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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 은빛 구속 (2)

'약속된 기회의 땅'이라 칭해지는 "위대한 땅".

웬만큼 이 땅에서 굴러본 적응자라면, 이 '약속된 기회'가 얼마나 기만적인 수사(修辭)인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위대한 땅은 그 어떤 기회도 약속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위대한 땅"이 딱 하나 약속하고 있는 게 있었으니.

바로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이곳은 죽어야만 올 수 있는 장소였군."

그제야 재환은 악몽의 탑을 부순 자신이 어째서 "위대한 땅"으로 가지 못하고, '줄기'인 "혼돈"으로 빠져나오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약 육체가 있었다면, 그는 곧장 "위대한 땅"으로 나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본 게임에 진입하지 않고 튜토리얼인 채로 탑을 나온 그는 영혼체 상태였다. 그러니 "환상수"는 자신을 사자(死者)로 착각해 이곳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위대한 땅"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영혼들이 모여드는 장소, "혼돈".

재환은 영혼 채로 발가벗은 사람들을 보았다.

'뿌리'에서 빠져나와 땅을 거닐었으나, 결국엔 '줄기'로 돌아오게 된 이들.

다들 죽은 눈빛들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위대한 땅"이 주는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죠."

미노가 소환장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도 죽으면 정말로 끝이에요. 줄기에서 죽은 영혼은 소멸해서 환상수의 양분이 되거든요. 더 이상은 기회가 없는 거죠."

재환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던 붉은 여우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지금쯤 이 거대한 나무의 일부가 되었으리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건가?"

"일단은 그렇죠."

"육체를 찾을 방법이 있는 모양이지?"

"정말 희박한 확률이지만,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한다면······."

그 말은 어쩐지 잔인하게 들렸다. 죽은 후에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지독한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을 보는 미노의 눈빛도 어느덧 탁해져 있었다.

...그래서 기억 상실이 부럽다고 말한 건가.

미노 또한 분명, 죽음을 통해 혼돈에 도달했으리라. 잊고 싶은 죽음의 기억. "혼돈에 왜 오게 되었느냐"라는 재환의 질문은, "당신이 왜 죽었느냐"는 말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원형 마법진의 빛이 점차 사그라지자, 성채의 도개교 쪽에서 다수의 경비병들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더럽게 많이 죽었구만. 자, 일들 하자!"

번듯한 제복을 걸친 턱수염 사내가 소리치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서 사망자들을 부축했다.

"어이, 정신 차리라고! 이렇게 비리비리하니까 뒤진 거야 인마."

넋을 잃은 사망자들이 하나둘씩 경비병들에게 인도되어 도개교 안쪽의 검문소를 향했다. 소환장의 사망자들을 관리하는 것도 이곳 경비병들의 일인 모양이었다.

"자자, 이거 걸치고 저쪽 가서 줄 섭시다."

경비병들의 통솔 하에 수십 명의 인파가 검문소 앞으로 정렬했다. 검문소 앞의 작은 단상 위에는 예의 턱수염 사내가 서 있었다.

턱수염 사내는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쯤 너희들은 여기가 어디인지 알았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설마' 하는 연놈들도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설마가 맞다. 너희들은 '정말로' 죽었다."

이미 한 번 죽은 자들을 또 죽이는 말이었다.

"너희 중 상당수는 "위대한 땅"에서 참가한 첫 번째 전투에서 죽었을 것이다. 내장이 터지고, 머리가 짓밟힌 채로. 벌레처럼 비참하게 죽어갔겠지."

사내의 말에 사람들의 낯빛이 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자신이 왜 죽게 된 것인지 알고 있는 자가 있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턱수염 사내도 입을 다물었다. 대신 턱수염 사내는 품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묵묵히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허공에 실오라기처럼 풀려나갔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를 찾을 시간.

공통의 답에 도달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추위를 느끼는지 넝마를 걸친 여자들이 떨고 있었다. 이윽고 담뱃불이 꺼졌다. 턱수염 사내는 꽁초를 툭 떨어뜨리더니, 발로 무참하게 짓이겼다. 그 모습을 보던 사망자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약했기 때문입니까?"

스스로 그 말을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턱수염 사내가 비웃듯 입을 열었다.

"맞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시선이 좌중 하나하나에 모두 머물렀다.

"너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웅성거림이 퍼져갔다.

모두 억울하다는 눈빛들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그들 중 노력하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노력하지 않은 자는 애초에 악몽의 탑조차 클리어 할 수 없는 세상인데. 심지어 몇몇은 아예 빳빳이 고개를 든 채로 턱수염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부정하는 눈빛들이군.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네놈들, 정말 죽도록 노력해 본 적이 있냐? 정말 '죽도록' 말이다."

죽도록, 이라는 말이 이처럼 사무치게 들리는 순간이 있을까.

"죽음을 겪어 본 너희들이니까 이제 알 것이다. 적들의 칼날 앞에서 내장을 질질 흘리면서, 날아간 머리를 짓밟히면서, 수치스러운 능욕을 당하면서 죽어 본 너희라면, 반드시 알 것이다. 내가 방금 말한, '죽도록'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신음과 흐느낌. 생생한 죽음의 기억들. 자신의 기억과 마주한 사망자들은 스스로의 어깨를 부둥켜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턱수염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으니까.

그들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죽도록' 노력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너희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이곳에서 다시 한번 '노력'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뭐, 아직은 영혼뿐인 상태지만."

기회.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서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뿐이다. 이번에도 죽으면, 너희들은 '정말로' 죽는다. 그러니 너희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도 오직 하나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

"살아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라. 칼날을 갈고 힘을 길러라.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힘을 기르며 기다리는 것.

"그러면 언젠가 기적은 찾아올 것이다. 내가 장담하지. 노력한 자는, 반드시 환상수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니 노력해라. 너희를 죽인 원수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들을 찢어발기고, 능욕하고, 짓밟기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연설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알몸의 사람들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잠자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경비병들이 영혼 없는 박수를 친 후, 하나둘씩 사망자들을 대형 검문소 쪽으로 인도했다.

"남자는 저쪽, 여자는 이쪽이다. 잘 따라오도록."

단상에서 내려온 턱수염 사내에게 경비병들이 다가왔다.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역시 보좌관님이십니다."

보좌관이라 불린 턱수염 사내가 경비병들로부터 물을 받아 마시며 중얼거렸다.

"훌륭은 무슨."

턱수염 사내는 지겨운 표정이었다.

실제로 이곳 북쪽 검문소에 발령받은 후, 그는 방금과 같은 연설을 백여 번도 더 반복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둥.

노력이 부족했다는 둥.

강해져서 복수하라는 둥.

분명 다 좋은 말이다.

좋은 말인데.

턱수염 사내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좋은 말은 거짓말뿐이라는 것을.

저들 중 누구도, 이제 다시는 이 "위대한 땅"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위대한 땅"에서 그러했듯 '첫 사냥'에서 죽을 것이며,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이곳의 주민이 되어 남은 생을 연명하듯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제임스, 입 잘 털더라? 여자 꼬실 때나 쓰는 주둥이인 줄 알았더니."

턱수염 사내, 제임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검문소의 앞쪽으로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특히 여자 쪽이 주목할 만했다. 전신에 흑색 로브를 두른, 선홍빛 머리칼의 여인. 저런 미인이라면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는데······.

"벌써 날 잊은 거야? '흔해 빠진' 제임스."

제임스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쳤다.

이어서 여자의 외모가 순간적으로 변했다.

검고 긴 머리카락에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 이른 새벽을 훔쳐 색을 낸 듯한 하얀 뺨.

제임스의 표정에 반가움이 번져 나갔다.

"······이게 누구야. 「흑림방」의 미노로군."

그 말에 미노가 정색을 하며 외모를 바꿨다.

"크게 떠들지 마. 뒈지기 싫으면."

재환은 제임스라 불린 경비병과 미노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서로 면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소장 보좌로 승진한 모양이네?"

"그래서 이런 연설도 하는 거지."

대체 언제 엄숙했냐는 듯, 제임스의 표정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그의 눈길이 미노의 전신을 재빨리 훑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검문을 시작할 듯한 눈빛.

미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응. 대단하더라. 네 '고상한 연설' 듣느라고 오래 기다렸으니까 빨리 들여보내 주면 좋겠는데."

"웬일로 북쪽 검문소로 왔군. 평소에는 다른 쪽으로 가지 않나?"

"어쩌다 보니 길을 이리로 들었어."

제임스가 킬킬 웃자, 미노는 딱히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난 딱히 증명할 필요 없지? 내 얼굴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증명(證明).

그 단어가 주는 이질감에 재환이 미노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문득 그 시선을 느낀 미노가 한숨을 짓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

[당신, '증명'하는 법도 잊은 거죠? 아니면 해 본 적이 없으려나?]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의 밀어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성채에 출입하는 모든 인원은 '증명' 절차를 받아야 해요. 보통은 "시스템"을 통해 불러낸 정보창을 띄워서 본인 증명을 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줄 알죠?]

당연히 모른다.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 실은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지금 재환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악몽의 탑"을 탈출하며 「망아」의 상태에 도달한 직후부터, 재환은 인벤토리나 상태창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보좌관 제임스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미노."

"응?"

"미안하지만 상황이 좀 변했어."

"······상황? 무슨 소리야?"

"얼마 전부터 규정이 바뀌어서, 성채에 출입하는 자들은 반드시 '증명서'를 제시하게 됐다."

"증명서?"

증명서?

미노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설마 예전에 쓰던 그 구닥다리 증명서 말야?"

"그래."

"어째서? "혼돈"에서 시스템 오류들이 수정된 후로 증명서는 필요 없어졌잖아?"

"내성에서 듣기로는 시스템이 이상을 일으켜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잦아졌다더군."

미노는 자신의 「정밀 탐색」 스킬이 실패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단순히 스킬 고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것도 이와 관련된 현상인지 모른다.

"아무튼 시스템 이상 현상으로 정보 창이 정상 출력되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어. 그래서 "혼돈"의 모든 성채에서는 당분간 '증명서'를 통해 신분 증명을 하게 됐다."

"하필이면 지금······."

일이 귀찮게 됐다. 미노는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재환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 증명서는....]

재환이 물끄러미 미노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없겠죠.]

"...."

[나만 믿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 테니까.]

가볍게 한숨을 내쉰 미노가 말했다.

"제임스."

"음?"

"미안하지만 내가 증명서를 두고 왔거든. 대신 이걸로 때우면 안 될까? 하루 이틀 보는 사이도 아니고, 겨우 증명서 하나로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미노는 씩 웃으며 제임스의 손에 뭔가를 쥐여 주었다. 하얀 가루가 들어 있는 봉투였다. 제임스의 눈빛이 변했다.

"좋은 약이군. 어떤 각수의 뿔이지?"

"이각수야."

"요즘 수입이 꽤나 쏠쏠한 모양이군, 미노."

씩 웃으며 주머니를 열어본 제임스는 새끼손가락으로 가루를 콕 찍어 혀에 대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품속에 주머니를 집어넣으며 재환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이자는 일행인가?"

"응."

"무슨 사이지?"

"아니 뭐 사이랄 건 없고, 그냥―"

"흠?"

슬렁슬렁 대답을 피하려는 미노의 태도에 제임스의 눈빛이 다시 바뀌었다. 미노가 재빨리 재환에게 손짓을 했다. 일이 꼬이기 전에 얼른 지나가자는 투였다. 그런데 재환이 제임스의 곁을 지나치려는 순간, 제임스가 어깨를 붙잡았다.

"좀 의심스러운데. 그쪽은 증명서를 보여줘야겠어."

인상을 찌푸린 미노가 짜증을 냈다.

"잠깐만, 내가 저 사람 몫까지 챙겨줬잖아."

"그 정도로는 부족해."

"아니, 일각수도 아니고 이각수 뿔이면―"

안색이 굳은 제임스의 표정을 본 순간, 미노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지금 제임스는 진심이었다.

...왜? 이유는 모른다.

어쩌면 단순히 재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고, 미노 자신이 실수를 했을 수도 있다. 혹은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지금 굽히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금방 안색을 편 미노가 제임스를 붙들며 말했다.

"제임스, 왜 이래? 우리 하루 이틀 거래하는 거 아니잖아. 저 사람 내 동료야. 그러니까―"

그런 미노의 노력을 무시하듯, 묵묵히 꽂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증명서 같은 건 없는데."

그 태연자약한 말투에 제임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면 넌 못 들어와."

"없으면 안 되는 건가?"

어느새 다른 경비병들도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미노가 어어, 하며 물러나는 사이 어느새 일이 커지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안 되지. 네가 누군지 증명이 안 되잖아."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데, 어째서 다른 물건이 필요하지?"

"허헛, 이 친구 봐라?"

오랜만에 힘 좀 쓰겠다는 듯, 병장기를 쥔 경비병들이 위협적으로 어깨를 풀기 시작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미노가 재빨리 재환에게 밀어를 사용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서 해결될 게 아니에요. 상대는 성채의 경비병들이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아무리 재환이 강하다고 해도, 경비병들과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성채 하나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자꾸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굴면 나도 못 도와줘요.]

미노는 일부러 겁을 주듯 이야기했다. 일개 적응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혼돈"은 그저 일신의 무력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재환보다 전투력은 떨어진다 해도, "혼돈"에서의 생활은 훨씬 더 오래되었다.

[경비병은 레드 폭스 같은 용병단이랑은 달라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볼 테니 당신은 물러서―]

다행히 아직 문제는 심각하지 않았다. 대단한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니고, 고작 증명서 쪼가리 하나가 걸리는 거라면 그녀가 어떻게든 해 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재환의 기세가 변한 것은 그때였다.

왼발이 아주 살짝 뒤로 물러났고, 어깨의 높낮이가 완만하게 변했다. 예민한 신경을 가진 미노만이 포착할 수 있는 변화였다. 만약, 저기서 손을 칼자루에 갖다 대기만 한다면······.

...설마?

미노가 재빨리 밀어를 사용했다.

[잠깐만요! 아니죠?]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니! 그거 아니잖아! 당신이 강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저 경비병들을 죽이게 되면 당신은 수배자가 된다고요!]

그러나 재환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미노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당신이 강해도 이 성채 전체와 대적할 수는 없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재환의 기세는 바뀌지 않았다.

멍청한 경비병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 미묘한 움직임만으로도 재환의 존재감은 너무나 강렬하여, 미노에게는 거의 환시가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이곳의 모든 이를 도륙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환시(幻視).

순간 어제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숲 하나를 불태워 버린 무시무시한 찌르기.

미노는 자신이 뭔가 커다란 오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자는 강할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법칙에 구속되지도 않는 자였다.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미노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기어코 칼을 뽑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곳의 모든 경비병을 모두 베고, 필요하다면 이 성채 전체와도 대적할 것이다. 그걸 할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는,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사람.

미노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Episode 3. 은빛 구속 (3)

수십의 경비병들을 순식간에 도륙하는 것? "혼돈"의 고차 적응자들이라면 누구든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경비병들이 죽은 이후다.

하나의 '성채'와 대적하는 것.

그것은 개인이나 클랜을 상대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혼돈에서 성채란 시스템을 대신하여 환상수의 적응자들을 관리하는,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할을 겸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채란 곧 하나의 세계다.

수십의 '고차 적응자'들을 순살할 수 있는 혼돈 십방의 방주들도 성채와 대적하지는 않는다. 그런 짓을 해서 이득 볼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간, 미노는 어쩌면 이 사내가 그런 상식 따윈 전혀 개의치 않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제임스! 저 사람 진짜 내 일행이거든? 우리 흑림방의 엄청 중요한 손님이라고!"

"아까는 그런 소리 없었잖아?"

"우리 방파의 일을 대놓고 떠벌릴 수는 없잖아."

결국은 흑림방까지 팔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제아무리 성채의 소장 보좌라도 억지를 쓰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제발 헛소리하지 말아요! 알겠죠?]

재환은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재환의 모습이 제임스는 영 못마땅한 듯했다.

걸친 옷으로 봐서는 "혼돈"에 온 지 얼마 안 된 녀석이 틀림없는데, 저 흑림방의 미노가 이렇게나 감싸고돌다니.... 제임스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렸다.

"싫다면?"

"이번만 그냥 넘어가 주면 나중에 내가 한잔 살게. 어때?"

"그래도 안 돼."

미노가 이를 악물었다.

"오늘 왜 그래? 대가가 필요하면 더 지불할게. 이각수 뿔이면 될까?"

지나치게 적극적인 미노의 모습에, 오히려 제임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더 의심스러워. 저 녀석, 소장님한테 데리고 가야겠어."

소장이라는 말에 미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모든 성채의 검문소에는 동서남북의 입구별로 각각 한 명의 검문소장이 있다.

보통 소장은 1, 2차 적응자쯤은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로 임명된다. 특히 이 북쪽 성문에 배정된 검문소장은 그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고르곤 성채의 모든 주민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고집쟁이 칼튼.'

미노도 몇 번인가 칼튼에게 걸려서 귀찮은 일을 치른 적이 있었다. 여기서 '귀찮은'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딱히 칼튼이 개차반 같은 성격을 가졌다거나,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통행료를 과잉 징수한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 반대였다.

"혼돈"의 어떤 검문소장도 칼튼처럼 청렴하고 올곧지는 않다.

천사의 혈통이 섞인 천족(天族) 방계 출신답게, 칼튼은 검문소 내의 그 어떤 검문소장보다도 더 정직한 원칙주의자였다. 마치 검문소장이 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고나 할까.

한데 그게 문제였다.

원래 검문소장이라는 자가 지나치게 완고하면 사랑받기 힘들다. 이를테면 적당히 융통성도 좀 있고, 뇌물도 좀 받고, 불한당 같은 녀석들도 적당히 눈감아 주고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검문소장도 좋고, 성채 내부의 지하 경제도 활성화된다. 그리고 성채의 지하 경제가 커져야 성채의 고관들이 얻는 수익도 급증한다.

그런데 칼튼은 그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쪽 검문소에서 걸려 들어가는 현상범은 다른 검문소의 서너 배에 이르렀고, 혼돈의 밀수상들은 차라리 다른 성채에 물꼬를 트는 편을 택했다. 멀쩡한 이들마저 사소한 실수 때문에 줄줄이 끌려가 조서를 쓰는 곳인지라, 적응자들 사이에서는 고르곤 성채를 출입할 때 '무조건 북쪽만은 피해라'라는 이야기가 돌 지경이었다.

그나마 제임스가 소장 보좌로 들어오고 나서는 좀 나은 형편이었지만······.

미노는 재환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 사람과 칼튼이 만나면 모두 끝장이다.

하나는 법도 없이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인간들을 절대 두고는 못 보는 천족이다. 둘이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나 빤한 일이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자칫 잘못하면 오늘 북쪽 검문소가 폭파될지도 모른다.

"제임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이 사람 전혀 나쁜 사람 아니거든? 아니,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데, 하여간!"

마음이 급해지니까 횡설수설하게 된다. 이제 미노도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레드 폭스 알지? 레드 폭스를 이 사람이 혼자 쓸어 버렸다니까?"

"레드 폭스를? 혼자서?"

"그래. 전혀 의심스러운 사람 아니라니까!"

클랜 하나를 혼자서 쓸어버렸다고?

제임스가 재환의 전신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나마 차고 있는 칼이 좋아 보이기는 한데, 겉모습은 그냥 비렁뱅이다.

"엄청 의심스러운데?"

"아니, 그러니까······."

[아니, 당신도 무슨 말이라도 좀 해요! 이상한 말은 빼고!]

재환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그의 입술이 뭔가를 움직거리며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깐 아무 말도 하지 말라더니.'

[당신한테도 최소한의 사회성은 있을 거 아니에요!]

미노의 간절한 목소리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재환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여자 말이 맞아."

미노의 예쁜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 더 성의 있고 설득력 있게 말하라구요!]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임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당황한 미노가 채근했다.

[아니, 그렇게 고집 피울 때예요? 지금―]

그 순간, 미노는 재환이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력한 영압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을 모조리 부정할 존재였다.

훤칠한 키에 말끔한 피부의 미남.

어깻죽지에 은빛 아우라가 날개처럼 일렁이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거의 흡사한 외모를 지닌 천족.

'성채 고르곤' 최악의 고집쟁이.

미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과 동시에, 제임스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다들 무슨 일입니까?"

고르곤 성채의 명물.

북쪽 검문소장, 고집쟁이 칼튼의 등장이었다.

*

잠시 후, 대강 사정을 전해들은 칼튼은 자신의 매끈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고뇌에 빠졌을 때 칼튼이 자주 취하는 버릇이었다.

고집쟁이 칼튼은 특유의 고집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외모로도 유명했다. 아무래도 천족 혼혈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흐트러진 금발을 묶은 채 턱을 매만지는 모습이 어찌나 우아한지, 성채의 조형 예술가들이 턱을 만지는 그의 모습을 조각해 판매할 지경이었다.

제일 인기 있는 작품은 『고뇌하는 칼튼』.

그러나 칼튼이 고뇌를 하든 뭘 하든 미노에게 있어 그는 그저 귀찮고 꼬장꼬장한 기생오라비 검문소장일 뿐이었다.

"그러니까요, 소장님. 이자는 레드 폭스를······."

"레드 폭스니 어쩌니 하는 건 됐습니다."

미노가 입을 다물었다.

칼튼이 재환을 향해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 성채에 들어오고 싶다는 것이군요."

"그래."

"하지만 당신은 증명서가 없고요."

"그래."

"안 됩니다."

"왜지?"

칼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그런 '당연한 것'을 궁금해 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고르곤의 북쪽 검문소에서 근무한 55년 동안, 그처럼 당연한 것을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안 되니까 안 되는 것.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내는 그걸 궁금해 한다.

'...기뻐하고 있어!'

칼튼의 표정을 본 미노가 이마를 짚었다. 이제 '그게' 나오겠군 싶었다.

칼튼이 입을 열었다.

"증명서를 통해서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경우, 검문소장의 권한으로 여행객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다. 고르곤 출입법 제 27조 4항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추가로 이 출입법의 참조조항으로 포함된 고르곤 출입법 34조 2항에 따르면······."

경비병들이 전율했다.

"나왔군! 소장님의 『고집쟁이 법률 사전』!"

"오랜만에 보는데?"

"볼 때마다 정말 굉장하다니까."

"난 가끔 저게 다 거짓말이 아닐까 싶어."

이 와중에도 북쪽 검문소의 경비병들은 어쩐지 들뜬 분위기였다. 그럴 법도 했다. 그들은 그만큼 자신의 소장을 믿는 것이다. 적응자들은 말한다.

고르곤 성채의 4대 검문소장 중 최강은 단연 칼튼이라고.

비록 직위는 검문소장밖에 안 되지만, 칼튼이 이곳에서 근무한 55년 동안 북쪽 검문소는 단 한 번도 돌파된 사례가 없었다. 칼튼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 비슷한 사례에 근거한 고르곤 구속법 제 2조 7항에 따르면,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은 이는 검문소장의 판단 여부에 따라 강제로 구속 조치에 들어갈 수······."

그때, 재환이 말을 끊었다.

"그만. 그러니까, 날 구속하겠다는 건가?"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근 10년 이내 칼튼에게 저딴 식으로 말한 놈은 아무도 없었다. 칼튼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경비병들은 알 수 있었다.

칼튼이 지금 화가 났다는 것을.

"물론 당신이 '증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지금 당장 그런 조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그런 것이 왜 필요하지?"

"필요합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증명서를 가지고 자신을 증명하니까요."

"증명서에 뭐가 쓰여 있는데?"

"당신의 본명, 소속 기관, 대외 직업과 주요 스킬 정보, 일부 스테이터스 정보, 범죄 경력 및 영혼 오염도, 그리고······."

"그렇다면 더더욱 내겐 그 '증명서'라는 게 필요하지 않겠군."

그 말에 칼튼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혼돈"의 주민들은 누구나 증명서를 지니고 있고, 그 증명서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한다.

증명서란 적응자가 혼돈에서 스스로를 증명할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그 증명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군요. 그럼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을 증명할 겁니까?"

"나는 나를 증명하지 않겠다."

너무나 확고한 그 목소리는 칼튼을 당황케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나온 적응자는 그의 55년 근무 역사 이래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희귀한 경우였다.

대다수의 적응자들은 칼튼이 읊는 「법령」의 구속력에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칼튼은 그저 이유 없이 법령의 내용을 줄줄 읊었던 게 아니었다.

언령 스킬, 「법령(法令)」.

「법령」은 성채의 일부 인사들만이 다룰 수 있는 상급의 언령 스킬이었다.

검문소장급임에도 그 능력을 인정받은 칼튼은 성채 내의 소장급들 중 유일하게 법령을 하사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숙련된 3단계의 적응자들조차 칼튼이 줄줄 읊는 「법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곤 했다.

그런데 이 사내는 대체 어떻게······.

더욱 기이한 것은 스킬을 시전한 칼튼 쪽에서 오히려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법령조차 뚫고 들어갈 틈이 없는 단단한 영혼.

어떤 의미에서 칼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자는 마치, 자신을 증명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칼튼은 침음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 검문소장 칼튼은 고르곤 구속법 제 2조 7항에 따라 지금부터 당신을 구속하겠습니다."

칼튼의 손아귀에서 은빛 아우라가 일렁였다.

아우라의 그물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재환의 전신을 휘감았다. 경비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오오, 저것은!"

『고뇌하는 칼튼』이 여성 수집가들이 선호하는 최다 판매 품목이라면, 혼돈의 부유층들만이 가지고 있는 칼튼 컬렉션도 있다. 휘황한 은빛 아우라로 뒤덮인 칼튼을 조형한 히든 컬렉션.

이름하야 『은빛 구속의 칼튼』.

그 조형체의 모티브가 눈앞에 있었다. 실제로 은빛 구속은 칼튼의 또 다른 별명이기도 했다.

천족 고유 스킬, 「은빛 구속」.

그것은 칼튼이 가진 최강의 스킬 중 하나였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 구속력을 가진 은빛의 사슬.

하지만 잠시 후 칼튼은 다시 한번 놀라야만 했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은빛 아우라는 재환에게 닿는 순간 연기처럼 흐트러지더니 소멸해 버렸다.

"······어떻게?"

「법령」의 힘을 떨쳐낼 정도로 강력한 영력을 가진 적응자들을 만나본 적도 있었다. 하나 그런 강자들조차, 칼튼의 고유 스킬인 「은빛 구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고르곤의 법령에 거역하는 모든 이는 구속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한(惡漢)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은빛 구속」이 지금 눈앞의 사내는 악한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미노가 끼어들었다.

"소장님! 이 사람,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데 깜빡 두고 온 것뿐이에요.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다음부터는 잘 들고 다니라고 할게요. 네? 제발요!"

파들파들 떨리는 작은 어깨. 하얗게 부르쥔 작은 손.

재환은 입술을 꾹 깨문 미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이 세계에서 '성채'라는 곳의 존엄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법령. 법령이라.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재환이 자세를 바꾸고 기세를 꺼뜨렸다.

미노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아아, 드디어 이 인간이 내 말을 들어주는구나.

애초에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다. 귀찮기는 하지만 그냥 검문소장을 따라가서 인터페이스를 호출해 개별 정보를 제공하고 조서를 쓴 다음 증명서를 새로 발급받으면 끝날 일이니까.

"알겠다. 너희들의 '법령'을 따르도록 하지."

의외로 너무 순순히 말을 따르니까 미노는 되려 불길한 느낌까지 들었다. 칼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당신을 구속······."

그 말에 재환이 묘한 얼굴을 했다.

"아니, 난 구속당할 필요가 없어."

"그게 무슨······."

"저 여자가 했던 것처럼 하면 되는 거잖아?"

멈칫한 미노의 얼굴이 천천히 사색으로 변했다.

"자, 잠깐만요!"

그러나 재환은 이미 차원 배낭을 뒤져 꺼낸 '뭔가'를 칼튼을 향해 던진 후였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칼튼의 손이 그 '뭔가'를 잡았다.

"그걸 받고 날 보내 줘. 그럼 되는 거지? 아까 보니까 이렇게 하면 되는 것 같던데."

좌중의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환과 눈이 마주친 제임스의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저, 저 자식이―"

칼튼은 넋이 나간 눈빛으로 재환이 던진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잘난 법령대로라면, 다들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었나? 좀 전에도 그렇게들 하던데 말이지."

법령.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 것.

"혹시 부족해? 그럼 이것도 주지."

두 번째 '뭔가'가 칼튼을 향해 날아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미노가 소리를 질렀다.

[다, 당신 왜 그래요, 진짜!]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특히 제임스와 그의 뇌물수수를 곁에서 방관한 경비병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지금 놈을 죽여야 한다!'

혼돈에서 가장 깨끗한 검문소장인 칼튼에게 이 범죄 행각이 들통 나게 된다면, 이 일은 결코 묵과되지 않을 것을 경비병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제임스는 바로 지금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병장기를 꼬나 쥐고 나섰다.

"감히 소장님을 뇌물로 매수하려 들다니, 어처구니없는 녀석이로구나!"

"소장님! 저런 놈은 즉결 처형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집쟁이 칼튼에게는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짓이 있다. 지금까지 총 154명의 가엾은 적응자들이 그딴 식으로 칼튼의 양심을 굴복시키려다 고르곤 성채의 감옥에 갇히거나 즉결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지금 막, 그 155명째 인물이 그들의 눈앞에서 탄생하려는 참이었다.

제임스는 기대했다.

고르곤 성채가 만들어 낸 오물이, 고르곤 성채에서 가장 깨끗한 존재에게서 지켜지는 광경을.

그런데 칼튼의 표정이 묘했다.

"재환 씨라고 하셨습니까?"

칼튼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영롱한 청색의 보석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또 바라보더니, 갑자기 몹시 정중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정말 장난이 짓궂으시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녹명가의 사자(使者)여."

Episode 3. 은빛 구속 (4)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소장님이 어째서 증명서도 없는 자를······."

"설마 그 소장님이 뇌물을 받아들이신 건가?"

"어디 가서 그런 소리들 말게!"

몇몇 적응자들이 검문소 진입로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한 후 성채 안쪽으로 사라졌다.

누군가는 재환의 검을 연신 흘끔거렸고, 또 누군가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지나쳤다. 주변에서는 경비병들이 수군거렸다.

특히 제임스는 노골적으로 재환에게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눈빛을 언어로 바꿀 수 있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느낌이었을 터다.

'저 녀석이 대체 뭐길래?'

그리고 잠시 후, 검문소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미노와 칼튼이었다. 특히 미노는 거의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법령」의 정신 고문에 들들 볶인 것이다.

"미노 씨, 다음부터는 꼭 증명서를 지참하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뇌물은 절대로 안 됩니다. 원래는 고르곤 출입법 7조 34항에 따라 엄정히 처단해야겠지만, 재환 씨가 선처를 부탁해서 특별히 용서해드리는 겁니다."

미노가 탁 풀린 동공으로 힘없이 재환 쪽을 바라보자, 칼튼이 말을 이었다.

"재환 씨는 이미 자신의 신분을 증명했습니다."

재환이 칼튼에게 건넸던 물건.

그것은 "위대한 땅"의 5대 가문인 녹명가(綠螟家)에서 만든 망혼석(忘魂石)이라 불리는 귀물(貴物)이었다.

기본적으로 망혼석은 녹명가의 일원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었지만, 사실 망혼석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망혼석은 적응자의 영력을 강제로 상승시켜 주는 보물이었다.

가령 재환이 칼튼에게 던져준 청색 망혼석은, 「무적응자」를 단숨에 「1차 적응자」 수준의 영력을 갖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만한 물건이었기에, 재환은 자신의 신분을 무리 없이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망혼석들은 확인이 끝났으니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나 보군."

"망혼석은 쉽게 누구에게 양도할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칼튼은 재환의 손에 직접 두 알의 망혼석을 쥐여 주었다.

재환과 미노를 진입로 안쪽으로 안내한 칼튼은 이게 마지막 절차라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체온계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오염도 측정기입니다. 이미 알고들 계시겠지만, 성채에 출입하는 존재들은 반드시 이 검사를 받아야만 합니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해야 하니까요."

오염도? 재환은 힐끗 미노 쪽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럴 때는 그녀가 떽떽거리며 설명해 줬으니까. 하지만 미노는 여전히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칼튼이 말했다.

"아마 법령에 당했으니 당분간은 저런 상태일 겁니다."

재환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노 씨부터 재 보겠습니다."

삑-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허공에 작은 화면이 출력되었다.

[측정 결과 : 안전 경고! 영혼 오염도가 15%를 돌파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복약을 권합니다.]

칼튼의 표정이 또 굳어졌다.

"미노 씨, 고르곤 출입법 8조 14항에 따르면······."

미노는 멍청한 얼굴로 품속에서 가루약 뭉치를 꺼내 입 안에 꾸역꾸역 처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재환의 차례였다. 측정기가 깜빡이는 순간 재환은 뭔가가 자신의 몸을 빠르게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측정기의 불빛이 과도하게 깜빡였다.

그런 일은 처음인 듯, 칼튼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설마, 오염된 영혼인가?

그런데 다음 순간, 측정 결과가 출력되었다.

[측정 결과 : 대상의 영혼 오염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칼튼이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번 재환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해 보겠습니다."

[측정 결과 : 대상의 영혼 오염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칼튼은 잠시 침묵했다. 이 측정기는 결코 오류가 나지 않는다. 그가 근무한 이래로, 아니, 이 측정기가 만들어진 이래로 측정기가 '오류'가 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측정기가 영혼 오염도를 측정할 수 없는 경우는, 오직 단 한 경우뿐이다.

바로 영혼 오염도가 0%인 경우다.

0%의 영혼 오염도.

그건 좋은 약을 많이 먹는다고 달성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었다. 55년 동안 측정기를 찍어온 칼튼조차 이런 결과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 성채의 고차 적응자 중 누구도 이처럼 깨끗한 영혼을 보유한 자는 없었다.

어쩐지 칼튼은 납득한 얼굴이었다.

"과연, 이래서 제 「은빛 구속」이 전혀 먹히지 않았던 것이겠죠. 저는 이제껏 당신처럼 맑은 영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칼튼은 「법령」 스킬이 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은빛 구속」조차 전혀 먹히지 않았던 재환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스템을 전혀 준수하지 않는 자가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모순이었다. 모순이었지만, 명백한 측정 결과를 확인한 마당에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절차는 모두 끝났으니,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재환이 순순히 가지 않았다.

*

"소장님, 정말 저렇게 보내 줘도 괜찮겠습니까?"

소장 보좌 제임스가 멀어지는 둘을 보며 말했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임스, 당신도 녹명가가 혼돈에 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알 수밖에 없다. 위대한 땅의 5대 명가들은 혼돈을 방문하기 전에, 각 성채에 미리 기별을 넣으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5대 명가다.

꿈을 다루는 「몽마」를 비롯해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도 "혼돈"을 왕래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녹명가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초록색 피부에 두 개의 더듬이. 녹명가의 생김새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특징적이었다.

"그렇죠. 그는 전혀 녹명가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소장님은 왜 그가 녹명가라 확신하셨습니까?"

그 말에 칼튼이 쓴웃음을 짓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제임스, 혹시 망혼석이 어떤 물건인지 아십니까."

"적응자의 영력을 증폭시켜 주는 귀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망혼석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적응자라면 누구나 망혼석을 탐낸다.

"그렇다면 혹시, 망혼석의 부작용에 관해서도 들어 보셨습니까?"

부작용?

그 말에 제임스의 표정이 잠깐 멍해졌다.

칼튼은 말없이 자신이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을 벗었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 손바닥과 모세혈관이 새까맣게 타 버린 손바닥.

그러나 분명 화상은 아니다.

제임스는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영혼 오염?"

어떻게 이런 일이.

제임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영혼 오염은 "혼돈"을 살아가는 이의 업(業)과 같은 병이었다. 혼돈의 모든 이들은, 혼돈에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조금씩 영혼이 오염된다.

조금씩, 그리고 조금씩.

그리고 끝내 영혼 오염 수치가 백 퍼센트에 달하면, 죽음보다도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바로 사냥한 각수의 뿔을 먹는 것.

뿔을 갈아 만든 '약'을 꾸준히 복용한 자들은, 오염을 피해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제임스가 아는 한 칼튼은, 이 성채에서 가장 영혼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칼튼의 영혼이 오염되었다.

그것도 손바닥만.

제임스는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어 칼튼의 손에 뿌려 주었다. 아까 미노에게서 받은 그 약이었다.

"설마 망혼석 때문입니까?"

칼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 당신은 녹명가가 아닌 이가 망혼석을 지니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제임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망혼석 정도 되는 귀물이면, 녹명가를 습격해서라도 그걸 얻으려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텐데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녹명 중에는 혼자 다니는 이들도 있다. 그들 모두가 망혼석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한 번쯤 돌을 노리고 습격하는 무리도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제임스는 그런 일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영혼 오염 때문이었군요."

칼튼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녹명가가 아닌 자는, 결코 망혼석을 다룰 수 없습니다. 오염을 피한 채로 그 돌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오직 녹명뿐이니까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칼튼이 저 사내를 녹명가라 칭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쉽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더듬이가 없는 녹명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에, 칼튼이 씁쓸하게 미소를 짓더니, 어깻죽지로 돋아나 있던 자신의 은빛 아우라를 꺼뜨렸다.

"제임스, 지금 제가 뭘로 보이십니까?"

"······예?"

다음 순간, 제임스는 칼튼의 말을 이해했다.

칼튼 제비어.

천족과 인간의 혼혈로 태어난 남자.

그는 천족의 특성인 뾰족한 귀와 이마의 보석을 물려받지 못했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오직 천족의 은빛 아우라 뿐. 그게 없다면 그는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

제임스는 속으로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런가. 만약 저 사내도 소장과 같은 존재라면······.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하던 제임스가 멈칫했다.

하지만 이 고집쟁이 소장이 그런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저 사내를 통과시켰단 건가.

제임스는 칼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선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상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제임스."

"······죄송합니다."

"아뇨, 당신의 의심은 훌륭합니다."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다.

"저 역시 평소라면 그런 이유만으로 저 사내를 통과시키지 않았을 테니까요."

곧바로 제임스는 뭔가를 깨달았다.

"설마 내성의 명령이 있었습니까?"

"한시가 급했던 모양입니다. 연락을 넣었으니, 아마 곧 저들을 찾겠지요."

"아"

"저자가 녹명의 일원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망혼석을 가지고 있고, 또 사용할 수도 있는 듯하니······."

망혼석.

적응자의 영력을 높여주는 돌.

동시에 녹명이 아닌 자를 빠르게 오염시키는 돌.

그런 망혼석을 다룰 수 있는 자를 시급히 찾는 일.

제임스의 머릿속에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성주님의 병세(病勢)와 관련 있는 일입니까?"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이 고르곤에도 곧 뭔가가 시작되리라는 것.

칼튼은 재환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나는 녹명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아니야.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날 보내 줘도 괜찮은 건가? 너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일 텐데.

정의. 그 말에 칼튼이 빙긋 웃는다.

―언젠가, 다시 우리의 정의가 만나는 날이 있겠지요.

칼튼은 재환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떠올렸다.

그 기세가 아니었다면 칼튼은 황급히 달려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싸우고 싶어 했던 사내.

아니, 어쩌면 그가 상대하고 싶었던 건 자신이 아니라······.

칼튼은 가만히 고르곤 성채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만약 그의 검이 뽑혀 나왔다면, 또는 그가 망혼석을 던지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쯤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실력을 자부하는 칼튼조차 이상하게도 그 뒤의 그림이 잘 그려지질 않았다.

"참, 제임스."

"예?"

"듣자 하니 당신이 바로 뇌물을 수수한 장본인이라더군요."

"그, 그건······."

"고르곤 형법 제 34조 7항에 따르면······."

제임스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Episode 4. 1%의 세계 (1)

「세상에는 노력만으로는 갈 수 없는 세계가 있다.」

―〈황혼 어스름〉 부공방장.

메이칼 가르나드가 직공들에게 남긴 말 中

*

"혼돈"에는 일대의 방파 또는 세력들이 모여 군집을 이룬 거점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삼궁사성(三宮四城)이었다.

특히 혼돈 방위의 기준점이 되는 사성(四城)들은 적응자들의 정착을 허락하기 때문에, 적응자들의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

성채 고르곤은 그 사성(四城) 중의 하나였다.

...아쉽군. 그냥 한판 붙어 보고 싶었는데.

재환은 어깻죽지에 은빛 아우라를 일렁이던 칼튼을 떠올렸다. 사기꾼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 입으로 법령이란 걸 줄줄 읊던 녀석.

재환은 법을 말하는 존재들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있었던 악몽의 탑에도 법조계 인사들이 다수 공략에 참가했었다.

―탑 안의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

처음 그들은 약자들을 위해 법을 만들었다. 기존의 사회와 완전히 격리된 세상. 어쩌면 진정 인간을 위한 법을 제정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많은 법을 만들었고, 어떤 법들은 약자들을 보호해주는 듯했다.

착각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모든 법은 '그들만이 아는 법'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름도 모르는 법에 걸려 넘어졌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면 늘 과도한 세금을 내야 했고, 보호라는 명목 하에 통제된 장소에서만 사냥해야 했다. 성장 폭이 낮은 그들은 약한 스킬, 레벨이 낮은 장비들만을 가질 수 있었다.

모두가 평등하기 위해, 약자들은 공평하게 약해졌다.

법은 강자에게 아첨했고, 약자에게 잔혹했으며, 체계를 고착시키기 위해 한없이 어려워졌다. 그렇게 법령이 만든 체제에 의해 탑의 분위기가 한계에 달할 무렵, 법을 만든 사람들은 법을 남긴 채 과거로 사라졌다. 누구도 지키지 않는 외로운 법들은 버려졌다.

85층 이후 재환이 만든 법은 하나뿐이었다.

모든 인간은 오늘을 살아간다.

재환이 지금껏 믿고 지켜온 법은 그것 하나뿐이다.

길 한번 더럽게 복잡하군.

재환이 혼잡한 거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짐 덩이도 하나 끼어 있었다.

미노는 여전히 몽롱하게 눈이 풀린 상태였다.

어떻게 걸을 의지는 있는 모양인지, 재환이 걸어가면 비척비척 따라오기는 했다.

...무슨 자기만 믿고 있으란 것처럼 말하더니.

아마 이대로 계속 함께 다니는 것은 무리겠지.

"혼돈"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난 인간.

반가운 마음도 있었으나, 재환에게 미노의 의미는 거기까지였다. 앞으로 그가 걸어갈 길을 생각하면,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그녀에게도 좋을지 모른다.

재환은 일단 미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만 거리를 배회하기로 했다.

희한한 빛깔을 띤 약초들을 파는 좌판상들. 휘황한 세공을 뽐내는 장비상들. 그리고 다양한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한 거리.

그 거리를, 재환은 비틀대는 미노와 함께 걸어갔다.

"요새 성주님 얼굴이 통 안 보이네."

"듣기엔 앓아 누우셨다는데······."

"허허."

곳곳에서 들려오는 상인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노점상 거리의 큰 골목길을 지나자 대낮부터 여관의 종업원들이 호객행위에 한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헤맸을까.

마침내 재환은 자신이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간만에 사람이 많은 곳에 온 까닭일까.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시장 거리의 뒷골목이었다.

골목의 깊숙한 곳에서는 건달패로 보이는 녀석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아, 아까 미노가 먹던 '약'이라는 것을 한창 코로 흡입하고 있었다.

망할. 여긴 또 어딘지.

별수 없이 재환은 「의심」과 「이해」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정보로 구체화되어 재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처럼 혼잡하고 어수선한 곳에 온 게 처음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정보가 마구잡이로 밀려오자, 정신에 과부하가 걸리며 심각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그때 재환의 감각에 중요한 정보가 스쳤다.

"어이, 이제 정신 좀 차려 보지?"

미노의 눈빛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묻지 말고 길부터 안내해. 지금 머리 아프니까."

주변을 둘러보며 재빨리 지리를 파악한 미노가 바깥 길 쪽으로 재환을 안내했다.

"일단 저쪽으로 나가요."

골목 거리의 바깥쪽으로 나가자, 큰길임에도 비교적 한산한 장소가 나왔다. 그제야 재환의 두통도 사라졌다.

"됐어, 너는 이제 가."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내팽개치듯이······."

서서히 기억들이 돌아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재환이 무심하게 말했다.

"방해만 돼."

단호한 재환의 말에 미노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자신만 믿고 있으라며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는데, 결과적으로 일을 해결한 것은 재환이었다.

변명할 말은 있었다. 그가 조금만 협조해줬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임스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더라면, 칼튼이 거기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난 아직...."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사실은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직 당신에게 빚을 갚지 못했어요."

미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만약 여기서 한 번 더 재환에게 같은 대답을 듣는다면, 그녀는 지금 자신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는 이 생각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방해만 되는, 쓸모없는 인간.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줄곧 노력해 온 시간이 눈앞을 스쳤다. 어떻게든 살고, 또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왜일까. 이 사내의 앞에 서면, 그런 자신의 시간들이 모조리 의미를 잃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을 때, 재환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이봐요."

재환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저기요."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질문을 해도, 그는 결코 대답할 줄 모른다.

그래서 아직 그녀는 그의 정체조차 모른다.

물론 아는 것도 하나 있긴 하다.

그가 인간이라는 것.

대답하기보다는, 질문하길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것.

그는 그녀가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갈 것인지 아닌지를 질문했고, 또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어째서 증명서가 필요한 것인지를 질문했다.

그녀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들을 궁금해하는 사람.

오직 이 세상에 대한 질문들로 이루어진 사람.

······이 사람은, 왜 그런 것들을 궁금해 하는 것일까.

그 질문들을 통해서 이 사내가 궁극적으로 닿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미노는 불현듯 궁금해졌다.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너랑은 상관없어."

"······그래도 말해 줘요."

미노는 조금 상처받은 느낌으로 말했다.

"찾는 게 있어."

"뭔데요? 혹시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재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몽마."

몽마. 위대한 땅에서는 「제작자」라 불리는 존재들.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미노는 멈칫했다.

'상품'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이라면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몽마를 찾아서 뭘 하려고요? ...복수?"

미노는 재환이라면 충분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침묵.

미노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몽마는 위대한 땅 전체에서도 굉장히 희귀한 종족이에요. 한곳에 머무르는 법도 없고요."

"그럼 여긴 없는 건가?"

"잘 찾아보면 있긴 하겠죠. 몽마는 '죽음'을 겪지 않고서도 "혼돈"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족 중 하나니까요."

죽음을 겪지 않고서도 "혼돈"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재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몽마만 그런 건가?"

"재배자들이나 "위대한 땅"의 군주들도 가능해요. 특수한 방법을 사용해서 진입한다고 들었는데, 저도 자세한 방법은 알지 못해요."

재환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그 움직임에 미노의 표정에도 약간 화색이 돌았다. 왜인지, 조금은 재환이라는 사내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음....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미노는 재환의 짙은 눈썹을 주목한 채,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했다.

"몽마가 있을 만한 곳을 하나 알긴 해요."

"그게 어디지?"

"대장간이 하나 있어요. 몽마가 만든."

대장간. 그 말에 재환은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빙룡검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대장간에 한 번 들르긴 해야 했다.

"아."

미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런 검을 칼집도 없이 허리에 매달고 다니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까부터 재환을 보는 주변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쪽으로 안내해 줄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재환이 칼자루를 잡았다.

"일단 아까부터 따라오는 녀석들을 좀 손봐주고 나서."

재환이 등을 돌리자, 먼젓번 골목에서 약을 먹던 건달패들이 킬킬 웃으며 서 있었다. 마침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후미진 길목이었다.

건달패의 두목으로 보이는 녀석이 앞으로 나오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저쪽입니다, 대장님!"

"찾았다! 너, 그 칼······!"

건달들이 칼을 뽑는 순간, 재환도 칼자루를 잡아 뽑았다.

건달패들의 처량한 비명이 골목 어귀를 가득 메웠다.

*

잠시 후, 십여 명에 이르던 건달패들은 모조리 길바닥에 드러눕거나 달아나고 말았다.

...건달 아닌 것도 하나 해치운 것 같긴 한데.

지붕 위에 숨어 그를 관찰하던 누군가가 있었다. 때마침 사용 중이던 「의심」에 걸려든 녀석은, 제법 열심히 숨어 있었는데, 너무 열심히 숨어있는 통에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왕 검을 뽑은 김에 그 녀석도 기절시켜 놨다. 죽이지 않은 것은 딱히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노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찌르기만으로 전부 해치울 수 있죠? 제대로 된 스킬을 쓰면 대체 얼마나 강한 거예요?"

"난 찌르기밖에 몰라."

"······농담이죠?"

"진짜야. 살짝 찌르기. 보통 찌르기. 세게 찌르기."

웃으며 손사래를 치던 미노가 멈칫했다.

"...진짜로?"

미노의 질문에 재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누가 기술 이름을 그 따위로 지어요?"

"혼돈"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이라면 대부분 휘황찬란한 기술명을 갖고 있게 마련이었다. 강한 만큼 멋있어 보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 지어 줄까요? 흑화파열참이나 아수라무한참 어때요?"

"거창한 이름은 싫어."

"그래요, 뭐. 이름이야 개인 취향이니까. 근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뭔데."

"방금 쓴 기술은 그 살짝, 보통, 세게 중 뭐예요?"

허공이 번쩍번쩍하는 찌르기였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세게 찌른 찌르기였다.

모르긴 몰라도 혼돈 십방의 강자들이라고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법한 파괴력.

그런 찌르기라면······.

"살짝 찌르기."

"네?"

"살짝 찌르기야."

쓰러진 사내들은 건달패치고는 꽤 강한 수준이었다.

대부분은 무적응자였지만, 1차 적응자도 둘 정도 끼어 있었다.

그런 놈들을 '살짝' 찔러서 다 죽여 버렸다고?

미노는 재환이 레드 폭스를 쓸어버렸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숲 하나를 그대로 박살 내버린 그 엄청난 '찌르기'를.

미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지금까지 '살짝 찌르기'만 써온 거예요?"

"아니. '보통 찌르기'도 한 번 썼지."

미노는 그 '보통 찌르기'란 것이 아마 레드 폭스를 끝장낸 그 찌르기인가보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재환의 대답은 달랐다.

"뿔 달린 늑대를 사냥했을 때."

"엄청 강한 각수였나 보죠?"

"다른 녀석들보단 강했지."

재환은 자신의 차원 배낭에 들어 있을 각수의 뿔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 뿔 다섯 달린 늑대는 재환이 "혼돈"에 들어선 이후 상대했던 가장 강한 적이었다. 녀석은 '살짝 찌르기'를 몇 대나 맞고도 죽지 않았다. 물론 '보통 찌르기'를 한 대 맞더니 그대로 죽어 버리긴 했지만.

한동안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재환을 보던 미노는 의외로 빠르게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아는 사람 중에도 당신처럼 한 가지 기술만 쓰는 적응자가 있어요."

"나처럼?"

"네. 그 사람은 찌르기가 아니라 '베기'지만요."

...베기만 사용하는 적응자?

흥미가 생긴 재환이 그에 관해 좀 더 물어보려고 할 때, 어디선가 대앵-대앵-하는 쇳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운 소리였다.

재환은 정말 오랜만에, 악몽의 탑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동료를 떠올렸다.

제이와 〈제이스 공방〉.

탑의 최전선에서 끔찍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오면, 재환은 언제나 신전의 성수에 몸을 깊이 담근 채로 공방에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음악도 아니었지만, 그저 그곳에서 가만히 울려 퍼지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소리였다.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겪고, 또 검이 부러진 채로 돌아왔을 때도, 그 소리만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가 사라진 후에도 그 소리는 환청처럼 사라지지 않고 재환의 귓가에, 또 재환의 손끝에 아련한 감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쩌면-

제이가 물려준 그 소리가 있었기에, 그는 혼자서 탑의 100층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길었던 망치질 소리가 마침내 잦아드는 곳. 그 시작이자 끝의 장소에서, 미노가 입을 열었다.

"고르곤에서 가장 큰 대장간이에요."

〈황혼 어스름〉

몽마가 있다는 대장간의 이름이었다.

*

언젠가 "위대한 땅"의 호사가들은 다음과 같은 화두를 논한 적이 있었다.

"위대한 땅 최고의 장인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호사가들은 먼저 장인(匠人)이라는 표현이 심히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애초에 위대한 땅에서 '최고의 장인'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몽마(夢魔).

위대한 땅의 최강자가 군주라면, 위대한 땅 최고의 장인, 아니 장마(匠魔)는 몽마였다.

특히 「명장(名匠)」이라 불리는 오백 명의 몽마들과, 「거장(巨匠)」이라 불리는 13인의 몽마들은 "위대한 땅" 전체에서 단연 최고라 주저 없이 손꼽을 수 있는 최고의 제작자들이었다.

성채 고르곤에 위치한 〈황혼 어스름〉은 그런 「명장」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몽마, '깊은 어스름의 이그넬'이 만든 "혼돈" 최고의 무기 공방 중 하나였다.

재환은 주변을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아토포스에서 가장 큰 공방보다도 훌륭한 수준이었다. 내부는 널찍했고 사용하는 도구들도 하나 같이 고급품이었다. 곳곳에서 제작 의뢰가 진행 중인지 수십의 장인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고, 중앙에 위치한 화로의 열기는 어지간한 공방 전체를 녹여버릴 만큼 강렬했다. 재환이 물었다.

"이곳을 몽마가 만들었다고?"

"그래요."

"그럼 몽마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쩌면요."

그때, 공방의 안내를 맡은 직공 하나가 어디선가 나타나 그들을 맞이했다. 어느 장인의 제자쯤으로 보이는 젊고 건장한 청년이었다.

"어서 옵쇼―!"

"네가 몽마인가?"

들어오자마자 대뜸 질문을 던지는 재환을 보며, 직공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곳에서 '몽마'라고 하면 가리키는 대상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미노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죄송한데 이분이 죽었다 살아나신 지 얼마 안 돼서 상태가 좀.... 조금만 양해해 주세요."

"아, 그렇습니까."

미노의 심심한 미소에 직공의 표정이 풀렸다.

[아니, 어떻게 봐도 사람이잖아요.]

재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몽마를 만나러 왔다."

"······공방장님을 만나러 오셨군요."

직공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공방장님께서는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어디로 간 건가?"

"그게, 워낙 방랑벽이 심하신 분이라······. 설마, 공방장님께 직접 의뢰를 맡기러 오신 겁니까?"

재환은 잠시 생각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떤 물건을 의뢰하시려고······."

"칼집이다."

"칼집이라······."

칼집이 없는 재환의 칼을 잠시 바라보던 직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공방장님이 계셨다 하더라도 의뢰를 수주하진 않으셨을 것 같군요."

"왜지?"

"애초에 공방장님의 본업은 무기 제작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몽마들이 주로 만드는 것은 '무기'가 아니니까요."

그럼 뭐냐고 물으려던 재환은, 자신이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몽마란 놈들이 '주로 만드는 것'을, 재환은 지난 수십 년간 가장 처절한 형태로 겪어 왔기 때문이다.

Episode 4. 1%의 세계 (2)

재환은 떠오르는 기억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마음을 다스렸다.

어쨌든 몽마는 없다는 건가.

몽마를 만나 꼭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

재환이 다시 물었다.

"그럼 남은 장인 중 최고는 누구지?"

"그다음은 부공방장이신 메이칼 님이신데······."

직공이 재환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끝을 흐렸다. 재환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전히 비렁뱅이 차림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메이칼 님의 공정은 비용이 상당합니다. 게다가 제작 재료도 필요하고······."

"재료는 가져왔어."

공방에서 '재료'란 각수의 뿔을 칭함이 보통이었다. 물론 강철이나 묵철 같은 금속도 제련은 하지만, "환상수" 내부에서 각수의 뿔만큼 가치 있는 재료는 없었다. 그 어떤 금속도 각수의 뿔보다 가볍고 단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뿔을 가져왔단 말씀이십니까?"

직공이 의심스런 목소리로 되물어왔다.

"저희는 최소 이각수 이상의 뿔이 아니면 의뢰를 받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보급형 칼집 중에서 골라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 〈황혼 어스름〉에서 제작한 것인 만큼, 보급형이어도 상당히 품질이 괜찮―"

재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무안해진 직공이 뭐라 말하려는 차, 재환이 물었다.

"너희가 말하는 이각수라는 게, 뿔 두 개 달린 괴물을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만."

재환은 조용히 차원 배낭 속을 뒤져 제작에 사용할 뿔을 꺼냈다. 언젠가 늑대 괴수를 잡고 얻은 뿔이었다.

얼떨결에 뿔을 받아 품에 안은 직공은 한참이나 그 뿔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손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이, 이건 대체...?"

오랫동안 〈황혼 어스름〉에서 직공 교육을 받은 그조차 생전 처음 보는 뿔이었다. 뿔의 검은색 광택과 단단함, 그리고 굵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것이······."

청년 직공은 깨달았다. 이 의뢰는 그의 선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황급히 두리번거리던 직공의 고개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중앙 화로 근처에서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는지, 열댓 명의 장인들이 모여 수런거리고 있었다.

"아, 마침 부공방장님이······!"

직공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재환은 이미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한숨을 푹 내쉰 미노가, 다시 뿔을 든 직공이 허겁지겁 쫓아갔다.

*

〈황혼 어스름〉의 부공방장, '새벽의 장인' 메이칼.

고르곤 성채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 중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한 「도제」 급의 제작자였기 때문이었다.

오직 몽마들만이 받을 수 있는 제작자의 칭호.

비록 제작자 삼 등급 중 제일 낮은 「도제」였지만, 그 콧대 높은 몽마들이 다른 종족을 제작자로 인정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허허, 나도 이젠 늙었나 보군."

그것도 벌써 몇십 년 전의 일이었다.

메이칼은 최근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다.

―네가 태어난 종족을 탓해라. 인간의 몸으로는 결코 「도제」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어.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도제의 칭호를 받았을 때, 한 몽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젊은 메이칼은 생각했다. 그에게는 시간이 있다. 열정도 있다. 비록 불리한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노력해서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

그는 몽마들이 잘 때 한 번이라도 더 담금질과 무두질을 연습했고, 몽마들이 놀 때는 금속학을 연구했다.

언젠가는 「명장」이나 「거장」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그러한 메이칼의 노력은 결국 '새벽의 장인'이라는 별명을 가져다주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까지도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의 모습에 감탄한 이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새벽의 장인도, 어느덧 인생의 황혼을 앞두게 되며 차츰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이제 이 짓도 못 해 먹겠구만."

메이칼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뿔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혼돈 십방 중 하나인 '무극방'의 방주가 직접 맡긴 사각수의 뿔이었다. 검을 한 자루 제작해 달라는 의뢰였는데, 공정 자체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문제는 마지막 세공이었다.

―칼자루의 중앙에 보석 홀더를 하나 만들어 주시오.

사각수의 뿔 정도로 단단한 물질에 홀더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니, 부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사각수의 뿔이다. 특유의 노하우로 검신을 깎고 모양을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보석 홀더라니······.

몽마 전용 스킬, 「가공(加工)」

그가 「도제」에 도달했을 때 몽마들로부터 배운 이 스킬로도, 사각수의 뿔에 정교한 홀더를 파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젊었을 때라면 모를까.

결국 메이칼은 잠시 손을 놓았다. 계속 작업을 이어 가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주변의 장인들이 달려들었다.

"스승님, 제가 한번 해 봐도 되겠습니까?"

"어디 제가 한번······."

메이칼이 피식 웃었다.

젊다는 건 좋은 것이다.

"네 녀석들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놈들아!"

메이칼은 저들 중 누구도 자신을 넘지 못할 것을 안다. 세상에는 분명 안 되는 것이 있으니까. 인간은 제작 분야에서 결코 몽마를 넘어설 수 없다.

그래도 청춘의 열기는 늙은 메이칼의 가슴마저 뜨겁게 했다. 젊음은 젊을 때 모두 소진되어야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청춘이 제때 타오를 수 있도록 불을 지펴주는 일이었다.

"좋다, 이 뿔에 구멍을 뚫는 녀석이 있다면 그 녀석이 누구든, 오늘 하루 동안은 이 〈황혼 어스름〉의 부공방장 자리를 내주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지속시켜주는 것. 어쩌면 그게 늙은 자신의 몫인지도 모른다고 메이칼은 생각했다.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면 저도!"

흥분한 젊은 장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들었다.

당연하게도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영력을 제법 다룰 줄 안다는 장인들조차 사각수의 뿔에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사각수의 뿔은 그런 재료였다.

"나도 해 보고 싶은데."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중앙 화로의 열기 속에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메이칼의 표정이 묘해졌다.

"손님, 거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품에 뭔가를 한 아름 안은 직공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부터 입구 쪽 안내를 맡게 된 네이븐이었다. 메이칼이 물었다.

"네이븐, 저자는 누구냐? 품에 안은 건 또 뭐고?"

"이, 이건······."

네이븐은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재환과 자신의 품속에 든 뿔을 번갈아 바라보며 우물거렸다. 메이칼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여긴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네."

"이 칼자루에 홈을 파내면 되는 거지?"

메이칼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차림은 비렁뱅이 같은데, 패기 하나는 일류 장인급이었다.

혹시, 혼돈을 여행 중인 젊은 직공인가?

메이칼은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던 주변의 장인들을 손짓으로 물리며 말했다.

"한번 내버려 둬 봐라."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었다. 초보 직공들은 주눅부터 들기 바쁜 이 〈황혼 어스름〉에서, 저런 기백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젊은이의 무모함은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모함은 어디까지나 무모함일 뿐.

권위라는 것은 그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결코 무너지지 않기에 그것이 권위. 그리고 공방 〈황혼 어스름〉은 그 권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장소였다.

그렇다면 이참에 〈황혼 어스름〉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메이칼은 생각했다.

"······엉?"

단단히 손가락을 치켜든 사내는, 자신의 손가락을 뾰족하게 세워 사각수의 칼자루에 가져다 댔다. 마치, 손가락으로 홈을 파내기라도 할 것처럼.

미친 짓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백이면 백 손가락이 부러지고 만다.

물론 수준급의 몽마들은 도구 없이도 각수의 뿔을 제련하는 게 가능하지만, 인간이 그런 걸 해냈다는 이야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딴 게 되면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할 리가....

그리고 굉음과 함께 먼지가 폭발했다.

〈황혼 어스름〉 전체가 무너질 듯한 굉음이었다. 이 공방이 자리 잡은 지축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소리.

그때까지도 메이칼은 몰랐다.

그 소리는, 그가 한평생 쌓아온 모든 노력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소리였다는 것을.

굉음과 함께 사방을 채웠던 먼지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모루 아래로 정확히 손가락 하나 굵기로 파고 내려간 작은 공동(空洞)이 보였다. 어찌나 깊게 파고 내려갔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 저저, 저······!"

공방의 모두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러면 되는 거지?"

문제의 사내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사각수로 만든 검은 홀더 채로 사내의 손가락에 끼워진 채, 허공에서 뱅글뱅글 회전하고 있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검을 보며, 메이칼의 세상도 뱅글뱅글 돌아갔다. 어지럼증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메이칼이 물었다.

"······자네는 대체 누군가?"

재환은 이제 그 말을 듣는 것도 슬슬 지겹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부공방장."

그 말에 메이칼의 안색이 약간 나아졌다. 어디의 부공방장쯤 되는 자라면, 유명한 실력자인지도 모른다.

"부공방장? 대체 어떤 공방 소속이시오?"

재환이 무심히 답했다.

"황혼 어스름."

그 말에 공방 장인들 중 몇몇이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이? 지금 장난치자는 거냐!"

"어디서 감히 황혼 어스름의 이름을!"

그러나 재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아까 약속했잖아?"

약속?

모두의 머릿속에 동일한 광경이 스쳐 갔다.

잠깐, 설마?

―좋다, 이 뿔에 구멍을 뚫는 녀석이 있다면 그 녀석이 누구든, 오늘 하루 동안은 이 〈황혼 어스름〉의 부공방장 자리를 내주마!

부공방장 메이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재환의 다시 한번 말했다.

"오늘 하루는 내가 〈황혼 어스름〉의 부공방장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재환의 손가락 위에서 흔들거리던 사각수의 뿔에 쩌저적, 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메이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

무려 무극방의 방주가 손수 맡긴, 단단한 사각수의 뿔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재환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살짝 찌르기인데."

Episode 4. 1%의 세계 (3)

메이칼은 〈황혼 어스름〉의 권위고 나발이고 내던진 채 절규했다. 대체 무슨 사기를 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사각수의 뿔이 부러졌다. 이곳 혼돈에서는 천정부지의 가치를 지니는 사각수의 뿔이.

무극방에는 이제 어떻게 변상해야 한단 말인가?

"의도한 건 아닌데, 미안하게 됐군."

"미안? 지금 미안하다고 했소?"

메이칼은 콧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의 머릿속은 눈앞의 사내를 망치로 두들겨서 죽일지 담금질로 죽일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뿔은 더 좋은 것으로 변상해주지."

"변사앙?"

그 말에 공방의 모든 장인들이 코웃음을 쳤다. 변상을 하겠단다. 그것도 사각수의 뿔을.

사각수가 어떤 각수인가? 희귀할 뿐만 아니라 혼돈 십방의 장로급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상대할 수조차 없는 괴수다. 그런 괴수의 뿔을 변상하겠다고?

"그 대신, 그쪽도 약속을 지켜."

메이칼은 좀 전에 자신이 호언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각수 뿔에 보석 홀더를 파내면 하루 동안 부공방장을 시켜주겠다던 이야기.

메이칼은 기가 찼다. 이 상황에서도 그딴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사각수의 뿔을 변상할 수만 있다면, 자네가 부공방장을 하든 뭘 하든 오늘 하루 동안은 맘대로 해도 좋네. 하지만 변상이랍시고 어쭙잖은 대안을 내놓는다면, 오늘 자네는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이븐을 불렀다.

"그거 여기 내려놔."

재환의 손짓에 직공 네이븐이 안고 있던 뿔을 화로 옆에 내려놓았다. 거무튀튀하고 커다란 괴수의 뿔. 다들 이게 뭔가 싶은 눈치였다.

모두가 동시에 숨을 삼킨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맙소사, 가르낙의 뿔!"

"혼돈"에서 오각수 이상의 괴수들은 따로 분류 계통수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강력하고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혼돈 십방의 장로들 여럿이, 혹은 부방주 급이 나서야 잡을 수 있다고 알려진 늑대형 괴수.

그게 바로 혼돈의 오각수, 가르낙이었다.

깊디깊은 적막이 공방 내부를 가득 메웠다.

메이칼이 무거운 음색으로 명령했다.

"문을 닫아라.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겠다."

황급히 달려간 직공들이 공방의 정문을 닫았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철문이 봉쇄되었다.

미가공 상태인 가르낙의 뿔을 보는 것은 메이칼도 이번이 겨우 세 번째였다. 한 번은 "혼돈"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적 다른 유명 공방에서 보았고, 다른 한 번은 선대(先代)의 〈황혼 어스름〉 부공방장이 가공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았다.

"대단하군."

어린 가르낙의 것인지, 뿔의 상태가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공방의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 물건과 하룻밤만 작업해 볼 수 있다면······.

"이 정도면 변상으로 충분한가?"

"물론이오. 넘치고도 남지."

사각수와 오각수 사이에는 열 배 이상의 가치 차이가 있다. 오각수의 뿔이라면 딱히 가공할 필요도 없이, 그저 귀퉁이를 잘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변상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내는 뿔 하나를 통째로 내주었다. 손해를 보상하고도 한참이나 남는 장사였다.

메이칼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하루 동안 이 〈황혼 어스름〉은 당신의 것이오."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퍼지자, 메이칼이 일갈했다.

"조용히들 해라!"

이내 정신을 차린 직공들이 입을 다물자, 메이칼은 재환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귀인께 실례했소이다."

"괜찮아."

"한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이까?"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칼이 물었다.

"이 뿔은 대체 어디서 난 거요?"

"직접 구했어."

"직접 구했다? 그 말씀은······. 오각수를 직접 사냥하셨다는 거요?"

"그래."

오각수를 직접 사냥하는 자라고?

대체 이 사내가 누구기에? 그러나 재환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바로 작업 시작할 거니까 준비해 줘."

"작업이라 하면······?"

"제작을 할 거야."

직공 네이븐이 달려와 메이칼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메이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칼집을 만드실 거로구만."

"그래."

"재료는 뭘로?"

"이거다."

재환은 차원 배낭 속에서 또 다른 오각수의 뿔덩이를 꺼냈다. 아까 것보다도 상태가 좋은 물건이었다. 오각수는 말 그대로 뿔이 다섯 개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메이칼에겐 다른 의미에서 당연하지 않았다.

"가르낙의 뿔로 겨우 칼집을 만들겠단 소리요?"

삼각수도, 사각수도 아니고 오각수 가르낙이다.

진흙만 대충 처발라 만들어도 명작이 나오는 재료다. 그런 재료로 겨우 칼집을 만든다고?

메이칼은 이 젊은 사내가 가르낙의 뿔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가르낙의 뿔을 집으로 쓸 행운의 칼이 대체 어떤 녀석인지, 내가 한 번 봐도 되겠소이까?"

재환은 말없이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내주었다. 칼의 정보를 들여다보던 메이칼이 미묘한 탄식을 내뱉었다.

"허, 빙룡검이라."

"알고 있나?"

"빙룡왕의 뿔로 만든 칼이잖소. ...뭐, 어디까지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는 거지만."

빙룡왕은 "위대한 땅"의 12지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는 '잊혀진 지대'의 마룡이었다. 그 마룡의 뿔을 다듬어서 만든 검. 명검이 아닐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 칼이 '레플리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종종 "위대한 땅"의 소식을 듣는 메이칼이지만, 잊혀진 지대의 마룡이 사냥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제껏 들은 적이 없었다.

고귀한 군주들조차 이제껏 사냥하지 못한 전설의 괴수가 바로 빙룡 벨키서스다.

그런고로, 이 칼은 실제로 빙룡왕을 목격한 어떤 몽마가 그 빙룡왕의 뿔을 모티프로 하여 제작한 무기일 터였다.

즉, 이 검을 제작할 때 사용된 것은 진짜 빙룡왕의 뿔이 아니라는 것.

"몽마가 직접 만들었다는 점에서 희소성은 있지만, 이 정도 칼의 칼집을 만들기에 가르낙의 뿔은 좀 과한 것 같소. 차라리 뿔로 새로운 칼을 만드는 게······."

칼이 웅웅, 하고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때였다.

놀란 메이칼이 칼자루를 놓치자, 칼의 검신이 정확히 가르낙의 뿔 쪽으로 떨어졌다. 진동이 심해지며 칼날이 입처럼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와자작.

눈앞에서 오각수의 뿔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고 있었다. 메이칼은 놀라는 것조차 지쳐버렸다.

"맙소사, 설마 정령 무기일 줄이야."

오각수의 뿔을 먹은 빙룡검의 모습이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당신의 검이 진화하고 있구려."

검신은 더욱 예리해지고, 표면의 밀도와 강도는 더욱 촘촘해졌다. 그 강도는 가르낙의 뿔로 만든 칼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수준. 게다가 칼에서 흘러나오는 흑색 아우라는 검신을 천으로 둘둘 말지 않고서는 도저히 감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칼집이 반드시 필요한 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만한 영기(靈氣)가 시장 바닥에 돌아다닌다면 쓸데없는 잔챙이를 불러들일 것이다.

"검에서 느껴지는 영기로 보아 상위 종족의 영혼이 깃든 듯한데, 대체 어찌······."

검은 계속해서 울었다. 재빨리 칼의 상태를 확인한 메이칼이 말했다.

"대진화(大進化)로군. 조금 오래 걸릴 듯한데, 진화가 끝나면 칼 이름을 새로 지으셔야 할 거요."

"이름?"

"정령 무기는 대진화를 겪으면 본래의 이름이 사라지거든."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검이 외롭게 웅웅,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메이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재료가 없어졌소만······."

칼집으로 쓰려던 재료를 칼이 먹어 버렸다.

이젠 무엇으로 칼집을 만든단 말인가?

"괜찮아. 하나 더 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오각수의 뿔은 다섯 개다.

차원 배낭에서 줄줄이 나오는 뿔을 보던 메이칼이 질렸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

잠시 후, 메이칼은 가르낙의 뿔을 앞에 두고 섰다.

은은한 검은빛 광택의 뿔. 그도 가르낙의 뿔을 가공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래전, 성주들의 무기를 만들 때 가르낙의 뿔로 만드는 것을 언뜻 보기는 했지만······.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부공방장의 자리에 올랐고, 「도제」의 칭호를 받기도 했지만 이젠 사각수의 뿔을 가공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메이칼이었다.

애초에 탑 한 번 만들어 보지 못한 게 무슨 「도제」라고······.

「도제」끼리도 어마어마한 수준의 격차가 있다.

같은 급수라도 몽마와 인간은 상상력의 규모 자체가 다르다. 인간이 칼 하나에 쩔쩔매고 있는 동안, 몽마들은 하나의 세계가 될 탑을 건설한다.

메이칼은 가르낙의 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간혹 이런 재료들이 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사람을 압도하는 것들.

"미안하지만 이걸 내가 떠맡는 것은 아무래도······."

곁에서 재환이 주섬주섬 뭔가를 입고 있었다.

"자네······. 아니, 임시 부공방장께선 지금 뭘 하시는 거요?"

어느새 직공의 옷을 갖춰 입은 재환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메이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칼집은 내가 만들 거야."

"······엉?"

"당신은 옆에서 도와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저 재환이란 사내의 능력이 대단한 것은 알겠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내에겐 뿔을 부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뿔을 부술 수 있다는 것과 뿔을 가공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맞아. 분명 나 혼자는 무리겠지."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에게는 파괴력이 있지만 기교가 부족했다. 가르낙의 뿔 정도 되는 재료는 힘만으로 가공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거야."

재환은 메이칼의 망치 끝에 하얗게 남은 몽마의 스킬, 「가공」의 흔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

동 시각, 고르곤 내성.

정갈하고 검소하게 꾸며진 내실의 안쪽에, 단정한 정복을 입은 노후한 중년인이 잔에 담긴 찻물을 마시다가 돌연 기침을 토했다.

"망혼석을 놓쳤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죄송합니다."

중년인의 앞에 부복한 진청색 무복의 사내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어떻게 당한 거지?"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냥 지붕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당했는데 어떻게 당했는지를 모른다.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중년인이 한껏 인상을 쓰며 물었다.

"적응 차수가 어떻게 되지?"

"3차입니다."

"은신 스킬 등급이랑 레벨은?"

"상급이고, 마스터 레벨입니다."

"그런데도 들켰다고? 아니, 대체 어떻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미치겠군."

상급의 은신 스킬을 마스터한 3차 적응자가 마음먹고 숨는다면, 혼돈의 고차 적응자들이라 해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는 그의 부하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낌새도 없이 습격해 기절까지 시켰다.

"...칼튼 말로 5차는 아닐 거라고 했는데."

어쩌면 5차 수준의 적응자일지도 모른다. 만약 상대가 고차 적응자라면, 이쪽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인원을 확충한다. 성채 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내."

다음 순간, 내성 지하 감옥의 깊은 곳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옅은 진동이었지만, 이미 고차적응을 넘어선 중년인이 느끼기엔 충분한 수준의 진동이기도 했다. 길게 늘어지는 비명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고통에 흐느끼는, 아득한 신음.

중년인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성주, 조금만 더 견뎌주시오."

Episode 4. 1%의 세계 (4)

〈황혼 어스름〉에서의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이 찾아왔다. 부공방장 자리를 약속한 하루가 지났는데도 메이칼을 비롯한 직공들은 딱히 불만스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가르낙의 뿔 같은 귀한 재료를 취급할 기회가 좀처럼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르낙의 뿔은 제련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직공들에게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이니까.

그리고 미노는 조용히 〈황혼 어스름〉을 나왔다.

*

어수선한 분위기의 주점.

곳곳에서 중년 사내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주점의 가장자리에 설치된 구식 홀로그램 기기에서는 한창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송의 진행자는 머리에 작은 뿔이 돋아난 분홍빛 머리카락의 몽마였다.

[시르엔과 함께 하는 금주의 핫 텐! 아쉽게도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네요. 오늘 보여드릴 마지막 영상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영상이에요. 근래 "리틀 브라더"에서 이것보다 유명한 영상은 없었으니까요. 바로, 「99층 솔로 클리어」 영상입니다.]

곧이어 화면에 거대한 빙룡의 거체와, 한 남자의 모습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오로지 찌르기만을 반복하는 남자의 모습. 남자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다. 상품 정보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보안책이었다.

주점의 바 쪽에 앉아있던 사내들이 투덜거렸다.

"저 자식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네, 분명 군주들한테 러브콜 겁나게 왔을 텐데."

"어이, 모르냐? 저 탑, 재배 정지당했잖아."

"재배 정지? 왜?"

"몰라. 악마 놈이 조작이라도 하다가 걸렸나 보지. 재배 내팽개치고 도망갔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뭐야, 진짜 조작이었어?"

"당연하지, 인마. 상식적으로 1세대 탑을 혼자 깬다는 게 말이나 되냐?"

시끌시끌한 사내들의 화제가 서서히 옮겨갔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보지만, 이제 그들에겐 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이곳은 혼돈. 이미 죽은 자들의 세계니까.

"어디서 「열매」라도 안 떨어지나? 나도 다시 살아나 보고 싶네."

"클클, 「열매」가 뉘집 괴수 이름인 줄 알아?"

"아줌마. 여기 일각주 하나 더―"

그때,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 미노였다. 미노는 그대로 척척 바까지 걸어와서는, 사내들의 술잔을 치우고 바테이블의 좌석에 척 걸터앉았다. 사내들의 눈이 미노에게 집중되었다. 늘씬한 허리에 하얗고 갸름한 얼굴.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내들을 향해, 미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경고했다.

"좋게 말할 때 가라."

"옙."

그녀의 무시무시한 영압에 짓눌린 사내들이 황급히 주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 사내들을 보던 미노가 쓰게 웃었다.

...저런 조무래기들에 비하면 나도 강한 편인데.

곧이어 주점의 주인이 등장했다.

"계집애가 장사 다 말아먹네."

"······클레어 아줌마."

"또 무슨 일로 왔냐?"

말없이 술을 꺼내오는 중년 여성을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인 미노가 그대로 술잔을 들이켰다.

한 잔, 두 잔.

그렇게 잔을 홀딱 비운 미노가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든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줌마아······. 들어 보라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그렇게 얼마나 이야기를 더 했을까. 취해서 혀가 배배 꼬인 미노가 말을 잇고 있었다.

"충분히 들었다, 애송아."

클레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클레어는 미노와 같은 월드 '아르칼' 출신으로, 혼돈에 남은 마지막 고향 동료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런 거잖아."

"······으응?"

"정체 모를 놈 하나를 놀려먹으려다가 죽을 뻔했는데, 역으로 그놈이 널 구해준 거지."

"그게 그렇게 되나?"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던 넌 어떻게든 그 인간 쫓아다니면서 은혜를 되갚아 줄 기회만 노리는 중이고."

"...."

"그런데 그마저도 제 능력으로 마땅찮으니 늙은 아줌마를 찾아와서 하소연이나 하고 있다는..., 그런. 넌 정말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구나. 대체 왜 그런 인간들을 가만두질 못하는 거냐?"

온더록 잔의 얼음을 채우며 클레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잔의 움직임을 따라, 미노의 고개도 갸웃갸웃 돌아갔다.

클레어는 미노를 잘 안다.

악몽의 탑에 있을 때부터 미노는 그랬다. 미노는 약했고, 노력했고, 살아남았다. 빚을 지고는 절대로 못 살고, 어떻게든 상대에게 그 두 배, 세 배로 갚아 주었다. 자신이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미노는 죽었다.

"나 때문에 죽은 것도 모자라서 또 골로 갈 생각이냐?"

미노는 아무 말도 않고 술을 들이켰다.

"듣자 하니 위험한 놈 같은데, 빨리 단념해라. 딱히 사내가 아쉬운 것도 아닌 애가."

"······에헤헤."

"한동안 안 그러더니, 왜 그 사람한테 그리 집착하는 거냐?"

가만히 잔을 흔들던 미노가 한참이나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그 사람 보고 있으면...."

서두를 들은 클레어가 혀를 찼다. 주점을 운영하는 동안,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보나마나 또 한바탕 신파가 나오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열 받아."

"뭐?"

"그 인간, 아주 시건방져. 예의도 없고, 싸가지는 밥 말아 먹었고······. 그런데 진짜 이상하게, 아무도 그 사람 앞길을 막질 못해. 그냥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그 사람을 못 당해. 레드 폭스도, 고집쟁이도, 황혼 어스름 영감님도······.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아?"

미노가 작은 주점 안을 가만히 둘러보며 말했다.

"마치,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클레어도 나도, 열심히 살았잖아. 우리, 죽고 싶어서 죽은 거 아니잖아."

미노의 눈동자 위로 오래된 감정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가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것들을 잘못됐다는 것처럼 다 때려 부수고, 쉽게 검을 휘두르고, 무시하고······."

잔이 비었다. 미노는 일각주 한 잔을 더 따랐다. 뿔의 쓰디쓴 향취가 알코올의 내음과 함께 은은하게 퍼졌다.

"어쩌면 난 보고 싶은지도 몰라. 난 못하지만, 누군가가 그 사람 혼내주는 거. 그래서, 그래서 그 사람이 결국엔 절망하는 걸······."

미노의 이야기를 들으며, 클레어는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끝까지 솔직하지 못한 아이였다. 아마도 미노가 정말로 보고 싶은 건 그런 광경이 아닐 것이다.

미노가 그 사내와 함께 다니며 보고 싶은 광경은....

"만나선 안 되는 사람을 만났구나, 미노야."

클레어는 미노가 받은 느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클레어 역시 까마득한 옛날에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 클레어는 그것을 외면하고, 도망쳤다.

그리고 나이를 먹었다.

클레어는 완고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충고 하나 해 주마."

"응?"

"이제 다시는 그놈이랑 엮이지도, 마주치지도 마라."

"······왜?"

"넌 그 사람이랑 있으면 죽게 된다."

미노는 흠칫 놀랐다.

그런 클레어의 표정은, 자신이 클레어와 함께 죽은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상한 느낌도 받았다.

클레어가 말한 죽음이라는 것이, 자신이 아는 죽음과는 다른 개념처럼 느껴졌던 까닭이다.

미노가 재차 입을 열려는 찰나, 어디선가 영력으로 만든 전서응 하나가 주점의 창문을 뚫고 날아왔다.

미노는 전서응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북쪽 검문소장 칼튼 제비어

"······고집쟁이가 나한테 왜?"

메시지를 열어보려는 순간, 미노는 뒤쪽에서 섬뜩한 기세를 느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이한 영력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한 명이 아니었다.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혼자서는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자들이 여러 명이었다.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다음 순간.

미노는 술기운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가뜩 긴장하며 품속의 단검을 꺼냈다.

인물 중 하나가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네가 몰살의 마녀인가?"

"그런데?"

답변과 동시에, 주점의 문이 닫혔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