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자념암으로의 외출 (1)
나무상자를 손에 쥔 묵자는 마치 반절을 하듯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묵자는 방으로 들어오려던 사람과 제대로 부딪히고야 말았다.
묵자가 재빨리 사과하였지만, 그 사람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묵자를 몰아세우며 화를 내었다.
“죽고 싶어? 죽고 싶지 않으면, 고개 똑바로 들고 다녀!”
“애련아,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하면 어떡하니. 여기 나리도 계시는 거 안 보여?”
춘귀원 마님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화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제 부군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고작 계집종일 뿐인데 내가 좀 가르치지도 못하나요?”
붉은 치마를 입은 애련은 넷째에게 추파를 던지며 말했다.
“우리 나리, 낮에 집에 계신 건 참 오랜만이네요. 근데 왜 바로 언니네로 오셨어요, 저한테도 오시지.”
“내가 가지 않아도, 네가 찾아 왔잖아?”
구명은 제 부인이 주는 다과를 받아먹으며 차가운 어조로 대답하였다.
“…….”
춘귀원 마님이 그를 타일렀다.
이미 문턱을 걸어 나온 묵자는 춘귀원 마님이 무어라 하였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사실 궁금하진 않았다. 그래 봤자 사내 하나를 두고 서로 애정을 얻기 위해 연기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춘귀원 마님의 처지가 평란원 마님보단 나은 것 같았다. 집에 신경 쓸 여인이 하나 있긴 했지만, 남편이 집 밖의 기생들을 데리고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애련은 집안에 떠도는 풍문처럼 총애받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애련과 다섯째가 저지른 일도 그렇고 말이다.
묵자가 발길을 재촉했다.
아름다운 정원과 화려한 건물은 갈수록 사람의 숨통을 조여왔다.
* * *
구수운이 춘귀원 마님과 담소를 나누는 동안, 소의는 묵자와 함께 앉아야 한다며 녹국을 앞쪽 마차로 쫓아냈다.
묵자는 훨씬 넓고 편안해 보이는 앞쪽 마차를 보며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기가 많은 소의도 묵자를 따라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장 씨는 구수운을 배웅하는 길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구수운도 그녀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구수운을 배웅하러 나온 춘귀원 마님은 장 씨의 몸이 편치 않아 자신이 대신 나온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구수운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 구수운과 계모 장 씨의 불화는 백일하에 드러났고, 두 여인 모두 사이를 회복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인제 승패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이런 상황에선 행동을 꾸밀 필요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마지못해 자념암을 찾게 된 구수운은, 진심으로 아버지의 평안을 비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 위 씨를 만나는 건 부수적인 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묵자는 춘귀원 마님이 자신을 향해서 이따금 미소를 지을 때마다 배수진을 치고 싸워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묵자는 자신의 몸이 위험을 경계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춘귀원 마님은 구수운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말을 하였다. 묵자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말을 들어보니, 구수운에게 집 밖에선 건강을 유의해야 한다며,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라며 당부하고 있었다. 올케라기보단 큰형수님 같았다.
묵자가 이를 눈치챘으니, 구수운 또한 눈치챘을 것이다. 구수운은 눈썹을 씰룩이며 쥐엄나무 열매에 대해서만 감사 인사를 전하였다.
이것이 바로 구수운의 오기였다. 악덕 상인을 상대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여인과 얄팍한 수를 겨루진 않았다. 구수운의 말을 빌리자면, 말로 한두 번 이겨봤자 좋을 게 무엇 있겠는가, 은자 두 푼이라도 더 주머니에 들어오는 게 좋지 않겠는가?
춘귀원 마님은 여전히 다정하게 웃음을 지으며, 직접 구수운의 손을 부축하여 구수운을 마차에 태워주었다.
“셋째 아씨, 춘귀원 마님.”
안 할멈이 시녀와 할멈을 한 무리 데리고 왔다.
“마님께서 셋째 아씨의 효행에 하늘이 감동하셔서, 어르신의 병이 분명 완쾌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또한, 셋째 아씨를 모시는 시녀가 너무 적다고, 제게 손발이 빠릿빠릿한 계집을 골라 아씨와 함께 자념암으로 보내라 하셨고요.”
마차에 기대어 있던 묵자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속으로 짜증을 냈다.
‘가만히 있다가 왜 지금에야 보내는 거야?’
그들은 본래 마차 네 대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앞뒤로는 구수운을 경호하는 시종과 짐을 싣고, 중간에는 구수운과 시녀들이 탈 계획이었다. 묵자가 대충 수를 세어보니, 시녀 대여섯 명에, 젊은 할멈 대여섯, 그리고 할멈이 둘이나 되었다.
‘대체 어떻게 데려가라는 거야?’
어찌어찌 데려간다고 해도 대부분 장 씨의 귀와 눈이 되어줄 텐데, 그럼 구수운의 의도가 들통날 게 뻔했다.
“마음만 받겠다고 전해줘. 이번에는 효도를 위해 가는 거야. 신성한 절에 이리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지. 함께 가는 시녀는 몇 없지만, 다들 어려서부터 내 시중을 들어온 계집들이라, 한 사람이 다섯 사람 몫은 거뜬하게 한다고. 걱정하지 마.”
마차에 오른 구수운이 안 할멈을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아씨처럼 귀중하신 분이 어찌 시녀 넷만 데리고 가신다는 거예요?”
안 할멈은 구수운의 예리한 눈빛에 지레 겁을 먹었지만, 장 씨가 시킨 일을 망치는 것이 더욱더 두려웠다.
“내가 필요 없다면 그런 줄 알아.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마차도 네 대뿐이고, 사람이며 물건이며 이미 준비가 끝났는데, 내가 시녀들이랑 바짝 붙어 앉아서 자념암까지 가야겠어?”
구수운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하가 파란 발을 내리자, 구수운은 그대로 마차 안에 몸을 숨겼다.
그와 동시에 마차 안에서 이만 출발하자는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귀가 밝은 마부가 소리치며 말을 몰기 시작했다. 네 대의 마차가 차례대로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내며 골목을 돌아 나갔다.
춘귀원 마님이 안절부절못하며 울상이 된 안 할멈에게 말했다.
“마음만 급하면 일이 저절로 해결되나?”
안 할멈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마님께서 급하게 분부하신 거라, 허겁지겁 사람을 뽑아온 거였어요. 한데 마차가 부족하다니……. 춘귀원 마님, 요 며칠 주인마님께서 기분이 영 안 좋으신데, 마님께서 제발 좋은 말씀 좀 해주세요. 아니면, 제가 지금 마차를 준비해서 뒤따라가게 할까요?”
“인제 와서 준비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때쯤이면 셋째 아씨는 이미 절에 도착해서, 여승에게 사람들이 오면 지낼 곳이 없다고 말하면서 돌려보내라 할 텐데 말이야. 됐네, 이게 자네 잘못은 아니지. 이리 급하게 일을 맡기시면 어떡해? 내가 어머님께 대신 이야기하지.”
강소심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안 할멈이 꼼꼼하지 못하게 일 처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우르르 대문을 나섰던 사람들은 다시금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마차가 계속해서 움직이니, 몰래 발을 젖히고 창밖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같은 마차에 탄 묵자와 소의는 쉼 없이 수다를 떨었다.
자세히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꽤 재미있었다.
“소의 언니, 아씨께서 내가 도망갈까 봐 걱정되신대?”
묵자는 질문을 던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공이 상당한 소의 언니를 함께 태운 건가?’
“응.”
소의는 정말 솔직했다.
“내가 도망갈 거였으면, 일찍이 도망치지 않았을까?”
그러며 묵자는 하고픈 말을 삼켰다.
‘뭣 하러 오늘까지 기다렸겠나?’
그러자 소의가 대꾸했다.
“예전에는 네가 매를 맞지 않았잖아.”
매를 맞았으니, 인제 언제든지 도망갈 위험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아, 그렇구나.”
“응. 그래,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서 도망가면 밀입국자가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당분간은 도망갈 일이 없을 터였다. 현대식 농담이었지만, 소의는 묵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렇게 되니 묵자는 화제를 바꾸어야 했다.
“목마르지 않아?”
묵자가 커다란 보따리에서 작은 보자기 하나를 꺼내자 소의가 대답했다.
“조금.”
소의의 눈은 절로 커졌다. 보자기 안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이상한 병 세 개가 있었다.
“뭐 마실래? 물? 단물? 아니면 술?”
묵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병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술을 그렇게 두면 새지 않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세 개의 병에는 일반적인 마개가 아니라, 덮개처럼 보이는 희한한 것이 씌워져 있었다.
“꽉 잠그면 괜찮아.”
묵자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희한한 덮개를 몇 바퀴 돌리니, 병이 열렸다. 묵자가 술을 한 잔 따랐다.
“이게 뭐야?”
술잔을 건네받는 동안에도 소의의 눈은 병뚜껑을 향하고 있었다.
“한 잔만 마셔야 해, 아씨께서 술 냄새를 맡으시면 큰일이잖아.”
묵자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당부의 말을 했다. 묵자가 손으로 뚜껑을 몇 번 돌려주니, 소의가 술병을 거꾸로 들고 흔들어도 술이 새지 않았다.
“이거 마개보다 좋네.”
맛있는 감주였다. 소의는 술이라면 편식을 하지 않았다.
“병뚜껑이라고 하는 거야.”
이것은 묵자가 현대의 지식을 응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소의가 보기에도 병뚜껑이 퍽 나쁘진 않았다.
“병뚜껑으로 닫으면, 평범한 마개로 닫은 술보다 훨씬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어.”
묵자가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새지 않아.”
소의가 그 말을 듣고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이 병을 들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마음에 들면 내가 선물해 줄게.”
묵자가 미끼를 던졌다.
“그럼 나 주라.”
그러자 소의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앞으로 아씨의 분부가 없어도, 내가 담벼락을 넘고 싶을 땐?”
“한두 번 정도는 도와줄게.”
충심은 변치 않았지만, 두 번쯤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역시, 뇌물을 받으면 나쁜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좋아.”
묵자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인내심을 가졌다.
웅덩이에 빠진 소의는 병뚜껑의 원리를 헤아리려 애쓰며, 가는 길 내내 입 한 번을 뻥끗하지 않았다.
자념암에 도착하였을 때, 무공이 뛰어난 소의는 마차에서 펄쩍 뛰어내리고 무공이 없는 묵자는 마차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푸른 산과 맑은 물이 묵자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하늘을 가린 커다란 나무는 무성한 이파리 위에 이슬을 머금고 있었고, 절 옆 산 정상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그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선명히 보였다. 이름 모를 꽃들은 붉고 노란빛을 선보이며 낭만적인 풍경을 더하였다. 분명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투명한 가림막이 놓이기라도 한 듯이 이곳은 유난히 조용하고 아득했다.
‘그대와 함께 산수에 머물며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고, 새벽을 노래하며 저녁을 듣고 싶어라……. 누구지? 대체 누구의 말이었을까?’
너무도 서글픈 목소리가 묵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묵자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슬피 울음을 터뜨렸다.
“또 머리가 아픈 거야?”
다시 뛰어 돌아온 소의가 물었다.
“응.”
소의의 물음이 들려오자, 묵자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던 슬픔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좋은 의원을 찾아가 보는 게 좋겠어. 그 의생(醫生)이 정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지 믿을 수가 없어. 처방전도 안 써주고, 들고 있던 멜대에서 집히는 데로 꺼내다가 진찰을 본 거였잖아.”
고개를 돌려 구수운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소의가 말했다.
“아기씨께서 네게 마을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원을 찾아주려 하셨는데, 진료비가 너무 비싸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거 다 거짓말이야.”
“나도 알아.”
맨 처음 묵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였다. 당시 사경을 헤매었던 묵자는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무 의생이나 불러서 상태를 보는 게 진료를 받지 않는 것보다 나았고, 아무 약이라도 먹는 게 약 없이 버티는 것보다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