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7화
<57화 - I belive I can fly(1)>
욕심과 같은 이야기지만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헬피온 공작령에서 늘 이야기 들었잖아.
아펠 집사장을 각성시킨 것이 사람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고.
이 사실이 널리 퍼지게 된다면 전 세계의 검사들이 날 노리고 달려들 거라고.
그러니까 이걸 이용해 보는 거지.
그래서 제이슨 씨의 수련을 도울 방법이 있나 꽤 깊이 고민해 봤다.
그랬더니 답이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사실 찾았다고는 해도 내가 마법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니까 이게 잘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야기해 봐야 하겠지만.
만약 된다면 이건 진짜로 내가 적극적으로 나선 첫 번째 결과물이 되겠지.
"제이슨 씨는 심장에 써클을 만들었잖아요. 지금 몸을 움직이는 동안 마나를 움직이는 게 심장의 마나를 근육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방출하시는 거죠?"
"하루 만에 완전히 파악했구나. 하긴, 마나의 흐름을 읽고 끌어다 쓰는 사람이니 쉽게 읽어 내겠지."
"단전에 마나를 쌓고, 단전으로부터 마나 로드를 따라 마나를 돌리는 것이 전사의 방법이구요."
"그래."
"그럼 시작점을 심장으로 바꾸는 건 어떨까요?"
"심장을?"
"네. 심장으로 시작점을 바꾸고, 마나 로드를 따라 마나를 순환시킨 뒤 심장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내 설명이 어려웠나?
제이슨 씨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쉬운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니까 음, 복부에 있는 단전을 하단전이라고 하고, 심장에 있는 걸 뭐 상단전이나 중단전 정도로 부르는 거죠. 우리 몸의 단전이 꼭 배꼽 아래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이건 이를테면 달걀을 책상 위에 세우는 법과 같다.
달걀을 깨뜨려 세우면 누구든지 세울 수 있겠으나, 처음 달걀을 깨뜨린다는 생각을 떠올리기 힘든 거지.
세상 사람들 모두 단전은 하복부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단전이라는 거 어디에 있든지 마나를 모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내 말에 제이슨 씨는 눈을 끔뻑이기 시작했다.
"음....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지만 좀 황당한 소리이긴 하네."
"황당한가요?"
"그렇지. 마나 호흡법과 마나 순환법은 그냥 마나 로드를 따라 마나를 회전시키는 방법이 아냐. 사람들이 왜 상승의 마나 호흡법에 미치겠어. 마나를 움직이는 순서에 따라 마나가 몸과 호응하기 때문이지."
"음... 단순히 그냥 회전시키기만 해 보는 거라면요?"
"글쎄. 부작용이 있어서 쉽게 해 볼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럴듯해 보였는데 안 되는 건가.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제이슨 씨가 나를 토닥거리며 위로했으니까.
"으어허허, 깨달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될 리 있나. 만약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이 막 깨닫고 막 경지가 상승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진짜 몸과 영혼을 다 바쳐서 그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겠어? 현자님 현자님 하면서 말이야."
저어기 어떤 공작령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절 찾아다녔는데 말입니다.
집사장이나 헬피온 공작은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일까.
끄응.
남들이 현자 현자 할 때는 부담스러웠지만 정작 깨달음을 주고 싶을 때 못 주니까 괜히 아쉽네.
"아, 맞다. 내가 라워드 군을 찾아온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라워드 자네에게 편지가 왔어."
편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는데.
나는 제이슨 씨로부터 편지를 건네받았다.
돌돌 말린 양피지에는 실링왁스로 스콰렛 공작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스콰렛 영감님이 보낸 편지인 모양이군.
무슨 이야기일까.
티타니아 영애와 헬피온 공작간의 관계에 대해 투덜거리는 소리라도 적으신 건가?
그렇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편지를 열었고 급하게 휘갈겨 적은 필체를 볼 수 있었다.
[룸펜 하운드가 제국을 빠져나와 자기 팔을 자른 검수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네. 제국의 국경을 빠져나온 뒤의 행적이 잡히질 않네. 그곳에 있으면 위험하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몸조심하게.]
그때 목숨을 끊지 못했던 사냥개가 들개가 되어 돌아왔단 연락이었다.
* * *
'크으으으으으으으! 네놈만은, 네년만은!'
나는 룸펜 하운드의 원한 서린 괴성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눅눅하다.
침대보가 완전히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네.
하.
편지를 보고 나서 마음이 진정이 안 되더니 결국 이렇게 잠을 설치고 마는구나.
슬쩍 일어나 커튼을 걷어 보니 아직 어스름한 새벽녘에 불과했다.
태양은 아직 뜨지 않았는지 보랏빛의 하늘에 새벽별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멀리서 이름 모를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쓸쓸할 정도로 고요한 숲속.
나는 어쩐지 그 숲 너머에서 모에르가 날 노려보는 것 같아 커튼을 급히 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날 싸움은 정말... 끔찍했지.
룸펜 하운드는 내가 싸워 본 사람 중 가장 끔찍하고 강력한 작자였다.
헬피온 공작령으로 돌아가 전쟁도 겪고, 8써클 대마법사가 특임대를 학살하는 것도 봤다.
그래서 그때의 공포는 충분히 없어졌다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곁에서 보는 것과 직접 싸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인가 보다.
마음을 좀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럴 땐 역시 내가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수련이 답이겠지.
갑자기 머릿속에서 아펠 집사장의 '훈련! 훈련만이 답입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사고방식이 헬피온 공작령의 사람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르지.
그렇게 새벽부터 검을 들고 나갔을 때, 나는 의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수련을 하는 겁니까?"
"낮, 시간... 없어서...."
그곳엔 푸른 달빛을 받으며 앨리스가 단검을 든 채 서 있었다.
앨리스는 평소의 복색인 하녀복이 아니라 처음 룸펜 하운드를 찔렀을 때 입었던 암행복을 입고 있었다.
어둠 속에 완전히 잠긴 채 눈동자와 칼날만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마치 그 모습이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 같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녀의 눈동자가 묘한 초록빛을 띠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현자... 실패...."
아, 낮에 제이슨 씨와의 일을 말하는 건가.
"계속 시도해 봐야죠."
내 대답을 들은 앨리스 씨가 잠시 날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곤 단검을 들어 올렸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연무장 구석에 나타났다.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그러고 보니 룸펜 하운드랑 싸울 때에도 기척 없이 그의 뒤에서 나타나 칼을 찔렀었지.
"앨리스 씨. 앨리스 씨가 소드마스터 초급이라고 하셨죠."
앨리스는 아주 미세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으로 뛰어올라 단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광이 허공에 굉장히 살기 넘치는 궤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방금 궤적들, 모두 인간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지.
"앨리스 씨가 보셨을 때 룸펜 하운드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강함."
그녀로서는 드물 정도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집사장보다 약간 약하고... 하녀장님... 더 강함."
헬피온 공작령을 지탱하는 공작의 가신들 정도 실력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자들이 하나의 부대를 이루어서 다수 포진한 곳이 제국이고.
"그, 앨리스 씨가 보기에 제가 만약 룸펜 하운드랑 싸운다면...."
"져."
그렇긴 하겠지.
너무 당연한 대답이라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팔 한쪽이 잘리고 몸이 만신창이로 돌아갔던 사람이라도 말이죠?"
"져."
아, 네.
"지금 저랑 앨리스 씨 둘이서 협공한다면?"
"모에르 죽어."
아, 협공이라면 확률이 있구나.
"그리고 참모장 죽어."
...그거 날 미끼로 삼아서 룸펜 하운드를 죽이겠다는 소리 아냐?
거기까지 대답한 앨리스는 이제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듯 아까보다도 더 거세게 연무장 곳곳을 움직이며 훈련에 임했다.
언뜻언뜻 보이는 그녀의 희미한 움직임은 눈으로 좇는 것이 힘겨울 정도로 무척이나 빨랐다.
땅을 딛고는 있는 건지 발자국 소리가 전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그저 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약한 파공음 뿐.
허공을 잠깐 수놓고 사라지는 검광은 짧은 순간 번뜩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나는 내 수련을 위해 연무장을 찾은 것도 잊은 채 서서히 그녀의 움직임에 몰입되었다.
마치 스콰렛 공작령에서 알버트 경의 검술을 볼 때와 비슷했다.
그의 검에서 눈 덮인 북해의 풍경을 보았던 것처럼 앨리스의 검에서도 희미한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녀는 넓은 평원에 불어온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몸을 침범했다.
나무가 꺾이고 갈대가 눕는다.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그 위협적인 바람에 잡초들이 메말랐다.
그야말로 위협적인 바람 그 자체인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뜬금없이 한 권의 책 제목을 떠올렸다.
[비행 기술의 원리와 응용]
'혹시 모르지. 자네가 태양 빛에 대해 아주 자세히, 가장 작은 단위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빛이 왜 발생하는지, 어떻게 빛이 우리에게까지 도달하는지,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등등?'
왜 그런 게 없다고 생각했을까.
지금 이 세계에는 없지만 수천 년 뒤의 미래에까지 없으리란 보장은 없잖아.
얼핏 살펴보았던 그 책은 그래프와 도식, 그리고 수많은 전문용어를 통해 바람과 공기, 그리고 중력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책, 그 책을 어디다 뒀더라?
맞아, 내 숙소! 거기에 침대 매트 밑에다가 숨겨 놨었지.
나는 헐레벌떡 숙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람."
뒤에서 앨리스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방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책을 꺼냈다.
미래의 기술 덕분인지 고급스러운 감촉의 책이 처음 가져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날 기다렸다.
사실 이 책은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지젤 선배, 또는 바바라를 주려고 했던 건데.
이게 또 이렇게 연결되네.
어디 보자.
책은 우선 '비행기'라는 것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요새이자 섬과 같은 물체였다.
수백 명의 사람을 허공에 띄우고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수백 톤의 물체.
전설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드래곤조차 이 정도의 인원을 자기 등에 태우고 날 수 없을 것 같은데.
더군다나 이 쇳덩이가 하늘을 나는 데에 한 톨만큼의 마나도 필요 없다고?
책은 천천히 비행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건 뭐지. 양력에 항력, 추력에 중력... 으으, 역시 내 머리론 이해하기 힘든 소리들이다.
그러니까 대충 저 날개처럼 생긴 쇳덩이가 한쪽은 평평하고 한쪽은 굴곡이 있다는 거지.
굴곡이 있는 곳은 공기의 흐름이 빠르니까 압력이 낮고, 평평한 곳은 공기의 흐름이 느리니까 높은 압력이 가해진다는 거고?
그러면 무슨 정리와 법칙, 그리고 방정식에 의해 힘이 발생하면서 비행이 가능하다는데 여기까지가 내 이해의 한계였다.
그 밑에 무슨 수식이라고 도형이랑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는데, 수식은 숫자가 나와야 하는 거 아냐?
왜 처음 보는 언어나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냐고.
어쨌거나 확실한 건 이 책이 공기와 바람, 그리고 흐름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아주 미세한 단위까지 쪼개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단 점이었다.
좋아. 일단 해 보자.
그렇게 나는 다시 숙소를 나섰다.
* * *
"라워드 군은 참 이상한 사람 같아."
"왜요?"
"그야 볼 때마다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렇지."
"이상한 짓이라뇨.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 아주 진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으어어허허, 진리... 음, 좋긴 한데 말이지...."
제이슨 씨는 뭐라 대꾸하기가 힘들었는지 말꼬리를 흐리며 실없이 웃었다.
난 진심인데.
하지만 이 상황을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하던 짓이나 계속하자.
나는 방금 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접던 종이비행기를 완성했다.
좋아. 어디 구겨진 곳은 없지. 그럼 던져 볼까, 흡!
앞으로 힘껏 내던진 종이비행기는 힘차게 위로 솟구쳤다가 천천히 활공하며 저 멀리 수풀 사이로 날아갔다.
"음, 확실히 날개 쪽을 살짝 굽혀 주니까 위쪽으로 더 높게 솟구치는구나."
역시 마탑이야.
연구를 위해 마련된 비싼 종이를 쓰니까 종이비행기가 훨훨 잘 날아간다.
그럼 이번엔 앞부분을 약간 무겁게 만들어서 속력을 올려 볼까?
아까 책에 나온 대로라면 공기의 속도가 더 빨라지니까 위로 더 높게 솟구치지 않을까?
어디 보자, 종이가, 종이가....
"저기, 라워드 군?"
"네?"
"사실 내가 온 이유는 항의가 들어왔기 때문이거든. 종이는 마탑의 자산인데 자네가 종이를 미친 듯이 낭비한다고 말이야."
아니 도대체 누가 누구더러 낭비를 한다고 지적질이지.
아무리 내가 오전 중에 한 120장 정도 비행기를 접어 날리긴 했지만, 다시 말하면 고작 종이 120장뿐인걸!
"세상에서 가장 연구에 돈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마법사란 족속 아닌가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한데, 지금 라워드 군 자네가 하는 행위엔 속하지 않지. 지금 자네가 하는 건 마법실험이 아니라 그, 이를테면 방탕한 짓? 일탈?"
아, 마법사들이여. 종이접기를 하는 게 방탕이고 일탈이라니.
마탑 속에서 당신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겁니까.
어쨌거나 이 오해는 풀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제이슨 씨를 붙잡아다가 공기의 흐름과 압력에 대한 기초 설명을 한 뒤 예시로 만들었던 종이비행기를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대충 설명을 듣는 것 같았던 제이슨 씨는 이내 흥미가 가는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후후, 라워드 군. 이게 우리 동네의 비전 종이비행기일세."
"아니, 날개가 네 개라니... 그건 마치 전설 속의 페어리 드래곤?!"
"나는 자네가 말한 굴곡을 상날개로 만들어 내고, 하단의 날개를 궁극에 가까운 수평으로 보조하겠네. 자, 자네의 턴일세!"
"큭,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제이슨 씨를 이길 만한 궁극의 종이비행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무려 열다섯 종의 비행기를 늘어놓았다.
"아니, 이건... 설마?!"
"네! 똑같은 비행기처럼 보이지만 무려 날개의 굴곡을 2도 단위로 수정한 녀석들입니다! 첫 번째 1호기부터 마지막 열다섯 번째 15호기까지!"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양치기를 할 셈인가?"
"후후, 정확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이죠. 자! 저는 이 열다섯 개의 종이비행기를 바구니에 넣고 날릴 예정입니다. 그럼 가장 강력한 녀석이 제일 높게 날겠죠."
"냉정하군!"
"실험을 위해서라면...! 자, 그럼 날아, 으억?"
한창 흥이 올라 바구니에 담은 종이비행기를 던지기 위해 창가로 가려던 때.
누가 내 뒷목을 잡아끌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누구... 아. 보리스 씨."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마탑의 큰형님인 보리스 씨였다.
툭 튀어나온 광대에 신경질적인 인상, 그리고 190에 달하지만 빼빼 마른 몸은 마치 그가 살아 있는 뼈다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 제이슨 씨를 바라보았고, 제이슨 씨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필 페어리 드래곤을 잡고 있는 손으로 말이지.
"내가 분명 종이 낭비를 말리라고 보냈던 것 같은데."
"으어허허, 형님. 이게 말이죠. 이게 진짜 마법 수련이...."
"밖에 가서 다 주워 와."
"...네."
우리 둘은 변명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그대로 마탑 바깥으로 쫓겨났다.
"크흠, 형님 거 참 너무하시네. 열심히 마법 연구하는 사람들을 구박하시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 그래서 깨달음은 얻었나?"
"마지막에 15호를 한 번에 던져 봤으면 더 정확했을 것 같긴 한데... 일단 뭐 하나 얻은 건 있어요. 될지 안 될지 모르겠는데, 한번 해 볼게요."
나는 천천히 주변 마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나라는 건 자연을 모방하기 위한 에너지라고 했지.
그렇다면 나의 앞쪽 마나를 빠른 속도로 흐르게 하고, 내 뒤쪽의 마나를 느리게 흐르게끔 한다면?
나는 그렇게 마나가 유동하는 순간을 노려 앞쪽으로 몸을 던졌고.
주변의 풍경이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압축되며 뒤쪽으로 순식간에 멀어졌다.
동시에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에게로 단숨에 덮쳐 오기 시작했고.
이내 내 몸이 부서질 듯한 충격이 났다.
쿵!
"으억? 이, 이봐, 라워드 군! 괜찮아? 라워드 군...!"
제, 젠장.... 지금 뭐가 어떻게....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제이슨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라워드가 검사란 얘길 들었으나 그 실력이 대단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나의 흐름을 읽고 써클을 생성하지 않은 채 마법을 쓴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상식 안에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기적이었다.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검을 휘둘러 봤자 얼마나 휘두르겠는가.
실제로 라워드의 몸은 검을 수련한 사람치곤 연약해 보였고, 가끔 발을 헛디디는 등 미묘한 실수를 연발할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방금 그 움직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발을 한 번 구른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쳐 버렸다.
마치 마나로 폭발시킨 공격 마법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날아가 버렸으니까.
라워드의 몸은 숲의 나무들을 완전히 박살 내며 150m를 날아가 바위에 그대로 처박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바로 정신을 잃어버렸고, 부랴부랴 뛰어온 제이슨이 그의 몸에 늘 상비용으로 가져온 포션을 부었으나 큰 차도를 보이진 않았다.
그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만일 그가 나무들을 부러뜨리지 않고 바로 바위에 박혔더라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제이슨은 포션을 라워드의 상처 범위에 모두 넓게 뿌려 놓곤 라워드를 짊어진 채 마탑으로 달려갔다.
이 정도의 상처라면 포션만으로 회복이 불가능했다.
안타깝게도 마탑엔 회복마법에 능한 사람이 없었으나 그래도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은 있었다.
제이슨은 급히 마탑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눈에 띈 어린 마법사를 불렀다.
"이봐, 얼른 가서 훔볼트 영감님께 연락해서 중환자가 생겼다고 해. 급히 와 달라고 하고."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8화
<58화 - I belive I can fly(2)>
"무식한 짓을 했더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마주한 건 털 망토를 뒤집어쓴 야생의 훔볼트 영감이었다.
가죽으로 거칠게 만든 옷과 단단히 동여맨 털신, 털장갑, 그리고 등과 허리 등에 단단히 매여 있는 수많은 무기들까지.
저건 화살통이고 저건 단검, 저건 손도끼인가?
영감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체 훈련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힘을 썼다지. 전신엔 화상과 타박상을 입었고, 두개골과 왼팔은 골절. 왼쪽 발목과 다리, 오른쪽 허벅지와 가슴뼈. 모두 작살이 나 살아 있던 것이 기적이었네."
참 신기한 게 정신을 차린 순간엔 고통이 하나도 안 느껴졌는데 영감님이 한 곳 한 곳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곳에서 통증이 살아났다.
그래서 지금은 온 전신이 아파 죽을 것 같다.
그러나 곧, 이런 모든 통증을 잊게 할 만한 충격적인 목소리가 들렸으니.
"30만 골드."
"네?"
"자네 치료비."
자, 자, 잠깐만, 얼마라구요? 30만?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고.
"으아아아아아아악?!"
"미쳤군."
그대로 뒤로 엎어져 고통에 신음했다.
미친, 개아파!
그때 알바트론이 영혼을 뽑았을 때보다도 더 아픈 통증이 온몸에 가득하다.
도대체 얼마나 다쳤던 거야.
"무, 무슨 치료비가 그렇게 비쌉니까. 최상급 포션 가격이라고 해 봤자 몇천 골드에 불과한데."
"엘릭서."
"네?"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지 않았나. 더 큰 기적이어야 살 수 있었지. 30만 골드는 기적의 가격일세."
"아니, 무슨...."
나는 침대 곁에 서 있던 다른 사람을 찾았다.
마침 제이슨 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제이슨 씨! 이게 정말입니까?"
"으음... 사실이야. 라워드 군, 자네 정말로 죽을 뻔했어."
아무리 그래도 30만 골드라니.
이거 바가지 아냐?
데온 크라피가 우리 가문을 망가뜨렸을 때 절망과도 같았던 빚이 1만 골드였지.
헬피온 공작이 나에게 투자했던 거금이 10만 골드였다.
헬피온 공작령같이 부유한 영지에 보유한 자금이 300만 골드인데 고작 포션 하나가 30만 골드라니.
어허허허.
내 생명이 30만 골드짜리가 되었구나.
"그래서 지불은?"
"그... 혹시 외상 됩니까?"
훔볼트 씨는 말없이 지긋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
저 눈빛은 지금 나한테 쌍욕을 하는 눈빛이다.
"그, 제가 헬피온 공작령의 참모장이거든요. 연락을 해서 돈을 달라고 하면...."
조금 치졸하지만 내 직위를 팔아먹자.
이 사람, 소드마스터 중급이라고 했지?
헬피온 공작이라고 하면 모든 검사들이 동경하는 롤모델인 만큼 말발이 좀 먹힐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어 보았으나 훔볼트 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자가 붙네. 한 달에 3천 골드."
단지 이렇게 말을 덧붙였을 뿐.
"...최대한 빨리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메시지 마법을 써서라도 헬피온 공작령에 최대한 읍소해 봐야겠다.
내 말을 들은 훔볼트 씨는 두고 보겠다는 듯 날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동네 양아치도 아니신데 왜 그렇게 무섭게 보십니까.
"가겠네."
아 참, 이 사람 훔볼트 영감님이지, 그냥 보내선 안 돼!
"어르신!"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내 방을 나가던 영감님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탈리오 마탑주 사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가 그때 일 없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마탑에 있으신 사람 중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시고...."
"셈? 나는 이미 오늘 널 살렸으니 됐다. 돈이나 준비해."
그렇게 훔볼트 영감님은 더 이상 내 부름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크으,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한 번 더 매달려라도 볼 텐데.
제이슨 씨는 영감님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몸은 어때?"
"죽을 것 같네요."
"그래도 영감님의 엘릭서는 효과가 좋지."
"겪어 보신 적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우리는 마탑이잖아? 마법실험을 하다 보면 가끔 크게 다치는 경우도 있어. 그럴 때마다 훔볼트 영감님이 우릴 치료해 주시거든."
"그때마다 30만 골드를 내나요?"
"으어어허허, 말했잖아. 우린 실험에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진 않는다고."
30만 골드면 좀 아까워해야 할 돈 같은데.
끙.
"혹시 헬피온 공작령으로 가장 빠르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메시지 마법은 상대의 수신 코드가 있어야 해. 혹시 아는 사람 있나?"
영지의 마법사라면 제이미 씨나 엘시아 부인이 있긴 하지만 메시지 마법의 수신 코드까진 알지 못하는데.
제이슨 씨는 대답 없는 날 보더니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단 스콰렛 공작령에는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 거길 통해서 헬피온 공작령으로 연락해야겠어."
"부탁드립니다. 저기 그... 한 달 안에는 답이 오겠죠?"
"답은 올 수 있지만 돈이 올지는 장담 못 하겠는걸."
그렇긴 한데... 와야죠.
안 오면 진짜 큰일 날 것 같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라워드 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에 그 감각.
그건 분명히 빠른 속도로 내 몸이 쏘아지는 감각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뛴다는 감각보다도 더 상위의 느낌.
그래.
책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말로 '비행'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어마어마했지."
"너무 과도하게 마나를 가속시켰나 봐요. 적정선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뭐? 이 짓을 또 할 셈이야?"
당연하지.
위험하긴 하지만 그만큼 정말 매력적인 힘이니까.
만약 이 속도와 힘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나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사방을 종횡무진하며 상대를 압박할 수 있게 되리라.
나만의 필살기가 완성되는 거지.
하지만 제이슨 씨는 건강이 더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너 그러다가 진짜 죽는 수가 있다."
"위험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조금씩 천천히 해 봐야죠."
"조심해. 30만 골드가 300만 골드 되는 거 진짜 금방이다. 인생 빚으로 훅 가는 수가 있어."
어쩐지 제이슨 씨의 조언에서 찐한 진심이 느껴지는데?
"혹시 경험자이신가요?"
"나는 아니고 내가 아는 선배의 이야기야."
"그 선배님은?"
"평생 마탑을 전전하며 연구 노예로 살아야 하지. 마탑을 나가는 순간 그 빚은 마탑의 몫이 아니라 선배의 몫이 될 테니까."
으으, 끔찍하군.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곤 몸을 뉘인 채 긴장을 풀었다.
통증과 함께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너무 무리했던 모양이었다.
"저는... 좀... 자다 일어날게요...."
"그래. 푹 쉬고, 수련은 일어났을 때 생각해 보자. 스콰렛 공작령 쪽으론 내가 편지를 보내 놓을게."
"그래 주신다면 고맙죠...."
나는 거기까지 대답한 채 깊은 수마에 몸을 맡겼다.
내가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완전히 병상에서 일어난 건 그로부터 이틀 후의 일이었다.
사실 일어나기만 했다뿐이지 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뼈마디 구석구석은 조금만 움직여도 비명을 질렀고, 몸 역시 완전히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해 조금만 무리를 하면 피로가 몰려왔다.
더 쉬는 게 맞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까웠다.
일단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고 무리가 되면 들어와 쉴까.
그렇게 꾸역꾸역 연무장에 도착하자 제이슨 씨가 멍한 표정으로 연무장에 앉아 있다 날 맞이했다.
"아, 제이슨 씨."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나온 거야? 너 그러다가 죽어."
아하하하, 죽는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신담.
"이른 시간인데 연무장에 계시네요."
"으어허허허, 스승님이 칩거하고 계시니 여유를 좀 부리는 거지. 안 그랬다간 나도 죽을 것 같거든."
하긴.
며칠 사이에 제이슨 씨의 다크써클이 좀 줄어든 것도 같다.
그런데 요령을 피우는 게 훈련을 하러 연무장에 나오는 거라니.
진짜 제이슨 씨, 마법사가 아니라 전사가 더 맞았던 거 아닐까?
"몸이라도 좀 움직여 보면 개운해질까 해서요."
"아이고, 무리하지 마. 며칠 아파서 앓아누웠잖아. 그런 상태에서 근육을 무리하게 쓰면 문제가 돼. 정 하고 싶으면 가벼운 스트레칭만 하고."
"저도 알지만 조급해지네요."
나는 내가 왜 연무장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생각의 과정을 제이슨 씨에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제이슨 씨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마법사들은 뇌를 마법근육이라고 불러. 뇌 역시도 꾸준히 훈련을 해 주고 깊이를 만들어야 한단 얘기지."
"마법근육이요? 그거 어쩐지 어감이 영 별로인데."
꺼림칙한 내 반응에 제이슨 씨는 피식 웃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때 우리가 종이비행기를 미친 듯이 접어 날렸잖아. 그때의 데이터와 마나 움직임 등을 정리하는 거지. 좀 꼰대 같은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그냥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보다 글로 쓰면서 정리되는 게 있는 법이거든."
하긴.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에도 교수님들이나 선배들이 저런 소리 많이 했었지.
단순히 머리만 쓰는 것보다 손을 쓰고 근육으로 익히는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나쁘지 않겠네요."
"아, 그리고 메모할 때 종이는 꼭 정해진 종이를 써야 해."
"정해진 종이요?"
"우리가 종이접기해서 날렸던 종이 있잖아. 그거 완전히 구겨진 채 해져서 다른 사람들은 못 쓰거든. 스스로의 일에 책임을 져야지. 한 300장 정도 있으니 여유롭게 종이를 쓸 수 있을 거야."
"...저 혼자 접은 게 아니잖아요."
"으어허허, 나도 똑같이 책임을 지고 있으니 억울해하지 말고."
제이슨 씨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주먹을 질러 댔다.
어째서인지 그의 주먹에 평소보다 감정이 실린 것 같았다.
그 대화 이후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내가 깨달은 내용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다.
내 깨달음과 의견, 그리고 데이터를 정리해 하나의 글로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카데미 시절 열중했던 공부도 생각나고 아카식 레코드에 처박혀 읽던 책도 생각난단 말이지.
참고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이나 논문도 읽었는데 이것도 무척 재미있었다.
제이슨 씨가 몇 년 전에 쓴 듯한 [써클보유자의 신체 활용을 위한 몇 가지 단상]이라는 논문부터 글레이시아 씨가 쓴 [유아를 위한 마법교육학 용어 정립 연구]까지.
논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무슨 연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알 것만 같았다.
내 글도 그럴까?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하니 글을 쓰는 것이 점점 즐거워졌다.
어설프게나마 마법 논문들을 참조해 참고자료도 넣고 주석도 달고.
심지어 표지도 그럴듯하게 만들어 집필자 라워드 고르뎀 하고 내 이름을 박아 넣었다.
후후, 이 정도면 대충 보면 진짜 논문인 것처럼 보이겠지?
내용도 내가 썼지만 상당히 그럴듯했다.
자료와 자료를 교차하다 보니 의외로 과학 논문 속에서 바람과 비행에 대해 다룬 이야기들이 많더라고.
그것들을 조합해 어떻게 하면 내 기술을 다듬을 수 있을지 그런 이야기들을 쭉 정리한 거지.
제이슨 씨의 말이 맞았다.
깨달음과 여러 정보를 조합해 정리하다 보니 그 기술을 어떤 식으로 연습하고 활용해 보아야 할지 감이 좀 잡힌다.
단지 혼자 연습하기엔 또 한 번 부상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네.
앨리스에게 수련을 도와달라고 부탁해 볼까?
저번에 연무장에서 본 움직임이 무척 날렵했었지.
어쩌면 내가 속도를 주체 못 해 허우적거려도 커버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고 들어가야지.
이걸로 약 40매 분량의 원고구나.
나중에 제이슨 씨에게 부탁해서 이걸 따로 책으로 엮어 달라고 해 볼까.
나는 그렇게 원고들을 대충 정리해 쌓아 둔 뒤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만약 내가 아주 약간 흥에 겨워, 했던 일련의 작업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훗날 이때의 부주의함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9화
<59화 - I belive I can fly(3)>
마법 사회에서는 공인 써클과 비공인 써클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수련을 하다 깨달음을 얻어 각성을 하면, 5써클이 될 경우 그 마법사는 비공인 5써클로 칭해진다.
이 마법사가 마법 사회에서 공인받기 위해선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한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즉 7써클 마법사는 총 7번의 논문을, 8써클의 마법사는 8번의 논문 수라장을 헤쳐 나온 백전용사인 셈이다.
탈리오 마탑의 텔마는 비공인 5써클 마법사로 공인 마법사 논문 발표를 세 번이나 미끄러졌다.
5써클의 깨달음치고는 무게가 너무 가볍고 논리가 빈약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통상 마법사는 두 번 정도의 논문 발표 실패를 겪는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마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마탑 입학 1년 만에 5써클을 달성했지만 논문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는 네 번째 논문을 준비하며 한 달 동안 하루 두 시간 이상 잠든 적이 없었다.
매일매일이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오늘도 그는 평소처럼 도서관에서 자신의 논문 완성을 위해 책상에 머리를 박아 대고 있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바람의 개념을 연속된 공간으로 이해하고, 바람과 바람 사이의 공간 중 임의의 공간을 마법의 수행자가 제거하면... 제거하면... 으아아아아아아! 제거하면 그냥 없어지는 거겠지 개자식들아아아아!"
쿵,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도서관을 울렸다.
주변 사람들이 텔마를 힐끗 바라보았으나 곧 신경을 껐다.
저런 풍경은 어느 마탑을 가더라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니까.
"으어, 논리적으로 말이 되면 되잖아! 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법에 대해서 근거 자료를 가져오라고 하는 거야! 내가 처음 만든 마법인데 연구사가 있을 리 없잖아! 개자식들아아아아아!"
한참을 절규하던 텔마는 마른세수를 한 차례 하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욕한들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 논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마탑의 지저분한 도서관을 배회하며 비슷한 소리를 한 논문의 구절을 아무렇게나 배치해 근거라고 우겨야 했다.
텔마는 광대까지 내려온 다크써클을 한 채 흐릿한 눈으로 도서관 구석부터 책을 꺼내 읽고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도서관을 배회하던 텔마의 눈에 꼬깃꼬깃 구겨진 듯한 종이 다발이 들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40페이지가량의 종이는 마치 오랫동안 방치되어 관리가 되지 않은 듯 엉망진창이었다.
'[마나의 다중 공간 배치를 활용한 고속이동 연구]...? 처음 보는 글인데. 라워드 고르뎀? 어디서 들어보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누구더라. 유명한 마법사인가? 이름이 익숙한 것 보니 고써클 마법사 같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텔마는 자신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려 마나와 공간, 그리고 고속 이동이 아닌가.
어쩐지 이 글에는 자신의 갈증을 채워 줄 정보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 대, 대박이다...! 어떻게 이런 혁신적인 생각이? 우, 우와! 실험 결과를 이런 식으로 도식화할 수 있단 말이야? 이거라면 한눈에 알 수 있게 데이터를 뽑을 수 있겠어. 마나에 이런 성질이 있다니, 이거라면, 이거라면...!'
텔마는 혹여 글이 사라지기라도 할까, 종이 뭉치를 들고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종이뭉치에 적혀 있는 글은 마치 던전에서 발굴한 고대의 아티펙트와 같았다.
자신의 논문에서 부족한 지점을 어찌나 핵심만 쏙쏙 골라 설명해 놓았는지.
무려 한 달을 고생시켰던 논문이 고작 두 시간 만에 완성되는 거 아닌가.
"으어어아아아아앙!"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로 한바탕 괴성을 쏟아 낸 텔마는 자신을 도와준 소중한 고문서를 끌어안았다.
어쩐지 고문서치고는 잉크가 아직 덜 마른 것처럼 생생했고 종이의 재질도 좋았지만 지금의 텔마에겐 그런 사소한 건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알아도 모른 척했다는 것이 더 맞으리라.
한 달이나 자신을 속을 썩였던 논문이 완성되는데 이깟 문서의 진위 여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혹시나 싶어 고문서에서 옮겨 적은 문장에 모두 라워드 고르뎀이란 출처를 확실히 적어 두었으니 표절 의혹을 받을 일도 없었다.
텔마는 고문서에 대한 예의를 갖춰 문서들을 원래 자리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뒤 자신의 논문을 들고 스승을 찾았다.
그러나 하필 탈리오 마탑주는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채 연구실에 칩거 중이었다.
"제이슨. 이 논문에 스승님 도장 좀 찍어 주라."
"그래도 되겠어?"
"벌써 네 번이나 고쳐 쓴 논문이잖아. 어차피 스승님은 내용을 다 알고 계신걸. 논문 마감이 얼마 안 남아서 지금 빨리 보내야 해."
"뭐, 괜찮겠지. 표정 보니까 이번엔 통과할 자신이 있나 봐?"
"후후. 자신이 없다. 떨어질 자신이."
그렇게 텔마의 논문은 여러 가지 주먹구구의 과정을 거쳐 제국마도학회로 배달되었다.
그로 인해 탈리오 마탑과 마탑주, 그리고 텔마와 라워드 고르뎀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이 당시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으리라.
* * *
"그럼 다시 갑니다."
나는 목검을 든 채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마나를 움직였다.
핵심은 내 신체 바깥의 마나를 섬세하게 조작해 최적의 마나값을 찾는 것이다.
나중에 종이비행기를 통해 실험한 데이터를 정리하다가 알게 되었지.
내가 그날 처박혔던 건 이를테면 폭포물 밑에서 양동이를 들고 물을 받겠다 기다린 것이었다.
당연히 폭포의 힘에 의해 양동이는 저 멀리 하류까지 날아가 버린 거지.
무한정 마나를 쓸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마나를 운용하다간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가 몰려든단 소리였다.
그러니 단순한 라이트 마법에도 광선검이 만들어졌던 거였지.
대충 완성된 것 같은데.
나는 긴장감을 잔뜩 끌어 올린 뒤 마나를 폭발시키며 몸을 날렸다.
무심한 듯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앨리스 씨의 모습이 단숨에 가까워진다.
"흡!"
목검에서 뻗어 나온 세 가닥의 희미한 선.
인식의 한계 언저리.
나는 그 세 선 중 하나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것은 이성이라기보단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찌른다기보다는 쏜다에 가까운 검격이 쏘아진다.
동시에 앨리스 씨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앨리스 씨를 꿰뚫던 선이 함께 일그러지며 진동하다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휘어졌다.
어차피 선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치.
나는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둘렀다.
퉁!
앨리스 씨는 보이지 않는데 둔탁한 타격음만이 연무장을 채운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연속으로 세 번의 검격이 오갔을 무렵.
세상이 일그러졌다.
급격한 움직임 탓에 주변의 마나가 일그러진 것이었다.
"으앗?"
내 몸이 또 멋대로 어딘가 날아가려던 찰나.
팔을 붙잡는 단단한 손길이 느껴지더니 이내 반대 방향으로 붕, 소리와 함께 던져졌다.
"으엇."
겨우겨우 어설프게나마 배운 낙법으로 몸을 굴러 일어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연무장 중앙에서 공기가 팡, 소리와 함께 폭발하며 바람이 사방으로 터졌다.
"네 번."
"이번이 최고 기록이죠?"
앨리스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계속되는 훈련에 그녀의 이마엔 옅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앨리스 씨가 보기에 몇 번 정도까지 연속으로 사용해야 실용성이 있을까요?"
내 물음에 앨리스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되물었다.
"어느 정도?"
"음... 소드마스터 초급을 기준으로 한다면?"
앨리스 씨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즉답했다.
"한 번."
"그걸로 충분할까요?"
"...처음, 아냐."
앨리스 씨가 들고 있던 목검으로 날 가리키더니 검을 무척이나 빠르게 휘둘렀다.
슉, 슈슉, 슉 하며 사정없이 목검이 파공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이내 가속도가 붙은 목검은 허공을 날아 연무장 구석에 툭,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다른 설명 없이 목검을 주워 든 앨리스 씨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확연히 느려진 속력이었으나 중간중간 한 번씩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검이 휘둘러지곤 했다.
"그러니까 숨기고 있다가 중간중간 섞어 쓰란 말이죠?"
앨리스 씨는 내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 눈... 익숙."
그러니까 익숙한 속도를 눈에 익게 한 후에 익숙하지 않은 속도가 잠깐씩 발현되게 함으로써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란 소리겠지?
앨리스 씨와 몇 번 훈련을 반복하다 보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좀 쉬죠."
그렇게 말한 나는 연무장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제이슨 씨를 찾아갔다.
그는 오늘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이슨 씨가 연무장에서 몸을 움직이길 멈추고 생각에 잠긴 것은 사흘째였다.
이론을 정리하고 왔더니 이러고 있더라구.
깨달음이 온 건가 싶어 물어봤는데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그냥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다 보면 뭔가 근질근질한 느낌이 들어 멍하니 보게 된다고 했지.
그 느낌이 뭔지 며칠 전의 나도 느껴 봤기 때문에 그냥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중이다.
"어, 어, 끝났어?"
"아뇨. 잠깐 쉬려구요."
"...소드마스터라는 건 정말 대단하네."
"앨리스 씨 말씀이세요?"
"응."
제이슨 씨의 눈은 자리에 앉아 쉬는 앨리스 씨를 끊임없이 좇았다.
"용병단 시절 소드마스터를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그런데 저 정도가 되니 몸 움직이는 게 차원이 다르구나."
어쩐지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조금 떨어진 듯했다.
"제이슨 씨의 무술도 훌륭하신걸요."
"에이, 나는 주먹구구에 불과하지. 마나를 각성하기 전 실력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불과했는걸. 지금은 더 엉망진창이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헬피온 공작령에서 아펠 집사장한테 들었던가?
깨달음이 눈앞에 온 시점에서 너무 슬럼프에 빠져 버리면 심마에 온다고 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제이슨 씨. 이건 입발림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거예요. 제이슨 씨가 훈련할 때의 모습, 정말로 멋져요. 실전적이란 생각도 들구요."
"글쎄.... 정말로?"
"네, 정말로요."
"하지만 참... 뭐라고 할까. 앨리스 씨는 라워드 군을 보조하라고 붙은 하녀라며? 하녀가 소드마스터일 정도면 난 쓰레기가 아닐까."
아뇨, 아닙니다.
그건 헬피온 공작령이 진짜 괴랄해서 그런 거예요.
소드마스터 초급 하녀?
헬피온 공작령에선 명함도 못 내밀죠.
거긴 소드마스터 중급이 집사장과 요리장이고 소드마스터 상급이 하녀장인걸요.
심지어 6써클 마법사가 식료품점을 하고 있어요.
그런 특이사항을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받아들이시면 안 된다구요.
내 설명을 들은 제이슨 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으어허허, 대단하네... 그럼 그 사람들은 왜 거기서 그런 짓을 하고 있대?"
"얼핏 듣기론 헬피온 공작에게서 목숨 빚을 졌다고 했어요. 저는 최근에 영지에 들어와서 잘 모르긴 한데... 앨리스 씨! 혹시 하녀장님이나 집사장님이 헬피온 공작령에 왜 근무하게 되셨는지 아시는 거 있으세요?"
어라, 이건 착각인가?
어쩐지 달밤인데도 불구하고 앨리스 씨의 눈이 반짝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앉아 쉬고 있던 앨리스 씨가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오더니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늘 매사를 귀찮아하던 모습이 아닌, 처음으로 엄청난 텐션의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궁금해?"
"어어, 응."
"네에."
우리는 어쩐지 그 기세에 압도당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헬피온 공작, 적 많아. 제국, 싫어해. 하녀장, 헬피온 공작이 마왕 퇴치 이후 공작을 암살하려 했다."
뭐라?
그 얌전해 보이고 교양 넘치는 하녀장님이 무려 헬피온 공작을 암살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도대체 왜?"
"하녀장, 거대 암살길드의 주인. 길드에 큰돈 들어왔다. 총력을 다해 암살 요청."
"보통은 아무리 큰돈이 들어와도 그 정도로 강한 상대의 암살 의뢰를 받진 않잖아요."
"특임대에게 납치. 인질. 어쩔 수 없었어."
와, 진짜.
특임대 이 녀석들은 안 빠지는 곳이 없네.
제국이 하는 일 중에 안 더러운 것도 없고.
"그래서 어떻게 됐죠?"
"하녀장은 몰래 잠입 성공. 심지어 칼, 찔렀다."
그 헬피온 공작이 하녀장에게 칼침을 맞았다고?
알고 보면 하녀장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난 고수가 아닐까...?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0화
<60화 - I belive I can fly(4)>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하녀장님이 죽었나요?"
내 질문에 앨리스 씨가 경멸 어린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무식한 질문이긴 한데, 그래도 생각이 그렇게 튀는 건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헬피온 공작에게 칼침을 놓았으니 말이야.
앨리스 씨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공작이 하녀장 제압. 뛰어난 실력. 인간끼리 싸울 때가 아니니 마왕을 함께 잡자고 제의."
"하녀장님이 공작님을 노린 건 인질 때문이라면서요."
"공작, 단신으로 제국 특임대 쳐들어가 인질 구출. 일주일."
"우와, 개멋져."
이건 내 감탄이 아닌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새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제이슨 씨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는 단순히 헬피온 공작이 강하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자가 되겠다고."
"아펠 집사장. 그렇게 왔다."
"체트록스 요리장님은요?"
"대결. 패배. 부하가 되겠다고."
그렇게 세 사람이 헬피온 공작의 부하가 된 거구나.
"그건 그렇고 앨리스 씨, 평소엔 매사에 아무 의욕도 없어 보였는데 오늘은 어쩐지 텐션이 높으시네요."
"하녀장 없어...."
엑.
설마 텐션이 낮은 게 하녀장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그리고 지금은 하녀장 이야기를 해서 텐션이 갑자기 높아진 거고?
"도대체 하녀장님이 앨리스 씨에게 무슨 의미예요."
내 질문에 앨리스 씨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나, 인질."
설마... 특임대에 잡혀 있었다던 그 인질이 앨리스 씨였어?
마왕 어쩌구 하는 얘기가 나온 걸 보니 적어도 13년은 지난 이야기잖아.
그렇다는 건 앨리스 씨가 아직 어릴 때 납치되었다는 건데, 앨리스 씨는 그때부터 하녀장님과 친분이 있었구나.
"하녀장 내 은인."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처음 보는 그 미소는 무척이나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다 쉬었어. 다시 훈련...."
물론 그 미소는 1초 만에 다시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의욕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앨리스는 다시 축 늘어져 매사 지친 표정으로 터벅터벅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이 마탑에 널려 있는 마법사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훈련을 재개하려고 할 때.
"라워드 군. 강한 사람 곁엔 강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거라고 했지?"
갑자기 제이슨 씨가 내 팔을 붙잡았다.
"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댔죠."
"네가 지금 연습하는 그 기술, 두 공간의 마나 흐름을 조절해 압력 차를 이용한다고 했잖아?"
"그랬죠."
"그거 흐름이나 압력 말고 마나 그 자체의 밀도나 농도의 차이도 있지 않을까?"
"아마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속도와 압력의 차이가 흐름을 만들어 낸다는 걸 안 건 세상의 법칙이나 상식을 잘 알아서 그런 게 아닌걸.
아카식 레코드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이 알려 준 걸 그냥 그렇구나 생각해서 시도해 본 거지.
"아냐, 분명 그래. 심장의 써클이 생겼을 때 마나 로드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거. 빨아들인다는 상식만 생각했지, 왜 빨아들이는지 알 생각은 안 했지. 만약 심장이 마나를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모여 있는 마나가 다른 마나를 빨아들이는 것이라면?"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제이슨 씨에게 필요한 건 대답이 아니라 그저 말을 들어 줄 사람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심장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심장의 마나만큼 마나를 모아 둔다면? 이를테면 원래 마나를 담아 두는 단전에다 말이지. 그래. 라워드 군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중단전과 하단전으로 나눠 생각해 보는 거야."
제이슨 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연무장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을 안 앨리스 씨가 말없이 자리를 비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거?"
"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저런 식으로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모습.
주변 사람들에게서 종종 보던 광경이었다.
깨달음이 분명하지.
"역시... 현자. 깨달음 줬네."
"이건 앨리스 씨의 옛날이야기 때문이니까 기여도가 반반 아닐까요?"
"역시 현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제이슨 씨의 몸에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장 언저리에서 맴돌던 푸른 기운이 천천히 제이슨 씨의 마나 로드를 따라 뻗어 나가더니 이내 단전으로 향했다.
"흡!"
제이슨 씨는 기합과 함께 마나를 단전 안에 묶어 두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원시적인 보조마법과 다름없었다.
그의 몸에 두 개의 마나 뭉치가 완성될 무렵, 제이슨 씨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말아쥔 주먹으로 허공에 정권을 지르고, 바로 연달아 오른발을 차올린다.
평소 제이슨 씨가 몸을 움직이는 것도 굉장히 위협적이었지만 지금 움직임은 그보다 훨씬 굉장했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연무장 전체가 울릴 정도의 강력한 파장이었다.
제이슨 씨의 마나 로드는 단전에서 시작되어 심장을 향해 움직이고, 다시 심장에서 단전으로 순환하며 점차 속력과 위력을 더해 갔다.
그와 함께 제이슨 씨의 몸짓 역시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손과 발을 위력적으로 움직이는 무술이구나 싶었던 것이, 마나의 흐름에 몸을 싣고 흘러가는 '무술'로 거듭나고 있었다.
제이슨 씨의 주먹이 몸을 순환하는 마나와 외부를 순환하는 사이, 마나의 결을 따라 선을 그렸다.
마치 헬피온 공작이 처음 검술을 보여 줬을 때 느낀 것마냥 전율이 일었다.
아름다운 한 개의 선.
나는 저 선을 알고 있었다.
한바탕 연무를 끝낸 제이슨 씨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더니 한껏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와 날 크게 안았다.
"으아아아! 라워드 군! 알았어, 알았다고!"
"축하드려요, 제이슨 씨. 깨달으셨군요."
"하하, 그래! 넘었어, 넘었다고! 아하하하, 이런 거였구나. 이렇게 쉬운 걸 내가 미련해서 10년이나, 아하하, 아하하하하!"
제이슨 씨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울었다.
"이게 다 라워드 군 덕분이야! 아, 진짜, 어떡하지? 이럴 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지? 아하하하하. 너무 오랜만에 경지를 넘은 거라 정신이 없어! 아하하하."
"방금 막 깨달음을 얻었으니 수습하셔야죠. 논문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녜요?"
나는 아펠 집사장 때나 나의 경험에 기반해 제이슨 씨에게 조언했다.
제이슨 씨는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 그래. 아무렴! 그렇지. 라워드 군. 깨달음을 10년 동안 못 얻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이번에 깨달으면 이렇게 글을 써야지. 이러이러한 내용을 써야지. 그런 헛된 망상이 계속된단 말이지. 심지어 그 글은 제목도 써 놨다구!"
아하하.
그 심정은 어째서인지 알 것 같다.
나도 아카식 레코드에 있을 때 여길 나가서 데온 크라피에게 복수를 마치면 쓸 자서전 제목과 내용을 구상하고 그랬거든.
"그래서 제목이 뭔가요?"
"신체활용비서!"
나는 마치 고장난 테엽인형처럼 온몸이 우뚝, 하고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뭐라고?
설마.
우연이겠지?
"마나를 활용해 신체의 움직임과 효율을 극대화하는 움직임이잖아? 그러니 신체활용비서라고 정했지! 으하하하, 좀 거창하지?"
우연이... 아니네.
제이슨 씨가 이야기한 내용은 내가 봤던 책에서 언급한 바로 그 내용이다.
그때 아카식 레코드에서 알바트론이 그랬지.
아카식 레코드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지식이 교차하는 곳이라고.
그렇다는 건 설마... 내가 처음 아카식 레코드에서 읽었던 그 책이 제이슨 씨가 내 도움으로 만들어 낸 책이었다고?
과거.
현재.
미래.
그 모든 것이 교차한 곳에서 지식이 만들어진 순간.
[아카식 레코드에 지식이 등재되는 순간을 목격했구나.]
머릿속에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고 나는 어느새 기록의 관에 도착해 있었다.
"축하해. 빨리 왔네."
"티아. 방금...."
"응. 별의 지식을 봤지?"
"별의 지식?"
티아가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튕겨 벽에 붙어 있는 화면 하나를 켰다.
그곳은 지혜의 탑.
처음 편지를 만났던 책장의 공간이었다.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될 정도로 위대한 지식을 별의 지식이라고 불러. 너는 전승자로서 별의 지식을 처음 보았기에 지식의 끝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거고."
"지식의 끝?"
"그래. 나도 직접 본 건 몇 번 안 돼. 진귀한 경험이지. 운 좋은 줄 알라구."
티아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그때 알바트론의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방 전체의 풍경이 변화했다.
* * *
화면은 흐린 날의 망망대해를 비추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육지의 조각조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넓은 공간의 중앙.
그곳에 갤리온 선박 다섯 척과 제이슨 씨가 있었다.
흰머리와 하얗게 바란 수염, 그리고 검버섯과 함께 주름이 난 얼굴까지.
제이슨 씨는 무척이나 나이 들어 보였지만 그 몸만큼은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선수에서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잔잔했던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깊은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흙이 해수면을 혼탁하게 어지럽혔고, 거대한 기세에 겁먹은 바다가 하얗게 부글거렸다.
이내 다섯 척의 배보다도 거대한 그림자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마치 바다 위에 솟구친 탑과 같았다.
바다 위에 세워진 건물처럼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알려 주고자 친히 강림한 재앙이었다.
씨서펜트.
크라켄과 함께 바다를 양분하는 인류의 절망이었다.
녀석이 만드는 그림자가 배 전체를 뒤덮었을 때.
"왔군."
제이슨 씨가 미소 지으며 전신의 마나를 움직였다.
단전과 심장, 그리고 더 나아가 뇌까지.
온몸에 골고루 나누어진 세 개의 마나 뭉치가 단숨에 회전하며 세상의 마나를 움직였다.
그것은 단순히 몸 안의 마나를 회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세상의 마나를 재구성하는 명령이었다.
제이슨 씨의 몸이 배를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가 박찬 배가 전복이라도 될 것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
씨서펜트가 거대한 소리로 울부짖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제이슨 씨의 주먹이 씨서펜트의 머리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정말로, 정말로 아름다운 선이었다.
후우우우우웅!
씨서펜트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도 남은 마나의 파장이 허공에 몰려 있던 구름들을 좌우로 흩어 놓으며 화창한 하늘을 만들었다.
머리를 잃은 씨서펜트의 시신이 천천히 바다에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해일이 배들을 덮쳤다.
선원들의 고함 소리와 배의 일부분이 우지끈하며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란 가운데에서 어느덧 배 위로 착지한 제이슨 씨가 제 주먹을 털며 투덜거렸다.
"어이구, 늙어서 그런가, 주먹이 예전 같지는 않군. 라워드 군이 보면 비웃겠어."
영상은 그렇게 제이슨 씨의 어처구니없는 엄살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 * *
"제이슨의 신체활용비서는 마법을 익힌 모든 이에게 희망이 되었어. 후일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마법사가 신체를 활용할 방법도 나오게 되고 말이야. 그야말로 마도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지."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티아가 날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서 라워드 군. 제이슨 씨는 자길 보면 라워드 군이 비웃을 거라고 했잖아. 비웃을 거니?"
"아뇨."
그럴 리 없잖아.
"그렇네. 감동을 받아 울음까지 터뜨린 사람이 비웃을 리 없지."
장난끼 섞인 티아의 말처럼 어째서인지 나는 제이슨 씨의 모습을 보며 울고 있었으니까.
제이슨 씨가 그린 선.
그 선을 본 순간부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거든.
10년 동안이나 남들이 앞서 나가는 동안 홀로 묵묵히 자기 길만을 팠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노력과 결실이 지금의 그가 있게끔 만들어 준 것이기도 하고.
아까 제이슨 씨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 모든 것이 내 덕분이라고 했던가?
아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제이슨 씨 스스로의 노력 덕분이다.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쪽은 나인걸.
나는 제이슨 씨의 주먹이 그렸던 그 아름다운 선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얼핏 헬피온 공작과 비슷해 보이지만 제이슨 씨가 이야기했던 모든 철학의 궁극 담긴 그 선.
나는 내가 왜 처음 헬피온 공작이 보여 준 저 선을 봤을 때 그 선을 따라하는 데 실패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늘 선을 따라 검을 휘둘렀던 것처럼 마나의 흐름을 따라 그저 검을 휘두르면 되는 거였지.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휘두른다.
훙,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이 허공을 갈랐다.
이건... 다르다.
저번에 어설펐던 움직임과 달리 분명히 손에 느낌이 있었어.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티아가.
"그래. 라워드. 그거야. 소드마스터의 문턱에 들어온 걸 환영해."
내가 문턱을 넘었다는 걸 알려 주었다.
* * *
그렇게 소드마스터가 되어 기록의 관을 나온 나는.
"이거군, 이거였어! 바로 이게 내 마법을 완전히 일그러뜨렸던 비밀의 정체였구나!"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는 탈리오 마탑주와 마주할 수 있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1화
<61화 -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1)>
"스승님?"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는 건 정말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제이슨 씨가 깨달음을 얻고, 내가 접속을 한 바로 그 순간 탈리오 마탑주가 나타난 듯했다.
"스승님! 으어허허, 이 불초제자가 벽을 넘었습니...."
"알고 있다."
탈리오 영감은 환희로 가득 찬 제이슨 씨의 말을 중간에 끊어 버렸다.
"네 마나가 요동치는 게 연구실에까지 전달되더구나. 네놈. 지금 네가 몇 써클인지 아느냐?"
"으어허, 당연히 4써클...."
"쯧, 머저리 같으니. 네 몸에서 느껴지는 건 5써클의 힘이다. 제대로 살펴보도록."
제이슨 씨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제가... 5써클?"
"그래서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내려왔지. 그런데 말이다. 못 느꼈느냐?"
"무, 무얼 말씀이십니까?"
"아주 찰나지만 마탑의 결계가 일순 거대한 힘에 의해 쓸려 나갔다. 마치 모래사장 위의 모래성처럼 말이지."
"그런 일이...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으어어허."
"쯧, 깨달음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더 큰 보물을 놓치는구나. 그래, 애송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마법을 부려야 이 거대한 마탑의 마법을 그렇게 지워 버릴 수 있는 게지?"
탈리오 영감님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낡은 두건이 둘러져 있음에도, 그 거대한 기세 때문인지 내 몸, 내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착각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묘하게 간질거리는 느낌이 내 머리와 가슴을 자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척이나 불쾌하고 싫은 기분.
그 기분을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몸 안을 제멋대로 헤집으려고 눈치를 보던 기운이 일순 씻겨 나갔다.
"어허?"
"정신마법을 또 쓰셨군요."
"뭘 한 거지? 어떻게 한... 오호라. 네놈, 소드마스터가 되었구나?"
영감님의 얘기에 앨리스 씨와 제이슨 씨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곳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제 말에 대답을 안 하시는군요. 정신마법을 또 제게 써서 정보를 얻어 내시려 하셨군요."
"또 이상한 것으로 핀트가 나가는구나. 8써클 마법을 단숨에 지워 버리는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그깟 정신마법 한두 번이 뭐가 중요하다고!"
역시 이렇게 되는군.
이 영감님, 저번에 비슷한 상황에서도 죄책감을 전혀 못 느끼는 모양이다.
내가 아카식 레코드에서 소드마스터로 각성하지 못했다면 또 똑같이 정신마법에 휩쓸려 아카식 레코드에 대해 무방비하게 나불거렸겠지.
그렇게 끌려가지만은 않으리라.
나는 강하게 나섰다.
"경고하겠어. 나한테 다시 한번 그딴 수작 부린다면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못 들을 줄 알아. 보아하니 연구실에 처박혔지만 결국 9써클에 들어가지 못한 모양인데."
"뭐라? 으하하하하하!"
탈리오 영감은 입꼬리를 좌우로 완전히 찢어 마치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웃었다.
영감을 중심으로 연무장 전체가 떨릴 정도로 거대한 힘의 파도와 압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네놈이 겁을 상실했구나! 스콰렛이나 헬피온의 위세를 업고 있어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느냐!"
"아니."
처음 헬피온 공작령에 도착해 참모장으로 대접을 받기 시작했을 때.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헬피온 공작이 내 뒷배가 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스콰렛 공작령을 거치고 특임대와 싸우며 알게 되었다.
"그런데 뭘 믿고 오만방자하게 군단 말이냐?"
"그야 당연히 나 자신."
인생은 나 스스로 싸워 이겨 나가야 한다는 것을.
"영감님은 절 쉽게 죽일 수 있겠죠. 소드마스터 중급을 단숨에 쓸어버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9써클은 고사하고 당신이 궁금해하는 건 그 무엇도 알지 못할 겁니다."
"허허, 으허허허, 으하하하하하하."
그는 내 경고에 미친 듯 웃어 댔다.
웃음에 담긴 기세가 워낙 살벌했던 탓에 앨리스 씨가 얼른 내 곁으로 자리를 옮겨 기세를 끌어 올렸다.
제이슨 씨도 날 돕고 싶은 눈치였으나 아무래도 탈리오 영감이 스승인 만큼 우왕좌왕했다.
그사이. 나는 영감의 웃음소리에 들어 있는 아주 미약한 불안감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내가 밀어붙일 부분은 그 한구석밖에 없었다.
"9써클."
뚝, 하고 탈리오 영감의 기세가 끊어졌다.
"거래를 합시다. 그럼 제가 가진 비밀을 알려 드릴게요."
"거래라."
그래, 거래.
아직 내 힘이 부족한 만큼 탈리오 영감에게 자존심을 세우며 마냥 들이받으면 내 손해겠지.
그러니 지금, 지금 이 상황에서 최대한 내가 얻어 낼 수 있는 건 얻어 낼 거다.
그런 내 의지가 통한 것일까.
영감님이 내뿜던 기세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어쭙잖은 내용을 거래랍시고 제시했다간 경을 치를 거다."
일단 1차는 성공인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제 첫걸음을 뗀 것뿐이니 아직까지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순 없지.
방금 전까지 영감님이 내뿜던 기세가 완전히 죽었을 때, 탈리오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그래, 원하는 게 뭐냐."
"바로 처리해 주시게요?"
"네놈 성격상 먼저 비밀을 말하라고 해도 입을 다물고 있을 것 같으니 빨리 치워 버리는 게 낫지."
정확히 보긴 했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워낙 고집스럽고 욕심 많은 모습을 보여서 그런 거 아냐.
나는 그렇게 속마음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 탈리오 영감을 따라 라그나 왕국에 왔을 때부터 생각하던 일이다.
"뇌옥요새 트팔로. 거기에 친구 한 명이 수감되어 있어요. 그 친구를 꺼내고 싶어요."
"뭐라고? 지금 뭐라 했냐. 뇌옥에서 죄수를 탈옥시키고 싶다고? 허 참."
그렇다.
바바라 드 팔세우스.
나는 그녀를 뇌옥에서 꺼내 주고 싶었다.
"그 말이 뜻하는 게 뭔지 알고 있기나 하냐? 지금 네 말은 왕국이 직접 관리하는 뇌옥에 내 영향력을 행세해서 왕국과 척을 지거나 빚을 지라는 말이다."
"그 빚이 9써클의 가치보다 중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내 비아냥에 영감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제기랄, 9써클, 9써클 노래를 불러 대는구나."
"하실 수 없으신가요? 제 조건은 그것밖에 없어요."
"크흥. 내가 못 한다고 한 적은 없다."
영감은 콧방귀를 끼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열흘 뒤. 네놈이 뇌옥에 면회차 방문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마. 거기서 사람을 빼 오는 건 네놈의 역량일 게야."
그게 무슨 소리람.
"제 거래 내용은 사람을 빼 오는 거지, 감옥 관광이나 보내 달라는 게 아닌데요."
"쯧, 거기까지 이야기를 대충해 둘 테니 데리고 나오란 말이다. 그날 공식적으로 뇌옥에서는 탈옥한 죄수가 없을 게야."
"가능한가요?"
"열흘 안에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야겠지. 간만에 왕실 놈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겠군...."
후, 대충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는 듯했다.
"흥이 다 식어 버렸군. 제이슨! 네놈의 성취를 확인해야겠으니 네가 날 즐겁게 해 줘야 할 것이야!"
"으어허, 제, 제가요?"
"그럼 여기에 네놈 말고 누가 나와 있냐! 따라와!"
제이슨 씨는 별달리 반항도 못 해 보고 구겨진 얼굴로 영감님을 바라보았다.
저게 대학원생의 비애인지 뭔지 하는 그건가.
"그러고 보니 애송아. 편지 작업은 제대로 되고 있는 거냐?"
아, 그 작업.
생각해 보니까 잊고 있었다.
요 며칠 너무 일들이 몰아쳐 대서 말이지.
"그거 그대로 만들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내가 쓴 편지를 그대로 책으로 엮는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냐!"
"말씀드렸다시피 그걸 그대로 책 만들면 저승에 계신 사모님이 저한테 달려와 멱살 잡을 만한 내용입니다."
이건 자존심이 걸린 부분이다.
그따위 엉망진창의 내용을 죽은 아내에게 바치는 책으로 내고, 글쓴이로 라워드 고르뎀이 떡하니 박힌다고?
차라리 날 죽여라.
내가 그따위 엉망진창 작업의 뒤처리나 하려고 델피 아카데미를 졸업한 줄 아나.
검술이나 마법 같은 곳엔 자존심을 안 세우지만 문학과 인문학의 경우는 다르지.
내가 당신보다 훨씬 더 배웠고 더 선배란 말씀이야.
"그래서 영감님과 사모님에 대해 설명해 줄 만한 사람을 찾긴 했는데 이야기를 듣는 게 어렵더군요."
"사람?"
"훔볼트 어르신이요. 약초꾼."
내 말에 영감님의 표정이 묘하게 변화했다.
마치 지금 여기에서 들을 거라 예상 못 한 이름을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네놈이 어떻게 그 작자를 알게 되었지?"
"제자 분들이 그분이라면 오랫동안 거래를 해 온 덕에 영감님의 이야기도 알 거라 추측하더군요."
"쯧, 이 녀석들이 게을러 빠져서 사담이나 하고 있었군. 하라는 연구나 논문 작업은 다 마무리되었는가 점검이 필요하겠어."
혹시 나 말실수를 한 거 아닐까?
제이슨 씨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든 거 보면 실수한 게 맞는 것 같은데.
글레이시아 씨.
보리스 씨.
이하 탈리오 마탑의 수많은 구성원 분들.
미안합니다!
"그렇게 찾아가 봤자 아무 말을 안 해 줄 텐데?"
"영감님도 어르신 성격을 잘 아시는군요. 하긴, 오래 봤다고 했지."
"꼭 그 사람을 찾아가야겠다면... 잠시 있어 봐라."
그렇게 이야기한 영감님은 순간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다시금 나타났을 땐 손에 펜던트 하나를 쥐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먼지 속에서 겪은 것처럼 잔뜩 낡아 버린 금색 펜던트로, 펜던트 중앙엔 조그마한 오팔이 박혀 있었다.
"이걸 가져가 영감에게 보여 주거라. 그럼 뭐라도 이야기를 해 줄 테니."
자기와 관련된 일에는 이렇게 선심 쓰듯 도와주기도 하는군.
정신마법이나 마법에 대한 욕심 같은 것만 없으면 참....
하지만 이제 와 당신에 대한 인식을 바꿀 생각은 없다.
힘이 생기면 꼭 복수를 할 테다.
"감사합니다."
나는 분노로 들끓는 속마음을 감춘 채 펜던트를 챙겼다.
이제 도구도 생겼겠다, 훔볼트 영감을 찾아가 이런저런 조언을 구해 볼까.
탈리오 영감은 용무가 끝났다는 듯 제이슨 씨를 데리고 특유의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끌려가는 제이슨 씨의 표정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는데, 그래도 날 위로해 주겠다는 건지 한 차례 씩 웃어 주긴 하더라.
정말 고마운 사람이야.
후. 일단 좀 쉴까.
나는 그대로 자리에 늘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서 있는 것도 버텨야 할 정도로 온몸의 기운이 빠진 참이었거든.
나 따위는 단숨에 압살할 수 있을 법한 8써클 마법사.
그런 사람에게 겁 없이 들이박았으니.
그렇게 마음을 좀 가다듬고 있었는데 앨리스의 표정이 이상하다.
"...."
평소 모든 것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은 없어지고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왜?"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드마스터...."
"네. 소드마스터 초급. 됐습니다."
"...남들만 각성시켜 주는 게 아니라 자기도 각성...."
"어, 뭐, 네. 그렇게 됐네요."
"치사...."
네, 뭐라구요?
아니 이게 뭐가 치사해.
나 혼자만 각성했어?
제이슨 씨 각성시켜 주고 그 과정에서 보답처럼 각성한 거 아냐.
하지만 앨리스 씨는 억울한 내 심정 따위 아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연무장을 떠났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걸음걸음마다 짜증이 조금 배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소드마스터 초급이었지.
혹시 질투하나?
에이, 설마. 아, 모르겠다.
지금은 저런 작은 투정을 신경 쓸 정도로 정신이 여유롭지 못하다.
탈리오 영감의 일을 처리하는 것부터 훔볼트 어르신을 만나는 것, 그리고 트팔로에 갇혀 있을 바바라까지.
바바라. 곧 가서 꼭 널 구해 줄게.
그렇게 의욕을 다졌던 것도 잠시.
다음 날. 나는 헬피온 공작령에서 온 편지를 받아 들고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말았다.
[미안하네, 참모장. 자네의 생명값이라면 30만 골드가 아니라 100만 골드라도 얼마든지 지불할 의향이 있네.
그만큼 자네가 우리 영지와 영지민들에게 해 준 공이 크니 말일세.
하지만 지금 영지에는 그만한 현금이 존재하질 않네.
전쟁으로 인한 부산물을 처리하고 용병들의 공에 맞게 포상금을 지급하느라 가진 자금의 대부분을 다 사용해 버렸네.
오죽하면 몬스터 판매를 상인들에게 위탁하고, 수익이 발생했을 때 판매 대금의 7할을 받는 위탁 판매까지 진행하고 있는 실정일세.
현명한 티타니아와 참모진의 의견으로는 여유자금 30만 골드를 유용하기 위해선 적어도 3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듯하네.
그때까지 이자와 함께 31만 골드의 자금을 마련해 보낼 터이니 가급적 훔볼트라는 사람과 잘 논의해 상환 시기를 조절해 보게.]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2화
<62화 -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2)>
으아아아아!
하필이면 일이 이렇게 꼬이냐.
잊고 있었다.
전쟁의 후처리 과정에서 외부 상단이나 귀족들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헬피온 공작령의 이득을 극대화하려고 했지.
덕분에 헬피온 공작령 창고에 모아 두었던 자금을 투자 개념으로 펑펑 써 버렸단 말이야.
30만 골드라는 거금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비싼 가격으로 이자를 부른 만큼 돈을 갚는 게 늦어진다고 해서 못 기다릴 사람은 아니겠지만....
나는 손에 든 펜던트와 편지를 바라보았다.
채권자와 채무자 상태에서도 제대로 된 옛날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잘못하다가 영감님에게 신체 일부를 썰리는 건 아니겠지.
여러모로 걱정이 늘었다.
* * *
나는 오후가 되자마자 마법사들이 알려 준 대로 마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진 작은 오두막에 찾아갔다.
첫인상은 정말 전형적인 사냥꾼, 그리고 약초꾼의 집이었다.
그런데 바깥에 걸려 있는 약재 저거, 만드라고라 아냐?
그리고 벽면에 방풍을 위해서 걸어 둔 가죽, 저거 그리즐리 베어 같은데.
가죽의 상태를 보아하니 상처도 없고 단칼에 배를 갈라 죽인 듯했다.
전형적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어마어마한 곳이네.
"누구냐."
그때, 오두막 안에서 훔볼트 영감님이 걸어 나왔다.
"넌."
"아하하,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빚을 갚으러 온 건가."
제가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서요.
돈 얘기를 계속 끌고 가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나는 탈리오 영감이 준 펜던트를 꺼내 훔볼트 영감에게 보여 주었다.
"그 펜던트는...."
펜던트를 꺼내자마자 훔볼트 어르신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오, 반응이 있구나.
영감님, 감사합니다.
"탈리오 마탑주님이 이 펜던트를 보여 드리면 옛날이야기를 해 주실 거라고...."
그런데 어르신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눈이 점점 벌겋게 충혈되고 몸이 조금씩 떨리는 게, 저거 빡친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이놈, 탈리오! 다 늙어서까지 이 몸을 조롱하는구나!"
훔볼트 어르신이 눈썹까지 솟구칠 정도로 거세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 이 미친 탈리오 영감탱이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으아아아아! 탈리오오오오오!"
정제되지 않은 분노와 살기가 마구 뒤섞여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훔볼트가 좌우로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훔볼트 영감의 주먹이 오두막 바깥의 거대한 고목을 두들겼다.
팡.
나무를 두드렸는데 나무가 마치 가죽 터진 것처럼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미쳤다.
방금 저 사람 맨손으로 그냥 가볍게 두드린 거 아냐?
검을 든 것도 아니고 온몸을 저렇게 단련했다고?
아무리 봐도 저 정도의 위력이면 소드마스터 중급이 아닌데.
이 아저씨, 소드마스터 상급 아냐?
"자살이 취미...?"
오죽하면 호위 겸 따라왔던 앨리스 씨가 단검을 꺼내 든 채 한심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나 역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헬 파이어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대비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훔볼트는 자신의 분노를 천천히 다스렸다.
"어르신...?"
"후."
이내 완전히 분노를 가라앉힌 훔볼트 어르신이 살벌한 기색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들어오도록."
* * *
오두막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더 좁고 황량했다.
가구와 소품이고는 침대 하나와 약제를 조제하기 위한 책상과 약탕기, 몇 개의 플라스크가 고작.
대신 집안을 가득 채운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초들이었다.
저건 만드라고라고, 저건 태양의 꽃, 저건 뭐지, 마수의 내장을 말린 것 같은데.
"대충 앉지."
그렇게 말한 훔볼트 영감은 딱 하나 시약 조제용 의자에 걸터앉았다.
우리는 어디에 앉으라고?
그렇게 허둥지둥하고 있자니 앨리스 씨는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침대 위에 그냥 걸터앉아 버렸다.
자기 혼자 앉냐, 나 혼자 뻘쭘하게.
"펜던트."
"네?"
"다시 내놔 봐."
나는 허겁지겁 펜던트를 꺼내 훔볼트 어르신한테 건넸다.
어르신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펜던트를 차근차근히 살피기 시작했다.
"세야의 것이 맞군."
"세야...라고 하시면?"
"여동생."
훔볼트 어르신은 이내 펜던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눈을 감고 양미간을 구겼다.
순식간에 짙은 피로감이 내려앉은 듯한 표정이었다.
"왜 탈리오 영감님이 어르신 여동생의 유품을... 아, 설마? 어르신이 탈리오 영감님의 형님?"
"남자 보는 눈이 없었지."
그러게요.
진짜 더럽게 없었네요.
그렇게 맞장구치고 싶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기 싫어 입안으로만 삼켰다.
"그래. 날 도발해서 뭘 듣고 싶었지?"
도발까지 하려던 건 아닌데요....
나는 훔볼트 어르신을 찾아온 이유와 과정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왜 편지를 쓰게 됐는지까지 이야기가 이어졌고, 그러다 보니 헬피온 공작의 이야기까지 닿게 되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으나 훔볼트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곤.
"엿 같은 이야기군."
방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이제 와서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척이요?"
"내가 보기에 녀석은 동생을 괴롭히던 악질 스토커나 다름없었다."
"...네?"
결국 나는 방 안에서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어르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었다.
* * *
탈리오 영감탱이, 편지만 보아선 센 척하는 악질 욕쟁이 할아버지인데 현실은 찌질하기 그지없는 쫄보에 불과했다.
마법 경연대회에서 세야라는 분에게 졌던 그 날.
그때부터 탈리오 영감은 타도 세야를 외치며 절치부심하고 마법수련에 힘썼다.
그렇게 1년 뒤.
마법대회에 참여한 탈리오는 세야 씨를 만나지 못했다.
세야 씨는 전년도 마법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니 다시 나올 이유가 없었거든.
그리고 누군가 말했지.
범재가 죽어라 노력하는 만큼 천재도 죽어라 노력을 한다고.
범재의 노력은 천재의 노력보다 가성비가 안 나와 노력하는 천재를 이길 수 없다고.
세야 씨도 자신의 수련을 위해 절치부심 노력했고, 탈리오 영감보다 더 순수한 목적인 탓에 하늘이 감동한 것일까 무려 5써클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공식 5써클로 인정받기 위해 논문 작업에 착수하느라 칩거 생활에 들어간 것이다.
탈리오 영감은 세야 씨의 그러한 행보가 자신을 견제하고, 자신을 모욕하기 위한 것이라고 우겼다.
단지 그 정도뿐이었다면 자신이 낭비해 버린 1년에 대한 울분 정도로 웃어넘길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탈리오 영감은 적당히를 몰랐다.
제국으로 넘어가 포르타민 마탑으로 쳐들어가 한창 논문 작업 중이던 세야 씨의 연구실 앞으로 찾아갔으니 말이다.
잔뜩 신경이 예민해져 있고 작업으로 피폐해져 있는 세야 씨에게 다시 마법대결을 펼치자고 무려 한 달을 농성했단다.
* * *
"그래서요?"
"분노한 세야는 녀석을 그야말로 박살 냈지. 탈리오는 그때 고작 4써클 마스터에 불과했거든."
"그 뒤, 다시 안 옴...?"
앨리스 씨가 드물게 눈을 반짝거리며 이야기에 흥미를 드러냈다.
"그 무식한 녀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야를 찾았지. 그러다가 일이 벌어졌네."
"일이요?"
"논문작성과 소음, 주변 마법사들에 대한 미안함... 여러 가지 요인으로 결국 세야가 스트레스를 받아 쓰러졌었지."
"저런...."
"그래서 난 녀석을 때려죽이기 위해 유니텔로 마탑으로 찾아갔네."
...이 아저씨 진짜 성격 더러우시네.
나는 슬그머니 훔볼트 어르신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 * *
만약 상대가 탈리오 영감 혼자였다면 훔볼트 어르신이 단매에 죽일 수 있었으리라.
그 당시 훔볼트 어르신은 이미 소드마스터 초급의 벽을 깬 상태였다니까.
그러나 어르신이 찾아간 건 탈리오 영감이 아니라 유피텔로 마탑이었다.
자신들의 촉망받는 제자를 죽이겠다고 달려든 검사를 놔둘 마탑이 어디 있겠는가.
마탑은 훔볼트 영감을 진짜로 딱 죽기 직전까지의 상태로 만든 뒤 조롱이라도 하듯 포르타민 마탑에 전송시켜 버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 가는 호흡을 겨우 이어 가는 반 시체덩어리가 포르타민 마탑의 입구에 전송된 그 날.
포르타민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의 눈이 뒤집혔다.
다음 날 새벽.
아침이슬을 맞으며 헐레벌떡 탈리오 영감이 포르타민 마탑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당연히 포르타민 마탑의 사람들은 분노했다.
단숨에 죽여 시체 덩어리를 유니텔로 마탑에 던져 버리겠다고 울부짖었을 정도이니.
그중 가장 분노했던 사람은 당연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야 씨였다.
친오빠였던 훔볼트 어르신의 상태를 보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그렇게 일촉즉발의 순간.
탈리오 영감이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물론 말로만 사과가 가능했을 리 없다.
영감은 목숨을 걸고서 유니텔로 마탑에 단 세 개밖에 없다는 비전 포션을 훔쳐 왔다.
탈리오 영감은 이제 다시 유니텔로 마탑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거기에 덧붙여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두 눈을 뽑았다.
* * *
"그, 그럼 영감님의 두 눈이...."
"그래. 그것이 사죄의 대가였어."
"포르타민 마탑은 그 사과를 받아들였나요?"
"손해 볼 게 없었지. 아니, 오히려 이득이었지. 유니텔로에서 촉망받던 신인이 그들을 배반하고 포르타민 마탑에 붙었다. 얼마나 자극적인가. 서로를 라이벌로 여겼던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통쾌감을 주었지. 심지어 비전의 포션까지 훔쳐 왔으니까."
"아...."
"그러나 단 한 명. 세야만큼은 탈리오를 용서하지 않았어."
* * *
세야 씨는 눈이 먼 탈리오 영감을 지독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우연인 것처럼 발을 걸거나 등을 밀거나, 먹을 것을 엎거나....
그런 유치한 장난이 몇 주를, 몇 달을, 그리고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탈리오 영감은 자신의 죗값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그 괴롭힘을 감내하였다.
그런 삶이 계속되는 게 문제였다.
사람 관계를 잘 모르고 마법에만 매진했던 두 사람은 몰랐을 것이다.
세상에는 미운 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훔볼트 어르신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비밀스럽게 쌓아 온 이야기였으니까.
그로부터 10년 뒤.
7써클을 달성한 탈리오는 포르타민 마탑을 떠나 제 이름을 딴 마탑을 세웠다.
마탑주 탈리오.
부마탑주 세야.
경비원 훔볼트.
세 명의 단출한 인원으로 탈리오 마탑이 탄생했다.
원래는 100명 넘는 제자를 거느려야만 가능한 마탑의 설립이었지만 7써클 마법사 두 명의 위세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탄생을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다.
가장 아끼던 제자가 비전을 도둑질해 도망쳐 마탑의 명예에 먹칠을 당한 이들.
유니텔로는 무려 10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모욕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탈리오 마탑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 방문한 것은 다섯 명의 6써클 마법사와 두 명의 7써클 마법사였다.
압도적일 거라는 그들의 예상과 달리 전투의 양상은 탈리오 영감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유니텔로 측에선 단순히 눈먼 7써클 마법사만 해치우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마탑주인 세야가 완숙한 7써클 마스터인 것.
그리고 세야의 오빠가 소드마스터 중급으로 마탑주의 경비를 자처하고 있단 것을 몰랐다.
결국 그들은 6써클 마법사 세 명, 7써클 마법사 한 명을 잃고 물러났다.
결과적으론 대승이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전황이 불리하자 7써클 마법사 중 한 명이 비상시를 대비해 가져온 8서클 소닉 트위스트의 마법서를 찢은 것이다.
음속을 넘는 속도의 날카로운 회오리바람이 일었고, 바람의 칼날은 단숨에 세야의 몸을 난도질했다.
그렇다.
그들은 탈리오를 죽이진 못하였으나, 이 모든 일의 근원이었던 세야를 죽이는 것에는 성공했다.
유니텔로 마탑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세야의 죽음이 두 남자를 지옥 끝으로, 파멸로 내몰았으니까.
세야가 죽고 탈리오는 그야말로 광인이 되었다고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방에 욕을 하는가 하면, 미치광이처럼 하루 종일 울기도 하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무리할 정도로 몸을 혹사하며 마법 연습에만 몰두했다.
동생의 죽음에 좌절한 훔볼트 어르신이 탈리오를 찾아간 건 세야의 죽음 이후 반년 뒤.
탈리오 영감이 강해지기 위해서 정신마법이란 금기를 범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3화
<63화 -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3)>
"...이게 다 뭔가."
"연구 자료."
훔볼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탈리오가 연구 자료라 이야기한 것은 몬스터의 것으로 보이는 뇌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플라스크 속 녹색 액체엔 뇌뿐만이 아니라 심장, 그 외에도 괴수들의 장기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그 장기들은 어떤 짓을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살아 있었다.
"미친놈."
"뻔한 소리나 지껄이러 왔나?"
훔볼트가 악문 이빨 사이로 으득,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내가 방문한 건 동생의 유품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큭, 이제 와서? 그녀가 죽은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는데?"
"나는 나대로 동생을 애도하고 슬픔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큭큭, 웃기는군."
"뭐?"
웃긴다는 말이 단순한 수사는 아니었는 듯 탈리오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잖아? 솔직히 이야기해 보자고. 네가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처박혀 있던 건 두려웠기 때문 아냐?"
"내가 두려워한다고? 무엇을?"
"유니텔로."
탈리오가 툭, 하고 내뱉자 훔볼트가 움찔거리며 긴장했다.
그 기색을 느낀 탈리오가 훔볼트를 비웃었다.
"슬픔을 추슬러? 지X. 너는 그냥 무서웠던 거야. 그걸 슬픔이란 말로 피했던 거고."
"그건...."
훔볼트가 뭐라 이야기하려 했으나 탈리오는 듣지 않고 고함질렀다.
"비겁한 새X!"
탈리오의 고함이 그의 연구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미쳤냐고? 그래! 미칠 수밖에 없었지. 그래야 복수를 할 수 있으니까! 그 개 같은 새X들에게 힘을 보여 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 엿 같은 정신마법까지 익히는 동안 널 뭘 했지? 그래 놓고 유품을 가지러 왔다고? 꺼져!"
그런 탈리오의 공격에 훔볼트는 견디기 힘든 모욕감을 느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훔볼트는 마법이, 그리고 유니텔로 마탑이 두려웠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동생이 고작 종이 한 장을 찢은 것만으로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절명했다.
세야가 누구였던가.
무려 7써클 마스터의 대마법사였다.
그런 그녀를 단숨에 죽인 8써클 종이 쪼가리의 존재는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탈리오의 고함은 훔볼트가 그때 느꼈던, 그가 꽁꽁 숨겨 두었던 무력감과 치욕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훔볼트의 반응 역시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네가 하는 일이 뭐지? 6개월 동안 미친 짓에 몰두하는 거? 그래서 복수를 끝내고 나면 뭐가 남나? 정신마법을 눈치챈 제국마도학회 감찰단의 사망 선고? 거창하게 자살이라도 할 셈인가?!"
"꼬리를 만 개가 될 바에야 미치광이가 되겠어! 설령 내 영혼을 팔아 리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네 미친 짓에 동참해 줄 여력은 없다! 세야의 유품을 내놔!"
"유품을 주면 네놈은 그걸 들고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세상 누구도 세야를 잊어선 안 된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질 사람이 아냐. 줄 수 없다."
"주지 않겠다면 힘으로 가져가겠다."
"크크, 가져가겠다고? 네깟 놈이?"
훔볼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두 주먹에서 푸른 권강이 넘실거렸다.
동시에 이를 가는 탈리오의 발밑으로 초록빛 마법진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그대로 격돌했다.
* * *
"녀석의 말이 맞았어. 나는 꼬리를 만 개였고 탈리오에게 형편없이 깨졌지. 유품은 구경조차 못 했지."
거기까지 과거 이야기를 마친 훔볼트 어르신은 잠시 입을 다문 채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이 오팔 위를 스쳤다.
"그런데 이렇게 얻게 되는군. 편지를 엮어 책을 쓴다고 했나?"
"네."
"편지라. 그런 짓도 하고 있었군. 25년이라. 세월을 잊고 살았는데 그만큼이나 시간이 지났군. 녀석은 하루하루 세월을 세며 살고 있었던가."
"모르셨습니까?"
그는 피식 웃었다.
"무엇을. 편지? 아니면 25년? 어느 쪽도 몰랐네. 그 이후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으니까."
"약재를 납품하고 계셨잖아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었어. 납품이라기보다는 그냥 물건을 거기에 놔두는 것에 불과했지."
"떠나지 않았던 건 유품을 위해?"
어르신은 앨리스 씨의 질문에 대답을 주저하다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것보단 겁먹었던 나 자신 때문이겠지. 미련이랄까, 후회랄까. 뭐라 대답하긴 어렵군. 어쩌면 떠나는 것조차 무서워졌는지 모르지."
훔볼트 어르신의 시선이 날 향한다.
"이 정도면 이야기가 됐나?"
"네, 감사합니다."
나는 어르신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며 일어났다.
그렇게 집을 떠나려는 때.
훔볼트 어르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고맙네. 25년 만에 받게 된 유품일세."
* * *
방으로 돌아온 난 탈리오 영감님이 주셨던 편지를 하나둘 찬찬히 읽어 보았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눈과 거취까지 포기하고 걸인으로 살았던, 그리고 광인조차 되길 주저하지 않았던 영감님.
아카식 레코드와 9써클에 대한 열망, 정신마법에 대한 무신경함 등은 다 그 결과겠지.
[그 시답잖은 잔소리가 없어지니 내 연구가 좀 시원하게 진행되는구만. 나는 곧 7써클의 벽을 뚫을 것 같아. 자네는 죽었으니 더 이상 경지를 못 올라가겠지? 저승에서 약 좀 오르고 있겠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편지 속에서 영감님이 이야기하는 시비조의 욕설들 속에는 지독한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와 비통함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속마음을 감춘 채,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고 그런 스타일이라고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법한 문장을 놔두는 게 맞을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이야기해야만 전달되는 진실이 있다.
게다가 영감님, 이게 죽은 지 25년 동안 꾸준히 써 왔던 글이라며.
그렇다는 건 25년 동안 한 번도 진심을 이야기해 본 적 없다는 거 아냐.
연애 스토리를 들어 봐도 그럴듯한 사랑 고백 한번 해 봤을 것 같지 않고.
그래.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제대로 전달해 주자.
무엇보다 이 책. 탈리오 영감과 세야 씨.
두 사람 외에도 읽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편지를 고치기 시작했고 열흘이 지나서야 연구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어설프게 엮은 한 권의 초고를 들고서.
* * *
"다 완성되었다고?"
"네."
"흥, 뭘 거창하게 할 게 있다고 그만큼이나 시간이 걸린단 말이냐. 하기 싫다고 게으름 부리며 뻗댄 거 아니냐?"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책을 펼쳤다.
"뭐야. 왜 책을 펼친 거지?"
"마나를 통해 사물은 파악하시지만 글자를 제대로 읽진 못하시죠. 지금부터 읽어 드리겠습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하, 네놈이 이젠 쓸모없는 짓을...."
"당신이 없는 침대에서 홀로 잠에서 깨는 것도 3개월. 나는 당신이 없다는 사실 하나로 매일매일 어제보다 조금 더 미쳐 가고 있소. 아마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미쳐 있을 테지."
영감님의 투덜거리던 목소리가 뚝 하고 끊어졌다.
"내가 당신을 위해 두 눈을 바쳤을 때. 내 삶은 시야를 잃었을지언정 더 찬란해졌지. 오롯이 당신 덕분이었소.
미움으로 시작된 장난은 점차 하루의 일과가 되었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말 속에서 어느덧 애정이 자라는 것을 느꼈다오.
그러나 지금 내 세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소. 나는 이제 막 실명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매일을 더듬거리오.
당신이 나의 빛이었소."
단순 욕설처럼 보이는 영감님의 편지엔 패턴이 있었다.
[자네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드세서 매번 내 성질을 긁어 놓곤 했지.]
"당신의 목소리는 행여 내가 듣지 못할까 걱정되었는지 언제나 크고 올곧게 와닿았지."
[자네와의 시간을 떠올려 보면 늘 지겨운 하루가 계속되었네. 마법 연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 토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걷거나 사담을 나누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게 유익한 시간이었을까?]
"당신과 보냈던 하루를 늘 곱씹는다오. 특별할 것 없었던 사소한 잡담, 함께 걷던 길의 풍경. 그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 선명하오."
영감님의 편지 속 세야 씨는 늘 영감님에게 대화를 걸고, 함께 걷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마도 세야 씨가 떠올라 그리울 때마다 펜을 들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내가 쓴 책의 내용을 낭독했다.
그리 짧지 않은 글이었으나 탈리오 영감은 묵묵히 선 채로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죽은 것도 벌써 25년이 흘렀구려.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늙기만 했지. 복수도 하지 못했고 꼬인 인연도 해결하지 못했지.
내 삶에서 앞으로 진전되는 건 당신을 향한 그리움과 그때마다 쓰는 편지밖에 없는 것 같아. 그만큼 나에게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이번에는 내 마음을 담아 책 한 권을 선물해 보려 하네.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만나세. 오랜만에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겠군.
사랑하는 세야에게.
탈리오."
책을 덮은 뒤 고개를 들어 탈리오 영감을 쳐다보았다.
영감님은 턱을 타고 떨어진 눈물들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나는 조용히 책을 영감님에게 내밀었다.
영감님은 한 손으로 책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은 뒤, 다른 한 손으로 책의 표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완전히... 다시 썼군."
"소설을 좀 썼죠. 영감님 글은 전혀 못 써먹을 거라."
"망할 놈. 내가 이런 말을 했더냐?"
"말은 안 하셨죠."
대신 편지의 행간에 꾹꾹 눌러 담아 놓았지.
"젠장,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고."
"마음에 안 드시면 가져갈까요?"
"크흥."
코를 한 번 훔친 영감님은 슥슥 눈물을 닦고는 몸을 돌렸다.
"고생했다. 가도 좋아."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들은 격려의 말이었다.
영감님은 특유의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나올 쯤, 문 너머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 * *
나는 또 한 권의 책을 들고 마탑을 나섰다.
영감님의 편지 내용들을 보면서 이 내용들을 꼭 훔볼트 어르신에게도 보여 주고 싶었거든.
25년 동안이나 탈리오 영감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고 했지.
이 책을 통해 훔볼트 어르신이 탈리오 영감을 완전히 이해하고 용서할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어르신의 동생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얼마나 그리움의 대상인지 등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가볍게 길을 나섰던 거였는데.
내 목을 꿰뚫는, 아니 완전히 찢어발기려는 듯한 불길한 선이 한순간 나타났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린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몇 바퀴 땅을 구르다 겨우겨우 자세를 다잡았다.
급히 헬 파이어를 꺼내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날린 흙먼지 속에서 한 차례 만난 적 있는 검은 기운이 음습하게 넘실거렸다.
"크흐, 크흐흐흐흐, 크흐흡, 크흐. 세상에나, 그 애송이가 이렇게 날 애태울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처음 들었을 때보다도 더욱 탁하게 쉰 목소리.
앨리스 씨의 독 때문인지 거뭇거뭇하게 죽어 있는 피부.
덜렁거리는 오른쪽 소매.
그리고 왼쪽 손에 든 검에서 춤추듯 넘실거리는 불길한 검은 기운까지.
"룸펜 하운드. 아니, 헬 하운드라는 말이 더 맞겠군."
"지옥견이라. 그거 좋지. 크흐흡, 이 몸이 말이다. 네 그 쌍판때기를 갈아 버리려고 지옥에서 올라오셨거든."
룸펜 하운드의 상태는 정말로 처참했다.
눈은 완전히 돌아 있었고, 채 다물지 못하고 비틀린 입가에선 조금씩 침이 흘렀다.
더군다나 제멋대로 움찔움찔 경련하는 그의 얼굴 근육은 룸펜 하운드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줬다.
그야말로 광인이었다.
"여기 있는 걸 용케도 찾았군."
"용케라. 크흐흡, 그래. 용케지."
저벅저벅 하는 소리와 함께 룸펜 하운드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에게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주변에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나무가 쓰러지고 땅이 파였다.
그 파괴적인 기세에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몰랐지. 헬피온 공작령의 참모장 나으리가 팔자 좋게 마탑에서 논문이나 쓰고 있을 줄은 말이지."
"논문?"
"학회에 보고된 논문에서 네 이름을 찾았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크흐, 아주 죽겠더군, 씨X."
학회의 논문에서 뭐 어쨌다고?
그렇게 한참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룸펜 하운드의 눈에서 소름 끼치는 안광이 번뜩였다.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왔지. 크흡, 크흐흐. 네놈을 찢어발겨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말이야아아아아!"
절규에 가까운 고함과 함께 룸펜 하운드가 나에게로 쇄도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4화
<64화 -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4)>
밤을 불러오는 장막처럼 룸펜 하운드의 검기가 허공을 뒤덮었다.
피하지 않아.
헬 파이어의 검신에서 거대한 불꽃이 피어올랐고, 나는 그 검을 앞으로 쏘아 냈다.
콰아아앙!
검과 검이 만들어 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소리가 숲을 울렸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폭풍 속에서, 나는 룸펜 하운드를 찾아 몸을 날렸다.
"죽어어어어어어!"
룸펜 하운드의 검이 뱀처럼 쇄도해 온다.
검을 쳐 내고, 쳐 내고, 쳐 내고.
반복되는 공방 속에서 빈 공간으로 선이, 그리고 그 뒤를 뒤따라 내 검이 쇄도했다.
"크흡, 크흐으."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룸펜 하운드는 위태위태해 보이는 몸짓으로도 정확히 내 검을 쳐 내며 치명상을 피했다.
그러나.
"왜냐! 왜 닿지 않는 거냐!"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건 룸펜 하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왼손에서 펼쳐지는 그의 검은 무척 어색했다.
제대로 된 조절이 되지 않는 듯 검의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으며 한 번 검을 휘두르면 균형을 잡지 못해 몸이 조금씩 기우뚱거렸다.
살짝 풀린 눈동자도 잠깐잠깐 나를 놓쳤고, 그때마다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자잘한 상처가 그의 몸에 늘어났다.
"왜! 왜 맞지 않는 거냐아아!"
그의 절규를 들으며 확신했다.
이길 수 있다.
아니, 무조건 이긴다.
헬 파이어의 손잡이부터 솟구친 거대한 화염이 화르륵 하며 불길을 키웠고 그와 내 사이를 갈라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버러지 주제에, 나는, 나는!"
버러지라.
확실히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나라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와 다르다.
무엇보다 난 지금 가진 힘을 전부 발휘한 것도 아니거든.
"으아아아아아!"
피를 토하는 절규와 함께 룸펜 하운드의 몸 전체에서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솟구치며 넘실거렸다.
마치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전설 속 거대 괴수 히드라를 보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뱀과 같은 기운이 사방을 채찍처럼 내리쳐 박살 낸다.
저 불길한 기운은 더 이상 검기라 부를 수도 없는 것 같았다.
기운을 발한 순간 녀석의 눈에선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
아마 저 기운은 시전자의 몸에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그롸아아아아!"
룸펜 하운드는 더 이상 사람의 말이 아닌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아주 날카롭게 다듬어진 살의가 날 찌를 듯 노리고 있다는 것을.
그래, 끝내자.
나는 몸 전체에 마나를 강하게 회전시켜 신체가 나갈 길을 만들었다.
보인다.
내 검이 룸펜 하운드까지 날아갈 수 있는 흐름이.
느껴진다.
그곳으로 날 이끌어 줄 바람이.
나는 그대로 발을 굴렀고 주변의 풍경이 단숨에 멀어진다.
그와 날 가로지르던 불꽃을 가르며 단숨에 녀석에게 쇄도했다.
"아---니---?"
녀석의 눈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급히 날아온 녀석의 기운들을 몸을 비틀어 피한 후.
벤다.
툭.
"으, 으, 으아아아아아!"
룸펜 하운드의 검과 함께 다른 한쪽 팔이 떨어졌다.
동시에 헬 파이어의 불꽃이 사냥감을 포착했다는 듯이 단숨에 절단된 팔과 룸펜 하운드의 몸, 두 곳에서 솟구쳤다.
잘린 팔은 10초도 채 되지 않아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흐, 흐, 흐어."
룸펜 하운드는 더 이상 고통에 울부짖거나 괴성을 내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
죽음을 직감한 것일까.
그가 허탈한 듯 읊조렸다.
"고작 한 달 못 본 사이에 소드마스터가 되어 있었군... 이 얼마나 불합리한 재능인가...."
동시에 그의 몸을 둘러싼 불꽃이 몸집을 몇 차례나 키웠다.
훙, 하고 불어온 바람에 얼굴을 잠시 팔로 막았다 내렸을 때, 그곳엔 다 타 버린 재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불어온 바람이 그 잿더미조차 흩어 놓으며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천천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꿈에서까지 나왔던 녀석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이기는구나.
불합리한 재능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나는... 그 힘과 재능으로 타인을 괴롭히고 목숨을 뺏는 것만 생각하던 당신이 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요. 제 재능보다 더."
내 승리는 나 혼자만의 승리가 아니다.
검술을 가르쳐 준 수많은 사람의 도움.
그리고 신체활용비서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는 데 아낌없었던 제이슨의 도움.
그리고 필살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알려 준 앨리스의 도움까지.
모두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
후, 감상은 여기까지만 하자.
얼른 훔볼트 영감님께 드리려고 했던 책을 가져다드려야지.
나는 그렇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이 필살기 잘 통하네. 뭐라고 이름을 붙일까.
바람의 길? 바람의 흐름? 윈드로드?
어떤 이름이 필살기다우려나.
* * *
"쯧쯧, 제국의 종자들의 욕심은 정녕 끝이 없군."
탈리오는 방금 전까지 라워드와 잿더미가 있던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마탑 지근거리에서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려 나온 것이다.
검은색으로 넘실거리는 기운.
그 기운을 보자마자 녀석이 제국의 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겁도 없이 마기를 다루는 족속들이 제국 말고 또 있을 리 없었으니까.
자신이 정신마법을 썼다고 투덜거리는 라워드에게 콧방귀를 낀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제국과 싸우는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그 제국은 정신마법 따위 가볍게 비웃어 줄 짓거리를 멀쩡하게 하면서 제국마도회 같은 기만을 하고 있다고.
그러나 탈리오가 그런 치기 어린 소릴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굳이 고르라면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지금도 굳이 전투에 나서지 않고 방관하지 않았나.
'고작 한 달 못 본 사이에 소드마스터가 되어 있었군... 이 얼마나 불합리한 재능인가....'
탈리오는 아까 그 미친놈이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가 처음 본 라워드는 여러모로 어설프고 불균형했던 소드 익스퍼트에 불과했다.
그런데 잠깐 연구실에 들어가 있던 며칠 사이 단숨에 소드마스터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것만 해도 어처구니없는데, 다른 놈들 같으면 깨달음을 수습하니 뭐니 정신없을 시간 동안 하는 게 고작 소설 놀음이라니.
그렇기에 깨달음을 수습하고 제 몸을 확실히 관조하란 의미에서 전투를 방관한 거였다.
물론 위험하면 언제라도 뛰어들 준비를 하고 말이지.
그런데 이 녀석은 마치 자기를 세상의 상식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듯, 소드마스터 중급의 실력자를 손쉽게 이겨 버렸다.
지지 않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려 마기 아닌가.
인간이 손에 넣으면 본신의 능력보다 1.5배가량 힘을 발휘하는 대신 정신이 타락한다.
심지어 마기에 몸이 잠식되면 방금처럼 영혼을 노리고 있던 악마가 영혼을 회수해 간다.
그런 의미에서 헬 파이어는 마기를 가진 존재들에게 천적이었다.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여기 있다고 지옥에 알람을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뒷정리나 해야겠군."
탈리오가 손짓하자 주인을 잃고 바닥에 놓여 있던 검이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검이 손에 닿자마자 마치 정신마법을 당했을 때처럼 불쾌한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쯧, 어딜."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탈리오가 기운을 발하자마자 기운은 단숨에 사라졌다.
'사념이 강해 마검이 된 겐가.'
평범한 검을 마검으로 바꿀 정도의 마기라.
제국이 마기를 연구하긴 하지만 이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는데.
무언가 변수가 있었으리라.
아마 헬피온 공작령 근처에 있었던 마왕성도 그 영향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검은 아닌가.'
무려 마기를 품은 소드마스터 중급의 애병이었다.
그 마기를 견디고 헬 파이어 같은 보검과 맞부딪쳤는데도 날 하나 상하지 않았다.
아티펙트 수준의 명검이었으니 마기와 결합해 희대의 마검이 되어 버렸다.
그냥 세상에 내놓았다가는 혈겁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신마법에 내성이 있는 라워드라면?
분명 이런 검조차 제대로 다룰 수 있으리라.
'눈앞의 보물도 못 알아보는 녀석이라니.'
탈리오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지팡이로 바닥을 툭, 하고 찍었다.
단순해 보이는 움직임이었으나 그로 인해 유동하는 마나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탈리오 마탑이 있는 라그나 서부의 숲.
그곳의 모든 생기와 마나를 재배열하는 대마법으로, 탈리오 마탑과 훔볼트의 오두막까지를 세상과 떨어뜨려 절대공간 속으로 은둔하는 마법이었다.
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준비 기간만 10일이나 걸렸다.
그마저도 이전에 한 번 마법이 구동되었던 전력이 있어 단축된 기간이었다.
이걸 단숨에 깨 버리는 힘이란 대체.
그렇게 한숨을 쉬며 투덜거리는 탈리오의 기감이 확장되었다.
바깥의 공기가 단절되고 사위가 자신의 마나로 가득 찬 것이 느껴졌다.
마법이 제대로 시전된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엔 혹시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깨지더라도 자동수복이 될 수 있게 몇 가지 수를 써 뒀다.
'그건 그렇고... 녀석이 라워드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로 학회 운운을 했던가?'
혹시 자신이 칩거해 있는 동안 고 애송이 녀석이 논문을 발표라도 한 걸까.
자신의 눈앞에서 1써클 마법을 발현했었지.
녀석의 재능과 특성이라면 1써클 마스터 따위는 금방 달성했을 것이고, 그 겁 없는 녀석이라면 공인 1써클을 따기 위해 논문을 썼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글 실력은 꽤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탈리오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검이나 괴상한 힘 같은 건 녀석의 영역이겠으나 마법만큼은 제 영역이었다.
제깟 놈이 아무리 용을 써 봤자 어설프기 그지없는 논문일 게 분명했다.
그걸 가지고 녀석을 골려 준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최근 며칠 동안 녀석에게 휘둘린 데다 한심스럽게 눈물까지 흘리지 않았나.
더군다나 이렇게 뒤처리까지 나섰으니 그 정도의 즐거움은 괜찮으리라.
탈리오는 나중에 낭패가 된 라워드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콧노래가 나올 것 같았다.
'얼른 돌아가 봐야겠군.'
그렇게 마탑으로 향한 탈리오는 몰랐으리라.
학회에 발표된 것이 라워드의 논문 따위가 아니라 제 제자의 논문이었음을.
라워드는 단지 각주에 들어 있었고, 제가 칩거한 탓에 그 각주를 걸러 내지 못했음을.
그 탓에 제국의 마도학회에서 라워드의 이론이 돌풍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라워드를 노린 자객이 온 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란 걸.
지금의 탈리오가 알 수는 없었으리라.
그 모든 사태를 파악한 탈리오가 난감한 표정으로 제자 모두를 모아둔 채 고성을 지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세 시간 뒤의 일이다.
* * *
"...고맙군."
훔볼트 어르신은 말없이 한참을 읽던 책을 덮었다.
탈리오 영감과 달리 눈물을 흘리진 않았으나 연신 움찔거리는 턱과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보면 감정적으로 약간 격양되긴 한 모양이었다.
"도움이 되실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알려 주고 싶었어요. 세야 씨는 탈리오 영감한테 정말 사랑받으셨고, 세야 씨도 영감님을 엄청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스토커라고 했던 어르신의 걱정과는 다르게 말이죠."
"오지랖이 넓군."
"제 장점이죠."
내 넉살에 훔볼트 어르신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만나고 처음 보는 미소였다.
"그래. 이걸 보여 준 이유는 그게 다인가?"
"혹시 탈리오 영감님의 편지가 30만 골드 정도의 가치를 가질...."
"그럴 리 없지."
"...수는 없겠죠. 아하하. 그럼요. 아무렴요."
쳇.
한 번에 두 가지의 일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그건 역시 무리인 모양이다.
그렇게 툴툴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훔볼트 어르신이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있게."
응?
그렇게 잠깐 대기하고 있으려니 집 안에서 무언가 뒤적거리며 찾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집안에서 나온 훔볼트 어르신의 손에는 묘한 색의 포션통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건?"
"자네가 먹었던 엘릭서."
"헉? 30만 골드!"
내 생명을 구해 줬던 포션이 저거란 말이지.
누렇기도 하고 푸르딩딩하기도 한데, 냄새도 뭔가 비린내가 풍기는 듯했다.
재료를 짐작조차 못 하겠네.
정신을 잃었을 때 마시길 잘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가지게."
으억, 잠깐만요. 그 비싼 걸 던지면 어떡합니까?
나는 두 번 정도 병을 놓칠 뻔하다가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까딱 잘못하면 30만 골드의 빚이 60만 골드로 뻥튀기될 뻔했잖아.
"탈리오의 편지? 책? 그깟 건 30만 골드가 아니라 3골드도 필요 없네. 하지만... 내 인생값이라면 다르지."
"인생값이요?"
"책을 읽으며 생각했네. 탈리오 녀석의 말대로야. 25년. 그 기간 동안 녀석은 끝없이 세야의 생각을 하며 제 실력을 쌓았지. 내가 졌어. 세야가 내 동생이지만 나는 그 정도로 세야를 그리워하진 않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저 과거의 나한테 매여 있었던 것에 불과해. 그러니 이제 모든 걸 포기해야지."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급히 어르신의 팔을 붙잡았다.
"어르신. 세상은 아름답고 삶은 찬란한 법입니다."
"무슨 헛소리인가?"
"생을 끊기엔...."
"쯧쯧, 나이도 젊은데 노망이 들었군."
아니, 그렇게 한심한 표정으로 보실 것까진 없잖아요.
나는 뻘쭘한 표정으로 어르신의 팔을 잡던 손을 놓았다.
"이곳에서 사는 걸 관두겠다는 이야기야. 내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어르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꼿꼿하고 고집스럽던 그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묶여 있던 모든 족쇄가 단숨에 풀려 버린 죄수처럼.
그래서 나는 어르신에게 제안했다.
"헬피온 공작령으로 오시죠."
그도 그럴 것이 완숙한 소드마스터 중급의 실력자인데 엘릭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고급 약제사이기도 하다.
이런 인재는 잡는 게 당연하잖아.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5화
<65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1)>
"이곳에서 사는 걸 관두겠다는 이야기야. 내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어디로 가실 건가요."
내 질문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목적지를 정해 두시진 않으셨군요."
"3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만 살았네. 그전에도 세야의 곁에서 그냥 검만 수련했지.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몰라."
"헬피온 공작령으로 오시죠."
"헬피온이라. 마왕을 잡았던 그 검사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이죠. 어르신도 좋아하실 겁니다. 타인에게 속박당해 사셨으면 이제 스스로를 위해 사셔야죠. 여러 전사들과 교류하시다 보면 상급도 금방 도달할 수 있으실 겁니다."
"상급이라."
훔볼트 어르신의 목소리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듯했다.
마치 자신은 상급을 추구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고 보면 25년 전, 세야 씨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쭉 중급이라고 하셨지.
정말로 훔볼트 어르신은 그때부터 수련을 완전히 그만두셨던 것이 아닐까?
"나 같은 퇴물이 그런 곳에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퇴물이라니 무슨 말씀을.
지금 헬피온 공작령에 도착하는 순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가 되실 텐데요.
어디 보자. 체트록스 요리장이 분명 완숙한 중급이라고 했지.
셰리나 하녀장이 상급이고.
그렇다면 거의 넘버 쓰리네.
"어르신에게 한 차례 설명드린 적 있을 겁니다. 제가 지금 제국과 싸우고 있다구요. 어르신 정도의 강자가 더 필요합니다."
"제국이라. 포르타민 마탑이 있던 곳이군. 그 정도의 강자들과 싸워야 하다니, 자네도 고된 길을 걷는군."
"아하하...."
"알았네."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 나이스!
"감사합니다."
"간다고 하긴 했으나 내가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도움, 도움이라...."
어르신이 몇 번이나 입 안에서 도움이란 단어를 굴리는 것을 보아하니 도움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드는 듯하셨다.
나는 그런 어르신을 뒤로하고 마탑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구나.
이것 봐.
오지랖을 부린 게 아닐까 걱정한 것과 달리 정말로 든든한 아군까지 생겼잖아.
훔볼트 어르신, 잠깐잠깐 보여 주는 무예의 수준이 장난 아니었지.
분노에 차 휘두른 주먹으로 고목을 터뜨릴 정도였으니까.
후후후.
이렇게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 * *
"쯧, 미안하네."
탈리오 영감님이 마지못해 한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듣고 싶었던 사과였는데, 정작 사과를 듣는 난 넋이 나간 상태였다.
"지금, 뭐...라구요?"
"자네의 이름이 논문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
"어째서요?"
"쯧, 다시 설명해 주랴?"
"아니, 설명해 주신 내용은 알겠어요. 텔마라는 분이 제가 적어 놨던 낙서를 진짜 논문인 것처럼 착각해서 인용했다는 거잖아요. 그 논문을 발표했는데 덕분에 전 세계 마도학회에서 제 존재를 알게 되었고 문의까지 넘쳐난다고요."
"여기, 마탑을 통해 자네를 찾는 서신들일세."
영감이 내민 건 편지가 잔뜩 들어 있는 상자였다.
얼추 보아도 수십 통은 쌓인 듯했다.
"이게 무슨...."
"그만큼 애송이 네놈의 이론이 혁신적이었다는 소리지."
탈리오 영감은 이내 한 권의 책으로 엮인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그것은 내가 도서관에서 적었던 [마나의 다중공간 배치를 활용한 고속이동 연구]였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공간과 떠나고자 하는 공간의 마나 밀도를 조절해 가속도를 붙이는 방식이라. 확실히 미치광이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더군."
"그 미친 생각에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 겁니까?!"
"마법사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미치고 싶어하는 자들이니까 그렇지. 생각해 봐라, 요놈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불꽃이 타오른다. 이걸 제정신 박힌 사람이 생각이나 하겠느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건 그냥 제가 생각한 단상을 메모한 것에 불과한데요...."
"쯧,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 게 아니냐."
탈리오는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구석에 박혀 있는 텔마 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작고 왜소해 보이는 체구였는데 저러고 있으니 엄청 심약해 보여 타박하기 께름칙하네.
"라워드 군, 미안해."
더군다나 저 논문의 합격 도장을 대리해 찍어 준 제이슨 씨까지 저렇게 의기소침해 있으니 원.
텔마 씨뿐 아니라, 아무래도 제이슨 씨가 끼여 있으니 마음 놓고 화를 내기도 어렵다.
신체활용비서로 날 도와준 은인이잖아.
제이슨 씨, 이걸로 은원은 갚은 셈 칩시다.
"네 말대로 단순히 이 책만 놓고 보자면 주장도, 논리도, 결론도 어설프기 그지없어. 당장 이 기술을 네가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지."
"어라, 제가 거기 적혀 있는 걸 사용할 수 있다고 영감님께 얘기한 적 있던가요?"
"쯧, 닥치고 말이나 계속 들어. 그런데 문젠 이 책에서 가장 그럴듯한 부분을 잘라 논문 속에 인용했단 게야. 그것도 네 주장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하긴, 논문이라는 게 그렇지.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자기가 필요한 문장들을 사방팔방에서 떼어다가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다 보니 논문에서 인용된 이야기들은 헛소리여도 그럴듯해 보이는 효과가 있거든.
문제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헛소리를 한 사람이 나란 거다.
후.
나는 상자 더미에서 편지 몇 장을 꺼내 읽었다.
[존경하는 탈리오 마탑주님. 귀하의 마탑에서 발표한 공간과 마나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에 라워드 고르뎀이란 분의 이론은 혁신에 가까운 방식이었습니다. 하나의 마법 안에서 두 개의 공간을 나누고 밀도를 달리한다니요. 그분에겐 현자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법 논문이 발표된 수많은 학회지를 뒤져 봐도 라워드 고르뎀 님의 논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 그분은 탈리오 마탑에 은거 중이신 현자님이시겠지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현자님의 논문을 좀 받아 볼 수 있을런지요.]
[...현자님과 대면을....]
[...현자님에게 지금 제 연구에 대한 자그마한 조언이라도....]
살려 줘.
이제 겨우 현자 소리를 벗어나는가 했는데 이제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현자 타령을 해 대니 원.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더 이상 탈리오 마탑에 몸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단 점이다.
제국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데 전 세계를 상대로 나 여기 있소 알린 셈이니 원.
"이제 어쩐다."
"떠나야지."
내 중얼거림에 탈리오 영감이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다른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거?"
"영감님께 부탁드렸던 거 있잖습니까. 뇌옥."
영감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다 준비가 끝났다. 네놈이 가겠다고 하면 바로 갈 수 있어."
아, 하긴.
내가 글을 쓴다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연구실에 박혀 있었지.
그렇다면 얼른 떠나는 게 나아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바로 떠난다면 다시 한번 아무 소득 없이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잖아.
그러니 여기선 도박수를 던지자.
"거기다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리고 싶은데요."
"부탁?"
"저를 아예 현자로 만들어 주세요."
"뭬이라?"
내 말에 탈리오 영감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지금 날더러 네놈을 7써클 이상의 대마법사로 만들란 소리냐?"
"아뇨, 그게 아니라, 제 논문 있잖습니까. 진짜로 발표해 버리죠. 물론 저 상태가 아니라 좀 더 다듬어서요."
내 말에 음, 하고 탈리오 영감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제가 다듬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아이디어와 발상이 뛰어난 거니, 영감님이 손대면 어렵지 않게 그럴듯한 게 나올 겁니다. 무려 대 탈리오 마탑주시잖아요."
내 말에 영감님은 끄응 하고 신음 소리만 흘렸다.
평소에 그렇게 자기 잘난 척을 하는 사람이었으니 지금 와서 자기가 할 수 없다고 뺄 수도 없으리라.
"차라리 저를 엄청 유명하게 만들고 현자로 만든다면 제국에서도 쉽사리 건들 수 없을 겁니다. 그냥 헬피온 공작령에서 일하는 사무관 한 명 죽이는 거랑 마도학회에서 촉망받는 현자를 죽이는 거랑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요."
"그렇다고 안 죽일 놈들은 아니다. 알고 있겠지?"
"그렇다고 쉽게 죽일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영감님은 조금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내 의견에 동의했다.
"좋아. 알았어. 뭐 그까짓 논문 애들 좀 시키면 되겠지. 대충 5써클 마법사 수준으로 해 주랴?"
아하하하.
영감님.
영감님은 눈이 없으셔서 모르겠지만 그 말을 끝내는 순간 뒤에 계시는 제자 분들의 눈초리가 변했어요.
제국한테 살해당하기 전 저 사람들에게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은데요.
"맞다, 이놈아. 이거 챙겨라."
응?
나는 벽 한구석에서 갑작스럽게 날아온 검을 받아 들었다.
손에 닿는 순간 찌릿하고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잠시 들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방금 뭐였지?
이 검이 내뿜은 기세인가?
슬쩍 검을 검집에서 뽑아 봤더니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검, 익숙한 모습인데.
설마.
"네놈을 찾아왔던 잿더미의 검이다."
역시.
룸펜 하운드의 검이었구나.
아무래도 영감님은 그때 있었던 싸움을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하긴, 마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있었던 싸움이었으니까 충분히 느꼈겠구나.
눈이 없어도 주변을 살펴볼 정도로 마나감응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니까.
"잿더미의 검이라니, 그... 무언가 인권이 없는 명칭이네요."
"잿더미가 된 놈을 잿더미라고 부르지 뭐라고 하겠냐. 녀석에겐 그 정도의 칭호도 아까워. 마기를 두른 놈이었으니."
마기?
"네놈이 보았던 그 검은 기운. 그거 마족이나 쓰는 것이다. 제국 특임대 녀석들이 종종 그렇게 마기를 두르곤 했지. 잿더미 놈은 그중에서도 좀 특이할 정도로 강하긴 했지만 말이다."
특임대와 마족이라.
어쩌면 제국이 마왕성을 소환했던 것과 관련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아카식 레코드를 접속하면 마기와 마족에 대해서 물어볼까.
"그 검, 마기를 흡수해 마검이 되었다만 정신마법도 방어해 내는 네놈의 상태라면 충분히 쓸 수 있을 게다. 단, 다른 놈들이 그 검을 잡으면 광인이 될 테니 주의하거라."
설명을 들으니 이렇게 불길한 검을 내가 써도 되는 건가 불안해졌다.
내 께름칙한 시선을 읽은 것인지 영감님이 버럭 하고 고함을 질렀다.
"마기를 견디고 네 검의 기운을 견딘 명검이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잘 쓰기나 하란 말이다!"
"넵."
"쯧... 돌아가 떠날 채비를 해라. 여기에 오래 있어 봤자 악취 나는 제국의 개들이나 들이닥칠 테지. 네놈이 가진 비밀은 다음에 내가 직접 헬피온 공작령을 찾아가 들으마. 이걸로 네놈에게 빚진 건 모두 갚은 게다."
"안 듣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듣는 게 빚을 갚는 거라구요?"
"쯧,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게야,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영감님은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구실로 들어가 버렸다.
참,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런데 왜일까.
편지를 다시 쓰며 삶의 방식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어쩐지 저 영감님의 저런 모습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훔볼트 어르신의 말처럼 젊은 나이에 노망이 들었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채비를 챙기기 위해 내 방으로 들어갔다.
* * *
나는 마탑을 떠날 채비를 마친 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제이슨 씨, 다음에 만나요."
"그래, 내가 꼭 연락할게. 네 덕분에 이룬 게 많아."
"하하, 우리가 만나려면 논문 작업부터 먼저 끝내셔야 하는 거 아녜요? 듣자 하니까 4써클과 5써클, 두 개의 논문을 써야 한다면서요."
"으어어허허, 이별의 순간엔 좀 더 감상에 젖을 수 있게 해 주지 않겠니."
"뭐 어때요. 논문 얘기 덕분에 더 감상에 젖으신 것 같은데."
"이런 슬픔과 비애는 순수하지 못하잖아."
그렇게 제이슨 씨와 글레이시아 씨 등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무렵, 숲길 저쪽에서 두 명의 기사가 저벅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 저 사람들이 영감님이 말한 사람들인가.
"안녕하세요."
나는 반가운 기색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라워드 고르뎀. 당신을 살인, 방화, 강간, 절도, 특수폭행 등의 혐의로 체포한다. 죄질이 무척이나 흉악한 만큼 재판까지 뇌옥요새 트팔로에 수감될 것이다."
단숨에 제압당해 밧줄로 묶였다.
어라?
어라라라?
자, 잠깐만요. 제 죄질이 왜....
제이슨 씨, 글레이시아 씨!
잠깐! 왜 그런 쓰레기 보는 눈으로 날 보는 건데!
오해야! 이건 누명이라고!
으아아아아, 영감! 준비했다는 게 고작 이런 방식이냐!
죽인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내가 꼭 찾아내 죽여 버릴 거라고!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6화
<66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