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히든 스킬 (4)
박동재가 꺼낸 것은 마석.
강후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가운데, 전세혁이 박동재의 뒤통수를 쳤다.
"야! 이건 그냥 마석이잖아.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뜸을 들이고 보자기에 싸 오기까지 해?"
"의미가 있는 거겠죠."
전세혁의 생각과 달리, 강후는 박동재의 마석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았다.
박동재 성격이 예의를 갖췄으면 갖췄지, 무례하게 장난을 칠 성격은 아니니까.
그러자 박동재가 강후의 말을 반갑게 받았다.
"맞아요! 이 녀석이 제가 던전에서 처음으로 얻은 마석이에요. 이 녀석을 들고 다닌 이후로는 일이 정말 잘 풀렸어요."
"부적 같은 겁니까?"
"네, 그렇죠. 죽을 위험도 다섯 번이나 넘겼고, 꼭 필요했던 버프 스킬북도 두 개나 먹었더랬죠. 이 정도면 행운의 부적아닙니까?"
"까쉬마르 길드에 납치를 당했을 때는 이 마석을 챙기고 다니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정확합니다...."
강후가 피식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타이밍인 것 같은데 웃음이 나왔다. 정말 진지하게 부적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럴 수 있다.
징크스라는 게 괜히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루틴 같은 것이 생기는 이유도 비슷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박동재에게 소중한 마석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됐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예? 혹시 너무 형편없는 답례라서 그렇습니까? 이건 우선 먼저 드리는 겁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제가 돈을 버는 대로 계속 선규 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릴 생각입니다. 섭섭하지 않게요."
"아니,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건 받는 자체가 부담이라서. 그래서 됐다는 겁니다."
"아...."
"정 보답하고 싶으시면, 나중에 같이 던전에 갈 때 무료봉사 하시죠. 어떻습니까?"
역제안을 했다.
박동재 같은 버퍼를 무료로 이용해 먹을 수 있으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물론 그렇게 되면, 상당히 빡빡한 던전을 데려갈 생각이다. 그래야 뽕을 뽑으니까.
"물론이죠! 아니, 평생 무료 이용권도 가능합니다! 진짜로요!"
"평생까지야."
"진심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캘빈 쿨리지."
"오! 어떻게 아셨어요?"
"꽤 좋아하는 명언이라."
"감사는 정중함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자크 마리탱."
"와우! 명언 지식이 상당하신데요?"
"두 개 대답했습니다만."
"하여간 동재 이 자식.... 죄송합니다, 선규 씨. 이 녀석이 워낙 이런 대화를 좋아해서."
"아뇨. 저도 틈새 지식을 써먹을 수 있어서 좋네요."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박동재의 캐릭터는 확실해 보였다. 실제로 독서를 매우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박동재가 최고의 버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헌터들의 수많은 논문을 다 읽어봤기 때문이다.
직접 실험해 보거나 도전해 볼 수 없는 것은 논문을 통한 간접 경험과 함께, 연구 재료로 썼다.
"어쨌든 꼭 불러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선규 씨의 요청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찬스 좀 알차게 쓰겠습니다. 마석은 다시 가져가세요. 저랑 던전 갈 때 챙겨오시고."
"아! 알겠습니다. 하하하!"
긍정의 활기가 가득한 박동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마 저런 캐릭터이기에 진지한 구석이 있는 전세혁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반세영 같은 동료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겠지.
강후 자신과 비교하자면 반대편 끝에 있는 성격이지만, 그래서 더 재밌는 구석도 있었다.
* * *
술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서울의 장점은 고물가라는 점을 제외하면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점이다.
비틀거리면서 어두운 길을 걸어 다녀도, 전혀 문제 될 일이 생기지 않는다.
두 사람과의 대화에서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우선 박동재도 전세혁만큼이나 이클립스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십년지기 친구 둘이 이클립스에게 납치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여전히 찾고 있는 모양.
그래서 박동재가 오랜 설계 과정을 거쳐, 이클립스 안에 내부자를 만들어 뒀다고 했다.
차소희가 강후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전세혁이 알 수 있었던 것도 내부자 덕분이었다.
박동재는 자신이 만들어 둔 내부자 라인 전체를 '블랙 네트워크'라고 불렀다.
그리고 블랙 네트워크의 영향권에는 국내에 있는 어지간한 길드, 군벌이 모두 포함된다고 했다.
강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보망이 훨씬 넓었던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다르게 상당히 치밀하고 용의주도했다.
블랙 네트워크에 연결된 내부자 전체의 정보를 박동재는 알지만.
내부자끼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고도 했다. 아주 사소한 단서조차 준 적이 없다고 한다.
'멱살 단단히 잡아야겠네.'
실력파 버퍼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높았던 박동재의 기대 가치가 폭등한다.
물론 박동재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눈치지만, 강후에게는 선명하게 보였다.
블랙 네트워크는 도움이 될 일이 많을 듯했다.
지금 박동재의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네트워크 유지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부자들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면, 더 많은 활동비의 지원이 필요할 테니까.
서로 기울인 술잔의 횟수는 점점 더 늘어갔지만, 이상하게 취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중간에 전세혁이 보안이 필요한 통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강후와 박동재, 둘이 자리에 남았다. 박동재가 강후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주고는 화제를 돌렸다.
"세영이랑 세혁이 형에게 들었어요. 미로 던전 최고 기록을 압도적으로 갱신하셨다면서요."
"그랬죠."
"게다가 내부 공략에서 거의 원맨쇼로 압살하셨다고 들었어요."
"빨리 끝나긴 했어요."
"세혁이 형이나 세영이나, 의외로 외부인에 대한 칭찬은 까다롭게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엄청 냉정하죠."
"그렇군요."
"근데 두 사람이 선규 님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칭찬밖에 없어요. 아니, 흠잡을 것이 없대요."
"미로 던전 공략이 처음치고는 셋이 손발이 잘 맞아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어요."
"그러니까요. 호흡에서도 진짜 안 맞을라치면, 몇 번을 같이 가도 꼬이고 또 꼬이거든요."
"꽤 재밌었습니다."
"저보다 선규 님과 더 성적이 좋았다고 하니까...."
"상처?"
"아뇨. 그런 사람과 한 번 던전에서 제대로 각 잡고 공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동재다운 말이었다.
도전과 모험을 좋아한다.
그게 화근이 되어, 그라운드 제로에 갔다가 납치를 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 박동재 역시, 평범한 공략보다는 한계를 시험받는 시련 형태의 던전을 더 즐길 것이다.
"이번에 세혁 님에게 넘겨받은 던전. 조만간 공략하러 갈 건데, 그때 손발 한 번 맞춰 보죠."
"좋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무상으로 갑니다! 악수 한 번 하실까요?"
"갑자기?"
"미리 손 한 번 꽉 잡고, 잘 맞는지 맞춰 보는 거죠! 발은 나중에 맞춰 보고요."
"지금, 농담인 거죠?"
"...재미없으셨나요?"
이래저래 캐릭터는 확실한 박동재였다.
* * *
두 사람과의 술자리는 새벽을 기해서 정리가 됐고, 강후는 그날 저녁까지 푹 잤다.
이후 일정이 없어서 신경 쓸 것도 없었을뿐더러, 오랜만의 과음이라 푹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는 동안에 진효영으로부터 가벼운 아침 인사 연락이 왔지만, 자는 중이라 자동으로 씹혔다.
강후가 급할 게 없는 입장이라, 이참에 인내심이나 테스트를 해 볼 생각이었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갈 무렵.
이예린과 만남 약속을 잡은 강후는 그 길로 대전역으로 내려가서 그녀를 만났다.
윤상미의 상태도 겸사겸사 챙길 겸, 이예린과 향후 의뢰의 방향성에 대한 얘기도 하기 위해서였다.
대전역에서 내리자마자, 강후는 윤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일찍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 네, 오빠.
"몸은 좀 어떤가 물어보려고."
- 저요? 좋아요. 근데 저 지금 공략 들어가는데? 우리 나중에 통화해요. 그럼!
"...."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통화가 끊어졌다.
매번 전화를 먼저 끊는 쪽은 강후였는데, 오늘은 포지션이 뒤바뀐 느낌이다.
어쨌든 던전 공략에 들어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은 것 같아서 마음은 한시름 덜었다.
자신의 일과 엮여서 해결사에게 고생한 윤상미였기에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역 앞에서 멍하니 서서 뭐 해요? 뒤에서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요."
뒤에서 강후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쳤다. 이예린이었다.
원래 대전역에서 좀 더 외곽으로 나와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도 역 안에서 나오고 있던 모양.
"아, 통화가 막 끝나서."
대답하는 강후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이예린의 성좌가 그새 둘이 늘었기 때문이다.
'급성장에 시동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때지.'
훗날 이예린의 포지션을 생각하면, 슬슬 가파르게 상승하는 성장 곡선이 이상하진 않았다.
아마 이 무렵쯤일 것이다.
공격적으로 소규모 용병단을 합병, 인수하고 그들의 던전을 사들이기 시작한 시점이.
이예린의 용병단 '청안'이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인맥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다.
그래서 그간 꾸준히 벌어온 돈, 그러니까 자본이 충분해 인수 자금 조달은 문제가 없었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요? 오늘 얘기는 살짝 주제가 무거워서. 보안 유지도 좀 필요하고요."
"어디로 갈까요."
"저희 용병단 건물로 가요. 보안 시설이 충분히 되어있으니까 안전하기도 하구."
"그러죠."
처음으로 가 보는 그녀의 용병단 건물이었다.
지금까진 보통 대전역 앞에 마련된 청안 용병단의 상설 안내 부스 근처에서 보거나.
혹은 대전역 외 다른 지역에서 만나곤 했었으니까. 오늘은 그러기엔 좀 더 깊은 의뢰 얘기였다.
* * *
대전역에서 서쪽으로 1km 정도 가면 위치해 있는 청안 빌딩.
청안 빌딩 내부에 완벽한 방음 처리가 된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끊겼던 대화가 이어졌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이예린이었다.
"요즘 용병 시장이 심상치 않아요. 용병 수요가 급증하면서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는 중이예요."
"의뢰꾼인 저한테는 좋은 얘기네요."
"그건 맞죠. 의뢰 단가는 말할 것도 없고 성공, 목숨 수당도 폭등하니까 말이에요."
"수요 급증에 이유가 있겠죠?"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확인도 한 번 해 볼 생각으로 강후가 물었다.
이유는 뻔하다.
제약사 간의 전쟁, '하얀 전쟁' 때문이다.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일 터다.
"제약사들이 판을 키우고 있어요. 알죠? 지금 전 세계에서 마약류 각성제 가격이 우리나라가 가장 높다는 거."
"네, 압니다. 외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공급 라인에 연줄을 만들려고 한다면서요."
"제약사들이 결심을 하는 것 같아요. 지금처럼 파이를 나눠 먹는 구조가 아니라 독점을 한다면."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다."
"그거죠. 이런 흐름에 편승해서 외국 자본도 같이 들어오고 있는 거고요."
"제약사도 각자의 뒷배가 다를 텐데. 중국이나 러시아 쪽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이번 달에 두 나라에서 입국한 외국인 헌터의 수가 전월 대비 450% 뛰었어요."
"미쳤네."
확실히 조짐이 좋지 않았다.
제약사 간의 전쟁은 둘째치고, 이렇게 된다면 용병들 사이에서도 국제 전쟁이 벌어질 판이었다.
국내가 대단히 시끄러워질 조짐이 분명했다.
차라리 시끄럽기만 하면 다행이고,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이다.
이미 하얀 전쟁의 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126화 진효영 (1)
이후로도 이예린을 통해서 현재 돌아가는 제약사 간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폭풍전야가 확실했다.
이예린을 보고 있으면, 지금 용병 품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매우 큰 문제로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그녀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의뢰와 의뢰꾼 용병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매칭해 줄 용병이 줄어드는 것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원작에선, 하얀 전쟁의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했었지. 신경 쓸 게 별로 없었으니까.'
기억을 거슬러 가 보면.
원작의 하얀 전쟁은 주인공 장시환에게 조금 시끄러운 이슈 정도였을 뿐이었다.
일단 주 활동 영역인 서울 내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던 데다가.
이 무렵부터는 심판의 지옥 공략을 끝으로 국외 활동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더 높은 곳으로의 성장을 위한 여정이었고, 이때의 장시환에게는 국내 무대가 너무 좁았다.
'내게는 현실이군. 이게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차이인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자신이 신강후가 아닌 채관형이나 케이시 렉스 같은 인물에 빙의했다면?
그때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 또 어떻게 달라지게 되었을까? 상상으로는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채관형으로 빙의했다면. 부역자 엔딩으로 가는 친구 장시환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을까?
케이시 렉스였다면. 미국의 포르투나 길드를 이끌고 한국의 정화 길드부터 쳤을까?
만약은 없다지만, 생각을 곱씹어볼수록 흥미로웠다.
어쨌든 현실은 신강후다.
원작에서 주인공의 숙적이었지만 결국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천재 암살자.
그 운명을 비틀어야 한다.
"선규 씨?"
"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아니. 잠깐 생각 좀 정리하느라."
강후가 한참을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 말이 없자, 이예린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떤 의뢰를 받고 싶어요?"
"일단 팀적으로 호흡을 맞춰야 하는 단체 의뢰는 전부 거절하겠습니다. 제안도 하지 마시고."
"그 말은 블라인드 포지션을 원한다는 거죠?"
블라인드 포지션.
무슨 말인가 하면, 제약사를 대신해 대리로 치르게 되는 전면전은 다른 용병들이 하고.
그 안에서 1인으로 눈치껏 혼자 움직이는 임무를 부여받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용병들이 전투를 벌이는 틈을 타, 느슨해진 보안을 뚫고 제약사에 잠입하는 것이다.
전투를 이용하는 셈.
물론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은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과 위험을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했다.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될 가능성이 커요. 사망률이 높은 포지션이기도 하고요."
"원래 그렇게 살아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지금 바로 착수 가능할까요?"
"잠시. 잠깐 휴식 시간을 갖고 얘기할까요?"
"그래요. 마침 커피 한 잔이 절실하던 참이었는데. 마시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준비해 오죠."
"캔커피 하나."
"굿 초이스. 10분 후에 봐요."
이예린과의 대화에 잠시 쉼표가 찍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강후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안영호였다.
신호가 두 번을 채 가지 않았는데, 안영호가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 아앗, 형님! 선규 형님! 이렇게 드디어 전화를 처음 해 보네요! 그렇죠? 반갑습니다, 형님!
"잘 지냈고?"
- 물론이죠, 형님! 이제 일본으로 오시는 겁니까?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만약에 내일 움직인다고 하면 가능할까?"
- 아앗! 내일요?
"편하게 답해도 돼. 미리 얘기해 두지 않은 건 나니까."
- 사흘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리코우 길드가 전면전 중이라서....
"토우시 길드와 얼마 전에 상호 평화 협약을 체결한 것으로 아는데?"
- 그거 위장이었어요.
"양아치들이군."
- 사흘만 주시면 그 안으로 제가 어떻게든 자리 꾸려볼게요. 충분히 가능해요.
"아냐, 됐어. 길드 상황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 정말 괜찮아요, 형님!
"뒤통수 걱정하면서 던전 다니고 싶진 않아."
- 아....
"전황에 여유가 생기면 얘기해. 항상 조심하고."
- 죄송해요, 형님.
"죄송은 무슨. 다만 이젠 일본으로 갈 준비 끝났으니까, 세팅되면 얘기해 주고."
- 알겠습니다!
그렇게 안영호와의 통화가 끝났다.
별문제가 없으면 용병 의뢰보다는 일본에서의 암흑기 파밍에 충실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닌 듯했다.
리코우 길드와 토우시 길드의 관계는 국내로 따지면, 정화 길드와 군벌 심연의 사이와 같다.
사실상 앙숙이다.
정화 길드와 심연은 아직까지 전면전을 벌인 적은 없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피를 제대로 흘리고 있는 모양.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전화를 끊은 강후가 이번엔 박동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동재는 안영호와 달리 시간이 한참 흘러서 받았다.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 서, 서, 선규 님.... 어흑.
"자고 있었나 보네요."
- 네, 새벽에 던전에서 복귀했거든요. 간만에 달렸더니 몸이 버티질 못하네요.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요."
- 잠시. 잠시만요. 제대로 눈 좀 뜨고 전화 받겠습니다. 잠결에 받고 싶지 않아서요.
잠깐의 기다림.
이내 몇 번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걸걸했던 박동재의 목소리가 맑게 바뀌었다.
-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세혁 님에게 받은 던전에 가려고 하는데. 한 번 손발 맞춰 보는 건 어떨까 해서."
- 공략할 구성원은 어떻게 되나요? 셋? 넷?
강후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박동재가 수를 잘못 짚었다. 사실 당연한 생각이기도 하다.
"둘."
- 아? 아! 저와 선규 님만요?
"네. 어차피 난전 콘셉트의 던전은 아니니까, 둘이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요."
- 좋습니다. 가 보시죠! 던전이야 현재 그냥 대기 상태잖습니까?
"내일 저녁. 어떨까요."
- 딱 좋네요. 오늘은 푹 쉬어야 할 것 같고, 내일 아침에는 블랙 네트워크 관련해서 일이 있고요.
"그럼 내일 오후 6시에 경주 던전 앞에서 보죠. 위치는 알고 계시죠?"
- 물론입니다. 정시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보기로."
조율이 끝났다.
일본은 나중으로 미뤄야겠지만, 박동재와 함께 버프 던전에 갈 일정은 잡혔다.
안에서 꼭 얻고 싶은 버프 강화 스킬이 있는 만큼, 의뢰보다 우선시하고 싶었다.
'일단 이예린에게 받는 용병 의뢰는 보류. 어차피 몸값은 무조건 올라갈 테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수요는 늘면 늘었지 줄어들 리는 전혀 없으니, 강후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오히려 조급해지고 애달프게 되는 쪽은 고급 인력을 구하고 싶어 하는 의뢰인 쪽일 터다.
이후.
강후는 이예린에게 얼마 동안 용병 관련으로는 의뢰를 절대 받지 않을 것임을 통보하고.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지며, 국내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폭넓게 나누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아는 만큼 알려 주는 이예린이기에 그녀의 말이 꽤 많은 도움이 됐다.
그리고 헤어지며 나오는 길에.
청안 빌딩에서 북쪽으로 1km쯤 가면 나오는 공터에 순간이동 포인트를 새로 지정했다.
박동재 구출 이후, 새롭게 지정하는 포인트였다. 여차하면 청안 빌딩에 찾아오기 딱 좋은 위치.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난 뒤에야 강후는 오늘 저녁 시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진효영이었다.
* * *
얼마 후.
머물던 호텔 방 안에서 풀 메이크업을 마친 진효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봤다.
"예뻐, 진짜 예쁘다니까."
여자는 자기 자신에게 유독 냉정하다는데. 진효영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진효영은 자신의 빼어난 외모가 남자를 상대할 때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헌터가 된 이후, 자신의 능력만큼이나 외모를 활용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았다.
그것이 바로 이클립스에서 활동하면서, 일종의 '미인계'로 타깃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유혹이지, 사실 유혹해서 데려온 이후엔 신경 쓰지 않았다. 강동현의 소관이었기에.
어쨌든 이런 부분을 강동현에게 인정받으면서, 그녀는 이클립스에서 제법 높은 서열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아울러 던전 공략에서도 위험에는 덜 노출되면서, 경험치를 안정적으로 올리는 지원도 받고.
더 나아가 유혹으로 데려온 헌터에게 빼앗은 아이템과 자산 3할 이상은 반드시 수고비로 받았다.
물론 이런 작업을 수월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외모 하나뿐만은 아니었다.
진효영은 중독에 특화된 능력도 함께 갖고 있었다.
특히 몬스터나 헌터로 하여금, 빠르게 수면 상태에 빠져들게 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이른바 수면 중독.
적을 앞에 두고 잠이 드는 것만큼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는 일도 없을 터.
진효영은 이렇게 누군가를 무력화하기에 딱 좋은 조합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전화를 걸었다.
강후와는 이미 아까 전화가 끝났고, 함께 서울에서 술을 마시기로 약속이 된 상태.
- 어, 나다.
"동현 오빠. 세팅 다 돼가요."
- 신강후, 그놈이 물었나?
"안 물고 배기겠어요? 지금까지 괜히 떠본 거죠. 아까 오늘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 수상한 낌새는 없고?
"첫 만남부터 조심하는 게 느껴지기는 했는데. 어차피 제 정보가 노출될 게 없잖아요."
- 그건 맞지.
"헌터 치안청에 등록된 레벨 데이터 베이스도 조작된 거고요. 수정도 안 됐잖아요?"
- 맞아.
"그럼 저에 대해 제대로 알 방법이 하나도 없는 거죠. 정화 길드에서도 몰랐잖아요."
- 호텔은 그때 그 호텔인가?
"네. 미리 방 잡아놨어요. 이따가 신강후를 눕히게 될 방이기도 하고요."
- 차는 미리 대기시켜놨다. 잘 재워서 모셔오라고. 어디 다치지 않게 말이야.
"걱정 마세요. 제 성좌가 몇 개인지 세어 볼 능력이 있는 게 아니면, 저에 대한 진실을 하나도 알 수 없을 거예요. 능력까지도요."
거울에 비친 진효영의 눈동자에 어느덧 창밖으로 떠오른 저녁달이 빛났다.
전화 너머의 강동현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잘 풀려가는 것 같을 때의 웃음이다.
- 역시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 해. 그렇지 않아?
"맞아요."
- 기대하지. 우리 실력 좋은 헌터님을 정중히 모셔오도록 해 보자고.
"알겠어요.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그녀가 거울을 보며, 늘 그랬듯, 주문을 외듯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정말 예쁘다니까."
그리고 다음 날 새벽 2시.
유독 평소보다 더 야릇하고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달빛이 창문에 막 스며들기 시작할 즈음.
쿠웅!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온 두 남녀가 한 몸으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하아아."
"후우."
이내 몽환적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 두 사람은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고.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정적으로 서로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적당한 술과 호감,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욕망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협주곡의 시작이었다.
127화 진효영 (2)
* * *
"음."
"괜찮아?"
"괜찮아. 어디 긁힌 모양인데."
빠르게 달아오르던 분위기에 잠깐 제동이 걸린 것은 강후의 손목에서 느껴진 통증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느낌이 든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신경 쓸 것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진효영의 입술을 부드럽게 감쌌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전혀 없을수록, 역설적으로 스킨십에 더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랄까. 상대를 영혼 없는 인형처럼 대할 수 있게 되니, 어떤 행동을 해도 부담이 없달까?
강후는 진효영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가 순수한 의도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그녀의 뒤에 숨어 있는 흑막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위험을 방지할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그녀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목적을 간파했으니까.
하지만 속내는 이미 다 들여다본 만큼, 그 뒤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효영의 스킬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도, 그녀의 능력은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성좌 스캔 덕분이다.
[몽마(夢魔)]
[스킬로 수면 상태가 유발된 타깃을 직접 죽일 경우, 영구적으로 마력 10을 획득합니다.
최대로 100회까지 가능하며, 그 이후에는 몽마가 한 단계 더 성장한 특전을 제공합니다.]
[심마(心魔)]
[계약자를 두려워하는 적 또는 몬스터를 상대로는 2배 더 강화된 공포감을 부여합니다.
계약자를 두려워하는 적의 정신계 공격은 계약자를 상대로 완벽하게 무력화됩니다.]
처음부터 진효영의 성좌를 보고, 그녀가 수면에 관련된 능력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수면 유발에 관련된 능력 역시 다른 스킬 만큼이나 다양하다.
다만 강후는 그녀의 메인 성좌가 둘이라는 점에서, 고급 스킬을 갖진 않았을 것으로 봤다.
이를테면 바로 정신을 제압하고 수면 상태로 빠져들게 만드는 스킬 말이다.
이런 스킬은 실력이 충분히 오를 만큼 오른 헌터나 가능한 일이다. 유청화가 좋은 예시일 터다.
하지만 진효영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수면을 유발하는 도구나 아이템의 보조를 받을 듯했는데.
그것이 방금, 강후와 진효영이 한 몸으로 뒤섞여 방으로 들어오면서 벌어진 '찔림'이었다.
그렇게 난 상처를 통해, 진효영이 수면을 유도하는 스킬을 썼을 것이다.
실제로 그 순간에는 강후도 아주 잠깐, 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의미 없는 수작이었다.
얼마 전에 마켓에서 산 2등급 목걸이, 역신의 숨결이 수면 중독을 성공적으로 억제한 것이다.
'좀 더 놀아 줄까.'
강후가 진효영을 푹신한 침대로 밀쳤다.
"아앗!"
그녀의 긴 생머리가 흩날리며,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보이지 않는 수 싸움만 없었다면 농밀한 두 남녀의 격정적인 하룻밤이 되었겠지만....
강후는 그저 성욕에 휩싸인 남자를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놀라우리만치 이성적이었다. 다만 겉으로 그 티를 내지만 않았을 뿐이다.
"선규 씨, 이런 사람이었어?"
"내가 왜?"
"처음 날 봤을 때는 이렇지 않았잖아? 꼭 목석처럼 쳐다보더니, 지금은 너무 적극적인걸?"
"너 같이 예쁜 여자를 두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 끌 생각하지 마. 안 통해."
"아흑! ...선규 씨!"
거칠게 그녀의 양손을 움켜쥐고 목선을 탐닉하기 시작하자, 가는 신음이 그녀에게서 터져 나왔다.
원작에서 신강후라는 캐릭터를 조형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온기 대부분을 빼앗았을지는 몰라도, 오히려 욕망에는 충실하게 만들었었다.
성장에 대한 욕구.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
그리고 말초적이고 원초적인 것에 대한 거침없는 추구.
지금 강후가 진효영에게 보이고 있는, 욕망에 충실한 행동은 진심이었다.
단지 그 안에 사랑만 담지 않았을 뿐이다. 상대도 자신에게 사랑을 담지 않았으니까. 그뿐이다.
"후우."
본능에 푹 빠진 거친 숨소리가 강후에게서 터져 나왔다.
진효영은 강후를 양팔로 꽉 끌어안은 채, 강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웃었다.
'넌 끝났어.'
강동현을 골탕 먹일 만큼의 실력을 가졌어도, 역시 여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차소희. 그래서 넌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세상일은 힘 하나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고.'
강동현의 '총애'를 두고, 차소희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많이 갖고 있던 진효영이었다.
전투에 있어서는 빼어난 실력을 가진 차소희가 늘 강동현이 찾는 심복 1순위였고.
그런 차소희를 보면서 진효영은 꼭 한 번, 그녀를 넘어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강동현조차 어쩌지 못했던 신강후는 지금 완벽하게 자신에게 푹 빠져서 무력화되기 직전이었다.
"...아!"
옷 안으로 훅 들어온 강후의 손길을 느끼고, 진효영이 한 번 더 메소드 연기를 보태려는 순간.
스으윽!
강후가 다른 손으로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단검은 순식간에 진효영의 동공 앞까지 닿았다. 조금만 아래로 흔들려도 바로 각막이 찢겨져 나갈,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말해. 누구야."
"선규 씨...? 무슨 말이야?"
타인을 잘 믿지 못하는, 헌터의 일반적인 의심일 수도 있기에 진효영이 말을 돌렸다.
하지만 강후는 고개를 까닥이며 그녀의 되지도 않는 능청스러운 연기를 무시했다.
"누가 시켰는지 얘기하면, 살려 줄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
발각된 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강동현이 직접 알려준 것만 아니라면, 자신의 레벨과 클래스에 대한 정보는 전부 위장이었다.
레벨 100도 안 되는, 그저 달리는 발 재주 정도나 있는 정찰 역할군에 어울릴 세팅이다.
이것을 두고 뒤에 누가 있는지 의심을 하기엔 능력이 하찮았다.
"두 번 협상은 없어."
사악!
"꺄아악!"
단검의 날 끝으로 그녀의 볼에 붉은 줄을 만들어냈다.
"너한테나 소중한 얼굴이지, 나한테는 아니거든. 난 내 목숨이 소중한 사람이고."
"그래 봤자! 그래 봤자일걸?"
"...?"
"이제 곧 잠들 텐데! 언제까지 네가 그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을까? 있겠냐고!"
말이 끝나자마자 진효영이 왼손 검지에 끼고 있던 반지로 강후의 팔뚝을 몇 번이고 찔렀다.
처음엔 몰랐는데, 지금 살피니 반지의 특정 부분을 누르면 날카로운 바늘 같은 것이 나왔다.
아마 이것으로 상처를 내고, 그 상처를 통해 스킬의 수면 효과를 주입하는 것이었을 터다.
아직 레벨이 충분히 높은 수준은 아니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사전작업인 셈이다.
"조잡하군."
"왜 잠들지 않는 거지...?"
진효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유발하는 '수면 중독'은 걸리면 강동현도 자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옵션이었다.
물론 강동현은 상처가 날 틈을 주지 않겠지만, 지금처럼 무주공산으로 당하면 답이 없는 것이다.
앞서 강후에게 상처를 냈고.
그 상처를 통해서 몇 번이고 수면 유도 스킬인 '요람의 속삭임'이 들어갔다.
그럼 잠이 들어야 맞는데?
강후는 멀쩡했다.
"그렇게 날로 먹으려고 하면 쓰나."
"...."
강후의 말을 듣는 순간, 진효영은 등골을 타고 오싹한 느낌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간파당한 건가? 어디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알았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러면 플랜 A는 실패다. 하지만 다행히도 플랜 B가 있다.
진효영이 몸을 꿈틀거려, 호텔 밖에 있을 대기조에게 연락을 보내려는 찰나.
홰액!
강후가 진효영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순간이동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2인이 되면 확률이 50%가 되기에 성공 유무에 따라, 강후 역시 다음 계획을 달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파팟!
"성공이군."
"아?"
강후와 진효영은 서울의 호텔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인 대전에 내려와 있었다.
* * *
목에 강후의 단검이 닿은 상태가 유지됐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숨을 거둘 수 있는 상태.
진효영은 정면으로 보이는 청안 빌딩의 간판을 보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갑자기 서울에서 거리가 한참은 떨어진 대전으로 온 걸까? 이게 설마 강후의 능력인 걸까?
"마지막으로 묻는다. 배후가 누구야. 그것만 말해."
"X 까, 이 X발 새끼야!"
아름다운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욕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투득. 투드득. 투득!
이어 진효영의 블라우스와 치마가 인정사정없이 찢어졌다.
동시에 진효영의 전신이 마치 비늘이 솟은 것처럼 검붉고도 두꺼운 외피로 뒤덮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외피는 목과 얼굴까지 완벽하게 감쌌다. 약점을 전혀 만들지 않겠다는 방어 기제로 보였다.
"이건 또 흥미로운 능력이군."
"죽여버리겠어...!"
목소리가 변했다.
방금까지 고운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렸다면, 지금은 중성적인 톤으로 내려온 상태였다.
외형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에도 변화를 주는 모양.
진효영은 강후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위치까지 자리를 옮겼다.
그가 암살자라는 사실은 알기에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다.
한편.
[분신술]
강후는 분신을 만들어 냈다.
실전에서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눈앞에 만들어진 강후의 분신은 강후를 쏙 빼닮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눈가에 있는 작은 점도 똑같았다.
분신술의 특징은 스킬 사용자가 자신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만큼 똑같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만약 강후가 자신의 눈가에 작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분신에게는 점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서투른 암살자는 그렇게 자신의 분신을 들키곤 했다.
물론 누구보다 눈썰미가 좋고, 관찰력이 뛰어난 강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
강후가 분신의 뒤로 조용히 숨었다.
그러자 진효영이 방향을 틀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신이 아닌 강후의 본신을 쫓아야 하니까.
하지만 강후는 분신과 줄을 맞춰서는 그녀가 위치를 바꾸는 만큼, 자신도 똑같이 바꿨다.
애초에 앞에 분신이라는 '벽'이 있으니 사각(死角)을 만드는 것은 쉬웠다.
[백일참]
이미 그 시점에 강후는 백일참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효영이 가진 비늘의 내구력이 제법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공격 능력에서는 떨어질지 몰라도, 방어 능력에서 극대화가 되는 외피라면....
일반적인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어설픈 스킬도 마찬가지다.
한편 진효영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일단 접근하기만 하면 돼.'
강후의 예상대로 이 외피는 일정 대미지 이하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해 주는 외피였다.
스킬 활용 능력을 상실하게 되지만, 반대급부로 근력과 같은 육체적인 스탯이 급상승했다.
즉, 초인적인 힘으로 상대를 목 졸라 죽이거나 짓눌러 죽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파앗!
진효영이 강후에게 달려들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양팔을 X자로 만들어 정면을 방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암살자의 뻔한 레퍼토리가 정면에서 접근, 횡 이동으로 뒤를 잡아 공격하는 방식이니까.
이미 그 정도 계산은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런 수준 낮은 공격에 당할 자신이 아니다.
바로 그때.
분신 뒤에 철저하게 모습을 숨기고 있던 강후와 아주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
그 순간.
진효영은 전투에 맞춰 잔뜩 끌어 올려둔 자신의 항마력과 무관하게 환각에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미 빠져 있었다.
사방팔방이 온통 물에 녹인 물감처럼 정신없이 뒤섞이는 상태였다. 되돌릴 수 없었다.
'이게 절대 판정이라고?'
모든 방어 능력, 스킬을 무시하고 뚫고 들어오는 '절대' 판정.
강후에게 그 정도의 고급 환각 유발 스킬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그녀였다.
암살자는 보통 암살자다운 스킬을 갖는다.
순간이동과 같은 공간계 스킬이나 환각 같은 정신계 스킬을 쉽게 다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강후에게는 말도 안 되는 조합이 벌써 둘이나 들어가 있었다.
이것은 앞서 차소희의 죽음으로 수집된 강후의 스킬 정보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강후가 또 업그레이드됐다.
"하."
짧은 탄식.
동시에 단검 끝을 떠난 백일참이 환각이 유발된 틈을 타고 날아와, 그녀의 허리를 갈랐다.
모든 것이 담긴 일격이었다. 외피로 버티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128화 진효영 (3)
* * *
"난 너를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
쿵!
진효영의 목숨줄은 안타깝게도 길지 못했다. 자기가 하려던 말을 매듭짓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다.
"나도 이 공격에 네가 죽을 줄은 몰랐지."
강후가 쓰러진 진효영을 향해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왜 죽이냐는 그런 말이겠지.
곱씹어 볼수록 개소리다.
살아서 납치를 당하든, 인신매매를 당하든 하는 것이 오히려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할 줄 알았다면, 이런 짓거리를 할 리도 없었겠지.
지옥에 데려가려 해 놓고는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헛소리를 유언으로 남길 줄이야.
진효영의 쓸만했던 능력과 외모를 생각하면 참 아쉬운 최후였다.
어쨌든 전투 직전부터 관심 있었던 몽마, 심마 성좌를 손에 넣었다.
몽마 성좌는 당장 효율을 볼 일이 없겠지만, 심마 성좌는 제법 요긴할 때가 있을 듯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적이 사용하는 정신계 공격은 완벽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검붉은 외피로 전신을 감싼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꼴사납게 알몸으로 방치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자체가 알몸일지도.
강후는 그녀에게서 아이템을 착실히 벗겨냈다.
마력 위주의 아이템 구성은 전부 판매할 생각으로 벗겼고, 그중에 쓸만한 '발찌'를 챙겼다.
현재 착용하고 있는 발찌가 '마법사 사냥꾼'이라는 6등급 발찌로 항마 25를 올려주는 녀석이었다.
진효영이 착용하고 있던 발찌는 그것보다 훨씬 옵션이 좋았다.
[이화(梨花) - 발찌]
[등급 : 4등급]
[항마 +50]
[맷집 +50]
안 바꿀 이유가 없었다.
꽤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지금껏 발찌에 대한 투자를 너무 인색하게 했나 싶을 정도.
[신강후 Lv.103]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근력 670] [민첩 270]
[체력 721] [마력 20]
[항마 445] [맷집 595]
[* 암흑기 100]
오랜만에 전체 화면으로 스탯 상태를 확인해 보니,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마력은 일부러 50 이하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암흑기 스탯의 경우는 '*' 표시가 있는데, 기존의 헌터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스탯이라서다.
히든 스킬의 표기도 마찬가지라서 백일참과 흑월참의 경우, 각각 이름 옆에 ('*') 표시가 붙었다.
"얼추... 50억 원은 되겠군."
강후가 진효영에게서 빼앗은 아이템의 가치를 가늠했다.
그 정도면 12시간을 투자한 것 치고는 꽤 남는 장사다.
그리고.
진효영의 스마트폰으로 확인했다. 분명 사주한 사람이 있다면, 전화 한 통은 했을 듯해서다.
그래서 통화 목록을 봤더니 이게 웬걸, 너무 익숙한 이름이 강후의 눈에 들어왔다.
"가지가지 하는군."
최근 통화 기록에 잔뜩 이름을 남긴 사람의 정체는 바로 강동현이었다.
진효영도 이클립스가 보낸 사냥개였던 것이다. 혹은.... 미인계라고도 할 수 있겠지.
강후가 전화를 걸었다.
마침 강동현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연결이 됐다.
- 이렇게 빨리? 효영이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수완이 훨씬 더 좋은걸?
"지랄을 해라, 그냥."
- 어, X발?
찰나의 순간에 가시 돋친 욕이 오갔다. 덩달아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강후는 불쾌감으로 가득한 표정이고, 강동현은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강동현이 되물었다.
- 효영이는 죽었나?
"아무리 사냥개들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한다고 해도, 너무 쉽게 버리는 거 아닌가 싶은데."
- 효영이의 수면 능력도 안 통했단 말이야? 이야.... 대단한데, 신강후?
"두 번이나 털린 게 부끄러워서 칭찬하는 거면, 그건 인정해 주지."
- 그래. 꽤 부끄럽군. 인정했으니 됐나?
"왜 자꾸 내게 관심을 갖지?"
-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강동현. 이렇게 된 이상, 이클립스도 이제 앞가림 잘하는 게 좋을 거야."
- 왜, 불가침 조약을 깨서?
"호감은 용서해도, 스토킹은 용서 못 하지. 너 같은 놈이 질척거리는 건 더 싫고."
- 그래. 기대하지. 이제부턴 뒤통수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생각보다 뒤끝이 좀 있거든.
"피차 불리한 건 쪽수가 많은 네 쪽 아닌가? 난 철저하게 혼자인데."
- 신강후. 이제 더 이상 정선규라는 가명은 쓸 수 없게 될 거야. 잃어버린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지. 어때, 내 배려가?
"하여간 직접 나설 배짱은 없어서 아랫것만 두 번 보낸 놈이 허세는. 꼴리는 대로 하든 말든."
- 신강후. 조심해라. 다음에 직접 날 만나게 되면, 그때는 다음이 없을 거다.
"그러니까 네가 직접 오라고. 골방에 틀어박혀서 궐련이나 태우지 말고."
- 신...!
강후가 전화를 끊었다.
사실 시작부터 이클립스와 악연이었기에, 이제 와서 공식적인 악연이 된 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청명 수용소를 탈출해서 지금까지 그나마 이렇게 조용히 지낸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가명 건도 마찬가지.
세상에 본명이 알려진다 한들,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본명을 쓰던 시절에 눈에 띄는 활약을 하던 헌터였다면 숨길 것이 많았겠지만.
강후에게 있어 본명의 의미는, 청명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순수했던 시절의 상징이었다.
즉, 본명을 따라서 그때의 삶을 캔다고 한들, 고아로 살아온 지난 29년밖에 보이는 게 없을 터다.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이참에 주변인들에게도 전부 본명을 밝힐 생각이었다.
본명으로 활동하면 라이센스 처리라던가,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과정에서 일 처리가 훨씬 빨라진다.
물론 헌터 치안청에서 공식적인 모니터링을 할 수 있게 되는 단점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모니터링이라는 게, 사후에 뜨는 결과만 보는 수준이라 사실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강후가 텅 빈 벌판에 누워 있는 진효영의 시체를 한참 동안 무표정하게 내려보았다.
그녀가 원했던 건 뭘까.
강동현의 인정이었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자신의 외모가 가진 우월성을 확인하고,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었을까?
저벅저벅, 저벅.
무심한 강후의 발걸음이 새벽달을 배경 삼아, 벌판에 무성한 갈대 사이로 사라져 갔다.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는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어도 어디서든 벌어지고 있으니까.
딱히 특별할 것은 없는 새벽이었다. 조금 소란스러웠을 뿐이다.
* * *
이후.
경주로 미리 이동한 강후는 호텔 하나를 잡고 푹 쉬었다.
박동재를 만나기로 한 것은 저녁이었기에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넉넉했다.
헌터 뉴스는 전동 제약의 제1 보관 창고가 폭발한 소식을 속보로 전하고 있었다.
보관 창고는 값비싸면서도 다양한 원재료가 있는 곳이라 보안 수위가 높았다.
그 말은 즉, 이번 폭발에 적지 않은 인력이 투입되었음을 뜻한다.
하얀 전쟁의 불이 제대로 붙고 있는 중이다.
원작의 장시환의 시점에서는 그저 조금 시끄러운 서울 밖의 이슈일 뿐이었는데.
용병의 시점으로 보는 현실은 전혀 달랐다. 자칫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가까운 현실이었다.
"암흑기 파밍을 확실히 하긴 해야 하는데...."
강후가 입맛을 다셨다.
물론 암흑기 스탯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답이 없고, 암흑기 스킬도 같이 늘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 쪽의 공략이 필수인데, 아쉽게도 당장 갈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미리 리코우 길드의 소유 던전 목록을 보고, 계획을 세워둘 수는 있었다.
예를 들면, 언데드 콘셉트의 던전 위주로 리스트업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옵저버 자격 요구까지는 무리려나."
길드에 소속되진 않지만, 길드원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옵저버.
스핏파이어 길드로부터 강후가 받은 대우가 바로 이 옵저버 자격이었다.
리코우 길드에서 거기까지 힘을 써 준다면, 활동이 훨씬 더 수월해진다.
안영호를 잘 활용해야 할 듯했다. 외삼촌의 힘이 막강한 만큼, 아주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리코우 길드에 가게 되면 아키야마 타카시도 만나게 되는 건가."
문득,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아키야마 타카시.
현재 리코우 길드 옵저버로 활동하고 있는 헌터다. 동시에 열세 개의 별이기도 하다.
대외적인 활동이 잦은 다른 구성원과 달리, 타카시는 얼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열세 개의 별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목소리만 겨우 들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타카시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신술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아예 분신과 본신이 운명 공동체의 개념이었다.
다만 분신은 밖에서 활동하면서 성장하고, 본신은 집에서 그 분신을 '조종'할 뿐이다.
그리고 조종의 과정은 놀랍게도 타카시가 직접 설계한 특수 패드를 통해 이뤄졌다.
즉, 타카시에게는 분신을 조종하는 모든 순간이 하나의 게임과도 같은 셈이다.
단순히 시야나 감각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고 운명도 공유한다. 분신이 죽으면? 본신도 죽는다.
"지금쯤이면 한창 무사 콘셉트에 심취해서, 분신에 색색깔로 가면을 씌워서 생난리를 칠 때군."
이번에 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보게 된다면 안면은 터두고 싶기는 했다.
처음 가는 던전의 패턴과 디버프 분석에 매우 능해서 원작에서 장시환이 직접 영입한 인재니까.
열세 개의 별에 들어간 것도 사명감보다는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이끌려 갔을 뿐이다.
"재밌겠군."
일본에서의 행보를 미리 떠올려 보니 기대도 되고, 한편으로는 살짝 긴장도 됐다.
그곳의 생태계는 한국이랑은 또 다르다. 게다가 한국 헌터에 대해 적대적인 길드도 존재하고.
국외이기에 조심해야 되는 것도 분명 있는 만큼, 신중하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 * *
오후 5시 30분.
"왔어요?"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강후를 반긴 것은 다름 아닌 박동재였다.
방금까지 나눈 메시지에서는 이제 막 경주역을 출발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거짓말을 했네요."
"미리 와서 주변도 좀 살피고, 혹시나 위험 요소는 없는지 체크하고 싶어서요."
"굳이 그걸 혼자서?"
"생명의 은인에 대한 소소한 감사 표시인 거죠."
"그나저나 이제 우리, 말은 좀 놓았으면 하는데요. 할 말이 많을 때는 존대도 귀찮아서."
"알겠습니다. 형이라고 부를게요. 아니 부를게!"
"그래. 그렇게 가자고."
교통정리가 빠르게 끝났다.
강후가 박동재보다 나이가 많은 만큼, 자연스럽게 형 동생이 되었다.
강후가 물었다.
"내부 브리핑은?"
"필요 없어. 여기는 세혁이 형, 세영이랑 자주 갔던 던전이라. 선규 형은?"
"나도 미리 넘겨받은 자료로 숙지는 끝난 상태야. 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강후라고 불러."
"아?"
"내 본명이야. 정선규는 가명이고."
"아...!"
"가명을 숨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슈가 생겼거든."
강후가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으로 방금 막 띄운 화면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클립스의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신규 척살 대상 헌터의 내용이었다.
사진은 청명 수용소에 수감되기 직전에 찍은 머그샷이었다.
[신강후]
[청명 수용소 출신.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 가명은 '정선규'.
추후 다른 가명이 확인될 시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될 예정.
이클립스의 핵심 간부인 차소희와 진효영을 죽인 전과가 있으며, 클럽 하데스에 침투하여 지하 던전을 불법 활용한 전적이 있다.
오늘부로 해당 헌터를 이클립스의 1급 척살 대상으로 지정하며, 아래와 같은 현상금을 건다.]
[생포 시 : 200억 원 및 착용 아이템 전량 지급.]
[제거 시 : 50억 원 및 착용 아이템 전량 지급.]
"헐."
박동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웬 거물이 눈앞에 있었다.
129화 버프 (1)
* * *
그 무렵.
강후와 연락이 가능한 사람들은 모두 강후에게 메시지를 받은 상태였다.
내용은 강후가 박동재에게 보여 준, 이클립스 공식 홈페이지 링크였다.
마침 마스터 K를 만나고 있던 정유리도 그와 함께 메시지를 받았다.
"차소희를 죽인 헌터가 선규 오빠였다고요? 아니, 이제는 강후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
"진효영은 얼마 전까지 활동 내역이 있었는데. 최근에 죽은 모양이군. 영악한 녀석이었다만."
"할아버지, 왜 이클립스에서 이런 내용을 공개한 걸까요?"
"너무 뻔하지 않니. 선규, 아니 강후 청년이 강동현에게 한 방 먹인 거지. 누가 봐도 욱해서 올린 척살 명단이 아니냐?"
"둘 다 강동현의 사냥개라고 불릴 만큼 실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그간 왜 가명을 썼는지는 알 것 같구나. 수용소 출신이라.... 그 참혹한 곳에서 탈출을 했다니. 보통 청년이 아니군."
"본명이 뭔가 오빠 이미지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선규라는 이름은 좀 순둥이 같았는데."
"어쨌든 강후 청년도 머리가 좀 아파지겠구나. 이클립스와 꼬여서 좋을 건 없는데 말이야."
"반대로 생각하면, 이클립스 입장에서도 귀찮지 않을까요?"
정유리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조직이니까.
"어쨌든 사냥개가 둘이나 죽었다는 건, 그만큼 강동현을 화나게 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요."
"워낙 적이 많은 이클립스라서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게다. 하물며 강후 청년의 실력을 생각하면."
K가 웃었다.
정유리를 통해서 듣고, 또 본인의 안목으로 살핀 강후의 실력으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훨씬 윗선에 있는 간부나 강동현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강후를 죽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본인이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이 싫어서, 저렇게 척살령을 내렸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아랫것'들이 알아서 강후를 노릴 테니 말이다. 귀찮은 수고와 시간 낭비를 덜 수 있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차소희, 진효영 모두 레벨은 200이 넘는 헌터들이었을 텐데요."
"레벨이 전부는 아니지."
"강후 오빠도 참 대단해요, 그쵸?"
"그래. 그러니까 너를 그라운드 제로에서 끄집어내서 이렇게 밖으로 데려온 것 아니겠니."
"맞아요. 호호."
"지켜보자꾸나. 강후 청년이 도움이 필요하면 직접 요청할 테고, 그게 아니라면 알아서 하겠지."
"저도 그럴까 해요."
"주제넘게 참견할 것 없다. 혼자 알아서 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일 테니까."
"네, 할아버지."
"밥 먹자."
* * *
"세혁 오빠. 오빠는 알았지?"
"뭘?"
"선규 오빠가 이클립스랑 이런 관계였던 거."
"알았지. 다만 굳이 공개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어서 나만 알고 있었을 뿐."
"다들 궁금해했거든. 차소희가 죽은 것은 확실한데, 누가 죽였는지를 몰랐단 말이야."
그 무렵, 반세영과 전세혁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클립스의 공식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는 것은 두 사람의 오랜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메인 화면에 보란 듯이 뜬 강후에 대한 척살령을 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반세영은 깜짝 놀랐다.
어렴풋이 레벨을 짐작만 하는 K나 정유리와 달리, 강후의 레벨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단순 수치로 따진다면 레벨이 2배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 헌터 둘을 죽인 것이다.
아니, 차소희가 죽은 시점을 생각하면 3배에서 4배 차이까지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내가 얘기했잖아. 강후 씨와는 앞으로 계속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게 좋을 거라고."
"혼자 다 해 먹는 줄은 알았지만, 사냥개까지 저렇게 때려잡고 다닐 줄은 몰랐네...."
"진효영이 죽은 걸 보면. 강동현이 강후 씨에게 미인계를 시도했던 것 같네."
"강동현, 비겁한 새끼! 지가 직접 싸우면 될 걸, 그걸 못 해서 여자로 꼬셔서 납치하려고 해?"
"원래 그런 놈이다. 나와도 제대로 한 번 붙어본 적이 없어."
전세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잘 된 듯했다.
전세혁도 그렇고, 박동재도 그렇고. 주변 인맥 모두 이클립스라면 학을 떼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들과 심리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됐으니, 관계는 훨씬 더 가까워질 터.
강후의 실력을 생각하면, 앞으로 고생하게 될 것은 강후가 아니라 강동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떼기 힘든 혹을 붙인 셈이다.
그것도 붙이고 있을수록, 점점 더 심한 고통을 유발하는 악성 종양 같은 혹으로 말이다.
"어쨌든 강후 오빠, 진짜 무섭네. 다시 보게 됐어. 원래부터 무서운 사람인 건 알았지만...."
"아마 강동현이 어떻게든 데려다가 써먹으려고 했을 거다. 그러다가 일이 저렇게 된 거겠지."
"그렇겠네. 강후 오빠 정도의 실력이면 탐낼 만하잖아. 하다못해 나도 팀플레이가 간절...."
"야, 너무 그러지 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촌 오빠가 최고라고 하지 않았냐. 세영아."
"이제 전세혁의 시대는 끝났어. 신강후의 시대야. 호호호."
농담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 더 드러내어 표현하진 않았지만 강후에 대한 가치 평가가 올라갔다.
강동현은 조직의 공적으로 지정하고 처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한 공지였겠지만.
강후를 아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오히려 강후의 몸값을 올려주는 것으로 보였다.
저렇게 되면 이클립스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곳에서 용병 의뢰를 보낼 수도 있다.
이래저래 강후가 강동현의 위에서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전세혁이었다.
"큭."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더 재밌어질 것 같아서.
* * *
강후는 던전에 입장한 박동재에게 물었다.
"직전에 던전에 갔다 온 헌터들은 누군지 알려줄 수 있나?"
"에, 그게...."
여전히 박동재는 이클립스에 올라온 공지를 되새기며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후는 별생각 없는 듯이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아까 공지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군. 차소희와 진효영은 날 어떻게든 이클립스로 끌고 가려고 했어. 납치를 하려고 했던 거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걔네 둘이 쓰레기인 거는 나도 잘 알아! 단지 형이 죽였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전부 훈련받은 헌터들이잖아. 쉽지 않은 적이었을 텐데."
"나도 그만큼의 훈련과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아! 하긴... 하긴, 그렇네!"
"자만은 스스로 주는 것이다."
"응? 누구 명언이지?"
"다음에 만날 때까지 공부해 오시고. 아무튼 달라질 건 없어. 날 부를 이름만 달라졌을 뿐."
강후가 박동재의 어깨를 툭툭 치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그가 강후의 질문을 떠올렸다.
"아! 세혁이 형, 그리고 세혁이 형을 통해서 알게 된 헌터 두 분이 계시는데. 백성호, 장선영님과도 다녀왔어."
"혹시 명가 길드에 있는 두 헌터를 말하는 건가?"
"맞아! 혹시 알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고, 이름은 알지. 꽤 높은 분들과 손을 맞췄군."
"내가 좀 찾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
"그러게."
확실히 박동재가 실력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명가 길드는 소수 정예로, 레벨 450 이상의 헌터만 모인 곳이다.
각 분야에서 한가락 한다는 헌터들이 모인 길드인 것이다.
따로 거점은 두지 않지만, 다들 재력이 좋다 보니, 활동 범위는 전국적이었다.
소유한 던전도 많았고, 그들과의 협업을 요청하는 길드나 조직도 꽤 많았다.
그런 곳에서 박동재를 따로 부를 정도라면, 그의 실력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
"형, 어떻게 손발을 맞출까?"
"굳이 맞추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나. 네 센스를 믿어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버프가 들어온 건 상태창으로 내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 싸우겠다고."
"...그게 가능해? 버프 계산을 확실하게 하려면, 버퍼에게서 듣는 게 나을 텐데?"
"상태창 체크는 나에게는 매 순간의 일상이라."
강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게임을 할 때.
미니맵을 보는 맵플레이를 꼼꼼하게 하는 것처럼 강후는 항상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어렵지도 않았다.
잠깐 눈길만 확실히 주면 되는 것이니까.
어쨌든 하나의 루틴처럼 일상이 된 것이라, 강후에게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습관화가 되어있지 않은 헌터는 방금 박동재가 말한 방법을 썼다.
버퍼가 통보해 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속 버프 30초 남았습니다!', '가속 버프 15초 남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듣는 입장에서야 편하다.
하지만 말하는 버퍼 입장에서는 계속 모든 버프의 현황을 보고해야 하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형. 이러면 내가 미친 듯이 버프를 넣기 시작하면, 형이 완전히 꼬일 수도 있어. 진짜 괜찮아?"
"그럼 꼬이게 해 봐. 꼬이게 할 때마다 내가 마석 하나씩 주지."
"무슨 색 마... 아앗! 색깔은 말해 줘야지, 형!"
강후가 의도적(?)으로 제자리를 박차며 앞으로 나갔다. 강후 나름의 장난이었다.
박동재도 강후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이 던전에 온 마당에 욕심을 낼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이 박동재다.
그는 강후에게 빚진 자신의 목숨을 앞으로 꾸준히 이렇게 갚을 생각이었다.
한편으론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실력 좋은 헌터임은 분명하다.
다음 순간.
"읏! 엄청나군."
강후에게 바로 버프가 걸렸다.
순간 박동재의 말처럼 발이 꼬일 뻔했다. 가속이 엄청 빠르게 걸렸기 때문이다.
강후가 갖고 있는 가속 스킬보다도 2배는 더 뛰어난 효율이었다.
[질주 본능 - 55초]
'길다.'
버프 유지 시간이 상당히 길다.
보통 기본 버프 스킬을 획득하거나 스킬북으로 깨우친 버퍼의 버프 유지 시간은 기본값이 20초였다.
여기서 숙련도를 높여야만 유지 시간을 늘리는 것이 가능했다.
저 정도면 최대 숙련도나 그 근처에 다다랐을 가능성이 높다. 수만 번은 썼을 거란 얘기다.
그리고.
파앗!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통째로 새로이 열리는 것처럼 시각 정보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졌다.
이 역시도 버프였다.
[정신 집중 – 53초]
[전략 통제 - 39초]
정신 집중은 시야에 들어오는 시각 정보에 대한 수용도를 대폭 높인다.
전략 통제는 쓸모없는 정보, 이를테면 바닥에 보이는 하찮은 자갈 따위에 대한 정보를 배제한다.
한 마디로 봐야 할 것만 확실히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버프인데, 체감이 확실히 됐다.
매드 솔라키움을 먹었을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이던 그때를 체험하는 느낌이었다.
'미쳤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직 박동재는 성장 중인 버퍼고, 성장할 레벨이 강후 자신만큼이나 넉넉하게 남은 헌터다.
지금도 미쳤다라는 표현을 할 수 있을 정도면, 나중 얘기는 굳이 할 필요도 없다.
바로 그때.
뒤에서 호기로 가득 찬 박동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어때? 버프 맛 죽이지? 이 맛에 다들 날 찾거든? 어때? 손이 근질근질하지?"
그러자 강후가 씨익 웃으며, 박동재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 같이 죽어보자!"
박동재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달아 주면, 그 말을 따라가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날개가 제대로 달린 강후의 폭주가 그때부터 시작됐다.
130화 버프 (2)
* * *
"허억. 허억. 허억."
"후우."
"내가 입을 잘못 털어도 한참은 잘못 털었네, 진짜...."
"동재 너는 국내에서만 활동하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정말 좋았다. 아주 만족스러웠어."
"숨 끊어질 것 같아."
"좀 쉬자."
거의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몬스터와의 전투에 전념한 강후가 박동재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버프 덕분에 빨라진 몸은 강후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버프 효과를 보는 것은 둘째치고, 마나 과민증의 영향에서 살짝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전투 방식대로면 가속을 즐겨 쓰는 강후는 시간이 지날수록 과부하가 걸리는 형태였다.
특히 과부하 수치가 높은 그림자 걸음 같은 스킬을 쓸 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림자 걸음을 쓰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위치 전환이 필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동재의 버프가 들어온 이후로부터는 그런 쪽으로의 스킬 활용이 줄었다.
상시 가속 상태가 버프로 유지되다 보니, 굳이 자신의 가속 스킬을 쓸 필요가 없었고.
그런 이유로 자리를 잡기가 수월하다 보니, 그림자 걸음을 공간 이동 스킬로 쓸 일이 없었다.
스킬 효율화가 이뤄진 것이다.
'합법적이면서도 부작용이 없는 마약을 하는 느낌이랄까. 비유가 매우 이상하지만.'
지금 느낌이 딱 그랬다.
과부하가 덜 걸리니 마나 과민증에 대한 걱정도 줄어들게 되고, 움직임에 과감성이 더해진다.
예전부터 박동재의 버프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강후지만, 직접 체험하니 더 실감하게 됐다.
그리고 다짐했다. 박동재는 꼭 동료로서 옆에 두어야겠다고. 아주 최고의 버프 '셔틀'이다.
미들 보스 구간까지 끝내는 과정에 막힘이 전혀 없었다.
지금 강후와 박동재의 앞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방금 숨이 끊어진 미들 보스의 시체였다.
레벨은 미들 보스의 죽음과 동시에 딱 맞춰서 105가 됐고.
강후가 의도했었던 대로 버프 증폭에 관련된 스킬을 미들 보스에게서 강탈할 수 있었다.
[과몰입]
[버프 스킬 전반의 효율이 1%에서 100%까지 1초 단위로 갱신되면서 계속 증가합니다.
100%에 도달하면 '과몰입' 상태가 되어 10초간 유지된 후, 다시 1%에서부터 증가합니다.]
패시브 스킬이었다.
100%에 도달해 '과몰입' 상태가 됐을 때와 버프 스킬의 연계 타이밍을 맞추면 파괴적인 조합.
꽤 마음에 들었다.
스킬에 대한 신경을 쓸 것도 없이 알아서 진행되므로, 그때그때의 상황만 체크하면 됐다.
한편.
박동재는 강후가 잠깐 휴식하자고 한 시간 동안, 앞서 전투를 복기하는 중이었다.
버프 주는 맛이 났다.
대장장이가 자기가 만든 무기를 유려하게 쓰는 주인을 볼 때마다 쾌감을 느끼듯.
버퍼인 박동재는 자신의 버프를 100% 이상으로 활용해 주는 헌터를 볼 때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버프라는 것이 눈에 명확하게는 띄지 않는 데다가.
취급에 따라선 소위 말하는 버프 '셔틀'로 통할 때도 많았다.
버프 고마운 줄은 모르고, 야! 버프 안 넣고 뭐 해? 빨리 풀 버프 둘러! 같은 식으로.
전세혁은 늘 박동재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편이지만.
사실 그 외에 알게 된 인맥들은 버프를 당연스럽게 기계적으로 받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오히려 버프에 의존한 탓인지, 제대로 된 전투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뭐랄까. 매사, 매 전투에 진심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조금은 나사 풀린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아니었다.
오히려 박동재가 자신의 버프 안배가 모자란 게 아닐까 몇 번이고 스스로를 의심했을 정도로.
모든 움직임이 폭발적인 공격으로 이어졌고, 단 한 번도 전투에 느슨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짜내고 짜낸다, 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강후는 분명히 버프 효율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게다가 호흡을 맞추는 과정 없이 바로 전투에 임했음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꼭 게임에서 고렙 쩔 받으려고 들어온 힐러 느낌이야. 민망하지만 지금 딱 그런 포지션인데.'
박동재가 스스로의 위치를 냉정하게 재단했다.
자신이 버프로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철저하게 강후에게 끌려가고 있다.
그리고 버프를 잘 활용하는지 살필 게 아니라, 어떤 버프를 더 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했다.
페이스의 주도권이 강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박동재가 자기 역할에 몰입할 수 있다는 뜻.
'재밌잖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기계적인 버퍼의 역할에 충실했고, 사실 타성에 많이 젖어있기도 했던 박동재였다.
하지만 강후와 호흡을 맞추니, 스스로도 매 순간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어디에 자리를 잡고, 어떤 버프를 줘서 위력을 극대화할지를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다는 것! 박동재는 그것이 너무 좋았다.
원래부터 달라 보였지만.
지금 보니 강후가 더욱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버퍼를 누구보다 잘 쓸 수 있는 헌터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 * *
'너무 날뛰었나.'
강후가 휴식을 취하면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익숙한 두통이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문득 잠시 잊고 있었던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떠올랐다.
마나 과민증이 전투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이제 매드 솔라키움으로 억제가 가능하다.
적어도 마나 과민증의 영향으로 정상 전투를 치르지 못할 가능성은 없었다.
매드 솔라키움, 솔라키움의 보유량을 꾸준히 유지하는 한, 그런 변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난 후에 30분 동안 모든 고통과 억제에서 해방되는 것은....
고통을 '유예'하는 것이지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즉, 30분 후에는 후폭풍을 감당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극한까지 전투를 치러본 적이 없어서, 이후의 후폭풍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30분을 꼬박 다 쓸 만큼의 장기전, 그것도 격전이 벌어지게 된다면?
'내가 이것에 대한 답을 얻어놓지 못했다.'
강후에게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음표였다.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다.
이제는 답이 필요해졌다.
강동현의 그릇된 호기심으로 시작된 악연으로 인해, 서로 귀찮아질 가능성이 커져서다.
아마 당분간은 강동현이 아니라 아래의 헌터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겠지만.
언젠가는 강동현과의 싸움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차소희와 진효영이 죽었다 해도, 여전히 이클립스에는 실력 좋은 간부가 많다.
앞으로도 싸울 일은 널렸다.
* * *
충분한 휴식으로 체력을 비축한 강후와 박동재는 다시 광란의 폭주를 하기 시작했다.
앞서 첫 번째 폭주는 박동재도 당황한 구석이 있어, 중간에 호흡 조절에 실패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둘 다 미쳐 날뛰다 보니,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던전을 휩쓸고 다녔다.
얼마나 전투에 몰입하면서 버프를 쏟아부었으면, 중간에 박동재가 마력 고갈을 외칠 정도였다.
어지간해서는 핵심 버프만 둘러주고 시간 체크만 하면 돼서, 마력이 충분히 남는 게 일반적.
하지만 강후에게는 욕심과 호기심이 앞서다 보니, 사소해 보이는 버프도 전부 활용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풀 버프 상태를 유지하려다가 마력이 완전히 바닥나 버린 것이다.
강후가 박동재의 외침을 들어서 멈췄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박동재가 기절할 뻔했다.
그렇게 보스 구역에 도착했을 때, 강후는 레벨이 무려 108까지 올라 있었다. 3이나 오른 것이다.
보통 4인으로 올 경우, 레벨 1을 올리기가 힘들다는 점을 비교해 보면....
경험치를 넷이 아닌 둘이서만 나눠 먹는 것이 얼마나 이득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형. 여기 4인 권장인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던전 코드 밑에 바로 적힌 게 최적 권장 인원이니까. 모를 수가 없지."
"이건... 형이니까 가능한 2인 공략인 것 같아. 사실 몰이 사냥에 특화된 던전인데...."
"우린 하나씩 유인해서 속도전으로 잡았지. 꼭 몰아서 잡을 필요는 없잖아?"
"암살자에게 일대일 전투가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그렇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전투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강후는 일격에 화력을 집중하는 스타일이고, 그래서 일대일 전투가 효율이 훨씬 좋았다.
그래서 무리 지어 있는 몬스터들도 하나씩 꾀어내어 처치하는 식으로 갔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공략 속도를 더 빠르게 해 줬다.
일대 다수의 전투로 갔으면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렸을 것이다. 효율도 당연히 나빴을 테지.
"형이랑 2인으로 깔끔하게 공략을 빼니까. 이제 3인, 4인이 갑자기 시시해졌어. 가기 귀찮은데?"
"좋은 소식인가?"
"솔직히 오기 전까지 속으로 생각했거든. 암살자에 버퍼 2인 조합은 너무 위험하고, 리스크가 크다고."
"방어를 전제로 하면 리스크가 크지. 하지만 확실한 선공을 전제로 하면 얘기가 달라져."
"응. 그걸 느꼈어.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딱 형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달까?"
"암살자인 내게는 극찬이군."
"레벨도 쭉쭉 오르고. 왜 세영이가 형이랑 던전에 가고 싶다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반세영도 쓸모가 있다.
강후는 원거리 공격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원거리 옵션이 필요한 던전에는 그녀가 꼭 필요하다.
박동재가 전부가 아니고, 반세영이 전부가 아니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맞게 효율이 극대화되는 파트너가 따로 있는 셈이다.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 강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솔로 플레이였다.
요 근래 팀플레이를 몇 번 하긴 했지만, 다시 기존 방향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솔플로 공략할 만한 던전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서다. 특히 일본 쪽으로는 더더욱.
"버퍼는 전장의 꽃이라고 생각해. 한 번도 하찮게 생각한 적 없다. 넌 대단한 거야."
"형 같은 암살자면 정말 존경해도 된다고 생각해. 워낙 폼만 잡는 암살자가 많아서. 없던 암살자 포비아까지 생길 것 같았거든."
탁!
강후와 박동재가 서로를 향한 존경을 주먹 인사로 담았다.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인정이었다.
그로부터 5분 후.
"메인 디쉬네."
"후우. 4인이 아니라 2인 공략이라서 좀 쫄리기는 하는데. 형만 믿고 갈게."
"거리 유지 잘해. 놈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대신 나서려고 하지 말고."
"알겠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동재가 열 걸음은 뒤로 쭉 물러섰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버퍼인 박동재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앞서 공략 중에 위험에 처했을 때도, 강후가 납치 스킬로 구해 준 적이 있었다.
멀리서 바로 구할 방법이 없으니, 납치로 오히려 위험 지역 탈출을 도왔던 것이다.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로슈.
인간형이고 격투계다.
어찌 보면 강동현과 유사한 계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강동현은 여기에 검도 쓰지만.
[이기적 탐닉]
강후의 시선은 로슈를 마주한 때부터 녀석에게 강탈할 수 있는 스킬 이름에 계속 꽂혀 있었다.
이기적 탐닉.
이 던전을 꼭 오고 싶었던 이유에 너무 딱 들어맞는 최고의 버프 보조 스킬이었다.
131화 버프 (3)
로슈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전투를 시작하면 반드시 자신과 적에게 동시에 버프를 건다.
몸에 빨강, 노랑, 초록색 형태의 오오라가 생기기 때문에 보통 신호등 버프라고 부른다.
각 버프는 특징이 있는데,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버프가 될 수도, 디버프가 될 수도 있었다.
우선 빨간색은 공격 대미지가 2배 늘어나지만, 상대에게 받는 대미지도 똑같이 2배 늘어난다.
노란색은 마나 소모량을 평소보다 2배 증가시키는 대신, 스킬 쿨타임을 반으로 줄인다.
초록색은 즉사 포인트를 활성화한다. 비정상적으로 대미지가 들어가는 포인트가 생기는 셈.
이건 스킬이라기 보다는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버프라서 강탈은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전투에 있어 상당한 변수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로슈가 즐겨 쓰는 스킬 '이기적 탐닉'은 자신의 버프 스킬 효율을 증폭시킨다.
그런 이유로 신호등 버프에 이기적 탐닉이 연계되면, 그야말로 지옥이 펼쳐지는 셈이 된다.
그때, 박동재가 말했다.
"형, 버프를 어떤 쪽으로 맞출까?"
"네 페이스대로 가!"
강후는 선택권을 박동재에게 줬다. 버퍼는 능동적이어야 한다.
긴박한 전투 현장에서 전투원과 버퍼가 매번 원하는 버프의 형태를 교감할 수는 없다.
척하면 딱이라는 말이 가장 잘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 버퍼인 것이다.
하지만 그간 박동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수동적인 생각으로 임해왔던 듯했다.
아마 그것은 박동재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를 다뤄온 팀원들의 문제였을 것이다.
강후는 박동재를 믿었다.
그는 생각할 줄 아는 버퍼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을 즐기는 버퍼니까.
"후하! 후!"
강후를 본 로슈가 양손을 원투 펀치를 날리는 시늉을 하며, 호흡을 골랐다.
강후는 만약을 대비해 매드 솔라키움을 입에 물었다. 먹진 않았지만,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초록색 버프가 뜰 때까지는 일단 버틴다.'
방향성은 확실히 정했다.
로슈는 분명히 자신보다 강하고 내구성 높은 몬스터이기에 정면 승부는 좋지 않다.
빨간 버프로 등가교환이 성립되기 힘들다. 그리고 노란 버프는 딱히 매력적이지 않다.
신중하게 움직이려는 강후의 생각을 읽었는지, 로슈가 지면을 박차며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빨간 버프에 이기적 탐닉을 걸어, 극대화된 대미지 효과를 누리겠다는 녀석의 계산이었다.
[환영술]
[분신술]
동시에 두 스킬을 썼다.
강후를 중심으로 나선으로 퍼져 나온 환영 사이에 분신이 자연스럽게 섞였다.
자신의 몸에 있는 작은 티끌까지 파악하고 있는 강후이기에 분신과 환영의 모습은 똑같았다.
"후후!"
하지만 로슈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우측 측면에 보이던 강후에게.
쉬이이익! 퍼억!
전력으로 어퍼컷을 날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확신에 찬 한 방이었다.
근거는 있었다.
유일하게 우측 측면에 있던 강후만 단검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뻐어억!
턱 아래부터 정확히 들어간 어퍼컷이 뼈를 으스러뜨리는 소리를 내며 강후의 몸을 하늘로 날렸다.
그리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강후의 몸을 향해 이미 로슈의 라이트 펀치가 작렬하고 있었다.
그때.
"큿!"
펀치를 날리려던 로슈의 몸뚱이가 갑자기 스프링에 튕긴 것처럼 뒤로 쭉 끌려왔다.
납치였다.
로슈가 방금 시원하게 올려친 것은 강후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푸우욱!
"끄허어어!"
허리 뒤쪽에서 묵직하게 찌르며 들어온 강후의 단검이 로슈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단검을 찔러넣는 순간에 대참수를 곧바로 연계했기에 녀석의 몸으로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크허! 으허!"
로슈가 정신없이 사방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최대한 강후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애썼다.
일격을 먹이기는 했어도 여전히 위협적인 녀석인 만큼, 강후도 여기서 턴을 더 쓰진 않았다.
녀석의 품으로 휘말려 들어갔다가는 역공에 뼈도 못 추리고 당할 수 있어서다.
녀석은 아주 멍청한 몬스터도 아니고, 지나치게 똑똑한 몬스터도 아니었다.
'적당히' 생각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강후도 지능을 무턱대고 낮게 보진 않았다.
그때.
"와. 나도 속았네."
멀리서 강후에게 가속 버프 위주로 걸어 주면서 전투를 지켜보던 박동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동재 역시, 단검을 들고 있던 강후의 형상을 본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환영과 강후의 분신(으로 생각했던 본신)은 단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
'아, 일부러?'
똑똑한 박동재는 곧바로 강후의 전략을 파악했다.
의도적으로 가짜인 척 한 것이다. 누가 봐도 가짜인 것이 너무 뻔해서 의심할 생각조차 안 들게.
"...."
강후의 전략을 파악하고 나니, 박동재는 순간 손등을 따라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생각을 한번 꼬아서 기출 변형으로 선택지를 낼 줄이야. 어설프게 똑똑하면 당하기 딱 좋다.
"칫!"
로슈가 강후에게 단거리 이동을 하며 붙으려던 스킬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헌터였다면 순간적으로 단거리로 이동하는 스킬, 일명 '블링크'를 써서 붙었겠지만.
강후의 다섯 번째 성좌 효과로 억제되고 있는 탓에 스킬 자체가 아예 구현되지 않았다.
"우호오오!"
로슈가 정면승부를 선택했다.
이번에는 사방으로 강렬한 충격파를 발산하며, 강후를 거칠게 덮쳐오기 시작했다.
"음."
환영술을 쓰려던 강후가 멈칫했다.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라, 마력의 흐름을 비트는 충격파였다.
즉, 지금은 환영술을 쓴다고 해도 환영이 만들어지는 즉시 무력화될 가능성이 컸다.
괜히 수 싸움을 하려다가, 선택지가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
로슈의 돌격은 거셌다.
이기적 탐닉의 버프 증폭을 가속에다가 걸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좁혀졌다.
[그림자 걸음]
이번에는 강후가 자신의 후방으로 다섯 개의 그림자를 쭉 날려 보냈다.
강후의 본체가 정면에서 들어오는 충격파의 흐름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강후의 본체를 벽으로 삼아 일렬로 뒤로 뻗어 나간 그림자는 충격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진짜 빠르다.'
박동재가 풀 버프 상태를 유지해 주고 있어 그나마 움직임을 쫓을 수 있는 상황.
버퍼 없이 왔다면, 강후는 진즉에 한 줌의 뼛가루가 되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공략 인원수를 늘린다면야 쉽게 잡을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래서는 성장의 효율이 떨어진다.
이 정도의 까다로움은 늘 고정값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할 듯했다.
"우화앗!"
강후의 코앞까지 쇄도해 들어온 로슈가 이번에는 상단에서 주먹을 내리찍는 형태로 들어왔다.
처음부터 강후는 로슈의 공격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철저하게 피할 생각만 있었을 뿐.
파팟.
그림자 걸음을 활용한 위치 전환으로 로슈의 첫 공격을 쉽게 피해냈다. 너무 깔끔하다 싶을 만큼.
"크으읏...!"
바짝 약이 오른 듯한 로슈가 걸쭉한 침을 흘렸다.
나름 신경 쓴 한 방이었는데 허공에 휘저은 결과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웨이!"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로슈가 이번에는 두 다리에 있는 힘껏 힘을 줬다.
도약 직전의 동작이다.
인간형 몬스터는 철저하게 인간의 움직임을 따라가므로, 미리 노림수를 읽을 수 있었다.
쿠와앙!
공간을 가르면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싶을 만큼, 거의 소닉붐에 가까운 굉음이 들렸다.
독기가 잔뜩 오른 로슈는 아예 스트레이트 펀치를 내뻗으며 강후의 몸통을 노리고 있었다.
파팟!
아직 남아 있는 그림자 중에 하나를 활용한 회피가 다시 먹혔다.
앞서서 로슈가 뿜어낸 충격파의 영향은 사라진 이후라, 그림자들을 사방으로 분산시킨 상태였다.
"으에에엑!"
쾅쾅!
두 번의 일격이 연이어 실패로 돌아가자, 울화가 뻗칠 대로 뻗친 로슈가 지면을 내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강후의 그림자만 열심히 쫓으며, 허공에 삽질을 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히든 스킬은 안 되겠네.'
강후가 냉정하게 판단했다.
일격필살의 유혹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지만, 로슈는 움직임이 정말 빠른 녀석이었다.
재수 없으면 준비 단계에서 바로 덮쳐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즉사를 면하기 어렵고.
그래서 강후가 선택한 것은.
[처세술]
방금 전에 로슈가 활용한 공격 스킬 중 하나를 처세술로 가져다 쓰는 것이었다.
선택한 것은 로슈가 첫 공격에 써먹었던 어퍼컷, 정식 스킬 명은 올려치기였다.
바로 그때.
시잉. 시잉. 시잉.
기분 나쁜 울음소리와 함께 강후와 로슈의 몸에 동시에 초록 버프가 걸렸다.
즉사 포인트의 활성화.
로슈는 턱 아래에 만들어졌고, 강후는 복부 한가운데에 점이 찍혔다.
"크워!"
다음을 생각할 겨를 없이, 강후의 배에 찍힌 점을 본 로슈가 재차 도약했다.
온 힘을 다한 공격과 도약의 반복으로 로슈도 과부하가 잔뜩 걸려 있었지만.
눈앞에서 자꾸 약 올리는 인간을 죽이겠다는 집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니, 일부러 무시했다.
로슈의 도약을 확인한 강후가 이번에도 그림자 하나를 선택해서 위치를 바꿨다.
아직 그림자의 여유가 있는 만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회피 기동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흐아!"
로슈가 강후의 위치를 바꾼 그림자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무릎 관절에서 우득하고 소리가 날 만큼 급선회였지만, 그 자체가 로슈의 노림수였다.
"...!"
역으로 허를 찌르고 들어온 로슈의 노림수에 강후의 두 눈이 평소와 달리 커졌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당한다.
하지만.
[신속 회피]
강후가 실로 오랜만에 기본 스킬을 꺼내 들었다.
바로 신속 회피였다.
그 이유는 명확히 있었다.
[회피 기동 중에는 저항의 장막 효과가 활성화됩니다. 스킬에 대한 회피율이 상승합니다.]
타이밍을 맞추면, 저항의 장막 효과를 보면서 회피율이 크게 상승하는 효과를 볼 수 있어서다.
회피율이 크게 오른다는 건, 적의 공격을 정타로 맞을 확률을 매우 낮춘다는 뜻도 됐다.
신속 회피로 강후가 이동한 거리는 약 75cm.
로슈의 올려치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는 거리였다.
사실 더 넉넉하게 피할 수도 있었지만, 강후는 자신이 계산한 거리감을 정확히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틀린다면...?
호신을 써서 한 턴은 버틸 생각이었다. 목숨을 지킬 보험이 있으니 과감하게 수를 던져본 것이다.
후웅!
"읏!"
엄지손가락 한 마디 차이라고 해도 될 만큼, 미세한 차로 로슈의 주먹이 얼굴 앞을 훑고 갔다.
순간 강후의 얼굴이 바람에 휘말려 일그러질 만큼 강력한 바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로슈의 공격은 실패했다. 아쉽게 빗나갔든 그렇지 않았든 말이다.
[처세술 – 올려치기]
[대참수]
그리고 강후의 턴이 왔다.
쉬이이익! 푸슉!
올려치기와 함께 연계된 대참수 스킬이 순식간에 로슈의 턱 아래를 뚫고 들어갔다.
초록색 버프 때문에 즉사 포인트로 지정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꼭 즉사 포인트가 아니더라도, 일격을 당하면 얼굴 안쪽이 걸레짝이 될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끄엑!"
턱뼈를 부수고 근육과 혀를 비집고 들어간 강후의 단검이 로슈의 뇌까지 타격을 입혔다.
완벽한 한 방을 위해 판을 크게 짜고 기다린, 강후의 노림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미쳤다, 미쳤어...."
저 멀리서.
박동재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던 승리의 그림. 강후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던 모양이었다.
132화 제주도 (1)
* * *
로슈를 죽이고.
마석과 전리품 뒷수습을 끝마친 강후와 박동재는 던전 밖으로 나와 시내로 향했다.
강후는 경주 시내에 머물 호텔을 잡아둔 데다가, 박동재도 시내로 가야 하는 동선이어서다.
가는 길에 있던 마켓에서 갖고 있던 물품들을 전부 팔았다.
예전에 팔지 못한 부수적인 것들부터 해서, 이번에 던전에서 얻은 것까지 싹 팔고 나니.
약 50억 원 정도의 잔고가 확보됐다. 한때 천억 원도 넘었던 잔고를 생각하면 아쉽기는 했다.
레벨은 110.
오름세는 쏙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런 형태가 네임드의 성장 방식이기도 했다.
경험치를 독식 혹은 최소 분배로 유지하면서 급성장을 하는 과정 말이다.
열세 개의 별을 비롯한 많은 네임드는 거의 정석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 루트를 따라갔다.
후발주자인 강후의 입장에선 그들보다 더 폭넓게, 빨리 따라가야 하는 만큼 더 부지런해야 한다.
박동재가 마켓에서 몇 가지 아이템들을 판매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는 동안.
강후는 보스 몬스터 로슈를 죽이고 강탈한 스킬을 살피고 있었다. 상당히 중요한 스킬이다.
[이기적 탐닉]
[스킬 숙련도 : Lv. Max]
[자신에게 걸린 버프 스킬 하나를 지정해서, 해당 버프의 효율을 300% 증가시킵니다.]
로슈가 이것을 이용해서 가속에 이기적 탐닉을 걸었다. 그래서 강후도 아차 싶을 정도의 엄청난 속도가 나왔던 것이다.
강후가 노리는 것도 마찬가지.
기존에 자신이 가진 가속 스킬에 박동재의 가속 버프, 여기에 이기적 탐닉까지 걸어준다면?
말도 안 되는 미친 속도가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전제가 하나 있기는 하다. 몸이 버텨줘야 한다는 것. 버티지 못하면 안 쓰느니만 못하니까.
어쨌든 무리를 감수하고라도 쓸 수 있는가, 아예 불가능한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게다가 꼭 가속이 아니더라도,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버프는 얼마든지 많다.
체력 회복을 극대화할 수도 있고, 스킬 쿨타임을 극적으로 줄일 수도 있다.
'이기적 탐닉이라는 스킬 자체가 사기지. 보스 전용이니까 특성으로 퍼준 건데, 이게 차원 강탈자 특성으로 빼앗을 수 있으니까 밸런스 붕괴가 되는 느낌이랄까.'
강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원작에서 적당히 디테일했던 것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만약에 밸런스를 꽉 잡아준답시고, 로슈에게 이런 스킬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강후가 이득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좀 씁쓸하기도 하군.'
옅은 미소는 이내 쓴웃음이 됐다.
직접 이 세계에서 살아 숨 쉬면서, 새삼스럽게 원작의 빈틈을 느끼는 것이 많아서다.
신강후의 입장에서야 반길 만한 일이지만, 과연 원작자로 소설에 진심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생각지도 않게 얻은 인기에 취해서, 너무 느슨하게 생각한 것도 있었지.'
그때는 어떤 내용을 써도, 그리고 그 내용이 좀 허술하더라도 독자들이 환호해 줄 거라 생각했다.
부역자 엔딩을 냈을 때도 마찬가지. 오히려 독자들이 기발한 결말이라며 박수를 쳐줄 줄 알았다.
'독자들은 해피 엔딩을 원했고. 독자에게 작가가 그 누구보다 진심인 글을 원했지. 나만 다른 생각에 취해 있었던 거야. 거만하게도.'
이미 지난 전생의 삶이 되어버린 얘기지만, 강후는 그 부분에서도 교훈을 얻기로 했다.
지금 자신의 상황에 충분히 적용해 볼 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능력에 만족하고 느슨하게 생각한다면, 언제든 이 세계의 어둠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이 순간.
장시환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도 자신은 죽는다.
아주아주 운이 좋아서 장시환을 죽인다고 해도, 자신 역시 죽음을 피하긴 어려울 터다.
최소 기대치가 '사망'이다. 최대는 흔적도 없이, 시체마저 소멸되어 죽는 굴욕을 맞이하는 거고.
어쨌든.
이기적 탐닉 덕분에 앞으로 박동재의 버프를 더 극대화해서 누릴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자체 버프 스킬이 생기면, 그것대로 유용하게 연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이번 로슈 공략은 정말 의미가 컸다. 게다가 강후 소유의 던전이기도 해서 더 뜻깊기도 했고.
그때, 판매와 구매를 전부 마치고 나온 박동재가 강후에게 말을 걸었다.
"형! 많이 기다렸지?"
"아니. 레벨이랑 경험치 상태를 좀 살피고 있었어. 마침 잘 나왔네."
"형 지금 레벨이?"
"110."
"진짜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라고 하기 딱 좋은 숫자다. 솔직히 310이라고 해도 믿을걸?"
"립서비스가 좋네."
"아니, 진짜 그렇다니까. 형, 내가 손발을 맞춰본 고렙 헌터가 한둘이 아닌 건 알잖아."
허풍은 아니다.
박동재는 충분히 고레벨 헌터들이 찾을 가치가 있는 버퍼였다.
강후도 이번에 합을 맞춰 보면서 느꼈다. 박동재, 이놈이 진국이라는 것을.
"그래, 읊어봐."
강후가 팔짱을 끼고서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박동재를 지켜보았다. 무슨 칭찬을 늘어놓을까.
"형은 말야. 버프를 받으면, 그것에 맞게 전투 콘셉트를 바로 바꿔. 가속이면 기동전을 하고."
"집중이면 적의 공격을 회피하면서 흘려내는 쪽으로 가지."
"응, 맞아! 그거라니까. 버프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움직임을 짜니까, 화력이 더 좋아지는 거야."
"다른 헌터는 아닌 모양이지?"
"십중팔구는 그냥 딜뻥 버프 셔틀하라고 해. 버프로 뽕맛 보겠다 이거지. 그게 폼도 나잖아."
"전투를 폼으로 하는 건 아닐 텐데."
"생각보다 눈에 보이는 것에 과몰입하는 헌터가 많아. 복잡하게 버프까지 신경 쓰기도 싫어해."
"너무 날먹이군."
"내 말이."
박동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의미에서 강후는 자신으로 하여금 단순 버프 셔틀이 아니라,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해 줬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자신이 '버퍼'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 줬던 것이다.
누군가는 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박동재에게 자신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봐 준 외부인은 강후가 처음이었다.
"타성에 젖은 전투는 언젠가 사고가 나기 마련이지. 난 그런 전투는 원하지 않아."
"그래서! 형이랑은 당분간 연락 순위를 1순위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갈 던전만 있다면야 언제든."
"걱정 마. 생각보다 내가 인맥이 넓거든. 타협만 잘 보면, 다른 사람 소유의 던전에 가 볼 수도 있을 거야."
"그건 신세 좀 져도 될까?"
"형이 날 구해 준 목숨값에 비하면 한참 싼 거지. 맡겨 줘!"
하찮은(?) 가슴까지 퍽퍽 치며 어필하는 박동재의 모습에 강후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고. 때론 바보 같고 맹한 구석도 있달까?
정유리 같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박동재에게도 분명 있었다.
* * *
박동재와는 그 길로 헤어졌다.
원래는 시내의 호텔로 와서 시원하게 칵테일이라도 한잔할까 했지만.
전세혁과 반세영이 긴급히 박동재를 호출했던 것이다. 그들끼리의 던전 공략 일정이 있는 모양.
그래서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반신욕을 하며, 욕실 내 TV로 헌터 뉴스를 보고 있었다.
역시 오늘도 속보는 제약사 관련 이슈로 잔뜩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폭발이 아니라.
전동 제약의 핵심 수석 연구원이 안전 가옥으로 이동하던 중에 기습으로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내부자군."
100% 내부자와의 합작품이다.
수석 연구원이 탄 차, 혹은 그 곁을 지키면서 호위하던 차에 탑승한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을 터.
헌터 치안청에서는 무분별한 테러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연구원을 납치, 살해하는 헌터들에게 엄벌을 내리겠다고 연일 공식 입장을 냈지만.
종이호랑이의 하찮은 포효에 겁먹을 무법자는 안타깝지만, 없다. 그저 안줏거리만 되고 말 뿐이지.
그때.
이예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 선규 씨! 아니, 이제는 신강후 씨라고 불러도 되겠죠?
"편할 대로 하시죠. 저는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쪽이 헷갈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강후가 이미 지인들에게 본명에 대해 알려 둔 터라, 그들의 반응이 새삼스럽진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강후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제약사 건에 관련된 의뢰는 보류하겠다고 했는데요."
- 아! 안 그래도 그쪽은 전부 딜레이 해 놨어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그러면?"
- 제약사 관련 건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의 용병 요청 건이 들어와서요.
"뭔가요?"
- 출혈 딜러를 구하는 공격대의 의뢰에요. 꾸준히 출혈을 유지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네요.
"보수는?"
- 착수 50억, 잔금 50억. 그리고 보스 몬스터의 드롭 아이템에 대한 최우선 선택권 1회요.
"음."
솔깃한 제안이다.
물론 일차적인 판단이 그렇고,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
- 던전의 레벨 수준은 350에서 400대예요. 공격대는 총 9명이고, 한 자리를 더 구하는 거죠.
"의뢰처가 어딘지 공개 가능합니까?"
- 네. 제주도의 그루 길드에요. 아시죠? 제주도를 꽉 잡고 있는 길드.
"물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루 길드.
제주도 내 모든 이권을 독식하고 있는 길드로 국적이 다양한 길드원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이한 부분은 공개적으로 '완벽한 중립'을 천명한 길드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화 길드에 협조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협조적인 것도 아니었고.
동시에 정화 길드원이라고 해서 도내의 활동에 프리패스를 준다거나 하는 특혜를 주지도 않았다.
즉, 그루 길드원이 아니면 모든 외부인에 대해서는 똑같은 잣대로 대하는 구조였다.
원작에서는 그런 이유로 주인공 장시환과 그루 길드가 엮일 일이 크게 없었다.
장시환에게 악감정도, 호감정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예 제주도 밖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 어때요? 흥미가 좀 동하지 않아요? 대미지 딜링이 아니라 출혈 쪽이면 지금 강후 씨의 수준이면 문제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콜?
"잠깐."
이예린 특유의 빠른 추진에 휘말릴 뻔한 흐름에 강후가 제동을 걸었다.
괜찮은 조건인 것은 맞지만, 너무 이야기가 쉽게 풀린다.
일단 던전 레벨 수준이 높은 것은 둘째치고, 최근 용병 품귀 현상이 심하다는 이슈가 있다.
게다가 보스 몬스터의 드롭 아이템에 대한 최우선 선택권을 양보할 정도라는 것은....
그만큼 던전 자체가 까다롭다는 뜻도 된다.
용병 품귀로 몸값이 올랐는데, 그 용병이 가야 할 던전의 수준까지 높다?
협상 테이블을 다시 짜야 한다.
강후가 말을 이었다.
"조건을 조정하죠. 착수, 잔금 각각 두 배씩 올리고. 미들 보스도 우선권 하나 받기로."
- 끅....
이예린이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은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중간 조율하고 수수료를 챙겨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선 너무 과격하다 싶은 거겠지.
하지만 지금은 의뢰를 요청하는 쪽이 철저하게 을이다. 공급과 수요의 논리가 깨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기 위해서, 이야기를 수월하게 만들 카드를 하나 던져줬다.
"어필 하나 하죠. 출혈은 안 끊기게 유지할 자신 있습니다. 그것도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 바로 협의해 볼게요.
재협상이 시작됐다.
133화 제주도 (2)
* * *
꽤 긴 통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예린과 의뢰인의 통화는 금방 끝났다.
전화를 여러 개 쓰는 그녀였기에 아주 작게 들리긴 했지만, 통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맥락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내 이예린이 말을 이었다.
- 협상이 끝났어요.
"뭐라 하던가요?"
- 전부 다 수용하겠다고 하네요. 대신 출혈 유지가 안 되면 원래 제안대로 하겠다고 해요.
"말에 책임을 지라는 거군요."
- 밥값 하라는 거죠.
"수락하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내게 원하는 게 대미지 딜링은 아닌 듯하니."
- 맞아요.
"제게는 단순한 문젭니다."
- 착수는 언제로 통보할까요?
"날 밝는 대로 바로 제주 공항으로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오전 8시쯤 되겠네요."
- 강후 씨는 전부터 그랬지만, 참 행동이 빨라서 좋아요. 머뭇거리지를 않는단 말이죠?
"좋은 의뢰꾼 뒀다고 생각하십쇼."
- 그럼 바로 관련 자료 보낼게요. 내일 만나야 할 사람에 대한 정보까지.
"네."
통화가 끝났다.
전화하는 내내 자꾸 진동이 울려서 뭔가 했더니, 윤상미에게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오빠가 신강후였어요?]
[서연 언니가 예전에 오빠 얘기를 했었거든요. 저도 오빠 얘기를 했었는데!]
[그땐 저는 선규로 알았고, 언니는 강후로 알았고 말이에요. 지금 생각하니 같은 사람을 가지고 다른 이름으로 말하고 있었네?]
[방금 서연 언니랑 통화했어요. 이거 괜찮겠어요? 이클립스에 제대로 찍혔는데?]
답장이 없었음에도 뚝심있게 할 말을 다 적어낸 윤상미의 근성을 보니 꽤 심심했던 모양이다.
강후가 답장을 보냈다.
[이클립스 홈페이지 가서 척살 명단 봐. 모가지가 몇 개 걸려 있나. 나 빼고도 200개는 넘게 걸려 있어. 걱정하지 마.]
[하긴. 그리고 오빠라면 위험해질 것 같지도 않긴 해요.]
[아! 지난번에 간호해 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본 간호였거든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했으면 좋겠군. 됐고, 잘 지내고 있어. 또 보자.]
[오빠도 조심해요.]
짧은 문자 대화이긴 했지만, 나름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 윤상미의 마음은 정말 고마웠다.
진심 어린 걱정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분명, 따뜻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빨리 눈을 좀 붙여야겠군."
강후가 바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클래식을 틀고는 잠을 청했다.
성좌 효과를 듬뿍 받아서 회복에 박차를 가할 시간이다.
* * *
그 시각.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백선태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수 군벌 '자강' 소속인 백선태가 타 지역 소식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악명이 꽤 높은 이클립스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클립스에서 매월 공지하는 척살 대상 명단을 늘 흥미롭게 지켜보곤 했다.
보통 거기에 이름이 올라왔다는 것은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상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척살 명단에 오르기 전에 조사관, 사냥개로 대표되는 자들에게 모두 제거 당한다.
한데 바로 그때.
"어?"
최신 목록으로 업데이트된 사람의 얼굴이 너무 익숙했다.
정선규라고 알고 있었던 남자.
같은 암살자이면서 동시에 백선태로 하여금,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던 남자.
그 사람이 척살 명단에 등재되어 있었다. 그것도 신강후라는 본명으로.
"선규 님, 아니 강후 님이 차소희랑 진효영을... 죽였어? 아니, 그것보다 차소희가 언제 죽었지?"
세상 소식에 눈이 어두우면 이렇게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다.
차소희가 죽은 것은 한참 전이었지만, 대외비로 관리되고 있던 탓에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차소희는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뛰어난 화염 활용 능력에 혀를 내둘렀던 헌터였다.
백선태로서는 저런 화염계 능력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졌을 정도.
강동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사냥개가 강후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진효영도 마찬가지고.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처음 강후를 봤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었다.
"연락 좀 해 주지, 진짜 안 주시네....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말 예술이었는데."
강후가 일방적으로 받아가기만 한 자신의 연락처와 SNS는 아직까지 조용했다.
내심 연락이 좀 일찍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러다가는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여수 생활을 청산할까. 재미도 없고, 골목대장 노릇도 지겨운데."
습관적으로 캔맥주를 입에 갖다 댄 백선태의 눈빛이 깊어졌다.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여수는 자신에게 좁았다.
그리고 왠지.
강후를 따라가면 정체된 지금의 성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강후라면 뭔가 자신과는 다른 길을 알고 있을 듯했다.
* * *
새벽을 가득 메웠던 어둠이 걷히고, 동쪽 하늘부터 조금씩 붉은 하늘이 고개를 내밀 즈음.
오전으로 예약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돌아가려던 에밀리아가 잠갔던 캐리어를 다시 열었다.
일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일정을 취소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바꾼 것은 통화하고 있는 상대였다.
"빈센트, 갑자기 여기에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는 건데?"
바로 빈센트 마이어였다.
열세 개의 별의 같은 구성원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물론 가깝지는 않았다.
서로 진심을 드러내놓은 적은 없었으니까.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까웠다.
- 엘과 갈 거야. 한국 여행도 좀 하고, 이왕이면 볼 수 있는 얼굴들도 좀 볼까 해서.
"그러고 보니 한국에 좀 많이 모여있긴 하지? 케이시도 정화 길드와 협약을 맺고, 그쪽 던전을 공략 중이고...."
- 유청화도 계속 있고 말이야. 장시환이랑 채관형은 기다리면 던전에서 나올 거고. 여차하면 타카시도 부를 수 있지 않나?
"그 히키코모리는 밖에 안 나와. 와도 무조건 분신이 오지."
- 분신이 오는 게 본체가 오는 거니까. 그게 그거다.
"이것 참. 미리 얘기 좀 해 주지, 갑자기 일정을 잡으면 어떻게 해?"
- 취소한 비행깃값은 두 배로 물어 주지. 그러니까 잠깐 딜레이시켜. 얼굴 좀 보자고.
"알았어. 서울 오는 대로 연락해. 엘리자베스 님과는 처음 인사하게 되겠네."
- 엘도 너에 대해서 기대가 커. 네가 자기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했단 말이지?
"이상한 데서 싸움 붙이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 이제 곧 이륙이야. 내리면 보자고.
생각보다 자리가 커질 듯했다.
장시환, 채관형, 유청화, 케이시 렉스, 엘리자베스, 빈센트 마이어, 그리고 자신까지.
최소 일곱 명의 참여가 확정적이다. 여차하면 일본에서 타카시를 부를 수도 있고.
동료들을 만나는 일이야 즐겁지만, 빈센트가 왜 한국에 오는지는 궁금했다.
그는 단지 사람이 보고 싶다고 훌쩍 여행을 오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볼 일이 있어야 한다.
어딘가에 꽂힌 것은 맞는데, 그게 뭘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애들 맞이 음식이나 할까?"
평소에도 요리를 즐기는 에밀리아였기에 간만에 요리 실력이나 발휘할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뉴 페이스로 이번에 구성원으로 합류한 엘리자베스의 반응을 보고 싶기도 했다.
구원의 성녀는 진실일까 아니면 위선일까? 에밀리아는 99%의 확률로 후자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은 진실보다 진실처럼 연기하는 것이 훨씬 더 잘 먹히는 빌어먹을 세상이기 때문이다.
* * *
아침.
예정했던 대로 제주 공항에 도착한 강후는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포근한 기운에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시내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온몸을 감싸는 온화한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평화롭고 아늑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마치 마법 같았다.
공항은 헌터 치안청과 그루 길드가 연계하여 수속을 밟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워낙 강도 높은 보안 기준을 적용하다 보니, 검문 검색 단계에서 범죄자들이 대거 적발됐다.
강후가 막 들어선 시점에도 이미 두 명의 헌터가 수갑을 찬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 내에 다수 비치된 전광판에는 방금 체포된 헌터의 정보와 범죄 목록이 적혀 있었다.
[오대기]
[강원도 정선의 공설 도박장에서 헌터 '김석'에게 상해를 입히고, 10억 원을 탈취하여 도주.]
[도주광]
[서울역으로 향하는 KTX 열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성 승객을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도주.]
보통 헌터 치안청에 접수된 혐의가 기록되기 마련인데, 두 헌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후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은 죽음이나, 죽어 마땅한 상대를 죽였을 경우에는 혐의가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혐의가 있더라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어쨌든 강후는 문제 될 것이 없어 금방 수속을 밟고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공항 근처에서는 다수의 길드가 홍보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채집, 채굴, 탐험 전문 길드였다.
아마 핵심 요소는 그루 길드가 독점하고, 나머지를 하청 형태로 처리하는 식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적극적인 모집 행위가 허용될 리 없다.
바로 그때.
"신강후 씨, 여깁니다!"
강후를 알아본 그루 길드의 관계자가 이름을 불렀다.
시선을 돌리니, 그루 길드의 상징 문양이기도 한 월계수를 그린 견장을 찬 남자가 있었다.
"그쪽이?"
"네, 맞습니다. 그루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만남 장소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남자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는 조심스럽게 강후가 가야 할 위치를 가리켰다.
그러자 전에 정유리 덕분에 한 번 타본 적 있는 안전 리무진이 준비되어 있었다.
강후를 태우고 난 뒤,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앞서 받으신 자료가 있겠지만, 가독성을 좀 더 높여서 정리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셔도 됩니다."
남자가 건넨 것은 앞서 받은 것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였다.
"감사합니다."
"현장까지 조용히 모시겠습니다. 제가 필요하시면 벨을 눌러 주십시오. 그럼."
이내 운전석과 조수석이 완벽하게 방음, 차단되는 내부 차단막이 올라왔다.
동시에 결계도 활성화됐다.
외부 방음과 방탄까지 확실하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루 길드 나름의 배려가 느껴졌다.
다시 내용을 살폈다.
앞서 숙지한 대로 함께하게 될 구성원은 9명이었다. 강후를 포함하면 총 10명이 된다.
구성은 전형적인 화력 조합이었다.
탱커 한 명에 마법사 넷, 궁수 넷.
보통 이런 형태를 극딜 팟이라고 부른다. 대미지 딜링에 집중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유일한 근거리 딜러이자 어그로의 핵심인 탱커?
아니다.
"출혈이 없으면 아홉 명 다 병신 되는 거지."
바로 강후 같은 출혈 딜러의 존재였다. 이 조합에는 가장 중요한 퍼즐이 빠져 있었다.
134화 제주도 (3)
* * *
강후가 원작에서는 깊게 다뤄진 적 없는 제주도의 풍경과 흐름을 보며 신기해하는 동안.
출혈 딜러, 강후의 도착을 기다리는 그루 길드의 공격대원들은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격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마진호라는 남자였다.
현재 해외 활동 중인 길드 마스터, 부 길드 마스터를 대행하고 있는 3인자이기도 하다.
마진호는 레벨 435의 메인 탱커로 온몸이 근육 그 자체인 탱킹의 교과서와도 같았다.
"이 망할 놈의 출혈 옵션은 왜 암살자와 광전사만 다루기가 쉽게 되어 있냔 말이지."
마진호가 볼멘소리를 냈다.
다른 직업군도 출혈 효과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지속 시간이 매우 짧고 스킬 쿨타임이 길었다.
출혈 효과라는 것은 검으로 베어서 피를 흘리게 만드는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순리고, 피를 흘리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회복과 치유를 억제해야 한다.
이는 클래스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암살자와 광전사의 레벨 200 기본 스킬이 출혈 계열의 스킬이었다. 상시 활용 가능한 형태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했다.
암살자의 기본 스킬 중 하나인 가속 찌르기가 최대 숙련도를 달성하면 '출혈 찌르기'가 된다.
하지만 말이 쉽지, 숙련도 최대를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고된 작업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가속 찌르기의 숙련도 최대를 찍는 것보다 레벨 200 달성이 더 빠를 터였다.
"대장, 출혈 옵션이 많이 있대요?"
"일단 가속 찌르기가 아니라 출혈 찌르기를 가지고 있고."
"헐... 레벨이 100을 넘긴 지도 얼마 안 되었다면서, 숙련도 최대를 벌써 찍은 거예요?"
"그렇다고 하네. 의뢰까지 받는 마당에 허풍떨 리 없지. 이예린이 그럴 사람을 소개하지도 않고."
"하루 종일 밥만 먹고 찌르기 연습만 했나?"
"어쨌든 그게 베이스인 것 같고. 거기에 출혈 상태를 더 악화, 강화하는 옵션도 있다고 해."
"아이템이에요?"
"디테일한 부분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보니, 저렇게 뭉뚱그려 설명을 해 놨다."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스펙이 상당한 데요?"
"그러게. 레벨이 너무 낮은 게 흠이긴 하다만, 우리가 대미지 딜러를 요청한 건 아니니까."
"진짜 출혈 딜러 구하기가 힐러보다도 어렵네요. 진짜 귀하네요. 내부 육성은 너무 어렵고."
"내 말이."
마진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루 길드에서 출혈 딜러 육성을 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매번 외부 용병만 구할 수도 없고, 오래전부터 길드 차원에서 공을 많이 들여왔다.
하지만 암살자와 광전사는 기본적으로 근접전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위험 노출도가 높았다.
더군다나 핵심 과제가 '출혈 유지'가 되면,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타깃과 가까이 붙어야 했다.
여기서 늘 희생자가 발생했다.
출혈 딜러는 때로는 적극적으로 타깃에게 붙어서 출혈 유지에 공을 들여야 하는 만큼.
고위험의 상황이 밥 먹듯이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이를 견뎌낸 인재가 없었다.
출혈 딜러를 구하지 못하는 고레벨 공격대는 그런 이유로 출혈이 필요하지 않은 던전을 찾았다.
당연히 미봉책이다.
출혈이 없는 던전은 곧 레벨 수준이 낮은 던전임을 의미하고, 그만큼 보상이 떨어졌다.
안전하고 쉽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성장 동력을 크게 잃게 되는 셈이다.
"어? 신강후라는 사람, 이번에 이클립스에서 척살 명단 리스트에 올라갔네요?"
"어제 다 했었던 얘기다, 지훈아...."
"아, 죄송합니다. 어제 졸았나 봐요."
"집중해. 긴장을 풀라고는 했지만, 정신을 놓으라고 하진 않았다."
"예, 죄송합니다."
지훈이라는 공격대원이 뒷북으로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이것 때문에 다들 강후를 궁금해했다.
이클립스를 싫어하긴 해도, 어지간해서는 척지기 싫어하는 것이 보통의 헌터들이었다.
이클립스의 조사관들과 안 좋게 꼬일 수는 있다. 그래도 웬만해서는 끝장은 안 보는 것이다.
계속 피한다거나, 아니면 적당히 이클립스에게 협조하면서 타협점을 찾는다.
그것이 헌터들의 일반적인 대응이었다. 강동현이 생각 이상으로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다.
하지만 강후는 앞뒤 잴 것 없이 자신을 위협한 조사관 둘의 목숨을 취한 모양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느낌이고, 좋게 말하면 자기 실력에 자신 있는 느낌이랄까?
마진호는 그 한끗 차이로 강후가 대단한지, 무모한 건지 살펴보고 싶었다.
- 곧 도착합니다.
그때, 연락이 왔다.
강후를 태운 안전 리무진이 도착한 모양.
"다들 일어나자. 빠르게 테스트하고, 별문제 없으면 바로 던전으로 뛰자고."
마진호가 몸을 일으켰다.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다.
* * *
'전종두도 옆에 서면 애가 되겠네. 사람이야, 아니면 타이어들을 붙여서 만든 인간 모형인 거냐.'
마진호를 처음 본 강후가 그에게서 떠올린 단어는 '근육 괴물'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강후 세 명을 나란히 세워도, 안 보이게 가려질 것 같을 정도였다.
물론 깨는 구석도 있었다.
"으아앗! 벌! 벌이야!"
날파리 한 마리가 귓가를 스치며 날아가자, 냅다 머리를 양팔로 감싸며 주저앉았던 것이다.
"대장, 벌이 아니라 그냥 파리에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게...."
"벌이었어, 인마! 흠. 흠흠."
애써 괜찮은 체를 했지만, 강후가 이미 모든 상황을 본 터라 마진호의 얼굴이 굳었다.
첫 만남부터 적당히 기선제압을 해 두고 싶었는데, 파리 무서워하는 쫄보 신세가 됐다.
창피한 분위기가 몸 전체를 휘감기 전에 마진호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강후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제주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루 길드 대표 이사를 맡고 있는 마진호입니다."
"신강후입니다. 소속은 따로 없습니다. 마진호 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도 모두 반갑습니다."
강후가 마진호의 뒤로 쭉 늘어서 있는 공격대원들에게 하나하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마법사는 전부 남자고, 궁수는 전부 여자였다. 일부러 맞췄다기보다는 어쩌다 저렇게 된 거겠지.
"바로 테스트로 가실까요? 이예린 님에게 듣기로 허례허식을 싫어하신다기에."
"가시죠. 얘기는 가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 근처입니다. 저희 소유의 던전에서 출혈 관련 테스트를 진행할 겁니다."
"편하네요. 오픈형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내부는 완벽히 저희 길드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전혀 없지요."
마진호의 안내를 따라, 그의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걸었다.
그의 큰 덩치 때문인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강후가 오는 내내 궁금했던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마진호에게 질문을 건넸다.
"저기."
"네?"
"길드 마스터와 부 길드 마스터분은 부재중인 겁니까?"
"네. 두 분은 스웨덴에 가 계십니다. 거기서 장기 프로젝트로 던전 공략에 참여하고 계시죠."
"부재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렇죠. 아시다시피 제주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저희 길드는 완벽하게 중립이니까요."
"변수는 없습니까?"
"전혀요. 제주도 안에서는 정화 길드의 장시환이 와도 똑같은 헌터로 취급할 겁니다."
"그렇군요."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도의 현 상황을 슬쩍 물어본 것은 나중을 생각해서 알아본 일종의 보험이었다.
혹시라도 이클립스나 정화 길드에 꼬여 본토에서의 삶이 복잡해지면.
제주도를 임시 도피처로 쓸 수 있을까 하는 계산에서였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 * *
던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굵은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몬스터 한 마리였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몸이 초록빛으로 빛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니.
자체적인 회복 기전을 갖고 있는 몬스터가 틀림없었다.
마진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상태창을 보면 아시겠지만 워낙 이름이 길어서요. 저희는 그냥 1호라고 부릅니다. 실험체 1호."
"그러네요."
몬스터의 이름은 마치 공룡의 학명을 보는 것처럼 십수 글자의 단어로 되어 있었다.
굳이 하나하나 눈에 담고 싶지도 않아서, 강후도 녀석을 1호로 지칭하기로 했다.
"워낙 연습용으로 많이 쓴 녀석이라 패턴과 상태는 저희가 잘 압니다. 보여 주시면 됩니다."
"그럼, 잠시 실례."
강후가 바로 1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애초에 녀석과 어떻게 싸울지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출혈 능력을 보려는 것인 만큼.
강후도 긴장 없이 바로 상황에 임할 수 있었다.
[출혈 찌르기]
시작은 역시 출혈 찌르기였다.
"으후우우우!"
단검 공격에 바등거리는 1호의 반응을 무시하고, 강후가 신속하게 출혈 찌르기를 꽂아 넣었다.
이내 찌르기가 10번 이상 들어가고, 출혈 중첩이 10중첩으로 쌓이자.
[회복 능력 제한]
1호에게 추가 디버프가 활성화됐다. 회복 능력 제한이 걸린 것이다.
시이잉!
이윽고 1호가 기존의 간격대로 발동된 회복 기전을 활용해 회복을 시도했다.
하지만 기존의 절반도 안 되는 시간만큼만 유지됐고, 그 효과도 미미했다.
강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출혈 강화]
[스킬 숙련도 : Lv Max]
[기존에 출혈 효과가 있는 스킬의 효율을 임의의 확률로 2배에서 3배까지 늘립니다.]
일전에 여수에 갔다가 얻은 패시브 스킬인 출혈 강화.
여기에.
[핏빛 탐식]
[출혈 상태가 대상에게 적용되고 있을 때, 출혈 상태를 50% 더 악화시킵니다.]
반지 '핏빛 탐식'의 효과 덕분에 출혈의 효과가 극대화됐다.
출혈 찌르기로 인한 출혈은 2초가 최대치고, 그래서 그 안에 반드시 새 공격을 해야 하지만.
두 효과 덕분에 최소 4초에서 최대 6초까지 갱신 타이밍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출혈 상태를 더 심화시킴으로써 회복 효율을 50%에서 훨씬 더 밑으로 깎아내렸다.
전투까지 보여달라고 했다면 좀 더 유려하게 움직였어야 했을 터.
하지만 출혈 능력만 검증하겠다고 했으니, 강후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단검을 푹푹 찌를 뿐이다.
덕분에 애꿎은 1호만 계속 고통에 울부짖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 뿐이었다.
"저거 좀 사기인 것 같아요."
그때, 여성 궁수 중 한 명이 말했다. 김지혜. 그루 길드에선 나름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마진호는 이미 파악을 끝낸 상태였지만, 다들 같은 생각인가 싶어 김지혜에게 물었다.
"지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출혈 유지는 출혈 찌르기 덕분에 너무 쉽게 되는 것 같고요. 일단 기본 스킬은 애초에 마나 사용도 적잖아요."
"그렇지."
"사실 그것만으로도 다 먹어 주고 들어간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린 그냥 출혈이면 됐으니까."
"계속 말해 봐."
"그런데 출혈 효율에 지속이 너무 좋아요. 유지도 최소 4초는 되는 것 같고, 회복 억제도 50%가 아니라 75%까지 가는 듯하고."
"정확하게 봤군."
이어 1호가 몇 차례의 대회복을 시도하며 체력을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효율 나쁜 회복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정화 버프를 가동시켜 출혈을 해제하기도 했지만.
푸욱.
강후는 너무 쉽게 새로운 출혈을 갱신해 버렸다.
"하암...."
심지어 기지개까지 켜며, 1호 옆에서 세상 태평스럽게 하품이나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귀한 손님이 왔다.
모두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주 뛰어난 용병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검증이 끝났다. 그루 길드원들의 마음을 잔뜩 홀린 채로.
135화 다재다능 (1)
* * *
공략 일정이 확정됐다.
오후 6시로.
그리고 정오부터 전체 브리핑을 진행하도록 하고는 모두 최종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준비를 다 마치고 내려온 강후는 딱히 챙길 것이 없었다.
그것은 일찌감치 출발 준비를 해 뒀던 대장 마진호도 마찬가지.
덕분에 할 일이 없었던 둘은 티타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계획에 없던 즉흥적인 자리였다.
"출혈 찌르기 보유자는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애초에 암살자가 품귀이기도 하고요."
마진호는 얘기하는 내내 근처를 날아다니는 날파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아무리 큰 덩치를 가졌다고 해서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이해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훈련을 좀 많이 했습니다. 출혈로 먹고사는 직업이기도 하잖아요."
"지금까지는 광전사 쪽으로 많이 구했거든요. 아시다시피 레벨 1 기본 스킬이 숙련도 최대가 되면 출혈 발동이 쉬워지니까."
"그러셨겠죠."
"하지만 광전사는 더 구하기가 힘드니.... 이래저래 상위 던전 가기가 참 힘드네요."
"본격적으로 출혈 유지가 강제되는 던전 레벨이 한 400쯤 되죠?"
"맞습니다. 이때부터 출혈 없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던전이 태반이죠."
원작의 설정대로였다.
이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주류가 될 수 있던 암살자와 광전사가 위로 갈수록 주목을 받게 된다.
괜히 정화 길드 같은 곳에서 암살자와 광전사 클래스를 애지중지 키우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상위 던전에서는 쓸모가 엄청 크기 때문이다. 아니, 없으면 공략 성립이 안 된다.
"밥벌이는 열심히 할 생각으로 왔습니다. 대미지 딜링은 제가 임의로 보태겠습니다."
"출혈 유지만 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애초에 계약 조건이 그렇기도 하고요."
마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후를 제외하고, 9인 극딜 공격대로 짰기에 화력에서의 걱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강후가 소소하게 대미지까지 보태준다면야, 금상첨화이기는 할 것이다.
그때, 마진호가 잠깐 멈췄던 말을 이어 붙였다.
"혹시 이번 던전 공략에서 만족할 만한 호흡이 되면, 다음 공략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강후로서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사실 다른 부분으로 요청을 강후가 먼저 해야 했던 참인데, 멍석이 깔렸다.
아쉬운 소리를 상대방이 먼저 하면, 이를 빌미 삼아 요구를 당당하게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진호의 입장에서는 귀한 출혈 딜러를 이렇게 구했으니까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조급한 마음이 뜻하지 않게 좋은 자리를 만들어 준 셈이다.
"일정을 보긴 해야겠지만, 가능하긴 할 겁니다. 다만 협의 조건이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탐사를 다녀와 보고 싶은 던전 하나가 있습니다. 그루 길드 소유의 던전입니다."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던전 공략이 목적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임밸런스 포인트에 다녀오는 것이 목적이다.
일전에 한 번 재미를 봤고, 국내에선 제주도에 있는 이 던전이 마지막 포인트였다.
그리고 남은 세 개의 포인트 중의 하나는 일본에 있다. 두 곳의 위치는 원작에서도 미상(未詳).
"공략이 아니라 탐사요?"
"네. 내부 풍경이 정말 예쁜 곳이 있다고 해서요. 외부인은 갈 수 없는 던전이라 들었습니다."
"아하. 탐사 정도라면야 문제 될 것은 전혀 없긴 합니다만....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죠."
"감사합니다."
협의가 무난하게 끝났다.
임밸런스 포인트는 그 존재 자체가 사기다. 이 세계의 빈틈을 상징하는 불균형의 증거이기도 하다.
레벨이 최소 2, 30은 거뜬히 오를 수 있는 만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강후가 화제를 돌렸다.
"제주도는 평화롭죠?"
"완벽하게 중립이라 가능한 평화죠. 예외가 없으니까. 여긴 누가 와도 평등하게 취급받습니다."
"공항에서부터 보안이 상당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주도가 평화롭다는 사실을 알고, 그 품에 숨어들려는 개새끼들이 많죠."
가감 없이 적의를 드러내는 마진호의 눈빛에는 나름의 정의감이 물씬 묻어났다.
실제로 그는 도내에 잠입해 들어왔던 외부의 범죄자 헌터를 직접 체포한 경력이 상당히 많았다.
말이 체포지, 거의 반병신을 만들어서 데려오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범죄자들도 두려워했다.
"민간인들은 잘 지냅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길드 마스터, 부 길드 마스터 두 분이 자매라서 그런지 세심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여성 헌터나 민간인도 정말 많이 살고 있고요."
"마음 편히 밤길을 거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겠네요."
"그렇죠. 매년 서울 다음으로 살기 좋은 도시 2위를 차지하는 게 우연은 아닐 겁니다."
마진호가 웃었다.
순간 눈빛에 뭔가 많은 생각이 묻어나는 듯한 것이 나름의 사연이 있는 듯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강후가 꺼낸 화두가 그의 깊은 감정을 자극한 것 같았다.
어쩌면 치안에 관련된 이슈로 소중한 사람이나 지인을 잃은 경험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출혈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된다면 무리하지는 마십쇼."
"그럼 밥값이 안 되잖습니까."
"그건 나중 얘기고. 목숨은 누구나 귀하니까요. 처음 본 동료라고 해도, 눈앞에서 잃고 싶진 않습니다."
"기억해 두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비를 주고 고용한 용병이라고 해서 도구처럼 쓰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마진호의 험상궂은 외모만 제외하면, 내면이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규모가 큰 길드의 3인자로서 원만하게 많은 것을 잘 관리하고 있는 것일지도.
* * *
오후 6시.
상세 브리핑과 질답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수준 높은 던전이기는 해도, 던전 자체의 규모가 큰 것은 아니기에 전투 식량은 조금만 챙겼다.
몸이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강후는 던전에 입장하기에 앞서 거의 배를 채우지 않았다.
진짜 많이 먹어야 샌드위치 반쪽 정도? 어지간해서는 속을 비우고 출발하는 편이었다.
입장하자마자 강후는 테스트 차원에서 양해를 구하고, 몬스터 하나와 일대일을 붙었다.
'누적 대미지를 늘릴 수는 있는데 혼자는 진짜 어렵군.'
결론은 빨리 나왔다.
능숙하게 출혈 유지를 바탕으로 회복을 억제할 순 있었지만, 다들 체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잡으려고 하면 한 놈씩 잡을 수는 있겠지만, 효율이 바닥으로 떨어질 듯했다.
강후는 아쉬워했지만.
사실 일대일을 지켜보던 다른 헌터들과 마진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애초에 레벨 100을 갓 넘긴, 그것도 암살자 헌터가 몬스터와 일대일이 가능할 수 없어서다.
강후는 자신의 부족한 대미지와 길어질 플레이 타임을 탓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레벨이 네 배 차이나 나는 몬스터를 아무렇지 않게 노리는 패기를 높게 평가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정말 솔플도 가능할 것 같아서 놀라기도 했다.
몸풀기가 그렇게 끝났다.
강후는 지금까지 공략해 온 던전과는 조금 다른 몬스터의 생리를 파악한 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첫 번째 공략 포인트는 앞서 브리핑에서 공유된 정보대로 구조 자체는 단순했다.
엄청난 체력과 맷집으로 떡칠 된 문지기 몬스터가 도개교 형태로 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의 타워 브릿지처럼 다리를 올리고 내릴 수 있었다.
당연히 문지기 몬스터가 지키고 있는 도개교는 다리가 최대치까지 올라가 있는 상황.
녀석을 제압하거나 혹은 별도의 방법으로 구동 장치를 운전해야만 양쪽을 이을 수 있었다.
공간 이동이 억제되는 왜곡 영역이 폭넓게 펼쳐져 있고, 도약으로 넘기엔 떨어진 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길었다.
즉,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도 도개교를 이어 주지 않으면 답이 없는 상황이다.
사전 브리핑에서는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문지기 몬스터를 찍어누르자는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정공법이기도 하고, 다른 방법이 딱히 없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오자, 강후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차피 문지기 몬스터는 말 그대로 문지기라서 주는 보상도 시원찮다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녀석을 공들여서 잡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괜히 체력 관리만 애매해질 뿐.
"잠깐. 제게 한 3분 정도만 주시죠. 쉽게 다리를 통과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예?"
"다리가 연결됐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달릴 준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준비야 항상 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생각이신지...?"
"녀석이 순찰이랍시고 가장 멀리 나와 있으니까, 일단 타이밍을 한 번 노려보겠습니다."
쌔앵!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후의 모습이 마진호와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없어진 강후의 위치를 다시 특정했을 때, 이미 그는 저 멀리 도착해 있었다.
문지기 몬스터, 피스치스.
붕어 대가리에 이족 보행의 인간형 모습을 한 녀석은 날카로운 삼지창을 움켜쥐고 있었다.
삼지창의 끝에는 검붉은 액체가 발라진 상태였는데, 마비독이거나 실명독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대놓고 관심을 끌어버리면, 아무리 붕어 대가리여도 목적을 뻔하게 알겠지.'
피스치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쓸만한 옵션은 많았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때로는 상대의 지능을 높게 생각해 두는 것이 전략을 짜는 과정에 도움이 될 때도 많고.
강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간 숱하게 공략한 이곳에서 정공법 외 전술은 아무것도 통한 것이 없는데 무슨 생각인 걸까?
[환영술]
강후는 먼저 환영을 여럿 만들어 내서 간을 봤다.
전에 재미를 봤던 것처럼, 환영 중 하나를 본체처럼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 냈다.
실제 본체는 단검을 옷소매 속에 넣은 상태였고, 가짜 환영이 단검을 보란 듯이 들고 있었다.
"부웅! 부웅!"
붕어 대가리라서 붕붕 대는 건진 모르겠지만... 피스치스가 위협적으로 삼지창을 찔러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삼지창이 환영 하나를 손쉽게 분쇄해 버렸다.
사라진 환영이 흩어지면서 연막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강후가 그 틈에 그림자 걸음을 전개했다.
피스치스는 강후가 자신의 눈을 속이고 장치로 이동하려는가 싶어서 뒤를 돌아봤지만.
오히려 강후는 아무 생각 없었다는 듯, 정면에서 피스치스를 그대로 덮쳐오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위하듯이 피스치스와 거리를 몰아붙이는 상황이었다.
"부웅! 붕!"
피스치스가 과감하다 싶을 정도로 정면에서 달려드는 강후를 향해 삼지창을 뻗었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움직임이었다는 듯이, 강후는 상승 도약으로 삼지창을 피해냈다.
오히려 피스치스의 삼지창 윗면을 디딤대로 삼아, 한 번 더 녀석의 위로 도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우웅!"
피스치스가 기민하게 삼지창을 휘둘러 위를 노렸다.
강후가 예측을 한 번 깨기는 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만큼 피스치스는 자신의 피지컬에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도 아니었다.
그때.
스파앗!
강후의 위치가 다른 그림자가 있던 곳으로 바뀌었다.
그림자 걸음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위치 전환 능력.
덕분에 피스치스의 일격은 애먼 그림자만 가르고 말았다.
자꾸 약이 오르기는 했지만, 어차피 눈에 보이는 적을 다 걷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환영도 그렇게 걷어냈고, 방금의 공방전으로 그림자 하나도 어쨌든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한데 바로 그때.
끼기기기.
쿠구구구....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이내 도개교가 내려가며 이어지기 시작했다.
"부웅...?"
피스치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손도 대지 않은 다리가 움직이고 있는 걸까?
이내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구동 장치를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강후였다. 강후가 멀리서 피스치스를 향해 말했다.
"그거 분신이야, 붕신아."
136화 다재다능 (2)
* * *
전략은 단순했지만, 과정엔 디테일함이 있었다.
정면에서 피스치스의 관심을 끌었던 강후는 진짜 강후가 아니었다. 분신으로 만든 가짜였다.
분신의 움직임이 허술했더라면, 피스치스도 이상함을 깨닫고 관심을 돌렸겠지만.
분신 자체의 육체 능력까지 활용하면서 대응한 강후의 연계는 말끔했다.
녀석이 제대로 속았다.
피스치스가 분신에 주의를 잔뜩 빼앗겼을 때, 강후는 횡 이동으로 녀석의 후방으로 이동한 뒤.
기교의 장막을 깔고, 거기에 무영을 연계해서 소리 없이 구동 장치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전투에 잔뜩 몰입해 있던 터라, 피스치스도 후방에 또 다른 강후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 강후의 작전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챈 팀원들은 내려온 도개교를 따라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전에 없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피스치스를 상대로 헛심 쓸 것 없이, 너무 깔끔하게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거구의 몸뚱이를 가진 피스치스는 다리 반대편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분노를 표출할 뿐이었다.
이내 상황 파악을 마친 강후가 다리에서 팀원들에게로 합류하자, 마진호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시간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단축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놈이 죽어야 열쇠를 얻는 것도 아니고, 구동 장치만 돌리면 되는 거니까 머리 좀 써 봤죠."
강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젠 이런 레퍼토리에도 익숙해지기는 해야 한다.
상위, 최상위 던전으로 갈수록 조건부로 길이 뚫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문지기 피스치스는 그런 레퍼토리 중에 그나마 단순한 축에 속했다.
어떤 곳은 정체불명의 문자들을 해석하고 정렬해서 맞춰야만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곳은 어느 몬스터는 잡고, 어느 몬스터는 살려둬야만 길이 뚫리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무식하게 힘으로만 던전을 공략하는 팀들은 레벨 4, 500을 전후로 도태되곤 했다.
진행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진호가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신세 졌습니다."
"어쨌든 한 팀이니까요. 체력을 아끼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아주 잘 됐군요."
"분신, 붕신. 라임 아주 좋았습니다. 지켜보다 애들이랑 웃었네요. 노리신 건가요?"
"큭, 그럴 리가."
딱히 노린 건 아니었는데, 아재 개그처럼 재밌게 들렸던 모양이다.
하기야 강후의 얼굴을 보면, 농담의 니은도 안 꺼낼 것 같은 얼굴이라 더 그런 구석도 있다.
개그맨이 애드리브를 하는 것보다, 잘생긴 연예인의 '개드립'이 더 재밌게 느껴지는 원리겠지.
시간이 제법 걸릴 줄 알았던 구간을 순식간에 돌파한 덕분에 공략에 속도가 붙었다.
당초 계획대로면 피스치스를 제압하고, 도개교를 건넌 뒤에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소모된 체력 없이, 오히려 팀의 사기가 대폭 올랐다.
강후가 출혈 딜러의 역할 외에도 지능 캐릭터 역할까지 해 주자, 기대감이 고조된 것이다.
"이젠 구경하셔도 됩니다. 얘네는 회복 패턴이 형편없어서 그냥 딜로 잡으면 됩니다."
"임의로 보조해도 될까요?"
"그래 주시면야 감사하죠."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볼 수도 있었지만, 강후는 일부러 전투에 참여했다.
레벨 400대의 몬스터를 상대해 볼 기회가 흔하게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격이 녀석들에게 얼마나 박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아울러 난이도를 점검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미리 체험해 둬서 나쁠 건 전혀 없다.
"흐아아!"
강후가 기합과 함께 몬스터들을 잔뜩 도발하는 마진호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가 도발로 주변의 몬스터를 강제로 끌어들이는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강후마저 도발에 끌려갔을 것처럼 영향력이 훌륭했다.
물론 감탄만 하지는 않았다.
강후는 도발에 걸리지 않은 몬스터들 사이로 그림자와 환영, 분신을 나눠 보냈다.
몬스터들이 똑똑한 건 아니어서, 일단 동족이 아닌 불청객이 보이자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몰이였다.
강후가 타격하기 좋게 몬스터를 뭉쳐놓은 것을 확인한 궁수, 마법사들이 광역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한 번의 공격으로도 몬스터 네댓 마리가 골고루 피해를 입는 효율적인 광경이 연출됐다.
주력의 대미지는 마진호 쪽으로 집중됐지만, 남은 보조 대미지도 강후 덕분에 알차게 쓰였다.
효율 100%.
그렇게 몬스터 소탕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강후의 움직임을 본 마법사 하나가 궁수이자 베테랑인 김지혜에게 말했다.
"누나, 이런 경우는 처음 보지 않아요? 난 암살자 클래스가 몬스터 모아 주는 건 처음 봐요."
"그러게. 보통은 몬스터의 뒤를 잡으려고 하거나, 치고빠지기를 할 타이밍을 보는데."
"그러니까요. 근데 그림자나 환영 같은 스킬을 갖고 있으니, 오히려 공격적으로 움직여 주네요."
"엄청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환영이든 분신이든 그림자든. 어느 것 하나 엉성하게 움직이는 게 없어."
"왜 차소희가 죽었는지 알겠어요. 저런 방식이면 어디에 진짜가 있는지 쫓기도 어려울 테니까."
"그러게 말야.... 섬뜩하네. 그동안 너무 짐살자들만 봐와서 그런지, 갓살자는 적응이 안 돼."
"망할 짐살자 새끼들...."
짐살자.
'짐만 되는 암살자'의 줄임말이다.
지나치게 후방 공격, 은신 공격에만 치중해서 수동적인 공격 패턴을 추구하는 암살자를 말한다.
사실 단체 공략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 역할군이 자연스럽게 스위칭될 수 있어야 하는데.
암살자에 과몰입한 헌터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습! 이 명제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팀원들이 밥상을 차릴 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레벨 200 미만의 구간에서 암살자 직업군 기피 현상이 생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클래스 존재 이유에 충실한 건 좋은데, 너무 융통성이 없다 보니 답답할 수밖에.
하지만 강후는 지금, 전장에서 암살자가 아니라 또 다른 서브 탱커의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어 한곳에 모아주는 것으로도 탱커의 덕목인 '도발'이 성립되니까.
"좋아요, 좋아! 정말 좋아요!"
강후의 노력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은 팀원들이 힘껏 격려하며, 스킬 연계에 더 집중했다.
출혈 셔틀만 해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능동적으로 판을 짜주는 멋진 용병이 왔다.
시작부터 정말 대만족이었다.
* * *
이후, 공략에 속도가 붙은 공격대는 바로 미들 보스 구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문지기 피스치스 구간에서 체력을 완벽에 가깝게 아낀 것이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
게다가 중간의 '잡몹' 구간에서도 마진호와 강후가 합을 맞춰 그림을 그린 덕분에.
주요 딜러를 담당하고 있는 네 명의 마법사와 궁수는 정말 편한 사냥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미들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에닥스(Edax).
도마뱀 형태의 몬스터로 기괴하게 큰 입이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출혈이 잠깐이라도 끊기면, 체력이 가속 페달을 밟은 것처럼 우르르 올라가는 것이 특징.
그래서 어떤 출혈이냐를 떠나, 출혈을 절대 끊기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전투에 돌입하자마자 마진호와 강후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딜러들은 강후가 적당하게 패턴을 살피면서 몸을 사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굳이 플레이 타임을 길게 가져가고 싶지 않은 강후는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패턴을 살폈다.
그리고.
와작!
에닥스의 가장 까다로운 패턴인 '크게 깨물기'에 숨겨진 사전 동작을 파악했다.
정조준 스킬로 에닥스의 몸뚱이 여기저기를 확대 관찰하면서 얻은 성과였다.
'크게 깨물기를 하기 직전에 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비늘 방향이 사선으로 미세하게 올라가네.'
습관이 이래서 무섭다.
스스로는 너무 당연해서 인지하지 못하는 습관.
야구에서는 이런 습관을 간파당한 투수가 어느 날 갑자기 인정사정없이 통타당하곤 한다.
스포츠야 그렇게 습관을 분석을 당한다고 해도, 고치면 그만이고, 목숨의 위협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헌터의 세계는 다르다.
적에게 습관을 파악당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흐름이 뻔해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진호를 상대하다가 흘깃 후방의 강후를 살핀 에닥스의 복부 비늘 방향이 사선으로 틀어졌다.
다음 순간.
[신속 회피]
와작!
강후가 신속 회피를 시전하며, 에닥스의 깨물기를 피했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
"오!"
"와! 완전 아슬아슬했어!"
"미리 예측한 건가?"
강후에게 방해가 될까 봐 다들 내색은 안 하고 속으로 숨죽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에닥스의 깨물기는 방어력을 극대화한 마진호 입장에서는 적당히 받아낼 수 있는 일격이지만.
강후 같은 암살자에게는 일격에 몸이 반토막이 날 수도 있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후는 쉽게 공격을 피했고, 무방비 상태가 된 에닥스에게 연계 공격을 퍼부었다.
사족 보행류 몬스터이다 보니, 노림수가 실패했을 때 그다음 동작까지의 시간이 길었다.
순식간에 쌓인 출혈 중첩이 10중첩이 되면서 회복 억제가 되고.
이어 최대치인 50중첩까지 신속하게 오르면서, 과다 출혈 상태로 전환됐다.
과다 출혈 상태가 되면, 임의의 확률이기는 하지만 회복을 시도하다가 거꾸로 체력이 더 깎이는 경우가 존재했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보통 이런 상황을 헌터들은 '데스힐'이라고 부른다.
회복은 됐는데, 죽는 쪽으로 마이너스 회복이 됐다는 그런 뜻.
50중첩에서만 발동되는 과다 출혈 상태에서는 이런 데스힐 현상이 확률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쿠에에에엑...!"
급격히 빠진 체력을 확인하고서 회복을 시도하던 에닥스가 걸쭉한 침을 토해내며 비명을 질렀다.
데스힐에 걸린 것이다.
때아닌 대형 사고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에닥스가 화풀이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앞에서 태산처럼 버티는 마진호는 어려우니, 아까부터 귀찮게 굴던 강후를 죽일 참이었다.
[신속 회피]
와작!
첫 번째 깨물기 실패.
[환영술]
펑! 퍼펑! 펑! 펑!
만들었다가 일부러 해체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만들어낸 정신 사나운 연막 효과.
와작!
[그림자 걸음]
그림자를 활용한 위치 전환으로 두 번째 깨물기도 실패. 세 번째, 네 번째도 실패.
심지어 마지막에는.
와작!
[귀요미!]
에닥스가 으스러뜨리겠다는 독기로 깨물은 것이 강후가 아니라, 뜬금없이 만들어진 슬라임이었다.
여기서 에닥스의 남은 인내심과 이성을 간신히 유지하던 끈이 시원하게 끊어졌다.
차분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멍청한 미들 보스 몬스터. 녀석이 맞이할 미래는 밝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억제된 회복 속에서 저승행 급행열차를 탄 에닥스가 결국 집중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기여도가 적었다면, 미들 보스 몬스터를 잡고도 스킬 강탈을 활성화할 수 없었겠지만.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덕분에 강후는 에닥스의 스킬 하나를 보기 좋게 강탈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순풍의 속삭임]
[스킬 숙련도 : Lv Max]
[영구적으로 '민첩'이 100 상승합니다.]
그간 체력에 투자하느라 꼼꼼하게 돌볼 틈 없던, 민첩 스탯에서의 든든한 소득이었다.
137화 다재다능 (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