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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진짜 혹은 가짜

'뭐야 이거.'

송유빈이 앞에서 재생되는 동영상에 눈살을 찌푸렸다.

후배의 연락을 받고 들어간 뮤튜브.

뮤튜브엔 후배의 말대로 무기왕의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뭐 하는 놈이지.'

정확히는 가짜 무기왕의 동영상이었다.

닉네임은 무기왕이었지만 무기왕이 아닌 존재의 동영상.

@ 무기왕이 왜 갑자기 뮤튜브로 옮겼지?

@ 국가직 헌터 그만뒀나?

하지만.

올라온 동영상이 가짜 무기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송유빈뿐이었다.

찾아보면 몇 명이야 더 있겠지만 댓글의 추세를 봤을 땐 다들 동영상의 주인이 가짜 무기왕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 바보들아 여긴 일단 뮤튜브잖아!'

송유빈이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쳤다.

애초에 국가직 헌터의 동영상은 한튜브에만 올라올 수 있었다.

국가직 헌터 소속인 무기왕의 영상이 누구든 올릴 수 있는 뮤튜브에 올라왔다면 의심이라도 해봐야 할 텐데.

사람들은 그저 무기왕이 국가직 헌터를 그만뒀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흐음."

송유빈이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진짜 여부에 초점을 안 맞추는 게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 두두두두두두!!

무척 비슷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가짜에 대한 괘씸함을 내려놓고 말하자면 거의 동일했다.

송유빈처럼 찐덕후로서 무기왕의 동영상을 하나하나 반복해 뜯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정도로 말이다.

'합성인가?'

무기왕의 이름을 처음으로 쏘아 올렸던 빛의 탄환.

동영상의 짭 무기왕은 빛의 탄을 쏘아냄과 동시에 사로카전에서 사용한 푸른 비늘까지 두르고 있었다.

슥.

송유빈이 몸을 기울여 동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천천히 재생시켰다.

방송국에서 오랜 세월을 일해 온 만큼 동영상 제작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는 송유빈이었다.

'… 합성은 아닌 거 같은데.'

조금 더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돌려보긴 해야겠지만.

합성을 했을 때 나타나는 부자연스러움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무기왕이 아닌 건 확실해.'

심증에 의한 확신이 아니었다.

동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뜯어봤을 때 보이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송유빈이 아니라면 웬만해선 알아차릴 수 없는 차이였지만 말이다.

'비늘이 입혀지는 게 달라.'

삑.

송유빈이 기존 무기왕의 동영상과 가짜 동영상을 동시에 띄워놓은 후 분석을 시작했다.

대충 봤을 땐 알 수 없지만 가짜 무기왕의 비늘은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비늘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팔로 덮어지는 순간까지.

마치 무슨 규칙을 가지고 프로그래밍 된 것 마냥 순서에 맞춰 동작하는 느낌이었다.

'무기왕의 비늘은 저렇지 않아.'

비늘에 반사되는 빛 역시 달랐다.

햇빛이나 달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푸른 빛을 뿜어내는 무기왕의 비늘과 달리.

가짜의 비늘은 푸른 빛이긴 하지만 일부러 만들어낸 듯한 인위적인 빛을 뿜고 있었다.

꽈악.

비교 분석까지 마친 송유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찐 분노였다.

'감히 무기왕을 따라해?'

직장 생활을 하면서 화나는 일은 많았었지만, 오랜 시간 반복하며 완벽하게 적응해냈기에. 

최근 몇 년간 진심으로 분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죽었어, 이 가짜 새끼!'

하필이면 따라한 게 송유빈이 최고로 좋아하는, 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하고 있는 무기왕이라니.

같은 팬심이었다면 동지애를 느꼈겠지만 이건 아니었다.

딸깍.

송유빈이 댓글 버튼을 누른 뒤.

타타타타타타닥!!

분노의 키보드질을 시작했다.

'이렇게 가짜가 나와서 판을 치는데!'

타악!!

'찐 무기왕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한동안 잠수를 타고 있는 무기왕에 대한 원망과 함께 말이다.

* * *

후비적.

누가 내 욕 하나.

간지러운 귀를 열심히 후벼 팠다.

날 욕할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누군지 짐작은 가지 않았다.

대신.

- 절차가 완료되면 연락하라고 하겠네.

헤어질 때 강태황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끄덕.

좋은 아저씨였어.

강태황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단순히 칸의 검을 건네줘서가 아니었다.

장관이란 자리에 올라있으면서도 자신과 과거부터 함께 했던 이들을 끔찍이 아끼는 마음.

높은 자리에 올라서까지 그런 마음을 유지한다는 게 참 힘든 일인데 대단할 따름이었다.

고위 관리직하면 일단 거부 반응부터 일어났는데.

생각이 달라지는구먼.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편견이 강태황으로 인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이틀이라.

당장 검을 가져다 조사를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았던 이틀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대산에서 받은 문서도 살펴봐야 하니까.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검과 함께 살펴보려던 계획만 틀어졌을 뿐 봐야 할 문서가 산더미였다.

- 대산에 한 번 들려주세요.

소피아는 문서를 건네주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실제 문서를 작성했던 탐사원들을 불러 대면시켜주겠다고 한 소피아.

문서엔 담겨있지 않은 여러 정황과 상황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쁘구만, 바뻐.

회귀 전에는 너무 잉여했다면.

지금은 너무 바빴다.

물론 당장 일정이 급박해 무언가 해야 되는 건 아니었지만.

망자의 길에서 홀로 떠돌고 있을 도윤을 떠올리니 마음이 급해졌다.

"흐음… 악귀참도라."

솔직히 말하면 기약 없는 바람이었다.

일단 악귀참도가 실존하냐 안 하냐도 문제였지만, 어찌저찌해서 악귀참도를 구하더라도 실제로 망자를 벨 수 있는지 역시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못 베면 망인데.

조금 망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스 시장에서 만난 감정사 에밀리.

에밀리의 말에 따르면 아테네의 목걸이의 사용 횟수는 딱 한 번이었다.

그건 즉 바인딩 시킨 좌표로 이동 후에는 재사용할 수 없다는 것.

되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번엔 로인도 없다.

지난번에야 로인이 있었기에 어찌저찌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만약 이번에 들어가서 악귀참도로 망자가 베어지지 않는다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으음.

해가 저문 길을 걸으며 팔짱을 낀 채 턱을 문질렀다.

악귀참도로 망자를 못 벤다면.

못 베면 어떡하지로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음!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서 생각해본다.

막무가내 대책 없는 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로인은 망자를 죽일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었다.

애초에 그런 말을 반박하고 악귀참도라면 벨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접근을 하고 있는 입장이니.

악귀참도로 못 베었을 때를 위한 대책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고민한다고 해서 미리 준비할 수도 없고 말이다.

무조건 벨 수 있다.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다른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베지 못해도 베게 만든다!

"음!"

몹시 불안정하지만 흡족스러운 결론을 내린 후.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먹방이나 봐볼까.

어플 첫 페이지에 있는 뮤튜브를 실행했다.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기 전 먹방을 보며 식욕을 당겨놓을 생각이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헌터들의 영상이 가장 인기가 많았지만.

요새는 항상 비슷한 전투 속에서 살아서인지 별로 땡기지가 않았다.

오히려 전투와는 거리가 먼, 조회수와 인기는 별로 없지만 특이한 지역을 여행하거나 음식을 먹는 영상들이 내가 주로 보는 것들이었다.

삑.

어느새 로딩이 완료된 뮤튜브의 상단.

최근 업로드된 영상 중 가장 조회수가 많은 걸 보여주는 탭이었다.

전투 영상을 찾아보진 않지만 가끔 상단에 뜬 건 챙겨보는 주의였기에.

가장 위에 있는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 두두두두두!

이야 화려하구만.

내 리볼버랑 비슷하잖아.

# 사아아아---!

이건 유탈라스랑 비슷하고!

신기하네.

누구길래 나랑 이렇게 비슷한 거지.

신기한 마음에 동영상을 올린 사람의 닉네임을 확인했다.

# 무기왕.

와우 닉네임까지 똑같… 응?

화악!

가볍게 보던 핸드폰을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뭐… 뭐야, 이 새끼."

* * *

한국의 비버리힐즈라 불리는 청담동 고급 주택가.

주택가에서도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주택에서 한 남자가 여유롭게 칵테일을 들이켰다.

"이거 참."

남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는 태블릿을 응시했다.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주의 조회수 1위를 찍은 무기왕의 동영상.

정확히는 무기왕을 사칭한 동영상이었다.

"이러면 내가 진짜 무기왕이 되는 건가? 하하하!"

남자가 쉬지 않고 올라가는 조회수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벅.

"태혁 도련님, 리볼버의 스펙은 요청하신대로 준비했습니다."

한참 웃고 있는 서태혁을 향해 다가온 하얀 가운의 노인.

발명가 에디슨을 연상케 하는 생김새의 노인이었다.

"딕슨! 조금 더 무기왕의 탄에 가까워진 거겠죠?"

"예, 탄환의 재질을 바꿔 이젠 완벽하게 빛처럼 보일 겁니다."

딕슨이 들고 있는 노트북을 서태혁에게 건넸다.

"비늘 역시 조금 더 나노화 시켜봤습니다. 성능은 이전보다 떨어지지만 보이는 것만큼은 무기왕의 것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좋아요! 좋아!"

딕슨이 건넨 실험 영상을 보며 서태혁이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젠 누가 분석하더라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 그리고 전에 뮤튜브에서 사용하던 서군의 호화로운 일상 아이디는 지워버리세요."

"예…? 뮤튜브에서 최상위권인데요."

서태혁이 손을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무기왕이란 놈한테 밀린 2등짜리 아이디, 필요 없어요."

"… 알겠습니다."

삑.

서태혁이 태블릿을 터치해 삭제될 예정인 아이디를 바라봤다.

어느 정도 돈이 많더라도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의 호화로운 생활.

이전에 사용하던 아이디에서의 컨텐츠였다.

여기에 휘황찬란한 무기를 선보이며 데몬까지 잡으니 압도적인 조회수와 구독자 수로 뮤튜브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쯧.'

무기왕이란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무기왕입니다!

서태혁은 그 날의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한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을 렉카질 해 뮤튜브에 올렸을 뿐인데.

지금까지 굳건했던 자신의 동영상이 2위로 밀려버렸었다.

처음엔 일시적인 현상이라 생각했지만.

- 이번에는 노네임드급 데몬입니다!

- 그리스입니다!

- 그리스 대통령이 무기왕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무기왕의 동영상이 올라올 때마다 서태혁의 동영상은 2위로 곤두박질쳐졌다.

감당할 수 없는 굴욕감이었다. 

'….'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기 위해 무기왕의 동영상을 계속해서 정주행했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서태혁은 무기왕이란 존재에 빠져들고 말았다.

'매력적이다.'

매력적이라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왜 열광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자신이 뭘 올리든 무기왕의 인기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 쉬운 방법이 있지.'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서태혁은 방법을 찾게 되었다.

'무기왕을 이길 수 없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이 있었다.

'내가 무기왕이 되면 된다.'

방법을 찾은 날.

서태혁은 무기왕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175화. 선을 넘다

집으로 향하는 호수길.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뮤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을 감상했다.

대단한 새끼네 이거.

날 따라하다니 때려죽일 년! 이라던가.

당장 목을 치러간다 이 따라쟁이 새끼! 라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당장은 그저 놀라웠다.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 그리고 유탈라스의 비늘을 이 정도로까지 재연해내다니.

따라하기 능력이라도 개방한 건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후 봤다면 내가 올리고 까먹은 건가 싶었을 정도였다.

물론 실사용자의 눈이다 보니 어색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닉네임까지 따라한 건 좀 그렇네. 

조회수가 터진 뮤튜버를 따라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자신이 올리는 컨텐츠에 대한 특허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었기에.

기존 컨텐츠에서 약간만 바꾸어 새로운 컨텐츠인 것 마냥 방송하는 게 암묵적으로는 허용되고 있었다.

기존 뮤튜버의 팬들이 가만 놔두지 않겠지만.

그런 팬들의 매질마저 자신은 벤치마킹 한 거라며 버텨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매질을 버텨내면 많은 조회수와 그에 따른 이익이 따르니 어찌 보면 버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왜 당신들까지 헷갈리냐고오.

물론 무기왕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닉네임이 똑같은 걸 떠나서 벤치마킹 수준이 아니었다. 

완벽히 무기왕인 척하기 위해 기술까지 카피해내고 있었다.

기존 독자들까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괘씸한데.

날 따라하고 있다는 게 몹시 괘씸했지만 당장 무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장 동영상이 올라오고 있는 건 뮤튜브였다.

내가 속해 있는 한튜브와는 엄연히 다른 매체.

그렇다 보니 닉네임을 무기왕이라 한 것 역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든 이의 자유였다.

한튜브의 무기왕과 뮤튜브의 무기왕.

각기 다른 매체 소속의 무기왕이 존재하는 것일 뿐이었다.

"흠."

당장 뮤튜브의 무기왕이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었다.

무기왕의 이름을 걸고 이미지를 갉아먹는 짓이라도 하면 문제겠지만.

지금은 그저 내 기술을 따라하며 데몬을 잡고 있는 게 다였기 때문이다.

데몬을 잡는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은 일이니까.

빠득.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따라쟁이를 가만히 놔둘 생각은 아니었다.

무기왕은 이미 한국을 넘어 다른 국가에까지 알려진 이름.

지금 당장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추후 이름값이 필요할 땐 무기왕의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놈이 계속해서 무기왕을 사칭하며 활개치게 둘 수는 없었다.

최소한 닉네임은 바꾸게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무기왕바라기 정도라면 납득해 줄 수 있겠지만.

완벽히 나인 척하는 건 몽댕이질이 필요했다.

이 쉨… 조금만 기다려라.

괘씸함을 억누르며 재생 중이던 동영상을 껐다.

어디에 사는 놈인지 알았다면 오늘 밤에 찾아갔을 테지만.

가짜 역시 나처럼 사는 곳이나 실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당장 찾아가고 싶다 해도 찾아갈 수 없는 상황.

악귀참도 찾아서 도윤부터 꺼내고.

다음에 조져주마!

물론 데몬처럼 묵사발 내겠다는 건 아니었다.

단지 찾아가서 왜 따라했냐고 귓방맹이 몇 대 날려준 후 닉네임을 바꾸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었고 따라쟁이 놈이 무언가 엄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약간 후순위로 미뤄둘 생각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일단은 대산에게서 받은 문서부터 읽어볼 생각이었다.

띠링.

응?

그때 꺼지지 않은 뮤튜브 어플로부터 알람이 울리고.

띠링!

동시에 국가직 헌터 어플에서 알람이 울렸다.

두 가지 알람이 뜻하는 건 각기 다른 의미였다.

뮤튜브는 새로운 무기왕의 동영상이 올라왔다는 알람이었고.

# 새로운 전달 메시지.

헌터 어플에선 예전 김희연이 보냈던 것과 같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삑.

먼저 헌터 어플에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 안녕하세요, 무기왕 백운 님.

국가직 헌터를 관리하는 부서에선 내가 무기왕이란 걸 알고 있었다.

기밀정보인 만큼 부서의 소수를 제외하곤 접근할 수 없는 정보지만 말이다.

# CBC 방송국으로부터 백운 님, 정확히는 무기왕님께 전달해달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응…? CBC에서 왜?

CBC에선 무기왕이 누군지 모르는 만큼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태.

그렇기에 국가 부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었다.

# 보낸이는 CBC 방송국의 카메라 담당인 진유석 님입니다. 리포터인 송유빈 님의 요청으로 뮤튜브의 가짜 무기왕에 대한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빈 님…!

동영상을 찍어 부서로 보내기만 할 뿐. 

실제로 한튜브에 가서 내 동영상을 보는 일은 드물었지만, 나 또한 알고 있었다.

CBC의 리포터인 송유빈이 내 찐팬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당장 유연경과 배인슬이 나와 만날 때마다 이야기해줬었다.

국민 리포터로 통하는 송유빈이 대놓고 내 팬이라 부럽다는 말과 함께.

흐뭇.

유명인이 내 팬이란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바보 같은 표정으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 유빈 님한테 머선 일이 생겼…!?

메시지의 마지막 줄.

그 라인을 읽으며 입가에 번져 있던 미소는 완벽히 지워졌다.

# 송유빈 님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진유석 님은 현상황을 심각하다고 판단, 무기왕인 백운 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 * *

몇 시간 전.

'안 되겠어, 이 가짜 새끼.'

송유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 송유빈은 뮤튜브에 동영상을 올린 가짜 무기왕에게 쪽지를 보냈었다.

당신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몇 가지의 증거를 분석한 내용이었다.

띠링.

그리고 도착한 가짜 무기왕의 메시지.

# 죄송하지만 제가 진짜 무기왕입니다. 

간략한 메시지와 함께 동영상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이제 곧 업로드될 거라는 새로운 짜가 무기왕의 영상이었다.

# 두두두두두두--!

새로운 영상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진짜 무기왕인 것 마냥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정교해진 수준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이… 이 미친놈이!!

육성으로 욕이 터져 나왔다.

동영상에서 가짜놈이 총알을 갈겨대고 있는 곳.

그곳에 있는 건 데몬이 아니었다.

몹시 수상스럽게 생겼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 사실 제가 진짜 무기왕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진짜라고 생각하면 제가 무기왕인거죠. 이제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모르는 짭퉁이 아니라요.

마치 송유빈을 도발하듯.

가짜는 계속해서 송유빈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 콰앙--! 끄아아악!

동영상이 재생될수록 더 끔찍한 장면이 흘러나왔다.

비늘을 감싼 채 벽을 부수는 가짜 무기왕.

동영상을 찍은 장소는 사람이 적은 장소가 아니었다.

퇴근 시간대인 조금 전.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가짜 무기왕에 의해 무너진 벽은 속절없이 퇴근 중인 민간인들을 덮쳤다.

삑.

송유빈이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틀었다.

잠시 후 속보로 흘러나오는 CBC 방송의 속보.

# 뉴스 속보입니다. 서울 상암동 부근에서 건물이 무너져 퇴근 중이던 민간인이 깔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목격담에 따르면 벽을 무너뜨린 건 인기몰이 중인 헌터, 무기왕의 기술과 비슷하다고 하여 진상 파악 중입니다.

그래서였다.

송유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말이다.

이 상태에서 조금 전 놈이 보내온 동영상이 뮤튜브에 올라온다면?

'안돼.'

이미 긴가민가하면서도 사람들은 뮤튜브에 올라온 가짜를 무기왕이라 믿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극적인 기사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을 생각했을 때 동영상이 올라오는 순간 한바탕 난리가 날 터.

'이 가짜 새끼가 기어이.'

송유빈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 나눈 메시지와 미리 받아본 동영상, 그리고 자신이 분석한 증거를 토대로 먼저 방송을 할 생각이었다.

CBC 방송국의 허락은 받아야겠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이런 사건에 대한 방송이라면 시청률은 따놓은 당상이었기에 상부에서 거절할 리가 없었다.

# 진유석이! 당장 방송국 앞으로 와!

담당 카메라맨인 후배에게도 문자를 보낸 후.

송유빈이 빠르게 옷을 챙겨 입었다.

'짭퉁이 감히 이 송유빈 님을 도발해?'

몇 가지 정리해둔 자료를 마저 챙긴 다음.

송유빈이 문을 열어젖혔다.

'죽었어! 이 짭퉁…!?'

"안녕하세요, 닉네임 songsong을 쓰시는 송유빈 리포터님."

열린 송유빈의 집 문 앞.

무기왕과 똑같은 가면을 쓴 남자, 서태혁이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은 송유빈.

송유빈이 조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너구나, 이 가짜 새끼."

동시에 풍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송유빈이 핸드폰 비상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덥썩.

"…!"

어느새 뒤에서 나타나 송유빈의 핸드폰을 뺏는 복면의 남자들.

그런 송유빈을 보며 서태혁이 조소를 머금었다.

"저랑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 * *

@ 뭐야? 진짜 무기왕인데.

@ 국가직 헌터 그만두더니 범죄 조직이라도 들어간 거냐?

뮤튜브에 새로 업로드된 영상의 댓글.

댓글창은 그야말로 난리가 나 있었다.

난리가 안 나는 게 이상하지.

조금 전 업로드 된 동영상.

동영상에 나온 것 역시 분명 나의 기술들이었다.

처음 올라왔던 동영상보다 더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기술들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 콰쾅!

미치광이처럼 리볼버를 쏴대고 비늘을 두른 주먹을 꽂아버리는 가짜 녀석.

녀석의 타겟은 무언가 범죄 스멜 물씬 나는 놈들이었다.

# 끄아악!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게 뭐 하는 놈들인진 알 수 없었고, 댓글이 난리가 난 것도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난리가 난 이유는 그다음 장면 때문이었다.

의도한 거 같진 않지만 뒤 없이 휘두른 공격의 여파로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고.

퇴근 중이던 민간인들 중에 사상자가 생겨버렸다.

# 뉴스 속보입니다.

지금 뉴스에서도 흘러나오는 걸 보아 두 번째 영상이 찍힌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다 가짜 무기왕에 대한 방송을 준비하던 송유빈이 사라졌다.

후배인 진유석은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도움을 요청한 상태.

씁.

솔직히 무기왕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동영상을 찍은 적은 없었다.

목적이 돈이긴 했지만 조회수를 신경쓰며 상황을 작위적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말이다.

발생하는 상황과 상황에 따른 순간적인 나의 판단.

그것들을 그대로 솔직하게 찍어 올렸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올라왔던 무기왕의 동영상엔 백운이란 인간의 판단과 성향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바빠죽겠는데 쌍놈에 새끼가.

처음 동영상까진 괘씸하지만 잠시 놔두려고 했었다.

지금 당장 따라쟁이 놈에게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동영상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던 무기왕의 이미지에 재를 떠나 똥물을 끼얹고 있는 녀석.

빠득.

거기다 나의 열렬할 팬인 송유빈까지 건드리다니.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다.

스윽.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렸다.

"이 가짜 새끼 딱 기다려라."

우드득.

"넌 뒤졌다."

176화. 무기왕 아니고

"…?"

앞에 서 있는 이청아를 바라봤다.

츄리닝 차림에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이청아.

이 오밤중에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눈빛이었다.

그럴 수 있어.

안 그러는 게 이상했다.

지금 시각은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한밤중이었다.

김희연과 김소연을 구하러 갈 때 함께 했다곤 하나 이청아와는 딱 한 번 만난 사이.

그런 내가 전화를 해 불러냈으니 저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청아 님!"

이상한 건 알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점심시간에 식당가를 지나치다 만난 듯한 텐션으로 말이다.

"아… 네! 오랜만이에요, 백운 님."

기본적으로 내가 무기왕이란 사실은 비밀로 하는 스탠스였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모두를 속이기 위해 과한 노력을 하진 않았었고 그 덕에 기태랑과 비광을 제외하더라도 적지 않은 사람이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청아 역시 마찬가지.

지난번 김희연 김소연 구출 작전으로 내가 무기왕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뜬금없지만 청아 님 도움이 필요해서요."

"네? 제 도움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급했기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청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혹시 가면서 얘기해도 될까요?"

"어… 네… 네."

손까지 내밀자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이청아였지만.

이전의 일로 날 신뢰하고 있어서인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손은 내밀고 있었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휙.

"아!"

이청아가 더 놀랄 새도 없이.

날개를 꺼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

비명을 지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단지 순식간에 높아진 고도에 침착… 은 아니고 약간이지만 멘탈이 나간 느낌이었다.

이젠 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 흐름에 몸을 맡기겠다는 표정.

"갔다 와서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나 같아도 벙찌겠지만 어쩌겠어.

처음엔 혼자 출발할까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송유빈의 집은 진유석의 메시지에 남아있어 찾아 갈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였다.

당장 뮤튜브에 동영상을 올리고 있는 놈의 정체나 거처를 모르는 상황.

다짜고짜 송유빈 집 근처를 뒤지며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옛날부터 두뇌 회전은 기가 막히단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를 칭찬할 수 밖에 없는 떠올림이었다.

머릿속에서 유레카!란 단어와 함께 떠오른 인물, 이청아.

김희연을 찾을 때 일주일 내의 기억을 읽는 이청아의 사이코메트리가 많은 도움이 됐었다.

사람 찾는데는 청아 님 만한 사람이 없지.

"제가 사람을 찾아야 해서요."

"사람요…? 누가 백운 님 돈 떼먹고 도망이라도 갔나요?"

"하하 아뇨. 무기왕 찐팬이 납치돼서 구하러 가야 돼요."

"어!?"

무기왕 찐팬이란 말에 이청아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졌다.

"설마 CBC 송유빈 님요!?"

"바로 맞추시네요."

단 번에 맞추는 이청아를 내려다보자.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이청아가 미소를 그렸다.

"당연하죠! 무기왕을 진심으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뽑으라면 송유빈 님이니까요. 공중매체든 개인방송에서든 안 가리고 찬양 일색이니까요."

역시 당장 구해야겠어!

한 시라도 빨리 나의 바라기를 구해야겠다 다짐하는 순간.

팔에 안겨 있던 이청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날 올려다봤다.

"대한민국 국민 리포터 송유빈 님이라니."

척.

턱 바로 아래에서 엄지를 치켜든 이청아가 손을 내밀었다.

"역시 백운 님 클라스! 엄청나네요."

* * *

순식간에 도착한 서울 송유빈의 오피스텔.

진유석에게 들었던 집으로 이청아와 함께 올라갔다.

슥.

고개를 들어 뜯겨진 자국이 있는 천장을 바라봤다.

다른 층은 복도마다 놓여져 있는 CCTV.

1층부터 송유빈의 층까지 올라오는 길의 CCTV만 전부 뜯겨져 있었다.

가면 안 써도 됐겠구만.

혹시나 싶어 가면 하나를 주워왔는데.

다 뜯겨 있는 걸 보니 괜한 짓을 한듯 했다.

"청아 님."

"네, 제가 봐볼게요."

문 앞으로 다가간 이청아가 눈을 감았다.

청아 님 안 데려왔으면 큰일 날 뻔 했네.

가장 먼저 떠올렸던 건 CCTV였다.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첫 생각만 가지고 무턱대고 왔으면 뜯겨진 CCTV를 보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뻔 했다.

스륵.

눈을 뜬 이청아가 입을 열었다.

"무기왕 가면을 쓴 남자가 있어요."

역시 가짜 새끼였구만.

집으로 가던 길 동시에 울렸던 두 개의 알람.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었다.

송유빈이 사라진 것에 가짜 새끼가 연관되어 있을 거란 확신이.

"그리고 그 남자의 부하로 보이는 자들이 다섯 명 있고요."

유빈 님 한 명 데려가려고 여섯명?

양아치 새끼들이네 이거.

"애초에 이 집이 송유빈 님 집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올라오자마자 CCTV를 부수고나서도 문 앞에서 꽤 기다렸네요."

바로 들이닥친 것도 아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들으니 더 소름이 돋았다.

그나저나 이 새끼는 유빈 님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방송국 관계자인가?

국민 리포터로 유명인인 만큼 송유빈의 인적사항은 비공개 상태였다.

나 역시도 진유석이 아니었다면 찾아오지 못했을 터.

가짜 새끼는 어떻게 알고 부하들까지 끌고 와 죽치고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송유빈 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나왔다가 가짜 무기왕과 맞닥뜨렸어요."

이청아가 사이코메트리로 본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가짜와 만나기 무섭게 쫄기는커녕 가짜라고 욕을 박았다는 송유빈.

한 성깔 한다고 들었는데 진짜인 모양이었다.

괴한 대여섯을 앞에 두고도 그런 깡이라니.

"마지막에 송유빈 님은 목을 맞고 정신을 잃었고요."

이런 개놈들이?

꽈악.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감히 내 찐팬한테 당수를 날리다니.

당수 때린 새끼 인상착의는 기억해뒀으니 제대로 되갚아줄 생각이었다.

저벅.

이청아가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발동하며 걷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이동한 경로였다.

"송유빈 님을 데리고 1층까지 내려왔고."

오피스텔 옆에 있는 골목길.

골목길로 간 이청아가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세워졌던 커다란 벤에 태워졌어요. 차 안으로 네비게이션이 보이는데… 음."

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만큼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파이팅.

방해할까 싶어 소리내어 응원하진 못했으나.

마음속으로 이청아를 응원했다.

마지막에 말한 네비게이션이란 단어.

송유빈이 향했을 목적지가 찍혀 있을 것 같았다.

봐야 돼.

예전 이청아의 설명에 따르면 사이코메트리 능력은 뭐든 볼 수 있는 슈퍼 능력이 아니었다.

최근의 기억 중 사람의 사념 강도에 따라 보이는 선명도가 다르다고 설명했던 이청아.

만약 추가적인 소득 없이 송유빈이 벤에 태워진 채 기억이 닫혀버린다면 곤란했다.

차가 어디로 향했을 지 모든 길바닥을 뒤지며 이청아의 능력을 사용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

부디 이청아가 목적지를 알아내길 바라며 기다린지 몇 분.

눈을 뜬 이청아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서울 특별시 압구정로 443-8 번지요!"

* * *

백운과 이청아가 청담으로 향하고 있는 시각.

"으…."

집 앞에서 정신을 잃었던 송유빈이 눈을 떴다.

"뭐야?"

곧이어 들어오는 주변 모습에 송유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흔히 생각하는 납치범의 은거지와는 몹시 다른 장소였다.

신경 써서 잘 가꾸어진 거대한 정원과 정원을 밝히는 아름다운 조명들까지.

송유빈이 정신 차린 곳은 드라마에서도 잘 안 나오는 호화로운 저택 정원의 한가운데였다.

'이게 집이야 성이야.'

정원 끄트머리에 위치한 저택에 송유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납치 당한 와중에 남의 집이 보인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안 놀라기에는 너무나 웅장한 생김새였다.

주변 호화 저택을 몇 개를 공사로 이어놓은 듯 했다.

"깨어나셨습니까?"

뒤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훽.

잠시 집에 넋을 놓고 있던 송유빈이 목소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만 하는 줄 알았더니 완전 범죄자 새끼셨네요."

동영상에 나왔던 가면을 쓰고 있는 서태혁을 향해 송유빈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집 앞에서 저들을 만난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겠구나 각오는 했었기에.

말을 조심할 생각은 없었다.

"듣던대로 거침이 없군요. 제가 나가는 사교 모임에서 유명하시더라고요, 인간 치와와로."

치와와란 단어에 송유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뭐 하는 새끼지?'

상사들에 의해 건너건너 듣고는 있었다.

아니다 싶으면 상대가 누구든 거침없이 내지르는 성격에 정재계 사이에서 치와와로 불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호화로운 저택에 사교 모임이라.'

점점 더 가짜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송유빈이었다.

"날 잡아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젠 존댓말마저 생략한 물음에 서태혁이 송유빈을 바라봤다.

"당신의 목소리는 영향력이 있으니까요. 두 번째 동영상이 올라간 뒤 생겨나는 여론에 변수가 생길까 싶어 일단 모셨습니다."

송유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태혁이 말하고 있는 두 번째 동영상.

집을 나서기 전 개인적으로 전송받았던, 무기왕의 이미지에 금을 그어버리는 동영상이었다.

여론은 그걸 무기왕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비난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기왕한테 원한이라도 있어? 왜 사람을 납치까지 해가면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하하! 원한이라뇨, 그 반대입니다."

서태혁이 정원의 조명을 향해 양팔을 들어올렸다.

"전 무기왕을 무척 좋아합니다! 몹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요."

"그런데 왜 욕을 먹이려는 거야?"

"욕을 먹이다뇨, 큰 오해입니다."

스윽.

정중한 자세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서태혁.

"그저 새로운 무기왕에 적응할 수 있도록 조금씩, 약한 것부터 맛보게 해주는 거죠."

새로운 무기왕이란 말에 송유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기술 두어 개 따라 했다고 무기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편협하네, 편협해. 언제까지 통할 거 같아?"

"…."

조용히 송유빈을 바라보던 서태혁이 왼손을 들었다.

"고작 두어 개라 생각하십니까?"

"…?"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잠시 후.

후우우…!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를 쫓던 송유빈의 눈이 커졌다.

후웅… 철컥!

멀리서부터 날아와 서태혁의 손에 안착한 것의 존재.

가장 최근 동영상에서 나왔던 플라잉 믹서기의 수리검이었다.

같은 무기일 리는 없지만 비늘이 덮여 있던 걸 제외하면 외관상으로는 완벽히 똑같았다.

스륵.

송유빈이 수리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서태혁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죠. 전 새로운 무기왕이 될 사람이기 이전에."

송유빈을 향해 정중히 몸을 숙이는 서태혁.

"세계 사람들에게 한때는 천재 공학자의 새싹으로 불렸으며."

촤라라락--!

자기소개를 하는 서태혁의 등 뒤로 총을 포함한 수많은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각국의 전장에서 사용되는 무기의 대부분을 제공하고 있는."

서태혁의 얼굴로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그려졌다.

"무기상 서태혁이라고 합니다."

177화. 일어나

'서태혁… 서태혁이라.'

서태혁의 이름을 되뇌이며 송유빈이 생각에 잠겼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바로 떠오르진 않지만 기억의 저편에서 한 번쯤은 새겨진 적 있는 이름.

'아.'

무언가를 떠올린 송유빈이 고개를 들어 서태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천재 개발자 중학생 서태혁."

서태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영광이네요. 송유빈 님이 10년도 더 전에 불렸던 제 호칭을 다 기억해주시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서태혁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하긴, 뭐든지 다 기억하실 수 있죠? 송유빈 님은."

"…."

'가짜 놈이 모르는 게 없네.'

송유빈이 개방한 능력은 절대 기억력.

눈으로 한 번 본 장면은 절대 잊지 않고 사진처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애써 숨기고 살진 않았으나 능력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서태혁은 그마저도 다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절대 기억력을 가진 송유빈조차 서태혁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서태혁의 모습.

단순히 시간이 지나며 외관이 변한 수준이 아니었다.

꿈 많고 눈이 빛나던 중학생은 온데간데없이, 볼까지 내려온 짙은 다크써클과 빛 따위는 옛날 옛적에 사라져버린 듯한 눈을 가진 서태혁.

정말 동일 인물이 맞나 의심될 정도였다.

'약이라도 하는 건가.'

생김새를 넘어 분위기마저 완벽히 달라진 서태혁에 송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달라졌나요? 당신이 기억하던 천재 중학생과는요."

"달라진 수준이 아니라 완전 피폐해졌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침없는 송유빈의 감상평에 서태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면서 말이다.

"하아."

간신히 웃음을 그치며 작은 한숨을 내쉬는 서태혁.

서태혁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송유빈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입니다. 그 마지막 인터뷰 이후에 전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거든요."

"마지막 인터뷰…?"

"그 이후로는 아무도 절 찾지 않았거든요."

서태혁의 말을 곱씹으며 기사를 봤던 시기를 떠올렸다.

분명 개방의 날 직전의 날짜였었다.

'개방하지 못한 건가.'

정말 극소수지만 존재했었다.

자신의 개방 조건을 찾지 못해 죽을 때까지 능력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개방은 했습니다."

송유빈의 생각을 읽은 듯 서태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했지만, 안 하는 게 나을 뻔했죠."

* * *

과거 개방의 날이 찾아오고 몇 년이 흐른 시점.

스륵.

커다란 저택의 침대에서 서태혁이 눈을 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서태혁.

침대에서 일어난 서태혁이 앞에 놓인 전신 거울 앞에 섰다.

피식.

본인 스스로가 봐도 웃음이 나오는 꼬라지였다.

밖으로 안 나간 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학교도 가지 않은 채 이 거대한 저택에 스스로를 가두고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개방의 날이 찾아오기 몇 년 전.

그때까지만 해도 서태혁은 빛났었다.

또래 중에서 압도적인 두뇌를 뽐냈던 서태혁.

현직 과학자들마저 압도하는 아이디어와 개발력에 다른 나라의 과학계조차 서태혁을 보러 올 정도였다.

말 그대로 나라의 보물이며 세계의 기대주였던 것.

- 서태혁 학생 스케줄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집으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쏟아졌었다.

매일 반복되어 귀찮을 법도 한 전화였지만.

서태혁의 부모님은 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과학자 출신이자 발명품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던 서태혁의 부모님.

이들 역시 아들의 뛰어남과 쌓여 가는 명성에 몹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넌 나를 뛰어넘을 과학자가 될 게다! 모든 지원을 해줄 테니 꿈을 펼쳐보거라!

말 그대로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시절이었다.

뛰어난 두뇌는 시도때도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잠을 줄여가며 익혀온 기술 덕에 쏟아지는 아이디어를 얼마든지 표현해낼 수 있었다.

이대로만 가도 노벨상은 물론이고 세기의 과학자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서태혁 본인 역시 의심치 않았었다.

'….'

물론 서태혁의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 미확인 생명체가 나타났습니다!

-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이런 뉴스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 정부는 오늘을 개방의 날이라 명명하기로 했습니다.

개방의 날.

인류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날이었다.

인류에 속해 있었던 서태혁의 인생에도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 ….

서태혁이 우연히 능력을 개방한 날.

곁에 있던 부모님과 저택의 도우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반짝.

서태혁의 손에선 초록색 야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 야광을 뿜어내는 것.

천재라고 불리던 서태혁이 개방한 능력의 전부였다.

꾸득.

거울을 바라보며 서태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그 날을 떠올리면 치가 떨렸다.

자신을 둘러싸고 실망에 집어 삼켜졌던 사람들.

몹시 실망했지만 눈앞의 아들이, 도련님이 상처받을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던 사람들.

'나보다 훨씬 무능했던 것들이…!!'

그랬던 사람들이 자신을 동정하고 있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굴욕이었다.

'….'

물론 서태혁의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작에 불과했다.

- 천재 과학자 서태혁 군은 무슨 능력을 개방했나요!?

서태혁을 알았던 모든 이가 궁금해했다.

일반인 중에도 로또에 맞은 듯 엄청난 능력을 뿜어내는 이가 있는데.

과연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던 서태혁은 어떤 엄청난 능력을 개방했을지 모두의 관심사가 된 것이었다.

- … 야광요?

서태혁이 개방한 능력이 알려지며.

천재라는 게 알려졌을 때부터 들끓었던 사람들의 발길은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개방이 찾아와 온갖 능력이 넘치는 세상.

손을 야광화 시키는 능력 따위에 눈을 돌릴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 다녀오마.

발길이 끊긴 건 외부인뿐만이 아니었다.

아들의 낙오 이후 과학계를 위해 뛰어난 능력자를 찾아 집을 떠났던 부모님까지.

그렇게 서태혁은 거대한 저택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불공평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생각이었다.

# 세계의 과학 유망주로 떠오른 김유영 학생을 만나보겠습니다.

객관적으로 자신보다 부족했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운 좋게 뛰어난 능력을 얻어 훨씬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니.

너무 분해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

개방과 동시에 찾아온 영생.

사람들은 축복이라 여겼지만 서태혁에겐 지옥이었다.

세계의 중심에 속해 있다가 완벽한 들러리가 된 채로 평생 살아야 한다니.

어쩜 이리 끔찍할 수 있단 말인가.

"으아아아아!!"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함에 서태혁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약해졌던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리기 직전.

책상 위에 놓인 여러 장의 지폐가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이 해외로 나가며 두고 간 돈이었다.

'….'

방으로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돈.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아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서태혁의 부모님이 쌓아 올린 막대한 부.

부자가 모여 산다는 동네에서도 나름 큰 저택에 사는 서태혁이었다.

# 개발계 능력을 개방 후 불법 무기를 만들어 판매한 범죄자들이 구속되었습니다.

마침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죽어가던 서태혁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런 능력을 가졌어도 애초에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이들이었기에.

돈을 벌기 위해 불법적인 일에 능력을 사용하며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저들에게 필요하지만 없는 걸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필요하지만 없는 걸 저들이 가지고 있다.'

두근.

새삼스레 깨닫게 된 사실에 서태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굳이 내가 뛰어날 필요는 없다.'

뛰어난 이를 내 것으로 만들어 부려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한번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지도 몰랐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서태혁의 부모님 역시 뛰어난 능력을 개방하진 못했다.

단지 뛰어난 능력을 개방한 이들을 데려와 지원해주며 자신의 업적을 쌓아나갈 뿐이었다.

'이제 방해되는 건.'

슥.

고개를 돌린 서태혁이 액자를 바라봤다.

몇 년 전 부모님과 찍었던 사진이었다.

조금 전 떠올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연히 돈이었고.

지금 저 돈의 주인은 서태혁이 아니었다.

'….'

띠링.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리는 서태혁의 핸드폰.

핸드폰 화면으로 아버지 이름이 표시되었다.

# 이번에 데려온 아이들과 함께 오늘 저녁에 도착한다.

'….'

무심한 얼굴로 메시지를 내려다보던 서태혁.

서태혁의 얼굴로 소름 끼치는 미소가 그려졌다.

* * *

"완전… 미쳤구나."

서태혁의 이야기에 송유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믿기지 않는 과거 이야기였다.

처음엔 그럴 수 있겠거니 했지만,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었다.

"아마 하늘에서 아버지도 기뻐하실 겁니다. 제 덕분에 집도 이렇게 더 큰 곳으로 옮길 수 있었으니까요."

개발계 범죄자들을 영입해 무기를 찍어낸 서태혁.

서태혁은 만들어낸 무기를 세계 곳곳으로 팔아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부를 벌어들였다.

덕분에 뒷세계에서는 최고 고래 무기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말이다.

우웅.

서태혁의 손에서 빛나는 야광.

"제가 가진 능력은 이것뿐이지만."

철컥.

특수 제작된 장갑과 장갑에 들려있는 수리검.

서태혁이 수리검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전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자들을 데리고 이런 게 가능해졌죠."

철컥.

수리검에 이어 서태혁의 등 뒤에서 푸른 비늘이 쏟아져 나왔다.

여전히 인위적이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기왕의 비늘이라 착각할만한 생김새였다.

"제 아래에 있는 박사들은 돈만 있으면 뭐든지 만들 수 있거든요. 이 비늘은 빛을 재현해내느라 위력과 실용성은 좀 떨어지지만요."

만족스러운지 한참동안 들고 있는 수리검과 비늘을 바라보던 서태혁.

슥.

송유빈에게 고개를 돌린 서태혁이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저번 영상에서 나온 무기왕의 플라잉 믹서기를 만들어낼 겁니다. 그럼 사람들은 완벽하게 믿겠죠, 새로운 무기왕의 재림을."

"…."

한껏 자아도취 되어 있는 서태혁을 송유빈이 딱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움찔.

쓰라린 과거가 생각나서일까.

송유빈의 눈에 반응한 서태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 뭐죠? 그 눈은."

"참 딱하네. 부모님을 죽여가면서 얻으려고 한 게 고작 그거야?"

"뭐…?"

송유빈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한다고 네가 무기왕이 될 수 있을 거 같아? 사람들이 뭐 때문에 무기왕을 좋아하고 열광하는지 전혀 모르는구나, 가짜야."

여유 넘치던 조금 전과 달리 서태혁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거침 없으신 건 알지만 말은 좀 조심하시죠.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겠습니까?"

날이 선 경고에도 송유빈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돈으로 능력자들을 사와 무기를 만들어 팔든, 무기왕의 기술을 따라해 잠시 사람들의 눈을 속이든. 그렇게 받은 스포트라이트는 너꺼가 아니야."

슥.

서태혁 쪽으로 몸을 기울인 송유빈이 조소를 머금었다.

눈엔 불쌍하다는 동정의 빛이 잔뜩 서린 채였다.

"잠깐 만들어진 허상에 대한 스포트라이트일 뿐이지. 그걸 거둬내면 넌 결국 손에서 야광이나 내는 싸이코 정신병자에 불과하단다. 이 가짜야."

으드득.

"이…!!"

이젠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의 서태혁이 송유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도련님!"

부하 중 한 명이 테블릿을 들고 서태혁에게 달려왔다.

"뭐야!!"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급한 일인지 부하가 테블릿을 건넸다.

"…?"

테블릿에서 재생되고 있는 건 누군가의 영상이었다.

정확히는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있는 스트림 방송.

한튜브에서 스트림되고 있는 무기왕의 방송이었다.

"이건 뭐…!?"

서태혁이 뭐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방송으로 익숙한 집과, 익숙한 누군가의 뒤통수가 나타났다.

'하늘…!!'

휙!

영상에 자신의 뒤통수가 보임과 동시에 고개를 올린 서태혁.

서태혁이 하늘에 뭐가 있는지 인지하기도 전, 눈앞으로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쩌억!!

쿠당탕!

손바닥의 주인을 확인할 새도 없이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리는 서태혁.

"도… 도련님!! 전부 나와!!"

부하가 증원을 요청하기 위해 저택 안으로 달려가고.

그러든 말든 날아간 서태혁을 응시하고 있는 침입자.

침입자의 주변에선 검은 연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설마 한 방에 죽은 건 아니지?"

침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죽었으면 얼른 일어나라."

씨익.

침입자의 입가로 그려지는 반갑다는 듯한 미소.

"격의 차이를 보여 줄 테니까."

178화. 톡

정원 구석으로 처박힌 가짜를 바라봤다.

너무 안 알아보고 뺨을 갈겼나 싶긴 했지만.

정황상으로 봤을 때 송유빈 앞에 서 있는 저놈이 가짜가 분명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최대한 힘을 조절한다고 하고 쳤는데.

순간의 괘씸함에 너무 대충 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뺨을 때리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송유빈.

국민 리포터 무사하시고.

나도 모르게 싸인 해달라고 달려갈 뻔했지만.

지금 상황에 그러면 너무 없어 보일 것 같아 인내하기로 했다.

액션 캠도 돌아가고 있으니 참아야지.

송유빈의 집으로 급히 향하는 와중에도 챙긴 게 있었으니.

가짜놈을 참교육해주기 위한 액션 캠이었다.

원래는 돌발사태를 대비해 라이브 스트림은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저택을 발견하기 무섭게 스트림을 틀었다.

그나저나.

"와…."

아까부터 굳어버린 것마냥 입을 벌린 채 날 바라보고 송유빈에.

쉽사리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는 멋지게 등장해서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으려고 했는데.

저런 얼굴에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 넣어두기로 했다.

우루루!

조금 전 서 있던 부하가 뛰어들어가고 얼마나 지났을까.

저택 안에서 많은 수의 인원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

정원 구석에 처박혔던 짭퉁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뭐 하는 곳이냐 여긴.

아직 적들이 도착하려면 약간의 여유가 남아 주변을 둘러봤다.

거대한 저택 여러 개를 붙여놓은 듯한 넓이에 그곳을 빠짐없이 채우고 있는 엄청난 양의 무기까지.

이 새끼 무기왕이 아니라 판매왕이었나.

한 추적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었다.

브로커를 통한 불법 무기의 수출입이 많아졌다는 내용.

세계에서 활동하는 거물 무기상이 한국에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끝으로 방송은 끝이 났었다.

어쩌면 유명인의 집으로 쳐들어온 걸지도 모르겠구만.

이거 또 나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일에 휘말렸단 생각을 하며.

저벅.

여전히 멍해있는 송유빈에게 걸어갔다.

"지… 진짜 무기왕이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 사이로 송유빈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상상 속의 무언가를 목격한 듯한 눈빛이었다.

개미굴에서 쫓아오던 이후로 처음이구만.

정확히는 두 번째 만남이었다.

개미굴을 리볼버로 쓸어버리며 나온 뒤.

혹여나 카메라에 모습이 담길까 혼신을 다해 튀던 날 잠깐 멈춰보라며 끝까지 쫓아왔던 송유빈이었다.

"일단 자리 좀 피할까요?"

잠시 후면 난장판이 될 저택이었기에.

송유빈을 먼저 빼내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와락!

!?

놀라지 않게 손부터 잡으려고 한 건데 지체없이 날아드는 송유빈.

순식간에 목을 감싸버린 송유빈에 오히려 내가 놀라버렸다.

"가… 갑니다."

당황스러웠지만 피하긴 피해야 하니. 

송유빈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은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스르르.

저택에서 꽤 떨어진 위치.

순식간에 날아온 뒤 땅을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

지상으로 내려왔음에도 여전히 찰싹 달라붙어 있는 송유빈을 바라봤다.

날아오른 순간부터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송유빈.

얼굴이래봤자 가면이 쓰여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송유빈은 잠시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저…."

"아!"

후다닥.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송유빈이 팔을 풀며 조금 거리를 벌렸다.

"아… 안녕하세요, 무기왕님."

평소 세간에 비춰지는 모습과 달리 송유빈이 수줍은 인사를 건넸다.

스트림 잠시 멈춰놓길 잘했네.

애초에 가짜 참교육을 위해 튼 캠이었기에.

송유빈을 안고 하늘로 오른 순간부터는 잠시 멈춰놓았었다.

"안녕하세요."

나도 어색한 인사를 건네자 송유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진유석이란 후배분이 연락을 해와서요. 유빈 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요."

송유빈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져갔다.

자신을 위한 후배의 헌신에 대한 감동인 것 같았다.

"그럼 절 구하러 오신 거예요?"

감동은 감동인데 내가 생각하던 방향은 아닌 거 같기도 했다.

"하하… 네, 당연히 구하러 와야죠."

내 찐팬인데.

그렇고말고.

"우와…!"

다시 한번 놀라는 송유빈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이제 가봐야 할 거 같네요."

갈 시간이었다.

싸움이 일어날 장소에서 송유빈을 멀리 떨어뜨려 놨으니.

이제부턴 가짜한테 참교육을 해줄 시간이었다.

"곧 여기로 후배분이랑 경찰이 올 거예요."

사아아…!

일렁이고 있는 칼데아로 연기를 집중시켰다.

"나중에 또 봐요."

"아…!"

송유빈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연기를 터뜨리며 조금 전 떠나온 저택으로 방향을 틀었다.

* * *

"…."

송유빈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중에 또 보자는 말을 하기 무섭게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무기왕.

꽈악.

볼따구를 꼬집은 송유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현실이란 말이지."

방송국에서 일하며 유명한 연예인들은 질리도록 봤었다.

그렇기에 누굴 보든 감동하거나 떨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완벽한 착각이었다.

- 사락.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말 잘하기로는 CBC 방송국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유빈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

무기왕에게 매달려 이곳까지 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저택에서 멀어져 버린 무기왕과 송유빈.

목을 감싼 팔로 무기왕의 체온을 느끼면서도 송유빈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덕분에 땅에 내려서까지 별말을 건네지 못했고 말이다.

'진유석 이 자식…!'

싱긋.

어떻게 한지는 모르겠지만 무기왕에게 연락할 생각을 다한 후배 진유석.

후배 하나는 잘 뒀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 당연히 구하러 와야죠.

'목소리 완전 좋아.'

조금 전 들었던 음색을 떠올리며 송유빈이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는 거에 더해 목소리까지 좋다니.

완전 사기 캐릭터였다.

띠링!

"응?"

마음속으로 무기왕에 대한 찬양을 남발하고 있을 때.

송유빈의 핸드폰으로 알림이 울렸다.

슥.

"…!"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송유빈의 눈이 커졌다.

# 오늘 기존의 무기왕은 몰락합니다!

뮤튜브에서 켜진 서태혁의 스트림 방송이었다.

* * *

쿠웅!!

송유빈을 내려준 뒤 다시 도착한 가짜의 저택.

살벌하구만.

날 향해 겨눠져 있는 수많은 총구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하늘에서 땅으로 착지하는 동안에도 날 쏘지 않고 있는 녀석들.

"오늘 기존의 무기왕은 몰락합니다!" 

응?

지 혼자 소리를 지르는 가짜놈.

위잉.

허…?

가짜놈의 등 뒤에서 무언가 돌아가고 있었다.

방송국에서나 쓸 것 같은 거대한 카메라였다.

이 미친놈 봐라.

"무기왕의 몰락을 두 눈으로 지켜보십시오!"

어이가 없었다.

송유빈을 데려다주느라 잠시 사라진 사이.

가짜 녀석도 스트림을 시작한 것이었다.

나라고 속이는 건 글른 걸 안 건지 따라하는 것 대신 교체를 선언하는 모습.

재밌네.

저 근거 없는 자신감에 어이가 없긴 했지만.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으로 내려오며 나의 스트림 역시 다시 시작된 상황.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야 가짜, 이름이 뭐냐?"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을 테지만.

존댓말을 할 생각 따윈 없었다.

"서태혁입니다."

이미 내 스트림을 통해 얼굴이 드러나서인지 거침없이 이름을 밝히는 서태혁.

대답한 뒤 날 바라보던 서태혁도 입을 열었다.

"당신은요?"

"무기왕이다, 이 새끼야."

순간이지만 미간을 찌푸렸던 서태혁.

무언가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을 자기 딴에는 무기왕의 세대교체라는 웅장한 판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군요."

"너 같은 따라쟁이 새끼한테 해줄 건 욕밖에 없거든."

피식.

웃음을 터뜨린 서태혁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철컥.

곧이어 꺼내지는 두 자루의 리볼버.

저건가.

외관 만큼은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를 완벽히 재연해낸 서태혁의 리볼버.

"스스로의 기술에 잡아먹힐 텐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보고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서태혁이 말을 건넸다.

그런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저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내기할래?"

"…?"

의아해하는 서태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놈 리볼버가 쏘아지는 동안에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짜 네가 이긴 걸로 해주지."

"뭐라구요…?"

"대신 내가 이기면 딱 한 대만 맞자."

"풉."

입으로 손을 올린 서태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그렇게 한참을 웃다 간신히 진정하는 서태혁.

"정말 오만하군요. 이 상황에서까지 센 척이라니… 좋습니다."

철컥.

서태혁의 리볼버가 나를 향해 겨눠졌다.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의 성능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죽일 생각까진 없었는데… 죽음을 자초하시는군요."

끼릭.

"그럼."

방아쇠로 손가락이 얹어진 후.

두두두두두두두---!!

발사되는 탄을 바라보며.

[유탈라스 - 동기화]

[전신 의태 - 갑주]

비늘로 온몸을 둘러나갔다.

카가가가가가가가!

갑주로 부딪히는 엄청난 수의 탄환들.

자동으로 개조한 건지 연사력 하나만큼은 내 리볼버보다 한 수 위였다.

웃기지도 않네.

위력은 비교할 수조차 없이 조악했지만 말이다.

겉모습은 잘 따라했네.

덕분에 내 리볼버에 당하던 적들의 시야를 경험해보고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조차 힘든 빛의 쏟아짐.

탄환은 비늘에 기스조차 내지 못하고 튕겨나가고 있었지만 몹시 색다른 경험이었다.

두두… 두…!

탄환이 바닥난 건지 서태혁의 리볼버가 멈추어갔다.

"…!!"

탄환으로 인한 연기가 사라지며 눈이 커다랗게 변한 서태혁의 얼굴이 드러났다.

비늘로 감싸진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탄을 다 받아냈다는 사실에 경악한 얼굴이었다.

"너 따라하기 전에 뭘 본 거냐."

탄을 받고 나니 더 어이가 없었다.

분명 따라하기 전에는 한튜브에 올라온 내 영상을 분석했을 터.

고작 이따위 화력으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 리볼버가 이따위였으면 난 이미 개미굴에서 죽었을 거다."

"이… 건방 떨지 마라!!"

스트림이 켜져 있어서일까.

순식간에 냉정을 잃은 서태혁이 오른손을 치켜 올렸다.

스르륵.

서서히 올려진 오른손을 감싸는 푸른색의 비늘들.

"조악하구만 조악해."

푸른색이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인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이걸 받아 보고나 그런 소리를 해라!!"

탓!!

마치 내 1단계 의태처럼 오른팔을 비늘로 감싼 서태혁.

달려온 서태혁이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엄청난 기세로 휘둘러지는 서태혁의 주먹.

스윽.

느리다 못해 하품이 나오는 주먹을 바라보며.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내밀었다.

쿠아아아아--!

엄청난 기세로 내질러져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서태혁의 주먹이.

나의 중지에 와닿았다.

토옥.

179화. 격

푸화아아아!

진심을 다해 내지른 주먹에 주변으로 풍압이 일었다.

최신 나노 기술의 집결체로 사용자의 힘을 비약적으로 증폭시키는 비늘.

그런 비늘을 두르고 내질러진 주먹이었다.

'…?'

그런데 토옥이라니.

서태혁이 들려올거라 예상했던 타격음이 아니었다.

힘이 가진 주먹이 부딪힌 게 아닌, 부드럽고 말랑한 고양이 발바닥이 부딪힌 소리였다.

꿀꺽.

서태혁이 마른침을 넘기며 자신의 주먹을 막은 것을 바라봤다.

자신이 두르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영롱한 빛을 내고 있는 비늘.

푸른빛의 비늘이 둘러싸진 중지 손가락 하나였다.

'말도 안 된다.'

막힌 것이었다.

서태혁이 가진 모든 것의 집결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나노 기술.

그런 기술을 집약해 재연해낸 비늘이 손가락 하나에 막혀버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네."

손가락 주인의 음성이 서태혁의 귓가로 들려왔다.

몹시 여유로운 음성이었다.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는 목소리.

모든 걸 걸고 내지른 누군가의 주먹을 막아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신 있었던 모양이야."

두말하면 입이 아픈 소리였다.

서태혁은 자신 수준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리볼버의 탄환은 어찌저찌 막혔지만 나노 기술로 만들어진 최고의 비늘만큼은 통할 거라 생각했다.

'뭉개졌어야 하는데.'

주먹을 내지른 후 눈앞에 남은 건 다져진 고깃덩어리일 거라 확신했었다.

그리고 그 고기를 조금 전 무기왕이었던 것! 이라며 스트림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생각이었다.

'내 최고의 발명품인데…! 저따위 비늘보다 훨씬 강해야 하는데…!'

2년 만에 등장했던 무기왕의 동영상.

붉은 갑주의 사로카라는 노네임드 데몬과의 전투였다.

무기왕은 그곳에서 비늘을 두른 주먹으로 사로카를 박살 냈었다.

'나도 잡을 수 있다.'

점점 최신 기술이 깃들어 강력해지는 비늘을 바라보며.

서태혁은 확신했었다.

이미 자신의 비늘은 무기왕의 것을 뛰어넘었으며 사로카라는 데몬이 다시 나타나더라도 한 방에 보낼 수 있다는 확신을 말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드러난 결과는 대체 뭐란 말인가.

압도해서 박살내긴커녕 1cm조차 밀어내지 못했다.

콰지직!

충돌의 대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멈춰있던 무기왕의 손가락에 닿은 서태혁의 오른팔.

오른팔에 둘러져 있던 나노 비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 상대 거래처의 조직원들과 벽까지 부숴버렸던 비늘이었다.

파아앙!

"끄아아아악!"

강도를 가늠하기 힘든 무기왕의 중지.

중지에 부딪힌 리바운드가 서태혁을 덮쳐왔다.

나노 비늘이 터져나감과 동시에 서태혁의 오른팔로 전해지는 끔찍한 고통.

우드드득!

"아아아악!"

서태혁이 오른팔을 움켜잡으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팔을 지탱하던 뼈가 모두 부숴져 흐물해진 상태.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은 영문 모를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었다. 

"말도 안된다아아아!!"

고통에 차있으면서도 서태혁이 악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지금의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인정해선 안 됐다.

- 태… 태혁아!

부모까지 죽여가며 손에 넣은 것이었다.

개방과 함께 밑바닥까지 고꾸라졌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이었다.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끔 해준 것이었다.

뒷세계의 사람들은 물론 내전이 일어나는 국가의 인사들까지 무기의 공급줄을 쥐고 있는 서태혁에게 몸을 굽씬거리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이것의 영향은 음지에서가 끝이 아니었다.

양지에서도 서태혁을 빛나게 해주었다.

수많은 뮤튜버들이 거주하고 있는 뮤튜버에서 1위를 찍으며 모든 이의 부러움과 선망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게 바로 서태혁이었다.

"삼류."

지금의 서태혁을 있게 해준 모든 것들이 저 중지에 하나에 부딪히며 깨부서졌고.

벌어져 있는 차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눈앞의 남자는 서태혁을 향해 삼류라 부르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슥.

서태혁이 완벽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가면을 쓴 무기왕을 올려다봤다.

"잘 기억해둬라."

그런 서태혁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네는 무기왕.

"이게 너와 내게 어울리는 높이차이니까."

"…!!"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릎을 꿇은 채 무기왕을 올려다보고 있는 서태혁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스트림을 통해 이 모습을 보고 있을 터였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죽여버려!!"

서태혁이 뒤에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절규에 찬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러든 말든 천천히 주먹을 쥔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무기왕.

달빛을 받아 영롱한 푸른빛을 자아내는 팔이었다.

구구구구…!

'아.'

들어 올려지는 주먹을 보며.

서태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죽는다.'

쿠아아아아아!

"도련님 구해!"

"이 새끼가!!"

열심히 달려오는 적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엄청난 힘을 머금은 채 아래로 내려꽂히는 무기왕의 주먹.

저택의 지면과 주먹이 닿으려는 찰나, 무기왕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격의 차이다."

콰아아아앙!!!

* * *

펄럭.

칼데아를 펄럭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짜 무기왕 서태혁의 저택.

정확히는 저택이었던 장소였다.

쿠구구구---!

지면부터 완전히 박살 나 폭삭 내려 앉아버린 저택.

정확하게 서태혁이 보유하고 있던 땅과 저택만이 완벽히 박살 나 있었다.

힘 조절 완벽하고.

흡족스러운 결과에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무기는 한 번 쏴보지도 못한 채 서태혁과 함께 지면 밑으로 빨려 들어간 녀석의 부하들.

서울 한복판 저택에서 저 정도 양의 무기를 들고 설치는 놈들이라니 보통 녀석들은 아닐 터였다.

삑.

열심히 돌아가던 액션 캠을 종료했다.

흠.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서태혁이 어째서 날 따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체 없이 날 향해 탄을 쏟아부은 것부터 비늘을 두른 주먹을 망설임 없이 내게 휘둘렀던 서태혁.

이것만 봐도 정신이 나가도 보통 나간 놈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꼴깍.

잠시 무너져 내린 저택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는 사이 마른침이 삼켜졌다.

내가 주먹 한 방에 얼마를 해먹은 거지.

땅값이 비싼 청담동 중에서도 가장 큰 저택과 부지였다.

정원의 관리 정도만 봐도 어마무시한 돈이 들었을 터.

그런 저택과 정원이 완벽하게 박살나 버렸다.

다행이야.

새삼스레 가면을 쓰고 온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서태혁 놈이 운 좋게 살아남았더라도 청구할 대상을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정당방위였지."

거기다 먼저 총을 갈겨댄 건 서태혁이었으니 정당방위 성립이었다.

"나의 찐팬 유빈 님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무기왕의 이름에 먹칠을 하려고 하다니."

절로 고개가 내저어지는 서태혁의 잘못들.

"아무도 뭐라할 수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백 억대의 재산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자신을 합리화하며.

사악.

이청아가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번쩍.

!?

그 순간. 

무너져내린 서태혁의 저택 사이로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보랏빛이 새어 나왔다.

* * *

# 스트림이 종료되었습니다.

화면에 떠오른 문장을 보며.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던 송유빈이 고개를 들었다.

쿠우우우우!

조금 전 굉음이 들렸던 서태혁의 저택 쪽.

그곳에선 엄청난 먼지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뭐야 진짜."

스트림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 진짜다.

@ 이게 진짜지.

송유빈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짤막한 채팅만이 올라오고 있었다.

@ 잠시나마 가짜 따위와 헷갈린 자신을 반성합니다.

@ 죄송합니다, 무기왕 님.

반성의 채팅도 함께였다.

@ 한국에 대형 무기상이 있다고 하더니 가짜가 그놈이었나 보네요.

송유빈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에 봤던 추적 프로그램에서 나온 고래 무기상.

그놈이 공급한 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내용이었다.

정재계에 긴밀한 커넥션을 가지고 있어 절대 잡히지 않을 거라 예상되었던 무기상.

내용을 봤을 때 모든 정황이 서태혁을 가리키고 있었다.

띠링.

@ 송유빈 님은 꿈 이뤘겠네요.

@ 부러워요, 실제로 만나다니.

이어서 거론되는 자신의 이름을 보며.

스윽.

송유빈이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금 전 납치를 당하고 무기왕에게 구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고요한 하늘이었다.

왜에에에엥--!

곧이어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불빛들.

사이렌은 두 갈래로 나뉘어 저택과 송유빈 쪽으로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흐음."

살랑 불어와 송유빈의 뺨을 간지럽히는 밤바람까지.

짧은 시간동안 별일을 다 겪었지만 꽤 상쾌하게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싱긋.

묘한 기분 좋음을 느끼며.

송유빈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무기왕."

미소와 함께 떠오르는 무기왕의 모습과 그런 무기왕과 함께 했던 한밤중의 비행.

보는 사람 한 명 없는 고요함 속에서 송유빈의 입으로 진심이 담긴 말이 흘러나왔다.

"진짜 멋있네."

* * *

휙! 쿵!

앞에 놓인 돌무더기를 헤쳐나갔다.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사이렌 소리.

아니 어디까지 묻힌 거야.

날아가려던 중 새어 나온 보랏빛에 곧장 아래로 내려왔다.

저택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안 보였던 걸 보면 어디 저택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져 있었던 것 같았다.

"으… 으."

돌에 파묻혔지만 직접 타격을 받은 건 아니기에.

목숨줄은 붙어 있는 서태혁의 부하들.

살려달라고 뻗어오는 손들을 툭툭 쳐내며 계속해서 땅을 파나갔다.

"기다려, 구급차 오잖아. 마음도 급한데 말이야."

어차피 살 녀석들이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발굴을 계속했다.

다가오고 있는 경찰차와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빠르게 공명을 하고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나저나 왜 보랏빛이 이놈 저택에서 나오는 거지.

땅을 파면서도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무기상이라 해도 서태혁이 가지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최신식 화기들이었다.

다른 화기와 다른 게 있다면 서태혁과 부하들이 개발한 기술들이 적용되어 있다는 것.

어쨌든 내 무기고에 넣을만한 무기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수집한 것들 중에 뭐가 있었던 건가.

돈이 많았던 녀석인 만큼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았을 터.

유물 수집이나 각종 취미를 하다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일 수도 있었다.

콱!

빛을 막고 있던 돌멩이를 치워내자.

무언가를 둘둘 싸매고 있는 천이 나타났다.

그 속에서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는 무언가.

스륵.

검… 조각?

천이 싸고 있던 건 손바닥만 한 검날이었다.

무언가에 녹아내린 건지 양 끝은 심각하게 훼손되어있는 상태.

멀쩡한 건 가운데 부분의 날뿐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보랏빛.

무엇에 대한 빛일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슥.

생각해봐야 알 수 없는 의문들을 뒤로하고.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검날로 손을 가져갔다.

180화. 특이한 마부

덜컥. 덜컥.

아직 시야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

몸이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사아아…!

조금씩 회복되는 시야에 정면을 응시했다.

무언가의 마차 안이었다.

정확히는 마차 뒤편에 실린 짐칸.

슥.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와우.

뒤편엔 나와 함께 많은 검이 실려있었다.

대충 봐도 백 자루는 거뜬히 넘는 숫자였다.

검을 싣고 어디로 가는 거지.

고개를 돌려 주변 풍경을 살폈다.

딱히 특이점 같은 걸 발견할 수 없는 평범한 숲길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지만.

마차를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네. 

많이 부식된 상태였던 검날.

아마도 뒤에 실린 검들 중 하나가 검날의 주인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검의 기억인 만큼 난 마차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이고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이왕 나가지 못하는 거 마음이라도 편하게 있자는 생각에.

털썩.

약간 남은 공간으로 몸을 앉혔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함에 뭐라도 보일 때까지 심신의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스으읍."

다소 추한 소리를 내며 숲속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코를 타고 몸 전체로 상쾌한 숲 내음이 퍼져갔다.

상쾌하구만.

검날을 찾기 위해 열심히 땅을 파서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들이킨 먼지가 숲의 공기로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스읍 하 스읍 하"

그렇게 몇 번의 심호흡을 더 해 먼지를 완벽히 몰아낸 뒤.

다시 마차의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굴까.

마차를 이끌고 있는 누군가의 뒤통수가 보였다.

나보다 작은 키를 가진 채 망토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누군가.

망토 때문에 나이라던가 성별을 특정하기가 힘들었다.

흐음… 이거 참.

감이 안 잡히네.

항상 그랬던 건 아니지만, 웬만한 경우엔 대충 어떤 무기에 관련된 기억이겠구나를 예상하며 보랏빛과 공명했었다.

지금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이 우연히 보랏빛과 공명한 적은 손에 꼽는 수준.

덕분에 공명을 통해 기억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여긴 어디이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예상조차 알 수 없었다.

첨벙.

…?

마차를 타고 얼마나 이동했을까.

바퀴가 무언가에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무기의 기억일까 머리를 굴리던 걸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터널이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각형의 입구를 가진 터널이었다.

만들어지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 벽돌로 이루어진 터널엔 물이끼와 덩굴이 가득했다.

물 위에 지어진 터널이라.

신기하네.

물론 처음부터 물 위에 지은 건지, 지은 다음에 물이 차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첨벙. 첨벙.

터널로 나아가며 조금씩 물도 깊어지고 있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변을 밝히던 빛도 사라져 점점 어둠에 먹히고 있는 상태.

그러든 말든 정체불명의 마부는 계속해서 마차를 앞으로 몰고 있었다.

꽤 깊은가 본데 괜찮은 건가.

이미 터널로 꽤 들어왔음에도 반대편엔 작은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도 터널처럼 깜깜하거나 아니면 그만큼 터널이 깊다는 얘기였다.

척.

잠시 후.

"워 워."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가 작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앳된 목소리였다.

왜 멈춘 거지.

아직까지도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그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스윽. 삭. 삭.

앞에서 무언가를 하는 듯한 마부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사방이 어두워 뭘 하고 있는지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우웅.

…!

그렇게 눈살을 찌푸린 채 쳐다보고 있기를 몇 분.

마차의 맨 앞에서 푸른색의 빛이 생겨났다.

공중에 떠 주변을 밝히는 푸른색 빛에 마부의 생김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애네.

아까 봤던 것보다 더 작은 키였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수준.

그리고.

문제는 키가 아니었다.

뾰족.

사람과 달리 하늘을 향해 쫑긋 솟아있는 귀.

토… 토끼?

아무리 봐도 토끼의 귀와 똑 닮은 생김새였다.

쫑긋. 쫑긋.

주인의 의지인지 아니면 자동으로 움직이는지는 모르겠으나.

토끼귀는 쉬지 않고 쫑긋거리며 내 눈길을 빼앗고 있었다.

"길을 보여주소서."

토끼귀에 정신 팔려 있기를 잠시.

토끼 마부의 읊조림과 동시에 하늘에 떠 있던 푸른빛이 앞으로 번져나갔다.

우우웅…!

정확히는 그려 나가고 있었다.

마차가 나아갈 곳을 알려주는 푸른빛의 길을 말이다.

그렇게 길이 그려지는 걸 기다리던 토끼 마부가 입을 열었다.

"가자."

주인의 말에 따라 다시 이동하기 시작한 마차.

마차의 말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익숙한지 조금의 놀람도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

그렇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기를 잠시.

저 멀리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아마도 출구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끝이 가늠되지 않는 깊은 터널이었다.

그랬던 터널이 그려진 빛을 따라가자 얼마 되지 않아 출구를 드러낸 것.

길이 없으면 통과할 수 없는 터널 같은 건가.

열심히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며.

어느새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버린 출구의 빛을 응시했다.

* * *

덜컹… 덜컹.

멀미 나겄네.

터널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토끼 마부와 마차는 하염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기억은 또 처음이구만.

우연히라도 발견된 검날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했던 공명으로 봤던 것 중 가장 지루한 기억이었다.

체감상으로 대충 가늠해도 이미 두세 시간은 넉넉히 지났을 듯했다.

발라당.

마차에 몸을 눕히고 정면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의 하늘은 우울하고 칙칙하기 그지없는 하늘이었다.

지구는 아닌 거 같고.

분위기 자체가.

코를 통해 들어오는 공기 자체가 달랐다.

호흡을 통해 공급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니었다.

폐에 쌓일 듯한 찝찝한 먼지 섞인 공기만이 열심히 코로 들어오고 있었다.

터널 하나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다르네.

보통 터널이 아닐 거라 생각은 했지만.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잇는 터널이라니.

생각보다 더 신비로운 녀석이었다.

이곳이 낯설지 않은 건 지난번의 공명 때문이겠지.

로튼의 장막에 부딪힌 순간 일어났던 공명을 떠올렸다.

회귀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기의 빛이 아닌 다른 것에 공명이 반응한 것은 말이다.

공명에서 봤던 건 로튼을 묵사발 냈던 무기왕 카이안의 기억.

그 기억에서 느꼈던 공간의 분위기가 이곳과 비슷했다.

그럼 데몬의 세계인가.

점점 마차를 끌고 있는 토끼 마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뭐하는 녀석이길래 인간 세계에서 검을 잔뜩 실은 채 데몬의 세계로 넘어온 걸까. 

이 토끼쉨 설마?

이틀 뒤 받을 계획이었던 칸의 검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척사윤이란 사람이 만들어낸 검.

검을 봤을 때도 어떻게 데몬인 칸이 인간이 만든 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토끼쉨이 인간의 무기를 데몬에게 나르고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귀 귀여워서 착한 놈인 줄 알았더니.

진짜면 서태혁 투 같은 새낀데.

인간들 몰래 두 세계를 오가며 데몬을 돕는 녀석일지도 몰랐기에.

조금이라도 얼굴을 담아두고자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오랜만이구나 민쿠야."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힘이 실려있는 목소리.

장발의 아저씨다.

남자를 마주한 한 줄 감상평이었다.

울긋불긋한 근육의 남자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기다란 흑발을 가지고 있었다.

직업 여쭙고 싶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또 한 가지.

온몸에 새겨진 엄청난 양의 흉터였다.

저렇게 많이 다쳤는데도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흉터 자국들이 남자의 몸에 남아 있었다.

호다닥!

남자의 인사가 건네지기 무섭게.

말에서 호다닥 내려온 토끼 마부, 민쿠.

생김새에 잘 어울리는 귀여운 이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민쿠가 남자를 향해 120도로 인사를 박았다.

아까부터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인간은 아닌 듯한데 유창하게 말을 하는 민쿠.

대체 뭐하는 녀석일까.

"껄껄! 편하게 하라니까 편하게!"

민쿠를 향해 손을 내저은 남자가 마차를 바라봤다.

"이번에도 늦지 않게 와줘서 고맙구나."

이번에도.

저 말로 미루어 보건대 민쿠가 이곳에 온 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차에 실린 검을 인간 세계서부터 남자에게 전달하는 것.

이게 토끼 마부 민쿠가 수행하고 있는 임무인 듯했다.

"당연합니다! 그게 제 역할인 걸요!"

"그래, 그래."

호탕하게 웃으며 굽신거리는 민쿠를 바라보는 남자.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민쿠야 그… 율이는 잘 있느냐?"

질문을 듣기 무섭게 방긋 웃어 보이는 민쿠.

"당연하죠! 율이는 매우 잘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잘 챙길 테니."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우렁차게 입을 연 민쿠.

민쿠가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을 이어갔다.

* * *

눈이 내리고 있는 겨울 설산.

설산의 깊은 곳에 오래된 집 한 채가 위치해 있다.

오래되긴 했지만 소복이 쌓인 눈 때문일까. 

집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아늑함을 뽐내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오래된 집의 툇마루.

툇마루의 끝엔 눈 만큼이나 하얗게 센 머리의 할머니가 앉아 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인자한 인상.

할머니의 얼굴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눈을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의 눈동자.

눈 만큼이나 깨끗하고 맑은 빛을 가진 눈동자였다.

"콜록!"

눈을 구경하던 할머니가 위태로워 보이는 기침을 시작했다.

벌컥!

그러자 문이 열리며 튀어나오는 흑발의 소녀.

이제 갓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할머니! 날씨 추우니까 밖에 나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홀홀! 눈이 이렇게 예쁘게 내리는데 어찌 안 나오겠느뇨."

걱정스러운 손녀의 말을 기분 좋게 웃으며 받아치는 할머니.

"감기 걸리니까 얼른 들어오세요!"

"그래 그래."

손녀에게 못 이긴 척 할머니가 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까악--! 까악--!

그때 들려오는 설산 까마귀의 울음소리.

울음소리를 들은 할머니가 묘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할머니! 얼른 안 들어오고 뭐 하세요!"

"홀홀, 유라야."

"네?"

할머니의 부름에 유라라 불린 소녀가 몸을 돌렸다.

"방을 따시게 데워놓도록 하거라."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할머니를 바라보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곧 손님이 찾아올지도 모르겠구나."

* * *

"앞으로도 제가 잘 챙길 테니."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민쿠가 힘차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척준경 님!"

181화. 강 위의 터널

우당탕!

이미 일이서 있었지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처… 척준경!?

앞으로 찰싹 달라붙어 민쿠와 말하고 있는 남자, 척준경을 바라봤다.

민쿠의 입에서 불린 이름에 너무 놀라버렸기에 뇌가 정지된 지는 오래였다.

이게 머선 일이고!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살아온 인생을 돌아봤을 때 행운의 신이 함께 했느냐를 물으면 대답은 무조건 아니오였다.

행운의 신이 함께하긴커녕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 느껴질 정도로 불행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척준경이라니.

참교육해주러 간 서태혁의 집에서 만난 보랏빛이 척준경에 관련된 기억이라니!

신이시여!!

앞에 행운의 신이 있었다면 지체 없이 달려가 감사의 절을 박았을 것이다.

토끼 님은 어떻게 척준경을 아는 거지.

어느새 토끼쉨에서 토끼 님으로 변경된 호칭.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지 말을 주고받는 둘 사이엔 깊은 유대감이 느껴졌다.

"네가 율이 곁에 있어주니 안심이구나."

율이 누구지.

분명 사람의 이름일 터였다.

척준경과 민쿠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

말하는 뉘앙스를 봤을 때 율은 두 사람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율이도 겉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척준경 님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민쿠의 말에 척준경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비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 지경이군."

민쿠 같은 토끼귀는 없지만 나름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비라는 걸 보아 두 사람이 언급하고 있는 율은 척준경의 자식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민쿠는 율의 친구 정도 될듯한 느낌.

"그런 말씀 마세요, 척준경 님이 누구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지는 율이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거지.

아니 애초에 고려의 무신이었던 사람이 왜 데몬의 세계에 있는 거야.

모든 게 의문이었다.

어디까지나 척준경은 개방의 날이 오기 전, 삼국시대의 사람.

무신이었던 만큼 전장에서 죽었을 확률은 있다 생각했지만, 그 전장이 아예 이세계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으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

이리저리 두뇌를 회전시키며 눈으로는 열심히 척준경의 몸을 훑었다.

악귀참도는 없네.

아무리 보랏빛의 기억일지라 해도 악귀참도가 있으면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지금 내가 탄 마차에 있는 검 중에도 악귀참도는 없는 상태.

당연히 척준경이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악귀참도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적 없는 무기였다.

단지 무신 척준경이 사용했을 거라 추정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고무적이다.

검날과 공명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악귀참도의 실존유무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랏빛이 존재한다는 건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무기가 존재한다는 증거였고.

기억에서 척준경이 나타난 순간 그 무기는 악귀참도일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검은 전부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호다닥 마차에서 검을 내려놓은 민쿠.

그런 민쿠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은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여기부터는 내가 가지고 가마."

"예! 율이에게도 안부 전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거라, 요새 정체를 알 수 없는 데몬 5인조가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 하더구나."

걱정하는 척준경을 향해 민쿠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무슨 종족인지는 몰라도 표현만큼은 인간 패치가 제대로 된 느낌이었다.

"걱정마십시오! 배달꾼 민쿠, 어떤 위협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거참 우렁찬 토끼구만.

척준경도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조심히 가거라."

"예! 항상 몸조심하십시오!"

그렇게 서로에게 짤막한 인사만을 남긴 후.

민쿠와 척준경이 등을 돌렸다.

* * *

스륵.

기억에서 빠져나온 뒤.

눈을 떠 빛이 사라진 검날을 내려다봤다.

내가 본 건 민쿠가 아닌 마차에 실려있던 검날의 기억이었다.

검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헤어진 뒤에도 이어졌던 검날의 기억.

대체 정체가 뭐야.

뒤의 기억이 길진 않았다.

민쿠가 내려놓은 검들을 가지고 어떤 절벽 앞까지 걸어간 척준경.

엄청난 절벽이었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높이와 뭐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재질까지.

내가 태어나 본 절벽은 절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장했다.

- 우우웅.

그리고, 단순히 신기한 재질로 만들어진 거대한 절벽이 아니었다.

엄청난 크기로 갈라져 있는 절벽의 사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가 일렁였고.

- 크아아아악! 키아아악!

그 에너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데몬이 쏟아져 나왔었다.

최소 B급 이상이었어.

나약한 녀석들이 숫자만 채운 게 아니었다.

지금 한국에서의 분류 기준으로 봤을 때 모두가 B급 이상의 데몬.

데몬 수천수만 마리가 균열에서 계속 쏟아져 나왔고, 척준경은 그런 데몬들을 상대로 홀로 맞서고 있었다.

- 카앙!

어째서인지 척준경이 사용하는 검은 얼마 가지 않아 모두 부러지고 말았다.

검에 대한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검이 잘못 만들어지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봤을 땐 사용자인 척준경이 너무 강했다.

멀쩡한 검이지만 견뎌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설 만큼 척준경의 힘이 엄청났다.

스윽.

양 끝이 녹아내린 검날을 들어 올렸다.

기억의 마지막.

다른 검과 마찬가지로 검날이 있던 검도 부러졌었다.

부러지며 어떤 데몬에게 집어 삼켜져 버린 검날.

검날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으.

데몬의 침 때문에 녹았던 건가.

본의 아니게 녹아버린 이유까지 알아버렸다.

서태혁의 손에 들어간 건… 음. 

검날을 집어삼킨 데몬이 어찌저찌 살아남아 인간계로 내려왔고.

누군가한테 죽임당하면서 검날을 뱉은 건가.

데몬의 세계에서 서태혁의 손까지.

검날이 전달된 경로를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 올렸다.

뭐, 이건 별로 안 중요하지.

검날이야 어쨌든 내게 기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할 바를 다한 뒤였다.

더 이상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휙.

빛이 사라져버린 검날을 돌더미로 던져버렸다.

"흐음."

턱을 문지르며 조금 전 기억에서 본 상황을 떠올렸다.

율과 검 배달꾼 민쿠.

그리고 배달받은 검을 이용해 쏟아져 나오는 데몬들과 싸우던 척준경까지.

풀썩.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슥슥 관계도를 그렸다.

계속해서 검을 소모하며 싸우는 척준경과 그런 척준경의 검이 부족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배달하는 민쿠.

둘 사이에는 율이라는 척준경의 아들 혹은 딸이 있었다.

척준경은 율을 보러 가지 못하는 거에 대해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

척준경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본 건 아니었지만.

표정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끝도 없이 데몬이 쏟아져 나오고 척준경이 그것들을 막는 입장이라면.

보러 가지 않은 게 아니고 못 가는 상황인거고.

톡… 톡.

관계도를 보며 이틀 후에 받을 예정인 척사윤의 검을 떠올렸다.

척사윤이 기억에서 봤던 율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척사윤이 율이고 율이 검을 만드는 입장이라면.

민쿠가 둘 사이를 계속 오고 가는 게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생각해보자.

기억에서 본 민쿠를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애초에 난 검날에서 본 기억의 시간대를 알지 못했다.

척준경이 살아있는 걸 봤을 땐 분명 몇백 년 전의 일일 터.

아닐 가능성도 있긴 하지.

모두가 개방의 날 이후 등장했다던 데몬도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는 상황.

척준경도 이미 인과율을 벗어나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꽤 오래된 과거라 생각하면 민쿠를 찾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내가 민쿠에 대해 아는 건 토끼귀와 앳된 생김새뿐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다면 이미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다른 걸 중심으로 찾아야 해.

기억에서 봤던 이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지금.

내가 찾아볼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터널.

기억 속에서 인간 세계와 데몬 세계를 이어주었던 터널을 찾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며 어느 정도 지형이 바뀌었을지언정 비생명체인 터널을 찾는 게 현명했다.

기억에서 봤을 땐 구석탱이에 있어서 손을 덜 탈 거 같았고.

분명 인간 세계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곳은 한국일 가능성이 높았다.

단순히 척준경이 고려인이어서는 아니었다.

척준경과 율 사이를 오갔던 토깽이 민쿠.

데몬 세계로 넘어갈 때는 특수한 터널을 사용했지만, 터널까지는 마차로 일반적인 이동을 했었다.

계속 오고 가려면 말도 안 되는 거리를 가진 해외는 아닐 것 같았다.

방법은 아직 딱히 떠오르는 게 없지만.

툭 툭.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널부터 찾는다.

작은 소목적을 정한 후.

왜에에에엥--!

거의 다가온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백운이 검날의 기억 속에서 봤던 터널 앞.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터널은 여전히 건재했다.

시간이 흐르며 물이 차오르고 무언가에 의해 막힌 상태였지만 말이다.

첨벙.

터널이 있는 강으로 누군가 발을 들였다.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차림새.

스윽.

터널까지 와 망토를 벗자.

백운이 기억 속에서 봤던 토끼귀가 튀어나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완 달리 귀가 더 이상 쫑긋거리지 않고 있단 것이었다.

"…."

외관만 봤을 땐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생김새였다.

작은 키와 더불어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

기억에서의 생김새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민쿠가 조용히 터널을 응시했다.

'어둡네.'

이제는 거대한 봉인석에 막혀 안쪽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었다.

그럼에도 민쿠는 느낄 수 있었다.

봉인석 뒤에 있는 깊고 깊은 터널의 길을 말이다.

질끈.

조용히 터널을 바라보던 민쿠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 때문이야.'

첨벙.

자책을 하며 민쿠가 강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심한 자책 때문인지 가슴을 움켜잡은 채였다.

'내가 전부 망쳤어.'

민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후회와 자책, 미안함 등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는 눈물이었다.

"으윽… 흑."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수천수만 번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실책과, 실책으로 인한 끔찍한 결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겁쟁이 새끼…! 그때 죽었어야 됐는데."

퍽! 퍽!

자신의 머리를 몇 대 두들긴 민쿠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율아."

율의 이름을 말하며 한참 울던 민쿠.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계속 흘리며.

"죄송합니다."

민쿠가 닿을 리 없는 사죄를 건넸다.

"척준경 님."

182화. 터널을 찾아서

짹짹짹.

귓가로 참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동시에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아침 햇살.

분명 기분 좋게 맞이해야 할 아침이었지만.

"뒤지겠다."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왼편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엄청난 양의 문서.

대산에게 받아왔던 악귀참도에 대한 추가 서류였다.

"전부 다 달라 그런 건 나지만, 진짜 더럽게 많네."

이 정도 양의 서류를 작성한 대산의 연구진들이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런 걸 쓰라고 했다면 대산이고 나발이고 최소 백 번은 탈주했을 것이다.

끼익.

"후아아!"

의자를 뒤로 젖히며 몸을 기댔다.

거의 이틀 간 밤을 새 수면 부족으로 죽기 직전이었지만 어쨌든 한 장도 빠짐없이 다 살펴보았다.

"이렇게 잘 읽는데 학창 시절에는 왜 이리 공부를 못했었지."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떠올린 후.

앞에 놓인 노트북의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이틀 동안 문서에서 발견한 내용 중 쓸만한 것들만 추린 문서였다.

"휴."

문서를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세 줄.

이틀 동안 쓸만하다고 생각한 내용의 전부였다.

척준경이 생전 살았다고 알려진 위치와 가족 관계도였다.

이러니 못 찾지.

새삼스레 대산이 못 찾을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의 유리함은 어디까지나 풍부한 정보의 양이었다.

그런 대산조차 이 정도 밖에 못 모았으니 중도 포기를 선언한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슥.

고개를 돌려 어찌저찌 그려진 그림 한 장을 쳐다봤다.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터널을 머리에서 사라지기 전 열심히 그려낸 것이었다.

이틀 동안 본 자료보다 이게 더 유용할지도 모르겠어.

그림을 집어 들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얼추 비슷하게 그려내긴 했는데 이걸 가지고 어떻게 찾아야 할까 하는 고민이었다.

장소를 특정 지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없을 무였다.

작은 간판이라도 있어야 언어를 보고 위치라도 유추할 텐데.

깊고 구석진 산속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도울 될 수도 있는 건 산세와 식물인가.

순간 구룡산에서 유탈라스의 옹달샘을 찾아줬던 할아버지 덕문을 떠올렸다.

손을 짚기만 해도 해당 산의 지리를 모두 그려낼 수 있는 능력.

하지만, 어디까지나 특정되는 산이 있었을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예상 가는 산이라도 생기면 연락해보는 걸로 하고.

식물 전문가가 누가 있었지.

이마를 짚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떠오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인물이 없었으면 로튼 전에서 불태워버렸던 유리아가 떠오르는 걸까.

"식물 전문가를 어딜 가서 찾아봐야 하나."

아직 시작조차 못 했는데 막힌 느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핸드폰의 뒤지던 중.

응?

회귀하고 열심히 적어놨던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회귀 전에 봤던 뉴스 기사들을 생각나는 대로 기록해뒀던 노트였다.

슥.

혹시 뭐라도 건질게 있을까 싶어 노트를 펼쳤다.

이미 지난 것들은 스킵한 후.

오늘 날짜 이후에 봤던 뉴스를 살폈다.

음?

# 부산 금정산을 뒤덮는 엄청난 수의 데몬 출현.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지만 헌터들의 합세로 진압됨.

회귀 전에 봤던 거라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일까.

기사는 정확한 날짜나 사건의 원인 같은 특징이 적혀 있지 않았다.

아직 발생하기 전일 테고.

그저 회귀 후 똑같은 뉴스를 본 적이 없기에 아직 일어나지 않았구나를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뭐… 내가 나서서 다 구할 순 없으니까.

회귀하며 처음부터 정리해뒀던 나 스스로의 스탠스였다.

내 목적은 모든 인류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구해야 하는 이들만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날짜도 부정확한데 금정산에 가 죽치고 있을 시간 또한 없었다.

어차피 내가 안 가도 뉴스를 본 헌터들이 합세해 진압할 테니까.

그렇게 터널 찾기에는 별 도움 안 되는 노트를 덮었다.

….

뉴스라.

노트를 덮은 뒤 당시 봤던 뉴스의 내용을 떠올렸다.

금정산에서 엄청난 데몬의 군세가 나타났으니 전투가 가능한 헌터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뉴스였다.

그리고 그 뉴스를 접한 국가직, 프리랜서 헌터들이 대거 금정산으로 지원을 갔었고 말이다.

띠링.

# 한튜브에 새로운 동영상이 올라왔습니다.

마침 핸드폰 위로 떠오르는 한튜브의 푸쉬 알림.

지금 가장 유명한 헌터는 누구지?

무언가를 올렸을 때 가장 큰 반응을 얻을 수 있는 헌터는?

한튜브의 알림을 보며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답은 별 고민 없이 쉽게 내려졌다.

무기왕.

의도하진 않았으나 바로 이틀 전 가짜로 인해 최고의 화제가 됐었던 헌터.

바로 나였다.

무기왕인 걸 숨기고 도움을 요청하면 그냥 묻혀버리겠지.

엄청난 수의 헌터가 동영상을 올리는 시대였다.

아무런 이름도 없는 내가, 국가직 10급 헌터 백운이라는 존재로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반응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무기왕은 달랐다.

필요할 때 써먹으려고 이틀 전에 이미지 보호까지 한 건데.

호다닥.

빠르게 그렸던 그림과 필요한 내용들을 깔끔하게 문서 하나로 정리하고 옆에 있던 가면을 썼다.

그리고.

삑.

지체 없이 한튜브의 스트림 시작 버튼을 눌렀다.

* * *

쏴아아아… 끼익.

뜨신 물을 쏟아내던 샤워기가 멈추고.

철컥.

출근 준비 중인 송유빈이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늦겠다 늦겠어."

위잉.

아직까지 물기가 뚝뚝 흐르는 머리를 말리며 송유빈이 한튜브를 켰다.

자는 사이 재밌는 동영상이 올라왔나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띠링.

한튜브에 접속함과 동시에 뜨는 알람에.

'!!'

꾹.

송유빈이 열심히 돌아가던 드라이기를 꺼버렸다.

현재 시간은 오전 9시.

침대에서 일어난 직장인들이 한참 출근을 하거나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무기왕이 왜?'

동영상이 올라온 게 아니었다.

뜬금없는 아침 출근 시간.

무기왕이 라이브 스트림을 켠 것이었다.

꾸욱.

출근 준비 중이었다는 걸 잊은 채 송유빈이 스트림 방으로 입장했다.

@ 뭐야 이거? 또 가짜임?

@ 한튜브 무기왕인데? 진짜인 거 같네요.

먼저 방에 입장한 사람들도 송유빈과 마찬가지였다.

무기왕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궁금해하면서도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삑.

잠시 후.

가면을 쓴 무기왕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다른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라이브 스트림을 하더라도 항상 무언가와의 전투를 보여주었던 무기왕인데.

오늘은 차분한 자세로 앉아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무기왕입니다.

무기왕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이 진짜 무기왕임을 깨닫자 난리가 난 것.

# 오늘은 여러분께 부탁이 있어 스트림을 켜게 되었습니다.

부탁이 있다며 무기왕이 한 장의 그림을 화면에 비추었다.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림이었다.

'터널… 인가?'

그래도 최대한 자세히 묘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특히 전체적인 터널의 느낌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식물을 자세히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 터널의 느낌으로는.

이어서 터널에 대한 무기왕의 설명이 들려왔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어딘지는 모르고 가지고 있는 거라곤 직접 그린 그림 한 장뿐인데.

무기왕은 실제로 터널을 본 적 있는 사람처럼 상세히 묘사하며 설명하고 있었다.

# 이 터널과 주변 식물에 대해 약간의 정보라도 가지고 계신 분은 제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탁과 함께 방송을 종료하려던 무기왕에게.

한 가지 질문이 올라왔다.

@ 제보해서 정보의 유효성이 확인되었을 때 주어지는 보상도 있나요?

반 정도의 농담이 섞인 질문이었다.

# 보상이라.

질문자의 의도와는 달리 글을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무기왕.

결정한 건지 무기왕이 입을 열었다.

# 법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한 번. 원하시는 모든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띠링.

# 스트림이 종료되었습니다.

"허."

말도 안 되는 보상을 말한 뒤 방송을 종료한 무기왕.

뚝 뚝.

핸드폰에 물기가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송유빈이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른 이도 아닌 무기왕이 직접 부탁을 들어준다니.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보상이었다.

휙!

이젠 출근마저 포기해버린 송유빈이 자세를 잡고 무기왕이 올렸던 그림을 응시했다.

절대 기억력을 가진 송유빈이었기에.

가지고 있는 기억을 활용해 그림과 대조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좀 살펴보자.'

다 끄집어낼 각오도 했지만. 

처음부터 다 보기엔 30년 넘게 쌓인 기억이 방대했기에 조금이라도 특정할만한 걸 찾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림을 살피던 송유빈의 눈썹이 올라갔다.

'응?'

무기왕의 그림을 멀리 떨어뜨리며 여러 각도로 터널을 살폈다.

'이거 분명 어디선가.'

이번엔 눈을 감고 기억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확한 날짜까지 떠오르진 않았으나 어느 정도의 시기는 알고 있었다.

'….!'

사진처럼 남겨진 기억 하나를 끄집어낸 후.

눈을 뜬 송유빈이 옆에 놓인 노트에 빠르게 기억을 스케치했다.

과거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부산의 산에 방문했을 때 봤던 기억이었다.

탁.

스케치를 마치고 무기왕의 그림과 비교해보는 송유빈.

송유빈이 그린 스케치엔 터널의 입구따위는 없었다.

입구 대신 놓여 있는 거대한 비석.

의미를 알 수 없는 글귀와 부적이 잔뜩 감겨있는 비석이었다.

'비석 뒤에 입구가 있다고 친다면.'

슥슥.

송유빈이 펜으로 비석이 막고 있는 부분을 검은색 원형으로 색칠했다.

'요것 봐라.'

자신이 떠올리고도 믿기지 않는지 송유빈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터널을 감싸고 있는 식물이나 차오른 강의 수위가 완전히 달랐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완벽히 똑같은 장소였다.

후닥!

송유빈이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 *

"감사합니다!"

우렁차게 인사를 박은 후.

검은색 케이스를 들고 강태황의 방을 나섰다.

척사윤 검 받았고.

당장 악귀참도 찾기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척준경과 관련 있을 것 같은 인물이 만든 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조사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 다시 돌려드리지 못할 수도 있는데 괜찮나요?

강태황이 건네주는 검을 받으며 혹시나 해서 물었었다.

악귀참도를 찾다 보면 검을 무사히 가져올 수 있으리라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무리할 필요는 없네.

그런 내 질문에 대한 강태황의 대답이었다.

역시나 시원시원 쿨하기 짝이 없는 답.

다시 돌려주면야 좋지만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돌려줄 필요는 없단 것이었다.

- 그래도 귀띔은 해주게나. 내가 알아야 수습할 수 있으니까.

먼저 뒷수습까지 해주겠다 말하는 강태황에.

우렁차게 감사 인사를 박은 후 방을 나섰다.

좋은 분이야.

기태랑과 비광부터 해서 헌터 중앙처는 참으로 좋은 곳이란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띠링.

건물을 나서기 직전.

핸드폰으로 한튜브의 알람이 울렸다.

한튜브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였다.

# 보낸이: songsong.

183화. 목표는 부산

메시지를 받은 날 밤.

"…."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눈앞의 사람을 바라봤다.

자신이 그 장소를 본 적 있다며 메시지를 보내온 songsong이란 닉네임의 구독자.

스트림을 하고 얼마 안되어 왔던 첫 메시지였기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내가 튼 스트림을 수많은 사람이 봤을 터였고 도착하는 메시지가 전부 정확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송송…님?"

그럼에도 별 고민 없이 약속 장소에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무기왕의 영상 댓글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송송.

날 까는 댓글이 달리면 투견처럼 달려 들어 싸워준 사람이었다.

그 덕에 송송은 무기왕 갤러리와 여러 커뮤니티에서 싸움닭이란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거짓 제보를 했더라도 팬 서비스 차원에서 용서해 줄 생각으로 온 것. 

"또 뵙네요, 무기왕 님!"

송송에 대해 음모론에 가까운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송송 닉네임을 쓰는 구독자가 송유빈이 아니냐는 가능성.

공중파에서 대놓고 무기왕을 찬양하는 송유빈과 인터넷에서 여포 수준인 송송을 연결 지은 것이었다.

- 송유빈이 바보냐?

- 머리 달렸으면 생각 좀 합시다. 연예인이 무슨 자기 성으로 닉네임으로 짓습니까.

나도 머리 달렸으면 안 그러겠지 했었는데.

"네 하하…!"

약속 장소에 나타난 송송은 이틀 전 밤에 만났던 찐 송유빈이었다.

슥.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송유빈이 두 장의 그림을 건넸다.

한 장은 내가 스트림에서 뿌렸던 것.

다른 한 장은 송유빈이 새로 그린 그림이었다.

"왼쪽이 제가 기억하는 곳이에요. 터널의 입구 대신 커다란 비석이 있지만요."

대충 보면 두 그림은 다른 장소였다.

하지만 송유빈의 말대로 비석에 구멍이 뚫렸다 생각하고 다시 보면.

오?

차오른 강물과 주변 덩쿨을 제외하곤 뒤의 풍경이나 분위기가 완벽하게 일치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이곳을 본 건 맞지만 정확한 위치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도착한 송송의 메시지에도 적혀 있었다.

절대 기억력으로 저 장소를 본 건 틀림없지만.

산 입구부터 장소까지 가는 모든 길을 본 건 아니기에 기억이 드문드문 잘려 있단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들어도 고개 좀 들고 갈 걸 그랬어요."

송유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본 걸 절대 잊지 않음에도 경로가 온전치 않은 이유였다.

너무 힘이 들어 땅바닥만 보며 산을 올랐다는 것.

"하지만 그곳까지 가며 거친 중간 포인트들은 확실히 봤었으니! 걱정마세요!"

송유빈이 의욕 넘치는 얼굴로 활짝 웃어보였다.

나 역시 그 웃음에 화답하기 위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괜찮을까.

걱정말라며 웃어보이는 송유빈이었지만.

걱정이 없을 수가 없었다.

캠핑 장비를 이것저것 잔뜩 챙겨 옥상에 모습을 드러낸 송유빈.

정확한 위치를 찝어 줄 수 없기에 꼭 동행해야 한다고 송유빈은 메시지에서 강조했었다.

흠.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고자 지금도 가면을 쓰고 있는 상황.

얼마나 동행해야 할지 모르는 일정에 가면을 쓴 채 정체를 숨기며 함께 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미 알 사람은 아는 정체였기에 여차하면 오픈해버리지 뭐! 하는 생각으로 왔지만.

나타난 게 송유빈이라는 걸 안 순간 얘기가 조금 달라졌다.

유빈 님이 내 정체를 알게 됐다고 해서 방송에 뿌리거나 하진 않겠지… 만.

정체를 일반인 한 명에게 알리는 것과 국민 리포터라 불리는 송유빈에게 알리는 건 와닿는 무게가 달랐기에.

숨겨보자.

마침 가면도 편한 걸 쓰고 있겠다 열심히 감춰볼 생각이었다.

송유빈에게 있어 백운이 아닌 무기왕으로서 계속 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럼 가볼까요?"

"네!"

고개를 끄덕인 송유빈이 핸드폰에 찍힌 지도를 건넸다.

지도는 부산에 위치한 금정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산이라.

위치를 확인한 후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뜻밖의 부산행.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출발.

* * *

두근두근.

순식간에 날아 도착한 금정산.

등산을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심장이 두근대고 있었다.

국민 리포터 송유빈과 단 둘이 밤 등산이라니.

서태혁의 저택에서 만나긴 했었지만 아주 잠시 뿐이었다.

유명인을 만났다는 걸 체감하기도 전에 헤어져버렸던 것.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바로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는 송유빈.

등산이 금지된 산이어서인지 주변은 고요 그 자체였다.

그런 고요 속에 있다 보니 단 둘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와닿고 있었다.

"키라아--!"

후웅! 콰직!

물론 종종 고요를 깨려는 놈들이 나타나긴 했다.

기척이 느껴지거나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수리검을 냅다 던져버려 삭제 해버렸지만 말이다.

감히 유빈 님과의 고요한 동행을 망치려 들다니.

괘씸한 놈들.

그렇게 괘씸한 놈들을 처단하면서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회귀 전의 백운이 보면 거품 물겠구만.

당연히 회귀 전에도 송유빈을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10년이 넘게 흐른 뒤에도 송유빈은 인기 넘치는 리포터로 활동 했었으니까.

그냥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멀다는 느낌을 넘어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기는커녕 말 한 마디 섞어볼 수조차 없는 존재.

그런 현실이 골방에 쳐박혀 살던 내겐 몹시 잔인하고 절망적이게 느껴졌었다.

부스럭.

잠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있을 때.

옆으로 초코바 하나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드세요."

언제부터 먹고 있었는지 송유빈은 이미 초코바 하나를 입 안에서 오물거리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초코바를 받아 들며 뒤따라 오고 있는 송유빈을 살폈다.

"힘들면 말씀하세요."

오래 전에 폐쇄된 산이었던 만큼 애초에 길이 고르지 못했다.

울퉁불퉁한 흙길의 연속이라 일반적인 체력이라면 충분히 힘들어할 수도 있었다.

"힘들면 업어주시게요?"

"…."

부축 혹은 업어주려 했던 건 맞지만.

막상 저렇게 대놓고 물으니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곧바로 네 라고 했다간 없던 흑심마저 있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싱긋.

잠시 날 응시하던 송유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농담이에요! 체력 아직 충분합니다. 옛날에 왔을 땐 리포터 신입 시절이었거든요. 지금은 리포터 잔뼈가 굵으면서 체력도 엄청 좋아졌어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하긴.

당장 개미굴 때만 봐도 송유빈의 체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모두가 다 나가 떨어졌음에도 최후의 최후까지 날 바짝 쫓아왔던 송유빈.

그것만으로도 체력 부문에선 리포터 상위 1%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휴게소 하나가 나올 거예요. 거기까진 고개 잘 들고 갔었거든요."

"그럼 거기서 날 밝을 때까지 좀 쉬다 가죠."

둘 다 체력이 충분한데도 쉬는 건 다른 흑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전적으로 송유빈의 과거에 보았던 장면에 의존해서 가야 하는 상황.

칼데아로 오기 위해 밤에 출발하긴 했지만, 송유빈이 길을 찾으려면 뭐라도 보여야 했다.

"아! 저기에 있네요."

걸음을 멈추며 손을 드는 송유빈.

송유빈의 손을 따라가니 낡다 못해 무너지려는 산장이 눈에 들어왔다.

꼴깍.

귀신이 나올 듯한 산장에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애써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가… 가시죠."

* * *

타닥… 타닥.

산장 중앙에서 모닥불이 타올랐다.

"무기왕도 라이터를 쓰는군요."

모닥불에 불을 지피기 위해 가져왔던 터보 라이터.

라이터를 본 송유빈이 오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왕이라면 뭐랄까… 손을 펼치면 불이 펑! 하고 나올 줄 알았거든요."

"하하… 그런 능력은 없어요."

불을 피우는 능력이 있긴 있었다.

라의 문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

문제가 있다면 모닥불의 크기가 얼마나 커질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산 하나는 홀라당 태워먹겠지.

답은 라이터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쏘옥.

송유빈이 펼쳐놨던 침낭으로 몸을 파묻었다.

좋아 보이는데.

딱 봐도 몹시 두툼해 보이는 침낭이었다.

못해도 백 만원은 훌쩍 넘을 듯한 고급 침낭.

잘은 몰라도 푹신함의 정도를 보니 분명 구스다운이었다.

"따듯해 보이죠? 큰 마음 먹고 구매했거든요."

부러워하는 노골적인 내 시선을 느껴서일까.

송유빈이 누운 채로 침낭을 팡팡 치며 푹신함을 과시했다.

"무기왕 님은 진짜 가면만 챙겨오셨군요. 아, 라이터도."

"음 아닐걸요."

"네?"

턱을 살짝 들어 의아해하는 송유빈을 가리켰다.

"오는 길에 송송 님도 챙겨왔으니 다 챙겨왔다 봐야죠."

"풉."

굳이 웃기려 한 건 아니었지만 살짝 웃음을 터뜨리는 송유빈.

작은 한숨을 내쉰 송유빈이 입을 열었다.

"정말 다르네요."

"뭐가요?"

"상상했던 무기왕 님 성격이랑요."

앗.

조금 더 진중한 컨셉을 유지했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를 하며.

"이제 제 영상 댓글창에 등장 안 하시는 거 아닌가요? 팬심 하락으로."

넌지시 탈주하는 거 아닌지 질문을 건넸다.

"…."

아무 말 없이 날 잠시 응시하는 송유빈.

송유빈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닐걸요."

"…?"

스윽.

나의 되묻는 표정에 송유빈이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곧이어 들려오는 아주 작은 목소리.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소리였다.

"반대니까요." 

* * *

날이 밝기 무섭게 산장을 빠져나왔다.

송유빈이 잘 찾아주겠거니 믿고는 있었지만.

얼마나 걸릴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으니 최대한 일찍 나온 것이었다.

"…."

그리고.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의 걱정은 괜한 기우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아아…!

시원한 산바람과 함께 눈 앞에 펼쳐진 광경.

"와우."

자기가 찾아놓고도 놀란 건지 송유빈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엄청난데.

고개를 돌려 놀라고 있는 송유빈을 바라봤다.

날이 밝아 시야가 트이자 드문드문 끊긴 기억과 기억을 연결해 나가며 길을 안내했던 송유빈.

아무리 절대 기억력이 있다 해도 끊어진 기억을 이 정도 속도로 찾아 맞춰 나갈 줄은 몰랐었다.

능력자구만 능력자야.

슥.

어느 세월에 찾나 막막했던 그림의 장소를 둘러봤다.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구조물과 그 구조물을 감싸고 있는 덩쿨들.

터널의 입구가 있어야 하는 장소엔 송유빈이 그렸던 그림처럼 거대한 비석이 위치해 있었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으나 심상치 않은 기운이 짙게 뿜어져 나오고 있는 비석.

강물은 기억에서 봤을 때보다 많이 불어나 비석의 중간까지 차올라 있었다.

터널도 반 정도는 잠겼겠는데.

첨벙.

먼저 강물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타고 강물의 시원함이 머리끝까지 느껴졌다.

조금 더 들어가자 가슴 부근까지 차오르는 강물.

뭘까 이 느낌은.

아무리 봐도 강물 역시 일반적이지 않았다.

비석의 영향인지 비슷한 기운이 강물에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첨벙.

그렇게 앞으로 더 나아가려는 찰나.

"멈춰라."

!!!

내 걸음을 멈추게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목소리 만큼은 아니었다.

바로 어제 들었던 것처럼 무척이나 낯익은 목소리.

"더 이상 다가가지 말고 강에서 나오거라."

어떻게 보면 위협적으로까지 들리는 엄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 입가엔 목소리 주인공의 의도와는 달리 미소가 그려졌다.

살아있었구나.

묘한 반가움을 느끼며.

스윽.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184화. 뜻밖의 이야기

고개를 돌린 곳엔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의 민쿠가 서 있었다.

다크써클이 깊게 내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촐망한 눈과 앳된 얼굴이었다.

망토를 뒤집어써 특유의 쫑긋 귀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세상이 참 알 수가 없구만.

민쿠 손자의 손자의 손자 이런 건 아니겠지.

눈으로 보고는 있지만 쉽게 납득이 가진 않았다.

개방의 날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이들이었다.

터널이었던 장소의 변화만 봐도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 수 있는 상황.

그럼에도 민쿠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은 듯 보였다.

애초에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었단 건가.

물론 이런 케이스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내게 힘을 넘겨주었던 카이안 역시 로튼의 장막에서 본 기억과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으니까.

음… 카이안 님은 예외긴 하지.

내 안에서 카이안은 이미 신을 뛰어넘는 신앙적인 존재였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예외로 분류되었다.

뭐 소피아 님도 있네.

생각해보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소피아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외관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게 병에 의한 건지 정말 무언가 법칙을 벗어난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다.

"안 들리는 건가? 나오라고 말했다."

나오라는 말을 듣고도 움직이긴커녕 빤히 바라만 보고 있자.

민쿠가 얼굴만큼이나 앳된 목소리로 다시 한번 경고의 말을 건넸다.

그런 민쿠를 향해.

"혹시 민쿠 님?"

괜한 마찰을 일으킬 필요도, 서로를 경계하는 이 상황을 길게 끌고 갈 필요도 없었기에.

곧장 기억에서 들었던 이름을 불렀다.

민쿠 본인이든 민쿠의 자식이든 손자이든 어쨌든 반응할 테니까.

"!?"

역시나 깜짝 놀라는 민쿠.

예상을 너무 안 벗어나는데.

훌렁.

오.

내 예상보다 더 놀랐던 걸까.

숨겨놨던 귀가 쫑긋 세워지며 민쿠가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가 흘러내렸다.

"우와… 토끼다."

어린아이의 모습에 토끼귀가 달려있자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송유빈도 탄성을 터뜨렸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토끼귀가 달린 사람은 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였을 테니 말이다.

"누군데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역시 나이를 안 먹는 거였나.

팟.

당장 대답을 듣고 싶어서일까.

질문을 마치기 무섭게 민쿠가 몸을 날렸다.

토끼라 그런지 날래구먼.

첨벙!

날다람쥐 같은 느낌으로 강에 착지한 민쿠.

민쿠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름을 불려서인지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경계가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눈이 많이 가셨네.

촐망과 퀭함이 뒤섞여 있는 민쿠의 눈.

볼까지 내려온 다크써클로 보아 무언가 고생을 심하게 한 모양이었다.

스윽.

다가오는 민쿠를 바라보며.

처음부터 기억에서 봤다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

칸의 검이 담겨있는 상자를 앞으로 꺼내 들었다.

"…?"

다가오던 민쿠가 의아한 눈으로 상자를 바라봤다.

철컥.

그런 민쿠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상자에서 칸의 검을 꺼냈다.

정확히는 척사윤이 만든 검을 꺼냈다.

"…!"

뜬금없이 이름이 불렸던 놀라움을 해소하기도 전.

다시 한번 등장한 물건에 민쿠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자리에 굳어 내가 들고 있는 검에 시선을 빼앗긴 민쿠.

슥.

검을 건네주자 민쿠가 아무런 거부 없이 검을 받아 들었다.

잠시 검을 바라보던 민쿠가 고개를 들어 날 응시했다.

"당신… 대체 누구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의 민쿠를 향해 옅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전 무기를 모으는 사람입니다."

저벅.

다소 누그러진 민쿠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척준경 님의 악귀참도를 찾고 있습니다."

* * *

악귀참도를 찾고 있다고 말하자 따라오라고 손짓했던 민쿠.

송유빈을 데리고 한 시간 정도를 따라가자 작은 동굴이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생긴 동굴이지만 오랜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산 건가.

나름 사는데 필요한 물품들이 잘 갖추어진 동굴이었다.

추위를 막기 위한 문과 난로까지도 말이다.

"차 먹을래?"

토끼귀를 가진 사람이 타주는 차.

고민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송유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부탁드릴게요."

외관만 봤을 땐 나보다 한참 어린 민쿠였지만.

적어도 백 살은 더 많을 것이기에 깍듯이 존댓말을 했다.

사람을 외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니까.

스스로의 지조 있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민쿠가 안내해준 자리에 몸을 앉혔다.

추운 밖 날씨와는 달리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동굴이었다.

쿵쿵… 콱콱.

잠시 요란한 소리가 들린 후.

동굴 안쪽에 있던 민쿠가 세 잔의 차를 내왔다.

"마셔, 몸이 따듯해질 거야."

"잘 먹겠습니다."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송유빈과는 달리.

난 약간의 의심을 가진 채 차를 받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받아든 차의 비쥬얼이 뭐랄까.

먹어도 되는 걸까.

딱 죽기 좋게 생겼는데.

오묘한 색깔이었다.

보라색과 초록색을 마구잡이로 반죽해낸 듯한 빛깔.

쉽사리 넘길 수 없는 생김새에 잠시 망설이고 있자.

후릅.

민쿠가 시범을 보이듯 차를 홀짝였다.

홀짝.

"와! 너무 맛있는데요."

뒤이어 차를 들이켠 송유빈도 감탄을 터뜨렸다.

유빈 님을 시험대에 올릴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둘 다 멀쩡한 걸 확인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

겉보기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입으로 들어오는 순간 몸으로 퍼져나가는 열기.

단순히 뜨거운 차를 마셔서가 아니었다.

"씁쓸한 맛을 내지 않는 약초만 모아 만든 차야. 추운 날씨에도 몸의 온도를 지켜줘."

"오호."

몸에 좋다는 말에 연신 차를 들이켜는 동안.

정면에서 민쿠의 눈길이 느껴졌다.

"아까 보니 나를 반기는 거 같던데. 묻고 싶은 게 있겠지?"

민쿠는 어째서 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를 따져 묻지 않았다.

오히려 동굴로 오기 전 악귀참도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내가 원하는 걸 묻고 있었다.

음.

첫 질문을 고르다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척준경 님의 악귀참도는… 실존하나요?"

꼴깍.

물으면서도 긴장 때문에 침이 삼켜졌다.

솔직히 악귀참도를 찾기 시작하며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이다.

생각이 부정적인 길로 빠질까 고민하는 것 자체를 자제하긴 했지만. 

실존하는지 안 하는지도 알 수 없으며 심지어 대기업 대산마저 포기했던 무기였으니까 말이다.

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벌어지는 민쿠의 입을 바라봤다.

저기서 없다라는 대답이 나와도 찾는 걸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기왕이면 실존한다는 확답이 들렸으면 했다.

"척준경 님의 악귀참도는 실존해."

예쓰!

갑작스럽게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 자세를 취해서일까.

"…?"

옆에 있던 송유빈이 떨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봤다.

그간에 내가 겪은 내적갈등을 모르는 상태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실존하지만, 손에 넣을 순 없을 거야."

"!?"

"인간이 가지러 갈 수 없는 곳에 검이 있거든."

단호하게 말하는 민쿠였지만.

난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터널 저편인가요?"

"… 맞아."

민쿠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체 뭐 하는 놈이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들어가는 순간 죽임당할 거야. 그곳은 지금 인간들이 데몬이라 부르는, 먼 태고 시절부터 존재했던 악마들의 세계거든."

말을 하는 민쿠의 얼굴로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간 세계에도 종종 나타나는 노네임드 데몬. 그런 녀석들이 드글대는 곳이야."

스윽.

민쿠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실존하지만 손에 넣는 건 불가능한 검이야. 찾으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포기하고 돌아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 민쿠를 향해 대답하기 전.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의미에서 미소를 먼저 머금었다.

"제가 많이 죽여봤어요, 그 노네임드라는 거."

"응?"

순간이지만 축 처져 있던 토끼귀가 움찔거렸다.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이었다.

"인간 세계에서 제 직업이 데몬 사냥꾼이거든요. 노네임드도 많이 잡았어요."

슥.

손을 들어 칸이 가지고 있었던 척사윤의 검을 가리켰다.

"저 검도 노네임드 중 하나를 잡고 얻은 거고요."

"!!"

쨍!!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들고 있던 찻잔을 떨군 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커다랗게 변한 민쿠.

이젠 손마저 떨고 있는 민쿠가 옆에 놓여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데몬의 생김새…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 * *

아무 말도 없는 민쿠를 바라봤다.

칸과 로튼,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데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민쿠는 눈을 질끈 감으며 검에 이마를 맞대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잊은 채 살고자 했던 기억을 말이다.

"이 검은 내 친구… 율이가 만든 검이야. 정확히는 율이가 만든 수많은 검 중 하나지."

처음에 검을 보자 놀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놈이 친한 친구의 검을 가지고 있으니.

반가운 마음에서든 신기한 마음에서든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로튼 패거리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아직 민쿠가 어디서 온 종족인지, 인간과는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 왜 척준경에게 검을 배달하고 있었는지 등 아는 게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 녀석들이 죽었다고?"

마침내 검에서 머리를 떼고 입을 연 민쿠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죽었습니다. 다섯 명 모두요."

"그렇구나."

작은 한숨을 내쉬며 민쿠가 눈을 감았다.

과거의 기억과 로튼 패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감정을 추스르는 듯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나도 네가 만났던 노네임드들을 만났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조차도 점점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이야기. 

옆에 송유빈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쿠에게 로튼과 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직전.

- 저는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있을게요.

터널을 찾아주기 위해 동행했지만, 내 과거에 관련된 일들을 다 듣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일까.

송유빈은 일부러 나와 민쿠가 대화하기 편하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놈들을 만나 뺏겨선 안 되는 걸 뺏겼고, 그 덕에 난 모든 걸 잃어버렸어."

순간 검날의 기억에서 척준경이 떠나려는 민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요새 정체를 알 수 없는 데몬 5인조가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 하더구나.

5인조의 데몬.

로튼의 패거리가 딱 5명이었다.

생각해보자.

민쿠가 인간 세계를 넘어 데몬 세계로 간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절벽의 틈을 막아내며 끝나지 않는 싸움을 이어 간 척준경.

그런 척준경의 검이 부족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공급해주는 것이었다.

율이란 사람이 검을 만들면 민쿠가 데몬의 세계에 묶여 있는 척준경에게 배달한다.

그런데 배달하던 검을 데몬 세계에서 로튼 패거리에게 빼앗겼고, 패거리 중 한 명인 칸이 사용하게 되었다?

으.

점점 연결되는 사실에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처음 칸의 검을 봤을 때만 해도 뭐 하는 새끼지? 어디서 주웠지? 정도의 생각만 했을 뿐 크게 개의치는 않았었다.

어디서 주워다 썼든 알 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악귀참도과 무척이나 밀접하게 엮여있는 듯한 검과 민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 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민쿠가 원치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알고 싶었다.

여전히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민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민쿠 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185화. 배달원이었던 토끼

오래된 과거였다.

한반도가 세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던 시절, 고려에 위치한 어느 산 깊은 곳.

"그 아이와 만나지도 말고! 배달도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산으로 누군가의 호통 소리가 퍼져나갔다.

왜소한 덩치지만 목소리만큼은 쩌렁쩌렁한 노인.

노인의 귀엔 두 개의 쫑긋한 귀가 달려있었다.

"저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노인의 호통에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인간의 나이로 치면 어른, 토족의 나이로 치면 한참 어린 나이인 민쿠였다.

"민쿠! 족장님께 예의를 갖추거라!"

옆에 서 있던 어른들이 민쿠를 나무랐다.

민쿠를 꾸짖고 있는 토족의 족장 토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어린 민쿠가 묘족의 공간을 떠나 만나선 안 될 아이를 만나며, 맡아선 안 될 배달 의뢰를 받은 것이 말이다.

"애초에 인간들에게 있어 우리는 이질적인 존재다.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사이가 아니거늘!"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저희가 달에서 떡방아나 찧는 존재인 줄 알기에 신기한 괴물 보듯 쳐다보지만, 있는 그대로의 절 친구로 받아주는 사람도 있다고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민쿠의 대답에 토칼이 한숨을 내쉬었다.

토족 중에서도 똑똑하고 총기 넘치기로 소문난 민쿠였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말을 더럽게 안 듣는다는 것.

"인간의 수명이 우리보다 훨씬 짧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

이번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민쿠.

민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인간과 토족의 수명이 다르다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족장님, 예외도 있다구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머금은 채 민쿠가 토칼을 응시했다.

"전 제가 맡고 있는 배달 임무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토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맡은 배달품을 목적지까지 옮긴다! 토족에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말씀하신 건 족장님이잖아요."

질끈.

족장 토칼이 아찔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토족의 공간에서 충당할 수 없는 물품들이 있었다.

공간에는 외부 물품과 교환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노동력 제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토족.

그래서 토족이 선택한 것이 배달업이었다.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발달된 신체를 이용해 배달을 해주며 물품을 받기로 토칼은 결정했다.

오랜 시간 토족의 삶을 지탱해준 소중한 종족의 업이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목숨이 위험한 의뢰까지 하라고 한 적은 없다!"

10년 전부터 민쿠가 한 소녀에게 의뢰를 받아 검을 배달하고 있다는 것도, 소녀와 친해져 하루가 멀다하고 놀러 간다는 것도 토칼은 알고 있었다.

끽해야 하루 정도가 걸리는 짧은 배달.

최종 목적지까지 옮겨 줄 다른 인간 배달부에게 검을 건네는 게 다인 간단한 배달이었기에.

토칼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 민쿠야 너… 어딜 갔다 온 게냐?

얼마 전의 일이었다.

배달에서 돌아온 민쿠로부터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닌 몹시 위험하고도 소름 돋는 기운.

- 최종 목적지까지 배달해주던 사람은 몸이 쇠약해져 더 이상 배달을 할 수 없다고 해요. 제가 이제 최종 목적지까지 검을 옮길 겁니다.

최종 목적지.

그제서야 토칼은 검이 향하던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다.

토족의 공간도, 인간의 세계도 아닌.

그저 살육을 즐기는 악마와 죽음만이 가득한 세계였다.

- 당장 그만두거라!!

억만금을 준다 할지라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어린 민쿠가 아니었더라도, 토족 중 가장 숙련된 이가 나섰어도 절대 보내지 않을 땅이었다.

"정신 차려라 민쿠! 넌 그냥 이용당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런 위험한 땅으로 배달을 부탁하는 친구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율이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율이를 위해서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은인에 대한 보답.

말한 적이 없기에 토칼은 모르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전 가야 해요."

휙.

민쿠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렸다.

"민쿠!!"

말리기 위해 뻗어진 토칼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민쿠가 순식간에 토족의 공간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카앙! 카앙!

토족이 사는 공간에서 꽤 떨어진 장소.

쇠와 망치가 부딪히는 소리가 산을 울렸다.

"오늘도 우렁차구만."

민쿠가 귀를 쫑긋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토칼의 호통이 있은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민쿠는 이 소리를 듣기 위해, 정확히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토족의 공간을 빠져나왔다.

"응?"

망치 소리가 잦아들고.

누군가 민쿠의 앞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울적했던 민쿠의 얼굴에 한가득 함박웃음이 머금어졌다.

"율아!"

민쿠가 귀를 쫑긋거리며 나타난 율에게 달려갔다.

"민쿠! 왔구나!"

마찬가지로 달려오는 민쿠를 반갑게 맞이하는 척사율.

긴 흑발을 아무렇게나 묶은 채 망치질을 하느라 지저분해진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특유의 고운 선과 선한 분위기가 살아있는 생김새였다.

"오늘도 혼났구나."

평소보다 조금 늦게 온 민쿠를 바라보며.

척사율이 못 말린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장간의 거뭇한 재가 잔뜩 묻어 있는 척사율.

그럼에도 척사율의 미소에선 빛이 났다.

'예쁘다.'

그리고.

민쿠는 그런 척사율의 미소를 좋아했다.

사랑 같은 감정에서는 아니었다.

그저 10년 넘게 만나온, 가장 친하고 소중한 친구의 미소가 좋았다.

"민쿠야 이리 와."

척사율이 아무 말 없이 배시시 웃고 있는 민쿠에게 손짓했다.

"산딸기 따놨으니까 가지고 올라가자."

"그래!"

수십 년을 살았지만 어린 아이의 모습인 민쿠와 2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척사율.

묘한 공통점을 가진 둘이 발을 나란히 맞춘 채 언덕으로 올라갔다.

* * *

"오늘도 좋구만 좋아!"

"맞아!"

민쿠가 산딸기를 집어먹으며 귀를 쫑긋거렸다.

둘이 만나면 항상 대화를 나눠온 장소가 있었다.

척사율의 집 뒤 편에 위치한 언덕.

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선선한 산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장소였다.

"여기 올라온 지도 정말 오래됐다."

"아마 10년은 됐을걸?"

둘만의 추억이 10년이나 깃든 언덕.

척사율이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슥.

민쿠가 그런 척사율의 얼굴을 옆에서 조용히 바라봤다.

친구의 얼굴을 살핀 민쿠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마저 사라진다면 율이는 이 산속에서 혼자 살아야 해.'

조금 전 율이를 만나지 말라며 꾸짖었던 토칼.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었지만, 척사율을 만나고 보니 더 마음이 확고해졌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 살아온 척사율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그런 아버지를 위한 검을 만들면서 말이다.

-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척준경이 떠나며 척사율에게 남긴 말이었다.

산속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던 십 대 소녀가 감당하기엔 몹시나 잔인한 말이었지만.

척사율은 좌절하거나 슬픔에 빠져 살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하며 보다 더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율아 오늘은 검 더 안 만들어도 돼?"

민쿠의 물음에 척사율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너 오기 전에 이미 다 만들어놨지. 바로 마차에 실을 수 있게 준비도 마쳐놨어!"

척사율은 어려서부터 검 제작을 해왔다.

척준경의 동료이자 고려에서 가장 유명한 대장장이에게 배우며 검 제작 실력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고.

여기에 그녀만의 독특한 재능까지 더해져 만드는 족족 훌륭한 검이 탄생했다.

"나 오면 같이 하지 그랬어, 힘들게."

"힘들긴 뭐가 힘들어, 아주 그냥 팔팔한데."

척사율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약간 솟아오른 알통을 보여주었다.

피식.

해맑은 척사율을 보며 민쿠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홀로 산속에 남겨져 아버지가 사용할 검을 쉴새 없이 제작하고 있는 척사율.

끝이 보이지 않는 생활의 연속이었으나 그럼에도 척사율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 맞다! 민쿠, 내가 어제 있지."

척사율이 입을 열며 시작된 오늘의 대화.

오늘의 주제는 지난번 민쿠가 잡아다 준 멧돼지였다.

멧돼지로 많은 반찬을 만들었으며 나머지는 내년을 위해 냉동고에 쟁여놨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

그렇게 두어 시간의 대화가 이어지고.

사락.

척사율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벌써구나.'

몸을 일으켜 옷을 털고 있는 척사율을 바라보며.

민쿠가 아쉬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척사율과 함께 얘기를 할 때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일은 해야 하니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민쿠 역시 척사율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윽.

배달 시간이었다.

* * *

"오늘도 척사윤이구나."

마차에 척사율이 만든 검을 모두 실은 뒤.

민쿠가 조금 전 따로 건네받은 검의 손잡이를 바라봤다.

"당연하지, 검 제작의 달인은 척사율이 아니라 척사윤이니까!"

처음 들었을 땐 이상한 고집이라 생각했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기 마련인데.

척사율은 그런 욕심 따위는 없는지 자신이 만든 검에 척사윤이란 이름을 새겨 넣었다.

- 뭐랄까. 내 이름이 알려지는 건 부끄러워서 싫지만, 또 내가 아닌 완전 엉뚱한 이름이 새겨지는 건 싫은… 그런 복잡한 감정이랄까?

언젠가 왜 척사윤이냐는 질문에 대합 율의 답이었다.

'이상한데서 유별나다니까.'

어쨌든 본인의 바람이기에.

율이의 이명인 척사윤의 검을 받아 들며 민쿠가 마차로 올라탔다.

모르는 이가 보면 뒤에 실린 검과 같아 보였지만.

율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달랐다.

검이면서도 동시에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신비로운 검.

척준경에게 닿는 길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척사율만이 만들 수 있는 검이었다.

"아! 민쿠 도시락 챙겨가."

집 안으로 들어갔던 척사율이 두 개의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멧돼지 고기로 만든 율표 특제 도시락! 하나는 민쿠 꺼, 하나는 금문 아저씨 꺼."

척준경의 오랜 동료이자 중간에서 민쿠에게 마차를 넘겨받은 뒤 데몬의 세계까지 운반해줬던 금문.

민쿠가 내밀어진 두 개의 도시락을 바라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두 개 먹어야겠네.'

척사율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10년이란 시간동안 금문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때문에 민쿠는 금문의 몫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율아!" 

"오늘도 조심히 갔다 와! 오면 지금 숙성 중인 율표 특제 산딸기 주스를 줄 테니까!"

"응! 갔다 올게!"

민쿠가 귀를 쫑긋거리며 척사율에게 손을 흔들었다.

'율표 특제 산딸기 주스라.'

조금씩 멀어져 가는 척사율을 보며 민쿠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얼른 먹어보고 싶네!'

186화. 거짓말

민쿠가 눈앞에 놓인 터널을 바라봤다.

인간 세계와 데몬 세계를 잇는 길목.

척사율에게 받아온 검들을 금문에게 넘겼던 장소이기도 했다.

- 미안하구나 민쿠.

몸이 쇠약해진 금문은 민쿠에게 큰 죄를 짓게 됐다며 고개를 숙였었다.

척준경과의 신의와 공통된 목표를 위해 세계를 오갔었던 금문.

그런 금문이었기에 저편의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아니에요! 이제부턴 저한테 맡기세요

민쿠가 해맑게 대답한 후 떠났지만.

금문은 민쿠가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터널을 떠나지 못했었다.

혹시나 처음 떠난 민쿠가 길을 헤매진 않을까 걱정한 탓이었다.

'금문 아저씨의 길로 가면 안전하니까.'

민쿠가 손에 들려 있는 지도를 바라봤다.

금문이 직접 수많은 배달을 오가며 작성한 지도였다.

데몬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경로.

지금까지 금문을 대신하여 이 길로 몇 번의 배달을 다녀온 민쿠였지만, 단 한 번도 데몬을 만난 적은 없었다.

'만나도 상관없어. 난 충분히 도망칠 수 있으니까.'

인간의 신체보다 훨씬 발달한 토족이었다.

속도는 말할 것도 없으며 멧돼지도 한 방에 잡을만한 힘이 있었기에.

민쿠는 혹여나 데몬을 만나더라도 도망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후웁!"

첨벙.

한 차례의 심호흡을 한 민쿠가 강으로 발을 내디뎠다.

강 안에 있는 터널.

평소엔 끝이 막혀 있는 터널이었지만, 척사율이 만든 검을 사용하면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신기한 터널이었다.

- !!!

터널을 향해 발을 뻗으며.

민쿠가 처음 데몬의 땅에서 자신을 본 척준경의 표정을 떠올렸다.

귀신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던 척준경.

고려의 무신이라 불린 척준경의 그런 표정을 본 건 자신이 유일할 것이라고 민쿠는 생각했다.

- 안된다! 위험한 땅이니라, 다시는 와선 안된다.

딸과 함께 있어 주는 둘도 없는 친구.

척준경에게 있어서 민쿠란 존재는 딸의 친구였다.

그런 민쿠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죽음만이 가득한 땅으로 배달을 왔으니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 내가 방법을 찾아보마.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척준경은 데몬의 세계를 떠나지 못했다.

이곳에 발이 묶여 있는 척준경이 배달할 사람을 새로 구해보겠다니.

더군다나 인간 세계와는 완벽하게 동떨어져 있는 위험한 장소까지 말이다.

- 내가 편지를 써보마.

일반 사람과는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척준경이었다.

이미 금문을 포함해 척준경과 함께했던 대부분의 전우들은 세상을 떠난 직후.

편지 몇 통을 보내 척준경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 제가 하고 싶습니다.

- 안된다.

- 제가 하지 않으면 율이가 오려고 할 겁니다.

- 그렇다 하더라도 안된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척준경이.

손을 들어 민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나에겐 검의 배달보다 너와 율이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율이에게 이 일은 알리지 말고, 너 역시 더 이상 오지 말거라.

척준경의 뜻은 완고했다.

소중한 딸과 딸의 친구.

둘 중 누구에게도 위험을 부담하고 싶지 않았다.

- ….

척준경이 뜻을 꺾지 않을 것 알았기에.

민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물론 말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첨벙.

민쿠가 다시 한 발자국 내디디며 척준경을 떠올렸다.

'내 생명의 은인.'

민쿠에게 있어 척준경은 단순히 친구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친구의 아버지이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 잡아라! 영주님께 드릴 선물이다!

민쿠가 더 어렸던 시절.

어른들 몰래 공간을 빠져나온 뒤 인간 군사들에게 둘러싸였던 적이 있었다.

영주에게 진귀한 제물을 바치기 위해 사냥을 나선 백제의 군사들이었다.

당시엔 너무 어려 토족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민쿠였고.

잠시 후엔 인간들에게 잡혀 평생을 우리 안 구경거리로 살아가게 될 상황이었다.

- 멈춰보게나.

그때 말을 타고 홀로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고려의 무신이라 불렸던, 전쟁을 위해 백제 땅에 와있던 척준경이었다.

- 아직 어린아이인데 선물이라니.

- 척준경이다! 죽여라!

민쿠에게 쏠려있던 백제군의 시선이 척준경에게로 쏠렸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전쟁에서 무참히 백제군을 썰어버리고 있던 고려의 무신임을 알았기에.

토끼 인간 따위보단 홀로 등장한 무신을 잡는 게 더 이득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 푸화악!

물론 그들의 바람일 뿐이었다.

척준경은 몇 번의 검 휘두름만으로 백제군 수십을 베어버렸다.

- 척.

아무렇지도 않게 적을 쓸어버린 뒤 말에서 내린 척준경.

바로 앞까지 다가온 척준경이 피 묻은 손을 옷에 슥슥 닦은 뒤 민쿠에게 내밀었다.

- 나와 함께 가자꾸나, 네가 사는 곳까지 데려다주마.

'척준경 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난 존재하지 않았다.'

은인이 살려준 목숨을 은인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했던 민쿠이기에.

척준경의 호통에도 계속해서 데몬의 땅으로 배달을 갔었다.

- … 항상 조심해야 한다.

몇 번이나 갔을까.

달래도 보고 혼내기도 하며 민쿠를 말렸던 척준경이었지만.

뜻을 꺾을 것 같지 않은 민쿠에 마침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오지 말라는 대답 대신 조심하라고 말을 하기 시작한 것.

첨벙.

척준경에 의해 두 번째 생을 얻게 된 순간을 떠올리며.

민쿠가 깜깜해진 터널 끝에 멈춰 섰다.

철컥.

척사율에게 받았던 검을 뽑았다.

'나의 은인을 위하여.'

우우웅…!

검에서 푸른빛이 어두운 터널로 뻗어져 나갔다.

* * *

망토를 입까지 끌어올린 민쿠가 정면을 바라봤다.

여전히 삭막하고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땅이었다.

'오늘도 순탄하네.'

솔직히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무서웠었다.

의기양양하게 들어왔던 것과 달리 귀를 한껏 쭈그린 채 지도로 그려진 길을 걸어갔었다.

하지만 몇 번의 배달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조심은 하되 무서워하진 않게 되었다.

'금문 아저씨는 정말 대단해. 이런 길을 어떻게 알아내신 거지.'

덜컹. 덜컹.

흔들리는 마차를 이끌고 평소처럼 뒷길을 따라가던 민쿠.

"역시 검을 운반하는 자가 있었군요."

"!!"

그런 민쿠의 귓가로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척준경 외에는 어떤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는 땅이었다.

'사람…?'

얼핏 보면 사람과 다를 것 없는 생김새였다.

이질적인 황금색 머리와 눈동자, 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금빛 기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사람이 아니다.'

"크르르!"

금발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울음소리를 흘리는 존재.

당장에라도 민쿠에게 달려들 것 같은 자도 함께였다.

"당신이겠죠, 절벽의 괴물에게 검을 운반하고 있었던 자가."

'도망쳐야 돼.'

절벽의 괴물이니 뭐니 하나도 알 수 없는 소리였지만.

당장 저들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스윽.

민쿠가 조심스럽게 발아래로 힘을 모았다.

모은 힘을 한 번에 터뜨려 마차와 함께 내달릴 생각이었다.

드드드…!

발아래로 모이는 토족의 힘.

'지금.'

민쿠가 충분히 모인 힘을 터뜨리려고 한순간.

우웅!

민쿠의 주변으로 황금색 장막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장막이 펼쳐짐과 동시에 민쿠의 발아래로 모이던 힘이 사라져버렸다.

저벅.

어느새 힘이 사라져 당황 중인 민쿠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로튼과 칸.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덜덜.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두 데몬을 보며.

민쿠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미친듯이 떨어대고 있었다.

'주… 죽는다.'

가까워진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다가오고 있는 저 두 존재는 자기가 뭘 하든 이길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예의를 갖추세요."

털썩!

로튼의 말이 들리기 무섭게.

민쿠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야 하는데.'

척준경에게 검을 배달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는 존재.

그런 존재 앞에서 민쿠가 할 수 있는 건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흐음 인간은 아니군요."

스윽.

몸을 굽힌 로튼이 민쿠의 머리로 손을 얹었다.

'…!!'

몹시 차가운 손이었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머리를 으깨버릴 것 같은 시린 손.

'주… 죽고 싶지 않아.'

은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생각 이전에 본능적인 공포가 민쿠의 몸을 집어삼켰다.

덜덜덜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1시간 같은 1초를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쿠를 향해.

"잘 들으세요."

로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과 달리 자비로움과 따듯함이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전 그대를 살려 보내줄 생각입니다. 망설이지 않고 저에 대한 예를 표했으니까요. 대신."

사악.

차가운 로튼의 손이 민쿠의 얼굴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였지만 순식간에 몸이 얼어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들이지 마십시오. 두 번은 없습니다."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민쿠는 그저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눈물만 흘렸다.

슥.

로튼이 몸을 일으키고.

"크르!"

철컥.

옆에 있던 칸이 민쿠가 가지고 있던 검을 가로챘지만.

민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어나서 떠나세요."

'…!'

떠나라는 로튼의 말에.

'척준경 님께 가야 하는데.'

민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날 기다리고 계실 텐데.'

원래 가려던 길에서 덜덜 떨며 몸을 돌렸다.

'검을 드려야 하는데.'

저벅… 저벅… 풀썩!

공포로 풀린 다리에 넘어져 버리는 민쿠.

넘어진 민쿠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다.

'죄송합니다.'

아득한 공포를 가진 로튼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죄송합니다.'

민쿠가 터널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 * *

"어?"

밖에 나와 바람을 쐬던 척사율.

이쪽으로 오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척사율의 얼굴에 반가움이 피어올랐다.

"민쿠!"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민쿠를 향해 척사율이 손을 흔들었다.

땀으로 온몸을 적신 채 어딘가 안 좋아 보이는 민쿠.

"민쿠!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야. 열이 조금 나는 것 같아."

스윽.

온도를 확인하기 위해 이마로 다가오는 척사율의 손.

본능적인 거부감에 민쿠가 몸을 뒤로 뺐다.

"민쿠…?"

"난 괜찮아!"

저벅.

뒷걸음질을 치며 민쿠가 당황하고 있는 척사율을 바라봤다.

'말하면 안 돼.'

진실을 말하는 순간 척사율이 무모한 행동을 할지도 몰랐기에.

민쿠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검… 검은 잘… 잘 전달 드렸어. 오늘은 이만 가볼게!"

의아해하는 척사율에게 거짓을 전한 후.

민쿠가 몸을 돌렸다.

* * *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던 민쿠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난 생명의 은인에게 검도 전달하지 못한 채,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에게 거짓말을 해버렸어."

187화. 겁의 대가 

로튼이다.

민쿠의 이야기를 들으며 확신이 들었다.

금발과 금안에 이은 황금빛 장막과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효과까지.

의심할 여지 없이 민쿠의 앞을 막은 건 로튼과 칸이었다.

칸이 가지고 있던 검은 민쿠 님에게 뺏었던 거군.

이제야 앞뒤가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난 그렇게 겁에 질려 한참동안 율이를 만나러 가지 못했어."

겁에 질린 채 토족의 공간에서 머물렀다는 민쿠.

민쿠가 다시 척사율을 찾은 건 다음 검 배달의 날이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데몬의 땅으로 떠날 척사율이었기에.

민쿠는 회복되지 않은 멘탈을 부여잡고 척사율에게 간 것이었다.

"똑같이 행동했어. 율이가 아무것도 눈치 못 채게 말이야. 그리고 검을 받아 들고 터널까지 왔어."

터널까지 왔지만.

민쿠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손에 쥐었던 거스를 수 없는 존재를 잊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난 터널 구석에 검을 숨겼어. 다음 배달 때도, 그다음 배달 때도."

말을 하는 민쿠의 얼굴로 죄책감이 번져나갔다.

은인에게 검을 못 갖다 준다는 것과 친구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어. 여느 날처럼 터널에 검을 숨기려고 했었는데… 그러지 못하겠더라고."

터널엔 이미 너무나 많은 검이 쌓여있었다고 했다.

천장까지 쌓인 검을 보자 스스로의 비겁함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었다는 민쿠.

그 길로 민쿠는 목숨을 버릴 생각으로 터널을 통과했다.

"정말 무서웠지만 다행히 그때 만났던 데몬들과 다시 마주치진 않았어. 하지만… 항상 만나던 장소에 척준경 님은 없었어."

머리로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 뒤 돌아가지 않고 척준경이 있을 절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는 민쿠.

"절벽 앞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어. 산이라 불러도 될 만큼 쌓인 데몬의 시체 앞에… 척준경 님이 서 계셨어."

꼴깍.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야기를 이어온 민쿠를 봤을 때 척준경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신 척준경의 최후라 생각하니 긴장이 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어. 온몸에 엄청난 상처가 쌓인 채로. 그리고 척준경 님은…."

질끈.

가장 떠올리기 힘든 부분이었는지 민쿠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맨손이었어."

아.

나도 모르게 탄성 섞인 숨이 나올 뻔했지만.

안 그래도 슬픔에 잠긴 민쿠에게 폐가 될까 간신히 집어삼켰다.

"주변엔 부서진 검이 수북하게 쌓여있었어. 더 이상 검이 없어서 맨손으로 싸우다 돌아가신 거야."

척준경은… 죽었구나.

솔직히 기대하고 있었다.

척준경이 일반적인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전 민쿠의 말로 조금이나마 품고 있던 기대는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스윽.

고개를 든 민쿠가 물기 섞인 눈으로 날 바라봤다.

"척준경 님의 악귀참도를 찾고 있다고 했지? 절벽 앞에 있을 거야. 내가 척준경 님과 함께 묻었으니까. 하지만… 그곳까지 가진 못할 거야."

민쿠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로튼 패거리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는 민쿠였기에 내 안위에 대한 걱정 때문은 아니었다.

"아까도 봤겠지만, 혹시나 넘어올지 모르는 이세계의 존재 때문에 터널은 봉인되었어."

터널을 막은 건 자신과 토족이라고 민쿠는 설명했다.

아마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

넘어올지도 모르는 데몬 때문도 있겠지만.

무모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는 척사율을 막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터널을 막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봉인으로 인해 세계를 잇던 터널의 힘은 약해졌을 거야. 설령 그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 한들 길을 열 수 있는 건 율이의 검뿐이고."

"그 검도 척사율 님의 검이니 길을 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잠시 옆에 놓인 검을 바라보던 민쿠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검은 이미 길잡이의 힘이 사라졌어. 새로 만들어진 율이의 검이어야만 해."

이런.

척사율의 검만이 터널을 통과할 수 있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보통 인간과는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는 척사율이었지만.

나이를 안 먹는 건 아니었다고 민쿠는 설명했었다.

수백 년이 지난 만큼 척사율이 살아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하지만.

"그래도 전 포기할 수 없어서요. 혹시 척사율 님이 살았던 장소를 알려줄 수 있나요?"

여기서 그만둘 순 없었다.

설령 척사율이 없어 터널을 사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데몬의 세계로 넘어가는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로튼은 물론이고 데몬은 인간의 세계로 넘어오고 있다. 

분명 길이 있을 거야.

"율이가 아직 그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알려줄게."

잠시 고민하던 민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난 자격이 없거든."

스윽.

한 장의 지도를 건넨 민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나… 만약에 율이를 만나게 된다면."

민쿠의 입가로 슬픈 미소가 어렸다.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 줄래?"

* * *

저벅.

"어?"

지도를 들고나오자 바닥에 앉아 있던 송유빈이 몸을 일으켰다.

모래 바닥에 잔뜩 그려진 그림.

나와 민쿠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자 들어오지 않고 계속 기다린 모양이었다.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배려심 깊은 송유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마리 정도는 얻었네요."

척사율과 민쿠, 척준경이 얽혀있는 과거.

그 과거를 듣게 된 것만 해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이젠 척사율이 살아있기를 바라야 하나.

척사율이 살아있고, 살아있는 척사율로부터 데몬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검을 받는 것.

내가 생각하는 베스트 케이스였다.

스윽.

손에 들려 있는 지도를 내려다봤다.

지도에 적힌 곳은 강원도에 위치한 산이었다.

강원도부터 부산까지 맨날 마차를 끌고 다녔다니.

엄청난데.

검날의 기억에서 마차를 봤었기에.

당연히 척사율의 집과 터널은 가까울 거라 생각했었는데 의외였다.

저벅.

잠시 민쿠의 동굴을 돌아본 후.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유빈 님, 돌아가요."

* * *

그날 밤.

사아아…!

검은 연기를 흩날리며.

송유빈의 오피스텔 옥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밤이 되자마자 서울로 날아왔다.

"잘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품에서 내려온 송유빈이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제가 더 감사하죠. 유빈 님 덕분에 터널까지 갈 수 있었으니까요."

너스레를 떠는 게 아니었다.

송유빈 이후로도 그림에 대한 제보 문자가 여럿 왔었지만.

모두 틀린 장소를 지목하는 문자들이었다.

송유빈이 아니었다면 엉뚱한 곳을 한참 뒤지며 시간을 허비했을 터였다.

"무기왕 님은 바로 떠나시는 건가요?"

미소와 함께 물어오는 송유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까지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서울까지 날아오느라 칼데아의 연기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민쿠가 알려준 산을 향해 갈 수 있는데 까지는 바로 가볼 생각이었다.

"아 맞다, 유빈 님 부탁 하나 말씀하셔야죠."

그림에 대한 제보를 요청할 때 걸었던 조건.

불법적인 일을 제외하고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음."

꼴깍.

고민하듯이 턱에 손가락을 올린 송유빈을 보며.

나도 모르게 긴장의 침을 삼켰다.

무… 무슨 부탁 하시려나.

급하다 보니 냅다 조건을 걸긴 했는데.

막상 들을 때가 되니 살짝 긴장이 되었다.

"정했어요."

내 긴장을 줄어주려는 듯 곧장 입을 여는 송유빈.

"가면 벗고 정체를 밝혀 주세요."

거침없이 건네어진 송유빈의 부탁을 들으며 올 게 왔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

"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요."

송유빈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아무래도 됐어요."

"됐다니…?"

작은 한숨을 내쉰 송유빈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짧았지만 충분히 재밌었으니까요. 이걸로 됐어요." 

아무 부탁도 하지 않겠다는 송유빈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면을 쓴 상태라 보이진 않겠지만 말이다.

"어… 그럼… 음."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에 잠시 당황하는 사이.

휙.

송유빈이 옥상 입구로 몸을 돌렸다.

"졸려서 얼른 가야겠어요! 잘 가요, 무기왕 님."

몸을 돌린 채 말하는 송유빈에.

"고마웠어요, 유빈 님. 좋은 꿈 꾸세요."

나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모든 상황이 예상할 수 없이 흘러가는지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인사는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저벅.

그렇게 옥상 문 바로 앞까지 걸어간 송유빈의 뒷모습을 확인한 후.

후웅…!

연기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하아."

무기왕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소리를 들은 후.

옥상 문고리를 잡고만 있을 뿐 아직 돌리진 못한 송유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슥.

다시 몸을 돌려 조금 전까지 무기왕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송유빈.

송유빈의 눈으로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어렸다.

'토끼귀를 한 어린애라니.'

터널 앞에서 만난 민쿠를 떠올렸다.

물에 잠긴 터널 앞에 갔을 때까지만 조금 의아했었다.

아무것도 없는 깊은 산골.

그저 물에 잠긴 오래된 터널일 뿐이었는데 무기왕은 왜 이곳을 찾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좋긴 했지만.'

무기왕이 무엇을 위해 터널을 찾았는지.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자기도 모르게 찐팬이 되어버린 무기왕.

무기왕과 함께 한다는 것만 해도 몹시 만족스러운 여정이었으니 말이다.

- 첨벙.

그러던 중 등장한 토끼귀의 민쿠.

민쿠를 바라보며 송유빈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역시 무기왕의 여정은 평범하지 않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따라가고 싶었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말할까 말까 고민했었는지 모른다.

지도를 대충 봤을 때 강원도로 향할 예정인듯한 무기왕.

이대로 무기왕과의 동행을 끝내기가 너무 아쉬웠었다.

'민폐니까.'

그럼에도 참은 이유는 간단했다.

무기왕을 누구보다 좋아했기에. 

그런 무기왕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쉽다, 아쉬워.'

송유빈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꽤 오래 대화를 나누며 무기왕에 대해 보다 많은 걸 알게 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매꿔질 수 없는 거리감 역시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다르구나.'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게 되었다.

무기왕과 자신이 사는 세계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과는 달리 머물러 있지 않는 존재, 계속해서 새로운 여정으로 향하는 무기왕이었다.

'원래 가면 벗어 달라고 하려 했는데.'

어째선지는 알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다.

부탁을 하고 무기왕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금 더 라는 욕심이 생길 거란 확신이 말이다.

그래서 부탁하지 않았다.

'지금이 딱 좋아.'

자신과는 다른 무기왕의 세계와 시간, 그리고 길.

송유빈이 가질 수 없는 것들임과 동시에 무기왕을 동경하는 이유였다.

슥.

송유빈이 고개를 들어 무기왕이 떠나간 하늘을 바라봤다.

서울 한복판이라 별이 보이거나 하진 않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하늘이었다.

"무기왕."

하늘을 바라보는 송유빈의 입가로 시원섭섭한 미소가 그려졌다.

"화이팅."

188화. 설산 속

와 얼어 뒤지겠네.

조금만 더 있으면 냉동 생선이 될 것 같은 추위였다.

하도 오돌오돌 떨어 가만히 있어도 살이 빠질 것 같은 느낌.

제발! 토끼 님!

호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지도를 살폈다.

오로지 이 지도만을 믿고 도착한 강원도 산골이었다.

패딩이라도 하나 가져올걸.

척사율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탓일까.

강원도와 서울의 온도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바로 날아와 버렸다.

급기야 오던 중 연기가 떨어져 산골짜기 한복판을 거닐게 되었다.

신발이라도 두툼해서 다행이야.

여름 신발이었다면 이미 동상에 걸리고도 남을 추위였다.

아니 강원도 여기 뭐야 대체.

강원도가 춥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제까짓 게 추워봐야 어차피 한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 다른 나라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눈 쌓인 산을 봤을 때 잠시 후퇴했어야 했는데.

하늘에서 설산을 발견하고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눈이라곤 첫눈조차 내리지 않은 서울이었는데 뜬금없이 설산이라니.

완전 겨울왕국이구먼 생각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간 게 실수였다.

조금만 더 걸어보자.

아직도 어둠이 깊게 내려있는 산골짜기.

먼저 살을 에는 겨울 칼바람이라도 피해야 할 것 같았다.

안되면 어쩔 수 없지.

머릿속으로 라의 불꽃을 떠올렸다.

얼어 뒤질까 봐 라의 힘을 쓰고 싶진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까딱하면 산골짜기 한복판에서 얼어 죽게 생겼는데.

면도칼 들고 호다닥 달려가는 것도 불가능이야.

이런 온도와 바람 속에서 빠른 속도로 달린다?

그냥 바로 볼따구고 귀고 뜯겨 나갈 것이었다.

데몬도 이런 추위는 무리지.

보통 깊은 산속엔 데몬이 살고 있기 마련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마리도 안 나온다는 건 데몬 역시 이 칼바람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는 것.

난 데몬보다 못한 놈인가…!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으며 고개를 들었다.

딱 눈앞에 보이는 나무까지만 간 후 라의 불꽃을 사용해 몸을 녹이고 주변에 불이라도 피울 생각이었다.

불을 피운다기보단 불을 지른다는 표현이 더 옳겠지만 말이다.

딱 다섯 발자국만 더.

그렇게 한 발 한 발을 세며 걷고 있을 때.

딸랑.

감각이 거의 사라진 발아래로 무언가 걸리는 느낌과 함께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함정이고 나발이고 얼어 죽게 생긴 터라 무지성으로 발을 내디딘 결과였다.

뭐야 이건 또.

발아래의 방울을 시작으로 산속 깊은 곳까지 퍼져나가는 방울 소리.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속에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니 묘한 기분이었다.

"거기 누구야!"

울려 퍼졌던 소리가 잦아들 때쯤.

눈보라를 뚫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때문에 제대로 들리진 않았으나 가늘고 앳된 목소리였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어른의 목소리든 어린애의 목소리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죽을 위기에 처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라의 불꽃을 사용하기 직전이었기에 일단 살려달라 소리를 질렀다.

"어?!"

뜻밖에 사람의 외침이 들려서일까.

의아한듯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 살려줘요!"

혹시나 그냥 가버렸을까 싶어 소리를 질러봤다.

그렇게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커… 컹!

강아지 소리가 들려왔다.

컹! 컹! 컹!

빨리 와! 멍멍이들아!

가까워지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여러 마리의 강아지와 강아지들이 끌고 있는 썰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눈사람이네."

눈보라에 한참을 걸은 탓일까.

눈이 어깨 위는 물론이고 머리 위까지 쌓여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눈사람이라고 감탄사를 뱉는 소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두 손을 흔들었다.

"눈사람 살려!"

애처롭고 절박한 목소리가 통한 것일까.

소녀가 썰매를 끌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검은 흑발을 가지런히 땋아 뒤로 넘기고 있는 소녀.

외관만 봤을 땐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손님, 진짜 왔네."

손님…?

손님이란 단어에 잠시 의아해하고 있자.

소녀가 마차 뒤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얼른 타!"

"!!"

쿨한 소녀의 외침에.

혹시라도 놓고 갈까 호다닥 썰매로 몸을 옮겼다.

* * *

신이시여!!

평소엔 믿지도 않는 신을 울부짖으며 바닥으로 몸을 눕혔다.

최대한 많은 면적의 몸이 바닥에 닿도록 말이다.

뜨끈.

온돌인지 뜨뜻하게 데워진 바닥에 얼굴을 댄 채.

조금 전 날 이곳으로 데려온 소녀를 떠올렸다.

- 난 유라야.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며 날 방으로 집어 넣어주었다.

착한 녀석이야.

유라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바닥에 닿은 면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뜨끈한 방바닥의 온기.

이것만으로도 유라에 대한 내 호감도는 매우 상승 중이었다.

진짜 뒤질 뻔했네.

그리스와 이집트를 돌아다니며 더위에만 고생을 했었던 탓이리라.

추위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안 하고 냅다 날아온 것은 말이다.

다음에 또 올 일 있으면 패딩에 타이즈까지 둘둘 해서 와야지.

그렇게 이번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리 다짐하고 있을 때.

벌컥!

시원하게 문이 젖혀지며 유라가 찻잔을 건넸다.

"이거 마셔."

아까부터 느꼈지만 몹시 단호하면서도 잘 챙겨주는 유라였다.

처음 본 날 경계하긴커녕 오래 알고 지낸 동네 오빠마냥 말까지 놔버린 유라.

"고맙습니다!"

그런 유라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한입에 들이켰다.

엄청 뜨거울 테지만 속이 하도 얼어있는 상태라 단숨에 녹여버리고 싶었다.

"꾸에엑!"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찻잔을 떠나 목에 꽂힌 건 얼음장처럼 차가운 액체였다.

바닥의 온기로 스멀스멀 따듯해지던 몸속이 다시 한번 얼음으로 변해 가는 느낌이었다.

"유라야 따듯한 차를 내드려야지."

차가운 액체를 느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때.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산딸기 쥬스를 드리면 어떡하느뇨."

산딸기 쥬스…?

그제야 입가에 남아 있는 액체의 맛을 음미했다.

달면서도 새콤한 맛이 나는, 와 이거 정말 산뜻한 맛이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생과일 쥬스맛이었다.

슥.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내 모습이 웃긴지 킥킥거리고 있는 유라와, 그런 유라의 옆에 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할머니.

잠시 날 바라보고 있던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어서오게나, 이 늙은이의 이름은 사율."

!!

"척사율이라네."

* * *

자신을 척사율이라 소개하는 할머니에 놀라기도 잠시.

몸을 바로 앉히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척준경의 악귀참도를 찾고 있으며 배달꾼 민쿠에게 이곳의 위치를 들었단 이야기였다.

"그렇구먼."

민쿠의 이름이 등장하자 몹시 놀라는 척사율.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척사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었구먼."

혼잣말을 하는 척사율의 얼굴로 안도의 빛이 번져나갔다.

민쿠에게 들었던 과거에 대한 말은 하지 않은 상태.

그저 악귀참도를 찾기 위해 당신의 검이 필요하다는 말만을 건네었다.

다행이야.

나 또한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으나 척사율과 마찬가지로 안도하고 있었다.

척사율만이 만들 수 있는 길잡이 검.

만약 척사율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었기 때문이다.

"민쿠는… 잘 지내고 있는가?"

왠지 모르게 망설임이 묻어 있는 물음이었다.

음.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터널 앞에서 만난 민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검을 빼앗기고 겁에 질려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인 척사율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단 이야기.

"…."

척사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이네."

"네?"

"그 아이가 그토록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건 나 때문이야."

작은 탄식을 한 차례 내뱉은 척사율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민쿠에게는 듣지 못했던 이후의 이야기였다.

"어느 날이었네. 배달을 마친 민쿠가 울면서 내게 온 날이었어. 나는 놀라서 왜 그러느냐 물었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척준경이 죽었단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민쿠.

아버지의 죽음을 들은 척사율은 그런 민쿠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며 후회했다.

"난 누구보다 힘들어하는 민쿠를 감싸주긴커녕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네. 우리 부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했을 민쿠에게, 너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며 꼴도 보기 싫다고 소리쳐버렸어."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민쿠와 마찬가지로 척사율 역시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이거 참.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건 아니었지만.

민쿠와 척사율 두 사람의 심정이 짐작되어 가슴이 미어졌다.

친구의 잘못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에 감정이 격해졌을 척사율과.

친구가 건넨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스스로가 가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을 민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헤어져 지냈을 두 사람이, 오랫동안 후회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두 사람이 안타까웠다.

"몇 날 며칠을 홀로 집에 박혀 울었다네. 그리고 감정이 어느 정도 추슬러질 때쯤, 민쿠를 찾아 금정산으로 갔었어."

하지만 결국 척사율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민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 친구를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할머니."

평소와 달리 의기소침해진 척사율에.

유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할머니의 손을 감싸 쥐었다.

"홀홀… 민쿠를 만나고 싶지만 나 또한 자격이 없구나. 친구가 오랜 시간을 나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을 거라 생각하니 말이야."

척사율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후회와 죄책감이 깃든 얼굴이었다.

그렇게 쉽사리 검을 만들어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척사율이 먼저 물어왔다.

"그래… 그래서 자네는 그 세계로 길을 그려 줄 검이 필요하다고?"

"예."

"터널이 아직 끊기지 않았다 해도… 아마 오랫동안 봉인된 탓에 세계를 잇는 힘이 약해져 있을 거네."

잠시 침묵하던 척사율이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돌아오지 못 할 게야."

세계를 잇는 힘에 대해 정확히 알진 못했다.

하지만 척사율의 말을 미루어 봤을 때.

건너가는 건 가능하지만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순간 돌아오는 게 불가능해진단 것 같았다.

뭐.

어쩌겠어.

"괜찮습니다."

"…."

괜찮다고 말하는 날 조용히 바라보는 척사율.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에도 가려는 이유.

이유를 묻는 척사율을 향해 빙긋 미소를 그려 보였다.

"꼭 데리러 가야 할 친구가 있어서요."

지금도 망자의 길에 홀로 갇혀 있을 도윤.

지난번을 제외하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였지만.

비젼 수리검이 나와 함께 한 순간부터, 소멸하지 않고 홀로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무조건 데려와야 할 존재가 되었다.

"그렇구먼."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인 척사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정도만 머무르게나."

…!

척사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을 만들어주겠네."

189화. 설산에서 터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