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양첩
머리가 다 마르고 아교가 준 생강차 한 잔을 다 마시자, 강서는 몸이 노곤해졌다. 침상에 머리를 누이자 눈꺼풀이 절로 감기며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버린 것이었다.
* * *
동평백부가 평온한 적막에 휩싸이는 동안, 고작 길 두 개를 사이에 둔 안국공부는 모든 불이 환하게 켜진 채 오가는 사람들로 부산스러웠다.
안국공 부인 위 씨(衛氏)는 침상에 기대어 안국공의 손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묵묵히 위 씨를 받아주던 안국공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만 우시오. 큰아이가 갔으니 셋째는 무사할 것이오.”
실종된 계숭역을 찾기 위해 국공부가 이미 한차례 발칵 뒤집힌 상태에서, 갑자기 셋째가 물에 빠졌다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그야말로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첫째를 막우호로 보내는 바람에 대체 셋째가 어떻게 물에 빠지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안국공 내외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무렵, 시종이 헐레벌떡 달려와 아뢰었다.
“대감마님, 마님. 세자께서 삼 공자님과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어서 들라 하게!”
안국공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위 씨가 몸을 튕겨 일어나며 말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시종이 주렴을 걷어 올리자 세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위 씨는 파리한 안색의 계숭역을 보자마자 그에게로 달려갔다.
“셋째야, 내 아가.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정말 무탈한 것이냐?”
“어머니, 저는 괜찮습니다.”
계숭역이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가 괜찮단 말이냐!”
위 씨는 계숭역의 두 뺨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머리가 다 젖었구나.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왜 물에 빠진 것이야?”
“크흠, 흠.”
안국공의 헛기침 소리에 위 씨는 그를 돌아보았다.
허나 안국공의 시선은 계숭역의 뒤쪽을 향해 있었다.
안국공의 시선을 따라가니 계숭역의 뒤에 아담한 여인 하나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치마 앞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위 씨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이 여인은 누구냐?”
계숭역은 손을 뻗어 교랑을 제 옆에 세우고 위 씨를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어머니, 이 여인이 바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 교랑입니다.”
돌연 위 씨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지더니, 교랑을 보는 눈빛이 한없이 서늘해졌다.
“아가씨가 교랑이었군요. 일전에 우리 셋째를 구해 주었다죠? 아직 감사 인사도 못했네요.”
교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위 씨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마님의 감사를…….”
“함방(含芳), 아가씨가 쉴 수 있게 방으로 모시거라.”
교랑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 씨가 명령했다.
위 씨 곁에 있던 시종 함방이 교랑에게 다가가 말했다.
“교랑 아가씨, 소인을 따라 오십시오.”
교랑은 대답 대신 계숭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계숭역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교랑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먼저 가서 쉬는 게 좋겠소. 날이 밝는 대로 내가 찾아가리다.”
그제야 교랑이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시종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위 씨의 눈에선 섬광이 번뜩했다.
‘정말 교양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계집이구나. 내 아들과 몰래 교제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방을 나갈 때 인사조차 올리지 않는다니. 수준이 알 만하군그래!’
“탄예(綻蕊)야, 어서 삼 공자에게 생강차를 가져다주거라.”
함방과 같은 복장의 시종 하나가 재빠르게 차 한 잔을 내왔다.
안국공은 싸늘한 눈빛으로 계숭역이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바라보다가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허나 질문의 대상은 계숭역이 아닌 안국공 세자 계숭례였다.
계숭례는 계숭역을 힐끗 보다가 체념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셋, 셋째가…… 저 여인과 함께 호수로 뛰어 들었습니다…….”
“고얀 놈!”
안국공이 의자를 걷어차며 버럭 화를 냈다.
털썩.
계숭역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위 씨가 안국공을 책망하듯 노려보았다.
“어찌 이리 화를 내십니까, 대감. 삼 공자가 물에 빠졌으니 어서 의원을 모시고 오거라. 한기를 쫓는 약도 몇 첩 달여야겠다.”
“의원은 뭐 하러 부르시오? 본인이 죽고 싶다는 걸 누가 말린단 말이오?”
초라하게 꿇어앉아 있는 계숭역을 보고 있자니 안국공은 속이 더 터질 것만 같았다.
“배짱 한번 좋구나, 고작 여인을 위해 죽음도 불사한단 말이냐!”
계숭역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제발 소자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안국공이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헛소리 말거라!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한 절대 안 될 말이다. 너는 얌전히 동평백부 여식과 혼인 준비나 하거라!”
위 씨도 더 이상 안국공을 말릴 수 없었다.
원래 그녀의 눈엔 동평백부도 성에 차지 않는 집안이었다. 애초에 안국공이 동평백 형제에게 목숨을 빚진 일 때문에 성사된 혼사여서 더욱 그랬다. 몇 차례나 거듭 반대하였지만, 완강한 안국공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평백부가 아무리 뒤떨어진다 한들, 평민보다야 백배 천배 더 낫지 않겠는가.
계숭역은 꼿꼿이 등을 세우고 꿇어앉아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 소자는 교랑만을 사랑합니다. 동평백부의 넷째 딸은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일면식도 없는 여인을 어찌 아내로 맞는단 말입니까!”
“이 아비도 다 알아보았다. 동평백부의 넷째 딸이 도성 안 규수 중에서도 알아주는 미인이라더구나.”
안국공이 화를 가까스로 누르며 계숭역을 달랬다.
위 씨도 적극적으로 거들고 나섰다.
“정말이란다. 혼사가 정해지고 그 아이를 몇 번 보았는데, 아버지께서 괜히 하시는 말씀이 아니란다.”
“제 눈에는 교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계숭역이 고개를 들어 안국공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께서도 은혜를 갚기 위해 동평백가와 혼사를 약조하셨지요. 어찌 소자의 마음을 몰라주십니까? 만약 교랑이 아니었다면 소자는 오늘 이 자리에도 없었을…….”
“닥쳐라! 혼사 같은 중대사를 네 녀석 맘대로 하게 둘 듯싶으냐!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지금 당장 교랑을 쫓아내 버리겠다!”
계숭역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버지께서 교랑을 쫓아내신다면 소자도 함께 내치십시오!”
“너…… 너, 이 자식!”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안국공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을 향해 호령했다.
“당장 교랑을 끌어내 몽둥이로 매우 쳐라!”
“안 됩니다!”
계숭역이 시종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 나갔다.
안국공이 급히 소리쳤다.
“첫째야, 셋째를 막아라!”
계숭례가 계숭역의 두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아우야, 더 이상 아버님의 화를 돋우지 말거라.”
“형님, 이거 놓으십시오!”
계숭역은 있는 힘을 다해 뿌리치려 했지만, 계숭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시종을 놓친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진득한 피를 울컥 토해내었다. 소년의 몸이 계숭례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위 씨가 창백하게 질려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어서 의원을!”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이 도착하였다. 계숭역을 진맥한 그는 몸에 한기가 든 데다 마음속의 화가 커져서 각혈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며칠 요양하면서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의원이 약을 처방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위 씨는 안국공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었다.
“이게 다 대감께서 성질이 급하셔서 그런 겁니다. 하마터면 귀한 아들을 잡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내 탓이라는 거요? 이게 다 부인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 것 아니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피까지 토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안국공도 괜스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위 씨가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이제 와서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랍니까. 셋째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어찌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동평백부와의 혼사는 무를 수 없소!”
안국공의 단호한 얼굴을 보며 위 씨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생각해 보세요, 대감. 셋째와 교랑이 이미 순정까지 한 마당에, 또다시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만약 셋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때 가서 후회한들 소용없을 것입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위 씨는 눈물을 그치고 방 안을 쓱 훑어보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럼, 이 방법은 어떻습니까? 동평백부와의 혼사는 그대로 두고, 교랑을 셋째의 양첩(*良妾: 양인 신분의 첩)으로 들이는 겁니다.”
“신부도 맞지 않았는데 첩을 들인다면 동평백부에게 뭐라고 설명한단 말이오?”
안국공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위 씨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이번 대(代)만 지나면 일개 평민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가문이 아닙니까?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기까지 한 딸이 국공부에 시집을 오는데, 감히 무어라 트집을 잡는단 말입니까?”
안국공의 얼굴이 더욱 찡그려졌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오.”
“대감, 정녕 모르시겠어요? 셋째도 이제 머리가 커서 몽둥이로는 말을 듣지 않는 나이입니다. 교랑과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그런 바보 같은 일을 벌일지 누가 안답니까!”
위 씨가 손수건에 눈물을 찍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혹여 셋째가 잘못되는 날엔 저도 제 명에 못 삽니다…….”
안국공이 침묵을 지키자 위 씨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대감, 고작 첩일 뿐입니다. 무얼 그리 어렵게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집안일은 대감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이 저에게 맡기시지요.”
안국공이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소이다. 명일, 날이 밝는 대로 부인께서 직접 동평백부에 다녀오도록 하시오.”
“걱정 마셔요. 이번 일은 제가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셋째를 보러 가요.”
저녁 내내 계숭역의 열이 떨어지지 않자, 위 씨는 전전긍긍하며 밤을 꼬박 지새우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안국공 세자 부인 곽 씨(郭氏)가 문안 인사를 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용건을 꺼내 놓았다.
“어젯밤 일어난 일은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 대신 네가 동평백부에 좀 다녀와 주어야겠구나.”
위 씨의 뻔뻔한 말에 곽 씨는 껄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차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곽 씨가 물러가자 위 씨는 그제야 베개에 편안히 머리를 뉘이며 두 눈을 감았다.
‘안국공부의 세자 부인 정도라면 동평백부에게도 충분히 성의 표시를 한 것이지. 넷째 딸만 무사히 데려오면 이번 일도 잘 마무리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