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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모른단 말이야?"

"초면이다."

"아무리 봐도 너랑 형제지간인 것 같은데. 이름도 그렇고. 너는 베타 0702잖아."

"모른다. 아무런 기억이 없다."

알파를 높은 산 부족으로 압송한 후.

검은 바위의 동굴로 돌아온 승현이 은밀히 흉내쟁이를 불러내 알파에 관해 물어보았지만, 연신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답답해진 승현이 다시금 흉내쟁이를 채근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러지 말고 좀 잘 떠올려 봐."

"정말 모른다. 그보다 배가 고프니 다과를 내놔라. 미개한 인간."

"...됐다. 들어가라. 그리고 앞으로 넌 한 달간 TV 시청 금지다."

"..."

"얼른 들어가. 쯧...대체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오는 거야."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흉내쟁이를 흘겨보던 승현이 상태창을 불러내자, 곧이어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상이 지급되었다.

[고블린의 품격-1]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유대 포인트 [500]과 [제작자의 눈] 스킬이 지급됩니다!

[제작자의 눈]

스킬을 사용한 상태로 아이템을 제작할 시, 일정 확률로 '사용자가 제작한' 아이템의 옵션 중 하나를 강화합니다.

* 숙련도에 따라 강화 확률과 스킬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 숙련도는 아이템 제작 횟수에 비례해 증가합니다.

현재 숙련도 : [0%]

강화 확률 : [10%]

초당 마나 소모 : [2]

'좋았어.'

자신이 사용하던 은퇴한 알케미스트의 장갑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 스킬임을 확인한 승현이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게다가 숙련도에 따라 효력이 상승하는 스킬이라니.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스킬을 바라보던 승현이 아쉬운 듯 상태창을 닫아버렸다.

"당장 사용해 보고 싶지만, 일단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곧이어 동굴을 벗어난 승현의 눈에 결박당한 채 고블린들의 흉흉한 시선을 받아내는 알파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 한승현과의 대화가 끝나면, 검은 바위는 알파의 목을 친다."

"밝은 귀는 폭탄을 던진다!"

"못된 트롤이다!"

"높은 산 부족을 괴롭힌 못된 고블린들의 우두머리!"

만일 로제가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알파를 향해 달려들 듯한 날카로운 분위기다.

놈을 둘러싼 고블린 무리를 헤치고 빠져나온 승현이 알파와 눈을 맞추며 늪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미지의 존재를 떠올렸다.

알파는 분명 그때의 승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긴 했지만, 승현을 물러나게 만들었던 놈에게서 느껴지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이놈은 아니야.'

그렇기에, 놈과 알파는 다른 존재라고 단정 지은 승현이 알파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지만, 이것부터 묻자. 네 동포란 놈들은 왜 그런 짓을 벌인 거지?"

"그런 짓?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 왜 고블린들의 모습을 모방하면서까지 매일 밤 높은 산 부족에 쳐들어왔냐는 말이야."

"역시, 창조주와는 다르게 멍청한 인간이군."

"?"

"밤마다 움직인 이유는, 내 동포들은 햇볕을 쬐면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걸 묻지 마라."

"...그걸 묻는 게 아닌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 뭐지. 인간."

자신을 올려다보는 알파를 향해 한숨을 내쉰 승현이 입을 열었다.

"왜 여기에 쳐들어왔냐는 말이야.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고블린들을 잡아먹으려고 오는 것도 아니고,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처만 입힌 뒤 돌아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의미? 꼭 무언가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건가?"

"대체 무슨 소리야?"

"동포들이 밤마다 고블린들을 습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인간들은 매일 배를 채우고, 잠을 자는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알파.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승현이 다시금 질문을 건넸다.

"그러니까 나는 이유를 묻는 거야. 배를 채우는 건 배가 고프기 때문이고. 잠을 자는 건 피곤하기 때문이니까. 너희들이 높은 산 부족을 습격한 것도,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인 거 아니야?"

"아아. 그런 뜻이었나. 너무 우매한 질문이어서 이해하지 못했었군. 용서해라. 인간."

커다란 눈알을 데룩, 굴리던 알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블린의 모습과 행동을 복제하라는 창조주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주의 지시를 따르는 건, 배가 고프면 배를 채우는 것처럼 당연한 본능이다."

"완전한 고블린? 본능? 대체 네 동포들이 뭐길래? 네 창조주는 누구고, 그리고 네 모습은 왜 트롤인 거지?"

"트롤이라...그래. 트롤이란 말이지? 좋은 정보다. 트롤에 대해 더 아는 게 있으면 말해라. 인간. 답례로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지."

쏟아지는 질문에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던 알파가 트롤이란 단어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살려줘? 네가? 날?"

기도 안 차는 대답에 승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알파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인간.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하고, 트롤에 대한 정보를 내놔라. 그것만이 네가 살 수 있는 길이다."

"그게 무슨..."

승현이 황당하다는 듯 알파를 쳐다보던 찰나. 쿠웅- 어디선가 울린 요란한 진동이 한차례 대지를 뒤흔들었다.

"왔군. 지금이라도 목숨을 구걸해라. 인간."

"오다니. 대체 뭐가...우욱."

알파에게 반문하던 로제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한 악취.

황급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검은 숲을 뒤덮었던 것과 동일한 짙은 어둠이 바위산을 휘감아오기 시작했다.

"키이이익-!!!"

"조상신이 노하셨다! 밤이 고블린을 잡아먹으러 온다!"

"족장의 동굴로 도망친다! 못된 고블린은 이겨도 밤은 이길 수 없다!"

이 기이한 현상에 혼비백산한 고블린들이 검은 바위의 동굴로 우르르 달아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알파의 몸을 감싸고 있던 승현의 와이어가 투두둑- 끊어져 나갔다.

"뭐야. 무슨 일이지?"

점점 상승하는 알파의 스텟. 승현의 0.9배였던 근력은 어느새 1.5배까지 상승해 있었다.

이를 확인한 승현이 재빨리 와이어를 회수했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로제가 일몰을 꺼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악취가 너무 심해요. 게다가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어요."

쿠웅-

묵직한 진동이 한 차례 더 바위산을 흔들어 놓았고, 알파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형제여!"

두 손을 번쩍 든 알파가 완전히 어둠에 휩싸인 바위산 아래를 향해 커다랗게 외치자.

쿵-쿵-쿵-쿵-

무언가가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때. 앞은 잘 보여? 불빛이 필요하면 말해. 꺼내줄 테니까."

"이 정도 어둠쯤은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코를 막을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속이 안 좋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을 감지한 승현과 로제가 정면을 향해 경계 태세를 취함과 동시에.

"오오오오-!!!"

한층 더 짙은 어둠을 온몸에 두른 외뿔의 거인이 포효를 내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26화

어림잡아 6m는 넘을 듯한 키. 번들거리는 살구빛 피부. 하늘을 향해 삐죽 솟아오른 뿔. 그리고 흉포함을 가득 담은 두 눈.

알파의 형제, 델타는 오거와 마찬가지로 최상위급 몬스터인 기간트와 비슷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어둠과 함께 주변을 감싼 짙은 투기는, 승현에게도 낯설지 않은 기운이었다.

'그놈이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델타가 검은 늪의 주인임을 확신한 승현이 막 자세를 잡으려는 찰나.

"형제여. 날 구하러...!!!"

우드드득-

정면을 향해 달려가던 알파의 안면에 델타의 거대한 주먹이 내리꽂혔다. 울컥, 코와 입에서 피를 뿜어낸 알파가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무슨 짓이냐! 델타!"

"멍청한 놈.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너 따위를 구하러 온 것 같나. 네놈이 여기서 그냥 죽어버려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

델타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마주한 알파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기세등등하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이윽고 알파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상황이지?"

"저도 모르겠네요...."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건 승현과 로제도 마찬가지였다.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어쨌거나 알파의 말에 따르자면 둘은 형제 아니던가.

"같은 편을 저렇게 후려치다니..."

황당해진 승현과 로제가 멍하니 델타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퍽-잔뜩 위축된 알파의 복부를 세차게 걷어찬 델타가 몸을 돌려 승현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구면이로군. 인간. 이번이 두 번째인가."

단순히 가까이 다가왔을 뿐인데.

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위압감이 승현의 전신을 압박해옴을 느낀 승현이 이해와 분석을 발동하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시시포스의 화신체...아니, 그보다는 조금 아래인가. 그래도 쉽지 않겠어.'

시시포스보다 아래라곤 해도, 도핑 없이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물론 멀쩡한 상태의 로제가 있기에 패배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승현이 유틸리티 자켓에 넣어둔 포션들을 꺼내려는데.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델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계를 풀어라. 나는 멍청한 알파 놈과는 다르다."

"...무슨 뜻이지."

"창조주의 충실한 종이자 세 번째 피조물인 나, 델타는 너희를 적대할 생각이 없단 뜻이다."

곧이어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델타가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의 몸짓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승현과 로제 또한 자신들의 무기를 거두었다.

"좋아. 이제 대화가 좀 통하겠군. 고맙다. 인간. 아직 온전한 자아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례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그러한 부분은 양해를 부탁하는 바이다."

도저히 알파의 형제라고는. 아니, 몬스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휘력을 구사하는 델타. 아직 완전히 경계를 거두지 않은 승현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알파를 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무슨 목적이지? 고블린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동족들의 복수인가.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아니다. 나는 덜떨어진 알파와는 다르게, 그 실패작들을 동족으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실패작이라..."

승현이 잠시 같은 단어를 입안에서 굴리자, 델타가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곳에 온 건, 위대한 창조주께서 친히 내게 명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서, 설마. 그분께서 이곳에 다시..."

"닥쳐라. 알파."

흉측한 얼굴에 화색을 띠며 대화에 끼어들려던 알파를 제지한 델타가 커다란 손을 들어 승현과 로제를 가리켰다.

"위대한 창조주께서는 너희를 만나보길 원하신다. 수락하겠다면 날 따라와라."

"우릴? 대체 왜?"

"모른다. 나는 그저 전달을 명 받았을 뿐."

"거절한다면?"

"아무런 보복도 없을 거다. 창조주께서는 누구보다 관대하시고, 또 자비로우시니까."

어서 결정하라는 듯 델타가 팔짱을 끼자,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로제가 승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다짜고짜 따라오라니...어쩐지 수상한데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닐까요?"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그럼 역시 거절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로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떤 존재가 기다릴지 모르는, 어찌 보면 적진의 한복판에 덜컥 발을 들여놓는 건 미련한 짓이라고밖에 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승현은 녀석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띠링-

델타의 제안과 동시에 나타난 퀘스트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고블린의 품격-2]

- [델타]를 따라 [???]의 실험장 안으로 들어갈 것.

보상 : 유대 포인트 [1500]

퀘스트는 승현에게 미지의 존재와 조우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다시금 돌아갈 통로를 개방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이에 따라야 하는 상황.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는 델타를 향해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널 따라가면 되는 건가."

"말이 잘 통하는군. 마음에 든다, 인간. 창조주의 명예를 걸고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날 따라와라."

승현과 로제를 향해 미소–로 추정되는-를 지어 보인 델타가 육중한 걸음과 함께 어둠을 몰고 바위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 [???]의 실험장에 입장하였습니다.

델타와 알파를 따라 반쯤 불타버린 검은 숲에 들어선 승현의 눈에 익숙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실험장...?"

승현과 같은 메시지를 확인한 로제가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한층 더 진해지는 악취. 아직 잔불이 남아있는 길을 익숙한 듯 걸어가는 승현을 향해 로제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정말 괜찮은 걸까요. 아무리 신탁이 있었다고는 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저들을 따라가는 건..."

"만일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네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승현의 이야기는 진심이었다.

지금껏 그가 두 눈으로 확인한 로제의 무력은 A급 최상위권 헌터와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를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게다가 승현 또한 아직 로제보다 부족하다곤 해도, 도핑의 힘을 빌면 델타 정도는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다.

즉, 순식간에 이들 둘을 무력화하는 게 아닌 이상 위험한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충분히 몸을 뺄 수 있단 뜻이다.

이러한 의견이 함축된 승현의 대답을 들은 로제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앗, 그렇다는 건...수행원인 저를 믿고 이곳에 와 주었다는..."

뭔가 조금 다르게 이해한 것 같긴 하지만.

굳이 그러한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판단한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가 양손으로 일몰을 꾹 틀어쥐며 의욕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걱정하지 말고 저만 믿어요! 누구든지 한에게 위해를 끼치기만 하면 극야를...음?"

당장이라도 일몰을 해방할 기세로 주변을 경계하던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깜한 숲속에 덩그러니 높인 찐득한 늪. 어느새 그곳의 가장자리에 도달한 델타가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도착했다. 늪지대 안으로 들어가라, 두 인간."

"안으로 들어가라니...설마, 저금 저희보고 저 더러운 늪 안으로 들어가라는 건 아니죠?"

"더럽다니. 실례다. 창조주의 은총이 가득 담긴 성스러운 늪이다."

지독한 악취와 함께 알 수 없는 부유물이 잔뜩 떠다니는 늪을 보며 로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승현 또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로제와 같은 심정이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라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들을 불러들인 창조주란 녀석은, 제법 고약한 취미인 것 같다. 자칫 몸을 담그기라도 하면 온몸이 썩어들어갈 것 같은 늪. 그 가장자리에 선 승현과 로제가 머뭇거리던 그때.

"그게 아니죠. 델타. 귀한 손님들이신데, 제가 마중 나와야 하는 게 맞는 거죠."

늪의 한복판이 쩍 갈라짐과 동시에 알파와 델타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지저분한 진흙 위에 무릎을 꿇었다.

철퍽- 사방으로 튀는 더러운 진흙을 보며 인상을 찡그린 승현이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새까맣고 지저분한 로브를 뒤집어쓴,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적응될 대로 적응된 승현마저도 몸을 움찔하게 만들 정도의 지독한 악취. 승현과 로제가 반사적으로 코와 입을 가리자, 사내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설마 후각으로도 마기를 감지하실 줄은...이거 실례했습니다. 바로 거두어 드리죠."

"후각? 마기? 그게 무슨 뜻이죠?"

눈까지 아려올 정도의 지독한 악취다. 그들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인 사내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검은 숲을 가득 메우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짐과 동시에 진득한 늪이 탁한 호수로 바뀌었다.

"어?"

마치 에포나의 권능과도 같은 능력에 당황한 로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린 사내가 다가왔다.

"겨울숲 부족의 대사제이자 에포나 님을 모시는 충실한 종. 로제 님. 맞으십니까?"

"...절 아세요?"

"알다마다요! 꽤 오래전부터 당신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대체 어떻게...?"

의문을 표하는 로제를 뒤로하고, 이번엔 승현을 향해 다가간 사내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한승현 님. 반갑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간 만나 뵙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습니다."

"...날 어떻게, 어디까지 아는 거지?"

"음...글쎄요. 이걸 말씀드려야 하나...?"

마치 약 올리듯 승현의 주변을 빙빙 돌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전에 먼저, 제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두 분이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우리가 널 안다고?"

고개를 들어 눈썹을 찡그리는 승현을 바라보던 사내가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띠었다.

"반갑습니다. 만마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구시온이라고 합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27화

띠링-

- [고블린의 품격-2]가 완료되었습니다!

승현이 막 나타난 알림을 확인하던 그때. 로제가 구시온을 향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구시온?"

"반갑습니다. 로제...이크."

구시온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제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해방된 일몰을 휘둘렀다.

"용서 못 해..."

강맹한 분노가 담긴 창격이 반월을 그리자, 심상치 않은 기류가 사방에 휘몰아치며 새카만 어둠이 구시온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성질도 급하셔라."

작게 중얼거린 구시온이 양손을 펼친 뒤, 손바닥을 쭉 폈다.

그리고는 허공을 움켜쥔 후, 두 팔을 교차하자.

콰지직-거센 폭풍이 휘몰아치며 구시온을 덮친 어둠이 마치 종이 쪼가리처럼 찢겨나갔다.

"아이고...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반으로 갈라진 어둠을 뒤로하고 장난스레 인상을 찡그리는 구시온.

곧이어, 콰아앙-하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극야를...찢어버렸어? 그것도 맨손으로?'

쏟아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승현이 멍하니 구시온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로제가 쏘아낸 극야는 유천호의 언데드를 쓸어버릴 때보다 더 강맹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는데. 시시포스의 화신체 따위는 일격에 갈라버릴 정도의 위용이 담긴 극야를 구시온은 너무나도 손쉽게 막아버린 것이다.

"이거 보십시오. 상처가 나지 않았습니까."

약간의 핏기가 비치는 손바닥을 과장된 동작으로 펼쳐 보인 구시온이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로제 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막무가내로 이러시는 건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뻔뻔한 대답에 까득. 어금니를 깨문 로제가 일몰을 앞으로 쭉 뻗으며 기수식을 취했다.

"입 다무세요."

"아아, 잠시만요. 로제 님. 제 얘기를 좀..."

구시온이 적의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로제를 향해 손사래를 치는 순간. 질퍽한 땅을 박찬 로제가 마치 탄환처럼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휴우...저는 대화를 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모신 건데.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한숨을 내쉰 구시온이 손을 뻗어 코앞까지 쇄도한 일몰을 와락, 움켜쥐었다.

예상했다는 듯 이를 축으로 삼은 로제가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리며 상대의 얼굴을 차올리려는데.

촤르륵- 순식간에 날아와 로제의 허리를 감싼 와이어가 그녀의 몸을 세차게 뒤로 잡아당겼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 한!"

예상치 못한 승현의 개입에 중심을 잃고 바닥을 나뒹군 로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아버지와 부족의 원수 중 하나가 코앞에 있는데, 대체 왜 이런 중요한 순간에 훼방을 놓는단 말인가.

"위험했어. 저놈, 보통이 아니야."

"그 정도쯤은 저도..."

승현을 향해 재차 소리치려던 로제가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구시온의 어깨너머로 마치 뱀처럼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검푸른 칼날을 발견한 것이다.

'대체 언제...?'

분노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탓에 미처 보지 못했다.

만일 조금 전 승현이 자신을 끌어당기지 않았더라면...등골이 서늘해진 로제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이런...예상보다 감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너무 거칠게 나오셔서 발목 하나쯤은 내려두고 대화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구시온이 아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로제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일몰을 휙 던졌다.

"받으시죠. 신병(神兵)계통 무기는 저하고는 영 안 맞아서 말입니다."

"..."

철퍽. 더러운 진창을 나뒹구는 일몰을 본 로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켜야 할 대상인 승현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것도 모자라, 불구대천의 원수인 구시온에게 동정까지 받은 것이다.

"대체..."

시시포스와의 일전 때에는 놈의 권능에 육신이 억눌려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이유라도 댈 수 있었지만,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금은 아니었다.

변명할 여지 없는 완벽한 패배. 압도적인 격차를 체감하자, 도저히 다시 덤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압도적인 무력감에 어깨를 떠는 로제를 향해 다가온 구시온이 위로하듯 말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시시포스 님과 달리 예의를 아는 전 본체로 여러분들을 맞이하러 온 거니까요. 오히려 본체인 제게 작게나마 상처를 입힌 걸 영광으로 아셔야 합니다."

"..."

"그래도 아직 양친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군요. 조금 전 일격을 베일 님이나 멜리사 님이 펼쳤더라면...크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네요."

"...함부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

진흙 범벅이 된 일몰을 주워든 로제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구시온을 노려보자. 그녀를 향해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린 구시온이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젖혔다.

"뭐,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푸른빛이 도는 흑발에 창백한 피부. 세상 밖으로 드러난 구시온의 얼굴은 조금 병약한 사내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신 듯, 손바닥을 펼쳐 눈썹 위에 그늘을 만든 구시온이 승현과 로제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주십시오. 저는 어쩔 수 없이 직속 상관인 시시포스님의 명을 따른 것뿐. 제가 의도한 일은 아닙니다."

"..."

"게다가 로제 님의 부친이신 베일 님의 목숨을 빼앗은 건 제가 아니라 시시포스 님입니다. 그러니까, 로제 님의 분노는 방향이 잘못되었다. 이겁니다."

"그걸 말이라고..."

"그만둬, 로제."

능청스럽게 변명을 늘어놓는 구시온. 그를 노려보는 로제를 제지한 승현이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와이어를 거두었다.

조금 전 구시온의 무력을 본 이상 놈과 맞서는 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슨 꿍꿍이지? 행동을 보아하니 우릴 죽일 생각은 아닌 것 같고. 이리로 부른 목적이 뭐냐."

"확실히 로제 님보단 상황 판단이 빠르시군요.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겨울숲 부족에서의 활약도 인상 깊었고. 역시 승현 님은 대단하십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의문을 꾹 눌러 담은 승현이 구시온을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만 얘기해."

어깨를 으쓱거린 구시온이 입을 열었다.

"본론이라...그 전에 앞서, 먼저 여러분께 사과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사과?"

"제 실패작들이 승현 님의 지인...음. 지인이 맞으려나? 아무튼, 그분들께 실수를 좀 저지른 모양이더군요."

검은 숲의 고블린들이 한 짓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한숨을 푹 내쉰 구시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말입니다. 변명을 좀 하자면 본래는 몇 가지 실험을 위해 도플갱어의 유전자를 주입해 창조한 실험체들인데...제가 잠시 눈을 뗀 사이, 제멋대로 행동한 모양입니다."

"알아듣게 얘기해."

"그러니까, 음...그렇지. 인간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프로그래밍이 잘못되었다. 이겁니다."

구시온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요약하자면, 고블린들을 이용해 생명 창조에 대한 실험을 강행했다는 것인데.

"고블린들을 모티브로 한 종족을 창조해보려고 했는데...도플갱어의 형질이 너무 강하게 발현된 모양인지, 고블린 그 자체가 되려고 하는 성향을 보이더군요. 게다가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몰라도 자신이 복제한 종족을 죽이고자 하는 성향까지...후우. 완전히 판단 미스였습니다."

"...그래서 실패작이라고 했던 거냐."

"알고 계셨습니까? 아무튼, 그래서 하얀 샘물에게 이곳의 관리자인 조상신의 권능까지 일부 줘 가며 녀석들을 묶어두었었는데..."

"내가 하얀 샘물을 죽임으로써, 그것들이 전부 풀려났다 이거냐."

"정확하십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이번 일에는 승현 님의 책임도 약간. 그러니까 아주 약간 있다는 겁니다!"

구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뼉을 탁, 쳤다. 명백한 농락의 의도가 담긴 제스쳐. 이것을 애써 무시한 승현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게 있나."

"음...성취감?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불가능한 목표에 도전하는 쾌감. 사실 인형이나 마찬가지인 아바타나 골렘을 만드는 건 손이 많이 가긴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 거기서 더 나아가 종족을 창조하는 건 그것과 별개의 영역입니다. 신의 영역이란 말입니다."

구시온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희열과 광기가 뒤범벅되어 혼돈의 빛을 띠는 눈동자.

흥분한 듯 연신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구시온을 향해 승현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왜 하얀 샘물을 꼬드겨 조상신의 정수를 탈취한 거지. 네 힘이라면 그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

"그야...아, 잘 모르시겠구나. 아시려나? 차원에 심어진 세계수를 철거하기 위해선 관리자의 권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절대적인 정화의 힘을 가진 세계수가 있으면 연구를 진행하기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거든요."

"설마, 푸른 숲에서 살던 고블린들을 전부 죽인 이유도 네 알량한 탐구욕 때문이냐?"

"초기 단계를 진행하기 위한 샘플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살아있는 걸 쥐어짜는 건 조금 거부감이 들거든요."

"미친 새끼."

구시온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승현이 거칠게 욕을 내뱉었다.

그러자, 짐짓 슬픈 표정을 지은 놈이 승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런...같은 제작자로서 제 마음을 이해해주실 줄 알았는데. 서운합니다."

기도 안 찰 지경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한 종족을 멸망 직전까지 밀어 넣다니.

분노한 듯한 승현의 표정을 살피던 구시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한승현 님의 입장에서 보면 높은 산 부족의 고블린들은 고작 몬스터 아닙니까. 제가 잘못한 부분이니 사과는 드리겠지만, 이렇게까지 열을 내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승현 또한 높은 산 부족과 친분을 쌓지 않았더라면, 이 사태를 보며 그저 단순한 몬스터의 멸종 정도로 생각했을 확률이 컸으니까.

그렇기에 승현이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구시온이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뭐, 한승현 님의 마음을 이해할 순 없지만...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보다 선물을 하나 드리고자 하는데, 어떠십니까?"

선물?

승현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흘리는 구시온을 황당한 듯 바라보았다.

"우리가 정답게 그런 거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을 위해 공들여 이곳에 깔아놓았던 마기까지 거두어들였는데. 조금은 제 마음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답한 구시온이 품속으로 손을 넣어 붉은빛을 발하는 구슬을 꺼낸 뒤 승현에게 내밀었다.

"이건...?"

낯설지 않은 물건을 본 승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관리자의 온전한 영체입니다. 아, 이곳에선 조상신이라고 하던가요? 차원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니 원...일일이 외우는 것도 일입니다."

"조상신을 어떻게 한 거지."

"그걸 꼭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 합니까?"

"죽인 거냐?"

"뭐, 죽인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리자의 자격을 빼앗기긴 했어도 아마 빠르면 수백 년 안으로 다시 활동이 가능해질 테니까요."

"...믿을 수 없지만,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그건 말입니다..."

승현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구시온이 더러운 진흙이 뒤범벅된 땅을 가리켰다.

"조상신을 대신해, 한승현 님께서 이곳의 관리자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28화

"이곳의...관리자가 되라고?"

"그렇습니다."

구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현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헛소리나 해댈 생각이었다면 그만 돌아가겠다."

"이렇게나 제 진심을 몰라주시다니. 섭섭하네요. 자꾸 이러시면 저 상처받습니다."

내뱉는 말과는 달리 초승달처럼 원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구시온의 눈꼬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순간적으로 넋을 잃을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으나, 구시온의 정체를 아는 로제와 승현에겐 그저 역한 가식으로 보일 뿐이었다.

"진심이라. 웃기지도 않는군. 아니면 내가 영문도 모를 제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제가 승현 님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상신인지 뭔지 하는 덜떨어진 관리자보다 승현 님이 이 아름다운 차원의 관리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름답다고? 아니, 그보다. 난 내가 조상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아. 게다가 원래 난 이곳의 거주민도 아니고."

"그 점이 특별한 겁니다!"

구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승현을 향해 재촉하듯 말했다.

"대체 무슨 방법을 썼길래 세계수를 매개체로 삼지 않고 아무런 패널티 없이 다른 차원으로 건너오신 겁니까? 지금껏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승현 님 같은 케이스는 처음입니다."

"자꾸 이야기를 빙빙 돌리시는 것 같은데. 길게 듣고 싶지 않으니 본론만 얘기하시죠."

"아아...로제 님. 제가 조금 전 그렇게 최선을 다해 해명을 해 드렸는데...이렇게나 쌀쌀맞은 태도라니. 하늘의 별이 되신 베일 님과 멜리사 님께서 보시면 통곡을..."

"그 더러운 입에 부모님을 담지 말라고 했지!"

"푸하하하하!"

날카롭게 외친 로제가 구시온을 노려보자, 배가 찢어지게 웃던 구시온이 별안간 뚝. 표정을 굳혔다.

"이번엔 안 덤비시는군요."

"..."

"뭐, 아주 바람직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건 수명 연장의 지름길이니까요. 좋아요. 아주 좋아."

"그만 닥치고 묻는 말에나 답하지."

승현이 연신 로제를 도발하는 구시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구시온이 품속을 뒤적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디 보자. 분명 여기 어디쯤 있었을 텐데...아, 찾았다. 우선 이걸 봐 주십시오."

"우웁..."

반사적으로 구시온이 내민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던 로제가 입을 틀어막았다.

승현 또한 로제 정도는 아니었지만, 익숙한 기운에 강한 구토감을 느끼며 눈살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물건이지만, 낯설지 않다.

"저건...?"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시시포스님의 화신체에 장착되어 있던 코어입니다."

"분명 겨울숲 부족에서 완전히 파손되었을 텐데? 네가 이걸 어떻게?"

"어후...말도 마십시오. 완전히 박살이 나는 바람에 수습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아무튼, 승현 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그 첫 번째 대가로 음...이걸 완전히 폐기해 드리죠."

"전혀 나에게 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제안인데. 어차피 화신체의 코어라고 했으니 시시포스의 본체에는 전혀 타격이 없을 테고."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구시온이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시시포스의 코어에 자신의 마기를 불어넣자.

- 다시 붙어. 이 개자식아.

과도한 도핑으로 인해 온몸이 붉게 물든 승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곧이어 시시포스의 화신체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승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시온이 말을 이어갔다.

"이 안에 보관된 건 시시포스 님의 마기 중 일부. 그리고 자신이 패배한 날의 기억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저는 여러분들의 목숨을 한 번 구원해 드리는 겁니다. 투쟁심과 파괴 본능. 그리고 식욕이 전부인 미련한...아, 지금 건 못 들은 거로 해 주십시오. 아무튼, 그런 시시포스 님의 본체에 이 기억이 흡수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잠시 이야기를 멈춘 구시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앞뒤 가리지 않고 여러분들. 음...그중에서도 한승현 님을 찾아오시겠죠. 비록 약하디약한 화신체 상태였다곤 해도 자신에게 패배의 고배를 들이켜게 만든 분이시니까요."

"..."

"게다가 만마전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시시포스님은 고작 서열 16위인 저따위보다 몇 배는 강하시니...저 하나도 온전히 상대할 수 없는 두 분께서 분노한 시시포스님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단순한 블러핑일수도 있다. 하지만 아예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침묵에 빠진 승현과 로제를 보며 빙그레 웃던 구시온이 별안간 와자작, 구슬을 깨부숴 버렸다.

"물론 그런 상황은 저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을 벌인 구시온은 마지막 남은 구슬의 파편까지 완전히 으깨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제가 시시포스 님을 따르는 건 어느 정도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일 뿐."

그리고는, 구슬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마기를 흡수하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에 이런 짓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겁니다."

순식간에 구시온의 내부로 흡수된 시시포스의 마기. 아무래도 완전히 빈말은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승현이 턱을 매만졌다.

"그런가...그런데, 방금 그걸 부숴버림으로써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더더욱 사라진 것 같은데. 안 그래?"

"뭐, 대가라곤 했지만, 이건 사실 두 분을 위한 제 작은 호의입니다. 진짜로 드릴 선물은 따로 있기도 하고. 아무튼, 제가 승현 님에게 바라는 건 많지 않습니다."

"말해라."

"관리자의 자격을 취득해, 초월체를 흡수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격이 높은 존재로 성장해 주십시오."

아무 것도 모른 채 만마전에 잠들어있을 시시포스를 떠올린 구시온이 한층 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과거의 일은 잠시 접어두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가 되자, 이겁니다."

"성장? 그보다...나보고 지금 악마와 거래를 하라는 건가?"

"이런, 아직도 그런 구시대적인...그저 본인이 가진 힘의 특성에 의해 소속이 결정되었을 뿐. 만마전의 존재라고 해서 전부 악한 것도 아니고, 만신전의 존재라고 해서 전부 선한 건 아닙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결코 네가 선한 놈이 아니라는 거지."

"뭐, 여러분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좀 억울하긴 하지만, 그 부분은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제 님."

"...?"

갑작스레 지목당한 로제가 고개를 들어 분노와 허탈함, 그리고 무력감이 섞인 눈으로 구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에게 다가간 구시온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로제 님께서 승현 님을 도와주시면, 일출의 행방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그걸...어떻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로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분명, 어머니께 듣기론 일출은 폐기되었다고..."

"일출이라면, 네가 사용하는 일몰과 관계가 있는 거야?"

이름에서 느껴지는 연관성에 승현이 질문을 던지자, 로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출은 일몰과 한 쌍으로 제작된 아버지의 독문병기예요. 그런데...그걸 저자가 어떻게?"

"뭐, 오래 살다 보면 여러 사실을 알게 되는 법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베일 님께서 일출을 스스로 폐기하지 않으셨더라면, 온전한 상태의 시시포스 님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몰랐겠네요."

"..."

음기의 집합체인 일몰과는 반대로, 극양의 기운을 품은 일출.

그 패도적인 위력은 베일조차도 온전히 제어할 수 없었기에, 로제가 태어나기 전에 베일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출을 파괴했다고 들었었는데.

구시온의 이야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로제가 한 차례 몸을 비틀거렸다.

"비록 일출의 힘이 많이 약화 되긴 했지만, 확실한 건 아직도 제가 아는 곳에 보관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걸 믿어야 할까. 로제가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 이번에는 구시온이 승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장소는 승현 님께서도 익히 아는 곳일 겁니다."

"내가 잘 아는 곳?"

"그리고, 승현 님께서 잡아먹어야 할 존재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구시온이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승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방패 위를 가로지르는 한 자루의 창. 어찌 저 문양을 모를 수 있을까.

"너...아레스를 어떻게 아는 거냐."

"아레스뿐일까요. 키메라 프로젝트. 그리고 천윤기와 유천호 등.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설마, 네가 아레스의 클랜장이냐?"

아레스의 클랜장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데다가, S급에 도달한 헌터라는 소문이 돌 정도의 강자. 승현이 본 구시온이라면 그런 역할을 맡고도 남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구시온을 아레스의 클랜장으로 단정 지은 승현이 그를 강하게 노려보자, 짐짓 겁먹은 시늉을 하며 뒤로 물러난 구시온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뭐, 아예 관련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사실대로 말해!"

"음...그러니까. 직장 동료쯤 되려나요. 아, 그 친구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조금 더 있는데. 말해드릴까요?"

"빠짐없이 말해. 단 하나도 빠짐없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본 거지? 수많은 의문이 승현과 로제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으음...이걸 말씀드려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이라는 게...뭐. 상관없으려나."

승현의 주위를 맴돌며 자문하던 구시온이 결정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녀석의 진명(眞明)은 단탈리온. 만마전의 서열 28위이자, 시시포스님의 충직한 음...왼팔 정도 되려나요?"

"...아레스의 클랜장이 시시포스와 관련이 되어 있다고? 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는 거냐."

"악마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뭐, 이게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요. 푸하하하!"

자신의 농담이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린 구시온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단탈리온은 이미 오래전부터 승현 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날? 아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겠지. 지난 몇 달간 아레스와 마찰을 빚어왔으니..."

"땡! 그게 아닙니다!"

구시온이 승현의 코앞까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마치 약올리듯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인간들 식으로 세어 보자면, 11년쯤 되었으려나요."

"11년? 잠깐..."

머릿속에 무언가를 떠올린 승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11년이라면 분명, 자신이 각성 절차를 밟고 막 각성자가 되었을 시기일진대.

승현의 추측에 쐐기를 박듯, 구시온이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승현 님께 부여된 [마력 결핍]은 누구의 짓일까~요?"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29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의 주변을 맴돌며 빙글빙글 웃음을 짓는 구시온을 향해 승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단탈리온이 내가 부여받은 마력 결핍과 연관되어 있다는 거냐?"

"어라? 길길이 날뛰며 화내실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침착하시네요. 또 한 번 감탄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한층 낮아진 승현의 목소리. 구시온이 가볍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쯧쯧, 그걸 꼭 제 입으로 말해야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악마라고 하더라도 동료를 이렇게까지 팔아먹는 건 좀...하하."

"말장난에 응해줄 생각 없으니, 당장 집어치워."

"그렇게 정색하실 것까지는...뭐,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구시온을 보며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다.

백 보 양보해 아레스의 클랜마스터가 조금 전 언급된 단탈리온이라고 해도, 대체 왜 일개 연금술사 지망생이었던 그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만에 하나 자신의 성장을 저지할 생각이었다면, 왜 그 당시에 자신을 죽이지 않고 지금까지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

연이어 쏟아지는 의문이 뒤섞이며 승현의 머릿속에 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왜 굳이 그런 짓을...?"

"그야, 승현 님에게 직접 손을 대는 건 단탈리온에게 있어 커다란 위험부담을 안고 가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위험부담이라니. 시시포스의 수하가 풋내기 각성자였던 승현에게 위험부담을 느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위험부담? 대체 무슨 위험부담을..."

"우선, 이것부터 받으시죠."

승현의 의문을 뭉개버린 구시온이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조상신의 영체를 건넸다.

"아마, 굳이 승현 님이 찾아가지 않더라도 머지않은 시일 내로 단탈리온과 부딪히게 되실 겁니다. 그전까지 관리자의 권한을 취득해 최대한 격을 높이시고 입지를 견고히 다지며 힘을 기르시길 권장해 드리는 바입니다."

"...내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뭐지?"

"이유라...뭐, 지금은 개인적인 호감 정도로 해 두죠. 밑천이 다 드러나면 전 뭘 먹고 삽니까. 게다가 제 역작 중 하나인 베타까지 빼앗아 가시고.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장난스레 울상을 지어 보인 구시온이 승현의 발치를 가리켰다. 자신을 지목한 걸 알아차린 듯 움찔, 파문이 일어나는 그림자.

"역시,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흉내쟁이도 네 작품이었나."

"어라? 이건 별로 안 놀라시네요. 그보다 흉내쟁이라니. 그런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푸하하,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제작 말고 작명에도 제법 소질이 있으시군요."

"그래서, 흉내쟁이의 소유권을 주장하시겠다?"

만일 구시온이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지금 당장은 흉내쟁이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흉내쟁이가 지닌 바 능력도 도움이 많이 되거니와, 그간 알게 모르게 정도 많이 들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승현의 우려와는 달리 구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미 제 손을 떠난 녀석인데. 눈물이 날 만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거 참 다행이네."

소매로 장난스레 눈가를 쓱쓱 문지른 구시온이 내심 안도하는 승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무튼, 제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깐. 아직 묻고 싶은 게..."

"쉿. 그건 나중에. 조만간 기회가 되면 뵙도록 하죠."

승현과 로제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구시온의 몸이 순식간에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머리만 남은 구시온.

허공에 둥둥 뜬 머리가 승현을 향해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넸다.

"아 참, 깜빡하고 여쭤보지 못했는데. 승현 님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으십니까?"

어머니?

뜬금없는 질문에 승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구시온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역시...."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끝으로, 구시온의 머리는 완전히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 * *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에요. 대체 왜 저희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발끝으로 땅을 톡톡 치던 로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 또한 심경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데. 속내를 알 수 없으니...답답할 노릇이다.

'게다가, 마지막 질문은...'

어머니에 관해 아는 거라고는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는 것뿐. 이를 제외하면 아무런 기억도, 기록도 없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말씀을 안 해주셨지.'

나에게 늘 따뜻하던 아버지는 유독 어머니에 관한 질문을 할 때면 의도적으로 대화를 피하셨다.

어렸을 땐 남들 다 있는 엄마가 왜 나는 없냐며 울고불고 난리를 친 적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니 반쯤 체념한 상태로 받아들였었고.

그래서 아예 잊고 지냈었는데. 구시온은 대체 무슨 의도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걸까.

"짜증 나는 새끼 같으니라고."

"맞아요. 구시온은 아주 짜증 나는 새끼에요."

"..."

처음으로 로제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에포나나 춘식이도 아니고 설마 로제가 입에 저런 말을 담을 줄이야.

조금 놀란 내가 로제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꾹 쥐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완전히 패배했지만...나중엔 꼭..."

아무것도 못 하고 무기력하게 패배한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설마 극야를 맨손으로 찢어버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강함의 범주를 한참 뛰어넘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극야를 받아내고도 여유가 가득한 모습은,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마저도 섬찟함을 느낄 정도였다.

"헌터로 치자면...어느 정도일까."

S급?

아니. 장담컨대 S급 헌터도 극야를 피할 수는 있을지언정, 저렇게 손쉽게 깨부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건 S급을 초월한 경지라는 건데.

"설마, 단탈리온도 구시온과 비슷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다.

단탈리온의 서열은 26위.

만마전의 생태계를 모르니 어떤 순으로 서열이 정해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그것이 가진 힘의 크기로 결정되는 거라면...과연 우리에게 승산이 있는 걸까?

"어쩔 수 없지."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단탈리온이 날 찾아올 거라고 했으니, 구시온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그때 가서 판별하면 될 일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지금은 오로지 내 판단을 믿는 수밖에.

"보아하니 여기에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 같지는 않고..."

[관리자의 정수]

등급 : [미정]

- [AR-001] 채널 관리자의 권능이 담긴 영체이다. 오로지 자격이 있는 자만이 이것을 취할 수 있다.

* 흡수에 필요한 시간 : [24시간]

미미한 온기를 발하는 조상신의 영체를 주머니에 챙긴 나는, 알파와 델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희들은 주인 따라 안 가냐?"

아직까지도 구시온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부동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기간트와 트롤.

어느새 놈들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마기는,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아까와는 달리 기운이 없어 보이는 듯한 알파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창조주께선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 그러니 여기에 남아야 한다."

"여기 남아서 뭘 하려고?"

"당연한 걸 묻지 마라! 인간! 동포들을 죽인 고블린들을...어억."

꽈앙- 요란한 소리와 터져나오며 나를 향해 어금니를 드러내던 알파가 턱을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곧이어, 몸을 일으킨 델타가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창조주의 허락 없이 돌발 행동을 벌이면 용서하지 않겠다. 게다가 이분들은 창조주의 손님이시다. 기본적인 예를 갖추어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가 왜 평범한 인간한테...커윽."

이번에는 옆구리를 걷어차인 알파가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너희, 형제 아니었나?"

"저런 덜떨어진 놈은 내 형제가 아니다. 그리고 창조주께서 언급하신 베타 또한 내게 있어선 그저 배은망덕한 존재일 뿐. 오로지 그분만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건, 나. 델타뿐이다."

강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얼굴. 바닥에 쓰러진 알파의 목덜미를 움켜쥔 델타가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무튼, 창조주께서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으니 피조물들을 학살한 죄와 그분께 덤벼든 죄는 묻지 않겠다. 그럼 이만, 우리도 돌아가도록 하지."

"너희는 어디로 갈 생각이지?"

알파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가던 델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에게 허락된 장소는 이곳뿐이다. 그러나 창조주께서 이곳의 소유권을 포기하셨으므로, 앞으로는 본래 주인이었던 고블린들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일이 없을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델타와 알파는 쿵쿵거리며 반쯤 불타버린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갈 곳도 없을 텐데.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잠깐 머릿속을 스쳐간 의문을 지워버린 나는, 불씨가 꺼져가는 숲을 둘러보았다.

익스플로전 포션으로 인해 거의 초토화가 되긴 했지만...그래도 아직 호수 주변은 이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파릇파릇한 나무와 새가 지저귀는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그저 메마른 나무와 진흙뿐이었던 늪지대가 탁한 호수로 변해버린 것뿐이지만.

"일단, 저 둘이 사라졌으니 검은 숲의 문제는 해결된 셈이네."

"그러게요. 앞으로 고블린 씨들은 밤마다 고통받지 않아도...그런데, 이제 고블린 씨들은 어디서 먹을 걸 구하죠? 저희는요?"

아차.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최대한 아껴서 먹고 있긴 했지만, 내가 챙겨온 비상식량이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은 분량은 최대한 아껴서 먹어도 이틀. 이게 다 떨어지면, 고블린들 뿐만 아니라 나와 로제마저 다시 통로가 열리기 전까지 쫄쫄 굶어야 한다.

"미치겠네...어쩐다."

게다가 통로를 개방하는 데 필요한 다음 퀘스트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만일 식량이 전부 떨어지고 나면, 그래도 며칠쯤은 숲 주변에 남은 곤충으로 연명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마저 다 떨어지고 나면 방법이 없다.

게다가 어지간하면 그것들만큼은 입에 집어넣고 싶지 않다. 물론 최악의 상황이 오게 되면 어찌어찌 먹긴 하겠지만...솔직히 입맛이 도는 비주얼은 아니니까.

"일단은 높은 산 부족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저, 저기. 한...?"

식량 문제로 인해 한층 더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손을 가리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내리는데.

파지직-

손에 쥐고 있던 조상신의 영체가 잘게 부서지며, 그곳에서 뿜어져 나온 시뻘건 연기가 내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관리자의 정수]에 저장된 사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떠오른 메시지. 별안간 발밑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듦과 동시에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어갔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0화

어두웠졌던 시야가 돌아오자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주변을 바삐 돌아다니는 각양각색의 고블린들이었다.

"여긴...동굴?"

멀쩡히 서 있는 걸 보니 정신을 잃었던 것 같지는 않고. 내부의 구조로 미뤄보았을 때 검은 바위의 동굴인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 없이 제 할 일에 몰두하는 고블린들. 게다가, 찬찬히 살펴보니 아는 얼굴이 단 하나도 없다.

"로제는? 검은 바위는?"

심지어, 항상 내 그림자 안에 들러붙어 있던 흉내쟁이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상한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막 휘파람을 불며 경쾌하게 내 앞을 지나가는 고블린 하나를 불러세우려는데.

"이봐, 거기 너. 잠깐만..."

스윽- 마치 유령처럼 내 손이 녀석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황당한 상황. 헛것을 보았나 싶어 여러 차례 같은 행동을 반복해 보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뭐지, 관리자의 정수 때문에 생긴 일인가."

어서 높은 산 부족으로 돌아가 식량을 충당하고, 가게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일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막 동굴 밖을 나서려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호오, 이번엔 인간이로군. 이례적인 일인걸."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나이가 지긋한 고블린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블린이지만 고블린 답지 않은 말투와 분위기.

손때 묻은 지팡이를 껴안고 있는 녀석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내가 보여...윽!"

내 질문에 대답 대신 머리 위로 날아든 건, 녀석이 껴안고 있던 굵은 지팡이였다.

퍽-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픈 일격이다. 머리를 감싸 쥐고 꼴사납게 주저앉은 나를 향해 노(老) 고블린이 장난스레 일갈했다.

"요놈! 내가 존재해온 세월이 얼마인데, 반말을 찍찍 해대는 게냐?"

"...죄송합니다."

"죄송은 되었고, 영감님이라고 부르거라. 어디 버릇없이...쯧쯧."

너무 아픈 나머지 나도 모르게 사과해 버렸다.

시시포스한테 얻어맞았을 때도 이런 꼴은 보이지 않았는데...구부정한 고블린 영감님이 뭐가 이렇게 센 거지.

"그나저나 당신...아니, 영감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하나씩 묻거라, 요놈아!"

나에게 호통을 친 영감님이 자신의 앞에 앉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땅을 팡팡 두들겼다.

반쯤 홀린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고블린 영감님이 만족스럽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이제 좀 눈높이가 맞는구나. 그래, 인간아. 네 소개를 해보거라."

"...한승현이라고 합니다. 대체 여긴 어디...윽!"

딱-

또다시 내 머리 위로 떨어진 지팡이. 도저히 고블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속도와 위력에 또다시 머리를 감싸 쥐어야만 했다.

"요놈! 하나씩 천천히 질문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자칫 잘못했다간 머리통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기에, 영감님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마음먹었다.

"일단...여긴 어디입니까?"

"이곳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그게 끝입니까?"

"끝이다."

뭐 이런 성의 없는 답변이 다 있어? 최소한 부연 설명 정도는 덧붙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인간인 네 녀석이 이곳에 들어올 자격을 얻은 걸 보니, 어지간히 고블린들에게 신뢰를 받은 모양이구나."

"도움을 조금 주긴 한 것 같습니다. 많이는 아니지만요."

"원, 녀석. 생긴 거랑 다르게 겸손은..."

겸손이라.

굶주린 고블린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고, 무기를 쥐여주고, 구시온의 실패작들을...이렇게 생각해 보니 꽤 많은 것 같기도 하네.

"그리고 네가 여기에 왔다는 건 구시온 그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이 우리 차원에서 손을 떼었다는 뜻일 테고. 놈을 쫓아낸 게 네 녀석이냐?"

굳이 따지자면 쫓아낸 건 아니고, 제 발로 걸어나간 거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뭐, 그런 셈입니다."

영감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영감님이 입을 열었다.

"좋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다음 질문. 앞으로 딱 두 가지만 더 답해주마."

"두 가지라니. 너무 짠...흠흠. 아닙니다. 그럼 우선, 영감님은 누구십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고블린이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을까. 어이없어하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배를 잡고 낄낄대던 영감님이 수염을 매만졌다.

"나는 이름이 없다. 내가 바로 고블린 그 자체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건 가장 나중에 말해 주마. 자, 이제 하나 남았다."

똑바로 대답해 준 것도 하나 없으면서....

으스대듯 말하는 영감님에게 한소리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손에 쥐어진 지팡이를 발견한 나는 인내심을 발휘해 꾹 참았다.

'그나저나 진짜 고블린 맞아? 뭐가 저렇게...'

"그것도 질문에 포함되는 게냐."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설마,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요놈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어서 질문이나 하거라."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생각도 함부로 못 하겠네. 들으란 듯 속으로 툴툴거린 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 영감님을 쳐다보았다.

"영감님은 구시온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야, 그놈이 내 격을 있는 대로 떨어트려 놓았는데 모를 리가 있나. 망할 놈 같으니라고."

격을 떨어트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조상신도 나에게 격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고, 구시온 또한 격을 키우라는 이야기를 했었지.

그 격이라는 게 대체 뭘 얘기하는 걸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이 꼬리를 물며 몸집을 키워가던 그때. 영감님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간단히 이야기해 주마. 이 동굴 안을 돌아다니는 모든 고블린들은, 모두가 '나'다."

모두가 나라니.

이건 또 뭔 뜬구름 잡는 소리야.

"요놈, 이제는 입도 안 열고...흠흠. 아무튼, 저기 지나가는 덩치 큰 오닉스 고블린이 보이나?"

"보입니다."

영감님이 손가락을 뻗어 어깨에 도끼를 둘러메고 터덜터덜 동굴 밖으로 나가는 거구의 고블린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검은 바위와 상당히 닮은 녀석이다. 무언가 관계가 있는 건가.

"들어보았을지 모르겠지만, 저 녀석이 바로 굳센 바위다."

굳센 바위라면, 내가 기억하기론 녀석은 검은 바위의 조상이자 고블린의 멸망을 지켜보았던...이전 세대의 족장인데.

"그리고 저기서 무기를 손질하는 녀석은 속삭이는 귀. 역대 고블린 중 가장 아름다운 암컷이지. 인간인 네 녀석이 보아도 아름답지 않나?"

"...그렇네요."

잘 모르겠다.

속눈썹이 좀 긴 것 빼면 밝은 귀랑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속삭이는 귀 또한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분명 약소 부족의 족장이었으며, 굳센 바위와 혼약을 맺은 사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저 녀석은..."

내 생각을 읽은 듯, 영감님은 신이 난 표정으로 이리저리 고블린들을 가리키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대다수가 생소한 이들이었지만, 몇몇은 고블린들의 입에서 들어본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그들의 이름을 듣던 나는 어렵지 않게 녀석들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설마, 여기 있는 모두가 전대 족장들이란 말입니까?"

"그래. 하얀 샘물을 제외한 역대 모든 족장들의 흔적이지."

"하얀 샘물은..."

"알고 있다. 네 손에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흉내쟁이에게 혼까지 소멸당해 버렸지. 흥,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구시온의 꾐에 홀딱 넘어가서는..."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를 만지작대던 영감님이 별안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 안에서 네 행보를 지켜보던 '내'가 모두 동의했으니, 네 녀석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거겠지."

"그렇다는 건...?"

"그래. 내가 바로 역대 족장들의 영혼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이자, 고블린들의 조상신이다. 요 녀석아. 뭐, 이제는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지만."

내 추측에 쐐기를 박는 영감님.

그런데, 내가 알기론 에포나는 조상신의 경우와 달리 단일 개체였는데. 관리자마다 차이가 있는 걸까?

게다가 여기 있는 영감님이 조상신이라면, 내가 만난 조상신은 대체 누구지?

"이놈이..."

자문한 겁니다. 게다가 입 밖으로 내뱉으면 또 지팡이를 휘두를 거 아닙니까.

"끄응...잔머리를 쓰다니. 좋다. 딱 여기까지만 대답해 주마."

못마땅한 듯 나를 쳐다본 영감님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냉정히 말하자면 숫자만 많았지, 다른 종족에 비해 연약하고 아둔한 고블린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이러한 방법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대 모든 고블린들의 지혜와 지식이 집대성된 존재. 그게 바로 나, 조상신이다."

내가 정확히 이해한 건진 모르겠지만...그러니까, 관리자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힘을 키워나간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적인 힘이라기보단 '격'이다."

"그렇다면, 그 격이라는 건 어떻게 키우는 겁니까?"

"유대감. 혹은 신앙이나 믿음. 격을 높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격이 높을수록 자신이 관리하는 차원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커지고, 또한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이 풍요로워진다."

그러고 보니 에포나도 자신의 차원에 영향력을 발휘했었지. 날씨를 조종하고, 탈피하지 못하는 요르를 도와주는 등.

영향력이라는 건 기적이랑 비슷한 걸까?

"이놈아.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해야지. 그리고 네가 만난 조상신과 나는 같은 존재..."

조상신 영감님이 한참 말을 이어가던 그때. 빠지직- 허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헛것이 아닌 모양인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본 영감님이 눈살을 찡그렸다.

"이런...여기까지인가 보구나. 오래간만의 후보생이라 대화를 좀 더 나누고 싶었는데. 해줄 이야기도 많이 남아있고 말이지."

빠지지직-

또다시 뒤틀리는 공간. 신기한 건,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바닥에 앉아있는 영감님과 내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 공간이 사라지는 겁니까?"

"저장되어 있던 힘이 전부 소진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원래는 다음 후보로 검은 바위를 점찍어두고 있었는데...그래도 녀석보단 네가 낫겠지. 에잉. 인간에게 고블린의 운명을 맡겨야 하다니."

안타까운 듯 혀를 쯧쯧 차던 영감님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여전히 바닥에 앉아있는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래도 모든 '내'가 인정한 네 녀석이니 내 뒤를 이어 잘 해낼 거라 믿는다. 자, 이곳에 오래 있으면 정신이 붕괴될 지도 모르니 어서 돌아가거라. 남은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하자꾸나."

곧이어,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발밑이 푹 꺼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곧이어 정신을 차린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인간 한승현이 깨어났다!"

"정말요? 어디, 괜찮아요? 갑자기 쓰러져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

동굴 안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밝은 귀와 검은 바위.

그리고 이쪽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오는 로제의 모습과.

- [AR-001]채널의 관리자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 관리자의 권한이 일부 개방되었습니다.

- [유대 포인트]의 명칭이 [에테르]로 변화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였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1화

"내가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다고?"

"그러니까..."

로제가 말하길, 조상신의 정수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연기에 휩싸인 나는 곧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고 한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로제가 나를 들쳐메고 전속력으로 검은 바위의 동굴로 돌아온 뒤, 무려 사흘이나 눈을 뜨지 않았다고 한다.

"사흘이라니..."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을 리 없는데. 쉽사리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뻐근한 몸과 모두의 눈빛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영감님이 장난을 친 건가. 거 참...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영감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터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결국,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엔 너무 버겁다고 판단한 나는, 정신을 잃은 동안 겪었던 일을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니까, 음...쉽게 말하자면 내가 조상신이 되었어."

".....?"

내 폭탄 발언에 검은 바위를 비롯한 고블린들의 황당한 시선이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조상신이라고?"

"인간 한승현의 농담은 재미가 없다."

"인간은 고블린의 조상신이 될 수 없다. 이건 상식이다."

"조상신이라면, 구시온이 말했던...? 설마, 받아들인 거예요?"

"뭐, 자의 반 타의 반이긴 했지만. 그렇게 되었어."

대강 상황을 눈치챈 듯한 로제를 제외하면 모두가 불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섭섭한데.'

모두의 신뢰를 받아 관리자 후보로 발탁된 거라더니...녀석들의 표정에선, 믿음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백 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보여주는 편이 낫겠지.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을 흘려버린 후.

어떠한 권한이 추가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오픈하자 새롭게 추가된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채널 관리자]

- 한 채널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채널 관리자는 에테르를 소모해 자신의 권능을 강화하고, 채널의 등급을 높일 수 있습니다.

[현재 관리 중인 채널 목록]

- [AR-001] (7등급)

- [사용 가능한 권능]

- [기적(소)]

- 자신에게 소속된 채널에 한해, 인과 관계를 무시하고 작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단, 관리자의 격을 넘어서는 무리한 기적은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뿐이라니.

게다가 설명 또한 부실하기 그지없다. 포인트가 얼마나 소모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건지.

'결국, 직접 몸으로 알아보라는 뜻이네.'

현재 내가 보유한 에테르는 2천 남짓. 퀘스트 두 개를 클리어하며 받은 유대 포인트가 변환된 수치다.

유대 포인트에 빗대어 보면 그리 많지 않은 수치였기에, 신중히 사용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그간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 혹시 알파랑 델타가 약속을 어기고 다시 여길 쳐들어왔다든가..."

뭐, 놈들이 다시 와 봐야 로제가 있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었겠지만.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로제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오물거렸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대신 다른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요...."

문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조금 긴장하며 로제를 바라보자 머뭇거리던 그녀가 한구석에 가득 쌓인 플라스틱 페트병을 가리켰다.

전부 내가 가게에서 가져왔던 것들이다.

"한이 정신을 잃은 동안, 식수가 다 떨어졌어요. 식량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요."

벌써...라고 말하려던 나는 목소리를 꿀꺽 삼켰다. 하기야, 사흘이나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로제와 나. 두 명 기준으론 제법 넉넉하게 식수와 식량을 챙겨오긴 했지만, 고블린들을 전부 먹이기엔 턱도 없이 부족한 양일 테니까.

그렇다곤 해도 대책이 아예 없는 건 아닐 텐데.

"식수? 식량이라면 몰라도 식수라면 로제 네가 다루는 물의 정령이 있지 않아? 정령을 이용해 물을 만들어내면 되는 거 아냐?"

"그게...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아무리 불러도 운디네가 반응을 보이지 않아요."

이것도 통로가 닫힌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반사적으로 주변을 한 번 훑어보자 지친 듯한 고블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밝은 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본래 녹색이던 녀석의 피부는 청록색으로 변해 있었고, 파리한 두 뺨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갈증에 시달렸다고 해도, 사흘 정도로 저렇게 핼쑥해지진 않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밝은 귀는 왜 저래?"

"그게..."

로제의 설명에 의하면, 식수가 떨어진 후. 갈증을 참지 못한 밝은 귀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숲으로 들어가 호수의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잔뜩 오염된 물을 그냥 마셨다고?"

"네...말린다고 말리긴 했는데,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밝은 귀는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행동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고 한다.

"오, 오오...나, 나온다...앞뒤로 나온다!!!"

벌떡 몸을 일으킨 밝은 귀가 동굴 밖을 향해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보아하니 단단히 배탈이 난 것 같다.

"쯧쯧...아무리 목이 말라도 그렇지. 그 더러운 물을..."

듣기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배탈이 나면 극심한 탈수로 인해 생명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하던데.

검은 바위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밝은 귀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깨끗한 물이 없으면 밝은 귀의 배앓이를 낫게 만들 방법이 없다. 게다가 요즘은 비도 오지 않아 물을 구할 방법이 없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이 새로 얻게 된 능력을 시험해 볼 순간인 것 같다.

- [기적(소)]를 발동합니다.

- 에테르 [30]을 소모해, [밝은 귀]의 상태 이상 [장염]을 치유하시겠습니까?

일단, 가능은 한 것 같다고 판단한 나는 검은 바위를 향해 자신 있는 어조로 말을 건넸다.

"내가 한 번 치료해 볼게."

"...배앓이는 함부로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다섯 밤은 깨끗한 물을 마시며..."

"일단 한 번 믿어봐."

검은 바위의 말을 자른 후.

녀석이 뭐라 할 새도 없이 곧바로 기적을 발동하자, 심장 언저리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손바닥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 에테르 [30]이 소모됩니다.

- 잔여 에테르 : [2238]

곧이어,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빛은 순식간에 내 몸을 휘감았고. 이로도 모자랐던지, 동굴을 환히 밝히기 시작했다.

'굉장히...화려하네.'

기적을 처음 본 감상은 그러했다. 붉은 기운이 도는 휘황찬란한 광채.

시야가 가려질 정도의 빛이 주변을 가득 메움과 동시에.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놀란 로제와 고블린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건...에포나 님과 비슷한...."

"인간 한승현의 몸이 빛난다!"

"개똥벌레뿐만 아니라, 인간도 몸에서 빛을 내뿜을 수 있는 건가?"

"아니다. 우매한 고블린들 같으니라고. 지금 인간 한승현이 사용한 건 분명한 조상신의 힘이다. 높은 산 부족의 족장, 검은 바위가 보증한다."

아무래도 족장과 대사제 짬이 있어서 그런지, 로제와 검은 바위는 내가 발한 힘을 알아본 모양이다.

"조상신?"

"거짓말이다! 족장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인간이 조상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리 없다. 족장이 잘못 아는 거다."

나머지는 못 믿는 듯한 눈치인 것 같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하자, 이내 주변을 환히 밝히던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 관리자의 권능, [기적(소)]를 발휘해 [밝은 귀]의 상태 이상, [배탈]을 치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기적을 발현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메시지.

그것을 확인한 내가 고개를 들자,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 밝은 귀가 걸치고 있던 가죽 팬티를 추스르며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밝은 귀는 다 나았다! 몸이 가뿐하다! 위대한 밝은 귀에게 배앓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지 호기롭게 외치며 들어온 밝은 귀.

그를 한 차례 훑어본 고블린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인간 한승현. 조금 전의 그건...손도 대지 않고 밝은 귀를 치료했다. 믿을 수 없다."

"배앓이를 하던 밝은 귀가 나았다. 조상신의 기적이다! 인간 한승현이 기적을 일으켰다!"

"이건 조상신밖에 보이지 못하는 기적인데."

"그러고 보니, 인간 한승현은 자신이 조상신이라고 했다."

"인간 한승현은 지금까지 고블린들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점점 커져가는 소란.

"그럼...인간 한승현이 조상신이 된 건가?"

"높은 산 부족의 족장, 검은 바위가 조상신 한승현을 뵙는다."

"높은 산 부족의 날랜 고블린, 붉은 발이..."

"둥근 모래가..."

이제야 내 말을 믿게 된 모양이다.

곧이어. 털썩, 검은 바위를 시작으로, 동굴 안에 있던 고블린들이 하나둘 나를 향해 바짝 엎드리기 시작했다.

"요, 용맹한 고블린. 밝은 귀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영문을 몰랐던 모양인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던 밝은 귀를 마지막으로, 동굴 안에 있던 고블린들이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린 형세가 되었다.

솔직히 믿어준 건 고맙지만, 굉장히 부담스럽다.

"어...음...내가 조상신의 권한을 이어받은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민망하니까 빨리 일어나."

"아니다. 높은 산 부족은 조상신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

아니야. 그러지 마. 그냥 하던 대로 해. 이런 건 권능으로 어떻게 안 되는 건가?

- [기적(소)]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이다.

고작 이런 일에 에테르를 낭비할 순 없었기에 메시지를 치워버린 나는, 필사적으로 녀석들을 일으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제발, 일어나 줘...부탁이야."

"조상신 앞에서 함부로 고개를 들 순 없다."

하지만.

녀석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고집을 꺾지 못한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킥킥..."

허둥대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가리고 웃는 로제를 슬쩍 흘겨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대접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그나저나 퀘스트는 왜 안 나타나는 거야."

모습을 드러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퀘스트. 아무래도 내가 먼저 퀘스트를 찾아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보통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직면한 문제에 접근할 때 퀘스트가 나타나곤 했으니까....'

검은 고블린들과의 분쟁이 해결된 지금. 이들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식수와 식량 부족이다.

혹시 기적을 이용해서 먹을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물질 창조는 현재의 권한으로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안 되는구나.

하기야, 만약 된다고 해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어쨌거나 에테르는 한정되어 있고, 그걸 사용해 식수와 식량을 확보하는 건 언 발에 오줌 누기나 마찬가지인 방법이니까.

그렇다면...일단 식량은 조금 남은 게 있으니, 식수 문제부터 해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물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니,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데...과연 가능할까?

원래대로였다면 번거롭게 확인해 보았어야 할 일이지만, 아무래도 관리자 권한을 얻으며 시스템 또한 한 단계 진화한 모양이다.

- [기적(소)]를 이용해, 오염된 물질을 깨끗이 정화할 수 있습니다.

내 의문에 곧바로 답을 내려준 걸 보니.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2화

구시온이 떠나간 지 열흘. 그러니까, 내가 정신을 차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 선행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열리지 않는 퀘스트.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며 알아낸 것 중 하나는, 에테르를 사용할 수 있는 분야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이다.

- 오염된 호수를 정화하기 위해선, 에테르 [45000]이 필요합니다.

비록 에테르가 부족해 호수 전체를 정화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그래도 고블린들과 우리가 사용할 정도의 식수를 성공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 오염된 물 [30L]를 정화하시겠습니까?

- 에테르 [300]이 소모됩니다.

기적을 발현하자 페트병을 비롯한 각종 용기에 담긴 호수의 지저분한 물이 깨끗하게 정화되었고. 이를 확인한 녀석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조상신 한승현이 또다시 깨끗한 물을 만들어냈다!"

"저리 떨어져라, 우매한 고블린들. 조상신 한승현과 가장 친한 밝은 귀가 가장 먼저 물을 마셔야 한다."

"족장은 검은 바위다. 밝은 귀는 족장보다 아래다. 뒤로 물러나라."

"그만 싸워. 이것도 너희가 전부 목을 축일 정도는 되니까. 만약 부족하면..."

"모두 그만! 조상신 한승현이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집중!"

"집중!"

"집중해라, 멍청한 고블린들!"

내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티격대길 멈춘 녀석들.

"높은 산 부족은 조상신 한승현의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는 일제히 나를 향해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

쏟아지는 수백 쌍의 시선.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을 애써 억누른 나는, 그들을 향해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입을 열었다.

"물만 떠오면 식수는 충분히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차례를 지켜 받아가도록."

"조상신 한승현의 명이다! 높은 산 부족의 고블린들은 줄을 서 차근차근 식수를 받아가도록 한다!"

"족장인 검은 바위는 조상신 한승현의 명을 받들어 높은 산 부족의 부족민들에게 차례를 양보한다. 모두 검은 바위의 앞으로 줄을 선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사불란하게 줄을 서기 시작하는 고블린들. 녀석들이 보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미칠 것 같다.

아무리 관리자가 되었다고는 해도. 얼마 전까지 나와 친근하게 지내던 녀석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 그러니까...겨울숲 부족의 엘프들은 에포나 님을 뵙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존경심이 피어나고...아무튼 그래요. 아마 이들이 한을 보는 시선도 그와 비슷한 거 아닐까요?

이것도 관리자가 되면 얻게 되는 능력일까.

어쨌거나, 로제의 부연 설명 덕에 고블린들의 태도가 급작스럽게 변한 것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부담스러운 건 부담스러운 거지만...어쩔 수 없지.

지난 일주일간의 실험으로, 내가 이들에게 보인 모든 행동은 에테르로 변환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까.

- [높은 산] 부족의 고블린들이 당신에게 존경심을 보입니다.

- 에테르를 [250] 획득하였습니다.

- 잔여 에테르 [4548]

이들에게 무언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존경. 혹은 신뢰를 받으면 에테르가 지급된다.

'괜히 당황하는 표정을 보였다가 고블린들의 빈축을 사면 안 되니까...'

반대로. 신뢰도가 하락할 만한 짓을 하거나, 고블린들에게 무언가 악영향을 끼친다면 그에 걸맞은 에테르가 차감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느낀 의문점이 있는데.

'대체 에포나는 에테르를 얼마나 쌓아두고 지내길래...'

포인트로 환산하면 아마 수천만쯤은 쌓아두고 지내는 거 아닐까.

툭하면 록타를 두들겨 패곤 하는데도 멀쩡한 걸 보니...아마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에테르를 보유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아무튼.

한정된 에테르를 수급하기 위해선 녀석들 앞에선 최대한 위엄 있는 모습을 유지해야 했기에,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며 녀석들을 훑어보았다.

"풉..."

대강 사정을 알고 있는 로제만이 식은땀을 흘리는 날 보며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애써 그녀를 모른 체한 나는 대강 정리되어 가는 주변을 확인한 후. 고블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식수는 다 지급받은 것 같고. 슬슬 해가 저문 것 같은데. 준비는 끝난 건가?"

"그렇다. 검은 바위는 인간...아니, 조상신 한승현의 명에 따라 모든 준비를 끝마쳐 두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검은 바위를 보며 몸을 일으킨 나는, 그와 함께 높은 산 부족의 앞마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 열심히 포인트를 벌어뒀으니, 이제는 그걸 까먹어야 할 시간이다.

- [AR-001]채널의 모든 생명체를 이곳으로 소집하시겠습니까?

- 에테르가 [1000]포인트 차감됩니다.

- 잔여 에테르 : [3548]

식량을 만들어내는 건 지금으로선 불가능했지만...그나마 이 방법이 먹혀들어서 다행이다.

만일 이것마저 불가능했다면 이들이 사냥에 실패한 날엔 꼼짝없이 얼마 남지 않은 비상식량을 풀어야 했을 테고.

'그것마저 떨어진 후엔 나와 로제도 고블린들과 같은 것을 먹어야 했을 테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내 마지노선은 딱 번데기까지다. 그 이상은 조금. 아니, 많이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부우우웅-

그렇게 십여 분쯤 지났을까.

익숙한 날갯짓 소리가 들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검은 숲에서 보았던 커다란 곤충들이 이곳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익숙한 광경이다. 팔짱을 낀 채 이를 지켜보던 나는, 검은 바위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지? 개체 수가 많이 남지 않았으니 딱 먹을 만큼만 잡아."

점점 줄어드는 곤충들의 숫자. 자칫 욕심을 내다간 대안이 생기기도 전에 아예 씨가 말라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검은 바위는 조상신 한승현의 명을 받든다. 높은 산 부족의 전사들은 검은 바위의 뒤를 따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당돌한 녀석들을 향해 경추파쇄자를 꼬나쥔 검은 바위를 필두로 여러 고블린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키이익-

짧은 단말마와 함께 허공에 흩뿌려지는 체액. 순식간에 네 마리의 사마귀를 도륙한 고블린들이 그것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로제가 하늘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로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 멀리서 쿠웅- 하는 육중한 진동이 울렸다.

"...왔네."

쿠웅- 쿠웅-

간헐적으로 울리던 진동의 간격이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인지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사냥감을 해체하는 고블린들.

곧이어 나타난 건. 불과 며칠 전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나와 약속한 뒤 사라졌던 구시온의 피조물. 알파와 델타였다.

"오늘은 왜 부른 거지."

"설마, 오늘도 아무런 용건 없이 우리를 불러낸 건가."

아무래도 고블린들만큼은 아니지만, 이곳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저들 또한 내가 사용한 기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모양이다.

"...안 와도 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불렀으니 온 거다. 우리가 오는 게 싫다면 안 부르면 되는 거다."

그게 안 되니 문제지. 생명체 호출을 발동할 때 특정 필터를 걸면 에테르가 배로 소모되거든.

그러니까 좀 불편하더라도 너희들이 참아. 어차피 얘들한테 그간 지은 죄도 있잖아.

물론 이런 얘기를 입 밖으로 낼 정도로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녀석들을 향해 최대한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돌아가도 돼. 오느라 고생했어."

"..."

그와 동시에 주변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

불과 며칠 전에 그렇게 헤어졌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계속해서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불편할 만도 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고.

"...또 돌아가란 말인가."

"네가 아무리 창조주의 손님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로 툴툴대며 몸을 돌리는 알파와 델타.

처음엔 다짜고짜 이곳에 방문한 녀석들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던 고블린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 되었다.

"쯧쯧...."

심지어 밝은 귀를 비롯한 몇몇 고블린들은 혀를 차며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매일같이 이 말도 안 되는 똥개 훈련을 지켜보다 보니, 약간의 동정심이 생겨난 모양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놈들을 바라보던 그때. 꾸르르륵- 알파인지 델타인지 모를 녀석의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지금까지 계속 굶은 거냐?"

내 물음에 두 녀석이 걸음을 멈추었다.

"굶은 게 아니다. 우리는 창조주의 명에 따라 자연스러운 소멸을 기다리고..."

"닥쳐라. 알파.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으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이겠다."

자연스러운 소멸?

구시온 그놈. 설마 제 피조물을 여기에 버리고 돌아간 것도 모자라,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종용한 거야?

"...저분들을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구시온 그놈은 정말..."

로제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창조주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여자. 또다시 그런 무례를 저지를 시엔 나, 델타가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할 능력은 되고요?"

갑작스레 벌어진 둘의 신경전.

"그만둬, 로제."

이미 몇 차례 겪은 일이기에, 로제를 뒤로 무른 나는 그들을 향해 처음으로 제안을 건넸다.

"그러지 말고 돌아갈 거면 배라도 좀 채우고 가는 게 어때? 먹고 죽은 귀신이...음. 이건 아니다. 아무튼. 어떤 명령을 받았든 간에 너희들도 굶어 죽기는 싫을 거 아니야."

고블린들의 원수나 마찬가지였던 둘을 향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구시온이 떠나간 지금, 녀석들을 향한 악감정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흉내쟁이의 형제뻘 되는 놈들이라 그런 건가...아니면, 케이프의 암시에 걸려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건가....'

어쨌거나 모든 원인은 구시온에게 있는 거고, 이들은 그저 놈의 명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간의 악행에 대한 대가는 녀석들을 창조한 구시온이 받아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케이프 또한...그 점에 있어선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상관없다. 우리는..."

"그래도 되는 거냐?"

내 말을 듣자마자 가만히 고개를 젓는 델타의 앞으로 불쑥 나서는 알파.

"...그만둬라, 알파."

조금 전과는 달리 델타는 녀석을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속내가 뻔히 보였기에,

슬쩍 웃어 보인 내가 손을 뻗자, 쏜살같이 쇄도한 와이어가 허공을 날아다니던 사마귀 한 마리를 포박했다.

"입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이거라도 먹어."

"저, 정말인가...?"

"..."

우드득- 목이 꺾인 채 자신들의 앞에 떨어진 사마귀를 보며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알파와 침묵을 지키는 델타.

- [알파]와 [델타]가 당신에게 미약한 감사함을 느낍니다.

- 에테르를 [100] 획득하였습니다.

- 잔여 에테르 : [3648]

구시온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일까? 메시지를 보아하니 녀석들 또한 내 관리하에 들어온 것 같은데.

'그럼, 고블린들도 모자라 저놈들까지 계속 먹여 살려야 하는 건가?'

미묘한 표정으로 사냥감을 집어 드는 녀석들을 바라보던 그때. 띠링- 기다리고 기다리던 알림음이 울렸다.

-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차원 통로가 재개방됩니다!

- 신규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고블린의 품격-마지막]

- 퀘스트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 고블린의 생활 수준을 높인 후, 사용자의 관리하에 있는 [AR-001] 채널의 등급을 [6등급]까지 끌어올리자.

1. 농업 방식 전파하기(0/1)

2. 건축 방식 전파하기(0/1)

3. 무기 제작술 전파하기(0/1)

제한 시간 : 무제한

보상 : 에테르 [20000]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3화

"휴우...힘들었어요. 배도 고프고..."

나와 함께 통로를 넘어온 로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 채널의 정지되었던 시간을 다시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AR-001] 채널의 시간을 정지하시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나타난 두 줄의 메시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통로 너머의 풍경이 잿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맞는 거겠지."

이번 퀘스트는 이전까지와는 달리 관리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느낌이었기에, 급하게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클리어할 방법도 없는 데다가 시간을 멈추어 두었으니 식량과 식수 부족 등의 문제도 생기지 않을 테고.

'그나저나 설마, 발동 조건이 알파, 델타와 관련되어있었을 줄이야.'

아예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다. 그렇다는 건 그들도 내가 관리해야 한다는 뜻인가. 시스템은 이러한 부분을 다 알고 있었던 거고?

잠시 퀘스트와 시스템에 대해 고찰하던 나는,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음을 깨닫고는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그나저나 시간은 벌어 두었는데. 퀘스트를 무슨 수로 깬다...."

무기 제작술은 어차피 화기류가 아닌 데다 고블린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나무나 돌 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건축이나 농업은 내가 어찌 가르칠 수 있는 분야가 아닌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전문가를 불러야 하나...아니, 그렇다고는 해도...음...그 사람들을 데리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배워야 하나?'

그쪽 분야에 관해선 백지나 마찬가지인 내 지식수준으로는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거니와, 애초에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모르겠다...정 안 되면 내가 배워서 가르치는 수밖에."

어떻게든 되겠지. 어쨌거나 급한 불은 끈 셈이니까 천천히 생각하자.

이제 해결되지 않은 퀘스트는 두 가지. A급 연금술사 라이센스 획득과 만마전의 초월체 탐색이다.

"두 번째 퀘스트는 아마 단탈리온이겠지?"

구시온의 말에 따르자면, 어차피 놈이 나를 찾아올 거라고 했었으니 첫 번째 퀘스트는 자연스레 클리어될 테고.

그러므로 A급 라이센스 취득을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

굳이 퀘스트 때문이 아니더라도, 라이센스를 취득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B급 이상의 라이센스를 취득하면 정식으로 클랜을 창립할 수 있으니까.'

클랜을 창립하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동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클랜이 명성을 얻고 나면 각종 재료와 레시피를 구하기도 손쉬워지는 데다가, 거래소의 VIP 룸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진다.

즉, 돈만 있으면 고위급 균열에서 나온 전리품을 남들보다 먼저 선점할 수 있게 된단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남은 빚을 전부 청산한 뒤, 윤기 아저씨에게 각인술을 배우고...'

심각하게 향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그때. 별안간 벌떡, 몸을 일으킨 로제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겠어요."

"...뭐가?"

"구시온을 다시 만날 때까지만 여기서 지내게 해 주세요. 이대로는 분하고 창피해서 못 돌아가요."

"여기서?"

"네. 지금 돌아가면 에포나 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갑작스러운 제안.

결의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응시한 로제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렵지 않지만..."

"남게만 해 주면 뭐든지 다 할게요. 가게 일도 도와주고, 청소도 열심히 하고. 아, 글도 열심히 배울게요. 어차피 케이프가 돌아갔으니 그 자리를 제가 채우면 되는 거 아닐까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애초에 케이프는 실험 차 데려온 거지, 직원으로 쓰기 위해 데려온 게 아닌데....

어쨌거나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로제의 거취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그때. 반짝,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글을 배운 뒤, 다음 분기에 헌터 자격시험에 응시할 것. 어때?"

"헌터요?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좋아요. 해 볼게요!"

힘차게 대답하는 로제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나는, 머릿속에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가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로제와 함께 집을 나선 승현이 향한 곳은 제피로스의 사옥이었다.

"지금쯤이면 취합이 다 끝났겠지?"

3구역의 전리품을 확인하러 오라는 유신애 팀장의 말을 떠올린 승현이 걸음을 재촉했다.

"2구역이 그 정도일진대...3구역은 대체 뭐가 나왔을까."

균열의 등급이 등급이다 보니, 평소 승현이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물건들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레어 최상위급. 혹은 유니크급의 전리품이 있지 않을까."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 승현이 제피로스의 사옥 앞에 막 도착한 그때.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로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저거..."

로제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반대편 건물 옥외에 설치된 LED 전광판이었다.

- 아레스 클랜은 패기와 열정이 넘치는 헌터분들의 지원을 환영합니다. 클랜 가입 문의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광고가 송출되는 전광판을 힐끗 쳐다본 승현이 로제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아, 처음 보는 거겠구나. 저게 전광판이라는 건데 말이야. 돈을 주면 저기에 광고를..."

"저게 뭔지는 저도 '텔레비' 에서 봐서 알거든요. 이름은 처음 들었지만. 그거 말고, 저기 뒤에 선 사람 말이에요. 그때 봤던 분 아니예요? 언데드를 부리던...."

뒤에 선 사람?

밝은 목소리와 친절한 미소로 연신 아레스 클랜에 가입하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늘어놓는 광고 모델.

그의 뒤로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어라?"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정장을 입은 채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뱀눈의 사내와 거한의 털보. 그들은 분명....

"유천호? 게다가 박덕기까지?"

미리 제작된 광고일 확률이 높았지만,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박덕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천호가 죽은 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왜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는 거지?'

국내의 A급 헌터는 총 100명 남짓.

박덕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천호가 실종되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세상이 조용하다.

"그것도 퇴역 헌터도 아닌, 현역 헌터가...."

놈의 성향을 떠나 A급 정도 되는 헌터라면 그와 연결된 단체, 기관. 그리고 헌터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게다가 유천호는 클랜장인 단탈리온과 달리 딱히 비밀스럽게 행동하던 녀석도 아니다.

그런데도 헌터넷에서마저 그의 실종에 관한 언급이 전혀 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승현이 전광판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던 그때.

"유신애 팀장이 오면 한 번 물어봐야겠어."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승현의 뒤편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누나 찾았니?"

"...어디서 오신 겁니까."

놀란 행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승현을 향해 다가온 유신애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창밖으로 네가 보이길래 그냥 뛰어내렸지. 어머, 그때 봤던 친구도 있네. 로제라고 했던가?"

"안녕하세요. 유 팀장님."

"유 팀장님이 뭐야, 언니라고 불러 그냥. 신애 언니."

"언니는..."

로제의 나이를 대강 알고 있는 승현이 뒷말을 흐리자, 유신애와 로제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뭐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꼭 이렇게 나타나셔야 합니까?"

"뭐 어때. 반가워서 그러지."

"한 줄 추가되겠네요."

"한 줄? 그 정도면 양호하네. 거긴 이미 포기했어."

헌터위키에 작성된 유신애/논란 항목을 떠올린 승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보는 자신도 이럴진대. 유신애와 평생을 함께해야 할 오신우 클랜장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갈까.

'불쌍하구만...지난번 일도 그렇고.'

오신우 클랜장의 머리숱이 나날이 줄어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한 승현이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쓰게 웃던 그때.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인지, 승현을 흘겨보는 유신애 팀장.

그녀의 표정을 본 승현이 슬며시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흠흠...아, 참.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궁금한 거? 뭔데?"

"유천호는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그 재수 없는 자식 얘기는 왜 물어?"

유천호가 승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유신애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아레스 클랜의 광고가 흘러나오는 전광판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녀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 자식, 요즘 쥐죽은 듯 사는 거 같던데. 듣자 하니 그날 이후로 아예 공식적인 활동은 다 접어버린 것 같고. 모르지. 워낙 태생이 음흉한 녀석이라...뒤에서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그게 다입니까? 다른 얘기는 들리는 게 없고요?"

"내가 아는 건 이거뿐인데. 뭐야, 그 자식이 또 뭔가 저질렀어?"

정말 모르는 눈치다.

공론화된 정보가 아니더라도, A급 헌터인 유신애 팀장 정도라면 놈의 실종 여부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그녀마저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는 건, 유천호의 실종이 의도적으로 숨겨졌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단탈리온이 무언가 손을 쓴 걸까. 아니면, 유천호가 죽기 전에 뭔가 수작을 부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연이어 승현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여러 의문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애써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린 승현이 유신애를 따라 제피로스의 사옥 안으로 들어섰다.

"아닙니다. 그보다 이번 전리품은 뭡니까?"

"안타깝게도, 재료 아이템보단 장비류가 많이 나오긴 했는데. 일단 한 번 둘러봐. 우리를 제외하면 네가 가장 먼저 보는 거니까 영광으로 알고."

"..."

"이게 다 이 누님 덕분인 줄 알아. 자, 따라와. 네가 보기 편하게 전부 준비해 두었으니까."

승현의 무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스레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인 유신애가 승현과 로제를 인도했다.

"와아...제가 봤을 때 가게도 엄청 으리으리했는데. 여긴 더 굉장하네요. 책에서만 보던 궁궐 같아요."

그녀를 따라 움직이던 로제가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네 여자친구, 어디 시골에서 살다 왔니?"

"여자친구 아닙니다. 시골은 뭐, 맞는 것 같네요."

"그래? 여자친구 아니라 이거지? 흐흐...재밌겠다."

"왜 그러십...잠깐."

승현의 답변에 수상한 웃음을 짓는 유신애 팀장.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승현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

승현뿐만 아니라, 로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야, 둘 다 왜 그래?"

영문을 모르는 유신애 팀장이 질문을 던졌음에도, 대답 대신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층 구석에 마련된, [1팀장 유신애]란 문패가 달린 그녀의 집무실.

그곳을 심상치 않은 눈으로 쳐다보던 승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저기에 이번 3구역의 전리품들이 보관되어 있습니까?"

"어? 어떻게 알았어?"

아직 말해주지 않았는데. 게다가 저 심각한 표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악취는...역시."

"맞는 것 같죠?"

"악취?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유신애가 긴장된 얼굴로 집무실을 향해 다가가는 로제와 승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4화

"역시."

"마기...인 것 같네요."

집무실로 들어온 승현과 로제가 표정을 굳혔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검, 창, 철퇴, 방패, 단검 등의 장비들.

외형만 보았을 땐 상당히 높은 등급으로 추정되는 무구들이었지만. 이해와 분석을 발동한 승현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전부 이런 상태인가."

테이블 위에 놓인 것 중, 구불구불한 칼날을 가진 단검을 응시하던 승현이 인상을 구겼다.

[마기 주입]

- 아이템을 장비한 사용자의 모든 능력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주지만, 내성이 없는 경우 아이템을 사용할수록 마기에 침식되어 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 침식 속도는 사용자가 보유한 마력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 아이템이 파괴되면 더이상 침식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 에테르를 사용해 정화가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소모 에테르 : [11128]

이곳에 놓인 모든 아이템에 동일하게 부여된 옵션. 이것이 바깥에서부터 느껴지던 마기의 정체임을 직감한 승현이 뒤따라온 유신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한 번이라도 장비를 사용한 적이 있으십니까?"

"어? 어어...아니? 옮길 때 잠깐 만진 것 말고는...뭐야, 무슨 일인데?"

유신애가 벙찐 얼굴로 멍하니 고개를 가로젓자, 승현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길게 접촉하진 않으면 괜찮은 모양이네.'

유신애 팀장 정도 되는 사람이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모양이다.

"옵션은 확인해 보신 겁니까?"

"그야 당연하지. 레어 급이 다섯 개에 유니크 등급이 하나일걸? 유니크 등급은 생각보다 옵션이 좀 별로긴 한데, 붙어있는 스텟이 높아서 나쁘진 않은 것 같아."

반응을 보아하니 디텍터로는 잡히지 않는 옵션인 것 같다고 판단한 승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3구역에서 획득한 전리품 중, 외부로 유출되거나 누군가 사용한 아이템이 있습니까?"

"아, 아니, 여기 있는 게 전부야. 운반할 때를 제외하면 아무도..."

멍하니 질문에 답하던 유신애가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조금 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위축된 듯한 자신의 모양새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살면서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하던 그때.

그녀를 지나친 승현이 아까 눈여겨보던 단검에 손을 가져다 대자, 위험을 경고하듯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 마기가 침투합니다. 정화를 위해 에테르가 [1] 소모됩니다.

- 마기가 침투합니다. 정화를 위해 에테르가 [1] 소모됩니다.

만지기만 해도 에테르가 소모되는 것을 확인한 승현이 다시금 옵션을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아이템들도 아이템들이지만, 이것만큼은 꼭 손에 넣었으면 좋겠는데.'

[요르문간드의 어금니]

등급 : [유니크++]

옵션 : 민첩+20, 근력+10, [절삭], [고대의 맹독]

[절삭]

- 스킬을 사용한 후 이어지는 한 번의 공격은 [레어] 등급 이하의 방어구를 '무조건' 가릅니다.

* 하루에 사용 가능한 횟수 [2/2]

* 필요 마나 : [150]

[고대의 맹독]

[요르문간드의 어금니]에 피격당한 대상에게 [마비], [출혈], [환각], [부패] 중 랜덤으로 한 가지 효과를 부여합니다. (패시브)(중첩 불가)

단, 상대의 상태 이상 저항력이 높을수록 디버프가 부여될 확률이 낮아집니다.

승현이 보유한 [강철의 결의]를 뛰어넘는, 말 그대로 유니크 최상위급에 어울리는 옵션.

익스플로전 포션과 블레이즈 와이어를 제외하면 마땅한 공격 수단이 없는 지금의 그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다.

'게다가, 유신애 팀장의 말을 듣자하니 스텟을 제외한 옵션 또한 디텍터로는 감지되지 않는 것 같던데'

그렇다는 건, 크게 눈치를 보지 않고도 받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현재 그가 보유한 에테르의 총합이 이곳으로 넘어오며 받았던 교류 보상까지 합치면 약 4600가량이라는 것.

단검을 정화하는 데에 필요한 에테르가 1만이 넘어가니, 지금 당장은 사용하는 게 불가능하단 뜻이다.

'에테르야 뭐, 높은 산 부족을 다시 방문하면 어떻게든 벌어들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곤 해도 요르문간드의 어금니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아이템들을 정화하기 위해선 대략 5만 포인트를 모아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에테르도 에테르지만...'

정화가 끝나기 전까지, 누군가가 여기 있는 아이템들을 사용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판단을 끝마친 승현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유신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여기 있는 장비들은 지금 바로 제가 회수해가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그렇게 빨리? 클랜장 승인도 받아야 하고, 관련 서류도 작성을...당장은 무리고, 적어도 이틀은 있어야 해."

승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유신애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이틀은 너무 오래 걸리니...적어도 오늘 중으로는 처리해주셔야 합니다."

승현의 진지한 눈을 본 유신애가 홀린 듯 답했다.

"어? 어어...일단은 전달해 두도록 할게. 오늘 중으로만 처리해주면 되는 거지?"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제야 조금 안심한 승현이 털썩,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나저나 이번 균열 공략,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까?"

"전부 처음 보는 몬스터였다는 것 정도? 하나하나가 제법 강하긴 했지만...뭐, 이번에 들어간 인원들의 등급이 등급이다 보니 별로 문제가 될 사항은 아니었지. 게다가 이 누님이 있었잖냐."

균열 공략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유신애가 으스대듯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누님이 홍아랑 애아를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그럼, 4구역 공략은 언제 시작되는 겁니까?"

"거긴 보스 룸으로 추정되는 곳이어서 만반의 준비를...잠깐. 왜 자꾸 내가 너한테 보고하는 모양새가 되는 건데? 게다가 감히 이 누님의 말을 끊어?"

마치 아랫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 유신애가 따지듯 물었으나, 승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봐? 나 임자 있는 몸인 거 알지? 뭐, 선아 정도라면 소개해 줄 수도 있는데."

"...부탁이 있습니다."

"웃자고 한 소린데...사람 민망하게 정색을 해?"

장난스레 주먹을 치켜드는 유신애를 못 본 체한 승현이 말을 이어갔다.

"직접 들어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 있으니, 4구역 공략팀에 저와 로제를 넣어주십시오."

"앗, 저도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는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물론 안 될 것은 없다.

공략대에 한두 자리 정도 더 만드는 건, 굳이 오신우의 결재를 받지 않더라도 그녀 선에서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니까.

게다가 박덕기를 손쉽게 제압한 승현이라면,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 걸림돌은 되지 않으리라.

"너는 그렇다 치더라도, 로제를 같이 데리고 가 달라고?"

문제는 로제였다.

무력이 검증되지 않은 그녀를 균열 안으로. 그것도 7등급으로 격상된 대규모 균열의 보스 룸으로 데려간다는 건, 자살을 종용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행동이니까.

"안 돼. 그것만큼은."

그렇기에 유신애가 승현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균열 공락 측면에선 저보다 로제가 더 도움이 될 텐데요."

"...이런 거로 농담하는 거 아니다. 너야 뭐 어느 정도 실력이 있으니 네 한 몸 챙기는 게 가능하겠지만, 로제는 아니잖아. 호기심 때문이라면 나중에 내가 따로 시간을 내서 저등급 균열에...."

"확실한 건, 로제가 저보다 더 강합니다. 음...이런 말씀 드리긴 조금 그렇지만, 아마 팀장님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모르고요."

"푸하하, 지금 나랑 장난하니?"

승현의 황당한 이야기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유신애가 로제를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가느다란 팔뚝. 무기라고는 쥐어본 적 없는 듯한 고운 손에 유약한 느낌을 주는 크고 동그란 눈.

연예인이나 배우라면 몰라도, 절대 목숨을 걸고 몬스터와 싸우는 헌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건...호신용인가.'

게다가, 허리춤에 찬 삼단봉으로 추정되는 무기는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져 버릴 것처럼 생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신애가 이러한 판단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와 마주하면 무조건 반응하는 자신의 특성이 발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눈은 몰라도, 직감은 못 속이지."

그렇기에 승현의 말을 시답잖은 농담 정도로 치부한 유신애가 낄낄거리자, 조금 기분이 상한 로제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진짜거든요!"

"진쨰거든요~"

"따라 하지 마세요!"

"떄럐 햬지 마섀요!"

그런 로제가 귀엽다는 듯, 그녀를 놀리며 낄낄거리던 유신애가 표정을 바꾸었다.

"아무튼, 균열 공략은 장난이 아니야. 아무리 승현이 네 부탁이라고 해도 로제를 데려갈 순 없어."

"이거 참. 이 자리에서 증명해 드릴 수도 없..."

승현이 답답하다는 듯 유신애를 바라보던 그때. 끼이익- 경첩의 마찰음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뭐야. 어떤 놈이 감히 노크도 없이...어라? 당신이 여긴 웬일이야?"

유신애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습관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던 오신우가 재빨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로제 씨도 오셨군요."

"안녕하십니까 클랜장님. 안 그래도 부탁드릴 게 있었는데. 마침 잘 되었네요."

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눈을 빛내는 승현을 본 오신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부탁이요?"

"그게 말입니다..."

3구역의 전리품을 오늘 당장 가져가고 싶다는 승현의 이야기를 들은 오신우가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사장님의 부탁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절차라는 게..."

아무리 승현에게 우선 구매권을 주었고, 그 대가로 금전 대신 아이템의 가치에 걸맞은 제작품을 받기로 약속했다지만...그래도 형식상 공략에 참여했던 팀장급 헌터들의 동의는 얻어야 한다.

'뭐든지 내 독단으로 처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한 이유로 생각에 잠긴 오신우와 눈이 마주친 유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난 그 부분에 있어선 동의했어. 진성이나 철규, 선아도 동의해 주겠지, 뭐. 꽤 쓸만한 것들이긴 하지만, 단검을 제외하면 못 구할 정도의 아이템들도 아니고."

"그건 그렇긴 하지만...음, 일단 다른 팀장들의 의사 정도는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겠습니까?"

"늦어도 오늘 중으로는 가능할 듯합니다."

"오늘이라...그렇다면야, 크게 상관은 없겠네요."

어차피 오늘은 이곳에 있을 생각이니,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진 않으리라.

그렇게 판단한 승현이 소파에 몸을 묻던 그때. 무언가가 떠오른 듯 오신우가 손뼉을 탁, 쳤다.

"참, 그렇지. 박진성 팀장 하니까 생각났다. 여기 온 목적을 잊고 있었네."

"목적?"

"아까 박진성 팀장한테 연락이 왔는데, 3구역 내부에서 추가 전리품이 발견되었다고..."

"추가 전리품 말입니까?!"

갑작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승현이 오신우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예? 예. 추가 전리품이 발견되었다며, 박진성 팀장과 강철규 팀장이 지금 이쪽으로 운송 중이라고..."

"지금 혹시 박진성 팀장님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야 한 시간 전쯤에 연락이 왔으니,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을 겁니다."

"이런..."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낸 승현이 박진성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했다.

정적이 맴도는 집무실 내부에 퍼져나가는 통화 연결음. 그러나 박진성 팀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안 받네요."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너 대체 오늘 왜 이러는 건데? 이상하..."

영문을 모르는 유신애와 오신우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집어넣는 승현을 바라보던 그때.

꽈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제피로스의 사옥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5화

다급하게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달려 나온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바다가 된 채 연기가 가득 찬 1층 로비의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열기. 안내 데스크가 있던 이곳은갑작스레 터진 폭발로 인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다.

"아악-!!!"

"뭐, 뭐야 이거!!"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대피하는 이들.

그리고 화상을 입은 채 정신을 잃고 안내 데스크 주변에 쓰러진 클랜원들을 발견한 유신애와 오신우가 연기를 뚫고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야, 야. 정신 차려...뭐야. 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떤 자식이...포션, 포션 가진 거 있어?"

"일단 화상이 심한 것 같으니, 이것부터 사용하시죠."

승현이 다급히 외치는 유신애를 향해 유틸리티 자켓에서 치유 가속 포션을 꺼내 건넸다.

"...대체 이게 무슨...습격당할 만큼 원한을 산 기억은 없는데...게다가 여기서 느껴지는 마력의 흔적은 분명..."

그와 동시에, 폭발의 원인을 짐작한 오신우가 표정을 굳혔다.

익스플로전 포션. 승현이 제작한 광역 살상용 아이템이 이곳에 사용된 것이다.

승현 또한 이를 인지했기에, 다른 오해가 생기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설명은 나중에 드릴 테니, 일단은 상황 수습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릴 만큼 강한 폭발이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뭐야, 불? 왜 여기에 불이..."

"가스라도 터진 건가?"

"누가 소화기 좀 가져와! 빨리!"

"신고부터 해, 신고! 119!"

폭음을 감지한 제피로스의 클랜원들이 하나둘 로비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를 본 승현이 정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오신우를 향해 말했다.

"일단 클랜장님은 클랜원들을 통솔해 소방차가 오기 전까지 화재 진화에 집중해 주시고, 행여 전투가 벌어지면 다른 분들이 휩쓸리지 않게 신경 써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어서요!"

승현의 단호한 지시에 오신우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클랜원들을 이끌고 불길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본 승현이, 이번에는 유신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유신애 팀장님과 로제는 저들을 막아내야 합니다."

"저들이라니, 이런 짓을 한 게 누군지 알고 있는 거야?"

"아마...후우. 이 부분은 굳이 설명 안 드려도 되겠네요."

승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욱한 연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유신애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잠깐, 쟤들이 왜..."

박진성과 강철규.

제피로스의 3팀장과 2팀장이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륵-

자신들의 손에 마치 덩굴처럼 엉겨 붙은 건틀릿과 도끼를 앞세운 박진성과 강철규가 이를 드러내며 낮게 울부짖었다.

그들의 적의를 감지함과 동시에 승현의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

[박진성 (침식 : 36%)]

근력 : [1.7] 민첩 : [3.1]

체력 : [1.6] 마력 : [2.2]

- 정화가 가능한 대상입니다.

- 필요 에테르 : [1500]

[강철규 (침식: 41%)]

근력 : [3.0] 민첩 : [2.1]

체력 : [2.9] 마력 : [1.7]

- 정화가 가능한 대상입니다.

- 필요 에테르 : [1700]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아직은 정화가 가능하단 판단이 든 승현이, 조금 전 보았던 [마기 주입]의 특성을 떠올리며 로제를 향해 말했다.

"일단, 무기부터 파괴한 뒤 제압해야 해. 아직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으니 절대 죽이면 안 되고."

"넵!"

승현의 지시에 힘차게 대답한 로제가 일몰을 뽑았다.

촤르르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전개된 일몰을 꼬나쥔 로제가 막 자세를 잡으려던 찰나.

승현에게 받은 포션을 사용해 클랜원들의 화상을 치료해주던 유신애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니까, 뭔진 몰라도 저 두 놈이 손에 쥐고 있는 걸 부숴버리면 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줘야 한다."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 했는데...일단은 두 팀장님부터 제압한 후 얘기하도록 하죠."

한숨을 내쉰 승현이 자신의 몸 주변으로 와이어를 전개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바닥에 쓰러진 부상자들이 전투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들을 지키는 것.

마음 같아서는 전투에 합세하고 싶었지만.

평균적으로 자신의 두 배가 넘어가는 스탯을 보아하니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도핑이 동반되어야 한다.

'도핑이 끝나면 내 한 몸 가누기도 힘들어지니...'

그들을 원래대로 돌려놓기도 전에 먼저 의식을 잃고 탈진해버릴지도 모른다.

'겨울숲 부족에서처럼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이 나 혼자뿐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굳이 무리하게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승현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마자, 유신애가 앞으로 나서며 의기양양하게 쌍검을 뽑아들었다.

"로제는 괜한 짓 말고 뒤로 물러나렴. 이 언니가 다 할...응?"

없다.

그녀가 눈치채기도 전에 박진성의 코앞까지 도달한 로제의 신형. 뒤늦게 그 광경을 본 유신애가 황당한 듯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

아무리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신경이 분산되어있었다고는 해도,눈치조차 채지 못했음을 깨달은 유신애가 승현의 말을 떠올렸다.

'설마...아까 그 얘기가 농담이 아니었단 거야?'

콰앙-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로제가 손에 쥔 백색의 삼단봉과 박진성의 건틀릿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충돌하는 모습을 본 유신애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호오라...저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거지?"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대번에 그녀의 전신을 들뜨게 만드는 투기.

당장이라도 붙어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철규야. 좀 아플지도 모르지만 참아라."

이제야 승현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유신애가 로제에게 질 수 없다는 듯 몸을 날렸다.

"크르르르륵-"

그와 동시에, 눈이 마주친 강철규가 땅을 박차며 손에 쥔 도끼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부우웅- 널찍한 홀 안에 휘몰아치는 예기가 담긴 폭풍.

"좋아, 좋아-!!!"

카아앙-

경쾌하게 외치며 홍아와 애아를 교체해 강철규의 일격을 막아낸 유신애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와...이 정도일 줄이야. 더, 더 해봐. 더 세게!"

그녀에게 부여된 특성의 명칭이자 이명인, 투귀(鬪鬼)가 발동된 것이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흥분을 느낀 유신애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흐흐...철규 너는 오늘 이 누님이 만족할 때까지 좀 놀아줘야겠다."

기쁨으로 가득 찬 유신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그녀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 * *

"뭐야, 벌써 끝이야? 철규야, 정신 차려! 누나는 아직 만족 못 했단 말이야!"

반대쪽으로 팔다리가 꺾인 채 쓰러진 강철규를 향해 애원하듯 말하는 유신애 팀장.

이미 박진성 팀장은 로제에게 제압당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그때.

"후우, 그나마 수속성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헌터들이 다수 남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때마침 클랜원들을 지휘해 화재 진압을 얼추 끝마친 오신우 클랜장이 옆으로 다가왔다.

"...저게 유신애 팀장님의 특성입니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예. 보시는 대로...그렇습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내가 처참한 몰골이 된 강철규 팀장을 가리키자, 복잡한 표정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던 오신우 클랜장이 한숨을 내쉬며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요약하자면 강자와 맞붙을수록 강렬한 쾌감을 느끼는 게 유신애 팀장에게 부여된 특성이라는 것.

다만, 그 부작용으로 인해 자신이 만족할 정도의, 혹은 자신을 넘어설 만한 상대와 맞붙길 끊임없이 갈구하게 된다는 것.

"그런데, 요즘 저를 제외하면 만족할 만큼 공격을 받아낼 만한 상대가 거의 없던 터라...아무래도 오래간만에 좀 신이 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무명 아저씨를 만나보겠다며 죽어라, 가게에 눌어붙어 있었던 거구만.

울상을 짓는 오신우 클랜장을 보며 이제야 유신애 팀장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역시 A급 상위권 헌터네.'

본래는 B급 헌터였던 박진성 팀장과 강철규 팀장.

마기에 잠식당한 둘의 스텟은 수인화한 박덕기를 상회하고 있었다.

로제는 그렇다 치더라도...유신애마저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손쉽게 그를 제압하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유신애 팀장에게 전력을 다해 맞부딪히더라도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한계치까지 도핑을 끝마쳐야 간신히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참,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지금은 강철규 팀장과 박진성 팀장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일이 우선이다.

"끝나신 겁니까?"

"이런...아낀다고 아낀 건데. 여기까지인가 보네."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다가가자, 아쉬운 표정을 지은 유신애가 강철규의 손에 얽힌 도끼를 세차게 밟았다.

콰드드득- 파편을 날리며 사방으로 비상하는 금속의 파편들.

무기가 부숴짐과 동시에 더 이상 침식률이 올라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는, 먼저 로제에게 제압된 박진성 팀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테르가 [1500] 소모됩니다.

대상에게 침투한 마기를 성공적으로 정화하였습니다.

잔여 에테르 : [3198]

점점 편안해지는 박진성 팀장의 얼굴. 이번엔 강철규 팀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곧이어, 두 사람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나는, 유틸리티 자켓에서 치유 가속 포션 두 병을 추가로 꺼냈다.

"두 분의 상처는 이걸로 치료하시면 될 겁니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스킬이야? 내가 모르는 게 더 있어?"

포션을 건네받으며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 유신애 팀장이 오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스킬이라기보단, 정확히 뭐라 설명해 드리기가 애매하네요."

거짓말은 아니다.

어쨌거나 시스템의 지시에 따라 단순히 에테르를 소모해 그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았을 뿐.

딱히 무언가 스킬을 사용한 건 아니니까.

"흐음...어째 갈수록 의심쩍은 부분이 많아진단 말이지."

"그보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게다가 로제 씨는 대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오신우 클랜장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림과 동시에, 쓰러진 이들에게 포션을 사용하던 유신애가 눈을 빛내며 로제에게 달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맞아, 로제. 아오...아까워라. 철규한테 집중하느라 하나도 못 봤네. 어떻게 한 거야? 응? 사실 너 헌터지. 그렇지? 언니한테만 살짝 말해줄래?"

"어...음...그게...헌터는 아니고요, 그냥 이겼어요."

"그냥이 어디 있어. 응? 나보다 빨리 진성이를 제압한 걸 보니 상당한 것 같은데. 언제 한 번 언니랑 진지하게 놀아보는 게 어때? 오늘 시간 되니?"

"...당신, 지금 이 난리가 났는데...."

"아차, 그렇지."

오신우 클랜장의 핀잔에 머쓱한 듯 입맛을 다신 유신애 팀장이, 난처한 듯 우물쭈물하는 로제에게서 떨어진 후 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아직 특성이 가라앉질 않아서...흠흠. 그래서.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데?"

이제야 흥분이 좀 가라앉은 모양이다.

일단, 이들을 납득하게 만들기 위해선 어느 정도까지는 진실을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게다가 이들은 내 조력자가 되어줄 사람들이기도 하니....'

애애애앵-

화재 신고가 들어간 모양인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나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는 두 헌터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두 분은 악마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

"너 요즘 교회 다니니? 아니면 절? 누나는 무교다. 알아둬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

뜬금없는 소리에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 그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6화

"그러니까...오늘 벌어진 이 일이 악마의 소행이다. 이거지?"

"직접적으로 벌인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마기가 사용된 걸 보니 적어도 놈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푸흡!"

대강 주변의 상황이 정리된 후.

의식을 잃은 박진성과 강철규를 눕혀둔 침상 옆에 걸터앉아, 대략적인 그간의 이야기를 듣던 유신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승현이 몇 학년이니? 단탈리온? 악마? 그럼 천사는? 응? 무언가 정신 조작에 관련된 디버프가 걸린 것까지는 알겠는데. 마나도 아니고 마기니, 악마니...심지어 차원을 넘어?"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였기에, 박장대소한 유신애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전부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기는 어렵네. 몬스터라면 몰라도 악마라던가 다른 차원이라던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오신우가 유신애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야. 꼭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사장님께서는 지금껏 우리한테 거짓말을 하신 적은 없었잖아."

"당신은 이 얘기를 믿는 거야?"

"생각해 봐. 우리가 어렸을 적. 그러니까...균열이 나타나기 전에. 세상이 한순간에 지금처럼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

"몬스터가 있다면 어딘가에 악마도, 천사도. 신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균열이 있는데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게 불가능할 이유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몬스터, 스킬, 마나.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초인들.

거기에 더해 그때까지 쌓여온 인류의 보편적인 지식과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균열의 존재.

"그리고 아까의 일을 다시 떠올려 봐. 과연 그게 단순한 정신 조작이나 세뇌라고 생각해?"

"그건...."

오신우의 이야기에 강철규와의 전투를 복기해 보던 유신애가 표정을 굳혔다.

오늘 같은 일은 베테랑 헌터인 유신애조차도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껏 정신 조작 등의 스킬에 영향을 받은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상대한 강철규의 모습은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아까는 잔뜩 흥분해서 눈치 채지 못했었는데...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무기에 끌려다니는 듯한. 아니, 아예 다른 존재가 된 듯한 모습이었지.'

정신은 온전치 못하더라도 육체에 새겨진 경험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이십여 년 가까이 투귀로 살아온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시 생각하니 그렇긴 하네. 철규가 아무리 내 아래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어설픈 녀석은 아니니까."

강철규가 보인 힘이나 속도는 그녀를 어느 정도 달아오르게 할 만큼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기술만 놓고 보자면 막 무기를 쥔 E급 헌터와 비슷하단 사실을 깨달은 유신애가 승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듣다 보니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네. 장난으로 취급해서 미안해. 지금 생각해 보니 적어도 내가 겪어왔던 것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아."

"당신이...사과를 해?"

그러한 모습을 본 오신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하의 유신애가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고개를 숙이다니.

오랜 시간 그녀를 알아왔고. 또 함께 지내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다.

"...왜. 나는 사과하면 안 되냐?"

"아니...너무 의외여서. 흠흠."

날카로운 유신애의 눈초리를 외면한 오신우가 승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사장님의 말씀대로라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요."

"우연히 얻어걸린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저희를 목표로 삼아 이런 짓을 저지른 건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정작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채 약 올리듯 떠나가 버린 구시온을 떠올린 승현이 지긋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3구역의 전리품 모두가 이러한 속성을 띠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깝지만 전부 폐기해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만약 실수로라도 누군가 만지게 된다면...."

유신애가 말끝을 흐렸다.

오늘 같은 일이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졌기에 망정이지, 만약 민간인들이 밀집된 지역에서 같은 일이 발생했다면....

최소 수백 명의 인명 피해는 기본이요, 그들이 소속된 제피로스는 배상도 배상이지만, 국제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리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팀장급 헌터들이 저리도 손쉽게 이지를 상실할 정도라면...괜한 위험 부담을 질 것 없이 그냥 없애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맞아, 아무리 네가 이 아이템들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곤 해도,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며. 그 전에 분실하거나, 누군가가 호기심에 손을 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안전한 곳에 보관한다 한들, 만에 하나..."

입을 모아 우려를 토해내는 두 헌터.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승현이 테이블 위에 놓인 단검을 향해 다가가며 빙긋 미소지었다.

"그런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잠깐...그렇게 막 만져도 괜찮은 거야? 너는?"

다급한 유신애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태연히 단검을 잡은 승현이 그것을 쓱, 발치의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

"뭐야 저게...."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두 헌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벌써요?"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로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들이 정신을 차리면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일단 소기의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

거기에 더해, 의도치 않게 로제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덕에 나와 함께 4구역 공략팀에 참가할 수 있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상태.

'일단, 균열에 들어가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정말 우연히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단탈리온. 혹은 다른 존재가 개입된 일인지. 직접 균열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알 수 있게 되겠지.

이제 해야 할 일은, 고블린들에게 도움을 주며 요르문간드의 어금니를 정화할 에테르를 모으는 것과 각인술을 배워 A급 연금술사 라이센스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이 확실히 정해질 때까지 일상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내부 수리도 거의 끝난 참이고. 한동안은 가게에 신경을 좀 써야겠어.'

요즘 이래저래 바쁘다는 이유로 무명 아저씨에게 거의 가게를 떠맡기다시피 한 나였기에, 조금. 아니,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기에 어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아쉬운데...."

미련이 남은 눈으로 테이블 위를 바라보던 로제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발치에 놓인 쓰레기통에 가득 담긴 다과 껍질들을 본 나는 대번에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따가 내가...아니지."

저런 것쯤이야 배가 터질 때까지 사줄 수 있다.

하지만 로제가 한동안 이곳에 머물기로 한 이상 무조건 공짜로 베푸는 건, 안 될 일이다.

공동체 사회인 겨울숲 부족에서야 뭐...자신의 역할만 잘 해내면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겠지만, 여긴 겨울숲 부족이 아니니까.

겸사겸사 로제를 현대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만들어줘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분명, 지난번에 여기 머물게 해 주면 날 도와주겠다고 했었지?"

그래. 이건 결코 최근에 뚝 떨어진 매출 때문이 아니야.

* * *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안녕히 가세요!"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다시 오겠습니다!"

아직 잘 적응이 되질 않는 모양인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로제.

그런 그녀의 앞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바라보던 최수근이 옆에 선 전창수를 향해 중얼거렸다.

"...세상 참 불공평하구먼. 안 그런가."

"...영감님도 억울하시면 저렇게 생기시지 그러셨습니까. 게다가 저는 왜 아직도 여기에...."

"낸들 아나. 자네도 사장 놈의 취미 생활에 희생당한 것 같은데, 그냥 포기하게."

"..."

"적적하면 내 텐트에 놀러 오던가. 집이 별거인가. 살다 보면 집이고, 정 붙이면 고향이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전창수가 억울하단 듯 마당 한쪽에 위치한 승현의 공방을 노려보았다.

약속한 기한이 지났음에도, 승현은 전창수에게 돌아가란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게다가 뭔가 보람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지난 일주일간 한 일이라곤 청소뿐이다.

주부습진이 생긴 손가락을 보며 울상을 짓던 전창수가 카운터에서 계산에 여념이 없는 로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이게 오만 원짜리고. 이게 만 원짜리니까...십육만 원. 맞죠!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가, 감사는 무슨...하하!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그땐 전화번호라도..."

"저는 전화번호라는 게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원 참, 농담도 잘하..."

"당신, 빨리빨리 비키지?"

"가게 전세 냈나."

"죽고 싶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죄, 죄송합니다...."

쏟아지는 질책에 머쓱한 표정을 지은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피했다.

"쯧쯧...오늘만 몇 명째인지."

이를 지켜보던 전창수가 혀를 차며 불쌍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평소와는 달리 사람들로 가득 찬 가게. 물론 거의 대부분이 남성 헌터들이었다.

이 모든 게 로제가 카운터를 보기 시작한 지 불과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덕에 갑작스레 부족해진 아이템들을 충당해 내느라 사장인 승현은 온종일 공방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이고.

'그나저나 예쁘긴 더럽게 예쁘네.'

물론 그녀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전창수였기에, 더 이상 언감생심 로제에게 눈독을 들이진 않았다.

아니, 그럴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괴물이야, 저건...."

"괴물은 무슨. 자네, 연약한 처자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영감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시나 본데...아니다. 됐습니다. 직접 겪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피하는 전창수.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요즘 새로 오는 녀석들 상태가 다 왜 이래? 쯧쯧."

그를 향해 혀를 차던 최수근의 눈에, 갑작스레 사람들의 앞으로 끼어든 젊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 사장님 되십니까?"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는 사장님이 아니라...음. 그러니까...아르바이트라고 했던 것 같은데. 네, 그거예요."

"그럴 리가...당신이 사장님이 아니라고요?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당신밖에...아니지. 춘식 형님이 사장님은 남자라고 했는데."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의 사내다.

"당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안 살 거면 저리 비켜!"

"뒷사람 생각 좀 하지?"

"쏘리, 쏘리. 용무가 좀 있습니다. 어...음. 익스큐즈...아, 그렇지. 양해 부탁드립니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사람들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제를 향해 말을 걸어대고 있었다.

'쯧, 하여간 멀쩡하게 생긴 놈들이 한 군데씩 문제가 있다니까. 사장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사내의 목적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최수근이 가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봐, 당신. 순서를 지켜야지 말이야. 젊은 사람이...내가 외국인이라고 봐줄 줄 알아?"

"안녕하세요. 아, 사장님은 아니시네요. 나이가 많아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어보이는 사내.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한 최수근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씩씩거렸다.

"나이가 많아? 어? 그걸 아는 놈이 이래? 몇 살이야 너. 내가 몇 살인 줄 알아? 너 누구야 인마!"

"음, 그러니까. 제가 누구냐 하면 말입니다."

"대답하지 마! 이놈이 어디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아! 기생오래비같은 놈이 말이야."

"그러니까...제가 누군지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시끄러워! 당장 저리 안 꺼져?"

최수근이 사내의 멱살을 틀어쥐자.

투두둑-

자켓 앞섶이 뜯어지며, 안에 걸치고 있던 셔츠의 가슴께 위로 새겨진 엠블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어...어?"

방패 위로 겹쳐진 순백의 랜스.

미국의 거대 클랜. W.K를 상징하는 문양을 본 최수근이 입을 쩍 벌렸다.

"이건...?"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랜스의 몸통을 휘감는 새하얀 불꽃.

분명, 이 엠블럼 위로 불꽃의 문양을 더할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뿐.

"다, 당신 설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최수근이 서서히 손을 거두며 눈을 커다랗게 뜸과 동시에.

"안녕하십니까. 음...그러니까, 저는...W.K 클랜의 클랜마스터. 미하일 슬리먼입니다."

어딘가 어눌하지만, 부드러운 백기사의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향해 청천벽력처럼 박혀 들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7화

"들었어? 백기사래."

"에이...설마. 사칭이겠지."

"사칭할 사람이 없어서 백기사를 사칭해?"

"그나저나 저 얼굴 좀 봐. 조각이다, 조각. 저 얼굴에 S급 헌터라고? 세상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가게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웅성대는 사람들. 그들을 뒤로한 채 승현을 향해 다가온 미하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한승현 사장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승현이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이 의외의 반응에 당황한 건, 백기사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호들갑을 떨어대며 승현의 공방으로 쳐들어갔던 최수근이었다.

"사장, 저분이 누군지 몰라? 백기사야, 백기사. 펜타그램 나이츠의 일원이자 S급 헌터, 그리고 화이트 나이츠를 이끄는..."

"아까 영감님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니, 아는 사람이 그렇게 목을 뻣뻣이..."

"미하일 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

마치 이 상황을 예측했다는 듯한 승현의 반응. 머쓱해진 최수근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승현이 미하일을 향해 손짓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조금 한적한 곳에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미하일이 공방을 향해 앞장서서 걸어가는 승현을 따라갔고.

"이게 뭔 일이래..."

영문을 모르는 최수근만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과 단둘이 남았음에도, 전혀 당황한 내색을 보이지 않는 승현의 모습을 확인한 미하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아는 모습 그대로였어.'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평정심. 그리고 미국의 S급 헌터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자신감.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한 미하일이 막 입을 떼려는 찰나.

"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승현이 그의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일반적인 각성자는 아닌 것 같은데. 여긴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일반적인 각성자가 아니다.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한 마디였다.

승현이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지금도 피부로 생생히 느껴지는. 강대한 마나와 함께 미하일의 몸 주변을 맴도는 에테르 때문이었다.

'에테르를 쓰는 자다. 대체 어떻게? 정체가 뭐지?'

아까부터 느껴지는 생생한 기운. 이를 가만히 곱씹던 승현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초월체...혹은 관리자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가 아는 한 지금까지 에테르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을 제외하면 관리자의 권한을 넘겨준 조상신과 에포나 뿐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단탈리온 외에도 한국. 혹은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초월체가 더 존재할 수도 있단 뜻인데. 대체 무슨 이유로?'

지금의 승현에게는 그가 S급 헌터라는 것보다. 그리고 W.K 클랜을 이끄는 수장이라는 것보다.

에테르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에, 미하일의 신분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W.K 클랜이라면 분명....'

기억을 더듬던 승현이 표정을 굳혔다. 몇 달 전, 장춘식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뜻 모를 웃음을 지은 채 눈앞에 서 있는 미하일은, 몇 달 전 미국에 방문했던 장춘식과 접촉했다던 자가 확실했다.

'게다가 듣기로는 아버지를 언급했었다고 했지.'

차라리 평범한 헌터나 마이스터가 같은 목적으로 찾아왔다면 지금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겠지만, 상대는 에테르를 다루는 자.

그러니까, 만신전이나 만마전과 관련된 인물일 확률이 높단 뜻이다.

게다가 장춘식과 나누었던 대화와 지금의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미하일은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 보였으므로, 승현은 쉽사리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구시온처럼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기에 끝까지 침묵을 지키는 미하일을 응시하던 승현이,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묻지. 당신, 에테르를 다루는 자가 일개 연금술사인 내겐 무슨 용건이지?"

"...!!!"

어느새 하대로 바뀌어버린 승현의 말투.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여유롭던 태도를 유지하던 미하일이 눈을 크게 떴다.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저 한 번쯤 만나 뵙고 싶었...잠깐. 마나가 아니라 에테르의 존재를 알고 계신다는 건...설마."

이건 예상 밖의 일이다.

특별한 존재인 승현의 감각이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존재를 파악했단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설마 에테르의 존재를 알고 있을 줄이야.

"생각보다 빨리 자각하신 모양...아니지. 아니야. 그렇다면 나를 못 알아보실 리가 없는데.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미하일이 승현을 향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대기 시작했다.

"...?"

가만히 선 채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승현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각? 그게 무슨 뜻이지?"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 마냥. 자연스레 하대가 흘러나온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전 드린 말씀은 머릿속에서 지워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말해. 들어야겠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하지만, 몇 차례 승현이 같은 질문을 던졌음에도, 미하일의 입은 조개처럼 꾹 다물어진 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절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양 주먹을 허벅지에 붙인 채 차렷 자세로 허공을 바라보며 우렁차게 외치는 미하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엿본 승현이 한숨을 내쉬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그리고 에테르는 어떻게 얻게 된 거고. 만신전과는 무슨 관계지? 혹시, 네가 지구의 관리자인 거냐. 설마, 이것도 대답 못 하는 건 아니겠지?"

주르륵 쏟아지는 승현의 질문에 미하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난 죽었다.'

펜타그램 나이츠의 일원이자, 자신과 같은 피를 타고난 누이의 얼굴을 떠올린 미하일이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설마 습관적으로 몸 주변에 두르고 다니는 에테르를 감지할 줄이야.'

본래 이곳에 온 목적은 인과율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아직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지 못한 승현을 돕는 것.

그런데. 설마 승현이 벌써 에테르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젠장.'

게다가, 문제는 승현이 아직 자신의 힘을 채 깨닫지 못했다는 것.

'그렇다는 건, 아직 안전장치가 풀릴 만큼 성장하지 못하셨단 건데...만약 내 행동이 트리거가 되어서 예정보다 일찍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기하도 한다면....'

아직은 인간에 불과한 승현의 정신이 근간부터 붕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던 미하일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죄송합니다. 승현 님."

제자리에서 연기처럼 흩어진 그의 신형이 별안간 승현의 뒤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뻐억-

그의 단단한 손날이 승현의 목덜미를 후려갈겼다.

S급 헌터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채 대응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승현이 미하일을 향해 쥐어짜듯 말했다.

"이게 무슨 짓...."

풀썩-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진 승현을 내려다보면 미하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최, 최근 시, 십 분 정도의 기억만 지우면 되겠지? 되려나?"

공방에 들어온 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그 정도는 어찌어찌 만회할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미하일이 승현의 발치에서 꾸물대는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 당신. 오늘 일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시면 안 됩니다. 만약 한 마디라도 꺼내면...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비밀 엄수, 보장]

겁에 질린 듯, 자신을 보며 오들거리는 그림자를 확인한 미하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네. 그나저나 아까 그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자는...대체 뭐지?"

* * *

"왜 이렇게 목덜미가 아프지."

마치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뻐근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나는, 흥미롭게 익스플로전 포션을 만지작대는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호오...형질 변환을 이런 식으로도 응용할 수 있군요. 대단하십니다, 사장님."

...S급 헌터이자 제작자씩이나 되는 양반이 단순히 내가 만든 아이템을 구경하려고 먼 길을 온 건 아닐 테고.

'백기사의 문양을 쓰는 것과, 몸 주변을 흐르는 마나의 크기를 보아하니 사칭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정체에 관해서 분명 함께 공방에 들어가 무언가 얘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마치 안개가 낀 듯 기억이 흐릿하다.

게다가.

분명 미하일이 가게로 방문한 순간, 마나와 함께 등골이 찌릿할 정도의 강렬한 에테르를 감지했었는데. 지금의 그에게선 한 줌의 에테르도 느껴지질 않는다.

"에테르요? 그게 뭡니까? 처음 듣는 단어입니다."

이에 대해 물어도 미하일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닌데...대체 뭐 하는 작자지.

"뭔가를 숨기고 있는데... 흉내쟁이, 너는 뭐 아는 거 없어?"

[아무것도 못 봤음.]

흉내쟁이마저 이러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내가 꿈을 꾼 건가."

그럴 리는 없었다.

미하일과 함께 공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내 모습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케이프처럼 뭔가 세뇌에...시스템의 경고가 없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쩌면 다들 짜고 나를 속이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진짜 아버지 때문에 여기에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한승현 사장님. 어릴 적부터 S급 연금술사이신 한기호 님을 존경했었기 때문에...꼭 한 번쯤은 그분의 흔적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인 것 같은데. 그걸 증명해 낼 방법이 없다.

게다가, S급 헌터이자 S급 제작자인 미하일과 뭔가 연금술에 관한 지식을 교환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저만의 독창적인 레시피를 알려드리는 건 인과율...아니지. 시크릿. 그러니까, 비밀입니다."

저럴 거면 왜 온 거야? 진짜 구경만 하러 온 건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가게를 관광하러? S급 듀얼 클래스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제작한 물건들을 신기한 듯 만져보는 미하일을 보며 속으로만 답답해하던 그때.

가게 문이 벌컥 열리며,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얼굴이 들어왔다.

"야, 한승현. 형님 오셨다. 분명 미하일이 왔다고...."

내 전화를 받고 달려온, 꽤 오래간만에 보는 장춘식이었다.

'아, 여기선 시간이 별로 안 흘렀으니...오래간만은 아닌가.'

아무튼.

나를 힐끗 바라본 장춘식이 미하일을 향해 양팔을 벌린 채 쿵쿵거리며 달려갔다.

"오...!!! 미하일!!! 웰컴 투 코리아!!!"

"춘식 형님! 마이 베스트 프랜드! 사나이 장춘식!"

"오케이! 사나이 미하일! 나이스 투 미튜!"

뭐야, 둘이 저렇게 친했나?

내가 전화로 알려주기 전까지 미하일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던 놈이....

'됐다...이해하려 들지 말자.'

정상인인 내가 쟤를 어떻게 이해하겠어.

장춘식을 이해하느니, 친구를 하나 새로 만드는 편이 빠르지.

"춘식 형님! 그간 잘 지냈어?"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

"나는 잘 지냈지! 최근 춘식 형님이 가르쳐 준 사나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고!"

"오, 사나이. 미하일 이즈 베리 나이스 가이."

대체 사나이가 뭘까.

그리고 미하일은 한국어를 쓰는데, 대체 왜 영어로 답하는 거야?

'됐다...둘이 재밌으면 된 거지.'

그나저나 장춘식이야 원래 저 모양 저 꼴이라고 해도, 미국을 대표하는 S급 헌터, 백기사가 설마 저놈이랑 저렇게 죽이 잘 맞을 줄이야.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느낌이네.'

미하일쯤 되는 각성자라면 좀 진중하고...무게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가슴팍에 새겨진 백기사의 엠블럼이 아니었다면, 그냥 가끔 동네에서 보이는 외국인 관광객 같은 느낌이다.

그렇기에 그들을 없는 셈 치기로 마음먹은 내가 가게 일에 집중하던 그때.

"그래서 말이지...아 참. 미하일. 지금 얘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맞다. 춘식 형님. 내가 할까?"

"아냐. 내가 얘기한다. 사나이 장춘식, 친구에게 내 일을 떠넘기지 않는다."

한참 내용을 알 수 없는 대화를 즐겁게 나누던 장춘식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

"전에 네가 준 갑옷. 그거 미하일이 좀 손보고 싶다던데. 그래도 되냐?"

갑옷이라면...그 프리 마켓에서 싼값에 주워왔던 에고 아머?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 인마."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그래도 너한테 받은 거니까 물어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의외네.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나는 그런 걸 줬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나저나 대체 뭘 손보겠다는 건진 모르겠지만...아, 한 가지 있구나.

'장착할 때마다 걸치고 있던 옷이 다 찢어지는 옵션. [질투심]이었던가?'

그거라면 보는 사람도 괴로운 옵션이기에, 없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대로 해."

내 허락에 반색하며 불쑥 다가온 미하일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사장님?"

"대체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기뻐하시는 겁니까?"

에고 아머 자체가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하일 정도 되는 인물이 탐을 낼 만한 아이템은 아닌데.

"그건 말입니다. 제가 갑옷을 조금만 손보면 춘식 형님은 A급...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헌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잠깐만.

A급? 그게 무슨 소리야?

장춘식이 A급?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8화

C급과 A급.

둘은 단 두 등급 차이지만, 둘 사이에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

아직 인간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C급 헌터는, 인외(人外)의 경지에 완전히 발을 걸친 A급 헌터와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굳이 비유하자면...코끼리와 고라니 정도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절대 과장이 아니다.

고라니를 아무리 무장시켜 봐야 코끼리의 발길질 한 번을 당해낼 수 없듯이.

C급 헌터가 단순히 좋은 아이템을 장비하는 것만으로 두 단계를 뛰어넘어, A급 헌터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B급 상위권 헌터라면 몰라도.'

그 정도라면, 고라니는 아니고 사자 정도는 될 테니까. 잘만 무장하면 코끼리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비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물론, 그래도 진짜배기한텐 상대가 안 되겠지만.'

유천호와의 일전을 떠올린 승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하자면. 아직 구체적인 테스트를 받아보진 않았지만, 현재 그의 수준은 B급 최상위권. 잘 쳐 줘봐야 A급의 초입이다.

유천호가 미처 예상치 못한 겨울숲 부족의 지원.

그리고 속성 내성이 붙은 유틸리티 자켓과 흉내쟁이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승현은 유천호가 부리는 언데드의 한 끼 식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단순히 아이템을 손보는 것만으로 만년 C급인 장춘식이 A급 헌터가 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승현이 아는 장춘식은 평생 단 한 번도 C급을 넘어선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저런 말을 내뱉은 게 미국의 천재 듀얼 클래스이자, W.K 클랜의 클랜마스터. 백기사다.

'진짜인가? 아니면 날 놀리는 건가?'

승현의 복잡한 표정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미하일이 장춘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춘식 형님. 사장님은 아직 모르시는 거야?"

"당연하지. 사나이 장춘식, 비밀을 함부로 말하고 다닐 정도로 입이 가벼운 남자가 아니다."

"...?"

"춘식 형님이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왔다니 제가 먼저 말씀드릴 순 없지만...한 가지 확실한 건, 춘식 형님 덕에 저는 한 번 목숨을 건졌다는 겁니다."

마치 미리 짠 듯, 승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는 두 사람.

"야, 장춘식. 너 이 새끼...."

승현의 짜증이 폭발하려던 찰나. 그의 눈치를 살피던 장춘식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휴, 이걸 지금 보여줄 수도 없고."

그리고는 카운터에 선 로제를 힐끗 바라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승현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선 필히 에고 아머를 착용해야 하는데.

아무리 인생 막 사는 장춘식이라고 해도, 차마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그런 몰상식한 짓거리를 벌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 봐, 인마. 형님이 네 가디언이 되어줄 테니까."

"무슨 소리인지 내가 알아듣게 설명 좀 해 봐."

그렇기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내뱉은 장춘식이, 승현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지금은 위험하니 안 되고, 에고 아머 강화가 끝나면 그때 보여줄게. 이 형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똑똑히 잘 기억해둬라."

"미친놈."

승현이 연신 헛소리를 지껄여대는 장춘식에게 할 수 있는 건, 욕설뿐이었다.

* * *

"어쩌다 이런...."

늦은 저녁.

영업시간이 끝났음에도 북적이는 가게를 보며 승현이 탄식을 내뱉었다.

"...저기. 다들 안 돌아가십니까?"

딱히 머물 곳이 없는 로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창수와 최수근을 비롯해 무명, 장춘식까지.

'내 개인 시간은...어디로 사라진 거지.'

고객도 아닌 직원과 지인으로 북적거리는 가게의 내부를 본 승현이 인상을 찡그리자, 가장 먼저 이를 알아챈 무명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흠흠. 미안하다. 미하일에게 형질 변환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기에, 용무가 끝나길 기다리는 중이다."

"그렇다면야...."

무명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할 말이 없어진 승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형질 변환에 관해서도 더 연구를 해 봐야 하는데....'

지금의 승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아이템의 성질을 조금 변환하는 것뿐.

역귀의 저주에 감염된 무명의 딸을 치유하기 위해선 상대의 신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야 했기에.

지금의 그로서는 무명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화수 협회장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

형질 변환은 애초에 말로 전수받을 수 있는 성질의 기술이 아닌 데다가, 이화수 협회장 본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은 무명 본인이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승현이 언젠가 그 이유를 묻자.

- 이화수 협회장은 어쨌거나 협회 소속. 그런 자에게 내 딸을 맡겼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즉, 역귀가 퇴치된 후 울산이 유령 도시가 된 건 헌터 협회와 정부의 주도하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이스터 협회의 협회장. 이화수를 쉽사리 믿을 수 없단 뜻이다.

'그러니...나를 제외하면, 유일한 희망은 미하일 씨 정도겠구나.'

무명의 심정을 이해한 승현이 이번에는 최수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감님은. 안 돌아가십니까?"

"흠흠. 가 봐야 텐트인데...요즘 혼자 지내기가 적적하더군. 늙은이가 젊은 친구들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꼴이 그리도 보기 아니꼬웠던 겐가."

고개를 푹 숙이며 눈가를 쓱쓱 문지르는 최수근.

커다란 덩치를 제외하면, 일견 불쌍해 보이는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저런 저급한 연기에 속을 승현이 아니었다.

'이 사람도 미하일 씨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모양인데.'

아마도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는 레시피나 아이템을 하나쯤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남아있는 거겠지.

"속 보입니다. 영감님."

"..."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승현이 이번에는 전창수를 향해 다가갔다.

"창수야. 너는 왜 여기 있는 거냐. 퇴근 안 하니?"

"...형님이 가라고 안 하셔서...그리고, 약속한 보수는 언제 주실 겁니까! 일주일은 벌써 예전에 지났습니다!"

'아차....'

승현이 속으로 이마를 탁, 쳤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정신이 없어 전창수와 했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이, 이거라도 줄까?"

유틸리티 자켓에서 익스플로전 포션 두 병을 꺼낸 승현이 전창수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밀자.

전창수가 짐짓 화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습니다. 형님! 고작 익스플로전 포션이라니. 실망입니다. 저를 돈으로 매입하려고 하신 겁니까!"

"...고작?"

승현이 손수 제작한 익스플로전 포션의 값어치는, 공식적인 거래 가격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암시장 기준으로 대략 한 병에5-600만원 선.

D급 헌터인 전창수의 주급으로는 과분할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물건이다.

'그런데도 이걸 단칼에 거절한다는 건.'

더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는 뜻이겠지.

누가 전창수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는지 눈치챈 승현이 최수근을 흘겨보았다.

"...영감님이 꼬드기신 겁니까?"

"무슨! 내가! 뭘! 어쨌다는 말인가! 생사람 잡지 말게!"

"어쩐지. 요즘 부쩍 둘이 붙어 다닌다 싶더라니."

"오해일세, 나는 그냥 사회 경험이 적은 창수 군에게 조언을..."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승현의 눈을 피하는 최수근.

속내가 뻔히 보이는 행동에 한숨을 내쉰 승현이 익스플로전 포션을 다시 집어넣었다.

"어휴...됐다. 싫으면 관둬라, 창수야. 시급 계산해서 통장에 넣어줄 테니 계좌나 적어놓고 가라."

"아, 아니...형님. 그런 뜻이 아니고 말입니다. 저는 순순히 받고 싶었는데, 최수근 영감님이...."

"내, 내가 언제 그랬나. 나는 사회생활 선배로 자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다른 분들이 하는 얘기 다 들었습니다. 전직 사기꾼이 사회생활은 무슨 사회생활입니까? 쯧. 영감님 말을 믿은 내가 미친놈이지."

"뭐라고? 미친놈? 자네, 말 다했나?"

갑작스레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두 사람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연극임이 뻔히 보였지만, 굳이 이런 것까지 따지고 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승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강화 작업은 언제쯤 끝나는 거지.'

장춘식의 에고 아머를 강화하는 데엔 반나절이면 충분하다며, 승현의 공방을 빌린 미하일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작업 과정이라도 보여주면 좋을 텐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하일은 자신의 작업을 참관해도 되겠냐는 승현의 부탁을 극구 거절했다.

- 절대, 절대 안 됩니다. 사장님께 보여드리기엔...부끄러울 정도로 너무나도 미천한 실력입니다.

- ...?

미천한 실력이라니.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미하일의 변명에 어이가 없어 실소가 다 나올 지경이었다.

'S랭크 제작자가...미천한 실력? 그것도 나보다?'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다못해 대놓고 그에게 창피를 주기 위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발언.

그나마 아무도 듣지 못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보여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어떻게 그런 이유를 댈 생각을 하는 거지. 나 참. 사람 멕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얼굴을 붉힌 채 아까의 기억을 되짚으며 툴툴거리는 승현의 귓가에 장춘식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싸, 장사! 로제는 네 끗. 내가 이겼지? 햄버거 다섯 개. 빨리 차용증 써."

"..."

미하일이 공방으로 들어간 후.

아까부터 반나절 넘게 섯다에 열중하는 로제와 장춘식.

이 모습을 쭉 지켜보던 승현은 이제 머리가 아파져 올 지경이었다.

'다들...여길 놀이터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저 둘뿐만 아니라 전창수와 최수근. 그리고 최근에는 그나마 FM을 유지하던 무명까지.

아무래도 점점 사장으로서의 위엄을 잃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 승현이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어? 어디 가십니까?"

장춘식의 에고 아머를 든 미하일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검붉은 색으로 바뀐 에고 아머를 한참 섯다판이 벌어지는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실력이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받아, 춘식 형님."

"제발...그만해 주십시오."

미하일의 과도한 칭찬에 얼굴을 붉힌 승현이 그를 제지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하일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거라면 춘식 형님이 가진 능력 중, 절반 정도는 마음 놓고 발휘하실 수 있을 거야. [질투심]도 어느 정도 약화해 놨어. 형님이 능력을 전부 다 개방하는 게 아닌 이상, 이제는 옷이 찢어질 일은 없을 거야."

"절반이라, 나쁘지 않네. 그나저나 정말 나중에 한승현 이 자식이 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에고 아머를 만들어 줄 수 있단 거지?"

"사장님은 나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분이시니까. 아마 형님을 S랭크 헌터로 만들어 주실 수도 있을걸?"

점입가경이다.

말 같지도 않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승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돌리려던 찰나.

"그럼, 긴말할 것 없이 이 자리에서 보여줄게."

촤르륵- 순식간에 울려 퍼진 금속의 마찰음과 동시에.

크르르르륵-

장춘식의 전신에서 검푸른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39화

길게 자라나는 검푸른 털과 늑대처럼 뻗어가는 주둥이. 그리고 세로로 쭉 찢어진 샛노란 동공.

미하일이 강화한 에고 아머를 착용한 장춘식은, 마치 거대한 웨어울프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뭐야, 너. 수인화 능력자였어?"

조금 당황한 승현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껏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만 전투를 이끌어나가는 각성자로 알고 있었는데.

'저런 특성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장춘식은 지금까지 자신이 부여받은 특성에 관해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가끔 승현이 물어볼 때면 난처한 듯 턱수염을 매만지며 얼버무리기만 할 뿐.

"그저 그런 특성을 부여받은 게 쪽팔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넌 날 어떤 놈으로 보는 거냐."

완전한 반인반수의 모습을 취한 장춘식이 황당하다는 듯 승현을 쳐다보았다.

"그보다 안 놀라냐? 이 형님이 지금껏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데. 빨리 놀라서 뒤로 자빠지란 말이야."

"뭐, 그럭저럭 놀라긴 했지만...."

장춘식의 예상과는 달리 승현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자신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스텟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 느껴지는 기세는 잘 쳐 줘야 박덕기와 비등하거나 그를 조금 넘어서는 정도.

이 정도로 A급 상위권 헌터를 자처하기에는 조금. 아니, 상당히 부족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우와...이게 늑대인간인가요? 실제로는 처음 봤어요!"

"흐음. 확실히 더 강해지긴 한 것 같군."

"..."

"춘식 형님, 멋지십니다!"

그러한 이유로 다른 이들과 달리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한승현.

"그게 끝이냐? 더 없어?"

"뭐냐...그 실망스럽다는 눈초리는. 안 되겠다. 이 형님이 오늘 너를 아주 놀라 자빠지게...."

그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쳐다보던 장춘식이 자신의 터질 듯한 근육에 힘을 주려던 찰나.

"춘식 형님...거기까지만. 급하게 손본 거라 이 이상은 위험해."

장춘식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던 미하일이 그를 황급히 만류하고 나섰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예 이 자리에서 한승현 저놈의 콧대를 납작하게...아니다. 나 사나이 장춘식, 고작 저런 놈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지금껏 단련해 온 게 아니니까. 한 번만 봐주도록 하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고개를 가로저은 장춘식이 수인화를 해제하자. 싱겁다는 듯 자리로 돌아간 승현이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래서, 지금까진 왜 네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던 건데?"

"흠흠. 그야 네가 알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성을 제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에고 아머가 없이는,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컨트롤 할 수 없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장춘식이 말꼬리를 흐리자, 승현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래도 잘 됐네. 에고 아머의 도움이 필요하긴 해도, 수인화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으면 B급 헌터 라이센스 정도는 손쉽게 딸 수 있겠어. A급은 무리겠지만."

승현이 위로하는 척 조금 풀이 죽은 듯한 장춘식을 약올리자. 인상을 찡그린 장춘식이 분한 듯 그를 노려보았다.

"이걸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진짜 너, 다음에 두고 보자."

"우와. 방금 되게 삼류 악당 같았습니다! 춘식 형님!"

"전창수, 너 잠깐만 이리 와 봐."

"..."

갑작스레 불똥이 튄 전창수가 대경실색하며 몸을 일으켰지만, 갓 D급 헌터가 된 그가 장춘식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다.

"이 새끼. 요즘 안 만져줬더니 몸이 근질근질하지?"

"악! 아닙니다, 형님! 형님! 제발...으악!"

장춘식에게 붙잡힌 채 허공을 버둥거리는 전창수.

그리고, 그의 옆에서 양팔을 감싼 채 몸을 덜덜 떠는 최수근을 발견한 미하일이 눈을 빛냈다.

* * *

야심한 밤.

텐트를 빠져나온 최수근이 황급히 가게의 담벼락을 넘었다.

"빠, 빨리 가야 해...."

연신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아까부터 덜덜 떨리는 다리는 그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설마, 그놈이 그놈이었을 줄이야.'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사기 행각을 벌여오던 최수근은 알 수 있었다.

'장춘식이 설마...내가 알던 그놈일 줄이야.'

위험하다.

승현을 대신해 가게를 관리하는 아저씨란 놈에게 붙잡혀 양다리가 분질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장춘식은 유신애 팀장보다. 그리고 이화수 협회장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니미럴...내가 왜 못 알아봤던 거지."

벌써 수년은 지난 기억을 떠올린 최수근이 또다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당시에도 체구가 좋긴 했지만, 지금보단 훨씬 왜소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때와는 달리 동네 바보처럼 행동하는 현재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최수근이 기억하는 장춘식은 제자리에서 눈 깜작할 새에 협회 소속의 A급 헌터 일곱을 학살한 무지막지한 괴물이라는 거다.

'분명, 협회에서 부르던 코드네임이...뇌수(雷獸)였었지.'

당시 자신이 목숨을 건진 건 오로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요행이 두 번 일어날 거라곤 확신할 수 없었기에,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최수근은 오늘 밤 승현의 가게를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꽤 정이 들긴 했지만...그래도 목숨이 우선이지."

최수근이 아쉬운 듯 멀어져 가는 가게를 바라보던 그때. 그의 앞으로 불쑥. 누군가가 나타났다.

"도망치시는 겁니까?"

"히익. 누, 누구...백기사?"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미하일과 눈이 마주친 최수근이 뒤로 넘어지자. 가까이 다가온 미하일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춘식 형님에 관해 무언가 알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서, 설마. 자네도 알고 있는 겐가?"

"알다마다요. 미국에선 춘식 형님의 손에 한 번 죽을 뻔했는걸요. 뭐, 덕분에 목숨도 한 번 건지긴 했지만."

"..."

"그래서. 정말 도망가실 겁니까?"

"아는 사람이 그걸 묻나. 당연한 거 아닌가. S급 듀얼 클래스인 자네가 죽을 뻔했다는데...일개 연금술사인 나는 어떻겠는가. 자칫 잘못해서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주저앉은 최수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유신애를 만났을 때에도, 이화수를 만났을 때도 오줌을 지릴 만큼 두려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거대한 불발탄이 평생 살아온 집 아래에 묻혀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이 이러할까.

"아무래도 많은 걸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아마 걱정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미하일이 새파랗게 질린 그를 향해 시가를 꺼내 내밀었다.

"태우시겠습니까? 저희 클랜에서 제조한, 정신 안정 효과가 들어간 제품입니다. 아, 비매품이니 다른 분께는 말 하시면 안 됩니다."

"..."

찰칵-

떨리는 손으로 지포 라이터를 꺼내 시가에 불을 붙인 최수근이 허공을 향해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독하구만...이게 미국의 맛인가."

"정확히는 저희 클랜의 맛이죠."

그리고는 몇 차례 콜록거린 후, 미하일을 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런데, 자네는 장춘식의 실체를 보았다면서...하기야. S급 헌터쯤 되는 친구이니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닐세. 자네가 왜 나를 따라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대로 도망가게 내버려 두게나.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네."

"도망치는 거야 영감님의 선택이지만, 저는 어지간하면 영감님께서 사장님의 곁에 계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거야, 영감님은 사장님께 꼭 필요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

최수근뿐만이 아니었다.

장춘식과 로제. 그리고 아저씨라 불리는 자와 이곳에 오기 전, 대강 조사해 둔 제피로스의 클랜원들까지.

'전창수란 친구는...제외하고.'

모두가 범상치 않은 이들이었고, 전부가 승현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각성하기 전까지.

아니, 어쩌면 그 후에도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조력자들이었다.

'특히, 춘식 형님과 로제라는 엘프는....'

둘은 승현의 칼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의 자신이 태어난 나라. 미국에 나타난 초월급 몬스터, 아가씨(LADY)를 떠올린 미하일이 가볍게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춘식 형님은 평범한 인간이신데...설마 지금의 나를 뛰어넘었을 줄이야.'

물론 본신으로 돌아간다면 충분히 장춘식을 능가할 수 있겠지만. 자존심이 조금 상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최수근 또한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듯했지만, 결코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잠시 그의 전생. 정확히는 영혼의 본질을 살펴보던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서 드릴 수 있는 도움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비록 그 존재가 크진 않더라도, 최수근 또한 작은 인연의 끈으로 승현과 묶인 몸.

이대로 보내기엔 아쉬웠기에, 미하일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니, 절 믿고 사장님 옆에 남아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

"행여라도 춘식 형님이 영감님을 해하려 한다면, 온 힘을 다해 제가 막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S급 헌터이자 W.K클랜의 마스터인 제 이름을 걸고 영감님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렇다면...아니지. 아니야. 사장에게 내가 꼭 필요하다고 했던가."

"꼭은 아닌...아니다. 필요합니다. 사장님께는 영감님의 힘이 꼭 필요해요."

"그렇다는 건가."

시가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어느새 두려움 따위는 사라진듯한 최수근.

"흐음, 부탁이란 말이지. 부탁이라...."

하지만, 선뜻 다시 돌아가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미하일이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본질은 원래 이런 놈이었지. 안 본 지 오래돼서 잠깐 잊고 있었네.'

정작 지금의 승현과 마찬가지로,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최수근의 의도를 파악한 미하일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마면...되겠습니까?"

"내 텐트로 돌아가서 얘기하도록 합세. 그나저나 자네는 왜 사장을 도우려는 겐가?"

"...그건, 기회가 되면 천천히 말씀드리도록 하죠."

그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최수근.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미하일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역시...저놈이랑 나는 안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