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8화

<78화 -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6)>

"왼쪽."

"네?"

"왼쪽."

진은 갑자기 제 등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거리며 사람들을 정지시켰다.

목소리의 주인은 파르메시오였다.

방금 전까지 쥐죽은 듯 잠만 자던 사람이 갑자기 입을 열었으니까.

평소라면 지하 2층에서 지하 1층으로 막 올라가려는 급박한 때인지라 파르메시오의 목소리를 넘겼으리라.

그러나 묘하게 이 노인을 신경 쓰는 라워드의 태도부터 이상하리만큼 강렬하게 귓가를 울리는 파르메시오의 목소리가 진을 고민하게 했다.

"왼쪽으로 가란 말씀이신가요, 어르신."

진이 되물었으나 파르메시오는 귀찮다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러지?"

"어르신이 갑자기 왼쪽으로 가라고 하시는군요."

"하지만 우리가 나가려면 오른쪽으로 가야 하네. 바로 지하 1층으로 가는 문이 아닌가."

페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진과 파르메시오를 번갈아 봤다.

"그래서 어쩌겠는가?"

"...왼쪽으로 가겠습니다."

진은 그렇게 대답하고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그의 직감이 파르메시오 영감의 말을 따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화경에 들어 천기를 읽기 시작한 뒤부터 직감이라는 것은 운명과 맞닿아 있어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런 그의 선택에 주변 사람들은 잠깐 멈칫하긴 하였으나 곧 진을 뒤따랐다.

결과적으로 진의 결정은 옳았다.

지금 지하 1층에선 네클리우스와 에른하르트가 한창 기 싸움을 펼치는 중이었으니까.

만일 그곳을 향했더라면 진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 중 한 명 이상은 분명 죽었으리라.

* * *

에른하르트의 시선이 네클리우스의 발목을 향했다.

"클클, 족쇄를 용케 풀었군."

"생과 사를 넘나드는데 이런 물리적인 구속구 따윈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소?"

"낄낄낄. 그렇다고 제 발목을 잘라 버린 후 다시 재봉합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야."

에른하르트의 말대로였다.

네클리우스는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 발을 찍어 끊어 버렸던 거다.

마나를 움직일 수 있게 되고 흑마술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그에게 육신의 상실은 별달리 문제가 아니었다.

보라.

지금 하얀 뼈로 재구축된 자신의 발은 얼마든지 제구실을 하고 있지 않나.

더군다나 사방에 넘치는 것이 고통에 허덕이는 시체와 영혼이었다.

그야말로 흑마법사에겐 천국과 같은 환경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엔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는 풍경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네클리우스의 손짓에 맞춰 그를 둘러싼 좀비들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몰려들었다.

"으어어어."

무엇보다 그들 사이에서 시선을 끄는 건 일반인의 체구보다 1.5배 정도 거대해진 네르마, 아니, 네르마였던 것이었다.

다른 시체들과 엉켜 엉망진창의 생물체가 되어 버린 그를 보며 에른하르트가 클클 웃었다.

독과 마약으로 인해 이성을 상실해 버린 좀비와 시신으로 만들어진 좀비.

"아무래도 이거 기분이 나쁘구먼."

"기분 말이오?"

"이래서야 내가 튈 수 없잖은가. 쯧쯧."

"헛된 욕심과 희망을 품는군. 자네의 삶이 이곳에서 계속될지를 걱정해야 하지 않겠소?"

"그건 걱정하지 않네. 이미 폭탄은 심어 뒀거든."

"흠?"

네클리우스가 의문을 표한 것도 잠시.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샤론, 이 계집이!"

갑자기 네르마의 몸이 에른하르트의 폭탄 좀비들마냥 사정없이 부풀기 시작했으니까.

주변의 좀비들이 네클리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거의 동시에 네르마의 몸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에른하르트 역시 제 부하들로 그 폭발을 막은 뒤 낄낄거리며 웃었다.

"바보 같으니. 그럼 샤론 그년이 네놈 좋으라고 네르마 시신을 그냥 던져 줬을지 아느냐."

연기 속에서 네클리우스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붙어먹었던 게요."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엄마 뱃속에서부터였던가."

"기억이 잘 안 난다니 아쉽소. 도와주지."

연기가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나타난 네클리우스의 모습은 처참했다.

피부는 독에 의해 반 이상이 썩어 문드러졌고, 손과 발도 너덜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세만큼은 뚜렷하게 느껴졌으니.

에른하르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흑마법사란 종자는 독을 실험하기 참 좋은 허수아비로구만."

"실험이라, 나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실험 참 좋아하오."

에른하르트의 부하들이 기묘한 녹빛의 연기를 내뱉고, 네클리우스의 손에서 흑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를 무렵.

진 일행은 또 다른 통로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샤론과 마주했다.

* * *

"와, 드디어 찾았다!"

지금 어수선한 감옥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된 목소리.

진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멈추게 한 뒤 주먹을 말아 쥐며 앞으로 나섰다.

"진 오빠.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 자기들끼리만 가 버리는 게 어딨어. 기다렸잖아."

"우리는 지하 4층에서 제일 늦게 출발했다. 기다렸다면 우릴 못 만났을 리 없을 텐데."

샤론은 혀를 빼물며 헤실거렸다.

"아잉, 알면서 그래. 거기 독으로 엉망진창이었잖아. 그러니까 천천히 나왔다간 큰일 났다구."

그러면서 샤론은 진 일행의 입가에 매여 있는 천 조각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떤 마법을 부렸는진 모르겠지만 저 작은 천 조각이 그 지독한 에른하르트의 독을 막아 냈단 말이야.'

샤론의 눈빛이 살짝 번들거렸다.

지하 4층에 있다 보면 별별 인간군상을 다 만나게 되지만 저 일행은 더더군다나 특별했다.

노인과 아이도 신기한데 거기에 중년인에다가 누가 봐도 장군 같은 사람에, 바바라 같은 귀족까지.

거기다 마지막에 들어왔던 사내, 라워드라고 했던가.

그 사내에게선 진 일행보다도 더욱 신기할 정도의 날것 그대로의 기운이 풍겼다.

정제되지 않고 순박하고,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은 사내.

그래서 흥미가 돋았다.

"이제라도 만났으니까 헤헤, 같이 다니면 되겠다."

"아니."

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왜? 오빠들 나랑 같이 다니기로 약속했잖아! 그걸 어기려고?"

샤론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으나 진은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더욱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그로테스크했으니까.

그녀의 양손에는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뼈 곤봉과 칼이 각각 들려 있었다.

방금까지도 저 무기들로 누군가를 죽이고 온 듯 뼈 곤봉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이 경계를 하게 된 건 저 무기들 때문이 아니었다.

옷과 몸이 너무 깨끗했다.

엉망진창으로 더러워진 손과 무기와는 달리 옷과 몸에는 핏방울이 단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싸우면 저렇게 된단 말일까.

진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기예를 떠올려 봤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진을 긴장하게 하는 건 다른 부분도 있었다.

샤론의 몸에서 기묘한 기세가 느껴진 까닭이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족쇄를 풀 다른 방법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진은 대답 대신 다른 걸 묻기로 했다.

"몇 명이나 죽였지?"

"글쎄에. 오빠는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모기를 잡을 때 그 숫자를 일일이 세는 편?"

"모기보다는 더 크고 의미 있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아잉, 그래 봤자 범죄자들 아냐? 깐깐하긴."

샤론의 눈에 묘한 살기가 어렸다.

"우리도 죽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군."

"아하하하, 글쎄. 죽이게 될까, 아니면 안 죽일까. 나도 모르겠네~?"

진의 자세가 천천히 낮아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묘한 대치를 하고 있을 무렵.

마르쿠제와 라워드는 격렬한 대치를 이어 가고 있었다.

* * *

"죽어, 죽으란 말이다!"

마르쿠제의 채찍이 기를 받아 허공에서 살아 있는 듯 너울거렸다.

분명 한 줄기에 불과한 채찍이 수백 갈래로 나뉘며 하늘 전체를 뒤덮어 바닥으로 내려 꽂힌다.

"천라지망!"

또 그 짓거리군.

감옥에서 날 줘 팼던 기술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벌써 몇 차례나 대응해서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고!

나는 녀석이 펼친 기술의 흐름을 보는 것에 집중했다.

채찍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보다간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자연의 흐름을 완벽히 읽었을 때, 나는 녀석이 만들어 내는 흐름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흐름을 거스르고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흐름과 나의 몸을 일체화하는 움직임.

진이 가르쳐준 자연체의 원리였다.

곧 내 몸이 채찍이 만들어 낸 거대한 풍압에 휩쓸려 마치 먼지처럼 흔들거렸다.

나는 그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몸을 실었고, 이내 자연스럽게 채찍이 만들어 낸 그물 바깥에 서 있게 되었다.

"왜, 왜 안 맞는 것이냐! 왜!"

눈이 빨갛게 충혈될 정도로 흥분한 마르쿠제가 사방으로 채찍을 휘둘렀고, 그 여파 탓에 건물은 사정없이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궁.

감옥의 철창과 사람들, 그리고 거대한 바윗돌들.

지상 12층의 탑은 착실히 무너지고 있었다.

더 이상 사람의 힘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붕괴가 붕괴를 부르며 착실히 말이지.

우리 둘이 더 이상 난리를 피우지 않더라도 감옥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박살 날 것이다.

"마기...."

그때 마르쿠제가 이를 악물며 곱씹듯 중얼거렸다.

"네놈의 그 검, 마기를 다루는 검이구나, 허억, 헉...."

"마기라니."

"무기가 맞닿을 때마다, 허억, 체력을 갉아먹는 이 불쾌하고 음습한 기운, 허억, 마기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지."

어쩐지.

내가 소드 마스터 중급인 마르쿠제의 공격을 겪으면 겪을수록 쉽게 피하는 데엔 마기의 영향이 있었구나.

어쩌면 내가 처음 룸펜 하운드를 만났을 때 그 압도적인 능력 탓에 힘겨웠던 것도 이 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마르쿠제가 저렇게 헉헉거리는가 싶었더니 알게 모르게 마기가 도움을 줬던 모양이다.

검이 마르쿠제의 질문에 응답하듯 마기를 일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마르쿠제의 눈이 아까보다는 조금 차분해졌다.

"더러운 제국의 앞잡이가... 헉, 여기까지, 허억, 무슨 일로 왔단 말이냐."

이거 뭔가 일이 잘 풀릴 모양이었다.

녀석은 이 잿더미의 검 때문에 제국에서 감옥으로 쳐들어왔다 오해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입을 잘 털면 녀석과 라그나 왕국의 적의를 제국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최대한 내가 만나보았던 특임대 녀석들의 말투와 성격을 흉내 내 답했다.

"어떤 얼빠진 특임대가 임무 내용을 타인에게 누설하며 다녔지?"

"크흐, 크, 그렇지. 너희 제국은, 크흐, 늘 그런 식이었지. 버러지인 줄 알았더니, 허억, 짐승 새끼가 들어온 거였어."

마르쿠제의 반응을 보니 내 연기가 제법 괜찮은 모양인데.

단지 하나, 문제가 있다면 방금까지 호흡을 가다듬은 마르쿠제가 아까보다 훨씬 침착해졌단 사실이다.

"흡!"

그러곤 체내의 마나를 강제로 가속화시켜 몸을 침범한 마기들을 쫓아냈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 바깥으로 검은색의 안개가 흩어졌다.

정상적인 운용 방법은 아닌 듯, 녀석의 몸 전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마나가 거세게 흐르다 보니 정순했던 움직임보다 무척 불안정하고 금방이라도 바깥으로 튈 것처럼 흔들거렸다.

그중 유일하게 고요한 건 마르쿠제 그 자신뿐이었다.

녀석의 호흡이 점차 차분해지더니 이내 채찍을 넣더니, 장식처럼 허리에 매달고 다니던 소총을 꺼내 들었다.

"제국 특임대... 세상을 조롱하는 너희 짐승 새끼들과 한 번은 꼭 싸우게 될 거라 생각했다."

뭔가가 온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쪽으로 날렸다.

거대한 힘이 내가 서 있던 자리를 할퀴고 간 것이 느껴졌고 소리는 그 뒤에 따라왔다.

거대한 충격과 함께 땅이 울렸고, 이내 바람과 충격음이 뒤따라 몸을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삐- 하는 소리의 이명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워낙 강렬한 폭풍에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뒤에서는 심상치 않은 크기의 돌먼지가 피어올랐다.

"크흑?!"

저 총... 선이 보이지 않는다.

방금 공격을 피한 건 직감적으로 피해야 한다고 느껴서 그런 것이지 뭘 봐서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 빨라서 보지 못했던 건가?

아냐, 그런 게 아니다.

이건 오로지 저 총의 능력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지금 이렇게 빈틈을 노출하는 데도 마르쿠제는 꼼짝도 못 한 채 총을 쏘았던 자세 그대로 몸을 수습 중이었으니까.

마르쿠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머리 구석구석에는 약간 새치가 생긴 것도 같았다.

더욱이 그의 몸은 방금 전 마나를 오버히트 시킨 것보다도 더욱 많은 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증기가 내 뒤쪽, 방금의 충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동굴을 통해 감옥 외부로까지 흘러갔다.

미쳤군.

저기 통로 끝에 보이는 건 바다지?

총 한 방으로 수십 겹의 감옥과 통로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린 건가.

더군다나 아래론 거의 지하 1층까지 이 총격이 뚫어 버린 듯한데.

"그 총. 사격한 사람의 마나를 흡수해서 증폭해 발사하는 방식인가...? 사람을 갈아 넣는 무기군."

"짐승 새끼가 잘도 알아보는구나. 라그나가 자랑하는 팔세우스 마도공방의 정수다. 드래곤 브레스라고 하지. 네 말처럼 사람을 갈아 넣는 무기라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 몸을 아낄 순 없지 않겠나?"

드래곤 브레스라.

그 이름 그대로 무식한 위력을 자랑하는군.

그리고 왜 선이 안 보였는지도 알 것 같았다.

저거, 누굴 겨냥해서 죽이기 위한 무기가 아니다.

그냥 그 방향으로 시전자의 마나를 오로지 방출하는 것에 집중할 뿐.

그러니 아무런 의도 없이 오로지 방출될 뿐인 마나가 선을 보여 주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인 거지.

제길, 싸우면 싸울수록 완벽한 무기라 여겼던 선이 부족한 데가 너무 많아.

"솔직히 살아남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살아남을 줄은 몰랐다."

내 생각도 그래.

지금 생각해도 저걸 어떻게 피했는지 모르겠거든.

그때였다.

"라워드 군?"

마르쿠제의 총이 휩쓸고 간 바닥에서 진의 음성이 들린 것은.

아니, 진뿐만이 아니다.

"켈켈켈, 이게 무슨 꼴이람. 방금 뭐가 있었던 거 같은데."

"...어마어마한 마나의 유동이구려. 이 파동은 간수장인가."

"어머, 다들 모였네?"

샤론과 에른하르트, 네클리오스까지.

지하 4층의 주역들이 단숨에 지상 1층에 해방되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9화

<79화 -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7)>

"버러지들... 어느새?"

"클클, 이게 뭐람. 아주 시원하게 통로가 뚫려 버렸구만."

으엑, 저게 뭐야.

제일 먼저 에른하르트가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푸른 피부의 괴생명체 호위를 받으며 지상으로 올라왔다.

다음으로 올라온 것은 뼈로 된 해골인지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모습이 된 네클리우스였다.

그는 텅 비어 버린 한쪽 안구의 위치로 주변을 슥슥 살폈다.

"이거 공교롭구려."

"어머나, 이렇게 다 모였네? 이런 상태면 굳이 진 오빠랑 힘을 합할 것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마르쿠제도 약간 소강상태고, 지하 4층의 리더들도 서로를 견제하느라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눈치 같다.

나는 급히 진의 곁으로 다가가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시죠?"

"방금 어르신이...."

페른 아저씨의 시선이 슬쩍 진의 등 뒤에 업혀 있는 파르메시오 영감님을 향했다.

영감님은 귀찮다는 듯 몸을 동그랗게 말아 진의 등 뒤에 몸을 푹 기대고 있었다.

"팟, 했는데 확! 했어."

들뜬 한이 손을 휘저어 가며 뭐라뭐라 설명을 이어 나간다.

대충 해석해 보면 방금 공격을 파르메시오 영감님이 막아 준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탈출에 아예 무심하게 계시는 건 아니었구나.

그것 외에도 안심되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자넨 안 괜찮아 보이는군."

진이 내 옆으로 와서 섰다.

진의 말처럼 나는 더 이상 싸움을 이어 나갈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진의 몸 위로 무너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금보다 체력 훈련을 더 열심히 해 둘 걸 그랬나.

온몸이 욱씬거리고 팔다리에 힘이 없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이라도 바로 자리에 주저앉고 싶다.

내가 검을 휘둘렀다고 해 봤자 고작 반년.

그 정도 세월 동안 체계적인 운동도 아니고 그저 몸 움직이는 법을 배운 것만으론 이제 곧 한계였다.

"몸에 소금기가 가득하군. 이대로라면 전투가 끝나 긴장이 풀리면 금세 탈진할 걸세."

"다 올라왔으니 일단 몸을 피하죠. 솔직히 저들끼리 어떻게 되든 그건 알 바 아니니까요."

"그러세. 지금부터 길을 뚫는 건 내가 하겠네."

"부탁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의 제일 뒤로 움직였다.

페른과 멜빌, 한을 비롯해서 비전투원 9명.

나는 후위에서 그들을 보호할 생각이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이제야 확인한 모양인지 마르쿠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짐승. 버러지들과 어딜 가려는 거지?"

그가 채찍을 들고 무언가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그와 나 사이에 에른하르트가 끼어들었다.

"클클, 이거 어쩌지. 이런 기회가 생기면 간수장이랑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간수장한테 신경 쓰면 저기 저 청년들이 혼자 가 버릴 것 같단 말이지."

"그럼 다 같이 죽으면 되지 않겠나."

네클리우스의 몸에서 불길한 마나가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뛰어요!"

"본 스네이크! 다크 트랩!"

네클리우스의 외침과 함께 바닥의 시체들이 들썩이더니 그 속에서 생겨난 뼛조각들이 뱀의 모양으로 사방팔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동시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암흑 마나가 사방팔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수많은 선이 바닥에서부터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내 고함 소리에 진과 사람들은 아까 마르쿠제의 공격으로 뚫린 밖을 향해 달렸다.

나는 그 제일 뒤에서 본 스네이크와 다크 트랩을 헬 파이어의 불꽃으로 쳐 내며 달렸다.

연속적인 폭발음과 함께 사방에 매캐한 독연이 뿌려졌다.

"이깟 저열한!"

마르쿠제의 채찍 소리가 다시 주변을 어지럽혔다.

구구구구궁.

거대한 균열음과 함께 진이 달려가는 곳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위험...!"

순간 진이 양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백 개의 숫자로 늘어난 손바닥이 천장의 잔해를 사방팔방으로 깔끔히 쳐 냈다.

일행이 놀랍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엔틸 상승고무술上昇古武術, 오의奧義 천수여래신장千手如來神掌."

진이 말했던 무술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쿠우우우웅!

거대한 건물의 잔해가 내 뒤쪽을 강타했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바닥에 닿자마자 균열이 생겼다.

쩌적, 하는 불길한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주변의 마나를 움직여 바람의 길을 전개했다.

콰아아아앙!

감옥이 아래로 꺼지고 붕괴하고 있었다.

붕괴된 벽면 너머에서는 싸움의 여파가 계속되는지 폭발음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나는 계속 달려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바깥으로 밀어냈다.

"어어어어?!"

그렇게 잔뜩 달리고 달리자.

우리는 곧 감옥 바깥의 섬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왔구나?"

그리고 바로 그때, 내가 발을 내딛으며 균형을 잃는 찰나의 호흡을 노리고 목을 향해 칼이 날아왔다.

챙!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샤론의 칼이 튕겨져 나갔다.

"어머? 이 언니는 처음 보는데?"

"늦어... 배, 아까부터 준비...."

앨리스, 굿 타이밍!

감옥을 빠져나오자마자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뻔했네!

샤론,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여자다.

"우리는 동맹 아니었나?"

"글쎄? 그랬나? 진 오빠는 아닌 것 같던데. 날 빼놓고 가려고 했거든."

그럴 수밖에.

지금 그 살벌한 모습을 보아하니 쉽사리 널 데려갈 순 없을 것 같거든.

나는 먼저 나간 진과 일행을 살폈다.

그들은 멜빌 아주머니와 페른 아저씨의 인도로 앨리스가 절벽가에 세워 둔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앨리스는 안이 소란스러워지면 바깥의 배를 훔쳐 이곳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맡았다.

다행히 무사히 배를 옮겨 온 모양이었다.

"흡!"

어느새 다가온 진이 허공을 날아 샤론을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샤론은 제 몸을 날려 몇 차례 공중제비를 돌아 근처의 나무 위에 올라섰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흐응, 이거 정말 예상할 수 없네. 오빠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모르는 사람까지, 셋이라."

샤론이 우릴 보더니 헤헤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아, 무리무리. 포기. 안 되겠어. 오늘은 도망가야겠다."

"그냥 가겠다는 건가? 어디로?"

"글쎄?"

어깨를 한 차례 으쓱거린 그녀는 날 보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어디든 가겠지? 그리고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고. 그러니까 오빠. 죽지 말고 있어. 곧 내가 죽이러 갈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샤론의 신형이 순식간에 꺼진 듯이 사라졌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감각에 전혀 잡히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가 되어서 예민해진 감각에도 잡히지 않는다라. 그런 사람이 곧 죽이러 온다고 예고까지 했단 말이지.

무서운 적이 생겨 버렸군.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리한 뒤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얼른 출발하죠. 주변 배들과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으니까요."

* * *

배는 섬을 떠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를 젓는 선원이 따로 없었던 만큼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돛을 펴둔 탓에 바람을 타고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우리는 모두 선상에 모여 트팔로를 바라보았다.

내부에서 볼 땐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정말 폐허라고 해도 될 정도로 요새는 산산조각이 났다.

아니, 지금도 나고 있었다.

사방에선 균열이 계속되었고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며 일어난 흙먼지가 솟구쳤다.

연신 소란스러운 비명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고작 이틀 들어갔다 나온 내 마음도 이렇게 싱숭생숭한데, 저들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그들은 각각의 감정으로 감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하늘...."

한은 갑판에 벌러덩 드러누워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싸우고 뛰고 난리였던 탓에 이제야 정오가 되었다.

한낮의 태양이 상공에서 햇빛을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음습했던 감옥의 풍경과 달리 바깥 날씨는 화창했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한은 기쁜 듯 헤실거렸다.

"라워드!"

그때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어느새 갑판 위로 바바라와 탈리오 영감이 도착한 것이었다.

"모두 무사했구나!"

바바라가 상기된 표정으로 들떠 이야기했고 그녀의 곁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영감님만이 묘하게 서두르는 기색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놈아. 이제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이야기 좀 해 봐라. 9써클 마법사가 누구냐?"

"저기...."

내가 막 영감님에게 파르메시오 어르신을 알려 주려고 한 순간.

트팔로 쪽에서 거대한 마나가 소용돌이치는 것이 느껴졌다.

급히 갑판의 끝으로 달려가 요동치는 마나의 중심부를 살폈다.

그곳엔 어느새 전쟁터를 빠져나온 마르쿠제가 드래곤 브레스를 양손으로 든 채 날 노려보고 있었다.

에른하르트에 네클리우스까지 상대한 마르쿠제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머리에서는 피가 잔뜩 흘러내려 한쪽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고, 옷도 완전히 다 해지고 찢어진 상태였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일 거 같은데.

심지어 그 두 사람을 완벽하게 처리한 것도 아닌 듯했다.

그의 등 뒤로 수많은 폭발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지.

심지어 바닥에선 검은 손길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듯 잡아끌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그 모든 것을 버티며 이곳을 노려보며 총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 모양이, 그의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도망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버러지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바다 위에서 곱게 죽어라!"

"이봐, 애송이. 어쩔 셈이냐?"

탈리오 영감님도 육지의 마나 유동이 움직이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어쩔 셈이냐고요?

바로 이럴 셈입니다.

나는 내 몸을 촉매 삼아 배 주변의 모든 마나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바바라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탈출시킬 수 있을까.

그 고민의 결과였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의 총으로 몰려드는 마나의 움직임이 막 멈췄을 무렵 배를 둘러싼 거대한 마나막 또한 완성되었다.

그리고.

총신에서는 다시 한번 바다를 가르는 거대한 에너지가 발사되었다.

얕은 바다를 완전히 뒤집고, 해저의 밑바닥이 보일 정도의 강렬한 에너지포가 마치 터널 같은 기다란 통로를 만들어 내며 날아왔다.

에너지가 쏘아지는 방향의 그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리는 막대한 길.

하지만 그 끝에 우리는 없었다.

"이, 이건?!"

"날았어! 날았다고!"

"와아, 하늘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허공에서 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이제는 머리가 완전히 새하얗게 바란 마르쿠제의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배가 하늘을 날아 버렸거든.

아하하하하, 아하하하.

사람들은 지금 이 풍경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다는 듯 허둥지둥하며 주변 난간을 붙잡았다.

"난다, 난다!"

유일하게 진의 품 안에 안긴 한만이 즐거워하며 양손을 버둥거렸다.

그래. 나는 배를 하늘로 띄웠다.

내 바람의 길을 이용해서 말이야.

그중 내가 한 짓을 곧바로 이해한 탈리오 영감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날 바라보며 외쳤다.

"네놈, 미친 짓을 하는구나!"

그래, 미친 짓이다.

내 몸이 아니라 배를 둘러싼 마나와 배 주위의 마나를 조절해 배를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많은 마나를 한 번에 움직여서 그런가.

털썩, 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 절로 무릎을 꿇어 버렸다.

"라워드? 코, 코피가 나잖아!"

그제야 바바라가 비명과 함께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바라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교차하더니 누군가 날 부축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누군지 잘 모르겠다.

눈앞이 새까매져서 뭐가 잘 안 보였거든.

마나 탈진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아까 마르쿠제랑 싸우면서 너무 무리했던 모양이다.

하긴, 지친 상태에서 독 연기까지 마구잡이로 들이마셨던 거 같다.

에른하르트, 이 망나니 놈.

쿨럭, 하고 속에서 핏덩이가 입가로 흘러내렸다.

"이놈아. 마나를 계속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네놈의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게야! 아무리 네가 외부의 마나를 빌려 쓴다지만, 과도한 마나를 좁은 통로에 놔두면 통로는 무너지는 법이야!"

네네, 영감님. 저도 알죠.

그런 방법으로 감옥에서 족쇄들을 박살 냈는걸요.

그런데 제 몸이 박살 날 줄은 몰랐어요.

버틸 수 있나 싶었는데.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걸요.

지금 이대로 멈춰 버리면 배는 더 이상 하늘을 못 날고 바닥에 처박혀 버릴 겁니다.

그나마 마나를, 마나를....

"어디로 갈 셈이었느냐?"

그때, 낯익으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묘하게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헬피온... 공작령의 마왕성... 던전...."

"오랜만에 가 보겠구나.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모두 그곳에 있을 것이다. 자려무나."

그렇단 말이지.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당신이라면 안심할 수 있지요.

나는 천천히 안심한 채 눈을 감았다.

잘 부탁할게요.

파르메시오 어르신.

* * *

탈리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분명 저 애송이 녀석이 9써클 마법사가 있다고 얘길 하긴 했으나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으니까.

100년에서 150년에 한 번 나온다는 9써클 마법사가 이 세상에 나온다?

그건 마치 자신이 9써클 마법사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도 워낙 신기한 놈이니만큼 뭐라도 이야기를 하긴 할까 싶었는데.

그런데 진짜로 9써클 마법사가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와아...."

어린 꼬마아이의 실없는 감탄 소리가 허공을 수놓았다.

그래, 허공.

배는 안전하게 보호마법 속에서 새보다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배의 중앙.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몸을 말고 앉아 있는 저 노인에 의해서 말이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0화

<80화 - 못났던 주인공 세력이 너무 강해짐(1)>

끄응.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프네.

"정신이 들어?"

내 신음 소리를 들은 건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이 목소리는... 바바라인가?

눈을 뜨자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건지 초점이 흐릿하여 잘 잡히지 않았다.

"아직 몸은 일으키지 마. 벌써 나흘 동안 잠만 자고 있었어. 멜빌 이모님이랑 탈리오 할아버지가 마나 탈진이래. 너무 무리해서 마나를 써서 다 회복되려면 일주일은 걸린대."

"일주... 콜록, 일주일?"

나흘을 내리 잤다고 했나.

어쩐지.

말을 하는데 목 전체가 딱딱해 갈라져 절로 기침이 나더라.

그렇게 멍하니 내 몸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데 찰싹, 하고 내 등에 충격이 느껴졌다.

"으억? 콜록, 켁, 자, 잠깐."

"바보!"

"그, 그렇지만."

"진짜 안 본 사이에 왜 그렇게 무모해진 거야!"

아하하하.

나는 어쩐지 바바라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뭐랄까.

순수하게 날 걱정해 주는 말을 듣는 것이 오랜만이라 그런가?

잠들어 있던 몸이 깨는 것 같다.

등을 한 대 맞아서 그런 건가?

"그런데 여긴?"

나는 이제 좀 선명하게 들어오는 시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쩐지 낯익은 풍경인데.

익숙한 천의 질감과 침대의 감촉.

무엇보다 평온하게 날 감싸 주는 이 셀비너스의 향까지.

설마 여기.

"헬피온 공작령이야?"

"그래. 알아보겠어?"

언제 여기까지 왔대.

아니, 잠깐만.

내가 쓰러지고 정신을 잃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내가 움직인 마나만으론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을 텐데....

내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바바라가 날 다시 눕히며 얘기했다.

"대단하더라."

"아, 응, 내가 좀 대단하긴 한데...."

"쿡, 라워드 너도 대단하지만 파르메시오 할아버지 말이야. 정말 대단하더라. 9써클 대마법사라며?"

그렇군.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영감님이 우리를 이곳으로 옮겨 주셨나.

"어떻게 도착했지?"

"난 그런 거 처음 봤어. 배가 하늘을 날아 순식간에 헬피온 공작령에 도착하더라구. 장거리 텔레포트 같은 것도 아니고.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지?"

뭐라고 해야 하긴. 이름이라면 이미 있지.

"비공선."

"응?"

"마도비공선. 네가 미래에 만들게 될 발명품 이름이야."

바바라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눈만을 끔뻑거렸다.

아하하, 그럴 수 있지.

"바바라, 이번엔 나와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마법으로 배가 날았지만 다음번엔 네가 마도공학 기술과 지젤 선배의 과학으로 하늘을 나는 배를 만들어야 해."

"내가?"

"그래. 그걸 위해 널 데려온 거니까."

내 말에 바바라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하긴, 그녀가 이 모든 사항을 이해하는 건 어려우리라.

그러니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한 시간이 온 것 같다.

"바바라, 파르메시오 어르신이랑 탈리오 영감님은 어디 있어?"

"두 분 다 저택에 계셔."

"그 두 사람을 좀 모셔 와 주겠어? 그럼 모든 것을 설명해 줄게."

혼자서만 숨겨 두었던 진실을 공유할 시간이 말이다.

* * *

나는 바바라가 모셔 온 두 영감님을 옆에 두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 데온 크라피를 만나 고생하다 아카식 레코드를 만나고 여기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물론 기록의 관이라든가 지혜의 관 같은 세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건 문제가 있을 것 같으니.

대신 내가 주로 이야기한 것은 알바트론과의 만남이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바바라는 옛날 생각이 나는지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그때 네가 종종 사라지는 것 같았던 게 도서관에서 숨바꼭질을 잘했던 게 아니라...."

"아무리 숨바꼭질을 잘해도 데온 크라피 일행이 그렇게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는데 안 발견된 건 이유가 있지."

"그렇구나. 몰랐어."

하긴, 누가 알았을까.

전설상으로 전해지던 아카식 레코드에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들어가 있을 거란 걸.

"거기서 알바트론을 만났더냐?"

나는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괴성이라. 괴성. 그 이름을 이곳에서 들을 줄이야."

탈리오 영감이 신기하다는 듯 알바트론의 이명을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알바트론을 어떻게 만났고, 그 이후 어떤 영상을 봤는지 등의 이야기를 천천히 늘어놓았다.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오랫동안 경청했고, 마침내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때 파르메시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던전에서 나와 알바트론이 싸우는 걸 봤다고?"

"네. 딱 격돌 직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요. 아, 그리고 그 사내는...."

그때 내가 본 영상에선 알바트론과 파르메시오, 두 사람 말고도 다른 한 사람이 더 존재했다.

알바트론이 이야기한 XXXX.

이름도 모습도 알 수 없던 사내였지.

티아는 내가 권한이 부족해서 볼 수 없다고 했었는데.

내 질문에 하얀 눈썹 속, 파르메시오의 탁한 눈동자가 날 빤히 응시했다.

"젊은이. 내가 왜 갑자기 자넬 돕기로 했는지 아는가."

"아뇨, 모릅니다."

"알바트론. 자네가 그 이름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네. 그러고 보니 자네의 몸에 흐르는 그 마나, 그 방식이 알바트론을 닮았더군."

그가 제 영혼을 뽑고 마법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네. 나는 곧 늙어 죽을 걸세. 제국과 맞서 싸웠던 괴성보다는 오랫동안 살았지. 그러나 자네가 있는 한, 제국을 피해 숨어 살던 나보다 괴성이 더 오랫동안 이름이 남겠지. 그의 유지가 자네에게 이어질 테니."

"유지...."

내가 그렇게 거창한 것을 갖고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내가 이렇게 도망 다니는 것이 정말 내가 오랫동안 살아남는 길일지 의문이 들더군."

"어라, 파르메시오... 할아버지?"

옆에서 바바라가 경악하며 파르메시오를 불렀다.

그럴 수밖에.

파르메시오가 젊어지고 있었다.

80은 먹은 것처럼 노쇠했던 피부가 점차 탱탱해졌다.

잔뜩 굽었던 허리가 천천히 펴졌고, 백발로 성성했던 머리카락도 천천히 원래의 보랏빛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얼굴.

그 얼굴이 내가 영상에서 보았던 그 묘하게 중성적인 모습으로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옆에서 뭔가를 중얼거리던 탈리오 영감도 입을 떡하니 벌린 채 파르메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역천의 마나란 말이냐."

그래, 눈은 보이지 않지만 파르메시오 몸 전체를 휘젓는 마나의 흐름만큼은 선명히 보이실 테지.

역천.

그러한 이름에 걸맞게 하늘의 흐름을 역행하는 마나가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몸 전체를 감싸 안았다.

마침내 어르신의 외모가 40대 정도까지 줄어들었을 무렵.

"내가 그들을 두려워했던 건 녀석들이 아카식 레코드라는 기묘한 힘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이제 알았잖은가? 아카식 레코드를 사용하는 건 그들만이 아니란 것을. 그래서 도박을 한 번 걸어 보기로 했네."

마치 군장을 갖춘 채 싸울 준비를 모두 마친 전사처럼 파르메시오가 당당한 자세로 섰다.

9써클이라는 경지가 환각마저 보이게 하는 걸까?

파르메시오의 몸에선 그 어떤 마나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지만, 묘한 기운이 아우라처럼 등 뒤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마치 스콰렛 공작령을 나온 직후 마주했던, 헬피온 공작에게나 보았던, 아니 그보다도 더한 위압감이었다.

"도망치시지 않기로 했다는 거군요."

"그래."

파르메시오가 인자한 눈빛으로 바바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치매 노인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곁에 두어 고맙다."

"아, 아뇨...."

바바라는 아직도 파르메시오의 외모 변화가 당황스러운 듯 그의 모습을 낯설어 하며 머뭇거렸다.

"아까 그때 같이 있던 사내에 대해서 물었지. 라워드 자네는 혹시 라고르라는 이름을 아는가?"

왜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라고르 제르툴 스테알리오스.

지금 제국을 건국했던 황제 아닌가.

그럼 역시 그 사람은....

파르메시오는 내 예상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그곳에 있었던 자는 라고르였네. 나를 그곳으로 부른 사람이 그였지."

"허 참, 전대의 대마법사인 괴성부터 건국 황제까지. 스케일이 너무 방대하니 어처구니가 없구만."

그때 탈리오 영감이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봐, 애송이. 네 말은 잘 알겠고 마음으로는 믿고 싶긴 하다만, 이 머리는 아니다."

탈리오 영감은 자신의 스태프로 제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마법사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진리를 평생 회의하고 탐구하고 연구하는 자들이지. 그러니 너는 내게 증명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도 말이야."

"이 사람이라면... 나 말인가?"

파르메시오는 자신을 가리키는 탈리오 영감의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당신 말고 누가 있단 말이냐."

"허, 이거 마도의 선배를 대하는 예우가 엉망이구려."

"선배? 크흠, 물론 당신이 9써클 마법사라는 걸 의심하는 건 아니오. 배를 날려 보낸 능력이나, 방금 몸 전체를 휩쓴 역천의 마나는 어마어마했으니.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나는 왜 학회에서 파르메시오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을 한 편도 본 적이 없을까."

"자네의 공부가 얕은 거 아니겠는가?"

"뭐라?! 감히 네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그러느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딱!

화딱지가 난 탈리오 영감의 잔소리가 단숨에 멎었다.

허공에 나타난 작은 스태프가 탈리오 영감의 뒤통수를 후려 버린 탓이었다.

탈리오 영감은 앞으로 허리를 잔뜩 굽힌 채 맞은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고, 파르메시오 어르신은 오만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후배 아닌가."

"뭬야?"

"라워드라고 했나. 우린 이만 나가 보겠네. 자네의 몸이 안정되면 던전에 함께 나가 보세. 그때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더 많아질 것 같군. 자. 우리는 나가서 서열 정리 좀 하세."

"잠깐, 무슨 짓이냐! 놔라! 크아! 나는 저놈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악! 이 비겁한 놈아! 맹인 머리를 계속 때릴 셈이냐!"

"어허,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해야 이야기가 이어지는 법일세. 나감세."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탈리오 영감님의 로브 자락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영감님이 뭔가 마나로 반항을 하려는 듯했으나,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완드가 허공에서 제멋대로 슥슥 움직일 때마다 마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아펠 집사장의 검광을 사라지게 만들었던 헬피온 공작의 검 같은 예술적인 마나 운용이었다.

그때마다 사각을 찔러 툭툭 머리를 두드리는 완드의 움직임은 덤이었고 말이다.

저 영감님이 저렇게 속절없이 끌려가는 모습을 볼 때가 오는구나.

나와 바바라는 그렇게 멀리 떠나는 영감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 머쓱해했다.

어르신, 왜 나가시면서 연인이니 뭐니 이상한 얘길 하셨단 말입니까.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닌데 말입니다.

"그, 어, 라워드, 놀랍네, 이야기."

"아, 응. 그렇지? 나도 처음 얘기하는 거야."

"처음... 나한테 한 번 이야기한 적 있지 않았어?"

"기억났구나. 그래. 아카데미 4학년 때인가, 너한테 한 번 이야기했었어. 아카식 레코드를 찾은 것 같다고,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지식을 읽다 보면 데온 크라피를 혼내 줄 수 있을 거라고."

바바라가 후후, 하고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그땐 농담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였구나. 그때 내가 너를 믿어 줬더라면 우리는 조금 더 일찍 만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도 그런 무모한 짓을 안 하고, 좀 더 너를 믿고...."

"가정은 의미 없어."

나는 바바라의 자조적인 푸념을 끊어 버렸다.

"대신 다르게 생각해야지.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여기에서 만난 거야. 트팔로에서 더욱 단단해진 네가, 그리고 헬피온에서 더욱 단단해진 내가."

"그렇네. 너는 무려 마왕성이 있던 평원을 다스리는 현자님이 되었으니까."

"그래, 나는 헬피온 공작령에서 현... 뭐가 됐다고?"

잠깐만, 뭐가 어쩌고 어째?

마왕성이 있던 평원을 다스린다고? 현자님이라고?

어쩐지 바바라가 말하는 사람이 내가 모르는 나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바바라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아펠 집사장님이 너한테 이런 얘길 하면 어처구니없어할 거라고 했었어. 사람들한테 네가 깼다고 알릴게. 그럼 다른 사람들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러 올 거야. 너무 놀라지는 말고, 고르뎀 백작 나으리."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1화

<81화 - 못났던 주인공 세력이 너무 강해짐(2)>

"일어났나."

"공작님이 직접...."

"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게.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단 얘긴 들었으니까."

바바라가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방 안으로 헬피온 공작이 들어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보다시피 잘 지냈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이 들어오시자마자 방 안으로 그 괴물 같은 기운이 넘실넘실 움직이거든요.

마치 망망대해 속에서 날 바라보는 거대한 눈동자와 마주하는 감각이다.

이 절대적인 탈력감을 보아하니 공작님의 컨디션이 정상, 아니 최정상인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물어보는 안부는 그게 아니잖아요.

"티타니아 영애는...."

"후후, 잘 지내고 있네. 방금까지도 함께 검을 나눴지."

어, 잘 지내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왜 같이 지내는 방식이 잘못된 것 같죠?

보통 결혼을 약속한 남녀라면 함께 지내면서 사랑을 속삭인다든가, 정원을 산책한다거나!

그런 로맨틱한 이벤트가 넘치지 않아?

"왜 그런 표정인가?"

"아뇨. 그냥 진짜로 너무 잘 지내셨던 것 같아서요."

"흠, 어쩐지 자네의 표정이 조금 불손한 것 같군. 뭐, 평소의 자네대로인 것 같기도 하네만."

헬피온 공작은 날 도로 앉힌 후 방구석 테이블에 있는 의자를 침대 곁으로 가져와 앉았다.

"자네가 떠나고 약 3주 정도가 지났지. 그사이에 헬피온 공작령에 큰 변화가 있었네."

"그게 제가 마왕성이 있던 평지를 다스리게 되었단 소리와 연결되어 있나요?"

"그렇네."

그는 품에서 헬피온 공작령 주변 지도를 꺼내 침대 위에 펼쳐 놓았다.

"잘 보게."

그가 함께 챙겨 온 흑연으로 지도 위에 동그라미를 두 번 그었다.

처음 그었던 작은 원은 원래의 헬피온 공작령의 영토인 모양이고.

그것보다 약 네 배 가까이 크게 그려진 원은....

"설마 지금 헬피온 공작령이 이만큼의 크기란 말씀이신가요?"

"맞네."

"이건... 아무리 마왕성을 완전히 밀어 버렸다지만 기대 이상의 영지인데요."

원래 헬피온 공작령은 마물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델피 왕국의 경계를 따라 굉장히 넓게 펼쳐진 가로형 영지였다.

그 넓이만 하더라도 상당한 크기였는데 지금은 그 넓이가 무려 네 배.

라그나 왕국 전체 넓이의 1/5은 될 법한 규모였다.

그 속에는 제국의 경계부터 마숲, 마왕성, 기존 헬피온 공작령, 그리고 원래 마물의 서식지들이던 곳들까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저긴 블랙 웨어 울프들의 서식지가 아닙니까? 저긴 가고일들의 영지고요. 그리고 저긴 서리 거인의 서식지일 텐데요. 설마 제가 사라진 사이에 모두 토벌하신 겁니까?"

"아니, 그들이 스스로 사라졌네."

"사라졌다구요?"

"마왕성이 없어진 그날을 기점으로 몬스터들은 자신들이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처럼 천천히 흩어졌어. 있던 몬스터들도 평소와 달리 힘을 쓰지 못하고 사라졌지."

어쩐지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마기.

탈리오 영감은 제국의 특임대가 마기를 다루는 놈들이라고 말했지.

던전과 제국의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유추해 보건데 그곳에서 만들어진 마기가 몬스터들에게 어떤 특별한 영향을 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마기가 사라지자마자 몬스터들이 사라진 거지.

그래서 이렇게 어마어마한 영지가 만들어진 건가.

공작령이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는 위험한 몬스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역로 하나를 뚫은 것만으로도 환골탈태를 했었지.

그런데 사방의 모든 몬스터가 사라졌다?

"기존 헬피온 공작령의 시스템으론 이 영지를 운영할 수 없겠군요."

"역시 참모장이군. 지도만 보고도 사태 파악이 참 빨라."

헬피온 공작령의 경제가 돌아갈 수 있었던 건 헬피온 공작령의 거주민 대부분이 몬스터 사냥을 직업으로 삼은 용병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몬스터의 부산물을 식료품점에 팔면, 식료품점은 식자재를 배급한다. 그리고 소규모 무역을 통해 부산물을 외부 영지에 판매하는 거고.

그런데 이번 전쟁을 통해 몬스터들이 잔뜩 퇴치된 상황에서 지속적인 수익을 낼 만한 서식지마저 사라졌다.

"용병들이 서서히 이탈하겠군요."

"이곳에 정착해 삶을 시작하겠다는 자들이 없는 건 아닐세. 이번 전쟁으로 한몫하고 은퇴한 자들도 있고. 하지만 그래도 80% 이상의 용병들은 영지를 떠나겠다는군."

"이거 영지가 너무 넓어져도 문제군요. 지킬 곳은 많은데 사람이 너무 없어요. 그들을 고용하려면 영지 자체의 생산물이나 특산품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없고."

"자네의 말이 맞네. 그래서 급한 대로 가신들에게 영지를 나눠 주어 메꾼 걸세."

헬피온 공작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기존 헬피온 공작령은 아펠 집사장이.

마숲부터 북해와 라그나 왕국의 경계까지 이어진 협곡은 체트록스 요리장이.

과거 대형 몬스터들의 서식지가 남아 있던 대사막 쪽은 셰리나 하녀장이.

그리고 제국의 경계엔 헬피온 공작이 자리했다.

"공작님이 가장 험지에?"

"난 변경을 지키는 자일세. 더군다나 제국의 야욕을 제대로 알게 된 지금 가장 적의 가까이 있는 게 당연한 게지."

그리고 지도의 중심.

과거엔 마왕성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드넓은 평야와 넓은 강이 위치한 가장 아름다운 대지.

그곳에 내 이름이 적혔다.

"어째서 제가 이곳에? 저보다 가문을 위해 더욱 힘써 주신 가신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내 질문에 헬피온 공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영지 배분은 내가 한 것이 아니네. 티타가 했지."

"티... 아, 네, 티타니아 영애 말씀이시군요."

그래도 이제 애칭으로 서로를 부를 정도 사이까진 되었나 보구나.

"몬스터들이 사라진 후 그녀와 참모장들의 고생이 상당하네. 솔직히 그들이 없었더라면 영지를 단번에 망가뜨려 놓았을지도 몰라."

"유능한 자들이죠."

단지 죄를 짓고 이곳에 잠깐 왔을 뿐, 전략기획실에서 스콰렛 공작령을 움직였던 자들이었다.

가신들의 봉토까지 대단위 영지를 굴렸던 경험이 있는 만큼 시스템의 설계를 잘해 줬으리라.

"영지마다 특색이 있고 가신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었네. 물론 자네가 여기에 배치된 것도 말일세."

"이유라 하심은...."

거기까지 설명한 헬피온 공작은 내 침상 위에 지도를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말로 설명하긴 어렵군. 복잡한 마법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어서 말이야.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아무리 티타니아가 영지의 안주인으로 권한을 발휘한다지만 우리 영지의 참모장은 자네일세. 나는 자네의 지혜가 필요해."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헬피온 공작이 뭔가 주저하는 듯한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문제도 하나 있네."

"문제요?"

"테론을 기억하는가?"

테론?

아. 그 도련님.

스콰렛 공작령에서 너무 곱게 자란 나머지 권력다툼 한번 해 보겠다고 투정 부리다가 전쟁터로 내몰린 소년이었지.

"네."

"그가 결국 이곳 생활을 못 버티고 제국 국경을 넘었네."

지금 뭐라고 하셨죠?

테론이 제국의 국경을 넘었다고요?

헬피온 공작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티타는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만 처남에겐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네. 며칠 동안은 그래도 바깥을 돌아다니거나 사냥도 하고 뭔가 하려는 듯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깥으로 나오질 않더군. 그러다가 우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특임대와 접선해 넘어간 모양이야."

"특임대라고 하면... 제국이 먼저 접선했단 건가요?"

"그 사미오슈 크라피가 직접 나섰단 얘기가 있네."

헬피온 공작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어떻게 우리 내부의 이야기가 샜는진 모르겠네. 그들이 처남을 데려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것이 적어도 우리와 스콰렛 공작령에게 치명타로 돌아올 것은 아네. 그러니 자네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신경 써 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좀 더 쉬게."

헬피온 공작은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뒤 완전히 방에서 나갔다.

처음 영지 이야기를 들었을 땐 뭔가 거대한 스케일의 일 더미가 폭풍처럼 오겠구나 하고 멍해 있었다.

그런데 이후 테론의 이야기가 나오니 정신이 확 드네.

사미오슈 크라피.

모략과 음모를 통해 라이언하트를 황제로 만든 일등공신.

그런 자가 테론을 직접 회유해 갔다라.

도대체 어떤 일을 벌이려고 하는 건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몸을 침대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일단 눈앞에 산재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쉬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 * *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파르메시오 어르신을 찾아갔다.

그곳엔 따로 찾을 필요 없이 탈리오 영감님도 함께 있었다.

"제법 빨리 몸을 털고 일어났구나. 저번에 본 뒤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회복력이 좋아서요."

"젊구나."

탈리오 영감님도 아니고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풍경이 좀 이상하네요.

하긴, 풍경은 아까부터 이상했지.

탈리오 영감이 꿍얼댈 때마다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완드가 제멋대로 허공을 날아 딱, 소리가 나게 탈리오 영감의 뒤통수를 때려 댔으니까.

"아 좀! 그만 때리십쇼, 선배! 애송이들 앞에서 이게 뭡니까."

"네가 어린아이들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계속해 댔으니 맞는 거 아니겠느냐."

아하하.

영감님에겐 미안하지만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것저것 챙겨 주는 것과 별개로 영감님은 나와 청산해야 할 빚들이 제법 있으니 말이지.

"던전에 가고 싶습니다. 그곳이라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을 거구요."

"자유롭게 아카식 레코드를 접속할 수 있느냐?"

"그런 건 아닌데...."

약간의 확신이 있거든.

티아가 그랬다.

자기는 이곳에 계속 있을 것이고 조금 더 내가 강해진다면 아카식 레코드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9써클 마법사를 데려온 지금.

그리고 탈리오 마탑에서 새로운 지식들을 손에 넣은 지금이라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내 예측을 들은 두 마법사는 군말 없이 일어났다.

"바로 가자꾸나."

그런데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준비하는 채비를 보니 공간이동 마법이 아니라 걸어가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나랑 비슷한 감상을 느낀 모양인지 탈리오 영감님이 어르신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공간이동을 하지 않을 셈이요?"

"매사에 그렇게 몸을 움직이지 않고 마법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면 9써클은 평생 못 얻을 게다."

"끄응, 신소리 아니우? 으억! 아프다니까!"

또 한 번 딱 소리가 탈리오 영감의 머리를 두드렸다.

참 독특한 영감님들이란 말이지.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저택을 나서 유적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애송아."

"네?"

"이번에 그 아카식 레코드라는 걸 확인만 하면 마탑을 이곳으로 가져올 게다."

라그나 왕국에 있던 그 마탑을요?

아, 그렇지. 라그나 왕국에 있지.

나는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문제가 많겠군요."

"어차피 마법으로 외부와 격리시켜 놓았으니 엄한 녀석들이 들어오진 않았을 게다. 하지만 트팔로를 그렇게 들쑤셔 놨으니 곧 왕성에서 뭐라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오지 않겠느냐."

"트팔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든 되었겠지. 관심 없다, 그딴 곳."

너무 무심하신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고 어떻게든이라.

샤론, 에른하르트, 네클리우스.

그 세 사람은 한 명이라도 탈출에 성공하면 전 세계에 이슈가 될 정도로 묘한 악당들이었다.

특히 독과 마약으로 사람을 좀비화시키는 에른하르트의 경우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피해자들에게 내 죄는 얼마나 될까.

그러나 내 생각을 들은 영감님은 그런 것까진 신경 쓰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네놈은 네가 가진 힘에 비해 비정함이 부족하구나."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제가 착한 사람은 아녜요. 바바라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트팔로에 있는 수많은 죄수들을 희생시켰으니까요."

"자기 영역의 사람을 위해선 누가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거겠지. 역사적으로 네놈 같은 놈들이 미치광이가 많았다."

"하지만 세상을 바꾼 자들도 늘 그런 사람들이었지."

역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파르메시오 어르신밖에 없구만.

탈리오 영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쯧, 하고 혀를 한 차례 차곤 다시 내게 이야기했다.

"꼭 라그나를 도망치는 것만은 아니다. 네 말대로 아카식 레코드라는 것이 여기 있다면 그만큼 연구할 만한 대상도 없을 테니."

그렇긴 하지.

"감사합니다."

나는 탈리오 영감님에게 순수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용병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텅 빈 영지가 되어 가는 이때.

무려 8써클 마스터의 마탑이 세워진다면 그것은 그것만으로도 거대한 힘이자 상징이 된다.

거친 용병들은 떠나가겠지만 수많은 마법사와 마법지망생들이 다시금 이곳을 채우게 되겠지.

던전은 저택과 가까웠다.

내가 이곳을 중심으로 영지를 운영하기로 한 직후 기거할 수 있는 저택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누워 골골거리던 곳이 바로 그 저택이었다.

덕분에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우리는 어느덧 던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던전은 마왕성이 있을 때와 달리 지상에 노출된 이후 관리가 잘 되고 있었던 듯했다.

저기에 보이는 용병들은 던전에 출입하는 사람이 없는지 감시하는 용도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던전을 앞에 두고 탈리오 영감님이 파르메시오 어르신을 보고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제대로 얘기해 보시오. 도대체 이따위 던전을 왜 만들었는지."

영감님의 재촉에 어르신의 시선이 점차 추억 속으로 잠겨 드는 듯했다.

그의 눈동자가 완전히 현재와 과거 사이를 교차할 무렵.

그는 씁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의도적으로 세상을 망가뜨리기 위해 구성된 공간이네."

"세상을 망가뜨려?"

"잔잔한 호수를 생각해 보게. 아무리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라도 결과적으로 호수는 잔잔하게 제 형상을 유지하지. 그런데 만약 호수의 한쪽 면에 배수로를 만들면 어떨까? 호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게야."

"그렇다면 호수의 물은 모두 빠져나가겠죠."

"그래."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세상과 마나의 섭리는 그렇게 빈 공간을 가만히 두지 않네. 다른 무언가를 통해 그 힘의 균형을 맞추지.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이세계의 존재를 소환하려고 했네."

그때 알바트론은 이 던전이 이세계의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것이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1만 명의 피와 육신, 그리고 영혼을 매개로 한다면?

"악마, 아니 마왕을 소환하려고 한 건가요?"

파르메시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우리가 소환하려고 한 건 아카식 레코드였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2화

<82화 - 못났던 주인공 세력이 너무 강해짐(3)>

던전 내부는 외부만큼이나 훌륭히 관리되어 있었다.

지저분한 먼지들도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고, 통로 중간중간 어둠을 밝히는 마정석들이 배치되어 있어 예전보다 칙칙한 느낌도 훨씬 덜했다.

무엇보다 처음 파르메시오를 데리고 왔을 때보다 기운이 훨씬 깔끔했다.

마치 풍경 좋은 산의 정상에서 마시는 것처럼 맑은 공기가 느껴진다.

이건 이 던전만의 특색인가?

"10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군."

파르메시오 어르신은 유적을 들어온 직후부터 곳곳을 살피며 감상에 젖는 듯했다,

100년.

나로선 상상하기 힘든 세월이 지났음에도 던전의 지리를 비롯한 다양한 것들이 기억나시는 모양이었다.

"마법진은... 이쪽이었지, 아마?"

길 안내를 받던 어르신이 오히려 날 앞장서 스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셨으니까.

"아카식 레코드를 소환하려고 했다 하셨는데, 이미 제국은 그때부터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건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카식 레코드를 소환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막연하게 전설상에 존재하는 신비한 무언가를 소환하려고 했던 거지. 이를테면 아카식 레코드처럼 말일세. 당시 제국, 아니, 그때 제르톨은 아직 왕국에 불과했었군. 왕국은 저잣거리의 모든 허무맹랑한 전설에 관심을 뒀네."

"제국이 되고 싶어서요?"

나는 영상 속의 알바트론과 라고르 건국 황제가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국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던 그 목소리.

잠깐 들었지만 끝없는 집착에 사로잡힌 듯한 목소리였지.

"대부분의 전설은 그냥 허무맹랑한 소리였어. 하지만 그중엔 진실 또한 존재했네. 눈물을 흘리는 여신상이나 산을 가르는 건틀릿, 번개를 부르는 검...."

"그런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진짜로 있단 말이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뺏는다. 뺏을 수 없으면 파괴한다. 라고르는 그것이 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 여겼네."

"지금 제국의 행태와 다르지 않네요."

"그렇겠지. 그자가 죽지 않았으니까."

"뭐라?"

탈리오 영감님과 나의 시선이 동시에 파르메시오에게 붙박였다.

"죽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분명 지금의 황제는 라이온하트일 터!"

"형식상 황제를 말한다면 라이온하트가 맞다. 하지만 라고르는 비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계속 유지하고 있네. 내가 도망쳤던 것도 그 탓이지."

허, 진짜.

제국 놈들, 별별 짓을 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카식 레코드가 소환되었던 건가요?"

"잘 모르겠군."

"네?"

내 질문에 파르메시오 어르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의 마법은 실패했었거든. 자, 다 온 모양이군."

어르신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마법진이 있는 방으로 도착했다.

저번에 탈리오 영감이 봉인한 탓인지 마법진은 색을 잃고 칙칙한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봉인되어 있구먼."

"내가 했수다."

"깔끔하군."

어르신의 손에 잡힌 완드가 죽죽 늘어나 스태프 정도의 길이가 되었다.

그는 그 막대기로 마법진의 몇 군데를 툭툭 건드렸고, 곧 마법진 전체에서 쿠르릉 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뭘 하신 거죠?"

"마법진에 깃든 모든 에너지를 치워 버렸네. 단순히 봉인이 아니라 폐기지."

어르신의 말씀에 탈리오 영감이 울컥하고 화를 냈다.

"뭣이라, 마법진을 싸그리 폐기했다고? 선배, 너무하신 거 아니오!"

"이런 사이한 마법진이 자넬 9써클으로 만들어 주진 않네. 그러니 치워 버려야지."

어르신의 말처럼 정말로 마법진이 폐기된 모양이었다.

잿빛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던 선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땅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러더니 곧 던전 전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던전을 이루고 있던 돌들이 순식간에 풍화되는가 싶더니 갈라진 틈 사이에서 넝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넝쿨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 빠른 속도로 벽을 뒤덮었고, 곧이어 바닥에서 잡초들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잡초는 단순히 풀만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민들레 같은 생명력 강한 풀들은 금세 꽃을 피우더니 씨를 퍼뜨렸고, 곧 던전은 하나의 정원처럼 변해 있었다.

"이게 무슨...."

"던전이 주변의 정기 흐름을 막아 둔 채 흡수하고 있었지. 그걸 풀어놓았으니 이때까지 막힌 흐름이 단숨에 흘러간 거네."

"무려 100년 동안 막혀 있던 흐름인 거네요."

파르메시오 어르신은 주변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원의 풍경과 정말로 잘 어울리시는군.

"이봐, 애송아. 그래서 아카식 레코드는 언제쯤 열리는 것이냐."

그때 탈리오 영감님이 스태프로 주변 풀더미들을 툭툭 치며 물었다.

파르메시오 어르신 역시 별다른 말을 통해 재촉하진 않지만 궁금하시긴 한 모양이었다.

으음....

그러게요.

솔직히 저도 그걸 기다리고 있는데 별달리 반응이 없네요.

사실 어르신이 마법진을 부수는 순간 발동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발동 조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 이야기나 해 볼까요?"

"뭐라구? 이놈아, 우리가 그렇게 시간이 많은...."

딱!

"아악, 선배! 그만 좀 때리라고 안 했소! 나도 80 먹은 노인이요, 노인!"

탈리오 영감이 머리를 감싸 쥔 채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어르신은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대신 근처에 보이는 굵직한 넝쿨에 걸터앉아 날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필요하느냐?"

"보통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때가 제가 모르던 지식, 또는 진리 같은 걸 알게 될 때더라구요."

"그렇구나. 그럼 아무거나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무엇부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을까.

아무래도 이곳에 원래 있던 건물부터 하는 게 맞겠지.

"혹시 마왕성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니, 나는 마왕이 준동할 시기엔 이미 감옥에 있었단다."

분명 마왕성이 이곳에 소환되어 마수와 마족들이 날뛰었던 게 15년 전이었던가.

그렇다는 건 이 던전이 적어도 약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작동하지 않았단 뜻이군.

나는 파르메시오 어르신께 마왕성의 외양을 설명해 드렸다.

마침 눈을 볼 수 없었던 탈리오 영감도 옆에서 설명을 흥미롭다는 듯 따라 들었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건물이 아카식 레코드란 놈인가?"

"아카식 레코드는 맞았을 게야. 하지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소환했던 만큼 불안정했던 거지. 방향감각과 균형감각마저 어지럽히는 것도 그 탓이고."

"그럼 마왕과 마기는 왜 나온 것이오?"

"그들이 과연 마왕과 마기라고 생각하나?"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람.

탈리오 영감도 어르신의 그 말에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성을 버럭 냈다.

"뭐라고? 그럼 그들이 마왕이랑 마기가 아니라면 뭐란 말이오. 애송아, 검 들어 봐라."

"네?"

"잿더미 녀석 검 있잖아, 그거!"

어후, 잿더미 녀석 검이라니.

룸펜 하운드는 죽어서 영감님에게 제대로 이름 한 번 못 불리는구나.

조금 불쌍하기도 하네.

나는 품에서 잿더미의 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검에서 특유의 음습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자, 보시오. 저 불길한 기운이 마기가 아니면 뭐란 말이오."

파르메시오 영감님은 지긋이 내 검의 기운을 살피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어둠의 마나군."

"뭬야? 선배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요? 마기가 어둠의 마나지 그럼 신성력이요?"

"선후가 다르군. 마기는 모두 어둠의 마나일 수 있지만 모든 어둠의 마나가 마기이진 않네."

"그렇다면 왜 마기, 아니 어둠의 마나가 이곳에 나타났단 말이오?"

"1만 명."

파르메시오의 묵직한 음성이 주변을 울렸다.

"단기간에 1만 명의 사람을 죽였어. 수많은 원한이 누적되었겠지. 그러니 이런 이상한 공간에 괴상망측한 존재들이 소환된 것이지."

"그럼 그들이 마계에서 온 것이 아니고 그저 이곳에서 자연 발생했다는 것이오?"

"그렇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알바트론 어르신과 탈리오 영감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렇구나 하며 들을 뿐.

어느덧 두 사람은 날 내버려 둔 채 마나와 마나의 구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탈리오 영감이나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즐거운 표정을 보아하니 쉽사리 토론을 그칠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덧 아카식 레코드는 뒷전이시구만.

"어이, 애송이. 그럼 네놈이 들어갔다던 아카식 레코드는 어떻게 생겼더냐?"

"네?"

"선배 말에 따르면 여기 소환된 것이 비틀리긴 했어도 아카식 레코드의 일부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다는 건 네놈이 본 아카식 레코드의 풍경이나 여기의 풍경이 비슷하단 거 아니겠느냐?"

"아뇨. 제가 본 풍경이랑은 완전히 달랐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예전 아카식 레코드 풍경들을 떠올려 보았다.

작은 책상 하나에 편지가 저절로 말을 걸었던 곳.

그리고 책장과 책이 탑처럼 쌓인 지식의 관.

사방팔방의 벽이 이미지 마법을 송출하는 기록의 관.

그리고 내가 델피 아카데미에서 접속했던 원래의 아카식 레코드까지.

내 설명에 탈리오 영감이 한 차례 혀를 차더니 파르메시오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이거야 원, 오늘은 튼 것 같소. 이럴 거면 이 녀석을 데리고 아예 델피 아카데미로 가 보는 것은 어떻소? 거기에 아카식 레코드로 접속하는 통로가 있다잖소."

"음, 그것도 방법이겠지만, 잠깐. 라워드 군."

어르신이 탈리오 영감의 투덜거림을 뒤로한 채 내게로 다가왔다.

"네?"

"알바트론이 자네의 영혼을 뽑아 각성시켰다고 했지."

"네."

이상하다.

왜 단순히 사실 확인일 텐데 불길한 예감이 들지?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눈매가 묘하게 휘었다.

뭐랄까.

미안해하시는 것도 같은데.

"내가 다루는 마법이 뭔지 아는가?"

"어... 영상에서는 알바트론 님이 어둠의 마법을 다루신다고...."

"그렇네. 내 기원은 흑마법일세. 삶과 자연보다는 죽음과 영혼, 사자의 것을 다루지. 그러다 보니 나도 영혼에 대해서 일가견은 있네."

"네에... 설마?"

아차 하는 순간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완드가 내 머리 위로 올려졌다.

"그러니 한 번 더 해 봄세."

"자, 잠시만요, 잠시!"

"몸에 해는 안 갈 걸세. 아니, 오히려 알바트론이 추출한 순수 영혼보다 내 영혼술이 더 위에 있으니 자네의 성장을 도울 걸세."

아니, 자, 자, 자, 잠깐!

그거 아프잖아요!

그것도 무지!

사람이 죽는다고요!

이번 삶에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났는데 또 한 번 더 그딴 경험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수많은 발악을 하려고 했으나 그것도 잠시.

나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몸에서 하나둘 감각이 옅어지고, 서서히 내 몸과 의식이 사라진다.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무의 영역에 들어갔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정말로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었다.

* * *

익숙한, 그리고 정말로 보고 싶었던 정경이 펼쳐진다.

하늘까지 뻗어 있는 책꽂이와 책들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

푸른색 고색창연한 로브를 입고, 고깔모자까지 쓴 늙은 마법사까지.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알바트론!"

지식의 관에서 알바트론이 웃으며 날 마중했다.

"알바트론을 만나고 싶을 땐 티아가 나오더니, 티아를 만나는가 싶을 땐 직접 마중 나오시는군요!"

"당연히 마중 나와야 하지 않겠어? 질문할 것이 잔뜩 있어 보이니 말이야."

그가 생긋 웃더니 팔짱을 꼈다.

"그리고 너뿐만이 아니고 말이야."

"네?"

그러고 보니 그의 시선이 조금 이상하다.

나를 향해 웃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보다도 더 깊은 곳.

바로 내 어깨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보랏빛의 까마귀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마귀의 긴 부리가 열리고, 그곳에서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네, 알바트론.]

"오랜만이라. 그렇군. 너의 삶에서는 그런가. 100년이 흘렀다고 했지. 나는 며칠 전에도 너를 봤어, 파르메시오."

[그렇군. 한참 우리가 다툴 때였는가. 부질없는 싸움을 할 때군.]

"이렇게 널 볼 수 있는 걸 보면 내가 널 죽이는 덴 실패한 모양이군. 아쉽구만. 그 긴 명을 끊어 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전부 과거의 한때일세.]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아카식 레코드에 같이 들어왔다고?

알바트론의 적의 어린 목소리에 반응하며 까마귀가 내 영혼의 어깨 위로 올라앉은 뒤 한 차례 까악- 하고 울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3화

<83화 - 못났던 주인공 세력이 너무 강해짐(4)>

"어떻게 여길 들어오신 거예요?"

아카식 레코드는 현실의 시간조차 멈출 정도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 아니었어?

그런데 비록 까마귀 모양의 아바타를 이용하긴 했어도 내 접속에 같이 들어올 수 있다니.

[말했잖느냐. 내 영혼술이 저 녀석보다 훨씬 낫다고. 네 영혼에 내 영혼 일부를 함께 이식해 두었다.]

"흥, 영혼을 다루는 게 나보다 네가 낫다고? 웃기는 소릴 하는군."

[자넨 죽을 때까지 나를 못 죽이지 않았나. 자넨 죽었고 난 살아남았네. 그러니 내가 훨씬 뛰어난 게 맞지 않겠나?]

"후배 앞이라고 마음껏 거짓말을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그렇게 자신 있으면 지금 여기서 한판 떠 볼까?"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두 마법사 어르신들이 갑자기 자존심 싸움을 시작하더니 금방이라도 공격마법을 난사할 것처럼 흉악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아니, 잠깐만요.

"진정들 하세요. 제가 어르신들 싸우는 거 구경하려고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 영혼까지 뽑힌 건 아니잖아요."

젠장, 그러고 보니 파르메시오 어르신.

사전에 한 마디 설명도 안 하고 다짜고짜 영혼부터 뽑으셨겠다.

탈리오 영감도 그렇고 이놈의 마법사들이란 행동 방식이 다 이런 식인가?

[그건 그렇군. 라워드 군의 말처럼 우리가 이렇게 다투기 위해 아카식 레코드를 찾은 게 아니지. 난 궁금한 게 많다네.]

"크흠."

알바트론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내젓더니 가벼운 손짓으로 내가 앉을 의자를 마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파르메시오 어르신도 날개를 파닥거리더니 뼈로 만들어진 의자를 만들곤 그 위에 앉는 거 아닌가.

아니, 어르신.

애초에 어르신은 까마귀 형태니까 의자가 그닥 필요 없지 않습니까.

노인분들끼리 쓸모없는 자존심은.

[오호. 이 세계의 마나는 이런 방식이군. 아주 순수하고 정갈해.]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파르메시온 어르신.

아마 나름대로 아카식 레코드에 대한 정보를 얻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마나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지금 내가 들어 봤자 하나도 이해 못 할 가능성이 컸다.

그것보단 내가 알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물어보는 게 나았다.

알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알바트론. 기록의 관에서 당신의 모습을 봤어요. 라고르 선대 황제와 던전의 용도도 파르메시오 어르신에게 들었고요. 당신은 제게 이곳에서 외신부터 많은 것들을 보여 줬지요."

내 얘기에 알바트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파르메시오 어르신은 제국이 아카식 레코드를 이용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라고르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고도 했고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을 듣고,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기록의 관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다 볼 수 있었는데 라고르의 이름만큼은 생략되어 있었죠."

알바트론과 파르메시오 영감님의 과거 영상에서 난 그의 이름만을 들을 수 없었다.

티아는 자격이 안 된다고 했었지.

"도대체 아카식 레코드는 뭔가요? 그리고 제가 알아야 할 것, 알 수 있는 것은 뭐구요."

알바트론은 아카식 레코드에서 만난 자들 중 가장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편지는 내가 너무 약할 때 만나 아카식 레코드의 가장 기초적인 것밖에 이야기해 주지 못했지.

티아는 어째서인지 지극히 마이페이스라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기록을 보여 주는 것에 더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유일하게 알바트론만이 이곳의 진리와 존재 이유, 지식과 지혜를 전달해 주었지.

그래서 이번에 만나면 꼭 묻고 싶었던 질문들이었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렇게 속으로 수천 번은 되새겼던 질문을 내뱉는 내 음성이 점차 격양되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알바트론은 그 모든 질문을 묵묵히 들은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워드. 우선 칭찬해 주마. 무척 강해졌구나."

그가 기특하다는 미소를 띠었다.

"내가, 그리고 우리 아카식 레코드의 일원이 네게 강해지라고 했던 건 물리적인 강함이 아니다. 영혼과 내면의 강함. 수많은 경험을 통해 너는 진리를 견딜 준비가 되었다."

대마법사는 단언했다.

"그래. 너는 네가 궁금한 모든 것들을 알 자격이 생겼다."

그리고 알바트론의 음성은 그 자체로 선언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지혜의 관에서 수많은 책이 저절로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얼핏 보아도 수백, 수천 장의 책들이 허공에 스스로 떠 제 책장을 넘긴다.

책의 종이에 새겨진 글자들이 넘실거리며 허공을 다시 움직였다.

문장엔 힘이 있었다.

문장이 내게 박혀 들 때마다, 그리고 알바트론의 설명이 이어질 때마다 머릿속으로 선명한 이미지가 재생되었다.

"어느 곳에선 외신, 어느 공간에선 혼돈, 또 다른 시간에선 블랙홀이라 부르는 존재. 아카식 레코드는 설명한 것처럼 외신을 막기 위해 생겨났다."

암흑만 가득한 그곳에 세계 자체를 부수며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 공허로 만드는 존재가 나타났다.

"외신은 원래 우주, 이 행성 아주 먼 곳, 어쩌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절대적 존재였다. 본디 아직 젊은 우리 차원에서는 외신을 만날 일이 없었지. 아카식 레코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차원엔 외신이 없었던 탓에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던 개념이었어."

이해할 수 없을 법한 단어들이 개념으로 변해 머릿속에 박혔다.

우주, 차원, 행성.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용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라고르의 탐욕이었다. 힘을 추구한 나머지 다른 차원에 있는 아카식 레코드의 편린을 소환해 버렸지. 그리고 동시에 외신이 이 세계를 인식해 버리고 만 게야. 그래. 나와 파르메시오가 끝없이 안고 가야 할 죄악이었지."

낯익은 초원이 보였다.

마왕성이 있던 그곳의 허공이 마치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마나가 죽어 가고 있었다.

단말마를 남기며 세상이 일그러지고, 그곳에 천천히 마왕성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알았다.

"마왕과 마왕성, 이 아카식 레코드는 원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들어왔기 때문에 망가진 거군요."

"맞다. 가장 완벽하게 세상을 수호해야 할 아카식 레코드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어둠의 마나에 잠식되어 비틀린 시공간에서 엉망진창으로 구현된 거야."

거대한 우주가 움직였다.

저번에 알바트론이 보여 줬던 우주의 시작과 끝.

그 거대한 흐름이 초원에 집중되더니 순식간에 건물 몇 개가 만들어 우주 전역에 뿌려졌다.

"외신이 이 세계에 관심을 둔 순간 나머지 아카식 레코드의 입구들도 이 차원의 시공간에 뿌려졌다.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개념은 들어도 잘 모르겠어요."

"우주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라고르가 아카식 레코드를 부른 순간 우리의 차원은 다른 차원으로 변모한 게지. 이걸 평행차원이라고 한다."

"평행차원이요?"

"외신이 없던 세계에서, 외신이 우릴 노리는 세계로 바뀐 게다. 그 순간 모든 역사가 바뀐 거라 생각하면 된다. 이전엔 아카식 레코드가 없던 과거였다면, 지금은 아카식 레코드가 과거부터 존재하게 된 거지."

시간, 차원... 이해가 어려운 얘기지만 알바트론의 마법 덕분에 머릿속에 강제로 개념이 주입되며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전의 세계에서는 잊혀졌을 수많은 영웅들이, 이 세계에서는 지식을 남기게 된 거다. 외신에 대항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이전 세계의 나는 그냥 9써클 마법사로 기록이 남았을 뿐, 이렇게 너와 대화할 수 없었겠지. 그건 이들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여행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아는 제이슨 씨의 수련 장면을 비롯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

그들은 마법을 쓰기도 했고 검을 휘두르기도 했으며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행위들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지식이 저 문장들이었다.

"그럼 라고르는 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죠?"

"그는 저주를 받았다."

화면이 다시 바뀐다.

180 후반의 키를 가진 젊은 청년이었다.

화려한 금발이 어깨까지 찰랑거렸으며, 오만함이라는 단어가 오로지 그의 모습을 위해 조각된 듯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방 천지를 내려다보는 듯했고, 넓게 편 어깨와 자신만만한 걸음걸이 등은 단 한 번의 실패도 경험해 본 적 없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책의 삽화를 통해 낯익은 사람이었다.

라고르 제르툴 스테알리오스.

제르툴 왕국을 제르툴 제국으로 만들어 낸 초대 건국 황제.

그런 그의 뒤로 우주가 있었다.

절대적인 허무와 공허.

그렇게 이야기할 만한 거대한 힘이 라고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외신.

티아는 그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주의하라고 했었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저 저곳에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게 무엇인지 볼 수는 없었다.

단지 녀석이 라고르에게 엄청난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

마치 사람이 자신을 소환한 개미를 보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맹목적인 호기심, 고독, 쓸쓸함, 비참함, 허무함, 기쁨, 흥분, 설렘, 짜증, 비애....

수많은 감정들의 폭포가 내 영혼을 완전히 잠식하는 것만 같다.

[홀리지 말거라.]

날 구한 건 어느새 날아와 내 목덜미를 부리로 잡고 끌어낸 파르메시오 어르신이었다.

까만 부리가 문 목의 통증이 내 정신을 다시금 일깨운다.

허억...!

뭔가 턱 막혔던 숨이 단숨에 터지는 느낌이다.

내 몸은 영혼의 상태인 만큼 숨을 쉬거나 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런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이라니.

그 어둠 속의 시선을 받으며 라고르는 점차 괴이해졌다.

눈이 붉게 충혈되었으며 몸집이 비대해졌지만 허리는 반대로 구부정해졌다.

표정은 오만하고 광포하다기보단 히스테리컬해지고 겁쟁이가 되었으며, 잘생겼던 외모는 온데간데없는 비겁자가 되어 있었다.

머리는 푸석푸석한 누런색이 되었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치며 발악하고 피를 토했다.

"외신은 자신을 불러낸 라고르에게 관심을 가졌다. 좌표가 찍힌 거야. 이제 라고르의 삶은 죽음조차 외신의 허락이 필요해지지. 우주의 삶과 고락을 함께하는 불로불사가 된 거야."

불로불사.

일반인이 가졌다면 절대적 권능이자 축복이라고 불릴 만한 능력이지만 저런 상태여서야.

알바트론의 말처럼 저주를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다른 아카식 레코드를 제국이 수집한다는 얘기는요?"

"아까 이야기했듯 아카식 레코드는 다른 차원에서 외신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시간과 공간, 사람의 지식을 집대성하기 위한 거야. 그런데 라고르는 지금 당장 이 상황을 해결하고 안주하길 원해. 그리고 외신은 라고르를 계속 지켜보고 있지."

허공에 완벽할 정도의 아름다운 정경들이 펼쳐졌다.

희귀한 동식물들이 가득한 정원.

구름조차 내려다볼 정도로 높게 솟은 봉우리 위에 지어진 초가집.

허공을 아름답게 흘러 다니는 부유섬까지.

그 아름다운 정경이 비틀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공간들을 짓눌렀다.

정원은 순식간에 수천 년의 세월을 맞아 풍화되었고 봉우리는 지하 깊숙한 곳까지 찌그러졌으며 부유섬은 산산조각 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든 곳이 아카식 레코드였고, 그 모든 곳이 외신에 의해 붕괴된 것이다.

끔찍하군.

"라고르 황제는 왜 그렇게 힘에 집착하는 거죠?"

"처음의 이유는 달랐겠으나 지금은 오로지 죽기 위해서."

내 질문에 알바트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외신으로부터 벗어나 죽고 싶어 하지."

나는 어쩐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가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적에 불과한 라고르를 동정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특임대는 어떻게 마기를 쓰는 걸까요?"

"라고르가 망가뜨린 아카식 레코드의 기운을 쓰는 거다. 그것이 마기인지도 모른 채 사용하는 것에 가깝지."

거기까지 들었을 때 책장을 뛰쳐나왔던 문장들이 서서히 옅어지며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책들 역시도 책꽂이를 향해 다시 날아가 제자리를 찾는다.

마치 내게 허락된 지식은 여기까지라는 듯이.

하긴.

나도 다른 아카식 레코드 같은 이야기를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지금 이야기를 위해 머릿속에 새겨진 개념들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어야겠지.

그렇게 책들이 모두 돌아가고, 우리의 눈앞엔 세 권의 책만이 남았다.

그 책들은 마법적인 힘을 잃은 채 나와 파르메시오의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가 또다시 세 권의 책을 네게 남겼군. 라워드. 이걸 가지고 가서 다시 익혀라. 그럼 전승자로서 네 업은 다시 자연스럽게 흐를 거다."

왜일까.

알바트론의 말에서 뭔가 아련한 감정이 느껴졌다.

마치 그와 내가 만날 수 있는 게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자 알바트론이 미소 지었다.

"네 예상이 맞다.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야."

"어째서죠?"

"애초에 시공간을 거스른 만남이었어. 네 영혼이 자격을 얻은 것처럼 내게 부여된 임무와 자격은 여기까지란 거지."

[자격이라.]

그 말에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아 있던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영혼을 통해 이곳에 온 것도 임무와 자격이 있단 말인가?]

"아카식 레코드가 어떤 미래를 읽었는지는 몰라. 그래도 네 말처럼 무슨 필요가 있기 때문에 널 이곳에 허락했을 거다."

"알바트론... 스승님."

나는 급히 알바트론을 불렀다.

아카식 레코드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를 종종 밖으로 추방했다.

나는 꼭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고마웠습니다."

"끌끌. 스승이라. 그거 알아? 네가 내 첫 제자다."

"아...."

그렇구나.

괴성은 말년에 제국과 싸우고 홀로 전쟁을 치르느라 어떤 제자도 들이지 않았지.

그의 인자한 눈빛이 날 향했다가 다시 파르메시오에게로 향했다.

"이봐, 보라돌이."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군.]

"요샌 입술 시퍼러죽죽 하게 칠하진 않는 모양이네. 늙으니까 그게 쪽팔리다는 걸 알게 된 거냐?"

파르메시오 어르신은 부리를 앙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영상에서 봤던 어르신, 보라색 입술을 하고 계셨지.

정말로 쪽팔려서 아무 말 안 하시는 건가?

"네가 나보다 미래에 있으니까 물어보자. 너랑 나랑 지독하게 싸웠지. 나는 널 이겼냐?"

[217전 217무였다.]

"지독하기는."

우와.

파르메시오 어르신, 역사서에 나오는 대마법사랑 비등비등한 실력이었다고?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되지 않아 얕봤는데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알바트론은 낄낄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네게 죽었나?"

그렇게 질문한 그는 입매만 웃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이 파르메시오를 향한다.

[...자넬 죽인 건 라고르와 제국황실의 기사단, 그리고 제국의 마도학회였다.]

"그렇군. 하긴. 자넨 날 죽일 만한 깜냥이 못 돼."

그렇게 킬킬거리던 알바트론이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몰랐는데 그의 몸은 미세하게 늙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몸엔 흉터와 상처가 가득했고, 종래에는 그의 오른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생겼다.

이제는 완전히 기운이 빠진 듯한 모습이 되었을 때.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라고르와 기사단. 그리고 마도학회까지. 바로 지금이군."

"그, 그럼 알바트론 설마...?"

"연민은 됐다.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까. 죽기 전에 제자도 남겼고 말이다. 어이, 보라돌이. 내 제자다. 영혼을 뽑으며 내 기술의 정수가 들어갔으니 5써클 정도는 익힐 거다. 잘 부탁한다."

[야박하기는. 내가 영혼을 한 번 더 교정 봤으니 7써클은 갈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잘난 척하기는."

그렇게 그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잠깐, 잠...!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4화

<84화 - 못났던 주인공 세력이 너무 강해짐(5)>

나는 어느새 던전의 중심에 누워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몸 위로 넝쿨들이 자라 뒤덮고 있었다.

그것들을 끊어 내며 몸을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 두 어르신이 일어나 다가왔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죠?"

"15분 정도? 선배 말로는 영혼이 몸에 고통 없이 안착하는 과정이 필요해 일부러 재웠다는군."

그래서인가.

알바트론을 처음 만났을 때보단 고통이 덜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몸이 훨씬 가뿐했다.

처음 균형을 맞추고 몸을 움직였던 것처럼 가뿐했다.

"챙겨라."

그때 탈리오 영감이 세 권의 책을 마나를 이용해 넘겨주었다.

<엔틸초절상승고무술-기예박람>, <북해는 살아 있다>, <마나가공공정정석>.

총 세 권의 책이었는데 모든 책의 제목이 심상찮았다.

지혜의 관이 내게 준 선물들이었다.

나는 책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어쩐지 알바트론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미 죽은 자다."

"알고 있어요.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말처럼 알바트론은 아카식 레코드에 남아 있긴 했지만 원래 100년 전에 이미 죽었을 사람이었다.

지금 와서 감상에 빠지기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런 나를 탈리오 영감이 지팡이로 툭툭 치며 재촉했다.

"자자, 얼른 돌아가자. 네가 누워 있는 동안 스콰렛 영감탱이에게 연락이 왔다. 크라피 놈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생겼다고 하더라. 그리고 네 동생도 영지에 와 있다고 하는군."

로네와 스콰렛, 그리고 크라피까지.

아무래도 새로운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이 세 권의 책은 각각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 자리를 완전히 털고 일어났다.

* * *

"자네, 현자더군?"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스콰렛 공작, 헬피온 공작령에서 떠도는 이상한 얘기를 듣고 이러는 건가?

그러나 공작의 표정은 날 놀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에 더 가까웠지.

"하긴. 현자가 아니라면 저 곰탱이의 편지를 무술 비급으로 만들 수 없었겠지. 우리 영지에서 보여 주었던 수많은 활약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제가 무슨 활약을...."

"무엇보다 돌팔이 마법사보다 더 대단한 논문을 썼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군."

논문... 아.

나는 그제야 트팔로에 가기 전 탈리오 영감님께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제국마도학회에 어설프게 인용되었던 내 논문을 제대로 써서 기고해 달라 했었지.

설마 그 논문이 벌써 완성이 되었나?

시간은 기껏해야 1~2주 정도밖에 안 흘렀는데.

"돌팔이 놈도 놀라서 얘기하는 거 보면 제법 대단한 이론인 모양이더군. 마법에도 재능이 있었나?"

아뇨, 공작님과 한참 개자식 때려잡을 땐 없었는데요, 생겼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너무 재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슬쩍 웃고 말았다.

"돌팔이가 네 논문을 도와줬다지? 덕분에 크라피 녀석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생겼어. 이번 제국마도학회의 학술발표가 어디서 이루어지는지 아느냐?"

"어디서요?"

"델피 아카데미일세. 제국에선 사미오슈 가문의 장자인 데온 크라피가 올 거야."

데온 크라피.

드디어 네놈에게 내가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가 눈앞까지 도착했구나.

"학술발표에서 제국이 하는 건...."

"데온 녀석이 이번에 비공인 4써클에 올랐다고 하네. 공인 4써클을 인정받기 위해 오겠지."

"우리는 뭘 할 수 있죠?"

"제명과 출회 조치."

스콰렛 공작은 음모를 꾸미는 악당마냥 한쪽 입매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15년 전, 내가 학장을 할 때 마도학술대회가 몇 번 있었지. 아직도 기억나는군. 어떤 겁 없는 녀석이 다른 논문을 표절했는데 하필 그 논문이 다른 마탑의 원로였어. 그리고 그 학회에 마침 그 원로가 참석한 참이었지."

"제명과 출회의 차이는 뭐죠?"

"제명은 단순히 학회의 명부에서 이름을 제외하는 거지. 그런데 출회는 강력한 징계로 현존하는 모든 학회에서 이 학생의 이름을 받아 주지 말라고 선언하는 걸세."

와.

그거 듣기만 해도 무섭다.

"공인 쓰레기가 되는 거네요."

"물론 후작의 아들이니 그런 걸로 타격을 받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녀석을 긁어 댄다면 녀석이 분명 뭔가를 하겠지."

그렇지.

하지만 고작 그런 결말을 내가 복수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데온 크라피가 내 인생을 망가뜨렸던 것처럼, 사회와 삶에서 데온 크라피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계략을 진행해 볼 예정이다.

모략과 음모가 네 가문만의 특기인 줄 알았지?

오산이었단 걸 느끼게 해 주마.

"그럼 이제 어떻게 녀석을 출회시킬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할 텐데...."

"제게 계획이 있어요."

나는 내 계획을 스콰렛 공작에게 가볍게 전달했고, 공작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그럼 그 일은 자네에게 전적으로 맡김세."

일단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이게 제대로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탈리오 영감님과 파르메시오 어르신한테 확인해 봐야지.

"지젤 선배는 어떻게 지내요?"

나는 바바라를 구출해 오자마자 스콰렛 공작님을 통해 지젤 선배에게 연락을 취했다.

나도 내가 다스리는 영지가 생겼겠다, 지젤 선배와 바바라를 한곳에 모아 놓고 공방을 차리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제안한 거지.

그런데 지젤 선배는 거절했다.

자신이 맞서 싸우기로 한 곳은 스콰렛 공작령이라고.

대신 바바라를 파견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지.

"바바라라는 아가씨의 의욕이 대단하더군. 처음엔 지젤과 조금 기 싸움을 하는 듯하더니 지금은 서로 뚝딱뚝딱 뭔가를 만드는 모양이야."

"기 싸움을 해요? 왜지.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그러자 스콰렛 공작님이 한심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쯧쯧."

"왜 혀를 차시죠?"

"어쩌자고 헬피온 녀석은 자네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를 연애편지 대필 작가로 임명했을꼬."

왜 그런 한심한 표정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잘 모르겠거든요.

지금은 그것도 아카식 레코드의 운명이었거니 싶다.

아, 맞다.

나는 품에서 <마나가공공정정석> 이라는 이름의 책을 꺼냈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나온 이후 좀 읽어 봤지만 내 수준으론 이해는커녕 읽는 것조차 어려운 책이더라고.

하지만 바바라와 지젤 선배가 같이 연구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이 책을 건네주세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누구에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야 당연히 두 사람에게죠."

"책이 한 권 아니냐. 그럼 둘 중 누구에게 먼저 줄 건지 골라야 하지 않겠느냐."

"어, 그야 마나를 가공하는 공정의 정석이니까 바바라겠죠? 마도공학의 정수를 가진 팔세우스 가문의 장녀잖아요."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왜 스콰렛 영감님의 표정이 구겨지지.

"쯧, 역시 네놈은 마음에 안 들어."

허허허.

아마 딸자식을 헬피온 공작님에게 딸자식을 뺏긴 아버지의 마음이라 그런 거겠지.

그렇게 이야기를 정리하고 로네를 만나러 가려다 문득 영감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서 그럴까.

어쩐지 그의 표정에 옅게 어려 있는 수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테론 도련님 말인데요."

"에잉."

공작님은 테론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혀를 내두르며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공작의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따로 소식을 들은 게 있습니까?"

"없네. 특임대가 제국의 외곽도시인 벤후트까지는 데려갔다는 것 같은데, 벤후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선 아는 사람이 없더군."

"제국 남서부 쪽의 도시군요."

"그래. 수도로 가는 것도 아니고 남부라. 도대체 녀석은 뭘 하려고 하는지."

"괜찮으실 겁니다."

내 위로에 공작은 입을 다물고 복잡한 감정이 드러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 턱을 다물고 있던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고맙네. 미안하고."

"아뇨, 뭘요."

"마음이 좀 복잡하군. 미안한데 먼저 나가 주겠나? 나는 좀 생각을 정리하고 일어나겠네."

아무렴요.

나는 천천히 자리를 나섰다.

내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접견실의 방문을 닫을 때, 공작님의 손이 테이블 위에 갖춰 둔 와인병으로 움직였다.

지젤 선배의 편지를 보니 최근 술이 늘으셨다지.

딸은 헬피온으로 이제 시집을 오게 될 것이고, 그나마 영지를 이어야 했을 아들은....

나는 방금 본 풍경을 모른 척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 * *

"오빠!"

으으.

트팔로에서 샤론한테 시달렸던 탓인지 오빠 소리에 저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빠?"

"아, 아냐. 잠깐 트라우마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샤론 녀석, 마지막에 날 죽이러 올 거니까 기다리라고 했지.

그 섬뜩한 살인 예고에서 벗어나려면 얼른 강해져서 모에르 때처럼 처리해야 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몇 개월 만에 이렇게 동생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좀 풀어지는 듯했다.

"상행은 성공이었다며?"

"응. 북해 쪽에서 큰 건수를 잘 해결했거든. 투자금으로 받았던 10만 골드는 공작님에게 이미 반환했고, 그러고도 이만큼 돈이 남았어."

로네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2만은 당연히 아니겠고, 20만?"

"후후."

역시 로네야.

처음 만나 빚을 정리했을 때도 느꼈지만 장사 수완 하나는 대단하다니까.

"그런데 오빠. 빡치는 거 하나 들려줄까?"

"뭐. 장사하다가 뭔 일 있었어?"

"우리 빚 있잖아?"

있었지.

이제는 다 사라져 버렸을 테지만.

"우리 빚 30만 됐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분명 우리에게 남은 빚은 1,000골드 정도밖에 없었고, 그 정도의 빚이라면 금방 청산해서 처리할 수 있었을 거 아냐.

그런데 갑자기 30만?

그거 훔볼트 영감님의 앨릭서 비용이랑 비슷한데.

설마 훔볼트 영감님, 그새 도착하셔서 로네에게 빚을 청구했나?

방금 전까지도 싱글벙글하던 로네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오빠는 알잖아. 우리가 왜 빚을 얻게 되었는지."

"그야 사미오슈 크라피 후작 때문이잖아. 귀족을 모욕했다는 핑계로 주변의 모든 돈줄을 틀어막고 결국 사업을 망하게 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후작이 의뢰한 사람이 있어. 오빤 겔도브 상단이라고 들어 봤어?"

나도 이 직업을 갖기 전엔 고르뎀 상단의 맏아들로서 상단 경영과 운영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니 전 세계를 아우르는 겔도브 상단을 모를 리 없었지.

겔도브 상단.

과장을 조금 보태 전 세계의 상권을 다스린다고 하는 초거대 상단이다.

그러나 겔도브 상단은 그 이름이나 양지의 이미지보다 별명과 뒷세계의 이미지가 훨씬 더 유명했다.

겔도브 상단은 전 세계의 도둑 길드나 암살 길드와 연결되어 돈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지저분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살인, 인신매매, 장기밀매.

돈을 갚지 않으면 피도 눈물도 없이 상대의 핏방울 하나까지 받아 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흡혈 거머리일 정도니까.

"그 거머리 새X들한테 연락이 왔어. 우리가 갚은 1만 골드는 원금이고 이자가 불어났대. 6년 동안 30만 골드까지."

"그게 무슨 개소리람. 아무리 이자가 불어도 원금의 30배까지 불어난다고?"

"그래서 이자 계산 방식부터 산정 기준까지 다 달라고 했지."

그렇게 이야기한 로네의 표정이 묘했다.

"빈틈이 없었구나."

"완벽하더라구. 아버지 대의 상단과 어떤 거래를 했고, 어떻게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서 어떤 식으로 손실을 봤는지. 정말 있는 그대로 적혀 있었어."

"조작이겠지?"

"물론 조작이겠지. 문제는 어설픈 조작이 아니라 미래의 거상인 내가 봐도 조작된 흔적을 모를 만큼."

혼자서 밑바닥부터 상단을 꾸려 간 로네의 실력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그럼에도 로네가 이 정도까지 말한다면....

"오빠가 한 번 겔도브 상단주를 만나 봐."

"내가?"

"내가 만나는 것보단 더 효과가 있겠지. 그쪽에서는 어린 계집이 상단주라고 무시하거든."

그렇단 말이지.

내 동생을 무시하고 괄시한다니, 그건 확실히 기분이 나빴다.

"알았어. 뒷세계들이랑 연결되어 있으니 셰리나 하녀장님에게 부탁하면 연결해 주시겠지."

"아, 그리고 바바라라는 언니를 구해 왔고, 그 사람이 팔세우스 가문의 장녀라며? 그럼 팔세우스 가문도 데려올 거지?"

로네는 영지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의 소문을 수집한 모양이었다.

"어, 그럴 생각이야. 제국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꽤 필요하거든."

"그럼 오빤 겔도브 상단이랑 엮일 수밖에 없겠다. 팔세우스 가문이 망한 거, 그것도 역시 겔도브 상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여서 그런 거거든.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데려와도 별 소득이 없을 거야."

하긴.

바바라가 테러했던 곳이 크라피 후작가였으니 비슷한 경로로 공격받았겠구나.

"거기 어마 무시해."

"뭐가?"

"빚."

빚이라.

하긴, 우리 같은 중소 상단을 망하게 하려고 1만 골드의 빚을 준비했던 놈들이다.

그러니 라그나 왕국을 대표하는 마도공방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엄청난 짓을 했을 수 있지.

한 100만... 아니, 1,000만 골드 정도의 빚이라도 지웠으려나.

고급 마수 재료들이 창고에 수북이 쌓여 있는 헬피온 공작령도 300만 골드를 쌓아 놓은 게 고작이니.

엄청나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로네가 입을 열었다.

"1억 7천만."

"응?"

"팔세우스 공방이 겔도브 상단에게 진 빚이 1억 7천만이래."

....

팔세우스 가문을 구하는 건 포기할까?

그들이 노예로 팔렸을 때 사람들을 사 오는 게 훨씬 더 빠른 방법이 아닐까?

의욕을 갖고 도와주기를 결심하기에는 너무 많은 빚이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5화

<85화 - 못났던 주인공 세력이 너무 강해짐(6)>

"진 씨. 제가 만약 한이 엔틸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게 도와주면 말이죠."

"만약이 아니라 그렇게 해 주기로 한 거 아니었나?"

"아니, 해 주긴 할 건데, 일단 들어 봐요. 그러면 엔틸 제국은 저한테 얼마 정도의 보상을 해 줄 수 있나요?"

"흠. 값을 매기기 힘들군."

진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몸을 움직였다.

뭐라더라, 늠름한 맨티스의 자태를 흉내 내는 기예라고 했던가?

그런데 왜 사마귀과의 벌레 몬스터 자태를 흉내 내는 거지.

이왕 저렇게 손가락을 묘한 방식으로 칼날처럼 만들 거면 날카로운 뿔을 가진 들소나, 사슴 같은 걸 흉내 내면 안 되나?

"그러니까 대충이라도 이야기해 주면요."

"원하는 값을 먼저 제시해 보게."

"1억 7천만."

내 말에 뚝, 하고 맨티스가 제자리에서 멈췄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매서운 눈빛이 날 꿰뚫을 기세로 날아왔다.

"굉장히 속물적인 사람이었군."

"가능한가요?"

"그 정도 금액이면 엔틸 제국을 10년 동안 운용할 수 있을 자금이네."

10년 단위의 자금이라니.

불가능하단 얘기네.

어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진 씨."

"또 쓸데없는 말을 하면 쫓아내겠네."

"그럼 이 책의 가격은 얼마일까요?"

나는 진에게 보여 주려고 가져온 <엔틸초절상승고무술-기예박람>을 꺼내 들었다.

처음엔 무슨 책 따위의 가격을 물어보느냐는 듯 퉁명스럽던 진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 간다.

"이 책... 아니, 이 비급서는 도대체...."

"보시는 대로의 책이죠. 어때요. 이 정도면 1억의 가치가 있을까요?"

진 씨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듯 허덕이며 책을 천천히 받아 들었다.

나는 그가 책을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어차피 나중이 되면 그에게 줄 책인데 고작 며칠 일찍 보여 준다고 책이 닳겠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천천히 넘기더니 굉장히 드문 표정 변화를 보여 주었다.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거리는가 하면 허공으로 짙은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안면 근육을 씰룩거리며 뭔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아마 엔틸 제국의 고어인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진 씨의 반응을 보아하니 1억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가치를 지닌 책임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책을 읽어 보긴 했으니 진 씨의 저 반응이 이해가 가거든.

<엔틸초절상승고무술-기예박람>.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뒤.

수많은 장수와 무술가, 그리고 대종사라고 불릴 사람들이 고대의 상승 무술들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그들은 수많은 무술의 약점을 나열한 뒤, 그것을 파훼하기 위한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상승 고무술보다도 더욱 고절한 개념인 '초절상승 고무술'이라는 무예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완벽한 성공은 아니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정수로 가득한 최고의 무술 하나만을 만들려고 했으나, '기예박람'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의 17개의 무술을 정리하는 데에 그치고 마니까.

하지만 수백 개의 무술의 정수를 합쳐 놓은 17개의 기예는 그 존재만으로 지금 시대의 무인들에겐 사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참 책을 탐닉하던 진 씨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많은 것들이 깃들어 있는지, 그의 입김이 좀 더 오랫동안 허공을 맴도는 것 같았다.

"그렇군.... 이 자세와 움직임은 타격이 아니라 유술이었군. 왜 나는 이런 걸 놓치고 있었던가."

진의 손과 발이 곡선을, 그리고 종래에는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예박람에서 태극이라고 불리는 움직임이었다.

태극은 참 신기한 모양이다.

상하좌우 어디를 반으로 가르더라도 음과 양, 양쪽이 꼭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과 방어를 모조리 할 수 있는 완벽한 모양이라고.

그렇게 태극을 그리던 그의 손과 발이 묘하게 한 발로 앉은 자세를 취했다.

마치 온몸을 꼬을 수 있을 만큼 꼬은 상태에서 사방 천지를 향해 금방이라도 뻗어 나갈 것만 같은 자세.

엔틸 제국의 신수인 용을 형상화한 동작이었다.

그래, 이왕 동물을 따라 하려면 맨티스나 샤벨 타이거 같은 놈들이 아니라 저렇게 화끈하게 용, 또는 드래곤을 따라 하는 게 제일 강한 게 맞지.

꼬여 있던 몸이 묘한 각도로 펼쳐지더니 이내 강력한 힘을 가진 주먹이 되었다.

마침내 진 씨가 주먹을 모두 뻗었을 때, 주변 공기가 훙, 하고 진동했다.

어디를 때려서 나는 진동이 아니라, 그의 존재감이 세상을 울리는 것에 가까웠다.

"허허... 내가, 내가 화경을 넘어 현경에 닿을 줄이야."

"...기예의 깨달음은 굉장히 빠르군요."

무용이라고 해야 하나?

검무가 있으니 권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을 10분 정도 춘 것이 고작인데 그걸로 깨달음을 얻다니.

중급 소드마스터로 올라서는 데 몇 시간이 걸렸던 아펠 집사장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일부러 멈췄네."

응? 뭐라고?!

"네? 깨달음이 그렇게 쉽게 오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해요! 미쳤어요?"

내가 다급히 그렇게 외쳤지만 진 씨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어차피 책을 읽고 쉽게 얻은 깨달음이야. 모든 깨달음의 편린은 이 책에 있어. 천천히 곱씹으며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체하기 마련이지. 무엇보다도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네?"

"고맙네."

어, 잠깐.

그 지금 하는 거 절이죠?

엔틸 제국에서 극상의 예의를 취할 때 한다는 그....

우와, 이거 당하는 입장에서 엄청 부담스럽네.

"잠깐, 잠깐만요, 이게 무슨...."

"귀한 자료였소. 이런 비급을 거리낌 없이 맡기다니 은혜에 감복하였소. 이 진 모, 제국에서의 지위를 회복하면 언제라도 이곳으로 돌아와 살신성인하며 평생을 보은하겠소."

"어, 저기, 그럴 필요는...."

"1억 7천."

진 씨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던 내 몸이 움찔하고 멈췄다.

"그 정도의 가치는 충분히 차고도 남겠소. 무인들이 열광할 테니."

그렇단 말이지.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고 원래 이 책을 가져왔던 목적을 떠올렸다.

"진 씨, 혹시 엔틸 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은 되십니까?"

"연락이라."

"그 정도의 무예를 갖고 전사들이나 전사 후보생들 등을 끌어모은다면 얼마나 세력을 모을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진 씨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진지한 표정을 보니 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물경 1, 2만은 쉽게 채울 수 있을 것일세."

"제국을 수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렇게 해 줄 수 있나요? 저희는 영지를 채울 영지민과 함께 영지를 이끌고 제국과 싸울 전사도 필요해요. 그들을 모으고 교육해 주세요."

"알았네."

진 씨는 엔틸 제국에서 인사를 할 때 취한다던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어색하게 왼손바닥에 오른 주먹을 대고 답례했다.

이걸로 용병들이 빠진 영지의 군대 양성을 위한 계획은 대충 준비된 듯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그것도 물어봐야 하는데.

"진 씨."

나는 책을 들고 수련을 더 이어 가려던 그를 불렀다.

"혹시 겔도브 상단이라고 아시나요?"

"거머리들 말인가?"

역시....

"겔도브 상단과 엔틸 제국은 어떤 관계죠?"

"민준에게 후원하는 곳으로 알고 있네. 결국 제국의 돈이겠지."

"만약 제가 겔도브 상단주랑 담판을 지으면 한 군의 복권에 도움이 될까요?"

"당연하네."

진 씨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자금은 오로지 무력밖에 없는 민준의 뒷배가 되었지."

그래.

나는 다시 훈련에 들어가려는 진 씨에게 작별인사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하녀에게 로네를 불러 달라고 전했다.

집무실에 도착해 잠시 서류 처리를 하고 있자 곧 로네가 도착했다.

"불렀어?"

"겔도브 상단주를 만나야겠어."

"알겠어."

"단, 여기서 말고. 한 달 뒤, 델피 아카데미의 제국마도학회 학술대회. 그곳으로 찾아오라고 해."

로네가 큰 눈을 끔뻑거렸다.

"굳이?"

"제국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듯한 녀석이잖아. 가급적이면 완전히 준비가 됐을 때 만나고 싶거든."

내 말을 들은 로네가 고래를 끄덕거리면서 물었다.

"준비를 하는 건 좋지. 그런데 한 달 동안 무슨 준비를 하려고?"

준비라.

할 게 많지.

큰 물고기를 낚기 위해선 튼튼한 낚싯대와 거대한 뜰채를 준비해 둬야 하지 않겠어?

만약 겔도브가 제국 특임대처럼 황제의 손발이라면 이참에 아카식 레코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위해 잘라 낼 것이고.

만약 그저 돈을 보고 움직이는 자라면?

그렇다면 진을 통해 확인했던 것처럼 돈이 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거래를 해야지.

거래라.

상단이 망한 이후 처음으로 나서는 상행이 될 것 같다.

* * *

나는 이러한 모든 계획을 가지고 파르메시오 어르신과 탈리오 영감님, 그리고 제이미 씨를 찾았다.

"어...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나 같은 년이 정말로 논문을 써야 할까?"

"제이미 씨가 우리 계획의 핵심이거든요."

"그러니까 나보고 장기말이 되라는 거 아냐. 탐탁지 않은데."

"6써클의 은혜를 저버릴 생각이신가요?"

"솔직히 말해서 그게 네 은혜는 아니잖아. 왜 생색이야."

내 말에 제이미 씨는 힐끗 파르메시오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9써클의 마법사이자 마법진의 주인이라는 걸 알고 난 뒤부터 계속 저랬다.

존경과 경외, 어려움과 껄끄러움.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인 표정으로 힐끗힐끗하는 걸 반복한다.

그 어린아이 같은 표정에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인자하게 대답했다.

"용병들은 예로부터 비공인 마법사로 남는 경우가 많았지."

"야인으로 떠돌면서 논문 공부할 시간이 어딨겠어요. 그런 게 싫어서 마탑을 안 들어가는 건데."

"그래도 공인으로 마법 자격을 획득하면 말년이 편해. 깨달음에 대해 제자를 받는 것도 좋고. 공인은 지금 내가 아니라 미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일세."

"전 제자 받을 생각도, 애를 낳을 생각도, 취직할 생각도 없는데요...."

파르메시오에게 말대답하는 꼴에 탈리오가 호통을 쳤다.

"이래서 요즘 애들은 안 된다니까! 몇 년 살아 보면 바뀔 생각 갖고, 자기는 아니라고 빡빡 우겨 대! 애송아, 나도 그랬어. 안 그럴 거 같아? 사람 나이 먹으면 다 바뀌어!"

"제 나이도... 아뇨, 네...."

제이미 씨는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두 전설적인 마법사의 시선에 쪼그라들었다.

하하하.

저 당당한 제이미 씨가 저런 반응이라니, 재밌네.

하지만 내 말 중 잘못된 건 없거든.

제이미 씨는 정말로 우리의 키 카드 중 한 명이다.

데온 크라피 녀석은 이번에 공인 4써클 증명을 위해 델피 아카데미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고 마법사들에게 공증을 받는다.

마도학회에 있는 공인 마법사들이 그 심사를 맡게 되는 거지.

우리의 계획은 이렇다.

나와 제이미 씨, 그리고 탈리오 영감과 파르메시오 어르신까지.

네 명의 마법사가 이번에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데온 크라피 녀석의 논문의 핵심 내용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이미 녀석의 논문은 델피 아카데미에 도착해 있었고, 우리에겐 그 아카데미의 전 학장이었던 공작님이 함께하니까.

물론 여기는 무려 8써클 마탑주와 9써클 제국 황실 출신 마법사가 붙어 있으니 훨씬 고퀄리티의 논문이 나오리라.

그럼 어떻게 될까?

무려 다섯 명이 비슷한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는데, 다른 네 명은 모두 가상의 인물로 각주처리를 해 둔 상태.

그럼 그런 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한 명은?

거기서 바로 표절이나 일삼는 무례한 마법사가 되는 거지.

물론 이 계획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선 몇 가지 스텝이 더 필요하다.

하나는 이제 막 6써클이 된 제이미 씨가 이론적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속성으로나마 마법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

그걸 위해 탈리오 영감님이 필요한 거지.

이 제안을 들은 탈리오 영감님은 약간 신나신 모양이었다.

'제자라니, 순수한 제자인데 6써클, 중고신인.... 크으, 간만에 취한다.'

같은 소리를 끝없이 중얼거리며 흥이 돋은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나 역시 마법 공부를 해야 한다.

무려 4써클 수준의 마법사가 되어야 하거든.

까딱 잘못하다간 4써클 수준의 논문은 발표했지만 정작 쓸 수 있는 마법이 한두 개밖에 안 되는 쭉정이인 걸 들키고 말 거다.

그걸 도와주기 위한 사람이 파르메시오 어르신이지.

"라이트 마법을 한 번에 구현했다지?"

"솔직히 아직도 어떤 식으로 뭘 구현했는지 모르겠어요. 개론서를 보긴 했는데 이해도 못 했구요."

내 말에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알 만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했으니 그럴 게다. 아마 자연의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법은 모두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게야. 이번에 배를 날려 보낸 것만 하더라도 이미 6써클은 넘어야 할 수준이었으니."

"그럼 4써클 마법을 다 쓸 수 있을까요?"

"완전히 그렇지만은 않다. 마법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 외에 자연 상태를 변화시키는 변환계, 환상을 구현하는 환상계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니. 자연계만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겠지."

"그걸 공략하는 거군요."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앞으로 한 달, 자네는 자연계 마법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쓸 수 있게 만들어 주겠네."

어르신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셨고 그로부터 3주가 흘렀다.

출발을 하루 앞둔 저녁 어르신이 혀를 차며 내가 구현한 마법을 바라보았다.

"참.... 3주가 지나도 여전하군, 자넨."

"아하하, 하하."

"구현할 수 있는 마법이 딱 세 가지밖에 없다니."

어찌 보면 정말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겠지.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나와 어르신의 시선이 교차되자 우리는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겠죠?"

"충분하기만 할까. 거기에 있는 마법사 놈들이 깜짝 놀랄 걸세. 제국의 종자들이 경악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6화

<86화 - 채무자와 채권자의 콜라보레이션(1)>

지금으로부터 10년 정도 전.

나는 이곳의 입구를 보며 꿈을 키웠다.

세계 최고의 인문학자가 되어 황실의 서기관이나 문관으로 취업하겠단 꿈이었지.

승진을 거듭해 작위도 받고, 나아가 황실의 재상 정도가 되면 그야말로 성공한 삶이라 생각했었지.

처음 3년 동안은 그 꿈대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데온 크라피를 만나면서 내 인생의 플랜이 꼬여 버린 거지.

학자를 꿈꿨던 나는 마검사가 되어 있고, 공작가의 참모장으로 백작위를 받았다.

황실의 재상으로 일하는 스콰렛 영감님과는 적당히 친한 관계가 된 것 같긴 한데, 덕분에 이리저리 꼬여서 제국의 특임대에게 노림을 받았지.

9써클 마법사 두 명을 스승으로 얻었고, 영지 하나도 얻은 대신 라그나 왕국에는 완전히 공적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수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이곳은 변함이 없었다.

"그대로네."

나는 천천히 입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길을 지나 중앙의 분수를 지나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세워진 건물들을 마주한다.

네 개의 탑이 사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하고, 네 탑을 잇는 수많은 통로와 건물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요람.

델피 아카데미.

네 개의 탑은 각각 문학, 역사, 철학, 마법을 상징하지.

나는 그중 문학과 역사를 배웠고.

그렇게 생각하면 참 우습다.

마법 학생들에게 핍박받는 삶이었는데, 오늘은 그들 앞에서 마법을 발표하기 위해 와 있으니.

그러고 보니 나 졸업 전 대학원으로 떠난 선배들은 지금쯤 박사 학위를 받았을까?

4학년 때부턴 워낙 도망만 다녔었으니 선배들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4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에 있던 시기와 헬피온 공작령의 시기까지 합하면 도합 10년이다.

석사였던 선배들은 박사, 나아가서 교수가 되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곳이군. 학문을 익히기엔 참 좋겠어."

"좋죠. 우리가 들어왔던 정문 쪽 말고 서문 쪽으로 나가면 상점가가 조성되어 있어요. 카페테리아도 많고 식료품도 다양하게 팔구요."

"쯧, 설마 그런 것 때문에 선배가 학문 얘길 했겠냐? 네놈도 마법사라면 공간의 마나부터 확인해 버릇해라."

탈리오 영감의 구박에 나는 기감을 개방해서 이곳의 마나 흐름을 살폈다.

그렇게 집중하니 델피 아카데미의 풍경이 새롭게 들어왔다.

마나가 굉장히 정순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알바트론이 보여 준 풍경보단 작았지만 고요한 마나의 흐름이 네 탑을 순환했다.

마치 거대한 힘이 네 탑의 중심에서 마나를 잡아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중심에 도서관이 있겠군."

"네."

"이 정도로 강력한 집중력이라면 아카식 레코드밖엔 없겠지."

아카식 레코드의 힘이란 건 정말 대단하구나.

하긴, 내가 이때까지 본 아카식 레코드는 이렇게 상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영혼만 접속하는 거였지.

마나를 볼 수 있게 되고 소드마스터가 되며 기감이 넓어져 비로소 아카식 레코드가 보이게 된 것이리라.

그런데 잠깐.

여기 마도 아카데미에는 그래도 5써클 정도의 마법사는 있지 않나?

그 사람들은 저렇게 거대한, 그리고 상쾌한 마나의 흐름을 못 느끼는 건가?

그들이 흐름을 느꼈다면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를 금방이라도 찾았을 텐데.

나는 혹시나 해서 탈리오 영감을 바라보았다.

"뭘 보느냐."

"영감님도 여기서 아카식 레코드가 느껴지세요?"

"흠...."

영감님은 버럭 화를 내며 자기를 무시하냐고 방방 뛰는 대신 양미간을 잔뜩 모은 채 도서관 쪽을 노려보았다.

"잘 모르겠다."

오, 이건 의외의 답변이네.

"그건 무슨 뜻이죠?"

"솔직히 네놈에게 여기 아카식 레코드가 있단 얘길 들었으니 이상하다고 생각이 드는 게지, 그게 아니었으면 난 이 흐름이 건물의 배치와 지형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여겼을 거다."

"후배의 말이 맞네. 여기에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는 걸 알기 위해선 이곳에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게야."

"말장난처럼 들리네요."

"우습게 들리지만 그게 맞네. 이런 정순한 마나는 세상에 자주 있거든. 우리는 그런 곳들을 명승지, 명당 등으로 부르지. 단지 그런 명당과 이곳의 차이라면 명당은 왜 마나가 그렇게 정순한지 알 수 없지만 여긴 이유를 안다는 것."

명당이라고 하면 사막 중심에 존재한다는 환상의 오아시스나, 북해 빙하 50m 밑에 존재한다는 불꽃 같은 걸 말하는 건가.

확실히 그건 미스테리하지.

하지만 그걸 다시 말하면....

"그런 명당들에 아카식 레코드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제국도 그런 곳들을 자주 탐색하곤 했지. 이미 알려진 곳들은 이미 거의 다 뒤져 봤을 거야. 모르는 곳을 찾는 것이 나을 게다."

"그럼 여기는요? 여긴 이미 잘 알려진 명당 아닌가요?"

"아까 저 녀석이 말했듯 일반인들은 이곳의 마나가 풍부한 까닭을 건물 배치와 마법진 지형 때문이라고 여길 거다. 건물의 존재가 정순한 마나의 이유를 만들어 줘서 오히려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가 감춰진 게지."

그런가.

그런 것치곤 아카데미에서 도시 전설처럼 아카식 레코드의 이야기는 떠돌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카데미의 정령이 있고, 그 정령이 인정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아카식 레코드라는 게 있다고.

아는 사람만 아는 소문이었긴 했지만 말이야.

아카식 레코드에 관한 건 생각할수록 복잡하기만 하네.

머리를 비우고 두 사람에게 물었다.

"아카식 레코드부터 들리시겠어요?"

"그래, 그러자. 선배만 냉큼 들어갔다 왔으니, 남겨졌던 나 같은 놈은 어디 궁금해서 참을 수 있어야지."

탈리오 영감님의 재촉에 나는 웃으며 두 사람을 도서관으로 안내했다.

* * *

델피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내가 떠날 때랑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1년 정도가 지났을 뿐 아닌가.

인문학을 배울 수 있는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가 이곳인 만큼 도서관의 규모 역시 엄청났다.

지상 7층.

어지간한 후작, 공작가의 저택만큼 으리으리한 건물이 네 개 탑의 중심에 위치했다.

너희들은 모두 이 도서관에서 지식을 쌓아라.

그런 메시지를 강력하게 던지는 배치지.

그 덕분인지 도서관 주변엔 수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직 어린 1학년 학생들부터 졸업을 앞둔 것 같은 청소년들에,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나도 저렇게 이곳을 다닐 때가 있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취를 느끼려던 차에 탈리오 영감님이 감상을 깨뜨렸다.

"가자니까 뭐하는 게냐! 왜 계속 멈ㅊ... 악! 선배, 때리지 좀 말라니까!"

"쯧, 늙을수록 여유가 생겨야 하는데 그 조급증은 멈출 기색이 없는가. 9써클은 그렇게 도달할 수 없다니까."

"허, 참, 선배 두고 보자고. 내가 이렇게 살아도 9써클이 될 수 있다고 증명할 터이니! 말했죠? 나 8써클 마스터야. 금방 문턱 넘어간다니까요?"

영감님들도 참.

그런데 그 모습이 싫지만은 않다.

뭐랄까, 이곳을 홀로 외롭게 떠돌던 때와는 정말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자자, 얼른 가자구요."

그래서 나는 감상을 완벽히 떨쳐 버리고 두 사람을 안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의 7층, 제일 구석진 책장 근처에 도착했다.

"용케도 이런 구석진 곳을 찾았구나."

"도망치다 찾은 거니까요. 숨기 좋게 생겼잖아요. 어디 보자... 옳지, 여기예요."

책장과 책장이 배치된 얇은 틈.

그곳에 도착하니 언제나 날 숨겨 주던 문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오호."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묘한 음성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보이세요?"

나는 탈리오 영감을 향해 물었다.

"벽 말이냐? 묘한 것 같기는 하고."

탈리오 영감은 뭔가 가물가물하다는 듯 입을 쩝쩝거릴 뿐이었다.

정말로 시대를 풍미하는 절대자가 아니라면 아카식 레코드를 쉽사리 발견하는 건 어려운 듯했다.

"열어 보거라."

나는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말에 따라 아카식 레코드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오랜만에 맡는 정원의 냄새가 한껏 느껴졌다.

싱그러운 초원의 풀내음과 그 위를 산책하는 바람의 향.

나만의 보금자리이자 요람.

델피 아카데미의 아카식 레코드였다.

"열렸군."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눈이 기이할 정도의 보랏빛으로 빛났다.

"그런가? 난 잘 안 보이는데. 으음. 묘한 흐름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은데...."

"넓게, 더 광대하게 봐야 한다. 마치 우주를 처음 만난 개미라고 생각해라."

"개미... 개미라. 허, 잠깐, 오...? 응? 으으으으응?"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말에 탈리오 영감님이 기감의 감도를 넓히는 듯했다.

그러더니 점차 얼굴이 놀라움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경외로 바뀌어 간다.

거참, 눈도 두건으로 둘러놓았는데 표정 변화 한 번 버라이어티하군.

"이, 이게...."

"보이더냐. 그게 우주의 질서다."

"선배, 이건 너무 거대하오. 인간이 이런 인과와 흐름을 감당하는 게 맞소?"

"9써클은 인과를 감당하고 어그러뜨리는 자들이 아니다. 인과가 무엇인지 알고 그 흐름에 순응하는 자이지. 자, 가자꾸나."

나는 크게 호흡을 들이쉰 뒤 아카식 레코드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 * *

처음 이곳을 왔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데온 크라피가 공간이동 스크롤을 사용해서 날 날려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도서관 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법한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100여 평 정도 되는 공간에 작은 텃밭과 함께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작은 분수대와 책상, 그리고 의자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건 작은 통나무집.

그곳은 내가 5년 동안 보았던 책들이 가득 비치되어 있는 서가였다.

이런 풍경이었기에 나는 5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독서에 매진할 수 있었지.

"오오... 이럴 수가."

곧이어 내 뒤를 따라 두 마법사가 따라 들어왔다.

탈리오 영감이 놀랍다는 듯 주변을 연신 둘러보며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고 귀를 세우기도 했다.

저건 마나를 느끼는 마법사가 아니라 숫제 짐승과 같은 반응이었다.

"기묘하군, 기묘해! 이 공간의 모든 동식물이 생기가 넘쳐. 심지어 내 몸마저도. 오히려 눈이 있을 때보다도 더 사방을 더 잘 볼 수 있어!"

"바깥 마나의 순도는 여기의 1/100밖에 안 되겠구나. 그야말로 온 우주의 마나가 여기에 압축되어 있는 듯하다."

나는 그들의 감탄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모든 것의 정보가 살갗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이곳에서 5년이라. 자네 몸의 불균형은 너무 순수한 마나 탓이기도 했겠군."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인과들이 이렇게 묶여 있던 거구나.

"참으로 신기하구나. 하지만 알 것 같은 것도 있군."

"뭐 좀 찾으셨어요?"

파르메시오 어르신은 분수대 옆의 의자에 앉아 날 차분히 바라보셨다.

평소 날 바라보던 시선과 달리 깊은 눈동자가 날 훑었다.

"우리가 함께 알바트론을 만났던 때가 기억나느냐?"

"네."

"자네 설명을 들어 보니 아카식 레코드에 있는 자들은 자기 공간을 하나씩 가지는 모양이더구나. 그런데 궁금한 게 자네의 공간은 무엇이지?"

"제... 공간이요?"

나한테 그런 공간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나에게만큼은 그런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이 도서관 안쪽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을 뿐.

"어쩌면 이 공간이 자네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르네."

"설마요. 아카식 레코드의 전설은 델피 아카데미 곳곳에 있었는걸요."

"생각해 보게. 아카식 레코드는 탄생한 즉시 과거, 현재, 미래 전체에 뿌려졌네. 자네가 여기 있기 때문에 과거에 아카식 레코드가 이곳에 있었단 소문이 퍼졌을지도 몰라."

끄응.

그놈의 절대시간 개념은 정말 복잡하구나.

"그래서인가, 이곳 공간에 대해서 좀 알 것도 같군. 이 공간이 전부가 아닐 게야."

뭐라구요?

나는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도 그렇다면 알바트론이나 티아의 공간처럼 독특한 기능을 보여 줄 수 있단 말일까?

내 질문에 파르메시오가 싱긋 웃으며 탈리오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걸 찾아낸다면 이 무식한 후배 녀석도 수득이 있겠지."

"아 좀, 무식하다고 하지 마십쇼. 선배면 다인가."

"끌끌. 그러니 자네는 이제 나가 보게. 델피 아카데미에서 자네가 할 일이 많지 않은가? 제국의 사절도 만나야 할 거고, 거상과도 만남이 있다지."

"네에. 그런데 그게 아카식 레코드보다 급하지는...."

"쯧쯧."

파르메시오 영감님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늘 이 바보 녀석에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야. 자네도 서두르지 말게. 적어도 이틀 정도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으니 말일세."

참...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타이르듯 말하면 당해 낼 방법이 없다.

"나갔다가 일을 처리하고 내일쯤 오게. 우리는 여기 있겠네. 마침 이곳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많으니 이틀은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

그렇게 나는 아카식 레코드에서 반강제적으로 쫓겨났다.

끄응.

어르신 말이 맞다.

내가 그곳에 있어 봤자 할 거라곤 추억을 곱씹는 것밖에 없지.

거기에 있는 책들을 다 읽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겔도브 상단주는 도착했으려나.

어르신들을 모시느라 이곳부터 먼저 온 거니 지금이라도 학교 기숙사 쪽으로 움직여서 누가 왔는지 파악부터 해 봐야겠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7화

<87화 - 채무자와 채권자의 콜라보레이션(2)>

기숙사를 가기 위해 도서관을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저기!"

"네?"

누군가 뒤에서 자신감 없이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날 불렀다.

돌아본 그곳엔 160이 겨우 넘을 듯한 작은 키의 사내가 책 다섯 권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갈색의 심한 곱슬머리는 눈을 거의 가리고 있어 어수룩한 인상을 주었다.

왜소한 어깨와 옷 안에 있어도 느껴지는 빼빼 마른 몸.

약간 눈물을 글썽이는 듯 보이는 젖은 눈동자까지.

모든 부분이 마치 작은 애완용 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 사내를 알고 있었다.

"키안 선배?"

"마, 맞지? 라워드 군!"

키안테스 네르도라.

내가 델피 아카데미를 다닐 무렵 많이 따랐던 두 해 위의 선배였다.

선배는 팔에 힘이 빠진 듯 책을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뜨렸다.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 하긴.

내가 학창시절 당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이곳으론 침도 안 뱉고 평생 찾아오지도 않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 선배, 거의 7~8년 만에 만나는 건데 변함이 없네.

학창시절 때에도 이렇게 작고 뭔가 불쌍한 모습이었지.

그래서 동기나 선배들에게 괴롭힘도 무지하게 많이 받았더랬지.

선배와의 관계가 멀어진 것도 바로 그 괴롭힘 때문이었다.

'라워드. 미안해... 나, 나는 널 도와줄 수 없어. 무서워.'

내가 가장 힘들 때 나에게서 도망갔던 사람.

뭐, 그걸 몇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앙금을 품고 있거나 하진 않다.

자기 몸을 간수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이 사람에겐 불가항력이었을 테니까.

나는 선배가 떨어뜨린 책들을 주워 선배에게 건넸다.

선배는 뭔가 멍한 얼굴로 책들을 하나둘 받아 들곤 날 꼼꼼히 살폈다.

"정말... 라워드 군이네. 어쩐 일이야."

"학회 발표가 있어서요. 선배는요?"

"나, 나도 비슷해. 대학원에 들어갔거든."

그랬구나.

하긴, 선배는 공부를 정말 잘했지. 문장력도 엄청 뛰어났고.

내가 두 해 위의 키안 선배를 처음 알게 되었던 것도 그가 학년 수석이었기 때문이니까.

"잘 어울리시네요. 전공은요?"

"어, 으응, 델피 왕국의 문장과 어휘가 왕국의 통치이념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고고학적 연구를 하고 있어...."

"문장과 어휘라. 선배답네요."

"아하하하... 내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그게 제일 재미있더라구."

나는 선배가 내게 이야기해 준 연구 분야를 되새겼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시대를 막론한 책들을 읽었고, 최근 탈리오 마탑에선 마법 논문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었지.

그래서인지 제목만 들어도 이 논문의 수준을 알 것 같다.

"박사 따셨나 보네요."

"어, 응. 어떻게 알았어?"

"주제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고, 거대하니까요."

"아하하, 어, 응. 학회 발표를 하러 왔다고 했지? 너도 논문을 쓰니까 알겠구나. 그렇지 뭐."

키안 선배는 대화를 좀 나누고 나서야 정신을 수습한 듯 다시 책들을 끌어안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마침 선배가 가는 방향이 기숙사 방향 쪽인 것 같아서 나도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근황을 물었다.

"박사 따셨으면 교수가 되신 거예요?"

"아, 아냐. 나 따위가 교수는 무슨.... 학교에 박사가 얼마나 많은데. 그냥 강의만 몇 개 맡아서 하고 있어. 시간강사야."

"문학부 강사를 하고 계시겠네요."

"아니... 역사학부랑 마법학부."

"선배가요?"

"아하하, 학교가 원래 그래. 그, 조금 이상하지?"

조금 이상하다고?

내가 보기엔 많이 이상한데.

선배의 연구 주제가 델피 왕국의 역사랑 관련되어 있으니 역사학부 강의는 그렇다 치자.

마법학부라니.

"선배 마법사예요?"

"아, 아니야. 마법이라니... 나도 그런 거 쓸 수 있으면 좋겠는걸. 아하하."

"그럼?"

"처음 입학했을 때 배우는 기초 교과목들 있잖아. 말하기, 쓰기. 그런 거 가르치는 거야."

아....

선배, 대학원에서 짬처리 당했구나.

전공과 상관없이 능력 없거나 빽이 없는 박사들이 맡게 되는 기초과목들.

키안 선배가 맡은 과목은 그런 과목들이었다.

선배의 처지를 들어서 그런가.

그제야 펑퍼짐한 옷을 입은 선배의 몸 곳곳에 희미한 멍자국들이 보이는 걸 발견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목덜미의 멍을 본다는 걸 알곤 슬쩍 몸을 비틀어 멍을 감추었다.

"아, 그, 마법학부 애들이... 알잖아. 라워드 네가 제일."

선배의 씁쓸한 표정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가 졸업한 지 6년이 지났지만 마법학부와 인문학부의 대립은 여전한 모양이네.

이 모든 것이 데온 크라피 녀석의 농간으로 일어난 일이었지.

어쩌면 이 선배가 지금 괴롭힘당하는 것엔 내 탓도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른다.

"책 들어 드릴게요."

사실 이렇게까지 마음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날 위해 발 벗고 나서준 바바라 같은 사람들도 있는데 굳이 키안 선배 같은 방관자들까지 도와줄 이유는 없는 거지.

하지만....

그냥 변덕이라고 해 두자.

그래도 내 기억 속에서 아름답게, 즐겁게 남아 있던 초창기 추억을 위한 변덕.

"으응? 아, 아니 괜찮은데."

"말했잖아요. 저도 학회 발표를 위해 왔다고요. 선배가 강의하는 거 어떤 식으로 하는지 보고 싶어요.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아, 그랬지. 으응."

나는 당황하는 선배의 품에서 책 세 권을 받아 들곤 성큼성큼 걸었다.

"마법학부 쪽이시죠?"

"어, 응, 그래."

"수업?"

"바로 수업은 아니긴 한데, 곧?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바로 수업이야. 그, 교강사 대기실이 있어. 거기로...."

"어딘지 기억나요. 같이 가죠."

그렇게 나는 선배를 따라 교강사 대기실로 이동했다.

선배는 곁에 있는 내가 어색했는지 대기실에서 내 눈치를 보며 묵묵히 수업을 준비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나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있는 것은 마도 전공자들의 교강사 대기실.

그렇다 보니 거기서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다 마법학부의 수업을 하는 마법사들.

키안 선배를 바라보는 그 사람들의 시선이 굉장히 냉정하고 무감각했거든.

마치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느낌?

그렇다고 저들끼리도 그런 시선을 주고받는 건 아니었다.

자기들끼리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도 나누고 눈인사도 건네고 그러더라고.

선배의 상황은 여기에서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겠군.

"라워드. 그, 이제 곧 수업할 거야. 준비하고 나가야...."

"라워드?"

선배가 수업을 위해 내 이름을 부를 때였다.

모여 있던 마법사 중 한 명이 귀를 쫑긋거리며 내 이름을 되뇌었다.

혹시 키안 선배처럼 학부 시절 알고 지냈던 사람인가 해서 살펴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깐깐한 인상에 안경을 쓴 40대 중년 남성이었으니까.

"흔한 이름은 아닌데. 혹시 자네, 라워드 고르뎀인가?"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네, 제가 라워드 고르뎀이 맞습니다."

내 대답에 남자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설마 바람의 현자 라워드 고르뎀?!"

"뭐라고? 바람의 현자가 여기에 왔다고?"

"바람과 질량, 밀도에 대한 마나식을 해석한 그 천재!"

"현자라니, 그게 뭐지?"

"자네 그거 모르나? 요새 제국 마도학회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천재의 논문 말일세! 7써클 마학자인 스켈롯이 감탄했다던 그 논문 말이야!"

"아아! 나는 이것보다 더 나은 논문을 쓸 자신이 없다고 한탄했다던? 그럼 저 젊어 보이는 자가 그자라고?"

바람의 현, 뭐라고요?

지금 단기간에 엄청난 이야기들이 오간 것 같은데.

곁에 서서 강의를 준비하던 키안 선배도 지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모양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그렇게 바라보지 마요.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렇게 우리가 벙 쪄 있자 처음 날 알아봤던 사람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라워드 고르뎀. 탈리오 마탑이 낳은 현자를 이렇게 볼 줄이야."

하하.

이제 이해가 갔다.

"아하하... 절 알아보시는 분이 있으실 줄이야. 몰랐습니다."

"왜 모르겠나! 자네의 논문은 혁명이었어! 이번에 내가 공인 5써클을 받는 데 자네의 논문이 큰 도움이 되었네."

"나, 나도! 나도 자네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어! 지금은 비공인 5써클일세!"

"어떻게 하면 그런 치밀한 사고를 할 수 있나? 바람과 공기의 압력이라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선명하게 보고 관찰한 듯한 자네의 논문은 혁명이었네!"

나는 괜히 옆에 있는 키안 선배가 신경 쓰여 힐끔 눈짓을 한 번 하고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현자 소리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번 학술대회에서 내 세력을 만들기 위해 감당해야 할 일이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나올 걸 대충은 예상하고 영감님에게 논문을 써 달라 부탁했던 거니까.

단지 내 생각보단 훨씬 격한 반응들이라서 좀 놀라울 뿐이지.

나는 여유 있고 차분한 현자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논문이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아냐아냐, 부족하다니! 겸양도 과하면 결례일세!"

"제가 조금 더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여기 있는 제 선배와 선약이 있는지라...."

"선배?"

현재 교강사 대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약 십여 명.

그 사람들의 시선이 키안 선배에게 집중되었다.

선배는 그 시선만으로도 위축되는지 슬그머니 한 걸음 내 뒤쪽으로 물러나 움츠러들었다.

"자네 마법학부 기초 글쓰기 전공을 가르치는 강사군. 키안테스 네르도라라고 했나?"

나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떨고 있는 선배 대신 대답했다.

"네. 제가 델피 아카데미를 다닐 때 친하게 지냈던 선배님입니다.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셨죠."

키안이 알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오호. 그렇군. 이거 가까운 곳에 좋은 인맥을 둔 분을 몰라 뵈었군. 난 마법학부 4학년 암흑계열 전투마법을 가르치는 타일러일세."

"나, 나도! 나는 3학년 마도학의 역사를 가르치는 펨이야!"

"6학년 졸업학기에 마도학회와 논문작성의 기초를 가르치는 클라리스예요."

사람들이 너도나도 키안 선배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잠시 허둥거리는 키안 선배가 어색하게나마 자신에게 인사해 온 사람들에게 대꾸하는 걸 보다가 주변을 정리했다.

"그럼 저희는 이제 수업이라 이만."

"아, 알겠네. 이번 마도학회에 참석하는 게지?"

"네. 기숙사 쪽에 마련된 공실에 머물 테니 연이 닿으면 계속 이야기 나누시죠."

그렇게 우리는 아직까지 이야기의 여파로 소란이 남아 있는 교강사 대기실을 나섰다.

키안 선배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뚜벅뚜벅 말없이 걸었다.

어쩐지 뒤따르며 바라본 뒷모습이 더욱 작아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현자?"

"아, 네. 저 마도학 관련 논문을 하나 내서요."

"대단하구나... 라워드, 너는."

"선배?"

내 부름에 선배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선배는 한 강의실 앞에 도착해 문손잡이를 잡은 후에야 날 돌아보았다.

"라워드. 아까 이야기... 혹시 너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네, 뭐."

"방어마법도?"

"그렇죠."

나는 그렇게 대답하곤 선배를 향해 방어마법을 걸어 주려고 준비했다.

저 상처, 단순히 주먹으로 치고받으며 생긴 게 아니라 타격 계열의 마법을 맞았을 때 나오는 상처였거든.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선배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미리 얘기해 둘게. 지금부터 여기 강의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냥 지켜만 볼래?"

"네?"

"그냥... 그렇게 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잘 설명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늘 자신 없이 허둥거리고 말도 더듬는 선배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밝힌 거였다.

나는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채 강의실의 뒷문으로 먼저 들어갔다.

수업 전의 강의실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다.

아직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모여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지.

단지 공기에 묘한 흥분감이 서려 있는 게 독특하달까.

나는 곧 그 흥분감에 왜 맴돌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막 강의실의 앞문이 열렸을 때, 강의실 앞문에 설치되어 있던 트랩 마법이 발동했으니까.

저건 그리스 마법인가?

바닥의 마찰력이 갑자기 사라졌고, 두어 걸음을 내딛던 키안 선배가 발을 헛디디고 미끄러졌다.

허공에 붕 떴던 몸이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선배!

방금 그 쿵, 소리 되게 위험할 정도의 충격 같았는데?

그러나 강의실에서 놀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오히려 곳곳에서 풉, 하고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니 자신들이 비웃고 있다는 걸 감출 기색도 없는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선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마나를 보아하니 저 녀석들이 장난질을 친 것 같았다.

내가 급히 일어나 녀석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선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선배는 어색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 발을 헛디뎌 못 볼 꼴을 보여 줬네요. 크흠, 수,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키안 선배는 팔다리가 불편한지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강의실 중심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며 뭔가 짜증 난다는 듯한 기색으로 선배를 보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와, 저러고도 휴강을 안 하네.'

'독종이야 독종. 아픈 티도 안 내.'

'이번에도 네가 졌다. 돈 내놔.'

'아, 씨X 진짜 꼰대 개짜증 나네.'

다 들린다, 너희들.

나는 한숨을 쉬고 판서를 시작한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기 키보다도 훨씬 크고 넓은 칠판 앞에 서 있는 선배의 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분필은 멈추지 않고 글씨를 적고 있었다.

선배, 참으라고 했죠.

딱 한 번입니다.

이번 시간 딱 한 번만 참을게요.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8화

<88화 - 채무자와 채권자의 콜라보레이션(3)>

처음엔 그냥 익숙한 얼굴을 만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멍자국을 보게 된 거고, 상황을 알고 싶어서 따라온 거였고.

실상을 확인한 순간엔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지만 참으라던 선배의 이야기에 겨우겨우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분노도 다 잊고 선배의 강의에 푹 빠져 있었다.

"12대 델피 왕이었던 아실리오스는 주색잡기에만 빠져 살았다고 알려져 있죠. 하지만 그는 역대 왕 중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왕이었기도 했습니다."

선배는 능숙하게 수업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아실리오스 왕의 수필은 후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문장입니다."

하나의 화두로 시작된 수업은 오랜만에 내 학구열을 자극했다.

"치세를 제대로 하지 못한 왕의 문장을 평가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아니면 문장은 오롯이 문장으로만 평가해야 하는가.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아, 진짜 손과 입이 다 근질거린다.

여기서 손을 들고 내 의견을 마음껏 피력해 보고 싶다.

마법학부 놈들은 저 주제가 흥미롭지도 않나?

왜 모두 졸거나 아니면 따른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나마 제일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 한 명만이 선배의 이야기를 집중해 듣고 있었지만 오로지 듣는 것뿐.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선배는 그저 묵묵히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의 그런 반응이 익숙한 듯 실망한 표정이나 어색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차례도 끊어지지 않고 마쳤던 수업이 수업종 소리와 함께 끝났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선배는 그렇게 진행하던 강의를 마무리하고 짐을 챙긴 채 교실을 나섰다.

그런데 키안 선배, 많이 아픈가?

수업 중간중간 팔과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이 보였는데.

교실을 나서면서도 크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감각을 펼쳐 보니 미세하게나 선배의 팔다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선배의 무릎.

아까 넘어질 때 찧었던 건지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느낌상 상처가 커 보이는데....

바로 그때.

아까 수업 전 마법을 발동했던 녀석의 마나가 다시 한번 입구의 교실 바닥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수업 내내 자빠져 자던 녀석이...!

지금 선배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저걸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나는 지난 한 달간 파르메시오 영감님과 연습했던 것 중 하나를 써먹었다.

어차피 현실에 구현된 마법들은 우주의 거대한 흐름에 빌려 온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이 공간에 마나의 통로를 다 끊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어?"

마나를 구현했던 소년의 당황한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의 시선이 소년에게 몰렸다.

소년은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로 계속 마나를 끌어 올리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었다.

네가 백날 그렇게 해 봐라.

마법이 발동되나.

선배도 뭔가 이상을 감지했는지 나가기 전 소년과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마치 날더러 괜한 짓을 했다는 듯 책망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곤 말았다.

내가 뭘 했는지 선배가 어떻게 알겠어.

선배는 강의실을 먼저 나섰고, 나는 소년을 힐끗 쳐다보았다.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총량은 고작 1써클 남짓.

마법에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은 학생이 대학 강사를 상대로 저따위 놀음이나 하고 있다니.

스콰렛 영감님이 보시면 기함하시겠군.

후.

그래. 열 내지 말자.

선배가 참으라고 했고....

이번 학회에는 스콰렛 영감님도 참여할 거거든.

괜히 스콰렛 영감님께 크라피 가문에 복수를 도와달라 요청한 게 아니다.

학교를 떠난 건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학교 곳곳에 영감님의 지배력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다수의 교수가 스콰렛 영감님이 학장 시절 제자이거나 후배인 사람들.

그렇게 나는 선배의 뒤를 따라 강의실을 나섰고, 그곳에서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키안 선배의 앞에는 아까 제일 앞자리에서 유일하게 수업을 집중하던 소녀가 서 있었거든.

"저기, 강사님. 질문이 있는데요."

"아, 네, 시아 학생."

"그, 아까 델피 왕국의 12대 왕이 보여 주던 문장은 제국의 영향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시아라고 했던가?

그녀의 몸에서 청명한 마나가 키안 선배를 향해 움직였다.

나도 몇 번 받아 본 적 있는 익숙한 형태의 마나배열.

저건, 힐링인가?

선배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힐링 마법이 선배의 몸 곳곳을 훑고 지나간다.

굉장하네.

느껴지는 마나 보유량을 보면 고작 2써클 남짓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마나를 운용하는 수준은 3써클이나 4써클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천재라고 떠받들어지던 체칠리만큼, 아니 그 이상의 실력자처럼 보이는걸.

더군다나 지금 그녀는 마법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제국의 문인과 왕국의 교류가 이어졌던 거죠."

"그런데 사실은 두 교류가 있었다는 건 문헌의 문장 정도로 후대 연구자들이 추론한 것에 불과하다는 거죠. 확정은 아니고."

"아하하, 사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연구는 추론에 불과하죠.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대단하다.

저렇게 선배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마법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체칠리보다 낫니 마니 이야기할 수준이 아닌데?

그렇게 그녀의 마법이 키안 선배의 몸 전체를 한 차례 훑었을 즈음,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또 모르는 거 있으면 질문하러 오세요."

그 말에 학생이 뭔가 더 질문하려는 것처럼 머뭇거리다 슬그머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학생아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급히 인사를 남겼다.

"네, 그... 감사합니다."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고 후다닥,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선배와 나는 그렇게 뛰어가는 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착한 아이야."

"그러네요."

"그, 마법도."

"어라, 알고 계셨어요?"

선배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엔 모를 수 없더라구. 시아 학생만 다녀가면 몸이 엄청 좋아지는걸."

저 학생이 이번 한 번만 그런 게 아니구나.

그리고 선배가 이렇게 괴롭힘 받는 것도 이번 한 번만 그랬던 게 아니고.

"...그 꼬마들은 왜 선배를 괴롭히는 거죠?"

"나만 괴롭히는 게 아냐. 그냥, 마법학부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지."

그렇게 설명하는 선배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감이 보였다.

"그걸 학교가 그냥 내버려 두나요?"

"그... 아까 걔가 귀족이라."

"귀족이요?"

"시안델 왕국의 후작가...."

아 진짜.

크라피 때부터 이 학교는 변한 게 없구나.

아까 그냥 제대로 혼내 줄 걸 그랬나?

"라워드."

"네?"

"너 뭔가 했지?"

"뭘요?"

"아까 강의실... 걔가 당황했잖아. 네가 뭘 한 거 아냐?"

뭔가 하긴 했는데 그게 뭔가를 했다고 이야기할 만한 건진 모르겠다.

사실 강의실에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든 것뿐이었으니까.

"아뇨. 뭔가 했으면 걔를 혼내지 않았을까요? 바람의 현자~ 어쩌고저쩌고 사람들이 그랬잖아요. 바람을 불어서 녀석을 쓰러뜨렸다든가."

"비정함이 부족하군."

응?

나와 선배의 이야기를 가로챈 건 아주 중후하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따라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둡고 길게 뻗은 복도 끝.

거대한 스테인글라스 앞에 화려하게 반짝이는 빛들을 받으며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그의 옷이었다.

넓은 소매의 황금빛 코트에 풍성한 바짓단.

그리고 코트 안쪽에 하늘거리는 보랏빛 스카프.

엄청나게 화려한 색의 옷이었지만, 어쩐지 저 사내가 입고 있으니 무척이나 어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의 얼굴은 내가 이때까지 본 사람들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멋들어졌으니까.

180 정도 되어 보이는 키.

하얗게 바랜 백발을 올백으로 가지런히 묶었다.

외모만 보기에 느껴지는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정도?

단지 흠이 하나 있다면 그의 표정.

마치 꽁꽁 언 빙하 같은 그의 표정에선 단 한 줌의 인간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연금술사가 만들어 낸다는 호문쿨루스, 또는 골렘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저희한테 하신 이야기인가요?"

"교권에 도전하는 학생이었다. 마법을 써서 상처를 입혔지. 상대는 델피 왕국보다 소국인 시안델 왕국의 후작. 헬피온 공작령의 참모장인 네 힘이라면 아무 후환 없이 녀석들을 처리할 수 있었지."

"...라워드? 저 사람이 지금 하는 소리가... 어, 무슨 뜻이야?"

"탈리오 마탑주에게 마법을, 헬피온 공작에겐 검을 배웠지. 아펠 집사장, 셰리나 하녀장에게도 무언가 얻은 것 같고, 탈리오 마탑의 제이슨에게 몸 쓰는 법까지 익혔다."

그는 무표정한 소리로 내 행적들을 나열해 나갔다.

"그리고 최근엔 트팔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최악의 죄수들을 탈옥시켰어. 너는 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아나키스트가 아닌가?"

나는 당황하는 키안 선배의 이야기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한순간에 발바닥에서부터 목줄기까지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 내가 해 왔던 모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소름이 돋은 이유는 그게 아니다.

외눈 안경 너머 시리게 빛나는 저 눈빛.

저자는 지금 단순히 날 떠보기 위해 그들을 왜 파멸시키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궁금한 거였다.

파멸시킬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참냐고. 당연히 파멸시켜야 하는 거 아니었냐고.

도대체 얼마나 사람을 벌레같이 보면 저런 질문을 태연하게 던질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어쩐지 이 사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 것만 같았다.

"겔도브."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군. 하나 알려 주지. 네가 날 불렀고, 나는 널 만나러 왔다. 내가 이곳에 오기 위해 포기한 계약의 규모는 약 3천 200만 골드."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한 달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일을 처리하게 되면 하루에 106만 6,666골드의 돈을 낭비하게 된다. 너와의 만남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 생각하나?"

"...모든 걸 그렇게 돈으로 계산하나요? 그래서, 그렇게 당신이 잘났다는 걸 보여 주려는 건가요?"

나는 이렇게 질문하면 겔도브가 날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인이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표정 없이 되물었다.

"세상에 돈으로 측량되지 않는 것이 있나? 나만이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가? 아니. 세상 모든 것엔 가치가 있고 우열이 있고 차등이 있다."

겔도브에겐 돈이 전부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내가 너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다고 생각하지? 이 넓은 아카데미에서 너를 어떻게 찾아왔다고 생각하나. 저 멀리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 같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한 겁니까?"

내 질문에 겔도브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날 상품처럼 훑을 뿐.

"어린아이가 칼을 들고 있는 격이다. 비정함이 부족하니 사람을 찌르지 못해서 결국 제 몸이 찔려 죽겠군."

[그 말엔 어느 정도 동의가 되는구만.]

바로 그때,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목소리가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저번에 아카식 레코드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혼에 무언가 표식을 남겼던 모양이다.

내 어깨 위에 어느덧 생겨난 보랏빛의 까마귀가 까악, 하고 날개를 한 번 펼치더니 부리를 딱, 하고 부딪쳤다.

[기묘한 흐름이 느껴지기에 왔더니 이상한 놈과 만나고 있었구나. 겔도브 상단주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선문답은 때려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 3천 200만 골드라고 해나? 그만큼의 가치를 포기하고서라도 라워드를 만나러 온 이유가 있겠지. 거기서부터 대화를 시작하는 게 유익할 듯싶은데.]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이야기가 핵심을 꿰뚫었다.

겔도브 상단주는 천천히 나와 키안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키안 선배를 향해 떠나라는 듯 손짓했다.

"네, 네?"

지금의 이야기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던 키안 선배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와 상단주를 바라보았다.

상단주가 그에게 선고하듯 이야기했다.

"내 행보에서 네놈에게 투자할 시간도, 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삶에서 꺼져라."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키안 선배를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선배. 제가 다녀와서 이야기해 줄게요. 쉬고 있어요. 강의도 힘들었으니까."

"어, 으, 응. 그럼 나, 나는 갈 테니까 라워드, 몸조심해야 해. 어, 응!"

나는 키안 선배를 보낸 후 마음을 가다듬었다.

겔도브 상단주.

제국 특임대와 관련된 수많은 임무에서 자금을 대는 핵심 중책.

고르뎀 상단의 빚과 팔세우스 가문의 빚을 처리하기 위해선 그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키안 선배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고르뎀의 눈동자가 도록, 하고 굴러 날 향했다.

"부디 3천 200만 골드의 몫을 할 이야기였으면 좋겠군."

"만약 그 정도의 가치가 되지 않으면 어쩔 셈이죠?"

"그 손해는 누군가, 어떻게 해서든 갚을 것이다. 네가 아니라면 너와 관련 있는 누군가든."

나와 관련 있는....

나는 그 말에 이를 강하게 악물었다.

녀석이 이야기하는 게 누구인지는 뻔했으니까.

여동생인 로네 아니면 공작이나 뭐 이런 사람들이겠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조용히 이야기할 자리가 필요한데. 빈 강의실이 많아 보이니 조용한 곳에 들어가 이야기하지."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9화

<89화 - 채무자와 채권자의 콜라보레이션(4)>

강의실에 들어간 겔도브 상단주는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와 최대한 떨어진 곳에서 비스듬히 벽에 기대선 채 언제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 두었다.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분신인 까마귀가 까악- 하고 한 차례 울음을 터뜨리며 어깨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마치 날더러 긴장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여긴 이야기를 나누기 참 좋은 자리군. 교실이라. 옛 생각이 나는군.]

"최근 헬피온 공작령에 고써클의 마법사가 등장해 탈리오 마탑주를 구박한다는 소문이 있었지. 파르메시오. 9써클로 추정되는 마법사. 너를 뜻하는 거겠군. 영혼을 이용한 패밀리어 마법을 구사하는 걸 보니 흑마법사인가?"

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나에 대해서 줄줄 이야기할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엄청난 정보력이다.

"그 정보들, 돈을 주고 산 건가요?"

"모든 정보는 돈이지. 하지만 모든 정보에 가격을 지불할 필요는 없는 법이지."

"그냥 정보를 바친다고요?"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투자금, 정산금, 사채, 은행... 수많은 영역에서 돈은 나와 그들 사이에 선을 연결하지. 그중에선 나라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언제나 있는 법이다. 강한 불빛에 뛰어드는 부나방들처럼."

[홀리지 말거라.]

파르메시오 어르신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날 일깨웠다.

[전 세계를 이끄는 거상이라고 했지. 목소리에 묘한 마력이 있구나. 논리에 말려들면 홀릴 것이야.]

그 말대로다.

자신이 하는 말에는 한 점 잘못된 구석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그의 목소리와 말투, 행동거지 곳곳에서 느껴졌다.

정말로 지독한 나르시스트.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묘한 확신을 갖고 그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당신은 제국의 편이 아니군요."

"돈은 누구의 편도 아닌 동시에 모두의 편이다."

그의 판단 기준은 오로지 돈 하나뿐.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 겔도브 상단주에게 용건을 꺼냈다.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으니 내 용건도 알겠군요."

"고르뎀 가문의 빚 때문에 날 보자고 했지. 부채에 대한 서류는 여기 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이미 시뮬레이션을 해 왔던 모양이었다.

소매에서 고르뎀 가문의 빚이 어떻게 책정되었고 어떻게 이자가 붙었는지에 대한 서류가 나왔다.

나는 그가 내게로 던진 서류를 잡아들어 천천히 내역을 바라보았다.

과연, 로네의 이야기처럼 서류는 완벽했다.

정말로 논리정연하게 빚이 왜 발생했는지, 어떤 계약을 했고, 어떤 방식으로 이자를 계산했는지가 다 적혀 있었다.

단지 그 금액과 비율이 납득가지 않는 선에서 시작되었을 뿐.

내가 이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상태였더라면?

그럼 이 거래는 사기라고, 함정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이 사람은 숫자를, 그리고 서류를 다루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서류가 무슨 의미인지 속내를 짐작해야지.

처음 헬피온 공작령에서 공작님이 나에게 문제를 줬던 때처럼 말이야.

"왜 저를 보자고 하셨죠?"

"날 여기로 불러낸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다."

나는 그가 던졌던 서류를 설렁설렁 흔들었다.

"당신이 이런 서류를 완벽하게 다룬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반대로 말하면 이따위 빚은 당신에게 언제라도 무시할 수 있는 영역의 금액이라는 거죠."

언제든 청구할 수 있지만, 무시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지금' 꺼내 든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서류까지 준비해 갑작스럽게 빚을 늘렸다? 심지어 저에 대한 정보도 빠싹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결론이 나오더군요. 무슨 이유에서든지 당신이 날 만나고 싶어 하는 거 아닐까."

내 말에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흥미롭다는 듯 부리를 딱, 하고 한 차례 부딪쳤다.

겔도브는 여전히 특유의 차가운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태도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내가 말한 이 내용이 정답이었던 모양인데.

"그래서?"

"어... 그래서라뇨?"

"네 말이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하찮은 추리 놀이일 뿐. 내가 널 보고 싶어 한다면 왜 보고 싶어 하는지까지 찾아내야 온당한 거래가 된다."

그는 지금 이게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돈이 오가는 싸움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맞장구를 쳐 봐야지.

그가 날 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빠른 시간 안에 돈을 벌어서 그에게 갚았기 때문에?

글쎄, 그건 아닐 것 같았다.

팔세우스 가문의 빚이 1억 7천만이라고 했지.

억 단위의 돈을, 아니 그보다 훨씬 큰 규모의 돈을 굴리는 상단의 상단주다.

내가 몇십만 골드 정도를 굴리는 건 가소롭지 않을까.

내 존재가 제국에 해가 되기 때문에 찾아왔을까?

아니... 그것도 아닐 거야.

내가 파악한 이 사람은 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냐.

제국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이지.

그가 제국의 편처럼 보이는 건 일종의 착시 현상일 뿐.

제국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세계정세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당연히 전 세계의 돈은 제국을 향하고 있으며, 겔도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상단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국의 편처럼 보이는 거지.

이 두 가지에 답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돈을 많이 벌 것 같으니까? 투자하기 위해서군요."

처음으로 겔도브 상단주의 입매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아주 시릴 듯이 차갑고 냉정한 미소였다.

"머리가 잘 굴러가는군."

녀석이 이야기했지.

3천 2백만 골드의 몫을 하길 바란다고.

겔도브는 저렇게 매사를 숫자로 파악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만일 나와의 만남이 아무 가치가 없었다면 여길 왔을까?

그렇다면 여기서부터가 핵심일 텐데.

도대체 녀석은 내 어떤 부분에서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설마 아카식 레코드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 아닐까?

아니, 그럴 확률은 낮지 않을까?

라고르 황제가 찾아낸 아카식 레코드는 모두 망가졌다고 했다.

그러니 오히려 황제 곁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나 능력을 생각하긴 더 힘들 것이다.

헬피온 공작령의 개발?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그때.

아주 끔찍한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당신...!

[전쟁을 바라는군.]

파르메시오 어르신도 나와 비슷한 순간쯤 정답을 찾았는지 부리를 딱딱거리며 말했다.

"정답이다."

"당신은 어느 편도 아니라고 했죠... 국가나 영지의 발전 같은 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였어요. 오히려 혼란한 상황이 온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죠."

"전쟁은 늘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큰돈이,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힘이었지. 나는 네가 세계를 멸망으로, 혼돈으로 밀어붙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너에게 투자하고 싶어졌지."

그러니까 전쟁으로, 남의 죽음과 고통으로 돈을 벌기 위해 날 써먹겠다고?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51억 2,700만. 자네가 지금과 같은 행보를 꾸준히 보인다면 1년 동안 내가 벌어들일 금액을 산출해 봤지. 3천 200만 골드를 충분히 투자해 봄직 하지."

51억....

도대체 그 돈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거절하겠어."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겠어.

"왜지?"

그는 내 대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날 이용해 더러운 돈을 벌겠다는 얘기에 순순히 동참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요?"

"더러운 돈이라. 역시 너는 비정함이 부족하군."

그의 표정이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아까까지의 무표정함에는 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마치 도구를 바라보는 듯한 무심함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빛엔 희미한 적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여유롭게 활공하여 나와 겔도브 상단주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자네의 말이 맞아. 라워드 군은 가진 힘에 비해 비정함이 부족하지. 나도 그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네.]

까마귀의 까만 눈동자가 날 향한다.

어쩐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날 위로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까마귀는 제자리에서 콩콩 두어 차례 뛰더니 부리를 딱, 하고 부딪치며 겔도브 상단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라워드 군은 라워드 군이지. 그가 그의 곁에 머문 자들에게 오지랖에 가까울 정도로 관심을 쏟지 않았다면 지금의 성공은 없었을 걸세. 앞으로의 성공도 말이야. 당장 이 노인네도 그의 곁에 없었을 테니까.]

어르신의 말에 겔도브의 표정이 다시금 차분해졌다.

[라워드 군은 제 패를 충분히 보여 줬어. 그러니 이제 자네가 이 아이를 부른 까닭을 이야기해야겠지.]

"고르뎀 백작령에 1억을 투자하겠다."

겔도브는 어르신의 말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즉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날 만나러 오기 전부터 오랫동안 생각해 둔 얘기를 꺼내는 듯했다.

"1억...."

"이자는 1프로, 기한은 10년. 그 돈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든 상관없다. 그저 네가 하려는 일을 해라."

이자가 1프로에 상환은 10년.

어마어마한 돈이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고작 1억에 불과한 것이다.

그 돈으론 엔틸 제국은 물론이거니와 팔세우스 가문조차 구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돈만 버리는 것으로 그치고 말 거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거래는 지금의 나에게 하는 투자겠죠. 사흘 뒤. 학회가 끝났을 때 다시 봅시다."

"제국마도학회?"

"그 학회가 끝났을 때 제 가치는 또 한 번 달라졌을 테니까요."

나는 눈에 힘을 주어 겔도브 상단주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덤덤히 받아넘긴 상단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교실을 빠져나갔다.

더 이상 말할 것이 남지 않았다는 듯, 완벽하게 관심을 끊어 버린 채 뒷모습만을 남겼다.

나는 멍하니 그 뒤를 바라보다 후, 하고 한숨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으, 조금 쫄리네.

[긴장했는가?]

"압박이 대단한 사람이네요."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상인이 아닌가. 황제나 다름없는 자였어. 이만큼 버틴 것도 대단한 거네.]

아하하, 어쩐지 그 말이 약간 위안되네요.

"이제 학회에서 일만 잘 터뜨리면 될 텐데 말이죠."

[열심히 준비한 만큼 일이 잘 해결되지 않겠나.]

"라워드!"

파르메시오 어르신이 이야기를 마칠 즈음, 키안 선배가 잔뜩 염려 섞인 표정으로 교실 안에 들어왔다.

"선배. 기다리셨던 거예요?"

"그, 그렇지. 아무래도 네가 저기, 무서운 사람이랑...."

하하하.

선배, 남 걱정하는 게 어색하네요.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요.

하긴.

선배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니까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 모르겠다.

"별일 없었어요. 선배.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실래요?"

"어? 으, 으응, 너 일 있다고 한 거 아니었어?"

나는 당황한 선배에게 다가가 어깨동무해 무작정 건물 바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펼쳐질 거창한 계획이나 일들이 있지만 어쩐지 멍청한 선배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긴장감도 다 풀리고 마음이 간질거리기 시작했거든.

그래.

과거랑 지금은 다르니까.

선배가 변했듯 나도 변했으니까.

그러니까 괜히 과거에 붙잡혀 마음 졸이고 있기보단 그냥 술이나 한잔 털어 마시고 기분 푸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온 자리였는데.

술집에서 녀석을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은 추호도 못 했다.

"이 더러운 맥주 맛은 졸업한 지 3년이 지나도 그대로군, 안 그래?"

"에이, 자네에겐 여기 맥주뿐만 아니라 세상천지의 어떤 술도 그닥 맛이 없을 것 같은데. 제국에서 가장 좋은 술을 마시고 가장 좋은 안주를 먹을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 이봐, 주인장! 여기서 가장 비싼 와인이 뭐라고 했지? 세이렌 201년산? 그거 다 가져와!"

"크으, 덕분에 우리 같은 사람들만 호강하는구만! 역시 데온, 자네의 배포가 대단하네!"

술집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사방천지가 고요한데 중앙 테이블만 이상할 정도로 소란스럽고 격양된 분위기였으니까.

십여 명의 사내들이 둘러앉은 테이블.

그 상석에 데온 크라피 녀석이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90화

<90화 - 바람의 현자 나가신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