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6

219화. 여긴 어디

오?

망자의 세계에서 나와 얼마나 걸은 걸까.

하염없이 걸어도 나타나지 않던 길의 끝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반짝.

길의 끝엔 균열이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며 묘하게 일렁거리고 있는 균열이었다.

드디어…!

균열이 날 어디로 인도할지는 미지수였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념무상으로 걷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것도 없는 길을 한참이나 걷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데몬도, 나아감을 방해하는 함정도 없어 안전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으나.

오히려 그런 게 있었으면 할 정도로 극한의 지루함과 심심함을 이겨내야 했다.

학교에서도 벽 보고 서 있는 게 가장 힘들긴 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메고 있던 배낭을 고쳐 잡았다.

오는 길에 라면이랑 통조림만 먹느라 축 처져 있던 몸에 활력이 돌았다.

호다닥!

출구가 없어지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길을 벗어나고 싶었다.

통통 튀는 뜀박질로 균열을 향해 내달렸다.

사아아…!

응?

바로 균열로 다이빙해야지 마음먹으며 길의 끝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위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스르르.

고개를 올림과 동시에 눈으로 푸른빛이 일렁였다.

페샨의 눈이 발동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원래의 눈으론 볼 수 없는 게 하늘에 있다는 것.

얼레?

어디서 나타난 걸까.

방금까지 눈이 발동하지 않은 걸 보면 지금 나타난 것이었다.

로인… 은 아니겠지.

그리스에서 만났던 사신 로인을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였다.

저마다 약간씩 다르긴 했으나 로인과 매우 흡사한 갑주를 걸치고 있는 무리. 

못해도 스무 명은 넘을 듯한 숫자였다.

멋있네.

직접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로인을 보며 멋있다고 느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인은 사신 생김새의 갑주는 물론이고 무려 거대 낫까지 들고 있었다.

이건 못 참지.

간지의 로망 중 사신의 생김새를 완벽히 재현하고 있었으니.

눈이 반짝이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모여있으니까 더 멋있어.

로인이랑도 안면이 있으니 아는 척이라도 좀 해볼까 하는 순간.

스윽.

하늘에 떠 있던 사신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거리가 멀어 무슨 상황인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손을 흔들만한 분위기는 아니란 것이었다.

사신 무리와 나 사이로 약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

잠시 날 내려다보던 사신들이 가지고 있는 낫을 치켜들었다.

하늘로 높게 들린 스무 개의 낫.

사신님들… 설마 아니죠?

처음 만난 사이였다.

대화한 적도 없어 말실수한 것도 아니었다.

공격할 껀덕지라곤 전혀 없었는데 저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저기요! 지금 혹시…."

먼저 적의가 없음을 보이려 입을 열었지만 말을 끝맺진 못했다.

스무 개의 낫으로 심상치 않은 힘이 모이는가 싶더니.

쐐에에에엑!

한순간에 휘둘러지며 투명한 에너지가 쏘아졌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날카롭게 날아드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미친놈들이?

설마했던 공격을 지체 없이 쏘아내는 사신 놈들.

저런.

날아드는 에너지를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길에 부딪힌 에너지에서 충격파가 발생했다.

서 있기조차 힘든 후폭풍에 몸이 뒤로 밀려났다.

땅을 디디며 앞으로 도약하려는 순간.

어.

내가 서 있던 곳은 길의 끝부분이었다.

뒤로 밀려난 후 디뎌지지 않는 발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충격파 때문에 자연스럽게 균열로 뛰어들게 되었다.

[도윤 - 비젼 수리검]

수리검으로 다시 올라가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쐐에에엑--!

첫 공격을 피한 걸 확인한 사신들이 쉴새 없이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십 발의 포격.

포격 속으로 수리검을 던진다 한들 원하는 위치까지 도달하지 못할 터였다.

저런 샹.

[유탈라스 - 전신의태, 갑주]

콰가가가가!

피할 곳 없는 공중에서 공격을 받아내며.

스으으으…!

몸이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쿵…!!

공격을 얻어맞으며 나와서일까.

균열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런 뼈다귀 새끼들이!"

바로 일어나 하늘을 바라봤다.

다시 들어가려 했으나 날 뱉어낸 균열은 순식간에 사라진 뒤였다.

길의 끝에 도달해 신났었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묻지마 공격이라니.

다치진 않았지만.

다치긴커녕 유탈라스의 비늘에 기스도 안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몹시 괘씸했다.

먼저 손을 흔들어 볼까 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낫부터 휘두르고 보는 사신 놈들.

뭐 이런 경우 없는 새끼들이 다 있지.

잠시 씩씩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몹시 괘씸했으나 당장 길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왜 공격당한 건가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왔기에 나중을 기약해야 했다.

맨 앞에 있던 놈.

떨어지는 와중에도 무리의 선두에 있던 사신 얼굴은 똑똑히 봐뒀었다.

잊지 않게끔 눈을 감고 몇 번 놈의 얼굴을 되새긴 후.

기억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괘씸한 마음을 억누르고 나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긴 또 어디야.

유탈라스를 해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둘러보며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폐허.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부서진 건물이나 땅에 널브러진 물건을 봤을 때 지구인 건 확실했다.

단지 멀쩡한 게 하나도 없는 게 문제였다.

도시는 아니지만 나름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을 것 같은데.

제대로 폭격을 맞은 건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음?

앞에 반으로 쪼개져 있는 간판을 바라봤다.

일본어네.

일본인가?

떨어지는 곳이 지구임은 확실하지만.

지구의 어디일지는 미지수라고 아이작은 말했었다.

어디 화산이나 바다 한가운데 안 떨어진 것만 해도 땡큐지.

일본이라면 썩 나쁘지 않은 도착지였다.

와본 적이 있기도 했고 한국이랑도 멀지 않으니.

방향만 특정된다면 칼데아로 하루면 돌아갈 수 있었다.

스윽.

박살 나있는 자재에 손을 올렸다.

손을 통해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사달이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르릉.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 떨어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반가울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잘됐다.

태워달라고 해야지.

아직 말도 안 걸었지만 이런 곳에 버려진 사람을 내버려 두진 않겠지 생각하며.

차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인인가.

후지산 사로카 사태 때 봤던 군용 차량이었다.

꽤 큰 먼지가 생기는 걸로 보아 한두 대가 아닌 듯했다.

끼이익!

몇 대가 나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추는 차량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날 둘러싼 듯한 느낌이었다.

차가 멈추기 무섭게 완전 무장을 마친 병력이 내리며 자세를 잡았다.

오늘 마가 꼈나.

둘러싸는 거 같더니만 기우가 아니었다.

철컥! 철컥!

차에서 내린 병사들이 곧장 화기를 겨누었다.

아까 사신 놈들처럼 바로 쏘진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았다.

"꼼짝 마!!"

카랑카랑하면서도 비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을 겨누고 있는 쪽인데 겨눠지고 있는 나보다 훨씬 긴장한 목소리에.

스윽.

천천히 손을 들었다.

긴장은 왜 저쪽이 하는 거지.

의문이 들긴 했으나 어쩌겠는가.

아직 쏜 것도 아니었다.

데몬도 아닌데 막무가내로 뚜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벅.

조금 전 꼼짝하지 말려고 했던 군인이 헬맷을 벗으며 내게 다가왔다.

목까지 오는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였다.

"누구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비장한 얼굴로 묻는 여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됐다.

망자의 세계에 있다가 균열을 통해 왔습니다…? 하면 바로 총 맞을 거 같고.

어쨌든 공식적인 신분을 말하는 게 가장 문제가 적을 것 같았다.

"한국 국가직 소속 10급 헌터 백운입니다.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한국의 10급 헌터…?"

눈살을 찌푸린 여자가 더 수상한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전 일본 국가직 소속 헌터 미라코입니다.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있나요?"

말투는 존댓말로 변했지만 여전히 총구는 날 향하고 있었다.

경계와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증명을 요구하는 미라코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헌터청에서 받아둔 헌터 신분증이 배낭에 있었다.

"배낭에 있는데 좀 꺼내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미라코에 천천히 뒤로 메고 있던 배낭을 앞으로 옮겼다.

훼엥.

… 시벌.

어쩐지 가볍다 싶더라니.

어깨에 걸어뒀던 가방끈을 제외하고 배낭은 걸레 짝이 된 상태였다.

당연히 내용물도 어딘가에 다 토해내 버린 모습.

사신 새끼들!

멍하니 끈만 남은 배낭을 바라보며 사신을 욕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미라코가 다시 총을 겨누었다.

"일단 같이 가시죠."

쯧.

어차피 차를 얻어 탈 생각이긴 했었다.

본부로 가면 신원 조회도 금방 될 터였다.

철컥.

"신원이 확인되면 바로 풀어 드리겠습니다."

순순히 두 손을 내어주고.

"네, 어디로 타면 될까요?"

자연스럽게 탈 차량을 묻고 걸어가려는 찰나.

아.

무엇보다 내 신분을 빠르고,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증명해 줄 사람이 떠올랐다.

미라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신분을 증명해주실 분이 일본에 계시긴 하거든요."

"…? 누구시죠?"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미라코에.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넸다.

"니시다 료코 장관님요."

* * *

망자의 세계, 카사락의 성.

카사락이 찡그린 얼굴로 앞에 있는 사신들을 응시했다.

"언제부터 사신 따위가 멋대로 이곳에 드나든 거지."

싸늘한 카사락의 목소리에 사신 무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저벅.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사신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지구로 향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저번 이후로 다시는 길이 열리는 일이 없을 거라 하셨을 텐데요."

사신의 말에 카사락이 조소를 머금었다.

"네놈들이 지름길이랍시고 망자의 길을 사용하는 건 되고, 망자의 세계에서 길을 여는 건 안 된다는 건가?"

"그것이 약속이었습니다."

"클클…!"

스윽.

카사락이 비웃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무서워 직접 오지도 못하는 겁쟁이가… 약속을 논하는가?"

"…!!"

카사락 앞에 있는 사신, 정확히는 사신의 몸에 깃들어 있는 존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지구로 향하고 있는 인간을 발견했습니다. 누굽니까? 그자는."

이번엔 카사락의 눈이 커졌다.

"그자를 어떻게 했지?"

"사신이 아닌 자가 길을 이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곧장 처형했습니다."

"크… 크하하하하!!"

카사락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

"처형이라…."

백운과 맺었던 맹약이 멀쩡한 걸 확인한 카사락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건드렸어도 되는… 건드리면 안 되는걸."

카사락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괜히 건드렸구나."

220화. 사라진 마을

"죄… 죄송합니다!"

넓직한 내부를 가진 군용 차량.

당황한 미라코가 지체 없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게 직빵이구만.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마음속으론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 예…?

니시다 료코라는 이름을 말하자 미라코와 병사들은 눈살을 찌푸렸었다.

어디 타국의 10급짜리 헌터가 국가 장관의 이름을 논하느냐 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경고조로 말하는 미라코한테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복잡해지는 건 나니까 한 번 연락해보라는 말과 함께였다.

- 차에 타서 대기하세요.

반신반의하며 미라코가 본부로 연락을 취하고 잠시 후.

다급하게 달려온 미라코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과를 건네는 중이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최대한 흡족함을 티 내지 않으며 구속된 손을 내밀었다.

"아, 네!"

허겁지겁 키를 꺼낸 미라코가 구속구를 풀어주었다.

총구를 겨누고 의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인간이 대체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잘 나가는 장관님이 직접 연락했으니 당연한 건가.

"저… 혹시 장관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쭈뼛거리던 미라코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왔다.

개인적인 궁금함에 의한 질문은 아니었다.

밖에서 통화했음에도 전화기 너머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 누구신지 조심스럽게 알아봐! 장관님이랑 어떤 관계인지도!

난리가 난 건 미라코 뿐만이 아니었다.

미라코가 신분 확인을 요청했던 본부도 마찬가지.

나를 위한 배려인지 료코는 신분 확인만 해주고 그 밖의 이야기는 해주지 않은 듯했다.

"하하… 여러 가지 일이 있다 보니 장관님이 직접 전세기도 빌려주시고 뭐, 그렇게 된 거죠."

"저… 전세기요…!?"

화들짝 놀라는 미라코에 고개를 끄덕이며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더 말하려면 무기왕까지 나와야 하니 여기까지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기 어디에요?"

미라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서일까.

이건 또 무슨 질문인지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훗카이도의 오타루시입니다."

"오타루…!"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어딘지는 몰랐다.

대충 일본의 북쪽이란 것만 알 뿐이었다.

"마을이 완전 난장판이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일본은 북한 같은 공산당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타국인이라고 해서 총구를 겨누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

분명 초토화된 마을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음… 그게."

미라코가 고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내부의 일을 내게 알려줘도 되나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말씀해주시기 힘든 거면 안 해주셔도 되는데… 궁금했었거든요."

슬쩍 미라코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총구를 겨눌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하고요."

"!!"

지금 차량이 향하고 있는 건 삿포로에 위치한 군 기지였다.

나 때문만은 아닌 듯하지만 연락이 닿은 료코도 업무를 마치고 기지로 오겠다고 한 상황.

내게 수갑을 채우고 총까지 겨눴던 미라코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름보 할 생각은 없지만.

스윽.

머뭇거리던 미라코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 장관님을 뵙게 되면 조금 전 일은…"

"조금 전 일요? 혼자 덩그러니 있는 절 친절히 태워 주신 거잖아요."

"…."

바싹.

몸을 더 기울인 미라코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를 촬영한 사진이었다.

"오타루에 위치한 마을을 날림으로 우리의 힘을 보여주겠다…?"

간략하지만 섬뜩한 내용의 메시지였다.

힘을 보여주기 위해 마을을 날리겠다니.

"다들 믿지 않고 있었어요. 각성 때문에 별의별 능력이 다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마을 하나를 통째로 없애겠다는 건 허무맹랑한 협박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진짜 날아갔군요?"

작은 한숨을 내쉰 미라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한 시간 전에 마을이 지워졌고."

미라코가 내 눈을 응시했다.

"그 마을 한가운데에 백운 님이 계셨던 거예요."

* * *

흐음.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미라코에게 노트북을 빌렸다.

료코가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기록해뒀던 것들을 보며 기억을 되살려 볼 생각이었다.

아마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개미굴 이후 호텔에서 생성한 기록 파일.

유물 관련은 물론 기억나는 회귀 전 내용을 생각이 날 때마다 적어 놓은 것이었다.

- 마을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딸칵.

스크롤을 내리다 비슷한 내용의 파일을 클릭했다.

# 일본 훗카이도 침몰.

대략적으로 기억나는 거만 휘갈겨 놓은 기록이다 보니 상세한 내용까진 없었다.

정체불명의 빛줄기와 함께 훗카이도 1/3에 해당하는 영토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톡… 톡.

기록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두드렸다.

1/3이라고 해도 절대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인명 피해만 해도 150만이 넘어간 엄청난 사건이었다.

뭐로 날린 거지.

사건의 크기도 크기지만, 관심이 가는 건 어떤 수단을 이용했냐였다.

다른 나라의 미사일 공격도, 핵폭발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이거 설마.

톡.

무긴가?

미라코의 말대로 다양한 능력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만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강한 화력을 가진 능력자라 해도 150만에 달하는 인구와 영토의 1/3을 날려버리다니.

단순히 강하다 아니다로 구분 지을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었다.

능력 외에 분명히 뭐가 더 있을 거 같은데.

모든 게 미지수였으나 힘을 증폭해주는 매개체가 없는 이상 말이 안 되는 위력이었다.

일종의 무기일 거라 가정하고.

물론 무기의 한 종류라고 해도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지는 불확실했다.

지금까지 얻은 무기를 봤을 땐 얽힌 사연이나 경로의 성질이 완전 달랐기 때문이다.

확인해 볼 가치는 있을 거 같은데.

무기고에 넣을 수 없더라도 보랏빛처럼 무기에 닿을 수 있는 일종의 단서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꼭 이게 아니더라도 궁금했다.

무기라면 대체 어떤 무기기에 이런 스케일의 공격이 가능한지 말이다.

확인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정체불명의 힘에 훗카이도 날아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3일 정도였다.

스윽.

"으으!"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켠 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3일.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런던아, 3일만 기다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훗카이도 구석에 위치한 소규모 도시.

해가 진 도시로 빛의 행렬이 이어졌다.

저벅… 저벅.

무언가를 쉴새 없이 웅얼거리며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이가 행렬에 동참하고 있었기에.

웅얼거림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웅얼웅얼.

행렬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거대한 광장이었다.

몇천, 몇만 명은 가볍게 수용할 수 있을 듯한 크기.

대규모 수용이 가능한 야구장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크기였다.

"곧 심판이 내릴지 어니."

광장 중앙의 거대 단상에선 백색 사제복을 입은 은발의 남자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 우리는 구원을 얻으리라."

긴 행렬을 따라 광장에 도착한 이들도 모두 남자와 비슷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구원을 얻으리라!"

남자가 읽는 소절의 마지막을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들.

"저흴 구원하소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회의 시작 전부터 눈물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제각각의 반응이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단상에 선 은발의 남자를 우러러보고 있단 것이었다.

"그대들을 구원하는 건 누구입니까?"

은발 남자의 물음에 곳곳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신의 사도이신 료헤이 님이십니다!"

"료헤이 님!"

스윽.

"아닙니다."

천천히 고개를 저은 료헤이가 손을 올리자.

소란스러웠던 광장으로 순식간에 침묵이 깔렸다.

"여러분이 속한 구원교의 주인이자, 신의 사도인 제가 모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신도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헤키리스 님이십니다!!"

"헤키리스! 헤키리스!"

고개를 끄덕인 료헤이가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의 선택도, 삶도, 죽음도. 모두 그분의 뜻 아래에 있습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광장을 넘어 도시 전체를 울리는 함성.

힘찬 함성을 듣는 료헤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만 더…! 더 크게…!'

광장의 함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신도들의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신도들에게서 나온 기운이 료헤이가 선 단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 * *

"깜짝 놀랐습니다. 백운 님이 훗카이도에 계시다고 해서요."

"하하… 그렇게 됐네요."

기지 앞을 거닐며 료코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행히 료코는 내가 훗카이도에 어떻게, 왜 왔는지를 묻지 않았다.

길을 빠져나오고 보니 훗카이도였던 터라 대답하기 곤란했는데, 다행이었다.

"헌터들이 실례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대신 사과드릴게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들 예민했나 봅니다."

"아니에요, 제가 마침 의심받기 딱 좋은 장소에 있었으니까요."

료코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료코는 단순히 날 만나기 위해 훗카이도로 온 게 아니었다.

미라코가 말했던 오타루 시의 소멸과 관련하여 현장 지휘를 위해 온 것이었다.

"다행히 오타루는 지난번 데몬 사태로 비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덕분에 재산 피해를 제외하곤 희생자도 없었고요."

료코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도를 넘은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추적을 지시하긴 했지만 그렇게 우선순위를 높이진 않았었다고 료코는 말했다.

"그리고 오늘 메시지의 내용대로 오타루 시가 쑥대밭이 됐습니다."

"짐작 가는 곳은 있나요?"

"메시지는 분명 사람이 보냈지만, 위력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료코 님이 왔구만.

료코는 일본의 데몬 대응 부처 장관이었다.

오타루에서 벌어진 일을 데몬의 짓이라 방향을 잡은 듯했다.

"지금은 정부조차 감조차 못 잡고 있는 상태라… 공식적인 발표는 최대한 늦추고 있습니다."

고민이 될 거 같긴 했다.

단순히 감을 못 잡는 걸 넘어 사람이 보낸 것으로 보이는 협박성 메시지가 도착했고.

얼마 뒤 메시지의 내용대로 일이 벌어졌으며 그건 데몬의 짓으로 추정 중이었다.

이건 즉.

데몬과 인간의 유착 가능성.

사로카로 인해 말을 하는 데몬이 세상에 공개되긴 했으나.

이번엔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형태엿다.

사건의 크기를 넘어 인간으로선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정부가 급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스윽.

료코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의 액정 안.

의도가 분명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 다음은 훗카이도.

221화. 머리채

습기 가득한 지하 공당.

"왕이시여."

목소리만큼이나 기괴한 모습을 가진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체는 사람이지만 하체는 거대한 굼벵이의 모습을 한 데몬이었다.

"포이카."

굼벵이 데몬을 포이카라 부른 데몬, 헤키리스가 눈을 떴다.

1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였다.

울룩불룩한 근육질로 뒤덮인 파란색의 몸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지상의 준비가 거의 끝난 것 같습니다."

포이카가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를 올렸다.

"많은 신도를 모았고 그에 비례해 힘의 충전도 어느 정도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두 개의 뿔을 가진 헤키리스가 흥미롭다는 듯 몸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빠르구나."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끝마치다니.

"료헤이란 인간이 생각보다 쓸만합니다."

일본 구원교의 교주, 료헤이.

헤키리스가 처음 료헤이를 만난 날을 떠올렸다.

너무 연약하고 작아 손가락을 튕겨 목을 따버릴까 했었다.

"안 죽이길 잘했군."

앞에 선 료헤이는 약해도 너무 약했다.

작은 힘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태라 혐오감마저 들 정도였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라면 아무것도 아닌 능력이었다.

비각성자와 전혀 다를 게 없어 지나가는 개 한 마리보다 못한 인간.

하지만.

판을 깔아 주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졌다.

"다른 이의 믿음을 먹고 강해지는 능력이라."

료헤이가 각성한 능력이었다.

다른 이가 료헤이를 믿으면 믿을수록.

믿음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료헤이는 더 강해졌다.

"그 힘이 곧 헤키리스 님께 전달되겠죠."

헤키리스가 료헤이를 돕는 이유였다.

믿음이 쌓일수록 료헤이의 힘은 증폭되지만 거기까지였다.

"반쪽짜리라."

료헤이는 쌓은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힘을 모아 건넬 수는 있되 직접 사용하는 건 불가능한 반쪽짜리 능력자였다.

"마음에 든단 말이야."

료헤이를 같은 편에 둘 수 있는 자로선 이보다 훌륭한 능력이 또 있을까 싶었다.

- 정의를 위하여.

료헤이가 처음부터 헤키리스에게 협조한 건 아니었다.

처음 료헤이가 찾아온 이유는 헤키리스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위치를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료헤이는 적지 않은 수의 동료를 데리고 지하 공당으로 내려왔었다.

- 놔둬라.

원래라면 공당에 발을 들이기 전에 죽었어야 했지만.

헤키리스의 명령에 료헤이와 동료는 공당의 끝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 10분을 주마, 마음껏 공격해라.

헤키리스는 조소를 머금으며 그들에게 10분을 줬었다.

- 콰가가!

10분 동안 필사의 공격이 쏟아졌지만, 헤키리스의 몸엔 작은 기스조차 생기지 않았다.

- 내 차례구나.

한 명씩 손가락을 튕겨 머리를 날렸었다.

그렇게 마지막에 남게 된 이가 료헤이였고.

- 털썩.

료헤이는 압도적인 헤키리스의 힘에 무릎을 꿇었었다.

"료헤이도 알아버린 거죠. 그 누구도 헤키리스 님께 상처 입힐 수 없다는 사실을요."

포이카가 헤키리스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숙였다.

"클클."

헤키리스가 포이카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부를 위한 말 따위가 아니었다.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이었다.

그 누구도 헤키리스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단순히 단단하고 강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다른 법칙을 적용받고 있었기에 헤키리스는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

"어리석은 놈들… 사로카 하나를 잡았다고 기고만장하고 있겠지."

뚜둑.

"조금만 기다리거라."

헤키리스가 목을 풀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찔해지는 한 방을 선물해 줄 테니."

* * *

차량에서 내려 오타루를 거니는 사이.

미라코가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봤다.

"영… 영광입니다."

"아니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영광이란 말을 몇 번이나 한 건지 세는 것도 포기해버렸다.

눈만 반짝여도 부담스러운데 바짝 붙어 저런 말까지 하고 있으니.

당수라도 날려서 기절시켜야 하나 잠시 고민될 정도였다.

- 정… 정말인가요?!

생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장관이란 자리 때문인지 차분한 어조로 무게를 지키던 료코인데.

괜찮다면 도움을 주겠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화들짝 놀라며 입을 벌렸었다.

- 마을을 날려버리는 놈들이라니, 이… 이런 악질 놈들은 가만히 둘 순 없죠!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했던가.

차마 내가 후려올 수 있는 무기일까 싶어 협조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대신 눈을 불태우며 정의의 사도에 빙의해 주먹을 움켜쥐었었다.

내심 바라고 있었어.

즉각적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료코는 갈등 중이었다.

우연히 만났지만 누구보다 확실한 전력에 도움을 요청할까 말까를 말이다.

료코 님은 아마 알고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료코는 후지산에서 유탈라스를 봤었다.

무인도에서 사로카를 부수며 방송할 때도 유탈라스로 마무리했었으니.

료코는 내가 무기왕이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반응이었겠지.

생각보다 솔직한 반응을 보인 료코를 떠올리고 있을 때.

불쑥!

히익.

옆에서 미라코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이 앞부터 오타루입니다!"

"네… 네."

총을 겨눴을 때까지만 해도 비장한 각오를 다진 헌터였는데.

지금은 처음의 이미지가 많이 깨진 미라코였다.

- 미라코 요원이 훗카이도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동네를 혼자서 누비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라 길잡이를 한 명 부탁했었다.

그렇게 시작된 미라코와의 부담스러운 동행.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관님의 친구분이시니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친구도 아닌데.

미라코는 처음 봤던 비장함을 이상한 방향으로 불태우고 있었다.

"공격이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요. 동 시간대 레이더에서도 큰 에너지가 감지됐었고요."

미라코가 말한 곳으로 걸어갔다.

지반이 다 뚫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은 구멍이 나 있었다.

여길 시작으로 번져나갔나 보네.

구멍을 살피다 주변을 둘러봤다.

시야가 닿는 곳까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강한 에너지가 떨어져야 이렇게 되는 거지.

망자의 세계에서 카사락이 시전했던 마법이 떠올랐다.

그것보단 약한 느낌이지만 오타루에 떨어진 에너지도 보통은 아니었다.

"주변을 날던 비행기도,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항공모함도 없었어요." 

"흐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

턱을 만지작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에너지를 떨어뜨린 게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면 분명 거리에 한계가 있을 터였다.

"오타루 주변에서 이상한 일 같은 건 없었나요?"

"이상한 일요?"

"이번 일과 아무 상관 없는 거여도 괜찮아요. 평소에는 안 일어났던 일 중에 아무거나."

미라코가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검색해보려는 것 같았다.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일이 오밀조밀하게 이어져 있을 때도 있으니까.

정말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훗카이도 1/3이 날아갔던 3일 후까지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혔으면 좋겠네.

"어… 완전 최근은 아니지만 며칠 전까지 누적된 실종 신고가 꽤 많았어요."

미라코가 계속해서 내용을 읽어나갔다.

"신고한 건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들이에요. 이상한 종교 같은 거에 빠지더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요."

"종교요?"

"네, 하얀색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랑 종종 만났었대요. 그 사람들은 만난 이후로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행동하더니 모습을 감추었대요."

사제복이라… 응?

"미라코 님, 혹시 그 사제복 사진도 있나요?"

"멀리서 몰래 찍은 거라 화질이 안 좋긴 한데… 마주치면 알아볼 수는 있을 거 같아요."

"그래요? 그럼."

툭툭.

핸드폰에 몰두하고 있는 미라코의 어깨를 두들겼다.

"혹시 저건가요?"

"네?"

미라코가 뭔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서서히 다가오는 수십 명의 사제복 무리에 미라코의 얼굴이 굳어졌다.

맞나 보네.

철컥!

곧장 화기를 꺼낸 미라코가 다가오는 무리를 향해 겨누었다.

"백운 님, 제 뒤로 오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미라코의 뒤로 숨은 뒤 다가오는 사람들을 살폈다.

하얀색 사제복을 입은 채 사방에서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눈깔 봐라 저거.

조금 전 미라코가 읽어준 내용이 떠올랐다.

어딘가 맛이 가는 거 같다더니.

다가오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맛탱이가 간 눈을 하고 있었다.

"사도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이여."

"우매한 인간들. 언제 깨닫고 헛된 발버둥을 멈출 것인가."

눈만 간 게 아니구나.

복장만 보면 평화로워야 정상인데.

사제들은 각각 무기를 갖춰 들고 있었다.

"속죄하라."

"속죄하라."

속죄하라며 다가오는 무리에 미라코가 안전장치를 풀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톡톡.

마지막 경고를 하려는 미라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운 님?"

"우리 잡힙시다."

"네?"

미라코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다가오는 무리만 해도 골치 아픈데 그냥 잡히자니.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요, 한꺼번에 덮쳐 오면 방법이 없잖아요. 얌전히 굴면 다짜고짜 공격할 거 같지도 않고요."

먼저 공격해온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취조는 씨알도 안 먹힐 거 같아.

처음엔 몇 명만 남겨놓고 쓸어버린 뒤 정보를 캐낼까 했었지만.

맛탱이가 가버린 눈과 정신 상태를 보니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정신까지 가버린 놈들은 아무리 캐내도 입을 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스륵.

고민하는 듯하던 미라코가 화기를 내려놓았다.

"대신 저한테 딱 붙어 계세요…!"

"넵!"

꼬옥.

각오를 다지는 미라코의 팔을 슬며시 붙잡으며.

다가오는 놈들을 쳐다봤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왔던 건데.

싱긋.

머리채를 잡게 생겼다.

* * *

삿포로에 위치한 본부.

미라코에게 연락을 취하던 상황병이 몸을 일으켰다.

"미라코 님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한국의 헌터분과 오타루에 나가 있었습니다."

"…?"

직접 지휘를 위해 상황실에 내려와 있던 니시다 료코.

기지의 사령관과 대화를 나누던 료코가 상황병에게 걸어왔다.

"신호도 안 가는 건가요?"

"예, 누군가 의도적으로 완전히 망가뜨린 것 같습니다."

료코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잠복하던 놈들한테 잡힌 게 분명하다! 마지막 위치로 빨리 병력 보내!"

"주변 수색도 시작하겠습니다!"

급하게 명령을 알리는 사령관에 무언가 생각하던 료코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보죠."

뜻밖의 명령에 상황실로 정적이 찾아왔다.

"예…?"

너무 뜻밖인지 되묻는 사령관에게 료코가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조금만 기다려보도록 해요."

백운이 누군가에게 잡힌다는 것.

'잡힌 게 아니라.'

료코의 상식선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잡은 거야.'

222화. 끌려간 곳엔

나와 미라코를 둘러싼 채 행렬을 이어가는 신도 무리.

이렇게 계속 걷고 있자니.

중요한 사람이 된 느낌이야.

수많은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대통령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흐뭇하게 물샐틈없는 경호를 받으며 이동하는 대통령을 생각하다.

스윽.

고개를 내렸다.

물론 대통령은 손에 이런 거 안 차고 있겠지만.

나와 미라코의 손엔 쇠로 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투둑하고 뜯겨 나갈 정도의 강도.

너무 답답하면 풀어버렸겠지만 생각보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루건너 하루 차서 그런가.

처음에 찼을 땐 답답했었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심신이 고요해지는 기분이었다.

강제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게 되어서인 듯했다.

여기까지는 다 좋은데.

"속죄하라. 속죄하라. 속죄하라."

저 주댕이만 좀 다물었으면.

아마 두 손이 묶이지 않았다면 귀를 막았을 것이다.

걸어가는 내내 속죄하라고 울부짖는 인간들.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짓고 산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난 지은 죄도 없는데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 없는 사람한테 속죄하라고 말해봐야 뭐하겠는가.

조금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걸.

"백… 백운 님, 걱정하지 마세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얼마나 긴장한 건지 미라코는 쉴새 없이 주변을 경계하며 바짝 굳어 있었다.

하긴.

걱정 안 되면 이상한 상황이지.

나와 다르게 미라코는 정말 무방비 상태였다.

가지고 있던 화기는 빼앗겨 행렬의 맨 앞에서 옮겨지는 중이었다.

저 엄청 강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꼼짝없이 잡혀가는 상황에 그런 말을 해봐야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터였다.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요?"

걱정 가득한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하도 둘러싸여 있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기도 힘들었다.

"그러게요. 어디가 됐든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한 시간만 더 저 속죄하라를 듣는다면 다른 선택지를 떠올릴 것 같았다.

마침 해도 저물었으니 일단 다 때려잡고 날개를 꺼내 주변 탐색하기로 말이다.

"데려가서 어쩌려는 걸까요. 설마 해치거나 하진 않겠죠…?"

"그렇죠. 이 사람들이 데몬도 아닌데요."

미라코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하며.

옆에 있는 신도 한 명을 바라봤다.

데몬보다 더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생긴 건 멀쩡한데 역시 눈이 문제였다.

회까닥 맛이 가서 갑자기 칼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고개를 갸웃하며 까치발을 들었다.

번화하진 않았으나 분명 도시 내부였다.

당연히 지나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말이다.

대로 한복판인데도 이 꼬라지를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는 건.

전부 한통속이란 이야기였다.

아직 정체는 모르겠으나 사제복 무리는 단순한 싸이비 종교 수준이 아닌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됐다.

무기를 든 신도 행렬이 사람 두 명을 수갑 채워 데려가고 있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니.

쿠궁…!

다 온 건가.

맨 앞쪽에서 둔탁하면서도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저벅.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사방이 확 특인 다목적실 같은 느낌.

딱 봐도 중소규모 싸이비 종교가 집회하기 좋은 장소였다.

체육관 같은 곳인가.

내부 곳곳엔 이상한 문자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 싸이비 종교가 있는 곳이요! 하고 대놓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문자는 뭔지 모르겠고.

문양은 아무리 봐도 데몬인데.

추상적인 악마를 숭배하는 건지, 데몬을 숭배하는지는 정확지 않았으나.

이들이 멀쩡한 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끼이익.

기분 나쁜 쇳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꿉꿉한 공기가 가득한 공간에 도착해있었다.

"들어가."

"넵."

단호한 목소리에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엉성하게 만들어진 감옥이었다.

사용 흔적이 있는 걸로 보아 나와 미라코가 첫 방문객은 아닌 모양이었다.

끼익… 탁.

철창문이 닫히기 무섭게 얼기설기 대충 만들어진 의자로 몸을 앉혔다.

"미라코 님, 여기 좀 앉으세요."

감옥까지 등장해서인지 미라코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앉으라고 옆을 두드리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미라코였다.

저벅.

불편한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철창문 바로 앞까지 와 안을 응시하는 남자.

조금 멀쩡하네.

눈깔이 다 뒤집힌 놈들에 비하면 몹시 또렷한 편이었다.

"그대들이 신을 거역하는 분들이군요."

믿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딱히 거역했던 적은 없었다.

그냥 날아간 마을에 뭐가 있을까 어슬렁거린 게 전부였다.

"거역한 건 아닌…."

"닥치십시오."

이 새끼도 정상 아니네.

급발진 하는 남자를 보며 일단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거역자인 당신들을 어떻게 할지는 그분이 정해 주실 겁니다."

"그분이 누구…."

"닥치라고 했을 텐데요."

이 새끼가…?

딱히 나쁜 마음은 없었는데.

본능적으로 얼굴을 기억하게 만드는 놈이었다.

"속죄하며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지 할 말만을 마친 남자가.

스윽.

천천히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 * *

고요한 방 안.

쇼파에 앉은 료헤이가 와인 잔으로 손을 뻗었다.

"…."

와인이 흘러들어오며 입안으로 고급스러운 풍미가 퍼졌다.

'얼마 남지 않았다.'

풍미를 느끼며 료헤이가 고개를 쇼파에 기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데몬의 편에서 힘을 보태게 된 것은 말이다.

'헤키리스.'

료헤이가 지하 공당의 주인 헤키리스와.

- 공당에 강한 데몬들의 수장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처치하고 이름을 떨칩시다!

헤키르스를 잡기 위해 모였던 날을 떠올렸다.

료헤이가 일행과 만나며 민병단을 결성한 지 약 일 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 얼른 해치워버리죠!

당시 료헤이가 속한 민병단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모인 후 1년이란 시간 동안 수많은 데몬을 처치해왔으며.

훗카이도 지역에서 나름 이름있는 민병단으로 자리를 잡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 우리한텐 료헤이 님이 계시니까요!

민병단의 핵심 전력을 꼽으라면 당연히 료헤이였다.

딱히 각성한 능력이 전투에 특화되어 있거나 한 건 아니었다.

대신 팀적으로 봤을 때 엄청난 시너지가 되는 능력이었다.

믿음이 모일수록 힘이 쌓이고, 그 힘을 나눠줄 수 있는 능력.

팀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 소중한 서포터가 아닐 수 없었다.

- 그럼 가시죠!

이름이 퍼지며 많은 사람이 민병단을 믿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료헤이의 힘이 증폭된 건 물론이었고, 이에 비례해 민병단의 전력도 함께 강해져 있었다.

그래서였다.

정보를 접한 민병단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지하 공당으로 향한 것은 말이다.

- 내 힘도 더 강해지겠지.

고민하지 않은 건 료헤이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위험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민병단 활동은 수월했기에.

이번에도 빨리 지하 공당의 데몬을 잡고 명성을 얻어 힘을 증폭시킬 생각뿐이었다. 

- 어…?

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하 공당에 있는 데몬은 지금까지 봐온 개체들과 차원이 달랐다.

- 마… 말도 안 돼.

그토록 자신감 넘치던 민병단원들이었는데.

헤키리스가 제시한 10분 후엔 모두가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희망 가득했던 얼굴엔 죽음의 공포가 새겨져 있었으며 승리를 외치던 입에선 믿을 수 없다는 말만이 되풀이되는 중이었다.

- 생채기조차… 안 났다고…?

단원들이 약한 건 아니었다.

평소보다 컨디션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

료헤이의 힘을 건네받은 단원들은 평소처럼 강했고 거침없었다.

- 크클.

문제는 상대에게 있었다.

지하 공당의 주인인 헤키리스.

헤키리스에겐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전혀 다른 법칙을 적용받는 듯 공격을 피하지조차 않았던 헤키리스.

- 이젠 내 차례구나.

헤키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살이 시작되었고.

일 년간 이어졌던 료헤이의 민병단 생활은 막을 내렸다.

- 넌 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어떠냐? 살려 줄 테니 나를 위해 그 힘을 쓰는 게.

너무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며 다리마저 풀려 있던 료헤이였기에.

헤키리스의 제안에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

그렇게 료헤이는 무사히 지하 공당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료헤이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법칙에서 사는 헤키리스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헤키리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인류에 희망 따윈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헤키리스를 정말 신으로 믿고 따르는 건 아니었다.

단지 신에 필적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인간이 아닌 헤키리스를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 누구도, 헤키르스에게 상처 입히는 건 불가능하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을 때.

띠리리.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 * *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남자가 한 말이었다.

무슨 판결이냐고 굳이 묻진 않았다.

또 닥치라고 할 게 분명했으니까.

저벅.

감옥을 나서자 처음 지나왔던 다목적실이 나타났다.

아까와 다른 게 있다면.

화형 시키는 건가.

다목적실 중앙에 원형의 공간이 갖추어졌다는 것과.

그 공간을 중심으로 많은 수의 신도가 둘러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딱 두 사람 서기에 좋게 만들었네.

남자가 나와 미라코를 원형 공간으로 안내했다.

"묶어라."

다가온 덩치 좋은 몇 명의 신도가 나와 미라코를 원형 공간의 대에 묶었다.

과거 마녀사냥이라며 사람을 태워 죽이던 게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백운 님…!"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역시 소용없겠지만 일단 말을 건네둔 뒤.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응?

사아아.

"백운 님 눈이…!"

열심히 두리번거리다 정면의 단상 구조물에 도달했을 때.

페샨의 눈이 발동했다.

"속죄하라, 속죄하라, 속죄하라."

"신을 섬기지 않은 자 심판이 내릴지어다."

신도들이 기도하면 할수록 왠지 모르게 안의 기운이 늘어가는 구조물이었다.

힘을 모으고 있는 건가?

무언가 늘어 가는 건 보였으나 그게 뭔지는 당장 알 길이 없었다.

"거역자에게 내린 료헤이 사도님의 판결은."

앞으로 걸어 나와 신도들을 향해 선 남자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심판."

남자의 입에서 심판이란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속죄하라!! 속죄하라!! 속죄하라!!"

신도들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이 정도로 열렬한 환호라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럼 심판을 시작한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쪽에 서 있던 신도들이 길을 비켜섰다.

쿠구구…!

오…? 돔까지 갖춰져 있다고?

신도들이 서 있던 바닥이 열리며.

허.

설마했던 가능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봐라.

223화. 가능성이 현실로

"말… 말도 안돼."

바닥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존재에.

미라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놀랍긴 하네.

다목적실에 들어오며 봤던 여러 가지 문양들.

문양을 보며 이놈들은 악마 혹은 데몬을 숭배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은 했었다.

단순히 숭배가 아니었네.

실존하지 않는 걸 숭배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

설마하는 작은 가능성만 남겨둔 채 그러려니 했었다.

열린 바닥에서 데몬이 기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척… 비척.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데몬을 응시했다.

거대한 덩치에 몸 여기저기로 뿔이 솟아있는 녀석이었다.

흔히 하수구에서 볼 수 있는 색깔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거부감이 들었다.

인간… 체형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팔다리가 있긴 했는데 엉성하게 생겼다.

만들어지다 만 듯한 생김새.

데몬이 어느 정도 걸어오자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준비되었습니다. 카랑클 님."

이름도 있어?

자연스럽게 이름까지 부르는 걸 보니 확실했다.

사로카가 등장하며 조심스럽게 떠올랐던 한 가지 가능성.

인간과 데몬의 유착이 더 이상 가능성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게 밝혀진 순간이었다.

"키… 키륵… 키르륵."

신기한 광경이었다.

카랑클이라 불린 데몬은 말을 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옆에 있는 신도들을 공격하거나 하진 않았다.

말을 이해하진 못하나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아군이란 걸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별꼴을 다 보네.

고개가 절로 내저어지는 상황이었다.

인류의 최대 적이라 불리는 데몬을 숭배하는 것도 모자라 힘까지 합치고 있다니.

인간의 선택 범위는 무궁무진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스윽.

고개를 돌리자 사색이 된 미라코의 얼굴이 보였다.

단서를 잡기 위해서라곤 하나 미라코에게 못 할 짓을 한 건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 어떻게 저럴 수 있죠…? 같은 사람이면서."

미라코의 눈엔 신도들에 대한 분노와 데몬으로 인한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데몬의 편에 설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덤이었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 아닐까요. 원하는 바를 이룰 수만 있다면 데몬이고 뭐고 일단 붙고 보는 거죠."

꿀꺽.

긴장한 건지 미라코가 마른침을 삼켰다.

신도들에 대한 분노는 둘째 치더라도.

무방비 상태에서 만난 데몬에 긴장이 최고조로 달한 모습이었다.

약해 보이지 않기도 하고.

전에 봤던 사로카나 로튼과 함께 다니던 칸 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풍겨오는 기운이 결코 낮은 등급의 데몬은 아닌 듯했다.

"자! 카랑클 님! 거역자들에게 심판을 내려 주십시오!"

"키르… 키르륵."

"거역자에게 심판을! 거역자에게 심판을!"

남자와 신도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잠시 멈춰 섰던 카랑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네가 말한 심판이 데몬한테 먹이 주는 거였어?"

"입 닥치세요! 감히 성스러운 심판 중에! 카랑클 님은 신의 사도 중 한 명이십니다!"

데몬을 사도로 모시며 사람을 먹이로 주고 있는 꼴이라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남자를 바라봤다.

"너 잠깐만 기다려."

눈깔이 가장 멀쩡한 사람이었다.

정신이 나가버린 다른 신도들에 비해 묻는 말에 대답할 여지가 많아 보였다.

"곧 먹힐 거역자 따위가 감히…!"

오만상을 찌푸린 남자가 카랑클을 향해 소리 질렀다.

"당장 저들에게 심판을!!"

비척… 비척. 비척. 비척.

말을 알아듣긴 하는 건지 카랑클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걸어왔다.

정면으로 계속 바라보고 있기 힘든 생김새였다.

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기분이 나빴는지.

"키르르륵!!"

도착한 카랑클이 지체 없이 우락부락한 손을 뻗어왔다.

* * *

'어떻게 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등장이었다.

싸이비 종교와 데몬의 협력이라니.

너무 끔찍해 쉬쉬하던 가능성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꽈악.

걸어오는 카랑클을 보며 미라코가 손에 힘을 주었다.

카랑클이 도달하기 전에 일단 묶여 있는 손이라도 어떻게 해야 했다.

꽈아악…!

한참을 힘주던 미라코의 얼굴로 절망이 번져나갔다.

기둥과 손을 묶고 있는 건 단순한 밧줄이 아니었다.

철 성분이 섞인 건지 아무리 힘을 줘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비척.

어느새 코앞까지 도달한 데몬, 카랑클.

"키르르륵!!"

카랑클이 괴성을 지르며 백운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안돼…!?'

우악한 손에 백운의 머리가 잡힐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미라코의 눈앞엔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어… 어떻게…?'

여전히 발은 묶여 있지만 백운의 손은 자유로워져 있었다.

바로 옆에서 보고 있었음에도.

언제 어떻게 푼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보다 당장 믿기지 않는 건.

부들부들.

아무런 장비도 없이 카랑클의 손을 붙잡고 있는 백운이었다.

어떻게든 손을 뻗으려 부들대는 카랑클과 달리.

대충 한 손을 뻗어 카랑클을 막고 있는 백운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데몬이 약한 게 아니야.'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는 카랑클의 우악스러운 힘이 충분히 느껴졌었다.

단지.

그런 카랑클을 붙잡고 있는 백운의 힘이 비정상적이었다.

"너 좀 씻고 다녀야겠다. 내 말 이해하지?"

천연덕스럽게 한 마디 건네기까지 한 백운이.

철컥!

'…!'

묶여 있던 발을 움직이자 꼼짝도 않던 줄이 힘없이 끊어졌다.

아주 얇은 실로 묶어 놓은 것 마냥 힘없이 끊어지는 매듭에.

안 그래도 놀라 커질 대로 커져 있던 입이 더 크게 열렸다.

"키르르!"

화가 난 건지 다른 쪽 손까지 휘두르려는 카랑클에게 백운이 발을 뻗었다.

콰앙!

걷어차인 카랑클의 몸이 기도 중이던 신도들에게 날아갔다.

"으… 으악!"

엎드려 기도하느라 거대한 덩치의 카랑클을 피하지 못한 신도들이 짧은 단말마를 내질렀다.

….

놀란 건 미라코만이 아닌 듯했다.

공간을 가득 채우던 기도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는 다목적실이었다.

스윽.

고요해진 다목적실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라코가.

뚜둑. 뚜둑.

고개를 돌려 백운을 바라봤다.

백운은 별거 아니라는 듯 천연덕스럽게 손목을 돌리고 있었다.

'이게….'

한없이 여유로운 백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꿀꺽.

미라코가 마른침을 넘겼다.

'10급 헌터라고…?'

* * *

저 멀리로 날아간 카랑클을 바라봤다.

무기를 바로 꺼낼까 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덩치 값 못하네.

방금 붙잡아봤기에 가늠할 수 있었다.

카랑클은 굳이 무기를 꺼내지 않아도 두들기는 게 가능한 수준이었다.

"무… 무슨…!"

이제야 좀 봐줄 만한 표정이 됐네.

이곳의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를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뭐라도 된 양 기세등등하던 남자였다.

카랑클이 날아가자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당황하는 상태.

"키르…!"

주춤거리며 날아갔던 카랑클이 일어났다.

말은 안 하지만 카랑클 역시 당황한 모습이었다.

당장 달려들기보단 전투태세를 취하며 응시하고 있는 녀석.

조금만 더 두들겨볼까.

한 방에 죽일까 싶었지만 뭔가 나올 것만 같았다.

스윽.

고개를 돌려 정면에 있던 구조물을 바라봤다.

뜻밖의 상황에 신도들의 기도가 끊겨서인지 힘의 증가를 멈춘 상태였다.

기도에 따라 힘이 증가하는 구조물이라.

페샨의 눈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할뻔했다.

당당거리는 귀여운 말투.

킹냥이 리카르도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아 맞다.

호다닥.

뚜두둑 손목을 풀다 몸을 돌려 미라코에게 걸어갔다.

왠지 모르게 신도들보다 더 놀란 얼굴이었다.

투둑.

묶여 있는 손목과 발을 한방에 풀어주자 더욱더 놀라는 모습.

저 놀라움을 없애주려면 오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기에.

애써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가… 감히!!"

응?

인상을 찌푸린 남자의 손엔 전화기가 들려있었다.

어딘가로 다급하게 전화를 거는 듯했다.

"료… 료헤이 사도 님!"

료헤이?

료헤이라 불리는 자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한 남자가.

핸드폰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스피커로 바뀐 건지 핸드폰 안에서 료헤이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깃들지어다.

우웅.

…?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정면에 있던 구조물에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르륵.

흘러나온 기운이 향한 곳은 카랑클이었다.

넘칠 만큼 흘러나와 카랑클에게 스며들고 있는 구조물의 기운.

"키… 키르르르르!!"

카랑클이 몸을 부들대며 괴성을 질렀다.

고통스럽다기보단 기분 좋아 보이는 듯한 외침이었다.

"크… 크하하하! 어리석은 거역자 놈! 알량한 힘으로 우쭐대는 것도 이제 끝이다!"

잠시 사그라졌던 남자가 다시 주댕이를 놀리기 시작했다.

스며들고 있는 기운이 카랑클의 승리를 확정 지은 것처럼 말이다.

투둑… 뚜둑.

"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변신… 이라기보단 강화라고 부르는 게 나을 듯했다.

몸이 울룩불룩하더니 카랑클이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힘의 증가를 증명하듯 솟아있던 뿔도 더 크고 뾰족하게 치솟았다.

조금 기다려야 할 거 같으니.

스슥.

턱을 문지르며 신도와 구조물, 그리고 강화 중인 카랑클을 번갈아 봤다.

완벽하진 않아도 대략적인 메커니즘은 알 것 같았다.

신도를 모아 기도 혹은 믿음으로 구조물에 기운을 모으고.

모은 기운을 소모해 데몬을 강화시킨다.

남자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구조물은 전화기 너머에 있는 료헤이란 자의 작품인 듯했다.

목소리에 반응해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 말도 안 되는 에너지였습니다.

오타루를 날린 힘에 대한 료코의 설명이었다.

하나의 개체만으론 힘들 수 있지만.

오는 길에 본 신도가 전부는 아닐 터였다.

사제복을 안 입고 있더라도 이 도시 자체가 집어 삼켜진 모습이었기에.

지역별로 훨씬 더 많은 신도가 기도하고, 그 기도가 각 구조물로 모이고 있을 듯했다.

숫자가 많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어.

료헤이란 자의 기운이 어디까지 깃들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데몬만 강화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어떠한 무기나 장치에도 깃들 수 있는 건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만약 데몬만 강화 가능한 거라면… 무기는 아니겠네.

훗카이도를 날린 건 무기가 아니라 료헤이에 의해 강화된 데몬이란 결론이 도출될 터였다.

"키르으으으!!"

강화를 마친 건지 우렁찬 괴성이 들려왔다.

괴성엔 카랑클의 승리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잔뜩 묻어 나오고 있었다.

"오만한 거역자에게 심판을!!"

남자도 확신에 차 있긴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자신감 넘치는 외침이 퍼지기 무섭게.

쿵! 쿵! 쿵!

훨씬 거대해진 카랑클이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 걷어차인 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거침없는 돌격이었다.

자세한 건 쟤한테 물어보자.

간략한 메커니즘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카랑클의 역할은 끝났다.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오른팔에 비늘을 두르고.

"죽어라 거역자여!!!"

"키르르르르르륵!!"

괴성과 함께 달려오는 카랑클을 향해.

스윽.

뻗어냈다.

224화. 쏘아지다.

오타루 근처의 작은 중소 도시.

털썩.

도시에서 신도들을 이끌던 남자, 규타이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

멀쩡하던 다리에 힘이 탁 풀려버릴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 규타이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규타이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 그들은 신의 뜻을 거스르려 하고 있습니다.

거역자.

규타이가 속한 구원교를 믿지 않는 것은 물론, 구원교의 일까지 방해하려는 자들을 일괄로 묶어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중에서도 구원교가 새로운 포섭 대상이 아닌 적으로 간주하는 집단이 있었다.

구원교가 신의 계시를 받고 오타루에 행한 심판을 파헤치고 있는 정부와 군대였다.

- 어리석은 놈들…!

잡혀온 백운과 미라코를 보며 규타이는 조소를 머금었었다.

우매하고 어리석은 건 둘째 치고 무식하기까지 했다.

신의 뜻을 거스르겠다며 심판의 장소까지 온 놈들이 고작 둘이라니.

웃음이 나오다 못해 구원교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에 화까지 나는 상황이었다.

- 부디 심판이 내려지길.

료헤이가 판결을 내리기 전부터 규타이는 심판이 내려지길 간절히 바랐었다.

이런 시건방진 놈들에겐 기회가 아닌 마지막을 선물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투둑.

잡혀 온 백운이 팔과 다리를 풀어내며 의외의 상황이 펼쳐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작은 해프닝일 뿐이었다.

카랑클은 료헤이에게 힘을 전달받음으로써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힘의 양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으나 최소 A급 이상은 될 터.

- 쿵! 쿵! 쿵!

그런 카랑클이 무기 하나 없는 인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면 처참히 뭉개져 원래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를 정도의 끔찍한 심판이 저들에게 내릴 예정이었다.

'….'

하지만.

규타이의 눈앞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강화한 카랑클이 백운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 …?

짧은 찰나.

규타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보통이라면 다가온 죽음을 마주하며 공포에 집어 삼켜지기 마련인데.

백운은 겁먹긴커녕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다가오는 카랑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 후우우웅!

사방으로 가시가 돋힌 카랑클의 주먹이 백운에게 휘둘러졌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풍압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주먹이었다.

- 사아아.

카랑클의 주먹이 백운에게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백운의 오른팔로 신비로운 빛을 띠는 비늘이 감싸지는가 싶더니.

-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굉음과 함께 퍼졌던 먼지가 걷히자 규타이의 눈에 들어온 건.

후두둑.

산산조각이 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카랑클이었다.

조금 전까지 위용을 자랑하던 카랑클의 거대한 몸은 절반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뭐에 부딪힌 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카랑클의 상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A급 이상의 카랑클 님이… 한방에…?'

먼지 때문에 자세히 보진 못했다.

하지만 분명 한 번뿐이었다.

규타이에게 들려온 굉음은 말이다.

툭툭.

먼지가 완전히 걷히자.

푸른 비늘을 휘날리며 손을 터는 백운의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필사적으로 힘을 끌어올린 것 같지도 않았다.

백운은 그저 카랑클을 부수기 전과 마찬가지였다.

마치 무슨 일 있었어? 란 얼굴이었다.

스윽.

"!!!"

묻은 먼지를 다 털어내서일까.

백운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저벅.

규타이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 * *

"지린 거 아니지?"

믿었던 데몬이 한방에 부서져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남자는 온몸이 흐물해진 상태로 바닥에 앉아있었다.

힘이 쭉 빠진 오징어 같구만. 

앉아있다기보단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더 맞는 표현일 것 같았다.

"너… 넌."

"입 닥쳐."

넌 누구냐, 넌 대체 뭐냐 같은 질문을 하려는 듯했지만.

이놈이 아까 행한 전적이 있기에 끝까지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지리기까진 안 한 거 같으니.

스윽.

쭈그리고 앉아 놈에게 몸을 기울였다.

"!!"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방금 전까지 신나서 고함 지르던 그놈이 맞나 싶었다.

"너 이름이…."

# 규타이 님, 무슨 일입니까? 규타이 님?

이름을 물어보려는 찰나.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끊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계속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으… 으."

료헤이란 남자의 물음에도 규타이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내가 앞에 있어서는 아니었다.

지금 벌어진 일을 머리가 쫓아오지 못해 고장이 난 듯했다.

"줘봐."

말과 동시에 규타이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뺏었다.

료헤이란 놈이 종교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규타이란 놈보다 위라는 건 확실하니 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 것이었다.

데몬에게 힘을 깃들인 것도 이놈이니까.

"여보세요."

아무 대답도 없는 전화기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료헤이 님? 규타이는 지금 맛이 갔거든요. 제가 대신 얘기해드릴게요."

# 잡혀온 두 명의 거역자 중 한 분이시겠군요.

침묵이 이어지던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외로 무척 차분한 목소리였다.

심각해졌다가 처웃다가 다시 지리기 직전이 된 규타이와는 확실히 달랐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타루 날린 거, 어떻게 한 거예요?"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아직 일어나진 않았으나 훗카이도를 무엇으로 날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 의외군요. 여기에 나타난 데몬은 무엇이냐, 어째서 데몬과 사람이 한 편에 서 있는 거냐, 넌 누구냐… 이런 질문을 하실 줄 알았는데요.

"뭐…."

보기 드문 장면이라고는 생각했다.

회귀하기 전에도 인간과 데몬이 협력한다는 소린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뭐랄까.

입이 떡 벌어지고 머리가 멈출 정도로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란 정도였다.

불가능이 없는 세상이야.

사로카의 어눌한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 가능성을 염두해뒀었다.

데몬과 인간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어디에선가는 이미 협력 중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니까.

공식적으론 절대 섞일 수 없어 보이던 사이도.

이해관계가 얽히며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판단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맞잡는 게 사람이었다.

"인간이 끝없는 욕심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데몬도 비슷하지 않을까 해서요. 아직 데몬 친구가 없어서 순전히 추측이긴 하지만."

데몬에게도 엄청난 탐욕이 있다는 건 로튼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금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며 쏘다니던 기고만장한 놈이었다.

# 재밌군요.

빈말은 아닌지 전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은요?"

# 그건 말씀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한테 별 의미가 없을 거 같거든요. 

의미가 없다…?

그나저나 이 새끼가 안 말해 줄 거면 빨리 말하지.

말을 길게 하고 있어.

욕을 한 바가지 해줄까 하다가 궁금했던 게 하나 더 떠올랐다.

"그럼 다음 질문. 그쪽은 원하는 게 뭐길래 데몬한테 바짝 기면서까지 힘 셔틀이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필요한 질문엔 답해 줄 거 같지 않았기에.

더 이상 존댓말 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질문은 그저 순수한 궁금함이었다.

대체 뭘 얻길래 데몬에 편에 서 자국의 영토와 150만이란 인구를 몰살하려는 걸까.

# ….

대답을 생각 중인지 아니면 힘 셔틀이라 해서 화가 난 건지.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 살기 위해서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았다.

독심술이 있는 건 아니지만 료헤이의 목소리엔 진심이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다.

# 아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겠죠. 당신이 지금 살아 있다는 건 겪어 온 모든 전투를 이겼다는 걸 뜻하니까요.

맞는 말이라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그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료헤이에게 귀를 기울였다.

# 그 알량한 승리의 경험이 당신을 오만하게 만든 겁니다.

"뭐?"

# 그런 면에선 저와 당신은 비슷합니다. 저도 한때는 당신 같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오만을 떨 때가 있었거든요. 절대 닿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요.

… 피식.

료헤이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한정된 경험에 갇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일까?

적어도 나는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네.

"내기할래? 네가 말하는 그 존재한테 내가 닿을 수 있나 없나. 난 내가 닿을 수 있다에 전재산을 걸지."

# 풉… 푸하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긴지 한참이나 웃는 료헤이.

# 이거 참… 정말 아쉽네요. 흥미롭고 재밌을 것 같은 내기였는데.

…?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달라진 료헤이였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던 방금까지와는 달리.

숨겨왔던 본색을 드러내듯 싸늘하게 변해버린 목소리.

# 내기란 게 상대가 살아 있어야 성립이 되는 거니까요.

의미 모를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규타이를 쳐다봤다.

이놈 역시 료헤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 하신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곧 사라질 테니까요. 대답 대신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설마.

# 약소하게나마 직접 겪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아니, 우리 구원교가 따르고 있는 분의 힘이니까요.

뚝.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우우웅…!!

구조물에 모여있던 기운이 다목적실 천장으로 치솟았다.

카랑클에게 깃들었던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천장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쿠구구구구!

천장 때문에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떠한 힘이 순간적으로 하늘에 나타났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하늘에 나타난 무언가는 오타루를 날린 것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훗카이도를 날릴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휙.

이런 미친놈이…!

"…?"

규타이와 신도들은 지금도 멍한 얼굴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

저들은 머리 위에 뭐가 떠 있는지, 이제 곧 무슨 닥칠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뭔진 몰라도 올라갔던 기운이 전부 흡수된 모양이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향해 오타루를 날렸던 힘이 쏘아질 것 같았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스아아아…!

"뭐… 뭐야!?"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 연기가 뿜어지자 규타이와 신도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런 녀석들을 한 번 바라본 후.

파앙!

연기를 터뜨려 미라코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예상 밖의 돌발상황만 일어나서인지 눈이 한껏 커져 있는 미라코였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요, 실례."

"…!"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미라코를 어깨로 들쳐 멨다.

"좀 빠를 거예요."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것의 정체는 나가봐야 알겠지만, 파워가 엄청날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에.

파아아앙!!

연기를 최대치까지 모아 한 번에 터뜨렸다. 

다목적실 밖으로 나가야 했다.

"!!!"

어깨를 꽉 움켜쥔 미라코의 손에서 비명도 안 나오는 수준의 공포가 느껴졌지만.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방어막이 되어 줄 수 없는 천장의 위로.

콰아아아아아!

이곳을 날려버릴 무언가가, 쏘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225화. 수색

눈앞으로 나타난 벽으로 발을 뻗었다.

콰앙!

문을 찾고 있을 시간따윈 없었다.

건물 하나 정도는 게눈 감추듯 깔끔하게 날려버릴 수 있는 에너지였다.

쾅. 쾅.

깊이도 들어왔네!

쾅!

마지막 벽을 뚫어내자 바깥의 공기가 뺨을 스쳤다.

순간이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공기조차 떨리고 있었다.

파앙!

다시 한번 연기를 터뜨리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 했다.

"배… 백운 님."

미라코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등 너머를 보고 있는 미라코였기에.

지금 하늘에 나타난 게 뭔지 보고 있을 터였다.

나도 보고 싶다!

너무 빠른 속도로 쏘아지고 있었기에.

지금 당장은 고개를 돌릴 틈이 없었다.

싸이비들의 다목적실이 나름 도시에 위치하고 있던 탓에 피해야 할 건물이 많았다.

콰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굉음이 들려왔다.

안 돌아봐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묶여 있었던 다목적실은 이제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아…."

왠지 모르게 망연자실한 목소리였다.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광경을 보고 있는 듯한 목소리.

사아악…!

이 정도면 됐겠지.

속도를 줄이며 몸을 돌렸다.

"허."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직접 보고 나니 미라코의 반응이 이해가 됐다.

원형 기둥 모양을 한 에너지의 결집체였다.

하늘에서 쏘아져 그대로 건물이 있던 위치로 꽂히고 있는 에너지.

콰가가아아아…!!

건물이 사라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에너지의 도착지에서 시작된 폭발이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후우우웅…!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후폭풍으로 인한 바람이 닿을 정도이니.

도시 안에 있던 건 전부 소멸했다고 봐야 했다.

저건 또 뭐냐.

사라지고 있는 도시에서 에너지가 떨어진 하늘로 시야를 옮겼다.

저게 뭔지 직관적으로 와닿진 않았으나, 형태만 봤을 땐 무언가의 손이었다.

불량식품 색이 떠오르는 푸르딩딩한 파란색 손.

두꺼운 갑주 같은 걸로 덮인 손이었고, 그 손의 중앙에서 에너지가 쏘아지고 있었다.

데몬이라면… 어디서 쏘고 있는 거야.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주시했지만.

보이는 건 덩그러니 떠 있는 거대한 손과 약간의 손목뿐이었다.

일렁.

문… 인가.

자세히 보니 손목이 나타난 하늘은 미묘하게 일렁이는 중이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열렸던 포탈이 떠오르는 모양새였다.

손이 저만하면 얼마나 크다는 거야.

아직 실체를 본 건 아니기에 100%라 할 순 없지만.

하늘에 드러난 손목과 손을 보고 있자니 무기일지도 모르겠단 희망은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에너지를 쏘아내면서도 손은 묘하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갑주 사이사이로 굵직굵직한 핏줄까지 보이는 걸 보니 살아있는 무언가의 손이었다.

오싹.

도시를 지우고 있는 에너지를 보고 있자니.

망자의 세계에서 카사락이 쏘아냈던 힘이 떠올랐다.

느껴지는 것만 봤을 땐 지금 도시에 떨어지고 있는 에너지보다 몇 배는 강력했었다.

막아야 하니까 일단 달려들고 본 건데.

나도 저렇게 지워질 뻔한 건가.

"어떻게 이런 게… 도시가 없어지다니."

미라코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네요."

건물에 있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끌려가던 중 봤던 도시의 사람들도 반응을 봤을 땐 같은 종교에 속해있었다.

료헤이란 놈, 보통이 아니네.

단순히 떨어진 에너지가 강해서는 아니었다.

료헤이가 꼬리 자르기를 위해 망설임 없이 한 행동이 놀라웠다.

구원교의 일부분과 구조물을 발견한 나를, 추가로 정보를 더 뱉을 수도 있는 규타이를 없애기 위해 도시를 날려버리다니.

"저건 대체 뭘까요?"

"글쎼요."

에너지를 다 쏘아내서일까.

하늘에 내밀어졌던 손은 다시 균열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저걸로 날린 거구나.

당장 저 손의 정체를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틀 뒤 훗카이도의 1/3을 날리며 1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건.

조금 전 하늘에 나타났던 저 손이 주인이었다.

스윽.

"미라코 님, 기지로 돌아가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기에서 알아낼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손이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도시도 폐허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아까 건물에 있던 구조물 보셨죠?"

"네… 네."

"그게 방금 쏘아진 에너지의 원천이고, 분명 더 있을 거예요."

"!!"

훗카이도의 피해를 생각했을 때 준비된 구조물은 한두 개가 아닐 터였다.

분명 여러 개의 구조물이 분산되어 숨겨져 있을 터였다.

"찾아야 해요."

* * *

"주의를 주겠습니다. 계획되지 않은 걸 시도 때도 없이 요청하다니."

굼벵이를 닮은 데몬, 포이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 료헤이로부터 다급한 요청이 왔었다.

오타루 근처의 작은 도시로 헤키리스의 힘을 사용해달란 것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것 같습니다. 겨우 힘을 조달하는 게 전부인 놈이."

포이카는 료헤이의 이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쓸만한 건 인정하겠으나.

자신이 모시고 있는 군주에 대한 예의는 다시 배울 필요가 있었다.

"놔둬라."

"…!"

뜻밖의 대답에.

눈이 커진 포이카가 고개를 들었다.

급하다고 하니 일단 말을 들어주긴 했지만, 헤카리스 역시 비슷한 이유로 기분이 얹짢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포이카의 눈에 들어온 헤키리스의 얼굴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까드득… 까드득.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헤키리스.

헤키르스의 미소는 만족감에 의해 그려진 것이었다.

'마음에 드는군.'

헤키리스가 조금 전의 감각을 떠올렸다.

료헤이가 준비한 구조물을 통해 흘러들어온 엄청난 양의 에너지.

이미 한 차례 사용한 적이 있었으나 여전히 색다른 힘이었다.

'이 정도까지 날 강하게 만들어 주다니.'

료헤이의 힘을 받기 전에도 헤키리스는 지하 공당의 절대적인 군주였다.

사고 체계를 지닌 데몬이 인간의 눈을 피해 숨어드는 장소, 지하 공당.

생각과 판단이 가능한 만큼 본능에 이끌려 날뛰기만 하는 여타 데몬과는 수준이 다른 개체들이었다.

그런 데몬들이 모이다 보니 초기의 지하 공당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었다.

스스로가 우월한 개체라는 걸 알고 있는 데몬들이 모였으니 쉽게 서열 정리가 되지 않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꿇어라, 죽이진 않을 테니.

피 냄새가 들끓으며 강한 개체만이 살아남았던 시절. 

그랬던 공당의 서열을 단숨에 정리하고 왕좌를 차지한 게 헤키리스였다.

- 살려… 줘.

- 크… 크르륵.

말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헤키리스에게 덤볐던 모든 데몬이 무릎을 꿇으며 목숨을 구걸했었다.

까드득.

이미 그만큼 강력했던 헤키리스인데도.

료헤이는 그걸 넘어 헤키리스가 도저히 닿을 수 없었던 경지까지 힘을 끌어 올려 준 것이었다.

'일부분 모아놓은 힘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포이카가 열어 준 포탈의 너머로.

헤키리스는 자신이 행한 일을 똑똑히 봤었다.

그저 손 한 번 까딱였을 뿐인데 도시 하나와 그 안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소멸했다.

- ….

자신에 의해 가루가 되어버리는 존재들을 보며.

헤키리스의 머리로 한 가지 단어가 떠올렸다.

신.

그야말로 신의 손짓이었다.

모든 공격으로부터 완전무결한 몸을 가짐과 동시에.

앉은 자리에서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는 힘.

자신은 단순한 공당의 군주가 아닌, 신이란 경지로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틀 뒤, 수많은 이의 믿음과 충성을 바탕으로 헤키리스 님은 신이 되실 겁니다.

씨익.

'이틀 뒤, 난 신으로서 첫 발자국을 내디딜 것이며.'

헤키리스의 입가가 양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훗카이도는 세계에 나의 존재를 알리는 희생양이 될 것이다.'

* * *

기지의 상황실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꼴깍.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가는 침묵이었다.

괜히 따라 들어왔나.

예상했던 대로 도착한 기지는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오타루에 이어 도시 하나가 또 사라져 버렸고, 이번엔 전과 달리 인명 피해까지 있었다.

싸이비 종교에 소속된 놈들.

구하고자 했다면 무리더라도 에너지를 막으려 노력해봤겠지만.

밖으로 나오기 전까진 어떤 게 떨어지고 있는지 몰랐었고, 미라코까지 함께 있는 상황이었기에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었다.

구할 가치가 없기도 하고.

오타루에 이어 이틀 뒤엔 훗카이도를 날리는데 가담하고 있는 인간들이었다.

데몬에게 인간을 바치면서 눈 하나 깜짝 안 한 놈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료코 님과 국가 입장에선 아니겠지.

아무리 싸이비 종교라 해도 자국민이었다.

정확히 몇 명인지 집계되진 않았어도 적지 않은 수가 소멸해버렸으니.

기지에 비상이 걸린 것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 방에 그렇게 됐다는 거죠?"

료코가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되묻자.

미라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상세히 설명을 해 나갔다.

….

설명이 끝나자.

"그렇군요. 하늘에서 쏘아 도시를 날리는 힘이라."

료코가 미간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다는 걸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힘이긴 해.

방금 봤던 힘을 봤을 때 대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늘에서 나타난 불명확한 포탈과 그곳에서 갑자기 등장해 도시를 날려버리는 무언가의 손바닥.

심지어 손바닥의 등장을 감지한 후 에너지가 쏘아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속수무책.

순식간에 도시를 날릴 정도로 막강한 힘인 건 알지만 대처할 수단이 없으니. 

료코의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가진 단서는 힘을 모아둔다는 구조물과, 힘을 모으는데 구원교라는 종교 단체가 관랸됐다는 것뿐이군요."

생각을 마친 건지 료코가 모여있는 간부들을 둘러봤다.

"고민할 시간도 아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지에 있는 인원만으론 부족할 거 같으니 정부에 증원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동안."

료코가 화면에 띄워진 지도를 보며 각 도시를 가리켰다.

훗카이도 주변에 모인 도시들이었다.

"기지의 인원을 총동원해서 도시를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종교의 규모가 작지 않은 만큼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다들 방심하지 말고 샅샅이 수색해달라고 전달해주세요. 아무리 작은 도시 하나라고 해도 통째로 종교에 넘어갔었다면… 집단적으로 구조물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간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목격자로 불려왔던 미라코도 자리에서 일어나 료코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저벅.

"백운 님."

지나가던 미라코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도 정신이 없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백운 님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예요."

다시 한번 꾸벅 숙이는 미라코에.

뜨끔.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인사를 받을만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마음만 먹었으면 오타루에서 충분히 안 잡혀갈 수 있었으니까.

"하… 하… 별말씀을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미라코가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고 상황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나가볼… 응?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둘이 남길 기다렸는지 료코가 내게 걸어왔다.

"백운 님."

평소보다 더 진중한 표정으로 앞까지 걸어온 료코.

료코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226화. 료코의 제안

"끄어어!"

상황실을 나와 기지개를 켰다.

뿌드득!

무거운 분위기 속에 오래 앉아 있어서일까.

어깨와 등에서 시원한 소리가 들려왔다.

"음!"

빠지기 직전까지 쭉 폈던 팔을 내리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기지 사람들을 바라봤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늦은 시간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곧장 투입되려는 것 같았다.

톡… 톡.

손가락을 두드리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렇게 봐서 알 정도면 간첩이란 단어가 아깝겠지.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전 상황실.

료코는 기지 내부에 구원교의 첩자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 원래라면 에너지가 발생한 순간 신호가 왔어야 합니다.

기지에선 넓은 반경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탐지하고 있었다.

이번에 날아갔던 도시 역시 탐색 범위에 들어와 있었기에.

에너지가 쏘아지기 직전에 기지로 알림이 왔어야 정상이었다.

- 알림이 울리지 않았습니다.

료코는 기지에서 도시의 소멸을 알아챈 건 그 이후의 일이라고 말했다.

위성에 의해 관측이 되었고, 화면을 받았을 때 도시는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다는 것.

- 에너지가 탐지되었다면 동류의 에너지를 추적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며 료코는 흩어져 있는 간부와 병사들을 둘러봤었다.

더 듣지 않아도 다음 말은 알 것 같았다.

내부에서 정보 흘리기를 넘어 강경 행동까지 취하는 첩자가 있다는 것.

구원교에 소속된 군인이라.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건 상황실뿐이었고.

상황실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 중 최근 1, 2년 사이에 입대한 이는 없었다.

한쪽으로 단정 짓기는 힘들겠어.

훨씬 전에 구원교에 있다 군인이 되었던지, 군 생활을 하던 도중 포섭되었던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찾으려면 고생 좀 하시겠네.

당연하지만 첩자를 찾는 건 내가 아니었다.

처음엔 내게 첩자를 찾아달라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내가 무슨 수로 찾겠어.

온 지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함께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료코가 내게 하고자 한 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료코 역시 얼마 전에 기지로 온 외부인인 건 마찬가지.

누가 첩자인지 감도 안 오는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마무리될 때까지라 해도 어차피 이틀이지만.

물론 이틀 뒤에 훗카이도가 날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건 나밖에 없었다.

슥.

턱을 괴고 기지에서 빠져나가는 차량들을 응시했다.

이미 최악의 사태가 임박했다 가정하고 최대한 신속히 움직이고 있는 료코와 군이었다.

처음엔 잠깐 고민했었다.

내가 회귀로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알려 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알려 줄 방법은 많으니까.

별의별 각성자가 다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일본으로 오기 전 우연히 만난 예지 능력자에게 들은 거라고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었다.

의미가 없어.

이틀 뒤 훗카이도와 150만 인구가 소멸된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어디서 어제 봤던 손이 등장하는지, 그 규모는 어떠한지, 막기 위해선 무얼 미리 해야 하는지 등.

날짜를 제외하고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구조물의 힘을 빌리고 손에서 빔 뿜어지는 것도 이번에 안 사실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

"흐음."

입으로 작은 한숨이 나왔다.

처음에 3일을 기다려 보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훗카이도를 날린 게 무기라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거라면 들른 김에 집어 갈까 해서였다.

데몬이겠지.

카랑클을 강화했던 료헤이의 힘과 하늘에 나타난 손을 봤을 때 훗카이도를 날린 건 데몬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어도 의미는 없어.

손에선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황금색은 고사하고 보라색도 보이지 않았다는 건 무기고에 넣을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즉, 내가 기다리고자 했던 이유는 에너지를 쏘아내는 손을 목격하며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 ….

그래서였다.

기지에 미라코를 내려주고 상황실에서 브리핑을 들으면서도.

떠날까 말까를 계속 고민한 것은 말이다.

내가 무슨 정의의 히어로도 아니고.

애초에 이곳은 한국도 아니었다.

원래도 애국심이란 게 거의 없다시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여기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사명감 같은 게 존재할 리 만무했다.

인류애도 아니지.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없다 생각한 가장 큰 이유였다.

불살주의라거나 인류의 희생을 용납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내가 남아 있다고 훗카이도가 사라지는 걸 막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훗카이도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이었다.

없지만.

- ….

난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었다.

나 자신인데도 현재의 마음을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150만.

이틀 뒤에 하늘에서 쏘아진 에너지에 사라질 숫자였다.

기사에서 봤던 숫자를 가볍게 읊고 있긴 하지만, 결코 작은 수가 아니었다.

여기도 사라질 거고.

아는 사람이라 할 만한 건 료코와 만난 지 하루 된 미라코 뿐이지만.

어쨌든 이들도 150만에 포함될 확률이 높았다.

거기다.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 보장은 불가능하지만, 못 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쏘아지는 위치만 특정할 수 있다면 오히려 할 수 있다에 훨씬 무게가 실렸다.

이틀.

굳이 내가 잃는 걸 따진다면 이틀이란 시간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난 여길 외면하고 이대로 떠나는 게 옳은가? 에 대한 고민이 내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 사로카부터 백운 님께 받은 게 정말 많습니다. 이번마저 염치없이 그럴 생각은 없고요.

좋은 타이밍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 마음에 턱을 문지르고 있을 때 료코는 말을 걸어왔었다.

자신의 권한이 닿는 선에서 무얼 원하든 다 들어주겠다는 제안과 함께였다. 

듣는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고나 할까.

- 슥슥.

시원하게 소화가 된 것 마냥 손으로 가슴팍과 배를 몇 차례 쓸어내렸었다.

가!? 말어!? 하던 고민 역시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졌었다.

대신 료코에게 뭘 말할까에 대한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 지금 바로 말씀드려도 되나요?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었다.

내가 원하는 건 명확했기 때문이다.

- 네… 네, 말씀하세요.

이렇게 바로? 라는 듯한 놀란 얼굴로 말하라는 료코에.

지체 없이 입을 열었었다.

- 제가 원하는 건.

* * *

"알겠습니다. 계속 보고 부탁드립니다."

료헤이가 전화를 끊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

직접 들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보고였다.

도시로 잡혀갔던 두 명의 인원이 무사 복귀했으며.

구원교의 구조물과 헤키리스의 손에 대한 이야기까지 알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뭘 들은 거지?'

구조물이 알려진 건 분명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제부터 군이 구조물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료헤이가 핀치에 몰려 난처해지는 건 아니었다.

이틀.

이제 이틀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몇 년 전부터 준비한 걸 이제 와서 알아차렸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거기다 이미 다 대비가 되어있고 말이다.

까득.

료헤이의 인상이 찌푸려진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기지에 심어 놓은 내부자가 이름을 알려왔었다.

한국의 10급 헌터, 백운.

백운이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규타이와 함께 있었는데.'

헤키리스의 심판이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백운은 건물 안에 있었다.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복귀라니.

-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합니다.

"하."

료헤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범위에 들어가는 사람은 물론이요 도시까지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헤키리스의 심판이었다.

심판의 목표물임과 동시에 도시의 한복판에 있던 자가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순간이동이 가능한 각성자인가."

잠시 생각하던 료헤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말이 안 되는 가정이었다.

'불가능하다.'

자신의 힘으로 직접 강화한 카랑클이었다.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이동기 각성자가 잡을 수 있는 데몬이 아니었다.

- 콰아앙!

그렇다고 마냥 부정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백운은 카랑클을 쓰러뜨렸고, 헤키리스의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았다.

- 내기할래? 네가 말하는 그 존재한테 내가 닿을 수 있나 없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화를 통해 백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 치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던 목소리.

이게 왜 지금 떠오른 건진 알 수 없었다.

'….'

휙휙.

료헤이가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다.'

몸을 돌린 료헤이가 방으로 향했다.

말도 안 되는 가능성.

분명 그럴 거라 생각하면서도, 료헤이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 * *

"후후."

기대되는구만.

걸음을 옮기며 료코에게 말했던 걸 떠올렸다.

내가 가장 원하며 가지고자 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무기.

그래서 별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가져간 유물들이 있는데요.

과거 유물관에서 일했기에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지겹게 반환 요청을 하고 있음에도 종말의 날이 온 그때까지도 반환하지 않은 유물이었다.

안 주겠단 거지.

그저 모르쇠로 일관한 일본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려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단순히 유물을 돌려주는 게 아닌, 국가의 자존심과도 연관되는 부분이라 더 의지를 다진 느낌이었다.

-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들여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가져간 거 다 돌려주세요! 라고 요구하진 않았다.

한국 입장에선 정당한 요구일지언정 현재 나와 료코에게 있어선 부담을 넘어 무리한 요구가 될 터였다.

- 유물요…?

뜬금없는 요청이어서일까.

료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었다.

그럴 만도 하지.

료코는 내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뜬금없이 유물 보관소를 보여달라고 하니 의아한 것이었다.

하나쯤은 있을 거야.

보관소를 보여달라고 한 이유였다.

유물관에서 일하며 파악한 바로는.

일본이 가져간 유물 속엔 조선 장수들의 물품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가짓수가 적지 않다 보니 어느 장수의 유물이 있다 특정 지을 순 없으나.

분명 장수들이 사용하던 무기가 섞여 있을 확률이 높았다.

찾아야 하는 무기 리스트를 정리할 때도 좀 아쉬웠었지.

리스트에 넣기가 뭐랄까, 참 애매했었다.

어디에 보관 중인지, 접근은 할 수 있는지 등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국가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였다.

일본이 가져간 유물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 후순위에 두기로 한 것은 말이다.

- 문화재청 장관과 가까운 사이입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하겠습니다.

의외의 곳에서 방법이 생겼구먼.

물론 막상 들어갔더니 황금빛은 고사하고 보랏빛조차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쉽겠지만 적어도 유물 속에 무기가 없다는 건 확인한 거니까.

아예 수확이 없는 건 아니야.

무기 혹은 단서가 없을지언정.

불확실성 하나가 해소되는 것이었기에 들여보내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저벅.

유물 속에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무기가 있기를 바라며.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진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내가 배정받은 구역을 응시했다.

싸이비 잡으러 가볼까.

227화. 구원교는 이미

"안돼!!"

"멈춰라!"

뒤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안되긴."

스으….

"뭐가 안돼."

쾅!

"끼아아아악!"

"으아아아!"

"천벌 받을 놈!"

구조물을 시원하게 때려 부수자.

그러지 말라던 신도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나라라도 잃었나 싶을 정도였다.

양심 없는 새끼들이네.

나라를 날리려는 놈들이 저리 서럽게 절규하고 있다니.

싸이비 종교가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악마 새끼!"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누가 보면 내가 나쁜 놈인 줄 알겠네.

역시 나쁜 놈은 상대적인 거야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

구조물은 부쉈으니 싸이비들을 잡아가라고 해야 했다.

툭툭.

손을 털며 박살 나 있는 구조물을 바라봤다.

다섯 개.

기지에서 나와 내가 부순 구조물 개수였다.

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 거야.

처음에 배정받았던 도시를 중심으로 수색 범위를 넓혀 가는 중이었는데.

들르는 곳마다 구조물이 있었다.

이전처럼 도시 전체가 신도화 되어 있진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모양이야.

괜히 훗카이도의 1/3이 날아간 게 아니었다.

준비한 시간에 비례하여 구조물도 쌓여 있을 터.

지금 적중률대로라면 앞으로 몇 개의 구조물이 더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그아아악! 날 죽이고 가라 이 새끼야아아악!"

으.

귀가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고 있는 아줌마를 바라봤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저 아줌마도 10분 전까지는 멀쩡했었다.

- 네…? 구원교요?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뭐냐며 순박한 얼굴로 되물었던 아줌마.

전부 동일한 강사한테 배운 건가 싶을 정도로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이었다.

- 이 거역자 새끼가!!

- 악귀 새끼야! 천벌을 받을 거다!

아줌마의 순박한 얼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구조물을 발견하기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군에서 잡아갈 게 아니라 엑소시스트가 필요한 거 아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나름 꽁꽁 숨겨 놔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근처로 가면 여지없이 페샨의 눈이 발동되어 구조물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 각 지역으로 파견된 군에서도 구조물을 발견하여 파괴 중입니다.

기지의 작전은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의외야.

어디에 구원교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첩자에 의해 정보가 조작되거나, 일부러 구조물을 발견하지 못하게 잘못 인도하거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과한 우려였나 싶을 정도로 수월했다.

스윽.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하루가 지나버렸다.

최대한 빠르게 돌고 있다곤 하나 지역마다 절대적인 거리가 있으니.

어느 정도의 고정 시간은 계속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 남은 건가.

물론 24시간이 온전하게 남은 건 아니었다.

훗카이도를 날린 에너지는 내일 중에 떨어질 터였다.

그게 0시를 넘은 직후가 될지, 아침이 밝은 뒤일지, 해가 질 때일지는 알 수 없었다.

파워가 훨씬 약해졌길 바라야지.

내일 전까지 모든 구조물을 부수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최대한 많은 구조물을 부수어 떨어지는 에너지를 막지 못하더라도 피해가 최소화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 나쁜 샠…."

쩌억!

겁을 상실한 건지 옆으로 호다닥 달려드는 신도를 쳐내며.

다음 도시로 걸음을 옮겼다.

* * *

고오오오오.

묘한 흥분과 함께 정적이 흐르는 공당.

왕좌에 앉은 헤키리스가 앞에 모인 데몬들을 훑었다.

에너지가 떨어지기 직전 전야제를 벌일 데몬들이었다.

"크륵… 크르르."

정적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헤키리스의 허락이 없어 공당을 못 나간 지 한참이 되었기에.

모두가 살육과 피에 잔뜩 목말라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헤키리스에게 선택되어 전야제에 나갈 수 있게 됐으니.

곧 펼쳐질 피의 향연에 흥분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준비는 다 되었는가, 나의 종들이여."

나지막한 헤키리스의 음성에.

"크아아아악!"

"키아아악!"

곳곳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중엔 말을 할 수 있는, 붉은 갑주의 사로카와 비슷한 등급인 데몬도 섞여 있었다.

"포이카, 포탈의 준비는?"

왕좌 옆에 서 있던 포이카가 고개를 숙였다.

"완료되었습니다."

힘이 닿는 범위에선 어느 곳에라도 포탈을 열 수 있는 능력.

특별한 전투 능력이 없는 포이카가 헤키리스 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포탈의 크기가 거리에 반비례해 줄어들긴 하지만, 데몬을 뿌리고 헤키르스의 손을 내보내는 데는 충분했다.

"료헤이도 준비를 거의 끝마쳤다고 합니다. 곧 헤키리스 님께 몇 년간 모아둔 힘을 보내올 겁니다."

헤키리스가 흡족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몹시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지금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인간을 소멸시키면서 말이다.

"인간들의 방해가 있다고 들었는데."

"구조물의 존재를 파악하고 병력이 배치되었지만, 별문제는 없습니다."

포이카가 한쪽 손을 펼쳐 보였다.

"지금까지 파괴된 구조물은 다섯 개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열 개가 더 부서져도 대세엔 전혀 지장 없을 숫자였다.

"곧 사라질 놈들이니 따로 손 쓸 필요는 없겠지."

헤키리스가 대답하며 대기 중인 데몬들을 바라봤다.

데몬들은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나를 알리는 첫 무대가 될 것이다."

스윽.

왕좌에서 일어난 헤키리스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먼저 가서 피를 흩뿌려라! 열등한 종족과 우리의 차이를 알려라! 저들이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때쯤."

씨익.

헤키리스의 입가로 소름 돋는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심판을 내릴 것이다."

* * *

오 이미 와있었네.

조금 전 떠난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루모이 시.

도착하니 이미 적지 않은 병력이 각 구역 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백운 님이시군요."

기지에서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친 남자였다.

먼저 아는 척하며 다가온 남자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삿포로 본부 소속 중령, 마츠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여기에도 구조물이 있었나요?"

마츠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들었다.

"몇 시간 전에 도착해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일곱 개 정도의 구조물을 파괴했습니다."

한 곳에만 일곱 개라니.

정말 더럽게 많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백운 님도 구조물을 파괴하고 오시는 길이군요."

"네, 큰 규모의 도시나 마을이 아닌데도 하나씩은 꼭 있더라고요."

마츠다가 침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구원교 놈들의 손길이 어디까지 뻗어있는 건지 가늠이 안 되는군요."

"그러게요. 생각보다 오래 준비한 모양이에요."

저벅.

대화를 나누며 시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기는 더 이상 조사하실 게 없을 겁니다. 주변 도시들도 병력이 전부 배치가 완료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생각보다 엄청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네요."

"예, 구원교도 구조물이란 존재를 들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구조물들이 생각보다 허술하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마츠다의 말이 잠시 날 멈칫하게 만들었다.

허술…?

여기까지 오며 찾아낸 구조물들은 모두 꽁꽁 숨겨져 있었다. 

쉽게 찾아낸 건 온전히 킹냥이의 눈 덕분이었다.

페샨의 눈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했을 정도로 잘 숨겨진 곳도 적지 않았던 것.

"일단 본부로 보고하겠습니다. 아직 조사하지 못한 도시가 있는지요. 백운 님은 기지로 복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츠다가 세상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

그런데 어째서일까.

분명 사람 좋은 얼굴임에도, 오며 만났던 싸이비 놈들이 떠오르는 것은.

사아아.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날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묘했다.

몇 명씩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군인들.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모습이지만, 어렴풋이 느껴지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 쏠려있다는 것을 말이다.

저벅.

"…!"

알게 모르게 앞을 막아섰던 마츠다를 지나.

도시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루모이라, 눈 오고 나서 보면 엄청 예쁠 풍경이네요."

"하하 그렇죠. 특히 눈이 왔을 때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마츠다는 당황하고 있었다.

….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시야에서 벗어 낫다고 생각한 걸까.

간간이 들려오던 대화 소리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마츠다 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저벅.

몇 걸음이나 더 걸었을까.

스르르.

페샨의 눈이 발동하며.

눈앞 건물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구조물에서 뿜어지는 기운이었다.

심지어.

스으으…!

한두 개가 아니었다.

깊이 들어온 게 아님에도.

눈으로 보이는 것만 네 개였다.

"백운 님?"

날 부르는 마츠다에 걸음을 멈췄다.

시선은 계속 정면을 바라본 채였다.

"부쉈다고 하신 구조물들이."

스윽.

뒤를 돌아 날 바라보고 있는 마츠다의 눈을 응시했다.

"왜 다 남아있는 걸까요?"

"…."

나도 모르게 오싹함이 들 정도로.

마츠다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웃음이 빠르게 지워졌다.

하.

마츠다 뿐만이 아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날 신경 쓰지 않는 척하던 병사들 역시.

지금은 연기를 그만두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엄청나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첩자가 있을 거라는 건 료코의 말을 들으며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작은 도시라 해도 전체를 물들였던 놈들이고, 준비한 시간도 적지 않았다.

군이라고 해서 구원교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한 합리화였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비단 내 앞에 있는 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여기도 이 꼬라지라면 다른 곳에 배치된 병력도 비슷한 상황일 터.

지금까지 구조물을 파괴했단 보고는 신뢰할 수 없게 됐다.

어쩌면 제대로 구조물을 부순 건 나뿐일 수도 있겠어.

살짝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최대한 에너지가 쏘아지는 시점에 막아내 볼 생각이긴 했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도 대비해야 했기에.

줄어드는 구조물 수를 들으며 약간이나마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조용히 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싸늘하게 식은 마츠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 무덤을 판 거다."

말을 마친 마츠다가 손을 들어 올리자.

철컥. 철컥. 철컥.

바라보던 병사들이 각자 무기를 집어 날 조준했다.

"…."

그런 마츠다와 병사들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구제가 불가능한 놈들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싸이비를 선택하지 않는 편이 너네한테도 훨씬 좋았을 텐데."

"뭐?"

"되물을 필요 없어, 왜인지는."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이제부터 알려 줄 테니까."

228화. 에너지가 떨어지는 곳

삐빅. 삐비빅.

"…!"

들려오는 알림음에 료코가 몸을 일으켰다.

"에너지가 감지됐습니다!"

상황실엔 거대한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에너지가 감지 될 때마다 붉은 점이 찍히는 모니터였다.

삐빅.

"한곳 더 발생했습니다."

삐빅. 삑. 삑…!

"한곳… 아니 여러 곳에서…!"

기지에 남아 상황실을 돕던 미라코가 입을 벌렸다.

모니터에 찍히는 붉은 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잠시만요, 저기는 아까 보고 받은 곳인데요."

모니터를 보고 있던 료코가 한 지점을 가리키자.

미라코가 들어왔던 보고 일지를 검색해나갔다.

"2시간 전 구조물을 파괴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미라코의 말을 들으며 료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처 발견하지 못해 남은 건가…?'

삐빅.

"저… 저곳도 마찬가지입니다."

료코가 늘어나는 점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늘어가는 속도와 숫자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구조물을 파괴했다고 알려 온 모든 지역에서 에너지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설마.'

머리로 떠오르는 가능성에. 

온몸으로 퍼지는 싸늘함을 느끼며 료코가 마른침을 삼켰다.

있어선 안될 일이었다.

만약 떠올린 가능성 대로라면.

지금까지 들어온 모든 보고를 신뢰할 수 없었다.

"장관님, 알림이 잘못 됐을 확률은… 없습니다."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은 료코의 마음을 알아채서일까.

모니터링 하던 간부 한 명이 말을 건네왔다.

각 구역에 탐지기를 설치하며 테스트를 마친 장본인이기도 했다.

"각 구역으로 배치된 병력 리스트 주세요."

"네… 네!"

간부에게 리스트를 받은 미라코가 료코에게 달려갔다.

사락.

료코가 심각한 얼굴로 리스트를 훑기 시작했다.

'병력 배치를 구성한 건 마츠다 중령.'

각 지역으로 배치된 인원을 살피던 중.

무언가를 발견한 료코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상황실 인원 몇 명이 비어있었다.

'상황실 인원을 수색대에 배치시켰다…?'

이상한 일이었다.

인원들이 상황실에 배치된 건 저마다의 각성 능력을 고려해서였다.

'전투 능력도 없는 인원을?'

누가 아군이지 적인지조차 알기 힘든 상황이었다.

분명 리스크가 있는 수색 작전임에도 상황실 인원을 데리고 갔다는 건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현재 기지에 남은 병력은 얼마나 되죠?"

"남은 인원은."

간부 한 명이 각 소속별 인원을 보고하자.

료코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갔다.

병력의 배치 시점.

마츠다 중령에게 들었던 인원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기지에 남아있었다.

'동원 가능한 모든 인원을 수색대로 배치하라 했는데도… 전투 각성자는 남겨두고 상황병을 데려갔다?'

아찔한 기분에 료코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긴급 대응 특성상 료코는 처음 보는 군이나 기관으로 배치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노력했었다.

갑자기 배치되어 권력으로 짓누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기존 권한을 존중하며 규합하여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이 이번엔 독이 되어 료코에게 돌아왔다.

'실수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후우."

이마를 짚으며 료코가 고개를 들었다.

료코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실 인원들.

다들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마츠다 중령을 포함… 구조물을 찾으러 나간 모든 인원이 구원교였던 거예요."

"…!!"

"네…?!"

예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인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고대로 파괴된 건 백운 님이 간 지역 뿐입니다. 나머지 구조물은 모두 살아있다 봐야 할 거 같고요."

삐빅! 삐빅!

미친 듯이 울리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감지가 된다는 건 발생한 구조물의 에너지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단 이야기였다.

"에너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상황실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모두가 직전에 일어났던 포격의 결과물을 본 상태였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되지 않는 에너지가 모이고 있으니.

지난 두 번과는 비교 불가한 사태가 벌어질 터였다.

스윽.

료코가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현재 상황을 백운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틱… 틱.

"이런… 혹시 통신기기 상태 좀 알 수 있을까요?"

료코의 물음에 분주히 움직이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전화기를 포함 모든 통신기기 먹통입니다."

"…."

훗카이도 전역에서 움직이는 에너지의 파장 때문인듯 했다.

외부에서 기지로의 통신은 물론, 기지에서 외부로 뻗어나가는 통신까지 먹통이 되어버렸다.

"에너지가 모이는 곳, 추적 가능한가요?"

"네… 네! 해보겠습니다."

톡… 톡.

료코가 초조한 마음으로 담당 간부의 분석을 기다렸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추적이 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기지에 남은 인원 중엔 일본의 1급 및 2급 수준의 인원도 여럿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도시를 날릴 정도의 에너지에 어떻게 대응 지시를 해야 할지는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이건 백운 님이라도… 불가능해.'

에너지가 도시를 날리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일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만큼 말도 안되는 화력이었기에.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다 해도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웨에에에에엥…!

"…?"

상황실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발생하고 있는 에너지와는 상관없는 울림이었다.

"장관님! 데몬입니다!"

"뭐라고요…?"

병사 한 명이 한 켠에 있는 모니터로 화면을 띄웠다.

기지에 배치되어 있는 카메라에서 찍고 있는 것이었다.

# 크… 크르.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으나 한 무리의 데몬이 기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강해 보이는 개체들이었다.

# 피… 피를…!!

# 죽… 죽… 죽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어 구사가 가능할 정도의 지능을 가진 고위 등급의 데몬도 섞여 있었다.

"왜 지금 기지에…!"

삐빅!

"장… 장관님."

분석을 마친 간부가 료코를 바라봤다.

아까보다 더 사색이 된 얼굴에.

료코가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에너지가 모이고 있는 곳은."

간부가 고개를 들어 상황실의 천장을 바라봤다.

"본부의 하늘입니다."

* * *

"에잉!"

퍽퍽! 

먹통이 된 전화기를 두들겼다.

보통 전자기기는 두드리면 고쳐지기 마련이었다.

퍼석!

"…."

고쳐지긴커녕 반으로 쪼개지며 생을 마감한 전화기.

전화기를 잠시 바라보다.

휙.

뒤로 내던져버렸다.

"기지에 알려줘야 하는데."

- 시… 심판을….

- 퍽퍽퍽퍽퍽!

- 시….

- 퍽퍽퍽!

눈이 돌아간 다른 놈들에 비해 마츠다는 이성이 남아있었다.

처음엔 심판 어쩌고 헛소리를 지껄이긴 했으나.

몇 대 두들겨 맞으며 육체적 고통을 못 이길 때쯤이 되자 술술 불기 시작했었다.

- 료헤이 사도님은… 심판의 장소에 계실 거다.

중간에 마츠다가 정신을 잃었기에 심판의 장소까진 듣지 못했다.

기지에 남아있는 인원 중 누가 구원교의 첩자인지에 대해 들은 게 추가적인 수확이었다.

- 없… 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나.

기지에 남은 인원 중 구원교는 없었다.

구조물을 더 잃지 않기 위해 수색대를 구원교 인원만으로 구성했다는 마츠다.

그때 모든 구원교 인원을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 좀 이상한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나라면 구원교 인원을 한 명이라도 상황실에 남겨뒀을 것이다.

그래야 현재 흘러가는 상황이나 료코의 판단을 알아차리고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본부 자체를 날려버릴 게 아니고서야 왜 한 명도 안 남… 응?

머리를 스친 생각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싹한 생각이었으나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사라질 예정이라면, 그리고 그 시기가 임박했다면. 

굳이 상황을 살필 필요는 없었다.

설마 에너지가 떨어지는 장소가…?

우우우웅…!

가능성을 떠올리기 무섭게.

사방에서 구조물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하늘로 날아올라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씨."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엄청난 숫자였다.

수색대가 파괴한 구조물이 아예 없다는 걸 가정하더라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 기운이 뿜어지고 있었다.

파워가 약화 되길 바라는 건 물 건너갔네.

방금 전 부순 구조물까지.

내가 무효화시킨 건 총 13개 정도였다.

뿜어지는 기운의 수당 하나의 구조물이라 봤을 때.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숫자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시간이 걸리는 건가.

이전처럼 바로 쏘아질 거 같진 않았다.

료코가 있는 본부 방향으로 날아가는 구조물의 기운들.

구조물이 배치되어있는 곳에서 쏘려는 목적지까지 도달해야 하는 만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구조물과 본부를 번갈아 쳐다봤다.

가능하다면 구조물의 수를 최대한 줄여 놓고 싶었지만.

언제 쏠지를 모르니.

위험한 도박이었다.

구조물을 찾겠다고 꽤 멀리까지 온 탓에 여기서 본부까지의 거리가 짧지 않았다.

칼데아로 날아간다 하더라도 곧장 도착할 순 없는 거리.

쏘아지는 걸 감지하고 날아가면 늦고 말 터였다.

파워는 어제랑 비교가 안 될 거야.

구조물마다 모인 힘의 차이가 있겠으나.

하나에서 나온 에너지가 작지만 도시 하나를 날려버렸었다.

이 정도 수가 한 번에 모이고 있으니 뭐가 떨어질지는 가늠이 안 될 지경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이제 와서 저 많은 구조물을 다 처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스윽.

본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파앙!

연기를 터뜨리며 속도를 올렸다.

* * *

덜덜.

료헤이가 고개를 내렸다.

손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겁에 질렸다거나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다.

기대감.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기대 때문에 떨리는 것이었다.

'이 정도라니.'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모은 힘이었다.

수많은 신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기도를 올려 모은 힘.

그 힘이 지금 이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펄럭… 펄럭.

자신을 태우고 있는 데몬의 어깨에서.

료헤이가 두 손을 들어 올려 힘을 하늘로 유도했다.

지지… 지지직.

하늘에선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힘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헤키리스 역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할 터였고.

그에 맞춰 포이카가 포탈을 열고 있는 것이었다.

씨이이익.

하늘을 바라보는 료헤이의 입가로 광기 어린 미소가 그려졌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쾌감과 환희가 밀려왔다.

'선택은 옳았다.'

다른 법칙을 적용받는 헤키리스를 따르기로 한 것.

그런 선택을 한 자신에 대한 환희였다.

'난…'

료헤이가 열리는 균열로 힘을 집중시켰다.

'틀리지 않았다!!'

229화. 구워보자

삿포로에 위치한 본부 기지.

쾅! 쾅! 쾅!

기지를 둘러싸고 데몬과 군 헌터 간에 격전이 벌어졌다.

"원거리 각성자는 저 날개 달린 놈부터 노려!"

"기지의 방어 시스템은 왜 동작하지 않는 거야!"

"시스템이 다 마비됐습니다! 마츠다 짓인 거 같습니다!"

"이런 젠장…!"

전방으로 나선 1, 2급 헌터들이 데몬과 몸을 부딪혔다.

제대로 된 전형을 짜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기지 바로 옆에서 열린 정체불명의 포탈.

포탈을 통해 한 무더기의 데몬이 기어 나와 기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밀리지 마! 여기가 뚫리면 끝이다!"

1급 헌터 츠로이가 데몬의 공격을 받아내며 뒤를 돌아봤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방어 시스템은 마비되어 무용지물인 상태.

기지에 남아있는 건 지원 부대와 비전투 인원들이었다.

데몬이 한 마리라도 들어가는 순간 무차별 학살이 벌어질 터였다.

"쉬이이익!"

콰앙!

츠로이가 거대한 창을 들어 덮쳐오는 데몬을 쳐냈다.

"대체 뭐냐 이놈들은!"

지금까지 봐오던 데몬과는 달랐다.

보통 종족이 다르면 데몬끼리도 적으로 인식해 치고받기 마련인데.

기지를 덮치고 있는 놈들은 마치 서로가 아군이라는 걸 인지한 것처럼 협력하며 밀려오고 있었다.

"말을 하더니."

휘이….

"동료라는 개념이라도 생긴 거냐!"

쾅!

"크르르…!"

창은 유효타를 내며 히트했지만.

데몬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한 얼굴로 츠로이를 노려보는 데몬.

으득.

데몬을 바라보며 츠로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협력도 협력이지만 한 마리 한 마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최소 B등급, 높은 건 S등급까지 볼 수 있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녀석만 해도 S등급에 버금가는 피부 강도였다.

까드드득…!

"끄… 끄아아아!"

"!!"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데몬과 가까이 붙었던 몇 명의 헌터가 얼어붙고 있었다.

'저놈들은!'

푸른 기운을 띈 채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두 마리의 쌍둥이 데몬.

본 적이 있는 놈들이었다.

'서리누!'

몇 년 전 훗카이도의 최북부에서 모습을 감춘 S급 데몬이었다.

사라지기 전 수십 명의 헌터를 통째로 얼려버렸던 놈들.

웬만한 공격은 기스도 못 내는 가죽과 닿는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드는 기운이 문제였다.

두두두두두두!

여러 발의 탄환이 서리누에게 날아들었다.

투두둑.

냉기에 닿기 무섭게 속도가 죽으며 탄환이 튕겨 나갔다.

가죽에 닿기도 전에 약화되고 마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가까이 붙지 마! 거리를 벌려라!"

"예… 예!"

쐐에에에…!

"!!"

퍼억!

다른 곳에 시선을 너무 오래 판 모양이었다.

창을 맞았던 데몬이 츠로이의 어깨로 주먹을 적중시켰다.

"끄으…!"

간신히 반응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는 츠로이.

츠로이가 숨을 몰아쉬며 혀를 찼다.

'안 좋다.'

앞에 놈은 어떻게든 막고 있었지만.

성큼성큼 기지로 걸어가고 있는 서리누가 문제였다.

기지로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무작정 막겠다고 다가가면 얼어 붙어버리니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상황.

'불이 필요한데…!'

다시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면서도.

츠로이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리누의 전진을 막을 수 있을 만한 화염 각성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퍼엉! 퍼엉!

그나마 유탄 및 화염탄이 적중될 때마다 걸음을 멈칫거리는 서리누였다.

'저걸론 얼마 못 버텨.'

멈칫거리는 것뿐이지 데미지를 입는 건 아니었다.

탄은 유한했고 서리누의 전진은 멈추지 않고 있으니.

언젠간 탄이 바닥나며 서리누가 기지에 도달할 터였다.

"크르르!"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며 소리 지르는 듯한 데몬에.

츠로이가 두 손으로 힘을 끌어모았다.

'일단.'

위이이이잉!

츠로이의 창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놈부터 처리한다.'

"이거나 먹어라!"

전방의 데몬에게 창을 내지르며.

뒤에서 지원 중인 헌터들을 떠올렸다.

'조금만 버티고 있어라…!'

* * *

두두두두두두!

펑펑!

미라코가 쉴새 없이 탄을 쏘아댔다.

아비규환.

눈 앞에 펼쳐진 전장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서리누한테 탄을 집중해! 다리를 노려라!"

5미터는 족히 되는 크기였다.

다리로 쏘는 거야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콰앙!

문제는 데미지를 받지 않는단 거였다.

미라코 역시 화기의 유탄을 계속해서 서리누에게 쏟아붓고 있었지만, 도무지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게… S급 데몬.'

미라코가 탄을 갈며 서리누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데몬을 바라봤다.

데몬과 맞서고 있는 건 일본에서도 손에 꼽히는 헌터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웬만한 중대 하나의 전력과 맞먹는 인원들인데도.

각자 맡은 데몬을 쉽사리 처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기지 주변에 나타난 데몬의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철컥!

장전을 마친 미라코가 다시 한번 서리누를 겨누었다.

장전 한 번 했을 뿐인데 꽤 많은 거리를 좁힌 서리누.

덩치가 워낙 커 보폭이 보통 넓은 게 아니었다.

"후우."

엎드린 채로 조준을 마치고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저 서리누의 전진을 최대한 늦추는….

스륵.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미라코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공간을 채울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였다.

"…?"

"위다!!"

미라코가 잠시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귓가로 부대원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

몸을 빙글 돌려 하늘을 조준했다.

쐐에에엑---!

두껍고 긴 부리와 거대한 날개를 가진 펠로크.

비행이 가능한 수릿과 데몬이었다.

근접전에 취약하다는 지원 부대의 단점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펠로크 놈들은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내려올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하늘로 갈겨!"

두두두두두두!!

쐐엑!

탄이 날아들기 무섭게. 

뭉쳐 있던 펠로크 무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저… 저게 뭐야."

타아밍을 정확히 맞추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사람이 지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

"서… 서리누가!"

"하늘도 심상치 않습니다!"

지원 부대의 화력이 하늘로 향한 사이.

어느새 서리누는 기지와 멀지 않은 곳까지 와있었다.

거기다 기운이 모여들고 있는 하늘에선 파란색의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손이다…!!'

미라코만이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백운과 함께 있을 때 본 손이었다.

일 분이 채 되지 않아 도시를 날려버렸던 누군가의 손.

그 손이 기지의 상공으로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서리누한테 탄을…."

콰득!

"!!"

서리누에게 시선을 돌렸던 헌터가 펠로크에게 잡혀 하늘로 날아올랐다.

으득.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원래라면 지원 부대가 위치한 곳을 방어해주는 인원이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방어를 해줄 높은 급수의 헌터들은 전방을 맡느라 뒤를 신경 써 줄 겨를이 없었다.

철컥…!

조금이라도 전진을 막고자.

근처에 펠로크가 없는 걸 확인한 미라코가 다시 서리누에게 화기를 겨누었다.

"미라코!!"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지만.

쐐에에엑!!

"아…."

무언가를 하기엔.

어디선가 나타난 펠로크의 부리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이… 런.'

미라코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다가오는 부리를 바라봤다.

죽을 상황에 처하면 몸이 굳는다고 하더니.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질끈.

두 눈을 질끈 감아 공포를 줄이는 것.

몸이 굳어버린 미라코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콰직!!

'…?'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머리가 부서진 후에도 소리가 들리던가…? 라는 생각을 잠시 하고.

스륵.

미라코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

미라코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달려들던 펠로크의 머리엔 커다란 수리검 하나가 박혀있었다.

번쩍.

그리고 수리검이 빛나는가 싶더니.

사아아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이 느껴지는 검은 연기와.

그런 연기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현 상황에 누구보다 반가운 이의 모습이. 

미라코의 앞으로 등장했다.

* * *

굴러떨어지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라코의 눈은 커져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퍼엉!

연기를 터뜨리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채가듯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독수리 데몬들.

"끼루루룩!!"

날 발견한 데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독수리가 왜 갈매기 소리를 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칼데아의 연기를 모았다.

망자의 세계에서 치라타를 소화 시키며 연기 양이 상당량 증가한 칼데아였다.

고향이었던 토라소처럼 무한으로 사용할 순 없지만 말이다.

충분하지.

"끼루루루!"

마치 편대를 구성해 날아드는 데몬 무리를 바라봤다.

연기 양이 충분해지며 가능해진 게 있었다.

"끼루…!?"

데몬들이 충분한 거리로 들어온 순간.

온몸을 감출 정도로 모았던 연기를 터뜨렸다.

파아아앙!

연기가 검은 가시의 형태를 띠며 사방으로 뿜어졌다. 

이카로스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힘.

푸푸푸푸푹!!

"끼… 루."

그대로 연기에 꿰뚫린 열댓 마리의 데몬이.

휘이이…!

숨이 끊어진 채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음… 연기 소모가 확실히 많긴 해.

일반적으로 비행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소모량이었다.

형태를 만들어 유지하는 시간에 비례해 감소하는 연기.

치라타를 먹고 많이 늘어났다 해도 형태 공격을 남발할 수준은 아닌 듯했다.

다음은.

고개를 내려 전황을 살폈다.

다른 녀석들은 헌터들이 웬만큼 막아내고 있었다.

성큼.

문제는 저 두 놈 같았다.

몸에 두르고 있는 기운 때문인가.

놈들의 몸엔 푸르딩딩한 기운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헌터들이 그 기운을 경계하며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쩌적. 쩌적.

얼음인가.

놈들이 앞으로 전진할 때마다 땅이 얼어붙고 있었다.

범위 자체가 넓진 않으나 닿는 순간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 같았다.

급속 냉동고 같은 느낌이구먼.

날아든 탄환마저 얼리며 속도를 낮추고 있는 냉기.

저 냉기 때문에 군 헌터들이 어느 한 곳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단순무식하지만, 냉기를 이기려면 불이겠지.

아닌가? 불을 이길 때 냉기인가?

순간 든 의문에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상성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가위바위보에서도 강한 찌가 주먹을 으스러뜨리는 법인데.

[유탈라스 동기화, 전신 의태 - 갑주]

그럼.

온몸을 비늘로 감싼 뒤.

파앙!

연기를 터뜨려 냉기 데몬을 향해 강하를 시작했다.

구우러 가볼까.

230화. 헛된 몸부림

두 마리의 냉기 데몬이 고개를 돌렸다.

저건 또 뭐하는 날파리길래 달려드는 거지란 표정.

"뭐… 냐."

"죽으러… 온다."

오…?

생긴 건 어디 폐수거함에 버려진 누더기인데 말을 하다니.

다시 한번 외관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으으…!

누더기 데몬에 가까이 다가가서일까.

비늘을 두르고 있음에도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냥 다가왔으면 바로 얼었겠는데.

누더기가 지나온 곳엔 꽁꽁 얼어버린 몇 명의 헌터가 있었다.

전방에 나선 걸 봤을 땐 저들도 낮지 않은 급수일 텐데.

상대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왜 날… 아 와."

"너도… 얼어 버…?"

어눌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두 마리의 누더기에게 각각 손을 뻗었다.

콰악!

"!?"

"안… 얼…!?"

여유 넘치는 얼굴로 걸음을 내딛던 놈들인데.

내가 냉기에 닿았음에도 얼어붙지 않자 당황한 듯했다.

어눌한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들.

후우웅…!

뭐라 뭐라 말을 하는 놈들을 무시하며 정면으로 날길 잠시.

이쯤이면 되려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비행 데몬이 있는 건 본부 위뿐만이 아니었다.

열리고 있는 포탈에서 기어 나온 데몬들이 아래로 활강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왕 굽는 거 한 번에 많은 수를 소각하면 좋을 것 같았다.

데몬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을 확인하고 두 손에 힘을 줬다.

꽈아아악.

"끄… 끄으…!"

"놔… 놔!"

"기다려봐, 놔줄 테니까."

놓치지 않게끔 머리를 잡은 손의 갈무리를 마치고.

스으으…. 파앙!

연기를 터뜨리며 봐뒀던 자리로 솟아올랐다.

"끼루…?"

"크르?"

괴성을 질러대며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던 데몬들.

데몬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나타난 내게로 쏠렸다.

"크… 크르!?"

아마 손에 쥐고 있는 누더기 때문인 듯했다.

냉기에 휩쓸릴까 걱정한 건지 몇 마리의 데몬이 다급하게 몸을 뺐다.

못 도망갈 텐데.

거리를 벌리려는 놈들을 굳이 다시 잡아 오진 않았다.

어차피 열심히 날아 가봐야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

누더기의 냉기야 피할 수 있겠지만, 다른 건 피하지 못할 터였다.

휘익!

잡고 있던 데몬을 하늘 위로 던지며 칼데아를 해제했다.

[라 - 불꽃의 문양]

화륵.

문양을 넘어 새어 나오려는 불꽃을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았다.

악귀참도를 얻은 뒤 균열 안에서 했던 것처럼.

일정 범위의 하늘을 즉석 오븐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화르… 르르….!

화염을 얼마나 눌러 담았을까.

이젠 더 못 누르고 있겠다는 판단이 든 순간.

하늘로 던졌던 누더기 두 마리가 나와 수평을 맞출 정도로 내려왔다.

"너… 뭐…!"

"여기… 떨어져도 안 죽…어…!!"

장난감 다루듯이 붙잡고 내던진 거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아까보다 일그러진 채로 뭐라뭐라 열심히 소리 지르는 녀석들.

"알아 이 새끼야, 떨어진다고 안 죽는 거."

굳이 검으로 그어보거나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놈들이 두르고 있는 누더기는 두껍고 강했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화르르르르…!

더 이상 눌리지 않는 화염을 느끼며 꽉 쥐고 있던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건 다를걸."

들어 올린 양손을 맞잡으며. 

내보내달라고 요동치던 불꽃을.

꽈악…!

한 번에 폭발시켰다.

* * *

"크흑…!!"

데몬 위에 있던 료헤이가 몸을 숙였다.

말도 안 되는 열기였다.

꽤 먼 거리임에도 마주하기 힘든 엄청난 불꽃.

불꽃은 허공의 한가운데에서 터져 나왔다.

'무슨…?!'

료헤이가 자신을 태우고 있는 데몬을 내려다봤다.

거대한 날개를 가져 엄청난 비행속도를 가진 데몬이었다.

만약 불꽃이 터진 순간 데몬이 반응해 거리를 벌리지 못했다면.

료헤이는 불꽃에 닿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열기에 익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스윽.

어느 정도 불꽃이 잦아들 때쯤.

료헤이가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렸다.

'….'

보는 이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분명 포탈에서 나온 비행 데몬 무리가 눈앞의 하늘을 채워가고 있었는데.

지금 데몬은 온데간데없이 새까만 밤하늘만이 말끔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불…?!'

펄럭.

불꽃이 터졌던 위치에 무언가 있었다.

료헤이는 의아했다.

펄럭이고 있는 저 검은 연기는 대체 뭐길래 이렇게 스산한 기운을 내뿜는 걸까 하고 말이다.

"조금만 가까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말을 알아들은 데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한 날갯짓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데몬.

'겁먹었다? S급 데몬이…?'

포효하며 미친 듯이 날갯짓하던 아까완 달랐다.

데몬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뚝.

그리고 얼마 다가가지도 않아 날갯짓을 멈춰버린 데몬.

본능적으로 멈춘 녀석에게 더 다가가라는 건 무리한 요구였고, 동시에 료헤이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스윽.

료헤이가 눈을 찡그리며 몸을 기울였다.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달빛이 펄럭이는 무언가에 비치고 있었다.

스르륵.

료헤이가 보고자 하는 것이 달빛과 완전히 겹쳐진 순간.

'!!!'

료헤이의 얼굴로 경악이 번져갔다.

'백운!!'

본부 기지에 있던 구원교 신도가 보내온 사진.

사진 속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찍혀있었다.

체격이 다부지긴 했으나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훽!

검은 연기와 불꽃의 주인이 백운이란 걸 확인한 료헤이.

료헤이가 지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키리스에게 힘을 보내느라 하늘에만 집중하고 있던 터였다.

'서리누가…!!'

이미 기지를 초토화 시키고 있어야 할 S급 데몬, 서리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륵.

서리누가 사라졌음을 확인한 료헤이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 불꽃이다.'

냉기로 잔뜩 둘러싸여 있는 서리누를 한 방에 없애버릴 정도의 불꽃이라면.

꿀꺽.

위험했다.

- 까드득.

공당을 방문하며 여러 번 볼 기회가 있었다.

서리누의 냉기가 얼마나 지독하고 시린지 말이다.

"… 후우우우."

료헤이가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상식을 깨는 백운의 힘이 놀랍긴 했지만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달라지는 건 없다.'

아무리 백운이 강한 힘을 가졌다 한들 달라지지 않는 게 있었다.

곧 힘을 전달받은 헤키리스가 에너지를 뿜어낼 테고, 그 순간 훗카이도의 대부분이 사라질 거란 사실이었다.

'저게 뭐가 됐든… 아무 의미도 없다.'

다시 눈을 뜬 료헤이가 하늘을 바라봤다.

포탈은 거의 다 열린 상태였다.

구조물의 힘 역시 조금만 더 올려보내면 끝이기에.

거의 다 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스윽.

하던 일을 마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료헤이.

그런 료헤이의 귓가로.

끼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이 들려왔다.

* * *

하늘에 있던 놈들이 모두 재가 된 걸 확인한 후.

지상으로 내려와 스이카를 꺼냈다.

[칼데아 윙 & 스이카]

연속으로 연기를 터뜨려 이동하며 발도를 뿜어냈다.

옆에 뭐가 나타난 건지도 모른 채 상반신이나 팔다리가 날아가고 있는 데몬들.

- !!!

처음엔 바로 옆에서 뿜어지는 발도에 헌터들이 기겁했었다.

데몬을 마주하면서도 그렇게 커지진 않았던 거 같은데.

너무 놀란 탓인지 발도가 뿜어지기 직전엔 굴러떨어질 정도로 눈이 커진 상태였다.

죄송!!

놀라서 굳어버린 헌터들을 뒤로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바빠죽겠는데 발도를 휘두를 때마다.

이건 귀신의 검 스이카인데요.

발도 범위 안에 있어도 제가 베고자 하는 게 아니면 안 베이거든요.

그러니까 귀는 좀 아파도 안전하니까 안심하세요!

라고 구구절절 설명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악---!

자리를 옮기며 몇 번이나 휘둘렀을까.

지상에 있던 데몬의 숫자는 처음보다 훨씬 줄어든 상태였다.

"당신은…!"

멋진 창이구만.

거대한 드릴로 싸우고 있던 헌터가 말을 걸어왔다.

헌터가 입은 제복 위엔 츠로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츠로이 님, 얼른 본부에 있는 분들이랑 여기서 멀어지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건넸다.

훗카이도의 1/3이 날아가는 만큼 여기서 멀어진다고 무언가 달라질까 싶긴 했지만.

그래도 바로 아래에 있는 것보단 멀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불똥 튈 수도 있으니까.

하늘에서 나오고 있는 손은 미친 듯이 거대했다.

이전 도시에서 봤던 손과 비교할 수 없는 크기.

구조물로부터 얼마의 힘을 받느냐에 따라 손의 크기도 달라지는 듯했다.

떨어지는 것도 엄청나겠지.

뿜어지던 원형 에너지의 크기가 손에 비례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크기가 크기이다 보니 악귀참도로 베어내도 에너지의 잔여물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츠로이는 무언가를 더 묻지 않았다.

같은 하늘 아래 있었기에 츠로이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곧 엄청난 게 떨어질 거란 사실을 말이다.

"그럼!"

연기를 터뜨려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거의 다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의 손.

에너지를 쏘아내기 전에 뭐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앤 보니&메리 리드 - 작열탄]

철컥.

거대한 손과 손목을 향해 리볼버를 조준했다.

저게 뭔진 몰라도 일단 나쁜 놈의 손모가지인 걸 분명했기에.

일단 한바탕 갈겨 볼 생각이었다.

[빛의 구원]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빛의 탄환이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손으로 날아갔다.

뭐 하는 놈인진 몰라도 따끔은 하겠…?

슉슉수숙숙.

뭐야?

쏘고 있으면서도 두 눈을 의심했다.

탄은 손에 닿지 않았다.

손에서 터지지 않고 진행 방향 그대로 뚫고 지나가 버리는 탄환들.

마치 신기루에 대고 총을 갈긴 느낌이었다.

"푸… 푸하하하하하!!"

"…?"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꽤 먼 거리였다.

날개가 달린 데몬 위에 올라타 있는 한 명의 남자.

저 구석에 있었네.

이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화기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하하하하하!! 하…!!"

뭐가 그렇게 웃긴지 한참을 웃던 료헤이가 날 응시했다.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요."

저놈부터 보내야겠네.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닿지 않는 게 있다고요! 하하하하!"

파앙!

날개를 터뜨리며 방향을 틀었다.

능력을 이용해 데몬을 강화하는 녀석이었다.

뭐가 됐든 먼저 죽여둬서 나쁠 건 없었다.

"자! 계속 발악해보십시오!"

오냐 바로 죽여…?

료헤이에게 나아가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에너지의 움직임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헛된 몸부림일 뿐이니!"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손에서.

번쩍.

빛이 뿜어졌다.

231화. 악귀의 형상

에너지가 뿜어지기 직전인 하늘을 응시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료헤이에겐 리볼버 몇 발을 갈겨주긴 했지만.

- 쉬이익!

료헤이를 태우고 있던 데몬 놈이 빠르게 피하는 바람에 별 의미는 없었다.

쯧.

멀어지는 료헤이와 데몬을 쫓진 않았다.

빛이 번쩍이는 걸 보니 내려올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당장 뿜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일렁임을 바라보며.

료헤이가 도망치며 떠들어 재낀 말을 떠올렸다.

- 닿을 수 없는 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싸이비 종교다 보니 비유적으로 말한 거라 생각했었다.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데몬이다 보니 과장도 많이 섞였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리볼버의 탄환은 손에 닿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흐음.

탄환이 지나쳤다고 해서 죽일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일본으로 오기 직전까지 베다 온 게 망자였다.

내밀어진 손과 망자가 같은 법칙을 적용받진 않겠으나,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벨 수 있었던 건 상대가 망자여서가 아니었다.

닿지 않는 존재였기에 벨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손모가지도 벨 수 있어.

[척준경 - 악귀참도]

오른손으로 악귀참도의 감촉이 느껴졌다.

여전히 검의 아랫단부터 손잡이까지 흑색 성해포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였다.

사아아.

성해포 위로 뻗어있는 백색의 날에선 섬뜩한 예기가 흐르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서인지 유난히 더 시리게 느껴지는 예기였다.

스윽.

고개를 들어 료헤이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당신의 나라가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발버둥치는 겁니까!? 그 쓸데없는 정의로움이 목숨을 잃게 만든 겁니다! 아득한 에너지에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후회하도록 하십시오!

료헤이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었다.

하여튼 싸이비 놈들이 말은 더럽게 많아.

고개가 절로 내저어지는 놈이었다.

너무 멀어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순간까지 지 할 말만 내뱉고 사라진 료헤이.

떨어지기 직전인 에너지만 아니었다면 당장 따라가 머리채를 잡고 쥐흔들었을 것이다.

쿠르릉… 콰아아아아아아!

온다.

쏟아지기 시작한 에너지에.

꽈악.

악귀참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쓸데없는 정의로움이라.

입가로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아픈 데를 찌르고 있어, 싸이비쉨이.

구조물을 찾으러 나가기 전, 기지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했던 생각들.

여기서 난 뭘 하고 싶어하는 건지, 뭘 위해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건지.

료코에게 유물관 오픈이란 보상을 약속받기 전까지, 난 스스로도 모르겠는 마음에 긴가민가했었다.

난 정의의 용사나 선한 신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죽음을 막을 순 없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모르는 이의 죽음까지 막을 수도, 막아야 할 의무도 없다.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내 마인드였다.

마인드가 이렇다 보니 지금까진 항상 나를 위한 선택만을 해왔었다.

나의 강함을 위하여.

나의 무기를 위하여.

나의 친구를 위하여.

잊지 말자, 난 정의의 용사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되뇌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손에 넣을 수 없는 무기라는 걸 확인한 순간 떠났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지만… 아니지, 않았지만.

떨어지는 에너지를 마주하고 있어서일까.

이전보다 명확한 자기객관화가 되었다.

안 떠났을 거야.

료코가 보상을 제안하지 않아 내가 얻는 게 없었을지라도.

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인류애 넘치는 정의의 용사로 변신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난 막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재가 되어버릴 150만의 사람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파앙!

연기를 터뜨리며 날아올랐다.

"차가운 인간이 아니었지."

콰아아아아아!

눈을 똑바로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하고 거대한 에너지.

에너지를 똑바로 응시하며 악귀참도를 뒤로 젖혔다.

"오그라들지만… 오늘 이곳은."

꽈아아악.

"내가 지킨다."

스아아아아악!

* * *

얼레.

잠시 후면 떨어지는 에너지와 맞닿을 순간이었다.

이제 악귀참도를 휘둘러야지 하고 있었는데.

떨어지던 에너지를 포함하여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게 멈춰버렸다.

스윽.

휘두르려던 악귀참도를 내려놓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칼데아 윙과 악귀참도 두 개를 사용 중이었지만.

칼데아는 토라소에서 소화를 마치며 채워졌던 게이지가 사라진 상태였다.

나오기 전에 꽉 차긴 했었지.

망자의 세계에 있는 동안 악귀참도만 사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많은 망자를 베고 카사락의 마법까지 베며 게이지가 충전됐었던 악귀참도.

망자의 세계란 특수한 상황에서 옴팡지게 사용한 덕에 벌써 찼네! 하고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오랜만… 이던가?"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내게 악귀참도를 건넨 건 물론이고 검까지 알려 준 사람.

"안녕하세요, 스승님."

꾸벅 고개를 숙이자 척준경이 손사래를 쳤다.

검을 배울 때도 스승이라 부를 때마다 어색하다고 하지 말라던 척준경이었다.

"스승이란 단어는 계속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군. 그나저나 뭘 어떻게 해야."

가까이 다가온 척준경이 고개를 들었다.

코앞까지 와있는 밝은 에너지 기둥.

척준경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걸 마주하고 있는 거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시간이 멈춘 채 다시 보니 더 아찔하게 느껴지는 에너지였다.

무려 훗카이도 1/3을 날려버리는 힘.

그 힘 앞에서 난 검 한 자루를 쥐고 맞서려는 중이었다.

스윽.

다시 내게로 눈을 돌린 척준경.

잠시 응시하던 척준경이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무모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만."

싱긋.

척준경의 입가로 그려지는 묘한 미소.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하하… 그렇죠."

예외여야 하지.

암, 그렇고말고.

예외가 아니면 그대로 에너지에 녹아 잿가루 엔딩이었으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스륵.

척준경이 악귀참도의 성해포로 손을 뻗었다.

"자네도 사용해봐서 알겠지만, 악귀참도를 닿지 못하는 걸 베게 해주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떤 건지는 망자의 세계에서 충분히 알게 되었다.

"성해포가 봉인하는 건 베는 범위… 간단하게는 닿을 수 있는 깊이라네."

"깊이요…?"

애매모호한 말에 음…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악귀참도의 날은 때 묻지 않은 백색이지. 수많은 악귀를 베어 온 날이기도 하고 말이야."

악귀를 베긴 벴구나.

사실 멋을 위한 이름인가라고 생각했었다.

닿지 않는 걸 베는 것과 악귀참이란 단어가 딱히 매칭되거나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슥.

성해포에서 손을 올린 척준경이 날을 쓰다듬었다.

"악귀참도도 원래는 일반적인 검과 같았어. 벨 수 있는 것만을 베는 녀석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새하얀 백색이라 해도 수많은 암흑을 베다 보면 물 들기 마련. 진하게 뿌려졌던 악귀의 피가 스며들며 저주가 내려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부터 이런 무기가 아니었다니.

"그럼 악귀참도의 능력은 저주로 생긴 거란 말씀인가요?"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어야 할 걸 베지 못하게, 베어선 안 될 걸 벨 수 있게. 이것이 수천, 수만의 악귀를 베어낸 악귀참도에 걸린 저주라네."

베면 안 되는 것까지 베는 힘.

지금까진 못 베는 것도 베게 해주다니! 하면서 신이 났었는데.

말을 조금 바꾸니 무척 위험해 보이는 능력이었다.

"여러 번 겪어 본 상황이라 알겠지만, 이곳을 나가면 악귀참도를 감싸고 있는 성해포가 풀릴 거야."

"베면 안 되는 것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아찔하네요. 성해포가 감싸져 있는 게 오히려 마음이 좀 놓이는 거 같기도 하고요."

"완전히 풀리진 않을 거야. 하지만 더 넓게, 더 깊이 벨 수 있게 된 만큼."

여기까지 말한 척준경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뒤로는 말하지 않아도 알지? 라는 얼굴이었다.

위험한 힘이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게 맞지만,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는 의미였다.

왠지 악귀참도 성장 시점이 지금인 이유를 알 거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해 베어선 안 되는 걸 베는 순간이 아닌.

무언가의 파괴를 막기 위해 베지 못하는 걸 베는 순간.

훗카이도로 떨어지는 에너지를 베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끄덕끄덕.

악귀참도로 어디까지 벨 수 있나 실험해보거나 하진 말자.

괜한 짓을 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았기에.

꼭 베어야 하는 것만 베자는 굳은 다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봐도 아찔해지는 에너지라 도망치는 게 현명하겠지만."

시야가 닿는 하늘 전체를 채운 에너지를 보며.

척준경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기엔 늦은 거 같으니."

싱긋.

척준경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잡고 있던 성해포를 당겼다.

"무조건 베고 살아남으라고, 1호이자… 마지막 제자여."

장난스러운 응원을 끝으로.

멈춰있던 것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 *

[악귀참도 - 동기화]

콰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기세로 떨어지는 에너지에서.

스르륵.

성해포가 풀리고 있는 악귀참도로 시선을 옮겼다.

척준경의 말대로 완전히 풀어지는 건 아니었다.

감싸고 있던 날에서부터 손잡이의 중간까지 풀어진 성해포.

그와 동시에.

꿀렁.

…!

새하얗기만 했던 날로 정반대되는 흑색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사악한지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날을 뒤덮기 시작한 흑색의 기운은 백색의 기운과 뒤섞여 악귀참도의 도신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성질이 바뀌었다.

악귀참도의 도신은 더 이상 일반적인 날붙이가 아니었다.

흑과 백이 뒤섞여 일렁이는 기운의 결집체.

길이가 제한되는 날붙이와는 달리 기운이 허락하는 한 어디까지든 뻗어 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고오오…!

늘어나고 있는 도신에선 무언가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악귀.

악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은 없지만, 형상을 보며 본능적으로 떠오른 단어였다.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탐욕을 나타내는 흑색과.

그런 탐욕을 억누르고자 흑색을 휘감는 백색까지.

오싹하구만.

보기만 해도 사악함이 느껴지는 수천 개의 악귀 형상이 악귀참도를 뒤덮었다.

"후우."

한 차례 심호흡했다.

자 그럼 악귀 여러분.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거대한 에너지를 응시했다.

딱 눈앞에 있는 것만.

꾸드득.

손에 최대한의 힘을 주며 하늘을 채운 에너지를 향해.

베어버립시다.

악귀참도를 휘둘렀다.

스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