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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프라하 III

지하실에는 스컬스 조직원이 없었다.

위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차우진이 기름통을 열고 기름을 바닥에 뿌렸다. 의자 같은 내부 집기도 기름으로 적셨다. 남은 기름은 보일러에 뿌렸다.

건물에 온수를 공급하는 기름보일러에는 연료통이 붙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의 쿨타임이 다 찼다.

차우진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하나 꺼냈다. 오늘 프라하 노점에서 산 짝퉁 지포 라이터였다.

차우진이 라이터에 불을 켠 후에 지하실 바닥에 툭 던졌다.

바닥에 뿌려진 기름에 불이 옮겨붙었다. 불꽃이 마치 종이에 물감이 번지듯이 바닥에 퍼졌다. 그렇게 늘어난 불꽃이 내부 집기를 타고 올라갔다. 의자나 천으로 된 기름걸레 등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

그 불이 보일러까지 번졌다.

차우진은 거기까지 확인한 후에 계단 앞에서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지하실에서 사라졌다가 2층 계단 중간에 나타났다.

***

마약조직 스컬스는 건물을 이용해 적의 공격을 방어했다.

건물이 워낙 튼튼해서 정문으로는 스컬스의 방어를 뚫을 수가 없었다.

범죄조직인 울프팩의 현장 리더는 좀 전에 조직원 두 명을 건물 뒤로 보내 뒤치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담장을 넘다가 안나를 탈출시키던 차우진에게 당했다.

현장 리더는 뒤치기를 보낸 조직원들이 연락이 없자 다른 놈을 보내 확인했다.

그놈이 돌아오자마자 당황한 얼굴로 보고했다.

"이미 당했습니다."

"뒤쪽에서는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둘 다 칼을 맞았습니다."

"젠장. 매복이 있었군. 스컬스는 히트맨이 부족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놈들의 저항이 거셉니다. 어떻게 할까요?"

리더가 고민했다.

두목의 아들인 루카쉬가 건물 안에 있다.

루카쉬를 버리고 후퇴하면, 두목이 리더를 살려둘 리 없다.

후퇴하지 않고 버티면 결국은 중무장한 체코 경찰까지 상대해야 한다.

리더는 지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살 수 있…."

갑자기 스컬스의 건물 창문으로 연기가 흘러나왔다.

"어? 불? 건물에 불이 났다!"

리더의 얼굴이 환해졌다.

불이 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화재 때문에 건물 안에 있는 스컬스가 불리해졌다.

건물을 엄폐물로 삼고 있던 스컬스 조직원들이 연기를 피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으아아!"

울프팩의 리더가 소리를 질렀다.

"쏴! 다 죽여버려!"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건물을 급하게 빠져나온 스컬스 조직원 몇 명이 총에 맞아 나자빠졌다. 나머지는 급히 엄폐물을 찾아 뛰었다.

스컬스의 건물에는 스프링클러가 있다. 하지만 용량이 충분하지 않아서, 기름을 뿌려가며 불을 지른 화재를 진압하는 건 무리였다. 그 스프링클러로는 불이 더 번지지 않게 막는 게 한계였다.

건물 내부가 수증기로 가득 찼다. 수증기와 함께 연기도 지하실에서 올라왔다.

차우진은 2층 창문에서 바깥쪽을 슬쩍 확인했다.

"이대로 가면 스컬스가 전멸하겠는데?"

그러면 곤란하다. 다른 놈은 다 죽어도 상관없지만, 두목은 살아야 한다.

전멸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울프팩 조직원이 줄어들면 된다.

울프팩 조직원 하나가 엄폐물에서 몸을 일으키며 총을 쏘려고 했다. 차우진이 2층 창문을 통해 사격했다. 유리창에 구멍이 나면서 몸을 일으키던 조직원이 뒤로 나자빠졌다.

"케엑!"

차우진이 말했다.

"두목은 살아서 빠져나가야지. 그래야 박사한테 갈 테니까."

차우진이 사격한 창문으로 적의 총탄이 쏟아졌다. 유리창이 모조리 박살 나고 실내로 총알이 퍽퍽 박혔다.

그러다 잠깐 사격이 중단됐다. 적의 탄창이 비었다.

차우진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며 적을 향해 난사했다.

총탄이 엄폐물을 뚫지는 못했지만, 머리만 내밀어도 죽겠다 싶을 정도로 엄폐물 상단을 정확히 때렸다. 적들이 황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차우진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자세를 낮추며 입구 쪽에 세워둔 차의 아래쪽을 쏘았다. 타이어 사이를 통과한 총탄이 뒤에 있던 적의 다리를 뚫었다.

"으아악!"

울프팩 조직원이 옆으로 넘어졌다. 차우진이 넘어진 놈을 향해 다시 총알을 날렸다.

그 직후에 옆으로 뛰었다.

그가 서 있던 곳에 총알이 퍽퍽 꽂혔다. 차우진은 이미 건물 옆으로 이동했다.

스컬스 조직원들은 당황했다.

"누군데 저렇게 빨라?"

"몰라! 이 기회에 같이 갈겨!"

"드, 등이 뜨거워!"

불길은 스프링클러 때문에 2층까지 번지지는 못하고 지하실과 1층을 주로 태웠다.

대신에 수증기와 연기가 지하에서 올라와 1층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건물 밖으로 나간 스컬스 조직원들은 쉬운 타깃이 되었다. 차우진이 울프팩을 견제해준 덕분에 전부 총알밥이 되는 사태는 면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두목인 안드레이가 혼잣말을 했다.

"다 틀렸어. 이대로 가면 전멸이야. 여기서 살아남더라도 경찰에 체포되겠지."

그래서 그는 탈출을 선택했다.

건물 뒤쪽 철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에는 잠겨 있는 문이었다.

두목이 그 문을 이용해 건물을 빠져나온 후에 담장 아래에 설치된 비상탈출용 레버를 돌렸다. 담장 벽에 발라놓은 회칠이 떨어져 나가면서 비밀 문이 열렸다.

안드레이가 그 문을 이용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총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체코 경찰이 모를 수는 없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두 조직의 갱들은 상당수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아직 남은 놈들은 있었다. 울프팩이 조금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병력으로는 스컬스를 제압하고 1층의 불길을 뚫고 건물의 2층까지 가서 루카쉬를 데려올 수가 없다.

시도는 할 수 있지만, 성공하기 전에 경찰이 도착한다.

리더가 어쩔 수 없이 지시했다.

"후, 후퇴해! 루카쉬는 경찰이 구해주겠지!"

그들이 허겁지겁 그곳을 떠났다. 도망치다가 등에 총을 맞은 놈도 있었다.

스컬스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두목은 어디 있는 거야!"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 불은 소방관이 끄겠지!"

체코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소방차도 같이 도착했다.

소방관이 본격적으로 진화 작업을 하자 화재는 빠르게 진압됐다.

중무장한 프라하 경찰이 현장을 장악했다.

형사들도 현장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서 현장을 조사하던 형사가 팀장에게 보고했다.

"스컬스와 울프팩이 제대로 붙었습니다."

"울프팩이 습격한 건가?"

"그런 것 같긴 한데,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이쪽으로 와 보시죠."

화재는 1층에서 진압됐기 때문에 2층은 멀쩡했다.

형사가 2층에서 시체를 보여주었다.

"루카쉬입니다. 울프팩의 간부이고, 두목의 아들입니다."

"납치된 건 아닌 듯한데?"

"예. 문 앞 있는 시체 넷 중에 둘이 울프팩 조직원입니다."

"여기서 거래를 했구나. 그러다 뭔가 틀어졌겠지."

현장에서 체포된 조직원은 꽤 많았다. 총에 맞았지만 죽지는 않은 놈들이었다.

스컬스 조직원이 외쳤다.

"울프팩 새끼들이 쳐들어왔어! 거래하는 척하면서 킬러를 건물 안으로 침투시켰다고!"

울프팩 쪽은 정반대 주장을 했다.

"스컬스가 거래하자고 불러놓고 다 죽인 거야! 저 새끼들이 킬러를 보내서 우리 애들을 죽었단 말이다!"

사건 수사를 맡은 책임자가 회의실에서 물었다.

"양쪽 주장이 정반대라고?"

"예. 서로 상대편에서 배신했다고 주장합니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거나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그런데 양쪽 주장 중에 일치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외모입니다."

형사가 몽타주를 한 장 띄웠다.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쓰고 고글까지 착용한 사진이었다.

"스컬스는 이 킬러를 울프팩에서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스컬스 조직원 다수가 이 킬러에게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울프팩이 킬러를 침투시킨 게 맞나?"

"그런데 이 킬러는 울프팩 조직원들도 여럿 잡았습니다."

"어?

"건물에서 탈출하던 스컬스 두목을 울프 조직원이 발견했는데, 그 조직원도 이 킬러가 쐈습니다."

"안드레이의 탈출을 도왔다고?"

"예."

"그러니까 혼자서 양쪽 조직을 상대로 싸웠다?"

수사 책임자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파악 중입니다."

"저 킬러에게 몇 명이나 당한 거야?"

"양쪽 주장을 그대로 믿으면, 최소한 열 명 이상…."

책임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실제로는?"

"건물 내부의 사상자 위치로 동선을 추적해봤는데, 사실처럼 보입니다."

"어? 그게 가능해?"

"저도 확인해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마약조직 두 개를 상대로 혼자 싸웠는데, 조직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스컬스와 울프팩은 서로 싸웠으니까 이 킬러 혼자 한 건 아닙니다만…."

"저 킬러가 그렇게 판을 짰을 수 있잖아."

"그렇습니다."

"무기는? 중기관총이라도 가져왔어?"

"권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겨우 권총으로…. 뭐 그런 무서운 놈이 다 있어? 정체는 파악했나?"

"아닙니다. 다만, 스컬스와 울프팩 놈들은 이 킬러를 악마라고 불렀습니다. 검은색 날개를 봤다는 놈도 있습니다."

"마약중독자들은 환각을 보잖아. 진술을 그대로 믿으면 안 돼. 진실을 찾아내야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악마보다는 죽음의 천사가 낫겠지. 어쨌든 나쁜 놈들을 처단한 거니까."

***

스컬스 두목 안드레이는 차를 몰고 프라하를 빠져나갔다. 그 차는 본거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둔 탈출용 차량이었다.

비상탈출용 차량은 평범해 보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를 이용했다.

안드레이가 운전석에서 화를 냈다.

"스컬스를 내가 얼마나 공들여 키웠는데!"

조직원 대부분이 죽거나 총에 맞았다. 그나마 멀쩡한 몇 명도 대부분 체포됐다.

건물은 불에 탔다.

오늘 전투로 스컬스는 무너졌다.

"한국에 보낸 드미트리와 히트맨들이 당하지만 않았어도, 늑대 새끼들 따위에게 이렇게 밀리진 않았어!"

세르게이가 데리고 있던 조직원들은 스컬스의 직속이 아니었다. 세르게이가 한국에 생산 기지를 만들면서 끌어들인 놈들이다.

그래서 세르게이가 죽었을 때만 해도 스컬스의 전투력은 큰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다르다. 드미트리가 데려간 일곱 명은 스컬스에서도 총 좀 쏘는 실력자들이다.

그런데 드미트리까지 여덟이 한국에서 전멸했다.

"그놈들만 여기 있었어도, 늑대 새끼들 따위는 쓸어버렸을 텐데!"

안드레이가 울프팩과 거래를 하게 된 건 그 여덟이 죽으면서 조직의 전투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조직원을 보충할 때까지 울프팩과 임시 동맹을 맺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오히려 서로 싸우다 공멸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박사가 있으니까 조직은 복구할 수 있어! 돈만 있으면 부하들은 얼마든지 모인다고! 조직을 재건하면 그 킬러 새끼는 내 손으로 죽여버릴 테다!"

***

파인드스톤 사장 정수찬이 뉴욕시 옆에서 심각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차우진 씨가 틀렸으면 했는데…."

파인드스톤에는 정수찬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데려간 직원 박태우가 있다. 박태우는 지금 진행하는 탐지기 테스트에서 메인 시스템을 담당했다.

"사장님. 아직 데이터가 다 나온 건 아닙니다. 강원도에서는 때마침 지진이 있어서 한 방에 데이터가 뽑혔지만, 우리는 그런 우연은 없으니까요."

"알아. 아는데…."

파인드스톤에서 마그마 폭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정수찬과 박태우뿐이다. 지금 이 실험의 목적을 아는 사람도 파인드스톤에는 그들뿐이다.

"안 좋습니까?"

"지하 깊은 곳에 뭔가 있어."

"혹시…."

박태우가 주변을 둘러본 후에 물었다.

"마그마 폭탄입니까?"

"아직 확실하진 않아. 데이터가 다 수집돼야 정확한 분석 결과도 나올 거야. 그렇지만…."

이미 차우진이 뉴욕시 옆에 마그마 폭탄이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

지금 하는 테스트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돈만 날리게 된다. 그래도 그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지하에 뭔가가 있었다.

박태우가 물었다.

"사장님. 차우진 씨의 말은 말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이 땅 밑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는 게 정상이지. 그런데 실제로 뭔가 존재하잖아. 이건 말이 되냐?"

"그야…."

"차우진 씨는 천재야. 그래서 그 말을 무시할 수가 없다."

"저는 사장님이 천재이신 줄 알았는데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정수찬이 데이터를 보며 말했다.

"만약 데이터를 다 수집해서 분석했는데 차우진 씨의 예상대로 뉴욕 지하에 마그마 폭탄이 있다면…. 미국 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3D 이미지부터 만들어야지."

"그건 맡겨만 주십쇼.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태우야. 이건 아직은 우리만 알아야 한다는 거 알지?"

"사장님. 제 입 무거운 거 아시잖…. 후우. 사실 쫄려서 미치겠습니다."

"나도 쫄린다."

139. 박사

파인드스톤 사장 정수찬이 말했다.

"태우야.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뉴욕 지하에 마그마 폭탄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큰일 난다."

"저도 압니다. 그건 진짜 초대형사고죠."

"당분간은 술도 마시지 마라. 취해서 실수로 누설하면 뒷감당이 안 되니까. 증시 폭락에 뉴욕 부동산폭락, 거기다 혹시 경제위기라도 오면 누가 그걸 다 감당하냐."

파인드스톤 직원 박태우가 걱정했다.

"사장님. 그래도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잖습니까?"

"그 전에 마그마 폭탄을 막을 방법이 있다는 걸 먼저 알려야지."

"그런 방법이…."

"아직 없지."

"아. 저 진짜 쫄리는데요?"

"그 방법을 찾는 연구조차 기밀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해."

"이 모든 게 해프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끝나면 알게 되겠지. 해프닝인지, 아니면 차우진 씨의 말처럼 초대형 재난인지."

박태우가 임시 사무실에서 나간 후에 정수찬이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우진은 받지 않았다. 마약조직 스컬스를 처리하는 동안은 휴대폰을 이탈리아의 호텔에 놔두었다.

"후우. 의견이라도 좀 듣고 싶은데."

오윤서가 임시 사무실로 들어왔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심각해?"

"예상대로야. 그러니까 심각하지."

"난 이게 무슨 실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수찬은 오윤서에게 마그마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걱정은 나만 해도 충분해.'

오윤서도 짐작하는 게 없는 건 아니다. 그녀는 지하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누가 이 테스트를 하라고 했는지는 안다.

오윤서가 물었다.

"차우진 씨 말이야."

"응?"

"오빠네 회사에서 이렇게 거창하게 조사해야 겨우 알 수 있는 걸, 차우진 씨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천재잖아. 지형으로 의심 지역을 찾아낼 수 있나 보더라."

"그러면 대책도 알고 있대?"

정수찬이 한숨을 쉬었다.

"나보고 그 대책을 찾으라더라."

"차우진 씨는 안 도와주고?"

"이건 오직 나만이 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정작 나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를 모르겠다."

오윤서가 정수찬을 안아주었다.

"할 수 있을 거야. 난 믿어."

***

러시아계 체코 마약조직 스컬스의 두목 안드레이는 체코의 소도시에 숨어들었다. 그 도시 외곽에는 차고가 딸린 집이 한 채 있었다.

안드레이는 타고 온 차를 창고처럼 생긴 허름한 차고에 넣었다.

그 집을 관리하던 조직원이 물었다.

"갑자기 여기는 왜 오셔서…."

안드레이는 그 조직원이 스컬스가 무너졌다는 걸 아직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단둘이 있을 때 말하면 이 새끼가 배신할 수도 있어.'

안드레이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언제부터 내가 너한테 무슨 일인지 보고했지?"

부하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차 준비해."

"예? 가져오신 차는…."

"네 차 내놓으라고!"

"드, 드리겠습니다!"

"무기는?"

"권총이 두 정 있습니다."

"총알 꽉 채워서 가져와."

"알겠습니다!"

안드레이가 부하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우진이 건물 옆에서 나타나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 두목이 뒷좌석에 탔네."

그가 처음 이 소도시로 올 때는 안드레이의 차 뒷좌석에 잠입해서 이동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다. 안드레이가 저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어서였다.

차우진이 차고를 보았다. 안드레이가 타고 온 차가 세워져 있었다.

안드레이는 시동만 끄고 차에서 내렸다.

"아. 그래. 열쇠는 놔두고 내렸지. 뛰어서 쫓아가야 하는 줄 알았네."

차우진이 안드레이가 차고에 숨겨둔 차를 몰고 두 사람을 따라갔다. 워낙 흔한 차라서 안드레이는 그 차가 그의 차라는 걸 의심하지 못했다.

안드레이의 목적지는 그 소도시에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그가 부하를 데리고 건물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차우진은 안드레이가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건물 입구에 설치된 CCTV가 안드레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문이 열렸다.

안드레이가 부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다시 닫혔다.

차우진은 방금 문을 열어준 놈의 표정을 분석했다. 연락 없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는데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흥분하거나 당황한 표정도 아니었다.

"프라하의 본부가 날아간 걸 아무도 모른다? 여기는 아예 독립적으로 운영한 거겠지."

안드레이는 차를 몰고 이 소도시로 올 때 박사만 있으면 조직을 재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죽은 드미트리는 박사가 어디 있는지는 두목만 안다고 했다.

간부들도 모른다는 건,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곳에 박사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가 그런 곳이다.

"레드 크리스털을 만든 박사가 여기 있구나."

차우진이 건물 주변을 확인했다. 그 건물은 단층이라 지붕이 주변보다 높지 않았다. 지붕으로 공간이동을 하면 다른 주민이 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네."

차우진이 그 건물 정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차우진이 문을 대놓고 두드렸다. 안드레이가 두드렸을 때와 똑같은 박자였다.

누군가 문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차우진이 문에 손을 대보았다. 문의 재질은 얇은 철판이 아니었다. 강철의 느낌이 났다.

"총알이 통과하진 못하겠다."

차우진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문 위에 숨겨진 CCTV 앞에서 두 손을 위로 들어 보였다.

안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누군가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화내는 건 안드레이겠지.'

CCTV 카메라가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확인했다.

잠시 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건물 안에서 총구 세 개가 차우진을 겨누고 있었다.

총을 겨눈 놈 중 하나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차우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적들은 뒤로 물러나면서 계속 차우진을 조준했다.

안드레이는 더 뒤쪽에서 여유 있는 척하며 말했다.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배짱이 좋은 놈이군."

안드레이가 사용한 언어는 체코어였다.

차우진이 말했다.

"뭐라는 거야?"

"뭐?"

"영어 못하냐?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안드레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늑대 새끼인 줄 알았더니…. 영국 놈이었나?"

"영어로 하라니까?"

안드레이가 딱딱한 발음의 영어로 말했다.

"어디서 왔지?"

"네가 생각하는 그곳."

"MI6?"

MI6는 영국 정보부의 해외 담당 기관이다.

"어. 거기. 잘 아네."

"젠장. MI6가 왜 하필 지금 나를…."

"레드 크리스털 때문이지."

안드레이가 화를 벌컥 냈다.

"그건 그냥 약이란 말이다. 다른 약보다 부작용도 적어! 어차피 약을 할 거라면 그걸 하는 게 낫다!"

"세상에 더 나은 마약은 없어. 더 나쁜 마약만 있지."

"그래도 기왕이면…."

"됐고, 박사는 어디 있지?"

"뭐?"

"박사와 이야기할 게 있어서."

안드레이가 일그러진 얼굴로 화를 냈다.

"너! 박사를 찾으려고 내 조직과 울프팩이 싸우게 판을 짰구나!"

"어."

"이 지독한 영국 스파이 새끼가!"

"지독하지만 강하지?"

안드레이도 안다. 조직 두 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차우진은 손끝 하나 다친 곳 없이 이곳에 서 있었다.

안드레이가 숨을 고르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박사의 위치에 대한 대가는?"

"네 목숨?"

"스파이의 약속을 믿으라는 건가?"

"믿기 싫으면 할 수 없고."

안드레이는 차우진을 믿지 않았다. 그가 눈알을 굴렸다. 차우진이 강한 건 알지만 이미 부하 셋이 차우진을 조준하고 있다.

안드레이가 숨을 들이마신 후에 큰소리로 외쳤다.

"죽…."

차우진의 반응이 부하들보다 빨랐다.

게다가 이곳은 실내다. 거리가 가깝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하며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손에서 날아간 칼날이 조직원의 가슴에 푹 박혔다.

"컥!"

차우진은 동시에 왼쪽으로 뛰었다. 왼쪽에 있던 놈의 목을 손날로 후려쳤다.

"켁!"

세 번째 조직원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그는 차우진이 움직이는 걸 보고 처음에는 멈칫했다.

그래도 반응이 크게 느리진 않았다. 그는 차우진이 왼쪽 놈을 제압할 때 급히 총구를 돌려 조준할 수 있었다.

적이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잡았….'

차우진이 서 있던 곳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 직후에 조직원의 바로 옆에 나타났다. 그러면서 조직원의 권총 슬라이드를 손으로 잡고 뒤로 젖혔다.

약실에 들어 있던 탄약이 튀어나갔다. 뒤늦게 조직원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조직원은 기겁했다. 차우진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으헉!"

차우진이 권총을 빼앗아 적의 턱을 후려쳤다. 적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목을 얻어맞은 왼쪽 놈이 이제야 권총의 총구를 위로 들려고 했다.

차우진이 턱을 맞은 놈의 허리에서 칼을 뽑아 왼쪽으로 날렸다.

"컥!"

왼쪽 놈이 칼을 맞고 고꾸라졌다.

차우진은 턱이 돌아간 채로 넘어지는 놈의 턱을 다시 걷어찼다. 적의 고개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차우진이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았다.

"도망치는 건 빠르네?"

안드레이는 차우진이 부하들을 공격하는 순간 지하실 계단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는 본부에서 차우진이 어떻게 날뛰었는지 안다. 그래서 첫 번째 부하가 제압될 때 전투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안드레이는 총소리가 들리면 다시 계단을 올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벌써 다 당했다고?'

차우진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계단 아래에서 모퉁이를 돌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스킬 쿨타임을 채우려면 시간을 조금 끌어야 한다.

차우진이 말을 걸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는 스파이일 수도 있잖아.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지 그랬어?"

안드레이가 악을 썼다.

"야 이 새끼야! 들어오면 박사는 죽는다!

차우진은 안드레이의 목소리로 그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제 박사의 위치도 알아내야 한다.

"박사가 거기 있구나? 그럼 살아있는지를 알아야겠는데?"

"뭐?"

"난 박사를 만나러 왔다니까. 박사가 이미 죽었으면 임무는 실패니까 너도 죽어야지."

"MI6가 박사를 어디에 쓰려고!"

"세계평화?"

"영국 놈들이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는 거냐! 그리고 박사와 세계평화가 무슨 상관인데!"

"박사의 생존부터 확인시켜라. 목소리라도 내게 해. 안 그러면 박사는 죽었다고 판단하고 들어갈 테니까."

"기, 기다려!"

잠시 후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살아있다! 아직은."

차우진이 박사의 위치도 파악했다. 안드레이보다 조금 앞쪽이었다.

'두목이 박사를 방패로 쓰고 있구나. 총구는 등이나 뒤통수에 닿아 있겠지.'

차우진이 말했다.

"박사. 우린 대화가 필요해."

"왜, 왜 나를…."

"레드 크리스털."

"제조법은 나 말고도 아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왜 나를…."

그건 사실이다. 백희선이 제조법을 받아 양산 기술을 연구했다.

차우진이 갑자기 모퉁이를 쓱 돌았다.

안드레이가 총구를 박사의 등에 댄 채로 외쳤다.

"우, 움직이지 마!"

차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박사.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어떻게 생겼는지 참 궁금했는데."

멸망한 세계에서는 누가 레드 크리스털을 만들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레드 크리스털을 개발한 놈을 드디어 찾았다."

박사가 급히 변명했다.

"나는 시켜서 한 것뿐이야. 난 여기 갇혀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어쨌든 레드 크리스털을 만들었잖아."

"그, 그렇지. 그렇지만 레드는 부작용이 적은 편이니까…."

"라이트한 마약과 각성제 시장을 노렸다면 제대로 만든 거야. 레드 크리스털은 베스트셀러가 될 테니까."

"그건…."

안드레이가 박사의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닥쳐! 너 이 새끼. 박사를 원한다고 했지? 그럼 총 버려! 안 그러면 박사를 쏴버릴 테다!"

차우진이 경고했다.

"그러면 너도 죽어."

"뭐?"

"내가 박사를 만나고 싶은 건 맞는데, 총을 버릴 만큼은 아니라서."

"이, 이 새끼가…."

차우진이 안드레이는 무시하고 박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뭐 더 만드는 거 없냐?"

"외국에서 양산 기술을…."

"그런 거 말고. 신종 마약은?"

멸망급 마약은 레드 크리스털이 아니라 블러드 크리스털이다.

"연구는 다양하게 하고 있지만, 아직은 레드 크리스털만…."

차우진이 다른 걸 물었다.

"연구 시설은 이게 전부냐? 장비는 좋은데, 종류가 적고 규모도 작다?"

박사가 대답했다.

"그래서 여기서 양산 기술을 연구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긴 하겠어."

안드레이가 총구를 박사의 등에 댄 채로 차우진에게 소리를 질렀다.

"총 버리란 말이다!"

"시끄럽다. 중요한 이야기하는 거 안 보이냐?"

"뭐? 뭐?"

"무식한 새끼가 예의도 없어."

"내 총이 지금 박사를…."

"넌 기다리라고."

"이, 이 새끼가!"

140. 박사 II

러시아계 체코 마약조직의 두목 안드레이는 박사의 등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총구가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서 방아쇠만 당기면 빗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차우진은 인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사에게 이것저것 묻기는 하는데, 총을 쥔 안드레이는 대놓고 무시했다.

안드레이는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무시하는데 순순히 놔줄 것 같지도 않았다.

'딱 한 발만!'

어차피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뭔가 하긴 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은 박사를 방패로 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차우진을 향해 한 발만 재빨리 쏘고 다시 박사를 겨눌 생각으로 총구를 움직였다.

안드레이의 총구가 박사의 오른팔 옆으로 삐져나왔다.

차우진이 공간이동 스킬을 쓰면 안드레이의 뒤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목격자가 있으면 그 스킬은 쓰면 안 된다.

대신에 시간 가속 스킬이 있다. 그건 눈으로 봐도 구분하기 어렵다.

안드레이가 총구를 움직일 때 차우진도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차우진은 권총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그는 안드레이의 어깨 근육이 꿈틀댈 때 권총의 총구를 비틀었다. 안드레이가 권총을 박사의 오른쪽으로 내미는 순간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사람의 반응속도보다 총알이 날아가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

금속 총알이 안드레이의 권총 앞부분을 때렸다. 권총이 손에서 빠져나가 옆으로 날아갔다.

"억!"

차우진이 무기를 잃은 안드레이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넌 이제 총이 없네?"

안드레이는 겁을 집어먹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히, 히익! 오지 마!"

차우진이 권총을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 계속 전진했다.

지하실에서 울린 총소리 한 번 정도는 이 동네 사람들이 들어도 무슨 일인지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연속으로 총소리가 들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우진이 권총 대신에 단검을 뽑았다.

"총이 시끄럽긴 해."

차우진이 총을 내려놓고 칼을 뽑은 걸 본 안드레이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스페츠나츠의 단검술 교관 출신이다. 그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안드레이도 단검을 뽑으며 말했다.

"겨우 총소리 때문에 미련한 선택을 했구나. 넌 내 칼에 죽는다."

"노력은 해봐라."

"그동안 내 칼에 죽은 놈이 몇인 줄 아나?"

"넌 그걸 셀 수 있구나?"

"뭐?"

거리가 가까워졌다.

안드레이가 먼저 움직이며 차우진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빨랐다. 옆에서 들어오는 각도도 예리했고 방향도 정확했다.

시간 가속 스킬은 이미 끝났지만, 차우진의 전투 센스는 여전히 잘 작동했다.

차우진이 안드레이의 다리와 허리, 팔과 어깨, 그리고 눈의 시선을 모두 보고 움직임을 분석했다. 적이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려는지가 훤히 보였다.

차우진이 허리를 조금 젖혔다. 안드레이의 칼이 그의 바로 앞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이 딱 한 걸음 전진하며 오른손에 쥔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칼이 안드레이의 가슴에 푹 꽂혔다.

"컥!"

안드레이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차우진이 안드레이를 따라가며 가슴에 꽂은 칼을 손으로 툭 밀었다. 칼날이 더 깊이 들어갔다.

"커컥."

안드레이가 무릎을 꿇었다.

차우진이 안드레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약하구나."

안드레이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차우진이 아니라 박사를 향해서였다.

"끄, 끅…."

입을 뻐끔거리던 안드레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걸로 이번 일이 해결되면 좋겠는데…."

박사가 뒤에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요원."

차우진은 박사에게 물어볼 게 많다.

"고마우면 질문에 좀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질문이라면…."

"여기서 뭘 연구했는지와, 저놈이 앞으로 뭘 만들라고 했는지 같은 것?"

박사가 밝은 얼굴로 제안했다.

"아.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소리가 났으니까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안드레이의 부하들이 올 수도 있으니까…."

"안드레이의 부하 중에는 여기 올 놈이 없겠지만, 총소리는 좀 그렇긴 하군요."

"빨리 빠져나가는 게 좋습니다."

"납치됐다고 했으니까 이놈이 여권이나 신분증을 빼앗아갔겠군요. 그것만 찾아서 나갑시다. 그래야 일이 편해집니다. 박사님 이름이?"

"이반 소코로프입니다."

차우진은 멈칫했다.

"이반 소코로프?"

"그렇습니다."

차우진이 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반 소코로프…."

"왜 그러십니까?"

***

멸망한 세계에서 차우진이 물었다.

"창수 형. 블러드 크리스털은 도대체 어떤 놈이 만든 걸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 블러드는커녕 레드조차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개발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우리나라는 멸망 초기에 마약을 팔던 놈이 워낙 많아서 누군지 짐작도 안 간다. 알면 찾아가서 탄창 하나를 다 비워줄 텐데."

"사실 용의자는 몇 명은 있어. 지구 여기저기에 있었지. 그 용의자 중에 진짜 개발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도 용의자가 있나?"

"아니. 우리나라는 초기에 퍼지긴 했는데, 용의자까지는 없었던 거로 알아."

"그럼 외국에서는 누가 유명해?"

박창수가 이름을 몇 개 말했다. 미국도 나오고 남미도 나왔다. 유럽 쪽도 있었다.

"유럽의 마약왕 이반 소코로프라는 놈도 의심스럽지. 유럽의 블러드 크리스털 공급망을 그놈이 꽉 잡았으니까."

차우진이 물었다.

"그놈은 지금은 죽었을까?"

"적어도 멸망 초기에는 살아남았어. 아직도 살아있으면 유럽의 거물 빌런이 됐겠지."

***

차우진이 활짝 웃었다.

"미래의 마약왕을 여기서 보네?"

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연기력이 참 좋아. 내 전투 센스를 피할 정도라니. 살짝 수상하긴 했는데, 대충 넘어갔으면 속을 뻔했어."

전투 센스는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올수록 변칙이나 속임수, 연기 등을 더 잘 파악한다. 이반 소코로프처럼 움츠리고 있으면 그 효과가 떨어진다.

지금 1층에는 조직원 셋이 죽어 있다. 차우진은 그들이 안드레이의 명령을 듣는 걸 보고 스컬스의 조직원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도시에 있던 세 놈은 스컬스가 아니었어. 그중에 최소한 둘은 네 부하들이야. 그래서 스컬스의 간부인 드미트리가 이곳의 위치를 몰랐던 거지."

박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

"같은 박사인데도 참 달라. 어떤 박사는 인류의 절반을 살릴 약을 만드는데, 넌 절반을 죽일 약을 만드네?"

이선정 박사는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 중이고, 이번 소코로프 박사는 블러드 크리스털을 만들려고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반 소코로프. 멸망 초기 유럽의 마약왕. 너 사람 피를 가지고 연구하는 거 있지?"

박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번에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아, 아니…."

박사의 눈에 바로 옆에 놓인 권총이 보였다. 박사가 권총을 재빨리 잡았다.

차우진은 이제 권총이 없다. 칼은 안드레이의 가슴에 박아넣은 후라 두 손이 다 빈손이다.

박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어떻게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늦었다!"

박사는 차우진이 위층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보지 못했다. 프라하에서 두 개 조직을 상대로 어떻게 날뛰었는지도 보지 못했다.

"이제 내 손에 총이 있단 말이다!"

차우진이 물었다.

"총까지 들었으면 대답을 해주지? 사람 피, 그중에서도 중독자의 피로 연구하는 거 있지?"

박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그걸…."

"이미 그 단계까지 갔나 보다? 역시 네가 블러드 크리스털의 개발자였어."

박사가 총구를 겨눈 채로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도 비슷한 연구를 하는 중이라서?"

박사가 그 말을 듣고 실실 웃었다.

"너. MI6 요원이 아니구나?"

"그거야 안드레이가 넘겨짚은 거에 맞장구친 거고."

"그럼 넌 어디서 왔지?"

"너희들이 한국에 지사를 설립했잖아. 거기서 왔다."

"설마…. 백희선?"

"백희선과 동업하던 중이지."

박사가 의심했다.

"혹시 지금도 넘겨짚은 거에 맞장구를…."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희선. 그 여자와 함께 레드 크리스털의 양산 연구를 하다가, 발전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게 중독자의 혈액이다?"

"너는?"

박사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많이 쫓아왔군. 하지만 그 연구는 내가 더 앞서고 있다."

"그래. 인정한다. 너는 10년 안에 블러드 크리스털을 만들어낼 거야."

"너도 그 가능성을 봤단 말이지. 맞다. 레드 크리스털과는 차원이 다른 마약을 만들 수 있다."

차우진이 지하실의 장비들을 가리켰다.

"여기 상황을 보면 아직 연구는 초기 단계일 테고."

"그렇지만 오직 나만이 그 연구에 성공할 수 있다. 너. 나랑 손을 잡자. 네가 나를 후원하면, 내가 조직을 재건하고 역사상 최고의 마약을 완성할 수 있다."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나는 말이야. 어떤 개새끼가 블러드 크리스털을 만들었는지 아주 오래 궁금해했다."

"블러드 크리스털. 정말 마음에 드는 이름이군."

"네가 그 이름을 지었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블러드 크리스털은 말이지. 그 자체로도 멸망급 마약이지만, 다른 멸망급 재난을 더 심각하게 만드는 기름 역할도 하더라."

"멸망급 재난이라니?"

"그래서 우리 누나가 죽었지."

박사는 차우진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확실히 이해했다.

"누나가 죽었다고?"

"성격 포악하고 툭하면 주먹부터 나가고 많이 먹지만, 싸움은 겁나 잘하거든? 난 누나가 어디서 맞고 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그게 무슨…."

"그래도 블러드 크리스털에 중독된 동료들이 뒤에서 총을 쏘는 건 못 피했나 보더라. 경찰 중에 배신자가 한 놈이 아니었거든."

"이봐.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내가 만든 건 레드 크리스털…."

"블러드 크리스털은 너밖에 만들 수 없다고 했지? 그 말이 진실이었으면 싶다. 그래야 너만 죽으면 그 저주받은 멸망급 마약도 사라지니까."

박사는 차우진을 권총으로 조준하고 있다. 그래서 여유가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차우진이 하는 말을 이해하진 못했다.

"너 뭐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멸망급 빌런 이반 소코로프. 현상금을 못 받는 게 아쉽다. 멸망 초기에 블러드 크리스털의 개발자에게 걸린 현상금이 10억 달러가 넘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모르는 채로 죽어라."

박사는 차우진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박사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죽는 건 너야! 나한테 총이 있고 너는 빈손…."

차우진이 갑자기 박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박사는 경악했다.

"헉! 이, 이게 무슨…."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찾나?"

박사가 기겁하며 권총을 옆으로 돌리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으, 으헉!"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차우진이 박사의 권총 슬라이드를 붙잡는 게 빨랐다.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헉?"

차우진이 권총을 빼앗았다.

"이제 나한테 총이 있고 너는 빈손이네?"

박사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너, 너 뭐야! 너 도대체…."

"징벌천사. 너를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내려왔지."

"그, 그런 게 진짜로 있다고?"

"눈으로 봤잖아. 내가 네 눈앞에서 사라지는걸. 천사의 능력이지."

박사는 겁을 집어먹었다.

"그, 그럼 지옥은…."

"지옥에서 불구덩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박사가 공포에 질려 두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니야. 난 지옥이 있는 줄 몰랐어. 알았으면 마약을 안 만들었을 거야. 알았으면 착하게 살았…."

"뒈져라."

차우진이 박사를 향해 사격했다. 총구에서 불꽃이 튀면서 총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켁!"

차우진이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총탄이 박사의 몸에 퍽퍽 박혔다.

"커억! 컥!"

박사가 뒤로 넘어져 장비 사이에 처박혔다. 차우진이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박사의 몸 위로 실험용 장비가 넘어졌다.

권총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져 고정됐다. 탄창이 비었다.

차우진이 지하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이 장비도 다 없애야지. 누가 네 실험기록을 보고 블러드 크리스털을 만들면 안 되니까."

실험실에는 인화물질이 충분히 있었다.

차우진이 박사의 비밀 연구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이 점점 더 커지다가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건물에서 계속 펑펑 터졌다.

차우진이 걸어가면서 말했다.

"물론 지금은 우리 누나가 멀쩡히 살아있지. 집에 가면 고기 많이 넣은 짜장면이나 만들어줘야겠다."

141. 뉴욕 II

이반 소코로프 박사가 연구실로 쓰던 건물은 불에 타고 내부 폭발까지 일어나 폐허처럼 변했다. 유리창은 모조리 날아갔고 지붕도 반쯤 무너졌다.

집이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져서 벽은 그나마 형체를 유지했다. 다른 집과의 거리도 조금은 떨어져 있어서 화재가 번지지는 않았다.

소방차가 먼저 출동해 화재를 진압했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불길을 약해져 화재는 어렵지 않게 잡혔다.

소방차보다 조금 늦게 현장에 도착한 체코 경찰은 건물의 상태를 보고 당황했다.

"집이 완전히 다 날아갔네?"

"그러게 말입니다."

"총소리가 많이 들렸지?"

"폭발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지원은?"

"이미 요청했습니다."

***

그 지역 경찰서 형사팀장은 이미 퇴근했다가 집에서 연락을 받고 현장에 왔다. 이미 다른 형사들이 와 있었다.

팀장이 물었다.

"사상자는?"

"시체 다섯 구가 발견됐습니다."

"다섯이나? 확실해?"

"진화 작업을 한 소방관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끄응. 많네. 너무 많아."

"그런데…."

"왜? 뭐가 또 있어?"

형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지하실에서 파괴된 실험장비가 많이 나왔습니다. 화학물질도 많이 나왔고요."

"아. 그래서 저렇게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만 저 안에서 일하는 거야?"

"예. 폭발물은 더는 없어 보이지만, 유독물질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른 형사가 다가왔다.

"팀장님. 사망자 중 한 명의 신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기…."

"넌 또 왜? 뭔데?"

"스컬스의 보스인 안드레이입니다."

팀장은 깜짝 놀랐다.

"뭐? 스컬스는 오늘 프라하에서 박살 났잖아."

스컬스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현장에서 탈출한 안드레이는 긴급 수배가 떨어진 상태다.

"예. 보스가 여기로 도망쳤다가 결국 당했나 봅니다."

"프라하에 연락해."

***

프라하에서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몇 명이 연락을 받고 이 소도시로 달려왔다.

상황을 전해 듣고 현장도 확인한 프라하의 형사팀장이 말했다.

"여길 날려버린 건 울프팩 놈들인 걸까?"

"그것보다는 그 킬러 아닐까요?"

"어? 죽음의 천사?"

"예. 여러 놈이 쳐들어왔으면 흔적이 많이 남아야 하는데, 나오는 게 별로 없답니다."

"죽음의 천사라면 혼자서라도 여기를 이렇게 만들 실력은 있는데…."

"당연하죠. 혼자서 스컬스와 울프팩을 동시에 농락한 놈인데요."

"그럼 그 킬러가 프라하에서 여기까지 안드레이를 쫓아왔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요?"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킬러는 안드레이가 본거지에서 탈출하는 걸 도와줬다며."

"탈출하게 해놓고 다시 뒤를 밟았나 봅니다."

"허…. 지독하네."

"철저한 놈이기도 하고요."

팀장이 걱정했다.

"천사인지 악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잡기는 해야 할 텐데…. 이런 놈을 잡을 수 있을까?"

"팀장님. 이쪽 수사팀한테 떠넘기면 어떨까요? 그 킬러가 이 도시에 있다면 그게 맞지 않습니까?"

"야. 너는 어떻게 우리 사건을 떠넘길…. 어…. 살짝 무서운 놈이니까 열린 마음으로 생각 좀 해보자."

***

차우진은 프라하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관광객들이 타는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꽤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다.

차우진은 프라하 외곽에 오스트리아에서 빌린 차를 세워두었다. 그 차를 타고 체코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 차는 워낙 낡아서 보증금으로 맡긴 돈이 중고차의 시세보다 많았다.

차를 빌려준 사람이 보증금을 돌려주며 아쉬워했다.

"그냥 차를 가져도 되는데."

그러면 서류에 흔적이 남는다. 그런 절차를 피하려고 개인에게 현금을 주고 차를 빌렸다.

차우진이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갈 때는 기차를 이용했다.

이탈리아에 왔지만 관광할 시간은 없었다. 탐지기 테스트가 끝나기 전에 뉴욕으로 돌아가야 한다.

***

뉴욕에서 파인드스톤 사장 정수찬이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박태우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사장님. 아직 탐지기 테스트가 끝나지는 않았는데, 혹시 벌써 분석 결과가 나온 겁니까?"

"추정치는 나왔지. 차우진 씨의 예상대로야."

"아…. 그럼 우린 다 죽었네요."

***

차우진이 이탈리아에서 뉴욕으로 가는 여객기를 탔다.

"후우.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여객기의 좌석은 비좁고 다리를 뻗을 수도 없었지만, 인천국제공항에서 뉴욕에 갈 때 이용한 넓은 좌석보다 마음은 편했다.

"이제 집에 좀 가고 싶다."

***

정수찬이 한마디 했다.

"넌 말을 해도 재수 없게 하냐."

"하지만 그게 터지면…."

"뉴욕 근처 지각 아래에 마그마 폭탄이 숨어 있는 건 맞아. 지금까지의 데이터만 봐도 그건 짐작할 수 있다."

"그럼 그게…."

"이게 천 년 후에 터질 수도 있지만, 차우진 씨가 예상한 것처럼 10년 후에 터질 수도 있겠지."

"저기, 그 10년 말인데요. 그 시기가 확실한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정확한 건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야 알 수 있다."

"데이터가 다 나오면 3D 모델링은 제가 최우선으로 만들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너 혼자 만들라고 하고 싶은데."

"제 실력으로요? 무리인데요?"

"알아. 담당 부서에는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지는 말고, 데이터만 보고 만들게 해."

"옙! 이미 강원도 때 한 번 했던 작업이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땅속에 뭐가 있는지 미국 정부에 알리고 지원을 받으려면, 눈에 보이는 게 있어야 해."

정수찬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파인드스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가 아직도 테스트가 진행 중인 마그마 탐지기 시스템을 보았다.

"차우진 씨의 예상대로라면, 저런 마그마 폭탄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 테니까."

"하나가 아니라요."

"그래. 하나가 아니라 지구 전체에 여러 개가 있겠지."

***

차우진이 뉴욕 공항에 도착했다.

"배고프다."

그는 공항에서 나온 후에 휴대폰을 켰다.

메시지가 잔뜩 들어와 있었다.

주로 정예지가 보낸 것이었다.

[우진 오빠. 촬영장에 언제 와요?]

[오라니까요?]

[오라고.]

[촬영 끝났어요. 이제 시간 많아요.]

[야! 전화 받아!]

부재중 통화도 많았다.

"어휴. 무슨 전화를 수십 통이나 했냐."

차우진이 정예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목소리가 들렸다.

- 야!

"야?"

- 말이 곱게 나가겠어요? 진짜 이럴 거예요?

"CF 촬영 도중에 나랑 관광 다니면 스캔들 날 텐데?"

- 그쵸? 그래서 안 온 거죠? 근데 전화는 왜 안 받아!

차우진이 사실대로 말했다.

"나도 어디 좀 다녀오느라 바빴는데."

- 그쵸? 바빠서 못 온 거죠? 근데 전화는…. 잠깐. 그 바쁜 일이 설마 도인선 기자랑 어디 취재 다닌 건 아니죠?

"도 기자는 아직 전화해보기 전인데, 부재중 전화가 와 있긴 하네요."

- 나한테 먼저 전화한 거예요?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전화한 건 맞는데…."

정예지의 목소리가 조금 풀어졌다.

- 흐응. 알았어요.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사요.

"난 뉴욕은 뭐가 맛있는지 모릅니다."

- 스테이크 먹으러 가요. 내가 알아본 식당에 스테이크 엄청 큰 거 있어요.

"큰 고기? 나 그런 거 좋아합니다."

"알아요. 우진 오빠 취향에 아주 딱인 곳을 골랐으니까."

차우진이 정예지와 저녁 약속을 잡은 후에 도인선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 어머. 우진 씨. 연락 기다렸어요.

"나를 기다릴 일이 없을 텐데요?"

- 제시카 알죠?

"비행기에서 기절했던 그 미국 언론사 기자?"

- 네. 그 기자요. 제가 우진 씨랑 안다고 했더니, 꼭 만나고 싶대요.

미국 언론사 기자를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

"음…. 오늘은 시간이 없는데."

- 내일 어때요? 내일.

"오래는 못 봅니다. 좀 바빠서."

- 앗! 역시 이사님. 알았어요. 내일 잠깐 만나요. 제시카가 인사만 할 거예요.

***

차우진이 통화를 마치고 뉴욕 옆에서 진행 중인 탐지기 테스트 현장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탐지기 테스트 일정 중 마지막 날이다. 차우진이 도착했을 때는 마지막 테스트가 끝나기 직전이었다.

"제가 늦진 않았군요."

정수찬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차 이사님. 아무래도 새 회사, 그러니까 마그마에너지를 설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데이터가 예상대로인가요?"

"정확한 상황은 분석 작업을 마쳐야 알겠지만, 제가 간단히 분석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지하에 크고 위험한 게 있습니다."

"정식 분석 작업은 얼마나 걸립니까?"

"오늘 데이터가 모두 확보되면 제가 직접 긴급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내일까지는 나올 겁니다."

"저도 뉴욕에 조금 더 있어야겠군요."

정수찬은 심각했다.

"상황이 만약 차 이사님이 예상한 그대로라면,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건 정수찬 사장님, 아니, 정수찬 박사님이 찾아내셔야지요."

"차 이사님은 방법을 이미 다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아니요. 저는 경험과 감에 의존해서 판단한 것뿐입니다. 마그마 폭탄을 찾아내는 기술도, 감압 기술도 오직 정수찬 박사님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정말 큰 짐을 지우시는군요."

"미안합니다만, 정말 정 박사님밖에 없습니다."

멸망 초기에도 은퇴한 정수찬을 도로 불러낸 후에야 그 기술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정수찬이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래도 연구에 도움은 주실 거지요? 이거 저 혼자서는 못 합니다."

"당연히 미국 정부를 통해 여러 연구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겁니다."

"차 이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뭐, 방향을 조언하는 정도라면야."

"딥어스테크의 탐지기를 개발할 때도 그런 식으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곽수혁 팀장님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마그마 탐지기의 마지막 현장 테스트가 마무리됐다.

장비 철수는 정수찬이 지휘할 필요가 없다.

정수찬이 물었다.

"이제 저는 회사로 복귀할 겁니다. 차 이사님은 어쩌실 겁니까?"

"그런데 왜 자꾸 저를 차 이사라고 부르십니까?"

"마그마에너지 설립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곧 명함을 파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어, 뭐. 네."

정수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그마 발전소는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두신 게 있지요?"

"개념 정도는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차우진은 멸망 초기에 마그마 발전소의 개념이 나오는 방송을 여러 번 보았다.

그가 발전소를 직접 만들 순 없다. 그렇지만 어떤 기술을 써서 어떤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지 정도는 설명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력발전소를 지을 때 댐을 어떤 형태로 짓고 어떤 발전기를 넣어야 하는지 정도처럼, 마그마 발전소의 기본 개념 정도라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상식적인 수준이죠."

"마그마 발전소는 그 상식적인 것조차 정립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처음부터 올바른 방향과 틀을 만들 수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 조언이라도 필요하면 연락하시죠."

정수찬은 회사로 돌아갔다. 그는 지금부터 내일까지 데이터를 분석해야 한다.

차우진은 뉴욕 중심가로 이동했다. 정예지와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정예지는 차우진을 보자마자 따져 물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이 먼 타향까지 와서 연락을 딱 끊고 말이야!"

"진짜로 바빠서였는데."

"뭐 지구평화라도 지켰어요?"

"어떻게 알았지?"

멸망급 마약 블러드 크리스털의 개발자를 제거했다. 레드 크리스털의 초기 공급을 맡았던 조직도 날려버렸다.

"뭐래? 오늘 스테이크는 우진 오빠가 사요!"

"이미 그러려고 했는데."

정예지가 겁을 주었다.

"여기 엄청 비싸요!"

"스테이크는 한국에서도 비쌉니다. 그런데…."

차우진이 정예지의 옆을 보았다. 오윤서가 있었다.

"오윤서 씨가 같이 온 건, 스캔들 방지인가요?"

오윤서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그리고 수찬 오빠는 오늘은 도저히 시간을 못 낸다고 했거든요. 그렇게 만든 사람이 차우진 씨라는 소문이 있어서."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정예지가 옆에서 투덜댔다.

"언니랑 데이트하려면 그렇게 없는 시간도 쪼개서 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차우진이 말했다.

"정수찬 사장님은 오늘은 진짜로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일 좀 미룬다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누가 죽습니다. 그것도 많이."

정예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진짜 죽어요?"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하려고 오늘 밤새도록 일할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해합시다."

정예지는 그 말을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했다.

"아아.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인가 보다. 그런데 그걸 우진 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어쩌다 옆에서 구경해서?"

"그럼 어쩌다 스테이크나 사요. 나 오늘 실컷 먹을 거니까 많이 사요."

"그렇게 먹으면 뒷감당은?"

"CF는 이미 다 찍었는데 뭐 어때요?"

"한국에 돌아가면 드라마 촬영이 남았지 않나?"

정예지가 큰소리쳤다.

"괜찮아요. 고기만 먹으면 살 안 찌니까."

142. 뉴욕 III

차우진이 뉴욕 식당에서 대형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1kg짜리였다.

다른 요리도 몇 가지 더 시켰다.

오윤서는 몸매 관리를 위해 아주 조금만 먹었다. 그녀는 그동안 미뤄둔 스케줄을 한국에 돌아가면 처리해야 한다.

정예지도 스케줄이 있지만, 큰소리를 쳐놓은 게 있어서 열심히 먹었다. 그렇다고 차우진이 먹는 속도를 쫓아갈 순 없었다.

차우진이 스테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이 집 고기가 참 맛있네. 짭짤하고 부드럽고 바짝 구워진 겉 부분이 고소해."

정예지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진짜 많이 먹네."

"남길 순 없으니까?"

"먹방 해도 될 듯."

"할 리가."

"우진 오빠는 요리 잘하잖아요. 스테이크도 잘 굽지 않아요? 직접 요리해서 먹는 먹방 하면 통할 것 같은데…."

"안 한다니까."

"근데 진짜 맛있게 먹는다."

"예전에는 이만큼 좋은 고기가 없어서, 공들여 구워도 이 맛이 안 났으니까."

멸망한 세계에서는 가축을 키우기 어렵다.

식량이 부족해서 사람과 음식을 공유하는 가축은 키울 수 없다. 그래서 돼지는 멧돼지나 야생화된 돼지만 존재했다.

소는 여건이 되는 생존 커뮤니티에서는 키우는 경우가 있었다. 소는 풀만 먹어도 살 수 있고, 밭도 갈 수 있고, 수레를 연결하면 짐도 나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소는 일을 시키는 데 써야 한다.

현대 문명이 무너진 세계의 소는 트랙터와 트럭 대신에 키우는 거지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게 아니다.

"이렇게 좋은 소고기는 못 구하니까, 이런 스테이크도 해먹을 수 없었지."

소고기만 차이 나는 게 아니다. 멸망한 세계는 식용유도 품질이 떨어졌고 그나마도 구하기 어려웠다. 버터는 더 구하기 어려웠다.

정예지가 두 손을 옆으로 벌리며 말했다.

"우진 오빠는 그동안 이런 거 못 먹었다니까 내가 마음이 약해지네. 알았어요. 오늘 이거는 내가 다 살게요."

"아싸. 개꿀."

오윤서가 차우진을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차우진이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

"아니에요. 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말, 수찬 오빠가 아니라 차우진 씨한테 딱 맞는 말인 것 같아서요."

"뉴욕에 오는 여객기에서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셨나?"

"아니, 그게 아니라…. 돈이 없는 분은 아니지 않으세요?"

"방금 한 건 옛날이야기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다. 꿈속에서 경험한 미래라 멸망을 막으면 오지 않을 미래다.

"아니, 방금 개꿀 하신 것도…."

정예지가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에이. 언니. 돈은 내가 더 많으니까 내가 사면 돼."

"정말 네가 더 많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나 연예인이잖아."

"으…. 그래. 난 누가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니까."

"당연히 연예인인 내가 더 많겠지."

***

이튿날 아침에 차우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정예지의 전화였다.

- 책임져!

"뜬금없이?"

- 체중이 왕창 늘었단 말이에요! 책임져!

"어쩐지 어제 많이 먹더라. 한국에서는 닭똥집만 조금 집어 먹더니, 미국에 오니까 고기 진짜 잘 먹던데."

- 고기만 먹으면 살 안 찌는 거 아니었어요? 난 고기만 먹었는데 어째서!

"그 고기를 조리하는데 들어간 오일과 버터는? 그리고 예지 씨는 내가 시킨 요리들도 많이 먹었는데?"

- 내가요?

"그리고 고기에 곁들여 먹은 거나, 술 마신 건 생각 안 하나 보네?"

- 아. 내가 술도 마셨구나.

"잘 마시더라."

- 이제 어쩌죠?

"운동하면 다 빠집니다."

- 우리 트레이너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아. 그럼 우진 오빠가 나 운동시켜줄 수 있어요? 운동 잘하잖아요.

차우진이 물었다.

"내 배가 왜 나왔을까?"

- 운동을 안 해서?

"알면서 왜 나한테 운동을 시켜달라고 하지?"

- 쳇. 설득력이 있어. 오늘은 뭐 해요?

"오전에 도인선 기자와 만날 일이 있고, 오후에는 정수찬 사장님 만나야지요."

- 잉? 도 기자님을 왜 만나요?

"제시카라고, 뉴욕에 올 때 여객기에서 기절했던 기자 알지요?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싶다고 해서."

- 아. 단둘이 만나는 건 아니구나. 어디서 봐요?

***

차우진이 카페에서 도인선을 만났다. 그녀는 제시카를 데려왔다.

제시카가 한국식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비행기에서 구해주신 덕분에 살았어요."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예전에 한국 특파원이었거든요. 요즘도 한국을 오가면서 일해요."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는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난 심폐소생술을 몇 번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그때 제가 깨어났잖아요. 뭔가 도움이 됐겠죠."

차우진이 회복 스킬을 썼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병원 검사 결과에 그게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의사는 뭐라고 합니까?"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운이 좋았대요."

"역시 그런 식으로 보이나 보네."

"네?"

"아닙니다."

제시카가 물었다.

"혹시 차우진 씨가 제 몸에 뭔가 하신 거예요?"

"특별히 한 게 없다는 걸 본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구나."

도인선이 옆에서 말했다.

"우진 씨는 무술 고수예요. 아마 기공 같은 걸 썼을 거예요."

제시카의 눈이 반짝였다.

"기공! 그거 그거죠? 내공 같은 신비한 힘…."

차우진이 말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무슨 기자가 내공을 믿나."

"아니구나. 그래도요. 운이 좋아서 제가 깨어났다고 해도, 도와주시던 그때 깨어났으니까 고마운 건 맞죠."

"뭐, 그렇게 생각하시든가."

제시카가 제안했다.

"한국에 가면 그땐 제대로 밥을 살게요."

밥을 산다는 말에 차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거 괜…."

정예지가 그곳에 나타났다.

"어머어. 이게 누구야? 우리 차 매니저 아니야?"

차우진이 옆을 돌아보았다.

"뭐지?"

"우연히 지나가다가 봤지, 뭐지는 뭐예요?"

그녀가 차우진의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도 기자님도 또 보네요?"

"예지 씨는 아직 미국에 계셨어요? CF 촬영 오셨다더니."

"아는 언니랑 왔는데, 기왕 멀리 온 김에 며칠 더 놀고 있어요."

"출연 중인 드라마는 아직 촬영 안 끝났잖아요."

"그래서 내일 한국으로 가요."

"아. 저도 내일 가는데."

"혹시 비행기가?"

출발 시각을 확인해보니 같은 비행기였다.

도인선이 물었다.

"그럼 우진 씨도 내일 같은 비행기예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난 오후에 일이 남아서, 귀국일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같이 가면 좋은데 아쉽다."

***

스톤파인더는 본사가 뉴욕에 있다. 차우진이 그날 저녁때 스톤파인더 회의실에서 정수찬을 만났다.

정수찬은 퀭한 얼굴이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밤새워 일하셨나 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걸 보니까 잠이 안 오더군요."

"좀 볼까요?"

정수찬이 대형 화면에 3D 이미지를 띄웠다. 그 옆에는 각종 수치도 표시했다.

"아시다시피 이번 테스트로 뉴욕시 외곽 지각 아래 깊은 곳에서 마그마 폭탄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정확한 결과가 나왔는데, 형태와 규모가 강원도에서 발견한 것과 비슷합니다."

"없었으면 했는데…. 역시 있군요."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그 마그마 폭탄이 실제로 터졌다.

정수찬이 설명했다.

"강원도에 있는 마그마 폭탄처럼 이것도 지표면을 향해 기다란 통로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폭탄의 도화선처럼요."

스톤파인더 직원 박태우가 물었다.

"차 이사님. 이게 터지면 피해가 크겠지요?"

"뉴욕은 강원도보다 인구밀도가 높으니 피해는 당연히 더 크겠지요."

"그럼 예상 피해 규모가…."

"뉴욕시 절반이 용암에 덮이고, 나머지 절반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대피하기 전에 터지면…."

멸망한 세계에서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 뉴욕의 마그마 폭탄은 경고도 없이 터졌다.

"뉴욕이 전멸할 겁니다."

"헉! 뉴욕에는 천만 명쯤 사는데요?"

"대참사죠. 그러니까 그걸 막아야 합니다."

정수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원도의 마그마 폭탄은 저도 제대로 계산해봤습니다. 차 이사님의 말대로, 강원도의 삼 분의 일이 용암으로 덮일 수 있겠더군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것도 그러겠지요."

박태우가 급히 물었다.

"잠깐만요. 제가 이거 계속 궁금하던 건데요. 차 이사님은 그걸 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우리는 이렇게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겨우 알아낸 건데…."

"감으로 추측한 겁니다."

"네?"

"강원도에서 지진 덕분에 '우연히' 마그마 폭탄을 발견하고, 그 데이터를 근거로 비슷한 지점이 있나 찾아봤습니다. 여기가 스톤파인더가 있는 뉴욕 옆이라 신경을 더 써서 찾아봤는데, 뭔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오더군요."

"느낌이요?"

"운이 좋았던 거죠. 아니, 이걸 좋았다고 해야 하나?"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럼 다른 설명이 가능하신지?"

"아니, 그럼 다른 마그마 폭탄을 찾는 일은…."

"난 감으로 여길 조사하자고 한 거라서, 체계적인 탐색 기술은 만들 수 없습니다. 그 기술은 정수찬 사장님이 개발하셔야 합니다."

정수찬이 그 말을 받았다.

"그 문제를 계속 고민했습니다. 제가 연구하던 것들을 더 발전시키면 불가능한 건 아니겠더군요. 앞으로는 그쪽 연구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차우진이 3D 이미지를 가리켰다.

"지각을 뚫고 올라오는 부분을 이용해 전체 압력을 낮춰야 합니다. 그렇게 폭발 시기를 점점 늦추다 보면 결국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쏟아져나오는 에너지로 물을 끓이는 거지요."

"아. 마그마 발전소 기술도 당연히 개발해야죠. 마그마에너지를 빨리 설립해야겠군요. 돈은 미국 정부가 낼 겁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미 정부에 연락하신 겁니까?"

"아니요. 이제 해야죠. 연줄을 동원해서."

차우진이 조언했다.

"그 연줄은 마그마 폭탄의 존재를 모르게 해야 합니다. 해결법이 확보되기 전에 정보가 새어나가면 전 세계에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물론이죠. 미국 정부와 만날 때 차 이사님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제가 소개하겠습니다."

차우진이 거절했다.

"아니요. 이 연구는 정 사장님이 주도하셔야 합니다. 저는 조언이나 몇 마디 할 뿐, 실무는 도와드릴 게 없습니다."

"아쉽군요. 도와주시면 큰 힘이 될 텐데요."

"저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국에서도 할 일이 많아서."

***

체코 경찰은 젊은 여성 안나가 마약조직 스컬스에 억류되어 있다가 전투 도중에 탈출했다는 걸 알아냈다.

수사팀장이 담당 형사에게 물었다.

"그 여자를 그때 거기서 구해준 사람이 있다고?"

"예."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놈이냐?"

"예. 그 킬러가 구해준 것 같습니다."

"얼굴은 봤대?"

"복면을 써서 전혀 모른답니다. 그냥 찾아와서 구해줬답니다."

팀장이 푸념했다.

"스컬스와 울프팩을 휘젓고 다니는 거로 모자라서, 그 전쟁터에서 여자까지 구해? 사람 맞나?"

"괜히 별명이 죽음의 천사겠습니까?"

"아. 잠깐. 혹시 그 여자를 구하는 게 진짜 목적이었나?"

"그게 사실이라면 보통 로맨티스트가 아니네요."

"그 여자 남자친구나 전남친, 아니, 그 여자한테 호감 가진 사람은 다 찾아내."

"알겠습니다. 그런데 워낙 미인이라서 그런 사람이 많을 겁니다."

"전부 다 찾아내서 조사해."

팀장이 다른 형사에게 물었다.

"그 킬러가 스컬스의 두목 안드레이를 어떻게 따라갔는지는 알아냈어?"

"죄송합니다. 성과가 없습니다."

"프라하에서 빠져나간 경로는?"

"다양한 방법으로 추적 중인데, 그것도 나온 게 없습니다."

"스컬스 두목이 어떤 차를 타고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확인했잖아. 그 차를 미행하거나, 그 시간에 같은 경로로 이동한 차량은?"

"사건 발생 이후에 프라하에서 그 도시로 가는 도로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안드레이의 차량을 쫓아가는 차는 발견된 게 없었습니다."

팀장이 화를 냈다.

"그게 말이 되나? 그럼 어떻게 안드레이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거기를 날려버리나! 분명히 뒤따라가는 차가 있었어야 해!"

"비슷한 시간대에 그 도로를 이동한 블랙박스 장착 차량을 찾아내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그 시간에 같은 경로로 이동한 차량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킬러가 안드레이와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차우진이 했다.

그는 안드레이의 차 뒷좌석에 잠입해서 같이 이동했다. 잠입할 때는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에 안드레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요."

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제발 뭐라도 좀 찾아내라. 그래야 위에 보고도 하고 기자한테 브리핑도 하지."

"최선을 다해서 찾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알아낸 게 하나도 없냐?"

143. 귀국

차우진은 뉴욕 공항에서 도인선 기자와 마주쳤다.

도인선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우진 씨는 뉴욕에 더 있는 거 아니었어요? 일이 남아서 귀국 일정도 못 정했다더니."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일은 정수찬에게 다 떠넘겼다. 정수찬이 미국 정부와 만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발목을 잡히지 않는다.

도인선이 물었다.

"혹시 같은 비행기예요?"

"빠른 티켓을 찾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 비행기에 자리가 많이 남아서."

차우진이 옆을 돌아보았다. 정예지와 오윤서도 공항에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인선이 차우진에게 말했다.

"귀국하면 밥이나 먹죠?"

"그럽시다."

도인선이 그 자리를 떠났다. 정예지도 차우진을 발견했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머. 우진 오빠? 오늘 들어가요?"

"어쩌다 보니."

"같은 비행기?"

"그렇죠."

"혹시 나랑 같은 비행기 타려고 일부러 맞춘 거예요?"

"당연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잘됐다. 집에 갈 때도 같이 갈 수 있겠네."

"난 이코노미석인데?"

정예지는 비즈니스석이다.

"아니, 왜? 방금 그 사람 도 기자님 맞죠? 왜 나랑 안 가고, 도 기자님하고 가는데!"

"비싸서?"

"설마 옆자리는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난 공항에 와서 티켓 산 건데."

"엥? 공항에 와서?"

정예지가 오윤서를 돌아보며 투덜댔다.

"정수찬 사장님 너무한 거 아니에요? 뉴욕에 올 때만 표를 보내주고 돌아가는 표는 안 줬나 봐요?"

"그랬나?"

"초대만 해놓고 갈 때는 나 몰라라네요?"

"바빠서 신경을 못 썼겠지."

정예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우진 오빠 월급이 얼마지? 미국에서 한국까지 가는 항공권값 내면 남는 게 있나?"

오윤서는 당황했다.

"아니, 차우진 씨한테 그 정도는 부담이 안…."

"실망이야!"

"말을 듣지 않는구나?"

정예지가 차우진에게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그 티켓 내가 비즈니스로 바꿔줄까요?"

"한국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굳이."

"아니, 그래도 편하게 가면 좋잖아요."

"이것도 편해서."

"설마 내가 없어서 편한 건 아니죠?"

"어…."

"확 씨."

***

정수찬은 인맥을 동원해 미국 국무부의 국장급 간부를 만났다. 미팅은 금방 잡혔다.

마음 같아서는 국무부 장관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국무부 랜더스 국장은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친구가 꼭 만나달라고 해서 보기는 하는데, 서로 불편하지 않게 커피나 마시고 일어납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그냥 일어서실 수는 없을 겁니다."

"5분 드리지. 그 안에 내 관심을 끌어보던가."

"1분이면 충분합니다."

정수찬이 노트북 화면에 3D 이미지를 띄웠다.

"이건 지각 아래에 숨어 있는 마그마 덩어리입니다. 여기 이 굴뚝처럼 길게 올라오는 부분 때문에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분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화산처럼 터진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랜더스 국장이 피식 웃었다. 그의 자리에 있으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을 종종 본다.

'정부 지원금이 필요한 거겠지.'

"3D로 만든 이미지 같은데, 저게 실제로 있기는 한 겁니까?"

"예. 최근에 찾아냈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뉴욕입니다."

랜더스 국장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어? 뭐? 어디?"

"정확히는 뉴욕시 바로 옆 지하에 있습니다."

랜더스 국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지금 이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그가 물었다.

"위력은 얼마나 됩니까?"

정수찬은 아직 거기까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슷한 규모인 강원도 마그마 폭탄의 피해 규모는 알고 있다.

그는 차우진에게 들은 말을 랜더스 국장에게 전했다.

"뉴욕이 전부 다 날아갈 겁니다."

국무부 랜더스 국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제가 아니라 데이터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랜더스 국장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신! 지금 나한테 사기를 치는 거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직접 확인해보시죠. 필요한 데이터는 제공하겠습니다."

이제 랜더스 국장은 정수찬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스톤파인더 사장이 데이터까지 제공하면서 국무부를 상대로 뉴욕을 판돈으로 걸고 사기를 친다?'

회사가 껍데기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스톤파인더는 자기 분야에서 나름 잘나가는 회사다.

'그럼 진짜란 건가?'

랜더스 국장이 정신을 차리려고 잠시 숨을 골랐다.

"후우. 이게 사실이라면 뉴욕 부동산이…."

"뉴욕 부동산만이 아니라 미국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겁니다."

랜더스 국장이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후에 물었다.

"저게 터질 위험이 얼마나 됩니까? 한 천 년쯤 후라면, 미래의 후손이 알아서 해결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투에서 조금 전의 삐딱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정수찬이 입을 열었다.

"이 분야 세계 최고 전문가의 의견으로는."

그는 차우진이 경고한 기간을 그대로 전했다.

"10년 후에 터진다더군요."

남은 기간이 너무 짧았다. 랜더스는 당황했다.

"헉! 10년…. 아, 안돼! 막을 방법이 있습니까? 있어야 합니다! 뉴욕을 포기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차우진은 정수찬이 막을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정수찬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충분한 예산과 전폭적인 학술 지원이 있다면, 가능합니다."

랜더스 국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니까 막을 수 있다는 거군요. 휴우."

"기술은 지금부터 개발해야 하지만요."

랜더스 국장은 다시 당황했다.

"지금부터 개발이라니? 그러니까 막을 기술이 아직 없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허…."

"저 혼자 힘으로는 무리입니다. 예산은 물론이고, 연구 인력도 필요합니다."

"그 모든 걸… 비밀리에 지원해야겠군요."

차우진은 정수찬에게 비밀 유지의 중요성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정수찬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이걸 공개하지 않고 이렇게 조용히 국장님을 만나는 겁니다."

랜더스 국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장관님을 모시고 백악관에 가야겠습니다."

정수찬이 랜더스 국장을 만난 건, 그가 국무부 장관의 측근이기 때문이다.

랜더스 국장이 단서를 달았다.

"물론 그 전에 우리 전문가들이 검증할 겁니다. 저 빌어먹을 데이터가 진짜인지를 말입니다."

***

그 시간에 차우진은 태평양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에 있었다.

"높은 곳에서 먹는 컵라면은 역시 맛있어. 하나 더 달라고 하면 또 주나?"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킥 웃었다.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맞아요. 저 김세린이에요."

"누구?"

"어머. 저 몰라요?"

"그러니까 누구…."

"아이돌인데요?"

"어…. 아! 아이돌!"

김세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시는구나!"

"한국에 돌아가면 꼭 검색해보겠습니다."

"혹시 노래 잘 안 들으세요?"

"노래는 당연히 좋아합니다."

멸망한 세계에는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음악을 들을 기회는 많았다. 폐허를 수색하다 보면 MP3 재생이 가능한 장비가 가끔 나왔다.

차우진은 전기 전문가다. 그것도 멸망한 세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전문가다.

그는 그곳에서 소형 발전기나 보조 배터리로 MP3를 충전하거나 전원을 직접 연결해 음악을 듣곤 했다.

김세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왜 저를 모르시는 걸까요?"

멸망한 세계는 인터넷이 안 된다. 그러니 가수가 누구인지 검색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돌 멤버 하나하나의 이름을 아는 건 더 어렵다. 얼굴이나 이름을 모르고 듣던 노래가 한두 개가 아니다.

"혹시 10년 후에는 은퇴하나?"

"어머. 10년이나 활동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데뷔가?"

"올해요."

"연예인은 보통 얼굴을 가리지 않나요?"

"나중에는 그래야겠죠?"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거봐요. 지금은 알아보는 사람이 없…. 아니, 그건 아니고."

"와. 아저씨. 저 상처받았어요."

***

정예지가 비즈니스석에서 라면을 먹으며 투덜댔다.

"혼자서 컵라면이나 먹어라."

오윤서가 옆에서 물었다.

"왜 심통이 났어?"

"좌석을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해준다고 해도 싫다잖아요. 같이 가면 심심하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

"네가 그런 데 돈 쓰는 게 부담스러웠겠지."

"그런가? 내 생각해서인가? 그럼 지금 혼자 외롭게 앉아 있으려나?"

"도인선 기자랑 같이 있으니까…."

"혼자가 아니네!"

***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차우진이 출국장을 나왔다. 김세린도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나오면서 말했다.

"나중에 우리 콘서트에 꼭 오세요."

"올해에 데뷔했다면서 벌써 콘서트라…. 그게 그렇게 쉽게 잡히는 거였나?"

"지금 말고 나중에 유명해지면요."

"아. 그런 날이…."

"방송국 공개 음악방송에 나간 적도 있거든요? 그리고 신곡 나오면 음악방송에 또 나갈 거예요. 그 정도면 콘서트나 마찬가지죠."

"그건 아닌 듯."

"음악방송에 오면 연예인도 볼 수 있어요."

"아니, 뭐. 연예인은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김세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머. 누구요? 얼굴 보면 아는 사람이에요?"

옆에서 정예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데?"

김세린이 옆을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앗! 정예지 선배님!"

"내가 선배예요?"

차우진도 물었다.

"그러게. 세린 씨는 올해에 데뷔한 아이돌인데 족보가 왜 그렇게 되지?"

김세린이 얼른 설명했다.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했어요! 안녕하세요! 김세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배라고?"

"네!"

정예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딱 보니까 민증에 잉크도 안 말랐겠네. 우진 오빠한테는 너무 어린 거 아닌가?"

차우진이 한마디 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도대체 무슨 의심을 하는 거지?"

"아닌가?"

"당연히 아니지."

"그럼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비행기 옆좌석?"

"보통 옆좌석 사람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나오나?"

"세린 씨가 인싸더라고."

정예지가 김세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흐음. 우진 오빠는 누가 첫눈에 반할 비주얼은 아닌데…."

"나 상처받으려고 하네."

"그럼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어요?"

"물론 그럴 리 없지만."

김세린은 바짝 긴장했다.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컵라면을 너무 맛있게 드셔서 말을 걸었다가…."

"어머어. 우리 우진 오빠. 혼자서 뒤에서 심심할 줄 알았는데 아주 즐거운 여행을 하셨네?"

오윤서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예지야. 그만 놀려. 그냥 옆자리라잖아."

김세린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히이익! 오윤서 선배님!"

차우진이 말했다.

"숨 쉬어요. 숨. 그러다 쓰러질라."

"안녕하세요! 루나페어리의 김세린입니다!"

차우진은 멈칫했다.

"루나페어리?"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며 말했다.

"루나페어리네?"

"누군데?"

"망돌."

"응?"

"망한 아이돌."

"왜 망했는데? 노래를 못 했나?"

박창수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데뷔는 나쁘지 않게 했는데, 신곡을 냈다가 표절이 걸렸거든."

"직접 표절했어?"

"표절은 작곡가가 몰래 했지. 근데 욕은 루나페어리가 먹었어. 너튜버들한테 저격도 참 많이 당했다."

"형이 알 정도면 정말 많이 당했나 보네."

"어. 그러다 망했어. 경쟁이 치열한 세계니까 신인 아이돌이 그 상황에서 버티긴 어려웠겠지."

***

차우진이 물었다.

"혹시 루나페어리가 신곡 내는 거 있나?"

"네? 네! 회사에서 좋은 곡 하나 구했다고, 싱글로 내겠대요! 이제 준비해야 해요!"

"아…. 그거겠네."

"네?"

그 노래가 박창수가 말한 표절한 곡이라면, 그 노래를 부르면 루나페어리는 쫄딱 망한다.

그런데 그걸 알려줄 방법이 없다.

지금 시점에서는 차우진은 그 노래를 들어본 적도 없어야 한다. 그러니까 표절이라는 것도 알 수 없어야 한다.

게다가 구체적으로 누구 노래의 어느 부분을 표절했는지도 모른다.

멸망 초기의 TV는 멸망과 관계된 방송이 주류였다. 걸그룹 하나가 10년 전에 어떻게 망했는지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꼭 해줘야 할 말이 있는데, 말을 할 수가 없네."

김세린이 물었다.

"왜요?"

"나도 뭔지 몰라서."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게."

144. 집

신인 걸그룹 루나페어리의 멤버 김세린이 물었다.

"해줘야 할 말이 있지만 뭔지 몰라서 못 해준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무슨 철학적인 선문답 같은 거예요?"

"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멸망한 세계의 루나페어리는 표절곡을 부르다 망했다. 그건 박창수에게 들어서 안다.

그런데 차우진은 그 표절곡이 어느 노래의 어떤 부분을 표절했는지까지는 모른다. 심지어 이번에 준비하는 곡이 그 표절곡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정예지가 옆에서 물었다.

"후배님. 안 바빠?"

김세린에 대답했다.

"네? 저요? 안 바쁘…."

"바쁠 거야. 바빠야 해."

"앗! 네! 바빠요. 저 먼저 갈게요!"

김세린이 가라는 말인 걸 뒤늦게 눈치채고 얼른 가방을 챙겨 사라졌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냥 가면 안 되는데…. 갔네."

정예지가 투덜댔다.

"그냥 비행기 옆자리였다면서 되게 편하게 말한다. 나도 그래도 되나?"

"이미 그러고 있지 않나?"

"히히. 그런가?"

차우진이 설명했다.

"그리고 세린 씨 경우는, 일단 인싸인 데다가."

"나도 인싸인데?"

"얼굴이 뭔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대화가 편하더라고."

"설마 아는 사람?"

"아니, 그건 아니고."

"알았어요. 한국 왔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

"국밥?"

"미국 음식만 먹었더니 칼칼한 게 땡기네. 국밥 말고 부대찌개."

"그것도 원산지는 미국 아닌가?"

"어머. 부대찌개는 당연히 한국 음식이지."

"앞으로 스케줄은 어떻게 하려고?"

"몰라요. 배 째."

***

차우진은 뉴욕에 갔다가 다시 유럽에 가고 또 뉴욕에 갔다가 귀국해서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우진이 현관문을 열면서 말했다.

"피곤하다. 이제 집에 왔으니까 당분간은 소파에 누워서 꼼짝도 안…."

차유리가 이미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뭐지? 요즘은 야근 안 해?"

차유리는 소파에 누워 TV를 보며 과자를 까먹었다.

"네가 한국에 없으니까 야근을 안 하더라. 야. 너 한 1년쯤 외국에 나가 있어라."

"그러겠냐."

"나가서 놀면 편하잖아."

"이번 여행은 안 편했어."

이번에 나가서 러시아계 체코 마약조직 스컬스를 무너뜨리고, 체코 범죄조직 울프팩도 반쯤 날려버렸다. 그러면서 뉴욕 탐지기 테스트도 신경 쓰고 정수찬에게 앞으로의 일을 맡겼다.

"나가니까 더 바쁘더라."

"노느라 바빴겠지."

차유리가 누운 채로 손을 내밀었다.

"줘."

"뭘?"

"선물."

차우진이 가방에서 가죽장갑을 꺼내 던져주었다.

"옜다."

차유리가 한 손으로 날아오는 장갑을 탁 잡아채 품질을 확인했다. 그녀가 즉시 소파에 똑바로 앉았다.

"응? 뭐지? 이 고급진 장갑은? 이건 네 싸구려 감성으로 고를 수 있는 게 아닌데?"

그 장갑은 정예지와 뉴욕에서 밥 먹고 놀 때 샀다.

차우진이 사려던 장갑은 내구성과 기능성, 방호력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누나 선물이라는 말을 들은 정예지가 이걸 추천했다.

차유리가 얼른 장갑을 껴보았다.

"오. 딱 맞아."

차우진이 충고했다.

"그걸 끼고 사람 패면 장갑 망가진다."

"살살 팰게."

"원래는 칼날이 안 들어가는 안전장갑을 사려고 했는데."

"그런 걸 누가 끼냐?"

정예지도 똑같은 말을 했다.

차유리가 신나서 말했다.

"동생이 부자니까 배달 음식 말고도 좋은 게 있구나. 이거 누가 골라줬냐?"

"정예지."

차유리가 눈을 껌뻑였다.

"응? 너 미국 갔다 온 거잖아. 정예지를 어디서 만났다는 거야?"

"마침 미국으로 CF 촬영 왔더라고. 오윤서 씨하고 셋이서 저녁 먹다가 장갑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장갑을 사래. 그게 좋대."

"역시 연예인은 보는 눈이 있어. 네 천박한 패션 감각으로는 이런 고급진 장갑을 고르는 건 무리지."

"목장갑이나 사다 줄걸."

차우진이 가방을 열고 짐을 꺼내는데 전화가 왔다. 민수연의 전화였다.

- 야. 내 선물은?

"누나가 그새 연락했냐?"

- 언니가 자랑하더라. 그래서 내 선물은?

"아차."

- 뒈진다?

"장갑 하나 더 샀다."

차우진은 선물을 고르기 귀찮아서 똑같은 장갑을 색깔만 바꿔서 두 개 샀다.

- 기다려. 가지러 간다.

***

이튿날 미국에 있는 정수찬이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늘 정부 사람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내일도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고생 많으시네요."

- 탐지기 데이터는 제공했습니다. 미국 정부에서 기밀 정보로 취급해 따로 분석 중입니다.

"정 사장님이 도와주셔야 할 텐데요.

- 당연히 분석 작업에 저도 참여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르는 게 많아서 가르쳐가면서 해야 하더군요.

차우진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 전화로 해도 되나? 발신지가 미국이니까 미국 정부에서 다 듣고 있을 것 같은데.'

정수찬이 머뭇거렸다.

- 그런데, 저기, 내일 미팅에서는 딥어스테크의 강원도 탐지기 테스트 이야기도 해야 합니다. 그때는 차 이사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차우진도 그 정도는 예상했다.

"부풀려 말하지만 마시죠. 제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감에 의한 추측이나 아이디어 수준입니다."

- 그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론을 완성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건 정 사장님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그건 오직 정수찬 박사님만 할 수 있습니다."

- 후우. 알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차우진이 당부했다.

"꼭 성공하셔야 합니다. 박사님이 실패하면 40억 명이 죽습니다."

- 아니, 왜 또 그 이야기로 부담을…. 그리고 너무 과장하셨습니다. 솔직히 40억은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그러게요. 너무 많죠. 그래서 막아야 합니다."

***

차우진이 이선정 박사를 찾아갔다.

"어머. 우진 씨가 어쩐 일이에요?"

"지나가다 생각나서 들렀습니다. 지금 점심시간인데 밥 먹으러 갈까요?"

"좋죠!"

식당에서 차우진이 이선정을 보며 생각했다.

'이선정 박사가 시작이었는데.'

차우진은 연쇄살인마 마상국을 잡아 이선정이 살해당하는 일을 막았다. 이선정은 혼자서 멸망급 전염병인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이선정이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손하은 씨는 일 잘하나 해서요."

손하은은 라이프레인 제약을 그만두고 화선바이오로 이직했다. 중견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갔지만 만족도는 전보다 더 높았다.

"잘해요. 실력 진짜 좋아요. 나보다 일을 더 잘하는 거 같아요."

"그럴 리가요."

"정말 뛰어난 인재라니까요."

"적어도 이 분야에선, 이선정 박사님보다 대단한 사람은 지구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선정이 부끄러워했다.

"어머. 나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에요?"

"사실을 말한 겁니다."

멸망 초기의 전문가들은 그녀가 천재라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멸망급 재난 하나를 막을 수 있는 천재다.

이선정이 배시시 웃었다.

"괜히 띄워주는 거 같지만 기분은 좋네요."

차우진은 식사 후에 화선바이오로 따라가 손하은도 만났다.

"할만합니까?"

손하은이 활짝 웃었다.

"여기 진짜 마음에 들어요. 이선정 실장님한테 배우는 것도 많아요."

"월급은 줄어들었을 텐데."

이선정이 씩 웃었다.

"괜찮아요. 돈이라면 회사 나올 때 한 몫 제대로 뜯어냈으니까요."

차우진이 그러라고 조언했다.

"그 돈으로 아파트도 샀어요. 투룸으로요."

전에는 옥탑방에서 혼자 살았다.

"잘했네요."

"이선정 박사님 집이랑 멀지도 않아요."

"어…."

"왜요?"

"그러면 우리 동네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을 것 같아서."

손하은이 손뼉을 쳤다.

"와. 다행이다."

"다행?"

"어쩐지 든든해서요."

차우진이 손하은을 보며 생각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 이번에는 블러드 크리스털을 막는 데 도움을 받았고.'

레드 크리스털를 만든 이반 소코로프는 죽였다. 그놈이 블러드 크리스털도 만들려 했다는 것도 확인했다.

'이제 블러드 크리스털이 세상에 나올 일은 없겠지.'

차우진은 지금까지 세 개의 멸망급 재난을 찾았다. 그중 두 개는 앞으로 관리만 하면 되는 단계까지 해결했다.

그런데 마그마 폭탄은 앞으로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 일은 정수찬에게 맡겼다.

'정수찬 박사님이 미국 정부에 휘둘리지 않고 잘해야 할 텐데.'

***

차우진이 드라마 촬영장을 방문했다.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는 꽤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 방영 중이다.

방송은 아직 남았지만 촬영은 이제 막바지였다.

오윤서는 최근에 죽을 수도 있는 질병이 발견돼 치료받았다. 그래서 제작진이 그녀의 촬영분량을 앞으로 당겨주었다. 덕분에 뉴욕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출연 분량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걸 오늘 촬영해야 한다.

조연인 정예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촬영은 이미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지만, 에필로그에 잠깐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차우진이 촬영장에 찾아가 오윤서를 만났다.

"정수찬 박사님은 요즘 바쁘시죠?"

오윤서가 한숨을 쉬었다.

"나 진짜 우진 씨한테 묻고 싶어요. 도대체 둘이서 뭘 했는데 우리 오빠가 이렇게 바빠졌어요? 요즘은 통화도 길게 못 해요."

"정 박사님은 미국 정부하고 일 하나 하느라 바쁜 겁니다. 자세한 건 정 박사님이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요."

"정부 프로젝트를 받아서 일하는 게 처음도 아니거든요? 근데 이번엔 유난히 바빠요. 역시 지난번에 그 테스트 때문이죠? 뉴욕 지하에서 유전이라도 발견됐대요?"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유전 대신에 마그마 폭탄을 찾았다.

"거기서 에너지를 뽑을 기술을 만들면, 유전은 아니지만 비슷한 효과는 있겠군요."

"거봐. 역시 유전 비슷한 거였어. 그런데 그런 기술이 있어요?"

"그건 정수찬 박사님이 이제부터 개발해야죠."

"아…. 설마 우진 씨가 나랑 오빠 연애에 고춧가루를 뿌린 건 아니죠?"

"두 분의 미래에는 이게 더 낫습니다. 진짜입니다."

오윤서가 죽고 정수찬은 은퇴하는 미래보다는 이게 훨씬 더 낫다.

차우진이 말했다.

"두 분 결혼하실 때 꼭 참석하겠습니다."

오윤서는 그 말만 들어도 좋아서 웃었다.

"꼭 초대할게요."

정예지가 촬영을 마치자마자 신나서 뛰어왔다.

"우진 오빠? 나 만나러 왔어?"

"오윤서 씨를…."

"어? 뭐지? 왜 윤서 언니가 저렇게 웃지?"

"예지 씨 만나는 김에 같이 만나려고 왔지."

"진짜지?"

오윤서가 설명했다.

"결혼식 하객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앗! 언니. 날짜 정한 거예요?"

"아니. 수찬 오빠가 너무 바빠져서 예상보다 더 늦어질 거 같아."

"그런데 왜 벌써 하객 이야기를…."

차우진이 말을 돌리려고 찬합을 들어 보였다.

"뭐 좀 만들어왔는데."

곽민지가 귀신같이 나타났다.

"앗! 맛있는 거다!"

차우진이 물었다.

"민지야. 너 왜 아직도 여기 있냐? 단역 아녔냐?"

"원래도 단역은 아니었어요. 짧게 나오지만 강렬한 느낌을 주는 보석 같은 조연이죠."

"밖에서 너 알아보는 사람 있냐?"

"학교 친구들?"

"그게 네 보석의 크기야. 손톱만큼이지."

"우이씨."

"그래서 왜 아직도 여기 있냐?"

곽민지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자랑했다.

"노래 하나 더 부르기로 해서 막판에 분량이 생겼어요."

차우진은 멸망 초기의 싱어송라이터 민지를 안다.

"아. 너니까 그럴 수 있겠다."

"저 이러다 막 가수 취급받는 거 아녜요?"

"넌 가수가 될 거야. 물론 네가 노력할 생각이 있어야겠지만."

"에이. 그건 너무 나갔다. 전 농담한 건데요."

"나도 농담한 거다."

곽민지가 찬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건 누가 먹을 거예요?"

정예지가 찬합 뚜껑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다.

"내 거야. 내가 다 먹을 거야."

"많아 보이는데요?"

"넌 내가 따로 떡튀순 사줄게. 그거 먹어."

"삶은 계란도…."

"메뉴판에 있는 거 다 사줄게."

"아싸아!"

차우진이 찬합을 보며 말했다.

"많이 만들어왔는데…."

정예지가 얼른 말했다.

"나 이제 많이 먹어도 돼. 난 오늘 촬영이 마지막이거든."

"그럼 이제 놀겠네."

"당연하지. 우진 오빠. 이번 주말에 뭐해?"

"바다낚시?"

"앗! 나도 따라가도 돼?"

"초대한 분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나 정예지야. 내가 간다는데 설마 거절하시겠어?"

***

성혜리가 결사반대했다.

"아빠. 안돼요. 우리 배에 왜 연예인을 태워요? 그것도 여자 연예인을!"

"사실 우리 배는 아니지. 빌린 건데. 그리고 차 이사가 아는 사람이라잖아."

"그러니까 더 안되죠!"

"스케줄이 겹쳐서, 안 그러면 이번에는 차 이사가 못 온다던데…."

성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잠시 고민했다.

'승산은? 아니, 최소 피해는? 어느 쪽이 이익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요트 위에서 배우 정예지를 얼굴이나 몸매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학살당한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안 돼요. 내가 그 꼴을 못 봐요. 그냥 우리도 다음 주로 연기해요."

"혜리야?"

"차 이사님이랑 우리끼리 미래를 의논하고 싶어서 그래요."

"응? 미래라니?"

"당연히 회사의 미래요. 진짜예요."

성기호가 입맛을 다시다가 목적지를 바꾸었다.

"그럼 이번 주말에는 차 이사랑 골프나 치러 갈까?"

성혜리는 정예지가 친선 골프대회에 나왔다는 게 생각났다. 골프웨어 대결에서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빠. 이번 주는 그냥 출근하세요. 바쁘시잖아요."

"아니. 네가 싫으면 너만 빠지면 되지 왜 나까지 출근을…."

"저는 라이프레인보다 큰 회사의 사장 딸이 되는 게 꿈이에요."

"어?"

"그러니까 아빠가 더 노력해야 해요."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나?"

145. 읍내

차우진이 통화를 잠깐 하고 나서 정예지에게 말했다.

"바다낚시는 연기됐어."

"어? 왜요?"

"초대한 분이 회사 일이 바빠져서 주말에도 출근하신대."

회사 일 때문이 아니라, 성혜리가 결사반대해서 취소됐다.

정예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바람을 부쳤다.

"와아. 믿어지지가 않네. 내가 간다고 했는데도 일이 더 중요하대요?"

"예지 씨 인기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듯."

"수영복도 새로 샀는데!"

"바다낚시라니까?"

"바다에 가는 거잖아요."

"해변이 아닌데?"

"달라요?"

"달라."

"웅…."

잠시 머뭇거리던 정예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우진 오빠는 주말에 뭐할 거에요?"

"시골에 가서 좀 걸으려고."

정예지가 얼른 말했다.

"앗! 트래킹 같은 거? 나도 데려가요! 아니, 데려가!"

"많이 걸어야 할 수도 있는데?"

"운동화 새로 사야겠다!"

"그냥 있는 거 신어. 발에 안 맞는 새 신을 신고 울퉁불퉁한 흙길을 걷다가 후회하지 말고."

"그러다 발 다치면 업어주나?"

"당연히 버리고 가겠지?"

"쳇."

***

주말에 차우진은 농촌을 찾아가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그런데 마을 안쪽이 아니라 주로 논이 있는 마을 바깥쪽을 걸었다.

정예지가 말했다.

"아니, 나는 어디 휴양림이나 아니면 경치 좋은 강변 산책로, 그것도 아니면 둘레길 같은 곳을 걷는 줄 알았는데…."

"시골이라고 했잖아."

"그 시골이 논 옆에 있는 시골길일 줄은 몰랐지."

"경치 좋잖아."

"우진 오빠는 도시를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맞아."

차우진은 현대 문명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도시를 좋아한다.

정예지가 물었다.

"진짜로 걷기만 하는 건 아니죠?"

"뭘 기대했으려나?"

"아니, 뭐, 강가에서 돌도 던지고, 시원한 그늘에서 바람도 쐬고."

차우진이 길가에 있는 식당을 가리켰다.

"그럼 밥 먹고 쉬었다 가자."

정예지의 표정이 당장 밝아졌다.

"와. 되게 오래된 가게다. 여기가 맛집인가? 흐흥. 우리 원래 목적지가 여기였구나?"

"맛집인지는 모르겠는데?"

"엥? 알아보고 온 거 아니에요?"

"내가 알아본 건 다른 거라서."

"뭘…."

차우진이 멀리 있는 논을 가리켰다.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린 대형 드론이 논 위를 날아다니며 농약을 뿌렸다.

정예지가 감탄했다.

"와. 요즘은 저렇게 약을 치는구나."

"논 하나에 약을 치는 시간이 얼마 안 걸릴 정도로 빠르지."

"저렇게 농약 치는 거 보러 온 거예요?"

"아니. 초대규모 식량 재난이 걱정이긴 한데, 그건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서."

"아! 그럼 저 드론에 관심이 있는 거구나? 저기에 AI가 들어가는 건가?"

"AI도 문제이긴 한데, 저 드론을 움직이는 건 AI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지."

"혼자 움직이는데?"

"지금은 사람이 미리 세팅한 대로 움직이는 거야."

"그렇구나. 그래서 여긴 왜 온 건데요?"

차우진이 드론이 농약을 뿌리는 논을 가리켰다.

"저 땅에 관심이 있어서."

정예지가 걱정했다.

"우진 오빠. 설마…. 귀농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현대 문명을 좋아하기 때문에 도시에서 살 거야."

"휴우. 다행이다."

"왜 한숨?"

"아니야! 밥이나 먹어요. 여기 뭐 맛있어요?"

"보자. 뭐가 맛있나."

두 사람은 그 식당에서 국수를 한 그릇씩 먹었다. 차우진이 먹은 건 곱빼기였다.

정예지가 감탄했다.

"여기 국수 진짜 맛있다! 비결이 뭘까? 토핑으로 자연에서 난 채소를 바로 써서 그런가?"

"많이 걸어서 그런 거야. 원래 배고프면 다 맛있어."

"사람이 로망이 없어. 로망이."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드론을 이용한 농약 살포 작업은 이미 끝나 있었다.

정예지가 감탄했다.

"농약 진짜 빠르게 친다."

차우진과 정예지는 점심을 먹고 나서 논 근처 시골길을 다시 걸었다.

한 시간쯤 걸은 후에 정예지가 물었다.

"설마 오늘 코스가 계속 걷기만 하는 건 아니죠?"

"난 좋은데."

"아니, 나도 나쁜 건 아닌데…."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속으로 꿍얼거렸다.

'이 곰탱이는 이럴 때 팔짱이라도 끼고 싶지 않나?'

시골길 맞은편에서 남자 셋이 걸어왔다. 셋 다 낮술을 마셔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그중에는 온몸에 문신을 한 놈도 있었다.

정예지가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았다. 마스크도 있고 선글라스도 있다.

'좋아. 못 알아보겠지. 그냥 쓱 지나가면 스캔들은 안 날 거야.'

상대는 생각이 달랐다.

몸에 복잡한 문신을 한 곽병식이 시비를 걸었다.

"이야아. 예쁘네?"

같이 걷던 두 놈도 같이 실실댔다.

"흐흐흐. 얼굴을 가렸는데도 예쁜 걸 알겠다."

"어이. 아가씨. 그 배 나온 놈은 버리고 우리랑 놀까?"

세 놈 다 술 냄새를 많이 풍겼다.

정예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말했다.

"시골에도 양아치가 있나 봐."

"이 동네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그냥 가요."

"그것도 나쁘지 않…."

곽병식이 손가락을 비볐다.

"어이. 골라봐. 아가씨랑 우리랑 데이트하던가, 아니면 배 나온 네놈이 돈 되는 거 다 내놓고 꺼지던가."

옆에 있던 놈은 한술 더 떴다. 그가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와 정예지의 팔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돈도 주고 남자만 꺼지면 더 좋…."

차우진이 그 팔을 잡아 비틀었다.

"으아악!"

"내가 지금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왜 너희 같은 놈들이 하필 이곳에 있을까? 이거 우연일까?"

"소, 손! 아아악!"

차우진이 상대를 툭 밀었다. 그놈이 손목을 붙들고 뒤로 넘어졌다. 그런 후에 허겁지겁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곽병식이 잭나이프를 꺼내며 화를 벌컥 냈다.

"너 이 새끼!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

"이제부터 알아내려고."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냐고!"

"그것도 알아내야지."

정예지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놈들이 일부러 우리를 노린 거예요?"

"잡아놓고 물어보면 알겠지."

"저놈이 칼을 들고 있잖아요."

"칼날이 작은데?"

"네? 아니, 그래도 위험…."

"누가?"

차우진이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곽병식은 당황한 얼굴로 칼을 휘둘렀다. 차우진을 정확히 노린 게 아니라 앞쪽으로 그냥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더 다가가면 칼에 맞는 위치였다.

곽병식이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이거 진짜 칼…."

차우진이 곽병식의 손을 툭 쳤다. 칼이 손에서 빠져나가 옆으로 날아갔다.

"어?"

차우진이 곽병식의 다리를 걷어찼다. 적이 앞으로 엎어졌다. 엎어지는 놈을 다시 걷어찼다.

곽병식의 몸이 옆으로 굴러갔다.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사지가 멀쩡한 마지막 놈이 당황해서 차우진을 향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동작이 너무 컸다.

"이 새끼!"

차우진이 몸을 슬쩍 젖히며 적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케엑!"

적은 허리가 옆으로 꺾이며 자빠졌다.

이제 두 놈이 바닥에 쓰러져 굴렀다. 처음에 손목이 꺾였던 놈만 서 있었다.

그놈은 겁을 먹고 뒤로 주춤거렸다.

"어? 어?"

정예지가 뒤에서 팔짱을 끼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 실장님. 죽이진 말아요."

정예지는 차우진이 적을 죽이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한 건 세 놈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다. 더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차우진을 김 실장이라고 불렀다.

정예지가 마치 카메라 앞에서처럼 연기했다.

"시체 처리하기 피곤해져요."

차우진이 그 연기를 받아주었다.

"아가씨. 목격자가 없으니까 그냥 묻으면 됩니다."

"땅은 누가 파게요? 나한테 삽 주지 말아요."

정예지의 차가운 목소리는 이런 일이 일상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세 놈을 노려보는 차우진의 눈빛에는 살기가 돌았다.

손목이 꺾인 놈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으아아!"

차우진이 바닥에 쓰러진 두 놈을 보았다.

"야. 네 친구 도망친다. 아니, 이제 친구가 아닌가?"

겁에 질린 곽병식이 사정했다.

"사, 살려주십쇼!"

"나한테 칼을 휘두른 놈이 할 말인가 싶은데."

"그, 그건 그냥 위협이었습니다!"

"하긴. 칼질이 어설프더라. 사람 좀 찔러본 놈은 그렇게 크게 휘두르지 않아."

차우진이 곽병식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옆구리 쪽으로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여기를 이런 식으로 푹 찌르지."

"히익!"

"아니면 여기나, 여기. 그럼 몸에 힘이 빠지거든? 그때 여기를 그어주면 확실하게 끝나지."

"히이익! 혀, 형님, 살려…."

"내가 왜 네 형님이냐?"

"주인님!"

"이 새끼가?"

"서, 선생님!"

"좀 낫네."

차우진이 일어나며 말했다.

"뭐하냐?"

"예? 아! 가도 됩…."

"꿇어."

"예!"

두 놈이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왜 우리를 노렸냐?"

곽병식이 얼른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용돈이나 좀 벌어볼까 하고…."

"그러니까 그 대상이 왜 우리였냐고?"

"저분께서 너무 예뻐 보이니까 어쩐지 화가 나서…."

"배 나온 놈이 예쁜 여자와 걷는 게 보기 싫었다?"

"아, 아닙니다!"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 게 있는데."

차우진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너희들 왜 여기에 있냐?"

"예?"

정예지가 물었다.

"김 실장님. 이 동네에 사는 놈들이 아닌가요?"

"아가씨. 이 동네에서 낮에 일하면 살이 더 타야 하는데, 선크림도 안 바른 놈들이 살이 별로 안 탔습니다. 한 놈도 아니고 셋 다. 밤에 활동하는 놈들이거나, 최소한 도시 놈들입니다."

"역시 김 실장님은 전문가라 그런지 그런 걸 놓치지 않는군요."

전문가라는 말에 곽병식의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이런 일의 전문가라면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킬러?'

"사, 살려…."

차우진이 곽병식에게 물었다.

"이 동네에서 뭘 노리는 거냐?"

"저, 저는 형님이 시키는 대로…."

"그놈이 우리를 노리라고 했냐?"

"아, 아닙니다!"

"그러면?"

"이 동네에 못 보던 사람이 보이면 시비를 걸라고…."

"아. 우리가 만만했구나."

"죄, 죄송합니다!"

"너 말이야. 조금 전하고 이야기가 바뀌었어."

"그, 그게 아니라, 용돈도 벌고 시비고 걸려고…."

"너한테 그 일을 시킨 놈은 지금 어디 있어?"

"예? 그게…."

"케엑!"

차우진이 곽병식을 걷어찼다.

"눈알 굴러간다. 산에 묻어줄까?"

"사, 살려주십쇼! 읍내에 있습니다!"

차우진이 주변의 논을 보았다.

차우진은 이 동네에 놀러 온 게 아니다. 멸망급 재난의 단서가 이 동네에 있다.

'이 지역에 문제가 생기는 건 몇 년 후라서, 지금은 쉬는 김에 현장을 미리 봐두려고 온 것뿐인데…. 이놈들이 왜 벌써 여기 있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이놈들을 조질 순 없다. 지금은 대낮이라 언제 목격자가 생길지 모른다.

게다가 정예지가 함께 있다. 연예인과 함께 이놈들을 조지면 신분 노출 위험이 커진다.

차우진이 선글라스를 쓴 채로 말했다.

"가라."

"예? 예!"

두 놈이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 정예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무서워서 혼났네."

"안 무서워하던데?"

"연기력으로 안 무서운 척한 거죠."

"역시 배우는 다르네."

정예지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우진 오빠도 연기 잘하던데? 막 그냥 무서운 사람인 척하고, 내 연기에 보조도 맞춰주고, 그리고 그 눈빛 그거 진짜 멋지던데."

"그건 연기가 아니라 실전이라고 하는 거야."

"그게 연기인데?"

"하고 싶은 말이?"

"우리 드라마에 출연…. 아. 촬영 다 끝나가지. 그래도 막판 까메오라도…."

"배우가 되려는 게 아닌데 얼굴만 어설프게 알려지면 내 평온한 일상은?"

정예지가 쉽게 납득했다.

"아. 그건 인정.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니까, 일단 내 매니저로 시작하는 건 어때요? 내가 잘해줄게."

"아직도 포기를 안 했네?"

"히히."

"산책은 그만하고 가서 밥이나 먹자."

"어머. 이게 산책이었어요? 난 철인경기인 줄 알았네. 너무 오래 걸어서."

"밥은 내가 사야겠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차라리 술은 어때요?"

"운전은?"

"서울 가서 술 마셔요. 어차피 읍내는 가면 안 되니까. 괜히 저놈들 패거리하고 마주칠라."

"어차피 오늘은 읍내에 안 가."

차우진이 읍내 방향을 보았다.

'그 전에 이 지역 정보를 수집하라고 해야 하니까.'

딥어스테크 조사팀과 SL 제약 분석팀은 그런 일을 공짜로 해준다.

146. 대사관

정예지가 차를 운전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 많이 걸었으니까 많이 먹고 마셔야지."

차우진이 물었다.

"스케줄은 이제 없나 보네?"

"당분간은 없어요. 나 이제 시간 많다는 말씀."

"난 이제 시간 없는데."

"어머! 맨날 노는 거 내가 다 아는데 왜 하필 이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좀 생겨서."

두 사람이 떠난 곳에 승합차가 도착했다. 그 차에서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를 든 놈들이 우르르 내렸다.

두목인 조기택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뭐야? 그 새끼 어디 있어?"

몸에 문신이 많은 곽병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여기에 있었는데…. 벌써 튀었나 봅니다."

"야 이 새끼야. 금방 안 갈 거 같다며? 느긋했다며!"

"부, 분명히 그랬는데…."

조기택이 곽병식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오. 이 멍청한 새끼. 넌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죄, 죄송합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얻어터지기나 하는 새끼."

"하지만 그 새끼 분위기가…."

"킬러 같았다고?"

"예. 분명히 느낌이…."

조기택이 이곳에서 같이 무릎을 꿇었던 다른 놈에게 물었다.

"야. 킬러 맞아?"

그놈은 차우진이 물어볼 때 두목이 읍내에 있다고 말한 게 생각났다. 그걸 덮으려고 얼른 말했다.

"제가 보기엔 지나가던 사람 같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멍청한 새끼들. 내가 이런 새끼들을 데리고 일을 하니까 일이 안 풀리지. 병식이 넌 앞으로 매일 읍내나 돌아다녀!"

***

정예지가 물었다.

"근데 그놈들 괜찮을까요?"

"셋 다 안 죽었는데?"

"아니, 죽긴 왜 죽어? 그거 말고, 막 보복하는 거 아닌가 해서."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보복을 어떻게 하지?"

"아. 그렇지. 그럼 안심하고 술 마셔도 되겠다. 차 매니저. 얼른 가자."

"매니저는 포기하라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오마카세 쏜다!"

"오늘 저녁만 매니저 해준다. 오늘만이다."

***

이튿날 아침에 차우진이 SL 제약에 출근했다.

차우진은 어제 그 마을에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어떤 곳인지 간단히 검색하긴 했다. 어제는 그곳을 그냥 둘러나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조사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차우진이 SL 제약 분석팀을 소집했다.

분석팀은 평소에는 각자 부서에서 일하다가 차우진이 소집하면 팀으로 모인다.

차우진이 지도를 화면에 띄워놓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농사에 사용하는 비료, 농약 같은 화학제품을 모두 알아야겠습니다. 만약 흔히 쓰이지 않는 제품을 사용하는 농가가 있다면, 제조 회사가 어떤 곳인지, 성분이 뭔지도 조사하세요."

성혜리가 물었다.

"차 이사님. 거기에 무슨 특이한 거라도 있나요?"

"모릅니다."

"네?"

"이제부터 알아봅시다. 아. 이거 비밀리에 조사해야 합니다. 소문 안 나게, 은밀히 움직입시다."

성혜리가 장담했다.

"우리가 원래 조용히 조사하는 거 전문인 팀이잖아요. 맡겨만 주세요."

***

차우진은 오후에는 딥어스테크에 출근해서 조사팀을 소집했다.

딥어스테크는 탐지기도 개발하지만, 원래 토목 분야의 매출이 더 큰 회사다.

차우진이 조사팀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 지역에 누가 건물을 짓거나 토목공사를 할 계획이 있는지 조사해야 합니다."

비서실 송미소가 손을 들었다.

"차 이사님. 거기에 개발 호재가 있는 건가요?"

"모릅니다."

"네?"

차우진은 왜 곽병식 패거리가 그 시골 마을에서 외지인에게 시비를 걸고 다녔는지 알아낼 생각이다.

화학약품에 관한 거라면 SL 제약이 더 잘 알겠지만, 토목공사가 예정되어 있거나 개발 호재가 있다면 딥어스테크 쪽에서 소문을 수집해야 한다.

"어쨌든 좋은 의견이군요. 하는 김에 이 지역에서 개발 예정인 사업이 있는지, 아니면 그러려고 논의되는 게 있는지 조사합시다. 은밀하게."

***

차우진은 두 개 팀에 각각 다른 분야의 조사를 맡겨놓았다. 은밀히 조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가 금방 나오진 않는다.

차우진이 회사를 나와 다시 이동하다가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려는데 미국에 있는 정수찬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차 이사님. 미국 정부에서 지질학 분야의 최정상급 전문가 몇 명에게 우리 데이터를 보여주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물론 비밀유지 각서를 받고요.

"정부 자체 분석팀이 확인한 걸 믿고 싶지 않나 보군요."

- 명분은 교차 검증이라고 하더군요.

"결과는요?"

- 뉴욕 바로 옆 지각 아래에 위험한 게 있다는 걸 미국 정부에서 인정했습니다. 이제 위기대응팀을 만들어 움직일 겁니다.

차우진이 조언했다.

"앞으로의 일은 정수찬 사장님이 주도하셔야 합니다. 필요하면 회사를 새로 만들어서라도요. 다른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 미국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 일을 조사하게 된 계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얼마 전에도 정수찬은 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었다.

- 차 이사님이 있다는 걸, 이제 미국 정부가 압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이는데 미국에서 차우진의 역할을 모를 리는 없다.

- 그래서… 곧 누가 차 이사님을 찾아갈 거라더군요.

"아. 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구나."

- 예?

"아까부터 누가 날 따라오길래, 난 또 양아치인가 했네."

- 아니, 이 사람들이. 나한테는 정중히 약속을 잡고 만날 거라더니….

"제가 아는 형이 그러는데, 그 동네가 원래 그렇다더군요. 이것도 예상했던 일입니다."

차우진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근처에 정차해 있는 SUV로 걸어갔다. 차 유리는 짙은 색으로 틴팅해서 차량 내부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꼬리가 붙으면 떼어내야 한다. 그래야 들키지 않아야 하는 일들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꼬리를 떼어내기 전에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는 있다. 바로 어제 시골에서 만난 양아치들일 가능성도 희박하게나마 있긴 있다.

차우진이 유리를 두드렸다.

유리가 스르르 내려갔다. 안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한 명은 동아시아계 사람이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유리가 이렇게 진하면 밤에 앞이 보이긴 합니까?"

남자가 인상을 썼다.

"그걸 확인하려고 부른 겁니까?"

"그건 아니고, 어디서 오셨나 해서."

"지나가던 길입니다."

"아닐 것 같은데. 내가 딥어스테크에서 나올 때부터 미행하던데."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래서 어디서 오셨나? 대답 잘해야 할 겁니다."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옆에 있는 백인과 눈빛을 주고받은 후에 명함을 꺼냈다.

"미국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몇만 원만 주면 찍을 수 있는 명함만 보고 미국 대사관 직원이란 걸 믿으면 내가 호구인데…."

"뭐요?"

차우진이 명함을 받았다.

"근데 나도 방금 연락받은 게 있으니까, 일단 믿어는 드릴게. 박기호 씨."

박기호가 인상을 썼다.

"이봐요. 미국 대사관이 우습습니까?"

"여긴 한국 땅인데?"

"미국과 한국은 동맹국입니다."

"그니까. 동맹국 국민을 미행했으면 사과부터 하셔야지."

"아니, 이건 미행이 아니라…."

"내가 딥어스테크에 왜 갔다 왔는지는 아시고?"

박기호가 동료와 다시 눈빛을 교환한 후에 말했다.

"차우진 씨가 딥어스테크의 이사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내 뒤를 밟아야 했는지는 아시나?"

"우리는 뒤를 밟은 게 아니라…."

"모르시나?"

"우리는 그냥 일상적인 정보 수집 차원에서…."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비밀 인가 등급이 낮나 보네."

박기호의 얼굴이 벌게졌다.

"뭐, 뭐요?"

"왜 나를 미행하는지도 모르는 거 보면 뻔하지. 어쨌든 들켰으니까 그만 가시지?"

"차우진 씨. 우리는 당신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았…."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 미행해도 된다? 그러면 내가 당신들을 미행하는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당신네 대사를 미행하든지."

"아니, 당신 지금 협박을…."

"아! 이게 협박이구나! 난 당신네는 미행해도 된다길래 나도 해도 되는 줄 알았지."

"이 사람이…."

동료가 박기호의 팔을 건드렸다.

"들켰으면 빠지는 게 맞아. 가자."

"끄응."

박기호가 차 유리를 올렸다.

차우진이 멀어지는 차를 보며 말했다.

"그냥 만나자고 연락했으면 미팅 정도는 했을 텐데, 저 사람들은 일을 왜 저렇게 할까?"

차우진이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들으셨죠?"

그는 정수찬과의 통화를 종료하지 않았다.

- 하, 하하. 차우진 씨의 목소리만 들렸지만,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짐작은 갑니다.

"정 사장님. 미국 정부에 저에 대해 뭐라고 하셨습니까?"

- 마그마를 찾아낸 신형 탐지기의 개발 총 책임자. 마그마 폭탄의 위험을 최초로 깨달은 사람. 마그마 발전소의 개념을 만든 사람.

"너무 많이 하셨네요. 그 정도는 아닌데."

- 사실만 말했습니다.

"그 정도면 미국이 나한테 신세 진 건데, 저 사람들은 왜 나를 미행할까요?"

- 제가 미국 정부에 항의하겠습니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기분도 나쁘다.

"어디서 정보가 누설되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시죠."

- 예?

"이번 일은 저런 일반 직원들이 알아도 되는 낮은 등급의 기밀이 아닐 테니까요. 어디서 정보가 샌 겁니다.

- 아. 그것도 항의하겠습니다. 이 사람들. 기밀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

박기호는 미국 대사관으로 돌아가면서 불평했다.

"건방진 새끼. 미국 대사관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감히 티껍게 굴어? 버릇없는 새끼.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을 거야. 내가 저 후진국 새끼 뒤 제대로 파본다."

동료가 물었다.

"어느 자원을 써서?"

"대사관 자원을 쓸 필요도 없어. 한국 경찰에 아는 사람이 있어. 조용히 알아봐 달라고 하면 처리해줄 거야."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뭐가 나오면 우리 쪽 정보하고 맞춰보자고."

박기호가 물었다.

"그런데 위에서는 왜 저놈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 거야?"

"난들 아냐? 시키니까 하는 거지."

두 사람은 일단 대사관으로 돌아가 자기 사무실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 다른 직원들도 많았다.

박기호가 아는 경찰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은 김 경위를 만나서 뒷조사를 시켜…."

갑자기 그 사무실에 대사관 고위 간부가 나타났다. 그의 뒤로 대사관을 지키는 해병대원 두 명도 따라왔다. 그들은 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직원들은 당황했다.

"무, 무슨 일 있는 거야?"

"분위기가 왜 저렇게 살벌하지?"

대사관 간부가 박기호에게 다가왔다.

"박기호?"

"예. 무슨 일로…."

"체포해."

"예?"

해병대원이 박기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아, 아니, 왜 저를…."

"스파이 혐의다."

"예?"

"취조실로 끌고 가!"

***

대사관 간부가 직접 박기호를 조사했다.

"박기호. 당신 어느 나라 스파이야? 북한? 중국? 아니면 러시아야?"

박기호가 소리쳤다.

"제가 왜 스파이라는 겁니까! 저는 미국인입니다! 시민권자라고요!"

"이 대사관에서 제일 흔한 게 시민권자야!"

"아니, 그…."

"누가 시켰어?"

"뭘 말입니까!"

"뭘 하려고 했어?"

"예?"

고위 간부가 화를 벌컥 냈다.

"무슨 짓을 했는데 국무부에서 나한테 쌍욕을 하냐고!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박기호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니, 저는…."

"당신이 국가 기밀 프로젝트에 접촉했다던데!"

"제가요? 제 보안 등급으론 그런 건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대사관 간부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맞아! 당신 보안 등급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야! 그런데도 접촉했잖아! 네 정체가 스파이니까!"

박기호는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엿 됐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늘 어디 갔다 왔어?"

"예? 외근…."

대사관 간부가 책상을 내리쳤다.

"똑바로 말해! 당신은 오늘 외근 일정이 없었어!"

"국무부에서 국장님이 저한테 따로 좀 알아보라고 한 일이…. 헉! 설마!"

대사관 간부의 눈이 번뜩였다.

"국장? 어느 부서 국장?"

"그, 그게…. 스미스 국장님이…."

"오케이. 스미스. 이름 하나는 나왔군. 스미스 국장이 뭘 시켰지?"

"그러니까 누굴 좀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미행을 포함해서요. 그게 누구냐면…."

"잠깐!"

"예?"

대사관 간부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들어도 되는 이름인지 아직 모르니까, 거기까지만 말해. 난 네 뒤에 스미스 국장이 있다고 보고한 후에, 내가 들어도 되는 이름인지 물어보고 올 테니까."

대사관 간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조실에는 박기호 혼자 앉아 있었다.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아니, 왜…. 나 도대체 누구를 건드린 거야?"

147. 대사관 II

정수찬이 뉴욕에서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 국무부에서 대사관 직원 일을 사과했습니다. 정보 공유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그 일이 여기저기 공유할 일은 아닐 텐데요."

- 아니죠. 공유하지 말아야 할 정보가 다른 파벌로 조금 넘어갔는데, 그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슬쩍 찔러봤나 봅니다.

"저에 대해서는요?"

- 넘어간 정보 중에 차 이사님이 프로젝트에 관여한 기술자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쪽 파벌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했나 봅니다.

"파벌 문제라…. 하긴. 당파싸움은 원래 미국이 잘하지요."

- 그런가요? 하, 하하. 아. 며칠 후에 차 이사님께 담당자가 정식으로 찾아갈 거라더군요. 사과하러요.

"사과는 핑계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겠죠."

- 그렇겠죠. 하, 하하.

***

정수찬은 며칠 후라고 했지만, 당장 이튿날 미국 대사관에서 사람이 차우진을 찾아왔다.

"라이언 최입니다. 오늘 미국 대사관에 부임했습니다."

어제 박기호를 조사한 대사관 간부는 다른 사람이다. 라이언 최는 오늘 한국에 도착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래서 절 보자고 한 이유가?"

"이번 사태를 제일 먼저 파악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일단, 어디까지 알고 오셨습니까?"

"미국에서는 정 박사님의 업무를 지원했습니다. 대사관에서 이번 일을 아는 사람은 저 혼자입니다."

"그럼 말해도 되겠군요. 마그마 폭탄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강원도에서 탐지기를 테스트하는데 하필 그때 지진이 일어나서 지각 아래 마그마를 탐지했으니까요."

그 지진이 그때 일어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차우진이 계속 설명했다.

"그 지진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우연입니다."

"그 우연 덕분에 이 상황을 알게 됐으니, 우리에게는 고마운 지진이군요."

"인명피해는 없었으니까요."

정예지가 절벽에서 추락해 죽을뻔했지만, 차우진이 구해줬으니 인명피해는 없다.

라이언 최가 질문했다.

"차우진 씨가 정수찬 박사님께 이번 일을 맡긴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최고니까?"

"예?"

"그 분야는 정수찬 박사님이 세계 최고입니다. 마침 아는 사이라서 조사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니까 떠넘긴 게 아니라, 이 일은 정수찬 박사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 맡긴 겁니다."

"마그마 발전소 계획도 제안하셨다면서요. 그걸 차우진 씨가 직접 주도하면 많은 돈을 벌 텐데, 그건 왜 넘기신 겁니까?"

차우진이 인상을 살짝 썼다.

"쯧. 나한테 따지는 기분이 드는데. 어제도 누가 미행하더니 이거 영…."

라이언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워낙 위중한 사안이라 확실히 하고 싶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난 그 발전소를 못 만듭니다. 그래서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예?"

"탐지 기술이나 감압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건 정수찬 박사님뿐입니다. 마그마 발전소는 감압 기술이 개발된 후에, 그걸 이용해서 물을 끓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발전소도 맡아야지요."

마그마 발전소는 전담 기업을 만들어서 개발하고 지어야 한다. 그 회사는 처음에는 정부 지원금으로 만들고, 나중에는 외부 투자를 받아야 한다.

차우진이 그 회사를 차지하려면 돈 냄새를 맡고 들어온 온갖 놈들과 싸워야 한다.

발전소가 제일 중요한 목표라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발전소는 목표가 아니다. 제일 중요하지도 않았다.

차우진은 다른 멸망급 재난을 해결해야 한다. 발전소에 발목을 잡힐 수는 없다.

라이언 최가 물었다.

"음…. 기술적인 부분에 제안을 많이 하셨다고…."

"나에 대해 대충 알아보고 오셨을 텐데, 나한테 기술력이 있어 보이던가요?"

라이언 최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 전기 전문가인 건 알고 있습니다."

"난 땅속이 아니라 전기가 전문입니다. 그러니까 난 그냥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조언할 뿐입니다. 그걸 현실로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정수찬 박사님 같은 과학자가 해야지요."

"그야 그렇지만…. 그럼 전문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직관적인 조언이 가능한 겁니까?"

"전기 기술자인 줄 알았던 내가 눈 떠보니 지질학 천재?"

"예?"

"농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따져 물을 게 아니라, 먼저 고맙다고 해야 할 텐데?"

"그게 무슨…."

"우리가 그거 못 찾았으면 10년 후에 뉴욕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라이언 최가 얼른 인사했다.

"아! 그렇죠. 고맙습니다. 이 일이 워낙 기밀이라 공식적으로 보상해드리진 못하지만요."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라이언 최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수찬 박사님은 마그마에너지에 차우진 씨를 꼭 이사로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는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득에 도움을 주시면…."

"아. 그거."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미국 정부에서 반대하면 난 이번 일에서 손 뗄 겁니다. 앞으로의 일은 알아서 하겠죠."

라이언 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차우진과 협상하려고 찾아왔다.

'미국으로 데려가서 그 일만 전담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막상 대화해보니 차우진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귀찮은 일을 다 떠넘기려는 사람처럼 보여.'

차우진이 말했다.

"인사나 하러 오신 거면, 이쯤 일어날까요?"

"음….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뭐. 그러시죠. 저도 부탁할 게 있으면 전화할 테니까."

"예?"

차우진이 씩 웃었다.

"뉴욕이 날아갈 뻔한 걸 알려줬는데, 설마 미국 정부가 입을 닦지는 않겠지."

"아. 농담하시는…."

"진담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

차우진이 최근에 방문한 마을 이름은 신당읍이다.

딥어스테크 비서실 송미소가 보고했다.

"신당읍 인근에 도로가 뚫린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곳에 산업단지가 들어온다는 소문도 있고요."

"근거는 있는 겁니까?"

"아니요. 구체적인 근거는 없어요. 누군가 소문을 흘리는 것일 수도 있고요."

"땅 투기 사기?"

"가능하죠. 전문적인 투기꾼이 전국 각 지역을 돌면서 그런 수법을 쓰기도 하니까요."

"아니면, 땅을 사려는 놈이 활발하게 움직이니까 그 이유를 찾다가 그런 소문이 생기는 건가?"

"차 이사님. 그 지역에서 혹시 무슨 문제라도…."

"문제가 생기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아니지. 지금은 아니어야 하는데…."

멸망급 식량 위기와 관련된 것이 그곳에서 작물 재배에 사용될 예정이다. 그 지역은 최초 테스트 지역 중 하나다.

그런데 그건 몇 년 후의 이야기다.

"미리 좀 점검하려고 그럽니다. 좀 더 알아봐 주시죠. 은밀하게."

"알겠습니다."

***

SL 제약 분석팀은 쓸만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다.

성혜리가 분해서 씩씩댔다.

"딥어스테크는 알아낸 게 있다는 거죠?"

차우진이 말했다.

"거긴 전문분야가 다르니까. 토지 개발에 관련된 소문을 좀 들었나 봅니다."

"기다려봐요. 우리도 꼭 찾아낼 테니까. 아. 우리가 맡은 화학 쪽으로도 뭔가 있는 거 맞죠?"

"모릅니다. 있는지 확인하려고 분석팀을 움직인 거니까."

"뭐가 있다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낼 거예요."

***

차우진이 신당읍을 방문했다. 며칠 전에 문신 양아치 곽병식이 말한 읍내가 그곳이었다.

읍내에는 주로 단층 건물이나 2층 건물이 있었다. 창고도 곳곳에 보였다.

식당은 여러 곳이 있는데, 그중에는 치맥이 가능한 곳도 있었다. 프렌차이즈는 아니고 동네 치킨집이었다.

차우진이 그곳에서 옛날 방식으로 튀긴 치킨을 먹었다.

"옛날 생각 나는 맛이다."

멸망한 세계에도 이런 걸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

차우진이 기름에 튀긴 닭을 먹으며 말했다.

"창수 형. 거 다리 두 개는 너무한 거 아니야?"

"봤냐?"

"냉큼 내려놓지?"

박창수가 들고 있던 닭다리를 덥석 물었다.

"야. 우리 사이에 다리 하나 가지고 그러기 있냐?"

"하나 가지고는 안 그러지. 그런데 형이 두 개 다 먹었다고!"

그들에게 치킨을 만들어준 김세나가 말했다.

"우진 아저씨가 날개 두 개 다 먹어요."

"아니, 세나야. 날개와 다리 중에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다리 아냐? 이러면 교환비가 안 맞는데!"

"어디서 닭 한 마리 잡아오면 또 만들어줄게요."

"식용유는?"

치킨을 만들려면 닭과 식용유, 소금이 필요하다.

차우진이 닭 대신에 꿩이나 다른 새를 잡아올 수 있다. 하지만 식용유를 튀김에 쓰는 건 대단히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그 귀한 식용유로 치킨을 만들었다. 물론 식용유는 아껴야 해서 이 치킨을 만들 때도 최소한으로 사용했다.

그런데도 맛은 옛날 치킨과 비슷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이 정도면 고급 요리다.

이런 요리에 식용유를 쓸 수 있는 건 김세나의 스킬 덕분이다.

"기름 뽑을 재료도 아저씨가 구해줘야죠. 기름을 짜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박창수가 다리 하나를 정성을 다해 뜯어먹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세나가 쥐어짜는 거 하나는 잘하지."

"형네 세나 아니라고. 그리고 압축 스킬을 가진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

차우진이 치킨을 먹다가 말했다.

"아. 생각났다."

멸망한 세계의 김세나는 도구를 사용해 물체를 압축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스킬은 적용 범위가 좁고 압축 시간도 오래 걸렸다. 게다가 손이 대상에 접촉했을 때만 쓸 수 있는 근접 스킬이다. 그래서 전투 활용도는 떨어졌다.

대신에 그 스킬로 식물을 쥐어짜면 기름을 뽑아낼 수 있었다.

김세나는 그 생산계 스킬로 식용으로 쓰기엔 적당하지 않은 씨앗이나 식물에서 기름을 만들어냈다.

"세나랑 김세린이 좀 닮은 느낌인데?"

뉴욕에서 귀국하던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신인 아이돌 김세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서 금방 말을 편하게 했다.

김세린이 멸망한 세계의 세나와 닮았다는 게 이제야 생각났다.

"친척인가?"

알 수 없다. 김세린과는 연락처조차 교환하지 않았다.

김세린은 올해 데뷔한 걸그룹 루나페어리의 멤버다. 이대로 놔두면 루나페어리는 표절곡을 부르다가 망한다.

"근데 어느 부분을 어떻게 표절했는지 알아야 알려주지. 난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데. 그게 이번 노래가 아닐 수도 있고."

그것도 박창수가 말해줘서 아는 것뿐이다.

치킨을 먹으면서 그 생각을 하다가 문신한 놈을 발견했다.

며칠 전에 시비를 걸길래 쫓아낸 양아치가 치킨집 앞을 지나갔다.

"찾았다."

***

곽병식이 읍내를 어슬렁거렸다.

"술 땡긴다."

평소라면 치킨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셔도 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는 며칠 전 일로 두목인 조기택에게 욕도 먹고 맞기도 했다. 이럴 때 치킨집에서 술을 마시다 들키면 또 맞는다.

"동네가 작으니까 숨어서 술 마시기도 어렵잖아."

곽병식이 문신이 새겨진 팔을 긁으며 걷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가 쌀가게에 들어갔다. 가게 주인 김기환이 곽병식을 보고 인상을 썼다.

"뭐야? 또 온 거야?"

"어이. 사장님. 우리가 그 땅 사준다니까? 그만 고집부리고 팔지?"

"내 논에서 나온 쌀은 내가 팔아야 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 논은 절대로 안 파니까 그냥 가!"

곽병식이 문신을 보여주며 말했다.

"자꾸 이러면 재미없어."

"나 경찰에 아는 사람 있다. 너야말로 이러면 재미없다."

곽병식이 쌀이 담긴 통을 엎을 듯이 붙잡으며 말했다.

"확 그냥 다 엎어버릴까? 아니면 여기 불이라도 질러? 쌀가게가 없어지면 논도 필요 없겠네."

"그거 엎어봐. 바로 신고 때릴 테니까."

곽병식은 통을 엎지는 못하고 손을 털었다.

"잘 생각해보쇼. 이러다 당신 안녕하지 못해져."

곽병식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게를 나갔다.

쌀집 주인 김기환이 욕을 했다.

"양아치 새끼가 어디서 협박질이야?"

차우진은 곽병식이 뭘 하는지 구경했다. 곽병식은 다른 가게 몇 곳도 돌아다니며 비슷한 시비를 걸었다.

차우진이 그걸 보며 말했다.

"신고해도 처벌받지 않을 정도만 협박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이라…. 인상이 더럽고 문신도 있으니까 효과는 좋겠다."

곽병식이 그러고 돌아다니는데 읍내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다.

며칠 전에 두들겨 패서 쫓아낸 놈은 두목이 읍내에 있다고 했다.

"저놈이 거기로 가겠지."

148. 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