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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년 뒤.

85화. 반갑다

돌산의 정상.

지글지글.

와구!

"좀 익으면 먹지?"

비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날 노려봤다.

그러든 말든.

와구와구!

더 속도를 올려 익고 있는 소고기를 낚아챘다.

오늘은 2년 좀 넘게 이어진 수련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산 기념으로 소고기와 술을 잔뜩 사온 기태랑.

"에이 많잖아요."

"이 속도면 네가 다 처먹을 거 같아서 그렇지."

일주일에 한 번 보긴 했지만 비광과도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뭔가 기태랑이 선생님이라면, 비광은 친근한 동네 형 같은 이미지였다.

"비광, 넌 좀 덜 먹어도 돼. 오늘은 백운 하산 기념 소고기니까."

"와 서러워서 살겠나. 누가 보면 난 불청객인 줄 알겠네."

투덜대면서도 열심히 고기를 집어가는 비광에 웃음이 나왔다.

1급 헌터 두 명과의 고기 파티라니.

누군가 보면 말이 되냐고 할 장면이었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하산하면 보고 싶겠는데.

2년이 넘게 붙어 살아서 인지 둘과 함께 하는 생활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가능만 하다면 돌산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을 정도.

안될 말이지.

그럼에도 하산을 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했기에.

내려가야 했다.

강해지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여러 일정이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도 다시 구해야 하고.

친구도 만나러 가야 할 때가 됐으니.

그리고, 하나 더.

고개를 들어 기태랑을 바라봤다.

회귀 전에 기태랑은 누군가에게 살해 당했었다.

그 시기가 일 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

답답하네.

무언가 정보라도 있으면 좋을 테지만.

회귀를 하는 순간까지도 기태랑의 죽음은 모든 이들의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다이아몬드 인간이 검에 베여서 죽임을 당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어려웠다.

지금 기태랑에게 나중에 죽으니 조심하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애초에 누구에게, 어떻게 죽을지를 모르니 뭘 조심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일주일 전부터 밀착 경호를 실시할 수밖에.

돌산으로 오르기 전에는 아니었지만.

이젠 기태랑을 졸졸 따라다녀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두어 달 전부터 조사는 시작해보자.

혹시 얻어걸릴지도 모르니.

기태랑에 대한 플랜을 정립한 후.

다시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진짜 눈물나게 맛있네.

종종 고기를 구워 먹긴 했지만 이렇게 입에서 살살 녹는 소고기는 처음이었다.

하산 기념이라고 최고 등급을 사온 느낌.

"그래서, 오늘 내려가면 어디로 갈 생각이야? 지낼 곳도 없잖아."

기태랑의 물음에 으음 소리를 내며 턱을 문질렀다.

확실히 당장 잘 곳도 없지만.

당분간은 필요 없었다.

"구하긴 해야 되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해야 하는 일이 있거든요."

"대체 그 해야 되는 일이 뭔데? 이제 좀 알려주지."

스윽.

엄근진한 얼굴로 궁금해하는 비광을 바라봤다.

틈만 나면 하산하고 뭘 하려는 거냐고 물었었던 비광.

"그것은."

"그것은…?"

덩달아 진지해진 비광에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밀입니다."

"… 사적으로 패도 되나? 수련 아니어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비광에게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둘에게만 미리 말할까 싶었지만.

분명 미친 짓을 한다고 말릴 게 분명했기에 알리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조만간 알기 싫어도 알게 될 테니까요.

"마각 보호대는 언제까지 차고 있으려고?"

기태랑의 말에 고개를 내려 팔과 다리, 몸에 차져 있는 보호대를 바라봤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차례도 떼지 않았던 보호대들.

이제는 내 몸의 일부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좀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중에 반납해도 되나요?"

"몇 년 뒤에 해도 돼. 그거 쓰려는 인간은 아무도 없으니까."

감사하다는 표시로 엄지를 치켜 세운 뒤.

연기가 향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여기도 이제 빠빠이구만.

둘 만큼이나 너무 익숙해진 장소였다.

물론 겨울에는 얼어 죽을 뻔했지만.

어찌 됐든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 생긴 곳이다.

슥.

…!

기태랑이 가득 채운 잔을 내밀었다.

"하산 축하한다."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건배 제의에 비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낯간지러운 말 참 잘해."

투덜대면서도 잔을 내미는 비광.

내게 아무런 대가 없이 2년간 많은 걸 가르쳐준 두 사람.

두 사람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준 뒤 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쨍.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세 개의 잔.

잔에 든 술을 들이키며 기태랑을 바라봤다.

걱정마세요.

꽈악.

절대 죽게 두지 않을 테니까.

* * *

끼이익.

차가 멈춰서고.

"진짜 여기면 되겠어?"

걱정스러운 얼굴의 기태랑에게 걱정말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 먼저 볼일이 있어서요."

"검 관련해서 괜찮은 녀석 있으면 바로 알려줄 테니까. 연락 잘 받아라."

비광에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검 쓰는 법도 좀 배울 수 있을까요?

돌산에서 기태랑과 비광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면도칼과 스이카를 쓰고 있긴 하지만 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으쓱.

내 말에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올렸던 기태랑과 비광.

두 명 모두 검을 잡아본 적도 없기에 알려주는 게 불가능하단 말을 했다.

- 좋은 놈 있으면 소개 시켜줄게.

물론 두 명의 눈에 차는 인물이 없었기에.

아직까지 검술은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저 그럼 갑니다!"

뒷좌석에서 쿨하게 내려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데자뷰가 일어나는 장면이었다.

휘적휘적.

그런 나를 향해 건성건성 손을 흔들어 주는 비광과.

손을 흔드는 대신 미소를 건네는 기태랑까지.

둘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렸다.

자 가볼까.

도착한 곳은 용산의 전자상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전자기기들이 모여있단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왔다.

저기가 좋아 보이네.

전자상가 정중앙에 거대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손님도 제일 많은 걸 보니 무언가 신뢰 가는 가게였다.

딸랑.

"어서옵셔!"

반갑게 맞아주는 주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미 살 건 정해져 있었기에 둘러볼 필요는 없었다.

내가 돌아왔으니.

"여기서 제일 좋은 액션 캠 하나 주세요!"

무기왕도 돌아와야 할 때였다.

* * *

CBC의 휴게실.

카메라맨 진유석이 파트너인 송유빈에게 다가갔다.

"선배, 뭘 또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요?"

정신없이 무언가를 찾아보고 있는 송유빈.

다가갔던 진유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선배 또 무기왕 찾아보고 있네."

"저리 가라, 우울 옮는다."

송유빈의 힘 없는 목소리에 진유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기왕이 사라진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살아있다면 밥벌이를 위해서라도 한튜브에 영상이 올라왔을 텐데.

무기왕과 관련된 동영상은 완전 제로였다.

-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 크게 다친 건 아닐까요?

1년까지는 많은 이들이 무기왕을 찾으며 그리워했지만.

- 무기왕은 죽은 게 분명합니다.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이들의 나름 일리 있는 해석에 기다리고 있던 이들도 한 명 두 명 희망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2년이란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물론, 딱 한 명.

아직까지도 목 놓아 무기왕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이 정도면 끈질긴 걸 넘어갔는데.'

2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무기왕을 포기하지 못한 송유빈.

진유석이 송유빈을 보며 저 정도면 병이 아닐까란 걱정을 했다.

"조금 있으면 나가야 되니까 준비하세요, 선배."

"오냐아."

기분은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하니.

준비하라는 진유석에게 송유빈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 보였다.

"하아…!"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쉰 송유빈이 쇼파로 몸을 기댔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마운티거 당시 무기왕이 돌아왔다며 소리를 질렀던 송유빈.

그 덕에 프로그램이 끝난 뒤 꽥꽥 소리를 질러댄 죄로 한참을 깨져야 했다.

'무기왕님, 안 돌아오면 반칙이에요. 그렇게 깨졌는데 바로 없어지기 있냐고 진짜.'

1년 전까지만 해도 종종 댓글이 달리던 무기왕의 영상.

이제 송유빈을 제외하곤 아무도 보지 않는 동영상으로 저 바닥에 깔려버렸다.

'… 왜 이렇게 다 재미가 없냐.'

부족했다.

지금도 수많은 헌터가 조회수를 위해 동영상을 올려대고 있지만.

그때 무기왕이 줬던 만큼 송유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아아아아!"

다시 한번 큰 한숨을 내쉰 송유빈이 울상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좀 돌아오라고! 어디서 뭘하고 있냐고오오오!"

* * *

"에취!"

누가 내 얘기 하나.

간질간질한 귀를 후비적거리며 앞을 바라봤다.

점점 저물어가는 해가 바다에 비춰 멋진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옘병 광경이고 뭐고 지겨워 죽겠네.

분명 멋진 광경이지만.

한두 번 봐야 멋지지 계속 보니 하품만 나올 뿐이다.

보글보글.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맛있는 거 더 사올 걸!

나름 챙겨온다고 챙겨왔는데 이제 남은 거라곤 비상식량으로 사온 라면 한 박스 뿐이었다.

외딴 무인도의 바닷가에 죽치고 있기를 2주일.

기다리고 있는 사로카는 나타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회귀 전 태랑 아저씨가 사로카를 잡은 게 일주일 뒤.

기태랑이 사로카를 잡은 뒤 국가에선 사로카가 나타난 경로를 역조사 했었다.

그렇게 도달한 장소가 바로 이곳, 인천 앞바다 구석탱이에 떠 있는 조용한 무인도였다.

여기서부터 놓치긴 했지만.

당시엔 이 뒤로 흔적이 지워져 더 쫓지 못했지만.

지금이야 일본에서 오겠거니 싶었다.

흐음… 역시 바뀐건가.

후지산에서 날 만나며 팔을 잃었던 사로카.

그 일이 변수가 되어 나타나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만 더 기다려보자.

기태랑이 잡았던 시기까지 안 나타난다면.

더 이상 여기에 죽치고 기다리는 건 무의미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 쌍놈의 새끼."

라면이나 먹자.

드드드…!

!!

나무젓가락을 갈라 냄비로 향하려는 순간.

라면 국물에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지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제발.

점점 근처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진동에 두근거림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땅을 바라봤다.

회귀 전과 똑같은 위치였다.

드드드… 콰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시뻘건 거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이렇게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애가 탔었는데.

드디어 나타났다.

슥.

미치도록 반가운 마음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금 전 무인도에 모습을 나타낸 놈에게 걸어갔다.

"크르…?"

어느 정도 다가가자 고개를 돌리는 사로카.

팔 하나가 없는 걸 보니 후지산에서 만났던 그놈이었다.

씨익.

나도 모르는 사이.

양쪽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반갑다, 빨갱이 새끼야."

입에서 미소를 넘어 웃음이 흘러나왔다.

"보고 싶었다."

86화. 고마워, 그리고 잘 가

"크르…!"

"너 말할 줄 알잖아 새끼야."

팔을 날려준 사람을 만나서일까.

사로카는 시종일관 무서운 울음소리만을 흘려대고 있었다.

드드드…!

그리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구만.

날 발견하기 무섭게 사로카가 갑주를 세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속도가 빨라졌던 돌기 모양의 갑주였다.

"저번보다 더 빨라야 될 거다."

"크아아!"

사로카가 포효와 함께 달려들었다.

후지산 분화구에서 한 번 봐서인지 이미 눈에 익은 속도였다.

쾅!

보호대가 있는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저릿.

여전히 파워 하나는 엄청나네.

몸으로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지만 비명이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사로카의 갑주가 미친 듯이 단단하긴 하나 기태랑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쾅! 쾅! 쾅! 쾅!

계속해서 휘둘러지는 공격을 보호대를 통해 방어했다.

돌산을 내려오면서도 마각 보호대를 반납하지 않은 이유.

확인해보고 싶었다.

과연 이 더럽게 무거운 보호대를 차고 어디까지 사로카의 공격을 따라갈 수 있을지를 말이다.

보호대가 있어야 맨몸으로도 막을 수 있고.

신체가 말도 안 되게 강해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기태랑의 공격이나 갑주를 두른 사로카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는 건 미친짓이었다.

쾅!

앞에서 열심히 주먹과 발을 내지르고 있는 사로카.

그런 사로카의 공격을 막고 있자니 나도 모르는 사이 웃음이 나왔다.

따라가진다.

후지산에서는 잭 더 리퍼를 꺼낸 뒤에야 피할 수 있었던 공격이었다.

그랬던 공격을 지금은 아무 무기도 꺼내지 않은 채, 엄청난 무게의 마각 보호대를 찬 상태로 따라가고 있었다.

이쯤이면 됐다.

휘이… 쾅.

발을 뻗어 사로카를 밀어낸 뒤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크르!?"

역시 말을 알아듣는 놈이다.

표정을 정확히 알긴 힘들지만 오만상을 찌푸린 듯한 사로카의 얼굴.

그러면서도 사로카는 잠시 멈춰 서 있었다.

투둑.

빠르게 마각 보호대의 고리를 풀었다.

툭… 쿵!

툭… 쿵!

하나를 풀 때마다 모래사장으로 떨어져 먼지를 일으키는 보호대.

보호대의 무게 때문에 모래사장이 푹푹 패이고 있었다.

와… 이 정도였나.

몰랐었다.

보호대가 이렇게 무거웠고.

보호대를 푼 몸이 이렇게 가벼울 줄은.

하.

앞에 사로카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가벼워진 몸을 내려다봤다.

보호대를 2년 동안 차며 그냥 내 몸의 일부구나 했었는데.

지금의 해방감을 느끼니 다시는 못 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웅…!

자기를 내버려두고 뻘짓을 해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새를 못 참고 사로카가 주먹을 뻗어왔다.

사로카의 주먹이 일 미터 내까지 접근했지만.

여유롭다.

내겐 여유가 넘쳤다.

삭!

"크르…!?"

고개를 숙여 사로카의 주먹을 흘려보낸 뒤.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회전의 힘을 그대로 왼발 뒷꿈치에 담아 사로카에게 뻗어냈다.

콰앙!

모래사장인 이유도 있겠지만.

내 맨발바닥 공격에 사로카가 뒤로 밀려났다.

찌릿.

갑주의 단단함에 내게도 고통이 전해졌지만, 상관없었다.

5미터의 거구를 밀어낼 정도로 올라온 힘.

"크라아!!"

그리고 분노한 S급 데몬의 주먹을 여유롭게 피해낼 수 있는 속도까지.

휙.

보호대가 없어 맨몸으로 막아내는 게 꺼려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막을 이유가 없었다.

휙! 삭! 삭!

너무 느렸다.

한참 뒤에 피해도 사로카의 공격을 넉넉하게 피할 수 있었다.

내가 빠른 건가.

자만은 하지 말아야지 했지만 입에서 새어 나오는 미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돌산에서도 수련을 하며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아직 실전에 사용해보지 못한 상태였기에 정확히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최상이다.

전후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 사로카는 가히 최고의 상대라 할 수 있었다.

후지산에서 내 한계를 알게 해주며 무릎 꿇렸던 상대.

돌산을 내려온 후 사로카를 가장 만나고 싶었던 이유였다.

사로카 만큼 내 성장을 명확하게 증명해 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말을 할 줄 아니까.

생각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생각을 하니 깨닫고 있을 거다.

공격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느껴지는 격차를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로카는 점점 더 큰 포효를 질러내고 있었다.

메워지지 않을 격차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포효였다.

이 정도면 됐어.

아무런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사로카의 공격을 피하는 건 지장이 없었다.

힘, 속도 확인했고.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날 막아섰던 벽을 깨부수는 것.

갑주 튼튼한 거 하나는 인정이다.

기태랑의 다이아몬드만큼은 아니어도 사로카의 갑주 역시 엄청난 강도를 자랑했다.

분화구에서 제대로 맞추지 못했던 거.

이번엔 제대로 꽂아주마.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 * *

"하아… 되다 되."

퇴근한 송유빈이 침대로 몸을 눕혔다.

젖은 머리를 말리는 것조차 귀찮았다.

가만히 팔다리를 쭉 뻗은 채 지금의 평화를 즐기기로 한다.

띠링.

"어떤 매너 없는 자식이야. 퇴근했구만."

하도 귀찮게 하는 인간들이 많아 최소한의 인원만 추가해놓은 핸드폰.

지금 시간에 울릴 건 회사밖에 없었다.

스윽.

건성으로 핸드폰을 들어 보자 진유석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뭐야."

휙.

핸드폰을 침대 저편으로 던져버린 송유빈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몸도 노곤하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잠들어야지 마음 먹은 순간.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으."

띠링!!

"이런 씨! 미쳤구만 미쳤어 진유석!"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분명히 퇴근 후엔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주 혼꾸녕을 내줄 생각이었다.

# 선배!

# 선배! 한튜브!

# 한튜브 라이브 봐요! 빨리!

"뭐라는 거야, 미쳤나."

미쳤냐고 보내려는 순간.

한 통의 메세지가 추가로 도착했다.

# 무기왕 나온다고!!

"!!!"

무기왕이란 단어에 빠르게 한튜브 사이트로 접속했다.

한튜브 최상단에 위치해 있는 라이브 방송.

# 무기왕.

방송을 켜고 있는 건, 누군가 계정을 도용하는 게 아니라면.

'무기왕 본인!!'

아니나 다를까.

들어간 방송 채팅창은 난리가 나있었다.

@ 믿고 있었다구우!!

@ 진짜가 돌아왔다.

@ 와 앞에 저거 뭐임! 빨간색.

죽었다고 생각한 무기왕의 복귀.

심지어 앞에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무시무시한 데몬이 서 있었다.

하지만, 송유빈의 눈에 데몬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무기왕….'

송유빈이 채팅창에 손을 올렸다.

@ 나도 믿고 있었다구우우!!!

* * *

익숙하지?

사로카가 잘 볼 수 있도록 비늘이 둘러진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분화구에서 날 낚으며 피해냈던 사로카였다.

"이번에도 잘 피해 봐. 피하면 네놈 승리니까."

내가 비늘을 두른 뒤부터 사로카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갑주를 뚫고 팔을 날려 보낸 공격.

섣불리 달려들면 위험하며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내가 간다."

팟!

사로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이 신중한 만큼 나도 섣부르게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무조건 맞출 수 있을 때 꽂아 넣을 생각이다.

"으랴아!"

휘두르는 척을 할 때마다 사로카는 움찔거리며 몸을 내빼고 있었다.

그 덕에 안 그래도 느린 공격은 망설임으로 인해 절대 닿을 수 없는 상태.

내가 주먹 앞에 때리라고 머리를 들이대주지 않는 이상 맞는 건 불가능했다.

"무섭지?"

내 페이크 동작에 움찔대는 사로카를 보며 조소를 보냈다.

사로카는 분명 내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팔 날아갔을 때 기억날 거야. 이번에는."

사로카에게 점프해 오른손을 뒤로 젖혔다.

"그 몸 쪼개줄게."

어차피 속도는 내가 한참 위였다.

이제 와 움직여서는 내 공격을 피할 수 없다.

쐐에에엑!

사로카를 향해 비늘로 둘러싸인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굉음과 함께 엄청난 모래가 일어났다.

뿌옇게 변한 시야.

안 맞았다.

주먹에 닿은 감촉이 없었다.

사르르…!

팔에서 비늘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두더쥐 새낀가.

모래가 걷히며 눈에 들어오는 땅굴.

움직여서 피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땅을 파는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쾅!!

어느 정도 떨어진 땅 아래.

지반과 모래를 뚫으며 사로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라라!!"

분화구 때와는 달리 아무 데미지 없이 내 공격을 잘 피해낸 사로카.

사로카가 허공으로 뛰어올라 내게 달려들었다.

비늘이 사라져 있는 내 팔을 보며 승리를 확신한 모습이었다.

생각할 줄 아는 데몬.

사로카는 분명 자신의 팔을 날렸던 공격의 사용횟수가 한 번뿐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슥.

고개를 들어 내게 떨어지고 있는 사로카를 바라봤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비광의 가르침.

- 블러핑이라는 거 아냐?

뻥카요?

라는 내 대답에 수준 낮은 단어를 쓴다며 비광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상대보다 낮은 패를 가지고 있지만, 높은 패인 척하며 레이스를 강하게 이어가 상대가 게임을 포기하게 만드는 카드의 기술이었다.

- 반대인 경우도 마찬가지야. 상대보다 높은 패를 가지고 있지만 낮은 패인 척하는 거지.

높은 패를 가지고 있으면 그냥 내면 되지, 왜 뻥카를 쳐요?

- 패버리고 싶네.

내 질문에 대한 비광의 한 줄 평이었다.

- 네가 높은 패인 걸 아는 순간 상대는 사릴 거다. 그럼 한 방에 털어먹을 수도 없지. 끌어들이는 거야.

끌어들인다…?

- 상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걸 때까지, 무조건 이겼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끌어들여서.

거기까지 말한 비광은 가지고 있던 패를 오픈했다.

삼팔광땡.

- 한 방에 박살 내는 거다. 다시는 못 일어서게.

"크라아!!"

사로카가 내지른 주먹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이겼다는 확신이 가득한 주먹이었다.

씨익.

사아아아악!

사로카가 볼 수 없는 위치, 손 아래.

그 아래에 있던 유탈라스의 비늘이 순식간에 팔을 뒤덮었다.

"크르!?!"

내 의태는 끝나지 않았단다.

- 나무토막이구나.

내 주먹질을 보며 기태랑은 고개를 저었었다.

- 처음부터 힘을 주는 게 아니야. 그럼 상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빗나갈 거다.

설명과 함께 기태랑을 자세를 잡아줬었다.

- 어깨에 힘을 빼고 물이 흐른다는 느낌으로 뻗어라.

어깨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비늘로 쌓인 손을 사로카에게 뻗기 시작했다.

- 그리고 네가 맞추길 원하는 목적지보다 한 뼘 뒤, 그곳에서.

- 콰아아아앙!

돌산의 정상에 있던 거대한 바위.

기태랑의 주먹이 살며시 닿았을 뿐인데도 바위는 가루가 되어버렸다.

- 힘을 폭발시켜라.

스스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내 귓볼 옆으로 지나가는 사로카의 주먹과, 무방비 상태인 녀석의 복부로 향하는 나의 주먹.

툭.

찰나의 순간.

주먹으로 사로카의 갑주가 느껴졌다.

"날 이겨줘서 고마웠다."

힘을….

"이만 꺼져라."

폭발시킨다.

"나약한 새끼야."

콰아아아아앙!!!

87화. 다시 위로

무인도의 해변가.

어느새 해가 지고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사라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비늘을 바라봤다.

달빛에 반사된 비늘이 평소보다 더 눈부신 청색 빛을 뿜어냈다.

자신의 맡은 바를 훌륭히 수행한 후 사라지는 유탈라스의 비늘.

돌산에서 유탈라스를 계속해서 사용하며 새삼스레 알게 된 게 있었다.

항상 한 번만 사용하고 사라졌던 건 내가 그렇게 사용해서였다는 것.

우매했어.

무기왕의 능력으로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디테일은 챙기지 못했다.

의태와 동시에 팔을 덮는 수많은 유탈라스의 비늘.

비늘에는 개수가 정해져 있으며 사용자인 내가 조절할 수 있었다.

맨날 100%로 한 방에 다 때려 박아서 바로 사라진 거였어.

비늘이 다 소모되는 만큼 강력했지만 동시에 내게 주어진 건 단 한 번의 기회였다.

사로카도 똑같이 생각했겠지.

분화구에서 자신의 팔을 날린 뒤 곧바로 사라져버린 비늘.

그리고 내가 최후의 한 방이라는 듯 공격을 재며 신중을 기하는 모습까지.

깊이 생각할 시간따윈 없었기에 사로카는 주어진 정보들로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한 번만 피하면 비늘은 사라질 테고, 그럼 내가 이길 수 있다.

라고 말이다.

그걸 노렸다.

그렇기에 첫 의태 공격은 비늘 중 10% 정도만을 사용해 그럴싸한 모양만 냈었다.

맞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인 공격.

그렇게 빨리 땅굴 파고 도망갈 줄은 몰랐지만.

첫 공격이 빗나간 후 팔을 덮었던 비늘은 소모되어 사라져버렸다.

나머지 비늘은 모두 손바닥에 숨겨둔 채 사로카를 기다렸다.

사로카의 주먹이 내게 거의 다가온 순간.

사로카가 나타나고 아주 잠시였지만, 꽤 길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비광과 기태랑의 가르침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고.

가르침에 따라 내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붉은 갑주의 사로카는 지금 산산조각이 나 내 발아래 흩어지게 됐다.

- 날 이겨줘서 고마웠다.

사로카를 끝내기 전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사로카 덕에 많은 걸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 후지산으로 가라.

지금도 긴가민가 하지만.

어쨌든 쪽지도 진짜였던 걸로 확정.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모든 게 후지산으로 가 사로카를 만난 덕분에 시작된 것이었다.

"하아아!"

2년 넘게 기다렸던 일을 끝내서일까.

땅이 꺼지는 한숨이 아닌.

속을 뻥 뚫리게 만드는 숨이 터져 나왔다.

… 조용하네.

조금 전까지 전투가 벌어졌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 혼자만이 서 있게 된 무인도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척박한 환경 때문인지 벌레도 살지 않는 모양이었다.

쏴아아….

들리는 거라곤 멀지 않은 바다에서 파도가 치는 소리뿐이었다.

아 맞다.

삑.

손을 들어 가동 중이던 액션 캠을 종료시켰다.

- 라이브 송출도 가능합니다!

전자상가의 아저씨는 최고의 액션 캠이라 소개하며 새로운 기능들을 읊어줬었다.

뭐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됐다면.

무기왕의 복귀도 성공적으로 알린 셈이었다.

풀썩.

그대로 몸을 젖혀 모래사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침대 만큼은 아니지만 폭 파여 내 몸을 둘러싸는 모래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벽.

막힘없이 오르던 나를 멈춰 세웠던 사로카라는 벽.

조금 전 그 벽을 완전히 박살 냈으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다시 올라간다.

2년이 넘는 시간을 멈춰 있었으니.

앞으론 절대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뭘 만나든.

스르륵.

어떻게든 부수고 올라간다.

나른해지는 느낌에 두 눈을 감았다.

* * *

"…."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핸드폰을 보고 있는 송유빈.

누가 보면 핸드폰 안으로 빨려 들어간 줄 알 듯한 자세와 집중도였다.

"…."

화면엔 검정색 바탕뿐이었다.

라이브 방송은 한참 전에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송유빈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심장이 이렇게 뛴 적이 있었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미쳤어.'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후 송유빈의 한 줄 감상평이었다.

채팅창은 읽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정신없게 난리가 나버렸지만.

상관없었다.

채팅창으로 눈을 돌릴 여유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사로카야.'

송유빈도 사로카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이 사로카를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로카는 바로 옆 나라인 일본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뒤 사라져버린 데몬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사로카의 퍼포먼스를 보며 겁에 질렸고, 바다를 건너 한국으로 오면 어떻게 하냐며 많은 걱정을 토로했었다.

'2년이 지나면서 무뎌지긴 했지만.'

무기왕이 사라졌던 시간 만큼.

사로카 역시 일본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추격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어느 정도 포기한 느낌이 들었었다.

'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사로카를 잡은 게 2년 만에 부활한 무기왕이라니.'

핸드폰은 안 보고 있지만 이건 엄청났다.

예상하건데 이 라이브 영상은 한국에서만 화재가 된 게 아닐 것이다.

'일본.'

사로카에게 직접적인 인명 피해까지 당했던 게 일본이다.

그런 사로카를 잡아버린 무기왕.

아마 지금쯤 일본도 난리가 났을 터였다.

풀썩!

"하하…!"

송유빈이 자세를 고쳐 침대로 몸을 뉘었다.

아직까지도 두근거리는 가슴.

"오늘 잠은 다 잤네."

잠은 못 잘 게 분명했지만, 괜찮았다.

"내일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송유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재밌겠다."

아주 오랜만에 내일이 기다려지는 밤이었다.

* * *

송유빈의 예상과는 달리.

2년째 유지되고 있는 일본 긴급 대책 본부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고요함보다는 정적이 더 옳은 단어였다.

"…."

본부의 장을 맡고 있는 니시다 료코를 포함한 모든 이가 새까맣게 변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의 표정은 동일 했는데.

마치 귀신에 홀려 굳어버린 듯한 멍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료코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단어였다.

아마 본부의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일 것이다.

후지산 이후 료코와 본부는 하루도 마음 편히 쉰 적이 없었다.

'휴식은 사치였으니까.'

사로카에게 죽임당했던 수많은 동료들.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꼭 사로카를 찾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2년이 넘게 끈질긴 추격을 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항상 한발 늦었었지.'

사로카가 땅굴을 통해 이동한다는 건 알아냈지만.

땅굴을 이용해 어디로 갈지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항상 땅굴을 발견하더라도 이미 사로카는 사라진 뒤였다.

- 그만 포기하고 돌아와.

상부의 명령에도 료코는 고집을 꺾지 않았었다.

이제 와서 포기하면 죽은 이들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그러던 중 한국의 한튜브에서 시작된 라이브 방송.

무기왕이란 헌터가 튼 방송을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토록 찾던 사로카가 한국의 라이브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어떻게 찾은 걸까.'

라이브가 시작된 시점을 봤을 때.

무기왕이란 헌터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사로카가 그곳에 나타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 !!

그리고 사로카와 무기왕이란 헌터의 싸움이 시작되고 잠시 후.

료코는 알게 되었다.

2년 전 분화구에서 사로카와 싸웠던 백운이 무기왕이란 것을.

분화구에서 봤던 팔을 감싸는 청색 비늘.

후지산에서 그 비늘을 봤었기에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또 다른 의미의 어떻게였다.

분명 같은 사람일 터인데.

라이브에 등장한 백운은 더 이상 분화구에서 사로카에게 패배했던 그 백운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S급 데몬 사로카를 장난감 가지고 놀 듯 한 백운.

그 때문이었다.

본부에 정적이 깔려있는 이유는.

'사로카가 나타났다는 것도 놀랄 일인데… 그 끔찍했던 데몬을 저렇게 잡아버렸으니.'

본부의 이들은 누구보다 사로카의 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1급 혹은 2급 헌터가 아니라면 대적조차 불가능한 게 사로카였다.

그런데 라이브에 등장한 타국의 헌터는 그런 사로카를 가지고 놀다 한방에 산산조각 내버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료코가 2년 전을 떠올렸다.

일본을 떠나는 백운을 보며 들었었던 확신.

다음에 봤을 땐 비약적으로 강해질 거란 확신을 했었지만.

조금 전 봤던 건 그 확신을 한참 뛰어 넘어버렸다.

"자… 장관님."

꺼진 화면을 보던 이들이 료코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바쁘게 했던 모든 일들을 더 이상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 모두 하던 일은 내려놓으세요."

지시를 기다리는 직원들을 향해 료코가 입을 열었다.

'허무하지만.'

료코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비상 대책 본부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 * *

부스스.

오지게 자버렸네.

모래사장에서 몸을 일으켜 텐트로 다가갔다.

싸울 때 신경은 못 썼는데 다행히 박살나거나 하지 않았다.

꼬로록.

생각해보니 밥을 먹기 직전이었다.

젓가락을 한술 뜨려는 순간에 나타나버린 사로카.

좋지 않은 타이밍에 다 끓인 라면은 맛도 못 보고 말았다.

샤발.

돌아오니 라면이 있던 냄비는 모래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직접적인 충격은 안 받았지만 흩날린 모래가 라면에 침투한 것.

관우는 차가 식기 전에 끝내고 돌아왔는데.

그러지 못했음에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지은 후.

생수를 부어 냄비를 씻어냈다.

큰일 날 뻔했어.

싸우던 중 버너가 부서지거나 냄비가 날아갔다면 쫄쫄 굶거나 생라면을 씹을 뻔했다.

안될 말이지.

날 밝으면 수영해야 하는데 생라면이라니.

육지와 그리 먼 무인도는 아니었지만.

들어올 때처럼 배로 나갈 순 없었다.

데리러 올 필요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호다닥.

빠른 움직임으로 냄비를 씻어내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투하 준비를 마친 세 개의 라면.

꼴깍.

어느 때보다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일과를 마친 뒤 먹는 라면이라.

아직 안 먹었지만 필시 존맛일 것이다.

빨리 끓어라아!

두구두구.

누구보다 맛있게 먹어 줄 테니!

* * *

백운이 라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둠이 짙게 깔린 거대한 지하 공당.

불빛 하나조차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드글.

공간엔 많은 수의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왕이시여."

기괴한 발음의 목소리가 누군가를 부르자.

공당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이가 입을 열었다.

"말해라."

"사로카가 죽었습니다."

"뭐…? 어디서?"

부하가 조금 전 한국 무인도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했다.

"인간 중에도 있었구나. 사로카의 갑주를 깰 수 있는 놈이."

"어떻게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예…?"

슥.

자리에서 일어난 왕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88화. 남겨진 메시지

음! 역시 이 동네가 좋겠어.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인도에서 헤엄쳐오느라 몸에 묻은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청라 국제 도시라.

냅다 높은 건물이 있는 곳으로 수영을 해왔는데.

도착하고 나니 엄청나게 깔끔한 도시가 나와버렸다.

공항이랑도 가까운 거 같고.

한국에도 분명 어딘가에 무기가 잠들어 있겠지만.

그렇다고 몇 개 있는지도 모르는 무기를 다 찾을 때까지 한국에만 죽치고 있을 순 없었다.

땅덩어리만 놓고 보면 한국보단 다른 넓은 땅들에 훨씬 많은 무기가 있을 터.

넓은 곳으로 나아가야지, 암! 그렇고말고.

앞으로 외국 나갈 일이 많을 걸 생각하면 공항이 가깝다는 건 최고의 조건이었다.

물론, 대산에서 준 자료가 시작점이다보니 정보에 따라서 한참 뒤가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젠 정말 집을 구해야 할 때야.

너무 오래 미뤄왔다.

덕분에 등 뒤에 있는 배낭은 터지기 직전.

당장 다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들이지만, 돌산에서부터 함께 한 추억 가득한 옷가지와 캠핑 물건들이었다.

핸드폰도 사자.

원래는 연락할 사람이 없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지만.

이젠 조금이나마 생겼기에 연락할 수단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했다.

거기다 앞으로 찾아야 하는 각종 정보들도 핸드폰이 있어야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으니.

집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것이었다.

나도 문명인이 되어야지.

굳은 다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엄마, 저 아저씨 봐."

"보지마! 저런 거 보면 못 써!"

아주머니… 혼내려거든 안 들리게 좀 혼내세요.

살짝 마음에 상처를 입은 뒤 상가의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봤다.

시발!

갑자기 조금 전 아주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무인도에 거울따윈 없기에 몰랐었는데.

일주일이 넘는 노숙으로 인해 몰골이 심각하다 못해 미친 상태였다.

아니 머리를 뭐 이렇게 짤라놨어.

자신이 군 시절 이발병이었다며 하산하는 날 머리를 잘라줬던 비광.

몹시 불안했지만 뭐 별일 있겠냐 싶어서 맡겼었다.

그 결과, 개차반인 모습에 여기저기 쥐가 파먹은 듯한 머리까지 더해져 연변 거지가 한 명 탄생해버렸다.

그래도 수영하면서 와서인지 깨끗하네.

작은 호재에 만족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쓰레기장.

호다닥.

빠르게 다가가 배낭을 통째로 집어던졌다.

추억은 뒤에 남겨둬야 아름다운 법.

미련을 가지면 변색되고 말아!

조금 전까지 추억 어쩌고 했던 마음은 싹 사라져 있었다.

일단 이 거지 같은 몰골에서 벗어나야 뭐라도 될 것 같았다.

휙휙.

그다음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눈을 돌렸다.

연변 거지 몰골의 가장 큰 주범은 이 개차반 난 머리였다.

복구할 수 있을까.

복구 여부는 몹시 미지수였다.

나쁜 마음을 먹은 건지 비광이 제대로 조져놨기 때문이다.

퐁퐁 이발소.

저기야!

퐁퐁 나이트도 아니고 이름이 몹시 못 미더웠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머리를 복구하기 위해선 깊은 내공의 솜씨가 필요했다.

딸랑.

"안녕하세요!"

"어서오… 슅!!"

멋쟁이 하와이 남방에 염색한 머리까지.

어딜 가든 멋쟁이 할아버지라 불릴만한 미용사분이 날 반겨줬다.

물론 반겨준 건 잠시고 지금은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말이다.

꿀꺽.

엄근진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어떻게… 가능하시겠습니까?"

"…."

땀까지 흘리며 덩달아 심각해진 할아버지.

끄덕.

할아버지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71세 장봉팔. 신의 가위라 불릴 능력을 개방했으니 걱정마시게." 

끄덕.

엄청난 각오가 담긴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믿습니다…!

* * *

"와… 백운 님."

"우와…!"

이발을 시작하기 전.

-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한테 빌린 전화로 배이슬과 유연경에게 연락을 했다.

집을 구해야 하는데 한 번도 구해본 적이 없다 보니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진짜 백운 님이에요!? 죽은 줄 알았잖아요!

2년 만에 닿은 연락에 배이슬과 유연경은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를 시작으로 너무하다고 따발총처럼 말을 쏘아댄 두 사람.

너무하긴 했어.

내가 생각해도 킹정이었다.

수련한답시고 돌산에 틀어박히면서 연락 한 통을 안 했으니.

그래놓고선 집 구하는 거 도와달라고 전화했으니 염치 리쓰 확정이었다.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

내가 오랜만에 맛있는 걸 먹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에 사주려는 것이었다.

- 근처에 있으니까 금방 갈게요! 

마침 가까운 곳에 있다며 이발소로 온 두 사람.

오랜만의 재회를 위해 들어온 두 사람이 마주친 건 흡족스러운 할아버지의 얼굴과.

시발.

더 이상 복구하지 못할 정도로 짧게 밀려 있는 내 머리였다.

"절 들어가실 거예요?"

"이슬 님도 참… 깔… 깔끔하고 보기 좋… 기만 하구만 왜 그러세요. 하하… 하."

제대로 조졌나보다.

사실 두 사람의 반응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거울로 비추어진 나의 머리는 당장 절로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군대에서도 반항하냐고 욕먹을만한 9mm 까까머리였다.

왜지?

왜 할아버지는 저렇게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는 9mm탭의 바리깡.

저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개방한 게 신의 가위라면서?

신의 가위가 왜 가위는 안 쓰고 바리깡으로 이발을 한단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피어났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라 되돌릴 방도가 없었다.

아까 일어났어야 하는데!

의미없는 후회를 해볼 뿐이었다.

어차피 못 일어났을 테니까.

찐특… 미용실에서 잘못 되어가는 거 같아도 아무 말도 못함.

스스로의 찐따력에 눈물을 흘리며 계산을 마쳤다.

"잘 가게. 또 오고!"

안 와요!

라고 속으로 소리를 지른 뒤 배이슬과 유연경을 따라나섰다.

"아니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2년 동안 연락 끊겼던 사람이 갑자기 라이브 방송을 틀다니."

두 사람도 뒹굴거리던 중 깜짝 놀라 라이브를 봤다고 했다.

빠안.

어제 본 영상이 떠올라서일까.

배이슬과 유연경이 묘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왜… 왜요?"

땀을 삐질 흘리며 묻자 실소를 터뜨리는 두 사람.

"그냥 신기해서요."

"백운 님 어제 잡은 거 사로카잖아요. 일본에서 나타났던 S급 데몬."

"그… 그쵸."

작은 한숭믈 내쉰 배이슬이 말을 이어갔다.

"뭔가 그런 엄청난 영상을 보고 있으면 진짜 다른 세계 사람이구나 싶다가도. 이렇게 보면 또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락가락해요, 엄청."

두 사람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나 또한 회귀 전엔 데몬을 상대로 싸우는 헌터들을 보며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쨌든, 집 구한다고 하셨죠?"

"넵."

내가 원하는 집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동네는 여기였으면 좋겠고. 혼자 살기 좋은 한 14평 정도? 벌레 안 나오는 신축이었으면 좋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얘기를 듣던 두 사람이 동시에 날 바라봤다.

"돈은 얼마나 있는데요?" 

* * *

….

안내 받은 집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과 함께 간 부동산에서 안내를 해준 곳이었다.

신축은 신축인데.

너무 좁았다.

14평은커녕 약 8평 정도 되어 보이는 집이었다.

"이곳이 2억으로 살 수 있는 오피스텔입니다."

- 아파트는 어림도 없어요.

사로카 처치에 대한 국가에서의 포상금과 후원금까지 해 잔고는 약 2억 5천 남짓.

집 사고 밥을 굶을 순 없는 노릇이니 비상금으로 5천 정도는 남겨두려는 중이었다.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2억으로 맞는 집을 찾으니 도착한 장소가 이곳이었다.

"백운 님, 현실적으로 여기가 한계에요."

유연경과 배이슬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회귀 전까지는 집값에 대한 개념을 잃고 살았었다.

애초에 살 상황도 안됐고 종말의 날로 인해 부동산 보유라는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원래 시작은 지하 단칸 방부터라고 했어.

옛 어른들의 말씀을 되새기며 눈을 낮췄다.

내가 무슨 결혼 생활을 할 것도 아니고 큰 집은 필요 없었다.

8평도 충분한 크기!

어차피 난 밖에 있을 일이 많으니까!

낮아진 눈에 비례해 다양해진 자기 위로가 이어졌다.

돈이 없는 현실 때문에 좁은 집을 사는 게 아니야, 암!

대부분 나가 있을 거니까 거기에 맞는 집을 사는 거지.

더 큰 집은 내게 사치야.

합리화를 완료한 후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부동산 업자를 바라봤다.

척.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로 하겠슴다!"

* * *

"너무 비싼 거 얻어먹은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저희가 사드려야 되는데!"

배이슬과 유연경이 배를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집 구하는 거까지 도와주셨는데 이 정도는 사드려야죠."

예상보다 돈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이런 것조차 아끼면 안되지 않겠는가!

840,000.

라고 하기엔 한 끼 식사치곤 넘나리 큰돈이었다.

"핸드폰은 여기서 사면 되겠네요."

마지막 순번은 핸드폰 구매였다.

미안한 마음에 괜찮다고 하는데도 같이 가주겠다고 한 두 사람.

그 후에 비싼 밥을 사줘서일까.

이제 미안한 마음은 조금 많이 사라졌어.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후.

핸드폰 구매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백운 님, 핸드폰 쓰는 방법은… 아시겠죠…?"

조심스럽게 묻는 배이슬.

"그럼요."

날 뭘로 보고!

유물관에서 일과가 끝나고 나면 할게 없어 하루 종일 핸드폰을 끼고 산 나였다.

회귀 후에는 워낙 쏘다니다 보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헌터들이 쓰면 좋을 어플들 알려드릴게요."

한튜브를 포함해 두 사람이 이것저것 어플을 알려주었다.

"이거 배달 앱인데 아마 필요할 거예요. 뭔가 딱히 안 해드실 거 같으니까."

"저… 정확하십니다."

그렇게 배달 어플까지 설치를 완료한 후.

또 뭐 없으려나 하며 두 사람이 자신의 핸드폰을 살폈다.

"아! 백운 님 국가직 헌터시죠? 이것도 설치하세요."

국가로부터 내려오는 오더나 포상금에 대한 정보.

혹은 현상금이 잔뜩 걸린 데몬에 대한 정보를 보여 주는 어플이라고 배이슬은 설명했다.

"아마 백운 님 지문이 등록되어 있을 테니 입력만 하면 될 거예요."

배이슬의 말대로 설치한 어플에 엄지를 대니 자동으로 로그인이 되었다.

"이야 볼 때마다 적응이 안되네요."

"그러게요. 10급 헌터라니."

둘이 사기꾼 보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하하…."

머리를 긁적이며 업데이트되는 어플을 바라봤다.

각종 포상금에 대한 데이터와 입금 내역 등이었다.

띠링.

"응?"

그러다 빨간색으로 점멸되는 메시지함.

"누가 메시지 보냈나본데요?"

나한테 뭘 보낼만한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시지함을 클릭했다.

!!

도착해있는 한 통의 메시지.

메시지엔 익숙한 이름이 찍혀있었다.

# 보낸이: 김희연.

89화. 도움 요청

- 이제 핸드폰 샀으니까 연락 잘 받아요.

내일 있을 동영상 촬영을 위해 집으로 돌아간 유연경과 배이슬.

대산의 토벌전에서 만나 마음이 맞은 둘은 이후로 함께 프리랜서 플랫폼인 프튜브에서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 나중에 한 번 등장해 주시고요.

무기왕으로서 한 번 등장해달라는 반농담을 마지막으로 둘은 서울로 떠났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가줘야지.

삐비빅.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지 생각하며 낯선 번호키를 눌렀다.

집이 비어있어 바로 입주가 가능했던 나의 오피스텔.

오우야.

이래서 내집 내집 하는 건가.

뭔가 월세로 살던 원룸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계약이 끝나고 나갈 일이 없어서인지 한층 더 포근한 느낌.

물론.

이불이고 뭐고 하나도 안 사온 터라 맨바닥에서 자야 하는 건 약간 곤란했다.

긁적.

2년 넘게 산바닥에서 잤는데 이불 하나 없다고 곤란하다 생각하다니.

하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아 메시지.

아까는 배이슬과 유연경이 있어 굳이 메시지를 열어보지 않았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김희연에게 곤란한 내용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보자보자.

딱딱한 맨바닥에 대충 배를 깔고 핸드폰을 꺼냈다.

회귀하기 전에 질리게 썼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써서인지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

삑.

어플을 열어 메시지함으로 들어갔다.

헌터청에선 국가직 헌터 간의 연락을 위해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메시지를 열자 짤막한 글이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백운 님. 

2년 전에 개미굴에서 함께 한 김희연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연락을 드리는데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염치없는 건 알지만.

저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지 궁금해 메시지를 남깁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아래 주소와 번호를 남길 테니 연락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일주일 전에 도착한 메시지.

메시지 안에는 공손한 말투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지?

김희연의 성격상 웬만하면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 메시지까지 남긴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닐 듯했다.

음, 좀 봐볼까.

부스럭.

챙겨놨던 기록지를 꺼내 살폈다.

소피아가 건네준 유물의 정보는 두 개가 남아 있었다.

이카루스의 날개.

척준경의 검, 악귀참도.

둘 다 몹시 구미가 당기는 유물들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눈이 번쩍 뜨이는 물건들.

그럼에도 이 두 개를 미루고 스이카를 먼저 찾은 이유가 있었다.

대산이 찾아낸 시기도 시기지만.

이 두 개의 무기들엔 각각의 문제점이 존재했다.

먼저 척준경의 검, 악귀참도.

이건 회귀 전에 대산이 오랫동안 찾다 포기해버린 무기였다.

- 모든 수단과 자원을 쏟아부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이미 소실 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정녕 실존은 했었던 무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악귀참도의 정보를 요구한 이유는 간단했다.

개멋있어… 척준경.

전세계 남자들에게 한 가지 무기를 고르라면 대다수의 이들이 검을 고를 것이다.

그만큼 검은 남자에게 있어 로망이나 마찬가지.

그중에서도 내가 몹시 동경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소드 마스터라 불렸던 고려제일검 척준경이다.

회귀 전에 대산조차 포기한 검이지만.

존재만 한다면 어떻게든 내가 찾고 싶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선택해버렸다.

히죽.

잠시 악귀참도를 발견해 사용하는 행복한 상상을 마치고.

이카루스의 날개를 내려다봤다.

으음…. 이건 무기인지 아닌지 아직도 애매하단 말이야.

대산이 찾아서 유물관에 기증했던 이카루스의 날개는 과연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인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악귀참도랑 스이카 말고는 딱히 고를 게 없었지.

날개를 고른 이유였다.

나머지 유물은 딱 봐도 무기고에 못 넣을 것 같았기에.

그나마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듯한 날개를 골랐다.

흠…. 이카루스의 날개는 그리스로 가야 하니까.

대산의 정보가 가리키는 장소는 그리스였다.

애초에 시작이 외국이다 보니 아무리 최소로 걸린다 해도 꽤 시간이 들 터였다.

악귀참도는 기약 없고.

어쨌든 이것들을 찾은 뒤 한국으로 돌아오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이거 찾고 나서 연락하는 건… 말이 안 되겠지.

집 정리만 끝나면 바로 그리스로 떠나려고 했었는데.

막상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니 못 본 척하기가 찜찜했다.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가까운 사이가 아님에도 김희연은 개미굴에 버려졌던 날 위해 밖에서 소리를 내주었던 사람이다.

- 데몬을 찾고 있습니다.

거기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떤 데몬을 찾고 있다던 이야기까지.

위험한 일에 처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흐음, 전화나 해보자.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능하다면 후딱 도와준 뒤 그리스로 향하면 된다.

띠리리---

메시지에 적혀있는 김희연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금 어색하겠네.

2년 만에 하는 통화.

일단 누르긴 했는데 막상 받으면 어색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리리---

이런 걱정 때문일까.

신호음만 계속 갈 뿐 김희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딱히 늦은 시간은 아니라 잘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 몇 번의 신호음이 더 간 후.

여전히 안 받는 김희연에 핸드폰을 내려놨다.

어쩔 수 없지 뭐.

바닥에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았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되니 어쩌겠는가.

….

누워있는 곳이 너무 딱딱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호텔에서 같이 밥을 먹던 김소연과 김희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따로 표현하지 않아도 김희연은 동생인 김소연을 끔찍이 아끼는 게 보였었다.

만약 소연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그래서 희연 님이 어쩔 수 없이 내게 연락을 한 거고.

으음.

오지랖인 거 같은데.

가능하다면 다른 이의 일에 오지랖 부리지 말자는 주의였다.

그런 주의였지만.

오지라퍼들에게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지.

회귀 전 주변의 오지라퍼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에잉!"

다시 몸을 뒤집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삑.

메시지함을 열어 아래 적혀있는 김소연과 김희연의 집 주소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집까지 찾아가는 건 명백한 오지랖이었지만.

찜찜한 마음 때문에 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찰칵.

메시지함의 주소를 스크린샷 해둔 뒤.

송도 근처니까 내일 한 번 가보자.

팔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집을 나섰다.

메시지에 적혀있던 집 주소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피스텔이었다.

버스를 타고 삼십 분 정도 걸렸을까.

아기자기하게 생긴 오피스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가.

눈앞의 오피스텔 이름과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보자, 11층.

마침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계단으로 가도 금방 가겠지만 굳이 1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를 못 본 척할 이유는 없었다.

난 문명인이니까.

핸드폰을 산 이후 잔뜩 문명인 뽕이 올라온 상태였다.

꾹.

11층 버튼을 누르고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잠깐만요!"

허겁지겁 달려온 여자가 거의 닫힌 문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시… 시발 놀래라.

멍 때리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손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내가 놀랐든 말든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에 오른 깔끔한 단발 머리의 여자.

"감사합니다."

난 아무것도 안 했지만.

감사하다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는 여자에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11층에 사나 보네.

내가 눌러놓은 11층을 보더니 아무 층도 안 누른 채 한 켠에 자리를 잡는 여자.

여자는 갈색 단발 머리에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얼레.

여자가 걸고 있는 목걸이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목걸이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국가직 7급 헌터, 이청아.

아 국가직 헌터 목걸이었구만.

등록소와 헌터청에서 많이 본 목걸이라 눈에 익었던 모양이다.

난 받자마자 잃어버렸으니.

스스로의 칠칠치 못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왜… 왜 그러세요?"

잔뜩 경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몸을 두 손으로 감싸며 나와 먼 곳으로 붙는 이청아.

목걸이를 본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저도 국가직 헌터라서요. 낯익은 목걸이에 저도 모르게 그만."

"아… 헌터셨군요."

그제야 살짝 경계를 누그러뜨린 이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사시나 봐요?"

"아니에요. 직장 동료 좀 만나러 왔어요."

"아하."

그렇게 영양가 없는 몇 마디를 주고 받는 사이.

1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꾸벅.

"그럼 안녕히가세요."

"아, 네! 안녕히가세요."

서로에게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저벅. 저벅.

… 뭐야.

갈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이청아와 난 완벽히 똑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아마 이청아도 속으로 저 새끼 뭐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듯했다.

"동… 동료분 집이 이쪽인가 보네요."

"네 하하…. 그러게요."

뚝.

그렇게 둘의 발걸음이 멈춘 1107호실.

동시에 멈춘 발걸음에 이청아가 조심스럽게 날 돌아봤다.

"혹시 만나러 오셨다는 분이…?"

"김희연 님이요."

"!!"

김희연이란 이름에 이청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청아 역시 같은 사람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꾸욱.

이청아가 쥐고 있던 열쇠를 뒤로 감추며 날 바라봤다.

"저 초면에 실례지만… 헌터증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희연이와는 무슨 관계시죠?"

엘리베이터에서보다 날 더욱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희연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이청아와 김희연은 직장 동료 이상으로 친한 모양이었다.

스윽.

"헌터증은 없고."

어플을 실행시킨 뒤 김희연이 보냈던 메시지를 보여줬다.

"!"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에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이청아.

이청아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철컥.

메시지를 확인한 뒤 쥐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여는 이청아.

바짝 날이 서 있던 경계심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저벅.

방으로 들어가는 이청아를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희연의 시크한 느낌과 김소연의 아기자기한 느낌이 한데 뒤섞여 있는, 따듯한 느낌의 집이었다.

"백운 님이셨군요."

조금 전 메시지에서 내 이름을 본 모양이었다.

"네, 제가 백운이에요."

안쪽으로 몇 걸음 더 옮긴 이청아가 핸드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나와 똑같은 어플이 실행되어 있었고.

어플 최상단엔 조금 전 내 핸드폰에 떠 있던 것과 같은 메시지 창이 올라와 있었다.

# 청아야, 나랑 소연이가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면.

지원을 받아 우리를 찾아 줄 수 있을까?

어려운 부탁해서 미안해.

부탁할 수 있는 게 너밖에 없다.

절대… 혼자서 찾으면 안돼.

지원이 불가능하다면 절대 찾지마.

그리고 바로 밑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아직 연락이 닿지 못했고.

닿는다 한들 백운 님이 우릴 도와줄지 모르겠지만.

만약 백운 님을 만난다면 청아 네가 그분에게 길을 알려줬으면 해.

…!

메시지의 마지막 줄.

# 우릴 찾게 된다면 꼭… 소연이를 먼저 찾아줘. 부탁할게.

90화. 흔적을 읽다

이청아에게 김희연의 메시지가 도착한 건 3일 전이었다.

내게 메시지를 보내고 4일이 지난 시점.

어찌 보면 겨우 4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청아의 메시지에서의 김희연은 무언가 달랐다.

뭔가 더 조급하고, 위험을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느낌인데.

그렇다고 당장 메시지가 납득이 가는 건 아니었다.

나와 이청아에게 메시지를 보내놓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

김희연과 김소연은 어째서 도망치지 않고 계속 나아간 걸까?

"청아 님은 더 들은 거 없나요? 메시지만 봐서는 상황을 잘 모르겠는데요."

고개를 흔든 이청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메시지를 받은 건 부산에서였어요. 사건 조사 때문에 부산 헌터청으로 파견 갔었거든요."

안 좋은 예감을 불러오는 메시지에 일이 끝나자마자 올라왔다는 이청아.

그런 이청아도 김희연에게 무언가를 듣진 못한 것 같았다.

"데몬을 찾고 있다."

"…?"

뜬금없는 내 말에 이청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김희연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그때 좀 더 물어볼 걸 그랬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것 같아 굳이 캐묻지 않았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때 한 말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희연 님이 저한테 했던 말이에요. 어떤 데몬을 찾고 있는지, 찾아서 어떻게 하려는 건지는 듣지 못했지만요."

"그러고 보니… 저한테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데몬을 찾는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어떤 물건을 한 번 봐줄 수 있냐고 했거든요. 찾아야 하는 게 있다고."

물건을 봐달라…?

"아, 제 능력이 무언가를 찾는데 좀 도움이 되거든요."

이청아가 식탁에 놓여 있는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을 시작으로 희미한 하얀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제 능력은 사이코메트리에요. 물건에 담긴 기억의 흔적을 볼 수 있어요."

…!?

사이코메트리.

물건을 통해 지난 일을 볼 수 있는 능력.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가진 형사 혹은 조력자가 물건의 흔적을 통해 사건을 풀어 가는 건 수사물의 단골 소재였다.

드라마나 만화에서만 봤었는데 실존하는구만.

새삼스레 인간이 상상 가능한 능력은 이미 다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만능은 아니에요."

이청아의 말과 함께 그릇에서 반짝이던 빛이 사라졌다.

무언가 더 빛나야 하는데 말아버린 느낌이었다.

"일주일 이내의 기억. 그리고 사용했던 사람의 물건에 대한 집착이나 중요도까지. 이것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기억이 보이지 않거든요."

방금 손을 댄 그릇에서도 아무런 기억이 안 보인다며 이청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유용한 능력이네.

일주일이란 시간 제한이 있지만.

반대로 이 시간 안에서는 중요한 단서에 대한 기억을 볼 수 있단 이야기였다.

시간이 많이 지난 미제 사건 같은 게 아니라면 수사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부산까지 출장가는 이유가 있구먼.

물론 살짝 불탔던 내 욕심은 사라졌다.

물건의 기억을 보는데 제한이 없다면 나중에 무기 찾을 때 도움 좀 받을까 했었는데.

"집안을 좀 더 살펴봐야겠어요."

이청아를 따라 집을 거닐었다.

두 명이 살기에는 꽤 큰 평수의 집이었다.

"희연 님이 부탁했던 물건은 뭐였어요?"

"음… 그게 좀 뭐라고 말하기가 애매하네요. 불에 탄 인형부터 애들이나 입을 법한 옷가지였어요."

불에 탄 인형이라.

감이 안 오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지 남아 있는 기억들도 희미하더라고요. 다른 것들은 아예 기억이 안 남아 있었고 인형에서만 약간의 장면만이 흐릿하게 보였어요."

이청아가 두 눈을 감았다.

좀 오래된 일인지 그때의 일을 떠올리려는 것 같았다.

"불이 나기 전이었어요. 주변에선 끼긱… 끼긱… 뭔가 부자연스러운게 억지로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났고. 사람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다수가 한쪽 문을 향해 나가고 있었어요."

불이 꺼져 있어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고 이청아는 말을 덧붙였다.

얘기만 들었을 땐 공포 영환데.

내가 인형이었으면 겁나 무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잠시 후엔 불까지 났으니.

흔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최대한 훑고는 있는데 뭔가 도움이 될만한 흔적은 없네요."

신발장을 시작으로 이청아는 계속해서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언가 놓칠세라 하나하나 전부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철컥.

"응…?"

집 안의 마지막 방.

방 앞에 선 이청아가 몇 차례 더 문고리를 당기더니 눈을 감았다.

"…!"

무언가를 본 건지 이청아가 고개를 돌렸다.

"희연이랑 소연이가 제일 많이 들락거린 방이에요. 기억이 남아 있는 걸 보니 문고리를 잡았을 때의 두 사람의 감정도 일반적이지 않았던 거 같고요."

이청아가 여기저기 둘러보며 방의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제가 열게요."

"네…?"

"아마 희연 님도 용서해 줄 거예요."

뿌드득.

조금 힘을 줘 문고리를 돌렸다.

이청아가 돌렸을 땐 철컥거리며 안 돌아갔지만 지금은 돌아가다 못해 뽑혀버린 손잡이.

사이코메트리 능력에 시간제한이 있는 이상 열쇠를 찾으며 시간을 흘려보낼 순 없었다.

"…."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집 방문 손잡이를 뽑아서일까.

이청아가 멍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들어가시죠."

"아… 네."

캄캄한 방이었다.

빛 한줄기조차 없어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어둠이 깔린 방.

더듬더듬.

통상 국룰로 스위치가 있는 벽을 더듬었다.

역시.

딸깍.

"!!"

캄캄했던 방에 불이 들어오고.

방 안을 바라본 이청아와 난 잠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냐.

* * *

범죄 스릴러 영화에나 나올 법한 방인데.

김희연과 김소연의 집이란 걸 몰랐다면 100% 범인의 방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조사한 거 같아요."

사각형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기사와 메모들.

대충 양만 봐도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자료를 모은 듯했다.

한샘 보육원 실종 사건.

별빛 보육원 실종 사건.

전부 실종 사건이네.

각 연도 별로 일어난 사건들의 기사가 붙어있었는데.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보육원이며 이곳에서 지냈던 모든 아이가 한 명도 빠짐없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건이 아직까지도 미제라는 점이었다.

"아이들을 돌보던 돌봄이나 선생님들은 모두 죽었어요."

사라진 건 오직 아이들뿐이었다.

대충 사건 수만 봐도 수백은 넘을 거 같은데 아직도 미제라니.

각종 능력이 생기면서 수사도 훨씬 수월해졌을 텐데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는 거 같아요."

이청아의 말대로였다.

자료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음."

방의 왼쪽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희연과 김소연이 언제부터 실종 사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한 건지 궁금했다.

2010년.

사건의 시작은 무려 11년 전이었다.

개방과 능력이 생기기도 훨씬 전의 일.

"제일 최근 사건은 한 달 전이에요."

나와 반대로 가 사건을 살피던 이청아의 목소리.

10년이 넘게 같은 사건이 발생했단 거야…?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철저하게 사건을 은폐하고 숨기려 했다 하더라도 10년이 넘게 같은 방식의 사건이 발생하다니. 

연쇄 살인도 이렇게 오래 지속된 건 없을 터였다.

!!

시간순을 따라 기사를 읽던 중.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 실종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김희연 양과 유소연 양.

"청아 님, 이거 좀 보실래요?"

다가온 이청아가 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

"이거 희연 님이랑 소연 님… 맞죠?"

"마… 맞는 거 같아요. 10년 전 사건이면 나이도 똑같아요."

"두 분 친자매 아니었나요?"

고개를 젓는 이청아.

이청아도 따로 들은 건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안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처음 만났을 땐 성도 같고 워낙 살가운 모습에 당연히 친자매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생김새 자체는 전혀 닮지 않았었다.

일단 이건 나중에 궁금해하고.

김희연과 김소연에 대한 기사를 쭉 읽어나갔다.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발생한 보육원 실종 사건.

# 드디어 사건의 실마리가 발견되었다.

# 목격자가 있으니 해결은 시간 문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목격자의 탄생에 사람들은 김희연과 김소연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 기대는 오래 가지 못했구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 가득했던 기사는 점점 암울한 내용으로 바뀌어 갔다.

# 유소연 양은 잠에 든 상태였기에 아무것도 보지 못함.

# 김희연 양은 계속해서 괴물이 범인이라 주장해 사건에 난항 예상.

# 사건의 충격으로 인한 착란 증상으로 보임.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들어갔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해당 사건의 기사는 마무리 지어져 있었다.

어렸을 때라고 해도 희연 님이 없는 얘기를 했을 거 같진 않은데.

김희연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김희연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겁에 질려 패닉에 빠지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동생인 김소연을 챙길 사람이었다.

괴물.

나 역시 옛날이었다면 김희연이 꿈을 꿨거나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

광산에서 봤던 피렌조와 루비 산에 살고 있던 페샨까지.

데몬은 개방과 동시에 나타난 존재들이 아니었다.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우리의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개방과 동시에 나타난 것들이라 생각하지만.

10년 전이라면 데몬은 커녕 스마트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괴물이라 말하는 김희연의 말을 믿지 않는 건 당연한 일.

만약 희연 님이 말한 괴물이 데몬이라면.

- 데몬을 찾고 있어요.

김희연이 했던 말과 연결점이 있었다.

데몬이 희연 님과 소연 님이 있던 보육원을 공격했고.

어른들을 죽인 후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김희연과 김소연은 친구들을 데려간 데몬을 쫓고 있다…?

아직 가설을 확정 지을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지만, 가능성은 존재했다.

….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김희연과 김소연이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진 이유는 명확했다.

찾았구나.

띠링!

머리를 굴리며 가설에 대한 증거를 떠올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이청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메시지를 확인한 이청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그래요?"

"반대편 벽에 있는 가장 최근의 기사… 거기서 기억을 읽었어요. 희연이랑 소연이는 찾고 있는 게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특정한 거 같았어요. 그리고…."

슥.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여주는 이청아.

메시지엔 8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곳이 위험하다 판단하며 어딘가로 지원을 요청하는 걸로 기억은 끝이 났어요."

두 사람이 지원할만한 곳은 소속되어 있는 국가 헌터청이었기에.

조금 전 이청아는 인천 헌터청으로 김희연의 지원 요청이 있었는지를 물었다고 했다.

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온 게 조금 전의 메시지.

"희연이에게 전투 헌터들을 지원해달라는 연락이 왔었대요. 그리고 여기에 적힌 사람들이 지원을 나간 헌터들 이름이고요."

이청아가 스크롤을 내려 메시지의 마지막을 보여주었다.

….

"헌터청으로 가보죠."

고개를 끄덕이는 이청아를 앞장 세우고 방을 빠져나왔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한다.

방금 본 메시지의 마지막은 마음을 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 8명의 헌터 모두 복귀하지 않음.

91화. 보육원의 인형들

"어? 청아 님? 오늘 휴가잖아요."

김희연과 김소연, 이청아가 근무하고 있는 인천 지부.

입구로 들어서자 데스크에 있던 요원이 이청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뭐가 이렇게 긴장감이 없어?

도착했던 메시지에 따르면 이곳에 있는 헌터가 10명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이는 인천 지부.

지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부산 갔다 왔으면 집에서 푹 쉬어야지! 어! 왜 출근을 하고 그래요!"

이청아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요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윗선의 정보가 차단되어 있다고 한들 분위기란 게 있을 텐데.

저렇게 해맑게 손 흔드는 게 가능한가.

지금 상황이 적응되지 않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예상하던 분위기와 다른지 이청아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윤 님, 희연이랑 소연이, 그리고 희연이가 지원 요청했던 헌터들이 복귀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아아! 그거요."

말도 말라는 듯 윤이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난리 났었어요. 헌터들이 한 방에 우르르 사라졌으니." 

윤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인천 지부에 와본 적은 없지만 평소 업무 분위기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대충 감 오죠? 괜한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다 정상 업무 중이고요."

"괜한 걱정이었다고요…?"

고개를 끄덕인 윤이 두어 시간 전의 출입 명부를 띄워줬다.

"두 시간 전에 지원 나갔던 헌터 두 명이 복귀했거든요. 나머지 사람들은 술 먹고 뻗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네…!? 술 먹고 뻗어 있다니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쵸? 완전 어이없죠? 희연 님 지원받아서 나갔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밝혀졌대요. 그래서 간 김에 아쉬우니 술 한 잔하고 헤어진다는 게 과음해서 다 뻗어 있다고 하던데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윤이란 사람은 어이없다며 열변을 토했지만.

말이 되는 소린가 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복귀한 게 누군데요?"

"이재호 선배님이랑 김철주 선배님요."

이청아가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줬다.

"두 명 다 5급 헌터들이에요. 상시 대기 중인 헌터 중에는 제일 높은 급수 선배들이고요."

꽤 높은 급수의 선배들인 만큼 지부에서의 신망도 두터울 터.

두 사람이 복귀해 그렇게 말했으니 조금 말이 안 돼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다들 술병 나서 내일이나 내일모레면 출근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거 듣고 지부장님은 다 출근하면 아주 혼쭐내겠다고 하는 중이긴 한데, 그러면서도 별 문제 없으니 다행이라는 거 보면 많이 화나신 거 같진 않아요."

지부장님이고 뭐고.

다른 헌터들은 몰라도 김희연이 그랬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냈으면서 술 먹다가 술병이 났다?

말도 안 되지.

슥.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청아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당연했다.

김희연에게 메시지를 받았고, 집에서의 그 자료들까지 봤다면 현재 상황을 그렇구나 하며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윤 님, 복귀하셨다는 선배님 두 분 어디 가셨어요?"

복귀했다는 사람들을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정확히는 그 사람들이 알고 있을 김희연과 김소연의 위치가 필요했다.

지금은 무슨 말을 듣던 김희연 본인을 만나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희연 님이 지원 요청했던 현장 좀 들린다고 했어요. 처리할 게 있다고 하면서요."

슥.

다급하게 핸드폰을 내민 이청아가 입을 열었다.

"여기에 위치 좀 찍어 주세요."

* * *

윤이 찍어준 주소를 따라 도착한 장소.

이것 봐라.

송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육원이었다.

도시와 멀진 않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폐쇄적인 느낌을 주는 위치.

"가보죠."

보육원의 안내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시설물들이 전부 깨끗한 걸로 보아 얼마 전까지 사용되던 곳 같았다.

아니네.

얼마 전 수준이 아니었다.

바로 3,4일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생활했던 흔적들이 보였다.

급식소로 보이는 건물 앞에 정차되어 있는 차량과 그 차량에 담긴 식재료들까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식당으로 옮겨졌어야 할 식재료들은 트럭 뒤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왜 아무도 없을까요…?"

"그러게요, 당장 사람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데."

정말 딱 사람만 없었다.

"원래는 인천 지부에서 헌터들을 더 파견할 예정이었다고 해요. 선배 두 명이 출근하면서 취소되었고요."

"그 선배들은 어디에 계실까요?"

핸드폰을 내려다본 이청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부터 연락을 하고 있는데 둘 다 받지 않는다는 것.

계속 들어가 볼 수밖에 없나.

….

길을 따라 얼마나 더 걸었을까.

아이들이 지냈을 걸로 보이는 숙소가 나타났다.

이곳 역시 외관상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상태.

끼익.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찌릿.

…!!

들어왔을 때도 어둡다 보니 눈에 띄는 건 없었지만.

문을 열기 무섭게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왔다.

철컥.

현장에 갈 일이 많아서일까.

피비린내를 감지한 이청아도 차고 있던 총을 꺼내 들었다.

비전투 계열일 텐데 용감하시네.

총부터 뽑고 보는 이청아에 감탄하며 고개를 돌렸다.

… 아니구나.

예상과 달리 엄청난 긴장으로 눈이 땡그랗게 변해있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총을 잡은 손에선 미세한 떨림마저 느껴졌다.

그냥 가자.

괜찮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괜히 말 걸었다가 깜짝 놀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한다.

등에 총 맞을 순 없으니까.

찰박.

….

이청아에게 향했던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익숙한 감촉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약간 묽지만 끈적한 것.

일본에서 시노카 놈들 본거지로 처들어 갔을 때 질리도록 느꼈던 감촉이었다.

끼긱. 끼긱.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피를 밟음과 동시에 괴기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주변에선 끼긱. 끼긱. 뭔가 부자연스러운게 억지로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났어요.

이청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김희연이 건넨 불탄 인형에서 본 기억.

그 기억 속에서 들었다는 소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윽.

조용히 돌아보자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이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청아를 옆에 바짝 붙인 뒤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끼기긱…! 끼긱…!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불협화음.

존나 무섭네.

상황 자체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공포 영화였다면 몸을 억죄어오는 긴장감에 꺼버렸을 터.

암막 커튼은 쓸데없이 좋은 거 써가지고.

대낮인데도 빛 한 줄기 안 들어오는 건물에 괜한 원망을 해본다.

저벅.

끼기긱!!! 끼끼기긱!!!

… 이런.

발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던 이청아에게 손을 뻗었다.

"…?"

긴가민가했었는데.

이쯤 걸어오니 확실해졌다.

다가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커졌던 불협화음의 정체.

우리만 다가가던 게 아니었구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것들이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젠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배… 백운 님…!"

떨리는 이청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에 적응된 눈이 바라보고 있는 걸 이청아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뭐지 저건? 마리오네트…?

이제야 저런 소리가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뭐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걸음걸이 자체가 몹시 불안정한 인형들.

인형… 맞겠지.

인형들은 비틀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관절이 뒤틀리며 나는 소리가 끼긱거리며 사방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청아 님, 혹시 주변 밝힐만한 거 있나요?"

마음 같아선 수리검을 던져 천장을 박살내고 싶었다.

그러면 햇빛이라도 들어와 주변을 밝혀줄 테니 말이다.

안에 누가 있을지를 모르니 난감하네.

아무래도 어린 애들이 있을 보육원이다 보니 행동이 조심스러운 상황.

적어도 공격하기 전에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확인이 필요했다.

"구… 구조 신호용 탄이 하나 있어요."

몇 걸음 안 남은 거리까지 다가온 소리에 이청아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잠깐이면 되니까.

"천장 쪽으로 탄 터뜨려요."

"네… 네!"

되묻지 않고 빠르게 내 말에 따르는 이청아.

끼긱!!! 끼기긱!!!

"지금 쏴요."

"네…!"

탕!

건물의 높은 천장을 향해 쏘아 올려진 신호탄.

신호탄의 불빛에 주변에 있는 것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수십 기의 인형들.

"귀 막아요."

"…!"

두 손을 들어 귀를 막는 이청아를 확인하고.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철컥.

[발도]

끼아아아아아아아악----!!

* * *

습하고 눅눅한 공간.

약간의 호흡만으로도 풍겨오는 후덥지근함과 악취에 숨이 턱턱 막히는 장소였다.

"음…?"

그 공간의 중앙에 있던 무언가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작은 체구에 어릿어릿한 얼굴.

그리고 이런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와 흰자 없이 검은색만이 가득한 공허한 눈동자까지.

얼핏 보면 사람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사람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존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밌네."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발음과 목소리.

끼긱.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데몬이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에 누가 내 인형들을 한 방에 박살 내버렸는데, 너 아는 사람이야?"

"…."

"응? 희연아."

스윽.

"흐읍!"

목덜미로 닿는 손길에 김희연이 몸서리를 쳤다.

위로 묶여있는 두 손으로 인해 앞에 있는 데몬에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칼 한 번 휘둘렀는데 내 애들이 다 박살나버렸네."

'…!!'

자세한 건 듣지 못 했지만 김희연의 머릿속엔 단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백운.

김희연이 감고 있던 눈을 떠 앞에 있는 데몬.

이젠 데몬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정혁을 바라봤다.

"어제 데려온 놈들은 참 실망스러웠는데. 너 인맥 좋구나?"

정혁이 김희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10년 전만 해도 그냥 보육원에 있는 외톨이 중 한 명이었는데 성공했네."

"소… 소연이는… 어떻게 했어!"

김희연의 물음에 정혁이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만 열면 소연, 소연. 진짜 지겨워죽겠네. 그거 하나는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구나."

"제발… 소연이는 내버려둬. 나만 잡았으면 되잖아."

간절하게 말하는 김희연에게 정혁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까?"

되묻는 듯한 물음으로 실실 웃어대는 정혁에 김희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정혁이 김소연의 목숨을 두고 저런 농담을 지껄인 게.

'아직은 못 잡았어.'

이곳으로 향하던 중 보육원에서 갈라진 김소연.

정혁이 저러는 걸 보면 아직 잡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피식.

"재미없네."

어깨를 으쓱 올린 정혁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

김희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김소연도, 그리고 널 찾으러 오는 두놈년도. 네가 보는 앞에서 내 인형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92화. 10년 전에는

김희연이 갇힌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

사람의 발길이 끊긴 폐허에 푸른색의 실뭉치가 겹겹이 쌓여있다.

카각! 카각! 카각!

쉽게 풀리지 않는 실뭉치를 향해 쉴새 없이 칼질 중인 인형들.

인형들의 목적은 오로지 실뭉치 안에 든 것을 꺼내는 일이었다.

"하아… 하아."

실뭉치에 둘러싸여 있는 김소연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언니는 괜찮을까.'

오랜 시간 찾아오던 데몬을 발견한 게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헌터 지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개인적인 조사를 통해 다음 실종 사건이 일어날 곳을 미리 알아낼 수 있었다.

- 무슨 실종 사건요? 그건 미제 사건이잖아요. 불확실한 증거로 인력을 지원해드릴 순 없습니다.

사건 담당이라던 경찰에게 들은 말이었다.

똑같은 사건이 일정 주기를 두고 일어나고 있음에도 찾을 생각은커녕 어차피 또 미제가 될 거라 여기며 손을 놓고 있던 것.

'조사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간신히 찾은 데몬은 언제 또다시 모습을 감출지 몰랐기에.

김소연과 김희연을 둘만이라도 갈 생각이었다.

- 내 개인 권한으로 지원할 수 있는 건 8명뿐이다.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소속되어 있는 지부장에게 보고를 올렸고.

지부장은 공식적인 지원은 불가능하지만 개인 권한을 통해 전투 계열 헌터 8명을 증원해줬다.

- 감사합니다!

상황 자체는 믿기 힘들지만 김희연과 김소연 두 사람을 믿은 지부장.

그렇게 지부 헌터 8명의 지원을 받아 사건이 일어날 거라 예상되는 보육원으로 향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곳이었다.

- 끼익.

'….'

도착한 보육원엔 있어야 할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라진 뒤였고 어른들은 전부 살해당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 전투 준비.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시체에 함께 온 헌터들이 전투르 준비하는 사이.

- 끼긱.

피범벅이 되어 있던 시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몸 안이 텅 비어 외형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시체들은 사람보단 인형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 쾅! 쾅! 두두!

처음엔 순조로웠었다.

함께 온 헌터들 중엔 많은 전투 경험은 가진 5급도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 10년 만이네.

그게 나타난 뒤로 상황은 바뀌어버렸다.

어린아이의 체구로 흰색 머리를 한 데몬.

10년 전 함께 보육원에서 지냈지만, 이제는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정혁이었다.

- …!!

정혁의 등장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굳고 말았다.

일본에서 사로카라는 데몬이 말을 했다는 소식은 들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 사… 사람…?

헌터들이 헷갈릴 정도로 정혁의 모습은 데몬보다는 인간 아이에 가까웠다.

- 데몬이에요!

김희연의 외침에 주춤거리던 헌터들이 정신을 차렸다.

솔직히 김소연 역시 헷갈렸다.

저걸 과연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이다.

- 섭섭하네, 데몬이라니.

마치 사람처럼.

두 손을 들고 천천히 다가온 정혁에 모두가 긴장했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바로 공격할 채비를 마친 상태.

- 희연아, 데몬인데.

다가온 정혁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그려 보였고.

- 왜 안 쏘니.

새카맣기만 했던 눈에서 하얀색 그림자가 튀어나와 김희연과 김소연, 눈을 바라보고 있지 않던 한 명의 헌터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덮쳐버렸다.

- 죽여라.

정혁의 한 마디와 함께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주변의 인형들과 정혁은 놔두고 자기들끼리 능력을 난사하기 시작한 헌터들.

그중에서도 선임급인 이재호와 김철주에 의해 나머지 5명의 헌터는 순식간에 도륙당해버렸다.

- 명규 님! 소연이 데리고 도망쳐요!!

뒤늦게 방아쇠를 당긴 김희연에 인형들이 달려들었고.

유일하게 정혁의 눈에 안 당한 임명규가 단거리 이동 능력을 사용해 김소연을 옮겨왔다.

'언니… 명규 님….'

간신히 보육원에서는 벗어났지만.

거기까지였다.

정혁의 인형은 금세 추격해왔고, 능력을 사용하기 전 김철주의 무기에 맞은 임명규 역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카각!

'얼마 못 버티겠어.'

사방에서 달려드는 인형을 당해낼 전투 능력은 없었다.

일단 급한대로 능력을 사용해 공격을 버텨내는 중이었다.

그마저도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어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김소연의 머릿속엔 홀로 남겨졌던 김희연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김희연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김소연이 두 손을 모았다.

지금 김소연이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제발… 언니를 구해주세요.'

* * *

딸깍.

허.

스이카의 발도를 한차례 뿜어낸 후.

잠잠해진 주변에 검을 집어넣고 전동 스위치를 찾아냈다.

"아…!"

전등으로 밝혀진 보육원은 처참 그 자체였다.

피비린내의 정체는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었다.

그중엔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인천 지부의 헌터들도 섞여 있는 듯했다.

"아… 안돼."

함께 일했던 동료의 시체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이청아.

충격이 크겠는데.

단순히 죽어서만이 아니었다.

쓰러져 있는 시체의 상태가 너무 처참했다.

어째서인지 내부가 다 비어버리고 뼈와 살만이 남겨져 있었다.

특히 저 둘.

아마 인천 지부에 돌아왔었다던 두 명 같았다.

내부가 비워지던 중 우리가 온 건지 각 장기가 끄집어져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뭐 때문에 꺼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청아가 안 보는 게 나았을 법한 장면이었다.

조종도 가능한 건가.

조금 전 스이카를 휘둘렀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인형 같이 움직이긴 하지만, 나무토막이나 플라스틱을 베는 느낌이 아니었다.

약간 다르지만 사람을 베었을 때와 똑같은 감각.

재료가 사람인 인형이라.

스이카에 베여 조각나 있는 인형들의 외형은 대부분이 어린아이였다.

무언가에 의해 살과 뼈가 코팅되어 인형처럼 변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기분 더럽네.

인형화 되어 조종되고 있는 데몬이었지만.

재료가 된 사람과 생김새 때문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보육원 실종 사건들.

설마 사라진 애들은 전부…?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휙휙.

고개를 내저어 이런 생각들을 털어내고.

저벅.

조심스럽게 주저앉아 있는 이청아에게 다가갔다.

현재 상황만으로도 힘들겠지만 지금은 김희연과 김소연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청아 님."

조용히 부르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청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청아가 천천히 주변을 돌며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좀 미안하네.

능력을 사용하면서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이청아.

눈 앞에 펼쳐진 광경만 봐도 이청아가 보고 있는 기억이 끔찍할 거란 걸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었다.

"이런…!"

"뭔가 보였나요?"

"희연이는 살아있는 상태로 끌려갔어요. 소연이는 명규 님의 능력으로 자리를 벗어난 모양이고요. 그런데… 바로 쫓아간 인형들이 많아서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겠어요."

동생을 피하게 하고 잡혀간 건가.

보면 볼수록 동생 바보인 사람이었다.

"장소, 알아낼 수 있을까요?"

이청아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볼게요…. 아니, 꼭 찾을게요!"

* * *

팟.

어느덧 어둠이 깔린 시간.

조심스럽게 낡은 관람차 위로 몸을 옮겼다.

- 청아 님은 지부에 지원 요청하셔서 소연 님한테 가세요.

처음엔 갈려버린 김희연과 김소연을 놓고 잠시 고민했었다.

메시지에서 꼭 김소연을 먼저 찾아달라 부탁했던 김희연.

그럼에도 김희연이 향한 월미도 쪽으로 방향을 튼 이유는 하나였다.

그 데몬은 김희연 쪽인 거 같으니까.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몰라도 5급 헌터까지 조종해낸 데몬.

지부에는 5급보다 상위 급수의 헌터가 없었기에 월미도로 가봐야 똑같이 당할 확률이 높았다.

내가 조종 당하는 건 아니겠지.

아까 몸이 비어있던 시체들이 떠올라 잠시 소름이 돋았다.

그럼 귀신이 돼서라도 죽인다.

믿고 있는 구석이 두어가지 있었지만, 어쨌든.

제일 높은 관람차 위에서 아래를 훑었다.

데몬의 등장 이후 버려진 지역, 월미도.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국가에서도 관리하지 않게 된 곳이었다.

으스스하네.

버려진 장소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한때 사람이 북적였던 놀이기구들이 휑하게 있으니 더 오싹한 느낌이었다.

눅눅하고 후덥지근하다고 했지.

이청아는 내가 벤 인형들을 상대로 기억을 읽었었다.

흐릿한 기억을 통해 월미도를 알아냈고. 

인형들이 있던 장소가 눅눅하고 습하며 동시에 후덥지근한 장소란 것까지 읽어냈다.

충분히 했어.

티는 안 내려 노력했지만 딱 봐도 이청아의 안색은 최악이었다.

습하고 눅눅하면 일단 지하일 거 같은데.

끼긱.

…!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작게 들렸지만, 분명히 보육원에서 들었던 인형 소리였다.

스윽.

관람차 아래로 몸을 날렸다.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듯한 인형의 소리.

소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부디 둥지로 안내해다오.

* * *

월미도의 지하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돌아온 정혁이 묶여있는 김희연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둘만 있으니 옛날 생각나네."

"…."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김희연을 향해 정혁이 말을 이어갔다.

"원장 놈한테 두들겨 맞은 날이면 네가 조용히 나와서 위로해줬잖아."

질끈.

떠오른 기억에 김희연이 눈을 더 강하게 감았다.

1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너무나 선명한 기억이었다.

- 고마워 희연아.

모질게 맞았음에도 고맙다며 밝게 웃었던 친구.

그 친구가 지금은 데몬이 되어 사람들을 죽여대고 있었다.

"날 괴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세상엔 나보다 더 악질인 놈들이 많아. 인간 중에서도 말이야."

정혁이 자신의 둥지를 한 번 둘러봤다.

10년 동안이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머물렀던 공간.

"여기가 안 들킨 게 과연 나만의 힘이었다 생각해?"

"…?"

의미심장한 질문에 김희연이 눈을 떴다.

히죽.

김희연이 반응해서인지 웃어 보인 정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이 공간을 사랑하는 이유는 딱 하나야. 모든 게 썼었지만, 여긴 아니거든. 내가 만든 이곳은 깨끗해."

"너만의 힘이 아니라면… 누군가 또 있다는 거야?"

김희연의 질문에 정혁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글쎄. 나의 공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해두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정혁이 김희연을 응시했다.

"10년 전과 지금, 어떻게 생각해? 훨씬 살기 좋은, 깨끗한 세상이 됐다고 생각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때도 더러운 지옥이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김희연의 바로 앞에 자리를 잡은 정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떠올려봐, 10년 전을."

* * *

10년 전, 어느 외딴 곳에 위치한 보육원.

"괜찮아?"

93화. 보육원의 밤

짜악! 짜악!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어제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잠에 들어야 하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는 보육원. 

비틀.

뺨을 얻어맞던 작은 체구의 아이가 몸을 비틀거렸다.

"야 정혁 이 새끼야! 똑바로 서!"

짜악!

바로 서기 무섭게 날아드는 뺨에 정혁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미 얼굴은 팅팅 불어 피범벅이 되어 있는 상태.

조금만 더 맞았다간 정말 큰일을 치를 것 같았다.

"아휴 원장님, 그만하세요. 오늘만 날인가요."

큰일이 나면 불똥이 튈 걸 걱정해서일까.

폭행을 한참이나 방관하던 선생, 이지수가 원장을 말렸다.

"아니 이 새끼 눈이 어!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새끼가!"

원장 김태용은 몹시 화나 있었다.

하지만, 서 있는 이들 중 김태용이 화난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유가 없으니까.'

눈앞에서 친구가 얻어맞는 광경에 눈을 돌리고 있던 김희연.

김희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용의 이유 없는 분노와 폭행은 일일행사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김태용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밤이 되면 몸을 사렸다.

"죄송하단 말을 안해 이 새끼는!!"

'죄송하다고 해, 이 멍청아!'

눈살을 찌푸린 김희연이 쓰러져 있는 정혁을 응시했다.

재수 없게 타겟이 되면 다른 아이들은 울며불며 용서해달라고 난리인데.

정혁만은 항상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폭행을 견뎌냈다.

'매를 벌고 있어.'

그래서인지 요즘 김태용의 타겟은 정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밤이 깊으면 누구를 찝을 생각도 없이 정혁의 머리를 끌고 나갔다.

"퉤!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마무리로 침을 뱉은 원장이 선생 이지수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하아.'

드디어 기나긴 하루가 끝나고 짤막한 평화가 찾아왔다.

보육원에 허락된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우루루.

자리에 서 있던 아이들이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쓰러져 있는 정혁에게 다가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괜히 가까이했다가 원장의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단 한 명.

김희연만이 정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윽.

김희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고개를 털며 일어난 정혁이 김희연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정혁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괜찮냐는 질문에 정혁은 항상 미소를 지었다.

'이상해.'

김희연의 상식선에서 정혁은 이상했다.

아프거나 울긴커녕 웃어버리다니.

"가자, 희연아."

조용히 입을 연 정혁이 방으로 앞장섰다.

'충격받아서 그런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김태용과 이지수가 하는 말을 들었었다.

정혁이 원래 있던 보육원의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 선생님들은 모두 죽었다고 하던대요?

- 저 자식만 살아남았다는데 재수 없는 자식!

"하암, 잠이나 자자."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는 김희연.

김희연이 정혁을 따라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정혁, 안 아파?"

"응."

2층 침대 중 아래에 위치한 정혁이 곧장 대답을 해왔다.

"오빠, 정말 괜찮아?"

김희연의 옆에 누워있는 유소연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정혁은 여전히 괜찮다는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희연아, 소연아."

정혁의 부름에 김희연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상한 소리 하려고.'

밤이면 밤마다 정혁이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곳이 생기면, 같이 갈래?"

처음엔 정혁의 말에 김희연과 유소연도 격한 반응을 해줬었다.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꿈 같은 이야기였지만 상상만 해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수십 번 들으니까 지겨워.'

김희연이 고개를 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착해빠진 유소연만이 정혁의 말에 대꾸를 해주고 있었다.

"대체 거기가 어딘데? 말을 해줘야지."

"그냥… 어른들이 없는, 우리끼리만 있을 수 있는 곳이야."

언제나 여기까지만 말한 뒤 말을 멈췄던 정혁.

제대로 된 대답을 안 해주고 잘 걸 알기에 김희연은 신경을 끄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멀지 않았어."

'…!'

정혁이 평소엔 하지 않았을 말을 한마디 더 내뱉었다.

"다 왔어."

"뭐라고?"

평소와 다른 말에 김희연이 몸을 일으켰지만.

"…."

밑에 있는 정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 *

"어떤 새끼야!!"

얼굴이 시뻘게진 김태용이 차고 있던 벨트를 풀었다.

제대로 화가 난 김태용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보육원의 아이들.

"어떤 개새끼가 이런 짓을 한 거냐고!!"

눈이 돌아간 김태용 옆엔 고양이 한 마리가 잔인하게 찢겨 죽어있었다.

보육원 아이들 전부보다 더 아껴온 김태용의 고양이었다.

"너야!?"

"아… 아니에요!!"

"그럼 너야!?"

"흑흑… 전 아니에요!"

무차별적인 김태용의 지목에 아이들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들 한 번씩은 저 벨트의 희생자가 되어봤기에.

익히 알고 있는 고통이기에 더욱 큰 공포에 질려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단 한 명.

정혁을 제외하고.

척.

아이들을 둘러보던 김태용이 걸음을 멈췄다.

그런 김태용 앞에서 떨기는커녕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정혁.

"야이 새끼야, 너지?"

콰악.

정혁의 멱살을 잡은 김태용이 침을 튀기며 욕지거리를 했다.

짜악!

"대답 안 해?"

짜악!

"대답해!"

짜악!

김태용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폭발 직전이었다.

그러든 말든 정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김태용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냐 이 개새끼. 오늘 한 번 죽어보자."

김태용이 들고 있던 벨트를 무자비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소리가 퍼지며 정혁의 살이 터져나갔고, 자리에 있던 아이들은 잔인한 구타 현장에 모두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새끼! 이 싸이코 새끼! 왔을 때부터 알아봤어!"

짝!

"전에 있던 보육원도 네가 그랬지 이 새끼야!!"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악에 받쳐 나오는 대로 뱉었을 뿐인 말.

그 말에 정혁이 고개를 들어 김태용을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어요?"

오싹.

또박또박 들려오는 정혁의 목소리에 김희연이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심지어 김태용마저 놀라 매질을 멈춘 상태.

"뭐… 뭐?"

그만큼 소름 돋는 한 마디였다.

지금까진 아무리 때리고 혼내도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았던 아이가.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의아한 얼굴로 저런 되물음을 한 것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순간이지만 눈앞의 작은 아이에게 움츠러든 김태용.

이런 사실에 더 화가 난 김태용이 밸트를 높이 치켜들었다.

"여기에 있어요."

'…?'

히죽.

'!!!'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는 정혁에 얼음장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주춤.

김희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입꼬리가 찢어질 듯 웃고 있는 정혁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 언니."

꼬옥.

옆에 있던 유소연이 김희연의 옷깃을 붙잡았다.

옷깃 너머로 유소연의 떨림이 느껴졌다.

"미친 새끼!!"

주먹을 쥐고 정혁을 패기 시작한 김태용과.

아무 말도 못하고 바싹 얼어있는 보육원의 아이들.

평소엔 김태용이 무서워 얼어있던 아이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

아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건 눈앞에서 주먹에 얻어맞고 있는 아이, 정혁이었다.

* * *

늦은 밤, 보육원의 숙직실.

원래라면 간밤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당직이겠지만.

이곳은 달랐다.

"설마 내 당직 때 도망가는 새끼는 없겠지."

감시.

가혹한 일과와 자신들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는 일이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일어났고.

이걸 막기 위한 대책으로 김태용은 당직이란 시스템을 만들어버렸다.

"꼭 지만 쏙 빠져요."

월급을 주는 원장이다 보니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지만.

정말 대책 없는 인간이었다.

다음 날이 국가에서 주기적으로 나오는 검사 날인데도 화를 못 이겨 애를 곤죽을 만들곤 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보육원의 선생들이 나서 아이들을 소풍이란 명목으로 빼돌려야 했다.

"고양이는 또 어떤 새끼가 그런 거야, 피곤하게."

아끼던 고양이가 죽으며 대폭발을 해버린 김태용.

오늘이야말로 정혁이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었다.

"독한 새끼,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괜히 그 새끼 때문에 불똥이나 튀고."

고개를 흔든 이지수가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시작한 고스톱.

오늘도 새벽을 고스톱으로 지샐 생각이었다.

"아이 썅, 당직도 짜증나는데 패는 또 왜 지랄이…."

끼긱.

"…?"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끼긱.

무언가 비틀리며 나는 듯한 괴기한 소리였다.

"누… 누구야? 김 선생님이야?"

순찰을 돌고 있을 김 선생인가 싶어 말을 걸어보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끼긱.

"재미 없으니까 장난치지마!"

여전히 들리지 않는 대답에 이지수가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김 선생이 아니야.'

끼긱.

"어떤 새끼야!!"

이지수가 빼액 소리를 지르자 소리가 잦아들었다.

분명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 중 한 명이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했지만.

어째선지 숙직실을 나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꿀꺽.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소리.

이제야 고요해진 주변에 이지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끼긱! 끼긱! 끼긱! 끼기긱!!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소리에 이지수가 비명과 함께 머리를 감싸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겁에 질려 다급하게 김 선생과 원장에게 전화하려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들려오는 선명한 노크 소리였다.

"선생님."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육원생 중 한 명인 이지혜의 목소리.

"이 개년이!!"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포가 분노로 변해서일까.

이지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지수가 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딴 장난을 친 대가를 치르게 해줄 생각이었다.

"가만 안 둬!"

벌컥!

문을 열자 덩그러니 서 있는 지혜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잠에 취해있는 듯한, 공허하고 멍한 눈빛이었다.

휙!

이지수가 아이를 내려치기 위해 손을 치켜들었다.

푹.

"?"

치켜들었던 손은 아이에게 휘둘러지지 못했다.

대신, 낯선 소리와 함께 낯선 감촉이 몸을 엄습해왔다.

감촉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내리는 이지수.

"끄아아악!!"

배에 꽂힌 칼에 이지수가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히죽.

"!!!"

아이의 얼굴을 본 이지수는 비명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입꼬리가 찢어지게 웃고 있는 아이의 소름 돋는 얼굴.

"너…! 너 누구야!!!"

이지수가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다.

눈앞에 있는 건 지혜가 아니었다.

저 미소는 분명, 낮에 다른 아이에게서 봤던 미소였다.

"너 뭐… 뭐야아아!!"

극심한 공포가 밀려왔다.

앞에 있는 아이가 뭐든 대답해주길 바랐지만.

끼긱!!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었다.

"으…. 으…."

이지수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기괴한 소리의 정체들.

인간이라기보단 싸늘한 인형의 모습을 한 아이들이 이지수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꺄아아아아악!!"

94화. 지하 낙원

… 아악 --!!

'!!'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

귓가로 들려오는 비명에 김희연이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지…?'

잠결에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어… 언니."

소리를 들은 건 김희연 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유소연 역시 깨어나 김희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애들도 들었나?'

다른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린 김희연.

김희연의 눈에 들어온 건 텅텅 비어있는 침대들이었다.

'어디 갔지?'

보육원의 부지 자체는 넓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최소한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그만큼 좁은 방에 가능한 최대 인원을 수용하고 있던 보육원.

김희연의 방 또한 둘을 제외하고도 최소 열 명 이상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직을 서고 있을 선생님들 때문에 나갈 수도 없는 시간대였다.

"소연아, 여기 있어 봐."

"무서워 언니."

"내가 보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렇게 김희연이 2층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순간.

"내려올 거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1층에서 자고 있을 정혁이었다.

"혁아…?"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배시시 웃기만 했던 정혁.

그랬던 정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또렷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너도 방금 들었어? 비명 소리."

"왜일까."

"…?"

비명을 들었냐고 물었는데 정혁이 엉뚱한 대답을 해왔다.

"어째서 너는 다른 거지?"

"무슨 말이야?"

심상치 않은 정혁의 목소리에 옆에 누워있는 유소연은 바짝 얼어버리고 말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보육원의 친구가 아니었다.

김태용에게 맞으면서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던, 마치 다른 사람 같았던 그 느낌의 정혁이 아래에 있었다.

"아직 약한가."

정혁이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

'!'

잠에서 조금씩 깨어나서일까.

꿀꺽.

2층 침대에 있던 김희연이 무언가를 느끼곤 마른 침을 삼켰다.

들려오는 건 정혁의 목소리 뿐.

방은 분명 빈 침대로 가득한 상태였지만.

우글.

미세하지만 여럿의 옷깃 스치는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뭐야… 대체.'

마음을 먹은 김희연이 2층 침대 밖으로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방 복도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기를 속으로 바라면서.

잠에서 덜 깨어 잘못 느끼고 들은 것이라 생각하면서.

슥.

그렇게 김희연이 2층 침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흐읍!!!"

김희연이 입을 틀어막았다.

평소엔 우는 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 김희연이었지만.

입을 막지 않았다면 눈에 들어온 아래의 광경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너네 둘은 혼자가 아니어서일까?"

2층 침대 밑.

정혁이 있을 1층 침대 앞엔 각자의 침대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일제히 조금 전에 고개를 내민 김희연을 바라보는 상태로.

"언니, 왜 그래?"

뭔가 잔뜩 놀라 있는 김희연에 유소연도 고개를 내밀려고 했지만.

김희연의 필사적인 저지에 유소연의 몸이 다시 눕혀졌다.

"정혁… 무… 무슨 짓이야."

아직 정혁이 한 말은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정혁의 침대 앞에 모여 있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희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혁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했다는 걸.

"나도 알게 된지는 얼마 안 됐어. 보여 줄까?"

"뭐… 뭘 보여준다는 거야."

뿌득.

"!!"

정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희연을 올려다보던 아이 중 하나가 스스로의 손가락을 반대로 꺾어 벼렸다.

"내가 죽으라면 죽더라고, 정말로."

"너… 너 지금 무슨 짓이야."

김희연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방의, 이 방에 있는 자신과 유소연은 정혁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전에 있던 보육원도 여기랑 비슷했어. 버려진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어른들."

스윽.

자신의 침대에서 나온 정혁이 위를 올려다봤다.

"당연히 아이들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 했지. 버려지고 버려져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마저 버려지면? 앵벌이 집단이나 더 한 곳에 가서 고통스럽게 살다 죽겠지."

옆에 있던 아이에게 손을 올린 정혁의 얼굴로 해맑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서 정했어. 우리처럼 버려진 아이들끼리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만들기로."

'미… 미쳤어.'

왠지 모르겠지만.

정혁의 함께라는 단어에 김희연의 온몸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 한 아이의 손가락을 부러트리게 만든 놈이.

지금은 그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함께 살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 전에 있던 보육원도 네가 그랬지 이 새끼야!!

낮에 김태용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 오기 전에 있던… 아이들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이곳 보육원의 미래가 곧 그 아이들과 같아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다 이곳에 있어. 지금은 좀 바쁘고."

슥.

정혁이 2층 침대로 손을 뻗었다.

"같이 가자."

손을 뻗고 있는 건 분명 지금까지 알고 있던 정혁의 생김새였다.

이전이었다면 별생각 없이 손을 잡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면 안돼.'

정혁이 뭐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눈앞의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이해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한 설명이었다.

"나… 난 안 가."

"흐음."

정혁이 고개를 약간 돌려 김희연의 옆을 쳐다봤다.

"소연아, 너는?"

"!!"

어느새 일어나 옆에서 아래를 보고 있는 유소연.

유소연은 아래의 광경에 바싹 얼어 비명조차 못 지를 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언… 언니가 안 가면… 나도 안 가."

"그래?"

손을 내린 정혁이 무심한 얼굴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쿵 쿵 쿵.

김희연과 유소연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는 정혁의 손에 달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정혁이 어깨를 올려 보였다.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어. 버려진 너희도 결국 오게 될 테니까."

저벅.

정혁이 문 쪽으로 몸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아이들도 함께 방향을 틀었다.

"다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정혁과 아이들은 방을 떠났다.

* * *

"거봐. 결국엔 내 말대로 돌아왔잖아."

정혁의 말에 묶여 있던 김희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10년 전의 그 날을 떠올리면 마음이 괴로워졌다.

정혁과 아이들이 떠난 후.

텅 비어버린 방 안에서 김희연과 김소연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백 년 같은 밤이었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한참 뒤에 찾아온 경찰이 물어온 말이었다.

아침마다 식자재 배달을 오는 기사님이 참사가 난 보육원을 발견했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헛소리… 하지 마. 돌아온 게 아니야."

히죽거리는 정혁을 향해 김희연이 고개를 저었다.

- 다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

10년 동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 말과 함께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수많은 아이들의 눈동자를 말이다.

공허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을 데려가지 못하게 해달라는 듯한 간절한 눈동자였다.

당시의 김희연과 김소연은 그 눈을 못 본체 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떻게 했어."

시간이 지나며 같이 자랐겠지만.

김희연의 안에서의 아이들은 10년 전 모습 그대로 멈춰진 상태였다.

그래서 찾았던 것이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구하러 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서.

'….'

10년 동안에도 꾸준히 일어난 보육원 실종 사건.

점점 더 끔찍해지는 현장에 김희연은 정혁을 인간이라 여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개방 전부터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혁이 하는 짓은 데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훨씬… 강해졌어.'

동시에 능력 또한 말도 안 되게 강해졌다.

솔직히 김희연은 충분할 거라 생각했었다.

지부에서 지원 나온 5급 헌터들까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빙긋.

대답 대신 웃어 보인 정혁이 입을 열었다.

"만나게 해줄까?"

오싹.

소름 끼치는 정혁의 웃음에 몸서리가 쳐졌다.

"기다려봐, 내가 불러 올…!!"

쾅!

김희연이 묶여 있는 곳과는 거리가 꽤 떨어진 장소. 

그곳에서 무언가에 의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꽈드득.

지금까지 여유로웠던 정혁.

그랬던 정혁의 얼굴이 지금은 종잇장 구겨지듯 찡그려져 있었다.

"감히!!!"

* * *

철컥.

탕!

달려드는 인형들을 향해 탄을 쏘아냈다.

몇 발자국 다가오기 무섭게 몸이 날아가 버리고 마는 인형들.

끼기긱!!

탄을 쏘기 무섭게 사방에서 인형들이 달려들었다.

마치 한 명이 모두를 움직이는 것처럼, 똑같은 동작과 자세로 말이다.

기분이 참.

탕! 탕! 탕!

더럽구만!

달려들고 있는 건 분명 데몬이었다.

사람이 몸 안에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을 전부 빼앗겨 버린 존재들.

그럼에도 살아 움직이며 체구에 맞는 칼과 도끼를 휘두르는 존재들이었다.

- …!

관람차에서 발견한 인형을 뒤따라 들어온 지 얼마나 됐을까.

눈앞으로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공기 자체는 눅눅하고 습해 기분 나쁜 장소였지만.

내부는 아예 딴판이었다.

어떤 싸이코 새끼지.

도착한 장소는 거대한 어린아이의 방 같았다.

아기자기한 장난감과 인형들, 그리고 작은 침대가 가득했다.

눅눅한 장소 탓에 곰팡이 투성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침대에 수많은 인형들이 눈을 감은 채 바른 자세로 누워있었다.

기괴.

눈앞의 모습을 보고 떠오른 단어였다.

이 단어가 아니면 눈 앞에 펼쳐진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 꾸린 장소지만, 정작 누워있는 건 아이들이 아닌 싸늘하게 식은 인형들이라니.

- 끼긱!

심지어 인형들은 자고 있지 않았다.

내가 들어오기 무섭게 누워있던 인형들은 눈을 떴다.

마치 누군가의 인형놀이를 위해 잠든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탕! 탕!

엄청난 수에 작열탄을 쏠까 고민도 했지만.

이곳엔 인형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당장 어제 이청아와 갔던 보육원의 아이들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피 한 방울 안 나오네.

총에 맞은 인형은 살점과 뼈가 부서져 나갈 뿐,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인형의 재료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라진 아이들임이 분명한데 피조차 나지 않는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 피까지 모두 빼버린 것.

으득.

어떤 새낀지 면상 좀 보자.

길을 막는 인형들을 밀어내며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미세하지만 불어오고 있는 시원한 바람.

개미굴과 다를 바 없는 이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

얼마나 달렸을까.

바람이 들어오는 곳으로 빠져나오자 푹 파여있는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희연 님.

그곳에서 묶여 있는 김희연.

그런 김희연의 앞엔 하얗게 머리가 세어버린 남자아이… 아니, 데몬이 서 있었다.

저 새끼구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끼기기긱!!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는 엄청난 수의 인형들을 만들어낸 장본인.

"너구나아!!"

데몬을 향해 몸을 날린 순간.

"눈을 보면 안 돼요!!"

김희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데몬의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

"늦었어."

95화. 지금 총구 방향 어디?

"아… 안돼…."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혁의 뒤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나 싶더니 어느새 백운이 날아들고 있었다.

- 죽여라.

정혁의 말에 아비규환이 됐던 보육원을 떠올렸다.

서로를 공격했던 헌터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정면에서 정혁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랑 소연이는 애초에 타겟이 아니었어.'

눈을 보고 있었지만 정혁의 능력에 걸리지 않은 건 김희연과 김소연뿐이었다.

아마 함께 온 헌터들만 처리하려는 정혁의 의도였을 터.

그리고 또 한 명, 능력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존재했다.

일행에게 가려져 정혁의 눈을 볼 수 없었던 임명규였다.

'눈이었는데…!'

정혁이 무엇을 위해 자신과 김소연은 남겨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상대를 조종하는 능력은 눈을 통해 걸릴 거라 짐작했기에 날아오는 백운에게 급히 소리 질러줬었다.

하지만,

척.

정혁의 말대로 늦은 것 같았다.

보육원에서 마찬가지로 눈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백운을 덮쳤고, 백운은 날아들다 말고 그대로 자리에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백운 님이라 해도.'

김희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2년 전 마운티거를 잡던 백운을 보며 개미굴 때보다 더 강해졌다고 생각했었다.

'5급도 당했어.'

백운이 강해졌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지만.

5급 헌터들마저 한 번에 걸려든 정혁의 능력을 뿌리치는 건 무리였다.

'다 나 때문에… 죽는구나.'

김희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김희연은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10년 전을 생각하며 정혁의 능력이 더 강해졌을 거란 걸 간과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지부의 동료들이 죽었고, 김소연이 위험에 처했다.

거기다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2년 넘게 사라졌던 백운에게 도움이 필요하단 이유로 무작정 메시지를 남겨버렸다.

'….'

솔직히 와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개미굴 이후로 얼굴을 보기는커녕 연락 한 번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절실한 마음에,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했기에 남겼던 메시지일 뿐이었다.

'백운 님.'

남일처럼 그냥 무시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메시지.

백운은 그런 메시지를 보고 여기까지 찾아와 주었는데.

"좀 다른가 싶었는데 똑같네."

정혁이 멈춰있는 백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환각을 붙여 조종하는 능력.

처음엔 눈을 바라보며 최면을 걸듯 반복해 말해야 했는데, 강해진 능력 덕에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최강의 힘이다.'

누가 오든 상관없었다.

냄새를 맡은 경찰이나 군대의 헌터가 쫓아오더라도.

눈만 마주칠 수 있다면 역으로 모두를 이용할 수 있었다.

'난 선택 받았다.'

어째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는 정혁 역시 알지 못했다.

그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처음 깨달았을 땐 환각을 걸거나 인형을 만드는 힘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걸 어떻게 죽일까?"

정혁이 고개를 들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낙원을 바라봤다.

자신이 구한 아이들이 살아가는 장소.

어른들에게 착취당하던 보육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오로지 버려진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에 스크래치를 내 버린 백운은 그냥 죽일 생각은 없었다.

"들어있는 건 다 빼서 인형으로 만들어주마. 평생 나를 위해 일하도록."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전에 죽는 순간조차 최대의 고통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한 번씩 찌르라고 할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끼기긱! 끼긱! 끼긱!

이미 낙원에 있던 모든 인형이 백운을 쫓아 나와 있었다.

텅 비어있던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난 숫자.

"정혁!! 그 사람은 놔둬! 내가 인형이 될 테니까! 인형이 아니어도 계속 있을 테니까!"

슥.

소리 지르는 김희연에 정혁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인형이라니? 섭섭하게 말을 하네. 친구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뭐…?"

짝짝.

정혁이 박수를 치자 몰려있던 인형들 중 한 무리가 앞으로 나섰다.

"!!!"

김희연의 입이 벌어졌다.

앞으로 나온 인형들은 10년간 김희연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보육원의 아이들이었다.

10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목숨을 잃고 모두가 인형이 되어버린 아이들.

'예상했잖아.'

보육원의 날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

아이들이 살아있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걸 김희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하는 것과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차이가 컸다.

희망.

죽었으리라 예상하면서도 김희연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함께 적지 않은 시간을 지낸 만큼 정혁이 데려간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래서였다.

10년 만에 마주친 정혁을 향해 바로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데몬이라 생각했음에도,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 쏘지 못하고 망설여버렸다.

아이들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보육원의 어른들은 죽였지만 아이들에게 만큼은 정혁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착각이었구나.'

그 희망이 조금 전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앞에 있는 건 보육원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 정혁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이상한 욕망을 위해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 만큼도 생각 안 하는, 완벽한 데몬이었다.

"그나저나, 희연이 넌 저 사람이 안 죽었으면 하는구나."

조금 전 김희연의 반응에 정혁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는, 10년 전부터 김희연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열악한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건 네 가지 정도였다.

'절망, 자기연민, 원망, 두려움.'

하지만, 김희연은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원장과 선생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보육원을 위한 혹독한 일과를 치르면서도, 김희연은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잃기는커녕 흔들리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울기만 하는 놈들이랑은 달랐지.'

여기에 더해 자신의 능력에 걸리지 않았던 것까지.

유소연… 아니, 김소연에겐 애초에 능력을 걸지도 않았었다.

김소연에 의해 김희연이 억지로 따라오게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무너져야 의미가 있지.'

정혁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던 김희연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약간 주저앉는 수준이 아닌, 철저하게 자신을 놔버릴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말이다.

"동생 소연이랑 저 남자, 둘 중에 한 명만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떡할래?"

"…!!"

정혁이 이죽거리며 묶여 있는 김희연의 손을 풀어줬다.

'무너뜨리자.'

스스로 무너졌으면 했기에.

김희연이 이곳을 찾을 때까지 장장 10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줬다.

슥.

정혁이 손을 젓자 인형 하나가 김희연의 라이플을 가져왔다.

"죽여."

"뭐…?"

"네 손으로 저 남자를 죽이면 소연이를 놔주지, 약속할게."

"헛소리하지 마."

김희연에게 라이플을 가져다주려 다가간 정혁이 소름 돋는 웃음을 터뜨렸다.

"헛소리 같아? 네가 쏘지 않으면 일어날 일을 알려줄게."

손바닥을 펼친 정혁이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칼로 손바닥을 여기저기 그어대는 정혁.

"소연이는 이렇게 난도질당해 죽을 거고, 그다음엔 내 낙원에서 평생 살아갈 거야. 살아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일 거고."

김희연의 눈이 커지며 몸이 떨려왔다.

무서웠다.

자신이 살해당하고 인형이 되는 것보다 여리고 여린 김소연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다 생각하니 공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스윽.

떠는 김희연에게 총을 쥐여준 정혁이 옆으로 비켜섰다.

"김소연이 잡혀 오는 순간 내 배려는 끝이야. 저 남자와 김소연 둘 다 죽는다."

'쏴라, 김희연.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 욕심을 위해, 자신을 구하러 온 남자를 죽여라.'

히죽.

'그리고, 자기혐오에 무너져라.'

"쏴. 동생 죽일 거야?"

덜덜.

정혁의 재촉에 김희연이 총구를 들어 백운을 겨누었다.

그런 김희연을 보며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정혁.

"당겨. 동생을 살려."

끼릭.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쳐졌다.

곧 벌어질 광경에 정혁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김희연이 굴복하는구나!'

끼릭… 탕!!

커다란 굉음을 내며 라이플이 발사되었다.

"…."

그리고, 발사된 탄이 향한 건 백운이 아니었다.

투둑.

팔목이 떨어진 정혁이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

의아한 정혁의 얼굴에 김희연이 입을 열었다.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괴물 새끼가 하는 말따위… 믿을 거 같아?"

"킥!"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정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키키킥!! 키키키키킥!"

정혁이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팔목을 주워들었다.

끼긱.

"!!"

떨어진 곳에 붙이자 언제 떨어졌냐는 듯 팔이 이어졌다.

"넌 정말! 단단하구나!!"

정혁이 순식간에 다가와 김희연의 라이플을 빼앗았다.

뒤이어 달려와 김희연의 팔을 붙잡는 인형들.

"방금 한 선택의 결과는 아주 끔찍할 거다!!"

라이플을 든 정혁이 백운에게로 다가갔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김희연의 눈앞에서 온갖 끔찍한 장면을 다 보여줘 무너지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 것이다.

척.

백운의 이마에 겨누어진 라이플.

질끈.

김희연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백운 님.'

탕!!

귓가로 라이플의 발사음이 들려왔다.

….

무겁게 내리깔리는 정적.

잠시 후, 그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끼가 아직 적응 안 끝났는데."

* * *

눈에 깃들어 있는 시원한 감각이 느껴졌다.

비광 님이랑 여러 번 해봤는데도 적응이 안 되네.

하루는 비광이 능력을 이용해 환각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카드 여러 장을 펼쳐놓고 환각을 이용해 다른 카드로 보이게 한 것이었다.

- 어떠냐? 아마 앞으로 만날 적 중에는 너의 오감을 흐트러뜨리는 녀석이 있을 거다.

환각을 건 카드를 한데 뒤섞은 비광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 어때? 스페이드의 에이스, 절대 못 찾겠지?

비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 손을 뻗어 스페이드의 에이스를 집어냈다.

- ….

비광은 마치 귀신을 본 듯 놀라있었다.

물론,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환각을 걸었다고 했는데 보였기 때문이다.

좀 희뿌연한 것들이 겹쳐있어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 너 눈깔은 또 왜… 퍼런색이냐.

그제야 깨달았다.

- 우리 페샨의 눈은 항상 진실만을 본당. 진실 외의 것은 보이지 않는당.

리카르도가 건넸던 선물, 페샨의 눈.

적응에 시간이 좀 걸리는지 진실 외의 것과 진실이 겹쳐 좀 혼동되긴 했지만.

어쨌든 비광이 펼쳐놓은 스페이드 에이스가 구분 가능한 정도로는 보였었다.

그리고.

지금 정혁이란 데몬이 건 환각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희뿌옇고 기괴한 형상들 천지였지만, 눈이 조금 적응되자 실제인 것과 아닌 것 정도는 구분이 되고 있었다.

슥.

고개를 돌려 옆에서 발사된 라이플을 바라봤다.

고막 터지겄네.

귀를 슥슥 문질러준 후.

앞에서 놀라 있는 정혁을 응시했다.

"총구 사람한테 향하면 뒤지게 맞는 거 안 배웠냐?"

"뭐… 뭐?"

아 이 새끼 군대 안 갔겠네.

콰득.

정혁이 잡고 있던 라이플을 힘으로 뺏어내고.

정혁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이제 가르쳐줄게."

96화. 되지

솔직히 처음에 봤을 땐 헷갈렸다.

눈깔이 시커멓긴 했지만 그 외에는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에 팔목을 주워다 붙이는 걸 보곤 확신이 들었다.

데몬쉨.

요새 말하는 게 대센가.

사로카부터 해서 계속 말을 하네.

물론 아직 헷갈리는 건 있었다.

데몬이 말을 하는 건가?

아니면 사람이었는데 데몬이 되어서 말을 하는 건가?

김희연과 정혁의 대화를 봤을 때.

정혁이 처음부터 데몬이었던 건 아닌 듯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차이지만.

김희연과 만났을 때부터 애초에 데몬이었을 수도 있지만.

뭐,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연혁이야 어쨌든 눈앞에 있는 건 명확한 데몬이란 사실이었다.

"너… 어떻게…?"

잔뜩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걸 보니 정혁은 내가 환각에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 눈이 보통 눈이 아니거든."

치켜들었던 주먹을 앞으로 휘둘렀다.

"킹냥이의 눈이다 이 새끼야!"

콰직!

순식간에 앞으로 끼어든 인형이 주먹의 진행을 가로막았다.

처음 하나를 시작으로 쉴새 없이 밀려드는 인형들.

일단은.

내게 달려드는 인형을 뒤로하고 묶여 있는 김희연을 바라봤다.

마음 놓고 싸우려면 김희연부터 안전한 장소로 옮겨둬야 했다.

[비전 수리검]

봉인문에 의해 도윤의 영혼이 소멸해서일까.

다른 무기들과 달리 수리검에는 게이지가 쌓이지 않았다.

마치 현재 주어진 스펙이 끝이라는 느낌이었다.

훌륭한 이동기면 됐지.

이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그저 많이 무겁지만 훌륭한 이동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산에서 2년을 보낸 후에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완전 힘 캐릭이네.

엄청난 무게 때문에 몸에 회전을 주지 않으면 제대로 던지기조차 힘들었던 수리검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돌산에서 힘을 기르면 기를수록 수리검을 꺼내 들었을 때 증폭되는 힘 역시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

그 결과로.

콰직! 콱! 쾅!

지금은 별도의 준비 동작 없이도 수리검을 더 빠르고, 더 강하게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상대하는 입장에선 살살 던져도 받기조차 힘든 수리검을 무자비하게 그어대는 무식한 힘 캐릭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탓.

"!!"

순식간에 달려드는 인형들을 제쳐낸 후 주춤거리는 정혁에게 다가갔다.

후웅.

왼쪽으로 접었던 팔을 펼치며 수리검을 정혁의 옆구리에 꽂아버렸다.

콰앙!

"크악!"

굉음과 함께 공당의 오른쪽 언저리로 날아가 버리는 정혁.

뒤졌으면 좋겠는데.

아까 팔을 붙이는 꼬라지를 보니 쉽게 뒤질 놈 같진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정혁을 쫓아가지 않고 바로 김희연에게 달라붙어 있는 인형들을 처리했다.

"배… 백운 님!"

김희연은 당사자인 정혁 만큼이나 놀란 것 같았다.

아까 포기하신 거 같던데.

페샨의 눈으로 인해 겹쳐 보이는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에 적응하느라 최대한 몸을 멈춘 채 눈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정혁이 내게 총구를 겨눈 순간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던 김희연.

머리통 날아갔을 놈이 달려왔으니 놀랄만하지.

"오랜만이에요, 희연 님. 잠시 실례."

놀라는 건 킹정이지란 생각을 하며 김희연을 어깨에 걸쳤다.

"이거 드시고."

조금 전 주워 온 라이플을 건네준 후.

이곳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수리검을 던졌다.

[비전]

정혁과 인형들은 모두 바닥으로 내려와 있는 상황.

이 정도 높이면 안전할 것 같았다.

"!!"

순식간에 몸이 옮겨지자 깜짝 놀란 듯했지만.

지금 비전까지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소연 님은 청아 님이 지부 사람들이랑 구하러 갔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

너무 갑작스레 상황이 전개되어서일까.

김희연의 사고가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느낌이다.

천천히 따라오시고.

"그럼 전 내려갔다 올게요."

김희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바닥으로 수리검을 던졌다.

정혁과 인형들의 어그로가 김희연 쪽으로 끌리기 전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팟.

아래로 돌아와 정혁이 날아갔던 방향을 응시했다.

꾸물.

일었던 먼지 속으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역시 질긴 놈이었어.

그나저나 저놈은 피가 나네.

아까 쏟아지던 피를 떠올렸다.

이놈 새끼는 잡아 온 아이들 피는 다 없애더니 지꺼는 쏙 남겨놨네.

꾸두둑.

응…?

뭔가 꾸물거리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나에게 달려들다 말고 전부 정혁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인형들.

꿈에 나오겄네.

수많은 인형이 끼긱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건 혀가 내둘러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설마 합체 가능한 건가.

정혁에게 도달한 인형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림자의 크기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원래 합체하는 순간에 조지는 게 정석인데.

어렸을 적 소년만화를 보면 항상 궁금했었다.

왜 악당들은 주인공이 합체하는 걸 기다려주는 걸까.

마디마디가 합쳐지는 순간에 공격하면 만사 오케이인 걸 말이다.

이래서였구먼.

막상 그 상황에 놓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뚜두둑. 드득. 꾸둑.

엄청나게 기괴한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합쳐지고 있는 정혁과 인형들.

처음 보는 합체 모습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악당들도 합체를 처음 보니 다들 어이가 없었던 게지.

새삼스레 이해가 되는 악당들의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합체를 마쳐가는 정혁을 응시했다.

시… 시발.

합체의 결과물은 생각보다 굉장했다.

몇백 기의 인형이 합쳐져 팔과 다리, 몸통을 이루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보니 합체라기 보단 그냥 되는대로 때려 넣었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드드득.

완전히 몸을 일으킨 정혁이 나를 응시했다.

"너도 곧 내 몸의 일부가 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미친놈인가.

불타 죽는 한이 있어도 그건 사절이었다.

"이 싸이코 새끼. 너 뭐야 대체?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인데."

어디까지나 합체 전의 이야기였지만.

마침 말이 통하니 물어보고 싶었다.

보육원에서 함께 지내던 인간이 어떻게 이런 데몬이 되었는지를 말이다.

"진화다."

"뭐?"

"단지 남들보다 빨리했을 뿐이지."

개방을 말하는 건가.

개방이라 쳐도 헷갈렸다.

비광 역시 능력 자체가 다채로운 기술을 쓸 수 있는 능력이긴 했지만.

앞에 있는 정혁처럼 인간의 선을 넘어 사람을 인형으로 만들고 하는 게 가능한 건 아니었다.

거기다 합체까지.

"내가 살던 곳은 지옥이었지. 함께 있던 녀석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진화한 거다. 그 상황을 부수기 위해서! 무력하고 버려진 녀석들을 구하기 위해서!!"

아마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황을 부수긴 했지만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른 놈이 구한다는 말을 하다니.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어차피 물어봐야 정신 나간 놈한테 들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보였다.

마침 때리기 좋게 합쳐져 있으니 큰 걸 한 방 먹이고, 그다음 놈의 재생 능력을 파악해볼 생각이었다.

끼기기기긱---!

내가 공격할 거란 걸 알았는지 정혁도 커다란 팔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휘두를 때마다 몸을 이루고 있는 인형들이 움직이며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날아오는 거대한 주먹을 바라보며 오른팔을 뒤로 젖혔다.

일단 10%.

비늘을 조절한 후 주먹을 내뻗었다.

쾅!!

굉음과 함께 정혁의 팔이 부풀어 올랐다.

콰지지지직!

유탈라스이 힘을 못 이겼는지 정혁의 팔이 주먹 끝을 시작으로 갈라지며 터지기 시작했다.

"크으…!"

어깻죽지까지 터지고 나서야 멈춘 힘에 정혁이 신음을 흘렸다.

쑤우욱!

순식간에 다시 팔이 돋아나긴 했지만 확실히 데미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작아졌다.

팔이 저절로 돋아난 게 아니었다.

아무리 많다 해도 합체를 한 인형의 숫자엔 끝이 있었다.

다른 곳의 인형을 끌어와 팔을 다시 재생한 듯한 느낌.

그렇다면.

다시 비늘로 팔을 덮어나갔다.

계속 두드려볼까.

멈칫거리고 있는 정혁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 * *

마지막 한 방.

콰앙!

"크하악!"

몇 방이나 때렸을까.

잔뜩 커졌던 정혁의 몸집이 순식간에 열 토막의 크기로 변해버렸다.

처음보다는 약간 크지만 합체했을 때에 비하면 콩알만 해진 수준.

더럽게 안 뒤지긴 하네.

크기는 다 줄여놨지만 정혁이 쓰러진 건 아니었다.

처음보다 잔뜩 여유가 없어진 얼굴을 보니 확실히 데미지는 있었고, 비축해둔 인형 역시 더 이상 없는 모양이었지만.

어딜 조져야 죽는 거지.

정혁의 몸 자체는 상처가 생겨도 순식간에 회복되어버리는 상황.

다른 인형을 소비해 몸을 재생시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탱커였네.

합체한 모습은 위협적이었지만.

공격 자체는 정교하거나 빠르지 않았다.

수십 차례 팔이 휘둘러진 듯하지만 내게 닿은 건 0회.

속도 자체의 차이가 엄청났기에 앞으로도 내가 맞을 일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저 탱킹력.

든든하게 버티는 방어형은 아니었지만 거의 좀비 수준의 재생력을 가지고 있었다.

[잭 더 리퍼]

면도칼을 꺼내 들었다.

재생이 무한일 리는 없다.

분명 재생을 해대는 주체가 있을 터.

최대한 썰어보자.

"으아아아!"

단 한 번의 공격도 닿지 않은 탓인지 정혁이 포효를 내지르며 들고 있는 칼을 휘둘렀다.

휘익. 휘익.

정말 형편없는 공격이었다.

눈을 이용한 환각과 인형들이 사라지니 그저 체구에 어울리는 능력 정도만 남게 된 모습.

탕!

쿠득.

총성이 들리나 싶더니 정혁의 휘두르던 팔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탕! 탕! 탕! 탕!

계속해서 총성이 이어지고.

정혁의 팔과 다리를 끊어놓음과 동시에 상체까지 날려버리는 김희연의 총알.

오!

김희연의 능력은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저격의 위력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지금은 정혁과 한참 먼 거리에 위치한 상태.

그 덕인지 총알 한 방 한 방이 정혁의 몸을 끊어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꿀렁.

!!

팔다리와 몸통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어지는 찰나의 순간.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보였다.

분리된 정혁의 신체 중 왼쪽 발목 부분이 제일 먼저 꿈틀거리며 다른 신체로 살이 뻗어 나가는 것을.

"으아!! 김희여어언!!!"

되는 게 하나도 없자 괴성을 지르는 정혁.

그러든 말든 정혁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

사아악…!

면도칼을 휘둘러 정혁의 왼쪽 하체를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이 새끼가!!"

콰직!

정혁이 그런 나를 막기 위해 팔을 휘둘렀지만.

그 팔도 순식간에 베여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콰드득!

그렇게 발목으로 조금씩 근접해가며 휘두른 면도칼.

꿀렁!!

찾았다.

발목의 윗부분.

검푸른색으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박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뇌를 정강이에 박아 넣은 모양새였다.

"이아아아아아!!"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악을 쓰며 온몸으로 내게 달려드는 정혁.

콰드드득!!

그대로 정혁의 면상을 발로 밟아 땅으로 처박아버렸다.

"끄으으으…!!"

꾸드득.

발로 녀석의 면상을 짓이기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으로 찍어 눌렀다.

꾸물거렸던 발목을 잡힌 상태로 옴짝달싹도 못 한 채 신음만을 흘리는 상태.

척.

면도칼을 정혁의 정강이로 가져갔다.

"아… 안돼에에!!!"

"안되긴 뭘 안돼, 이 새끼야."

정확히 봐뒀던 위치로 면도칼을 박아 넣었다.

콰드득.

"되지."

97화. 10년의 기억은 여기서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흐물거리던 걸 썰자 정혁은 더 이상 재생하지 못했다.

발과 손끝을 시작으로 흐물거리는가 싶더니 녹아내리고 있는 정혁의 몸.

"말도 안… 돼."

가만 보면 이런 새끼들이 유독 양심이 없어.

수백의 아이들은 잔인하게 죽이고 인형으로 만든 놈이.

이제 뒤질 때가 되니 저런 표정을 지으며 안된다는 말을 지껄이다니.

나쁜 새끼를 한두 번 보는 건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기가 찼다.

아.

정혁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

물어볼 게 있었다.

이곳에 있던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보육원에서 인형에게 해체당하던 5급 헌터들.

"야 사람들 장기는 어디다 쓴 거냐."

모두 밝혀진 건 아니었지만.

데몬이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방법은 다양했다.

사람을 죽이거나 잡아먹음으로써 힘을 키우는 녀석들이 기본.

그 외에도 데몬마다 강해지는 능력은 각지각색이었기에 정혁 역시 장기를 가지고 무언가를 한 건가 싶었다.

"어차피 뒤질 거 말하고 가라."

정혁이 공허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죽음을 깨끗하게 받아들였다기보단 악을 쓸 힘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구한답시고 데려와서 피랑 장기를 뺀 거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는 되지 않겠어?"

"속죄…? 풉."

속죄란 단어에 정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제로 속죄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웃는 꼬라지를 보니 대답은 둘째 치고 당장 죽여버려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공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를 위한 일인데 속죄라니… 웃기지도 않네."

공간을 위해 어쩔 수 없다…?

정혁에게 오기 전 살폈던 공간을 봤을 때 이곳은 일이 년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들인 게 아니라면 엄두도 못 냈을 복잡한 구조로 공간은 이루어져 있었다.

텅텅 빈 월미도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데몬.

심지어 혼자 숨어있던 게 아니었다.

수백 기의 인형과 함께 터전을 꾸린 상태.

누군가 월미도로 정찰팀만 파견했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버려진 지 오래됐지만.

11년 전부터 그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아무도 이곳을 의심하지 않는 게 가능한가.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주로 사건이 일어난 곳은 월미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들이었다.

애초에 인형을 끌고 다니며 보육원의 아이들까지 데려가야 하니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던 것.

의심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면?

의도적으로 장기를 빼낸 정혁과.

이상하리만치 용의선상에 포함조차 되지 않았던 월미도란 장소까지.

정혁은 이것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스르르…!

온몸이 다 흐트러진 정혁.

마지막으로 얼굴이 흐물거리기 시작하자 정혁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난… 버려진 이들… 을… 구했… 다."

"…."

상식적으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버린 정혁의 정의.

정혁은 그 정의가 옳았다는 걸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기 암시를 걸듯 끝까지 되뇌이다 숨이 끊어진 정혁.

"흐음."

복잡한 머리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착해 있던 부재중 메시지로부터 시작됐던 일.

사건의 본체였던 데몬까지 죽였음에도 뭔가 떨떠름한 맛이었다.

회귀 전에 뭐라도 봤다면 모를까.

이상하리만치 알려지지 않았던 보육원의 사건.

그때 당시엔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었다.

아마 그때까지도 이놈의 행각이 계속됐던가.

누군가에 의해 끝맺음 당했지만 거기서 꼬리가 끊겼던가.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뭐… 나머지는 알아서 알아내겠지."

김소연을 구한 뒤 지부 사람들과 함께 월미도로 오기로 한 이청아.

이후의 조사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들이 이어나갈 터였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김희연과 김소연을 돕는 것이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했단 생각이 들었다.

슥.

고개를 돌려 김희연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라이플 조준경을 통해 정혁의 죽음을 지켜봤을 김희연.

천천히 가볼까.

수리검으로 갈까 싶었지만.

김희연에게 정리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거 참.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래저래 찜찜하구만.

묘한 찜찜함을 느끼며 김희연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 *

"…."

정혁이 죽는 걸 마지막으로 조준경에서 눈을 뗀 김희연.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김희연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울고 있는 거지?'

울고 있는 김희연 본인조차 눈물이 흐르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 허무했다.

- 다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

10년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정혁의 말과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이들의 모습.

그 모습과 말은 10년 동안 한 시도 쉬지 않고 김희연을 괴롭혔었다.

때문에 무려 10년이란 시간동안 정혁을 찾아다녔던 것.

물론 어렸던 때와 능력을 개방하기 전까지는 주어진 환경과 능력의 한계 때문에 본격적으로 찾진 못했지만.

머릿속엔 언제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게 내가 바랐던 끝인 건가.'

의문이 들었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10년의 기억을 만들어줬던 정혁이 죽은 지금.

분명 기뻐야 할 터인데, 후련해야 할 터인데도 김희연은 그러지 못했다.

'난 대체 무얼 위해서.'

때때로 생각했었다.

10년 전에 사라진 아이들이 살아있을 확률은 몹시 희박하며 헛된 희망이라는 걸.

그럼에도 포기하는 건 불가능했었다.

'과연 아이들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였을까.'

막상 이 시점이 오니 헷갈렸다.

10년동안 정혁을 찾아다닌 게 정말 그 알량한 희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10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였는지 말이다.

저벅.

옆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김희연이 고개를 들었다.

"…!!"

"도… 도와주세요."

많은 수의 아이가 겁에 질린 채 김희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직전 보육원에서 끌려온 아이들이었다.

'아.'

스윽.

기다란 라이플을 뒤로 치운 김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앞의 아이들에게서 10년 전에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괜찮아 애들아. 이제 괜찮아."

다가가 팔을 벌리자 겁에 질려있던 아이들이 김희연에게 달려왔다.

총을 쥐고 있어 다가오지 못하고 있던 것 같았다.

안기기 무섭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김희연이 그런 아이들을 따듯하게 안아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괜찮아.'

* * *

못… 못 가겠네.

금세 걸어 위까지 올라왔지만.

눈물 바다가 된 모습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분위기는 쉽지 않지.

괜히 끼어들고 싶지 않아 올라가던 중 자리를 잡고 몸을 앉혔다.

"아이고야."

힘든 싸움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도착해서부터 본 찝찝한 광경들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 지친 느낌이 들었다.

슥.

고개를 돌려 조금 전까지 정혁과 수백 기의 인형이 있던 장소를 내려다봤다.

낙원이라.

처음엔 가볍게 무시해버렸지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 정혁을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낙원이긴 하지.

정혁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들어가 보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분명한 건 한 가지 있었다.

적어도 이곳이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낙원은 아니라는 것.

이곳은 그저 단 한 명만을 위한 낙원이었다.

부우우웅…!!

혼자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월미도로 달려오는 차량들의 불빛이 보였다.

아마 이청아의 안내를 받은 지부 사람들인 것 같았다.

풀썩.

완전히 몸을 눕히고 차량들이 가까워지길 기다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돌아갈 땐 얻어 타고 가야겠다.

* * *

불이 꺼진 어두운 회의실.

"무슨 소리에요? 더 이상의 공급이 불가능하다니."

# 월미도가 당했네.

"뭐라고요…?"

자리에 앉아있던 연수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월미도가 당하다니.

그렇게 신경 써서 관리하라고 했는데 대체 뭘 했단 말인가.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관리는 완벽했어. 그 데몬 놈이 쓸데없는 것들을 끌어들인 게지.

월미도가 버려지게 만든 사람들.

연수정 역시 그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버려지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정혁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데몬 자식…! 그렇게 뒤를 봐줬는데.'

버려진 이들을 구하겠다면서 아이들을 빼돌려 장기를 제공하고 월미도의 은폐를 약속받은 정혁.

연수정이 생각해도 완전 이율배반의 끝판왕인 싸이코였다.

# 어떻게 할까?

"…."

마음 같아선 한 소리를 퍼붓고 싶었다.

담당이라는 인간이 물이 다 엎질러지고 나서야 어떻게 할지를 물어오다니.

'마가 꼈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큰 손인 히무라가 죽으며 일본과의 커넥션이 약해진 것도 모자라 이번엔 중요한 공급처인 월미도가 날아가 버렸다.

'그나저나 그놈이 거느린 인형만 수백 기일 텐데.'

마이크로 입을 가져간 연수정이 입을 열었다.

"월미도를 공격한 건 누구죠? 인천 지부는 관리하에 있었을 텐데요."

# 그게 좀 이상하더군.

'이상하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목소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 인천 지부의 말로는 10급 헌터가 혼자 월미도를 날렸다고 해. 함께 있던 인천 지부의 헌터가 있었지만 그리 큰 영향을 끼쳤을 거 같진 않고.

"뭐라구요…? 10급? 뉴스랑 얘기가 다른데요."

# 공식적인 발표에선 본인이 빠지길 원했다고 하더군.

공식적인 기사에선 빠졌지만.

지금 듣고 있는 말이 더 정확한 보고였다.

인천 지부에 있을 협력자를 통한 정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 10급 헌터가 뭐 하는 인간인지는 지부에서도 모른다고 하더군. 나도 들은 건 이름뿐이야. 10급 답게 알려지지도 않은 놈이고.

무언가를 보거나 들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연수정을 엄습해왔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그 인간에게 많은 방해를 받을 것 같은 찝찝한 기분.

"그 10급 헌터, 이름이 뭐죠?"

# ….

잠시 뜸을 들이던 건너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 백운.

* * *

아따 잘 날아간다.

고개를 들어 하늘로 뜬 비행기를 바라봤다.

월미도에서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지체 없이 달려온 인천공항.

"백운 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어요."

"이제 그만 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우물쭈물거리는 김희연과 김소연을 향해 강하게 손을 내저었다.

구해줘서 고맙다며 벌써 열 번도 넘게 감사 인사를 받은 상태였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항상 느끼지만 이런 상황이 몹시 어색했다.

조금만 길어지면 호다닥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낯간지러운 상황.

"혹시… 그 문은 보셨나요?"

둘의 집에 들어가 비틀어 부숴버렸던 문 손잡이.

뜬금없는 질문에 웃음을 터뜨린 김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있던 것들도 다 없애버렸어요. 벽지도 갈고, 문도 갈고, 전부 다 새 걸로 바꿨어요!"

"잘하셨습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희연이 입을 열었다.

"그리스에 가시면 꼭 연락해보세요. 도움을 주실 거예요."

그리스로 간다고 하니 명함 한 장을 건네준 김희연.

명함엔 국가직 2급 헌터라는 신분이 적혀 있었다.

"옙, 꼭 연락해볼게요."

# 그리스 행 13시 비행기 탑승 수속을 시작하겠습니다.

타야 하는 비행기의 방송이 들려왔다.

놓고 갈세라 호다닥 인사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백운 님."

"네?"

김희연의 입가로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오.

뭔가 김희연의 이미지와는 잘 매칭이 되지 않지만.

처음으로 보는 밝은 미소였다.

"돌아오시면 꼭, 밥 사드릴게요."

씨익.

그런 김희연을 향해 더 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기대하겠슴다!"

우렁찬 대답을 한 후.

비행기를 타러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자 그리스로… 드가자!

98화. 그리스

안돼!!

그리스로 도착한 직후.

밀려오는 절망감에 고개를 파묻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짧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편안한 여행을 위해 저번에 받아뒀던 퍼스트 클래스 이용권을 사용했다.

- 이번에도 오지게 먹어볼까!

라고 마음먹었던 게 탑승 직전이었다.

- Zzz….

하지만, 내 몸뚱아리는 굳은 결심과는 정반대로 움직여버렸다.

월미도에서의 피로가 남아있던 건지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것.

흑흑.

비싼 술은커녕 자느라고 기내식조차 먹지 못했다.

기내식 남았으면 두 개 달라고 벼르던 참이었는데.

두 개는커녕 하나조차 먹지 못하고 말았다.

죽어! 죽어! 배가 불렀어 이 새끼!

이마를 때리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지난번 일본행 때 퍼스트 클래스에 이어 전용기를 타서인지 배가 불러도 너무 불러버렸다.

퍼스트 클래스를 탔는데 즐기긴커녕 처자버리다니.

수군수군.

너무 진심을 다해 이마를 쳐버려서일까.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닐까요?"

"슬픈 일을 겪었나 봐요."

주변에서 진심 어린 걱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들이 보기엔 비행을 끝내고 소중한 사람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비극의 주인공 모습이었을 것 같다.

"아… 아임 파인."

전 세계 언어가 통하니 굳이 알지도 못하는 영어로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최대한 말을 못 알아듣는 이상한 인간인 척하며 호다닥 공항을 빠져나왔다.

오… 오우야.

공항까진 유럽도 똑같구만 하면서 나왔는데.

촌놈의 착각이었다.

공항을 나서기 무섭게 물씬 느껴지는 유럽의 풍경.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지만.

엄청 다르다!

유럽을 처음 접한 촌놈의 첫 감상이었다.

한국보다 훨씬 층고가 낮고 오래된 연식이 느껴지는 건물들.

뭔가 낡았다라기 보단 멋있다라는 느낌이 드는 그런 건물이었다.

… 배고픈데.

물론 이런 감성적인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퍼잤다는 죄책감이 사라지기 무섭게 잠시 잊고 있었던 식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환전도 든든하게 해왔으니까.

열심히 쓰고 틈틈이 벌자!

국가 하나를 경유 해야 해서 오래 걸리긴 하지만.

그리스에서 데몬을 잡아도 포상금이 들어오기에 틈이 날 때마다 때려잡아 돈을 벌 생각이었다.

저번 월미도는 못 올렸으니까 더 열심히 잡아야지.

월미도 영상은 포상금을 위해 호다닥 올릴까 했었지만 이내 삭제 버튼을 눌러버렸다.

동영상을 다시 돌려봐도 몹시 찝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얼굴은 안 보여도 희연 님의 10년 전 보육원 친구들도 있을 테니.

여러 사람 찝찝할 만한 동영상을 굳이 올리고 싶지 않았다.

데몬… 이지만 애매하기도 하고.

데몬과 비슷한 능력을 개방한 인간인지, 찐데몬인지 끝까지 헷갈렸던 정혁.

세상 참 복잡해.

새삼스레 진리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밥이나 먹자.

공항 근처이니 먹을 게 여러 가지 있었다.

가능하다면 현지 찐 음식으로 먹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수블라키, 수블라키.

그리스에 도착하기 전부터 폭풍 검색을 했었다.

그리스에서 꼭 먹어야 하는 슈퍼 푸드 10선.

그중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게 꼬치에 고기와 야채를 끼워 만든 수블라키였다.

보자 보자 수블… 응?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국에서 겁나 먼 그리스에서 나한테 손을 흔들다니?

호갱을 노린 사기꾼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뒤에 누가 있나.

휑하니 비어있는 뒷공간.

저건 사기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벅.

본때를 보여 줘야겠구만.

겁 없이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전혀 사기칠 것 같지 않은 인자한 얼굴인데.

저번 마운티거의 윤명구도 그렇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슥.

나에게 입을 열려는 남자를 향해 손을 들었다.

"노."

"…?"

강한 부정을 나타냈다.

당신이 뭐라 말하든 난 거절하겠다는 철벽.

밑도 끝도 없는 노라는 말에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백운 님 아니신가요?"

…?

이번엔 내 차례였다.

자동으로 남자와 같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앞을 바라봤다.

"맞군요."

내 멍청한 표정에서 답을 얻었는지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슥.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내미는 남자.

얼레.

핸드폰 화면엔 김희연, 김소연과 함께 찍은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그렇다는 건…?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스 한국 대사관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국가직 2급 헌터이자, 희연이와 소연이의 아버지인 김대혁이라고 합니다."

* * *

하나씩 서빙되는 수블라키를 보며 앞에 앉아있는 김대혁을 바라봤다.

- 갈 데 없는 저와 소연이를 아무런 대가 없이 키워 주셨어요.

실종 사건 직후.

사라진 보육원에 덩그러니 남게 된 김희연과 김소연을 김대혁이 데려다 키워 주었다고 했다.

김대혁의 대사관 임무 때문에 떨어져 산지 꽤 되었지만 말이다.

소연 님이 먼저 전화했을 줄은.

김대혁은 몇 시간 전 김소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월미도에서 있었던 일과 그곳에서 김희연을 구해준 은인이 그리스로 향한다는 설명.

내가 전화 안 할 거라 생각했었나 보네.

김소연이 먼저 전화를 한 이유는 대충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그리스에 도착해서도 내가 부담을 느껴 김대혁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 같았다.

밥 먹고 꼭 하려고 했는데.

김대혁의 명함을 받아든 순간 전화를 하는 건 확정이었다.

대사관으로 가야 하니까.

그리스로 온 궁극적인 목적은 이카로스의 날개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동시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시기쯤 그리스에 위치한 한국 대사관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 수블라키가 그리스 제일입니다. 제가 살 테니 마음껏 드십시오."

"앗… 넵. 잘 먹겠습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 인사를 너무 많이 받아도 쉽지 않구먼.

나는 조금 전 잘 먹겠다고 한 번 고개를 숙였지만, 김대혁은 공항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순간부터 쉬지 않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 제가 어제까지 임무를 수행하느라 희연이의 메시지를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걸 못 참고 둘이서 데몬에게 간 모양이구요. 백운 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딸을 구해줘서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김대혁.

- 수… 수블라키 사주시죠!

그런 김대혁을 향해 나란 새끼가 내뱉은 말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과하게 감사해하는 모습에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 ….

물론 그런 말을 들은 김대혁의 표정은 예술이었다.

뭘 말하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수블라키를 사달라니.

와작!

그렇게 해서 수블라키 가게에 도착하게 됐다.

조금 전 나와 김이 풀풀 나는 꼬치.

꼬치 가장 윗단에 있는 고기 한 점을 베어 무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찐맛집이다.

육즙이 팡! 터지며 입안을 가득 채웠고.

겉면에 발린 버터의 고소함이 코로 스며들었다.

이것이 고기다.

그렇게 안 봤는데 그리스는 고기의 나라였다!

빠안.

…?

열심히 고기를 욱여넣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나온 수블라키는 안 먹고 날 쳐다보고 있는 김대혁.

"아… 안 드시나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앞에 있는 꼬치를 한 입 베어 문 김대혁이 미안하다며 손을 저었다.

"하도 매칭이 안되어서요. 10급 헌터란 직급과 희연이와 소연이에게 들은 백운 님의 모습이요."

"하하… 자주 듣습니다. 사기 치는 거 아니냐고."

"급수를 올리지 않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김대혁의 물음에 고뇌가 시작되었다.

어딘가에 소속됨으로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게 싫어 10급을 지원했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직급을 선택한 것.

예상대로 날 건들거나 귀찮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좋은 선택이었어.

결과론적으로 봐도 무척이나 잘한 선택이었지만.

이렇게 누군가 이유를 물을 때면 항상 변명을 생각해야 했다.

"글쎄요… 크게 이유는 없어요. 굳이 올려야 될 필요가 없어서… 라고 해야 되나."

"그렇군요."

만족스러운 답변이 아니었을 텐데도 김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식사 후에는 대사관에 가보고 싶으시다고요?"

"옙, 다른 나라에 있는 대사관은 어떻게 생겼나 꼭 보고 싶었거든요."

대놓고 만나려는 사람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회귀 전에 이어졌던 인연이기 때문에 나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자 관계였기 때문이다.

괜히 이름을 말했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을 터.

"알겠습니다, 조금 전에 연락을 해뒀으니 문제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원래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더더욱 타국의 공공기관을 출입하기가 힘들어졌다.

말을 하는 데몬, 사로카의 등장 때문이었다.

물론, 완벽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말을 하는 데몬이 발견된 적은 아직까지 없었지만.

존재하지 말란 법이 없기에 다들 조심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야, 대혁 님이 대사관에 있어서.

그래서 김대혁의 힘이 필요했다.

10급 헌터라는 변변치 않은 신분.

정말 방법이 없다면 기태랑이나 비광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지양하고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이 받았으니까.

아직 받은 걸 갚지도 못했는데 친해졌다고 툭툭 도와달라 연락하고 싶진 않았다.

"얼른 드시죠. 다 드신 후에 대사관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멀지 않으니 금방 갈 거예요."

"옙!"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앞에 놓인 수블라키를 마음껏 흡입하기 시작했다.

* * *

"우… 우와…!"

내 반응에 김대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생각 같지 않죠?"

"…."

최대한 아닌 척하려고 했는데 정곡을 찔려버렸다.

수블라키 흡입 후 도착한 한국 대사관.

대사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태극기 안 달려있었으면 조금 큰 가정집으로 봐도 무방해.

눈앞에 나타난 검소한 대사관의 모습에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하하! 이래 봬도 내외부로 보안은 철저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하하! 네!"

김대혁과 함께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곤 대사관 안으로 향했다.

두근대는구만.

드디어 대사관을 들어와 본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웠던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오는 외교관들과 기업들의 인원들이 주 방문 인원입니다. 아무래도 타국에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보니 말이죠."

김대혁의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빈자리가 많죠? 이미 대부분은 퇴근했을 시간이라서요."

"아… 퇴근 시간이었군요."

아직 저녁이 되기 전이었기에 의외였다.

오늘은 못 보겠구만.

"내일은 파르테논 신전에 가신다고요?"

"네 맞아요."

대산의 문서에 적혀 있던 첫 장소가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내일부터는 이카로스의 날개를 찾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날개 찾은 다음에 다시 와야겠네.

기대가 잔뜩 부풀었던 탓일까.

재회를 잠시 미뤄야 한다는 생각에 살짝 풀이 죽고 말았다.

"원래는 제가 같이 가드리려고 했었는데 급한 업무가 생겨서요. 그래서 대신 백운 님을 가이드 해줄 수 있는 친구를 불렀습니다."

"친구요?"

"하하, 저랑 진짜 친구는 아니고 제 직속 부하입니다. 아, 저기 오는군요."

김대혁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기 전.

"안녕하세요, 팀장님."

…!!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쳐다보지 않아도 말하고 있는 게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백운 님. 팀장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입가로 그려지려는 미소를 참으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백운이라고 합니다."

이번 생에서는 첫 만남이었기에.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마음에 담아두어야 했다.

오랜만이야.

99화. 파르테논 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