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강정(剛正): 강직한 사람
“잠시 멈추십시오!”
그때,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뇌홍이었다. 그는 난감해 보이기도, 불안해 보이기도 했으나 분명 화를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바람에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공자.”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뇌홍이 일어섰다. 그러곤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공자에게 진심을 담아 말을 올렸다.
“저들은 이곳에 자신의 기예를 보이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저 그 기예를 감상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이리 많은 사람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옷을 벗는 놀이는 오히려 분위기를 해칠 듯합니다.”
그의 말에 넓은 공간에 정적이 들어찼다.
“….”
쥐죽은 듯 조용했던 시간도 잠시, 양공자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자 근처에 있던 공자들 몇몇이 말을 이었다.
“모두 장대인이 강직하여 듣기 좋은 소리 따윈 하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옆에 있는 호위도 이리 강직한 것을 보면요!”
“강직은 무슨! 무슨 말을 그리 돌려? 그냥 고루한 것이지!”
강신도 그들의 말에 함께 웃으며 말했다.
“형님, 그를 이곳에 남겼다가는 흥이 다 달아나겠습니다!”
양공자는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웃지도 않았다. 그저 여전히 의자에 반쯤 기대앉은 상태로 그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뇌호위.”
“네, 공자.”
이미 이곳에 있는 공자들에게 놀림을 당할 각오를 한 뇌홍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뇌호위가 한 행동을 무어라 하는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뇌홍이 여전히 굳은 채 대답하자 양공자가 천천히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는 걸세.”
뇌홍이 그에 대해 반박을 하려 하자, 양공자가 손을 들어 막았다.
“지금 자네가 어려운 자를 돕고 있는 것 같나? 좋아. 만약 이번에 내가 자네의 말대로 했다고 하세. 그럼 다음은? 본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기녀들의 일이지 않나? 자네가 기녀란 존재를 없애지 않는 한, 이러한 일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란 말일세. 그러기에 자네가 지금 한 행동이 쓸데없는 행동이란 말이야.”
“허나….”
양공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더구나 만약 오늘 기녀들이 여기 앉은 이들에게 잘 보여 그들의 눈에 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숱한 사내를 상대하며 힘들게 살던 기녀들이 한 남자만 섬기며 힘겨운 삶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지금 자네의 행동은 그것을 막는 것이 아닌가? 자네는 왜 그들의 앞길을 막으려 드는가?”
“맞습니다!”
한 공자가 나섰다.
“오늘 여기 있는 계집 중 누군가가 날 만족스럽게 옆에서 잘 보필한다면, 첩실로 데려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
양공자는 손에 든 미주(米酒)를 살랑거리며 웃음 지었다.
“뇌호위, 자네는 온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가 제아무리 온 세상을 다 뒤집어 깨끗하게 만들려 해도, 천하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네.”
그러나 양공자의 말에 뇌홍은 더욱 강직하게 대답했다.
“방을 청소하지 않고 어찌 천하를 깨끗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장대인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장대인이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을 해결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일은 그리할 수 있다고요.
공자께서 오늘 기녀들에게 달리 대하신다면 여기 있는 기녀들은 한 번 덜 고단할 것이고, 그런 이들이 모이고 늘어난다면 세상이 깨끗해지는 날도 올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무가치한 일이란 말입니까?”
뇌홍의 말은 들을수록 일리가 있었기에, 공부와는 담을 쌓은 방탕한 공자들의 수준으론 그 말에 대꾸할 말들이 생각날 리가 없었다.
양공자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곧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눈치를 보며 양공자를 따라 웃었다. 백옥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환하게 웃던 양공자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좋다! 뇌호위를 봐서 내 오늘은 그들을 고단하게 하지 않을 것이네! 놀이는 아까 이야기 한 대로 진행하겠지만, 굳이 옷을 벗으라는 강요는 하지 않겠네. 대신 옷을 벗기 싫은 이는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하세. 뇌호위, 이 정도면 자네도 만족하겠는가?”
뇌홍은 말이 없었다.
양공자가 이미 그를 위해 크게 한발 물러선 상황에서 계속 기녀들을 놓아 달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양공자가 이미 말한 것처럼 기녀들은 다른 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었다.
이번엔 자신이 나서 그녀들이 이런 상황을 모면하더라도 다음번, 또 그 다음번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그녀들의 인생이었다. 또한, 이 일은 기녀들의 생계가 걸린 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견을 계속 고집할 수는 없었다.
뇌홍이 손을 모아 공수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공자.”
뇌홍의 대답에 양공자가 낭창하게 대꾸했다.
“내 그대의 청을 들어준 것임을 잊지 마시게.”
“예.”
뇌홍이 공손하게 대답하고 자리에 앉자, 잠시 끊겼던 연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는 사이 강신은 이미 명미의 앞까지 와있었다.
강신은 명미를 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천이 달린 갓이라. 흥미롭기는 하지만, 본 세자가 선택하기 거치적거리니, 갓을 벗거라!”
명미는 잠시 멈칫했지만, 세자의 명이기에 무조건 갓을 벗어야만 했다. 그녀는 갓을 벗으려 천천히 손을 올리면서도 망설였다. 이 갓을 벗으면 자신의 눈을 가려주던 것은 사라지고 만다.
명삼부인은 본래 오늘 이 자리에서 전체적으로 옅은 색깔을 많이 사용한, 가볍고 고고하게 나부끼는 옷을 입으려고 했었다.
거기에 얇은 천으로 얼굴을 살짝 가려,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하려 했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녀의 신분을 가리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그렇게 얼굴 반을 가려둠으로써 눈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대의 권세를 잃은 명 씨 집안의 남자들이 미모의 첩들을 몇 명씩 들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명삼부인은 명 씨 집안에서 그런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것은 그녀가 다른 이들에 비해 눈에 띄게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내 눈이 드러나면 누군가 날 알아볼지도 모르는데.’
명미는 불안해하며 손을 갓에 가져갔다. 그녀의 손이 갓에 다다랐을 때, 명미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 * *
눈앞의 여인이 갓을 벗자 천으로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얇은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미인이었다.
강신은 그녀를 본 순간 얇은 천 위로 드러난 여인의 두 눈이 너무도 매혹적이란 생각을 했다.
오직 그러한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한순간에 눈앞의 여인에게 빠져들었던 강산은 다시 한번 그녀를 집중해서 보았다.
그 순간 그는 크게 실망하며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곤 바로 다음 여성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천에 가려진 명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강호에 떠도는 여러 역용술에는 얼굴의 이목구비 전체를 바꾸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바꾸는 것도 있었지만, 그와 비슷한 효과를 주는 다른 역용술도 있었다.
바로 얼굴의 근육을 미세하게 조정하여 원하는 효과만을 주는 술법이었다.
그렇게 하면 이목구비를 바꾸지 않고도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을 줄 수가 있었다. 이는 사람이 가진 정(精), 기(氣), 신(神)에 변화를 주는 원리로 된 역용술이었다.
명미는 갓을 내리는 그 순간, 눈썹을 아래로 쳐지게 만든 후, 두 눈에 가득했던 총기를 거두어 버렸다.
그래서 마치 선녀라도 본 듯 명미를 보자마자 명미에게 홀렸던 강산이, 명미를 재차 보고는 실망한 것이다.
역용술을 쓴 명미는 흐리멍덩한 눈과 어딘가 우울하고 어두워 보이는 인상의 여인이 되어있었으니까 말이다.
미인의 아름다움이란 겉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이라 했다. 그녀의 두 눈은 나무랄 곳 없이 너무도 아름다웠지만, 역용술로 흐리멍덩하게 바꾼 눈빛과 전체적으로 풍기는 우울한 분위기는 상대가 호감을 지니지 못하게끔 했다.
그렇게 명미를 지나친 강신은 곧 다른 이를 선택했다. 그는 방탕한 공자답게 꽃을 그녀의 훤한 가슴에 꽂고서는 시원하게 웃었다.
“자, 자, 자! 어서 본 세자를 따라오라고!”
강신의 선택을 받은 그녀는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하고는 그를 따랐다. 세자의 선택을 받은 것이 자못 기분이 좋았던 것인지, 그녀의 얼굴 가득 의기양양한 미소가 흘렀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 없이 잘 넘어갔구나.’
명미는 안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고개를 든 명미의 시야에 위쪽에 앉은 양공자가 들어왔다.
그는 알 수 없는 의미의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든 부용화 꽃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해 명미는 순간 긴장했다.
‘착각인가? 비록 그를 다루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그땐 서로 멀리 있었어. 게다가 지금 내가 이리 얼굴도 가리고 있으니 설마 알아보진 못했을 것이다.’
그때, 양공자의 목소리가 명미의 귀에 들렸다.
“뇌 호위, 세자가 선택을 마쳤으니, 이제 자네가 골라보는 것이 어떤가?”
“저… 저는….”
뇌 호위가 미적거리자 양공자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심하게, 기예만 겨루려는 거지, 남녀의 여흥을 위함이 아니니!”
이미 양공자의 호의를 한번 거절한 뇌홍이었기에 다시 그의 말을 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양공자의 체면을 깎을 수 없었던 뇌홍은 잠시 고민 끝에 마음을 정하고는 기녀들이 선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분으로 하겠습니다.”
뇌 호위는 그저 기녀들을 향해 아무렇게나 손을 뻗었을 뿐, 사실 누군가를 지목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그런 손짓에 당황한 것은 기녀들이었다.
그가 자신을 가리킨 것인지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기녀들이 순간 당황하던 찰나, 누군가가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명미였다.
명미는 뇌 호위가 아무나 지목한 순간,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양공자의 말로 미루어볼 때 선택당하면 그 사람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곳에 있는 다른 공자들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지만, 뇌홍은 믿을만했기 때문에 그녀가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
사실 그녀가 있던 곳은 뇌홍이 가리킨 곳으로부터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도 아무 곳이나 가리켰으니,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명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녀가 지목된 것이겠거니 여겼다.
명미는 천천히 뇌홍 앞에 선 후 몸을 낮춰 인사를 하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그녀의 말에 뇌홍이 어색한 듯 쭈뼛거리며 손에 든 두견화(*진달래꽃)를 건넸다.
명미가 손을 들어 받으려는 순간, 자리에 앉아 있던 뇌홍과 몸을 숙이던 명미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명미의 눈과 시선을 마주치자 뇌홍은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눈을 보자마자 전에 본 적이 있던 다른 이의 눈망울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이번엔 나일세!”
누군가의 외침에 뇌홍의 상념이 끊어졌다. 그는 아직 자신이 꽃을 주지 않고 그저 들고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꽃을 명미에게 건넸다. 그런 후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양공자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 여인이 명가의 규수란 것을 알아챈 건 아니겠지?’
양공자는 턱을 괴고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공자의 입가에는 여전히 있는 듯 없는 듯 미약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어, 뇌홍은 그가 명미의 정체를 알아챈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꽃을 받은 명미가 그의 뒤로 가 자리에 서는 그 짧은 순간에 뇌 호위의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녀의 신분상 올 만한 곳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장문봉이 처음 동녕에 들어왔던 그 날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아도 손에 꼽을 만큼 놀라웠던 날이다. 그날의 일은 기억 속에 매우 깊게 남아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정말 저 소저가 내가 알고 있는 그녀라면, 이곳에 왜 온 것일까? 무슨 의미지? 명가에서 그녀를 보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