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노심초사하는 연왕
여인들이 앉은 자리에서 정 씨는 미소 짓되 경직된 얼굴로 제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연왕비의 곁에 앉아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푸른 옷의 남궁묵이 있었다.
정 씨는 그 소녀를 보며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 딸은 집에 갇혀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남궁묵은 연왕비 곁에 앉아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으니 밉살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금릉에 돌아가기만 하면…….
정 씨는 급작스레 싸늘한 시선을 느꼈고 절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조심스레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연왕 곁에 앉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그의 기이한 자줏빛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 씨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옆에 놓인 술잔을 엎을 뻔했다.
남궁묵이 연회에 참석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정말 별것 없었다. 황실을 대신해 귀향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 연회에는 가무와 음악도 없었다. 그저 두 왕이 황장손과 함께 연회를 열고 단양의 고관과 세력가를 초대해 식사 한 끼 먹는 자리였다.
동시에 소씨 가문이 번성했음에도 조상을 잊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두 왕과 황장손은 서로 술을 권하며 황은이 망극하다는 등의 말을 했고 이제 남은 건 세력가와 관원들끼리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기는 것이었다.
남궁묵이 지루함을 느낄 때쯤, 위군맥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연왕비 곁에 나타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외숙모님, 외숙부께서 무하(*無瑕: 남궁묵의 자(字))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연왕비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그의 행동을 조금도 불효라 여기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남궁묵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묵아는 이만 가보아라.”
남궁묵은 이 지루하고 따분한 연회에 벌써 흥미를 잃은 상태였고, 이곳에 계속 앉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더욱이 없었다. 그녀는 연왕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위군맥을 따라 자리를 떴다.
뒤에서 주왕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보아하니 군맥이가 남궁가 큰아가씨에게 마음이 있나 봅니다.”
위군맥이 남궁가 큰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했다면 주왕비는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요 몇 년간 수도에 사는 모든 가문의 여식들이 위군맥을 두려워했고, 그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냉담하게 굴며 그 어떤 절세미인이 다가와도 가차 없이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남궁묵에게 이리 마음을 쓰는 것을 보니, 설마 초국공부 때문인가? 초국공부가 지지해 준다면 정강군왕부 내에서 위군맥의 입지가 훨씬 단단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태자 전하는 아마 난처해지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왕비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연왕비가 주왕비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참 좋은 아가씨네, 군맥이도 이제 나이가 찼고.”
주왕비는 괜한 얘기를 꺼냈다가 분위기를 망칠까 싶어 그저 멋쩍게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위군맥은 주왕의 친외조카이기도 했으니, 말이 너무 과하면 자신이 옹졸해 보일 수도 있었다.
* * *
연왕은 몸이 불편해, 일찍 연회 자리에서 물러나 행궁 안쪽에 있는 궁전에서 쉬고 있었다.
곧이어 위군맥이 남궁묵을 데려와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고 빠르게 글씨를 써 내려가고 있는 그를 보았다. 심지가 굳고 신중해 보이는 얼굴에는 어떤 불편함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연왕이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왔구나, 어서 오너라.”
남궁묵은 잠시 쭈뼛거리다가 위군맥을 따라 다가갔다. 연왕의 책상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맹호(猛虎)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남궁묵은 그저 그림을 본 것뿐인데도 백수의 왕인 호랑이의 사나운 기운을 고스란히 느꼈다.
위군맥이 남궁묵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차분하게 물었다.
“외숙부, 몸은 괜찮아지셨습니까?”
연왕이 붓을 내려놓은 후 몸 뒤쪽에 남은 오래된 상처를 손으로 문지르자, 양미간이 펴졌다.
“묵아의 처방이 정말 신통하더구나.”
남궁묵은 연왕 앞에서 티 나지 않게 위군맥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 채 옅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황공하옵니다. 연왕 전하.”
연왕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는다. 수도의 돌팔이 의원들이 십수 년을 치료해도 병의 원인도 찾지 못했는데 네가 준 약을 쓰니 요 이틀 동안 아주 편했다. 다만…….”
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남궁묵에게 말했다.
“약을 쓸 때 너무 아프더구나. 통증을 완화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냐?”
연왕은 매번 약을 쓸 때마다 과거 부상을 당했을 때 느꼈던 고통이 다시 한 번 생생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만약 그가 평범한 사람들처럼 의지가 굳지 않았다면, 처방약을 쓸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천하에 위세를 떨치는 제후가 약을 쓸 때 아프다고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니, 남궁묵은 조금 우스워졌다. 연왕 전하는 보이는 것만큼 위엄이 넘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묵은 자신의 한쪽 손을 잡고 있는 차분한 표정의 위군맥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연왕은 외조카인 위군맥을 정말 아끼고 있으며 그녀에게 이런 곰살가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라는 것을.
남궁묵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연왕 전하, 이 부분은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원래 좋은 약이 입에는 쓴 법입니다. 전하의 상처는 오래된 것이라 센 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유주는 매우 추운 지역이니, 앞으로 몇 년간은 각별히 신경 쓰시고 탕약도 챙겨 드셔야 합니다. 잠시 후에 소녀가 약방문을 위…… 세자께 드리겠습니다.”
연왕 전하께서 이리 친근하게 대해주시는 데다 짧은 시간이더라도 위군맥과 한 쌍으로 엮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남궁묵은 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연왕은 곁에 서 있던 외조카를 바라보며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올렸으나,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남궁묵에게 너무 아프지 않은 약을 처방해 달라고 신신당부할 뿐이었다.
사소한 이야기를 마친 후, 연왕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두 사람에게 앉으라고 권하고 화제를 전환하려 물었다.
“천야의 피습 사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군맥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자객을 못 잡았습니까?”
연왕은 고개를 저으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큰형님이 천야의 버릇을 잘못 들인 게지. 지금 때가 어느 때라고 그런 곳에 발을 들이는 건지. 돌아가서 정강군왕부와 얘기를 좀 해야겠다. 아니, 이 일은 내가 직접 소천야에게 얘기를 좀 해야겠어.”
소천야, 이 조카에 대해 연왕은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어리석다 하자니 황손들 중에서 재주와 학문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났고, 철들지 않았다고 하자니 황제 폐하 앞에서 능숙하게 그의 비위를 맞췄다.
사람들이 이틀 늦게 도착했는데 그 안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연왕의 자식들이 이런 온당치 못한 일을 했다면, 아마도 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것이었다.
“위군박과 위군택이 소천야를 데려간 것입니까?”
연왕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그럼 또 누가 있겠느냐? 그리고 데려갔다는 말은 하지마라. 소천야가 철없는 어린애는 아니지 않으냐?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아직까진 별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아랫것들은 감히 이 이야기를 황제 폐하께 알리지는 못하겠지만, 태자까지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황장손이 단양에서 피습을 당하자 가장 먼저 의심받은 사람은 태자의 아들 몇 명과 황제의 숙부들이었다.
위군맥이 담담히 말했다.
“황장손은 조금도 초조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생각이 다 있을 것이다. 황장손의 숙부인 우리도 태자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이고. 황제 폐하를 대신해 제사를 올리는 것이니, 일이 더는 커지면 안 된다. 너는 지금 처신을 잘하고 있으니 그 아이들과 가능한 한 어울리지 말고 이 일에 말려들지 마라.”
위군맥이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연왕은 위군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옆에 앉아 있는 남궁묵을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장손이 피습당한 큰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는데도, 이 소녀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조금의 걱정과 놀라움도 드러나지 않았다.
연왕은 남궁묵을 바라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고 말해야 할 때와 말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걸 보니, 남궁가의 적장녀는 정말 괜찮은 여인이었다. 장평 공주가 봤으면 분명 기뻐했을 것이었다.
곧이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연왕의 얼굴에 서글픔이 어렴풋이 비쳤다. 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궁묵에게 말했다.
“며칠 있으면 황장손이 수도로 돌아갈 것이고 나와 연왕비도 유주로 돌아가야 한다. 금릉으로 가면 정강군왕부를 찾아가 장평 공주를 뵙거라. 사씨 가문의 그 아가씨도 좋은 사람 같아 보이더구나. 묵아,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남궁묵이 정중히 답했다.
“연왕 전하의 가르침에 황송할 따름입니다.”
연왕은 외조카인 위군맥 때문에 늘 노심초사했다. 아마 자기 아들한테도 이렇게 걱정을 쏟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 그만 가보아라. 너희가 혼인할 때 금릉으로 가마.”
연왕의 말에 위군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 * *
편전(偏殿)에서 나온 두 사람은 순간 말이 없었다. 남궁묵은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반드시 필요하다면 이야기꽃을 피우며 그를 상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남궁묵은 그를 그런 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위군맥은 똑똑한 사람이니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적당히 상대해 주는 것인지 십중팔구 간파할 터였다.
그녀의 난처함을 눈치챘는지, 위군맥의 무표정한 얼굴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옅은 미소가 번졌다.
“행궁이 꽤 넓습니다. 함께 둘러보겠습니까?”
남궁묵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둘은 나란히 널찍한 행궁을 한가롭게 거닐었다.
위군맥은 이번에 단양 행궁에 온 것이 초행이 아니었다. 덕분에 행궁의 구조에 익숙해, 경치가 아름답고 고요하며 사람이 적은 곳으로 남궁묵을 데리고 다녔다.
남궁묵이 별생각 없이 있는데, 사내의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하는 나와 얘기하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남궁묵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에서 걷고 있는 검은 옷의 위군맥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어색해서 그럽니다.”
남궁묵은 정말이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친아버지에게 버려져 시골에서 얼마나 가엾게 자랐는지에 대해? 아니면 금릉 황성에서 그가 얼마나 난감한 처지인 것을? 분명 둘 다 적절한 화젯거리는 아니었다.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며 우리가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남궁묵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친해졌다고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로 이름과 가문 말고 우리가 더 아는 것이 있습니까?”
위군맥이 기분 좋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직접 물어봐도 됩니다.”
남궁묵은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위군맥에게 딱히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