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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압구정 로데오 (1).

1.

여의도.

김지운과 강현중이 사라진 그곳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분주함의 중심에는 고강수가 있었다.

"추가 작업이다. 백화점 주변 바리케이트를 보강한다."

"IFC몰 지하 주차장에서 석유 노획에 나선다. 헌터 5명 모집한다."

"여의도 콘래드 호텔방 수색을 기획할 거다. 콘래드 호텔에 아는 이들을 모아라."

그는 쉴 새 없이 지령을 내렸다.

물론 필요한 지령이었다.

여의도에 있는 물자는 제한적인 상황이었고, 그나마 있는 물자 수급도 언제 불가능해질지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는 잡념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인간이란 몸이 힘들면 다른 건 생각이 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지금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는 건 정신 건강에 아주 안 좋았다.

뭐든 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실제로 효과는 분명 있었다.

김지운의 부재 속에서도 여의도 생존자들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바쁜 나날을 보내는 탓이었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바쁜 건 그였다.

타닥타닥!

이영후, 그는 정말 하루 내내 키보드를 두드리며 어비스넷의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정보를 저장하는 건 어려울 게 없지만, 그중 쓸만한 정보를 분류하는 건 별개의 일.

특히 프로그램은 정보의 진위 유무를 구분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이영후란 인간이 필터링을 해야 했다.

'아, 노동력이 필요해. 개처럼 일해 줄 노동력이.'

이 대목에서 이영후는 이제 진지하게 자신 말고 이 업무를 대신해줄 인력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보의 보안도 보안이지만,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아야 했으니까.

또한 이런 작업을 하는 건 또 나름 해본 사람이 해야 했다. 그게 아니면 오히려 엉망이 됐다.

'대학원생 같은 노동력이. 짜고 짜내도 나오는 그런 고급 노동력이.'

그렇기에 나오는 건 푸념뿐.

띵!

그때 이영후의 노트북 하나가 알림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이영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1티어짜리가?'

여러 노트북 중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가진 정보만 검색해서 알려주는 노트북이었으니까.

해서 이영후가 내용을 확인했고, 그 순간 그는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글이었다.

[아이템 뿌립니다.]

제목 자체는 솔직히 이제 어비스넷에 심심하면 올라올 만큼 흔했다. 이제는 욕지거리 댓글조차 달리지 않을 만큼, 또라이에게는 무플이 답이다! 라는 온라인 주민들의 규칙이 적용될 만큼.

[작성자 : 최강레이븐스]

그러나 중요한 건 작성자였고, 해서 이영후는 바로 내용에 집중했다.

[이번에 또 아이템 뿌린다. 정확히는 뿌리는 게 아니라 운송 중에 아이템을 잃어버렸다.

그냥 두면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 능력 되는 헌터가 있으면 가져다 그냥 쓰길 바란다.

안다. 내가 병신짓을 했다는 거. 그래서 지금 이 글 쓰면서도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누군가 가져가서 몬스터 한 마리도 죽이는데 쓰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글 올린다.

아이템은 범닭의 알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장소는 압구정 로데오거리로 추측된다.]

그 내용을 보는 순간 이영후의 표정이 굳었다.

아이템이 뭔지 알아서 굳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범닭이 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굳은 이유는 하나였다.

'대장한테 알려야 한다!'

이걸 빠르게 전달해야 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지금 관악산에 있는 김지운에게 정보를 전달할 방법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없는 건 아니었다.

'술은맥캘란이라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이가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이영후는 바로 움직였다.

지금 이건 속도가 생명이었다.

만약 정말 중요한 아이템이라면, 1분, 1초라도 더 빨리 움직여야 했으니까.

그때였다.

이영후가 막 쪽지를 보내려고 하는 순간, 이영후는 자신의 쪽지함에 쪽지가 도착한 걸 볼 수 있었다.

'누구지? 술은맥캘란인가?'

이 상황에서 민트초코케이크란 닉네임의 존재를 아는 것은 술은맥캘란 뿐.

그래서였다.

'어?'

이영후의 표정이 굳은 것은.

'민트생크림케이크?'

쪽지를 보낸 이는 술은맥캘란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미친 새끼지? 이름을 지어도 이딴 병신 같은 걸 짓는 거지?'

그 사실에 당혹감과 분노를 느끼는 이영후.

그러나 그 분노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이딴 걸 상상하는 놈은 대체 어떤 놈인지 얼굴 한 번 보고 싶······.'

봤으니까.

[나다, 이영후. 관악산에서 쪽지를 보낸다.]

'······대장이네.'

김지운, 그가 쪽지를 보냈다.

'가만, 어떻게?'

그 사실에 이영후는 일단 놀랐다.

'설마 서울대에 접시가? 그래, 있을 수도 있어. 거기 위성통신 연구하는 곳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

그러나 이내 한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냈다.

그 예상대로였다.

[서울대에 접시가 있어서 연락을 하게 됐다. 그래도 신분증명이 필요할 수 있으니 질문을 건네라.]

이어진 쪽지에 이영후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티라미수케이크랑 딸기케이크 중 뭐가 좋습니까?]

그러다 대답이 왔다.

[둘 다.]

김지운다운 대답이.

[대장, 지금 글 하나 보냅니다. 최강레이븐스가 올린 글입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영후가 지금 확인한 글을 보냈고, 그러자 곧바로 대답이 왔다.

[지금 당장 가겠다.]

그 대답에 이영후가 빠르게 쪽지를 보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준비하겠습니다. 얼마나 걸리십니까?]

그 질문에 답변이 왔다.

[30분.]

2.

김지운, 그가 30분 후에 온다고 했을 때 이영후는 생각했다.

'잘못 본 건가?'

하지만 3시간 후와 30분 후를 착각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착각이 아니었다.

'어떻게 관악산에서?'

물론 그럼에도 이영후는 놀랐다.

사실 믿지 않았다.

"이영후."

그런 이영후 앞에 김지운은 정확히 29분 33초가 지났을 때 등장했다.

"어, 어, 어!"

아포칼립스 세상이 되기 전 차를 타도 30분은 걸릴 거리를 두 다리로 주파한 김지운의 모습에 이영후는 말문을 잊은 모습을 보였다.

"이영후, 아직 글 남아있나?"

"예?"

그러나 김지운은 그런 이영후가 정신을 차릴 시간을 줄 수 없었다.

"이영후."

"아, 네!"

싸늘한 그 목소리에 비로소 이영후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가 노트북을 보여주며 말했다.

"예, 아직 글은 남아있습니다."

"조회수와 댓글은?"

"조회수는 제법 높습니다. 약 1200회 정도 됩니다. 반면 댓글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윽고 김지운도 봤다.

- ㅇㅇ : 또또 이 새끼 허언증 도졌네.

- 121212 : 빨리 게시판에 관리자가 생겨야 해. 이런 인간들은 밴을 해야 한다고

- ㅁㄴㅇ : 이거 믿는 흑우 없제?

그런 글의 댓글들은 대부분 닉네임이 없는 유저들이었고, 달리는 댓글 내용들은 다를 혀를 차거나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밖에 없었다.

사실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어비스넷 한국 게시판에서 최강레이븐스가 올린 글은 두 개였고, 그중 하나는 올리자마자 삭제했던 바.

그 글을 올린 후에 거기 나온 아이템을 얻은 이가 인증을 하는 일도 없었다.

- qwe : 범닭은 또 뭐야? 어디서 또 이상한 거 지어왔네.

- ㅇㅇ : 딱 봐도 대전 레이븐스 팬 같은데 치킨 놈들답게 이름을 지어도 치킨 냄새 나게 짓네. 올해도 꼴지할 듯.

ㄴ 123 : 그랬으면 좋겠네. 씨발.

그리고 이번에 언급한 범닭이란 표현은 솔직히 몬스터라기에는 촌스러운 수준을 넘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지어낸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영후도 마찬가지였다.

"범닭이라니, 조금 웃긴 이름이긴 하네요."

반면 김지운은 달랐다.

"직접 보면 웃음기는 사라질 거다."

"예?"

"굉장히 위험한 몬스터다."

"보신 적이 있나요?"

"딱 한 번."

그는 범닭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떤 몬스터인가요?"

"키가 한 3미터에 이르는 닭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닭이 아니라 싸움닭하고 비슷하다. 그리고 황색 털에 검은 줄무늬가 그려져 있지. 마치 호랑이처럼."

"아, 그래서 범닭이군요."

그 모습을 상상하던 이영후는 놀랐다. 그뿐이었다. 공포에 몸을 떨거나 그런 건 없었다.

아무리 무섭다고 하더라도 닭은 닭이었으니까.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가소로운 동물이었으니까.

"옐로우 등급의 보스 몬스터다."

"예?"

그러나 그 설명을 듣는 순간은 달라졌다.

김지운이 잡았던 호른 오크가 레드 클래스 보스 몬스터였는데, 그보다 두 단계가 더 강하다?

그건 사실상 재앙과 같았다.

"그런 범닭의 알이라니, 대체 뭡니까?"

"진짜 알은 아니다."

하지만 김지운이 아는 범닭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게 아니었다.

"범닭의 목구멍 안에 있는 돌멩이다. 그 생김새가 알처럼 생겨서 범닭의 알이라고 한다."

범닭에게는 매우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 범닭의 알은 자기보다 강한 몬스터가 등장하면 진동한다."

"진동이요?"

"지진이 난 것처럼. 강하면 강할수록 그 진동이 강해진다."

자신보다 강한 몬스터를 본능적으로 감별할 수 있다는 것.

"지랄 맞은 능력이지."

그래서 골치 아팠다.

"그 능력 덕분에 놈은 자기보다 약한 것 앞에만 모습을 드러내니까."

일단 체급에서 지고 시작하는 셈이었으니까.

반대로 범닭의 알을 얻기만 하면, 그러면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당장 이영후가 기겁했다.

"그거 말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헌터들 눈이 돌아갈 텐데요?"

근처에 강한 몬스터의 존재를 알려준다, 이것보다 어비스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 과연 있을까?

물론 범닭의 알이 만능이란 건 아니었다.

일단 범닭의 알은 그 능력 자체에 쿨타임이 존재했다.

진동하는 건 하루에 한 번!

또한 위험을 알려줄 뿐, 그 위험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비스의 헌터들에게는 범닭의 알이 가진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김지운 역시 범닭의 알 덕분에 목숨을 몇 번이나 구했다.

귀한 물건이었다.

그래서였다.

'이게 어떻게 최강레이븐스 손에 들어간 거지?'

김지운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은.

범닭의 알은 구하기 힘든 아이템으로, 제아무리 삼족오 클랜의 큰 후원자라고 하더라도 기념품으로 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물며 이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운송 중에 잃어버릴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사실 김지운이 보기에 글만 보면 이건 사기였고, 구라였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강레이븐스, 내가 아는 회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을 쓴 작성자가 김지운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의도가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최강레이븐스가 이런 글을 올린 것은 그저 술이나 약에 취해서 올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랬다면 이미 글을 내렸을 터.

그쯤이었다.

쪽지가 왔다.

[술은맥캘란 : 야, 타이거치킨킬러.]

이수연이 쪽지를 보냈다.

[술은맥캘란 : 너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3.

김지운, 그는 이수연이 쪽지를 보내는 순간 망설이지 않았다.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마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일단 김지운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고, 골렘을 가진 마녀는 누구보다 정보 습득에 유능한 헌터였다.

'마녀의 거처를 파악해서 나쁠 건 없다.'

또한 마녀의 위치를 아는 건 앞으로 그녀와의 관계에 있어서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물론 김지운은 이것을 순수한 호의로 여기지 않았다.

이건 제스처였다.

'마녀가 내민 손길을 마다할 이유도 없고.'

이제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게 좋겠다, 라는 제스처.

사실상 동맹관계를 맺자는 의미였다.

더불어 김지운은 마녀가 이렇게 손을 내밀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마녀와는 은퇴하기 전에도 나쁘지 않은 관계였으며, 무엇보다 현재 마녀는 혼자였다.

이건 꽤 중요한 부분이었다.

화려한 장난꾼은 혼자서 움직이는데 가장 불리한 직업이었다.

화려한 장난꾼들의 명줄을 대개 바람 앞의 등불로 표현하고는 했으니까.

괜히 마나 실드에 마녀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게 아니었다.

여기에 또 하나, 마녀는 헌터들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녀의 성격이 나쁘다, 그녀의 술주정이 너무 심하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비스에서 엄청난 실력자였고, 그래서 그 누구도 쉽사리 범접할 수 없었다.

더불어 그녀 역시 친근하게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사교성 넘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그녀 입장에서는 김지운이 동아줄처럼 보였을 터.

'그래도 설마 흑석동일 줄이야.'

그러나 그런 그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여의도에서 가까운 흑석동에 있는 것은 김지운도 예상 못한 바였다.

그녀의 재력, 능력이라면 압구정 혹은 한남동에 살고 있었으리라 생각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청렴한 삶을 살고자 값비싼 부동산에 과한 지출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잘 왔어.]

애초에 그녀가 있는 곳은 모두가 생각하는 아파트가 아니었다.

[내 건물에.]

흑석동에 위치한 5층짜리 빌딩, 제법 큰 그 빌딩을 거주지로 개조한 것이었다.

가격으로 따지면 대한민국에서 비싸다 하는 아파트들보다 몇 개는 비싼 곳이었다.

더불어 그 건물 안에 투자한 비용은 더 엄청났다.

[일단 들어와. 지하 1층에 방공호가 있으니까.]

특히 그녀는 지하 1층을 거대한 방공호로 개조한 상태였다.

핵폭발에도 대비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공기여과 기능은 잘 돌아가고 있고.]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공기여과장치가 있었다.

사실 여기서 김지운은 작은 의문 하나를 품었다.

돈 많은 사람이 방공호를 만드는 건 사실 꽤 당연한 일이었다. 돈이 넘치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수연은 예외였다.

핵폭탄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어비스에서 헌터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딸칵!

"숙녀의 집에 온 걸 환영해. 여기 온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녀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 김지운은 알았다.

"술창고였군."

"하하."

그녀가 이 건물을 개조한 이유를.

"그냥 취미 생활 겸 술창고 하나 만들고, 기왕 만드는 거 돈 걱정 없이 만들라고 하니까 이 새끼들이 내 돈을 제대로 빨아 먹으려고 했는지 방공호를 만들었더라고. 그게 설마 내 목숨을 구해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인생 참 신기해, 안 그래?"

이어진 설명에 김지운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전기는 가솔린으로 돌아가는 건가?"

"그럼 설마 원자력으로 돌아가겠어?"

"용케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군."

그쯤에서 김지운은 그녀가 적잖은 아이템을 가진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녀가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술창고에 어비스의 아이템을, 그것도 전설급 아이템을 보관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어, 그게 그러니까 실수였어."

"실수?"

"원래 아이템은 내가 움직일 때 같이 가지고 움직이거든. 당연하잖아? 그 중요한 걸 몸에서 떼는 게 미친년이지. 그리고 내가 술에 취해도 아이템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거든. 그날도 연말 맞이해서 좀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한 잔 더하고 싶어서 여기 왔거든. 실수였지."

그 설명에 김지운인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술 좋아하는 게 큰 문제는 아니잖아? 그러는 너는 케이크 때문에 별 지랄 다 했잖아? 아직도 기억나네. 진짜 다 죽을지도 몰라서 유언 남기고 있는데 거기서 집에 가서 딸기케이크 먹을지, 치즈 케이크 먹을지 고민하던 거. 웃긴 건 둘 다 먹었지."

그 이야기에 김지운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른 이유는?"

"설마 진짜 라면 대접하려고 불렀겠어? 범닭의 알 때문에 불렀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

그 질문에 김지운은 정보를 풀었다.

"난 가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강레이븐스 덕분에 아이템을 두 개나 얻었다."

"두 개?"

"모루뱀의 눈과 헥타르 거미줄."

"진짜? 아니, 대체 누군데 그걸 가지고 있어?"

"진화 그룹 회장 혹은 그 관계자로 추측하고 있다."

"아! 삼족오 스폰서!"

이어진 설명에 이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정도 되는 양반이 그냥 심심해서 뻘글을 썼을 것 같지는 않네. 하지만 그래도 범닭의 알이잖아? 그냥 툭, 언급될 만한 물건이 아니야."

"그래서 마녀,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 가야지. 그래서 부른 거야. 안 갈 생각이면 뭐하러 널 부르겠어? 술 한 잔 하고 있지."

이어진 설명에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러모로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가고자 한다는 것.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지금 압구정 로데오 거리, 레드존이야."

"몬스터는?"

"미노타우로스 무리가 점령하고 있어."

이어진 설명에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노타우로스는 본래 무리를 이루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만약 무리를 모은다면 그것을 통솔하는 강력한 개체, 그러니까 보스 몬스터가 있다는 의미.

여기서 김지운은 답을 내놓았다.

"레드불이 있군."

"역시 킬러답네."

이수연이 움직이고자 하는 이유를.

"그래, 맞아. 레드불이 있어.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레드불이라면 범닭의 알이 진짜든 아니든 가야 해."

레드불.

표현답게 놈은 붉은색 황소였다.

덩치가 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붉은색 황소!

그리고 머리에 창과 같은 2미터짜리 뿔을 가지고 있었고, 그 뿔로 마주한 모든 적을 부숴버리는 몬스터였다.

매우 강력한 몬스터였다.

그러나 그런 헌터들에게는 그런 특징보다 다른 특징으로 매우 유명한 놈이었다

"놈의 뿔은 호흐프 열매랑 같은 기능이 있으니까."

레드불의 뿔에는 매우 강력한 각성 효과가 있고, 그런 레드불의 뿔을 먹으면 어비스의 안개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복용량에 따라 버틸 수 있는 시간도 달라졌고, 화이트존의 경우에는 최대 12시간까지 효과가 유지됐다.

범닭의 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잡을 만한 가치가 넘치는 몬스터였다.

김지운도 인정했다.

'호흐프 열매도 떨어져간다.'

더군다나 지금 수중에 들어온 호흐프 열매의 개수는 그리 많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의 전쟁을 시작하면 어떤 의미에서 범닭의 알보다는 레드불의 뿔이 더 필요했다.

지금 이 사실을 말해주는 것도 이해가 됐다.

"원래는 좀 더 상황이 나아지면 잡으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됐잖아?"

이번 최강레이븐스의 글을 보고 헌터들이 압구정 로데오에 몰릴 터.

그리고 그들은 범닭의 알의 진위 유무를 떠나 보스 몬스터가 레드불이란 걸 아는 순간 사냥에 나설 터였다.

"범닭의 알을 아는 놈들이면 보통 놈들 일 리 없고."

더불어 김지운이 은퇴할 때를 기점으로 범닭의 알을 아는 헌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시 기준으로 별이 최소 두 개 이상은 되는 헌터들 정도만이 알고 있는 정도.

즉, 이번에 모이는 헌터들도 별을 가지고 있거나 최소 별을 가질 만한 실력일 가능성이 컸다.

불장난꾼인 이수연 혼자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게 그녀가 김지운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이유였다.

"자, 그래서 결정은?"

"좋다."

그리고 김지운 역시 여기서는 사냥에 나설 생각이었다.

안 나설 이유가 없었다.

레드불의 뿔만 하더라도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을뿐더러, 정말 범닭의 알이 있다면 그건 대박이니까.

또한 파트너가 불의 마녀라면 나쁠 건 전혀 있었다.

결국 남은 건 하나였다.

"레드불의 뿔은 2개. 길이는 4미터."

분배.

"그냥 뿔 하나씩 가지자고. 조금 더 긴 쪽 너한테 줄게."

그리고 여기서 김지운은 분명하게 말했다.

"3대1이다."

"응? 뭐라고?"

"4미터 기준으로 내가 3미터를 가져간다."

그 말에 이수연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 술 취했어?"

진지한 그 물음에 김지운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기여도에 따라 아이템을 배분한다, 그게 어비스의 규칙이다."

"아니, 그러니까 술 취했냐고? 응? 네가 나보다 기여도가 3배인 게 말이 되냐고? 네가 나보다 3배 더 강한 게 말이 되냐고?"

"된다."

그 말과 함께 김지운이 왼손을 보여줬고, 그 손에 껴진 검은 것을 보는 순간 이수연이 기겁하며 말했다.

"어? 너 씨발 이거 어디서 났어?"

"그래서 대답은?"

이어진 물음에 이수연이 짧게 탄식을 토했다.

"콜이다, 씨발놈아."

그 순간 김지운이 품에서 가지고 온 걸 꺼냈고, 그것을 본 이수연이 눈빛을 바꾸었다.

"뭐야? 어? 이거?"

코볼트 주술사로부터 얻은 지팡이였고, 그것을 본 이수연이 눈빛을 반짝였다.

"이야, 역시 센스가 있네. 여자 집 오는데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구나. 고마워, 잘 쓸게."

그녀에게는 매우 좋은 아이템이었으니까.

"2주 빌려주지."

물론 김지운은 그냥 공짜로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그런 김지운의 말에 이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잘 쓸게."

"친구니까."

그리고 이어서 김지운이 말했다.

"친구니까 유리룡의 눈도 좀 더 빌려주도록."

"야이 씨발놈아! 이거랑 그거랑 같아?"

그런 이수연의 반응에 김지운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꼬우면 말든가.

그 눈빛에 이수연이 이내 주먹을 부르르 떨고는 말했다.

"······너 언젠가 내가 벗겨먹을 거야."

"기대하지."

그렇게 거래가 끝났고,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좋아, 그럼 언제 갈까?"

압구정 로데오에 가는 날을 정하는 것.

그런 이수연의 질문에 김지운은 손가락 하나를 펼쳤고, 그것을 본 이수연이 기겁하며 말했다.

"내일? 미친, 제정신이야?"

"내일이 아니다."

그 놀람에 김지운이 대답했다.

"10분 뒤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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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압구정 로데오 (2).

5.

김지운과 이수연, 그 둘은 김지운이 말한 10분이 지난 순간 흑석동을 떠났다.

"올림픽대로를 통해 이동한다."

그리고 그 둘은 곧바로 올림픽대로 위에 올라탔다.

그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으어어어!

12월 31일을 기점으로 올림픽 대로는 자동차와 어비스 좀비로 가득 찬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나 김지운에게는 이제 더 이상 어비스 좀비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았다.

으어어어!

검은 이무기의 역린 장갑으로 발달된 감각은 어비스의 좀비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알려줬다.

'이 감각, 오랜만이군.'

수증기 가득한 습식 사우나에서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상쾌해지는 기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지운에게는 거미줄마저 있었다.

이 순간 김지운에게 더 이상 어비스 안개가 주는 시야의 불편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수연도 알고 있었다.

이미 경험도 해봤다.

전성기 시절 퍼스트 킬러가, 절정의 기량과 그 기량에 어울리는 아이템으로 무장한 그가 어비스 안개를 얼마나 가소롭게 만들었는지.

물론 지금 김지운의 역량은 그가 은퇴하기 직전, 전성기 시절에는 비할 바가 못 됐지만 어비스 좀비 상대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그 둘은 빠르게 올림픽대로를 지나, 압구정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달한 압구정역의 풍경은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었다.

'처참하군.'

으어어어!

그 값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이라고 불리는 압구정역도 다른 곳처럼 어비스의 방랑자들을 위한 곳이 되어 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압구정역은 다른 곳보다 불리했다.

근처에 지어진 아파트들이나 건물은 연식이 오래됐고, 때문에 고층 빌딩 같은 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마저도 안개를 뚫고 솟아오른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안개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저거.'

'봤어.'

압구정역 나와 움직이던 김지운과 이수연은 볼 수 있었다.

압구정역 4번 출구에서 좀 나오면 보이는 사거리, 그곳에서 조용히 있는 한 무리들을.

짙은 안개 탓에 그 무리들의 정체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존재감은 드러내고 있었다.

'일부러.'

그건 실수나 부족함 때문이 아니었고, 해서 김지운 파티도 그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났다.

정말 슬쩍.

그냥 무언가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만.

그 후에 다시 근처에 있는 차량 뒤로 모습을 감춘 채 고개만 내밀어 무리를 확인했다

그러자 보였다.

반짝!

플래시 빛이 1초 간 반짝이고.

반짝!

이후 다시 플래시 빛이 2초간 반짝이고.

반짝!

마지막으로 플래시 빛이 다시 정말 짧게 반짝이는 것을.

그것은 신호였다.

어비스의 헌터들이 서로 마주했을 때, 안개 속에서 모른 채 마주했을 때 보내는 신호.

대화를 하자는 신호.

그 신호에 김지운과 이수연은 망설임 없이 빛이 난 방향으로 향했다.

이게 함정이거나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저울질을 했다.

'우리보다 빨리 와서 진을 칠 정도면.'

'저 새끼들 보통내기는 아니야.'

저기 있는 헌터들은 이제까지 마주한 어중이떠중이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그런 실력자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면서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존재감을 일부러 드러내면서까지 기다리고 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역시 교통 정리를 하려는 모양이네.'

이곳에 오는 헌터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워서 몬스터들만 배부르게 하는 일은 피하는 것.

해서 헌터들은 어지간한 적대 관계가 아니면, 심지어 적대 관계인 경우에도 몬스터를 마주할 때는 손을 잡았다.

지금은 더더욱 협력 관계가 중요했다.

만약 저들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김지운과 이수연이 사냥에 나서면 좋은 꼴을 보기 힘들었으니까.

그렇게 그 둘이 다가가자 세 명이 보였다.

모두가 화재용 마스크를 쓴 그들은 비슷한 차림의 김지운과 이수연을 보자 손을 들었다.

머리 위로.

항복을 하듯이.

그 모습에 김지운과 이수연도 바로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휘이휘이!

그리고 양옆으로 흔들었다.

이 역시 헌터들의 제스처였다.

서로 마주했을 때 손을 드는 것.

우스꽝스러운 짓이지만 꽤 중요했다. 이래야 헌터로 변신한 몬스터인지 아니면 어비스 좀비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서로를 인지하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헌터들의 세계에서 인사로 악수를 하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쯤에서 앞에 있는 세 명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손을 내렸고, 이내 바닥에 있는 걸 들었다.

그건 박스였다.

[옆 건물 지상 2층에 오아시스가 있다.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그 문구가 적힌 박스.

그것을 본 김지운과 이수연이 고개를 돌리자, 4층짜리 상가 건물 하나가 보였다.

그 둘이 그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계단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2층에 도달하자 안개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마스크를 벗거나 그러진 않았다.

둘은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보이는 문, 이미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17명.'

그런 그곳에는 꽤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룹은 우리를 포함해서 4개.'

더불어 모인 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쯤에서 김지운은 확신했다.

'클랜이다.'

이들이 갑자기 급조된 모임 따위가 아니라 원래부터 같은 소속의 클랜원들이었음을.

'꽤 단련된 게 보이는군.'

그리고 최소 다들 30레벨 이상은 찍어 본, 그러니까 오렌지 존 이상은 경험해 본 실력자임을.

모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지운과 이수연이 등장하는 순간 긴장된 기색을 보였다.

알았으니까.

'둘? 이것 봐라?'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고작 단 둘이 움직인다, 그건 어지간한 자신감과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모두가 서로를 바라봤다.

그뿐이었다.

대화는 없었다.

어비스의 안개에서 소리를 낸다, 그것만큼 위험한 짓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1시간 남짓.

밑에 있던 세 명 중 한 명이, 박스를 들고 있었던 한 명이 상가 건물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곧바로 대기 중이었던 다른 한 명이, 가장 말단으로 보이는 여성이 잽싸게 움직였다.

스윽, 스윽!

'저건?'

그 한 명이 가지고 온 가방에서 비닐뭉치를 꺼내고는 그 안에 조심스럽게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비닐 돔 텐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김지운의 눈빛이 빛났다.

'이런 수가 있었군.'

감탄이었다.

'이동형 방공호다.'

어비스의 안개는 기본적으로 필터로 여과가 가능했다. 필터 수명이 빨리 닳고, 전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여하튼 조건이 갖춰지면 안개를 정화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공간.

그런데 저런 비닐 돔 텐트라면 간편하게 가지고 다니면서 임시 오아시스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저 헌터들이 자신들이 가진 끝내주는 비닐 돔 텐트를 자랑하려고 꺼낸 건 아니었다.

텐트가 완성되는 순간, 박스를 들고 있던 사내가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손짓을 했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가리켰다.

각 파티에서 두 명씩 들어오라고.

이윽고 안에 들어가는 순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 이야기 좀 해보자고. 목소리는 최대한 낮추고. 방음이 되긴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방음, 그게 이 텐트의 또 다른 장점이었다.

물론 너무 과한 경계일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이 번잡한 작업을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도리어 안심했다.

이 정도로 철저한 실력자가 있다는 사실에.

"일단 자기 소개는 대충 적당히 하자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보통의 대화랑은 조금 달랐다.

"어차피 서로가 뭐라고 말해도 그게 진짜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 아니야? 얼마든지 구라를 치려면 칠 수 있고. 또한 서로 정체를 드러내면 반갑게 인사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여기가 동창회도 아니고."

하지만 이상할 건 없었다.

"안 그래?"

"동감이다. 이름 드러낸다고 해서 없던 결속력이 생기거나 그러는 건 아니니까."

어비스의 헌터들에게 중요한 건 상대의 신분이나 이름이 아니라 상대가 규칙을 지키는 헌터인가 아닌가? 그거였고 여기 모인 이들은 최소한 규칙을 아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말한 것처럼 믿기도 힘들지. 얼굴 보기도 힘들고."

또한 어비스의 안개 때문에 헌터들은 마스크를 쓰거나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모로 신분 확인이 쉽지 않았다.

"막말로 저 둘이 자기가 퍼스트 킬러라고, 불의 마녀라고 소개해도 알 도리는 없으니까. 안 그래?"

그쯤에서 온 질문에 김지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퍼스트 킬러인 건 어떻게 알았지?"

그 말에 좌중에 있던 이들이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유쾌한 헌터들이 모여서 다행이군. 좋아, 나쁜 놈인지 착한 놈인지는 모르지만 또라이 같진 않으니까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고."

그 웃음을 끝으로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다들 노리는 건 범닭의 알이겠지. 그리고 범닭의 알을 노린다는 건 실력 좀 된다는 거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다들 손 잡고 범닭의 알을 확보한 후에 알을 네 개로 쪼개는 걸 바라는 이는 없을 테고. 그럼 어떻게 할까?"

"헌터답게."

이어진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답다는 것, 그건 가장 먼저 찾은 이를 주인으로 인정해주겠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 방해를 하거나 그러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 그럼 이제 서로 호칭을 정하자고. 자기소개랑은 별개로 야, 너, 거기, 그렇게 부를 순 없으니까. 뭐, 저 안에서 얼마나 소리를 지를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그다음으로는 이름을 정했다.

"일단 나는 붉은 늑대다. 참고로 어비스넷에서도 같은 닉네임을 쓰고 있어. 만약 연락하고 싶으면 쪽지 보내. 쪽지 보낼 때 압구정날라리라고 써두면 답장은 해줄게."

가장 먼저 이름을 말한 건 이 무대를 만든 이였다.

그쯤이었다.

"아, 잠깐. 이야기 하기 전에 그래도 우리 믿고 와줬는데 접대는 제대로 해줘야지."

붉은 늑대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조금 전 텐트를 설치했던 여인이 후다닭 움직이더니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8명이니까 케이크 하나씩 먹자고. 미안하지만 홍차나, 커피는 준비 못 했어. 없는 건 아닌데, 여기서 향 풍기는 건 좀 그렇잖아?"

그렇게 등장한 케이크는 딸기생크림 케이크로 얼었던 걸 녹인 것이 아니었다.

만든지 하루 정도 된 것.

그 사실에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케이크를 만든다? 그것도 딸기생크림 케이크를? 저쪽이 가진 기반이 보통은 아니라는 의미.

그런 케이크의 등장에 여러모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는."

5명으로 구성된 파티의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30대로 보이는 날카로운 외모의 사내가 말했다.

"이응이응이다."

"뭐?"

"어비스넷 닉네임이 이응이응이다."

"그 동그라미 두 개 말하는 거지? 유동닉이란 거야?"

"아니, 계정 닉네임이 이응이응이다."

"그걸 가졌다고? 와, 엄청 유니크 이름이네! 아니지, 거의 레전더리급 아닌가?"

이어서 다른 파티가, 단발 머리칼의 뱀 같은 외모를 가진 여성이 입을 열었다.

"어비스넷 닉네임은 엘리스에요. 그렇게 불러주세요."

이제 남은 건 김지운과 이수연뿐.

자연스레 몰리는 시선에 김지운과 이수연은 잠시 동안 짙은 고민에 빠졌다.

그 둘은 도무지 자신들의 닉네임을 이 자리에서 드러낼 마음도, 용기도 없었으니까.

그쯤에서 나선 건 김지운이었다.

"어비스넷 닉네임을 밝히긴 좀 그렇고, 아까 그 별명대로 하겠다."

"아까?"

"퍼스트 킬러랑 불의 마녀, 줄여서 킬러랑 마녀로 불러줘라."

그 말에 모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닉네임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이 닉네임을 부르게 될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다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확보하는 순간, 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자, 그럼 이제 마지막만 정하자고."

애초에 이 자리도 괜히 서로 엉키고 싶지 않아서 만든 자리였으니까.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지금 레드존이야. 그리고 여기는 지금 네 팀이 있고. 그러면 이야기는 쉽겠네. 동서남북. 하나씩 방향 정해서 들어가자고. 방법은 어떻게 할까? 제비뽑기? 아니면 가위바위보?"

붉은 늑대의 말에 모두는 말했다.

"난 북쪽 루트를 원한다. 하지만 다른 루트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넘겨줄 수 있다."

"엘리스는 남쪽을 원해요."

"좋아, 난 찬성. 그럼 동서 중에 난 서쪽을 노리겠어. 잘 흘러가는데?"

진행은 빠르게 됐다.

"그럼 퍼스트 킬러랑 불의 마녀는 어디를 원해?"

"동쪽으로 가지."

그리고 그 흐름에 김지운과 이수연은 순응했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 그럼 이제 헤어지자고. 아, 여기는 언제든 와. 우리 애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 나지막한 대화를 끝으로 모두가 비닐 돔 텐트를 나오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돌리거나 여한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김지운과 이수연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고, 이야기했던 대로 압구정 로데오 거리의 동쪽으로 이동했다.

사실 그건 가장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압구정역 근처, 압구정 로데오 거리의 동쪽은 가장 먼 곳이었다.

그러나 김지운과 이수연은 개의치 않았다.

거리는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그 둘은 알았으니까.

[저기 애들 딱 봐도 오픈런이 알바네.]

저기 온 헌터들이 당장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공략할 일이 없음을.

[간보려고 보낸.]

그리고 그게 당연했다.

뛰어난 헌터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욕심에 취해 무모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동시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으니까.

저들이 그랬다.

범닭의 알이란 것이 언급되는 순간 그들은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선발대를 보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나름 세력을 갖춘 클랜이 최소 세 개 이상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강남이라서 그런가 돌아가는 클랜들이 제법 있네.]

지역적 특성 덕분이었다.

헌터들은 돈이 부족하지 않은 집단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서울에서도 가장 비싼 땅에 모여 있었으니까.

[다들 그렇게 펜트하우스 좋아하더니, 비싼 값 지불한 보람들 좀 느끼겠어.]

여기에 하나 더, 그들이 높은 곳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그만큼 생존 가능성도 높았다.

물론 제대로 된 세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마 아포칼립스가 터지고 지금까지 세력을 갖추는 중이었을 터.

사실 원래대로라면 좀 더 세력을 갖춘 후에 움직이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범닭의 알이 역시 화끈하긴 화끈해.]

그러나 이번에 걸린 미끼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게 했다.

[이게 그 진화 그룹 회장 양반이 노린 거 아니야? 서로 싸우지 말고 모여서 지내라고?]

이쯤에서 이수연은 범닭의 알이 등장한 이유를 추측했고, 그 추측은 매우 타당했다.

어느 때보다 힘을 합쳐야 하는 상황, 반면 헌터들은 이럴 때일수록 엉덩이가 더 무거워지는 족속이었으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쟤들하고 이야기 좀 해볼까?]

함정일 가능성도 무시는 못했다.

그 때문이었다.

[아쉬우면 알아서 오겠지.]

김지운이 저들과 거리를 두는 것은.

'흑랑 클랜이 어디까지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김지운, 그의 상식으로는 린샤오웨이는 결코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처지였다.

아무리 밀입국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삼족오 클랜의 능력이라면 린샤오웨이 정도 되는 거물의 거취를 파악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린샤오웨이는 들어오는 수준을 넘어서 아랑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들을 그리고 강력한 아이템을 같이 가지고 들어왔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삼족오 클랜이 내가 알던 수준이 아니다.'

아주 큰 구멍이 생겼다는 것.

그런 큰 구멍으로 무엇이 들어왔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김지운은 섣불리 모르는 헌터와의 접촉은 피하고 싶었다.

김지운이 지금 흑랑 클랜의 존재를 주변 헌터들에게, 어비스넷에 올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흑랑 클랜이 한국에 있고, 한국을 상대로 수작을 부린다는 글을 올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진 않았으니까.

'모이면 정보가 샌다.'

오히려 괜히 머릿수를 모여서 대대적으로 움직이면 린샤오웨이에게 대비하라고 신호를 주는 격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결코 남의 손 안 빌리는 게 디저트킬러니까.]

무엇보다 김지운은 문제를 앞에 두고 남의 손을 빌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을 때의 일.

김지운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직접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떻게 할까?]

김지운은 모두가 방관하는 상황에서 뒷짐을 지고 구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압구정 로데오에 진입한다.]

주저함 없이 사냥에 나설 생각이었다.

[그래? 자신 있나 보네. 미노타우로스 꽤 센데.]

[상관없다. 약점이 있으니까.]

[약점?]

또한 주저할 생각도 없었다.

[숨을 쉰다는 약점이.]

53화 15화. 압구정 로데오 (3).

 7.

 헌터들이 떠나고 사라진 상가 2층의 오아시스.

 

 "후우."

 

 그곳에 설치된 비닐 돔 텐트에 남아있던 붉은 늑대는 헌터들이 사라지는 순간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밖에서 한 여인이 비닐 돔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 비닐 돔 텐트를 열심히 치는 것을 비롯해 온갖 잡일을 여인이었고, 그 여인이 들어오는 순간 붉은 늑대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보통 헌터들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많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매우 조심스럽게 존대를 하면서.

 증거였다.

 가장 궂을 일을 하던, 가장 위치가 낮으리라 생각했던 여인이 이곳의 대장이라는 증거.

 그런 붉은 늑대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이 올라오고 바로 행동에 나설 정도면 보통이 아니지. 별 클랜과 해태 클랜이니까."

 "어? 진짜입니까? 별하고 해태라고요?"

 

 이어진 말에 붉은 늑대가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클랜은 대한민국 클랜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는 꼽힐 만큼, 최고의 클랜이었으니까.

 

 "아직 건재한 모양이군요."

 "것도 그렇지만 운이 좋았지. 별 클랜의 본부가 청담동에 있으니까. 해태 클랜 같은 경우에는 성수동에 건물이 있고. 둘 모두 지하에 아이템 보관실을 가지고 있고."

 "아하."

 

 이어진 설명에 붉은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가 있다면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상주하는 헌터가 적지 않게 있다는 의미.

 또한 그 정도 거대 클랜의 아이템 보관실이라면 대통령을 위한 방공호보다 더 튼튼하게 지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안에서 꽁꽁 숨은 채 착실하게 상황을 개선시키고 있었을 터.

 

 "범닭의 알이 대단하긴 하네요, 그 정도 되는 이들도 오게 만들고. 그런데 그게 가짜란 걸 알면 큰일 날 거 같은데요?"

 "어차피 가짜란 거 알고 있다."

 "예?"

 "진짜라고 생각했으면 여기 올 이유가 없다. 이미 진작에 압구정 로데오 거리로 들어갔을 거다."

 "그, 그런데 온 겁니까?"

 "의도를 파악한 거지. 회장님이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그쯤에서 여인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붉은 늑대가 질문했다.

 

 "대장, 남은 두 명은 어떻습니까? 그 퍼스트 킬러랑 불의 마녀요. 생각해보니 웃기네요."

 

 그 질문에 여인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세상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짓 아닙니까? 퍼스트 킬러랑 불의 마녀를 가지고 이렇게 장난을 치다니."

 

 두 이름은 한국은 물론 어비스에 들어가는 모든 세계 헌터들에게 있어서 아득한 이름이었다.

 장난으로라도 그 이름을 언급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부하의 말마따나 이런 상황, 정말 모두가 처참한 꼴이 됐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소속은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은 아니다."

 "그래요? 아무런 느낌이 안 났는데, 대장은 느껴지나 보죠?"

 "아니, 나도 이렇다 할 특이점은 못 느꼈다. 그래서 보통이 아닌 거다."

 "예?"

 "자기 색을 완벽하게 감추고 있다는 거니까."

 "아!"

 

 이어진 설명에 감탄하는 부하.

 

 "그런데 대장."

 

 그러나 이내 부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만약에 누군가 들어가서 범닭의 알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범닭의 알이 가짜인 걸 알고 온 것과 가짜인 게 드러난 것, 그건 전혀 다른 일이었으니까.

 어비스넷에 글을 올린 계정이 다시는 쓸 수 없는 계정이 된다, 그런 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올 정도의 헌터들이라면 보통이 아니라는 의미.

 그런 그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그에 준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문제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해 여인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 거길 들어갈 만한 미친 개또라이가 있을 리 없으니까."

 

 8.

 미노타우로스.

 어비스의 레드 존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로, 레드 클래스에서 꽤 골치 아픈 몬스터였다.

 골치가 아픈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덩치였다.

 3미터에 이르는 걸어 다니는 근육질의 소인 미노타우로스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힘이 셌다.

 화이트 클래스 중 근력으로는 손에 꼽히는 트롤이 복싱에서 페더급 정도 되면, 미노타우로스는 미들급 정도 되는 정도.

 맨주먹으로 자동차 한 대를 폐차시키는 데에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더불어 미노타우로스가 골치 아픈 이유는 무장의 정도였다.

 트롤의 경우에는 거의 무기 정도만 들고 다녔다. 방어구란 개념이 없었다. 트롤이 가진 막강한 회복력 때문에 무언가를 막을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렇지만, 방어구를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높은 지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반면 미노타우로스는 오크 정도의 무장을 했다. 무기를 쓰는 건 물론 갑옷을 둘렀다.

 그건 단순히 방어력을 가진 수준을 넘어서 방어구를 쓸 수 있을 만큼 지식이 있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어비스의 헌터들에게 미노타우로스는 여러모로 공포로 존재하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울음 소리를 들어본 헌터들은 지나가다 소 울음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

 

 음머머어!

 

 그리고 지금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미노타우로스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머어어컥컥!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가 내지를 법한 소리를.

 그마저도 그 소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컥컥, 컥!

 

 어느 순간 소리조차 내지 못한 미노타우로스는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했습니다.]

 [도감에 미노타우로스가 등록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그런 미노타우로스의 죽음을 확인한 김지운의 표정에는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가 이제까지 잡은 미노타우로스의 숫자는 천 단위를 넘어서 거의 만 단위에 가까웠으니까.

 미노타우로스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놈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알 정도였다.

 

 '트롤 때보다 더 쉬워졌군.'

 

 더군다나 지금 김지운은 검은 이무기의 역린 장갑을 손에 착용한 상태였고, 그 덕분에 그 가볍기 그지없는 헥타르의 거미줄도 이제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목을 휘감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비단 그만 그런 건 아니었다.

 

 '불의 마녀도 그렇고.'

 

 스펙업을 한 건 불의 마녀 역시 마찬가지.

 그녀의 불꽃은 더 강해졌고, 예리해져 있었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그녀가 날린 불꽃으로 만든 제비는 용산 국방부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심지어 미노타우로스의 얼굴에 달라붙는 순간 작은 도마뱀이 되어 미노타우로스의 입과 코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단순히 얼굴을 태우는 수준을 넘어 호흡기와 식도를 태웠다.

 그건 정말 매우 힘든 일이었다.

 메모지에 글을 쓰는 것과 쌀알에 글을 쓰는 것, 그 정도 차이가 있을 만큼 힘든 일.

 

 '음?'

 

 그때 이수연을 바라본 김지운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수연의 표정 때문이었다.

 이수연의 표정이 굳어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심지어 눈빛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실에 김지운이 빠르게 대응했다.

 

 [무슨 일이지?]

 

 그 질문에 이수연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고기 냄새 끝내줘서. 아, 저거 적당히 구운 다음에 위스키 먹으면 끝장나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답변.

 그러나 김지운은 그 답변을 보는 순간 뚱한 표정을 짓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여유가 넘치는군.'

 

 이런 헛소리를 지껄인다는 것은 그만큼 불의 마녀가 여유가 넘친다는 의미였으니까.

 

 '나쁠 건 없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여유였다.

 

 '레벨업을 할 기회이기도 하고.'

 

 더불어 김지운은 이제 20레벨을 달성한 상태, 어비스의 규칙에 따르면 20레벨부터는 무조건 레드 클래스 이상의 몬스터를 잡아야 레벨이 올랐다.

 화이트 클래스 몬스터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레벨업에 티끌의 도움도 안 된다는 의미.

 미노타우로스를 많이 잡아서 나쁠 건 없었다.

 물론 둘은 알았다.

 

 [아, 술 땡긴다. 이 소리도 조만간 못하겠지.]

 

 이 여유가 오래 가지 않으리란 것을.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거듭해서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며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움직이던 김지운이 이내 손바닥을 들었고, 그 둘이 동시에 행동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그 둘은 볼 수 있었다.

 건물값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압구정 로데오 거리.

 그런 건물들이 무너져 있는 광경이.

 

 '레드불이다.'

 

 레드 클래스 보스 몬스터인 레드불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엄청난 흔적이었다.

 아무리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건물들이 오래 전에 지어진 만큼 내진설계 등 여러 부분에서 요즘 건물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철근과 콘크리트 덩어리가 가지는 강도는 엄청났다.

 그런데 그런 건물을 그냥 무너뜨린다?

 심지어 무너진 건물의 개수는 대충 보이는 것만 하더라도 열 채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걸 잡아야 한다니, 미친 거 같긴 해.]

 

 더 아득한 것은 김지운과 이수연은 그 레드불을 잡으러 이곳에,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들어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방법은?]

 

 더 골치 아픈 건 레드불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한 가지 뿐이라는 점이었다.

 

 [로데오.]

 

 레드불의 몸에 올라타서 놈을 잡는 것.

 미친 짓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레드불의 돌진은 비슷한 수준의 헌터들이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놈을 막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의미.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로데오처럼 올라타는 것.

 그냥 올라타서 미친 듯이 질주하는 레드불의 몸뚱이에 상처를 낸다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제아무리 헌터들이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로데오를 하는 건 습성 때문이었다.

 레드불은 자신의 등 뒤에 무언가가 올라타면 뿌리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뜀박질을 했다.

 즉, 레드불을 자리에 잡아둘 수 있다는 의미.

 물론 그 역시 충분히 미친 짓이었다.

 레드불이 뜀박질을 한다는 건 그냥 들썩이는 게 아니라 제 자리에서 삼사 미터 정도를 도약하는 것이었다.

 한 번 점프할 때마다 몸에 오는 충격이 건물 2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거 좆같은 대머리 새끼가 잘하던 건데.]

 

 해서 본래 이 역할은 무식한 파수꾼의 몫이었다.

 

 [아쉽네. 좆같은 대머리 새끼가 없어서.]

 

 그러나 지금 김지운 파티에서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김지운, 그가 올라타야 한다는 것.

 물론 김지운도 알고 있었고, 이미 로데오를 할 각오로 이곳에 왔다.

 이수연도 마찬가지였다.

 

 [응? 괜찮겠어? 너무 힘들면 내가 할까? 연약한 내가?]

 

 그렇기에 이수연은 이 기회를 노려 김지운을 놀렸다.

 하지만 김지운은 그 놀림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로데오는 내가 한다.]

 

 김지운의 그 담담한 대답에 이수연이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으로 말했다.

 

 [너무 멋져, 반할 것 같네.]

 

 이 상황을 즐기는 이수연에게 김지운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마녀, 네가 시선을 끌어라.]

 

 그 대답에 이수연의 표정이 달라졌고, 그런 그녀에게 김지운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로데오를 할 테니까, 넌 투우를 해라.]

 

 그 말에 이수연이 소리 없이 말했다.

 씨발, 이라고.

 그 순간이었다.

 

 음머어어어어어어!

 

 레드불, 놈의 소리가 들렸다.

 

 9.

 레드불.

 놈의 생김새는 황소였다. 그러나 보통의 황소와는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일단 덩치가 보통 황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꼬리와 뿔을 제외한 몸길이가 대충 봐도 6미터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보통 황소가 치와와라면, 레드불은 최소한 진돗개 이상은 잡아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섬뜩한 것은 그 몸뚱이보다 더 인상적이기 그지없는 뿔이었다.

 머리 양옆으로 솟아오른 그 뿔은 레드불이 고개를 살짝 내리는 순간, 정면을 노리는 창이 되었다.

 마치 말에 탄 기사가 내찌른 창처럼.

 물론 그 파괴력은 말 탄 기사의 창과 달랐다.

 해서 레드불을 마주한 헌터들은 말했다.

 저걸 마주할 바에는 그냥 달려오는 트럭하고 마주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다고.

 그런데 지금 그것을 이수연이 했다.

 

 음머?

 

 그 말도 안 되는 레드불을 향해서 이수연이 걸어갔다.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그건 그녀가 가짜 따위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어쩔 수 없었다. 가짜 따위를 내세워서 통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가짜를 떠나서 레드불 정도 되는 몬스터는 이제 어지간한 것을 상대로는 감흥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지나가는 새를 보면 별 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주 강렬한 것을 보내야 한다는 의미!

 이수연에게는 그런 강렬한 것을 보낼 능력이 있었다.

 

 화르르르!

 

 그녀의 손바닥에서 치솟은 불길, 그 불길에 이수연이 허리춤에 있는 술병의 액체를 부었다.

 

 화르르르르!

 

 그러자 더 거대해진 불길이 이내 하나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거대한 황소의 모습을!

 레드불의 크기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강렬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화르르르!

 

 그 불로 된 황소가 레드불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이었다.

 

 음머머!

 

 거대한 불꽃으로 된 황소가 그대로 레드불의 몸을 휘감았고, 그 공격에 레드불이 거친 소리를 토해냈다.

 고통에 찬 소리였다.

 

 화르르르!

 

 몸에 불이 났는데 고통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 일.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대한 불꽃이 해낼 수 있는 것은 레드불의 털을 태우는 것이 전부였다.

 놈의 질기디 질긴 가죽을 태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이수연은 마주해야 했다.

 

 크릉, 크릉!

 

 자신에게 불덩이를 던진 인간을 당장 죽이기 위해 몸을 웅크리기 시작한 레드불을.

 그 상황에서 이수연은 괜한 장난 따윈 하지 않았다.

 

 "드루와! 드루와!"

 

 기세 좋게 소리를 내질렀고, 레드불은 기꺼이 응했다.

 몸을 웅크렸던 레드불이 뿔을 앞세운 채 돌진을 시작했다.

 그건 총알이었다.

 

 콰과광!

 

 소리가 나는 순간, 그 순간 100미터 앞에 있던 레드불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이수연이 움직인 건 그 순간이었다.

 반응이 느린 건 아니었다 미리 움직이려고 하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의미가 없었다. 만약 먼저 움직이면, 레드불이 그에 대응해서 움직일 테니까.

 그러니까 놈이 궤도를 바꿀 수 없을 만큼 관성이 생긴 순간, 그 순간에 몸을 날려야 했다.

 

 쉬익!

 

 그리고 그 타이밍이 왔을 때 이수연이 전력을 다해 왼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이수연이 있던 자리를 레드불이 지나갔다.

 

 콰콰콰콰!

 

 마치 지하철이 지나가는 것과 비슷한 존재감을 뿜으며.

 거대한 바람을 만들어내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 느낌에 이수연은 더 이상 욕지거리도 내뱉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판은 깔아줬다.'

 

 이제 레드불은 모든 것을 부수다가 멈출 것이고, 그 순간이 유일한 기회였다.

 놈의 몸에 올라탈 기회.

 

 콰콰콰쾅!

 

 그리고 레드불이 건물 한 채를 뚫고 지나갔을 때, 그때 그 기회가 드디어 왔다.

 

 크릉!

 

 레드불이 자리에서 멈추고는 이내 몸을 털기 시작했고, 그 순간 무언가가 레드불의 몸뚱이 위에 올라탔다.

 

 음머머머머!

 

 그리고 제 몸에 무언가가 올라타는 순간 레드불은 앞서 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쿠웅!

 

 제 몸에 올라탄 것을 떨어뜨리기 위해 제 자리에서 미친 듯이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로데오가 시작됐고, 그것을 먼 발치에서 본 이수연의 눈동자는 조금이지만 흔들렸다.

 김지운을 믿었다.

 그러나 김지운의 역할은 파수꾼이 아니었다.

 저 위에서 버티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의미.

 

 '어?'

 

 그때 이수연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어? 어?'

 

 로데오를 하는 레드불의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어!'

 

 그것을 보는 순간 이수연은 기겁했다.

 그건 실패였으니까.

 

 '킬러, 저 새끼!'

 

 그 사실에 이수연은 김지운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럴 때가 아니었다.

 김지운 없이는 그녀 역시 레드불을 잡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해서 여기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장 숨거나 혹은 도망치거나.

 김지운을 구한다, 같은 선택지는 없었다. 어비스에서 위기에 빠진 동료를 구하는 것은 그 누구도 장려하지 않는 짓이었다.

 이수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레드불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김지운을 도울 생각에.

 막연한 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도 김지운이라면 어떻게든 제 살길을 찾아내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수연의 발걸음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퍽!

 

 작은 돌멩이 하나가 그대로 이수연의 머리를 때렸고, 그 사실에 이수연이 놀라며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였다.

 김지운이.

 

 '어떻게?'

 

 그 사실에 놀라는 이수연에게 김지운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보여줬다.

 

 [레드불에 마네킹을 붙여 놓고 왔다.]

 

54화 15화. 압구정 로데오 (4).

10.

어비스에서 안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브레수 나뭇잎이었고, 그다음으로 유명한 게 호흐프 열매였다.

이 밖에도 안개에서 제정신을 유지해줄 수 있는,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 제법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아이템에 대한 헌터들의 욕망은 그 어떤 아이템들보다 강력했다.

보이면 일단 눈이 돌아갈 정도.

레드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레드불은 헌터 입장에서 정말 골치 아픈 몬스터였지만, 보는 순간 결코 다른 헌터에게 빼앗길 수 없는 몬스터였다.

해서 어비스의 헌터들은 레드불을 잡기 위해 무수히 많은 도전을 했고, 공략법을 강구했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삼족오 클랜 그리고 김지운도 마찬가지였다.

김지운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가 은퇴하기 전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보다 레드불을 더 많이 잡은 헌터는 두 명에 불과할 거라고.

'지금 나는 로데오는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김지운은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험하다.'

지금 자신의 역량은 로데오를 무사히 할 정도가 아님을.

물론 이를 꽉 물고, 전력을 다하면 할 수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면 못할 건 없었다.

그래서였다.

'리스크를 감수할 바엔 포기하는 게 낫다.'

여기서 김지운은 목숨을 걸면서까지 레드불을 잡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레드불의 뿔이 좋은 건 맞지만, 목숨을 걸면서까지 구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김지운은 레드불의 뿔만이 아니라, 그 어떤 아이템에도 목숨을 걸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아이템을 노리고, 몬스터를 노리고 움직이는 것은 생존이 보장됐을 경우뿐이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리 만무.

즉, 김지운은 방법이 있었다.

[마네킹?]

레드불 위에 마네킹을 세우는 방법이.

어려울 건 없었다.

일단 마네킹 수급이 쉬웠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사치품 가게들이고, 그곳에 넘치는 게 마네킹이었으니까.

마네킹을 부착하는 것도 어렵진 않았다. 어지간한 강력 접착제보다 더 강력한 헥타르 거미줄이 있었으니까.

[그게 통한다고? 등 위에 돌덩이가 올라온 걸 가지고?]

물론 이것만으로 레드불을 낚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의 어깨에 달라붙은 게 벌레인 것과 그냥 종이쓰레기인 것과는 느끼는 바가 전혀 달랐으니까.

김지운도 알았고, 해서 조치를 했다.

[핫팩을 붙였다.]

하나는 마네킹과 레드불이 닿는 부위에 핫팩을 잔뜩 붙여 놓았다.

적당한 열기를 전달했다.

[스마트폰도 함께.]

여기에 김지운은 마네킹에 스마트폰 진동모드를 해두었다.

이 역시 그냥 스마트폰은 아니었다.

이영후가 노트북을 두드리더니, 김지운이 원하는 기능만 들어간 앱을 만들어줬다. 음량, 진동의 크기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앱을.

물론 김지운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내는 것을 추가했다.

"살려줘요!"

특별히 개조한 무선 스피커를 장착했고, 그곳에 녹음을 했다.

"살려주세요! 으아아아악! 괴물이다!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아주 절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음머어!

그러한 모든 요소들 앞에서 레드불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것을 생명체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쿠웅, 쿠웅, 쿠웅!

레드불이 거듭 제 자리에서 로데오를 시작했고, 그 광경에 이수연은 감탄을 내뱉었다.

[와]

진심으로.

[목소리 장난 아니네. 나도 속겠는데? 연기력이 보통이 아닌데 누가 녹음 한 거야?]

그 감탄에 김지운은 이영후라는 재주 넘치는 헌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눈빛을 보냈다.

'시간이 없다.'

마네킹이 먹혔다고는 하지만, 그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

무엇보다 마네킹을 고정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헥타르 거미줄이었고, 헥타르 거미줄의 점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말 적지 않은 마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이수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녀는 이미 준비 중이었다.

화르르르!

그녀가 손바닥에서 만들어낸 불꽃 제비들이 빠르게 날뛰고 있는 레드불의 얼굴을 향해 들어갔다.

그리고 달라붙는 순간 제비들은 작은 도마뱀이 되어 레드불의 코와 눈, 입안으로 파고 들었고, 이내 달라붙었다.

음머머어!

호흡기관을 태우는 그 열기에 레드불이 비명을 내질렀다.

더욱이 지금 이수연이 날린 불꽃은 그냥 불꽃이 아니었다.

'이번에 비싼 거 썼다.'

그린 클래스의 몬스터인 불꽃거북의 침을 연료로 삼은 불꽃이었다.

한 방울만으로도 라면 하나 정도는 끓여먹을 수 있을 만큼, 그만큼 엄청난 놈이었다.

그 불길이 달라붙는 순간, 사실상 꺼지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김지운도 움직였다.

스윽!

그가 가지고온 가방 안에서 강철 와이어를 꺼냈다.

견인차에서 뜯어온 견인용 와이어였다.

다루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일단 무게감이 상당했다. 가뜩이나 마력이 부족한 김지운 입장에서는 이 묵직한 견인용 와이어를 마음대로 움직일 만큼의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헥타르 거미줄은 끊어진다.'

저 날뛰는 레드불을 상대로 헥타르 거미줄은 아무래도 부족했다.

헥타르 거미줄을 많이 사용하면 문제없겠지만, 김지운의 수중에 있는 헥타르 거미줄은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많은 게 아니었다.

그가 전성기 시절 쓰던 것의 일부, 극히 일부일 따름이었다.

또한 문제점은 하나 더 있었다.

올가미란 당겨야 의미가 있는 법.

지금 레드불의 올가미를 걸어도 김지운이 당기는 것으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해서 김지운은 일단 강철 와이어를 근처에 있는 무너진 건물, 그 건물의 큼지막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묶었다.

그 후에는 강철 와이어의 끝을 올가미처럼 세팅한 후에 미쳐 날뛰는 레드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올가미를 머리 위로 크게 흔들었다.

후웅, 후웅!

카우보이가 로프를 휘두르듯이.

그렇게 로프에 힘이 실리는 순간 김지운은 그것을 던졌고, 그렇게 던진 로프는 바닥에 떨어지는 레드불의 목에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완벽하게 걸렸다.

이어서 레드불이 다시 도약했고, 그때 로프가 팽팽해졌다.

음머머머억!

레드불의 입에서 숨통이 막히는 소리가 났다.

쿠웅!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레드불이 바닥에 급하게 착지하고 다시 놀라 도약을 했다.

음머어어어!

숨통이 재차 조여들었다.

이때부터 레드불의 기색이 달라졌다.

가뜩이나 불길 때문에 숨 쉬는 게 고통스러운데 목까지 졸리기 시작하는 상황.

"살려주세요, 으아아악! 괴물이다! 살려주세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에 올라탄 벌레는 쉴 새 없이 짜증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듣는 순간, 그 순간 레드불의 리미트가 끊어졌다.

놈의 눈동자가 바뀌었다.

새빨갛게!

핏빛으로!

음머어어어!

그 순간 레드불이 도약을 했다. 이제까지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내면서.

어비스의 몬스터들이 쓰는 스킬, 폭주였다.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면서 힘을 끌어내는 것!

치이이잉!

그런 레드불의 폭주에 그의 목을 감고 있던 강철 와이어가 속절없이 끊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우웅!

레드불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놈의 몸뚱이에 올라타고 있던 마네킹도 거듭된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음머머어어어!

이윽고 놈이 거센 포효를 내질렀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건재함을 알리는 포효를.

사냥을 하는 헌터 입장에서는 결코 듣고 싶지 않고, 들어서도 안 되는 포효를.

'놈이 폭주를 썼다.'

그것을 보는 순간 김지운과 이수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됐다.'

계획대로였으니까.

애초에 김지운과 이수연은 레드불의 숨통을 조여서 죽일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몬스터의 숨통을 조이는 수법은 숨을 쉬는 몬스터에게 굉장히 유효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했다.

애초에 숨을 막히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필요했다. 어린 아이가 기술이 좋으면 어른 정도는 숨통을 조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목 두께가 일반인 허벅지만 한 단련된 프로레슬러의 숨통을 보인다? 거의 불가능한 일.

하물며 미노타우로스가 그런 프로레슬러라면 저기 레드불은 표현대로 황소였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성인이 달려들어도 그 숨통을 막아 죽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즉, 김지운과 이수연이 노린 것은 이거였다.

레드불이 폭주 스킬을 쓰게 만드는 것.

그렇게 원하는 바를 이룩한 김지운과 이수연이 뒤로 물러났고, 그 사이 분노에 가득 차던 레드불이 분풀이를 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콰앙, 콰왕, 콰광!

놈은 그렇게 3분 동안 압구정 로데오 거리의 모든 것을, 도로를, 차량을, 건물을 부쉈다.

그리고 3분이 지났을 때 레드불은 정신을 차렸고, 이제 놈은 느낄 수 있었다.

화르르르!

여전히 호흡기관에 달라붙어 꺼지지 않는 불길이 주는 고통을.

음머어어!

잊었던 만큼 다시 찾아온 그 고통은 레드불의 정신을 미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순간 레드불의 과제는 하나였다.

이 불길을 잠재우는 것.

음머머어!

그리고 레드불은 그 순간 초인적인 감각을 발휘해서 물의 냄새를 찾아 움직였고, 이내 발견했다.

음머!

바닥에 생긴 웅덩이, 그 웅덩이를 덮고 있는 거대한 비닐 안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그것을 보는 순간 레드불은 망설이지 않고 웅덩이를 향해 다가갔고, 입을 박고 물을 머금었다.

돌멩이 같은 온갖 이물질이 들어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꿀꺽꿀꺽꿀꺽!

목구멍의 불꽃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레드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으니까.

해서 레드불은 몰랐다.

자신이 삼키고 있는 것 중에 솔방울 모양을 한 것이 네 개나 있다는 것을.

그 솔방울 모양을 한 것에 달린 작은 고리에 잘 보이지 않는 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잘 보이지 않는 실의 끝에 다른 누구도 아닌 김지운의 손이 있다는 것을.

스윽!

그 순간 김지운이 그 실을 잡아당겼고, 동시에 느껴졌다.

핑!

안전핀이 뽑히는 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꾸르르릉!

마치 손바닥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푸웨엑!

레드불이 피를 토하는 소리가.

그와 동시에 김지운과 이수연의 귀에는 들렸다.

[레드불을 처치했습니다.]

[도감에 레드불이 등록됐습니다.]

[근력이 5포인트 상승했습니다.]

사냥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그렇게 모든 소리가 지나가며 다가온 적막감, 그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하나뿐이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괴물이다!"

야단법석 속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스피커 소리뿐.

여러모로 경이로운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김지운과 이수연에게는 이 결과물을 즐길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

'작업을 시작한다.'

이제는 레드불의 뿔을 해체할 때였으니까.

더불어 그 작업은 꽤 힘든 작업이었다.

레드불의 뿔은 콘크리트를 꿰뚫고도 무사할 정도로, 그 정도로 강인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것을 고작 칼이나 톱 따위로 자를 수 있을 리 만무, 해서 김지운과 이수연은 준비했다.

건설용으로 콘크리트를 자를 때 사용하는 다이아몬드 체인 전기톱을.

위이이잉!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다이아몬드 체인 전기톱이 내는 소리는 이제까지 전투 소리만큼이나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즉,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음머머어어!

레드불의 분노에 몸을 사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미노타우로스들을.

'작업하고 있어. 시간은 내가 끌게.'

그쯤에서 이수연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고, 김지운은 바로 레드불 뿔 해체 작업에 나섰다.

카카카카카!

불똥과 함께 거친 소리가 김지운의 주변을 울렸다.

어비스 안개에서는 가장 위험한 짓.

그러나 김지운은 망설임 없이 작업에 나섰다.

믿었으니까.

불의 마녀를.

툭!

이윽고 레드불의 뿔이, 그 기나긴 뿔 두 개가 잘린 채 바닥에 떨어졌고, 김지운이 바로 챙겼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스킬룬!

그것을 챙기는데 감흥 따위는 없었다.

김지운은 잽싸게 챙긴 후에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드불의 몸에서 피어오른 꽃, 그 꽃에 맺힌 스킬룬을 보는 순간, 그 순간 김지운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는 아포칼립스가 시작된 이후 어느 때보다 놀란 눈빛을 보였다.

'······이게 나오다니.'

거기서 김지운은 간신히 놀란 감정을 삼키며 스킬룬을 챙겼고, 소리를 내질렀다.

"마녀!"

그 외침을 끝으로 레드불의 뿔을 짊어진 채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음머머어!

그러자 사방에서 미노타우로스의 소리가, 분노에 취해 사냥감을 찾는 미노타우로스의 소리가 들렸다.

으어어어!

어비스 좀비의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김지운은 그 소리를 너무나도 쉽게 피하면서 이윽고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마련된 건물 한 곳에 들어갔다.

까르띠에 매장, 그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대표하는 사치품 건물 안으로.

그렇게 들어가자 바로 이수연이 김지운을 반겼다.

그런 이수연이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수고했어.]

여러모로 쉽지 않으리란 생각했던 레드불 사냥이 끝났으니까.

물론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좀 진정되면 범닭의 알을 찾아보자고.]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이제 찾아야 했으니까.

그러나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문제가 생겼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김지운의 말에 이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생길 문제가 있다?

있을 순 있다.

그러나 있을지도 모르는 범닭의 알을 두고 이곳을 떠날 만한 문제는 이수연이 생각하기에 없었다.

[왜? 무슨 일이야? 급똥이라도 왔어?]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아니고서는.

그런 이수연에게 김지운은 자신이 얻은 스킬룬을 보여줬고, 그것을 보는 순간 이수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씨!"

'발!'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김지운이 꺼낸 것은 그 정도의 물건이었다.

[룬(헬의 축복)]

- 등급 : 레전더리

- 니플헤임의 여왕 헬의 축복을 받아 육체를 얼음으로 바꿀 수 있다. 스킬 랭크가 높아질수록 변환 가능한 부위가 늘어난다.

- 2레벨 이상 습득 가능

- 화려한 장난꾼만 습득 가능. 

헬의 축복.

그 스킬은 설명처럼 육체를 얼음으로 바꿀 수 있는 스킬이었다.

일명 원소화 스킬이었다.

화려한 장난꾼들에게 있어서는 꿈의 스킬, 환상의 스킬이었다.

[야, 이거 나 줘. 내가 먹을게. 까짓것 이제부터 얼음마녀하지 뭐.]

당장 불의 마녀 이수연이 반쯤은 장난이지만 자신의 전직을 바꾸려고 할 정도.

달리 말하면 반은 진심이었다.

그만큼 이 스킬은 엄청난 스킬이었다.

동시에 매우 귀한 스킬이었다.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서 이 스킬을 소유한 이가 밝혀진 것만으로는 세 명에 불과할 정도.

때문에 이수연은 이해했다.

[장난은 됐고 일단 튀자. 이게 손에 들어왔는데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김지운이 왜 물러나고자 했는지.

있을지도 모르는 범닭의 알보다는 이 스킬을 가지고 이곳을 떠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물론 아직 남은 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할까? 응? 이거 그냥 우리가 쓸 수는 없잖아?]

이 스킬룬에 대한 처리.

그에 대해 김지운은 대답했다.

[내가 가져도 되나?]

그 질문에 이수연은 대답했다.

[좋아.]

흔쾌히 넘겨줬다.

[대신 소원 세 개만 들어줘.]

대가를 지불하면서.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물건이라면 이수연의 제안 정도는 기꺼이 받아줄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수연 역시 이런 제안을 하는 배경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레드불 사냥에서 김지운의 몫이 75퍼센트 이상이란 것.

[자, 그럼 첫 번째 소원이야.]

그런 김지운의 제스처에 이수연이 바로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헬의 축복을 줘.]

그 질문에 김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장난이란 걸 알았으니까.

[장난이고.]

그런 김지운의 반응에 이수연도 웃으며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너네 집에 가서 2차 하자. 이게 첫 번째 소원이다.]

55화 16화. 중고거래 (1).

1.

'미치겠네.'

김지운이 떠난 후 이영후는 어느 때보다 긴장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단순히 김지운의 공백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김지운은 혼자서 훌쩍 나가도 언제나 멀쩡히 놀아왔으니까.

모두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결과물을 가지고.

그러나 이번은 조금 달랐다.

'압구정 로데오, 거기 지금 뭔가 일어나고 있어.'

어비스넷의 분위기가 달랐다.

막연한 느낌 따위가 아니었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가 들어간 모든 게시글들이 빠르게 조회수가 늘어나고 있어. 간보는 글들도 제법 올라오고 있고.'

어비스넷의 한국 게시판에 압구정 로데오 거리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표면 아래에서.'

더 특이한 점은 이 열기가 가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관심을 가진 이들이 최대한 그 관심을 숨기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의미.

그리고 보통 이런 식의 관심이 노골적인 관심보다 훨씬 위험했다.

'지금은 잔잔하지만 이러다 터지면 화산이 터지는 거지.'

그냥 뻥뻥 터지는 화산보다 힘을 모았다가 갑자기 한 번에 터지는 화산이 더 무섭듯이.

그리고 그런 이영후의 예상은 현실이 됐다.

글이 올라왔다.

[제목 : 압구정 로데오 거리 상황.]

[작성자 : 드래곤슬레이어]

[내용 : 내가 찍은 건 아니고, 저번에 드래곤마운틴 공략 당시 알게 된 회원분이 보내준 사진인데 지금 압구정 로데오 거리 상황이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위험하니까 되도록 접근하지 마라.]

그 글에 올라온 사진은 별거 없었다.

그저 새빨간 안개로 뒤덮인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찍었을 뿐.

하지만 글을 보는 이들에게 중요한 건 그거였다.

- ㅇㅇ : 용살자님 오셨다!

- ㅁㄴㅇ : 드래곤슬레이어 님, 지방 원정은 안 오시나요?

이 글을 쓴 이가 국방부 사건 이후로 어비스넷 한국게시판의 일약 스타가 된 드래곤 슬레이어란 것.

- ㅇㅇ : 그런데 갑자기 왜 압구정 로데오 거리야?

그런 그가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언급하는 순간 이제 더 이상 표면 아래에서 달구어지는 건 불가능해졌다.

어비스넷이 압구정 로데오 거리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ㄴ 123 : 거기 범닭의 알이 있다네.

ㄴ ㅇㅇ : 범닭의 알? 그거 엄청난 거잖아!

그리고 그 시발점인 범닭의 알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ㄴ 123 : 범닭의 알이 뭔지 앎?

ㄴ ㅇㅇ : 알지. 먹어본 적도 있다! 맛 장난 아님!

ㄴ qwe : 진짜 알고 있나보네. 그게 뭔지.

물론 대부분은 범닭의 알이 뭔지 몰랐지만, 지금 어비스넷 유저에게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헌터, 그것도 꽤 실력 좋은 헌터들만 아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

그쯤에서 기어코 터졌다.

[제목 : 압구정 로데오 거리 터졌다!]

[작성자 : 드래곤슬레이어]

[제목 : 긴 말 안한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누군가가 엄청난 전투 중이다. 제정신 박힌 놈이면 접근하지 마라!]

결국 누군가가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사고를 쳤고, 그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의 표정이 굳었다.

'빌어먹을!'

이제부터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불붙은 화약고가 되었으니까.

그건 곧 김지운이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범닭의 알을 구해오는 게 어려워졌다는 의미였으니까.

'어떤 개또라이 새끼야?'

욕지거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

그쯤이었다.

"대장!"

나갔던 김지운이 돌아왔고, 그를 보자마자 이영후는 바로 김지운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며 말했다.

"대장! 지금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주 따끈따끈한 속보를

"어떤 미친 개또라이 새끼들이 사고를 쳤습니다! 지랄을 했어요!"

그 속보에 김지운이 대답했다.

"우리다."

"예?"

"우리가 그곳에서 레드불을 사냥하고 왔다."

그 대답에 이영후는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못 했다.

그의 뇌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으니까.

"이야, 63빌딩을 집으로 쓰는 거야? 끝내주네."

"어?"

그런 이영후를 정신 차리게 한 건 다름 아니라 김지운의 뒤에 함께 온 여인이었다.

"마녀?"

2.

그건 첫 손님이었다.

아포칼립스 세상이 되어버린 여의도,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마주한 첫 손님.

"63빌딩에 백화점에 성모병원? 세 곳이나 오아시스라고? 디저트킬러가 집으로 삼을 만하네."

그런 이수연에게 김지운은 친절하게 자신의 집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들을 말해줬다.

물론 그건 이수연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그 세 곳은 자신의 집이니까 만약 들어오려면 허락을 받으라는 선언.

그렇지 않으면 무단침입으로 그에 걸맞은 응징을 하겠다는 선언.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그쯤에서 이영후가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김지운은 상황을 설명해 줬고, 그것을 전부 들은 이영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김지운이 말해준 행보는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아니, 하루도 안 지나서 이게 뭔 일이야?'

심지어 이 모든 게 반나절 만에 끝났다.

"다급하긴 했다."

사실 김지운 역시 이렇게 긴급하게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느꼈을 뿐이었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무언가 일이 더 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빨리 움직인 게 정답이었던 것 같군."

그리고 그 느낌은 현실이 됐다.

"드래곤슬레이어가 관심을 가질 줄이야."

드래곤슬레이어가 어비스넷에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언급한 건 그냥 심심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글을 올린 시간 등을 보면 드래곤슬레이어도 일단 범닭의 알을 노리고 파티를 조직해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오려고 했던 모양.

당연히 선발대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안에서 김지운 파티가 전투를 치르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고민했을 것이다.

여기서 난입을 해야 할지, 아니면 못 먹는 감 찔러봐야 할지.

글을 올린 건 후자였다.

글을 올려서 다른 헌터들이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오게 만들려고, 그래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려고 유도한 것이었다.

그래야 범닭의 알을 가지고 도망치는 게 힘들어질 테니까.

그런 드래곤 슬레이어의 행동에 김지운은 딱히 불만을 가지거나 분노를 품지는 않았다.

아포칼립스 세상 아닌가?

살아남은 자들은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뿐이었다.

'한 시간만 늦었어도 여러 부분에서 골치 아팠겠어.'

때문에 김지운은 그 문제를 마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었다.

물론 마주할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럼 범닭의 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 범닭의 알.

이에 대해서 김지운은 결론을 내렸다.

"포기한다."

"포기요?"

"일단 범닭의 알이 정말 있을지, 그 자체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제 너무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뜨거워졌다. 다시 그곳에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여기서 손을 떼자고.

"무엇보다 이제부터 이걸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손을 대야 한다고.

"이거요?"

그렇게 꺼내든 스킬룬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그렇게 엄청난 겁니까?"

그가 보기엔 그리 대단해 보이는 게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뭔지도 몰랐다.

몸이 얼음으로 바뀐다, 신비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위력은 제대로 상상되지 않은 탓.

그에 대한 설명은 이수연운 해줬다.

"아포칼립스가 시작되기 전에도 헬의 축복 스킬룬이면 현존하는 거의 모든 아이템과 1대1 거래가 가능했어. 사우디아라비아 애들은 헬의 축복 스킬룬을 팔면 아람코 지분을 준다고 했고."

"아람코요? 아람코 3천조짜리 회사 아닙니까? 그거 지분을 준다고요?"

"1퍼센트인가 그랬을 걸? 나도 잘은 모르겠네. 그런 거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그 설명에 이영후는 이해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그리고 이걸 거래한다는 게 얼마나 미친 일이지.

말 그대로였다.

범닭의 알만으로도 지금 어비스넷이 요동을 치고 있는데, 그보다 더 대단한 게 등장했다?

심지어 이걸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걸로 거래를 한다?

과연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질까?

김지운 역시 알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영후, 이걸 어비스넷에서 거래할 수 있나?"

더군다나 지금 상황에서 이 정도 되는 물건을 거래할 수 있는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우리 위치가 들키지 않고."

그리고 그 장소는 여러모로 우려가 많았다.

"아, 그건 문제없습니다. 어비스넷에 접속한 유저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건 어비스넷 관리자랑 우리가 사용하는 위성의 관리자들뿐인데 그 추적도 기본적으로 접시에 부여되는 코드를 따라가는 겁니다."

"그럼?"

"접시 하나 포기하실 생각하시면 우리 위치가 걸릴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물론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결국 위성을 이용하는 거라서 위치 세탁에 한계가 있긴 하지만······ 솔직히 그 관리자 양반들이 얼마나 이걸 파고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럴 여유가 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그쪽도 살아남기 급급할 거 같은데."

그 설명에 김지운은 고민하지 않았다.

"거래글을 올린다."

어비스넷을 이용하기로.

"닉네임은 뭐로 할까요?"

"헬의 축복."

"예?"

"간단하다. 헬의 축복이라고 닉네임을 정한 후에 스킬룬 거래합니다, 라고 글을 올린다. 그 의미를 파악도 못하면 어중이떠중이란 의미. 만약 헬의 축복이 있으면 뒤에 숫자를 추가로 붙인다. 123, 이런 식으로."

그리고 어떻게 이용할지도 이미 머릿속으로 구상이 끝난 상태였다.

"이야, 빠르네, 빨라. 그걸 이미 계산해둔 거야?"

그 모습에 이수연이 감탄을 내뱉었다.

"난 또 이번에는 닉네임으로 민트생크림케이크 같은 거 쓸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네."

이어진 그 말에 김지운과 이영후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행동에 나섰다.

다행히도 접시를 가지러 다시 관악산에 갈 필요는 없었다.

이미 김지운이 올 때 다섯 개 정도를 챙겨왔으니까.

이어서 이영후가 세팅을 했고, 바로 글을 올렸다.

[제목 : 스킬룬 거래합니다.]

[작성자 : 헬의축복123]

[내용 : 스킬룬 거래합니다. 물물교환만 가능. 거래 가능 지역, 물건 적어서 쪽지 주세요.]

담백하기 그지없는 글을.

너무나 담백해서 그냥 무관심 속에서 묻힐 것 같은 글.

심지어 지금 이 시점은 압구정 로데오 거리로 한국게시판이 불이 난 상태였다.

결국 이 불이 꺼지고 나중에 누군가가 헬의 축복으로 검색을 하면, 그제야 접촉이 올 터.

"대장, 아마 시간 좀 걸릴 것 같네······."

그때였다.

띵!

이영후의 노트북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띵!

띵!

띵!

쪽지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를.

그것을 본 이영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반면 김지운과 이수연은 달랐다.

'헌터라면 헬의 축복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별이 많을수록 더더욱.'

예상한 바.

"와, 대장! 미친 듯이 옵니다. 심지어 상당수가 외국에서 온 쪽지들입니다!"

반면 이영후는 쪽지를 읽으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지금 영국하고 어떻게 거래를 해? 응? 진짜 영국에서도 쪽지가 왔네요. 보십시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에이, 진짜. 어디서 장난질이야!"

하지만 이내 이영후는 깨달았다.

보내는 쪽지 중 상당수는 장난임을.

물론 그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라는 흔적을.

즉, 존재감을 보여준다는 의미였고, 보내는 입장에서도 제법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이었다.

흔적을 남기면 역으로 추적되거나 꼬리가 밟힐 수도 있으니까.

"외국 건 전부 무시해도 좋다."

그러나 김지운은 그런 시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결국 실질적인 결과가 중요했으니까.

"어차피 거래 가능 지역은 한국 한정이다."

이어진 말에 이영후가 말했다.

"저기 대장, 너무 장난질 같은 건 배제할까요?"

"장난질?"

"아니,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걸 주겠다고 하는 쪽지도 상당해서요. 보십시오."

그리고는 노트북을 보여줬다.

"얘는 텔레포트 스킬이랑 바꾸자고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장난질 아닙니까? 텔레포트 스킬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 상태에서 이영후는 볼 수 있었다.

김지운과 이수연의 표정이 진지해진 것을.

"······있는 겁니까?"

"있다."

이어진 말에 이영후가 그대로 굳었다.

설마 텔레포트 스킬이 있을 줄이야?

물론 스킬이 있다고 해서 이 거래를 하는 쪽이 가지고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가능성은 낮았다.

헬의 축복이 화려한 장난꾼들에게 꿈의 스킬이라면, 텔레포트는 음험한 사기꾼들에게 환상의 스킬이었으니까.

김지운 역시 텔레포트 스킬을 사용하는 헌터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추측할 뿐이었다.

텔레포트 스킬을 쓴 것 같은 헌터가 있음을.

그쯤이었다.

"야, 디저트킬러."

이수연이 말했다.

"술 좀 가져와. 위스키로."

그 말에 이영후가 더 굳은 표정으로 이수연을 바라봤다.

이런 엄청난 상황에서 술이라니, 술에 정말 미친년인건가? 하는 표정으로.

반면 김지운은 달랐다.

바로 캐치했다.

"아는 게 있는 모양이군."

이수연이 요구한 건 정보료란 것을.

"이영후, 지금 여기 술은 없나?"

"어, 그게······ 물자 모아둔 곳에 제법 있긴 합니다. 특히 고급 술은 따로 모아뒀습니다."

"오, 그래? 좋네. 맥캘란은 없어?"

"30년 몇 병 있었습니다."

"2병 챙겨놔. 집 갈 때 가져가게. 안주도 좀 넣어주고. 아, 안주로 케이크 넣지마. 나 그건 별로니까."

그쯤에서 김지운이 나섰다.

"알고 있는 게 있나?"

"우리나라에서 텔레포트 스킬룬을 가진 인간을 알고 있지. 참고로 디저트킬러도 잘 아는 얼굴일 거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얼음으로 장난을 잘 치는 헌터니까."

"자, 잠깐만요!"

그에 대한 대답은 이영후의 입에서 나왔다.

"서, 서리군주 말씀하시는 겁니까? 별 다섯 개를 가진 최강의 얼음놀이꾼?"

그 설명에 김지운은 살짝 의문을 품었다.

그가 아는 이들 중에서 서리군주라는 이름을 가진 헌터는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서리군주는 최근에 지가 지은 별명인거고, 원래 별명은 따로 있었어. 아마 디저트킬러는 그 별명으로 알 거야."

그제야 비로소 김지운은 떠올렸다.

"빙신."

"그래, 빙신."

그리고 그를 떠올리는 순간 김지운은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헬의 축복을 가장 먼저 습득했던 헌터였지.'

이번에 온 쪽지가 생각보다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쪽지 보낸 이의 닉네임이 뭐지?"

"어, 어, 그게······ 신의물방울입니다. 와인 좋아하나보네요?"

그리고 이어진 닉네임을 보는 순간 이제 김지운과 이수연은 확신할 수 있었다.

"빙신 맞네."

56화 16화. 중고거래 (2).

3.

어비스의 헌터들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극비리에 취급됐고, 그래서 어지간한 헌터들, 별을 가진 헌터들도 그 정보가 헌터들이나 관광객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달리 말하면 이름이 알려진 헌터들은 그 존재감이 보통 헌터와 차원이 다른 이들이었다.

퍼스트 킬러의 경우에는 그냥 그 행보가 모든 어비스 헌터들 중에서 독보적이었다.

불의 마녀 같은 경우에는 몬스터를 학살하는데 있어서는 어비스 헌터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했다.

서리군주도 마찬가지였다.

"서리군주라면 혼자서 리자드 킹 무리를 사냥한 최강의 얼음장난꾼 아닙니까?"

혼자서 사냥은커녕 어비스를 산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화려한 장난꾼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옐로우 클래스의 보스 몬스터인 리자드 킹과 그 리자드맨 무리를 상대했다는 것.

그 외에도 서리군주는 무수히 많은 몬스터 무리를 홀로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행보에 많은 어비스의 헌터들과 관광객은 감탄 그리고 존경과 동경을 보냈다.

서리군주의 모습은 로망이었으니까.

"그래, 빙신 대단하지."

그런 위대한 헌터를 김지운과 이수연은 빙신이라고 하고 있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물론 그건 서리군주를 바보 취급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빙신이라고 이름 붙인 건 본인이니까."

"본인이요?"

"초창기에는 헌터가 얼마 없어서 다들 내키는 대로 별명 붙였거든. 개나소나 왕이고, 마녀고, 스페셜리스트였는데 걔가 그걸 보고 같잖은 새끼들하고 동급 취급 받을 순 없다고 해서 자기를 신이라고 불렀어. 갓 오브 아이스라고. 그래서 우리는 빙신이라고 불러줬지."

"아."

"그러다가 재작년부터인가 갑자기 서리군주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다니더라고."

이수연은 거기까지만 말해줬다.

"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수연과 김지운이 서리군주를 빙신으로 불러도 서리군주가 딱히 무어라 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하튼 빙신이 텔레포트 스킬 가진 거 맞아."

"증거는?"

"세 달 전에 나한테 접근했거든. 텔레포트 스킬룬이 손에 들어왔는데 살 생각 없냐고."

그쯤에서 이수연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솔직히 탐나긴 했어. 하지만 포기했어. 확실히 대단한 스킬이지만 내가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른 클랜들도 마찬가지였어. 다들 관심은 높았지만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지."

"별을 가진 헌터의 그 귀한 스킬 슬롯에 채울 가치가 있는가."

"그래, 맞아."

별을 가진 헌터들, 그러니까 50레벨 이상에 이른 헌터들에게 스킬 슬롯의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50레벨에서 60레벨에 도달하는 것은 헌터들 사이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헌터가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그게 걸맞은 클래스의 몬스터를 잡아야 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50레벨에 이른 헌터들이 스킬 슬롯에 텔레포트를 넣는다?

쉽지 않은 일.

"50레벨이 넘는 헌터들 중에 스킬 슬롯을 여분으로 남겨두는 헌터는 없지."

정확히는 슬롯이 남는 헌터가 사실상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스킬을 이제 막 헌터가 된 애송이들에게 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반면 지금은 달랐다.

아포칼립스 세상이 된 지금 지구에서는 텔레포트의 값어치는 어비스 때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결정은?"

"바꾼다."

저울질을 해도 손해볼 건 없었다.

"빙신이라면 더더욱."

무엇보다 거래 상대가 서리군주라는 게 가장 매력적이었다.

"그래, 빙신은 믿을 만하지. 또라이 새끼는 아니니까."

제아무리 텔레포트 스킬룬이 탐난다고 하더라도 흑랑 클랜 같은 승냥이들에게 헬의 축복을 줄 수는 없는 일.

'빙신이 흑랑 클랜과 손 잡는 일은 없다.'

특히 그 흑랑 클랜과 관련해서 김지운은 한 가지 확신을 품을 수 있었다.

'나 다음으로 흑랑 클랜을 많이 잡은 헌터니까.'

여기서 이제 저울질은 끝이었다.

어차피 김지운이 스킬룬 주인이고, 그가 거래를 하겠다고 하면 이야기는 끝난 상황.

남은 건 방법이었다.

"그런데 거래는 어떻게 하죠? 이 정도 되는 물건을 그냥 던져서 거래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김지운이 이수연을 바라봤다.

"아직도 김포에 살고 있나?"

"맞아. 거길 어떻게 떠나겠어?"

"김포요? 서리군주가 김포에 삽니까?"

그 둘의 대화에 이영후가 조금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 정도 되는 헌터라면 돈에는 구애받지 않는 인간이고, 대개 그런 인간들은 서울 중심에 살기 마련인데 김포에 산다니?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

"말했다시피 와인애호가거든. 그래서 김포에 집을 만들었지. 땅을 거의 한 1만 평 산 다음에 지하 몇십 미터 아래에 1천 평짜리 방공호를 만들었어. 정확히는 1백 평짜리 방공호를 10개 연결한 거지만."

이어진 설명에 이영후가 더 놀란 반응을 보였다.

와인애호가들이 와인을 보관하기 위해 지하 창고가 딸린 집을 산다는 것은 들었지만 방공호가 나오다니?

그 반응에 이수연이 옅게 웃었다.

"나도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냐고 물었는데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핵이 떨어져도 와인을 지키기 위해서래."

그 대목에서 이영후는 '아니, 그럼 핵이 떨어질 가능성이 가장 낮은 미국으로 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와인 컬렉션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군요."

"전 세계 제일 비싼 와인들은 다 걔 창고에 있을걸?"

"그 정도입니까?"

"헌터로 번 돈 죄다 와인 사는데 썼으니까. 그리고 관광객들이나 후원가들에게 받은 선물도 엄청나니까."

선물이란 말에 이영후는 이해했다.

서리군주의 컬렉션이 세계 최고라고 하는 이유가.

어비스에 미친 관광객들 중에는 이영후를 그냥 동네 장사 좀 잘 되는 고깃집 사장님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만큼 부자들이 있었고, 그런 부자들에게 몇십억짜리 와인은 일반 회사원들이 면세점에서 보는 10만 원 대 위스키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런데 별 다섯 개짜리 헌터가 와인을 좋아한다?

그것도 그 명성이 넘치는 서리군주가?

그 천 평짜리 와인 창고를 채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터.

"특별한 일 없으면 자기 집에서 지내니까, 아마 지금도 김포에 있을 확률이 높아."

어쨌거나 김지운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여의도에서 김포까지 거리가 짧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다른 지역인 것보단 나았으니까.

"확실한 건 아니지만."

물론 이 모든 건 추측일 뿐, 해서 김지운은 쪽지를 보냈다.

[거래 위치는?]

그 쪽지에 답변이 왔다.

[김포국제공항 활주로. 정해진 좌표로. 3일 후 정각. 10분까지만 기다려주겠다.]

4.

어비스의 안개와 몬스터가 세상을 덮쳤을 때 세상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한 채 그 아포칼립스를 마주해야 했다.

단, 전부는 아니었다.

아포칼립스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비행기 탑승자들이었다.

어비스의 안개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그들은 어비스 아포칼립스가 일어나는 순간을 방관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축복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포칼립스를 마주한 이들 중에서 가장 운이 없는 이들이었다.

일단 그들이 착지해야 하는 공항들은 짙은 안개로 기본적인 기능조차 마비된 상황.

여기에 관제탑에 있는 직원들은 이들은 대부분이 어비스 좀비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착륙을 한다?

어비스의 안개 속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그 어떤 기장도 그 순간 그런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무언가 상황이 풀리기를 바라면서 다른 공항을 알아보거나 혹은 하늘을 떠다니는 것뿐.

그러다가 연료가 떨어진 후에는 결국 다시 마주해야 했다.

어비스의 안개를.

그 후의 결과물은 뻔했다.

첫 착륙한 비행기는 나름 잘 착륙했겠지만, 문제는 활주로에 착륙하는 순간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어비스 안개를 조우했다는 점이었다.

광기와 분노에 물든 조종사가 비행기를 활주로에서 치우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그다음 번에 착륙을 시도한 비행기는 자신과 같은 비행기를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마주침이 거듭됐고, 공항의 활주로는 그야말로 비행기의 무덤이 되어 있었다.

지금 전 세계 대부분의 공항들은 그런 상태였다.

김포국제공항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김포국제공항은 다른 공항들보다 훨씬 더 상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김포국제공항과 제주국제공항을 오고가는 비행기 노선은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많은 바.

당연히 사고에 휘말린 비행기의 숫자는, 그 참사에 기록될 비행기의 숫자 역시 전 세계 어느 곳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김포국제공항의 활주로는 물론 공항 전부가 비행기들의 잔해로 뒤덮여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사실상 김포국제공항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비스 좀비가 거의 없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참사였는지는 김포국제공항에 있는 어비스 좀비의 숫자가 보여줬다.

결코 적지 않은 이들이 있었을 연말의 김포국제공항임에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는 어비스 좀비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몬스터도.]

몬스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포칼립스가 시작됐을 때 거듭된 비행기의 추락과 충돌은 이곳에 등장했던 어비스의 몬스터들조차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그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는 땅이라는 의미.

[왜 중고거래 장소로 여기를 잡았는지 알 만하네.]

반대로 그렇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이곳보다 안전하게 거래를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물론 그 안전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일 뿐 위험한 건 분명했다.

특히 이 거래 자체가 위험했다.

[진짜 약속 장소로 갈 거야?]

아무리 여러 정보가 서리군주를 말해준다고 해도,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

또한 서리군주가 이번 거래에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결정적으로 김지운과 이수연의 정체를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김지운과 이수연 역시 정체를 알리지 않았다. 쪽지라는 제한적인 방법을 통해서 신뢰를 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때문에 말해준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헌터답게.]

그렇기에 김지운은 움직였다.

[사냥감을 찾는다.]

약속된 장소가 아니라 서리군주를 찾기 위해서.

현재 시각은 정각.

주어진 시간은 10분.

그 안에 못 찾으면 서리군주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제로로 만들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김지운 역시 그 안에 서리군주를 먼저 찾고, 그가 서리군주라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거래를 굳이 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중고 거래는 그랬다.

작은 여지가 있으면 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렇게 김지운이 김포국제공항을, 안개로 자욱한 그곳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그리고 조용하게.

이윽고 12시 8분이 됐을 때 김지운은 찾을 수 있었다.

'저기.'

먼 발치에서 숨 죽인 채 약속 장소를 지켜보고 있는 코트를 입은 사내의 모습을.

'빙신 맞군.'

그 사내가 서리군주임을 확신하는 순간, 그 순간 김지운은 적당한 거리에서 인기척을 냈다.

스윽!

그리고 그 인기척을 느끼는 순간 서리군주가 그대로 굳더니 이내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항복 제스처를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서리군주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노리고 온 누군가에게 뒤를 잡힌 셈이었으니까.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협조를 해야 한다는 의미.

김지운은 그런 서리군주와의 거리를 좁혔고,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서리군주가 입을 열었다.

"거래는 거래다. 날 죽여도 물건을 건네줄 수 없다."

각오를 내뱉었다.

"네가 누구든 간에."

그러면서 말했다.

"참고로 나는 퍼스트 킬러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았었다."

자신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런 각오에 김지운이 대답했다.

"그랬었지. 한 번은."

그리고 그 대답이 나오는 순간 서리군주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윽고 김지운의 얼굴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순간 서리군주가 입을 열었다.

"귀, 귀신!"

"쉿!"

그때 경악하는 서리군주를 향해 이수연이 나타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마녀?"

"조용히 해 빙신아."

그 등장에 거듭 놀라는 서리군주.

그때 이수연이 김지운을 바라봤다.

"어때? 대화해도 되겠어?"

이곳은 어비스의 안개,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감각에는 그 무엇도 잡히지 않았으니까.

그쯤에서 서리군주는 상황을 이해했다.

"맙소사. 살아있었어?"

자신의 중고 거래 상대가 누구인지.

"아니지, 살아있겠지. 아무렴. 퍼스트 킬러가 죽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리고 바로 상황을 납득했고, 납득하는 순간 서리군주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어졌다.

"아, 신이 나를 돕는구나."

가장 믿을 수 있는 거래 상대가 등장했으니까.

물론 그건 김지운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이다, 빙신."

김지운의 그 인사에 서리군주의 미소가 흔들렸고, 그것을 본 이수연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왜? 빙신이라고 하니까 기분 나빠? 아이스 오브 갓, 빙신 맞잖아?"

"······거, 오랜만에 만났는데 꼭 사람 속을 뒤집어야겠어?"

"그래서 꼬와?"

"아니, 꼽다는 건 아니고······."

거기까지였다.

서리군주는 그 이상 무어라 항변하지 못했다.

알았으니까.

이 둘을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 젠장. 어비스 몬스터들은 뭐하는지 몰라, 이 빌어먹을 년을 안 데려가고."

그렇게 짧게 푸념을 뱉은 서리군주를 향해 김지운이 말했다.

"긴 이야기는 필요 없다. 원하면 서리군주든 빙신이든, 아니면 본명인 김영훈이든 어떤 표현으로도 불러주겠다. 어차피 이곳에 서로 이름이나 부르려고 온 게 아니니까."

그리고는 김지운이 스킬룬을 꺼냈다.

"헬의 축복이다."

그것을 본 김영훈의 눈빛도 바뀌었다.

"이미 한 번 먹어본 적 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터."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서 이 스킬룬의 값어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헌터가 그였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본 김영훈은 손을 뻗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것을 본 김지운은 바로 눈치 챘다.

"안 가져왔군."

그 순간 나선 것은 이수연이었다.

"야, 말 똑바로 해. 빙신이 텔레포트 가지고 있다고 말한 건 나니까."

만약 김영훈이 텔레포트 스킬룬을 가진 게 아니라면 그에 대한 책임은 이수연도 짊어져야 했으니까.

김영훈 역시 바로 상황을 설명했다.

"가지고는 있어."

"장소는?"

"집에 있어."

그 대목에서 이수연이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게 더 위험한 일.

반면 김영훈의 집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지간한 곳보다 안전한 곳이었다.

김지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문제 없네."

이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집에 가서 와인도 한 병 따자고. 내가 골라도 되는 거지?"

"어, 그게. 문제가 없진 않아."

그쯤에서 김영훈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집 마당에 리틀 오우거가 있거든."

57화 16화. 중고거래 (3).

5.

"아니, 무슨 집 앞마당에 리틀 오우거를 키워?"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뱉는 이수연.

물론 이수연은 알았다.

"내가 키우고 싶어서 키웠겠냐?"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몬스터를, 그러니까 도그블린이나 오크, 코볼트 같은 걸 키우는 미친놈은 있을지언정, 리틀 오우거를 키우는 미친 놈은 없을 거라고.

오우거란 몬스터는 그런 몬스터였다.

"그것도 그 지랄 맞은 리틀 오우거를?"

다른 몬스터들과는 차별화 될 만큼 그 성격이 흉폭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흉포함은 일반인들의 상식 수준과는 아득히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기본적으로 어비스의 몬스터들은 흉포했다. 눈앞에 뭔가 거슬리면 그냥 눈이 돌아갈 정도. 그런데 오우거는 그 이상이었다. 다른 몬스터들이 건드리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것과 달리 오우거는 항상 자신의 폭력성을 풀어낼 시비거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당연히 김영훈이 일부러 키우는 몬스터는 아니었다.

"갑자기 연락이 끊기고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에 준비해서 밖으로 나가보니까 안개가 보이더라고."

그건 흔한 이야기였다.

"레드존이. 그때 눈치 까고 바로 가지고 있던 아이템 챙기고, 호흐프 열매 먹고 주변을 탐색했는데."

12월 31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마주한 흔한 이야기.

"하필 리틀 오우거 새끼가 내 집근처에 있더라고. 씨발."

단지 김영훈은 조금 더 재수가 없었을 뿐.

"일단 당연히 튀었지."

여기서 김영훈은 바보 같이 집으로 돌아가거나 그러지 않았다.

알았으니까.

"리틀 오우거 영역에서 각성도 안 한 상태로 싸울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어비스에서 살아남은 방법을.

"여하튼 거기서 오아시스 찾아 움직이다가 운 좋게 오아시스 지역을 확보했고, 다행히도 내가 아이템하고 위성 전화기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지."

그 후의 이야기는 다른 생존자들의 이야기와 비슷했다.

"이후 일단 몸 사리면서 레벨 올리고 파밍하고 있는데, 그때 때마침 그 글이 올라온 거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구라 같아서 반신반의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데, 도박 좀 한 번 해봤지."

이야기를 마친 김영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그에게 이수연이 말했다.

"새끼, 약한 척 하지 말고. 결국 구라친 거잖아?"

차갑게.

"중고 거래하면 제대로 물건을 가져와야지. 못 들어가는 게 무슨 집이야?"

하지만 이건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김지운과 이수연 그리고 김영훈, 이 셋은 나름 인연이 깊었다.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서 경력이 긴 편에 속했고, 클랜은 다르지만 서로 힘을 합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지 않으리란 믿음.

그런 의미에서 김영훈은 상대방을 속였다. 가지고 올 수 없는 물건을 팔려고 했다.

"아무렴, 알지."

김영훈도 그 사실을 알기에 바로 제안했다.

"이제 거래 내용을 바꿔야 한다는 거."

김영훈이 김지운을 바라봤다.

"집으로 들어가면 텔레포트 스킬룬이 있을 거야. 그거랑 내가 놓고 온 아이템 좀 가져다 줘. 그럼 텔레포트 스킬룬 줄게."

중고 거래에서 의뢰로.

"헬의 축복은?"

"당연히 사야지."

물론 여기서 김영훈은 헬의 축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집에 있는 것들보다 헬의 축복이 더 중요했다.

"자신 있게 말하지."

그렇기에 김영훈은 꺼냈다.

"이건 킬러랑 마녀, 너희 둘도 본 적 없는 아이템일 거다."

붉은빛 액체가 담긴 고급스럽기 그지없는 크리스털 병을.

"그게 뭔데?"

그것을 본 이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김지운은 대답했다.

"······흔들어 봐라."

그 대답에 도리어 김영훈이 놀랐다.

"너 설마 알아?"

놀라면서 이내 김영훈이 병을 흔들자 붉은빛 액체의 색깔이 주황빛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한 번 더 흔들자, 노란빛으로 변했다.

마법처럼.

"무지개꽃이군."

"······이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

그쯤에서 이수연이 되물었다.

"둘이만 이야기하지 말고 설명해 주면 안 돼?"

"어비스에서 구할 수 있는 무지개꽃이다. 꽃잎 개수가 저마다 무지개색으로 빛나지. 그리고 먹으면 스킬 랭크가 영구적으로 상승한다. 꽃잎 개수에 따라서."

"영구 상승? 무지개색? 잠깐만. 그러면 무지개가 7개니까, 꽃잎이 최대 7개란 거네? 그럼 7개짜리 먹으면?"

"S랭크다."

그 대답에 이수연이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스킬 랭크가 S랭크에 도달한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

당장 이수연만 하더라도 아포칼립스가 되기 전까지 S랭크에 도달한 스킬은 단 두개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고작 아이템의 힘으로 영구적으로 만든다?

물론 김지운은 알았다.

"하지만 일곱 개짜리는 구할 수 없다."

"못 구해?"

"무지개꽃은 자라나는 환경에 영향을 받으니까. 보랏빛 꽃잎을 보려면 퍼플 존에 가야지."

그쯤에서 김영훈이 몇 번 더 크리스털 병을 흔들었고, 이내 색이 크리스털 병의 액체 색이 바뀌었다.

남색으로

"인디고 존에 구했군."

"첫 모험의 성과치고는 매우 운이 좋았지."

그쯤에서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인디고 등급의 무지개꽃이라면 스킬 하나의 랭크를 영구적으로 A랭크로 만들어주는 소비 아이템.

김지운은 망설이지 않고 헬의 축복 스킬룬을 건네줬다.

이 거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자, 그럼 다음 거래로 넘어가자고. 우리집 말이야."

서리군주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6.

김포시 고촌읍.

김포국제공항과 가까운 그곳은 다른 김포시 지역보다 허허벌판이 개발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김포국제공항과 가까운 탓이었다.

비행기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공항 주변 지역에서는 개발이나, 건물을 올리는 데에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제약이 걸렸으니까.

"수도권 내에서 1만 평짜리 남아도는 땅이 있는 곳은 여기를 포함해서 얼마 없더라고."

그 때문이었다.

"물론 지방도 생각하긴 했는데, 클랜에서 반대하더라고. 최소한 문제 생기면 헬기 타고 30분 안에 서울 안에는 들어오는 곳에 있으라고. 그것 말고도 인천공항을 이용해야 할 일도 많고, 여러모로 선택지는 많지 않았지."

김영훈이 김포시 고촌읍에 집을 지은 이유는.

"나쁘진 않았어. 주변이 개발도 안 되고, 개발될 가능성도 매우 낮았거든. 개발되려면 김포 공항이 사라져야 하는데 그게 되겠어? 여하튼 조용하고, 여러모로 좋았지."

그리고 그 선택에 김영훈은 만족했었다.

"그 빌어먹을 리틀 오우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하지만 아포칼립스 세상이 되는 순간 그 선택이 처음으로 후회됐었다.

"그냥 그때 여의도에 빌딩 하나 사서 벙커로 개조하는 게 나을 뻔했어."

다른 후보지를 고르지 않은 게 후회가 될 정도.

"응? 여의도 어때? 괜찮을 것 같던데. 들어보니까 용산 쪽도 지랄 났고, 압구정하고 청담 쪽은 난리도 아닌 거 같던데?"

"좋은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곳에는 생존자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하긴, 사람이 있어야 소식이라도 터지는 거니까. 여하튼 미칠 노릇이라니까."

여러모로 후회로 가득 찬 김영훈.

달리 말하면 리틀 오우거란 몬스터는 그 만큼 골치가 아팠다.

아무리 모든 능력치가 초기화됐다고 하나 김영훈은 별을 다섯 개나 가진 헌터 서리군주였다.

또한 그는 밖이 어비스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때 그냥 무작정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집 안에서 쓸모 있을 만한 물건들을, 당장 쓸 수 있는 아이템들을 전부 가지고 나왔다.

당연히 헌터로 각성하는 순간, 그의 능력치는 일반 헌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진 상태.

또한 어비스에서 어지간한 헌터들과는 감히 비교가 무색할 만큼 뛰어난 사냥 능력과 생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금 부족하나마 위성 통신을 통해 어비스넷도 이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건 곧 그가 속한 도깨비 클랜과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틀 오우거를 지금까지 어찌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리틀 오우거, 애초에 그 새끼는 레드 클래스도 아닌데 레드 클래스로 분류되고 지랄이야."

리틀 오우거.

이 표현이 붙는 건 그저 단순히 일반적인 오우거들보다 작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작긴 했다. 보통 오우거들이 5미터부터 덩치가 시작되는 것에 비해 리틀 오우거는 3미터에서 4미터 사이였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오우거가 오렌지 클래스 몬스터인 것에 비해 리틀 오우거는 레드 클래스, 즉 레드존에서도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게 매우 골치 아픈 부분이었다.

클래스가 높아질수록 강해지지만, 그만큼 낮은 등급의 존에서는 활동이 힘들어졌으니까.

더불어 말이 리틀 오우거지, 오우거 특유의 강함과 폭력성은 결코 리틀이 아니었다.

"심지어 주변의 레드존은 우리 집뿐이더라고. 이게 날 엿 먹이려고 하는 건지 말이야."

반면 레드존이 김영훈의 집뿐이기에 리틀 오우거는 그곳을 쉬이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즉, 그곳이 리틀 오우거의 집이 된 셈.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여하튼 문제는 하나야."

결국 모두가 마주해야 하는 정답은 하나뿐이었으니까.

"리틀 오우거 놈의 포스를 견디는 것."

리틀 오우거는 사실상 오렌지 클래스의 몬스터였고 그런 놈의 포스를 버티기 위해서는 최소한 20레벨을 넘어야 했다.

그게 이제까지 리틀 오우거를 어찌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또한 리틀 오우거가 골치 아픈 이유이기도 했다.

포스란 분노의 표출이고, 적의의 표출이었다.

그리고 보통 몬스터들이 분노와 적의를 표출하는 것은 위험을 느끼거나 적을 발견했을 때뿐이었다.

항상 화가 나있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 리틀 오우거는 항상 화가 나 있었고, 자연스레 놈은 항상 포스를 분출하고 있었다.

김영훈 입장에서는 사냥은커녕 리틀 오우거를 중심으로 반경 5백 미터 안에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따름.

그게 이제까지 리틀 오우거를 어찌하지 못한 이유였다.

그리고 김영훈은 솔직히 지금 시점에서 리틀 오우거를 어찌할 수 있는 헌터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포스의 벽이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했으니까.

"그래서 킬러, 가능하겠어?"

그러나 김지운이라는 사실이 김영훈을 기대케 했다.

퍼스트 킬러, 어비스에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가장 먼저 이룩했던 이가 김지운이었으니까.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별말 하지 않았다.

"열쇠."

그 요청에 김영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스윽!

다름 아니라 단검을.

푸홧!

그렇게 꺼낸 단검으로 김영훈은 그대로 자신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잘라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영훈은 멈추지 않고 오른손의 모든 손가락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빠득!

김영훈의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조금의 비명도 없이 자신의 오른손 손가락을 전부 잘라낸 후에 입을 열었다.

"지문인식이거든. 그것도 다섯 개 전부."

그 말을 뱉은 김영훈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그 순간 손가락이 전부 잘린 김영훈의 오른손이 얼음 덩어리로 변했고, 이내 손가락이 다시 자라났다.

헬의 축복이 가진 효과, 원소화 효과였다.

"그래서 이게 필요했단 말이야."

김영훈이 다른 무엇보다 헬의 축복을 원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리틀 오우거의 포스를 버틸 수 없는 김영훈 입장에서는 열쇠인 손가락을 줘야 하는데, 그것을 문제없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헬의 축복 밖에 없었으니까.

"홍채 인식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그 사실에 이수연이 한 마디를 던졌다.

"눈알 뜯어내는 건 훨씬 더 아프잖아?"

그 말에 김영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픈 건 눈알이 덜 해. 근데 좀 느낌이 그렇지. 손가락 잘리는 게 더 익숙하기도 하고."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이.

실제로도 익숙했다.

김영훈의 전투 스타일은 제 몸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하고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얼음 마법을 미친 듯이 난사하는 것이었으니까.

그가 홀로 싸우는 이유였다.

그의 전투 스타일을 옆에서 휘말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헌터는 많지 않았으니까.

동시에 김영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소화 스킬을 가진 장난꾼들 중에서 김영훈만큼 육체 수복이 빠른 이들은 다섯 명이 되지 않지.'

원소화 마법은 결코 무적의, 불사의 마법이 아니었다.

도리어 몸을 수복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김지운의 염력과 같았다. 타고난 재능 그리고 극한의 훈련과 경험이 있어야 김영훈처럼 단숨에 손가락을 수복하는 게 가능했다.

어쨌거나 이로써 열쇠는 확보했다.

이제 남은 건 리틀 오우거를 처리하는 것.

"그래서 방법은?"

"마네킹을 쓸 거다."

"마네킹?"

"무장한 마네킹으로 리틀 오우거를 유인하는 사이 내가 방공호 안으로 들어갈 거다."

그 설명에 김영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럼 리틀 오우거는 어떻게 하고?"

"우리 거래 내용은 리틀 오우거를 처리하고 네 집에서 물건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었다."

"어?"

이어진 설명에 김영훈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상황을 이해한 듯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이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빙신, 너 낚인 거야."

그 놀림에 김영훈은 무어라 항변할 수 없었다.

그 역시 김지운에게 단 한 번도 리틀 오우거를 처치해달라고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을 해도 처리해달라고 말했을 뿐.

무엇보다 김영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거래를 하지 않겠다?

그리 말하면 김지운은 대답할 것이다.

그럼 고르라고.

이대로 그냥 손 빨면서 리틀 오우거가 너네 집 앞마당에 똥 싸는 걸 지켜보든가.

아니면 김지운이란 도둑이 너네 집을 털고 유유히 아이템을 가지고 도망치는 걸 보든가.

결국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우리 집 잘 부탁해."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