'

오토가 손을 올리자 부하 넷이 능숙하게 활을 꺼내들었다.

'그래봐야 무식하게 힘만 센 야만전사 하나일 뿐이다. 원거리 공격으로 조지면 돼.'

한편 아틸라는.

'아. 말까지 죽여 버렸네.'

자신도 모르게 범한 실수를 후회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말이라면 꽤나 값이 나갈 터.

한 마린 실수로 죽였지만 이제부터라도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던 아틸라의 눈이 자신에게 쏘아진 네 발의 화살을 포착했다.

'음?'

아틸라는 용아귀를 들어 그것들을 막아 낸 뒤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휘둘렀고.

주인의 손을 떠난 용아귀는 활잡이 하나와 그가 탄 말을 관통한 뒤 그 뒤에 있던 사내의 가슴팍에 처박혔다.

"크허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사내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 주인을 잃은 말이 큰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도망쳤다.

'젠장할 또.'

대장으로 보이는 도적의 거친 욕설과 함께 재차 화살이 날아왔다.

용아귀를 잃은 아틸라는 손도끼를 꺼내 그것들을 튕겨 낸 뒤 대장을 향해 돌진했다.

"쏴! 쏘라고 이것들아!"

오토가 소리치며 물러서는 사이 또 한 명의 활잡이가 아틸라의 도끼질에 쓰러졌다.

'좋아. 말은 살렸다.'

그러나 아틸라의 가공할 살기에 기겁한 말은 또다시 줄행랑을 쳤고.

'가지 마!'

그와 동시에 세 개의 검날이 아틸라의 빈틈을 노리며 쇄도했다.

창 들고 날뛰던 놈이나 활 몇 번 당기고 뒈져 버린 두 활잡이와는 확연하게 다른 기세.

'기사인가?'

오랜 기간 제대로 검술을 교육받은 자들만이 내뿜을 수 있는 예리함이 느껴졌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드는 세 개의 공격.

아틸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채채챙!

차랑한 파찰음이 공기를 울렸다.

기사들의 검은 아틸라에게 닿지 못했다.

그 모든 공격을 아틸라는 완벽하게 막아 냈다.

"뭐, 뭐야!"

"막았다고?"

아틸라는 웃었다.

그는 문주크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대일로 널 상대할 수 있는 자는 대륙 전체를 뒤져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는 법. 네 용력과 체력도 무한정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틸라 역시 핏물도끼 부족과의 전투에서 뼈저리게 느낀 점이었다.

홀로 수십 명의 적을 쓰러뜨리는 동안 체력은 완전히 고갈되었으니까.

'지금은 그때보단 나아졌겠지만.'

야만 숲을 벗어나며 몇 단계 레벨업을 했다.

당연히 체력 스텟도 올랐다.

그렇다고 방심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이, 이 새끼 뭐야!"

"전부 막아 내고 있어!"

"젠장! 제대로 좀 해 봐!"

기사들이 소리쳤다.

이어 우두머리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 두목!"

"대장이 도망친다!"

'놓칠 순 없지.'

아틸라는 반격기를 사용해 단숨에 세 기사를 낙마시켰다.

역시나 주인 잃은 말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뿔뿔이 흩어졌고.

전의를 잃은 나머지 도적들은 두목을 쫓아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닿을 수 있을까.'

두목의 등짝을 향해 손도끼를 던지려던 아틸라는 녀석이 제법 먼 곳까지 거리를 벌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아틸라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저거다.'

아틸라는 처음 죽였던 도적의 시체 앞으로 달려가 창을 쥐었다.

그의 팔 근육이 물 밖으로 튀어 오른 물고기처럼 퍼득거리는가 싶더니.

[ 스킬, 창 투척이 활성화됩니다. ]

엄청난 기세로 쏘아졌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오토가 뒤를 돌아보고는 경악성을 내질렀다.

"저, 저게 뭐야!"

뱀처럼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쏘아진 창이 오토를 뒤따르던 부하의 말을 꿰뚫고, 또 다른 말을 꿰뚫었다.

끔찍한 절규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치명상을 입은 두 말이 볼링핀처럼 옆의 말들을 쓰러뜨렸고.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오토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저게 사람이냐...!'

맹렬하게 굴러오는 말의 등짝을 바라보며 오토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퍼어억! 오토의 시야가 암전 됐고 그 모습을 확인한 아틸라가 양팔을 추켜올렸다.

"스트라이크!"

* * *

"촌장이 날 네놈들에게 넘기기로 했고, 추가로 보상금까지 지불하겠다 했다고?"

"예예. 그렇습니다 전사님."

오토가 굽신대며 말했다.

녀석을 포함해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일곱 명의 도적은 밧줄에 포박된 채 무릎 꿇려 있었다.

"흠. 그랬단 말이지."

아틸라는 놀란 기미조차 없었다.

모두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뭐,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의뢰였지.'

자신은 고작 도적단 축에도 못 끼는 얼간이 넷을 손봐주었을 뿐이다.

그것 말곤 아무런 검증도 되지 않은 야만족 전사에게 기사 출신 도적단을 괴멸시켜 달라는 의뢰는 그야말로 얼토당토 되지 않는 소리.

'내가 야만족이라 무지하다 생각했던 거겠지.'

촌장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야만전사 하나 때문에 마을이 큰 피해를 입을 상황이었으니까.

원인을 제공한 외부인과 함께 약간의 보상금으로 무마할 수 있다면 그에겐 크게 남는 장사였던 것.

하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고.

"보상금으로 얼마를 요구했지?"

"그, 금화 열 닢입니다."

이런 쳐죽일 놈이.

돈 없는 불쌍한 노인네인 척할 땐 언제고 도적놈들한테 금화 열 닢을 줘?

"모, 목숨만 살려 주시면 금화 열 닢하고, 그동안 모은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모은 재산이 얼만데."

"으, 은화 수십 개 정도는."

"장난치냐?"

"...."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 숙인 오토에게 아틸라가 물었다.

"촌장 말로는 며칠 내로 가스코뉴 공작의 토벌대가 올 거라던데. 알고 있었나?"

"무, 물론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번에 야만족 새끼만 족치고 나면."

"야만족 새끼?"

"아니 야, 야만 어르신 일만 마무리되면 당분간 이곳을 떠나 있을 계획이었습니다."

"너희를 공작에게 넘기면 금화 열 닢은 넘게 받을 수 있겠지?"

"아이고 어르신! 그 무슨 잔인한 말씀이십니까!"

오토가 눈물을 쏟으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고.

잔뜩 험악해진 그의 눈짓에 나머지 도적들도 아이고아이고, 억지 눈물을 흘리며 쿵쿵 머리를 박아 댔다.

"남는 말은 없나?"

애석하게도 녀석들이 타고 온 말은 모두 죽거나, 도망치거나,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다쳤다.

"예. 말은 오늘 타고 온 것이 전붑니다."

"젠장."

말들을 팔아 한몫 단단히 챙기고 개중 제일 괜찮은 놈은 직접 타고 다니려 했는데.

오토가 눈치 좋게 물었다.

"말이 필요하십니까? 영주관에 꽤 괜찮은 놈이 있습니다."

"영주관에?"

"예. 이 마을 영주 놈이 제법 좋은 말을 가지고 있더군요. 제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검 실력을 가진 주제에 지난번 전투에서 목숨을 부지한 건 순전히 말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주의 말이라면 달란다고 덥석 내주진 않겠지?"

"그야 그렇지요."

"그럼 너희와 맞교환하면 되겠군."

"아이고 어르신!"

* * *

"그대가 잡아온 도적들과 내 군마를 교환하고 싶다 이 말인가."

영주관에 모습을 드러낸 노기사 베르트랑은 한때는 여자 깨나 울렸을 것 같은 중후한 외모의 사내였다.

"그렇습니다. 아울러 적절한 포상금을 원합니다."

옆에 있던 촌장이 화들짝 놀라 아틸라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아틸라는 영주관에 오기 전 촌장의 집에 들러 의뢰 완수 비용과 함께 오토에게 주기로 했던 금화 열 닢, 그리고 사기 위약금 명목으로 은화와 동화까지 깡그리 뜯어냈던 것이다.

'돈에 환장한 놈인가! 야만족은 물욕이 없다더니만 완전 헛소문이었군!'

영주, 베르트랑이 짐짓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도적놈 몇을 잡아와 놓고 내게 군마와 포상금을 요구하는 것인가."

"고작 도적놈 몇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

"여러 날 동안 이놈들을 잡지 못해 갖은 고생은 다 하셨다 들었습니다. 얼마 전엔 도적단 두목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지던 걸 간신히 말의 도움으로 살아나셨다고."

"그게 무슨! 누가 그런 헛소릴 한단 말인가!"

"제 옆에 있는 촌장이지 누구겠습니까."

"내, 내가 언제!"

촌장이 기겁하며 외쳤고 베르트랑의 노한 눈길이 촌장에게 틀어박혔다.

"게다가 이들이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는 건 영주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즉각 전력으로 활용 가능한 기사 출신이 넷이나 있습니다."

"허! 즉각 전력이라니. 그대는 마치 이 평화로운 가스코뉴 공작령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말하는군."

"공작께서는 동쪽의 아키텐 백작령과 전쟁을 준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곳으로 진군 중인 부대 역시 도적단 토벌이 주목적이 아니라 동쪽과의 전쟁을 위한 것이라는 걸 촌장의 입을 통해 아주 소상히 들었습니다."

"야 이놈아!"

격노한 영주가 촌장에게 일갈했다.

"네 이노오오옴!"

"아이고 아닙니다 영주님! 전 이자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야만전사 놈아! 어째서 날 모함하는 것이냐!"

"촌장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그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더러운 거짓말쟁이!"

바락바락 소리치던 촌장은 영주의 명에 어디론가 끌려갔다.

정의 구현이다 이 사기꾼 노인네야.

"영주님께서도 이자들의 실력을 알고 가급적 생포하려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 때문에 지난번 전투에서 불필요한 부상까지 입으셨던 것이고요."

아틸라의 은근한 말에 베르트랑이 눈을 동글게 떴다.

"뭐라?"

"그러지 않았다면 '남부의 승냥이'라 불리던 위대한 기사께서 이런 허접 나부랭이들을 쓰러뜨리지 못했을 리 없지요."

"허허. 그 이름을 알고 있었는가."

"물론입니다. 남부의 승냥이라면 제가 살던 야만 부족 사이에선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하는 공포의 상징입니다."

"허허허허허."

물론 뻥이다.

그러나 베르트랑은 크게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이번 전쟁이 끝나면 일선에서 물러나려 생각하던 그였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 나섰던 도적단 토벌전에서 맥없이 오토에게 당한 뒤 그 생각은 더욱 가속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을 알아봐 주고 추켜세워 주기까지 하는 자가 나타났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좋다. 내겐 세 마리의 군마가 있으니 그중 원하는 것 하나를 주겠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포상금은."

"금화 열 닢.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는 말에 아틸라는 놀란 얼굴을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됐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모두 원하던 바를 이루기 위한 밑밥이었으니까.

곧이어 예상했던 말이 영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009. 패왕의 등장 (1)

그리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건 아니었지만, 아틸라는 소설과 현실이 다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소설을 원작 삼아 만든 게임처럼.'

큰 줄기는 같지만 자잘한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나는 느낌이랄까.

이를테면 도적기사용병단장 오토는 원작에선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가스코뉴 공작군에 토벌된다.

그래서 아틸라는 패영전 역사의 개입에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아직까진 큰 무리 없이 가고 있는데."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일으킨 가장 큰 변화라면 역시, 군디카의 야망이자 가스코뉴 공작의 계획을 무산시킨 일.

원작에서 가스코뉴 공작은 그의 막강한 군세와 군디카의 야만 부족을 이용해 아키텐 백작령을 공격한다.

그는 아키텐 백작을 자신의 상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두 진영의 전력 차이는 극심했으니까.'

그러나 압승을 예상했던 가스코뉴 공작의 생각과 달리 전쟁은 치열한 접전을 이어 가게 되는데.

이유는 아키텐 백작의 군세 속에 엄청난 인물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샤를 아인하르트.'

녀석의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전쟁.

그것이 바로 향후 벌어질 가스코뉴 공작과 아키텐 백작 간의 영지 전쟁이다.

그런 샤를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가스코뉴 공작은 야만 부족을 손에 넣지 못한 것에 상관없이 군대를 일으켰고.

그것이 불러일으킬 결과는 그야말로 명백한 것이었다.

'완패.'

이대로라면 가스코뉴 공작은 아키텐 백작에게 완패한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크게 바뀌겠지.'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가스코뉴 공작의 힘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딱 군디카가 이끌던 야만 부족만큼의 전투력을.

그래서 아틸라는 베르트랑 영주를 통해 원하는 답을 얻어 냈다.

'그대도 이번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라.'

아틸라는 웃었다.

자신이 계획한 방식으로 적과 싸우려면 영주의 뒷배가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할 사람은 아틸라와.

"흐에엑. 아, 아키텐 백작이라니! 제가 그런 대전쟁에 나가야 한단 말입니까!"

오토였다.

"아니면 걍 참수당하든가."

"아이고 어르신! 살려주십시오!"

"그놈의 어르신 소리 좀 집어치워. 나 열여섯 살이다."

"응? 열여섯? 마흔여섯이 아니고?"

"이 새끼가 진짜."

아틸라는 오동나무 용병단의 일원으로 참전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눈에 덜 띌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용병단에 속해 있다 한들 서쪽의 야만 부족에서 건너온 아틸라의 외모가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고.

그래서 아틸라는 제대로 된 용병 행색을 갖추기 위해 방어구점에 들렀다.

흥정은 오토에게 맡겼다.

"이런 시벌. 이깟 허접한 투구가 뭐? 얼마?"

"맙소사! 이따위 체인 메일을 그 가격에 팔겠다니! 내가 물구나무서서 대충 발가락으로 조물대도 이거보단 촘촘하겠다!"

오토의 수완(?) 덕에 아틸라는 그럭저럭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장비로 무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얼굴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투구가 마음에 들었다.

'좋은데?'

그런 아틸라의 옆에 달라붙어 오토는 이곳의 무기점에선 양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진정한 기사의 방어구라면 역시 플레이트 아머인데 그건 대륙에서 가장 저렴한 물건을 찾는다 해도 금화 100닢은 거뜬히 호가할 것이며 무엇보다 물건 자체를 구하기 어려운 탓에 아직까지 자신도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기회만 된다면 꼭 갖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너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았냐?"

"아이고 아틸라 님. 이제 영락없는 오동나무 용병단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하하하."

"그래? 제법 평범한 용병처럼 보이나?"

"그 곰 같은 덩치로 평범한 건 무리죠. 하지만 빌어먹을 야만족 새... 아니, 야만 부족 출신 전사로 보이진 않습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공작의 군대가 오기 전까지 아틸라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오동나무 용병단원을 불러 모아 훈련을 시작한 것.

박박 긁어모으니 얼추 서른 명은 되었다.

"아틸라 님! 제발 살살 좀 해 주십쇼!"

"엄살 부리지 말고. 명색이 기사였다는 놈이."

"아이고 언제 적 이야길 하십니까! 이젠 내가 기사였는지도 까먹었다니까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오토는 생각 이상으로 잘 훈련된 기사였다.

'이 정도면 지휘관 급 아닌가?'

일전에 겨뤘던 세 기사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긴. 한때 영주였다 했었지.'

게다가 배움에 대한 소질도 좋았다.

물론 아틸라가 잘 가르친 덕이 컸지만.

[ 보조 스킬, 검술 교육이 활성화됩니다. ]

아틸라의 주무기는 도끼였지만 검을 비롯한 다른 무기 사용법도 꾸준히 배워 왔다.

그는 아키텐 백작과의 전쟁에서 검으로 싸울 생각이었다.

'이 시대의 기사나 용병들이 도끼 들고 싸우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가스코뉴 공작의 군대를 최대한 조력하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그게 아틸라의 목표였다.

'내 존재가 샤를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녀석이 가만있을 리 없지.'

물불 안 가리고 죽이려 들 거다.

그때 새끼곰이 아틸라의 발을 톡톡 건드렸다.

녀석의 얼굴 표정을 읽은 아틸라가 투덜대듯 말했다.

"재수 없는 소리 말라니까."

* * *

"검이라면 제가 좀 볼 줄 알지요. 아틸라 님은 그냥 이 오토에게 딱 맡기고 가만히만 계시면 된다 이 말씀입니다."

오토는 한때 영주였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위엄이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긴, 저러니 그리 시원하게 말아먹었겠지.'

아틸라는 적당한 검을 찾기 위해 무기점에 이어 대장간까지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아틸라 님. 이 검은 어떻습니까."

오토가 고른 검을 아틸라는 가볍게 쥐어 보았다.

'일단 그립감은 좋은데.'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칼자루가 부서질 것처럼 덜걱거렸다.

"손잡이가 더 단단한 건 없나?"

"아까부터 왜 그렇게 손잡이 타령을 하십니까. 검은 당연히 날을 봐야죠. 설마 날을 쥐고 손잡이로 두들겨 팰 생각은 아니실 테고 당최 이해를 못 하겠네."

구시렁대던 오토는 아틸라의 서늘한 표정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몇 개인가의 검을 더 만져 보았지만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쇠처럼 단단한 손잡이를 원하신다면 드워프 대장장이를 찾으셔야 할 겁니다. 그중에서도 장인 칭호를 가진 자들의 무기 중엔 날끝부터 손잡이까지 드워프 강철로 제작한 신박한 것도 있다 하더군요."

오토의 말대로 이 세계관에서 가장 훌륭한 무기와 방어구를 제작하는 건 드워프들이다.

"물론 드워프가 만든 무기를 갖는다는 건 플레이트 아머를 손에 넣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죠. 하긴 정통 플레이트 아머 역시 고도로 정제된 드워프의 기술력으로만 제작 가능하고 인간이 만든 건 그것을 흉내 낸 모조품에 지나지 않으니 어쩌구저쩌구...."

끊임없이 재잘대는 오토의 수다를 아틸라는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이 마을에선 제대로 된 무기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무휼을 쓰고 싶진 않은데.'

심지어 무휼은 도끼처럼 널찍한 너비에 비해 길이는 단검처럼 짧아서 전투에 유용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군.'

대안을 꺼낼 때가 왔다.

뉘엿뉘엿 기우는 해를 바라보던 아틸라는 오토에게 부하들을 데리고 여관으로 오라 말했다.

"왜요?"

"그간 다들 고생했으니 늘어지게 술판 한 번 벌여 보게. 왜. 싫어?"

"그, 금방 다녀오겠수!"

오토는 귀 끝까지 입을 찢으며 뛰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