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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련은 중앙 화로에 영력을 공급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가르낙의 뿔이 재료인 만큼, 평소보다도 많은 양의 영력을 투입해 강렬한 불꽃을 피워내야 했다.
불길이 타오르는 동안, 재환은 깨끗하게 씻은 가르낙의 뿔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가공하는 방식을 먼저 보여 줘."
〈황혼 어스름〉에서 뿔을 가공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기본 골조를 잡는 것이었다.
실제로 메이칼은 이미 깃펜에 하얀색 잉크를 찍어 가르낙의 뿔 위에 초안을 그려내는 중이었다.
골조 스케치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인 만큼 구체적일수록 좋았다. 뿔의 형태는 한 번 가공하고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슬슬 초안이 마련될 무렵, 직공들이 메이칼을 불렀다.
영력이 집중된 중앙화로에서 새하얀 염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메이칼은 미리 마련된 틀 속에 뿔을 집어넣고, 열기 속에서 뿔의 결합력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충분한 시간이 경과하자, 뿔의 표면에 작은 기포 같은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메이칼과 직공들은 재빨리 틀 속에서 뿔을 꺼내 미리 마련된 절단기로 절단을 시작했다. 원하는 만큼의 뿔을 잘라내기 위해서였다.
하얀 잉크가 타오르는 자국을 따라 절단기가 움직였다.
결합력이 약해진 상태임에도 뿔이 가진 강도가 만만치 않아서, 공방에 있던 절단기를 열댓 개나 버려야만 했다. 거기까지 끝나자 간신히 한숨 돌리는 데 성공한 메이칼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스킬 싸움이지."
도제급 제작자의 고유 스킬, 「가공」.
이미 숙련도가 최고조에 달한 장인의 가공술.
망치와 끌개에서 나오는 새하얀 빛은 한낱 인간의 기술이라 믿기엔 놀라운 데가 있었다.
그러나 재환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그 역시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환 군, 내가 하는 건 제련이 아닐세. 그냥 확률 게임일 뿐이지.
언젠가 제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토포스 제일의 대장장이였던 제이.
―재환 군을 보면서 그간 나도 많이 노력했다네. 대장장이와 관련된 모든 스킬들을 마스터했지. 나는 자부할 수 있네. "악몽의 탑"에서 나온 그 어떤 무기라도, 나는 99%의 확률로 그것을 수리해 낼 수 있다고.
"악몽의 탑"에서 나온 무기라 봐야, "위대한 땅"에서는 하품의 무기에 불과했다. 탑의 아이템들은 전부 진품의 복제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99%라는 확률은 대단한 것이었다. "악몽의 탑"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수리 확률에 도달한 이는 오직 제이뿐이었다. 재환은 제이가 수리에 실패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한데 그 확률에 도달하고 나니까, 가끔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든다네. 어쩌면 나는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그런 생각 말일세.
그때 재환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이가 말했다.
―나는 99%라는 확률에 도달하기 위해 스킬 숙련에 내 모든 시간을 바쳐 왔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 어쩌면 나는 99%라는 확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1%라는 확률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재환이 「의심」의 능력을 얻은 것은, 제이로부터 그 말을 듣고 채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스킬과는 뭔가 다른 힘.
불완전하고 까다롭지만, 자유로운 힘.
"이제 대강 알겠으니, 잠깐 중단하지."
등이 흠뻑 젖도록 땀을 쏟는 메이칼을 재환이 저지했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르낙의 뿔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끌개와 망치만 망가졌을 뿐이다.
"제련이란 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야. 게다가 가르낙의 뿔이라면 한 달은 족히 투자해야 가공할 수 있는 재료고."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허허."
메이칼은 어쩐지 허탈한 표정이었다.
"노인을 놀리면 못 쓰지."
"······."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뿔의 표면을 더듬어 볼 뿐이었다. 무수한 망치질로도 약간의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재료.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재환이었지만, 이 뿔을 제련하는 한 시간 동안 메이칼이 끊임없이 들어야 했을 메시지에 관해, 재환은 잘 알 수 있었다.
[스킬이 실패했습니다.]
[스킬이 실패했습니다.]
[스킬이 실패했습니다.]
[스킬이 실패했습니다.]
....
"가르낙의 뿔을 다루기에 나는 너무 늙었다네. 당신은 나를 좀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어."
화로 옆의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은 메이칼이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약속한 하루는 이미 지났으니, 이제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나? 당신은 이제 임시 부공방장이 아니니까."
재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공방장의 권위가 되돌아오자, 메이칼의 표정은 한결 여유를 찾은 듯했다.
"한 대 피우겠나?"
재환이 고개를 저었다.
메이칼이 뿜어낸 연기가 허공을 뿌옇게 물들였다. 곁에서 지켜보는 직공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메이칼은 작업 중에 결코 다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메이칼이 망치를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백 번을 해도, 천 번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지. 저기 네이븐 같이 젊은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직공 네이븐이 얼굴을 붉혔다. 처음 재환과 미노를 안내했던 바로 그 직공이었다.
"아닙니다, 부공방장님!"
"아니긴. 지난번에 나한테 대들었던 건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군?"
메이칼은 다시 재환을 보며 말했다
"저 직공은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라네. 나한테 말대답을 하다가 입구 쪽으로 차출되긴 했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친구지. 아마 미래의 '새벽의 장인'은 저 친구가 될 거야. 운이 좋다면 「도제」의 칭호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메이칼이 물고 있던 담뱃불을 모루에 비벼 껐다.
"저 친구도, 결코 태생의 벽을 넘지는 못해. 인간은 최고의 장인이 될 수 없어. 마치 내가 이 가르낙의 뿔을 다룰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재환은 메이칼의 자조 섞인 비감이, 비단 가르낙의 뿔 하나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뿔은 그저 계기일 뿐이었다.
그보다 훨씬 깊숙한 내부에서부터 이 사람은 망가져 간 것이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지금껏 얼마나 해 봤지?"
"충분히 해봤다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럼 만 번을 해야지."
"만 번을 해도 안 되면?"
"백억 번을 하면 돼."
"백억 번? 으허헛! 자네, 젊구만."
메이칼이 유쾌하다는 듯 웃어 젖혔다.
"자네는 내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
"하지만 나는 충분히 노력했다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자네가 말한 백억 번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에 가까운 수준으로 노력했을 거야.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메이칼의 눈빛에 세월이 스친다. 그가 이 공방에 온 것도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자넨 몇 년을 살았지?"
재환은 속으로 나이를 세어 보았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 이십 년을 살았고, 탑 안에서 사십 년 이상을 살았다.
「의심」을 익힌 이후로는 시간을 세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도합 육십 년 이상은 살았으리라.
"아마 육십 년 정도."
"그래? 생각보다 일찍 죽은 모양이군."
재환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관이었다. 메이칼이 말했다.
"나는 백오십 년을 살았네."
묘하게 거만한 톤이었다. 재환의 나이를 알고 난 뒤 메이칼은 한결 더 편안해 보였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 본 적이 없으니까."
누구도 타인의 시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재환이 입을 열었다.
"아니, 나도 알아."
그 무덤덤한 말투에 메이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입가에 피식 웃음이 스쳤다.
하긴, 그러니 젊음이겠지. 결국 젊음이란 지난한 세월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미숙한 것이다.
메이칼 역시 젊었을 때는 오기를 부렸다. 다가올 세월에 대해 '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늙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도 있다.
메이칼이 점잖은 충고를 위해 한마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재환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분명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을 테지."
고저 없이 담담한 재환의 목소리를 들으며, 메이칼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단순한 사실을 나열하는, 대단한 수사도 격찬도 없는 말.
그런 말에 메이칼은 동요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담백하게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는 칭찬을 받았고, 늙어서는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인정을 받았다는 느낌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 나도 노망이 난 모양이군.
메이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운 말이군. 살다살다 젊은이에게 그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재환은 답하지 않았다.
그 무뚝뚝한 젊음에, 메이칼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궁금증이 생겼다. 저 오만한 젊음은, 과연 그의 세월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말이 나온 김에, 자네의 젊음에 한번 물어보고 싶어지는군."
메이칼은 담배 한 대를 더 꺼내며 물었다.
"자네는 나한테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
"재능? 태생? 아니면 운이나 확률?"
메이칼을 바라보는 재환의 눈동자는 깊었다.
아니, 깊다는 말로는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심연이라든가 무저갱이라든가, 그런 빤한 말들로 담을 수 있는 깊이가 아니었다.
그 눈동자에는 메이칼이 가진 말들로는 차마 닿을 수 없는, 불편한 무언가가 있었다.
"당신은 부족하지 않아."
"······부족하지 않다고?"
"부족하기보다는, 오히려······."
"오히려?"
"너무 과하다고 할 수 있지."
"너무 과해? 뭐가 말인가?"
부족한 걸 물었는데 오히려 과하다니? 메이칼은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재환을 보았다. 재환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너무 오래 살았어."
Episode 4. 1%의 세계 (5)
재환의 말에 분통을 터뜨린 것은 메이칼 본인이 아니라, 주변의 직공들이었다.
"감히 무슨 망발을!"
그러나 정작 메이칼은 재환의 말에 뭔가를 심각하게 고뇌하는 낯빛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
"이제 늙었으니 그만 죽으라든가, 그런 의미는 아닐 테고."
재환은 그런 메이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시 한번 스킬을 사용해 봐."
"뭐?"
"다시 한번 스킬을 사용해 보라고."
잠시 망설이던 메이칼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재환의 말대로 했다.
망치와 끌을 잡고 가르낙의 뿔을 두드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계처럼 뿔을 두드려는 메이칼을, 한순간 재환이 저지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무얼 봤지?"
"······무슨?"
"스킬을 쓰면서 무얼 보았냐고 묻는 거야."
메이칼의 혼란스러운 눈빛에 재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시 잘 보면서 해 봐."
메이칼은 다시 한번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이 실패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연신 그의 귓가를 채워간다. 그는 필사적으로 메시지에 굴복하지 않고 스킬이 발생하는 지점을 면밀히 노려보았다.
거기서 뭐가 보이냐고?
딱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망치와 끌이 보인다.
"그렇겠지. 그런 것들이 보이겠지."
"······지금 장난치는 건가?"
메이칼은 하마터면 망치를 재환에게 내던질 뻔했다.
"당신은 그 망치와 끌이, 어떤 원리로 뿔을 다듬는 것인지는 알고 있어?"
메이칼은 잠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건 「가공」 스킬의 힘으로······."
재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다르게 물었어야 했군. 다시 질문하지."
재환은 메이칼의 두 눈을 응시하며, 그에게 정확하게 알맞은 단어를 골라 질문을 구성했다.
"당신은 「가공」 스킬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인지 알고 있어?"
메이칼의 표정이 굳어졌다.
"젊은이,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그는 절반쯤은 분노하는 음색으로, 또 절반쯤은 어처구니없다는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가공」 스킬의 원리가 무엇이냐고?"
모든 스킬들의 시류가 되는 최초의 스킬들이 있다.
무수한 스킬들의 시원(始原)에 있는 스킬들.
몽마의 「가공」은 그런 최초의 스킬들 중 하나였다.
최초의 스킬들은 물질로 친다면 하나의 입자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들이다. 원소로 치면 불이나 물처럼, 원래부터 존재해온 것들. "위대한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최초의 스킬이란 그런 개념이었다.
인간이 어찌 세계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까.
또 그걸 설명한다고 해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재환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당신은 자기가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계속해서 스킬만 써온 거로군."
그 말이 메이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메이칼이 이를 갈듯 말문을 열었다.
"······영력을 통해서 망치와 끌을 강화하고, 그 힘을 섬세하게 조절해서 뿔을 깎아내는 것. 그게 아마 이 스킬의 원리겠지."
"그래? 그런 간단한 원리라면 왜 다른 이들은 「가공」을 사용하지 못하지?"
"그건······."
그건 그들이 단지 「가공」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이칼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사내의 말대로 스킬의 원리가 그렇게 간단하다면, 「가공」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스킬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그 스킬이 무엇인지 잘 몰라. 그런데도 그 스킬을 쓰고 있지."
메이칼은 그 순간 눈앞의 사내가 싫었다.
애초에 「가공」의 원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이 사내는 자신이 그걸 모른다는 이유로 이런 모욕감을 주는가?
"자네는 마치 원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알고 있어. 정확히는 좀 전에야 알게 되었지."
"뭐라?"
재환은 말없이 자신의 손으로 뿔의 결을 짚어나갔다. 마치 그의 손길에 반응하듯 뿔의 표면이 일렁였다.
다음 순간, 메이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법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가공」을······!"
뿔이 재환의 손끝을 따라 천천히 갈라진다.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하얗게 말라붙은 선금을 따라서. 뿔은 재환의 손길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몸을 떨며 쪼개져 가고 있었다.
메이칼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풀렸다. 질투심과 절망감이 구차한 모양으로 섞여들었다.
"자네는 대체 누군가! 대체 어떤 축복을 받았기에 이런 재능을 가진 건가?"
"재능 같은 게 아니야."
"그럼 대체······."
"다시 잘 봐. 그리고 뭐가 보이는지 말해 봐."
메이칼은 다시 재환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손끝에 닿은 뿔의 입자들이 곱게 뭉그러진다. 마치 무언가에 파 먹히는 것처럼.
"······입자들이 분해되는 건가?"
재환이 고개를 저었다.
메이칼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쉽진 않을 거야. 당신의 엄청난 노력 때문에 당신이 보는 세계는 그만큼 단단해졌을 테니까."
재환의 말이 맞았다.
지금 재환의 손끝을 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메이칼은 재환을 완전히 믿지 않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보는 광경이 뭔가 교묘한 사기극일 거라는 기대감이 메이칼의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젊음에 대한 불신.
그동안 쌓아온 세월에 대한 아집.
수백억 번에 달하는 무두질과 담금질, 그리고 망치질로 다져진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삐뚤어진 자존심이었다.
"지겹도록 노력을 해 봤으면 당신도 슬슬 깨달아야 할 거 아냐?"
재환의 손끝이 닿은 가르낙의 뿔이 툭, 하고 바스러졌다.
"그만큼 노력해도 안 된다면 잘못된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이라는 걸."
"그, 그런······."
메이칼은 재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세상 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메이칼은 처음으로 「가공」을 배우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보다 먼저 이 길을 걷고 있었던 몽마들의 뒷모습이 두 눈에 선연했던 젊은 시절의 자신을.
젊은 메이칼은 언제나 불안했다.
노력하면 언젠가 저 몽마들처럼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의구심 같은 게 있었다.
과연 저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수련해서 저들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하지만 의구심이 든다고 해서 젊은 메이칼에게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젊은 메이칼은 노력했다.
몸이 축날 정도로 스킬을 쓰고 또 썼다.
아무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과한 노력이 주는 성취감에 몸을 맡김으로써 본래의 의구심을 잊어버렸다.
잊어버릴 만도 했다. 스킬은 숙련도가 쌓이는 만큼 효과가 상승했고, 그만큼 성공률도 좋아졌다.
노력만큼 성과가 있는 정직한 세계. 그런 세계였기에 메이칼은 자신이 가는 길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다.
그의 노력이 모든 빛을 잃어 더 이상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 장소. 그 장소에 온 메이칼은 이제 안다.
세상 탓을 할 수 있는 것은 젊을 때뿐이라는 걸.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메이칼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란 건가."
150년간의 노력과 울분이 짙게 깔린 목소리.
세월을 온전히 견뎌낸 목소리였다.
"이 세상과 맞서 싸우기라도 하란 소린가?"
재환은 가만히 메이칼을 보았다.
자신의 세계에 배신당하고서도, 끝내 그 세계를 버리지 못하는 노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당신은 늙었지만, 아직 싸울 수 있어."
그 말에 메이칼의 동공이 흔들렸다.
"다시 잘 봐. 시스템에 의존하지 말고, 당신의 눈으로 잘 보라고."
잠시 멍하니 있던 메이칼은 그게 무슨 뜻인지 뒤늦게 알아들었다. 지금 재환은 메이칼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세월을 송두리째 내버리라고. 모두 잊어버리라고.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부정하는 것.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부정을 통해 보게 될 어떤 세상이 메이칼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어쩌면 늙은 메이칼의 마음속에 아직까지 남은 유일한 젊음일지도 몰랐다.
메이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킬을 잊었다.
흐르는 세월 동안 그의 영혼과 하나가 된, 단단한 족쇄에서 벗어나 보려 발버둥 쳤다. 물론 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재환의 손끝을 보았다.
자신의 세월이 놓친 뭔가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 망치질을 하듯, 재환의 손끝이 뿔을 향해 움직였다.
타앙.
다시 한번.
타앙.
그리고 다시 한번.
타앙.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메이칼은 자신의 영혼 어딘가가 조금씩 부서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관성으로 그의 머릿속에 굳어져 있던 무수한 상식들이 풀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유리가 부서져 나가듯, 뭔가가 끄트머리부터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어떤 진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돌연 메이칼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쳤다. 이래도 되는 걸까. 어쩌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메이칼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세계에 침묵이 찾아왔다. 압도적인 적막 속에서 뭔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고독감이 엄습해 온다.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는, 방금 멸망해 버렸다는 사실을.
공포와 호기심이 한데 얽힌 가운데, 메이칼은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디뎠음을 깨달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가르낙의 뿔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뿔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성채의 흉벽에 달하는 체고, 온몸에는 흉측한 이빨과 가시들을 빼곡하게 박아 넣은 몸피. 마치 거대한 증오의 덩어리처럼 생긴 괴물.
메이칼은 턱을 덜덜 떨면서 그 괴물을 마주 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저런 것을 마주하고 있었던 건가.
저런 것에게 잘도 알량한 스킬을 써댔던 건가.
주변을 돌아보니, 직공들이 있어야 할 곳에 웬 송장들이 서 있었다. 비쩍 말라 뼈만 남은 송장들에게서는 악취가 풍겨왔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구더기들이 솟아 나왔다.
메이칼은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했다.
그리고 재환이 있었다.
맨몸에, 끌과 망치를 들고서.
스킬도 없이 괴물과 맞서는 남자가 있었다.
괴물이 재환을 공격하자, 재환 역시 괴물을 마구 헤집었다. 괴물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괴물의 몸에서 피가 튀고 체액이 흘렀다. 그럼에도 괴물은 괴로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적수는 오랜만이라는 듯이.
주변의 송장들이 숨을 들썩이며 소리를 질렀다.
재환을 응원하는지, 괴물을 응원하는지 알 수 없는 환호. 그 혼란과 광기의 중심에서 메이칼은 정신이 몽롱해지고 심신이 떨려왔다.
이 사내는, 언제나 이런 세계를 보며 살아왔단 말인가?
스킬도, 스테이터스도, 레벨도 없는 세계.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기에 한없이 적나라하지만, 그 어떤 기만도 존재하지 않는 정직한 세계.
메이칼은 토할 것만 같은 어지러움 속에서도 가공할 희열을 맛보았다.
이곳은 멸망 이후의 세계였다.
어떻게 이런 세계가 존재한단 말인가.
어떻게 저 사내는, 이런 세계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한순간 재환과 메이칼의 눈이 마주쳤다.
이 세계에서 재환은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고, 구원자도 아니었다. 그는 흔한 젊은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겐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메이칼은 재환의 광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고독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해했기에, 메이칼은 누구도 이 사내를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가르낙의 뿔이 서늘한 눈으로 메이칼을 보고 있었다.
―너는 여기에 올 수 없다.
세계에게 허락받지 못한 공포.
메이칼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괴물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다가온다. 괴물의 잇속은 송장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다음 순간, 메이칼은 괴물의 거대한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세계에서······.
그것이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전, 메이칼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그럴 뻔했다.
턱.
괴물의 아가리를 벌려 메이칼을 끄집어낸 재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재환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정신 안 차려?"
"허억······."
"제련 중인 거 잊었어? 제대로 도와 달라고."
재환의 핀잔을 들으며, 메이칼은 어지러움 속에서 다시 한번 괴물과 마주 섰다.
어깨를 짚는 재환의 손.
늙은 메이칼은 오랜만에 용기라는 것을 냈다.
스킬 없이 세계에 맞설 용기. 가 보지 않은 길을 내디딜 용기. 그가 오래전에 갈 수 있었으나 차마 가지 못했던 그 길 위에 다시 올라설 용기를.
그러자 메이칼의 손에서 피부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속살 깊은 곳으로 혈관이 생기자 피가 맥동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시야가 맑게 개었다. 메이칼은 자신의 온몸에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젊은 시절 처음으로 망치를 잡았던 그 날처럼.
메이칼은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르낙의 뿔을 향해, 그의 망치가 움직였다.
*
이틀 뒤.
마침내 재환의 칼집이 완성되었다.
Episode 5. 망자 (1)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도 있어. 혼돈을 한 번만이라도 가 본 자라면, 누구나 그게 뭔지 알지.」
―「균열」 제2 단장, 유설하
***
의뢰 시작일로부터 사흘 뒤.
재환은 완성된 칼집과 함께 〈황혼 어스름〉의 입구에 서 있었다.
하루 만에 끝날 거라 생각했던 작업이 도합 사흘이나 걸린 셈이지만, 평균적인 뿔의 공정 기간이 넉넉잡아 삼 주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메이칼을 비롯한 몇몇 직공들이 입구까지 재환을 배웅나왔다.
"정말 이대로 갈 텐가?"
"제작도 끝났으니 가 봐야지."
몽마들의 스킬인 「가공」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재환은 뜻밖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바로 이 괴수들은 자연적으로 존재해 온 생물이 아니라는 것.
가르낙의 뿔은 「가공」하기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게 「가공」된 상태였다. 말인 즉―
이 괴수들은 모두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그게 누구인지, 또 무슨 목적인지는 불분명했지만, 뿔을 가진 괴수들은 상당한 정성으로 만들어진 생산품이 틀림없었다.
메이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아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재환은 칼집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것도 마음에 들어."
새로운 집에 만족하는 모양인지 검이 웅웅거리는 울음을 토했다.
은은한 검은 빛을 발하는 멋들어진 칼집.
칼집은 튼튼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이한 기운에 저항하는 항마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특히 삼각수 이하의 괴수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는 힘, 「가르낙의 위엄」이 자체적으로 내장되어 있어서 약한 괴수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방지하기에도 용이했다.
메이칼은 재환의 칼집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참, 자네 검 이름은 정했는가?"
"아직."
"괜찮다면 내가 하나 지어 줘도 되겠는가?"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칼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지난 사흘 동안 자네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네."
사흘. 한없이 짧았지만 너무나 깊이 각인된 시간.
"나는 자네가 정확히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겠네. 그 '세계'를 내게 보여 준 이유도 모르겠고."
메이칼은 자신이 본 세계를 떠올렸다.
한 번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나니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는 이제 다시는 그 세계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스킬과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진 그가 잠깐이나마 그 세계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재환 덕분이었으니까.
그 세계는 무언가의 비유나 상징 같기도 했고, 환상이나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메이칼은 재환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네."
아무렴 어떤가.
그것이 비유든, 환상이든, 혹은 현실이었든.
너무나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결코 자네를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야."
이 세계에서 진실은 결코 정의(正義)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만의 현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복잡한 것들을 싫어하고, 난해한 것들을 외면한다. 불확실한 것들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그 모든 것의 총체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네에게 감탄할 걸세.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거야."
메이칼은 재환이 처음 공방에 들어왔을 적을 떠올렸다. 겸손이란 걸 전혀 모르던 사내.
"어떤 사람들은 자네를 무서워할 것이고."
불합리할 정도로 폭력적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자네를 조롱하고 멸시하겠지."
비이성적으로 보일 만큼 기이한 면들을 가진 사내.
"어쩌면 자네를 죽이려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렇기에 메이칼은 알았다. 정교하게 비뚤어져 있는 재환의 방식은 무수한 이들에게 반감을 살 것이다. 이 세계의 대부분은 그를 배척할 것이며, 심지어 누군가는 그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런데도 자네는, 계속 그 세계를 지키려는 건가?"
메이칼은 재환을 말리고 싶었다.
그가 보여준 그 세계가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혹여 그 세계가 "혼돈"의 모든 존재를 계도시킬 진리를 담고 있을지라도······.
메이칼은 차라리 재환이 그 세계를 포기하고서 살아남기를 바랐다.
재환은 언제나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눈을 보며 메이칼은 깨달았다. 사내에게 그 세계는 포기하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 세계는 이미 그의 삶 자체라는 것을.
사내는 혼자서 그 세계를 살아갈 것이다.
메이칼이 쓰게 웃었다.
"역시 그 칼에 어울리는 이름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군."
메이칼은 직공을 시켜 망치와 끌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는 「가공」을 사용해 재환의 칼집에 멋들어진 글씨를 음각으로 써넣기 시작했다.
독불(獨不)
"독불장군 할 때의 '독불'인가?"
메이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쓰는 김에 멋들어진 무림어로 써 봤다네. 혼돈에 있다 보면 그쪽 월드에서 온 치들도 꽤 만나게 될 테니 말일세."
홀로 독(獨)에 아닐 불(不).
어떤 의미에서 그 이름은, 지금의 재환을 나타내기보다는 메이칼의 바람을 담은 것이었다.
뒤이어 검에서 환한 빛줄기가 솟았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독불이 첫 울음을 토했다.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 잘 가게나."
메이칼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준 재환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메이칼은 멀어지는 사내의 등을 보았다.
한없이 외롭고 또 고고한 세계.
그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 하나의 세계가 멀어지고 있었다.
"자, 잠깐만!"
돌연 메이칼이 다급하게 외쳤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 봐도 되겠나?"
멀어지던 재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자네가 보는 '세계'에서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보이는가?"
재환은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돌아보는 것을 망설이는 사람처럼. 그는 끝내 등을 돌리지 않은 채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
그리고는 다시 멀어져 갔다. 메이칼은 재환이 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는지 알고 있었다.
메이칼은 탄식했다.
그 누가 저 외로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 멀리서 사내를 향해 다가가는 한 여인이 있었다.
메이칼이 허허로운 한숨을 지었다.
"독불이라, 젊음이구만."
***
대로변을 걷는 동안 재환은 무언가가 변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쩐지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게 없다.
공방에 있을 때는 종종 기웃거리기도 하고 고양이처럼 괜히 한 번씩 헤살도 놓고 가더니, 어제부터는 내내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가 버린 건가 싶었다.
"혹시 나 찾아요?"
미노는 어디서 옷을 갈아입고 온 것인지 말끔한 차림이었다. 야행의는 검은빛이 감도는 짧은 무복으로 변했고 다리는 검정 스타킹으로 감싸고 있었다. 여전히 거무죽죽한 로브 같은 걸 걸치고 있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지만······.
"어디 있었던 거지?"
"근처에요."
"뭘 했는데?"
"뭐, 이것저것이요. 나도 꽤 바쁘다고요. 참, 이것 받아요."
"뭐지?"
"당신 옷이에요. 언제까지 비렁뱅이처럼 돌아다닐 순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아직도 옷이 거지꼴이었다. 재환은 봉투에 든 옷들을 받아들었다. 어딘가 중세풍의 뉘앙스가 있기는 하지만, 꽤 캐주얼한 복색의 옷들이었다. 칼집과의 조화를 고려한 것인지 코트까지 검은색 일색으로 맞춰져 있었다.
"······그냥, 목숨 보답으로 주는 거예요."
"그렇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하는 게 어때요?"
"고마워."
미노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가는 〈황혼 어스름〉 쪽을 돌아보았다. 메이칼과 직공들이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직공들이 당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네요."
"그럴 리가."
"특히 그 영감님이랑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요?"
"착각이야."
"그렇지만 그 영감님, 꽤나 찐한 눈빛으로 당신을 보고 있었다고요."
"······."
재환은 딱히 대거리하지 않았다. 둘은 한동안 대로변을 걸었다. 노점상 거리가 나오며 드문드문 인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계속 날 따라오지?"
"왜요. 뭔가 시커먼 목적이라도 있을까 봐?"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는 않아."
그러자 미노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또 뭔갈 꾸미고 있나?"
"당신을 죽일 계획이요."
"죽여서 뭘 하려고?"
"당신이 가진 망혼석을 빼앗을 거예요."
"빼앗은 후에는?"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아무튼 그걸로 잘 먹고 잘 사는 거죠."
재환이 피식 웃었다. 미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여유가 담긴 웃음이었다. 미노는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진짜거든요?"
"알겠다."
고저 없는 목소리. 자길 죽이려 드는데도 관심 없다는 듯한 초연함. 미노는 재환의 그런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단지 압도적인 강함에서 나오는 여유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미노는 재환 못지않은 강자들을 몇몇 알고 있었다.
가령 그녀가 속한 혼돈 십방의 방주들.
하지만 재환의 여유는 그들의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제부턴 뭘 할 거예요?"
"몽마들을 만날 거야."
"어떻게요?"
"메이칼이 방법을 알려 줬어."
"만나서 뭐 할 건데요?"
"환상수에 대해 물어 보고, 이 세계의 위쪽으로 올라갈 방법을 알아낼 거다."
"위쪽에 뭐가 있는지 알고 하는 소리예요?"
""심연"."
미노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왜 거길 가려는 건데요? 강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아니면, 다시 살아나고 싶어서?"
환상수의 '가지'인 "심연"으로 올라가려는 이들은 재환 말고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대부분 좌절되고, 올라간 이들도 거의 돌아오지 못했다.
운 좋게 살아 돌아와 '심연의 강자'라 불리게 된 이들조차, 결국엔 정신 착란 속에서 폐인이 될 뿐이었다.
재환은 약간 지겹다는 투로 말했다.
"내 목적이 그렇게 궁금해?"
"그래요."
재환이 서늘한 눈빛으로 미노를 응시했다.
미노는 순간 주춤거렸으나, 눈빛을 피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들어도 믿지 않을 텐데."
"대체 뭔데 그래요? 세계 정복이라도 하시려고?"
미노의 농담에도 재환은 웃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노도 그런 재환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재환은 하늘이 아니라 창공 너머를 꿰뚫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또다시 보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으며, 계속 보고 있으려니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재환의 입이 뭔가를 말했고.
미노는 망연해졌다.
처음에는 재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저―
그 말이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노는 과장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겠지.
이 사람도 농담쯤은 할 수 있을 테니까, 하며.
그러나 잠시 후, 재환의 표정을 보고서 미노는 이 사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웃음기가 가시고.
안면의 근육이 경직되어 갔다.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하늘 위로 붕 뜨기라도 한 양, 미노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는 스스로 말한 것을 실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노는 서서히 화가 났다.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예요? 당신이 뭔데요? 대체 무슨 자격으로?"
"······."
"내가 이렇게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짜증나네요, 당신."
왜 그렇게 자신이 흥분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로 미노는 계속해서 말했다.
"주위 사람들 눈치도 안 보고, 배려도 없고, 무뚝뚝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어요. 무엇보다도······."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이곳의 다른 사람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질 않아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미노는 아차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당신 삶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이곳 사람들도 힘들게 뿌리를 나왔고, 위대한 땅에 도착했고, 거기서도 죽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요."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미노는 생각했다. 이것은 울분일까. 열등감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일까. 미노도 자신을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당신이 말했었죠. 당신은 인간이라고."
그때 미노는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인간이에요. 비록 당신처럼 강하지도, 굳세지도 않지만, 나도 분명 '인간'이에요."
어쩌면 그가 말하는 '인간'이란, 전혀 다른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훨씬 숭고하고 대단한 무언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미노에겐 너무 어려웠다.
"거창한 꿈이나 신념은 없어도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으면 그걸로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존재. 내가 아는 '인간'은 그런 거예요."
이런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걸까.
대로의 끝에서 두 갈래 길이 보였다. 미노는 마치 그 길이 어떤 운명적인 지표처럼 여겨졌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인간'처럼 보이진 않아요."
어디선가 쿵,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누군가가 쓰러진 입간판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서 헤어져요."
"······."
"아무래도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이랑은 같이 다닐 수가 없으니까."
미노는 인사도 없이 노점상들이 즐비한 갈래 길 안쪽으로 걸어갔다. 재환은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얼마나 지났을까. 재환은 문득 자신의 손에 쥐어진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
미노가 달려간 두 갈래 길의 끝에는 주점이 있었다. 클레어가 운영하는 주점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미노는 그 주점의 입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재환을 이 주점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서, 클레어에게 소개할 생각이었다.
아마 이젠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미노는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안, 아줌마. 내가 많이 늦었지?"
최소한의 조명을 남겨두고 불이 꺼진 주점. 그 주점의 중심에, 클레어가 멍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전신을 포박당한 클레어는 혼자 나타난 미노를 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미안해, 진짜."
클레어가 클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진짜로 둘 다 죽게 생겼구나."
클레어. 미노와 함께 "악몽의 탑"을 클리어하고 이곳 "혼돈"까지도 줄곧 동행해온 여인. 미노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녀는 마지막 동료를 지킬 수 없을 것이었다.
"몰살의 마녀."
차가운 목소리에 주점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 주점뿐만이 아니었다. 인근 주거 구역 전체가 무시무시한 살기로 가득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얼마 전 주점에 있던 미노를 찾아온 그 남자였다.
"거래는 어떻게 된 거지?"
"그 사람은 여기 못 와."
살이 에일 정도로 싸늘한 공기였다.
그 사이 재환의 영향을 받은 걸까. 이렇게나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도 미노는 왜인지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그 사람은 이 세계를 멸망시키러 갔거든."
Episode 5. 망자 (2)
언제나 자신의 주변은 불행해지고 만다.
돌이켜 보면 악몽의 탑에서부터 그랬었다.
'몰살의 마녀'라는 미노의 별명은, 사실 "혼돈"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었다.
고향에 악몽의 탑이 출현해 사람들이 공략을 시작하던 무렵, 미노가 처음 가입했던 파티는 사흘 만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그녀는 혼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운이 좋다'며 격려해주었다.
어쩌면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그 전멸이, 최초의 징후였다는 것을.
이상한 예감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가입한 두 번째 파티와 세 번째 파티가 전멸한 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또 혼자서 살아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비슷한 일이 대여섯 번 더 반복되자, 그녀를 의심하고 멸시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저게 그 유명한 '몰살의 마녀'라며?
몬스터를 끌고 다니는 마녀. 파티원들을 몰살시키는 저주받은 여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어느 파티에도 끼지 못한 채 버려진 열여섯 살의 소녀.
그게 미노였다.
자신의 불운이 실은 패시브 스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미노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상급 스킬, 「유인」
그녀가 클리어 한 "악몽의 탑"에 숨겨져 있던 유일한 히든 스킬.
미노는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만약 그때, 클레어를 비롯한 동료들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계의 모두가 그녀를 외면하고 버렸을 때, 혼자서 탑의 공략에 도전하다가 생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만약 그녀를 도와준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미노는 사람을 믿는다.
아무리 이 세계에 끔찍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설령 이 세상의 대부분이 악인으로 이루어져 있더라도, 이 세상에는 분명 좋은 사람들이 있다.
강한 힘도, 뛰어난 재능도 없지만 타인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들.
미노는 그들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불행을 끌고 다닌다면,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끝내 불행하게 만들고야 만다면, 불행보다도 더 강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흑림방에 들어갔고, 암살 스킬들을 배웠고, 영력을 쌓았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미노야, 여기까지 왔으면 망설이지 마라.]
클레어는 얼굴을 몇 대 얻어맞은 모양인지 은빛이 맺힌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약하다고 죽음을 선택할 권리조차 없는 것은 아니야.]
그 말에 미노는 울컥하고 말았다.
[조금만 참아, 아줌마. 구해 줄 테니까.]
클레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클레어도 알고 미노도 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미노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았다. 얼핏 보이는 3차 적응자들의 숫자만 해도 열이 넘었다. 특히나 무리 중앙에 있는 사내는 미노가 수준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레드 폭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놈들이었다.
이만한 전력을 비밀리에 운용할 수 있는 집단은 고르곤 성채 내에 그리 많지 않았다.
혼돈 십방, 혹은 그에 준하는 세력이 움직인 것이다.
현재 고르곤 성채 내에 혼돈 십방은 둘뿐이었다.
염마군(炎魔君) 강황이 이끄는 화왕방과, 창천검(蒼天劍) 신무극이 이끄는 무극방.
그러나 이들은 화왕방이나 무극방 소속은 아닌 듯했다. 호방한 성격의 염마군이나 고고한 성격의 창천검은 이런 치졸한 음모를 꾸미지 않는다.
게다가 적 중에는 그녀가 암살 대상으로 지정받았던 악당도 끼어 있었다.
...사막 독사?
황토색 붕대로 얼굴을 가린 사막 독사는 혼돈 동쪽에서 인간 사냥을 일삼는 3차 적응자였다. 얼굴을 숨기고는 있지만, 눈가에 난 십자형의 상처나 붕대 아래로 움푹 들어간 콧날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때는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서 의뢰를 포기했는데 이런 곳에 있었다니.
설마, 이 녀석들.
자세히 보니 죄다 현상수배범으로 도망 다니는 녀석들이었다.
그제야 미노는 이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만한 범죄자들을 한꺼번에 규합하고 집단으로 운용할 수 있는 단체는 "혼돈"에서도 한 곳뿐이다.
금천방(禁天房).
본래는 "혼돈"을 떠도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만든 패거리지만, 근래 들어 급부상한 집단이었다.
최근 혼돈 십방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명월방(明月房)을 밀어내고 십방의 하나가 된 단체.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몰살의 마녀."
금천방 중 하나가 앞으로 나오는 순간, 미노는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틀림없다. 저자는 최소한 '4차 적응자'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었다. 뒤의 둘도 아슬아슬하지만 4차에 거의 근접한 강자들. 셋이 모이면 성체인 오각수 가르낙도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4차 적응자였다.
게다가 미노는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고차의 입문이라 불리는 4차 적응자 급이 되면 "혼돈"에서도 웬만큼 이름이 알려지게 마련이니까.
"잔야(殘夜) 삼형제······."
이곳 숲지대 근처에서는 유명한 악적들이었다. 고차 적응자임에도 어떤 방파에도 들지 않았던 무법자들. 그들이 금천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왜 그를 데려오지 않은 거지? 분명 약조했을 텐데."
"마녀가 약속 지키는 거 봤어?"
그 말에 잔야가 낯빛을 굳혔다.
"망혼석은 원래 우리 물건이다."
"거 참 설득력 있는 소리네."
"녹명가는 우리와 거래 중이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그걸 가로챈 거지."
"아하, 그러셔?"
미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당당하다면 직접 되돌려 받거나, 성채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면 되지 왜 굳이 나를 부추겨 음모를 꾸민 거야?"
"그건······."
잔야는 대답하지 못했다.
미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잔야가 한층 더 낮아진 톤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놈을 데려와라."
"싫다면?"
"너는 죽는다."
미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의 대답이라고 받아들인 듯, 잔야의 눈이 살기로 물들었다. 잔야 삼형제 중 둘째인 잔명이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흑림방 여자들 밤일 실력이 대단하다고 듣긴 했지."
"오밤중에 흑림방 여자들 만나고 살아 돌아간 녀석이 없다는 것도 들었겠네?"
미노는 여유를 가장했다. 기세에서 밀려 버리면 싸움조차 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까.
"명월방을 밀어내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인데, 너희들 오늘 후회하게 될 거야. 흑림의 이름은 결코 명월처럼 가볍지 않으니까."
실제로 가까운 흑림 지부에 이미 기별을 넣어 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최소 한 시간 이상은 걸린다. 문제는 그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지의 여부였다.
그 말에 셋째 잔망이 괴이쩍은 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성채 고르곤에 흑림의 지부가 없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놈들이 도착했을 때쯤, 이미 네 시신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겠지."
"······너희는 흑림의 추격을 받게 될 거야."
"뒷일이야 우리 방주가 알아서 할 일이고."
잔야의 손짓과 함께 금천방의 인원들이 미노를 원형으로 둘러쌌다.
"잡담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지체하면 저 여자의 의도대로 된다."
미노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잔야 형제의 특기는 삼형제가 함께 펼치는 「그림자 비술」이었다. 듣기로는 "위대한 땅"의 5대 명가인 흑영가(黑影家)에서 만든 스킬이 유출된 것이라는데, 실제 흑영가가 쓰는 것만은 못해도 위력 하나는 정평이 난 것이었다. 저 기술에 수많은 적응자들이 당했다.
그러나 미노도 기술만큼은 결코 꿀리지 않는다. 미노의 등 뒤에서 일곱 자루의 단검이 떠올랐다.
상급 스킬, 「아카람의 일곱 검세」
「아카람의 일곱 검세」는 흑림방주에게서 직접 물려받은 스킬이었다. 듣기로는 어느 고명한 몽마가 알려준 스킬이라는데, 몽마가 직접 전수해 준 것이라 그런지 그 위력도 상당한 편이었다.
"하하핫! 제법이구만!"
그림자처럼 수많은 분신을 남기며 움직이는 잔야 형제. 그림자에 숨어 있던 칼날들이 짐승의 송곳니처럼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미노의 옷은 넝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찢어진 허리 쪽으로는 하얀 살결이 드러났고 오른팔에는 긴 자상이 남았다.
"천천히 즐겨보자고."
혼자서 두어 명의 3차 적응자들을 처리했지만, 아직도 적은 많았다. 무엇보다 설렁설렁 공격하는 듯한 잔야 삼형제가 난적이었다. 오른쪽을 막으면 왼쪽이 비고, 왼쪽을 막으면 뒤가 비었다. 간신히 피했다 싶으면 어느새 정면이 막혀 있었다.
최소한 이곳이 성채 밖이었더라면.
「유인」을 사용할 수만 있었다면 괴수들을 불러 모아 난전을 유도할 수도 있었을 터다. 하지만 이곳은 성채 안이었다.
미노는 영력을 잔뜩 머금은 단검 몇 자루를 과감하게 내질러 지붕 한 쪽을 폭발시켰다. 굉음 정도는 아니었지만 폭음이라 불릴만한 정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마 주변의 모두가 들었을 것이다.
잔야가 말했다.
"꾀를 쓰는군."
"······."
"소용없다. 이미 방음 장벽을 쳐 뒀거든."
마지막 수단도 수포로 돌아갔다. 하긴, 이 정도로 몰려 왔다면 방음 능력자가 없는 편이 더 이상했다. 어쩌면 경비병들까지도 매수해 두었을지 모른다. 금천방 녀석들이라면 그런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냥터에서는 몰살이라 불렸다지만 이곳에선 어떨까?"
둘째 잔명이 휘두른 그림자의 칼이 미노의 한쪽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얕지 않은 상처였다.
"이제는 맨살이라 부르는 편이 어울릴 것 같은데요, 형님?"
그게 재미있는 유머라도 된다는 양, 셋째 잔망이 웃었다. 이미 대결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싸움이었다.
심지어 금천방원 중 몇몇은 하품을 하며 이쪽을 보거나 죽은 점원들의 시신을 뒤지고 있었다. 자신들까지 싸움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아아, 분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흑림에 좀 더 빨리 기별을 넣었어야 했다.
금천방의 범죄자들이 정신을 잃은 클레어의 머리채를 붙잡고 흔들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빨리 불러오지 그래? 이 늙은 년이 더 망가지기 전에 말이야."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흔들리는 클레어의 모습에, 미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아카람의 일곱 검세」 오의.
혹한검세(酷寒劍勢).
영력을 한껏 빨아들인 일곱 개의 칼날들이 서로 부딪치며 차가운 빛을 발했다. 곧이어 칼날들이 만든 새하얀 소용돌이가 눈보라처럼 잔야 삼형제를 휩쓸고 지나갔다. 폭풍이 지나간 곳에 잔명과 잔망이 약간의 부상을 입고서 물러나 있었다.
정면에서 스킬을 막은 것은 잔야였다.
"장난을 받아 주는 건 여기까지다."
영력이 제로에 수렴한 미노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어떻게든 무릎만은 꿇지 않기 위해 문간에 붙어 섰다. 잔야가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미노는 생각했다.
이 세계는 정말 희망이 없는 걸까.
개 같은 놈들이 횡행하는 세계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있어도, 저런 놈들이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한 이 세계는 지옥일 뿐이다.
재환이 말하는 인간도, 미노가 말하는 인간도, 모두 저런 놈들에 의해 하나둘씩 짓밟혀 죽어갈 뿐이다.
미노는 다가오는 칼날을 보며 눈을 감았다.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죽음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
미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때 두 갈래 길에서 그를 따라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그녀는 이 세계의 멸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멸망을 직접 보고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말이지, 정말 굉장했다니까. 알아? 멸망이란 말이야.
그녀는 상상 속의 자신이 부러웠다.
알고 있었다. 그런 미래는 없다는 걸.
이제 그녀는 다시는 재환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거친 숨소리가 터질 듯 귓가를 채워갔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칼날의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수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떠 보니, 당황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잔야 삼형제의 얼굴이 보였다. 미노는 저런 눈빛을 한 이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설마, 싶기도 했고.
그럴 줄 알았다, 싶기도 했다.
이런 전개 진짜 싫어하는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누군가가 그녀를 받아 주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 목석같지만 든든한 품이었다. 미노는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세계 멸망은 어쩌고 여기에 왔어요?"
그 말에 재환이 왼손에 쥐어져 있던 가방을 슬쩍 들어 보였다. 미노가 사 준 옷가지가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옷 사이즈가 안 맞아."
Episode 5. 망자 (3)
미노와 함께 두 갈래 길에 있을 적부터, 재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허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마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네 동료의 목숨은 없다.]
[약속만 지킨다면, 충분한 보상은 약속하지.]
....
미노를 향해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거친 밀어들.
재환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금방 눈치챘다. 누군가가 미노를 협박했고, 인질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범인은 재환을 원하고 있었다.
재환은, 당연히 미노가 그를 팔아넘기리라 생각했다.
끝없는 「의심」을 통해 「이해」한 이 세계는, 수치와 데이터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곳.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재환의 「의심」은 미노의 배신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환은 미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거창한 꿈이나 신념은 없어도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으면 그걸로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존재. 내가 아는 '인간'은 그런 거예요.
그런 재환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미노의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그런 면에서 당신은 '인간'처럼 보이진 않아요.
미노는 두 갈래 길에서 그를 남기고 떠났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어떤 배신도 없이.
마치 그의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재환은 멍하니 멀어지는 미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재환의 머릿속에서 모든 말들이 사라졌다.
세상을 파고들던 「의심」이 갑자기 힘을 잃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잦아들고 세상이 침묵 속에 뒤덮였다. 가슴 한쪽이 꽉 죄어왔다.
왜 저 여자가 '인간'으로 보이는 것일까?
멀어지는 미노를 보며, 재환은 고개를 흔들었다.
비슷한 일은 지난번에도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라는 대답을 했던 미노.
재환과 함께 칼집을 만들었던 메이칼.
그때 그들은 잠깐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잠깐일 뿐이었다.
일순 '인간처럼' 보였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송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재환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 그가 지난한 세월 동안 홀로 탑을 오르며 배운 것은 하나뿐이었다.
한 명 한 명에 집착해서는 결코 이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것.
몇 번을 구해줘도 그들은 스스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재환은 멀어지는 미노를 보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다시 「의심」이 발동되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길, 마녀가 배신했다! 전서응을 날려!]
[······기껏 데려온 몽마가 소용없게 됐군.]
...몽마?
***
거기까지가, 재환이 이곳에 오게 된 전말이었다.
재환을 멀뚱히 올려다보며 미노가 물었다.
"······사이즈가 안 맞아서? 정말 그런 이유로 온 거예요?"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편, 재환의 등장과 함께 잔야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가. 찾을 수고를 덜었군."
희미하게 느껴지는 녹명의 기운으로 보아, 사내는 잔야가 찾던 망혼석을 가진 자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찾을 수고를 던 것이 어느 쪽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너희가 몽마를 데리고 있나?"
잔야의 안색이 변했다. 금천방에서 몽마를 데리고 있다는 것은 방내에서도 일급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였다.
잔야는 주점 밖에서 방음 장벽을 치고 있는 금천방의 밀사들을 불렀다.
[놈이 몽마에 대해 알고 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럴 리가―]
금천방의 밀사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재환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물었다.
"몽마는 어디에 있지?"
"······알려줄 수 없다."
잔야는 무심코 대답하고 말았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늦은 후였다. 몽마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로 몽마를 데려와라."
그 말에 잔야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미친놈인가?
갑자기 나타나서 몽마에 대해 묻더니, 몽마에게 데려가 달라는 부탁도 아니고 이곳으로 데려오란다.
몽마가 어떤 존재인지나 알고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아니, 그 전에······ 내가 왜 이런 놈 대거리를 해주고 있는 거지?
잔야는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잔야 삼형제의 첫째인 잔야. 숲 지대의 그림자이자, 검은 밀림의 학살자다.
"성채와 대적하려 했다더니 소문대로 제정신이 아닌 놈이로군."
이도류를 꺼내 쥐는 잔야를 보며 미노가 침을 삼켰다.
"조심해요. 저 녀석들 무려 4차 적응자예요."
미노가 싸워 본 결과 잔명과 잔망의 실력은 4차에 거의 임박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원숙한 4차의 경지에 이른 잔야였다.
3차와 4차는 고차를 가르는 경계인만큼 하늘과 땅 차이의 격차가 난다. 어지간한 방파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4차 적응자다.
"내가 질 것 같아?"
"······아뇨."
미노는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술술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4차다. 심지어 상대는 합격술로 오각수 가르낙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잔야 삼형제.
재환이 해치운 레드 폭스쯤은 이들 역시 식후 운동거리로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다.
먼저 움직인 것은 잔야 삼형제였다.
「그림자 비술」
수십여 갈래로 뻗어 나가는 그림자의 파랑.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재환은 곧바로 「망아」를 사용했다. 놀랍게도 잔야는 「망아」를 사용한 재환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따라오고 있었다. 재환은 약간의 차이로 그림자의 칼날을 피해냈다.
이래서 4차부터 고차(高次)라고 하는 거로군.
잔야란 녀석이 사용하는 「그림자 비술」이란 스킬도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의심」을 통해 날아오는 칼 중 진짜만 골라내서 쳐낼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꼴에 상급 스킬이라고 영력의 패턴이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귀찮아진 재환은 그냥 그림자의 칼날을 모조리 쳐내 버리기로 했다.
검집 채로 뻗어 나온 하얀 섬광이 허공을 온통 수놓았다. '살짝 찌르기'를 연발로 사용한 것이다. 그 찰나에 얼마나 많은 찌르기를 퍼부었는지, 찌르기의 잔상만으로 시야가 혼탁해질 지경이었다.
잔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재환은 그림자의 칼날을 모두 쳐낸 것으로도 모자라, 내친김에 잔야의 머리까지 노렸다. 그런데 잔야는 자신의 귀를 내주고 찌르기를 피해갔다.
...피한다?
재환의 표정이 흥미롭게 변했다. 지금까지 '살짝 찌르기'를 피한 녀석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지. 피한 녀석이 하나 있긴 하다. 그 녀석은 '보통 찌르기'를 맞고 지금 독불의 칼집이 되어 있다.
"형님······!"
예상치 못한 난전에 잔명이 잔망을 부축하고 섰다. 방금 전의 찌르기에 대퇴부와 오른팔을 다친 잔망이 신음하고 있었다.
침음하며 표정을 굳힌 잔야가 형제들을 보호하며 물러섰다.
잔야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단 세 발의 찌르기로 「그림자 비술」을 모두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 공백을 틈타 자신의 머리까지 노렸다.
잔야가 그 찌르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쳐 얻은 초감각이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잔야는 지금쯤 환상수의 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다급히 밀사들을 찾았다.
[분명 무적응자라고 하지 않았나?]
[······틀림없다. 무적응자다.]
금천방이 저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 강함은 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설마..., 심연의 강자?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일견 비슷한 분위기가 풍기기는 하지만 잔야가 본 '심연의 강자'들 중 무적응자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잔야는 다시 한번 태세를 가다듬었다. 발출하는 영력도 별 볼 일 없고, 쓰는 것은 오직 찌르기뿐인 사내. 그런데도 그들 삼형제의 전력을 상회하는 존재.
[믿을 수 없지만 우리보다 강하다.]
[혀, 형님. 그렇다면······.]
[계획을 바꾼다.]
잔야는 납득이 빨랐다. 적이 상식 밖으로 강하다면, 그들의 싸움 방식도 상식 밖이 되어야 했다.
재환은 잔야 삼형제의 급변한 전술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대형을 흩뜨린 잔야 삼형제가 하나둘씩 인질을 방패로 그림자 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찌르기 일변도인 재환의 공격 패턴을 정확히 읽어낸 전술이었다.찌르기는 빠르지만 패턴이 단조로운 공격이다. 공격이 날아들기 전에 방향만 잘 읽어낸다면, 또 그 범위를 최소화할 수만 있다면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그래서 잔야 삼형제는 인질들을 방패삼아 찌르기가 날아올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하는 것을 택했다. 실제로 그 방법은 꽤 효과적이어서, 재환의 찌르기는 점차 공간의 점유율이 낮아지고 있었다.그러나 잔야 삼형제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무슨······?"재환의 오른손으로 무시무시한 풍압이 몰려들고 있었다. 얼마나 강력한 힘이 몰려드는 것인지, 근처의 집기들이 모조리 떨어져 내릴 지경이었다.보통 찌르기의 준비 자세였다.애초에 인질 따위 재환에겐 무의미했다.잔야 삼형제든, 금천방의 범죄자든, 인질들이든.거슬리는 것은 날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의 눈엔 모두 죽은 송장일 뿐이니까.
그런데 보통 찌르기를 사용하려는 순간, 재환의 심장 어림이 욱신거렸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며 인질들의 얼굴 위로 잔상 같은 것이 스쳐 갔다.
...뭐지?
재환은 무시하고 다시 한번 보통 찌르기를 사용하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쳐 갔다.
―나 역시 인간이에요. 비록 당신처럼 강하지도, 굳세지도 않지만, 나도 분명 '인간'이에요.
혼란스럽다. 왜 지금 저 송장들의 얼굴이 '인간'으로 보이는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게도 그의 몸이 공격을 거부하고 있었다. 저들에게 '보통 찌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재환의 공격이 지체되자 잔야 삼형제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재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의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의심」이 흔들리자 「이해」가 흔들렸고, 「이해」가 흔들리자 「망아」가 흔들렸다.
인질들을 죽여야 한다.
재환은 다시 '보통 찌르기'를 사용해 보려 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심지어 그의 「의심」이 집중을 방해하고 있었다. 「의심」이 세계를 「의심」하는 대신, 「의심」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영혼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망아」와는 궤를 달리하는 강력하고 따뜻한 에너지가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무척 오래되고 그리운 느낌이 드는 에너지. 「망아」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가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어떤 힘······.
문제는 이 힘이 지금 당장은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젠장.
사태가 점점 꼬여가자 재환은 처음으로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이 '찌르기' 뿐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베기라든가, 던지기라든가, 하다못해 놈들을 제압하기 위한 잡기(雜技) 하나라도 쓸 수 있었더라면······.
잡기라.
그 순간, 재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주점의 곳곳을 향해 '살짝 찌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떤 공격은 잔야 삼형제를 향했고, 어떤 공격은 주점의 천장을 향했다. 마구잡이의 찌르기는 주점을 벌집으로 만들고 있었다.
"미친놈이 실성했구나!"
잔야는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히죽 웃었다. 저대로라면 놈은 영력이 고갈되어 자멸하고 말 터였다.
재환이 공격을 멈춘 것은 그로부터 삼십 초가 더 경과한 후의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찌르기를 퍼부었는지 숭숭 뚫린 주점의 지붕으로 너른 하늘이 보일 지경이었다.
재환은 그 구멍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검을 아래로 내렸다.
이 정도면 됐겠지.
잔야 삼형제로부터 등을 돌리자, 미노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저놈들은 이제 다른 녀석에게 맡기려고."
"······다른 녀석? 누굴 말하는 거예요?"
"말 많은 고집불통."
말 많은 고집불통?
미노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미지가 스쳤다.
하지만 설마······. 아니, 어떻게?
금천방의 범죄자 중 하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친 것은 그때였다.
"잔야님! 방음 장벽이 깨져 있습니다!"
"뭐?"
잔야의 낯빛이 변했다.
그는 금천방의 밀사들에게 밀어를 넣어 보았다. 그런데 밀사들의 영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돌연 잔야는 흠칫 몸을 떨며 주점의 곳곳을 바라보았다. 숭숭 뚫려 있는 찌르기의 구멍들.
설마, 지금까지 있었던 저 공격은······?
그리고 잠시 후, 주점 안의 모두가 어떤 강대한 기운을 감지했다. 기운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4차 적응자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기세.
잔야 삼형제의 안색이 급격하게 굳어져 갔다.
밝고 웅장한 영압이었다. 이런 영압을 가진 이는 이 성채 안에서 오직 하나뿐이다.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하얀 은빛 플레이트를 걸친 이들이 나타났다. 북쪽 검문소의 경비병들. 그리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주점 안을 환히 메우는 눈부신 은빛에 전율이 인다. 어깻죽지에서 날개처럼 솟아나는 천족의 아우라. 머리 위에서 하늘거리듯 흔들리는 금발. 이 성채 최고 최악의 고집쟁이 검문소장.
은빛 구속의 칼튼.
미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인간이 이렇게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재환을 발견한 칼튼이 눈을 좁히며 물었다.
"재환 씨? 이게 대체...."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법령을 어긴 놈들이 있다. 아마도 고르곤 형법 276조 4항쯤을 어긴 놈들이지."
그 말에 칼튼이 눈을 부릅떴다.
"고르곤 형법은 조항이 그렇게 많진 않습니다만.... 그게 누굽니까?"
"저놈들."
재환의 턱짓에 칼튼이 주점 내부를 바라보았다.
여급들을 인질로 잡고서 난동을 부리는 악적들이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이 주점을 발판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더군."
그 태연한 거짓말에 미노가 입을 딱 벌렸다.
칼튼의 손아귀에서 은빛을 내뿜는 거대한 핼버드가 나타났다.
"세계 멸망이라······.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죄목이로군요."
칼튼의 차가운 눈빛이 잔야 삼형제를 향했다.
"고르곤 형법 제 174조 4항과 124조 6항에 따라, 성채 내의 불법적인 사유물 파손과 주민 상해죄로 당신들을 긴급 구속 조치하겠습니다."
금천방을 비롯한 잔야 삼형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Episode 5. 망자 (4)
은빛 구속은 강했다.
인질을 잡고 있던 금천방의 대다수는 칼튼의 「법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고, 남은 잔야 삼형제 또한 칼튼의 고유 스킬인 「은빛 구속」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비록 '고집쟁이'라는 별명에 그 명성이 바래지고 있긴 하지만, 고르곤 사대 검문소장 중 최강이라는 칼튼의 실력은 그저 허울이 아니었다.
"혼자서 가르낙도 잡는다는 은빛 구속의 명성은 사실이었군."
칼튼이 휘두른 핼버드 끝을 간신히 쳐낸 잔야가 이를 갈았다.
"혼돈"을 여행하는 적응자들에게 있어 천족의 「은빛 구속」은 최악의 상성을 지니고 있다. 고차 적응자인 잔야는 어느 정도 그 구속력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두 동생은 이미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보였다.
칼튼의 핼버드가 선형을 그리며 잔야의 목을 겨누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합니다."
잔야의 목울대로 침이 넘어갔다.
그의 입술이 작게 움지럭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흑운(黑雲)을 써야 할 것 같다.]
[진심입니까, 형님? 그걸 쓰게 된다면······.]
[밀사들이 모두 당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잔야가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항복하지."
"현명한 판단입니다."
완전히 체념한 듯한 그 모습에 칼튼이 가까이 다가와 구속구를 꺼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잔야가 미소를 지었다.
"정의로운 만큼 순진한 구석이 있다더니, 그것도 사실이었군."
순간 뭔가를 눈치챈 칼튼이 경비대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주점 밖으로 나가라!"
거의 동시에, 잔야의 품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뭉게뭉게 피어나며 주점 안을 가득 채웠다. 검은 연기 속에서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와 신음이 들려왔다. 무사히 연기를 피한 이들이 다시 들어오려 하자, 칼튼이 외쳤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십시오!"
연기는 걷힐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곧이어 칼튼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대신 살과 뼈가 뒤틀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연기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잔야 삼형제는 주점 옆 폐건물의 지붕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얼굴에 마스크를 뒤집어 쓴 잔야는 씁쓸한 기색이었다.
"설마 여기서 흑운(黑雲)을 사용하게 될 줄이야."
둘째 잔명이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막내가 흑운을 조금 마신 듯합니다."
"한심한 놈.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검게 물든 잔망의 얼굴을 본 잔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량을 마신 거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참아라."
멀찍이서 금천방의 후속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빨리도 오는군."
후속대의 대장은 잔야와 같은 고차 적응자인 금천방의 장로, 흑설랑(黑舌郞)이었다.
"위대한 땅"에서는 색마로 유명한 녀석이었는데, 결국 적응자들 손에 잡혀서 성기와 혀가 뽑힌 채 능지처참을 당한 녀석이었다.
잔야가 있는 지붕 위로 훌쩍 뛰어 올라온 흑설랑이 이죽거렸다.
"잔야. 꼴이 말이 아니로군?"
"닥쳐라."
"마녀는 어떻게 됐지? 내게 넘겨주기로 하지 않았나?"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예민한 잔야의 반응에 흑설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주점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를 확인하더니 혀를 찼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군. 방주의 허락도 없이 흑운을 남발하다니."
"은빛 구속이 왔다."
"은빛 구속?"
주점 쪽을 보던 흑설랑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설마 은빛 구속이 지금 저 안에 있다는 것이냐?"
"그래."
흑설랑이 통쾌한 표정으로 낄낄 웃었다.
"크하핫! 그 고집쟁이가 흑운을 마시다니! 꼴좋게 됐군."
범죄자들 사이에서 은빛 구속에게 좋은 기억을 가진 이는 없다. 흑설랑 역시 칼튼에게 당한 기억이 있었다.
"오늘 아주 볼 만한 구경거리가 생기겠군."
흑설랑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잔야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둘째야. 놈이 보이느냐?"
"아무 기척도 없습니다. 아무리 녀석이라고 해도 설마 흑운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모른다. 계속 지켜봐라."
사실 은빛 구속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은빛 구속은 상성에서 불리했을 뿐이지, 원래라면 그들 삼형제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였다. 잔야가 신경 쓰이는 쪽은 오히려 찌르기 하나만으로 자신들을 밀어붙였던 한 사내였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흑설랑이 채근하듯 물었다.
"잔야. 망혼석은 어떻게 됐지?"
"아직 저 안에 있다."
"설마 성주 쪽에 빼앗긴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회수만 하면 끝이다."
잔야는 마스크를 단단히 착용한 채 돌입 준비를 마쳤다. 이미 주점 내부는 흑운으로 완전히 뒤덮인 상태. 미량으로도 순식간에 영혼을 오염시킬 수 있는 흑운의 성능을 감안하면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주점 내부의 존재들은 영혼 오염이 한계치에 도달했으리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군.
영혼이 오염된 이들이 어떤 '존재'로 변이되는지 잔야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존재들에 관해 모르는 이는 이 "혼돈"에 아무도 없었다.
그때, 흑설랑이 잔야를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잔야, 저건 뭐냐?"
잔야는 부지중에 흑설랑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태연한 표정으로 주점의 흑운 속을 걸어 나오는 사내의 모습.
설령 녹명의 일족이라 해도 흑운을 정면에서 들이켠다면 멀쩡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저 사내는 녹명의 일족도 아니었다. 더듬이가 없는 녹명 따위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잔야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자가 망혼석을 가지고 있다."
"뭐? 잘됐군. 쳐라!"
흑설랑과 함께 온 후속대가 덤벼들었다.
사내는 태연히 칼을 뽑았다.
한 발짝, 그리고 한 발짝.
잔야는 사내가 한 발짝을 걸어올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환시를 보았다. 사내의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한 명의 후속대가 죽어 나가고 있었다.
낯빛이 변한 흑설랑이 소리쳤다.
"대체 저놈은 누구냐."
저놈이 누구냐고?
오히려 잔야가 묻고 싶었다. 뒤쪽을 보니 아직도 오십여 명에 달하는 3차 적응자들이 남아 있었다.
웬만한 중상급 클랜은 순식간에 쓸어버릴 만한 병력.
잔야는 후속대의 숫자를 보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아직 후속대는 충분하다. 이 정도라면······.
벌떼처럼 달려드는 후속대를 쳐 내던 재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 명 한 명 찔러 죽이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
더 시간을 지체하면 또 아까처럼 곤란한 상황이 닥칠지도 몰랐다.
······이것만은 쓰기 싫었는데.
아이템의 성능에 의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제하고 있었는데, 고집 때문에 계속 쓰지 않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었다.
재환은 싸운 직후 처음으로 독불을 '칼집'에서 뽑았다. 그가 지금까지 칼집 채로 싸웠다는 사실을 잔야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독불이 칼집과 마찰하며 거친 검명(劍鳴)을 토해냈다. 막대한 요기가 사방으로 발산되며, 하나의 거대한 상(相)이 나타났다.
잔야와 흑설랑을 제외한 모든 후속대의 몸이 빳빳이 굳어갔다. 마치 거대한 각수가 그들의 앞에 도래한 느낌이었다.
"가, 가르낙······."
칼집에 내장된 고유 스킬, 「가르낙의 위엄」이 발동된 것이었다.
거대한 가르낙이 우렁찬 포효를 토해냈고, 독불의 검극이 움직였다.
잔야는 망연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3차 적응자 부대를 추풍낙엽처럼 썰어 버리는 위력. 공포에 몸이 굳어버린 후속대들은 거대한 발톱에 몸이 찢기듯 스러져 갔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남은 것은 잔야와 흑설랑뿐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흑설랑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잔야는 바닥에 늘어져 있는 자신의 형제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확인했다.
그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었다.
"네가 살아날 방법이 하나 있다."
마치 속내를 읽은 듯한 말에 잔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재환이 말했다.
"몽마의 위치를 말해라."
잔야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재환 또한 그에 맞춰 기이한 눈빛을 했다.
"왜 웃지?"
실성한 듯 웃는 잔야를 바라보며 재환이 물었다.
그러나 잔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웃을 뿐이었다.
잔야는 알고 있었다. 만약 몽마에 관한 이야기를 분다면, 이곳에서 살아나더라도 그는 결국 죽게 된다.
잔야는 한 존재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잔야가 "혼돈"에서 본 누구보다 강한 존재이자, 장차 "혼돈"을 통일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존재.
금천방주(禁天房主).
아무리 이 사내가 강하다 한들 금천방주보다 강할까? 잔야는 고개를 저었다. 금천방주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심치 못할 사실이었다.
잔야는 믿었다.
이 "혼돈"을 통일하고, 「열매」를 얻어 위대한 땅으로 진출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금천방주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충성심인가?"
잔야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야."
금천방주가 무서운 것은 맞다. 눈앞의 사내가 두려운 것도 맞다. 하지만 지금 그의 행동이 충성심 때문인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잔야는 쓰러진 형제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함께 헤쳐 온 시간들과, 세상을 향한 증오가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증오의 숙원을 대신 이룩해 줄 한 존재의 그림자까지.
잔야가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흑운이 살포되었으니, 곧 '그것'이 시작될 것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어차피 여기서 죽을 거라면.
잔야는 재환을 노려보며 품속에서 검은 보석 같은 것을 꺼내어 그대로 삼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재환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망혼석?
찰나였지만 재환은 잔야가 삼킨 보석의 형태를 목격했다. 그것은 분명 망혼석이었다. 정확히는 망혼석보다 훨씬 사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돌이었다.
돌의 기운이 잔야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며, 그의 육체가 불어나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재환의 기감을 불편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기운이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핫!
잔야의 웃음소리가 괴이쩍게 일그러졌다. 온몸에서 검은 혈관이 도드라졌고, 전신의 근육이 급격하게 팽창했다. 4차 적응자 수준이었던 영력 계수치는 거의 두 배로 증폭하여 순식간에 5차 적응자를 뛰어넘었다.
어쩌면 6차 적응에 달할지도 모를 힘.
부풀어 오른 잔야의 몸이 중앙에서부터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섬뜩한 이빨이 달린 거대한 입이 드러나고, 그 입 주변으로 흉측한 촉수들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재환은 문득 저 존재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마약 같은 걸 먹는군.
거리마다 묘한 가루를 흡입하는 치들을 보며 재환이 그렇게 말했을 때, 미노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긴 한데.... 저건 마약이 아니에요. 영혼의 오염도를 떨어뜨리려면 어쩔 수 없다고요.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았다.
―망자(忘者)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
망자. 존재의 영혼 오염이 백 퍼센트에 도달하여 변이된 괴물.
"혼돈"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두려움이자, 그들 모두가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여기는 공포. 생전의 모든 기억과 이지를 잃고 욕망만이 남은 짐승.
오오오오오오오.
잔야의 목소리가 쾌감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기억들이 소멸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잔야는 비로소 완전한 자유에 이르고 있었다.
자신을 나락에 빠뜨릴 자유. 스스로 구더기 속으로 몸을 던질 자유. 그 파괴적인 자유의 끝에서 잔야는 하나의 세계에 도달했다.
...이것이, 이 세계의 진실인가.
모든 인간들이 송장으로 보이는 세계. 끔찍한 수치와 데이터들이 구더기처럼 존재를 갉아먹는 세계.
잔야는 용솟음치는 자신의 촉수들을 바라보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왜 지금까지 망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우스웠다. 이런 엄청난 세계를 볼 수 있는데 인간으로서의 기억이나 존엄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주, 중형 망자다!"
"모두 도망쳐라!"
공포에 젖은 경비대원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잔야는 주변의 송장들에게 촉수를 마구잡이로 꽂아 영력을 빨아들였다. 점차 이성이 마비되어 갔다. 성욕과 식욕. 끝없는 욕망이 그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그 순간 잔야는 완전한 자유의 노예였다.
그리고 잔야는 한 사내를 보았다.
잔야는 웃으며 그를 향해 촉수를 뻗으려 했다.
그런데 어떤 서늘한 감각이 그의 영혼을 스쳤다.
어떻게 이 세계에 '인간'이 존재하는가?
잔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인간은 없다.
모두 송장들뿐이다.
한데 어떻게 저 사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잔야는 강렬한 거부감에 몸을 뒤틀었다. 저런 존재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잔야는 반사적으로 촉수를 움직여 사내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촉수가 움직이질 않았다.
사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인간도 아니고, 망자도 아닌 자의 눈빛이 그를 바라보았다.
잔야의 촉수들이 덜덜 떨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다고? 이 내가?
저런 것이 존재할 리가 없다.
괴성과 함께 촉수들이 움직였다. 그가 보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이 모든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그러자 사내가 검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마치 세상이 그를 겨누고 있는 듯한 광경.
다음 순간 잔야는 주변의 광경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강력한 섬풍(閃風) 같은 것이 지나갔고,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세상이 빙그르 돌았다.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이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장악했다. 사내의 칼날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허공에 흩날리는 촉수들이 하늘에서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파괴적인 풍경 속에서, 잔야는 오래도록 자신이 바라왔던 외로운 끝의 풍경을 엿보았다.
······비가 내리는가.
잔야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Episode 5. 망자 (5)
숨이 끊어진 잔야의 영혼이 은빛 가루로 변해 흩날렸다. 세계수의 양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재환이 어깨를 두어 번 휘돌리며 입술을 실룩였다.
웬만하면 보통 찌르기는 안 쓰려고 했는데.
잔야를 관통한 찌르기는 창공의 일부를 변형시킬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거대한 몽둥이 같은 것이 하늘을 한 대 두드려 패기라도 한 듯한 광경이었다.
대체 뭐였을까, 저놈은.
보아하니 저 괴물은 이곳에서 '망자'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영혼 오염이 극한까지 이르렀을 때 영혼 변이를 통해 탄생하는 괴물. 재환은 조금 놀랐다.
이곳의 모든 존재는 「의심」을 사용하는 순간 그 형태의 본질이 드러난다. 인간들은 송장으로, 괴수들은 흉악한 감정의 덩어리로······.
그런데 저 망자라는 놈들은 「의심」을 사용해도 모습이 변하지 않았다.
저 거대한 입과 촉수가 놈들의 본질이란 뜻이었다.
재환은 일단 주점 쪽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몽마에 대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아직 주점 근처에 잔당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주점 내부로 들어갔을 때, 재환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튼과 미노를 비롯한 점원들이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특히 칼튼은 상태가 심각해 보였는데, 광채를 뽐내던 그의 은빛 날개가 완전히 비틀려 있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 모양인지 칼튼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서, 내성에 경보를······."
칼튼의 하얀 피부에 불거진 혈관을 보며 재환의 안색이 굳어졌다. 잔야의 그것과 흡사한 증상이었다. 옆을 보니 미노도 상황이 비슷했다.
재환이 미노를 부축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주점 사이로 드는 희미한 볕에 미노가 간신히 눈을 뜨며 말했다.
"...영혼 오염이에요."
색색거리는 숨소리. 재환이 다시 물었다.
"영혼 오염이라는 건, '약'이라는 걸 먹지 않아서 발병하는 게 아니었나?"
"보, 보통은······."
혼돈에서 영혼 오염은 흔한 질병이었다. 오염의 초중기에 각수의 뿔을 갈아 만든 약만 꾸준히 복용하면 극복해나갈 수 있는 병. 재환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미노 본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칼튼마저 이런 꼴이다. 그 칼튼이 이처럼 심각한 지경이 될 때까지 약을 먹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니 답은 하나뿐이었다. 무언가가 주점 내부를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아까 그 검은 연기 때문인가?"
미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위태로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시스템이 고장이라도 난 양, 손가락의 끝에서 스파크가 쳤다.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 오염이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미노의 입술이 우물거렸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역광이 비치는 재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깊은 음영이 진,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여기까지 온 사내의 얼굴이었다. 한 번도 이 사내의 얼굴을 이처럼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자세히 봐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놈들은..., 어떻게 됐어요?"
"모두 죽였다."
그렇구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내의 얼굴이 조금씩 흐려져 간다.
"앞이 잘 보이질 않아요."
"······."
"나 지금 어때요? 괜찮아 보이나요? 숨 쉬고 있죠?"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있잖아요."
미노는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점차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뭔가를 말했다. 마치 스스로의 운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검붉은 색이던 혈관이 이제 완연한 검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
재환은 미노가 이제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아까 그가 죽인 남자처럼 괴물이 될 것이다. 이성을 잃고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괴물로 죽어갈 것이다.
재환은 그녀를 살릴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가 탑을 오르는 내내 연습한 것은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뿐이었으니까.
"정말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노가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날 죽여 줘요."
재환은 조용히 칼을 뽑았다. 그리고 칼을 뽑는 순간,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이 사람은, 인간이다.
모순된 감정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재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여자를 보면 「의심」이 흔들리고, 「망아」가 흐트러지는가. 어째서 잊은 줄 알았던 것들이 다시 돌아오려 하는가.
그가 가는 길에 감정은 필요 없었다.
그녀가 죽여 달라고 했으니 재환은 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를 위한 길이자 재환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으니까.
"잠깐."
누군가가 재환의 손목을 붙든 것은 그때였다. 늙고 주름졌지만 부드러운 손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조금만 기다려 줘."
"자길 죽여 달라고 했어."
"이 양반아! 미노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겠어? 그런다고 진짜 죽여 버리면 어떡해?"
목소리는 주점의 주인이었던 클레어의 것이었다.
다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데가 있는 목소리. 칼튼의 경고와 동시에 주점 밖으로 몸을 피하더니, 다행히 영혼 오염을 면한 모양이었다.
곧이어 주점 안쪽으로 성채의 의료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어서 이쪽으로!"
고르곤 성채의 대처는 제법 빨랐다. 급하게 출동한 성채 내 의료담당관은 아직 망자화가 진행되지 않은 칼튼과 미노만을 싣고 외성 의료원으로 움직였다.
재환은 호송용 침대에 실려 가는 미노를 보며 물었다.
"아직 살아날 수 있나?"
"이대로 망자화가 진행된다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만······."
의료대원 중 하나가 흐려진 얼굴로 말했다.
망자화(忘者化).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스친 공포를 재환은 놓치지 않았다.
[경고합니다! 영혼 오염도가 90%를 돌파했습니다!]
칼튼이 휴대하고 있던 오염도 측정기에서 연신 경보음이 쏟아져 나왔다. 뒤이어 성채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르곤 넷' 급 경보 발령!]
[성채 내부에 소형 망자 출현!]
[북부 노점 거리 인근 지역의 주민들은 지금 즉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채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직접 망자라는 것을 상대해 본 재환으로서는 이 상황이 조금 호들갑스럽게 여겨졌다.
...망자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건가?
「의심」을 통해 곳곳에서 망자에 관한 정보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때, 재환의 기감에 기이한 밀어들이 잡혔다. 적색 야행복을 입은 인형(人形)들이 지붕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
[멸마대(滅魔隊) 1중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멸마대 2중대, 도착했습니다.]
....
연이어 보고가 끝나자, 그들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이가 명령을 내렸다.
[망자화가 끝나기 전에 멸절한다.]
곧 망자 소탕이 시작되었다. 멸마대라 자칭한 이들은 대부분이 3차 적응자 이상이었다. 전체적인 수준에서도 금천방의 세력들에게 뒤지지 않거나,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그들은 곧장 주점 안으로 돌입했다.
"미노! 정신 좀 차려봐!"
클레어는 자신이 가진 약들을 미노의 입에 모조리 쏟아 넣는 중이었다. 일각수건 이각수건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의료담당관이 대원에게 물었다.
"남은 약은 얼마나 있지?"
"······이제 얼마 없습니다."
"어제 새로 보급된 약은?"
"모두 성주님의 병세를 진정시키는 데에······."
"젠장."
오염도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마치 뭔가가 칼튼과 미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듯했다. 일각수나 이각수의 뿔 가루로는 도저히 정화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무언가가.
의료원에 도착하자,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이 곤란한 얼굴로 미노 쪽을 내려다보았다.
"검문소장님은 입원이 가능합니다만, 이 여자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남은 약이······."
"약은 내가 제공할 테니 기구만 빌려줘!"
클레어가 악을 썼다. 결국 경비병이 양보했다.
"그러시다면야."
외성 의료원은 재환의 생각보다도 시설이 열악했다.
그저 넓은 천막에 수백 개의 야전 침대를 끌어다 놓은 게 시설의 전부였다. 침대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환자들의 몰골. 모두 영혼 오염이 상당한 수준까지 진척된 이들이었다.
"비켜라! 긴급 환자다!"
의료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칼튼과 미노의 입에 호흡기를 가져다 대었다. 호흡기를 통해 직접 약을 투여하려는 모양이었다.
의료원의 천막 밖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주점의 모습이 보였다.
경보 발령과 동시에 주점은 폐쇄되었고, 멸마대의 정예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주점 안쪽에서는 망자로 변한 점원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미노가 말한 그 사람이지?"
클레어는 재환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물었다.
"붉은 여우 몇 마리 잡으러 갔다가 사신을 만나서 돌아올 줄은 몰랐네."
"······."
"이곳의 모든 규칙을 거부한다지? 오직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고, 인간을 정의하고."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잘 알고 있어. 이미 본 적이 있거든."
클레어는 미노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그녀의 호흡을 가늠하며 말했다.
재환은 클레어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 처음 본 여자의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바보라서 여기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게 아니야.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지."
뿌리 깊은 무기력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재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용기가 없는 거겠지."
"용기?"
클레어가 반문했다.
"무엇을 위한 용기?"
재차 입을 열려던 재환의 입이 다시 닫혔다.
클레어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에 맺힌 회한과 세월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용기를 내고 또 내며 간신히 살아왔기에, 더 이상 짜낼 용기가 없게 된 사람의 눈동자.
"더 높은 이상, 더 올바른 정의······. 아마 당신은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겠지."
곳곳에서 의료대원의 고함이 들려왔다. 영혼 오염이 깊은 환자들이 새카만 기침을 토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훌륭하고, 숭고한 무엇일 거야. 너무 훌륭해서 이곳 사람들은 감히 이해할 수조차 없는······. 그래, 아마도 당신 말이 맞아. 나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 하지만 아는 것도 하나 있지."
클레어의 눈동자는 꼭 미노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건 당신이 위험하다는 거야."
미노가 정신을 잃기 전 방언처럼 중얼거린 말들이 재환의 뇌리를 스쳤다.
―이제 알겠어요. 내가 왜 당신을 따라다니고 싶었는지. 떠나려는 당신을 왜 자꾸만, 잡고 싶었는지.
그 말들은 클레어의 말과 섞여 점차 뒤죽박죽이 되어 갔다. 클레어와 미노가 동시에 말했다.
"당신은 이곳을 떠나야 해."
―나는 당신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이곳에 오래 있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절망할 거야."
―사람들은 당신을 보며 희망을 가질 테니까요.
"뭔가가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이 그들을 괴롭힐 테니까."
―정말 뭔가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그런 희망 말이에요.
"미노처럼 젊은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쉽게 유혹당하고, 쉽게 흔들릴 거야. 그래서 당신에게 동조하고, 끝내는 이렇게 죽어가겠지."
―혼돈의 사람들은 당신을 싫어할 거예요. 이곳에 이미 적응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나처럼 열등감에 시달리고,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당신을 증오하겠죠.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고, 다칠 거예요.
"난 당신 같은 사람이 정말로······."
―그걸 잘 알면서도 난 왜 자꾸 당신을 잡고 싶어질까요.
클레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미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미노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부디 이 세계를 포기하지 말아 줘요.
Episode 5. 망자 (6)
그때 외성 의료원의 낡은 문이 벌컥 열렸다.
"소장님!"
소장 보좌 제임스와 북쪽 검문소의 대원들이었다.
스치듯 재환을 본 제임스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경비대원 하나가 재빨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제임스가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서 칼튼을 돌아보았다.
"가지고 있는 상비약 다 꺼내!"
경비병들이 휴대 중이던 약들을 모두 토해냈다. 대부분은 일각수의 가루였고, 간혹 이각수의 것도 섞여 있었다. 제임스는 아껴 두었던 삼각수 가루까지 선뜻 내놓았다.
"삼각수로도 정화가 안 되다니······."
의료대원 중 누군가가 신음을 흘렸다. 영혼 오염은 조금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경비대원 하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떡합니까? 만약 소장님이 망자가 되어 버린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겠지."
제임스가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며 말했다.
재환이 지나가듯 물었다.
"한 번 망자가 되면 되돌릴 방법이 없나?"
의료대원 하나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은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 칼튼과 미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재환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칼튼의 멱살을 붙잡았다.
"어이, 정신 차려 봐. 물어볼 게 있으니까."
재환이 칼튼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뺨이 붉게 부풀어 오를 지경이었다. 불안에 떨던 경비대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어 달려들었다.
"가, 감히 소장님께!"
그런데 놀랍게도 칼튼이 의식을 되찾았다.
"소, 소장님?"
북쪽 검문소의 경비병들이 칼튼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부하란 무릇 상관을 싫어하게 마련인데 하나 같이 걱정스러운 얼굴들인 걸 보면, 칼튼은 생각보다 괜찮은 상관이었던 모양이었다.
칼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재환 씨?"
"그래."
"······부탁이 있습니다."
"뭐지?"
"저를 죽여 주십시오."
오늘은 만나는 사람마다 다 자길 죽여 달란다.
재환이 인상을 썼다.
"당신이라면 절 죽여 주실 수 있겠지요. 부탁합니다. 더 늦기 전에 저를 죽여 주십시오."
여러 가지 함의가 담긴 말이었다.
칼튼의 푸른 망막에 무표정한 재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이럴 때는 보통 살려 달라고 하지 않나?"
칼튼이 희미하게 웃는다.
"고르곤 특별법 1조 4항. 영혼의 오염도가 95퍼센트를 돌파해 망자화가 시작된 자들은 모두······."
말하기가 힘들어지는지 칼튼이 기침을 토해냈다. 재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는 칼튼처럼 조직에 헌신하는 인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아무런 의심도 없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인물이라면 더욱 질색했다.
하지만 그런 재환도 칼튼에 관해 한 가지 인정하는 바가 있었다. 만약 "악몽의 탑"에 칼튼 같은 인물이 열 명만, 아니 다섯 명만 있었더라도 그는 40년씩이나 탑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재환은 다시 기절하려는 칼튼의 뺨을 때리며 말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무, 무엇을······."
칼튼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네가 자랑하는 고르곤 법령에는 '과거 회귀의 죄목' 같은 건 없냐?"
"그게 무슨······."
"이 세계를 버리고 과거로 도망간 놈들을 처벌하는 법령은 없냔 말이다."
"질문을 이해 못 하겠······."
칼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이 돌아갔다. 칼튼의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검푸른 핏줄이 다시 한번 팽창하며, 온몸의 근육이 기어 다니는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망자화가 임박한 것이다.
[경고! 영혼 오염도 94%. 곧 망자화가 시작됩니다!]
그때, 의료원의 천막이 나풀거리며 일련의 사내들이 난입했다. 선두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이 익숙했다. 그는 방금전까지 주점 쪽에서 망자들과 싸우던 멸마대의 지휘관이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 본 제임스의 낯빛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고르곤 성채 최강의 전투대대 중 하나.
대망자섬멸부대, 멸마대.
그 멸마대를 이끄는 수장.
"멸마대주······."
멸마대주의 차가운 시선이 정확히 칼튼을 향하고 있었다. 몇몇 경비대원이 슬쩍 칼튼의 몸을 가려 보았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모두 비켜라."
스르릉, 하고 칼날이 울었다.
"저자는 이미 너희들이 아는 북쪽 검문소장이 아니다.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말에도 경비대원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멸마대주가 강경책을 택했다.
"고르곤 특별법 1조 4항에 따라, 칼튼 북쪽 검문소장 및 1인을 즉각 배제한다."
「법령」의 현현.
재환은 어쩐지 우스운 기분이 되었다.
고집쟁이, 네가 지키던 세계가 널 죽이러 왔구나.
「법령」의 효력에 경비대원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법령」은 성채 내에서는 전무후무한 힘을 발휘하는 스킬. 저항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멸마대주의 칼은 가차 없이 칼튼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격이었다.
그랬어야 했다.
누군가가 그 칼날을 맨손으로 잡기 전까지는.
"이 녀석은 죽일 수 없다. 아직 물어볼 게 남았거든."
*
5차 적응자가 휘두르는 칼을 맨손으로 잡는다는 것.
당연하게도, "혼돈"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놀란 멸마대주가 검을 빼내려고 했지만, 단단히 붙들린 칼날은 손아귀에서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멸마대주는 5차 적응자 중에서도 상당한 강자였다.
그런데 재환은 그의 칼날을 맨손으로 막아냈다. 아무리 영력을 발출하지 않은 검이라 해도, 그의 검을 맨손으로 막아낼 수 있는 자는 이 성채 내에서도 손에 꼽는다.
게다가, 법령이 효과가 없다.
고르곤 성채에서만 무려 백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멸마대주였다.
법령을 파훼하고 자신의 칼날을 막아낸 사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자임은 확실했다.
"······귀하께서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멸마대의 행사를 방해하지 마시오. 우린 더 큰 재앙을 막으려는 것뿐이니까."
"재앙?"
재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튼을 죽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 사태의 원인을 찾는 거지 칼튼을 죽이는 게 아니잖아?"
정론이었다.
멸마대주 역시 사태에 관해 들어 알고 있었다. 금천방의 일당들이 무언가 수를 썼고, 칼튼의 영혼이 오염되었다. 듣자 하니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다 이렇게 되었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범인들은 사라졌고 증거도 없어졌다.
칼튼은 곧 망자가 될 것이다.
사실은 그것뿐이었다.
"우린 법령대로 할 뿐이오."
"법령."
재환은 「의심」을 통해 칼튼의 인벤토리를 살폈다.
역시 있군.
칼튼의 품속으로 들어갔던 재환의 손이 한 권의 책과 함께 빠져나왔다. 칼튼이 달달 외우고 다니던 일명 『고집쟁이 법률사전』의 실체였다.
"고르곤 특별법 1조 4항······. 영혼의 오염도가 95%에 임박해 망자화가 시작된 자들은 모두 즉결 처형한다. 이 항목이로군?"
"······그렇소."
"그럼 망자화만 막는다면 칼튼을 죽일 이유는 없는 것이겠지?"
재환은 차원 배낭 속에서 거무튀튀하고 길쭉한 뿔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내 생각엔 이거면 될 것 같은데."
의료팀 중 누군가가 그걸 알아보았다.
"가르낙의 뿔!"
고르곤 성채에 오각수 가르낙의 뿔이 유입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주인이 저 사내였을 줄이야?
"저, 저거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의원들이 동의하자 멸마대주가 천천히 칼을 집어넣었다.
사내의 말이 맞았다. 망자화를 막을 수만 있다면 당장 칼튼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의원들의 표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문제가······."
시중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약재는 삼각수 이하의 것들이었다. 사각수 이상의 뿔을 가공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성채 내에 그런 일이 가능한 존재는 그나마 〈황혼 어스름〉의 메이칼 부공방장 정도. 하지만 지금 부공방장을 불러오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부공방장이 고작 약을 제조하는데 자신의 기술을 빌려줄지도 알 수 없는······.
거기까지 말하던 의원들이 입을 딱 벌렸다.
"이러면 되는 거 아닌가?"
가르낙의 뿔이 재환의 손에서 으스러져 가루가 되고 있었다.
"자, 잠시만요!"
경악한 의원들이 손을 떨며 그 가루를 받았다.
대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약이었다.
기본 정제가 끝난 가루가 칼튼과 미노의 호흡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염도 측정기의 계수가 처음으로 증가 양상을 멈추고 안정세에 돌입했다. 아직 정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망자가 되는 것은 막아낸 것이다.
그때, 미노를 진료하던 의원이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큰일 났습니다!"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 오염지수.
"망자화가 진정되지 않습니다. 이쪽 분의 체력이 너무 저하되어 있어서······!"
의료팀이 황급히 미노의 오염도를 측정했다.
[경고! 영혼 오염도 95% 돌파! 망자화가 시작됩니다!]
의료대원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이젠 멈출 수가―"
아무리 좋은 약을 쓰더라도 오염도가 95%를 돌파하게 되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멸마대주가 다시 칼을 뽑으려 했다. 클레어가 소리쳤다.
"청허, 청허를 불러줘! 그 영감이라면 '망자 베기'가 가능하잖아! 그걸 쓰면 아직 가능성이 있어!"
"······설마 절망신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의료담당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절망신의(切忘神醫) 청허.
이곳 의료원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망자화의 단계에 접어든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의원. 독문절기인 '망자 베기'를 사용해 강제로 망자화를 중지시킬 수 있다는 지고의 신의.
재환의 머릿속으로 의원들의 밀어가 들려왔다.
[그런데 담당관님, '망자 베기'가 대체 뭡니까?]
[절망신의께서 사용하시는 기술이다. 듣자 하니 망자화를 진행시키는 오염 자체를 베어 버린다더군.]
[어떻게 그런 일이······.]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절망신의와 아는 사이야. 그 영감이라면 반드시 이 아이를 도와줄 거야."
"신의께서는 중요한 일로 내성에 계십니다. 고작 이런 일로 오실 수는 없습니다."
"······고작 이런 일이라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클레어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멸마대주가 끼어들었다.
"비켜라."
강력한 영압에 클레어와 의료담당관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멸마대주는 미노의 영력 수치를 재보는 듯하더니 재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양보할 수 없소. 귀하께서도 비켜주시오."
재환이 독불을 뽑았다.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살벌한 대치가 시작되려는 순간, 뜻밖에도 재환이 등을 돌렸다.
"이 여자는 내가 죽인다. 부탁을 받은 건 나니까."
멸마대주가 의외라는 듯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공기가 서서히 누그러졌다. 의료팀이 물러났다. 클레어가 입술을 깨문 채 재환의 칼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 의료대원들이 체념한 듯 고개를 돌렸다.
재환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위장 스킬이 풀린 여자의 낯빛은 창백했지만 아름다웠다. 그가 이 "혼돈"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
그녀의 이름은 미노다.
그가 한 번도 불러준 적이 없는 이름. 재환은 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무얼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왜 암살자 주제에 이토록 유약한 성정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독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웅웅, 하는 울음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재환의 눈에 미노의 죽음을 인도하는 가상의 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극도의 「망아」 상태에 도달했을 때 보이는 죽음의 선(線). 그것은 미노에게 재환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그 선 중 어느 것을 따라가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즉사할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주변의 정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뭐지?
미노와 재환을 제외한 주변의 정경이 새하얀 백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재환의 「의심」이 극한까지 만개했다.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탑의 66층에서 서큐버스를 만났을 때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고도의 환술이다.
재환은 「의심」을 사용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워있는 미노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재환이 칼자루를 쥐었다. 공간 자체를 갈라 버릴 속셈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재환은 깜짝 놀랐다. 미노의 옆에 처음 보는 노인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허허, 우리 미노가 어쩌다 이 꼴이 됐을꼬.]
챙이 넓은 갓에 새카만 도포를 입은 훤칠한 인상의 노인. 얼핏 보면 저승사자로 오해할 법한 인상이었다.
노인은 재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미노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가엾은 아이야, 내가 도와주마.]
노인은 미노를 검지로 톡 치더니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재환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미노의 전신을 음흉하게 바라보며 눈을 빛내던 노인이 자신의 검을 부여쥔 순간. 화들짝 놀란 노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흐아아앗! 뭐냐, 네놈은!]
노인은 뭔가를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더니, 잠시 후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저, 젊은 친구가 대단한 영혼을 품고 있군. 대체 어떻게 내 '세계'에 들어온 거지?]
재환은 대답하지 않고 「의심」을 사용했다.
그런데 「의심」이 먹히지 않았다.
짧은 순간 여러 가지 가설이 뇌리를 스쳤다.
오염된 영혼을 바라보던 중 갑자기 나타난 노인.
설마, 이 노인이 영혼 오염의 근원인가?
재환은 의원들이 나누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노인을 죽이면 여자는 살아날지도 모른다. 재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데 숭고한 영혼이 어찌 그리 옹졸한 기세를 품고 있을꼬. 마치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재환의 칼자루가 움직였다.
[이런?!]
노인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사나운 노호성을 터뜨렸다.
[젊은 친구가 혼나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이어서 눈부신 검격(劍擊)이 터져 나왔다.
그 충격에 재환은 한 걸음을, 노인은 세 걸음을 물러섰다. 재환은 깜짝 놀랐다.
내 검을 막아?
혼돈에 온 이후 처음으로 그의 '살짝 찌르기'가 막혔다. 찌르기를 피하거나 타격을 받고 안 죽은 놈들은 있지만, 막아낸 적은 하나도 없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인은 '베기'로 찌르기를 막았던 것이다.
노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어, 어떻게 나의 '평범 베기'를······?!]
어쩐지 신경 쓰이는 기술 이름이었다.
수염을 부들부들 떨던 노인이 비틀거렸다.
방금 충돌로 큰 손해를 본 것이다. 부딪친 노인의 칼에는 심각한 금이 가 있었다.
[대, 대체 너는 누구냐?]
노인의 일갈과 함께 주변 세계가 깨어져 나갔다. 주변의 풍광이 다시 의료원의 그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어서 처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 돼······! 사각수로 만든 나의 애검이!"
고개를 돌려 보니 방금까지 그와 검을 겨루었던 노인이 무릎을 꿇은 채 통곡하고 있었다.
부러진 검을 든 채 파들파들 떠는 노인을 보며, 멸마대주와 클레어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시, 신의······?"
"청허 영감!"
고르곤 성채가 자랑하는 최고의 의원.
절망신의 청허의 등장이었다.
Episode 6. 절망신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