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 산 속 옹달샘 >
원래 다정과 나의 계획은 눈썰매로 부천운동장역에 가는 거였다.
하지만 석현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언제 한 번 만나자고. 가급적 빠른 시일이면 좋겠다고.
거기에 직접적인 대면이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다정은 무시하자는 쪽이었다.
"굳이 정보를 줄 필요는 없잖아? 그 할아방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아니야. 이번에는 만나야겠어."
"그 수상한 놈들 때문에?"
"그래.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놈들···분명 대통령도 눈치는 챘을 거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어봐야지."
"직접대면이면 정체가 알려질 텐데?"
"그 양반이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지금쯤은 경매장에 내 정보가 돌아다녔겠지. 입이 무거운 양반인 건 확실해."
"직접 대면하고 정보를 까발리려는 수작일 수도 있잖아?"
"그래서 대통령이 뭘 얻는데? 내 정체를 밝혀 봐야 그 양반은 이득이 될 게 없어."
"하긴···그 할아방탱이 꽤나 냉정하게 계산하는 스타일인 것 같으니까···"
"그리고 내 얼굴을 알아봐야 소용없어. 내가 이마에 강성호, 김밥조아라고 써서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나하고 같이 다니니까 김밥조아라고 광고하는 셈이잖아. 거기에 할아방탱이가 덩치 크고 머리 짧다는 것만 말해버리면."
"날씨가 워낙 추워. 다들 틀어박혀 있는데 누가 우릴 봐?"
"흐음, 그건 그래."
날씨가 개판이라는 게 정체 은닉에 도움이 되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날씨에 다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창문은 꽁꽁 틀어막아서 온기를 최대한 보존하려 애썼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덕분에 나는 다정과 다니면서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얘기.
"날이 풀리면 이제 철사병도 가라앉을 시기지. 나한테 총이 있고 부활 스크롤도 있고 옹달샘까지 있는데 누가 덤벼? 다 쏴죽이고 부활하면 그만이야."
다정은 웃으며 내 등을 토닥토닥했다.
"우리 소심이가 조금은 대범해졌네. 잘 생각했어."
"최대한 조심은 할 거야.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그런 선택지도 있다는 말이지. 얌전한 리트리버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빨을 드러내듯이."
"성호 넌 리트리버가 아니라 광견병 걸린 핏불이야···"
부정은 못하겠다.
근데 난 선공은 안 하잖아.
"그리고 지금 다정이 너 보면 아무도 오리궁뎅이라고 생각안할 걸."
구울도 눈썰매로 달릴 때 외에는 멀리 떨어트려 놓는지라 착각하기 딱 좋다.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곤 울상이 되었다.
"완전 뚠뚠이가 되어버렸지 뭐야."
"그래도 예쁘니까 걱정 마."
"흐흥. 내가 좀 이쁘긴 하지."
그녀는 기분이 좋아져서 내게 1만 포인트를 선물하고 부활 스크롤을 한 장 챙겼다.
내 가슴에 칼을 박은 기억이 떠올라서 안 되겠다고.
"구울 파밍 좀 할 테니까 넌 레벨이나 복구해."
그 외에도 쉘터 정리와 옹달샘 등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어디 보자···"
주승철의 벙커를 턴 것까지는 좋았는데 쉘터가 꽉 차버렸다.
확장을 했는데도 이 지경이다.
"보기만 해도 뿌듯하긴 하네."
샌드위치 패널로 조립된 창고에 얌전히 저장되어 있는 비축물자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혼자서 소비한다면 10년 이상 버티고도 남을 양이었다.
무한대에 가까운 이세계의 자원을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파밍을 그만둘 생각도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 챙겨야지."
도시에서 파밍 가능한 자원은 이 순간에도 줄어들고 있다.
몇 년만 지나도 구경도 못하는 게 많아서 있을 때 챙겨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샌드위치 패널이 없네···"
철조망도 재고가 바닥나서 쉘터를 확장하기가 어려워졌다.
풍뎅이들에게 맡기는 건 시간이 너무 걸리고, 튼튼한 울타리가 필요했다.
"근데 울타리는 약해서···"
벽돌을 쌓는 건 시야가 좁아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차라리 목책을 박아볼까?
나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격언을 떠올렸다.
쉘터 주위에 꾸역꾸역 몰려드는 몬스터가 문제라면 다 죽이면 그만 아닌가?
"원래는 그게 힘들었지만···"
지금의 내겐 수천 발의 총알이 있다.
가능하면 아껴야겠지만, 인천과 부천 지하철역을 털면 뭔가가 나올 것이다.
사실 그것보다는 철조망 밖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는 몬스터를 모조리 쏴죽이고 싶었다.
"개자식들이 누런 이빨을 보여?"
나는 러시아산 AK-74소총에 탄창을 삽탄했다.
철컥.
손질 없어도 영원히 작동한다는 내구성을 가진 소총을 가지니 세상이 내 것만 같았다.
"꺼져 새끼들아."
방아쇠를 당기자 소염기에서 번쩍번쩍 섬광이 튀어나왔다.
탕! 탕! 탕!
5.45mm 소총탄의 위력에 몬스터들이 줄줄이 죽어나갔다.
키에엑!
카악!
"속이 다 시원하네."
몬스터들이 총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달아나는 걸 보면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방심하지 않고 딩고와 딩순이를 데리고 추적해 쏴 죽였다.
그렇게 수십 마리를 작살내고 나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역시 만병지왕은 총이라니까.
철사병만 없었더라도 인류는 몬스터들을 멸종시키고 신세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다 좋은데 뒤처리가 문제로구만."
본 크리퍼가 언제 철조망을 박살낼지 모르기 때문에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야 했다.
"작작 좀 오라고. 나도 편하게 살자."
구덩이에 몬스터의 사체를 밀어 넣으려니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몬스터들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그런 건 없을까?
"좀비 레이드나 이거나 비슷하니까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런 건 검인이 전문인데.
나는 구덩이를 덮고 포크레인을 몰아 쉘터로 돌아왔다.
"덥다 더워."
현실에서 한파가 몰아치는 것과는 정 반대로, 이계의 숲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나는 방검복을 벗고 반팔 차림이 되었다.
튼튼한 육체를 가진 나지만 더위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
포크레인을 주차하고 시동을 끄니 잘 정돈된 텃밭이 보였다.
풍뎅이들이 관리할 때보다 훨씬 넓어졌고 작물의 종류도 많아졌다.
사슴벌레들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현대의 개량된 씨앗은 굉장히 좋아했다.
"그것들의 주인이 나란 말이다."
하여튼 녀석들이 알아서 작물을 키워주니 나로선 쏙쏙 빼먹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현재는 수박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한여름이 되면 먹어 볼 참이었다.
"근데 니들 그만 좀 싸우라고."
나는 한판 붙을 기세인 대장 풍뎅이와 대장 사슴벌레를 멀찌감치 떼어놓았다.
이 녀석들은 다 좋은데 틈만 나면 으르렁대고 싸운다.
싸움도 보통 풍뎅이류의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검과 화살이 오가는 아주 살벌한 싸움인 것이다.
풍뎅이들이 수가 많고 덩치도 크고 튼튼했지만 사슴벌레들은 치고 빠지기의 선수였다.
동굴 앞의 넓은 공터에서 싸우는 걸 보면 무슨 전쟁이 따로 없다.
물론 죽이지는 않지만 나로선 답답한 게 사실이었다.
이제 한 식구인데 왜 그렇게 싸우지?
"니들 전생에 앙숙이었지? 응?"
대장 두 녀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묻자 필사적으로 서로를 외면했다.
여기선 경고를 해줘야겠군.
"3주 동안 황제꿀하고 태양사과 압수."
그, 그것만은!
두 대장이 내 손가락에 매달렸다.
나는 간지러움을 참으며 둘에게 당부했다.
"내가 어? 기분 좋게 쉘터 관리하러 왔는데 니들 전쟁하는 거 구경해야 되겠냐. 3주 동안 안 싸우면 그 때 준다."
대장 풍뎅이는 시무룩해선 땅에 내려갔다.
나는 대장 사슴벌레를 데리고 옹달샘으로 향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퀴퀴한 오물 냄새가 뒤섞여 아주 난장판이었다.
대장 사슴벌레는 오염된 옹달샘을 보더니 앞발로 머리를 붙잡았다.
히에에엑!
그림으로 표현하면 뭉크의 절규 비슷하다.
녀석은 옹달샘에 다가가선 거무죽죽한 액체를 확인하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는데 이렇게까지 했어야 됐냐는 원망의 눈빛이 넘쳐났다.
"내가 한 거 아니야. 일어났더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나는 자세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죽고 부활했다는 소리를 들은 대장 사슴벌레가 깜짝 놀랐다.
정말?
"그렇다니까. 내가 한 거라곤 발견하고 가만히 놔둔 것뿐이라고. 그게 죄가 되냐?"
음···그렇단 말이지.
대장 사슴벌레는 턱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나뭇가지를 들고 그림을 그렸다.
확실히 그림이 예쁘구만.
녀석은 옹달샘으로 흘러가는 어떤 기운을 그려냈다.
"그러니까···이게 기? 기운? 정수? 뭐 그런 건가?"
끄덕끄덕.
사슴벌레의 말에 의하면 이 숲에는 독특한 정수가 흐르고 있단다.
그 정수가 모이는 곳이 옹달샘이고, 매우 희귀해서 다른 곳에선 찾기조차 힘들다고.
"그 정수를 내가 오염시켰으니 되살려야 한다 이건가···근데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
찌릿.
사슴벌레가 나를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 확실히 풍뎅이와는 달리 반항적이군.
나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옹달샘이 원상태로 돌아가면 나야 좋지. 목숨이 하나 더 생기는 거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야 돼?"
녀석은 커다란 나무뿌리에서 수액을 채취하는 그림을 그려냈다.
"나무뿌리치고는 너무 큰데? 이런 게 있긴 있는 거야?"
뿌리 본체도 아닌 모양인데 무슨 건물만 하다.
녀석은 내 말을 무시하곤 뿌리에 상처를 내는 날카로운 조각을 그려냈다.
이거 문양이 엘레멘티움 재질인데?
엘레멘티움은 에메라스와 비슷한 재질로 전투용으로는 별로지만 색이 다채롭다는 특징이 있다.
빨간색, 파란색 등 천연색의 엘레멘티움이 나와서 룩 꾸미기엔 최고였다.
그걸로 사냥하는 놈은 고인물밖에 없지만.
"이걸 어디서 구하냐···"
녀석은 내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더니 설산의 북쪽 광산을 가리켰다.
여기 풍뎅이들이 가르쳐준 곳이었지.
"여기 엘레멘티움 있을지도 모른다고?"
끄덕끄덕.
그럼 가봐야겠지.
나는 쉘터로 돌아와 장비를 챙겨 대장 사슴벌레와 함께 설산으로 향했다.
ATV로 숲에서 벗어나자 따사로운 햇살에 비춰진 설산이 드러났다.
초원을 달리는데 계곡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바로 옆을 신나게 뛰어갔다.
거 참 빠르구만.
.
.
.
나는 검은 숲의 동굴을 찾았다.
각종 희귀한 광물이 있을 거라는 풍뎅이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동굴 벽면에 각종 원광이 반짝거렸다.
"이야···죽이는데."
엘레멘티움은 보이지 않았지만 발광석이 특히 많았다.
점화석도 작게 박혀 있는 것 같고 흑탄은 넘쳐났다.
나는 플래쉬로 안을 확인했다.
"둥지는 아닌 모양이고."
벽과 바닥은 다행히 무른 재질이라 쉽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깡! 깡!
시끄러운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나는 간만에 땀을 빼며 작업에 열중했다.
캐낸 원광을 대장 사슴벌레가 굴려서 주머니에 넣었다.
녀석은 풍뎅이와 달리 금속을 추출하는 능력은 없었다.
대신 원광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흰 펜을 들고 돌아다니며 표시하면 거기가 바로 곡괭이질을 할 장소였다.
나는 몇 시간에 걸쳐 곡괭이질을 한 끝에 엘레멘티움 덩어리를 하나 찾아냈다.
"진짜, 더럽게, 안, 나오네."
여러 개의 주머니엔 발광석이며 점화석, 흑탄 등이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에메라스와 미스릴, 아다만트 등 각종 희귀 원광까지 몇 개 쌓였다.
"이거 무기로 가공해서 팔면 포인트 장난 아니겠는데."
다정이 1만 포인트를 선물해줘서 한시름 덜었지만 왠지 욕심이 났다.
3티어 상점이 열리기 전에 포인트를 적당히 모아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밖을 쳐다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적당히 하고 나무뿌리를 찾아야지.
나는 주머니를 ATV 적재함에 싣고 대장 사슴벌레와 광산을 떠났다.
나무뿌리가 있을만한 곳은 하필 검은 숲이라서 상당히 위험했다.
예전에 풍뎅이와 사슴벌레를 발견한 곳보다 훨씬 북쪽이었다.
거대한 늪지대에 온갖 몬스터가 우글거렸고 독무를 내뿜는 식물 몬스터까지 도사리고 있었다.
어설프게 들어가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곳이다.
끼이이익!
나무 위에서 돌원숭이들이 무언가에 쫓기는 소리가 들렸다.
위를 스윽 보니 블랙 서펜트였다.
그리 크지 않은 뱀 몬스터인데 독을 수 미터까지 뿜어낼 수 있어 대단히 위험했다.
"뱀 주제에 날기까지 하지···"
날개는 없지만 몸통에서 피막을 펼쳐서 활강하면 수십 미터는 우습게 날아간다.
"꼭 이런 곳에 나를 데려와야 했냐."
대장 사슴벌레를 쿡쿡 찌르자 녀석은 본 체도 않고 방향을 가리켰다.
총 있으니까 괜찮지 않냐 이거지.
나는 덤벼드는 온갖 몬스터들을 해치우며 북쪽으로 나아갔다.
총알을 뿌리듯 한 덕분에 레벨이 25로 복구되었다.
"추가효과는 여전히 차원감옥이구만."
다른 사람을 들이는 추가효과는 30레벨을 기대해보자.
마침내 나무뿌리에 도착하니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뭐가 이렇게 크냐···"
나무뿌리 하나의 굵기가 집채만 했다.
기둥은 어디에 있는지 안 보였고 수많은 동물이 집삼아 드나들고 있었다.
"이거 무슨 괴물 아니야?"
대장 사슴벌레는 그 말을 듣곤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야야, 말로 하자 말로."
나는 망치와 끌로 엘레멘티움 덩어리를 조각냈다.
이 상태에선 에메라스처럼 날카롭지는 않아서 비교적 쉽게 다룰 수 있다.
조각을 헝겊과 테이프로 감아 대장 사슴벌레가 가리키는 나무뿌리에 상처를 내자 하얀 액이 주르륵 흘렀다.
놀랍게도 수액 자체에 버프가 존재했다.
「엘더우드의 수액」
「효과 : 고통내성, 피부재생」
효과가 두 개나 붙었네.
고통내성은 말 그대로 고통을 줄여주는 좋은 버프고 피부재생은 처음이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나무의 이름이었다.
"엘더우드···? 설마 이 나무로 엘더우드 롱보우를 만든 건가?"
총이 있어서 가지고 오진 않았지만 하여튼 쏠쏠하게 잘 써먹고 있는 활이었다.
그 멋진 활의 재질이 이 나무라니.
그럼 좀 가져가야겠군.
톱을 꺼내자 대장 사슴벌레가 결사적으로 나를 뜯어말렸다.
"왜? 그냥 나무잖아?"
톱을 나무뿌리에 대자 검은 숲의 수많은 동물과 몬스터가 나를 쳐다봤다.
전신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감각이 저릿저릿 느껴졌다.
"···"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다가 톱을 내렸다.
나를 직시하던 시선이 그제야 원래대로 돌아갔다.
무슨 숲이 이래.
하여튼 위험한 것 같으니 나무 자체에는 손대지 말자.
"···엘레멘티움 조각으로 상처를 내야 이런 일이 안 벌어지는 거냐."
끄덕끄덕.
미리 말 좀 해주지.
나는 엘더우드 수액을 통에 담았다.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담백한 우유처럼 느껴졌다.
그 왜 무지방 우유 있잖아.
"흐음. 괜찮은데."
욕심이 났지만 한 병을 채우자 수액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고 대장 사슴벌레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더 이상 채취하지 말란 뜻이겠지.
"알았다, 알았어."
욕심이 많은 나지만 여기선 주는 만큼만 챙겨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병과 톱을 배낭에 넣고 ATV에 올라탔다.
나무뿌리에서 떠나는데 뒤에서 누가 손을 흔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이, 착각이겠지."
나는 옹달샘으로 돌아와 엘더우드의 수액을 뿌렸다.
희뿌연 액체가 옹달샘에 떨어지자 물이 투명하게 변해갔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사슴벌레들은 서로의 앞다리를 붙들고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옹달샘이 회복되어 기쁜가보다.
수액을 또 채취할 수 있나 물어보니 시간이 지나야 한단다.
"원할 때마다 복구시키지는 못한다는 거네."
무한부활을 기대했던 나는 조금 실망하곤 현실로 건너갔다.
다정은 아직 파밍이 끝나지 않았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경매장을 열어 정부 쉘터의 코멘트를 확인하니 장소와 시간이 올라와 있었다.
뭐 여기에서 가깝군.
시간도 이만하면 적당하고.
그런데 나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장원택 한 명이 아니었다.
―배검인씨가 만나고 싶어합니다. 괜찮을까요?
"검인이 걔는 또 왜···"
총부리에 위협당한 게 억울했나?
목숨을 살려준 걸 고맙게 여겼어야지.
"아냐···석현이를 변호해준 걸 보면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이 참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군.
나는 코멘트를 남겼다.
―좋습니다. 만납시다.
< 깊은 산 속 옹달샘 > 끝
< 지하철역의 미궁 - 1 >
12월 20일.
눈이 완전히 그쳤다.
시계는 한결 나아졌지만 온도는 더 내려가 영하 25도를 밑돌았다.
모처럼 태양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비췄지만 얼어붙은 대지는 변함이 없었다.
때때로 부는 차디찬 강풍은 살벌하게 피부를 쪼아댔다.
바야흐로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인간도 몬스터도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특히 아지트를 옮겨 다니느라 짐을 잃어버린 생존자들이 큰일이었다.
그들은 말로만 듣던 맛없는 상점빵과 물로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경매장에선 누군가가 고블린 고기를 생으로 먹었다가 사흘 동안 앓다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누구는 비웃었고, 누구는 안 됐다며 애도를 표했다.
공통점이라면 다들 그 소문을 금방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아포칼립스에서 남을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
···이런 처절한 현실과는 상관없이.
나는 고무보트를 타고 따뜻한 바다에서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참 안 잡히는구만···"
왕.
딩고가 동감한다는 듯 작게 짖었다.
우리의 목표는 약 올리듯 보트 주위를 떠다니는 큰입농어다.
현실의 농어와는 전혀 안 닮았지만 크기만큼은 비슷했다.
녀석은 보트 주위를 돌다가 미끼인 조갯살을 야무지게 베어 먹고는 달아났다.
"먹다가 바늘까지 삼키지 좀."
아침부터 이러고 있을 게 아닌데 다정에게 호언장담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참치는 불가능한 거 알고 있으니 큰 생선을 잡아달라고 했고, 나는 앞바다에서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래서 아침부터 이 모양이지···"
큰입농어님 제발 잡혀주세요.
다음부턴 철저히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내 간절한 소원이 먹혀든 것일까.
드디어 농어가 미끼와 바늘을 삼켰다.
나는 바로 낚싯대를 챘다.
"이엽!"
얕은 수심에서 잡힌지라 물보라가 눈부시게 피어올랐고 딩고가 벌떡 일어났다.
이놈 힘이 장난이 아닌데!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은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큰입농어가 보트 위에 올라왔다.
"휘유. 엄청 크네."
길이는 한 85cm정도 될까?
이름답게 입이 상당히 큰 편이어서 수율은 높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만하면 배불리 먹고 남지.
나는 노를 저어 해변으로 향했다.
큰입농어를 손질하고 밥상을 차려 현실로 나가보니 다정이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우와, 그거 잡은 거야?"
"큰입농어야. 어떻게 먹을래?"
"추우니까 매운탕으로 해줘.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어. 근데 먹어도 되는 거지?"
"사슴벌레가 독 없는 거라고 했으니까 괜찮아."
녀석들은 놀랍게도 독 있는 동식물을 판별할 수 있었다.
내가 동물을 먹는 것 자체는 별로 안 좋아했지만 모른 척하지는 않을 모양.
투덜거리면서도 할 건 다 한단 말이지.
나는 커다란 살점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세라믹 칼로 두툼하게 썰었다.
완전 싱싱하니 매운탕으로 다 먹기엔 아까워서였다.
접시에 몇 점 담아 간장종지와 함께 다정에게 건네주니 그녀는 눈물을 좍좍 뽑으며 회를 먹었다.
"이거 탄력이 장난이 아니야. 살이 막 이빨 튕겨 내는데?"
"오바는."
나는 매운탕을 끓이고 파를 듬성듬성하게 썰어서 올렸다.
보글보글 끓는 국물 위로 뭉툭하게 썬 무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매운탕 냄새가 금방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다정은 금방 회를 해치우고 수저를 들었다.
"흐으응. 맛있겠당···나 진짜 성호 너랑 만난 거 행복해. 아포칼립스에서 농어 매운탕을 먹다니."
그녀는 국물을 떠서 호로록 맛을 보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곤 냄비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잘 익은 김치와 농어 살점을 올리고 우적우적 씹었다.
참 복스럽게 먹네···
그녀는 입 안의 것을 꿀꺽 삼키고는 한탄하듯 말했다.
"으음. 칼칼하니 진짜 맛있어. 나 쉘터에 있을 때는 밥이 하도 맛이 없어서 전투식량 파밍해서 까먹었거든."
"전투식량 그거 오래 먹으면 안 좋은데."
"그래서 변비 걸리고 난리도 아녔어. 똥이 안 나와서 막···남자들 군대 가면 몇 주간 똥을 못 눈다면서?"
아침부터 신성한 밥상 앞에서 무슨 똥 얘기야.
"야. 똥 먹는데 밥 얘기 좀 그만해."
나는 말을 내뱉고 나서 실수를 깨달았다.
다정이 눈물을 뽑으며 웃었다.
"푸하하! 똥 먹는데 밥 얘기 하지 말래! 너무 웃겨!"
"실수야. 밥이나 먹어."
그녀는 볼 가득 살점을 넣곤 씹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신혼부부 같다, 그지."
"신혼부부는 무슨."
"왜, 내가 마음에 안 차?"
"그런 건 아닌데···"
"이쁘다며, 몸매 좋다며, 맛있다며."
"마지막 말은 좀 빼라. 니가 하도 나 맛있냐고 물어봐서 대답한 거잖아."
잠자리 얘기를 밥상까지 끌고 오는 건 반칙 아니냐.
아포칼립스에서 할 건 없고, 밖은 춥고 해서 저녁만 되면 눈이 맞는 게 일상이었다.
예전에 왜 출산율이 높았는지 이해가 갈 정도.
나는 식사를 다 끝낸 후 미리 챙겨둔 식사를 경매장을 통해 석현에게 보냈다.
쟁반을 회수하고 나니 다정이 식후운동을 해야 한다며 내게 덤벼들었다.
"스톱. 미리 지하철역 가서 정찰 좀 해야 돼."
"왜, 할아방탱이가 무슨 짓이라도 했을까봐서?"
"적은 아니지만 아직 친구도 아니니까. 뭐든 의심해야지."
그녀는 가만 생각하다 손가락을 튕겼다.
"검인이 걔도 온다며? 너 혹시 죽이려는 건 아니지?"
"죽일 거면 배틀로얄에서 죽였겠지."
"하긴···가만. 그럼 검인이하고 손을 잡게 되는 건가? 할아방탱이하고도?"
"그건 가서 이야기를 해봐야 아는 거고. 하여튼 내 생각은 그래.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으니까."
다정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뭐야. 전에는 정부 쉘터를 엎어버릴 것처럼 얘기하더니."
"상황이 달라졌잖아. 배검인과 연결고리가 생겼고 주승철이 죽었거든. 또 총기도 넉넉하게 챙겼고."
굳이 정부 쉘터의 균열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주승철이 있었다면 장차 일어날 갈등에서 한 몫을 챙겼겠지만 석현의 주먹질과 칼찌 에 기회가 날아갔다.
물론 석현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물자와 총기류를 넉넉하게 확보했으니까.
나는 다정에게 딥키스를 당한 후 밖으로 나왔다.
폐를 얼려버릴 듯한 바람이 불어 닥쳤지만 왠지 춥지는 않았다.
나는 신도림역으로 향했다.
.
.
.
장원택과 배검인은 철가루로 가득한 승강장에서 김밥조아를 기다렸다.
사실 둘은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인천과 배틀로얄 전장에서 만나 이야기도 하고 협박도 당했다.
특히 장원택은 파밍 던전에서 얼굴을 드러낸 그와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검인은 사뭇 긴장되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을 이 역에는 냉기와 먼지만 가득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건너편 계단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
예상했듯 키가 상당히 큰 남자였다.
검은 방검복에 배낭과 활이라는 생존자의 정석과도 같은 장비를 메었다.
외모를 보자면 눈매가 상당히 사납고 턱은 굳건했다.
검인은 그를 보고 왠지 움츠려드는 자신을 느꼈다.
전장에서 총을 뽑아 들고 사정없이 위협하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
그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찮아···괜찮아···아무 일도 없어. 싸우러 온 것도 아니잖아?'
정상적인 상태에서 김밥조아와 붙으면 어떻게 될까.
다중특성을 갖고 있음에도 이긴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 분위기.
사람 하나 죽이는데 1초도 안 걸릴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검인을 쫄게 만들었다.
같이 웃고 떠들며 게임하던 김밥조아가 맞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나, 나도 고인물이야.'
검인은 가슴을 펴고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무심한 김밥조아의 눈이 그와 장원택을 훑었다.
"앉읍시다."
셋은 승강장 끝에 걸터앉았다.
장원택이 허허 웃었다.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지요? 있을 겁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확실히 대통령쯤 되면 눈이 다르긴 한 모양이다.
"파밍 던전에서 만났죠."
"그래요···그때 다정씨와 만난 적이 있었는데···허허, 그 사람이 김밥조아일 줄이야."
"강성호입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검인은 김밥조아의 이름을 처음 듣고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장원택이 물었다.
"그래요···석현씨가 일으킨 일련의 소동이 성호씨와 관련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주승철은 죽었습니다."
"허허, 역시 그렇군요."
그 튼튼한 벙커를 무슨 수로 깼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여기선 말을 아끼는 게 좋다.
무엇보다 대답에서 시간낭비 하기 싫다는 의도가 진하게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쪽도 템포를 조금 빠르게 할 수밖에.
"어떻습니까. 벙커에 뭐가 있던가요?"
"그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한남동 일대의 벙커 말입니다만, 대통령님이 보도를 막은 겁니까? 언론에선 한 번도 못 들어봐서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언론사의 사주는 대기업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지요. 결국 가족의 일인데 보도를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커뮤니티 등지에선 조금 시끄러웠던 모양이지만, 아시다시피 몬스터 건으로 묻혔죠."
"대통령님은 알고 있었습니까?"
"···보고는 받았죠."
"주승철이 어떤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대책본부에 그 세력의 끄나풀이 있었다는 것도요?"
정보를 제공하려 한 불쌍맨 지만이를 잡으려 한 수트 입은 남자를 얘기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장원택은 거기까진 몰랐다.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정보가 편향되게 올라오는 걸로 봐서 대강 짐작은 했습니다만, 워낙 정황이 없어서 살피지는 못했습니다."
"뭐 그걸 지적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 정보를 알고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게임 서버 내의 정보를요."
"우리 정보···?"
검인이 턱을 내밀자 성호가 가볍게 대답했다.
"플레이시간하고 마지막으로 즐긴 컨텐츠, 이벤트 클리어 횟수까지 나와 있더라고."
"내, 내 것까지?"
"우리 고인물은 전부 다."
검인은 그가 우리 고인물이라고 말해준 것이 기뻤다.
왠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아서.
한편 장원택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게임의 기록이라면 행방을 알 수 없는 운영진밖에 모를 텐데···그럼에도 초월자는 아닌 모양이군요."
"음모를 꾸미고는 있지만 힘은 별 볼일 없는, 그런 포지션에 가깝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실체에 약간이나마 근접한 자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뭐 그런 뉘앙스였다.
그 말을 들은 검인은 가슴이 덜컹했다.
혹시 자기를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모르던 정보를 술술 풀어내는 그를 보며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역시 쉘터 밖에서 행동해야 하나?
하지만 너무 추워서 밖에 나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좋은 정보를 들었으니 저도 하나를 알려드려야겠군요. 정부에서 마련한 쉘터는 하나가 아닙니다. 예비 쉘터가 인천 쪽에···"
"아, 그건 압니다."
"알고 있다고요?"
"부천 쪽의 타임쉘터 입구가 반쯤 부서졌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인천에 나갔던 오승연 뿐이었다.
국도변에서 만났다는 부부는 역시 성호와 다정이었군.
장원택은 넌지시 물었다.
"그럼 지금은 완전히 털렸겠군요?"
"글쎄요, 왠지 나만 말하는 느낌이 드는데, 착각은 아니겠죠."
정보를 내놨으니 너도 내놓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자잘한 것을 제공했다간 바로 일어서겠지.
"그렇군요. 큼직한 거 하나 알려드리지요. 현재 대한민국은 폐쇄된 상태입니다."
성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인들은 뭐란 말인가.
"중국인들이 멀쩡히 들어왔잖습니까."
"사람은 괜찮지만 그 외 환경이 완전히 폐쇄되었습니다. 지난 몇 개월 간 해안가에 사람을 보내 관찰한 결과지요. 중국의 수많은 원전이 우리 서해안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검인이 나섰다.
"게임 서버 같은 거야. 한국 서버, 중국 서버, 일본 서버, 뭐 이렇게. 사람은 서버를 드나들 수 있잖아?"
"올해 태풍이 하나도 없었지요? 한반도를 격리하고 있는 어떤 힘이 태풍을 막아낸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주도는 여러 번 초토화되었을 겝니다."
서버의 격리라···
성호는 마산의 돝섬을 떠올렸다.
육지에서 몇 백m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리 멀지는 않았다.
동물도 헤엄을 칠 수 있는데 몬스터가 못할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돝섬으로 건너오는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섬 안에서 가끔 리젠되는 몬스터가 있었을 뿐.
···어쩌면 몬스터는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정의 구울이 마음에 걸렸다.
녀석들은 분명 헤엄을 쳤었는데.
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괴음이 울렸다.
고우우오―
"어?"
성호를 보고 있던 검인이 튕기듯이 일어났다.
이렇게 크게 우는 몬스터는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녀석은 지상에서 볼 수 없는 몬스터다.
"미, 미궁이 열렸어."
성호도 일어섰다.
"이 근처야."
미궁은 서바이벌 라이프의 최종 컨텐츠 중 하나로 매우 복잡하고 큰 규모의 지하 던전을 가리킨다.
간단히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과 달리 어둠속을 며칠간 헤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장원택까지 옷을 털고 일어섰다.
미궁이 열린 이상 한가하게 대화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못 다한 말은 내일 해도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같은 시간에."
둘은 시선을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장원택이 먼저 계단을 통해 올라갔고 검인은 안절부절 못했다.
이제 성호를 비롯한 세 명은 미궁 공략에 들어갈 것이다.
거기 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보다 약한 부하들을 동원할 수도 없고···
잔뜩 고민하는데 성호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니 생각이 나서 싸왔어. 먹어."
"뭐, 뭔데?"
"풀어보면 알 거야. 그리고 그땐 미안했어. 널 살리려다 보니 거칠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어."
"아, 알고 있어···"
그가 떠난 후 검인은 화장실에 들어가 헝겊을 풀었다.
도시락 안에는 두툼하게 썰린 훈제생선과 고기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먹음직스런 양념으로 구워진 커다란 닭다리가 검인의 눈을 환호로 물들였다.
이렇게 큰 닭도 있었나?
"흠흠, 뭘 이런 걸 다···"
그간 쉘터에 처박혀 맛없는 밥만 먹던 검인은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어치웠다.
"으흠, 흠, 쿨럭쿨럭."
너무 급하게 먹느라 목에 걸렸나보다.
하여튼 생선과 고기는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의 원대한 계획에 성호를 끼워 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지배자가 굳이 하나여야 할 이유는 없잖아. 그지?'
성호라면 자신의 옆에 설 자격이 있다.
"···"
근데 먹다 보니 괜히 울적해졌다.
아포칼립스에서 이런 걸 먹으니 힘이란 게 참 허망하게 느껴졌다.
결국 잘 먹고 잘 살자고 힘을 얻으려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아등바등 허우적대는 그와 달리 성호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배틀로얄에서 나를 살려줬잖아.'
그가 같이 가자고 손을 내민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증거로 성호가 직접 싼 도시락을 자신이 먹고 있지 않은가.
"맛있네."
검인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 히죽 웃었다.
< 지하철역의 미궁 - 1 > 끝
< 지하철역의 미궁 - 2 >
지하철역에 미궁이 열렸지만 나는 바로 진입하지 않았다.
미궁은 여타 던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입구는 하나가 아니며 준비 없이 진입했다간 헤매기 십상이다.
출입도 한 번으로 제한된 게 아니라 들락날락하면서 공략이 가능하다.
"근데 워낙 넓고 깊어서···"
미궁은 여러 종류로 나뉘는데 규모가 작은 미궁은 하나도 없다.
최소 한나절을 소모해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며칠씩 헤매는 경우도 존재했다.
등장하는 지형과 함정, 몬스터의 종류도 천차만별이고 난이도도 엄청나게 높아서 대충 준비해서 갔다간 끔살당하기 일쑤였다.
"독점은 어렵겠어···"
가장 작은 미궁도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자랑한다.
대미궁 쯤 되면 백 단위가 헤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규모만 따지면 그렇다는 거다.
애초 서바이벌 라이프란 게임엔 유저가 별로 없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무슨 미궁인지 확인하는 거지···"
직접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들어가 본 놈들의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다.
경매장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알리고픈 관심종자들이 넘쳐난다.
물론 개소리와 루머도 많지만 그거야 내가 가진 정보와 비교해서 취사선택하면 된다.
나는 2층의 넓은 화장실로 이동했다.
아지트에 가려면 시간이 걸리니 돌발적인 상황에 대처하려면 여기 있는 게 낫다.
"정보 확인하고 다정이한테 여기로 오라고 해야겠군."
또 아지트 버리냐며 툴툴거리겠지만 내게 있어 큰 의미는 없는 곳이다.
진정한 쉼터는 차원문 안에 있으니까.
화장실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근처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쉬쉿, 쉿.
익숙한 소리에 밖을 보니 리자드맨 무리가 화장실 앞을 지나쳤다.
녀석들은 특유의 삼지창과 그물을 들고 통로를 배회했다.
몬스터가 튀어나온 걸 보면 얌전한 미궁은 아니네.
"근처가 난장판이 되겠어···"
들어가는 것부터가 난관이라 난이도는 높은 축에 속한다.
미궁 안은 축축하다고 보면 되겠고.
"벌써부터 찝찝해지네."
게임이라면 이런 미궁 따윈 패스했겠지만 현실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작은 소굴조차 철저하게 뒤져서 아이템을 획득해야 할 판에.
"편식은 안 돼."
경매장을 여니 몇 사람이 정보를 올린 후였다.
―신도림역 근처에 있는 사람? 몬스터 울음소리 들었음?
―뱃고동 소리가 나던데 뭔 몬스터임?
―아마 미궁 보스일걸···뭔지는 아무도 모름.
―고인물들은 알듯? 맨날 미궁에서 놀던 사람들이었으니.
―헐 그럼 신도림역 근처에서 미궁이 열렸다는 거 아님요?
―씨발 그 새끼가 와서 다 깨버리기 전에 빨리 들어가야 함.
―님 잠시 진정하셈. 미궁은 던전과 달라서 입구가 하나가 아님.
―그것도 맞고 엄청 넓어서 김밥조아도 독점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거기 가면 김밥조아 만날수 있음?
―야야 씨발 잡소리말고 좀 모여봐. 파티원 구함.
―공중부양 17렙인데 가능?
―공중부양을 미궁에서 어디다 씀?
―너무하네.
"공중부양이라···늪지대를 건널 때 괜찮겠는데."
평소라면 정찰 등에서 능력을 발휘하겠지만 전투에는 큰 쓸모가 없는 게 단점이다.
여러 명이 파티를 이뤄 공략하는데 전투력이 밀리면 말이 나오기 마련.
"내가 잘했니 니가 못 했니 하는 말이 나오는 순간 파티 깨지는 거지."
미궁 초입이면 모를까, 안에서 깨지면 답도 없다.
나는 동굴에서 노트북으로 영상을 뒤져 리자드맨이 나오는 유형의 미궁을 찾았다.
"수중 미궁이 많네."
가장 골치 아픈 유형이다.
일단 물 지형은 태생적으로 육상동물인 인간과는 맞지 않다.
물론 리자드맨과 상위종이 수중호흡 스킬을 주지만 답답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계속 젖은 채로 있어야 하니까 답답하지."
냄새도 많이 나고 하여튼 골치 아픈 곳이었다.
흠···
나는 영상을 계속 돌려가면서 공략법을 되새겼다.
미궁의 지형 자체가 좀 가혹한 면이 있어 몬스터는 크게 위험하진 않았다.
기껏해야 리자드맨의 상위종과 보스 정도.
"클리어 시간은 10시간 안쪽···"
이 정도면 짧은 편에 속한다.
다만 10시간을 젖은 채로 활동해야 하므로 실제 도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트롤들이 많겠네."
입구에서 깔짝거리며 공략을 방해하는 놈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입구에 형성되는 지형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검토했다.
숨을 곳이 많은 지형이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실전에 들어갔을 시 당황하게 된다.
"···됐다."
나는 리자드맨이 지나간 틈을 타 입구를 찾았다.
지하철 통로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주위는 리자드맨과 습지에서 서식하는 서펜트, 우는 두꺼비로 가득했다.
"하필 저놈이 있네."
정확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우는 두꺼비라 부르는 몬스터.
외형은 말 그대로 두꺼비인데 덩치가 상당히 커서 남자의 상체와 맞먹는다.
공격법은 단순무식 그 자체로서 웅크리고 있다가 위협적인 적이 나타나면 박치기를 시도한다.
사거리가 장난이 아니고 바로 후속공격이 이어지기 때문에 피하는 게 좋다.
"피하는 것도 어렵긴 해."
보통은 늪지대를 지나가다가 뭔가 이상한 바위를 발견하면 캐릭터가 삭제되는 식이다.
인지거리 밖에서 날아와 들이박는데 피할 방법이 없다.
서펜트들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고 지하철 통로가 참 만만치 않았다.
"저걸 어떻게 뚫는다···"
물이 흥건해서 폭죽을 쓰기도 어렵다.
고민하고 있는데 어두운 통로에서 느닷없이 메뚜기가 튀어나왔다.
"강화 구울이 왜 나와?"
습지 미궁은 좀비나 구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저 녀석은 흔히 메뚜기라 부르는 강화 구울로 펄쩍펄쩍 뛰어 이동한다.
벽, 천장 어디든 붙어 다닐 수 있고 주변 지형에 동화까지 해대서 상당히 위험했다.
내 인지 스탯이 높아서 금방 발견하겠지만 녀석은 이미 점프한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차원벽으로 막고···
"아니지."
구울이라면 환장하는 여자가 있잖아?
나는 경매장을 통해 다정을 불렀다.
그녀는 왜 안 오냐며 투덜거렸지만 메뚜기가 나타났다는 말에 바로 출발한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뭐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군.
나는 차원벽을 정확한 위치에 켜는 연습을 하며 그녀를 기다렸다.
.
.
.
정부 쉘터의 모두가 황석현의 복귀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십 명 남짓한 작은 쉘터지만, 나름 정치가 있고 파벌이 존재한다.
알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서로 견제한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그들 중 일부는 석현의 복귀를 반대했다.
사정이야 어쨌든 살인을 저질렀으니 나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장원택 대통령은 처음엔 그들을 설득하려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무조건 룰대로 쫓아내라고 하는데 할 말이 없는 것이다.그가 무시로 일관하자 목소리는 차츰 사그라졌다.
하지만 석현 반대파가 모두 뜻을 굽힌 것은 아니었다.
이장훈, 김대호, 채상신.
이 셋은 배검인의 동료이긴 했지만 완전히 신뢰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단지 철사병이 완전히 사라지면 힘을 합쳐 목소리를 내기로 합의한 것뿐이었다.
검인의 입장에서도 동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석현을 두고 검인과 세 명의 의견이 엇갈렸다.
검인은 한 번은 봐주자는 쪽이었고 셋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겉으로는 살인자를 쉘터에 둘 수 없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들은 석현이라는 존재 자체를, 아니 그 뒤의 김밥조아를 싫어했다.
―그 새끼가 괜히 토공을 들여보냈겠습니까? 보나마나 우리 쉘터를 망가뜨리려는 목적일 겁니다.
―예전에 다정인가 하는 여자도 알고 보면 끄나풀인 거 아닙니까? 고인물 셋이 여기 집착하는 이유야 뻔하죠.
―총이죠, 총. 고인물 해봐야 총 한 방에 대가리에 구멍 뚫리잖아. 무한부활? 계속 쏴죽이면 지가 어쩔 거야?
―하여튼 토공 걔는 쫓아내야 됩니다. 다들 그건 동의하시죠?
―당연하죠.
―저는···
―왜 말을 못 하실까. 그새 정이 들었어요?
―우리 검인씨도 사람이 달라졌어. 쉘터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하더니 정작 노력은 안 보이고···
동료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검인은 김밥조아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와 연결고리가 이어졌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욕을 먹을지 두려워서였다.
상당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라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미궁의 소리를 듣고 쉘터로 가자마자 그들이 입을 열었다.
"검인씨? 혹시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요?"
검인은 모른 척했다.
그와 장원택이 김밥조아를 만나러 간 것은 비밀이었기 때문.
통상적인 정찰이라 둘러댔지만 왠지 셋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려니 여기저기 허점이 많다.
"미궁이 열렸답니다. 신도림역 지하에요."
"갑시다. 무슨 미궁인지는 경매장에서 알려줄 겁니다."
"멍청이들이 워낙 많거든."
눈보라도 그쳤고 슬슬 포인트를 모아야 한다는 얘기에 검인도 솔깃했다.
그러나 하필 그 소리가 들린 미궁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골치 아픈 유형이 될 것 같은데···
성호가 근처에 있었다는 점도 그를 머뭇거리게 했다.
분명히 그는 미궁에 들어갈 텐데 자칫 잘못하면 동선이 겹쳐질 우려가 있었다.
"···막 돌아와서 몸이 안 좋네요. 조금 쉬고 가십시다."
피곤한 척 했지만 다들 믿지 않았다.
"육체강화 특성도 있으면서 무슨···엄살 그만 떨고 갑시다."
"검인씨 너무 재는 거 아닙니까? 원할 때 언제든 불러달라고 해놓고선."
"그럼 우리끼리 가야겠네."
상황이 이쯤 되자 검인도 그들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성호를 만나서 맛있는 도시락까지 얻어먹고 참 기분이 좋았는데···
넷은 단단히 배낭을 챙기고 쉘터 밖으로 나섰다.
출구와 신도림역은 상당히 가까워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웬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지하를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미친년이다! 튀어!"
"으아악!"
그새 미궁이 알려졌단 말인가?
넷은 바삐 계단을 내려가다가 한 무리의 생존자들과 대면했다.
지하철역이 워낙 시끄러워서 인지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퀴에엑!
사람들은 발작적으로 무기를 뽑으려다가 한 몬스터의 괴성에 흠칫했다.
생전 처음 듣는 기괴한 소리였지만 검인은 바로 알아챘다.
"메뚜깁니다! 숨어요!"
"메, 메뚜기가 뭡니까?"
"강화 구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긴 팔다리를 가진 구울이 승강장을 미끄러지며 달려갔다.
누군가를 쫓는 것 같았다.
강화 구울.
보통 구울과는 현격히 다른 전투력을 가졌으며 각 개체마다 특수한 능력이 존재한다.
메뚜기의 경우는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기동력이 아주 높으리라.
이름에서부터 특징이 드러나잖은가.
"숨어요!"
누군가 그렇게 소리치자 일제히 반대편의 화장실로 달려갔다.
힘을 합쳐서 대항해도 되겠지만 뭘 믿고?
각각 남녀화장실에 숨자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끄아아악!"
쫓기던 사람이 죽었나보다.
사람들은 숨소리까지 낮추며 강화 구울이 이쪽으로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승강장을 지나쳤다.
모두가 그녀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다.
강화 구울은 개인이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기 때문.
어떤 면에서 늑대인간보다 더한 놈이라 다굴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겁먹지 않고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강화 구울에게 다가갔다.
퀴엑?
녀석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이제 승강장에 핏물이 뿌려지겠지···
하고 사람들이 고개를 돌린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메뚜기가 주춤주춤 여자에게 기어가더니 몸을 낮춘 것이다.
시뻘건 피부에 긴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여 있어 매우 흉측했지만 녀석이 복종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검인은 그제야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구울을 지배하는 여자가 또 있을까.
그때 여자화장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좀비하고 붙어먹을 년아!"
"···"
강화 구울을 지배하는데 성공해 흐뭇해하고 있던 다정의 이마가 확 일그러졌다.
"우, 우리가 말 안했어요!"
바로 옆 여자화장실에 있던 사람들의 변명이다.
검인도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남자화장실을 가리키기 바빴다.
우리가 아니라 저 새끼라고!
하지만 다정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그녀가 화를 폭발시키기 직전, 남자화장실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모습이 안 보이는 걸 봐서 은신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어쭈. 그런다고 내가 놓칠 것 같아?"
다정이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기자 여기저기에서 구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우르르 튀어나갔다.
괜히 여기 있다가 드잡이질을 하기는 싫은 것이다.
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화장실 앞을 지나치던 다정과 시선을 마주쳤다.
"···"
"다정아···"
그녀는 별 말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다 갑자기 몸을 돌렸다.
이윽고 사람을 쫓던 구울들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검인과 같은 편이라 생각하고 살려주는 걸까?
"고, 고마워."
"주둥이 함부로 놀리면 다음엔 진짜 죽여 버린다고 전해."
그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아무래도 정부 쉘터에서 매일 당하고 살다 보니 둘의 관계가 그렇게 굳어진 것이다.
개구리가 아무리 커도 뱀 앞에서 꼼짝 못하는 것과 같았다.
검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보냈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
.
신도림역에 미궁이 열렸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알려졌다.
위치가 상당히 좋아서 여력이 있는 많은 생존자들이 신도림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도 미궁에 들어가지 못했다.
비단 몬스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구울 여왕이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구울은 그러려니 했는데 몇 마리의 강화 구울이 문제였다.
놈들은 메뚜기처럼 벽과 천장을 뛰어다니며 접근하는 사람을 쫓아냈다.
방귀 좀 뀐다는 실력자도 강화 구울들이 달려드는 통에 체면불구하고 도망쳐야 했다.
이쯤 되자 경매장에서 구울 여왕에 대한 성토가 빗발쳤다.
―완전히 미친거 아님? 대체 왜 입구를 막은 거임?
―정부 쉘터에 있는 인간? 대체 왜 저러는지 좀 물어봐줘라.
―오리궁뎅이 걔 정부 쉘터에서 나간지 오래임.
―아놔 씨발 미치겠네. 강북에서는 벌써 들어갔다던데.
―강북에도 입구 있음?
―미궁은 입구가 여러 개라고 똘빡아!
―새끼가 갑자기 욕을 하고 지랄이야.
―뭐 병신아 뒤질래?
코멘트란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미궁이 눈앞에 있는데 막상 들어갈 수 없으니 다들 뿔이 단단히 났다.
다정은 아예 입구에 진치고 있으면서 들어오는 인간들을 막았다.
모든 건 성호의 부탁 때문이었다.
'무슨 미궁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만 막아달라고 했지···'
미궁 중에선 유저의 능력 하나를 완전히 봉쇄하는 것도 있다.
특성이 봉쇄될 경우, 같은 입구로 들어가면 동선이 겹쳐져서 위험하다.
다른 지역의 입구야 다정이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구울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사람들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다음에 또 오세요! 손님!"
"아 씨발!"
"진짜 미치겠네···"
승강장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흘렀다.
그러나 대놓고 욕을 하는 강심장은 없었다.
구울 여왕이 꼭지가 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기 때문.
하지만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정을 유인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어떻게든 입구에서 떼어내야 방법이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명이 그녀가 보이는 자리에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천장의 환풍구에 숨어 있던 구울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시뻘건 팔다리가 거미처럼 펼쳐지며 남자를 덮쳤다.
나름 속도에는 일가견이 있던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구울에게 잡혔다.
다정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구울이 남자를 끌고 왔다.
"요즘 미세먼지 없어서 숨 쉬기 편하지? 어? 오늘 미세먼지 농도 좀 올려볼까?"
"사, 살려···끄아아악!"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다정을 입구에서 떼어내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 지하철역의 미궁 - 2 > 끝
< 지하철역의 미궁 - 3 >
"젠장."
이번 미궁은 진짜 지랄 맞은 곳이다.
웬만하면 손대고 싶지 않았지만 스킬과 아이템이 어른거려서 어쩔 수 없었다.
난이도가 높으면 그만큼 보상이 풍족하다는 건 진리니까.
나는 늪지대에서 빠져나온 후 수초를 떼어냈다.
"아오 진짜."
바닥도 멀쩡한 게 아니라 장화가 푹푹 들어가는 진흙탕이었다.
하여튼 이 미궁은 어둡고 축축하며 위험한데다가 좁기까지 한 최악의 환경을 지녔다.
몬스터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이런 환경에 특화된 리자드맨이라 제법 까다로웠다.
"게임은 장난이었네."
게임을 하는 것과 실제로 환경을 극복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VR장비가 생생한 경험을 제공해도 사람의 오감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덕분에 나는 30분 정도 아주 엿 같은 경험을 해야 했다.
"이걸 깨라고 만들어 놓은 건지···"
들어간 직후부터가 난관이었다.
입구에서 리자드맨을 죽여서 수중호흡을 얻지 못하면 개고생을 하면서 수중동굴을 지나야 한다.
나야 뭐 숲에서 리자드맨을 족쳐서 스킬을 얻었으니 상관없지만.
"··근데 이거 나만 어려운 거 아니지?"
혹시 다른 입구는 괜찮나 싶어서 경매장을 여니 가관이었다.
―와 수중동굴 이거 어떻게 깸? 어두운 건 둘째 치고 좁아 미치겠는데?
―나 진짜 폐쇄공포증 같은 거 없었는데 막 생길라 그럼 아···
―물 흐름도 빨라서 엄청 무서움.
―ㄷㄷㄷ
―와 입구부터 장난아니네.
―이거 깨는 거 가능하긴 함?
―고인물도 이건 거르겠다···
"거르긴 뭘 걸러."
나는 숨만 붙은 리자드맨의 꼬리를 잡고 입구로 향했다.
다정이 수중호흡 스킬을 못 얻었다고 해서 도와줄 참이었다.
25레벨 까지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딩고, 나와."
차원문을 여니 딩고가 밖으로 나왔다.
"성격 사나운 여자를 데리고 오는 거야, 알겠지?"
왕.
엉덩이를 툭툭 치자 녀석은 입구가 아니라 차원문에 들어가 딩순이를 데리고 나왔다.
"···너도 성격이 별로 안 좋은가 보구나."
하여튼 끼리끼리 모인다니까.
나는 재차 딩고의 엉덩이를 쳐서 입구로 보냈다.
잠시 후 다정이 구울 한 마리와 함께 들어왔다.
"안은 좀 어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좆같아."
"난이도가 높은가보네. 몬스터가? 아니면 환경 쪽이?"
"환경이 아주 지랄 같아."
"구울은 어떻게 할까?"
"좁아터져서 안 되겠어. 아주 강한 몬스터가 있는 건 아니니까 두고 가자. 어지간하면 나 혼자서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도와줄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패딩의 단추를 풀었다.
"마누라 좋다는 게 뭐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마누라?"
"마누라가 좀 그러면 애인으로 해. 하여튼 비슷한 건 맞잖아. 그것도 부정할 셈이야? 밖에서 애들 족치며 기다렸는데?"
시범 케이스로 몇 놈 조졌구나.
구울 수십 마리가 지키고 있으면 들어올 엄두도 못 낼 테니 당분간은 안심이다.
나는 다정이 벗은 패딩과 바지를 받아 차원문에 넣었다.
그리고 낚시용품점에서 구한 잠수복과 장화, 그리고 짧은 아다만트 창을 건넸다.
그녀가 물끄러미 날 바라봤다.
"이런 게 필요할 정도야?"
"무기도 창밖에 못 써. 활이고 검이고 죄다 사용불가야."
물에서 활동해야 하니 총도 못 쓴다.
작살총은 글쎄, 물고기 잡는 데에나 쓸까.
다정은 옷을 훌떡 벗은 다음 잠수복을 걸쳤다.
그리고 장화까지 신으니 완전 핑크색 해녀가 되었다.
나는 숨만 붙은 리자드맨을 가리켰다.
"일단 얘 죽이고."
"깜짝이야. 죽은 줄 알았잖아."
"수중호흡 못 얻었다고 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다른 장비는 내가 가면서 줄게."
"그새 다 파악했구나."
"공략본이 다 있으니까. 내가 앞장 설 테니까 따라오기만 하면 돼."
내가 먼저 가려 하자 다정은 갑자기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나 놔두고 어디 도망가면 안 돼···"
그녀의 말투에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외로움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성격인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밖에서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나는 몸을 돌려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내가 마누라 두고 어디 가겠어? 우리 마누라."
엉덩이를 두드려주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었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엉덩이 만졌으니까 끝장을 봐야지? 오늘 밤엔 안 재울 거야. 각오해."
"알았으니까 일단 미궁이나 깨자."
그녀는 리자드맨을 죽이고 수중호흡을 얻은 듯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우리는 미궁의 입구로 향했다.
.
.
.
바퀴벌레 커플이 미궁으로 들어가고 30분.
입구를 봉쇄하고 있던 구울들이 흩어졌다.
구울 여왕의 선조까지 욕하던 사람들이 부랴부랴 입구로 몰려들었다.
다른 사람을 견제하고 할 시간에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미궁은 시작부터 그들에게 커다란 장애물을 안겼다.
진흙탕은 그렇다 치는데 수중동굴이 문제였던 것이다.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법한 검고 어두운 구멍에 다들 몸서리를 쳤다.
"이거 한 명이 들어가서 로프 연결하면 되겠는데요···?"
"나머지는 기다리다 꿀 빨고요?"
그게 문제였다.
하나가 고생하면 나머지 십여 명이 혜택을 받는다.
평상시라면 영웅심을 발휘하고 박수 받는 걸로 끝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포칼립스에서 남을 돕는 것은 뻘짓이란 걸 다들 인식하고 있었다.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먼저 간 구울 여왕을 향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그년을 반드시 잡아 족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총대를 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다른 입구는 지금 난리가 났네. 수중동굴 중간에서 누가 죽어서 완전히 막혔어요. 시체를 빼내야 되는데 아무도 안 들어가."
"와 그런 일도 있네···"
"완전 미쳤네 미쳤어."
"이거 잘못 들어갔다간 죽겠는데?"
모두가 눈치만 봤다.
마치 조별과제에서 조장을 맡을 사람을 기다리듯.
한편 검인은 속이 탔다.
정황으로 봐서 다정이 입구를 막은 것은 성호 때문이었다.
그에겐 공략본이 있으니 이런 엿 같은 환경을 극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합류하고 싶은데 시작부터 꽉 막히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뒤에서 김대호가 은근히 물었다.
"우리 검인씨. 말로만 리더 하지 말고 좀 리더십을 발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게요. 이번에 활약 좀 하면 우리도 다시 볼 것 같은데."
뻔한 부추김이었지만 그걸 거절할 수 없다는 게 슬펐다.
검인은 신발을 벗고 배낭에서 로프를 꺼냈다.
그가 주섬주섬 준비하자 김대호가 오오 외치며 박수를 보냈다.
"검인씨 대단한데요? 여러분! 정부 쉘터의 검인씹니다! 생존자1!"
"생존자1이면 고인물 아니야?"
"근데 그런 사람이 여기서 뭐해?"
다들 뻘쭘한 표정의 검인을 바라봤다.
검인은 속으로 어쩔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캐삭을 감수하고 미궁을 돌아다닌 건 김밥조아를 비롯한 셋이었지 자신은 아니었다.
물론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지랄 같은 미궁은 처음이었다.
"자자, 고인물도 막힐 수가 있는 겁니다, 박수, 박수!"
채상신이 부추기자 군중심리에 이끌린 자들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
평소의 검인이라면 잘난 체를 하며 존재감을 각인시키려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앞서가는 누군가의 등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주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손을 외면할 때가 아니었다.
검인은 굳은 표정으로 수중동굴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로프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다.
정부 쉘터의 세 명은 기침을 토하고 있는 검인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웃음은 아니었다.
호구를 발견하고 잘 써먹을 수 있겠다는 기쁨에 가까웠다.
"검인씨 대단하시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뭐 리더시니까 알아서 잘 하시겠죠. 우리는 뒤만 따라가겠슴다."
검인은 이들이 동료가 아니란 걸 비로소 느꼈다.
상황이 악화되면 자신을 방패로 삼고 바로 도망갈 놈들이었다.
이런 놈들의 본성을 눈치 채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
'잘난 척을 하도 했으니···'
그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워낙 잘난 체를 하다 보니 이 사람들도 부추기는 식으로 적당히 맞춰 준 것이다.
이용하기 딱이라는 생각도 했겠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그는 일어서서 통로 하나를 골랐다.
물이 허리까지 들어차는 늪지대였다.
다들 욕설을 내뱉으며 통로에 들어섰고 세 명도 검인을 따라붙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검인씨 최다정 걔와 친하지 않았어요? 말 좀 해보시지."
"짝사랑이었던 거죠. 크으, 고년 고거 날뛰는 거 보면 침대에서 장난 아닐 텐데."
"그런 년하고 떡 좀 쳐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엉덩이 팡팡 때리면서 흐흐."
"어허, 순서 지킵시다. 똥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야."
뭐 흔한 음담패설이다.
검인도 한 때는 다정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애초부터 검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친구로만 대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지금쯤은 친하게 지냈을지도 모른다.
검인은 화장실 밖을 지나가던 다정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움츠러들었었지···
그건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늘 눈치만 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다 보니 슬픈 개구리가 되어버렸다.
'난···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을 하다 보니 그는 중간에서 멈추고 말았다.
뒤에서 따라 오던 김대호가 그의 등을 슬쩍 밀었다.
빨리 가라고 말없이 재촉하는 듯했다.
검인은 이를 악물었다.
셋과 같이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하지만 따돌리기는 어려웠다.
지금 와서 돌아간다고 말할 수도 없고···
검인이 고민하고 있을 때, 초감각 특성을 지닌 이정훈이 경고했다.
"이상한 냄새 나는데. 비린내 같은···"
그때 리자드맨 무리가 동굴 저편에서 나타났다.
쉬쉿, 쉿.
일행은 깜짝 놀라 무기를 빼들었다.
"여기 너무 좁아!"
"뒤로 조금씩만 갑시다!"
"밀지 말고 저놈들 죽이면 되잖아!"
장소가 협소해서 무기를 든 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리자드맨들은 곧장 그물을 던지고 돌격했다.
사람들은 물속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는 리자드맨 무리에 맞서서 악전고투를 펼쳤다.
넷 다 전투에는 이골이 났는지라 이기기는 했지만 상처를 많이 입었다.
그물에서 버둥거리다 보니 삼지창에 찔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처에 포션을 바르던 채상신이 거친 말을 내뱉었다.
"아 씨발···리자드맨이 그물 갖고 있는 거 미리 말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물속에 감췄을 줄 누가 알았습니까."
검인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지만 셋에겐 변명으로 들릴 뿐이었다.
고인물이면 그쯤은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고인물도 별거 아니네."
"에휴···이 아저씨 믿고 오는 게 아닌데."
순간 검인의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미궁에 오자고 한 건 애초에 그가 아니었다.
쉬고 싶은 사람을 끌고 와 놓고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가?
평소의 검인이라면, 여기서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을 것이다.
그나마 있는 인맥을 버리긴 싫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애초에 여기 오자고 한 사람들이 누군데요. 난 분명히 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날 끌고 온 겁니다."
셋은 그걸 부정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맞아요, 그건 맞는데. 여기 온 이상 열심히 하셔야 한다는 그런 의미지."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 돌아가시려고?"
"검인씨가 우리한테 뭐라고 그랬더라···같이 살아보자고 그러지 않았어요?"
검인은 울분을 참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남 탓하지 말자는 겁니다. 해봐야 싸울 뿐이니까."
일행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짜증과 분노, 비웃음이 섞인 시선이 오갔다.
미궁의 험악한 환경이 사소한 다툼을 키워서 균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떤 계기로 깨지기만 하면 남보다 못한 사이로 돌변한다.
검인은 그 때가 지금이 아니길 빌었다.
일행은 전투를 끝내고 젖은 땅에 올라가 숨을 돌렸다.
다들 침묵한 채 건빵을 씹는데 김대호가 중얼거렸다.
"다른 입구에서 진입한 사람들이 죽은 몬스터를 봤다는데···"
"자기들끼리 싸운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이마에 정확히 구멍이 났답니다. 아다만트 창 흔적이라는데요."
"김밥조아네."
채상신이 확정하듯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동감하는 분위기였다.
"그 새끼 맨날 몰래 들어와서 다 쓸어가잖습니까?"
"근데 어디로 들어온 걸까요?"
사람들은 최다정이 입구를 30분이나 틀어막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가 입구를 막은 건, 시간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김밥조아를 위해서 말이다.
검인은 거기까지 생각하긴 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그를 제외한 셋이 몰려다니니 왠지 울적했던 것이다.
'나만 빼고 셋이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신나게 날뛰고, 서로 도와주기까지 하니 참 부러웠다.
자신은 적인지 동료인지 모호한 사람들과 불편한 동행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김대호가 건빵봉지를 치우며 말했다.
"지금 경매장에서 누가 선동하는데요. 김밥조아 얼굴이나 한 번 보자면서."
"그 새끼도 보고 있을 텐데 당해주겠어요? 그리고 훨씬 앞서간 모양인데."
"답답하시네. 그놈이 죽인 몬스터를 발견했잖습니까. 길이 교차되는 겁니다. 우리 진행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잘 하면 죽일 수도 있겠는데?"
이장훈이 중얼거리자 다들 그를 비웃었다.
"김밥조아한테 이길 수 있겠어요? 택도 없을 텐데."
"그 새끼 모르긴 몰라도 스킬칸 아이템칸 다 채웠을 걸요? 한 둘이 덤벼선 상대가 안 돼."
"누가 1:1로 싸운답니까? 따라잡기만 하면 상황이 나온다는 거지. 이렇게 좁고 어두운데 기회가 없겠어요? 여럿이 덤비는데?"
"하긴···"
따라잡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가능성 자체는 있어 보였다.
김대호는 김밥조아를 상상 속에서 만나기라도 했는지 흥분한 듯했다.
"맨날 랭킹칸에 그 새끼라고 적어놓은 거 얼마나 꼴 보기 싫었는지 압니까? 대가리에 콱, 어? 미스릴 나이프 꽂으면 진짜 속이 시원하겠는데."
"씨발 만나기만 하면 진짜···"
검인은 묵묵히 짐을 챙겼다.
이들이 성호에게 이를 가는 것은 공략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실 생각하면 웃긴 일이다.
맡겨놓은 것도 없으면서 내놓으라는 꼴이니.
그를 지켜보던 채상신이 물었다.
"우리 검인씨는 무슨 생각이실까. 일단 김밥조아를 싫어하긴 할 텐데."
"요즘 검인씨가 수상하단 말이죠. 예전에는 친한 척도 않던 토공에게 친절하게 굴지를 않나."
"그러고 보면 토공이 김밥조아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혹시 검인씨도?"
"···아닙니다."
검인은 부정했고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진짜 즐거워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시다. 빨리 따라잡아야지."
어느새 김밥조아의 뒤를 쫓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검인은 구석에서 오줌을 누는 척하며 경매품을 올리고 코멘트를 남겼다.
―도시락 맛있었어.
성호라면 이 코멘트를 보고 자신이 검인이라는 것 알아챌 것이다.
반드시.
.
.
.
다정은 아까부터 사람들이 경매장에 올린 코멘트를 보고 끅끅거리고 있었다.
"성호 너 여기 들어온 거 다들 아는 눈친데?"
"모르면 등신이지. 그리고 니가 시간을 끌었다는 것도 알 걸?"
"오오, 그럼 이제 우리 큰일이네, 그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다정의 얼굴에선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뭣하면 구울을 호출하면 되니까.
내게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덤비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된다.
나는 경매장을 훑다가 이상한 코멘트를 발견했다.
도시락 맛있었다라···이건 나한테 전하는 말인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신도림이라고 코멘트를 입력하자 역시나였다.
검인이 내게 경고했다.
―조심해, 지금 사람들이 너 찾고 있어.
―조심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찾는 놈들이야. 혹시 다른 놈들하고 같이 있으면 빨리 떨어지는 게 좋아.
―미안···지금 그럴 처지가 아니야.
어쩌다가 코가 꿰인 모양이군.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검인이 자기 위치를 말했다.
―여기 고목이 솟은 늪지대인데, 세 명이 앞서 가고 있어. 머리가 짧은 남자는 육체강화고···
검인은 그렇게 동료 아닌 동료들의 특성을 말해주었다.
가까이에 있단 말인데 이거 위험하다.
내가 경고를 보내기도 전에 다급한 코멘트가 올라왔다.
―윽!
그걸로 끝이었다.
검인은 더 이상 코멘트를 보내지 않았다.
걸렸나보군.
나는 경매장을 닫으며 일어섰다.
"검인이 구하러 가자."
< 지하철역의 미궁 - 3 > 끝
< 지하철역의 미궁 - 4 >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배검인이 우리 중에선 비교적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인물이다.
미궁에서 적의 습격 같은 것에 대해서는 꽤 빠삭하다.
또한 코멘트를 보면 긴장을 풀고 있진 않은 모양이니 선제공격을 당하더라도 금방 반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의 경우는···그걸 써야겠군.
다정이 말했다.
"근데 검인이 걔 말이야···왠지 좀 약한 것 같지 않아?"
"나도 그 생각은 했었어."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고목이 자리한 늪지대로 향했다.
다정의 말마따나 그는 고인물이라기엔 좀 약했다.
물론 다중 특성은 상당히 강력한 특성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월미도에서도 그렇고 어째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다정이 내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
"걔 쫄보라서 공격을 못하는 것 같아."
"몬스터는 잘 공격하던데. 그리폰 때 봤거든."
"그건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때잖아. 혼자 싸우는 건 잘 못해.
"봤어?"
"몇 번 봤지. 특히 대인전이 잘 안 돼. 성호 니가 백정이면 검인이는 깃털을 뽑히는 닭 정도? 나름 반항은 하는데 영 시원찮아."
"뭔 비유가 그러냐···"
하여튼 검인의 전투력이 약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이번에 영입하면 상담을 좀 해봐야겠군.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정이 우뚝 멈췄다.
"걔 영입하려고? 우리 다 모이는 거야?"
"이제 고인물 4인방이 모일 때도 됐지."
"헐. 난 그것도 모르고 걔 보고서도 대충 지나갔는데."
"중요한 건 마음이지. 아직도 검인이가 싫어?"
"싫다기보다는 그 찌질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나는. 다리 힐끔힐끔 훔쳐보기나 하고."
"걔는 또라이가 아니라서 그래."
"뭐야, 갑자기 두둔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적당히 평범하고 적당히 찌질하고 적당히 욕심 있는 뭐 그런 남자라서 그래. 솔직히 너 보고도 눈이 안 돌아가면 비정상이라고."
"흐음, 그건 인정."
나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석현이하고 다닐 때 아무 일 없었지? 나하고 다닐 때도 처음엔 그랬지?"
"···갑자기 생각난 건데 니들 이상해. 보통은 남자가 여자한테 달려들잖아?"
"그러니까 검인이가 보통 사람이라는 거지. 남들 위에도 서고 싶고, 지배도 해보고 싶고, 예쁜 여자와도 사귀고 싶은···"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걔 20대 중반이라고 했지? 내가 보기엔 너한테 밀리지 않으려고 살짝 올린 것 같은데. 하여튼 조금 허세가 있을 나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번에 구해주면 완전히 우리 편으로 넘어올 거야. 밑밥은 충분히 쳐놨거든. 정부 쉘터의 틈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져. 검인이 것이 우리 것이 될 테니까."
"친해지면 너 특성도 복사할 텐데?"
"그건···"
사실 나는 우리 특성이 완벽히 복사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유니크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특성도 추가효과를 다 복사하진 못하고 하나만 가져온다는데 유일한 특성은 어떻겠는가.
복사가 가능하긴 하되 반쪽짜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차원문도 더 이상 내 전용이 아닐 거야."
"응···그렇겠지? 나도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리겠지?"
아마도 내 허락 하에 열리는 문이겠지만.
"가능성은 있다는 거야. 들어가서 같이 일하고 같이 놀고, 밥 먹고···그렇게."
"우리 셋, 아니 넷이서 막 숲을 헤매고 다니고? 재밌겠다···"
"그러려면 빨리 검인이 구해야 돼. 어디 보자···"
나는 지형을 그리고 다정에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그녀가 앞에서 어그로를 끌고 있으면 내가 뒤에서 덮친다는 계획이다.
"공격은 하지 말고 적당히 시선만 끌어.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고 공격하게."
"개판이면 어떻게 해? 지금 보니까 경매장 애들 흥분했는데 막 사람들 몰려와서 난리치면?"
"깽판으로 만들어 주면 돼. 나 만나고 싶은 놈이 한 둘이 아닌데 소원 성취하겠네."
지금 이 순간에도 경매장에선 내 욕과 선동이 올라오고 있다.
욕먹는 것도 지겹다.
더 이상 욕을 못하게 해주마.
.
.
.
늪지대에선 네 명의 쌈박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인이 경매장에 한 눈을 파는 사이 다른 세 명이 기습을 한 것이다.
초감각의 범위를 오해한 검인의 실수였다.
애초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이장훈이 용의주도하다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습격을 당했다고 해서 호락호락 당해줄 검인은 아니었다.
쫄보 기질 때문에 인간과 싸운 적은 거의 없지만 그건 셋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특성은 무려 세 개로 블링크와 육체강화, 구속이다.
소수의 적과 싸우는데 특화된 능력.
실제로 그는 기습을 버텨냈고 역공의 기회를 노렸다.
아주 잠깐 그랬다는 얘기다.
"저 새끼 조져요!"
"쏘세요! 쏴!"
비교적 넓은 늪지대는 넷의 싸움으로 인해 난장판으로 변했다.
검인은 블링크로 거리를 벌렸다.
시야가 짧아서 이동한 거리는 길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늪지대라 이동이 어려운 건 저들이 더 심하니까.
"뒤져! 배신자 새끼!"
김대호가 철벅철벅 뛰어서 부웅 날았다.
검인은 그를 구속으로 묶어버리고 블링크로 이동해 막 석궁을 장전하던 이장훈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는 바로 석궁을 휘둘렀고 검인은 어깨로 공격을 막았다.
"윽!"
대인전에 능한 성호나 석현이었다면 막은 즉시 박치기나 무릎치기를 선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인은 쫄보라서 고통에 익숙하지 않아 물러나고 말았다.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너만큼은 조진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채상신이 달려들었다.
그의 특성은 순간가속.
움직임을 빠르게 가속시킬 수 있어서 익숙하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당한다.
잠깐 틈을 보인데다가 대인전 경험도 드문 검인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퍼퍼퍽!
검인은 연속으로 얼굴을 맞고 물러섰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다른 둘이 달려들었다.
육체강화 능력자가 마크하고 초감각 능력자가 움직임을 봉쇄하니 검인은 괴로워졌다.
특성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집중해야 하는데 세 명과 싸우려니 어려웠던 것.
이장훈이 쏜 볼트가 머뭇거리던 검인의 어깨에 박혔다.
"끄헉!"
검인은 어깨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는 고통에 익숙하지 않았다.
포션으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음에도 겁부터 집어먹었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다른 두 명이 검인을 양쪽에서 포위하고 무차별 폭력을 선사했다.
검인으로선 머리를 감싸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에 블링크를 할 생각도 못했다.
둘은 웅크린 검인을 밟으며 농락했다.
"이 새끼 믿는 게 아니었어!"
"힘껏 밟아요! 대가리 부셔버리라고!"
"거기 잠깐 일으켜 세워요!"
멀리서 석궁을 장전한 이장훈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검인을 표적지로 쓸 계획이었던 것이다.
적당히 팔다리만 맞추면 육체강화 때문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걸 눈치 챈 다른 둘이 동의하고 검인을 일으켜 세웠다.
제법 튼튼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멍과 상처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새끼야, 일어서라고!"
"거시기에 볼트 꽂아요!"
"그러면 내가 살인자 되는데요?"
"아. 우리 간당간당한데···"
두들겨 패긴 했지만 죽이진 못하는 참 미묘한 상황이다.
그때 다른 두 명이 늪지대에 들어왔다.
검인이 경매장에 코멘트를 올리는 동안 셋도 가만히 있진 않았던 것이다.
채상신이 손뼉을 쳤다.
"여기요! 여기 이 아저씨 김밥조아하고 동료인 놈입니다!"
"뭐라고요? 그 사람 생존자1 아닙니까?"
"수중동굴 들어간 사람이잖아."
"이 새끼가! 김밥조아하고 내통을 했다고요. 우리를 기만했어!"
"허억···허억···"
검인은 뒤로 돌아간 팔에 힘을 줬지만 풀 수가 없었다.
스탯이 거의 비슷한 김대호가 팔을 당기고 있었기 때문.
고통이 너무 심해서 블링크를 쓰지도 못했다.
새로 온 두 명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 사람 죽이라는 겁니까?"
"당신들 정부 쉘터에서 오지 않았어요? 생존자1 없이 돌아가면 어쩌시려고?"
"미궁에서 죽었다고 둘러대면 됩니다."
"워낙 어렵잖아요. 사람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인데."
"아하."
"우리가 직접 손을 쓸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50포인트 가지십쇼."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건 좀···"
"김밥 그 새끼라고 생각하고 좀 해요."
"···"
눈치를 보던 둘 중 하나가 나섰다.
김대호는 검인의 머리통을 후려갈겨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다.
그때 다른 입구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핑크한 수영복을 입은 다정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몸매에 군침을 흘렸다.
"누구지?"
"와 씨발 몸매 장난 아니네."
머리를 묶고 모자를 썼는지라 쉘터의 세 명도 그녀가 다정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검인은 고통을 호소하며 고개를 숙인 채였다.
한눈을 판 그들의 뒤로 인간도살자가 조용히 진입했다.
.
.
.
딱.
핑거 스냅에 허공에서 볼트가 튀어나왔다.
뭔가 해서 뒤를 돌아본 김대호의 복부에 볼트가 꽂혔다.
"끄아악!"
무지막지한 살인자를 무력화시키는 볼트의 위력에 김대호는 빈사상태가 되었다.
검인의 팔이 풀렸고 그제야 사람들이 뒤돌아봤다.
"어?"
"뭐, 뭐야?"
특히 이장훈이 놀랐다.
그는 자신의 초감각을 뚫고 오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는 2초 동안 성호는 차원벽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마치 허공을 딛고 뛰는 듯한 그 움직임에 다들 경악했다.
"어, 어떻게 한 거야?"
"우와···"
"씨발 지금 놀라고 있을 때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한 명이 달려들었지만 성호는 차원감옥을 열어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다섯 명 중 두 명이 전력에서 이탈한 것이다.
남은 셋은 그제야 공격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김밥조아!"
"맞아."
성호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에메라스 비도를 투척했다.
씨익!
공기가 갈라지며 검인의 바로 옆에 있던 채상신의 어깨에 박혔다.
몸통을 노렸지만 순간가속 특성으로 피해낸 것이다.
"너 이 새끼야!"
채상신은 고통을 참으며 성호에게 달려들었다.
농락당한 그의 분노는 이깟 고통으로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육탄전에 들어간 순간, 그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휘두른 주먹을 성호가 너무 쉽게 피한 것이다.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스탯이 높아도 이렇게 빠른 공격에 대처하는 건 힘들다.
겪어보지 못한 이상은.
혹시 전에 순간가속 능력자를 만난 적이 있나?
그의 머릿속으로 많은 상상이 지나갔고 성호의 주먹이 배에 틀어박혔다.
뿌드득―
"끄훕!"
몸이 들썩하며 배와 등이 맞닿았다.
내장이 파열되어 채상신의 입에서 피거품이 쏟아져 나왔다.
"끄헉···으흑···"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천천히 주먹을 회수하는 성호의 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남은 둘은 섬뜩한 시선에 놀라 물러섰다.
"미, 미친놈···"
"약한 게 아니잖아···"
그동안 경매장에선 김밥조아에 대한 많은 헛소문이 올라왔다.
상당수는 그의 기록을 보고 강하다고 인정했지만 인정하지 못하는 소수가 존재했다.
성호에겐 그걸 수정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모르면 죽어야지.
그는 별 말도 하지 않고 둘에게 달려들었다.
다정은 부러진 고목에 앉아 성호가 싸우는 걸 지켜봤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진짜 쎄네···"
상대가 다섯이라 좀 도와줄 생각이었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탯도 스탯이지만 특성을 너무 적절하게 사용해서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집중해서 차원벽으로 공격을 막는 저건 어떻게 파훼해야 할까?
주먹질이 어찌나 강한지 한 대 맞은 상대방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다.
교통사고도 아니고 저게 뭐야.
상대방의 특성도 잘 파악해서 대응하는 것 같았다.
'진짜 반해버릴 것 같네.'
전투가 순식간에 끝났다.
마지막에 차원감옥에서 나온 남자도 주먹 두 방에 기절하고 말았다.
아니, 저건 기절이 아니라 고통을 못 이기고 혼절한 거다.
성호는 숨이 약간 거칠어졌을 뿐 멀쩡했다.
"일어설 수 있냐."
"어···응."
검인은 입을 벌리고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포션을 마셔서 상처는 적당히 회복되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심했다.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토공이야 강할 수밖에 없다고 자위했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그때 다정이 말했다.
"너희 둘, 그러고 있을 시간 없어. 지금 사람들 몰려온다고."
"여기로?"
"걔네 중 하나가 경매장에 알렸나봐. 여기 찾고 있는데?"
"그, 그러면 곤란한데···"
어쩔 줄 몰라 하는 검인과 달리 성호는 덤덤했다.
"다 죽여 버리면 돼."
"살인자 되고 부활하려고?"
"아니 그거 페널티가 많아서 어지간하면 쓰기 싫어. 이런 환경이라면 방법은 많거든."
"정확히 어떤 방법인데?"
다정이 묻자 성호는 그동안 써왔던 방법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입구를 차원문으로 막고 몬스터에게 죽게 만들거나.
주위에 휘발유를 붓고 손에 폭죽을 쥐어주는 등 온갖 방법이 튀어나왔다.
"헐···"
"완전히 미쳤어···"
둘은 성호의 지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진짜 인간도살자가 따로 없다.
다정은 구울을 부를까 하다가 놔두었다.
이런 좁은 환경에선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성호에게 방법이 있다고 하니 맡기는 게 좋다.
그녀는 검인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우리 쫄보 검인이, 몸은 좀 괜찮아?"
"멀쩡해. 이렇게 보여도 튼튼하거든."
"그러면 좀 제대로 싸우지 그랬어."
"그게···"
하필 그녀가 왔을 때 두들겨 맞고 있을 게 뭔가.
여기까지 생각한 검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변명하며 핑계를 댈 게 아니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약하다고.
"내가 약해서 그렇지. 미안해."
"···"
다정은 얘가 무슨 핑계를 대나 궁금해 하다가 조금 놀랐다.
조금은 성장한 건가?
그때 철벅철벅 소리가 들리더니 석현이 나타났다.
팬티가 물에 젖어서 참으로 가관이었다.
뜬금없는 등장에 둘은 물론이고 성호도 놀랐다.
"석현이 니가 여긴 왜···"
"토공! 우리 도와주러 왔구나!"
다정이 반가워했고 그는 활짝 웃었다.
"아니. 지나가다가 갇혔어."
< 지하철역의 미궁 - 4 > 끝
< 지하철역의 미궁 - 5 >
마침내 고인물 4인방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오붓하게 대화할 시간은 없었다.
이 순간에도 생존자 다섯 명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으니까.
나는 친구들을 구석으로 불렀다.
"여기서 뭘 할 분위기가 아니네. 나가서 하자. 다정이 니가 검인이 데리고 좀 나가줘."
"···진짜 죽이려고?"
"들어온 놈들 전부 다 죽일 거야. 그럼 조용해지겠지."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 쟤네들 여기 지형을 잘 모르니까 보스방만 클리어하고 나가면···"
다정은 내키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또라이라도 십 수 명을 죽인다는 생각은 좀 그렇겠지.
처음으로 4명이 모였으니 기분 좋게 가자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지금 경매장 열어서 봐. 여기 들어온 놈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세 명은 각각 경매장을 열어서 활성화된 코멘트란을 보고선 침묵했다.
―김밥조아 만난사람?
―아직 아무도 못 만난듯?
―씨발 고목이 있는 늪지대가 대체 어디야···전부 동굴인데···
―근데 님들 그 새끼 만나면 이길 수는 있음?
―누가 일대일 해줌? 포위하고 공격하면 제깟놈이 깨갱해야지 별 수 있나.
―그 새끼가 여기 보고 있을 게 뻔해서 말은 못하는데, 확실히 잡을 순 있음.
―ㅋㅋㅋ님 은신으로 다가가도 들켜요. 그 새끼 인지 엄청 높을건데.
―그걸 왜 말함? 이새끼 간첩인가.
―그래서 잡으면 죽일거임?
―죽여야지. 그 새끼 죽이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근데 정보 안 풀었다는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여기 놈들도 정보 안 푼건 똑같잖음.
―ㅋㅋ내가 보기엔 여기 놈들 김밥조아를 조리돌림하는 거임. 심심풀이로.
―지랄하네 병신새끼신가.
―그냥 세상이 개판됐으니까 짜증은 나고 해서 한 놈을 욕하고 싶은거임.
―너 김밥조아지?
―모든 걸 김밥조아 탓으로 돌리면 편하잖아. 나는 왜 이지경이 됐는가? 김밥조아가 정보 안 풀어서. 나는 왜 이지랄을 해야 하는가? 김밥조아가 정보 안 풀어서.
―나는 왜 못생겼는가? 김밥조아가 정보 안 풀어서.
―엌ㅋㅋㅋㅋㅋ
―님들 여기 오리궁뎅이도 있다는거 잊지 마셈. 씨발년이 입구막았음.
―잠깐만, 그럼 여기 고인물 두 명이 있다는 거 아님?
―아까 누가 배검인 이새끼가 배신자라고 하지 않았음? 그럼 세 명인가?
―이거 진짜임? 그럼 고인물 세 명이 여기 다 있음?
―씨발 토공까지 있는거 아냐?
―쫄?
―쫄은 무슨···토공이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같이 달려들면 별수있음?
―영화에선 그렇게 말하는 놈들은 다 쳐맞던데.
―ㅋㅋㅋㅋ
여기까지 본 다정은 은근히 열이 오르는지 숨을 훅, 불어 머리카락을 날렸다.
"맨날 이런 거 보면 화가 좀 나긴 하겠네."
"여기 들어온 놈들 다 죽여 버리려고. 그러고 나면 좀 조용해지겠지."
가만히 있던 석현이 검인에게 다가섰다.
"너 화살 뽑아야겠다. 이 꽉 물어."
"뭐, 뭐하려고?"
"이, 꽉, 물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검인은 이를 꽉 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석현이 얼굴을 후려치자 꽥, 하더니 기절하고 말았다.
어깨에 꽂혀 있던 화살이 뽑혀져 나왔다.
뭐 특성이 육체강화이니 만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석현이 그의 상처에 포션을 발라주며 말했다.
"오리 니가 데리고 나가. 여긴 우리 둘이서 해결할 테니까."
"나까지 있는 게 편하지 않아?"
"아니."
나는 차원슬롯의 무기를 점검했다.
"여긴 좁아서 구울이 날뛰기 힘들어. 그리고 검인이는 큰 도움이 안 돼."
"그건 뭐···"
아주 약한 건 아니지만 강하다고 하긴 좀 그렇다.
결정적으로 이건 내가 해결할 일이었다.
"검인이 데리고 나가서 아지트에 같이 있어. 일 끝나고 갈 테니까."
다정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알았어. 토공 너도 보스방 경험치 얘한테 양보하는 거야."
"당연하지."
대충 상황이 끝났다.
다정은 기절한 검인을 부축해 투덜투덜하며 밖으로 나갔다.
슬슬 시작할 때다.
.
.
.
당연하지만 미궁에 들어온 사람 모두가 성호의 적은 아니었다.
미궁만 공략하려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까지 죽이는 건 좀 그렇지.
해서 성호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는 경매장을 열어 코멘트를 남겼다.
―주목. 내가 김밥조아다.
―?
―너 돌았지?
―자기가 그 새끼라고 주장하던 놈이 10명이 넘는데.
―증거대셈.
―믿는 건 자유고 몇 마디만 할게. 지금 습지 미궁 공략하려고 들어온 사람이 있는 걸로 아는데···다 나가라.
―니가 무슨 권리로?
―안 나가도 상관없긴 한데 죽고 나서 징징거리지는 마라.
―ㅋ?
―이새끼 지금 협박하는 건가.
―맞아. 협박이지. 10분 줄 테니까 빨리 미궁에서 나가라. 그 뒤에 조질 테니까.
―웃긴 새끼네 이거. 니가 뭔데 나가라 마라야?
―다시 말하지만 안 나가도 상관없어. 열명 죽이나 열한명 죽이나 똑같으니까.
―니가 김밥조아 맞으면 하나만 물어보자. 왜 미튜브 영상 다 내렸냐?
―뻔하지. 이 씹쌔끼 혼자만 살려고.
―착각하지 마라. 미튜브 영상 내린 건 1년도 더 전이야. 게임 접으면서 이 짓을 왜하나 싶어서 내린 건데 뭐가 잘못됐냐?
―지랄하네 이 새끼 거짓말하는데?
―영상 내렸어도 원본은 있잖아. 그거 왜 커뮤에 공유 안했음?
―내가 왜 해야 되는데?
―씨발놈아 같이 살면 되잖아. 혼자 살려고 안 내놓고 있으니 다 지랄하지.
―영상 맡겨놓은 것도 아니면서 왜 내놓으라고 난리야?
―그렇게 꼭꼭 숨기고 있으니 인류가 전멸했지. 전부 니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 학살자 새끼야.
―웃기고 있네. 좀비 포자하고 철사병을 내가 불러왔냐? 정보를 풀건 말건 종말은 확정이야. 뭐가 달라지는데?
―최소 지금보다는 생존자가 더 많았겠지. 너 때문에 다 죽었고.
―그 생존자들도 내가 정보를 더 안 풀어서 다 죽었다고 욕하고 있겠지. 모든 걸 다 내놔도 똑같을 거야. 사건 하나 일어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욕하고 보는 거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아?
―하여튼 니가 다 죽인거야, 이 살인자 새끼야.
―나 살인자 맞으니까 더 욕해봐. 더더.
그 후로 몇 분 동안이나 김밥조아에 대한 욕설이 쏟아졌다.
진짜가 나타났다고 하니 다들 흥분해서는 패드립까지 서슴지 않았다.
성호는 10분이 될 때까지 코멘트를 구경했다.
그리고.
―10분 지났다. 이제부터 미궁에 있는 놈은 전부 죽는다.
―허세 떨기는 씹새끼가.
―야 구울들이 나갔다는데 오리궁뎅이도 나간거 아님?
―그럼 혼자 있다는 말인데···
―생존자1인가 그 새끼는 죽었나? 정부 쉘터 애들이 죽인다고 벼르던데.
―야 아까 도움 요청하던 애들 어딨냐?
―죽진 않았지만 곧 죽을 거다.
―내 위엣놈 김밥조아냐? 하나만 묻자. 다 죽이고 부활 스크롤로 부활할 거냐?
―니네들 죽이는데 부활 스크롤을 왜 써? 습지 미궁에서 사람 죽이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
―개새끼 그런 것만 연구했네.
―완전 미친새끼임.
―껀수 하나 잡았다고 몇 개월이나 한놈을 조리돌림하는 니들은 정상이고?
―나는 오늘 처음 들어왔는데?
―경매장에 사람이 몇 명인데···일부일 뿐이지.
―경매장 사람들 전부가 내 욕을 안했다는 건 내가 더 잘 알아. 기록해 뒀거든.
―뭘?
―나한테 욕한 아이디 말이야. 어디 보자···내 위의 놈 아이디는 토공님결혼해주셈이네. 너 예전에 나한테 패드립 박았지? 미안한데 내 어머니 돌아가신지 오래됐어.
―아닌데, 패드립 안했는데.
―게임에서 토공 졸졸 따라다닌 거 내가 잊었을 것 같냐? 부산에 오면 풀코스로 쏜다는 거 지금도 유효해?
―뭐 이 병신아 나 아니라고.
―당연히 너는 다른 놈이니까. 니들 익명이라고 너무 안심하는 거 아냐?
―내 아이디는 뭔데?
―주차왕파킹.
―주차왕이 파킹이래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
―성기사이즈킹, 몹인지아랏내.
―어?
성호가 아이디를 줄줄이 말하자 경매장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이거 다 구라지? 한마디 했다가 아이디를 지적당하곤 찌그러졌다.
―나는 분명히 나가라고 경고했어. 그걸 무시한건 니들이야.
다들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장기간에 걸쳐 경매장의 분위기를 주도했던, 가장 심한 욕을 한 조유환은 식은땀까지 흘렸다.
보다 못한 동료가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 둘 정도였다.
"씨발, 괜찮아, 저 새끼가 혼자 뭘 할 수 있는데?"
"우리 네 명이니까 이겨. 그리고 코멘트란 날려버려."
"여기 우리만 있는 거 아냐. 혼자 다니는 놈 찾아서 몰면 돼. 새로 경매품 파서 연락을 좀 해보자고."
"잠깐만···"
유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코멘트란을 살폈다.
―하나 알려줄까? 니들이 날 포위한 게 아냐. 나하고 미궁에 갇힌 거지.
―전부 잡아 죽일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김밥조아의 코멘트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동료들이 침묵한 채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뭔가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
.
.
성호는 풍뎅이에게 보스방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석현은 연신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도와주면 더 쉽잖아?"
"맞아, 그게 더 효율적이지. 하지만 이건 내 적과의 싸움이야."
"친구의 적은 내 적이기도 해."
"···"
여기서 조금이라도 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성호는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도와주는 셈 치고 먼저 보스방 쪽으로 가고 있어. 여긴 내가 해결하고 싶어."
"···알았어. 그럼 먼저 갈게. 김밥아."
"왜?"
"쎅쓰!"
"그, 그래. 섹스···"
석현은 동굴을 떠나갔다.
풍뎅이가 길을 인도해줄 것이다.
성호는 다른 곳으로 빠져서 리자드맨 몇 마리를 데리고 왔다.
쉬잇! 쉿!
"이쪽이야."
차원문을 열어 숨어버리자 놈들은 당황한 듯했지만 곧 진동을 감지했다.
기절해 있다가 막 일어난 늪지대의 놈들을 말이다.
"으윽···"
"아 씨발···"
놈들은 저마다 욕을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특히 배에 볼트를 꽂은 김대호가 심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인사불성이었다.
"대호씨, 대호씨!"
"하 이거 어떻게 해야 되나···"
"이거 뽑으면 위험해요. 죽으면 볼트 뽑는 사람이 살인자 된다고."
"그게 또 그렇게 되네···"
하필 배에 맞을 게 뭐람.
특성이 육체강화라서 간신히 숨이 붙어있긴 하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들 난감해하며 대호에게서 떨어졌다.
"근데 김밥조아는 어디 갔죠?"
누군가 물었고 채상신은 경매장을 열었다.
그리고 충격을 받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지, 지금 경매장 봤는데···다 죽일 거라는데요···김밥조아가요···"
"지가 무슨 수로···살인자 되기 싫으니까 우리 놔두고 간 거 아닙니까?"
그때 동굴 통로에서 리자드맨 여러 마리가 등장했다.
경황이 없어 눈치 채지 못했던 이들의 눈이 커졌다.
"에라이 씨발!"
"튀어요!"
다들 절뚝거리며 도망가는데 선두에 선 사람이 뭔가에 머리를 박고 튕겨났다.
"억!"
"뭐, 뭐야?"
"비켜! 비켜!"
그를 밀고 나가려던 사람도 뭔가에 부딪치고 말았다.
손으로, 몸으로 허공을 밀어봤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성호가 차원벽으로 통로를 막아버린 것이다.
"여기 막혔어!"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리자드맨들이 그들을 덮쳤다.
그물이 휙 던져지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두 명이 갇혔다.
삼지창이 그들의 가슴을 찔렀다.
"끄아악!"
처절한 비명이 늪지대를 울렸다.
평소라면 리자드맨 몇 마리 정도는 충분히 잡았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심한 상처와 공포가 그들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숨만 붙어 있던 김대호는 리자드맨의 공격에 풍선 빠지는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그렇게 늪지대의 다섯 명이 모조리 죽기까지 걸린 시간은 몇 분에 불과했다.
"···"
성호는 그제야 차원문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리자드맨을 죽이고 루팅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은 다른 놈들을 찾고 싶었다.
다섯 명을 죽였음에도 죄책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다.
.
.
.
조유환과 일행은 급히 방향을 틀어 입구로 향했다.
처음엔 다른 사람과 협공해 김밥조아를 구석으로 몰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김밥조아가 아이디를 하나하나 거론하니 다들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이들 중에도 지목당한 사람이 있었다.
유환의 뒤를 따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신경질을 냈다.
"그거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왜 긁어대? 긁기를."
"내가 뭐. 어차피 우리 위치 모르는데."
여자는 변명하듯 말했지만 큰일 났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두운 가운데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눈동자에는 겁먹은 기색이 가득했다.
남자는 멈춰서 그녀를 나무랐다.
"그 새끼가 뭘 알고 모르는지 우리가 모르잖아. 그럼 조심을 했어야지. 왜 자꾸 패드립을 날려서 신경을 긁는 거야?"
그녀의 아이디가 하필 키큰여자인 게 문제였다.
김밥조아는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키큰남자와 커플이라는 걸 지적했다.
여자는 거기에서 겁을 먹고 경매장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미 들킨 후였다.
이제 김밥조아는 키가 큰 여자를 보면 바로 알아챌 것이다.
"나가면 끝이잖아. 그리고 뭐가 그리 무서운데? 우린 네 명인데."
여자는 뒤지지 않고 맞받아쳤고 남자는 잠깐 눈을 감았다.
"하···진짜···김밥조아가 얼마나 강한지 넌 몰라서 그래."
"평소엔 나타나면 박살내 주겠다고 하더니 그 용기 다 어디 갔어?"
"이게 진짜."
"왜, 때리고 싶어? 때려! 때려봐!"
"싸우지 말자···"
나머지 둘이 말렸으나 둘은 들은 척도 않았다.
목에 핏대가 솟은 게 평소 감정을 다 쏟아내는 듯했다.
안 그래도 허리까지 오는 물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든데 싸움까지 가미되자 다들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씨발 좀 그만하자고!"
"뭐 씨바알?"
네 명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극한상황이 그들의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들은 삿대질을 해가며 말싸움을 하느라 누가 근처에 오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어두컴컴한 저편에서 덩치가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 큰 여자, 키 큰 남자, 누군지 알겠군."
여자는 정체를 발각 당하자 무릎을 조금 굽혀서 키가 작아보이게 했다.
그러나 성호의 섬뜩한 시선은 정확히 그녀를 향해 있었다.
"다 봤으니까 소용없어. 그나저나 패드립 아주 멋지던데."
"내, 내가 한 거 아니야."
"뭘 아니야. 내가 스킬로 다 봤다니까. 옆에 있는 남자가 애인이지? 키큰여자의 애인 키큰남자. 딱이네."
"애, 애인 아닙니다···"
놀랍게도 남자는 애인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여자가 쌍심지를 켜고 그를 노려보자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을 쳐다볼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뭐 상관없어. 어차피 다 죽일 거니까."
"넌 혼자고 우린 넷이야···"
조유환이 석궁을 들어 올리자 성호는 그를 비웃었다.
"쏴."
"진짜 쏜다···나 사람 죽인 적 없어···한 명 죽여도 상관없다고."
가까운 거리라 아무리 높은 스탯을 가졌어도 피하는 건 어려웠다.
그러나 성호는 여유로웠다.
"쏘라고. 방아쇠 당기는 게 힘드나? 내가 좀 도와줄까?"
"씨발!"
유환은 욕설을 내뱉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볼트가 발사되었지만 뭔가에 가로막혀 튕겨나고 말았다.
"어?"
"뭐, 뭐야?"
성호의 특성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늘 이렇다.
그리고 그들의 결과도 비슷했다.
"니가 볼트 쐈으니 나도 볼트 쏠게. 그래야 공평하지?"
그가 뭔가를 속삭이자 허공에서 볼트가 튀어나왔다.
볼트는 순식간에 유환의 가슴을 꿰뚫었다.
여자는 전혀 공평하지 않은 볼트의 굵기를 보곤 입을 쩍 벌렸다.
"말도 안 돼···"
남은 둘은 본능적으로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차원감옥에 빨려 들어갔다.
"으아악!"
토공이 간신히 살아남은 거대한 바다가 그들을 삼켰다.
이제 남은 것은 키 큰 여자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리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특성을 발휘할 생각도 못한 채.
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이미 몬스터를 그쪽에 풀어놨기 때문에 그녀가 살아날 길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악!"
성호는 묵묵히 자리를 벗어났다.
< 지하철역의 미궁 - 5 > 끝
< 지하철역의 미궁 - 6 >
경매장은 내 공격으로 인해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살려줘! 살려줘!
―살인마 새끼가 돌아다닌다!
―씨발 저새끼 완전히 미쳤어!
―뭐가 어떻게 된 거임?
―김밥조아가 미궁에 들어간 사람들 다 죽이고 있다고!
―그럼 살인자 상태일건데 데스매치 걸어서 죽이면 되지 않음?
―살인은 했는데 살인자가 아니라고!
―헐.
―아니 뭘 어떻게 하면 살인을 하면서도 살인자가 안될 수 있음?
―니가 직접 가서 물어봐 등신아!
―내가 왜?
―맨날 김밥조아 욕하고 도발한 니들이 감당해.
―꼬시다 경매장 죽돌이들. 지들이 정의인 척 하더니 살려달라고 개처럼 울부짖네.
―솔직히 정의도 아님요. 그냥 김밥조아님이 정보 안 내놓으니까 욕했을 뿐이져.
―이젠 하다하다 김밥조아님까지 나오네. 간첩새끼냐?
―그 새끼는 그 새끼로 충분하지 않냐?
―사냥당하는 놈들이 말이 많네.
―간첩은 아닌데 솔직히 니들 꼬라지 보니까 쌤통이긴 해.
―죽돌이들 맨날 경매장에 죽치고 있으면서 저 가격이 말이 되냐고 욕함. 그거 땜에 경매품 내리는 사람도 많았음.
―이번 기회에 김밥조아가 쓰레기들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네.
―씨발새끼들 살인자를 옹호하고 자빠졌네.
―니들 잘못된 정보 올려서 사람 여럿 죽였잖아?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임.
―지랄하네 미친새끼가.
"지랄하네 미친새끼가."
저놈들이군.
나는 구석에 숨어서 경매장에 코멘트를 등록하는 놈들을 지켜봤다.
죽음의낙인 스킬과 그늘포도가 아니었으면 놈들을 지나칠 뻔했다.
흔히 경매장 죽돌이라고 한다.
죽순이라고 따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이 남자라서다.
미궁에 들어온 인원도 그렇고, 하여튼 날 욕하는 놈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들은 경매장에 죽치고 있으면서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 애썼다.
물건의 가격이 마음에 안 들면 욕을 달아서 부담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잘못된 정보를 올려서 사람 골탕 먹이는 것도 이들의 주특기였다.
서바이벌 라이프에 대해 약간 아니까 적당하게 꾸며내면 그럴싸한 정보로 변한다.
"그러니까 그 새끼를 왜 옹호하냐고."
"씨발 니들도 다 공범이야."
"김밥조아 무섭냐고? 아니, 내 눈앞에 나타나면 찢어죽일 건데?"
왜 쫓기는 상황에서도 경매장에 신경을 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중동굴이 근처라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착각이라는 걸 가르쳐 주마.
나는 차원슬롯에서 폭죽과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심지가 타오르자 놈들이 흠칫했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착각이겠지···"
미안하지만 착각이 아니라네.
나는 폭죽을 신중히 조준해 놈들이 숨은 곳으로 휙 던졌다.
파파팡!
폭죽이 신나게 불꽃과 연기를 뿜어내자 놈들이 말 그대로 혼비백산했다.
"우와악!"
"왔다! 뛰어!"
셋이 후다닥 도망가는 게 보였다.
확실히 동작 하나만큼은 빠르구만.
근데 내 특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놈들은 물에 뛰어들어 로프를 잡고 수중동굴로 들어가려 하다가 무언가에 턱 막혔다.
내 차원벽이다.
―!
선두의 남자는 크게 당황해 허우적댔고 뒤에 있던 둘은 왜 안 들어가느냐고 재촉했다.
기포가 마구 솟았고 나는 물가에 서서 놈들을 지켜봤다.
"미꾸라지 같네···"
좁고 어두운 구멍으로 기어들어가려는 모양이 딱이다.
셋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숨이 막혔는지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나는 놈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훅을 한 방씩 먹여주었다.
퍽!
"훕!"
"구웨에엑···"
음, 물을 한 바가지씩 먹었구만.
셋은 제대로 숨도 못 쉬며 바닥에 물을 쏟아냈다.
옆구리를 걷어차니 다들 답답한 신음을 뱉으며 자갈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끄으으으···"
그 와중에 한 놈이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들었다.
특성이 육체강화라 견딜 만 한 모양이다.
내가 손을 뻗자 그는 나의 손을 맞잡고 씨익 웃었다.
"너 임마 실수한 거야, 내 힘이 얼마나···"
"힘이 뭐 어떤데?"
투쟁본능과 야성 스킬이 활성화되자 스탯이 폭증했다.
손에 지긋이 힘을 주자 남자의 이마가 확 찌그러졌다.
"으, 아, 안 돼···"
"돼."
나는 단숨에 힘을 주어 남자의 손을 뭉개버렸다.
뿌드득―
불길한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걸 버티네.
아무래도 고통내성을 가진 것 같다.
20레벨이라고 봐도 되겠지.
"고맙다."
"뭐, 뭘···?"
"육체강화 20레벨 추가효과가 고통내성인걸 가르쳐줘서."
남자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나는 덜렁거리는 손을 끌어당겨 머리로 들이받았다.
뻑!
남자는 코뼈가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멀리 나가떨어졌다.
젠장, 나도 아프네.
하드스킨 2레벨로는 안 될 것 같다.
그때 쓰러져 있던 놈이 갑자기 사라졌다.
특성이 은신인가?
추가효과 때문인지 내 죽음의낙인 스킬로도 포착되지 않았다.
"근데 너무 티가 나네."
뛰는 소리가 이렇게 들리면 못 본 척 할 수가 없잖아.
나는 놈의 진로방향에 차원벽을 깔았다.
답답한 소리와 함께 자갈이 움푹 파였다.
쓰러진 남자에게 손을 뻗자 물컹한 뭔가가 잡혔다.
"흐억!"
하필 잡아도 여기를···
짜증이 나서 남자를 걷어차자 투명화가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사, 살려 주세요···"
마지막 남자가 내게 기어와 애원했다.
"분명히 경고했지? 나가라고."
"지금···지금 나가겠습니다···목숨만···"
"나가면 이를 갈면서 날 죽일 계획을 짤 텐데, 안 그래?"
"아닙니다···절대, 절대···"
"미안한데, 난 니들 안 믿어."
남자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사람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주 가끔은 어떤 계기로 변화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
하지만 이놈들은 아니다.
나는 발리스타를 이용해 놈들을 하나씩 죽였다.
육체강화 능력자는 최후의 힘을 쥐어짜 수중동굴로 도망가려다가 차원벽에 막혀 익사했다.
"···"
열다섯 명이 내 손에 죽었고 미궁은 마침내 조용해졌다.
"대한민국 인구수 또 줄어드네."
내 특성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왜 시비를 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원감옥에 들어간 놈들이 경고해주겠지."
둘을 확실히 죽이지 않은 것은 이 참상을 알릴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죽으면 그게 운명이고.
나는 태양사과를 씹어 먹고 석현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
.
.
지하철역에 열린 미궁은 생존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쳐대서였다.
엄청 어렵다느니, 입구를 누군가가 막고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섞여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서울권에서 방귀 좀 뀐다 하는 사람은 직접 미궁으로 향했다.
실력이 안 되는 사람은 손가락을 빨며 구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미궁에서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다 죽었단다.
그것도 한 명의 손에.
사태의 전말이 기록된 경매품이 죄다 날아갔기에 진실은 이대로 묻히는가 싶었다.
사람들은 정보에 목이 말라 찾아다니다가 누군가가 올린 경매품을 발견했다.
―님들 절대 미궁에 들어가지 마세요!
―님들 절대 미궁에 들어가지 마세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도배를 해대는지 궁금해 했다.
―님 진정하고 말 좀 해보세요.
―안에서 무슨 일 있었음?
―다···다 죽었어요···
―미궁이 그렇게 위험해요?
―그게 아니라 누군가가 다 죽였어요···저는 겨우 살아남았고요···
―답답하시네 그래서 누가 죽였는지 얘기 좀 해보세요.
―김밥조아요···
단순히 김밥이 좋다는 아이디, 정말 웃기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다.
김밥조아란 사람은 종말 전부터 각성자 커뮤니티에서 유명했다.
정보 공개를 안 한다는 이유로 수없이 많은 욕을 먹었다.
아마 각성자들이 평생 먹은 욕을 다 합쳐도 김밥조아가 먹은 욕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종말 이후로도 그런 사태는 계속되었다.
익명의 공간인 경매장은 욕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경매장의 주류인 죽돌이들은 김밥조아가 껌이라도 되는 양 잘근잘근 씹어댔다.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데도 갑자기 소환되어 욕을 먹는 게 일상이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강원의 생존자 A가 실력을 과신하여 홀로 오크와 싸우다가 죽었다. 당시 생존자 B는 양패구상을 노리며 숨어 있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서울에서 팬티 긁고 있던 김밥조아.
이런 농담에서 끝내면 좋았을 텐데 패드립도 거의 통용되었다.
아무래도 익명이라는 공간이 사람들을 안심하게 한 것이다.
덕분에 김밥조아 아이디가 언급되면 그 코멘트란은 죽돌이들 외엔 외면했다.
욕뿐인데 읽을 가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욕을 먹던 김밥조아가 미궁에 들어온 사람들을 다 죽였단다.
유일한 생존자의 말을 들어보면 죽은 사람들은 경매장 죽돌이라고 한다.
―그래서 김밥조아의 특성은 뭔데요?
―그의 특성은···아, 아니···말 안 할 겁니다···너무 무서워요···
그는 한참을 울다가 겨우 진정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전했다.
김밥조아가 공격하는 걸 피해 도망가는데 갑자기 거대한 바다에 빠졌단다.
육지고 뭐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망망대해에 말이다.
―밑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가 나서 너무 무서웠어요···살려고 막 헤엄치다 보니 겨우 빠져나왔죠···
―창조 계열이 아닌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미궁에 들어간 사람이 몇 명이죠?
―최소 열 명은 넘는 것 같던데.
―입구에서 포기한 사람도 많아요. 난이도가 엄청 어렵다면서.
―몬스터는 별로 없다던데 뭐가 그리 어렵나요?
코멘트란의 분위기는 아주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욕을 섞어서 쓰던 죽돌이들이 대거 사라진 결과일 것이다.
물론 죽돌이들 전부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김밥조아가 보고 있을게 뻔해서 코멘트 하나 남기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하여튼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등록자의 말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와 진짜 열 몇 명을 다 죽이다니 얼마나 강한 거야···
―지금 김밥조아를 옹호하는 건가요? 살인자인데?
―심장소리는 못 들었다고 하는데 살인자가 아니지 않아요?
―시스템적인 살인자를 말하는 게 아니고, 사람을 열 몇이나 죽였잖아요. 학살자가 아니고 뭡니까?
―내가 안 죽었으니까 상관없음.
―나도 딱히 나쁜 생각은 안 드네요.
―와 진짜 너무하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들 맨날 김밥조아 만나고 싶다 노래를 불렀잖아요. 소원성취했네.
경매장의 분위기는 김밥조아에게 유리한 쪽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점화석하고 식량 같은 거 올린 사람도 김밥조아 아님? 경매장 죽돌이들에 비하면 훨씬 쓸만한 사람임.
―저번에 떡볶이 세트 그거 맛있었는데.
―허미 그 비싼걸 낙찰받은 사람이 여기 있네.
―떡볶이는 인정이죠.
―아무튼 여기서 김밥조아 욕해봐야 소용없음요. 우리는 피해본 거 없거든.
―막말로 건드리지만 않으면 조용하잖아?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괜히 건드려서···
결론이 하나로 모였다.
코멘트란을 보고 있던 정부 쉘터의 이범석은 정보를 취합해 장원택에게 보고했다.
"최소 열 명에서 이십 명이 사망이라···참혹하군."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업자득이라는 의견입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 따위는 없네."
"아포칼립스니까요. 또 평소 경매장 죽돌이들의 행패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나같이 잘 죽었다고 하는 걸 보면."
"하긴···"
장원택은 눈을 감으며 의자에 몸을 뉘었다.
십 수 명의 인원이 아까웠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워 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 낫다.
그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 검인씨는? 검인씨도 사망했나?"
"그건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석현씨 행동을 보면 삼인방이 검인씨를 적으로 대하는지 아닌지 애매하단 말이야."
"이번에 드러날 겁니다. 접촉한 게 분명하니까요."
"그래···"
장원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부 쉘터에서 미궁에 들어간 사람은 총 네 명인데 모두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최소 세 명은 죽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여튼 강성호와 관련되면 사람들이 죽어나가니 큰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딱하지만 어쩔 수 없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시점이다.
그게 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범석이 새로운 정보를 꺼냈다.
"그리고 부산에 상륙했다는 일본인들에 대한 정보입니다만···숫자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최소 수백 명 규모입니다."
장원택의 미간이 모아졌다.
"수백 명이나 되는가···왜 일본에 있지 않고."
"요원에 의하면 방사능···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둘은 쓴웃음을 지었다.
방사능을 피해 보트피플이 되어서 기껏 한국에 왔더니만 부산이라니.
거긴 이미 방사능으로 오염된 상태였다.
"그래서 거기 계속 있는가?"
"아닙니다. 방사능으로 오염됐다는 걸 눈치 채고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기장 쪽으로 간 사람도 있습니다만···"
"다 죽었겠군."
"아무래도 오염도가 높을 것으로 추측되다 보니···"
"나머지 지역은 어떤가? 창원이나 김해 같은 곳 말이야."
"몇몇 세력이 마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한국지도가 없는 모양이군. 창원으로 갔어도 됐을 텐데."
"눈에 독기가 올라 있다고."
"충돌이 없어야 될 텐데···일단은 함부로 접촉하지 말도록 당부해두게."
"이미 홍보를 해두었습니다."
"그래···내일 성호씨와 접촉하는 일만 남았군."
어쩌면 고인물 4인방이 함께 나올지도 모른다.
그들과 대화할 준비를 해둬야겠군.
장원택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
.
.
나는 석현과 함께 둘이 기다리고 있을 아지트로 향했다.
메뚜기가 우리를 원룸 건물 3층으로 안내했다.
입구를 막고 있던 덩치가 비키자 다정이 나왔다.
"니네들 안 죽었네?"
"멀쩡히 살아와서 미안해. 검인이는?"
"안 잡아먹었으니까 걱정 마."
검인은 방에 누워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곤 벌떡 일어났다.
이리저리 돌아가는 눈동자에서 초조함이 엿보였다.
얘기하기 전에 다짐을 받아두는 게 좋겠지.
나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검인이 널 도왔어. 그렇지?"
"어, 뭐···고맙게 생각해."
"그런데 그게 진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동료라는 말은 아니야."
"···"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다른 둘은 내 말을 기다렸다.
"선택권을 줄게. 기운은 차렸을 테니 정부 쉘터로 가도 돼. 안 막을 테니까."
"···안 막는다고?"
"그래. 니 입장에선 나쁠 건 없을 거야. 정부 쉘터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을 테니까. 단지 우리와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지는 것뿐이지."
검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속마음이 잘 드러나는 타입이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두, 두 번째 선택지도 있어?"
"우리와 완전히 친구가 되는 거야. 모든 것을 털어놓고, 예전 관계로 돌아가는 거지. 서바이벌 라이프를 플레이할 때로 말이야."
검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우리와 같이 게임을 즐길 때를 회상하는 것이리라.
쉘터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나름 같이 놀긴 했다.
차곡차곡 모은 아이템을 구경하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힘주어 말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상관없어.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예전으로···"
"선택지는 이것뿐이야. 첫 번째를 선택하면 그냥 나가면 돼. 방금 말했듯 널 잡는 사람은 없을 거야."
석현과 다정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라이라도 약속은 지킨다는 거겠지.
검인은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 지하철역의 미궁 - 6 > 끝
< 고인물 4인방 >
"···함께 있고 싶어, 니들하고."
"그 말은 우리와 어떤 비밀도 공유한다는 말인데, 괜찮겠어?"
내가 다시 묻자 검인은 긍정했다.
"얼마 전부터 생각했어. 내가 지배자가 되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지배자가 될 수는 있을까···곧 철사병이 사라지는데···"
"왜, 뭐가 잘 안 됐어?"
다정의 질문에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도 정부 쉘터에 있어봐서 알잖아. 쉘터에서 내 위상이란 사실 보잘 것 없다는 거. 사람들의 눈에 배검인이란 사람은 그 정도였다는 거지, 안타깝지만."
"그래도 결정적으로 포기한 이유가 있을 텐데?"
검인은 곧바로 말했다.
"김밥···성호 때문이야."
"나?"
"어. 우리가 배틀로얄에서 만났잖아? 나 진짜 완전히 절망했거든. 갑자기 총을 들이대면서 무작정 뛰라고 하니 말이야."
"널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어. 일정시간 안에 몬스터의 벽을 뚫어야 했으니까."
"알아. 아무튼 그 후로 친구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 강해지고 싶어서 주승철과 손을 잡으려고도 했고. 그런데···"
"하필 토공이 죽빵을 날려버렸지."
"하하···지금 생각하면 잘 된 일이야. 아무튼 나는 쉘터로 돌아가지 않고 니들하고 함께 있고 싶어···예전처럼."
검인은 우리들을 하나씩 바라봤다.
그 선택은 존중해야 하지만 그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미안한데 검인아, 넌 쉘터에 가줘야겠어."
그가 당황했다.
"어? 안 돼?"
"그게 아니고, 친구로 여기되 당분간은 정부 쉘터에 있으라는 말이야."
"왜? 아···총 때문이구나."
"너는 별 영향력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정부 쉘터에서 나름의 지분이 있을 거야. 석현이도 인망을 얻었고, 그렇지?"
"뭐 그렇기야 하지···요즘에는 나보다는 토공이 더 인기가 있어."
"얘가 빤스만 아니면 여자들한테서 인기 좋을 거라니까."
다정이 석현의 팬티줄을 당기다 놓았고 그는 말했다.
"난 별로 인기 없어. 다들 히익 괴물 하면서 도망가던데."
"쉘터에서 어쨌기에?"
"별거 안했어. 평소 먹던 대로 먹고 자고 뛰어다니고."
그 말을 들은 다정이 화를 내며 석현의 등짝을 후려쳤다.
"고블린 그만 먹으라고 했지!"
"그럭저럭 먹을 만 하다고."
"전혀 안 그래! 하여튼 그딴 거나 먹으니까 다들 괴물 취급하는 거야."
"상관없어. 니들 앞에서는 안 먹잖아."
나름 우리를 배려하는 거군.
하여튼 나는 검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철사병이 사라질 때까지 검인이하고 석현이가 정부 쉘터에 있어줘야겠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거 대응하려면 가까이 있는 편이 편하거든."
"알았어."
"우리는 뭐하고?"
"인천 지하철에 가서 예비쉘터 털어야지. 전에 그거 하다 말았잖아?"
"참참 그랬지."
그때 검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다정이 내 엉덩이를 툭툭 때렸다.
"처음으로 넷이 모였는데 뭐 없어?"
"겨울이니까 뜨끈한 국물이 있는 게 좋겠지? 차원문 열어."
"아공간을 여는 시동어가 그거구나."
"여기 들어가면 어디가 나오는가 하면···전에 배틀로얄 했었지? 초원에서."
"설산이 하나 있었지···혹시?"
"그 주위에 내 쉘터가 있어. 이 차원문이 이세계와 연결되어 잇는 거지."
"와···진짜 대박이다···"
검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대박이란 말만 되뇌었다.
그나저나 우리 특성을 얻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긴 신뢰란 게 그렇게 갑자기 팍 생겨날 일이 있나.
예전처럼 친구로 돌아가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차원문 안으로 들어가 식사를 준비했다.
.
.
.
우리는 밥을 먹으며 얘기를 나눴다.
내가 차린 식사는 셋의 마음에 퍽 든 모양이었다.
입가에 국물을 묻히면서 김치찌개를 퍼먹는 걸 보면.
"와, 나는 진짜 이런 기름기 둥둥 떠다니는 김치찌개를 먹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이거 성호가 담근 김치로 만든 거라는데 진짜 잘 익었지."
다들 잘 먹으니 내 마음도 훈훈해졌다.
나는 미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석현이와 헤어진 후에 사람들을 죽이는 얘기가 나오자 다들 수저를 멈췄다.
"···총 열 다섯 명이야. 나머지 둘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어. 경매장을 보면 하나가 산 것 같지만."
"그···나 공격한 놈들도 다 죽었지?"
검인이 어깨의 상처를 매만졌다.
포션으로 치료는 되었지만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다.
"다 죽었어. 전부 경매장 죽돌이라서 그런지 지금 경매장이 깨끗해."
"음···경매장."
여러 경매품목을 훑어본 다정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성호 니 욕이 없어."
"죽돌이들이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몸을 사리는 거지. 괜히 아이디가 드러나면 밑천 탈탈 털리니까."
그때 검인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이디 보는 건 경매장에서만 되는 거야?"
"진실을보는눈이라는 스킬이 있어. 10포인트를 내고 아이디를 확인하는 거야. 전에 허세가 심한 놈이 있어서 봤더니 너더라?"
"아니 뭐 그런 얘기는···"
그는 고개를 숙이곤 잘 구워진 화조알 프라이를 흡입했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개를 연달아 먹는 걸 봐선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하긴 크기도 크고 고소하지.
"그래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됐어? 미궁 공략 말이야."
다정이 재촉했고 나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이게 참 고생 좀 할 걸로 생각했는데 석현이가 다 끝내놨더라고. 내가 막타만 치면 바로 경험치 들어오게."
"이 길치가 그 복잡한 곳에서?"
"내가 풍뎅이 빌려줬거든."
"아. 걔네들이 있었지."
그녀는 바로 납득했지만 검인은 풍뎅이가 뭔지 궁금해 했다.
이번 기회에 사슴벌레까지 데뷔시켜야겠군.
나는 동굴에서 대장 풍뎅이와 대장 사슴벌레에게 양해를 구한 후 데리고 나왔다.
붙어 있으면 싸우기 때문에 양 손바닥 위에 따로 올려야 했다.
검인이 둘을 쳐다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어···진짜 풍뎅이네? 난 비유인 줄 알았는데."
"사람 말을 알아듣는 지능이 높은 친구들이야. 쉘터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어. 얘 둘이 대장이라고 보면 돼."
"대단하다···"
검인은 사슴벌레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집게에 물리고 말았다.
"아얏."
"참, 풍뎅이는 너그러운데 얘는 성격이 좀 난폭하니까 조심해."
대장 사슴벌레는 참지 못하고 버럭버럭 내게 항의했다.
"미안미안."
나는 잽싸게 둘을 동굴로 보내주었다.
석현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전부터 느낀 건데, 풍뎅이는 드워프 같네. 광물을 좋아하고 길도 잘 찾는 걸 보면."
"드워프?"
"판타지에 나오는 난쟁이 종족 말이야."
듣고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군.
반면 사슴벌레는 엘프와 비슷했다.
나무를 좋아하고 작물 가꾸기를 즐기는 걸 보면 말이다.
근데 보통 엘프는 온화한 성격으로 나오지 않나?
뭐 성격이 나쁜 엘프도 있겠지.
나는 미궁을 클리어한 결과를 얘기했다.
"26레벨로 올랐고, 포인트는 뭐 대충 넘어가고, 스킬칸을 하나 더 얻었어. 우버 머맨한테서는 체력재생이 나왔고."
"우버 머맨은 또 뭐야."
"뱃고동 같은 소리 내는 몬스터 있어. 물고기하고 도마뱀이 합쳐진 것처럼 생겼는데. 석현이가 거의 다 죽여 놨더라고."
"토공 잘했어. 이제 좀만 더 있으면 우리의 원대한 계획이 결실을 맺겠구나."
"원대한 계획?"
"성호네 쉘터로 쳐들어가서 같이 노는 거 말이야!"
다정이 호들갑을 떨자 검인이 물었다.
"다른 사람도 들어갈 수 있어?"
"지금까진 안 됐는데 30레벨에 혹시 될까 하는 거지."
"참고로 25레벨 추가효과는 차원감옥이야."
"5분 동안 하늘에서 떨어지기만 했다고. 진짜 끔찍했지···"
"나는 망망대해에서 헤엄쳤어."
"···진짜?"
"진짜, 리얼루."
검인은 겁먹은 눈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근데 우리가 보기에 너 좀 약한 것 같아서 말이야. 특성이 정확히 뭔데?"
"음···내 특성은···"
그는 입 안에 있던 걸 꿀꺽 삼키고 입 주위를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다중 특성에 대해 얘기했다.
"아직도 조건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를 신뢰한 사람의 특성을 복사할 수가 있어. 복사하는데 포인트가 들고, 추가효과는 하나만 가질 수 있어. 5레벨 추가효과만."
"지금 19레벨이지? 추가효과는 뭐야?"
"5레벨에 포인트 소모를 없애주는 게 나왔고 10레벨은 추가효과까지 복사하는 거야. 그리고 15레벨에는 특성 저장칸이 나왔고."
"특성 저장칸?"
"그러니까 특성을 쓰지는 못하고 저장만 해두는 거야. 책상을 예로 들면, 지금 필요 없는 책 같은 건 한쪽으로 치워두잖아? 다시 보려면 가져오고."
아하.
스킬이 붙은 아이템을 착용할 때와 비슷한 효과다.
10개의 스킬을 소유하고 있을 때, 스킬이 붙은 아이템을 착용하면 일시적으로 첫 번째 스킬이 사라진다.
아이템을 빼면 복구된다.
"뭐야. 그럼 특성을 총 네 개 갖고 있다는 말이잖아. 사기네."
다정이 그의 어깨를 툭 치자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꼭 그렇지도 않아. 특성 저장칸엔 항상 쉘터 강화를 놔둬야 하거든. 다른 사람에게는 유용한데 정작 나한테는 큰 쓸모가 없어. 시설물하고 무기한테만 적용되는 거라."
그 말을 들은 다정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서 우리가 효과를 못 봤구나···좀비를 조종하고 맨 주먹으로 싸우니까?"
"미안해. 그 때는 말을 못했어."
"뭐 그럴 수도 있지. 맨날 내 가슴하고 다리 쳐다봤으니까 이걸로 쌤쌤이야. 알겠지?"
"대신 내 걸 봐."
"토공 넌 좀 빠지고."
대체 남자가 남자 다리를 봐서 뭘 어쩌자는 거야.
···슬슬 정리할 때로군.
나는 그동안 머릿속으로 정리한 것을 털어놓았다.
"다정이도 그렇고, 석현이도 내가 30렙 찍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근데 이게 쉬운 건 아니라서 시간이 좀 필요해. 그리고 30렙이 되어도 원하는 추가효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일단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하자고."
석현이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우리 둘은 정부 쉘터에 들어가고, 너네는 인천 예비쉘터 공략하고?"
"거기 좋은 게 있다고 하니까. 겸사겸사 날이 풀리면 근처 타임쉘터도 봐야겠지."
"얘가 웃긴 게 뭐냐면, 종말 시작부터 지금까지 파밍만 했어. 완전 파밍 인생이지."
"덕분에 동굴에서 편하게 지내잖아.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커, 컴퓨터도 있어?"
"검인이 넌 잘 모르지? 얘 쉘터에 별의 별 게 다 있어. 미니 포크레인하고 오토바이도 있다는데. 언젠간 타고 말 거야."
모 과자 CF에서 실패만 거듭하는 치타처럼 얘기하는 다정.
석현이도 그걸 떠올렸는지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지껄이다가 한 대 맞고 말았다.
아이고 생각만 했어야지.
"전기는 어디서 끌어오는 거야?"
"태양광 발전기로."
"···거기는 철사병이 없나보구나."
"그러니까 총도 있지. 참고로 말하자면 주승철 쉘터 털어서 총기하고 실탄 넉넉히 챙겨놨어. 수천 발 정도."
"혹시 컴퓨터는 있어?"
"노트북까지 합치면 세 대네. 내 건 아니고 종말 당일에 원룸에서 파밍한 거야."
"안에 혹시 게임 있었어?"
"게임?"
검인이 너 겜돌이였구나.
하긴 20대 초중반이면 게임에 푹 빠져있을 나이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게임은 안하게 된다.
새로 뭐 배우는 것도 귀찮고, 집중을 못하거든.
"영화나 음악은 많던데 게임은 글쎄···나중에 내가 찾아볼게."
"철사병 끝나면 말이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챘다.
겜돌이가 하려는 거야 뭐 뻔하지.
"쉘터에도 컴퓨터 있잖아? 지금은 못써도."
"공용으로 쓰는 건데 그걸로 게임하긴 좀 그렇잖아···지식저장용이라서 게임도 없어."
하긴 정부에서 비축했으니 게임 같은 걸 넣었을 리 만무하다.
기껏해야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만 가득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인이 너 하는 거 봐서. 물론 우린 친구지만 줄 때 기분 좋게 줘야지, 안 그래?"
"물론이지. 그러니까 내가 정부 쉘터에서 제대로 지분 확보하면 되는 거지?"
"나중엔 전부 내 쉘터에 들어와서 생활하는 거야. 동굴이 좁으니까 각자 쉘터를 만들어야겠지만, 생활은 같이 하는 거지. 비축물자도 나눠 쓰고."
"쉘터, 쉘터···
쉘터성애자인 검인이 갑자기 흥분했다.
서바이벌 라이프에서도 활동하는 시간보다는 쉘터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다.
컬렉션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나 뭐라나.
나는 넷이서 숲에서 활동하는 상상을 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
다정도 비슷한 것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헛구역질을 했다.
"오리 너 임신했어?"
"임신은 무슨! 니가 발가벗고 숲을 뛰어다니는 걸 상상하니 역겨워서 그런다 왜!"
"사람은 원래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야."
"결국 벗고 뛰어다닐 거라는 말이잖아···"
"임신?"
검인이 심하게 눈을 깜빡였고 다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 성호하고 섹스했어."
"어···그래? 축하해."
뜻밖에도 검인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래? 하더니 다시 찌개를 먹기 시작했다.
다정이 볼을 부풀렸다.
"뭐야. 너 나 좋아했잖아. 딴 남자한테 나를 뺏겼다는 절망의 리액션은 보여줘야지."
"니가 떠나면서 마음을 많이 접었거든. 나한테는 그, 안 어울리기도 하고."
나름 마음을 정리했구나···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라면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아마도.
.
.
.
석현과 검인이 쉘터로 떠났다.
나는 그들이 떠나기 전 석현에게 다짐을 받아두었다.
쟤 좀 굴리라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특성을 가지고 늑대인간도 못 잡았다는 건 말이 안 돼.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야.
―철저히 뜯어고치란 말이지?
―억지로라도 데리고 다니면서 스킬 먹이고 경험도 좀 쌓아줘. 자기가 약하지 않다는 걸 알면 자연스레 강해질 거야.
―내가 가장 잘하는 거네. 맡겨둬.
―참, 그리고 당분간 장원택 아저씨한텐 말하지 마. 긴가민가하고 있을 거거든.
그들이 떠난 뒤 나와 다정은 준비를 끝마치고 신도림역에 나갔다.
장원택과 비서실장 이범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내 옆의 다정을 보더니 뜻밖이란 표정이 되었다.
"짐작은 했었는데 확실히 삼인방이 함께 하고 있군요. 우리 검인씨는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최소한 내 손으로 죽이진 않았습니다."
"살아있단 말이군요. 그렇다면 세 명은 죽었다고 봐야 하나···"
"누구 말입니까?"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장원택은 자리에 앉더니 탄식을 쏟아냈다.
"성호씨와 만나기만 하면 사람이 죽어나가니 큰일입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죽었을 겁니다.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봐줄 생각은 없었습니까? 대한민국의 인구수가 계속 줄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결심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겁도 없이 내게 덤비는 놈들에게 하시죠."
"평범한 사회였다면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걸로 끝났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 때는 개소리를 해도 대가리가 깨지지 않았거든요. 자기 대가리가 깨질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 다들 얌전해지겠죠."
"그때까지 많은 사람이 죽겠군요···"
"내가 공격하는 건 상대가 살인자이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뿐입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공격 안 합니다."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는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성호씨를 탓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조금 아쉽다는 거지요. 조금만 소통이 이루어지면 다들 협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그도 나도 알고 있다.
다들 특성이라는 초능력을 가진 시대.
몬스터가 사람을 공격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특정다수를 믿고 협력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다정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말했다.
"아까 마산 얘기를 하던데 뭐였죠?"
"마산···?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는데···?"
"들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마세요. 내 귀는 여러 곳에 있으니까."
벌써 25레벨까지 올렸구나.
추가효과가 휘하 좀비나 구울이 듣는 소리를 다이렉트로 전달받는 거겠지.
유현이의 특성과 비슷하지만 일장일단이 있다.
그나저나 마산에는 그 사람들이 있는데···
장원택의 시선을 받은 이범석이 입을 열었다.
"마산에 일본인들이 진입했습니다. 부산의 방사능을 피해 달아난 자들이죠. 자세한 숫자는 파악이 안 됩니다만 최소 수십 명 규모는 됩니다."
수십 명이 돝섬을 보고 지나칠 리가 없다.
나는 표정을 감추고 일어섰다.
오랜만에 마산에 연락해야겠군.
< 고인물 4인방 > 끝
< 내 아이디는 - 1 >
서울과 경기권 일대가 극한의 추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동안.
마산의 돝섬 멤버들은 비교적 따스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남해안 일대가 원래 따듯하기도 하거니와 몬스터를 신경 쓰지 않고 난방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선 쉘터가 섬이란 게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했다.
가끔 섬 자체에서 리젠되는 자잘한 몬스터 외에는 안전하다 보니 신나게 모닥불을 피울 수 있었다.
식량도 문제가 없는 것이, 불쌍맨 엄지만의 특성이 빛을 발했다.
각종 채소는 물론이고 한겨울에 과일을 먹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멤버 개개인이 열심히 비축한 식량도 상당한 양이었다.
이런 요소가 모여서 돝섬 멤버들은 상당히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아포칼립스가 맞나 싶을 정도다.
12월 말의 어느 날.
돝섬의 멤버 중 한 명인 정미경은 가장 먼저 일어났다.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보니 주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거기 가서 살아라 살어."
자리의 주인은 한여울을 말한다.
뭘 어떻게 했는지 유현이를 꼬셔서 둘이서 신혼살림을 차리기 직전이다.
밤만 되면 어디론가 스윽 사라지는데 아마 유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멤버들의 대장격인 형준과 수연도 그걸 모르지 않아서 제발 임신만 하지 말라고 당부한 적이 있었다.
아포칼립스에서 임신은 곧 절망이라면서.
미경은 바다에 나가 기지개를 켰다.
"흐으윽···하아···"
겨울임에도 마산의 새벽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서울권은 역대급의 한파를 맞아서 몬스터가 활동하지 못할 정도라는데 상상도 가지 않았다.
"여기도 좀 더 추웠으면 좋았을 걸."
미경은 서울권의 생존자들이 들었으면 쌍욕을 했을 말을 내뱉곤 체조를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푸는 것은 어느덧 일상화된 그녀만의 루틴이었다.
그녀는 시멘트로 만든 세면장으로 가서 고양이 세수를 했다.
돝섬에 물이 있다지만 펑펑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이 하루에 쓸 수 있는 물의 양은 3리터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건 형준의 방침이었는데, 그는 아껴야 잘 산다는 케케묵은 격언의 신봉자였다.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틀린 말은 아니라 다들 잘 따랐다.
미경은 거울을 들여다보곤 울상이 되었다.
"피부 완전 엉망이야···"
그 하얗고 윤기가 나던 좋은 피부는 사라지고 없었다.
최대한 보습을 해주고 목토시로 햇빛을 가리는 등 신경을 썼지만 한번 거칠어진 피부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매일 9시간은 자는데.
겨울 들어서 해가 빨리 지면 할 것도 없고 해서 빨리 잠자리에 드는 게 일상이었다.
미경은 괜히 거울을 툭 친 다음 일어섰다.
슬슬 사람들이 일어날 시간이다.
소매를 걷고 찬물에 쌀을 씻으려니 손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앗 차거."
그녀는 손을 털어가면서 솥에 밥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밥은 따뜻한 걸 먹자고 다들 의견을 모았기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아궁이에서 연기가 솟아오르자 어디선가 여울이가 나타났다.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밤에 따뜻했겠다?"
"침낭에 둘이 들어가 있으면 당연히 따뜻하죠."
"좋겠네. 누구는 새벽부터 나와서 이러고 있는데."
"반찬 뭐해야 돼요?"
여울이는 능청스럽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당분간은 둘이 식사당번이라 얼굴을 맞대고 일 할 수밖에 없었다.
미경은 나도 남자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듣다 못한 여울이가 한 소리를 했다.
"아저씨 가기 전에 콱 도장 찍지 그랬어요."
"무, 무슨 도장을 찍어···"
"또또 알면서 모르는 척. 언니가 아저씨 좋아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제가 아저씨라고 부르니까 언니가 부르는 호칭이 오빠로 바뀐 거잖아요."
"그런 거 아닌데."
"전에는 계속 아저씨라고 불렀다면서요. 저 오기 전만 해도."
할 말이 없어진 미경은 손가락을 꼬았다.
그녀가 성호를 부르는 호칭이 아저씨에서 오빠로 바뀐 까닭은 여울이 때문이었다.
둘이서 아저씨라고 부르기가 싫었던 것.
남자들은 이 미묘한 분위기를 몰랐지만 여자들은 눈치 챘다.
특히 여울이는 잊을 만하면 꺼내서 미경을 놀려댔다.
"근데 언니는 아저씨가 뭐가 그리 좋아요? 체격이 너무 커서 부담스럽던데."
"···멋있잖아."
"뭐가 멋있어요?"
"오빠가 나서면 안 될 일도 막 해결될 것 같거든. 실제 그런 일도 몇 번 있었고···우리가 여기로 오게 된 것도 결과적으론 오빠 덕분이잖아?"
"언니는 의외로 얼굴은 안 따지네요."
"아포칼립스에서 얼굴 따져서 뭐해. 능력이 최고야."
"근데 그런 건 있어요. 막 화가 나도 잘생긴 얼굴 보니까 참게 되더라고요."
"유현이 잘생긴 거 아니까 그만해···"
둘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온기를 쬐었다.
"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요?"
"낸들 알겠니."
수연과 유현이에게 영어 문서 해석본을 받아간 뒤로는 연락이 없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다.
형준과 지만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말했지만 미경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연락이나 좀 해주지."
그녀는 괜히 울적한 마음에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옆에서 여울이가 경매장을 호출하더니 말했다.
"언니 요즘 경매장 분위기가 많이 바뀌지 않았어요?"
"나 안 들어가서 몰라."
미경뿐만 아니라 돝섬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매장을 잘 쓰지 않았다.
경매품은 별로 올라오지도 않고 욕질이나 해대는 사람들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헛소문은 기본이고 들어갈 때마다 싸우고 있어서 다들 경매장을 꺼려했다.
돝섬에 모여 있어서 쓸 일도 없었다.
경매장을 살펴보던 여울이는 미경의 무릎을 콕콕 찔렀다.
"언니 사람들이 많이 죽었나 봐요."
"얘는 무슨 끔찍한 소리를."
"경매장 죽돌이들 있잖아요. 맨날 욕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다는데요?"
"···진짜?"
미경은 반신반의하며 경매장을 호출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분위기가 꽤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새벽부터 진행되는 경매만 해도 9개에 욕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호가 죽돌이들 상당수를 죽여 버렸기에 일어난 변화였지만 이들은 돝섬에 틀어박혀 있었기에 잘 몰랐다.
그녀가 한참 경매품을 구경하는데 여울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언니언니, 여기, 여기요."
"왜에에···"
"아저씨가 우리 불러요. 이 암호문 돝섬이잖아요."
"우와 진짜다."
둘은 바로 코멘트를 입력했다.
―아저씨 저 들어왔어요. 여울이요. 옆에 미경 언니도 있어요.
―내 인사까지 니가 해버리면 안 돼에~
―둘 다 반가워. 한 달 만이지?
―네네, 언니가 아저씨 많이 보고 싶었다네요. 밤마다 이불을 눈물로 적실 정도로···
―아니거든!
한편 코멘트를 보던 성호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옆에 다정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잠꼬대까지 해가면서.
"흠냐암 성호 너무 커어어어···"
이걸 어쩐다···
.
.
.
성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여울이는 즉각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그녀의 특성은 일심동체.
파트너의 특성을 복사함과 동시에 보너스 스탯을 나누어가지고 추가효과를 쓸 수 있게 해주는 희한한 특성이었다.
덕분에 유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스탯이 오르고 20레벨의 추가효과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여울이가 돝섬 주변을 감시하는 동안 미경은 블링크로 남자숙소에 쳐들어갔다.
"우왓 깜짝이야!"
다들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미경은 구석에 있는 유현이를 깨웠다.
"빨리빨리! 오빠한테 연락 왔어!"
"···오빠가 누군데···"
눈을 비비며 일어난 형준은 성호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자세히 얘기 좀 해봐라. 성호가 뭐 어쨌다고?"
"마산에, 일본인들이 들어왔대요!"
"···걔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자세히는 모르겠고 정부 쉘터에서 정보를 들었다나 봐요!"
형준은 정부 쉘터가 서울에 있다는 걸 떠올리곤 기겁했다.
언제 거기까지 올라갔지?
아무튼 다들 일어나서는 경매장에 들어가 성호와 인사했다.
―급식이 둘은 없습니까?
―걔네들 창원 갔어. 그나저나 일본인들이 근처에 왔다고? 자세히 좀 설명해주라 성호야.
―제가 들은 건 이렇습니다···
성호는 이범석에게서 들은 것과 나름 경매장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전했다.
숙소에 모인 돝섬 멤버들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수연이 노트를 꺼내 손가락으로 훑었다.
"최소 합포구 쪽은 아니에요. 수십 명이 있다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어요."
"그건 맞죠. 맨날 파밍하러 다니는데요."
미경이 블링크로 돌아다니고 유현이와 여울이가 종이비행기를 계속 날려서 합포구는 이들의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멀리 있다는 말인데···
그때 유현이가 눈을 떴다.
"양곡동에서 일본인들 확인했어요."
"일본인인 줄은 어떻게 알고?"
"남자들 헤어스타일이 삐죽빼죽 하더라고요. 예전에 유행했던 샤기컷처럼."
"일본인이 그런가?"
형준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미경은 알고 있었는지 재빨리 끼어들었다.
"걔네들 헤어컷 가격이 되게 비싸거든요. 그래서 남자들 머리가 길어요."
"아하."
일행은 그제야 그들이 일본인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걸 들은 성호가 정보를 말해주었다.
―자국의 방사능을 피해 부산에 상륙했는데, 아시다시피 거기 꼴이 그래서···하여튼 방사능을 피해 달아난 곳이 그쪽입니다. 일부는 김해로 올라갔고요.
―그럼 방사능에 오염된 인간이란 말 아니냐? 이거 골치 아프네.
―두어 달 동안 계속 이동하느라 피곤에 쩔어 있을 겁니다. 독기도 올라 있을 거고요.
형준은 코웃음을 쳤다.
―지들이 독기가 올라 있으면 어쩔 거야. 여긴 우리 안방이라고.
―형님 자신 있습니까?
―수십 명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건 아니고, 최소 지지는 않는다는 거지. 여긴 섬이잖냐. 그리고 우리도 레벨 많이 올렸거든.
―그럼 다행이고요.
성호는 안심이 안 되는지 지만이에게 상어 있냐고 물었다.
―아뇨. 상어는 먼 바다로 돌려보냈어요.
―왜? 걔네들 있으면 유용하잖아.
―앞바다에 있으니까 말라가는 게 보이더라고요. 지방이 많은 물개 같은 걸 먹어야 겨울을 나는데 물고기로는···
그런 사연이 있었군.
성호는 상어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눈치만 보던 미경이 코멘트 중간에 잽싸게 끼어들었다.
―오빠 지금 어디 계세요?
―나? 지금 어···인천 쪽에.
―여기 안 내려오실 거예요? 씨드볼트 파밍하고 오신다고 해놓구선···
―곧 갈 거야, 아마.
―근데 어떻게 오실 거예요? 인천에서 마산 너무 먼데···
―혹시 근처에 파밍 던전 나타난 거 있으면 말해줘. 우리도 찾을 테니까.
―우리···요? 오빠 누구하고 같이 있어요?
―딩고 말하는 거야, 딩고.
―아하. 딩고도 많이 컸죠? 빨리 보고 싶어요.
많이 컸지.
성호는 어지간한 대형견보다 더 큰 딩고를 보곤 경매장을 껐다.
뒤에서 다정의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산에 내려갈 거야?"
"그놈들 독이 올라 있어서 위험해. 가봐야지."
"흐음, 구울 풀어서 파밍 던전 찾아줘?"
"그래주면 고맙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적으로 파밍 던전이 출현하고 있다.
나타나는 위치가 완전히 랜덤이라 찾기가 쉽지 않을 뿐.
다정의 구울이 흩어져서 찾는다면 확률은 꽤 올라갈 것이다.
그녀는 손을 뻗어 성호의 볼을 꼬집었다.
"슬슬 말 안 할 거야? 너만 믿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의 정체와 차원문에 대한 것이다.
돝섬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대충은 눈치 채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안 좋아지니까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
"계속 숨기는 것도 좀 그러니 이번에 기회를 내서 말을 해야지."
"제법 용기를 냈네. 전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때로는 정면 돌파가 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가 이렇게 결론을 내린 데에는 습지 미궁에서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그를 사냥하러 모여든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나니 상황이 반전된 것이다.
경매장은 깨끗해졌고 그를 욕하는 사람도 사라졌다.
물론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당장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정체를 밝히면 돝섬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 다들 착해서 그런 일은 없을 걸?"
"그건 보면 알겠지."
성호에게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
왜 우리를 더 열심히 도와주지 않았느냐.
왜 종말을 막지 않았느냐···
만약 이런 말이 나오면 성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락을 끊을 생각이었다.
특히 형준의 입에서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
.
.
다정이 구울을 풀어 파밍 던전을 찾고 있을 때.
석현과 검인은 인천으로 향했다.
처음엔 정부 쉘터에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검인이 방향을 틀었다.
"그, 미안한데···누구를 좀 찾아야 할 것 같아···"
"누구를?"
"전에 인천에서 내가 속인 사람들이야···정부 쉘터의 요인인 척 하고 서울로 오면 받아들여 준다고 그랬거든···"
"배틀로얄 때문에 특성이 필요했구나."
"어···구속하고 사격술."
"지금쯤은 죽지 않았을까? 레벨 낮은 사람들에게 도시 간 이동은 어려워."
"그, 그렇겠지?"
검인의 표정은 너무도 우울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속였다는 생각에 자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석현이 말했다.
"너 사람을 이용했구나. 우리도 이용하고 버리겠지?"
"아, 아니야. 이제 그런 일은 없어···"
"한 번 일을 저지른 사람은 또 그럴 수 있지. 안 그래?"
검인은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니 말이 맞아···그래서 나 혼자서라도 가려고 해. 시체라도 찾아서 묻어줘야지."
그가 발걸음을 옮기자 석현이 어깨를 움켜쥐었다.
"잠깐."
"응?"
"난 너를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성호는 믿어. 그러니까 성호가 믿는 너도 믿어."
"···도와주는 거야?"
"사실은 니가 떠나버리면 내가 길을 못 찾으니까 그런 거야."
"그, 그래···"
어찌되었든 좋은 일이다.
둘은 인천으로 향했다.
날씨가 살짝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온갖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석현은 몸을 이용해 싸우는 법을 검인에게 가르쳐 주었다.
"맞는 걸 두려워하면 안 돼. 너는 충분히 강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부활이 없잖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이상 언제나 약한 채로 있을 수밖에 없어. 내가 하는 걸 잘 봐."
그는 긴 울음소리를 내는 늑대인간에게 달려들었다.
둘의 처절한 육박전이 펼쳐졌다.
처음엔 마른침을 삼키며 구경하던 검인은 차츰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나보고 그렇게 싸우라고?"
조금만 방심하면 발톱에 목이 날아갈 거리에서 긴 팔을 모두 쳐내며 늑대인간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너도, 이렇게, 싸울 수, 있어!"
그렇게 외치며 이쪽을 돌아본 석현의 얼굴엔 붉은 빛이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스킬을 발동시키지 않았다는 증거.
검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도···'
석현의 스탯은 물론 높지만 그에 비해 아주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육체강화를 제대로 발동한다면 저렇게 싸우지 말란 법도 없다.
하지만 석현의 싸움은 점입가경으로 변해갔다.
처음엔 육박전을 벌이나 싶더니 이젠 늑대인간과 껴안고 뒹굴기까지 했다.
크릉!
늑대인간이 포효하며 석현의 어깨를 꽉 물었다.
피가 철철 흐르자 그는 입을 쫙 벌렸다.
"니가 물었으니까 나도 문다!"
깨갱!
늑대인간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인은 땀을 삐질 흘렸다.
절대 저렇게 싸우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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