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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흔적

두두두두두두두!

적색과 청색의 탄환이 크럭커의 입으로 퍼부어졌다.

꾸룩.

그제야 위기를 느낀 건지 입안의 막을 움직여대는 크럭커.

조금 전 유한의 탄과 가시를 막았던 막이었다.

뚫려라.

다행히 아까와는 달리 리볼버의 탄에는 막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꾸루루루룩!

뚫리면 죽는다는 걸 크럭커도 본능적으로 느껴서일까.

크럭커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막을 재생시켜 나갔다.

찢기면 재생시키고, 찢기면 재생시키는 줄다리기의 연속.

끈기 하나는 인정한다, 보물 박스.

그런데,

스윽.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나갔다.

꾸… 꾸루욱!

좁혀진 거리만큼 탄은 더 빠르게 크럭커의 막을 찢어갔고, 조금씩이지만 탄이 크럭커의 뒤쪽으로 전진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기는 건."

두두두두두두두두!!!

"나다!!"

쩌적, 쩍. 펑!

탄이 막을 밀어내기 시작하고 잠시 후.

적색과 청색이 한데 뒤섞인 탄환이 크럭커를 관통해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꾸루….

막 생성보다 월등히 빠르게 쏘아지는 탄환.

탄환을 버티지 못한 크럭커의 윗 입, 보물 상자로 치면 뚜껑 부분이 뒤로 젖혀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쿵!!

조금씩 뒤로 젖혀지더니 완전히 꺾여 떨어져 내리는 크럭커의 뚜껑.

오.

반으로 갈라진 녀석을 보고 있자니 이게 반갈죽인가 싶었다.

툭툭.

조심스레 다가가 발로 크럭커를 건드려보았다.

쉴새 없이 들리던 소리는 물론이고 동작 자체를 완전히 멈춘 크럭커.

털썩.

"후아아아아!"

바위에 기대 참아왔던 호흡을 쏟아냈다.

호흡과 함께 몸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긴장의 끈 역시 풀어져서일까.

풀썩.

나도 모르는 사이 바위에서 미끄러져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반짝.

고개를 돌려 크럭커의 하단에서 빛나고 있는 보랏빛을 확인했다.

처음과 다를 것 없는 건강한 밝기를 보니 무사한 모양이다.

나이스.

무기에 눈이 멀어서일까.

정신없이 탄을 때려 넣으면서도 시야의 일부분은 보라색 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근두근.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크럭커에게 리볼버가 안 통하면 어떡하지란 걱정 때문이 아닌, 내 보라돌이가 탄에 맞고 잘못되면 어떡하지란 두근거림이었다. 

"후우."

빛이 무사하다는 것까지 확인하자 마음과 몸에 완벽한 평화가 찾아왔다.

끈쩍.

한참을 정신없이 움직여서인지 온몸은 땀투성이.

입고 왔던 옷이 땀에 절여져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휘이이.

다행인 게 있다면 잔잔하면서도 시원한 산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려는 듯 몸 구석구석을 스치며 지나갔다.

상쾌하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뜨거워졌던 몸이 시원한 바람에 의해 천천히 식혀지는 상쾌함.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다니.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할 걸 그랬네.

운동과는 거리가 몹시 멀었었다.

개방을 포기한 뒤엔 매일같이 좁고 어두운 방에 처박혀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몸이 그 지경이 됐나.

보통 햇빛을 안 보면 주름도 안 생기고 하얗게 된다던데.

회귀 전의 내 얼굴은 잘 봐줘도 60은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고, 몸 상태는 정말 오늘내일할 정도로 최악에 치달아있었다.

뭐 이젠. 운동 부족할 일은 없어 보이지만.

매번 오늘처럼 격하게 움직여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10급 헌터가 된다면 생계 유지를 위해 계속해서 데몬을 잡아나가야 했다.

물론 헌터 일이 아니더라도 무기를 찾기 위해선 싸움이 계속될 터.

스윽.

몸을 뒤집어 크럭커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정상 부근이다 보니 지원팀이 왔다 한들 벌써 올라오진 못하겠지만, 굳이 미룰 이유는 없었다.

끈적.

이런.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생물과 다름없는 크럭커.

몸을 일으켜 바라본 크럭커의 내부는 끔찍 그 자체였다.

구룡산에서 잡아먹은 뒤 아직 소화되지 않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

그 중엔 오늘 공격당한 헌터들의 일부도 남아있었다.

….

잠시 고개를 숙여 묵념을 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죽음에 눈 하나 깜짝 안 할 만큼 냉혈한은 아니었다.

스윽.

묵념을 마친 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최대한 다른 이들의 일부를 건드리지 않도록, 잘 살피며 빛을 찾아갔다.

으…. 제발 빨리.

끈적한 입속으로 어깨까지 들어가니 팔로 엉겨 붙는 타액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덥썩.

!!

손에 닿은 걸 천천히 꺼내 들었다.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는 물건의 정체.

물고기 비늘..?

크럭커의 내부에 박혀 있던 건 커다란 하나의 비늘이었다.

산 여기저기를 들쑤시다가 삼켜버린 모양.

이런 크기를 물속에서 마주치면 무조건 기절이다.

비늘 하나가 거의 사람 얼굴만 한 크기.

깊은 물 속을 무서워하는 나로선 이런 비늘을 가진 물고기를 만나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자 그럼, 보라돌이야 넌 대체 무엇이냐.

눈을 감고 빛을 뿜어내는 비늘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 * *

쿵! 쿵! 쿵!

백운이 크럭커를 처치하기 조금 전.

정체불명의 굉음이 구룡산을 울리고 있었다.

"좀."

쾅!

"꺼져라, 잔챙이들!"

소리를 만들어내는 건 조금 전 도착한 1급 헌터, 기태랑.

기태랑은 위에 민간인이 있다는 소리에 최대 속력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등산로가 아닌 최단 루트를 골라서일까.

"끼에에에!"

"크르르!"

기태랑의 앞으로 많은 수의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상주하는 팀은 주로 등산로 근처를 담당했을 테니 관리가 미흡한 길은 데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쾅! 쾅! 쾅!

기태랑의 주먹과 발이 뻗어질 때마다 앞에 있는 데몬이 터져 나갔다.

누가 보면 풍선형 데몬인가 싶을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데몬들.

그만큼 데몬의 몸 내구성에 비해 기태랑의 위력이 너무 강했다.

"크워어어어!

동족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4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덩치의 데몬이 기태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쯧."

그런 데몬을 보며 혀를 차는 기태랑.

한 마리 한 마리를 잡으며 가자니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가자.'

"크워엉!!"

엄청난 괴성과 함께 곰처럼 생긴 데몬이 기태랑에게 발바닥을 휘둘렀다.

일반 사람이라면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체가 으스러질 것 같은 위력과 크기.

빠각!

"크워!?"

하지만, 으스러진 건 공격을 한 데몬의 발바닥이었다.

기태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공격을 한 데몬이 으스러진 발바닥을 안고 고통스러운 울음을 내뱉고 있었다.

빡! 빡! 빡!

이후의 공격들도 마찬가지였다.

팔을 뻗으면 뼈가 부러졌고, 손톱을 휘두르면 손톱이 부러져 버렸다.

이빨도 마찬가지.

콰득!

"크어어엉!"

늑대형 데몬이 가루가 된 이빨을 감싸며 뒤로 넘어갔다.

그런 데몬들의 공격을 받은 기태랑은 오히려 여유로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당연하다는 표정.

기태랑은 눈앞으로 발톱이 휘둘리든 말든 머리 위로 이빨이 덮쳐오든 말든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국가 1급 헌터, 기태랑.

대중들에게 기태랑은 다이아몬드 인간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멈칫.

"!!"

두두두두두두두-----!!

쉬지 않고 달리던 기태랑이 걸음을 멈췄다.

구룡산의 정상 부근에서 하늘로 쏘아지는 적색과 청색의 불빛.

"저건!"

본 적이 있는 빛줄기다.

며칠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개미굴 남자의 동영상.

폭발한 조회수로 인해 해외까지 보도된 영상이었다.

기태랑 역시 뉴스에서 그 영상을 접했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허."

영상을 볼 때도 아름다운 빛줄기였는데 실제로 보니 더 장관이었다.

"쿼어어!"

쾅.

"좀 가만히 있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달려오는 데몬을 터뜨려버린 기태랑.

기태랑의 눈은 쉴 새 없이 쏘아져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빛줄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직접 맞아본 적은 없지만 분명 엄청난 화력.

"어이가 없네."

기태랑의 입으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정도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건 능력이 화력에 집중되어있는, 최소 6급 이상의 헌터였다. 

"저게…."

헛웃음을 터뜨렸던 기태랑의 입가로 흥미 가득한 미소가 그려졌다.

"10급이라고?"

* * *

흠.

공명을 통해 들어온 공간.

뭔가 낯익으면서도 잘 모르겠는 애매모호한 장소였다.

구룡산인가?

느낌상 구룡산이라고 추측을 해봤지만, 산이라고 하기엔 지금 서 있는 곳의 지대는 너무 낮았다.

산이라기보단 좀 높은 고지라고 보는 게 맞아 보였다.

구룡산 근처는 도심지니까 건물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건물은커녕 뭔가 현대라고 여길 수 있을 만한 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심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도, 멀리서도 보이는 고층 빌딩 역시 보이지 않는 장소.

마치 현대 문물이 발달하기 전으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크게 다를 게 없는데.

황금색 빛을 뿜어냈던 면도칼이나 유리병을 만졌을 때도 어쨌든 공간은 바뀌었었다.

아직까지 보랏빛만의 특징은 발견하지 못한 상태.

스으으.

응?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중 왠지 모르게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머선 일이고, 왜 주변이 어두….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허.

주변이 어두워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늘의 태양을 가릴 만큼 겁나게 큰 게 날 향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

구와아악!

[잭 더 리퍼]

빠르게 면도칼을 소환해 옆으로 몸을 던지듯 내달렸다.

쿠우우웅!

몸을 내던지기 무섭게 무언가가 고지로 추락했다.

드드드드드!

엄청난 크기 때문인지 주변의 지형 자체가 무섭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에 비례하여 자욱하게 퍼지는 먼지구름.

뒤질 뻔했다.

무기 구하러 왔다가 쥐포가 될 뻔한 상황.

꼴깍 침을 삼키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무기왕이 되기로 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쥐포사라니.

안될 말이었다.

뭐가 떨어져야 이렇게 되지?

조금씩 걷혀 가는 먼지에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가 눈 바로 앞에 있었다.

반짝!

앞에 있는 물체는 햇빛을 받아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 이건.

크럭커의 배에 꽂혀 있던 거대한 청색 비늘이었다.

그 거대한 비늘을 몸 전체에 빼곡하게 뒤집어쓰고 있는 무언가.

물고기… 는 아니겠구나.

하늘에서 떨어졌으니까.

스스스스.

마침내 시야를 방해하던 먼지가 사라지고.

떨어진 것의 정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번쩍! 번쩍!

빛을 굴절시키던 먼지가 걷히자 드러나는 화려한 외관.

햇빛은 청색 비늘을 만나 아름다운 푸른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삭.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눈앞의 정체를 한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몇 걸음이나 물러섰을까.

홀리….

떨어져 내린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청색 빛에 휩싸인 채 힘없이 쓰러져 있는 거대한 존재.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나 등장했던 전설 속의 존재.

눈앞에 있는 건 그런 존재의 대표자였다.

"요오오오옹!?"

17화. 떨어진 용

세상에…. 이게 머선 일이고.

눈앞에 떨어진 건 다름 아닌 용이었다.

그것도 푸른 빛깔을 눈부시게 뿜어내고 있는 청룡.

가상의 존재가 아니었구나.

천천히 거닐며 떨어진 용을 살폈다.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전설에서나 듣던 용이 실존하다니.

스윽.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청룡의 몸에 가져다 댔다.

미약하지만 아직 살아있는지 오르락내리락하는 몸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쪽이 머린가.

몸이 두꺼워지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허허벌판인 고지와 용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무기왕의 능력이 날 엄한 곳으로 이끌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쉬이이!

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거대한 뿔이 달린 용의 머리가 나타났다.

갑자기 입 벌려서 날 잡아먹진 않겠지?

조금 전까지 뻑하면 주댕이를 벌려대는 크럭커와 싸우고 와서일까.

거대한 입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았다.

난 맛도 안 느껴질 텐데.

한 입 거리.

아니지, 미세먼지급 먹거리.

이 정도의 크기의 용에게 난 그런 존재였다.

사람이 아주 작고 작은 소금 입자 하나를 먹는 느낌과 비슷할 터.

저벅.

용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얼굴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만약의 상황엔 도주하기 위해 면도칼을 해제하지 않은 상태였다.

음!?

용의 정면에 선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섭구만.

예상은 했지만 훨씬 더 부리부리하고 매서운 눈매를 가진 용.

힘을 다한 건지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커다란 코에선 가뿐 숨이 내쉬어지고 있었다.

날 못 보는 건가?

바로 앞에 서 있음에도 용의 눈동자는 날 향하지 않았다.

분명 조금씩은 반응이 있는 걸 보아 멈추거나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마치 나란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휘적휘적.

손을 흔들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희미한 숨만을 내뱉고 있는 청룡.

죽어가고 있다.

용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호흡이 희미해지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느껴졌다.

눈앞의 용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

죽어가는 용을 바라보고 있던 중, 피부로 느껴지던 바람의 속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달라진 건 바람의 속도뿐만이 아니었다.

슥.

고개를 들자 보이는 하늘.

!!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을 촬영한 뒤 수십, 수백 배속으로 돌려놓은 느낌이었다.

우우웅.

어느새 완전히 눈을 감은 용.

용의 주변으로 맑은 물이 솟아올랐다.

맑다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로 깨끗하고 투명한 푸른 색의 물.

청룡의 비늘과 잘 어울리는 색깔이었다.

- 용이 떨어져 죽은 자리에 물이 생기면서 양재천이 됐다고 해요!

구룡산을 오르며 들었던 임수빈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저 재미 삼아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용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해서일까.

임수빈이 말했던 게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스르르..

용을 중심으로 솟아난 물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샘물 정도의 물이었지만 지금은 콸콸 넘쳐 허허벌판이던 고지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것도 없이 매말라 있던 장소에 변화가 찾아왔다.

변화.

이 단어만으론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변화보다는 창조에 가까운 현상.

물이 닿은 모든 곳에서 새싹이 피어났고, 그 새싹은 잠시 후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황무지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던 장소.

조금 지나자 그곳은 숲이 되었고, 점점 솟아오르는 지형과 함께 쌓이고 쌓인 숲은 마침내 산이 되었다.

드드드!

내가 서 있는 곳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주변이 산으로 변한 후, 용이 죽은 장소에도 토지가 빠르게 쌓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용의 영향인지 일정한 공간을 남겨두고 동굴화가 되어버린 지대.

첨벙.

곧이어 용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물이 동굴을 채워나갔다.

어어!

발밑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물의 감각.

워낙 빠르게 차올랐기에 피할 틈도 없었다.

발끝에서 느껴졌던 물은 어느새 내 머리를 넘어 동굴을 가득 채워버렸다.

수… 숨이….

익사의 공포에 잠시 허우적거렸지만,

얼레?

숨이 쉬어졌다.

분명 물 속인데 말이다.

슥.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여 보았다.

조용히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손바닥.

뭐지 이 느낌은.

몸을 감싸는 포근한 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숨이 쉬어진다는 걸 깨달은 후 찾게 된 여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물로 가득 찬 공간은 온통 푸른색이었다.

그리고 푸른색만이 존재하는 세상엔 나와 죽은 용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평온하다.

아니, 평온하다는 단어만으론 부족했다.

이곳에 있다면 어떤 위협이 닥쳐도 안전하다는 안정감.

태어나서 이렇게 평온하고 포근한 안정감을 받았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하아.

그렇게 물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날 찾아와라.]

!!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는 곳은 깊은 물 속.

물속에서 어떻게 소리가 들리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분명히 들리고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말이다.

신기하네.

귀로 들린다기보단 내가 들어와 있는 물 자체가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진동을 통해 온몸으로 목소리가 전달되는 신기한 감각.

우우우웅!

다시 한번 물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빛 한 점 없던 동굴로 눈부신 밝은 빛이 흩뿌려졌다.

[기다리고 있겠다.]

기다리겠다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흩뿌려진 빛에 몸이 집어 삼켜졌다.

* * *

번쩍.

눈을 뜨기 무섭게 들려오는 벌레의 울음소리.

하늘에선 별과 달이 조용히 자신의 빛을 뽐내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고요함만이 가득한 구룡산의 정상.

철퍽.

왠지 몸이 무거운 느낌에 손을 들어 올려봤다.

몸과 옷이 폭삭 젖어있었다. 

비늘을 만지기 전까지는 땀에 절여져 몹시 찝찝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깨끗하고 맑은 샘물로 한바탕 몸을 헹구고 나온 느낌.

상쾌하구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왼 손바닥을 바라봤다.

여전히 들려있는 청색의 비늘.

역할을 다 한 건지 비늘에선 더 이상 보랏빛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안 사라졌네.

황금빛을 뿜어내던 리볼버나 면도칼처럼 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비늘은 사라지지 않은 채 달빛에 반사된 영롱한 청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잠시간의 멍 때리는 시간을 가진 후.

웃챠.

몸을 일으켰다.

비늘을 만지기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반갈죽 되어 널브러져 있는 크럭커와 이빨 자국이 남은 바위까지.

- 날 찾아와라.

몸으로 전달되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100%는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만진 비늘의 주인, 청룡.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뒤 구룡산을 포함, 이 일대의 자연을 만들어낸 장본인.

손으로 구룡산의 바위를 어루만졌다.

비늘에서 본 동굴.

이 아래다.

얼마나 깊숙한 곳에 위치한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구룡산이었다.

황금색 빛은 무기를 얻을 수 있는 빛.

보라색 빛은 무기를 찾아가는 흔적… 인건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마지막엔 무언가가 들려오긴 했지만, 처음에 죽어가던 용은 나란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었다.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말을 걸어왔던 잭과 보니의 공간과는 달랐다.

보라색 빛을 따라가면 황금색 빛이 존재한다… 인가?

"으음."

복잡해지는 머리에 턱을 어루만졌다.

만약 진짜라면 보라색 빛을 따라 도달한 곳에 있는 건 황금빛. 

그리고 황금빛과 공명을 통해 들어갈 장소에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건 용일 확률이 높았다.

쩌… 쩐다.

턱에 닿아있는 손으로 미세한 떨림이 찾아왔다.

용과의 대화라니.

이거 인류 최초 아니야?

최초.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단어였다.

히죽.

그렇게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며 웃고있던 중.

"아!"

크럭커에게 나서기 전 켜뒀던 액션 캠이 떠올랐다.

혹시나 이걸로도 돈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켜놨던 것.

호다닥.

바로 귀 옆에 있던 소형 카메라를 떼어내 가장 최근 영상 재생을 눌렀다.

슉슉슉.

크럭커에 관련된 영상은 빠르게 넘겼다.

이런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다.

비늘을 향해 손을 뻗기 직전.

과연 비늘을 통해 들어갔던 공간이 찍혔을 것인가.

발라당.

?

안 찍혀있었다.

비늘을 만지는 영상을 마지막으로 카메라가 향한 곳은 하늘.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카메라가 움직였다.

내가 공간에서 나온 시점.

공간에서 보낸 시간은 못해도 최소 20분이었다.

역시.

면도칼과 리볼버 때도 느꼈었는데, 역시나 공명을 통해 다른 공간에 들어가 있는 동안엔 현실의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흠.

카메라에 공간이 찍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들과 함께 볼 수 없어서 아쉽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오로지 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오로지 나만이 볼 수 있는 공간.

오로지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쩐다, 그것도 미친 듯이 쩐다.

"나… 나이써!"

공명 최고!!

스스로의 능력에 취해 나이스를 연발하는 사이.

부스럭.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직 누군가 올 만한 시간이 안 됐을 텐….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내게 다가오고 있는 남자.

하운드의 입에서 핏덩이 째로 나왔던 잭을 연상시키는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건 무기왕의 능력에 의한 고유 공간.

지금은 리얼, 현실이었다.

"꺄…."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작은 소리를 내뱉은 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 *

순식간에 정상까지 도달한 기태랑.

기태랑이 한쪽에 앉아있는 백운을 발견했다.

'!!'

그런 백운의 옆에서 반쪽으로 갈라진 채 내동댕이쳐져 있는 크럭커.

'올라올 때 본 건 역시….'

하늘로 치솟는 탄환을 본 후. 

다급하던 기태랑의 마음에선 작은 여유가 생겨났다.

어째서 여유가 생겼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지만, 그냥 생겨났다.

왠지 모르게 크럭커와 싸우고 있을 남자가 멀쩡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태랑의 직감은 적중했다.

물에 빠진 생쥐마냥 온몸이 폭삭 젖긴 했지만, 어찌 됐든 별 상처 없이 혼자서 주먹을 움켜쥐어 대고 있는 백운.

'별 상처는 없어 보이는데,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혼자 나이스를 외치며 허공에 어퍼컷을 날려대고 있으니.

누가 오든 의심할만한 장면이었다.

스윽.

인기척을 느낀 걸까.

어퍼컷을 날려대던 백운이 기태랑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눈동자가 커짐과 동시에 백운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백운에게 걸어가는 기태랑.

기태랑은 궁금했다.

등장부터 개미굴을 쓸어버리고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크럭커까지 잡아낸 남자, 백운.

어떻게 그런 화력을 뿜어낼 수 있는 건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10급 헌터에 지원을 한 건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저벅.

서로의 얼굴이 완벽하게 보이는 거리.

백운에게 말을 걸기 위해 기태랑이 입을 열려는 순간.

"꺄…."

"?"

꺄.

처음 만난 두 사람 사이에 첫 마디였다.

18화. 일주일 전의 당신은

캄캄한 산속 길.

기태랑의 뒤에 바싹 붙어 하산을 시작했다.

그 기태랑이었다니.

정상에서 피를 뒤집어쓴 귀신… 인 줄 알았던 기태랑을 만난 지 10분.

- 괜찮나?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말을 걸어온 기태랑.

기태랑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구룡산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나저나 처음 만나자마자 꺄라니.

날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스윽.

다시 한번 기태랑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여전히 피에 흠뻑 젖어있는 모습.

소연 님이랑 희연 님은 대단한 거였어.

내가 비슷한 몰골이었을 때 마주쳤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비명은커녕 인상만을 찡그리며 호다닥 자리를 피했었던 두 사람.

이제 보니 비명을 안 지른 것만 해도 대단한 담력이었다.

잭 더 리퍼가 쿨타임이라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반사적으로 꺼내어 휘두르고 말았을 것이다.

어차피 안 통했겠지만.

다이아몬드 인간, 기태랑.

내가 오해하고 면도칼을 휘둘렀더라도 기태랑은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을 터다.

오히려 다이아몬드에 부딪힌 내 팔이 더 아팠겠지.

"크워어어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내려가고 있을 때.

앞쪽에서 데몬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

펑!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기태랑이 지름길이라며 날 데리고 온 길.

관리되던 곳이 아니어서인지 길에선 심심할 때마다 데몬이 튀어나왔다.

- 데몬!

처음엔 튀어나온 데몬에 호들갑 떨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었지만,

- 펑!

- 펑!

- 펑!

몇 번의 동일한 상황이 반복된 후 지금은 단검을 꺼내긴커녕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데몬! 이라며 눈을 크게 뜨는 것조차 낭비라고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적을 처리해버리는 기태랑.

역시 1급은 클라스가 다르구만.

1급의 명품 클라스를 느낌과 동시에 저렇게 한 마리 한 마리 다 터뜨려버리니 피범벅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호다닥.

잰걸음으로 기태랑의 뒤로 바싹 붙었다.

피는 좀 튀길지언정 가장 안전한 자리였다.

게임에서 버스 타면 이런 느낌이려나.

5:5 대전 게임을 할 때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버스 기사.

기사는 4명의 멱살을 잡고 승리까지 버스를 운행하곤 했는데, 기태랑에게서 그런 기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기사 중에서도 운전 실력이 최고인 베스트 드라이버의 향기가!

기사님한테 바짝 붙자.

데몬이 계속 등장할 테니 듬직한 버스 기사의 등에 바짝 붙어서 가야 안전….

휙.

움찔.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기태랑에 나도 모르게 움찔해버렸다.

너무 바짝 붙은 모양이다.

"…."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구만.

첫 만남 꺄에 이어 거머리처럼 바짝 달라붙는 행동까지. 

이상한 놈이라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진짜 10급 헌터 지원자라고?"

"어…. 네. 맞습니다."

아까 한 대답으론 부족했는지 기태랑이 재차 물어왔다.

여전히 안 믿긴다는 듯 묘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는 기태랑.

"왜 꼭 10급이야? 이유가 있는 건가?"

"음… 급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국가 조직에 깊이 속하게 된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전 그런 걸 안 좋아해서요."

기태랑이 재밌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복지라고 여겨서 어떻게든 얻어내려고 하는 걸 안 좋아한다니, 특이하구만. 뭐,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고."

오.

이해한다는 기태랑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감동을 받았다.

TV나 영상에서만 보던 유명 인사가 내 말을 납득해주고 있다니.

신기한 느낌이다.

"사실 안 믿었거든. 개미굴을 쓸어버렸던 사람이 10급 헌터에 지원하다니? 밑에 있던 애들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었다."

봤구나.

얼굴이나 이름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동영상에 보니와 리드의 탄환 빛줄기가 너무 제대로 찍혀버렸다.

기태랑 역시 조금 전 크럭커에게 쏘아진 빛을 보고 알았을 터.

피식.

감탄사밖에 뱉지 않는 나에 기태랑이 실소를 터뜨렸다.

"설마 그렇게 화려하게 쏴대고선 정체는 비밀이었는데…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하, 아니에요."

그러고 싶었지만.

나도 양심이란 게 있었다.

영상에 그렇게 찍혀있는데 비밀이라니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나마 얼굴이 안 팔려 길 가다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걸 다행으로 여길 뿐이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더 높은 급수로 지원할 생각은 아예 없는 건가? 생각이 있다면 내가 추천서를 써줄 수도 있는데."

!?

모두가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1급 헌터의 추천서라니.

예상컨데 기태랑의 추천서가 있다면 승진 하이패스는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높은 급수까지 올라가면 많은 부를 쥘 수 있을 테고 인기도 많아….

짝!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10급이 좋아요."

정신 차려야 한다.

성공 가도를 달릴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책임과 제약이 생겨버린다.

"1급 헌터의 추천서를 거절하다니. 아마 최초일 거다."

어깨를 으쓱 올린 기태랑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TV에서 봤을 땐 엄청 껄렁껄렁하고 성격도 괴팍해 보였었는데.

실제로 만나 대화를 나눠보니 그냥 시원시원한 아저씨였다.

아, 그냥 아저씨는 아니고 멋있고 쎈 아저씨.

"그런데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던 거지? 처음 만났을 때 반응이 묘하던데."

"그건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피칠갑을 하고 나타나셨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죠.

"아니, 그거 말고. 나라는 걸 알고 나서 말이야."

"아."

구룡산의 정상.

기태랑이 괜찮냐며 물어온 순간, 달빛이 기태랑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었다.

대충 뒤로 넘겨놓은 갈색 머리와 만사가 귀찮다는 듯 반쯤 감긴 눈.

달빛 덕분이었다. 

내게 말을 건 사람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1급 헌터라는 걸 알게 된 건 말이다.

하지만, 기태랑이 말하는 것.

앞에 있는 게 기태랑이란 걸 안 후 나도 모르게 묘한 표정을 지었던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또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하 갑자기 유명인을 만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대답을 기다리는 기태랑에게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의 나로썬 기태랑의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식.

"그렇구만."

다소 뻔한 답변에 기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기지개를 켜는 기태랑.

"어디 다친데는 없으니 잘 따라올 수 있지?"

"넵!"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기태랑의 뒤로 바짝 붙어 보였다.

"좋아, 그럼 속도를 올려볼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 * *

기태랑을 쫓아오다 보니 순식간에 도착하게 된 구룡산 입구.

그곳엔 죽상을 하고 있는 김경찬과 임수빈이 앉아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니.

저 둘을 말하는 거였구만.

"아!!"

"배… 백운 님!"

나와 기태랑을 발견한 두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이에요!"

김경찬의 얼굴엔 안도의 표정이, 임수빈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말 죄송해요. 백운 님을 혼자 보내버리다니."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이래서 죽상이었구만.

김경찬과 임수빈은 아직 헌터가 되지도 않은 나를 버렸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이야.

"아니에요, 제가 그러자고 한 건데요 뭘."

나를 제외하고 모두의 마음이 뭉클해지는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

지금이었다.

말해야 되는 타이밍이다.

"저 경찬 님. 아까 빌려주셨던 화기, 부서져 버렸어요."

차마 크럭커의 입에 던져 넣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던져 넣었을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내 탄환에 맞고 가루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못했다.

덥썩!

"그런 건 신경쓰지 마세요! 백운 님이 무사하다는 게 중요하죠!"

이 착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둘의 반응에 부응하기 위해 나도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시간이 늦어서 차도 다 끊겼을 텐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빈아!"

"네! 잠시만요!"

김경찬이 말하기 무섭게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시작한 임수빈.

어차피 차가 안 끊겼더라도 집이 없는 처지라 돌아갈 곳도 없었는데.

뭘 하려는 걸까.

"예약 완료했습니다."

예약?

꼬옥.

"!?"

김경찬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희의 죄송한 마음입니다! 거절하지 말고 꼭 받아주세요!"

* * *

끼이익.

와우.

3일 연속 의도치 않은 공짜 호텔행이라니.

드디어 인생이 피는 건가.

김경찬과 임수빈이 예약해준 구룡산 근처의 호텔.

눈앞에 날 기다리고 있는 침대가 보였다.

폭!

푹신한 침대로 몸을 던졌다.

자고로 침대란 씻고 몸을 던지는 게 국룰이지만, 지금은 샤워 대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 처음 만났을 때 반응이 묘하던데.

기태랑의 말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회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TV에서나 가끔 보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머나먼 사람.

그것이 내가 느꼈던 기태랑이었다.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내가 유물관의 아재에서 회귀한 지는 이제 막 일주일이 되려는 찰나.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어서 그런지 나름 지금의 나에게 적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과 일주일 전까지의 일들이 남 일처럼 느껴지고 그런 건 아니었다.

음.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활약을 하며 데몬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온 1급 헌터, 기태랑.

그의 능력이 다이아몬드 인간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기에 모든 이가 기태랑을 무적이라고 불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험한 전투 속에서도 기태랑은 단 한 번도 상처 입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국가 차원에서의 엄청난 손실입니다.

-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 서울에선 영웅을 추도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적이라 여겼던 기태랑이 목숨을 잃고 만 것.

- 정부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 영웅의 죽음에 대해 규명하라!

기태랑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보도된 게 없어서일까.

추도의 기간이 끝난 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정부와 언론이 기태랑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시했다.

그건 아닐 거 같은데 말이지.

무능력자로 유물관에서나 일하던 내가 뭘 알겠냐마는.

언론에서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감추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숨기고 자시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아마 정부든 언론이든 몰랐을 것이다.

아니, 누구보다 진실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 다이아몬드는 검으로 벨 수 없다. -

초등학생도 알 만한 상식과 법칙을 깨버리고 국가의 영웅을 베어 죽인 범인이 대체 누구인지 말이다.

스윽.

감았던 눈을 떠 천장을 바라봤다.

대한민국 1급 헌터, 기태랑.

불과 일주일 전까지의 나에게 있어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

19화. 돈 있수?

으드드득!

"끄어어어어어!"

요란스럽게 기지개를 켠 후.

호다닥.

책상에 올려뒀던 액션 캠으로 달려갔다.

크럭커를 잡은 증거로 포상금을 받아야 하니 곧 제출해야 할 동영상이었다.

- 동영상 주시면 내일 바로 제출하실 수 있도록 편집해서 보내드릴게요.

헌터 지사로 출근하며 동영상을 많이 받아본 두 사람.

동영상을 주면 임수빈이 대신 편집을 해주겠다 했지만 정중히 거절했었다.

- 아니에요. 호텔까지 잡아 주셨는데 그런 건 제가 할게요. 첫 제출이라 어떤 식으로 해야 되는지도 알아봐야 하고요.

동영상을 제출하고 포상금을 받는다.

간단한 시스템이지만 앞으로 계속할 일이니 직접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동영상을 바로 주지 않은 가장 큰 이유.

[삭제]

꾸욱.

동영상엔 약간의 편집이 필요했다.

크럭커를 죽인 이후.

청룡의 비늘을 집는 순간은 삭제 해둬야 했다.

반짝.

흐뭇.

바지춤에 숨기고 왔던 비늘이 보였다.

동영상이 그대로 공개됐다간 비늘의 행방을 물어올 게 분명했다.

안되지, 안돼.

내 건데.

비늘이 나온 부분을 통편집한 후 설정창으로 돌아갔다.

- 처음 제출하는 거면 액션 캠에 닉네임 설정하셔야 돼요.

닉네임 설정.

국가직 헌터는 처음에 닉네임을 정할 수 있다고 했다.

정해진 닉네임으로 제출한 동영상을 올리는 것.

- 99.9%는 다 본인 이름으로 하죠. 

이유는 간단했다.

유명해지기 위한 것.

헌터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유명해진다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일단 유명해지면 동영상을 올릴 때마다 고정적으로 찾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런 고정팬들이 생기면 그만큼 후원금을 받을 확률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만이겠는가.

유명해진 헌터에겐 많은 기업이 줄을 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유명인을 영입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광고 효과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이름이 아닌 다른 걸로 할 생각이었다.

싸우다 보면 내 무기나 기술 때문에 이름과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긴 하겠지만.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일.

동영상이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길을 걷기만 해도 사람들이 알아보는 경우라도 줄여야 했다.

# 닉네임을 입력해주세요, 한 번 설정하면 다시는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내 액션 캠에서만 설정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설정을 하는 순간 국가로 보내져 등록이 되는 모양.

으음. 닉네임이라.

이름 짓기.

옛날부터 쥐약인 분야였다.

어렸을 적, 게임을 시작할 때도 이름 짓기 때문에 캐릭터 생성창에서 항상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에라이.

또 그렇게 고민할 생각은 없었다.

바빠 죽겠는데 닉네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톡톡톡.

# 무기왕.

시원하게 내 목표를 적어 넣었다.

닉네임으로 목표를 적다니.

이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구만.

오랜 시간 고민한 건 아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꾹.

# 닉네임, 무기왕. 등록하시겠습니까?

예쓰!

# 환영합니다, 무기왕 헌터님. 첫 동영상 업로드를 위해선 본인 확인 및 액션 캠과의 링크 설정이 필요합니다. 가까운 헌터 지사로 1회 방문 부탁드립니다.

조으아써.

첫 부분으로 돌린 동영상을 다시 재생시켜 보았다.

크럭커에게 나아가기 직전의 상황.

- 무기왕님 심정은 이해 가지만….

임수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닉네임 설정의 기능 중 하나였다.

동영상에서 내 이름이 불리면 자동으로 닉네임으로 교체해주는 기능.

좋구먼.

동영상 편집을 완료한 후.

의자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향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 * *

"안녕하세요, 양재 헌터 지사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안녕하세요, 포상금 신청이랑 닉네임 등록 좀 하려고 왔어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는 창구 접수원, 김민희.

친절한 안내에 따라 액션 캠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성함 한번 말씀해주실래요?"

"백운입니다."

이름을 들은 김민희가 조회를 시작했다.

"!!"

무언가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는 김민희.

모니터를 재차 확인한 김민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운 님, 어제 10급 헌터 테스트 보셨고요. 테스트 통과 검수인이… 기태랑 님이시네요."

!?

- 헌터 테스트는 통과했어. 내일쯤이면 등록되어 있을 거다.

헤어지기 직전. 

쿨한 한 마디를 남긴 뒤 기태랑은 현장을 떠났었다.

그냥 통과시켜줬겠지 했는데 직접 자기 이름을 적어주다니.

역시 멋진 아저씨다.

"저 혹시…."

"네?"

한 차례 주변의 눈치를 살핀 김민희가 앞으로 몸을 숙였다.

"사적인 질문이지만 기태랑 님과는 어떤 사이신가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어제 우연히 만나서 제 테스트 검수를 해주신 것뿐이거든요."

"아…."

김민희가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기태랑 님 완전 팬이거든요. 싸인 받는 게 꿈이어서…."

오. 그렇게 만나기 힘든 사람이었단 말인가.

싸인이 무산되었다는 걸 깨달은 김민희가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

"액션 캠 통해서 등록한 닉네임이 무기왕?"

"…."

왜일까.

부끄러웠다.

게임에서 친해진 사람들과 정모를 하게 되면 발생하는 일.

- 흑사자님?

- 아! 혹시 왼손의흑염룡님!?

이런 느낌이었다.

분명 적을 때는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다.

"무기왕으로 등록한 거 맞으시죠?"

확인사살을 하는 김민희에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통은 다 본인 이름으로 하시거든요. 10급 헌터 백운 님, 닉네임 무기왕으로 링크 되셨구요. 앞으로는 지사로 안 오셔도 액션 캠을 통해서 포상금 신청 및 동영상 업로드가 가능하세요."

스윽.

김민희가 작은 기계를 내밀었다.

"여기 검지 손가락 지문 한번 찍어 주세요. 지금 가지고 계신 액션 캠을 잃어버려도 등록한 지문을 통해 새 액션 캠에 닉네임이 링크될 거고."

타닥.

"해당 지문으로 등록된 계좌에 포상금 및 동영상으로 후원된 돈이 들어갈 거예요."

생체 인식으로 모든 게 되는 세상.

항상 느끼지만 정말 편한 세상이다. 

"동영상 올리는 법 알려드릴게요."

액션 캠을 사이에 두고 김민희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동영상을 올리기 전엔 꼭 한 번씩 확인해보는 걸 추천 드릴게요. 실수로 올리면 안 되는 것까지 올라오는 경우가 많아서요. 요청하시면 삭제는 되지만 이미 다른 곳에 퍼진 경우까지는 삭제가 불가능해요."

업로드 실수.

많이 봤었다.

민간인의 영웅이라 불리던 사람이 뒤에선 누군가를 협박하고 돈을 갈취하는 장면이라던가.

청렴결백을 외쳤던 헌터가 사고 현장에 있는 물건을 훔친다던가.

익숙해진 업로드에 검수를 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사고들이었다.

난 꼭 해야지.

다시 한번 다짐하며 김민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자, 여기까지 한 후에 업로드 버튼을 누르시면."

꾹.

게이지가 차며 동영상이 어딘가로 전송되었다.

"백운 님은 국가 소속이라 해당 동영상과 영상에 기록된 수치들은 영상 담당 부서로 전달되고요. 그다음에 해당 부서에서 영상과 기록을 검증해 포상금을 입금해드릴 거예요. 그 뒤에 실제 국가 사이트에 동영상이 올라가면서 대중에게 노출될 거고요."

그나마 국가 소속이라 한 차례 검수 단계가 존재한다는 건 다행이었다.

철저한 개인 프리랜서라면 촬영부터 업로드 및 등록까지 자신이 검수를 다 마쳐야 하니 말이다.

"다 됐습니다. 지금 캠에 있던 동영상은 전송되었고, 몇 시간 후에 검수가 끝나면 포상금 입금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연락처 란이 비어 있는데…."

"아직 핸드폰이 없어서요."

핸드폰이 없다는 말에 김민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21세기 시대.

이젠 군인 장병들도 부대 내에서 핸드폰을 쓰는 시대인데 없다니 라는 눈빛이었다.

만들어야겠구만.

당장 연락할 사람은 없지만, 정보의 검색을 위해서라도 하나 장만할 필요가 느껴지던 참이었다.

"네! 그럼 다 끝났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한 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스윽!

"저…."

다시 한번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김민희.

"기태랑 님은 정말 모르시는 거죠?"

"네. 진짜 몰라요."

뜨거운 김민희의 싸인 투지를 느끼며 호다닥 지사 출구를 향해 뒷걸음질 쳤다.

* * *

양재천 근처.

- 산수 지리소 -

낡은 가게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가게가 맞을까?

이 가게에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으음."

잠깐의 고민을 마친 후, 문을 열어젖혔다.

바로 이곳이야! 라는 확신은 안 섰지만 지금 당장은 선택지가 없었다.

딸랑.

"계세요?"

오래된 책의 향기와 함께 묵은 먼지가 나를 반겼다.

와. 진짜 더럽네.

정말 어느 곳 하나 건드리고 싶지 않은 가게였다.

책이란 책엔 하나도 빠짐없이 먼지가 쌓여 있었고, 건드리는 순간 폐렴에 당첨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게의 청결 상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누구쇼?"

지리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인.

주인을 본 첫인상이었다.

긴 백발과 흰수염을 흩날리며 모습을 드러낸 노인.

도인이란 존재가 실제 한다면 저런 모습이겠거니 싶었다.

"안녕하세요, 구룡산의 지리서가 있을까 싶어 왔는데요."

지리소에 찾아온 목적이었다.

동굴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용님을 만나러 가야 하는 상황.

가긴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가 막막했다.

"구룡산? 없수다."

"그… 그렇군요."

노인의 짧고도 깔끔한 대답.

없는 걸 있다고 거짓말하진 않았으니 솔직한 주인장이라고 해야 될까.

"그럼 안녕히계세요."

만난 지 일 분만에 이루어지는 이별.

가게 문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지금은 없지."

뒤에서 의미심장한 노인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은?"

빙글.

노인이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았다.

"돈, 얼마나 있수?"

"!?"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노인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들어주지, 돈만 충분하다면."

* * *

국가 헌터들의 동영상이 올라오는 사이트, 한튜브.

띠링.

알림음과 함께 한튜브로 동영상이 올라왔다.

제목은 구룡산에서의 혈투, 닉네임은 무기왕.

@ 무기왕? 이 촌스러운 닉네임은 뭐지?

@ 온몸이 오그라드네, 어린이집 다니는 헌턴가봐요.

대부분의 헌터가 실명을 사용했기에, 실명이 아닌 닉네임은 네티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케이스였다.

거기다 무기왕이라니.

유치원생도 손사레 칠 닉네임이었다.

@ 어그로는 미쳤네요, 저절로 재생 버튼에 손이 가네.

@ 선발대 출발할게요. 얼마나 유치하게 싸우나 보고 댓글 남기겠습니다.

영상을 발견한 네티즌들이 비웃음과 함께 동영상을 클릭했다.

그런 네티즌들 앞으로 플레이되는 동영상.

[아가리 벌려라.]

[철컥.]

[탄 들어간다.]

@ 선발대 어디 갔어요? 후기 안 남기나?

선발대의 댓글을 기다리는 네티즌들.

띠링.

잠시 후 선발대의 한 줄 평이 올라왔다.

@ 지림.

20화. 그림 그리는 노인

"돈이요?"

노골적인 노인의 요구.

무릇 친한 사이에도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돈 이야기인데.

순간이지만 당황하고 말았다.

"없으면 가던 길 계속 가시고."

노인이 가라며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생긴 거만 봐선 속세의 굴레를 벗어던진 도인의 느낌인데 돈이라니.

쉽지 않은 할아버지야.

손님이 왕이다! 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은 없었지만, 감안하고서라도 무척이나 불친절한 주인장이었다.

리뷰를 남길 수만 있다면 별점 0.1점을 남기고 싶은 가게.

물론 여기서 0.1점은 등록을 위한 최소한의 별점이다.

"돈 드리면 제가 원하는 거 그려 주실 수 있는 건가요?"

슈퍼 불친절한 가게.

에라이 똥 밟았네 하고 나가면 되는 일이지만, 어째서일까.

끌린다.

저 말도 안 되는 자신감.

돈만 주면 그대가 원하는 걸 당장에 줄 수 있다는 표정.

서비스는 최악이지만 너무 맛있어 발길이 향하게 되는 맛집 느낌이었다.

"구룡산? 두 시간이면 다 그려 줄 수 있지."

"얼마 드리면 되나요?"

보통의 가게는 공급자가 수요자를 원하는 상황인데 지금은 반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아쉬운 건 나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용을 찾아 구룡산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저 높디높은 산을 곡괭이로 다 파헤칠 수도 없는 일.

길이 필요했다.

"정확히 원하는 게 뭔가?"

"물길이 필요합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용이 있던 공간을 제외하곤 오랜 시간 토지가 쌓아 올려지며 산이 되어버린 상태.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물길이라면?

용의 추락했을 때부터 계속해서 흐른 물길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 용이 떨어져 죽은 자리에 물이 생기면서 양재천이 됐다고 해요!

용도 떨어졌는데 양재천이라고 불가능하란 법은 없었다.

실제로 용을 중심으로 나온 물이 양재천을 만든 거라면, 토지가 쌓이는 와중에도 용에게서 발생한 물이 계속 흘렀다면.

그 물길은 여전히 열려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려 주실 수 있나요?"

다시 한번 노인에게 질문을 건넸다.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 끌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확신이 서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이름 있는 산들에 비하면 큰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산은 산.

노인이 내가 모르는 최첨단 탐사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산속에 숨겨져 있는 물길을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말했잖은가, 두 시간이면 그린다고."

"좋습니다. 얼마 드리면 되나요?"

한 10만 원이면….

"100만 원."

뭐?

입술을 안 깨물었다면 나이 많은 노인에게 반말이 튀어나갈 뻔했다.

100만 원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비싸다 생각하면 그대로 나가면 되는 일."

내 놀란 얼굴 때문일까.

혀를 찬 노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꼭 필요하다면 찾는 이가 있을 테니."

마지막 말도 잊지 않는 노인.

꼭 필요한 사람.

나였다.

물길이 아니면 들어갈 방법이 막막한 상황.

할아버지, 사기꾼 아니죠?

아니지.

저 정도 연기의 사기꾼이라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불하겠습니다."

돈이라곤 일시불 카드에 남은 50만원 뿐이지만.

오늘 저녁도 사먹고 찜질방 비도 내야 하는 돈이지만.

일단 뱉고 본다.

"호오?"

"대신."

손가락을 펼쳐 내밀어 보였다.

"선금 50만 원, 결과물 확인 후에 나머지 50만 원! 전 아직 사장님을 믿을 수 없으니까요."

날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노인.

고민하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수다."

얼떨결에 사기를 쳐버렸다.

50만원 밖에 없는데 100만원짜리 계약을 하다니.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뱉은 말은 아니었다.

크럭커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변종이니 50만 원은 들어오겠지란 판단.

노인의 내밀어진 손으로 내 피 같은 선불 카드를 건넸다.

나름 아껴 쓰던 건데 이렇게 한 방에 사라져 버리다니.

노인이 받아 간 카드를 기계로 넣었다.

삐빅.

"?"

노인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날 돌아봤다.

왜… 왜 저러지.

조심스럽게 다가가 내려다본 기계.

# 잔액: 497,200.

의심할 만하군.

100만 원을 내겠다고 한 놈이 50만 원밖에 없으니.

그마저도 온전치 않은 50만 원.

"제가 50만원도 없을 거 같습니까? 잔금 치를 때 2800원 더 드릴 테니 일단 그거 받으시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노인이 결제 버튼을 클릭했다.

휴, 뻥카 성공.

휙.

결제를 마치기 무섭게 노인이 카드를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목숨을 다 한 선불 카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스윽.

!?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난 모든 지리를 그릴 수 있는 지리소의 주인, 덕문이라네."

"배… 백운입니다."

"음! 좋은 이름이구만."

70% 반말에서 100% 완전한 반말로 바뀌었지만.

입금 전의 모습에 비하면 덕문은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역시 돈이야.

새삼스레 돈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입금 전과 후의 모습이 이렇게 다르다니.

"그런데 구룡산의 물길은 왜 필요한 건가? 대답하기 힘들다면 안 해도 되네."

"산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어서요."

"산의 안쪽?"

원래라면 말하지 않았겠지만, 검증이 필요했다.

내가 세운 가설이 현실화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 말이다.

"어르신은 풍수나 지리에 전문가이실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길을 통해 산의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거."

"미친 짓이지."

!?

덕문이 망설임 없이 답변을 했다.

이럴 수가. 역시 허무맹랑한 가설이었단 말인가.

"미친 짓인데 불가능한 건 아닐세."

오?

좌절하려는 순간 덕문의 희망 섞인 말이 들려왔다.

"물론 조건이 필요하지. 가려는 공간까지 물길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어야 하고, 사람이 통과할만한 크기여야 한다는 점."

대부분의 산에는 지하수가 흐른다.

흐르지만, 그건 물이 흐를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

덕문의 말대로 구룡산의 물길이 내가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인지가 중요했다.

"어르신이 그리는 그림에서 그것도 알 수 있나요?"

"당연하지."

주섬주섬 책상에서 도구를 챙기는 덕문.

특별하다고 할 만한 도구는 아니었다.

커다란 도화지와 먹물, 그리고 그림을 그릴 붓까지.

진짜 사기꾼 아닌가.

도구를 보니 다시 한번 의심이 올라왔지만, 어쨌든 돈은 이미 건넸으니.

믿어보기로 한다.

"나가지, 나라고 이 자리에서 바로 그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 * *

백운이 덕문과 구룡산으로 향하고 있는 시각, 한튜브 사이트를 관리하는 부서.

모니터링 하던 부서의 직원, 이한솔이 고개를 돌렸다.

"서… 선배님, 터졌는데요."

"뭐!? 서버 터졌다고?"

"아뇨, 동영상요. 이거 좀 보세요."

"깜짝 놀랐잖아, 임마. 주어 좀 뺴먹지마."

부서의 선임 도민철이 투덜거리며 이한솔에게 다가갔다.

"무기왕? 뭐야 이 촌스러운 닉네임은."

제일 먼저 닉네임을 확인한 도민철이 영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조회수.

"뭐야 이거."

조회수: 10만.

유명 헌터들에 비하면 놀랄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하며 많은 영상을 올렸거나, 이미 이름이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는 헌터였다.

처음 올라온 동영상의 경우 조회수 1000 정도만 나와도 준수한 수치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10만이라니?

꿀꺽.

동영상을 튼 도민철이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폈다.

변종 미믹 크럭커에게 유한이란 팀장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

# 아뇨, 전 저분이 죽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아무리 말리셔도 전 갈 겁니다.

무기왕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영웅이다.

@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의인이야

@ 오지네요…. 너무 멋있네요.

그리고 크럭커와 무기왕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 와작!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크럭커의 입질 소리.

동영상을 보는 이마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생생한 소리였다.

@ 나였으면 포기했음.

@ 저도 이미 삶 포기했을 듯요.

저렇게 무서울 바엔 죽음을 택하겠다는 네티즌들의 댓글.

동영상을 보던 도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회수가 왜 터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현장에 있다고 느낄 정도의 긴박감과 생생한 리얼리티.

이것이 경쟁력이 되는 이유는 뻔했다.

'그놈이 그놈이니까.'

이미 유명한 헌터들의 동영상 주제는 통일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했다.

사이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데몬을 썰어 보는 사람에게 시원한 청량감과 대리만족을 주는 것.

사이다는 호불호 없이 대부분의 네티즌이 좋아했기에 헌터들 역시 이런 니즈에 맞춰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이건 진짜 리얼인데…."

거기다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동영상 업로드를 목적으로 일부러 데몬을 찾아가 사냥하며 촬영하는 타 헌터들의 영상과 달리, 무기왕의 영상은 순도 100% 리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동영상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는 무기왕의 호흡과 쫓기고 있다는 공포감.

다른 동영상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 두두두두두두!

@ 어! 이거 개미굴 그 남자 아님?

@ 기자들 피해 도망갔던 남자? 맞는 거 같은데.

동영상의 조회수가 급속도로 퍼지는 이유는 알파 요인도 있었다.

며칠 전 전국구 방송을 타며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개미굴의 남자.

그 남자가 무기왕이었다.

어느덧 동영상의 마지막 부분.

# 아가리 벌려.

# 철컥.

# 탄 들어간다.

@ 미쳤다.

@ 와.

@ 바지 갈아입으러 갑니다.

@ 저도 갑니다.

그리고 완벽한 마무리 대사까지.

누군가 볼 걸 의식하고 뱉은 인위적인 대사와는 와닿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선배, 어떡하죠?"

"뭘 어떡해."

동영상을 확인한 도민철이 몸을 일으켰다.

"당장 방송사로 연락해, 개미굴의 남자가 국가 소속 헌터라고."

"네!"

후다닥 달려나가는 이한솔을 보며 도민철이 강한 확신을 느꼈다.

무기왕.

"이건 터진다."

* * *

택시에서 덕문과 함께 내린 구룡산 입구.

입구엔 노란색 줄로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아마 어제의 사건을 수습하는 중인 듯했다.

"어쩌죠? 못 들어가는 거 같은데요."

구룡산으로 가자는 덕문의 요청에 따라 왔는데 출입 금지라니.

덕문에게 그림을 받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상관없네."

"!?"

산에 들어갈 수 없음에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는 덕문.

그대로 풀썩 바닥에 앉은 덕문이 가져온 도구들을 풀기 시작했다.

땅바닥에서 뭐하시려는 거지?

커다란 받침대 위에 도화지를 올려놓은 뒤 먹을 갈기 시작한 덕문.

탁.

필요한 만큼 다 갈았는지 먹에서 손을 뗀 덕문이 눈을 감았다.

가부좌를 틀고 편하게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는 덕문.

우우우웅.

!?

덕문의 손에서 초록색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21화. 옹달샘으로

솔직히 말하면 방금 전까지 의심했었다.

아무런 장비 없이 흙바닥에 앉아 먹을 갈다니.

21세기라고 사기도 이렇게 대놓고 치는 건가 싶었다.

안돼. 내 50만 원.

정확히는 497200원이 허공으로 흩어진 건가 절망에 빠지려는 순간.

우우웅.

덕문의 손에서 연초록색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빛이 보이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탁.

붓을 집어 든 덕문이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슥!

그냥 그리고 있다는 단어로는 부족한 현란한 손놀림.

내가 저렇게 휘둘렀으면 사방팔방으로 먹물이 튀며 개판이 났을 텐데.

도화지에선 구룡산으로 보이는 산을 기점으로 복잡한 길이 그려지고 있었다.

와우.

그야말로 신들린 붓질.

제대로 그리고 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신뢰도가 떡상하게 만드는 그림 실력이었다.

펄럭펄럭.

덕문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햇빛에 노출되고 있는 덕문이 덥지 않도록 열심히 부채질을 하는 것.

어르신 파이팅!

그렇게 부채질을 하는 팔이 아파오려는 찰나.

"후우!"

완성된 건지 덕문이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놨다.

"?"

뭐하고 있냐는 듯 바짝 붙어 있는 날 바라보는 덕문.

열심히 부채질 중이었습니다.

"크흠!"

이제 그만 절로 꺼지라는 신호를 보내며 덕문이 도화지를 내밀었다.

"내가 개방한 능력은 위치한 산의 길을 그리는 것. 요즘 시대에 돈이 안되는 능력이지."

돈은 안되지만 내게는 무척이나 필요했던 능력.

제대로 찾아온 듯했다.

음.

덕문이 내민 도화지를 살폈다.

모르겠는데?

길 같은 게 그려져 있긴 한데 까막눈이라 그런지 아무리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윽.

산의 중앙을 짚는 덕문.

"나도 그리면서 안 건대 이 산, 좀 특이하군."

"특이하다뇨?"

"지금 선으로 그려져 있는 것들이 전부 길이네. 수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수로일 걸세. 물이 흐르지 않았다면 이미 다 막혔을 거거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덕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길이라고 말한 선은 정말 많았다.

산의 중심을 시작으로 윗쪽을 제외하곤 사방으로 뻗어있는 수로.

"특이한 건 바로 이곳이야."

덕문이 그림의 정중앙, 모든 물길이 시작되는 곳을 짚었다.

그림에서도 새까맣게 칠해져 있는 부분이었다.

"구룡산의 중앙인데, 커다란 공간이 있어."

여기다.

덕문의 말을 들으며 확신이 들었다.

청룡의 비늘에서 봤던 동굴이었다.

"보통은 산 중앙에 이런 공간이 있을 수가 없거든. 무언가 가득 차 있지 않은 이상 말이야."

"가령 물이라던가…?"

"그렇지."

슥슥.

덕문이 여분의 도화지에 또 하나의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통의 산은 이런 모습이야. 이건 지하수가 지나다니는 길이고."

구룡산과 달리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채워진 중앙.

빈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건 지하수가 다니는 좁디좁은 길들 뿐이었다.

다시 구룡산의 중앙으로 손을 올린 덕문이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게 대다수의 경우에 불가능하거든. 특히 구룡산의 경우는 위에서 이 중앙 공간으로 향하는 물길이 하나도 없잖아."

당연한 말이지만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렇기에 보통의 산에 흐르는 지하수는 하늘에서 내린 비가 고여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룡산은 달랐다.

가운데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 향하는 물길은 제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지하수가 스며들 수 없는 공간이란 이야기다.

그런데도 공간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불가능한 상황에 덕문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알 것 같았다.

애초에 물의 시작은 용이었다.

물을 떠나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허허벌판의 고지.

그곳에서 물을 발생시켰던 건 하늘에서 떨어진 용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용에게서 솟아오른 물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면 이 공간 역시 설명이 가능했다.

"수로의 크기는 어떤가요?"

크기에 따라 선의 두께를 달리 해놓은 듯했지만 내가 알아보기는 무리가 있었다.

슥.

공간으로 향하는 길 중 가장 두꺼운 곳으로 덕문이 손을 올렸다.

"여기가 가장 넓은 길이야. 이 정도면 사람 너댓 명은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크기지."

덕문이 짚은 길을 역으로 따라가 보았다.

산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였다.

"여긴 어딜까요?"

"아마 산속에 있는 작은 옹달샘 정도 되겠군. 공간까지의 거리는 음… 3km 정도 되겠군."

3km라.

일반적인 길이었다면 별거 아닌 거리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하는 길은 물길.

물속에서 3km를 나아가야 했다.

심해 공포증인데.

사실 진짜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어두컴컴한 심해 사진을 보면 움츠러들었기에 공포증이라 예상만 해볼 뿐이었다.

설명을 마친 덕문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진짜 여기로 갈 생각인가?"

솔직히 말하면 안 가고 싶다.

왜냐하면.

무서우니까!

몸의 행동이 제약되는 물속에서 3km을 가야 한다니.

거기다 가던 중간에 문제가 생긴다면?

익사 확정.

사방이 막혀 있는 물길이기에 빠져나갈 길도 없었다.

"요즘 익서터림 스포츤가 뭔가 유행한다고 하더니. 목숨 귀한 줄 알아야 하네."

어르신, 저도 익스트림 스포츠 안 좋아합니다.

걱정해주는 덕문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크흠! 뭐 더 말리지는 않겠네. 자네 목숨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럼."

슥.

덕문이 손을 내밀었다.

잔금을 달라는 강력한 수신호였다.

하지만, 지금 줄 순 없다.

크럭커 처치 포상금이 들어오기 전까진 난 빈털터리니까.

"잔금은 갔다 온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뭐?"

인상을 팍 찡그렸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난 필요한 걸 전부 얻은 상황.

거래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었다.

"제대로 그려주신 건지는 실제로 가봐야 아니까요. 저 50만 원 떼먹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이유가 논리적으로 들려서일까.

끄응 소리를 내던 덕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기 치면 재미없을 줄 아시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한번 덕문을 안심시킨 뒤 도화지를 챙겼다.

옹달샘, 딱 기다려라!

* * *

띵동.

"어서 오세요!"

덕문의 지리소와는 달리 반갑게 맞이해주는 가게의 사장님.

사장님에게 쾌활하게 인사를 한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찾으시는 거 있나요?"

"저… 잠수 용품 좀 사려고 하는데요."

찾아온 곳은 스킨 스쿠버 가게.

잠수할 때 필요한 각종 장비를 파는 곳이다.

안전 제일!

맨몸으로 3km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순 없었다.

내 최대 잠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100m도 못 가고 숨이 바닥날 터.

"이쪽으로 오세요."

"저 혹시 보여 주시기 전에 잔액 확인 좀 할 수 있을까요?"

은행은 아니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대부분의 가게에는 존재했다.

지문 인식을 통해 계좌 잔고와 입금 내역을 확인하는 기계가 말이다.

"아 예, 여기에 손가락 올려 주세요."

삐릭.

지문이 인식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국가님!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부디 포상금이 들어와 있기를.

내가 국가에 실망하지 않도록 빠르게 처리해줬기를.

띠링.

기계의 맑은 벨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맑은 소리에 잔고가 0원이면 킹 받을 거 같은데.

!?

걱정이 무색하게 선명히 찍혀있는 내역.

입금자: 헌터 중앙처

B급 데몬 크럭커 처치에 대한 포상금.

올라간 동영상의 후원금은 입금까지 2-3일 소요됨.

위의 설명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이것.

[잔고: 10,000,000.]

홀리….

예상외였다. 

천만 원이라니.

크럭커가 낮은 등급의 데몬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거 한 마리 잡았다고 천만 원이라니.

다들 헌터 헌터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있었구만.

헌터. 싸릉한다.

유물관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직업 만족도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스윽.

잔고가 뜨기 전까지 쭈그려져 있던 어깨가 펴졌다.

펴졌다 뿐이겠는가.

몇 센치 차이겠지만 하늘을 향해 잔뜩 솟아올랐다.

"흠흠."

작은 헛기침을 한 후, 여유로운 얼굴로 주인 아저씨를 응시했다.

난 더 이상 0원일지도 모르는 잔고를 걱정하던 쭈글이가 아니다.

!?

그리고, 달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잔고를 확인하겠다는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었던 주인 아저씨.

장사도 안 되는데 왠 거지가 왔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랬던 아저씨가.

방긋!

지금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띄우며 두 손을 비벼대고 있었다.

"뭘 찾으신다구요, 손님? 말씀만 하시죠. 지금 없더라도 어떻게든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잠수한 상태로 3km 정도를 가야 해서요."

"잠수한 채로 쭉 3km나요? 빡세게 하시는 분이군요."

아마 익스트림 스포츠 하드코어 유저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벅.

진열대로 간 아저씨가 이것저것 장비를 집어 들기 시작했다.

"계속 잠수를 하셔야 하니 슈트랑 오리발, 물안경, 산소통은 기본으로 필요할 거 같고요."

산소통 하나를 가리킨 아저씨가 고개를 돌렸다.

"이거 하나면 3시간 정도 갑니다. 3km 정도 가시면 음… 두 개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그럼 네 개 주세요."

"네?"

안전 제일!

충분만으론 부족하다.

만에 만에 만에 하나의 상황까지 고려해서 충분한 산소통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숨이 막혀 고통스럽게 죽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끄덕.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 알겠습니다."

아저씨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잠시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물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도 부탁드립니다!"

* * *

"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신나는 쇼핑 시간을 마무리 한 뒤 두세 시간 만에 돌아온 구룡산 입구.

묵직.

등에 매달려 있는 배낭과 손에 달린 휴대용 구르마를 바라봤다.

- 짐이 많아서 구르마가 필요하실 거 같은데요.

구르마라니.

군대에서 사용했던 게 떠올라 망설여졌지만,

짜잔.

아저씨가 끌고 온 구르마는 내가 상상하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기술의 발전을 체감하게 만드는 최첨단 구르마.

끌고 다니기 편하게 손잡이까지 슈퍼 개량된 모습이었다.

철컥.

어깨에 걸려 있는 화기를 바라봤다.

스킨 스쿠버 가게에서 총이라니.

직접 사놓고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개방으로 인한 능력자가 속출하고 헌터란 직업까지 성행해버린 한국.

고심 끝에 국가는 화기 소지 및 판매 금지법을 풀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막아봐야 관련 능력자들이 암시장에서 무기를 만들어 팔아댔기에, 그럴 바엔 관리가 가능한 수면 위에서 판매하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좋았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

고개를 들어 구룡산 입구를 바라봤다.

1차 목적지는 공간까지 이어지는 옹달샘.

가자, 옹달샘으로.

22화. 드가자

대산의 홍보실.

실장 최리아가 모니터를 바라봤다.

# 탄 들어간다.

팀장 전수희가 급히 알려온 동영상.

'그 남자네.'

하늘로 치솟는 탄환.

적색과 청색이 담긴 빛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개미굴의 남자, 백운.

개미굴 때부터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언론에 공개하거나 하지 않았었다.

안 그래도 백운 때문에 물 먹어서 화가 나는데, 물 먹인 남자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허… 21만?"

눈에 띄는 조회수에 최리아가 혀를 찼다.

올라온 지 하루도 안되는 동영상이었다.

그것도 무기왕이란 닉네임으로 올라온 첫 동영상.

그런 동영상이 조회수 21만이라니.

끼익.

의자에 몸을 기댄 최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개미굴부터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줬던 백운.

그때는 대산의 삽질로 운 좋게 퍼진 거라 그러려니 했었는데, 눈앞의 영상은 달랐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업로드된 동영상.

국가엔 수많은 헌터가 소속되어 있었고, 그 숫자에 비례하여 한튜브에 올라오는 동영상의 수는 하루 만 개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조회수라니.

"이것 봐라?"

저 정도 화력을 뿜어낼 수 있는 인원은 대산에도 많이 있었다.

화력만 놓고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존재.

하지만, 이 영상은 달랐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몰입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동영상.

대부분의 헌터가 돈벌이와 유명세만을 위해 대충 안전한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영상을 찍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런 목숨을 건 데몬 사냥 동영상이라니.

띡.

최리아가 호출 버튼에 손을 올렸다.

"전수희 팀장."

- 네! 실장님.

"저 백운이란 남자." 

최리아의 눈에 확신이 깃들었다.

"데려오세요."

* * *

구룡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세 시간.

덕문이 그려준 옹달샘까지는 쉽게 갈 거라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크와오!"

잊을만하면 데몬이 튀어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푹푹!

"크오."

쿵.

그나마 다행이라면 약한 녀석들이라 무기고의 무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상대가 가능하다는 것.

오는 길에 사왔던 정글도는 지금까지 데몬을 죽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뽕을 뽑을 것 같았다.

"후우우."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초코바와 물을 꺼냈다.

이건 뭐 산이 아니라 던전이었다.

강하지 않다 하더라도 데몬이 이렇게나 자주 나오다니.

냠.

초코바를 씹으며 매고 있는 화기를 내려다봤다.

최대한 면도칼과 리볼버를 안 꺼내기 위해 챙겨온 건데, 소음 때문에 데몬이 몰려들까 쉽게 쓰지 못하고 있었다.

물속에서라도 잘 써야지.

슥슥.

"허어어!"

계획과 달리 열일 중인 정글도를 정성스럽게 닦아줬다.

입김까지 불어가며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닦아 줄 생각이다.

그나저나 많이 좋아졌구만.

산을 올라오며 첫 데몬을 만났을 때는 잠시 고민했었다.

면도칼을 꺼내야 하나?

리볼버에 비하면 길지 않지만, 면도칼에도 두어 시간 정도의 쿨타임이 존재했기에 가능하다면 최대한 넣어두고 싶었다.

막 썼다가 정말 필요할 때 못 쓰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위험해 처하면 꺼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달려드는 데몬을 향해 정글도를 휘둘렀었다.

그리고, 놀라고 말았다.

다가온 데몬의 발톱을 가볍게 피한 후 들고 있던 정글도를 휘둘렀다.

- 서걱.

깔끔한 소리와 함께 피를 뿌리며 쓰러진 데몬.

?

너무 간단해서 놀랐고, 생각보다 더 잘 움직여 주는 몸에 다시 한번 놀랐다.

면도칼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몸 상태가 올라오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라니.

사방에서 데몬이 덮쳐오는 상황이 아니라면, 무기를 꺼내지 않고도 웬만한 녀석들은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것 같았다.

다행이네.

무기고를 사용하지 않아도 데몬을 잡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한 후. 

마음엔 한층 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간단한 데몬 한 마리조차 그냥 잡지 못 했다면 무기들의 쿨타임이 도는 동안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을 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꿀꺽.

초코바 하나를 게 눈 감추듯 삭제시킨 뒤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계속 가야 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는 시간.

어둠 속에서 후레쉬를 켠 채 나 여기 있소! 광고하면서 다니는 건 위험했다.

그렇게 멀진 않아.

덕문이 추가로 그려준 그림이 네비게이션처럼 정확한 지점을 나타내고 있진 않지만, 거리상으로 봤을 땐 근처였다.

"후우우웁!"

목표는 옹달샘.

해가 지기 전까진 어떻게든 도착한다.

* * *

풀썩.

"으어."

땅바닥에 몸을 뉘었다.

대체 몇 시간이나 헤맨 걸까.

해가 진 뒤에도 도착하지 못해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르겠다.

뭐 어쨌든.

도착했다.

사아아아.

물이 있어서인지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

죄송합니다, 어르신!

마음속으로 덕문에게 사과를 올렸다.

길을 헤매며 마음속에서 덕문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었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론 얼마 안됐는데 이렇게까지 도착을 못 하다니. 

설마 사기?!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애초에 거리에 따른 시간에 맞춰 딱 도착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덕문의 찍어준 건 대략적으로 이쯤이다 였기에 캄캄한 산에서 단번에 도착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엉금엉금.

샘까지 기어가 물 앞에 자리를 잡았다.

땀에 절여진 얼굴이라도 씻어낼 생각이었다.

첨벙.

!!

그렇게 물에 손을 담근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물 감정사 같은 건 아니었지만, 비늘을 통해 몸을 담궜던 물과 똑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제대로 왔구만.

다시 한번 덕문의 가게 쪽으로 인사를 한 후 가져온 짐을 풀었다.

물속으로 들어갈 때 착용할 슈트와 오리발, 물안경, 산소통까지.

더럽게 힘든 일이었다.

이것들을 다 들고 산을 오른다는 것은.

장하다, 백운.

잘 올라온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짐을 꺼내 들었다.

바스락.

사각형의 라면 두 봉지.

물속 탐험을 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짐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앞으로 최소한 몇 시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황.

체력이 떨어져 오리발을 젓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산을 오른 건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만다.

팡.

예쁘게 뜯긴 라면 봉지 위로 챙겨왔던 보온병을 기울였다.

뜨거운 김을 내며 부어지는 보온병의 물.

야외에선 뽀글이지.

군대의 추억팔이에서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었다.

라면 봉지째로 물을 부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한 끼 요리.

물론 그 추억을 가지고 집에서 해 먹는다면 십중팔구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것이다.

이 맛이 아닌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군대에서 맛있었던 이유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새벽 근무를 선 후 먹었기 때문이니까.

돌돌돌.

가져온 나무젓가락으로 돌돌 만 봉지를 잘 찝었다.

이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아."

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

들리는 거라곤 찌륵거리며 우는 벌레 소리와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나무 소리뿐이었다.

그 중심에서 뽀글이라니.

이건 FM 중대장도 못 참지.

왠지 모르게 신나는 기분.

허겁지겁 봉지를 풀고 젓가락을 집어넣었다.

후르릅!

"오. 시발."

한국인의 공통 감탄사.

정말 감탄했을 때만 나온다는 최고의 감탄사가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꿀꺽.

뜨끈한 라면 국물 한 모금까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국물의 뜨끈함에 나도 모르게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인생.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 * *

"오리발 멀쩡하고."

후읍. 후읍.

"산소통 멀쩡하고."

뽀글이 두 개로 배를 가득 채운 뒤.

곧바로 입수 준비에 들어갔다.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밤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동굴까지는 빛 하나 없는 물길을 가야 하는데 해가 떠 있고 안 떠 있고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찰칵.

산소통 꾸러미를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나의 생명통.

혹시나 연결한 줄이 끊어질까 제일 비싸지만 가장 튼튼한 로프로 구매했다.

딸깍.

위이이이이잉!

그리고 대망의 아이템.

큰마음 먹고 구매한 아이템의 모터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담쓰담.

너만 믿는다.

소중하게 쓰다듬고 있는 아이템은 수중 제트모터.

영화에서 특수 부대원들이 물속으로 잠입할 때 쓰던 장비다.

- 손님, 혹시 제가 하나 더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던 스킨 스쿠버 가게의 주인 아저씨.

아저씨의 입은 이미 귀에 걸린 상태였다.

잠수 장비에 더해 가격대가 쎈 수중 화기까지 몽땅 판매를 했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아저씨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야심차게 꺼내온 아이템.

힘들게 오리발을 젓지 않아도 물속에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제트모터였다.

자. 필요한 건 다 확인했고.

만약의 사태에 사용할 화기까지 잘 챙긴 후.

옹달샘으로 걸어갔다.

"후우우."

커다란 심호흡을 한 뒤 아저씨가 알려줬던대로 산소 호스를 입으로 가져왔다.

입수 준비 완료.

부디,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첨벙!

* * *

와.

옹달샘으로 드가자를 시전한 직후.

눈이 크게 떠졌다.

그렇게 작게 보이던 옹달샘에 들어온 건데 이런 깊이와 넓이라니.

어르신 그림 정확도가 장난 아니네.

다시 한번 덕문의 솜씨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림에서도 깊이가 꽤 됐었던 옹달샘의 깊이.

실제로 들어와 보니 정말 깊다는 게 새삼스레 느껴졌다.

우우우우웅.

잘 샀다.

열심히 회전하는 프로펠러에 따라 내 몸은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오리발을 흔들지도 않는데 이 정도라니.

3km 가는데 너무 오바를 했나 싶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대만족이었다.

스윽.

모터를 한 손으로 잡은 채 방수 처리를 한 도화지를 꺼냈다.

옹달샘을 따라 바닥까지 내려간 뒤 U자 형태를 한 좁은 물길을 따라 공간까지 올라가야 하는 루트.

일단은 바닥이 보일 때까지 가면 되겠구만.

생각보다 길 자체는 복잡하지 않았기에 길을 잃어버리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지금까지는 몹시 순조로운 상황.

하느님, 제발 뭐가 안 튀어나오게 해주세요.

순조롭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물속.

내가 볼 수 있는 시야라곤 머리에 달려있는 헤드라이트가 닿는 범위가 끝이었다.

부처님, 제발!

만약 이 상태에서 무슨 그림자라도 움직인다면?

오우야.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오는 상황.

물 속이라서 별 상관은 없겠지만 바로 지려버리고 말 터였다.

재수 없는 상상하지 말자.

말이 씨가 된다고 속으로라도 이딴 무서운 상상은….

꿀렁.

!?

순간이지만 심장이 내려앉았다.

저 밑에서 무언가 움직인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거겠지? 

하하. 나도 참. 헛것이나 보고.

애써 머쓱한 척 하는 겉과 달리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제발 잘못 본 것이길.

하지만,

삶은 녹록치 않다고 했던가.

부우우우우우웅!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는 귓가로, 무언가의 울림이 들려왔다.

23화. 깊은 산속 옹달샘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먹고 가나… 아아아악!

부우우우우!

제트모터의 출력을 최대치로 올렸다.

울음소리를 내뱉는 건 나보다 더 아래에 있었지만, 이미 깊숙이 들어 와버린 상황.

이제 와서 뒤를 돌아 다시 올라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뒤에서 쫓기면 더 답 없다.

정확히는 견딜 수 없이 무서울 것 같았다.

울림통만 봐도 크기가 거대할 것이라 예상되는 녀석.

이런 깜깜한 물속에서 그런 놈한테 뒤를 쫓긴다?

심장마비다.

용납할 수 없는, 내 심장이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웅!

머리에 달린 라이트가 비추는 약간의 시야 범위.

무언가가 그 범위를 순식간에 헤엄쳐 지나갔다.

아래에 있는 무언가야.

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의상 얼굴이라도 보여라.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슉슉 지나가기만 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후우우웅.

빠르게 왔다 갔다 하더니 내가 내려가고 있는 방향에 멈춰 선 거대한 녀석.

착한 녀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가져보았다.

지금까지 왔다 갔다 거리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은 거 보면, 어쩌면….

부우우우!

시발.

멈춰 섰던 녀석이 빠르게 내 쪽으로 돌진해왔다.

서서히 드러나는 녀석의 정체.

거… 거북이?

거북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며 기묘한 울음소리를 뱉어내는 녀석은,

물론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거북이는 아니었다.

삐죽삐죽 솟은 등딱지와 붉은 눈, 그리고 잔뜩 화가 나 있는 얼굴과 이빨까지.

데몬이다.

저건 거북이지만 거북이라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부우우!

어깨에 메고 있던 화기를 올라오는 괴물 거북이에게 조준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

이렇게 된 이상, 싸워주마.

철컥!

* * *

양재의 스킨 스쿠버 가게.

가게의 주인 오창우가 콧노래를 부르며 선반을 닦았다.

요새 장사가 안돼서 죽을 맛이었는데 오늘은 그야말로 잭팟을 터뜨렸다.

'스킨 스쿠버를 얼마나 하드하게 하시는 분이지.'

낮에 방문했던 백운이 사간 장비는 프로 스쿠버도 혀를 내두르는 수준이었다.

오리발이나 산소통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제트모터까지 사가다니.

물속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무기도 사갔었지?'

다시 생가해보니 물속을 사랑한다기 보단 물속에 있는 걸 사냥하려는 사람 같았다.

데몬이 판치는 요즘 세상에 물속으로 들어가 사냥이라니.

생각하던 것보다 더 하드코어 매니아였다.

뭐 어쨌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창우는 네 개의 산소통과 오리발, 물안경, 제트모터, 거기다 육지용 지원화기까지 판….

"어?"

신나게 먼지를 털던 오창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진열대에 그대로 걸려 있는 수중용 화기.

저 화기가 여기에 걸려 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잘못 팔았다.'

꿀꺽.

너무 신이 났던 걸까.

육지에서 사용하는 무기를 수중용이라고 팔아버렸다.

"하하하…."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오창우가 문밖을 바라보았다. 

"별일… 없겠지?"

* * *

이런 씨이이빠아아알!

어깨에 메고 있던 화기를 냅다 집어 던져버렸다.

조금 전 올라오는 거북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발사는커녕 당기기 무섭게 완전 분해가 되어버리는 화기.

슈아아아악!

어느새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거북이가 커다란 입을 벌렸다.

지금 와서 오리발질을 한다 하더라도 늦은 상황.

화악.

달고 있던 산소통 하나를 잡아당겨 밸브를 풀었다.

푸화아아악!

순간적으로 산소가 터져 나오며 몸이 옆으로 이동되었다.

솨아아악!!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가 버리는 데몬 거북이.

저곳에 있었다면 이빨에 찢겼던가 몸통 박치기를 당해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가야 돼.

거북이와 위아래 위치가 바뀐 상황.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어떻게든 달려서 거북이가 들어오지 못하는 U자형 물길까지 도달해야 했다.

제트모터님 제발!

최대 출력의 제트모터에 더해 산소통의 힘을 빌리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거북이를 만나기 전까지도 꽤 내려온 상태.

조금만 더 가면 물길이 나올 터였다.

부우우우!

가까워진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빠른 속도로 커져가는 그림자.

그만큼 거북이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거북이가 느리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 그건 육지에서의 이야기인가.

잠깐 동안의 의미 없는 잡념을 마치고 등의 고리에 제트모터를 고정 시켰다.

제트모터는 계속해서 나를 바닥으로 이끌었고, 난 위에서 내려오는 거북이를 바라보고 있는 포지션.

[앤 보니&메리 리드]

보니 님, 리드 님.

제발 한 번만 더 살려주십쇼.

마음속으로 기도를 마친 후 거북이에게 리볼버를 조준했다.

철컥.

만약 이것마저 나가지 않는다면.

이제는 진짜 거북이 먹이 행이다.

신이시여.

신을 찾음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두두!!

우려한 게 무색할 정도로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탄환의 빛줄기.

눈앞에 보니와 리드가 있었다면 바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뒈져라!!

얼마나 탄을 갈겨댔을까.

워낙 많은 탄이 지나가서인지 물속엔 많은 기포가 생겨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해치웠나.

불길한 말을 내뱉은 입을 치며 정면을 응시했다.

제발 분쇄되어 있어라. 

아직까진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상태.

부디 탄에 찢겨 조각조각 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스르르.

시야를 가리던 물속의 기포들이 사라지고.

!!

목과 팔이 사라진 거대한 등딱지가 눈에 들어왔다.

보니와 메리의 탄환에도 뚫리지 않는 높은 강도의 등딱지.

보이지 않는 거북이의 머리가 탄에 맞아서 날아간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보지만.

쑤욱.

나의 간절한 바람을 비웃듯 등딱지에서 머리와 팔다리가 재등장했다.

조졌다.

부우우우우!

화까지 난 건지 다시 나를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한 거북이.

뒤를 돌아 바닥과의 위치를 살폈다.

라이트의 가시거리에 샘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물길에 닿을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거북이가 더 빨랐다.

이번엔 멈추지 않고 샘의 바닥까지 처박을 기세인 녀석.

대체 산속 샘에 저딴 게 왜 살고 있단 말인가.

일단, 물길로 달린다.

U자 물길을 향해 제트모터를 틈과 동시에 남은 산소통 세 개를 바라봤다.

리볼버의 탄에도 뚫리지 않는 걸로 보아 산소통을 터뜨린다 해도 거북이가 데미지를 받을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까운 산소통을 낭비하는 셈.

그렇다면.

산소통 하나를 풀어 발아래 쪽에 위치시켰다.

공격 수단이 될 수 없다면 이동 수단으로라도 이용해야 했다.

어느새 지면까지 거의 도달한 거북이.

철컥.

리볼버를 산소통에 조준했다.

하나.

둘.

부우우우!

세다 보니 셋까지 셀 여유는 없었다.

타이밍에 맞춰 발사된 리볼버의 탄환. 

탄환이 산소통을 맞추고, 

퍼어엉.

통에 압축되어 있던 산소가 터져 나오며 근처에 있던 날 날려 보냈다.

제트모터의 속도와 산소통이 터지며 생긴 가속력까지 붙은 상황.

엄청난 속도를 느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철컥.

두두두두두두두두!

어차피 못 죽이겠지만 상관없었다.

제트모터가 날 U자형 물길로 데려다줄 때까지만 녀석의 움직임을 멈추면 된다.

꿀렁.

잠시 멈췄나 싶었던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하고, 

스으으.

리볼버의 시계 초침이 거의 끝에 도달해 가고 있었다.

아직 물길까지는 약간의 거리가 남은 상태.

찰칵.

남은 두 개의 산소통 중 하나를 발밑으로 보냈다.

이제 무언가를 망설이고 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철컥. 탕.

퍼어엉.

산소통이 폭발하며 생긴 마지막 가속력.

스륵.

손에 있던 리볼버가 사라졌다.

내게 남은 건 조금 전에 붙은 가속력 뿐.

이제 물길에 도달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수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철퍽철퍽.

이번엔 열심히 오리발까지 내저었다.

제트모터와 오리발, 그리고 마지막 가속력까지.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하고 있었다.

제발.

발아래로 점점 커지는 그림자를 확인한 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게 다가오든 말든 쳐다보고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제발!

어금니를 깨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발을 내저었다.

부우우우우우!!!!!

정말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녀석의 울음소리.

얼마나 가까이 다가온 건지 오리발 끝으로 놈이 발생시키는 물살이 느껴지고 있었다.

제발 좀.

가까워진 좁은 수로의 입구가 보였다.

닿아라아!!!

콰직!

* * * 

꿀렁! 꿀렁!

후우.

물길의 좁은 틈으로 일렁거리는 녀석의 그림자가 보였다.

눈앞에서 놓친 먹이가 못내 아쉬웠는지 수로의 입구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거리고 있는 놈의 그림자.

고개를 내려 발을 쳐다봤다.

끝에 부분이 댕겅 잘려나간 오리발.

조금만 더 늦었다면 못 걸어 다니는 신세가 될 뻔했다.

또 물에 들어오면 성을 간다.

옹달샘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가 물 공포증이 있는 건지 아닌 건지 헷갈렸지만.

이제 그딴 건 중요하지 않게 됐다.

조금 전 완벽하게 생겨났기 때문이다.

거북이 극혐.

동시에 거북이에 대한 혐오가 피어났다.

파충류에 속하지만 똘말똘망한 눈과 느릿한 움직임 때문에 귀여워했었는데.

이젠 아니다.

돌돌돌돌.

혼자서 열일하고 있는 제트모터에 몸을 맡긴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진짜 죽을 뻔했다.

크럭커한테 쫓길 때도 식은땀이 줄줄 나긴 했지만, 이 정도의 위기는 아니었다.

수 틀리면 잭 더 리퍼의 면도칼을 꺼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던 상황.

하지만,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다.

카이안이 다시 뺏어 가도 인정이다 이건.

왕이 될 거란 놈이 거북이 하나를 어쩌지 못하다니.

왠지 모르게 분함이 느껴졌다.

- 힘의 한계 때문에 무언가를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카이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힘이 없어서 목숨을 놓칠 뻔하다니.

그리고 내가 바꿨어야 할 모든 걸 놓칠 뻔하다니.

거 참. 더럽게.

쎄지고 싶네.

반짝.

?

내 강한 바람이 들려서일까.

감고 있는 눈으로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스르륵.

눈을 뜨자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U자 물길의 꼭대기로 보이는 공간.

공간 전체가 물과 함께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고생 끝에 도달한 공간.

비늘을 통해 봤던 장소였다.

슈우우우.

공간까지 올라간 뒤 제트모터의 시동을 껐다.

비늘에서 내 시점이 있었던 위치.

잠시 후,

!!

눈앞으로 거대한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만났던 거북이가 작다고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크기였다.

그리고 뼈 주변을 감싸고 있는 청색의 비늘들.

물속인데도 뼈를 따라 가지런히 정렬된 비늘들이 청룡의 옛 형태를 유지 시키고 있었다.

번쩍.

너무 밝아 공간 전체가 빛난다고 느껴질 정도의 빛.

빛은 청룡의 비늘에까지 반사되어 황금색과 청색이 섞인 말도 안 되게 화려한 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스르르.

천천히 발을 굴러 용에게 다가갔다.

정확히 나에게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겠다 말했던 청룡.

청룡님,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청룡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저딴 거북이 새끼는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스아아아!

힘을 주세요.

24화. 용

비늘을 통해 왔었던 허허벌판의 고지.

아.

같은 장소인 걸 깨달은 후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저번엔 고지에 도착하고 얼마 안 돼서 엄청나게 큰 용이 떨어졌었는데.

…없네.

떨어지는 용은커녕 구름 한 점 존재하지 않는 파란 하늘.

하늘에선 따가운 햇살만이 내리쬐고 있었다.

"뭘 찾는 거지?"

"!!"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비늘 속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목소리였다.

얼레.

눈동자가 나만 했던 용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나와 비슷한 키의 남자가 서 있었다.

비늘의 색과 똑같은 영롱한 청색 빛의 머리와 눈을 가진 남자.

물론,

사람의 생김새였지만 풍겨오는 기운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용님이구만.

내가 용 전문가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비슷한 체구지만 가만히 있어도 몸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

비늘에서 보았던 청룡과 같은 느낌이었다.

"별일이군. 여기서 나 이외의 존재를 보게 되다니."

역시 비늘의 기억에서 용은 날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슥.

바지춤으로 손을 넣었다.

옹달샘으로 들어오기 전 챙겨놨던 비늘.

없네?

이번 무기를 찾은 뒤에 팔아야지 했었는데, 황금빛에 손이 닿으며 함께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건 그대의 능력 덕이라 치고, 어떻게 날 찾은 거지?"

남자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가볍게 건넨 말이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용님 맞으시죠? 밖에서 용님의 비늘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제 능력으로 비늘을 따라 이곳까지 왔고요."

잠시 놀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비늘이 하나 새어나갔나 보군. 그나저나…."

남자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날 응시했다.

잡아먹으려는 건 아닌 것 같고,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였다.

"내가 용이란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그… 렇죠?"

"대담한 인간이군. 보통은 용이란 존재를 만나면 도망치거나 기절해버리는 게 정상일 텐데 말이야."

아마 저도 그랬을걸요.

만약 사람의 생김새가 아닌 비늘에서 봤던 용이 나를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면?

거품 기절 확정.

사람이든 뭐든 외관보단 내면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항상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다.

"어쨌든, 반갑구나. 난 유탈라스."

"백운입니다."

용 유탈라스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용님이 이름을 알려주며 반갑다고 해주다니, 가문의 영광이다.

….

서로의 이름을 소개한 후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뭐가 그리 흥미로운 건지 날 응시하며 여기저기 훑고 있는 유탈라스.

저벅.

!

유탈라스가 날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쿵!

그저 가볍게 발을 내딛었을 뿐인데도 사방을 울리는 거대한 발소리.

부피 자체는 인간처럼 줄였지만 담겨 있는 건 역시 용이란 건가. 

"찾아오는 길이 쉽지 않았을 텐데."

정확하십니다.

두 다리랑 목숨 중에 하나를 잃을 뻔했거든요.

아니면 둘 다 잃거나.

"뭘 원해서 왔지?"

!!

망설임 없는 직구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런 내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난 걸까.

"당황할 필요 없다. 인간은 욕심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역시 용님이다.

모든 것에 통달한 듯한 모습.

그런 유탈라스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 현명하지 않아 보였다.

괘씸하게 여길 거 같긴 하지만.

"저는 무기를 모읍니다."

"그리고?"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무기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탈라스가 내게 어떤 무기를 줄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잭 더 리퍼의 경우를 제외하곤 무기를 통해 공간에 도달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기라…. 그런 건 없다만."

"네…?"

용님.

없다뇨.

없으면 안돼요.

싱긋.

지진이 나버린 동공을 봐서일까.

유탈라스가 재밌다는 미소를 그려 보였다.

"무기는 없지만, 무언가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부디!"

나도 모르게 유탈라스에게 부디라는 말을 해버렸다.

이 정도면 불경죄 아닌가.

"그런데 내 비늘에서 뭘 봤길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시작부터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던 유탈라스.

"비늘의 기억은 유탈라스 님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꿀꺽.

유탈라스가 죽음에 이른 것부터 그 주변으로 생명이 깃든 물이 나와 산이 생겨나는 이야기까지.

비늘을 통해 봤던 걸 모두 유탈라스에게 들려주었다.

"그렇군, 신기한 능력이구나. 나조차 알지 못하는 걸 봤다니."

떨어진 뒤에 목숨을 잃었던 유탈라스.

유탈라스는 자신에 의해 폐허였던 고지에 생명이 돋아나는 걸 보지 못했다.

무덤덤하네.

하늘에서 떨어져 죽고만 유탈라스.

그 죽음에 분노하거나 억울해할 줄 알았는데.

유탈라스는 예상외로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스윽.

유탈라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 이것이다."

그래서 공간이 여기였구나.

지금이야 어떻든 유탈라스 본인이 마지막으로 본 건 허허벌판의 황무지였다.

그 영향으로 공간 역시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만나자마자 내가 너무 질문만 해댔구나. 자, 인간. 아니지, 백운."

들으셨나요, 여러분?

무려 용님이 제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지금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면 당장 SNS에 이 상황을 자랑하고 싶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거라.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해주마."

유탈라스의 말을 듣자 임수빈이 해줬던 구룡산 이야기가 떠올랐다.

10마리의 용이 승천하던 중 임신한 여자의 비명 소리에 놀라 한 마리가 떨어져 버렸다는 설화.

아닐 거 같긴 한데 말이지.

유탈라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봤을 때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저런 기운을 가진 용이 비명 소리에 놀라 떨어진다니.

그래도 물어봐야지.

아마 살아가며 용을 만날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궁금한 게 있다면 전부 다 물어보는 게 현명한 선택.

"제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수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유탈라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유탈라스가 입을 열었다.

"대부분은 맞고, 두어 가지는 틀리구나."

대부분이 맞다고?

다 틀릴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역시 옛말이 다 틀리진 않다니깐.

옛말의 위엄에 고개를 끄덕이며 유탈라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열 마리의 용이 승천하려던 것도 맞고, 그중 한 마리가 떨어진 것도 맞다. 예상대로 그 떨어진 한 마리가 나지."

자신이 떨어진 걸 말하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유탈라스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깜짝 놀라서 떨어진 건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인 듯했다.

틀린 부분을 정확히 바로 잡아 주는 유탈라스.

"그리고."

해맑던 유탈라스의 얼굴에 슬픈 빛이 어렸다.

"한 여인이 소리를 지른 것 역시… 사실이다."

이쯤 되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일 텐데.

조금 변형되었다곤 하나 어떻게 그때의 일이 현대에까지 전해질 수 있는 걸까.

흠.

궁금하다.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고 하던데,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전해지던 이야기가 대부분 사실이라는 답변을 들었음에도 그 뒤에 있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인간 최초라서 그런가.

굳이 진실을 듣고 밖으로 나가, 사실은 이 설화가 이랬습니다! 라고 소리 지르며 뽐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어째서 여인은 소리를 질렀고, 승천하던 유탈라스는 왜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가 말이다.

스윽.

유탈라스가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드드드.

고지의 중심에 솟아나는 두 개의 의자.

"바쁘지 않다면, 좀 앉지 않겠나?"

"네!"

바쁘긴요.

호다닥 달려 의자로 몸을 날렸다.

누구보다 용님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시간이 정지되어있는 상태.

정지되지 않았다면 줄어 가는 산소통 때문에 곤란했겠지만, 그럴 일도 없었다.

"하도 오랜만에 만난 말벗이라서 말이야. 반갑구나."

와우.

저절로 몸을 굽신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인간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기에 항상 진실을 탐구해 나간다고 들었다."

맞습니다요.

적이 있을 확률이 높은 걸 알면서도 직접 그곳에 들어가 확인해야만 적성이 풀리는 게 바로 인간입니다요.

"어떠냐?"

"네?"

유탈라스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늘에서 용이 추락해야만 한 이야기, 들어보지 않겠느냐."

!!

추락해야만 했다니.

누가 이런 이야기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스윽.

두 손을 모은 채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꼭 듣고 싶습니다."

싱긋.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유탈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 전, 용이 있었다."

* * *

풀 한 포기 없는 황폐한 장소.

생명이 살아남기 힘든 장소였지만, 그런 장소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슬아, 또 어딜 나가는 게냐."

마을의 이장이 마을을 나서려는 윤슬에게 물었다.

"아, 이장님! 안녕하세요!"

작은 키와 긴 흑발, 선명한 갈색 눈을 가진 윤슬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슬아. 너 또…."

"하하."

윤슬이 들고 있는 종이에 이장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날이 지날수록 부족해지는 식량과 척박해지는 환경.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마을은 속수무책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요!"

그런 마을을 살리겠다며 윤슬은 하루가 멀다하고 나가 나무의 씨앗을 심고 있었다. 

"슬아. 아무리 간절히 바라더라도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게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이장을 포함한 사람들은 이미 마을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저 남겨진 것을 아끼며 근근이 목숨을 연명할 뿐이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 네가 심은 씨앗이 살아남더라도 제 시간 안에는…."

나무는 심는다고 해서 며칠 만에 자라는 게 아니었다.

기적이 일어나 나무가 자란다 하더라도 이미 마을은 사라졌을 가능성이 컸다.

"당장 저한테는 도움이 안 될지라도."

저벅.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윤슬이 마을의 출구를 향해 발을 뻗었다.

"나중의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 * *

"휴우!"

윤슬이 가는 팔로 땅을 파나갔다.

매일 매일 해도 도통 적응이 안 되는 고된 작업이었다.

쩍쩍 갈라진 땅을 어느 정도 판 후.

윤슬이 가지고 있던 씨앗을 꺼내 들었다.

"부디 살아남아서 커다란 나무가 되어 주세요."

한차례 기도를 한 뒤 파인 땅으로 씨앗을 넣었다.

슥슥.

조심스레 마른 흙을 덮은 후, 다음 씨앗을 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꺄악!"

콩.

언제 온 건지 그런 윤슬 앞에 서 있는 청색 머리의 남자. 

"아야."

엉덩방아를 찧은 윤슬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

윤슬과 청룡 유탈라스의 첫 만남이었다.

25화. 용과 소녀

둘의 첫 만남 이후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오늘도 심는 것이냐?"

"당연하지! 씨앗에서 싹이 트고, 그 싹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숲이 되고, 숲이 산이 될 때까지 심을 거야."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눠왔다.

"율아, 용이면 좀 싹이라도 트게 해봐."

유탈라스란 이름이 길다며 율이라 줄여 부르기 시작한 윤슬.

정체를 밝혔음에도 다른 이들과 달리 윤슬은 두려워하거나 유탈라스를 멀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하다며 눈을 크게 뜬 채 이것저것 물어온 윤슬.

"내가 매일같이 도와주지 않느냐."

유탈라스가 쭈그려 앉아 호미를 집어 들었다.

용이 씨앗을 심기 위해 땅바닥에 앉다니.

누군가 들으면 거짓말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을 이야기였다.

"어허, 그대의 친구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것! 돕는 거 말고 손가락 튕기면 갑자기 씨앗이 발아한다거나 나무가 된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윤슬이 생글생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윤슬은 항상 유탈라스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항상 같은 시간에 나와 씨앗 심기를 도와주는 유탈라스.

매일 밝은 모습으로 나와 씨앗을 심었지만, 혼자뿐이란 사실은 때때로 찾아와 윤슬을 무겁게 짓눌렀었다.

그런 윤슬에게 유탈라스는 씨앗 심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런 능력은 없다, 난 신이 아니니까."

진지하게 받는 유탈라스를 윤슬이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지상에서 승천을 기다리고 있는 청룡.

"율아 이제 1년 남은 거지?"

승천을 하기 위해서 용에게 주어진 조건은 간단했다.

이무기에서 용이 된 후, 지상에서 천 년이란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간단하지만 용에게 있어서도 천 년이란 시간은 기나긴 시간이었고, 모든 지상의 용들은 하루빨리 천 년이 가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윤슬의 질문에 유탈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야 하는 천 년 중 유탈라스에게 남은 건 고작 1년.

1년 뒤면 유탈라스는 하늘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승천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보통 사람은 하늘로 간다고 하면 죽었다는 의미거든."

"그건 나도 알지 못한다. 그저 들은 이야기가 몇 가지 있을 뿐이지."

호미질을 멈춘 유탈라스가 하늘을 바라봤다.

맑아도 너무 맑아 비 한 방울조차 내리지 않는 마른하늘.

"지금은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위해 일한다고 들었다."

"우와…. 사람들이 말하는 신… 그런 건가?"

신이란 단어에 잠시 고민하던 유탈라스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윤슬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유탈라스를 응시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년.

유털라스와 함께 하며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면, 1년이란 시간은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율이는 빨리 지나가길 바라고 있겠지.'

당연할 거라 생각했다.

천 년이다.

백 년도 아닌 천 년.

백 년조차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선 쉽게 이해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길고 긴 시간이었다. 

그런 긴 시간을 기다려온 유탈라스.

1년 남은 승천이 얼마나 기다려지겠는가.

'남은 시간이 천천히 가기를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겠지.'

윤슬은 유탈라스와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무뚝뚝하지만 유탈라스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인간과는 존재 자체가 다른 유탈라스.

윤슬은 궁금했다.

과연 유탈라스에게 있어 자신은 어떤 존재인 걸까.

"율아, 승천해도 나 잊어버리면 안 돼. 알겠지?"

윤슬의 질문에 유탈라스가 고개를 돌렸다.

윤슬이 커다랗고 맑은 갈색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난 모든 걸 기억한다."

유탈라스가 윤슬의 눈을 바라보며 따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 너 또한 잊지 않을 것이다."

* * *

오늘은 메마른 고지에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유탈라스와 윤슬, 그리고 윤슬의 갓난 동생까지.

"귀엽지?"

유탈라스가 곤히 자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작은 존재라니.

"너무 작구나."

"율이 너도 어렸을 땐 이렇게 작았을걸?"

윤슬의 말에 기억을 되살려보지만, 성체가 되기 전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단계 나아갈 때마다 다른 존재가 되며 이전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용.

- 모든 걸 기억한다.

윤슬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었다.

승천하는 순간 윤슬과 지내왔던 시간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오늘은 씨앗을 심지 않는 건가?"

"응! 오늘만이야 오늘만!"

오늘만 쉬는 것임을 강조하며 윤슬이 안고 있는 동생에게 눈을 돌렸다.

동생을 바라보는 윤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윤슬이 포기하지 않는 이유였다.

동생을 위해서.

윤슬은 동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메마르고 메말라 생명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땅이 아닌, 아주 작지만 새로운 생명이 생겨날 수도 있는, 그런 땅을 말이다. 

"꼭! 보여 줄 거야."

* * *

유탈라스의 승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오늘따라 오지 않는 윤슬에 유탈라스가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박.

평소와 달리 힘없는 얼굴로 걸어온 윤슬.

윤슬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매일 같이 챙겨왔던 호미도, 소중히 봉투에 싸왔던 씨앗도.

"오늘은 안 심는 건가?"

유탈라스의 물음에 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씨앗이 다 떨어졌거든…. 여기까지야."

"…."

윤슬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진짜 보여주고 싶었는데."

윤슬의 입가로 슬픈 미소가 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있었다.

이런 황폐한 땅에 아무리 씨앗을 심어 본들 나무가 피어날 리 없다는 건 말이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해버리는 순간 아주 조금 가지고 있던 희망마저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안해, 율아. 지금까지 열심히 같이 해줬는데. 다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네."

그렇게 조금이지만 남아있던 희망.

그 희망은 씨앗이 줄어들 때마다 조금씩, 함께 줄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동이 나버린 씨앗.

어딘가에서 씨앗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윤슬의 작았던 희망은 동이 난 씨앗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이고. 하하…."

웃고 있지만 슬퍼하고 있는 윤슬.

그런 윤슬을 바라보며 유탈라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슬퍼하는 사람을 위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미안해할 필요 없다. 내가 기다려온 천 년의 시간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으니.'

말로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 * *

승천까지 일주일이 남은 시점.

며칠째 나타나지 않는 윤슬에 유탈라스가 마을로 내려왔다.

'괜찮은 건가.'

"싫다고 했잖아요! 그게 말이 돼요!?"

조심스럽게 들어간 마을에선 큰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슬아!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거 잘 알잖느냐!"

"슬아!!"

"절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윤슬은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쨍!

바닥으로 무언가를 던지는 윤슬.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칼이었다.

"전 절대 못해요! 아니, 안 해요! 율이를 죽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어요?!"

"네가 하지 않으면 마을 모두가 죽는다! 이젠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어. 우릴 도와줄 곳도 없고!"

"그렇다고 해도…."

"네 동생까지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게냐!"

"!"

마을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바닥을 보이는 식량과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까지.

그런 절망적인 마을로 한 명의 무당이 찾아왔다.

- 난 신을 모시는 사람일세. 그리고, 이 마을을 살리라는 계시를 받았지.

마을을 찾은 무당은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알려줬다.

- 용이 죽은 자리엔 생명이 돋아난다네. 그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풀이 피어나고 나무가 자라 숲을 만들고, 수많은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을 탄생시키지.

방법을 일러주는 무당에게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어디서 용을 찾을 것이며, 찾는다 한들 그런 존재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 스윽.

그런 마을 사람들의 물음에 무당은 손을 들어 윤슬을 가리켰다.

- 저 아이와 함께 해온 자, 인간이 아닐세.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용이지.

- !

윤슬이 그저 친구라 말하며 숨겨왔던 정체였다.

- 저 아이라면 죽일 수 있을 걸세. 아니. 오직 저 아이만이 용을 죽일 수 있네.

유일하게 마을을 살릴 수 있는 사람.

그게 윤슬이었기에 그 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윤슬을 어르고 달래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슬아, 내 아이야. 힘든 선택이겠지만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제발 해다오."

윤슬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붙잡았다.

"응애--! 응애--!"

뒤이어 들려오는 동생의 울음소리까지.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윤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저벅.

모든 걸 보고 들은 용, 유탈라스가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 * *

승천까지 남은 시간은 3일.

"안녕, 율아."

오랜만에 윤슬이 찾아왔다.

"오랜만이구나."

"헤헤, 미안, 좀 아팠어서."

둘러대는 윤슬에 유탈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둘 사이에 없던 정적이 찾아온 후.

유탈라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3일 뒤면 난 떠난다. 그 전에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다."

"말해주고 싶은 거라니?"

"널 잊지 않겠다는 말, 거짓이었다.

"응?"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하는 윤슬.

그런 윤슬에게 유탈라스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용은 진화를 겪을 때마다 그 전의 기억을 잃어버린다. 아니지, 정확히는 지워버린다."

"지워버려…?"

"당연한 것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었을 때 이전의 기억이란."

유탈라스의 얼굴에 차가운 빛이 어렸다.

"하찮은 존재였을 때 생긴 하등 쓸데없는, 가치 없는 것이니까."

"!!" 

최대한 숨기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당혹감이 윤슬의 얼굴로 묻어나왔다.

"어…."

너무 갑작스러워서였을까.

윤슬의 눈가로 눈물이 맺혔다.

"유… 율아,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눈물을 숨기려는 듯 윤슬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윽.

유탈라스가 대답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착각하지 않길 바라서였다."

"착각?" 

"너와 난 존재 자체가 다르다."

"나에게 있어 최근 몇 년의 시간들은, 용이 사는 억겁의 시간 중 아주 작고 하찮은…."

으드드득.

어째서인지는 유탈라스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저, 미칠 듯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주 잠깐의… 여흥이었을 뿐이다."

* * *

승천의 날.

지난 3일 동안 윤슬은 나타나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이 땅에 살던 나머지 9마리의 용이 승천을 마치고, 유탈라스의 차례가 돌아왔다.

저벅.

'!'

뒤에서 나타난 기척.

돌아보지 않았지만 윤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왔구나.'

승천을 준비하며 유탈라스가 입고 있던 웃옷을 벗었다.

그러면서 드러난 등 뒤의 붉은 반점.

역린.

용의 거꾸로 난 비늘로 건드린 자는 분노한 용에 의해 무조건 살해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약점.'

용이 분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용이란 절대적인 존재를 한순간에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급소였기 때문.

- 우와. 절대 건드리면 안 되겠네.

윤슬도 알고 있었다.

역린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벅.

천천히 다가오는 윤슬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 어떤 착한 인간이라도, 선택을 하게 된다.

자신과 소중한 이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말이다.

윤슬에게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다.

어차피 모든 걸 잊을 용을 죽여 소중한 동생과 마을 사람들을 살리는 것.

인간이라면 당연한 선택지였다.

'이상하군.'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유탈라스가 하늘을 바라봤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온 승천의 순간인데.

난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피식.

유탈라스의 입가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차피 머리로 생각해 본들 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머리로 생각해 결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척.

바로 뒤까지 다가온 윤슬.

윤슬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너를…. 이해한다.'

26화. 선택

꺼내든 걸 든 채 윤슬이 손을 내밀었다.

쿠욱.

등 뒤로 찔러져 오는 무언가.

'?'

예상과 다른 감각에 유탈라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윤슬의 마음을 약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써 돌아보지 않고 있던 상태였다.

'!'

윤슬의 손에 들려있는 건 칼이 아니었다.

급하게 깎아 만든 것 같은 나무 조각상.

서툰 솜씨로 깎여 울퉁불퉁했지만, 조각상이 뭘 나타내고 있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유탈라스와 윤슬.

"뭐 하는 짓이냐."

"어허, 기껏 만들어서 가져왔는데 뭐 하는 짓이냐니. 선물이야."

유탈라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승천 직전임에도 역린을 찾기 쉽도록 기껏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선물이라니?

"천 년을 기다려온 승천, 축하해."

윤슬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진심으로 승천을 축하하는 얼굴.

평소와 같은 맑은 미소였다.

유탈라스가 가장 좋아하는, 가장 보고 싶어했던, 그런 미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잠시 후면 난 너를 잊는다. 이런 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상관없어."

"뭐?"

"율이 너한테는 아주 잠깐의 여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다.'

"아주 작고 작은… 하찮은 시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다.'

"매일 혼자 황무지에 버려져 있던 나에겐 정말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어."

싱긋.

'나에게도 정말 소중하고 행복한….'

"율아, 네가 잊더라도…. 내가 기억할게. 그건 내 자유잖아."

"난…."

우우우우!

시간이 되어서일까.

하늘이 유탈라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때가 됐으니 데려가겠다는 하늘의 뜻이었다.

으득.

그런 하늘의 힘에 마음을 다 잡은 유탈라스.

유탈라스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마을을. 동생을! 포기할 셈이냐!"

"!!"

만난 이후 처음으로 소리를 지른 유탈라스.

그런 유탈라스의 고함 섞인 말에 윤슬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어갔다.

"알고… 있었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우우우우웅!!

하늘의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현명한 선택을 해라! 윤슬!!"

다급해하는 유탈라스와 달리, 윤슬의 얼굴로 다행이라는 미소가 어렸다.

'그래서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던 거구나.'

선택.

윤슬 역시 알고 있었다.

너무 소중해 만지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작은 동생, 오랜 시간 부족함 없이 사랑을 준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까지.

그리고,

이제 곧 영원히 떠나갈, 함께 했던 기억 따윈 금세 잊어버릴 매정한 용.

머리에선 당연히 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윤슬이 고개를 들어 다급해하는 유탈라스를 바라봤다.

"천 년을 기다린 용, 율아. 그러는 넌. 현명한 선택을 했니?"

"!"

유탈라스의 말문이 막히고, 그런 유탈라스를 보며 윤슬이 시원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둘 다 바보네."

우우우우웅!

더 강력해진 하늘의 힘이 유탈라스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안녕, 내 친구야."

'안….'

마지막 인사를 하는 윤슬을 뒤로하고, 하늘로 떠오른 유탈라스의 몸이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 * *

'안돼.'

완전히 청룡의 모습으로 변한 유탈라스.

멀어져 가는 윤슬을 보며 유탈라스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멈추어라, 빌어먹을 하늘아!"

황폐화된 환경의 마을에 미래 따윈 없었기에, 이대로 승천해버리면 윤슬은 죽는다.

그리고, 원망받을 것이다.

가족과 마을을 버리고 한낱 용 따위를 택한 대가를 받을 것이다.

그렇게 윤슬은 원망받으며 비참하게 죽어 갈 것이다!

"멈춰라아아아!!"

온 힘을 다해 하늘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우웅.

잠시지만 멈춰진 몸.

유탈라스가 아래에 있는 윤슬을 바라봤다.

'살린다.'

머리가 시키는 선택이 아닌, 마음이 가리키는 선택을 한다.

'살려야 한다.'

선택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 둘 다 바보네.

'바보라….'

스윽.

유탈라스가 역린이 있는 턱 아래로 발톱을 가져갔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 년을 기다렸는데 이런 선택을 하다니.

"!!"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슬.

이상한 낌새에 무언가를 눈치챈 윤슬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마!! 율아!!"

푸우욱.

"하지마!! 안돼에에!!"

절규에 찬 윤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쩌적.

관통된 역린을 시작으로 유탈라스의 몸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우…우….

점점 약해지기 시작한 하늘의 힘.

승천의 자격을 잃은 유탈라스를 하늘이 포기한 것이었다.

스아아아아!!

힘을 잃은 유탈라스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런 유탈라스를 보며 소리 지르고 있는 윤슬.

'살거라.'

죽음을 직감하며 유탈라스가 눈을 감았다.

'내 친구여.'

* * *

"여기까지가 나의 이야기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려준 유탈라스.

이야기는 끝났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선택한 거였구나.

친구를 위해서.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나도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지은 듯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옛날이야기니까."

천 년.

백 년도 아니고 천 년이다.

천 년을 애타게 기다려놓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니.

"바보 같은 선택이라 생각하느냐?"

질문을 건넨 유탈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자문자답을 마친 유탈라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염치없지만 하나만 더 물어보마."

유탈라스의 얼굴로 호기심이 어렸다.

"내가 죽은 자리엔 생명이 생겨났느냐?"

생겨났죠.

작은 풀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산들과 강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자. 그럼 지금까지 케케묵은 이야기를 듣느라 고생 많았다. 이젠, 내가 무언가를 줄 차례구나."

유탈라스가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사아아아!

들어 올린 유탈라스의 팔로 모여드는 청색의 용 비늘.

"나를 천 년 동안 지켜온, 그 무엇에도 뚫리거나 부서지지 않는 나의 비늘이다."

팔을 옮겨 내 머리에 손을 올리는 유탈라스.

"내 모든 힘이 담겨 있는 보물. 너에게 주마."

청명한 색의 비늘이 내 몸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항상 후회 없는 선택을 하거라."

서서히 빛의 입자로 흩어지는 유탈라스.

유탈라스의 입가로 시원한 미소가 어렸다.

"나 또한 내가 한 선택에 있어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

* * *

물이 가득 차 있는 구룡산의 공간.

공간 속엔 더 이상 용의 뼈도, 뼈를 감싸고 있던 푸른 비늘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무기고 공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무수히 많은 용의 비늘들.

마치 생명을 가지고 있는 듯한 영롱한 청색의 비늘이 공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엄청나구만.

용이 실재한다는 걸 본 것도 모자라 용의 비늘까지 얻다니.

면도칼과 리볼버까지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무기의 범주였다.

하지만, 용의 비늘은 예상외였다.

무기고의 범위는 대체 어디까지일까.

새삼스레 카이안의 능력에 한계란 게 있긴 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공간 자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무기들.

까마득하구만.

카이안의 발끝에라도 따라가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스윽.

고개를 내려 산소통의 수치를 체크했다.

마지막 데몬 거북의 공격으로 하나 남아있던 산소통마저 잃어버린 상태.

지금 입에 물고 있는 게 마지막 산소였다.

딸깍.

제트모터를 다시 가동 시키고 아래로 방향을 틀었다.

돌아갈 때다.

* * *

얼마나 왔을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물길의 출구가 보였다.

물길의 출구이자 다시 옹달샘의 범위로 들어가는 입구.

망설임 없이 입구를 통과해 위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남은 산소는 기껏해야 10분.

조금이라도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꿀렁.

이 거북이 새끼 왜 안 나오나 했다.

저 멀리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 용을 보고 와서인지 왠지 모르게 귀여워 보이는 크기.

머릿속으로 저놈에게 휘둘렸던 장면이 떠올랐다.

구룡산 옹달샘에 들어와 겨우 거북이 한 마리에게 목숨까지 위협받았던 순간.

간신히 물길로 몸을 숨겨 위험에서 벗어났음에도, 속에서부터 끓어 올랐던 분한 마음 까지.

부우우우우우!!

날 발견한 건지 거북이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흠.

상황만 놓고 보면 무척이나 절망스러웠다.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는 쿨타임에 걸려 있어 꺼낼 수 없었고, 면도칼은 꺼낸다 한들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는 상황.

돌격해오는 거북이를 피해낼 산소통도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다.

잠시 후면 저 거대한 데몬이 내게 부딪혀 뼈를 부셔놓을 텐데도 말이다.

후우.

오히려 거북이를 대면하고 있는 마음은 절망보단 평온에 가까웠다.

죽기 전엔 평화가 찾아온다고 하던데.

그래서일까?

아니면.

꽈악.

죽지 않을 거란 확신 때문일까.

수우우우웅!

서서히 거북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조차 뚫지 못했던 단단한 등딱지.

그런 등딱지가 머리를 제외한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머리를 노린다 해도 숨어버리겠지.

리볼버의 탄환을 피할 정도로 녀석이 머리를 숨기는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노린다 해서 맞출 수 있는 부위가 아닌 것.

원래라면 이미 내게 도달하고도 남았을 거 같은데.

이상하게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것 같았다.

휙.

날 이끌던 제트모터를 옆으로 던진 후, 기다리기 시작했다.

내가 올라가는 걸 막는 거북이 새끼.

부우우우우!!!

엄청난 속도로 코앞까지 다가온 거북이.

꼭 내가 가는 길을 막아야겠다면.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처 부숴주마.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물에 반사된 용의 비늘이 오른팔로 모여갔다.

손가락 끝부터 어깨 위까지 빠짐없이 감싸지는 비늘.

오른팔로 지금까지 없었던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확신이 들었다.

이 오른팔에 부딪히는 게 뭐가 됐든, 다 박살 낼 수 있다는 확신.

드루와라, 거북아.

다가온 거북이를 향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용 발톱]

콰아아아앙!!

* * *

파바바바박!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발장구를 쳤다.

우웁.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족해진 호흡.

파바박. 파악.

"푸하아아아아!!" 

간신히 도달한 옹달샘의 끝.

부족했던 산소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호흡을 했다.

엉금엉금.

지긋지긋한 옹달샘을 벗어나 뭍으로 기어 올라왔다.

풀썩.

대자로 뻗은 뒤 산속의 맑은 공기를 즐겼다.

새삼스레 느껴지는 공기의 소중함.

"하아."

드드드.

누워있는 지반으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푸화아악!!

옹달샘의 물과 함께 거대한 물체가 솟아올랐다.

산산조각 나 생명이 다한 거북이의 잔해들.

스윽.

고개를 돌려 솟아오른 잔해를 바라봤다.

씨익.

"거북이 쉨!"

27화. 형아가 쏜다

가볍게 물놀이만 해도 허기가 몰려오는 게 국룰이라고 했었는데.

그래서인가보다.

뒤지겠다.

옹달샘 속에서 개고생을 한 뒤 긴장이 풀린 시점.

미친 듯한 허기가 찾아왔다.

꼬로로로로록!!

배꼽시계가 울리는 정도가 아닌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

당장 뭐라도 안 넣어주면 난리가 날 것 같았다.

부스럭.

급하게 가방을 뒤졌지만 나오는 거라곤 뽀글이를 해 먹고 남은 쓰레기뿐이었다.

초코바도 올라오는 길에 다 먹어버린 상황.

군대 야간 행군 전날, 미리 나눠 준 초코바와 건빵을 못 참고 다 처먹은 뒤 당일 날 개고생했던 게 떠올랐다.

어떡하지.

풀이라도 뜯어 먹어야 되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두둥실.

옹달샘 위에 떠올라 있는 거북이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 위험한 상황에선 데몬도 훌륭한 단백질이랍니다!

인터넷 동영상에서 보던 데몬 먹방이 떠올랐다.

야생으로 가 닥치는 대로 데몬을 사냥해 구워 먹던 먹부림 헌터.

생각해 보니까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됐잖아.

과학지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났다.

데몬의 종류에 따라 못 먹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비슷한 과의 동물과 다를 것 없기에 먹어도 무방하단 실험이었다.

꼴깍.

한참 물에서 고생을 하다 나와 젖어 있는 몸.

몸으로 불어오는 산 바람에 체온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으슬으슬한 듯한 느낌이 바로 그 증거.

지금 상태에서 거북이 고기가 우려낸 뜨끈한 육수 한 입을 먹는다면?

천국이다.

옹달샘으로 입수 전에도 깨닫지 않았던가.

뽀글이 국물 한 모금에서 느껴졌던 그 행복감.

거북이탕이라면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을 터였다.

스윽.

마침, 혹시 몰라 챙겨왔던 버너도 있다.

완벽하다.

사사삭!

빠르게 흙을 파고 그 안으로 버너를 넣었다.

그리고 불의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버너 위에 냄비를 올렸다.

거북이탕 답게 등껍질을 냄비 대신 쓰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탄 사례를 받으면서도 안 깨졌던 껍데기다 보니 두께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산산조각이 나있지만 말이다.

서걱. 서걱.

옹달샘으로 가 거북이 고기를 먹기 좋게 썰고, 탕을 끓일 샘물을 떠왔다.

샘물이 1급수를 넘어 0급수 수준이란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사실.

의구심이 드는군.

버너를 켜서 끓이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아무 조미료도 없이 들어간 거라곤 거북이 고기와 샘물이 끝.

과연 사람이 먹을 만한 게 나올 것인가.

보글보글보글.

어느새 팔팔 끓기 시작한 거북이탕.

고기로서의 제 역할은 하는지 뽀얀 육수가 잘 만들어지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뻗어 고기 약간과 국물을 떠올렸다.

제발!

후릅.

홀리…!

* * *

[잭 더 리퍼]

서걱! 서걱! 서걱!

데몬들을 빠르게 베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힘이 불끈불끈 솟는 구만!

대짜리 냄비 하나를 게 눈 감추듯 삭제 시켜버렸다.

그래서인지 온몸에 거북이탕의 뜨끈함이 가득 퍼져 있었다.

오, 면도칼 꺼낸 채로 왔더니 금방 왔네.

올라갈 때와는 달리 짐도 많이 줄어든 상태.

거기다 면도칼로 인해 속도까지 향상되니 순식간에 구룡산의 입구가 보이고 있었다.

사아아.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면도칼을 해제했다.

"키리리릭!"

!!

우연인지 노린 건지 모르겠지만 면도칼의 해제 순간을 노리고 달려드는 데몬 한 마리.

다 왔다고 생각해서 면도칼을 해제했는데 큰일이었다.

라고 하는 건 오늘 낮까지의 나였다.

[잭 더 리퍼]

푸확!

다시 꺼내든 면도칼로 데몬의 혈관을 끊은 후 가볍게 입구로 착지했다.

씨익.

손에 들려있는 면도칼을 바라봤다.

무기들 중에서는 가장 짧은 쿨타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한 시간 이상이라 항상 아껴가며 꼭 필요한 때에만 꺼내왔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무기고로 유탈라스의 비늘이 추가된 이후.

잭 더 리퍼의 면도칼엔 더 이상 쿨타임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앞으론 꺼내고 싶을 때 마음껏 꺼낼 수 있게 된 것.

든든하구만!

쿨타임이 약간이라도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건 천지 차이였다.

이전보다 계획을 세우고 싸우는 데 있어 훨씬 여유와 안정감이 생기게 되었다.

거기다 구룡산에서 새로 얻게 된 유탈라스의 비늘.

처음엔 의아했었다.

이게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굳이 따지자면 방어구로 분류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의문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 콰아아아아앙!!

유탈라스의 비늘이 감긴 오른 주먹과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던 거북이가 맞닿은 순간.

거북이가 등껍질을 앞세워 그렇게 빨리 돌진해 왔음에도 내 주먹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나의 오른손엔 용의 비늘에 의한 엄청난 단단함과 인간으로서 낼 수 없는 엄청난 괴력까지 더해져 있었다.

- 퍼엉!

물론, 거북이를 박살 내기 무섭게 비늘은 해제됐지만 말이다.

위력이 강한 만큼 짧은 사용 시간.

앞으로 어떤 무기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무기에 적용될 듯한 법칙이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다.

내가 사용했던 건 1단계 의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용의 힘이 그 정도일 리가 없었다.

아직 자격이 없다는 거겠지.

분명 훨씬 더 강한 힘이 깃들어 있음에도 내가 사용하진 못하는 상태.

사용하려면 그에 맞는 자격을 갖추고 오라는 무기고의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꽈악.

아직까지 남아있는 거북이 분쇄의 손맛.

싱긋.

나도 모르는 사이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 멀었지만, 나아가고 있었다.

멈춤은… 없다.

* * *

어째서일까?

분명 멈춤은 없을 터인데.

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을 텐데.

"맥반석 계란 다섯 개랑 뚱바 두 개요."

"뚱… 뭐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저기 바나나 우유요. 통통한 거."

"아아, 7000원입니다."

삑.

계란과 바나나 우유 두 개를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왜지?

어째서 내 잠자리는 발전하긴커녕 더 후퇴한단 말인가.

호텔에서 찜질방이라니.

뭐, 어제까지 호텔에서 잔 거야 특수 케이스로 봐야 하지만 말이다.

아니야 아니야, 찜질방이 뭐 어때서.

앞에 놓인 만족스러운 야식을 바라봤다.

갈색빛을 띠며 맥반석에 잘 구워진 계란과 시원한 뚱땡이 바나나 우유까지.

빠른 손놀림으로 계란을 까 입으로 집어넣었다.

으음!

그나저나 배에 거지가 든 걸까.

조금 전에 거북이탕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는데 또 계란을 집어넣고 있다니.

아닌가?

어쩌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찜질방에 왔는데 맥반석 계란과 뚱바를 그냥 지나친다? 이게 잘못된 일일지도.

계란을 우물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꽤 큰 규모의 찜질방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나 하나뿐이다.

아, 맞다.

오늘 평일이지.

더군다나 이곳은 구룡산 근처의 찜질방.

주말 등산객이 주 손님일 텐데 평일에다 지금은 출입 금지까지 당했으니.

계란 더 팔아드려야겠다.

꾸욱.

- 크워어어!

액션 캠에 녹화된 영상을 재생시켰다.

옹달샘으로 올라갈 때와 다시 내려올 때 데몬을 잡았던 영상.

으음. 지워야겠지?

적지 않은 숫자를 잡아서 아깝긴 했지만.

대놓고 진입 금지 명령이 내려진 산으로 들어간 거니 당당히 제출하기가 찜찜했다.

난 10급이긴 하지만 어쨌든 공무원이니까.

문제 될 짓은 하지 말아야지.

끄덕.

현명한 선택을 지지하며 삭제 버튼을 눌렀다.

옹달샘으로는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었기에 거북이에 대한 기록은 되어있지 않은 상태.

그래서인지 삭제해야 하는 아쉬움은 훨씬 덜 했다.

그런데 그 거북이 뭐였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구룡산에 그딴 새끼가 있다니.

웬만한 데몬은 도감을 통해 다 봤었는데.

옹달샘에서 마주쳤던 건 처음 본 녀석이었다.

수륙 거북이가 아니라서 옹달샘 위로 기어 올라오기라도 했다면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났겠어.

크럭커가 B등급인 걸 감안했을 때 거북이는 최소 A는 될 것 같았다.

등딱지 때문에 화기가 먹히질 않았을 테니 웬만해선 상대가 안되는 것도 당연한 일.

뭐, 그분이 오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1급 헌터, 기태랑.

거북이 등딱지가 아무리 단단해도 다이아몬드보단 약할 테니 쉽게 처리했을 것 같았다.

나도 다음에 만나면 싸인해달라고 해야지.

헌터 지사에서 만났던 김민희의 반응을 보니 기태랑의 인기는 엄청난 것 같았다.

싸인이라도 받아 놓으면 나중에 요긴한 협상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을 듯….

짝!

계산적인 인간이 다 됐어, 이거.

스스로의 세속적임에 고개를 내젓는 사이.

짤랑.

찜질방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왔다.

"마지막에 궁 오졌지? 나 때문에 이긴 거야."

"무슨 개소리야, 내 이니쉬가 지렸지. 그거 아니었으면 졌음, 인정?"

왜 이런 산 근처 찜질방에, 그것도 다음날 학교 가야 하는 중학생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섯 명은 시끌시끌한 목소리를 뽐내며 찜질방 안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아, 이 새끼가 학교 얘기만 안 했어도 계속했을 텐데."

"그니까, 그 아저씨 우리 민짜인 거 아예 몰랐는데."

짐작해본 건데 청소년임을 숨기고 게임하던 PC방에서 쫓겨난 듯 했다.

좋을 때 구먼.

오래된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니 흐뭇한 표정이 지어졌다.

나도 왼손의 흑염룡이 깃들었던, 엄청난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었다.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며 허구헌날 치고 박고 싸우….

뻥.

…?

데굴데굴.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는 찰나, 조금 전까지 내 앞에 있던 뚱바가 저 멀리로 굴러가고 있었다.

"앗 죄송."

조금 전 들어온 중학생들이 장난치다 모르고 차버린 모양.

장난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다시 제대로 갖다 주기만 하면.

"형, 받으세요."

툭!

데구르르.

저 멀리 간 뚱바로 달려가더니 다시 발로 차버리는 중학생 B.

"이리에스타급 패스네."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욕탕으로 향하는 녀석들.

이리저리 차인 채 처량하게 놓여 있는 뚱바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뚱바를 괴롭히는 건 못 참지.

오랜만에 왼손의 흑염룡이 살아나는 기분이다.

스윽.

"거기 중딩들."

"…?"

뭐냐는 듯 동시에 내 쪽을 바라보는 다섯 명의 중학생들.

"일루 와바."

* * *

오독.

이 사이로 이물감이 느껴졌다.

"똑바로 안 깔래?"

"죄… 죄송합니다."

"야. 똑바로 까."

옆에 있는 친구를 격려하는 중학생 B.

- 그러다 다칩니다. 얘가 강동구 돌주먹이에요.

돌주먹이라던 녀석은 사실 돌 손톱이었다.

오른쪽 엄지 손톱이 돌인 능력.

그래서인지,

"너는 잘 깐다."

"가… 감사합니다!"

칭찬에 신이 났는지 중학생 C가 더 열심히 계란을 까기 시작했다.

스윽.

조용히 계란을 까던 중학생 D가 친구를 돌아봤다.

"이거 무기왕이었으면 면도칼로 껍떼기 남은 거 하나 없이 벌써 다 깠다, 인정?"

"인정이지." 

"킹정이지, 다 까고도 백 개 더 깠지."

?

"뭐라고?"

잠시 흠칫 놀라던 녀석들 중 하나가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줬다.

"형, 무기왕 모르세요? 요새 완전 인기 터지는 헌터인데."

얼떨떨한 기분으로 동영상을 시청했다.

# 아가리 벌려라.

# 탄 들어간다.

"크으… 뒤진다."

"나 저 부분 백 번은 돌려본 듯."

"지렸다. 빨리 욕탕 들어가야 됨."

뭐야 이거.

심장박동 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동영상 밑에 달린 수천 개의 댓글.

그리고 그 옆에 믿기 힘든 숫자가 적혀있는 조회수까지.

조… 조회수 41만?

조회수와 응원의 댓글들을 보고 있자니,

- 영상에는 후원금 제도가 존재하는데, 세금을 제하고는 모두 영상을 제공해주신 헌터에게 돌아갑니다.

10급 헌터 등록 때 만났던 접수관의 설명이 떠올랐다.

호다닥!

거의 날다시피해 카운터로 달려갔다.

"뭐… 뭐시여!"

갑자기 날아들자 당황한 주인 아주머니.

"자… 잔액 조회 좀 할게요!"

"난 또 뭐라고! 깜짝 놀랐네."

가슴을 쓸어내린 아주머니가 기계를 건넸다.

삐빅.

두근두근.

조회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후원금이 꼭 있으리란 법은 없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삑.

허..

잔액: 32,000,000.

하마터면 입에 있던 계란이 튀어나올 뻔 했다.

크럭커 처치 보수로 받은 게 천 만.

거기서 옹달샘 가느라 이것저것 쓴 게 사 백.

2천이 넘게 후원금이 들어왔어?

"총각, 괜찮아?"

걱정스러운 듯 질문을 건네는 아주머니와,

"저 형 왜 저래?"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잘못 걸려도 제대로 잘못 걸렸다며 좌절하는 중학생 5인방까지.

후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주인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아주머니."

"이잉?"

"여기 계란이랑 뚱바, 그리고 핫바까지 다 주세요."

"!?"

고개를 돌려 열심히 계란을 까준 5인방을 바라봤다.

"애들아, 와서 다 먹어."

"!?"

씨이익.

"형이 쏜다."

28화. 장점도 있어

띠리리 --

"네 전수희입니다. 찾으셨나요?"

전화를 받기 무섭게 질문을 건네는 전수희.

덤덤하게 물었지만 전수희는 간절히 빌고 있었다.

'제발 찾았다고 해!'

지금 온 전화에서마저 이전과 똑같은 답이 들려온다면.

- 백운이란 남자, 데려오세요.

망했다고 봐야 한다.

개미굴 때문에 크게 깨진 뒤 아직 만회하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 죄송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죄송하다는 사과가 들려왔다.

'망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죄송하다니.

"흔적이라도 없나요? 사람이면 뭐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카드 사용 내역이라던가, 아니면 주소지라던가"

# 그게… 없습니다. 주소지도 없고 어디를 갔다고 특정할만한 정보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최근 결제 발생은 있는 거 같습니다만….

"안 내어주겠죠."

국가와 대산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맞지만, 소속원의 개인정보 만큼은 예외 사항이었다.

겉으로는 뉴스에 나와 악수를 하고 하하호호 만찬을 즐기지만 뒤에선 조직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빼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헌터니까.'

인재 중에서도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계열, 헌터.

좋은 능력을 가진 헌터의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못해도 가진 능력만큼은 조직에 도움이 되었고, 더 나아가 플러스 알파가 있다면 도움을 넘어 조직의 이미지와 성장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장님이 데려오라고 한 거 보면 영입하려고 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최리아의 머릿속을 다 헤아리겠냐만은.

저렇게 직접 데려오라 말한 거 보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마음엔 안 들더라도 대산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

'하긴 지금 조회수 터진 거만 해도 충분히 쓸만한 가치가 있지.' 

쿵.

'그러면 뭐하냐고. 내가 못 찾는데.'

전수희가 책상으로 머리를 박아 넣었다.

'난 무쓸모야.'

절망스러웠다.

최단 시간에 찾아서 실장 최리아에게 조금이라도 이쁨을 받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인간이 연기도 아니고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산단 말인가.

'이름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건가.'

물론 다른 기업보다 앞서 나가는 점은 있었다.

개미굴로 같이 향했던 대산 직원, 이대현과 전국현.

두 사람이 백운의 이름을 들어놨기에 그나마 헌터 무기왕이 백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벌떡!

'포기하지 말자 전수희!'

포기하기엔 최리아에게 혼나는 게 너무 무서웠다.

촤락.

전화번호부에서 연락처를 검색했다.

이대현과 전국현.

전국현은 모르겠지만 이대현이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개미굴에서 그런 개고생을 했으니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딸칵.

# 네, 대산 대외협력 1팀입니다.

"헌터 이대현 님 바꿔주세요!"

* * *

후룹.

"조오타."

바쁘게 오가는 직장인들을 보며 마시는 따듯한 커피 한 모금.

한껏 여유까지 추가되니 커피가 한층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3000만원.

흐뭇.

찜질방에서 잔액을 확인한 이후 계속해서 마음이 풍요로웠다.

뭐랄까.

인생에 한층 여유가 생긴 느낌이랄까.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 돼.

돈이 없을 때는 뭔가 살 때마다 가격표를 확인하고, 이 돈이면 아끼면서 며칠을 더 살 수 있는데 라고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사주는 행위 역시 불가능.

하지만, 오늘 새벽은 달랐다.

- 형이 쏜다.

껄렁하긴 하지만 놓고 보니 착했던 중학생 오인방.

녀석들의 건강을 위해 고단백 식품인 맥반석 계란과 핫바를 잔뜩 사주고 왔다.

- 혀… 형님!

형에서 형님으로 호칭이 바뀌는 마술.

이런 맛에 누구를 사주는 건가 싶었다.

덕문 어르신한테 50만원도 드렸고.

줄 돈도 다 줬기에 더 나갈 돈도 없었다.

원래는 스킨 스쿠버 가게로 가서 엄한 화기를 판 것에 대한 피해 청구라도 할까 했었는데.

됐어, 뭐더러 그래. 놔둬!

금융 치료를 받으며 한껏 유해진 내 마음이 발걸음을 막아 세웠다.

어딘가 다친 것도 아니었고 원하던 무기까지 얻어 왔으니 해피엔딩 아니던가.

집도 구하긴 해야 되는데.

언제까지 찜질방 신세를 질 순 없었다.

무릇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의식주 정도는 필요한 법.

굳이 서울일 필요는 없으니까.

무기가 서울에 몰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10급 헌터를 유지하려면 어딘가로 출근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데몬이야 어느 지역에든 다 있었으니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

굳이 집값이 하늘을 찌르는 서울에 방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너 이거 봤어?"

"뭔데 뭔데?"

"이거 한튜브에서 조회수 터진 무기왕!"

구룡산에 박혀 있느라 몰랐었다.

별 생각 없이 제출했던 동영상이 이렇게 핫해져 있을 줄은.

의식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잊을만하면 계속 무기왕이란 단어가 들려오고 있었다.

묘하구만.

내가 겪은 상황을 누군가 보면서 재밌어하고 있다니.

뭔가 몸이 간질간질 해지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후원금 명목으로 목돈까지 들어오니 일석이조.

흐음.

물론, 이게 마냥 잘된 일인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굳이 본명을 숨긴 채 닉네임을 사용하며 동영상에서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했던 이유.

혹시나 동영상이 퍼져 너무 많은 이들이 내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될까 걱정해서였다.

스타가 될 수도 있지만 공인은 그만큼 언행을 조심해야 하니까.

남의 눈을 의식하며 무언가를 조심하며 살 생각이 없었고, 살아야 한다고 해서 잘할 자신도 없었다.

무기를 구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욕 먹을 짓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면 당사자한테만 욕 먹으면 될 걸 사방에서 우수수 들어 먹어야 했다.

지금 가장 잘 알려진 건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

적색과 청색이 하늘로 뻗어나가다 보니 못 알아보는 게 불가능한 이펙트였다.

얼굴과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리볼버를 사용하는 순간 나를 무기왕으로 특정할 것이다.

끼익.

뭐.

복잡한 생각을 덜어내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정 안되겠으면 잠시 어디 산골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잠수 타다 오면 되는 거니까.

욕 먹을 짓을 안 하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함에 있어 욕 좀 먹는 게 두려워 망설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는 게 꼭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니야.

예상하고 터뜨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널리널리 퍼지게 된 무기왕이란 이름.

불리한 상황만 생각해서 그렇지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배… 백운 님?"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대현 님?"

개미굴에서 함께 했던 대산의 헌터 이대현.

이대현의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찹쌀떡…?

작은 키에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 허리까지 땋아 내린 갈색 머리.

햇빛을 거의 안 보다시피 한 건지 찹쌀떡마냥 허여멀건한 피부를 가진 여자.

여자는 어째서인지 손을 바들바들 떨어대고 있었다.

"배… 백운…! 찾았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현재의 장소와 여자가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을 보고 상황을 추측해볼 뿐이었다.

씨익.

무기왕이란 닉네임이 퍼지며 생길 수 있는 장점.

아마도 지금일 것 같다.

바들바들 떠는 전수희를 보며 몇 시간 전 찜질방을 떠올렸다.

* * *

찜질방을 나서기 전.

드륵.

찜질방에 있던 컴퓨터로 정리해뒀던 파일을 열어보았다.

헌터 테스트를 보러 갔다가 우연치 않게 발견하게 된 유탈라스의 비늘.

비늘을 무기고에 넣었으니 원래 계획했던 루트를 다시 진행할 때였다.

딸깍.

정리해뒀던 리스트 중 한 파일을 클릭했다.

헌터 테스트를 마친 후 찾으려고 했었던 무기.

비전 수리검.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무기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찾아볼 가치가 있는 무기였다.

수리검이 발견된 건 현 시점부터 약 2년이 흐른 뒤였다.

발견 장소나 과정 자체는 공개된 적이 없기에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길 가다 발견하거나 그런 케이스는 아닌 듯 했다.

2년 전부터 수리검에 대한 소식을 은근슬쩍 흘렸어.

경쟁자를 대비해 자신들이 뭘 찾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하진 않았지만, 이제 곧 어떠한 탐사가 결실을 맺을 것이며 기대해도 좋다는 말 등을 수차례 공표해 왔었다.

아마도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모은 뒤 사람들의 기대감을 위해 조금씩 흘렸던 것일 터.

타다닥.

검색창에 비전 수리검을 검색했다.

검색 건수: 0

0건이라니.

깨끗해도 너무 깨끗했다.

비전 수리검이 발견된 후 봇물 터지듯 올라오기 시작했던 관련 정보들.

당시 정보들의 내용과 양을 봤을 때 지금 시점에 이렇게 깨끗한 건 말이 안됐다.

관리하고 있는 건가.

비전 수리검을 찾고 있는 주체.

그리고 곧 찾을 주체.

그 주체가 비전 수리검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열심히 비전 수리검을 찾고 있을 그곳으로 접근해 정보를 얻어야 했다.

정확히는, 그들이 가지고 있을 실마리를 알아내야 했다.

비전 수리검이 황금색 빛을 띠는 무기라면 분명 실마리는 보라색 빛을 띠고 있을 터.

운이 좋으면 바로 황금색일 수도 있고.

그나저나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까.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서 비전 수리검 좀 보여주실래요?

하면 바로 어딘가로 잡혀가서 죽거나 미친놈 취급을 당할 테니.

자연스러운 접근법을 찾아야 했다.

톡. 톡.

손가락을 두드리며 모니터에 떠 있는 어제 자 기사의 부제를 응시했다.

# 유서 깊은 보물을 찾고 있는 기업! 뭔진 알려줄 수 없지만 거의 다 찾았다!

기업.

대산.

* * *

그래서였다.

대산의 본사 앞에 있는 카페를 찾은 이유는.

대산을 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의심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리고, 

들어봐야 명확해지겠지만.

앞에 있는 전수희의 반응으로 보아 의도치 않게 유명해진 동영상이 내게 길을 열어주려는 것 같았다.

"수희 님, 진정 좀 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이대현의 만류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전수희.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 열심히 찾은 모양이었다.

"절 찾으셨나요?"

맑고 순수하고 깨끗한,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심호흡 중인 전수희를 바라봤다.

물론 눈과 상반되게 속에선 구렁이 한 마리가 먹이를 기다리며 똬리를 틀고 있었다.

부디 내가 생각하는 게 맞기를.

"후우…!!"

심호흡을 마친 전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찾았습니다."

개미굴 영상이 뜬 후에도 가만히 있던 대산이 지금 날 찾는다는 건, 무기왕 동영상 때문일 확률이 크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스윽.

조심스럽게 몸을 내민 전수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잠시 얘기 좀 하시죠."

"…."

"무기왕 님."

콰득.

넓게 벌려진 구렁이의 입 속.

그 속으로 참새 한 마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29화. 토벌전

"무기왕 님."

난 당신이 무기왕인 걸 알고 있다!

라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전수희.

전수희의 기대에 부응해줘야겠다.

"!?"

"놀라실 필요 없어요. 저도 굳이 백운 님이 무기왕이란 걸 떠벌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당연히 없으시겠지.

대산이 날 찾고 있었던 걸 보면 다른 기업에서도 무기왕을 찾고 있을 터.

내가 무기왕이란 걸 알고 있는 대산이 굳이 우위에 있는 정보를 풀 리가 없었다.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제 사무실로 가시죠."

"알… 알겠습니다."

커피를 든 전수희가 이대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현 님, 협조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도와드리기도 전에 만나버리셨으니… 제가 한 게 없네요."

이대현과 전수희가 만난 이유는 나인 듯 했다.

전수희가 혼자 힘으로는 찾을 수 없으니 안면이 있는 이대현을 불러낸 것.

전국현 그 인간은 없네.

회사 내에서도 실속 없는 인간이란 게 알려져 있는 모양이었다.

나 같아도 똘똘한 대현 님만 부른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현 님, 나중에 또 봬요."

"네 백운 님. 또 뵐게요."

이대현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전수희를 따라나섰다.

나를 찾아서인지 발걸음이 유독 통통 튀는 전수희.

아 신난다.

신이 난 건 전수희 뿐만이 아니었다.

대산 본사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던 조금 전.

어떻게 해야 대산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중이었다.

무기왕 이름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했지만 유일하게 확률이 있는 방법이었다.

무명이었던 헌터도 동영상이 터지는 순간 기업의 스카웃 대상이 되기에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닌 셈.

아 제의 왔으면 좋겠다.

대산을 바라보며 알아서 제의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타난 전수희.

뜻밖의 행운.

평생 바란 적 없던 행운이 제 발로 걸어 와줬다.

그저 회사 쳐다보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었을 뿐인데.

자… 얼른 제의해주세요! 준비가 되었습니다!

대산으로의 침투를 시작한다.

* * *

태어나 처음 들어와 보는 대기업 본사 건물.

사람들이 왜 대기업 대기업 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전에 방문했던 헌터 지사나 등록소도 일하기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눈이 확 높아지는 느낌이다.

몇 층까지 있는 거여.

철저한 보안을 거친 뒤 탑승한 엘리베이터.

오른쪽에 나열된 숫자를 보고 입이 벌어졌다.

80층이라니.

오래전부터 있던 63빌딩조차 안 가봤었는데, 그것보다 더 높은 건물에 와볼 줄은.

보안을 위해 엘리베이터에 카드를 찍는 전수희.

전수희가 70층 버튼을 눌렀다.

"높은 곳에서 일하시네요."

자신을 대산의 홍보실 팀장이라고 소개한 전수희.

대기업 팀장 정도 되면 이런 큰 건물의 70층에서 일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 제 사무실로 가는 거 아니에요."

"…?"

슥.

전수희가 손을 들어 45층을 가리켰다.

"제 사무실은 여기고요. 70층은 저희 실장님이 근무하시는 곳이에요."

"실장님요?"

"네, 백운 님을 찾으신 게 저희 실장님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열심히 찾았던 거고요."

이건 예상외였다.

전수희만 하더라도 홍보실 팀장이라니 처음부터 제의가 제대로 오는구나 싶었는데.

홍보 실장이라니.

두근두근하구만.

두근두근하면서도 한 편으론 살짝 걱정이 됐다.

내가 원하는 건 수리검의 정보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접근인데 날 찾은 게 실장이라니.

적당한 접근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음… 아니지, 애초에 적당한 접근으론 부족했을지도.

비전 수리검에 대한 정보.

인터넷에서도 철저히 관리하고 있는 걸 보면 대산 내에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렇다면 적당한 접근이 아닌 더 깊이 관여하고 침투해야 흔적에 도달할 수도 있는 일.

띵동.

"다 왔네요, 내리시죠."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

좋은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올라가는 속도도 엄청난 것 같았다.

오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무섭게 등장하는 거대한 문.

단순한 사무실이 아니었다.

층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듯한 구조.

"홍보실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은가 보네요. 층 하나를 통째로 쓰다니."

"…?"

앞서가던 전수희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실장님 한 분만 계세요."

와우.

머릿속에 있는 대기업 실장에 대한 이미지를 좀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실의 책임을 지고 있어 한순간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강제 워커 홀릭.

동시에 남들 다 밥 먹는 순간에도 혼자 난 괜찮다며 손을 흔드는 그런 부서의 가장 역할을 생각했었는데.

아니구만.

이런 거대한 건물의 한 층이 개인 사무실이라니.

실장이라… 나도 하고 싶다.

나도 모르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후우!"

문 앞에선 전수희가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옷을 단정히 여미고 있었다.

조금도 까일 구석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행동이다.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였던 거 같은데 은근히 깐깐하나?

대기업 대산의 홍보 실장.

유물관에서도 종종 봤던 기억이 났다.

대기업에서 사회 환원 차원으로 종종 하는 유물 증정 행사.

그런 행사에는 항상 홍보 실장이란 사람이 동행했었다.

그냥 똑같은 아저씨구나.

가지고 있는 돈이나 명예는 천지 차이였지만, 행사에 나온 실장을 보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반명….

똑똑.

"들어와요."

!?

걸쭉한 아저씨 목소리가 들릴 거라 생각했었는데.

문 너머에서 들려온 건 낮게 깔린 여자 목소리였다.

개방한 능력이 목소리를 차갑게 만드는 건가 싶을 정도로 냉기가 느껴지는 음성.

전수희가 저렇게 바짝 쪼는 이유가 있었구만.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지만, 왠지 모르게 엄청 깐깐하고 사람을 쥐 잡듯이 잡을 듯 했다.

긴장해야겠어.

끼익.

문을 열기 무섭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전수희.

"실장님, 아침에 말씀하신…."

"백운 님이군요."

단번에 내 이름을 맞추는 홍보실 실장.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물관에서 봤던 오십 대 아저씨를 떠올렸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전 대산의 홍보실 실장, 최리아입니다."

자신을 실장이라 소개하는 최리아는 내 머릿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차가운 목소리에는 잘 매칭되지 않는 따듯한 에메랄드 색의 머리와 눈동자.

그리고 많이 쳐도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나이까지.

그 사이에 실장이 바뀌었었나 보네.

다녀본 적은 없지만 대기업 일수록 인사 이동이 잦다고 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수희 팀장."

"네… 넵!"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니 별로 혼날 일이 없을 텐데도 전수희는 땀을 뻘뻘 흘려대고 있었다.

많이 시달렸구먼.

"잘했어요, 내려가서 일 봐요."

"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90도로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는 전수희.

올 때도 신이 나 있었지만 최리아의 칭찬을 들은 전수희는 거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백운 님."

탁.

살짝 고개를 숙인 전수희가 문을 닫으며 퇴장했다.

….

이 넓은 층 안에 존재하는 건 실장 최리아와 나 둘 뿐.

"이쪽으로 앉으세요."

최리아가 바로 앞에 있는 의자로 날 안내했다.

"차는 어떤 걸로 드실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조금 전 커피 마시고 왔거든요."

최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를 통해 처음 느꼈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최리아가 옆에 있는 모니터를 내 쪽으로 회전시켰다.

모니터 안에서 재생되고 있는 건 역시나 무기왕으로 올린 구룡산의 동영상.

"백운 님이 무기왕이냐는 질문은 넘어가도 되겠죠?"

"하하… 네."

서랍을 연 최리아가 A4 용지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다.

빼곡히 무언가 써져 있는 것이 무언가의 지원서 혹은 계약서인 것 같았다.

"저는 백운 님이 저희 대산의 토벌전에 참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찾은 거고요."

일단 나이스고… 토벌전이라.

토벌전.

다른 세상 이야기라 크게 관심은 두지 않았었지만, 매년 특정 시즌이 되면 많은 동영상들이 올라왔기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특정 기업이 상금을 걸고 이름 있는 헌터들을 모아 경쟁시키는 것이 토벌전의 주요 내용.

얼핏 보면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로마 시대 콜로세움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데몬 토벌.

경쟁이라고 해서 헌터끼리 싸우는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방해가 있을 순 있지만 기본적으로 토벌전에서 점수를 획득하는 방식은 데몬 처치였기 때문이다.

"강원도 사북의 탄광로. 그곳에 엄청난 수의 데몬이 있습니다."

토벌전을 위해 필수적인 준비물이 있다면 많은 수의 데몬이었다.

사람들이 토벌전에 열광하기 위해선 참가한 헌터들의 멋진 활약이 필요했고, 활약을 하기 위해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통상 토벌전이 열리는 장소는 비정상적으로 데몬이 많아 던전이 형성된 곳이었다.

"이번에 대산에서는 그 탄광촌 던전을 중심으로 토벌전을 열 생각이고, 게스트로 유명한 외부 헌터 몇 분을 더 모시려는 중이거든요."

유명이라니.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 건 알았지만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단어였다.

토벌전 게스트라.

어찌 됐든 2년 뒤에 비전 수리검을 찾는 건 대산이었다.

무슨 방법을 쓰든 대산과의 커넥션을 만든 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기서 활약해서 이름값이 높아지면 날 잡아두려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충분히 무언가를 더 알아낼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당장 가장 빠른 게 2년 뒤의 비전 수리검이지, 그 이후로도 대산은 많은 유물들을 발견해나갔다.

그걸 고려해봤을 때 대산과 좋은 커넥션을 유지하는 건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터.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10급이긴 하지만 국가에 소속된 상태…."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슥.

최리아가 또 다른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이번엔 동의서였다.

언제 받아 놓은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이 데몬 처치라는 사회 공여라면 10급 헌터 백운이 타조직에 '임시' 파견을 허락한다는 헌터 중앙처의 내용.

임시라는 단어에 강하게 마크되어 있긴 하지만… 역시 대기업이구만.

그리고 최리아의 자신감 역시 엿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직 날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미리 이런 것까지 다 받아놓다니.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국엔 날 찾을 것이고, 동시에 내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상황을 확신하고 있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최리아가 여유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토벌전에는 백운이 아닌 무기왕의 이름으로 참가해주셨으면 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산이, 최리아가 원하는 건 토벌전의 흥행.

그 흥행을 위해 게스트를 데리고 왔으니 뜬금없는 백운이란 이름보단 현재 뜨거운 감자인 무기왕이란 이름을 쓰는 게 옳았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시죠."

"무기왕이 저라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어차피 필요하신 건 무기왕일 테니 어려운 부탁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싱긋.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려 보이는 최리아.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최리아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백운… 아니죠, 무기왕님."

꽈악.

"잘 부탁드립니다."

대산으로의 침투.

시작.

30화. 인사

백운이 최리아의 방을 떠난 직후.

똑똑.

"김대석입니다."

"들어오세요."

대산의 용병대 1팀 팀장, 김대석.

김대석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김대석 팀장님."

그런 김대석을 최리아가 해맑은 미소로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실장님."

"잠시 앉아 계시죠, 차 한 잔 드릴 테니."

"영광이군요, 알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후 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층을 개인 사무실로 받으며 다른 실장들보다도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최리아는 굳이 비서를 두지 않고 있었다.

개인 공간에 대한 사랑.

비서가 됐든 누가 됐든 최리아는 혼자 있는 공간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에 손님이 왔을 때 차를 내오는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탁.

각종 과자와 차들이 놓여 있는 다과실.

최리아가 수많은 차 종류 중에서도 가장 맛없고 품질이 떨어지는 찻잎을 집어 들었다.

'침 뱉고 싶네.'

김대석을 위해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불쾌했다.

실장이 더 낮은 직급인 팀장을 위해 차를 준비해야 돼서?

그런 유치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싫었다.

우선은 대산의 용병단.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용병단의 대부분이 싸움과 명예, 돈에 미친 짐승들이었다.

특히 1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저 인간, 김대석.

가장 상종하기 싫은 류의 인간이었다.

'후우.'

지난번 김대석으로 인해 물 먹었던 개미굴만 해도 아직 화가 덜 가라앉은 상태.

'도움이 안 되는 인간.'

그때의 일 한 번만이 아니었다.

기업의 이미지와 명예를 높이기 위해 발 벗고 뛰는 부서.

그것이 홍보실이었다.

'쌓으면 깎아 먹고, 쌓으면 깎아 먹고. 치우면 싸고, 치우면 싸고.'

최리아가 용병단과 김대석을 혐오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기들이 사고를 치더라도 홍보실에서 처리해줄 걸 알기에 조심하긴커녕 더 마음 놓고 활개 치고 다니는 인간들.

그 속마음과 마음가짐이 훤히 보였기에 싫어하는 것이었다.

저벅.

"이탈리아에서 직접 가져온 차입니다. 드셔보세요."

"잘 마시겠습니다."

후룹.

차를 한 모금 마신 김대석이 깜짝 놀랐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향이 정말 좋네요. 이렇게 비싼 걸 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최리아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 웃음이 터질 뻔한 위기를 넘긴 뒤, 최리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거 먼저 보시죠."

"이건…?"

최리아가 건넨 종이를 확인하는 김대석.

김대석의 눈이 커져 갔다.

"무기왕…!"

"잘 알고 계시겠죠. 개미굴에서 제대로 물 드셨으니까요."

빠득.

아픈 곳을 서슴없이 찌르는 최리아에 김대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 날 백운이란 놈한테 빼앗긴 스포트라이트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설칠 지경인데.

"그 무기왕의 지원서가 여기에 있다는 건…."

"제가 찾아서 불러왔습니다. 무기왕의 구룡산 동영상… 터진 거 알고 계시죠?"

"예, 봤습니다."

"터진 지 얼마 안 돼서 무기왕에게 쏠려 있는 관심이 엄청납니다."

최리아가 백운을 불러온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백운 정도 되는 인기의 헌터는 지천에 깔려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백운을 데려온 이유.

"용병단과 김대석 팀장님을 위해서 준비한 거니… 잘 드셔야 합니다."

전화위복.

회사 이미지를 위해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던 개미굴.

개미굴에서는 그야말로 물을 오지게 먹어버렸다.

공들인 음식을 그대로 백운의 입에 떠먹여 준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떠먹여 살을 찌운 백운을 다시 잡아먹을 수만 있다면?

기업의 이미지 회복에 더 효과적인 영양소가 될 수도 있었다.

꿀꺽.

최리아의 말을 이해한 김대석.

김대석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기회다.'

기회였다.

개미굴에서의 복수이자 가로채기 당했던 것들을 모조리 되찾아올 수 있는 기회.

최리아의 말대로 이번에 백운을 밟을 수만 있다면 조회수가 터지고 있는 구룡산 동영상은 배 아파할 대상아 아닌, 잡아먹기 전의 영양도 높은 먹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다.

'쯧.'

이미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에서부터 김대석이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단순하고 뻔한 인간.'

아마 저 인간은 구룡산 동영상을 보면서도 배만 아파했을 것이다.

그 동영상이 기회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번에도 내가 치워 주는구나.'

준비를 했으면서도 용병단과 김대석이 명성을 얻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들이 명성을 얻어야 그 뒤에 있는 대산의 이미지도 더 올라갈 텐데.

"하실 수 있겠죠?"

꽈악.

백운의 지원서를 움켜 쥔 김대석이 여유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아주 개박살 내버리겠습니다. 운만 타고 난 초짜 헌터놈, 이 세계가 만만치 않다는 걸 이번 기회에 교육해주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최리아 실장님."

자신감 넘치는 김대석의 말에 최리아의 얼굴로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도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김대석.

'고맙다면서도 끝까지 눈은 안 마주치네.'

"그나저나 팀장님이랑 눈 마주치고 대화 나눈지도 오래된 거 같은데요. 이제 절 믿어 주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하하하하!"

최리아의 말에 김대석이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김대석.

"전과가 있으시지 않습니까, 이해 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하하, 전과라… 한 번 해본 말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겁쟁이 새끼.'

'여우 같은 년.'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웃음이 오가고 있었다.

* * *

터벅. 터벅.

끝이 없는 계단을 열심히 내려갔다.

언제 다 내려가냐.

최리아의 방을 나온 뒤 엘리베이터의 진입까진 순조로웠다.

문제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려면 대산의 카드키가 필요한데, 나한텐 없다는 것.

허술하구만, 대산.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자니 저절로 혀가 차졌다.

물론 카드 좀 찍어 달라고 최리아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하하 호호하며 굽신굽신 간신히 방을 빠져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최리아를 또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쉽지 않아, 분명 더 있을 거야.

사실 토벌전의 흥행 말고도 뒤에 다른 생각들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최리아에게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과 불쾌함이 느껴졌었다. 

뭔가 있는데,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최리아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받았던 묘한 느낌.

알 수 없는 힘이 계속해서 내게 접근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냥 실장이 된 건 아닐 거야.

대산이란 대기업에서 저 자리까지 오르려면 분명 특출난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그게 일 처리 능력이나 뛰어난 두뇌 등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특출난 능력을 개방한 케이스일 가능성도 컸다.

조심해야지.

그런 기분을 몇 번 느낀 후부터는 의도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니 별일 있겠냐만은.

다음에 또 만나게 되더라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 미친 계단은 언제 끝나는 거지.

- 전수희 팀장이 앞으로 일정을 안내해드릴 거예요.

25층만 내려가면 되니 천천히 생각이나 하면서 가자 했는데.

생각보다 25층이란 높이는 더럽게 높은 듯 했다.

탁.

…?

내려가다 보니 나와 같은 신세, 아니지.

올라오고 있으니까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한 명 더 보였다.

금발이라니 외국인인가.

인위적으로 염색한 것 같지도 않은 색깔.

지금은 윗통수만 보여서 외국인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저벅.

난 내려가고 저 사람은 올라오는 상황.

"…!"

잠시 후 마주치게 되었다.

역시 외국인이었구만.

160이 안되어 보이는 키와 푸르렀던 구룡산의 옹달샘을 떠올리게 만드는 물색 눈동자.

이국적이어도 너무 이국적이게 생긴 소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날 빤히 쳐다보는 걸까?

"안… 안녕하세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싱긋.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조용히 웃어 보이는 소녀.

보기 드문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였다.

만국 공통 인사라도 건네자.

어색하게 손을 들어 흔들자,

스륵.

소녀가 천천히 격식 가득한 인사를 건네왔다.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부담스러울 정도의 인사.

"하… 하하… 떙큐, 바이."

더 이상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것 같아서 엄지를 치켜세운 뒤 속도를 올렸다.

후다닥.

또 말 걸기 전에 45층까지 전력질주다.

* * *

후다닥!

백운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후.

여전히 계단에 멈춰 서 있는 소녀.

"황금빛이 쏟아져 나오길래 와봤는데…."

싱긋.

소녀가 백운이 내려간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다르네요."

비상구로 들어온 목적을 달성한 소녀.

소녀가 옆문을 통해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 * *

"진짜 죄송해요!"

드디어 만난 전수희가 두 손을 모았다.

"제가 너무 신이 나서 그만…."

날 챙겨 갔어야 했는데 까먹고 호다닥 내려가 버린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운동도 하고 좋았어요."

계속해서 사과를 하는 전수희에 괜찮다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이…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하는 전수희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작은 소음 하나조차 없던 70층과 달리 흡사 전쟁터를 떠올리게 만드는 45층.

홍보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전화를 받으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 안된다니까요! 약속 하셨잖아요! 보도 안 하기로!"

"이번에 또 약속 어기시면 다음부터 대산 광고는 못 받을 줄 아세요!"

오우야.

이것이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나 보던 언론 탄압인가.

역시 대기업은 무서워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실장님께 연락받기로는 지내실 곳이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슥.

전수희가 황금색 카드를 건네왔다.

"바로 앞에 있는 대산 호텔 카드에요. 스위트룸이고요."

"스… 스위트룸요…?"

"원래 게스트 분들은 보통 디럭스에서 묵으시는데… 실장님이 스위트로 드리라고 해서요."

홍보 실장님 최고!

"어쨌든 이 카드를 카운터에 보여 주시면 안내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토벌전 장소로 출발은 언제인가요?"

"내일이고 대산의 차량으로 같이 이동할 거예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스트 분들도 계셔서요. 그리고…."

전수희가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토벌전에 대한 가이드에요. 매년 열리긴 하지만 장소나 시기에 따라 룰이 조금씩 달라지니 숙지 부탁드릴게요."

단순히 헌터들이 경쟁을 해 데몬을 잡는 행사… 가 내가 토벌전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기에 전수희의 말대로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자, 그럼 제가 전달 드릴 건 여기까지고요. 내일부턴 담당자들이 안내를 도와드릴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용무가 끝난 건지 전수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45층엔 안내 인원이 있으니 엘리베이터 타시면 돼요. 수고하셨습니다."

최리아와 달리 무언가를 숨기거나 하는 거 없이 솔직해 보이는 전수희.

전수희에 맞춰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토벌전 출발까지 D-1.

31화. 명령

다음 날 아침.

뽀득뽀득.

스위트룸에서 자서일까.

한층 매끈매끈해진 얼굴에 놀라며 호텔을 나섰다.

다시 한번 느껴버렸다.

좋은 걸 먹고, 좋은 곳에서 자는 것의 중요함을.

우글우글.

저건 뭐하는 사람들… 허.

호텔을 나오기 무섭게 보이는 엄청난 인파.

뭐하는 사람들인가 했더니 대산으로 벌때처럼 모인 기자들과 구경꾼들이었다.

그 사이를 뚫고 천천히 대산의 수송차로 탑승하고 있는 헌터들.

복장이 다 동일한 걸로 보아 대산 소속의 헌터들인 것 같았다.

"김대석 팀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떤 각오로 이번 토벌전에 임하시는 건가요?"

대산의 이름 있는 헌터 중 한 명인 김대석.

오늘도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김대석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일단 대산을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방송 체질인 갑네.

개미굴에서 김대석과 대산의 헌터들이 기자들을 기다리느라 진입하지 않았다고 김소연과 김희연에게 들었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척을 했지만.

괘씸한 놈들.

속으론 무척이나 괘씸해 했었다.

리볼버를 얻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개미 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지들 인기몰이 좀 해보겠다고 한참을 안 들어오다니.

"누구보다 빨리, 최적의 효율로 데몬을 처치하겠습니다. 토벌전 같은 경우에 상금이나 순위 같은 게 있긴 하지만, 저희 대산에겐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산에게 중요한 건 딱 하나, 시민들을 위협하는 데몬을 처치하는 것입니다."

저 저 저 뱀 같은 혓바닥 보소.

그런 새끼가 시민 죽어 가는데 기자 기다리느라고 안 들어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말은 저렇게 뻔뻔스럽게 하지만 물불 안 가리고 일등을 노리겠지.

"김대석 팀장님! 이번 토벌전에는 지금 핫한 무기왕도 참가한다고 들었는데요, 어디에 있나요?"

"개미굴에서는 무기왕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뺏겼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와우.

"…."

표정 관리는 잘하네.

애써 웃고 있지만 순간 말을 잃은 김대석.

누가 저렇게 멋진 질문을 했나 봤더니, 역시나.

"CBC 방송 송유빈입니다! 대답 좀 해주시죠!"

보면 볼수록 시원시원한 기자님이다.

기자님 파이팅.

잠시 입맛을 다신 김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만나본 적은 없지만, 지금 무기왕님은 무척 부담스러운 상태일 겁니다. 단 한 번의 활약에 기연이 겹치면서 그렇게 뉴스를 타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개미굴에서도 도망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 새끼 봐라.

"하지만 무기왕은 구룡산에서도 크럭커를 처치 했는데요! 그것도 우연인가요?"

"음… 크럭커는 화력만 갖춰진다면 웬만한 헌터들도 다 잡을 수 있는 데몬입니다."

"무기왕의 활약이 과대평가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김대석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무기왕님은 10급 헌터입니다. 10급 헌터가 그런 활약을 한다는 건 엄청난 거죠. 전 오히려 칭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번 토벌전에선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잡아 오던 것들과는 다를 테니까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후 차로 탑승하는 김대석.

마지막 말의 의도는 뻔했다.

무기왕이 아무리 날고 기더라도 결국 10급 헌터이며, 대단하다는 범주는 10급 헌터의 기준 내에서라는 것.

거기다 칭찬해주고 싶다는 건방진 소리까지.

완전히 깔보였구만.

이번 토벌전 참가 목적은 두 가지.

대산과의 커넥션을 만드는 것과 가능하다면 비전 수리검의 정보를 얻는 것.

하지만, 조금 전.

세 번째 목적이 생겼다.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김대석의 콧대를 박살내는 것.

기다려라, 대석아.

깐족거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기회만 된다면 확실히 갚아주리라 다짐을 마친 후.

여전히 바글거리는 기자들을 쳐다봤다.

"무기왕은 어디에 있는 거지!"

"다른 게스트 버스 아니야? 저 뒤에 찾아봐!"

어떻게 가지?

가긴 가야 하는데 지금 저곳으로 갔다간 카메라의 집중 표적이 되고 만다.

어디 샛길이….

끼이이익!

"우왁!"

두리번거리던 내 앞으로 나타난 파란색 스포츠카 한 대.

"저기로 가는 건 좀 무리죠? 타세요."

운전석엔 어제 봤던 최리아가 타 있었다.

묘한 기분 때문에 최대한 안 마주쳐야지 했었는데.

시간상으론 하루도 안 돼서 다시 마주치고 말았다.

철컥.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누가 볼 새라 호다닥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사북까지 같이 가시죠. 저도 볼일이 있으니까요."

부웅!

최리아의 스포츠카가 시원한 배기음과 함께 앞으로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