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호의를 보이다 (1)
임근용이 여기에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임역지가 재수 없게 이 일을 뒤집어쓰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오상이 쓸데없이 뭘 더 하겠는가? 그는 지금껏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임근용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오상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상도 그녀를 향해 하얗고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더니 이 일을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현장에 있던 네 사람 중 이미 세 명이 마음을 정했으니 임역지는 속으로 희망에 차올라 아직 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육경을 조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임근용은 흰 뚱땡이 육경을 보면서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악한 마음을 떠올렸다. 마음속에서 분노와 증오가 일었지만 겉으로는 더욱 찬란하게 웃었다.
“육 셋째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아까……?”
비록 임역지가 그들 앞에서 이 돌을 자랑한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육륜을 부추겨 임역지를 놀리게 한 그도 잘한 것은 없었다.
방금 모든 잘못을 육륜에게 떠넘기고, 이제는 임역지까지 가만두지 않으려는 건가?
여기는 임씨 가문의 집이지 결코 그들 육씨 가문의 정원이 아니거늘!
몇 쌍의 눈이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육경은 눈을 굴리며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너희들이 말한 그대로지. 넷째 누이, 잊지 말고 어른들한테 정원에 있는 다른 돌에도 이런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말씀드려. 만약 있다면 빨리 손을 써야 할 것 같아. 안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다칠 수도 있겠어.”
임근용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알았어요.”
그녀는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임역지를 향해 손짓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난 오라버니 찾으러 온 거예요. 아버지께서 찾아요.”
‘얼른 가라! 더 이상 우리 어머니한테 화를 불러일으키지 말고.’
임역지는 난처한 눈빛으로 그 돌을 보고 또 육경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임근용은 한숨을 쉬고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빨리 가요. 내가 바로 가서 어머니께 말씀드릴게요. 사람을 불러서 돌을 세우면 될 거예요.”
임역지는 감동한 듯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육경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공수를 하고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가버렸다.
임근용은 빙그레 웃으며 육경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잡극(*杂剧: 중국 전통극의 일종)을 하는 사람들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오라버니들은 먼저 가서 보고 있어요. 재미있는 게 있으면 이따가 우리한테도 말해줘요. 난 이제 어머니한테 가볼게요.”
육륜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발로 밟더니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난 안 갈래, 너랑 같이 일곱째 동생한테 가서 놀 거야.”
육경이 그의 새까만 이마에 꿀밤을 한 대 먹이며 나무랐다.
“버르장머리 없이! 발 안 치워?”
“또 때렸어?”
육륜은 육경의 가슴께를 퍽퍽 때리며 도발하는 눈빛으로 임근용을 쳐다보았다.
임근용은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육륜은 그녀가 화를 내기는커녕 자기를 향해 웃자 자기도 모르게 귀가 빨개져서 발을 치우고 거친 말투로 물었다.
“근데 어쩌다 병이 난 거야?”
그녀가 어쩌다 병이 났는가?
임근용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웠다. 말을 하는 순간 집안 망신이었다.
육륜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손을 뻗어 그녀의 땋은 머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여지가 침착하게 앞으로 나가 그를 가로막았다.
여지는 육륜보다 나이가 많아 키는 이미 어른만 했다. 서 있으면 육륜보다 절반 가까이 더 컸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그곳에 서 있으니 꽤나 당당한 기세가 느껴졌다.
“키가 너무 크잖아!”
육륜은 자신이 소년 영웅이라 계집애한테는 손을 안 대는 것이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분개해서 불평을 해 댔다.
“가자, 이번에 부른 극단에 실력이 좋은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 구경하러 가자. 넷째 누이, 이따 봐.”
오상이 웃으며 육륜을 안고 임근용을 향해 눈짓을 한 뒤, 육씨 가문 형제 둘을 끌고 갔다.
계원은 작은 목소리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임근용에게 물었다.
“아가씨, 다섯째 공자를 왜 도와주셨어요?”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황씨 모자의 콧대를 호되게 꺾어 삼부인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임근용이 이렇게 쉽게 그를 놓아 주다니!
“오라버니도 임씨고 나도 임씨야.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임근용은 계원이 억울해하는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돌아서서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전생의 어린 시절에 그녀는 이 육륜이라는 악당을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정말로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가 눈도 감지 못한 차갑고 뻣뻣한 시체가 아니라 살아서 껑충껑충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륜이 죽은 후, 그녀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며 어려움을 해결해 주던 오라버니 하나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임근용은 허리를 굽히고 육륜에게 밟힌 더러운 치맛자락을 들여다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때는 늘 그가 그녀를 도와주었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지키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저 육륜 공자는 정말 미워죽겠어요. 아가씨의 새 치마를 이렇게 더럽히다니요. 역시 오 이공자가 온화하고 예의도 바른 것이 좋은 사람 같아요.”
계원이 편을 들어 주는데, 진작 가 버렸어야 할 임역지가 갑자기 대나무 숲 한쪽에서 튀어나오더니 하얀 손수건을 임근용에게 건네주었다.
“방금 시냇물을 묻혔으니 이걸로 좀 닦아.”
사실 이렇게 주고받다 보면 서로 친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예전에 그녀는 어째서 임역지도 이런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을까?
모든 일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었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마침 필요했어요.”
임근용은 웃으며 그를 한 번 보고 자연스럽게 그 수건을 받았다.
여지는 얼른 젖은 손수건을 건네받아 쪼그리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임근용의 치맛자락을 닦으며 남매를 위로했다.
“귀퉁이만 조금 더러워졌을 뿐이라 잘 닦으면 안 보일 거예요.”
임역지는 불안한 듯 손가락을 비비 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넷째야……정말 고마워.”
그들의 관계는 원래 냉담했다. 그는 사실 임근용이 그가 망신당하거나 재수 없는 일을 당하면 그냥 보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또 오만한 공자들을 설득해 그를 위해 증언을 하게 해 줄 줄은 몰랐다.
비정상적인 일이 생기면 반드시 이상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었다. 임역지는 임근용에게 혹시 무슨 계략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임근용이 그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었다.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 잘못이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어른들 걱정을 덜어 주고 손님을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잖아요. 이런 뜻밖의 사고가 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 돌이 연못으로 떨어졌으니 천만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누군가 다쳤을 거 아니에요?”
그녀는 다정하게 살살 달래는 말투였다. 마치 임역지가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사리 분별을 제대로 못 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임역지는 복잡한 눈빛으로 임근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넷째야, 난…… 아무래도 네가 날 제일 잘 이해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자신의 출신이 다른 사람보다 못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줄곧 오씨와 육씨 두 가문의 적출 자제들과 친분을 쌓아 장래에 그들의 힘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임역지가 어떻게 해도 그들은 항상 임역지를 자기들보다 한 수 아래로 보았다. 그것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접근하려 온갖 방법을 다 쥐어짰다. 임역지는 그래서 일부러 이 영벽석이 평주에서 제일이라고 허풍을 떨어 댔던 것이다. 그는 어른들을 따돌리고 정원을 둘러본다는 핑계로 그들을 데려와 돌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마음을 임근용에게 말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임근용이 그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주었으니 그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여 그대로 따르면 될 일이었다.
임근용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치 어른인 양 엄숙하고 낮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오라버니가 도와주려 했던 마음은 선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신중해야 해요. 큰어머니랑 작은 어머니께서 아시면 분명히 야단맞을 거예요.”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좀 더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오라버니도 자기 몸을 좀 아껴야죠. 그렇게 걸핏하면 물에 뛰어들다가 몸에 한기가 들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럼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져요.”
만약 예전 같았으면 임역지도 임근용 이 계집애의 말은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인지 그녀의 말이 아주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힘들다는 말은 바로 자신의 친어머니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뜻이 아닌가?
삼남가는 집안 분위기가 늘 침울했다. 장남가와 차남가는 별일 없어도 늘 삼남가를 업신여기고 입방아를 찧어 대며 삼부인의 화를 돋웠다. 이 화가 분명 그의 친어머니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아버지와 자신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으응.”
임역지가 더듬거리며 대답을 하고는 또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부인께는…….”
임근용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몰라요? 어머니가 불같은 성격이시긴 하지만 옳고 그름을 아시는 분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이따가 황 이낭한테 가서 미리 말하기만 하면 될 거에요.”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 어머니도 황 이낭의 체면을 봐 줄 테니 아마 그리 과하게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다.
임역지는 완전히 안심하고 임근용의 환심을 사려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넷째야, 내가 며칠 후에 아버지를 따라 외출할 일이 있는데 찹쌀로 만든 인형을 사다 줄까? 아니면 신기한 장난감을 봤는데 그걸 사다 줘?”
임근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거 좋지요. 오라버니, 고마워요. 셋째 언니랑 신지도 좋아할 것 같아요.”
적출 막내인 다섯 살짜리 임신지(林慎之)는 그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났다. 임역지는 다소 어색했지만 자연스러운 척하며 대범하게 말했다.
“셋째 누나와 일곱째 동생 것도 당연히 빼먹으면 안 되지.”
임근용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난 먼저 어머니 집으로 가볼게요.”
그녀는 임역지가 그녀의 남매들에게 잘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표면적으로 가능한 한 평화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이 그녀의 어머니를 핍박할 핑곗거리를 찾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