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부족하다
당염원은 사릉고홍의 앞에서 손바닥으로 연못물을 가볍게 튀기며 거짓으로 말했다.
“제 원력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당염원은 사릉고홍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몇 마디 더 물어볼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약간 놀라워하면서도 기뻐하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는 웃으며 당염원을 안고 말했다.
“그대만 다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하시오.”
당염원은 기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어떠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오늘 얻어 낸 모든 것들로부터 느낀 행복으로 그 감정은 흩어져 버렸다.
* * *
빙연곡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된 후 당염원은 온종일 연못 안에 몸을 담갔다. 사릉고홍의 곁에 있는 것이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수련에는 더 효과적이었지만, 그녀는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했다. 빙연곡 안에는 다양한 보물들이 있어 약 조제에 대한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사릉고홍은 이날 하루 동안 그녀를 볼 수 없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이튿날 그는 당염원을 안아 빙연곡에 함께 간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너무 급할 필요 없다며 서둘렀다간 오히려 몸이 상할 수도 있다고 그녀를 달랬다.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그녀였지만, 연장자인 그가 한 말에 딱히 반박할 수는 없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낮게 내리깔리면서 어두워진 눈, 작고 오뚝한 코, 가볍게 오므린 입술, 눈처럼 새하얀 얼굴, 그런 얼굴로 그녀가 아쉽고 실망한 기색을 말없이 드러낸 것이다. 이를 본 누구라도 안타까워할 터인데, 사릉고홍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이대로 둘 수 없었다. 사릉고홍은 곧바로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결국 수련을 할 때 사릉고홍이 함께했고, 삼시 세끼를 항상 잘 챙겨 먹으며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 약속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당염원은 그가 지금 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약조는 그와 처음으로 무언가를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약조엔 자신의 자유에 관한 일도 포함되어있었다.
“하루 중 정오 반 시진(*한 시간) 동안만은 저 혼자 있겠습니다.”
사실 사릉고홍과 함께 있어야 수련이 더욱 빨랐다. 그렇기에 딱 반 시진 동안만 약 조제를 익히기로 한 것이다. 이건 그녀가 가장 소홀히 해선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요구가 위험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릉고홍은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이를 모두 허락했다. 사릉고홍은 그저 당염원을 꼭 껴안고 아래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뿐이었다.
그는 서운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품에 두고 싶었지만,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만큼 함께 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또 그는 당황했다. 당염원이 자유를 무척 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염원, 원아…….”
사릉고홍은 당염원의 귓가에서 그녀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주묘랑은 처음엔 웃으며 그들을 지켜봤지만, 지금은 약간의 염려와 함께 눈썹을 찡그렸다. 사릉고홍이 알아챈 것을 그녀도 알아챘지만, 당염원은 그러지 못한 듯했다.
주묘랑은 당염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떨 땐 아이 같다가도 어떨 땐 모든 것을 달관한 늙은이 같았다. 사릉고홍에 대한 태도는 더욱 종잡을 수 없었다. 사릉고홍의 곁에 있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둘이 함께 있을 때면 당염원에게서 어떠한 간절함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어떨 때엔 사릉고홍의 마음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담담히 굴기도 했다.
정오가 되자 당염원이 떠났다. 주묘랑은 홀로 남은 사릉고홍을 보며 자리를 지켰다. 사릉고홍의 표정은 마치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고요함 같았다. 매림의 번화함 역시 그의 고요한 뒷모습을 채워 주지 못했다.
이게 바로 그동안 주묘랑이 본 사릉고홍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동시에 당염원에 대한 화가 치밀었다. 장주가 온 마음을 다해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인가! 본래 사릉고홍은 다른 이 앞에서 절대 웃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돌고 돌아 사릉고홍의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았고, 사릉고홍에게 있는 독의 기운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인을 찾았다. 한데 이 여인의 마음은 어찌 이리도 갈대 같단 말인가?
역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란 불가능한 것일까?
주묘랑의 머릿속이 복잡할 즈음, 사릉고홍이 그녀에게 갑자기 다가와 물었다.
“여인의 마음은 어떻게 얻는 것이냐?”
“……예?”
주묘랑이 멍하니 대답했다.
다시 묻는 사릉고홍의 얼굴에선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묻어났다.
“어찌해야 원이가 날 좋아하겠느냐?”
주묘랑이 조심히 이마에 배어 난 땀을 닦고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모님께서는 분명 장주님을 좋아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리도 가깝게 지내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나와 함께 있으려 하지 않는 것이냐?”
사릉고홍이 주묘랑을 바라보았다.
‘그건 저도 궁금한 점입니다!’
주묘랑은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만 사릉고홍이 상처받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답했다.
“본래 여인이란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딱 반 시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 동안 장주님과 함께하는데도 부족하십니까?”
하지만 뜻밖에도 사릉고홍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부족하다.”
주묘랑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릉고홍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푸른 그림자에 덮인 듯한 두 눈동자가 보는 이의 마음을 졸이게 했다. 주묘랑이 급히 입을 뗐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장주님처럼 재력과 외모, 권세, 그리고 무공 능력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분을 어느 여인이 마다하겠습니까? 주모님께서 아직 장주님과 함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장주님 곁을 떠날 줄 모르실 겁니다!”
사실 주묘랑 자신도 그 말에 확신이 없었다. 혼사를 위해 신부를 찾아다니면서 사릉고홍의 명성이 꽤나 실추되긴 했다. 하지만 이전의 신부 열두 명 중 도망가려 했던 사람이든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이든 함께 죽으려 했던 사람이든, 모두 사릉고홍을 처음 만났을 때엔 온순한 태도로 이곳에 남아 있으려 했다.
이 세상에 사릉고홍과 필적할 만한 사내는 한 명도 없었다. 단연코 없었다. 하지만 당염원이라는 이 여인은 이처럼 극진한 사릉고홍의 대우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애초에 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주묘랑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 * *
그들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적막한 설원 위를 걸었다. 바람도 유난히 매서운 듯했다.
당염원은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다가 주변 환경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혹시 형방(刑房)으로 가는 거니?”
주묘랑이 의아해하며 답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형방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벌하는 곳이기는 합니다.”
설연산장에는 형방이 없고 감옥만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백을 강요할 필요가 없었고, 강요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면 함구하라. 이것이 설연산장의 규율이자 일종의 관용이었다.
“아아.”
당염원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사흘 이상은 참지 못하셨나 보구나.”
“예?”
주묘랑은 당염원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감형받을 수 있을까?”
“예??”
주묘랑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염원의 대답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러자 당염원이 답했다.
“내가 반 시진의 자유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 장주님의 심기를 건드린 것 아니야? 그래서 나에게 벌을 주는 거고.”
당염원은 늙은 괴물의 시도 때도 없는 괴롭힘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릉고홍의 성격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갑작스러운 형벌에도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당염원은 주묘랑의 표정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되풀이했다.
“감형받는 법, 없을까?”
게다가 주묘랑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덧붙였다.
“설연산장의 형벌은 얼굴을 해하기도 하나?”
그녀는 진지했다. 몸이 다치는 것은 옷으로 가린 뒤 천천히 치료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다친다면 치료가 다 되기 전까진 가면을 써야 했다. 그녀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시금 인간도, 귀신도 아닌 처지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염원은 지난 그때를 생각만 해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자고로 줬다 뺏는 것이 제일 나쁜 것이라 했다. 그녀는 일단 손에 얻은 것들은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다.
주묘랑은 당염원의 괴이한 생각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당염원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폈다. 하긴, 여인들은 아름다움을 좋아하니, 당염원 같은 절세미녀가 외모를 신경 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주묘랑이 간절히 읍소했다.
“주모님께선 장주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녀는 당염원의 앞에서 사릉고홍을 칭찬할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장주님께선 주모님을 해치지 않으십니다. 장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주모님의 건강을 염려하시고 계셔요. 주모님께서는 장주님 곁에서 하고 싶으신 것, 원하는 것들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염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주묘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묘랑 역시 당염원을 의아하다는 듯 보았다. 그때 당염원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 나에게 살기 위해선 똑똑하게 굴어야 한다고, 똑똑한 척만 해선 안 된다고 그랬지.”
주묘랑이 끄덕였다.
당염원이 차분히 주묘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영리한 척만 하도록 유도하는구나.”
경멸이다!
주묘랑은 방금 당염원의 아리따운 얼굴에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나간 것을 알아챘다. 멸시를 당한 것이다. 주묘랑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담담한 당염원의 얼굴을 보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뭐랄까,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 틀린 건 아니었다. 만약 다른 여인들이 이처럼 생각했다면 필히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염원은 그들과 달랐다. 그녀는 사릉고홍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여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묘랑은 당염원이란 여인이 이해되지 않았다. 당염원은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것처럼 굴면서도 상황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다. 설사 그 통찰이 완전히 빗나갔다고 하더라도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건 분명했다.
주묘랑은 사실 그대로 말했다.
“제가 주모님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조금 뒤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당염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형벌을 받는 건 아니라는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