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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아테네의 사신

잉여하다.

잉여란 단어는 아마 지금의 날 위해 생겨난 말이 아닐까.

이집트 카이로로 떠나는 비행기는 3일 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니 금방 갈 거라 생각했는데.

더럽게 안 가네.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3일 동안 다른 곳 좀 돌아다닐까 했는데 하나같이 거리가 멀어 애매한 위치뿐이었다.

결국엔 아테네에서 3일을 보내야 한다는 말인데 왜 이렇게 할 일이 없는 걸까.

- 제가 놀아 줄게요!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젯밤 헤어지기 전에 이연화가 한 말이었다.

이집트로 떠나면 이제 또 언제 볼지 모르니 밥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것.

문제는 이연화가 퇴근할 때까지 할 게 없었다.

이거라도 알아봐야지.

그나마 할 일이라곤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의 용도를 알아내기 정도였다.

그래서였다.

대사관에서 잠깐 마주쳤던 김대혁에게 질문을 했던 것은.

- 목걸이의 용도를 알고 싶은데요, 혹시 아시는 능력자 있을까요?

김대혁에게 물건의 용도를 알아봐 줄 만한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었다.

아쉽게도 대사관엔 그런 능력자가 없다고 대답한 김대혁.

그랬던 김대혁이 오늘 아침 문자를 한 통 보내왔다.

# 도심지 중앙 시장 골목에 물건을 봐주는 사람이 있음.

자신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정확하지 않지만, 들리는 소문으론 어떤 물건이든 척척 용도를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알려주는 척척박사라니.

얘기만 들었을 땐 사짜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기에 찾아가는 길이었다.

"으아아! 죽고 싶지 않아! 살려줘!! 제발! 아무나 좀!"

오 씨,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많은 시가지 한복판에서 주저앉아 있는 아저씨 한 분.

왜 저러지.

딱히 누가 위협을 하고 있다거나 어디가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아저씨는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아저씨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무슨 일인지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반응들.

"아이고, 저 아저씨도야?"

"말도 마세요. 3일째 저렇게 울고 있다니까요."

사사삭.

"무슨 일이에요?"

"아이고 깜짝이야!"

바퀴벌레 같은 은밀한 움직임으로 다가가서일까.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날 돌아봤다.

"왜 저러는지 아시는 거예요?"

"여기 사람이 아니구만?"

"정확히 보셨습니다. 여기 온 지 일주일도 안 됐어요."

그럼 모를 수 있다는 얼굴로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이여 사신."

"사신요?"

뜻밖의 대답에 눈을 크게 뜨자 아주머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1년 전인가부터 그랬을 거여. 사신이 나타나기 시작한 게."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말을 이어갔다.

"다들 개방하면 사고가 나거나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평생 살 거라고 생각하잖여. 그 생각이 극에 달했을 때 처음으로 사신이 나타났어."

사람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영생을 얻었다는 기쁨에 취해있었다고 한다.

그런 아테네의 사람들 앞으로 사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아주머니의 설명.

"사신의 존재가 퍼지기 시작한 건 인터넷이었어. 자기가 사신을 봤는데 3일 뒤에 죽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하더라고."

안 믿었겠는데.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괴담 수준이었다.

밤에 칼을 물고 화장실 거울을 보면 안 된다던지.

분신사바를 할 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하면 귀신에 씌인다던지 하는 그런 괴담.

"처음엔 그냥 심심한가 보다 했었지, 요즘 세상에 사신이라니 말이여."

"나도 다 읽어보지도 않았다니까? 무슨 사신이야 21세기에, 안 그려?"

옆에서 동의를 구해오는 아주머니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이란 존재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였다.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등장하는 존재지만 과학적으로는 한 번도 입증되지 않아 가상의 존재라고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똑같은 글이 엄청 올라오더라고."

"글뿐만이 아니었지, 유명 인사 중에도 사신을 만났다는 사람이 나왔고 실제로 방송국과 인터뷰를 한 사람도 많았어."

유명 인사까지 그랬으면 뭐가 있긴 있나 본데.

공인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어그로 좀 끌어보자고 그런 예민한 걸로 허위 주장을 하진 않았을 터.

"그 사람들 어떻게 됐는데요? 거짓말로 밝혀졌나요?"

거짓말이었냐는 내 물음에 아주머니 두 분이 목소리를 낮추며 바짝 다가왔다.

"다 죽었어."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루머나 주작 엔딩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정직한 결말이었다.

"방송에 나왔던 유명 인사도 예외는 아니었어. 사신을 만났다는 사람들은 정확히 3일 뒤에 전부 죽었거든."

"그래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 군, 경찰, 대사관에서 전부 투입됐을 정도로."

난리가 안 나는 게 이상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하고 실제로 그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예고 살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됐나요? 범인은 잡았나요?"

"잡았으면 아저씨가 저러고 있겄어? 한동안 잡는다 어쩐다 떠들썩하더니 다 포기해버렸지 뭐."

"포기요⋯?"

이해되지 않는 결론이었다.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포기라니.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가 없다고 하던디. 심지어 죽는 시간에 그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도 말이여. 그냥 시간이 되면 슥삭 하고 죽어버리더래."

"그래서 처음엔 사람이나 데몬에 의한 살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도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지.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신적 존재의 행동이라고 말이야."

톡톡.

내 어깨를 두드린 아주머니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 사신을 만난 분들은 신고 부탁드립니다.

"오죽하면 이런 제도도 생겼겠는가. 죽을 날이 정해진 사람들을 위해 나라가 복지를 만든 거여."

화면 아래로는 여러 가지 혜택이 적혀 있었다.

사는 동안 딱 한 번만 누릴 수 있는 혜택엔 그리스 전체의 호텔 및 식당, 각종 부대시설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적혀 있었다.

최후의 만찬 같은 건가.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어쩔 수 없는 죽음으로 인정해버리다니.

예상하지 못한 해결 방법이었다.

"저 아저씨도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무서우니까 저러는 거여."

아주머니 두 분이 딱한 듯 혀를 찼다.

"나 좀 살려달라고!!"

아무리 절규해도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그저 가까이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막을 수 없는 죽음이라.

절규하는 아저씨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구먼.

* * *

김대혁이 알려줬던 시장으로 들어왔다.

데몬이 나타난 후 줄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관광객과 현지인이 섞여 있는 시장이었다.

어디 보자.

뒷골목이라.

어째서 찐 능력자들은 항상 뒷골목에 있는 걸까.

대기업마냥 큰 간판을 걸어 놓고 장사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저벅.

어둑어둑해 보이는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뒷골목의 시작부터 어둑어둑한 안쪽까지 늘어서 있는 정체불명의 상인들.

다들 좌판을 깐 채 무언가를 팔고 있었지만, 상품에 명확한 주제가 있다기보단 이것저것 파는 느낌이라 도통 그 상인의 주체를 알기가 힘들었다.

초큼 막막하네.

김대혁이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긴 했지만.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어디에 앉아 있는지는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뭐가 주력인지 모르는 뒷골목 상인들을 상대로 한 명씩 물어보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안 살 거면 꺼져."

"넵."

왠지 이 할아버지는 아닐 것 같다는 판단에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어째서 저렇게 날이 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몹시 무서웠다.

그렇게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애야, 이쪽으로 좀 와볼래."

내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의 여자가 날 불러 세웠다.

애야 라고 부를 만큼 나이 차이가 커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부르는 여자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왔습니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가 고개를 들며 싱긋 웃었다.

⋯!

여자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그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 목걸이 어디서 났니?"

"뒷골목에 물건을 보면 용도를 알려 주는 척척박사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척척박사인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물건을 잘 보긴 하지."

스윽.

"에밀리야."

이름을 밝힌 에밀리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백운입니다."

내민 손을 맞잡으며 힘차게 자기소개를 했다.

"목걸이 달라고. 손은 잡지 말고."

"앗 네."

호다닥 손을 놓으며 에밀리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그래서 목걸이 어디서 났다고?"

"친구가 주고 갔어요."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설명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뒷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이카로스와 아테네의 신화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순 없지 않은가.

"능력 좋은 친구를 뒀구나."

목걸이를 다시 건넨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이건 어떤 좌표든 새길 수 있는 바인딩 석이다."

"⋯! 뒷골목을 새겨 놓으면 다른 곳에서도 바로 날아올 수 있는 건가요?"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마. 딱 한 번 밖에 못 새기고, 딱 한 번밖에 못 사용하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에밀리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곳이든 새길 수 있어. 현재에 존재하는 곳이든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곳이든. 그러니 신중하게 사용해. 나중에 가야 하는데 지금밖에 갈 수 없는 장소⋯. 그런 곳을 새겨 넣어라."

"어⋯ 음⋯ 네."

설명을 들으면서도 딱히 와닿지는 않았다.

좌표를 새긴다니.

살면서 내가 쓸 일이 있을까 싶은 기능이었다.

"지금은 필요 없더라도 목걸이를 소중히 여겨라. 이런 목걸이는 보통 다른 차원의 존재와 소통할 자격과 힘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으니까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아테네를 떠올렸다.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신격화될 뻔했던 아테네였지만, 분명 남들에겐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띠링.

아테네의 특수한 힘을 생각하고 있을 때 휴대폰으로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 퇴근 완료.

이연화의 메시지였다.

"고맙습니다, 혹시 사례는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필요 없어."

"⋯!?"

비싸게 부르면 어쩌지란 찰나였는데 뜻밖의 대답을 하는 에밀리.

"왕에게 반말을 해본 것으로 충분하니까."

에밀리의 입가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백운에게 문자를 보낸 후 화장실에 들른 이연화.

이연화가 거울 앞에서 입고 있는 셔츠를 내려 목덜미를 살폈다.

어제보다 확실히 커진 검보라색의 문양.

문양은 마치 꽃이 개화되는 것처럼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

스으으으⋯!

갑자기 이연화의 등 뒤로 거대한 낫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공허한 눈과 창백한 피부를 가진, 칠흑같이 어두운 흑발을 가진 남자였다.

입고 있는 검은 망토를 약간 펄럭이며 나타난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3일 뒤."

고개를 든 남자가 이연화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은 죽습니다."

115화. 날라차기

어찌저찌 시간은 흐르는구먼.

벌써 비행기 타는 날이 오다니.

공항 쪽으로 걸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카로스의 날개를 찾아 날아온 그리스 아테네.

대략 일주일 정도를 머물렀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벌써 정이 든 것 같았다.

무슨 일 있나.

옆에 있는 이연화를 바라봤다.

언젠가부터 이연화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 무슨 일 있어요?

그때부터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무 일 없다며 이연화는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연화 님,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네⋯. 네? 에이 없다니까요, 자꾸 그러시네."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분명 뭔가 있다.

겨우 3일이었다.

3일 동안 사람이 하루가 가기 무섭게 이렇게 어두워지다니.

회귀 전에도 전혀 본 적 없었던 모습이었다.

"비행기 탑승 번호나 잘 확인해요. 놓치지 말고."

"사람을 뭘로 보시고."

자연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무슨 일일까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렇게까지 물어보는데도 대답을 안 하는데 더 물어본다고 말해줄 것 같진 않았다.

더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고.

이 정도로 극구 아니라 하는데도 더 물어보는 건 실례일 것 같았다.

연화도 연화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예상도 해봤지만.

이연화는 어렸을 때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었던 걸 떠올렸다.

- 저도 외톨이에요.

한국에서 만났을 때 이연화가 웃으며 건넨 말이었다.

같은 외톨이끼리 친구 하자며 먼저 다가와 줬던 이연화.

지금도 웃으며 말을 걸어주던 이연화의 얼굴이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선명했다.

아마 연화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당시엔 쿄스케의 죽음 이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스스로를 좀 먹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백운 님."

"네?"

나란히 걷던 이연화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 만난 이후로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계속 침묵하고 있었던 이연화.

"영화에 보면 가끔 나오잖아요. 시한부 삶을 가지고 하루나 이틀 정도의 삶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요."

"그렇죠, 마지막에 눈물 안 쏟아내기가 힘든 장르죠."

"백운 님은 그런 상황이 오면 뭘 할 거 같아요?"

"!?"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서일까.

이연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뭘 그렇게 놀라요? 설마 제가 뭐 죽기라도 할까 봐요?"

"하하⋯. 그쵸, 그냥 한 번 놀란 척 해봤어요."

찐으로 놀랐지만.

너무 오바했다는 생각에 급히 정정 멘트를 날렸다.

아무리 사람이 3일 동안 어두웠기로서니 이연화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 살아봐요.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예요.

살아야 하는 의미를 못 찾고 있던 내게 이연화가 건넨 말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든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든.

이연화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그런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이 내게 무척이나 힘이 됐었다.

"그래서! 뭐 하실 거예요? 백운 님은."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회귀 전에는 그저 희망 없이 하루하루 살아나가기 바빴고.

회귀를 한 지금은 신이 와서 날 죽이려고 해도 어떻게든 뿌리치고 나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애초에 죽을 거란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았던 요즘이었다.

"엄청 맛있는 걸 먹지 않을까요? 그리고 재밌는 친구를 만나거나 영화를 볼 거 같아요. 아니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라던가."

"왜요?"

"뭐랄까 이미 죽을 걸 안다는 건 무척이나 슬프고 절망적인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받아들일 거 같거든요. 그리고 하루 밖에 안 남은 시간을 울면서 보내고 싶지도 않고요. 최소한 마지막엔 웃으면서 행복하게 죽고 싶다⋯. 요런 느낌?"

이연화가 오호⋯.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떠오르는 대로 막 뱉은 말인데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말을 한 듯했다.

그런 이연화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연화 님은 뭐할 건데요?"

내 질문에 이연화가 손을 들어 턱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떠올려 말한 나와는 달리 무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활짝 웃으며 날 바라보는 이연화.

"저도 백운 님이랑 똑같아요!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두운 방에 박혀서 질질 짜며 보내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크게 심호흡을 한 이연화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저도 밖에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최대한 웃으면서 보낼 거 같아요."

슥.

말을 마친 이연화가 주먹을 쥔 채 내게 내밀었다.

"동지네요, 동지. 마지막 날에 똑같은 일을 할 동지."

"뭐에요 그게."

뭐냐고 물으면서도 주먹을 들어 이연화의 제스쳐에 화답을 해줬다.

# 이집트 카이로행 F-384, 2시간 뒤 출발 예정입니다.

귓가로 내가 타야 하는 비행기의 방송이 들려왔다.

덥석.

!?

내 팔뚝을 잡은 이연화가 빠르게 날 끌어당겼다.

"얼른 와요, 맛있는 거 한 번 더 먹게."

이연화가 공항 안에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미소를 되찾은 이연화.

"하하⋯. 네, 천천히 가요 넘어지겠네."

"안돼요, 빨리 와요!"

이연화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바라봤다.

"시간이 별로 안 남았으니까요."

* * *

빠르게 맛집을 탐색해 한 끼 식사를 마쳤다.

그 날따라 얼마나 많이 시켰는지 값비싼 음식을 몽땅 주문해버린 이연화.

마지막으로 많이 먹고 가라며 이연화는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다.

"배 터질 거 같아요."

"그걸 다 먹었으니까 터지려고 하죠."

농담이 아니라 누가 치면 바로 뿜어져 나올 기세였다.

아무리 내가 대식가라도 이연화가 시킨 음식 양은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다 먹은 나도 미련하지만.

어쩌겠어. 많이 먹고 가라고 사주는걸.

남기고 갈 순 없었다.

가는 날까지 날 챙겨 준 이연화.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세만 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카이로행 비행기, 30분 뒤 출발 예정입니다.

항공사의 방송이 들려왔다.

주어진 건 약 5분의 시간.

방송에서 날 찾는 이름이 신나게 불리지 않으려면 5분 뒤에는 탑승 게이트로 가야 했다.

저벅.

어느새 도착한 출입국 심사 입구.

멈춰 선 이연화가 묘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이제 정말 안녕이네요."

"그러게요."

시원섭섭한 얼굴의 이연화를 보니 나도 덩달아 아쉬움이 느껴졌다.

2년 뒤에 한국에서 만나요.

이연화는 아테네의 대사관에서 2년을 더 근무한 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내가 다시 아테네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어찌 됐든 만나게 되는 것.

물론 이연화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기에 나보다 더 섭섭해하고 있었다.

"저 한국 놀러 가면 놀아 주시나요?"

"당연하죠, 먹고 싶은 거 리스트 작성해서 오세요. 다 사줄 테니까."

"오올⋯. 이런 건 녹음 해둬야 하는데."

이연화가 농담을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잠수 타거나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마세요."

"당연하죠, 그러면 반칙이지."

띠링.

# 이집트 카이로행 비행기, 25분 뒤에 출발 예정입니다.

휴대폰으로 공항사에서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인사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벌써 5분이 지났다니.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게 다시 한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슥.

"마지막으로 악수 한 번 해요, 우리."

어느 때보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민 이연화.

그런 이연화에 나도 함께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놀아 주셔서 고마웠어요, 백운 님. 정말 재밌었어요. 그럼⋯!"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이란 말을 마지막으로 이연화가 빠르게 멀어졌다.

내가 타야 하는 비행기에 늦기라도 할까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뭐지.

멀어지는 이연화를 바라보다 고개를 내렸다.

조금 전 이연화의 손을 맞잡았던 손.

손을 통해 틀림없이 전해졌었다.

어째서⋯ 그렇게 떠는 거야?

이연화의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말이다.

* * *

"하아⋯!"

백운과 헤어진 뒤 집 옥상으로 올라온 이연화.

이연화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치익!

들고 올라온 맥주를 따 한 모금 들이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맥주의 탄산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먹는 맥주라⋯. 맛없네."

어째서일까.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먹는 시원한 맥주.

분명 맛없을 수 없는 것인데 그냥 맹물을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던데⋯. 때깔 곱기는 글렀네."

백운과 만나 많은 걸 먹었지만.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다 토해내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백운과 함께 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 마음의 정리도 했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백운과 헤어지기 무섭게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공포가 다시 이연화의 몸을 집어삼켰다.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무릎에 파묻은 이연화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음.

그저 다른 이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 당신은 죽습니다.

남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3일 전 이연화를 찾아온 사신.

데몬으로 생각해 빠르게 공격했음에도 사신은 별 반응 없이 죽음의 예고만을 남긴 채 사라졌었다.

- ⋯.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3일 뒤에 죽는다니.

- 어떡하지⋯?

처음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신에 의해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며 접고 말았다.

군, 경찰, 이연화가 근무하고 있는 대사관까지 모두가 나섰음에도 결국엔 사신을 잡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약한 모습 보여주고 싶지도 않아.'

대사관으로 달려가 김대혁과 팀원들에게 사신을 만났다는 걸 울며불며 토로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이들의 동정과 위로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 잘 들어가요! 연화 님!

- 잘 가라.

오늘까지도 대사관에 출근해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냈었다.

똑같이 일을 했고, 똑같이 인사를 하며 퇴근했다.

- 다 사줄 테니까.

헤어지기 직전 한국에 놀러 오면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한 백운이 떠올랐다.

신기한 일이었다.

죽기 직전 떠오른 게 만난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백운이라니.

'이상하게 친근하단 말이지.'

묘한 끌림이었다.

한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끌림.

오랫동안 알고 지낸 듯한 신기한 느낌이었다.

'한국⋯. 가서 또 놀고 싶었는데.'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연화의 눈에 들어온 비행기 한 대.

비행기가 몇 대 안 뜨는 아테네의 특성상 시간대를 봤을 때 아마도 백운이 탄 카이로행 비행기일 터였다.

'큰일 날 뻔했어.'

백운과 악수를 한 마지막 순간.

이제 혼자가 된다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었다.

들킬세라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왔던 이연화.

'이제⋯ 됐어.'

스르르⋯!

마음을 들은 것일까.

이연화의 눈앞으로 3일 전에 봤던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됐습니다."

"⋯."

이연화가 모든 걸 내려놓은 눈으로 사신을 바라봤다.

다시 만나면 뭐라도 묻고 싶었었다.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고통스럽진 않을 겁니다."

'됐어.'

그런데 막상 만나니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공격을 해도 통하질 않으니 어차피 피하지 못할 죽음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연화가 눈을 감았다.

츠츠츠⋯!

보이진 않았지만 남자의 낫이 들어 올려지는 게 느껴졌다.

'정말⋯ 끝이구나.'

질끈.

혹시나 눈이 떠지면 무서울까 봐.

주변의 풍경을 보면 다시 살고 싶어질까 봐.

눈을 더 꽉 감았다.

츠악!

낫이 휘둘러져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쐐에에엑!

그 순간.

낫이 아닌 다른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쾅!!

이연화의 피부에 닿은 건 낫의 차가운 쇠가 아니었다.

똑같이 차갑긴 하지만 무언가 연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스륵.

이연화가 본능에 이끌려 눈을 떴다.

'!!!'

그런 이연화의 앞에서 칠흑의 날개를 일렁거리며 서 있는 백운.

백운이 옆으로 날아간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새끼가 어디다 낫을 들이대."

116화. 목숨을 거두는 남자

진정하자.

심호흡해.

- 흥분하지 마라. 싸울 때 가장 최악인 행동이니까.

비광의 말을 되뇌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틈 따위는 없었다.

이미 누군가의 낫이 이연화에게 휘둘러지고 있었기에.

칼데아를 최대 출력까지 올려 걷어 차버렸다.

쿠궁⋯!

덕분에 저 멀리 처박혀버린 낫 자식.

꽈악.

나도 모르게 떨리는 오른손을 붙잡았다.

조금 전 걷어찬 놈이 무섭거나 해서 떨리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연화가 죽었을지도 모른단 사실이 내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배⋯ 백운 님."

쉽게 진정되지 않는 상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의 얼굴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눈물 자국.

나와 헤어진 뒤 이연화는 이 옥상에 올라 홀로 죽음을 맞이하려 했었다.

"어떻게 여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었다.

이연화와 헤어져 탑승 게이트 앞까지 갔지만.

이상하게 잊을 수가 않았다.

헤어지기 전 떨려 오던 이연화의 손을 말이다.

- 손님? 탑승하셔야 합니다. 손님?

그렇게 마지막 탑승객을 기다리던 직원들에게 사과를 한 뒤 공항을 뛰쳐나왔다.

왠지 모르게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본능적인 감각에 의한 행동이었다.

"백운 님, 이집트는 어쩌고⋯?"

"지금 이집트가 중요해요?"

엉뚱한 말을 하는 이연화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조금 전 걷어찬 놈은 분명 이전에 시장에서 들었던 사신이었다.

3일 전에 나타나 죽음을 예고하고, 3일 뒤에 찾아와 목숨을 거둬 간다는 사신.

그렇다는 건 이연화 역시 3일 전부터 죽을 거란 사실을 알았다는 얘기였다.

"왜 말 안 했어요?"

늦지 않게 도착해서일까.

걱정 뒤에 숨어 있던 화가 올라왔다.

3일 동안 사신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이연화.

심지어 무섭다거나 죽고 싶지 않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었다.

"⋯."

"후우."

고개를 숙이는 이연화에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굳이 묻긴 했지만.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이에게 밝은 에너지를 주려고만 할 뿐 남에게 기대거나 앓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던 이연화.

- 갔다 올 테니까 울지 말고 딱 기다리고 있어.

죽음이 확정적인 전투로 나가면서도 이연화는 마지막까지 미소를 지었었다.

가지 말라고, 함께 숨어 있으면 된다는 내 만류에도 끝끝내 문을 나섰던 이연화.

- 제2, 3의 백운이 있을 테니까. 내가 싸워서 지켜내야지.

붙잡는 내 손을 잡고 이연화가 했던 말이었다.

- 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걱정 말고 여기에 있어.

그렇게 전투로 향했던 뒷모습이 내가 본 이연화의 마지막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뉴스에서 본 건 참가했던 90% 이상의 헌터가 사망했다는 뉴스뿐.

어디에도 이연화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

이미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 생각했을 터.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게 한마디의 말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간을 보냈던 건 말이다.

이 멍청이가.

홀로 죽음을 기다리며 겉으론 웃었을 이연화를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졌다.

슥.

고개를 돌려 사신이란 놈이 나가떨어진 벽을 바라봤다.

어쨌든.

으득.

늦지 않았다.

* * *

"크윽⋯!"

무너진 벽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자기 몸보다 더 큰 낫을 들고 있는 남자.

남자는 생각보다 앳된 모습이었다.

"너 뭐 하는 새끼냐."

어려 보이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눈앞의 놈이 이연화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켜⋯라."

"아직 정신 못 차렸네."

비키라는 말에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후두둑.

남자의 옆구리 쪽에서 무언가가 박살 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걷어찼을 때 뭔가에 막힌 거 같았는데.

저건가 보네.

우둑.

주먹을 풀며 일어나는 남자를 응시했다.

처음엔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몸을 감싸고 있는 게 박살이 난 이상 두 번째는 없었다.

"어떻게 날⋯ 볼 수 있는 거지⋯?"

⋯?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남자.

얼레.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느새 발동한 페샨의 눈.

색이 변한 눈동자에서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원래 볼 수 없는 놈인가 보네.

다시 한번 킹냥이 리카르도에게 감사를 표하며.

남자를 두들기기 위해 다가갔다.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죽음이 확정된 자만이⋯ 날 볼 수 있을 텐데."

남자는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흔들리는 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그나저나 죽음이 확정된 자라니.

지가 죽이려고 했으면서도 무슨 소리일까.

"죽음이 확정됐다는 게 무슨 소리냐."

"후우⋯!"

조금 전 공격 때문인지 남자는 숨을 고르며 고통을 다스리려는 듯했다.

"당신은 아니지만⋯ 뒤에 있는 여자는 죽음이 확정되었습니다."

"알아듣게 설명해. 당장 죽이기 전에."

남자가 고개를 돌려 이연화를 바라봤다.

"당신의 목에⋯ 죽음의 꽃이 피었을 터."

"⋯!"

남자의 말에 이연화가 놀란 표정으로 목덜미를 만졌다.

죽음의 꽃⋯?

"그 꽃⋯ 피안화가 이미 개화했기에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줘 입을 열었다.

"아테네가 사라질 겁니다."

* * *

아테네가 사라진다니.

남자는 계속해서 알아듣지 못할 말만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처음엔 이연화를 죽이려는 남자에 눈이 돌아 머리가 멈췄었지만.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무언가 어긋남이 느껴졌다.

마치 자기가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게 아닌, 이연화가 이미 죽음이 확정됐기에 죽이려고 한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들어봐야겠어.

조금만 더 이상한 소리를 하면 즉결 사형을 주려 했지만.

만약 이놈을 처리한 뒤에도 이연화에게 죽음의 위험이 드리워져 있는 거라면.

이놈에게 들어야만 했다.

"아테네가 사라진다니 무슨 말씀이죠⋯? 그리고 당신은 누구길래⋯ 그런걸."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른 건지 이연화가 옆으로 걸어왔다.

이연화의 질문을 받은 남자가 천천히 들고 있던 낫을 집어넣었다.

이후엔 어쩔지 몰라도 당장은 공격할 의사가 없는 듯 보였다.

"제 이름은⋯ 로인, 5일 전 확정된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어가는 로인.

확신할 순 없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제 목에 있는 문양은 당신이 한 게 아니었나요⋯?"

로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목에 핀 꽃은 피안화⋯. 꽃말의 이름은 죽음. 문양이 새겨진 순간이 있을 겁니다."

"⋯!"

이연화가 놀란 눈으로 하늘에서 열렸던 문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 내민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켰고 그 뒤로 문양이 생겼단 설명.

"그다음 날⋯. 당신이 절 찾아왔고 죽음을 예고했어요."

그래서 이연화는 하늘의 문과 로인이 한통속일 거라 생각한 듯했다.

"당신에게 문양을 새긴 건 메토스.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데몬입니다."

메토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군대를 지닌 군주죠. 그 군주는 자신이 지목한 사람에게 피안화를 새기고 5일 뒤 그 목숨을 거두러 옵니다."

"⋯!"

로인이 하는 말이 전부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짜라면 이연화에게 죽음을 확정시킨 건 로인이 아니었다.

"메토스는 혼자 목숨을 거두러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군대를 끌고 오죠. 그리고 그 군대는⋯ 일대의 모든 생명체까지 죽일 테고요. 그래서입니다⋯.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요컨대 그쪽은 5일 뒤의 죽음을 볼 수 있고, 연화 님은 메토스란 놈에게 죽게 될 테니⋯ 그 메토스란 놈이 더 큰 피해를 끼치기 전에 연화 님을 죽이려 하는 거다?"

로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메토스란 놈을 박살내면?"

"⋯."

날 조용히 응시하던 로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까지 제가 미리 봤던 죽음은 전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됐습니다."

"뭐⋯?"

"당신은 메토스를 죽일 수 없습니다."

스으으.

"어차피 제가 뭐라 설명하든 당신은 절 막아서겠죠."

로인의 몸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날 넘어 이연화를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한 듯했다.

대신, 고개를 돌려 이연화를 바라봤다.

"당신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옳은 판단을 하십시오."

사락.

"한 번 확정된 죽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죽을 운명이란 건⋯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사라지며 남긴 로인의 마지막 말이 공기를 타고 옥상에 울려 퍼졌다.

* * *

로인이 사라진 직후.

이연화와 나란히 앉아 고요한 아테네 시내를 내려다봤다.

"왜 공격은 안 한 거예요? 연화 님."

조금 전 옥상에서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연화.

내가 알고 있던 이연화는 끝까지 살기 위해 공격을 할 사람이었기에 의아했었다.

"제가 아무것도 안 했겠어요⋯. 처음에 로인이 나타났을 때 공격했어요. 데몬이라 생각해서."

으쓱 어깨를 올려 보이는 이연화.

"안 맞더라고요. 마치 공기를 베는 느낌이랄까. 애꿎은 화장실 타일만 다 깨졌어요. 피할 생각도 않고 로인이 그러더라고요.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는 걸 건들 수 없다고, 당신은 내가 일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에 보이기만 할 뿐 건들 순 없다고."

진짜 사신인가 그 새끼.

슥.

고개를 든 이연화가 날 응시했다.

넌 어떻게 로인을 걷어찼는지를 묻는 눈이었다.

"제가 눈이 좀 특별하거든요. 남들은 못 보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래서였을 것이다.

페샨의 눈을 통해 난 로인을 인지했기에.

동시에 물리적인 힘을 가할 수도 있었던 것.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백운 님은."

무릎에 머리를 댄 채 날 바라보는 이연화.

이연화의 얼굴엔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 아테네가 사라질 겁니다.

아마 로인이 했던 말 때문이리라.

자신이 죽지 않으면 메토스가 찾아올 것이고.

그럼 아테네의 많은 이들이 죽는다는 말.

내일까지 옆에 있어야겠어.

쉽게 목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자신 때문에 다른 이가 죽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회귀 전에도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죽음이 확정된 전장으로 나섰던 사람이니까.

"연화 님, 엉뚱한 생각 하지 말아요."

- 내가 지켜줄게.

이번엔.

"제가 확실히 지켜 줄 테니까 걱정 마요."

"⋯!"

역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연화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연화 님이 죽는 일은 없어요. 그게 운명이었다고 해도 말이죠."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이연화를 응시했다.

"막연히 하는 말이 아니에요."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 로인.

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면 이미 내가 바뀌었고, 쿄스케의 정해졌던 운명 역시 바꾸었으니까.

조금 경우는 다르긴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연화 님이 죽는 운명."

이연화를 향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운명, 박살 낼 거예요."

117화. 하루 전

빛 한 줄기 없는 아테네의 골목.

기다란 검은색 망토를 걸친 남자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부상을 입은 건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남자의 몸이 골목 한쪽으로 쓰려졌다.

"하아⋯. 하아."

아테네의 사신.

많은 이들이 로인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풀썩.

골목에 기대앉은 로인이 가쁜 숨을 쉬며 옆구리를 만졌다.

두어 시간 전 갑자기 나타난 백운에게 걷어차인 부위였다.

'말도 안 되는 위력.'

눈 깜짝할 사이 나타난 백운.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미리 갑주를 두르고 있지 않았다면 맞는 순간 죽었을 것이다.

- 콰앙!

굉음이 들린 순간.

옆구리를 시작으로 말도 안 되는 고통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총이나 칼을 날아와도 거뜬히 막을 수 있는 갑주였다.

물론 지금까지 맞아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어떻게 날 본 거지.'

로인이 지금까지 총이나 칼에 맞은 적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도 로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걸 넘어 바로 앞에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도 상대의 물리력은 로인에게 닿지 않았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지하지 못한 이들은 날 건드릴 수 없다.'

로인이 개방한 사신화의 능력이었다.

종종 특수한 눈을 개안한 능력자들에겐 보인 적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공격당한 적은 없었다.

이번이 능력을 개방한 후 로인이 처음으로 맞은 유효타인 셈.

찌릿.

끊임없이 느껴지는 고통에 로인이 고개를 숙였다.

개방 전에 맞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기는 처음이었다.

'더럽게 아프네.'

달칵.

로인이 들고 있는 낫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신화 능력을 개방하며 생긴 건 세 가지였다.

존재를 지워줌과 동시에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갑주와 공격을 위한 낫, 그리고 상대의 5일 뒤 죽음을 볼 수 있는 눈이었다.

'하나 깎인 건가.'

로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낫을 쳐다봤다.

누군가 들으면 사기적인 능력이라고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능력이었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5일 뒤에 죽을 이의 목숨을 거두는 것.

그렇게 해서 낫에 있는 생명 구슬이 다 닳기 전에 채워 넣는 게 능력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아직 여유는 있지만.'

지금까지 거둬들인 목숨이 꽤 됐기에.

적어도 2주 정도는 이 상태로도 버틸 수 있는 양이 낫에 깃들어 있었다.

으득.

'그 여자는 죽었어야 하는데.'

인상을 찌푸린 로인이 이연화를 떠올렸다.

메토스의 타겟이 되어 몸에 피안화의 문양이 새겨진 여자.

어떻게든 그 여자의 목숨을 거뒀어야 했다.

'참사가 벌어지겠지.'

5일 뒤의 죽음을 보고 하루 전에 목숨을 거두러 간다.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규칙이었지만.

로인은 유독 이연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메토스의 피안화.'

로인이 피안화를 본 게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인 로도스.

로도스에선 1년 전 데몬에 의한 엄청난 대학살극이 벌어졌었다.

'⋯.'

학살극이 벌어지기 전.

로인이 지냈던 곳은 아테네가 아닌 로도스였다.

그곳에서 죽음에 이를 이들의 목숨을 거둬들이고 있었던 것.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 제발요, 오늘 제가 약을 챙기지 않으면 동생은 죽을 거예요.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목숨을 거둬야 하는 상대가 무척이나 어린 소녀였단 점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루를 남겨둔 시점.

평소처럼 목숨을 거둬야 했지만 간절히 비는 소녀의 모습에 로인은 차마 낫을 휘두를 수 없었다.

- 너는 어차피 죽는다.

- 괜찮아요, 동생 약만 챙겨 줄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끝내 낫을 휘두르지 못한 로인은 소녀를 보내주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운명에 의해 죽을 아이였기에 고작 하루 더 살게 해주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집을 향해 달려가는 소녀의 목덜미엔 불길한 검보라색의 피안화가 피어있었다.

'거두었어야 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건 다음 날이 되어서였다.

평소와 같이 5일 뒤에 죽을 이를 찾아 도심지를 거닐고 있을 때.

- ⋯!!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죽음이 보이지 않았던 이들인데.

모두가 짜기라도 한 듯이 갑작스레 죽음이 모든 사람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심지어 떠오른 죽음이 가리키고 있는 건 5일 뒤가 아닌 지금이었다.

- 불가능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죽을 운명이었다면 5일 전에 이미 죽음이 보였어야 하는데.

마치 누군가의 죽음이 전염병처럼 퍼져 원래 죽지 않아도 될 이들까지 죽게 만든 것 같았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 얼른 와, 누나는 시간이 없으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로인의 마음이 약해져 보내준 소녀였다.

소녀의 목덜미에선 완전히 개화한 피안화가 불길한 빛을 뿜으며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녀의 목덜미에 있던 피안화에서 빛이 뻗어 나갔고, 그 빛이 닿은 곳에선 처음 보는 균열이 생겨났다.

- 으⋯ 으아아! 데몬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겨난 균열에선 셀 수 없이 많은 데몬들이 튀어나왔고.

잠시 후엔 말도 안 되게 강한, 데몬들을 이끄는 메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야말로 참극이었다.

전투가 가능한 모든 이가 공격했지만, 메토스는 약간의 상처만을 입었을 뿐 결국엔 모든 이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으득.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로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로도스의 참극 이후 로인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잠에 든 적이 없었다.

매일 밤 로도스에서 죽은 이들이 원망 섞인 눈과 목소리로 로인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목숨을 거두는 일을 하면서 죽은 이들 때문에 잠을 못 잔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능력으로 사신화를 개방했다고 한들 적은 나이의 로인에겐 아직까지도 사람의 죽음이 익숙지 않았다.

능력을 지키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하며 목숨이 하루 남은 이들의 목숨을 거두는 게 최대였다.

'이번에는 꼭 죽였어야 했는데.'

로인이 얼굴을 감쌌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다른 이는 몰라도 피안화를 가진 이는 꼭 죽여야 했는데, 유일하게 실패한 두 번의 경우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피안화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뭐였지.'

로인이 백운과 대치하고 있을 때 봤던 걸 떠올렸다.

옆구리를 걷어차여 데미지가 컸지만, 로인은 어떻게 해서든 이연화의 목숨을 거둘 생각이었다.

고통은 둘째 치고 로도스와 같은 참극이 아테네에서까지 되풀이되는 건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빠르게 물러난 건.

- 일렁.

백운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변화 때문이었다.

처음엔 고통 때문에 시야가 흔들린 건가 싶었지만.

다시 보니 제대로 보였었다.

이연화에게서 보이던 선명한 죽음이 흐릿해지며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을 말이다.

'⋯ 불가능해.'

죽음이 보이는 순간 그건 그 사람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뜻했다.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도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확정된 죽음의 운명.

이연화의 위에서 흐릿해지는 죽음을 보며 로인은 혼란스러웠고, 그렇기에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꽈악.

로인이 고개를 흔들어 찾아온 혼란을 털어냈다.

'정해진 죽음은, 운명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 * *

"연화 님, 잘 드시네요. 아까 공항에서도 많이 먹었을 텐데."

옥상에서 내려와 들어온 이연화의 집.

2인용 아담한 식탁에 앉은 이연화가 먹던 면을 끓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부른데 맛있게 끓여주셨으니까 먹는 거예요."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옥상에서 내려온 이연화의 배에선 폭풍 소리가 났었다.

마치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은 채 굶은 사람처럼 말이다.

내 라면이 예술이긴 하지.

회귀 전 삼시 세끼 끓여 먹던 라면이었다.

그때 단련했던 라면 실력을 꼬로록거리는 이연화를 위해 아낌없이 발휘했다.

후룹.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운 이연화가 그릇을 내려놨다.

"흠. 흠."

순식간에 라면 한 그릇을 삭제해버린 게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하는 이연화.

띠링.

옆에 있던 이연화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 대혁 님에게 알리죠.

옥상으로 내려오며 이연화에게 한 말이었다.

로인의 말이 맞다면 이연화에게 피안화를 새긴 메토스가 도착하기까지 채 하루도 남지 않은 상황.

처음엔 어디 외딴곳으로 가 메토스를 맞이할까 했었지만.

메토스가 꼭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나타나란 법은 없었다.

문이 다른 데서 열리면 대참사다.

이연화가 있는 곳이 아닌 도시 한가운데서 문이 열리면 아테네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무더기로 밀려오는 데몬을 맞이해야 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대사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김대혁이었다.

"시간이 걸린다고 하시네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건 대사관 단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메시지를 읽어 주는 이연화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람들이 현재 상황을 인지하고 대비를 시작했으니 된 것이었다.

드륵.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연화.

호다닥.

"⋯?"

식탁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는 이연화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자신보다 타인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이연화.

피안화가 새겨진 자기만 사라지면 메토스가 오지 않을 거란 말을 들은 상태였기에 혼자 둘 순 없었다.

그러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졸졸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졸졸 따라가는 나에 이연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 화장실 가려고요."

"으음."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연화를 노려봤다.

감히 거짓말이라면 당장 말하라는 의미였다.

"풉⋯. 저도 창피해요, 오래 수사했는데도 꼬리조차 잡지 못했던 사신 사건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신에게 죽음을 예고 받으면 피하지 못할 거라고 자포자기해 버린 게요."

아테네 대사관에서 일하며 수많은 사신 사건을 겪어 온 이연화였다.

당장 공격을 해도 통과하기만 하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메토스란 놈. 제게 죽음을 확정시킨 게 문에서 나왔던 놈이라면 얘기가 달라요. 제가 그놈 손가락 두 개 날렸거든요."

말하면서도 이연화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에게 죽음을 새겨 넣은 게 사신이라 생각했을 땐 3일 동안 죽을 생각만을 하며 자포자기하며 지냈었는데.

메토스란 걸 안 이후부터 다시 싸우고자 하는 스스로의 태세변환이 사뭇 창피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백운 님은 정말 괜찮으신가요?"

"네?"

이연화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로인의 말에 의하면 메토스는 말도 안 되게 강하잖아요. 그리고, 백운 님이랑 제가 만난 건 일주일도 안 됐고요."

미소를 지은 이연화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백운 님은 아무런 책임도 없어요."

책임이 왜 없어요.

나 때문에 기둥으로 갔다가 만난 건데!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이연화를 지키려는 건 아니었기에 잠시 접어두었다.

대신.

"연화 님은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나한테 피안화가 그려졌다면요. 그냥 죽도록 내버려 뒀을 거예요?"

"그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이연화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안 그랬을걸요."

- 이거 좀 먹어봐요. 그쪽이 죽으면 또 홀로 남겨질 외톨이 B를 위해서라도 먹으라고요, 외톨이 A님.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나를.

다시 활력을 찾고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준 이연화였다.

"⋯."

뭐라 대답하려다 입을 다문 이연화를 향해 미소를 지어줬다.

"그것뿐이에요."

118화. 맞이할 준비

조기 출근이라니.

왠지 모르게 드는 미안함을 느끼며 회의실에 모인 헌터들을 바라봤다.

이른 아침.

아직 출근 시간 전이었지만 회의실은 김대혁의 연락을 받고 모인 헌터들로 가득했다.

- 이연화, 너 진짜!

피안화에 대해 말하자 그렇게 온화했던 김대혁의 얼굴이 시뻘게졌었다.

아끼는 부하인 이연화를 아무것도 모른 채 잃을 뻔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백 번 천 번 이해합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화내는 김대혁을 굳이 말리진 않았다.

-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는 이연화에 화 가득한 한숨을 내쉰 김대혁.

어쨌든 지금 급한 건 이게 아니기에 다음에 보자는 표정이었다.

"도심지 각 위치에 가용한 대사관 헌터들을 배치했습니다."

"군과 경찰에도 연락을 해둔 상태고요. 바로 지원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김대혁의 부름으로 출근한 헌터들은 모이기 무섭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빠르게 아테네에 위치하고 있는 군과 경찰에 소식을 알렸고, 도시 근방에 위치한 타 도시의 병력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 연화의 피안화에 대한 건 나만 알고 있는 걸로 하지.

사신 로인을 만난 일과 메토스의 피안화에 대해 들은 김대혁의 결론이었다.

이연화만 죽으면 이 사태가 끝난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여론이 형성될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공식적인 소식엔 피안화에 대한 내용을 누락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역시 이쁨 받는구만.

어느 누가 이연화 같은 부하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구보다 타인을 생각하며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막상 들으면 쉬운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아직 시민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각각의 보고를 들으며 김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토스를 맞이하기 위해 급조된 회의긴 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부로부터의 대답은?"

"아직입니다. 문의한 대피에 대한 답변도 아직 오지 않았어요."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시민 대피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정부에서 결정이 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망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데몬 때문에 대피령을 내려야 하는지를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지만 정부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까지 진행이 된 것만 해도 나와 이연화의 말을 믿어준 김대혁 덕분이었다.

김대혁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전면에 나서주지 않았을 터.

그만큼 아직 나타나지 않은 데몬 군대가 나타난다는 말은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도 없는 애매한 문제였다.

"흠⋯. 빨리 와야 할 텐데."

준비는 다 마쳤지만 국가의 결재가 떨어지지 않아 시민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

당장 오늘이었기에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시간 일분일초가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끼익.

회의실로 들어온 헌터가 입을 열었다.

"대혁 팀장님, 차량 도착했습니다."

나와 이연화, 그리고 김대혁이 선별한 헌터들이 타고 갈 차량이었다.

피안화로 타겟팅 된 이연화를 데리고 도시 외곽의 공부지로 가겠다고 말했었다.

- 백운 님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가 안 이상 둘만 보낼 순 없습니다.

현재 상황을 책임지고 있는 김대혁의 말이었기에 거부할 순 없었다.

- 연화와 함께 기둥에 나갔던 인원들로, 원거리 공격에 능한 헌터들로 선별했습니다.

어차피 가까이 오는 적들은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 터.

리볼버와 수리검을 제외하곤 딱히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는 날 고려했을 때 좋은 조합 구성이었다.

"백운 님."

차량으로 가기 위해 일어서자 날 부르는 김대혁.

김대혁의 눈엔 무언가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테네에서 벌어지는 일에 도착하지 얼마 되지 않은 날 끌어들었다는 미안함과.

아끼는 부하를 외곽으로 보내면서도 현장 지휘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등이 말이다.

"걱정 마세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김대혁이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았기에.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지금까지 진 적 없으니까요."

잠시의 1패는 있었지만, 어쨌든.

"도시의 대피만 끝나면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김대혁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이연화와 몸을 돌렸다.

이 정도면 메토스가 오기 전 미리 해놔야 하는 것들은 해둔 셈이었다.

이젠 외곽으로 가 메토스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가시죠, 연화 님."

* * *

그 시각.

그리스의 정부에서도 비상 대책 회의가 열렸다.

다름 아닌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였기에 그 심각성을 인지한 것이었다.

"한국 대사관에선 계속 답변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대체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냐는 겁니다. 아직 데몬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대체 왜요?"

"크흠⋯ 그건."

회의에서의 의견은 갈라지고 있었다.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모르지만 보고를 받아들여 시민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의견과, 그랬다가 데몬이 나타나지 않으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며 극구 반대하는 의견으로 말이다.

"다 대피시켰다가 안 나타나면? 그땐 어떻게 할 겁니까? 시민들은 패닉에 빠질 테고 대피 중에 부상자가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럼 데몬이 나타나 사상자가 생긴 다음에 대피를 시작하자는 말입니까? 정부가 보고를 미리 받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게 알려지면 더 걷잡을 수 없이 비난받을 겁니다."

보고를 해온 것이 한국 대사관이란 것도 문제였다.

자국군이나 기관에서 해온 보고가 아닌 타국의 대사관이 주장하고 있는 데몬의 출몰 가능성.

아테네에서 그 전력을 인정받아 활약하고 있는 한국 대사관이었지만, 타국의 대사관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한국 대사의 입장도 같습니까?"

싸우고 있는 의원들은 바라보던 대통령 카풀라가 입을 열었다.

"예, 한국 대사는 김대혁 팀장을 100%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김대혁 팀장이 한 일 중에 틀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요."

"그렇군요."

카풀라가 눈을 감고 신음을 냈다.

김대혁 팀장과 그의 휘하 헌터들의 활약상은 익히 들은 바가 있기에.

마음 같아선 당장 그 보고를 받아들여 아테네의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수도의 대피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대피령을 내렸는데 만약 데몬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론은 물론이고 야당의 의원들은 그걸 노리고 집요하게 공격하겠지.'

아테네 시민들을 위한 회의였지만, 그 뒤엔 의원들의 치밀한 정치 싸움이 함께 하고 있었다.

띠리링.

다시 한번 울리는 벨에 카풀라가 눈을 떴다.

보나 마나 한국 대사관의 전화일 터였다.

"한국 대사관에 전하세요."

고민을 마친 카풀라가 입을 열었다.

"일단 대기하라고요."

* * *

차량으로 두어 시간을 달려 도착한 부지.

재개발 예정이었다 버려진 장소로 사용되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는 땅이었다.

딱 좋네.

사방이 넓게 트여 있으면서도 폐건물들로 인해 모습을 감추고 있기에도 좋은 장소였다.

고개를 돌려 이연화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이젠 입고 있는 옷을 넘어 목 위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피안화 문양.

로인의 말대로 메토스가 나타날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는 듯했다.

철컥.

철컥.

함께 온 원거리 딜러 헌터들이 개인 화기 및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기계들을 설치해나갔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엔 적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었다.

사냥을 하기 전 버프를 두르는 것처럼 가능한 준비를 다 해두는 것.

- 대피가 끝나고 데몬이 확인되면 군대도 움직일 겁니다.

도심지에서의 여기까지는 차량으로도 꽤 걸리는 거리였다.

대피가 제때 다 끝나더라도 지원이 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터.

내가 빠르게 끝낼 수 있으면 최상이겠지만.

아직 메토스가 얼마나 강한지, 녀석의 군대는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는 상태.

혼자서 마음껏 썰어댈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질지는 미지수였다.

양이 너무 많고 다가오기 전에 정리가 안 된다면 앞으로 나서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어.

메토스를 박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싸움의 목적은 이연화를 안전히 지켜내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위험이 된다 생각하면 무리를 하며 본진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서진 않을 생각이었다.

"12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대피 소식이 없네요."

"그러게요, 정부에서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나 봐요."

준비를 마친 헌터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도시 시민들이 대피를 시작했어야 했다.

대피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김대혁과 군의 발이 묶일 테고 그만큼 지원이 오는 시간도 늦춰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탄이라도 한 트럭 더 가져왔어야 했나 싶네요."

이미 충분히 많아 보이는 양의 탄을 옆에 쌓아 놓은 대사관의 헌터, 찰리.

능력을 이용해 거대한 대공포 몇 개를 순식간에 세팅한 찰리는 마지막 영점을 조준하고 있었다.

"기력 분배를 잘 해가면서도 싸워야겠어요."

다들 각자의 능력에 들어가는 리소스가 부족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장기전이 될 거 같으니⋯ 현명하네.

아니길 바랐지만 아직까지 대피가 이루어지지 않은 걸 보아 우리끼리 버텨야 하는 시간이 짧진 않을 듯했다.

해라도 지면 좋을 텐데.

고개를 들어 쨍쨍한 하늘을 바라봤다.

아무리 많은 적이 있고 여러 장애물이 있더라도.

이카로스의 칼데아만 있다면 순식간에 메토스에게 접근하는 게 가능했다.

메토스가 균열에서 나와 있다면 말이다.

이번에 무조건 죽여야 해.

무리하진 않더라도 메토스를 못 잡으면 이연화는 계속해서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다.

전투에서 함께 온 이들을 지키면서도 메토스는 꼭 잡아야 하는 쉽지 않은 상황.

하늘의 균열에서부터 온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칼데아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올 터였다.

수리검으로도 접근할 수 있겠지만.

하늘에 장애물이 많을 수도 있으니.

날개와 달리 언제든 쿨타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비전 수리검이 있었지만, 메토스로 향하는 길에 다른 데몬이나 장애물이 많으면 접근이 용이치 않을 확률이 높았다.

우우웅.

⋯!

여러 상황에 대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이연화의 피안화가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의 하늘이 일렁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투 준비."

끼릭.

철컥.

이연화와 헌터들이 비장한 얼굴로 공격을 준비했다.

저거구만.

이전에 한 번 균열을 통해 데몬과 만났던 이들이었다.

드드드⋯!

신기한 광경이었다.

하늘을 채우고 있던 구름이 사라지고.

구름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문⋯?

균열 속에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특이한 재질의 문.

수많은 해골이 문을 감싸고 있었다.

지옥행 문인가.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면 아마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쿵!!!

점점 선명해지는가 싶더니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려 젖혀졌다.

꿀꺽.

긴장한 헌터들의 침 넘김 소리와 함께.

삐이이이이이이---!!

미리 설치해뒀던 탐지기에서 알림음이 터져 나왔다.

119화. 거대한 뼈다귀 등장

웨에에에에엥---!

아테네 도시로 비상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이 일렁이나 싶더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엄청난 수의 데몬.

균열 자체가 열린 위치는 도시와 꽤 거리가 있었지만, 하늘에 열린 문에서 내려온다는 특성상 언제든 도시로도 도달할 가능성이 있었다.

"저⋯ 저게 뭐야."

"⋯."

경보음에 밖으로 나온 시민들이 하늘로 눈을 돌렸다.

하늘이 갈라지며 문이 생겨나다니.

데몬은 각 종류에 따라 여러 경로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알려졌었지만.

하늘에 문을 뚫고 나온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등장 방법이었다.

"뛰실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차례대로 와주세요!"

균열이 생겨남과 동시에 대피령을 허가한 그리스 정부.

정부는 곧장 도시로 시민들을 이송할 수송 차량을 보내왔다.

으득.

김대혁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는 시민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 데몬이 도시를 공격하거나 한 건 아니었기에 패닉이 오진 않았지만.

김대혁이 말했을 때 대피를 시작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통제가 가능했을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정부도 완전히 손 놓고만 있진 않았는지 수송에 필요한 차량들을 미리 준비시켜놨단 것이었다.

"팀장님, 저 방향은⋯!"

백운의 말대로였다.

균열과 함께 문이 생겨난 곳은 백운과 이연화가 가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지금, 그곳으로 엄청난 수의 데몬이 내려가고 있었다.

'지금 가도 되는 건가.'

김대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피 중인 시민들을 바라봤다.

군과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기에, 갑작스레 데몬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면 자신과 대사관의 헌터들까지 굳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모두 이동할 준비해! 연화가 있는 곳으로 간다!"

"예!"

김대혁의 명령에 따라 대사관의 헌터들이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시민들의 대피도 중요하지만 요원들의 머릿속엔 동료인 이연화의 걱정이 가득했다.

그때.

드드드⋯!

"!!"

불길한 소리에 김대혁이 하늘로 눈을 돌렸다.

'이런 젠장⋯!'

도시 위 하늘이 일렁이며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백운이 있는 부지 쪽과 동일한 현상이었다.

'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나.'

김대혁을 포함해 이동 준비를 하던 헌터들의 얼굴에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미 이연화가 있는 쪽도 다수의 데몬이 나타난 상황.

한시라도 빨리 저곳으로 달려가야 하는 타이밍에 데몬이 나타나며 발이 묶이고 만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군대와 경찰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더라도 문제였다.

지금 도시를 놔두고 이연화가 있는 부지로 향하면 한국 대사관 전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연화에게 새겨진 피안화에 대해서는 보고를 누락한 상황.

추후 도시를 버린 채 외딴 부지로 향한 이유와 책임을 물어올 게 분명했다.

드드득!

균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데몬들.

기본적으로 큰 크기의 데몬들이 도시로 내려오고 있었다.

"으아! 데몬이다!"

"도망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도시.

시민들 역시 개방을 완료한 능력자들이었지만.

데몬에 대항할 수단이 없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투 준비! 일단 도시를⋯!?"

그런 시민들을 버리고 갈 순 없기에.

김대혁이 팀원들에게 도시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참이었다.

콰가가가가가!

내려오고 있는 데몬들을 뒤덮는 엄청난 양의 가시와,

콰아앙!!

문을 향해 물샐 틈 없이 쏟아 부어지는 메카닉 폭탄들까지.

"저건⋯!"

저벅.

놀라고 있는 김대혁 옆으로 낯익은 사람들이 걸어왔다.

정부 대통령 직속 경호대.

국가직 1급 헌터에 속해 있는 자들이었다.

'저들이 어떻게 벌써 와 있는 거지.'

균열이 생긴 뒤 왔다고 하기엔 너무 빨랐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대응 속도.

"김대혁 팀장님이시죠?"

"각하의 명으로 도시를 수비하러 왔습니다. 김대혁 팀장님은 따로 행동하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후 한국 대사관엔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라 하셨으니 걱정말고 가셔도 됩니다."

요원들의 말을 들은 김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1급 헌터들이 도착했다면 더 이상 자신이 도시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저벅.

김대혁이 곧장 몸을 돌려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바로 출발한다!"

"예!"

차량에 탑승하는 팀원들을 확인한 후.

김대혁이 고개를 들어 이연화가 있는 부지를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려라⋯!"

* * *

와 더럽게 많네.

내려오고 있는 데몬들을 보고 있자니 혀가 절로 내둘러졌다.

- 두두두두두두!!

문이 열리기 무섭게 리볼버를 꺼내 들어 작열탄을 문으로 퍼부었다.

나와서 퍼지기 전에 한 번 쓸어버릴 생각이었던 것.

후두두둑!

작열탄 세례와 헌터들의 공격이 쏟아 부어져서인지 문에선 엄청난 수의 데몬 시체가 떨어졌었다.

멀리서 본다면 비가 내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 ⋯?

하지만, 떨어져 내린 녀석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한동안 죽은 녀석들이 다 쏟아지고 나자 등장한 훨씬 많은 수의 데몬.

조금 전 떨어진 게 소나기라면 등장하기 시작한 녀석들은 태풍을 동반한 폭우 수준이었다.

콰앙! 콰앙! 콰앙!

옆에서 쉬지 않고 불덩이를 뿜어내는 마도 공학 기계를 바라봤다.

화산이 용암을 뿜어내듯 계속해서 하늘로 날아가는 불덩이.

발사되는 건 한 발씩이지만 한 발 한 발이 웬만한 미사일보다 강력했다.

"쉬지 말고 쏴!"

"탄도 아직 넉넉하다!"

함께 온 헌터들의 화력도 유효타로 먹혀들고 있었다.

원거리에 특화되어서인지 단단한 갑주류를 입은 종을 제외하곤 효과적으로 데몬들을 추락시키고 있었다.

"1시 방향에 열 마리! 8시 방향에 7마리 접근 중입니다!"

그럼에도 숫자가 너무 많았기에.

빗발치는 화력을 피한 데몬들이 쉴새 없이 본진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내 몫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악---!

본진을 넘어 펼쳐져 있는 경계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반 토막이 나 떨어지는 데몬들.

- 다가오는 놈들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제가 말씀드린 건 챙겨오셨죠?

군대 사격에서 사용되는 이어플러그.

내 말에 따라 양쪽 귀에 이어플러그를 착용한 헌터들이 뿌려지는 백색 검기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적응이 안 되나 보네.

귀를 째는 비명과 함께 뿜어지는 검기.

눈으로 따라갈 수조차 없는 속도로 뿌려지는 검기에 헌터들은 지금도 적응되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다.

"와⋯."

바로 옆에 있는 이연화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검에서 터지는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잠시 후엔 다가오던 사방의 데몬들이 떨어지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쯧."

철컥.

스이카를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이연화가 봤다던, 로인이 경고했던 메토스는 등장하지 않은 상태.

말도 안 되는 숫자의 데몬만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저릿.

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을 꼬물거리며 발도를 뿌리고 있는 팔의 상태를 살폈다.

돌산에서도 수없이 휘둘렀지만⋯ 쉽지 않네.

스이카의 사용법 자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단지, 기본적으로 검에 대한 이해가 기본 베이스로 깔려있지 않았다.

물론 기본기와는 별개로 신체 능력이 올라가면서 발도의 속도와 파워는 증가했다.

하지만.

문제는 발도를 휘두를 때마다 팔에 누적되는 데미지였다.

수련을 하면 할수록 강해지는 것과 별개로 발도의 리바운드로 팔에 쌓이는 피로와 데미지는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던 것.

"후우⋯!"

고개를 내려 혹사당하고 있는 오른팔을 바라봤다.

데미지가 누적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멀쩡했다.

쿠구구!

잠시의 쉬는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밀려오는 데몬들.

호흡을 정리하며 밀려오는 녀석들을 응시했다.

버텨라, 내 팔아.

드드⋯ 끼아아아아아---!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 * *

데몬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하늘의 문에서 지금까지 나오던 데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토스⋯!

처음 보는 녀석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나오고 있는 녀석들을 지휘하고 있는 녀석.

그놈이 이제 됐다고 생각한 건지 직접 행차를 한 것이었다.

"이제야 나오는군요."

"귀한 몸이라는 건가."

"이제부터 시작인가 본데요, 하."

헌터들이 여유롭게 말을 주고받았지만.

메토스를 발견한 모든 이의 얼굴은 긴장으로 바짝 굳어 있었다.

한쪽 손에 남은 손가락이 세 개.

이연화가 바다에서 만난 녀석이 분명했다.

슥.

고개를 돌려 이연화와 헌터들을 둘러봤다.

데몬의 접근은 없었기에 다친 곳은 없었지만.

다들 몹시 지쳐 있었다.

이미 몇 시간 째 멈추지 않고 능력을 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뚝. 뚝.

수백 번 스이카를 휘두른 내 오른팔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잡이엔 이미 손에서 베어낸 피가 맺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팔 내부의 핏줄이 몇 개 터진 건지 검붉은 멍이 여기저기에 생겨 있었다.

"백운 님⋯!"

메토스가 등장하며 잠시 찾아온 평화.

그제야 내 오른팔을 발견한 이연화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개 아프지만.

누가 다가와서 장난으로 오른팔을 건드린다면 주저 없이 뺨을 갈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데미지가 누적되어 아픈 상태였다.

쿠구구.

아니 이 미친놈들은 자가복제라도 하는 건가.

진짜 끝이 없네.

자기들의 군주인 메토스와 함께 등장한 엄청난 수의 데몬.

지금까지는 1차 웨이브였다고 말하는 듯 혀가 내밀어지는 숫자였다.

메토스도 나타났고, 해도 졌다.

이카로스의 칼데아를 이용해 메토스를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것.

문제는.

끼아아아아아아---!

이 자리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스이카는 해제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밀려드는 데몬들로부터 본진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리볼버의 쿨타임은 돌았다.

여기서 냅다 메토스에게 리볼버를 갈기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 있는 데몬들의 숫자를 보면 효과적으로 탄이 닿지 못할 것 같았다.

"사방에서 몰려 옵니다!"

메토스가 훨씬 더 많은 데몬을 끌고 나온 탓도 있지만, 오랜 전투에 지쳐 이연화와 헌터들의 화력도 약해진 상태.

아까보다 더 많은 데몬이 화력망을 통과해 접근해왔다.

후우.

다시 한번 스이카를 휘두르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발⋯?

스르르⋯!

발도를 휘두르기 직전.

공간이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페샨의 눈이 발동했다.

콰직! 콰득! 서걱!

순식간에 나타나 거대한 낫으로 다가오던 데몬을 썰어버리는 존재.

로인⋯?

저놈이 왜?

어제까지만 해도 메토스는 못 막는다며 이연화를 죽이려 했던 녀석이었다.

"뭐⋯ 뭐죠? 왜 갑자기 데몬들이?"

로인이 보이지 않는 헌터들이 당황하고, 옆에 있던 이연화가 고개를 돌려 푸른빛을 뿜고 있는 내 눈을 바라봤다.

"로인이에요."

"⋯!"

이연화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퍼어엉!!

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팀장님⋯!"

펑! 펑! 펑! 펑!!

와 씨.

한 방만 터져도 엄청난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근방에 있던 데몬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저벅.

가루가 된 데몬을 뚫고, 양손에 붉은 기운을 두른 채 걸어오고 있는 김대혁.

도착한 김대혁과 헌터들이 본진으로 합류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각자의 위치를 잡으며 접근하고 있는 데몬을 바라보는 김대혁과 헌터들.

됐다.

2급 헌터인 김대혁이 도착한 이상 나까지 본진의 방어에 발이 묶여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스윽.

고개를 들어 군대의 뒤에 숨어 있는 메토스를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간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120화.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

백운이 있는 부지에서 문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높은 건물에 위치한 로인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얼른 도망쳐!"

"엄청난 숫자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세요!"

데몬이 나타난 건 꽤 먼 거리였지만 등장한 데몬의 숫자 때문이었을까.

당황한 도시 사람들은 점점 더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아래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로인에게 익숙했다.

1년 전에 다른 도시 로도스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게 있었다.

'어떻게⋯?'

로도스에선 문이 나타나기 전부터 도시 사람들에게 죽음이 새겨졌었다.

5일 뒤도 아닌 당장 오늘 죽는 죽음이 말이다.

'어째서 없는 거냐.'

로인의 밑에서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쁜 시민들.

그런 시민들의 머리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오늘 죽을 운명은커녕 5일 뒤에도 멀쩡히 살아있을 사람들이란 증거였다.

저들은 그걸 모르기에 저렇게 허둥지둥 도망치기 바쁜 거겠지만 말이다.

드드드⋯!

부지에서 열렸던 문에 이어 도시 위에도 새로운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이 새겨지지 않는 사람들.

로도스 때와는 달랐다.

'뭐가 다른 거지? 로도스에도 강한 헌터들은 있었다.'

로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시에 아무리 강한 헌터가 있다 한들 로인이 알고 있는 한 엄청난 수의 군대와 함께 등장하는 메토스에게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

- 콰앙!

로인이 어제 갑주를 차고 있었음에도 옆구리로 느껴졌던 고통을 떠올렸다.

규격 외의 위력을 내는 규격 외의 인간.

'설마.'

어제 일을 떠올리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너무 터무니없는 확률이라 가능성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만약⋯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규격 외의 힘이 메토스와 군대를 뛰어넘는 거라면.'

로인의 상식선에선 불가능했지만, 이 경우라면 지금 도망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보이지 않는 것도 말이 됐다.

로도스엔 없었지만 아테네에는 있는 것.

이방인인 백운이었다.

스륵.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로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

로인이 아테네를 떠나 도착한 장소는 처음 문이 열렸던 부지였다.

"⋯."

아무 말 없이 로인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바라봤다.

부지에선 눈을 의심케 하는 전투가 벌써 몇 시간 째 이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지금까지 로인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개념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백운의 옆에서 마도 공학을 시전하고 있는 이연화.

메토스에게 지목되어 피안화가 그려졌기에 죽음이 확정된 여자였다.

"분명⋯ 분명 오늘이었는데."

이연화의 머리 위.

어제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보였던 죽음의 흔적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끼아아아아아--!

혼란스러운 로인의 귓가로 들려오는 귀신 울음소리.

저 남자는 아까부터 말도 안 되는 검기를 대체 몇 번이나 뿌려내고 있는 걸까.

'⋯.'

걱정하던 참극이 일어나지 않아서 기뻐해야 할지.

지금까지 믿고 있던 모든 게 부정당하는 현재에 슬퍼해야 하는지.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저벅.

생각은 나중이었다.

일단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간다.'

로인이 낫을 꺼내 들었다.

* * *

"대혁 님, 여기 잘 부탁드려요."

본진에 합류해 엄청난 화력으로 데몬을 부수고 있는 김대혁.

복싱을 베이스로 한 김대혁의 주먹에선 데몬과 부딪힐 때마다 강한 폭발이 터지고 있었다.

굳이 내가 없더라도 충분히 본진을 지킬 수 있는 화력.

"⋯!"

갑작스레 꺼내어진 날개에 놀랐던 김대혁.

김대혁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박살 내고 와주세요."

"예입."

경쾌하게 대답을 한 후 날개를 움직였다.

펄럭!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라 메토스에게 향했다.

"크어어!"

그런 나를 발견한 건지 울부짖기 시작한 메토스.

군대에게 명령을 내린 건지 땅을 향해 내려가기 바빴던 데몬들이 타겟을 변경했다.

와라 이 새끼들아.

스이카의 데미지로 오른손을 사용하는 건 무리였지만, 없어도 충분했다.

쾅! 쩌억!

날개를 이용한 속도와 두 다리만 있어도 충분했다.

쾅! 쾅! 퍽!

이게 태권도다 이 새끼들아.

빠르게 데몬을 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방금 꺼내 연기의 양도 충분했다.

쿠우!

쐐엑!

사방에서 데몬들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숫자가 많은 만큼 원거리, 근거리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공격을 해대는 녀석들.

마음 같아선 뒤를 돌아 다 후두리고 싶었지만, 목표는 메토스였기에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피해가며 계속해서 발을 휘둘렀다.

후웅⋯ 쾅! 쾅!

길목에 위치한 놈들을 몇 마리나 치워냈을까.

찰나의 순간이지만 작은 틈이 보였다.

작지만 내 한 몸 통과하는 데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틈이었다.

우우우우우⋯!

강한 출력을 위해 칼데아로 연기를 끌어모으며 메토스를 응시했다.

만화에서 봤을 법한 네크로맨서를 닮은 모양새.

온몸이 뼈다귀로 이루어진 모습에 다 뜯어진 망토만 걸치고 있으니 로인보다도 더 사신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이 뼈다귀 새끼!

파아앙!

연기를 터뜨리며 순식간에 메토스의 앞으로 날아갔다.

"!!"

엄청난 크기라 그런지 움찔하는 게 유독 눈에 띄는 메토스.

날아온 속도를 살려 내밀어진 메토스의 팔을 걷어찼다.

쾅!!

"크우우우!"

웬만한 자동차 수십 개를 합친 크기의 메토스가 뒤로 밀려났다.

덩달아 아작이 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오른팔의 뼈까지.

"크아아아아아아!!"

팔이 떨어져 꼭지가 돈 건지 메토스가 커다란 포효를 질러냈다.

쿠아아아아!

주변을 감싸고 있던 데몬들의 몸에서 검보라빛의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버프 같은 건가.

산개되어 있던 데몬들이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빨라진 움직임이었다.

오냐, 다 떨어뜨려 주마.

다시 날개를 움직여 메토스의 머리 위로 착지했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달려드는 수백, 수천 마리의 데몬들.

살짝 오금 저리네.

아무리 별거 아닌 놈들이라 해도 저렇게 사방을 메꾸고 달려드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크오오오오!"

자기의 머리 위에 올라와서인지 메토스가 남아 있는 왼팔을 위로 뻗었다.

사방이 데몬으로 둘러싸여 미세한 달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순간.

[앤 보니&메리 리드]

칼데아를 집어넣고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빛의 탄을 뿌리려는 순간.

화악⋯!

공간이 바뀌기 시작했다.

* * *

무슨 조건을 만족한 건지 감도 안 오네.

두리번거리며 옮겨진 장소를 살폈다.

저번엔 사방이 탁 트인 바다의 한가운데였는데.

이번엔 여러 높은 건물로 둘러싸인 길목의 한 가운데였다.

해적이라 이번에도 바다 위겠지 했는데 아니구먼.

옮겨진 공간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양옆으로 보니와 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또 구해온 건지 바다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카우보이 복장이었다.

"너 참 바쁘게 사는구나."

"우리 살아있을 때보다 더 바쁜 거 같은데."

쯧쯧 혀를 차는 보니와 리드에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생각해도 참 스펙타클하게 사는 것 같았다.

"그러게요, 저도 의도한 건 아닌데 이게 참 하하!"

멋쩍게 웃자 보니와 리드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번 작열탄을 개방할 때 상선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갈겨대던 모습을 봐서인지 처음과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둘이었다.

"오? 온다."

"이제야 오네."

철컥.

한참을 웃다가 무언가를 느끼곤 각자의 총을 꺼내 드는 두 사람.

온다니 뭐가 온다는 거야.

도통 만날 때마다 종잡을 수 없는 보니와 리드였다.

"1분 정돈가."

"응 1분이면 오겠는데."

"뭐가 온다는 거예요? 둘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알려줘요."

징징거리자 그것도 모르냐는 듯 손가락을 좌우로 휘젓는 보니.

변했어.

확실히 변했다.

감옥에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게 된 보니.

"한참 해적질을 하고 다닐 때 우릴 노리는 놈들이 많았거든."

"정말 많았지."

리드가 보니의 말에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엄청난 수의 해적단이지만, 우린 두 명이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을 거 같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턱을 문질렀다.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둘이 가진 화력은 웬만한 해적선에서 뿜어지는 것보다 몇 배는 강했기에.

적들이 다가오기 전에 전멸을 시켰을 터였다.

"우리 둘의 화력이 강하니까 적이 다가오기 전에 다 사라졌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뜨끔.

뜨끔하는 날 보며 고럼 고렇지라는 눈빛을 보내는 두 사람.

두 사람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 올리며 등을 맞댔다.

"우린 배만 턴 게 아니거든. 마을도 털었다고."

대단하시네요.

"그러다 보면 함정에 빠져 많은 수의 적을 근접에서 처리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지."

더 이상 둘의 대화에 따라갈 수 없었기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쿠구구구⋯!

⋯?

발 아래로 진동이 느껴졌다.

뭔진 모르겠지만 많은 수의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기다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건물 위의 무언가까지.

사람⋯ 인가?

명확한 형태를 가지진 않은 존재들.

그저 검은색 에너지로 이루어진, 지점토 인형 같은 것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충 봐도 몇 백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완벽히 포위 됐구만.

이건 보니랑 리드의 할아버지가 와도 살아나가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나갈 거예요?"

쿵!!

질문을 하기 무섭게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이 우리를 향해 날아 들었다.

사방을 빼곡히 메워 도망칠 틈은 전혀 없는 상황.

그럼에도 보니와 리드는 여유로웠다.

씨익.

"어떻게 살아나갈 거냐고?"

동시에 웃어 보인 보니와 리드가 총을 치켜 들었다.

"이렇게."

* * *

스륵.

보니와 리드의 공간에서 빠져 나와 양손에 쥐어진 리볼버를 바라봤다.

그렇게 살아남으셨다.

내게로 달려들고 있는 수많은 데몬을 바라봤다.

30초?

음⋯. 아니야, 10초.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했다.

다가오는 녀석들을 녹이는데 필요한 시간.

[앤 보니&메리 리드 - 동기화]

서 있는 내 양옆으로 붉은색과 푸른색의 사람 형체가 생겨났다.

둘 모두 양손에 리볼버를 쥐고 있는 상태.

공간에서 봤던 둘의 기술을 떠올렸다.

한 번 사용하는 순간 리볼버는 바로 쿨타임으로 들어가겠지만.

상관 없었다.

다 끝나있을 테니까.

양 어깨를 맞대고 있는 세 사람에게 주어진 건 여섯 자루의 리볼버.

이거면 충분했다.

척.

아래를 향하고 있던 여섯 자루의 리볼버가 들어 올려지고.

동기화와 동시에 개방된 기술을 떠올렸다.

다 뒈져서 가루나 되어버려라.

철컥.

[데스페라도]

121화. 데스페라도

"⋯."

"⋯."

부지에 있는 모든 이들이 행동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백운이 메토스에게 날아간 이후 어그로가 돌려져 더 이상 접근하는 데몬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행동을 멈춘 걸 넘어 굳어 있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콰가가가가가가!!

눈앞에서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탄환들.

마치 미니 건 수십 대를 뭉쳐 동시에 발사하는 듯한 화력이었다.

한 발 한 발의 위력 역시 얼마나 강력한지 갑주를 입은 데몬조차도 버티지 못해 꿰뚫리고 있었다.

- 어⋯ 어!

- 안돼⋯!!

처음에 사람들은 메토스에게 달려드는 백운을 보며 깜짝 놀랐었다.

아직도 상공엔 천 마리 이상의 데몬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심지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무모한 행동이었다.

- 데몬들이⋯!

- 아⋯.

아니나 다를까.

메토스와 데몬들은 제 발로 날아 들어온 백운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대장격인 메토스의 포효와 함께 백운의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기 시작한 데몬들.

아무리 엄청난 속도를 가진 날개가 있다 한들 빠져나올 구멍조차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 이런⋯!

수백 마리의 데몬이 둘러싼 포위진.

그 포위진이 좁혀지고 좁혀져 백운에게 도달한 순간.

백운을 지켜보던 이들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저기서 살아 나온다는 건 불가능했다.

- ⋯.

세 명.

지켜보던 이들 중 탄식을 뱉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눈앞에 그려지는 상황 자체는 절망적이었지만 백운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은 사람들.

김대혁과 이연화, 로인이었다.

- 쿠구.

- ⋯!?

그리고 잠시 후.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에게 묘한 변화가 감지 됐다.

새까맣게 백운을 둘러쌌던 데몬들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

틈은 저절로 생긴 게 아니었다.

- 콰아아아아아!!

새까맣던 포위망이 잠시 들썩이는가 싶더니 그 틈에서 수십, 수백 발의 탄환이 쏟아져 나왔다.

빛의 탄막.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촘촘한 탄막이었다.

그 범위 안에 있다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죽어서도 온전한 시체는커녕 가루가 될 게 분명해 보이는 화력.

꿀꺽.

김대혁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백운을 의심하진 않았었다.

김희연에게 이미 들어온 게 있었기에 백운이라면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포위망을 뚫는 수준이 아니라.'

분명 저곳으로 들어간 건 백운 한 명인데도, 팽이처럼 돌아가며 쏘아지는 빛의 탄환은 최소 열 명 정도의 인원이 쏘는 수준의 화력이었다.

쿠구구구우⋯!

목표했던 바를 다 이루어서일까.

사방으로 쏘아지던 빛줄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다⋯ 지워버렸군.'

* * *

"후우⋯!"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해진 하늘.

다가오고 있던 데몬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성능 확실하구만.

스르륵.

데스페라도가 끝나자 사라져 버린 보니와 리드의 형체.

포위해오던 데몬들을 바라보며 이것들을 언제 다 죽이나 했었는데.

세 명이서 빙글빙글 사방으로 정신없이 쏘아대니 순식간에 정리되어버렸다.

물론.

단점도 존재했다.

우욱.

하도 정신없이 빙글빙글 팔을 이리저리 뻗었더니 살짝 멀미가 온다는 것이었다.

자 그럼 남은 건.

고개를 내려 내 발판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메토스를 바라봤다.

그나마 탄막이 덜 닿는 위치에 있어서인지 약간의 형체는 남아 있는 상태.

형체라고 해봐야 뼈로 된 거대한 골통과 상체 일부지만 말이다.

"⋯."

분명 살아있음에도 잠잠한 메토스를 내려다봤다.

"야."

자기 멋대로 죽일 사람을 집어 피안화를 박아 넣는 미친 자식.

직접 날아오기 전까지도 메토스는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자신의 부대만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었어.

그 건방진 행태가 처음부터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있는 본진을 지켜야 했기에 계속해서 분노 스택만 누적시키고 있었다.

"어떡하냐? 이제 너만 남았다, 야."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끝을 내기 위해 멀쩡한 왼팔로 비늘을 둘렀다.

"마치 지가 신인 것 마냥 사람한테 낙인을 찍던데 말이야."

스윽.

왼팔을 메토스의 머리로 조준했다.

"건방 떨지 마라."

콰아아앙!

* * *

후두둑.

엄청난 양의 뼈가 땅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메토스 하나를 부섰을 뿐인데도 비가 내리는 것처럼 쏟아지는 뼈다구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콜록!"

주먹을 내려침과 동시에 사방으로 백색 뼛가루가 퍼졌다.

하늘의 일부분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난 양.

누가 밖에서 보면 연막탄 수십 개를 터뜨렸다고 생각할 듯했다.

"하아."

날개를 펄럭이며 가루가 없는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공격할 틈을 안 줘서인지 메토스는 예상보다 훨씬 싱겁게 끝나버렸다.

오히려 포위망을 좁혀 오던 데몬들이 더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부하들만 앞세워서 성과를 챙기는 놈이었구만.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가지고 뼈다구쉨!

그나저나.

저건 왜 안 없어져?

고개를 돌려 메토스와 데몬들이 나왔던 문을 바라봤다.

아까와 달리 이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문이었다.

메토스가 열었을 테니 녀석을 죽이면 자연스럽게 닫힐 줄 알았는데.

문은 여전히 활짝 열린 상태였다.

연화 님의 피안화도 안 없어졌네⋯?

위를 바라보고 있는 이연화의 목덜미.

목덜미에선 여전히 피안화가 검보라빛을 뿜으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직 뭐가 남았⋯!?

안쪽에 적이 더 남은 건가 의아해하는 사이.

칼데아로 작은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사아악!

순간 뼛가루에서 튀어나와 문으로 쏘아지는 검보라빛의 무언가.

조금 전의 크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체구의 해골이었다.

저런 개⋯!

곧바로 칼데아에 연기를 모아 출력을 끌어 올렸지만.

쏙!

해골은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드드⋯!

열려있던 문은 빠르게 닫혀가고 있었다.

* * *

"쿠우⋯ 크으⋯!"

문을 통과한 메토스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사방으로 방사된 뼛가루를 가림막으로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 올려 문으로 내달렸다.

"쿠우우우!!"

메토스가 분한 듯 포효를 내질렀다.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수백 수천의 군단이 작은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자신의 갑주에 가해진 공격까지.

본체와 갑주가 별개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

뼈를 한땀 한땀 모아 오랜 시간을 걸쳐 만들어낸 갑주였다.

웬만한 공격엔 기스조차 나지 않는 최강의 갑주.

그런 갑주가 인간의 손에 가루가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쿠우우우!!!"

메토스가 소리를 지르며 복수를 다짐했다.

군대와 갑주 모든 걸 잃었지만 자신이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연화에게 새겨놨던 피안화 역시 멀쩡한 상태였다.

살아있으면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를 느끼며 살게 될 터였다.

드드⋯득⋯!

"⋯?"

메토스가 몸을 돌려 닫히다 만 문을 바라봤다.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열거나 닫을 수 없는 고유의 문이었다.

어떤 강한 힘이 당겨도 끄떡도 하지 않는 뼈의 문.

"쿠으!!"

닫힌 듯하면서도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에 메토스가 분노를 내뱉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인간이라곤 믿겨지지 않는 강력한 괴물부터 시작해 엄청난 전력적 손실까지.

이젠 하다 하다 문까지 말썽이었다.

스륵.

메토스가 다가가 남은 힘을 쏟아 문을 밀었다.

끼기⋯ 끼기긱!

무언가 걸려있는 것처럼 아무리 힘을 쏟아도 닫히지 않는 문.

"쿠으⋯?"

문 위쪽에 걸려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메토스.

"!!"

메토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지 못하도록 잡고 있는 건 조금 전 자신의 갑주를 박살 낸 푸른 비늘의 손이었다.

"쿠으!!"

콰아앙!!

아무리 강한 힘으로 당겨도 열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문이 규격을 넘어서는 힘에 의해 활짝 열려 젖혀졌다.

휘릭!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메토스가 문에서 멀어지기 위해 다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쑤우우욱!!

열려진 문에서 튀어나온 푸른 비늘의 손이 메토스의 머리를 붙잡았다.

"!!"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막강한 힘.

메토스의 몸으로 탄생한 이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운이 엄습해왔다.

수많은 데몬의 위에 군림해오던 메토스에겐 너무나도 낯선 기운이었다.

덜걱. 덜걱. 덜걱.

메토스의 몸을 이루고 있는 뼈들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

온몸을 잠식하고 있는 기운의 정체였다.

몸이 떨리는 게 끝이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넘어 작은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저 손이 움직여 자신을 산산조각낼 거란 확신이 들었다.

"깜짝 놀랐잖아."

메토스의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이는 건 문을 넘어 들어와 있는 팔 하나뿐이었지만.

메토스는 본능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팔을 뻗어온 건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 건드렸다간 필히 영멸에 처해질 존재.

자신이 그런 존재를 겁도 없이 건드렸다는 사실과.

그리고.

드드드⋯!

"그만 가라, 이 개새야."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차가운 진실이었다.

콰직!!!

* * *

닫힌 뒤 소멸해가는 균열을 확인한 뒤.

손을 털며 지상으로 향했다.

휴, 뼈다귀쉨! 개놀랐네.

방심한 건 아니었지만 꿈에도 몰랐다.

본체라고 생각했던 게 거대한 갑주였고, 그 안에 저런 콩알만 한 본체가 숨어있을 줄은.

뜻밖의 모험할 뻔했네.

메토스를 잡지 못했다면 고민 없이 따라 들어가 박살 낼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칼데아의 속도로 따라잡아 늦지 않게 낚아챌 수 있었다.

응⋯?

지상이 가까워질수록 잠시 다른 데로 갈까 고민이 들었다.

지상엔 그리스 한국 대사관에 속한 대부분의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날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못 볼 걸 본 것처럼 입을 쩍 벌린 채로 말이다.

부⋯ 부담스럽네.

뚫어질 것 같아!

의식하지 않는 척 시선으로부터 눈을 돌렸지만.

지상으로 서서히 내려오는 날 무슨 추적 장치마냥 고대로 따라오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쳐다보는 것에 힘이 있었다면 난 이미 사방이 뚫리고도 남았을 정도.

척.

땅에 발을 딛기 무섭게 날개를 집어넣었다.

오늘도 맹활약한 이카로스의 칼데아 윙.

아직 숨겨진 힘이 많겠지만 일단 공중을 나는 것 자체는 적응이 된 것 같아 흡족스러웠다.

저벅.

"백운 님⋯!"

고개를 들어 제일 먼저 다가온 이연화를 바라봤다.

오.

정확히는 검보라색의 피안화가 피어 있던 목덜미를 쳐다봤다.

어깨와 목을 가득 채우고 있던 피안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씨익.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돼쓰!

122화. 감사 인사

"아니 팔이 뭘 해야 이 지경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 아테네에서 가장 큰 병원.

병원 의사 마티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봐도 좀 혐오스럽네.

마티가 보고 있는 건 내 오른팔.

내려오는 데몬들을 써느라 쉬지 않고 스이카를 사용한 팔이었다.

"서… 설마 심각한 건 아니겠죠?"

"으음."

마티가 잔뜩 심각한 눈으로 팔을 살폈다.

빨리 대답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만 울부짖었다.

심각하지 않냐는 말에 저런 무서운 얼굴로 으음이라니.

팔을 내밀고 있는 환자 입장에선 일 초가 십 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슥.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고개를 든 마티가 날 응시했다.

"병원으로 오기 전에 치료받은 적 있나요?"

"아뇨, 팔 움켜쥐고 냅다 여기로 달려왔는데요."

부지에서의 상황이 정리된 후 내 팔을 발견한 김대혁은 곧장 수도 병원으로 연락을 넣어줬다.

멍이 들다 못해 손부터 어깨까지 검붉게 변한 팔에 기겁을 한 탓이었다.

아까보다 더 심해진 팔에 이연화는 옆에서 바짝 굳어 괜찮냐는 말조차 못 건네고 있었다.

"이상하네."

"뭐… 뭐가 이상한데요?"

말해!

마티가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탁!

"으악!"

갑자기 오른팔을 내려치는 마티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냥 건들기만 해도 아픈 팔을 이렇게 내려치다니.

오는 길에 차가 흔들리며 슬쩍슬쩍 건드려지는 것만으로도 미친 듯이 아팠었다.

"아파요?"

"그럼 당연히 아프… 응?"

그랬던 팔인데.

머선 일이고 이게.

쿡쿡.

왼손으로 오른팔을 찔러봤다.

약간의 고통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까처럼 뒤로 넘어갈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별로 안 아프죠?"

"어… 네. 뭐지?"

혼잣말을 하며 갸웃거리자 마티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외관은 이미 터졌던 피 때문에 이렇지만. 안쪽은 이상하리만치 멀쩡해요. 물론 100% 정상이다는 아니라서 조금 아프긴 하겠지만요."

"왜죠?"

"그건 제가 환자분한테 묻고 싶은데요."

어깨를 으쓱 올린 마티가 다시 한번 능력을 발동해 팔을 살폈다.

마티의 오른손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연초록색의 빛.

특수한 기계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몸 상태를 살필 수 있다고 마티는 소개했었다.

"보통 팔 외관이 이 지경이 될 정도의 상태에 들어갔다면, 무슨 치료를 받든 완전한 기능 복구는 불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살피는 걸 마친 마티가 날 바라봤다.

"환자분 팔은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회복되고 있어요."

내 몸인데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마티의 말을 들어봤을 땐 심각하다거나 상처 치료가 오래 걸릴거라거나 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다행이라는 결론.

"환자분 회복계 능력자는 아니죠?"

"네, 전혀 아니죠."

"미스테리 하네, 미스테리 해. 무슨 몸이 이럴까요? 신의 육체 이런 건가."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은 마티가 몸을 일으켰다.

"별다른 치료는 필요 없을 거 같네요. 조금만 지나면 알아서 회복하겠어요."

"그럼 붕대라도 좀 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거 팔이 색이 좀."

무슨 귀수도 아니고 붉은 팔을 단 채 돌아다닐 순 없었다.

보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붕대를 감을 생각이었다.

피식.

어이없다는 듯 웃은 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 * *

병원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는 이연화.

이연화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붕대가 감긴 오른팔을 바라봤다.

"백운 님, 치료는 잘 받았어요? 어떻대요?"

"괜찮다고 하던데요. 이거 붕대도 안 감아도 되는 건데 다른 분들 눈을 위해 감은 거예요."

"…?"

괜찮다는 말에 이연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응시했다.

하긴.

팔 하나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태였으니 저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진짜 뭘까.

전문가는 아니어도 내가 느끼기에도 진짜 위험했던 거 같은데.

스이카를 계속 휘두르면서도 괜찮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이 심했었다.

멈출 수 없는 상황이라 계속 휘두르긴 했지만 가능했다면 무서워서 바로 멈췄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후지산에서 사로카한테 걷어차였을 때도 그랬었지.

눈을 떴을 때야 온몸을 울리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야 했지만, 정말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 대부분이 완치에 이르렀고 치료를 맡았던 의사도 오늘 만난 마티처럼 혀를 내둘렀었다.

그때야 그냥 좀 빨리 낫는구나 했었는데 오늘은 좀 심하네.

뭐, 튼튼한 거니까 됐나.

어차피 나쁜 건 아니니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하하, 진짜 괜찮아요. 대혁 님은 대사관으로 가셨나 보네요."

"아, 네. 아마 정신없으실 거예요. 하루 만에 급하게 진행되던 일들이다 보니 정부에서도 자세한 상황을 물으려 할 거고요."

"질문 세례를 받으시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를 둘러봤다.

여기저기 데몬과의 전투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빠른 대응이 이루어져서인지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데몬이 떼거리로 나타났었는데도 수도에서 가장 큰 병원이 바쁘지 않다는 것 역시 피해가 크지 않다는 증거였다.

"로인 님은 사라진 거죠?"

우리를 도와준 까닭인지 어느새 로인의 이름에 님을 붙이는 이연화.

아직도 의문이네, 고놈은.

질문을 들으며 부지에 나타났던 로인을 떠올렸다.

김대혁과 지원군보다도 먼저 와 데몬들을 썰어버렸던 로인.

처음엔 이연화를 공격하러 온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였다.

"제가 땅으로 다시 내려왔을 땐 사라진 후였어요."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에이!"

그런 이연화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어! 해보지도 않고 말이야. 운명이 어쩌고저쩌고 말이야."

"풉, 무슨 백 년 산 어르신 같아요. 그러지 마요."

날 말리는 이연화와 함께 웃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도와준 건 도와준 거니 나중에 만나면 말은 걸어줘야지.

잠시지만 강렬한 인상을 줬던 로인.

왠지 모르게 싫진 않은 녀석이다.

* * *

그리스의 한국 대사관.

대사관의 한적한 길로 검은색 차량 한 대가 멈춰 서 있다.

"어서오세요, 김대혁 팀장님."

뒷좌석에 타 있는 카풀라에 김대혁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대사관에 있는 김대혁에게 찾아왔던 1급 헌터.

도시에 데몬이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대응을 해줬던 헌터였기에 의심 없이 따라나섰다.

"타시죠, 누가 볼까 무섭네요."

"알겠습니다."

대통령 카풀라와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김대혁.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풀라가 입을 열었다.

"일단 바로 대피 결정을 못 내린 점, 죄송하다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카풀라의 말에 김대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데몬이 나타남과 동시에 도착한 수송 차량들. 그리고 1급 헌터들까지. 뒤에서 움직여 주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김대혁에 카풀라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김대혁의 말대로 공식적으론 대기란 명령을 내렸지만 카풀라는 뒤에서 데몬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을 조용히 진행했었다.

"이제부터 하는 질문은 비공식적인, 제 사적인 질문이니 편하게 대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대답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알겠습니다."

김대혁 쪽으로 몸을 돌린 카풀라.

"도시에 균열이 생기기 전, 두어 시간 떨어진 부지에서 먼저 문이 열렸었죠. 그리고 그곳에서 로도스에 참사를 일으켰던 데몬이 목격됐고요."

"예, 맞습니다."

"나타난 데몬의 숫자도 비교 불가였죠. 도시는 수십 마리 수준이었지만 부지 쪽은 아니었어요. 제가 궁금한 건… 대부분의 전력은 아테네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낸 1급 헌터들도 도시에 있었고요."

카풀라의 말을 들으며 김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도스에도 높은 급수의 국가직 헌터들이 있었지만 학살극을 막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아테네에서의 피해는 약간의 재산 피해만이 있을 뿐 희생자가 0이었다.

'무슨 질문을 할지 알 것 같군.'

카풀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지에서 아테네를 지켜낸 건… 누구인가요?"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찾은 아테네 공항.

"아테네에서 나가는 비행기는 없습니다. 최소 일주일 이상은 이럴 거예요."

"네…?"

해야 하는 일도 끝났으니 다시 이집트로 가려는 중이었는데 비행기가 없다니.

"오늘 하늘에 나타난 데몬들 때문에 비행 길이 전부 막혔거든요.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비행기는 아테네 상공을 이용할 수 없어요."

이제 안전해요!

다 없앴다고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항공사 자체적으로 한 결정이 아닌 정부에서 내려온 지침일 것이기 때문이다.

흠, 일주일이라.

물론 더 있으라 하면 못 있을 이유까진 없었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일정도 일고 말이다.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진 않아.

기태랑이 죽는 시점.

몇 개월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 전에 무기를 하나 더 찾아 무기고의 다음 능력을 개방해두고 싶었다.

태랑 님은 회귀 전에도 강했어.

그런 기태랑을 베어 죽인 무언가.

그게 어떤 녀석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 최대한의 전력을 쌓아 대비해야 했다.

비행기가 없다고 못 가는 건 아니니까.

체력을 비축하며 안전하게 가는 건 불가능해졌지만 그렇다고 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종목이 철인 3종 경기로 변경될 뿐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대통령 카풀라입니다.

응?

그때 공항 내 전광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풀라.

# 오늘 있었던 사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 *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카풀라가 오늘 있었던 일을 브리핑했다.

로도스를 괴멸시켰던 데몬과 그 데몬의 군대가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한국 대사관의 빠른 보고와 조치로 사상자 0명으로 상황을 종결할 수 있었다는 브리핑.

- 한국 대사관의 역할은 축소해야 합니다. 타국의 대사관입니다.

기자회견이 있기 전 열렸던 회의.

많은 의원이 있는 그대로 브리핑을 하게 되면 정부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걱정했다.

그렇기에 김대혁과 대사관의 활약을 축소 시키자는 의견이었다.

- 그럴 순 없습니다. 한국 대사관과 김대혁 팀장 및 휘하 헌터들이 한 활약은 그대로 발표할 겁니다.

카풀라의 고집을 알기에 해당 건에 대해선 의원들 역시 한 발자국 물러났었다.

하지만.

- 대통령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부지에서 데몬의 주요 전력을 괴멸했다는 한국의 무기왕이란 헌터. 그 이야긴 빼셔야 합니다. 이건 저희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여야 의원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합쳐지는 기적적인 순간이었다.

이름 모를 이방인 헌터가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발표는 절대 발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김대혁이 카풀라에게 알려줬던 무기왕이란 헌터의 활약.

- 애초에 믿기지도 않는 일입니다. 신빙성도 없고요.

믿을 수 없다는 의원들의 말에 카풀라는 속으로 혀를 찼었다.

도심지에서 카메라로 포착된 데몬 부대의 괴멸 장면이 그 증거인데 신빙성이 없다니.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의원들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에 카풀라는 무기왕을 제외 시키자는 의견에 동의했었다.

"아테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주신 정부 및 한국 대사관 헌터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기자회견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분위기에 정리를 하려던 기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도시에서 먼 거리인 부지에서 데몬을 상대해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 준 건 물론이고, 로도스를 괴멸시켰던 데몬과 그 데몬의 주요 전력을 처치해주신 분이 있습니다."

옆에 있던 의원들이 낭패 섞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스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한국 소속 헌터이기에, 그대로 못 본 척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부지에서 데몬의 본대를 상대하며 시간을 끌었고, 마지막엔 그 수장과 부대를 괴멸시켜 추후에 있을지 모르는 그리스의 잠재적 위험을 제거했습니다."

슥.

"그리스의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를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자리에서 일어난 카풀라가 카메라를 바라봤다.

"대한민국 국가직 소속 헌터, 무기왕님께."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카풀라.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23화. 이집트로

"옴뇸뇸 맛있겠다아."

여의도에 위치한 카페 안.

오랜만의 힐링을 위해 카페를 방문한 송유빈이 신나게 케이크와 커피의 사진을 찍어댔다.

"와… 딸기 봐. 미쳤다 미쳤어."

얼굴이 많이 알려지다 보니 사람이 적은 구석진 곳을 찾아 도착한 곳이지만.

예상치도 못한 엄청난 케이크와 커피가 있어 송유빈을 몹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기야, 이거 하나 먹어봐."

"아이, 부끄럽게 왜 그래."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보는 사람 여깄다, 이것들아.'

부끄럽다면서도 와작와작 잘 받아먹는 커플을 보며 송유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커플 지옥, 솔로 천국이거늘.'

카페에 홀로 찾아와 달달한 케이크를 먹으며 보내는 아늑한 시간.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하며 송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폭.

맨 위에 올려진 딸기와 케이크를 크게 떠 입으로 포크를 옮긴 송유빈.

"와우."

한 번에 온몸을 녹여 주는 달달함에 육성으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냠.

한 입 더 옮긴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송유빈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국가직 헌터들의 동영상이 올라오는 한튜브.

얼마 전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무기왕의 동영상이 올라왔었다.

'닳겠다, 닳겠어.'

몇 번이나 돌려본 건지 이젠 스스로도 세는 걸 포기할 상태였다.

'진짜 활동반경 미쳤네.'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론 고개가 내저어지는 사람이었다.

어디 갔나 싶으면 일본에 가 있고.

한동안 잠잠하다 싶으면 갑자기 나타나 노네임드 급 데몬을 잡아 버리고.

이제 뭘 하려나 싶었는데 그리스에 가 있다니.

'사건이 무기왕을 따라다니는 건가. 아니면 무기왕이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건가.'

이쯤 되니 헷갈리는 수준이었다.

어렸을 때 봤던 장수 탐정 만화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도 주인공이 있는 곳에서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사실 만화의 메인 빌런은 주인공이란 농담이 돌 정도였다.

'동굴 진짜 이쁘다.'

제일 많이 돌려본 구간이었다.

영상으로만 봐도 반짝이는 게 느껴지는 바다색의 동굴.

갈 수만 있다면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꼭 가보고 싶었다.

# 뉴스 속보입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일어난 데몬 사태에 대한 그리스 대통령 카풀라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습니다.

커피를 홀짝인 송유빈이 켜져 있는 TV로 고개를 돌렸다.

동영상이 올라온 것도 분명 그리스 아테네였다.

'이번에도 관련 있으면 진짜 사건을 몰고 다니는 거야.'

웃음이 나왔다.

동영상이 올라온 후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기에, 지금 나오는 뉴스가 무기왕과 연관 있을 확률은 적었지만 말이다.

이어지던 카풀라의 브리핑이 끝나가는 시점.

'다행이네, 이번엔 관련 없어서.'

마무리될 듯한 기자회견 분위기에 송유빈이 다시 케이크를 한 점 떠올렸다.

# 대한민국 국가직 소속 헌터, 무기왕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입으로 케이크를 가져가던 송유빈이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째앵!

송유빈이 놓친 포크가 케이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줄줄줄.

헌터 중앙청에서 오랜만에 모여 차를 마시던 강태황과 기태랑, 비광.

차를 마시던 중 굳어버린 비광의 옷으로 차가 흘러내렸다.

"…."

비광 뿐만이 아니었다.

호탕하게 소리를 치던 강태황도, 다과를 집으려 몸을 숙이던 기태랑도.

모두가 굳은 채 흘러나오고 있는 뉴스 속보로 눈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비광이 줄줄 흐른 차를 닦으며 잔을 내려놨다.

잔이 책상에 놓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기태랑이 입을 열었다.

"무기왕이라고 한 거 같은데."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너는 뭐라고 들었는데?"

"무기왕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비광과 기태랑이 강태황에게 눈길을 돌렸다.

팔짱을 낀 채 멍하니 앉아 있던 강태황이 입을 열었다.

둘과는 또 다른 질문이었다.

"지금 말하는 사람 그리스 대통령 맞지?"

모두가 비슷비슷한 상태라는 걸 깨달은 세 사람이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비광과 기태랑의 입가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미쳤네."

"미쳤지."

고개를 끄덕인 기태랑이 쇼파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너무 미쳐서 종잡을 수가 없네."

* * *

"백운 님, 한순간에 너무 달라진 거 아니에요?"

옆에서 날 따라오고 있는 이연화에게 뭘 모른다는 듯 손가락을 내저었다.

"어허, 아니라니까요. 진짜 알아보는 거 같았다니까."

한밤중이었지만 내 눈엔 새까만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었다.

머리엔 촌스러운 스카프와 이연화에게 빌린 마스크까지.

유명 연예인이 시내 활보 시 얼굴을 숨기기 위해 갖추는 풀세팅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상해서 쳐다본 거예요. 누가 야밤에 그러고 다녀요."

"그… 그런가요."

멋쩍게 웃으며 스카프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를 벗으니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잘 보이네."

"…."

후련한 듯한 내 목소리에 이연화가 혀를 찼다.

인정.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소리였다.

"그런데 정말 놀랐어요. 대통령님이 직접 얘기하실 줄은."

"그러게요."

진심으로 놀랐다.

별생각 없이 낮의 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이 나오길래 보고 있었을 뿐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리스 대통령이 내 이름을 직접 언급하다니 말이다.

물론 이름이 아니고 무기왕이지만.

"전에도 백운 님이 원하지 않으셨던 거 같아서 이름 대신 무기왕 닉네임을 알려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다행이네요. 대혁 님 앞에 계셨으면 바로 둥가둥가 해드렸을 텐데."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이연화.

"아쉽지 않아요? 백운이란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릴 절호의 찬스였는데."

하긴.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했다.

언제 또 한 국가의 대통령이 내 이름을 언급해 줄 기회가 생기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에이, 아니에요. 유명해지는 게 좋기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피곤할 거예요. 저도 안 그랬으면 하고요."

"으으음…!"

…?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이연화.

"나중에 범죄 같은 거 저지를 생각은 아닌 거죠? 보통은 다 유명해지고 싶어서 난린데 그 반대라니."

날카롭군.

언제든 열려 있는 가능성이었다.

최대한 자제하겠지만 실제로 국가에 소속된 유물을 털거나 하는 일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하… 범죄라니. 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살 수 있지.

법이었던 것들을 신나게 악용하면서 말이다.

저벅.

얼마나 걸어왔을까.

처음에 바다로 뛰어들었던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 바로 앞이라 그런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오늘따라 유독 밝고 크게 떠 있는 달까지.

떠나기 딱 좋은 날이네.

"그런데 진짜 이렇게 가실 거예요? 김대혁 팀장님이 서운해하실 텐데."

"연화 님이 잘 말씀드려주세요. 나중에 또 놀러 온다고."

공항에서 이집트로 가는 비행기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내가 한 선택은 그리스에 머무르는 게 아니었다.

이집트까지 한 방에 가진 못하겠지만.

제한되어있는 날개의 연기.

아마 이 연기만으로 한 방에 이집트에 도달하진 못할 것 같았다.

수영도 하고 달리기도 해야지.

그야말로 철인 3종 경기.

최대한 날아가다 연기가 바닥나면 아래의 지형에 따라 종목을 변경할 생각이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떠나시는 거예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뭐랄까."

기태랑의 일도 일이었지만 시간상으로 봤을 때 엄청 촉박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이틀 삼일 정도 그리스에 머무르며 천천히 인사도 하고 휴식을 취한 뒤에 가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내 깊은 곳에선 계속 떠나야 할 때라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단 멈춰 있지 말고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본능의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멈춰 있는 게 익숙하지 않다고 해야 하나,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말하면서도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단순히 말하면 공항에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이집트로 향하기 위해 걷고 있는 지금이 백 배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마치 이 길이 옳은 길이라는 느낌이었다.

"… 백운 님은 정말 바람 같은 사람이네요."

잠시 날 바라보다 바람 같다고 표현하는 이연화.

이연화의 목소리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바람요?"

"누군가 잡으려고 해도 절대 잡히지 않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게 바람의 특징이니까요."

척.

어느새 도착한 절벽에 이연화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멋있다고요!"

"하하…."

멋쩍게 웃으며 절벽 끝으로 가 섰다.

단순히 멋있다는 의미만 담긴 게 아닌 듯하지만, 여기서 더 안다고 해서 내 결정이 달라지는 건 아니기에.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지체 없이 날개를 꺼냈다.

"와… 아까도 봤지만 참."

밝은 달빛을 등진 채 펼쳐진 검은 연기의 날개.

날개를 잠시 쳐다보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아름답네요."

아름답다라.

날개를 보며 멋있다고 생각은 많이 해봤지만 아름답다는 건 또 처음이었다.

"이집트로 가면 뭐하실 거예요?"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실존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데까지는 찾아볼 생각이에요."

"모험가네 모험가야."

이연화가 부럽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음에 또 만나겠죠?"

"그럼요."

너가 안 만나고 싶어도 만나게 될 거란다.

나만 아는 미래를 생각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여기까지 마중 나와주셔서 고마워요. 밤이라 혼자 왔으면 무서울 뻔했는데."

"풉, 백운 님은 참 속에도 없는 말 잘하네요."

웃는 이연화를 바라보며 천천히 날개를 움직였다.

이제 갈 시간이었다.

슥.

악수를 하기 위해 이연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볼게요, 나중에 또 봐요."

"…."

잠시 손을 내려다보던 이연화가 한 발자국 내게 다가섰다.

꼬옥.

"…!"

가볍게 날 안는 이연화.

"오해하지 마요, 그리스식 인사니까."

"네… 넵!"

내가 깜짝 놀라서인지 이연화가 미세하게 웃는 게 느껴졌다.

"또 봐요, 백운 님."

* * *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 세사앙."

오월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아는 노래를 부르며 날개를 펄럭였다.

핸드폰에 있는 GPS를 통해 미리 방향은 잡아뒀다.

이대로 쭉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

휘릭.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머리 위에 떠 있는 달을 바라봤다.

하늘 위에서 보니 더 가깝고 크게 느껴지는 달이었다.

쏴아아아.

아래는 잔잔한 바람을 따라 물결치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 이게 맞구나.

떠나고 나니 새삼스레 느껴졌다.

무척이나 홀가분해진 마음.

이 길이 내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휙!

다시 몸을 원위치시키고 날개로 연기를 모았다.

자 이집트로….

파앙!

연기를 터뜨리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드가자!

124화. 바다 한가운데

너무 기분을 내버린 탓일까.

풍덩.

….

생각보다 훨씬 못 가서 칼데아의 연기가 바닥 나버렸다.

최대한 느긋하게 연비를 생각하며 달렸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홀가분해진 마음에 악셀을 너무 밟은 모양이다.

종목 변경해볼까.

자세를 바꿔 발과 팔을 내저었다.

"음!"

쑤욱.

"파하!"

타이밍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전에 봤던 영화에서 실수로 파!음! 하면 뒤진다고 했기에 신경 써서 호흡을 하는 중.

그나저나 바다는 참… 무서워.

매번 들어오고 나서야 깨닫는 바였다.

햇빛 한 줌 없어 그저 새까맣기만 한 바다.

그나마 달빛이 비추고는 있지만, 조금만 고개를 내려도 칠흑 같은 암흑이 반겨 주는 공포스러운 공간이었다.

저 밑엔 뭐가 있을까.

기둥 앞은 수심이 얕은 편이었다.

거기다 아테네의 힘에 의해 동굴까지 형성되어 있었으니.

실제로 심해다운 심해를 본 적은 없는 것.

물론 보고 싶단 건 아니야.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고.

캄캄한 심해를 생각하니 춥지도 않은데 몸이 절로 떨려왔다.

부디 다음 연기가 찰 때까지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첨벙.

몸을 뒤집어 배영으로 전환했다.

여기가 태평양인지 대서양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바다 한가운데서 여유롭게 즐기는 배영이라니.

정취에 취해버리는 순간이었다.

꿀렁.

취해버린 탓일까.

여유롭게 나아가고 있는 머리맡으로 작은 물살이 느껴졌다.

지금은 바람 한 점 없는 상태.

이런 물결이 생기면 안 될 텐데 어째서일까.

바다는 내게 있어서 저주받은 공간인 건가.

배영에서 몸을 원위치시켜 물살이 밀려오고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쏴아아… 쏴아아…!

점점 강해지고 있는 물살을 보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배… 같은 건가?

바다 밑에서부터 오고 있다면 이런 물살이 생기지 않을 터.

수면 위로 뭐가 다가오는 걸까 지켜보고 있는 사이.

부우우우우---!

우렁찬 뱃소리와 함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거리가 꽤 되긴 하지만 조명이 어찌나 밝은지 내가 있는 곳까지 닿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 죽으란 법은 없구만.

일이 잘 풀리려면 뒤로 넘어져도 뒤통수가 안 깨진다더니.

첨벙!

스퍼트를 올려 조명 쪽으로 헤엄쳐갔다.

냅다 수리검을 던져 이동하면 더 빠르겠지만, 초면인데 너무 놀래키는 듯하여 정상적인 진입 루트를 선택했다.

마침 완벽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있는 배.

생각보다 큰데?

"여기요!!"

다가오는 배를 향해 손을 휙휙 흔들었다.

조명이 저렇게 밝으니 이 정도 거리면 날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터.

"저기요! 저 좀 봐요!"

부우우우우---!!

"사람 있어요!!"

뿌우우우우--!

"사람 있다고오!!"

시간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잠에 든 건지 아무 대답도 없는 배.

아니지, 배 운전하면서 자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배는 속도를 줄일 생각도 없이 힘차게 나를 향해 달려왔다.

어쩔 수 없군.

지성인답게 합당한 허락을 받고 타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날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쩌겠는가.

사사사삭!

옆으로 돌아 빠르게 배에 달라붙었다.

* * *

뚝… 뚝… 뚝.

"…."

그렇게 열심히 기어올라 도착한 배의 갑판.

올라가는 동안 어디로 가서 사람을 찾아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막상 올라와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

갑판에 둘러앉아 무언가를 먹고 있는 사람들.

먹고 마시느라 앞에 있는 날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말이야.

데몬도 나오는데 바다에서 긴장을 풀고 말이야.

애써 남탓을 시전해 보지만, 현재 상황이 무척 이상한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술잔과 음식을 손에 든 채 사람들은 굳어버린 상태였다.

한밤중에 바다에서 물에 폭싹 젖은 물미역 같은 게 기어올라 왔으니 그럴 수밖에.

초면에 뭐야라고 하는 게 납득이 가는 바였다.

"아… 안녕하세요."

"꺄아악! 괴물이야!!"

말씀이 심하시네.

올라온 물미역이 말을 해서인지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지르려면 처음에 지르지 내 얼굴과 목소리를 확인하고 괴물이라 하니 약간 상처가 되는 느낌이었다.

"당신 뭐야!"

"저는 뭐랄까… 조난자…?"

조난 당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상항에서는 배에 올라온 가장 합리적인 이유일 듯했다.

"조난자요?!"

조난자라 소개한 게 효과적이었던 건지 앉아 있던 사람 중 책임자로 보이는 여자가 심각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알이 커다란 둥근 안경에 목까지 올듯한 갈색 머리를 포니테일로 편하게 묶은 여자.

즐겨봤던 모험 영화인 인디아나존손에서 나올 법한 사람이었다.

"사고가 난 건가요!?"

여자의 반응 때문인지 앉아서 음식을 즐기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심각한 얼굴이 된 걸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쁘게 움직이지 마!

괜한 거짓말로 일을 키우는 것 같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 저기요!"

수습을 위해 입을 열었다.

* * *

"더 어이없네요."

"그러게요…. 거짓말 아니죠? 간첩 이런 거 아닌가?"

사람들은 날 취조하듯 둘러싼 뒤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 조난자가 아니라 이집트 가던 길이었어요.

하긴 내가 들어도 안 믿기겠네.

21세기에 비행기 안 타고 헤엄쳐서 이집트 가겠다는 새기가 나타났으니.

"무슨 기네스 도전 그런 건 아니죠?"

"하하… 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찾을 것도 있고 관광도 할 겸 가고 있었어요."

"이 시간에 헤엄쳐서요…?"

"네… 넵."

조금 전 자신을 배의 책임자이자 학자라고 소개한 셀린이 혀를 내둘렀다.

"어디서 사고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죄송합니다! 순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서요."

"여기 좀 앉으세요, 물기 좀 말리게."

셀린의 안내를 받아 갑판의 불가로 몸을 앉혔다.

최신식 배 위에 캠프 파이어라니 신기한 사람들이었다.

"좋은 배네요. 헤엄치다가 이런 큰 배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부러운 눈으로 셀린을 바라봤다.

흔히 돈 많은 이를 바라볼 때 나오는 부러움의 눈빛이 가득한 상태로 말이다.

"부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제 배가 아니라 이집트 정부 소속이니까요."

"정부요? 정부에서 일하시는 건가요?"

슥.

"오 감사합니다."

내민 차를 받아 들어 호다닥 입으로 가져갔다.

호록.

"크으."

"브랜디를 넣은 홍차에요, 몸을 녹여 줄 거예요."

어쩐지 겁나 맛있더라.

홍차를 끓일 줄 아는 사람들이구먼.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질문에 대한 셀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카이로 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학자에요. 나머지 분들은 정부에서 절 지원해주기 위해 나온 헌터, 기관사 분들이고요."

셀린의 말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한 번씩 숙여 보인 뒤 각자의 자리로 떠났다.

한창 무르익을 때 내가 올라와 흥을 깬 모양이었다.

"백운 님이라고 하셨죠? 엄청 용감하시네요, 관리되는 구역이 아닌 곳엔 데몬이 있을 확률이 높은데 수영이라니."

용감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이 무식한쉨이라고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하… 제가 너무 무모했죠. 셀린 님의 배를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안 만나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었을걸요?"

"!?"

갑자기 등장한 의미심장한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짓자 셀린이 손으로 선장실 쪽을 가리켰다.

"저희가 찾고 있는 게 좀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국가 소속 헌터들도 동행을 한 거고요."

"뭘 찾으시는데요?"

인다아나존손에 나올 법한 생김새였는데 역시.

"요새 이집트 영해에서 정체불명의 데몬이 나온다는 제보가 있어서요. 그걸 찾으러 나왔어요. 밤 중에만 등장한다고 해서 지금 찾고 있는 거고요."

영해에서 어업을 하거나 할 테니 정부에서 데몬을 찾는 것까지는 오케이.

그런데 왜 헌터만 와도 되는 일에 대학교의 학자까지 동반하고 있는 걸까?

이런 내 의아함을 읽은 건지 셀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투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제가 타고 있는 건…."

웨에에에에엥!

셀린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배에 장착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타났다!!"

"공격 준비해!"

분주해진 헌터들에 몸을 일으켰다.

경보를 들은 셀린도 사뭇 긴장한 얼굴이었다.

"부딪힌다!!"

쿵!!

"우왁!"

뭘 붙잡을 새도 없이 흔들리는 배에 데굴데굴 굴러가는 몸.

셀린은 다행히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아 충격을 견디는 중이었다.

뭐가 부딪혔길래 배가 이렇게 흔들려.

빠르게 몸을 일으켜 헌터들이 모여 있는 뱃머리로 달려갔다.

"뭐가 부딪힌 거예… 허?"

저것들을 뭐라 불러야 할까.

샥스핀 하나가 웬만한 고래 크기인 샤킨들이 배를 향해 부딪혀 오고 있었다.

기둥 앞에서 봤던 놈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커 보이는 크기.

쩌적.

"옆에도 있습니다!"

옆이란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말도 안 되게 큰 빨판이 배를 휘감는 게 보였다.

뭐야 이 문어쉨은 또.

해물 모듬이야 뭐야!

거대 상어에 이어 거대 문어라니.

옛날 신화 속 바다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놈들이 배를 둘러싸고 있었다.

- 안 만나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었을걸요?

조금 전 셀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건가.

촤르르륵!

가장 앞에 서 있던 헌터가 품으로 손을 넣어 수십 개의 구슬을 꺼내 들었다.

구… 구슬 놀이!?

꺼낸 구슬을 배로 돌진하는 상어들에게 뿌리는 헌터.

콰가아아앙!!

구슬이 바다와 닿기 무섭게 수십 발의 폭발을 일으켰다.

오… 가 아니지.

감탄만 하고 있으면 안 되지.

나도 모르게 이집트 헌터들의 활약을 구경하느라 정신줄을 놔버리고 말았다.

브랜디 홍차 값은 해야지. 

[비젼 수리검]

상어들은 대충 잘 대응하고 있는 것 같으니 달라붙고 있는 문어 다리를 정리할 생각.

쩌적…!

응?

이제 가서 좀 잘라볼까 하는 순간.

배에 들러붙던 문어쉨이 빨판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나의 살기를 느낀 건가.

"샤킨도 물러갑니다!"

생각보다 허무하게 상황이 끝나는 건가.

멋쩍게 꺼내 들었던 수리검을 조용히 집어넣었다.

"선장님…! 전방요!!"

뒤에서 다급하게 들려오는 셀린의 목소리.

그제야 샤킨이 몰려오던 곳에서 헌터들이 고개를 돌렸다.

"허."

"…!!"

조금 전까진 기민하게 움직였던 헌터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고.

배의 갑판이 드리워지고 있는 그림자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집트 쪽 바다는 따듯하다고 들었는데.

헌터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자기 나타난 슈퍼 샤킨과 대형 문어쉨까지.

작정하고 해물 모듬 파티를 벌이는 건가 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니 왜.

왜 저딴 게 있냐고오!!

고오오오…!

배에 그림자를 만들며 다가오고 있는 건 거대한.

거대하단 말로는 30% 부족할 정도로 더럽게 큰, 북극에서나 볼 법한 빙하였다.

125화. 다크메타

이 해물 모듬 새끼들, 이래서 도망쳤구만.

애들이 끈기가 부족한가 생각했었는데.

끈기가 부족한 게 아니라 지능이 넘치는 것이었다.

"우현으로 최대한 꺾어! 부딪히면 못 견딘다!"

"예!"

조금 전 데몬들에게는 재빨리 대응하는 듯 보였지만.

눈앞에 나타난 빙하는 대응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듯했다.

배의 속도를 줄이며 우측으로 꺾는 것 말고는 모두가 충격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

"쉴드 게이지 최대한 채워! 쉴드 양 어때!?"

"방금 있었던 데몬들 공격으로 30% 날아갔습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선장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말로 한 건 아니지만 다가오고 있는 빙하를 보며 쉴드가 못 견딜 거란 걸 직감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우현이라.

배나 항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빙하를 완벽히 피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백운 님! 이쪽으로 오세요!"

선장실에선 나머지 사람들이 모여 각종 방어 도구와 배리어를 펼치고 있었다.

설령 배가 버티지 못할지언정 부상이라도 최대한 줄이려는 것 같았다.

여기서 배 침몰하면 멸망인데.

아까 쫓아오던 해물 모듬이 아예 사라졌을 것 같지 않았다.

빙하의 등장으로 잠시 물러난 것일 뿐.

배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뷔페 식사를 하듯 하나씩 골라잡을 게 분명했다.

물에 빠진 다음에 내가 다 지키는 건 불가능이고.

이집트 헌터들이 바닷속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관건인 셈.

"백운 님!"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잠시 빙하와 아늑한 선장실을 고민하던 중.

빙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

배는 최대한 우측으로 꺾고 있기에 완전 정면으로 부딪히는 건 피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정면충돌만 피할 뿐 얼마 안 가 배의 측면에 빙하가 닿을 거라는 점이었다.

좀 깎아주면 되려나.

저벅.

빠르게 달려가 배의 난간에 발을 걸어 몸을 고정 시켰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내 기행에 할말을 잃은 건지 조용해진 상태였다.

잘 깎아야 된다.

괜히 정면으로 뿌갰다간 빙하가 배로 무너질 테니.

배와 스쳐 지나갈 빙하의 위치를 파악한 뒤.

[앤 보니&메리 리드]

리볼버를 꺼내 봐뒀던 위치로 조준했다.

빙하의 가생이 부분.

저 부분을 깎아 우측으로 꺾이는 배가 닿지 않게 할 셈이었다.

[빛의 구원]

두두두두두두두두!

양손의 리볼버에서 탄환이 뿜어져 빙하로 날아들었다.

콰가가가가가가!!

팥빙수가 갈리듯 사방으로 얼음조각을 뿌려대는 빙하.

시원하게 박살내진 못하지만 원했던 대로 가장자리 부분이 깎이고 있었다.

얼음 깎기 장인처럼…!

그렇게 마이크로 컨트롤을 하며 탄환을 뿌리고 뒤를 돌아봤다.

"어때요!? 이 정도면 가능?!"

잠시 내 행동에 정신이 팔려있던 선장이 빠르게 배의 각도와 빙하를 살폈다.

"가능합니다! 됐어요! 지나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우케이, 가능!

이젠 나도 아늑한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호다닥 달려갔다.

보셨습니까.

이게 한국산 얼음 깎기 장인의 실력입니…!?

쩌적!

휘청!

뿌듯한 얼굴로 신나게 달려가는 중, 아까 봤던 해물 모듬 중 문어쉨이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직접적으로 배 위를 공격하진 않지만, 빨판을 붙여 우측으로 꺾이던 배를 왼쪽으로 다시 몰아붙이는 녀석.

마치 배가 빙하를 피하는 걸 방해하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여기 바다 데몬들 아이큐 머선 일…? 

하는 행동이 진짜 데몬이 맞나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비젼 수리검]

가장 가까이 있는 다리를 향해 수리검을 날렸다.

콰득!

아무리 두꺼워도 문어는 문어인지 가볍게 수리검에 썰리는 문어발.

[비젼]

그렇게 수리검으로 몸을 옮겨가며 배에 달라붙어 있는 다리들을 잘라냈다.

순식간에 잘라내진 문어의 다리들.

풍덩!

잡으러 가는 건 오바겠지.

물속으로 사라지는 문어쉨을 향해 입맛을 다신 후 사람들이 무사한가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

문어 발을 제거하기 위해 나오던 중 상황이 종료되자 입을 벌린 채 날 바라보고 있는 헌터들.

허공에서 헌터들을 향해 살인 미소를 한 번 날려 준 후 입을 열었다.

"다시 배리어 안으로 들어가세요!"

"네… 네!"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빙하를 바라봤다.

흠… 남은 건 저건데.

거의 도달한 빙하와 배의 사이 거리를 가늠했다.

굳이 선장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부딪히는 건 100%일 듯했다.

되려나.

짤막한 고민을 마친 후.

후웅.

착지하지 않은 채 배와 빙하 사이로 수리검을 던졌다.

잠시 후면 제대로 키스각이 나올 배와 빙하.

눌려서 터지는 거 아니겠지.

보통 사람이면 터지겠지만.

이 정도로는 터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기에.

배가 부딪힐 지점인 빙하로 날아가 수리검을 박아 넣었다.

쿠구구구…!!

오우야.

나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배를 보니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짤막한 고민만 하고 와서인지 이거 맞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간다.

살아있는 충돌 방지 쿠션!

[유탈라스 - 2단계 의태]

유탈라스의 비늘로 몸 주변을 감싼 후.

대부분의 비늘이 둘러싸인 오른손으로 배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와라, 돛단배쉨!

드드드득!

* * *

"…."

난리가 났던 배 안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빙하를 무사히 지나쳤음에도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선장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셀린과 선원들.

아직 위험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잠시 패닉이 와 다음 행동으로 몸이 나아가지 않을 뿐이었다.

'뭐… 뭐야.'

안경알만큼이나 커진 셀린의 눈이 비껴나간 빙하를 바라봤다.

백운이 배에 나타난 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었다.

비에 쫄딱 젖은 채 나타나 뭐 하는 사람인가 했었는데.

- 두두두두두!

엄청난 화력으로 빙하를 깎아냈던 백운.

원거리 공격에 제대로 특화된 능력자구나 생각한 사이, 이번엔 수리검으로 순간이동을 해가며 배에 달라붙은 빨판을 잘라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말을 잃기엔 충분했지만, 마지막으로 빙하와 배의 충돌 지점으로 몸을 날린 백운.

- 드드드드득!

엄청난 굉음이 들렸지만 배가 빙하와 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무언가 엄청난 힘이 빙하와 배 사이에서 둘이 충돌하지 않도록 배를 밀어내고 있었다.

- 죽고 말 거야…!

무모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강해도 사람인 이상, 거대한 빙하와 배 사이에서 압력을 버텨낸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체도 안 남고 죽었을 백운을 떠올리며 곧 있을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 ….

우려했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배는 빙하를 무사히 비껴갔고.

충돌할 거라 생각했던 빙하는 배를 지나쳐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사사삭!

그리고 잠시 후.

조금 전 등장했던 것처럼 다시 물미역이 된 백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휴! 쥐포 될 뻔했네."

이마에 물기를 훔치며 멀어지는 빙하를 바라봤다.

대충 계산하긴 했지만 비늘이 다 사라지기 전에 빙하를 못 비껴갈까 잠시 쫄았었다.

"쥐포 먹고 싶네."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는 말을 내뱉은 후.

여전히 선장실 쪽에 멈춰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 뭐하지?

빙하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 놀란 눈으로 일제히 날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

요즘 들어 이렇게 주목받는 일이 부쩍 늘어난 것 같았다.

"괘… 괜찮으시죠!?"

내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게 맞나 잠시 고민이 됐지만.

이런 정적이 싫기에 먼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배… 백운 님! 괜찮아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호다닥 달려오는 셀린과 선원들.

10분 전까지만 해도 이건 웬 물미역이누 하는 눈이었는데, 지금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마치 21세기 구세주를 바라보듯이 날 우러러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하하! 뭐 이 정도야."

쥐포가 될까 잠시 쫄았었지만, 잊고 태연한 척을 시전했다.

"그런데 이집트 바다 원래 이런가요? 아니 무슨 대형 상어랑 문어까지는 그렇다 쳐도 빙하가 나와요."

난처하게 웃어 보이는 셀린.

셀린이 데몬이 나타나기 전 하려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다크메타요?"

셀린에게 들은 건 무척이나 낯선 이야기였다.

나름 회귀를 한 입장으로써 남들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도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

"네, 아직 진짜 정체는 밝히지 못했어요. 그냥 이집트 정부에서 다크메타라고 명칭을 정한 것뿐이죠."

다크메타라는 물질에 의해 평소에 잠잠했던 데몬들이 날뛰고 있단 것이었다.

심지어는 아까 봤던 해물 모듬처럼 크기와 모습까지 변형되어서 말이다.

"데몬만 변한 게 아니에요. 멀쩡히 있던 나무가 갑자기 데몬으로 변한다던가, 사막 한가운데서 아까 같은 얼음덩이가 나타나는 이상 현상까지 발생했어요."

이상 기후야 개방과 데몬이 등장한 후 세계 각지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긴 했지만.

사막 한가운데서 얼음덩이가 나타나는 것 같은 극단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이상 변화가 일어났던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셀린이 핸드폰에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검은색 슬라임처럼 생긴 묘한 생김새의 물체였다.

"이게 다크메타군요."

고개를 끄덕인 셀린이 말을 이어나갔다.

"데몬 같은 생명체에 들어있던 다크메타는 숙주가 죽음과 동시에 사라졌어요. 그나마 남은 게 사막 얼음덩이에서 채취했던 거죠."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게 있나요?"

"하나 있죠."

한숨을 내쉰 셀린이 텅텅 비어있는 보고서를 보여줬다.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던 물체라는 것. 이것뿐이에요. 그래서 다른 케이스와의 비교 분석을 위해 다크메타가 깃들어 있을 데몬이나 이상 현상을 찾아 바다로 나온 거고요."

다크메타 채집단이었구먼.

"그나마 알아낸 게 있다면 데몬에 있는 다크메타도 순식간에 냉동시키면 보존할 수 있다는 거였거든요."

아까 그 상어랑 문어 새끼를 산 채로 잡아서 다크메타를 끄집어낸 다라.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까이!"

선장이 조금 전 피했던 빙하에 천천히 배를 댔다.

따듯한 수온을 자랑하는 이집트 한가운데 있는 빙하이니 다크메타가 있을 거란 것.

"저희도 내리죠."

먼저 몸을 일으킨 셀린을 따라 배 밑으로 향했다.

마치 북극 한가운데 있는 듯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빙하.

"제가 개방한 능력은 탐구. 타겟팅으로 잡은 물체를 연구할수록 물체에 깃든 성질과 성분을 알아낼 수 있어요. 같은 성분이 있다면 대략적이지만 위치도 추적할 수 있고요."

앞장선 셀린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탐구란 능력을 통해 다크메타의 방향을 잡고 있는 듯했다.

사아아!

…!!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엄청난 한기.

빙하에서 뿜어지고 있는 단순한 냉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세하지만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다른 기운이 함께 섞여 있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저벅.

셀린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점점 커지는 한기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 모습을 드러낸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본능적인 확신이 들었다.

정체불명의 물체를 따라 도달할 수 있는 곳. 

다크메타가 탄생했을 근원지에는 위험한 게 있다는 확신이 말이다.

126화. 다크메타를 쫓아서

"이쯤일 거예요."

셀린의 말에 뒤에 있던 헌터들이 장비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빙하 전체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가장 짙게 올라오는 곳.

다크메타는 빙하의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드드드드드!

헌터들이 기계를 이용해 셀린이 가리킨 곳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초조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셀린.

"저 다크메타를 꺼내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는 건가요?"

"그럴 거예요. 제 능력이 제대로 발동하기 위해선 다크메타에 흔적이 많이 묻어 있어야 하거든요. 사막의 빙하에서 발견한 다크메타엔 그 흔적이 적어서 많은 걸 알아내지 못했어요. 단지 탐구로 타겟팅을 했으니 근처에 다른 다크메타가 있을 때 알아낼 수 있다 정도를 얻은 거죠."

설명을 마친 셀린이 날 바라봤다.

"백운 님은 이집트로 가시던 중 아니었나요? 괜히 배에 타셔서 고생만 하시네요. 저희야 백운 님 덕에 위기를 넘겼지만요."

"아니에요, 힘들게 헤엄치던 절 태워주셨으니까요."

태워줬다기보단 내가 알아서 탔지만, 어쨌든.

"혹시 여기서 이집트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나요?"

"음… 얼마 안 될 거예요. 애초에 그리스부터 이집트 카이로까지는 2시간 정도 거리니까요."

2시간이라.

처음에 칼데아로 날아온 것과 헤엄친 거까지 합치면 한 시간 거리 정도는 넉넉하게 왔을 듯했다.

좀 있다가 연기 차면 가야겠다.

어차피 젖은 김에 다시 헤엄치나 칠까 했지만, 아까 득실거리던 상어와 문어를 봤더니 몹시 꺼려졌다.

편하게 배에 좀 있다가 칼데아 쿨타임이 돌면 여유롭게 날아갈 생각.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조금만 있다가 사라질 예정이라, 하하!"

"그렇군요."

멋쩍게 웃는 날 바라보며 미소 짓는 셀린.

이 인간이 또 어떻게 사라지려는 건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셀린은 사라지는 방법 대신 다른 걸 물어왔다.

조금 전과 달리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표정.

"혹시 백운 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를 더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다크메타를 쫓다 보면 오늘처럼 위험한 일이 더 생길 거 같은데… 정부에서의 지원은 한계가 있거든요. 보상은 충분히 하겠습니다."

정확하십니다, 이거 쫓아가다 보면 엄청 위험해질 거예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위험해 보인다고 쫓아가지 말라 경고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곳곳에서 다크메타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으니 어쨌든 이집트 입장에선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하… 이거 어쩌죠, 죄송합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보면 매정한 새끼!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본능으로 느껴지는 확정적인 위험으로 걸어 들어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무기 찾아야 된단 말이야.

촉박은 아니어도 멀지 않은 시일 내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전까지는 최대한 사방팔방을 뒤지며 무기를 찾아야 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 관련 없는 다크메타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순 없었다.

꾸벅.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셀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싱긋.

"아니에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건 이집트에서 해결해야 할 일인데 저도 모르게 그만."

살짝 목례를 한 셀린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셀린의 눈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도시의 건설 현장을 방불케 하는 드릴 시공 현장.

한참을 파 내려가던 헌터가 고개를 들어 셀린을 쳐다봤다.

"보입니다!"

"!!"

헌터의 말에 셀린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탈주하겠지만 한 번 보기나 하자.

회귀 전에도 못 봤던 물체라 그런지 호기심이 들었다.

저벅.

그렇게 셀린을 따라 다크메타로 다가갔다.

보자보자, 다크메타 보…?

번쩍.

셀린을 따라 도착한 얼음 구멍 위.

열심히 드릴로 파놓긴 했지만 다크메타에 닿으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았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빙하가 달빛에 반사된 건가 했었는데.

저 아래 얼음에 묻혀 있는 다크메타는 선명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될 놈은 뒤로 자빠져도 뒤통수가 멀쩡하다.

무기가 있을 장소를 가리키는 보라색빛이 말이다.

* * *

드드드드…!

셀린의 1차 확인 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발굴 작업.

기웃기웃.

"…?"

"크흠!"

발굴을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뿜어지고 있는 보랏빛.

내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보랏빛에 나도 모르는 사이 주변을 기웃거리고 말았다.

"백운 님…? 곧 가신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뜨끔.

의아한 눈으로 물어오는 셀린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냥 안 가고 조용히 뭉개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묻힐까 싶었는데.

셀린의 얼굴을 보니 그러기는 힘들 것 같았다.

"혹시 모르잖아요. 다크메타를 꺼냈을 때 강력한 데몬이 나타날 수도 있고요."

"…!"

뜻밖의 대답에 놀란 모양인 셀린.

눈망울이 촉촉해진 걸 봐선 조금 전 내 말에 살짝 감동을 받은 듯했다.

감동 받지마!

살짝 찔리는 양심을 뒤로하고 머리를 긁적여 보였다.

부끄럽지만 지금 생각하고 계신 게 맞다는 무언의 제스쳐였다.

피식.

살짝 웃음을 터뜨린 셀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봤다.

"백운 님 츤데레셨군요."

"하하… 제가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졸지에 매정한 놈에서 츤데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빨리 짱구 좀 굴려보자.

서서히 드러나는 다크메타와 엄청난 오해 중인 셀린을 번갈아 보며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일단 보랏빛에 손을 대 흔적을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 탐구 능력을 가진 셀린과 함께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저 다크메타가 가지고 있는 흔적에서 명확한 장소가 나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아직까지 보랏빛이 무기가 있는 장소를 여기입니다! 하고 명확하게 찝어준 적은 없었다.

이것저것 유추하며 쫓다 보니 만났거나 상황에 흘러가다 보니 운명처럼 만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단 좀 비벼놓자.

다크메타를 함께 찾지 않겠냐는 셀린의 부탁을 거절한 게 불과 10분 전이었다.

아무리 태세변환을 패시브로 가지고 있는 생존형 인간이라 할지라도 약간은 뻐쩍지근한 고런 짧은 시간.

사삭.

스리슬쩍 발굴을 지켜보고 있는 셀린 옆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다른 데몬이 나타나거나 하진 않는 모양이네요."

"아… 네. 다행이에요. 아까 빙하까지 만났을 땐 정말 아차 싶었거든요."

"셀린 님은 안 무서우세요? 다크메타를 쫓다 보면 아까 같은 위험이 더 있을 텐데요."

셀린이 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정부에 헌터의 지원을 조금 더 요청해볼 생각이에요. 쉽진 않겠지만요."

"지원받는 게 쉽진 않은가 보네요."

"그렇죠. 저한테 의뢰한 게 정부긴 하지만, 정부에선 다크메타 상황이 해프닝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렇다 보니 소중한 자원인 높은 급수의 헌터까진 지원해주지 않는 거죠."

어느 국가나 상위 급수의 헌터는 귀하구먼.

정부는 아직 다크메타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저 이상기후와 이벤트적인 현상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르거든요."

말을 이어가며 셀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크메타에 의한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빈도가 점점 늘고 있어요. 정부에선 다크메타에 의한 것이라는 확증이 없다며 쉬쉬하고 있지만요. 아마 인정해버리는 순간 여론에서 난리가 날 테니 정부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

셀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한테 동행해달라고 한 거구만.

앞으로 위험해질 게 예상되는데도 정부의 입장이 저렇다 보니 빵빵한 헌터 지원을 받을 순 없는 상황.

셀린은 다크메타의 조사와 연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라도 보다 강한 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도 아직 모든 걸 알아낸 게 아니다 보니 이런 말은 조심스럽지만."

스윽.

고개를 돌린 셀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늘어나는 다크메타를 이대로 뒀다간 이상 기후 수준이 아니라 이집트 전체가 위험해질 거라고… 전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실 놀라진 않았지만, 조심스레 말한 셀린의 말에 맞춰 나도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부터 나라를 지켜온 건 남들보다 먼저 의심하고 대비를 한 사람들 덕분이었죠."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셀린의 말에 힘을 실어주기까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셀린 님이 그런 분이군요!"

"네…? 그 정도까지는…!?"

저벅!

한 발자국 크게 다가가자 화들짝 놀라는 셀린.

셀린을 바라보며 비장한 눈빛을 마구 뿜어줬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거시는 셀린 님을 그냥 둘 순 없겠네요!"

"아니 아직 목숨까지는…."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확실히 지켜드릴게요."

"…! 정말인가요?"

말도 안 되는 태세변환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셀린이 지켜준다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진행이 이상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자신의 원하는 바였어서 그런지 반가운 얼굴이었다.

"다 팠습니다! 이제 꺼내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헌터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가볼까요?"

셀린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인 후 조용히 뒤를 따라나섰다.

"말씀하셨던 보상에 대해선 조금 있다가 들어보겠습니다."

처음에 약속했던 보상에 대한 속삭임과 함께 말이다.

* * *

투둑… 투둑.

땅을 팠던 헌터들이 장비를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다크메타를 끌어 올렸다.

보랏빛이 꺼려지긴 처음이네.

예전엔 보랏빛만 보면 눈이 뒤집혀 손을 뻗었었지만, 이번엔 본능적인 꺼림직함이 느껴졌다.

다크메타가 올라옴과 동시에 보랏빛이 강렬해진 만큼, 다크메타가 갖고 있는 한기와 불길함 역시 커졌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이걸 손대도 되는 건가 망설여지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만져야 되나.

올라오고 있는 다크메타 주변엔 특수한 케이스를 가진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 잠시만요!

하고 뚫고 가서 다크메타를 슥 만지기엔 무리가 있었다.

보랏빛이라 본체가 바로 사라지진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인 것.

황금빛이었으면 만진 후에 칼데아로 호다닥 째야 할 뻔했어.

첫 국가 범죄를 남길 뻔한 위기였는데 다행이었다.

쯧.

올라오는 다크메타를 보며 혀를 찼다.

하도 불길한 한기가 느껴져서 만지기는 꺼려졌지만, 어쩌겠는가.

눈앞에 있는 무기의 흔적을 못 본 척할 수도 없는 것.

샤샥.

모두가 다크메타에 눈이 쏠려있는 지금.

빠르게 움직여 다크메타를 끌어 올리고 있는 헌터 뒤로 접근했다.

충분한 넓이로 드릴질을 했다 보니 사람 한 명쯤은 쏙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었다.

"거의 다 올라왔습니다! 케이스 준비해주세요!"

땀을 뚝뚝 흘리며 거의 밖으로 나온 다크메타를 들어 올리는 헌터.

헌터는 들어 올려지는 다크메타에 집중하느라 앞쪽으로 무게가 쏠려있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한, 몹시 위태로운 자세였다.

툭.

"어!!"

무릎으로 등을 슬쩍 밀자 다크메타를 올리던 헌터가 균형을 잃고 휘청이기 시작했다.

올리고 있던 다크메타마저 덩달아 흔들리고 떨어지려는 순간.

"제가 잡을게요!"

혼신의 연기를 뿜어내며 다크메타로 손을 뻗었다.

* * *

이건 또 뭐냐.

다크메타로 손이 닿기 무섭게 빨려 들어온 공간.

공간이 아직 제대로 형성이 안 된건가 싶었지만.

잠시 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하.

등 뒤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이번엔 진짜… 쉽지 않겠네.

127화. 근원지

눈 앞에 펼쳐진 건 암흑이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사방이 온통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드득.

그리고, 단순히 어두운 게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은 약간씩이지만 움직이고 있었다.

다크메탄가.

빙하에서 보랏빛을 띠고 있던 다크메타는 그리 큰 크기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크기였다.

주먹만 한 놈이 수온 높은 이집트 바다에 빙하를 만들어냈다.

그런 다크메타가 지금 내 주변을, 정확히는 내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을 메우고 있었다.

주먹만 한 게 빙하 하나를 만들어내는 수준이라고 봤을 때.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게 다크메타가 맞다면.

끔찍하네.

바다에 흘러나온 건 극히 일부의 다크메타일 뿐 문제는 아직 시작조차 않은 것이었다.

거기다 사방에 있는 다크메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한기…?

허.

주륵.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분명 몸은 한기에 반응해 오싹한 상태임에도 땀이 흐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크메타가 뿜어내는 게 아니었네.

공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알 수 있었다.

빙하에서 만진 다크메타가 뿜어내던 한기부터 지금 날 둘러싸고 있는 한기까지.

처음엔 다크메타란 물질 자체가 뿜어내는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두근.

누구냐.

꽤 떨어진 거리였다.

내 시야가 닿는 끝자락.

그곳 역시 다크메타가 가득했지만, 그 뒤로 누군가가 있었다.

밖으로 빠져나온 다크메타에서마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베여버리는 엄청난 한기를 지닌 누군가가 말이다.

뭐가 있는 거냐.

저벅.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한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흔적의 공간에서 상대는 날 보지 못한다.

일방적으로 내가 볼 수 있을 때 봐둬야 했다.

장소도 봐야 돼.

한기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쉬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 한 점 없는 공간.

이것만 봤을 땐 사방이 막혀 있는 실내 공간인가 잠시 생각도 들었지만,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이곳이 실내가 아니라는 걸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태양은 또 왜 저래.

두 개의 태양… 아니지.

정확히는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검은색의 구체에 의해 서서히 삼켜지고 있었다.

달이 태양의 일부나 전체를 가리는 일식과 모양 자체는 몹시 흡사했지만. 

다른 게 있다면 태양을 가리는 수준이 아니라 삼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태양을 삼키고 있는 게 달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얼마 안 남았는데.

태양은 이미 1/5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나머지는 침범하고 있는 어둠에 의해 완벽히 집어 삼켜진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화악!

…!?

순간이지만 오른쪽 뺨으로 무언가의 온기가 느껴졌다.

다크메타와 몸서리치게 만드는 한기만이 가득한 공간.

온기란 게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에서 느껴진 따듯함, 정확히는 뜨거움에 가까운 온기였다.

슥.

고개를 돌려 온기가 느껴졌던 오른쪽을 주시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다크메타 속.

번쩍.

!!!

계속해서 움직이는 다크메타에 의해 잠시였지만, 익숙한 황금빛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나오는 거야!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날개를 꺼내 빛이 보였던 곳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뜨거워지는 온기.

이젠 온기라고 부르기 힘든 수준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갔다간 타버리고 말 듯한 강력한 열기.

파악!

"우악!"

무언가에 반응한 칼데아 윙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몸이 다크메타 속으로 나동그라졌다.

[지… 켜]

수많은 다크메타가 몰려들고 있는 중심 속.

아주 작지만 선명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렇게 작은 불꽃임에도 이 정도 거리까지 열기를 뿜어내다니.

[지켜라]

다시 한번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

지키라고…? 뭐를?

꿀렁.

…!

불꽃이 보이는 위치까지 와서야 알게 되었다.

사방에서 움직이고 있는 다크메타들.

규칙 없이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다크메타는 지금 바라보고 있는 불꽃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마치 타오르고 있는 마지막 불꽃을 꺼버리려는 듯 말이다.

[불꽃을]

화륵.

[지켜라]

화아악!

불꽃을 지키라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주변을 감싸고 있던 공간이 흩어졌다.

* * *

"꺄악!"

"으아아!"

시야가 돌아오기도 전 들려온 건 사람들의 비명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내가 공간에 들어갔다 온 건 찰나의 순간일 터였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을 리가 없는데 어째서?

"…?"

다시 돌아온 빙하를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 발라당 넘어져 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

"다들 왜 그러세요?"

사람들의 눈을 보니 어지간히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배… 백운 님, 괜찮으세요?"

"백운 님이 다크메타를 잡는 순간에 말도 안 되는 한기가…!"

아.

손에 쥐여진 다크메타를 바라봤다.

지금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건 내가 잡고 있는 다크메타의 한기가 아니었다.

조금 전 공간을 들어갔다 나오며 내 몸에 밴 한기였다.

진짜 미친 한기구만.

보통 한기라는 건 약간 몸을 들썩이며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정도인데.

잠시 있었던 것만으로도 여러 사람이 저렇게 발라당 넘어갈 정도의 한기가 몸에 베어버리다니.

결국 못 봤네.

다크메타에 둘러싸여 있던 존재.

공간 자체를 말도 안 되는 한기로 가득 채우고 있던 존재가 뭔지는 결국 확인하지 못했다.

쯧.

들고 있는 다크메타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아까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공간에 다녀오며 다시 한번 확신이 들었다.

이번 무기 찾기는… 개빡세다.

* * *

콕콕.

….

옆에서 조심스럽게 날 찔러보는 셀린.

무슨 사람이 콕콕콕 스파게티도 아니고 말이야.

뭐하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셀린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좀 가라앉았네요."

"그렇게 심했었나요?"

셀린이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가까이 있었으면 숨이 멈출 것 같은 한기였어요. 뭔가 춥다… 라는 느낌이 아니라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몸에 배인 한기로도 그 정도라면.

보통 사람이 그 공간에 들어갔다간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백운 님은 정말 괜찮으세요? 어디서 갑자기 그런 한기가 나온 걸까요."

"전 괜찮아요, 그러게요. 다크메타를 손으로 잡아서 그런가."

보랏빛을 통해 들어갔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다크메타 탓을 하며 케이스를 바라봤다.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들에 내가 직접 케이스로 옮겨 담아 준 다크메타.

"어때요? 셀린 님이 탐구 능력이 제대로 발동할까요?"

"네, 충분할 거 같아요. 케이스가 흔적이 흩어지는 걸 막아주고 있으니 이대로 연구실로 가져가면 돼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들어갔던 공간을 떠올렸다.

다크메터가 움직이며 불꽃이 드러났고, 그 불꽃에 다가가자 칼데아가 순식간에 풀렸었지.

칼데아의 주인인 이카로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카로스는 태양을 견딜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칼데아에는 태양이 없는 밤에만 꺼낼 수 있다는 제약이 걸려있었다.

날개가 풀린 걸 보면 일반적인 불이 아니야.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른 건 이집트로 향한 이유, 태양의 신 라였지만.

아직 단정 짓기에는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슥.

고개를 돌려 케이스 안의 다크메타를 살피는 셀린을 바라봤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내가 들어갔던 공간이 어딘지 특정하지 못한 상황.

"셀린 님, 혹시 연구소에 빈 쇼파 하나 없나요?"

"네…?"

이집트조차 처음 와보는 내가 혼자 찾기보단.

현지에서 학자를 하고 있는, 탐구라는 능력을 가지고 다크메타를 쫓고 있는 셀린과 함께 하는 게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공간 특정됐으면 째려고 했는데 보류다.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놀란 셀린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같이 좀 가자는 말을 이제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도 있으니까 걱정마세요."

* * *

배에서 내려 도착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내리자마자 밤인데도 불구하고 후덥지근한 날씨가 느껴졌다.

여기가 피라미드의 나라구만.

다른 나라를 이렇게 어거지로 온 건 또 처음이었다.

매번 비행기를 탄 뒤 합법적인 입국 절차를 거쳐서 들어왔는데 말이다.

- 백운 님의 입국 심사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두겠습니다. 한국 국가직 소속 헌터시니 신분상 문제는 없을 겁니다.

배에서 내리며 정부 소속 헌터들이 해준 배려였다.

맞네, 나도 모르게 불법 체류자 될 뻔했네.

막무가내로 이집트로 가즈아 하면서 출발해서일까.

입국 심사 같은 건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럼 연구소로 갈까요?"

"아, 네."

케이스를 든 정부 헌터 두 명과 함께 앞장서 걸어가는 셀린을 따라갔다.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못 했네요, 전 이집트 정부 소속 헌터, 무하타라고 해요."

머리를 스포츠로 짧게 짜른 무하타가 손을 건넸다.

"백운입니다!"

무하타는 샤킨이 배를 쫓아올 때 구슬을 뿌려 폭발을 일으킨 헌터였다.

"전 헤리아라고 해요."

보라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어디선가 소환한 쇠사슬로 케이스를 들고 있는 헤리아.

손이 남지 않는 헤리아에겐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제가 좀 들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이게 룰이라서요."

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향해 헤리아가 입을 열었다.

"제 능력은 사슬 봉인으로."

휘릭.

헤리아가 케이스를 든 반대쪽 손을 들어 올리자 굵은 쇠사슬이 뿜어져 나왔다.

"제가 죽기 전까지는 안 풀리는 사슬을 조작할 수 있거든요. 정부에서 지정한 장소까지는 맡은 물건에 감은 사슬을 절대 해제시키지 않는다. 이게 정부의 룰이에요."

"아하!"

설명을 들으니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헤리아 혼자 들고 가는 게 마음이 불편하긴 하지만, 내가 좀 불편하다고 남에 국가 룰을 어길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나란히 걷고 있던 무하타가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 헌터들은 다 백운 님처럼 강한가요? 아까 배에서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으음."

무하타의 물음에 잠시 턱을 문질렀다.

강하다라는 단어를 들으니 단번에 떠오르는 두 사람, 비광과 기태랑.

"다는 아니지만 괴물들이 있긴 하죠."

무하타가 역시!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집트에도 있거든요, 괴물같이 강한 분이."

"오…?"

자신이 존경하는 상관인지 유독 눈을 반짝이는 무하타.

"이집트의 수호자 혹은 모래의 신이라 불리는 분이에요. 이집트 국가직 1급이죠."

"오오…!"

모래의 신이라니.

듣기만 해도 벌써 강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었다.

어…?

연구소로 가는 김에 얘기나 더 들어보자는 생각에 입을 열려는 찰나.

익숙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백운 님…?"

갑자기 멈춰 서서인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세 사람.

그런 세 사람을 뒤로하고 발견한 문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이로의 도심 한가운데 바닥.

….

거대한 태양과 그 태양의 반을 가리고 있는 어둠의 원.

공간의 하늘에서 봤던 문양이 조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128화. 해와 어둠

갑자기 멈춰 선 탓인지 앞장서던 셀린이 옆으로 다가왔다.

"으음."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내가 바라보고 있는 문양을 살피는 셀린.

"해와 어둠 혹은 태양의 신 라와 혼돈의 신 세트의 균형이라고도 불리는 문양이에요."

"오…? 이집트에서 유명한 문양인가요?"

"그럼요."

어느새 다가온 무하타와 헤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있어선 라와 세트는 가장 유명한 신이니까요. 고대에도 가장 많은 이가 섬겼던 신이기도 하고요."

"당연히 해 쪽이 라, 이 어두운 원이 세트고요."

세 사람의 설명을 들으며 문양을 살폈다.

공간에서 봤던 것과 같았지만, 조금은 달랐다.

새겨져 있는 문양은 정확히 해와 어둠이 반반이었으나 공간에선 분명 어둠이 해의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있는 상태였다.

"해와 어둠이 딱 반반인 느낌인데 지역마다 문양이 새겨지는 기준이 다른가요?"

질문을 들은 셀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문양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건 균형이거든요. 해와 어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요. 그렇다 보니 엉뚱하게 그린 게 아니라면 당연히 반으로 나뉘어 있을 테고요."

라와 세트, 그리고 균형이라.

공간에서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던 불꽃을 떠올렸다.

아직 확정 지을 순 없지만 만약 그 불꽃이 라의 불이라면.

내가 들어갔던 흔적의 공간이 라와 세트의 공간이라면, 셀린이 말한 둘 사이의 균형은 어긋나고 있는 것이었다.

공간의 시간대가 현재인지 과거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균형이 어긋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어긋나버린 건지도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공간의 시간대가 현재이길 바라는 게 최선이겠지.

분명 하늘에 떠 있던 어둠은 태양을 삼켜가고 있었다.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던 불꽃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양의 다크메타에 의해 조금씩 삼켜지며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던 상태.

만약 공간의 시간대가 과거이고 태양과 불꽃 둘 다 어둠에게 삼켜졌다면, 이미 무기는 내 손을 떠나버린 걸 수도 있었다.

"백운 님, 이집트 신화에 대해 관심 있으신가요?"

"하하… 옛날에 조금 읽은 정도에요."

셀린이 말한 해와 어둠 문양은 처음 보는 거였지만, 유물관에 머무르며 라와 세트에 대한 신화를 읽기는 했었다.

라와 세트는 서로 싸우는 사이가 아닐 텐데.

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태양의 신 라는 세트를 거두어준 은인이었다.

그렇기에 악신 혹은 혼돈의 신이라 불리며 통제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세트도 라만큼은 건들지 않았다고 신화에 쓰여 있었다.

신화가 절대적으로 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검증이 된 이야기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셀린을 바라봤다.

"문양이 담고 있는 의미가 균형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라와 세트가 대립하는 관계인 건가요? 제가 읽었을 땐 대립보단 우호와 상호 존중 정도로 봤었거든요."

셀린의 얼굴이 오오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생각보다 신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자 감탄하는 것 같았다.

"맞아요, 둘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지 라이벌이라던가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자리에 쭈그려 앉은 셀린이 묘한 눈으로 문양을 바라봤다.

"세트의 어둠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증식하며 퍼졌다고 해요.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악신과 혼돈의 신이고요."

증식.

흔적을 통해 봤던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많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다크메타.

좀 끔찍하네.

그 정도 양의 다크메타가 다시 증식을 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주먹만한 양의 다크메타만 밖으로 나와도 빙하를 만들어내는데, 공간에 있던 다크메타가 밖으로 터져 나와 무한 증식을 한다면.

멸망각 아닌가…?

설마 흔적으로 본 게 세상의 멸망 전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트의 증식하는 어둠과 혼돈에 대해서는 해석이 좀 갈리는데요. 세트 본인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퍼지는 혼돈을 두려워했고, 그렇기에 세트를 아끼는 라가 태양의 힘으로 제어해주며 균형을 유지했단 해석이 하나 있고요."

"또 다른 해석은요?" 

슥.

자리에서 일어난 셀린이 웃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세트의 본질이 혼돈과 어둠이었기에. 자신을 거둬준 라까지 집어삼키고자 무한에 가까운 시간동안 서로 싸우고 있다는 해석이죠."

"오… 그렇군요."

셀린이 말한 해석 중 공간의 상황에 가까운 건 두 번째였다.

아무리 봐도 태양과 불꽃을 집어삼키는 다크메타에 존중 따위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태양의 신 라는 완전 킹왕 넘사로 센 줄 알았는데 비실비실해진 건가.

어느 각도로 보나 싸움이 끝나는 건 시간 문제처럼 보였었다.

싸운다는 표현보다는 라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테니 말이다.

"만약 균형이 깨져서 세트가 태양을 삼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음."

셀린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혼돈과 어둠이 세상을 집어삼키겠죠?"

* * *

늦은 밤, 카이로 도시 근처의 작은 마을.

"크르르르!!"

마을을 향해 수십 마리의 데몬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 아버지!"

"일어나세요! 데몬이에요!"

밤 중에 갑자기 나타난 데몬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도심지에 비해 경비가 허술한 외곽일지라도 마을로 오기 전 경계에는 국가 소속 헌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이렇게 코앞까지 데몬이 나타난 적이 없었던 것.

"데루가인데… 크기가 왜 저러죠?"

마을에 상시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전방으로 나섰다.

평소엔 평화로웠던 마을이었던 만큼 헌터들도 현재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달려오고 있는 데몬은 일반적인 개체보다 몇 배는 덩치가 커다랬기에 긴장은 최고조로 달하고 있었다.

"지… 지원 요청해."

점점 가까이 오며 그 크기를 자랑하는 변이 데루가에 공격 준비를 하던 헌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도 또한 기존보다 훨씬 빠른 데루가 무리.

단순히 크기만 커진 게 아닌 듯했다.

"전방은 나와 세 명만 방어한다! 나머지는 주민들 대피시켜! 빨리!"

온전히 막을 수 없단 판단에 지휘를 맡은 헌터가 지시를 내렸다.

일반적인 데루가였다면 방어선을 세운 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테지만 달려오고 있는 놈들이 수십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크아아아아!"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와 헌터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데루가.

"시간이라도 벌어야 한다!"

데루가가 죽음을 직감한 헌터들에게 거대한 발을 치켜들었다.

사아아…!

그 순간.

꾸드드득!!

어디선가 솟아 나온 모래가 날아들던 데루가를 집어삼켰다.

"크… 크르… 크."

드드… 우둑!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치다 모래의 압력에 못 이겨 그대로 뼈가 분쇄되어버린 데루가.

"이 모래는…!"

헌터들이 두리번거리며 모래를 일으킨 주인을 찾았다.

낯선 기술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모래를 다룰 순 있는 헌터라면 단 한 명.

드드드!

누구인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데루가들이 딛고 있는 모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

그리고 잠시 후.

마을에 있던 헌터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넋을 놓고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데루가들 전부를 충분히 집어삼키고도 남을 모래가 하늘로 솟아올랐고.

꽤 높은 높이까지 올라갔던 솟았던 모래가 데루가를 향해 찍어 눌러졌다.

콰아아아앙!!

데루가였던 것들이 모래의 압력에 쥐포가 되어 모래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데루가 무리.

저벅.

마을을 향해 태연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남자.

회색 머리에 터번을 쓴 남자는 머리 색깔만큼이나 무미건조한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꼴깍.

그제야 남자를 발견한 헌터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걸어오고 있는 건 이집트의 비밀 병기이자 수호신이라 불리는 남자.

국가직 1급 헌터, 비칼이었다.

* * *

이곳이 이집트의 대학교인 것입니까!?

셀린을 졸졸 따라 도착한 카이로 대학교.

이집트에서는 최고 명문대학교라고 셀린은 자신의 학교를 설명했다.

한국으로 치면 샤울대 같은 느낌이구먼.

"여기로 옮겨!"

"좀 더 이쪽으로!"

늦은 시간이라 대학교까지 오는 길엔 사람 그림자 보기가 힘들었는데.

대학교 안은 달랐다.

왠지 모르게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외관은 달라도 한국이나 이집트나 대학원생의 고통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셀린의 안내를 받아 입구로부터 꽤 떨어진 연구실로 발을 들였다.

조금 전 대학원생들을 봐서인지 셀린의 연구소도 고등학교 교실 같은 랩실이려나 생각했었는데.

여기저기가 최신식 기계들로 꾸며져 있는 걸 보니 그렇진 않은 듯했다.

삐빅.

셀린의 지문과 홍체를 인식하자 열리는 문.

최첨단 보안 시설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머… 멋있네요."

"저도 옮긴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카이로 대학이 정부와 협력해 하는 일이 많거든요. 여기는 해당하는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만 배정되는 곳이고요."

시한부 연구실이었구먼.

들어가기 무섭게 연구실에 불이 밝혀졌다.

사방에 꽂혀 있는 여러 서적과 도구들.

누가 봐도 학자가 머무를 것 같은 공간이었다.

"셀린 님, 다크메타 케이스는 이곳에 놓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헤리아가 연구소의 중앙에 케이스를 내려놨다.

띠링.

"국가직 7급 헌터, 헤리아 입니다. 수집했던 다크메타를 셀린 님 연구소로 이동 완료했습니다."

보고 체계 확실하구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은 헤리아가 무하타와 함께 문으로 향했다.

"그럼 저희는 위층 대기실에 있겠습니다."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헤리아와 무하타가 퇴장하고.

기지개를 켠 셀린이 케이스로 다가가 준비를 시작했다.

나… 난 어떻게 하지.

휘리릭 사라져 버린 무하타와 헤리아.

그리고 다크메타를 분석할 준비를 하는 셀린까지.

잠시 정체성을 잃은 채 어버버하며 주변을 걸었다.

연구실이라도 살펴보자.

뻘쭘하게 서 있는 거보단 돌아다니며 뭐라도 보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오 신화에 관한 서적도 있네.

"라와 세트에 관련된 서적을 저쪽에 있어요."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손을 뻗어 위치를 알려주는 셀린.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보자보자, 어디 공간 찾는데 도움될 만한 게 없으려나.

가장 오래되어 보이고 그럴싸한 책을 뽑아 들었다.

라와 세트의 신화 초입부가 쓰여진 책 같았다.

# 태양의 힘으로 악마들을 물리친 라의 앞에는 작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의 눈은 몹시 깨끗한 빛을 띠며 빛나고 있었다.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더러움을 마주한 적이 없는, 그런 맑은 눈이었다.

작은 소년이 세트인가.

책에 쓰인 내용만 봤을 땐 혼돈이나 어둠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네.

# 소년을 잠시 바라보던 라는 고민에 빠졌다. 악마들이 득실거리던 공간. 이 소년 역시 그들과 같은 존재일 것이기에 죽이는 게 옳았다.

빨리 죽여!

재앙의 불씨야!

이런 내 바람을 비웃는 듯한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라가 소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129화. 헬리오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