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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No.104 흑사방 (6)

나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 카가가가각!

새까만 강기 세 줄기가 방금 내가 있던 자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또 뒤로 물러나자 흑사방주가 내 앞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상태에서 검지로 나를 가리키자 손가락이 쭉 길어지는 것처럼 지공이 날아온다.

직접 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는 이렇게 나를 뒤쫓으며 원거리 공격을 함께 가하는 중이다.

이 원거리 공격들은 흑사방주가 익힌 무공의 특성상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독공이 자꾸만 엉뚱한 곳에 떨어지다 보니, 독기가 쌓이고 쌓여서 일대가 완전히 황폐해져 버렸다.

곳곳에 깊게 패인 바닥에 검은 웅덩이가 고이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당분간 이 근방에서는 풀 한 포기도 못 자라겠지.

이 난리를 피워 놓고도 내 옷깃 하나조차 스치지 못하자 흑사방주는 조금 질린 기색이었다.

"발재간 하나는 뛰어난 놈이로구나. 허나 이해가 안 가는군. 염패는 강맹하고 패도적인 무공을 주로 쓰는 줄 아는데, 그 제자는 어찌 이리도 경망스럽단 말인가?"

"제자 아니라니까요."

아니니까 메뚜기마냥 폴짝거리고 다니지.

내가 또다시 한 마리 메뚜기가 되어 뛰어다니려던 순간,

귀에 꽂아 둔 통신기기를 통해 신병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어. 안전지대로 이동한다.]

"좋았어. 거기서 보자."

흑사방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방금 내가 한 말이 다른 누군가와의 대화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내가 혼자 쳐들어온 게 아니라는 말은 즉,

"...네놈 설마?"

"눈치가 없으시네."

양동작전인 걸 이제 깨닫다니.

사실 이건 내가 계속 곁에서 얄밉게 알짱거리면서 성질을 긁어 댄 탓도 컸다.

사람은 머리에 열이 뻗치면 생각을 깊게 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까 하는데요."

"보내 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못 잡잖아요. 그럼 수고."

작별 인사를 건네고 홱 등을 돌려서 달렸다.

흑사방주가 죽일 듯이 뒤따라온다.

"서라!"

물론 나는 도망치는 척만 하는 거였다.

속도는 내가 우위라지만 흑사방주도 느린 편은 아니라, 거리를 확보하려면 제대로 한번 떨쳐 내고 가야 한다.

조금 달리다가, 한순간 다시 홱 몸을 돌려 흑사방주에게 달려들었다.

"얕은 수작을!"

흑사방주가 즉시 허공을 미친 듯이 할퀴자, 묵빛 강기가 커다란 그물을 형성하며 뒤덮어 왔다.

나는 땅을 박차고 대각선 방향으로 이동하고, 다시 땅을 박차 흑사방주의 앞에 도달했다.

흑사방주의 눈으로는 그 속도를 온전히 따라잡을 수 없어서, 마치 내가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흑사방주가 대응하기 직전, 불길을 담은 주먹이 뻗어졌다.

['증폭'을 사용합니다.]

['인페르노 피스트'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C->A)]

[인페르노 피스트]

[윈드포스]

- 콰콰콰콰콰—!

여태까지 시전했던 것에 비해 몇 배는 막강한 화염 폭풍이 정면을 불태우며 나아갔다.

흑사방주의 모습은 불길에 휩쓸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야."

주먹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서 내려다보니 옅은 화상 자국이 남았다.

코끝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아 보면 매캐한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다.

안 그래도 페널티가 심한 스킬을 증폭까지 했으니, S급 원소 저항으로도 완벽하게 무효화하지 못한 것이다.

'근데 저래도 안 죽었을걸.'

그것이 흑사방주의 무시무시한 점이다.

일대의 청년들을 잡아다 마교의 대법을 시술했기 때문에 명줄이 엄청나게 질겨진 상태.

희소식이라면,

'안 싸우면 그만이지.'

굳이 흑사방주를 쓰러뜨릴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A급 인페르노 피스트를 갈겨서 아주 잠깐이나마 무력화시켜 놓았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다.

[도둑걸음]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전력 질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될 때만 해도 흑의인들이 촘촘하게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흑사방주가 온 사방에 독극물을 튀기고 다닌 탓에 지금은 다소 허술해진 상태였다.

- 펑!

막아서는 말단 무사 하나는 윈드포스로 밀쳐 내고, 다른 놈은 붙잡아서 근처 독 웅덩이에 냅다 집어 던지고 달렸다.

"거—기—서—라—!!!"

흑사방주의 외침이 등 뒤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저거 봐라. 벌써 회복했잖아.

근데 너 같으면 서겠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을 유지하며 달렸다.

'응, 더 안 싸워. 가서 다신 안 와, 백날 쫓아와 봐.'

아마 우리가 던전을 벗어난 뒤에도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질 텐데, 그러고도 못 찾으면 화병 좀 나실 거다.

그 화풀이는 나중에 검술 동아리라고, 칼 든 형 누나들 찾아오면 거기다 하겠지.

저잣거리를 벗어나 폐가로 들어서니 고현우와 신병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형."

"오, 빨리 왔네?"

연락을 받자마자 뛰어온 셈이라 두 사람과 시간 차가 별로 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고현우의 안색이 조금 파리했다.

쟤 실력으로 정예 무사들한테 고전했을 리는 없고, 다른 무슨 일이 생겼었나 본데.

"백사랑 붙었냐."

"그렇소."

"운도 없지. 고생 많았다."

그 확률을 뚫고 히든 보스를 마주쳐 버리네.

다행히 고현우가 공략대로 잘 헤쳐 나간 듯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대처법을 언급해 놓길 잘했다.

일단은 신병철이 아껴 두던 하이포션까지 써 가며 내상을 달래 놨다지만, 원체 입은 피해가 커서인지 하루 이틀 정도는 정양해야 할 듯했다.

"보건실 가야겠네. 일단 나갑시다."

신병철이 곧바로 보관해 두었던 스크롤을 꺼냈다.

[긴급 탈출 스크롤(B)]

스크롤을 반으로 찢자 각인되었던 마력이 풀려나며 주문이 발현되었다.

허공이 마구 요동치더니 투명한 손이 억지로 비틀어 여는 것처럼 틈새가 쩍 벌어졌다.

우리는 차례대로 긴급 탈출 포탈에 몸을 집어넣었다.

* * *

밖으로 나와 심층부의 풍경이 막 눈에 들어오려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우리를 덥석 집어삼켰다.

우리는 순간 움찔했으나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잠자코 있었다.

당규영이 밖에서 대기하다가 우리를 보는 즉시 [쉐도우 파우치]에 집어넣은 것이다.

주머니 안의 흔들거림에 몸을 맡기고 잠시 기다리다 보니, 퉤 뱉어 내는 느낌이 들며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일 먼저 당규영과 채다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주변을 둘러보니 C층과 심층부의 경계 부근이다.

당규영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어땠어? 흑사방."

"큰 문제는 없었어요. 챙겨 먹을 거 다 먹고 나왔습니다."

"크, 우리 후배님이 진짜 능력자라니까? 1학년이 B급 털어먹고 나왔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 헛소리하지 말라 그러지."

다음으로 당규영과 채다빈의 시선이 신병철에게 꽂혔다.

"선물은?"

"간식은?"

"...어어."

신병철이 두 눈을 껌벅이다가 이내 아차 싶은 표정이 되었다.

여태까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나 보다.

잠시 신병철의 변호를 해 보자면, 처음 들어가 보는 심층부 던전이라 잔뜩 긴장했을 테고, 뭘 사러 돌아다닐 시간 여유도 없었다.

선물 같은 사소한 부탁은 금방 까먹었겠지.

'물론 그건 얘 사정이고.'

당규영과 채다빈이 그 사정을 이해해 주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다.

반쯤 장난삼아 던진 말이기는 하지만, 거창한 부탁도 아니었는데 당과 한 개조차 없으면 무시당한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아예 기억조차 못 한다면 더욱.

두 여인의 눈빛이 점차 싸늘해져 간다.

위기감을 느낀 신병철이 다급한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헬프! 도움!'

당규영의 손이 신병철의 깍두기 머리를 움켜쥐기 직전, 나는 방금 막 떠올린 것처럼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맞다. 이거 쟤가 맡겨 둔 건데, 여기요."

나는 고현우와 신병철에 비해 운신이 여유로웠고, 어디에 어떤 노점이 있는지도 거진 파악해 두었기에 잠깐 틈을 내서 특산품 몇 개 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매콤달콤 육포]

[화산폭발 육포]

흑사방 인근 저잣거리에서만 파는 육포.

특유의 양념 때문에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명물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3학년들 중에는 이것 때문에 흑사방 공략에 참여하는 학생도 있을 정도.

육포 묶음을 받아 들자 당규영과 채다빈의 얼굴이 도로 펴졌다.

"사 왔네? 난 또 병철이가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나 했지. 서운할 뻔했잖아."

"잘 먹을게."

"에이, 누님들. 아무렴 제가 이 정도도 못 해 드리겠습니까. 헤헤헤."

신병철이 비굴하게 웃으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1학년이 동아리에서 살아남기가 이렇게 힘들다.

당규영과 채다빈이 앞장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올라가면서 하나 까먹을까? 무슨 맛부터 먹어 볼래?"

"매콤달콤부터 먹죠. 화산폭발은 장난 아니래요."

두 선배가 육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신병철이 슬쩍 뒤로 빠져서 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껌벅 죽는 표정을 지으면서,

'하이고, 우리 형님 센스가 아주 그냥, 너무 훌륭하십니다. 앞으로도 형님만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이걸로 하이포션은 퉁친 거다.'

'그건 좀....'

'싫어? 그럼 솔직히 말하고.'

'...콜.'

하이포션과 육포 묶음 몇 개를 맞바꾸는 기적의 교환비.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비싼 하이포션을 썼네 운운할까 봐 원천 차단을 해 버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신병철에게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그냥 뒀으면 당규영이 깍두기 머리를 쥐어뜯었을 텐데, 포션을 포기하고 머리털을 지켰다면 남는 장사 아닐까?

* * *

올라가는 길은 내려오는 길과 마찬가지로 제법 순탄했다.

당규영이 그림자 나비를 정찰병으로 보내며 길을 안내하고, 중간중간 채다빈과 신병철이 손을 보태는 방식.

계속 그렇게 순탄했으면 좋았겠지만....

고현우가 백사를 마주친 것도 그렇고, 오늘은 운이 잘 따라 주지 않는 날이었다.

E층쯤 올라왔을 즈음,

잘 걷던 당규영이 흠칫하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아씨, 걸렸네, 이거."

정찰병으로 보낸 영접의 이목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걸려든 듯했다.

채다빈이 물었다.

"누군데요? 선생님?"

"곽승재 같은데."

도망치기는 이미 늦었다 판단했는지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대신 1학년들과 빠르게 말을 맞춘다.

"얘들아, 우린 지하층 구경만 하러 잠깐 내려온 거야. 던전에는 손도 안 댔고. 오케이?"

"예, 선배님."

- 쿠구구구구....

제자리에 멀뚱멀뚱 서서 몇 초 기다리고 있으니, 나무로 이루어진 문짝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문이 열리며 걸어 나온 것은 짐작대로 곽승재였다.

당규영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승재 안녕."

"D층에서 이런 걸 발견해서, 잠시 확인차 찾아뵈었습니다."

곽승재가 나무로 된 새장을 들어 올렸다.

새장 안에 그림자 나비 두어 마리가 갇혀 팔랑거리고 있다.

그림자 마법은 성향에 맞는 사람이 적은 데다 숙달하는 난이도도 높아서 제대로 익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영접비행]을 정찰병으로 쓸 정도까지 연마한 사람은 아마 용살학원 내에서 한 손에 꼽을 터.

따라서 그림자 나비는 당규영이 시전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한 정찰병을 보낸다는 건 떳떳하지 못한 일을 꾸민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단순히 던전 공략을 위해 내려왔다면 누굴 마주치든 상관이 없지 않은가.

이런 사고의 흐름으로 곽승재는 그림자 나비를 포착하는 즉시 당규영을 추적해 온 것이다.

그리고 곽승재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의 시선이 나, 고현우, 신병철을 차례대로 훑었다.

"...."

1학년이 지하층을 돌아다니다 발각됐으니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곽승재가 모두에게 권했다.

"잠시 선도부실로 동행해 주시지요."

"그러지 뭐."

당규영이 손쉽게 곽승재를 제압할 수 있음에도 아무 저항도 안 하는 이유는 이곳이 던전동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소란을 피우는 순간 곳곳에 상주하는 교직원들, 순찰을 도는 선도부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든다.

아마 지금쯤이면 출구 쪽에도 누군가 대기하고 있을 터.

괜히 일을 키워 봤자 힘만 빠지고 얻는 게 없으니, 얌전히 따라가는 게 낫다는 계산이다.

곽승재 역시 우리가 섣불리 손을 못 쓴다는 사실을 아는 듯, 별다른 경계심 없이 등을 보였다.

나무 문을 닫고 잠시간 마법을 캐스팅하더니 다시 열었다.

열린 문 너머의 풍경이 선도부실로 바뀌었다.

"들어오십시오."

75화 학생선도부실

선도부장 오세훈은 이 늦은 시간에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선도부 몇 명이 곁에서 서류 작업을 돕는다.

그중에는 송천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졸음을 도저히 못 참겠는지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무 문을 통해 우리가 몰려나오자, 화들짝 놀라 자세를 꼿꼿하게 세우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선도부원들의 이목 역시 우리에게 집중되었으나, 송천혜와는 달리 특별히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이런 일이 하도 자주 벌어져서 면역이 됐나 보다.

"...."

오세훈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던 작업을 마무리 지은 뒤, 서류에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당규영을 비롯한 도둑 동아리 일당부터 고현우와 나까지 차례차례 살펴보고, 알 만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다.

상황은 대강 파악했어도 절차대로 처리하려는지 먼저 곽승재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야?"

"지하 E층 부근에서 발견하고 데려왔습니다."

"그래? 내려가는 길이었어?"

"올라가는 중이더군요."

올라가는 중이었다는 말은 지하층에서의 용건을 끝마쳤다는 의미.

오세훈이 말없이 2학년 선도부 하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별다른 지시를 받지도 않았는데도 눈짓에 담긴 속뜻을 알아듣고 나무 문을 열고 나갔다.

'확인하러 가나 보네.'

오늘 밤 공략되고 파괴된 던전에 대해 파악하러 간 것이다.

입찰이 걸리지 않았는데 파괴된 던전이 있다면 십중팔구 우리가 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사람을 보내 놓고,

오세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빈 의자들을 손짓했다.

"일단 앉자. 뭐 좀 마실래?"

"나는 꿀물."

"저는 찬물 마실게요."

먼저 당규영이 의자에 턱 걸터앉고 그 옆에 채다빈이 앉았다.

곽승재는 언제 가져왔는지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한구석에 기대고 섰다.

1학년들은 어째 마실 거리를 시키기 부담되는 눈치였으나, 나는 원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주의였다.

흑사방주와 격렬한 술래잡기를 하고 오는 길이라 심히 갈증이 나기도 했고.

당규영과 비슷하게 의자에 턱 걸터앉으며 말했다.

"저도 꿀물 마시겠습니다."

"...."

선배들 앞인데도 내가 너무 태연해서 그런가, 선도부원들의 표정이 한순간 묘해졌다.

유일하게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오세훈뿐.

입학식 때 나를 한번 겪어 봐서 그렇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주억거린 다음 신병철과 고현우에게도 물었지만,

"꿀물 둘에 냉수 하나, 너희는?"

"저희는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오세훈이 직접 마실 거리를 준비하려 하자 송천혜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제가 가져올게요."

오세훈은 우리 맞은편에 앉아서 당규영과 나를 천천히 번갈아서 보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당규영에게 물었다.

"김호가 도둑 동아리 들어갔던가?"

"꼬시는데 잘 안 넘어오네. 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둘이 이렇게 보니까 분위기가 조금 비슷해."

"그치! 비슷하지? 내 말이 맞다니까?"

당규영이 흥분해서 내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이거 봐! 너는 딱 우리 동아리에 가입할 운명이라고! 우리 이따 가서 신청서부터 쓰자!' 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매정하고 단호하게 끊었다.

"당분간은 무소속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래, 동아리는 한번 들어가면 바꾸기 어려우니까 신중하게 잘 생각해 봐."

오세훈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는데, 내 신중함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아니면 배신감에 물든 당규영의 표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송천혜가 금방 꿀물 둘과 냉수 하나를 가져와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꿀물을 내 앞에 놓으며 째릿 눈짓을 보내고, 홱 등을 돌려 버린다.

오세훈도 보온병에서 자기 몫의 커피를 따르고, 한 모금 홀짝이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규영아, 네가 말해 봐. 1학년들 데리고 지하층은 왜 내려갔니?"

"뭐, 별건 아니고, 우리 후배님들 지하 구경이나 시켜 줄까 했지."

"던전은 안 들어갔고?"

"응, 근처에도 안 갔어."

당규영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나 당장은 밝혀낼 방법이 없었다.

오세훈은 내 쪽으로 화살을 돌려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김호야, 지금은 지하로 내려가는 거 교칙 위반인 줄은 알지?"

"예, 압니다."

"그런데 왜 내려갔니?"

"어떻게 생겼나 너무 궁금해서, 못 참았어요."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 2호.

송천혜가 어이없어하며 허! 참나! 허! 하고 헛바람을 터뜨렸다.

반면 오세훈은 납득이 간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궁금할 수 있지. 그래도 교칙을 어기면서까지 내려가야 했을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오세훈이 다시 당규영 쪽으로 화살을 돌려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규영아, 너는 반성해야 된다. 선배가 돼 갖고, 후배들이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하면 바로 잡아 줘야지, 앞장서서 나쁜 물을 들이면 써?"

"...."

당규영은 조금 억울해 보였다.

자신이 길잡이를 맡기는 했지만 원인을 되짚어 가면 의뢰를 넣은 건 나니까.

그러나 조금 억울하다고 그걸 발설했다간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기에 애써 딴청만 피워 댔다.

그때, 방금 곽승재의 나무 문을 열고 나갔던 2학년이 지하층에서 돌아왔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달싹여 오세훈에게 보고하는데, [전음(傳音)]을 쓰는 듯했다.

오세훈은 굳이 자신이 보고받은 것을 숨기지 않았다.

"지하층에 확인해 봤는데, 오늘 밤 비인가 공략은 없다네."

오늘 밤 파괴된 던전은 모두 정식으로 입찰 후 공략된 것들.

리플레이도 빠짐없이 등록되었단다.

물론 저들도 바보는 아니다.

현재 지하층 쪽에서 파악한 것은 '파괴된,' 즉 완벽히 공략된 던전들뿐이고,

우리가 도중에 긴급 탈출을 썼을 가능성 역시 염두에 두고 있을 터.

하지만 그걸 어느 던전에서 썼는지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니, 결국 명확한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증만으로는 이 상태에서 더 추궁하거나 붙잡아 둘 수 없는 노릇.

여기까지 계산했기에 당규영도, 나도 순순히 선도부실로 따라온 것이다.

지하층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는 처벌 수위가 높지 않으니까.

"김호야. 어쨌든 지하 E층까지 내려갔으니까, 이건 벌점 1점이야. 그리고,"

오세훈의 실눈이 순간 예리한 빛을 머금은 것 같았다.

"혹시 우리한테 숨기는 게 있으면 지금 솔직하게 말해. 벌점이든 징계든 내가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줄여 줄게. 말 안 하고 우리가 직접 알아내면 가중 처벌이다. 잘 생각해야 돼."

당근과 채찍.

몰래 던전을 공략한 것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선도부장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최대한 처벌을 줄여 주겠다.

반면 끝까지 숨기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가중 처벌.

처벌 수준이 최대 두 배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선도부의 수사 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며, 어떤 면에서는 집요하기까지 해서 사후 검거율이 꽤 높았다.

물론 그래 봤자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절대 안 말하지.'

가볍게 F급이나 E급 던전을 공략했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밤 들어간 곳은 심층부.

접근만 해도 무조건 최고 수준의 징계가 떨어지는 곳이다.

이러나저러나 징계 폭탄이니, 말 안 하고 버티는 게 최선이다.

끝까지 숨길 자신이 있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답했다.

"숨기는 거 없습니다."

"정말 없는 거지?"

"예, 선배님."

오세훈이 신병철과 고현우에게도 확인했지만, 저 둘도 눈치 하나는 귀신같다.

내가 이렇게까지 확답을 했는데 딴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오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두 벌점 1점으로 해 둘게. 다음부터 조심하고, 나가들 봐."

* * *

김호와 도둑 동아리 일당이 벌점 1점씩을 받고 떠나고.

선도부실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오세훈은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하던 업무로 돌아갔으며, 다른 선도부원들도 그의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송천혜도 자연스레 그들 사이에 합류하려 했으나, 곽승재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불렀다.

"송천혜."

"네, 선배님."

"한번 말해 봐라. 네 생각은 어떤가."

당규영과 김호가 뻔한 거짓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은 서로가 안다.

하지만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꼈는가?

그것을 짚어 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송천혜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답했다.

"우선은, 조합이 너무 화려했어요. 정말 지하층 구경만 하는 거라면 신병철이나 채다빈 선배 둘 중 하나로도 충분했겠죠. 당규영 부장님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바로 보았다."

"저 세 명이 조합을 이뤘다는 건 높은 확률로 던전, 그것도 상위 던전의 보안을 뚫기 위해서라고 추측합니다."

곽승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셋이라면 심층부까지도 도전해 볼 만하지."

"일전에 결투도 같이 참관해서 아시겠지만, 김호는 목종화 부장님의 골렘을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할 정도의 실력자, 그리고 고현우는 현재 1학년 공략전 랭킹 10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송천혜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방금 고현우를 보니 내상을 조금 입은 것 같더군요. 저 정도 실력자가 내상을 입었다는 건...."

"그만큼 고난이도 던전에 도전했다는 의미지."

"D급에서 C급 사이, 가능성은 낮지만 B급일 수도 있겠죠."

그러니 D급에서 B급 사이의 던전들로 수사망을 좁혀 들어가면, 저들이 남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천혜의 추리가 끝났음에도 곽승재는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더 기대하는 듯했지만, 당장 송천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송천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놓친 게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방금 꿀물을 줄 때."

"...?"

"김호의 손은 확인했나?"

"!!"

송천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 입장에서는 김호 일행에게 마실 거리를 주는 게 다소 못마땅했는데, 벌점 받으러 끌려와서 꿀물까지 달라는 태도가 몹시 뻔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탓에 꿀물을 내려놓자마자 홱 몸을 돌려 버렸고, 미처 김호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반면 곽승재는 뒤에서 모든 것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른손에 아주 옅은 화상 자국이 남았더군."

"그렇다면!"

그러나 곽승재는 송천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전 일과 결부시키기는 어렵다. 네가 확인했을 당시에는 깨끗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저 화상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호가 쓴 것이 [인페르노 피스트]든, 다른 화염 마법이든.

저들이 오늘 들어갔다 나온 던전에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던전에 입장하는 순간.

"그때가 저들의 꼬리를 잡는 순간이 될 것이다."

76화 한밤의 산책

밤이 깊었기에, 도둑 동아리와 김호 일행은 선도부실을 나오자마자 해산했다.

고현우는 내상을 치료하러 보건실로,

도둑 동아리 부원들은 졸리다며 각자 기숙사로.

한편 당규영은 김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고,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막 발걸음을 떼는 후배에게 넌지시 물었다.

"잠깐 걸을래?"

"그러죠."

새벽이 밝아 오기 전이라 하늘은 여전히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남색이었다.

가로등들이 밝혀 주는 길을 따라 두 사람이 발을 맞춰 걸었다.

매일같이 오가는 길도 이 시간대에, 단둘이서만 걸으면 색다른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그 탓인지 한동안 당규영과 김호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규영이 우물쭈물하더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문을 열었다.

"그.... 미안하다. 잡혀서."

이번 의뢰의 핵심인 심층부 던전 침투는 성공적이었지만, 의뢰 내용은 '끝까지 들키지 않고 지하층을 벗어나는 것'까지였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에 곽승재에게 덜미를 잡혀 벌점을 받았으니, 마무리가 부실한 셈이었다.

도둑 동아리 부장이 직접 참여한 의뢰치고는 더욱 부실했고.

김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배님,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아무리 육포가 맛있어도 그렇지, 마지막까지 집중하셨어야죠."

"아, 아니거든? 계속 집중하고 있었어!"

"그런 것치곤 너무 맛있게 드시던데, 육포에 더 집중하신 거 아닙니까?"

"야, 진짜 아니야! 이건 솔직히 곽승재가 잘 치고 들어온 거—"

당규영은 발끈해서 김호의 앞을 가로막았다가,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린 것을 발견했다.

조금 친해졌다 싶으니 이렇게 한 번씩 장난을 걸어온다.

동아리의 시커먼 남정네들이 이랬다면 당장 기강 다지기에 들어갔을 테지만, 이 후배가 하니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어깨만 가볍게 밀치고 말았다.

"아이씨, 놀리지 마라."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벌점 1점 정도는 크게 신경 안 써요."

벌점이 1점이라곤 해도 성적에 영향이 없진 않은데.

하나하나 쌓이다 보면 더 커질 거고.

그러나 김호는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스타일인 듯,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가 화제를 전환해 곽승재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확실히 곽승재 선배님 추적 능력이 엄청나던데요. 임시 보관소에서도 끝까지 따라붙으시고."

"내 말이. 걔는 입학했을 때부터 완전 개코였어, 개코."

곽승재는 뛰어난 감지, 추적 능력은 기본에 심기가 깊고 묘하게 촉까지 좋아서, 신입생 시절부터 도둑 동아리 2, 3학년들을 검거한 전력이 있었다.

실력이야 2, 3학년 도둑들이 그보다 윗줄이었지만, 그럼에도 열 번에 한두 번 정도는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

"2학년 되고 더 까다로워졌단 말이야."

곽승재가 1학년일 때는 열 번에 한두 번 잡힐까 말까 했던 것이, 2학년이 된 지금은 열 번에 두세 번으로 늘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두세 번이거든.... 혹시 오해할까 봐."

자신이 보이는 것처럼 무능한 건 아니라며 열심히 어필하는 당규영이었다.

큼큼 헛기침을 하고, 잠시 옆길로 샌 대화를 도로 끌어왔다.

"아무튼 우리 서비스가 부실했던 건 사실이니까, 뒤처리를 더 도와줄게. 이러면 문제없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잠깐 손 좀 보자."

사실은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것이 있었다.

당규영은 김호가 내민 손을 앞뒤로 뒤집어 가며 살폈다.

울긋불긋 옅은 화상 자국.

[인페르노 피스트]의 후유증이다.

무슨 특성 덕분인지는 몰라도 저번에는 인페르노 피스트를 쓰고도 아주 깨끗했는데, 이번에는 흔적이 남았다.

흑사방에서 꽤 고생한 거겠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에 차차 이야기를 나눠 볼 일이고,

지금은 더욱 급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건 승재가 봤겠는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곽승재는 오세훈에게 응대를 모두 맡기고, 본인은 한발 물러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김호에게 시선이 꽂히는 빈도가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잦았으니, 화상 자국을 못 보고 넘어갔을 리가 없다.

"이러면 꼬리가 잡힐 수도 있겠다. 인페르노 피스트 많이 썼냐? 흑사방에서."

"솔직히 좀 지저분하게 해 놓고 나왔어요."

저렇게 말할 정도면 많이 쓰기는 했나 보다.

아마 이곳저곳 불타고 박살 나고 난리도 아니었겠지.

검술 동아리에서 흑사방 공략에 성공하면 그 광경은 고스란히 리플레이로 저장될 터.

유의미한 증거 자료로 남는 것이다.

물론 이런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김호가 인페르노 피스트를 익혔고, 그것을 흑사방에서 사용했다!'라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화염 마법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러나 이런 정황들이 모일수록 선도부 측의 의혹은 짙어질 테고, 학사 측에서 [돋보기] 아이템 사용 허가를 내려 줄 확률도 올라갈 터.

돋보기로 김호가 인페르노 피스트를 익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그때부터는 일이 굉장히 귀찮아진다.

그러니 수사가 진척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둬야 하는 것이고.

"흑사방 리플레이를 비공개로 돌릴 수 있냐, 없냐가 관건이겠네."

"그 부분에서 힘을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자. 네가 잡히면 우리 쪽에도 좋을 게 없으니까."

김호가 잡히면 오늘 벌점 1점씩 받은 일행들도 줄줄이 엮여 들어갈 위험성이 있었다.

심층부 침투에 동조했다는 죄목으로.

그러니 애프터 서비스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리플레이는 사라지는 편이 모두에게 이롭다.

검술 동아리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당규영은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십분 발휘해 볼 생각이었다.

당규영이 거기에 조심스레 제안을 덧붙였다.

"하는 김에.... 우선 입찰 무시하고 들어간 것도 조금 도와줄까?"

"아니요, 그건 제가 해결할 일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는 전부 저한테 토스해 주세요."

그러나 김호는 아주 단호하게 끊었다.

당규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얘도 은근히 고집이 세다니까.

그냥 도와 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도와줄 텐데.

"너 잘난 거 아는데 그래도 걱정돼서. 감당할 수 있겠냐?"

"예. 감당이 안 됐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이렇게까지 확답하는데 더 의심하면 김호를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당규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한 거절 탓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고,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당규영은 발끝만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기다가, 한층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김호야,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보세요."

"너.... 그렇게까지 해서 얻고 싶은 게 뭐야?"

김호가 용살학원에 입학하고 고작 한 달.

그사이에 벌써 크고 작은 교칙을 여러 개 위반했고, 중견급 동아리인 에메랄드 마탑과 충돌했다.

그리고 이제는 용살학원 내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인 검술 동아리와도 마찰을 빚으려 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음에는 또 얼마나 무지막지한 짓을 벌일 생각이란 말인가?

물론 당규영도 자신의 본분이 도둑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 훈계할 처지는 못 된다는 것도.

그래도 김호는 모처럼 마음에 든 후배였다.

그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가 비참한 끝을 맞이하는 건 막고 싶었다.

그런 걱정스러운 마음을 갖고 목적을 물어본 건데,

"세계 평화요."

"또 장난친다."

당규영은 불퉁한 표정이 되었다.

걱정돼서 물어봤더니 생뚱맞은 소리나 하고.

저번에는 무슨 졸업을 200번 했다고 하질 않나.

어쩌면 저 생뚱맞은 소리가 김호 나름의 완곡한 거절일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을 받았기에 이전에 비슷한 문답이 오갔을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답을 들어 두고 싶었다.

'딱 한 번만 더 물어보자.'

당규영은 김호를 약하게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다시 물었다.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말해 주면 안 돼?"

"...."

당규영은 올려다보고, 김호는 내려다본다.

두 사람은 얼마간 말없이 그러고 있었다.

조금은 진심이 전해졌을까, 김호가 당규영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돌려, 먼 저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졸업을 200번 넘게 했다고 말씀드렸었죠."

'또 그 소리야?'라고 말하려던 당규영은 김호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일단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200번 동안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특히 숫자가 한 자리였을 때는 저도 많이 미숙해서 안 좋은 일이 더 많았죠."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누구 죽고, 다치고, 그런 거요."

"...."

김호는 지나가듯 가볍게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듣는 당규영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졸업 200번은 당연히 거짓말일 테고, 그렇다면 이건 그 거짓말 뒤에 숨어 있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아픈 과거이리라.

"미안하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나 봐."

"괜찮습니다. 다 지나간 일인데요. 그래도 그때 하나 확실하게 정한 건 있습니다."

"...그게 뭔데?"

김호는 여전히 먼 저편을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내 것은 절대 빼앗기지 않기로. 내 사람 누구도 죽지 않게 하기로."

"내 사람 누구도 죽지 않게 하겠다...."

당규영이 나지막이 그 말을 되뇌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네."

"어렵네."

"어렵죠."

용살학원에 다니는 영웅 지망생들은 모두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간다.

언제 격전지 한복판으로 투입되어 생사가 오가는 싸움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곳에서는 제 한 목숨 부여잡고 버티기조차 어려울 텐데, 자기 사람들까지 챙기겠다니.

김호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쉬워질 때까지 강해져야죠."

더욱 빠르게, 압도적으로 강해지겠다고.

당규영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구나.

남 눈치 보면서 몸을 사리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나중에 더욱 힘겨운 싸움을 하고, 어쩌면 누군가를 잃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반면 지금 다른 동아리들과 투닥거리고 교칙 몇 개를 어기면 온갖 문제에 휘말리더라도 끝에는 분명히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김호는 후자 쪽이 후회가 적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다행이네, 이러면 괜찮겠다.'

다 들으니 한시름 덜은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지키는 것이 김호의 목표라면,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막는 것도 목표에 포함된 셈이다.

그렇다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도록 알아서 자중할 것이다.

당규영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마음에 들었어."

방금 김호가 보여 준 일면이 정말 그의 진심이라면, 그녀는 앞으로도 기꺼이 공범이 되어 주리라.

어느새 기숙사의 모습이 가까워져 왔다.

일부러 먼 거리를 빙 둘러 걸었는데도 벌써 헤어질 때가 됐다는 게 당규영은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한 바퀴 더 돌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늦었다. 들어가서 쉬자."

"쉬세요, 선배님."

"응, 월요일에 봐!"

"?"

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월요일에 볼일이 있던가 되짚어 보는 듯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게 없는지 묻는다.

"월요일은 왜요?"

당규영은 장난스럽게 배시시 웃었다.

너만 놀리냐? 나도 놀릴 거야.

"안 알려 줘."

77화 방주의 검은 궤짝

나는 당규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잠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월요일에 뭐가 있더라.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역시....

'멘토링?'

...은 말도 안 되는데.

도둑 동아리 부장이 멘토링을 한다?

그 귀찮은 짓을?

곽승재와 송천혜가 손잡고 은행을 터는 것만큼이나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멘토링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정했다.

'그냥 놔두자.'

그냥 월요일에 한 방 먹어 주는 걸로.

당규영이 나에게 악의를 갖고 함정을 파는 것도 아니니,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 * *

주말 오후.

고현우와 서예인을 불러냈다.

[고현우:곧 가리다.]

고현우는 보건실에서 막 치료를 마친 참이라 곧장 이쪽으로 오기로 했고.

서예인은 몇 번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답장이 돌아왔다.

[김호:똑똑똑]

[김호:(문 두들기는 고양이 이모티콘)]

[김호:(문 두들기는 고양이 이모티콘)]

[김호:깸?]

[서예인:....]

[서예인:(뒹굴거리는 강아지 이모티콘)]

[서예인:(부스스한 강아지 이모티콘)]

[서예인:(뒹굴거리는 강아지 이모티콘)]

이모티콘의 상태로 보아하니 지금 막 일어났나 보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이 시간에.

서예인이 더 빨리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김 호:(사진)(사진)(사진)(사진)]

내가 무슨 사진을 첨부했는가 하면,

흑사방 저잣거리에서 매콤달콤 육포를 사며 같이 산 당과, 말린 과일 등의 다양한 간식거리들이다.

[김 호:오실?]

[서예인:갈게.]

맛있는 거로 꾀어내기. 성공적.

그래도 막상 올 때까지는 한참이겠지.

"김 형."

반면 고현우는 정말로 금방 도착했다.

본론은 세 명이 다 모인 다음에 꺼내는 걸로 하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고현우와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대화 주제는 당연히 흑사방.

특히 백사와의 삼 초식 승부에 관해서였다.

고현우가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무서운 고수였소. 삼 초식만 교환했는데도 가까스로 살아남는 게 고작이었으니."

첫 초식은 순수하게 무학의 격차로 압도당했다.

선공을 가한 데다 나름 고현우가 가진 절기라 할 수 있는 급류까지 쓰고도 독사수동에 단숨에 파훼당했으니,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두 번째 초식 교환은 고현우의 최고 절초인 청류를 쓰고, 운 좋게 스쳐 간 깨달음이 더해져서 매우 경미한 피해로 끝났단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어지는 소리였다.

"거기서 기연을 얻어?"

보고 뭐라도 얻어 가라고 빌려준 달마상이기는 했지만, 그건 던전을 공략한 뒤의 이야기었다.

흑사방에 진입하기 전에 잠깐 본 걸 그새 떠올리고 써먹을 줄은.

고현우 역시 어이가 없었던지 실소를 머금었다.

"본인도 전혀 예상치 못했소. 백사 선배님과 겨루게 되었을 때만 해도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기연을 얻었으니 그리 없지도 않았나 보오."

"잘 풀렸으면 됐지. 달마상은 계속 시간 들여서 연구해 봐."

"그렇게 할 생각이오."

"그래서,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세 번째 초식 교환.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백사가 앞의 두 초식보다는 강한 걸 썼을 텐데."

"그렇소. 독사수동과 독사출동은 한눈에 알아보았는데, 마지막 초식은 매우 생소한 것이더군."

이어지는 고현우의 표현을 듣자 어떤 초식인지 곧바로 감이 왔다.

"백리등천(白螭登天)인가 보네."

"백리등천.... 과연, 마치 거대한 백색 이무기를 보는 것 같았소."

백사가 쓰는 기술 중에서는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절초였다.

백사가 정말 작정하지 않고서는 꺼내지 않는 건데, 그걸 삼 초식 승부에서 썼나 보다.

아마 두 번째 공방에서 고현우가 선보인 한 수에 자극을 받아서겠지.

"그래서, 어떻게 막았는데? 청류를 또 썼을 것 같지는 않고."

"으음...."

고현우는 잠시 침음했다.

이걸 털어놓아야 하나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오. 허나 김 형이라면 일의 전말을 들을 자격이 있지."

백사의 백리등천이 날아오는 순간, 고현우는 직감했다.

무슨 수를 쓰든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청류를 쓰고 죽거나, 다른 힘을 빌려 오거나.

그리고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먼저 본인은 순류(順流)라는 초식을 사용했소."

순류(順流).

고현우가 익힌 초식 중 가장 방어적인, 적의 공격을 흘려 내는 데에만 중점을 두는 초식이라고 한다.

아직 이 기술의 숙련도는 청류보다 몇 단계는 떨어져서, 차라리 청류를 쓰는 게 방어력이 높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순류를 고집한 이유는.

"그래야 조금의 여유가 남았기 때문이오."

청류는 부드러워 보이는 동작과는 달리 거의 모든 정신을 초식의 운용에만 집중해야 한다.

반면 순류는 전개하는 것 자체는 쉬운 편이라, 전개하는 동안 작은 여유가 생긴다.

다른 힘을 빌려 올 여유가.

여기까지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사문의 신물을 썼나 보네."

"...그렇소."

순류로 방어하고, 그 방어를 사문의 신물이라는 장검으로 굳혀서 백리등천을 막아 냈던 것이다.

항상 겹겹이 봉인해 놓은 탓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느 정도 수준일지 짐작은 갔다.

고현우가 익힌 무공만 해도 엄청나게 강력한 것인데, 그 사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신물이라면.

'못해도 S급, 잘하면 그 이상이겠지.'

S급 이상의 무기라면 그냥 방패처럼 세워 놓기만 해도 B급 히든 보스의 공격은 제법 해소하지 싶다.

물론 그 신물을 사용하는 대가는 치러야 했겠지만.

고현우가 마지막 공방에 관해 이야기하길 주저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사문의 신물을 계승은 했어도, 아직 그걸 휘두를 자격은 갖추지 못한 상태.

그런 것을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는 용도로 꺼냈으니, 무인으로서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했을 것이다.

"고생 많았다.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후회하지는 않소. 본인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신 형의 목숨도 걸린 일이었고, 김 형이 믿고 기다리는데 자존심만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지. 단지...."

"단지?"

고현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단지, 자격이 부족함에도 신물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으니, 사부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뵐까 면목이 없구려."

그러나 고현우가 의기소침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금세 표정을 회복하곤 강하게 결의를 다진다.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겠소. 그리하여 하루빨리 자격을 갖추는 것만이 사문의 위신을 바로 세울 방법일 거요."

"너라면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다."

이다음으로는 나와 흑사의 술래잡기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물론 요리조리 도망쳐 다니기만 했다는 이야기는 영양가가 없으니, 흑사가 나를 잡겠다고 퍼부었던 초식을 중점적으로.

고현우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경청하던 도중.

"나 왔어."

서예인이 왔다.

아이스티 세 잔을 포장해서 들고.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묻는다.

"어제 던전 갔다 왔어?"

"어. 이거 다 거기서 사 온 거다."

서예인은 테이블에 죽 늘어놓은 당과, 전병, 말린 과일 등을 종류별로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

나는 매콤달콤 육포만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저번에 빨간색 매운 주먹밥에 호되게 당한 것을 떠올려 보면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었다.

모두 이것저것 집어 먹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한결 화기애애해진 가운데, 나는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오늘도 상자깡을 해 볼 겁니다."

인벤토리에서 새까만 칠이 되어 있는 직사각형 모양 상자를 꺼냈다.

[방주의 검은 궤짝]

"언제 꺼내나 내심 기대하고 있었소."

직접 방주의 비고까지 침투해서 궤짝을 가져온 장본인으로서 내용물이 몹시 궁금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생을 했기에 더욱.

나는 덮개를 붙잡으며 말했다.

"바로 열 건데, 아직은 긴장하지 말고."

'궤짝'에서 나오는 아이템은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주저 없이 열어젖히자 작은 상자 두 개가 궤짝의 크기에 딱 맞게 들어 있었다.

[방주의 주괴 상자(B)]

[흑사방 랜덤박스(B)]

랜덤박스가 한 개씩.

비고만 털어서 나왔기에 이게 끝이다.

아무래도 흑사방주를 처치하고 던전을 클리어하고 얻는 주요 보상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초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1학년 1학기에 B랭크 랜덤박스 두 개가 어디인가.

특히 [방주의 주괴 상자]는 등장하는 아이템의 종류가 무조건 '주괴'로 고정된다는 특징이 있다.

매우 높은 확률로 [한철 주괴], 또는 [현철 주괴].

어느 쪽을 써서 무기를 제작하든 고등급 결과물을 기대할 만하다.

이것만으로도 흑사방에 들어갈 가치는 충분했던 셈이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서예인을 불러낸 이유였다.

[방주의 주괴 상자]를 슬쩍 밀며 물었다.

"열어 볼래?"

"응."

저번 한 번뿐이기는 했지만, 서예인은 D급 랜덤박스에서 무려 B급 쿠션을 뽑는 기적을 일으켰었다.

그때 작은 가설을 하나 세웠는데, 만에 하나 서예인이 행운 관련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면?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이 주괴 상자에서도 기대치 이상의 아이템을 뽑아 줄지.

"...."

서예인은 B급 랜덤박스를 앞에 두고도 평범하게 굴러다니는 박스를 대하듯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다.

오히려 지켜보는 나와 고현우가 더욱 긴장한 상태.

그렇게 잠시 무표정하게 주괴 상자를 내려다보나 싶더니, 느릿느릿 상자를 개봉했다.

나는 이 시점에서 이미 두 눈을 가려서 보호하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또 섬광탄이 터질 테고, 시력은 소중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 콰아아—아아아—!

오색 찬연한 광채가 주괴 상자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장내를 온통 뒤덮어 버렸다.

"오오."

사방이 새하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고현우의 감탄사가 들려온다.

나 역시 말로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게 진짜 되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여전히 놀라웠다.

서예인이 행운 관련 특성을 보유하고 있으리란 가설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다.

한참 동안 두 눈을 가리고 있으니 점점 광채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주괴 상자 안에서 존재감을 자랑하는 큼지막한 금속 덩어리.

[만년한철 주괴(A)]

'대박이다.'

기존의 목표였던 한철만 해도 매우 뛰어난 금속인데, 그보다 더 좋은 게 나왔다.

"서 소저의 운이 엄청나구려. 이런 경우는 목도하기도 어렵거늘, 두 번이나 겪게 될 줄은 몰랐소."

"그러게, 뭐 이렇게 운이 좋냐."

고현우와 내가 입을 모아 추켜세웠지만, 서예인은 딱히 놀라거나 기쁜 것 같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되물었다.

"도움 됐어?"

"어. 엄청 많이 됐다."

"그럼 됐어."

나에게 도움이 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이 기세를 몰아 나머지까지 빠르게 처리하는 걸로.

[흑사방 랜덤박스(B)]를 넌지시 건네며 물었다.

"이것도 열어 볼래?"

"응."

서예인은 이번에도 연필이나 지우개 따위의 사소한 물건을 받는 것처럼 B급 랜덤박스를 넘겨받더니, 이내 예고도 없이 홱 열어 버렸다.

- 번쩍—!!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지만 아무래도 섬광탄에 비해서는 다소 손색이 있었다.

그와 비례해서 드랍된 아이템의 랭크도 다소 낮았다.

[백년하수오(C)] *4

백년하수오라면 제법 괜찮은 영약이다.

그것이 네 뿌리.

B급 랜덤박스에서 드랍되는 아이템으로는 중박 정도 친 셈이다.

"네 뿌리나 되니까 이건 나누자. 하나씩 받아."

어차피 만년한철을 얻은 시점에서 목표는 한참 초과 달성하기도 했고,

같은 종류의 영약은 중복으로 복용하면 효과가 반감된다는 점도 있고,

다 같이 성장하는 게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더 이득이기도 하고,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나 혼자 독식하는 것보다 나누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사양하지 않으리다. 고맙게 받겠소."

언제나 영약이 고픈 고현우는 냉큼 하수오 한 뿌리를 받아 품에 간직했고, 서예인 역시 한 뿌리를 받아 주섬주섬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 몫까지 빼도 하나가 남는데, 이건 다른 사람한테 넘기거나, 정 임자를 못 찾으면 효과가 반감되더라도 내가 먹으면 될 것이다.

서예인은 또 열어 줄 랜덤박스 없냐고 묻는 것처럼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나는 더 없다는 의미로 약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자 서예인 역시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고현우와 간식 탐방에 들어갔다.

나는 이곳저곳으로 손을 뻗는 서예인을 놔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특성을 갖고는 있는 것 같은데....'

주괴 상자를 열 때는 대박이 터지고, 랜덤박스는 중박으로 끝났다.

이런 경우 단순히 특성이 없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어떤 발동 조건이나 제약이 존재한다는 쪽에 가능성을 두는 게 맞다.

예를 들면 특성 발동에 쿨타임이 존재한다거나, 행운의 '총량'에 제한이 걸려 있다거나.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또 시켜 보면 될 테니까.

"...! ...!"

"일부러 빼놨더니 그걸 또 찾아서 먹냐. 매운 것도 못 먹으면서."

"...!"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매콤달콤 육포에 손을 댄 서예인이었다.

78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1)

무기를 제작할 금속을 얻었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 다음 행선지는 대장장이 공방이었다.

깡! 깡! 하고 철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이따금씩 후끈한 열기가 몰아친다.

안에서 수많은 학생이 바쁘게 작업 중임이 분명했으나 묘하게도 사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 말 한마디 할 시간도 아까울 만큼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온 정신을 집중하는 와중 외부인인 내가 공방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면 매우 거슬릴 것이기에, 나는 문가에 멀거니 서서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철 두드리는 소리에 마음속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자니 근육이 울끈불끈한 사내가 나를 맞이했다.

교복을 반쯤 풀어 헤쳐서 넥타이핀은 보이지 않지만 높은 확률로 선배일 것이다.

얼굴이 도저히 신입생의 그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액면가가 3학년이니 3학년 선배로 치자.

반면 대장장이 선배는 내 가슴께의 넥타이핀만 쓱 확인하면 되었다.

"1학년? 무슨 볼일이야."

"제작 의뢰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나처럼 찾아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지, 3학년 선배가 조금 귀찮다는 듯 등허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미안한데, 이번 학기 대기열은 다 찼다. 지금 의뢰 넣으면 다음 학기 초에나 끝날걸?"

"부장님을 뵈어도 될까요?"

나 같은 요구를 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닌지, 선배는 내 속이 훤히 보인다는 태도였다.

보나 마나 부장한테 아이템 하나 쥐여 주고 개인적으로 부탁하리라 생각하는 거겠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네가 어디 명문가 직계쯤 돼도 안 해 주니까,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가."

"명문가 직계는 아니고, 이런 건 있습니다."

품 안에서 자그마한 티켓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보자 심드렁하기만 하던 3학년 선배의 눈이 휘둥그레 치켜 떠졌다.

[제작 VIP 티켓]

"아니, 1학년이 이걸 어디서...."

어디긴, 다른 동아리에서 뜯어 왔지.

에메랄드 마탑과의 결투에서 승리 보상으로 걸렸던 건데, 곽지철을 바닥에 마구 패대기치면서 내 것이 되었다.

그리고 몇 주간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 두었다가 이제야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부장님을 뵈어도 될까요?"

"어.... 어, 그래. 잠깐만."

3학년 선배가 허겁지겁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뒤 다른 근육질 사내가 대신 나왔다.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은 방금 나를 맞이한 선배보다 더욱 나이 들어 보였다.

분명 3학년일 텐데 도저히 3학년 같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옛날에 키웠던 대장장이들도 하나같이 우락부락하고 삭아 보였던 것 같다.

사람은 망치를 들면 늙는 것일까?

내가 그런 무례한 가설을 세우는 한편,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은 나에게 터벅터벅 다가오더니 대뜸 한 마디 내뱉었다.

"티켓."

"예."

VIP 티켓을 보이자 진품인지 쓱 확인만 하고, 아직 받지는 않는다.

VIP 티켓은 대기열을 최우선으로 앞당기는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의뢰를 받고 말고는 장인 마음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고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뭐 만들려고."

"직접 보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미리 그려 온 설계도를 부장에게 건넸다.

사람 팔뚝보다 조금 길쭉한 봉.

조립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대장장이 부장이 설계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보통 봉은 아니군. 형태도 특이하고, 부품도 장착하게 해 놨고, 꽤 정교해. 마법공학 장비인가?"

"바로 보셨습니다."

나는 참고용으로 쓰라고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E급 [부유의 철봉]을 넘겼다.

물론 핵심 부품은 분리해 두었다.

부장은 철봉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뜯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어 보이는군. 평소 같았으면 마법공학 장비는 안 만들었겠지만 이번에는 예외로 치지."

대장장이들은 대개 마법공학 부품을 만드는 걸 선호하지 않는데,

자그마한 부품 여러 개를 깨작거리기보다는 크고 묵직한 철 덩어리를 통째로 가공해 휘두르는 게 더욱 사나이답지 않냐는 마초적인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내가 보여 준 설계도는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나 보다.

부장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재료는?"

"이걸 주재료로 사용해 주세요."

만년한철 주괴를 꺼내자 대장장이 부장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여태까지는 나한테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았는데, 지금 막 생기기 시작했는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본다.

"재미있는 1학년이야. 만들어 달라는 것도 특이하고, VIP 티켓에 만년한철까지."

"이래저래 운이 좋았죠."

"운만 좋다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아닌데.... 일단 그렇다 치지. 만년한철이 주재료면, 부재료는 뭘 추가하나?"

"부재료는 이걸 쓰려고 합니다."

착용하고 있던 [블랙 미스릴 밴드],

그리고 [제사장의 검은 팔찌]도 벗어서 넘겼다.

둘 다 [블랙 미스릴]이라는 금속이 주를 이룬다.

블랙 미스릴의 첫 번째 강점은 매우 마나 전도율이 높다는 것, 두 번째는 장신구를 만드는 적은 양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장은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다.

"만년한철에 블랙 미스릴 합금.... 잘하면 두 금속의 장점만 취할 수 있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다뤄 본 적 없는 조합이지만 어려울 건 없겠지. 어림잡아 일주일은 걸릴 거다. 완성되면 연락 주마."

그러나 나는 확신했다.

일주일이 아니라, 불과 며칠도 안 돼서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의 연락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어려울 건 없다?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을걸.

* * *

5주 차.

월요일.

누군가에게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대인전 주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큰 의미가 있는 주간이었다.

이번 주부터 멘토링이 시작되기 때문에.

학사 일정에는 변동이 없고, 멘토링을 신청한 사람에 한해서 둘을 병행하게 된다.

이수독이 수업을 마치며 공지 사항을 전달했다.

"1차 멘토링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지금 즉시 아레나로 이동한다. 정확한 장소는 학생증 뒷면을 확인하도록."

절반이 조금 안 되는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앉아 있는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번 멘토링을 신청하지 않았겠지만, 한 달쯤 지나서 신청한 학생들과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생각이 바뀔 거다.

2차 멘토링부터는 참여율이 껑충 뛸 테고.

고현우, 서예인과 함께 느긋하게 아레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아레나'인 것은 모두 같다.

어차피 멘토링을 받으면서 대인전도 같이 치를 예정이라, 학사 측에서 아예 아레나를 약속 장소로 정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아레나 어디'로 가는가는 제각각이다.

이수독의 말대로 학생증 뒷면을 확인해 보면,

[163-H]

관중석의 좌석 번호를 받았다.

고현우와 서예인이 받은 좌석 번호는 또 다르고.

이렇게 지정된 좌석에서 각자의 멘토를 만나게 된다.

고현우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본인 말고도 그 멘토라는 분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있지 않소?"

"당연히 있지. 한 서너 명 정도."

"그들도 본인과 같은 검사들이오?"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그러려고 신청서를 까다롭게 써서 낸 거니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클래스가 최대한 비슷하도록 좁혔으니, 결과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의 클래스도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고현우 말고 다른 멘티가 네 명이라면, 네 명 모두 검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고현우의 얼굴에 더욱 기대감이 차올랐다.

"선배 고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솜씨까지 볼 수 있다니, 과연 멘토링에 참여하길 잘한 것 같소."

"기회 봐서 대련도 하고 그래."

"물론 그럴 생각이오."

다만 고현우와 대련을 할 만한 실력의 검사가 그의 조에 포함되어 있을지는 가 봐야 안다.

멘토를 기준으로 매칭되기 때문에 조의 구성원은 완전히 무작위니까.

생각보다 별 볼 일 없어서 실망할지도 모르지.

그때, 어깨너머에서 질문이 날아왔다.

"너희도 멘토링 신청했어?"

시선을 돌려 보니 어느새 한소미가 근처에서 보조를 맞춰 걷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반이다 보니 다 같이 걷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소미와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송천혜도 있었는데, 한소미가 나에게 말을 건 시점에서 조금 거리를 벌리고 애써 우리를 외면하는 중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잖아. 안 할 이유가 없지."

"너, 캐스터 계열이지?"

"어."

"배틀 메이지 맞아? 올라운더."

"맞는데, 그건 왜?"

내가 되묻자 한소미가 송천혜를 척 가리키며 답했다.

마치 짜잔!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다.

"천혜도 올라운더로 신청했거든! 잘하면 둘이 같이 멘토링 받을 수도 있겠다!"

그 말에 먼 곳에 관심을 두는 척하던 송천혜가 질색 팔색을 했다.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진짜!"

"잉? 왜 이상한데?"

"그건...."

한소미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송천혜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인페르노 피스트나 지하층 침입 등, 나에 대한 의혹들을 다 털어놓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직 뚜렷하게 확정된 것이 없기도 하고, 2, 3학년 선도부들이 입단속을 시켰을 수도 있고.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결국 말하지 않기로 한 듯했다.

"...그런 게 있어!"

얼버무리기와 쏘아붙이기의 중간쯤이었다.

홱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다가,

"으힉."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을 헛디디고 비틀거린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나서 우리 쪽을 째릿 쏘아보곤 두 배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나는 한소미에게 물었다.

"쟤 자주 저러냐?"

"응, 맨날 저래."

맨날 저러는구나.

전에도 느낀 거지만 생각보다 맹한 구석이 있었다.

몇 가지 사소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레나가 코앞이었다.

우리도 각자의 좌석을 찾아 흩어지기로 했다.

"멘토링, 대인전 다 잘들 하고, 나중에 봅시다."

"응! 안뇽!"

"김 형에게도 무운이 함께하길 바라겠소."

"...."

한소미가 해맑게 인사하고 떠나고, 고현우도 빙긋 웃더니 한소미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서예인도 나른한 눈으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인사하고 제 갈 길을 나섰다.

관중석 곳곳에서 3학년 혹은 졸업생 멘토들은 자리를 잡고 대기하다가, 1학년들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면 반갑게 맞이했다.

일부는 벌써 모든 인원이 다 모인 것 같았는데, 멘토 주위로 네다섯 명 정도가 둘러앉아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도 내 자리를 찾아 좌석 배치도를 확인했다.

'163-H는 저쯤이겠네.'

위쪽 자리여서 제법 시선을 들어 올려야 했다.

그 부근이 텅 빈 걸 보면 우리 멘토는 아직 안 왔나 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막 계단에 첫발을 올리려는데,

"...."

조금 앞서 올라가던 송천혜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표정이 대번에 못마땅해진다.

"왜 따라와요."

"너 따라가는 거 아닌데."

"그럼 먼저 지나가세요."

"그러지 뭐."

나는 멈춰선 송천혜를 지나쳐 163-H 좌석까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아주 편한 자세로 걸터앉았다.

송천혜는 내가 자리를 잡는 걸 확인한 후에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다시 움직여서 걸음을 멈춘 곳이 내 바로 앞이었다.

불신이 가득 차오른 얼굴로 자기 학생증과 좌석 번호를 번갈아 확인한다.

"설마...."

"너도 163-H니?"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내가 돌려줄 반응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뿐이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나?

"하...."

송천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물론 감은 척만 했을 뿐, 이따금씩 실눈을 뜨고 나를 몰래 훔쳐보는 티가 난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느긋하게 다음 사람들을 기다렸다.

같이 멘토링을 받는 게 송천혜 하나일 리가 없다.

또 누가 올라올까?

흥미진진한 심정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79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2)

곽지철은 계단을 오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색이 조금 창백해지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닥에 마구 패대기쳐지던 그 날의 악몽이 떠올랐으리라.

반면 나는 더 이상 곽지철에게 해묵은 악감정이 없었다.

이미 충분히 발산했기 때문에.

그래서 서로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먼저 질문을 던졌다.

"163-H?"

"...그렇다."

"제대로 오셨네."

송천혜가 곽지철을 대하는 태도는 나를 볼 때처럼 질색을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여러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듯했다.

그중 하나는 곽지철과 내 조합에 대한 걱정인 것 같다.

결투까지 한 사이인데 한 달간 다 같이 멘토링이라니,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싶겠지.

그리고 마지막 멤버는 더욱더 가관이었는데....

어깨까지 닿는 붉은 중단발, 루비가 박힌 지팡이,

그리고 지난주에 나와 함께 공략전을 치렀던,

홍연화였다.

홍연화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런 상태로 좌석 배치도를 훑어보고,

163-H가 어디인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

온몸이 석상처럼 굳어져 버린 홍연화.

동공만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마구 흔들리는 홍연화.

이내 등이 보이도록 몸을 홱 돌리더니 주섬주섬 뭘 꺼내서 확인한다.

아마 학생증 뒷면을 다시 확인하는 거겠지.

그러나 송천혜가 그랬고, 곽지철이 그랬듯, 정해진 운명이 바뀔 리가 없었다.

그냥 받아들이렴. 마음이 편해질지는 모르겠지만.

홍연화는 두 다리에 모래주머니라도 잔뜩 찬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

"...."

혼자서만 세상 편하게 앉은 나, 그리고 조금씩 거리를 벌리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세 사람.

제삼자가 보기에는 은근히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래서, 우리 멘토는 누군데?'

배울 사람이 다 모이도록 가르칠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기다림이 길지는 않았다.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각자 다른 곳을 보던 네 명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시선들을 받으며 한없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관중석 계단을 오르는 우리 멘토.

바로 3학년이며 도둑 동아리 부장 되시는,

당규영이었다.

"안녕? 내가 너희들 멘토다."

당규영은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하며 내 앞 좌석 등받이에 기대듯이 앉았다.

그러면서 나한테 몰래 눈웃음을 치는데,

'어때, 놀랬냐?' 하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월요일에 보자는 게 이런 뜻이었구만.'

깜짝 놀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의외이기는 했다.

도둑 클래스에 속한 이들은 대체로 무언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고, 부지런한 것보다 한량같이 느긋한 것을 선호하곤 한다.

반면 멘토링에 참여하면 용살학원과의 계약에 얽매이는 데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일정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니, 도둑의 성향과는 완벽하게 상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당규영은 동아리 부장을 맡는 몸이라 일반 부원들보다 몇 배는 바쁠 텐데,

내 예상을 뒤엎고 멘토가 된 것이다.

'무슨 숨겨진 내막이 있나 본데.'

물론 그냥 받아들였을 것 같지는 않고, 학사 측에서 그만한 메리트를 제시했다고 봐야겠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보자.

"...."

당규영이 우리 네 명을 한 명씩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몰래 눈인사를 한 이후로는 더 이상 아는 척을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멘토다 보니 일부 학생만 편애하는 인상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송천혜는 3학년 학생회장 송천기의 여동생.

임시 보관소 침입 때 오갔던 가시 돋친 대화를 생각하면 송천기와 썩 사이가 좋지는 않은 것 같다.

곽지철은 곽승재의 동생.

도둑과 선도부의 관계임에도 당규영은 곽승재에 대해 나름대로 괜찮은 인식을 갖고 있다.

상대하기는 까다롭지만 인정할 만한 호적수.

하지만 그 동생인 곽지철에 대한 인식은 글쎄.

나와의 결투에서 3학년 골렘과 장비들을 빌려 쓰고, 그러면서도 우주 방어까지 하는 졸렬한 모습을 보였던 탓에 아마 매우 부정적인 쪽에 가까우리라 추측한다.

우리 넷 중에서 가장 당규영과 접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홍연화였지만, 루비 마탑과 도둑 동아리의 관계를 자세히 모르니 이건 계속 지켜볼 일이었다.

종합하면 보기만 해도 골이 아파 오는 조합.

그러나 멘토링으로 들어온 이상 조합이 어떻든 모두 포용해야 하리라.

물론 당규영은 동아리 부장을 맡을 만큼의 공사 구분은 되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연다.

"너희는 올라운더형 마법사를 목표로 내 밑에 들어왔다. 마법으로는 다들 한가락 하겠지만 올라운더는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마법사의 역할은 역할대로 충실히 해내면서도, 상황에 따라 파티의 전, 중, 후위를 오가며 추가적인 역할을 수행할 줄 알아야 한다.

당규영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어느 부분에서, 얼마나 부족한지 나는 몰라. 그러니까 오늘은 그걸 확인해 볼 거다."

이번 주 대인전을 통해서.

당규영이 자기 옆에 대인전 환경과 규칙을 띄워 올렸다.

MAP:[원형 투기장]

RULE:[강적][임의 규칙]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규칙은 [강적].

2주 차 공략전의 강적은 일반 고블린의 규격을 벗어나 몇 배는 강화된 보스 몬스터, 참수자 고블린이었다.

이번 대인전의 강적 역시 그만큼 어려운 상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게 누구일지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적은 당연히 나야."

"...!"

당규영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척 가리켰다.

실력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직접 부딪히고 싸워 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으니까.

한편으로는 멘토들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가르칠 자격을 갖췄음을 확인시킬 기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기강 다지기 타임이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송천혜, 홍연화, 곽지철은 비록 1학년이지만 제법 이름난 집단 소속이다.

그만큼 자존심도 비대하게 크며, 멘토의 출신이나 신분의 고하 등을 문제 삼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당장 이들이 당규영에게 은근히 못 미더운 시선을 보내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도둑 클래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있고,

당규영은 마탑회가 아니라 길드연합 소속 마법사 아닌가.

위와 같은 불필요한 잡음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지금 확실하게 기강을 다져 두는 것이 최선이다.

"아무리 그래도 3학년을 쓰러뜨리라는 건 너무 가혹한 요구겠지. 그러니까 [임의 규칙]을 추가할 거야."

일부 규칙은 멘토의 재량으로 조정이 가능하다.

당규영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규칙이 추가되었다.

MAP:[원형 투기장]

RULE:[강적][제한][스티커][2인]

"우선 난 이걸 차고 싸운다."

언제부터인가 당규영의 손가락 끝에 팔찌 하나가 걸려서 대롱대롱 흔들거리고 있었다.

전자 팔찌 비슷한 생김새에 화면에는 큼지막하게 'C'자가 떠올라 있다.

공략전 배치 고사의 [픽스 존]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팔찌로, 스펙의 최대 상한을 C랭크로 고정한다.

스킬과 특성의 위력이 하향되고, 일부 고등급 스킬은 사용이 불가능하다.

가령 마법사들의 최고 범용기이자 이동 마법인 [블링크]는 태생부터 B급인데, 여기서는 사실상 못 쓴다고 보면 된다.

물론 전부 C랭크로 고정되더라도 1학년들과의 스펙 차이는 여전하다.

익힌 스킬의 개수 차이만 해도 엄청난 데다,

1학년들이 가진 스킬들 대부분은 최고 랭크가 C, 숙련도가 낮은 건 E, F랭크도 있을 테니까.

그런 까닭에 다음 규칙인 [스티커]도 우리 쪽에 유리한 규칙이다.

당규영이 손바닥만 한 스티커 세 장을 꺼내 보인 다음 하나는 허벅지 바깥쪽, 하나는 옆구리, 하나는 쇄골 위에 착착 붙였다.

그 모습을 보고 곽지철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너 무슨 생각 하니?

이런 음흉한 녀석 같으니라고.

내가 본 것을 당규영이 못 봤을 리가 없지만, 내색하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날 쓰러뜨릴 필요까지는 없고, 스티커만 3개 다 떼면 성공으로 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스티커를 떼려면 당연히 손 닿는 거리까지 접근해야 할 테고, 당규영은 다가오는 상대를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규칙인 [2인]은 너무 뻔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두 명이 재주껏 힘을 합쳐서 스티커를 떼 보라는 소리지.

"여기까지. 궁금한 거나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

핸디캡을 이렇게까지 걸어 주는 데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더라도 옆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혼자 투정을 부리기엔 자존심이 상할 테고.

당규영이 우리를 데리고 경기장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순간이동 마법진 위에 발을 올린 채 말했다.

"준비되면 두 명씩 들어와. 짝은 알아서들 정하고."

그런 다음 슉 하고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

"...."

남겨진 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구 교차했다.

숨 막히는 눈치 싸움 끝에, 송천혜가 곽지철에게 제안했다.

"페어 하시죠."

"그게 좋겠군."

곽지철이 이 중에서는 그나마 덜 불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나 보다.

곽지철 역시 마찬가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같이하기는 싫을 테고, 견원지간인 루비 마탑보다는 토파즈 마탑과 함께하는 게 낫겠다 싶었겠지.

즉석에서 팀을 짠 두 사람이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경기장 안으로 이동했다.

"...."

그리고 홍연화는 반쯤 울상을 짓고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송천혜와 곽지철 앞에서는 평소의 당당하면서도 약간은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나와 단둘이 남게 되니 급격히 쭈굴해져서 눈치를 살핀다.

'쟤는 아직도 저러네.'

지난주에 소탕 공략전을 같이 잘 풀어 나가면서 내가 조금은 편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아무튼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비슷하게 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송천혜와 곽지철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방금 도착했던 알림 메시지들을 다시 불러냈다.

[이벤트:1차 멘토링](진행 중....)

[남은 기간:27일]

▷멘토의 도움을 받아 더욱 빠르게 성장하세요.

▷스킬/특성 습득 확률 증가

▷스킬/특성 성장 속도 증가

[서브 퀘스트:5주 차 대인전]

▷목표:스티커 떼기(-/3개)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달성 시기에 따라 차등 지급

멘토링 이벤트는 잠시 제쳐 두고.

당규영이 아직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강적한테서 스티커 떼기' 대인전의 경우 여러 번 도전이 가능하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달성 시기'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는 점.

첫날인 오늘 성공하는 것과 일요일이 다 끝나 갈 때쯤 가까스로 성공하는 것에는 제법 큰 보상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니 깔끔하게 첫 도전에서 스티커 세 개를 모두 떼는 걸 목표로 삼는다.

"크엑."

그때, 곽지철이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나오며 내 상념을 깨뜨렸다.

데굴데굴 구르다가 속도를 잃고 바닥에 대자로 뻗는데, 몸에서 미약한 전류가 파직거린다.

뒤이어 송천혜가 급격히 피로해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털썩 주저앉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를 의식하더니 최대한 멀쩡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경기장 쪽을 가리켰다.

"다음, 들어오시래요...."

80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3)

홍연화와 함께 순간이동 마법진에 올랐다.

원형 투기장은 배치 고사에도 등장했고 앞으로도 꽤 자주 보게 될 지형이다.

다만 이번 원형 투기장은 대인전을 세 사람이 치른다는 점을 감안해서, 전체적인 면적이 훨씬 넓다.

멀찍이 맞은편에 당규영이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곽지철과 송천혜의 상태를 보면 짧은 시간이나마 제법 격렬하게 싸운 걸로 짐작되는데, 당규영에게서는 그런 격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스티커는 물론이고 옷차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난다는 뜻.

당규영이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준비하고, 아무 때나 들어와."

"...."

시작하기에 앞서 홍연화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무슨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예전에도 봤던 표정이라 속뜻을 짐작하기는 쉬웠다.

이왕이면 같이 싸워 줬으면 좋겠는데,

그걸 요구하자니 내가 부담스럽고,

부탁을 안 하고 혼자서 싸우자니 상대가 3학년이라 너무 어려워 보이고.

이도 저도 못 하고 머뭇거리길래 내가 방향키를 잡기로 했다.

"일단 싸워 봐라."

"...나 혼자?"

"...."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홍연화의 표정이 또다시 다채롭게 변화했다.

- 이걸 나 혼자 하라고? 진짜로?

울상이 되었다가,

- 에휴, 저 인간이 그럼 그렇지....

체념했다가,

- 그래도 저번처럼 위험해지면 도와주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홍연화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첫 도전은 소극적으로 임할 생각이다.

'쟤도 뭘 배우긴 해야지.'

아무리 퀘스트가 걸려 있더라도 나 혼자서 덜컥 다 해결해 버리면 홍연화가 얻어 가는 게 없다.

기껏 멘토링을 신청해 놓고 시간 낭비만 하는 격이다.

모름지기 진정한 고인물이라면 뉴비의 성장을 배려해야 하는 법.

공략전에서 쌍둥이 트롤을 상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팀워크를 맞추는 건 홍연화가 직접 부딪히고 깨져 본 다음의 일이 될 거다.

그런 면에서 홍연화는 배울 자세가 된 뉴비였다.

내가 도와주든 말든 최선을 다해 보기로 마음먹은 듯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 번쩍!

완드에 박힌 루비가 붉게 빛났다.

화염 마법이 활활 타오르더니, 홍연화의 온몸으로 흡수되고 퍼져 나가며 에너지를 공급했다.

[오버히트]

육체 능력이 대폭 강화되었으나 그렇다고 당장 접근전을 걸 자신까지는 없나 보다.

완드가 또다시 붉은빛을 발하고, 끄트머리에서 가느다란 한 줄기 용암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용암은 바닥에 웅덩이가 되어 고이는 대신 완드와 연결된 채 뱀이 똬리를 틀듯 바닥에 늘어졌다.

홍연화가 완드를 슬쩍 휘젓자 그것을 따라 채찍처럼 움직인다.

[라바 윕]

"...."

당규영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 소환했는지 자그마한 그림자 나비 두 마리가 손등과 어깨 부근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당규영이 고개를 까딱이는 것을 신호로,

"와 봐."

"!"

홍연화가 곧바로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상대를 사정거리 내에 두는 즉시 힘껏 채찍을 휘두른다.

얼핏 당규영의 몸통을 노리는 것 같지만, 아마 진짜 목표는 스티커 셋 중 하나.

- 휘리리릭!

그러나 마지막 순간 당규영이 팔을 척 들어 올리자 채찍이 거기에 감겨들었다.

용암 속에 팔을 담근 것이나 다름없는데 당규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홍연화가 그 상태에서 추가로 화염 마법을 흘려보내려 했으나, 당규영의 발밑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손이 할퀴듯 용암 채찍을 찢어발겼다.

"...."

홍연화는 기대도 안 했다는 기색으로 자연스럽게 채찍을 회수했다.

반으로 줄어들었던 용암 채찍을 바닥에 가볍게 휘두르자 길이가 원상 복구되었다.

- 휘리릭!

재차 당규영을 공격해 들어간다.

당규영은 두 번은 안 통한다는 듯 마력을 그러모은 손으로 탁 쳐 냈다.

홍연화가 세 번째로 공격하기 전에 그림자 나비의 역공이 들어왔다.

힘없이 팔랑거리는 모습과 곡선을 그리는 동선을 보고 착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속도가 엄청나다.

지금처럼 아차 하는 순간 코앞까지 날아오고 만다.

"윽...!"

홍연화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채찍으로 그림자 나비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나비는 이리저리 잘도 팔랑거리며 유유히 채찍을 피해 냈다.

홍연화는 가느다란 채찍으로는 어렵겠다 싶었는지 재빨리 다음 주문으로 넘어갔다.

보다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쪽으로.

용암 채찍이 커다란 화염으로 변해 전방을 불태우고, 동시에 그림자 나비에서 한 움큼의 그림자가 뿜어져 나와 충돌했다.

- 펑!

그러나 당규영이 소환했던 그림자 나비는 두 마리.

두 번째 나비는 여전히 바짝 따라붙는 중이다.

게다가 언제 소환했는지 한 마리가 뒤따라오고 있어 날아다니는 나비의 수는 여전히 둘.

나는 연신 뒷걸음질 치는 홍연화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완전히 말려들었는데.'

홍연화가 눈앞의 나비를 피하는 데만 급급해서 잊고 있는 사실.

그림자 술사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가장 쉬운 대상은?

바로 그림자다.

그렇다면 그림자 술사를 상대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곳은?

'발밑이지.'

"...!"

홍연화가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래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손이 다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힘주어 떨쳐 내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사이 시시각각 접근해 오는 나비 두 마리.

홍연화가 다급히 불덩이를 쏘아 냈다.

- 펑!

한 마리는 어떻게 태워 버렸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커다란 그림자 주먹으로 변해서 홍연화를 강타했다.

- 퍼억!

둔탁한 소리와는 달리, 홍연화의 몸이 부드럽게 뒤로 날아가 사뿐 내려앉았다.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더니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을 보낸다.

굳이 따지자면 고마운 쪽에 가까웠는데, 얻어맞는 순간 [윈드포스]로 충격을 줄여 줘서 그렇다.

나는 계속해 보라는 의미로 턱을 까딱였다.

"...."

홍연화는 계속 고마워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자세를 잡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쯤 외우다 말고 땅을 걷어차 자리를 벗어난다.

다음 순간 그림자 손아귀가 빈 곳을 잡아챈다.

한번 당하고 난 뒤로는 발밑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핵심은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발을 놀리는 것.

'여기까지는 좋고.'

그렇게 계속 기동성을 유지하면서 홍연화가 다음 카드를 꺼내 들었다.

[플레임 애로우]

- 화르륵!

완드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활 모양을 형성했다.

쫓아오는 나비와 발목을 잡아채려는 손아귀들을 피해 달리며, 당규영을 조준하고 시위를 놓았다.

- 피잉!

당규영은 계속 그 자리에 팔짱을 낀 상태.

대신 근처를 날아다니던 그림자 나비가 열심히 팔랑거리며 불화살 앞으로 날아들었다.

- 펑!

제법 커다란 화염 폭발이 일었다.

폭발이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화살이 쇄도했다.

이것 역시 그림자 나비가 몸으로 막았지만, 또 세 번째가 날아온다.

'이런 거 보면 유망주가 맞기는 해.'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화살 하나 만들 때마다 한참씩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데, 홍연화는 거의 활시위를 놓는 것과 동시에 다음 불화살이 완성된다.

그림자 나비가 보충되는 속도보다 화살을 연사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결국 몇몇 개가 방어를 뚫고 당규영에게 직접 쏘아져 들어왔고, 마침내 당규영은 팔짱을 풀더니 귀찮다는 것처럼 팔을 휘저어 불화살을 걷어 냈다.

홍연화는 일정 거리를 두고 원 모양으로 겉돌면서 계속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의도는 알 것 같은데....'

아마 원거리 견제를 하다가 틈이 보이면 들어가려는 심산일 것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두 사람의 역량 차이가 너무 커서 좀처럼 빈틈이 나오질 않는다는 점.

당규영은 또 불화살 하나를 걷어 내고,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는지 홍연화에게 물었다.

"언제 들어올 거야?"

기껏 핸디캡도 여럿 걸어 줬는데, 떼라는 스티커는 안 떼고 멀찍이서 마법만 쏘고 있으니.

그럼에도 홍연화가 가까이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자, 당규영이 처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안 오면 내가 간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빠르면서도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도둑걸음에 그림자 술사 특유의 보법이 더해진 결과다.

랭크는 팔찌의 제한을 받았어도 둘 다 C급.

홍연화 역시 오버히트로 육체 능력을 강화하기는 했으나 C급 이동기술 둘에 비하면 손색이 있어서,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버렸다.

그림자 술사의 특징 하나 더.

가까운 그림자일수록 영향을 더 빠르고, 강하게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홍연화가 멀찍이서 도망 다닐 때야 손아귀로 잡는 게 한 박자 느렸지만, 지금은 몇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태.

당규영이 허공에 주먹을 뻗자, 발밑의 그림자가 불쑥 커다란 주먹을 만들어 홍연화를 강타했다.

홍연화가 황급히 불로 장벽을 만들어 막아 냈으나, 뒤이어 커다란 발이 재차 장벽을 뻥 걷어찼다.

장벽이 흩어지고 충격을 입은 홍연화가 비틀거렸다.

이번에는 홍연화의 양옆에서 곧게 편 그림자 손바닥이 하나씩 솟아오르더니 손뼉을 치듯 마주쳐 가까워져 갔다.

- 짝!

"악!"

홍연화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그림자 박수에 끼기 직전 내가 윈드포스로 확 잡아당긴 탓이다.

상황이 급박했던 만큼 거칠게 잡아당겼기에 바닥을 여러 번 데굴데굴 구르고서야 멈추었다.

홍연화는 순간 성질이 뻗쳤는지 일어나면서 내 쪽으로 왁! 소리를 지르다가,

"살!!! ...살살 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머리가 차갑게 식는지 급격히 볼륨을 줄였다.

내가 방금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을까 연신 눈알을 굴리지만,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러면 끝난 것 같은데.'

이번 도전에서 홍연화가 스티커를 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면 될 것 같다.

그럼 이왕 불가능한 김에.

"근접전 해 봐."

"...?"

홍연화의 낯빛이 불가사의하게 물들었다.

여태까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근접전을 하라고?

반면 당규영은 내 제안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좋은 생각이야. 질 땐 지더라도 시도는 해 봐야지."

이제 홍연화는 조금 억울해 보였다.

표정을 해석해 보면 대충 이렇다.

- 여태까지 피 터지게 싸운 건 난데 왜 쟤가 칭찬을 받아?

그러나 이내 뭐 어쩌랴 싶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고, 마음을 다잡고 투지로 눈빛을 번뜩인다.

이번에는 홍연화가 마법을 시전하는 시간이 길었다.

캐스팅 속도로는 여태까지 봐 온 마법사 중 제일 빠른 홍연화가 저렇게 시간을 잡아먹는다면 제법 고위 마법일 것이다.

[오버히트]로 증가하는 육체 능력은 흡수하는 화염 마법의 위력에 비례한다.

그러니 최대한 강력한 것을 흡수해 육체 능력을 배가시키겠다는 의도다.

이내 홍연화의 온몸에서 선명한 불길이 타올랐다.

후, 하고 심호흡을 하곤, 곧장 땅을 박찼다.

당규영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홍연화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바로 앞까지 근접한 홍연화가 주먹을 휘두르는 척하더니, 당규영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이 대인전에서는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스티커를 떼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이다.

'당규영의 근접 공격을 막거나 흘리면서'라는 전제 조건이 붙지만.

홍연화의 공격은 오버히트로 강화되어 분명 엄청나게 빨라졌다.

다만 여전히 아쉽게도, 동선이 단순해서 예측하기 쉬웠다.

산전수전 다 겪은 3학년이 그걸 예측하지 못할까.

당규영이 홍연화의 손목을 붙잡고 확 잡아당기자 균형이 흐트러졌다.

빠르게 자세를 고치고 다시 손을 뻗는다.

스티커에 겨우 닿나 싶은 순간, 당규영의 몸이 빙글 회전하며 홍연화의 등 뒤로 이동했다.

툭 밀자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지는 홍연화.

"헉."

짜증 날 틈도 없었다.

홍연화가 기함하더니 급하게 몸을 옆으로 데굴 굴렸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몇 바퀴를 추가로 구른다.

그 자리를 커다란 그림자 주먹이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 쿵! 쿵! 쿵!

겨우 몸을 일으켰더니 코앞에 당규영이 쇄도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이후부터는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웠다.

'쟤도 갈 길이 멀구만.'

나는 신나게 뻥뻥 걷어차는 당규영과 공이 되어 굴러다니는 홍연화를 지켜보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끊어야 할 것 같다.

저렇게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하는 상태로 정신없이 얻어터지기만 하면, 배우기는커녕 트라우마만 깊어질 테니까.

두 사람에게 다가간 다음, 사이에 쏙 끼어들며 손을 내밀었다.

당규영이 탁 쳐 내려는 순간 손이 휙 뒤집히며 당규영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당규영은 굳이 빼려고 들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붙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반대쪽 손에 윈드포스를 그러모아 응수했다.

주먹과 손바닥이 충돌하고,

- 팡!

바람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서로 일정 거리 떨어졌다.

그사이 홍연화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추스른 상태였다.

홍연화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하지."

그러면서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가볍게 눈짓했다.

나가 있으라는 뜻.

홍연화가 소심하게 반항해 봤지만,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홍연화 본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규영을 상대로 갖은 수단을 써 봤지만 상대도 안 됐고, 그마저도 내가 위급한 상황에 세 번이나 도와준 덕에 여기까지 할 수 있었던 거니까.

2인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마찬가지였다.

홍연화가 두 명으로 늘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힘을 합쳤으면 가능이야 했겠지만, 결국 자신은 짐만 됐으리란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았어...."

결국 홍연화가 터덜터덜 경기장 밖으로 나가고, 당규영과 나 둘만이 남았다.

당규영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우리 후배님 실력 좀 볼까?"

81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4)

"멘토링은 어쩌다 하시게 됐어요?"

"프흫흫, 놀랬냐? 놀랬지?"

당규영이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멘토 하면 징계 빼 준다잖아. 생각해 보니까 이게 더 나을 거 같더라."

"얼마나 빼 줬는데요?"

"전부 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빼 주면 할 만하지.

임시 보관소에 침입하고 금지 아이템들도 잔뜩 해 먹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꽤 많이 받았을 텐데, 그걸 다 제해 준다면 멘토링의 귀찮음도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다.

그래도 설마하니 전면 탕감일 줄은 몰랐는데.

선도부장 오세훈은 내 생각보다 더 화끈하게 타협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해. 밖에 애들 기다리잖아."

홍연화만 경기장 밖으로 내보냈으니, 내가 당규영과 단둘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밖에서 기다리는 세 명이 의아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커진다.

빨리 끝내고 나가는 게 상책이다.

다만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제안하기로 했다.

"리플레이를 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태까지 나를 지켜봤던 당규영이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리플레이를 꺼 준다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일 수 없는 실력을 내보이겠다는 뜻.

당규영은 구미가 당기면서도 조금 고민되는 눈치였다.

"솔직히 궁금하기는 한데.... 내가 지금 멘토란 말이야? 리플레이는 꼬박꼬박 올려야 되거든."

대인전뿐이라면 몰라도 멘토링이 함께 진행 중이다.

학사 측에서 학생들의 진척도를 파악하길 원하는 까닭에, 모든 리플레이를 기록하고 제출하는 것이 권장된다.

반드시까지는 아니지만, 당규영의 멘토링 성과에 반영되니 최대한 맞춰 주는 게 좋다.

해서 나는 다시 제안했다.

"그럼 이번만 비공식으로 하고, 공식전은 리플레이 돌아갈 때 한 번 더 치르죠. 다른 애랑 같이."

"그럴까?"

[서브 퀘스트:5주 차 대인전]

▷목표:스티커 떼기(-/3개)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달성 시기에 따라 차등 지급

서브 퀘스트의 목표는 '스티커를 떼는 것.'

퀘스트 보상만 받고 나면 대인전 자체는 느긋하게 해도 상관없다.

당규영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다

결과적으로 학사 측에 제출할 리플레이는 확보가 된다는 소리였으니까.

리플레이 수정구를 회수한 다음, 나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와 봐, 그럼."

뭘 보게 될까 기대감에 부푼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와는 달리, 이번에 내가 보여 줄 건 많지 않다.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이니까.

['증폭'을 사용합니다.]

['오버히트'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D->B)]

[인페르노 피스트]를 시전하고,

주먹에서 불타오르는 화염을 [오버히트]로 흡수했다.

오버히트는 흡수하는 화염 스킬이 강력할수록, 또는 오버히트 자체의 랭크가 높을수록 효과가 극대화된다.

인페르노 피스트에 B급 오버히트까지 썼으니 그 결과는.

- 화르르륵,

곧 내부에서 막대한 힘이 끓어오르며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당장 내 그릇, 육체의 수준에 비해 과한 힘이라 컨트롤이 조금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 더욱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자세를 잡은 뒤 땅을 강하게 걷어찼다.

- 팟!

한 호흡 만에 당규영의 모습이 성큼 가까워졌다.

또다시 땅을 걷어차자 코앞에 다가왔다.

당규영은 조금은 대비를 하고 있었으나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치 못한 듯 눈을 치켜떴다.

"어, 어?"

- 찌익!

내 신형이 순식간에 당규영을 스쳐 지나가며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느새 내 손에는 스티커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당규영이 스티커를 보고, 시선을 내려 제 허리 쪽을 확인했다.

휑하게 빈 옆구리.

'이래서 랭크를 올려야 하는 거지.'

현재 당규영은 팔찌를 착용해서 모든 스킬과 특성이 C급으로 제한된 상태다.

반면 내가 당규영에게서 복사한 도둑걸음의 랭크는 B인데다, 서예인이 준 신발의 보너스를 받아 B+.

이것만 해도 속도 차이가 엄청난데, 오버히트로 육체 능력까지 잔뜩 끌어올렸다.

오버히트가 D급이었을 때도 흑사방주와 술래잡기를 하면서 털끝 하나 안 다쳤으니, B급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

나는 바로 자세를 다잡았다.

"다음 가겠습니다."

"야, 야, 잠깐. 잠깐 기다려 봐."

"승부에 잠깐이 어딨어요."

- 팟!

다시 공간을 압축하여 짓쳐 든다.

당규영이 다급하게 뒷걸음치며 허공에 손을 긋자, 아래에서 여러 개의 그림자 손발이 솟아올라 나를 저지하려 했다.

나는 손 위에 마나를 그러모은 뒤, 덮쳐 오는 그림자 손발을 강하게 후려쳤다.

- 펑!

그림자가 흩어지며 당규영에게도 제법 충격이 전달된 듯했다.

아주 잠깐이나마 몸이 경직될 만한 충격이.

그 짧은 틈에 나는 빠르게 그림자를 우회해서 당규영의 측면으로 돌아 들어갔다.

"...."

3학년이 되도록 쌓은 경험치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당규영도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스티커를 향해 뻗는 손을 옆으로 밀쳐 내면서 되려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내가 뻗는 척만 하고 손을 회수했기에 당규영은 허공만 움켜쥐었다.

내가 다시 손을 뻗고, 당규영이 응수한다.

한 걸음조차 안 되는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이 마구 부딪히고 얽힌다.

그러다가 내가 돌연 훌쩍 뒤로 물러나서,

- 쿵!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그림자 망치가 꽂히는 것을 보고, 다시 땅을 강하게 걷어차 돌진했다.

- 팟!

당규영이 즉시 반응했지만, 몸이 따라와 주지 않는지 방어가 아주 조금 늦었다.

- 찌익!

그리고 그 작은 차이를 이용해 두 번째 스티커를 떼는 데 성공했다.

거리를 벌리고 스티커들을 내 몸에 척척 붙이니, 당규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와, 벌써 두 개나 뜯어 갔어. 근데 김호야, 준비할 시간은 좀 주지."

"드릴수록 제가 불리해지거든요."

"뭐, 그렇기는 해."

스티커 두 개를 손쉽게 뗄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내 속도가 팔찌를 낀 당규영보다 월등히 빨랐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허를 찌르고 나서 계속 몰아쳤다는 점도 꽤 컸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는 그리 쉽지 않을 듯하다.

당규영이 부드럽게 손을 젓자, 발밑의 그림자가 파도처럼 위아래로 출렁거리며 범위를 넓혀 가기 시작했다.

스킬의 성능을 C급의 최대치까지 잔뜩 끌어올린다는 의미였다.

"내가 앞에 애들 때문에 너무 긴장을 놨나 봐. 생각해 보면 흑사방에서도 손만 다치고 나왔는데. 마지막이라도 맞게 대우해 줘야지."

계속 범위를 넓혀 가던 그림자가 이내 정사각형 모양의 텃밭을 만들었다.

[음영화원(陰影花園)]

꽃 대신 그림자로 이루어진 팔다리가 불쑥불쑥 솟아 있고, 그 위로는 나비 세 마리가 정찰하듯 날아다닌다.

스펙이 C급으로 제한된 상태에서도 영역 마법에 나비 세 마리까지.

당규영의 저력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미련한 짓이기도 했다.

저렇게 온갖 마법을 잔뜩 펼쳐 놓으면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실시간으로 쭉쭉 빠져나간다.

거기다 [음영화원]은 굉장히 수비적인 마법이라,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당규영 역시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멀찍이서 지켜보면 제풀에 지쳐 주문을 거두어들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당규영이 이 사실을 모를까?

자기가 마법을 시전한 당사자인데.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빙긋 웃는다.

"뭐 해, 안 들어오고."

두 눈이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멀뚱멀뚱 서 있지는 않겠지?' 하는 눈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럴 때 멀리서 기다리는 스타일이었다.

기왕이면 기다리는 동안 약간의 트래쉬 토크까지 곁들이면서.

그것이 상대를 가장 열 받게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당규영이다 보니, 장기적인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그 방법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원하는 대로 해 줘야겠지.'

당당하게 제 발로 음영화원에 걸어 들어간다.

척척 걸음을 옮겨 경계선을 밟자, 그림자 손발들이 일제히 사방에서 덮쳐들었다.

꽉 움켜쥔 그림자 주먹들이 휘둘러지고, 발들이 걷어차거나 다리를 걸려 하며, 손들이 나를 움켜쥐려 한다.

나는 주먹들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기울이고 비틀고, 발들을 타 넘거나 폴짝폴짝 뛰고, 움켜쥐려는 손들은 마나를 모아 마주 후려쳤다.

- 펑!

잠시 그림자가 흩어지며 공간이 생기자 잽싸게 조금 전진한다.

뒤따라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림자 손발들.

열 사람, 스무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느낌이다.

어느 곳을 보든 새까만 그림자가 득실거려서 기가 질릴 지경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에 기가 질리기에는 너무 닳고 닳은 고인물이었다.

게다가 마냥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한 손이 열 손을 이길 수 없는 법이라고는 하나, 스킬의 랭크 차이는 여전히 내 쪽이 우위였다.

한 손으로 열 손의 힘을 낼 수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것이다.

침착하게 피하고, 따돌리고, 뿌리치면서 야금야금 전진한다.

몇 번 반복하다가 화원 중심의 당규영과 거리를 재 보니,

'이제 뛰어도 되겠는데.'

크게 한 번만 뛰면 닿을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발에 힘을 주어 땅을 강하게 걷어찼다.

- 팟!

당규영은 예상했다는 듯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어느새 화원 곳곳을 날아다니던 그림자 나비 세 마리를 모두 자기 앞으로 불러 모은 상태였다.

나비들이 일제히 폭발하며 온갖 날붙이들이 비 오듯 우수수 쏟아졌다.

'안 되네. 취소.'

- 팟!

재차 땅을 걷어차 이전 위치로 돌아왔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몰려드는 그림자 손발을 피하고 후려치며 생각했다.

'이젠 진짜 뛰어도 되겠는데.'

나비 세 마리를 다 썼으니까, 보충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 팟!

또 당규영 바로 앞으로 뛰어들었다.

당규영은 자기 영역 안을 제 안방처럼 드나드는 내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힌 듯했다.

C급에서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수를 꺼냈어도 랭크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랭크에서 우위를 점하는 게 나라면 더욱.

그러나 투지를 잃지 않고 주먹을 내질러 왔다.

나는 옆으로 비켜서며 스쳐 가는 주먹을 더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면서 스티커로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을 당규영이 붙잡으려 하고, 그 손을 탁 쳐 내면 또 그 손을 막는 등 허공에서 빠르게 공방이 오갔다.

한곳에 오래 머물며 공방을 나눌수록 내가 불리했다.

당규영에게는 두손 두발 말고도 거들어 줄 손이 무수히 많았으니까.

등 뒤에서 짓쳐 드는 그림자들을 피해 또다시 자리를 바꿨다.

- 팟!

바닥에 발자국 하나가 깊이 찍히고.

다음 순간 나는 당규영의 반대쪽 측면에서 나타났다.

먼저 그림자 손들을 강하게 후려쳐서 치워 둔 다음, 스티커를 떼려는 것처럼 앞으로 손을 쭉 뻗었다.

"...?"

순간 당규영의 얼굴에 의문스러운 기색이 스쳤는데, 내가 손을 뻗도록 놔둬도 아직 자신과는 제법 거리가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찰나,

- 펑!

등 뒤에서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며 당규영의 신형을 한순간 내 쪽으로 확 밀쳤다.

처음 음영화원에 발을 들일 때부터 은밀하게 조금씩 준비해 왔던 윈드포스였다.

"!!"

당규영의 눈이 놀람으로 치켜 떠졌다.

다급하게 자세를 수습하려 했으나 그전에 내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가슴께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스티커 끄트머리가 손가락에 걸리는 순간 붙잡고 힘껏 잡아 뜯었다.

- 찌익—투둑.

"?"

나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워 올렸다.

스티커 뜯어지는 소리는 알겠는데 투둑은 무슨 소리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투둑 하는 소리와 동시에 손톱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내 얼굴을 노리고 쏘아져 나왔다.

이건 또 뭐지. 당가의 암기인가.

고개를 홱 옆으로 기울여 피한 다음 멀찍이 물러났다.

그리고 당규영을 보니,

"...."

상당히, 많이 언짢은 듯 안면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뺨이 약간 붉어 보이기도 한다.

스티커 다 뗀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내가 뭘 놓쳤나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당규영이 한 손으로 셔츠 칼라를 여민 채 움켜쥐고 있다.

마치 놓으면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나는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다.

'아, 단추.'

가슴께에 붙은 스티커를 너무 세게 잡아 뜯은 탓에 교복 셔츠 단추가 뜯어진 것이다.

당가의 암기라고 생각하고 피했던 것이 그 단추였고....

'너무 열심히 했나?'

나는 잠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내 귓가에 당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평소보다 높낮이가 낮고 싸늘한 어조로.

나는 곧바로 허리를 굽혔다.

"미안합니다."

82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